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6, 열 세번 째 에피소드: 마이클 제섭

안녕하세요. 팟캐스트 “어답티드” 시즌 6, 열 세번 째 에피소드를 지금 시작합니다. 

이 팟캐스트는 한국 해외입양인들의 목소리에 그 중심을 둡니다. 입양인들이야 말로 입양에 관한 한 전문가들이죠. 저는 카오미 리이고 저 또한 한국에서 입양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목소리는 아름다운 사연만을 원하는 입양 기관과 정부 혹은 양부모에 의해  지워지곤 했습니다. 실제 우리의 삶은 그것보다는 더 복잡했는데 말이죠. 이 팟캐스트는 그 이야기를 되 찾고자 합니다. 

“글쎄요,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수 있다. 뭐 그런 관점이라면 모르겠지만, 입양된 아이라는 사실을 놓고봤을 때 고작 여섯살 짜리 아이가 그렇게까지 해야했던 이유는 뭘까요?”

마이클 제섭은 아버지이자, 스포츠 지도자이자 한국인 입양인입니다. 그 또한 한 여인의 아들이지만 엄마에 대한 기억은 없습니다. 인식했던 아니던 그는 평생을 친엄마로부터 떨어졌다는 상처를 이겨내며 살아왔습니다. 지금 그는 그의 지식과 재능을 사회에 나누고 있습니다. 마이클의 이야기입니다. 

마이클 제섭(이하 마이클) : 제 이름은 마이클 제섭이고 올해 마흔여섯입니다. 캘리포니아주 마운틴 뷰에 살고 있습니다. 

카오미 리 (이하 카오미) :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마이클 : 태어난 때 부터 시작하죠.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13개월 때 길에서 발견되어 고아원으로 보내졌다고 해요. 며칠 뒤에 임시보호가정에 6개월간 맡겨졌고 정명찬이라는 이름을 받았어요. 그 후 19개월에 미국의 짐 제섭, 리타 제섭 부부에게 입양되었고 마이클 제섭이 되었어요. 지금도 이름으로 살고 있고요.

카오미 : 양부모로부터 왜 입양했는지에 대해서 들었나요? 아이를 가질수 없어서?

마이클 : 네. 아이를 가질수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입양하기로 결정한거고. 

카오미 :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친부모와 일년 정도를 같이 살았을 수도 있다는 점이네요. 

마이클 : 맞아요. 실은 그 전에는 그 점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었는데 2018년에 한국에 갔을 때 누군가가 그 점을 짚어줬어요. 다른 입양인들과 함께 제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당신 부모님이 당신을 계속 키우고 싶어했던 것 같네요 라고 하더라고요. 그 때 버스안에 있었는데 엄청난 충격이었던 기억이 지금도 나요. 보통 입양 서류에 별로 정보가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물었더니 너를 13개월이나 키웠고 건강에도 이상이 없었으니  그건 계속 키우고 싶었던거라고요. 많이 놀랐고 그때 마음이 너무 이상했어요. 내 과거나 출생에 대한 그 어떤 정보라도 중요하니까요. 딱히 설명할 순 없지만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었어요. 

카오미 : 맞아요. 기록에는 그냥 아기때 입양되었다고만 되어 있으니까 실제 타임라인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잖아요. 하지만 좀 더 찬찬히 생각해보면 추측컨데 그 기간동안 엄마와 다른 가족들이 당신을 돌봤고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니까요. 물론 그게 더 많은 질문거리를 주긴 하겠겠지만요. 

마이클 : 글쎄요. 쉬운 일이 아니죠. 내 뿌리 찾는 일이요. 최근에 의정부의 입양인들과 연결이 되었어요. 제가 의정부에서 발견되었다고 하거든요. 제 입양기록에 의하면 제가 쉼터 같은 데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보호소 같은 그런 곳이죠. 그런데 의정부가 DMZ근처라서 그 쪽 출신 입양인들이 미군과 한국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경우가 많고, 많은 경우는 어느 정도 자란 후에 입양이 되었기 때문에, 그 때 그 곳에 살았던 기억이 있죠. 그래서 그분들이 저를 위해 조사를 좀 해주었는데 그 때 당시에 그 곳엔 남자들을 위한 쉼터 혹은 보호소 같은 곳은 없었다고 해요. 좀 이상하죠. 그 외 다른 몇 가지도 앞뒤가 안 맞고요. 그래서 내 입양서류가 과연 얼마나 정확한가? 그냥 조작된건가? 다른 입양인들한테도 그런 경우가 많잖아요. 도대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참. 

카오미 : 안 그래도 서류조작이 아닌가 하고 말하려던 참이에요. 나에 대한 기록이 허위일수도 있다는 걸 중년이 된 나이에 알 때 기분이 어떤가요? 

마이클 : 무언가 더 많은 것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화가 나고 그러진 않았고요. 물론 화도 났지만 그보다는 뭐랄까 더 참담한 기분이에요. 출구가 없는 게임을 하는 것 같은. 굳이 해야 하나 혹은 그냥 관둘까 하는 생각도 들고. 감정이 복받쳐 오르거나 의심스럽고 불분명한 상황일땐 그냥 잊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럴수록 그냥 부딪혀 보는게 제 방식이기도 하고요.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요. 

카오미 : 캘리포니아 북부로 입양되었다고 했죠?

마이클 : 네, 캘리포니아주 사라토가요. 

카오미 : 어린시절은 어땠나요?

마이클 : 두 가지 측면이 있어요. 외적인 부분에서는 아주 좋았어요. 제가 운동을 잘했거든요. 남자아이로서 운동을 잘한다는 게 또래들과 어울리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됐죠. 제가 굉장히 내성적이고 체구도 작고 말도 똑부러지게 못했지만 운동을 잘하니까 동양인인거랑 상관없이 금방 어울리게 됐죠. 경기를 하면 항상 1순위로 지명되거나 팀 캡틴이 되거나 했으니까요. 그로 인해 적어도 안심이 되고 어딘가에 속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됐죠. 그것이 성장하는데 굉장히 큰 부분이었어요요. 

내적인 부분을 보자면 항상  외로웠던 것 같아요. 제 부모님은 환경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은 다 해주셨지만 정서적인 면에서는, 글쎄요. 지금 돌아보면 우리 부모님도 나름 힘들었죠. 아버지가 알콜 중독이셨는데 주변을 힘들게 하거나 했던 건 아니고 그냥 방문 닫고 들어가서 안나오는 그런. 그리고 엄마는 그런 아버지와 사느라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나 싶고요. 엄마한테도 엄마 나름의 문제들이 있었고요.

그리고 그때는 아마도 우리가 처음이라 그랬던 것 같은데 입양아들에게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아무도 몰랐죠. 그래서 그냥 같은 백인인라고 간주하고 당신들이 알아서 해라 이런 식이었죠. 그래서 자라는 동안 아시안문화를 전혀 접하지도 못했고 실제로 전 제가 백인인줄 알았어요. 그런 부분이 힘들었죠. 그냥 항상 혼자인 기분이었는데 그걸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했죠. 부모님한테도요. 지금까지 한번도 그 부분에 대해서 부모님과 솔직한 이야기를 해보지 못한 것 같아요. 항상 “잘 지내요. 별 일 없어요” 이런 대화만 했죠. 

카오미 : 굉장히 표면적인?

마이클 : 네. 아주 표면적인 대화요.. 아마도 룸메이트와의 대화보다도 더 표면적이었을 거에요. 룸메이트들은 가끔씩 술이라도 한잔씩 하며 이야기하잔아요. 그 당시에는 술도 못 마셨고.

카오미 : 그렇죠. 외동이었나요?

마이클 : 네 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어요. 역시 한국에서 입양되었고요.

카오미 : 그럼 여동생과도 그런 표면적인 관계였나요? 혹은 가족들 사이가 다 그랬나요?

마이클 : 네, 우리 가족은 그랬어요. 그렇게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죠. 어렸을 때는 그래도 동생과 꽤 가까웠던것 같은데 중고등학교에 진학해 팀운동을 시작하고 대회에 많이 나가게 되면서 제가 집에 많이 없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된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친구들 무리에 끼고 싶어서 내가 거리를 두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친구들하고 있을 때는 어린 여동생이 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멀어진 것 같아요. 

카오미 : 항상 전투적으로 살았던 것 같은데 맞나요? 생존을 위한 투쟁 같은. 언젠가 저한테 엄청난 이야기를 들려줬잔아요. 생존 본능에 관한.

마이클  : 맞아요. 어릴 때는 내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이 내가 운동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땐 그냥 뭐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생각했죠. 과거는 과거일 뿐 앞으로 일어날 일과는 상관없다고. 지금 이 순간만이 중요하고 지금 이 순간에 네가 뭘 하는지가 너를 결정한다고. 그런 마음가짐이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었어요. 말씀하신대로 저는 항상 전투적이었어요. 그땐 그런 줄도 몰랐지만. 그리고 전 모두가 다 그런 줄 알았어요. 테니스 선수로서 승부욕이 강한 것이 굉장히 강점이었는데 지금 생각 해보면 그저 승부욕이라기 보다는 생존 본능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두살 반정도 되었을때 저희 부모님이 제가 온 지 일년이 된 기념을 하고자 휴가를 갔다고 해요. 스누피 여행가방에 짐을 싸서 차를 타고 Long Beach에 가서 멕시코로 크루즈 여행을 할 계획이었대요. 그런데 제가 차 안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서는 한마디도 안 하더래요. 롱비치에 있는 호텔까지 일곱시간 정도를 가는 내내 말이죠. 저희 부모님은 제가 왜 저러나 싶었죠. 그 다음날 크루즈를 타고 방에 가서 짐을 풀렀더니 그제야 제가 침대에서 방방뛰며 평소의 저로 돌아갔대요. 

그래서 휴가에서 돌아온 후에 엄마가 입양기관 담당자한테 전화를 해서 설명을 했더니, 아마도 내가 또 버려지는 줄 알고 그랬을 거라고 했대요. 두살 반짜리 아이가 어떻게 그걸 알고 그랬는지 진짜 기가 막히죠. 입양에 대해서 많이 연구하다 보니 언어 이전에 우리 몸에 각인된, 우리가 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는 그런 것들이 있는것 같아요. 승부욕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되돌아가 보자면 어떤 사람들은 이기려고 싸우고 어떤 사람들은 지지 않기 위해서 싸우는데, 제 경우엔 생존을 위해서 경기를 했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에 제가 했던 모든것을 돌아보면 다시금 버려질 상황에 놓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카오미 : 아마도 그 13개월때의 기억때문이 아닐까요? 의식적인 기억이 있든, 없든 간에 말이죠. 그 나이에 가족과 헤어진 것이 큰 트라우마로 남아있었을 테니까요.

마이클 : 그랬을지도 모르죠. 제 입양기록을 보면 한가지 더 힘들었을 점은 제가 임시보호 엄마에게 정이 많이 들었었다고 해요. 아무래도 고아원보다는 임시보호 가정이 나았을 테고, 그 나이에 6개월이란 긴 시간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임시보호 엄마와 애착이 생겼는데 또 헤어져야 했으니. 임시보호 가정이 고아원에 있었던 것보다는 나았겠지만 그래도 고아원에만 있었다면 바로 끊어질 관계를 맺지는 않아도 되었을텐데요요. 

카오미 :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나요?

마이클 : 글쎄요 

카오미 : 성인이 된 후에도 말이에요.

마이클 : 관계가 끊어지는 것에 대해서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냥 사람을 잃는다기 보다 가까운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불안은 있죠. 관계가 아주 가까워지면 불안해져요. 어려워지고요. 친한 친구 혹은 완전 친한 친구보다 그냥 적당히 친한 사이가 되는게 낫죠. 뭔가 위험해 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항상 이 정도면 충분하다 하고 적당히 선을 긋죠. 

카오미 : 그럼 사람들한테 가깝게 다가가거나 서로 의지하는 관계를 맺는 것이 소용없다고 느껴질 정도인가요? 이 관계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에?

마이클 : 제가 의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그런것 같아요.  의식적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실제가 그러니까요. ㅋㅋ

 카오미 : 통계로 입증되나봐요 (웃음)

마이클 : 맞아요. 무의식적인 불안이 분명히 있는것 같아요.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둔다거나 안전 장치를 마련하거나 해요. 내 자신을 엄청 바쁘게 만든다거나 하는. 일종의 방어기제죠. 그런 모든 일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는 게 참 무섭죠 

카오미 : 여섯살 때 일어났던 그 이야기를 해주세요. 조금 마음이 아픈 이야기인데 살아남기 위해 애썼던 이야기..

마이클 :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만화를 너무 좋아해서 생긴 이야기이기도 하고요ㅋㅋ. 초등학교 1학년 여섯살 때 였어요.  우리 학교에서 연례 모금행사로 걷기 대회를 했는데 1등  상이 컬러티비였어요. 토요일 아침마다 볼트론, 썬더캣, 지아이조 같은 만화를 봤었는데 

카오미 : 스머프는요

마이클 : 맞아요. 스머프도 있었죠. 스머프 안좋아 한 사람이 누가 있어요? (웃음) 

그 해 1등 상이 컬러티비 였어요. 토요일 아침마다 춥게 티비를 봤거든요 그래서  내 방, 내 침대에서  따듯하게 티비를 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엄마에게 엄마 이번 걷기대회1등 상품이 컬러티비래. 내가 1등하면 그 티비 내 방에 놔도 돼요? 하고 물었죠. 그랬더니 그래라 하는거에요. 그래서 그럼 케이블도 연결해 줄 거예요? 하고 물었더니 당연하지 그러는거에요. 아주 기분이 좋았죠.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설마 이 애가 일등을 하겠어 라고 생각했을거에요. 아직 일학년이고 일등하려면 5-6학년 애들을 이겨야 되는데. 여섯살 짜리가 열 한살 열 두살 애들을 이겨야 되는거니까요.

카오미 : 체구도 작은 편이라고 했었죠?

마이클 : 맞아요. 꽤 작은 편이었어요. 검은 머리에 키도 작은 전형적인 아시안이었죠. 아무튼 대회날이 다가왔고 나보다 큰 아이들과 함께 경기를 시작했죠. 아침 8시 경이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갈수록 어떤 아이들은 좀 쉬기도 하고 어떤 애들은 내내 걷기만 했고 어떤 애들은 뛰었고요. 나는 내내 가볍게 뛰었는데 한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 세 시간이 지나자 거의 모든 아이들이 중간에 쉬는데 나는 계속 했어요. 어떤 애들은 쉬었다가 다시 뛰는 애들도 있었고요. 점심시간이 되자 많은 애들이 가서 점심을 먹는데 나는 엄마에게 핫도그와 콜라를 가져다 달라고 해서 그걸 먹으면서 계속 걸었어요. 그때는 콜라가 스포츠 음료였거든요. 

카오미 : 최고의 건강음료였죠

마이클 : 그랬죠. ㅋㅋ  오후 세시 쯤 경기가 끝날 때가 되니 다른 아이들이 늦게라도 마일리지를 더하려 돌아왔는데, 저는 그때까지도 쉬지 않았어요. 계속 걸었던거죠.  화장실에 갔었는지도 기억이 안나요. 그 뒤에 이틀 정도 걷지 못했던 기억이 나는데, 제가 그날 25마일(역자 주 – 대략 40킬로미터) 을 걸었더라고요. 

다행히 그 날이 토요일이어서 하루 이틀정도 회복할 시간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 금요일이 되었어요.

카오미 : 교사들이나 학교 담당자들이 걱정도 안 됐었나봐요? 이 어린아이가 이렇게 많이 걸어도 괜찮은지?

마이클 : 글쎄요. 그때는 스포츠 사이언스 이런것도 없었잖아요. 한 여름에 훈련을 할 때도 물 마셔야 되면 니가 약해서 그런거야, 물 안마셔도 돼. 그래서 세시간 동안 물도 없이 훈련하는 그런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니 괜찮았다고 봐요. 어쨌든 금요일이 됐고 조회를 하는데, 3등 발표를 하고, 2등을 발표하고, 교장선생님이 1등 마이클 제섭! 하고 발표를 했는데, 그 순간 체육관이 조용해졌어요. 5-6학년은 서로 다들 알잖아요. 그런데 1학년의 이름은 모르니까 다들 두리번거렸어요. 그리고 우리반 애들은 이게 진짜인가 싶었겠죠. 제가 단상에 올라가서 컬러티비를 받았는데 그때가 참 기념비적인 순간이었어요.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해낼 수 있구나 라는 걸 깨달았던 순간이랄까. 그런데 참 자랑스러우면서도 짠한 기억이에요.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어, 이런 관점에서라면 몰라도, 입양된 아이라는 점에서 여섯살 짜리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를 생각해보면 굉장히 짠하죠. 

카오미 : 많이 속상하네요. 그래서 방에 티비를 놓았나요? 케이블도요?

마이클 : 네. 부모님이 약속을 끝까지 지켰어요. (웃음)

그 티비를 대학에 가서까지 계속 가지고 있었어요. 기숙사에 가지고 갔죠. 

카오미 : 지금은 어디에 있나요

마이클 : 그것까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확실한 건 대학 시절에는 계속 가지고 있었어요. 

카오미 : 그 경험이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확실히 북돋아 주었겠어요. 후에 운동선수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신체적 강점이나 지구력같은 것들 말이죠. 

카오미 : 네. 제가 워낙 운동을 잘 하기도 했지만 타고난 능력 만큼 중요한 것은 얼마나 더 이기고 싶어 하느냐에요. 전 그걸 어린 나이에 배웠던 것 같아요. 혹은 누가 더 이기고 싶어하느냐가 승부를 결정하는데 심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직관적으로 알았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항상 누구보다 더 더 이기고 싶었어요. 진심으로 이기고 싶었고 지금 돌아보면 이기기 위해 죽을 수도 있었어요. 이기기 위해서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내가 더 겪어야지 하는 그런 마음.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지 하는 마음이요.

카오미 : 완전 진심이었네요. 진적도 있었나요?

마이클 : 그랬죠. 때때로 경기에서 질 때면 너무 괴로웠어요. 세상이, 적어도 내 세상이 망하는 것 같았어요. 

카오미 : 그렇다면 죽을만큼 혹은 죽더라도 이기고 싶었던 그 마음도 일종의 생존기제였을까요?

마이클 : 그렇죠. 그런데 그때는 그렇게 생각을 안했고 남들도 다 그런줄 알았어요. 그땐 그냥 제가 남들보다 더 승부욕이 강한 줄로만 알았어요.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특히 테니스 코치가 되어 후배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보니 그런 승부욕은 훈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포어핸드나 백핸드, 올바른 자세, 그리고 어떤 요령같은 것들은 가르칠 수 있지만, 승부욕은 가르치기가 굉장히 어렵죠. 어떤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이기고 싶다거나 지는게 싫다거나 하는 감정을 어떻게 가르치겠어죠?

카오미 : 그런게 바로 킬러 본능이라는 건가요?

마이클 : 맞아요. 킬러 본능이요.  그런건 가르칠수가 없어요. 타고나는거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가능할지도 모르죠. ㅋㅋ 

카오미 : 그렇다면 지금 돌아보건대 입양되었다는 사실 덕에 킬러본능을 키울 수 있었네요. 

마이클 : 맞아요. 아주 어린 나이부터 모든 것에서 이겨야만 직성이 풀렸어요. 그냥 재미로 하는 게임은 없었어요. 죽거나 살거나 둘중 하나였죠. 

카오미 : 그렇다면 상당히 진지한 편이기도 했나요요?

마이클 : 네, 굉장히 진지한 아이였어요. 모든면에서 심각했죠.  

카오미 : 그래요? 지금 제가 보는 마이클은 느긋하고 낙천적인 성격에 항상 아재개그를 날리는 그런 사람인데, 재밌네요. 지금의 그런 성격들은 마이클이 일부러 노력해서 얻게 된건가요? 그렇게 진지한 아이였다면요.

마이클 : 맞아요. 지난 몇 년 동안 그쪽으로 많이 노력했어요. 긴장을 풀고 조금은 즐길 수 있도록요. 또 최근에는 대인관계 기술을 단련하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불과 일이년 전까지도 지금의 저와는 많이 달랐어요. 많이 수줍었고, 나 자신에 대해 확신이 별로 없었고, 내성적이었죠. 아마 방구석 외향형이었을거에요. 지금은 사람들이 제가 한 때 그랬었다고 하면 안 믿어요.  연습하면 다 좋아지죠. 연습하면 못할 것이 없잖아요. 조금 더 쉬울 순 있겠죠. 타고나면요.  하지만 대부분 꾸준히 연습하면 적어도 능숙하게는 되죠. 

카오미 : 왜 테니스였죠?

마이클 : 왜 테니스를 했냐고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카오미 : 가족들이 모두 테니스를 치고 그런것도 아니었잖잖아요, 맞죠?

마이클 : 네. 테니스는 다섯살때 시작했어요.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그땐 인터넷도 셀폰도 없고. 여름이면 아이들이 할 일도 없고 많이 지루해 하잖아요. 그래서 주변을 뒤지고 다니다가 차고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테니스 라켓과 공을 발견한 거에요. 차고 문을 향해 공을 치기 시작했는데, 그때 테니스를 하는 이웃이 오더니 우리 부모님한테 나를 테니스 캠프에 데려가보라고 했어요. 제가 잘 한다고요. 진짜 잘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죠. 그래서 부모님이 저를 테니스 캠프에 등록했고 매 여름마다 테니스를 쳤어요 그리고 아홉살이 되던 해에는 일년 내내 테니스를 쳤어요. 그런데 그때는 축구랑 야구도 했고요. 

한 야구 게임이 기억이 나는데요, 플레이오프였고 우리가 지고 있었어요. 저는 2루에 있었고 6회말 이었어요. 어린이야구라 6회까지만 해요. 우리가 몇 점 차로 지고 있었는데 우리 팀이 안타를 쳤어요. 그래서 제가 삼루 그리고 홈까지 가서 동점이 되었죠. 제 뒤를 따라 다른 주자가 또 들어왔고, 우리는 이겼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 때 상대팀이 삼루로 공을 다시 던져서 아웃이 된거에요. 제 뒤에 들어온 주자가 삼루 베이스를 안 밟아서 아웃이 된거였죠. 

카오미 : 아이고

마이클 : 아마 그때를 계기로 테니스에 올인 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기억나는데 다른 사람이 나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 나 혼자 하는게 낫다, 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카오미 : 유년시절을 거의 혼자 보냈다고 했잖아요, 맞죠?

마이클 : 네.

카오미 : 그러고 보면 혼자서 하는 스포츠에 끌린 것이 자연스럽네요. 

마이클 : 테니스는 진짜 고독한 운동이에요. 코트에 혼자 서 있잖아요. 얼마 전까지는 코칭도 못했어요. 오로지 나와 내 상대 둘 뿐이었죠. 테니스를 해보지 않았다면 알기 힘든 감정인데요, 정신력이라는 측면에서, 혼자하는 스포츠가 더 힘든 점이 있어요. 테니스를 얼마나 잘 하는지보다 얼마나 성숙한 사람인지가 더 중요하죠. 코트에 서 있으면 멘탈이 털리거든요. 나 자신에 대한 회의 같은 것들 말이에요. 운동을  하며 그런 경험을 한다는 것이 참 재밌죠. 테니스는 한번 하면 푹 빠지게 되는 운동이에요. 하다보면 광신도가 되죠. 사람들이 재미로 하는 운동이 아니에요. 말로는 재밌어서 한다고 하는데 아니죠.  테니스는 재미없어요. 잔인하죠. 비참해지고 싶으면 테니스를 쳐보세요. 테니스 홍보하는데 도움이 안되겠는데요ㅋㅋ 엄청난 내적 성찰이 필요한 운동이에요. 자기 자신을 찾는 과정에 있거나 혼자가 더 편하거나 뭔가 이루어야 한다거나 자신을 몰아 붙이고 싶은 사람들에게 잘 맞아요.

카오미 : 테니스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까지 올랐었죠. 아닌가요?

마이클 : 그랬죠. 프로생활까지 했으니까요.  꽤 잘 나갔어요. 18세 이하 랭킹 미국 2위까지 했어요. 페퍼다인 대학 대표였고 프로리그 세컨티어에서 3년간 뛰었어요. 아주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때까지는 저도 아주 잘했어요. 제 개인적인 목표는 거의 다 이뤘으니까요. 

그런데 탑 레벨에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장난이 아니거든요. 승부욕이 다가 아니에요. 그 정도 레벨에서는 승부욕은 다들 기본이거든요. 지역에서 뛸 때는 계속 이기기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프로레벨이 되면 넘어야 할 난관이 너무 많죠. 훈련도 그렇고요. 그 때 부터는 개인운동이 아닌 팀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당신을 맡겨야 해요. 코칭을 받고 바뀔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해요. 그런데 전 그러지 못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제 코치들이 절 어떻게 감당했나 싶어요. 

카오미 : 왜였죠? 왜 가르치기 힘들었나요?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나요?

마이클 : 듣기 좋은 것만 들었죠. 제가 많이 예민했어요. 듣기 좋은 것만 듣고, 싫은건 안 듣고. 그리고 방어적이었어요. 방어적이면 가르칠 수가 없거든요. 방어적인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긴 해요. 고집스럽다는건 확고하다는것을 의미하기도 하니까요. 저는 뭐랄까 좀 고지식했어요. 내 포어핸드나 서브가 좀 부족해도 열심히만 하면 될거라고 생각했어요. 예외 없이요. 그런데 그 정도 레벨에 올라가면 그 어떤 약점도 있으면 안되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그런 건설적인 비판을 못 받아 들였어요. 그분들이 하는 말이 다 일리가 있었는데도요. 내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그 점을 파고들테니 그걸 고쳐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말이에요요. 

그런 점이 제가 조금 더 발전하는데 큰 장애물이 되었죠. 그리고 또 사람을 상대하는 기술이요. 좋은 선수가 되려면 그런 것도 굉장히 중요했는데 제가 사람들과 말을 잘 하지 못했어요. 팀을 모으고 잘 꾸려가려면, 나에게 맞는 코치, 스타일, 매니저 등 결정할 것이 너무 많았고, 돈이 한없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자금이 있으면 그걸 또 어디에 쓸지 결정해야 해요.  이 대회에 나갈까 저 대회에 나갈까, 자격은 되는데 급이 높은 대회는 혹시나 지게 되면 수익이 전혀 없을테고, 나은 성적을 낼 수 있고 상금도 탈수 있는 작은 규모의 대회를 나갈까, 그런데 그건 또 경력에는 도움이 안되고 하는 것들이요.

혹은 그냥 집에서 훈련하면서 그 돈으로 코치를 고용해서 단점을 좀 보완할까, 아니면 경기에 나가서 랭킹을 좀 올릴까, 나한테 맞는 코치는 어떻게 찾을까, 코치인터뷰는 어떻게 해야 하나, 코칭 철학이 있는지 혹은 내가 이런 이런 점이 부족한데 어떻게 지도할 것인지 물어야 되고 등등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지 어려운 점이 많았어요. 그때는 인터넷도 없고 셀폰도 없으니 어떤 코치가 괜찮은지, 심지어는 연락처 찾기도 힘들었으니까요. 끝이 없는 고민이었죠. 그리고 나한테 그런 재능들이 다 있었다고 해도 힘들었을거에요. 누군가를 내 삶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부터가 힘들었거든요. 코칭이라는 관계,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받기로 선택한다는 것은 참 용기가 필요하고, 제 자신이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거든요. 나를 드러내고 그래서 도울 수 있도록 해야 되는데 저는 지나치게 독불장군이었어요. 다른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다는 고집이 나를 딱 거기까지만 가도록 만들었죠.  

그런 부분들이 끝나지 않는 고민이었어요. 맞는 팀을 찾고, 잘 꾸려나갈수 있는 능력이요. 

카오미 : 그럼 그런 모든 성향들이 입양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마이클 : 한 90%정도는 그런 것 같아요. 그 이상일 수도 있고요. 그런 점에 대해서 마흔살이 되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거든요. 항상 입양된 사실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혹은 과거는 중요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너에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중요하다. 미래를 봐야지. 내 과거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내 스스로 나를 정의한다. 뭐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으니까요

카오미 : 뒤 돌아 보지 말고 앞만 봐, 뭐 이런거요?

마이클 : 네. 과거는 나를 정의하지 못해. 나는 내 스스로 정의한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나를 찾는 이 여정이 조금 늦어진 것 같아요. 

이렇게 여정이 늦어진 또 다른 이유는, 어떤 외적인 동기가 없었다는 거에요. 제 생각에 인간은 외적인 동기에 크게 좌우되는 존재에요. 요즘은 모두 내적 동기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결국은 내적 동기도 외부로부터 오는 거잖아요. 제 경우에 테니스 쪽으로 잘 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어떤 조직에 소속감을 느끼고 있었고, 나의 뿌리 같은 것에 깊이 파고들 필요가 없었어요. 나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할 필요 말이죠. 그럴 용기도 없었고요.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굉장히 무서운 질문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남에게 뒤지기 싫어하는 성격 덕에 나의 뿌리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게 된 것 같기도 해요. 처음 내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들여다보기 시작했을때, Renee Brown의 팟캐스트를 들었거든요. 창피함과 약함에 관한 에피소드였는데 참 와 닿았어요. 가장 큰 용기는 약해지는 것이라는 거에요. 그 이유들이 모두 타당했어요. 그래서 지기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강한 사람으로서, 나는 용기가 있으니까 해봐도 되겠다. 할 수 있겠다. 이런 생각으로 뛰어들었죠. 어떻게 보면, 경쟁심 강하고 지기 싫어하는 내 성격에 불을 지른거죠. 그래서 뛰어 들었어요. 뛰어들기 전에 잘 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냥 뛰어 들었어요. 상담 치료도 받고, 입양에 관한 책도 읽고, 유투브도 보며 몇년을 보냈어요. 팟캐스트는 못들었죠. 그 땐 이 팟캐스트가 없었으니까요.  

카오미 : 그럼 그때가 대략 2015년 즈음이었겠네요. 제가 2016년에 시작했으니까요. 

마이클 : 그렇죠 

카오미 : 어떤 계기로 이런 성찰을 시작한건가요?

마이클 : 2015년에 당시 와이프와 별거를 시작했어요. 아이들하고도 헤어지게 됐고요. 그 때 많이 힘든 시기였어요. 그러면서 나에 대한 질문들을 하게 됐어요. 시간이 많기도 했고요. 직업도 직업이고 부모가 되면 주변을 돌아 볼 시간이 없잖아요. 그런데 그 때 그 일들을 겪으면서 주변을 좀 돌아보고 질문할 시간이 생긴거죠. 그래서 시작된 거에요. 

카오미 : 많이 힘들었겠네요. 결혼생활을 얼마나 했나요?

마이클 : 20년 이상이요.

카오미 : 그래서 결국엔 결혼생활을 정리하게 됐군요? 

마이클 : 네, 노력을 한다고 했는데 많이 힘들었어요. 관계를 잘 맺으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하잖아요. 이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는 나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내가 나를 잘 모른다는 사실은 이미 알았던 것 같네요. 그 사실을 항상 숨겼을 뿐이죠. 그 사실을 마주할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고요.

카오미 : 아버지로서는 어땠나요? 부모 역할을 하는데, 입양되었다는 사실이 영향을 끼쳤나요?

마이클 : 확실히 그랬어요. 특히 지난 몇 년 간에는 더욱 더요. 왜냐하면 이제는 나 혼자 해내야 하잖아요. 그 전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그냥 애들 엄마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됐었거든요.

그래서 그냥 내 스타일대로 해보자 싶었죠. 그 전에는 생각도 안 해 본 것들이요. 좀 시간이 걸렸어요. 헤쳐나가는데. 

카오미 : 친구같은 아빠인가요?

마이클 : 그런 편이에요. 제가 보기에 그건 자랄 때 양육환경, 그러니까 부모가 어떻게 키웠는지에, 그래서 어떻게 느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은데요. 자랄 때 난 항상 두려웠어요. 그래서 항상 모범생이었죠. 성적도 A만 받았고요. 문제가 될만한 일은 피했어요.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 기억나는 일이 있어요. 집에 가려고 엄마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건물 앞에서 공을 가지고 놀면 안되잖아요. 애들도 많고 차고 있고, 위험하니까요. 그런데 지금도 이름이 기억나는데, 현재는 테네시에 살고 있는 커트라는 친구가 풋볼을 저에게게 던졌어요. “받아봐” 그러면서요. 그러니 어떻게 안받아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공 던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죠. 그래서 나는 공을 안 던지고 돌려줬어요. 그랬더니 그 녀석이 나한테 다시 공을 던지는 거에요. 저는 던지지 말라고 정색을 했어요. 그래서 교장실로 불려갔는데 전 정말 큰일났구나 싶었어요. 집에 가서도 마당에 숨어있었어요. 엄마가 절 찾으시는데 뒷마당에서 혼자 숨어있었던 기억이 나요. 그냥 너무 무서웠어요. 그 후에도 기억은 잘 안나지만 어떤 말썽을 피운적이 있는데, 결국엔 도망을 갔었어요. 이제 끝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돌려 보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항상 했었어요. 

카오미 : 만약 제가 그때로 돌아가서 마이클의 정신분석을 해본다면 (웃음) 마이클은 항상 일종의 연기를 하고 있었던 거네요. 그 누구도 화나게 하지 않고, 마이클을 다시 돌려 보내버리고 싶어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마이클 : 그때는 그렇게 해야 내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었나봐요. 부모 역할로 돌아가보면 참 어려운 점이, 내가 너무 엄한가 하는 생각도 있어요. 입장을 바꿔 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아요. 내 입장에서는 그냥 눈길 한번에 애들이 알아서 해야 되고, 부모가 하는 말은 다 심각하게 받아 들여야죠. 제 부모님은 저한테 두 번 말할 필요가 없었어요. 무언가 하라고 말 할 필요조차 없었죠. 매일 아홉시 반이면 알아서 자고, 일곱시면 일어나고, 숙제도 매일 알아서 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내 애들한테는 아흔 여덟번 말해야 해요. 환경이 너무 좋은거죠. 불안해 할 일이 전혀 없거든요. 부모가 항상 지지해주고요. 가끔씩 화가 날때는 닥치고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해, 할 수도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부분이 저에게는 어려워요. 저희 부모님이 저에게 그랬다면 너무 힘들었을 것 같거든요.   

카오미 : 아이들에게서 자신을 보나요?

마이클 : 네. 아이들이 커 갈수록 더욱 더요. 인간성이나 품행같은 자연스러운 성향들이 표출될 때 참 재밌어요. 이런게 유전자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외부 환경의 영향일까 궁금하기도 하고요. 아이들이 나와 닮은 것을 볼때마다 내 핏줄이라 그런건지 아니면 나한테 배워서 그런건지, 그런 닮은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참 재밌어요. 

카오미 : 묻고 싶은게 있는데요. 우리가 같이 아는 지인중에 호정씨가 있잖아요. 시즌 2에 나왔었던. 호정씨하고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마이클 : 2018년에 친부모 찾기를 시작해서 서울 뿌리의 집(한인 해외 입양인들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 에 묵게 되었죠. 새벽 6시 쯤에 한국에 도착해서 8-9시 경에 숙소에서 체크인을 하는데, 마침 호정씨는 체크아웃을 하는 중이었고,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게 됐어요. 그래서 이런 저런 모험들을 함께 하게 되었죠. 여러곳을 같이 다녔는데, 호정씨는 정말 대단했어요. 뿌리의 집도 정말 좋았고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죠. 호정씨는 정말 훌륭한 상담가에요.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는데, 뭐랄까 엄청난 아우라가 있고, 하는 모든 말들이 깊이가 있고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그곳에서 여러 활동들을 할 때 나를 도와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정말 특별했죠. 함께 미혼모 시설에 갔었던 기억이 나요. “I wish you a beautiful life” 란 책을 우리 둘 다 읽었거든요. 미혼모 시설에서 아이를 입양보내기 전에 카운슬링의 일환으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편지를 쓰는데 그걸 엮어서 나온 책이에요. 그 책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책일거에요. 내가 읽은 책 중에서 제일 슬펐거든요. 그래서 쉼터에 방문했을 때, 원장으로부터 책에 사인도 받았어요. 시설을 둘러 본 후에 잠깐 카페테리아에서 쉬고 있을 때였어요. 그 곳에서 기금 마련을 위한 바자회 같은 것이 열리고 있었는데, 우리 옆 테이블에 열 일곱, 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들이 앉았어요. 그때 통역해주시는 분이 넌지시 우리에게 그 소녀들이 다음주에 출산 예정이고 아이들을 입양 보낼거라고 말해 주시더라고요. 

그때 참 마음이 말할 수 없이 복잡했어요. 뭐랄까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간 느낌었죠. 내가 바로 그 아이였겠구나 하는 감정. 그런 순간에 그런 경험들을 함께 이해하고 소화할 사람이 옆에 있어서 너무 감사했죠. 또 함께 고아원도 방문해서 아기들도 안아봤거든요. 솔직히 그건 그리 큰 감흥이 없었어요. 너무 정신없었거든요. 그런데 그곳에 한 아이가 곧 생일이고 나이가 다 되어서 곧 고아원을 나가야 한다고, 혹시 상품권같은 선물을 해주면 아이한테 큰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해서, 

그래서 큰 아이들이 지내는 곳으로 가서 지금 17살이라는 곧 18살이 되는 그 아이에게 상품권을 줬는데, 그 아이가 우는거에요. 그때 저도 울컥하더라고요.  아이가 너무 감사해 하면서 울먹거리는데, 고아원에서 자랐으니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주는 선물을 많이 못 받아봤겠구나 싶어서 많이 짠했어요. 아직까지 한국에선 사회적으로 고아라면 많이 무시당하고 천대받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그 경험이, 내가 지금쯤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다른 삶에 대해, 내가 만약에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어요. 물론 언제나 우리는 20개쯤은 되는 “만약에”의 상상을 하며 사니까요. 그런식으로 호정씨와 많은 경험을 함께 했어요. 호정씨는 또 제가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것인지 정리하는 데도 상당한 도움을 줬어요. 꽤 의미있는 조언들이요. 

카오미 :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데요?

마이클 : 그 후에도 계속 연락하며 지냈거든요. 지금은 플럼 빌리지에서 안수를 받고  

카오미 : 수도자가 되었죠? 맞죠?

마이클 : 네. 딱 어울려요. 그녀만의 타고난 평안함이 있잔아요. 

카오미 :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죠. 

마이클 : 맞아요. 제가 아이들 키우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했어요. 그녀는 훌륭한 상담가잖아요. 내 이야기를 듣고 말하길 플럼 빌리지 (Plum Villiage- 역자 주 프랑스에 위치한 불교 사찰)에 수양을 하러 오는 부모들이 말이에요, 그들이 제일 원하는 것이 뭔지 아냐고 물으면서, 바로 아이들의 행복이래요. 그런데 아이들한테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치려면 뭘 해야 하는지 아느냐, 그건 바로 네 자신이 행복해지는 거라고요. 모든 부모들이 아이들한테 좋은 걸 해주고 가르치려고 하는데 그렇다고 아이들이 배우는건 아니다. 아이들은 네가 보여주는걸 배운다고요. 

그게 많이 와 닿았어요. 특히 요즘에는, 적어도 제가 사는 곳에서는, 아이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물론 그것도 중요하죠. 그런데 많은 경우에 그러려면 부모 자신의 행복을 포기해야 하거든요, 그때 이해가 됐어요. 한명의 부모로서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고요, 그렇다면 어떤 모습을 아이들한테 보여줘야 할지 고민들이 시작됐죠. 이런 것들이 지금의 제가 아이들을 어떻게 대할지 결정하는데 중요한 동기가 됐어요. 지금 저의 양육방식은 아이들이 가졌으면 하는 모습들을 내가 먼저 보여주는 것이에요. 어떤 특별한 습관을 가지기를 원하면 그 습관을 내가 먼저 길러야죠. 이거해라 저거해라 잔소리만 하는게 아니라요. 잔소리는 쉽지만, 어차피 애들은 안 듣잖아요. 아이들이 뭐가 되기를 원하거나 하기를 원하면 내가 먼저 그 모습이 되어야죠. 

카오미 : 저도 호정씨를 알지만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죠. 호정씨가 모든 답을 알고 있는것도 아니고 본인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겠지만, 다양한 삶의 경험에서 오는 통찰력 같은게 있어요. 그때의 그 한국방문에서 호정씨의 존재가 의미하는건 무엇이었나요? 어머니의 같은 표상 같은 존재였나요? 그때나 혹은 그 뒤에도요?

마이클 : 좋은 질문이네요. 뭐라 답하기는 어려운데

카오미 : 어렵죠. 둘 사이에 유대가 깊었던 것 같아서요.

마이클 : 네. 깊은 공감대가 있었죠.

카오미 : 둘이 만난 것도 아주 우연이었잔아요. 한국에 가지 않았다면 절대 만날 수 없었겠죠. 

마이클 : 제가 10분만 늦게 도착했어도 못만났겠죠. 

카오미 : 몇 분만 늦었어도요, 

마이클 : 맞아요. 못 만날 뻔 했죠. 그 후에도 오랫동안 연락하며 지냈는데, 이 입양인 모임이 대단한 점은 우리가 서로에게서 각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에요. 서로 배우기도 하고, 무엇보다 각자의 경험에 대해 언어를 부여할수 있다는거에요. 언어는 강한 힘이 있어요. 언어를 통해 우리만의 이야기에 어떤 힘이 생기고 우리가 원하는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호정씨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잡한 경험이나 감정들에 딱 맞는 표현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졌어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감정들을 해석해서 정확한 말로 설명해줘요. 도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굉장히 위로가 되요. 이걸 어떻게 더 잘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겠어요. 카오미씨도 잘 알잖아요. 호정씨를. 

카오미 : 너무 캐묻는것 같지만 마이클이 그랬잖아요. 사람들이 떠나갈까봐 미리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고요. 호정씨하고는 어땠나요?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그것도 마이클을 버리고 떠나간 것으로 느껴졌나요?

마이클 : 저때문에 수도원에 갔다고 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네요(웃음)

카오미 : 아니면 이제 관계를 잃는 것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나요?

마이클 : 글쎄요, 항상 조금 더 거리를 두긴 해요.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자신을 잘 보호하는 거겠죠.

카오미 : 아이들한테 직접 보여주기로 했다고 했잖아요. 아이들이 행복하길 바란다면 스스로 행복해져야 한다고.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행복을 찾고 있나요?

마이클 :네. 지인들과의 관계를 통해서죠. 많이 사귀고 같이 뭔가를 하고 그런거요. 항상 현재 진행형이죠.  매일, 매달, 매년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하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에요. 내 자신도 찾고요. 내 자신이 되는 것이 항상 어려워요. 그래서 최근 몇년간 글쓰기를 시작했어요. 상담의 일부로 시작했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내 감정을 말로 표현해내고 내 경험과 감정을 소화하는 작업이요. 그게 한 방법이에요. 

카오미 : 학생들을 지도하는 쪽으로도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 같은데요, 어떻게 보면 마이클이 선수였을때 받았으면 했던 그런 코칭을, 혹은 그런 코치가 되어주면서 성취감을 느끼기도 하나요? 

마이클 : 학생들을 지도하는게 뭐랄까 소명처럼 느껴져요. 너무 재미있고 내가 온전한 내가 되는 느낌이에요. 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인생의 목적도 있고요.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요? 전 각각의 제 학생들이 마음만 먹으면 뭐든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어요. 제 학생들도 저의 그 부분을 높이 사주는 것 같아요. 그리고 학생들이 그 길을 가는데 약간의 코칭이라도 제가 어떤 역할을 한다는것이 참 영광이죠. 자녀교육과도 같은 원칙이죠. 내가 먼저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요. 내 학생들이 열심히 하길 바라면 내가 먼저 열심히 해야 하고, 집중하길 바라면 내가 집중해야 하고요. 그 모습이 됨으로써 가르치는거죠. 말로도 가르칠 수 있고, 유튜브로 봐도 되지만. 유튜브에 없는게 없잖아요. 그렇지만 그 핵심은 어떻게 배울수 있을까요? 제가 심어주려고 하는게 바로 그거에요. 

카오미 : 앞에서 이야기 했던 것들 중 하나가 생존본능이었잖아요. 이기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런데 그 투지만 있었을 때는 오히려 이기기가 힘들고, 얻고 싶은걸 얻는게 더 힘들었던 것처럼 보여지네요. 그 부분은 이제 받아들이게 되었나요? 그런 갈망말이에요. 혹은 내 선에서 콘트롤 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나요?

마이클 : 아주 많더라고요 (웃음)

카오미 : 어릴땐 그것이 삶의 동력이 되어준 것 같은데요, 지금은 어떤가요? 마흔 여섯이 된 지금에도 그런가요? 아니면 인생관이 바뀌었나요?

마이클 : 제 내면을 들여다보는 여정을 시작한 이후에 확실히 덜 경쟁적이 되었어요. 외부에서 해야할 싸움이 따로 있고 내면에서 해야할 싸움이 있는것 같아요. 성취, 성공이 외부에서의 게임이라면 내부에서 해야하는 싸움이 바로 우리가 가야할 길이죠. 지금까지는 그쪽으로 투자를 안했었고요. 이겨야만 한다는 갈망은 지금도 있지만, 제 주된 관심사는 이제 그쪽에 있지 않아요. 내 관심사는 주로 나 자신과 나의 움직이는 동기, 나를 자극 하는 것은 무엇인지, 무슨일을 하건 나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것 등에 있어요. 

카오미 : 치유가 되었다고 느끼나요? 어떤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마이클 : 맞아요. 힐링이에요. 내가 어디 다녀오기라도 했나?하고 느낄정도로요. 예전의 나를 생각해보면 지금의 제가 훨씬 자신이 있고요. 예전엔 사람들하고 눈도 못 마주치고 뭔가 내 자신이 부끄럽고 확신이 안 들고 그랬거든요. 지금이 훨씬 낫죠 5년 전보다요. 

카오미 : 혹시 직접 쓴 글 중에, 읽어주고 싶은것이 있나요?

마이클 : 네. 지금 쓰고 있는 책이 있어요. 진도는 전혀 안나가고 있지만  “테니스의 기술, 너만의 경기를 해라” 가 제목인데. 글이 안 써지고 막힐때면 그냥 다른 주제에 대해서 계속 썼어요. 입양이나 사는 이야기, 관계 이야기 같은 것들요. 여행이나 그림, 혹은 어떤 경험같은. 지난 9월 Bay to LA*=(**미국 캘리포니아 한인입양인모임)에 다녀와서 쓴 것을 읽어볼까 해요 

카오미 : 우리가 거기서 만났었죠.

마이클 : 네. 지난 9월 BAY TO LA에서요.

카오미 : 설마 저에 대해서 쓴건 아니죠?  농담이에요 (웃음)

마이클 : 다른 입양인들과 함께 한 날은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거대한 집단 에너지 같은. 물론 그 후에 어떤 허탈함도 있었고요. 그때 쓴거에요. 제목은 Surrender(항복)입니다. 

웃었다. 울지 않으려고

미소지었다. 찡그리지 않으려고

바쁘게 보냈다. 외롭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을 치켜 세웠다. 내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음악을 들었다. 그래서 나를 안 들으려고

다른 사람을 돕는다. 나를 필요 없으려고

시를 쓴다. 

나를 표현하려고

관심을 다른데 두려고. 

해는 없고 구름은 있고 

눈에는 비가 오고.

생각이 천둥치고

고통은 번쩍이고.. 

밸런스를 어떻게 찾을까.

춤을 출.

익사하지 않을. 

카오미 : 밝은 시는 아니네요. 

마이클 : 외적 균형에 대한 시에요. 항상 웃지만. 웃음으로 감추는거죠. 

카오미 : 하나 더 읽어줄 수 있어요? 입양과 관계된 것도 있나요?

마이클 : 하나 더 읽을게요. 이건 시는 아니고. 생각만 해도 울컥하는데. 다른 입양인이 그러더라고요. 입양기관에 편지를 남겨 놓으라고요. 엄마한테요.  이것도 일종의 테라피 같은건데. 이건 제가 엄마한테 쓴 편지에요.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엄마 

이 편지는 제 평생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에요.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도 너무 많고 물어보고 싶은 것들도 많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네요. 저는 저의 이 고통과 슬픔을 지우려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자랐는데, 19개월에 이곳에 도착했을때 양부모님이 마이클이라는 이름을 지어줬어요. 어린 시절에는 모든게 두려웠지만, 강하고, 결단력 있고, 강건했어요. 나의 이런 점들은 혹시 엄마를 닮은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어요. 낯선 언어와 문화, 그리고 가족관계도 모두 잘 헤쳐나갔어요. 

제 새 가족들을 기쁘게 해주고, 또 제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어요. 고등학교랑 대학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요. 운동을 잘해서 전세계를 돌며 프로 테니스 선수 생활도 했어요. 지금은 샌프란시스코에 살아요. 두 아이가 있는데 매들린과 가브리엘이에요. 매들린은 열세살인데 의지가 강하고 집중력도 뛰어나고 착해요. 카브리엘은 열살인데 주변을 밝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요. 왠지 나중에 연예인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엄마가 이 애들을 만나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사람들을 항상 존중하고 함부로 평가하지 않으려고 해요. 착하고요. 아마 제 주변 사람들이 저에 대해 그렇게 들 말할거에요. 엄마도 저를 자랑스러워 하셨으면 좋겠어요. 지금 테니스 교습소를 운영하고 있고 제가 테니스를 가르쳐요. 제 지역에서 꽤 인정받으면서, 제 학생들이 잘 되도록 돕고 있어요. 그래도 항상 가슴 한구석이 비어있는 것 같아요. 엄마를 안고 엄마의 따뜻한 품을 느끼는 꿈을 꿔요. 제가 엄마 목소리를 알아볼 수 있을까 궁금해요. 저를 보내기로 한 결정이 너무너무 힘들었다는 것 알아요. 그로 인해 너무 많이 고통받지 않았기를 바래요. 

전 잘 살고 있어요. 엄마를 원망하지 않고 좋은 마음만 가득해요. 이번 생에 언젠가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래요. 안되면 다음 생에서라도요. 그때까지 마음과 영혼이 평안하고 행복하길 바라요. 제 옆의 빈자리는 제가 잘 간직할게요.  엄마를 위한 자리에요.. 

저도 눈물이 나네요. 이 편지를 이렇게 팟캐스트에서 전세계를 통해 읽는다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텐데요. 우리 모두 마이클의 마음을 조금 들여다 봤네요. 고마워요. 

이 팟캐스트를 해줘서 고마워요. 다른 모두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에 대해 정말 많이 배워요. 이렇게 내 이야기를 할 기회를 줘서 고마워요. 

카오미 : 언젠가 2탄도 있겠죠? 사람들이 마이클에게 연락하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되죠?

마이클 :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해요. 10sjourney인스타그램이에요.

카오미 : 아..  10is 테니스군요

마이클 : 네 

카오미 : 무슨말인가 했어요..ㅋ

마이클 : 그쵸. 혹은 페이스북에서 마이클 제섭을 찾으면 됩니다. 

카오미 : 고맙습니다. 마이클. 지금 새벽시간인데요, 내일 하루 너무 피곤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야기 들려주고 약한 모습 보여줘서 고마워요. 

마이클 당신은 굉장히 특별한 사람입니다. 고맙습니다. 오프닝 뮤직을 협찬해주고 있는 제이진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더 많은 곡을 듣기를 원하시면 제이진닷컴을 찾아주세요. 앤드류 헨리씨와 다른 후원자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지원으로 이 한인 입양인들을 위한 퍗캐스트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후원자가 되시면 에피소드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들으실 수 있어요. 앤드류처럼 후원자가 되기를 원하시면  홈페이지를 방문해주세요. 다음에 뵐 때까지 잘 지내세요.       

                                                                                                         번역 : 전유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