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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6, 에피소드 20: 사라 존스와 사랑의 표식

“‘팔에 문신이 있는걸 보니 부모가 되찾고 싶어 했던것 같은데 이렇게 버려졌으니 입양보내도 되겠다’ 고 입양기관 담당자가 판단했대요.”

 이번 주인공 사라 존스(Sara Jones)는 “혹시 내가 나온 테드 톡 봤어요? 조회수가 200만명 정도 되는데..” 라고 말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사람입니다. 다른 많은 우리입양인들과 마찬가지로 사라도 자신의 나이를 정확히 모른다고 합니다. 다만, 한국의 아버지가 그를 입양보낼 계획이 없었던 것만은 확실히 압니다. 그 증거가 있으니까요. 

제 이름은 사라 존스에요. 1977년에 미국의 유타주로 입양되었어요. 그 뒤로 이곳에서 자라며 경력도 쌓았고 지금도 살고 있어요. 저를 지칭하는 대명사로는 “그녀”를 씁니다. 법적으로는 48세이지만 몇년 전에 친가족을 찾았을 때 제 진짜 생일을 알았는데 실제로는 제가 8달 일찍 태어났더라고요. 중년의 나이에 내 나이가 실제로는 내가 알던 것보다 더 많았음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반색할 만한 사실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또 그래서였나보다 하고 이해가 되는 것들이 있었고요. 그러니 마흔 아홉인셈이죠. 오늘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 사는 곳은 어디죠?

유타주의 솔트레이크 시에 살고 있어요. 

테드톡에서도 다뤘지만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된 이야기를 좀 해주시겠어요?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테드 톡을 보셔도 됩니다.(https://youtu.be/8kjN1PnEGhA) 대략 말씀드리면 이제는 친가족을 찾을때가 된 것 같다고 느낀 때가 왔어요. 그리고 저는 운이 좋은 경우인데 제 몸에 입양되던 당시에 남겨진 것이 분명한 표시가 있었거든요. 신분확인을 위해 그게 있는 거라는 감이 있었고요. 왼쪽 팔 앞부분에 있었는데 어릴때 제 양부모가 수술로 그 문신을 제거해버렸었어요. 당시에 세살이었는데 이 미국에서 그런 문신을 가지고 살아가면 힘들거라고 생각하셨나봐요. 70년대였으니까요. 미국 문화에 동화되어서 살아가야 되는데 그런 이상한 문신이 있으면 힘들거라고요. 아무튼 그 문신 덕에 가족중의 일부를 찾을수 있었고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전부 다 찾은 것은 아니고요. 그래서 오늘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부분이 우리가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 현실이에요. 우리가 어디서 왔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는 현실이요. 

와우, 굉장히 궁금하네요. 그래서 아직도 그 표식이 남아 있나요?

네. 성형수술로 제거됐었어요. 그때는 그게 유일한 방법이었대요. 그래서 팔에 희미하게 흉터만 조금 남아있었는데 어릴때 사진을 보면 가리고 있더라고요. 햇빛을 받으면 흉터가 진해질수 있으니까요. 아주 희미해서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 봐야만 보이는 정도였죠. “나에 대한 특이한 사실” 같은 토크 주제가 나오면 “내가 실은 문신이 있는데.”하는 정도의 소재였어요. 이 곳이 아주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곳이고 또 문신의 모양이 사람들이 그리 반겨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살면서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왔고요. 흔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어서 친부모를 찾겠다는 결심을 했을때 네임펜으로 문신 모양을 따라서 다시 그린후 그 사진을 가지고 여기 저기에 올렸죠. 

십자가 모양이었나요? 

무슨 표시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십자가 모양 혹은 알파벳 “X”에 가깝긴 한데 그 밑에 점 네개가 있었고요. 저희 부모님도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셨고요. 제 입양 서류에 그에 대한 언급이 있긴 한데 그들도 모른다고 적혀있더라고요. 혹은 알아도 모른척 했거나요(웃음). 이곳 유타에는 70년대 80년대에 동양인 비율이 1퍼센트에서 1.5퍼센트 정도였어요. 지금은 주 전역에 2.5 퍼센트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거의 대도시 근처에 집중되어 있긴 하지만요. 솔트레이크시만 따져보면 아시안 비율이 6-7%정도 되는데 생각보다 꽤 높죠. 아무튼 그때는 아시안을 만나기만 하면 왠지 말을 걸어야 할것 같고 그랬어요. 그래서 대화를 하게 되면 물어보기도 했어요. 혹시 이 모양이 무슨 뜻인지 아는지 본적이 있는지 혹시 중국쪽 상징인지 불교쪽인지 등등요. 그런데 확실히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 문신을 가지고 어떻게 했나요? 문신 덕에 찾게 되었나요?

진짜는 그때부터였죠. 입양되었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잘 몰랐으니까요. 일단 제 정보를 한국인들에게 뿌려야했죠. 입양 기록에 적힌 제가 태어났다는 도시는 알고 있었어요. 당시에 약 8천명 정도가 Korea Adoption Service(아동권리보장원)를 통해 가족 찾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곳에 제 정보를 입력할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어요. 어떤 핵심 키워드를 입력할수가 있게 되어 있었는데 저만 유일하게 “문신”이 핵심 키워드였어요. 꽤 특히하잖아요. 그리고 그곳 이외에도 페이스북등등 여기 저기에 제 정보를 올렸죠. 사람들도 많이 퍼날라주고요. 너무 감사했어요. 그때 페이스북에 한 그룹이 생겼는데 아동권리보장원에 있는 정보를 샅샅이 훑어서 퍼날라주던 그룹이었어요. 특히 어떤 특이한 정보가 있어서 친부모 찾기에 유리하겠다고 생각되는 포스팅들을 말이에요. 그 그룹은 특히 납치당한 아이들에 대한 정보를 많이 올려주었고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 그룹을 팔로우했는데 제가 그들의 마흔 아홉번째 포스팅이었거든요. 그걸 제 오빠의 지인이 보고 그 문신을 알아본거에요. 

그러니까 오빠의 친구가 오빠한테 연락을 한거네요. 오빠한테도 같은 문신이 있었고 그걸 친구가 봤었나봐요?

네. 저에게 오빠가 둘이 있었는데 오빠들이 다 같은 문신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우리를 고아원으로 보낼때 잠시 맡겨만 둘 계획이었었나봐요.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때는 포기각서 같은 것을 썼어야 했나봐요. 그래서 그러기로 결정을 했을때 나중에 찾기 쉬우라고 아버지가 우리들의 팔에 문신을 새긴거죠. 70년대에는 이미 해외입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였고 그래서 우리를 못 찾을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을 한거죠. 오빠들은 결국 그 고아원에 8년이나 머물렀더라고요. 해외입양을 안가고요. 둘이서 같이 있었고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와 가족들과 함께 살았대요. 그런데 한국에는 문신에 대한 편견같은 것들이 있어서 친구들한테 놀림을 당했대요. 성형수술로 제거할만한 형편이 안 되었으니까요. 오빠들도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내왔는지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그들만의 사연이 있었던 거에요. 그 문신을 보고 우리 오빠들한테 연락했던 그 친구분이 그러길 제 오빠들이 그 문신만 보면 해외로 입양보내진 여동생이 생각나서 힘들어 했다고 기억하더라고요. 다들 너무 분노했고 특히 아버지가 많이 힘들어하셨대요.  

그럼 이렇게 가족을 되찾게 된 과정이 상당히 빨리 진행되었나요? 마음의 준비는 되어있었나요?

준비가 되어있었다고 딱히 말하진 못하겠어요(웃음) 가족과의 재회는 빨리 진행이 됐죠. 이래저래 넘어야 할 장벽들이 조금씩은 있었죠. 진짜 큰 장벽은 막상 재회를 하고 나서 찾아왔죠. 일단 엄청난 언어의 장벽이 있잖아요. 통역이 항상 정확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모두가 다 저를 찾아서 기쁜 마음으로 소통을 한다는 것은 알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럴거면 도데체 나를 왜 찾아낸거야’ 같은 의문은 전혀 안들었어요. 그런 사례들도 있잖아요. 그래서 한국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일도 즐거웠고요. DNA 검사 결과는 좀 의외였지만 다른 모든 증거들이 맞아 떨었거든요. 그래서 만날 계획을 바로 잡았어요. 그때는 제가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막상 그 순간이 되면 엄청난 양의 새로운 감정들이 밀려 오잖아요. 엄청나고 엄청 지칠만큼에요. 

그리고 그때 이곳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네 입양부모님들은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였어요. 거의 모든 사람들이요. 대답하기 지칠만큼요. 그래서 지인들이 같이 점심이나 먹으며 이야기 하자는 이런 말들이 다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 하는 것도 너무 지치고 무엇보다 아직 저에게도 낯설고 또 현재진행형 이었잖아요. 다들 너무 잘 됐다고 해피엔딩이라고 이야기 좀 더 해달라고 하는데 너무 지칠정도였죠. 특히 이 모든 일들을 멀리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어떤 축하 이벤트 정도로 생각하고 잘됐다고 포옹해주고 박수쳐주거나 하는등의 미국인의 관점과 방식들이 좀 빈정상하더라고요. 실제로는 굉장히 복잡하고 무거운 문제인데 말이죠. 

가족들이 강제로 헤어져야 했고 아동인신매매였을수도 있는 그런 심각한 상황이죠 아버지가 해외로 보내질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포기각서를 썼던 안썼던간에 말이죠. 

맞아요. 요즘 상실(역자 주 – Grief)의 개념이 많은 화두가 되어서 반갑기도 해요. 보통 입양인들 본인이 느끼는 상실감을 많이 생각하는데 우리 아버지가 느꼈을 상실감을요. 아빠가 다치셔서 우리를 보러 자주 못 왔었대요. 그래서 할머니가 대신 보러 오곤 했었는데 어느날 막내 손녀가 입양을 위해 다른 고아원으로 보내졌다고 하더래요. 그냥 통보를 받은 거죠. 그래서 아버지가 느꼈을 상실감을 생각해봐요. 찾을 수 있는 방도도 없었고 뭐랄까 아이가 죽은 거나 마찬가지 잖아요. 

그래서 저는 아이가 다른 나라로 입양을 가게 되면 그 가족들 전체가 죽는거나 마찬가지라고 봐요. 되돌릴수도 없고 되돌릴 권리도 없고요. 그냥 잊어버리고 살거나 해야죠. 사랑했던 사람이 죽은 거나 마찬가지죠. 그래서 테드톡에도 나갔던 거에요. 실은 솔트레이크 시티의 TEDx(역자 주 – 특정 지역인들이 모여서 여는 강연회)였는데 테드톡 담당자들이 TED로 뽑아줬어요. 아무튼 그런 감정들이 입양인들에게는 아주 분명한데 일반 사람들은 알길이 없죠.  

주변 사람들 특히 비입양인들로부터 제일 많이 들었던 질문중에 하나가 “친가족을 만나는 것에 대해 입양부모가 어떻게 생각할까?” 라고 했잖아요. 그 질문이 왜 그렇게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걸까요? 이 일이 입양부모의 허락이라도 받아야 하는 일로 보여지나봐요.

 양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할때 아주 쉬운 질문이지만 그런 질문을 받을때 내가 심정이 어떤지를 모르고 묻는 것 같아요. 다른 입양인들도 똑같이 느낀다고 가정하진 않을게요. 제 경우에는 그런 질문을 받으면 제 입양부모와의 지난 45년 세월이 다 떠오르거든요. 좋은 때도 있었고 안좋을 때도 있잖아요. 문제는 입양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차원을 넘어서 내가 선택한 답에 대해 해명을 해야 한다는 거에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제 선택을 정당화해야 하는 거죠. 그게 너무 스트레스였어요. 그래서 그냥 “이건 온전히 내 개인의 일이야” 라고 핵심만 대답하곤 했어요. 제가 그때 나이가 마흔이 넘었었는데 오년전이었으니 마흔 셋쯤 되었을때에요. 나이가 중요한건 아니지만  

완전히 성장한 개인이죠

그렇죠. 다 큰 여자이고 이건 내 일이라고요. 누구 허락을 받을 일이 아니라고요. 내 남편에게조차도요.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죠. 그렇다고 해도 동의를 구해야 할 문제는 아니죠. 문제는 우리 입양인들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할때마다 항상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수 있도록 이해시켜주어야 할것만 같은 입장에 있어요. 그래서 오히려 더 스트레스였던 것은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그런 질문들을 하는데 저에게는 가볍게 답할수 있는 질문들이 아니었다라는 거죠. 그들이 제가 왜 그래야 하는지 아님 왜 안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해명을 들을 권리가 있는것도 아니고요. 

이 사회가 우리 입양인들은 그저 감사하며 살아야 하고 친부모 찾기를 하면 배은망덕한거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으니 그런 생각없는 질문들이 튀어나오는 거죠. 혹시라도 입양부모가 상처받는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그들의 감정을 우선시하면서요. 

평생을 다른 사람의 기분을 먼저 살피며 살았잔아요. 또 그래야 하는거죠. 내가 잘못했을지도 모른다는, 평생 내 모든 행동의 밑바닥에 깔렸있던 감정말이에요. 그 사람들은 자기들을 뭘 물어보는지도 모를거에요. 그래서 혹시라도 주변에 입양된 사람이 있어 대화를 할때 이런 부분을 배려해 줄수 있도록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참 유익한것 같아요. 아무튼 서로 깊게 아는 사이이거나 하면 그래 실은 이래하며서 이야기를 해줄수도 있지만 아무 생각없이 그냥 치고 들어오는 그런 무지한 수준들도 있잔아요. 물론 다들 악한 의도는 없죠. 사람들도 다 너무 깊고 예민한 주제만 아니면 다들 배우고 싶어할 거라 생각해요

그런데 또 미세차별인 경우도 있잖아요. 쉽게 힘든 경우인데. 그런 경우 피드백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도 중요하죠. 그냥 대충 넘겨버리고 말아햐 하는지 아니면 이 사람이 들을 귀가 있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인지 항상 상황판단을 해야 하죠. 그런 부담이 항상 있는 것이 억울하지만 사실이에요. 

한국에서 가족들과 재회했을때의 이야기를 좀 해주실래요? 어떤 생각과 느낌 이었는지 말이에요. 어떤 입양인들에게는 어쩌면 평생 경험할수 없는 일 일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아직 대중에는 공개안 한 이야기가 있어요.(웃음) 만감이 교차하는 상황이었어요.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할 상황이었죠.  장거리 비행등 모든 것이 지치죠. 그리고 방송 촬영이라는 복병도 있었고요. 출발하기전 미국에서부터 촬영을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었어요.인천공항에서 세관을 지나서 특정 게이트로 나가야 하잖아요. 담당피디로부터 어느 게이트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문자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막 게이트를 나가려고 하는 참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공항 직원이 다른 게이트로 나가야 한다고 하는 거에요. 바로 게이트 앞에 서있었는데 말이에요. 제 남편이 한국어를 조금 할줄 알아서 통역앱등을 총 동원해서 바로 이 게이트 앞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곳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는데도 안된다고 다른 게이트로 나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니 여기 지금 이사람들은 다 뭐냐고 이 사람들은 다 이 게이트로 나가는데 왜 우리는 안되냐고 도데체 우리한테 왜 이러는거냐고 항의했어요. 이해가 안되었죠. 오빠랑 방송 관계자들이 바로 저 문앞에서 몇시간째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다른 게이트로 가라고 말하기가 너무 미안한 상황이었거든요. 조금 스테레오 타입을 동원해서 말해보자면 한국의 부정적인 면을 그 직원이 보여줬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우린 그냥 갈거라고. 사람들이 기다린다고 우리 그냥 이 게이트로 나갈거라고 막 성질을 부렸어요. 그랬더니 보내주더라고요. 그래서 그 영상을 보시면 제가 웃고있다가 갑자기 표정이 확 굳는걸 보실수 있어요. 안그래도 힘든데 말이죠. 공항 빠져나가기가 그렇게 힘들줄 누가 알았겠어요. 오빠들은 이 이야기를 몰라요. 제 입장에서는 ‘설마 지금? 여기에서까지 세상이 나한테 이렇게 팍팍할까’하며 살짝 울컥한 기분이었거든요. 제 남편과 아이들은 제가 한번씩 폭발하는 것에 익숙해서 ‘지금 엄마 건들면 안돼’ 이런 분위기였고요. 

첫 만남은 아주 기뻤죠. 물론 핸드폰등으로 텍스트를 사용해야했지만 나랑 똑같이 생긴 사람들을 마주하는 기분이 좋았어요. 동시에 시각적인 정보를 마음속으로 빨리빨리 평가를 해야 하잖아요. 일단 시각적으로 외적인 면을 평가해야하죠. 오빠들이랑 포옹을 했는데 저랑 몸집이 비슷하더라고요. 제가 미국에서는 많이 작은 편이거든요. 오빠들이랑 키가 비슷하네 두상이 똑같네 등등의 정보가 즉각적으로 들어오고 알아채고 관찰하고 하는 평가들이요. 그리고 수십년을 걱정하고 궁금해하다가 마침내 만난 기쁨도 그렇고요. 오빠들이 궁금해 했던것과 제가 궁금해햇던 것은 많이 달랐어요.  저희 오빠들은 제 어릴때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니 오빠들에게는 큰 아픔이었죠. 막내동생을 잃어버렸다는. 살아 있기는 하는지 화목한 가정을 만났을지 하는 걱정들 말이에요. 그래서 오빠들이 알고싶어했던 것과 제가 알고 싶어햇던 것이 달랐죠. 저는 우리 가족들은 어떻게 생긴 사람들일까 하는 궁금함이었고요. 저는 어릴때 읽었던 “꼬마고아 애니”스토리말고는 지금까지 한번도 제 남편과 아이들을 잃는다는 상상도 해본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 모든 가족들과 오빠들이 생겼다는 것이 피부로 와 닿았죠. 저는 자매들하고만 자랐거든요. 그래서 제 입장에서는 많은 것을 관찰하고 머릿속으로 정리해야 하는 순간었지만 오빠들 입장에서는 지난 수십년간의 세월동안 쌓여진 원망과 아픔들이 터져나오고 해소되는 시간이었죠.  그 사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저를 다시 찾은 것을 못 보시기 때문에 더 원통했을것이고요. 그래서 오빠들은 오빠들 나름대로 해소할 것들이 있었고 저와는 달랐죠. 그렇지만 한 마음으로 기쁜것은 같았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때 분노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잔아요. 오빠들도 그랬을까요?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아버지에 대해 분노했을수도 있고 사회나 한국 정부에 대해 분노했을수도 잇고요. 사라씨도 분노를 느꼈나요 아니면 아직인가요?

그럼요. 가족들은 찾기 전부터 많이 화나 있었어요. 저는 다른 입양인들처럼 저의 입양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었어요. 아니 그러도록 제가 저를 놔두질 않았죠. 그래서 마침내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분하고 원통한 감정이 올라 오더라고요. 제 앞에 깊게 자리하고 있었지만  한번도 다뤄지지 않았던 감정 말이에요. 그 감정을 정확히 이름을 붙이지는 못하겠어요. 지금은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도 거짓과 허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잔아요. 그런데 제가 입양기관에 연락해서 혹시 70년대에 전주에서 온 문신이 있었던 여자 아이를 기억하는냐고 물었거든요. 그랬더니 굉장히 상투적인 형식으로 당신의 생일은 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정보의 전부입니다. 하는 답이 돌아왔어요. 제가 묻지도 않았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제 진짜 생일을 알고 있었던 거죠. 저는 평생을 몰랐는데 말이죠. 제 삼촌이 확인을 해줬어요. 제 생일이 삼촌의 생일에 가까웠었대요. 년도는 달라도 날짜가 하루이틀 정도만 차이났었대요. 그들이 제 정보를 40년 넘게 가지고 있었고 저는 몰랐다는 거죠. 

그리고 또 분노했던 순간이 입양기관에서 제가 버려졌다고  주장했잔아요. 제 기록에 남겨진 서류가 있었는데 흔치 않은 일이죠. 담당자가 남겨둔 서류에 의하면 “팔에 문신이 있는걸 보니 부모가 다시 찾길 원한 모양인데 이렇게 버려졌으니 해외로 보내도 되겠다” 라고 써있었어요. 버려졌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그들이 규정할수 있죠? 저는 오빠들이랑 같이 맡겨졌고 모두 같은 문신도 있었잔아요. 그리고 근처 지역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가 누구의 자식들인지 알았을수도 있고요. 그런데도 가족과 떼어내서 해외로 보내버렸잔아요. 그런 결정을 누가 할수 있는거죠? 서류에 적혀 있던 말도안되는 결정을 어떻게 할수 있는거냐고요. 그리고 법적으로 “포기”됐으면 해외로 보내도 되는거였냐고요. 

수많은 아이들이 이렇게 “버려졌다”는 꼬리표를 달고 해외로 입양이 되었다는 이 억울함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 “버려졌다”라는 단어가 그 아이들이 성장하며 자존감을 쌓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저만 영향을 받은건 아닐거에요. 저는 버려진것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다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고 그것들이 쌓이죠. 그러니 이 분노는 아주 자연스런 반응이에요. 제 경우에는 제가 해외로 입양됐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어요. 저에겐 가족이 있었잖아요. 고아원에서 계속 자랐다면 완전 끔찍했겠죠. 우리 오빠들이 그랬대요. 제 미래가 핑크빛이었을 거라고 말하는건 아니지만  굳이 나라 밖으로 보내질 이유까진 없었다는 거죠. 그리고 평생을 “더 잘 된 일이야. 너무 감사하지. 이렇게 교육도 받고 기회도 얻고. 자랄수 있었잔아”… 그런 메시지와 싸우며 살아가지 않을수 있었다는 거죠. 오빠들처럼 저도 집으로 돌아갔을거에요. 결국 성매매 여성이 되었거나 아니면 궁핍한 생활을 하지 않고요. 저희 가족들이 저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아니고 한국에서 고아로 자랐다면 어땠을지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잃어버린 놓쳐버린 모든 것들을 이젠 되찾을수 없잖아요. 그냥 감내해야죠. 어떻게든요. 

굉장히 심오한 경험이었을거에요. 우리 입양인 모두가 내가 한국에 계속 살았다면 어땠을까하고 시나리오를 써보는 내적경험을 하잖아요. 이것은 한국이 좋고 이것은 미국이 좋고 하며 비교 해보기도 하고요. 사라씨의 경우에는 솔트레이크 시티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강연도 하고 그 분야의 전문가이고 남편도 저명하시고 아이들도 둘이나 있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었구나 하고 생각할수도 있죠. 친가족과 재회를 했을때 사회경제적지위의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잖아요. 한국의 가족들이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했을 수도 있고요. 그런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였나요? 그리고 한국에 살았다면 삶이 어땠을지 그림이 그려졌나요? 

한국에 살았으면 좋았을점 부터 시작해볼까요? 가족들을 만나서 오래전에 그 궁핍했던 때로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들어보니 고생을 참 많이 했더라고요. 그리고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버지가 굉장히 똑똑하고 전략적인  분이셨대요. 과감한 성격이었고요. 제가 그 부분을 많이 닮았어요. 저는 운 좋게도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었지만 저도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요. 그래서 제 삶을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 볼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서 감사하죠. 내 가족이 그렇게 안 좋은 상황속에서도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었고 나한테도 그런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어서 다행이었어요. 제 오빠들은 택시운전을 하고 있는데 택시운전사가 그렇게 안좋은 직업인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한국에서 살았으면 맞이했을 최악의 상황인건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지금 특히 이곳 미국에서는 모든 것을 계급적으로 봐요. 한국도 물론 그렇지만요. 어른들이 우리를 위해 미리 내려 놓은 결정 속에서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갖게 되었느냐에 따라 우리를 평가하죠. 지금 하는 이 이야기가 Adoptees Citizenship Act (역자 주 –  입양인 시민권 조례, 다른 나라에서 미국으로 입양되어 온 사람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주기 위한 법률. 2023년 현재 아직도 미결 )의 미래의 활동 주제로 이어질 수도 있는데요 저는 제가 성공한 입양인(역자 주 – Model Adaptee)의 모델로 쓰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저를 보며 ‘저 사람을 좀 봐. 입양되어서 저렇게 잘 살게 되었잔아. 좋은 교육도 받고 기회도 많이 누리고. 그러니 입양은 좋은거야’ 라고요. 그런데 다 그런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성공한 입양인이라는 신화가 사라졌으면 해요. 그리고 제가 사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고 인지도도 있기 때문에 입양이 되면 다 저렇게 잘 되나보다 하는 인식이 저로 인해 퍼질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아요. 사람들이 입양제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더 깊이 들여다 보며 실제로는 이런 문제들이 있구나 하고 알아보게 해야 되는데 말이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네 운이 좋았네 그러니 불평하지 마 이런 식의 대화 보다는 조금 더 깊은 대화가 있었으면 어떨까 해요. 오래되어서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다 가졌다고 생각이 될때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는 쉽다(It is really easy to think that you haven’t lost anything when it seems like you have everything).”라는 말을 테드톡에서 했었어요.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런 특권들을 모두 잘 알고 있고요 그리고 그 특권들이 이 입양시스템 안의 문제들을 찾아내서 해결책을 찾아보는데 큰 도움이 되는 특권들이죠. 그래서 그런 특권들을 이제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써보려고 해요. 나한테 다른 사람한테 없는 이런 특권들이 있으니 이제는 그걸 이용해보자 하는 생각이에요. 굉장히 복잡하지만요. 카오미씨는 입양인들을 많이 인터뷰했으니 잘 알겠지만 다들 저 같은 경험들이 있는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일단 문제를 한번이라도 깊게 들여다본 경험을 한 입양인들이라면 그냥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이 입양에 대해서 고민하는지 아닌지 말할수는 없다는 것을 알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 사람의 외적인 성공지표로 그 사람이 입양제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면 안되죠. 

맞는 말이에요. 입양에 대해 흔히들 쉽게 하는 말중에 하나가 가족과 재회를 하면 새로운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죠. 가족과의 재회를 함과 동시에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서 알게 되잖아요. 친가족을 찾았으니 이제 가족이 더 생긴거라고만 생각하고 동시에 그들을 더 잘 알게 될 기회는 잃어버렸다는 것은 생각 안하죠.

그 이야기를 꺼내줘서 너무 고맙네요. 가족들과 재회했다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기쁘기만 할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아직도 딱 들어맞는 말을 찾지 못했는데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것은 아니잖아요. 제 오빠들이나 삼촌과 고모이모들은 저를 되찾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들을 되찾은 것이 아니죠. 그리고 서로간의 언어장벽이 있다는 상황이 어떤건지를 사람들은 몰라요. 그래서 부모를 찾았는데 같은 언어로 소통할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워요. 만났다고 해서 바로 끈끈한 정이 들거나 하는건 아니고 말이죠. 지난 9월에 코비드 이후 4년만에 처음으로 다시 가족을 만났는데 뭐랄까 두번째 데이트를 하는 느낌이었어요. 

아직도 조금씩 서로 알아가는 단계고 마치 달팽이처럼 아주 천천히 알아가는데 많이 지치죠. 한국어를 배우려고도 해봤는데 일도 해야하고 가족도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게 쉬운일이 아니고요. 언어를 배우려면 아예 몰입해야 하잔아요. 그리고 살아온 이야기같은  깊은 이야기까지 하려면 도달해야 하는 단계가 있으니 그것도 쉽지 않고요. 그러니 어쩌면 되찾았지만 전부 되찾은것은 아니죠. 그리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잖아요. 그 잃어버린 시간들과 죄책감같은 것들까지도요. 이렇게 쉽게 찾을줄 알았다면 이렇게 가능할줄 알았다면 좀더 일찍 찾아볼걸 같은 생각들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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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오래 기다린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고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왜 그들은 나를 찾지 않았지? 왜 나만 죄책감에 시달려야해? 왜 내가 다 해야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뭐 누구를 책망하고 그러자는 것은 아니고 그런저런 생각의 파편들이 생긴다는 말이죠. 모든것이 참 복잡해요. 나 자신과 그런 생각들에 대해 혼자 묻고 답해요. (웃음)  그래서 재회나 가족의 확대 보다는 회복이라는 말이 맞는것 같고요. 그렇다고 해도 완전한 회복 아니죠. 영원히 회복 못할 것들이 있으니까요.  

사라씨가 성공한 만큼 돌려주고 싶다고 했잔아요. 사라씨 같은 기회를 얻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에요. 미국 시민권에 대한 거죠?

솔직히 이번에 너무 크게 실망을 했어요. 이번 116번째 입법회기에서 결의안이 통과되지 않았거든요. 너무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사는 곳의 주상원의원이 유타주의 의석을 가진 최초의 아시아계 여성이에요.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해서 유타로 와서 경력을 쌓은 사람인데 어느날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해외입양과 입양인시민권부여법안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그가 그럼 결의안을 채택해보자고 하더라고요. 시민권은 연방법인데 주결의안이 어떻게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자고 그녀가 저를 설득했어요. 제가 그 전에 주경제와 관련해서 결의안을 채택해본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쪽도 내가 할수 있는 일이 되겠다 싶었어요. 다른 주와 도시에서도 입양인 시민권에 대해서 결의안을 채택했기때문에요. 그래서 그때는 제가 아직 Adoptees for Justice(역자 주 – 2018년에 입양, 이민, 인종 그리고 사회적 정의를 위해 결성된 입양인 주도의 국제 조직)에 직접 관여하기 전이라 그쪽에 연락을 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같이 연대하고 싶다고 했더니 유타주에도 활동을 하고 싶어하는 입양인이 있었냐며 반기더라고요. 

이쪽 유타주는 의회대표자들이 전부 공화당이거든요. 그래서 초당적인 법안을 통화시키려 할때는 공화당의원들의 협조를 많이 받아내는 것이 정말 중요해요. 민주당의 협조는 받아내기가 쉬워요. 그래서 이렇게 두 당의 협조를 모두 받아내는 것을 전략적으로 도왔죠. 상원이랑 하원 모두 사법위원회에서활동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었거든요. 제가 왕년에 변호사였었던 터라 모든 분야를 알면 위험할정도로만 알아요(웃음). 그래서 이런쪽에 제가 도움이 될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홍보하고 언론의 주목을 끄는 등의 활동을 조직하고 관심을 이끌어냈죠. 

미국만이 시민권을 자동으로 주지 않는 나라에요. 좀 창피하죠. 다른 나라는 이런 문제가 없어요. 지금 벌써 9년째인데 그럼 Adoptees for Justice에서 10년이나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우리 법안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헛점을 바로잡기 위해서요. 그러니 올해 이 일이 마무리 됐음 좋겠어요. 솔직히 저는 그 전에는 시민권이 없는 사람을 만난적이 없어요. 이일을 하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추방당할 걱정속에 법에 안 걸리기만을 바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저도 알게 되었어요. 요즘 이민법이 제일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이슈잖아요. 자칫 하나 아주 작은 일에도 출신국으로 내쫒길수 있죠. 한국인 입양인들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고 26개국이 해당되는 것으로 알아요. 그래서 저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도 해봤어요. 모두 저와 마찬가지로 평생을 유타에서 보낸 사람들이요. 그러면서 이 시민권에 대해서 제가 얼마나 당연하게 생각해 왔는지 알게 됐죠.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들을 정치적 지도자들이 이 일에 관심을 가지고 해결하는데 동참하도록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혹시라도 여러분께서도 관심이 있다면 동참하는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싶어요. 그리고 필요하면 저 같은 사람들이 각각의 지역 정치인들을 동참시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안내해드릴수 있어요. Adoptees for Justice가  오래 이 일을 해왔고 전문가들도 많이 관여하고 있고 미국 전역에서 멋지게 해오고 있어요. 제가 비영리 단체와 일을 많이 해봤는데 이 Adoptees for Justice가 일을 진짜 잘 하더라고요. 그러니 같이 활동하고 싶으시면 시간낭비는 아닐거에요. 

대략 현 상황을 좀 알려주시겠어요? 시민권이 없는 해외입양인들이 이 나라에 몇명이나 있고 이런 일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요.

지금 대략 이만 오천명에서 오만명 정도의 해외 입양인들이 시민권이 없는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 중에 많은 수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순간 갑자기 여권이 필요하다거나 연방정부와 관련된 일을 하려 한다거나 할때 갑자기 알게 되는 거죠. 은퇴후에 의료보험이 필요해서 지원했는데 갑자기 자기가 미국 시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상황을 상상해보세요. 많은 경우에 비자를 받아서 미국에 들어왔기 때문에 사회보장 번호도 있고 이미 세금을 내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모를수 있어요. 만약에 이렇게 몰랐던 경우에는 부모가 귀화절차를 밟지 않았거나 몰랐거나 혹은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랬을거에요. 어떤 입양인들은 임시보호가정으로 보내지기도 하고 다시 입양이 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이유는 정말 많은데 그 중에서 입양인 자신이 잘못한 경우는 하나도 없죠. 시민권이 없는 것이 그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요. 그래서 2000년에 절차를 조금 간소화 하는 법이 만들어 졌는데 그 말은 그 전까지는 관련법안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에요. 몇몇 입양인 부모들이 해외입양절차를 간소화 하고 해외입양인들에게 시민권을 자동부여하자는 의견을 의회에 내었어요. 저도 열네살까지 시민권이 없었어요. 입양은 세살에 됐는데 말이죠. 그래서 의회에서 합법적인 입양에 대해서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상정이 되었는데 아무런 법률적 하자가 없는데 왜인지 계속 통과가 안 되고 있어요. 

만약 입법이 되면 미성년 입양인에게는 모두 해당이 될거라고 해요. 성인 입양인은 아니고요. 입양인들이 입법과정에 참여를 안하니 생기는 일이죠. 실제 이 일에 영향을 끼칠수 있는 사람들중에 입양인들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이 Adoptees for Justice 팀하고 같이 일하는 것을 좋아해요. 입양인들이 주체가 되는 조직이니까요. 같이 조사하고 연구해서 이제는 영향력을 미칠수가 있게 되었어요. 사소한 법률적 문제만 고치면 되는데 문제는 제일 첫 발을 2000년에 떼었는데 2001년에 911이 터지고 그 뒤로 10년이 지났죠. 그리고 한 대통령이 이민을 굉장히 어려운 주제로 만들어 버렸죠. 우리가 고치고자 하는 법은 가족에 대한 법이고 거기에 이민관련 세부조항만 하나 고치면 되는건데 말이에요. 생물학적 형제지간인경우 시민권을 줄수 있는데 입양형제는 줄수 없어요. 아주 불평등하죠. 혈통 우선인거죠. 입양이 됐건 안됐건 같은 권리를 부여받아야 되는데 아닌거죠. 

그래서 이걸 고쳐야 하는데 자꾸 지금 정치적으로 뜨거운 이민관련 이슈로 분류되어 법안이 표류하고 있어요. 2000년에 처음 이 운동이 시작됐을때 이렇게 오래 걸리리라곤 다들 생각 못했을거에요.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다들 삶을 살아가야 하잖아요. 살면서 잘못도 저지르고 그러다가 사법처리를 당할 일이 생기면 그때가서야 시민권이 없는 것을 알고 형을 살고 나오면 바로 추방당해버려요. 너무 끔찍하고 몰인정한 처벌이죠. 우리 친자식들이면 그렇게 하겠냐고요. 제가 자꾸 언성이 높아지는데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나서 그래요. 그냥 앞뒤가 안 들어맞아서 더 화가 나나봐요. 이런일이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너무 화나요. 

그래서 내가 도움이 될수 있는 일이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저처럼 사업경력이 있거나 아니면 의회에 아는 사람이 있거나 해야 동참할수 있는건 아니에요. 여러분 지역구의 정치인들을 움직이시면 되어요. 지역구 유권자가 하는 말이면 듣거든요. 미국에 사시는 경우에는 하원의원과 상원의원한테 의견을 전달할수 있는 권리가 있어요. 그들은 들어야하고요. 그들이 이 일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요? 아닐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의견을 전달할 수 있으니 Adoptees for Justice에서는 원하시면 도움을 드릴수 있어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등등에 대해서요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요. 저도 이 일을 하면서 공부를 많이 했거든요. 그 전에 회사소속 변호사였어서 이민법등에 대해서는 전혀 도움이 안되었었어요. 다른 분들한테도 좋은 기회가 될거에요. 

유타주는 공화당이 우세인 주잖아요. 

네 아주 보수적이죠. 

그럼 의회쪽 사람들한테 어떤 식으로 접근하죠? 반응은 어떤가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원하는 것들이 크게 다르지 않아요. 유타주가 가족을 아주 우선시 하는 곳이거든요. 일단 여러분이 사는 곳과도 접점을 찾아서 공략해보세요. 유타는 전통적으로 난민들에게도 굉장히 우호적인 곳이었어요. 70년대에 제가 어렸을때 저희 집에도 난민들이 같이 살았던 적이 있었고 임시보호를 한적도 있었어요. 그래서 임보형제자매랑 가족들도 많이 생겼어요. 그래서 그렇게 난민들을 환대했던 역사가 있고 가족우선주의에요. 가족이 기본이고 아이들을 정말 중요시 하죠. 유타주가 유소년인구 비율이 미국 내에서 제일 높은 주 중에 하나일거에요. 그리고 또 한가지 유타가 특이한 점은 커뮤니티가 작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일들이 더 빨리 추진되기도 해요. 캘리포니아 같은 곳은 경우가 다르겠지만요. 그래서 어디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지를 아는 거죠.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시작할때 이렇게 말하는 거죠. 우리 유타에서는 이렇게 가족을 우선시하고 아이들을 중요시하고 난민들을 환영해왔는데 유타의 가정에 합법적으로 입양된 아이들이 작은 법률상의 하자로 인해 시민권이 없는 경우가 있다. 라고 운을 떼는 거죠. 그러면 다들 세상에 말도 안된다면 놀라요. 몰랐다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몰라서 문제인거죠. 한가족에 친자식들은 시민권이 있고 입양된 자식들은 시민권이 없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고 잘못된거 아니냐고 말하면 다들 동의해요. 

가족에 대한 일이니까요. 우리가 가족의 중요함을 믿고 입양이 아이들에게 가족을 찾아줄수 있는 길이라고 믿는다면 여기에 잘못이 있다는 것에도 동의해야죠. 물론 그후 법을 어떻게 개선하느냐로 들어가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지만 일단은 그렇게 자기한테 시민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을 알아야죠. 시민권이 없다는 것을 알되 된 후에는 이민온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민법을 상대해야 되는데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백인인 미국 시민들이니 더 어렵고 힘든 상황에 빠지는 것이지요. 거기다가 이민법이 너무 복잡해서 변호사를 고용해야 되는데 보통은 그럴 여력이 없죠. 그리고 그럴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사회경제적 여건이 안되는 경우가 대부분 이구요. 그리고 거기까지 갈수 있다 하더라도 이 사안에 대해서 경험이 있는 변호사를 만나기가 힘들죠. 이민알선기관들도 이 사안에 대해 알고 있고 대비가 되어 있는 경우가 거의 없고요. 그러니 이리저리 옮겨다니게 되는 거고요. 이일이 얼마나 복잡한 문제인지 사람들은 몰라요. 이런 상황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사람들은 모른다고요. 사람들한테 알리고 이 일에 동참하게 하는 일은 차라리 쉬운 일이에요. 

일단 사람들이 동참하고 나면 그들과 연합해서 그들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슈와 연합해서 공동전선을 펴야해요. 정치인들은 항상 자기 지역구의 유권자들이 어떤일에 관심이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지역구의원이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럼 좋구요. 입양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도 좋구요. 국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것도 좋아요. 왜냐면 군대쪽이 해외 입양이 이루어지는 제일 큰 경로거든요. 이렇게 지역구 의원이 중요한 기치로 내건 사업들이 있으면 그것과 이 입양인 시민권을 어떻게든 엮을 수 있어요. 그런식으로 연합해서 지지를 이끌어내는 거에요. 유타의 경우는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우리 상원의원이 일단 구두로 약속을 했거든요. 최종 문안을 볼때까지는 아무도 공식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아요. 이번 하원에 있는 모든 의원들이 일단 구두로 지지해준다고 약속을 했어요. 물론 끝날때까지 가봐야 알겠지만 그래서 항상 커뮤니케이션채널을 열어둬야 하고요. 보통은 다들 동의해줘요. 말이 된다 싶으면 토를 달지 않고요. 그렇지만 법안이 통과되는 과정을 잘 알고 어떤 변수들이 있는지도 잘 알아야 해요. 

범죄를 저질러서 수감된 입양인들의 경우에 어떤 장애가 있을까요? 이 법안을 지지하기를 꺼려하는 이유가 시민권을 범죄자들한테도 그냥 줘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나온다고 들었어요. 

그 부분이 아무래도 제일 큰 걸림돌이 되는 부분이죠. 문제는 실제 현실을 입법가들한테 알리는 거에요. 첫번째로 그들 모두 아이들일때 미국 의회의 승인에 따라서 미국에 입양이 됐어요. 의회가 이 일을 승인했으니까요. 그러니 이 문제는 의회의 문제라고 봐야해요. 입양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고요. 그리고 두번째로는 그들이 처벌을 받잔아요. 미국이라는 이 나라에서 우리는 정당한 처벌과 그 효과를 믿죠. 그런데 처벌을 한다음에 출신국으로 되돌려보내는것이 정당할까요? 가족도 없고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곳으로요. 이건 명백히 부당한 처사에요. 그런데 이것이 바로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죠. 특히나 그들이 저지르는 잘못들이 어떤 중대범죄가 아니에요. 그런 경우는 아주 극소수죠. 아무리 잔인한 연쇄살인범이라 하더라도 미국 밖으로 보내버리지는 않잔아요. 그래야 될지도 모르겠지만요(웃음) 농담이에요. 

이런일은 중단된지 오래에요. 몇백년전에요. 영국에서 범죄자들을 호주로 보냈었잖아요. 그러다가 중단했죠. 그런데 왜 이민이 정치적으로 뜨거운 현안이라는 이유로 몇백년전에 중단한 일을 입양인들이 다시 겪어야 하나요. 우리가 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미국의 근본적인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지금의 이 정치적 상황때문에 우리의 원칙에 위배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잖아요. 의회의 지도자들이 미국의 원칙을 다시 좀 공부를 해야해요(웃음) 그런데 정치적 현안에 밀려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 중에는 몇몇 우리나라의 근본적 토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이 런일을 하기 위해서는 아주 강하고 자신있는 지도자가 필요해요. 

관련해서 떠오르는 이름이 밋 롬니 상원의원인데요 당을 초월해서 원칙에 입각해서 표결하겠다고 했잖아요. 이 법안과 관련한 그의 입장은 어떤가요? 

롬니 의원실과 이에 관련해서 아주 긍정적인 대화를 나눴죠. 롬니 의원이 법사위원회 소속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입법이라는 것이 국회의 상임위원회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런 위원회들의 리더들과 일을 해나가야 하거든요. 롬니 의원은 우리가 적정한 선에서 서로 문안을 맞추면 우리를 지지해줄거라고 생각해요. 상원의원 두명과 하원 네명 모두 만장일치로 지지를 받는다면 엄청난 일이 될거에요. 그 전에도 그런적이 있었거든요. 최근 결혼 존중법에서도 그런적이 있지요. 만장일치로 초당적으로 지난 의회에서 통과가 됐잔아요. 그러니 이번에도 또 가능하다고 봐요. 모두 다들 긍정적이라고 의사를 표하고 있고 롬니 의원 같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것을 본다면 더 파급효과가 크겠죠. 그쪽이 지금 제 공략지점이에요. 

나중에 혹시 법적 도움을 구할일이 생기면 사라씨를 꼭 찾아갈게요. 말씀 한번 똑부러지게 잘하시네요. 

제가 카오미씨라면 NAKASEC(역자 주 – National Korean American Service & Education Consortium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 미교협)을 부르겠어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꼭 드라마들이 있기 마련이잔아요. 입양인들 모임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이 NACASEC에서 일처리하는 것을 봤는데 추방된 사람들을 그냥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걸 봤어요. 이미 추방된 사람들을 그냥 포기했버렸다면 아마도 이 법안을 이미 통과시켰을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이미 소외된 사람들까지 챙기는 것을 보고 감동 받았어요. 그래서 혹시라도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들한테 나를 위해 싸워달라고 부탁할거에요. 지난 몇년간 그들과 함께 일하며 얼마나 꾸준히 이 일에 전념하는지를 봐왔어요. 그래서 더더욱 입양인들이 주축이 되는 단체가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른 단체들도 이 입양인 시민권 관련 법안을 위해 일하고 있지만 그냥 어떻게든 법안만 통과시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살릴수 있는 길을 만들려 하더라고요. 그 하나하나의 길이 각각 다를지라도요. 그래서 저는 NAKASEC을 찾아갈래요. (웃음)

남편도 있고 자녀들도 있지요? 아이들은 대학생인가요? 

큰애가 스무살이고 둘째는 열 여섯살이에요. 

한국의 가족들과 재회하고 한국쪽의 출신과 정체성을 찾게 된 일이 가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그부분에 대해서 말해줄수 있나요?

그럼요. 실은 친가족을 찾을 결심을 한 주요 계기가 큰애가 한국의 가족들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어요. 입양인들 각각이 이 사안에 대해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겟고 제게 동의를 구하는 것도 잘했다고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지만 저는 뭐랄까 책임감을 좀 느꼈어요. 제가 입양인이라는 사실이 저만의 문제가 아니고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더라고요. 특히나 제 아이들이 소위 잘나가는 소수인종을 찾아보기 힘든 곳에서 자라났잔아요. 학교도 모두 백인일색이고 그러니 각자가 자신의 인종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있겠죠. 그래서 한국의 가족이라도 찾으면 아이들의 몇몇 질문들에 스스로 답을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여러모로 나와 내 가족들 모두에게 좋겠다 해서 시작을 했는데 이렇게 빨리 찾게 될줄은 몰랐죠. 어떤 사람들은 몇년씩 걸리기도 하잖아요. 저도 가족들을 찾았다고 했을때 다른 사람들 만큼이나 놀랐어요. 그런데 아이들한테 자신들이 동양인이라는 것에 어떤 연결고리가 생겨서 좋은것 같아요. 그전에는 “그래 나 아시안이야, 그래서 뭐?” 이랬을거에요. 우리가 자랄때 그랬잖아요. 그냥 뭔가 위축되고 심리적으로 불편하고 내세울 것이 없었잖아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동떨어져 있는 그런 느낌말이에요. 그런데 가족을 찾고난 지난 5년간 본인들이 편한 수준에서 많이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것 같아요. 두 아이가 받아들이는 것이 다른 것도 보기에 재미있구요. 뭐랄까 본인들의 모습에 더 자신감이 있어보여요. 물론 다른 방법으로도 그렇게 될수 있었겠지만 가족들과의 재회가 분명 어떤 역할을 한것 같기도 해요. 

남편분의 입장에서 말해보자면 그 전에는 그냥 아시안계 미국여인과 결혼해서 살고 있었다면 지금은 한국여인과 결혼한것 같군 이런 느낌을 받을까요? 사라씨가 느끼는 바도요?

실은 제 남편이 한국에서 저보다 더 오래 살았었어요. 정말요? 남편이 예수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의 선교사로 제가 태어난 한국 전주시 근방에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활동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처음 만났을때 이미 한국말을 너무 잘했어요. 지금도 잘하고요. 한국음식 너무 사랑하고요. 

백인인가요?

네. 백인이에요. 참 아이러니한것이 제가 태어난 지역에 그도 살았고 우리가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됐잖아요. 혹시라도 그가 우리 가족중에 한사람이라도 마주쳤을지도 모를일이죠. 물론 그때는 제 아버지와 오빠들이 서울로 이사간 후였지만요. 그런데 선교사였기 때문에 한국여인과는 결혼할수 없었나봐요. 그런데 저는 어떻게 보면 한국인이 아니잖아요. 백인으로 교육받고 성장 했잖아요. 그래서 살면서 서로 낯설고 달라서 힘든점은 없었어요. 그 사람과 결혼해서 살며 그 사이 제가 더 한국인이 되거나 한것도 아니었고요. 

같이 한국 드라마도 보는데 남편은 알아듣는데 저는 그러질 못하니까 가끔 샘도 나고 그래요. 그래서 우리 사이에 어떤 묘한 긴장감이 있어요. 남편이 저보다 한국에 대해서 더 잘 아는것 때문에요. 그리고 남편이 저보다 더 한국적이에요. 얼마전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같이 보는데 그 자기소개 도입부를 보면서 이거 “회문(palindrome앞으로 읽거나 뒤로 읽어도 같은)이네”라고 하는 거에요. 저는 몰랐거든요. 저는 5회정도까지 볼때도 몰랐어요. 글쓰는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 최선을 다해서 번역을 했겠지만 몰랐거든요. 그런데 남편은 딱 듣고 알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부분을 캐치 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 샘도 나고 그러죠. 

회문이 뭐에요?

시작하는 소리와 끝나는 소리가 같은 거에요. Race car 라는 단어의 경우 거꾸로 써도 똑같죠. 그런데 우영우는 한국어로 이 회문을 말했기 때문에 저는 들어도 몰랐던 거죠. 남편은 한번에 듣고 알아챘고요. 너무 샘나죠.  

한국에 처음 돌아갔을때 기분이 꽤 묘했을것 같아요

한국에 처음 간것은 1999년이었어요. 제가 일하던 법률회사에서 인턴을 하며 한국에서 두달간 지낼 수 있었거든요. 그때 당시 약혼자였던 남편이 한국에 와서 마지막 몇 주를 함께 보냈어요. 함께 거리를 다니면 사람들이 저에게 한국어로 말을 해서 제가 남편을 쳐다보면 남편이 저에게 통역을 해주고 그렇게 삼단계를 거치다 보니 사람들이 저는 한국어를 못하고 남편은 한국어를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랬죠. 인사동인가에서 쇼핑을 하는데 남편이 한국말을 못하는 줄알고 상점 점원이 가격을 더 올려부르라고 자기들끼리 말하는 것을 남편이 들었대요. 그래서 계산대에서 무슨이야기 하는지 다 들었다고 말했더니 그들이 너무 민망해했어요. 

그래서 더 깎아 줬나요? 아니면 바가지를 씨웠나요?

바가지를 쓴것 같지는 않아요. 우리가 알아챘으니까요. (웃음) 

그래서 한국의 가족들을 찾게 되니 사람들이 그럼 남편이 통역을 전담해주면 되겠네 하고 생각하는데 그부분에 있어서 많이 조심하려고 해요. 남편한테 그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요. 최대한 통역해주실 분을 찾아보거나 하려고 해요. 통역이 남편의 의무가 아니기도 하고 제가 제 가족과의 관계를 찾아가는데 있어서 남편한테 너무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계속 주지하려고 해요. 그냥 남편이 제 가족들하고 소통하는데 있어서 항상 한국어로 말해야 하는건 아니라고요. 그래도 항상 저보다 더 많이 소통하고 서로 많이 좋아하고 그러죠. 그럴때면 저도 정말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고 싶구요.  

혹시 청취자들이 사라씨와 소통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대환영이에요. 친가족찾기를 하는데 제가 도움을 드릴수 있는 부분은 별로 없을 거에요. 저는 운이 아주 좋은 편이었잖아요. 그래서 그부분에 대해서 제가 조언을 해드릴 것은 별로 없을것 같지만 그래도 연락주시는것은 대환영입니다. 제가 처음 저희 지역 테드톡에 나갔을때 연락이 많이 왔엇거든요. 그리고 나서 메인 테드에 올라갔더니 갑자기 뭔가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테드에서 유명인이 되었다고 사람들이 막 그러더니 갑자기 메시지들이 뜸해지고 연락이 안오더라고요. 사람들이 저에게 연락하기를 바랬던것도 아니지만 제가 너무 유명져서해서 접근불가 한사람이라고 이렇게 생각했나봐요. 그런거 아니고 연락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제가 혹시라도 도움이 된다면요. 

제가 도움이 될수 있는 가장 큰 방법은 아마도 여러분이 입양인 시민권 법안운동에 참여하고 싶으신 경우일거에요. 공유할수 있는 자료도 많고 함꼐 할수 있는 다른 조직도 많아요. 저는 거기에 조금더 경영적이고 실제적인 관점을 더한 도움을 드리고 있어요. 제가 상담사도 아니고 어떤 정신적인 상처 같은 부분을 도와드릴 어떤 자격도 없어요. 저도 상담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고요. 이 일에 경험이 많고 준비가 된 상담사들도 많이 있고요. 이런 소리를 하니까 제가 더 다가가기 힘든 사람으로 보이네요

제 이메일 주소는 sara@inclusionpro.com입니다. 

저에게도 종종 입양인들이 연락을 해오시곤 해요. 친부모 찾기나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활동등과 관련해서요. 그런데 한가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어요. 우리가 입양인 커뮤니티를 위해 좋은 마음으로 봉사하고 싶은건 분명해요. 저도 다른 입양인들로부터 좋은 충고도 듣고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선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일전에 제 직장으로 저에게 연락처를 남겨주신 분에게 전화를 했어요. 저를 NPR에서 들으셨대요. 그래서 입양과 관련된 잘못된 시스템등등에 대해서 의견을 주셨는데 두시간 가까이 통화를 하게 되었어요. 물론 필요한 도움을 받지 못한채 고립된 분들도 많이 계시고 다른 입양인의 경험을 처음 접하는 분들도 물론 계시겠죠. 다만 도움을 청하실때 다른 사람들의 시간과 노동은 좀 분명히 알아주셨으면 해요 

그것에 더해서요 Adoptees for Justice의 활동이나  입양인 시민권 부여법 관련 활동이나 혹시 시민권이 없이 살고 계시다면 NAKASEC을 접촉해보시길 추천해요. 저는 사회정의와 관련한 전문가가 아니거든요. 그 사람들은 이 일을 몇십년 동안 해왔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바로 답을 줄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를 찾아오셔도 저는 아마 다시 그쪽으로 보낼거에요. 홈페이지는 adoptees for justice.org입니다. 법안이 통과되는데 힘을 보태고 싶으시거나 혹은 시민권이 없이 살아가는 입양인이라면 꼭 연락해보세요. 

오늘 나와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저도요. 카오미씨가 하는 일도 계속 잘 진행되길 바래요.

                                                                                          번역 : 전유근

시즌 6, 에피소드 19: 에릭 풀과 새로운 희망

(**New Hope 는 그가 자란 동네 이름이기도 하다.)

그 어떤 친밀감도 못 느끼는 성을 지니고 살았죠. 새 이름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이 Poole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죠.”

한국인과 흑인 혼혈인 55세의 에릭풀씨와 그의 일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전편에 이어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가족이란 새로이 찾아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에릭씨를 만나보시죠. 

어린 시절에 벌을 많이 받았다고 했죠. 그냥 다르게 행동한다는 이유만으로요. 순탄치 않은 시기를 보내고 트라우마까지 있는 아이를 말이에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줄수 있나요?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이나 5학년때쯤일거에요. 쉬는 시간에 싸움이 붙었는데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때 어떤 암흑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던것 같아요. 현실을 부정하거나 도피하거나 한것은 아니에요. 뭐랄까 나에게 해를 끼치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찾아서 일부러 싸움을 붙이고 다녔죠. 내가 상대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아도 나를 자제할수 있는 능력이 없었구요. 그래서 그 녀석 얼굴을 막 발로 찼는데 그때 친구들이 달려와서 나를 떼어냈어요. 교장실로 불려갔고 아마 퇴학이야기도 나왔었던것 같아요. 지금 돌아보면 그때가 아마 적기이지 않았나 싶어요. 전문가등이 나를 도울수 있는 타이밍이었죠. 그런데 그냥 당신들이  얼마나 실망했는지 계속 이러면 한국으로 다시 돌려보낸다 이런 말만 들었던 기억이 나요. 제 행동의 결과로 돌아오는것은 결국은 다시 협박과 공포뿐이었죠. 그냥 저 혼자서 상황을 타개해야했어요. 그리고나서 아마도 외출금치를 당했던것 같은데 마치 교도소 독방에 갇힌 것 마냥 제 방에서 혼자서 삭혀야했어요. 신체적 체벌은 전혀 받지 않았죠. 저를 때리거나 한적은 없어요. 다만 그때 그 과정에서 입양부모와의 사이에서 오간 일련의 대화들이 나를 너무 힘들게 했어요. 그 상황들이 다루어진 방식들이나 나에게 겁을 줬던 방식들이요. 

그들의 직업은 뭐였나요?

아버지란 사람은 엔지니어였고 어머니였던 사람은 방부용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했던 것으로 기억이 나요. 장례식장에서 쓰는 용품들을 만드는 회사였던것 같아요. 

(4:45) 고등 교육을 받은 백인들이었군요. 70년대에. 저도 70년대에 미네소타로 입양됐거든요. 입양부모가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멀리 타국에서부터 트라우마를 지닌채 오는 타인종의 아이를 돌볼 준비가?

그럼요. 거기서 모든 문제가 시작된거죠. 아이를 입양한다는 사실에 현실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해보지 않았어요. 더군다나 인종이 다른 아이릉요. 70년대에는 그런 인식이나 체계도 없었구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Liz Riley가 입양이 되어 가는 아이들 사이의 등급이 있다는 책을 썼어요. 그 사이에 폭리를 취하는 사람이나 기관도 있고요. 그러니 70년대에는 백인들사이에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이나 노력이 전혀 없었죠. 지금은 어떻게든 안하려고 버티고요. (웃음)

지금이 팟캐스트 같은 것은 일종의 사회적 나눔이나 재능기부 활동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런 맥락으로 접근하면 안되죠. 어떻게 보면 시작부터 망치고 들어가는 거죠. 그러니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답을 하자면 네 맞아요. 준비가 안되어 있었죠. 그분들한테 최대한 유리하게  “의도는 좋았다” “라고 말하곤 해요. 그런데 부모가 되어준다는 것은 좋은 의도만으로는 힘든 일이죠. 또 그분들은 나이도 많았어요. 아이들을 키우는데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가잖아요. 지금의 제 나이에도 어린 아이를 키운다면 엄청 힘든일일텐데. 더군다가 힘든일을 많이 겪은 아이를말이에요. 

그러니 그 누구를 데려와도 저 같은 아이를 키우는 것은 아주 힘든일이었을거에요. 

우리가 친부모 자녀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항상 명제처럼 따라다녔어요. 그 누구를 만나든 그 사실이 먼저 거론되었죠. 그러니 우리 사이에 장막이 쳐진것 같았죠. 친구들이 놀러와도 먼저 “저분들이 네 부모님이야?” 하고 놀랐고 학교 직원들도 제게 말할때 굳이 “입양”부모임을 강조했죠. 그러니 항상 자연스럽지 않고 진짜가 아닌 가족이다라는 사실을 확인받았죠. 그런 공간에 당사자인 바로 그 아이로서 존재한거죠. 이름뒤에 항상 별표가 쳐져있는 아이였군요. 그런데다 그 부모라는 사람들은 “다시 돌려보낸다” 같은 말로 안그래도 있는 장막을 더 두껍게 했죠. 자기들도 지각하지 못하면서요. “입양됐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이런 말로요. 대화나 혹은 그냥 하는 소리에도 항상 은연중에 뭔가를 내포하는 것 같았고 그런 것들이 항상 우린 진짜 가족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 같았죠. 그리고 제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저와 같이 유색인종이었던 형과 누나들이 서서히 떨어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했죠. 다음은 나구나 내 차례는 언제일까 하면서요. 그때쯤에 알았죠. 이대로는 못 살겠다는 것을요. 희망이 없다는 것을요. 이 가정에서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것을요, 

(9:31) 한국에 살때도 그곳에 속하지 못한다고 느꼈잖아요. 마치 한국인이 아니기라도 한것처럼요. 사람들이 대놓고 그 사실을 분명히 했잖아요. 미국에 오니 양부모와 피부색이 달랐죠. 혹시 가족 안에서 인종차별을 경험했나요? 그리고 그땐 자신의 흑인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요? 

한국에 살때도 우리는 흑인이었죠. 그리고 끊임없이 껌**등등으로 불렸어요. 고아원에서는 까마귀라고 불렸던것도 기억나고요. 아주 어릴때부터 인식했던것 같아요. 나는 한국인이 못되고 흑인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백인가정으로 입양이 됐잔아요. 저는 1퍼센트도 백인같지 않은데 말이죠. 나이가 들어가며 조금씩 동양인의 특징이 나오고는 있긴해요. 지금은 하와이나 필리핀혹은 사모아쪽 출신이냐는 이야기도 가금 듣거든요. 광대뼈가 있네요. (*백인에 비해서 도드라지는 동아시아 인들의 특징) 네. 얼굴도 넙적하구요. New Hope에 와서 살게 되었을때 제 이름은 그냥 그 “흑인애” 였어요. 마치 그 이름이 저의 모든 것인양 말이죠. 100퍼 백인동네에 살고 있었는데도요. 저는 한국인의 피가 섞였건 안섞였건 그냥 흑인으로 퉁쳐졌달까요. 그리고 초등학교때 친했던 두 친구도 흑인이었어요. 미국의 흑인문화에서는 흑인됨의 범위가 아주 광범위하죠. 백인처럼 밝은 피부의 흑인도 있고 아주 까만 흑인도 있고요. 그만큼 포용하는 범위가 넓어요. 같은 편이라고 받아들여주는 것말이에요. 

어릴 때 그 흑인 친구네 집에 놀러 갔었어요. 아마 가족모임 같은거였을거에요. 친구의 엄마가 저를 그 남부출신인 할아버지께 소개하며 저를 반은 한국인이라고 소개 했어요. 그랬더니 그 할아버지께서 웃으면서 하시는 말이 “아무리 그래도 깜**는 깜**지이러시더라구요. “한국피가 섞였다고 하면 노예로 안 팔릴것 같아?” 마치 이런 뜻으로요. 그때가 생생히 기억나요. 나는 아무말도 안했는데 왜 그러나 좀 억울하기도 했고. 그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보다 좀 나아보이는 것 같았을까요? 제 흑인임을 어떻게든 없애보려는 걸로 보였겠죠. 흑인보다는 한국인임을 내세워서요. 그때 그 할아버지의 눈빛이 마치 “넌 어떻게 해도 흑인이니까 별수 없어” 이러는 것 같았어요. 제게는 적어도 그렇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그때가 뭐랄까 흑인됨의 그 묘한 뉘앙스 같은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던 때이기도 해요. 초등 고학년이나 중학교였던것 같은데 역사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이 나라에서 흑인이라는 그 미묘한 위치를 말이에요. 그때가 이상하게 제 뇌리에 남았어요. 어떻게 보면 큰 배움의 순간이었죠. 그 한번의 대화를 통해서요. 

(15:00) 제가 오랫동안 궁금해하던 일인데 에릭씨도 생각해봤는지 모르겠네요. 이 미국이라는 나라가 노예 억압의 역사위에 세워졌잖아요. 한국도 마찬가지죠. 식민지배를 당했죠. 그런데 에릭씨는 한국에서 또 이 미국으로 그것도 백인 가정으로 입양이 되었네요. 어떻게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나요? 아니면 본인의 출생과 성장 배경이 너무 난해한가요?

그 부분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해요. 지금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조금 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보면 당연히 서구유럽중심의 자본주의 구조죠. 실제로 잘 작동해 왔구요. 그런데 현재의 인류들은 뭐랄까 그 속살을 해부하기 시작했다고 할까요? 어떻게 여기에 도달했고 앞으로 도달하게  될 곳이 어디고  인류라는 공동체로서 이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공정한 곳으로 만들기 위에서요.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가다서다를 반복하고 있죠. 그곳에 도달할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채요. 

제 존재와 살아온 경험이 그것과 아주 큰 관련이 있죠. 한국에서 태어난 어린아이로서 또 흑인 어린이로서, 그리고 이 나라의 성인으로서 말이에요. 

궁극적으로는 백인들이 창조한 문화가 파괴적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는 데서부터 시작하죠. 백인들이 만들어 낸 것들중에 훌륭한 것들도 있죠. 그렇지만 동시에 굉장히 어두운 면도 철저히 탐구해봐야죠. 더 이해하고 파헤쳐가다보면 그게 진보하는 것일테구요. 그런데 저항도 만만치 않아 보여요. 인간애 같은 취지로 앞으로 진보할수 있는 맥락을 만드는데 말이에요.

너무 횡설수설 한것 같은데  말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저는 언제나 물이 반 컵밖에 없다기 보다는 반컵이나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저 같은 사람이 더 나은 앞날을 믿지 못한다면 말그대로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같은 상태가 되는거죠.  그리고 이 미국의 현 상황 특히 정치적인 상황이 혼란스러울 수록 마틴 루터킹이 말한 The Arc of Justice (역자 주 : “The arc of moral universe is long but it bends towards justice. 도덕적인 세계로 향하는 궤적은 멀지만 결국은 정의로 나아간다”를 축약해서 말한것으로 보인다.)인것 같아요. 거시적으로 보면 앞으로 진보하고 있지만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암담한 상태 말이에요. 마틴루터 같은 사람을 존경해요.사상적인 면에서요. 앞을 내다봤죠. 당대의 사람들이 왜 그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지 몰라봤는지 이해가 안돼요. 그래서 아무튼 전 희망을 봅니다.

(18:50) 제가 에릭씨를 알게된 건 오래지 않았지만 뭐랄까 희망을 놓지 않아서 여기까지 왔네요. 

그럼요. 제 와이프도 항상 그래요. 현재에 충실하라는 명상책 같은것도 와이프가 많이 읽는데. 어려서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항상 일단 어떻게든 하루만 버터보자 이런 마음으로 지냈던것 같아요. 그날 그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일단 버티면 이기는 거라고요. 누군가가 먹을 것을 주고 또 누군가는 지낼곳을 마련해주고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넘겼어요. 성인이 된 지금도 그래요. 지금은 그럭저럭 잘 살고 있지만 지금도 그날 그날을 무사히 넘기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향이 있어요. 어린 시절의 유산인가봐요.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요. 그리고 그 덕에 힘들었던 과거에 붙잡히지 않을수 있는것 같아요. 크게 우울증 같은 것도 없어요. 사람들도 그래요. 힘든 일을 많이 겪은 것에 비하면 꽤 밝게 잘 산다고요. 

(21:00) 어린 시절에는 같은 고초를 겪었지만 지금은 세 아이들의 아버지이고 항공 조종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유색인종들을 위해 높은 진입장벽을 허물고 있고요. 정말 엄청난 길을 걸어왔네요. 

초기에는 다른 사람들 도움이 많이 필요했어요 믿고 의탁해야 할때도 있었고요. 그게 항상 올바른 쪽으로만 풀렸던 것은 아니지만 제 인생 전반을 놓고 봤을때 언제나 길을 찾도록 도와줄 사람이 있었던것 같아요.  의정부에서도 그랬고, 고아원에 갔을때는 싱글리 아저씨가 그랬고요. 미국에 와서 한 동안은 힘들었죠. 결국엔 며칠씩 신세를 지곤 하던 친구들 그룹을 만들게 됐어요. 그러다가 입양가족하고 상황이 아주 나빠졌을때 Poole 가족 집에 가서 아예 살게 됐어요. Chuck Poole이 제 풋볼팀 친구였거든요. 그러다가 아예 제 진짜 가족이 되어버렸죠. 그들도 흑인이었나요?  아니요. 백인들어있어요. 그리고 제 입양부모보다 좀 젊었고요. 그들도 문제없이 행복하기만 한 가족은 아니었어요. 마치 Norman Rockwel 그림속의 가족 같았다고나 할까요? (역자 주 – Norman Rockwell은 미국 중산층의 생활 모습을 묘사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아버지는 알콜중독 경력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그때 당시에 아마 20년째 금주중인가 그랬을거에요. 그래서였는지 저를 더 잘 이해해주고 제 힘든 속내를 제가 스스로 극복해나가는데 도움이 됐던것 같아요.  알콜중독 치료의 12단계라는 것도 있잖아요?  저를 잘 이해해주고 환영해주고 조건없이 받아들여줬죠. 제 입양부모로부터는 받아보지 못한 것들 말이에요. 저를 이래저래 판단하거나 아님 제 출신이 뭔지등등 따지지 않고요. 일부러 제 속내를 끄집어 내려고 하지도 않았죠. 제가 살 희망을 갖도록 도와줬어요. 저를 잘 돌봐주고 지지해줬죠. 그래서 정말 많이 의지했어요. 

(23:53) 조건없이 받아들여주고 용서해주고 지지해 주는것이 무엇인지 아는 분이었군요. 

그래서 제가 그 이름을 이어받았어요. 제가 입양됐을때 제 이름은 WITBECK이었어요. 항상 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공허한 이름을 지니고 사는 느낌이었죠. 그러다가 해군에 입대를 했고 그때 아버지가 큰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중상이었어요. 헬기로 큰 병원으로 이송을 했을 정도로요. 덩치가 큰 분이라 모두가 아버지를 Big Jim이라고 불렀어요. 저도 중환자실로 찾아갔는데 온몸은 퉁퉁 붓고 노랗게 변하고 그래서 아주 거대한 형체가 병원침대에 누워있더라고요. 그때 아버지를 잃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쯤 마침 Witbeck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찾으려고 하던 때였는데 그렇다고 Kim이라는 이름을 쓰기는 싫었거든요. 어떤 이름을 지니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막 고민하던 때였는데 그 순간 분명하게 알았죠. 이 사람들이 내 가족들이라는 것을요. 곧 돌아가실수도 있는 이 사람이 내 아버지라는 것을요. 그래서 중환자실에 누워계신 사람한테 말을 했어요. 의식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요. 이름을 바꿀 거라고요. 그랬더니 온몸에 주사바늘하고 온갖 튜브가 연결되어 있는데도 몸을 막 일으키시려고 했어요. 나중엔 기억을 본인이 그랬다는 것을 기억도 못하시더라고요. 그때 이 사람들이 저한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알았죠. 그래서 아무런 친밀감을 못 느끼는 이름을 버려 버리고 새 이름을 찾았죠. 그래서 제 성이 Poole이 된거에요. 아버지와 실제 함께 산 기간은 얼마 되지는 않아요. 그리고 한가지 해피엔딩은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어요. 2016년 즈음에 돌아셨어요. 그래서 제 아이들은 그분들을 할머니 할아버지로 알고 컸고 삼촌으로 알아요. Chuck하고는 자주 연락해요. 틱톡 비디오 같은거 저한테 막 보내거든요. 그렇게 가족이 생겼고 그것이 타인종간 입양에 대해서 꼭 부정적으로만 볼것은 아니라는 반증이 된다고도 생각해요. 입양부모가 많이 준비하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을요. 어쨌거나 제일 중요한 사실은 부모가 되어준다는 것이잖아요. 자녀가 어떤 힘든 상황을 지닌채 오더라도 잘 받아들여줄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죠. 

그래서 그분들이 서류상으로도 입양을 했나요?

아뇨. 그때 전 이미 성인이 된 후였어요. 그래서 이름만 바꿨어요. 16살때 아예 그집에 가서 살았어요. 12살부터 16살까지 친구네 집을 전전하며 신세를 지며 살았었거든요. 

(28:40) 입양부모와 사이가 이미 너무 틀어져버려서?

네. 그때쯤 이미 그 어떤 소통도 하고 지내지 않았어요. 집에가서도 아무 말도 안했고 그분들도 굳이 그럴 시도조차 하지 않았어요. 그때 이미 한집에 살긴 하지만 서로 모르는 사람 같았죠. 외할머니하고는 그래도 좀 친밀하다고 느꼈었었는데 그분께서 제가 대학때 물어물어 저에게 연락을 하셨더라고요. 그때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노스타코타 대학에서 비행강사로 일하고 있었어요. 그때 뜬금없이 할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더라고요. 그 사이 그쪽 가족들과 연락이 끊긴 지가 이미 오래였었거든요. 형제들도요. 다들 제가 창피했었나보다 라고 생각하던 차였어요. 그래서 저는 다들 제가 없어져서 속시원한가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어느날 갑자기 전화를 하셨더라고요. 제 생각엔 제 출신 고등학교로 전화를 해서 제가 어느 대학으로 갔는지를 알아낸 다음 제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계속 유도심문을 하신 모양이더라고요. 개인정보를 안 알려주니까요. 그만큼 노력하셨다는 이야기죠. 나중에 알고보니 할아버지가 먼저 제가 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하셨대요. 그때 이미 나이도 많으시고 병도 있으셔서 본인이 직접 못하시니 할머니께서 나셔셨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뭐랄까 그 집에서는 볼드모트 같은 존재였거든요. 이름을 입에 올려서는 안되는 존재 말이에요. 그렇게 할머니랑 연락이 되고나서 다른 형제들하고 연락이 됐어요. 입양자녀들말고도 친자식이 셋이나 더 있었거든요. 저보다 열 살정도 많았던 커트 형하고 연락이 닿았죠. 그리고 첫 번째로 입양 됐었던 테시누나하고도 연락이 닿았는데 그 누나는 그 후에 입양이 된 다른 누나의 친 동생이었죠. 그렇게 연락을 하고 살았었는데 그 뒤로는 살다보니 좀 소원해졌고요.  한국 누나들하고 연락을 하고 살았다고요? 네 둘째 누나하고요. 저랑 나이상으로 제일 가까웠었거든요. 

(31:55) 그런제 진정한 가족은 풀씨네 가족이었군요. 

그럼요. 제게 필요로 했던 것들을 필요했던 시간에 저에게 줬으니까요. 그때서야 비로소 제가 처음으로 제가 있을 곳에 있는 것 같았으니까요. 대학 신입생 때 풋볼선수 가족들이 방문해서 소개하는 날이 있잖아요. 하프타임때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분들을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았었어요. 그냥 빅짐과 밥 (Big Jim and Barb)이라고 불렀죠. 부모님을 소개하는 날이라 하니 어떻게 해야하나 좀 고민하고 있다가 전화를 드렸어요. 혹시 오실 수 있냐고요. 그랬더니 “당연하지”라고 하시며 오셨어요. 그리고 하프타임때 그분들을 제 부모님으로 소개됐죠. 그순간부터 뭐랄까 영구적이고 공식적이 된 날이라고나 할까요? 

(33:20) 에릭씨의 인생을 영화로 만들었다고 치면 마침내 최고의 선수가 되어서 부모를 소개하는데  빅짐과 밥이 등장하며 클로즈업이 되는 감동적인 장면일것 같아요. 그때 그 순간에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이 부모로 소개될때 말이에요

그때 그 순간에는 별다른 생각은 없었던것 같고요. 그 뒤로부터 그분들과 대화할때  어머니 아버지라라고 불렀던것이 생각나요. 정확한 순간은 기억이 안나지만요. 엄마아빠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어본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아버지가 사고를 당했을때 그때 모든것이 분명히 굳어진 순간이었죠. 제가 그떄까지 생각해오던 것들을요. 

(34:30) 어쩜 보면 에릭과 그분들 모두 필요할때 서로를 위해 있어줬네요. 

너무 자세한 사정까지 밝히기는 그렇지만 제가 대학을 가고나서 그분들도 결국은 이혼을 하셨어요. 나중에 Chuck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그 전에도 조금씩 잡음은 있었대요.  행복하기만 한 가족은 아니었던거죠.  그랬는데 제가 오고 나서 문제가 완전히 해결 됐었던 것은 아니지만 상황이 좀 좋아졌었다고 해요. 그리고 제가 대학을 가고 나서 두 분 사이가 다시 원 상태로 돌아갔대요. 결국엔 이혼까지 하셨고요. 문제없이 완벽한 가정에 제가 식구로 들어갔던 것은 아니었던 거죠. 한편으로는 제 입장만 놓고 봤을때는 그렇게 서로 싸우기도 하던 불완전한 보통의 가족의 모습이 제게 필요한 가족이었어요. 그분들도 저처럼 아픔이 많은 아이를 보듬어 주면서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들이나 서로간의 관계를 돌아보기도 하고 이 가족이 앞으로 얼마나 갈수 있을까도 시험해봤을테니까요. 저를 받아들이면서 그들이 가진 문제도 조금은 봉합이 된거였겠죠.  

(36:05) 혹시 Colin Kaepernick근황은 알고 있나요?

최근 소식은 몰라요. 초반소식이랑 무릎꿇은 사건까지만요. 꽤 큰 사건이었잖아요. (역자 주 : Colin Kaepernick은 미국 프로리그 미식 축구선수로 미국의 인종주의와 경찰의 인종차별적 과잉 진압에 항의하는 의미로 경기 시작 전 미국 국가 제창시 무릎을 꿇은 사건으로 유명하다)

그가 그래픽노블을 출간했어요. 혹시 들어봤나 해서요.  몰랐어요. 

(36:28) 저도 아직 안 읽어봤는데 타인종의 부모한테 입양된 이야기와 입양부모로부터 겪은 인종차별등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요. 흑인 특유의 머리스타일을 했더니 부모가 흑인 불량배같다고 했다던 이야기등이요. 

저도 어릴때 비슷한 일을 참 많이도 겪었어요. 70년대 80년대까지만 해도 싱글리 아저씨와 연락도 하고 영향을 많이 많았었거든요. 그런데 미네소타에 살았잔아요. 흑인음악 같은 것을 접할 길이 없었어요. 

라디오에 KMOJ라는 지역 채널이 있어요. 중학교때 다른 흑인 친구를 통해서 그 채널을 알았어요. 그래서 흑인음악을 듣고 브레이크댄스에도 빠져보고 초기 힙합도 듣고 그랬어요. 그때 싱글리 아저씨가 저한테 녹음테잎을 보내주고 그랬어요. 자기 목소리도 녹음하고 나머지는어반뮤직으로 채우고요 

(36:10) 그때 들었던 노래들 제목이 기억나나요?

Parliament Funkadelic songs, Lakeside, Old Cameo boy, 이런 노래들은 공중파에서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노래들이었죠. 이 노래 테잎을 가지고 가서 지금 와이프인 백인 친구들 동네로 가서 놀았어요. 다들 너무 좋아했어요. Rapper’s Delight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때가 지금도 생각이 나요. 제가 처음으로 돈을 모아서 산 레코드였죠. 신문배달을 했거든요. 15분이나 되는 노래였는데 그 노래를 밤새 뒤로 돌려가며 가사를 받아 적고 이틀에 걸려서 외웠어요. 그럼 제 백인 친구들이 다 저희 집으로 와서는 라디오 스피커 옆에 바로 다른 라디오를 붙여서 녹음을 해가고 그랬어요. 그렇게 제가 아주 백합처럼 하얗기만 하던 동네에 힙합뮤직을 소개한거에요. 

또 유명한 운동선수들 사진을 방에 붙여 놓고 우상시 하고 그랬어요. Walter Payton 이나 Muhammad Ali. 같은 사람들이요. 뮤지션 사진들도요. 그런데 언젠가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부모님이 들어오셔서 “왜 이렇게 흑인들만 좋아해? 한국 문화를 더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라고 하시는 거에요. 12살짜리한테 그런 소리를 하면,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건지 알아듣지도 못하죠. 전 한국애를 입양하기를 바랬는데 흑인애가와서 혼란스러운가 하고 받아들였죠. 우리집에 놀러오던 애들 중에서 같은 동네에 살지 않는 애들은 다 흑인 친구들이었거든요. 그럴때면  제가 하는 말이며 행동을 다 지적 했어요. 흑인문화를 은근히 죄악시했죠. 

Colin Kaepernick도 같은 일을 많이 겪었을 거예요. 꼭 백인들처럼 머리가 촤르르 떨어지게 한다고 고데기로 제 머리를 편 적도 있었어요. 그런 날이 많았어요. 큰 누나 제 머리를 많이 봐줬는데 머리를 곧게 펴서 양갈래로 빗을수 있도록 해줬었어요. 그런데 머리를 감고나면 바로 다시 엉켜버리곤 했죠. 그 덕인지 누나가 결국엔 미용학교로 진학을 했죠. 정작 저는 크고 둥그런 아프로 머리를 하고 싶었는데 말이죠. 머리를 그렇게 펴도록 했던것도 은근히 흑인문화를 터부 해서 그랬던것 같아요. 

42:25  한국에 대해서는 지금은 어떻게 생각해요?

풋볼선수 하인즈 워드 기억해요? 그럼요. 흑인 혼혈 풋볼선수잖아요. 수퍼볼 MVP가 된 다음에 한국을 방문했고 엄청난 환대를 받았죠. 한국에선 아직도 혼혈 아이들을 달갑잖게 보는 시선이 있다고 해요. 저를 인터뷰 했던 Men’s Journal 의 박준 기자한테 들었어요. 한국인인데 캐나다에서 공부한다음 다시 한국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아직도 얼마나 한국에서 혼혈 아이들이 힘들게 사는지 말해줬어요. 차별이 심하대요. 저도 흑인 혼혈로서  한국에 대해서 아픈 기억이 남아 있죠. 지금 한국과 그 외에 동아시아 국가들이 미국 흑인 문화를 많이 받아들이고 있잖아요. 한국이 이젠 세계적인 국가가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케이팝을 통해서요. 그러니 이제 한국이 다양성을 수용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박준 기자가 말하길 요즘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조금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기성세대가 인종들을 바라봤던 방식과는 다르게요. 그러니 내일의 한국은 오늘의 한국보다는 더 나을거라는 희망이 있어요. 카오미 당신하고 제가 자랄 때의 한국보다는 훨씬 나은 한국 말이에요. 한국인들이 정상 혹은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범주 밖의 사람들도 받아들여줄수 있는 한국 말이에요. 신체적으로 불편한 사람들이나 혼혈들도요. 아직도 갈길이 멀긴 하겠지만요. 그 생각을 하면 좀 슬프죠. 

그런데 또 말하고 나니까 나이를 먹으면서 한국에 대한 친밀감이 조금씩 커가는 것 같기는 해요. 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의 뿌리를 먼저 알아야 하잖아요. 지금 현재 외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으니 지금이 적당한 때죠. 지금은 한국 문화에 순수하게 관심이 많아요. 음식도 아주 좋아하고요. 메뉴 선택을 할일이 있으면 한국음식을 먹죠. 어렸을 때 한국음식을 좋아했었는지 아닌지는 기억이 안나요. 고아원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요. 아무튼 이제는 한국을 받아들일 때가 된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그러기 싫었죠. 지금은 조금 더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중이에요. 내가 어떻게 태어나고 자랐는지 그 맥락을 이해하려고 해요. 그러면 저도 조금더 나은 삶을 살게 되겠죠. 이해가 되나요?

(46:30) 그럼요. 조금 복잡한 심경이겠죠. 나를 내쳤던 나라를 받아들이는 거잖아요.

맞아요. 아마도 많은 흑인들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느끼는 바와도 같을거에요. 어떤 백인들은 도데체 그게 왜 문제인지도 절대 이해못하는 정서 말이에요. 또 제 생각에 그래도 알만하고 또 더 알아야 하는 사람들이 또 그런 미묘한 정서들을 이해 못하기도 하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희망이 있다고 봐요. 제 아이들을 보면 어떤 인종인지 쉽게 가늠이 안되거든요. 큰애가 그래도 제일 저랑 비슷하긴 한데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아마 푸에르토리코 쪽 이거나 브라질쪽인가 할거에요. 둘째 말콤이 그래도 제일 동양인 스럽긴한데 또 키가 거의 190이거든요. 그래서 한국인 같아 보이지는 않아요. 눈이 동양인인것만 빼면요. 

막내 마일즈가 제일 사람들이 갸우뚱해 할거에요. 하와이쪽인가 싶기도 할거에요. 긴 머리에 서핑을 즐기는 소년 같은 아미지에요. 재밌는건 세 아이들 모두 막 태어났을때는 뭐랄까 한국인 할머니 같은 모습이었어요. 다들 검은 곱슬머리였거든요. 그러다가 다들 금발로 변하더라고요. 셋 다 세네살 정도까지는 모두 아주 금발이었어요. 그러다가 차츰 연한 갈색으로 변했고요. 

(48:58) 아이들 엄마는 백인인거죠? 진짜 다양한 인종이 섞여있네요. 아이들은 자신들의 인종을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아직은 어려서 이렇게도 해봤다가 저렇게도 해봤다가 할것 같은데. 

가끔씩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들여다보고 싶잖아요. 어느날 같이 저녁을 먹는데 한 녀석이 아시안들의 악센트를 놀리는 듯한 농담을 했어요. 꽤 오래전 일인데 다른 두 녀석이 낄낄대고 웃다가 제가 웃지 않는 것을 보고 아빠는 안 웃기냐고 묻대요. 그래서 제가 그건 좀 심한것 같다고 그랬더니 그게 왜 심하냐고 되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것을 흉내내며 웃는건 잘못이다 그리고 너도 아시안이다 라고 했더니 자기는 “부분적으로” 아시안이래요. 그래서 맞다고 유전적으로 봤을때 부분적으로 아시안이다. 아시안 문화 속에서 살지도 않고 모든 면에서 사람들이 너를 아시안으로 보지도 않지만  아시안인 다른 친구 부부의 이름을 대며 그들 앞에서 같은 농담을 하겠냐고 물었더니 안하겠대요. 그러니 그런 농담을 하지 말라고 했죠. 

제 아이들도 다 알죠. 부분적으로 흑인이고, 또 부분적으로 한국인이고, 반은 백인이죠. 그리고 또 이곳 미네소타에서 백인들에 섞여서 살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언뜻 보기에는 백인에 가까워서 제가 어렸을때와는 다르게 인종이라는 주제가 매일의 큰 화두는 아닌것 같아요. 제가 어릴때는 하루도 그냥 지나는 날이 없었거든요. 제가 남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확인받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하루도 없었어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가 인종이라는 것에 대해 가르치고 왜 그런지 설명할때 제가 겪었던 것처럼 인종이라는 것이 삶에 너무 큰 잣대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아이들 세대에서는 인종이라는 것이 좀 덜 심각하고 덜 예민한 주제였으면 해요. 이곳 North Field에는 대학이 두개나 있어서 인종적으로 꽤 다양하고 큰애한테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 꽤 많았거든요. 그래서 큰애한테 백인과 흑인 혼혈인 친구들도 꽤 있었고 동아프리카 쪽에서 온 친구들도 꽤 있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국경을 막론한 친구관계를 맺는 큰 아이에게 이런 인종적인 이슈가 어쩌면 그냥 문제거리도 안되는 이슈인 것 같기도 하고요. 문제 자체가 안되는 거죠.  

그런데 또 조지플로이드 사건(역자 주 : George Flyod; 2020년 5월 미국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 시에서 백인 경찰의 과잉 대응으로 질식사한 흑인 남성을 말한다.) 이 났을때 아이들과 아주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어요. 제가 우는 모습을 아이들이 처음으로 목격한 날이기도 했죠. 그 영상을 제가 차마 못 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 친구가 꼭 봐야 된다고 해서 방에 들어가서 혼자 봤거든요. 그걸 막내가 보고 아빠가 지금 운다고 아주 큰일이라도 난듯이 떠들어대서 아이들이 다 뛰어왔어요. 아빠가 운다고요. 그래서 아이들과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는 계기가 되었죠. 온 가족이 조지플로이드 기념비를 찾아가서 추모도 했어요. 아이들은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거라고 믿어요. 아마 그때쯤에는 인종문제보다 더 심각한 다른 문제를 겪어야 할수도 있지만요. 테네시 같은 곳에서도 젊은 세대들이 나서서 운동을 주도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희망이 있다고 봐요. 

(54:20)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 있나요?

열심히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팬데믹이 터졌죠. 마지막으로 갔을때 기억으론  제가 태어난 곳만 빼고는 다 개발이 되어 있더라구요. 제 기억에 남아 있는 한국은 지금의 한국과는 아주 많이 다르지만 제가 태어난 정착촌 같았던 곳은 아직도 좀 불결하고 가난한 동네로 남아있더라고요. 참 재밌죠. 지나는데 하수구 냄새가 나기도 했고요. 마치 박제된것 같은/시간이 멈춘것 같은? 집의 형태 같은 것들은 많이 현대화 됐죠. 그때는 말그대로 초가 지붕 집들이 있었거든요. 그래도 주변에 있는 높은 빌딩들하고 너무 극명하게 대조가 되더라고요. 곧 재개발이 될거라고 통역하는 사람이 설명해줬어요. 아마 아파트가 들어서겠죠. 처음 갔을때는 못 알아봤어요. 큰 산이 있었는데 한쪽이 깍이고 고가도로가 생겼고요. 군부대는 아직도 있었고요. 아이들을 데리고 방문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막 팬데믹이 터져서 포기해야 했죠. 곧 가야지 하고 생각중이에요. 의정부도 보여주고요.

(56:45)아이들도 관심있어 하나요?

어린 녀석들은 아직 별 생각이 없는것 같아요. 나이가 좀 들어야 관심이 가는 그런 일이 잖아요. 

지금은 아빠의 이야기에 대해서 알긴 아는데 아직은 와닿지 않는 단계인것 같아요. 잡지 글이 처음 나왔을때 아이들한테 읽어줬거든요. 그런데 그냥 아직 좀 어린것 같아요. 언젠가 조금은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겠죠. 그럼 그때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주면 되죠. 원래 기사는 7000단어 분량이었는데 기자분이 10000단어로 초고를 쓴다음 줄였나보더라고요. 그 잡지에서 분량이 가장 긴 글이었대요. 아무튼 그 기자가 12000단어 분량의 원고로 정리해서 저에게 기념으로 보내줬어요. 

대단한 것은 배경조사도 열심히 했더라고요. 고맙게도요. 제가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 사실이나 맥락 같은 것을 그 글을 통해 더 알게 됐어요. 한국에 군인들을 보내면서 인종차별도 같이 보냈잖아요. 제가 미국인은 다 흑인인줄로만 알고 컸던것에 이유가 있었더라고요. 제가 만난 미국인들은 다 흑인들이었으니까요. 한국전쟁이 1950년대였으니 미국도 아직 인종분리가 아주 심할때였고. 그러니 백인인 미군이나  흑인인 미국이나 다 힘들었겠죠. 백인인 미군은 흑인인 미군들하고 음수대도 같이 써야했고 방도 같이 써야했고요. 서로 교류도 없었고 기지촌 여성들도 그랬고요.? 이해가 되죠. 

(59:10) 흑인 병사들이 더 험지로 보내지고 그랬다죠?

맞아요. 조사하다보니 알게 되었대요. 

그게 인종차별이죠. 

네. 전투에서도 더 위험한 일을 맡았대요. 저도 군복무를 한지라 얼마전에 VA( Veteran Affairs : 미 보훈청)로부터 안내장이 왔는데 그동안 보훈청이 흑인병사들에 대한 보상을 차별적으로 다뤘다는 지적을 받아들이고 소급하여 다시 재조사를 한다고 하더라고요. 공식적으로 인정을 한거죠. 흑인 퇴역군인들에게 혹시 필요하면 다시 보상신청을 하라고요. 

(1:00:00)입대했을때 혹시 친아버지에 대한 생각도 했나요?

별로요. 일단 저는 장교로 입대를 했어요. 생계를 위해서 입대한 것이 아니고 조종쪽으로 더 경험을 쌓으려 갔죠. 그래서 유전자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진 않았어요. 제 친아버지는 아마도 계급으로 봤을때 낮은 계급이었을거에요. 그때는 흑인이 장교로 입대할 가능성이 희박했으니까요. 그러니 아마도 사병으로 공병단 일을 했거나 했겠죠. 한가지 기억나는 것이 “Baker”에요. (역자 주 – 제빵사를 뜻하나 “김” “이”처럼 미국의 아주  흔한 “성”이기도 하다) 그것이 성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보직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아버지를 그 이름으로 불렀던것만 기억이 나요. 엄마가 살아계셨을때 제 아빠가 누군지 분명히 알고 있었던것 같아요. 우리 셋이 같이 찍은 사진이 있었거든요. 제가 아주 어렸고 저를 안고 찍은 사진이에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계속 그 사진을 가지고 다닌 기억이 있는데 고아원에 간 이후 어느 순간 없어졌어요. 사진속의 저는 아주 어린 아이였고요. 

(1:02:28)혹시 결혼을 했었던걸까요? 아니면 아빠가 그냥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던 것인지?

그 뒤에도 엄마가 계속 기지촌에서 일한것으로 봐서는. 글쎄요. 모르겠어요. 

어쨌거나 에릭씨에 대해서 알았던 거네요. 

그런거죠. 아무튼 그 사진 한장으로 아주 많은 질문들이 떠오르죠. 그래서 유전자 등록등으로 가족찾기를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원치 않는 한 사람의 과거를 파내는 일이 될수도 있잖아요. 갑자기 나타나서 해명을 해보라고 하는. (웃음)

아직 준비가 안된건가요?

그렇다기 보다는 그냥 그렇게 궁금하지 않아요. 어머니쪽이나 아버지쪽으로 혹시 살아있는 친적들이 있는지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 별로 알 필요를 못 느껴요. 언젠가 해볼수도 있고. 언젠가 제 아이들이 해볼수도 있고요. 

아이들중에 하나가 언젠가 DNA테스트를 해보겠죠.

어느날 갑자기 말이죠. 

지금은 아직 어려서 이 모든 일이 그냥 아빠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언젠가 자신들의 이야기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을테니까요. 

그러길 바래요. 궁극적으로 그런쪽으로 흘러가서 어느 순간 궁금해지고 알아내겠죠. 이제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것을요. 저도 한 15년 20년쯤 전에 그랬어요. 한국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파보고 그랬어요. 한 동안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적도 있었으니까요. 그때의 상황 상 말이에요. 부정하고 싶어도 그 또한 내 일부분이니 받아들여야죠. 그래서 말인데 곧 아시안조종사 연합 컨퍼런스에 나가서 강의를 하게 되었답니다. 인구수에 비해서 아시안 파일럿 비율이 많이 낮거든요. 

그럼요. 에릭씨도 같은 아시안이죠. 

좀 이상하기도 한 부분이 그 잡지 사진기자가 말해줬는데 한국인들은 성공만 하면 장땡이고 같은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준다고 하대요. 그 기자가 직접 한말이에요. 하인즈 워드 선수의 경우도 그렇잖아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데 크게 성공했으니 이제 같은 편이라고요. 그런데 그냥 보통사람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고요. 

혼혈이 아닌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멀리 내쳐진 다음에 자력으로 크게 성공해서 돌아오면 이젠 우린 같은 한국사람이니 같은편이라고 한대요.

혹시 카오미 당신을 인터뷰한 팟캐스트도 있나요(웃음)?

네. 시즌3에 있어요. 다른 입양인이 저를 인터뷰했어요. 

다음 재생목록으로 당첨이네요. 

어느순간 말이 안되더라고요. 제가 사람들을 인터뷰하다보니 어느 순간 사람들이 네 이야기는 언제 들려줄거냐고 하대요. 제가 처음에 이 팟캐스트를 시작했을때는 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거든요. 우리 기자들은 본인을 드러내면 안되니까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저도 참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더 할게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네요. 너무 재밌었어요. 혹시라도 아직 더 치유되어야 부분이 남아있나요? 아니면 이만하면 되었다거나 혹은 가족을 통해서 치유가 되었나요?

완성형인 존재는 없잖아요. 그러니 물론 조금 더 치유되어야 할 부분이 남아있죠. 그런데 지금 이 상태의 나로 만족해요. 그래서 더 강해질수 있고 휘둘리지 않으면서 마음속에 눌려있던 부분들을 들여다볼수 있으니까요. 지금 55살까지 많은 일이 있었지만 잘 이겨내 왔잖아요. 지금 생각으로는 굳이 들춰내지 않아도 되는 일들은 들춰내고 싶지 않아요. 어린 시절에 겪었던 힘든 일들을 굳이 끄집어 내지 않아도 잘 살수 있으니까요. 완전히 치유가 됐다고 말할수 없을지도 모르죠. 어릴때 미식축구를 하며 하도 그쪽으로 많이 넘어져서 오른쪽 팔이 완전히 펴지지가 않거든요. 그렇다고 수술을 하거나 해서 고쳐보고 싶지도 않아요. 완전히 고쳐질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게 현실이죠. 그냥 살짝 불편한 팔로 살아가는 거죠. 신체적 트라우마처럼 정신적 트라우마도 같은 것 같아요. 그냥 안고 살아가는 거잖아요. 들춰내는 것이 꼭 치유를 말하는 것인지 더 심하게 만드는 것인지 알수가 없기도 하고요. 

그간의 경험들을 통해서 지금 이 자리에 꼭 필요한 내가 됐죠. 지금의 나로 만족해요. 그리고 지금 나에 대해 말하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죠.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경험도 필요했고 많은 내적대화도 필요했죠. 그러니 이제 내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것보다는 내 아이들이 오래된 제 이야기에 천착하겠죠. 그러니 이젠 풀어놔봐야죠. 최대한요. 하면 할수록 더 담담하게 이야기 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카오미씨에게 너무 감사해요. 이런 공간과 매체를 만들어 주는 것이죠. 시즌이 몇개가 있다고 했죠?

많아요. 6개나 있어요. 

고마워요. 

내적 평화를 이룬것 같네요. 

네. 맞는 표현이에요. 언제 만나서 식사나 한번 할까요

언제 North Field에서 만나서 유명한 Ole Store같은데 같이 한번 가죠. 제가 올라프 대학 출신이라 그 근처를 잘 알아요. 30년 전의 이야기이지만요. 

꼭 한번 봐요. 

혹시 한국의 엄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이 질문은 지금까지 아무도 저한테 물어보지 않았는데. 부모가 되어보니 아이들에게 제일 바라게 되는 것은 성공도 아니고 그냥 좋은 사람으로 크는 것이더라고요. 제 와이프하고도 항상 이야기 하는데. 그래서 저도 제 엄마한테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잘 자라서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요. 가족도 꾸리고 좋은 아빠가 되고 좋은 남편이 되고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었다고요. 제가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되었고 그게 엄마도 원하는 일이었을거에요. 그말 밖엔 할말이 없네요. 

고마워요. 에릭씨. 그리고 우리 입양인 커뮤니티에도 너무 많은 것을 주고 있네요.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거든요. 아무리 그 전에 잡지에 인터뷰를 했다고 해도 팟캐스트에서 이렇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 놓는 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아요. 제가 민감한 질문도 많이 했잖아요. 이 모든것이 결국은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죠. 이 이야기들이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니까요. 

멋진 조각보 같아요. 카오미씨가 이 이야기들을 연결하고 있고요. 그 조각보 이불이 우리를 따듯하게 감싸고 보듬어주네요. 

                                                번역 : 전유근 

시즌 6, Episode 18: 의정부에서 온 소년

제 이름은 에릭 풀(Eric Poole)입니다. 55살이고요 트윈시티(역자 주: 미국 미네소타주에 있는 미네아 폴리스 시와 세인트 폴 시를 말한다) 바로 남쪽에 있는 노스필드에 살고 있어요. 벌써 23년이나 살았네요. 큰 아이는 루치아라고 지금 아리조나 대학 1학년이에요., 둘째 말콤이 고등학생, 셋째 마일스가 중학생이라 매일 얼굴 맞대는 녀석들이고요. 아이들 엄마의 이름은 메리에요. 파고와 무어헤드 쪽 출신이죠. 대학에서 만났어요. 제가 노스다코타 대학을 다녔거든요. 풋볼 장학생으로요. 거기서 항공학을 접했죠. 아니 항공학이 절 찾아냈다고 해도 맞을 거에요(웃음). 그 뒤로 파일럿이 되었고 지금은 뉴욕에 베이스를 두고 있는 젯블루 항공사에서 조종사로 일하고 있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최고 조종사인데 다른 조종사들을 관리하는 역할이에요. 요즘은 새로 취항하게 된 뉴억공항 (Newark)을 기반으로 인사나 운영에도 관여하고 물론 비행도 하고요. 벌써 18년째 근무하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시간이 아주 짜릿한 비행이었다고나 할까요? 제 가치와 신념과 잘 맞는 회사를 만났어요. 아주 진보적이고 제가 추구하는 방향과 잘 맞아요. 처음에 채용됐을때는 거의 스타트업이나 다름 없는 작은 회사였거든요. 그랬기 때문에 제가 더 많은 역할을 할수 있었고 아주 재밌게 일해왔어요. 마치 회사가 제 일부와도 같다고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다들 입에 올리기 꺼려하는 주제가 있잖아요. 미국내 민간비행사에 흑인 조종사를 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요.

흑인 조종사 뿐만 아니라 유색인종 조종사 자체가 드물죠. 

백인남성 일색인 분야에서 일하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

미네소타에서 단련이 되어서 그런지 별로 힘들진 않아요(웃음). 어딜 가나 항상 제가 “유일한” 상황에 익숙해있거든요.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훈련이 되어 있고 어릴때 한국에 있었을때에도 항상 주변인이었어요. 제 존재가 시작된 순간부터 이방인으로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깨달은것 같다고나 할까요?. 나만의 조타실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 처럼요.

그런 측면에서 제가 스스로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제가 일하고 잇는 이 분야에서 여성들과 유색인종들이 조종사가 될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하고자 노력했어요. 제일 큰 걸림돌은 역시 돈이에요.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들어요. 대학에서 장학금을 최대한 다 받았어도 간신히 학비와 기숙사비만 댈수 있었고 조종프로그램은 아예 별도였어요. 4년제 대학 학비의 두배  가까이 되는 비용이 조종훈련에만 들어가니까요. 그러니 굉장히 큰 걸림돌이죠. 두번째 걸림돌은 이 분야에 이미 몸을 담고 있는 가족이나 혹은 같은 인종의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기회는 커녕 보고 배우거나 영감을 받거나 할수 없는 거죠. 

그래서 젯블루 와 함께 관련해서 많은 일을 하고 있어요. 회사에서 다른 흑인항공학종사자들, FAA(역자 가칭 : 미국 연방 항공국) 그리고 ACE(역자 가칭 : 미 항공 교육 협회) 와 연계해서 캠프와 같은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참여하게 됐죠. 다른 경로로는 전혀 조종학을 접해볼 기회가 없는 학생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죠. 

비행을 마친 후에 승객들이 조종사가 유색인종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의의의 얼굴을 하는 것을 보며 은근히 고소했던 적은 없나요?

안 그래도 다른 흑인 조종사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가 있어요. 우리 항공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중에 하나가 파일럿들이 조종실에서 나와서 승객들과 직접 인사하기에요. 그래서 젯블루를 타시면 파일럿들이 보딩시에 입구에서 인사하는 것을 보실수 있어요. 이륙후에 안내방송으로만 인사하지 않고요. 처음에는 좀 떨리는데 갈수록 익숙해져요. 20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승객들하고 이런 저런 대화도 나누게 되었고요. 유색인종 조종사를 대하는 승객들의 반응이 대략 두 종류에요. 한가지 자주 일어나는 경우가 제가 흑인이라서 저를 조종사로 보지 않는 경우에요. 다른 한가지는 제가 흑인이라는 사실이 사람들한테 어떤 큰 감흥을 주는 경우고요. 어느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승객들이 보딩할때 인사를 하고 있었는데 한 여성 흑인여성노인분이 맨 앞자리에 타셨어요. 제가 안내방송을 마치자 그 분이 다가와선 떨리는 손으로 저를 잡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손을 내밀었더니 저를 안아주시더라고요. 제가 너무 자랑스러우시다며 남편분도 조종사가 되고 싶어 했다고. 제가 오늘 이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을 남편이 알면 아주 자랑스러워할거라고요. 저도 뭐랄까 가슴이 울컥했죠. 

한편으로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휠체어를 타고 어르신이 타시고 아내분이 같이 타셨는데 가방을 무거워하시길래 제가 가방을 머리 위에 짐칸에 넣어 드리고 자리 찾는 것을 도와드렸죠. 그때 기내 사무장이 마침 제자리에 없었거든요. 그때 지상직 카운터 직원분이 오더니 저한테 “기장님 이제 다른 승객들이 탑승해도 될까요?”  라고 묻길래 그러라고 했죠. 일단 사무장한테 다시 한번 확인하라고요. 그랬더니 그 아내분이 당신이 기장이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옆에서 남편분이 “이 검*이가 올랜도까지 조종을 한다고?” 라고 하는 거에요. 그 아내분이 너무 당황하시며 목소리좀 낮추라고 남편을 꾸짖으셨어요. 다른 직원들 모두 아연실색을 했죠. 조종실에 들어갔더니 젊은 제 부기장이 도데체 지금이 몇년도인데 아직도 저런 말씀을 하냐며 황당해하더라고요. 그분 나이를 생각하면 제가 속상해 할일은 아니죠. 악의가 있어서 저를 그렇게 부른건 아닐테고 뭐랄까 아직 세상이 바뀐걸 모르시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날 다들 같이 저녁을 먹는데 굉장한 안줏거리가 되어줬죠. 그런 일들이 전혀 신경이 안쓰인것은 아니지만 좋은 쪽만 생각해야죠. 저를 바라보며 감동을 받으시는 분들이 계시기도 하니까요. 그분 남편분은 조종사가 되고싶어 하셨다는데 아마도 기회조차 얻지 못하셨을테니까요. 

얼마전에 CNN에서 닐 디그래스 타이슨(Neil Degrasse Tyson)의 인터뷰를 봤어요. 진행자가 유일한 흑인 천문물리학자됢에 대해서 물었어요. 어린 세대들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하는 질문을요. 저도 비슷한 상황이잖아요. 그의 대답이 제가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것이더라고요.  그 대답이 뭐였냐면 조금 뒤집어서 생각해보자였어요. 유색인종 어린아이들이 우리의 존재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대로 백인들이 우리가 이런 위치에 있는 것을 보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고요. 왜냐하면 결국 경제를 움직이고 정책을 만들고 판을 새로 짜는 건 그들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수행할수 있는 그룹으로서 그들이 우리를 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고요. 저도 항상 그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왔어요. 여성이나 유색인종들을 쉽게 보기 힘든 위치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을 백인들에게도 보여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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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진짜로 일어났던 일인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는건지 자신있게 말하기가 힘들어요. 꿈만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어릴때의 상황인식이 분명하지 않았을수도 있고요. 그냥 분명하지 않아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엄마와 의정부에 살았던 기억이에요. 의정부는 한국의 DMZ와 서울 사이에 있는 도시 이름이에요. 미군부대가 있고요. 그곳을 지나는 냇가가 있었어요. 이 이야기를 와이프한테 해주면서 제 첫기억이 하필 버려졌다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물 한가운데 널찍한 바위가 있었는데 비가 많이 오면 수위가 상승해서 안보이다가 가물때는 물밖으로 드러나는 그런 바위였어요. 위험해서 사람들도 많이 빠져죽는 그런 곳이어서 어린애들은 절대 근처에 가지 말라고 하는 곳이었죠. 비만 많이 안오면 아주 아름다운 그런 곳이었죠. 어느날 엄마하고 같이 거기에 간 기억이 나요. 자리를 깔고 바위위에 앉아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마도 제가 잠이 들었나봐요. 잠에서 깨보니 엄마는 없고 그래서 막 울었어요. 엄마가 아마 잠시 자리를 비웠었을거에요. 아무튼 그게 제 첫 기억이에요. 그 다음 기억은 제가 잡지 Men’s Journal에서도 밝힌 이야기인데 엄마와 함께 기차를 탔는데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쉬쉬하던 기억에요. . 흑인 혼혈이 분명해보이는 아이를 앉고 있었으니까요. 

또 그 후에 기억난 것이 함께 모여살던 정착촌 같은 것이 있었어요. 한국에 돌아갔을때 알게 되었는데 그곳의 이름이 텍사스 촌이었어요. 텍사스가 그곳에서는 성매매를 경멸적으로 부르는 말이더라고요.  그 곳에 사는 아이들은 모두 흑인 혼혈아이들이었어요. 그 안에서는 사람들이 저희를 잘 보살펴줬어요. 다른 한국 아이들과는 전혀 접촉이 없을 정도로요. 아마도 그때가 제 인생에서 저랑 비슷한 사람들하고 살았던 유일한 때인것 같아요. 우리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당할 뻔 했던 많은 부정적인 경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줬죠. 그 두가지가 제가 지니고 다녔던 기억이에요. 많은 부분이 분명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엄마는 기억나요. 

엄마는 어떤 분 이었나요?

그게 엄마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혹은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자세한 사항은 기억나지 않고요. 마야 안젤루(Maya Angelou 미국의 유명 시인)가 한 말 중에 사람들은 니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가 아니라 니가 어떤 기분이 들게 만들었는지를 기억한다” (“It’s not how, what people say or what they do, it’s how they make you feel.”) 는 말이 있잖아요. 저도 그 느낌만 기억해요. 어린아이였으니까 엄마와 나의 삶을 어떤 언어의 형태로 기억할 수가 없었을테고요. 하지만 엄마를 생각하면 그냥 따스했던 것과 나를 돌봐줬던 것과 엄마가 나를 보호해줬던 것등의 감정이 기억나요.  그래서 엄마가 죽은 것을 알았을때 엄마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돌아가셨거든요. 너무 슬펐고요. 아마 네살쯤 됐었을 거에요.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해줬군요.

네. 아주 처음부터요. 

그럼 엄마가 갑작스레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한국에 계속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어떤 근거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항상 미국에 가야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한국에 계속 산다면  엄마와 나 둘다의 앞날이 암울할거라는 것을 알았죠. 굉장히 가부장적인 사회였고 지금의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을테니까요. 극도의 빈곤한 제 3세계였죠. 제가 어릴때는 포장된 길도 아주 드물었어요.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남자들이 분뇨를 파다가 논에 거름을 줬던 것이 기억나요. 아주 낙후됐었죠. 이 모든 일이 한 세대안에 일어난 변화니까요. 그런 사회였으니 자신들을 위해 싸우러 와준 외국인 병사들이 뿌린 씨를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을거에요. 엄청난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겠죠. 그래서 미래가 밝지 않을거라는 것을 알았죠. 학교를 갈 기회도 못 얻었을테고 그래서 엄마가 어떻게든 미국으로 보내려고 했었던것 같아요. 아빠가 당연히 미군이었겠죠. 그래서 그랬는지 미군 부대 바로 주변에 모여 살았고요. 

“모호한 상실(Ambiguous loss)”이라는 말이 있어요. 엄마가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것 같은데 마을사람들이 화장을 해서 모셨나요? 엄마가 돌아가신 것을 아는데 고인을 추모할러 방문할 곳이 없다는 사실은 어떤 느낌인가요?

그런 쪽으로 생각을 많이 해보진 않았어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생존에 직면했죠. 성인이 된 지금에야 이야기해볼수 있는 경험들이죠.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것은 분명히 알았던것 같아요. 엄마를 다시 볼수 없다는 것말이에요. 강건너에 엄마가 자주 다니던 절이 있었었어요. 제가 불교에 대해서 아는 건 하나도 없지만 엄마가 성매매를 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영적인 충족을 위해 절에 다녔던 거죠.  아마도 누군가가 설명을 해줬었겠죠. 엄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요. 그러나 이제 앞으로 엄마 없이 살아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죠. 매일 혼자 지냈는데 그게 어느 정도 기간이었는지 시간개념도 잊었고요. 한동안 마을 사람들이저를  돌봐줬어요. 엄마가 없을때 저를 돌봐주곤 하던  할머니도 계셨고요.  어떤 공동체가 있었군요. 네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나서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런 의식들이 있었죠. 그리고 혼혈아이들을 키우는 다른 집도 있었어요. 저보다 큰 애들이 있는 집에서 같이 지낸 것도 기억나는데 그집 아들이 저를 많이 때렸어요. 아무튼 당시 아이들은 그냥 어떤 지도나 보살핌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그냥 존재했었던거죠. 마치 소설 파리대왕 처럼요. 

어머님과 다른 여성분들이 국가가 주도한 성매매종사자 였다는 사실도 언급해야 할것 같아요. 

맞아요. 

한국과 미국이 합작으로 힘든 환경에 놓인 여성들을 미군들을 위한 성매매를 하도록 주도했죠. 

제가 강연이나 인터뷰등을 하게 될때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제 존재자체가 국제 정치학상으로 제일 안좋은 형태의 부산물이라고요. 한국전쟁으로 인해 두 나라가 공조하게 되었고 가난한 여성들을 성매매로 이끌고 거기에 미군이 가담했죠. 두 나라가 공모해서 여성들의 성병유무 검사를 실시하고 확인증을 발급했으니까요. 군인들을 보여주라고요.  그리고 그 공조의 부산물로 저 같은 어린아이들이 태어나게되었는데 그에 대해선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죠. 참 서글프죠. 

그리고 그와 똑같이 일이 베트남에서도 벌어졌죠.  같은 이야기의 베트남 버전이요. Men’s Journal에 나간 제 기사가 입소문을 탔을때 어떤 젊은 여자분이 자기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다고 연락을 주셨어요. 그래서 아마 한국인아니면 베트남인인가 햇죠. 보통 그쪽 분들이 많이 연락을 주시니까요. 그랬는데 사실은 그 분이 동유럽출신이셨어요. 아버지가 소련군 군인 이었대요. 비슷한 일이 동유럽에서도 벌어진 것이죠. 그때 뭐랄까 한대 맞은 것 같더라고요. 미군이 주둔했던 곳이라면 그 어떤 곳에서도 이런 경우가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딸까요. 그리고 비단 미군 뿐만이 아니라 어떤 형태의 군대도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결국 제일 최전선에서 고통 받고 그 후폭풍 을 감당하는 것은 여자들과 아이들이니까요.

다른 혼혈아이들이 많이 있는 마을에서 자랐다고 했잖아요. 그러면서도 그곳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도 언젠가는 미국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하면서요. 혹시 미군 병사 특히 흑인병사들의 보살핌을 받기도 했나요 그래서 미국과 이어져있다고 느낄 수 있게? 

제가 있던 마을에는 흑인 병사들이 많이 찾아왔었어요. 영어에도 그때 조금 친숙해진것 같고 음악이나 미국의 흑인문화나 패션스타일등이 낮설지 않았어요. 미국에 대한 저의 어떤 인상이나 관점 같은 것이 그때로부터 시작됐다고도 할수 있을거에요. 그 뒤로 홀트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가게 되었는데 

제임스 싱글리(James Singly)라는 병사가 자주 찾아왔었어요. 모두 그를 그냥 싱글리라고 불렀고 또 애칭으로  Sergeant Pig (역자 의역 : 돼지 하사)라고 불렀어요. 덩치가 엄청 컸거든요. 그가 오면 모두 매달리고 올라타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흑인 혼혈 아이들한테 특별한 관심을 보였던것 같아요. 그도 그렇게 말했고요. 제가 Men’s Journal 일로 한국에 다시 돌아가 당시 고아원을 운영했던 몰리 홀트를 만났을때 그도 그랬어요. 싱글리가 흑인소년들만 좋아한다고 사람들이 불평했었다고요. 그런데 그녀도 그러더라고요. 흑인애들이 싱글리를 제일 필요로 했었다고요. 왜냐하면 입양이 되는 시기가 정해져 있는데 백인 혼혈애들은 들어오자마자 금방금방 입양이 되어서 나갔죠. 들어온지 몇달도 안되어서 유럽으로 많이 갔어요. 덴마크,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로요. 물론 미국이랑 캐나다로도 많이 갔고요. 물론 그때도 이런 사실들을 말로 표현하거나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던것은 아니지만 그냥 다들 알았죠. 그래서 백인혼혈애들하고는 안 놀았어요. 금방 갈거니까요. 그리고 같이 놀수 있었던 한국애들은 신체장애든 지적장애든 장애를 가진 애들 뿐이었고요. 고아원 전체를 통틀어서 말이에요. 입양이 되어야 하는데 혼혈이라고 또는 나이가 많다고 입양이 안되었으니까요. 그 사실을 싱글리가 너무 잘 알았던 거죠. 서울 시내쪽에 조금 큰 애들이 숙식하는 시설이 있었어요. 나이가 차서 입양이 되긴 글른 아이들이 모여 사는 일종의 그룹홈 같은 곳이요. 싱글리가 그곳도 종종 방문해서 아이들과 놀아줬어요. 슈바이처 같은 사람들을 박애주의자라고 하잔아요. 싱글리도 그런 셈이었죠.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자기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위해 자기의 휴일을 반납 한 거죠. 동기가 뭐였는지는 모르죠. 물어볼 기회도 없었죠. 미국으로 오면서 싱글리를 다시 못 만나게 됐으니까요. 물어봤어야 하는데 아쉬워요. 

싱글리가 어떻게 대해줬는데요?

엄마랑 똑같았어요. 다정했고 잘해줬어요. 그때도 알았던것 같아요. 이 분이 여기에 올 의무가 없다는 것을요. 한번씩 빼먹는 토요일도 있었거든요. 하루종일 기다렸는데 안온적도 있었어요. 당연한거죠. 그런데 그런날은 우리들이 엄청 낙담했죠. 뭐랄까 한동안은 싱글리를 만나는 것이 우리의 존재이유같기도 했달까요. 그와 있을때는 우리가 이렇게 사회에서 내쳐진 혹은 잘못 태어난 아이들이라는 것을 잊을수 있었고 누군가와 진정으로 속한다고 느낄수 있었어요. 그때 그곳에 있던 아이들을 대신해서 말하건데 그와 보내는 시간이 그 시절의 최고의 기억이었다고 감히 말할수 있을것 같아요. 자신을 내어주고 우리를 고아원 밖으로 데리고 나가 세상 구경을 시켜줬어요. 지금은 정책이 어떨지 모르지만 싱글리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던 홀트도 감사하 고요. 

일산에 있는 고아원에는 얼마나 있었던 건가요? 시설과 환경은 어땠나요?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안나지만 1973년 8월에 들어가서 75년 5월에 나왔어요. 8월 20일이 제 생일이라 기억해요. 물론 진짜 생일은 아니지만요. 그 관계자들이 날짜를 생일로 쓴거죠. 

고아원에 입소한 날이 생일이 됐군요. 

아마도 그때 한국에서는 생일이 그렇게 크게 축하할일이 아니지 않았나 싶어요. 태어나자마자 한살이 되고 해가 바뀌면 한살을 먹고 그랬잖아요. 그러니 그렇게 실제 나이보다 많은 나이를 제 나이라고 말했을거고 그렇게 기록이 됐겠죠. 입양인들 사이에서는 다들 친숙한 소재잖아요. 다들 진짜 나이를 모르는것 말이에요. 

시설만 놓고 봤을때는 나쁘지 않았던것 같아요. 깨끗했어요. 2017년에 돌아갔을때 많이는 아니어도 건물이나 근처 지형등이 모두 제 기억 그대로 이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새로 지은 건물에 속했고 검소했지만 인간적이었던것 같아요. 지금도 기억나는건 종교행사가 많았다는 거에요. 성경공부도 매일 있었고 성경으로 영어공부도 했고 예배와 교회 행사도 많이 참석해야 했어요. 나쁜 일을 하면 벌받는다 같은 공포를 조장하는 신앙 같은 거였죠. 

나중에 지옥에 간다 뭐 이런거요. 

네. 제도화된 종교에 대해 좀 삐딱하게 말해보자면 그렇게 함으로 아이들을 통제할수 있는것 아니겠어요? 기독교에 대해서 입문을 그렇게 한거죠. 소화되기도 전에 막 들이부었달까?

2017년에 몰리 홀트를 만났다고 햇잖아요. 어떤 사람이던가요? 그리고 홀트에 대해서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일단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들이는 어떤 시설과 시스템을 만든 공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박수 칠일은 박수 쳐줘야죠. 자신들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던 기사도 있잖아요. 의도는 물론 순수했고 거룩했죠. 다만 그들이 만든 시스템 안에서 일어났던 모든 상호작용들이 다 그렇진 않았죠. 개인적으로 참 제 인생에서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일을 그곳에서 당했어요. 물론 가장 빛나는 순간들도 결국은 홀트를 통해 가게된 입양을 통해서 가능했지만요. 제 인생에 일어났던 일들의 대부분을 좋게 생각해요. 나쁜면과 좋은 면을 동시에 봐야 하니까요. 몰리를 만났을때 살짝 어색한 순간이 있었어요. 저한테 좋은 가족을 만났냐고 물었거든요. 그냥 표정으로 대답을 했어요. 궁극적으로는 다 잘 풀렸으니까요. 

지금까지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이야기가 있어요. 제 와이프도 그러더라고요. 언젠가는 그곳에서 당한 육체적 성적 폭력을 공개해야 된다고요. 그런데 아마도 꼭꼭 숨겨놓고 살아서인지 아니면 생각하면 그때 당했던 고통이 연상되어인지는 몰라도 그동안 별로 생각이 안났어요. 너무 어릴때였으니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거나 수용할만한 지적 능력도 없었고요. 그리고 그 뒤로 그런 일들이 일상적이 되어버렸죠. 그러면 그걸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디죠. 다들 이렇게 사는가 보다 하고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를 모르니까요. 힘들었죠. 그 뒤로 그 기억을 묻어두고 살다시피 했던 이유가 그때를 떠올리며 제가 살아온 날을 반추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기 때문이죠.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으니까요. 한때는 내가 결혼을 할수 있을까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가질수는 있을까 의심했던 적도 있었어요. 그때의 아픈 기억들조차 제 일부분이니까요. 그래서 어릴때는 분노조절장애도 겪었고 싸움도 많이 했어요. 아마도 고아원에서 털어버리고 나오지 못한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싸워야만 했죠. 싸움으로 푸는 방법 밖에는 몰랐고요. 그래서 싸움을 잘 하게 됐죠.

그 뒤 미국에 오게 되었고 잘사는 백인들이 모여 살던 뉴호프 시 근교에 살게 되었어요. 미들레이크 초등학교에 들어갔죠. 저 말고도 유색인종 학생들이 있긴 했는데 아주 소수였죠. 아이들은 참 짖굳게 솔직하잖아요.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을때 상대방이 다르다 싶은 점만 부각시켜 공격하죠. 그러면 저는 여지없이 제가 할수 있는 방법으로 응징을 했고 당연히 교장실로 많이 불려갔죠. 저를 입양한 분들도 그런 일들로 많이 힘들어했는데 그 모든 일들이 고아원에서부터 쌓인 앙금같은 것이었죠. 그 이전에도 성폭력까지는 몰라도 아이들 간에 폭력은 있어왔고요. 

성적으로 학대를 당했다는 건가요?

같은 고아원의 다른 아이들로부터?

네. 저보다 큰 아이들이요

홀트의 직원들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알고는 있지만 관리할 인력이 없었다거나 하는?

몰랐을거라고 하는 것이 그들 입장에서는 낫겠죠? 안다 하더라고 다들 쉬쉬하는 일이잖아요. 애들 사이에 그럴수도 있지 하면서요. 저도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도 않았고요. 그런 일을 당하는 입장이 되면 이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을 하면 후폭풍을 감당해야 된다는 것도 알죠. 성직자들이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뉴스에서도 보면 아이들이 아무한테도 말을 안하잖아요.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자체로 수치심을 느끼니까요. 

제 경우에는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걸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죠. 이걸 누구한테 알려야 하는지 아닌지도 몰랐고요. 성직자들한테 성추행을 당하는 어린아이들의 기사를 접하면서 저도 같이 아파했어요. 제 경우는 그냥 저보다 큰 애들이 있고요. 그곳에 직원들 중에 그 누구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요. 적어도 제 경우에는요. 

에릭씨도 저도 50대인데 그건 명백히 어른들의 책임이죠. 관리자들의 책임이고요. 합당한 관리감독이 부재했으니까요. 

저를 입양한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잖아요. 너무 복잡해요. 그 분들이 그 사실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했다고 생각해요. 물론 50-60년대와 지금은 문화적으로도 너무 다르고 그때는 지금처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쉬쉬 했잖아요. 지금처럼 처벌을 받고 책임을 지고 그런일이 일어났을때 아이들이 안전하게 주변에 알리고 보호받을수 있게요. 

혹시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알았던 걸까요? 성적으로 학대당했다는 사실을 알리면 입양이 안될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런 부분이 작용을 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적어도 저는 아니었어요. 

생존을 위한 방어기제였을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말할수도 있죠. 

마침내 입양이 될거라는 사실을 알았을때 어땠나요?

아주 우쭐했죠. 

그 순간을 기억하나요?

아니요. 그렇지만 뭐랄까 해변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파도가 치기 시작하는 것을 어느 순간 감지하는 것처럼요. 어느 순간 직원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어요. 갑자기 잘해주고 뭐랄까 나를 단장시키기 시작했달까요? 갑자기 조금 더 적극적으로 영어를 가르쳤어요. 비영어권 국가로 입양가는 아이들도 있었잖아요. 그러니 알고 저를 준비시킨거였죠. 

그래서 알았어요. 다시 파도의 비유를 하자면 어떤 거대한 파도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요. 거대한 파도에 맞닥트렸는데 괜찮은거죠. 아무튼 조금씩 변화가 생겼어요. 저도 알았고 제 주변에 모든 아이들도 알았고요. 다들 주시하고 있으니까요. 그걸 지켜보는 다른 아이들도 갑자기 좀더 단정해지려 애쓰고. 이도 잘 닦고 그렇게요. 개인위생이나 면역주사 같은 것도 미리 맞았으니까요. 입양간다는 소식을 알려주기도 전에요. 

갑자기 그동안 못 누리던 것들이 가능해졌군요. 

네. 딱 그랬어요. 적당한 비유는 아니지만 제가 지금 개들을 임시보호 하고 있어요. 유기견 보호센터와도 똑같죠. 입양갈곳이 정해지면 개들을 보낼 준비를 하잔아요. 똑같죠. 뉴스가 공표되는것이 아니고 그냥 서서히 은밀하게 준비가 시작되는거죠. 

다른 아이들은 어땠을까 생각하게 되네요. 그런 변화들을 눈치채며 부러워했을 다른 아이들이요. 

출발날짜가 다가오자 너무 서운하고 다들 고맙더라고요. 복잡한 감정이었죠. 그곳에선 다들 친구고 형제같았으니까요. 떠날 때가 되니까 알겠는 그런 것들이요. 그 감정들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어요. 떠날때가 되니까 떠나야 된다는 사실이 진짜 힘들었죠. 이상하게 그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네요. 그 부분을 짚어줘서 고마워요. 생각하니 좀 울컥하네요. 제 인생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 뒤로 그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나요?

홀트를 방문했으때 몰리 홀트로 부터 몇몇 아이들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요. 제프리 김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덴마크로 입양됐었는데 그 뒤로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됐대요. 그리고 같이 방을 썼던 친구들 중에 몇은 스웨덴으로 입양을 갔고 또 여기 미네소타로 온 친구도 있었고요. 

미국으로 오며 뭐랄까 굉장히 축하받을 일인것 처럼 느껴졌죠. 드디어 집이 생겼구나 같은 느낌이요. 그때만 해도 미국엔 다 흑인들만 사는 줄 알았어요. 제가 주로 봐왔던 미국인들은 거의다 흑인들 이었으니까요. 저희들의 의식속엔 한국인이거나 아니면 미국인이거나 하는 이분법만 존재했어요. 그냥 피부색이 조금더 진하고 옅고 그정도의 차이로만 다가왔었어요. 미국인이거나 한국인 이거나 둘중에 하나일뿐이었죠. 제가 백인가정으로 입양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그걸 알았을때도 “헐” 이런 느낌 보다는 그냥 그런가보다 했던거죠. 밀튼 워싱턴 (시즌 2 출연한 흑인-한인 혼혈)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흑인 가정으로 입양된 그 친구와 저의 경험이 아주 다르더라고요. 

아무튼 그때부터 힘든 여정이 시작됐죠. 미네소타의 도시 근교 백인 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 꽤 잘 사는 백인 가정으로 입양이 됐어요. 문화적으로 언어적으로 적응하는 것도 물론 힘들었죠.  지금은 없지만 어릴땐 아프로(Aro – 흑인들 고유의 헤어스타일) 머리에 커갈수록 머리가 점점 꼬여가더라고요. 그때는 아무도 저를 보고 아시안 혼혈이라고 생각을 안했어요. 그냥 피부색이 조금은 연한 흑인인가보다 했을거에요. 제가 도착한 날 그 즈음이었던것 같은데 할머니였나 할아버지였나 아무튼 저를 유심히 보고 계셨었나봐요. 그러더니 하는 말이 “한국애를 데려온다더니  피카니니(Picaninny 흑인 어린아이들을 비하해 표현하는 캐릭터) 데려왔네” 라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안쓰는 말이 된지 오래죠. 경멸적인 표현이니까요. 그렇게 한번 또 꼬였고요. 

지금 어른이 된 후에 생각을 해봐요.  어떻게 태어나고 자랐는지가 잘 안 알려진 아이를 데려온다면 당연히 그 아이와 함께 많은 트라우마도 함께 오겠죠. 제가 딱 그런 경우였고요. 아이와 같이 살다보면 그 짐속에 있던 상처들도 하나씩 열리는데 그 상처들 혹은 폭력적인 성향들에 적절히 대처하거나 보듬어 줄 역량이 안돼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럴때마다 결국은 제가 혼나는 것으로 귀결되고 했죠. 좀 유별난 일을 한다고 벌을 많이 받았어요. 성장하면서 배우고 적응할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죠. 

홀트도 그렇게 저를 입양했던 가족들도 그렇고 동기와 의도는 좋았겠죠. 자선 혹은 이타주의 같은 거였어요. 저를 입양했던 이유말이에요. 그런데 아이를 입양하는 것은 그 아이의 부모가 되어 주겠다는 거잖아요. 제 생각엔 저를 입양했던 사람들이 그 부분을 심각하게 고려해보지 않은것 같아요. 감당할수 없었던 일을 벌인거죠. 

저 이전에도 한국인 남매를 입양했었어요. 저보다 일곱살 정도 많았었는데 그 입양이 안 좋게 끝났어요. 제가 미국에 왔을때 그 관계가 막 삐걱대기 시작하던때였죠. 그리고 에티오피아에서 온 남자아이도 임시보호하고 있었는데 그 형이 한국에서 입양된 누나와 나이가 거의 비슷했었어요. 에티오피아에서 내전을 피해 온 난민이었는데 심장수술이 필요해서 미네소타로 온 경우였죠. 그런데 그 형을 돌려보냈어요. 그 형이 저한테 나쁜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던거죠. 그 분들이 몰랐던 것은 그 형이 저에겐 그 가족과 저를 이어주는 끈 같은 존재였거든요. 자세한 내막은 저도 잘 모르지만 그 형이 흑인 문화와 흑인국가주의 이런 것들을 저한테 알려줬었는데. 그런것들을 문제라고 본것 같아요. 이 흑인 머리를 어떻게 손질하고 빗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크고 동그란 모양을 만들수 있는지 등등을 가르쳐줬죠. 저 한테는 마치 큰형같았어요. 그런데 입양부모가 보기엔 그 방향이 저한테 좋은 영향이 아니었죠. 그들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던거죠.  (2부에서 계속) 

  번역 : 전유근 

시즌 6, 열 한번째 에피소드 : “우리의 몸은 항상 생존모드에요” – 정울림

“어떤 때는 내가 정말 스웨덴 사람이 맞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어요. 특히 외국에 있을 때요. 스웨덴 사람들끼리 만났을 때 우리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또 어떤 때는 제가 너무나도 한국인 같아요.” 

리사 울림 호블럼은 한국계 스웨덴인이며 삽화가, 만화가이자 활동가입니다. 최근 작인 “Palimpsest”는 친부모를 찾는 그의 실제 여정을 담은 그래픽노블(만화형태의 소설)인데요 그 여정이 미로찾기와도 같습니다. 어떤 땐 허위로 작성된 문서와 씨름해야 했고 또 생애 초기의  작은 기억이 후에 어떻게 크게 작용하는지도 경험해야 했습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리사씨는 애착, 엄마가 되는 여정, 그리고 상실의 경험이 그녀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제 이름은 리사 울림 호블럼이고 현재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6년째 살고 있어요. 마흔 다섯살인데 제 나이가 아직 실감이 안나네요. 

어떻게 뉴질랜드에서 살게 되었죠?

제 파트너와 두 아이와 함께 스웨덴에서 살고 있었는데 오래전부터 떠나고 싶었었어요. 제 파트너는 영국인인데 항상 스웨덴이 자기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래서 기회가 되면 같은 영어권이면서 동시에 동양인들 비중이 높은 곳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을 하던 중에 마침 파트너에게 대학에서 오퍼가 들어왔어요. 박사과정 중 이었거든요. 다른 곳도 알아보던 중이었는데 마침 이곳 오클랜드 대학에서 제의가 와서 결정했어요. 그래서 바로 물건을 정리하고 짐을 싸서 왔어요. 우리 둘 다 그 전에 한번도 와본 적도 없는데 말이죠. 운이 좋았어요. 그리고 지금 아주 만족하고 있어요. 

그전에 한번도 가본적도 없었는데요?

제 파트너가 호주에 와본적은 있어요. 그런데 이 두 나라는 완전히 다른 나라거든요. 사람들이 대략 뭉뚱그려 생각하긴 하지만요. 

맞아요. 같은 나라가 아닌데 미국인들은 다 똑같다고 생각해요. 

스웨덴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저기 남반구 어디쯤 있는 나라들 그리고 같은 나라의 식민지(역자 주- 영국)였으니 비슷할거라고요. 그런데 실제로는 굉장히 다르거든요. 아주 아름답고 멋지고 고요한 곳이에요. 

뉴질랜드를 떠올리면 그렇게 인종적으로 다양할것 같지는 않은데, 제가 아는 친구중에 뉴질랜드 국적의 중국계 친구가 있거든요. 중국계가 많나요?

네. 아시안도 많고 태평양제도쪽 사람들도 많은데 물론 어디를 가느냐에 따라 달라요. 뉴질랜드가 제가 그동안 가본 곳들에 비교하면 인종적으로 아주 다양한 곳이기는 하지만 꼭 그런것만은 아니에요. 물론 오클랜드(역자 주-뉴질랜드의 수도)의 경우는 그렇죠. 하지만 아직도 백인위주의 곳이 많고요. 마오리족과 태평양제도 쪽이 주를 이루고 다른 인종은 없는 곳도 있고요. 오클랜드는 동아시아쪽 인구 비율이 꽤 높고 빠르게 늘어나고 있기도 하고요. 뉴질랜드 역사를 보면 백인들이 이곳에 도착했을때 중국인들도 거의 같은 시기에 왔거든요. 그러니 중국인들도 뉴질랜드 정착 역사가 아주 긴데 역사는 항상 뭐랄까 백인 특히 영국인 후손들과 마오리 족이 먼저 정착했고 태평양제도쪽 사람들과 중국인들 그리고 그 밖에 다른 아시안 이민자들은 항상 나중에 온 사람들 그리고 골칫거리인 사람들로 그려지죠. 그들도 이 곳에 오랫동안, 골드러쉬(역자 주- 1850년경 호주에서 금이 발견되자 유럽등지로부터 사람들이 몰려듬)  때부터  있었거든요.  미국도 그렇잖아요. 아시안들이 아주 오랫동안 거주했는데 항상 다른 민족들에 비해 “이민자들” 혹은 미국에 “받아들여진” 사람들로 묘사되죠. 

맞아요. 영원한 “외국인”이죠. 벌써 3-4세대나 살았는데도 말이죠.

다른 유럽쪽 피는 아무리 많이 섞여도 백인이고 미국인이잔아요. 그런데 아시안의 경우에는 항상 정착민이고 외국인이죠. 여기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리사씨는 자신의 출신을 어디라고 생각하나요? 본거지를 떠나서 사는 사람으로서 말이에요. 

이민자죠. 굉장히 복잡한 주제이고 내가 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지는 항상 변해요. 내가 당시에 어디에 있고 누구와 있고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어떤 때는 내가 정말 스웨덴 사람이 맞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어요. 특히 외국에 있을 때요. 스웨덴 사람들끼리 만났을때 우리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또 어떤 때는 제가 너무나도 한국인 같아요. 나의 “한국인임”(역자 주 – Koreaness) 이 항상 좋기만 한건 아니지만요. 두 나라에 다 가깝게 느끼고 한국에 대해 뭔가 나긋한 감정도 있지만, 이 나라가 우리를 어떻게 취급했고 지금도 취급하나를 생각하면 화도 나고 실망스럽고요. 그래서 그냥 특정 출신이 아닌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라고 느낄때도 있어요. 아주 복잡한 문제죠. 외국에 살면서 내 스스로 나를 외국인이라고 여기는건 괜찮아요. 여기서 꽤 마음 편하게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누가 나를 외국인이라고 생각하면 그런가보다 하죠. 그런데 그런 일이 스웨덴에서 일어나면 굉장히 의기소침해지고 화나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외국인이면서도 외국인이면 안되거든요. 저를 보면 제가 자기들과 같다고 생각하다가 제가 한국어를 못하는걸 알게 되면 그때부터 이야기가 달라지죠. 설명을 해야 되잖아요. 왜 겉모습은 똑같은데 행동하는건 다른지 왜 공감을 못하는지 말이에요. 그리고 그런것들이 상처가 되죠.  

다른 입양인들, 특히 자기 감정을 많이 들여다본 입양인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들어봤어요. 그들이 제 3의 장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제 3의 장소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고요. 그곳이 입양인 중심의 모임이 됐건 아니건 간에 말이죠. 우리가 입양된 나라나 태어난 나라가 아닌 제 3의 나라에서 말이에요. 리사씨는 실제로 지금 제 3의 나라에 있잔아요. 

저도 그런것 같아요. 항상 이리저리 옮겨왔고 제 삶을 그게 가능한 삶으로 만들어왔죠. 열 여덟살인가 아홉살때에 스웨덴에서 스페인으로 갔는데 그 이후로 항상 다른 나라에 사는 것을 꿈꾸고 바래왔어요. 돈을 모으려고 6개월동안 힘든 일을 한적도 있고요. 노르웨이에서 돈을 모으려고 생선가공 공장에서 하루에 14시간씩 일한 적도 있었고요. 그 후에 남미의 브라질로 가서 기차를 타고 여행했고요. 계속 그래왔어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왜 그렇게 항상 멀리 가버리냐는 질문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 질문을 받을때면 속상하기도 했는데 그땐 제가 저의 입양에 대한 탐구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이었어요. 조금 나이가 들어 되돌아 보니 그땐 그 어디에도 매이기가 싫었던것 같아요. 그래서 3-4년은 걸리는 대학에 들어가거나 할수가 없었죠. 그래서 항상 한 학기만에 끝내고 다음 과정을 할지 결정하는 단기 코스를 듣거나 했어요. 그래서 일도 저임금 일용직만 구해서 했죠. 언제든 그만두고 바로 떠날수 있게요. 다른 사람들이 했던 표현대로 하면 항상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것 같아요. 지금 돌아보면 그런 삶에서는 – 물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셈이긴 하지만 -조금 오래 머물렀다 싶으면 뭔가 갇히는 느낌이 들고 기대치가 생기게 되고 그러면 집이라고 느끼게 되고 그러잖아요. 

그 어느 곳도 집이라고 느끼지 못했어요. 새로움을 느끼는 것이 좋았고 낯설음을 느끼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그편이 편했던것 같아요.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고 느꼈으니까요. 그리고 나에 대해서 잘 몰랐기도 했고. 그게 아마도 제가 그때를 헤쳐나갔던 방식 같아요. 실제로는 문제를 회피한거였지만요.

왠지 알것 같아요. 사람들이 “도망”친다고 표현했을때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나요?

그때는 동의못했죠. 화도 많이 냈고요. 그때는 그저 내가 다른 문화를 동경해서 그런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사람들이 항상 이제 스물 다섯살이니 좀 정착해야 하지 않겠냐 라던가 이제 서른이니 가정을 꾸려야 하지 않겠니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계속 그 생활을 하다가 결국에는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서 이제는 같이 옮겨다니게 되었어요. 그에게는 또 그만의 숙제가 있고요.  아무튼 새로운 곳에 대한 동경도 이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을것 같아요. 

제가 보기엔 뭔가 더 심오한 이유가 있을것 같아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잖아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고 마침에 어느정도 지점에 다다르면 정착을 해야 할것 같은 기대치가 생긴다고요. 평생 어디에도 뿌리가 없다고 느꼈던 사람한테 그게 어떤 의미일까요?

글쎄요. 저도 답을 모르겠어요. 한 곳 정착해서 오랫동안 산 사람들 예를 들어 20년 이상 살았다는 사람들 집에 가보면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 가득차 있고 그러잖아요. 그런걸 볼때면 굉장히 부럽기도 하고 서럽기도 해요. 나도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치만 바로 뭔가 갇혀 있다는 느낌도 들고요. 저는 그렇게 감상적인 편이 아니거든요. 물건들에 연연해 하지 않고 바로바로 버려버리는 편이에요. 간직하고 있는 물건이 몇개 안되어요. 제가 한국에서 올때 입었던 내복이랑 베넷저고리 정도만 가지고 있어요. 다른건 바로 가차없이 버려버려요. 물건에 애착을 느끼고 연연해하는 편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한곳에서 오래 살며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보관하는 사람들을 보면 뭔가 안전망이 있고 돌아갈 곳이 있어서 좋겠다는 생각은 해요. 

그건 네가 어디에 있든 항상 네 가족들이 알고 있고 그것이 서로서로에게 안전망이니까요. 그래서 그런 느낌들은 내가 결코 알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우리는 너무 많은 상실을 경험 했잖아요. 가족과 관련된 감정이고요. 꼭 크리스마스가 가족을 위한 때 라서는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때 가족들 생각을 많이 해요. TV에서 가족영화들만 주구장창 보여주잔아요. 진짜 별로인 영화들도 있는데 그래도 항상 재밌게 보는데 뭐랄까 마조히즘(주 – 피학대도착증)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크리스마스 영화에는 항상 외로운 사람이나 고아나 혹은 부모가 없는 성인등이 나오잖아요. 그리고 그 주인공들이 누군가를 만나는데 그 누군가의 가족들이 그 주인공을 받아주고 바로 안락함을 느끼고 하는 그런 클리셰로 가득 찬 영화들이요. 가족들간의 끈끈한 사랑 뭐 이런 주제를 찬양하는 영화들 말이에요. 그럴때면 나도 이런 가족들이 있으면 좋겠는 생각도 들지만 막상 제가 그런 상황에 있거나 초대를 받거나 하면 왠지 숨이 막히고 그만 자리를 뜨고 싶고 그래요. 

가족들이 헤어지거나 하는 영화속의 장면들이 입양인들에게 상처를 줄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끈끈한 가족애를 보여주는 장면들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물론 모든 가족들이 다 그렇게 끈끈한 것은 아니고 크리스마스 가족영화들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도 안되지만 그래도 쓸쓸해지거든요.

그럴수도 있겠네요. 몇 군데 와 닿았던 부분이 있는데  물건등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고 했잔아요. 관계를 맺는데도 그런 편인가요?

그런 것 같아요. 왜냐면 관계에 너무 집착해서 그들을 괴롭히는 지경까지가곤 했었거든요. 그리고 사람들이 뒤에서 “재는 전화를 하면 안 끊어서 너무 힘들어”라거나 “너무 열성적이야”하는 이야기를 친구들한테 들었어요. 저는 친구들한테 충실한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너무 부담스러웠나봐요.  그래서 그때부터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항상 멀리 있었으니까요. 자연스러운 일이 됐어요.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또 언젠가는 멀어져야 될것을 아니까 힘들었죠.  

그리고 일반적으로 봤을때도 저한테 더 힘든일인것 같기도 해요. 항상 뭐랄까 크리스마스 영화에서처럼 친한 친구그룹에 끼고 싶었어요. 네 다섯명이서 모든 걸 같이 하는 그런 그룹이요. 그런데 저는 항상 “아싸”였고 그런 그룹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저를 초대해주기는 하는데 항상 초대 받기만 하고 핵심 멤버가 되지는 못했어요. 항상 손님이었죠. 그리고 친한 친구가 생기면 항상 더 부담스러웠어요. 무슨 일이 생겨서 관계가 끊어질 것만 같았고요. 

그래서 굳이 친해지려고 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더 힘들어지 니까요. 요즘엔 SNS덕에 멀리 떨어져 있어도 친구 관계를 유지 할 수 있잖아요. 저는 그게 더 편한 것 같아요.  무슨 일이라도 해줄 친한 친구들이 몇 있는데 멀리 떨어져 있으니 저로 인해 부담스러움을 느낄 일이 없으니까요. 멀리 떨어져 있는것이 다행이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제 생각엔 우리가 입양되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어요. 우리가 포기되었다는 사실이요. 리사씨가 말하는 동안 저도 많은 부분이 와 닿았는데 저도 같은 고민을 했거든요. 답이 없는 난제이고 역설적인기도 해요. 우리는 어떤 안정적인 관계의 중심이 되고 싶어하고 깊은 뿌리를 내리고 싶어하지만 너무 어려서 겪은 일때문에 동시에 관계안에서 갇혔다고 느끼기도 하고요. 혹은 너무 가까워지면 또 떠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고요. 그러니 차라리 관계를 안 맺어버리는게 쉬울수도 있죠. 간절히 원하지만 막상 갖게 되면 떠나게되죠. 빨리 식상해져버리거나 새로운 관계가 필요해서 일수도 있지만 결국엔 사람이나 장소에 너무 정들게 될까봐 두려운거죠

맞아요. 지금은 안그러지만 한동안 힘들어 했던일이 뭐냐면 제가 저와 각각 친했던 두 친구를 소개해서 서로 친구가 되고 나면 왠지 그 둘이 친해져서 나를 더이상 안 볼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어요. 실제로 그런 일이 몇번 있었거든요. 서로 몰랐던 두 친구가 저를 통해 알게 되었고 처음엔 셋이 항상 같이 어울리다가 언젠가부터 둘이서만 만나더라고요. 저를 빼고요. 어릴때 그런일이 몇번 있었는데 성숙하게 대처를 하지 못했죠. 성인이 되고나서도 그런일이 일어났을땐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와 친했던 것보다 자기들끼리 더 친해질수도 있겠다는 사실때문에 제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걸 깨달았어요. 좀 우스운 생각이긴 하지만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잔아요. 그래서 차라리 처음부터 친해지지 말자라고 생각했죠. 제가 굉장히 외로운 사람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그런건 또 아니고요. 아무튼 지금은 새로운 관계를 맺는 나만의 방식이 있어요. 이제는 저를 보호해야하니까요. 

또 하나 와 닿는 부분이 있는데요 다른 많은 입양인들도 친구 관계나 연인 관계가 복잡하고 어렵다고 해요. 친구나 연인 관계에서 많이 힘들어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제 경우에도 친구 관계에서 제가 먼저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마다 내가 너무 관계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그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건 물론 개인상담시간에나 가져가야 하는 질문이겠지만 입양되었다는 사실때문에 그런것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관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서 실망하거나 상처받게 되면 그게 너무 고통스럽죠. 

맞아요. 저는 심지어는 제가 너무 부담스럽고 제가 제 주변 사람들이 다 완벽하길 바란다는 말까지 들었어요. 제 생각엔 엄마와 자식 사이의 유대감과 관련이 있는것 같아요. 처음에 태어났을때는 모든 것이 완벽하고 조화롭잔아요. 어쩌면 유토피아에 가까운 상황이죠. 그런데 그 상황이 파괴되고 그때부터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야 하잖아요. 그토록 아름답고 가까웠던 관계가 한 순간에 날아가고 억지로 떨어졌잖아요. 점진적으로 일어난것도 아니고 갑자기요.  태어났으니 엄마와 함께 조금 있어야 하는데 바로 옮겨졌죠. 그때를 상상하면 그냥 암흑같아요. 그 갓난 아기한테 그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품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여기저기 맡겨지다가 결국엔 고아원으로 보내졌죠. 고아원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고 해도 생애 초기의 결정적인 엄마와의 시간을 대신하진 못하죠. 말하긴 좀 민망하지만 그래서 그런 관계를 제가 항상 열망하는 것 같아요. 모든 관계에서요. 친밀함의 가능성이 있는 관계 말이에요. 그래서 갓난 아기 적에 경험했던 그 빈자리를 메꾸려고 하나봐요. 그렇지만 이미 소용없죠. 다시는 일어날수 없죠. 

제 아이들하고 아주 끈끈하다고 느껴요. 아이들이 막 태어났을때 그런 완전무결한 상태를 느꼈거든요. 그런데 그애들이 아이들이고 저는 엄마잔아요. 제가 그 안정감을 줘야하는 존재죠. 저도 저를 향한 그 모든 것을 망라하는 안전함을 느끼고 싶은데 저는 그걸 가질수 없잖아요. 더이상 아이가 아니니까요. 아주 내면이 고요하고 모든것을 다 내어주는 연인을 만났다 해도 이미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더이상 같지 않아요. 제가 생각했던 방향과 다른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네요(웃음) 

그럼 단체활동운동저항시민조직활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요?

그냥 좀 놀랐어요. 이런 일들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을 안하고 살았거든요. 생각하면 너무 힘들어서요. 그런데 말하니 좋네요. 그냥 좀 의외라서요. 대개 사람들이 저에게 연락을 해올때면 주로 제가 하는 작품활동이나 시민운동에 대한 거고 이런 감정적인일에 대한것은 아니었거든요. 

제가 원래 좀 호기심이 많아요. 저는 엄마는 아니지만  리사씨가 아이를 낳았을 당시 이야기를 했을때말이에요. 리사씨는 아이때 그런 안전한 애착관계를 못 가졌잔아요. 갓난아기이건 혹은 조금 더 큰 아이라도 뭔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죠. 엄마가 없어졌고 애착을 주는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비록 이성적으로 뭔가를 알지는 못하더라도 몸속에 감지되고 각인되죠. 그래서 리사씨가 아이를 낳았을 때 리사씨는 그런 애착을 아이들한테 줄수 있었나요? 본인은 받지 못했더라도?

둘째 아이한테는 그럴수 있었는데 첫째한테는 그러질 못했어요. 아이가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물론 항상 함께 있었지만 산후우울증이 심하게 왔었거든요. 분만 도중에 갑자기 트라우마가 심하게 찾아왔어요. 너무 심각했는데 그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죠. 그래서 그 뒤로 스웨덴 의료시스템에 악감정이 생겼어요. 지금도요. 스웨덴 정부에서 입양인들을 위한 지원이 전혀 없었거든요. 입양인이면 정서적으로 임신시 고위험군에 속한다는걸 알려줬어야 해요. 성폭력 피해자이거나 부모를 잃었거나 하면 별도의 지원이 나가거든요. 그런데 우리의 존재는 안보이나봐요. 우리 입양인들은 부모를 잃은 것이 아니고 부모를 얻었다고 생각해요. 인식의 차이가 있죠. 우리에겐 마치 부모가 죽은 거나 마찬가지 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안해요. 

그런 특수한 상황에서 임신을 하면 여러 지원들을 많이 받을 수 있는데 저는 아무런 지원도 못 받았어요. 왜냐면 입양은 좋은 거니까요(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준비가 안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모든 사실이 제가 고위험군이라고 말해주고 있는데 말이죠. 진통이 와서 분만실에 있는데 갑자기 제가 제 엄마인것처럼 느껴지는 거에요. 그리고 이 진통이 오면 아이를 잃어야 한다는걸 알고 있는 거에요. 진통이 시작되기 전에 아이를 지킬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죠. 분만실에서 진통을 견디기 위해 아이를 품에 안는 상상을 해보라고 하잖아요. 지금 이 고통이 모두 그 순간을 위한거다 라고요. 그런데 저는 이 사람들이 내 아기를 뺏어가려고 그런다. 곧 아이를 잃을 거다. 이렇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분만의 고통도 정말 힘들었지만 감정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제 생모한테 감정이입이 되어서 마침내 아이가 나왔을때 아이가 울잔아요. 그런데 저는 아이가 저를 곧 떠나야 하는 것을 알아서 운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은 그냥 울잖아요. 제가 없어서 우는 것도 아니고 그냥요. 그런데 전 아이의 모든 울음을 자기가 곧 버려지니까 그걸 알고 우는거라고 해석했어요. 그래서 그런 모든 상황들이 너무 힘들어서 곧 우울증이 찾아왔죠.  산후우울증이라는 것이 꼭 트라우마가 있어야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아주 흔한 일이죠. 그런데 문제는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다는 거에요. 일차적으로는 제 스스로 저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몰랐고 임신 외에도 환경적으로도 상황이 많이 안좋았었거든요. 여러가지로 형편이 안 좋을때였어요. 

상황이 많이 안좋은 때였나봐요.

네. 실직에 집도 없었고 다른 문제도 많았어요. 굉장히 힘들고 도움도 받지 못하던 상황이었어요. 저와 제 파트너 모두 많이 외롭고 두려웠어요. 결국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상담을 받게 되었는데 또 상담사가 너무 별로였어요. 백인남자였는데 남자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출산을 경험한 여자였으면 그래도 좀 낫지 않았을까 생각은 들어요. 제 고통이 어려서 부모로부터 떨어져 입양이 되었다는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 근처로도 못갔어요. 

그래서 상담사로부터 엄마가 된 사실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즐겨라 도데체 뭐가 힘드냐라는 식의 조언만 주구장창 듣다가 끝났어요. 결국엔 너무 화가 나서 나한데 맞는 도움을 직접 찾아나서게 되었요. 이런 식의 도움보다는 누군가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엔 찾아 나섰고 적절한 도움을 받게 되었어요. 입양과 관련된 도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었어요.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왜 그렇게 아이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는지만 물어봤으면 됐을텐데.

그쵸. 제가 아이한테 너무 내 자신을 투사하고 있었다는것만 누가 알아챘어도 말이죠. 아이가 내가 자기를 버릴거라고 생각해서 우는거다 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러면서도 동시에 아이한테 질투심을 느꼈어요. 제 아이는 엄마한테 이렇게 가까이 있고 모유를 먹고 누군가가 옆에서 잘 돌봐주잔아요. 저는 그러질 못했으니까요. 너무 상실감이 느껴지는데 도대체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왜냐면 동시에 아이를 돌봐야 하니까요. 내 몸을 돌보는게 아니라. 아무튼 엉망이었죠. 그때 누군가가 조금만 힌트를 줬더라면 상황이 훨씬 나았을거라 생각해요.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후회가 되거든요. 그때 너무 감정적으로 힘들어서 그 시간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어요. 그래서 아이가 그때를 떠올리는 말을 하면 너무 미안해요. 갓난 아기였을때 조금 더 나은 엄마였어야 되는데 하고 말이죠. 아이한테 조금더 잘 대해줬더라면, 이러것 저런것을 해줬었더라면 하고 자책을 많이 해요. 지금 열두살이거든요.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후회가 되고 그때의 나를 혼내주고 싶어요. 

그럼 둘째 딸아이 하고는 어땠나요? 무언가 달랐나요?

그랬죠. 둘째가 태어나기 전까지 그 2년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죠. 그 사이에 저의 입양에 대해 파기 시작어요. 물리적, 환경적인 부분보다 정서적인 면과 관련된 부분을 말이에요. 그러니 많은 변화가 있었던 셈이죠. 그리고 이제는 좀 예상가능한 문제가 되었잔아요. 그래서 먼저 이런일이 나에게 있었다 그러니 이런 지원이 필요하다고 먼저 밝히고 받을수 있는 의료 서비스를 다 받았어요. 그러니 지원을 잘 해주더라고요. 필요한것을 명확히 알고 있으니 도움을 주는 것도 쉬웠나봐요. 모르면 힘들죠. 

그래서 도움도 많이 받고 특히 감정적인 부분을 많이 들여다봤어요. 그래서 둘째가 태어났을때 그냥 너무 행복했어요. 물론 몸은 너무 힘들었죠. 하지만 감정적으로 온전히 아이와 함께 할수 있었고 아이가 운다고 해서 나때문에 우는것이 아니고 괜찮은거다라는걸 알았죠. 그리고 이미 아이를 2년이나 키워서 아이를 만져도 아이가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죠. 손에 익었으니까죠. 기저귀가는 것이나 씻기는것등을 할때 허둥대지 않았죠. 갓난 아기때는 씻기는 것도 너무 엄두가 안나잔아요. 그래서 아이와 애착을 키우는데만 집중할수 있었어요. 

둘째는 또 다른 성격더라고요. 둘째는 항상 안겨있기를 좋아했는데 그 부분이 저에게 많은 힐링이 된것 같아요. 거의 6개월을 제 배위에서 잤거든요. 저도 알았고요. 그 아이가 그걸 필요로 한다는 것을요. 그 아이가 어떤 트라우마가 있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그냥 아기라서 그런거라는걸요. 그래서 그걸 줄수 있었고 더 가까워 질수 있었죠.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물어보신 것이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게 뭐였죠?

저는 아이를 낳아보지는 않았지만 현 의료체계에서 입양인에 대한 지원이 없잔아요. 어찌보면 우리도 트라우마를 이겨내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잔아요.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어요. 

그래요. 그게 큰 문제죠. 우리가 왜 스스로 트라우마 전문가가 되어야하죠?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한테 트라우마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인정하지도 않을 거에요. 우리 자신도 모르고요. 그리고 그 모른다는 사실때문에 언젠가 더 큰 트라우마를 겪을 수도 있죠. 트라우마는 항상 그런 식으로 작동 하잖아요. 우리의 몸이 항상 생존모드라는 사실도 모르고요.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입양되었다는 사실이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하잔아요. 그러도록 사람들이 바라고 우리도 그렇게 세뇌되었으니까요. 새로운 가족이 생겼으니까 된거다 라고요. 그리고 그렇게 생각안하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거라고 가스라이팅(역자 주-심리적 조종)을 당해 왔잖아요. 

그래서 문제를 만들지 않도록 너무 많은 질문을 하지 않도록 배웠죠. 안그럼 우리 가족 뿐만 아니라 다른 입양인들한테 상처를 줄수 있다고요. 우리 입양인들은 주변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하니까요(웃음). 그래서 많은 입양인들이 이 문제를 깊게 묻어두고 이런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갑자기 인생의 어떤 큰 계기가 되는 사건이 찾아오면 이것이 갑자기 사느냐 죽느냐 하는 정도 수준의 문제가 되어버리죠. 임신출산강좌 같은데 가보면 어린시절의 기억이 많이 떠오를거니 대비를 하라고 알려주잖아요. 그러면 다들 입양부모가 어떻게 키웠는지를 떠올리죠. 그런데 입양 이전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해요. 입양과 동시에 인생이 시작되었으니 입양 이전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교육받잖아요. 그래서 어린 시절에 너무나 잔인하게 부모로부터 떨어진 사실은 다들 기억을 안하죠.

 유전질환등 가족력이 없으니 무방비 상태로 인생의 각각 다른 단계들을 거쳐나가야하죠. 우리는 의학적으로 유령이나 마찬가지에요. 우리 스스로 경험하고 스스로 전문가가 해요. 아무런 교과서나 매뉴얼도 없는 채로요. 

네. 전문가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암흑속에 갇혀있죠. 많은 경우에 입양기관이나 친부모쪽에서 우리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경우가 많죠. 입양부모도 정보를 알고 있는데 아이들한테는 안 보여주기도 하고요. 그래서 전문가이기도 하고 아예 차단되어 있기도 하고요. 아직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면 참 의외에요. 보통사람과 다름 없다고 생각하죠. 아직 그리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없어서 잘 모를수도 있어요. 다들 각각 힘든 사정이 있으니까요. 제가 보기엔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는것 같은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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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냥 그 사람들이 무지해서 그냥 지나가는 아무한테나 그러는 거라고. 그런데 내가 동양인이니까 그런 말을 한거잔아요. 칭총(역자 주-동양인/중국인에 대한 멸칭) 내가 백인에 금발머리였어도 그런말을 했을까요? 그래서 인종차별이 아니라고 그냥 그들이 무지해서 그런거다, 너를 찍어서 말한 것도 아니었잖니 라고요. 그래서 그런 부분이 엄청 열받게 하는데 그건 또 입양과는 별도의 이슈죠. 사람들은 누구나 골칫거리들이 있잔아요 그래서 굳이 관여하고 싶지 않으니 문제를 문제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거죠.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그저 나는 너무 운이 없이 태어났나보다 하고 생각했었어요. 사람들한테 나한테 일어난 일을 설명하면 그냥 운이 없었던 거라고 했으니까요. 버스가 나를 그냥 지나치고 사람들이 날 안도와주고 나한테 소리지르고 무례하고 했던 일들이 그냥 오늘 하루 재수가 없어서 그랬나보다 생각했어요.  그 사람들이 오늘 기분이 안좋았나봐 그렇게 사람들이 저한테 말했으니까요. 너를 못봐서 그런거야 혹은 네가 외국인 유학생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거야 라고요. 항상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해명하려 했죠. 그래서 나는 왜 항상 일진이 안좋은 사람들하고만 맞닥트리려야 하나 하고 생각했죠. 

그러다가 제 파트너를 만나고 나서야 그게 인종차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외부자의 시선으로 더 넓게 볼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건 행운이죠. 그들은 이 상황에 덜 익숙하니 같은 상황을 다른 눈으로 보잖아요. 그리고 학연이나 지연등에 매이지 않았으니 편을 안들어도 되고요. 아무튼 그가 저랑 같이 살러 처음에 스웨덴에 왔을때 아주 놀라더라고요. “사람들이 너한테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하는지 여태까지 몰랐어?”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쳐다보는지 너를 보고 수근 대는지 여태 몰랐냐고요. 저는 그래서 여기는 항상 그렇다라고 했더니 그가 “그게 바로 인종차별이야” 라고 하더라고요. 외부인이 와서 지적을 해주고 나니 저에게도 그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때쯤부터 인종차별이 대한 여러 논의가 시작되었고 SNS가 특히 도움이 많이 됐지요. 저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때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어요. 내 전 인생이 인종차별속에 던져져 있었구나,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그렇게 애썼구나 하는 것들을요. 인종차별인것이 명백할때도 있지만 안그럴때도 많잔아요. 

그리고 항상 해명이 되죠. 

네 그때가 큰 계기가 되었어요. 

우리 백인 입양부모들이 여섯살 짜리 아이한테 “네 말이 맞아. 그건 인종차별이야”라고 말해줬다면 어땠을까요?  분명히 해주고 알려주고 또 네 느낌이 맞다고 해줬다면요. 

그러니까요. 

그런데 그러지 않았죠. 

제가 요즘 여러 이슈에 대해 열심히 활동을 하는 지금도 제가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하면 저희 부모님은 그냥 아무 말이 없으세요.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55세 이상들만 모여사는 은퇴촌 같은 곳에 사셨거든요. 스톡홀롬에 백인 중산층 이상만 사는 곳이죠. 거길 갔는데 그 전에도 여러번 방문한적이 있었고요. 한번은 어떤 사람이 저에게 여기서 뭐하는 거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부모님이 여기 산다고 했더니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냐고 하네요. 그게 아니고 우리 부모님이 여기 산다고 햇더니 이름을 대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거짓할 하는건지 시험을 해본거죠. “그 사람들 바로 저기 저집에 사는 사람들이지?” 하면서요. 그래서 아니라고 저집이 아니고 이집이라고 아무튼 그런 식으로 제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가 충분해지고 나서야 포기하더라고요 그래서 저희 부모님한테 말했더니 그 사람이 조금 웃긴 사람이라서 그래 하고 그냥 웃고 넘어갔어요. 다른 때는 환경미화원인 줄로 여겨졌던 때도 있고요 혹은 가사보조원인 줄로 여겨졌던 적도 있고요. 아무튼 방문할때마다 여러 질문을 받아야 했죠. 그런데 저희 부모님은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으셨죠. 너무 분명한일들인데 말이죠. 

아이들이 프레시안(역자 주 – 한국의 인터넷 신문)에 글을 기고 했다면서요. 어떻게 하게 된거죠?

들어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스웨덴한국인모임(Swedish Korean Adaptees)이라는 곳에서 활동하고 있었어요. 지난 몇년간 열심히 해서 한국의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정서도 제출했어요. 마침 그 시기부터 조직된 덴마크의 입양인들하고도 연합했어요. 그들도 그들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했거든요. 프레시안 측에서 입양인들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이나 배우자들의 목소리도 듣고 싶다고 해서 많은 글이 올라왔는데 우리 아이들한테 이야기했더니 아이들도 너무 하고 싶어라 했어요. 입양에 대해 궁금한것이 아주 많거든요. 어떻게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요

그래서 아이들도 한마디를 거들고 싶어햇어요. 그래서 저는 저 대로 쓰고 파트너가 아이들을 도와서 셋이 함께 글을 썼어요. 제가 끼면 아무래도 영향을 줄까봐 저는 빠지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파트너가 아이들을 각각 인터뷰 하고 나서 그걸 옮겨 적었더라고요. 도입부만 그가 쓰고 나며지는 거의 그대로 싣었다고 하더라고요. 순서 정도만 바꾸고요. 아이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살리고 싶었대요. 그래서 그냥 아이들의 대화 같은 느낌을 받으실거에요. 

아이들이 쓴 내용 중에 의외의 부분은 없었나요? 

제가 제일 놀랐던 부분은 아이들이 상당히 강경하더라고요. 강제로 입양보낸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말이에요. 여기서는 그들이 악인이자 적이니까요. 아마도 제 파트너가 그부분을 좀 순화시켰을거에요. 아들아이가 아주 신랄하게 표현을 해서 파트너가 다르게 표현해보라고 부탁했대요. (웃음) 제가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들이 벌을 받기를 원해요. 그리고 서서히 엄마의 입양이 자신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아이들이 알아가고 있어요. 한국에 친척들이 있는지, 왜 할머니 할아버지는 못만나는지, 이제는 만날 준비가 되었는지 아이들이 거의 매일 물어보거든요. 삼촌 이모가 있는지, 엄마의 형제자매들이 엄마의 존재에 대해서 아는지, 다음번에 한국에 가면 만날수 있는지 등등요. 그들이 자기들에 대해서 아는지, 우리를 생각하는지등등 궁금한 것도 많고 지난 번에 물어본 이후에 혹시 엄마가 더 알아낸것이 있는지 확인하고요. 자기 친구들한테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답을 해줄수 있는 것들이 몇개 없으니까요. 대가족이나 혹은 친척간에 친밀하게 지내고 물리적으로도도 가깝게 살고 몇 세대씩 거슬러 조상들을 따질수 있는 친구들도 있는데 자기들은 그러질 못하니까요. 언어도 마찬가지에요. 그리고 특히 이쪽에 사는 사람들은 언어를 두개 혹은 세개씩 하는것이 희귀한 일이 아니잖아요. 아주 멋지죠. 그래서 이곳이 더 좋기도 한데. 제 아이들도 스웨덴어와 영어 이중언어구사를 하긴 하지만 사람들이 한국어를 할거라고 기대하는데 못하니까요. 스웨덴인도 아니고 영국인도 아니고 한국사람처럼 생겼어요. 그리고 항상 왜 한국말을 못하는지 계속 설명해야 하고요. 실제 한국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고 제가 어설프게 간신히 흉내내서 만든 한국문화를 경험해야 하니까요. 그럴때면 뭐랄까 문화적 도용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아이들은 점점 커가고 생각도 감정도 커가는데 이제는 저만의 상실이 아니라 그들도 그들만의 이야기에 상실을 경험하는것 같아요. 

아이들이 그들만의 상실을 경험한다는 사실이 예상 밖이었나요?

그렇진 않아요. 공부를 많이 했거든요. 이런 질문들에 관심이 많고 제가 하는 일이 쓰고 그리는 일이고 또 활동가이다보니 항상 이런 일들에 관여해왔고 그래서 많이 참여하고 또 공부를 많이 했어요. 그리고 이쪽 지역에서는 제국주의 식민지와 대량학살등을 경험한 원주민들이 있기 때문에 세대간의 단절 및 손실이라는 주제가 아주 큰 화두거든요. 그리고 그 모든 주제를 입양하고도 연관 지을수 있어요. 그래서 이 트라우마가 어떻게 세대간에 전달이 되는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요. 제 아이들은 아직 어리지만 다른 많은 입양인들의 자녀들이 목소리를 더 내기 시작했어요. 이제 대부분의 입양인들이 부모가 되었잖아요. 부모가 그 자신의 입양스토리에 관심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들 자신의 상실 즉 정체성문제나 뿌리가 없다고 느끼는 거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들을 말이에요. 그들이 스스로 입양인이 아니라는 사실만 빼고는 우리의 입양스토리와 거의 흡사하죠. 그래서 그런 면에서 제 아이들도 그걸 경험할거라 생각하고 준비를 하려고 그런 질문들을 대비하고 있어요. 

그 글은 프레시안에 실렸는데요 제 아이들이 소개됐어요. 한인입양인 엄마에게서 태어나서 스웨덴에서 태어났고 뉴질랜드에서 자라고 있다고요. 아들아이의 이름은 테디인데요 축구를 좋아해요. 축구가 그 아이의 전 세상이에요. 딸아이의 이름은 포피인데 토끼와 발레를 좋아하고 만들기도 좋아해요. 귀엽네요. 세계여러나라에서 모인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니는데 백인이 한명밖에 없대요. 아주 의외죠. 우리가 사는 동네가 아주 백인 위주 동네거든요. 아이들 반에 동양인이 많아서 너무 좋아요. 

아이들 모두 한국에 두번 다녀왔는데 처음에 갔을때 제 친모를 찾았는데 그건 기억을 못해요. 한살하고 세살이었거든요. 그리고 조금 큰 후에 다시 한번 갔었는데 그때 제 아버지를 찾으려고 했었는데 못 찾았어요. 그래서 저의 이야기에 아주 궁금한게 많아요. 제 파트너가 아이들을 인터뷰했을때 아이들한테 이렇게 저렇게 말해야 한다고 미리 교육시키거나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인터뷰 질문이 아무래도 그런 내용을 담고 있었겟죠.  그러니 아주 진솔한 이야기에요.  제 딸 포피의 편지에요

우리 엄마는 슬프대요. 엄마의 엄마와 함께 할수 없고 엄마의 형제자매들과 아빠에 대해서 알수 없어서요. 한국에서 자라지 못해서 속상하고요. 엄마가 스웨덴에 살때 엄마만 동양인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백인이었대요. 사람들이 엄마가 다른 나라에서 왔다고 엄마에게 못되게 굴었대요. 엄마는 사람들이 한국말을 하면 못알아 들어서 속상하대요. 내 학교의 친구들이 친척들이나 조상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나만 한국에 가족들이 없어요. 한국말을 못해도 괜찮지만 언젠가는 배우고 싶어요. 내 친구들은 모두 자기 조상들의 말을 할수 있거든요. 저만 할머니할아버지의 말을 못해요. 너무 많은 아이들이 가족으로 부터 떨어져 다른 나라로 보내졌대요. 너무 나쁜 일이에요. 우리 엄마한테 거짓말을 하고 엄마의 정보를 조작해서 다른 나라로 보낸 사람들은 벌을 받아야 해요. 엄마가 스웨덴으로 입양되지 않았다면 나는 맛없는 스웨덴 죽을 먹지 않고 대신 맛있는 한국음식을 먹을수 있었을텐데 말이에요. 

포피가 지금 몇살이죠?

10살이에요. 여기서 말하는 맛없는 스웨덴 죽은 실제로는 맛있어요. 쌀로 만든 죽인데 크리스마스에 먹는 음식이에요. 일년에 한번 만드는데 아이가 안 좋아하거든요. 한국 죽도 만드는데 그건 좋아하고요. 이건 테디가 쓴 내용이에요. 

우리 엄마가 슬픈것 같다. 한국에서 입양보내져서.  우리 엄마는 사람들이 엄마를 엄마의 엄마로부터 떼어내서 화났다. 그리고 엄마의 엄마가 엄마의 여동생을 못 만나게 해서 화났다. 왜냐면 상황이 복잡해져서라고 한다. 우리엄마한테 이런 일을 한 사람들은 모두 감옥에 가야한다. 나도 속상하다. 한국 사촌들을 만나고 싶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모두 만나고 싶다. 한국에 가서 만나면 정말 재미있을것 같다.  같이 맛있는 음식 특히 부산에 있는 시장에서 그릴에 구운 생선도 먹으면 좋겠다. 학교 친구들은 내가 중국에서 온줄 안다. 어떤 애들은 나를 보고 칭총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건 인종차별이다. 한국에서 한 학기동안 다니러 온 애가 있었는데 그 애는 영어를 잘 못했다. 나는 그애한테 한국어로 말하고 싶었는데 못했다. 그리고 그애는 서울로 돌아가버렸다. 

나는 손흥민 선수를 좋아한다. 그가 나와 같은 한국인인데 우리 팀인 토튼햄을 위해서 뛰니 너무 좋다. 손흥민 선수를 보면 나도 멋지게 되고 싶다. 나는 한국인이다. 한국인인것이 좋고 한국에 또 가고 싶고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 친구도 만들고 싶다. 한국에 할아버지가 많이 아프다고 들었는데 우리의 존재를 몰라서 못만난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할머니에게 엄마와 친구가 되라고 말하고 싶다. 할머니한테 할머니의 가족들한테 우리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고 싶다.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한국에 가서 같이 지내면 좋겠다. 우리 엄마가 할머니의 가족들하고 친구가 되면 좋겠다. 

아이들 성격이 확연히 다른것이 느껴지죠? 테디는 외향적이고 활동적이에요. 그래서 조용하고 내성적인 우리 셋하고는 많이 달라요. 사람들을 좋아해서 대가족을 원하고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죠. 이 글에서도 보면 모든 사람들을 다 만나고 싶대잔아요. 모두 친구가 되어서 함께 모여  같이 맛있는거 먹자고요. 테디가 한국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중에 하나가 대가족이 있는 친구집에 방문해서 함께 요리해서 먹으면서 떠들고 놀았거든요. 그게 좋았나봐요. 그래서 가족이 생기면 그렇게 될것 같은가봐요. 귀엽기도 하고 안스럽기도 하죠. 다른 사람들은 절대 모를거에요. 

한가지 와 닿는 부분이 테디가 입양인들하고 똑 같네요. 받아들여지고 싶어하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싶어하고 그러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는. 

그래서 왜 복잡한 일인지 왜 할머니 할아버지가 엄마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는지를 이해시키려고 설명해주었는데 아직 아이가 이해하기는 좀 힘든가봐요. 

아직 가족들한테는 공개가 안되었나보네요. 리사씨의 존재가. 

 작가이자 예술가잔아요. 그 부분을 많이 못 다뤘네요. 할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요. 작가로서의 활동에 대해 좀 이야기해줄래요? 어떻게 하면 작품을 볼수 있는지 도요.

지금까지 두권의 그래픽 노블(역자 주 – 만화 소설)을 출간했어요. 하나는 Palimpsest (역자 주 – “오래된 종이 위에 다시 쓰다”이라는 뜻)라는 소설인데 영어로도 번역이 되어서 스웨덴 사람들 말고 다른 사람들도 읽을 수 있어요. 제 뿌리를 찾는 여정을 담은 책이에요. 또한 입양과정중에 있었던 조작이나 입양기관들의 부패등을 알게 되었을때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과정을 그리고 있어요. 두번째 책은 직접적으로 제 이야기는 아니지만 첫번째 책의 2편 같은 느낌인데 칠레입양인을 다루고 있어요. 마리아 디에마르와 그녀의 입양오빠가 칠레에서 각각의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스웨덴으로 왔거든요. 지금 활동가가 되어서 아동입양에 대한 일을 많이 하고 있어요. 아동입양과정중에 일어나는 부정등을 알리는 일부터 칠레의 사기입양등을 고발하는 일 등등요. 아주 대단한 활동가인데 그녀의 이야기에 저도 자극을 많이 받고 또 그녀가 해주는 활동들이 너무 고마워서 그녀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었어요. 활동가들은 아무런 보상도 못 받잖아요. 개인 시간을 내서 싸워야 하고 또 모든 걸 바쳐 전념해야 하고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굉장히 멋지지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제일 주력하는 분야인 입양과정에서의 조작과 부정을 조명하는 일이기도 해요. 이렇게 두 권이 있고 마리아에 대한 책도 곧 영어와 스페인어로 번역이 되기를 바래요. 칠레 사람들도 읽을수 있도록요. 

두번째 책 제목이 뭐라고 했죠?

아직 번역이 안되어서 정해진 영어제목은 없는데 일단 “Excavated Earth(역자 주 – 파헤쳐지는 세상)”이라고 했어요. 글자 그대로 번역한거에요. 

스웨덴어로 쓰여졌나요?

네. 올해 초해 나왔어요. 

스펠링이 어떻게 되나요?

Palimpsest요. 그리스어인데 오래된 문서에 글씨들이 바래지고 나면 그 위에 다시 쓰고 다시 쓰고 하는 과정을 부르는 말인데 우리의 입양과정에서 우리한테 일어났던 일을 묘사하는 말로 딱이라고 생각했어요. 입양 이전의 삶이 있고 입양 후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잔아요. 우리의 기록이 지워지고 다시 쓰여졌고요. 새로운 신원이 부여 됐잖아요. 아름다운 말인데 참 복잡한의미를 담고 있죠. 만화소설이에요. 둘 다요. 인스타그램을 활발히 까지는 아니지만 주로 사용해요. 제 작품이나 근황 혹은 견해등을 보시려면 인스타그램이 제일 빠를거에요. 입양에 대해 새로운 소식등이 나올때 공유하기도 하고 짧은 견해를 올리기도 하고 맘에 안드는 뉴스거리들을 볼때 도 자주 올리고요. 너무 자주 있어서 문제지만요. 

아이디가 Chung.woolrim 인가요? 네, 맞아요.  

오늘 이렇게 나와주어서 고마워요. 우리가 처음에 의도한 대로 이야기가 흘러가진 않았지만 너무 좋았어요. 내밀한 이야기까지 해주어서 너무 고마워요. 많이 와 닿았어요. 앞으로도 계속 연락이 닿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놀랐어요. 이야기나 활동이야기만 해서 지루한것 보다는 나았을것 같아요. 가끔씩 개인적인 이야기를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 팟캐스트 들으면 되겠네요. 너무 많이 공개를  했나 싶기도 하고요. 

후회되면 말씀하세요.  전 너무 좋았어요. 전 엄마는 아니지만 많은 입양인들이 아이들을 키우며 리사씨가 경험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문제들을 겪더라고요. 이야기를 정말 잘 해준것 같아요. 마치 내가 직접 경험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산후 우울증에 대한 부분이냐 분만중에 있었던 트라우마이야기 말이에요. 그런 이야기는 여기서 듣지 않았다면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거에요. 

말하자면 할 이야기는 더 많은데 조금더 관련 연구가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책도 있고 많은 입양인들이 부모가 되면서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는 있어요. 이제는 우리가 모두 그 나이이니까요. 많은 입양인들이 부모가 되면서 그런 일들을 경험할때 “안개를 뚫고 나오다(Coming out of the fog)”라는 표현을 자주 하는데 저도 제가 부모가 되기 전까지는 저의 입양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그 말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많은 입양인들이 다들 그 시기에 목소리를 내거나 활동가가 되거나 하죠. 부모가 되는 일이 정말 큰일이니까요. 다른 생명체를 돌봐야 한다는 인생의 큰 변화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 배우게 되는 시기이니까요. 그래서 상실과 고통이 함께 수반되는데 그렇게 반가운 일들은 아니죠. 내가 어떤 트라우마가 있었는데 그걸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고 또 알아서도 안되었었다는 자각이 수반되니까요. 

제 경우에는 상실과 함께 엄청난 분노가 찾아오고 심하게 실망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온거나 마찬가지죠. 그리고 그걸로 만족해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마침내 나중에 모든 걸 알게 되었다고 해도 얻을수 있는 것은 없죠.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입양되었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받을 수 있는 도움은 없고요. 내 스스로 빈칸을 채워야 했죠.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의료체계에서 입양인에 대한 도움은 없어요. 그러는 동안 우리는 서서히 꺼져가고 있고요. 

                                                                                                         번역 : 전유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