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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6, 에피소드 3: 피터 멜러 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TRC)

피터: 제 이름은 피터 뮐러입니다. 48세이고 덴마크에서 사는데 지금은 한국에 머무르면서 덴마크 한국인 진상규명그룹(DKRG)과 활동하고 있어요. 

카오미: 네, 한국에 얼마나 계셨나요? 

피터: 거의 한 달이 다되어 갑니다. 

호스트: 네,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피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TRC)에 최근 발굴된 불편한 사례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니까 올해 8월 23일 한국의 진실화해위에 요구사항을 제출하였고,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해외입양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요청했습니다. 아동 성적남용에 대한 새로운 불편한 사실들이 추가로 발굴되었는데요. 당시 한국 정부와 해외입양기관의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어요. 홀트와 한국사회봉사회(KSS) 모두 이중 문서를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한 문서는 공식적인 기록이고, 다른 문서는 비공개로 해외입양에 대한 진실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진실화해위가 이 사례들을 조사할 때 당시 사실이 그대로 반영된 문서를 참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카오미: 홀트와 한국정부측이 각각의 입양인에 대해 2개의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는 말씀이시죠. 

피터: 네, 마치 거울처럼 저희 각자가 갖고 있는 입양 문서와 번호가 있고요, 이 외 진짜 이름과 진짜 생년월일이 적힌, 친가족에 대한 정보가 담긴 다른 문서가 있습니다. 고유한 번호가 붙어있고, 진짜 문서와 가짜 문서를 구분할 땐 닉네임이 사용됩니다. 

카오미: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피터: 여러 입양인들이 사례를 접수했고, 그들이 제출한 서류로부터 알게 되었어요. 사례번호들이 다르게 나오길래 처음에는 저희의 서류정리에 실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알고보니 한 명의 입양인당 문서가 두개가 있는 거였죠. 실수였는지,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됐어요. 특히 한글 문서는 한자로 되어 있어서 굉장히 읽기가 어려워요. 공식문서은 영어로 되어있는데 (국내) 기록된 문서는 한자라, 한국사람들도 한자를 읽기 어려워합니다. 한자는 과거에 문서를 작성할 때 썼던 언어이거든요. 

카오미: 왜 두 개의 제도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세요? 

피터: 그게 저희가 진실화해위에 전달한 내용입니다. 1960년대외 1970년대에 한국정부가 사회정화라고 하는 제도를 운영한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인정하기 어려워할 수도 있지만 사회정화제도가 1960년대에 당시 정부에 의해 시행되었고, 혼혈아부터 시작했습니다. 섞인 아이들, 백인과 흑인이 섞인. 

카오미: 혼혈인종이요. 

피터: 네 혼혈인종이요. 덴마크에서는 이 단어가 매우 적절하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혼혈인종이라고 부릅니다. 보통 미군들의 자식이고, 흑인이거나 절반이 흑인이거나 백인인 아이들입니다. 실제로 저희가 아는 바로는 홀트의 전대표인 부씨가 아주 생생하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말했는데요, 1960년대에 당시 청와대로 찾아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안했습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혼열인종문제의 해결책이라고 했어요. 미국에 가서 많은 흑인 아이들이 구두를 닦는 걸 봤다고 이야기했어요. 

피터: 그는 대통령에게 만약 여행객들이 공항에 와서 흑인 아이들이 구두를 닦는 걸 본다면 한국에게 오명이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혼혈 흑인 아이들이 구두를 닦는 걸 말한거죠. 공항과 거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수치스러울 거라고 이야기해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혼혈인종문제를 해결할 권한을 부여받습니다. 부씨는 스스로 마을과 도시와 미군기지들을 돌아다니며 혼혈아동을 수거한 이야기를 설명했습니다. 또 엄마들이 아이를 내어주는 걸 꺼려했다는 이야기도 하죠. 그들을 설득했다고 말합니다. 

또 절반이 흑인인 아이들이 불만족스러워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한국인이라고 항의했지만 부정당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외국인 취급했죠. 이런 혼혈아이들이 모두 소환되어 초기에 미국으로 보내지고 제 고국인 덴마크, 노르웨이에도 보내졌는데요, 그는 이를 칭송했습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아이들을 데려간 걸요. 이후 제가 부씨를 인터뷰한 2시간의 내용이 덴마크와 한국 방송사 양측에 의해 녹화되었습니다. 지금 할 이 이야기는 녹화된 내용이 아닌데요, 그는 다음은 소아마비장애인, 그 다음은 뇌성마비장애인, 그리고 다른 종류의 장애인들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들은 같은 방식으로 소집되어 해외로 입양이 되었죠. 세번째 그룹은 미혼여성의 아이들이었습니다. 

이 사회정화제도는 당시에는 꽤나 현대적인 것이었습니다. 덴마크에도 사회정화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제도의 목적은 깨끗하고, 보기 좋은 사람들로 인구를 구성하는게 목적이었죠. 그래서 이 제도는 입양제도와 한국정치에 통합되었습니다. 제가 위원회에 주장하는 건 혼혈인종아동에게 일어난 일이 인종청소라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순수한 혈통의 한국인이 있다고 믿었고 인종이라는 말을 잠시 쓰면, 그 외의 아이들을 단순히 피부색이나 혈통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소환해서 일을 도모한 건 인종청소라고 보여집니다. 저는 위원회에 이 내용을 전달할 계획이고 UN인권위원회에도 전달될 것입니다. 

카오미: 한국은 아직 UN이 발행한 아동권리와 관련된 문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국가들 중 하나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피터: 아동권리협약은 비준한 상태입니다. 아마 헤이그 협약을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요. 

카오미: 네, 헤이그 협약이요. 한국은 아직 헤이그 권리협약에 서명을 하지 않았죠. 

피터: 네, 헤이그 협약은 입양인권에 대한 내용이고 아동 협약은 아동인권에 대한 내용입니다. 실질적으로 저희는 성인이지만 아동인권에 해당되기도 합니다. 아동 협약의 제7항과 8항에 보면 한국은 모두 서명을 했고, 정체성에 대한 권리, 자신의 뿌리를 알 권리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카오미: 그러니까 한국은 이 협약에서 아동이 자신의 뿌리를 알 권리가 있다고 명시한 조항에 서명을 한 셈이네요. 

피터: 네, 하지만 한국에 대해 이해해야 하는 건, 한국은 사실 많은 법이 제정되어 있고 이 법들은 미국이나 덴마크등 다른 국가로부터 차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가 시행된 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도와 기관들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마치 그림을 감상하는 것처럼 보기에는 좋아보이지만. 실제 내막을 들여다보면 제 생각엔 무정부주의처럼 보이고 조금 어지럽기도 합니다. 책무를 이행할 도구가 실제로 없습니다. 사실 아동협약은 문자 그대로 한국법에 통합되어 있습니다. 법에 적힌 내용이 아동협약에 적힌 내용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기관들이 뭘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만약 협약을 어겨도 기관이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습니다. NCRC 같은 경우에는, 

카오미: 아동권리보장원이요. 

피터: 네, 국제법에 따르면 입양을 관장하는 최상위 기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양기관이 입양이후 필요한 조치를 이행하지 않았을 경우, 이를 볼 수 있고 언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해당기관을 처벌을 하거나 조치를 취하도록 보장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무능력한 관리자들과 무능력한 기관들이 뒷짐지고 있는 셈이죠. 그들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변화를 시행할 수 있는 법과 제도가 없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는 겁니다. 도구가 없는거죠. 

제주도에 제가 갔을 때 베이비박스 활동가들을 봤습니다. 바로 이거에요. 우리가 겪었던 똑같은 일이 아직도 한국에서 반복되고 있는 겁니다. 아이들을 데려다가 정체성을 지워버리고 이름도 지워버리는 건 불법입니다. 베이비박스는 한국에서 불법이지만 관리자들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순히 불법이라고 말만 합니다. 할 수 있는 게 없죠. 경찰서에 가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처벌이 없고 제도에 대응을 위한 조치사항이 없습니다. 2014년 실제로 특별입양법이 통과된 이후에도 홀트는 여전히 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홀트는 아직도 법을 어깁니다. 그런데 제도가 없죠. 기관들은 외치고 있습니다만, 시행하기 위한 방법이 없는 게 한국의 문제죠. 

카오미: 홀트가 어떻게 계속 법을 어기고 있나요? 

피터: 초기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불법으로 여성을 위한 장소를 운영 중입니다. 여성을 위한 쉼터라는 이름을 붙였죠. 기관이 운영하는 여성사업이 있습니다. 한국은 1980년대부터 굉장히 부유한 국가가 되었고, 입양을 통해 아동을 돕는 일은 더 이상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한국에는 사회적 문제들이 많죠. 아이가 있는 미혼모들이 우선 (홀트에) 찾아갑니다. 사회적 도움이 없어요. 새로운 사회적 프로젝트들이 시작되고 있기는 하지만 시작단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입양기관을 통해서 민간인이 운영하는 사회적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도움을 받으려면 아이를 기관에 위탁해야 하죠. 

카오미: 네, 그러니까 안전한 쉼터 같은 곳들을 설치하고 임산부를 위한 서비스 같은 걸 제공하지만, 상담을 통해 아이를 포기하기를 강요하는 군요. 

피터: 네 상담이라고 불러요. 아동을 끌어올 자원이 바닥나고 있기 때문이죠.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생률을 보입니다. 1% 미만인데 제가 알기로는 0.56인가 그럴거에요. 전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생률이죠. 아동 자원이 바닥나니 다른 경로를 통해 여성과 아동에게 접근해야 하죠. 여성이 서양 국가에서처럼 같은 권리를 누리지 않습니다. 결혼을 안하면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이고, 결혼 제도 밖에서 아이를 가져도 엄청나게 수치스러운 일이죠. 

덴마크에서는, 제가 덴마크에서 왔는데요. 커플 중 1/3밖에 결혼을 안합니다. 사실 결혼을 안하는게 더 일반적이죠. 커플인데 결혼을 안 한 상태에서 가족으로 살아요. 한국에서는 결혼이 우선시되고 미혼모는 직업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구할 수가 없죠.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어요. 그래서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여성들이 아이를 포기하고 난 후에 후회하고 아이를 돌려달라고 요청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아이를 다시 사야 됩니다. 사회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대다수의 여성들에게 불가능한 일이죠. 

카오미: 그러니까 여성이 아이를 포기하고 나서 마음이 바뀌거나 후회가 들어서 돌아가면, 홀트가 아동을 구매하기를 강요한다는 말씀이시죠. 

피터: 네 그렇습니다. 

카오미: 2012년에 아까 말씀하신 특별입양법이 제정되었는데요, 입양인들에게는 익숙하지만 다른 분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을 거 같아서, 잠시 요약하자면 특별입양법은 

카오미: 입양인들이 친가족을 찾을 권리를 더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입양기관들은 이 법에 담긴 내용을 입양인들에게 도움이 안 되는 방향으로 매우 보수적으로 해석했죠. 이렇게 정리하면 맞을까요?

피터: 네 매우 정확합니다. 2012년까지 입양산업은 완전히 무법지대였습니다. 입양기관들이 마음대로 일을 처리했죠. 2012년 법 개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아이를 입양시키기 전 등록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기자님도 저도 등록이 된 적이 없었죠. 출생등록이 안됐었어요. 고아호적, 고아가족문서가 있었을 뿐이죠. 2012년 법은 실제 아동의 프로필을 보호합니다. 그러니까 하룻밤 사이에 버려진 아동이라는 개념이 갑자기 없어진거죠. 덴마크 입양기관이랑 이야기하면 더 이상 버려진 아동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갑자기 버려진 아동들이 사라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는 고아가 엄청 많았었다가 갑자기 한 명도 없게 되었다는 걸 믿지 않습니다. 기자님과 저도 문서로 추적해보면 고아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피터: 의심할 것도 없습니다. 저희는 서류상 고아로 조작된 겁니다. 2012년 법으로 가능해진 건 버려진 아동이 있을 때 어쩐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나와있습니다. 그리고 아동을 돕기 위해, 여성을 돕기 위해 어떤 조치가 가능한지 설명합니다. 입양은 다른 가능성들이 없을 때 하는 가장 마지막 선택지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아이를 친척집으로 보내서 돌봄을 받게 하거나 위탁 가정에 임시적으로 맡겨서 입양 외의 방법을 취해야 합니다. 이 때 바로 베이비박스가 갑자기 들어오게 된 겁니다. 기자님 말씀처럼 2012년 법은 실질적으로 아동을 보호하고 여성을 보호합니다.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반대합니다. 여성에게 공공기관을 무시하고 다이렉트로 자신들에게 아이를 넘기라고 하죠. 그러면 아이의 기록이 완전히 삭제되고 아이는 보육원으로 보내집니다. 이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문서상으로 고아를 만들어냅니다. 

카오미: 베이비박스가 한국에 몇 개나 있을까요? 

피터: 두 곳에 있습니다. 한 곳은 서울, 한 곳은 부산이고 제주도에 3번째로 지으려고 하고 있어요. 금요일에 분영씨랑 한국입양홍보회의장과 같이 제주도로 내려갔었어요. 반대시위를 하려고요. 

카오미: 베이비박스 찬성자들은, 한 분이 유명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서울 아니면 부산에서 활동하는 목사인가요. 

피터: 네네, 그룹 전체가 거기 있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그 교회에서 여러 대의 버스를 타고 왔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종교적 광신자입니다. 정말 종교적 광신자들이에요. 그들의 활동 구호는 ‘이름 없음, 수치 없음, 비난 없음’ 입니다. 

카오미: 그러니까 그분들은 여성이나 젊은 남성 아니면 누가 되었든 문제를 일으킬 사람들한테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피터: 입양제도를 다시 시행시키려고 합니다. 저희가 알기로는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요. 실제로 그 과정도 단계별로 설명을 했는데요. 

먼저 미혼여성의 아이를 찾은 다음, 그 아이의 모든 배경과 정체성을 삭제합니다. 이렇게 문서를 삭제함으로서 여성에게 도움을 준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아이의 엄마(에게 일어난) 일을 삭제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죠. 그래야 여성이 삶을 다시 되찾는다는 거죠. 아이는 완전히 지워집니다. 아이의 배경까지도요. 하지만 중요한 건 아이들이 보육원에 입양을 위해 등록된다는 사실입니다. 서울에 있는 보육원의 60%는 전부 베이비박스에서 옵니다. 아동을 구하는 게 아닙니다. 아동을 보육원에 데려다놓고 수거하는 거죠. 보육원을 아동으로 채워놓고 경찰서에 가서 아동들한테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입양의 기회를 주는 게 맞다, 그러니까 앞뒤 따지지 말고 입양을 허락해달라고 하려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금요일에 제주도에 온 겁니다. 

카오미: 아 네, 그러니까 특별입양법이 시행되긴 했지만 베이비박스로 인해 아이들 정체성이 한마디로 세탁이 되는 셈이네요. 

피터: 베이비박스는 불법입니다. 완전히 불법이죠. 2012년 특별법을 비롯해 아동을 보호하는 기타 사회적 법들도 모두 어겼습니다. 불법이라는 경고도 받았죠. 하지만 그 목사는 운영을 계속 하면서 종교적으로 광적인 발언들을 하고 있죠. 

카오미: 강제로 문을 닫게 할 권한을 가진 주체가 없다는 말씀이시죠. 

피터: 입양이 사랑의 행동이라고 부릅니다. 겉으로는 아동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아동인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 분들과 대화를 나눠보기도 했는데요, 스티브 모리슨씨였습니다. 미국 입양인인 그는 입양이 왜 훌륭한지에 대해 증언하기 위해 연사로 초대되었습니다. 자신이 집없이 떠돌이로 한국의 거리에서 생활했는데, 입양이 자신을 구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스티븐 모리슨은 전쟁고아였다는 점입니다. 스티븐은 전쟁을 통해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 때문에 입양되었습니다. 저희가 입양되었을 때는 더 이상 전쟁이 입양의 역사에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저희는 전쟁 때문에 입양이 된 게 아니었고, 그는 전쟁으로 인해 입양이 된 거죠. 모리슨씨한테 당신이 불운하고 힘든 어린시절을 보낸 건 진심으로 안타깝지만 저를 포함해 수천명의 입양인들은 전쟁고아가 아니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입양되었을 당시 14살이었기 때문에 정말 입양인인지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자신의 언어를 잃지 않았고 자신의 배경과 뿌리를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의 정체성은 우리처럼 삭제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제로 베이비박스 후원자이고 여러 미국을 비롯해 여러 백만장자들이 기관을 후원합니다. 

카오미: 그렇다면 피터씨, 인종청소라는 개념과요, 정체성을 삭제한다, 완전히 없애버린다라는 것은요, 인권남용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맞나요? 

피터: 위법입니다. 문서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법을 어긴 겁니다. 불법입양의 첫번째 조건은 문서가 거짓되고 과정이 조작되었다는 겁니다. 

카오미: 그러면 UN이나 다른 국제기구에 사례를 제출할 수 있나요 

피터: 아동협약 조항 7과 8에 보면 아동인권가 언급되고 저희 같은 성인 (입양인) 에게도 이름에 대한 권리가 해당됩니다. 출생일자에 대한 권리, 출생등록에 대한 권리, 자신의 적힌 문서에 대한 권리, 자신의 뿌리를 알 권리, 자신의 가족 배경을 알 권리 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서의 조작이란 건, 입양기관은 일종의 법인 회사입니다. 사회복지기관보다 법인 회사라고 가정하고 접근하면 좀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미국, 유럽 같은 서구에서 아동에 대한 요구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고아만 원했는데요, 시장이 고아를 요구한겁니다. 그리고 저희는 고아를 제공한 거죠. 아이들을 서류상 고아로 만드는 건 시장 수요의 논리입니다. 

호주에서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호주사람들은 아동은 (가족등록내용이 담긴) 족보에 대한 권리가 있고 이름을 알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진짜 이름과 부모를 알 권리를 주장했죠. 그래서 호주에서는 미국과 유럽시장과는 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호주로 입양된 아동은 가족에 대한 기록과 배경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요.

카오미: 아 네, 정말 공급과 수요가 있는 것처럼 들리네요. 수요가 있으니까 공급을 하는거고 어떤 나라인지에 따라 그 이민법의 기준을 따라야 하고요, 미국 같은 경우는 국제입양을 하려면 중요한 조건 하나가 아동에게 살아있는 부모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피터: 정확합니다. 

카오미: 그래서 입양이 되려면 고아가 되어야만 하는 거고요. 

피터: 그래서 많은 입양인들이 입양 경로를 추적할 때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보육원을 문서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남광아동복지원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남광이 물론 복지원이기는 했고 아동을 수용하기는 했지만, 많은 입양인들은 가본적이 없습니다. 남광이나 다른 기관에 간 적이 없는 거죠. 하지만 문서상 고아임을 증명하기 위해 서명이 되어있죠. 실제로 입양기관의 서명에 대해 한국사회봉사회(KSS)가 입양 절차를 위해 배경정보를 조작했음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는 내용이 적힌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입양 절차를 위해 정보를 조작했다고요. 이후 부모에 대한 정보와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자료위장을 인정한 사례가 있는 셈이죠. 

카오미: 그러니까 한국사회봉사회(KSS)와 홀트는 아동의 출생가족에 대한 정보가 있는 경우에도 두개의 문서를 만든 거지요? 하나는 빈 호적이고 다른 문서에는 진짜 정보를 넣고요. 

피터: 증거들이 있습니다. 다음주에 제가 증언을 하게 되어있는데요. 입양인 중에는 출생가족이 등록을 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름이 있고, ID 번호가 있고, 제가 확인한 바 호적에도 부모의 이름과 아동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입양기관은 또 다른 호적을 만듭니다. 그래서 호적에 이미 등록이 되어있는데도 고아호적으로 등록이 다시 된 거죠. 이번주 수요일에 주민센터에 갈 예정인데요. 사실 저도 1달 전에 마포구 주민…

카오미: 주민센터요

피터: 네, 주민센터에서 제 문서에 대한 증언을 했습니다. 실제로 홀트를 통한 모든 입양인들의 문서가 마포구 주민센터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홀트 사무실에서 100m 떨어져 있습니다. 제 호적을 가지고 찾아가서 어떤 문서가 있는지를 물었는데요, 제가 알게 된 건 10년동안 한국 시민으로 지냈었다는 겁니다. 저희 부모님도 몰랐죠. 

덴마크에서는 입양이 되면 자동으로 시민권이 부여됩니다. 그래서 1970년대에는 한 개의 시민권만 소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1975년에 덴마크 시민이 되었는데요. 대신 한국에서 저의 시민권 상태는 십년 뒤 박탈되었습니다. 친한 친구 중에 니아라는 덴마크 입양인이 있는데요, 그 친구랑 같은 센터에 갔더니 20년 동안 본인도 모른채 한국 시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20년이요. 많은 입양인들이 F4비자를 받으려면 이전에 한국 시민이었다는 걸 증명해야 되는데요. 대부분의 덴마크 입양인들은 본인이 아직 한국시민이라는 걸 알지 못한 채 지원합니다. 

카오미: 그러면 피터씨가 입양되었을 때 부모님은 빈 호적(고아호적)에 대한 서류를 받은 건가요? 

피터: 제 호적은 고아호적이었습니다. 제가 집안의 가장이고 부모님은 미상이라고 나와있습니다. 그리고 알게된게, 저는 한국에 오는 입양인들에게 주민센터에 호적을 가져갈 것을 권합니다. 홀트가 여전히 호적을 변경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제 문서는 1999년에 홀트가 변경하였습니다. 1984년이 아니라 1999년에 제 부모님에 대한 기록을 바꿉니다. 당시 제 양부모가 법적 보호자였기 때문에 홀트는 저랑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1999년에 저는 25살이었어요. 전 법적 관점으로 성인이었죠. 그런데도 법적으로 성인인 저를 대리해서 행동한 거죠. 제가 제 서류를 요청했더니 센터에서는 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뭐라고요? 저는 센터에서 제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긴 줄 알았습니다. 그게 아니라 제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고 물었더니 출생이 신고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호적만 있고 출생 신고가 되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주민번호도 없이 10년 간 시민일 수 있었는지 물었는데요, 그들은 질문을 이해를 못했습니다. 대답을 할 수 없었죠. 그러니까 명백하게 국가의 역할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홀트를 통한 경우에 외교부가 서명한 여행 증명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보면 저희가 한국 시민이라고 나와있습니다. 서구 법원 문서에도, 가족법원 문서에도, 법무부 문서에서도 그렇습니다. 만약 문서가 가짜라면 어떻게 이 서류들에 도장이 찍혀있을 수 있죠? 2주 전쯤 된 거 같은데 부씨와 저는 한 번 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2시간 반 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부씨는 제게 홀트 재단이 홀트 입양인의 80%에 대한 가족배경에 대한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80%요. 네. 그러니까 이게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사실 부씨는 제가 방문했을 때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마치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온 것 처럼요. 그는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제가 그의 입양아동 중 한 명인 셈인거죠. 그는 굉장히 거만했고 자신이 한 일이 훌륭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혼혈아동에 대해 인종청소를 한 것에 대해서도 자부심이 있어요. 

카오미: 홀트가 입양한 입양인이요. 

피터: 장애인과 갈색피부나 절반이 흑인인 아동을 모으러 다닌 이야기도 자랑합니다. 자기가 어떻게 그 제도를 구축했는지도 자랑합니다. 본인이 그 제도의 회장이었거든요. 그가 오기전에는 (홀트는) 직원이 12명인 작은 단체였다가 그가 온 이후로 마포구에 있는 빌딩을 사고 일산에 있는 산을 구매했습니다. 그는 아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요, 수천명의 아동이죠. 어떻게 죽은 아동을 직접 수거해서 땅에 묻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카오미: 아동들이 어떻게 죽었나요? 

피터: 좋은 질문입니다. 그는 당시 한국이 가난했고 사람들이 나쁜 상황에 처해있었다고 합니다. 저희는 1980년대 홀트 기관에서 지냈던 해외입양인들의 증언자료를 갖고 있는데요, 1988년까지의 기록이 있어요. 당시에 한국은 저개발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올림픽을 유치하기도 했는데요, 그런데 입양인들은 홀트에 먹을 것이 부족했고 아동이 지내기에 부적절한 아주 더러운 곳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제 생각엔, 베르타 홀트의 일기에 보면 해리 홀트가 돈을 아끼기 위해 19명의 간호사를 해고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히려 (홀트가) 회사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죠. 자동차를 생산하는 대신 아동을 생산했습니다. 그리고 최저예산을 이 일에 투입한거죠. 저희는 수백만명의 입양을 결심한 부모들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를 밝혀내려고 합니다. 한가지 분명한 건 아동에게 담요와 음식을 주기위해서는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제가 확신합니다. 

카오미: 돈의 경로를 추적하려고 하시는군요. 어디로 갔는지. 

피터: 네, 그렇습니다. 

카오미: 피터씨, 왜 부씨가 당신의 인터뷰와 언론공개에 응했다고 생각하세요? 왜 당신과의 대화에 동의했을까요? 

피터: 왜냐하면 제가 홀트 입양인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직접 제게 말하기를 제가 홀트 입양인이기 때문에 언제나 환영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굉장히 굉장히 자신의 일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카오미: 이야기하는 것에도 동의했구요. 

피터: 언론의 관심도 반겼습니다. 

카오미: 그는 본인이 원치 않는 아동을 보내 버림으로써 나라를 위한 일을 했다고 자랑스러워하는군요. 

피터: 네 100% 확신합니다. 

카오미: 놀랍네요. 

피터: 아동을 부를 때 굉장히 부적절한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여성들을 부를 때도 양키 공주라고 불렀습니다. 

카오미: 부씨의 나이가 몇 살이라고 추측하세요? 

피터: 여든 정도 된 것 같아요. 저한테 29세에 홀트의 기관장이 되었다고 했어요. 그는 당시 기관장이었던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살아있다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젊고 혈기왕성한 청년이 홀트에 와서 기관장이 되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아이디어들이 많았겠죠. 그의 정체성이 만들어진 시기였던 것 같아요. 전세계를 여행했다고 하는 걸 보면. 덴마크에서 돈을 많이 기부해서 덴마크를 아주 좋아한다고 했어요. 그가 실제로 한 말입니다. 일산에 가면 덴마크 표지판을 볼 수 있습니다. 일산시 전체에 덴마크 거리를 가리키는 표시들이 있습니다. 

카오미: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사회 전반적으로 조작되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피터: 틀림없습니다. 위원회에 그대로 전할 겁니다. 정부가 아주 깊게 관여했다는 증거문서들도 찾았습니다. 당시 한국정부조직 내에 사회적 정화를 집행하는 공식적 주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조직에서 두 명이 홀트로 발령받았죠. 처음에 사회적 정화제도는 정부의 대한사회복지회(SWS)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민간 사업이 되었죠. 하지만 대한사회복지가 만들어진 명목은 사회적 정화를 이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대한사회복지회에서 일하던 네덜란드인 전직원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그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한국과의 협력을 멈출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인종청소이기 때문입니다. 혼혈아동에 대한 조치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했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카오미: 피터씨,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정리사위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요? 

피터: 가장 중요한 목표는 모든 입양인들이 진실되고 왜곡되지 않은 문서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는 것입니다. 이 문서들은 기관들로부터 회부되어 중립적인 장소에서 보관되어야 합니다. 

입양기관들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며 입양인들이 배경정보 확인을 위해 지원할 수 있어야 하고 가족찾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실이 담긴 입양문서에 대한 권한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입양기관 관리 하에 정확히 몇 명의 아동이 죽었는지 알아내는 것입니다. 이 아동들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는데요. 이 아동들은 한국에서 입양국가로 이동하는 비행기에서 사망했습니다. 비행이 당시에는 더 힘들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파리에 도착해서 처리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아동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밝히려고 합니다. 아이들은 희생자입니다. 한국전쟁박물관에 가면 전쟁으로부터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처럼, 희생자들의 이름이 담긴 추모비가 필요합니다. 

한국 전쟁 희생자들을 기리는 것처럼 똑같이 추모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위한 보상과 회복이 중요합니다. 성적남용과 관련된 사례들이 점점 더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 입양인이 제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그는 한국에서의 모든 일을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을 기억하고 있었고, 자신이 강제로 분리당한 날을 기억했는데요 엄마와 시천시에 장에 갔는데 어떤 모르는 남성이 자신을 납치했고 며칠 간 홀트에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미국에 왔다고 했습니다. 도착한 두 번째 날 그는 성적으로 남용을 당했습니다. 그가 물리적으로 저항할 수 있을 때까지 6년 간 이 일이 지속되었습니다. 점점 더 이런 성적 남용 관련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고 전부 홀트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저희 조직의 추측으로는 홀트 내부에 소아성애 조직을 돕는 인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유럽의 한 입양인 여성에 따르면 홀트 기관의 직원으로부터 성적 남용을 당했다고 합니다. 퍼즐조각 맞추기와 비슷합니다. 위원회에 홀트 내부적으로 소아성애 조직에 아동을 제공한 인물이 있었는지에 대한 진상 조사를 요청할 계획입니다. 병원에서나 다른 곳에서 납치되어 입양이 된 분들은 회복을 위한 특별권리가 필요합니다. 

이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홀트 내에서나 다른 홀트 기관에서 아니면 입양국가에서 성적 남용을 당한 사례를 알고 있다면 위원회에 (자료로) 제출할 수 있도록 공개할 것을 요청합니다. 홀트나 해당 직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를 살아있다면 찾아낼 거고 이 일을 위한 자금을 지원할 생각입니다. 

카오미: 입양인들이 사례를 접수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피터: 덴마크한국지부를 통해 제게 연락을 주시면 됩니다. 웹사이트가 있고요. 영어로 된 1장 안내문이 있습니다. 주소는 danishkorean.dk/dkrg입니다. 제 이메일 주소도 여기 나와있으니 제게 이메일을 주시면 됩니다. 

카오미: 다시 한번 제가 말해볼게요. 웹사이트 주소가 Danishkorean.dk/dkrg였죠. 이메일 주소도 말씀해주시겠어요? 

피터: 네 peter.moller@danishkorean.dk 입니다. 

카오미: 이름 철자를 한 번 더 불러주시겠어요. 

피터: 아, 아니면 info@daniskorean.dk 로 보내도 됩니다.

카오미: 피터씨가 하고 계신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세계적으로무언으로 지지를 보내고 당신의 일을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저를 포함해 아주 많습니다. 이제 피터씨 개인에 대한 질문을 좀 드리고 싶은데요. 

카오미: 지금 하고 계신 일이 아마 생애 전반에 걸쳐 해야 할 정도의 일로 느껴집니다. 어떻게 사례들을 조사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셨고, 피터씨께는 이 일이 왜 중요한가요? 

피터: 사실 이 일은 이제 시작하는 일입니다. 저는 평범한 덴마크의 시민으로 출퇴근하는 직업이 있고 가정도 있어요. 

카오미: 네 

피터: 지난 5-10년 동안 덴마크의 입양인들은 서로 강한 연대를 다져왔습니다. 자주 만나서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었는데요, 한가지 발견한 이상한 점은 저희의 사연이 거의 똑같다는 겁니다. 문턱에서 발견이 되어서 경찰서에 넘겨졌다는 그런 이야기요. 길가에서 버려진 채 발견되어 홀트나 다른 기관 같은데에 데려다져서 입양이 되었다는 이야기. 그러면 아마도 1970년대를 상상해보면, 전 1974년생인데요, 서울 길거리가 아이를 담은 바구니로 넘쳤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학적으로만 봐도 앞뒤가 안 맞았어요. 불가능한 이야기죠. 그래서 올해부터 이걸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3-4월에 시작했고 6월부터 덴마크에 있는 한국입양인들로부터 증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피터: 고아였던 이들은 한국에서 모두 가족을 찾은 상태였고 저 또한 그랬습니다. 도저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문서들도 살펴보니 비슷했습니다. 이게 진실일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저희는 문서가 조작되었다는 전제 하에 사례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한국 정부도 어떤 형태로 개입을 했으며 그 와중에 일들이 터졌다고 가정했습니다. 2달 전만해도 소아성애 사례를 제가 조사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어린 아동을 대상으로 가한 조직화된 성적 남용이라니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인들도 제게 편지를 보내왔는데요, 비입양인이기 때문에 이 사건과 관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들의 편지는 자신의 (입양된) 형제자매를 찾아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자신의 형제자매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아기를 찾으러 와보니 홀트가 도둑질해 간 상태였죠. 

피터: 홀트가 훔쳐간거죠. 당시 1970년대에는 만약 모친이 자발적으로 이를 허락하는 경우에는 포기각서를 써야했습니다. 저희는 홀트로부터 포기각서 문서를 보여달라고 요청했는데, 제게 보여준 건 보육원과 홀트 사이에 체결된 포기 문서였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에는 포기각서 작성이 의무였습니다. 

피터: 홀트가 이 포기각서를 보여줄 수 없다면 입양이 불법이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양시키기도 쉬웠던거죠.  아이를 입양하려면 아주 많은 문서작성이 필요합니다. 홀트는 이걸 하기 싫어했죠. 그래서 한국사회봉사회가 사례를 모두 조작한 겁니다. 입양하기 위해 문서들을 다 만들어냈는데 이런, 아이가 죽어버립니다. 어떡하죠? 다른 아동을 죽은 아동의 대리로 보냅니다. 입양인들이 서로 뒤바뀐거죠. 40세가 넘은 한 덴마크 입양인은 본인이 서류상 등록된 입양아동이 아니었다는 걸 모르고 지냈습니다. 한 덴마크 입양인 여성은 제게 말하기를 자신이 이런 방식으로 보내졌다는 걸 알고나니 텅 빈 조개 같은 기분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진실된 정체성을 알 권리가 있습니다. 

카오미: 지금 말씀하신 불법적으로 위장 입양이 조직된 게 사실이라면, 이 제도를 운영하는 데에는 꽤 많은 고위 관직자들이 개입했을 거라고 보는데요, 피터씨의 활동이 그런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거라고 예상하시나요? 

피터: 그렇게 보지는 않습니다. 21일 다음주 금요일에 국회가 저를 초청해서 발언을 하러 갑니다. 국무총리와 국회의원들 앞에서 발언을 할 예정입니다. 힘이 많은 사람들이죠. 국무총리로부터 국회에서 발언요청을 받았으니, 저를 초청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저를 실제로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고 제 발언을 홀트가 약간 불편해할 수 있을 것 같고 한국사회봉사회가 약간 불편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불편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동을 훔치거나 남용하면 그건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홀트는 규명해야 할 사안들이 많지만 입양이 사랑이라는 둥 광적인 기독교적 헛소리만 합니다.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홀트는 피터 뮐러씨에게 어머니를 찾아주지 못해 매우 유감스럽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치 제가 어머니를 찾지 못해 화가 난 사람처럼 만들죠. 근데 저는 제 어머니를 찾아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입양인들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카오미: 피터씨가 생각하기에는 입양사례들이 범죄로 기소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피터: 한국이 공소시효기간이 10년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9월 29일에 UN 인권위원회가 저희 사례를 지지하면서 정부의 독립적인 진상규명 활동을 허락하고 촉구하고 자료조작을 기소할 것을 요청하는 합동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엔 가입국가들이 이런 사례를 기소 및 처벌하라는 요청도 있습니다. 제가 사는 덴마크에서는 살인은 공소시효 제한이 없습니다. 50년 전에 누군가를 죽였다고 해도 오늘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살인도 공소시효 기간이 10년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홀트와 한국사회봉사회가 그동안 어떤 일을 해왔는지 전세계가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피터: 홀트가 지금도 그런 일을 계속 하고 있다면 그 직원들은 감옥에 가야 할 것입니다. 

카오미: 정체성 삭제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아까 그건 인종청소와 다를 바 없다고 하셨죠. 사람들이 사라지게 하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살해의 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피터: 네, 스티브 모리슨씨와 베이비박스 지지자들이 지난 금요일에 저한테 해준 말이 있는데요, 법과 인권, 아동인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법과 인권은 제2순위라고 했습니다. 법과 인권이 2순위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하고자 하는 건 베이비박스입니다. 

베이비박스는 홀트가 5-60년 전에 한 일을 반복하고 있어요. 다른 경로를 통해 다시 입양을 시작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매우 종교적인데요, 제가 보기에는 베이비박스 지지자들은 종교적 광신자입니다. 너무 광적으로 종교에 몰입하면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지고 정치화 됩니다. 그들은 제게 인권과 법을 잊으라고 했습니다. 신이 가장 높은 권력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두머리라고요. 그들은 자신이 신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일을 할 때는 인권과 법이 제2순위가 됩니다. 그들이 제게 해준 말입니다.

카오미: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식의 말이군요. 

피터: 홀트도 비슷한 입장입니다. 중요한 건 홀트도 기독교 단체입니다, 굉장히 종교적인 단체입니다. 홀트도 법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하고싶은 걸 하는 거죠. 하고싶은 걸 합니다. 종교 광신자들이 활동하는 영역에 어디가 또 있을까요? 입양 영역에서 아동에게 일어나는 이 일은 알카에다가 상징하는 바에도 비유될 수도 있습니다.  

알카에다는 사람과 집과 빌딩과 자동차를 폭파시키죠. 종교적 광신자들은 한국에 있는 사회적 제도와 아동을 보호하는 법과 규칙을 폭파시킵니다.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종교가 광적이 되면 정치화되는데 굉장히 우려가 되는 일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없애고 싶은 법 조항의 목록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피터: 전세계에 저희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입양은 입양되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입양은 한가지의 현상이 아닙니다. 입양에는 굉장히 많은 과정들이 포함됩니다. 너무 다양해서 같은 사연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희는 모두 각자 개개인입니다. 홀트와 한국사회봉사회와 입양기관들이 저희에게 어떤 일을 했는가를 알려야 합니다. 며칠 전에 한 입양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그 여성은 제게 자살시도를 여러 번 했다고 했습니다. 

13살 때쯤 되었을 때 자살을 하려고 했었고 그 이후에도 몇 번 했다고 했어요. 그 여성은 머릿속에서는 자신이 70세의 푸른 눈에 금발 여성인데, 거울을 보면 다른 모습이 보인다고 했어요. 이런 이야기를 많은 입양인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입양인들은 제게 이메일이나 전화를 통해 굉장히 사적인 사연을 보내옵니다. 전세계 입양인들로부터 매일 4통에서 600통의 이메일을 받고 있습니다.  

카오미: 정말 놀랍네요. 더 놀라운 건 피터씨의 헌신입니다. 기부를 받으시나요? 어떤 분들은 돕고 싶어하실 거 같은데요. 

피터: 아니요. 아니요. 아닙니다. 만약 기부하기를 원하시면 한국미혼모가족협회(KUMFA)에 하시거나 아니면 제주도에 있는 여성쉼터에 하시기를 바랍니다. 굉장한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이 하시는 일은 한국아이들을 베이비박스 광신자들로부터 보호하는 일입니다. 한국의 아동을 위해 나서는 일은 저희가 입양되었을 당시에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카오미: 많은 입양인들이 입양기관이나 보육시설로부터 입양문서가 타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데요. 

피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문서는 탄 적이 없어요. 저희는 그 문서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시즌5의 마지막 에피소드: 신선영+호랑이에게 바치는 연가 

어답티트 팟캐스트 시즌5의 마지막 에피소드, 지금 시작합니다.

안녕하세요, 한인 입양인들을 위해 처음으로 생긴 팟캐스트의 호스트 카오미입니다. 이 팟캐스트에서는 지금까지 120여명을 인터뷰하며 해외한인입양인들의 경험을 담아왔습니다. 오프닝 음악을 협찬해주시는 제이진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더 듣기를 원하시면 jaejinmusic.com을 찾아주세요.

“ 우리의 건강과 행복을 결정하는데 핵심적인 가족관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는 것이 제일 힘들죠”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시인이자 대학 교수인 신선영을 만나봅니다. 가장 최근에 출간된 시집“The Wet Hex(역자 가제 : 젖은 주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유령같은 존재로서의 입양인, 입양인으로서 문학의 세계를 넘나듬기그리고 가족 관계 안에서의 인종적 자각등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 봅니다. 

제 이름은 신선영이고 대명사로 그녀/그들을 사용합니다. 48세이고 미네아폴리스에 살고 있어요.

저희 팟캐스트에 나와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함께 이야기 나눌 일이 정말 기대됩니다.

고맙습니다.

새 책을 출간 했잖아요. 그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이번에 나온 책은 시집인데요 지난 6월 14일에 출판됐어요. 제목은 “The Wet Hex (역자 가제 : 젖은 주문)”입니다.  제 네번째 시집이고 Coffee House 출판사에서 나왔어요.

책을 써온지는 얼마나 되었죠?

25년 정도요.

주로 쓰는 내용은 입양과 관련된 그러니까 입양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경험에 대한 내용인가요?

글쎄요. 책을 하나하나 뗴어 놓고 보면 그렇게 느끼지 않을수도 있어요. 하지만 입양인이라는 사실이 내가 쓰고 관계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미쳤어요. 특히나 타국으로, 타인종간에 입양되었다는 사실이 내가 어떻게 사고하고 쓰는지, 내가 어떻게 나의 책과 나의 문학에 다가가는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가르치는 지에도 모두 영향을 주니까요.

“The Wet Hex(역자 가제 : 젖은 주문)”는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죠?

일종에 대량 멸종에 대한 프로젝트를 하다가 시작되었어요. 진화라는 관점에서 인류인 우리는 어디쯤에 있나하는 물음에서요. 진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역사의 모든 단계는 전환기잖아요. 그런 관점에서 지금의 호모사피엔스는 어떤 전환적 존재인가 하는 그런 의문에서 시작됐어요. 인종이나 국가, 기후, 종들간의 평등, 생태계, 한국문화의 여러 면들을 생각하게 되면서요. 제 양아버지가 2017년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어떤 시들은 상실에 관한 여러 면들을 다루고 있기도 하고요. 사후세계라든지 지하세계에 대한 생각들.  그런 생각들에서 시작됐어요.

입양인으로서의 우리는 어찌보면 같은 한 세대라고 생각돼요. 언젠가 닥쳐올 죽음 그리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요즘 많이 하거든요. 가족 그리고 나의 기원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는데 중년을 넘긴 입양인들이 많이 그러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이 책도 선영씨가 나이들어가는 과정인가요? 이런 주제들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하죠. 2020년에 팬데믹이 시작됐잖아요. 그때도 이 책을 쓰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 책 뒤에 있는  작가서문이 유난히 길어지게 되었죠. 팬데믹을 겪으며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우리가 얼마서 서로 긴밀하게 엮여있나, 공공보건등등을 생각하게 되었잔아요. 입양인들의 입장에서 수명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가족력이 없기 때문에 의학적으로 더 취약하죠. 예상수명이 얼마인가같은 질문에서 답할 근거가 없죠. “우리 할머니가 100살까지 사셨고 우리 엄마도 80대 치곤 굉장히 건강해” 이런게 없으니까요, 거기다가 원래의 문화나 생화습관이나 환경으로부터도 떨어져 살았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카톨릭 가정에서 자랐는데 아주 대가족이었어요. 그래서 자라면서 장례식에도 많이 참석했어요. 카톨릭에서는 죽음이 굉장히 큰 부분이니까요. 그러다가 자연스레 제 작품의 일부가 되었죠. 그리고 나이들어가며 아마 45살을 넘으면서부터인가봐요. 그때 자각을 했죠. 내가 이 사회에서 어떤 “어린 노인”의 단계에 들어서는 구나 하고요. 지금 “Z”세대들이 성인이 되었잔아요. 큰 변화죠. 그러니 우리가 벌써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세대인 거잖아요. 가장 어린 알파세대로 부터.

물론 이런것들도 다 다 임의적은 개념이죠. 한번 밀레니얼 세대가 오고 나니까 그 뒤에 바로 “Z”세대가 바로 따라오고. 뭔가 엄청난 주목을 받았잔아요. 우리 “X”세대가 줄 수 있었던, 그리고 우리가 받았던 것 혹은 우리의 역량을 넘어서는 관심을 요구하고요. 우리는 좀더 자유롭게 자라났잔아요. 우리 세대가 이제 나이가 들어가고 우리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것을 보게 되었죠. 그래서 그런 부분이 항상 제 화두에요. 항상 무엇을 뒤에 남길 것이고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를 생각하죠. 그리고 영어선생으로서 시공간을 초월한 작품들을 가르치잖아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같은 작품들이요. 2000년이 지났는데도 지금도 생생한 작품이죠.

물론 번역이 잘 되어서 그렇기도 하지만요. 전쟁, 희생, 가족들간의 비밀이나 불화, 파워, 젠더, 영역 싸움 같은 주제들은 변하지 않아요. 제 세번째 시집에 그 “안티고네”가 많이 녹아들어있어요. 남북전쟁때의 가족의 혈통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며 누군가는 파멸하는 내용이죠. 아무튼 그게 제가 기웃거리는 주제들이에요. 그리고 지금은 나이듦에 대한 주제로 많이 기울고 있어요. 제 아이들이 25살 21살이에요. 저는 꽤 어린 엄마였고 지금도 상대적으로 젊은 엄마죠. 성인이 된 아이들의.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가면서 제 엄마 역할도 계속 변하는 것도 참 재밌고요. 결론적으로 각각의 세대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해요. 특히 제가 대학에서 일을 하다보니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당면한 문제와 그들 세대의 불안은 무엇인가에 대해서요. 매년 저는 늙어가지만 제가 가르치는 그들은 같은 나이대에 있으니까요.

이 젊은 세대들의 불안에 대해 저도 아주 깊이 공감해요. 그리고 지금 초중고에 다니는 학생들에 대해서도요. 제가 아이들을 위한 책도 쓰거든요. 지난주에는 한 학교를 방문했어요. 아이들이 이렇게나 갑지고 소중한 존재들인데 이 나라는 생명을 존중하지 않아요. 아이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죠. 교사들도, 여자들도, 성소수자들도 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런 저런 폭력에 노출되어 있죠. 작가들이란 사회적으로 깊이 관여하고 여러 당면주제들을 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도 항상 이런 이슈들에 대해 쓰는 사람들이에요. 한국 작가들이나 입양인 작가들이나 재미교포작가들이나 모두요. 우리는 모두 집단적으로 트라우마, 고통, 걱정 속에 살고 있잖아요. 물론 희망적이고 재미있는 일도 일어나지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지배구조에 대해서 어떤 대안을 제시해야죠.

다른 입양관련 활동가들은 우리의 존재가 소멸되기를 바라잔아요. 없어져야 한다고요. 이것또한 같은 맥락일까요? 내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맞는.

그렇죠.  오랫동안 생각을 해봤어요. 한국인 해외입양은 없어져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입양들을 위한 활동가들, 미혼모들을 위한 활동가들, 재생산권을 위한 활동가, 가족유지 활동가들 모두 큰 변화를 만들어냈죠. 그런데 제 친척중에 같이 한국에서 입양된 사촌이 있어요. 시카고에서 같이 자란. 저보다 다섯살 정도 어린데요. 여덟살인가? 암튼  그 친구가 몇 년전에 한국에서 입양을 했어요. 세살짜리 여자아이를요. 그 아이 개인을 놓고 봤을땐 집이 생긴거죠. 그래서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고 비록 예전 같은 한인대거입양은 없어졌다고 하더라도요. 그 수준으로 다시 돌아가면 안되고요. 

기후 변화나, 이민, 추방 그리고 한국이 됐든 우크라이나가 됐든 혹은 그 다음 어느 나라가 됐든 사회 불안정을 겪는 나라들, 여성억압, 강제 이주 이런 것들이 제가 깊게 생각하는 주제들이에요. 제가 전문 활동가나 법안을 만든다거나 그럴수는 없지만 적어도 제 분야-제 수업시간이나 제가 쓰는 언어로 사람들과 소통할때 항상 그런 부분들을 인식하고 자료를 나누고 다른 사람들이 이뤄놓은 자료들을 나누려고 해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고 우리는 어디에 있고 어디에서 왔고 미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등에 대해서요. 우리가 입양인으로서 하는 이런 모든 일들도 이 사회의 다양한 담론들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임신중절권이든 임시보호가 됐든 혹은 사회복지, 시민권등의 모든 부분에요.

쓰는 내용이 어떻게 변해왔나요?

그 질문을 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변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어요. 책을 한권씩 낼때마다 다루는 것이 다르긴 하지만 제가 주로 천착하는 주제가 있거든요. 지난번에 나온 시집에서는 환대의 정치학과 손님됨에 대해서 다뤘어요. 손님과 주인이라는 언어와 그 관계가 흥미로웠거든요. 지금은 조금 더 환경적으로 생태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쓰려고 노력해요. 생태시인이라고 하든가요? 기후와 종의 생존등에 관한것들요. 그런쪽으로 제 주제가 변해왔다고도 할수 있겠네요. 하지만 제가 쭉 해오고 있는 것들은 특히 시쪽으로는 제가 원자료수집(역자 주-SOURCE DOCUMENTS)에 관심이 있어요.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다른 사람들이 한 말 – 그게 프로파간다가 됐든 다른 작가들이 쓴 말이든 – 샘플링하고 모아붙이고 하는 작업을 해요. 일종의 업사이클링이죠. 그게 제가 계속 해오고 있는 작업들이에요.  전설이나 동화에도 관심이 있고요.

이번 책에는 한국을 많이 언급 했잖아요. DMZ라던지 휴전선이라던지, 고아라던지, 조금 더 개인적인 경험이 녹아들어있나요?

네. 이번엔 더 내 이야기 같아요. 내 개인의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느끼기도 하고요. 한국에 다섯번 갔었고 그 중에 두번 DMZ에 갔었어요. 제 모든 책들은 디아스포라 (주:이산, 원래의 거주지를 떠나 삶)로서 이곳의 삶과 그곳의 삶 사이의 차이를 붙들고 씨름하는 거에요. 한국과 미국의 관계도 아시아 지역의 정치적 변동과 함께 발전하고 있는 것도 나와 아주 관련이 깊다고 느껴져요. Books and BOBA 팟캐스트에서 한국인 소설가 조셉 하가 나와서 그의 데뷔 소설 “Nuclear Family(역자 가제 – 핵가족) 에 대해서 말하는것을 들었어요. 저도 한 권 구입했어요 . 그래서 이 현재 진형형인 상실과 슬픔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죠. 전쟁이 끝난지 70년이나 되었는데도 갈라지고 떨어져 살아야 되는 사람들말이에요. 엄밀히 따지면 한국은 아직  전쟁중이니까요. 아직도 이산가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고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많이 돌아가셨고 혹은 다들 사실 날이 얼마 안 남았고요. 굉장히 슬픈 일이죠.

입양인으로서 모국과 다시 이어지는데 굉장한 노력이 들어요. 기회비용이랄까요. 한국에 가기 위해서 많은 비용이 들고 역사를 공부하는 것들이요. 그걸 다른 내적 성장에 썼다면 – 테라피 같은 거요. 물론 테라피도 많이 받기도 했고요(웃음). 아무튼 평생을 가는 작업이에요. 또 제 아이들이 닻없이 표류하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무언가를 물려주고 싶기도 해요. 비록 한국에 다른 가족들이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굉장히 훌륭한 질문이었어요. 네. 개인적인 이야기맞아요.  비록 제 매일의 생활이나 어린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그것들이 재미없거나 중요하지 않았어서라기 보다는 한인입양인으로서의 저의 경험은 뭐랄까 조금더 집단적인 경험 같아요.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하잖아요. 백인우월주의라던가, 가족들간에 신념체계라던가, 입양 그리고 미국인으로 흡수, 동화되는 과정등 말이에요. 그래서 그래서 저의 개인의 경험이 시 안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는 않아요. 감추려고 하거나 그런건 아니고요. 저는 다 보여주는 사람이거든요.

시를 읽어줄 수 있을까요?

그럴까요? 제 친구 Sue Hwang을 위해서 쓴시인데 그 중에서 조금 읽어볼게요. 그  친구는 여덟살때 가족과 함께 이민온 한국계 미국인이에요. 몇 년전에 그 친구가 첫 책 “Bodega(역자 가제:잡화점)”를 냈을때 그 친구가 우리에게 여럿이 같이 책을 읽고 모두 “Bodega”라는 제목으로 시를 써달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그때 Bodega라는 제목으로 썼다가 나중에 “Behind This Door is a Siberian Tiger(역자 가제 : 문밖에 시베리아 호랑이가 있어)”라고 다시 제목을 붙였어요.

호랑이 해에 태어난 아이

사과를 쪼갤 운명의 아이

성냥첩을 모으고

들판에 서서 불의 언어를 하네.

시인은 해를 시샘하게 만들어.

마법을 부리 도록.

작아도록.

빈 통나무 속으로 숨어들 도록.

발톱을 무디게 만들 도록.

그 발톱은 지난 달의 달빛을 비춰

빛에 대해 말해볼까?

네 엄마는 그걸 어떻게 발음하지?

아빠는 어떻게 묻어버리지?

오빠는 어떻게 그걸 담보로 잡히지?

신이 약속한

모든 것을 걸면서.

어떤 내용이죠?

돌려표현하고 있는데요. 지금 DMZ가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자연 그대로의 땅이 되었잖아요. 지난 70년 동안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일본군의 강제 점령과 제국주의 합병이전까지 한반도 전역에 호랑이가 있었는데 지금 다 사라졌죠. 시베리아 호랑이와 UMER 호랑이 모두 이제는 자연속에서는 찾아볼수가 없죠. 그리고 제가 호랑이 해에 태어났어요. 산호랑이의 해에요. 그래서 제가 호랑이에 집착하는 것일수도 있고요. 그리고 “Lady or the Tiger? (역자 주-여주인인가 호랑이 인가?)” 라는 단편하고도 관련이 조금 있고요. 80-90년대에 미국에서 자랐다면 학교에서 많이 읽었을 거예요. 선택과 그 미지의 결과에 관한 이야기이죠. 문 뒤에 있는 것이 위험인지 보물인지 알지 못하는.

그리고 하나의 중요한 모티브는 복권추첨이에요. 고아들과 입양인들이 알지 못하는 가족들한테 보내진다는 것이 말이에요. 아이들을 다른 아이로 바꿔치기 했던 것과 같은 입양과정에서의 부조리들 말이에요. 입양부모한테는 이 아이를 데려갈 것이라고 해 놓고 그 아이가 죽거나 친부모가 나타나거나 하면 다른 아이를 보낸다거나 했던 것 같은거요. Deann Borshay Liem의 “In the Matter of Chan Jung Hee”(주-”차정희에 관하여”)라는 영화에서와 같이요. 입양기관에서 이름을 “차정희”라고 하라고 시켰다고 하잔아요. 뭐라고 이름붙이기도 난해한 그런 문제죠. 독자에 따라서는 그리 심각한 문제라고 느껴지지 않을수도 있고요.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의 생존에 대한 연가이죠. 생존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가 하는 물음이기도 하고. 여기서 호랑이는 인간에 의해 그 존재가 위협받고 있는 모든 존재들을 나타내는 거죠.

입양인들이 처한 위험과 우리를 향한 폭력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요. 물론 그 정도의 차이가 어마어마하지만 모든 입양인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버려지고 포기되었다는 면에서요. 그리고 이 미국이라는 인종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나라, 외국인을 원하지 않는 나라에 보내졌죠. 지난 트럼프 정부때 이걸 썼어요. 외국인 혐오, 속함belong, 등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요. 그렇다고 제발 우리를 받아주세요 우리는 여기 사람이에요 그런 뜻은 아이네요. 우리가 원래 살았던 땅도 아니고 착취한 땅이잔아요. 저도 어떻게 보면 점령하러 온 사람에 속하죠. 물론 내가 원해서 오게 된건 아니지만요. 이런 것들이 그 시를 쓸때 아니 모든 시를 쓸때 항상 생각하는 것들이죠. 한국에서 온 소녀라는 존재가 겪는 감정적 부침같은 것들이요.

제가 너무 넘겨짚는 것일수도 있지만 작품속에 폭력이 많이 보여요. 맞나요?

정말 그래요. 제 모든 작품들이 폭력에 관한 것이에요. 제 전집과 아이들을 위한 책들이 모두 마찬가지로 폭력에 반응하는 각각 다른 모습들을 다루고 있어요. 인권침해 혹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와는 달리 설명되는 문제들, 우리가 어떤 이념적 싸움에서 하나의 볼모나 담보로 사용되는 것과 같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에요. 제 개인적으로 보자면 제 양아버지가 아주 화가 많은 사람이었어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저도 화가 많아요. 만약에 우리가 여자이고 내가 먼저 화를 내지 않으면 평생을 뇌사상태 처럼 살아가야 하잖아요. 여자들은 화가 나 있고  아시안 여자들은 화가 나 있다 라는 것은 이제 말 하면 입아프죠. 물론 우리는 다 각각 다른 개인들이지만요.

이 세상이 너무 한심해요. 세상에 폭력이 너무 만연해요. 나이를 불문하고 여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어디에나 있죠. 어디든 안전하지 않아요. 성감별임신중절로 인해 세상을 태어나지 못한 여자아기들에 대해서도 생각을 끊임없이 해요. 남아선호사상때문에 성별의 불균형이 있는 곳들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화가 나요. 너무 속상하고요. 그래서 최대한 큰 목소리를 내려고 해요.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에게든 아닌 사람들에게든요. 세상엔 폭력이 너무 만연하고 그게 제가 세상을 보는 렌즈에요. 물론 기적도 많지만요.

참 멋진 사람들도 많지요. 아름다움 사랑 보살핌도 많고요. 저는 이상주의자이기도 하지만 작가로서 혹은 공공의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이 사회를 비판하는 일이 제가 할일이라고 생각해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폭력을 폭력이라고 부르는 일이요. 이 사회가 이젠 너무 당연시 하고 체념해버린것 같기도 하지만요. 그래서 문학을 파는 이유도 그거 같아요. 그게 제가 쓰는 주제이요 특히 시를 쓸때는요.

책 감수도 했었죠

네. “진실 마주할 시간 : 미네소타의 인종에 관하여(역자 가제, 원제 – A Good Time For The Truth: Race In Minnesota)”란 책이요

미국내에서 가장 백인비율이 높은 곳중에 하나잖아요. 그런 곳에서 자라는 건 어땠나요?

전 실은 일리노이에서 자랐어요. 미네소타가 아니고요. 그래서 제가 처음에 미네소타에 왔을때 제 작업에 큰 화두가 되어줬죠. 보스톤 대학으로 진학을 했다가 세인트폴에 있는 맥갈리스터 컬리지로 편입을 했어요. 그래서 그때 처음 세인트폴에 왔을때 그때 아주 큰 문화충격을 받았어죠. 그때 첫 날 도착해서 당시 남자친구하고 주변을 돌아보는데 미네소타가 처음이었거든요. 교회랑 주류삽이 왜 이렇게 많지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참 이상했죠. 그리고 주변이 온통 백인들 뿐이었어요. 백인세상이었죠.

그리고 바로 적응을 하면서 보니 티비 뉴스에 나오는 사람도 모두 백인, 라디오에 나오는 사람도 백인, 의회도 백인, 그 어떤 관공서도 다 백인, 학교 교장들도 백인, 교수들도 백인.. 끝도 없죠. 1992년 가을의 이야기이니까요. 제가 처음 여기 왔을때가요. 그대 90년대에는 90%이상이 백인인 주 였어요. 지금은 84%가 백인인 주이고요. 물론 트윈시티 (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와 세인트폴)주변은 그때도 상당히 더 갈색(역자 주- 서남 아시아 인을 비롯한  다양한 인종)이었지만요.  50년 전 이야기에요. 그런데 단지 백인이 많아서 그랬던건 아니에요. 저도 백인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주변 환경은 좀더 다문화였거든요. 다양한 인종이 모여사는 도시근처에서 자랐으니까요. 그런데 미네소타에서는 인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금기시되는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첫날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여기 오기전부터 이미 전 내가 유색인종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인종주의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페미니즘적으로 사고하고 있었고요. 그 모든것이 중고등학교때부터 시작됐었죠. 페미니즘까지는 아니었더라도 인종과 지역에 대해서, 이 나라에서 한인 입양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비백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특히 이미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뭘 의미하나 이런 문제들에 대한 고민을 벌써 하고 있었는데. 미네소타에 오니 뭐랄까 불모지에 온 것같은 기분이었어요. 여기는 주된 정서가 인종차별 같은거는 말을 꺼내지 않는 분위기였죠. “여러 인종들이 모여 살게 됐으니 인종차별도 없어졌고 이제 모두 똑같이 취급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그런 수준이었죠.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요.

그러다가 20년이나 머물게 되었네요.

30년이 거의 다 되가요. 이번 가을이면요. 아직도 좀 힘들어요. 제가 집순이라서 겨울스포츠를 안좋아하거든요. 겨울 너무 싫어하는데. 겨울이 너무 길죠. (웃음) 제가 오랫동안 몸담을 수 있는 모임이 있는 것에 감사해요. 제가 처음 시작했을 때는 많이 없었는데 지금은 유색인 작가모임이 인원이 많아요. 탄탄한 모임 같아요. 서로 많이 지지해주고요. 이 범아시안모임에 참 감사한 것이 그냥 중국인 모임만 있고 한국인 모임만 하는것이 아니에요. 물론 나라들 고유의 개성이나 문화들은 있지만요.

그래서 항상 다른 그룹들 다른 이웃나라 그룹들에도 최대한 많이 참여하고 맡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하려고 해요. 너무 미화하는것은 아니지만 이 예술 영역에서 유색인종작가들은 서로 정말 많이 도와요. 적어도 제가 아는 사람들은요.  서로 치켜 세워주고 같이 만들어나가죠. 경쟁한거나 영역싸움 이런거 없이요. 특히나 시쪽에서는 어짜피 돈이 안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냥 좋아서 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니면 다른걸 못해서 하기도 하고 아니면 안할 수가 없어서 하는 경우도 있고요. 특히나 시의 경우에는 사랑해서 하는 노동이죠. 구술이 가능한 예술이기때문에 사람들을 모을수 있고 접근하기도 쉽고요

시를 쓸때 돈이 드는 것이 아니잖아요. 때로는 펜도 필요없을때도 있어요. 그냥 말로 해도 되니까요. 그래서 제가 계속 이 쪽에 몸담고 있게 되는것 같아요. 예술 속에서의 교류,  영감같은거요. 제 생각엔 전 미국에서 우리 모임이 제일 잘 되는것 같아요. 동부나 서부쪽 사람들말을 들어봐도요. 일단 물가가 비싸니까 생활하기가 힘들고 그러니 모임이 여기 같을수가 없죠.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힘들고요. 그러니 세분화도 많이 되어있고요. 그냥 제 생각일수도 있죠.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의견이 있겠지만요.

지금의 유색인종작가들을 보면 많은 경우에 이민 이주과정에서 가족들이 겪은 외상, 부모세대와의 단절등이 주요 소재잖아요.  그런면에서 한인입양인작가들이 다른 이민작가들과 연대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까요?

굉장히 훌륭한 질문이에요. 물론 그래요. 이렇게 왕성 했던 적이 없어요. 입양인 작가들은 미국에서 성장한 1.5세 작가들하고 함께 공유하는 것이 많죠. 두개 혹은 세개의 문화속에서 자란 사람들이잔아요. 그런데 제 주변에 한인1.5세 작가들을 보면 그들 각각 자기 삶에 녹아든 고유의 문화는 있겠지만 한인1세 부모들로부터 지난 이야기나 고생한 이야기 혹은 조상들이 어떤 일을 겪었나 혹은 한국의 역사를 듣고 자란것은 아니더라고요. 1.5세들이 한국어를 못하는 경우도 많고요.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 한국어를 포기한 경우도 많고요.

미국인처럼 보였으면 해서요?

네. 그래서 마치 벤다이어그램 같은 모양이 되는것같아요. 겹치는 부분도 많으나 다른 부분도 큰. 지금까지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일반적으로 한인 입양인 작가들을 많이 포용해주는듯 해요. 그런데 소설쪽으로 가면 좀 다르다고 느껴요. 시쪽은 아무래도 이야기가 좀 덜하다보니까요. 제가 그런 서사시쪽을 안 쓰기도 하고요. 아무튼 소설이나 회고록쪽에서는 좀 이야기가 다른것 같아요. 다만 유색인종으로서 매일의 삶에서 방황하는 모습에서는 공통점이 더 크다고 봐야죠. 

게이트키핑(역자 주 – 결정권자가 보도 할 만한 이슈를 취사선택하는 함.)으로 인해 다 같이 힘들어하니 다 같이 맞서야 하는것도 많고요. 그러니 각각의 분야에 대한 개성은 존중하지만 조직을 너무 나눌 필요는 없다고 봐요. 우리의 경험이 모두 같다고는 말할 수 없죠. 그렇다고 하더라고 외로울 수도 있죠. 제 주변에 입양인들중에서도 그속에서 자란 사람들도 있어요. 같은 아시안들 사이에서 자랐어도 끼지 못한다고 느끼거나 외부자라고 느낄수도 있는거고요. 아쿠는 네가 어디서 자랏고 성인이 되었을때 어디에서 살아가는가에 달려있는것 같아요. 다른점이 분명히 있어요.

다른 한인작가들 사이에서 존재를 인정받는것 같나요?

잘 모르겠어요. 그런것 같기도 하고. 소설이랑 회고록분야는 아무래도 배경이나 스토리면에서 다루는 이야기의 범위가 넓잔아요. 살도 많이 붙고. 장르의 차이겠죠.

문학쪽을 잘 모른는 사람들을 위해서 설명을 더 해주실래요? 소설쪽이 왜 더 힘든건가요? 우리의 경험이 우리가 자란 백인 세상으로부터 만들어진거라서?

제가 한인 작가들이나 혹은 다른 유색인종 작가들 특히 제 나이 또래나 조금 더 나이든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같은 문화권에서 온 멘토같은 동료나 선배들을 찾기 힘들어요. 그것도 힘들고 은근히 자기 뜻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도 힘들고요. 지금도 많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죠. 지금 제가 가르치는 젊은 세대 작가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도 똑같대요. 장르에 관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보면 소설의 경우에 입양인 캐릭터가 비입양인과 상대를 할수도 있고 여러명의 입양인 캐릭터가 그냥 한인캐릭터 혹은 그냥 다른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들어 낼수도 있고요. 그래서 마치 포켓볼처럼 서로 주거니받거니 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서로 어떻게 감정적으로 영향을 주는지도 그릴수도 있고 시공간내에서 스토리라인을 그려낼수가 있잔아요. 그런데 제가 쓰는 시는 등장인물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어떤 시공간을 따라서 등장인물들이 연관되어서 움직이는 그런 세상이 아니죠. 어떤 존재에 관한 한 상황에서 조금더 감정적인 경험에 대한 거고 이미지나 느낌에 대한 거죠. 일시적인 상황일 수도 있고요. 혹은 언어 자체에 관한것일수도 있죠. 그래서 쓰는 시에 따라서 품이 더 들어갈수도 있고요.

그래서 조금 더 표현주의적이 될 수도 있고  인상파처럼 보여줄 수도 있고요 뚝뚝 끈기기도 하고요. 일부러 어지럽게 만들기도 하고요. 물론 소설에서도 가능하죠. 저는 장르간에 차이가 있다는 말을 별로 믿지 않는 편이에요. 물론 전문정을 획득하는 과정은 또 다른 이야기이지만요. 어떤 전문가의 영역에 들어가면 어떤 다른점들이 분명히 있지요. 지난 백년동안 미국내 아시안작가들이 쓴 소설을 보면 이민이야와 부모와 자식  세대간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가 주죠. 특히 성장소설 등을 보면요.  우리는 그곳에 못들어가죠.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우리는 한국가족을 접할 기회가 없었잔아요. 우리가 가족과 같이 오지 않았기도 하고 그들의 손에 큰것도 아니고 떨어져 자랐잔아요.

그런 면에서 좀 소외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입양인으로서의 내 이야기가 담겨있는 소설을 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쓰려고요. 십대들을 위한 소설을 쓰고는 싶은데 아직은 잠정적이에요. 인간복제에 대한 이야기인데 거기에 입양도 들어가 있고요. 하지만 입양인의 삶이 어떤가 그런 이야기는 또 아니고요.  입양인들의 회고록들이 참 좋고 그  중에 굉장한 작품들도 있어요.

입양인이라는 경험이 이 모든 창의력이나 상상력을 배가시켜주는것 같아요. 우리는 뭐랄까 유령과 함께 살고 있잖아요. 우리 주변을 유령이 배회하는 것 같달까요?  혹시 선영씨도 비슷하게 느끼나요? 우리의 삶 안에 유령이 있다고?

고마워요. 그 이야기를 꺼내주어서. 맞아요. 한국인들은 어떻게 보면 20세기 내내 진행된 전쟁과 그 상흔으로 고통에 시달리며 살고 있죠. 입양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미네소타 주립 대학의  Dr. Pauline Boss의 표현대로 애매한 상실(역자 주-Ambiguous loss)에요. 애매한 상실인 이유가 끝도 없고 실체도 없으니까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실체도 없고 어떤 경우엔 전해지는 이야기도 없잔아요. 예를 들어 전쟁중에 실종되어 유해도 찾을 수 없는 친적이라던가 납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가족들처럼 실체도 없고 정황도 없어요.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요.

관계라는 것이 우리 인류라는 종족의 전부나 마찬가지인데 우리의 건강과 행복을 결정하는데 핵심적인 가족관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는 것이 제일 힘들죠. 우리의 행복,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개념, 나 자신에 대한 의식도 마찬가지로 필수적이고요. 그런데 그건 양방향인이기도 해요. 우리의 존재가 비밀 존재일때가 많잖아요.그게 평생 친부모한테 고통을 주죠. 그러면 그것이 우리의 형제자매들한테 영향을 끼치겠죠. 그들이 우리에 대해 알던 알지 못하던요. 비밀이라는것이 그 비밀을 쥐고 있는 사람 주변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니까요. 그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한테도요. 그러니까 뭔가 있어요. 어쩌면 이중의 유령과도 같은 존재죠. 우리가 귀신한테 홀림과 동시에 우리 자체가 살아있는 유령이 되어 친부모가 됐든 우리의 존재를 아는 조부모가 됐든 우리가 유령이 되어 그들의 삶을 홀리고 있죠. 그리고 우리 입양인의 존재가 한국을 흔들고 있잖아요. 몸을 놓고 벌어지는 한국의 정치 상황이나 고아 수출등에 관해서요. 정치적으로나 시민사회에서 귀속될 권리를 빼앗긴 사람으로서 말이에요. 

그래서 이 유령의 비유가 적절한것 같아요. Avery Gordon 의 “Ghostly Matters: Hunting and the Sociological Imagination(역자 가제 – 유령에 관한 :  유령에 들림과 사회적 상상)”을 추천하고 싶어요. 미국의 백인 인류학자에요. 또 Grace Cho의 첫 책 “Hunting the Korean Diaspora(역자 가제 : 한인 이주 뒤흔들기”와 최근 책인 “Taste like War”(역자 가제 : 전쟁의 맛) 를 추천하고 싶어요. 이 책들이 제가 “Hunting(역자 주- 유령들림) 에 대해서 파고들 때 항상 보게 되는 책이에요. Grace Cho는 인류학자라서 항상 광범위하게 조사해보죠. 입양인은 아니고 한국인 엄마 백인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우리가 외국에 오래 살다가 돌아오면 신용유령이라고 한다고 들었어요. 신용을 쌓을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병원에서도 마찬가지에요. 가족력을 모르니까 의료기록에 있어서는 유령이나 마찬가지죠.

“Invisible Asians(역자 가제 : 보이지 않는 아시안들)”이라는 Dr. Kim Park Nelson의 책이 있어요. 일인 식민지(역자 주 – Colony of One)” 라는 개념을 그가 명명했거나 아니면 다른 학자가 고안한 개념을 썼던가 할거에요. 그 제목이 참 와 닿더라고요. 책이 나온지는 꽤 됐을거에요. 우리 입양인들은 너무 고립되어 있고 자라면서도 다른 입양인들이나 다른 한국인 모임이나 한국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분리되어 살았기 때문에 그 1인식민지라는 개념이 우리가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실존적 존재였는지를 보여주죠. 그래서 제가 어디가서 강연을 하거나 할 기회가 생기면 입양이라는 것이 왜 어떤 실존적 상황인지 그냥 단순히 집이 생기고 가족이 생기고 먹을 것이 생겨서 좋은 것이 아니라는 걸 설명하려고 해요. 가족이 생기고 음식이 생기고 집이 다시 생겼어도 학대받고 그러잖아요.

작품을 한 편 더 읽어줄 수 있나요?

그럼요. 이건 더 입양에 관한 것인데 아주 짧아요. 제목은 “Our Country Laundered Us (역자 가제 : 내 나라가 나를 세탁해버렸다. )”에요. 고아세탁이라고 아 이름이 생각이 안나는데 중년이 되니 이러네요. David Smolan이 명명한 개념일거에요. 그도 한인 입양인의 부모인데 법학과 교수인가 그렇죠.

내 나라가우리를 세탁해버렸다.

그것도 종이 위에.

숲도, 빵 부스러기도, 조약돌도

계모도, 아빠도, 죽은 엄마도

빗자루도, 새 장도, 설탕도

파리도, 혓바닥도

기지촌 여자들도.

계속되는 세탁소리.

술집들과 기지촌도,

얼룩말도, 낙타도, 양도,

여물통도.

신과 그의 천사들도, 악마도,

출생도, 사건도.

하얀 빛도, 열기도, 욕설도, 화염도.

한밤중의 희생적 비행

마침내 깨끗해졌다.

굉장히 시적이고 상징적이에요.

고마워요. 이건 뭐랄까 헨젤과 그레텔 같은 이야기에요. 예수와 마리아 같은 시일수도 있고요. 제 어린시절로 부터 떠오르는 원형같은 이미지죠. 이런 원형의 가족같은 이미지가 계속 떠올라요. 왜냐하면 버려진 아이들의 이미지가 항상 가슴속에 있거든요.

미국가족들이 작품속에 등장하기도 하나요?

그런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이름을 쓰고 하진 않지만요. 하지만 항상 존재하죠. 오빠가 있는데 오빠도 입양됐거든요. 그런데 오빠는 미국내 같은 백인간에 그것도 가까운 지역에서 입양됐어요. 친부모가 아마 아직 결혼전이었던가 그래서였을거에요. 그런데 그건 부차적인 이야기이고요. 아무튼 그래서 다른  입양인과 함께 자라기는 했지만 그와 나는 다른 인종이기때문에 그에 따른 각각 다른 경험을 했고 그것이 가족간의 친밀감을 쌓는데 다른 역할을 했겠죠. 그래서 그런 것들에 대해 항상 생각을 하죠. 그리고 그에게 지금 아이들도 있거든요. 그래서 백인 입양인의 백인 자녀들은 또 어떻게 자라날까 하는것도 그 다음으로 생각해볼 주제고요

제 아이들의 경우에는 부모가 둘다 입양인인 혼혈아이들이죠. 애들 아빠도 입양인인데 그의 경우엔 가족 내 입양이었어요.  얼마전에 Ancestry.com을 통해서 멕시코에 있는 친부와 할머니를 찾았어요. 항상 이 핵가족에 대해서 생각해요. 마음속에 항상 어떤 인형의 집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극장 같은 집이요. 한 곳에는 내 입양가족이 있고 한쪽에는 한국의 가족이 있어요. 그리고 아버지하고는 거의 10년간 연을 끊고 살다가 연로해지시고 사실 날이 얼마 안남게 되었을 때 다시 화해했어요. 아버지가 반이민자 슬로건 같은 것에 빠지셔서 대학때부터 연을 끊었거든요. 도무지 관계를 이어가는것이 불가능했었죠. 나도 그런것을 듣고 그냥 넘겨버릴 수가 없었고 서로 한치의 양보도 안했죠. 그런데 그 뒤로 조금 유해지시기도 했고 병세도 악화되고 그래서 그냥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더라고요. 부모님은 제가 대학때 이혼하셔서 그때부터 따로 사셨고요. 엄마는 아직도 건강하세요

78세이신데 일리노이주 시골에 사시고요.  제 입장에서 말하자면 엄마랑 가깝다고는 할수 없을것 같네요. 사이는 좋은 편이고요. 깊은 이야기까지 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지만요. 제 책도 읽으신적도 없어요. 책 읽는 스타일이 아니셔서요. 사는 이야기 서루 공유하고 아이들도 보여드리고 그런정도요. 그러니 이 정도면 좋은 사이라고 할수 있겠죠. 하지만 입양인으로서 항상 부모로부터 멀게 느껴졌었어요. 오빠랑도 잘 지내고요. 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더 가까워진것 같아요.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요. 우리가 같이 자랐다는 것이 고맙고 우리가 어린시절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이 아주 다르기는 하지만 같이 자란 형제자매가 있다는 사실이 고맙고요. 그리고 엄청 싸웠어요. 그래서 회복력이나 끈기 같은것을 기를 수 있었죠. (웃음)

입양인들과 이렇게 계속 연결되는 것이 우연일까요?

아니죠. 분명히 이 세계에 갇혀 있어요. 아이들 아빠와 이혼 이후에 만났던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임시보호 경험이 있거나 입양되기를 기다렸었거나 혹은 입양인이거나 아니면 부모가 입양인인 사람들이었어요. 제가 일부러 그렇게 찾아다닌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보면 입양인의 경험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사람하고는 가까워질 수가 없으니까요. 꼭 한인입양인일 필요는 없고요. 하지만 입양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죠. 그래서 일부러 계획을 하고 의식을 하는건 아니지만 항상 그렇게 됐어요. 아이들 아빠조차도요.

그런 사람들에게 끌리는 군요.

(웃음) 맞아요. 꼭 상처에 끌리는 것같아요. 그렇게 건강한것 같지는 않죠? 확실한 건 어떤 식으로든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한테 끌린다는 거에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우리중의 많은 수가 인종차별주의자속에서 자랐다고 했잔아요. 자기가 인종차별주의자인지도 모르는 양부모들 말이죠. 그것이 아이들을 키우는데 어떤 영향을 주는 것 같나요? 지금 성인이 다 됐잔아요. 그래서 아이들을 키우는데 있어서 조금더 의식적으로 인종차별적인 요소를 없애려고 노력하나요?

물론이죠. 제 애들은 몸만 성인인 아이들이에요. 딸아이는 아직 대학생이고 아들아이는 직장생활을 하긴 하지만 아직 애들이죠. Z세대 중에서 좀 나이든 쪽이라고 할까요? 모두 상당히 긴 어린시절을 보냈죠. 사회가 변했으니까요. 제 부모님은 그래도 다른 미네소타의 친구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본바에 의하면 상당히 괜찮은 분들이셨던것 같아요. 시카고주변에서 자랐기 때문에 인종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는것 자체가 금기시되고 그러진 않았거든요. 아예 심한 인종차별주의자이거나 아니면 다른인종과 친구이거나 그랬죠. 서로 다른 인종 간에 친구가 될수 있었어요. 왜냐하면 시카고 자체도 꽤 인종분리가 심한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유색인종이 아주 많았고 그래서 일터에서 같이 일하거나 이웃이 되거나 다양한 음식을 접하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에요.

제 부모님은 저를 같은 백인으로 취급하거나 하지는 않으셨어요.  특히 미네소타로 입양된 저와 같은 또래들과는 달리 말이죠. 저희 부모님은 제가 한국인이지만 미국 시민이기도 하다는걸 항상 강조하셨죠. “People of color(역자 주-유색인종)”이라는 말을 쓰거나 하지도 않으셨어요. 저를 백인만의 특정한 문화나 행동양식등에 맞추려고 하지는 않으셨죠. 어떤 이념을 추종한다거나 하지 않으셨어요. 복음주의 신도들처럼 저를 어떤 백인구원자적인 시각으로 보거나 하지도 않으셨죠. 다른 입양인들이 겪은 것처럼 말이에요. 어려서부터 인종이라는 것에 굉장이 눈을 떴는데 중학교 교장선생님이 흑인이기도 하셨고요. 엄마가 본인도 모르는새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할때 저는 그게 다 느껴졌어요. 제가 자란 일리노이 부룩필드 근처는 중심가로부터 20분 정도 떨어진 곳이라 폴란드인, 아이리쉬인, 라틴아메리카 사람들, 이태리 사람들이 많았어요. 모두 노동자계급들 이었죠. 그리고 우리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철길이 있었는데 그 철로 주변으로 흑인들이 모여 살았거든요. 우리 사회가 차별적이니까요. 그런데 엄마가 “유색인종들이 많이 사는 곳을 지나갈때는 조심해야 해” 라고 말할 때 굉장히 인종차별적이었죠.  물론 제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줄은 알았지만 어쩜보면 그런 것들이 다 미디어등을 통해 각인된거잔아요. 본인이  직접 흑인들한테 해꼬지를 당했던 것도 아니고. 아무튼 그럴때 인종차별적이었죠. 

그리고 우리 아빠쪽 가족들은 모두 시카고 남부쪽 출신들이고 지금도 다들 그 근방에 살아요. 그래서 N-word를 쓰는게 일상적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조심했어요. 그냥 튀어나올 까봐요. 그리고 제가 또 굉장히 경계할때가 있었는데 가족들이 외식을 하거나 할때면 사람들이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항상 알고 있었어요. 저는 다르다는 걸요. 그리고 인종으로 사람을 달리보는게 너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가 부모가 되고 나서 아이들을 인종적으로 다양한 학교에 보내고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곳에 사는 것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아이들 주변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으면 했거든요. 그들 주변에 있는 어른들이 여러 다른 사람이 되도록 말이죠. 특히 아시안들이요. 그래서 아이들이 어떤 롤모델을 가질수 있고 우리 아이들이 특출나지 않고 튀지 않도록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물려주는 것이 힘든가요?

글쎄요, 그건 애들한테 물어봐야 되는데. 2018년에 아이들을 한국에 데려갔었는데 그렇게 할수 있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갈때마다 힘들거든요.

마음 편한 여행은 아니죠.

네 쉬운 여행은 아니에요. 갈때마다 준비할 것이 너무 많고 매번 다르죠. 그리고 이제는 심정적으로 감정이 격해지고 하는 단계는 지났지만 그래도 준비할 것이 많아요. 그래서 애들한테도 항상 뭘 좀 더해줬어야 하나 하고 느껴요. 한국어 학교에도 좀 보냈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아마 제가 말을 꺼냈었는데 애들이 싫다고 그랬었을거에요. 그래도 항상 좀 더 했어야 되는데 좀 더 할 걸 그렇게 생각하는거죠.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할만큼 한것 같아요. 아이들과 항상 이 입양이라는 것에 대해 공유했고 알만큼 알고 있고요. 한국음식이나 물건등요. 그리고 그때는 요즘같은 스트리밍서비스도 없었잔아요.

그때는 넷플릭스만 틀면 한국 드라마가 나오는 시대도 아니었고요. 요즘처럼 한류다 K-culture가 융성하던 때도 아니었고요. 지금은 그래서 같이 “기생충”영화도 보고 많이 쉬워졌어요. 그리고 아이들 아빠가 한인도 아니니 쉽지 않죠. 하지만 또 그냥 개인이면 되는거잖아요. 아이들한테 한국인 조부모를 못 준 것이 짠하기도 하고 한국인 사촌들이 없는것이 미안하기도 하죠. 그래서 아이들이 대가족 출신인 사람들에 비해서 뭔가 뿌리가 없다고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요. 왜 그쪽은 소말리아 가족들이 라던가 하는게 없잖아요.  그래서 아이들한테 최대한 뿌리를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혹시라도 아이들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내가 미안하죠.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요. 그렇게 느끼는것이 이상하지 않고 나한테 화내도 괜찮다라고요. 그건 일생을 통해 계속 변할테니까요.

입양과정에 대해 알게 된 사실들이 있나요?

네. 제 서류에 의하면 실은 서류가 두 개에요. 하나는 제가 홀트에서 발견됐다고 하고 하나는 서울의 한 파출소에서 발견되어서 홀트로 보내졌다고 하고. 그리고 서류에 의하면 임시보호 가정에서 6개월 정도 있었다고 하는데 제가 발견됐을때 9개월 정도로 보였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미국에 온것은 13개월이었고요. 감기 등으로 출발이 지연이 되었다고 는 하는데 아무튼 뭐가 앞뒤가 좀 안 맞아요. . 물론 이 입양이라는 모든 일이 앞뒤가 안 맞지만요. 그리고 제 임시보호 가정엔 어른 네명과 개가 한마리가 있었대요. 홀트에 가서 조사를 좀 했는데 통역사를 데리고 가서 제 서류를 보자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이만큼이 우리가 공개할수 있는거다 하면서 보여주더라고요. 제가 볼수 없는 서류들도 많았고요. 제 생각엔 친부모에 대한 어떤 1급 비밀 같은것도 아닌것 같은데 말이죠. 제 임시보호 관련 서류로 보였죠. 그것도 제가 알면 안되는 거였고요. 그런데 제가 미국으로 입양되어 올 때 텍사스의 기독 선교단에서 나를 데려와줬거든요. 그때 저를 데리고 와준 분을 페이스북을 통해서 찾긴 했어요. 나이가 좀 많아서 그분하고 실제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던 것 같고 자녀분들과 이야기를 좀 했어요. 그게 제가 아는 다예요

그럼 그걸로 출신 찾기는 끝난건가요?

그런 셈이죠. DNA테스트도 두번이나 했는데 가까운 친척은 찾을수 없었어요. 10촌 넘어가는 사람들만 미국, 한국, 베트남, 중국에 퍼져있더라고요. 그래서 아주 가까운 DNA가 나타나거나  제 가족들이 홀트에 찾아가서 저를 먼저 찾지 않는 이상은 힘들다고 봐요. 제가 서류에 제 기록을 남겨 놓고 왔거든요 제 이름등등요. 티비에 나갔던 것도 아니고 광고를 낸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 더 할 일은 없다고 봐요. 제 생일이나 발견 날짜등이 다 정확하지 않아서요. 만약 누군가가 날 찾고 있고 날짜를 대략이라도 기억하고 있다면 그래도 그것이 단초가 될수는 있을텐데 그런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더 이상 할수 있는것이 없다고 봐요. 많이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해요.

오늘 나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영씨 책은 어떻게 구할수 있죠?

온라인으로 구입하신다면 BOOKSHOP.ORG으로 구입하실 것을 추천해요. 독립서점들을 후원하는 곳이거든요. 혹시 미네소타에 계시다면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Moon Palace, 세인트폴에 있는 Next Chapter,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Birch Bark에서 구할수 있어요. 세인트폴에 있는 Subtext도 항상 제 책을 너무 잘 다뤄주고요. Majors and Quinn도 좋고 어디든 가시면 구할수 있어요. 출판사인 Coffee House 를 통해서 사셔도 되고요. 그런데 이런 동네서점들이 요즘 너무 멋지거든요.

다른 작품들은 뭐가 있나요?

“Outsiders Within:Writing on Transracial Adoption (역자 가제 – 내부의 외부자들: 타인종간 입양에 관하여)” 가 있어요. 2판이 작년에 미네소타대학 출판부에서 나왔어요. 제가 Jane Jeon Tranka 그리고 Julia Chinyere Oparah와 함께 감수한 책이고 50여명의 공동저자가 있는 책이죠. 대부분이 비백인이고요. 그중에는 입양인 출신인 학자들도 있고 아닌 사람들도 있는데 모두 입양관련 연구에 동참해주는 분들이죠.  작년에 나온 음식에 관한 책 “What we hunger for:Refugees and Immigrant stories about food and family(역자 가제 : 우리가 먹고 싶은 것: 난민과 이민자들의 음식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 도 있고요. 미네소타 역사출판사에서 나온 책이에요. 어디서든 구하실수 있어요. “A Good Time for the Truth and Race in Minnesota(역자 가제 – 진실을 마주할 시간 : 미네소타의 인종적 진실에 관하여)” 도 있고요. 2016년에 나왔는데 지금도 쉽게 구하실수 있어요. 슬프지만 지금도 유색인종들에 대한 폭력이 만연하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책도 두권 있고요. “쿠퍼의 레슨”이라는 책이고요 한국어와 영어 두가지 버전이 있어요. 시카고에 있는 Lee and Low출판사에서 나왔죠. 그리고 제가 공동집필한 그림책이 10월에 나와요. 다코타출신으로 미네소타에서 활동하는 Diane Wilson 그리고 미네소타에 사는 동화작가  John Coy 와 흑인 혼혈입양인이자 소설가 그리고 전집 편집자인 Shannon Gibney와 함께 쓴 책이에요. “Where We Come From(역자 가제 : 우리는 어디에서 왔나)”에요. 10월에 출판 예정이에요. 우리의 모두의 조상들에 관한 이야기가 잘 역여서 그려지는데 인간 진화에 대한 큰 그림을 보여준다고도 할수 있어요.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더 기대됩니다.

저도 정말 고마워요.카오미씨.

선영씨 고맙습니다. 이 팟캐스트를 후원해주시는 분들과 매 시즌 돌아와주시는 청취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잠시 여름 휴가를 가질 예정이에요. 그 사이 혹시 놓친 에피소드가 없는지 찾아 들어주세요. 입양에 관한 다른 팟캐스트들을 찾아 들어보기에도 좋은 시간이 될거에요. 아니면 잠시 다 내려놓고 쉼을 갖는것도 좋겠어요.

                                                          (번역 : 전유근 )

Season 5, Episode 10: 아픔, 그리고 용서

“상처받고 아파하는 것의 최종 단계는 놓아버리는 것인데 이 놓아버리는 것이 바로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하는 용서죠”

제 이름은 조이(JO-YI)이고 제가 다시 지은 이름이에요. 한국식으로 하면 김조이가 되겠네요. 제가 미국에 왔을때 이름 철자를 바꿔서 조이 김 메러디스 데이비스( JO-EY Kim Meredith Davis)라는 이름을 받았거든요. 이십대가 되니까 갑자기 너무 진절머리가 나더라구요. 다른 사람들이 저에 대해 이런 저런 사실들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요.. 그래서 이름을 최대한 다시 원래 대로 돌렸어요. JoYi로 철자를 바꾸고 성도 Rhyss라고 제가 선택했어요. 그 어디 와도 연고가 없는 이름이죠.. 그래서 지금 제 이름은 조이 김 뤼스 (JoYi Kim Rhyss)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 

뤼스라는 이름을 스스로 선택했다고요? 

맞아요. 제 세 아이들과 제가 같이 쓰는 이름이에요. “강인함”, “열렬함” 이런 뜻인데 저하고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해요..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죠?

51살이에요. 생일이 두개죠. 3월에 있는 생일이 나중에 알게된 생일이에요. 3월 23일이 제 진짜 생일이라 그때가 되면 52살이 되겠네요. 그런데 미국 시민권에는 4월 23일로 되어 있어요. 다른 입양인들 처럼 나에 대한 사실들이 막 만들어진거죠. 친엄마를 찾았을때 내 진짜 생일을 알게 됐죠. 그날이 입양된 날이기도 하고요. 아무튼. 제 생일은 3월 23일이고요 답을 짧게 하기가 어려운 질문이에요. 

피부가 너무 좋아보이네요. 스스로의 정체성을 뭐라고 생각하나요?

흑인인 여성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살짝 갸우뚱 하기도 하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거의 자동적으로 흑인 여성으로 절 보거든요. 그리고 제가 다른 흑인들을 볼때 느끼거나 알아챌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한국인들을 볼때는 그러지 못하는 것들을요. 그리고 아홉살까지 한국에 살았는데 그 기억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인임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지금 스물 두살인 제 딸아이가 왜 엄마는 아시아인 인것을 내세우지 않냐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하대요. 그 애는 어릴적부터 미네소타의 콘코르디아 한국어 캠프에 가고 싶어 해서 제가 보낸적도 있고요. 그래서 중학교 이후로 한국어 학교에도 가고 저한테 한국 음식도 만들어 달라고 하고 그랬어요. 꽤 성가셨죠(웃음). 지금은 제가 혼혈이라는 것을 받아 들이고 한국에도 가봤을 정도구요.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미국에 사는 흑인인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요. 

아홉살 때, 입양이 될 당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어떤 기억이 남아 있나요? 

기억이 별로 없어요.. 그리고 제 기억을 제가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어요. 항상 제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던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많은 부분이 굉장히 흐릿해요. 엄마와 같이 부산에서 살았다는 것, 그리고 친 오빠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사를 많이 다녔던 것이 기억나고 몇몇 장면들이 스치듯이 떠올라요. 많이 울었던 것, 항상 도망다녀야 했던 것, 놀림을 당했던 것들이 때려 맞듯이 떠오르는 장면들이에요. 뭐랄까 갑자기 헉! 하고 통증이 오는데 동시에 이젠 더이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도하는 그런 기억이요. 

제가 제 일 – 상실, 트라우마 상담-등을 할때 공개하는 이야기인데요. 제 첫 기억은 엄마한테 오빠가 어디갔냐고 묻던 기억이에요. 어느날 갑자기 오빠가 없어져 버렸어요. 같은 혼혈이라 저와 비슷하게 생기고 어느 정도는 저를 보호해주고 그래서 제가 많이 따랐던 그런 오빠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어요. 그때 제가 다섯살이었으니까 오빠는 아마 열살정도 됐었을거에요. 그 뒤로 아무 소식도 없었죠. 아무도 저한테 오빠가 어디로 간건지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말을 안했어요. 그런데 그때 저희 같은 혼혈 아이들이 많이 없어졌다는건 알고 있었어요. 이미 그때에도 우리가 혼혈이라서 한국사람들이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언젠간 나도 멀리 보내질수도 있다는 것도요. 그게 제 첫 기억 아니 어쩌면 세상에 대한 첫 인식이었을수도 있어요. 

 그리고 제가 여덟살 반 정도 됐을때 1978년 10월이었죠. 그때 엄마가 저를 Father Keane’s home for Amerasian youth(역자 주: 미국인 킨 신부가 설립한 혼혈아동들을 위한 시설)에 맡겼어요. 거기서 6개월쯤 있었어요. 혼혈아이들을 위한 곳이었는데 백인혼혈아이들이랑 한국인 아이들만 받아주고 흑인 혼혈 아이들은 안 받으려 했어요.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애들 중에서도 우리는 더 아랫계급이라는 것을 고아원에서까지  확인받아야 했던거죠. 거기서 6개월 정도 머물렀어요. 꽤 짧은 시간이죠. 제 기억이 확실하지 않을수도 있고요 항상 제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어요. 생존모드에 있었다고 나 할까요? 최대한 조용히 눈에 안 띄게 말이에요. 그렇게 버텼던 것 같아요. 얼굴에 흉터가 있는데 돌에 맞아서 생겼다는 것은 기억이 나요. “N-word”(역자 주- “Nigger, 깜** )로 불리는게 일상이었고 매번 도망가고 숨어야 했던 기억이 나요. 엄마가 울지만 말고 차라리 더 빨리 도망치라고 제게 말했던 것도 기억나고요. 놀림받지 않게요. 

엄마가 친척들을 방문할때면 같이 못 들어가고 저만치 떨어져서 엄마가 나올때까지 기다려야했어요. 그게 할머니와 할아버지였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가 흑인이라 같이 못들어가고 밖에서 기다려야 했던것은 분명히 알았어요. 다른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이건 내 나라가 아니구나 하는걸 분명히 알았죠. 나는 여기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요. 인종차별이 아예 노골적이었어요 아예 대놓고 얼굴에 대고 하는 수준이었어요. 여기 미네소타주가 자랑하는 티나지 않는 은근한 인종차별이 아니고요. (웃음) 물론 그것도 처음엔 문화충격이긴 했어요. 적어도 한국에서는 내가 설자리는 분명했었거든요. 어딜가나 야유와 조롱을 받을거라는 것을 알았고 그게 일상이었어요. 어른들이나 아이나 똑같았어요. 

지금 이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중년에 접어들면서 힘든 시기가 찾아왔거든요.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잖아요. 내가 누군지 그런 것들이요. 그때 제가 살았던 고아원을 검색해봤어요. 어떤 다큐멘터리를 찾았는데 뤽 스몰란(Rick Smolan)과 나타샤 프뤄스( Natasha Pruss)의 테드톡이었죠. 뤽이 그 몇년 전에 책을 출간했대요. 그가 20대 때 타임지의 사진기자로 활동했는데. 나타샤라는 한국의 어느 산 중턱마을에서 찾아낸 아주 활기찬 여자아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대요. 그 사진기자의 눈에 다른 혼혈 아이들은 마치 좀비 같았는데 나타샤는 눈에 생기가 돌고 밝은 기운이 가득했다네요.. 그 기자의 나레이션이 너무 짜증나서 스크린 너머로 한대 후려 치고 싶었지만 혹시 나의 과거에 대한 어떤 실마리라도 찾을수 있을까 해서 좀 화가나도 그 것을 계속 보고 있었어요. 화면도 오래되고 아무튼 좀 별로였는데 갑자기 화면이 바뀌면서 어떤 사진이 나왔는데 거기에 제가 나온 거에요!!!  사진속에 제가 있었어요. 그때가 기억나요. 엄마가 날 놓고 가버린 것이 너무 트라우마가 커서 고아원에 남겨졌던 날 말고는 다른 기억이 없는데 그 날은 기억이 나요. 갑자기 사람들이 저한테 잘해주고 머리를 빗겨주고 새옷을 입혀줬어요. 나타샤를 위해 사진을 찍는 날이었던 거에요!! 나타샤랑 저랑 둘이 나이가 좀 많은 편에 속했어요. 나타샤는 열한두살 정도 였을거고 저는 아마 여덟살이었을거에요. 우리 둘다 더 어린 아이들을 안고 있었어요.. 나레이션에서 그 사진작가가 말하길 다른 아이들은 눈에 생기가 없고 영혼이 없어 보인다고 마치 좀비처럼 그냥 흐느적거린다고 말을 하더라고요. 정확히 그가 그렇게 말한건 아니고 제가 대충 기억하기론 암튼 그 비슷하게 말했어요.. 그러면서 사진들을 보여주는데 그가 말하는 그 좀비같은 아이가 바로 나더라구요.. 나타샤는 사랑스러운 아이고요. 제가 바로 그 영혼이 없어보이는 아이였고요.. 그 뒤로 나타샤를 만났는데 아주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아예 백인으로 보였어요. 백인 혼혈인데 그냥 백인으로요.. 그러니 아마도 백인구원자의 시각에서 그 젊은 남자 기자가 어린 나타샤를 봤을때 어떻게든 구해주고 싶었겠죠. 딱 그림이 그려지잖아요. 그쵸?

그리고 지금도 난 그 서사를 벗어나지 못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대요. 평생을 그것과 싸워왔는데 말이에요. 저는 같은 인간이 못되고 그냥 주변을 배회하는 존재인거죠. 나도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증명해야 하고  “너는 대체 정체가 뭐니?” 라는 질문에 항상 답을 해야 했죠. 그 질문을 받는 다는 것 자체가 내가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다는 거잖아요. 

그 비디오를 보면 모든 사람들이 저를 좀비라고 생각할거에요.. 그러니 저한테 한국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뭐냐고 물어보면 어떤 1차적인 기억이 없다고 말해요. 저는 항상 좀비였으니까요. 

굉장히 힘들었겠네요. 살기 위해서 어쩌면 기억을 놔버린 것일수도 있죠.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요. 엄마가 고아원에 데려다주던 날이 기억이 안난다고 했던가요? 아니면 혹시 기억나는 것이 있나요?

엄마랑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나요. 엄마가 날 고아원에 놓고 돌아서서 가던 기억은 나요. 그게 무슨 상황인지 분명히 알았던것 같아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던것 같은데 가끔은 그것이 제가 지금 한국어를 못해서 인가 싶을때도 있어요. 그때의 기억은 한국어로 되어 있을텐데 미국에 온 이후로 한국어를 잃어버렸으니까요. 아마도 그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해요. 어떤 말도 기억이 안나는데 그냥 알았다는 것만 기억나요. 내가 여기서 나갈수 있을때까지 여기서 살아야 한다는것을 알았다는 것만요. 

그럼 미국에서의 제일 첫 기억은 뭐죠? 

미네소타 공항에 내린거요.. 카오미씨의 경우와는 또 다르게 입양부모에게 이미 아들이 둘이나 있었어요. 다섯살짜리와 한살짜리가 있었는데 고아원에서부터 이미 아이들을 돌봤어가지고 한살짜리가 막 뛰어가니까 제가 쫒아갔어요. 눈폭풍을 뚫고 어떤 친척집에 갔는데 거기서 오즈의 마법사를 봤어요. 미네소타에 도착한 첫날 밤에요. 나중에 알고보니 사촌들이었어요. 다들 저를 보며 좋아라 했고. 그들을 보며 저도 그럴려고 흉내를 냈던 기억이 나요. 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행복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누군가가 행동을 잘 하라고 미리 귀띰을 해준것 같기도 하고요. 안그럼 다시 돌려보내질수도 있다고요. 그 전에 고아원에서 입양을 갔던 친구 하나가 다시 돌아왔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초기 몇년간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빨리 배워야 한다고 항상 의식적으로 노력했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그날밤에 모두가 흥분한 상태로 이불을 바닥에 깔아놓고 잠옷을 입고 누워 오즈의 마법사를 보는데 저는 생각했어죠. ‘그래 지금은 이걸 하는거야’ 이렇게요. 돌아보면 그렇게 항상 내 스스로를 의식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봤어요 내 몸 밖에서 내가 하는 일을요. 그런식으로 기억이 여러겹으로 존재해요. 

그 후로 미네소타의 스프링타운이라는 작은 마을로 갔어요. 인구가 1000명 남짓이었는데 그곳에 제 입양아버지가 루터교 목사로 부임했거든요. 노르웨이 후손들이 사는 마을이라서 마을의 표지판도 노르웨이어로 되어 있었어요. 미국의 가장 큰 노르웨이 공동체였어요. 아무튼 갑자기 이 잘 모르는 사람들을 엄마아빠라고 부르며 살기 시작했죠. 다섯살 짜리는 진짜 제 속을 많이 썩였고 계속 울고 절 힘들게 했어요. 한 살짜리를 돌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죠. 고아원에서부터 애를 어떻게 보는지 배웠으니까요. 가끔씩은 애보는 사람이 필요해서 나를 입양했나 싶은 순간도 있었어요. 온지 얼마 안되었을 때 벌써 저 혼자 밤새 애를 봐야했던 적도 있었어요. 그때 열살도 되기 전이었거든요. 지금 기준으로는 말도 안되지만 그땐 오래전이니까요. 그때도 아직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애를 맡기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아무튼 그렇게 제 미국에서의 삶이 시작됐죠. 그 후로 학교에서 ESL(제 2외국어서의 영어)도 듣고 백인만 가득한 아주 작은 마을에 익숙해져 갔죠. 다들 같은 학교를 가던 아주 작은 마을이었는데 거기에 몇년을 살다가 아이오와주 데모인으로 이사를 갔다가 또 캔자스주 토피카로 이사를 갔어요. 그렇게 이사를 할때마다 사람들하고 사귀는 것이 조금씩 힘들어졌어요. 조금씩 나이를 더 먹으며 조금씩 더 어색하고 불편해졌으니까요.

지금은 입양 가족 모두하고 연을 끊었어요. 오랫동안 거의 반강제로 인연을 이어오다 그렇게 된지 얼마 안 됐어요. 한국에서는 제가 제일 막내였다가 오빠가 어느날 사라졌죠. 그리고 이 집에 입양이 되고 나서는 갑자기 제가 제일 맏이가 되더니 온갖 책임이 맡겨졌잖아요. 제일 큰애이자 유일한 딸이 된거에요. 갑자기 두 어린 동생을 돌볼 책임이 생긴 큰 누나가 된거에요. 그리고 나서 5년쯤 후에 한국에서 다른 아이를 또 입양해서 이젠 그애가 막내가 되었고 저는 네 아이 중에 첫째가 되었죠. 둘은 입양한 아이들이고 둘은 친자식들이었죠. 그때로 돌아가서 어떤 연구같은 것을 해보면 참 재밌을것 같아요. 공교롭게도 입양된 저희 둘은 꽤 힘든 시간을 보냈고 친자식들은 세상의 잣대로 봤을때 꽤 성공한 삶을 살고 있으니까요. 

제 입양부모님은 모두 똑같이 키웠다고 항변을 할지도 모르죠. 그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르고요. 서로 다른 것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똑같이 키우면 어떻게 되겠냐구요. 아무튼 여러가지로 복잡한 상황이었어요. 데모인으로 이사를 갔을때가 중학생이었거든요. 그때는 많이 친해지고 정을 붙이려고 노력을 했어요. 그러다가 캔자스주 토피카로 또 이사를 갔죠. 가는 곳마다 제가 유일한 흑인이었어요. 그리고 커가면서 점점 더 흑인의 모습이 나오더라구요. 그렇지만 저는 말을 잘했어요. 영어를 빨리 배우고 싶어서 엄청 노력도 했고요.. 흑인 액센트 없이 백인처럼 말하려고요, 그래서 항상 의식적으로 노력을 많이 했어요. 80년대에는 인종차별이 지금과는 달랐어요. 장난 아니었죠. 제 친구들이 항상 인종차별적인 농담을 하다가 ‘맞아, 그런데 너는 아니야!. 너는 그들과 다르잖아! 이런 식이었죠. 이런 식으로 저는 흑인이었지만 흑인과 다르다고 취급됐어요.. 저희 부모님도 항상 그런식이었고 그것이 항상 혼란스러웠죠. 그러다가 제 입양아버지가 목사직을 포기하고 정신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해서 캔자스주 토피카로 이사를 가게 되었어요. 메닝거병원에서 일을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자신의 흑인인 큰딸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진단을 내리곤 저를 정신병원에 한달동안 입원시켰어요. 그때도 저는 생각했죠. ‘이젠 내가 아픈 사람 역할까지 해야 하는구나’ 하고요. 우리 형제자매들한테도 누나가 많이 아파서 우리 가족한테 이렇게 많은 사건사고가 일어나는 거라고 말을 했고요. 

몇년 전까지도 아무도 그 일을 거론하지 않았죠. 그러다가 다시 저를 그렇게 취급하는 것이 보여서 제가 그때 인연을 끊었어요. 제가 살기 위해서요. 버릴 인연은 버리고 슬퍼할것은 슬퍼하는 과정속에서요. 어떠한 체도 하지 않고 굳이 어떠한 화해도 필요하지 않았고요.  제가 그들의 소망을 못 이뤄줬겠죠. 딸을 가진다는 것에 대한 환상 같은 거 말이에요. 아이를 꼭 네명을 가지고 싶었대요. 아버지라는 사람이 사남매 였어서 말이에요. 그래서 아이를 넷을 가지고 싶었는데 아마도 더 낳지 못했나봐요. 

이렇게 저렇게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집도 아니었어요. 입양을 꼭 하고 싶어했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어쩌다가 시기와 조건이 맞아서 하게 된거죠. 그때는 루터교 목사가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하는 것이 뭔가 유행같은 일이었으니까요. 얼마나 많은 한인 입양인이 루터교 목사들에 의해 입양됐는지 알고 싶네요.  루터교가 난민을 위해 캠프를 열기도 했었고. 암튼 그때 목사들이 입양을 많이 했죠. 저를 열심히 키워주신건 알겠는데 저를 진심으로 원했어서 였는지는 모르겟어요. 그리고 그때도 그걸 알았던것 같아요. 본능적으로요. 성인이 되고 나서 갑자기 될대로 되라 하는 마음이 들어서 엄마에게 물어봤어요. 우리를 그렇게 원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입양한거냐고요. 그랬더니 엄마 왈 “네 아빠가 넷을 원했어서”였어요. 뭔가 복잡한 상황이 있었던거죠. 그러니까 제가 그들의 미완성인 꿈을 이루기 위해 있어야했던 거에요. 

어떤 기독교적 소명이나 백인 구원자적인 생각에서였을까요?

그럴수도 있고요 그들 개인적인 소망일수도 있고요. 넷을 원했는데 둘 밖에 낳질 못했으니 입양을 하는게 어떨까 이런 마인드 였던 거죠. 그게 전부에요. 미스터리죠. 공개를 안하니 개인적인 이야기니까 더 파지도 못하고요. 아무튼 그게 제가 들은 이야기에요. 그리고 다섯살 짜리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대요. 마더테레사 수녀 고아원을 통해서요. 수속을 다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취소가 됐다네요. 천주교 집안으로 보내고 싶었는데 우리가 장로교라서요. 너무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취소가 되어서 너무 마음이 아팠고 그 뒤로 저를 선택했다고요. 그 말을 듣고 제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을 해보세요. 안그래도 버려졌는데 입양부모한테도 첫번째 옵션이 아니었다는 말을 들었을때 어땠겠냐고요. 그리고 또 그 말을 굳이 저한테 한 의도는 또 뭡니까. 인도에서 오기로 했던 다섯살 짜리 아이가 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말을요. 마치 제가 와서 그들의 꿈이 못 이루어진것 같이요.  암튼 진짜 힘들었어요. 

스스로 흑인인 여성이라고 생각한다고 했잖아요. 흑인들 사이에서는 어땠나요? 바로 받아들여졌나요 아니면 그것도 힘들었나요?

물론 힘들었죠. 그리고 흑인들도 그 출신 배경이 아주 다 다르니까요. 

혹시 ‘너무 백인처럼 군다’ 이런 소리를 들었나요?

그것도 그렇고요, 흑인 사회에서도 컬리리즘(같은 유색인종 내에서도 피부색이 진한 정도에 따라 더 차별받는 경향, Shadism이라고도 한다)이 심하죠. .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진짜 한국인임에 그 정도의 차이가 있잖아요. 흑인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죠. 그러니 어떤 모임에서 저를 원할까 혹은 어떤 팀을 위해 뛰고 싶나를  생각해보면 저는 흑인이죠. 당연히 한국인 팀 보다는 흑인팀을 먼저 선택하겠죠. 집이라고 생각하는 곳이 어딘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지에 따른 결정이죠.

그런데 돌아보면 저도 정말 반흑인정서를 가지고 있었어요.  미네소타의 스프링 그로브나 아이오와의 데모인에서 학교다닐 때 저만 흑인이었고. 그래서 제가 흑인인것이 너무 너무 싫었죠. 캔자스 토피카에 살때 제 친한 친구하나가 차에 회초리를 싣고 다녔는데 그 친구는 그걸 “깜**들아 똑바로해라” 회초리 라고 불렀어요. 그 친구가 제 베프였다니까요. 그럴만큼 흑인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강했죠. 어느날 지나가다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봤어요. 제 스스로 생각하는 제 모습은 앞머리를 내린 백인 소녀였거든요. 그런데 거울에서 나를 바라보는 내 모습은 그게 아니어서 너무 충격이었죠. 학교에서 유전자에 대해서 배울때 두 세대안에 흑인 유전자가 없어질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선 순수 100퍼 백인을 만나서 흑인 유전자를 지우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하고 계산을 해봤던 기억이 나요. 그런생각이 어떻게 가능했겠어요? 인종차별적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저의 흑인임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런 제가 어떻게 하면 흑인인 손자손녀를 안 만들수 있을까 하고 궁리를 했었다는 사실이 너무 슬프죠. 어린아이가 말이에요. 

그 뒤로 좀 많이 돌고 돌아서 결국  Shattuck St Mary’s을 졸업했어요. 정신병원에서 나오고 나니 집을 나와서 기숙학교에 가는게 좋겠더라고요.. 그래서 기숙학교인 그곳에서 고등학교 3학년과 4학년을 보냈어요. 한 학년 전체가 33명 뿐이었는데 그곳에 다른 입양인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는 입양된 사실이나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길 거부했죠.  혹시 유일한 흑인 학생이었나요? 아니요. 다른 흑인 여학생이 한명 더 있었고 그 친구도 입양됐었는데 그 친구도 자신을 백인이라고 생각하더라고요. 그리고 선배중에 흑인이 한명 있었고 나머지는 혼혈이거나 했었어요. 비싼 사립학교라 사우디아라비아같은 데서 오는 외국인 학생들이 있었죠. 제 친한 친구도 그런 경우였는데 얼마나 부자인지는 몰라도 두번이나 약물과 알콜 사용으로 퇴학을 당하고도 다시 돌아오더라고요. (웃음)

그 다음에 학생이 한 1000명 정도 다니는 퀘이커교에서 운영하는 학교로 갔어요.  제가 마음이 편하려면 학생이 1000명 정도는 되어야 되나봐요. 인디애나주 리치몬드에 있는 작은 학교였죠. KKK단의 수도나 마찬가지인 오하이오주 데이튼에서 40분 밖에 안 떨어져 있는 곳이었어요. 80년대 말이었으니까 아직 기세가 등등할 때였는데 왜 자꾸 그런데로만 다니게 되었는지 몰라요. 그 학교에 흑인 학생이 54명이 있었어요. 그걸 알게된 계기가 갑자기 그 학생들이 나한테 와서 아는척을 하며 모임에 나오라고 초대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집에 갔는데 그때 그 장면이 지금도 영화의 한장면처럼 눈에 선해요. 갑자기 시간이 멈춘듯 모든 장면이 슬로우 모션처럼 돌아가더라고요. 그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이 흑인이었어요. 음악이 요란하게 흐르고 테이블에는 빨간 파티컵들이 흩어져 있고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지 뭐하는지 암튼. 그때 뭔가 제 안에서 감전이 된듯 왠지 그 순간이 너무 편안하고 좋았어요.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요. 그 후 얼마 안 있다가 모든걸 그만두고 케냐로 가서 6개월 동안 지냈고 그 후에는 자메이카에 가서 몇년을 살았죠. 미네소타로 돌아와서는 African spirituality community(역자 가제 : 흑인 영성 모임) 에 가입해서 푹 빠져서 지냈어요. 한번 하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거든요 

이렇게 흑인 사회를 여행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운것 같아요. 백인들 안에서 사는 것은 답이 아니었으니까요. 제 자신을 극도로 혐오했고 그래서 제 주변에 모든 것 모든 사람들과도 더 단절이 되어갔었죠. 항상 자살을 생각했어요. 입양인들의 자살비율이 보통 사람들보다 네배나 높잖아요.  항상 머릿속으로 자살하고 싶은 생각과 싸웠어요. 항상요.  아예 죽든가 아님 뭐라도 바꿔보든가 둘중에 하나였죠. 그러다가 드디어 저의 이 몸과 마음이 편할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게 되었죠. 흑인인 저의 몸이 편해진 장소말이에요. 그 역시 흑인인 이 몸이었죠. 그 뒤로도 많은 계기가 있었는데 그게 컸어요. 

내 몸이 편안해지고 내 스스로 내 몸의 주인이 되는 그런 거죠. 

네. 위축되지 않아도 되고 스스로를 작게 만들지 않아도 되는거요. 제가 머리도 엄청 크고 (주-흑인의 둥그런 머리스타일을 말한다) 입술도 크고 흑인 여성들의 특징을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너무 오랫동안 부끄러워 했어요. 항상 삐쩍 마른 금발에 앞머리를 내린 백인 여자애들과 같이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애들이 항상 지적질을 하곤 했죠. 그런데 웃긴건 지금은 오히려 입술을 도톰하게 보이려고 돈을 쓰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땐 그게 전혀 귀여운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아무튼 그런 애들을 찾아서 지적질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드디어 내 몸이 편하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흑인이나 황갈색 인종들이 주로 사는 곳으로 여행을 해보니 제 외모가 전혀 튀지 않는 거에요. 외국인인 것이 티가나긴 했지만  제가 흑인인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는 않았죠. 그렇게 제 스스로를 편하게 느끼기 시작했어요. 제 피부색부터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조이씨가 혼혈인것이나 백인가정에서 자란것을 알았을 때 그 새로운 사람들이 조이씨를 받아들여 줬나요? 아니면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나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살면서 한번도 어딘가에 확실히 속한다고 느껴본적이 없었어요. 항상 바람잘날이 없었고 언제나 생존이 달린 긴박한 상황에 처해있었으니까요. 자메이카에서 사귄 사람이 아주 폭력적이었어요.. 마침내 탈출했을때는 아이가 하나 저에게 남았고요. 그래서 그 뒤로는 싱글맘으로서 생존이 최우선 과제였죠. 그동안 하던 고민은 다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먹여살릴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정신줄을 놓지 않고 헤쳐나가며 살아남아야 할까가 됐죠. 갑자기 해결해야 되는 고민이 달라진거죠 사람들이 궁금해하긴해요. 여기처럼 다인종이 섞여 사는 곳에서도 출생배경등을 궁금해하죠. 그래서 지금은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대답하는 방법을 배운것 같아요. 제 성장환경 때문인지 너무 가까운 관계의 사람을 만들지는 않아요. 그러면 속깊은 이야기까지 안해도 되니까요. 친해졌는데 제 배경을 알고 나면 싫어졌다고 하는게 싫으니까요. 이게 답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네요.  

싱글맘이 된 것이 친엄마도 역시 싱글맘이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나요? 혹시 더 크게 다가오던가요?

저는 한국의 친엄마에 대해서 항상 좋게 말해봤어요. 같이 살기도 했으니까요. 살가운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엄마가 한번이라도 나를 안아줬던 적이 있었나 기억을 해보려고 했는데 없더라고요. 아홉살까지 같이 있었잖아요. 엄마는 굉장히 단호하고 수완이 좋은 분이었어요. 엄마랑 같이 있을때는 모든 것이 명확하고 분명했죠.. 길을 찾아다니거나 할때 말이에요. DMZ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던 터라 군인들을 자주 마주치고는 했었는데 그럴때도 엄마는 쫄지 않았더랬어요.. 일도 잘 하고 자신있는 사람이랄까요? 그래서 그걸 기억하며 엄마처럼 나도 강하게 이겨내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엄마라면 내가 이렇게 하길 원하겠지 라고 생각하면서요. 엄마를 내 마음속에 롤모델로 삼았다고나 할까요?  

엄마도 싱글맘 이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오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실은 지금은 아버지를 찾는데 주력하고 있거든요. 아무튼. 엄마가 그토록 강인한 분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다른 같은 처지의 여성들보다 저를 더 오랫동안 데리고 있을수 있었다는 사실이 저한테 말해주는게 크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강인한” 싱글맘이라는 글자가 나에게 각인되어 있는 것 같아요. 적절한 순간에 도움이나 개입이 있었다면 어떻게 피할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그런 삶을 살아왔네요. 아마 누군가가 제 삶을 영화로 봤다면 ‘저러다가 곧 애가 생길텐데’ 라고 생각했을거에요. 결국 그렇게 됐고요. 좀 웃기기도 한데 그냥 너무 뻔한 결말이잖아요. 

조금 일찍 정신을 차렸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때 엄마 생각을 많이 했죠. 엄마가 만약 내가 그런 폭력적인 관계속에 있는 걸 안다면 내 등짝을 한대 때리며 정신차리라고 했을거야 하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그 관계속에서 나왔죠. 그떄 제 아이 얼굴을 바라보며 제 아이는 그렇게 안 키우겠다고 결심하고 죽기를 작정하고 도망나와서 아이를 키웠어요. 돌아보면 그래도 잘 키운것 같아요. 지금 다 성인이 됐고 다들 잘 컸어요. 물론 실수도 많이 하고 많이 힘들었죠. 그렇지만 어떤 지표가 되어주는 것 그 역시 싱글맘이었던 제 엄마가 있었다고나 할까요?

삶이 굴곡이 많았네요. 건강하지 않은 관계에도 있어봤고. 어떤 면에서는 자초한 것도 있고요. 왜 그랬던것 같아요? 무언가를 찾고 있었나요? 그게 사랑받는 것이었나요 아니면 받아들여지는 것이었나요? 

지금은 그 질문 확실히 답을 할수 있어요. 오랫동안 살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많은 워크샵을 진행했는데 그러면서 많은 부분을 끄집어 내서 들여다볼수 있었어요. 지금 돌아보면 너무 가슴이 아픈데 전혀 어딘가에 속하지 못하고 기쁘지 않았어요. 그리고 왜인지 그 이유를 몰랐죠. 사람들은 다 가족이 있고 혹은 서로 챙겨주는 누군가가 있는데 저는 그냥 혼자서 배회했어요. 그래서 최근까지도 누군가가 저에게 호의를 보이며 초대를 하면 냅다 달려갔죠. 저는 무조건 예스였어요. 한번도 내가 뭘 원하는지를 스스로 묻지 않았죠. 20대 30대 까지도요. 마치 고아처럼 그냥 나를 데려가기만 해주세요 같은 태도로 말이에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요. 그러면 무조건 따라갈테니 하고요. 그리고 그게 저를 더 외롭게 만들었고요.  

상대방에게 자신을 맞췄군요. 

네. 완전요. 내가 왜 그 사람들하고 만났나 하고 그때를 돌아보면 강을 둥둥 떠내려가다가 물에 떠 있는 잔해들을 붙잡았던 식이었던것 같아요. 그 사람들이 그 잔해나 쓰레기였다는 건 아니고요. 그 사람들도 나름은 다 좋은 사람들이었을거에요. 그런데 서로 도움이 안되는 관계들이었던 거죠. 그렇게 떠내려 가다가 한동안 붙잡고 있고 그러다가 다시 떠내려가다가 하는 식이었죠. 마흔이 넘어가며 돌아보니 제가 그동안 나를 너무 망가트렸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천천히 작업을 시작했어요. 천천히 이번엔 끝까지요. 그런데 무엇을 찾아 가고 있는지는 몰랐어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한테만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왜 없는지 그 이유를 몰랐거든요. 

왜 그런지 통 모르겠더라고요. 종교적인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왜 나만 자꾸 시험에 드는지 그 이유를요. 왜 나만 하꾸 시련에 들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지 말이에요. 그때 사람들이 저를 비난하며 썼던 말들이 제가 이기적이고 사죄할줄을 몰라서 그랫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행복한 삶을 살 자격이 없다고요. 그 말을 20대 내내 지고 살았고요. 그 누구라도 저를 데려가면 너는 감사해야 한다고요. 그 말들이 내내 짐이 되어 제가 관계를 맺는데 작용을 했죠. 자기들도 피폐한 상대로 자기들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절 입양을 한 사람들이 저한테 자기한테 고마워해야 한다고 말하는 꼴이었죠. 어떤 부스러기라도 감사하라고요.  그런 말들을 어떻게 떨쳐내겠어요. 어떻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떨쳐내버리겠냐고요. .

그래서 그 말들이 저에게 각인된채 살았죠. 안그럼 임신 기간내내 두드려 맞는 관계에 어떻게 놓였겠어요? 평생 그런 말들을 듣고 살지 않았다면 그런 관계를 시작하지도 않았겠죠. 그게 제 평가에요. 20대때 내가 누군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히 답할수 있었다면 그런 관계과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 거에요.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죠. 

지금 하고 있는 일하고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말해주세요. 

그 이야기를 하려면 1988년으로 돌아가야 해요. 여름방학에 할일을 찾다가 미네소타의 바운더리 워터에 있는 캠프에서 일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곳이었죠. 백인 기독교인들이 주로 오는 캠프였는데 일년에 몇번은 도시빈민가 흑인 아이들을 초청했어요. .그리고 당연한듯 저를 지도교사로 지명했죠. 한국에서 태어나서 백인만 있는 스프링 그로브에서 자란 저를요. 피부색만 보고 판단을 한겨죠. 피부색은 안본다 안 중요하다고 말해도 결국은 본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80년대부터 고위험 계층과 일을 했던 거에요. 도움이 많이 필요한 청소년들이나 혹은 그런 흑인과 황갈색 인들을 위해 일하는 백인들과 함께 일하게 됐어요. 그러니 그때부터 그런 세계에 있게 된것이죠. 

그리고 제가 좀 잘 했나봐요. 사람들이 저한테 묻더라고요. 학생들이 네 말은 더 잘 듣는것 같다고요. 그래서 그 질문을 안고 가게 되었죠. 평생을 사회복지와 교육과정을 만드는데 기여해왔어요.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학군에서 제가 다양성 담당 정책관이었거든요. 직원에 8000명이 넘는 큰 학군이었는데 주당 32시간 일하는 제가 유일한 직원이었죠. 다양성에 대한 정책을 미네아폴리스에서 그 정도로 취급한거죠. 끔찍하죠.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말도 안되나 하는 고민을 항상 안고 살기 때문에 그런 질문들에 답할수 있는 일을 하게 된거죠. 어떻게 하면 나와 그리고 다른 단절된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질수 있나 하는 질문말이에요 가르친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도 듣게 만드는 것 말이에요. 제가 강의를 할때면 실감나게 해요. 특히 학생들이 차분히 앉아서 제 이야기를 듣고 과제를 끝내요 그래서 항상 그 부분이 궁금했어요. 

저도 학교를 중간에 관두고 자메이카에 갔다가 돌아와서 학부를 마쳤잔아요. 그런데 공부하고 싶었던 것이 확실히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냥 그때그때 되는 대로 했었어요.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항상 궁금한것은 있었어요. 언젠가는 답을 찾아야 될것 같은 것 말이에요. 그것이 아이들이 왜 내 이야기는 잘 들을까 였어요. 답을 찾기 시작했죠. 보통 교사들은 인종차별자로 몰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그래야 함에도 불구하고 또 자신들에게 그럴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딱부러지게 다루지 못하는 교사들이 많아요. 그러니 결핍이있는 아이들을 결핍이 있는 어른들이 다뤄야 하고, 다들 미친듯이 문제 해결을 하려고는 하는데 정작 중요한 문제 즉 결핍이 있을때는 그게 수학이 됐든 과학이 됐든 그 어떤 공부를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이 안되는 거죠. 저도 그걸 한참 후에야 깨닫게 됐어요.  

제가 정신병원에 있을때 기억나는 것들중에 몇몇이 굉장히 끔찍하거든요. 사람들 앞에서 옷을 다 벗어야 된다거나 내가 먹는 음식들을 모두 다 무게를 재야 한다거나 손을 뒤로 잡고 걸어야 한다거나 혹은 내가 자살할까봐 사람들이 나를 감시한다거나 하는 등등요. 그런데 그 중에서 어떤 큰 박스 같은 공간에 들어가 누워서 녹음된 명상테잎을 들어야 하는 것이 있었어요. 숨을 깊게 마시고 마음을 편안히 하세요 뭐 그런 식이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게 참 좋게 느껴지더라고요. 뭔지는 모르겠는데 좋은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그 마음챙김을 항상 마음에 새기기 시작했죠. 언제부터 그걸 마음챙김이라고 불렀는지도 모르겠어요. 우리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내 안의 수면을 진정시키고 너의 수면도. 진정시키고 이런 식으로요.. 그래서 캠프에 지도교사를 할때도 그걸 적용했어요. 도시 빈민 아이들이 캠핑을 와서 휴대용 변기에 볼일을 못본다고 난리 칠때나 호수가의 물이라고 안 먹는다고 할때등등 아이들을 달래서 하게 해야했죠. 그때 저도 어렸지만 그래도 열심히 고민을 해서 그래 일단 이 문제를 해결을 하자 그러면 먼저 나 사진을 진정시키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뭐가 필요할까 이런 식으로 찬찬히 생각을 정리해나갔어요. 일단 이 아이들을 인간으로 대하자. 흑인이나 빈곤층 아이들이 아닌 일단 그냥 개인으로 보자이런 식으로 시작했어요. 그 다음에는 그걸 다른 사람들한테도 적용하게 시작햇고 그랬더니 이래저래 지원도 받게 되고 사람들이 강의 요청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이 마음챙김일에 주력하게 되었고 지금도 여기 하와이에서 계속 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2000년에 아까 말씀드린 그 다큐멘터리았을때 그 기자라는 사람을 찾아 나섰어요. 당신이 말한 그 좀비를 직접 보여주겠어 이런 마음으로요. 미친듯이 모든 연줄을 다 동원해보니 결국 그 사람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전화를 했고 또 마침 그 시기에 이 용서와 화해에 프로그램도 시작했어요.. 제가 지원받은 사업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도 그쪽이었고요. 그러다가 그 나타샤가 저를 찾아서는 Korea and Me 라는 프로그램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고 혼혈 아이들을 한국으로 데려가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대요. 그리고 그 10년쯤 전에 제가 제 친엄마를 찾았는데 그것이 그닥 좋은 재회가 아니었어요. 엄마가 꽤 심술궂고 많이 어두운 사람이더라고요. 제 결혼식 이틀전에 그냥 가버릴 정도로요. 제 오빠도 찾았었는데 오빠가 신부입장때 같이 들어가주기로 했었거든요. 그런데 결국 나타나지 않았어요. 정말 헐이었죠. 그래서 그 즈음 10여년간 실은 아픔이 더 쌓였어요. 마음 챙김 프로그램도 진행하는 동시에 또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나타샤가 저한테 연락을 했을때 한국에 같이 가기로 결심했죠. 용서와 화해를 하기로 했으니 진짜로 해보자 하는 마음에서요. 가짜로 용서를 할수는 없으니까요. 기금지원도 받으니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잖아요. 맞죠?(웃음) 그래서 엄마한테 연락을 해서 지금 한국에 가니 한번 만나자고 했어요. 그러니 제가 찾아가면 문이나 열어달라고요. 그리고 용서 프로그램 참가하고 그 뒤로 이어지는 워크샵에도 참가해서 내가 고통받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도 알아봤죠. 

치유하시는 분들이 저를 딱 보면 알것 같나봐요. 고통이 많다는 것을요. 저를 보면 “몸안에 화가 가득하네요” 라고 말해요. 그럼 저는 “그래 화로 가득찬 흑인 여자가 보이겠지” 하고 생각해요. 그게 사실일테니까요. 아무튼 결국엔 그 일들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놓아 버릴것은 놓아버리는데요. 그리고 결국엔 저도 스탠포트에서 운영하는 용서프로그램에 지도자 과정을 밟았죠. 그 후엔 계속 이 마음챙김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데 결국엔 제 자신을 다스리는데 그 목적이 있어요. 저도 결핍이 많은 사람인데 상대방도 그런 경우에는 우리의 감정을 담당하는 전두엽까지 가담시키게 되죠 70%나요. 일단 일이 잘 안돌아가기 시작하면  제 몸이 선택하는 기본 감정은 분노에요. 그래서 갑자기 분노 게이지가 0퍼센트에서 100퍼센트까지 치솟죠. 그럴때면 정신줄을 놓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막 분노에 찬 말을 퍼부어대거나 했었어요. 그런식으로 나를 내 감정으로부터 내 스스로 분리시켰던것 같아요. 

아무튼 이렇게 제 안에 쌓였던 많은 이야기들을 털어냈죠. 그래서 제 안에 제 스스로를 감당할수 있는 공간이 생기게요. 그리고 그 단계들이 저의 이 굳어진 감정과 머리에 와 닿더라고요. 왜냐하면 저는 한번에 확 빠져드는 타입이 아니었거든요. 제가 비록 이 마음챙김에 대해서 설파를 하고는 있지만 처음에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마음속에 한을 놓아버러요” 어쩌고 저쩌고 하면 눈살을 찌부렸거든요. 헛소리하시네 하구요. 일단 시작하면 한번에 확 변화가 오는 그런 타입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 스탠포드 용서와 화해 프로그램은 1단계 2단계 3단계 각 단계별로 과정이 잘 나눠져 있고 우리의 뇌를 공부해요. 결국은 뇌가 관여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일단 뇌와 감정에 대해서 공부를 좀 한 다음에 내 자신을 알고 내 자신을 듣는 연습을 하죠. 그 전에는 제가 제 자신으로부터 너무 동떨어져있던지라 해보지 못했던 것들이에요. 그런데 이 과정을 시작하니 내 자신을 진정시키고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그런데 실은 제가 했던 일은 제 이성과 감정을 불러온것 뿐이었죠. 그 사이 너무 많은 고통을 겪은 제 이성과 감정 말이에요. 그저 버티느라 산산이 부서지고 서로 다투고 논쟁하던 제 이성과 감정이요. 이 과정을 하며 일단 제 마음의 소리를 듣고 이런 저런 제 자신을 인정하게 됐어요. 이게 바로 나 조이이고 이런 저런 모습들을 어떻게 끌어안아야 할까. 하고요. 이런 모든 것들이 말이 되더라고요. 이미 마음챙김에 대한 일을 시작했었기 때문에 이 용서 프로그램의 일련의 과정들이 설득력이 있게 느껴졌어요. 

그 뒤론 제가 추진력이 좀 있는 편이거든요. “Forgive for Good”(역자 주 “나를 위한 선택, 용서”라는 제목으로 국내 번역, 출간되었다) 이라는 책을 쓴 지금도 스탠포드에서 교수로 있는 프레드 러스킨을 만났어요. 전형적인 60대 백인 남자 교수인데 이미 90년대부터 하와이에 와서 강의를 했었거든요. 제가 그랬죠. 당신이 하는 연구도 좋고 다 좋은데 이걸 어떻게 제도화 시킬것인지 어떻게 널리 퍼트릴것인지 가 문제라고. 내가 한번 해보겠다. 그랬더니 그 분이 아주 적극적으로 나서줘서 몇년 동안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제가 항상 강의를 하기 전에 말해요. 나는 박사도 아니고 연구자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관련 분야에 대한 아주 풍부한 인생경험이 있다. 이런식으로 학위를 비롯해서 저에게 없는 것에 대해 먼저 사과를 하고 시작했었어요. 그런데 제가 대중앞에서 말을 좀 잘 하거든요. 그래서 어느 순간 사과하며 시작하기를 멈췄어요. 다들 이론은 빵빵한데 그 이론을 실천하지를 않잖아요. 용서와 화해작업이 얼마나 좋은지는 다 알죠. 그 사람들 중에는 워크샵을 50회나 넘게 가본 사람도 있는 걸요. 그런데 다들 그냥 서로 헐뜯기만 하고 징징대기만 하고요. 몸과 마음연결을 하지 않고 체화시키는 연습을 하지 않는게 문제죠. 거기서 오는 기쁨을 실제로 느껴봐야 되는데 말이죠. 실제로 해보는것이 중요하지 얼마나 책을 많이 읽었고 어떤 학위가 있고 이름 뒤에 붙은 알파벳이 몇개인지는 (역자 주- 전문가 타이틀을 말한다)-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요. 얼마나 실생활에 그 이론을 적용해봤느냐가 중요하죠. 그걸 파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가 해보니 됐다고 하죠. 정신병원에 갇혀 있을때부터 시작했으니까요. 15살때니 아주 오래전이요(웃음). 알기만 하고 실제로 실천을 안하면 소용이 없잖아요. 제가 운영하는 센터는 저와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여러방면으로 실행해보는 곳이에요. 저는 사람들이 실제로 이 마음챙김를 실습할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에요. 그럴려면 지금 현재의 나에 충실해야 해요. 뭐가 됐든 받아들이고 일을 만드려고 애쓰는 부분을 놔버려야 해요.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나를 진정시키려고 혹은 놓으려고 애쓰는 것은 아니에요. 애쓰지 않는것 부터 시작해야 하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해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생각보다 힘든데 그러다 보면 갑자기 엄마가 한번도 안아주지 않았던 것이 떠오르기도 하거든요. 또 제 양부모가 저를 그닥 원하지 않았다는 것도 떠오르고요. 그러면 또 울고요. 그러면 많이 지치죠. . 그러다가 깨달았어요. 제가 한번도 진심으로 슬퍼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그냥 잊어버리려고 하고 털어버리려고만 했거든요. 먹는 것으로 해결하고 술도 많이 마셨어요. 약에 취해보기도 했죠. 그렇게 힘든 감정들이 찾아올때면 제일 처음으로 찾은 것이 음식이었거든요. 배가 터질때까지 먹고나서는 배가 아프니까 이제 그 전에 힘들었던 감정들은 잊어버리고 마는 식이었죠. 제가 알면서 그랬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제가 제 감정으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이었죠. 

현재의 나에 집중하는 것이 쉽게 들리지만 꽤 가혹하기도 해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다 보면 고통도 수반되거든요. 꽤 오랫동안 이 작업을 해온 저조차도 아직도 고통스러울때가 있어요. 그래서 주변에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서 이 작업을 계속 하고 또 필요한 사람도 도울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용기를 좀더 낼수 있을까 행복이란 것은 도데체 어떻게 만들수 있는 것인가 놓는 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등등을 가르쳐요. 그런데 가르친다기 보다는 복돋우는 것이죠. 저는 일종의 치어리더라고 생각해요. 엉덩이를 대고 앉아서 호흡에 집중하며 지금 이 순간 나를 기분좋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본는 식으로요. 그러다 보면 저도 같이 하게 되고요. 저를 위한 직업이죠. 

누구를 용서해야 했나요? 그리고 어떻게 용서했나요?

우리가 스탠포드 대학의 용서프로젝트를 통해 하는 작업은 일단 놓는 것이에요. 나를 위해서요. 가해자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요. 그래서 일단은 내 힘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고요. 내 이야기를 할때 중요한 것은 나한테 상처준 사람들이 누군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해요. 가감없이요. 지금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하는 거요. 그래서 제 인생의 악당들을 나열해보자면 일단은 제 엄마죠. 그리고 제가 알지도 못하는 아빠와, 한국이라는 나라, 킨 신부와 가톨릭 교회죠..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애들을 입양보냈죠. 고아원도 그렇고 입양부모도요. 

그리고 저를 별종취급했던 모든 선생님들이요. 넌 도데체 뭐니 하면서요. 그리고 이름도 얼굴도 기억안나는 수많은 사람들도 그렇고. 저랑 안좋게 엮였던 그전에 만났던 남자들이나 저를 도와줄거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던 친구들도요. 다들 결국엔 제가 이 용서 작업을 하는데 궁극적으로는 기여를 햇죠. 그들의 공통 분모는 저잖아요. (웃음) 이렇게 제 삶의 악당들을 나열해보는 작업을 여러번 해봤어요. 일단은 폭력적이었던 제 전남편이 있고요. 양부모님도 그렇고요 제 친엄마 도요.  제가 실제 이 용서프로젝트를 진행할때면 항상 떠오르는 사람은 제 친엄마에요. 그 상처가 깊은가봐요. 그 전에는 엄마때문에 내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면 내가 생각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게 되거든요. 그리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것은 우리가 우리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요. 그 전에는 누군가가 나한테 전화를 해서 미안하다고 말을 해야 용서가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러면 내가 좀 불리해지죠. 그 중에 많은 수가 이미 죽은 사람들일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나한테 전화를 해서 사과 할수 없으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죠? 교회에 가서 신의 은총을 빌어야 하나요? 신만이 할수 있는 일이라서? 헷갈리죠. 그래서 좀 다른 방식으로 하기로 했죠. 제가 깨닫게 된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 어떤 사람들은 충분히 아파하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너무 넘치게 아파한다는 것이었어요. 아예 안하거나 너무 많이 하거나요. 상처받고 아파하는 것의 최종 단계는 놓아버리는 것인데 이 놓아버리는 것이 바로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하는 용서죠. 그래서 제가 가만히 앉아서 명상을 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이 모든 이야기들이 떠오르면서 결국에는 꺼이꺼이 울게 되요. 제가 그 과정을 안했기 때문이에요. 생존하느라 바빠서요. 한번 버려져 뵜으니까 또 버려져도 괜찮아. 난 헤쳐나갈거야 하고 그냥 넘어간거에요. 그러면 안됐었는데. 그건 아파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아무튼 그걸 받아들이고 충분히 아파했죠. . 

또 내 스스로 파워가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아냈어요. 40대가 되어서 까지도 엄마와 양부모와 전남편을 을 탓하며 술을 마시고 먹어댔어요. 지금은 죽고 없는대도요.  내 나이 40대에도 뚱뚱하고 인생이 비참한 이 모든 것을 그들을 탓했죠.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이 모든 것들이 말이 안되더라고요. 그리고 이것들을 놓아버리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하고 생각하게 시작했어요. 그 답의 일부는 내 스스로 그럴 힘이 있음을 깨닫고 내 스스로 설정한 기대치를 돌아보는 것이었어요. 내 스스로 이 인생을 어떻게 설계했었는지를 돌아보고 그 일부는 해체하고요. 내 스스로를 용서하고 내가 스스로 내렸던 결정들을 왜 그랬는지 돌아보고요 놓아버리고 그랬던 나를 한편으로는. 존중해주고요. 

카오미씨가 했던 질문이 실은 이 스스로를 용서하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하고도 곤란한 질문이에요. 내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 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내가 원하는게 뭔지 알아? 그때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다시 써보고 제 스스로를 탓하지 않아보면 제가 원했던 것은 그냥 가정에 속하는 것이었어요. 조건없이 사랑받는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사랑이요. 그래서 지금 그걸 다 큰 아이들이 있는 지금의 제 상황에 비춰보면 다시 어떤질문을 해야할지 알게 되죠. 내가 지금도 그걸 원한다면 내 아이들과 함께 어떻게 그런 가정을 만들수 있을까 겠죠. 우리 아이들이 나와 똑같이 단절감을 느끼지 않게요. 

한국의 엄마는 어떻게 찾았고 그 뒤로 그 관계는 어떻게 이어가고 있나요?

엄마와 헤어졌을때 제가 아홉살이었죠.. 내내 엄마를 찾았고 사람들도 찾기 쉬울거라고 했어요. 제가 기억하고 있는 이름도 많았고 가지고 있는 서류도 있었고요. 그런데 장로교 사회복지회에 연락을 해봤더니 그 고아원이 화재로 없어졌다는 등등 이래저래 못찾는 이유만 내놓더라고요. 제가 그당시 고아들을 구하러 루마니아까지 갔었다는 사회복지사하고도 연락이 닿았어요. 그런데 그분도 제 엄마를 찾을수 없다고 연락을 해도 답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2005년에 제 세아이들을 데리고 하와이로 이사를 갔고 그러면서 이 사회복지 관련일을 포기하자고 생각했어요. 돈도 벌어야 하고 하와이에서 정착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부동산 중개업을 시작했는데 적성에 안맞고 싫어서 금방 그만뒀어요. 그런데 그때 일했던 한 사무실에서 이름이 킴이라는 한국인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한국에 가족들을 만나러 간다는거에요. 하와이에는 한국인이 많잖아요. 한국어도 연습하고 할 기회가 많았죠. 항상 버킷리스트에만 있긴 하지만요. 암튼 그래서 그 친구한테 한국에 가면 혹시 이런이런 사람을 찾아봐줄수 있냐고 부탁했죠. 기대도 안하고 그냥 반쯤은 진심도 아니었어요. 30년 넘게 똑같이 사람들한테 같은 부탁을 해왔었거든요. 그래서 그때도 한번 말이나 해보자 싶었죠.  그랬더니 그 친구가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참 이상한 부탁이죠?(웃음). 아무튼 그 친구가 한국으로 가고난지 이틀인가 지나서 전화가 왔는데 받자마자 감이 왔어요. 살짝 격앙된 톤으로 조이 하며 제 이름을 부르는데 받자마자 감이 오더라고요. 엄마를 찾은것 같대요. 그때 제가 부동산 일을 관두고 다시 사회복지 쪽으로 일을 하려고 면접을 보러가던 길이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더니 그 친구가 제가 이메일을 받을테니 몇가지 질문에 답을 하래요. 그러면 그쪽에서 정보를 보내주겠다고요.  그래서 그날 밤에 집에가서 답장을 보내고 나니 그쪽에서 엄마의 연락처를 보내왔어요. 그리고 혹시 오빠의 연락처도 원하냐고하네요. 세상에나 평생을 그렇게 찾아다녔는데 갑자기 한순간에 모든 것이 몰려오더라고요. 갑자기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았죠 

항상 그런식이죠. 흔적도 없다가 갑자기 번쩍 하고 나타나죠. 

네. 그래서 이젠 이 모든 마음의 고통과 두통이 사라지고 드디어 모든게 더 나아지겠지 생각했죠. 그래서 오빠한테 먼저 전화를 했어요. 오빠가 영어를 했었거든요. 언어장벽이 제일 큰 문제가 될거라는걸 알았으니까요. 오빠가 미국으로 입양됐다고는 알고 있었어요. 어디로 갔는지 등등 자세한 사항은 모르고요. 그래서 부푼 가슴으로 오빠한테 전화를 했는데 통화를 시작한지 몇분 만에 크게 실망했어요.. 오빠가 그러길 저를 전혀 찾아보지 않았대요. 오빠는 미국으로 입양이 되었고 양아버지에게 한국인 와이프가 있었는데 그들이 오빠를 학대한 모양이더라고요. 그 부부는 이혼을 했고 그 아버지가 오빠를 한국으로 다시 데려온 다음 우리 엄마와 결혼했대요. 그러니 세 가족이 함께 산 것이죠. 오빠 이름이 “영”인데 그 뒤로 미국에 와서 군에 입대를 해서 한국에 배치가 됐었고요. 한국말도 하고 엄마와 아직도 잘 지내고 있었고요. 그런 말을 들으며 그러면서 나를 찾아볼 생각도 안했단 말이지 하며 화가 났어요.. 뭘 기대했는지를 모르겠지만 제가 원했던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죠. 어떻게 그럴수가 있죠? 자기들은 같이 살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는지. 너무 아프고 힘들었어요. 다시 버려지는 기분이었죠. 

오빠가 하와이로 저를 보러 오겠다고 했어요. 고맙게도요. 그런데 실상은 새로 사귄 여친을 데리고 하와이 반대편에 있는 호텔로 가서 지냈어요.. 좋으면서도 이게 뭔가 싶었죠. 그런데 제가 너무 뚱뚱하다면 뭐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사람을 보내 엄마를 데려오겠다는거에요. 엄마가 제 결혼식에 올수 있게요. 너무 좋았죠. 그래서 제가 엄마를 픽업하러 오하우 공항으로 갔거든요. 엄마가 저를 보자마자 차에서 나오지도 않고 팔짱을 끼고 저를 위아래로 훓어보며 한다는 소리가 “네 오빠가 말한것만큼 뚱뚱하지는 않네” 였어요. 영어로요. 그게 첫마디였어요. 면상을 한대 갈겨버리고 싶은 감정과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이 복잡하게 엉키더라고요,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이 관계를 잘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그 뒤로 계속 내리막이었어요. 계속 제 엉덩이가 얼마나 큰지 집은 왜 이리 더럽냐는 제 사촌이랑 저를 비교하면서요. 둥 저도 되받아치고 싶었어요. 그 애는 엄마가 버리지 않았으니까요 하면서요. 퍼붓고 싸우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알러지가 있다고 방에서 안나오더니 내 결혼식 이틀전에 가버렸어요.  

이게 모두 하와이에 있을때 일어난 일인가요?

네 2008년에요. 엉망이었죠. 이런식으로 가면 안되는 거였는데. 실은 입양이야기나 친부모와의 재회가 많은 경우 이런식으로 가잖아요. 

조이씨를 또 버린거네요. 

완전요. 완전 엉망이고 뒤죽박죽이었어요. 말했듯이 그럴때면 분노로 아예 집을 태워버리든지 아님 아예 침묵하든지 했다고 했잖아요. 이번에는 멈춰서 기다렸어요. 신혼이기도 했고 어떻게든 이겨내야 햇어요. 그래서 일단 침묵하며 다시 연락을 끈었죠.  

이해가 되네요. 

오빠는 저한테 연락을 꾸준히 했어요. 뭐랄까 살짝 어색한 관계를 이어갔죠. 무슨 일이 있거나 하면 연락을 하는 사이정도 였어요. 그런데 오빠는 결혼을 했는데도 저한테 말을 안했더라고요. 딸도 있었는데 그애가 지금 서른살이 됐어요. 그 애랑 저랑 연결이 되어서 지난 크리스마스에도 여기에 왔었어요. 조금씩 관계를 쌓아갔는데 그땐 제가 그게 성에 안찼었어요. 지금은 그 부분에 대해 서운하고 그러진 않아요. 오빠도 크면서 많이 힘들었고 자신을 잊은채 살아야 했으니까요. 이야기를 좀 나눠보니 왜 지금 이렇게 됐는지 알겠더라고요. 

제가 그 조카를 보러 샌안토니오에 갔을때 조카가 엄마랑 언성을 높이며 통화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엄마를 오라고 하라고 했죠. 그러니까 오빠의 전부인과 식사를 하게 됐죠. 그게 바로 지난 여름에 있던 일이에요. 멕시코인이었는데 살갑고 호들갑 떠는게 딱 내스타일이었어요. 그런데 다시한번 성급한 판단을 내린것을 후회하게 만드는 순간이 왔어요. 그녀가 그러대요 남편이 너를 찾아야겠다는 이야기를 항상 하면서 살았다고요. 오빠가 저한테는 한번도 저를 찾지 않았다고 했었거든요. 오빠랑 처음 이야기를 했을때 오빠가 저한테 솔직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었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한번도 찾은적이 없다고 했어요. 나중에 오빠랑 다시 관계를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을때 그것이 이유가 되기로 했었는데 나중에 오빠의 전부인의 말을 들어보니 오빠가 저를 찾았다잖아요. 

그래서 또 잘못 알고 10년을 보냈구나하고 후회했죠. 도데체 우리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이야기들을 얼마나 또 넘겨 짚으며 만들어내며 사는지 몰라요. 또 다른 깨달음이었죠. 듣기를 잘했죠. 미안하기도 했고요. 오빠가 막 속이야기를 하는 타잎이 아니었으니까요. 사람들하고 관계맺고 연결하고 하는 타입이 아니에요. 저랑은 다르죠. 그게 오빠가 살아남아온 방식이니까요. 남자입양인들 한테서 그런 모습을 많이 봐요. 그러면 달리 접근해야죠. 남자 입양인들은 잘 꺼내놓지 않아요. 여자입양인들은 서로 살아온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는데 남자입양인들은 과거는 과거다 이런 입장이죠. 제 오빠도 딱 그랬고요. 그래서 지금은 오빠의 방식을 존중해요. 오빠가 마치 저처럼 반응해주기를 원했었나봐요. 제가 원했던 방식으로요. 저는 오빠가 나를 어떻게 찾아봤고 어떻게 그리워했고 나에 대해서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시시콜콜 말해주길 바랬는데 오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거죠. 

그렇다면 우리의 친가족이나 입양가족이 우리가 원했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런일이 꽤 흔하죠. 항상 안고 살아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고 걱정이기도 하고요. 그게 엄마가 됐든 아빠가 됐든 파트너든 형제자매이든간에 그 모든 삶에 굴곡들에는 악당이 됐든 혹은 나를 보호해주는데 실패를 한 사람들이 있죠. 이건 비단 입양인들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친엄마손에 자랐는데 엄마가 약물중독자였던 경우도 있잔아요. 그 엄마의 삶을 생각하면 또 속상하죠. 아무도 약물중독자가 되고 싶어서 되진 않으니까요.. 사람들은 모두 다 각각 힘든일들이 있고 그것들을 이겨내려 노력하니 질문을 바꿔봐요. 이 사람들이 겪어낸 고통은 뭘까?하고요. 그럼 좀 낫지 않아요? 그럼 그 사람들의 각각의 여정이 다른 각도에서 보이고 그러다 보면 그들이 나한테 빚진것도 없다고 느끼게 될거에요. 다른 각도에서 보이니까요. 제 아이들도 저한테 더 많은 것을 원하죠. 이것도 해달라 이렇게 되어달라 이런 식으로요. 그럼 애들한테 “엄마가 얼마나 쌔빠지게 노력해서 이만큼 정신줄 잡고 사는줄 아니? 그걸 알면 엄마한테 어떻게 이러니?” 말해요. 

저 또한 이래저래 남들보다는 많이 유리한 입장에 있었죠. 기회도 많았고요. 가끔 제 친엄마가 어떠한 환경에서 살아와야 했나를 생각해보기도 해요. 그때 당시의 한국의 상황은 어땠는지. 그때 그 장로교 사회복지 센터는 어땠는지. 아이들을 그냥 납치해서 보내버렸었잔아요. 서류도 위조하고. 숨어다녔던 기억이 나거든요. 왜 숨었겠어요? 갑자기 차가 멈춰서 애들을 실어가버리니까요. 제 엄마는 나름 엄마가 아는 방식으로 엄마가 버틸 수 있을때까지 싸웠던거죠. 그러니 제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엄마에게는 있겠죠. 한국인 여자가 아이를 포기했다. 이게 저에 대한 딱 한줄의 사실이죠. 고통스러운 사실이죠. 그런데 더 고통스러운 것은 상대방의 이야기는 못들어 본채 저 혼자서 다시 이야기를 지어내야 한다는 점이죠. 

우리의 이야기는 각각 다 달라도 힘들어하는 방식은 비슷 하더라구요. 부모나 혹은 부모로부터의 보호가 어때야 하는지에 혹은 어떤 방식으로 자랐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대치가 있고 또 현실을 또 각각의 왜곡된 시선으로 보죠. 어떤 사람들은 현실을 아예 분간을 못하고요. 제가 하와이에 산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다들 와우 너무 좋겠다 그러는데 그럼 저는 속으로 물가가 얼마나 비싼데요 하고 불평하죠. 제가 실제로 살면서 느끼는 하와이의 삶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리는 것하고 차이가 있죠. 그러니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할때도 그 왜곡된 현실인식이 반영되죠. 입양인이든 조실부모를 했든 부모한테 학대를 받았든 스스로를 학대하든 우리의 삶은 항상 내가 생각하기에 그랬어야 되는 삶과 실제로 일어난 삶의 차이에 대한 것이죠. 그리고 성장하며 그 이야기를 가지고 어떻게 했는지요. 우리가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도요. 

저한테 도움이 된 요소가 하나 있어요. 항상 우리가 고통받는 방식엔 세가지가 있어요. 이 두 버전 사이에 간극이 클때. 그리고 계속 되새기며 파고들어요. 그러다가 누군가를 비난해야하죠. 이 불편한 감정에 대해서요. 그러다보면 우리의 뇌가 계속 조심하라고 경고를 주고요. 결국 그걸 놓아버리고 나아가지 않는한 뇌가 자꾸 우리를 휘젓죠. 그러다가 결국 삶의 목표를 추구하거나 삶을 살아가는것을 방해하는 정도까지 이르게 되면 우리는 그 이야기의 간극 자체를 탓해요. 그런데 말로는 엄마를 비난한다고 말해요. 사연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요. 엄마가 어쩌구 저쩌구해서 엄마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그래서 먹어야 되고 그래서 움직이지 못하고 그래서 이래저래 괴롭고 불안하다고요. 즉 우리가 연결을 지어요. 나한테 있는 이런 고통스러운 이야기들과 스스로 주체가되어서 당당히 행동하지 못하는 것을 연결지어요. 

그리고 입양인으로서 우리의 이야기는 단체로 무시당해왔죠. 우리의 이야기의 일부분을 남들이 가져다가 마음대로 바꾸고 떠들어댔죠.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요. 이 용서작업의 제일 첫 단계가 바로 누군가가 들어주는 것이거든요. 카오미씨가 이렇게 입양인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있잖아요.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들이죠. 너무 슬픈 이야기들이요. 그런데 곧 누군가는 나타나서 우리 면전에다 대로 우리가 얼마나 운이 좋아는지 선택받았다느니 축복받았다는둥 혹은 감사해야한다는둥의 이야기를 늘어놓겠죠. 진짜 짜증 지대로에요. 진짜 극혐이에요. 

그럼 말해야죠. 그날 나는 내 문화를 잃어버렸다고요. 내 언어와 음식과, 나를 인종차별하던 친구들까지도요. 나를 괴롭히던 친구들이었지만 적어도 나한테 익숙 했잖아요. 내가 잘알던 것들이란 말이에요. 내 나라였다고요. 비록 그 나라가 나를 원하진 않았지만 내가 알던 나라였다고요. 그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졌죠. 그리고 갑자기 네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를 축하하래요. 얼굴에 두껍게 가면을 쓰고 살면서 왜 나는 이렇게 비참한지를 생각해야 하죠. 그러면서 어떻게 한 사람이 건강한 삶을 살기를 바라나요? 다른 이야기하기를 하라고 사람들이 끈임없이 강요하는데 말이죠. 치유라는 것이 결국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잔아요. 듣기 싫은 다른 사람이 원하는 이야기를 억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고요. 내 스스로 내 이야기를 먼저 듣고 그 다음 목소리를 내야죠.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있죠? (웃음) 제가 말이 좀 많아요. 하루종일도 할수 있어요. 그런데 오랫동안 그러질 못한적도 잇었어요. 회의시간에도 맨 뒤에 앉아서 제발 눈에 띠지 않기를 제발 아무도 나한테 말시키지 않기를 바랬던 적도 있어요. 그냥 없어져버리고 싶었죠. 그러면 치유가 안되죠. 그러니 카오미씨가 백명이 넘게 인터뷰를 했다고 하면 그만큼의 힐링이 일어난거에요.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를 듣고요.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비록 반박당하는 한이 있더라도요. 지금도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힘있는 백인들이 나서서 제가 틀리다고 하겠죠. 진짜가 아니라고요. 마치 그 영상처럼 말이에요. 마침내 그 영상을 없애버리고 제가 나서서 말할때가 온거에요. 당신이 뭐라 생각하든 상관없다고. 나한데는 끔찍한 일이었다고. 그리고 그렇게 기억하는 것에 대해 나는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요. 돌아가서 그때의 엄마를 보면 그때 그렇게 나를 막 대해줘서 고마워요. 진짜로 고마워요. 라고 말할거에요. 그러다보면 내 목소리를 내고 내 스스로를 막 대했던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런 행동들을 멈출수도 있겠죠. 제 삶에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쳤으니까요. 입양인들이 목소리를 낼 공간을 마련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지나간 팟캐스트를 다 듣진 못하겠지만 할일 목록에 넣어 놓을게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조이씨와 연락할수 있죠?

The practice center.org 가 제 웹사이트 주소고 admin@thepracticecenter.org 가 이제일 주소입니다. 제 이름이 독특해서 소셜미디어에서 쉽게 찾을수 있어요.  검색도 쉽게 되고요. J O Y I <laugh> R H Y S S. 전화번호도 찾을수 있어요. 문자를 보내셔도 되고 이메일을 보내셔도 됩니다.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되고요. 유투브에 영상도 많이 있어요. 용서과정과 마음챙김 작업에 대해서 설명하는 영상도 있고 실제 상담자와 인터뷰를 한 내용도 있어요. 필요하시면 저와 함께 같이 이 작업을 해보면 좋겠어요. 관심 있으신 분들 연락 주시면 미리 대화를 나눠볼수도 있고요. 

              번역 : 전유근 

즌 4, 에피소드 25, 수잔 게이타

시즌 4, 에피소드 25, 수잔 게이타

어댑티드 팟캐스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호스트 카오미 리입니다. 

“어렸을 때 한국과 연관되고 싶지 않아했을 때, 제 부모님은 저를 존중한다면서 제 의사를 따라줬지만, 사실 제가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내면화했다는 점을 간과했던거죠.” 

어댑티드 팟캐스트에서는 전세계에 거주하는 해외입양인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이번주에는 미국 동부에 사는 수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수는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사는 해외입양인이자, 루터교회 목사이자, 양성애자입니다. 그동안 수가 이렇게 다양한 공동체에 속하면서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교류해왔는지에 대해 그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수를 소개합니다. 

수: 제 이름은 수잔 게이타이고 She/Her/Hers 대명사를 사용해요. 제 한국이름은 이형호라고 알고있어요. 현재는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북서쪽으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48세이고요. 제가 출생에 대해 아는 건 대부분 부모님이 받은 서류에 있는 내용이에요. 친어머니는 절 낳고 의학적 관리 미흡으로 바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친아버지는 3달 동안 아마 보모같은 분의 도움을 받으며 저를 키우려고 했던것 같지만, 결국 사회복지기관에 맡겼다고 해요. 제가 알기로는 당시 사회의 분위기상 남자가 혼자서 딸을 키우는 게 녹록치 않았던걸로 알고 있어요. 친부모님은 서류상으로는 양부모님보다 2살 정도 나이가 더 많아요. 딱히 젊었던 것도 아니고, 혼인도 한 상태였고, 다른 아이도 없었죠. 만약 아버지가 재혼하셨다면, 저한테 이복동생이 있을 수도 있겠죠.

팟캐스트: 저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미혼여성이나 미혼남성이 혼자 애키우는게 쉽지 않죠 – 주변의 편견이 많으니까요. 친부모님의 직업은 아세요? 농부였나요? 

수: 아버지가 판매원이였대요. 

팟캐스트: 네, 수의 고향은 어디인가요? 

수: 서울입니다. 왠지 모르겠지만 늘 제가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어른이 되서 다시 서류를 보고, 그 뒤에 구글이 생기고 나서는 (웃음) 주소로 검색할 수 있잖아요, 주소로 찾아봤더니 서울시에서 태어났더라고요.

팟캐스트: 유아로 입양되었죠?

수: 네 6개월 때 입양되었습니다.

팟캐스트: 어디로 입양되었죠?

수: 부모님이 뉴저지주 북부에서 살고 계셨어요. 뉴저지 포세이트 카운티에서 자랐습니다. 뉴욕시 근교였죠. 제가 1학년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죠. 그러고 웨스트체스터(뉴욕주에 있는 지역 – 번역주)로 이사를 가서 8학년때까지 살다가 다시 브롱스로 갔어요. 아마 우리가족은 웨스트체스터에서 브롱스로 이사한 유일한 가족이지 아닐까 싶어요 (웃음). 그곳에서도 몇 년 살다가 롱 아일랜드로 이사했죠. 하지만 전 롱 아일랜드에서 지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을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1년 더 빨리 진학할 수 있는 대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대학교에 일찍 입학했어요. 저에게는 사실 입양인인 오빠가 있는데요, 국내입양인이라 백인이죠. 3살 반 정도 나이가 많아요. 사람들에게 농담삼아 저는 수입산이고 오빠는 국내산이라고 이야기해요. 오빠와 저, 부모님이 한 가족이었죠. 제가 입양되었을 때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유치원에 들어갈 때 어머니가 간호사로 일하면서 저희를 키웠어요. 동시에 파트타임으로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제가 8학년 때 졸업을 하셨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제 부모님 두 분 다 목사였어요. 

팟캐스트: 목사 부모님은 엄격하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두 분도 그러셨나요? 

수: 아뇨. 엄격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어요. 두 분 다 공정하신 분이셨죠. 뉴욕주에서 자라면서, 저희 부모님은 루터교 목사였는데요 – 청취자들은 물론 루터교를 잘 알고있겠지만 (웃음) – 당시 대부분이 루터교를 거의 몰랐습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거나 목사의 아이들이라고 주목을 받지 않았죠. 부모님은 공정하신 분들이셨어요. 애정이 깊은 분들이기도 하셨습니다. 제 오빠는 항상 말썽꾸러기였죠. 부모님이 오빠때문에 고생을 하셨는데요, 부모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열심히 하셨습니다. 두 분 모두 건강한 가정에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물림을 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셨어요.

팟캐스트: 브롱스를 제외하면 백인 위주의 동네에서 지내셨군요?

수: 음…. 재밌는 사실은 웨스트체스터는 백인 위주의 동네였죠. 하지만 항상 반에서 서너명 정도의 아이들은 아시아인이었어요. 80년대였으니 일본 기업인들이 뉴욕을 한창 오갔을 때죠. 그래서 아시아 국가에서 온 아시아인들이 있었고, 1세대도 있었습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저를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학교에 갔을 때 담임 선생님이 절 보고 푹하고 한숨을 쉬더니, “애가 영어는 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대요(웃음). 못하는 애들이 워낙 많았어서 그랬죠. 어머니는 “애가 수다를 멈추지 않아서 걱정이에요”라고 답을 했대요(웃음). 어렸을 때 수다쟁이 었다고 하더라고요. 아시아인들 몇명과 친하기는 했지만 아시아인들과 자연스럽게 친구집단을 형성하지는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아시아인을 봤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친해지고 싶었나요? 관심이 갔나요? 

수: 그 아이들의 도시락을 보고 부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도시락 상자를 열면 맛있는 밥 향기가 났죠. 제 어머니는 아무리 노력해도 밥은 하실 수 없었거든요. 그런 점이 부러웠어요.

팟캐스트: 어머니에게 도시락을 만들어달라고 안했어요? 

수: 부탁하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밥을 잘 못하는걸 알고있으니까요. 

팟캐스트: 도시락을 따라잡기는 어렵겠죠. 아주 예쁘니까요.

수: 네 그랬죠. 아시아인 친구 몇명과 친하게 지냈어요. 비슷한 레벨의 반에 배정되었거든요. 물론 제 초등학교 때 가장 친한 친구는 이탈리아인이었어요. 그 친구가 기억하기로는 저와 로버트 리 둘만 독보적으로 독서반에 있었다고 해요. 다른 애들보다 똑똑했거든요.

팟캐스트: 아 아시아인이라 같은 반에 들어간게 아니라 모범생이어서 들어간거군요? 

수: 네, 당연하죠. 둘 다 공부를 잘했어요. 아시아인이니까요. 

팟캐스트: 그런 선입견에 반발하신 적은 없나요? 전 그랬어요, 고등학교 때 똑똑한 아시아인이라는 선입견이 싫어서 B를 받는 평범한 학생인게 좋았거든요. 

수: 제가 다닌 학교이름이 브라운과학고등학교였는데요, 입학시험이 있는 학교였죠. 한국계 미국인들이 정말 많았어요. 저는 그 애들을 보면 약간 겁을 먹었어요. 걔내들은 진짜 한국인들이니까요. 물론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 좀 친하게 지내긴 했지만 제가 각별히 친하게 지낸 친구들은 아니었죠. 저와 다르다는 게 느껴졌어요.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애들이 전부 공부를 잘했어서, 다른 일반 학교와는 다른 방식의 관계들이 있었어요. 

팟캐스트: 그럼 자라면서 외모 콤플렉스는 느끼지 않으셨나요?

수: 제 외모(의 차이)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어요. 외모를 싫어했기보다는 의식하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에, 나중에 느꼈던 감정은 놀라움이었죠. 스스로 제가 백인처럼 생겼다고 생각했거든요. 거울을 봐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죠. 제게 아주 강렬한 기억이라, 나중에 입양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다른 입양인들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는 걸 알게되면서 신기했어요. 제 외모를 싫어했다고는 할 수 없어요. 아예 인식을 못 했으니까요.

팟캐스트: 일종의 부정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수: 네, 하지만 적극적 부정이라기보다는 자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부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백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부모님은 저에게 늘 제가 한국인이라고 이야기 해주셨지만, 제가 아마 7살인가 8살 때 부모님께 제가 한국인인 부분은 얼굴밖에 없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어요. 물론 인지적으로는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렇지만 머릿속으로 제가 상상하던 저의 모습은 거울에서 보이는 제 모습과 달랐어요. 

제가 다른 입양인들을 찾아 만나기 시작한 건 2000년이었습니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탐구하기 시작했을 때였죠. 90년대에서 2000년대 무렵이었어요. 30세 정도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때부터 유색인종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자각도 하게 되었죠.

팟캐스트: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수: 신학대학 덕분이었죠(웃음). 신학대학에 입학하면서 스스로를 많이 돌아보게 되었어요. 제가 초대되었던 행사의 영향도 받았고요. 플로리다에서 유색인종 학생을 위한 전액 지원되는 행사가 있었어요. 잠깐 망설이긴 했지만, 플로리다로 공짜로 여행을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참여했죠. 큰 교회에서 주최하는 행사로 신학대학교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었어요. 저희(유색인종)는 무료였고요. 그 때부터 제가 유색인종이라는 자각을 하기 시작했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했죠. 입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 건 중국 여자애를 입양한 백인여성과 같이 지낼 때였어요. 중국입양인 부모단체의 멤버였고 단체가 여는 행사에 성인입양인을 패널로 초청하고 싶어했죠. 그 단체가 KAtCH(시카고 한국계 입양아, 시카고 기반 한국계 입양아 단체)에 연락을 했습니다. 위스콘신 밀워키에는 자생적인 입양인 단체가 없었기 때문에 KAtCH에 연락을 했어요.

팟캐스트: 그 때 밀워키에서 살고 계셨군요?

수: 신학대학에 1999~2003년까지 재학했었고, 2003년에 밀워키로 이사했어요. 밀워키에서 살면서 입양인부모를 위한 행사에 패널로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입양인의 정체성과 입양 현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났어요.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잘 하고 있는지랑 중국에서 입양한 아이들이 잘 자라줄지를 궁금해 했죠. 그런 질문에 저는 ‘저는 잘 자란 거 같습니다. 그렇지만…’이라고 대답했던게 기억나는데요, 그 때부터 국제입양을 사회적 문제로서 접근하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KAtCH와 같이 활동하기 시작했고, 위스콘신에 사는 한국인 입양인들을 만나기 시작했어요. 그 이후 같이 살던 여성과 중국을 방문해서 둘째 아이를 입양할 때 동행했습니다.

팟캐스트: 그 동거인과 연애 관계를 맺고 계셨나요?

수: 네 연애 관계를 맺고 있었죠. 공식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이혼을 하는 중이었고, 저의 친한 친구였던 그 여성이 동거를 제안했어요. 괜찮은 생각이었죠 (웃음), 어차피 이사를 나와야 했고, 친구가  미혼모였기 때문에 제가 도와줄수 있다고도 생각했어요. 제가 중국 방문에서 생생히 기억하는 일이 있는데, 광저우에 막 도착했을 때에요. 저와 제 친구, 친구의 딸이 같이 있었는데, 딸이 주변사람들의 시선에 많이 당황해 하더라고요. 자기가 엄마랑 같이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아시아인인 저랑 같이 있으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고 나중에 말하더라고요. 

팟캐스트: 아이가 수와 같이 있으면 이상해 보이지 않아서 신경을 안썼다는 거죠?

수: 네. 

팟캐스트: 중국에서만 일어난 일인가요? 아니면 다른 곳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나요?

수: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죠.

팟캐스트: 네.

수: 중국이었죠. 

팟캐스트: 근데 밀워키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수: 확실히 그랬을 수도 있지만, 말로 표현지는 않았어요. 

팟캐스트: 그 아이에게 부모이기도 했나요? 

수: 그 애의 삶에서 딸을 지지해주는 부모의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나이가 더 많은 다국적입양인으로써 아이의 경험을 이끌어주고 싶었죠. 아이의 경험이 평범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엄마와 제 관계가 멀어졌어요. 아이의 엄마가 제가 부모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그 애의 관계로 인해서 위협감을 느꼈으니까요. 

팟캐스트: 두 분이 연인 관계였을 때도 그랬나요?

수: 그랬죠. (웃음) 아주 복잡한 관계였습니다.

팟캐스트: 얼마나 그 관계를 지속하셨죠?

수: 2년 정도요.

팟캐스트: 팟캐스트에서 이야기하 는 데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수: 이정도의 수준에서는 괜찮아요.

팟캐스트: 아 다행이네요. 그분과의 관계가 첫번째 동성관계였나요?

수: 네. 첫 관계였죠.

팟캐스트: 어떤 성정체성을 가지고 계세요?

수: 양성애자입니다. 현재는 남성과 결혼한 상태이고, 예전에도 남성과 결혼한 적이 있죠.

팟캐스트: 언제부터 양성애자라는 사실을 아셨죠?

수: 대학교 때부터 알았어요. 대학교에서 제 성적 지향성과 감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죠.

팟캐스트: 그런 끌림을 거부하려고 하셨나요?

수: 네. 하지만 제가 이 여성과 교제할 때에는 부모님에게도 말씀을 드렸고 소통하려고 노력했죠. 저는 제 부모님에게 교제 사실을 알렸지만, 파트너는 자신의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았어요. 관계가 꽤 진행되었음에도요. 어머니에게 양성애에 관해서 설명하던 때가 기억이 나네요(웃음). 어머니가 이해하시려고 노력을 부단히 하셨어요. 그 때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는데요, 당시에는 사람들이 그런 지향성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니까요 (웃음). 뭐 지금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때는 성적 난잡함이 아니라, 사람의 성과 상관없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는걸 잘 몰랐을 때죠.  

팟캐스트: 중국입양인부모들을 만났을 때로 시점을 돌려보죠. 

수: 네.

팟캐스트: 그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불편했나요? 

수: 그 땐 망설였지만, 나중에 보면 입양인 부모들이 원하는 이야기나 선입견을 깨줄 수 있었던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어떤 이야기를 듣고싶어 했나요?

수: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듣고 싶어했어요. 좋은부모로서의 정당성을 부여받길 원했죠. 하지만 그런 말을 해줄 수 없었어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정확한 답안이 없죠. 그때 생각하게 된 게, 어렸을 때 한국과 연관되는 걸 거부했을 때, 부모님이 저를 존중한다면서 제 의사를 따라줬지만, 사실은 제가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내면화했다는 걸 간과한거죠. 굉장히 미묘한 일이죠. 부모님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올바른 일을 했으니까요. 입양인부모들은 정답과 국제입양을 한 행동에 대한 인정을 간절히 원했고, 제가 최선의 길을 추천해주기를 바랬습니다.

팟캐스트: 그러한 해답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공정하지 못하네요. 

수: 그렇죠, 물론 그 사람들이 저에게 그런 답을 원한다고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뭘 원하는지 느낄 수 있었죠. 하지만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그런 곳에 가면 불임인 부부도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 입양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거나 비판적으로 말하면 그 사람들이 가진 부모의 꿈을 파괴하게 되는 셈이니 말하기가 복잡하죠. 큰 압박입니다. 물론 수 씨는 이런 문답을 할 때 30세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난 뒤였지만, 더 어린 입양아들이 입양기관에 의해서 이런 복잡한 상황에 놓이니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수: 네 그렇습니다.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둘 다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일이었죠. 저에게 있어서 입양은 좋고 나쁜 일이었으니까요. 제 초등학교 때 가장 친한 친구가 불임 문제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친구에게 입양을 권유했죠. 저도 입양되었고, 입양, 입양제도와 관련해서 큰 문제는 없으니까요. 친구는 그 말에 하지만 피로 이어진 아이를 원한다고 대답했죠. 하지만 저는 자라면서 제 부모님이 진짜 부모님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항상 제 부모님을 진짜라고 생각했죠. 매우 복잡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서로 대립하는 관점을 동시에 가질 수 있어요. 

팟캐스트: 대립하는 관점이라니 정확히 어떤 의미이시죠?

수: 음…. 입양은 좋거나 나쁜 일이 아닙니다.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죠. 적어도 제가 가진 입양에 대해서 가진 관점은 그래요.

팟캐스트: 그 강연에서 입양 부모에게 준 다른 조언은 뭐가 있었나요?

수: 조언을 해주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조언을 원하지만 저는 조언을 주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했죠. 이 모든 일이 제가 타 인종 간 입양을 한 백인 입양 부모와 연인 관계를 맺고 있는 동안 일어났어요. 

팟캐스트: 그 입양 부모들을 아주 답답하게 만들었겠군요? 지금 만약에 똑같은 상황에 놓인다고 한다면, 똑같은 말을 할 건가요?

수: 지금 제가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선언보다는 질문을 더 많이 하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부모들에게 자기 스스로 질문을 던지라고 하고 싶죠. 

팟캐스트: 질문의 예를 몇 가지 들어 줄 수 있나요?

수: 왜 입양을 하고 싶나요? 왜 국제적 입양과 타 인종 간 입양을 고려하고 계십니까? 두려운 점은 있나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려우십니까? 이런 식의 질문을 하게 하고 싶죠. 입양 부모들의 동기를 알아내고, 공포를 알아내는 일입니다. 부모가 되어야 결혼 생활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그러한 인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부모의 정체성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처음에는 제가 입양 부모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교환 학생들을 집에서 지내게 하기도 했고, 유아 위탁 가정으로도 활동했으며, 입양아를 키우던 여성과 연인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죠. 무의식적으로 제 어머니가 출산과정 중에 죽었으니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가져야 할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가지고 싶다면 선택지는 입양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선택지가 없이 부모가 되었죠. 왜 그랬는지, 목적이 뭐였는지 몰랐습니다. 그때 저는 연인도 없었고, 돈도 없었지만, 부모가 되고 싶다고 선언했고, 부모가 되었어요.

팟캐스트: 선택지가 없었다니, 실수로 임신하셨나요?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었나요?

수: 실수라고 하지 않겠지만….

팟캐스트: 아이를 가지려고 계획하고 있지는 않은 상황에서 아이를 가지셨군요?

수: 네.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아이를 가진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때 제가 관계를 상대와는 결혼하지 않았죠. 제가 임신하게 된다면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결혼을 했고, 현재 남편이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그러니까 현재 남편과 재혼을 하셨는데, 아이를 가지고 난 뒤에 재혼했군요?

수: 네.

팟캐스트: 남편과 사귀실 때 아이를 가지는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남편분이 긍정적이셨군요?

수: 네.

팟캐스트: 알겠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백인인가요?

수: 푸에르토리코인이에요

팟캐스트: 오. 알겠습니다.

수: 저와 그이의 딸 그레이스가 태어난 지 몇 달 안 지나서 그 사람의 장녀가 18살이 되었죠. 그이와 저는 아주 달라요. 저도 의도적으로 제 주변에 있는 사람과 다른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레이스가 1살 반 정도 되었을 때 그이와 제가 결혼했죠. 

팟캐스트: 그때 나이가 37세 정도 되셨지요?

수: 38세였습니다. 

팟캐스트: 노산이라 생길 문제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으셨나요?

수: 확실히 제가 고위험군에 해당하긴 했어요. 거기에 전 희소병 환자이기도 해요. 아주 희귀한 병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저번에 입양아 포럼에 같은 병을 가진 사람에 관해서 물어보려고 하다가 까먹었습니다. 국소피부경화증이라고 하는 병이에요. 내부 경화증과 비슷하지만, 내부 경화증은 장기까지 경화시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는 병이지만, 제가 가진 병은 피부가 경화되고 근육이 위축되는 병입니다. 현재 제 다리 중 하나가 다른 다리보다 더 커요. 국소피부경화증을 앓고 있는 다리가 다른 다리보다 더 작고, 피부가 수축한 상태이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그걸 보고, 제가 화상을 입었다고 인식하고는 합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피부가 더 신축하지 않는 병이죠. 그리고 제 복부 피부가 더 신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생각했어요. 임신하고 나면 복부가 부풀어 오르기 마련이니까요.

팟캐스트: 하지만 복부의 피부가 늘어나지 않으니 문제가 되었군요?

수: 제 복부 피부의 반은 신축성이 남아 있었지만, 나머지 반이 신축성이 없었죠. 어떻게 제 육체가 제 임신에 반응할지 흥미로웠습니다.

팟캐스트: 그 국소피부경화증은 나이를 먹으면서 어떻게 변화하죠? 수 씨가 신경 써야 할 정도의 중병인가요?

수: 그렇게 심각한 병은 아닙니다. 제가 병원을 방문하면 의사들에게 제 질병에 대해서 가르쳐 줘야 할 정도예요. 의사도 잘 모르는 질병이죠. 제가 4살 때 이 병이 있다고 진단을 받았고 자라면서 조금씩 퍼지긴 했지만, 그렇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위험할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죠.

팟캐스트: 아주 어렸을 때 그 병 진단을 받았는데, 부모님이….

수: 제 부모님이 걱정했는지 궁금하세요? 당연히 걱정하셨죠. 사실 관련 수술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 다리들의 길이가 맞지 않아서 의사들이 다리 성장을 멈춰서 다리 길이를 맞추기 위한 수술을 언제 해야 할지 서로 토론하고 있었죠. 저의 긴 다리 쪽의 성장을 특정 시기에 멈춰서, 제가 성장을 끝낼 무렵에는 제 두 다리의 길이가 비슷하게 만들려고 했어요. 어머니가 한국에서 한국인 성장 표를 가지고 와야 했습니다. 미국 의사들이 “한국인이라 성장 속도가 다를지도 모른다.”라고 우려를 표현했기 때문이죠. 의사들이 생각보다 더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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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국소피부경화증을 가진 사람들은 증세의 사진을 올리기도 하는데, 그 사진을 보면 약간 놀라요. 좋은 방향으로 놀랍니다. 제 다리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다리를 본 적이 없죠. 한국 입양아들과 처음 만났을 때나, 다른 사람과 공통점을 찾았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는 합니다. 현실에서는 국소 피부경화증을 앓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죠. 한국 입양아의 경우는 과거에 한국 입양아를 만난 적이 있지만, 그 사람들이 한국 입양안지 자각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한국 입양아 사회와 만났을 때의 기분과 국소경화증 환자 집단과 교류했을 때의 기분이 비슷하군요?

수: 네. 저와 비슷한 다리를 가진 사람을 보는 과정이 그랬죠.

팟캐스트: 확실히 그렇네요. 공통점을 가진 다른 사람과 만나게 되는 일이니까요.

수: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국소피부경화증이 얼마나 희소병인지 알고 있나요?

수: 초 희소병입니다. 숫자 자체는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제가 방문한 의사 대부분이 들어보지 못했을 정도로 희귀하죠. 

팟캐스트: 수 씨가 입양 부모와 연인 관계였다는 사실을 다시 짚고 싶네요. 제가 만난 입양아 중에서는 처음으로 입양 부모 연인을 두셨거든요. 물론 제가 아는 한국계 입양아 중 몇 명이 입양 부모가 된 경우가 있긴 하지만, 수 씨의 경우에는 그 당시의 연인이 입양 부모였고, 다인종 간 입양이었죠. 그 관계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수: 제 전 여자친구는 관련 문화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죠. 그래서 저와 여자친구의 관계가 제 한국인 입양아의 특성과 연관이 있었는지 항상 궁금했어요.

팟캐스트: 아 묻고 싶었던 주제이네요. 이상하다고 느꼈나요? 이상했나요?

수: 입양 부모가 입양아와 관계를 한다는 사실이 말이죠?

팟캐스트: 한국계 입양아와 같이 연인 관계를 맺고 있는데 중국에서 두 명의 아이를 입양했다니, 백인 구세주 콤플렉스와 관련되어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수: 음…. 전 여자친구가 입양하기로 한 이유 중 하나는 여자친구가 미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같이 생활하면서 확실히 그 미혼 상태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했고, 그때 저는 미혼 상태에서 여자친구가 부모가 될 방법은 입양밖에 없어서 입양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죠. 여자친구가 부모가 되기 원해서 입양했지,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입양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 전 여자친구와 저의 관계가 지속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 2명의 관계가 비밀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저와 제 전 여자친구의 직업 때문에 서로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발표할 수 없었죠.

팟캐스트: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전 여자친구 집에서 수 씨가 방을 빌리고 있다고 생각했나요?

수: 네. 아이들 돌보는 일도 도우면서 같이 동거하고 있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교회에서 목사로 일하고 계시죠?

수: 네.

팟캐스트: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숨겨야 했던 이유가 목사 일 때문이었나요?

수: 네. 그때 교회 상층부에서는 그런 관계를 허용하지 않았거든요. 

팟캐스트: 동성연애나 결혼을 할 수 없었군요. 미국 복음주의 루터 교회(ELCA, 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America) 이었나요? 

수: 네. 공식 지침이 우리가 헤어지고 난 뒤 1년 뒤에 바뀌었죠.

팟캐스트: 그런…. 그 비밀 관계가 연인 관계가 실패한 원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적어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나요?

수: 아뇨. 궁극적으로 비밀 관계 때문에 우리 관계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처음부터 우리 관계가 건강하게 시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죠. 같이 상담도 받아보고 우리가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해보려고 노력을 해야 할지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죠.

팟캐스트: 왜 목사의 길을 걷게 되셨죠? 항상 목사의 길에 관심이 있었나요?

수: 아뇨. 제가 처음으로 목사에 진지하게 접근하기 시작했을 때는 대학교 졸업하고 난 뒤 사회 정의와 관련된 일을 하려고 했을 때였죠. 저는 사회 정의적 활동이 신앙과 영적 활동과 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어요. 그때는 제는 컴퓨터 공학 업계에서 일하면서 돈도 많이 벌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었죠. 하지만 공부해야 할지 몰랐어요. 신학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지만, 목사가 되고 싶었는지도 몰랐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다음 문이 열리고 다음 단계를 밟다 보니 목사가 되었죠. 지금도 제가 목사가 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서 기반이 필요하고, 그 기반은 사람과의 관계에 기반을 둬 있죠. 답을 아는 일보다는 같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요. 초등학교 때 저는 행복한 아이였죠. 그래도 다른 애들과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다르다고 느꼈죠. 입양아였기도 했지만, 주변 사람들보다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뉴욕에 스카스데일과 이스트체스터의 경계 지역에 살고 있었으니 여러가지 면모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느꼈죠. 입양아 경험이 제가 사람과의 관계를 추구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제 부모님은 제 오빠가 절 좋아하기를 원했고, 깊은 관계를 원했다고 했어요. 하지만 오빠가 가지고 있던 문제가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게 했죠. 오빠가 저를 버렸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오빠와 제 관계가 아예 멀어지지는 않았지만, 오빠가 먼저 저에게 연락하지는 않아요. 오빠에게 이메일을 하거나, 페이스북으로 연락하면 반갑게 맞아 주긴 하지만 정기적인 교류를 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오빠와 저는 서로를 좋아해요. 하지만 서로 차이가 심하게 나죠. 최근 오빠에게 입양아의 경험에 관해서 물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빠의 친가족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지 물어보고 싶었죠.

팟캐스트: 교회에서는 인연을 느끼나요?

수: 교회에서 인연을 느낀다고 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교회를 통해서 만나는 사람과 인연을 느낍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앙을 가지고 신앙과 영적 여행을 떠나면서 느끼는 인연을 느끼죠. 

팟캐스트: 신앙과 영적 경험이 수 씨에게 아주 중요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수 씨가 그 두 가지 요소에 대해서 말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요? 항상 수 씨 곁에 있으면서 수 씨가 어려운 경험을 할 때 도와줬나요? 

수: 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 적은 없어요. 여러 시점에 기독교와 관련해서 여러 문제를 겪기도 했지만, 제 신앙심은 하나님을 성령으로 믿고 기반이자 힘이라고 생각해요. 전 하나님이 여러 가지 일을 일어나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비극이나 나쁜 일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나타나서 돕는다고 생각하죠. 미국 흑인 여성의 경험에 기반을 둔 여성주의 신학에서 로렌 윌리엄스가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설명할 수 없는 일 대부분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죠. 적어도 제가 설명할 수 없는 좋은 일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과의 인연이 만들어지는 일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죠. 제가 한국 문화와 배경을 배우게 된 이유는 한국에서 태어나 8살에서 10살 사이에 미국에 이민을 온 한국 여성과 만나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색 신앙 프로그램에 같이 참여하고 있었죠. 사색 신앙은 침묵 속에서 신앙을 생각해보는 활동이었습니다. 그분도 모태 신앙이고 다시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어요.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만난 뒤에 서로 친해졌죠. 그 친구를 통해서 영적 탐구, 설교, 신학에 흥미가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 사회와의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20년 전에도 이 사회와 관계를 맺었지만, 그때는 관심이 없어서 거리를 뒀습니다. 제가 한국계 입양아라는 이야기를 꺼내자, 80명의 회원 중에 4명의 아시아계 다인종 간 입양아들의 대화를 나누게 되었죠. 지금 현재 다음 단계의 길은 저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계획을 하고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적어도 그 길에 대해서 열린 태도를 유지하고 어떤 길이 될지는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시즌 4, 에피소드 24: 마리 킨더

Audio available 4/26/21 at 12:00 EST.

2016년에 마리 킨더 씨, 한국 이름 창마리 씨 (33세)는 런던의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 스티브 씨와 함께 한국에서 여섯 동안 살며 친어머니를 찾기 시작했다. 킨더 씨의 친부모 조사는 슬픔과 실망을 하게 했지만, 그 고통을 한국 화장품을 통해 치료하며 한국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창구로 삼았다. 현재 킨더 씨의 영국 기반 한국 화장품 판매회사 뷰티 앤 서울(Beauty and Seoul)은 4년 넘게 성공적인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킨더 씨는 한국에 대한 관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관점, 자신이 살아오면서 배운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마리: 제 이름은 마리 킨더입니다. 현재 런던에 살고 있어요. 오늘 런던의 날씨는 맑은데, 런던에서는 특이한 날씨죠. 제 한국 이름은 창마리입니다. 제 양부모님이 제 한국 이름을 남겨뒀죠. 몇 달 있으면 34세가 됩니다.

팟캐스트: 현재 런던에 살고 계시지만 마리 씨의 국적도 하나의 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이죠?

마리: 네 거기에도 깊은 이야기가 엮여 있죠.

팟캐스트: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마리: 사람들이 제 억양을 듣고 어디 출신 억양인지 구분을 못 하죠. 영국 억양도 아니고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제 부모님이 저를 입양하셨을 때 우리 가족은 호주에 살고 있었죠. 그래서 전 호주 국적을 가지고 있어요. 어머니는 영국-아일랜드계이고 제 아버지는 네덜란드인이죠. 제 결혼 이전 성은 네덜란드계 성인 밴 하켄이었어요. 그런 환경에서 11살 때 호주에서 도쿄로 이주해 몇 년간 지냈죠. 제 고등학교 시절은 암스테르담에서 지냈습니다. 대학교는 영국에서 나왔고 영국에서 살기 시작했죠. 결혼한 상대는 웨일스인이에요. 다양한 국가들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팟캐스트: 확실히 호주 억양이 들리기는 하는데 다른 억양도 들리기도 하네요. 저도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억양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우리가 공감을 잘하는 사람들이라 다른 사람과의 억양을 맞춰준다고 생각해요. 

마리: 저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죠. 8년간 미국 국제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미국식 억양이 나오기도 합니다. 특히 미국인과 이야기할 때 자주 드러나죠.

팟캐스트: 사람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뉴질랜드 출신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나요? 

마리: 많은 사람이 제가 호주 출신이라고 생각하죠. 호주 억양을 없앴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듣기로는 여전히 그 억양이 남아있는 모양입니다.

팟캐스트: 마리 씨를 한국에서 만났을 때는 이러한 배경을 몰랐는데 사람들과 교류할 때 과거를 전부 소개하지는 않으니 당연한 일이죠. 마리 씨가 일본에서 거주했는지는 몰랐습니다.

마리: 네. 2년간 일본에서 거주했죠. 일본에서의 경험은 좋았어요. 11살에서 12살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전부 즐기지 못하긴 했지만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 뒤로 몇 번 돌아가기도 했지만,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살면서 국제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일본을 전부 경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죠. 도쿄를 아주 좋아했어요. 아주 좋은 도시였습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셨죠? 교육 업계에 종사하셨나요?

마리: 아버지가 영국통신에서 일하고 계셨죠. 부모님은 항상 여행을 좋아했어요. 부모님은 중동에서 만나고 8달 만에 결혼하셨고, 지난 40년간 금실 좋은 부부로 지내셨죠. 아버지가 호주로 이사해야 부부가 같이 호주로 이사했어요.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어렸을 적 여름방학 때는 같이 가족들과 여행을 다녔던 기억이 있죠. 아버지는 해외발령 자체를 즐기셨고, 아시아에 발령받을 기회가 생기자 부모님이 둘 다 가자고 결정하시고 이사하셨습니다. 저는 자주 이사해야 하는 상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11살 아이는 친구가 있는 곳에서 다른 나라의 학교로 전학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그러한 경험이 마리 씨의 적응력을 높여줬나요? 학교를 자주 바꾸거나 군인 아이들이라 자주 이주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시간을 들이기 어려워서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마리 씨의 경우는 어땠나요?

마리: 제가 친구들을 사귀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초등학교 때는 꽤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였죠. 하지만 항상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환경에 놓이고 수많은 학교에 다니다 보니 저에게 자신감을 자주 생겼습니다. 그래도 4살 때부터 가장 친했던 내 소꿉친구야- 이런 사람들을 보면 조금 질투를 하기도 하죠. 그러한 깊은 친구 관계는 없으니까요. 아니면 사람들이 친구는 몇 명 없는데 오래된 친구 관계를 유지해온 때도 부럽습니다. 이렇게 국제적인 생활을 하면 아는 사람은 많지만 진정한 친구 관계는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죠. 현재 런던에 정착한 상황에서 저와 가장 친밀한 친구들은 런던에 있는 친구들이에요. 런던에 고작 12년만 살았으니 좀 신기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특이한 성장 과정이라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왜 마리 씨의 부모님이 한국에서 입양하셨는지 아시나요? 그리고 외동딸이셨나요? 

마리: 네. 외동딸입니다. 제 부모님은 불임이었죠. 제 어머니가 여러 번 유산하셨고 그래서 입양을 염두에 두고 계셨어요. 전 1984년에 태어났는데, 그때 한국은 국제입양의 본산지였죠. 현재 영국 주 국제 입양 국가는 중국이지만 그때는 수많은 사람이 한국에서 입양하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에게 다른 국가에서 입양하고 싶지 않았냐고 물었는데 한국이 눈에 띄셨다고 하셨죠. 어머니가 한국에서 입양하신 사람을 알고 계셔서 그게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동방사회복지회를 통해서 입양 절차를 시작하셨고, 어머니 말로는 몇 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서류 준비와 인증 등에 시간이 걸렸다고 하셨죠. 관련된 이야기인데 전 항상 부모님에게 남동생을 입양해달라고 부탁했어요. 항상 남동생을 원했죠. 부모님이 또 다른 아이를 입양하려고 생각도 해보셨지만 제가 워낙 말썽꾸러기라서 부모님이 저로 만족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해야겠네요

팟캐스트: 부모님과 관계는 돈독한가요?

마리: 운이 좋게도 부모님과 관계가 아주 돈독한 편이죠. 코로나 이전에는 부모님을 만나러 2주마다 1번씩 부모님 집에 방문했어요. 현재 부모님은 런던에서 몇 시간 떨어진 영국 교외에서 살고 계시죠. 부모님과 관계가 돈독해서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마리 씨의 근처에 살기 위해서 이사했나요?

마리: 네. 그러셨죠. 제 부모님은 원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살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런던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한다고 하니 너무 멀다고 하셨죠. 그 말에 저는 비행기로 15분 거리인데 그리 멀지 않다고 했지만, 부모님이 영국으로 이사를 오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영국에 와서 정착하셨습니다. 

팟캐스트: 현재 마리 씨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하면 당연히 한국인의 정체성도 가지고 계시겠지만 그 정체성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자기소개 방법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나요?

마리: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저 자신을 소개하는 일에 자신감이 붙었다고 생각해요. 저를 한국계 영국인이라고 소개하죠. 한국계라는 점을 먼저 언급해요. 제가 청소년기와 20대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다르죠. 그때는 저를 한국계라고 소개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저 자신을 영국계 호주인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렇게 저를 소개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제 출신지를 다시 물었습니다. 그 말에 저는 영국계 호주인이라고 다시 말해야 했죠. 제 한국계 배경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34년이 지나고 나서야 제 한국계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제가 한국계 영국인이라고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제 한국계 배경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꽤 걸렸어요. 

팟캐스트: 한국에 처음으로 돌아간 때는 언제였나요? 혼자 한국을 방문하셨나요? 아니면 부모님이나 스티브 씨(마리 킨더 씨의 남편)와 방문하셨나요?

마리: 제가 어렸을 때, 9살 때 제 부모님과 같이 방문했습니다. 그때 방문은 잘 기억나지 않고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일주일간 학교 안 가도 되고 휴가를 보낸다는 느낌이었죠. 제 조국이고 제 출신국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으로 되돌아간 때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관련된 기억이 잘 나지 않죠. 가 23살 때 스티브와 같이 갔을 때가 처음으로 제대로 한국에 방문했던 때였어요. 그때는 한국을 제 출신국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에 그렇게 관심이 없었고, 제 부모님이 한국에 방문하라고 권유하셨죠. 저와 스티브를 위한 비행기 표가 있으니 한국에 방문해서 시간을 좀 보내고 한국이 어떤 곳인지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조국을 아는 일은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공짜로 표도 받았겠다 가자고 했죠.

팟캐스트: 공짜 표도 있고 사실상 공짜 여행이니 가도 손해는 없다고 생각하셨군요?

마리: 네. 그렇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결혼 선물이었나요?

마리: 결혼 선물은 아니었죠. 부모님이 꽤 오랫동안 계획하셨는지는 몰라요. 제가 한국에 가야 한다고 생각할 때까지 부모님이 기다리려고 했지만, 너무 오래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한국에 처음으로 방문할 때는 관련 지식이 전혀 없었어요. K POP과 K-드라마가 큰 문화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몰랐죠. 한국에 대한 어떤 인식도 없었습니다. 한국 음식이 어떤 맛인지도 몰랐죠. 하지만 2주간 한국을 여행하면서 한국과 사랑에 빠졌어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계속 울었습니다. 그때 스티브에게 한국 문화를 이제 겨우 알게 됐고, 계속 체험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죠. 하지만 그때는 한국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랐어요.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죠. 아직도 첫 한국 방문 때 찍은 사진을 다시 돌아보고는 해요. 좋은 기억입니다.

팟캐스트: 마리 씨의 블로그에서 읽었는지 아니면 스티브 씨가 이야기했는지 기억이 잘 안 지만, 제가 리 씨와 친구이기도 하니, 기억하기로는 첫 한국 방문 이후로 한국을 떠나려고 할 때 감정적 붕괴를 겪어서 스티브가 걱정했다고 들었어요.

마리: 우리는 여행에 여러 가지 경험을 꽉 채워 넣으려고 했죠. 여행은 좋았고 매일 즐겁게 일어났어요. 하지만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창문 밖의 풍경을 보면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몇 주간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니 감정 조절이 안 되어서 울기 시작했고, 돌아와서도 울고 있었죠. 옆에서 그 모든 일을 보고 있던 스티브도 마음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스티브도 제 고통을 이해하고 제 기분을 알았어요.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제가 사랑에 빠지고, 제 고향이라는 느낌이 드는 한국을 떠나야 하니 화가 났죠. 다시 한국에 돌아올 수 있을지 몰랐으니까요. 

팟캐스트: 그 여행을 계기로 마리 씨의 입양아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한국에 그러한 감정적 연결성을 느끼셨나요?

마리: 한국에서 돌아온 뒤 몇 달 동안 상당히 우울했죠. 그리고 한국에 집착하게 되었어요. 한국에 전혀 관심이 없다가 한국 요리를 시험해보고, 한국 음악을 듣고, 한국 드라마를 보고 20년 동안 제가 경험하지 못한 문화를 전부 경험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문화 흡수를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 한국에 형제나 자매가 있을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러한 의문이 제가 왜 입양되었는지, 어떻게 입양 제도에 맡겨지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했죠. 그렇게 친부모 조사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입양 기관에 돌아가서 본격적으로 친부모 조사를 시작했던 때는 어느 시기였죠?

마리: 제 첫 2주간 여행 동안 동방사회복지회를 방문해서 제 서류를 확인하고 위탁 가정을 방문했죠. 사실상 정신 건강을 유지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어요. 돌아온 뒤 몇 년이 지나고 나서 조사를 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방사회복지회를 통해서 조사를 시작했지만, 동시에 제가 입양되었던 호주 정부 기관을 통해서 조사를 시작했죠.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조사였어요. 제 입양 서류에는 이미 아주 많은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죠. 친부모가 어떻게 만났는지, 친부모의 학교, 이름, 고등학교까지 전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사 자체가 편하게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팟캐스트: 아주 많은 정보가 있었네요? 

마리: 네. 아주 많은 정보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검열되어 있었지만, 아버지가 제가 어렸을 때 따로 원본 서류를 복사하셨는데, 그 서류는 검열되어 있지 않았죠. 그래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어요.

팟캐스트: 오. 우리가 알아야 하는 정보인데 그렇게 확보를 해야 하니 문제가 있네요.

마리: 그렇죠. 우리가 알아야 하는 정보이죠. 그래서 처음에는 아주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다른 한국계 입양아를 만나본 적이 없어서 그 절차가 어떻게 진행될지 그리고 제가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전혀 몰랐죠. 그때 제가 영화 트윈스터즈(Twinsters)를 보게 됐어요.

-영화 트윈스터스 발췌-

영화 대사: 그 애도 한국에서 11월 9일에 저와 같이 입양됐죠.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출생신고는 서울에서 받았어요. 저와 똑같습니다. 

-발췌 끝-

마리: 한국에서 IKAA(국제입양인연대)에서 개최하는 회담이 열려서 거기 가서 다른 입양아를 만나겠다고 생각했죠. 겸사겸사 친부모 조사를 해보려고도 생각했습니다. 스티브와 저는 친부모 조사를 위해서 장기 휴가를 받아서 한국에서 살아 보려고 생각했어요. 동방사회복지회와 같이 일하려고 생각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낙관적인 생각이었습니다. 2016년에 저는 런던의 직장을 그만뒀고, 스티브는 안식년을 받아서 한국에서 6개월 동안 살면서 친어머니를 찾기로 했죠. 제가 생각하기로는 일이 아주 쉽게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의 작은 도시 출신이셨나요?

마리: 제 자료에 따르면 제 친부모님들은 군산에서 사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군산은 충청남도 대전 근처에 있는 도시인데, 한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흔하다면 흔한 소도시에요. 아주 작은 곳이죠. 제 자료에 따르면 제 부모님은 서로 다른 계급 출신이었다고 해요. 아버지는 농사꾼의 아들로 그렇게 학교에 관심은 없었지만, 육체적인 능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반면에 어머니는 수줍음이 많고 공부를 잘하는 중산층 출신이었다고 하죠. 어머니는 부모님의 압력으로 아버지와 헤어졌는데 어머니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자기 오빠가 공부하고 있던 대전으로 도망쳐서 대전에서 제가 태어났고, 제가 서울로 보내졌다고 하더군요.

팟캐스트: 부모님이 고등학교 시절 연인이었군요?

마리: 거기에 다른 계급 출신이었죠. 로맨스 영화 같네요.

팟캐스트: 그렇네요. 하지만 그렇게 정보가 많았고, 사회도 작은 편이었는데 왜 찾는 데 문제가 있었죠? 

마리: 입양 기관과 관련해서 전혀 진행이 전혀 되지 않았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이름이 제 서류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고 했죠. 

팟캐스트: 기관에서 이름들을 인정하지 않았다고요?

마리: 제 서류에 기록된 부모님의 이름과는 다르다고 하면서 저에게 서류를 보내줬는데, 그 서류는 검열되어 있었죠. 그리고 동부사회복지회에서 전혀 절 돕지 않았습니다. 상태가 괜찮아 보이니 친부모 조사를 해서 이득을 볼 수가 없다는 식으로 언급하면서 조사를 계속 회피했어요. 제가 만약에 그때 좀 더 싸울 힘이 있었다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겁니다. 다른 조사 방식도 확인해봤어요. 입양아들 조사를 도와주는 기관과도 일했고, 심지어 흥신소도 고용해서 제가 찾을 수 있는 정보가 있는지 알아봤죠. 하지만 정보를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찾은 유일한 정보는 제 친어머니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았고, 자료에 언급된 정보와 맞는 사람을 찾았다고 했을 때의 정보였어요. 이 조사는 흥신소를 통해서 얻은 정보였죠.

팟캐스트: 흥신소를 고용하셨군요?

마리: 네. 제가 정보를 찾기 위해서 고용했죠. 그 사람들이 군산의 지도를 보여주고 조사 절차를 전부 도와줬어요. 동방사회복지회에서 전혀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흥신소에서 대부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번역 도중에 이야기가 섞여서 정확한 정보는 모르지만, 어머니가 잘 만나려고 하지 않았는지, 동명이인이었는지, 그쪽이 최대한 노력을 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흥신소에서 연락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흥신소에서 다시 조사를 해보려고 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머니가 직접 동방사회복지회를 통해서 저에게 연락을 해오지 않는 이상 정보를 더 알 수가 없죠. 그렇게 해서 결론이 났습니다. 그 일이 6개월 한국 거주 기간 중 몇 달을 차지했죠. 저는 그 모든 일을 최악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제 정보를 보고, 제 사진을 봤는데도 절 만나고 싶어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저에게 실망하고 계신다고 생각했어요. 그일 자체가 큰 충격이었습니다. 한국에 오면서 많은 기회를 포기하고 와야 했고 스티브도 여러 가지 기회를 포기해야 했죠. 6개월 여행에서의 2개월 차였고, 아주 쉽게 부모님을 찾아서 제 이복동생이나 이부동생들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와보니 어떤 정보도 얻을 수가 없었어요. 그일 자체가 아주 힘들었습니다. 제 부모님을 보고 싶었지만, 제가 한국에 와있었고,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이 모든 일에 잘못 접근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팟캐스트: 움직이지 않는 벽을 무너트리려고 노력하는 기분이셨군요?

마리: 네. 그렇습니다. 제가 말했지만,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중요하죠. 지금 제가 훨씬 성장하고 안정된 뒤에 과거를 보면 그때 기관을 더 압박해서 제 서류를 보려고 해야 했지만, 그때는 다른 입양아들과 교류를 한 적도 없었어요. 절차도 전혀 몰랐고, 제가 봐도 되는 서류를 알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저를 도와줄 통역가도 없었죠. 통역과 번역을 통해서 저를 도와줄 사람도 없었어요. 나중에 제가 다시 돌아가서 해볼지도 모르지만, 용기와 힘을 다시 모아서 접근해야 합니다.

팟캐스트: 시간이 흐르고 난 지금은 그때를 어떻게 생각하시죠?

마리: 다른 입양아들의 생각은 모르지만, 제 경우에는 잊은 적이 없어요. 그때 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결론이 났다고 설득하려고 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자기 스스로 생각했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친부모와 관계가 중요하지 않고,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과거를 알 권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 전부를 알 수만 있다면 제 이야기에 대한 결론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죠. 매일 제 배경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제가 결론을 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팟캐스트: 런던에서 좋은 삶을 살고 있고, 좋은 관계를 맺고 있으니 친부모님을 찾지 못한 일을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았죠?

마리: 네. 사실 그 일에 죄책감이 연관되어 있기도 해요. 양부모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친한 친구들도 많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고, 성공한 사업가이기도 하죠. 표면적으로 보면 성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성공한 삶을 살고 있어도 자신의 근원을 모른다는 사실이 절 놓아주지 않아요. 평생이 지나도 그 욕구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자신의 근원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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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제가 생각하기로는 동방사회복지회에 돌아가는 일 자체가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조사를 하지 말아야 하고 제 감정에 관해서 이야기했던 일 자체가 화가 나죠. 

팟캐스트: 그래도 어느 정도는 괜찮아 보이시네요.

마리: 결국 그 기관이 결정할 일은 아니니까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 일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충분히 모으면 다시 도전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벌써 4년이나 지났죠. 하지만 다시 한국에 가서 몇 달 동안 조사를 진행할 수 있는 정신 상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꼭 진행할 겁니다.

팟캐스트: 마리 씨는 직장에서 퇴직하시고, 스티브 씨는 안식년을 얻은 뒤에 한국에 아파트를 빌리셨군요? 지금 생각해보시면 한국에서의 생활은 어떠셨나요? 6달 동안 한국에 계셨죠?

마리: 처음 몇 달간은 한국에서 생활한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했죠. 하지만 조사가 갑자기 끝나고 나니 그 흥분이 가라앉았어요. 제가 한국에 오기로 한 일이 옳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생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블로그를 시작했어요. 블로그에 제 친부모 조사에 대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제가 한국에서 사용해 본 화장품에 대한 평론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2013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방문했을 때는 한국 화장품 업계가 그렇게 거대한지 몰랐죠.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을 시작한 뒤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어요. 스티브와 저는 그 주목도를 보고 한국에서의 남는 시간을 사용해서 사업을 일구고, 한국 화장품을 영국으로 수입해볼까 생각했습니다. 한국 화장품이 미국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지만, 그때는 누구도 영국 시장을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처음으로 한국 화장품을 영국으로 수입할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2013년-14년에 한국에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한국에서 돌아오면서 옷 가방 하나를 화장품으로 채워와서 친구들에게 써보라고 했죠. 스티브가 제가 이렇게 좋아하는 일을 사람들과 같이 공유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이라고 했고 서로 웃고 말았습니다. 제 꿈의 직업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죠. 제 사업을 열어서 한국 화장품을 영국으로 수입하고 싶다고 이야기하고는 했지만 꿈에 불과했어요. 6개월간의 한국 거주 기간 중 마지막 달은 사업 계획을 작성하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기업을 최대한 많이 만나 회의를 하고, 많은 화장품을 시험해보고, SNS 관련 그룹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그다음에 영국에 돌아와서 2달 동안 준비를 하고 뷰티 앤 서울(Beauty and Seoul)을 창업했죠.

팟캐스트: 한국에서 아직 창업하기 전에 화장품 기업들을 만나고 다니는 일이 어려웠나요? 회의를 잡는 일도 어려웠죠?

마리: 네. 제가 계속 화장품 회사들에 전화하는 사진이 있어요. 전 전화하는 일 자체를 기분이 가장 좋을 때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스티브가 저에게 긴장하지 말라고 조언을 해줘야 했어요. 전화했을 때 사람들이 영어를 하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연락이 안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한국에서는 화장품 엑스포나 컨벤션을 자주 했고 그런 거기에 가서 참여 기업들과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요. K-Beauty 무역 박람회도 많이 열려서 거기에서 우리가 막 만든 명함을 뿌리고 다녔죠. 강남에 있는 부티크에 가서 정장을 맞춰 입고 박람회에 참여했습니다. 그때는 웹사이트도 없었고, 그냥 계획만 있었을 뿐이었고, 우리는 계획을 소개하고 다녔어요. 그렇게 한국을 떠날 때 이름과 연락처 몇 가지를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처음 시작했을 때는 작게 시작했어요. 6개에서 7개 정도의 브랜드를 수입해서 팔기 시작했죠. 4년 전에 그렇게 시작했는데 이렇게 성장한 사실을 보니 자랑스럽습니다.

팟캐스트: 이 사진에는 스티브 씨가 같이 사진에 찍혀 있지 않지만, 스티브 씨가 다른 일들을 도와주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매우 열정적이었습니다. 스티브가 처음부터 이 사업에 긍정적이었나요?

마리: 네. 스티브는 페이스 마스크 사용하는 일을 좋아해요. 항상 제 상품을 사용하고, 제가 가진 가장 비싼 화장품도 사용해보죠. 스티브도 화장품 사업을 좋아했습니다. 원래는 얼굴을 비누로 씻는 일을 제외하면 화장 자체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라 더더욱 신기했어요. 

팟캐스트: 현재는 10단계 피부관리 프로그램도 하고 있나요?

마리: 네. 지금은 저보다 훨씬 더 복잡한 절차를 거치죠. 저는 아침에 빠르게 준비해야 하니 10단계를 전부 할 수 없고, 최대한 빠르게 피부를 좋은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맞는 준비 단계를 거쳐요. 스티브는 그 10단계를 저녁에 합니다. 에센스, 세럼도 바르고, 새롭게 들어온 상품도 실험해보고, 면도한 뒤에 어떤 상품을 써야 할지, 이 모이스처라이저를 써야 할지 물어보고 피부관리를 좋아해요.

팟캐스트: 처음으로 시트 마스크도 써보고, 에튀드 하우스, 이니스프리 같은 화장품 판매점을 보니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한국과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나요?

마리: 한국에 처음 갔을 때 음식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갔죠. 김치를 처음 먹어본 적도 있습니다. 지금 첫 여행에 대해서 생각하면 아주 신기해요. 한국 음식이 어떤 맛일지 잘 몰라서 서양 음식을 먹으려고 했고, 음식 자체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 와서는 한국 음식을 좋아하지만, 그때는 그랬습니다. 한국어도 전혀 몰랐고, K-POP도 전혀 몰랐어요. 한국에 대해서 깊은 연결성을 만들 요소가 없었죠. 하지만 항상 화장품을 사용해보고 써보는 일은 좋아했어요. 그래서 한국 화장품 자체가 저의 흥미와 열정의 대상이 되었죠. 새로운 재료와 상품이 가득한 세계였습니다. 쿠션들을 보고 아주 대단한 발명품이라고 생각했고, 한국 문화와 연결되는 계기가 되어주었어요. 한국 상품을 사용하니 더 한국인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BB 쿠션을 사용하면 더 한국인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제가 입양되지 않았다면 BB 쿠션을 썼을 텐데 한국에서 그 BB 쿠션을 쓰고 있었죠. 그렇게 작은 일이지만, 그때는 제가 한국과의 연결성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그게 제 최초 여행에서의 경험이었죠. 2주 반이 지나고 나자, 한국 음식과 사랑에 빠졌고, K-POP도 잔뜩 내려받았고, K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지만, 한국과 최초로 연결성을 만들었던 계기는 한국 화장품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언제부터 화장품 회사들이 마리 씨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죠?

마리: 몇몇 회사들은 절 보고 거부하거나 최소 구매액이 수만 파운드가 넘어갔는데, 신생 기업으로는 그 구매 요구를 따라갈 수 없었죠. 이게 제 한국인 특성일지는 모르지만, 제가 생각하기로 나중에 충분히 성장해서 회사들이 제가 자기들의 브랜드를 팔아 주기를 원하길 만들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사업을 계속 진행해 나갔죠. 스티브는 그런 이유로 사업을 진행하고 발전시키다니 평범하지 않다고 농담하고는 했습니다.

팟캐스트: 미래에 가면 회사들이 나에게 전화를 하게 만들겠다고 생각하셨군요? 

마리: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이라는 느낌으로 접근했죠. 어쨌든 그렇게 부정적인 회사들이 좀 있었어요. 그때는 영국은 신규 시장이었고, 대부분의 회사가 아시아 시장이나 북미 시장에 더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엄청나게 성장했죠. 우리가 영국에서 와서 물어보는 일은 새로운 시장을 열어볼 수 있는 일이었어요. 운이 좋게도 많은 회사가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봤죠. 하지만 몇몇 회사들은 어떤 기준을 통과하고 오라고 우리를 거절했습니다. 사실 그 기준을 달성하고 난 뒤에 다시 돌아가서 하는 협상이 가장 즐거운 협상이죠. 아 네. 그 기준을 통과해서 이제 다시 사업을 논의하고 싶은데요.

팟캐스트: 그러한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보냈을 때의 감각을 기억하시나요?

마리: 아주 좋았죠.

팟캐스트: 그 뒤에 축하하고는 했나요?

마리: 네. 전화하면서 항상 긴장하고 있었으니 웃겼죠. 하지만 회의에서는 최대한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이려고 했고 그게 끝나고 나서 성공했다는 반응을 보였어요.

팟캐스트: 지금 돌아가면 VIP이신가요? 

마리: 우리는 화장품 회사들과 친밀해질 수 있어서 운이 좋았죠. 지난 4년간 여러 번 회사들을 방문해서 소통을 해왔습니다.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같이 식사도 하고, 몇몇 브랜드들은 우리를 통해서 체험 판매장과 스파도 열었기 때문에 관련해서 홍보도 되니 운이 좋았죠. 

팟캐스트: 스티브도 그런 대우를 같이 받나요?

마리: 네. 당연하죠. 스티브가 저만 그렇게 대우를 받게 두지 않죠. 뷰티 앤 서울을 처음 시작했을 때 좋았던 점은 한국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도 있었어요. 이 사업이 없었다면 한국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을 기회가 없었겠지만, 이러한 협상을 통해서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과 좋은 친구가 되었고, 그 친구들과 만나서 식사를 하게 되면 잘 못 하니 부끄럽긴 하지만 한국어를 연습하게 되었죠. 이 친구들이 저에게 새로운 요리를 소개해주려고 하고 여러 가지 새로운 문화를 소개해주기도 했어요. 한국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서 이득을 본 점 중 하나였습니다.

팟캐스트: 영국에서 한국 화장품 판매 사업을 어떻게 진행하셨죠?

마리: 우리가 처음으로 사업을 열었을 때 운이 좋았죠. 이미 SNS와 블로그를 통해서 제 이름을 어느 정도 알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미 수만 명의 사람이 이미 절 알고 있었죠.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이미 기다리고 있는 고객들이 존재했어요. SNS를 통해서 오신 분들도 있었고, 블로그를 통해서 오신 분들 있었고, 블로그를 통해서 우리 사업을 도와주려는 분들도 많았죠. 한국 화장품을 검색해보면 항상 영국 검색 엔진 위에 올라오기도 했고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첫해에는 어떤 이벤트나 행사에서 말할 기회가 있으면 전부 받아들였어요. 아주 힘들었습니다. 6개월간 해외에서 지내다가 영국에 돌아온 상태였고, 저는 무직이었고 영국에 돌아오면 다시 취직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사업을 처음 시작해서 이득을 얻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정규직에 취직해 일하면서 동시에 뷰티 앤 서울 사업을 주말과 퇴근 이후에 진행했습니다. 그래도 사업 시작 첫날의 판매량을 보고 이 사업에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진행했어요. 제가 노력한 이유는 이 사업에 진입해서 가장 먼저 성공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 모든 힘을 다해 노력하고 최대한 열심히 하려고 했죠. 여가 시간에 경영학 공부도 하고. 판매제안서에 관해서도 공부하고, 인스타그램 관리법도 배우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그렇게 성장했죠.

팟캐스트: 현재 규모가 어느 정도 되시죠? 물론 공유하기 어려운 정보도 있겠지만, 전용 창고의 사진을 봤던 기억이 나서요.

마리: 네! 전용 창고도 있고 직원도 4명이나 고용해서 거기를 관리하고 있어요. 4명 다 프리랜서로 고용했죠. 지금 현재 사업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 아버지가 처음 사업 시작할 때 사업장 구축과 상품 구매를 위한 융자를 해 주셨어요. 아버지도 꽤 사업가로서의 재주가 있으셔서 여러 부업도 하시고, 프리랜서 일도 하셨습니다. 현재는 은퇴한 상태라 아버지에게 좀 일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죠. 아버지의 말로는 소기업은 2년 내로 성공하지 못하면 실패하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2년이 지나고 나면 제가 성공하든 성공하지 않든 융자를 갚아야 한다고 하셨죠. 그게 융자 조건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융자를 4달 만에 갚을 수 있었어요. 그게 저와 아버지에게 이 사업에 미래가 있고 우리가 계속 열정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면 더 성공할 수 있다는 증거로 보였죠.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한국 화장품 판매 기업들이 영국에 상륙하고 있어요. 거의 매달 하나씩 새로 창업하는 느낌이죠. 하지만 제 이야기를 더하고, 우리가 영국 한국 화장품 판매 기업의 선구자 중 하나라는 사실을 더해서, 전 뷰티 앤 서울을 얼굴이 없는 무기질적인 기업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고객들과 소통하고, 제 얼굴을 SNS에 걸어 놓고, 친구로서 상품을 추천해주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그냥 한국 화장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국 화장품이 인기를 끌게 되니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더 개인적인 깊은 관계를 맺고 싶었죠. 그러한 접근 방식이 우리 사업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현재 마리 씨의 마음에 가장 드는 상품 몇 가지를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마리: 음…. 현재 제가 애용하고 있는 모이스처라이저는 헤이미쉬 모이스처 젤 크림이에요. 현재 영국의 따뜻해지고 있는 날씨에 맞춰 가볍게 사용하기 좋은 모이스처라이저죠. 피부에 닿으면 시원한 느낌이 드는 모이스처라이저입니다. 

팟캐스트: 수박 모이스처라이저인가요?

마리: 네. 수박 모이스처라이저에요.

팟캐스트: 저도 아주 좋아해요. 

마리: 네. 주원료가 수박 추출물이죠. 하지만 수박 향이 나지 않아서 좋은 제품이에요. 

팟캐스트: 그리고 무겁지도 않고요.

마리: 무겁지 않지만, 수분공급을 해줘서 좋은 제품이죠. 모이스처라이저는 그 제품이 마음에 듭니다. 그다음으로 마음에 드는 제품은 시오리스 에세너죠. 에세너는 에센스와 토너를 하나로 합친 제품으로 시오리스에서 직접 개발한 신규 제품이에요. 쑥과 녹차가 들어 있어서 안정되고 정화되는 느낌이 듭니다. 전 얼굴이 쉽게 빨개지는데, 이 제품을 쓰고 났더니 많이 도움이 됐어요.

팟캐스트: 저도 안면홍조증이 있어요. 현재 영상에 보이실 겁니다(팟캐스트 인터뷰를 영상 통화로 진행 중) 

마리: 한국 혈통 문제일지도 모르겠네요. 제 뺨이 자주 마르고 빨갛게 되고는 하는데 시오리스 에세너가 큰 도움이 됐죠. 거기에 유리병에 담겨 판매되어서 환경 보존적인 소비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팟캐스트: 한국 화장품이 왜 다른 나라 화장품들보다 낫다고 이야기가 많이 되는데, 이게 단순히 판매 전략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마리: 제가 한국 화장품을 한국 화장품과 피부관리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해야 한다면, 화장품 산업계에서도 한국 화장품이 사용하는 배합방법이 프랑스와 미국에서 사용하는 배합방법보다 10년에서 15년 정도 더 앞서 있다고 인정한다고 이야기할 겁니다. 그러한 잡지 기사들과 함께 한국 화장품이 영국에 상륙해 메리케이에서 팔리기 시작할 때 발간되기 시작했죠.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피부를 관리하고 외모를 관리하는 일을 자랑스러워합니다. 화장을 짙게 하기보다는 피부를 관리하려고 해요 특히 서양에서 자란 제가 보면, 서양에서는 피부에 잡티가 있다면 그 잡티를 컨실러로 숨기려고 하죠. 화장에 접근하는 방식이 달라요. 그렇게 피부관리에 대한 높은 관심이 화장품 기업이 혁신과 기술 발전에 투자하게 했고, 새롭고 대단한 배합방법을 개발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값싸고 고품질의 화장품을 생산할 수 있었죠. 거기에 고도의 경쟁을 통해서 미국, 프랑스 브랜드와 비교하면 가격을 낮게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한국 화장품을 소개할 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죠. 친구들이 한국 화장품을 파는 사업을 시작한다고? 이라고 궁금했습니다. 친구들에게 써보라고 상품을 나눠줬고, 친구들이 사용해보니 그 상품들과 사랑에 빠졌고, 그 결과 4년 뒤 지금도 같은 상품을 저에게 사서 사용하고 있어요. 그런 광경은 보기 좋죠. 모두에게 맞는 화장품이 있습니다. 저에게 맞는 상품이 다른 사람에게는 맞지 않기도 하고요. 어떤 사람에게는 달팽이 크림은 너무 과도한 물건일지도 모르죠.

팟캐스트: 너무 단순화시키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마리 씨는 꿈을 원하셨고 그 꿈을 쟁취하셨죠. 그런 진취적인 접근을 친부모 조사에 적용해 볼 생각은 안 했나요?

마리: (웃음)

팟캐스트: 안된다는 대답을 듣고도 계속 노력을 하셨으니까요.

마리: 알죠. 알아요.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특히 다른 입양아들과 이야기를 하면 항상 진취적이고 용맹한 사람이고, 그게 개인적인 삶이나, 사회적인 생활이나, 사업에도 드러나는데, 그 친부모 조사에만 다가가면 제가 정신적인 장벽에 부딪히는 느낌입니다. 과거보다 지금의 제가 훨씬 자신감이 넘쳐요. 지금 저는 저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배경을 받아들이고, 정신 건강상으로도 많이 나아졌죠. 나쁜 일이 일어나면 사람을 성장하게 하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성장의 결과가 현재의 저 자신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 친부모님을 찾았다면 뷰티 앤 서울을 시작하지 않았을 겁니다. 꽤 기묘한 생각이죠. 적어도 지금은 제가 그런 문제에 접근할 준비가 더 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똑같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있죠. 그렇게 되면 더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그런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 중이죠. 용기를 내서 동방사회복지회에 들어가서 제 정보를 달라고 요구를 하고 조사를 할 필요 없다는 소리를 없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고 도와줄 만한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팟캐스트: 한국 드라마처럼 동방사회복지회에 12명의 정장 입은 한국 남자들을 끌고 가야 할지도 몰라요. 사람들을 동원하는 방법이 한국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빠른 방법이죠.

마리: 런던 기반 기업과 같이 일하던 좋은 친구가 한국에 살고 있죠. 한국에 방문하면 그 친구가 항상 같이 가서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친구는 한국계 미국인이고, 한국어를 잘하거든요. 그냥 말만 하면 바로 도와주겠다고 했죠. 그러한 언어적 소통 여부도 성공 여부를 가린다고 생각합니다. 방문 자체가 정신적으로 힘든데, 언어적 장벽까지 더해지면 힘들어지죠. 그런 언어적 도움이 있다면 더 도움이 될 겁니다. 다음에 다시 동방사회복지회를 방문할 때는 사람을 대동할 예정이에요. 전에 동방사회복지회를 방문했을 때는 스티브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죠. 스티브도 들어오지 못한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스티브가 들어왔어도 큰 도움은 되지 못했을 겁니다.

팟캐스트: 제 자료에는 별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이런 행동까지 할 이유는 못 느꼈지만, 다른 친부모 조사를 더 깊게 진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국어를 잘하고 강한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한다고 하더군요. 한국 아줌마나 강한 언니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안된다고 해도 전혀 듣지 말고, 난리를 피면서 시끄러운 외국인이 되어야 한다면 해야 한다고 해요. 한국 사람들은 그런 문제에 반응하죠. 평범하게 협조하면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된다고 합니다.

마리: 저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팟캐스트: 큰 힘이 들기 마련이죠.

마리: 적어도 후자의 문제는 직접 경험했죠. 그냥 동의하면서 물었더니 결국 진행이 안 되더군요.

팟캐스트: 그리고 우리가 입양아로서 항상 예의 바르게 정보의 극히 일부를 받는 데 익숙해져 있죠. 하지만 더 많은 정보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마리 씨는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마리: 거기에 우리는 영상도 가지고 있거든요. 부모님에게 자료를 받으러 갈 때 스티브가 영상을 전부 찍었죠. 제 부모님이 고등학교에서 만났다는 사실이나 그런 부모님이 가진 자료를 전부 영상으로 남겼습니다. 하지만 저는 친어머니들이 자신의 신상을 보호하고 싶어서 가명을 대거나 친구의 이름을 대기도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기관에서 가명을 통해 사람들에게 연락을 보내면 그 연락을 받은 사람들은 잘 모르거나 모른다고 하기도 한다고 해요. 아주 힘들죠. 결론을 내고 싶은데 어머니를 만나기는 했는지, 어머니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는지, 어머니가 준비가 안 됐다고 했는지, 대답하지 못하겠다고 했는지, 어머니의 태도는 어땠는지, 어머니와 연락을 했는지, 거짓말을 했는지, 사실이나 거짓말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팟캐스트: 사람들이 마리 씨를 구독하거나 연락하고 싶으면 어떤 방식을 사용해야 하죠?

마리: 인스타그램이 가장 좋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죠. @Beauty_and_Seoul이 뷰티앤서울 계정입니다. 제 개인 계정은 @Mareekinder 인스타그램이에요. 2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다른 입양아들을 만나지 못해서 다른 입양아들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만나고 싶습니다. 서로 과거를 공유하니까요.

시즌 4, 에피소드 23: 제시 헤일

Audio available on Monday, April 19, 2021 at 7 am ET.

제시 헤일 씨, 한국 이름 송진주 (23세) 씨는 어린이일 때 한국에서 위스콘신으로 입양되었다. 현재 진주 씨는 한국에서 암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진주 씨는 친부모를 찾는 데 성공했으며 이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제시: 제 이름은 제시 진주 헤일입니다. 한국 이름은 송진주예요. 대한민국 양산시에 거주하고 있죠. 미국 위스콘신주 뉴 베를린에서 자랐으니 큰 거주지의 변화를 겪었습니다. 현재 23세예요.

팟캐스트: 양산 시는 어디에 있죠?

제시: 대한민국 남부에 있는 도시입니다. 한국 제2의 도시인 부산 바로 옆에 있죠. 남해안 근처에 존재하는 도시예요.

팟캐스트: 한국으로 이주하기로 한 이유가 뭐죠?

제시: 한국에 이주할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어학연수를 위해서 부산에 두 달간 방문했기 때문이죠. 2달 동안 학생 신분으로 부산에서 거주했어요. 그 2달 연수 이후에 미국에서 지내다가 한국으로 오기로 했습니다. 대학교 졸업을 하고 일자리를 찾고 있었는데, 어학연수 동안 만난 사람에게 제 전공 분야의 직장에 대해 연락해 자리를 얻었거든요. 한국에 이주한 이유 중 하나는 직장과 취업 때문이었죠. 그 시기에 제가 해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제 친부모님도 찾았어요. 한국에 이주할 다양한 이유가 있었죠. 여행과 새로운 도전을 좋아하는 성격도 한국 이주에 도움을 줬어요.

팟캐스트: 한국에 언제 이주하셨죠?

제시: 2019년 3월 말 사이에서 4월 초에 한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양산시에 있는 스타트업 생명공학 기업에서 암 연구를 하고 있어요. 제가 사는 지역은 부산대학교 병원 양산 캠퍼스와 연관된 곳이죠. 제가 이 일에 대해서 처음으로 알게 된 때는 부산대학교로 어학연수를 왔을 때였습니다. 한국어 관련 회담을 위해서 부산에 갔는데, 저와 똑같은 전공에서 똑같은 주제를 연구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죠. 전 학부생 신분으로도 어느 정도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거든요. 그 사람과 친해지고 난 뒤에 취직하고 싶으면 연락하라고 저에게 명함을 줬습니다. 제가 구직하던 도중에 명함을 기억하고 연락을 했죠. 면접하고 난 뒤에 취직에 관한 이야기가 진행되기 시작했어요. 최대한 빨리 한국으로 이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한국으로 이주한 뒤 미국에서 하던 연구를 지속했습니다. 경력자로 취직할 수 있었던 일이 도움이 됐죠. 부업으로 영어 학원에서 성인 대상 영어 교육도 할 생각이라 한국 영어 교육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몹시 어렵더군요. 한국에 이주했을 때 제 전공과 관련이 없는 신규 분야에 취직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한국에 이주하면서 전공을 살린 취직을 하는 독특한 경험을 하셨군요?

제시: 네. 아주 대단한 경험이었죠. 비자의 예를 들어도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연구 비자도 있었지만, F-4 비자로 한국에 오기로 했죠. 아주 좋은 비자이거든요. 한국에 오니 언어 장벽 문제를 제외하면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제 전공을 살린 일을 하는 일은 훌륭한 기회였고 영어 선생일 보다 돈을 잘 벌었으니 한국 이주에 있어서 좋은 시작이었다고 생각해요. 한국에 왔을 때부터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로 이주하면 많은 안정성을 잃게 되는데 저에게 안정적인 직장이 있다는 사실이 큰 도움이 되었죠. 상사들도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았고, 회사에서 일하는 외국인들도 많아서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상사 상당수도 미국에서 공부해서 한국인들이었지만 제가 겪는 문제에 대해서 이해를 해줬고, 제 적응 기간 동안 관용을 보여줬죠. 생명공학 기업이라 작업에 대한 유연성을 보여줬기 때문에 작업하는 데 유연성이 있어야 하는 저에게 도움이 됐어요. 제가 관심을 가진 주제를 연구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스타트업 기업이라면 흔한 하루에 20시간씩 직장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그런 기업 문화는 아니군요?

제시: 그렇지는 않지만, 한국에서 대학교에 가고 여기에서 박사학위를 따면 그렇게 되죠. 제가 한국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진행하라는 격려를 받고도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안 따기로 한 이유기도 합니다. 제 작업 시간은 평범한 편인데, 서양 국가에 적용되는 기준 덕분이라고 생각하죠. 평범하게 8시간을 일하고, 연구에서도 유연성이 존재해요. 어떤 연구는 긴 시간이 걸리니 시간을 더 들여야 하는 예도 있고, 그런 상황이라면, 다른 날에는 더 길게 쉴 수도 있게 되어 있어서 연구할 때 있어서 좋은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주말에도 일해야 하는 단점이 있기도 하죠. 취직했을 때는 한국어 공부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한국어로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소통이 제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았고, 사람들이 제 한국어 이해도를 과대평가하는 경우가 많아서, 제가 이해를 못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결과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았고, 상사들이 제가 왜 사람들이 원하는 일을 하지 않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았죠. 단순히 상사들뿐만이 아니라 제 동료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 동료가 많습니다. 그래서 동료들과 상사들을 위해서 언어적 다리가 되어주는 경우가 많죠. 

제시: 전 한국인이면서 동시에 외국인이니 그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어서 기뻐요. 미국인의 모험심이 발휘되어서 그 역할을 하는 데 있어서 두려움이 없죠. 영어를 더 써야 한다고 조언을 하기도 합니다. 상층부에서 더 영어를 쓰라는 격려를 받기도 하죠. 우리 기업은 영어 사용 국가에도 진출하려고 노력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영어 사용이 좋은 선택이었죠. 한국 직원들이 영어를 배우려고 노력하게 되었고, 소통의 오류가 있을 거라는 인식을 하고, 영어를 쓰기 어려워하는 한국 직원들을 격려하는 역할도 합니다. 우리 회사에도 저나 외국인 직원들과 대화하지 않으려는 직원들이 있어요. 이게 국적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인식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직장에서 영어를 사용하기로 한 결정이 제 한국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해줬어요. 제 한국어를 한국 사람들이 이해 못 하지만, 동시에 제가 한국 사람들의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 쌍방의 이해 부족을 아는 일이 중요했죠. 한국어를 말하려고 하면 사람들의 인식 자체가 달라지는 일이 느껴졌습니다. 제가 금발 머리를 선호하는데 염색을 풀고 검은 머리를 해야 하기도 했어요. 머리도 자르고 제 팀에 섞여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제 팀은 제 나이 또래의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적응이 어려웠고 성공하지 못했죠. 제가 한국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염색을 풀기로 한 선택이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회사가 다른 건물로 이사했고 이러한 변화가 적응에 도움이 되었죠. 사람들이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절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절 저로 봐줬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영어 사용이 동료들과 동급의 레벨에서 소통할 수 있게 해주기도 했겠네요. 동료들이 제시 씨를 외국인으로 생각하게 했으니까요.

제시: 네 그렇습니다. 제가 그러기로 했죠. 저와 비슷한 상황에 부닥친 입양아 중 일부는 한국어를 매끄럽게 해요. 하지만 그 사람들도 어떤 상황에서는 영어를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한국어를 하거나, 모국어를 합니다. 저는 한국어를 잘못 하므로 사람둘에게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줘야 해요. 제 경험, 인식, 반응이 다르다고 사람들에게 영어를 하면서 알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거기에 젊으시니 존댓말을 자주 사용해야 해서 어렵죠?

제시: 네 거기에 호칭도 다양하니까요. 제 직장에서 그런 언어 장벽과 외국인들이 존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주니 다행이죠. 제 외국인 동료 일부는 한국어를 아예 쓰지 않으려는 경우도 있고 그 이유를 이해해요. 한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한국인들은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한국인들은 왜 한국어를 잘 못 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외국인이 한국어를 잘 하지 못하면 한국인들은 공격받는 기분이 들고 모욕당한 기분이 들죠. 하지만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사람은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 해요. 존댓말이라는 개념이 모국어에는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화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그렇게 동료들 간의 다리가 될 수 있었군요?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조언해줄 수 있으니까요. 

제시: 네. 외국인들에게는 그런 말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해주고, 반면에 한국인에게는 외국인이라 이해 못 하고 한국어를 배우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죠. 이러한 예측과 반응이 어른이 되어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데 특히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실수하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거나, 사람을 불쾌하게 하거나 비웃음을 당하는 일을 무서워하니까요. 제 직장에서 소통을 늘리기 위해서는 양측이 전부 이해를 했는지 확인하거나, 적어도 쌍방이 서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도록 해야 하죠. 서로를 평가하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의 문화 중 하나는 상대방에 대한 지속적인 평가를 한다는 점이에요. 자신들의 영어 실력을 평가하고, 동시에 남들의 한국어 실력도 평가하죠.

팟캐스트: 친부모님을 어떻게 찾게 되셨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제시: 앞에 말했지만, 부산에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습니다. 주말에 관광하려고 친구들과 서울에 올라가기로 했죠. 제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지하철역 하나가 입양기관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봤어요. 그걸 보니 제가 지금 어른이 됐으니 제 친부모 조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하지만 입양기관은 주중에만 열었습니다. 주말 동안 서울을 구경하고 어학연수 수업을 들으러 부산으로 내려와야 했죠. 연수 관리자가 제 상황을 이해해주고 편의를 봐줬습니다. 제가 관리자에게 한국에 있을 때 친부모 조사를 진행하고 싶은데 주중에 방문해야 하니 서울에 하루 더 있을 수 있냐고 문의했어요. 월요일에 수업을 빠져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죠. 관리자는 제 상황을 이해하고 제시 씨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응원해 주셨어요. 그래서 월요일에 입양기관을 방문했고 4시에야 상담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 서류를 볼 수 있었어요. 제가 16살 때 처음으로 봤을 때와 다르지 않았죠. 입양기관에 친부모 조사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과거에도 생각을 해봤고, 다른 사람들의 친부모 조사를 듣고 고민하기도 했죠. 하지만 저는 모든 관련 조사를 할 수 있으면 해보려는 사람이고, 모든 질문의 대답을 알아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조사를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2018년 여름에 친부모 조사를 시작했어요.

팟캐스트: 입양기관에서 친부모님에게 연락했나요? 단체가 그 정도의 정보는 가지고 있었나요?

제시: 네.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었죠. 어학연수가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간 다음 제 생활을 지속했어요. 제가 대학교에서 또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전에 보낸 이메일을 봤냐는 이메일이었죠. 거기에 제 친어머니와 연락이 되어서 어머니가 만나려고 하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걸 읽고 전 이메일 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을 했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친아버지가 친부모 조사에 바로 대답을 줘서 입양기관에서 저에게 연락했지만, 그 이메일이 스팸 함으로 가서 이메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행히도 2번째 이메일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죠. 만약에 받지 못했다면 제 조사 방향이 달라졌을 것이고, 당연히 제 삶도 바뀌었을 겁니다.

팟캐스트: 친아버지가 직접 연락을 하셨나요? 

제시: 친아버지가 기관을 통해서 저에게 이메일을 보내셨죠. 제가 이메일을 확인하고 나서 답장을 썼습니다. 입양기관에서 편지를 편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한국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한글과 영어로 제 연락처를 포함한 편지를 2부 작성해서 보냈어요. 직접적인 소통을 위해서 이메일, 카카오 아이디와 저에게 연락할 다른 방법을 적어서 보냈죠. 그다음에는 아버지와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었어요. 어머니와는 카카오톡을 통해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헤어진 상태였고 제가 입양 제도에 맡겨진 뒤에는 만난 적이 없었죠. 그래서 따로 연락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듣기도 했어요. 아버지가 어머니보다는 더 연락하기 편했죠. 어머니는 가족을 꾸린 상태여서, 어머니와 연락할 시간이 적었고, 두 분 다 제 입양을 슬픔과 연관해서 연락하기 힘들었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언어적 장벽까지 더해지니 소통하기 힘들었습니다. 자신의 아이이지만 성인이고 알지 못하는 타인이니까요.

팟캐스트: 조사를 시작할 때 친부모님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나요? 아니면 홀트가 알아서 정보를 찾을 수 있었나요?

제시: 제가 어른이 되고 난 뒤에 친부모 조사를 시작하고 나서야 친부모님의 이름을 알 수 있었어요. 제가 이름을 몰랐던 이유 중 하나는 제 한국어 능력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을 받고 있었고, 약간의 한국어를 배워서 어느 정도 해독능력이 있었고, 어떤 정보를 찾아야 하는지 알았어요. 그래서 정보를 약간 알 수 있었지만, 친부모님의 이름 전부를 저에게 줄 수 없었죠. 하지만 제가 어른이 되어서 한 친부모 조사를 통해서 얻은 좋은 정보 중 하나는 친부모님의 성이었죠. 최 씨와 송 씨였습니다. 제가 조사를 하면서 찾은 선물 중 하나였죠. 하지만 제가 조사를 시작하면서 제 첫 역사였기 때문에 매우 귀중했어요. 작은 정보였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가졌습니다.

팟캐스트: 처음에 친부모님과 연락이 됐다는 이메일을 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셨나요?

제시: 이미 말을 했지만, 그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 있었죠. 너무 그 조사에 희망을 걸고 싶지 않았어요. 많은 사람이 친부모를 만나거나,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큰 희망을 걸고 있지 않았죠. 제 목표는 그냥 제 친부모님의 사진을 얻는 일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었어요. 친부모님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고 저를 만나려고 기관에 답을 줬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 해체된 가족에 대한 문화적 장벽과 다른 문제가 있는데도 답을 해서 놀랐죠. 아주 기뻤고 아주 신기했어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죠. 입양아로서 여러 문제를 겪지만, 동시에 이런 흥미롭고 특별한 경험도 할 수 있습니다. 설명하기 힘들죠

팟캐스트: 슬픈 감정도 느끼셨나요? 부모님을 잃으셨다가 다시 찾은 셈이죠?

제시: 슬픔은 제가 부모님을 만났을 때 느꼈죠. 제 친아버지는 여전히 미혼이셨고, 절 잃고 다시 회복하지 못하신 느낌이었어요. 거기에 다른 문제도 겪었던 느낌이었습니다. 제 친어머니도 만났는데 제 친어머니를 직접 만났을 때야 슬픈 감정을 느끼고 제가 잃은 가족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죠. 다행히도 제 양부모님이 아주 대단합니다. 이번 주말에 양어머니가 한국에 방문하실 예정이에요. 미국에 저를 지탱해주고 지원해주시는 부모님이 있었으니 제가 갈망이나 상실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제 양부모님은 제 입양아의 슬픔을 이해하고 저에게 슬퍼할 시간을 주셨죠. 제 양어머니는 저에게 아름다운 조언도 해줬어요. 전 항상 제 친어머니를 잃어서 슬퍼했죠. 제가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양어머니에게 제가 어머니를 친어머니만큼 사랑할 수 없다고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양어머니가 어느 날은 친어머니를 더 사랑할 수도 있고, 어느 날은 날 더 사랑할 수 있지만, 괜찮다고 했죠. 그 말이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제가 어른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저에게 이런 대화를 했다고 이야기를 해줬어요. 다른 가족과 부모가 입양아의 문제와 정체성을 못하는데 어머니는 이해해줘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양어머니가 그런 경험이 없는데도 통찰력을 보이실 수 있다니 신기하네요. 입양아 친구를 두고 계셨나요? 아니면 다른 경험이 있으셨나요?

제시: 어머니가 그런 통찰력을 보이실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어머니가 행동 건강과 정신건강 영역에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족 치료와 통합을 위해서 일하시고, 트라우마 기반 치료에도 관련되어 있어요. 치료를 직접 적용하는 쪽은 아닙니다. 프로그램 작성과 관리 쪽에서 일하시죠. 밀워키 쪽 정신건강 관련 기관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공식 명칭은 랩어라운드 밀워키 (Wraparound Milwaukee)이고, 어머니는 그곳에서 30년 동안 일하셨어요. 두 번에서 3번 정도 은퇴하셨지만 그래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도와주고 계시죠. 거기에서 하는 일이 좋은 일들이고, 프로그램들도 가족을 돕는 데 큰 역할을 하거든요.

팟캐스트: 가족들의 통합에 도움을 준다는 말이시군요?

제시: 가족의 통합을 돕는 일을 하시죠. 어머니가 가진 트라우마와 어머니의 경험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돕는다고 생각해요. 어머니가 태어나기 전에 가족이 언니를 잃었죠. 그런 배경에서 자라나시고, 어른이 되면서 그런 분위기를 받아들이고 인정하셨다고 생각해요. 물론 제가 어머니가 아니니 어머니를 대신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 형제자매를 키우고,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삶에 관점을 가지고 아이들을 소중히 여길 수 있도록 어머니를 크게 도왔다고 생각합니다. 

제시: 모두가 친어머니와 양어머니를 비교하고, 누가 어느 면에서 더 나은지, 누구에게 더 친밀감을 느끼는지 알려고 하죠. 하지만 두 분과의 관계는 전혀 다른 느낌이에요. 전 사람과의 관계에서 있어서 흑백으로 나누는 사람이 아닙니다. 전 모든 친구 관계, 연애 관계, 가족관계가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고 아주 다양한 모습을 할 수 있다고 믿죠. 제가 두 어머니에게 느끼는 감정은 제가 더 많은 지지를 받는다는 느낌이죠. 제 양어머니는 항상 저에게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항상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줄 수 있고 한 사람이나, 가족이나, 혈족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양어머니에게서 그러한 교육을 받아서 친가족과의 관계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죠. 단순히 양부모님을 사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친부모도 사랑할 수 있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같은 사랑은 아니라 다른 사랑이죠. 다른 외양을 하고 있고 다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여전히 사랑입니다. 연결이 있고 공통된 경험이 있어요. 단순히 친어머니, 친아버지, 양어머니, 양아버지로 국한되지 않죠. 한국에도 다른 어머니와 아버지와 같은 분들이 계시고, 절 생각해주시는 사람들이 많으니 가족이 더 커지는 셈입니다. 아주 좋은 경향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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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미국에 계시는 양부모님에게 다양한 지식을 배웠지만, 친부모님을 만났을 때 우리 둘이 닮았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서로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죠. 유전자 조사를 안 해도 친아버지의 딸이라는 느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우리 둘 다 심한 비염이 있어요. 서로 만났을 때 아버지가 비염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저도 아버지와 만나기 전에 이미 비염 수술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같이 지내는 동안 논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전형적 한국적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매우 이해심이 깊죠. 아버지에게 소리치거나 아버지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보이는 일을 해도 아버지는 제가 자랑스럽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딸이 가질 성격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도 고집이 세거나 화를 낼 때도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러한 기질은 아버지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해요. 제 친어머니는 1번밖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훨씬 조용하고 소극적이시지만 동시에 현명하고 상냥하시죠. 어머니와 공감했어요. 어머니가 제집에서 하룻밤을 묵으실 때 어머니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하셨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통해서 저와 소통하셨고, 제 입양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다른 이상한 이야기를 하자면 전 긴 발가락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 사람들을 발가락으로 꼬집고는 했죠. 친아버지가 계단에 앉아서 제가 제 발가락으로 아버지의 강아지들을 꼬집는 모습을 보시고 친어머니도 발가락으로 그러셨다고 했어요. 어머니와 그러한 공통점이 있다니 매우 신기하다고 생각했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친부모님과 만났을 때 부모님의 삶이 있고, 제시 씨의 삶도 있었는데, 제시 씨의 아버지가 제시 씨와 더 깊은 관계를 맺고 개인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군요? 

제시: 네. 확실히 그랬죠. 아버지에게 가족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여러 트라우마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삶이 힘들어졌죠. 아버지가 그러한 문제를 오랫동안 겪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버지의 삶에 나타나서 아버지의 삶에 변화가 줬죠. 전 삶이 잘 안 풀릴 때는 주변 환경을 바꾸는 것이 좋다는 지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직접 그런 변화를 선택하지는 않으셨겠죠. 아버지의 삶에 제가 나타난 것이 아버지에게 필요로 하는 변화를 줬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아버지가 빠진 수렁에서 빠져나오게 도와줬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아버지는 고생하고 계셨고, 지금도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서 고생하고 계시죠.

팟캐스트: 정신적 문제였나요? 아니면 직업적 문제였나요?

제시: 아버지에게 정신건강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도 알다시피 한국의 정신건강 관리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이 정신 치료를 받지 못했어요. 거기에 아버지는 대학교 진학도 못 하셔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해 답답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제가 미국에서 배울 수 있었던 기술을 아버지는 배울 수 없었죠. 사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배우지 못한 기술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버지가 미국인인 저와 교류하는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서로 전혀 다른 문화적 기준이 있고,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니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죠. 하지만 아버지의 직업상 비는 시간이 더 많았고, 겨울에는 제가 지내는 곳에 와서 같이 지낼 수 있었어요. 아버지가 저에게 항상 요리를 해주며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제가 라디오에 출연할 때는 아버지가 점심 도시락을 만들어 줬고, 아버지의 차를 빌려주시기도 했죠. 아버지가 볶음밥을 만들어주고 치즈를 얹어 주셨는데 작은 하트 모양으로 만들어서 볶음밥에 박아 주셨어요. 애정을 듬뿍 담은 도시락을 만들어주셨고, 아주 좋았죠. 왜냐하면, 아버지가 오시기 전까지는 냉장고를 사용하지도 않았거든요. 전 요리를 하지 못하고, 한국에 이주하는 데 있어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살고 있는지, 장기 휴가인지 고민했죠. 한국에서 사는 다른 외국인들은 1년에서 2년 정도 지내기 때문에 저도 그 종도 지낸다고 생각하고 한국에 정착하는 일이 힘들었어요. 특히 제 가족이 미국에서 살고 있었으니 정신적으로 큰 장벽이 있었습니다. 한 발은 한국에 있지만 한 발은 외국에 두고 있는 셈이었죠. 아버지가 한국을 집처럼 느끼는 데 도움을 주셨어요. 거기에 제집에 둘 중고 가구도 잔뜩 구해 주셔서 금방 집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집에 올 때마다 새로운 탁자가 있고, 새로운 의자가 있고 그랬죠.

팟캐스트: 아주 따뜻한 느낌이네요. 아버지가 제시 씨에 대한 애정을 제시를 돌봐 주면서 표현하셨군요.

제시: 네. 제가 아버지의 유일한 딸이에요. 저에게 이복 오빠가 1명 있지만, 아버지와 교류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돌보는 경험은 새로운 경험이었고, 제가 성인이니 아버지에게 새로운 사고 유연성을 부여했다고 생각해요. 아버지가 저에게 부모의 애정을 보여주셨습니다. 물론 아버지의 부모 역할 중 일부는 저에게 곤란하기도 했죠. 전 독립적이고 혼자서 생활할 수 있어요. 제가 요리를 하지 못해도 저 자신을 돌볼 수 있죠. 아버지와 같이 생활할 때 소통의 문제가 있어서 이런 도움은 필요 없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왜 돕지 못하는지 이해 못 하셨습니다. 소통 문제가 있긴 했지만, 항상 아버지가 저를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아버지와 작은 다툼을 하거나, 큰 싸움을 해도 아버지가 항상 신경 쓴다는 사실을 알았죠. 아버지가 절 잃고 싶어서 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의 전통적인 관점을 어느 정도 접어두고, 제 곁에 있기 위한 흐름에 타셨죠. 제 미국 부모님의 말씀을 빌리면 제시의 흐름을 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유연성을 보이고 절 이해해주고 서로 힘들어도 우리 관계를 중시해준다는 점이 아주 좋았어요. 서로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에 대해서 많이 배웠고, 아주 역동적인 관계입니다. 22년의 관계를 1년에서 2년 동안 압축해서 보내고 있죠.

팟캐스트: 아버지가 결혼하지 않으셨나요?

제시: 아뇨. 결혼한 적 없어요. 

팟캐스트: 한국 사회에서 평범한 사람은 아니네요? 아저씨이면서 미혼이고, 그러한 특이성이 제시 씨와의 관계를 도와준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버지도 평범하지 않고 사회에 맞아 들어가지 않으니까요.

제시: 좋은 관찰이네요. 그러한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지금 들어보니 아버지가 평범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가 한번 결혼하셨던 적은 있는데 이혼을 했다고 생각해요. 평범하지 않죠. 특히 90년대 초반이었으니까요. 또 다른 아이를 가지고 아이를 입양에 맡기고 난 뒤 삶을 살아오셨는데 생활이 평범하지 않았죠. 그 경험이 아버지와 제가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항상 흐름에 저항한다고 생각하죠. 적어도 저는 한국에 맞아 들어가지 않거든요. 우리가 같이 이 상황을 헤쳐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한국의 문제점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마음에 안 드는 점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라오스에서 살고 싶다고 하실 때도 있거든요. 아버지의 그런 갑갑함을 이해하고, 사회가 자신을 거부한다는 느낌도 이해하죠.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생각해요. 아버지는 사회에 맞아 들어가지 않고 프리랜서입니다. 유전적인 문제일지도 몰라요. 우리는 서로의 자유를 만끽하지만, 사회는 그렇지 않죠. 

팟캐스트: 한국에 있으면서 입양아에 대한 차별을 겪으셨나요?

제시: 그러한 차별을 겪는다고 생각하고 준비했지만, 그렇게 충격적인 일은 없었어요. 사람들 대부분이 예의 바르게 대응했죠. 한국인처럼 보이지만 한국어를 말하지 않는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제가 한국어를 못하는 사실을 알고 오해로 인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죠. 하지만 제 경험 자체가 매우 부드러웠던 이유가 한국 사회에 적응한 입양아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입양아 중 일부는 꽤 좋지 않은 경험을 한 경우도 많지만 많은 입양아가 꽤 오랫동안 한국에서 지내면서 선례를 만들었죠. 다른 한국인들에게 입양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렸습니다. 한국에 많은 서구화된 국제 입양아들이 많고, 한국인들이 그런 입양아들과 자주 접촉하면 그런 편견과 차별을 많이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이전에 온 입양아들이 F-4 비자를 만들고, 여기에서 살고 일하기로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제가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로 입양되어서 이점이 있기도 하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로 입양된 입양아들은 한국에 와서 직장을 얻는데도 고생을 합니다. 영어 선생으로 일하는 친구들 대부분이 이 일은 일시적이고 시험 삼아 하는 일이라고 말해요. 1년에서 2년 정도 한국에서 일하다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서 자신들의 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전 운이 좋았죠. 제 이전에 있던 사람들이 길을 닦아줬고, 그 입양아들이 역경을 넘었고, 입양아에 대한 인식을 바꿔줬으니까요. 입양아 사회가 노력하고, 이런 인터뷰와 한국 입양아들이 한국에 돌아와서 TV에 나오고, 유전자 조사도 하고, 그러한 일들이 입양아 인식을 강화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적응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됐죠. 어렸을 때 전 편식이 심했어요. 지금에 와서는 뭐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제시: 한국 음식은 대단하죠. 한국 음식이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어요. 약간 한국 요리에 대한 지식은 있었습니다. 설날에 한인 교회에 가면 무료로 한국 음식을 제공했죠. 잡채, 불고기, 제가 좋아하지 않는 김치 등 한국 요리가 많았어요. 전 불고기를 미국에서 자주 즐겨 먹었는데, 한국에서는 그렇게 인기가 많지 않았죠. 제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는 삼계탕이에요. 통닭을 국물에 넣고 3일 동안 끓여내는데, 맵지 않게 먹을 수 있어서 어머니에게 소개해 드리는 데 도움이 되겠죠. 한국에는 좋은 닭고기 요리가 많아요. 부산에서 비롯된 요리라고 생각하는데 찜닭도 있습니다. 간장에 끓여낸 닭고기 요리인데, 당면, 당근, 감자, 만두, 떡이 들어가요. 아주 맛있죠. 한국에 방문하거나 1번도 먹어보지 못한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는 합니다. 사람들에게 권하면 대부분 사람이 좋아하죠. 한국에는 그런 맛있는 요리도 있고, 사람들 앞에서 직접 요리하는 일도 잘 해요. 고기 굽는 것도 있고, 볶음밥도 있고, 닭갈비도 있어서 전부 싱싱하고 맛있습니다. 한국 요리에서 제가 가진 문제 중 하나는 채식주의자로 사는 일이 어렵다는 점이죠. 2018년에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채식주의자였습니다. 한국에 살면서 닭고기를 먹기 시작했고, 이제는 저에게 주어지는 요리 대부분은 그냥 먹게 됐어요. 약간 뒤로 물러난 느낌이죠. 비빔밥 같은 좋은 채식 요리도 있고, 돌솥비빔밥도 있는데 뜨거운 돌솥에서 밥을 비비면 달걀이 그 안에서 익는 데 아주 맛있어요. 아주 특이한 음식점이 많죠. 예를 들면 떡볶이는 떡과 어묵이 들어가고 다양한 소스 기반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제집 근처에는 떡볶이 뷔페가 있어서 떡, 만두, 라면을 고르고, 소스도 섞어 넣어서 만들 수 있어요. 다양한 레스토랑들이 많고 어디에나 있죠.

팟캐스트: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어묵과 국물을 마시는 것도 좋죠.

제시: 포장마차도 많아요. 자갈치시장 옆에 남포구에 많이 있습니다. 부산영화제로 유명한 지역도 있죠. 포장마차가 잔뜩 있는데 그중 하나가 게 껍데기를 비운 다음에 그 안에 치즈, 게살, 양파로 채운 다음에 눈앞에서 구워 줍니다. 진짜 맛있어요. 부산 해산물은 맛있고 어디에나 있죠. 

팟캐스트: 다른 입양아들처럼 서울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실망감을 느끼나요? 아니면 부산에 있어서 좋다고 느끼나요? 

제시: 그 질문을 하다니 흥미롭네요. 얼마 전에 서울에 기반을 둔 국제 입양아 잡지인 IM Magazine에서 인터뷰했는데 거기에서도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서울에 살 생각을 해봤냐고 했죠. 전 서울에 살 생각도 없었습니다. 전 부산에서 어학연수를 했고, 이 지역에서 직장을 얻었죠. 거기에 전 운이 좋아서 16살 때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어요. 서울, 부산, 제주, 대전, 그리고 제가 태어난 충주도 방문했습니다. 제가 방문한 지역 중 가장 마음에 든 곳이 부산이었어요. 모래사장도 가고, 밤 문화도 즐기고 쇼핑도 했죠. 서울도 괜찮았고 쇼핑도 즐거웠지만, 부산이 깊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부산이 제 마음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죠. 저는 밀워키 출신입니다. 대학교도 위스콘신 밀워키에서 나왔어요. 미시간호 바로 옆에 있는 해안가 지역입니다. 물과 해안가에 사는 생활이 저에게 있어서는 고향이라는 느낌이 들죠. 부산은 그런 의미에서 집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작은 섬들이 있고, 해안들이 많고, 해안가들도 방파제 때문에 밀워키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서울에 대해서 질투가 나지 않습니다. 물론 서울에 있는 입양아 사회가 크긴 하지만, 다행히도 부산과 주변 지역에 작지만 아주 잘 연결된 입양아 사회가 있어서 그 사람들과 2년 가까이 교류하고 있었어요. 물론 전 매우 사교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서울에 살고 있었으면 여러 사람을 만나서 지쳤을지도 모릅니다. 이 작은 도시인 양산에서도 여러 사람을 만나고 있어요. 지금 현재 COVID-19 사태에서도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죠. 온라인 언어 교류도 하고 있고, 영어 교육도 시작했고, 방역 수칙이 그렇게 강하지 않아서 카페를 가거나 음식점도 가고 있습니다. 이래서 서울에서는 너무 많은 교류를 해서 지칠지도 몰라요. 물론 이 COVID-19가 잦아들면 서울에 다시 방문하고 싶습니다. 서울 입양아 사회를 알게 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거든요. 하지만 질투는 나지 않아요. 지금 제가 지내는 곳이 마음에 듭니다.

제시: 운이 좋게도 저는 자라면서 많은 입양아를 알았어요. 많은 입양아는 한국에 방문해서야 처음으로 다른 입양아를 만나게 되죠. 특히 한국계 입양이 그리 대중화되지 않았던 다른 나라 출신 입양아의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한국에 와서 알게 된 새로운 정보였어요. 저는 미국에서 한국 입양아 사회와 연관되어 있었고, 수많은 입양아를 만날 수 있었거든요. 제 부모님이 저에게 준 또 다른 좋은 기회였습니다. 물론 전 모든 한국 입양아를 만나야겠다는 갈망을 느낀 적은 없어요. 제가 만난 한국계 입양아 전원이 마음에 들었고, 입양아들과 이야기를 하는 일을 즐깁니다. 거기에 입양아들과 대화를 하려고 하긴 하지만 한국에서의 한국 입양아 사회는 미국 입양아 사회와 다른 느낌이죠. 우리가 흩어져 있고 숫자가 적으니까요. 서울에서 살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도 있습니다. 서울에 수많은 자원이 몰려 있으므로 지방에서 살고 있으면 아무래도 스스로 생존해야 하죠.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고, GOAL(해외입양인연대) 같은 입양아 단체에 도움을 요청할 수 없습니다. GOAL에 접촉해서 행사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많은 입양아를 만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지방에는 그러한 행사가 별로 없죠.

팟캐스트: 알고 계실지는 모르지만, 저도 서울에서 1년 정도 거주한 적이 있죠. 제가 서울을 떠날 때가 생각나네요. 40대 미혼 여성이었죠.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답답했던 기업이 납니다. 물론 한국에서 좋은 경험도 많았어요. 많은 사람이 2년 정도 지내다 보면 한국이 많이 나아진다고 합니다. 제시 씨도 그런 경험을 하셨나요?

제시: 네. 확실히 그래요. 한국에서 지내는 첫해는 어려웠죠. 적응하기도 힘들었고, 친구들, 가족들과 떨어지는 일도 어려웠습니다. 우울해지기도 했고 여러 가지 역경이 있었죠. 거기에 취직해서 일하는 일 자체도 어려웠지만 그건 다른 문제예요. 문화적 차이로 인한 문제도 많죠. 제가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라는 인식과 그 인식으로 인한 소통 문제도 심각했어요. 앞에 이야기했지만, 한국에 정착할까 말까 고민하는 상태에서 한국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문제도 어려웠죠. 새롭게 사람을 만나도 1년 정도 있으면 헤어져야 하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삶이 2년 차가 되자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죠. 우선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를 한 일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한국에 있는 외국인 거주자 사회와 더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직장에서 영어만 쓰기 시작해서 사람들이 제가 미국인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하게 됐죠. 한국에 확실히 적응하게 됐습니다. 사실 한국에서 1년 정도만 지낼 수도 있었어요. 2020년 5월에 1년 거주가 끝났을 때가 한창 COVID-19가 한국을 덮치던 때였지만 미국을 덮치기 전이었죠.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갈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시: 제가 미국에 돌아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해요. 한국에 1년 더 지내니, 한국에 정착하게 되고, 한국에서 무엇을 할지 정하게 해줬죠. 단순히 한국에서 생존할 뿐만 아니라 성장할 수 있게 되었어요. 한국에서 첫 1년에는 여러 가지 일을 했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2년 차에는 좀 더 느긋하게 접근할 수 있었어요. 제가 한국에 지내기로 했고, 제가 한국에서 겪을 일을 알면서도 한국에서 지내기로 했죠. 한국에 와서 지내기로 할 때 한국에서 생활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옵니다. 하지만 얼마나 한국이 어려울지 몰라요. 그래서 한국에서 2년 이상 지내기로 하면 한국에서 1년 더 지내기로 했고, 한국 문제를 알지만 그걸 받아들인다는 결정을 내리는 셈입니다. 한국에서 겪을 문제가 괜찮고, 그걸 받아들일 수 있으며 1년 더 지낸다고 결정을 내리게 되면 한국에서 더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2년 차 생활이 저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마지막 질문을 하자면, 제시 씨는 양어머니가 한국에 방문하면 어머니와 같이 어떤 경험을 하고 싶으시죠? 

제시: 저번에 어머니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는 어머니와 같이 일본에 방문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결정이었어요. 지금은 일본에 방문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에는 어머니에게 제가 지내고 있던 양산시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제가 한국에 정착하면서 만든 삶을 어머니에게 보여드리고 싶죠. 차도 구매해서 어머니에게 다양한 곳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설악산 여행도 계획했죠. 하지만 제가 어머니와 하고 싶은 가장 큰 일은 양산시에서의 제 생활을 보여드리고 싶고, 부산에서 제가 좋아하는 곳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보여드리려고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한국에서 지냈던 첫해에는, 어머니가 방문했을 때 저는 한국의 모든 곳을 보려고 하고, 모든 일을 하려고 하고, 모든 나라를 방문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제가 한국에 삶을 만들었고 그 삶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어머니와 같이 제 친아버지를 방문하려고 합니다. 친아버지도 저희가 온다는 사실도 알고 있죠. 사실 어머니가 한국을 방문하게 되어서 친아버지에게 다시 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약간 오랫동안 서로 연락을 안 했거든요. 그리고 어머니에게 제 남자친구인 아담도 소개해 드리고 싶죠. 그래서 어머니가 오시는 달 전체를 휴가로 받아서 한국 곳곳을 보여드리려고 해요. 그런 휴가를 받을 수 있어서 운이 좋았죠.

팟캐스트: 사람들이 제시 씨를 구독하고 싶거나 연락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죠?

제시: 페이스북 계정이 있습니다. Jessyehale이라고 되어 있죠. 제주 초콜릿 박물관에서 여러 표지판을 들고 있는 사진이 제 프로필입니다. 인스타그램도 똑같은 이름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구독해주시면 되죠. 질문이 있거나, 더 정보를 알고 싶으시거나, 한국으로 이주하고 싶은 분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싶으니 연락해주세요. 여러분들과 교류하고 싶습니다.

시즌 4, 에피소드 22: 앨리 디 레이시

Audio available April 13, 2021 at 7 am ET.

앨리 디 레이시 (25세) 씨는 두 살 때 중국에서 영국으로 입양되었다. 에든버러에서 기혼자로 반인종차별주의 활동가로 일하는 디 레이시 씨는 인종적 고립 속에서 성장하며 겪어온 인종 차별 경험과 COVID-19 사태로 인해 자신이 겪고 있는 인종 차별에 관해 이야기한다. 디 레이시 씨는 자신의 과거를 조사해, 자신의 과거를 더 모르게 된 사실을 공유한다. 

앨리: 제 이름은 앨리 디 레이시입니다. 중국에서 입양되었죠. 고아원에서 저에게 준 이름은 중국어 발음이 안 좋긴 하지만 양이룬이에요. 이름의 뜻은 아침 나뭇잎에 매달린 아침 이슬을 뜻한다고 합니다. 현재 25세이지만, 여전히 12살처럼 보이죠. 에든버러에서 살고 있고 에든버러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한 뒤 지난 7년간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대학교에서는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전공했죠.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어요. 몹시 어려운 주제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에든버러로 온 이유가 전공 때문이었죠. 영국에서 유일하게 중국어 학위와 러시아어 학위를 딸 수 있는 학교가 에든버러에 있습니다. 

팟캐스트: 에든버러 대학교인가요?

앨리: 네. 에든버러 대학교입니다. 제가 따려고 했던 학위는 아주 특수한 학위였죠. 고등학교서 대학교 전공을 고를 때는 미래에 대해서 전혀 다른 꿈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전 대학교를 고를 때, 간첩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어/중국어 전공을 선택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좋은 간첩이 되지 못했겠지만, 대학교 전공을 선택할 때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팟캐스트: 고전적 냉전 시대의 간첩을 생각하셨군요?

앨리: 아직 어려서 간첩이라는 일에 대해서 순진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죠. 이걸 하면 간첩이 될 가능성이 있어서 이걸 하겠다는 식으로 접근했어요. 나중에 가서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죠.

팟캐스트: 앨리 씨는 영국 시민인가요?

앨리: 네. 그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하겠죠. 제 양부모님은 영국 백인이십니다. 그러니 그 두 분께 입양된 저도 2살 반에 영국 시민권을 받았어요.

팟캐스트: 알겠습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에서 자라지는 않으셨죠?

앨리: 아뇨. 사실 저는 잉글랜드에 있는 옥스퍼드시에서 자랐습니다. 물론 제 발음에 영국 억양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건 제 성장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제 가장 친한 소꿉친구가 캐나다인이에요. 그래서 북미풍의 억양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죠. 제 녹음된 목소리를 들어보면 제 억양이 자주 바뀌어요. 영국 억양을 쓸 때도 있고 미국 억양을 쓸 때도 있습니다.

팟캐스트: 단순히 억양만 들으면 영국에서 장기간 사는 캐나다인이나 미국인이라는 느낌이네요.

앨리: 그런 소리를 자주 듣죠. 에든버러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에든버러에 방문하신 적이 있나요?

팟캐스트: 방문해본 적이 있어요.

앨리: 오 언제 방문하셨죠? 

팟캐스트: 관련해서 이야기를 좀 한 적이 있는데, 옛날에 킹스크로스에서 기차를 타고 에든버러에 방문했죠. 축제 기간이었고, 친구 집에도 방문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도시였죠. 앨리 씨의 비디오를 보니 에든버러의 풍경이 기억나더군요.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앨리: 아주 아름다운 도시이면서 다문화적 도시이죠. 제 억양이 더 미국적으로 변한 이유 중 하나가 에든버러가 매우 국제적인 도시라 그래요. 많은 사람이 국제적인 억양을 가지게 됩니다. 

팟캐스트: 영국 억양은 특정 계급 선입견과 연관이 있는데, 국제 억양은 어떤 영향을 끼치나요? 사람들이 앨리 씨를 판단하는데 어렵게 하나요? 아니면 계급 구분을 거부하는 새로운 억양인가요? 

앨리: 네. 영국에서는 억양으로 계급을 나누는 일이 큰 문제죠. 영국에는 인종 문제가 아니라 계급 문제도 존재해요. 우리가 익히 아는 영국 억양은 표준 발음(Received Pronunciation)이라고 합니다.

팟캐스트: 소위 말하는 고급 억양이군요?

앨리: 그렇습니다. 그리고 표준 발음은 아 발음과 긴 모음이 많아요. 목욕탕(Bath)을 바스로 발음하지만, 영국 북쪽에선 배스로 발음하죠. 북쪽 발음은 강세가 들어가죠. 저는 영국 발음이 강하지 않지만,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부스라고 발음하기도 해요. 반면에 남쪽에서는 바스라고 발음을 합니다. U 발음과 A 발음의 중간이죠. 언어학적으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계급 차별의 동기도 되고, 억양에 따라 상대방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영국에는 수많은 방언과 억양이 존재하니까요. 거기에 인종까지 더해지면 더 심해지죠. 영국에는 이민자가 많은데, 영국식 억양이 아니라 다른 억양의 영어를 하면 눈에 띄게 됩니다. 결국, 더 많은 선입견과 편견의 대상이 되죠. 주로 소수 민족과 노동 계급이 차별의 대상이 되어요. 아주 흥미로운 주제이고,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과거 이야기로 들어가고 싶지만 우선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Girl with many faces)에서 먼저 시작하죠.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 영상-

앨리: 전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입니다. 하지만 어떤 얼굴도 제가 선택한 얼굴이 아니죠. 집이 마음은 둔 곳이라면, 제집은 항상 부서져 있었어요. 서류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전 정돈되어 있고 법규를 지킵니다. 하지만 전 겨우 두 살 때 서류에서 선택되었어요. 제 얼굴은 성공과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 상징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저 자신일 뿐이죠. 입양이 아름답고, 상냥하고, 옳은 일이라는 인식이 있어요. 문제가 있다면 사람의 문제일 뿐이죠. 갈색 아이를 데리고 와서 하얀 옷을 입힌다고 달라지지 않아요. 그 아이들의 색을 지우고, 언어를 빼앗은 뒤에도 성장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 애의….

-영상 편집됨-

앨리: 사실 그 영상에서 약간 떨어져야 했어요. 영상을 올리고 난 뒤에 고작 몇십 명에서 몇백 명이 보면 운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아내가 며칠 전에 말해주기를 페이스북에서만 영상이 26만 번 조회됐다고 하더군요. 아주 대단한 일이죠. 그리고 인스타그램에도 비디오가 올라와 있습니다. 전 기술에는 조예가 없어서 관련 영상 조회 수도 모르고 아내가 어떻게 정보를 얻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제 영상을 봐줬으니 대단하다고 생각하죠. 서로 연락을 했을 때 이미 들으셨지만, 사람들과 교류하는 일은 신기해요. 사람들이 연락하면 서로 이해하면서 교류하며 영적인 연결을 구축할 수 있지만, 동시에 사람들을 직접 만난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니 아주 이상한 경험입니다. 사람들을 알게 되지만 직접 알지 못하니까요. 

팟캐스트: 많은 입양아가 앨리 씨에게 연락을 해왔나요?

앨리: 죄책감이 느껴지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람들과 그렇게 깊게 교류하지 않았어요. 물론 메시지를 받으면 답신을 하려고 했죠. 하지만 30~40개가 넘는 메시지를 받으니 15개의 메시지에만 답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저에게 연락해서 제 영상을 보고 공감했다고 하는 일 자체가 매우 감명 깊었죠.

팟캐스트: 어떻게 그 영상을 찍게 되셨죠?

앨리: 그거 자체만으로도 이야기 하나가 나오네요. 전 상 운동권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성별 기반 폭력 반대 운동과도 깊은 관계가 맺었죠. 제가 한 아이 정책을 시행하던 중국에서 입양되었으니 성차별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성별 기반 폭력의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제, 남아선호사상 등이 연관되어 있으니 더 끔찍하죠. 과거에 성차별 반대 운동을 꾸준히 진행해왔지만 인종 차별에 대해 운동은 하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할 수 있을지 몰랐고, 그 시점에는 그 운동과 연관될 좋은 이유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든버러에서 2020년 12월에 에든버러 대학교의 학생이 동아시아계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공격당했어요. 8명에서 9명의 사람에게 집단 구타를 당했죠. 그 학생은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지역 사회에서 큰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제 친구와 저도 영국 거주 아시아인이었기 때문에 같이 모여서 이런 혐오 범죄를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COVID-19 사태 이전에도 반아시아계 인종 차별은 존재했지만, 사태가 일어난 뒤로 인종 차별이 급증해서 더는 차별을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앨리: 그래서 에든버러 인종 차별 폭로(Racism Unmasked Edinburgh) 단체를 창립했어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습니다. 저의 현명한 아내가 SNS 마케팅을 통해 우리 단체를 도와줬기 때문에 온라인상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죠. 여러 기자에게 연락했고, 그 기자 중 하나가 우리를 BBC와 연결해 줬어요. COVID-19 혐오 범죄와 관련된 기사를 쓰는 BBC의 부서에서 저를 인터뷰했습니다. 요약하자면, 페이스북을 통해서 언론에서 일하는 유색인종들을 위한 단체와 접촉했어요. 반아시아계 인종 차별 문제 인식을 높이고, 혐오 범죄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으니 기자들이 도와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 영상을 같이 촬영하게 될 진 링이 연락을 해왔죠. 진이 절 능력이 닿는 대로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혐오 범죄에 대한 영상을 찍을 예정이었어요. 하지만 온라인 통화로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삶에 관해서 이야기하니 이야기 흐름이 바뀌었죠. 진 링은 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 시민입니다. 진에게 제 삶과 제 과거를 공유했어요. 진은 그걸 듣고 입양과 중국 입양아의 영국에서의 삶에 대해서 영상을 찍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전 그걸 듣고 좋다고 했고, 진은 생각해둔 영상 아이디어가 있는지 저에게 물었죠. 제가 생각해둔 연설문이 있으니 그걸 바꾸면 된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거짓말이었습니다. 정확히 생각해둔 연설문은 없었죠. 하지만 마이클 잭슨의 노래대로 거짓말을 계속해서라도 성공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연설문이 있다고 말한 뒤 2시간 동안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의 대본을 적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썼던 글들을 대화체로 바꿔서 적었어요. 과정이 아주 흥미로웠죠. 제 아내가 제가 처음으로 이런 종류의 글을 쓰는 셈인데 걱정이 안 되냐고 물었고, 저는 유튜브로 강의를 들으면 된다고 답했습니다.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 영상 재시작-

앨리: 전 저에게 일어난 일을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도 옹호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부모님이 저를 입양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절 입양하지 않아도 됐다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죠. 제가 이러한 생각을 공적으로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무서워서 못해요. 입양아들이 조용히 망가진 과거를 넘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영원히 중국인이 될 수 없지만 동시에 백인도 되지 못하겠죠. 그래서 이 과거를 단순히 넘길 수 없다고 생각해요.

-영상 편집됨-

앨리: 지금 생각해보면 그 영상은 개인적 힘의 표시였을 뿐만 아니라 분노의 표시였다고 생각해요. 제가 표현할 수 있었던 가장 복잡한 감정이었다고 생각하죠. 과거에 저는 입양에 관해서 이야기한 적도 있고 중국 기반 입양 단체인 어머니 사랑의 다리(Mother’s Bridge of Love)와 같이 활동했습니다. 사랑의 다리는 신란이라는 이름의 훌륭한 기자가 운영하는 단체이죠. 신란 씨는 “중국의 선량한 여성들”(Good Women of China)이라는 책을 출판한 작가이기도 해요. 그 책은 중국 역사 동안 여성들이 받아온 대우와 비극에 대해서 저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불안정하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 그리고 문화대혁명 시기의 여성 대우에 대해서도 저술하고 있죠. 문화대혁명 시기는 홀로 놓고 봐도 흥미로운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신란 씨는 그 책의 후속작으로 “중국에서 어머니는 기억한다.”(Somewhere in China, Mother Remembers) 이라는 책을 저술했죠. 이 주제도 매우 흥미로웠어요. 90년대에 버려진 중국계 고아들이 많았죠. 여성이 대부분이었는데 신란 씨는 그 고아들의 친어머니들을 익명으로 인터뷰했고, 이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은 말을 받아 적어서 그 사람들 대신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출판했습니다. 아주 강력하고 아주 무거운 내용들이었죠. 제 고등학교 과제의 일환으로 저는 신란 씨에게 연락을 해서 인터뷰를 하게 됐습니다. 대단한 기자이자 작가가 영국 고등학생에게 시간을 내줬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신란 씨가 제 이야기를 들었고, 저의 글을 쓸 생각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 친어머니에게 편지를 썼어요. 아주 무거운 내용이긴 했지만 동시에 저는 15살에서 16살 정도의 나이였죠. 아직도 인터넷 어딘가에 올라와 있을 겁니다. 제가 신란 씨에게 편지를 보내자, 신란 씨가 중국어로 편지를 번역해서 어머니 사랑의 다리 단체 내에 있는 친어머니들에게 줬다고 합니다. 물론 그분들 중에 제 친어머니가 있을 가능성은 아주 적지만, 입양아가 그러한 글을 써서 친어머니들에게 그런 편지를 전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편지 작성이 제가 입양 관련해서 한 일 중 가장 훌륭한 일이었지만 주제의 논점이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앨리: 반면에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 영상은 제가 알지 못하는 어머니, 얼굴이 없는 여성을 찾으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국제 입양아로서 자라면서 겪었던 차별과 고통과 관련된 사회 청문회를 여는 셈이었죠. 입양아는 가족, 친구에게서 그런 문제를 겪게 됩니다. 물론 의도적인 차별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과 피부색이 다르면 당연히 소외되는 느낌을 받게 되죠.

팟캐스트: 그 영상을 제가 감명 깊게 봤던 이유는 입양의 복잡함을 잘 잡아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입양아들이 입양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지만 백인 가족이나 친구들과는 이런 대화를 나누기 어렵고 아예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경우가 나은 경우도 많죠. 반면에 앨리 씨의 영상이 감명 깊었던 이유는 이런 주제를 직접 언급하고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앨리: 쉽지는 않았어요.

팟캐스트: 영상에서 말한 대사가 과거에 이야기하고 싶었던 말이었나요?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앨리: 네. 영상을 찍을 때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어요. 그 사실 자체가 상당히 역설적이죠. 제 부모님이 입양 문제에 대해서 깊게 파고들어서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영상을 찍기 이전에, 정확히는 BBC 인터뷰 이전에 부모님에게 내용이 너무 분열적이거나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게 했습니다. 확인을 받는 일 자체가 입양아의 검열 문제와 입양아가 완벽하지 못해서 죄책감을 가지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봐요. 부모님에게 글을 검사받는 과정에서도 제 일부는 부모님이 괜찮지 않다고 해도 그냥 진행해야 할지 걱정했죠. 결국,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영상은 결과적으로 제 부모님과 타협으로 만들어진 영상이었습니다. 부모님을 존중하고, 모욕하지 않으면서 영상을 만들려고 노력했죠. 영상 중간에 제가 제 가족을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해야 했죠. 제가 글을 쓰면서 이 영상에 가장 큰 반발을 하는 사람들이 다른 양부모들과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하는 백인들, 제가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백인들이 되리라 예측했거든요. 세상의 일이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 있는 균형을 찾고 싶었습니다. 저에게 시간이 더 주어지고 관점이 넓었다면 제가 말하려고 하는 사실 자체를 잘 설명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는 입양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앨리: 하지만 제 영상의 댓글 중 상당수는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전 최대한 그 영상의 댓글에 반응하려고 했고, 부정적인 댓글에도 반응하려고 했어요. 제가 들으려고 한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영상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은 우리가 입양 자체를 하지 말아야 말고 아이들을 그냥 고아원에 내버려 두고 고통받게 해야 하냐는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영상에서 입양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죠. 고통이 많은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무시하는 사실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입양이 고아로 사는 일보다는 나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무시하는 일도 문제입니다. 네. 입양아의 삶이 고아의 삶보다는 낫죠. 하지만 고아의 고통과 입양아의 고통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어요. 입양되는 일이 고아에게 있어서는 가장 나은 일이고, 가족이 없는 아이가 안전하게 양육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어야 하는 일은 맞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이 잃은 삶과 문화에 대해서 슬픔을 표시할 수도 있는 일이고 그 감정이 있다고 해서 입양 자체를 부정하는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어요. 

앨리: 우리 입양아들이 입양아의 이야기와 고통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입양아들의 이야기, 고통, 분노가 전부 자신의 소유이고 다른 사람이 개입할 수 없죠.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승인,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어요. 제가 영상을 찍을 때도 부모님의 동의를 얻었는데 이 영상을 찍는 일은 위선적인지 고민했죠. 결국, 부모님의 뜻과 제 이야기의 균형을 찾아야 했어요. 편한 정답도 없고 맞는 답도 없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막 해버리고, 후폭풍을 신경 쓰지 않는 길도 있었죠. 하지만 제 분노를 드러내면서도 그 분노를 공손하게 표현하려고 했다고 생각해요. 사회 전체에게 보내는 이야기지만 어린이, 특히 입양아 어린이들은 분노를 건강하게, 그리고 생산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감정을 지우고 묻는 법을 배우고, 결국 삶을 조정받게 되죠. 분노는 부정적이고 나쁜 감정으로 인식됩니다. 분노하고 있다면 분노를 없애고, 놓아주거나 억제하라고 배우죠. 분노가 개인의 잘못이고 문제라는 인식 자체가 양부모들, 나아가서는 사회가 입양아의 분노에 가지고 있는 책임을 없애게 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분노를 받아들이고 처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가 말했듯이 이러한 상황에서의 분노는 당연한 일이죠. 이런 가족의 상실에서 입양이라는 요소를 빼봅시다. 어떤 사람이 가족을 교통사고로 전부 잃었다면 사람이 장례식에 와서 그래도 좋은 일을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 적어도 넌 살아남았다고 위로하지는 않죠

팟캐스트: 차에 같이 타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하지는 않죠. 

앨리: 그러지 않죠. 왜 이 상황에 행복하지 않은 지, 왜 화를 내는지 묻지 않아요. 가족 전체를 잃었지만 적어도 분노를 조절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큰 과장이 들어간 이야기긴 하지만 다른 슬픔과 분노는 사람들이 동정해주고 공감해주죠. 하지만 입양은 그러지 않아서 화가 납니다. 그 이유는 국제적 입양에 따라오는 거대한 무의식적 인종 차별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백인 구세주 콤플렉스에 관해서 이야기하고는 하죠. 하지만 이러한 인식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어요. 유색인종 아이를 입양하는 백인 부모들이 전부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 부모님과 저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제 부모님과 저는 관련 서적도 작성하고 있어요. 적어도 제 부모님과 저는 객관적이고 균형적으로 서로의 관계를 볼 수 있는 관계를 맺고 있죠. 하지만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저의 어린 시절은 완벽하지 않았어요. 제 부모님은 항상 인종 차별이나 무의식적 미묘한 차별과 같은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하는데 거부감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죠. 제 부모님이 저에게 그러한 환경을 제공해서 훨씬 더 강하게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입양아가 저처럼 운이 좋은 환경에서 자라나지 못했다는 사실도 알아요. 우리 가족은 부모가 구세주처럼 인식되는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하고는 했죠. 부유한 1세계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나가서 아이들을 입양하니까요. 가난하고 뒤처져 있는 국가들에 가서 이 불쌍한 고아들을 입양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고, 어떤 가치도 없고 미래도 없는 아이들에게 삶을 선물한다는 인식이 있어요. 그러한 인식 자체가 입양아에게 큰 해가 된다고 생각하죠. 문제가 있는 감사 문화가 입양아를 망가트린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항상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하고 기대에 맞춰야 한다는 압박이 존재하죠. 그러한 감정은 처리하기 힘들어요. 

팟캐스트: 전부 말이 되네요. 힘의 역학과 차이가 입양아들에게 더 나은 삶을 준다는 인식을 강화합니다. 고아들에게 더 나은 삶의 기준을 제공해주고 가난한 나라 출신의 아이에게 부유한 나라의 기회를 준다고 생각하게 하죠. 아주 흥미로운 일이예요.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관계를 반대로 하면 그러한 관계가 성립할지 의문입니다. 중국의 부유한 가족들이 미국 백인 아이들을 입양하기 시작한다면 세계가 그러한 관계를 잘 받아들일지 의문이죠.

앨리: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생각해보면 좋게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카오미 씨가 맞아요. 대중매체의 국제 입양 묘사에서는 항상 부유한 백인 가족들이 다른 국가에 가서 타국의 아이들을 입양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돌아간다면 그 사실 자체가 받아들여질까요? 전 세계적인 분노를 일으킬지도 모르고 더 큰 중국 공포증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미국 언론이 반중국 선전을 방송하는 광경이 그려지네요. 부유한 중국인들이 미국 아이들을 훔쳐간다는 방송을 할 겁니다. 사회적으로 그러한 불편함이 있다고 생각해요. 많은 유색인종이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 한정된 관점으로 접근하게 되죠. 제가 서양 문명을 싫어하는 사람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서양 민주주의의 장점과 활동 방식에 대해서 확실히 이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중국이 구식이고 구닥다리라는 묘사가 대중매체에 넘쳐나는 일도 사실입니다. 항상 중국에 초점을 맞추면 이 사람들이 구식이고, 박쥐나 먹는 비현실적인 사람들이라고 묘사하죠. 이 사람들이 비좁은 아파트에 다닥다닥 모여 살고 이런 가난한 천민들의 삶을 보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한 묘사는 중국의 극히 일부만을 과장해서 보여줄 뿐입니다. 중국은 아주 강한 영향을 세계에 끼치고 있는 신흥 강국이에요. 경제적, 기술적인 발전은 아주 놀라울 정도이죠. 제가 2019년에 관련 통계를 보고 있었는데 중국의 특허 신청이 미국의 특허 신청을 뛰어넘었어요. 그래서 중국을 그렇게 후진국으로 묘사하는 일 자체가 사실적이지 않죠. 물론 동아시아 입양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앨리: 아프리카가 가난한 지역이라고 묘사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해요. 아프리카에도 얼마든지 부유한 지역이 많죠. 아프리카 자체를 하나의 지역으로 엮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아프리카는 아주 넓고 거대한 지역이니까요. 사람들이 아프리카, 아시아라는 거대한 지역을 하나로 인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아프리카라고 하면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라고 생각하죠. 아프리카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화와 인종에 대해 인식을 하지 못합니다. 남아프리카, 짐바브웨, 이집트가 동시에 아프리카 대륙 안에 존재하죠. 거기에 인종적 차이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많은 서양인이 그 차이점과 깊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인식의 문제는 아시아에도 존재하죠. 사람들이 아시아라고 말하면 보통 중국을 생각하지만, 아시아는 아주 드넓은 지역인데, 아시아를 중국으로 인식하는 일 자체가 문제가 많아요. 아시아에 수많은 국가가 있는데 전부 중국이라고 부르는 일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앨리 씨, 현재 전 세계적으로 반아시아계 증오범죄가 증가하고 있는데, 앨리 씨도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폭언을 들은 적이 있나요?

앨리: 자주 들었죠. 

팟캐스트: 입양아로서 그러한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

앨리: 솔직하게 말하자면, 충격적이고 모욕적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너무 많이 들은 이야기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이미 다 알고 있어요. 그 사실 자체가 아주 슬프죠. 슬픈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라면서 자주 들은 이야기라 이미 익숙해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 때 유일한 아시아계로서 생활하는 일에는 매우 익숙해져 있었죠. 제 고등학교에만 학생이 2000명이 있었는데 그중 4명에서 5명이 유색인종이었죠. 제가 약간 과장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숫자가 아주 적었습니다. 아시아계는 5명 정도밖에 없었고 그중 하나가 제 자매였죠. 아시아계는 제 성장기에는 아주 극소수 인종이었습니다. 아시아계 집단이 있지도 않았어요. 학교 전체에서 저를 그 아시아계 여자애로 인식했죠. 그래서 항상 인종 차별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항상 눈에 띄기 마련이고,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독창성이 없는 차별을 들으면 오히려 실망하게 되어요. 좀 더 기발한 모욕을 할 수 없었나? 이라는 기분이 들죠. 하지만 COVID-19가 퍼지고 나서 생활이 좀 더 어려워졌습니다. 집 밖에 나가려고 해도 준비를 해야 하죠. 전 권리 운동을 하면서 자아를 찾을 수 있었어요. 제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활동을 하면서 가끔 문제아들과 싸우는 일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밖에서 전혀 보호받지 못하고, 영국의 인종혐오 범죄가 증가하고, 사람이 다치고 죽는 일을 보게 되니 두려워요. 아시아계의 외모를 하고 밖에 나가면 공격받을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 인종 차별 자들에게 한 말 중 좋은 말 몇 가지만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앨리: 여러 가지 말을 준비하죠. 어떨 때는 그 말에 대답해주고 같이 대화할 때도 있어요. 그리 생산적인 일도 아니고, 어른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제가 중국 시민이라고 생각하고 저에게 차별적인 말을 하면, 제가 그냥 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이 대응하죠. 사람들이 차별적인 말을 반복하게 만들어요. 그러다 보면 그 사람들도 자기들이 말하는 이야기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고 도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제 출신지를 물을 때도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영국에서 왔다고 대답하는 때도 있죠. 그렇게 대답하면 진짜 어디에서 왔는지 묻습니다. 그럼 저도 영국 옥스퍼드 출신이라고 대답하죠. 옥스퍼드는 영국 남부에 있고, 아주 부유한 동네에, 유명한 대학교도 있는 곳이에요. 

팟캐스트: 아주 유명하죠.

앨리: 하지만 대부분은 대응을 안 하려고 하죠. 몹시 나쁜 일입니다. 제가 눈치챈 또 다른 일은 영국 태생 아시아계와 이주 아시아계 사이의 차별이었죠. 전 영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중국계 영국인도 아니죠. 하지만 운이 좋게도 그러한 배경과 비슷한 성장환경에서 자라났어요. 전 어렸을 때부터 영국 영어를 배우면서 자랐고, 그래서 특수한 억양이 없죠. 사람들이 제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제가 영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사실이 절 더 고통스럽게 만들죠. 제 친구 중 일부는 중국 출신인데 중국식 억양을 가지고 있고, 제가 가진 언어적 보호막이 없습니다. 제가 몇 달 전에 음식을 포장하러 갔을 때 코로나바이러스를 원치 않는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죠. 그 말에 저는 “코로나라니 뭔 소리예요? 전 여기에서 23년간 계속 살았는데요.” 그렇게 대답하자 사람들이 제가 영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사과를 한 다음 말하는 방식을 바꾸더군요. 전 좋은 아시아계 중 하나이니 괜찮다는 인식이었죠. 이 말이 이해가 되나요?

팟캐스트: 그 이야기도 매우 무서운 이야기이네요. 우리가 가지고 성장한 백인의 특권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한 셈이죠?

앨리: 그렇죠.

팟캐스트: 너는 괜찮다.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우리의 일부라는 인정이죠.

앨리: 하지만 그건 칭찬이 아니죠. 사람들이 저에게 칭찬이라고 이상한 소리를 한 경우가 너무 많았고, 전부 모욕이나 다름없었어요. 하지만 제가 화를 내면 사람들이 놀라더군요. 영어 실력이 아주 좋다고 칭찬을 하면 제가 모국어이니 당연히 잘하죠? 이라고 답하고, 제 개인적인 생활에서도 남자들이 저에게 다가와서 “아시아인은 취향이 아니지만 넌 귀엽네.”라고 하던가 “아시아계 여자애치고는 귀엽네.”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런 소리를 계속 듣다 보니 여성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했을지도 몰라요. 뭐 농담이지만, 그런 인종차별적 발언을 해도 사람들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일이 문제라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페티시 문제도 있죠.

앨리: 아주 심각해요. 오리엔탈리즘까지 합하면 아주 끔찍하죠. 제 정보를 많이 공유하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제가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남자와 데이트를 그만둔 이유 중 하나지만, 그 남자가 갑자기 “나 아시아계를 먹어 본 적이 없어.” 이런 소리를 하더군요. 음식도 아니고 뭔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죠. 많은 아시아계 남성들의 경우는 정반대였습니다. 아시아계 남성들은 항상 조롱의 대상이죠. 너무 화가 나서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없네요. 전 아름답고 잘생긴 친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들이 연애할 때마다 인종 차별을 겪는 경우가 많아요. 백인 여성들도 인종 차별을 하죠. 난 아시아계 남자에는 관심 없어. 크기가 작거든. 이런 소리를 하고 다녀요. 이러한 개인적인 이야기가 마구 남발됩니다. 대중매체가 이런 문제에 있어서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아시아계 남성들을 매력적이지 않게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시아계 남성들이 작고, 약하고, 쓸데없다는 묘사가 많죠. 그리고 아시아계가 그런 선입견을 받아들이게 된 일도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요. 

팟캐스트: 물론 현재에 와서는 BTS나 한류 스타들 때문에 아시아계 남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여성들이 늘어났나요? 그게 페티시의 일부라고 생각하시나요?

앨리: 아주 이상하죠. 아시아계 남성들에게 조금 기분 좋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동시에 페티시적인 접근이고 충격적인 접근이죠. 제 동아시아계 남성 친구들은 아시아계 남성에게 적대적인 환경에서 자라왔는데 갑자기 아시아계 남성, 특히 한국계 남성과 데이트하는 일이 유행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제 배경은 좀 독특하긴 하지만 LBGTQ+ 사회에서도 이런 유행은 마찬가지죠. 제 전 여친도 한국계라면 뭐든지 다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제가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제가 한국계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니 전 여자 친구의 반응은 이상했습니다. 보통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은 과거의 배경이 뒤흔들린 일에 대해서 걱정을 하는데 제 전 여자 친구는 한국인과 사귀고 있다니 대단하네! 이런 반응을 보이면서 기뻐했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배경을 알게 된 이야기를 하자면, 19살 때 제 배경과 혈통을 알기 위해서 중국에 방문했죠. 그 방문 결정 자체도 매우 갑작스럽게 내려진 일이어서 제 부모님이 기뻐하지 않았죠. 19살에 중국어도 못하는 상황에서 혼자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제 출신지의 고아원을 방문했죠.

팟캐스트: 어디에 있죠?

앨리: 양저우라는 곳에 있어요. 양저우식 볶음밥으로 유명하죠. 백만 명의 거주자가 있지만, 중국 기준으로는 소도시입니다. 상하이에서 다섯 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죠. 고아원에 도착해서 제 서류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어요. 제가 입양되었을 때의 고아원장은 아니었지만 고아원장이 나와서 제 서류 작성을 잘못했다고 이야기했죠. 처음에 듣고 뭔 소리인지 이해를 못할 때 고아원에서 저에게 설명을 했습니다. 제가 다른 고아원에서 이전된 고아였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해안가 출신 도시인 둥타이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그걸 듣고 괜찮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이번에는 제가 중국계인 한국계인지 모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입양 절차에 연관된 많은 입양아가 한국계였기 때문이죠. 고아원에서 서류가 분실되었기에 제가 중국계 고아인지 한국계 고아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지역에는 조선족 거주지와 북한인 이민자가 많으므로 정확한 민족 출신을 알 수 없다고 했어요.

팟캐스트: 그 조선족 거주지가, 일본 제국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만든 거주지였나요? 아니면 독립군 계통 거주지였나요?

앨리: 아마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거주지라고 생각합니다. 고아원에서는 제가 한국계나 한국계 혼혈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를 해줬어요. 적어도 그 한국계 혈통이 대한민국 혈통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둥타이에 있는 한국계 거주자들은 북한 출신이거든요. 그 사실을 알게 되니 답답했죠. 사실을 알아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약에 둥타이에 가서 제 혈통을 찾으려고 해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요. 아주 웃긴 이야기이기도 한데, 제가 중국에 있을 때 절 보고 모두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중국 억양을 안 가지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지만 많은 사람이 저에게 와서 한국인인지 물었죠. 그걸 들으면 저는 그렇다고 답했어요. 제가 한국인이라고 답하는 일이 제가 영국인이라고 하는 일보다 훨씬 쉬웠습니다. 사람들에게 제가 영국인이라고 할 때마다 저를 믿지 않았거든요. 그 외모로 영국인이라니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고,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한국인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했죠.

팟캐스트: 자라나면서 사람들이 타국에서 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입양된 곳으로 돌아가니 그곳 사람들도 타국 출신이라고 인식하다니 아주 역설적이네요.

앨리: 네 그렇죠. 이상했습니다. 사실 그곳을 방문하는 일 자체가 저에게 있어서 큰 충격이었죠. 1번도 제가 중국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어요. 제가 중국에서 입양되었으니 당연히 중국계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고아원에서 한국계이거나, 혼혈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묘했습니다. 이제 제 혈통에 대해서 아는 사실이 없었죠. 제가 모른다는 사실만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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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 모두 이런 경험을 했는지는 몰라요.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저와 제 입양아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우리가 고아원 입구에 생년월일이 쓰인 카드가 붙여진 포대기에 넣어진 채로 남겨져 있었다고 이야기를 해주시고는 했죠. 제 부모님이 저에게 말해주신 이야기가 이랬고, 그 이야기를 믿으면서 자랐습니다. 그 이야기를 의심할 이유가 없었어요. 하지만 제가 고아원에 갔을 때 고아원에서 이야기는 거짓말이라고 말해줬습니다. 모든 고아에게 주는 배경이라고 이야기했죠. 제가 이런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던 이유가 제가 중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이야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소통의 오류가 적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뭐가 사실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 사실 그 배경 이야기가 나온 이유가 번역 오류 때문이었죠. 부모님이 저를 입양하셨을 때 번역가가 제가 생후 5일이라고 서류를 번역해줬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고아원에 비치된 제 서류를 직접 읽어보니 5일이 아니라 5달이었죠. 5일과 5달은 아주 큰 차이가 나요. 둥타이 고아원에서 양저우 고아원으로 이전될 때 나이였습니다. 제가 아는 정보에 의하면 둥타이 고아원은 과잉수용 상태였다고 합니다. 수많은 여자아이가 버려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한 고아원에서 다른 고아원으로 아이들을 이주시키는 제도가 만들어졌고, 그렇게 해서 제가 둥타이에서 양저우로 옮기게 됐습니다. 사실 중국 방문 때 시간이 없어서 둥타이는 방문하지 못했어요. 둥타이가 어떤 곳인지 알고 싶어서 한번은 방문하고 싶습니다. 해안가 도시라는 정보는 알지만, 제가 아는 정보는 이게 다예요.

팟캐스트: 둥타이 고아원의 과잉수용으로 인해서 다른 고아원으로 보내지셨군요? 그럼 부모님이나 다른 정보는 없나요?

앨리: 관련 정보는 전혀 없습니다. 불확실성이 너무 많고,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제 삶 전체를 거짓말로 도배한 셈이었죠. 제가 언제 태어났고, 어디 출신이었고, 입양되었을 때 나이가 어땠는지 전부 거짓말이었습니다. 제 출생 시기가 적힌 종이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거짓말이었죠. 고아원장이 저에게 제 생일은 제 진짜 출생 일자가 아니라, 고아원에서 마음에 든 날짜를 생일로 정해줬다고 했습니다. 그걸 듣고 나니 제 삶에서 뭐가 진짜였는지 의심이 갔죠. 몹시 화가 났어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사람들의 이야기도 믿을 수 있는지 의심이 갔습니다.

팟캐스트: 그 사실을 알고 난 뒤에 생일 축하하는 데 문제가 생겼나요? 아니면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생일을 축하할 수 있었나요?

앨리: 받아들이기 어려웠죠. 저는 제가 안 과거 배경이 전부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더 많은 사실을 알기 위해서 중국에 갔고. 19년간 그 정보를 믿으면서 자랐는데, 40분 만에 모든 사실 바뀌었고, 불확실성이 너무 많이 늘어나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고아원에서 맛있는 점심을 대접해줘서 고맙다고 하고 나왔어요. 그 뒤 몇 시간 넘게 울었던 기억이 나고, 간신히 호텔에 돌아가서 제 부모님에게 연락을 드렸죠. 제가 혼자 부모님의 압박에서 벗어나 저 혼자 사실을 찾으려고 했는데 역설적이지만 그때 어머니에게 울면서 여기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일이 기억이 납니다. 그 방문 이후 몇 년 동안 생일에는…. 제가 벌써 25살이라니 나이를 많이 먹었네요. 제가 현재 25살입니다. 어쨌든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그 방문 이후 몇 년 동안 생일이 어려웠던 기억이 나죠. 생일이 될 때마다 오 오늘 생일이네- 아닌가? 이런 반응을 보이고는 했거든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반응이 부드러워졌죠. 저에게 생일은 확실히 존재하고, 제가 생일이라고 축하하는 때와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으니, 아예 생일이 아니라 생월을 축하하게 됐습니다. 달 내내 제 탄생을 축하하죠. 

앨리: 제가 한국계이거나 한국계 혼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매우 기묘했어요. 양저우에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어서 다시 고아원에 방문했습니다. 주변 상황이 많이 바뀌었어요. 우선 가장 큰 변화는 국내 입양 허용이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입양될 때는 국내 입양이 불가능했거든요. 그래서 고아원에서 지내는 아이들의 숫자가 훨씬 줄었고, 1자녀 정책도 완화되어서 많은 사실이 바뀌었습니다. 고아원에 방문해서 직접 아이들도 만날 수 있었죠. 아이들과 직접 만나는 경험 자체가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애들처럼 생활한 적이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고아들의 구성 자체가 바뀌어서 많은 아이가 장애인이었어요. 거기에 제가 입양되었을 때는 여자애들뿐이었는데 성비도 바뀌었습니다. 오후 내내 고아원에서 이름이 귀여운 한 소년과 시간을 보냈어요. 제가 거기 갔을 때 갈색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그 가방을 당겨서 제 시선을 끌고는 했죠. 그 경험이 제 기억에 남았고, 제가 가야 하니 그 남자애가 매우 슬퍼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 생각에는 저, 중국 중국인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고 생각해요. 

앨리: 제가 학위를 따기 위해서 노력할 때, 학위를 따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제가 평범하게 자랐다면 알았을 언어를 다시 배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이 저에게 얼마나 감정적 영향을 끼칠지 생각하지 못했죠. 제가 중국에 갔을 때 중국어 실력 부족이 얼마나 저에게 영향을 끼칠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중국어를 못한다고 바보 같다고 하는 중국인이 많았죠. 제 능력 부족이 저를 얼마나 슬프게 할지 몰랐어요. 제가 아무리 노력하고 집중해도 진짜 중국인이 말하는 중국어를 따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슬펐죠. 제가 영국 백인들 사이에서 자랄 때는 항상 제가 그 사람들에게서 소외된 기분이었죠. 하지만 제가 중국에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소외된 기분이었어요. 제가 왜 중국에 가면 더 나아진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중국에 방문했을 때 아주 텅 빈 기분이었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는 기분이었습니다. 문화의 틈새에 사는 사람의 문제였죠. 중국인들이 저에게 긍정적으로 반응했을 때는 제가 중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와 제가 한국인이거나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고, 서양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죠.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중국인으로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중국인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었을 때는 제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뿐이었습니다.

팟캐스트: 고향에 돌아가서 같은 민족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그 일 자체가 불가능했군요? 

앨리: 네. 되찾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죠. 결국, 문제는 제가 대화를 나눈 사람 중 상당수가 제가 동아시아인처럼 생겼지만, 중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지 이해를 못 했기에 생겼습니다. 그러한 혼란과 의문은 사람들이 사실적이라고 논리적이라고 인식한 대답을 찾았을 때나 사라졌죠.

팟캐스트: 간첩 교육을 받았다면 이런 상황에서 쓸모가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앨리: 제 부모님도 똑같은 말을 하셨어요. 중국에 발령되어서 주변에 섞여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이라고 반응하셨죠. 그때 저는 제가 중국어를 쉽게 배우고, 중국에 섞여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중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자 언어의 복잡함을 이해했죠. 전 중국어를 하는 일은 어렵고, 아무리 중국어를 연습해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어요.

팟캐스트: 중국어를 대학교 때 배우셨죠? 그 이전에도 배우셨나요?

앨리: 아뇨. 대학교 때 들어가서야 본격적으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죠. 몹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전 자연스럽게 중국어를 배우지 못했어요. 전 중국어를 쉽게 배울 수 있다고 오만한 착각을 했지만 몹시 어려운 언어였습니다. 

팟캐스트: 다른 백인 학우들이 앨리 씨보다 중국어를 더 잘하는 예도 있었나요? 그럴 때 앨리 씨는 어떤 기분이 들었죠?

앨리: 백인 친구들이 단순히 저보다 중국어를 잘한다는 사실보다 더 영향을 끼친 일이 있었어요. 제가 학과 친구들과 중국어 학생을 위한 파티에 가거나, 중국에 방문하면 최대한 중국어를 많이 쓰려고 했죠. 제가 중국어를 제대로 말하려고 하고 좋은 주제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면 저와 대화하는 중국 사람들의 반응은 평범했어요. 반면에 백인인 제 아내는 중국어를 잘 하지 못하고 관련 학위도 없는데 중국어 몇 단어를 하면 중국 사람들이 아내를 칭찬해줬죠. 그러한 이중 잣대가 저에게 있어서 큰 역경이 되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노력하고, 중국어 실력을 키우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았죠. 심지어 지금도 제 노력과 실력을 사람들이 인식했으면 합니다. 예를 들면 파티에 제 아내를 데리고 가면 제 아내가 중국어로 인사를 하거나 중국어로 널 사랑해, 라는 조그마한 중국어 단어를 합니다. 제가 제 아내에게 가르쳐준 단어를 사용하니 귀엽죠. 하지만 백인들이 중국어를 배우는 일을 더 높이 평가하니 제 노력이 의미가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도 중국어를 모국어로 배우지 않고 자란 영국 사람이고, 제 부모님도 중국어를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제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10배는 더 노력해야 했죠.

팟캐스트: 한국에서도 한국 입양아 상대로 그러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요. 한국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 하는 일이 우리 잘못이고, 한국인이나, 중국인이 아닌 타국인, 특히 백인이 한국어나 중국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해도 말하는 일 자체가 높이 평가되죠. 저 외국인들이 노력하고, 자신을 개선하려 한다고 인식합니다.

앨리: 중국에서 사람들은 절 한국인으로 인식했죠.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중국 사람들에게 대화하려고 하면 중국어를 하려고 한다고 더 높은 평가를 해줬어요. 제가 영국인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일보다 더 높이 평가를 해줬습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제가 영국인이라 중국어를 잘 못 한다고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저를 믿지 않았어요. 제가 아무리 매끄러운 영어를 해도 믿지 않았죠. 영어로 말을 바꿔서 이렇게 영어를 잘하니 전 영국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이 저를 믿지 못했어요. 제가 영국인일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들에게는 믿기지 않는 일이었죠. 제가 대화를 한 사람 모두가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추궁했어요. 중국인들이 저와 대화를 나눠준 이유는 친구의 친구라는 이유 때문이었죠.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 이 친구의 친구이니 넌 믿을 수 있구나. 모국어가 영어인 이유는 영국에서 자랐기 때문이고 그래서 영국인이구나.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제 이야기를 믿어줬죠. 왜 사람들이 그렇게 저를 믿지 못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제가 한국인이라고 말하고 다닌 이유도 거기에 있었죠. 제가 중국어로 말하려고 하면 사람들이 절 모자란 사람으로 알았거든요. 저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소개하기 전까지는 제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죠. 제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제가 국제 입양아라는 사실보다 그 사람들에게는 더 믿기 쉬운 사실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중국에 방문하셨을 때 주변을 돌아보면서 주변에 나이가 많은 여성들이 어머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찾아보셨나요? 아니면 중국에서 자라났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생각하신 적은 있나요?

앨리: 그러기도 했고, 그러지 않기도 했죠. 적어도 고아원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그런 상상을 했습니다. 제 출신지를 방문했을 때는 누구든지 제 어머니일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제 삶 자체가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더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달 출신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으니까요. 중국에 방문했을 때 중국에서 생활하면 어떨지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중국으로 이주할까 생각했죠. 하지만 중국에서는 지내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웠어요. 틈새가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제가 직접 중국에 방문해서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과 거리가 여전히 존재했죠. 그리고 고아원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는 계획이 바뀌었습니다. 현재는 COVID-19 때문에 어디 여행을 가지 못하지만, 유행이 끝나고 나면 한국을 방문해볼 생각이에요. 제가 생각해보지도 못한 배경이죠. 하지만 지금은 아무거나 해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전 중국도 방문했고, 중국어도 배우고, 중국 문화를 배우기 위해서 평생 노력했어요. 하지만 제가 중국에 방문하니 고아원에서 제 출신지도 모르고, 제 혈통이 한국계일지도 모른다고 했죠. 그 반전 자체가 워낙 저에게 큰 충격을 줘서 한국을 직접 방문해야 하기로 했습니다. 정답도 없고,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모르죠. 물론 카오미 씨도 아시겠지만 23 and Me나 Ancestry.com(유전자 조사 회사들)이 있으니 유전자 검사를 해볼까 생각도 했죠. 제가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알아서 제 민족에 대한 결론을 내고 싶었어요.

앨리: 제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연애를 하고 관계를 맺은 사람은 태국 입양아 남자였어요. 서로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죠. 둘 다 백인 가족에 입양된 아시아계였습니다. 그때는 이러한 배경이 제가 필요로 하는 요소이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영혼의 단짝이 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했죠. 제가 그러한 생각을 했던 이유는 서로 비슷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고, 서로와 비슷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설명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 아내와 만나서 사랑에 빠져서 결혼한 뒤에 생각해보면 제 아내는 제 첫 연인처럼 제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죠. 하지만 굳이 아내가 절 이해해주기 원하지 않아요. 아내는 단순히 제 이야기를 들어주고 문제를 같이 생각해주면서 저를 많이 도와줍니다. 전 제 아내를 사랑하고, 우리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요. 매우 깊고 감정적인 관계이죠. 하지만 아내와의 관계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일은 입양에 관한 대화입니다. 제 아내, 캣은 저에게 공간을 줘요. 다른 입양아와 교제하면서 느낀 문제는 둘 다 입양아의 정체성과 과거에 대한 깊은 트라우마, 불안정성, 고통을 서로 가지고 있는데, 우리의 관계에서 그 2명분의 고통을 관리할 수 없다는 문제였습니다. 서로의 문제를 전부 신경 쓸 수 없었고, 우리의 정체성이 너무 망가져 있었어요. 그때 우리의 관계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전 더 혼란스러워졌고, 서로에게서 필요한 도움을 절반만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 아내와의 관계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저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되고, 제가 충분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아내가 저 자신을 고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전 항상 강하지 않습니다. 많은 입양아에게 있어서 정신 건강은 아주 심각한 문제죠. 영국에서 입양아들의 자살 시도율은 평균 자살 시도율보다 4배나 되고 끔찍한 일이예요. 아주 무거운 주제지만, 사실이죠. 부모에게 버림받고, 문화, 고향, 사람들에게서 괴리되니 아주 힘든 일입니다. 백인 여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일은, 제가 괜찮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있다는 점이에요. 아내는 절 가르치려 들지 않고, 절 구하거나 고치려고 하지도 않죠. 

앨리: 전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입니다. 하지만 어떤 얼굴도 제가 선택한 얼굴이 아니죠. 집은 마음은 둔 곳이라면, 제집은 항상 부서져 있었어요. 서류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전 정돈되어 있고 법규를 지킵니다. 하지만 제가 겨우 두 살일 때 서류에서 선택되었어요. 제 얼굴은 성공과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저 자신일 뿐이죠. 입양이 아름답고, 상냥하고, 옳은 일이라는 인식이 있어요. 문제가 있다면 사람의 문제일 뿐이죠. 갈색 아이를 데리고 와서 하얀 옷을 입힌다고 달라지지 않아요. 그 아이들의 색을 지우고, 언어를 빼앗은 뒤에도 성장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사회가 선을 지우는 광경을 봐요. 소녀는 웃는 법을 배우고, 모든 일이 괜찮다고 연기하는 법을 배우죠. 트라우마는 사람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할 때를 제외하고는 사실이에요. 유색인종 아이들이 구원받는 일은 돈이 되는 일입니다. 입양은 단순하지 않고, 존경할 일도 아니죠. 전 제 고향을 잃었고, 제 이름도 잃었어요. 다시는 완벽해지지 않겠죠. 

앨리: 전 제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이 저에게 준 사랑에 고마워합니다. 제 가족이 절 지금 있게 해줬고 그 사실을 변하지 않아요. 가족은 저에게 강해지라고, 제 목소리를 쓰라고 했죠. 전 저에게 일어난 일을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도 옹호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부모님이 저를 입양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절 입양하지 않아도 됐다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죠. 제가 이러한 생각을 공적으로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무서워서 못해요. 입양아들이 조용히 망가진 과거를 넘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영원히 중국인이 될 수 없지만 동시에 백인도 되지 못하겠죠. 그래서 이 과거를 단순히 넘길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저와 같은 사람을 위한 장소는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제 얼굴은 항상 바뀝니다. 인종에 집착하는 세계에서 저와 같은 사람을 위한 장소는 없죠. 아무도 입양과 입양아가 겪은 일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입양아가 공개적으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말하면 배은망덕하다고 비판을 받죠. 가족이 있지 않으냐, 신이 베푼 은혜를 생각해라, 넌 괜찮다, 이러한 말들은 제 고통을 줄여주려고 한 말이었습니다. 

앨리: 무지가 시끄러워지면 대화를 바꿔야 하죠. 사람들이 분노하지 않도록 대화를 조심해야 해요. 하지만 이러한 어려운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전 괜찮지만, 괜찮지 않아요. 입양의 의미 자체를 좋아하지 않죠. 제가 은혜를 몰라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고마워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고통을 받을 수 있죠. 입양아들이 겪는 역경을 사람들이 이해해줬으면 할 뿐이에요. 사람들이 좋은 의도로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우리의 고통을 쉽게 해주지 않고 더는 연기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이 삶을 사는 사람이고, 가면을 매일 바꿔 쓰는 사람이죠. 저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는 일에 너무 익숙해졌고, 얼굴을 너무 자주 바꿔서 횟수를 기억하지 못해요. 전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지만, 모두 제 얼굴이죠. 전 제 이야기를 하고 싶고,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합니다. 입양아들이 마이크를 잡고 전통에 저항하고 있고, 전 제 인생 전체를 말하기 위해서 기다렸고, 이제 여러분들이 들을 시점이에요.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앨리 씨와 연락을 하거나, 구독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죠?

앨리: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어요. 잠겨 있지만, 친구 신청을 하면 받아줍니다. Racism Unmasked 인스타그램 계정이 트롤들의 공격을 받아서 개인 계정을 잠가야 했어요. 또 다른 문제죠. 그래서 인스타그램 계정도 있고, 페이스북 계정도 있습니다. Allie De Lacy로 검색하시면 됩니다. 프랑스 계통 이름이라 앨리 디 레시라고 발음하기도 하죠. 참 고급스럽네요. 어쨌든 인스타그램도 페이스북도 똑같습니다.

시즌 4, 에피소드 21: 로버트 칼라브레타 이

Audio available April 5, 2021 at 7 am ET.

주의: 자해, 아동 학대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성적 학대 포함)

로버트 칼라브레타 이 (35세) 씨는 한국에서 미국의 학대 가정으로 입양되었다. 로버트 씨는 미시간주에서 뉴욕주로 이주하면서 힘든 성장기를 보냈고 16살에 독립해 친구들의 우정과 뉴욕주 이타카 한인 교회의 도움으로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로버트 씨의 이야기에는 홀트의 정보 부족 통보, 가족과의 재회, 그리고 그가 인신매매의 희생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등, 여러 반전이 있다.

로버트: 제 이름은 로버트 리입니다. 적어도 리로 바꾸려고 하고 있죠. 현재는 제가 입양될 때 주어진 성인 칼라브레타를 쓰고 있어요. 이번 COVID-19 때문에 시간 인지 능력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올해로 35세가 됩니다. 그리고 현재는 뉴욕주 퀸스에서 살고 있어요.

팟캐스트: 식도락의 중심지에서 살고 있군요.

로버트: 단순히 식도락만 아니라 제가 눈에 띄지 않는 첫 거주지이기도 했습니다. 이 선웨이 지역에서 사는 이득 중 하나는 미국에서 아시아계 인구가 주류인 지역 사회 중 하나라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점이죠. 밖에 나가서 식사해도 어떤 사람의 주목도 받지 않아요. 

팟캐스트: 칼라브레타는 이탈리아계 성인가요? 

로버트: 네. 이탈리아계 성이죠.

팟캐스트: 그 성과 관련해서 재밌는 이야기가 많겠군요?

로버트: 네. 몇 년 전에 뉴욕주 북부에 있는 화이트 플레인 시에서 보험 회사들을 대신해서 카센터들을 관리하는 일을 했죠. 그 카센터 중 상당수는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카센터들과 협상하는 일은 어려웠지만, 제가 성을 밝히면 분위기가 바뀌더군요. “오 이탈리아인이네요? 지미! 이분도 이탈리아인이래!” 이러면서 협상이 훨씬 쉬워졌습니다. 제가 성을 바꾸게 되면 그러한 이득을 잃게 되겠죠. 

팟캐스트: 뉴욕주 북부에서 자랐나요? 아니면 다른 곳에서 자라나셨나요? 

로버트: 제가 생후 6개월에 입양되었을 때, 제 수양 가족은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시 교외에 살고 있었죠. 6살 이후로는 뉴욕주 중심부 이타카에서 자랐습니다. 사람은 200명이고 2000마리의 양이 사는 아주 작은 마을이죠.

팟캐스트: 상상이 가는 광경이지만,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로버트: 이타카는 마을에 신호등이 없어요. 신호판 정도는 있었죠. 저보다 3살 어린 한국에서 입양된 여동생이 있었어요. 물론 혈연관계는 없습니다. 우리 둘만 백인이 아닌 주민이었죠. 따라서 다른 애들에게 온갖 인종 차별을 겪었습니다. 애들이 우리에게 돌을 던지기도 했고, 다른 인종 차별을 당하기도 했죠. 백인들에게 소외를 당해서 때문에 20대가 되자 백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워야 했어요. 살기 위해서 싸우기도 해야 했습니다. 어른이 되자 이 모든 일을 받아들이고 절 치료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죠. 

팟캐스트: 어린 시절에 괴롭힘을 당하셨군요?

로버트: 싸움에서 진 적은 없지만, 그때의 충격과 트라우마가 아직도 생생하죠. 뉴욕시 중심에서 벗어나면 몸이 긴장되고 정신 상태가 혼란스러워지는 경험을 자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죠. 주변 사람에게 잡히거나 공격받는 상황에 항상 대비하다 보면 정신적으로 힘들거든요.

팟캐스트: 부모님에게 이런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었나요? 그분들이 이 문제를 아셨나요?

로버트: 제 삶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어요. 전 제가 16살일 때 독립했습니다. 그때는 왜 독립했는지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방치와 학대에서 벗어나려고 독립했죠. 16살 때 독립하고 나서는 칼라브레타 가족과는 교류가 얼마 없었습니다. 저를 내버려 두는 가정환경에서 벗어나야 했고, 독립이 제 생존 방법이었어요. 

팟캐스트: 두 아시아계 아이들을 뉴욕주 한복판의 작은 마을에 입양해놓고 그러한 고통을 양부모님이 전혀 몰랐다니 충격적이네요. 왜 칼라브레타 가족이 그곳으로 이사를 했죠? 직업상의 문제였나요? 

로버트: 또 다른 설명을 해야 하는 문제네요. 우리를 입양한 가족의 남성 성인은 빌이었어요.

팟캐스트: 그 사람들을 양부모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군요? 

로버트: 네. 그 사람들을 양부모님이라고 부르면 저와 제 여동생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를 입양한 남자 빌은 목사였고 이타카 마을 교회에서 목사로 일했죠. 물론 그의 직업만 목사였지 그가 한 일은 감옥에 가고도 남았을 일이었어요. 우리를 입양한 여성도 그랬죠. 빌과 지니 둘 다 나쁜 사람들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어떤 학대를 당했는지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제 양아버지도 목사였는데, 전 양아버지에게 성적으로 학대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로버트 씨의 이야기가 슬프게도 익숙하네요.

로버트: 이런 이야기를 공유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에는 운이 좋게도 물리적인 학대였죠. 제 여동생은 충격적이고 어두운 학대를 당했어요.

팟캐스트: 로버트 씨의 여동생도 성적으로 학대를 당했군요?

로버트: 네. 그리고 전 4년 전까지 제 여동생이 성적 학대를 당했는지 몰랐습니다. 제 여동생의 이야기를 대신하고 싶지는 않아요. 여동생을 보호하고 싶죠. 제 여동생도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과 연결을 끊었습니다. 이러한 여동생의 독립과 학대를 알게 된 과정도 어이가 없어요. 4년 전에 출장을 가기 위해서 마을을 방문했을 때 빌이 저에게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제 여동생과의 교류가 끊긴 이유가 자기가 그 애를 성적으로 학대했기 때문이라고 저에게 말했어요. 하지만 거짓말이었죠. 빌 말로는 여동생을 입양한 뒤 1년만 성적으로 학대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동생은 빌이 12년 동안 자신을 학대했다고 하더군요. 우리를 입양했던 성인 여성, 지니도 이 학대의 공범자였습니다. 제 여동생이 지니에게 이러한 학대가 일어나고 있다고 호소했지만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으니까요. 어느 시점부터 학대 방조가 범죄가 되는지 궁금하죠. 그러한 일이 계속 일어나는지 몰랐다면 어머니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4년 전에 그런 사실을 알게 되고 나자 전 자유로워졌죠. 더 제 유년 시절의 기억을 추억할 필요가 없고, 더는 제 과거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과거는 제가 기억하던 대로의 악몽이었죠. 아시아계의 죄책감 서사는 아시아계 입양아에게는 두 배로 적용됩니다. 사람들은 입양아들이 양부모를 돕고, 기분 좋게 하고, 행복하게 하려고 왔다고 해요. 입양아들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좋게 보려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보죠. 여동생의 학대 사실을 알게 되자,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생겼던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었어요. 제가 나쁜 아들이라 16살 때 그 집에서 도망치지 않았죠. 빌과 지니 밑에서의 노예 생활에서 도망쳤습니다. 20대에는 제가 살 곳이 없던 경우도 있었어요. 전 대학교 등록금과 생활비를 전부 학자금 대출과 아르바이트로 충당했죠. 그 결과 살 곳이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요. 

팟캐스트: 같은 가정에서 자라는 형제자매들이 다른 형제와 자매들에게 가해지는 학대를 모를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죠. 지금 로버트 씨가 되돌아보면 여동생에게 가해지는 학대의 조짐이 보였나요? 아니면 주변 성인들이 그러한 학대를 숨기는데 능했나요?

로버트: 지금 그 이야기를 하시니 흥미로운 점은, 전 학대 사실을 알게 되자 제가 부모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죽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전 그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인지 몰랐죠. 그 사람들이 우리를 잘 키우려고 노력했지만, 우리가 그 노력을 이해하지 못해서 독립해야 했다 서사가 사라졌습니다. 그 사람들을 더는 사람으로 볼 수 없었어요. 제가 학대 사실을 알았냐는 질문에 답을 하자면 몰랐습니다. 하지만 어디서 나왔는지는 몰라도 무의식적으로 그 애를 보호하려고 하던 방법이 있었죠. 우리는 서로 신체 접촉이 별로 없었고, 여동생의 육체적 문제에 관심을 두거나 접근 자체가 금기였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의 말을 끝내줄 수 있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으니 괜찮았죠. 학대 사실을 제가 직접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무의식적으로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동생의 학대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제가 죄책감을 느꼈다고 생각해요. 제가 직접 학대를 받지 않아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 상황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도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로버트 씨는 성장하면서 가족이 부끄럽다고 생각했나요? 

로버트: 네. 제 청소년 초반기에는 아시아계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죠. 제가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아시아계, 한국계 정체성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제 경험이 입양아 사회와 연관된 다양한 관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죠. 많은 입양아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인종과 주변 사람들의 인종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제 여동생과 저는 한국에 대해 거의 몰랐지만, 백인 사회가 우리를 거부해서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른 입양아들보다 더 빠르게 자각하게 됐어요. 전 어쩌다 보니 한인 교회의 청소년부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빌과 지니는 한인 교회에 다니기를 원치 않았지만 저는 거기 참여했고, 다른 한국인들과 교류할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저의 한국인 정체성을 교회 참여를 통해서 구축할 수 있었죠. 

팟캐스트: 작은 마을에서 어떻게 한인 사회와 접촉할 수 있었죠? 한인 교회는 어떻게 접촉하게 되었나요?

로버트: 이야기를 좀 더 이상해지지만, 전 2학년 때부터 재택교육을 받았어요. 목사네 자식이라는 특이점에 재택교육을 받았다는 점까지 더해서 더 이상한 사람이 되었죠. 물론 재택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이야기도 아니고, 재택교육도 제대로 하면 좋은 경우도 많지만, 제가 받은 재택교육은 책을 잔뜩 받고 제가 알아서 공부해야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3학년 이후부터는 독학으로 공부를 했죠. 재택교육의 필요조건 중 하나는 외국어였어요. 이타카 한인 교회가 있어서 제가 가서 한국어 수업을 들었습니다. 제가 12살에서 13살 때였어요. 거기에 10명에 12명 한인 아이들로 구성된 정도의 청소년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 애들이 제 진정한 가족이 되어주었습니다.

팟캐스트: 그게 제가 가진 또 다른 질문의 답이네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고, 동시에 아시아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정체성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자원이 어디에 있었나 궁금했는데, 한인 교회와 교회 사람들이 있어서 로버트 씨의 한국 문화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었군요? 

로버트: 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들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미국의 경제지) 잡지가 있었는데 일본 수상의 사진이 나와서 그 사진을 잘라내서 보관했죠. 제가 찾을 수 있는 아시아계 정체성은 전부 찾아서 모았어요. 제 옷장 내부에 상자가 하나 있었고 그 안에 제 아시아계 정체성을 만들려는 노력이 담겨 있었습니다. 대부분 잡지에서 오려낸 짧은 기사들이었어요. 90년대 미국 시골이라 AOL 인터넷이 겨우 들어온 수준이었으니 인터넷을 통해 정체성을 찾는 일은 어려웠습니다.

팟캐스트: 잡지를 잘라서 앨범을 만드셨나요?? 

로버트: 네 그런 셈이죠. 전 북한에 관한 기사도 모아서 수집했습니다. 그때 왜인인지는 몰라도 미국 잡지에 북한에 관한 기사가 많이 실렸죠. 북한 병사들의 얼굴이 저와 비슷해 보였고, 저는 친밀감과 동질감에 굶주려 있었죠. 

팟캐스트: 로버트 씨는 한국 가족에 대해 생각을 하고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나요? 아니면 아예 생각하지 않았나요? 한인 교회에 가서, 한인 교회 친구들과 놀고 그 친구들 부모님과 일을 하면서 한국 가족이나 한국 기원에 대해서 생각하셨나요?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셨나요? 

로버트: 청소년 남자애라면 여자애를 사귀는 일, 차를 사는 일, 누가 더 근육질인지에 대해 신경을 쓰기 마련이죠. 저는 한인 교회 친구들 집에 놀러 가서 친구들 부모님이 한국어로 애들 이름을 부르고, 밥 먹으라고 부르는 일이 기억에 남아요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전 외로웠습니다. 그때 제 부모님이 누구인지 물어보면 빌과 지니를 지목했겠지만, 동시에 전 한인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그런 가족 관계를 원했죠. 친구들 부모님이 친구들에게 게임 그만하고, 좀 더 공부하라는 잔소리마저 부러웠습니다. 집에서 방치된 기간이 길어서 그런지 그런 관심을 받는다는 생각만 해도 아주 기뻤죠.

팟캐스트: 로버트 씨가 어떻게 방치되었는지 예를 좀 들어줄 수 있나요?

로버트: 제 양이모가 말해주시기를, 빌과 지니가 제가 어렸을 때 벌을 준다고 저를 어두운 지하실에 가뒀다고 하더군요. 양이모는 자기 자매와 자기 자매의 남편이 이렇게 저랑 제 여동생을 대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더군요. 이제 우리는 입양아가 잘못하면 아이를 어디 가두거나 외롭게 하지 말고, 가족이 모여서 아이의 잘못을 짚어주고,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다독여야 입양아들이 가진 공포를 관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빌과 지니는 그러지 않았죠. 오히려 제가 가진 공포를 증폭시켰고, 결국 전 살기 위해서 그 집에서 도망쳐 나와야 했습니다. 빌은 저에게 너무 화가 나서 이 방에서 안 나가면 절 죽이겠다고 했어요. 그러한 분노를 받아내야 하는 사실 자체가 아주 무서웠죠. 물론 과장일지도 모르지만 어렸을 때의 저는 그 협박이 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팟캐스트: 듣기만 해도 긴장되고 불안해지네요. 

로버트: 네. 좀 더 물리적인 학대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너무 충격적이니까요. 

팟캐스트: 16살에 짐을 싸서 그 집에서 나오셨다고 했는데, 어디로 가셨는지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로버트: 제가 16살에 독립했던 이유는, 전자 기타 때문이었습니다. 제 입양 가족은 보수적인 집이었죠. 제가 전자 기타를 소지할 수 없다고 그 둘이 선언했어요. 그게 계기였습니다. 더는 그 집에서 지낼 수 없겠다고 생각했죠. 전 재택교육을 받아서 고등학교 교육을 16살 때 끝낼 수 있었고, 전문대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대학교로 진학하긴 했지만, 그 전문대에 일본인 친구가 있었어요. 나카지마 히로키라는 이름의 친구였죠. 일본 전과자 출신으로, 갱생하고 나서 미국에서 사업을 공부하기 위해서 유학 온 친구였습니다. 아주 뛰어난 전자 기타 연주자였고, 전 히로키에게서 전자 기타를 샀어요. 저와 히로키와 아주 빠르게 친해졌고, 전 히로키의 룸메이트가 되었어요. 히로키와 온갖 즐거운 이야기를 공유했습니다. 학대와 방치로 가득한 집에서 살다가 저와 비슷하게 생기고, 절 친형처럼 챙겨주는 사람과 같이 살게 되니 아주 좋았어요. 히로키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찾으려고 노력했죠. 히로키는 제가 그 집에서 나와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팟캐스트: 히로키 씨의 이야기는 전직 전과자가 미국에 와서 삶을 다시 바꾸려고 하는 이야기고, 로버트 씨의 이야기는 자유를 되찾는 이야기군요. 두 분은 반항아라고 하긴 그렇지만, 서로 닮았다고 생각하셨나요?

로버트: 서로 닮았기 때문에 히로키가 저를 받아들여 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반항아여서 같이 락 앤 롤에 빠졌다고 생각하고요.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도 생겼죠. 제 삶을 위해서 최고의 전자 기타리스트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전부 히로키 덕분이죠. 

팟캐스트: 밤새 연주를 하고, 일본 음식을 먹는 그런 장면이 떠오르네요. 히로키가 오므라이스를 만들어주거나 그랬나요?

로버트: 네. 히로키와 제 우정은 저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해줬죠. 은행 계좌에 5달러밖에 없을 때 히로키가 저를 먹여 살려줬어요. 히로키와 저는 기타를 들고 어디든지 같이 다녔죠. 같이 동네 슈퍼마켓을 돌아다니면서, 히로키가 카트를 밀고 제가 카트에 앉은 채로 기타와 앰프를 들고 연주하고는 했습니다. 어디 가든지 연주를 했어요. 히로키가 오래된 밴 하나를 가지고 있어서 그걸 몰고 다니면서 같이 돌아다니기도 했죠.

팟캐스트: 둘이서 커버 밴드였나요, 아니면 독자적인 노래도 작곡해서 연주했나요?

로버트: 저랑 히로키 둘 다 U2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U2 노래를 많이 연주하고는 했죠. 

팟캐스트: 돈을 벌기 위해서 공연하기도 했나요? 식사 비용이나 연료비를 공연비로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벌었나요? 

로버트: 몇 번 그런 적이 있어요. 전문대 카페테리아 중심에서 앰프에 기타를 꽂고 카페테리아 전체를 위해서 연주하기도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드디어 자유를 처음으로 찾은 사람이 잃을 것도 없고, 자기 자신을 찾고 있다면 당연히 그런 일도 일어나기 마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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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히로키 씨를 마지막으로 본 때가 언제죠? 

로버트: 제가 주립 대학교에 진학했을 때가 마지막이었죠. 그 뒤로 히로키가 뭘 했는지는 모릅니다. 

팟캐스트: 서로 헤어질 때 작별인사를 했나요? 

로버트: 제가 대학교에 진학할 때 나이가 17살~18살 정도였어요. 우리는 친한 친구였고, 같이 한 일의 추억을 가지고 웃었죠. 히로키를 다시 찾을 수 있다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다시 범죄의 길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죠. 야쿠자는 아니었겠지만, 일본 범죄조직의 일부였다고 들었습니다. 

팟캐스트: 문신이나 염색을 하고 있었나요? 

로버트: 네. 염색한 머리는 미국에 왔을 때는 이미 색이 빠졌지만, 적어도 제가 본 사진에서 나온 청소년기의 히로키는 머리도 염색하고 문신도 있었죠. 그래도 아주 멋진 사람이었어요. 

팟캐스트: 계속 연락을 하지 않았군요? 영화처럼 그렇게 서로 헤어지고 끝났나요? 

로버트: 어떻게 헤어지게 됐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냥 주립 대학교가 있던 뉴욕주 버펄로시로 이사하는데 바빴던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사하면서 여러 가지가 바뀌었죠. 히로키가 먼저 일본에 돌아갔을지도 몰라요. 히로키가 저에게 먼저 작별인사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히로키에게 작별인사를 먼저 하지 않았던 기억밖에 없죠.

팟캐스트: 그다음에는 무슨 일을 하셨죠? 다음 이야기는 뭐로 하고 싶으시죠?

로버트: 음…. 결혼을 했죠. 

팟캐스트: 오 결혼을 하셨군요? 상대는 누구였죠?

로버트: 사라 리와 결혼했죠. 동명의 빵 가게는 관계없습니다. 제 아내는 한국계 미국인이고 8년 전에 결혼했어요. 대학교 졸업 후에 서로를 만났죠. 아내는 석사 학위를 준비하고 있었고, 전 버펄로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대학교 입학 뒤에도 버펄로 한인 교회를 찾아서 사회적 교류를 할 수 있었죠. 제 아내도 한인 교회에서 만났고, 아내를 만난 첫날 집에 돌아와서 제 동거인들에게 아내와 결혼할 운명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삶에서 운명을 느낄 때가 있고, 이 운명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죠. 물론 제 아내를 놓고 저와 경쟁하던 다른 3명의 남성과 싸워서 이겨야 했으니 큰 성공이라고 볼 수 있어요.

팟캐스트: 다른 남성들과 경쟁해서 승리하면 더 교제 상대를 소중하게 여기게 되는 법이죠.

로버트: 그렇기는 하네요. 그래도 제 경쟁자들도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팟캐스트: 로버트 씨가 어렸을 때 한인 교회에서 좋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한인 교회와 사회를 찾으신 이유는 이해하는데, 로버트 씨는 한국어를 못하시죠? 거기에 빌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품었을 것 같은데, 한인 교회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셨네요?

로버트: 꽤 오랫동안 기독교에 대해서 반감을 품었죠. 사실 전 한인 교회에 가서 한국 사람들을 만나고, 한국 사회를 느끼고, 공짜 한국 음식을 먹었습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가지는 않았어요.

팟캐스트: 한인 교회에서는 항상 음식을 제공해주죠.

로버트: 네. 항상 음식이 있어요. 그래서 벗어나기 힘들죠. 항상 주변에 저를 잘 대해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전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고, 대학교 때는 주변에 두기 좋은 사람은 아니었어요. 사람은 보통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는 경우가 많아서 기억을 믿을 수 없지만,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저는 대학교 때 분노에 가득 차 있었고 그 분노를 세상에 뿜어내려고 했죠.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가 제가 한국어를 못한다고 하셨는데, 네 그렇죠. 한국어를 못하면서 한국인들 주변에서 지내는 한국계 입양아들은 자신이 한국인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물론 전 한국인이지만, 다른 한국인들이 저를 한국인으로 보지 않았죠. 그래서 한국인들도 입양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한국인들의 농담이나, 관련 정보를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에게 다가온 멋지고, 다정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눈치를 보고 저에게 농담을 설명해 주는 경우가 많았죠. 입양아는 입양된 나라의 사회에도, 본국의 사회에도 맞아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게 됩니다. 제가 대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이었죠. 카오미 씨의 질문이 제가 한국어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말이 삼천포로 빠졌네요. 

팟캐스트: 로버트 씨의 분노를 이해합니다. 로버트 씨의 분노가 자기 앞길을 망치거나, 자기 파괴적이라고 생각하셨나요? 

로버트: 제가 겪은 방치가 얼마나 흔했는지 모르지만, 방치 상태가 일상이 된 바람에, 평범의 기준이 아주 낮아졌죠. 그래서 결혼하고 나서 배울 것이 많았습니다. 제가 평범하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문제가 많았어요. 그걸 인식하고 고치려면, 제가 비인간적 고생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니 힘들었습니다. 제 과거를 재인식하고 뭐가 맞고 뭐가 틀렸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긴 시간을 보내야 했죠. 지금도 그런 과정과 절차를 거쳐서 사랑, 그중에서도 전체적인 사랑에 대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어른이 되었을 때, 제 마음은 스위스 치즈처럼 수많은 구멍이 뚫려 있었죠. 전체적으로 누굴 사랑하고 돌보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카오미 씨가 빌이 제가 기독교에 대해서 반감을 품게 했냐고 물었는데, 확실히 기독교에 대해서 반감을 품게 되었죠. 그 반감 중 일부는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제 경험에 따라서 하나님이 절 버렸다고 생각했어요. 전 버려지는 일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입양아에게 있어서 버려지는 일은 큰 트라우마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에게 가졌던 질문도 그랬죠.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 대학교 때 가진 분노의 뿌리를 찾아보면, 우주에 대한 분노였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개인적인 분노였고, 신에 대한 분노였죠. 하지만 신앙으로 만들어진 사회에서 활동하면서, 분노에 가득 찬 저에게 조건 없는 사랑과 도움을 주고, 용서해주며, 어떤 대가도 원치 않는 사람들을 만나니, 그 사람들의 신앙을 거부할 수 없었고, 저에게 신앙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세상에는 파괴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알았고, 제가 느끼고 있는 사회적 신앙과 사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팟캐스트: 로버트 씨가 만나게 된 한국계 이민자 사회, 아니, 로버트 씨가 찾아간 한국계 이민자 사회가 로버트 씨가 어렸을 때 느끼지 못했던 사랑과 가치를 느끼게 해줬군요?

로버트: 네. 제가 현재 퀸스에서 사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지역 교회에서 만난 사람 중 일부가 제가 크리스마스 휴가 때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들 집에 절 초대해줬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국계 집에서 지내면서 그 사람들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가족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느낀 사랑은 대단했어요. 제가 많은 가족을 가지게 된 느낌이었죠.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 그분들이 부모 역할을 해줬습니다. 말이 또 삼천포로 흘렀네요. 제가 가진 분노가 저를 다치게 했는지 질문하셨죠. 네 저를 다치게 했습니다. 제 청소년기에 자해했죠. 스트레스를 조절하기 위해서 몸에 상처를 내고는 했어요. 저 자신에 대한 분노였는지, 버림받은 고통을 조정하기 위한 행동이었는지는 모릅니다. 아마 둘 다 일지도 모르죠. 자신에게 벌을 주는 행위였지만 외로움을 관리하기 위한 행동이었어요. 물론 이러한 자해행위를 옹호하거나, 권장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 왼팔은 지금도 흉터투성이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런 사실을 밝히는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죠. 제가 살아남기 위해서 한 행동 중 일부이고, 저 자신이 느끼던 고통과 정신적 갈등의 일부였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로버트 씨가 느낀 정신적 고통을 물리적 고통을 통해서 풀었군요?

로버트: 네. 적어도 그 물리적 고통은 조절할 수 있으니까요. 물리적 고통은 왔다가 가죠. 생각해보면 파괴적이지만 동시에 편안한 느낌이 듭니다. 항상 조정할 수 없는 버림받았다는 고통, 외로움의 고통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적어도 물리적 고통은 자신이 고통을 가하고, 느끼고, 치유하는 단계를 관리할 수 있어요. 망가진 방식이긴 하지만 고통을 조정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물론 자해를 권장하지 않고, 이런 인식에는 큰 문제가 있죠.

팟캐스트: 자해를 얼마나 하셨죠?

로버트: 집에서 지내고 있을 때 자해를 시작했고, 1년에서 2년 정도 지속하다가 제가 이사를 나왔습니다. 다시 언급하긴 좀 그렇지만 히로키와 같이 지낸 시간은 희열로 가득 찬 시간이었죠. 

팟캐스트: 로버트 씨와 히로키 씨가 같이 연주하면서 자유와 행복을 만끽하는 광경을 보고 싶네요. 

로버트: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했죠. 그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았으니까요. 

팟캐스트: 그래서 그 입양 가족과 관계는 어떻게 됐죠? 결국, 관계를 진짜로 끊어 낼 수 있었나요?

로버트: 올해 내로 제 성을 바꾸게 되는데, 그게 제가 법적으로 그 둘과 관계를 끊어내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겠죠.

팟캐스트: 계속 칼라브레타 성에 복잡한 감정을 가져서 그 성을 유지하셨나요? 아니면 그 성에 대해서 다른 감정을 품어서 성을 유지하셨나요?

로버트: 이 질문이 제 삶의 전환점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4년 전에 빌이 여동생에게 가했던 학대를 밝히자, 빌과 지니, 그리고 저의 어린 시절에 대한 모든 감정적 연결이 끊어졌죠. 저의 어린 시절, 제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가족의 죽음을 추모해야 했어요. 저의 어린 시절과 가족은 저에게 있어서 진짜였습니다. 하지만 과거는 부서졌고 추억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 둘은 죽은 셈이었죠. 그러한 죽음의 단점은 장례식을 치를 수도 없고, 그들을 위한 추모를 할 시간도 없다는 점입니다. 한 2년 정도 우울했고, 제 한국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죠. 전 제 한국 이름도 몰랐어요. 나중에 중요해지는 사실이긴 하지만, 제 서류에 기록된 한국 이름은 이성수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이성수라는 이름 자체도 저와 관련된 사회복지사에게서 받은 정보였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라는 성도 주어진 성이고, 성수라는 이름도 주어진 이름이었죠. 그래서 진짜 이름이 없었습니다. 칼라브레타 가족이 준 성은 쓸 수 없지만, 제 진짜 이름은 아무도 몰랐어요. 제가 가진 정보는 단지 한국에서 입양될 때 주어진 K-86 서류 번호뿐이었습니다. 그게 제가 가진 진짜 정체성에 가장 가까웠죠. 그때부터 제 친가족을 찾아야 한다는 욕구를 느꼈어요. 제 진짜 이름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친부모 조사를 시작했죠. 그게 2년 전이었습니다. 이 팟캐스트를 듣고 있는 분 중 상당수는 알고 계시겠지만 아주 무섭죠. 자신의 삶에서 공포를 마주하면서 자기 자신을 위험에 노출하는 일이니까요. 친부모 조사를 안 한 입양아들에게도 조사를 안 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주 무서운 일이니까요. 누구도 그 조사를 하는데 용감하게 돌진하지 않죠. 조사를 진행하고, 어떤 경우에는 부모를 찾지 못한 입양아들을 칭찬하고 싶어요.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용감한 사람들입니다. 그 조사를 하는 데만 큰 용기가 필요하고 사람들이 그 용기를 인식해야 하죠.

팟캐스트: 유기가 입양아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공포인데 그걸 직접 마주하고 고통을 다시 겪어야 하니까요. 로버트 씨 말대로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로버트: 어렸을 때부터 꾸던 꿈은 무언가 저를 쫓아오는 악몽이었습니다. 항상 돌아서서 뭔지 바라보기 무서웠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한 악몽들이 버림받는 일에 대한 공포이고, 아주 무서운 일이예요. 전 제 친부모 조사를 하기 위해서 배서니 입양 기관을 통해 홀트아동복지회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홀트아동복지회가 몇 달 뒤에 저에게 다시 연락해서 저와 관련된 정보가 전혀 없고, 제 친부모님이 어떤 정보도 남기지 않았다고 했죠. 그 이메일을 받고 나니 제가 또 다른 부모님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친부모님을 찾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하지만 실제로 제가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자, 친부모님의 부고를 들은 기분이었어요. 다시 슬픔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입양아들이 유독 나쁜 경우에 놓이는데, 이러한 슬픔을 관리하기 위한 사회적 절차가 없기 때문이죠. 만약에 가족이 죽으면 그 가족의 장례식을 하고, 가족을 잃게 된 일을 받아들이고 끝을 낼 수 있어요. 하지만 친부모 조사를 했는데, 친부모를 찾을 수 없거나, 그들이 입양아를 만나려고 않으면 그 슬픔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슬픔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고민했어요. 제가 현재 이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AKA(Also-Known-As, 뉴욕시 기반 국제 한국계 입양아 단체)를 통해서 여러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이 팟캐스트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인데, 한국 입양 기관이 거짓말을 한다는 이야기를 여기서도 들었거든요. 여러 입양아가 입양 기관이 자신들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저도 그런 경우일지도 모르고, 홀트아동복지회가 저에게 말하지 않은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동권리보장원(NCRC)을 통해서 한국 가족 조사를 진행했죠. 그쪽에서 따로 조사를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감정적 혼란을 겪어야 했죠. 다시 가족을 찾지 못했다는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이게 2019년 겨울에 일어났던 일이었어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 조사를 하기 위해서 제 서류를 한국에 보냈죠. 

로버트: 친부모 조사를 하던 도중에 제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신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진짜 목사가 되었어요. 제가 목사가 된 일에도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있죠. 제가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던 날의 아침이었습니다. 제가 일어나서 이메일을 확인해보니 아동권리보장원을 통해서 제 아버지를 찾았다는 연락이 들어와 있었어요. 제가 15분 뒤에 사람들 앞에서 연설해야 하는데 이 정보를 알게 되었죠. 그래서 그 자리에 앉아서 울었습니다. 서럽게 운 것도 아니고 모든 힘이 빠져서 그냥 거기 앉아서 울었죠. 감정적인 소모가 너무 크기도 했고, 서럽게 울고 싶었지만, 힘이 빠져서 그냥 앉아서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장원에서 조사를 하고 싶냐 물었고, 전 당연히 동의했죠. 첫 편지가 보냈는데, 그 집에 사람이 없어서 반송됐다고 하더군요. 보장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고, 다시 편지를 보내겠다고 연락을 했습니다. 제 친아버지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고, 다시 반송됐죠. 보장원에서는 3번 이후로는 우리가 더 연락할 수 없고, 이 정보를 경찰에 넘겨줘야 하고, 제가 다른 방법으로 조사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전 다시 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3번째 편지를 보냈을 때 제 아버지와 연락이 닿았고, 그 소식을 제가 연설 이전에 받았던 이메일로 받았죠. 이메일에는 제 아버지가 보장원에게 연락을 해왔고, 절 기억한다고 했죠. 아버지가 울면서 저에게 미안하다고 하셨고, 절 잊은 적이 없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둘 다 살아 계시고, 동생도 두 명이나 있다고 했어요. 그걸 듣고 나니 시간이 멈추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세상이 뒤집히는 기분이었죠. 이게 2020년 1월이라 아직 COVID-19가 세상을 휘감기 전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어요. 아버지가 문학 교수는 아니지만, 아버지가 쓴 편지는 따뜻했습니다. 아버지가 절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우리가 서로를 찾아서 기쁘고, 같이 미래를 공유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편지에 쓰여 있었어요. 

로버트: 아버지가 저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 2가지 흥미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왜 자꾸 보장원이라는 곳에서 편지가 오는지 몰라서 편지를 열어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3번째 편지를 열어봤고, 거기에 1986년생 이성수 씨가 가족을 찾고 있는데 정보를 안다면 이 번호로 연락을 달라고 쓰여 있었다고 하더군요. 1986년에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맞는데, 이성수는 아버지의 성함이었죠. 제가 쓰고 있던 한국 이름인 이성수가 제 아버지의 성함이었습니다. 제가 아버지에게 답장할 때, 아버지가 이렇게 사과하시지만, 아버지는 제 이름으로 곁에 같이 있었다고 편지를 썼죠. 제가 제 정체성의 일부로 붙잡고 있던 제 이름이 아버지와 연관되어 있었어요. 제가 알게 된 또 다른 정보는 병원이 저를 고아원에 넘겼을 거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머니가 제가 태어난 사실을 확인하고 제 손가락과 발가락을 보고 간호사에게 넘겼는데 그게 어머니가 저를 본 마지막이었죠. 병원에서 제 몸 상태가 안 좋다고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고 하더군요. 어머니가 절 임신하고 계셨을 때 어머니 건강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어머니에게 제가 죽었다고 하고, 병원에게 장례 절차를 맡기는 서류를 작성하게 했죠. 보통 부모들은 죽은 아기를 받아서 따로 장례를 치르려고 않으니까요. 그래서 제 가족 전체가 제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슬퍼했습니다. 제가 장남이었는데 태어나자마자 죽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게 제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34년 뒤에 자기들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놀라셨죠. 

로버트: 어머니가 제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해서 저에게 연락하는 데 3달이나 걸렸습니다. 어머니는 불교 신자인데, 절 위해서 불교에서 아이가 죽고 난 뒤에 하는 추도식을 세 번이나 하셨어요. 저를 놓아주기 위해서 해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훨씬 더 빠르게 연락을 하셨죠. 그리고 어머니와 화상 통화를 할 수 있었어요. 아동발달 심리학자가 말하길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자라지만, 태어나고 나서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세상을 인식한다고 하죠. 사람들이 가진 트라우마 대부분이 우리를 보고 웃는 어머니의 얼굴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고 어머니 얼굴에서 제 얼굴을 봤어요. 제가 어렸을 때 가지고 있던 아시아계 사람들의 사진이 아니라 진짜 어머니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게 됐습니다. 제 어머니는 대단하고 현명한 여성이죠. 제 얼굴을 어머니 얼굴에서 보게 되니 그걸로 충분했어요. 그리고 COVID-19가 전 세계를 덮쳤습니다. 어머니와 화상 통화로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지금까지 아버지의 이름을 써왔으니 어머니가 저에게 새 이름을 지어 달라고 했어요. 어머니가 직접 조사를 해서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제 강제입양으로 인해서 고통을 겪은 사람 중에서 어머니가 가장 깊은 고통을 느끼셨으니 어머니가 절 다시 받아들일 기회를 드리고 싶었어요. 제 한국 이름은 이한일입니다. 하늘이 아니라 한일입니다. 그리고 제 성도 리로 바꿀 예정이에요. 제 생일도 서류에 적혀 있던 생일과 달랐습니다. 제 이름도 달랐죠. 35세에 자기 생일과 자기 이름을 알게 되는 경험은 뭐라고 할 수 없었어요. 다시 입양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아예 입양을 취소하고 다시 복귀하는 느낌에 더 가까웠습니다. 제 친가족이 진짜 가족이라고 느낄 수 있었어요. 이제 매주 연락을 하죠. 어머니에게는 적어도 매주 한 번 연락을 드리고, 제 형제자매들과도 매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다시 가족을 찾은 셈이에요. 제가 가족들에게 운명과 확률을 뛰어넘어서 죽음에서 되돌아간 셈입니다. 제가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생각과 기독교로 다시 이야기가 돌아오게 되네요.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했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죠. 제 고통을 정당화하고 축소하려는 행동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삶이 이어져 있고, 고통이 하나님의 이야기 중 일부라면, 우리가 세상에서 시련을 겪는 이유는 하나님의 곁에서 영원히 평온을 찾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그런 경험을 조금씩 한다고 생각하고, 제가 운이 좋게도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아주 대단한 이야기이네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확률의 이야기기도 합니다. 어떤 날에는 어디에서 잘지도 몰랐는데, 역경을 넘어서 결국 그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간 셈이니까요. 

로버트: 가족과 같이 제주도로 여행을 간 적이 있어요. 제주도에 가 보셨는지는 모르지만, 밤에 오징어 어선들이 바다로 출항합니다. 그리고 조명을 켜서 오징어들을 유인하죠. 막 해가 질 무렵에 제주도의 상공에서 바다에 불이 켜지는 아주 아름다운 광경을 봤어요. 그 광경을 보니, 제가 아주 오랫동안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바다에 저와 같은 빛들이 같이 떠 있고,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주 무섭고 두려웠던 광경이 아름답게 보였죠. 바다에서 혼자 표류하던 저 주변에 이제 가족이 있었어요. 제가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을 때 이야기입니다. 인천공항에 내리기 30분 전에 좌석에 누워 있었어요. COVID-19 사태 덕분에 자리들이 비어 있었고, 밤이라서 불이 꺼져 있었죠. 공중에 뜬 채로 어둠 속에 아이처럼 웅크려 있었어요. 한국에 도착하면 어머니를 만나게 될 예정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두 번째 탄생과 가장 가까운 시점이라고 생각했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고, 그 과정을 기억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팟캐스트: 분노도 느끼셨나요? 부모님에게서 35년간 강제로 떨어지게 되어서 분노하셨나요?

로버트: 남동생이랑 여동생의 사진을 봤을 때 감정이 가장 격해졌죠. 제 여동생은 저보다 한 살 어려서 저와 세대가 비슷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자랐다면 비슷한 여동생과 비슷한 생활을 했겠죠. 동생들의 생활 광경을 사진으로 보니 사진 안으로 들어가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죠. 대신 어머니가 제가 가지고 온 어렸을 때의 사진을 가족 앨범에 넣어서 가족 앨범을 꾸미셨어요. 그래서 지금 보면 가족 앨범에 제 사진도 끼어 있어서 기쁩니다. 질문으로 돌아가면, 제가 느낀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좌절감이었어요. 과거로 돌아가서 어머니, 아버지가 싸우고 무서워할 때 같이 있고 싶었죠. 부모님이 제 고등학교 입학 때 같이 있었으면 했고, 그분들 곁에 있었으면 했습니다. 시간이라는 벽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제 이모가 해준 말이 있죠. 거기 있었을 때 제 조부모와 삼촌, 이모, 고모들을 만나는 대단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분들을 만날 때 이모가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한일아. 네가 만약에 여기 남아 있었다면, 너희 부모님이 아들 한 명으로 만족해서 여동생과 남동생이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관점이 또 바뀌었죠. 커다란 모순이었어요. 제 한국의 생활과 동생들, 둘 다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여동생과 남동생은 둘 다 대단한 애들이고 전 그 애들을 사랑해요. 그 둘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죠. 그런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로버트: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 어머니와 같이 14일 동안 격리되었어요. 그 격리 기간은 전혀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대단한 경험이었죠.

팟캐스트: 로버트 씨가 한국에 가족이 있으니 따로 격리되지 않고 바로 가족과 만날 수 있었군요?

로버트: 네. NCRC가 홀트와 같이 가정 격리가 가능하도록 도와줬죠. 홀트가 저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도움이 됐던 때였습니다. 홀트아동복지회를 깎아내리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홀트가 보내준 서류 중 유일하게 그 서류가 제가 한국 가족과 진짜 가족이라는 점을 증명해줬죠.

팟캐스트: 홀트가 왜 아무런 정보가 없다고 했는지, 왜 그런 정보 오류를 냈는지, 서류를 잘못 읽었는지 질문하지 않았나요? 어떻게 병원이 로버트 씨를 매매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았나요?

로버트: 우선, 제가 아는 일은 이게 저만 아니라 다른 입양아들에게도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한 10년 전에 고아 판매망을 한국에서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한국 아이들을 국제 입양시켜서 한국 경제가 큰 이득을 봤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겠죠. 제 납치와 매매가 그 이야기에 맞아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상품에서 부당함의 대상으로 자신의 인식을 바꾸는 일은 어렵죠. 현재 저는 제 시작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이야기는 부당함과 잔혹함에서 시작했으니까요. 적어도 제도에 대한 관리가 부족했다고 생각하죠. 어머니는 병원에 여러 번 돌아가서 제가 어디에 묻혔는지 질문했습니다. 병원은 어머니가 서류를 작성했으니 제가 어디에 묻혔는지 알 권리가 없다고 했죠. 제 부모님은 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고 노력했었는지만 알 수 없었어요. 이 일이 일어난 병원은 대구적십자병원이었는데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병원입니다. 인신매매 관련 스캔들인지는 모르지만 스캔들때문에 문을 닫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80년대에 이런 작은 병원들에서 납치와 인신매매가 일어났다고 하더군요. 제 부모님이 그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병원들은 주로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영업했고, 제 부모님은 그때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으니까요. 부모님이 사실을 알아도 병원에 맞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부모님을 상대로 이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서류를 작성하게 만들어서 관련 권리도 빼앗았군요. 홀트는 뭐라고 했나요?

로버트: 홀트에게는 이런 추궁을 하지 않았어요. 홀트에 대해서 너무 화가 나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하죠? 우리 가족의 삶 자체가 뒤집혔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면 멈추게 하고 과거의 부정행위를 밝히는 일이었어요. 과거의 부정행위 고발은 생각해볼 예정입니다. 그 부정행위를 고발할 방법이 있다면 그 길을 확인해보고 싶죠. 하지만 지금은 이 고통을 받아들이고 제 새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 집중하고 싶습니다. 

팟캐스트: 남동생과 여동생이 로버트 씨를 형이나 오빠로 부르기 시작했나요?

로버트: 네. 그 둘이 저를 형이나 오빠로 불러준 순간 음악을 들은 기분이었죠. 둘 다 저를 빠르게 받아들여 줬어요. 제 친가족은 아주 따뜻하고 멋진 가족입니다. 아버지는 최소주의적인 맞춤 가구를 만드는 목수시고, 어머니는 레스토랑을 운영하십니다. 제 여동생은 신생기업에서 일하고, 제 남동생은 대구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죠. 제 가족이 이렇게 성공한 모습을 보니 아주 자랑스러웠습니다. 제 어머니와 적은 시간을 같이 보냈는데도 서로 비슷하니 아주 이상하면서도 재밌죠. 

팟캐스트: 어머니와의 공통점을 몇 개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로버트: 우리 둘 다 외향적이고, 사교적이면서, 친구를 만들 수 있고, 사업가이죠. 예술적인 재능이 있고, 전화와 키를 놓은 곳을 잊어버리기도 해요. 그래서 집에서 나갈 때마다 우리 핸드폰을 찾으러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핸드폰을 까먹었는지 묻죠. 어머니가 요리하실 때 다섯 가지 요리를 동시에 시작하셔서 모든 요리를 동시에 진행하는데 제가 일하는 방식과 비슷하죠. 물론 저는 시작한 모든 일을 끝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문제가 생깁니다. 물론 아버지와 닮은 점도 많아요. 아버지는 B형이고 어머니는 A형이고 전 AB형이죠. 제 부모님의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전부 물려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제가 어머니를 더 닮았다고 하시죠.

팟캐스트: 가족과 만난 지 1년 정도 지났나요?

로버트: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그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지만, 이 만남이 로버트 씨를 바꾸셨다고 생각하나요? 바꿨다면, 어떤 식으로 로버트 씨의 삶을 바꿨죠?

로버트: 네. 제 삶을 바꿨습니다. 제 정체성을 꽃병으로 묘사한다면, 여전히 깨져 있고 망가져 있지만, 이제 그 꽃병에 아름다운 꽃들이 꽂혀 있죠. 적어도 제가 묘사한다면 그런 느낌이에요. 여전히 내면의 버릇과 정신적인 문제는 존재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문제에 대한 답이 훨씬 빠르고 쉽게 나오고, 제 삶에서 그 문제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제 삶에 있어서 큰 변화를 하나 꼽으라면…. 잘 모르겠지만, 가족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한다는 점이죠. 제 부모님의 건강에 대해서 걱정하고, 제 동생들이 더 좋은 직업을 가지기 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가족에 대한 걱정과 곤란을 봤지만, 지금까지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사람들이 왜 그런 가족에 대해 생각을 하는지 알았지만, 마음속 깊이 이해하지는 못했죠. 가족에 대한 감정과 걱정을 이해하게 되자 상당히 충격적이었어요. 부모님이 나이가 드시면 그분들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가족에 대해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하죠. 모든 일에 최대한 감사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친부모와 이런 관계를 맺고 다시 만날 수 있는 입양아들은 아주 적죠. 그래서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짜증이 나거나 답답한 일도 제가 감사할 수 있는 일이 되죠. 조금만 생각하면 몇 년 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아버지가 세 번째 편지를 열어보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했겠죠.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로버트 씨. 사람들이 로버트 씨와 연락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죠?

로버트: Y_o_o_l_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습니다. 또 hanillee0507@gmail.com 으로 이메일을 보내셔도 되고 페이스북에 Robert Hanil lee 계정이 있으니 페이스북 DM으로 연락을 주시면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어요.

시즌 4, 에피소드 20: 재클린 웰스

Audio available March 30, 2021 at 7 am ET.

한국계 미국인 입양아 재클린 웰스 (33세), 한국 이름 최예나 씨는 음악가, 장신구 디자이너, 한국계 입양아 사회 지도자의 삶에 대한 정보를 인터뷰를 통해 공유한다. 재클린 씨의 삶에 관한 이야기와 한국 가족과의 재회, 모든 사건에 대한 감상을 들어보자. 

재클린: 제 이름은 재클린 웰스입니다. 뉴욕시 브루클린에서 살고 있고 매사추세츠주 출신이죠. 한국 이름은 최예나에요. 장신구 디자이너 겸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국제입양아 단체인 Also-Know-As(AKA)의 이사회에서 활동하고 있고 현재 33세예요. 제가 19살일 때 제 수양 가족과 고국 순방 계획을 통해서 한국에 방문할 수 있었죠. 최초로 많은 한국계 입양아들을 만났고 같이 한국에 방문했습니다. 한국에서 많은 사회복지사가 만났고 데브라가 그중 하나였어요. 데브라와 제 양부모님이 제 친어머니를 찾아보라고 권유했죠. 대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걸고 데브라와 같이 편지를 작성하고 번역해서 제 사진, 가족 사진, 친구들 사진을 첨부해서 보냈어요. 주변 사람들이 연락이 온다면 좋겠지만 못 받을지도 모르니 희망을 걸지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저는 19살이었고, 매우 미국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죠. 제 아시아계 정체성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9살 청춘일 때 삶은 복잡하고, 전 정체성을 구축하지 않은 상태였어요. 그래도 지금의 저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죠. 

팟캐스트: 재클린 씨에게 음악적 영향을 끼친 음악가들은 누구였나요? 19살 때 주로 들은 음악가들은 누구였죠? 

재클린: 이모(EMO)계나 하드코어계 음악에 빠져있었죠. 피오나 애플, 라디오헤드, 포셀린 포어헤드, 데스캣 등의 밴드를 가장 즐겨 들었어요. 제가 가장 좋아한 밴드는 브라이트 아이즈였습니다. 우울한 분위기가 드는 음악이라면 다 좋아했죠. 유명한 밴드 중심으로 들었던 것 같아요. 음악은 저에게 인생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뜻과는 다르게 대학교에서 음악 전공이었어요.

팟캐스트: 현재는 밝은 성격인데 청소년기에는 꽤 우울한 성격이셨나요?

재클린: 젊었을 때도 밝은 성격이었지만 외양적으로는 EMO였다고 봅니다. 적어도 3년 동안은 검은색 옷만 입고 다녔죠. 물론 지금도 검은색 옷만 입고 다니긴 하지만, 이건 실용성의 문제지 취향의 문제는 아닙니다

팟캐스트: 고수(Goth, 미국의 패션 유행 중 하나)셨나요?

재클린 : 고스보다는 EMO에 더 가까웠어요.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 시절 매사추세츠 출신이라면 차이점을 알죠. 하지만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설명하자면 고스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 사악하게 좋네! (wicked good!) 같은 단어도 사용하셨나요?

재클린: 전 사악하다는 말을 평범하게 사용해요.

팟캐스트: 아주 흥미롭네요. 한국 여행에서 양부모님이 친부모 조사에 더 적극적이셨다고 하셨죠?

재클린: 우리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왔으면 친부모 조사를 진행해보자! 이라는 느낌이었어요. 제 부모님은 좀 더 나이가 많으시니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계셨죠. 하지만 전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다른 입양아들과 달리 친어머니 조사 자체를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입양아 대부분과는 달리 친부모 조사와 친부모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친부모 조사는 되면 좋지만 안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굳이 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죠.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제 삶을 바꾼 아주 중요한 일이었죠. 하지만 그때는 친부모 조사의 의미 자체를 잘 몰랐고, 지금도 저에게 직접 중요한 일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아요. 

팟캐스트: 제가 보기에는 재클린 씨와 양부모님의 관계가 아주 가까워 보였습니다. 많은 입양아는 자신의 삶에서 뭔가 부족해서 친부모 조사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죠. 재클린 씨는 그러한 부족함이 없어서 조사에 적극적이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재클린: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친어머니에게서 한국어로 된 답장을 받았습니다. 그 편지에는 제가 어디에서 왔고 왜 저를 입양 제도에 맡겼는지 이야기가 적혀 있었어요. 저에 대한 아주 좋은 이야기가 적혀 있었고 저에게 가족사진도 보내주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에 관한 이야기를 가족에게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만나기는 어렵다고 연락을 해왔죠. 어머니가 이야기를 공유할 정도로 편한 상황이 아니었어요.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아서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했죠. 사진을 받을 수 받아서 기뻤습니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느꼈어요.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느꼈습니다. 오 이 사진들 대단하네. 하지만 어머니가 만나고 싶지 않다니 별수 없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때는 그랬죠. 주변 사람들이 절 보고 화나지 않았는지 걱정했지만 전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왜 화나지 않았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팟캐스트: 사진을 보니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재클린: 가족이 전부 저와 닮았더군요. 특히 형제들은 그렇죠. 제 두 남동생은 저보다 5살에서 7살 어린데 쌍둥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사진을 받았을 때는 12살이었고, 그 애들은 19살이었지만 둘 다 저와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팟캐스트: 잠깐만요, 가족이 전부 있었는데도 재클린 씨가 입양되었다고요?

재클린: 나중에 더 많은 정보를 받았지만 제가 처음으로 받은 정보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부모님은 고등학교 때 서로를 만나서 사귀게 되었고,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키웠다고 해요. 그리고 제 친아버지가 군대에 입대했죠. 친아버지가 입대하고 난 뒤에 친어머니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친아버지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낙태를 하기로 결정을 내렸죠. 적어도 제가 들은 이야기는 그래요. 하지만 친어머니가 낙태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이를 낳기로 한 뒤에 친아버지를 면회하러 갈 때 긴 코트 등을 입어서 임신 여부를 숨겼다고 하더군요. 친어머니가 말랐기 때문에 숨길 수 있었다고 생각하죠. 처음부터 친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친어머니가 저를 낳은 뒤 2일 만에 제가 입양 제도에 맡겨졌죠. 친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있던 2일 동안 제가 입양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팟캐스트: 지금은 아버지가 재클린 씨의 입양에 대해서 알지만, 친어머니가 친아버지에게는 나중에 알려주신 모양이군요?

재클린: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래서 아무도 몰랐죠.

팟캐스트: 재클린 씨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숨겼군요?

재클린: 제 할머니 할아버지를 포함해서 모두에게 숨겼다고 합니다. 

팟캐스트: 재클린 씨를 낙태할 예정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겠네요?

재클린: 이런 상황이나 다른 상황에서 저는 다른 사람 처지에서 생각해요.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친어머니 입장이었다면 저도 낙태를 하려고 했을 겁니다. 19살 미혼에 교제하고 있는 남자를 믿지 못한다면 저도 낙태를 하려고 했겠죠. 친어머니를 이해합니다. 특히 한국이라면 더더욱 그래요. 나중에 아버지가 그 낙태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자 그 이야기도 말이 된다고 생각했죠. 아버지도 19살 미혼에 군대에 징병 되어 있고 거기에 양가 부모님의 반대까지 있었으니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인 반응이었을 겁니다. 거기에 저는 두 분을 잘 알지 못하거든요.

팟캐스트: 거기에 임신 사실이 알려졌다면 양가 부모님이 둘을 갈라놨을지도 모르고요.

재클린: 그렇죠. 어머니가 임신을 지속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고 봐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죠. 저를 입양 제도에 맡겨서 큰 죄책감을 느끼고 사셨다고 합니다. 지난 30년간 그 사실이 어머니를 괴롭혀 왔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제 남동생도 저에게 어머니가 매일 교회에 가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모두 어머니가 아주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가족들은 왜 그런지 몰랐죠. 어머니는 술·담배를 안 하십니다. 반면에 제 친아버지는 소주 두 병 마시는 애주가에 애연가예요. 어머니가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죄책감에 종교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았죠. 다른 문제는 어머니와 호텔에서 최초로 만났을 때 어머니는 제가 분노로 차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대중매체가 입양아를 묘사할 때 입양아들을 분노에 가득 차 있고 복수심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로 묘사한다고 어머니가 이야기해줬어요. 물론 그런 경우도 있죠. 하지만 어머니가 그러한 이유로 저를 만나기 무서워했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입양아들이 한국 대중매체에서 살인범같이 묘사된다는 말인가요? 한국에 돌아와서 가족을 찾아내려고 하니까요?

재클린: 어머니가 대중매체, 특히 다큐멘터리를 많이 봤는데 거기 나오는 입양아들 대부분이 분노하고 성격도 어두웠다고 합니다. 사실 저도 화가 많이 난 적도 있고 성격도 어두웠던 적이 있죠. 하지만 친어머니를 상대로 분노한 적은 없어요. 어떤 사람들이든 분노하고 어두울 수 있죠. 제 남동생들도 힙합을 좋아하고 1명은 문신도 하고 있는데도 입양아는 아니니까요. 어쨌든 결론만 이야기하면 종교가 확실히 영향을 끼쳤고 만약에 어머니가 저를 계속 데리고 계셨다면 힘들었을 겁니다. 친어머니가 생각해보셨는데 아주 힘든 삶이 예상되었다고 하셨죠. 돈도 없고, 미혼모, 아버지와의 관계도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에 가난과 한국이라는 배경까지 있었죠. 그래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그리고 한국 방문 이후에 미국에 돌아와서 음악계에 입문했나요?

재클린: 네. 저는 3살 때부터 음악에 심취해 있었죠.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작곡을 하고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어요. 고등학교 때는 음악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300명 정도의 아이들과 함께 음악 수업을 받았고, 제 삶의 일부였죠. 오히려 제 여행 이후에 음악을 잃었어요. 여행 때문이 아니라 여행 이후 대학 생활이 매우 백인적인 경험이었기 때문에 뭐가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몰랐기 때문이죠. 제가 젊기도 했고 그때는 아직 사람들에게 문화적 존중이나 자각이 부족했어요. 요가를 배우거나,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는 문화가 전혀 없었죠. 그런 쪽에 관심이 있어서 사람들이 직접 찾아보지 않으면 접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하는 일을 따라 하기 바빴고, 제가 사귀는 친구들은 삶을 최대한 즐기면서 살고,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대학교 경험 자체가 길을 잃은 느낌이었죠. 음악을 조금 하긴 했지만, 대학교 생활을 하면서 저 자신을 잃어버렸고 지금까지 저 자신을 다시 찾아내려고 노력해온 느낌입니다. 친구 몇 명이 자기 자신을 관리하지 않고 막 놀았어요. 노스이스턴대학교(보스턴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좋은 대학교이긴 했지만, 음악 전공이라 그렇게 학점 따기는 어렵지 않았죠. 그런 대학교에 다닐 수 있어서 운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편하게 대학교에 다닐 수 있어서 부끄럽죠. 

팟캐스트: 삶을 최대한 즐기면서 사셨군요?

재클린: 좋게 즐기지는 않았지만, 네. 확실히 삶을 즐기면서 살았죠.

팟캐스트: 재클린 씨 자신이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재클린: 네 그렇죠. 이유는 모르지만 제 내부에 EMO적인 면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는 당연히 그렇지 않았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제 삶의 대부분 동안 저는 사악하게 빛나면서 동시에 사악하게 어두웠다고 생각해요. 행복하고 밝은 면을 가지면서 동시에 어두운 영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재치가 넘치고, 아름다운데 남자애들이 아주 재클린 씨를 좋아했겠군요?

재클린: 아뇨.

팟캐스트: 이성 교제와 관련된 질문인데, 그 시기에 남자애들에게 관심이 있었나요? 교제는 자주 하셨나요?

재클린: 우리가 친구라서 관련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전 사랑 자체를 좋아해요. 실연, 아름다움, 강렬함, 짝사랑 등 사랑의 모든 부분을 좋아하죠. 전 사랑이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정 중 가장 강렬한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만 그렇게 느낀다고 해도, 누구를 보고 첫눈에 반하는 느낌은 예술가, 음악가, EMO에게는 놀랍고 찾기 어려운 감정이죠. 동시에 진정한 사랑을 찾는 일은 몹시 어렵지만 다양한 일에서 사랑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항상 사랑에 매료되었고 관련 음악에도 끌렸습니다. 

팟캐스트: 짝사랑이나 사랑 자체를 하는 일에 중독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재클린: 네 확실히 사랑에 미쳐 있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현재는 제 과거와 현재의 괴리가 깊어졌어요. 과거와 지금의 저는 다릅니다. 물론 전부 제 일부이고 제 과거를 없애는 일은 아니지만, 제가 바뀌고 발전했죠. 모두가 그렇게 변화하지만 전 지난 몇 년 동안 바뀌려고 노력했습니다. 단순히 변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과거를 통해서 배우려고 했어요. 대학교 때는 어렸고 주변 사람들을 따라 바뀌었죠. 그래서 주변의 변화에 따라 자기 자신을 맡기니 이상한 인간관계에 휘말렸습니다. 지금은 제가 어떤 변화를 할지 직접 정해요. 그래서 휘말리지 않고 목적을 가지고 살죠. 제가 가장 처음 데이트를 했던 때는 13살, 중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저에 대한 많은 요소가 바뀌었는데, 흥미롭게도 저는 여전히 고향 마을의 사람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어요. 전 20살 때까지 계속 같은 마을에서 살았죠. 

-재클린의 음악-

팟캐스트: 입양아들은 백인 지역에서 자라나면 아시아계라서 맞아 들어가지 않거나 차별당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죠. 재클린 씨도 그렇게 느꼈나요, 아니면 사람들의 일부로 맞아 들어간다고 느끼셨나요?

재클린: 우선 가장 마지막 질문부터 답하자면, 제가 6학년부터 고등학교, 대학교부터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은 바뀌어 왔습니다. 제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이니 지금 질문과도 연관이 있어요. 제가 자라면서 살던 마을에서 몇 안 되는 아시아계로서 제가 다르다는 사실을 6학년 때 알았습니다. 제 차이점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6학년은 사랑과 연관된 시기였죠. 남자애들에게 사랑받고 싶었지만, 그 애들은 백인 여자애들을 좋아했습니다. 물론 절 좋아해 주는 애들이 있긴 했지만 전 한 남자애를 좋아했어요. 하지만 그 남자애는 제가 4학년 때 제 가장 친한 친구를 좋아한다고 저에게 이야기했죠. 귀여운 백인 여자애였는데, 사실 아직도 친한 친구입니다. 우리가 그 애에게 학교에서 저와 제 친구 중 누가 마음에 드는지 물어보고 생각해보고 전화해 달라고 했죠. 그 애가 우리에게 동시에 전화해서 제 친구가 좋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걸 듣고 나니 제가 아시아계라서 거절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애가 아시아계를 싫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죠. 제가 아시아계라 다른 여자애들만큼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8살에서 10살 사이였으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죠. 사실 인종 문제도 아니었지만 전 오랫동안 그렇다고 느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우울했지만 그렇게 우울할 일도 아니었죠. 어렸을 때의 경험이라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중국이라는 단어만 꺼내도 몸에서 땀이 나고는 했어요. 6학년 때는 매우 소심했죠. 하지만 제가 중학교 3학년이 되니 무언가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페티쉬적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아시아계 여성이라는 정체성 자체에 오랫동안 널 사랑해 줄게- 이라는 식으로 성적인 의미가 부여되었죠.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중학교 3학년 이후로 제 아시아계 정체성에 어느 정도 편안함을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아시아계 학우들이 더 많이 늘어났죠.

팟캐스트: 청소년기에는 이런 성적 신호에 어떤 반응을 보이셨나요?

재클린: 그러한 표시가 어떤 뜻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때는 인식 자체가 어려웠죠. 미투 운동 이전이었고, 인종 차별 인식 운동도 없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지난주 애틀랜타 총기 난사 사건 이후로 계속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비탈길에서 굴러떨어지는 돌과 같이 그러한 탈의실에서 주고받는 농담에서 시작해서 실제로 일어나는 비극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았죠. 사람을 물건처럼 취급할 뿐만 아니라 아주 무례한 일입니다. 칭찬하는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죠. 그렇게 시작해서 비인간적 취급으로 진행하다가 살인으로 발전합니다. 물론 제가 이러한 주제에서 전문가는 아니지만 인종 차별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죠. 아주 힘든 한주였어요.

팟캐스트: 재클린 씨가 교제했던 남자들의 변화를 보면 재클린 씨의 변화를 볼 수 있다는 말을 하셨는데…. 그게 재클린 씨가 하고 싶었던 말인가요?

재클린: 네 저와 제가 만나는 남자는 같이 변화했죠. 현재는 교제 자체가 줄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대학교 때에는 항상 누군가를 만나고 다녔어요. 지금은 제가 아주 마음에 든 사람이 아니면 교제 자체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제가 교제할 상대의 진실함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좋은 판단인지는 모르지만, 서로가 같은 목적으로 만나는지도 확인하죠. 전 지금 33세니까요. 21세일 때 마냥 행동할 수 없습니다.

팟캐스트: 그렇죠. 다른 질문이 있는데 음악을 다시 시작하신 때가 언제였나요?

재클린: 딱히 음악을 그만뒀던 적은 없어요. 항상 음악과 함께했죠. 하지만 파도와 같이 음악도 높은 곳과 낮은 곳이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친어머니나 친가족을 위한 음악을 작곡하신 적이 있나요? 어떤 음악을 작곡하셨고, 하시고 싶으셨죠?

재클린: 아주 흥미로운 질문이네요. 제 친어머니를 위해서 “웃음(Laugh)”이라는 노래를 작곡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작곡 자체는 제 생각이 아니었어요. 이희선 씨의 생각이었죠. 희선 씨는 3개의 구절을 작성해왔습니다. 하나는 길을 잃은 입양아 래퍼의 관점, 두 번째 구절은 친어머니의 관점, 그리고 3번째 구절은 양어머니의 관점을 반영하는 가사였죠. 희선 씨가 이 구절을 위한 후크를 써줄 수 있냐고 했죠. 후크는 구절들 사이에 들어가는 후렴구인데, 저한테 8마디에서 16마디 정도의 후크를 써서 이 세 목소리를 묶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걸 듣고 나니 아주 기본적인 해답이 떠올랐죠. 말로 하면 그렇게 멋져 보이지는 않지만, 사랑입니다. 그 셋은 전부 사랑, 이해, 속죄를 원하니까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후크를 쓰는 일틐 아주 쉬웠습니다. 아주 빠르게 작성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 노래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세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사랑으로 노래가 마무리되어서 슬픔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요.

-노래 웃음(Laugh)-

재클린: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예요. 제가 작곡한 노래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노래 중 하나이죠. 희선 씨가 쓰자고 한 노래였지만 아주 대단한 노래라, 제 친어머니에게 이 노래를 들려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친어머니가 아주 좋아하셨거든요.

-노래 웃음(Laugh)-

팟캐스트: 왜 친어머니에 대한, 아니면 친어머니를 위한 노래를 작곡하지 않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수많은 입양아 음악가들이 한번은 다루는 주제인데 말이죠.

재클린: 우리가 이미 이야기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한번 말했지만 저는 친어머니에 대한 큰 갈망이 없었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노래를 쓰고 싶다는 갈망이 없었죠. 2번째 이유는 제가 주로 쓰던 음악은 사랑 노래이거나 실연 노래였습니다. 둘 다 제가 쓰기 좋아하는 주제이죠. 많은 사람이 제 우울한 노래들만 듣고, 제가 우울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절 아는 사람들은 제가 자신이 만난 사람 중 가장 밝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죠. 전 음악가가 노래를 만들 때 자신의 시간 중 일부를 꺼내서 만든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죠. 전 노래를 작곡할 때 한 시간 이내로 작곡합니다. 제 노래는 제 모든 면모를 드러내지 않죠. 자아 성찰이나 제 일부가 담기게 되고, 슬픔과 음악은 서로 함께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슬플 때는 음악과 함께하고, 제가 슬프면 슬픈 음악을 작곡하게 됩니다. 제가 행복할 때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죠. 집에서 울면서 피아노 음악을 작곡하고 싶지는 않아요.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양부모님과 관계는 어떻죠?

재클린: 부모님과 관계는 아주 친밀해요. 제 청소년기에 두 분이 이혼하셨고, 그때는 지금과 같이 친밀하지 않았죠. 물론 그때도 친밀하긴 했지만 전 반항아였고, 부모님에게 화도 자주 냈습니다. 제가 바뀌었다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청소년기에는 말썽꾸러기였어요. 

팟캐스트: 그리고 양부모님의 친자식인 오빠가 있죠?

재클린: 남동생이에요. 그리고 그 애는 순하고 좋은 애입니다. 

팟캐스트: 그리고 그 애는 입양아가 아니고요?

재클린: 네. 백인 남동생이죠. #Whitebrother인 셈이죠

팟캐스트: #Whitebrother라니.

재클린: 제 친구들이 사용하는 은어예요. 4년 전 남동생에게 제가 방해되지 않았는지 물어본 적이 있죠. 제가 더 많이 관심을 받거나, 빼앗았다고 생각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남동생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답했어요. 하지만 제가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제가 청소년일 때 여러 가지 문제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제 남동생은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았죠. 부모님이 현명하게 대처하셨습니다. 어떤 아이를 선호한다는 표시를 하지 않았고 우리를 공평하게 대해줘서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어요. 물론 형제자매가 더 많았다면 상황이 달랐을 겁니다. 아마 부모님의 가족에서도 비슷한 일이 생겨서 자기 자식들에게는 그런 경험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삶에 대해서 배운 일 중 상당수는 제 부모님에게서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자각이 있었죠. 예를 들면, 제 입양아 친구나 입양아 사회에서는 부모가 입양아를 백인처럼 대하면서 인종에 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죠. 하지만 제 부모님은 그러지 않으셨어요. 어머니날에는 제 친어머니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친어머니의 용기와 대단함에 관해서 이야기하자고 하셨죠. 한국 음식을 먹으러 자주 다니기도 했고, 한국 문화 학교에 데리고 가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는 그런 활동을 싫어하긴 했지만, 부모님께서 노력하셨다는 점이 중요하죠. 부모님이 완벽하지 않지만, 제가 다른 입양아들과 다른 경험을 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재클린 씨는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셨네요. 저도 입양된 뒤에 양부모님이 친자식을 가시셨죠. 그분들이 왜 입양을 하려고 했는지 이야기해줬나요?

재클린: 네. 왜 입양하려고 하셨는지 이야기해줬죠. 어머니가 난임이었든요. 그래서 입양을 하려고 하셨고, 2번째 입양을 한국에서 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도중에 어머니가 제 남동생을 임신했다는 사실을 아셨죠. 그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부모님은 한국에서 애를 입양하고 동시에 남동생도 낳으시려고 했지만, 입양 기관에서 입양을 거절했습니다. 모든 관심이 한 아이에게 집중되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죠. 부모님은 그 사실에 슬퍼하셨습니다. 

팟캐스트: 친어머니에게 거리를 두는 느낌인데 양어머니에게 미안해서 그러신 면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재클린: 아뇨. 그렇다면 적어도 말은 되겠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제 친어머니와 같이 시간을 보낼 때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아 확실히 양부모님이 관련 정보 조사를 항상 지지해줬다고 하셨죠? 

재클린: 단순한 지지만이 아니라 제 친어머니를 초대해서 같이 지내려고 하셨어요. 제 양부모님이 자각을 가지고 지지를 해줘서 그분들에게 분노하지 않았죠. 그분들에게 항상 제가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어렸을 때 제 부모님이 저를 완벽하게 만들려고 한 느낌이 있긴 했죠. 우리 아시아 애가 피아노나 축구를 하는 모습을 봐- 이런 느낌이었지만, 제가 반발해서 멈췄습니다. 양부모님은 아시아계 아이를 백인 위주 사회에 데리고 오는 일의 무게를 자각하지 못했고, 알았다면 좀 더 아시아계가 많은 곳으로 이사를 하였을 거라고 저에게 사과하시죠. 저는 그 말에 부모님이 몰랐고, 최선을 다했으니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를 드려요. 물론 제가 성장할 때 다른 아시아계 사람들을 봤다면 좀 더 안정적으로 자랄 수 있었을 겁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에 관해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재클린: 제 아버지는 지금 유타주에 거주하고 계시고 어머니는 메인주에 살고 계시죠. 그래서 사람들이 제가 메인 출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고향 방문할 때는 메인으로 돌아가니까요. 둘 다 매우 밝은 사람들입니다. 매우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들이죠. 두 분의 성격은 다르지만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계셔요. 제 어머니는 부끄러움이 많은 내향적 성격이고 반대로 제 아버지는 외향적인 사람입니다. 파티도 좋아하고 주변 분위기를 잘 아시죠. 누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가서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줍니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과도 같이 잘 지낼 수 있어요. 제 부모님 둘 다 매우 자유주의적이시죠. 어머니는 거의 사회주의자나 다름없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봉사활동과 관련되어 있었어요. 그렇게 종교적이지는 않았고 히피와 비슷한 느낌으로 생활했습니다. 두 분은 서로 싫어할 부분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친구로 남았죠. 그분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어요. 선한 일을 하고, 서로에게 진실을 이야기하고,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더라도 사실을 이야기하는 일을 배웠습니다. 두 분 다 저에게 좋은 모범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두 부모님에게 여러 가지 면모를 배우셨지만, 아버지 쪽을 많이 닮으신 것 같네요.

재클린: 네. 확실히 외양적으로는 아버지와 많이 닮았죠. 사실 내부적으로도 그럴지도 몰라요. 아주 깊이가 있는 분이죠. 겉에서만 봐서는 그 깊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가 없었다면 전 이미 죽었을 겁니다. 제 목숨을 수십 번이나 구해 주셨죠. 어머니가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의 삶을 찾아냈다고 생각해요. 그 이전에는 저와 제 남동생을 양육하는 데 신경을 쓰셨습니다. 어머니의 삶에 있어서 양육에 집중하는 생활은 좋지 않았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좋았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머니가 저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어머니의 지지를 통해서 버틸 수 있었죠. 전 한 10년 정도 그렇게 좋은 생활을 하지 못했는데, 그런 저를 어머니가 도와줬고, 그래서 어머니에게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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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재클린 씨와 2016년에 개최된 모임에서 처음 만났죠. 그때 서로 마음이 맞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자주 보지는 않았지만 서로 만날 때마다 마음이 맞았다고 생각해요.

재클린: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가 웃는 모습이 기억이 나네요.

팟캐스트: 네. 그랬죠.

재클린: 아주 재밌었어요.

팟캐스트: 그 뒤로 제가 한국에 갔을 때, 데브라 씨가 재클린 씨도 한국에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때 친부모 조사 중이라고 생각했죠. 그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나요?

재클린: 그때는 제가 평생을 함께해온 두 한국계 입양아 단체인 보스턴 한국 입양아 단체(Boston Korean Adoptees, BKA)와 DMZ를 건너는 여성들(Women Cross DMZ, WCDMZ)에 가입했을 때였죠. 전 20대 중반이었고 한국인 정체성을 제대로 탐구해 보려고 하려고 했습니다. 데브라 씨를 2006년에 만났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2016년에야 한국에 돌아갔어요. 2016년에 저는 26세였죠. 제 친어머니에게 다시 연락을 했습니다. 제가 다시 한국에 돌아왔는데 만나주실 수 있는지 물었어요. 친어머니는 제가 직접 저를 만날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걸 듣고 화가 나지 않았죠. 왜 그랬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친어머니가 저를 10년이나 지났는데도 만나주지 않으니 아예 만나주지 않을 것이라고 단념했습니다. 친어머니가 건강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슬프긴 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어요. 친어머니가 건강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니 아주 슬펐죠.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제가 삶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친부모를 만날 이유가 없었죠. 오히려 제 친어머니가 저를 만나고 저에게 의지할까 무서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도 가능성이 있지만, 그때는 무엇이 일어날지 불확실했고 친어머니가 만남을 거절했죠. 그걸 듣고 저는 어머니가 몸이 안 좋다고 생각했어요.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면 왜 단순한 만남도 거부하는지 궁금했고, 친어머니가 걱정되었습니다. 친어머니가 학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죠. 학대를 받지 않는다면, 왜 친어머니가 바람을 피워서 아이를 가진 것도 아니고 친아버지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숨기겠어요? 친아버지가 좋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2016년은 제 삶에 있어서 가장 좋은 시기였어요. 전 아주 건강했고 행복했죠. 슬픔과 우울에서 빠져나온 상태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일하면서 일도 잘 풀리고 있었어요. 더 삶에 있어서 고생하고 있지도 않았죠. 25세 이후로는 직업이 궤도에 올라 잘 풀리기 시작했고 29세 때는 진짜 어른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룬 성공이 자랑스러웠죠.

팟캐스트: 재클린 씨를 만났을 때 재클린 씨의 머리카락과 흘러내리는 옷이 기억이 나네요, 보호-시크(Boho-chic, 미국의 패션 스타일)적 스타일이라 아주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재클린: 전 그렇게 멋있게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가 그렇게 봐줬으니 다행이네요.

팟캐스트: 입양아 사회에 참여하고, 친구도 만들고, 보스턴 입양아들과 활동하다가 AKA에 참여하게 되셨는데 어떤 경험이었나요?

재클린: 전 2013년에 막 입양아 사회의 일부가 되었죠.

팟캐스트: 그럼 정말로 막 들어왔던 시기였겠네요?

재클린: 네. 

팟캐스트: 그리고 입양아 사회의 신입이셨군요.

재클린: 네. 제가 어떤 사회에 입문하게 되었는지 전혀 몰랐죠. 입양아가 아닌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돌아가니 어떤 경험이었냐고 그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각국에서 모인 비슷한 연령대의 한국 입양아들을 5성 호텔에 모아 놓고 이야기를 하는 TV 쇼에 참여한 느낌이었다고 답했죠. 제가 기억나는 입양아 중 하나는 이탈리아에서 온 입양아였는데 행동이나 모든 것이 이탈리아인 같은 한국계 입양아였어요.

 팟캐스트: 스테파노 씨요?

재클린: 아 네. 스테판 씨요. 이탈리아인 그 자체였지만 동시에 한국인이었죠. 모임에 수많은 억양과 발음이 있었지만 전부 한국인이었습니다. 친구들이 그걸 듣고 놀랐지만, 전 놀라는 친구들에게 TV 쇼와 비슷하다고 이야기해줬어요. 서울 캠프(2015) 영화를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그 영화와 비슷하죠. 서울에 있는 5성 호텔에서 진행되는 입양아들 모임이라니 TV 쇼의 기반이 될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확실히 TV 쇼 같았죠.

재클린: 그랬습니다. AKA 이사회에 참가하기 전까지는 입양아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일의 무게 자체를 몰랐어요. 지금은 우리 입양아 사회가 가진 무게를 알고 거기에 참여하는 입양아들에게 가지는 무게와 참여하는 집단들에 대해서 알지만, 그때는 이 모든 게 새로운 신입 입양아였죠. 

팟캐스트: 그 모임에서 공연도 하셨죠. 기억이 나요.

재클린: 공연 경험도 대단했죠. 루크 맥퀸 씨가 페이스북에 공고를 올려서 음악가인 입양아가 있다면 입양아 공연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공연장도 있고, 장비도 다 준비되어 있다고 공고를 했죠. 그걸 보고, 제 꿈이 현실로 이뤄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재클린의 공연-

팟캐스트: 대중 공연을 하신 때가 그때가 처음이었나요?

재클린: 음…. 보스턴 입양아 단체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몇 번 했던 경험이 있죠. 

팟캐스트: 입양아들 앞에서 공연하니 어땠나요? 무겁게 느껴졌나요? 아니면 기뻤나요? 

재클린: 아주 기분 좋았어요. 공연하기 편하게 아주 좋은 음향 장비를 제공해준 루크 씨에게 감사하고 싶어요. 끝나고 나자 누군가가 저에게 “누가 그런 실연 경험을 하게 만들었죠?”라고 질문했고, 제가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5개의 슬픈 노래를 연속으로 불렀거든요. 제가 공연하고 싶었던 노래들만 골라서 공연했죠

-재클린의 노래-

팟캐스트: 재클린 씨의 노래들은 사랑에 대한 노래들인가요?

재클린: 네. 모두 스포티파이와 아이튠즈에 올라와 있죠. 

팟캐스트: 재클린 씨의 전 남자친구들이 재클린 씨의 노래에 나오나요?

재클린: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재클린 씨의 고통을 사용해서 예술을 만드시는군요.

재클린: 전 남자친구들이 반발심을 표시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그 노래들을 좋아했죠.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노래가 있다니 재밌다고 했습니다. 전 제 전 교제 상대들과 여전히 연락하는 기묘한 사람이에요. 제가 가진 특성 중 하나이죠.

팟캐스트: 부모님이 이혼하셨는데도 친하게 지내셨으니 이해가 가네요.

재클린: 그렇죠. 사람이 가장 친밀해질 수 있는 상대는 같이 동거하거나 사랑을 한 상대입니다. 대부분 사이가 틀어지게 전에 그들이 누구였는지 알고,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죠. 그들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도 알게 되고 용서해 줄 수 있게 되죠. 물론 실연이 고통스럽다면 당분간 연락을 하지 않지만 결국 다시 연락하게 됩니다.

팟캐스트: 연애에 관련된 노래를 작곡하실 때 노래 나오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나요? 아니면 전 남자친구들의 여러 요소를 조합하시나요?

재클린: 다양한 요소를 조합해서 만들려고 합니다. 제가 지난 몇 년간 비슷한 느낌의 사람들을 만나와서 그렇게 어렵지 않죠. 여러 사람, 특히 여성들이 동감하는 내용을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노래에 나오는 과정을 똑같이 겪었다고 하더군요. 여성 측도 마찬가지지만, 30대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연애 시장에서 서서히 감정적으로 도움을 줄 수 없는 남성들이 늘기 때문입니다. 여성들에게 받은 호응이 아주 대단했습니다. 

팟캐스트: 전 남자친구가 그 노래를 나에 관해서 썼느냐 묻고, 사실이 아니라고 한 적도 있나요?

재클린: 대답하지 않도록 하죠. 하지만 제가 데이트하지 않은 남성 친구들이 그 노래들에 이입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도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밀어낸 경험이 있다고 했거든요. 특히 이번 COVID-19 격리 시기에 제가 쓴 노래들이 더욱더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최대한 많은 사람이 이입할 수 있도록 노래를 작곡했죠.

팟캐스트: 노래에서 애착이 중요한 주제인가요?

재클린: 애착, 서로 주고받는 사랑, 짝사랑, 타이밍,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밀어내는 사람 등 다양한 주제가 있죠. 제 여성 친구들이 제 노래에서 주로 짚어내는 주제예요. 단순히 입양아들뿐만이 아니라 여성 친구들 전부가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격리 중에 작곡한 다른 노래인 내가 알 모든 일(All I’ll Ever Know)은 사랑에 대한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길을 잃었는데 이유를 모르는 사람에 대한 노래였죠. 많은 사람이 COVID-19 유행을 겪으면서 바깥세상과 접촉하지 못하는 현재 상황 때문인지 노래에 공감하더군요. 제가 작곡하고 싶었던 노래였고 관련 주제와 관련해서 제 삶에 결론을 내줬다고 생각해요. 물론 완벽한 결론을 내주지는 않았습니다. 이 노래를 발매했으니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죠. 물론 모든 사람이 이야기를 공유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취약한 이야기를 공유하면 고통에서 사람을 해방해 줄 수도 있어요. 물론 전 어두운 주제를 별로 다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모두와 이야기를 공유할 필요도 없고, 모두가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재클린 씨가 음악을 대중에게 공개하고 청자와의 관계를 구축했는데, 그 일이 재클린 씨가 해방감을 느끼고 감정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나요? 

재클린: 네. 항상 그랬다고 생각해요. 제가 자란 마을에서는 EMO가 많았어요. 제 후배 중에도 잔뜩 있었죠. 저에게 연락해서 제가 작곡한 노래가 실연 시기를 뚫고 나오는데, 우울증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이야기를 해줬죠. 청소년기에 성장하면서 제 노래가 다른 사람을 도와줬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음악이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죠.

-재클린의 노래-

팟캐스트: 2016년으로 돌아가 보죠. 그때 루나 씨를 만나셨죠?

재클린: 루나! 

팟캐스트: 그때 루나 씨를 처음으로 만나셨나요?

재클린: 아뇨. 뉴욕시에서 개최된 AKA 20주년 행사에서 만났죠. 서울에서 만나기 전 몇 달 전에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하지만 서울에서 서로 깊게 알게 되었죠. 

팟캐스트: 루나 씨의 첫인상이 어땠나요?

재클린: 아주 좋았어요. 사악하게 착했고, 아주 정직하고 느긋한 사람이었습니다.

팟캐스트: 물론 루나 씨가 영어도 하지만 한국계 입양안데 노르웨이어를 해서 좀 특이하다고 생각했나요? 

재클린: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했죠. 노르웨이계 억양을 가지고 있어서 신기했죠. 동시에 한국인데도 영어가 제2 언어이고 노르웨이어가 제1 언어라는 사실 자체가 아주 재미있었어요.

팟캐스트: 루나 씨의 행동거지는 유럽인이라는 점도 그렇고요. 

재클린: 네. 참여자 대부분이 미국인이니 그러한 행동과 분위기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있었죠. 

팟캐스트: 예를 들어줄 수 있나요?

재클린: 루나는 훨씬 직설적이죠. 자신이 생각하는 사실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물론 루나는 좋은 사람이지만 화법이 워낙 직설적이라 실수로 사람을 헤아리거나 신경 쓰지 않는 화법으로 보여서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경우도 많아요. 한국계 입양아 사회에서 우리가 서로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전 처음으로 미국인이 아닌 사람을 사귀게 되었어요. 전 미국계 백인이 아닌 사람과 사귄 적도 얼마 없었죠.

팟캐스트: 재클린 씨가 처음으로 사귄 아시아계 남자친구였나요?

재클린: 아시아계-백인 혼혈과 고등학교 때 사귄 적이 있었지만, 그 친구는 백인에 더 가까웠어요. 사실 우리 둘 다 그랬다고 생각해요. 서양 사회에서 아시아계 남자가 주목받지 못하는 경향은 제가 흥미가 있는 주제입니다. 잘못된 일이니까요. 

팟캐스트: 제가 흥미롭게 생각한 면은, 재클린 씨가 입양아 사회에 들어와서 자신의 입양아 정체성을 자각하고, 또 다른 한국계 입양아와 사귀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재클린 씨의 모든 요소가 하나로 완성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나요?

재클린: 아뇨.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러기를 원했죠. 그래서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어요. 말을 좀 정리하죠. 한국계 입양아 사회의 판결과 분노는 무서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입양아들은 방송에서 입양아와의 연애 관계를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지 분노하는 경우가 많아요. 입양아들의 그런 반응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루나와 저는 서로가 연애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일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우리 둘은 친구이고 서로를 존중하죠. 과거의 연애에 대해서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이제 과거의 추억입니다. 지금은 루나도 저도 서로 다른 연인이 있고 서로가 행복하기를 원해요. 제 삶에 연관되었던 사람들은 전부 제가 루나와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죠. 제 삶의 일부였고 제 성장의 일부였던 사람입니다. 모두가 제가 누구를 언급하는지 아는데 그와 헤어졌다고 해서 다시 언급하지 않을 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죠. 루나는 좋은 사람이에요. 모두가 한국계 입양아 커플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니 이야기할 이유가 있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여러분 커플 명이 루나린이었나요? 재클루나였나요?

재클린: 커플 명은 없었어요. 제 이름도 루나의 이름도 사람들이 철자만 보고 발음할 수 없었죠. 전 루나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팟캐스트: 루나 씨에게 재클린 씨가 첫 한국계 입양아 여자친구였나요?

재클린: 당연히 아니죠. 루나는 저보다 13살 연상이고 20살 때부터 한국계 입양아 사회에서 활동해왔으니까요. 저는 막 한국계 입양아 사회에 참여한 신입이었습니다. 다른 입양아들이 루나가 다른 입양아와 교제해서 화가 나지 않는지 물어보고는 했죠. 당연히 그렇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한국계 입양아 사회 내부에서 연애하는 경험은 어땠나요? 작은 사회이니 그것과 관련된 문제가 재클린 씨를 신경 쓰게 했나요?

재클린: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루나에 대한 거짓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긴 했죠. 그래서 그를 변호하려고 했어요. 물론 모든 연애 관계가 완벽하지 않으니 하소연을 친구들에게 하면 뜬소문이 흘러나가기 마련이죠. 제가 한국계 입양아 사회 내부에서 연애하지 않았다면 관련 문제를 겪지 않아도 됐을 겁니다.

재클린: 그러한 뜬소문들이 저를 막지는 않았습니다. 한국계 입양아 사회 내부에서 연애하면 좋지 않다, 너무 큰 문제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입양아들 사이에 있었죠. 그걸 듣고 저는 동의하기도 했지만 동의하지 않기도 했어요. 일반화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입양아 사회에서 데이트한 좋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팟캐스트: 저도 동의해요. 한국계 입양아 남성과 여성 둘 다 자기들에게는 한국계 입양아와 데이트를 하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죠.

재클린: 그런 이야기는 꽤 모욕적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과 교제하고 싶다는 말은 아니지만,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거절하고 사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일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친어머니를 만나셨죠? 

재클린: 네 결국 2018년에 친어머니를 만났습니다. 한국 관련 이벤트로 다시 한국에 방문한 상태였죠. 친어머니에게 다시 연락을 드렸어요. 이번에는 아주 짧게 다시 한국에 왔으니 만나고 싶으면 만나자고 연락을 했습니다.

팟캐스트: 왜 친어머니가 두 번이나 거절했는데 다시 만나자고 연락을 하셨죠? 친어머니가 마음을 바꿔 먹었기를 기대하셨나요?

재클린: 제 친구 로니의 생각이었죠. 로니는 40살이고 저와 같이 한국에 와있었는데, 로니가 자기가 대신 연락해주겠다고 이야기했죠. 로니가 한국어를 하기 때문에 저 대신 연락을 해줘서 제가 한국에 있다고 이야기하고 일을 진행해줬습니다. 저는 친어머니의 거절을 상해서 긴 편지도 쓰지 않았고, 딱히 화가 나지도 않았어요. WCDMZ 관련 작업으로 계속 바빴고, DMZ를 따라 걷기 활동에 평화 집회도 준비하고 있어서 아주 바빴죠. 그 와중에 로니가 모든 준비를 다 끝내 놓고 “아 만나시겠다고 하시던데.”라고 저에게 말했죠. 당연히 놀랐어요. 서울에서 3시간 떨어진 곳에 있는 호텔 방에서 둘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레이스라는 이름의 통역가를 고용해서 아침 일찍 그곳으로 갔죠. 그렇게 친어머니를 만났어요. 

팟캐스트: 그렇게 갑작스럽게 만났는데 어떤 생각을 하고 계셨죠? 친어머니가 예라고 말해서 놀랐나요?

재클린: 아주 많이 놀랐죠. 거기에 아주 좋은 시기기도 했어요. 요가 학교를 막 끝내서 육체와 정신이 아주 안정적이었거든요. 요가 학교 자체가 아주 부르주아적이고 백인답지만 제가 간 학교는 정통 요가 학교라서 정신과 육체의 균형, 영혼, 병과 육체, 스트레스의 연관성에 관해서 이야기했죠. 그러한 고통에서 생각으로 자유롭게 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죠. 과거의 충격이나 기억을 확인하고, 지금까지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배웠어요. 200시간 정도 요가 교육을 받고 한국에 갔습니다. 그다음에 바로 친어머니가 저를 만나려고 하셨죠. 만나기 좋은 시점이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친어머니와의 만남에 관해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재클린: 아주 좋았습니다. 제 친구 로니와 통역가 그레이스 씨가 같이 호텔에 가서 문을 두드렸죠. 친어머니가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아주 한국적인 분이더군요. 지금과는 달리 한국 문화에 그렇게 익숙하지 않아서 놀랐죠. 영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시고, 화장한 상태에서도 매우 창백하셨고, 거기에 파마머리도 하고 계셨습니다. 어머니 행동과 패션도 전부 한국적이고, 저와 달라 공감할 수 없었어요. 어머니가 떠시면서 저를 안았고, 저를 안으신 채로 소파로 걸어가시기 시작하셨죠. 전 그 상황에 공감이 가지 않아서 울고 있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에 대해서 잘 몰랐으니까요. 그러니 공감을 하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었죠. 

팟캐스트: 그 모든 상황과 관련해서 약간 무덤덤한 기분이 들었나요?

재클린: 네 그렇습니다. 제가 모르는 사람이 제 앞에 있고, 여러 감정이 들어야 하는데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어요.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만날 수 있어서 기뻤고, 친어머니와 훌륭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불안하지 않았죠. 사실 공감하지 못하거나 무덤덤했던 것이 아니라, 친어머니를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반응했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제가 진짜 공감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몰라요

-재클린의 음악-

팟캐스트: 제가 재클린 씨가 입양아와 관련된 모든 일을 입양과 관련하는 이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지만, 재클린 씨가 친어머니에게 약간 무심한 태도를 보였던 이유가 친어머니가 재클린 씨를 거부한 후유증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재클린: 그랬다면 말이라도 되겠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전 거절을 당하면 아주 깊은 영향을 받죠.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기기 때문에 제 생애의 모든 거절을 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친어머니가 저를 거부한 느낌은 들지 않았어요. 친어머니와 같이 시간을 보내면 특별한 시간을 보내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여러 번 같이 시간을 보냈죠. 제 친어머니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지만, 제 양어머니와 느낀 친밀감 백 분의 1 정도밖에 느끼지 않았어요. 양어머니와 저와의 관계 사이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아예 없습니다. 사실 제 양어머니는 제가 친어머니와 같이 살러 간다고 해도 응원해 주시겠죠. 뭐 실제로 응원해 주실지는 모르지만, 양어머니와의 관계에는 빈틈이 없었습니다. 제가 나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친어머니가 필요 없었죠. 제가 19살이었을 때 제 입양과 관련해서 처음으로 배웠을 때부터 제 이야기를 알았고, 이미 결론을 냈기 때문에 이렇게 반응했다고 생각합니다. 입양아 사회에 참여하는 입양아들은 입양아 숫자에 비하면 숫자가 적죠. 하지만 입양아 사회에 참여하는 입양아 대부분은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이 사회에 참여했고 서로를 찾아냈습니다. 사람들이 제가 친어머니에 대해서 강렬하게 반응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이상하다고 여기는 감정을 이해해요. 전 친어머니를 아주 사랑하지만, 그 감정은 먼 친척 고모나 이모에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합니다. 그분들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그분들을 알게 되어서 좋죠. 제가 친어머니에게 느끼는 감정이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하고 나니 그렇게 좋게 들리지는 않네요.

팟캐스트: 아뇨. 사실적으로 느껴져요. 

재클린: 친어머니가 제 이모나 고모같이 느껴져요. 제가 잃어버린 이모나 고모같이 느껴지죠. 제가 아이를 가진다면 다르게 느낄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이런 문제에서 거리감을 느껴요. 그렇게 대단한 문제가 아니었죠. 오히려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서 분노나 슬픔을 느껴서 고생하지는 않았거든요. 

팟캐스트: 친어머니가 재클린 씨와 더 깊은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현재 상황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시나요?

재클린: 저도 비슷한 질문을 저 자신에게 한 적이 있어요. 친어머니가 저에게 더 깊은 관계를 맺으려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친어머니와 제가 서로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친어머니가 어른일 때 저를 놔줘야 했기 때문에 저에게 좀 더 깊은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하죠. 전 친어머니와 떨어졌을 때 아기였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합니다. 물론 제 몸에는 영향을 끼쳤겠지만 기억하지 못하죠. 제 양부모님이 저보다 훨씬 감정적으로 이 문제에 반응하셨죠. 오 두 사람이 드디어 만났구나! 이라는 느낌입니다. 제 양어머니는 제가 친어머니를 만난다고 하니 흥분하셔서 친어머니를 만나는 날에 계단에서 구르시기도 했어요. 두 분 다 아주 깊게 신경 쓰시죠.

팟캐스트: 양부모님이 재클린 씨보다 더 신경을 쓰니 이상한 기분이었겠네요?

재클린: 아주 이상했죠. 두 분께 전 괜찮다고 말씀을 드렸고, 제 형제들인 조니, 형진, 필진과 저는 비슷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큰 영향을 받지 않았어요. 그래서 단순히 저만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 이 일이 일어나니 대단하다고 기뻐했지만, 누구도 울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팟캐스트: 다른 가족들과는 언제 만났죠?

재클린: 어머니와 만나고 나서 얼마 안 있어 만났죠. 제 남동생들은 절 만나러 2번 만나러 왔었고 서로 아주 친밀해요. 남동생이 제 노래인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Say You Don’t Love Me)에 나오죠. 제가 가장 빠르게 친해진 사람 중 하나였어요. 남동생은 내향적이고 저는 외향적으로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아주 똑같았습니다. 남동생이 저를 받아들이고 누나로 인정해줘서 운이 좋다고 생각하죠. 제 남동생에게 느끼는 감정이 아주 강하다고 생각해요. 입양과 관련해서 제 남동생과 만들어낸 관계가 아주 특별하다는 사실을 알죠. 그리고 제 남동생이 제 가족 중 저를 진정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같이 2달을 같이 보냈기 때문에 절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뉴욕에 와서 같이 지냈군요?

재클린: 남동생이 저를 알고 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죠. 물론 다른 가족들도 절 알긴 합니다. 

팟캐스트: 아주 특별하다고 생각하는데, 남동생이 래퍼죠? 

재클린: 네.

팟캐스트: 그리고 서로 음악을 통해서 협업을 할 수 있었죠?

재클린: 네 기적과도 같이 서로 음악을 할 수 있었어요.

팟캐스트: 그 음악적인 협력에서 혈연이 중요하게 느껴졌다고 생각하나요?

재클린: 아주 특별했다고 생각하죠. 제 친어머니, 그리고 남동생에게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가족에 영향을 끼쳤는지 물어봤습니다. 남동생은 가족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이야기를 해줬고, 그 해답이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재클린과 남동생의 노래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Say You Don’t Love Me)- 

재클린: 전 평생 제가 왜 이런지 고민했어요. 제가 입양아라서 그런가? 제 백인 부모 때문인가? 제 친부모의 유전자 때문인가? 전 제가 왜 이런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모른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재클린 씨가 친가족과 같이 밥을 먹는 사진을 봤는데, 그럴 때는 친가족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죠? 오래전에 잃어버린 조카같이 대하나요?

재클린: 아뇨. 친가족들에 있어서 저는 잃어버린 딸이죠. 제 친아버지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다고 칭찬하는 일을 그만하라고 해야 합니다. 전 천사가 아니니까요. 다시 말하면 저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입양아 친구들과 사연을 들어보면 친어머니를 모르고, 입양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 모르는 사실이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하죠. 그러한 관점도 이해해요. 특히 입양된 가족에 따라서 이러한 정보를 알려고 하는 욕구가 커지기 마련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들에게도 제 결과와 비슷한 결과가 나왔으면 해요. 물론 그 사람들과 자리를 바꿔서 제 이야기를 주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제 결과를 제가 노력해서 얻었다고 생각되지 않기도 해요. 제가 이 결과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죠. 어쩌다 보니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입양아가 왜 제가 이렇게 운이 좋았는지 궁금하게 생각하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제가 평생 무언가를 원했는데. 다른 사람이 무언가를 쉽게 손에 넣으면 당연히 화가 나겠죠. 그런 반응이 왜 나오는지 이해합니다. 관련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죠. 왜 저에게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모르니까요. 카오미 씨는 제가 쓴 글을 읽어서 아시겠지만, 제가 우울증으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는 사람들은 제가 우울증으로 고생해서 이런 보답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 그런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지만, 제 이야기도 계속 편하다가 친가족도 만났는데 전부 착하고 좋았다- 이런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제가 살면서 여러 번 죽을 뻔했죠. 한두 번 자살시도를 했다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제 삶에 있어서 빠진 요소인지는 모르지만, 저도 조금씩 삶에 일어나는 좋은 일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친가족을 만난 일도 좋은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제가 조정해서 일어난 일은 아니었죠.

팟캐스트: 우리가 연애 관계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를 했는데 재클린 씨가 지금 교제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재클린: 네. 제 삶에서 찾고 있던 파트너라고 생각해요. 그와 같이 보내기 전까지 삶이 이렇게 편하고 좋았는지 몰랐죠. 제가 그를 찾으려고 아주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자아 성찰도 했고 직접 찾아내려고 노력했죠. 다른 사람으로 만족하고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시즌 4, 에피소드 19: 달시 미들스테드

내용 주의: 자살 시도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 

한국계 입양아 달시 미들스테드 (49세) 씨는 여러 역경을 넘어왔다. 그런데도 미들스테드 씨의 신앙과 봉사는 미들스테드 씨에게 희망을 주었다. 미들스테드 씨는 2살에 대한민국에서 입양되어 네브래스카주의 농업 마을에서 학대와 고통을 견디면서 성장했다. 그런 감정적 상처에도 불구하고 미들스테드 씨는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았고, 가족을 만들어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달시: 제 이름은 달시 진 미들스테드이고, 한국 이름은 이복실입니다. 제 입양 기록에 따르면 1972년 1월 29일에 태어났지만, 거기에도 물음표가 붙어 있어서 제 생일은 불명이죠. 현재 49세이며 미국 텍사스주 뉴 브론펠즈 시에 살고 있고, 2년 반 전에 이 도시로 이사를 왔어요. 네브래스카주에서 자라고, 애리조나주에서 거주하다가 텍사스주에서 거주하는 중입니다.

팟캐스트:  뉴 브론펠즈는 어디에 있는 도시인가요? 남쪽 휴스턴시 근처인가요?

달시: 샌안토니오 시와 오스틴 시 사이, I-35 고속도로에 걸쳐 있어요. 샌안토니오에서 30분 정도 북쪽으로 운전하면 나오고, 오스틴 시에서는 45분 남쪽으로 운전하다가 보면 나오는 도시입니다.

팟캐스트: 알겠습니다. 왜 텍사스주로 이주하셨죠?

달시: 제 직업 때문입니다. 미국 루터교 텍사스 지부의 집사이자 부목사로 일하고 있거든요. 

팟캐스트: 그럼 정식 목사인가요? 

달시: 루터 교회에서 집사 역할을 맡고 있죠. 원래는 부목사 직위를 맡고 있었는데 ELCA가 직위 개편을 하면서 전부 집사로 개편했습니다. 1년 전에 집사들도 임명직으로 개편을 했죠.

팟캐스트: 아시아계 여성이 ELCA에서 집사로 활동하는 일이 희귀한 일인가요, 아니면 요즘 들어서는 구성원이 다양화되었나요?

달시: 집사 자체는 희귀한 편이지만 구성원 자체는 다양화되었습니다. 많은 한국계 입양아들이 목사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목사들도 여러 명 있죠. ELCA에서 한국계 입양아들이 서로 모여서 집단을 만들려고 하고 있기도 합니다.

팟캐스트: 그렇게 한국계 입양아들이 개신교에서 큰 영향을 발휘하는 이유가 많은 한국계 입양아들이 기독교 집안으로 입양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달시: 아주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제 연령대의 한국계 입양아들이 입양될 때 많은 입양기관들이 루터 교회나 다른 개신교회와 연관되어 있었죠. 예를 들면 제 미국 입양기관은 오클라호마 털사에 있는 딜런 인터내셔널이었는데, 동방사회복지회와 같이 기독교 성전을 하고 있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협조 기관이었습니다. 이러한 입양아 사이의 기독교 강세 경향 일부는 많은 기독교 계통 입양기관들이 한국 입양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교회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종교적인 집안에서 자라나셨나요?

달시: 네. 교회 제도 내부에서 성장했습니다. 침례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ELCA로 개편되기 이전의 미국 루터 교회에서 성장했죠. 제 부모님은 우리 가족을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게 하는 엄격한 분들이었어요. 주일 학교, 견진성사, 교회 청년회도 다녔습니다. 식사 전에도, 자기 전에도 기도했죠. 아주 종교적인 집안이었어요.

팟캐스트: 저도 그러한 종교 행사에 참여하면서 성장했죠. 전 그런 교육을 받으면서 반발했습니다. 현재 전 교회에 다니지 않아요. 하지만 달시 씨는 그러한 종교적 교육에 반발심을 가지지 않으셨군요? 

달시: 사실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종교 교육으로 인해서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부모님, 특히 어머니가 종교를 무기로 사용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다른 입양아들의 이야기에서도 많이 나오는 이야기이죠. 부모님과 떨어진 뒤의 삶에서 다른 신도들을 만나고, 신앙과 신의 가르침을 다시 배웠습니다. 그 경험이 제 삶을 여기까지 이끌었고, 제가 목회자의 길을 걷게 했다고 생각해요. 전 네브래스카에 있는 캠프에 참여했죠. 제가 자라는 동안 가장 힘든 시기에 참여했던 캠프였고, 저는 그때 신앙에 의문을 가지고 해답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곳 인솔자들은 다정하고 이해심이 깊었고, 저에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었어요. 그때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들의 신앙심을 기르기 위해서는 신앙심을 무기로 사용하지 말고 신앙의 모범이 될 사람을 따르게 하는 일이 더 올바르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달시: 저는 제가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그때 이야기를 들으면 제가 학대당했다고 하고, 저도 동의하죠. 전 항상 부모님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왜 나를 이렇게 학대하지?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저와 제 남매들을 왜 보호해주지 않는지 생각했죠. 제가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은 신앙을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부모님은 항상 교회에 가면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하고, 신앙과 관련된 일을 해야 한다고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가르쳤죠.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잘못하면 교회 청년회에 참가할 수 없었지만, 교회는 가야 했어요. 

팟캐스트: 달시 씨를 조용하게 만들려고 신앙을 사용했다는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달시 씨가 말썽을 부리면 달시 씨의 신앙심을 빼앗으려고 했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학대를 학대로 보이지 않게 사용했다는 말인가요? 

달시: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고통받을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지 묻게 했죠. 우리가 어떤 문제를 일으켜도 항상 교회는 가야 했어요. 전 힘든 시기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지? 이라고 질문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러한 비극들을 일어나게 하는지 의문을 가졌어요.

팟캐스트: 그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죠?

달시: 많은 상담을 받았고,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모범 신도들을 만나서 해결했어요. 신도들이 저에게 하나님을 설명해줬죠. 하나님은 벌하는 자, 사악한 존재, 사람들이 사악해질 이유가 아니며, 인간의 원죄 때문에 인간 세상에 문제가 생긴다고 설명해줬습니다. 가르침과 저를 이끌어주면서 신앙 멘토가 되어준 모범 신도들을 통해서 선량한 하나님이라는 인식을 만들 수 있었어요. 지금에 와서는 제가 외롭다고 생각할 때 항상 하나님이 제 곁에 있다는 인식으로 위안을 얻죠. 그것이 지금 제 신앙입니다.

팟캐스트: 아주 흥미롭네요. 달시 씨.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이 달시 씨를 버렸는지 의문을 가졌지만, 캠프에 가서 하나님과 더 가까운 느낌을 받았나요? 관련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했나요? 아니면 더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됐나요? 

달시: 캠프에서는 소외감을 안 느꼈어요. 전 살면서 자살 충동을 느끼고 자살하려고 한 적도 있었죠. 하나님과 더 가까운 곳에 가고 싶었습니다. 제가 죽으면 천국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천국은 어떤 고통, 슬픔, 어려움도 없고 행복한 생활을 보낼 수 있는 곳이라고 배웠고 지구에서 부정적인 감정과 문제와 씨름하는 일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질문하기 좀 그렇지만 달시 씨의 삶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나요? 

달시: 짧게 설명하자면, 그리고 제 관점에서 설명하는 일이라고 언급을 하고 시작하자면, 전 아주 권위적인 집안에서 자라났습니다. 부모님은 매우 엄격하셨죠. 친구들을 집에 초대할 수도 없었고 친구네 집에 놀러 갈 수도 없었어요. 아주 엄격한 취침 시간과 규범이 있었습니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맞았어요. 식사할 때 일정량 이상을 먹을 수 없어서 영양부족이기도 했고,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습니다. 나중에 와서야 평범한 가정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죠. 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계속 맞았는데, 더는 버틸 수가 없었어요. 친구들 집에 놀러 갈 수도 없었고, 친구들을 초대할 수도 없었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주 외로운 기분이 들었어요. TV나 라디오도 없이 자랐죠. 물론 그 2개가 없어서 이점도 있긴 했어요. 제 형제자매들은 상상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회적으로 고립된 기분이었죠. 학교에서는 조롱당하고, 더는 버틸 수 없었고,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냥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구도 절 원치 않고 사랑해주지 않으니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진짜 자살 시도를 하니 어머니는 제가 죽는 살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답했어요. `절 상대할 시간이 없다고 저에게 말했죠. 그때 제 부모님이 이혼한 상황이었는데 아버지를 볼 수도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었어요.

팟캐스트: 왜 부모님이 한국에서 입양하셨죠?

달시: 좋은 질문이네요. 전 장녀입니다. 바로 밑에 한국계 입양아인 남동생이 있죠. 그 밑에 국내 입양아인 여동생 둘이 있어요. 우리 남매 전부가 항상 그런 질문을 했죠. 왜 부모님이 입양하셨을까? 제 아버지는 어머니가 불임이라 입양하셨다고 했어요. 반면에 어머니는 책을 읽고 난 뒤에 입양할 마음을 먹었다고 하셨죠. 지금 한국 입양 제도와 한국 입양 역사를 공부하고 있어요. 제가 2살에 입양이 되었는데, 입양된 날이 부모가 아이들을 구하는 날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종교적인 집안이 입양하는 경우가 많죠. 네브래스카에서의 어린 시절은 어떠셨죠? 

달시: 시골 농장에서 사람들과 고립된 채로 자랐고, 주변 사람들도 저와 전혀 닮지 않았죠. 제 사촌이 한국에서 입양되었기 때문에 사촌을 가끔 봤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은 때는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교 사이였어요. 제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친구 집에 놀러 갈 수도, 친구를 불러올 수도 없어서 항상 외로웠습니다. 아주 고독한 때였죠. 

팟캐스트: 남매들 사이는 좋았나요?

달시: 남매들 사이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주변에 같이 놀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TV도 없었고 라디오도 없었기 때문에 같이 밖에서 놀아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문을 잠그고 우리를 집안에 들여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밖에서 있어야 했죠. 취침 시간도 엄격했고 중학교 때도 8시에 잠들어야 했습니다. 아주 힘든 시간이었어요.

팟캐스트: 양부모가 아이들을 억제하고 음식의 양마저 조절하는 이야기는 슬프게도 전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을 당하셨는지에 아시나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시면 이유를 알 수 있나요? 

달시: 지금 와서 왜 부모님이 우리 형제자매들을 그렇게 양육했는지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요소 중 하나는 부모님이 더 나은 방법을 몰랐다고 생각해요. 또 다른 요소는 우리 집이 가난했기 때문이죠. 어머니는 전업주부이셨고 아버지는 타이어 가게에서 일하면서 돈을 많이 벌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돈이 부족했습니다. 4명의 아이와 2명의 어른을 위한 충분한 음식을 제공해야 했기 때문에 우리가 먹을 양을 관리하려고 했죠. 부모님이 이혼하고 어머니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했어요. 우리 가족이 복지 배급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복지 배급으로 나온 치즈를 받아서 먹었고, 식품권 배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먹는 양마저 조절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그 시대에는 다른 아이들이 비슷하게 양육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달시 씨 가족만 그랬다고 생각하시나요? 달시 씨 가족이 다르다는 사실을 언제 아셨죠?

달시: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우리 가족이 다른 가족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 저는 기억 자체가 별로 없습니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합쳐서 기억 자체가 별로 없죠. 저에게 남아 있는 기억들도 선명하지 않아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애들이 다른 친구들과 같이 하교하고, 다른 집에 놀러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부모님에게 친구 집에 놀러 갈 수 있는지 묻자, 안된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왜 안되는지 묻자 뺨을 맞았죠. 그런 일이 일어나면 더는 묻지 않게 됩니다.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다른 친구 집에 놀러 가지 못하게 했던 이유는 몰라요. TV도 없이 사는 환경이 부끄럽다면 친구들을 초대 못 하게 할 수도 있죠. 하지만 왜 친구 집에 놀러 가는 일까지 금지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팟캐스트: 정신적으로 학대당하셨고 거기에 육체적으로도 학대당하셨군요?

달시: 그랬습니다.

팟캐스트: 거기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셨겠군요?

달시: 네. 고등학교 때 자살 시도도 그곳에서 빠져나가려고 한 방법이었어요. 자살 시도가 실패하자 결국 가출을 했죠. 어머니가 일하러 갔을 때 편지를 쓰고 제 동생들을 모아서 더 여기에 있을 수 없다고 한 뒤에 친구를 불렀어요. 선생님으로 일하던 친구가 저를 데리러 왔고 제 아버지 집으로 절 데리고 가줬습니다. 전 제 아버지를 못 본 지 몇 년이 넘은 상태였죠. 아버지를 보러 갈 수 없었거든요.

팟캐스트: 그래서 아버지가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겠군요?

달시: 네. 전혀 몰랐습니다.

팟캐스트: 어머니에게 자살한다고 말했을 때 그냥 죽으라고 했다고 들었는데….

달시: 네. 그랬죠.

팟캐스트: 끔찍하네요. 아주 심한 고통을 겪으셨겠네요.

달시: 그랬습니다.

팟캐스트: 자살 방법은 뭐였죠? 약을 먹으려고 하셨나요? 아니면….

달시: 제 손목을 가위로 자르려고 했죠. 고등학교 1학년 때 심리학 수업을 들었는데 그때 일기를 쓰게 되었고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글을 쓰게 됐습니다. 그걸 본 제 선생님이 학교 상담사를 불렀고, 학교에서 저와 제 어머니를 불러서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단순히 제가 관심을 끌려고 이러는 거라고 말씀하셨죠. 

팟캐스트: 다행히도 자살 시도가 실패한 뒤에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서 가출하셨군요.

달시: 네. 제 아버지 집에 보내줬죠. 거기에서 한 달 정도 지냈습니다. 아버지는 재혼하신 상태였고 전 양어머니와 그렇게 잘 맞지 않았어요. 그분은 이미 4명의 남자애를 키운 상태라, 아버지에게 “이미 내 아이들도 다 키웠으니 네 애까지 키울 여유는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됐어요. 그때가 9월이었는데, 아버지가 제 병실에 들어오시더니 우리와 같이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거주지를 찾아야 했죠. 다시 어머니와 같이 사는 지옥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어요.

팟캐스트: 이때 달시 씨 나이가 어떻게 되셨죠?

달시: 17살이었습니다. 

팟캐스트: 17살 학생이 갈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죠?

달시: 그렇죠. 결국, 제 부모님의 친구를 부르게 됐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그분이 제가 입원해 있던 병원에 와서 제가 그분 집에서 지낼 수 있다고 하셨죠. 전 그분들을 제 양부모님이라고 불러요. 하지만 그 결과로 제 부모님과 양부모님의 친구 관계가 깨졌습니다. 제 부모님은 양부모님의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았죠. 제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양부모님이 법적 보호인이 되려고 하셨고, 제 부모님이 동의하시면서 양부모님이 제 법적 보호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 고등학교 생활을 양부모님과 보낼 수 있었죠.

팟캐스트: 자라면서 사랑받았다고 생각하시나요?

달시: 아뇨. 한국에서 잘못된 애를 보냈다고 듣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말로는 어머니가 입양기관에서 받은 사진과 제가 달랐다고 하더군요. 듣기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화가 나셨을 때, 한국에서 널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었다고 저에게 소리치시고는 했죠. 마지막으로 제가 뚱뚱하고 멍청하다고 조롱하고는 했습니다. 이러한 말들을 들으니 사랑받는 기분도 들지 않았고 받아들여지는 기분도 들지 않았어요. 친구들과 시간도 보내지 못했으니 사회적으로도 고립되었죠. 아주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자유가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달시: 여러 감정을 소화하려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 어머니가 오기를 거부하셨죠. 대학교 졸업식에도 오지 않으셨어요. 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식에 오긴 하셨어요. 어머니에게 대답을 듣기 위해서 연락을 했지만, 전화를 끊었죠. 어머니가 절 원치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원했지만,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문제를 받아들이고 상대해야 할지 몰랐다고 생각해요. 아버지는 독일계 집안에서 9명의 형제자매와 같이 자랐죠. 고등학교 중퇴생이기도 하셨습니다. 아직도 왜 부모님이 입양하시기로 하셨고, 입양 허가를 어떻게 받았는지도 몰라요. 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었고, 어머니는 고등학교 졸업생이긴 했지만, 대학교 졸업생은 아니었죠. 요즘이었다면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어서 입양 자체가 불가능했을 겁니다.

달시: 적어도 그때 입양 기준은 통과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입양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기도 하지만, 옛날 입양은 비용이 많이 안 들었습니다. 부모님은 한국에 가서 저랑 제 남동생을 데리고 와야 하지 않았어요. 시카고 공항에서 우리를 맞이했죠. 제 두 동생은 국내 입양이었기 때문에 바로 국내에서 입양되었습니다.

팟캐스트: 어릴 때 겪은 문제로 인해서 자해하기 시작하셨나요?

달시: 저 자신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건강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죠. 꽤 자주 자살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자살 시도를 하고 나서도 자살에 대해서 생각했죠. 자살에 대한 생각이 안 나는 경우가 없었죠. 트라우마에서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상담을 받으면서도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고생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는 했죠. 제대로 밥을 먹지 않기도 하고, 저 자신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했습니다. 제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팟캐스트: 어머니만 이런 학대를 하셨나요? 아니면 아버지도 학대에 동참하셨나요?

달시: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어머니만 저에게 이러셨죠.

팟캐스트: 팟캐스트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걱정을 하셨나요, 아니면 이러한 개인적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었나요?

달시: 좀 걱정되긴 했어요. 하지만 다른 팟캐스트 에피소드를 듣고 나니 이러한 문제를 저 혼자만 겪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죠. 다른 입양아들도 비슷한 문제나 상황을 겪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든 입양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완벽하지 않은 입양이라고 해도 괜찮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일종의 구원이군요?

달시: 네 그렇습니다. 현재 저는 괜찮아요. 제가 이렇게 괜찮아진 이유는 신의 은총, 좋은 친구들과 가족, 삶의 긍정적인 면모를 보여준 스승들이 제 삶의 긍정적인 면모를 보여줬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네브래스카의 농촌 마을에서 성장하셨군요. 작은 마을이니 서로서로 아는 곳이었죠? 달시 씨의 학대 사실이 숨겨졌나요? 다른 사람들이 몰랐다고 생각하세요?

달시: 알았지만 동시에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SNS로 다시 연락이 닿은 동네 사람들이 저에게 와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몰랐다고 이야기를 해줬죠. 친구들은 저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도울 방법을 몰랐습니다.

팟캐스트: 70년대였고, 중서부의 농촌 지역이라 그러한 문제를 아예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 문제도 있었겠군요?

달시: 네 그렇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이러한 문화가 좋지 않은 상황에 놓인 아이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죠. 그러한 상황에서 경찰이나 다른 공공기관에 신고가 들어가지 않았는지 궁금하네요.

달시: 사실 신고가 들어갔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아동복지국이 나와서 우리에게 질문한다고 부모님이 모아서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할 이야기를 정해주었죠. 4명 전부 소파에 모여서 앉아 있었고 어머니가 집을 돌아다니면서 집을 청소했습니다. 네. 마을의 누군가가 아동복지국에 연락했어요. 하지만 충분한 증거가 없어서 우리 형제자매들을 부모님에게 떼어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너무 자주 일어나죠. 제가 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심리학을 공부해서 왜 그런지 배웠고, 관련 분야 봉사 활동을 10년간 진행하면서 아동 학대와 방치 문제를 처리했는데, 우리 가족 상황과 비슷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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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친어머니에 대해 생각하신 적이 있나요? 만약에 친어머니가 달시 씨에게 일어날 일을 알았다면, 상황이 다르게 진행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나요? 많은 친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볼 수 없고, 돈도 없고, 남편도 없으니, 아이들에게 더 좋은 미래를 주기 위해서 입양 제도에 아이들을 맡겨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죠. 한국인들로서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하는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입양아들도 더 나은 삶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요. 달시 씨도 다른 선택지에 대해 생각을 하시나요?

달시: 네. 한국에서 자랐다면 제 삶이 어떻게 달랐을까 생각하죠. 어른이 되고 나서도 제 친어머니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친어머니를 찾기 위해서 노력했고 지금도 찾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제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고, 어머니가 저를 학대했기 때문에 진짜 모녀 관계를 원하고 제 친어머니를 찾고 싶어요. 친어머니에게 저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편지를 쓰기도 했죠. 하지만 제 친어머니를 원망하지는 않아요. 어머니가 저에게 사과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친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친어머니들 대부분이 입양 과정에서 아이와 떨어지는 고통을 설명하기 때문에 울게 되죠. 친어머니들은 아이들을 항상 기억한다고 해요.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제 친어머니도 절 계속 생각하거나 적어도 생각했다고 생각합니다. 제 친어머니가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친부모 조사는 진행하셨나요? 한국에 돌아가신 적은 있나요?

달시: 한국에 2번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2001년과 2016년에 한국을 방문했죠. 제 첫 한국 방문은 제 입양기관을 통한 방문이었어요. 입양기관에서 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뒤 얼마 안 있어서 방문하게 됐습니다. 대학교 수업 과제를 위해서 그쪽에 연락하게 됐죠. 입양과 관련된 과제였는데 제 부모님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서 입양기관에 연락했어요. 대학교 때 그 연락하기 전까지는 제가 입양에 맡겨진 지역도 어디인지 몰랐습니다. 연락하고 나서야 제가 어디에서 어떻게 입양되었는지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제 상황을 알게 되자 입양기관에서 놀라면서 사과했습니다. 하지만 입양기관 잘못이 아니었죠. 입양기관은 그 상황에서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니까요. 하지만 입양기관이 제 상황을 듣고 사죄하는 의미에서 조국 방문 여행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감정적인 유대감이 느껴졌고, 경험 자체가 매우 감동적이었죠. 돌아와서 좋았습니다. 유전자 검사는 하지 못했지만 제가 지냈던 고아원이 있었던 자리에 방문할 수 있었어요. 2016년에도 조국 방문 여행의 일부로 한국에 왔고, 고아원 자리도 다시 방문했습니다. 2016년에는 제가 좀 더 나이를 먹은 뒤라, 좀 더 무게 있는 방문이었죠. 한국에 다시 방문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고아원 출신 고아들과 다시 연락망을 구축했습니다. 그 연락망 구축이 제 조사 결말의 일부라고 할 수 있어요. 

팟캐스트: 고아원 이름이 어떻게 되죠?

달시: 동두천시에 있던 양주 고아원입니다. 그 고아원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배우고 있죠. 전 서울 북쪽에 있지만 의정부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DMZ 근처의 지역에서 태어났거나, 발견되었어요.

팟캐스트: 그 고아원에 대해서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나요?

달시: 나이가 어느 정도 먹은 뒤에 입양된 입양아들은 그 고아원에 대한 끔찍한 기억이 있죠. 

팟캐스트: 달시 씨가 지내던 곳이 좋지 않은 곳이었는데 달시 씨가 보내진 곳도 좋지 않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어땠나요? 

달시: 우선 제가 2살 때 입양되었기 때문에 한국 기억이 없습니다. 기억 자체가 억압되었는지 아니면 너무 어려서 기억을 하지 못하는지는 모르죠. 한편으로는 기억하지 못해서 그 기억을 가지고 자라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면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받은 삶과 기억도 그리 축복받은 삶과 기억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기억이 저에게 더 좋았을까 고민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미국에서 살았던 삶을 염두에 둔다고 해도, 입양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현재 제 생활, 저에게 주어진 기회,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고, 한국 고아원에서 끔찍한 생활을 하면서 자랐다면 제가 어디 있을지 생각해봤습니다. 아마 준비도 안 된 채로 거리에 내몰렸을 겁니다. 한국 고아들이 대부분 그러한 결과에 도달한다고 들었어요. 

팟캐스트: 달시 씨의 이야기는 회복과 생존의 이야기군요. 달시 씨의 어린 시절 자체가 생존하는 이야기입니다. 달시 씨의 이야기 일부에 대해서 공감해요. 어린 아이일 때 생존의 방식을 만들죠. 누가 자기를 도울 수 있는지 알고 인공적인 부모 관계를 만들게 됩니다. 달시 씨도 그런 일을 겪으셨나요? 

달시: 물론이죠. 이미 말했지만, 가족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인공적인 부모 역할을 해준 분들이 있었죠. 그분들 중 몇몇은 자기를 어머니로 불러도 좋다고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러한 이야기가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은 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단순히 입양아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죠. 제 입양 가족은 제 진짜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이 제 가족이긴 하고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절 사랑해주고 받아들여 주는 사람들이 제 진짜 가족이죠. 그러한 사람들이 제 삶에 있고 그 사람들이 있어서 기쁘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대학교 이후에는 어떻게 생활하셨죠? 어디로 가시게 됐나요?

달시: 대학교 졸업 이후에는 네브래스카주에 몇 년 동안 지냈어요. 그곳에서 지내면서 보이스 타운(Boys Town, 네브래스카주 기반 자선단체)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일은 즐거웠죠. 다양한 지식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보이즈 타운은 청소년들을 위한 보호 단체로, 아이들이 소년원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도착하게 되는 곳이죠. 그곳에서 아이들이 가족에서 같이 지내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저는 거기에서 가족 보조 선생으로 일했죠. 보이즈 타운에서 지내게 되는 아이들은 가족 선생들과 같이 진짜 가족과 지내게 됩니다. 8명의 아이들이 같은 집에서 지내게 되어요. 8명의 남자애나 8명의 여자애가 같은 집에서 지내게 되죠. 일하는 법을 배우고, 학교도 가고, 필요로 하는 상담도 받게 됩니다. 이 애들 대부분이 사회적 교류를 하는 법을 모르거나 사회적 스트레스를 상대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사회적 기술도 가르쳐요. 비행 청소년들을 위한 훌륭한 시설이죠. 그곳에서 6년간 일했습니다.

팟캐스트: 잠시 묻고 싶은 일이 있는데, 이러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정서적인 치유에 도움이 되었나요?

달시: 예. 정서적인 치유에 도움이 되었죠. 아이들 상당수가 제가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아이들 상당수가 학대당하면서 자랐으니까요. 제 삶을 고친 제가 그 경험을 통해서 다른 아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점이 좋았죠. 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여름 캠프에서 일했고, 대학교 교회에서도 활동하면서 멘토 가족도 있었어요. 그 가족과 여전히 연락하고 있습니다. 제 신앙이 대학교에서는 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죠. 제 친구는 교회 청소년 지도자였는데 그 친구와 함께 청소년 지도를 돕고, 대학교 청년 교회의 일을 도왔어요. 제가 일을 잘하는 것을 보자 친구가 다른 교회에서 청소년 지도자로 일해보라고 권유했습니다. 그걸 듣고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캠프를 가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설파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니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다른 교회에 청소년 지도자 신청을 했고 4년 정도 청소년 지도자로 일했습니다. 제 캠프 지도자 시기와 그 청소년 지도자 시기의 경험이 제가 종교 쪽으로 진로를 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애리조나 교회에서 15년간 일하다가 텍사스 교회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자살 충동은 잦아들었나요?

달시: 네 그렇습니다. 자살 충동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우울함, 소외감, 외로움, 의심이 남아 있죠. 전 여전히 신실한 신도지만 이러한 감정을 제 목사님과 공유했습니다. 현재 이 COVID-19 유행이 제 마음속에 큰 의심을 만들었거든요. 왜 이런 비극과 슬픔이 일어나고 있죠? 하지만 동시에 저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이 희망을 주시고 저희를 인도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죠. 자세히 설명하지는 못하지요. 

달시: 하나님이 어떤 이유로 삶에 어떤 일을 일어나게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한 이유로 현재 유행이 일어났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의 큰 시련이라고 보는 관점이죠. 전 그런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지구에 있으면서 온갖 고통을 겪는 이유는 원죄 때문이죠. 하지만 이런 시련이 하나님이 우리가 가진 사랑, 선, 품위를 더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 또한 천국에서 받을 기쁨을 더 높여준다고 봅니다. 말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제 관점이죠. 전 제가 망가진 가족에서 자란 이유가, 제 경험으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기회를 받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러한 경험을 겪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을 이 방식으로 도울 수 없었겠죠. 하지만 제가 만약에 절 사랑해주는 가족 밑에서 자라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고 해도 사람들을 다른 방법으로 도와줬을 겁니다. 제 인생 이야기를 자주 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의 동정이 싫기 때문입니다. 불쌍한 달시가 끔찍한 삶을 살았다는 동정을 받고 싶지 않아요. 전 제 삶을 그런 이야기로 소비하고 싶지 않죠. 놀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지구에 오게 된 이유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하나님의 뜻대로 최고의 사람이 되려고 왔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은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죠. 

달시: 자주 들은 말이네요. 제가 있어서 가장 힘든 기간은 고난 주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힘들죠. 학대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 하나님이나 교회에 적응하기 어려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왜 그런지 이해해요. 사실 저도 좋은 신도들이 저를 어려운 시기에 이끌어주지 않았다면 교회와 연관이 있거나, 깊은 신앙심을 가지지 못했을 겁니다. 적어도 전 그렇게 믿어요.

팟캐스트: 고난 주간이 다시 다가오는데 달시 씨는 그 기간을 어떻게 버티나요?

달시: 전 자아 고찰을 통해서 고난 주간이 가진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인간의 고통을 아신다고 생각하죠. 하나님이 예수님이 우리의 고통을 대속하게 하셔서 저희의 원죄를 씻어 주셨다고 생각해요. 힘든 시기이고 자아 성찰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달시: 저에게 있어서 관계는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쉽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저에 관해서 물어본다면, 특히 직장 동료들에게 저에 관해서 물어보면 제가 매우 사교적인 사람이라고 할 겁니다. 전 자원을 어떻게 찾아낼지 알고 있고 사람들을 서로 엮어내고 연락하는데 재능이 있어요. 거기에 사람들도 많이 알죠. 하지만 관계의 깊이가 다릅니다. 전 친구가 많이 있지만, 관계는 깊지 않죠. 제가 깊은 관계를 맺는 데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결혼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하죠. 아이를 가지지 않은 이유기도 하고요. 결혼은 하고 싶고, 남편을 가지고 가족을 꾸리고 싶습니다. 노력했다면 심리적 굴레를 뛰어넘고 그러한 길에 접어들 수 있었겠지만, 실패가 무서워서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심리학에서도 심리적 굴레를 뛰어넘지 못하면 양육의 굴레를 다시 반복하게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 자체가 저에게는 공포였고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죠. 연애 관계를 멀리하게 되었고 아직도 신뢰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입니다. 제가 여전히 혼자이고 깊은 친구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개인적인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답하고 싶으면 답해주세요. 친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달시: 친어머니에게 저에게 삶을 주셔서 감사하고, 어머니가 그때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일을 해줘서 감사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제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괜찮고 어머니의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죠. 어머니가 행복한 삶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하고 싶어요.

팟캐스트: 10살 때의 달시 씨에게는 어떤 말을 해주시고 싶죠?

달시: 음…. 아마 어른들이 말하는 모든 이야기를 믿지 말고,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 싸우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그때는 못했던 일입니다.

팟캐스트: 달시 씨 감사합니다. 여기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네요. 달시 씨의 이야기를 공유해줘서 고맙습니다. 많은 사람이 공감할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생존, 회복, 힘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달시: 감사합니다. 이 인터뷰를 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카오미 씨가 진행하신 이 팟캐스트에도 감사하고 싶습니다. 이 팟캐스트를 듣고 제가 혼자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서 감동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