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4, 에피소드 24: 마리 킨더

Audio available 4/26/21 at 12:00 EST.

2016년에 마리 킨더 씨, 한국 이름 창마리 씨 (33세)는 런던의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 스티브 씨와 함께 한국에서 여섯 동안 살며 친어머니를 찾기 시작했다. 킨더 씨의 친부모 조사는 슬픔과 실망을 하게 했지만, 그 고통을 한국 화장품을 통해 치료하며 한국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창구로 삼았다. 현재 킨더 씨의 영국 기반 한국 화장품 판매회사 뷰티 앤 서울(Beauty and Seoul)은 4년 넘게 성공적인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킨더 씨는 한국에 대한 관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관점, 자신이 살아오면서 배운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마리: 제 이름은 마리 킨더입니다. 현재 런던에 살고 있어요. 오늘 런던의 날씨는 맑은데, 런던에서는 특이한 날씨죠. 제 한국 이름은 창마리입니다. 제 양부모님이 제 한국 이름을 남겨뒀죠. 몇 달 있으면 34세가 됩니다.

팟캐스트: 현재 런던에 살고 계시지만 마리 씨의 국적도 하나의 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이죠?

마리: 네 거기에도 깊은 이야기가 엮여 있죠.

팟캐스트: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마리: 사람들이 제 억양을 듣고 어디 출신 억양인지 구분을 못 하죠. 영국 억양도 아니고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제 부모님이 저를 입양하셨을 때 우리 가족은 호주에 살고 있었죠. 그래서 전 호주 국적을 가지고 있어요. 어머니는 영국-아일랜드계이고 제 아버지는 네덜란드인이죠. 제 결혼 이전 성은 네덜란드계 성인 밴 하켄이었어요. 그런 환경에서 11살 때 호주에서 도쿄로 이주해 몇 년간 지냈죠. 제 고등학교 시절은 암스테르담에서 지냈습니다. 대학교는 영국에서 나왔고 영국에서 살기 시작했죠. 결혼한 상대는 웨일스인이에요. 다양한 국가들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팟캐스트: 확실히 호주 억양이 들리기는 하는데 다른 억양도 들리기도 하네요. 저도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억양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우리가 공감을 잘하는 사람들이라 다른 사람과의 억양을 맞춰준다고 생각해요. 

마리: 저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죠. 8년간 미국 국제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미국식 억양이 나오기도 합니다. 특히 미국인과 이야기할 때 자주 드러나죠.

팟캐스트: 사람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뉴질랜드 출신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나요? 

마리: 많은 사람이 제가 호주 출신이라고 생각하죠. 호주 억양을 없앴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듣기로는 여전히 그 억양이 남아있는 모양입니다.

팟캐스트: 마리 씨를 한국에서 만났을 때는 이러한 배경을 몰랐는데 사람들과 교류할 때 과거를 전부 소개하지는 않으니 당연한 일이죠. 마리 씨가 일본에서 거주했는지는 몰랐습니다.

마리: 네. 2년간 일본에서 거주했죠. 일본에서의 경험은 좋았어요. 11살에서 12살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전부 즐기지 못하긴 했지만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 뒤로 몇 번 돌아가기도 했지만,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살면서 국제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일본을 전부 경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죠. 도쿄를 아주 좋아했어요. 아주 좋은 도시였습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셨죠? 교육 업계에 종사하셨나요?

마리: 아버지가 영국통신에서 일하고 계셨죠. 부모님은 항상 여행을 좋아했어요. 부모님은 중동에서 만나고 8달 만에 결혼하셨고, 지난 40년간 금실 좋은 부부로 지내셨죠. 아버지가 호주로 이사해야 부부가 같이 호주로 이사했어요.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어렸을 적 여름방학 때는 같이 가족들과 여행을 다녔던 기억이 있죠. 아버지는 해외발령 자체를 즐기셨고, 아시아에 발령받을 기회가 생기자 부모님이 둘 다 가자고 결정하시고 이사하셨습니다. 저는 자주 이사해야 하는 상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11살 아이는 친구가 있는 곳에서 다른 나라의 학교로 전학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그러한 경험이 마리 씨의 적응력을 높여줬나요? 학교를 자주 바꾸거나 군인 아이들이라 자주 이주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시간을 들이기 어려워서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마리 씨의 경우는 어땠나요?

마리: 제가 친구들을 사귀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초등학교 때는 꽤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였죠. 하지만 항상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환경에 놓이고 수많은 학교에 다니다 보니 저에게 자신감을 자주 생겼습니다. 그래도 4살 때부터 가장 친했던 내 소꿉친구야- 이런 사람들을 보면 조금 질투를 하기도 하죠. 그러한 깊은 친구 관계는 없으니까요. 아니면 사람들이 친구는 몇 명 없는데 오래된 친구 관계를 유지해온 때도 부럽습니다. 이렇게 국제적인 생활을 하면 아는 사람은 많지만 진정한 친구 관계는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죠. 현재 런던에 정착한 상황에서 저와 가장 친밀한 친구들은 런던에 있는 친구들이에요. 런던에 고작 12년만 살았으니 좀 신기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특이한 성장 과정이라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왜 마리 씨의 부모님이 한국에서 입양하셨는지 아시나요? 그리고 외동딸이셨나요? 

마리: 네. 외동딸입니다. 제 부모님은 불임이었죠. 제 어머니가 여러 번 유산하셨고 그래서 입양을 염두에 두고 계셨어요. 전 1984년에 태어났는데, 그때 한국은 국제입양의 본산지였죠. 현재 영국 주 국제 입양 국가는 중국이지만 그때는 수많은 사람이 한국에서 입양하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에게 다른 국가에서 입양하고 싶지 않았냐고 물었는데 한국이 눈에 띄셨다고 하셨죠. 어머니가 한국에서 입양하신 사람을 알고 계셔서 그게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동방사회복지회를 통해서 입양 절차를 시작하셨고, 어머니 말로는 몇 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서류 준비와 인증 등에 시간이 걸렸다고 하셨죠. 관련된 이야기인데 전 항상 부모님에게 남동생을 입양해달라고 부탁했어요. 항상 남동생을 원했죠. 부모님이 또 다른 아이를 입양하려고 생각도 해보셨지만 제가 워낙 말썽꾸러기라서 부모님이 저로 만족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해야겠네요

팟캐스트: 부모님과 관계는 돈독한가요?

마리: 운이 좋게도 부모님과 관계가 아주 돈독한 편이죠. 코로나 이전에는 부모님을 만나러 2주마다 1번씩 부모님 집에 방문했어요. 현재 부모님은 런던에서 몇 시간 떨어진 영국 교외에서 살고 계시죠. 부모님과 관계가 돈독해서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마리 씨의 근처에 살기 위해서 이사했나요?

마리: 네. 그러셨죠. 제 부모님은 원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살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런던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한다고 하니 너무 멀다고 하셨죠. 그 말에 저는 비행기로 15분 거리인데 그리 멀지 않다고 했지만, 부모님이 영국으로 이사를 오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영국에 와서 정착하셨습니다. 

팟캐스트: 현재 마리 씨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하면 당연히 한국인의 정체성도 가지고 계시겠지만 그 정체성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자기소개 방법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나요?

마리: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저 자신을 소개하는 일에 자신감이 붙었다고 생각해요. 저를 한국계 영국인이라고 소개하죠. 한국계라는 점을 먼저 언급해요. 제가 청소년기와 20대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다르죠. 그때는 저를 한국계라고 소개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저 자신을 영국계 호주인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렇게 저를 소개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제 출신지를 다시 물었습니다. 그 말에 저는 영국계 호주인이라고 다시 말해야 했죠. 제 한국계 배경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34년이 지나고 나서야 제 한국계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제가 한국계 영국인이라고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제 한국계 배경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꽤 걸렸어요. 

팟캐스트: 한국에 처음으로 돌아간 때는 언제였나요? 혼자 한국을 방문하셨나요? 아니면 부모님이나 스티브 씨(마리 킨더 씨의 남편)와 방문하셨나요?

마리: 제가 어렸을 때, 9살 때 제 부모님과 같이 방문했습니다. 그때 방문은 잘 기억나지 않고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일주일간 학교 안 가도 되고 휴가를 보낸다는 느낌이었죠. 제 조국이고 제 출신국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으로 되돌아간 때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관련된 기억이 잘 나지 않죠. 가 23살 때 스티브와 같이 갔을 때가 처음으로 제대로 한국에 방문했던 때였어요. 그때는 한국을 제 출신국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에 그렇게 관심이 없었고, 제 부모님이 한국에 방문하라고 권유하셨죠. 저와 스티브를 위한 비행기 표가 있으니 한국에 방문해서 시간을 좀 보내고 한국이 어떤 곳인지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조국을 아는 일은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공짜로 표도 받았겠다 가자고 했죠.

팟캐스트: 공짜 표도 있고 사실상 공짜 여행이니 가도 손해는 없다고 생각하셨군요?

마리: 네. 그렇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결혼 선물이었나요?

마리: 결혼 선물은 아니었죠. 부모님이 꽤 오랫동안 계획하셨는지는 몰라요. 제가 한국에 가야 한다고 생각할 때까지 부모님이 기다리려고 했지만, 너무 오래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한국에 처음으로 방문할 때는 관련 지식이 전혀 없었어요. K POP과 K-드라마가 큰 문화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몰랐죠. 한국에 대한 어떤 인식도 없었습니다. 한국 음식이 어떤 맛인지도 몰랐죠. 하지만 2주간 한국을 여행하면서 한국과 사랑에 빠졌어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계속 울었습니다. 그때 스티브에게 한국 문화를 이제 겨우 알게 됐고, 계속 체험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죠. 하지만 그때는 한국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랐어요.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죠. 아직도 첫 한국 방문 때 찍은 사진을 다시 돌아보고는 해요. 좋은 기억입니다.

팟캐스트: 마리 씨의 블로그에서 읽었는지 아니면 스티브 씨가 이야기했는지 기억이 잘 안 지만, 제가 리 씨와 친구이기도 하니, 기억하기로는 첫 한국 방문 이후로 한국을 떠나려고 할 때 감정적 붕괴를 겪어서 스티브가 걱정했다고 들었어요.

마리: 우리는 여행에 여러 가지 경험을 꽉 채워 넣으려고 했죠. 여행은 좋았고 매일 즐겁게 일어났어요. 하지만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창문 밖의 풍경을 보면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몇 주간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니 감정 조절이 안 되어서 울기 시작했고, 돌아와서도 울고 있었죠. 옆에서 그 모든 일을 보고 있던 스티브도 마음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스티브도 제 고통을 이해하고 제 기분을 알았어요.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제가 사랑에 빠지고, 제 고향이라는 느낌이 드는 한국을 떠나야 하니 화가 났죠. 다시 한국에 돌아올 수 있을지 몰랐으니까요. 

팟캐스트: 그 여행을 계기로 마리 씨의 입양아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한국에 그러한 감정적 연결성을 느끼셨나요?

마리: 한국에서 돌아온 뒤 몇 달 동안 상당히 우울했죠. 그리고 한국에 집착하게 되었어요. 한국에 전혀 관심이 없다가 한국 요리를 시험해보고, 한국 음악을 듣고, 한국 드라마를 보고 20년 동안 제가 경험하지 못한 문화를 전부 경험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문화 흡수를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 한국에 형제나 자매가 있을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러한 의문이 제가 왜 입양되었는지, 어떻게 입양 제도에 맡겨지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했죠. 그렇게 친부모 조사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입양 기관에 돌아가서 본격적으로 친부모 조사를 시작했던 때는 어느 시기였죠?

마리: 제 첫 2주간 여행 동안 동방사회복지회를 방문해서 제 서류를 확인하고 위탁 가정을 방문했죠. 사실상 정신 건강을 유지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어요. 돌아온 뒤 몇 년이 지나고 나서 조사를 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방사회복지회를 통해서 조사를 시작했지만, 동시에 제가 입양되었던 호주 정부 기관을 통해서 조사를 시작했죠.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조사였어요. 제 입양 서류에는 이미 아주 많은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죠. 친부모가 어떻게 만났는지, 친부모의 학교, 이름, 고등학교까지 전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사 자체가 편하게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팟캐스트: 아주 많은 정보가 있었네요? 

마리: 네. 아주 많은 정보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검열되어 있었지만, 아버지가 제가 어렸을 때 따로 원본 서류를 복사하셨는데, 그 서류는 검열되어 있지 않았죠. 그래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어요.

팟캐스트: 오. 우리가 알아야 하는 정보인데 그렇게 확보를 해야 하니 문제가 있네요.

마리: 그렇죠. 우리가 알아야 하는 정보이죠. 그래서 처음에는 아주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다른 한국계 입양아를 만나본 적이 없어서 그 절차가 어떻게 진행될지 그리고 제가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전혀 몰랐죠. 그때 제가 영화 트윈스터즈(Twinsters)를 보게 됐어요.

-영화 트윈스터스 발췌-

영화 대사: 그 애도 한국에서 11월 9일에 저와 같이 입양됐죠.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출생신고는 서울에서 받았어요. 저와 똑같습니다. 

-발췌 끝-

마리: 한국에서 IKAA(국제입양인연대)에서 개최하는 회담이 열려서 거기 가서 다른 입양아를 만나겠다고 생각했죠. 겸사겸사 친부모 조사를 해보려고도 생각했습니다. 스티브와 저는 친부모 조사를 위해서 장기 휴가를 받아서 한국에서 살아 보려고 생각했어요. 동방사회복지회와 같이 일하려고 생각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낙관적인 생각이었습니다. 2016년에 저는 런던의 직장을 그만뒀고, 스티브는 안식년을 받아서 한국에서 6개월 동안 살면서 친어머니를 찾기로 했죠. 제가 생각하기로는 일이 아주 쉽게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의 작은 도시 출신이셨나요?

마리: 제 자료에 따르면 제 친부모님들은 군산에서 사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군산은 충청남도 대전 근처에 있는 도시인데, 한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흔하다면 흔한 소도시에요. 아주 작은 곳이죠. 제 자료에 따르면 제 부모님은 서로 다른 계급 출신이었다고 해요. 아버지는 농사꾼의 아들로 그렇게 학교에 관심은 없었지만, 육체적인 능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반면에 어머니는 수줍음이 많고 공부를 잘하는 중산층 출신이었다고 하죠. 어머니는 부모님의 압력으로 아버지와 헤어졌는데 어머니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자기 오빠가 공부하고 있던 대전으로 도망쳐서 대전에서 제가 태어났고, 제가 서울로 보내졌다고 하더군요.

팟캐스트: 부모님이 고등학교 시절 연인이었군요?

마리: 거기에 다른 계급 출신이었죠. 로맨스 영화 같네요.

팟캐스트: 그렇네요. 하지만 그렇게 정보가 많았고, 사회도 작은 편이었는데 왜 찾는 데 문제가 있었죠? 

마리: 입양 기관과 관련해서 전혀 진행이 전혀 되지 않았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이름이 제 서류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고 했죠. 

팟캐스트: 기관에서 이름들을 인정하지 않았다고요?

마리: 제 서류에 기록된 부모님의 이름과는 다르다고 하면서 저에게 서류를 보내줬는데, 그 서류는 검열되어 있었죠. 그리고 동부사회복지회에서 전혀 절 돕지 않았습니다. 상태가 괜찮아 보이니 친부모 조사를 해서 이득을 볼 수가 없다는 식으로 언급하면서 조사를 계속 회피했어요. 제가 만약에 그때 좀 더 싸울 힘이 있었다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겁니다. 다른 조사 방식도 확인해봤어요. 입양아들 조사를 도와주는 기관과도 일했고, 심지어 흥신소도 고용해서 제가 찾을 수 있는 정보가 있는지 알아봤죠. 하지만 정보를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찾은 유일한 정보는 제 친어머니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았고, 자료에 언급된 정보와 맞는 사람을 찾았다고 했을 때의 정보였어요. 이 조사는 흥신소를 통해서 얻은 정보였죠.

팟캐스트: 흥신소를 고용하셨군요?

마리: 네. 제가 정보를 찾기 위해서 고용했죠. 그 사람들이 군산의 지도를 보여주고 조사 절차를 전부 도와줬어요. 동방사회복지회에서 전혀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흥신소에서 대부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번역 도중에 이야기가 섞여서 정확한 정보는 모르지만, 어머니가 잘 만나려고 하지 않았는지, 동명이인이었는지, 그쪽이 최대한 노력을 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흥신소에서 연락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흥신소에서 다시 조사를 해보려고 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머니가 직접 동방사회복지회를 통해서 저에게 연락을 해오지 않는 이상 정보를 더 알 수가 없죠. 그렇게 해서 결론이 났습니다. 그 일이 6개월 한국 거주 기간 중 몇 달을 차지했죠. 저는 그 모든 일을 최악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제 정보를 보고, 제 사진을 봤는데도 절 만나고 싶어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저에게 실망하고 계신다고 생각했어요. 그일 자체가 큰 충격이었습니다. 한국에 오면서 많은 기회를 포기하고 와야 했고 스티브도 여러 가지 기회를 포기해야 했죠. 6개월 여행에서의 2개월 차였고, 아주 쉽게 부모님을 찾아서 제 이복동생이나 이부동생들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와보니 어떤 정보도 얻을 수가 없었어요. 그일 자체가 아주 힘들었습니다. 제 부모님을 보고 싶었지만, 제가 한국에 와있었고,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이 모든 일에 잘못 접근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팟캐스트: 움직이지 않는 벽을 무너트리려고 노력하는 기분이셨군요?

마리: 네. 그렇습니다. 제가 말했지만,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중요하죠. 지금 제가 훨씬 성장하고 안정된 뒤에 과거를 보면 그때 기관을 더 압박해서 제 서류를 보려고 해야 했지만, 그때는 다른 입양아들과 교류를 한 적도 없었어요. 절차도 전혀 몰랐고, 제가 봐도 되는 서류를 알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저를 도와줄 통역가도 없었죠. 통역과 번역을 통해서 저를 도와줄 사람도 없었어요. 나중에 제가 다시 돌아가서 해볼지도 모르지만, 용기와 힘을 다시 모아서 접근해야 합니다.

팟캐스트: 시간이 흐르고 난 지금은 그때를 어떻게 생각하시죠?

마리: 다른 입양아들의 생각은 모르지만, 제 경우에는 잊은 적이 없어요. 그때 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결론이 났다고 설득하려고 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자기 스스로 생각했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친부모와 관계가 중요하지 않고,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과거를 알 권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 전부를 알 수만 있다면 제 이야기에 대한 결론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죠. 매일 제 배경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제가 결론을 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팟캐스트: 런던에서 좋은 삶을 살고 있고, 좋은 관계를 맺고 있으니 친부모님을 찾지 못한 일을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았죠?

마리: 네. 사실 그 일에 죄책감이 연관되어 있기도 해요. 양부모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친한 친구들도 많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고, 성공한 사업가이기도 하죠. 표면적으로 보면 성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성공한 삶을 살고 있어도 자신의 근원을 모른다는 사실이 절 놓아주지 않아요. 평생이 지나도 그 욕구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자신의 근원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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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제가 생각하기로는 동방사회복지회에 돌아가는 일 자체가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조사를 하지 말아야 하고 제 감정에 관해서 이야기했던 일 자체가 화가 나죠. 

팟캐스트: 그래도 어느 정도는 괜찮아 보이시네요.

마리: 결국 그 기관이 결정할 일은 아니니까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 일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충분히 모으면 다시 도전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벌써 4년이나 지났죠. 하지만 다시 한국에 가서 몇 달 동안 조사를 진행할 수 있는 정신 상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꼭 진행할 겁니다.

팟캐스트: 마리 씨는 직장에서 퇴직하시고, 스티브 씨는 안식년을 얻은 뒤에 한국에 아파트를 빌리셨군요? 지금 생각해보시면 한국에서의 생활은 어떠셨나요? 6달 동안 한국에 계셨죠?

마리: 처음 몇 달간은 한국에서 생활한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했죠. 하지만 조사가 갑자기 끝나고 나니 그 흥분이 가라앉았어요. 제가 한국에 오기로 한 일이 옳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생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블로그를 시작했어요. 블로그에 제 친부모 조사에 대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제가 한국에서 사용해 본 화장품에 대한 평론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2013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방문했을 때는 한국 화장품 업계가 그렇게 거대한지 몰랐죠.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을 시작한 뒤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어요. 스티브와 저는 그 주목도를 보고 한국에서의 남는 시간을 사용해서 사업을 일구고, 한국 화장품을 영국으로 수입해볼까 생각했습니다. 한국 화장품이 미국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지만, 그때는 누구도 영국 시장을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처음으로 한국 화장품을 영국으로 수입할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2013년-14년에 한국에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한국에서 돌아오면서 옷 가방 하나를 화장품으로 채워와서 친구들에게 써보라고 했죠. 스티브가 제가 이렇게 좋아하는 일을 사람들과 같이 공유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이라고 했고 서로 웃고 말았습니다. 제 꿈의 직업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죠. 제 사업을 열어서 한국 화장품을 영국으로 수입하고 싶다고 이야기하고는 했지만 꿈에 불과했어요. 6개월간의 한국 거주 기간 중 마지막 달은 사업 계획을 작성하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기업을 최대한 많이 만나 회의를 하고, 많은 화장품을 시험해보고, SNS 관련 그룹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그다음에 영국에 돌아와서 2달 동안 준비를 하고 뷰티 앤 서울(Beauty and Seoul)을 창업했죠.

팟캐스트: 한국에서 아직 창업하기 전에 화장품 기업들을 만나고 다니는 일이 어려웠나요? 회의를 잡는 일도 어려웠죠?

마리: 네. 제가 계속 화장품 회사들에 전화하는 사진이 있어요. 전 전화하는 일 자체를 기분이 가장 좋을 때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스티브가 저에게 긴장하지 말라고 조언을 해줘야 했어요. 전화했을 때 사람들이 영어를 하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연락이 안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한국에서는 화장품 엑스포나 컨벤션을 자주 했고 그런 거기에 가서 참여 기업들과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요. K-Beauty 무역 박람회도 많이 열려서 거기에서 우리가 막 만든 명함을 뿌리고 다녔죠. 강남에 있는 부티크에 가서 정장을 맞춰 입고 박람회에 참여했습니다. 그때는 웹사이트도 없었고, 그냥 계획만 있었을 뿐이었고, 우리는 계획을 소개하고 다녔어요. 그렇게 한국을 떠날 때 이름과 연락처 몇 가지를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처음 시작했을 때는 작게 시작했어요. 6개에서 7개 정도의 브랜드를 수입해서 팔기 시작했죠. 4년 전에 그렇게 시작했는데 이렇게 성장한 사실을 보니 자랑스럽습니다.

팟캐스트: 이 사진에는 스티브 씨가 같이 사진에 찍혀 있지 않지만, 스티브 씨가 다른 일들을 도와주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매우 열정적이었습니다. 스티브가 처음부터 이 사업에 긍정적이었나요?

마리: 네. 스티브는 페이스 마스크 사용하는 일을 좋아해요. 항상 제 상품을 사용하고, 제가 가진 가장 비싼 화장품도 사용해보죠. 스티브도 화장품 사업을 좋아했습니다. 원래는 얼굴을 비누로 씻는 일을 제외하면 화장 자체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라 더더욱 신기했어요. 

팟캐스트: 현재는 10단계 피부관리 프로그램도 하고 있나요?

마리: 네. 지금은 저보다 훨씬 더 복잡한 절차를 거치죠. 저는 아침에 빠르게 준비해야 하니 10단계를 전부 할 수 없고, 최대한 빠르게 피부를 좋은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맞는 준비 단계를 거쳐요. 스티브는 그 10단계를 저녁에 합니다. 에센스, 세럼도 바르고, 새롭게 들어온 상품도 실험해보고, 면도한 뒤에 어떤 상품을 써야 할지, 이 모이스처라이저를 써야 할지 물어보고 피부관리를 좋아해요.

팟캐스트: 처음으로 시트 마스크도 써보고, 에튀드 하우스, 이니스프리 같은 화장품 판매점을 보니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한국과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나요?

마리: 한국에 처음 갔을 때 음식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갔죠. 김치를 처음 먹어본 적도 있습니다. 지금 첫 여행에 대해서 생각하면 아주 신기해요. 한국 음식이 어떤 맛일지 잘 몰라서 서양 음식을 먹으려고 했고, 음식 자체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 와서는 한국 음식을 좋아하지만, 그때는 그랬습니다. 한국어도 전혀 몰랐고, K-POP도 전혀 몰랐어요. 한국에 대해서 깊은 연결성을 만들 요소가 없었죠. 하지만 항상 화장품을 사용해보고 써보는 일은 좋아했어요. 그래서 한국 화장품 자체가 저의 흥미와 열정의 대상이 되었죠. 새로운 재료와 상품이 가득한 세계였습니다. 쿠션들을 보고 아주 대단한 발명품이라고 생각했고, 한국 문화와 연결되는 계기가 되어주었어요. 한국 상품을 사용하니 더 한국인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BB 쿠션을 사용하면 더 한국인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제가 입양되지 않았다면 BB 쿠션을 썼을 텐데 한국에서 그 BB 쿠션을 쓰고 있었죠. 그렇게 작은 일이지만, 그때는 제가 한국과의 연결성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그게 제 최초 여행에서의 경험이었죠. 2주 반이 지나고 나자, 한국 음식과 사랑에 빠졌고, K-POP도 잔뜩 내려받았고, K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지만, 한국과 최초로 연결성을 만들었던 계기는 한국 화장품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언제부터 화장품 회사들이 마리 씨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죠?

마리: 몇몇 회사들은 절 보고 거부하거나 최소 구매액이 수만 파운드가 넘어갔는데, 신생 기업으로는 그 구매 요구를 따라갈 수 없었죠. 이게 제 한국인 특성일지는 모르지만, 제가 생각하기로 나중에 충분히 성장해서 회사들이 제가 자기들의 브랜드를 팔아 주기를 원하길 만들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사업을 계속 진행해 나갔죠. 스티브는 그런 이유로 사업을 진행하고 발전시키다니 평범하지 않다고 농담하고는 했습니다.

팟캐스트: 미래에 가면 회사들이 나에게 전화를 하게 만들겠다고 생각하셨군요? 

마리: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이라는 느낌으로 접근했죠. 어쨌든 그렇게 부정적인 회사들이 좀 있었어요. 그때는 영국은 신규 시장이었고, 대부분의 회사가 아시아 시장이나 북미 시장에 더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엄청나게 성장했죠. 우리가 영국에서 와서 물어보는 일은 새로운 시장을 열어볼 수 있는 일이었어요. 운이 좋게도 많은 회사가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봤죠. 하지만 몇몇 회사들은 어떤 기준을 통과하고 오라고 우리를 거절했습니다. 사실 그 기준을 달성하고 난 뒤에 다시 돌아가서 하는 협상이 가장 즐거운 협상이죠. 아 네. 그 기준을 통과해서 이제 다시 사업을 논의하고 싶은데요.

팟캐스트: 그러한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보냈을 때의 감각을 기억하시나요?

마리: 아주 좋았죠.

팟캐스트: 그 뒤에 축하하고는 했나요?

마리: 네. 전화하면서 항상 긴장하고 있었으니 웃겼죠. 하지만 회의에서는 최대한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이려고 했고 그게 끝나고 나서 성공했다는 반응을 보였어요.

팟캐스트: 지금 돌아가면 VIP이신가요? 

마리: 우리는 화장품 회사들과 친밀해질 수 있어서 운이 좋았죠. 지난 4년간 여러 번 회사들을 방문해서 소통을 해왔습니다.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같이 식사도 하고, 몇몇 브랜드들은 우리를 통해서 체험 판매장과 스파도 열었기 때문에 관련해서 홍보도 되니 운이 좋았죠. 

팟캐스트: 스티브도 그런 대우를 같이 받나요?

마리: 네. 당연하죠. 스티브가 저만 그렇게 대우를 받게 두지 않죠. 뷰티 앤 서울을 처음 시작했을 때 좋았던 점은 한국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도 있었어요. 이 사업이 없었다면 한국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을 기회가 없었겠지만, 이러한 협상을 통해서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과 좋은 친구가 되었고, 그 친구들과 만나서 식사를 하게 되면 잘 못 하니 부끄럽긴 하지만 한국어를 연습하게 되었죠. 이 친구들이 저에게 새로운 요리를 소개해주려고 하고 여러 가지 새로운 문화를 소개해주기도 했어요. 한국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서 이득을 본 점 중 하나였습니다.

팟캐스트: 영국에서 한국 화장품 판매 사업을 어떻게 진행하셨죠?

마리: 우리가 처음으로 사업을 열었을 때 운이 좋았죠. 이미 SNS와 블로그를 통해서 제 이름을 어느 정도 알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미 수만 명의 사람이 이미 절 알고 있었죠.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이미 기다리고 있는 고객들이 존재했어요. SNS를 통해서 오신 분들도 있었고, 블로그를 통해서 오신 분들 있었고, 블로그를 통해서 우리 사업을 도와주려는 분들도 많았죠. 한국 화장품을 검색해보면 항상 영국 검색 엔진 위에 올라오기도 했고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첫해에는 어떤 이벤트나 행사에서 말할 기회가 있으면 전부 받아들였어요. 아주 힘들었습니다. 6개월간 해외에서 지내다가 영국에 돌아온 상태였고, 저는 무직이었고 영국에 돌아오면 다시 취직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사업을 처음 시작해서 이득을 얻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정규직에 취직해 일하면서 동시에 뷰티 앤 서울 사업을 주말과 퇴근 이후에 진행했습니다. 그래도 사업 시작 첫날의 판매량을 보고 이 사업에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진행했어요. 제가 노력한 이유는 이 사업에 진입해서 가장 먼저 성공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 모든 힘을 다해 노력하고 최대한 열심히 하려고 했죠. 여가 시간에 경영학 공부도 하고. 판매제안서에 관해서도 공부하고, 인스타그램 관리법도 배우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그렇게 성장했죠.

팟캐스트: 현재 규모가 어느 정도 되시죠? 물론 공유하기 어려운 정보도 있겠지만, 전용 창고의 사진을 봤던 기억이 나서요.

마리: 네! 전용 창고도 있고 직원도 4명이나 고용해서 거기를 관리하고 있어요. 4명 다 프리랜서로 고용했죠. 지금 현재 사업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 아버지가 처음 사업 시작할 때 사업장 구축과 상품 구매를 위한 융자를 해 주셨어요. 아버지도 꽤 사업가로서의 재주가 있으셔서 여러 부업도 하시고, 프리랜서 일도 하셨습니다. 현재는 은퇴한 상태라 아버지에게 좀 일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죠. 아버지의 말로는 소기업은 2년 내로 성공하지 못하면 실패하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2년이 지나고 나면 제가 성공하든 성공하지 않든 융자를 갚아야 한다고 하셨죠. 그게 융자 조건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융자를 4달 만에 갚을 수 있었어요. 그게 저와 아버지에게 이 사업에 미래가 있고 우리가 계속 열정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면 더 성공할 수 있다는 증거로 보였죠.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한국 화장품 판매 기업들이 영국에 상륙하고 있어요. 거의 매달 하나씩 새로 창업하는 느낌이죠. 하지만 제 이야기를 더하고, 우리가 영국 한국 화장품 판매 기업의 선구자 중 하나라는 사실을 더해서, 전 뷰티 앤 서울을 얼굴이 없는 무기질적인 기업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고객들과 소통하고, 제 얼굴을 SNS에 걸어 놓고, 친구로서 상품을 추천해주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그냥 한국 화장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국 화장품이 인기를 끌게 되니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더 개인적인 깊은 관계를 맺고 싶었죠. 그러한 접근 방식이 우리 사업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현재 마리 씨의 마음에 가장 드는 상품 몇 가지를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마리: 음…. 현재 제가 애용하고 있는 모이스처라이저는 헤이미쉬 모이스처 젤 크림이에요. 현재 영국의 따뜻해지고 있는 날씨에 맞춰 가볍게 사용하기 좋은 모이스처라이저죠. 피부에 닿으면 시원한 느낌이 드는 모이스처라이저입니다. 

팟캐스트: 수박 모이스처라이저인가요?

마리: 네. 수박 모이스처라이저에요.

팟캐스트: 저도 아주 좋아해요. 

마리: 네. 주원료가 수박 추출물이죠. 하지만 수박 향이 나지 않아서 좋은 제품이에요. 

팟캐스트: 그리고 무겁지도 않고요.

마리: 무겁지 않지만, 수분공급을 해줘서 좋은 제품이죠. 모이스처라이저는 그 제품이 마음에 듭니다. 그다음으로 마음에 드는 제품은 시오리스 에세너죠. 에세너는 에센스와 토너를 하나로 합친 제품으로 시오리스에서 직접 개발한 신규 제품이에요. 쑥과 녹차가 들어 있어서 안정되고 정화되는 느낌이 듭니다. 전 얼굴이 쉽게 빨개지는데, 이 제품을 쓰고 났더니 많이 도움이 됐어요.

팟캐스트: 저도 안면홍조증이 있어요. 현재 영상에 보이실 겁니다(팟캐스트 인터뷰를 영상 통화로 진행 중) 

마리: 한국 혈통 문제일지도 모르겠네요. 제 뺨이 자주 마르고 빨갛게 되고는 하는데 시오리스 에세너가 큰 도움이 됐죠. 거기에 유리병에 담겨 판매되어서 환경 보존적인 소비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팟캐스트: 한국 화장품이 왜 다른 나라 화장품들보다 낫다고 이야기가 많이 되는데, 이게 단순히 판매 전략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마리: 제가 한국 화장품을 한국 화장품과 피부관리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해야 한다면, 화장품 산업계에서도 한국 화장품이 사용하는 배합방법이 프랑스와 미국에서 사용하는 배합방법보다 10년에서 15년 정도 더 앞서 있다고 인정한다고 이야기할 겁니다. 그러한 잡지 기사들과 함께 한국 화장품이 영국에 상륙해 메리케이에서 팔리기 시작할 때 발간되기 시작했죠.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피부를 관리하고 외모를 관리하는 일을 자랑스러워합니다. 화장을 짙게 하기보다는 피부를 관리하려고 해요 특히 서양에서 자란 제가 보면, 서양에서는 피부에 잡티가 있다면 그 잡티를 컨실러로 숨기려고 하죠. 화장에 접근하는 방식이 달라요. 그렇게 피부관리에 대한 높은 관심이 화장품 기업이 혁신과 기술 발전에 투자하게 했고, 새롭고 대단한 배합방법을 개발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값싸고 고품질의 화장품을 생산할 수 있었죠. 거기에 고도의 경쟁을 통해서 미국, 프랑스 브랜드와 비교하면 가격을 낮게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한국 화장품을 소개할 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죠. 친구들이 한국 화장품을 파는 사업을 시작한다고? 이라고 궁금했습니다. 친구들에게 써보라고 상품을 나눠줬고, 친구들이 사용해보니 그 상품들과 사랑에 빠졌고, 그 결과 4년 뒤 지금도 같은 상품을 저에게 사서 사용하고 있어요. 그런 광경은 보기 좋죠. 모두에게 맞는 화장품이 있습니다. 저에게 맞는 상품이 다른 사람에게는 맞지 않기도 하고요. 어떤 사람에게는 달팽이 크림은 너무 과도한 물건일지도 모르죠.

팟캐스트: 너무 단순화시키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마리 씨는 꿈을 원하셨고 그 꿈을 쟁취하셨죠. 그런 진취적인 접근을 친부모 조사에 적용해 볼 생각은 안 했나요?

마리: (웃음)

팟캐스트: 안된다는 대답을 듣고도 계속 노력을 하셨으니까요.

마리: 알죠. 알아요.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특히 다른 입양아들과 이야기를 하면 항상 진취적이고 용맹한 사람이고, 그게 개인적인 삶이나, 사회적인 생활이나, 사업에도 드러나는데, 그 친부모 조사에만 다가가면 제가 정신적인 장벽에 부딪히는 느낌입니다. 과거보다 지금의 제가 훨씬 자신감이 넘쳐요. 지금 저는 저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배경을 받아들이고, 정신 건강상으로도 많이 나아졌죠. 나쁜 일이 일어나면 사람을 성장하게 하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성장의 결과가 현재의 저 자신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 친부모님을 찾았다면 뷰티 앤 서울을 시작하지 않았을 겁니다. 꽤 기묘한 생각이죠. 적어도 지금은 제가 그런 문제에 접근할 준비가 더 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똑같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있죠. 그렇게 되면 더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그런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 중이죠. 용기를 내서 동방사회복지회에 들어가서 제 정보를 달라고 요구를 하고 조사를 할 필요 없다는 소리를 없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고 도와줄 만한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팟캐스트: 한국 드라마처럼 동방사회복지회에 12명의 정장 입은 한국 남자들을 끌고 가야 할지도 몰라요. 사람들을 동원하는 방법이 한국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빠른 방법이죠.

마리: 런던 기반 기업과 같이 일하던 좋은 친구가 한국에 살고 있죠. 한국에 방문하면 그 친구가 항상 같이 가서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친구는 한국계 미국인이고, 한국어를 잘하거든요. 그냥 말만 하면 바로 도와주겠다고 했죠. 그러한 언어적 소통 여부도 성공 여부를 가린다고 생각합니다. 방문 자체가 정신적으로 힘든데, 언어적 장벽까지 더해지면 힘들어지죠. 그런 언어적 도움이 있다면 더 도움이 될 겁니다. 다음에 다시 동방사회복지회를 방문할 때는 사람을 대동할 예정이에요. 전에 동방사회복지회를 방문했을 때는 스티브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죠. 스티브도 들어오지 못한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스티브가 들어왔어도 큰 도움은 되지 못했을 겁니다.

팟캐스트: 제 자료에는 별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이런 행동까지 할 이유는 못 느꼈지만, 다른 친부모 조사를 더 깊게 진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국어를 잘하고 강한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한다고 하더군요. 한국 아줌마나 강한 언니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안된다고 해도 전혀 듣지 말고, 난리를 피면서 시끄러운 외국인이 되어야 한다면 해야 한다고 해요. 한국 사람들은 그런 문제에 반응하죠. 평범하게 협조하면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된다고 합니다.

마리: 저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팟캐스트: 큰 힘이 들기 마련이죠.

마리: 적어도 후자의 문제는 직접 경험했죠. 그냥 동의하면서 물었더니 결국 진행이 안 되더군요.

팟캐스트: 그리고 우리가 입양아로서 항상 예의 바르게 정보의 극히 일부를 받는 데 익숙해져 있죠. 하지만 더 많은 정보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마리 씨는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마리: 거기에 우리는 영상도 가지고 있거든요. 부모님에게 자료를 받으러 갈 때 스티브가 영상을 전부 찍었죠. 제 부모님이 고등학교에서 만났다는 사실이나 그런 부모님이 가진 자료를 전부 영상으로 남겼습니다. 하지만 저는 친어머니들이 자신의 신상을 보호하고 싶어서 가명을 대거나 친구의 이름을 대기도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기관에서 가명을 통해 사람들에게 연락을 보내면 그 연락을 받은 사람들은 잘 모르거나 모른다고 하기도 한다고 해요. 아주 힘들죠. 결론을 내고 싶은데 어머니를 만나기는 했는지, 어머니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는지, 어머니가 준비가 안 됐다고 했는지, 대답하지 못하겠다고 했는지, 어머니의 태도는 어땠는지, 어머니와 연락을 했는지, 거짓말을 했는지, 사실이나 거짓말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팟캐스트: 사람들이 마리 씨를 구독하거나 연락하고 싶으면 어떤 방식을 사용해야 하죠?

마리: 인스타그램이 가장 좋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죠. @Beauty_and_Seoul이 뷰티앤서울 계정입니다. 제 개인 계정은 @Mareekinder 인스타그램이에요. 2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다른 입양아들을 만나지 못해서 다른 입양아들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만나고 싶습니다. 서로 과거를 공유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