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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6, 에피소드 20: 사라 존스와 사랑의 표식

“‘팔에 문신이 있는걸 보니 부모가 되찾고 싶어 했던것 같은데 이렇게 버려졌으니 입양보내도 되겠다’ 고 입양기관 담당자가 판단했대요.”

 이번 주인공 사라 존스(Sara Jones)는 “혹시 내가 나온 테드 톡 봤어요? 조회수가 200만명 정도 되는데..” 라고 말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사람입니다. 다른 많은 우리입양인들과 마찬가지로 사라도 자신의 나이를 정확히 모른다고 합니다. 다만, 한국의 아버지가 그를 입양보낼 계획이 없었던 것만은 확실히 압니다. 그 증거가 있으니까요. 

제 이름은 사라 존스에요. 1977년에 미국의 유타주로 입양되었어요. 그 뒤로 이곳에서 자라며 경력도 쌓았고 지금도 살고 있어요. 저를 지칭하는 대명사로는 “그녀”를 씁니다. 법적으로는 48세이지만 몇년 전에 친가족을 찾았을 때 제 진짜 생일을 알았는데 실제로는 제가 8달 일찍 태어났더라고요. 중년의 나이에 내 나이가 실제로는 내가 알던 것보다 더 많았음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반색할 만한 사실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또 그래서였나보다 하고 이해가 되는 것들이 있었고요. 그러니 마흔 아홉인셈이죠. 오늘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 사는 곳은 어디죠?

유타주의 솔트레이크 시에 살고 있어요. 

테드톡에서도 다뤘지만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된 이야기를 좀 해주시겠어요?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테드 톡을 보셔도 됩니다.(https://youtu.be/8kjN1PnEGhA) 대략 말씀드리면 이제는 친가족을 찾을때가 된 것 같다고 느낀 때가 왔어요. 그리고 저는 운이 좋은 경우인데 제 몸에 입양되던 당시에 남겨진 것이 분명한 표시가 있었거든요. 신분확인을 위해 그게 있는 거라는 감이 있었고요. 왼쪽 팔 앞부분에 있었는데 어릴때 제 양부모가 수술로 그 문신을 제거해버렸었어요. 당시에 세살이었는데 이 미국에서 그런 문신을 가지고 살아가면 힘들거라고 생각하셨나봐요. 70년대였으니까요. 미국 문화에 동화되어서 살아가야 되는데 그런 이상한 문신이 있으면 힘들거라고요. 아무튼 그 문신 덕에 가족중의 일부를 찾을수 있었고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전부 다 찾은 것은 아니고요. 그래서 오늘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부분이 우리가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 현실이에요. 우리가 어디서 왔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는 현실이요. 

와우, 굉장히 궁금하네요. 그래서 아직도 그 표식이 남아 있나요?

네. 성형수술로 제거됐었어요. 그때는 그게 유일한 방법이었대요. 그래서 팔에 희미하게 흉터만 조금 남아있었는데 어릴때 사진을 보면 가리고 있더라고요. 햇빛을 받으면 흉터가 진해질수 있으니까요. 아주 희미해서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 봐야만 보이는 정도였죠. “나에 대한 특이한 사실” 같은 토크 주제가 나오면 “내가 실은 문신이 있는데.”하는 정도의 소재였어요. 이 곳이 아주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곳이고 또 문신의 모양이 사람들이 그리 반겨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살면서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왔고요. 흔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어서 친부모를 찾겠다는 결심을 했을때 네임펜으로 문신 모양을 따라서 다시 그린후 그 사진을 가지고 여기 저기에 올렸죠. 

십자가 모양이었나요? 

무슨 표시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십자가 모양 혹은 알파벳 “X”에 가깝긴 한데 그 밑에 점 네개가 있었고요. 저희 부모님도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셨고요. 제 입양 서류에 그에 대한 언급이 있긴 한데 그들도 모른다고 적혀있더라고요. 혹은 알아도 모른척 했거나요(웃음). 이곳 유타에는 70년대 80년대에 동양인 비율이 1퍼센트에서 1.5퍼센트 정도였어요. 지금은 주 전역에 2.5 퍼센트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거의 대도시 근처에 집중되어 있긴 하지만요. 솔트레이크시만 따져보면 아시안 비율이 6-7%정도 되는데 생각보다 꽤 높죠. 아무튼 그때는 아시안을 만나기만 하면 왠지 말을 걸어야 할것 같고 그랬어요. 그래서 대화를 하게 되면 물어보기도 했어요. 혹시 이 모양이 무슨 뜻인지 아는지 본적이 있는지 혹시 중국쪽 상징인지 불교쪽인지 등등요. 그런데 확실히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 문신을 가지고 어떻게 했나요? 문신 덕에 찾게 되었나요?

진짜는 그때부터였죠. 입양되었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잘 몰랐으니까요. 일단 제 정보를 한국인들에게 뿌려야했죠. 입양 기록에 적힌 제가 태어났다는 도시는 알고 있었어요. 당시에 약 8천명 정도가 Korea Adoption Service(아동권리보장원)를 통해 가족 찾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곳에 제 정보를 입력할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어요. 어떤 핵심 키워드를 입력할수가 있게 되어 있었는데 저만 유일하게 “문신”이 핵심 키워드였어요. 꽤 특히하잖아요. 그리고 그곳 이외에도 페이스북등등 여기 저기에 제 정보를 올렸죠. 사람들도 많이 퍼날라주고요. 너무 감사했어요. 그때 페이스북에 한 그룹이 생겼는데 아동권리보장원에 있는 정보를 샅샅이 훑어서 퍼날라주던 그룹이었어요. 특히 어떤 특이한 정보가 있어서 친부모 찾기에 유리하겠다고 생각되는 포스팅들을 말이에요. 그 그룹은 특히 납치당한 아이들에 대한 정보를 많이 올려주었고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 그룹을 팔로우했는데 제가 그들의 마흔 아홉번째 포스팅이었거든요. 그걸 제 오빠의 지인이 보고 그 문신을 알아본거에요. 

그러니까 오빠의 친구가 오빠한테 연락을 한거네요. 오빠한테도 같은 문신이 있었고 그걸 친구가 봤었나봐요?

네. 저에게 오빠가 둘이 있었는데 오빠들이 다 같은 문신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우리를 고아원으로 보낼때 잠시 맡겨만 둘 계획이었었나봐요.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때는 포기각서 같은 것을 썼어야 했나봐요. 그래서 그러기로 결정을 했을때 나중에 찾기 쉬우라고 아버지가 우리들의 팔에 문신을 새긴거죠. 70년대에는 이미 해외입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였고 그래서 우리를 못 찾을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을 한거죠. 오빠들은 결국 그 고아원에 8년이나 머물렀더라고요. 해외입양을 안가고요. 둘이서 같이 있었고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와 가족들과 함께 살았대요. 그런데 한국에는 문신에 대한 편견같은 것들이 있어서 친구들한테 놀림을 당했대요. 성형수술로 제거할만한 형편이 안 되었으니까요. 오빠들도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내왔는지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그들만의 사연이 있었던 거에요. 그 문신을 보고 우리 오빠들한테 연락했던 그 친구분이 그러길 제 오빠들이 그 문신만 보면 해외로 입양보내진 여동생이 생각나서 힘들어 했다고 기억하더라고요. 다들 너무 분노했고 특히 아버지가 많이 힘들어하셨대요.  

그럼 이렇게 가족을 되찾게 된 과정이 상당히 빨리 진행되었나요? 마음의 준비는 되어있었나요?

준비가 되어있었다고 딱히 말하진 못하겠어요(웃음) 가족과의 재회는 빨리 진행이 됐죠. 이래저래 넘어야 할 장벽들이 조금씩은 있었죠. 진짜 큰 장벽은 막상 재회를 하고 나서 찾아왔죠. 일단 엄청난 언어의 장벽이 있잖아요. 통역이 항상 정확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모두가 다 저를 찾아서 기쁜 마음으로 소통을 한다는 것은 알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럴거면 도데체 나를 왜 찾아낸거야’ 같은 의문은 전혀 안들었어요. 그런 사례들도 있잖아요. 그래서 한국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일도 즐거웠고요. DNA 검사 결과는 좀 의외였지만 다른 모든 증거들이 맞아 떨었거든요. 그래서 만날 계획을 바로 잡았어요. 그때는 제가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막상 그 순간이 되면 엄청난 양의 새로운 감정들이 밀려 오잖아요. 엄청나고 엄청 지칠만큼에요. 

그리고 그때 이곳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네 입양부모님들은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였어요. 거의 모든 사람들이요. 대답하기 지칠만큼요. 그래서 지인들이 같이 점심이나 먹으며 이야기 하자는 이런 말들이 다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 하는 것도 너무 지치고 무엇보다 아직 저에게도 낯설고 또 현재진행형 이었잖아요. 다들 너무 잘 됐다고 해피엔딩이라고 이야기 좀 더 해달라고 하는데 너무 지칠정도였죠. 특히 이 모든 일들을 멀리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어떤 축하 이벤트 정도로 생각하고 잘됐다고 포옹해주고 박수쳐주거나 하는등의 미국인의 관점과 방식들이 좀 빈정상하더라고요. 실제로는 굉장히 복잡하고 무거운 문제인데 말이죠. 

가족들이 강제로 헤어져야 했고 아동인신매매였을수도 있는 그런 심각한 상황이죠 아버지가 해외로 보내질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포기각서를 썼던 안썼던간에 말이죠. 

맞아요. 요즘 상실(역자 주 – Grief)의 개념이 많은 화두가 되어서 반갑기도 해요. 보통 입양인들 본인이 느끼는 상실감을 많이 생각하는데 우리 아버지가 느꼈을 상실감을요. 아빠가 다치셔서 우리를 보러 자주 못 왔었대요. 그래서 할머니가 대신 보러 오곤 했었는데 어느날 막내 손녀가 입양을 위해 다른 고아원으로 보내졌다고 하더래요. 그냥 통보를 받은 거죠. 그래서 아버지가 느꼈을 상실감을 생각해봐요. 찾을 수 있는 방도도 없었고 뭐랄까 아이가 죽은 거나 마찬가지 잖아요. 

그래서 저는 아이가 다른 나라로 입양을 가게 되면 그 가족들 전체가 죽는거나 마찬가지라고 봐요. 되돌릴수도 없고 되돌릴 권리도 없고요. 그냥 잊어버리고 살거나 해야죠. 사랑했던 사람이 죽은 거나 마찬가지죠. 그래서 테드톡에도 나갔던 거에요. 실은 솔트레이크 시티의 TEDx(역자 주 – 특정 지역인들이 모여서 여는 강연회)였는데 테드톡 담당자들이 TED로 뽑아줬어요. 아무튼 그런 감정들이 입양인들에게는 아주 분명한데 일반 사람들은 알길이 없죠.  

주변 사람들 특히 비입양인들로부터 제일 많이 들었던 질문중에 하나가 “친가족을 만나는 것에 대해 입양부모가 어떻게 생각할까?” 라고 했잖아요. 그 질문이 왜 그렇게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걸까요? 이 일이 입양부모의 허락이라도 받아야 하는 일로 보여지나봐요.

 양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할때 아주 쉬운 질문이지만 그런 질문을 받을때 내가 심정이 어떤지를 모르고 묻는 것 같아요. 다른 입양인들도 똑같이 느낀다고 가정하진 않을게요. 제 경우에는 그런 질문을 받으면 제 입양부모와의 지난 45년 세월이 다 떠오르거든요. 좋은 때도 있었고 안좋을 때도 있잖아요. 문제는 입양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차원을 넘어서 내가 선택한 답에 대해 해명을 해야 한다는 거에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제 선택을 정당화해야 하는 거죠. 그게 너무 스트레스였어요. 그래서 그냥 “이건 온전히 내 개인의 일이야” 라고 핵심만 대답하곤 했어요. 제가 그때 나이가 마흔이 넘었었는데 오년전이었으니 마흔 셋쯤 되었을때에요. 나이가 중요한건 아니지만  

완전히 성장한 개인이죠

그렇죠. 다 큰 여자이고 이건 내 일이라고요. 누구 허락을 받을 일이 아니라고요. 내 남편에게조차도요.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죠. 그렇다고 해도 동의를 구해야 할 문제는 아니죠. 문제는 우리 입양인들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할때마다 항상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수 있도록 이해시켜주어야 할것만 같은 입장에 있어요. 그래서 오히려 더 스트레스였던 것은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그런 질문들을 하는데 저에게는 가볍게 답할수 있는 질문들이 아니었다라는 거죠. 그들이 제가 왜 그래야 하는지 아님 왜 안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해명을 들을 권리가 있는것도 아니고요. 

이 사회가 우리 입양인들은 그저 감사하며 살아야 하고 친부모 찾기를 하면 배은망덕한거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으니 그런 생각없는 질문들이 튀어나오는 거죠. 혹시라도 입양부모가 상처받는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그들의 감정을 우선시하면서요. 

평생을 다른 사람의 기분을 먼저 살피며 살았잔아요. 또 그래야 하는거죠. 내가 잘못했을지도 모른다는, 평생 내 모든 행동의 밑바닥에 깔렸있던 감정말이에요. 그 사람들은 자기들을 뭘 물어보는지도 모를거에요. 그래서 혹시라도 주변에 입양된 사람이 있어 대화를 할때 이런 부분을 배려해 줄수 있도록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참 유익한것 같아요. 아무튼 서로 깊게 아는 사이이거나 하면 그래 실은 이래하며서 이야기를 해줄수도 있지만 아무 생각없이 그냥 치고 들어오는 그런 무지한 수준들도 있잔아요. 물론 다들 악한 의도는 없죠. 사람들도 다 너무 깊고 예민한 주제만 아니면 다들 배우고 싶어할 거라 생각해요

그런데 또 미세차별인 경우도 있잖아요. 쉽게 힘든 경우인데. 그런 경우 피드백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도 중요하죠. 그냥 대충 넘겨버리고 말아햐 하는지 아니면 이 사람이 들을 귀가 있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인지 항상 상황판단을 해야 하죠. 그런 부담이 항상 있는 것이 억울하지만 사실이에요. 

한국에서 가족들과 재회했을때의 이야기를 좀 해주실래요? 어떤 생각과 느낌 이었는지 말이에요. 어떤 입양인들에게는 어쩌면 평생 경험할수 없는 일 일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아직 대중에는 공개안 한 이야기가 있어요.(웃음) 만감이 교차하는 상황이었어요.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할 상황이었죠.  장거리 비행등 모든 것이 지치죠. 그리고 방송 촬영이라는 복병도 있었고요. 출발하기전 미국에서부터 촬영을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었어요.인천공항에서 세관을 지나서 특정 게이트로 나가야 하잖아요. 담당피디로부터 어느 게이트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문자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막 게이트를 나가려고 하는 참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공항 직원이 다른 게이트로 나가야 한다고 하는 거에요. 바로 게이트 앞에 서있었는데 말이에요. 제 남편이 한국어를 조금 할줄 알아서 통역앱등을 총 동원해서 바로 이 게이트 앞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곳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는데도 안된다고 다른 게이트로 나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니 여기 지금 이사람들은 다 뭐냐고 이 사람들은 다 이 게이트로 나가는데 왜 우리는 안되냐고 도데체 우리한테 왜 이러는거냐고 항의했어요. 이해가 안되었죠. 오빠랑 방송 관계자들이 바로 저 문앞에서 몇시간째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다른 게이트로 가라고 말하기가 너무 미안한 상황이었거든요. 조금 스테레오 타입을 동원해서 말해보자면 한국의 부정적인 면을 그 직원이 보여줬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우린 그냥 갈거라고. 사람들이 기다린다고 우리 그냥 이 게이트로 나갈거라고 막 성질을 부렸어요. 그랬더니 보내주더라고요. 그래서 그 영상을 보시면 제가 웃고있다가 갑자기 표정이 확 굳는걸 보실수 있어요. 안그래도 힘든데 말이죠. 공항 빠져나가기가 그렇게 힘들줄 누가 알았겠어요. 오빠들은 이 이야기를 몰라요. 제 입장에서는 ‘설마 지금? 여기에서까지 세상이 나한테 이렇게 팍팍할까’하며 살짝 울컥한 기분이었거든요. 제 남편과 아이들은 제가 한번씩 폭발하는 것에 익숙해서 ‘지금 엄마 건들면 안돼’ 이런 분위기였고요. 

첫 만남은 아주 기뻤죠. 물론 핸드폰등으로 텍스트를 사용해야했지만 나랑 똑같이 생긴 사람들을 마주하는 기분이 좋았어요. 동시에 시각적인 정보를 마음속으로 빨리빨리 평가를 해야 하잖아요. 일단 시각적으로 외적인 면을 평가해야하죠. 오빠들이랑 포옹을 했는데 저랑 몸집이 비슷하더라고요. 제가 미국에서는 많이 작은 편이거든요. 오빠들이랑 키가 비슷하네 두상이 똑같네 등등의 정보가 즉각적으로 들어오고 알아채고 관찰하고 하는 평가들이요. 그리고 수십년을 걱정하고 궁금해하다가 마침내 만난 기쁨도 그렇고요. 오빠들이 궁금해 했던것과 제가 궁금해햇던 것은 많이 달랐어요.  저희 오빠들은 제 어릴때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니 오빠들에게는 큰 아픔이었죠. 막내동생을 잃어버렸다는. 살아 있기는 하는지 화목한 가정을 만났을지 하는 걱정들 말이에요. 그래서 오빠들이 알고싶어했던 것과 제가 알고 싶어햇던 것이 달랐죠. 저는 우리 가족들은 어떻게 생긴 사람들일까 하는 궁금함이었고요. 저는 어릴때 읽었던 “꼬마고아 애니”스토리말고는 지금까지 한번도 제 남편과 아이들을 잃는다는 상상도 해본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 모든 가족들과 오빠들이 생겼다는 것이 피부로 와 닿았죠. 저는 자매들하고만 자랐거든요. 그래서 제 입장에서는 많은 것을 관찰하고 머릿속으로 정리해야 하는 순간었지만 오빠들 입장에서는 지난 수십년간의 세월동안 쌓여진 원망과 아픔들이 터져나오고 해소되는 시간이었죠.  그 사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저를 다시 찾은 것을 못 보시기 때문에 더 원통했을것이고요. 그래서 오빠들은 오빠들 나름대로 해소할 것들이 있었고 저와는 달랐죠. 그렇지만 한 마음으로 기쁜것은 같았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때 분노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잔아요. 오빠들도 그랬을까요?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아버지에 대해 분노했을수도 있고 사회나 한국 정부에 대해 분노했을수도 잇고요. 사라씨도 분노를 느꼈나요 아니면 아직인가요?

그럼요. 가족들은 찾기 전부터 많이 화나 있었어요. 저는 다른 입양인들처럼 저의 입양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었어요. 아니 그러도록 제가 저를 놔두질 않았죠. 그래서 마침내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분하고 원통한 감정이 올라 오더라고요. 제 앞에 깊게 자리하고 있었지만  한번도 다뤄지지 않았던 감정 말이에요. 그 감정을 정확히 이름을 붙이지는 못하겠어요. 지금은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도 거짓과 허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잔아요. 그런데 제가 입양기관에 연락해서 혹시 70년대에 전주에서 온 문신이 있었던 여자 아이를 기억하는냐고 물었거든요. 그랬더니 굉장히 상투적인 형식으로 당신의 생일은 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정보의 전부입니다. 하는 답이 돌아왔어요. 제가 묻지도 않았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제 진짜 생일을 알고 있었던 거죠. 저는 평생을 몰랐는데 말이죠. 제 삼촌이 확인을 해줬어요. 제 생일이 삼촌의 생일에 가까웠었대요. 년도는 달라도 날짜가 하루이틀 정도만 차이났었대요. 그들이 제 정보를 40년 넘게 가지고 있었고 저는 몰랐다는 거죠. 

그리고 또 분노했던 순간이 입양기관에서 제가 버려졌다고  주장했잔아요. 제 기록에 남겨진 서류가 있었는데 흔치 않은 일이죠. 담당자가 남겨둔 서류에 의하면 “팔에 문신이 있는걸 보니 부모가 다시 찾길 원한 모양인데 이렇게 버려졌으니 해외로 보내도 되겠다” 라고 써있었어요. 버려졌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그들이 규정할수 있죠? 저는 오빠들이랑 같이 맡겨졌고 모두 같은 문신도 있었잔아요. 그리고 근처 지역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가 누구의 자식들인지 알았을수도 있고요. 그런데도 가족과 떼어내서 해외로 보내버렸잔아요. 그런 결정을 누가 할수 있는거죠? 서류에 적혀 있던 말도안되는 결정을 어떻게 할수 있는거냐고요. 그리고 법적으로 “포기”됐으면 해외로 보내도 되는거였냐고요. 

수많은 아이들이 이렇게 “버려졌다”는 꼬리표를 달고 해외로 입양이 되었다는 이 억울함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 “버려졌다”라는 단어가 그 아이들이 성장하며 자존감을 쌓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저만 영향을 받은건 아닐거에요. 저는 버려진것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다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고 그것들이 쌓이죠. 그러니 이 분노는 아주 자연스런 반응이에요. 제 경우에는 제가 해외로 입양됐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어요. 저에겐 가족이 있었잖아요. 고아원에서 계속 자랐다면 완전 끔찍했겠죠. 우리 오빠들이 그랬대요. 제 미래가 핑크빛이었을 거라고 말하는건 아니지만  굳이 나라 밖으로 보내질 이유까진 없었다는 거죠. 그리고 평생을 “더 잘 된 일이야. 너무 감사하지. 이렇게 교육도 받고 기회도 얻고. 자랄수 있었잔아”… 그런 메시지와 싸우며 살아가지 않을수 있었다는 거죠. 오빠들처럼 저도 집으로 돌아갔을거에요. 결국 성매매 여성이 되었거나 아니면 궁핍한 생활을 하지 않고요. 저희 가족들이 저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아니고 한국에서 고아로 자랐다면 어땠을지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잃어버린 놓쳐버린 모든 것들을 이젠 되찾을수 없잖아요. 그냥 감내해야죠. 어떻게든요. 

굉장히 심오한 경험이었을거에요. 우리 입양인 모두가 내가 한국에 계속 살았다면 어땠을까하고 시나리오를 써보는 내적경험을 하잖아요. 이것은 한국이 좋고 이것은 미국이 좋고 하며 비교 해보기도 하고요. 사라씨의 경우에는 솔트레이크 시티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강연도 하고 그 분야의 전문가이고 남편도 저명하시고 아이들도 둘이나 있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었구나 하고 생각할수도 있죠. 친가족과 재회를 했을때 사회경제적지위의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잖아요. 한국의 가족들이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했을 수도 있고요. 그런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였나요? 그리고 한국에 살았다면 삶이 어땠을지 그림이 그려졌나요? 

한국에 살았으면 좋았을점 부터 시작해볼까요? 가족들을 만나서 오래전에 그 궁핍했던 때로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들어보니 고생을 참 많이 했더라고요. 그리고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버지가 굉장히 똑똑하고 전략적인  분이셨대요. 과감한 성격이었고요. 제가 그 부분을 많이 닮았어요. 저는 운 좋게도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었지만 저도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요. 그래서 제 삶을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 볼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서 감사하죠. 내 가족이 그렇게 안 좋은 상황속에서도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었고 나한테도 그런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어서 다행이었어요. 제 오빠들은 택시운전을 하고 있는데 택시운전사가 그렇게 안좋은 직업인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한국에서 살았으면 맞이했을 최악의 상황인건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지금 특히 이곳 미국에서는 모든 것을 계급적으로 봐요. 한국도 물론 그렇지만요. 어른들이 우리를 위해 미리 내려 놓은 결정 속에서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갖게 되었느냐에 따라 우리를 평가하죠. 지금 하는 이 이야기가 Adoptees Citizenship Act (역자 주 –  입양인 시민권 조례, 다른 나라에서 미국으로 입양되어 온 사람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주기 위한 법률. 2023년 현재 아직도 미결 )의 미래의 활동 주제로 이어질 수도 있는데요 저는 제가 성공한 입양인(역자 주 – Model Adaptee)의 모델로 쓰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저를 보며 ‘저 사람을 좀 봐. 입양되어서 저렇게 잘 살게 되었잔아. 좋은 교육도 받고 기회도 많이 누리고. 그러니 입양은 좋은거야’ 라고요. 그런데 다 그런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성공한 입양인이라는 신화가 사라졌으면 해요. 그리고 제가 사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고 인지도도 있기 때문에 입양이 되면 다 저렇게 잘 되나보다 하는 인식이 저로 인해 퍼질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아요. 사람들이 입양제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더 깊이 들여다 보며 실제로는 이런 문제들이 있구나 하고 알아보게 해야 되는데 말이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네 운이 좋았네 그러니 불평하지 마 이런 식의 대화 보다는 조금 더 깊은 대화가 있었으면 어떨까 해요. 오래되어서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다 가졌다고 생각이 될때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는 쉽다(It is really easy to think that you haven’t lost anything when it seems like you have everything).”라는 말을 테드톡에서 했었어요.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런 특권들을 모두 잘 알고 있고요 그리고 그 특권들이 이 입양시스템 안의 문제들을 찾아내서 해결책을 찾아보는데 큰 도움이 되는 특권들이죠. 그래서 그런 특권들을 이제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써보려고 해요. 나한테 다른 사람한테 없는 이런 특권들이 있으니 이제는 그걸 이용해보자 하는 생각이에요. 굉장히 복잡하지만요. 카오미씨는 입양인들을 많이 인터뷰했으니 잘 알겠지만 다들 저 같은 경험들이 있는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일단 문제를 한번이라도 깊게 들여다본 경험을 한 입양인들이라면 그냥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이 입양에 대해서 고민하는지 아닌지 말할수는 없다는 것을 알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 사람의 외적인 성공지표로 그 사람이 입양제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면 안되죠. 

맞는 말이에요. 입양에 대해 흔히들 쉽게 하는 말중에 하나가 가족과 재회를 하면 새로운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죠. 가족과의 재회를 함과 동시에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서 알게 되잖아요. 친가족을 찾았으니 이제 가족이 더 생긴거라고만 생각하고 동시에 그들을 더 잘 알게 될 기회는 잃어버렸다는 것은 생각 안하죠.

그 이야기를 꺼내줘서 너무 고맙네요. 가족들과 재회했다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기쁘기만 할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아직도 딱 들어맞는 말을 찾지 못했는데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것은 아니잖아요. 제 오빠들이나 삼촌과 고모이모들은 저를 되찾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들을 되찾은 것이 아니죠. 그리고 서로간의 언어장벽이 있다는 상황이 어떤건지를 사람들은 몰라요. 그래서 부모를 찾았는데 같은 언어로 소통할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워요. 만났다고 해서 바로 끈끈한 정이 들거나 하는건 아니고 말이죠. 지난 9월에 코비드 이후 4년만에 처음으로 다시 가족을 만났는데 뭐랄까 두번째 데이트를 하는 느낌이었어요. 

아직도 조금씩 서로 알아가는 단계고 마치 달팽이처럼 아주 천천히 알아가는데 많이 지치죠. 한국어를 배우려고도 해봤는데 일도 해야하고 가족도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게 쉬운일이 아니고요. 언어를 배우려면 아예 몰입해야 하잔아요. 그리고 살아온 이야기같은  깊은 이야기까지 하려면 도달해야 하는 단계가 있으니 그것도 쉽지 않고요. 그러니 어쩌면 되찾았지만 전부 되찾은것은 아니죠. 그리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잖아요. 그 잃어버린 시간들과 죄책감같은 것들까지도요. 이렇게 쉽게 찾을줄 알았다면 이렇게 가능할줄 알았다면 좀더 일찍 찾아볼걸 같은 생각들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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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오래 기다린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고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왜 그들은 나를 찾지 않았지? 왜 나만 죄책감에 시달려야해? 왜 내가 다 해야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뭐 누구를 책망하고 그러자는 것은 아니고 그런저런 생각의 파편들이 생긴다는 말이죠. 모든것이 참 복잡해요. 나 자신과 그런 생각들에 대해 혼자 묻고 답해요. (웃음)  그래서 재회나 가족의 확대 보다는 회복이라는 말이 맞는것 같고요. 그렇다고 해도 완전한 회복 아니죠. 영원히 회복 못할 것들이 있으니까요.  

사라씨가 성공한 만큼 돌려주고 싶다고 했잔아요. 사라씨 같은 기회를 얻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에요. 미국 시민권에 대한 거죠?

솔직히 이번에 너무 크게 실망을 했어요. 이번 116번째 입법회기에서 결의안이 통과되지 않았거든요. 너무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사는 곳의 주상원의원이 유타주의 의석을 가진 최초의 아시아계 여성이에요.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해서 유타로 와서 경력을 쌓은 사람인데 어느날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해외입양과 입양인시민권부여법안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그가 그럼 결의안을 채택해보자고 하더라고요. 시민권은 연방법인데 주결의안이 어떻게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자고 그녀가 저를 설득했어요. 제가 그 전에 주경제와 관련해서 결의안을 채택해본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쪽도 내가 할수 있는 일이 되겠다 싶었어요. 다른 주와 도시에서도 입양인 시민권에 대해서 결의안을 채택했기때문에요. 그래서 그때는 제가 아직 Adoptees for Justice(역자 주 – 2018년에 입양, 이민, 인종 그리고 사회적 정의를 위해 결성된 입양인 주도의 국제 조직)에 직접 관여하기 전이라 그쪽에 연락을 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같이 연대하고 싶다고 했더니 유타주에도 활동을 하고 싶어하는 입양인이 있었냐며 반기더라고요. 

이쪽 유타주는 의회대표자들이 전부 공화당이거든요. 그래서 초당적인 법안을 통화시키려 할때는 공화당의원들의 협조를 많이 받아내는 것이 정말 중요해요. 민주당의 협조는 받아내기가 쉬워요. 그래서 이렇게 두 당의 협조를 모두 받아내는 것을 전략적으로 도왔죠. 상원이랑 하원 모두 사법위원회에서활동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었거든요. 제가 왕년에 변호사였었던 터라 모든 분야를 알면 위험할정도로만 알아요(웃음). 그래서 이런쪽에 제가 도움이 될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홍보하고 언론의 주목을 끄는 등의 활동을 조직하고 관심을 이끌어냈죠. 

미국만이 시민권을 자동으로 주지 않는 나라에요. 좀 창피하죠. 다른 나라는 이런 문제가 없어요. 지금 벌써 9년째인데 그럼 Adoptees for Justice에서 10년이나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우리 법안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헛점을 바로잡기 위해서요. 그러니 올해 이 일이 마무리 됐음 좋겠어요. 솔직히 저는 그 전에는 시민권이 없는 사람을 만난적이 없어요. 이일을 하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추방당할 걱정속에 법에 안 걸리기만을 바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저도 알게 되었어요. 요즘 이민법이 제일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이슈잖아요. 자칫 하나 아주 작은 일에도 출신국으로 내쫒길수 있죠. 한국인 입양인들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고 26개국이 해당되는 것으로 알아요. 그래서 저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도 해봤어요. 모두 저와 마찬가지로 평생을 유타에서 보낸 사람들이요. 그러면서 이 시민권에 대해서 제가 얼마나 당연하게 생각해 왔는지 알게 됐죠.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들을 정치적 지도자들이 이 일에 관심을 가지고 해결하는데 동참하도록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혹시라도 여러분께서도 관심이 있다면 동참하는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싶어요. 그리고 필요하면 저 같은 사람들이 각각의 지역 정치인들을 동참시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안내해드릴수 있어요. Adoptees for Justice가  오래 이 일을 해왔고 전문가들도 많이 관여하고 있고 미국 전역에서 멋지게 해오고 있어요. 제가 비영리 단체와 일을 많이 해봤는데 이 Adoptees for Justice가 일을 진짜 잘 하더라고요. 그러니 같이 활동하고 싶으시면 시간낭비는 아닐거에요. 

대략 현 상황을 좀 알려주시겠어요? 시민권이 없는 해외입양인들이 이 나라에 몇명이나 있고 이런 일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요.

지금 대략 이만 오천명에서 오만명 정도의 해외 입양인들이 시민권이 없는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 중에 많은 수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순간 갑자기 여권이 필요하다거나 연방정부와 관련된 일을 하려 한다거나 할때 갑자기 알게 되는 거죠. 은퇴후에 의료보험이 필요해서 지원했는데 갑자기 자기가 미국 시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상황을 상상해보세요. 많은 경우에 비자를 받아서 미국에 들어왔기 때문에 사회보장 번호도 있고 이미 세금을 내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모를수 있어요. 만약에 이렇게 몰랐던 경우에는 부모가 귀화절차를 밟지 않았거나 몰랐거나 혹은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랬을거에요. 어떤 입양인들은 임시보호가정으로 보내지기도 하고 다시 입양이 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이유는 정말 많은데 그 중에서 입양인 자신이 잘못한 경우는 하나도 없죠. 시민권이 없는 것이 그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요. 그래서 2000년에 절차를 조금 간소화 하는 법이 만들어 졌는데 그 말은 그 전까지는 관련법안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에요. 몇몇 입양인 부모들이 해외입양절차를 간소화 하고 해외입양인들에게 시민권을 자동부여하자는 의견을 의회에 내었어요. 저도 열네살까지 시민권이 없었어요. 입양은 세살에 됐는데 말이죠. 그래서 의회에서 합법적인 입양에 대해서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상정이 되었는데 아무런 법률적 하자가 없는데 왜인지 계속 통과가 안 되고 있어요. 

만약 입법이 되면 미성년 입양인에게는 모두 해당이 될거라고 해요. 성인 입양인은 아니고요. 입양인들이 입법과정에 참여를 안하니 생기는 일이죠. 실제 이 일에 영향을 끼칠수 있는 사람들중에 입양인들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이 Adoptees for Justice 팀하고 같이 일하는 것을 좋아해요. 입양인들이 주체가 되는 조직이니까요. 같이 조사하고 연구해서 이제는 영향력을 미칠수가 있게 되었어요. 사소한 법률적 문제만 고치면 되는데 문제는 제일 첫 발을 2000년에 떼었는데 2001년에 911이 터지고 그 뒤로 10년이 지났죠. 그리고 한 대통령이 이민을 굉장히 어려운 주제로 만들어 버렸죠. 우리가 고치고자 하는 법은 가족에 대한 법이고 거기에 이민관련 세부조항만 하나 고치면 되는건데 말이에요. 생물학적 형제지간인경우 시민권을 줄수 있는데 입양형제는 줄수 없어요. 아주 불평등하죠. 혈통 우선인거죠. 입양이 됐건 안됐건 같은 권리를 부여받아야 되는데 아닌거죠. 

그래서 이걸 고쳐야 하는데 자꾸 지금 정치적으로 뜨거운 이민관련 이슈로 분류되어 법안이 표류하고 있어요. 2000년에 처음 이 운동이 시작됐을때 이렇게 오래 걸리리라곤 다들 생각 못했을거에요.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다들 삶을 살아가야 하잖아요. 살면서 잘못도 저지르고 그러다가 사법처리를 당할 일이 생기면 그때가서야 시민권이 없는 것을 알고 형을 살고 나오면 바로 추방당해버려요. 너무 끔찍하고 몰인정한 처벌이죠. 우리 친자식들이면 그렇게 하겠냐고요. 제가 자꾸 언성이 높아지는데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나서 그래요. 그냥 앞뒤가 안 들어맞아서 더 화가 나나봐요. 이런일이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너무 화나요. 

그래서 내가 도움이 될수 있는 일이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저처럼 사업경력이 있거나 아니면 의회에 아는 사람이 있거나 해야 동참할수 있는건 아니에요. 여러분 지역구의 정치인들을 움직이시면 되어요. 지역구 유권자가 하는 말이면 듣거든요. 미국에 사시는 경우에는 하원의원과 상원의원한테 의견을 전달할수 있는 권리가 있어요. 그들은 들어야하고요. 그들이 이 일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요? 아닐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의견을 전달할 수 있으니 Adoptees for Justice에서는 원하시면 도움을 드릴수 있어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등등에 대해서요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요. 저도 이 일을 하면서 공부를 많이 했거든요. 그 전에 회사소속 변호사였어서 이민법등에 대해서는 전혀 도움이 안되었었어요. 다른 분들한테도 좋은 기회가 될거에요. 

유타주는 공화당이 우세인 주잖아요. 

네 아주 보수적이죠. 

그럼 의회쪽 사람들한테 어떤 식으로 접근하죠? 반응은 어떤가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원하는 것들이 크게 다르지 않아요. 유타주가 가족을 아주 우선시 하는 곳이거든요. 일단 여러분이 사는 곳과도 접점을 찾아서 공략해보세요. 유타는 전통적으로 난민들에게도 굉장히 우호적인 곳이었어요. 70년대에 제가 어렸을때 저희 집에도 난민들이 같이 살았던 적이 있었고 임시보호를 한적도 있었어요. 그래서 임보형제자매랑 가족들도 많이 생겼어요. 그래서 그렇게 난민들을 환대했던 역사가 있고 가족우선주의에요. 가족이 기본이고 아이들을 정말 중요시 하죠. 유타주가 유소년인구 비율이 미국 내에서 제일 높은 주 중에 하나일거에요. 그리고 또 한가지 유타가 특이한 점은 커뮤니티가 작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일들이 더 빨리 추진되기도 해요. 캘리포니아 같은 곳은 경우가 다르겠지만요. 그래서 어디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지를 아는 거죠.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시작할때 이렇게 말하는 거죠. 우리 유타에서는 이렇게 가족을 우선시하고 아이들을 중요시하고 난민들을 환영해왔는데 유타의 가정에 합법적으로 입양된 아이들이 작은 법률상의 하자로 인해 시민권이 없는 경우가 있다. 라고 운을 떼는 거죠. 그러면 다들 세상에 말도 안된다면 놀라요. 몰랐다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몰라서 문제인거죠. 한가족에 친자식들은 시민권이 있고 입양된 자식들은 시민권이 없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고 잘못된거 아니냐고 말하면 다들 동의해요. 

가족에 대한 일이니까요. 우리가 가족의 중요함을 믿고 입양이 아이들에게 가족을 찾아줄수 있는 길이라고 믿는다면 여기에 잘못이 있다는 것에도 동의해야죠. 물론 그후 법을 어떻게 개선하느냐로 들어가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지만 일단은 그렇게 자기한테 시민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을 알아야죠. 시민권이 없다는 것을 알되 된 후에는 이민온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민법을 상대해야 되는데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백인인 미국 시민들이니 더 어렵고 힘든 상황에 빠지는 것이지요. 거기다가 이민법이 너무 복잡해서 변호사를 고용해야 되는데 보통은 그럴 여력이 없죠. 그리고 그럴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사회경제적 여건이 안되는 경우가 대부분 이구요. 그리고 거기까지 갈수 있다 하더라도 이 사안에 대해서 경험이 있는 변호사를 만나기가 힘들죠. 이민알선기관들도 이 사안에 대해 알고 있고 대비가 되어 있는 경우가 거의 없고요. 그러니 이리저리 옮겨다니게 되는 거고요. 이일이 얼마나 복잡한 문제인지 사람들은 몰라요. 이런 상황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사람들은 모른다고요. 사람들한테 알리고 이 일에 동참하게 하는 일은 차라리 쉬운 일이에요. 

일단 사람들이 동참하고 나면 그들과 연합해서 그들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슈와 연합해서 공동전선을 펴야해요. 정치인들은 항상 자기 지역구의 유권자들이 어떤일에 관심이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지역구의원이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럼 좋구요. 입양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도 좋구요. 국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것도 좋아요. 왜냐면 군대쪽이 해외 입양이 이루어지는 제일 큰 경로거든요. 이렇게 지역구 의원이 중요한 기치로 내건 사업들이 있으면 그것과 이 입양인 시민권을 어떻게든 엮을 수 있어요. 그런식으로 연합해서 지지를 이끌어내는 거에요. 유타의 경우는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우리 상원의원이 일단 구두로 약속을 했거든요. 최종 문안을 볼때까지는 아무도 공식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아요. 이번 하원에 있는 모든 의원들이 일단 구두로 지지해준다고 약속을 했어요. 물론 끝날때까지 가봐야 알겠지만 그래서 항상 커뮤니케이션채널을 열어둬야 하고요. 보통은 다들 동의해줘요. 말이 된다 싶으면 토를 달지 않고요. 그렇지만 법안이 통과되는 과정을 잘 알고 어떤 변수들이 있는지도 잘 알아야 해요. 

범죄를 저질러서 수감된 입양인들의 경우에 어떤 장애가 있을까요? 이 법안을 지지하기를 꺼려하는 이유가 시민권을 범죄자들한테도 그냥 줘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나온다고 들었어요. 

그 부분이 아무래도 제일 큰 걸림돌이 되는 부분이죠. 문제는 실제 현실을 입법가들한테 알리는 거에요. 첫번째로 그들 모두 아이들일때 미국 의회의 승인에 따라서 미국에 입양이 됐어요. 의회가 이 일을 승인했으니까요. 그러니 이 문제는 의회의 문제라고 봐야해요. 입양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고요. 그리고 두번째로는 그들이 처벌을 받잔아요. 미국이라는 이 나라에서 우리는 정당한 처벌과 그 효과를 믿죠. 그런데 처벌을 한다음에 출신국으로 되돌려보내는것이 정당할까요? 가족도 없고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곳으로요. 이건 명백히 부당한 처사에요. 그런데 이것이 바로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죠. 특히나 그들이 저지르는 잘못들이 어떤 중대범죄가 아니에요. 그런 경우는 아주 극소수죠. 아무리 잔인한 연쇄살인범이라 하더라도 미국 밖으로 보내버리지는 않잔아요. 그래야 될지도 모르겠지만요(웃음) 농담이에요. 

이런일은 중단된지 오래에요. 몇백년전에요. 영국에서 범죄자들을 호주로 보냈었잖아요. 그러다가 중단했죠. 그런데 왜 이민이 정치적으로 뜨거운 현안이라는 이유로 몇백년전에 중단한 일을 입양인들이 다시 겪어야 하나요. 우리가 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미국의 근본적인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지금의 이 정치적 상황때문에 우리의 원칙에 위배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잖아요. 의회의 지도자들이 미국의 원칙을 다시 좀 공부를 해야해요(웃음) 그런데 정치적 현안에 밀려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 중에는 몇몇 우리나라의 근본적 토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이 런일을 하기 위해서는 아주 강하고 자신있는 지도자가 필요해요. 

관련해서 떠오르는 이름이 밋 롬니 상원의원인데요 당을 초월해서 원칙에 입각해서 표결하겠다고 했잖아요. 이 법안과 관련한 그의 입장은 어떤가요? 

롬니 의원실과 이에 관련해서 아주 긍정적인 대화를 나눴죠. 롬니 의원이 법사위원회 소속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입법이라는 것이 국회의 상임위원회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런 위원회들의 리더들과 일을 해나가야 하거든요. 롬니 의원은 우리가 적정한 선에서 서로 문안을 맞추면 우리를 지지해줄거라고 생각해요. 상원의원 두명과 하원 네명 모두 만장일치로 지지를 받는다면 엄청난 일이 될거에요. 그 전에도 그런적이 있었거든요. 최근 결혼 존중법에서도 그런적이 있지요. 만장일치로 초당적으로 지난 의회에서 통과가 됐잔아요. 그러니 이번에도 또 가능하다고 봐요. 모두 다들 긍정적이라고 의사를 표하고 있고 롬니 의원 같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것을 본다면 더 파급효과가 크겠죠. 그쪽이 지금 제 공략지점이에요. 

나중에 혹시 법적 도움을 구할일이 생기면 사라씨를 꼭 찾아갈게요. 말씀 한번 똑부러지게 잘하시네요. 

제가 카오미씨라면 NAKASEC(역자 주 – National Korean American Service & Education Consortium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 미교협)을 부르겠어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꼭 드라마들이 있기 마련이잔아요. 입양인들 모임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이 NACASEC에서 일처리하는 것을 봤는데 추방된 사람들을 그냥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걸 봤어요. 이미 추방된 사람들을 그냥 포기했버렸다면 아마도 이 법안을 이미 통과시켰을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이미 소외된 사람들까지 챙기는 것을 보고 감동 받았어요. 그래서 혹시라도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들한테 나를 위해 싸워달라고 부탁할거에요. 지난 몇년간 그들과 함께 일하며 얼마나 꾸준히 이 일에 전념하는지를 봐왔어요. 그래서 더더욱 입양인들이 주축이 되는 단체가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른 단체들도 이 입양인 시민권 관련 법안을 위해 일하고 있지만 그냥 어떻게든 법안만 통과시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살릴수 있는 길을 만들려 하더라고요. 그 하나하나의 길이 각각 다를지라도요. 그래서 저는 NAKASEC을 찾아갈래요. (웃음)

남편도 있고 자녀들도 있지요? 아이들은 대학생인가요? 

큰애가 스무살이고 둘째는 열 여섯살이에요. 

한국의 가족들과 재회하고 한국쪽의 출신과 정체성을 찾게 된 일이 가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그부분에 대해서 말해줄수 있나요?

그럼요. 실은 친가족을 찾을 결심을 한 주요 계기가 큰애가 한국의 가족들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어요. 입양인들 각각이 이 사안에 대해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겟고 제게 동의를 구하는 것도 잘했다고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지만 저는 뭐랄까 책임감을 좀 느꼈어요. 제가 입양인이라는 사실이 저만의 문제가 아니고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더라고요. 특히나 제 아이들이 소위 잘나가는 소수인종을 찾아보기 힘든 곳에서 자라났잔아요. 학교도 모두 백인일색이고 그러니 각자가 자신의 인종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있겠죠. 그래서 한국의 가족이라도 찾으면 아이들의 몇몇 질문들에 스스로 답을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여러모로 나와 내 가족들 모두에게 좋겠다 해서 시작을 했는데 이렇게 빨리 찾게 될줄은 몰랐죠. 어떤 사람들은 몇년씩 걸리기도 하잖아요. 저도 가족들을 찾았다고 했을때 다른 사람들 만큼이나 놀랐어요. 그런데 아이들한테 자신들이 동양인이라는 것에 어떤 연결고리가 생겨서 좋은것 같아요. 그전에는 “그래 나 아시안이야, 그래서 뭐?” 이랬을거에요. 우리가 자랄때 그랬잖아요. 그냥 뭔가 위축되고 심리적으로 불편하고 내세울 것이 없었잖아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동떨어져 있는 그런 느낌말이에요. 그런데 가족을 찾고난 지난 5년간 본인들이 편한 수준에서 많이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것 같아요. 두 아이가 받아들이는 것이 다른 것도 보기에 재미있구요. 뭐랄까 본인들의 모습에 더 자신감이 있어보여요. 물론 다른 방법으로도 그렇게 될수 있었겠지만 가족들과의 재회가 분명 어떤 역할을 한것 같기도 해요. 

남편분의 입장에서 말해보자면 그 전에는 그냥 아시안계 미국여인과 결혼해서 살고 있었다면 지금은 한국여인과 결혼한것 같군 이런 느낌을 받을까요? 사라씨가 느끼는 바도요?

실은 제 남편이 한국에서 저보다 더 오래 살았었어요. 정말요? 남편이 예수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의 선교사로 제가 태어난 한국 전주시 근방에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활동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처음 만났을때 이미 한국말을 너무 잘했어요. 지금도 잘하고요. 한국음식 너무 사랑하고요. 

백인인가요?

네. 백인이에요. 참 아이러니한것이 제가 태어난 지역에 그도 살았고 우리가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됐잖아요. 혹시라도 그가 우리 가족중에 한사람이라도 마주쳤을지도 모를일이죠. 물론 그때는 제 아버지와 오빠들이 서울로 이사간 후였지만요. 그런데 선교사였기 때문에 한국여인과는 결혼할수 없었나봐요. 그런데 저는 어떻게 보면 한국인이 아니잖아요. 백인으로 교육받고 성장 했잖아요. 그래서 살면서 서로 낯설고 달라서 힘든점은 없었어요. 그 사람과 결혼해서 살며 그 사이 제가 더 한국인이 되거나 한것도 아니었고요. 

같이 한국 드라마도 보는데 남편은 알아듣는데 저는 그러질 못하니까 가끔 샘도 나고 그래요. 그래서 우리 사이에 어떤 묘한 긴장감이 있어요. 남편이 저보다 한국에 대해서 더 잘 아는것 때문에요. 그리고 남편이 저보다 더 한국적이에요. 얼마전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같이 보는데 그 자기소개 도입부를 보면서 이거 “회문(palindrome앞으로 읽거나 뒤로 읽어도 같은)이네”라고 하는 거에요. 저는 몰랐거든요. 저는 5회정도까지 볼때도 몰랐어요. 글쓰는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 최선을 다해서 번역을 했겠지만 몰랐거든요. 그런데 남편은 딱 듣고 알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부분을 캐치 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 샘도 나고 그러죠. 

회문이 뭐에요?

시작하는 소리와 끝나는 소리가 같은 거에요. Race car 라는 단어의 경우 거꾸로 써도 똑같죠. 그런데 우영우는 한국어로 이 회문을 말했기 때문에 저는 들어도 몰랐던 거죠. 남편은 한번에 듣고 알아챘고요. 너무 샘나죠.  

한국에 처음 돌아갔을때 기분이 꽤 묘했을것 같아요

한국에 처음 간것은 1999년이었어요. 제가 일하던 법률회사에서 인턴을 하며 한국에서 두달간 지낼 수 있었거든요. 그때 당시 약혼자였던 남편이 한국에 와서 마지막 몇 주를 함께 보냈어요. 함께 거리를 다니면 사람들이 저에게 한국어로 말을 해서 제가 남편을 쳐다보면 남편이 저에게 통역을 해주고 그렇게 삼단계를 거치다 보니 사람들이 저는 한국어를 못하고 남편은 한국어를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랬죠. 인사동인가에서 쇼핑을 하는데 남편이 한국말을 못하는 줄알고 상점 점원이 가격을 더 올려부르라고 자기들끼리 말하는 것을 남편이 들었대요. 그래서 계산대에서 무슨이야기 하는지 다 들었다고 말했더니 그들이 너무 민망해했어요. 

그래서 더 깎아 줬나요? 아니면 바가지를 씨웠나요?

바가지를 쓴것 같지는 않아요. 우리가 알아챘으니까요. (웃음) 

그래서 한국의 가족들을 찾게 되니 사람들이 그럼 남편이 통역을 전담해주면 되겠네 하고 생각하는데 그부분에 있어서 많이 조심하려고 해요. 남편한테 그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요. 최대한 통역해주실 분을 찾아보거나 하려고 해요. 통역이 남편의 의무가 아니기도 하고 제가 제 가족과의 관계를 찾아가는데 있어서 남편한테 너무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계속 주지하려고 해요. 그냥 남편이 제 가족들하고 소통하는데 있어서 항상 한국어로 말해야 하는건 아니라고요. 그래도 항상 저보다 더 많이 소통하고 서로 많이 좋아하고 그러죠. 그럴때면 저도 정말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고 싶구요.  

혹시 청취자들이 사라씨와 소통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대환영이에요. 친가족찾기를 하는데 제가 도움을 드릴수 있는 부분은 별로 없을 거에요. 저는 운이 아주 좋은 편이었잖아요. 그래서 그부분에 대해서 제가 조언을 해드릴 것은 별로 없을것 같지만 그래도 연락주시는것은 대환영입니다. 제가 처음 저희 지역 테드톡에 나갔을때 연락이 많이 왔엇거든요. 그리고 나서 메인 테드에 올라갔더니 갑자기 뭔가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테드에서 유명인이 되었다고 사람들이 막 그러더니 갑자기 메시지들이 뜸해지고 연락이 안오더라고요. 사람들이 저에게 연락하기를 바랬던것도 아니지만 제가 너무 유명져서해서 접근불가 한사람이라고 이렇게 생각했나봐요. 그런거 아니고 연락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제가 혹시라도 도움이 된다면요. 

제가 도움이 될수 있는 가장 큰 방법은 아마도 여러분이 입양인 시민권 법안운동에 참여하고 싶으신 경우일거에요. 공유할수 있는 자료도 많고 함꼐 할수 있는 다른 조직도 많아요. 저는 거기에 조금더 경영적이고 실제적인 관점을 더한 도움을 드리고 있어요. 제가 상담사도 아니고 어떤 정신적인 상처 같은 부분을 도와드릴 어떤 자격도 없어요. 저도 상담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고요. 이 일에 경험이 많고 준비가 된 상담사들도 많이 있고요. 이런 소리를 하니까 제가 더 다가가기 힘든 사람으로 보이네요

제 이메일 주소는 sara@inclusionpro.com입니다. 

저에게도 종종 입양인들이 연락을 해오시곤 해요. 친부모 찾기나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활동등과 관련해서요. 그런데 한가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어요. 우리가 입양인 커뮤니티를 위해 좋은 마음으로 봉사하고 싶은건 분명해요. 저도 다른 입양인들로부터 좋은 충고도 듣고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선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일전에 제 직장으로 저에게 연락처를 남겨주신 분에게 전화를 했어요. 저를 NPR에서 들으셨대요. 그래서 입양과 관련된 잘못된 시스템등등에 대해서 의견을 주셨는데 두시간 가까이 통화를 하게 되었어요. 물론 필요한 도움을 받지 못한채 고립된 분들도 많이 계시고 다른 입양인의 경험을 처음 접하는 분들도 물론 계시겠죠. 다만 도움을 청하실때 다른 사람들의 시간과 노동은 좀 분명히 알아주셨으면 해요 

그것에 더해서요 Adoptees for Justice의 활동이나  입양인 시민권 부여법 관련 활동이나 혹시 시민권이 없이 살고 계시다면 NAKASEC을 접촉해보시길 추천해요. 저는 사회정의와 관련한 전문가가 아니거든요. 그 사람들은 이 일을 몇십년 동안 해왔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바로 답을 줄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를 찾아오셔도 저는 아마 다시 그쪽으로 보낼거에요. 홈페이지는 adoptees for justice.org입니다. 법안이 통과되는데 힘을 보태고 싶으시거나 혹은 시민권이 없이 살아가는 입양인이라면 꼭 연락해보세요. 

오늘 나와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저도요. 카오미씨가 하는 일도 계속 잘 진행되길 바래요.

                                                                                          번역 : 전유근

시즌 6, 에피소드 19: 에릭 풀과 새로운 희망

(**New Hope 는 그가 자란 동네 이름이기도 하다.)

그 어떤 친밀감도 못 느끼는 성을 지니고 살았죠. 새 이름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이 Poole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죠.”

한국인과 흑인 혼혈인 55세의 에릭풀씨와 그의 일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전편에 이어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가족이란 새로이 찾아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에릭씨를 만나보시죠. 

어린 시절에 벌을 많이 받았다고 했죠. 그냥 다르게 행동한다는 이유만으로요. 순탄치 않은 시기를 보내고 트라우마까지 있는 아이를 말이에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줄수 있나요?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이나 5학년때쯤일거에요. 쉬는 시간에 싸움이 붙었는데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때 어떤 암흑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던것 같아요. 현실을 부정하거나 도피하거나 한것은 아니에요. 뭐랄까 나에게 해를 끼치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찾아서 일부러 싸움을 붙이고 다녔죠. 내가 상대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아도 나를 자제할수 있는 능력이 없었구요. 그래서 그 녀석 얼굴을 막 발로 찼는데 그때 친구들이 달려와서 나를 떼어냈어요. 교장실로 불려갔고 아마 퇴학이야기도 나왔었던것 같아요. 지금 돌아보면 그때가 아마 적기이지 않았나 싶어요. 전문가등이 나를 도울수 있는 타이밍이었죠. 그런데 그냥 당신들이  얼마나 실망했는지 계속 이러면 한국으로 다시 돌려보낸다 이런 말만 들었던 기억이 나요. 제 행동의 결과로 돌아오는것은 결국은 다시 협박과 공포뿐이었죠. 그냥 저 혼자서 상황을 타개해야했어요. 그리고나서 아마도 외출금치를 당했던것 같은데 마치 교도소 독방에 갇힌 것 마냥 제 방에서 혼자서 삭혀야했어요. 신체적 체벌은 전혀 받지 않았죠. 저를 때리거나 한적은 없어요. 다만 그때 그 과정에서 입양부모와의 사이에서 오간 일련의 대화들이 나를 너무 힘들게 했어요. 그 상황들이 다루어진 방식들이나 나에게 겁을 줬던 방식들이요. 

그들의 직업은 뭐였나요?

아버지란 사람은 엔지니어였고 어머니였던 사람은 방부용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했던 것으로 기억이 나요. 장례식장에서 쓰는 용품들을 만드는 회사였던것 같아요. 

(4:45) 고등 교육을 받은 백인들이었군요. 70년대에. 저도 70년대에 미네소타로 입양됐거든요. 입양부모가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멀리 타국에서부터 트라우마를 지닌채 오는 타인종의 아이를 돌볼 준비가?

그럼요. 거기서 모든 문제가 시작된거죠. 아이를 입양한다는 사실에 현실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해보지 않았어요. 더군다나 인종이 다른 아이릉요. 70년대에는 그런 인식이나 체계도 없었구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Liz Riley가 입양이 되어 가는 아이들 사이의 등급이 있다는 책을 썼어요. 그 사이에 폭리를 취하는 사람이나 기관도 있고요. 그러니 70년대에는 백인들사이에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이나 노력이 전혀 없었죠. 지금은 어떻게든 안하려고 버티고요. (웃음)

지금이 팟캐스트 같은 것은 일종의 사회적 나눔이나 재능기부 활동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런 맥락으로 접근하면 안되죠. 어떻게 보면 시작부터 망치고 들어가는 거죠. 그러니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답을 하자면 네 맞아요. 준비가 안되어 있었죠. 그분들한테 최대한 유리하게  “의도는 좋았다” “라고 말하곤 해요. 그런데 부모가 되어준다는 것은 좋은 의도만으로는 힘든 일이죠. 또 그분들은 나이도 많았어요. 아이들을 키우는데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가잖아요. 지금의 제 나이에도 어린 아이를 키운다면 엄청 힘든일일텐데. 더군다가 힘든일을 많이 겪은 아이를말이에요. 

그러니 그 누구를 데려와도 저 같은 아이를 키우는 것은 아주 힘든일이었을거에요. 

우리가 친부모 자녀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항상 명제처럼 따라다녔어요. 그 누구를 만나든 그 사실이 먼저 거론되었죠. 그러니 우리 사이에 장막이 쳐진것 같았죠. 친구들이 놀러와도 먼저 “저분들이 네 부모님이야?” 하고 놀랐고 학교 직원들도 제게 말할때 굳이 “입양”부모임을 강조했죠. 그러니 항상 자연스럽지 않고 진짜가 아닌 가족이다라는 사실을 확인받았죠. 그런 공간에 당사자인 바로 그 아이로서 존재한거죠. 이름뒤에 항상 별표가 쳐져있는 아이였군요. 그런데다 그 부모라는 사람들은 “다시 돌려보낸다” 같은 말로 안그래도 있는 장막을 더 두껍게 했죠. 자기들도 지각하지 못하면서요. “입양됐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이런 말로요. 대화나 혹은 그냥 하는 소리에도 항상 은연중에 뭔가를 내포하는 것 같았고 그런 것들이 항상 우린 진짜 가족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 같았죠. 그리고 제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저와 같이 유색인종이었던 형과 누나들이 서서히 떨어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했죠. 다음은 나구나 내 차례는 언제일까 하면서요. 그때쯤에 알았죠. 이대로는 못 살겠다는 것을요. 희망이 없다는 것을요. 이 가정에서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것을요, 

(9:31) 한국에 살때도 그곳에 속하지 못한다고 느꼈잖아요. 마치 한국인이 아니기라도 한것처럼요. 사람들이 대놓고 그 사실을 분명히 했잖아요. 미국에 오니 양부모와 피부색이 달랐죠. 혹시 가족 안에서 인종차별을 경험했나요? 그리고 그땐 자신의 흑인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요? 

한국에 살때도 우리는 흑인이었죠. 그리고 끊임없이 껌**등등으로 불렸어요. 고아원에서는 까마귀라고 불렸던것도 기억나고요. 아주 어릴때부터 인식했던것 같아요. 나는 한국인이 못되고 흑인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백인가정으로 입양이 됐잔아요. 저는 1퍼센트도 백인같지 않은데 말이죠. 나이가 들어가며 조금씩 동양인의 특징이 나오고는 있긴해요. 지금은 하와이나 필리핀혹은 사모아쪽 출신이냐는 이야기도 가금 듣거든요. 광대뼈가 있네요. (*백인에 비해서 도드라지는 동아시아 인들의 특징) 네. 얼굴도 넙적하구요. New Hope에 와서 살게 되었을때 제 이름은 그냥 그 “흑인애” 였어요. 마치 그 이름이 저의 모든 것인양 말이죠. 100퍼 백인동네에 살고 있었는데도요. 저는 한국인의 피가 섞였건 안섞였건 그냥 흑인으로 퉁쳐졌달까요. 그리고 초등학교때 친했던 두 친구도 흑인이었어요. 미국의 흑인문화에서는 흑인됨의 범위가 아주 광범위하죠. 백인처럼 밝은 피부의 흑인도 있고 아주 까만 흑인도 있고요. 그만큼 포용하는 범위가 넓어요. 같은 편이라고 받아들여주는 것말이에요. 

어릴 때 그 흑인 친구네 집에 놀러 갔었어요. 아마 가족모임 같은거였을거에요. 친구의 엄마가 저를 그 남부출신인 할아버지께 소개하며 저를 반은 한국인이라고 소개 했어요. 그랬더니 그 할아버지께서 웃으면서 하시는 말이 “아무리 그래도 깜**는 깜**지이러시더라구요. “한국피가 섞였다고 하면 노예로 안 팔릴것 같아?” 마치 이런 뜻으로요. 그때가 생생히 기억나요. 나는 아무말도 안했는데 왜 그러나 좀 억울하기도 했고. 그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보다 좀 나아보이는 것 같았을까요? 제 흑인임을 어떻게든 없애보려는 걸로 보였겠죠. 흑인보다는 한국인임을 내세워서요. 그때 그 할아버지의 눈빛이 마치 “넌 어떻게 해도 흑인이니까 별수 없어” 이러는 것 같았어요. 제게는 적어도 그렇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그때가 뭐랄까 흑인됨의 그 묘한 뉘앙스 같은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던 때이기도 해요. 초등 고학년이나 중학교였던것 같은데 역사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이 나라에서 흑인이라는 그 미묘한 위치를 말이에요. 그때가 이상하게 제 뇌리에 남았어요. 어떻게 보면 큰 배움의 순간이었죠. 그 한번의 대화를 통해서요. 

(15:00) 제가 오랫동안 궁금해하던 일인데 에릭씨도 생각해봤는지 모르겠네요. 이 미국이라는 나라가 노예 억압의 역사위에 세워졌잖아요. 한국도 마찬가지죠. 식민지배를 당했죠. 그런데 에릭씨는 한국에서 또 이 미국으로 그것도 백인 가정으로 입양이 되었네요. 어떻게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나요? 아니면 본인의 출생과 성장 배경이 너무 난해한가요?

그 부분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해요. 지금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조금 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보면 당연히 서구유럽중심의 자본주의 구조죠. 실제로 잘 작동해 왔구요. 그런데 현재의 인류들은 뭐랄까 그 속살을 해부하기 시작했다고 할까요? 어떻게 여기에 도달했고 앞으로 도달하게  될 곳이 어디고  인류라는 공동체로서 이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공정한 곳으로 만들기 위에서요.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가다서다를 반복하고 있죠. 그곳에 도달할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채요. 

제 존재와 살아온 경험이 그것과 아주 큰 관련이 있죠. 한국에서 태어난 어린아이로서 또 흑인 어린이로서, 그리고 이 나라의 성인으로서 말이에요. 

궁극적으로는 백인들이 창조한 문화가 파괴적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는 데서부터 시작하죠. 백인들이 만들어 낸 것들중에 훌륭한 것들도 있죠. 그렇지만 동시에 굉장히 어두운 면도 철저히 탐구해봐야죠. 더 이해하고 파헤쳐가다보면 그게 진보하는 것일테구요. 그런데 저항도 만만치 않아 보여요. 인간애 같은 취지로 앞으로 진보할수 있는 맥락을 만드는데 말이에요.

너무 횡설수설 한것 같은데  말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저는 언제나 물이 반 컵밖에 없다기 보다는 반컵이나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저 같은 사람이 더 나은 앞날을 믿지 못한다면 말그대로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같은 상태가 되는거죠.  그리고 이 미국의 현 상황 특히 정치적인 상황이 혼란스러울 수록 마틴 루터킹이 말한 The Arc of Justice (역자 주 : “The arc of moral universe is long but it bends towards justice. 도덕적인 세계로 향하는 궤적은 멀지만 결국은 정의로 나아간다”를 축약해서 말한것으로 보인다.)인것 같아요. 거시적으로 보면 앞으로 진보하고 있지만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암담한 상태 말이에요. 마틴루터 같은 사람을 존경해요.사상적인 면에서요. 앞을 내다봤죠. 당대의 사람들이 왜 그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지 몰라봤는지 이해가 안돼요. 그래서 아무튼 전 희망을 봅니다.

(18:50) 제가 에릭씨를 알게된 건 오래지 않았지만 뭐랄까 희망을 놓지 않아서 여기까지 왔네요. 

그럼요. 제 와이프도 항상 그래요. 현재에 충실하라는 명상책 같은것도 와이프가 많이 읽는데. 어려서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항상 일단 어떻게든 하루만 버터보자 이런 마음으로 지냈던것 같아요. 그날 그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일단 버티면 이기는 거라고요. 누군가가 먹을 것을 주고 또 누군가는 지낼곳을 마련해주고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넘겼어요. 성인이 된 지금도 그래요. 지금은 그럭저럭 잘 살고 있지만 지금도 그날 그날을 무사히 넘기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향이 있어요. 어린 시절의 유산인가봐요.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요. 그리고 그 덕에 힘들었던 과거에 붙잡히지 않을수 있는것 같아요. 크게 우울증 같은 것도 없어요. 사람들도 그래요. 힘든 일을 많이 겪은 것에 비하면 꽤 밝게 잘 산다고요. 

(21:00) 어린 시절에는 같은 고초를 겪었지만 지금은 세 아이들의 아버지이고 항공 조종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유색인종들을 위해 높은 진입장벽을 허물고 있고요. 정말 엄청난 길을 걸어왔네요. 

초기에는 다른 사람들 도움이 많이 필요했어요 믿고 의탁해야 할때도 있었고요. 그게 항상 올바른 쪽으로만 풀렸던 것은 아니지만 제 인생 전반을 놓고 봤을때 언제나 길을 찾도록 도와줄 사람이 있었던것 같아요.  의정부에서도 그랬고, 고아원에 갔을때는 싱글리 아저씨가 그랬고요. 미국에 와서 한 동안은 힘들었죠. 결국엔 며칠씩 신세를 지곤 하던 친구들 그룹을 만들게 됐어요. 그러다가 입양가족하고 상황이 아주 나빠졌을때 Poole 가족 집에 가서 아예 살게 됐어요. Chuck Poole이 제 풋볼팀 친구였거든요. 그러다가 아예 제 진짜 가족이 되어버렸죠. 그들도 흑인이었나요?  아니요. 백인들어있어요. 그리고 제 입양부모보다 좀 젊었고요. 그들도 문제없이 행복하기만 한 가족은 아니었어요. 마치 Norman Rockwel 그림속의 가족 같았다고나 할까요? (역자 주 – Norman Rockwell은 미국 중산층의 생활 모습을 묘사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아버지는 알콜중독 경력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그때 당시에 아마 20년째 금주중인가 그랬을거에요. 그래서였는지 저를 더 잘 이해해주고 제 힘든 속내를 제가 스스로 극복해나가는데 도움이 됐던것 같아요.  알콜중독 치료의 12단계라는 것도 있잖아요?  저를 잘 이해해주고 환영해주고 조건없이 받아들여줬죠. 제 입양부모로부터는 받아보지 못한 것들 말이에요. 저를 이래저래 판단하거나 아님 제 출신이 뭔지등등 따지지 않고요. 일부러 제 속내를 끄집어 내려고 하지도 않았죠. 제가 살 희망을 갖도록 도와줬어요. 저를 잘 돌봐주고 지지해줬죠. 그래서 정말 많이 의지했어요. 

(23:53) 조건없이 받아들여주고 용서해주고 지지해 주는것이 무엇인지 아는 분이었군요. 

그래서 제가 그 이름을 이어받았어요. 제가 입양됐을때 제 이름은 WITBECK이었어요. 항상 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공허한 이름을 지니고 사는 느낌이었죠. 그러다가 해군에 입대를 했고 그때 아버지가 큰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중상이었어요. 헬기로 큰 병원으로 이송을 했을 정도로요. 덩치가 큰 분이라 모두가 아버지를 Big Jim이라고 불렀어요. 저도 중환자실로 찾아갔는데 온몸은 퉁퉁 붓고 노랗게 변하고 그래서 아주 거대한 형체가 병원침대에 누워있더라고요. 그때 아버지를 잃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쯤 마침 Witbeck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찾으려고 하던 때였는데 그렇다고 Kim이라는 이름을 쓰기는 싫었거든요. 어떤 이름을 지니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막 고민하던 때였는데 그 순간 분명하게 알았죠. 이 사람들이 내 가족들이라는 것을요. 곧 돌아가실수도 있는 이 사람이 내 아버지라는 것을요. 그래서 중환자실에 누워계신 사람한테 말을 했어요. 의식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요. 이름을 바꿀 거라고요. 그랬더니 온몸에 주사바늘하고 온갖 튜브가 연결되어 있는데도 몸을 막 일으키시려고 했어요. 나중엔 기억을 본인이 그랬다는 것을 기억도 못하시더라고요. 그때 이 사람들이 저한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알았죠. 그래서 아무런 친밀감을 못 느끼는 이름을 버려 버리고 새 이름을 찾았죠. 그래서 제 성이 Poole이 된거에요. 아버지와 실제 함께 산 기간은 얼마 되지는 않아요. 그리고 한가지 해피엔딩은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어요. 2016년 즈음에 돌아셨어요. 그래서 제 아이들은 그분들을 할머니 할아버지로 알고 컸고 삼촌으로 알아요. Chuck하고는 자주 연락해요. 틱톡 비디오 같은거 저한테 막 보내거든요. 그렇게 가족이 생겼고 그것이 타인종간 입양에 대해서 꼭 부정적으로만 볼것은 아니라는 반증이 된다고도 생각해요. 입양부모가 많이 준비하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을요. 어쨌거나 제일 중요한 사실은 부모가 되어준다는 것이잖아요. 자녀가 어떤 힘든 상황을 지닌채 오더라도 잘 받아들여줄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죠. 

그래서 그분들이 서류상으로도 입양을 했나요?

아뇨. 그때 전 이미 성인이 된 후였어요. 그래서 이름만 바꿨어요. 16살때 아예 그집에 가서 살았어요. 12살부터 16살까지 친구네 집을 전전하며 신세를 지며 살았었거든요. 

(28:40) 입양부모와 사이가 이미 너무 틀어져버려서?

네. 그때쯤 이미 그 어떤 소통도 하고 지내지 않았어요. 집에가서도 아무 말도 안했고 그분들도 굳이 그럴 시도조차 하지 않았어요. 그때 이미 한집에 살긴 하지만 서로 모르는 사람 같았죠. 외할머니하고는 그래도 좀 친밀하다고 느꼈었었는데 그분께서 제가 대학때 물어물어 저에게 연락을 하셨더라고요. 그때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노스타코타 대학에서 비행강사로 일하고 있었어요. 그때 뜬금없이 할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더라고요. 그 사이 그쪽 가족들과 연락이 끊긴 지가 이미 오래였었거든요. 형제들도요. 다들 제가 창피했었나보다 라고 생각하던 차였어요. 그래서 저는 다들 제가 없어져서 속시원한가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어느날 갑자기 전화를 하셨더라고요. 제 생각엔 제 출신 고등학교로 전화를 해서 제가 어느 대학으로 갔는지를 알아낸 다음 제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계속 유도심문을 하신 모양이더라고요. 개인정보를 안 알려주니까요. 그만큼 노력하셨다는 이야기죠. 나중에 알고보니 할아버지가 먼저 제가 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하셨대요. 그때 이미 나이도 많으시고 병도 있으셔서 본인이 직접 못하시니 할머니께서 나셔셨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뭐랄까 그 집에서는 볼드모트 같은 존재였거든요. 이름을 입에 올려서는 안되는 존재 말이에요. 그렇게 할머니랑 연락이 되고나서 다른 형제들하고 연락이 됐어요. 입양자녀들말고도 친자식이 셋이나 더 있었거든요. 저보다 열 살정도 많았던 커트 형하고 연락이 닿았죠. 그리고 첫 번째로 입양 됐었던 테시누나하고도 연락이 닿았는데 그 누나는 그 후에 입양이 된 다른 누나의 친 동생이었죠. 그렇게 연락을 하고 살았었는데 그 뒤로는 살다보니 좀 소원해졌고요.  한국 누나들하고 연락을 하고 살았다고요? 네 둘째 누나하고요. 저랑 나이상으로 제일 가까웠었거든요. 

(31:55) 그런제 진정한 가족은 풀씨네 가족이었군요. 

그럼요. 제게 필요로 했던 것들을 필요했던 시간에 저에게 줬으니까요. 그때서야 비로소 제가 처음으로 제가 있을 곳에 있는 것 같았으니까요. 대학 신입생 때 풋볼선수 가족들이 방문해서 소개하는 날이 있잖아요. 하프타임때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분들을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았었어요. 그냥 빅짐과 밥 (Big Jim and Barb)이라고 불렀죠. 부모님을 소개하는 날이라 하니 어떻게 해야하나 좀 고민하고 있다가 전화를 드렸어요. 혹시 오실 수 있냐고요. 그랬더니 “당연하지”라고 하시며 오셨어요. 그리고 하프타임때 그분들을 제 부모님으로 소개됐죠. 그순간부터 뭐랄까 영구적이고 공식적이 된 날이라고나 할까요? 

(33:20) 에릭씨의 인생을 영화로 만들었다고 치면 마침내 최고의 선수가 되어서 부모를 소개하는데  빅짐과 밥이 등장하며 클로즈업이 되는 감동적인 장면일것 같아요. 그때 그 순간에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이 부모로 소개될때 말이에요

그때 그 순간에는 별다른 생각은 없었던것 같고요. 그 뒤로부터 그분들과 대화할때  어머니 아버지라라고 불렀던것이 생각나요. 정확한 순간은 기억이 안나지만요. 엄마아빠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어본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아버지가 사고를 당했을때 그때 모든것이 분명히 굳어진 순간이었죠. 제가 그떄까지 생각해오던 것들을요. 

(34:30) 어쩜 보면 에릭과 그분들 모두 필요할때 서로를 위해 있어줬네요. 

너무 자세한 사정까지 밝히기는 그렇지만 제가 대학을 가고나서 그분들도 결국은 이혼을 하셨어요. 나중에 Chuck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그 전에도 조금씩 잡음은 있었대요.  행복하기만 한 가족은 아니었던거죠.  그랬는데 제가 오고 나서 문제가 완전히 해결 됐었던 것은 아니지만 상황이 좀 좋아졌었다고 해요. 그리고 제가 대학을 가고 나서 두 분 사이가 다시 원 상태로 돌아갔대요. 결국엔 이혼까지 하셨고요. 문제없이 완벽한 가정에 제가 식구로 들어갔던 것은 아니었던 거죠. 한편으로는 제 입장만 놓고 봤을때는 그렇게 서로 싸우기도 하던 불완전한 보통의 가족의 모습이 제게 필요한 가족이었어요. 그분들도 저처럼 아픔이 많은 아이를 보듬어 주면서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들이나 서로간의 관계를 돌아보기도 하고 이 가족이 앞으로 얼마나 갈수 있을까도 시험해봤을테니까요. 저를 받아들이면서 그들이 가진 문제도 조금은 봉합이 된거였겠죠.  

(36:05) 혹시 Colin Kaepernick근황은 알고 있나요?

최근 소식은 몰라요. 초반소식이랑 무릎꿇은 사건까지만요. 꽤 큰 사건이었잖아요. (역자 주 : Colin Kaepernick은 미국 프로리그 미식 축구선수로 미국의 인종주의와 경찰의 인종차별적 과잉 진압에 항의하는 의미로 경기 시작 전 미국 국가 제창시 무릎을 꿇은 사건으로 유명하다)

그가 그래픽노블을 출간했어요. 혹시 들어봤나 해서요.  몰랐어요. 

(36:28) 저도 아직 안 읽어봤는데 타인종의 부모한테 입양된 이야기와 입양부모로부터 겪은 인종차별등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요. 흑인 특유의 머리스타일을 했더니 부모가 흑인 불량배같다고 했다던 이야기등이요. 

저도 어릴때 비슷한 일을 참 많이도 겪었어요. 70년대 80년대까지만 해도 싱글리 아저씨와 연락도 하고 영향을 많이 많았었거든요. 그런데 미네소타에 살았잔아요. 흑인음악 같은 것을 접할 길이 없었어요. 

라디오에 KMOJ라는 지역 채널이 있어요. 중학교때 다른 흑인 친구를 통해서 그 채널을 알았어요. 그래서 흑인음악을 듣고 브레이크댄스에도 빠져보고 초기 힙합도 듣고 그랬어요. 그때 싱글리 아저씨가 저한테 녹음테잎을 보내주고 그랬어요. 자기 목소리도 녹음하고 나머지는어반뮤직으로 채우고요 

(36:10) 그때 들었던 노래들 제목이 기억나나요?

Parliament Funkadelic songs, Lakeside, Old Cameo boy, 이런 노래들은 공중파에서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노래들이었죠. 이 노래 테잎을 가지고 가서 지금 와이프인 백인 친구들 동네로 가서 놀았어요. 다들 너무 좋아했어요. Rapper’s Delight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때가 지금도 생각이 나요. 제가 처음으로 돈을 모아서 산 레코드였죠. 신문배달을 했거든요. 15분이나 되는 노래였는데 그 노래를 밤새 뒤로 돌려가며 가사를 받아 적고 이틀에 걸려서 외웠어요. 그럼 제 백인 친구들이 다 저희 집으로 와서는 라디오 스피커 옆에 바로 다른 라디오를 붙여서 녹음을 해가고 그랬어요. 그렇게 제가 아주 백합처럼 하얗기만 하던 동네에 힙합뮤직을 소개한거에요. 

또 유명한 운동선수들 사진을 방에 붙여 놓고 우상시 하고 그랬어요. Walter Payton 이나 Muhammad Ali. 같은 사람들이요. 뮤지션 사진들도요. 그런데 언젠가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부모님이 들어오셔서 “왜 이렇게 흑인들만 좋아해? 한국 문화를 더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라고 하시는 거에요. 12살짜리한테 그런 소리를 하면,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건지 알아듣지도 못하죠. 전 한국애를 입양하기를 바랬는데 흑인애가와서 혼란스러운가 하고 받아들였죠. 우리집에 놀러오던 애들 중에서 같은 동네에 살지 않는 애들은 다 흑인 친구들이었거든요. 그럴때면  제가 하는 말이며 행동을 다 지적 했어요. 흑인문화를 은근히 죄악시했죠. 

Colin Kaepernick도 같은 일을 많이 겪었을 거예요. 꼭 백인들처럼 머리가 촤르르 떨어지게 한다고 고데기로 제 머리를 편 적도 있었어요. 그런 날이 많았어요. 큰 누나 제 머리를 많이 봐줬는데 머리를 곧게 펴서 양갈래로 빗을수 있도록 해줬었어요. 그런데 머리를 감고나면 바로 다시 엉켜버리곤 했죠. 그 덕인지 누나가 결국엔 미용학교로 진학을 했죠. 정작 저는 크고 둥그런 아프로 머리를 하고 싶었는데 말이죠. 머리를 그렇게 펴도록 했던것도 은근히 흑인문화를 터부 해서 그랬던것 같아요. 

42:25  한국에 대해서는 지금은 어떻게 생각해요?

풋볼선수 하인즈 워드 기억해요? 그럼요. 흑인 혼혈 풋볼선수잖아요. 수퍼볼 MVP가 된 다음에 한국을 방문했고 엄청난 환대를 받았죠. 한국에선 아직도 혼혈 아이들을 달갑잖게 보는 시선이 있다고 해요. 저를 인터뷰 했던 Men’s Journal 의 박준 기자한테 들었어요. 한국인인데 캐나다에서 공부한다음 다시 한국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아직도 얼마나 한국에서 혼혈 아이들이 힘들게 사는지 말해줬어요. 차별이 심하대요. 저도 흑인 혼혈로서  한국에 대해서 아픈 기억이 남아 있죠. 지금 한국과 그 외에 동아시아 국가들이 미국 흑인 문화를 많이 받아들이고 있잖아요. 한국이 이젠 세계적인 국가가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케이팝을 통해서요. 그러니 이제 한국이 다양성을 수용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박준 기자가 말하길 요즘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조금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기성세대가 인종들을 바라봤던 방식과는 다르게요. 그러니 내일의 한국은 오늘의 한국보다는 더 나을거라는 희망이 있어요. 카오미 당신하고 제가 자랄 때의 한국보다는 훨씬 나은 한국 말이에요. 한국인들이 정상 혹은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범주 밖의 사람들도 받아들여줄수 있는 한국 말이에요. 신체적으로 불편한 사람들이나 혼혈들도요. 아직도 갈길이 멀긴 하겠지만요. 그 생각을 하면 좀 슬프죠. 

그런데 또 말하고 나니까 나이를 먹으면서 한국에 대한 친밀감이 조금씩 커가는 것 같기는 해요. 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의 뿌리를 먼저 알아야 하잖아요. 지금 현재 외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으니 지금이 적당한 때죠. 지금은 한국 문화에 순수하게 관심이 많아요. 음식도 아주 좋아하고요. 메뉴 선택을 할일이 있으면 한국음식을 먹죠. 어렸을 때 한국음식을 좋아했었는지 아닌지는 기억이 안나요. 고아원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요. 아무튼 이제는 한국을 받아들일 때가 된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그러기 싫었죠. 지금은 조금 더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중이에요. 내가 어떻게 태어나고 자랐는지 그 맥락을 이해하려고 해요. 그러면 저도 조금더 나은 삶을 살게 되겠죠. 이해가 되나요?

(46:30) 그럼요. 조금 복잡한 심경이겠죠. 나를 내쳤던 나라를 받아들이는 거잖아요.

맞아요. 아마도 많은 흑인들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느끼는 바와도 같을거에요. 어떤 백인들은 도데체 그게 왜 문제인지도 절대 이해못하는 정서 말이에요. 또 제 생각에 그래도 알만하고 또 더 알아야 하는 사람들이 또 그런 미묘한 정서들을 이해 못하기도 하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희망이 있다고 봐요. 제 아이들을 보면 어떤 인종인지 쉽게 가늠이 안되거든요. 큰애가 그래도 제일 저랑 비슷하긴 한데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아마 푸에르토리코 쪽 이거나 브라질쪽인가 할거에요. 둘째 말콤이 그래도 제일 동양인 스럽긴한데 또 키가 거의 190이거든요. 그래서 한국인 같아 보이지는 않아요. 눈이 동양인인것만 빼면요. 

막내 마일즈가 제일 사람들이 갸우뚱해 할거에요. 하와이쪽인가 싶기도 할거에요. 긴 머리에 서핑을 즐기는 소년 같은 아미지에요. 재밌는건 세 아이들 모두 막 태어났을때는 뭐랄까 한국인 할머니 같은 모습이었어요. 다들 검은 곱슬머리였거든요. 그러다가 다들 금발로 변하더라고요. 셋 다 세네살 정도까지는 모두 아주 금발이었어요. 그러다가 차츰 연한 갈색으로 변했고요. 

(48:58) 아이들 엄마는 백인인거죠? 진짜 다양한 인종이 섞여있네요. 아이들은 자신들의 인종을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아직은 어려서 이렇게도 해봤다가 저렇게도 해봤다가 할것 같은데. 

가끔씩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들여다보고 싶잖아요. 어느날 같이 저녁을 먹는데 한 녀석이 아시안들의 악센트를 놀리는 듯한 농담을 했어요. 꽤 오래전 일인데 다른 두 녀석이 낄낄대고 웃다가 제가 웃지 않는 것을 보고 아빠는 안 웃기냐고 묻대요. 그래서 제가 그건 좀 심한것 같다고 그랬더니 그게 왜 심하냐고 되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것을 흉내내며 웃는건 잘못이다 그리고 너도 아시안이다 라고 했더니 자기는 “부분적으로” 아시안이래요. 그래서 맞다고 유전적으로 봤을때 부분적으로 아시안이다. 아시안 문화 속에서 살지도 않고 모든 면에서 사람들이 너를 아시안으로 보지도 않지만  아시안인 다른 친구 부부의 이름을 대며 그들 앞에서 같은 농담을 하겠냐고 물었더니 안하겠대요. 그러니 그런 농담을 하지 말라고 했죠. 

제 아이들도 다 알죠. 부분적으로 흑인이고, 또 부분적으로 한국인이고, 반은 백인이죠. 그리고 또 이곳 미네소타에서 백인들에 섞여서 살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언뜻 보기에는 백인에 가까워서 제가 어렸을때와는 다르게 인종이라는 주제가 매일의 큰 화두는 아닌것 같아요. 제가 어릴때는 하루도 그냥 지나는 날이 없었거든요. 제가 남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확인받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하루도 없었어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가 인종이라는 것에 대해 가르치고 왜 그런지 설명할때 제가 겪었던 것처럼 인종이라는 것이 삶에 너무 큰 잣대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아이들 세대에서는 인종이라는 것이 좀 덜 심각하고 덜 예민한 주제였으면 해요. 이곳 North Field에는 대학이 두개나 있어서 인종적으로 꽤 다양하고 큰애한테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 꽤 많았거든요. 그래서 큰애한테 백인과 흑인 혼혈인 친구들도 꽤 있었고 동아프리카 쪽에서 온 친구들도 꽤 있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국경을 막론한 친구관계를 맺는 큰 아이에게 이런 인종적인 이슈가 어쩌면 그냥 문제거리도 안되는 이슈인 것 같기도 하고요. 문제 자체가 안되는 거죠.  

그런데 또 조지플로이드 사건(역자 주 : George Flyod; 2020년 5월 미국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 시에서 백인 경찰의 과잉 대응으로 질식사한 흑인 남성을 말한다.) 이 났을때 아이들과 아주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어요. 제가 우는 모습을 아이들이 처음으로 목격한 날이기도 했죠. 그 영상을 제가 차마 못 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 친구가 꼭 봐야 된다고 해서 방에 들어가서 혼자 봤거든요. 그걸 막내가 보고 아빠가 지금 운다고 아주 큰일이라도 난듯이 떠들어대서 아이들이 다 뛰어왔어요. 아빠가 운다고요. 그래서 아이들과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는 계기가 되었죠. 온 가족이 조지플로이드 기념비를 찾아가서 추모도 했어요. 아이들은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거라고 믿어요. 아마 그때쯤에는 인종문제보다 더 심각한 다른 문제를 겪어야 할수도 있지만요. 테네시 같은 곳에서도 젊은 세대들이 나서서 운동을 주도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희망이 있다고 봐요. 

(54:20)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 있나요?

열심히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팬데믹이 터졌죠. 마지막으로 갔을때 기억으론  제가 태어난 곳만 빼고는 다 개발이 되어 있더라구요. 제 기억에 남아 있는 한국은 지금의 한국과는 아주 많이 다르지만 제가 태어난 정착촌 같았던 곳은 아직도 좀 불결하고 가난한 동네로 남아있더라고요. 참 재밌죠. 지나는데 하수구 냄새가 나기도 했고요. 마치 박제된것 같은/시간이 멈춘것 같은? 집의 형태 같은 것들은 많이 현대화 됐죠. 그때는 말그대로 초가 지붕 집들이 있었거든요. 그래도 주변에 있는 높은 빌딩들하고 너무 극명하게 대조가 되더라고요. 곧 재개발이 될거라고 통역하는 사람이 설명해줬어요. 아마 아파트가 들어서겠죠. 처음 갔을때는 못 알아봤어요. 큰 산이 있었는데 한쪽이 깍이고 고가도로가 생겼고요. 군부대는 아직도 있었고요. 아이들을 데리고 방문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막 팬데믹이 터져서 포기해야 했죠. 곧 가야지 하고 생각중이에요. 의정부도 보여주고요.

(56:45)아이들도 관심있어 하나요?

어린 녀석들은 아직 별 생각이 없는것 같아요. 나이가 좀 들어야 관심이 가는 그런 일이 잖아요. 

지금은 아빠의 이야기에 대해서 알긴 아는데 아직은 와닿지 않는 단계인것 같아요. 잡지 글이 처음 나왔을때 아이들한테 읽어줬거든요. 그런데 그냥 아직 좀 어린것 같아요. 언젠가 조금은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겠죠. 그럼 그때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주면 되죠. 원래 기사는 7000단어 분량이었는데 기자분이 10000단어로 초고를 쓴다음 줄였나보더라고요. 그 잡지에서 분량이 가장 긴 글이었대요. 아무튼 그 기자가 12000단어 분량의 원고로 정리해서 저에게 기념으로 보내줬어요. 

대단한 것은 배경조사도 열심히 했더라고요. 고맙게도요. 제가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 사실이나 맥락 같은 것을 그 글을 통해 더 알게 됐어요. 한국에 군인들을 보내면서 인종차별도 같이 보냈잖아요. 제가 미국인은 다 흑인인줄로만 알고 컸던것에 이유가 있었더라고요. 제가 만난 미국인들은 다 흑인들이었으니까요. 한국전쟁이 1950년대였으니 미국도 아직 인종분리가 아주 심할때였고. 그러니 백인인 미군이나  흑인인 미국이나 다 힘들었겠죠. 백인인 미군은 흑인인 미군들하고 음수대도 같이 써야했고 방도 같이 써야했고요. 서로 교류도 없었고 기지촌 여성들도 그랬고요.? 이해가 되죠. 

(59:10) 흑인 병사들이 더 험지로 보내지고 그랬다죠?

맞아요. 조사하다보니 알게 되었대요. 

그게 인종차별이죠. 

네. 전투에서도 더 위험한 일을 맡았대요. 저도 군복무를 한지라 얼마전에 VA( Veteran Affairs : 미 보훈청)로부터 안내장이 왔는데 그동안 보훈청이 흑인병사들에 대한 보상을 차별적으로 다뤘다는 지적을 받아들이고 소급하여 다시 재조사를 한다고 하더라고요. 공식적으로 인정을 한거죠. 흑인 퇴역군인들에게 혹시 필요하면 다시 보상신청을 하라고요. 

(1:00:00)입대했을때 혹시 친아버지에 대한 생각도 했나요?

별로요. 일단 저는 장교로 입대를 했어요. 생계를 위해서 입대한 것이 아니고 조종쪽으로 더 경험을 쌓으려 갔죠. 그래서 유전자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진 않았어요. 제 친아버지는 아마도 계급으로 봤을때 낮은 계급이었을거에요. 그때는 흑인이 장교로 입대할 가능성이 희박했으니까요. 그러니 아마도 사병으로 공병단 일을 했거나 했겠죠. 한가지 기억나는 것이 “Baker”에요. (역자 주 – 제빵사를 뜻하나 “김” “이”처럼 미국의 아주  흔한 “성”이기도 하다) 그것이 성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보직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아버지를 그 이름으로 불렀던것만 기억이 나요. 엄마가 살아계셨을때 제 아빠가 누군지 분명히 알고 있었던것 같아요. 우리 셋이 같이 찍은 사진이 있었거든요. 제가 아주 어렸고 저를 안고 찍은 사진이에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계속 그 사진을 가지고 다닌 기억이 있는데 고아원에 간 이후 어느 순간 없어졌어요. 사진속의 저는 아주 어린 아이였고요. 

(1:02:28)혹시 결혼을 했었던걸까요? 아니면 아빠가 그냥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던 것인지?

그 뒤에도 엄마가 계속 기지촌에서 일한것으로 봐서는. 글쎄요. 모르겠어요. 

어쨌거나 에릭씨에 대해서 알았던 거네요. 

그런거죠. 아무튼 그 사진 한장으로 아주 많은 질문들이 떠오르죠. 그래서 유전자 등록등으로 가족찾기를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원치 않는 한 사람의 과거를 파내는 일이 될수도 있잖아요. 갑자기 나타나서 해명을 해보라고 하는. (웃음)

아직 준비가 안된건가요?

그렇다기 보다는 그냥 그렇게 궁금하지 않아요. 어머니쪽이나 아버지쪽으로 혹시 살아있는 친적들이 있는지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 별로 알 필요를 못 느껴요. 언젠가 해볼수도 있고. 언젠가 제 아이들이 해볼수도 있고요. 

아이들중에 하나가 언젠가 DNA테스트를 해보겠죠.

어느날 갑자기 말이죠. 

지금은 아직 어려서 이 모든 일이 그냥 아빠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언젠가 자신들의 이야기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을테니까요. 

그러길 바래요. 궁극적으로 그런쪽으로 흘러가서 어느 순간 궁금해지고 알아내겠죠. 이제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것을요. 저도 한 15년 20년쯤 전에 그랬어요. 한국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파보고 그랬어요. 한 동안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적도 있었으니까요. 그때의 상황 상 말이에요. 부정하고 싶어도 그 또한 내 일부분이니 받아들여야죠. 그래서 말인데 곧 아시안조종사 연합 컨퍼런스에 나가서 강의를 하게 되었답니다. 인구수에 비해서 아시안 파일럿 비율이 많이 낮거든요. 

그럼요. 에릭씨도 같은 아시안이죠. 

좀 이상하기도 한 부분이 그 잡지 사진기자가 말해줬는데 한국인들은 성공만 하면 장땡이고 같은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준다고 하대요. 그 기자가 직접 한말이에요. 하인즈 워드 선수의 경우도 그렇잖아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데 크게 성공했으니 이제 같은 편이라고요. 그런데 그냥 보통사람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고요. 

혼혈이 아닌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멀리 내쳐진 다음에 자력으로 크게 성공해서 돌아오면 이젠 우린 같은 한국사람이니 같은편이라고 한대요.

혹시 카오미 당신을 인터뷰한 팟캐스트도 있나요(웃음)?

네. 시즌3에 있어요. 다른 입양인이 저를 인터뷰했어요. 

다음 재생목록으로 당첨이네요. 

어느순간 말이 안되더라고요. 제가 사람들을 인터뷰하다보니 어느 순간 사람들이 네 이야기는 언제 들려줄거냐고 하대요. 제가 처음에 이 팟캐스트를 시작했을때는 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거든요. 우리 기자들은 본인을 드러내면 안되니까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저도 참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더 할게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네요. 너무 재밌었어요. 혹시라도 아직 더 치유되어야 부분이 남아있나요? 아니면 이만하면 되었다거나 혹은 가족을 통해서 치유가 되었나요?

완성형인 존재는 없잖아요. 그러니 물론 조금 더 치유되어야 할 부분이 남아있죠. 그런데 지금 이 상태의 나로 만족해요. 그래서 더 강해질수 있고 휘둘리지 않으면서 마음속에 눌려있던 부분들을 들여다볼수 있으니까요. 지금 55살까지 많은 일이 있었지만 잘 이겨내 왔잖아요. 지금 생각으로는 굳이 들춰내지 않아도 되는 일들은 들춰내고 싶지 않아요. 어린 시절에 겪었던 힘든 일들을 굳이 끄집어 내지 않아도 잘 살수 있으니까요. 완전히 치유가 됐다고 말할수 없을지도 모르죠. 어릴때 미식축구를 하며 하도 그쪽으로 많이 넘어져서 오른쪽 팔이 완전히 펴지지가 않거든요. 그렇다고 수술을 하거나 해서 고쳐보고 싶지도 않아요. 완전히 고쳐질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게 현실이죠. 그냥 살짝 불편한 팔로 살아가는 거죠. 신체적 트라우마처럼 정신적 트라우마도 같은 것 같아요. 그냥 안고 살아가는 거잖아요. 들춰내는 것이 꼭 치유를 말하는 것인지 더 심하게 만드는 것인지 알수가 없기도 하고요. 

그간의 경험들을 통해서 지금 이 자리에 꼭 필요한 내가 됐죠. 지금의 나로 만족해요. 그리고 지금 나에 대해 말하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죠.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경험도 필요했고 많은 내적대화도 필요했죠. 그러니 이제 내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것보다는 내 아이들이 오래된 제 이야기에 천착하겠죠. 그러니 이젠 풀어놔봐야죠. 최대한요. 하면 할수록 더 담담하게 이야기 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카오미씨에게 너무 감사해요. 이런 공간과 매체를 만들어 주는 것이죠. 시즌이 몇개가 있다고 했죠?

많아요. 6개나 있어요. 

고마워요. 

내적 평화를 이룬것 같네요. 

네. 맞는 표현이에요. 언제 만나서 식사나 한번 할까요

언제 North Field에서 만나서 유명한 Ole Store같은데 같이 한번 가죠. 제가 올라프 대학 출신이라 그 근처를 잘 알아요. 30년 전의 이야기이지만요. 

꼭 한번 봐요. 

혹시 한국의 엄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이 질문은 지금까지 아무도 저한테 물어보지 않았는데. 부모가 되어보니 아이들에게 제일 바라게 되는 것은 성공도 아니고 그냥 좋은 사람으로 크는 것이더라고요. 제 와이프하고도 항상 이야기 하는데. 그래서 저도 제 엄마한테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잘 자라서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요. 가족도 꾸리고 좋은 아빠가 되고 좋은 남편이 되고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었다고요. 제가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되었고 그게 엄마도 원하는 일이었을거에요. 그말 밖엔 할말이 없네요. 

고마워요. 에릭씨. 그리고 우리 입양인 커뮤니티에도 너무 많은 것을 주고 있네요.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거든요. 아무리 그 전에 잡지에 인터뷰를 했다고 해도 팟캐스트에서 이렇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 놓는 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아요. 제가 민감한 질문도 많이 했잖아요. 이 모든것이 결국은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죠. 이 이야기들이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니까요. 

멋진 조각보 같아요. 카오미씨가 이 이야기들을 연결하고 있고요. 그 조각보 이불이 우리를 따듯하게 감싸고 보듬어주네요. 

                                                번역 : 전유근 

시즌 6, Episode 18: 의정부에서 온 소년

제 이름은 에릭 풀(Eric Poole)입니다. 55살이고요 트윈시티(역자 주: 미국 미네소타주에 있는 미네아 폴리스 시와 세인트 폴 시를 말한다) 바로 남쪽에 있는 노스필드에 살고 있어요. 벌써 23년이나 살았네요. 큰 아이는 루치아라고 지금 아리조나 대학 1학년이에요., 둘째 말콤이 고등학생, 셋째 마일스가 중학생이라 매일 얼굴 맞대는 녀석들이고요. 아이들 엄마의 이름은 메리에요. 파고와 무어헤드 쪽 출신이죠. 대학에서 만났어요. 제가 노스다코타 대학을 다녔거든요. 풋볼 장학생으로요. 거기서 항공학을 접했죠. 아니 항공학이 절 찾아냈다고 해도 맞을 거에요(웃음). 그 뒤로 파일럿이 되었고 지금은 뉴욕에 베이스를 두고 있는 젯블루 항공사에서 조종사로 일하고 있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최고 조종사인데 다른 조종사들을 관리하는 역할이에요. 요즘은 새로 취항하게 된 뉴억공항 (Newark)을 기반으로 인사나 운영에도 관여하고 물론 비행도 하고요. 벌써 18년째 근무하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시간이 아주 짜릿한 비행이었다고나 할까요? 제 가치와 신념과 잘 맞는 회사를 만났어요. 아주 진보적이고 제가 추구하는 방향과 잘 맞아요. 처음에 채용됐을때는 거의 스타트업이나 다름 없는 작은 회사였거든요. 그랬기 때문에 제가 더 많은 역할을 할수 있었고 아주 재밌게 일해왔어요. 마치 회사가 제 일부와도 같다고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다들 입에 올리기 꺼려하는 주제가 있잖아요. 미국내 민간비행사에 흑인 조종사를 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요.

흑인 조종사 뿐만 아니라 유색인종 조종사 자체가 드물죠. 

백인남성 일색인 분야에서 일하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

미네소타에서 단련이 되어서 그런지 별로 힘들진 않아요(웃음). 어딜 가나 항상 제가 “유일한” 상황에 익숙해있거든요.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훈련이 되어 있고 어릴때 한국에 있었을때에도 항상 주변인이었어요. 제 존재가 시작된 순간부터 이방인으로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깨달은것 같다고나 할까요?. 나만의 조타실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 처럼요.

그런 측면에서 제가 스스로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제가 일하고 잇는 이 분야에서 여성들과 유색인종들이 조종사가 될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하고자 노력했어요. 제일 큰 걸림돌은 역시 돈이에요.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들어요. 대학에서 장학금을 최대한 다 받았어도 간신히 학비와 기숙사비만 댈수 있었고 조종프로그램은 아예 별도였어요. 4년제 대학 학비의 두배  가까이 되는 비용이 조종훈련에만 들어가니까요. 그러니 굉장히 큰 걸림돌이죠. 두번째 걸림돌은 이 분야에 이미 몸을 담고 있는 가족이나 혹은 같은 인종의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기회는 커녕 보고 배우거나 영감을 받거나 할수 없는 거죠. 

그래서 젯블루 와 함께 관련해서 많은 일을 하고 있어요. 회사에서 다른 흑인항공학종사자들, FAA(역자 가칭 : 미국 연방 항공국) 그리고 ACE(역자 가칭 : 미 항공 교육 협회) 와 연계해서 캠프와 같은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참여하게 됐죠. 다른 경로로는 전혀 조종학을 접해볼 기회가 없는 학생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죠. 

비행을 마친 후에 승객들이 조종사가 유색인종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의의의 얼굴을 하는 것을 보며 은근히 고소했던 적은 없나요?

안 그래도 다른 흑인 조종사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가 있어요. 우리 항공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중에 하나가 파일럿들이 조종실에서 나와서 승객들과 직접 인사하기에요. 그래서 젯블루를 타시면 파일럿들이 보딩시에 입구에서 인사하는 것을 보실수 있어요. 이륙후에 안내방송으로만 인사하지 않고요. 처음에는 좀 떨리는데 갈수록 익숙해져요. 20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승객들하고 이런 저런 대화도 나누게 되었고요. 유색인종 조종사를 대하는 승객들의 반응이 대략 두 종류에요. 한가지 자주 일어나는 경우가 제가 흑인이라서 저를 조종사로 보지 않는 경우에요. 다른 한가지는 제가 흑인이라는 사실이 사람들한테 어떤 큰 감흥을 주는 경우고요. 어느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승객들이 보딩할때 인사를 하고 있었는데 한 여성 흑인여성노인분이 맨 앞자리에 타셨어요. 제가 안내방송을 마치자 그 분이 다가와선 떨리는 손으로 저를 잡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손을 내밀었더니 저를 안아주시더라고요. 제가 너무 자랑스러우시다며 남편분도 조종사가 되고 싶어 했다고. 제가 오늘 이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을 남편이 알면 아주 자랑스러워할거라고요. 저도 뭐랄까 가슴이 울컥했죠. 

한편으로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휠체어를 타고 어르신이 타시고 아내분이 같이 타셨는데 가방을 무거워하시길래 제가 가방을 머리 위에 짐칸에 넣어 드리고 자리 찾는 것을 도와드렸죠. 그때 기내 사무장이 마침 제자리에 없었거든요. 그때 지상직 카운터 직원분이 오더니 저한테 “기장님 이제 다른 승객들이 탑승해도 될까요?”  라고 묻길래 그러라고 했죠. 일단 사무장한테 다시 한번 확인하라고요. 그랬더니 그 아내분이 당신이 기장이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옆에서 남편분이 “이 검*이가 올랜도까지 조종을 한다고?” 라고 하는 거에요. 그 아내분이 너무 당황하시며 목소리좀 낮추라고 남편을 꾸짖으셨어요. 다른 직원들 모두 아연실색을 했죠. 조종실에 들어갔더니 젊은 제 부기장이 도데체 지금이 몇년도인데 아직도 저런 말씀을 하냐며 황당해하더라고요. 그분 나이를 생각하면 제가 속상해 할일은 아니죠. 악의가 있어서 저를 그렇게 부른건 아닐테고 뭐랄까 아직 세상이 바뀐걸 모르시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날 다들 같이 저녁을 먹는데 굉장한 안줏거리가 되어줬죠. 그런 일들이 전혀 신경이 안쓰인것은 아니지만 좋은 쪽만 생각해야죠. 저를 바라보며 감동을 받으시는 분들이 계시기도 하니까요. 그분 남편분은 조종사가 되고싶어 하셨다는데 아마도 기회조차 얻지 못하셨을테니까요. 

얼마전에 CNN에서 닐 디그래스 타이슨(Neil Degrasse Tyson)의 인터뷰를 봤어요. 진행자가 유일한 흑인 천문물리학자됢에 대해서 물었어요. 어린 세대들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하는 질문을요. 저도 비슷한 상황이잖아요. 그의 대답이 제가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것이더라고요.  그 대답이 뭐였냐면 조금 뒤집어서 생각해보자였어요. 유색인종 어린아이들이 우리의 존재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대로 백인들이 우리가 이런 위치에 있는 것을 보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고요. 왜냐하면 결국 경제를 움직이고 정책을 만들고 판을 새로 짜는 건 그들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수행할수 있는 그룹으로서 그들이 우리를 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고요. 저도 항상 그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왔어요. 여성이나 유색인종들을 쉽게 보기 힘든 위치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을 백인들에게도 보여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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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진짜로 일어났던 일인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는건지 자신있게 말하기가 힘들어요. 꿈만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어릴때의 상황인식이 분명하지 않았을수도 있고요. 그냥 분명하지 않아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엄마와 의정부에 살았던 기억이에요. 의정부는 한국의 DMZ와 서울 사이에 있는 도시 이름이에요. 미군부대가 있고요. 그곳을 지나는 냇가가 있었어요. 이 이야기를 와이프한테 해주면서 제 첫기억이 하필 버려졌다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물 한가운데 널찍한 바위가 있었는데 비가 많이 오면 수위가 상승해서 안보이다가 가물때는 물밖으로 드러나는 그런 바위였어요. 위험해서 사람들도 많이 빠져죽는 그런 곳이어서 어린애들은 절대 근처에 가지 말라고 하는 곳이었죠. 비만 많이 안오면 아주 아름다운 그런 곳이었죠. 어느날 엄마하고 같이 거기에 간 기억이 나요. 자리를 깔고 바위위에 앉아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마도 제가 잠이 들었나봐요. 잠에서 깨보니 엄마는 없고 그래서 막 울었어요. 엄마가 아마 잠시 자리를 비웠었을거에요. 아무튼 그게 제 첫 기억이에요. 그 다음 기억은 제가 잡지 Men’s Journal에서도 밝힌 이야기인데 엄마와 함께 기차를 탔는데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쉬쉬하던 기억에요. . 흑인 혼혈이 분명해보이는 아이를 앉고 있었으니까요. 

또 그 후에 기억난 것이 함께 모여살던 정착촌 같은 것이 있었어요. 한국에 돌아갔을때 알게 되었는데 그곳의 이름이 텍사스 촌이었어요. 텍사스가 그곳에서는 성매매를 경멸적으로 부르는 말이더라고요.  그 곳에 사는 아이들은 모두 흑인 혼혈아이들이었어요. 그 안에서는 사람들이 저희를 잘 보살펴줬어요. 다른 한국 아이들과는 전혀 접촉이 없을 정도로요. 아마도 그때가 제 인생에서 저랑 비슷한 사람들하고 살았던 유일한 때인것 같아요. 우리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당할 뻔 했던 많은 부정적인 경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줬죠. 그 두가지가 제가 지니고 다녔던 기억이에요. 많은 부분이 분명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엄마는 기억나요. 

엄마는 어떤 분 이었나요?

그게 엄마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혹은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자세한 사항은 기억나지 않고요. 마야 안젤루(Maya Angelou 미국의 유명 시인)가 한 말 중에 사람들은 니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가 아니라 니가 어떤 기분이 들게 만들었는지를 기억한다” (“It’s not how, what people say or what they do, it’s how they make you feel.”) 는 말이 있잖아요. 저도 그 느낌만 기억해요. 어린아이였으니까 엄마와 나의 삶을 어떤 언어의 형태로 기억할 수가 없었을테고요. 하지만 엄마를 생각하면 그냥 따스했던 것과 나를 돌봐줬던 것과 엄마가 나를 보호해줬던 것등의 감정이 기억나요.  그래서 엄마가 죽은 것을 알았을때 엄마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돌아가셨거든요. 너무 슬펐고요. 아마 네살쯤 됐었을 거에요.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해줬군요.

네. 아주 처음부터요. 

그럼 엄마가 갑작스레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한국에 계속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어떤 근거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항상 미국에 가야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한국에 계속 산다면  엄마와 나 둘다의 앞날이 암울할거라는 것을 알았죠. 굉장히 가부장적인 사회였고 지금의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을테니까요. 극도의 빈곤한 제 3세계였죠. 제가 어릴때는 포장된 길도 아주 드물었어요.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남자들이 분뇨를 파다가 논에 거름을 줬던 것이 기억나요. 아주 낙후됐었죠. 이 모든 일이 한 세대안에 일어난 변화니까요. 그런 사회였으니 자신들을 위해 싸우러 와준 외국인 병사들이 뿌린 씨를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을거에요. 엄청난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겠죠. 그래서 미래가 밝지 않을거라는 것을 알았죠. 학교를 갈 기회도 못 얻었을테고 그래서 엄마가 어떻게든 미국으로 보내려고 했었던것 같아요. 아빠가 당연히 미군이었겠죠. 그래서 그랬는지 미군 부대 바로 주변에 모여 살았고요. 

“모호한 상실(Ambiguous loss)”이라는 말이 있어요. 엄마가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것 같은데 마을사람들이 화장을 해서 모셨나요? 엄마가 돌아가신 것을 아는데 고인을 추모할러 방문할 곳이 없다는 사실은 어떤 느낌인가요?

그런 쪽으로 생각을 많이 해보진 않았어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생존에 직면했죠. 성인이 된 지금에야 이야기해볼수 있는 경험들이죠.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것은 분명히 알았던것 같아요. 엄마를 다시 볼수 없다는 것말이에요. 강건너에 엄마가 자주 다니던 절이 있었었어요. 제가 불교에 대해서 아는 건 하나도 없지만 엄마가 성매매를 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영적인 충족을 위해 절에 다녔던 거죠.  아마도 누군가가 설명을 해줬었겠죠. 엄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요. 그러나 이제 앞으로 엄마 없이 살아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죠. 매일 혼자 지냈는데 그게 어느 정도 기간이었는지 시간개념도 잊었고요. 한동안 마을 사람들이저를  돌봐줬어요. 엄마가 없을때 저를 돌봐주곤 하던  할머니도 계셨고요.  어떤 공동체가 있었군요. 네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나서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런 의식들이 있었죠. 그리고 혼혈아이들을 키우는 다른 집도 있었어요. 저보다 큰 애들이 있는 집에서 같이 지낸 것도 기억나는데 그집 아들이 저를 많이 때렸어요. 아무튼 당시 아이들은 그냥 어떤 지도나 보살핌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그냥 존재했었던거죠. 마치 소설 파리대왕 처럼요. 

어머님과 다른 여성분들이 국가가 주도한 성매매종사자 였다는 사실도 언급해야 할것 같아요. 

맞아요. 

한국과 미국이 합작으로 힘든 환경에 놓인 여성들을 미군들을 위한 성매매를 하도록 주도했죠. 

제가 강연이나 인터뷰등을 하게 될때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제 존재자체가 국제 정치학상으로 제일 안좋은 형태의 부산물이라고요. 한국전쟁으로 인해 두 나라가 공조하게 되었고 가난한 여성들을 성매매로 이끌고 거기에 미군이 가담했죠. 두 나라가 공모해서 여성들의 성병유무 검사를 실시하고 확인증을 발급했으니까요. 군인들을 보여주라고요.  그리고 그 공조의 부산물로 저 같은 어린아이들이 태어나게되었는데 그에 대해선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죠. 참 서글프죠. 

그리고 그와 똑같이 일이 베트남에서도 벌어졌죠.  같은 이야기의 베트남 버전이요. Men’s Journal에 나간 제 기사가 입소문을 탔을때 어떤 젊은 여자분이 자기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다고 연락을 주셨어요. 그래서 아마 한국인아니면 베트남인인가 햇죠. 보통 그쪽 분들이 많이 연락을 주시니까요. 그랬는데 사실은 그 분이 동유럽출신이셨어요. 아버지가 소련군 군인 이었대요. 비슷한 일이 동유럽에서도 벌어진 것이죠. 그때 뭐랄까 한대 맞은 것 같더라고요. 미군이 주둔했던 곳이라면 그 어떤 곳에서도 이런 경우가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딸까요. 그리고 비단 미군 뿐만이 아니라 어떤 형태의 군대도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결국 제일 최전선에서 고통 받고 그 후폭풍 을 감당하는 것은 여자들과 아이들이니까요.

다른 혼혈아이들이 많이 있는 마을에서 자랐다고 했잖아요. 그러면서도 그곳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도 언젠가는 미국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하면서요. 혹시 미군 병사 특히 흑인병사들의 보살핌을 받기도 했나요 그래서 미국과 이어져있다고 느낄 수 있게? 

제가 있던 마을에는 흑인 병사들이 많이 찾아왔었어요. 영어에도 그때 조금 친숙해진것 같고 음악이나 미국의 흑인문화나 패션스타일등이 낮설지 않았어요. 미국에 대한 저의 어떤 인상이나 관점 같은 것이 그때로부터 시작됐다고도 할수 있을거에요. 그 뒤로 홀트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가게 되었는데 

제임스 싱글리(James Singly)라는 병사가 자주 찾아왔었어요. 모두 그를 그냥 싱글리라고 불렀고 또 애칭으로  Sergeant Pig (역자 의역 : 돼지 하사)라고 불렀어요. 덩치가 엄청 컸거든요. 그가 오면 모두 매달리고 올라타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흑인 혼혈 아이들한테 특별한 관심을 보였던것 같아요. 그도 그렇게 말했고요. 제가 Men’s Journal 일로 한국에 다시 돌아가 당시 고아원을 운영했던 몰리 홀트를 만났을때 그도 그랬어요. 싱글리가 흑인소년들만 좋아한다고 사람들이 불평했었다고요. 그런데 그녀도 그러더라고요. 흑인애들이 싱글리를 제일 필요로 했었다고요. 왜냐하면 입양이 되는 시기가 정해져 있는데 백인 혼혈애들은 들어오자마자 금방금방 입양이 되어서 나갔죠. 들어온지 몇달도 안되어서 유럽으로 많이 갔어요. 덴마크,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로요. 물론 미국이랑 캐나다로도 많이 갔고요. 물론 그때도 이런 사실들을 말로 표현하거나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던것은 아니지만 그냥 다들 알았죠. 그래서 백인혼혈애들하고는 안 놀았어요. 금방 갈거니까요. 그리고 같이 놀수 있었던 한국애들은 신체장애든 지적장애든 장애를 가진 애들 뿐이었고요. 고아원 전체를 통틀어서 말이에요. 입양이 되어야 하는데 혼혈이라고 또는 나이가 많다고 입양이 안되었으니까요. 그 사실을 싱글리가 너무 잘 알았던 거죠. 서울 시내쪽에 조금 큰 애들이 숙식하는 시설이 있었어요. 나이가 차서 입양이 되긴 글른 아이들이 모여 사는 일종의 그룹홈 같은 곳이요. 싱글리가 그곳도 종종 방문해서 아이들과 놀아줬어요. 슈바이처 같은 사람들을 박애주의자라고 하잔아요. 싱글리도 그런 셈이었죠.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자기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위해 자기의 휴일을 반납 한 거죠. 동기가 뭐였는지는 모르죠. 물어볼 기회도 없었죠. 미국으로 오면서 싱글리를 다시 못 만나게 됐으니까요. 물어봤어야 하는데 아쉬워요. 

싱글리가 어떻게 대해줬는데요?

엄마랑 똑같았어요. 다정했고 잘해줬어요. 그때도 알았던것 같아요. 이 분이 여기에 올 의무가 없다는 것을요. 한번씩 빼먹는 토요일도 있었거든요. 하루종일 기다렸는데 안온적도 있었어요. 당연한거죠. 그런데 그런날은 우리들이 엄청 낙담했죠. 뭐랄까 한동안은 싱글리를 만나는 것이 우리의 존재이유같기도 했달까요. 그와 있을때는 우리가 이렇게 사회에서 내쳐진 혹은 잘못 태어난 아이들이라는 것을 잊을수 있었고 누군가와 진정으로 속한다고 느낄수 있었어요. 그때 그곳에 있던 아이들을 대신해서 말하건데 그와 보내는 시간이 그 시절의 최고의 기억이었다고 감히 말할수 있을것 같아요. 자신을 내어주고 우리를 고아원 밖으로 데리고 나가 세상 구경을 시켜줬어요. 지금은 정책이 어떨지 모르지만 싱글리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던 홀트도 감사하 고요. 

일산에 있는 고아원에는 얼마나 있었던 건가요? 시설과 환경은 어땠나요?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안나지만 1973년 8월에 들어가서 75년 5월에 나왔어요. 8월 20일이 제 생일이라 기억해요. 물론 진짜 생일은 아니지만요. 그 관계자들이 날짜를 생일로 쓴거죠. 

고아원에 입소한 날이 생일이 됐군요. 

아마도 그때 한국에서는 생일이 그렇게 크게 축하할일이 아니지 않았나 싶어요. 태어나자마자 한살이 되고 해가 바뀌면 한살을 먹고 그랬잖아요. 그러니 그렇게 실제 나이보다 많은 나이를 제 나이라고 말했을거고 그렇게 기록이 됐겠죠. 입양인들 사이에서는 다들 친숙한 소재잖아요. 다들 진짜 나이를 모르는것 말이에요. 

시설만 놓고 봤을때는 나쁘지 않았던것 같아요. 깨끗했어요. 2017년에 돌아갔을때 많이는 아니어도 건물이나 근처 지형등이 모두 제 기억 그대로 이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새로 지은 건물에 속했고 검소했지만 인간적이었던것 같아요. 지금도 기억나는건 종교행사가 많았다는 거에요. 성경공부도 매일 있었고 성경으로 영어공부도 했고 예배와 교회 행사도 많이 참석해야 했어요. 나쁜 일을 하면 벌받는다 같은 공포를 조장하는 신앙 같은 거였죠. 

나중에 지옥에 간다 뭐 이런거요. 

네. 제도화된 종교에 대해 좀 삐딱하게 말해보자면 그렇게 함으로 아이들을 통제할수 있는것 아니겠어요? 기독교에 대해서 입문을 그렇게 한거죠. 소화되기도 전에 막 들이부었달까?

2017년에 몰리 홀트를 만났다고 햇잖아요. 어떤 사람이던가요? 그리고 홀트에 대해서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일단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들이는 어떤 시설과 시스템을 만든 공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박수 칠일은 박수 쳐줘야죠. 자신들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던 기사도 있잖아요. 의도는 물론 순수했고 거룩했죠. 다만 그들이 만든 시스템 안에서 일어났던 모든 상호작용들이 다 그렇진 않았죠. 개인적으로 참 제 인생에서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일을 그곳에서 당했어요. 물론 가장 빛나는 순간들도 결국은 홀트를 통해 가게된 입양을 통해서 가능했지만요. 제 인생에 일어났던 일들의 대부분을 좋게 생각해요. 나쁜면과 좋은 면을 동시에 봐야 하니까요. 몰리를 만났을때 살짝 어색한 순간이 있었어요. 저한테 좋은 가족을 만났냐고 물었거든요. 그냥 표정으로 대답을 했어요. 궁극적으로는 다 잘 풀렸으니까요. 

지금까지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이야기가 있어요. 제 와이프도 그러더라고요. 언젠가는 그곳에서 당한 육체적 성적 폭력을 공개해야 된다고요. 그런데 아마도 꼭꼭 숨겨놓고 살아서인지 아니면 생각하면 그때 당했던 고통이 연상되어인지는 몰라도 그동안 별로 생각이 안났어요. 너무 어릴때였으니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거나 수용할만한 지적 능력도 없었고요. 그리고 그 뒤로 그런 일들이 일상적이 되어버렸죠. 그러면 그걸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디죠. 다들 이렇게 사는가 보다 하고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를 모르니까요. 힘들었죠. 그 뒤로 그 기억을 묻어두고 살다시피 했던 이유가 그때를 떠올리며 제가 살아온 날을 반추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기 때문이죠.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으니까요. 한때는 내가 결혼을 할수 있을까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가질수는 있을까 의심했던 적도 있었어요. 그때의 아픈 기억들조차 제 일부분이니까요. 그래서 어릴때는 분노조절장애도 겪었고 싸움도 많이 했어요. 아마도 고아원에서 털어버리고 나오지 못한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싸워야만 했죠. 싸움으로 푸는 방법 밖에는 몰랐고요. 그래서 싸움을 잘 하게 됐죠.

그 뒤 미국에 오게 되었고 잘사는 백인들이 모여 살던 뉴호프 시 근교에 살게 되었어요. 미들레이크 초등학교에 들어갔죠. 저 말고도 유색인종 학생들이 있긴 했는데 아주 소수였죠. 아이들은 참 짖굳게 솔직하잖아요.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을때 상대방이 다르다 싶은 점만 부각시켜 공격하죠. 그러면 저는 여지없이 제가 할수 있는 방법으로 응징을 했고 당연히 교장실로 많이 불려갔죠. 저를 입양한 분들도 그런 일들로 많이 힘들어했는데 그 모든 일들이 고아원에서부터 쌓인 앙금같은 것이었죠. 그 이전에도 성폭력까지는 몰라도 아이들 간에 폭력은 있어왔고요. 

성적으로 학대를 당했다는 건가요?

같은 고아원의 다른 아이들로부터?

네. 저보다 큰 아이들이요

홀트의 직원들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알고는 있지만 관리할 인력이 없었다거나 하는?

몰랐을거라고 하는 것이 그들 입장에서는 낫겠죠? 안다 하더라고 다들 쉬쉬하는 일이잖아요. 애들 사이에 그럴수도 있지 하면서요. 저도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도 않았고요. 그런 일을 당하는 입장이 되면 이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을 하면 후폭풍을 감당해야 된다는 것도 알죠. 성직자들이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뉴스에서도 보면 아이들이 아무한테도 말을 안하잖아요.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자체로 수치심을 느끼니까요. 

제 경우에는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걸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죠. 이걸 누구한테 알려야 하는지 아닌지도 몰랐고요. 성직자들한테 성추행을 당하는 어린아이들의 기사를 접하면서 저도 같이 아파했어요. 제 경우는 그냥 저보다 큰 애들이 있고요. 그곳에 직원들 중에 그 누구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요. 적어도 제 경우에는요. 

에릭씨도 저도 50대인데 그건 명백히 어른들의 책임이죠. 관리자들의 책임이고요. 합당한 관리감독이 부재했으니까요. 

저를 입양한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잖아요. 너무 복잡해요. 그 분들이 그 사실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했다고 생각해요. 물론 50-60년대와 지금은 문화적으로도 너무 다르고 그때는 지금처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쉬쉬 했잖아요. 지금처럼 처벌을 받고 책임을 지고 그런일이 일어났을때 아이들이 안전하게 주변에 알리고 보호받을수 있게요. 

혹시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알았던 걸까요? 성적으로 학대당했다는 사실을 알리면 입양이 안될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런 부분이 작용을 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적어도 저는 아니었어요. 

생존을 위한 방어기제였을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말할수도 있죠. 

마침내 입양이 될거라는 사실을 알았을때 어땠나요?

아주 우쭐했죠. 

그 순간을 기억하나요?

아니요. 그렇지만 뭐랄까 해변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파도가 치기 시작하는 것을 어느 순간 감지하는 것처럼요. 어느 순간 직원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어요. 갑자기 잘해주고 뭐랄까 나를 단장시키기 시작했달까요? 갑자기 조금 더 적극적으로 영어를 가르쳤어요. 비영어권 국가로 입양가는 아이들도 있었잖아요. 그러니 알고 저를 준비시킨거였죠. 

그래서 알았어요. 다시 파도의 비유를 하자면 어떤 거대한 파도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요. 거대한 파도에 맞닥트렸는데 괜찮은거죠. 아무튼 조금씩 변화가 생겼어요. 저도 알았고 제 주변에 모든 아이들도 알았고요. 다들 주시하고 있으니까요. 그걸 지켜보는 다른 아이들도 갑자기 좀더 단정해지려 애쓰고. 이도 잘 닦고 그렇게요. 개인위생이나 면역주사 같은 것도 미리 맞았으니까요. 입양간다는 소식을 알려주기도 전에요. 

갑자기 그동안 못 누리던 것들이 가능해졌군요. 

네. 딱 그랬어요. 적당한 비유는 아니지만 제가 지금 개들을 임시보호 하고 있어요. 유기견 보호센터와도 똑같죠. 입양갈곳이 정해지면 개들을 보낼 준비를 하잔아요. 똑같죠. 뉴스가 공표되는것이 아니고 그냥 서서히 은밀하게 준비가 시작되는거죠. 

다른 아이들은 어땠을까 생각하게 되네요. 그런 변화들을 눈치채며 부러워했을 다른 아이들이요. 

출발날짜가 다가오자 너무 서운하고 다들 고맙더라고요. 복잡한 감정이었죠. 그곳에선 다들 친구고 형제같았으니까요. 떠날 때가 되니까 알겠는 그런 것들이요. 그 감정들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어요. 떠날때가 되니까 떠나야 된다는 사실이 진짜 힘들었죠. 이상하게 그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네요. 그 부분을 짚어줘서 고마워요. 생각하니 좀 울컥하네요. 제 인생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 뒤로 그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나요?

홀트를 방문했으때 몰리 홀트로 부터 몇몇 아이들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요. 제프리 김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덴마크로 입양됐었는데 그 뒤로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됐대요. 그리고 같이 방을 썼던 친구들 중에 몇은 스웨덴으로 입양을 갔고 또 여기 미네소타로 온 친구도 있었고요. 

미국으로 오며 뭐랄까 굉장히 축하받을 일인것 처럼 느껴졌죠. 드디어 집이 생겼구나 같은 느낌이요. 그때만 해도 미국엔 다 흑인들만 사는 줄 알았어요. 제가 주로 봐왔던 미국인들은 거의다 흑인들 이었으니까요. 저희들의 의식속엔 한국인이거나 아니면 미국인이거나 하는 이분법만 존재했어요. 그냥 피부색이 조금더 진하고 옅고 그정도의 차이로만 다가왔었어요. 미국인이거나 한국인 이거나 둘중에 하나일뿐이었죠. 제가 백인가정으로 입양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그걸 알았을때도 “헐” 이런 느낌 보다는 그냥 그런가보다 했던거죠. 밀튼 워싱턴 (시즌 2 출연한 흑인-한인 혼혈)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흑인 가정으로 입양된 그 친구와 저의 경험이 아주 다르더라고요. 

아무튼 그때부터 힘든 여정이 시작됐죠. 미네소타의 도시 근교 백인 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 꽤 잘 사는 백인 가정으로 입양이 됐어요. 문화적으로 언어적으로 적응하는 것도 물론 힘들었죠.  지금은 없지만 어릴땐 아프로(Aro – 흑인들 고유의 헤어스타일) 머리에 커갈수록 머리가 점점 꼬여가더라고요. 그때는 아무도 저를 보고 아시안 혼혈이라고 생각을 안했어요. 그냥 피부색이 조금은 연한 흑인인가보다 했을거에요. 제가 도착한 날 그 즈음이었던것 같은데 할머니였나 할아버지였나 아무튼 저를 유심히 보고 계셨었나봐요. 그러더니 하는 말이 “한국애를 데려온다더니  피카니니(Picaninny 흑인 어린아이들을 비하해 표현하는 캐릭터) 데려왔네” 라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안쓰는 말이 된지 오래죠. 경멸적인 표현이니까요. 그렇게 한번 또 꼬였고요. 

지금 어른이 된 후에 생각을 해봐요.  어떻게 태어나고 자랐는지가 잘 안 알려진 아이를 데려온다면 당연히 그 아이와 함께 많은 트라우마도 함께 오겠죠. 제가 딱 그런 경우였고요. 아이와 같이 살다보면 그 짐속에 있던 상처들도 하나씩 열리는데 그 상처들 혹은 폭력적인 성향들에 적절히 대처하거나 보듬어 줄 역량이 안돼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럴때마다 결국은 제가 혼나는 것으로 귀결되고 했죠. 좀 유별난 일을 한다고 벌을 많이 받았어요. 성장하면서 배우고 적응할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죠. 

홀트도 그렇게 저를 입양했던 가족들도 그렇고 동기와 의도는 좋았겠죠. 자선 혹은 이타주의 같은 거였어요. 저를 입양했던 이유말이에요. 그런데 아이를 입양하는 것은 그 아이의 부모가 되어 주겠다는 거잖아요. 제 생각엔 저를 입양했던 사람들이 그 부분을 심각하게 고려해보지 않은것 같아요. 감당할수 없었던 일을 벌인거죠. 

저 이전에도 한국인 남매를 입양했었어요. 저보다 일곱살 정도 많았었는데 그 입양이 안 좋게 끝났어요. 제가 미국에 왔을때 그 관계가 막 삐걱대기 시작하던때였죠. 그리고 에티오피아에서 온 남자아이도 임시보호하고 있었는데 그 형이 한국에서 입양된 누나와 나이가 거의 비슷했었어요. 에티오피아에서 내전을 피해 온 난민이었는데 심장수술이 필요해서 미네소타로 온 경우였죠. 그런데 그 형을 돌려보냈어요. 그 형이 저한테 나쁜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던거죠. 그 분들이 몰랐던 것은 그 형이 저에겐 그 가족과 저를 이어주는 끈 같은 존재였거든요. 자세한 내막은 저도 잘 모르지만 그 형이 흑인 문화와 흑인국가주의 이런 것들을 저한테 알려줬었는데. 그런것들을 문제라고 본것 같아요. 이 흑인 머리를 어떻게 손질하고 빗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크고 동그란 모양을 만들수 있는지 등등을 가르쳐줬죠. 저 한테는 마치 큰형같았어요. 그런데 입양부모가 보기엔 그 방향이 저한테 좋은 영향이 아니었죠. 그들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던거죠.  (2부에서 계속) 

  번역 : 전유근 

시즌 6, 열 세번 째 에피소드: 마이클 제섭

안녕하세요. 팟캐스트 “어답티드” 시즌 6, 열 세번 째 에피소드를 지금 시작합니다. 

이 팟캐스트는 한국 해외입양인들의 목소리에 그 중심을 둡니다. 입양인들이야 말로 입양에 관한 한 전문가들이죠. 저는 카오미 리이고 저 또한 한국에서 입양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목소리는 아름다운 사연만을 원하는 입양 기관과 정부 혹은 양부모에 의해  지워지곤 했습니다. 실제 우리의 삶은 그것보다는 더 복잡했는데 말이죠. 이 팟캐스트는 그 이야기를 되 찾고자 합니다. 

“글쎄요,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수 있다. 뭐 그런 관점이라면 모르겠지만, 입양된 아이라는 사실을 놓고봤을 때 고작 여섯살 짜리 아이가 그렇게까지 해야했던 이유는 뭘까요?”

마이클 제섭은 아버지이자, 스포츠 지도자이자 한국인 입양인입니다. 그 또한 한 여인의 아들이지만 엄마에 대한 기억은 없습니다. 인식했던 아니던 그는 평생을 친엄마로부터 떨어졌다는 상처를 이겨내며 살아왔습니다. 지금 그는 그의 지식과 재능을 사회에 나누고 있습니다. 마이클의 이야기입니다. 

마이클 제섭(이하 마이클) : 제 이름은 마이클 제섭이고 올해 마흔여섯입니다. 캘리포니아주 마운틴 뷰에 살고 있습니다. 

카오미 리 (이하 카오미) :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마이클 : 태어난 때 부터 시작하죠.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13개월 때 길에서 발견되어 고아원으로 보내졌다고 해요. 며칠 뒤에 임시보호가정에 6개월간 맡겨졌고 정명찬이라는 이름을 받았어요. 그 후 19개월에 미국의 짐 제섭, 리타 제섭 부부에게 입양되었고 마이클 제섭이 되었어요. 지금도 이름으로 살고 있고요.

카오미 : 양부모로부터 왜 입양했는지에 대해서 들었나요? 아이를 가질수 없어서?

마이클 : 네. 아이를 가질수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입양하기로 결정한거고. 

카오미 :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친부모와 일년 정도를 같이 살았을 수도 있다는 점이네요. 

마이클 : 맞아요. 실은 그 전에는 그 점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었는데 2018년에 한국에 갔을 때 누군가가 그 점을 짚어줬어요. 다른 입양인들과 함께 제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당신 부모님이 당신을 계속 키우고 싶어했던 것 같네요 라고 하더라고요. 그 때 버스안에 있었는데 엄청난 충격이었던 기억이 지금도 나요. 보통 입양 서류에 별로 정보가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물었더니 너를 13개월이나 키웠고 건강에도 이상이 없었으니  그건 계속 키우고 싶었던거라고요. 많이 놀랐고 그때 마음이 너무 이상했어요. 내 과거나 출생에 대한 그 어떤 정보라도 중요하니까요. 딱히 설명할 순 없지만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었어요. 

카오미 : 맞아요. 기록에는 그냥 아기때 입양되었다고만 되어 있으니까 실제 타임라인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잖아요. 하지만 좀 더 찬찬히 생각해보면 추측컨데 그 기간동안 엄마와 다른 가족들이 당신을 돌봤고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니까요. 물론 그게 더 많은 질문거리를 주긴 하겠겠지만요. 

마이클 : 글쎄요. 쉬운 일이 아니죠. 내 뿌리 찾는 일이요. 최근에 의정부의 입양인들과 연결이 되었어요. 제가 의정부에서 발견되었다고 하거든요. 제 입양기록에 의하면 제가 쉼터 같은 데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보호소 같은 그런 곳이죠. 그런데 의정부가 DMZ근처라서 그 쪽 출신 입양인들이 미군과 한국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경우가 많고, 많은 경우는 어느 정도 자란 후에 입양이 되었기 때문에, 그 때 그 곳에 살았던 기억이 있죠. 그래서 그분들이 저를 위해 조사를 좀 해주었는데 그 때 당시에 그 곳엔 남자들을 위한 쉼터 혹은 보호소 같은 곳은 없었다고 해요. 좀 이상하죠. 그 외 다른 몇 가지도 앞뒤가 안 맞고요. 그래서 내 입양서류가 과연 얼마나 정확한가? 그냥 조작된건가? 다른 입양인들한테도 그런 경우가 많잖아요. 도대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참. 

카오미 : 안 그래도 서류조작이 아닌가 하고 말하려던 참이에요. 나에 대한 기록이 허위일수도 있다는 걸 중년이 된 나이에 알 때 기분이 어떤가요? 

마이클 : 무언가 더 많은 것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화가 나고 그러진 않았고요. 물론 화도 났지만 그보다는 뭐랄까 더 참담한 기분이에요. 출구가 없는 게임을 하는 것 같은. 굳이 해야 하나 혹은 그냥 관둘까 하는 생각도 들고. 감정이 복받쳐 오르거나 의심스럽고 불분명한 상황일땐 그냥 잊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럴수록 그냥 부딪혀 보는게 제 방식이기도 하고요.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요. 

카오미 : 캘리포니아 북부로 입양되었다고 했죠?

마이클 : 네, 캘리포니아주 사라토가요. 

카오미 : 어린시절은 어땠나요?

마이클 : 두 가지 측면이 있어요. 외적인 부분에서는 아주 좋았어요. 제가 운동을 잘했거든요. 남자아이로서 운동을 잘한다는 게 또래들과 어울리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됐죠. 제가 굉장히 내성적이고 체구도 작고 말도 똑부러지게 못했지만 운동을 잘하니까 동양인인거랑 상관없이 금방 어울리게 됐죠. 경기를 하면 항상 1순위로 지명되거나 팀 캡틴이 되거나 했으니까요. 그로 인해 적어도 안심이 되고 어딘가에 속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됐죠. 그것이 성장하는데 굉장히 큰 부분이었어요요. 

내적인 부분을 보자면 항상  외로웠던 것 같아요. 제 부모님은 환경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은 다 해주셨지만 정서적인 면에서는, 글쎄요. 지금 돌아보면 우리 부모님도 나름 힘들었죠. 아버지가 알콜 중독이셨는데 주변을 힘들게 하거나 했던 건 아니고 그냥 방문 닫고 들어가서 안나오는 그런. 그리고 엄마는 그런 아버지와 사느라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나 싶고요. 엄마한테도 엄마 나름의 문제들이 있었고요.

그리고 그때는 아마도 우리가 처음이라 그랬던 것 같은데 입양아들에게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아무도 몰랐죠. 그래서 그냥 같은 백인인라고 간주하고 당신들이 알아서 해라 이런 식이었죠. 그래서 자라는 동안 아시안문화를 전혀 접하지도 못했고 실제로 전 제가 백인인줄 알았어요. 그런 부분이 힘들었죠. 그냥 항상 혼자인 기분이었는데 그걸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했죠. 부모님한테도요. 지금까지 한번도 그 부분에 대해서 부모님과 솔직한 이야기를 해보지 못한 것 같아요. 항상 “잘 지내요. 별 일 없어요” 이런 대화만 했죠. 

카오미 : 굉장히 표면적인?

마이클 : 네. 아주 표면적인 대화요.. 아마도 룸메이트와의 대화보다도 더 표면적이었을 거에요. 룸메이트들은 가끔씩 술이라도 한잔씩 하며 이야기하잔아요. 그 당시에는 술도 못 마셨고.

카오미 : 그렇죠. 외동이었나요?

마이클 : 네 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어요. 역시 한국에서 입양되었고요.

카오미 : 그럼 여동생과도 그런 표면적인 관계였나요? 혹은 가족들 사이가 다 그랬나요?

마이클 : 네, 우리 가족은 그랬어요. 그렇게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죠. 어렸을 때는 그래도 동생과 꽤 가까웠던것 같은데 중고등학교에 진학해 팀운동을 시작하고 대회에 많이 나가게 되면서 제가 집에 많이 없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된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친구들 무리에 끼고 싶어서 내가 거리를 두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친구들하고 있을 때는 어린 여동생이 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멀어진 것 같아요. 

카오미 : 항상 전투적으로 살았던 것 같은데 맞나요? 생존을 위한 투쟁 같은. 언젠가 저한테 엄청난 이야기를 들려줬잔아요. 생존 본능에 관한.

마이클  : 맞아요. 어릴 때는 내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이 내가 운동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땐 그냥 뭐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생각했죠. 과거는 과거일 뿐 앞으로 일어날 일과는 상관없다고. 지금 이 순간만이 중요하고 지금 이 순간에 네가 뭘 하는지가 너를 결정한다고. 그런 마음가짐이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었어요. 말씀하신대로 저는 항상 전투적이었어요. 그땐 그런 줄도 몰랐지만. 그리고 전 모두가 다 그런 줄 알았어요. 테니스 선수로서 승부욕이 강한 것이 굉장히 강점이었는데 지금 생각 해보면 그저 승부욕이라기 보다는 생존 본능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두살 반정도 되었을때 저희 부모님이 제가 온 지 일년이 된 기념을 하고자 휴가를 갔다고 해요. 스누피 여행가방에 짐을 싸서 차를 타고 Long Beach에 가서 멕시코로 크루즈 여행을 할 계획이었대요. 그런데 제가 차 안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서는 한마디도 안 하더래요. 롱비치에 있는 호텔까지 일곱시간 정도를 가는 내내 말이죠. 저희 부모님은 제가 왜 저러나 싶었죠. 그 다음날 크루즈를 타고 방에 가서 짐을 풀렀더니 그제야 제가 침대에서 방방뛰며 평소의 저로 돌아갔대요. 

그래서 휴가에서 돌아온 후에 엄마가 입양기관 담당자한테 전화를 해서 설명을 했더니, 아마도 내가 또 버려지는 줄 알고 그랬을 거라고 했대요. 두살 반짜리 아이가 어떻게 그걸 알고 그랬는지 진짜 기가 막히죠. 입양에 대해서 많이 연구하다 보니 언어 이전에 우리 몸에 각인된, 우리가 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는 그런 것들이 있는것 같아요. 승부욕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되돌아가 보자면 어떤 사람들은 이기려고 싸우고 어떤 사람들은 지지 않기 위해서 싸우는데, 제 경우엔 생존을 위해서 경기를 했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에 제가 했던 모든것을 돌아보면 다시금 버려질 상황에 놓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카오미 : 아마도 그 13개월때의 기억때문이 아닐까요? 의식적인 기억이 있든, 없든 간에 말이죠. 그 나이에 가족과 헤어진 것이 큰 트라우마로 남아있었을 테니까요.

마이클 : 그랬을지도 모르죠. 제 입양기록을 보면 한가지 더 힘들었을 점은 제가 임시보호 엄마에게 정이 많이 들었었다고 해요. 아무래도 고아원보다는 임시보호 가정이 나았을 테고, 그 나이에 6개월이란 긴 시간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임시보호 엄마와 애착이 생겼는데 또 헤어져야 했으니. 임시보호 가정이 고아원에 있었던 것보다는 나았겠지만 그래도 고아원에만 있었다면 바로 끊어질 관계를 맺지는 않아도 되었을텐데요요. 

카오미 :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나요?

마이클 : 글쎄요 

카오미 : 성인이 된 후에도 말이에요.

마이클 : 관계가 끊어지는 것에 대해서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냥 사람을 잃는다기 보다 가까운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불안은 있죠. 관계가 아주 가까워지면 불안해져요. 어려워지고요. 친한 친구 혹은 완전 친한 친구보다 그냥 적당히 친한 사이가 되는게 낫죠. 뭔가 위험해 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항상 이 정도면 충분하다 하고 적당히 선을 긋죠. 

카오미 : 그럼 사람들한테 가깝게 다가가거나 서로 의지하는 관계를 맺는 것이 소용없다고 느껴질 정도인가요? 이 관계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에?

마이클 : 제가 의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그런것 같아요.  의식적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실제가 그러니까요. ㅋㅋ

 카오미 : 통계로 입증되나봐요 (웃음)

마이클 : 맞아요. 무의식적인 불안이 분명히 있는것 같아요.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둔다거나 안전 장치를 마련하거나 해요. 내 자신을 엄청 바쁘게 만든다거나 하는. 일종의 방어기제죠. 그런 모든 일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는 게 참 무섭죠 

카오미 : 여섯살 때 일어났던 그 이야기를 해주세요. 조금 마음이 아픈 이야기인데 살아남기 위해 애썼던 이야기..

마이클 :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만화를 너무 좋아해서 생긴 이야기이기도 하고요ㅋㅋ. 초등학교 1학년 여섯살 때 였어요.  우리 학교에서 연례 모금행사로 걷기 대회를 했는데 1등  상이 컬러티비였어요. 토요일 아침마다 볼트론, 썬더캣, 지아이조 같은 만화를 봤었는데 

카오미 : 스머프는요

마이클 : 맞아요. 스머프도 있었죠. 스머프 안좋아 한 사람이 누가 있어요? (웃음) 

그 해 1등 상이 컬러티비 였어요. 토요일 아침마다 춥게 티비를 봤거든요 그래서  내 방, 내 침대에서  따듯하게 티비를 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엄마에게 엄마 이번 걷기대회1등 상품이 컬러티비래. 내가 1등하면 그 티비 내 방에 놔도 돼요? 하고 물었죠. 그랬더니 그래라 하는거에요. 그래서 그럼 케이블도 연결해 줄 거예요? 하고 물었더니 당연하지 그러는거에요. 아주 기분이 좋았죠.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설마 이 애가 일등을 하겠어 라고 생각했을거에요. 아직 일학년이고 일등하려면 5-6학년 애들을 이겨야 되는데. 여섯살 짜리가 열 한살 열 두살 애들을 이겨야 되는거니까요.

카오미 : 체구도 작은 편이라고 했었죠?

마이클 : 맞아요. 꽤 작은 편이었어요. 검은 머리에 키도 작은 전형적인 아시안이었죠. 아무튼 대회날이 다가왔고 나보다 큰 아이들과 함께 경기를 시작했죠. 아침 8시 경이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갈수록 어떤 아이들은 좀 쉬기도 하고 어떤 애들은 내내 걷기만 했고 어떤 애들은 뛰었고요. 나는 내내 가볍게 뛰었는데 한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 세 시간이 지나자 거의 모든 아이들이 중간에 쉬는데 나는 계속 했어요. 어떤 애들은 쉬었다가 다시 뛰는 애들도 있었고요. 점심시간이 되자 많은 애들이 가서 점심을 먹는데 나는 엄마에게 핫도그와 콜라를 가져다 달라고 해서 그걸 먹으면서 계속 걸었어요. 그때는 콜라가 스포츠 음료였거든요. 

카오미 : 최고의 건강음료였죠

마이클 : 그랬죠. ㅋㅋ  오후 세시 쯤 경기가 끝날 때가 되니 다른 아이들이 늦게라도 마일리지를 더하려 돌아왔는데, 저는 그때까지도 쉬지 않았어요. 계속 걸었던거죠.  화장실에 갔었는지도 기억이 안나요. 그 뒤에 이틀 정도 걷지 못했던 기억이 나는데, 제가 그날 25마일(역자 주 – 대략 40킬로미터) 을 걸었더라고요. 

다행히 그 날이 토요일이어서 하루 이틀정도 회복할 시간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 금요일이 되었어요.

카오미 : 교사들이나 학교 담당자들이 걱정도 안 됐었나봐요? 이 어린아이가 이렇게 많이 걸어도 괜찮은지?

마이클 : 글쎄요. 그때는 스포츠 사이언스 이런것도 없었잖아요. 한 여름에 훈련을 할 때도 물 마셔야 되면 니가 약해서 그런거야, 물 안마셔도 돼. 그래서 세시간 동안 물도 없이 훈련하는 그런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니 괜찮았다고 봐요. 어쨌든 금요일이 됐고 조회를 하는데, 3등 발표를 하고, 2등을 발표하고, 교장선생님이 1등 마이클 제섭! 하고 발표를 했는데, 그 순간 체육관이 조용해졌어요. 5-6학년은 서로 다들 알잖아요. 그런데 1학년의 이름은 모르니까 다들 두리번거렸어요. 그리고 우리반 애들은 이게 진짜인가 싶었겠죠. 제가 단상에 올라가서 컬러티비를 받았는데 그때가 참 기념비적인 순간이었어요.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해낼 수 있구나 라는 걸 깨달았던 순간이랄까. 그런데 참 자랑스러우면서도 짠한 기억이에요.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어, 이런 관점에서라면 몰라도, 입양된 아이라는 점에서 여섯살 짜리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를 생각해보면 굉장히 짠하죠. 

카오미 : 많이 속상하네요. 그래서 방에 티비를 놓았나요? 케이블도요?

마이클 : 네. 부모님이 약속을 끝까지 지켰어요. (웃음)

그 티비를 대학에 가서까지 계속 가지고 있었어요. 기숙사에 가지고 갔죠. 

카오미 : 지금은 어디에 있나요

마이클 : 그것까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확실한 건 대학 시절에는 계속 가지고 있었어요. 

카오미 : 그 경험이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확실히 북돋아 주었겠어요. 후에 운동선수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신체적 강점이나 지구력같은 것들 말이죠. 

카오미 : 네. 제가 워낙 운동을 잘 하기도 했지만 타고난 능력 만큼 중요한 것은 얼마나 더 이기고 싶어 하느냐에요. 전 그걸 어린 나이에 배웠던 것 같아요. 혹은 누가 더 이기고 싶어하느냐가 승부를 결정하는데 심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직관적으로 알았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항상 누구보다 더 더 이기고 싶었어요. 진심으로 이기고 싶었고 지금 돌아보면 이기기 위해 죽을 수도 있었어요. 이기기 위해서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내가 더 겪어야지 하는 그런 마음.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지 하는 마음이요.

카오미 : 완전 진심이었네요. 진적도 있었나요?

마이클 : 그랬죠. 때때로 경기에서 질 때면 너무 괴로웠어요. 세상이, 적어도 내 세상이 망하는 것 같았어요. 

카오미 : 그렇다면 죽을만큼 혹은 죽더라도 이기고 싶었던 그 마음도 일종의 생존기제였을까요?

마이클 : 그렇죠. 그런데 그때는 그렇게 생각을 안했고 남들도 다 그런줄 알았어요. 그땐 그냥 제가 남들보다 더 승부욕이 강한 줄로만 알았어요.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특히 테니스 코치가 되어 후배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보니 그런 승부욕은 훈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포어핸드나 백핸드, 올바른 자세, 그리고 어떤 요령같은 것들은 가르칠 수 있지만, 승부욕은 가르치기가 굉장히 어렵죠. 어떤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이기고 싶다거나 지는게 싫다거나 하는 감정을 어떻게 가르치겠어죠?

카오미 : 그런게 바로 킬러 본능이라는 건가요?

마이클 : 맞아요. 킬러 본능이요.  그런건 가르칠수가 없어요. 타고나는거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가능할지도 모르죠. ㅋㅋ 

카오미 : 그렇다면 지금 돌아보건대 입양되었다는 사실 덕에 킬러본능을 키울 수 있었네요. 

마이클 : 맞아요. 아주 어린 나이부터 모든 것에서 이겨야만 직성이 풀렸어요. 그냥 재미로 하는 게임은 없었어요. 죽거나 살거나 둘중 하나였죠. 

카오미 : 그렇다면 상당히 진지한 편이기도 했나요요?

마이클 : 네, 굉장히 진지한 아이였어요. 모든면에서 심각했죠.  

카오미 : 그래요? 지금 제가 보는 마이클은 느긋하고 낙천적인 성격에 항상 아재개그를 날리는 그런 사람인데, 재밌네요. 지금의 그런 성격들은 마이클이 일부러 노력해서 얻게 된건가요? 그렇게 진지한 아이였다면요.

마이클 : 맞아요. 지난 몇 년 동안 그쪽으로 많이 노력했어요. 긴장을 풀고 조금은 즐길 수 있도록요. 또 최근에는 대인관계 기술을 단련하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불과 일이년 전까지도 지금의 저와는 많이 달랐어요. 많이 수줍었고, 나 자신에 대해 확신이 별로 없었고, 내성적이었죠. 아마 방구석 외향형이었을거에요. 지금은 사람들이 제가 한 때 그랬었다고 하면 안 믿어요.  연습하면 다 좋아지죠. 연습하면 못할 것이 없잖아요. 조금 더 쉬울 순 있겠죠. 타고나면요.  하지만 대부분 꾸준히 연습하면 적어도 능숙하게는 되죠. 

카오미 : 왜 테니스였죠?

마이클 : 왜 테니스를 했냐고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카오미 : 가족들이 모두 테니스를 치고 그런것도 아니었잖잖아요, 맞죠?

마이클 : 네. 테니스는 다섯살때 시작했어요.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그땐 인터넷도 셀폰도 없고. 여름이면 아이들이 할 일도 없고 많이 지루해 하잖아요. 그래서 주변을 뒤지고 다니다가 차고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테니스 라켓과 공을 발견한 거에요. 차고 문을 향해 공을 치기 시작했는데, 그때 테니스를 하는 이웃이 오더니 우리 부모님한테 나를 테니스 캠프에 데려가보라고 했어요. 제가 잘 한다고요. 진짜 잘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죠. 그래서 부모님이 저를 테니스 캠프에 등록했고 매 여름마다 테니스를 쳤어요 그리고 아홉살이 되던 해에는 일년 내내 테니스를 쳤어요. 그런데 그때는 축구랑 야구도 했고요. 

한 야구 게임이 기억이 나는데요, 플레이오프였고 우리가 지고 있었어요. 저는 2루에 있었고 6회말 이었어요. 어린이야구라 6회까지만 해요. 우리가 몇 점 차로 지고 있었는데 우리 팀이 안타를 쳤어요. 그래서 제가 삼루 그리고 홈까지 가서 동점이 되었죠. 제 뒤를 따라 다른 주자가 또 들어왔고, 우리는 이겼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 때 상대팀이 삼루로 공을 다시 던져서 아웃이 된거에요. 제 뒤에 들어온 주자가 삼루 베이스를 안 밟아서 아웃이 된거였죠. 

카오미 : 아이고

마이클 : 아마 그때를 계기로 테니스에 올인 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기억나는데 다른 사람이 나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 나 혼자 하는게 낫다, 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카오미 : 유년시절을 거의 혼자 보냈다고 했잖아요, 맞죠?

마이클 : 네.

카오미 : 그러고 보면 혼자서 하는 스포츠에 끌린 것이 자연스럽네요. 

마이클 : 테니스는 진짜 고독한 운동이에요. 코트에 혼자 서 있잖아요. 얼마 전까지는 코칭도 못했어요. 오로지 나와 내 상대 둘 뿐이었죠. 테니스를 해보지 않았다면 알기 힘든 감정인데요, 정신력이라는 측면에서, 혼자하는 스포츠가 더 힘든 점이 있어요. 테니스를 얼마나 잘 하는지보다 얼마나 성숙한 사람인지가 더 중요하죠. 코트에 서 있으면 멘탈이 털리거든요. 나 자신에 대한 회의 같은 것들 말이에요. 운동을  하며 그런 경험을 한다는 것이 참 재밌죠. 테니스는 한번 하면 푹 빠지게 되는 운동이에요. 하다보면 광신도가 되죠. 사람들이 재미로 하는 운동이 아니에요. 말로는 재밌어서 한다고 하는데 아니죠.  테니스는 재미없어요. 잔인하죠. 비참해지고 싶으면 테니스를 쳐보세요. 테니스 홍보하는데 도움이 안되겠는데요ㅋㅋ 엄청난 내적 성찰이 필요한 운동이에요. 자기 자신을 찾는 과정에 있거나 혼자가 더 편하거나 뭔가 이루어야 한다거나 자신을 몰아 붙이고 싶은 사람들에게 잘 맞아요.

카오미 : 테니스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까지 올랐었죠. 아닌가요?

마이클 : 그랬죠. 프로생활까지 했으니까요.  꽤 잘 나갔어요. 18세 이하 랭킹 미국 2위까지 했어요. 페퍼다인 대학 대표였고 프로리그 세컨티어에서 3년간 뛰었어요. 아주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때까지는 저도 아주 잘했어요. 제 개인적인 목표는 거의 다 이뤘으니까요. 

그런데 탑 레벨에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장난이 아니거든요. 승부욕이 다가 아니에요. 그 정도 레벨에서는 승부욕은 다들 기본이거든요. 지역에서 뛸 때는 계속 이기기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프로레벨이 되면 넘어야 할 난관이 너무 많죠. 훈련도 그렇고요. 그 때 부터는 개인운동이 아닌 팀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당신을 맡겨야 해요. 코칭을 받고 바뀔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해요. 그런데 전 그러지 못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제 코치들이 절 어떻게 감당했나 싶어요. 

카오미 : 왜였죠? 왜 가르치기 힘들었나요?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나요?

마이클 : 듣기 좋은 것만 들었죠. 제가 많이 예민했어요. 듣기 좋은 것만 듣고, 싫은건 안 듣고. 그리고 방어적이었어요. 방어적이면 가르칠 수가 없거든요. 방어적인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긴 해요. 고집스럽다는건 확고하다는것을 의미하기도 하니까요. 저는 뭐랄까 좀 고지식했어요. 내 포어핸드나 서브가 좀 부족해도 열심히만 하면 될거라고 생각했어요. 예외 없이요. 그런데 그 정도 레벨에 올라가면 그 어떤 약점도 있으면 안되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그런 건설적인 비판을 못 받아 들였어요. 그분들이 하는 말이 다 일리가 있었는데도요. 내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그 점을 파고들테니 그걸 고쳐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말이에요요. 

그런 점이 제가 조금 더 발전하는데 큰 장애물이 되었죠. 그리고 또 사람을 상대하는 기술이요. 좋은 선수가 되려면 그런 것도 굉장히 중요했는데 제가 사람들과 말을 잘 하지 못했어요. 팀을 모으고 잘 꾸려가려면, 나에게 맞는 코치, 스타일, 매니저 등 결정할 것이 너무 많았고, 돈이 한없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자금이 있으면 그걸 또 어디에 쓸지 결정해야 해요.  이 대회에 나갈까 저 대회에 나갈까, 자격은 되는데 급이 높은 대회는 혹시나 지게 되면 수익이 전혀 없을테고, 나은 성적을 낼 수 있고 상금도 탈수 있는 작은 규모의 대회를 나갈까, 그런데 그건 또 경력에는 도움이 안되고 하는 것들이요.

혹은 그냥 집에서 훈련하면서 그 돈으로 코치를 고용해서 단점을 좀 보완할까, 아니면 경기에 나가서 랭킹을 좀 올릴까, 나한테 맞는 코치는 어떻게 찾을까, 코치인터뷰는 어떻게 해야 하나, 코칭 철학이 있는지 혹은 내가 이런 이런 점이 부족한데 어떻게 지도할 것인지 물어야 되고 등등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지 어려운 점이 많았어요. 그때는 인터넷도 없고 셀폰도 없으니 어떤 코치가 괜찮은지, 심지어는 연락처 찾기도 힘들었으니까요. 끝이 없는 고민이었죠. 그리고 나한테 그런 재능들이 다 있었다고 해도 힘들었을거에요. 누군가를 내 삶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부터가 힘들었거든요. 코칭이라는 관계,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받기로 선택한다는 것은 참 용기가 필요하고, 제 자신이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거든요. 나를 드러내고 그래서 도울 수 있도록 해야 되는데 저는 지나치게 독불장군이었어요. 다른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다는 고집이 나를 딱 거기까지만 가도록 만들었죠.  

그런 부분들이 끝나지 않는 고민이었어요. 맞는 팀을 찾고, 잘 꾸려나갈수 있는 능력이요. 

카오미 : 그럼 그런 모든 성향들이 입양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마이클 : 한 90%정도는 그런 것 같아요. 그 이상일 수도 있고요. 그런 점에 대해서 마흔살이 되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거든요. 항상 입양된 사실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혹은 과거는 중요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너에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중요하다. 미래를 봐야지. 내 과거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내 스스로 나를 정의한다. 뭐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으니까요

카오미 : 뒤 돌아 보지 말고 앞만 봐, 뭐 이런거요?

마이클 : 네. 과거는 나를 정의하지 못해. 나는 내 스스로 정의한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나를 찾는 이 여정이 조금 늦어진 것 같아요. 

이렇게 여정이 늦어진 또 다른 이유는, 어떤 외적인 동기가 없었다는 거에요. 제 생각에 인간은 외적인 동기에 크게 좌우되는 존재에요. 요즘은 모두 내적 동기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결국은 내적 동기도 외부로부터 오는 거잖아요. 제 경우에 테니스 쪽으로 잘 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어떤 조직에 소속감을 느끼고 있었고, 나의 뿌리 같은 것에 깊이 파고들 필요가 없었어요. 나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할 필요 말이죠. 그럴 용기도 없었고요.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굉장히 무서운 질문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남에게 뒤지기 싫어하는 성격 덕에 나의 뿌리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게 된 것 같기도 해요. 처음 내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들여다보기 시작했을때, Renee Brown의 팟캐스트를 들었거든요. 창피함과 약함에 관한 에피소드였는데 참 와 닿았어요. 가장 큰 용기는 약해지는 것이라는 거에요. 그 이유들이 모두 타당했어요. 그래서 지기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강한 사람으로서, 나는 용기가 있으니까 해봐도 되겠다. 할 수 있겠다. 이런 생각으로 뛰어들었죠. 어떻게 보면, 경쟁심 강하고 지기 싫어하는 내 성격에 불을 지른거죠. 그래서 뛰어 들었어요. 뛰어들기 전에 잘 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냥 뛰어 들었어요. 상담 치료도 받고, 입양에 관한 책도 읽고, 유투브도 보며 몇년을 보냈어요. 팟캐스트는 못들었죠. 그 땐 이 팟캐스트가 없었으니까요.  

카오미 : 그럼 그때가 대략 2015년 즈음이었겠네요. 제가 2016년에 시작했으니까요. 

마이클 : 그렇죠 

카오미 : 어떤 계기로 이런 성찰을 시작한건가요?

마이클 : 2015년에 당시 와이프와 별거를 시작했어요. 아이들하고도 헤어지게 됐고요. 그 때 많이 힘든 시기였어요. 그러면서 나에 대한 질문들을 하게 됐어요. 시간이 많기도 했고요. 직업도 직업이고 부모가 되면 주변을 돌아 볼 시간이 없잖아요. 그런데 그 때 그 일들을 겪으면서 주변을 좀 돌아보고 질문할 시간이 생긴거죠. 그래서 시작된 거에요. 

카오미 : 많이 힘들었겠네요. 결혼생활을 얼마나 했나요?

마이클 : 20년 이상이요.

카오미 : 그래서 결국엔 결혼생활을 정리하게 됐군요? 

마이클 : 네, 노력을 한다고 했는데 많이 힘들었어요. 관계를 잘 맺으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하잖아요. 이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는 나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내가 나를 잘 모른다는 사실은 이미 알았던 것 같네요. 그 사실을 항상 숨겼을 뿐이죠. 그 사실을 마주할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고요.

카오미 : 아버지로서는 어땠나요? 부모 역할을 하는데, 입양되었다는 사실이 영향을 끼쳤나요?

마이클 : 확실히 그랬어요. 특히 지난 몇 년 간에는 더욱 더요. 왜냐하면 이제는 나 혼자 해내야 하잖아요. 그 전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그냥 애들 엄마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됐었거든요.

그래서 그냥 내 스타일대로 해보자 싶었죠. 그 전에는 생각도 안 해 본 것들이요. 좀 시간이 걸렸어요. 헤쳐나가는데. 

카오미 : 친구같은 아빠인가요?

마이클 : 그런 편이에요. 제가 보기에 그건 자랄 때 양육환경, 그러니까 부모가 어떻게 키웠는지에, 그래서 어떻게 느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은데요. 자랄 때 난 항상 두려웠어요. 그래서 항상 모범생이었죠. 성적도 A만 받았고요. 문제가 될만한 일은 피했어요.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 기억나는 일이 있어요. 집에 가려고 엄마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건물 앞에서 공을 가지고 놀면 안되잖아요. 애들도 많고 차고 있고, 위험하니까요. 그런데 지금도 이름이 기억나는데, 현재는 테네시에 살고 있는 커트라는 친구가 풋볼을 저에게게 던졌어요. “받아봐” 그러면서요. 그러니 어떻게 안받아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공 던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죠. 그래서 나는 공을 안 던지고 돌려줬어요. 그랬더니 그 녀석이 나한테 다시 공을 던지는 거에요. 저는 던지지 말라고 정색을 했어요. 그래서 교장실로 불려갔는데 전 정말 큰일났구나 싶었어요. 집에 가서도 마당에 숨어있었어요. 엄마가 절 찾으시는데 뒷마당에서 혼자 숨어있었던 기억이 나요. 그냥 너무 무서웠어요. 그 후에도 기억은 잘 안나지만 어떤 말썽을 피운적이 있는데, 결국엔 도망을 갔었어요. 이제 끝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돌려 보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항상 했었어요. 

카오미 : 만약 제가 그때로 돌아가서 마이클의 정신분석을 해본다면 (웃음) 마이클은 항상 일종의 연기를 하고 있었던 거네요. 그 누구도 화나게 하지 않고, 마이클을 다시 돌려 보내버리고 싶어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마이클 : 그때는 그렇게 해야 내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었나봐요. 부모 역할로 돌아가보면 참 어려운 점이, 내가 너무 엄한가 하는 생각도 있어요. 입장을 바꿔 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아요. 내 입장에서는 그냥 눈길 한번에 애들이 알아서 해야 되고, 부모가 하는 말은 다 심각하게 받아 들여야죠. 제 부모님은 저한테 두 번 말할 필요가 없었어요. 무언가 하라고 말 할 필요조차 없었죠. 매일 아홉시 반이면 알아서 자고, 일곱시면 일어나고, 숙제도 매일 알아서 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내 애들한테는 아흔 여덟번 말해야 해요. 환경이 너무 좋은거죠. 불안해 할 일이 전혀 없거든요. 부모가 항상 지지해주고요. 가끔씩 화가 날때는 닥치고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해, 할 수도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부분이 저에게는 어려워요. 저희 부모님이 저에게 그랬다면 너무 힘들었을 것 같거든요.   

카오미 : 아이들에게서 자신을 보나요?

마이클 : 네. 아이들이 커 갈수록 더욱 더요. 인간성이나 품행같은 자연스러운 성향들이 표출될 때 참 재밌어요. 이런게 유전자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외부 환경의 영향일까 궁금하기도 하고요. 아이들이 나와 닮은 것을 볼때마다 내 핏줄이라 그런건지 아니면 나한테 배워서 그런건지, 그런 닮은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참 재밌어요. 

카오미 : 묻고 싶은게 있는데요. 우리가 같이 아는 지인중에 호정씨가 있잖아요. 시즌 2에 나왔었던. 호정씨하고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마이클 : 2018년에 친부모 찾기를 시작해서 서울 뿌리의 집(한인 해외 입양인들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 에 묵게 되었죠. 새벽 6시 쯤에 한국에 도착해서 8-9시 경에 숙소에서 체크인을 하는데, 마침 호정씨는 체크아웃을 하는 중이었고,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게 됐어요. 그래서 이런 저런 모험들을 함께 하게 되었죠. 여러곳을 같이 다녔는데, 호정씨는 정말 대단했어요. 뿌리의 집도 정말 좋았고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죠. 호정씨는 정말 훌륭한 상담가에요.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는데, 뭐랄까 엄청난 아우라가 있고, 하는 모든 말들이 깊이가 있고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그곳에서 여러 활동들을 할 때 나를 도와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정말 특별했죠. 함께 미혼모 시설에 갔었던 기억이 나요. “I wish you a beautiful life” 란 책을 우리 둘 다 읽었거든요. 미혼모 시설에서 아이를 입양보내기 전에 카운슬링의 일환으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편지를 쓰는데 그걸 엮어서 나온 책이에요. 그 책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책일거에요. 내가 읽은 책 중에서 제일 슬펐거든요. 그래서 쉼터에 방문했을 때, 원장으로부터 책에 사인도 받았어요. 시설을 둘러 본 후에 잠깐 카페테리아에서 쉬고 있을 때였어요. 그 곳에서 기금 마련을 위한 바자회 같은 것이 열리고 있었는데, 우리 옆 테이블에 열 일곱, 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들이 앉았어요. 그때 통역해주시는 분이 넌지시 우리에게 그 소녀들이 다음주에 출산 예정이고 아이들을 입양 보낼거라고 말해 주시더라고요. 

그때 참 마음이 말할 수 없이 복잡했어요. 뭐랄까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간 느낌었죠. 내가 바로 그 아이였겠구나 하는 감정. 그런 순간에 그런 경험들을 함께 이해하고 소화할 사람이 옆에 있어서 너무 감사했죠. 또 함께 고아원도 방문해서 아기들도 안아봤거든요. 솔직히 그건 그리 큰 감흥이 없었어요. 너무 정신없었거든요. 그런데 그곳에 한 아이가 곧 생일이고 나이가 다 되어서 곧 고아원을 나가야 한다고, 혹시 상품권같은 선물을 해주면 아이한테 큰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해서, 

그래서 큰 아이들이 지내는 곳으로 가서 지금 17살이라는 곧 18살이 되는 그 아이에게 상품권을 줬는데, 그 아이가 우는거에요. 그때 저도 울컥하더라고요.  아이가 너무 감사해 하면서 울먹거리는데, 고아원에서 자랐으니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주는 선물을 많이 못 받아봤겠구나 싶어서 많이 짠했어요. 아직까지 한국에선 사회적으로 고아라면 많이 무시당하고 천대받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그 경험이, 내가 지금쯤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다른 삶에 대해, 내가 만약에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어요. 물론 언제나 우리는 20개쯤은 되는 “만약에”의 상상을 하며 사니까요. 그런식으로 호정씨와 많은 경험을 함께 했어요. 호정씨는 또 제가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것인지 정리하는 데도 상당한 도움을 줬어요. 꽤 의미있는 조언들이요. 

카오미 :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데요?

마이클 : 그 후에도 계속 연락하며 지냈거든요. 지금은 플럼 빌리지에서 안수를 받고  

카오미 : 수도자가 되었죠? 맞죠?

마이클 : 네. 딱 어울려요. 그녀만의 타고난 평안함이 있잔아요. 

카오미 :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죠. 

마이클 : 맞아요. 제가 아이들 키우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했어요. 그녀는 훌륭한 상담가잖아요. 내 이야기를 듣고 말하길 플럼 빌리지 (Plum Villiage- 역자 주 프랑스에 위치한 불교 사찰)에 수양을 하러 오는 부모들이 말이에요, 그들이 제일 원하는 것이 뭔지 아냐고 물으면서, 바로 아이들의 행복이래요. 그런데 아이들한테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치려면 뭘 해야 하는지 아느냐, 그건 바로 네 자신이 행복해지는 거라고요. 모든 부모들이 아이들한테 좋은 걸 해주고 가르치려고 하는데 그렇다고 아이들이 배우는건 아니다. 아이들은 네가 보여주는걸 배운다고요. 

그게 많이 와 닿았어요. 특히 요즘에는, 적어도 제가 사는 곳에서는, 아이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물론 그것도 중요하죠. 그런데 많은 경우에 그러려면 부모 자신의 행복을 포기해야 하거든요, 그때 이해가 됐어요. 한명의 부모로서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고요, 그렇다면 어떤 모습을 아이들한테 보여줘야 할지 고민들이 시작됐죠. 이런 것들이 지금의 제가 아이들을 어떻게 대할지 결정하는데 중요한 동기가 됐어요. 지금 저의 양육방식은 아이들이 가졌으면 하는 모습들을 내가 먼저 보여주는 것이에요. 어떤 특별한 습관을 가지기를 원하면 그 습관을 내가 먼저 길러야죠. 이거해라 저거해라 잔소리만 하는게 아니라요. 잔소리는 쉽지만, 어차피 애들은 안 듣잖아요. 아이들이 뭐가 되기를 원하거나 하기를 원하면 내가 먼저 그 모습이 되어야죠. 

카오미 : 저도 호정씨를 알지만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죠. 호정씨가 모든 답을 알고 있는것도 아니고 본인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겠지만, 다양한 삶의 경험에서 오는 통찰력 같은게 있어요. 그때의 그 한국방문에서 호정씨의 존재가 의미하는건 무엇이었나요? 어머니의 같은 표상 같은 존재였나요? 그때나 혹은 그 뒤에도요?

마이클 : 좋은 질문이네요. 뭐라 답하기는 어려운데

카오미 : 어렵죠. 둘 사이에 유대가 깊었던 것 같아서요.

마이클 : 네. 깊은 공감대가 있었죠.

카오미 : 둘이 만난 것도 아주 우연이었잔아요. 한국에 가지 않았다면 절대 만날 수 없었겠죠. 

마이클 : 제가 10분만 늦게 도착했어도 못만났겠죠. 

카오미 : 몇 분만 늦었어도요, 

마이클 : 맞아요. 못 만날 뻔 했죠. 그 후에도 오랫동안 연락하며 지냈는데, 이 입양인 모임이 대단한 점은 우리가 서로에게서 각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에요. 서로 배우기도 하고, 무엇보다 각자의 경험에 대해 언어를 부여할수 있다는거에요. 언어는 강한 힘이 있어요. 언어를 통해 우리만의 이야기에 어떤 힘이 생기고 우리가 원하는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호정씨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잡한 경험이나 감정들에 딱 맞는 표현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졌어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감정들을 해석해서 정확한 말로 설명해줘요. 도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굉장히 위로가 되요. 이걸 어떻게 더 잘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겠어요. 카오미씨도 잘 알잖아요. 호정씨를. 

카오미 : 너무 캐묻는것 같지만 마이클이 그랬잖아요. 사람들이 떠나갈까봐 미리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고요. 호정씨하고는 어땠나요?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그것도 마이클을 버리고 떠나간 것으로 느껴졌나요?

마이클 : 저때문에 수도원에 갔다고 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네요(웃음)

카오미 : 아니면 이제 관계를 잃는 것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나요?

마이클 : 글쎄요, 항상 조금 더 거리를 두긴 해요.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자신을 잘 보호하는 거겠죠.

카오미 : 아이들한테 직접 보여주기로 했다고 했잖아요. 아이들이 행복하길 바란다면 스스로 행복해져야 한다고.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행복을 찾고 있나요?

마이클 :네. 지인들과의 관계를 통해서죠. 많이 사귀고 같이 뭔가를 하고 그런거요. 항상 현재 진행형이죠.  매일, 매달, 매년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하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에요. 내 자신도 찾고요. 내 자신이 되는 것이 항상 어려워요. 그래서 최근 몇년간 글쓰기를 시작했어요. 상담의 일부로 시작했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내 감정을 말로 표현해내고 내 경험과 감정을 소화하는 작업이요. 그게 한 방법이에요. 

카오미 : 학생들을 지도하는 쪽으로도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 같은데요, 어떻게 보면 마이클이 선수였을때 받았으면 했던 그런 코칭을, 혹은 그런 코치가 되어주면서 성취감을 느끼기도 하나요? 

마이클 : 학생들을 지도하는게 뭐랄까 소명처럼 느껴져요. 너무 재미있고 내가 온전한 내가 되는 느낌이에요. 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인생의 목적도 있고요.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요? 전 각각의 제 학생들이 마음만 먹으면 뭐든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어요. 제 학생들도 저의 그 부분을 높이 사주는 것 같아요. 그리고 학생들이 그 길을 가는데 약간의 코칭이라도 제가 어떤 역할을 한다는것이 참 영광이죠. 자녀교육과도 같은 원칙이죠. 내가 먼저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요. 내 학생들이 열심히 하길 바라면 내가 먼저 열심히 해야 하고, 집중하길 바라면 내가 집중해야 하고요. 그 모습이 됨으로써 가르치는거죠. 말로도 가르칠 수 있고, 유튜브로 봐도 되지만. 유튜브에 없는게 없잖아요. 그렇지만 그 핵심은 어떻게 배울수 있을까요? 제가 심어주려고 하는게 바로 그거에요. 

카오미 : 앞에서 이야기 했던 것들 중 하나가 생존본능이었잖아요. 이기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런데 그 투지만 있었을 때는 오히려 이기기가 힘들고, 얻고 싶은걸 얻는게 더 힘들었던 것처럼 보여지네요. 그 부분은 이제 받아들이게 되었나요? 그런 갈망말이에요. 혹은 내 선에서 콘트롤 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나요?

마이클 : 아주 많더라고요 (웃음)

카오미 : 어릴땐 그것이 삶의 동력이 되어준 것 같은데요, 지금은 어떤가요? 마흔 여섯이 된 지금에도 그런가요? 아니면 인생관이 바뀌었나요?

마이클 : 제 내면을 들여다보는 여정을 시작한 이후에 확실히 덜 경쟁적이 되었어요. 외부에서 해야할 싸움이 따로 있고 내면에서 해야할 싸움이 있는것 같아요. 성취, 성공이 외부에서의 게임이라면 내부에서 해야하는 싸움이 바로 우리가 가야할 길이죠. 지금까지는 그쪽으로 투자를 안했었고요. 이겨야만 한다는 갈망은 지금도 있지만, 제 주된 관심사는 이제 그쪽에 있지 않아요. 내 관심사는 주로 나 자신과 나의 움직이는 동기, 나를 자극 하는 것은 무엇인지, 무슨일을 하건 나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것 등에 있어요. 

카오미 : 치유가 되었다고 느끼나요? 어떤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마이클 : 맞아요. 힐링이에요. 내가 어디 다녀오기라도 했나?하고 느낄정도로요. 예전의 나를 생각해보면 지금의 제가 훨씬 자신이 있고요. 예전엔 사람들하고 눈도 못 마주치고 뭔가 내 자신이 부끄럽고 확신이 안 들고 그랬거든요. 지금이 훨씬 낫죠 5년 전보다요. 

카오미 : 혹시 직접 쓴 글 중에, 읽어주고 싶은것이 있나요?

마이클 : 네. 지금 쓰고 있는 책이 있어요. 진도는 전혀 안나가고 있지만  “테니스의 기술, 너만의 경기를 해라” 가 제목인데. 글이 안 써지고 막힐때면 그냥 다른 주제에 대해서 계속 썼어요. 입양이나 사는 이야기, 관계 이야기 같은 것들요. 여행이나 그림, 혹은 어떤 경험같은. 지난 9월 Bay to LA*=(**미국 캘리포니아 한인입양인모임)에 다녀와서 쓴 것을 읽어볼까 해요 

카오미 : 우리가 거기서 만났었죠.

마이클 : 네. 지난 9월 BAY TO LA에서요.

카오미 : 설마 저에 대해서 쓴건 아니죠?  농담이에요 (웃음)

마이클 : 다른 입양인들과 함께 한 날은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거대한 집단 에너지 같은. 물론 그 후에 어떤 허탈함도 있었고요. 그때 쓴거에요. 제목은 Surrender(항복)입니다. 

웃었다. 울지 않으려고

미소지었다. 찡그리지 않으려고

바쁘게 보냈다. 외롭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을 치켜 세웠다. 내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음악을 들었다. 그래서 나를 안 들으려고

다른 사람을 돕는다. 나를 필요 없으려고

시를 쓴다. 

나를 표현하려고

관심을 다른데 두려고. 

해는 없고 구름은 있고 

눈에는 비가 오고.

생각이 천둥치고

고통은 번쩍이고.. 

밸런스를 어떻게 찾을까.

춤을 출.

익사하지 않을. 

카오미 : 밝은 시는 아니네요. 

마이클 : 외적 균형에 대한 시에요. 항상 웃지만. 웃음으로 감추는거죠. 

카오미 : 하나 더 읽어줄 수 있어요? 입양과 관계된 것도 있나요?

마이클 : 하나 더 읽을게요. 이건 시는 아니고. 생각만 해도 울컥하는데. 다른 입양인이 그러더라고요. 입양기관에 편지를 남겨 놓으라고요. 엄마한테요.  이것도 일종의 테라피 같은건데. 이건 제가 엄마한테 쓴 편지에요.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엄마 

이 편지는 제 평생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에요.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도 너무 많고 물어보고 싶은 것들도 많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네요. 저는 저의 이 고통과 슬픔을 지우려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자랐는데, 19개월에 이곳에 도착했을때 양부모님이 마이클이라는 이름을 지어줬어요. 어린 시절에는 모든게 두려웠지만, 강하고, 결단력 있고, 강건했어요. 나의 이런 점들은 혹시 엄마를 닮은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어요. 낯선 언어와 문화, 그리고 가족관계도 모두 잘 헤쳐나갔어요. 

제 새 가족들을 기쁘게 해주고, 또 제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어요. 고등학교랑 대학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요. 운동을 잘해서 전세계를 돌며 프로 테니스 선수 생활도 했어요. 지금은 샌프란시스코에 살아요. 두 아이가 있는데 매들린과 가브리엘이에요. 매들린은 열세살인데 의지가 강하고 집중력도 뛰어나고 착해요. 카브리엘은 열살인데 주변을 밝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요. 왠지 나중에 연예인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엄마가 이 애들을 만나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사람들을 항상 존중하고 함부로 평가하지 않으려고 해요. 착하고요. 아마 제 주변 사람들이 저에 대해 그렇게 들 말할거에요. 엄마도 저를 자랑스러워 하셨으면 좋겠어요. 지금 테니스 교습소를 운영하고 있고 제가 테니스를 가르쳐요. 제 지역에서 꽤 인정받으면서, 제 학생들이 잘 되도록 돕고 있어요. 그래도 항상 가슴 한구석이 비어있는 것 같아요. 엄마를 안고 엄마의 따뜻한 품을 느끼는 꿈을 꿔요. 제가 엄마 목소리를 알아볼 수 있을까 궁금해요. 저를 보내기로 한 결정이 너무너무 힘들었다는 것 알아요. 그로 인해 너무 많이 고통받지 않았기를 바래요. 

전 잘 살고 있어요. 엄마를 원망하지 않고 좋은 마음만 가득해요. 이번 생에 언젠가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래요. 안되면 다음 생에서라도요. 그때까지 마음과 영혼이 평안하고 행복하길 바라요. 제 옆의 빈자리는 제가 잘 간직할게요.  엄마를 위한 자리에요.. 

저도 눈물이 나네요. 이 편지를 이렇게 팟캐스트에서 전세계를 통해 읽는다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텐데요. 우리 모두 마이클의 마음을 조금 들여다 봤네요. 고마워요. 

이 팟캐스트를 해줘서 고마워요. 다른 모두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에 대해 정말 많이 배워요. 이렇게 내 이야기를 할 기회를 줘서 고마워요. 

카오미 : 언젠가 2탄도 있겠죠? 사람들이 마이클에게 연락하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되죠?

마이클 :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해요. 10sjourney인스타그램이에요.

카오미 : 아..  10is 테니스군요

마이클 : 네 

카오미 : 무슨말인가 했어요..ㅋ

마이클 : 그쵸. 혹은 페이스북에서 마이클 제섭을 찾으면 됩니다. 

카오미 : 고맙습니다. 마이클. 지금 새벽시간인데요, 내일 하루 너무 피곤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야기 들려주고 약한 모습 보여줘서 고마워요. 

마이클 당신은 굉장히 특별한 사람입니다. 고맙습니다. 오프닝 뮤직을 협찬해주고 있는 제이진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더 많은 곡을 듣기를 원하시면 제이진닷컴을 찾아주세요. 앤드류 헨리씨와 다른 후원자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지원으로 이 한인 입양인들을 위한 퍗캐스트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후원자가 되시면 에피소드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들으실 수 있어요. 앤드류처럼 후원자가 되기를 원하시면  홈페이지를 방문해주세요. 다음에 뵐 때까지 잘 지내세요.       

                                                                                                         번역 : 전유근

시즌 6, 열 한번째 에피소드 : “우리의 몸은 항상 생존모드에요” – 정울림

“어떤 때는 내가 정말 스웨덴 사람이 맞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어요. 특히 외국에 있을 때요. 스웨덴 사람들끼리 만났을 때 우리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또 어떤 때는 제가 너무나도 한국인 같아요.” 

리사 울림 호블럼은 한국계 스웨덴인이며 삽화가, 만화가이자 활동가입니다. 최근 작인 “Palimpsest”는 친부모를 찾는 그의 실제 여정을 담은 그래픽노블(만화형태의 소설)인데요 그 여정이 미로찾기와도 같습니다. 어떤 땐 허위로 작성된 문서와 씨름해야 했고 또 생애 초기의  작은 기억이 후에 어떻게 크게 작용하는지도 경험해야 했습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리사씨는 애착, 엄마가 되는 여정, 그리고 상실의 경험이 그녀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제 이름은 리사 울림 호블럼이고 현재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6년째 살고 있어요. 마흔 다섯살인데 제 나이가 아직 실감이 안나네요. 

어떻게 뉴질랜드에서 살게 되었죠?

제 파트너와 두 아이와 함께 스웨덴에서 살고 있었는데 오래전부터 떠나고 싶었었어요. 제 파트너는 영국인인데 항상 스웨덴이 자기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래서 기회가 되면 같은 영어권이면서 동시에 동양인들 비중이 높은 곳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을 하던 중에 마침 파트너에게 대학에서 오퍼가 들어왔어요. 박사과정 중 이었거든요. 다른 곳도 알아보던 중이었는데 마침 이곳 오클랜드 대학에서 제의가 와서 결정했어요. 그래서 바로 물건을 정리하고 짐을 싸서 왔어요. 우리 둘 다 그 전에 한번도 와본 적도 없는데 말이죠. 운이 좋았어요. 그리고 지금 아주 만족하고 있어요. 

그전에 한번도 가본적도 없었는데요?

제 파트너가 호주에 와본적은 있어요. 그런데 이 두 나라는 완전히 다른 나라거든요. 사람들이 대략 뭉뚱그려 생각하긴 하지만요. 

맞아요. 같은 나라가 아닌데 미국인들은 다 똑같다고 생각해요. 

스웨덴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저기 남반구 어디쯤 있는 나라들 그리고 같은 나라의 식민지(역자 주- 영국)였으니 비슷할거라고요. 그런데 실제로는 굉장히 다르거든요. 아주 아름답고 멋지고 고요한 곳이에요. 

뉴질랜드를 떠올리면 그렇게 인종적으로 다양할것 같지는 않은데, 제가 아는 친구중에 뉴질랜드 국적의 중국계 친구가 있거든요. 중국계가 많나요?

네. 아시안도 많고 태평양제도쪽 사람들도 많은데 물론 어디를 가느냐에 따라 달라요. 뉴질랜드가 제가 그동안 가본 곳들에 비교하면 인종적으로 아주 다양한 곳이기는 하지만 꼭 그런것만은 아니에요. 물론 오클랜드(역자 주-뉴질랜드의 수도)의 경우는 그렇죠. 하지만 아직도 백인위주의 곳이 많고요. 마오리족과 태평양제도 쪽이 주를 이루고 다른 인종은 없는 곳도 있고요. 오클랜드는 동아시아쪽 인구 비율이 꽤 높고 빠르게 늘어나고 있기도 하고요. 뉴질랜드 역사를 보면 백인들이 이곳에 도착했을때 중국인들도 거의 같은 시기에 왔거든요. 그러니 중국인들도 뉴질랜드 정착 역사가 아주 긴데 역사는 항상 뭐랄까 백인 특히 영국인 후손들과 마오리 족이 먼저 정착했고 태평양제도쪽 사람들과 중국인들 그리고 그 밖에 다른 아시안 이민자들은 항상 나중에 온 사람들 그리고 골칫거리인 사람들로 그려지죠. 그들도 이 곳에 오랫동안, 골드러쉬(역자 주- 1850년경 호주에서 금이 발견되자 유럽등지로부터 사람들이 몰려듬)  때부터  있었거든요.  미국도 그렇잖아요. 아시안들이 아주 오랫동안 거주했는데 항상 다른 민족들에 비해 “이민자들” 혹은 미국에 “받아들여진” 사람들로 묘사되죠. 

맞아요. 영원한 “외국인”이죠. 벌써 3-4세대나 살았는데도 말이죠.

다른 유럽쪽 피는 아무리 많이 섞여도 백인이고 미국인이잔아요. 그런데 아시안의 경우에는 항상 정착민이고 외국인이죠. 여기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리사씨는 자신의 출신을 어디라고 생각하나요? 본거지를 떠나서 사는 사람으로서 말이에요. 

이민자죠. 굉장히 복잡한 주제이고 내가 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지는 항상 변해요. 내가 당시에 어디에 있고 누구와 있고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어떤 때는 내가 정말 스웨덴 사람이 맞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어요. 특히 외국에 있을 때요. 스웨덴 사람들끼리 만났을때 우리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또 어떤 때는 제가 너무나도 한국인 같아요. 나의 “한국인임”(역자 주 – Koreaness) 이 항상 좋기만 한건 아니지만요. 두 나라에 다 가깝게 느끼고 한국에 대해 뭔가 나긋한 감정도 있지만, 이 나라가 우리를 어떻게 취급했고 지금도 취급하나를 생각하면 화도 나고 실망스럽고요. 그래서 그냥 특정 출신이 아닌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라고 느낄때도 있어요. 아주 복잡한 문제죠. 외국에 살면서 내 스스로 나를 외국인이라고 여기는건 괜찮아요. 여기서 꽤 마음 편하게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누가 나를 외국인이라고 생각하면 그런가보다 하죠. 그런데 그런 일이 스웨덴에서 일어나면 굉장히 의기소침해지고 화나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외국인이면서도 외국인이면 안되거든요. 저를 보면 제가 자기들과 같다고 생각하다가 제가 한국어를 못하는걸 알게 되면 그때부터 이야기가 달라지죠. 설명을 해야 되잖아요. 왜 겉모습은 똑같은데 행동하는건 다른지 왜 공감을 못하는지 말이에요. 그리고 그런것들이 상처가 되죠.  

다른 입양인들, 특히 자기 감정을 많이 들여다본 입양인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들어봤어요. 그들이 제 3의 장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제 3의 장소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고요. 그곳이 입양인 중심의 모임이 됐건 아니건 간에 말이죠. 우리가 입양된 나라나 태어난 나라가 아닌 제 3의 나라에서 말이에요. 리사씨는 실제로 지금 제 3의 나라에 있잔아요. 

저도 그런것 같아요. 항상 이리저리 옮겨왔고 제 삶을 그게 가능한 삶으로 만들어왔죠. 열 여덟살인가 아홉살때에 스웨덴에서 스페인으로 갔는데 그 이후로 항상 다른 나라에 사는 것을 꿈꾸고 바래왔어요. 돈을 모으려고 6개월동안 힘든 일을 한적도 있고요. 노르웨이에서 돈을 모으려고 생선가공 공장에서 하루에 14시간씩 일한 적도 있었고요. 그 후에 남미의 브라질로 가서 기차를 타고 여행했고요. 계속 그래왔어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왜 그렇게 항상 멀리 가버리냐는 질문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 질문을 받을때면 속상하기도 했는데 그땐 제가 저의 입양에 대한 탐구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이었어요. 조금 나이가 들어 되돌아 보니 그땐 그 어디에도 매이기가 싫었던것 같아요. 그래서 3-4년은 걸리는 대학에 들어가거나 할수가 없었죠. 그래서 항상 한 학기만에 끝내고 다음 과정을 할지 결정하는 단기 코스를 듣거나 했어요. 그래서 일도 저임금 일용직만 구해서 했죠. 언제든 그만두고 바로 떠날수 있게요. 다른 사람들이 했던 표현대로 하면 항상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것 같아요. 지금 돌아보면 그런 삶에서는 – 물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셈이긴 하지만 -조금 오래 머물렀다 싶으면 뭔가 갇히는 느낌이 들고 기대치가 생기게 되고 그러면 집이라고 느끼게 되고 그러잖아요. 

그 어느 곳도 집이라고 느끼지 못했어요. 새로움을 느끼는 것이 좋았고 낯설음을 느끼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그편이 편했던것 같아요.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고 느꼈으니까요. 그리고 나에 대해서 잘 몰랐기도 했고. 그게 아마도 제가 그때를 헤쳐나갔던 방식 같아요. 실제로는 문제를 회피한거였지만요.

왠지 알것 같아요. 사람들이 “도망”친다고 표현했을때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나요?

그때는 동의못했죠. 화도 많이 냈고요. 그때는 그저 내가 다른 문화를 동경해서 그런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사람들이 항상 이제 스물 다섯살이니 좀 정착해야 하지 않겠냐 라던가 이제 서른이니 가정을 꾸려야 하지 않겠니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계속 그 생활을 하다가 결국에는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서 이제는 같이 옮겨다니게 되었어요. 그에게는 또 그만의 숙제가 있고요.  아무튼 새로운 곳에 대한 동경도 이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을것 같아요. 

제가 보기엔 뭔가 더 심오한 이유가 있을것 같아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잖아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고 마침에 어느정도 지점에 다다르면 정착을 해야 할것 같은 기대치가 생긴다고요. 평생 어디에도 뿌리가 없다고 느꼈던 사람한테 그게 어떤 의미일까요?

글쎄요. 저도 답을 모르겠어요. 한 곳 정착해서 오랫동안 산 사람들 예를 들어 20년 이상 살았다는 사람들 집에 가보면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 가득차 있고 그러잖아요. 그런걸 볼때면 굉장히 부럽기도 하고 서럽기도 해요. 나도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치만 바로 뭔가 갇혀 있다는 느낌도 들고요. 저는 그렇게 감상적인 편이 아니거든요. 물건들에 연연해 하지 않고 바로바로 버려버리는 편이에요. 간직하고 있는 물건이 몇개 안되어요. 제가 한국에서 올때 입었던 내복이랑 베넷저고리 정도만 가지고 있어요. 다른건 바로 가차없이 버려버려요. 물건에 애착을 느끼고 연연해하는 편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한곳에서 오래 살며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보관하는 사람들을 보면 뭔가 안전망이 있고 돌아갈 곳이 있어서 좋겠다는 생각은 해요. 

그건 네가 어디에 있든 항상 네 가족들이 알고 있고 그것이 서로서로에게 안전망이니까요. 그래서 그런 느낌들은 내가 결코 알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우리는 너무 많은 상실을 경험 했잖아요. 가족과 관련된 감정이고요. 꼭 크리스마스가 가족을 위한 때 라서는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때 가족들 생각을 많이 해요. TV에서 가족영화들만 주구장창 보여주잔아요. 진짜 별로인 영화들도 있는데 그래도 항상 재밌게 보는데 뭐랄까 마조히즘(주 – 피학대도착증)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크리스마스 영화에는 항상 외로운 사람이나 고아나 혹은 부모가 없는 성인등이 나오잖아요. 그리고 그 주인공들이 누군가를 만나는데 그 누군가의 가족들이 그 주인공을 받아주고 바로 안락함을 느끼고 하는 그런 클리셰로 가득 찬 영화들이요. 가족들간의 끈끈한 사랑 뭐 이런 주제를 찬양하는 영화들 말이에요. 그럴때면 나도 이런 가족들이 있으면 좋겠는 생각도 들지만 막상 제가 그런 상황에 있거나 초대를 받거나 하면 왠지 숨이 막히고 그만 자리를 뜨고 싶고 그래요. 

가족들이 헤어지거나 하는 영화속의 장면들이 입양인들에게 상처를 줄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끈끈한 가족애를 보여주는 장면들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물론 모든 가족들이 다 그렇게 끈끈한 것은 아니고 크리스마스 가족영화들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도 안되지만 그래도 쓸쓸해지거든요.

그럴수도 있겠네요. 몇 군데 와 닿았던 부분이 있는데  물건등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고 했잔아요. 관계를 맺는데도 그런 편인가요?

그런 것 같아요. 왜냐면 관계에 너무 집착해서 그들을 괴롭히는 지경까지가곤 했었거든요. 그리고 사람들이 뒤에서 “재는 전화를 하면 안 끊어서 너무 힘들어”라거나 “너무 열성적이야”하는 이야기를 친구들한테 들었어요. 저는 친구들한테 충실한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너무 부담스러웠나봐요.  그래서 그때부터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항상 멀리 있었으니까요. 자연스러운 일이 됐어요.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또 언젠가는 멀어져야 될것을 아니까 힘들었죠.  

그리고 일반적으로 봤을때도 저한테 더 힘든일인것 같기도 해요. 항상 뭐랄까 크리스마스 영화에서처럼 친한 친구그룹에 끼고 싶었어요. 네 다섯명이서 모든 걸 같이 하는 그런 그룹이요. 그런데 저는 항상 “아싸”였고 그런 그룹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저를 초대해주기는 하는데 항상 초대 받기만 하고 핵심 멤버가 되지는 못했어요. 항상 손님이었죠. 그리고 친한 친구가 생기면 항상 더 부담스러웠어요. 무슨 일이 생겨서 관계가 끊어질 것만 같았고요. 

그래서 굳이 친해지려고 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더 힘들어지 니까요. 요즘엔 SNS덕에 멀리 떨어져 있어도 친구 관계를 유지 할 수 있잖아요. 저는 그게 더 편한 것 같아요.  무슨 일이라도 해줄 친한 친구들이 몇 있는데 멀리 떨어져 있으니 저로 인해 부담스러움을 느낄 일이 없으니까요. 멀리 떨어져 있는것이 다행이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제 생각엔 우리가 입양되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어요. 우리가 포기되었다는 사실이요. 리사씨가 말하는 동안 저도 많은 부분이 와 닿았는데 저도 같은 고민을 했거든요. 답이 없는 난제이고 역설적인기도 해요. 우리는 어떤 안정적인 관계의 중심이 되고 싶어하고 깊은 뿌리를 내리고 싶어하지만 너무 어려서 겪은 일때문에 동시에 관계안에서 갇혔다고 느끼기도 하고요. 혹은 너무 가까워지면 또 떠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고요. 그러니 차라리 관계를 안 맺어버리는게 쉬울수도 있죠. 간절히 원하지만 막상 갖게 되면 떠나게되죠. 빨리 식상해져버리거나 새로운 관계가 필요해서 일수도 있지만 결국엔 사람이나 장소에 너무 정들게 될까봐 두려운거죠

맞아요. 지금은 안그러지만 한동안 힘들어 했던일이 뭐냐면 제가 저와 각각 친했던 두 친구를 소개해서 서로 친구가 되고 나면 왠지 그 둘이 친해져서 나를 더이상 안 볼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어요. 실제로 그런 일이 몇번 있었거든요. 서로 몰랐던 두 친구가 저를 통해 알게 되었고 처음엔 셋이 항상 같이 어울리다가 언젠가부터 둘이서만 만나더라고요. 저를 빼고요. 어릴때 그런일이 몇번 있었는데 성숙하게 대처를 하지 못했죠. 성인이 되고나서도 그런일이 일어났을땐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와 친했던 것보다 자기들끼리 더 친해질수도 있겠다는 사실때문에 제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걸 깨달았어요. 좀 우스운 생각이긴 하지만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잔아요. 그래서 차라리 처음부터 친해지지 말자라고 생각했죠. 제가 굉장히 외로운 사람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그런건 또 아니고요. 아무튼 지금은 새로운 관계를 맺는 나만의 방식이 있어요. 이제는 저를 보호해야하니까요. 

또 하나 와 닿는 부분이 있는데요 다른 많은 입양인들도 친구 관계나 연인 관계가 복잡하고 어렵다고 해요. 친구나 연인 관계에서 많이 힘들어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제 경우에도 친구 관계에서 제가 먼저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마다 내가 너무 관계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그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건 물론 개인상담시간에나 가져가야 하는 질문이겠지만 입양되었다는 사실때문에 그런것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관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서 실망하거나 상처받게 되면 그게 너무 고통스럽죠. 

맞아요. 저는 심지어는 제가 너무 부담스럽고 제가 제 주변 사람들이 다 완벽하길 바란다는 말까지 들었어요. 제 생각엔 엄마와 자식 사이의 유대감과 관련이 있는것 같아요. 처음에 태어났을때는 모든 것이 완벽하고 조화롭잔아요. 어쩌면 유토피아에 가까운 상황이죠. 그런데 그 상황이 파괴되고 그때부터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야 하잖아요. 그토록 아름답고 가까웠던 관계가 한 순간에 날아가고 억지로 떨어졌잖아요. 점진적으로 일어난것도 아니고 갑자기요.  태어났으니 엄마와 함께 조금 있어야 하는데 바로 옮겨졌죠. 그때를 상상하면 그냥 암흑같아요. 그 갓난 아기한테 그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품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여기저기 맡겨지다가 결국엔 고아원으로 보내졌죠. 고아원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고 해도 생애 초기의 결정적인 엄마와의 시간을 대신하진 못하죠. 말하긴 좀 민망하지만 그래서 그런 관계를 제가 항상 열망하는 것 같아요. 모든 관계에서요. 친밀함의 가능성이 있는 관계 말이에요. 그래서 갓난 아기 적에 경험했던 그 빈자리를 메꾸려고 하나봐요. 그렇지만 이미 소용없죠. 다시는 일어날수 없죠. 

제 아이들하고 아주 끈끈하다고 느껴요. 아이들이 막 태어났을때 그런 완전무결한 상태를 느꼈거든요. 그런데 그애들이 아이들이고 저는 엄마잔아요. 제가 그 안정감을 줘야하는 존재죠. 저도 저를 향한 그 모든 것을 망라하는 안전함을 느끼고 싶은데 저는 그걸 가질수 없잖아요. 더이상 아이가 아니니까요. 아주 내면이 고요하고 모든것을 다 내어주는 연인을 만났다 해도 이미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더이상 같지 않아요. 제가 생각했던 방향과 다른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네요(웃음) 

그럼 단체활동운동저항시민조직활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요?

그냥 좀 놀랐어요. 이런 일들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을 안하고 살았거든요. 생각하면 너무 힘들어서요. 그런데 말하니 좋네요. 그냥 좀 의외라서요. 대개 사람들이 저에게 연락을 해올때면 주로 제가 하는 작품활동이나 시민운동에 대한 거고 이런 감정적인일에 대한것은 아니었거든요. 

제가 원래 좀 호기심이 많아요. 저는 엄마는 아니지만  리사씨가 아이를 낳았을 당시 이야기를 했을때말이에요. 리사씨는 아이때 그런 안전한 애착관계를 못 가졌잔아요. 갓난아기이건 혹은 조금 더 큰 아이라도 뭔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죠. 엄마가 없어졌고 애착을 주는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비록 이성적으로 뭔가를 알지는 못하더라도 몸속에 감지되고 각인되죠. 그래서 리사씨가 아이를 낳았을 때 리사씨는 그런 애착을 아이들한테 줄수 있었나요? 본인은 받지 못했더라도?

둘째 아이한테는 그럴수 있었는데 첫째한테는 그러질 못했어요. 아이가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물론 항상 함께 있었지만 산후우울증이 심하게 왔었거든요. 분만 도중에 갑자기 트라우마가 심하게 찾아왔어요. 너무 심각했는데 그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죠. 그래서 그 뒤로 스웨덴 의료시스템에 악감정이 생겼어요. 지금도요. 스웨덴 정부에서 입양인들을 위한 지원이 전혀 없었거든요. 입양인이면 정서적으로 임신시 고위험군에 속한다는걸 알려줬어야 해요. 성폭력 피해자이거나 부모를 잃었거나 하면 별도의 지원이 나가거든요. 그런데 우리의 존재는 안보이나봐요. 우리 입양인들은 부모를 잃은 것이 아니고 부모를 얻었다고 생각해요. 인식의 차이가 있죠. 우리에겐 마치 부모가 죽은 거나 마찬가지 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안해요. 

그런 특수한 상황에서 임신을 하면 여러 지원들을 많이 받을 수 있는데 저는 아무런 지원도 못 받았어요. 왜냐면 입양은 좋은 거니까요(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준비가 안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모든 사실이 제가 고위험군이라고 말해주고 있는데 말이죠. 진통이 와서 분만실에 있는데 갑자기 제가 제 엄마인것처럼 느껴지는 거에요. 그리고 이 진통이 오면 아이를 잃어야 한다는걸 알고 있는 거에요. 진통이 시작되기 전에 아이를 지킬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죠. 분만실에서 진통을 견디기 위해 아이를 품에 안는 상상을 해보라고 하잖아요. 지금 이 고통이 모두 그 순간을 위한거다 라고요. 그런데 저는 이 사람들이 내 아기를 뺏어가려고 그런다. 곧 아이를 잃을 거다. 이렇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분만의 고통도 정말 힘들었지만 감정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제 생모한테 감정이입이 되어서 마침내 아이가 나왔을때 아이가 울잔아요. 그런데 저는 아이가 저를 곧 떠나야 하는 것을 알아서 운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은 그냥 울잖아요. 제가 없어서 우는 것도 아니고 그냥요. 그런데 전 아이의 모든 울음을 자기가 곧 버려지니까 그걸 알고 우는거라고 해석했어요. 그래서 그런 모든 상황들이 너무 힘들어서 곧 우울증이 찾아왔죠.  산후우울증이라는 것이 꼭 트라우마가 있어야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아주 흔한 일이죠. 그런데 문제는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다는 거에요. 일차적으로는 제 스스로 저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몰랐고 임신 외에도 환경적으로도 상황이 많이 안좋았었거든요. 여러가지로 형편이 안 좋을때였어요. 

상황이 많이 안좋은 때였나봐요.

네. 실직에 집도 없었고 다른 문제도 많았어요. 굉장히 힘들고 도움도 받지 못하던 상황이었어요. 저와 제 파트너 모두 많이 외롭고 두려웠어요. 결국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상담을 받게 되었는데 또 상담사가 너무 별로였어요. 백인남자였는데 남자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출산을 경험한 여자였으면 그래도 좀 낫지 않았을까 생각은 들어요. 제 고통이 어려서 부모로부터 떨어져 입양이 되었다는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 근처로도 못갔어요. 

그래서 상담사로부터 엄마가 된 사실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즐겨라 도데체 뭐가 힘드냐라는 식의 조언만 주구장창 듣다가 끝났어요. 결국엔 너무 화가 나서 나한데 맞는 도움을 직접 찾아나서게 되었요. 이런 식의 도움보다는 누군가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엔 찾아 나섰고 적절한 도움을 받게 되었어요. 입양과 관련된 도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었어요.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왜 그렇게 아이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는지만 물어봤으면 됐을텐데.

그쵸. 제가 아이한테 너무 내 자신을 투사하고 있었다는것만 누가 알아챘어도 말이죠. 아이가 내가 자기를 버릴거라고 생각해서 우는거다 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러면서도 동시에 아이한테 질투심을 느꼈어요. 제 아이는 엄마한테 이렇게 가까이 있고 모유를 먹고 누군가가 옆에서 잘 돌봐주잔아요. 저는 그러질 못했으니까요. 너무 상실감이 느껴지는데 도대체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왜냐면 동시에 아이를 돌봐야 하니까요. 내 몸을 돌보는게 아니라. 아무튼 엉망이었죠. 그때 누군가가 조금만 힌트를 줬더라면 상황이 훨씬 나았을거라 생각해요.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후회가 되거든요. 그때 너무 감정적으로 힘들어서 그 시간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어요. 그래서 아이가 그때를 떠올리는 말을 하면 너무 미안해요. 갓난 아기였을때 조금 더 나은 엄마였어야 되는데 하고 말이죠. 아이한테 조금더 잘 대해줬더라면, 이러것 저런것을 해줬었더라면 하고 자책을 많이 해요. 지금 열두살이거든요.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후회가 되고 그때의 나를 혼내주고 싶어요. 

그럼 둘째 딸아이 하고는 어땠나요? 무언가 달랐나요?

그랬죠. 둘째가 태어나기 전까지 그 2년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죠. 그 사이에 저의 입양에 대해 파기 시작어요. 물리적, 환경적인 부분보다 정서적인 면과 관련된 부분을 말이에요. 그러니 많은 변화가 있었던 셈이죠. 그리고 이제는 좀 예상가능한 문제가 되었잔아요. 그래서 먼저 이런일이 나에게 있었다 그러니 이런 지원이 필요하다고 먼저 밝히고 받을수 있는 의료 서비스를 다 받았어요. 그러니 지원을 잘 해주더라고요. 필요한것을 명확히 알고 있으니 도움을 주는 것도 쉬웠나봐요. 모르면 힘들죠. 

그래서 도움도 많이 받고 특히 감정적인 부분을 많이 들여다봤어요. 그래서 둘째가 태어났을때 그냥 너무 행복했어요. 물론 몸은 너무 힘들었죠. 하지만 감정적으로 온전히 아이와 함께 할수 있었고 아이가 운다고 해서 나때문에 우는것이 아니고 괜찮은거다라는걸 알았죠. 그리고 이미 아이를 2년이나 키워서 아이를 만져도 아이가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죠. 손에 익었으니까죠. 기저귀가는 것이나 씻기는것등을 할때 허둥대지 않았죠. 갓난 아기때는 씻기는 것도 너무 엄두가 안나잔아요. 그래서 아이와 애착을 키우는데만 집중할수 있었어요. 

둘째는 또 다른 성격더라고요. 둘째는 항상 안겨있기를 좋아했는데 그 부분이 저에게 많은 힐링이 된것 같아요. 거의 6개월을 제 배위에서 잤거든요. 저도 알았고요. 그 아이가 그걸 필요로 한다는 것을요. 그 아이가 어떤 트라우마가 있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그냥 아기라서 그런거라는걸요. 그래서 그걸 줄수 있었고 더 가까워 질수 있었죠.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물어보신 것이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게 뭐였죠?

저는 아이를 낳아보지는 않았지만 현 의료체계에서 입양인에 대한 지원이 없잔아요. 어찌보면 우리도 트라우마를 이겨내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잔아요.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어요. 

그래요. 그게 큰 문제죠. 우리가 왜 스스로 트라우마 전문가가 되어야하죠?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한테 트라우마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인정하지도 않을 거에요. 우리 자신도 모르고요. 그리고 그 모른다는 사실때문에 언젠가 더 큰 트라우마를 겪을 수도 있죠. 트라우마는 항상 그런 식으로 작동 하잖아요. 우리의 몸이 항상 생존모드라는 사실도 모르고요.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입양되었다는 사실이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하잔아요. 그러도록 사람들이 바라고 우리도 그렇게 세뇌되었으니까요. 새로운 가족이 생겼으니까 된거다 라고요. 그리고 그렇게 생각안하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거라고 가스라이팅(역자 주-심리적 조종)을 당해 왔잖아요. 

그래서 문제를 만들지 않도록 너무 많은 질문을 하지 않도록 배웠죠. 안그럼 우리 가족 뿐만 아니라 다른 입양인들한테 상처를 줄수 있다고요. 우리 입양인들은 주변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하니까요(웃음). 그래서 많은 입양인들이 이 문제를 깊게 묻어두고 이런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갑자기 인생의 어떤 큰 계기가 되는 사건이 찾아오면 이것이 갑자기 사느냐 죽느냐 하는 정도 수준의 문제가 되어버리죠. 임신출산강좌 같은데 가보면 어린시절의 기억이 많이 떠오를거니 대비를 하라고 알려주잖아요. 그러면 다들 입양부모가 어떻게 키웠는지를 떠올리죠. 그런데 입양 이전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해요. 입양과 동시에 인생이 시작되었으니 입양 이전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교육받잖아요. 그래서 어린 시절에 너무나 잔인하게 부모로부터 떨어진 사실은 다들 기억을 안하죠.

 유전질환등 가족력이 없으니 무방비 상태로 인생의 각각 다른 단계들을 거쳐나가야하죠. 우리는 의학적으로 유령이나 마찬가지에요. 우리 스스로 경험하고 스스로 전문가가 해요. 아무런 교과서나 매뉴얼도 없는 채로요. 

네. 전문가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암흑속에 갇혀있죠. 많은 경우에 입양기관이나 친부모쪽에서 우리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경우가 많죠. 입양부모도 정보를 알고 있는데 아이들한테는 안 보여주기도 하고요. 그래서 전문가이기도 하고 아예 차단되어 있기도 하고요. 아직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면 참 의외에요. 보통사람과 다름 없다고 생각하죠. 아직 그리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없어서 잘 모를수도 있어요. 다들 각각 힘든 사정이 있으니까요. 제가 보기엔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는것 같은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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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냥 그 사람들이 무지해서 그냥 지나가는 아무한테나 그러는 거라고. 그런데 내가 동양인이니까 그런 말을 한거잔아요. 칭총(역자 주-동양인/중국인에 대한 멸칭) 내가 백인에 금발머리였어도 그런말을 했을까요? 그래서 인종차별이 아니라고 그냥 그들이 무지해서 그런거다, 너를 찍어서 말한 것도 아니었잖니 라고요. 그래서 그런 부분이 엄청 열받게 하는데 그건 또 입양과는 별도의 이슈죠. 사람들은 누구나 골칫거리들이 있잔아요 그래서 굳이 관여하고 싶지 않으니 문제를 문제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거죠.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그저 나는 너무 운이 없이 태어났나보다 하고 생각했었어요. 사람들한테 나한테 일어난 일을 설명하면 그냥 운이 없었던 거라고 했으니까요. 버스가 나를 그냥 지나치고 사람들이 날 안도와주고 나한테 소리지르고 무례하고 했던 일들이 그냥 오늘 하루 재수가 없어서 그랬나보다 생각했어요.  그 사람들이 오늘 기분이 안좋았나봐 그렇게 사람들이 저한테 말했으니까요. 너를 못봐서 그런거야 혹은 네가 외국인 유학생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거야 라고요. 항상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해명하려 했죠. 그래서 나는 왜 항상 일진이 안좋은 사람들하고만 맞닥트리려야 하나 하고 생각했죠. 

그러다가 제 파트너를 만나고 나서야 그게 인종차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외부자의 시선으로 더 넓게 볼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건 행운이죠. 그들은 이 상황에 덜 익숙하니 같은 상황을 다른 눈으로 보잖아요. 그리고 학연이나 지연등에 매이지 않았으니 편을 안들어도 되고요. 아무튼 그가 저랑 같이 살러 처음에 스웨덴에 왔을때 아주 놀라더라고요. “사람들이 너한테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하는지 여태까지 몰랐어?”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쳐다보는지 너를 보고 수근 대는지 여태 몰랐냐고요. 저는 그래서 여기는 항상 그렇다라고 했더니 그가 “그게 바로 인종차별이야” 라고 하더라고요. 외부인이 와서 지적을 해주고 나니 저에게도 그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때쯤부터 인종차별이 대한 여러 논의가 시작되었고 SNS가 특히 도움이 많이 됐지요. 저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때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어요. 내 전 인생이 인종차별속에 던져져 있었구나,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그렇게 애썼구나 하는 것들을요. 인종차별인것이 명백할때도 있지만 안그럴때도 많잔아요. 

그리고 항상 해명이 되죠. 

네 그때가 큰 계기가 되었어요. 

우리 백인 입양부모들이 여섯살 짜리 아이한테 “네 말이 맞아. 그건 인종차별이야”라고 말해줬다면 어땠을까요?  분명히 해주고 알려주고 또 네 느낌이 맞다고 해줬다면요. 

그러니까요. 

그런데 그러지 않았죠. 

제가 요즘 여러 이슈에 대해 열심히 활동을 하는 지금도 제가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하면 저희 부모님은 그냥 아무 말이 없으세요.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55세 이상들만 모여사는 은퇴촌 같은 곳에 사셨거든요. 스톡홀롬에 백인 중산층 이상만 사는 곳이죠. 거길 갔는데 그 전에도 여러번 방문한적이 있었고요. 한번은 어떤 사람이 저에게 여기서 뭐하는 거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부모님이 여기 산다고 했더니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냐고 하네요. 그게 아니고 우리 부모님이 여기 산다고 햇더니 이름을 대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거짓할 하는건지 시험을 해본거죠. “그 사람들 바로 저기 저집에 사는 사람들이지?” 하면서요. 그래서 아니라고 저집이 아니고 이집이라고 아무튼 그런 식으로 제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가 충분해지고 나서야 포기하더라고요 그래서 저희 부모님한테 말했더니 그 사람이 조금 웃긴 사람이라서 그래 하고 그냥 웃고 넘어갔어요. 다른 때는 환경미화원인 줄로 여겨졌던 때도 있고요 혹은 가사보조원인 줄로 여겨졌던 적도 있고요. 아무튼 방문할때마다 여러 질문을 받아야 했죠. 그런데 저희 부모님은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으셨죠. 너무 분명한일들인데 말이죠. 

아이들이 프레시안(역자 주 – 한국의 인터넷 신문)에 글을 기고 했다면서요. 어떻게 하게 된거죠?

들어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스웨덴한국인모임(Swedish Korean Adaptees)이라는 곳에서 활동하고 있었어요. 지난 몇년간 열심히 해서 한국의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정서도 제출했어요. 마침 그 시기부터 조직된 덴마크의 입양인들하고도 연합했어요. 그들도 그들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했거든요. 프레시안 측에서 입양인들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이나 배우자들의 목소리도 듣고 싶다고 해서 많은 글이 올라왔는데 우리 아이들한테 이야기했더니 아이들도 너무 하고 싶어라 했어요. 입양에 대해 궁금한것이 아주 많거든요. 어떻게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요

그래서 아이들도 한마디를 거들고 싶어햇어요. 그래서 저는 저 대로 쓰고 파트너가 아이들을 도와서 셋이 함께 글을 썼어요. 제가 끼면 아무래도 영향을 줄까봐 저는 빠지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파트너가 아이들을 각각 인터뷰 하고 나서 그걸 옮겨 적었더라고요. 도입부만 그가 쓰고 나며지는 거의 그대로 싣었다고 하더라고요. 순서 정도만 바꾸고요. 아이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살리고 싶었대요. 그래서 그냥 아이들의 대화 같은 느낌을 받으실거에요. 

아이들이 쓴 내용 중에 의외의 부분은 없었나요? 

제가 제일 놀랐던 부분은 아이들이 상당히 강경하더라고요. 강제로 입양보낸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말이에요. 여기서는 그들이 악인이자 적이니까요. 아마도 제 파트너가 그부분을 좀 순화시켰을거에요. 아들아이가 아주 신랄하게 표현을 해서 파트너가 다르게 표현해보라고 부탁했대요. (웃음) 제가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들이 벌을 받기를 원해요. 그리고 서서히 엄마의 입양이 자신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아이들이 알아가고 있어요. 한국에 친척들이 있는지, 왜 할머니 할아버지는 못만나는지, 이제는 만날 준비가 되었는지 아이들이 거의 매일 물어보거든요. 삼촌 이모가 있는지, 엄마의 형제자매들이 엄마의 존재에 대해서 아는지, 다음번에 한국에 가면 만날수 있는지 등등요. 그들이 자기들에 대해서 아는지, 우리를 생각하는지등등 궁금한 것도 많고 지난 번에 물어본 이후에 혹시 엄마가 더 알아낸것이 있는지 확인하고요. 자기 친구들한테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답을 해줄수 있는 것들이 몇개 없으니까요. 대가족이나 혹은 친척간에 친밀하게 지내고 물리적으로도도 가깝게 살고 몇 세대씩 거슬러 조상들을 따질수 있는 친구들도 있는데 자기들은 그러질 못하니까요. 언어도 마찬가지에요. 그리고 특히 이쪽에 사는 사람들은 언어를 두개 혹은 세개씩 하는것이 희귀한 일이 아니잖아요. 아주 멋지죠. 그래서 이곳이 더 좋기도 한데. 제 아이들도 스웨덴어와 영어 이중언어구사를 하긴 하지만 사람들이 한국어를 할거라고 기대하는데 못하니까요. 스웨덴인도 아니고 영국인도 아니고 한국사람처럼 생겼어요. 그리고 항상 왜 한국말을 못하는지 계속 설명해야 하고요. 실제 한국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고 제가 어설프게 간신히 흉내내서 만든 한국문화를 경험해야 하니까요. 그럴때면 뭐랄까 문화적 도용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아이들은 점점 커가고 생각도 감정도 커가는데 이제는 저만의 상실이 아니라 그들도 그들만의 이야기에 상실을 경험하는것 같아요. 

아이들이 그들만의 상실을 경험한다는 사실이 예상 밖이었나요?

그렇진 않아요. 공부를 많이 했거든요. 이런 질문들에 관심이 많고 제가 하는 일이 쓰고 그리는 일이고 또 활동가이다보니 항상 이런 일들에 관여해왔고 그래서 많이 참여하고 또 공부를 많이 했어요. 그리고 이쪽 지역에서는 제국주의 식민지와 대량학살등을 경험한 원주민들이 있기 때문에 세대간의 단절 및 손실이라는 주제가 아주 큰 화두거든요. 그리고 그 모든 주제를 입양하고도 연관 지을수 있어요. 그래서 이 트라우마가 어떻게 세대간에 전달이 되는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요. 제 아이들은 아직 어리지만 다른 많은 입양인들의 자녀들이 목소리를 더 내기 시작했어요. 이제 대부분의 입양인들이 부모가 되었잖아요. 부모가 그 자신의 입양스토리에 관심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들 자신의 상실 즉 정체성문제나 뿌리가 없다고 느끼는 거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들을 말이에요. 그들이 스스로 입양인이 아니라는 사실만 빼고는 우리의 입양스토리와 거의 흡사하죠. 그래서 그런 면에서 제 아이들도 그걸 경험할거라 생각하고 준비를 하려고 그런 질문들을 대비하고 있어요. 

그 글은 프레시안에 실렸는데요 제 아이들이 소개됐어요. 한인입양인 엄마에게서 태어나서 스웨덴에서 태어났고 뉴질랜드에서 자라고 있다고요. 아들아이의 이름은 테디인데요 축구를 좋아해요. 축구가 그 아이의 전 세상이에요. 딸아이의 이름은 포피인데 토끼와 발레를 좋아하고 만들기도 좋아해요. 귀엽네요. 세계여러나라에서 모인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니는데 백인이 한명밖에 없대요. 아주 의외죠. 우리가 사는 동네가 아주 백인 위주 동네거든요. 아이들 반에 동양인이 많아서 너무 좋아요. 

아이들 모두 한국에 두번 다녀왔는데 처음에 갔을때 제 친모를 찾았는데 그건 기억을 못해요. 한살하고 세살이었거든요. 그리고 조금 큰 후에 다시 한번 갔었는데 그때 제 아버지를 찾으려고 했었는데 못 찾았어요. 그래서 저의 이야기에 아주 궁금한게 많아요. 제 파트너가 아이들을 인터뷰했을때 아이들한테 이렇게 저렇게 말해야 한다고 미리 교육시키거나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인터뷰 질문이 아무래도 그런 내용을 담고 있었겟죠.  그러니 아주 진솔한 이야기에요.  제 딸 포피의 편지에요

우리 엄마는 슬프대요. 엄마의 엄마와 함께 할수 없고 엄마의 형제자매들과 아빠에 대해서 알수 없어서요. 한국에서 자라지 못해서 속상하고요. 엄마가 스웨덴에 살때 엄마만 동양인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백인이었대요. 사람들이 엄마가 다른 나라에서 왔다고 엄마에게 못되게 굴었대요. 엄마는 사람들이 한국말을 하면 못알아 들어서 속상하대요. 내 학교의 친구들이 친척들이나 조상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나만 한국에 가족들이 없어요. 한국말을 못해도 괜찮지만 언젠가는 배우고 싶어요. 내 친구들은 모두 자기 조상들의 말을 할수 있거든요. 저만 할머니할아버지의 말을 못해요. 너무 많은 아이들이 가족으로 부터 떨어져 다른 나라로 보내졌대요. 너무 나쁜 일이에요. 우리 엄마한테 거짓말을 하고 엄마의 정보를 조작해서 다른 나라로 보낸 사람들은 벌을 받아야 해요. 엄마가 스웨덴으로 입양되지 않았다면 나는 맛없는 스웨덴 죽을 먹지 않고 대신 맛있는 한국음식을 먹을수 있었을텐데 말이에요. 

포피가 지금 몇살이죠?

10살이에요. 여기서 말하는 맛없는 스웨덴 죽은 실제로는 맛있어요. 쌀로 만든 죽인데 크리스마스에 먹는 음식이에요. 일년에 한번 만드는데 아이가 안 좋아하거든요. 한국 죽도 만드는데 그건 좋아하고요. 이건 테디가 쓴 내용이에요. 

우리 엄마가 슬픈것 같다. 한국에서 입양보내져서.  우리 엄마는 사람들이 엄마를 엄마의 엄마로부터 떼어내서 화났다. 그리고 엄마의 엄마가 엄마의 여동생을 못 만나게 해서 화났다. 왜냐면 상황이 복잡해져서라고 한다. 우리엄마한테 이런 일을 한 사람들은 모두 감옥에 가야한다. 나도 속상하다. 한국 사촌들을 만나고 싶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모두 만나고 싶다. 한국에 가서 만나면 정말 재미있을것 같다.  같이 맛있는 음식 특히 부산에 있는 시장에서 그릴에 구운 생선도 먹으면 좋겠다. 학교 친구들은 내가 중국에서 온줄 안다. 어떤 애들은 나를 보고 칭총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건 인종차별이다. 한국에서 한 학기동안 다니러 온 애가 있었는데 그 애는 영어를 잘 못했다. 나는 그애한테 한국어로 말하고 싶었는데 못했다. 그리고 그애는 서울로 돌아가버렸다. 

나는 손흥민 선수를 좋아한다. 그가 나와 같은 한국인인데 우리 팀인 토튼햄을 위해서 뛰니 너무 좋다. 손흥민 선수를 보면 나도 멋지게 되고 싶다. 나는 한국인이다. 한국인인것이 좋고 한국에 또 가고 싶고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 친구도 만들고 싶다. 한국에 할아버지가 많이 아프다고 들었는데 우리의 존재를 몰라서 못만난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할머니에게 엄마와 친구가 되라고 말하고 싶다. 할머니한테 할머니의 가족들한테 우리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고 싶다.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한국에 가서 같이 지내면 좋겠다. 우리 엄마가 할머니의 가족들하고 친구가 되면 좋겠다. 

아이들 성격이 확연히 다른것이 느껴지죠? 테디는 외향적이고 활동적이에요. 그래서 조용하고 내성적인 우리 셋하고는 많이 달라요. 사람들을 좋아해서 대가족을 원하고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죠. 이 글에서도 보면 모든 사람들을 다 만나고 싶대잔아요. 모두 친구가 되어서 함께 모여  같이 맛있는거 먹자고요. 테디가 한국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중에 하나가 대가족이 있는 친구집에 방문해서 함께 요리해서 먹으면서 떠들고 놀았거든요. 그게 좋았나봐요. 그래서 가족이 생기면 그렇게 될것 같은가봐요. 귀엽기도 하고 안스럽기도 하죠. 다른 사람들은 절대 모를거에요. 

한가지 와 닿는 부분이 테디가 입양인들하고 똑 같네요. 받아들여지고 싶어하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싶어하고 그러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는. 

그래서 왜 복잡한 일인지 왜 할머니 할아버지가 엄마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는지를 이해시키려고 설명해주었는데 아직 아이가 이해하기는 좀 힘든가봐요. 

아직 가족들한테는 공개가 안되었나보네요. 리사씨의 존재가. 

 작가이자 예술가잔아요. 그 부분을 많이 못 다뤘네요. 할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요. 작가로서의 활동에 대해 좀 이야기해줄래요? 어떻게 하면 작품을 볼수 있는지 도요.

지금까지 두권의 그래픽 노블(역자 주 – 만화 소설)을 출간했어요. 하나는 Palimpsest (역자 주 – “오래된 종이 위에 다시 쓰다”이라는 뜻)라는 소설인데 영어로도 번역이 되어서 스웨덴 사람들 말고 다른 사람들도 읽을 수 있어요. 제 뿌리를 찾는 여정을 담은 책이에요. 또한 입양과정중에 있었던 조작이나 입양기관들의 부패등을 알게 되었을때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과정을 그리고 있어요. 두번째 책은 직접적으로 제 이야기는 아니지만 첫번째 책의 2편 같은 느낌인데 칠레입양인을 다루고 있어요. 마리아 디에마르와 그녀의 입양오빠가 칠레에서 각각의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스웨덴으로 왔거든요. 지금 활동가가 되어서 아동입양에 대한 일을 많이 하고 있어요. 아동입양과정중에 일어나는 부정등을 알리는 일부터 칠레의 사기입양등을 고발하는 일 등등요. 아주 대단한 활동가인데 그녀의 이야기에 저도 자극을 많이 받고 또 그녀가 해주는 활동들이 너무 고마워서 그녀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었어요. 활동가들은 아무런 보상도 못 받잖아요. 개인 시간을 내서 싸워야 하고 또 모든 걸 바쳐 전념해야 하고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굉장히 멋지지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제일 주력하는 분야인 입양과정에서의 조작과 부정을 조명하는 일이기도 해요. 이렇게 두 권이 있고 마리아에 대한 책도 곧 영어와 스페인어로 번역이 되기를 바래요. 칠레 사람들도 읽을수 있도록요. 

두번째 책 제목이 뭐라고 했죠?

아직 번역이 안되어서 정해진 영어제목은 없는데 일단 “Excavated Earth(역자 주 – 파헤쳐지는 세상)”이라고 했어요. 글자 그대로 번역한거에요. 

스웨덴어로 쓰여졌나요?

네. 올해 초해 나왔어요. 

스펠링이 어떻게 되나요?

Palimpsest요. 그리스어인데 오래된 문서에 글씨들이 바래지고 나면 그 위에 다시 쓰고 다시 쓰고 하는 과정을 부르는 말인데 우리의 입양과정에서 우리한테 일어났던 일을 묘사하는 말로 딱이라고 생각했어요. 입양 이전의 삶이 있고 입양 후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잔아요. 우리의 기록이 지워지고 다시 쓰여졌고요. 새로운 신원이 부여 됐잖아요. 아름다운 말인데 참 복잡한의미를 담고 있죠. 만화소설이에요. 둘 다요. 인스타그램을 활발히 까지는 아니지만 주로 사용해요. 제 작품이나 근황 혹은 견해등을 보시려면 인스타그램이 제일 빠를거에요. 입양에 대해 새로운 소식등이 나올때 공유하기도 하고 짧은 견해를 올리기도 하고 맘에 안드는 뉴스거리들을 볼때 도 자주 올리고요. 너무 자주 있어서 문제지만요. 

아이디가 Chung.woolrim 인가요? 네, 맞아요.  

오늘 이렇게 나와주어서 고마워요. 우리가 처음에 의도한 대로 이야기가 흘러가진 않았지만 너무 좋았어요. 내밀한 이야기까지 해주어서 너무 고마워요. 많이 와 닿았어요. 앞으로도 계속 연락이 닿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놀랐어요. 이야기나 활동이야기만 해서 지루한것 보다는 나았을것 같아요. 가끔씩 개인적인 이야기를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 팟캐스트 들으면 되겠네요. 너무 많이 공개를  했나 싶기도 하고요. 

후회되면 말씀하세요.  전 너무 좋았어요. 전 엄마는 아니지만 많은 입양인들이 아이들을 키우며 리사씨가 경험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문제들을 겪더라고요. 이야기를 정말 잘 해준것 같아요. 마치 내가 직접 경험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산후 우울증에 대한 부분이냐 분만중에 있었던 트라우마이야기 말이에요. 그런 이야기는 여기서 듣지 않았다면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거에요. 

말하자면 할 이야기는 더 많은데 조금더 관련 연구가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책도 있고 많은 입양인들이 부모가 되면서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는 있어요. 이제는 우리가 모두 그 나이이니까요. 많은 입양인들이 부모가 되면서 그런 일들을 경험할때 “안개를 뚫고 나오다(Coming out of the fog)”라는 표현을 자주 하는데 저도 제가 부모가 되기 전까지는 저의 입양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그 말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많은 입양인들이 다들 그 시기에 목소리를 내거나 활동가가 되거나 하죠. 부모가 되는 일이 정말 큰일이니까요. 다른 생명체를 돌봐야 한다는 인생의 큰 변화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 배우게 되는 시기이니까요. 그래서 상실과 고통이 함께 수반되는데 그렇게 반가운 일들은 아니죠. 내가 어떤 트라우마가 있었는데 그걸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고 또 알아서도 안되었었다는 자각이 수반되니까요. 

제 경우에는 상실과 함께 엄청난 분노가 찾아오고 심하게 실망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온거나 마찬가지죠. 그리고 그걸로 만족해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마침내 나중에 모든 걸 알게 되었다고 해도 얻을수 있는 것은 없죠.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입양되었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받을 수 있는 도움은 없고요. 내 스스로 빈칸을 채워야 했죠.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의료체계에서 입양인에 대한 도움은 없어요. 그러는 동안 우리는 서서히 꺼져가고 있고요. 

                                                                                                         번역 : 전유근 

시즌 6, 에피소드 6: 젠이 뢰멜스버그와 퍼즐 조각

“ ‘그냥 잘 안 맞는 퍼즐이 아니라 다른 퍼즐 박스에 잘 못 들어온 퍼즐 조각’ 같다고 느꼈어요.”

이번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하나도 못 보며 미국 중서부에서 자랐습니다. 다른 많은 입양인들 처럼요. 그는 한국인임에 대해 수십년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남달리 취급되던 스스로를 애써 못 본척 하며 살아오다 마침내 한국을 찾았습니다. 한국을 찾으며, 그리고 글을 쓰며, 심지어는 한국을 사랑하는 법을 그녀의 아들로부터 배우며 그녀는 온전한 자신이 되었습니다. 젠이씨를 만나보시죠.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젠이 레멜스버그이고 아이오와주 마리온에 살고 있어요. 곧 쉰 한살이 되네요.

아이오와주에서 자랐나요?

네, 평생을 아이오와를 떠난적이 없어요(웃음). 누가 전체 주민이 2-3천명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동네에서 자랐다고 하면 제가 코웃음을 치며 “우리 동네는 전체 주민이 700명 뿐이었거든!” 하고 말하곤 해요. 저만 유일하게 백인이 아니었어요. 지금은 그곳에서 50키로 정도 떨어진 Cedar Rapids라는 도시 쪽으로 옮겨 가서 살아요. 

이름 스펠링에 숨져진 뒷 이야기가 있나요? 스펠링이 특이해요. 

제가 입양인의 목소리 글쓰기 그룹(Adoptee Voices Writing Group)에 서 활동하고 있는데 안그래도 바로 얼마전에 이를 주제로 글쓰기를 했었어요. “내 이름에 숨겨진 뜻”(What’s in your name?) 이라는 주제였는데 모임의 여러 입양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부분이 우리 이름이 여러번 바뀌었다는 사실이었어요. 제 이름도 제가 아는 한 지금까지 네 번이 바뀌었거든요. 그중에 두번은 제가 원해서 였고요. 진짜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제 입양 서류와 여권에 있던 이름은 윤선영이고 미국에 와서 제가 받은 이름은 제니 엘리자베스 맥칼럼( Jenny Elizabeth McCallum)이에요. 그리고 그 이름으로 쭉 살았죠. 제니퍼의 준말인 제니가 아니고 그냥 제니라는 것을 강조하며 자랐는데 엄마쪽의 증조할머니와 아버지쪽의 증조할머니 두분이 모두 제니셨대요. 피도 안 통했는데 제가 양쪽 할머니의 이름을 물려받았다는 것이 좀 이상하긴 하죠. 한번도 만난적도 없는데 제가 이 분들을 따라 이름 지어졌다는 것이요. 

아무튼 역사가 좀 긴데 그래서 한동안 제니 엘리자베스 맥칼럼으로 행복하게 살아오다가 제 입양가족들하고 관계가 삐꺽대기 시작하면서 그 이름을 따라 살아가기 싫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제 남편을 만났을때 만약에 결혼하게 되면 이 이름을 따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제니 엘리자베스 뢰멜스버그가 되었죠. 이 지역에서도 그 이름으로 두루두루 알려졌어요. 그냥 제니라고 하지 않고 항상 “제니 뢰멜스버그” 이렇게 붙여서요.  그리고 그때 제가 미용실을 시작하고 이름을 스튜디오 젠이라고 지었어요. 그때 스펠링을 Zhen라고 붙였는데 그때 제가 쓰던 제품이름이기도 했고 한국제품이라고 들었거든요. 젠(역자-한문”진”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이 한국어로 아름다움이라는 뜻이라면서요. 그래서 제 샵이름을 그렇게 붙였는데 그 뒤에 그 지역에 심한 홍수가 나서 그 지역이 모두 다 침수가 되었어요. 제 샵도 완전 망가졌는데 그래서 샵 이름을 못 쓰게 된 것이 너무 속상하더라고요. 그때 제 이름 철자를  그렇게 바꿔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정식으로 이름을 바꿨고 그러고 나니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꼭 한글 같기도 하고 한국의 “ㅈ”이 마치 알파벳 Z랑 비슷하기도 하잔아요. 마치 제가 제 스스로 제 이름을 지은 것 같고 원래 이름인 제니와 발음은 거의 같으면서도 마치 한국 이름 같리기도 하고요. 제가 제 이름을 스스로 지은 것 같아 뭔가 더 의기양양해지는것 같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 젠이(Zhen E)가 되었지요. 

그랬군요. 몰랐어요. 그런데 듣고 보니 완전 말이 되네요. 제 이름(카오미) 도 입양부모님이 지어주셨는데 일본에서 입양되어온 제 아버지의 사촌을 따라서 지었대요. 그러니까 제 이름이 일본식인거죠. 저는 그분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데 가족안에 유일한 동양인들이라는 이유로 이름을 따라서 지은거죠. (웃음)

말도 안돼죠. 

그러니까요. 일본 이름이니까요. 

일본이랑 한국이랑 다른 나라인지도 모르고.

그러니까요. 그리고 그 뒤로 이 이름이 제 정체성이 되어버렸잔아요. 

사람들이 일본인이냐고 물어보나요?

네 항상요.

저는 가끔씩 중국인이냐고 물어봐질때가 있어요. Xhen이 중국식 성이니까 사람들이 Zhen을 보면 중국식일거라고 생각되나봐요. 사람들이 중국사람 아닌거 맞냐고 물어봐요. 그럼 “백퍼” 아니라고 하죠. (웃음)

뢰멜스버그(Rammelsberg)는 독일식 이름이잖아요, 맞나요?

네, 완전 독일 이름이에요. Ramel은 천둥이라는 뜻이고 Berg는 산이에요. 그러니 천둥치는 산(Thunder Mountain)이라는 뜻이에요. 마치 디즈니랜드 놀이기구이름 같죠? (웃음)

예전에 큰 상점에서 일하는 것들이 아직 위험하지 않을때에 한 유명 상점에서 일한 적이 있었어요. 명찰을 착용하고 일했었는데 그때는 이름 스펠링을 바꾸기 전이었어요. 한 여자분이 제 이름을 읽더니 “뢰멜스버그는 독일식 이름이잖아요?” 라고 하더라고요. 마치 제가 이름을 위조하기라도 했다는 뉘앙스로요. 그래서 제가 제 결혼전 이름은 맥칼럼이었다고 했더니 놀라며 “그건 아일랜드 식 이름이잖아요!” 그러더군요. 그래서 제가 “더 정확히 하면 스코틀랜드랑 아일랜드 식이죠” 라고 덧붙인 다음에야 입양되었다고 설명했죠.  그랬더니 갑자기 엄청 미안해하는 얼굴을 하대요. 물론 저도 바로 대답을 안하고 그 여자가 스스로 멍청하다고 느끼게끔 시간을 끌기도 했고요. 아무렇게나 지껄이지 말라고요(웃음) 아무튼 제니 엘리자베스 맥칼럼이나 제니 엘리자베스 뢰멜스버그나 사람들이 이름만 보면 이 한국인의 얼굴을 상상하기 힘든건 사실이죠(웃음)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가요?

이미 말했듯이 여러모로 굉장히 자신있어진것 같아요. 특히 저의 “한국인임”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도움이 됐어요. 제가 두살때 버려져 이곳으로 오게 됐는데 그때는 한국말을 할수 있었을 거에요. 그런데 지금은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너무 속상해요. 한국어가 제가 처음으로 배운 말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힘든 것을 보며 뭐랄까 제 문화유산를 빼앗긴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특히 제 입양가족이 세대간의 유대가 굉장히 끈끈한 편이었거든요. 제 입양어머니가 요리를 굉장히 잘하시는 분이었는데 가족 대대로 딸에서 딸로 구두로만 전해져 오는 레시피도 있고 그래요. 계절이 바뀔때면 같이 모여서 저장음식도 만들고요. 매년 양배추로 사우어크랏 (역자 주 – 독일식 양배추 절임)을 만드느라 엄청난 양의 양배추를 썰고 요리해서 저장하는 것을 보며 자랐어요. 한국에도 그런 문화가 있을텐데 저는 모르잖아요. 함께 모여서 김치를 만들고 하는 그런 것들이요. 저도 요리를 꽤 잘하는 편이라 독일쪽이랑 영국쪽 음식들은 꽤 잘 만들어요. 제가 자라면서 먹은 것들이요. 자다가도 번쩍 일어나서 그레이비(역자 주 – 고기 육수를 걸쭉하게 졸인 소스)를 만들라면 만들수 있거든요. 그런데 한국 음식은 만들려면 하나하나 신경써서 해야하죠.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어요. 

한때 제가 한국인임을 지우고 살고 싶었던 적이 있었어요. 사람들은 계속 제가 아시안음을 일깨워주는데 저는 그냥 미국인으로 보이고 싶었거든요. 항상 백인들에 둘러쌓여 있었고 저도 그들과 같다고 느꼈으니까요. 제가 백인이 아닌건 알았지만 달라보이고 싶지 않았죠. 그래서 저의 이런 아시안임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꽤 걸렸는데 막상 그 여정을 시작하고 또 이름을 바꾸고 나니 뭐랄까 나를 찾는 여정을 이젠 본격적으로 시작한것 같았어요. 미국인인것 또한 나 자신이지만 한국인임도 나니까요. 

우리가 2016년에 처음 만났죠? 젠이씨는 굉장히 재미있는 분이더라고요. 지난번에 한국에 갔을때는 다쳤다면서요? 한국인임을 되찾는 과정이 험난해보여요.  맞나요?

네. 제가 입양인 작가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는데요 꼭 한국인 입양인만 있는 것은 아니고 모든 입양인들이 다 참여 가능한 그룹이에요. 대부분 미국내입양이요. 한국인 입양인도 있고요. 거기서 시간을 정해 놓고 글을 쓴 다음에 앞에 나와서 발표하는 시간을 갖는 데 그때  “그냥 안 들어 맞는 퍼즐이 아니라 다른 퍼즐 박스에 잘 못 들어온 퍼즐 조각(“feeling like not just a puzzle piece that doesn’t quite fit, but a puzzle piece that actually is in the wrong puzzle completely”) 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모양이 비슷해 보이지만 아무리 끼우려고 노력해도 절대로 딱 들어맞을 수 없는 퍼즐 조각이요. 제가 그런것 같아요.

그때 우리가 만났을때가 저의 첫 한국 방문이었어요. 아들 아이도 같이 갔었는데 그때 제가 좀 많이 힘든 상태였어요. 그리고 한국에 갈때마다 무슨 일이 생기고 특히 지난번에는 제가 다치기까지 했어요. 그래서 제가 애증의 관계라고 표현을 해요. 한국에 가는 것이 좋긴 좋으니까요. 미국 중서부 아이오와에서 나고 자란 제 남편도 한국을 너무 좋아해요. 원래 낯선곳에 가고 새로운 것을 하기를 별로 안좋아하는 사람인데도요. 한국 문화가 너무 좋고 한국 사람들이 서로 챙겨주는 것이 너무 좋대요. 그런데 저는 왠지 동떨어진 느낌이 들때가 많아요. 제가 한국어는 못하지만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는 감으로 알아듣거든요. 그래서 한국 사람 같은데 왜 한국어를 못하는지 궁금해 하거나 하는 것은 바로 알아채거든요. “미쿡사람입니다~” 라고 이야기 해요. 입양됐다고 밝히지는 않아요 그럼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까요. 아무튼 언어장벽도 그렇고요. 한국인이지만 완전한 한국인이 아니라서 달리 취급받는 그런 것이 있어요. 관광투어를 갔는데 제가 미국인인것을 알고 처음부터 아예 한국인 대접을 안하더라고요. 그럼 조금 힘들죠. 백퍼! 한국인이 아니라고 취급받는 그런 항상 그런 느낌이요. 그러면 굉장히 불편하고 어색하죠. 한국인인데 한국말을 왜 못해 하며  왠지 무언의 질책을 당하는 것 같고요. 

한국에 네번 갔었잔아요. 갈때마다 매번 느끼는 것이 달라지나요? 그때그때 다른 것들을 깨닫나요?

그럼요. 제일 처음 갔을때는 제 남편이 그렇게 장기간 비행을 하고 멀리 가본 적이 처음이었어요. 비행기 여행 자체를 그렇게 많이 해본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저도 제가 준비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준비가 안되어 있었고요. 그런데 제 남편이 한국말을 하나도 못하는데도 지하철등 타고 다니는 것을 너무 잘  파악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부분은 걱정할 것이 없었죠. 길 잃어버릴 걱정을 한번도 안했어요. 남편이 마치 전생에 와보기라도 한 양 잘 찾아다녔어요. 주소 시스템이 달라서 먼저 동네를 찾은 다음 그런 식으로 찾아다녀야 하잔아요. 그런데 남편에 너무 잘 찾아다녔어요. 

어떤 계기로 그때 2016년에 한국에 간건 가요?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에요. 그 전에는 한국에 가봐야 겠다는 생각도, 친가족을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도 없었거든요. 아들아이가 대학에 지원을 할때 제가 한번 물어봤어요. 입학 원서에 인적 사항을 기입할 때 백인이라고 하는지 아시안이라고 하는지요. 그랬더니 아시안이라고 체크한다고 하더라고요. “당연한거 아냐?” 이런 반응이었죠. 그래서 그때 아들아이가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아들아이가 그러더라구요. “우리 엄마가 되게 멋진데 한국사람이잖아”라고요. 저를 아시안 롤모델로 생각하고 있었나봐요. 제가 바람직한 모델이던 아니건 간에요. 제가 아이한테는 하나의 롤 모델이었고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었던 거죠. 그때 알았어요. 아이가 아시안임에 대해서 스스로 좋게 생각한다는 것을요. 

그래서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 난 아시안인것이 그닥 달갑지 않았나 하고 깊게 생각해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마침내 한국에 가보기로 하고 비행기표도 사고 페이스북에도 한국에 간다고 올렸죠.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트윈스터(Twinsters)라는 다큐멘터리가 넷플릭스에 있다고 보라고 추천을 했어요. 그래서 봤는데 거기서 IKAA(International Korean adoptee Associations 국제한국인입양인모임) 에 대해서 들었어요. 검색을 해봤더니 삼년에 한번씩 열린다고 하는데 마침 그해 여름에 열리는 거에요. 그때가 대낮 이었는데 일하는 남편한테 바로 전화를 해서 흥분한채로 이야기했죠. “입양인들을 위한 컨퍼런스가 열리는데  세상에 우리 원래 계획보다 3주 정도 늦게 열린대” 라고요. 그랬더니 남편이 원래 여정을 취소하고 IKAA가 열리는 기간으로 다시 예약하자고 해주더라고요. 그래서 비용도 더 들었지만 원래 일정을 취소하고 IKAA에 참가하러 갔어요. 그것이 일단은 일차 이유였죠. 그런데 그때는 다른 입양인들하고도 어울려야 했는데 그러진 못했어요. 제 입양에 대해 깊게 들여다보지 않았던 때였거든요. 다른 입양인들하고 어울려 본적도 없었고요. 

그럼 그때가 막 첫 걸음을 떼었던 때였군요. 

제 또래 입양인들하고 어울려 본적이 없었어요. 제가 알던 입양인은 모두 제가 알바로 돌봐주던 어린아이들뿐이었거든요. 입양인들과 어울려보지 않았었어요. 

IKAA 에 대해서 부연설명을 좀 하자면 전세계의 입양인들이 모이는 행사에요. 삼년에 한번씩 서울에서 열리고 여러 입양인 단체들이 모두 모이기도 하고요. 

그 뒤로 코비드로 인해 잠정 중단됐었죠. 이번에 2023년에 열릴 IKAA에 제가 준비위원으로 활동중이에요. 그러니 아주 먼길을 온 셈이죠.(웃음)

진짜 먼 길을 왔네요. 처음에 봤을때는 꽤 힘들어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혹시 감정이 정리가 안 됐었나요? 그렇게 많은 입양인들을 한꺼번에 본 것이 처음이라서?

그러기도 했고 너무 큰 기대를 하기도 해서 좀 실망하기도 했고요. 제 출신 나라에 처음으로 돌아간 것이었잖아요. 그 자체만으로도 감정적으로 너무 벅차죠. 그런데 저처럼 처음 한국을 찾은 입양인들에 대한 별도의 지원들이 없었어요. 그 부분이 굉장히 크거든요. 그래서 한국에 처음으로 간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감정을 잘 살펴보라고 이야기 하곤 해요.  감정적으로 과부하가 걸릴수도 있으니까요. 우리가 떠나온 나라를 처음으로 다시 방문하는 일이 결코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그 자체로도 힘들었는데 같은 입양인들을 만나면 친해져서 바로 터놓고 이야기 할수 있는 상황이 될것이라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한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죠. 그게 힘들었어요. 왜냐면 제가 보통 사람을 되게 쉽게 사귀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이 입양인이라는 사람들은 뭐랄까 한명 한명이 책 한권 분량의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죠.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고 살아온 환경도 다 달랐으니까요. 입양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가 비슷한 사람들인것은 아니니까요. 

만나면 자동적으로 동질감을 느끼고 뭔가 통할거라고 생각했군요

그런데 제가 원하던 수준의 동질감을 느끼기엔 너무 시간도 짧고 역부족이었죠. 제가 입양인이라서인지는 몰라도 항상 주변에 사람들을 만들어두려고 하잔아요. 그래서 그렇게 노력했는데 잘 안 되다가 끝날때 쯤 쿠킹클래스에서 카오미 당신을 만나고 또 그룹 모임에서 저랑 같은 나이대 사람들을 만나니 그때쯤 드디어 뭔가 사람들과 통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 전까지는 제 아들 또래의 입양인들하고 활동을 같이 하게 되었는데 그건 제가 원하던 바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때 저를 시카고 입양인 모임으로 초대해준 크리스 디트리치(Chris Detrych)도 만났어요. 아주 더운 날이었는데 고궁투어를 갔었거든요. 명찰에 이름과 사는 나라가 적혀있어서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모두가 중서부(midwest)에서 온 것을 알게 되었죠. 우리는 아이오와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 친구도 아이오와에서 산적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호구조사를 하다보니 저희가 살고 있는 도시에 그 친구가 산 적도 있더라구요. 

그래서 대화를 나누다가 제가 아이오와에서도 입양인 모임을 시작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가 시카고의 입양인 모임으로 초대를 해주었어요. 대도시인 시카고하고 아이오와는 환경이 많이 달랐지만요. 아이오와에서는 다들 멀리 떨어져 살고 어떤 친구는 아이오와 내에서도 네 시간을 운전해야 서로를 만날수 있어요. 그래서 아이오와에서는 온라인 모임이 아주 유용했어요. 팬대믹 기간동안이 오히려 더 도움이 된것 같아요. 아무튼 마침 아들아이가 시카고에서 한시간 떨어진 밀워키에 있기도 했었고 그래서 시카고로 입양인 모임을 자주 나가서 모임에 대해서 배우고 입양인들하고 어울릴수 있었죠.  그러다 보니 한국에 방문할때마다 도움도 받게 되었죠. 최근에 갔을때만 빼고는 제가 한국에 갈때마다 크리스 그 친구가 항상 한국에 있기도 했고요. 그래서 우리가 한국 갈때마다 너도 꼭 있어야 해 하고 농담도 하고 그랬는데 지난 마지막 방문때 제가 하필 발목을 다쳤는데 그 때는 그 친구가 없었어요. 그래서 니탓이라고 농담도 했고요. IKAA 말고 그냥 방문했을때도 신기하게 그 친구가 한국에 있었던 적도 있었죠. 

2019년 IKAA에도 갔었는데 그때 마침 같은 한국인 입양인이던 제 며느리에게 아들아이가 프로포즈를 했어요. 오빠랑 둘이 모두 한인 입양인이거든요. 그래서 IKAA 에 같이 가자고 설득해서 그 애 가족도 같이 갔는데 그애에겐 그때가 입양과 관련된 모임에 처음으로 갔던 것이었어요. 그때 양가 가족이 다 있었는데 아들아이가 프로포즈를 하고 그 뒤로 팬데믹 중에 결혼해서 지금 아이도 있어요. 그래서 이번 여름에 다 같이 IKAA에 다시 같이 갈 예정이에요. 

한국에 처음 가거나 이런 대규모의 입양인 모임에 간다고 해도 바로 상처가 치유되고 도움을 받을수 있는건 아니잖아요. 그러니 아주 힘든 상황이 생길수도 있고 그래서 며느리가 처음 모임에 갔을때 젠이씨가 옆에서 설명해주고 같이 있어준것이 굉장히 도움이 되었겠네요. 

모든 프로그램에 다 참가를 해야 되는 건 아니다 라는걸 알려줬죠. 그게 제가 했던 실수거든요. 많은 감정이 올라올 수 있으니 네 마음을 자주 들여다보고 괜찮으니 힘들면 낮잠을 자거나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해줬죠.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잖아요. 그러기 보단 너를 먼저 살피라고요. 내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나와 비슷한 상태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힘들잖아요. 그런 조언들이 도움이 많이 된것 같더라고요. 같이 한복도 맞췄어요. 특별한 경험이었죠. 

며느라가 같은 입양인이라는 것이 어떤 느낌인가요

불편하게 생각할수도 있으니 입양인 모임을 가라고 권하거나 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저한테도 시간이 꽤 걸렸고 40대가 넘어서야 다른 입양인들을 찾기 시작했으니까요. 제가 어릴때는 그런 조언들을 들을수도 없었고 또 지역이 너무 떨어져있다보니 다른 입양인들을 마주칠일도 없었어요. 하지만 만나고 싶어했었던 기억은 나요. 다른 입양인 혹은 꼭 입양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한국인이라도 주변에 좀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고는 했었어요. 그러다가 저희 지역에 다른 가족이 한국에서 입양을 했는데 그애들은 저보다 너무 어렸어요. 제가 베이비시터를 할 정도였어서 그들은 별 도움이 안 됐었죠. 저의 존재가 그 아이들에게 도움이 됐을수는 있겠네요. 후에 알게된 사실인데 제 입양부모님이 저를 입양하는 것을 보고 그 가족들도 입양을 결심했대요. 저희 가족이 화목해보였나봐요. (웃음) 

입양에 대해서 깊게 들여다보고 있는 지금은 SNS나 제 글에 입양에 대해서 많이 쓰거든요. 제 글에 동의할수 없는 사람들도 많은걸 알아요. 아직도 많은 입양인들이 입양신화의 그늘안에서 입양은 너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잖아요. 그래서 한국정부에 입양인의 정보를 공개하라는 요구를 하는데 동참했어요. 입양이  불법적으로 진행된 증거가 점점 드러나고 있으니까요.

저도요. 

한 300명이 넘게 신청을 했잖아요. 

앞으로도 더 늘어날 예정이고요. 

맞아요. 최근에 더 많은 열람기회를 오픈했다고 하니 좋은 일이지요. 점점 더 늘어나고 있어요. 그러니 사람들도 더 많이 신청하겠지요. 잘 된 일이고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에 처음 갔을때 도착 전에 이미 필요한 서류작업을 마치고 저를 입양보낸 기관인 홀트를 방문했거든요. 처음에는 한국으로 연락하라고 하다가 그 다음에는 오레곤에 있는 기관으로 연락하라고 하다가 다시 한국으로 연락하라고 하다가 결국 제 기록을 찾았다고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라고 하대요. 그런데 그 정보가 제 부모님이 알고 있던 것과 달랐어요. 제 입양어머니가 제 기록을 아주 잘 보관해두셨었거든요. 그래서 무슨 말인지는 비록 몰랐어도 제 파일을 제가 보관하고 있다가 그 파일을 한국까지 가지고 갔었어요. 홀트에 연락을 해서 약속 잡고 입양 후 서비스를 신청했어요. 그 사람들이 엄청 두꺼운 파일을 들고 나왔는데 저한테는 첫 세장 정도만 보여주는거에요 . 더 있는데 왜 안보여주냐고 물어보니까 안된다고 보여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제 임시 보호자가 누구였는지 그런 것들을 안보여 주더라고요. 다른 아이들의 정보가 들어 있을수도 있다면서요.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출구가 없는 게임을 하는 것 같았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 인지 알수도 없었고요. 너무 막막하고 힘든 상황이었죠. 

 325 Camera에 DNA 등록도 했어요. 게스트하우스인 뿌리의 집에도 등록해 두고 경찰서 몇군데에 남겨 두기도 했어요. 그런데 화나는 것은 확실한 답이 없고 사람들도 답하기를 회피하는 거에요. 그러니 저에 대한 정보라고 제가 들은 것들이 진짜인지도 확인할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제가 발견 됐을때 남겨진 노트가 있었대요. 거기에 제 생년월일과 한국 이름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에 의하면 제가 알고 있는 저의 생일과 제 이름이 진짜에요. 그렇다면 제 두살 생일 이틀 후에 제가 발견됐다는 거거든요. 한겨울에요. 그리고 제가 안양시에서 발견됐대요. 그래서 그곳 시청에 찾아가 혹시 제가 출생등록이 되었었는지를 물었어요. 그랬는데 아니래요. 그러니 내가 한번도 정식으로 등록된 적이 없었구나 한국의 시스템상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구나 하며 방심하고 있다가 한번 훅 얻어맞는 느낌이었죠. 그리고 갑자기 저희보고 이 트럭에 타라고 하더라고요. 왜 타라고 하는지는 모르고 그냥 탔는데 갑자기 여기저기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데리고 다니더니 갑자기 내려서 사진을 찍으래요. 그래서 영문도 모르고 아무 생각없이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말하길 이 곳이 제가 발견된 곳 근처라서 그렇대요. 미리 말해줬으면 좀 자세히 보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졌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대충 지나가게 만든 다음에 말해주고요. 그리고 그게 확실한지 아닌지도 모르고요. 아무튼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더 헷갈리고 계획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죠. 그래서 그 뒤에 통역사를 고용해서 다시 가봤는데 통역사도 그닥 열심히 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요. 그래서 지금은 출신 찾기를 무한 보류한 상태에요. 그냥 막다른 골목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엄청 당황스럽고 화가 낫겠네요. 영문도 모르고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그 장소가 그렇게 의미있는 곳인줄 알았을때요. 

아무 설명도 없이 그냥 사진 찍으라고. 저희는 갑자기 왠 사진? 이런 반응이었고요. 저한테 그랬잖아요. 유머감각 있고 재밌는 사람이라고요. 이 모든 상황이 좀 웃겼는데 저희가 처음 제 서류를 들고 안양에 있는 경찰서를 찾아갔을때요 거기 젊은 경찰관들이 신이 나서 제 서류를 하나하나 읽어보다가 저희를 조사관 같은 사람한테 데리고 갔어요. 그러느라 저희한테 경찰차 뒷자리에 타라는 거에요. (웃음) 그래서 우리 셋이 경찰차 뒷자리에 타고 있는 사진을 찍어서 페이스 북에 올렸어요. “말도 안통하는 외국에서 제일 피해야 할일은 경찰차에 타는 것이지” 라고 써서요.  경찰들이 아주 친절하게 도와줬는데 개인정보보호법때문에 다른 건 말해줄수 없지만 저를 발견한 사람을 찾은 것 같다고 그런데 자꾸 죽었다라고(dead) 하는거에요. 그래서 누가 죽었냐고 했더니 제가 발견 된 장소에 살았던 그 노부부가 돌아가셨대요. 그 자식들은 살아있어서 혹시라도 저를 발견한 날에 대해서 기억을 할까 싶어서 연락을 해봤는데 그 분들이 관여하길 꺼려하신다고 해서 그 뒤로 접었어요. 그 기록도 사실인지 아닌지 알수도 없고요. 

홀트에서 정보를 더 가지고 있는데 젠이씨한테 알려주지 않는다고 믿나요?

네. 지금 이 이야기도 간추려서 말씀드린 거예요.  그것이 우리가 한국정부와 한국사회복지 서비스 그리고 홀트에 공개를 요구하는 거에요. 입양인들마다 각각 다른 두 종류의 서류가 존재하는걸 입양인들이 알았죠. 그리고 입양인인 우리가 들은 우리가 어떻게 발견됐는지 어떡하다가 입양까지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죠.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제 서류는 조작된것이고 홀트가 진짜 서류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해요. 

인권에 관한 사항이라고 생각하나요?

네. 서류 조작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기 전에도 입양이 마치 인신매매와도 같다고 말해왔어요. 돈을 지불하면 인신매매인거잖아요. 입양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그리고 인권침해이기도 하죠. 우리가 위조된 서류를 통해 보내졌고 또 물건 처럼 거래됐다는 증거가 있죠. 홀트가 해외 입양 할당량을 못채웠다고 써있는 문서를 찾았잔아요. 우리를 어떻게 홀트에서 관리하게 되었는지 그 부분이 인권침해일수도 있죠. 우리가 혹시라도 납치 됐을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생각만 해도 메스껍죠. 제가 발견됐을 당시에 저는 두살이었고 이미 말도 할줄 알았고 대소변도 가릴줄 알았대요. 제가 길을 잃어버린건지 아니면 누군가 나를 그냥 낚아챈것인지 누가 알겠어요. 

그래요. 발견됐을때 두살이었다고 하니 도데체 어떤 상황이었는지 너무 많은 의문이 생기죠. 납치 당한건지 아니면 길을 잃어버린건지 말이에요. 

카오미씨도 기억하죠? 입양인 모임에 갔을때 이런 세션이 있었어요. “친가족 찾기에 실패한” 주제로 그룹모임이 열렸는데 그때 질문중의 하나가 “가장 두려운 것은?” 이었어요. 그때는 이런 문서조작이나 위법의 가능성도 아직 수면위로 드러나지 않았을때였거든요. 그때 생각이 들기를 만약에 제 부모님이 저를 키울 형편이 안되어서, 예를 들면 제 동생이 생겼다거나 해서 저는 입양 보내고 다른 형제자매들은 계속 키웠다면이었어요(흐느낌).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것같아요. 왜 나를 보낸 것인지 왜 나를 계속 키우기로 결정 안한것인지 왜 나였는지 하는 회의말이에요. 그 후에 이런 저런 문서조작의 가능성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물론 혹시라고 내가 강제로 납치를 당했거나 불법적으로 거래되거나 했다면 그것또한 정말 끔찍한 일이겠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울 사실은 저만 입양보내고 다른 자식들은 키웠다는 가정이에요. 그래서 내심 진실을 알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어요. 

이 친가족을 찾는 과정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너무 부담이 크죠. 굉장히 심난하고 해도해도 끝이 없는 텅빈 구멍을 채우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나 자신의 출신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한 다는 사실이요. 막막하고 부질없는 노력 같기도 하고 사람들이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 것도요. 그 사람들이 정부관료일수도 있고 입양기관쪽 사람일수도 있고요. 일을 진행하기가 진짜 너무 힘들죠. 

주변사람들한테도 이제 가족찾는것은 그만 하겠다고 말했어요. 여기 저기 정보를 남겨 두었고 뉴스에도 나왔었으니까요. 방송출연을 한것은 아니지만 저에 대한 기사가 나왔었거든요. 제 남편 회사가 서울 강남에도 사무실이 있는데 동료들이 제가 나온 기사를 보고 남편한테 연락해온적도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제 입양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쓴 연극에 대해 KBS와 인터뷰를 한적도 있고요. 그때 제 가족 찾기에 대해서도 인터뷰를 했으니까요. 그래서 할수 있는 일은 이제 다 한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적극적으로 찾는 일은 중단한 상태에요. 제  DNA와 일치하는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모르겠지만 그건 활률이 적고요. 지금 아무도 저를 찾고 있는 것 같지 않아보이는데 그래서 차라리 잘 된건지도 모르겠어요. 

다른 입양인들이 노력도 별로 하지 않았는데 가족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축하를 해주고 싶지만 솔직히 좀 속상하죠.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지만요. 사람들은 다 각각 사연이 다르니까요. 그렇지만 그렇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과는 별개로 속상한것은 사실이고 어쩔수 없이 받아들이는 거죠. 되면 좋고 안되어도 어쩔수 없다는 마음으로요. 그 사람들한테도 “쉬운”일은 아닐거라고 생각해요. 새 가족을 찾았다고 해서 갑자기 삶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어떨때는 일이 더 꼬이고 복잡해지기도 하잖아요. 아무튼 친가족도 함께 찾고 있으면 서로 찾는 것이 훨씬 쉬워지죠. 물론 쉬운게 진짜 쉽다는 말은 아니지만요. 그런데 지금 현재로서는 아무도 저를 찾고 있는것 같아 보이지 않고 그래서 막다른 골목에 와 있는 것 같아요. 정부에서는 개인정보 보호때문이라고 자꾸 핑계를 대잖아요. 그래서 일단 적극적으로 찾는 것은 멈췄지만 제 정보를 여기저기 남겨두었으니 누구라도 맞는 사람이 나타나길 바라는 것이 지금 제 유일한 희망이에요. 

몇 회전에 덴마크 한인입양인권리찾기모임의 피터 묄러가 나왔었잔아요. 그들의 활동으로부터 바라는 것이 있을까요?

그분들의 활동이 성공해서 우리가 우리의 정보를 열람할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우리가 입양에 까지 이르게 되었는지요. 그리고 필요하다면 관련자 처벌까지도요. 이미 많은 수의 인권침해사례가 드러나고 있잔아요. 그리고 성범죄자인것을 알고도 아이들을 입양보낸 사실도 드러나고 있죠. 너무 끔찍하죠. 제 입양부모님한테도 친아들이 있었는데 그 오빠가 저를 성추행했어요. 그 사실이 알려지자 저희둘만 집에 남아있지 못하게 되었었는데 그 뒤로 한동안 잊고 살았어요. 입양되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죠. 그 뒤로 삶이 순탄하게 뻗어나가는것 같았거든요. 그러다가 그 사실이 다시 떠올라 괴로워서 가족들한테 그 이야기를 꺼냈고 그래서 지금 입양부모하고 연을 끈고 살게 되었어요. 그러니 입양을 보낼때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확실히 따져보고 입양을 보냈어야죠. 그러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너무 화나는 일이에요. 그러니 관련자들이 꼭 책임을 졌으면 좋겠어요. 

혹시 저에 대해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아동성학대 피해자에요. 문제는 이 가족들이 아동을 성적으로 추행하고 학대한것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가족들이 어떻게 대응했냐죠. 아니면 아예 대응 자체를 안했거나요. 

저도 그부분에 있어서 고통을 겪었어요. 나중에 성인이 된 후에요. 그래서 지금 입양가족하고 절연하게 된 계기가 됐는데 성추행은 둘째 치고라도 저를 심리적으로 조종(Grooming)하려고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더 힘들었어요. 그리고 그게 더 충격이었고요. 

그루밍이라니 어떤 상황이었죠?

그럴수 밖에 없었다. 혹은 네가 먼저 원해서 한거였다 이런 식으로요. 

입양오빠가요?

네, 계속 저를  그루밍 했고 그 사실이 드러난 뒤에는 그냥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묻혀버렸어요. 아무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이상했던 것이 우리 가족이 평소에 이런 저런 사안에 대해서 대화를 많이 나누는 편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이야기는 바로 묻혀버렸어요. 그러다가 제가 나중에 그 일을 꺼냈어요. 그때 왜 그 일을 해결해주지 않았냐고, 오빠한테 뭐라고 하기나 한거냐고요. 그부분이 제일 힘들었어요. 아무도 그 일을 문제삼지 않는 것이요. 

그리고 그 뒤로 분노조절문제까지 생기게 한 문제가 있었는데 제가 미혼모인 상태로 지금 제 아들을 임신을 했어요. 그때 제 양아버지가 원래도 그리 다정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때 저를 너무 심하게 대했어요. 도움이 필요한 저를 보듬어주기는 커녕 저를 더 불안하고 불편하게 만들었죠. 감정적 학대 수준으로요. 그때 진짜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때 마침  오빠도 이혼을 하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그 오빠는 아들아이와 같이 집에 들어와서 살게 해줬어요. 저는 거의 쫓겨나다 시피 하며 집을 나와야 했고요. 제가 미혼모가 되어서 우리 가족의 치부를 온천하에 드러나게 된것 마냥 말이에요. 안팎으로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으로 보이고 싶었는데 말이죠. 오빠가 저한테 한 짓이 제가 저지른 잘못보다 더 심한 잘못인데 오빠의 죄는 은폐되고 어려울때 집에 다시 받아들여졌잔아요. 한편으로는 오빠는 친 자식이라 그랬나 싶기도 해요. 항상 오빠 편을 들었었거든요.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작용을 한것 같아요. 

그래서 제 아이의 이름을 지을때도 아이를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해주자 싶었어요. 아이의 아빠 이름이 제이슨이고 저는 제니였던지라 아이 이름도 같은 “J”가 들어간 이름을 해주고 싶어서 조든이라고 이름을 짓고 제 성인 맥칼럼을 붙여 주었는데 미들 네임으로 아버지의 미들네임인 유진Eugene을 붙여주었어요. 아버지가 그 아이에게 잘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요.  그 계획이 잘 먹혀들어가서 제 아이가 아버지가 예뻐하는 손자가 되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실때도 그 말씀을 하실 정도로요. 아이를 보호하려던 제 작전이 성공한것이었죠. 좀 서글픈 작전이긴 했지만요. 

정작 젠이씨는 필요할때 보호받지 못했었잔아요. 

그냥 알았어요. 이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요. 나는 보호받지 못하고 학대당했어도 말이에요. 그래서 아버지가 아이한테는 함부로 하지 못했어요. 그 어린 나이에도 저는 알았던 거예요. 이름이 뭐라고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을요. 아이는 본인의 미들네임을 별로라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엄청 중요한 안전장치였던 셈이에요. (흐느낌)

이런 일들이 자존감에 영향을 미쳤나요?

가끔씩은요. 의구심이라는 씨앗은 그 뿌리를 정말 빨리 내리니까요. 하지만 저는 대체로 이상하게 자신감이 넘치는 편이었어요. 

머리스타일도 안경도 독특하고 개성이 넘치는 편이잖아요. 네, 완전 자신감 넘쳐 보여요. 

네. 대체로 자신있는 편이에요. 내 능력을 알고 승부욕도 좀 있고요. 일을 한번 시작하면 제대로 해내는 편이고 잘 안된다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편이에요.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크게 성공하는 것을 보면 저도 조금 낙담하기도 하고 그러죠. 그래도 조금 의기소침해하다가 다시 시작하고요. 제가 글을 좀 잘 쓰는 편인데 글 쓰면서 많은 일들을 이겨내기도 했어요. 최근에 제 친구가 운영하는 극장에 제가 쓴 연극대본을 제출했는데 보기좋게 거절당했거든요. 말했듯이 의구심라는 씨앗은 너무 잘 자라잔아요. 그래서 아 나는 역시 안되나봐 그냥 때려 쳐야지 하고 생각했죠. 의욕도 없어지고 자신도 없어지고 하니 제가 속해 있는 입양인글쓰기 모임에서도 잘 못 쓸정도로요. 평소라면 잘은 못 써도 쉽게 써내려갔었거든요. 그러다가 최근에 두 가지 일이 일어났어요. 한국에서 발목을 다친 이후로 뭐랄까 몸이 회복해야 되는 상황이 이르니 동력이 떨어졌나봐요. 그래서 지금 조금 그런 상황이고요. 또 다른 일들도 있었고 아무튼 그런 일들이 제 글쓰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꾸준히 쓰고는 있어요. 계속 써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요 그래야 이 모든 일들을 이겨낼수 있꺼든요. 매번 출판될만한 멋진 작품을 써야 하는건 아니니까요. 그냥 그래야 되니까 계속 쓰는거죠. 

그래서 암튼 저는 꽤 스스로 자신있는 편이고 낙천적이고 항상 이상하게도 모든 일에  밑도 끝도 없이 밝았어요. 좀 이상하죠.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꽤 현실주의자이기도 해요. 되게 부정적이고 꼬였기도 하고요. 어떤땐 비관적이기도 하기도 하고요. 저한테 끔찍한 일을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사람들한테서 좋은 면을 많이 보려고 해요. 아마 제 정신건강에 그리 좋은 일은 아닐것 같같죠?(웃음) 아무튼 사람들한테 좋은 면을 본다고 해서 널 용서해, 나를 계속 학대해 그러는건 아니에요. 따질 일이 있으면 따지기도 해요. 

젠이씨가 사는 그 지역에서는 입양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쉽지 않을 거예요

맞아요. 보통 그런 아름다운 입양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제가 내는 목소리에 불편함을 표시해요. 그럼 저는 당신 사연이 완벽하든 아니든 어쨌거나 우리의 입양은 트라우마로부터 시작된거아니냐고 받아치죠. 맞잖아요. 

우리 입양인 글쓰기 모임에 속해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아주 아름다운 입양사연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무런 트라우마가 없거나 의견이 없거나 하는 것은 아니죠. 사람들이 이 글쓰기 모임을 좋아하는 이유가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라서에요. 항상 모든 이야기들이 “입양한” 사람 위주였으니까요. 입양가족들한테 상처주는 것이 두려워서 하지 못했던 그런 이야기들 말이에요. 아마 입양 가족들은 그들이 이렇게 느낀다는 것을 모를수도 있고요. 우리는 완벽한 가정이니까 하고 말이에요. 그래서 입양인들이 입양부모한테 상처를 주거나 혹은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해서 말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을 드러낼수 있는 안전한 공간인것이죠. 아무튼 제가 말하는 바가 그거에요. 각각의 입양 사연은 다 다르다는 것을요. 

한국에서도 정부나 아니면 입양단체등이 젠이씨가 입을 좀 다물어 줬으면 한다고 느끼나요?

네 그렇게 느낀적이 있어요. 제가 한국에 가서 왜 한국말을 못하냐는 질문을 받을때마다 제가 입양되었다고 안 밝혀요. 왜냐하면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거든요. 갑자기 다들 당황하고 마치 못할말이라도 한것 같은 분위기가 되죠. 왜냐하면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기 때문이에요. 제가 제 입양부모를 찾는 포스터를 만들어서 돌릴때도 사람들은 알고싶어 하지 않더라고요. 읽으려고도 하지 않고요. 네 마치 그런일은 없었다는 것처럼 행동해요.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너무 속상한데 왜냐하면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잔아요. 당신들의 역사에서 아주 큰 일이었다고요. 인종청소였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죠. 피터가 지금 밝히고 있잖아요. 인종청소의 일환이었다고요. 아마도 진짜일거에요. 일본 식민지를 겪은 것도 그렇고. 군대도 주둔했고요. 그러니 혼혈도 많았을 것이고 그런 아이들이 한국인속에 섞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겠죠. 그러니 제가 저의 출신찾기를 하려고 여기저기 묻고 다닐때 사람들이 입을 다무는 것이죠. 통제할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니까요. 그러다가 DNA기술이 등장하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죠. 갑자기 가족들을 서로 찾기 시작 했잖아요. 정부가 곧 나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금방 밝혀질 일이니까요.

갑자기 20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사회로부터 지워놓고 이 사람들이 나중에 돌아와서 어떤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자 가정을 지켜야 하고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는 둥 하고 변명을 하잖아요. 이렇게 사람들을 보내버린 그 근원이 정부인데요. 

그 부분이 제가 미국의 지인들한테 제 친가족 찾기를 설명할때 어려운 점이에요. 미국에도 가족찾는 토크쇼가 있잖아요. “내가 바로 당신의 아들입니다

“(I was your son)같은 프로그램 말이에요. 한국에서는 친부모를 찾았다고 하더라도 바로 연락해서 제가 딸이라고 혹은 아들이라고 밝히면서 자동으로 만날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개인정보보호법때문이라고 해요. 왜냐면 갑자기 친모나 친부의 삶에 영향을 줄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연락을 하기를 꺼려하죠. 그러니까 친모나 친부의 권리만 중요하고 내 권리와 감정은 아닌거죠. 내 삶은 송두리째 도둑맞았는데도 불구하고요. 

나는 그냥 왜 였는지만 알고 싶을 뿐인데 말이에요. 그리고 가족과의 재회가 항상 해피엔딩인것만은 아니잖아요. 친가족을 찾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제가 누누히 이야기 해요. 가족을 찾은 후에 더 마음 아픈 일들이 벌어질수도 있고 혹은 복잡한 상황이 생길수도 있고 또 가족을 찾았다고 해서 그동안 가졌던 모든 의문들이 해소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궁금한 것들이 더 생기기도 하고요. 그러니 가족들과 다시 만나는 것이 항상 좋은 일 많은 아니에요. 저도 그냥 왜 인지를 알고 싶어요. 어떤 일이 있었던건지요. 

입양인 대부분이 그런 이유로 가족을 찾죠.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요. 친가족과 관계를 맺는 것도 좋겠지만 그때문에 가족을 찾는 것은 아니죠. 나 라는 존재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고 싶은 거죠. 

맞아요. 제가 딱 그래요. 가족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에요. 남편도 있고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도 있어요. 재밌는 것이 아들아이는 한국인혼혈이고 며느리는 100퍼 한국인이잖아요. 그러니 제 손녀는 거의 한국인인셈이죠. 제 아빠보다 더요. 그리고 지금 제가 이렇게 한국인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잖아요. 제 인생의 다른 시기 즉 한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화제를 돌리곤 하던 그런때가 있었는데 그때 나를 알아왔던 사람들이 이제 제가 한국에도 가고 한국 요리도 하고 한국에 대한 포스팅도 하니까 “그럼, 그렇지” 이런 눈치에요. 그리고 아들 내외도 이런 저를 너무 좋아하는데 제가 제 손녀아이와 유일하게 혈연으로 연결된 조부모인거잔아요. 며느리는 입양됐고 제 남편은 제가 아들아이를 낳고나서 만났으니까요. 그러니 손녀와 피가 통하는 조부모는 저 뿐인거죠. 그리고 제가 그 아이에게 한국과의 끈이 되어 줄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요. 열심히 배워서 적용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리고 며느리 스카일라도 열심히 한국에 대해서 배우고 있고 아들아이는 이상하게도 어려서부터 항상 그래왔어요. 그래서 제가 아이들에게 해주는 음식들을 보며 제 손녀가 내 한국 할머니가 해준거야 하고 기억할 날이 오겠죠. 그렇게 우리 가족만의 전통을 새로 쌓아하는거잖아요. 저 스스로는 비록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놓쳤지만 제 아이들에게는 기회를 주고 싶어요. 

미혼모로서 가족의 지원없이 혼자 아이를 낳았을때 말이에요. 그때 한국의 엄마를 생각했나요?

네, 아주 많이요. 우리 엄마도 이런 상황이었을까?  엄마의 삶이 나에게도 대물려진걸까 하는 생각들이요. 어떤 반복되는 패턴인가 하는 생각들이요. 아주 많이 했어요. 그리고 지금 내가 싱글맘으로서 느끼는 이런 감정, 아이를 바라볼때 드는 생각들을 엄마도 느꼈을까 하고요. 그래서 그부분을 제 연극 속에서 친엄마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에 반영했어요. 내가 가졌던 고민들을 엄마도 가졌을까 궁금했거든요. 제가 아이를 막 낳을때 든 생각이 아이가 백인에 더 가깝기를 바랬어요. 아이 낳는 순간에 드는 생각치곤 참 이상하죠. 제가 살면서 겪었던 문제들을 아이는 겪지 않기를 바랬거든요. 태어난 아이 얼굴을 보니 백인에 더 가깝게보여서 안도했던 기억이 나요. 그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좀 씁쓸하지만요. 제 엄마는 한국에서 한국 아이를 낳은 거니 그 걱정은 안해도 됐었겠지만서도요. 그때 제 친엄마와 내 삶이 비슷해진다는 생각을 지울수 없었어요. 

사전에 부탁은 안했지만 혹시 젠이씨의 작품을 좀 읽어줄 수 있나요? 연극작품이나 혹시 다른 것이라도요?

연극은 다른 데서 읽었고요. 제가 지난번에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쓴 시가 있어요. 14시간이 넘는 비행시간동안 머릿속에 떠오른 내용을 저장해두었다가 나중에 옮겨 적은거에요. 뒤에 영상과 함께 낭독할수 있도록 쓴거에요. 

제목은 Yellow입니다. 

노랑  

그것은 두살의 내가 이 이국땅으로 올때 입었던, 

소매에 파란 글씨의 홀트 로고가 있던 작은 원피스.

노랑

그것은 내 입양엄마의 머리색. 

그리고 엄마가 나를 안을때 엄마 주위로 쏟아지던 따듯하던 햇살. 

나는 이제 안전하다고 느꼈고 그녀와 바로 사랑에 빠졌어. 

노랑

나를 “고양이”라고 소리치게 만든, 

나의 새 집에서 나를 반겨준 뚱뚱하던 고양이의 눈. 

그것은 내 입양부모가 처음 들은 나의 목소리였고 그들은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었대. 

노랑

그것은 아주 어린나이부터 좋아할 수도, 가깝지도,

그리고 살갑지도 않았던 내 양아버지의 수염. 

노랑

그것은 경계의 색. 오늘은 아빠가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제발 오빠와 단 둘이만 남겨지지 않기를.  

노랑

그것은 안심이 될때까지, 

자장가를 들으며 잠에 들때까지 쭉쭉 빨았던, 

내가 좋아하던 치발기의 플라스틱.

노랑 

그것은 나만 백인이 아니라고 

“봐라, 저것들 중국놈들 일본놈들 더러운 손발들”하고 

학교에서 외쳐대던 녀석들.

노랑 

낯선 장소에 들어갈때 

사람들이 친절할지 아니면 싸늘할지 몰라 졸였던 내 마음

노랑

자기도 첫날이라 너무 떨린다며 같이 앉자고 청해준 

내 첫 친한 친구를 만난 그 스쿨버스

노랑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내 차를 몰았을 때 

내 얼굴로 내리쬐던 햇살과 내 머리카락 사이로 지나가던 바람. 

우린 볼륨을 높이고 모든 걱정이 사라진 듯 

가슴이 터지도록 소리를 질렀지.

노랑 

‘드디어 동양여자하고 해본다’라는 듯 

내 위로 나를 짓누르던 남자들의 가쁜 숨결

노랑

그것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내 이름을 물었을 때 네가 몰던 차

노랑 

우리가 부푼 가슴을 안고 처음으로 함께 등산을 했을때 

발 밑에서 부스러지던 나뭇잎의 색

난 우리가 함께 할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어.

노랑

평생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할 때 우리 손을 예쁘게 장식했던 금반지

노랑

우리의 사내아이를 감쌌던 포대기. 

그 아이는 

마치 우리를 다 안다는 듯이 그리고 믿는 다는 듯이 우리를 올려다봤고 

내 마음은 

내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사랑으로 가득찼어. 

노랑

반딧불과 수만개의 생일 촛불들, 자전거들과 캠핑 

그리고 

노랑

그것은 네가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던 날 네 목에 둘렀던 졸업가운

노랑

우리가 다시 찾은 그 나라에서 

네가 지금의 네 부인에게 프로포즈 했을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

감추고 싶었던 나와는 달리 넌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했지 

지금은 너와 함께 나도 자랑스러워.

노랑 

판테믹으로 못 할줄로만 알았던 네 결혼식 때 네 가슴에 꽂아 주었던 부케. 

노랑 

미국으로 올 때 내가 입었던 원피스, 

더 이상 버려지고 발견되고 보내버려진 아이가 입었던 치욕의 원피스가 아니지.  

소매에 파란 글씨의 홀트 로고가 있는 노란 원피스

지금은 너의 며느리와 너의 손녀 자스민 나리가 입는 원피스.

청취자들이 젠이씨에게 연락하고 싶으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요?

페이스북에서 찾을수 있어요. 제가 페이스북 조상님 수준이에요. 아직 아무도 페이스북을 모를때 시작했거든요. 페이스북이 제일 쉬울 거에요. 이메일도 있긴 하지만요. 제 이름을 검색하시면 되는데 예전에 “Princes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페북에서 정책을 바꿔서 모두 실명으로 전환해야 했을때 제 Zhen E Remmelsberg로 계정을 다시 만들었어요. 그때 화가 많이 났는데 페북에서 예명으로 활동하던 예술가나 예능인들도 실명을로 다 바꿔야 했거든요. Zhen E Remmelsgerg입니다. 

젠이씨 오늘 이야기 고맙습니다. 음악을 협찬해주는 제이진씨도 고맙습니다. 더 많은 음악을 듣고 싶으시면 jaejinmusic.com. 을 찾아주세요. Kimberly Kaminski 와 다른 모든 후원인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매달 이 팟캐스트가 지속되도록 도움주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이 팟캐스트를 후워하고 싶으시면patreon.com/adapted podcast 를 찾아주세요. 다음에 뵐때까지 안녕히 계셔요, 

시즌 6, 에피소드 3: 피터 멜러 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TRC)

피터: 제 이름은 피터 뮐러입니다. 48세이고 덴마크에서 사는데 지금은 한국에 머무르면서 덴마크 한국인 진상규명그룹(DKRG)과 활동하고 있어요. 

카오미: 네, 한국에 얼마나 계셨나요? 

피터: 거의 한 달이 다되어 갑니다. 

호스트: 네,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피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TRC)에 최근 발굴된 불편한 사례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니까 올해 8월 23일 한국의 진실화해위에 요구사항을 제출하였고,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해외입양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요청했습니다. 아동 성적남용에 대한 새로운 불편한 사실들이 추가로 발굴되었는데요. 당시 한국 정부와 해외입양기관의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어요. 홀트와 한국사회봉사회(KSS) 모두 이중 문서를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한 문서는 공식적인 기록이고, 다른 문서는 비공개로 해외입양에 대한 진실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진실화해위가 이 사례들을 조사할 때 당시 사실이 그대로 반영된 문서를 참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카오미: 홀트와 한국정부측이 각각의 입양인에 대해 2개의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는 말씀이시죠. 

피터: 네, 마치 거울처럼 저희 각자가 갖고 있는 입양 문서와 번호가 있고요, 이 외 진짜 이름과 진짜 생년월일이 적힌, 친가족에 대한 정보가 담긴 다른 문서가 있습니다. 고유한 번호가 붙어있고, 진짜 문서와 가짜 문서를 구분할 땐 닉네임이 사용됩니다. 

카오미: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피터: 여러 입양인들이 사례를 접수했고, 그들이 제출한 서류로부터 알게 되었어요. 사례번호들이 다르게 나오길래 처음에는 저희의 서류정리에 실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알고보니 한 명의 입양인당 문서가 두개가 있는 거였죠. 실수였는지,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됐어요. 특히 한글 문서는 한자로 되어 있어서 굉장히 읽기가 어려워요. 공식문서은 영어로 되어있는데 (국내) 기록된 문서는 한자라, 한국사람들도 한자를 읽기 어려워합니다. 한자는 과거에 문서를 작성할 때 썼던 언어이거든요. 

카오미: 왜 두 개의 제도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세요? 

피터: 그게 저희가 진실화해위에 전달한 내용입니다. 1960년대외 1970년대에 한국정부가 사회정화라고 하는 제도를 운영한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인정하기 어려워할 수도 있지만 사회정화제도가 1960년대에 당시 정부에 의해 시행되었고, 혼혈아부터 시작했습니다. 섞인 아이들, 백인과 흑인이 섞인. 

카오미: 혼혈인종이요. 

피터: 네 혼혈인종이요. 덴마크에서는 이 단어가 매우 적절하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혼혈인종이라고 부릅니다. 보통 미군들의 자식이고, 흑인이거나 절반이 흑인이거나 백인인 아이들입니다. 실제로 저희가 아는 바로는 홀트의 전대표인 부씨가 아주 생생하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말했는데요, 1960년대에 당시 청와대로 찾아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안했습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혼열인종문제의 해결책이라고 했어요. 미국에 가서 많은 흑인 아이들이 구두를 닦는 걸 봤다고 이야기했어요. 

피터: 그는 대통령에게 만약 여행객들이 공항에 와서 흑인 아이들이 구두를 닦는 걸 본다면 한국에게 오명이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혼혈 흑인 아이들이 구두를 닦는 걸 말한거죠. 공항과 거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수치스러울 거라고 이야기해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혼혈인종문제를 해결할 권한을 부여받습니다. 부씨는 스스로 마을과 도시와 미군기지들을 돌아다니며 혼혈아동을 수거한 이야기를 설명했습니다. 또 엄마들이 아이를 내어주는 걸 꺼려했다는 이야기도 하죠. 그들을 설득했다고 말합니다. 

또 절반이 흑인인 아이들이 불만족스러워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한국인이라고 항의했지만 부정당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외국인 취급했죠. 이런 혼혈아이들이 모두 소환되어 초기에 미국으로 보내지고 제 고국인 덴마크, 노르웨이에도 보내졌는데요, 그는 이를 칭송했습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아이들을 데려간 걸요. 이후 제가 부씨를 인터뷰한 2시간의 내용이 덴마크와 한국 방송사 양측에 의해 녹화되었습니다. 지금 할 이 이야기는 녹화된 내용이 아닌데요, 그는 다음은 소아마비장애인, 그 다음은 뇌성마비장애인, 그리고 다른 종류의 장애인들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들은 같은 방식으로 소집되어 해외로 입양이 되었죠. 세번째 그룹은 미혼여성의 아이들이었습니다. 

이 사회정화제도는 당시에는 꽤나 현대적인 것이었습니다. 덴마크에도 사회정화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제도의 목적은 깨끗하고, 보기 좋은 사람들로 인구를 구성하는게 목적이었죠. 그래서 이 제도는 입양제도와 한국정치에 통합되었습니다. 제가 위원회에 주장하는 건 혼혈인종아동에게 일어난 일이 인종청소라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순수한 혈통의 한국인이 있다고 믿었고 인종이라는 말을 잠시 쓰면, 그 외의 아이들을 단순히 피부색이나 혈통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소환해서 일을 도모한 건 인종청소라고 보여집니다. 저는 위원회에 이 내용을 전달할 계획이고 UN인권위원회에도 전달될 것입니다. 

카오미: 한국은 아직 UN이 발행한 아동권리와 관련된 문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국가들 중 하나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피터: 아동권리협약은 비준한 상태입니다. 아마 헤이그 협약을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요. 

카오미: 네, 헤이그 협약이요. 한국은 아직 헤이그 권리협약에 서명을 하지 않았죠. 

피터: 네, 헤이그 협약은 입양인권에 대한 내용이고 아동 협약은 아동인권에 대한 내용입니다. 실질적으로 저희는 성인이지만 아동인권에 해당되기도 합니다. 아동 협약의 제7항과 8항에 보면 한국은 모두 서명을 했고, 정체성에 대한 권리, 자신의 뿌리를 알 권리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카오미: 그러니까 한국은 이 협약에서 아동이 자신의 뿌리를 알 권리가 있다고 명시한 조항에 서명을 한 셈이네요. 

피터: 네, 하지만 한국에 대해 이해해야 하는 건, 한국은 사실 많은 법이 제정되어 있고 이 법들은 미국이나 덴마크등 다른 국가로부터 차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가 시행된 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도와 기관들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마치 그림을 감상하는 것처럼 보기에는 좋아보이지만. 실제 내막을 들여다보면 제 생각엔 무정부주의처럼 보이고 조금 어지럽기도 합니다. 책무를 이행할 도구가 실제로 없습니다. 사실 아동협약은 문자 그대로 한국법에 통합되어 있습니다. 법에 적힌 내용이 아동협약에 적힌 내용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기관들이 뭘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만약 협약을 어겨도 기관이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습니다. NCRC 같은 경우에는, 

카오미: 아동권리보장원이요. 

피터: 네, 국제법에 따르면 입양을 관장하는 최상위 기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양기관이 입양이후 필요한 조치를 이행하지 않았을 경우, 이를 볼 수 있고 언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해당기관을 처벌을 하거나 조치를 취하도록 보장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무능력한 관리자들과 무능력한 기관들이 뒷짐지고 있는 셈이죠. 그들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변화를 시행할 수 있는 법과 제도가 없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는 겁니다. 도구가 없는거죠. 

제주도에 제가 갔을 때 베이비박스 활동가들을 봤습니다. 바로 이거에요. 우리가 겪었던 똑같은 일이 아직도 한국에서 반복되고 있는 겁니다. 아이들을 데려다가 정체성을 지워버리고 이름도 지워버리는 건 불법입니다. 베이비박스는 한국에서 불법이지만 관리자들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순히 불법이라고 말만 합니다. 할 수 있는 게 없죠. 경찰서에 가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처벌이 없고 제도에 대응을 위한 조치사항이 없습니다. 2014년 실제로 특별입양법이 통과된 이후에도 홀트는 여전히 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홀트는 아직도 법을 어깁니다. 그런데 제도가 없죠. 기관들은 외치고 있습니다만, 시행하기 위한 방법이 없는 게 한국의 문제죠. 

카오미: 홀트가 어떻게 계속 법을 어기고 있나요? 

피터: 초기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불법으로 여성을 위한 장소를 운영 중입니다. 여성을 위한 쉼터라는 이름을 붙였죠. 기관이 운영하는 여성사업이 있습니다. 한국은 1980년대부터 굉장히 부유한 국가가 되었고, 입양을 통해 아동을 돕는 일은 더 이상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한국에는 사회적 문제들이 많죠. 아이가 있는 미혼모들이 우선 (홀트에) 찾아갑니다. 사회적 도움이 없어요. 새로운 사회적 프로젝트들이 시작되고 있기는 하지만 시작단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입양기관을 통해서 민간인이 운영하는 사회적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도움을 받으려면 아이를 기관에 위탁해야 하죠. 

카오미: 네, 그러니까 안전한 쉼터 같은 곳들을 설치하고 임산부를 위한 서비스 같은 걸 제공하지만, 상담을 통해 아이를 포기하기를 강요하는 군요. 

피터: 네 상담이라고 불러요. 아동을 끌어올 자원이 바닥나고 있기 때문이죠.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생률을 보입니다. 1% 미만인데 제가 알기로는 0.56인가 그럴거에요. 전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생률이죠. 아동 자원이 바닥나니 다른 경로를 통해 여성과 아동에게 접근해야 하죠. 여성이 서양 국가에서처럼 같은 권리를 누리지 않습니다. 결혼을 안하면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이고, 결혼 제도 밖에서 아이를 가져도 엄청나게 수치스러운 일이죠. 

덴마크에서는, 제가 덴마크에서 왔는데요. 커플 중 1/3밖에 결혼을 안합니다. 사실 결혼을 안하는게 더 일반적이죠. 커플인데 결혼을 안 한 상태에서 가족으로 살아요. 한국에서는 결혼이 우선시되고 미혼모는 직업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구할 수가 없죠.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어요. 그래서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여성들이 아이를 포기하고 난 후에 후회하고 아이를 돌려달라고 요청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아이를 다시 사야 됩니다. 사회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대다수의 여성들에게 불가능한 일이죠. 

카오미: 그러니까 여성이 아이를 포기하고 나서 마음이 바뀌거나 후회가 들어서 돌아가면, 홀트가 아동을 구매하기를 강요한다는 말씀이시죠. 

피터: 네 그렇습니다. 

카오미: 2012년에 아까 말씀하신 특별입양법이 제정되었는데요, 입양인들에게는 익숙하지만 다른 분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을 거 같아서, 잠시 요약하자면 특별입양법은 

카오미: 입양인들이 친가족을 찾을 권리를 더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입양기관들은 이 법에 담긴 내용을 입양인들에게 도움이 안 되는 방향으로 매우 보수적으로 해석했죠. 이렇게 정리하면 맞을까요?

피터: 네 매우 정확합니다. 2012년까지 입양산업은 완전히 무법지대였습니다. 입양기관들이 마음대로 일을 처리했죠. 2012년 법 개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아이를 입양시키기 전 등록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기자님도 저도 등록이 된 적이 없었죠. 출생등록이 안됐었어요. 고아호적, 고아가족문서가 있었을 뿐이죠. 2012년 법은 실제 아동의 프로필을 보호합니다. 그러니까 하룻밤 사이에 버려진 아동이라는 개념이 갑자기 없어진거죠. 덴마크 입양기관이랑 이야기하면 더 이상 버려진 아동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갑자기 버려진 아동들이 사라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는 고아가 엄청 많았었다가 갑자기 한 명도 없게 되었다는 걸 믿지 않습니다. 기자님과 저도 문서로 추적해보면 고아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피터: 의심할 것도 없습니다. 저희는 서류상 고아로 조작된 겁니다. 2012년 법으로 가능해진 건 버려진 아동이 있을 때 어쩐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나와있습니다. 그리고 아동을 돕기 위해, 여성을 돕기 위해 어떤 조치가 가능한지 설명합니다. 입양은 다른 가능성들이 없을 때 하는 가장 마지막 선택지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아이를 친척집으로 보내서 돌봄을 받게 하거나 위탁 가정에 임시적으로 맡겨서 입양 외의 방법을 취해야 합니다. 이 때 바로 베이비박스가 갑자기 들어오게 된 겁니다. 기자님 말씀처럼 2012년 법은 실질적으로 아동을 보호하고 여성을 보호합니다.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반대합니다. 여성에게 공공기관을 무시하고 다이렉트로 자신들에게 아이를 넘기라고 하죠. 그러면 아이의 기록이 완전히 삭제되고 아이는 보육원으로 보내집니다. 이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문서상으로 고아를 만들어냅니다. 

카오미: 베이비박스가 한국에 몇 개나 있을까요? 

피터: 두 곳에 있습니다. 한 곳은 서울, 한 곳은 부산이고 제주도에 3번째로 지으려고 하고 있어요. 금요일에 분영씨랑 한국입양홍보회의장과 같이 제주도로 내려갔었어요. 반대시위를 하려고요. 

카오미: 베이비박스 찬성자들은, 한 분이 유명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서울 아니면 부산에서 활동하는 목사인가요. 

피터: 네네, 그룹 전체가 거기 있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그 교회에서 여러 대의 버스를 타고 왔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종교적 광신자입니다. 정말 종교적 광신자들이에요. 그들의 활동 구호는 ‘이름 없음, 수치 없음, 비난 없음’ 입니다. 

카오미: 그러니까 그분들은 여성이나 젊은 남성 아니면 누가 되었든 문제를 일으킬 사람들한테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피터: 입양제도를 다시 시행시키려고 합니다. 저희가 알기로는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요. 실제로 그 과정도 단계별로 설명을 했는데요. 

먼저 미혼여성의 아이를 찾은 다음, 그 아이의 모든 배경과 정체성을 삭제합니다. 이렇게 문서를 삭제함으로서 여성에게 도움을 준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아이의 엄마(에게 일어난) 일을 삭제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죠. 그래야 여성이 삶을 다시 되찾는다는 거죠. 아이는 완전히 지워집니다. 아이의 배경까지도요. 하지만 중요한 건 아이들이 보육원에 입양을 위해 등록된다는 사실입니다. 서울에 있는 보육원의 60%는 전부 베이비박스에서 옵니다. 아동을 구하는 게 아닙니다. 아동을 보육원에 데려다놓고 수거하는 거죠. 보육원을 아동으로 채워놓고 경찰서에 가서 아동들한테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입양의 기회를 주는 게 맞다, 그러니까 앞뒤 따지지 말고 입양을 허락해달라고 하려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금요일에 제주도에 온 겁니다. 

카오미: 아 네, 그러니까 특별입양법이 시행되긴 했지만 베이비박스로 인해 아이들 정체성이 한마디로 세탁이 되는 셈이네요. 

피터: 베이비박스는 불법입니다. 완전히 불법이죠. 2012년 특별법을 비롯해 아동을 보호하는 기타 사회적 법들도 모두 어겼습니다. 불법이라는 경고도 받았죠. 하지만 그 목사는 운영을 계속 하면서 종교적으로 광적인 발언들을 하고 있죠. 

카오미: 강제로 문을 닫게 할 권한을 가진 주체가 없다는 말씀이시죠. 

피터: 입양이 사랑의 행동이라고 부릅니다. 겉으로는 아동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아동인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 분들과 대화를 나눠보기도 했는데요, 스티브 모리슨씨였습니다. 미국 입양인인 그는 입양이 왜 훌륭한지에 대해 증언하기 위해 연사로 초대되었습니다. 자신이 집없이 떠돌이로 한국의 거리에서 생활했는데, 입양이 자신을 구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스티븐 모리슨은 전쟁고아였다는 점입니다. 스티븐은 전쟁을 통해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 때문에 입양되었습니다. 저희가 입양되었을 때는 더 이상 전쟁이 입양의 역사에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저희는 전쟁 때문에 입양이 된 게 아니었고, 그는 전쟁으로 인해 입양이 된 거죠. 모리슨씨한테 당신이 불운하고 힘든 어린시절을 보낸 건 진심으로 안타깝지만 저를 포함해 수천명의 입양인들은 전쟁고아가 아니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입양되었을 당시 14살이었기 때문에 정말 입양인인지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자신의 언어를 잃지 않았고 자신의 배경과 뿌리를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의 정체성은 우리처럼 삭제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제로 베이비박스 후원자이고 여러 미국을 비롯해 여러 백만장자들이 기관을 후원합니다. 

카오미: 그렇다면 피터씨, 인종청소라는 개념과요, 정체성을 삭제한다, 완전히 없애버린다라는 것은요, 인권남용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맞나요? 

피터: 위법입니다. 문서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법을 어긴 겁니다. 불법입양의 첫번째 조건은 문서가 거짓되고 과정이 조작되었다는 겁니다. 

카오미: 그러면 UN이나 다른 국제기구에 사례를 제출할 수 있나요 

피터: 아동협약 조항 7과 8에 보면 아동인권가 언급되고 저희 같은 성인 (입양인) 에게도 이름에 대한 권리가 해당됩니다. 출생일자에 대한 권리, 출생등록에 대한 권리, 자신의 적힌 문서에 대한 권리, 자신의 뿌리를 알 권리, 자신의 가족 배경을 알 권리 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서의 조작이란 건, 입양기관은 일종의 법인 회사입니다. 사회복지기관보다 법인 회사라고 가정하고 접근하면 좀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미국, 유럽 같은 서구에서 아동에 대한 요구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고아만 원했는데요, 시장이 고아를 요구한겁니다. 그리고 저희는 고아를 제공한 거죠. 아이들을 서류상 고아로 만드는 건 시장 수요의 논리입니다. 

호주에서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호주사람들은 아동은 (가족등록내용이 담긴) 족보에 대한 권리가 있고 이름을 알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진짜 이름과 부모를 알 권리를 주장했죠. 그래서 호주에서는 미국과 유럽시장과는 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호주로 입양된 아동은 가족에 대한 기록과 배경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요.

카오미: 아 네, 정말 공급과 수요가 있는 것처럼 들리네요. 수요가 있으니까 공급을 하는거고 어떤 나라인지에 따라 그 이민법의 기준을 따라야 하고요, 미국 같은 경우는 국제입양을 하려면 중요한 조건 하나가 아동에게 살아있는 부모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피터: 정확합니다. 

카오미: 그래서 입양이 되려면 고아가 되어야만 하는 거고요. 

피터: 그래서 많은 입양인들이 입양 경로를 추적할 때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보육원을 문서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남광아동복지원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남광이 물론 복지원이기는 했고 아동을 수용하기는 했지만, 많은 입양인들은 가본적이 없습니다. 남광이나 다른 기관에 간 적이 없는 거죠. 하지만 문서상 고아임을 증명하기 위해 서명이 되어있죠. 실제로 입양기관의 서명에 대해 한국사회봉사회(KSS)가 입양 절차를 위해 배경정보를 조작했음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는 내용이 적힌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입양 절차를 위해 정보를 조작했다고요. 이후 부모에 대한 정보와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자료위장을 인정한 사례가 있는 셈이죠. 

카오미: 그러니까 한국사회봉사회(KSS)와 홀트는 아동의 출생가족에 대한 정보가 있는 경우에도 두개의 문서를 만든 거지요? 하나는 빈 호적이고 다른 문서에는 진짜 정보를 넣고요. 

피터: 증거들이 있습니다. 다음주에 제가 증언을 하게 되어있는데요. 입양인 중에는 출생가족이 등록을 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름이 있고, ID 번호가 있고, 제가 확인한 바 호적에도 부모의 이름과 아동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입양기관은 또 다른 호적을 만듭니다. 그래서 호적에 이미 등록이 되어있는데도 고아호적으로 등록이 다시 된 거죠. 이번주 수요일에 주민센터에 갈 예정인데요. 사실 저도 1달 전에 마포구 주민…

카오미: 주민센터요

피터: 네, 주민센터에서 제 문서에 대한 증언을 했습니다. 실제로 홀트를 통한 모든 입양인들의 문서가 마포구 주민센터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홀트 사무실에서 100m 떨어져 있습니다. 제 호적을 가지고 찾아가서 어떤 문서가 있는지를 물었는데요, 제가 알게 된 건 10년동안 한국 시민으로 지냈었다는 겁니다. 저희 부모님도 몰랐죠. 

덴마크에서는 입양이 되면 자동으로 시민권이 부여됩니다. 그래서 1970년대에는 한 개의 시민권만 소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1975년에 덴마크 시민이 되었는데요. 대신 한국에서 저의 시민권 상태는 십년 뒤 박탈되었습니다. 친한 친구 중에 니아라는 덴마크 입양인이 있는데요, 그 친구랑 같은 센터에 갔더니 20년 동안 본인도 모른채 한국 시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20년이요. 많은 입양인들이 F4비자를 받으려면 이전에 한국 시민이었다는 걸 증명해야 되는데요. 대부분의 덴마크 입양인들은 본인이 아직 한국시민이라는 걸 알지 못한 채 지원합니다. 

카오미: 그러면 피터씨가 입양되었을 때 부모님은 빈 호적(고아호적)에 대한 서류를 받은 건가요? 

피터: 제 호적은 고아호적이었습니다. 제가 집안의 가장이고 부모님은 미상이라고 나와있습니다. 그리고 알게된게, 저는 한국에 오는 입양인들에게 주민센터에 호적을 가져갈 것을 권합니다. 홀트가 여전히 호적을 변경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제 문서는 1999년에 홀트가 변경하였습니다. 1984년이 아니라 1999년에 제 부모님에 대한 기록을 바꿉니다. 당시 제 양부모가 법적 보호자였기 때문에 홀트는 저랑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1999년에 저는 25살이었어요. 전 법적 관점으로 성인이었죠. 그런데도 법적으로 성인인 저를 대리해서 행동한 거죠. 제가 제 서류를 요청했더니 센터에서는 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뭐라고요? 저는 센터에서 제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긴 줄 알았습니다. 그게 아니라 제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고 물었더니 출생이 신고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호적만 있고 출생 신고가 되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주민번호도 없이 10년 간 시민일 수 있었는지 물었는데요, 그들은 질문을 이해를 못했습니다. 대답을 할 수 없었죠. 그러니까 명백하게 국가의 역할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홀트를 통한 경우에 외교부가 서명한 여행 증명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보면 저희가 한국 시민이라고 나와있습니다. 서구 법원 문서에도, 가족법원 문서에도, 법무부 문서에서도 그렇습니다. 만약 문서가 가짜라면 어떻게 이 서류들에 도장이 찍혀있을 수 있죠? 2주 전쯤 된 거 같은데 부씨와 저는 한 번 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2시간 반 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부씨는 제게 홀트 재단이 홀트 입양인의 80%에 대한 가족배경에 대한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80%요. 네. 그러니까 이게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사실 부씨는 제가 방문했을 때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마치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온 것 처럼요. 그는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제가 그의 입양아동 중 한 명인 셈인거죠. 그는 굉장히 거만했고 자신이 한 일이 훌륭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혼혈아동에 대해 인종청소를 한 것에 대해서도 자부심이 있어요. 

카오미: 홀트가 입양한 입양인이요. 

피터: 장애인과 갈색피부나 절반이 흑인인 아동을 모으러 다닌 이야기도 자랑합니다. 자기가 어떻게 그 제도를 구축했는지도 자랑합니다. 본인이 그 제도의 회장이었거든요. 그가 오기전에는 (홀트는) 직원이 12명인 작은 단체였다가 그가 온 이후로 마포구에 있는 빌딩을 사고 일산에 있는 산을 구매했습니다. 그는 아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요, 수천명의 아동이죠. 어떻게 죽은 아동을 직접 수거해서 땅에 묻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카오미: 아동들이 어떻게 죽었나요? 

피터: 좋은 질문입니다. 그는 당시 한국이 가난했고 사람들이 나쁜 상황에 처해있었다고 합니다. 저희는 1980년대 홀트 기관에서 지냈던 해외입양인들의 증언자료를 갖고 있는데요, 1988년까지의 기록이 있어요. 당시에 한국은 저개발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올림픽을 유치하기도 했는데요, 그런데 입양인들은 홀트에 먹을 것이 부족했고 아동이 지내기에 부적절한 아주 더러운 곳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제 생각엔, 베르타 홀트의 일기에 보면 해리 홀트가 돈을 아끼기 위해 19명의 간호사를 해고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히려 (홀트가) 회사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죠. 자동차를 생산하는 대신 아동을 생산했습니다. 그리고 최저예산을 이 일에 투입한거죠. 저희는 수백만명의 입양을 결심한 부모들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를 밝혀내려고 합니다. 한가지 분명한 건 아동에게 담요와 음식을 주기위해서는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제가 확신합니다. 

카오미: 돈의 경로를 추적하려고 하시는군요. 어디로 갔는지. 

피터: 네, 그렇습니다. 

카오미: 피터씨, 왜 부씨가 당신의 인터뷰와 언론공개에 응했다고 생각하세요? 왜 당신과의 대화에 동의했을까요? 

피터: 왜냐하면 제가 홀트 입양인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직접 제게 말하기를 제가 홀트 입양인이기 때문에 언제나 환영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굉장히 굉장히 자신의 일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카오미: 이야기하는 것에도 동의했구요. 

피터: 언론의 관심도 반겼습니다. 

카오미: 그는 본인이 원치 않는 아동을 보내 버림으로써 나라를 위한 일을 했다고 자랑스러워하는군요. 

피터: 네 100% 확신합니다. 

카오미: 놀랍네요. 

피터: 아동을 부를 때 굉장히 부적절한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여성들을 부를 때도 양키 공주라고 불렀습니다. 

카오미: 부씨의 나이가 몇 살이라고 추측하세요? 

피터: 여든 정도 된 것 같아요. 저한테 29세에 홀트의 기관장이 되었다고 했어요. 그는 당시 기관장이었던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살아있다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젊고 혈기왕성한 청년이 홀트에 와서 기관장이 되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아이디어들이 많았겠죠. 그의 정체성이 만들어진 시기였던 것 같아요. 전세계를 여행했다고 하는 걸 보면. 덴마크에서 돈을 많이 기부해서 덴마크를 아주 좋아한다고 했어요. 그가 실제로 한 말입니다. 일산에 가면 덴마크 표지판을 볼 수 있습니다. 일산시 전체에 덴마크 거리를 가리키는 표시들이 있습니다. 

카오미: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사회 전반적으로 조작되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피터: 틀림없습니다. 위원회에 그대로 전할 겁니다. 정부가 아주 깊게 관여했다는 증거문서들도 찾았습니다. 당시 한국정부조직 내에 사회적 정화를 집행하는 공식적 주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조직에서 두 명이 홀트로 발령받았죠. 처음에 사회적 정화제도는 정부의 대한사회복지회(SWS)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민간 사업이 되었죠. 하지만 대한사회복지가 만들어진 명목은 사회적 정화를 이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대한사회복지회에서 일하던 네덜란드인 전직원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그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한국과의 협력을 멈출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인종청소이기 때문입니다. 혼혈아동에 대한 조치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했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카오미: 피터씨,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정리사위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요? 

피터: 가장 중요한 목표는 모든 입양인들이 진실되고 왜곡되지 않은 문서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는 것입니다. 이 문서들은 기관들로부터 회부되어 중립적인 장소에서 보관되어야 합니다. 

입양기관들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며 입양인들이 배경정보 확인을 위해 지원할 수 있어야 하고 가족찾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실이 담긴 입양문서에 대한 권한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입양기관 관리 하에 정확히 몇 명의 아동이 죽었는지 알아내는 것입니다. 이 아동들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는데요. 이 아동들은 한국에서 입양국가로 이동하는 비행기에서 사망했습니다. 비행이 당시에는 더 힘들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파리에 도착해서 처리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아동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밝히려고 합니다. 아이들은 희생자입니다. 한국전쟁박물관에 가면 전쟁으로부터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처럼, 희생자들의 이름이 담긴 추모비가 필요합니다. 

한국 전쟁 희생자들을 기리는 것처럼 똑같이 추모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위한 보상과 회복이 중요합니다. 성적남용과 관련된 사례들이 점점 더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 입양인이 제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그는 한국에서의 모든 일을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을 기억하고 있었고, 자신이 강제로 분리당한 날을 기억했는데요 엄마와 시천시에 장에 갔는데 어떤 모르는 남성이 자신을 납치했고 며칠 간 홀트에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미국에 왔다고 했습니다. 도착한 두 번째 날 그는 성적으로 남용을 당했습니다. 그가 물리적으로 저항할 수 있을 때까지 6년 간 이 일이 지속되었습니다. 점점 더 이런 성적 남용 관련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고 전부 홀트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저희 조직의 추측으로는 홀트 내부에 소아성애 조직을 돕는 인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유럽의 한 입양인 여성에 따르면 홀트 기관의 직원으로부터 성적 남용을 당했다고 합니다. 퍼즐조각 맞추기와 비슷합니다. 위원회에 홀트 내부적으로 소아성애 조직에 아동을 제공한 인물이 있었는지에 대한 진상 조사를 요청할 계획입니다. 병원에서나 다른 곳에서 납치되어 입양이 된 분들은 회복을 위한 특별권리가 필요합니다. 

이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홀트 내에서나 다른 홀트 기관에서 아니면 입양국가에서 성적 남용을 당한 사례를 알고 있다면 위원회에 (자료로) 제출할 수 있도록 공개할 것을 요청합니다. 홀트나 해당 직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를 살아있다면 찾아낼 거고 이 일을 위한 자금을 지원할 생각입니다. 

카오미: 입양인들이 사례를 접수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피터: 덴마크한국지부를 통해 제게 연락을 주시면 됩니다. 웹사이트가 있고요. 영어로 된 1장 안내문이 있습니다. 주소는 danishkorean.dk/dkrg입니다. 제 이메일 주소도 여기 나와있으니 제게 이메일을 주시면 됩니다. 

카오미: 다시 한번 제가 말해볼게요. 웹사이트 주소가 Danishkorean.dk/dkrg였죠. 이메일 주소도 말씀해주시겠어요? 

피터: 네 peter.moller@danishkorean.dk 입니다. 

카오미: 이름 철자를 한 번 더 불러주시겠어요. 

피터: 아, 아니면 info@daniskorean.dk 로 보내도 됩니다.

카오미: 피터씨가 하고 계신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세계적으로무언으로 지지를 보내고 당신의 일을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저를 포함해 아주 많습니다. 이제 피터씨 개인에 대한 질문을 좀 드리고 싶은데요. 

카오미: 지금 하고 계신 일이 아마 생애 전반에 걸쳐 해야 할 정도의 일로 느껴집니다. 어떻게 사례들을 조사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셨고, 피터씨께는 이 일이 왜 중요한가요? 

피터: 사실 이 일은 이제 시작하는 일입니다. 저는 평범한 덴마크의 시민으로 출퇴근하는 직업이 있고 가정도 있어요. 

카오미: 네 

피터: 지난 5-10년 동안 덴마크의 입양인들은 서로 강한 연대를 다져왔습니다. 자주 만나서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었는데요, 한가지 발견한 이상한 점은 저희의 사연이 거의 똑같다는 겁니다. 문턱에서 발견이 되어서 경찰서에 넘겨졌다는 그런 이야기요. 길가에서 버려진 채 발견되어 홀트나 다른 기관 같은데에 데려다져서 입양이 되었다는 이야기. 그러면 아마도 1970년대를 상상해보면, 전 1974년생인데요, 서울 길거리가 아이를 담은 바구니로 넘쳤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학적으로만 봐도 앞뒤가 안 맞았어요. 불가능한 이야기죠. 그래서 올해부터 이걸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3-4월에 시작했고 6월부터 덴마크에 있는 한국입양인들로부터 증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피터: 고아였던 이들은 한국에서 모두 가족을 찾은 상태였고 저 또한 그랬습니다. 도저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문서들도 살펴보니 비슷했습니다. 이게 진실일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저희는 문서가 조작되었다는 전제 하에 사례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한국 정부도 어떤 형태로 개입을 했으며 그 와중에 일들이 터졌다고 가정했습니다. 2달 전만해도 소아성애 사례를 제가 조사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어린 아동을 대상으로 가한 조직화된 성적 남용이라니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인들도 제게 편지를 보내왔는데요, 비입양인이기 때문에 이 사건과 관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들의 편지는 자신의 (입양된) 형제자매를 찾아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자신의 형제자매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아기를 찾으러 와보니 홀트가 도둑질해 간 상태였죠. 

피터: 홀트가 훔쳐간거죠. 당시 1970년대에는 만약 모친이 자발적으로 이를 허락하는 경우에는 포기각서를 써야했습니다. 저희는 홀트로부터 포기각서 문서를 보여달라고 요청했는데, 제게 보여준 건 보육원과 홀트 사이에 체결된 포기 문서였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에는 포기각서 작성이 의무였습니다. 

피터: 홀트가 이 포기각서를 보여줄 수 없다면 입양이 불법이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양시키기도 쉬웠던거죠.  아이를 입양하려면 아주 많은 문서작성이 필요합니다. 홀트는 이걸 하기 싫어했죠. 그래서 한국사회봉사회가 사례를 모두 조작한 겁니다. 입양하기 위해 문서들을 다 만들어냈는데 이런, 아이가 죽어버립니다. 어떡하죠? 다른 아동을 죽은 아동의 대리로 보냅니다. 입양인들이 서로 뒤바뀐거죠. 40세가 넘은 한 덴마크 입양인은 본인이 서류상 등록된 입양아동이 아니었다는 걸 모르고 지냈습니다. 한 덴마크 입양인 여성은 제게 말하기를 자신이 이런 방식으로 보내졌다는 걸 알고나니 텅 빈 조개 같은 기분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진실된 정체성을 알 권리가 있습니다. 

카오미: 지금 말씀하신 불법적으로 위장 입양이 조직된 게 사실이라면, 이 제도를 운영하는 데에는 꽤 많은 고위 관직자들이 개입했을 거라고 보는데요, 피터씨의 활동이 그런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거라고 예상하시나요? 

피터: 그렇게 보지는 않습니다. 21일 다음주 금요일에 국회가 저를 초청해서 발언을 하러 갑니다. 국무총리와 국회의원들 앞에서 발언을 할 예정입니다. 힘이 많은 사람들이죠. 국무총리로부터 국회에서 발언요청을 받았으니, 저를 초청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저를 실제로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고 제 발언을 홀트가 약간 불편해할 수 있을 것 같고 한국사회봉사회가 약간 불편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불편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동을 훔치거나 남용하면 그건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홀트는 규명해야 할 사안들이 많지만 입양이 사랑이라는 둥 광적인 기독교적 헛소리만 합니다.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홀트는 피터 뮐러씨에게 어머니를 찾아주지 못해 매우 유감스럽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치 제가 어머니를 찾지 못해 화가 난 사람처럼 만들죠. 근데 저는 제 어머니를 찾아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입양인들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카오미: 피터씨가 생각하기에는 입양사례들이 범죄로 기소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피터: 한국이 공소시효기간이 10년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9월 29일에 UN 인권위원회가 저희 사례를 지지하면서 정부의 독립적인 진상규명 활동을 허락하고 촉구하고 자료조작을 기소할 것을 요청하는 합동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엔 가입국가들이 이런 사례를 기소 및 처벌하라는 요청도 있습니다. 제가 사는 덴마크에서는 살인은 공소시효 제한이 없습니다. 50년 전에 누군가를 죽였다고 해도 오늘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살인도 공소시효 기간이 10년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홀트와 한국사회봉사회가 그동안 어떤 일을 해왔는지 전세계가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피터: 홀트가 지금도 그런 일을 계속 하고 있다면 그 직원들은 감옥에 가야 할 것입니다. 

카오미: 정체성 삭제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아까 그건 인종청소와 다를 바 없다고 하셨죠. 사람들이 사라지게 하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살해의 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피터: 네, 스티브 모리슨씨와 베이비박스 지지자들이 지난 금요일에 저한테 해준 말이 있는데요, 법과 인권, 아동인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법과 인권은 제2순위라고 했습니다. 법과 인권이 2순위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하고자 하는 건 베이비박스입니다. 

베이비박스는 홀트가 5-60년 전에 한 일을 반복하고 있어요. 다른 경로를 통해 다시 입양을 시작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매우 종교적인데요, 제가 보기에는 베이비박스 지지자들은 종교적 광신자입니다. 너무 광적으로 종교에 몰입하면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지고 정치화 됩니다. 그들은 제게 인권과 법을 잊으라고 했습니다. 신이 가장 높은 권력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두머리라고요. 그들은 자신이 신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일을 할 때는 인권과 법이 제2순위가 됩니다. 그들이 제게 해준 말입니다.

카오미: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식의 말이군요. 

피터: 홀트도 비슷한 입장입니다. 중요한 건 홀트도 기독교 단체입니다, 굉장히 종교적인 단체입니다. 홀트도 법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하고싶은 걸 하는 거죠. 하고싶은 걸 합니다. 종교 광신자들이 활동하는 영역에 어디가 또 있을까요? 입양 영역에서 아동에게 일어나는 이 일은 알카에다가 상징하는 바에도 비유될 수도 있습니다.  

알카에다는 사람과 집과 빌딩과 자동차를 폭파시키죠. 종교적 광신자들은 한국에 있는 사회적 제도와 아동을 보호하는 법과 규칙을 폭파시킵니다.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종교가 광적이 되면 정치화되는데 굉장히 우려가 되는 일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없애고 싶은 법 조항의 목록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피터: 전세계에 저희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입양은 입양되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입양은 한가지의 현상이 아닙니다. 입양에는 굉장히 많은 과정들이 포함됩니다. 너무 다양해서 같은 사연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희는 모두 각자 개개인입니다. 홀트와 한국사회봉사회와 입양기관들이 저희에게 어떤 일을 했는가를 알려야 합니다. 며칠 전에 한 입양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그 여성은 제게 자살시도를 여러 번 했다고 했습니다. 

13살 때쯤 되었을 때 자살을 하려고 했었고 그 이후에도 몇 번 했다고 했어요. 그 여성은 머릿속에서는 자신이 70세의 푸른 눈에 금발 여성인데, 거울을 보면 다른 모습이 보인다고 했어요. 이런 이야기를 많은 입양인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입양인들은 제게 이메일이나 전화를 통해 굉장히 사적인 사연을 보내옵니다. 전세계 입양인들로부터 매일 4통에서 600통의 이메일을 받고 있습니다.  

카오미: 정말 놀랍네요. 더 놀라운 건 피터씨의 헌신입니다. 기부를 받으시나요? 어떤 분들은 돕고 싶어하실 거 같은데요. 

피터: 아니요. 아니요. 아닙니다. 만약 기부하기를 원하시면 한국미혼모가족협회(KUMFA)에 하시거나 아니면 제주도에 있는 여성쉼터에 하시기를 바랍니다. 굉장한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이 하시는 일은 한국아이들을 베이비박스 광신자들로부터 보호하는 일입니다. 한국의 아동을 위해 나서는 일은 저희가 입양되었을 당시에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카오미: 많은 입양인들이 입양기관이나 보육시설로부터 입양문서가 타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데요. 

피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문서는 탄 적이 없어요. 저희는 그 문서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시즌5의 마지막 에피소드: 신선영+호랑이에게 바치는 연가 

어답티트 팟캐스트 시즌5의 마지막 에피소드, 지금 시작합니다.

안녕하세요, 한인 입양인들을 위해 처음으로 생긴 팟캐스트의 호스트 카오미입니다. 이 팟캐스트에서는 지금까지 120여명을 인터뷰하며 해외한인입양인들의 경험을 담아왔습니다. 오프닝 음악을 협찬해주시는 제이진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더 듣기를 원하시면 jaejinmusic.com을 찾아주세요.

“ 우리의 건강과 행복을 결정하는데 핵심적인 가족관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는 것이 제일 힘들죠”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시인이자 대학 교수인 신선영을 만나봅니다. 가장 최근에 출간된 시집“The Wet Hex(역자 가제 : 젖은 주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유령같은 존재로서의 입양인, 입양인으로서 문학의 세계를 넘나듬기그리고 가족 관계 안에서의 인종적 자각등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 봅니다. 

제 이름은 신선영이고 대명사로 그녀/그들을 사용합니다. 48세이고 미네아폴리스에 살고 있어요.

저희 팟캐스트에 나와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함께 이야기 나눌 일이 정말 기대됩니다.

고맙습니다.

새 책을 출간 했잖아요. 그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이번에 나온 책은 시집인데요 지난 6월 14일에 출판됐어요. 제목은 “The Wet Hex (역자 가제 : 젖은 주문)”입니다.  제 네번째 시집이고 Coffee House 출판사에서 나왔어요.

책을 써온지는 얼마나 되었죠?

25년 정도요.

주로 쓰는 내용은 입양과 관련된 그러니까 입양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경험에 대한 내용인가요?

글쎄요. 책을 하나하나 뗴어 놓고 보면 그렇게 느끼지 않을수도 있어요. 하지만 입양인이라는 사실이 내가 쓰고 관계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미쳤어요. 특히나 타국으로, 타인종간에 입양되었다는 사실이 내가 어떻게 사고하고 쓰는지, 내가 어떻게 나의 책과 나의 문학에 다가가는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가르치는 지에도 모두 영향을 주니까요.

“The Wet Hex(역자 가제 : 젖은 주문)”는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죠?

일종에 대량 멸종에 대한 프로젝트를 하다가 시작되었어요. 진화라는 관점에서 인류인 우리는 어디쯤에 있나하는 물음에서요. 진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역사의 모든 단계는 전환기잖아요. 그런 관점에서 지금의 호모사피엔스는 어떤 전환적 존재인가 하는 그런 의문에서 시작됐어요. 인종이나 국가, 기후, 종들간의 평등, 생태계, 한국문화의 여러 면들을 생각하게 되면서요. 제 양아버지가 2017년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어떤 시들은 상실에 관한 여러 면들을 다루고 있기도 하고요. 사후세계라든지 지하세계에 대한 생각들.  그런 생각들에서 시작됐어요.

입양인으로서의 우리는 어찌보면 같은 한 세대라고 생각돼요. 언젠가 닥쳐올 죽음 그리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요즘 많이 하거든요. 가족 그리고 나의 기원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는데 중년을 넘긴 입양인들이 많이 그러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이 책도 선영씨가 나이들어가는 과정인가요? 이런 주제들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하죠. 2020년에 팬데믹이 시작됐잖아요. 그때도 이 책을 쓰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 책 뒤에 있는  작가서문이 유난히 길어지게 되었죠. 팬데믹을 겪으며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우리가 얼마서 서로 긴밀하게 엮여있나, 공공보건등등을 생각하게 되었잔아요. 입양인들의 입장에서 수명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가족력이 없기 때문에 의학적으로 더 취약하죠. 예상수명이 얼마인가같은 질문에서 답할 근거가 없죠. “우리 할머니가 100살까지 사셨고 우리 엄마도 80대 치곤 굉장히 건강해” 이런게 없으니까요, 거기다가 원래의 문화나 생화습관이나 환경으로부터도 떨어져 살았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카톨릭 가정에서 자랐는데 아주 대가족이었어요. 그래서 자라면서 장례식에도 많이 참석했어요. 카톨릭에서는 죽음이 굉장히 큰 부분이니까요. 그러다가 자연스레 제 작품의 일부가 되었죠. 그리고 나이들어가며 아마 45살을 넘으면서부터인가봐요. 그때 자각을 했죠. 내가 이 사회에서 어떤 “어린 노인”의 단계에 들어서는 구나 하고요. 지금 “Z”세대들이 성인이 되었잔아요. 큰 변화죠. 그러니 우리가 벌써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세대인 거잖아요. 가장 어린 알파세대로 부터.

물론 이런것들도 다 다 임의적은 개념이죠. 한번 밀레니얼 세대가 오고 나니까 그 뒤에 바로 “Z”세대가 바로 따라오고. 뭔가 엄청난 주목을 받았잔아요. 우리 “X”세대가 줄 수 있었던, 그리고 우리가 받았던 것 혹은 우리의 역량을 넘어서는 관심을 요구하고요. 우리는 좀더 자유롭게 자라났잔아요. 우리 세대가 이제 나이가 들어가고 우리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것을 보게 되었죠. 그래서 그런 부분이 항상 제 화두에요. 항상 무엇을 뒤에 남길 것이고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를 생각하죠. 그리고 영어선생으로서 시공간을 초월한 작품들을 가르치잖아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같은 작품들이요. 2000년이 지났는데도 지금도 생생한 작품이죠.

물론 번역이 잘 되어서 그렇기도 하지만요. 전쟁, 희생, 가족들간의 비밀이나 불화, 파워, 젠더, 영역 싸움 같은 주제들은 변하지 않아요. 제 세번째 시집에 그 “안티고네”가 많이 녹아들어있어요. 남북전쟁때의 가족의 혈통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며 누군가는 파멸하는 내용이죠. 아무튼 그게 제가 기웃거리는 주제들이에요. 그리고 지금은 나이듦에 대한 주제로 많이 기울고 있어요. 제 아이들이 25살 21살이에요. 저는 꽤 어린 엄마였고 지금도 상대적으로 젊은 엄마죠. 성인이 된 아이들의.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가면서 제 엄마 역할도 계속 변하는 것도 참 재밌고요. 결론적으로 각각의 세대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해요. 특히 제가 대학에서 일을 하다보니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당면한 문제와 그들 세대의 불안은 무엇인가에 대해서요. 매년 저는 늙어가지만 제가 가르치는 그들은 같은 나이대에 있으니까요.

이 젊은 세대들의 불안에 대해 저도 아주 깊이 공감해요. 그리고 지금 초중고에 다니는 학생들에 대해서도요. 제가 아이들을 위한 책도 쓰거든요. 지난주에는 한 학교를 방문했어요. 아이들이 이렇게나 갑지고 소중한 존재들인데 이 나라는 생명을 존중하지 않아요. 아이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죠. 교사들도, 여자들도, 성소수자들도 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런 저런 폭력에 노출되어 있죠. 작가들이란 사회적으로 깊이 관여하고 여러 당면주제들을 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도 항상 이런 이슈들에 대해 쓰는 사람들이에요. 한국 작가들이나 입양인 작가들이나 재미교포작가들이나 모두요. 우리는 모두 집단적으로 트라우마, 고통, 걱정 속에 살고 있잖아요. 물론 희망적이고 재미있는 일도 일어나지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지배구조에 대해서 어떤 대안을 제시해야죠.

다른 입양관련 활동가들은 우리의 존재가 소멸되기를 바라잔아요. 없어져야 한다고요. 이것또한 같은 맥락일까요? 내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맞는.

그렇죠.  오랫동안 생각을 해봤어요. 한국인 해외입양은 없어져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입양들을 위한 활동가들, 미혼모들을 위한 활동가들, 재생산권을 위한 활동가, 가족유지 활동가들 모두 큰 변화를 만들어냈죠. 그런데 제 친척중에 같이 한국에서 입양된 사촌이 있어요. 시카고에서 같이 자란. 저보다 다섯살 정도 어린데요. 여덟살인가? 암튼  그 친구가 몇 년전에 한국에서 입양을 했어요. 세살짜리 여자아이를요. 그 아이 개인을 놓고 봤을땐 집이 생긴거죠. 그래서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고 비록 예전 같은 한인대거입양은 없어졌다고 하더라도요. 그 수준으로 다시 돌아가면 안되고요. 

기후 변화나, 이민, 추방 그리고 한국이 됐든 우크라이나가 됐든 혹은 그 다음 어느 나라가 됐든 사회 불안정을 겪는 나라들, 여성억압, 강제 이주 이런 것들이 제가 깊게 생각하는 주제들이에요. 제가 전문 활동가나 법안을 만든다거나 그럴수는 없지만 적어도 제 분야-제 수업시간이나 제가 쓰는 언어로 사람들과 소통할때 항상 그런 부분들을 인식하고 자료를 나누고 다른 사람들이 이뤄놓은 자료들을 나누려고 해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고 우리는 어디에 있고 어디에서 왔고 미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등에 대해서요. 우리가 입양인으로서 하는 이런 모든 일들도 이 사회의 다양한 담론들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임신중절권이든 임시보호가 됐든 혹은 사회복지, 시민권등의 모든 부분에요.

쓰는 내용이 어떻게 변해왔나요?

그 질문을 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변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어요. 책을 한권씩 낼때마다 다루는 것이 다르긴 하지만 제가 주로 천착하는 주제가 있거든요. 지난번에 나온 시집에서는 환대의 정치학과 손님됨에 대해서 다뤘어요. 손님과 주인이라는 언어와 그 관계가 흥미로웠거든요. 지금은 조금 더 환경적으로 생태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쓰려고 노력해요. 생태시인이라고 하든가요? 기후와 종의 생존등에 관한것들요. 그런쪽으로 제 주제가 변해왔다고도 할수 있겠네요. 하지만 제가 쭉 해오고 있는 것들은 특히 시쪽으로는 제가 원자료수집(역자 주-SOURCE DOCUMENTS)에 관심이 있어요.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다른 사람들이 한 말 – 그게 프로파간다가 됐든 다른 작가들이 쓴 말이든 – 샘플링하고 모아붙이고 하는 작업을 해요. 일종의 업사이클링이죠. 그게 제가 계속 해오고 있는 작업들이에요.  전설이나 동화에도 관심이 있고요.

이번 책에는 한국을 많이 언급 했잖아요. DMZ라던지 휴전선이라던지, 고아라던지, 조금 더 개인적인 경험이 녹아들어있나요?

네. 이번엔 더 내 이야기 같아요. 내 개인의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느끼기도 하고요. 한국에 다섯번 갔었고 그 중에 두번 DMZ에 갔었어요. 제 모든 책들은 디아스포라 (주:이산, 원래의 거주지를 떠나 삶)로서 이곳의 삶과 그곳의 삶 사이의 차이를 붙들고 씨름하는 거에요. 한국과 미국의 관계도 아시아 지역의 정치적 변동과 함께 발전하고 있는 것도 나와 아주 관련이 깊다고 느껴져요. Books and BOBA 팟캐스트에서 한국인 소설가 조셉 하가 나와서 그의 데뷔 소설 “Nuclear Family(역자 가제 – 핵가족) 에 대해서 말하는것을 들었어요. 저도 한 권 구입했어요 . 그래서 이 현재 진형형인 상실과 슬픔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죠. 전쟁이 끝난지 70년이나 되었는데도 갈라지고 떨어져 살아야 되는 사람들말이에요. 엄밀히 따지면 한국은 아직  전쟁중이니까요. 아직도 이산가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고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많이 돌아가셨고 혹은 다들 사실 날이 얼마 안 남았고요. 굉장히 슬픈 일이죠.

입양인으로서 모국과 다시 이어지는데 굉장한 노력이 들어요. 기회비용이랄까요. 한국에 가기 위해서 많은 비용이 들고 역사를 공부하는 것들이요. 그걸 다른 내적 성장에 썼다면 – 테라피 같은 거요. 물론 테라피도 많이 받기도 했고요(웃음). 아무튼 평생을 가는 작업이에요. 또 제 아이들이 닻없이 표류하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무언가를 물려주고 싶기도 해요. 비록 한국에 다른 가족들이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굉장히 훌륭한 질문이었어요. 네. 개인적인 이야기맞아요.  비록 제 매일의 생활이나 어린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그것들이 재미없거나 중요하지 않았어서라기 보다는 한인입양인으로서의 저의 경험은 뭐랄까 조금더 집단적인 경험 같아요.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하잖아요. 백인우월주의라던가, 가족들간에 신념체계라던가, 입양 그리고 미국인으로 흡수, 동화되는 과정등 말이에요. 그래서 그래서 저의 개인의 경험이 시 안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는 않아요. 감추려고 하거나 그런건 아니고요. 저는 다 보여주는 사람이거든요.

시를 읽어줄 수 있을까요?

그럴까요? 제 친구 Sue Hwang을 위해서 쓴시인데 그 중에서 조금 읽어볼게요. 그  친구는 여덟살때 가족과 함께 이민온 한국계 미국인이에요. 몇 년전에 그 친구가 첫 책 “Bodega(역자 가제:잡화점)”를 냈을때 그 친구가 우리에게 여럿이 같이 책을 읽고 모두 “Bodega”라는 제목으로 시를 써달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그때 Bodega라는 제목으로 썼다가 나중에 “Behind This Door is a Siberian Tiger(역자 가제 : 문밖에 시베리아 호랑이가 있어)”라고 다시 제목을 붙였어요.

호랑이 해에 태어난 아이

사과를 쪼갤 운명의 아이

성냥첩을 모으고

들판에 서서 불의 언어를 하네.

시인은 해를 시샘하게 만들어.

마법을 부리 도록.

작아도록.

빈 통나무 속으로 숨어들 도록.

발톱을 무디게 만들 도록.

그 발톱은 지난 달의 달빛을 비춰

빛에 대해 말해볼까?

네 엄마는 그걸 어떻게 발음하지?

아빠는 어떻게 묻어버리지?

오빠는 어떻게 그걸 담보로 잡히지?

신이 약속한

모든 것을 걸면서.

어떤 내용이죠?

돌려표현하고 있는데요. 지금 DMZ가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자연 그대로의 땅이 되었잖아요. 지난 70년 동안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일본군의 강제 점령과 제국주의 합병이전까지 한반도 전역에 호랑이가 있었는데 지금 다 사라졌죠. 시베리아 호랑이와 UMER 호랑이 모두 이제는 자연속에서는 찾아볼수가 없죠. 그리고 제가 호랑이 해에 태어났어요. 산호랑이의 해에요. 그래서 제가 호랑이에 집착하는 것일수도 있고요. 그리고 “Lady or the Tiger? (역자 주-여주인인가 호랑이 인가?)” 라는 단편하고도 관련이 조금 있고요. 80-90년대에 미국에서 자랐다면 학교에서 많이 읽었을 거예요. 선택과 그 미지의 결과에 관한 이야기이죠. 문 뒤에 있는 것이 위험인지 보물인지 알지 못하는.

그리고 하나의 중요한 모티브는 복권추첨이에요. 고아들과 입양인들이 알지 못하는 가족들한테 보내진다는 것이 말이에요. 아이들을 다른 아이로 바꿔치기 했던 것과 같은 입양과정에서의 부조리들 말이에요. 입양부모한테는 이 아이를 데려갈 것이라고 해 놓고 그 아이가 죽거나 친부모가 나타나거나 하면 다른 아이를 보낸다거나 했던 것 같은거요. Deann Borshay Liem의 “In the Matter of Chan Jung Hee”(주-”차정희에 관하여”)라는 영화에서와 같이요. 입양기관에서 이름을 “차정희”라고 하라고 시켰다고 하잔아요. 뭐라고 이름붙이기도 난해한 그런 문제죠. 독자에 따라서는 그리 심각한 문제라고 느껴지지 않을수도 있고요.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의 생존에 대한 연가이죠. 생존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가 하는 물음이기도 하고. 여기서 호랑이는 인간에 의해 그 존재가 위협받고 있는 모든 존재들을 나타내는 거죠.

입양인들이 처한 위험과 우리를 향한 폭력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요. 물론 그 정도의 차이가 어마어마하지만 모든 입양인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버려지고 포기되었다는 면에서요. 그리고 이 미국이라는 인종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나라, 외국인을 원하지 않는 나라에 보내졌죠. 지난 트럼프 정부때 이걸 썼어요. 외국인 혐오, 속함belong, 등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요. 그렇다고 제발 우리를 받아주세요 우리는 여기 사람이에요 그런 뜻은 아이네요. 우리가 원래 살았던 땅도 아니고 착취한 땅이잔아요. 저도 어떻게 보면 점령하러 온 사람에 속하죠. 물론 내가 원해서 오게 된건 아니지만요. 이런 것들이 그 시를 쓸때 아니 모든 시를 쓸때 항상 생각하는 것들이죠. 한국에서 온 소녀라는 존재가 겪는 감정적 부침같은 것들이요.

제가 너무 넘겨짚는 것일수도 있지만 작품속에 폭력이 많이 보여요. 맞나요?

정말 그래요. 제 모든 작품들이 폭력에 관한 것이에요. 제 전집과 아이들을 위한 책들이 모두 마찬가지로 폭력에 반응하는 각각 다른 모습들을 다루고 있어요. 인권침해 혹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와는 달리 설명되는 문제들, 우리가 어떤 이념적 싸움에서 하나의 볼모나 담보로 사용되는 것과 같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에요. 제 개인적으로 보자면 제 양아버지가 아주 화가 많은 사람이었어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저도 화가 많아요. 만약에 우리가 여자이고 내가 먼저 화를 내지 않으면 평생을 뇌사상태 처럼 살아가야 하잖아요. 여자들은 화가 나 있고  아시안 여자들은 화가 나 있다 라는 것은 이제 말 하면 입아프죠. 물론 우리는 다 각각 다른 개인들이지만요.

이 세상이 너무 한심해요. 세상에 폭력이 너무 만연해요. 나이를 불문하고 여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어디에나 있죠. 어디든 안전하지 않아요. 성감별임신중절로 인해 세상을 태어나지 못한 여자아기들에 대해서도 생각을 끊임없이 해요. 남아선호사상때문에 성별의 불균형이 있는 곳들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화가 나요. 너무 속상하고요. 그래서 최대한 큰 목소리를 내려고 해요.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에게든 아닌 사람들에게든요. 세상엔 폭력이 너무 만연하고 그게 제가 세상을 보는 렌즈에요. 물론 기적도 많지만요.

참 멋진 사람들도 많지요. 아름다움 사랑 보살핌도 많고요. 저는 이상주의자이기도 하지만 작가로서 혹은 공공의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이 사회를 비판하는 일이 제가 할일이라고 생각해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폭력을 폭력이라고 부르는 일이요. 이 사회가 이젠 너무 당연시 하고 체념해버린것 같기도 하지만요. 그래서 문학을 파는 이유도 그거 같아요. 그게 제가 쓰는 주제이요 특히 시를 쓸때는요.

책 감수도 했었죠

네. “진실 마주할 시간 : 미네소타의 인종에 관하여(역자 가제, 원제 – A Good Time For The Truth: Race In Minnesota)”란 책이요

미국내에서 가장 백인비율이 높은 곳중에 하나잖아요. 그런 곳에서 자라는 건 어땠나요?

전 실은 일리노이에서 자랐어요. 미네소타가 아니고요. 그래서 제가 처음에 미네소타에 왔을때 제 작업에 큰 화두가 되어줬죠. 보스톤 대학으로 진학을 했다가 세인트폴에 있는 맥갈리스터 컬리지로 편입을 했어요. 그래서 그때 처음 세인트폴에 왔을때 그때 아주 큰 문화충격을 받았어죠. 그때 첫 날 도착해서 당시 남자친구하고 주변을 돌아보는데 미네소타가 처음이었거든요. 교회랑 주류삽이 왜 이렇게 많지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참 이상했죠. 그리고 주변이 온통 백인들 뿐이었어요. 백인세상이었죠.

그리고 바로 적응을 하면서 보니 티비 뉴스에 나오는 사람도 모두 백인, 라디오에 나오는 사람도 백인, 의회도 백인, 그 어떤 관공서도 다 백인, 학교 교장들도 백인, 교수들도 백인.. 끝도 없죠. 1992년 가을의 이야기이니까요. 제가 처음 여기 왔을때가요. 그대 90년대에는 90%이상이 백인인 주 였어요. 지금은 84%가 백인인 주이고요. 물론 트윈시티 (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와 세인트폴)주변은 그때도 상당히 더 갈색(역자 주- 서남 아시아 인을 비롯한  다양한 인종)이었지만요.  50년 전 이야기에요. 그런데 단지 백인이 많아서 그랬던건 아니에요. 저도 백인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주변 환경은 좀더 다문화였거든요. 다양한 인종이 모여사는 도시근처에서 자랐으니까요. 그런데 미네소타에서는 인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금기시되는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첫날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여기 오기전부터 이미 전 내가 유색인종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인종주의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페미니즘적으로 사고하고 있었고요. 그 모든것이 중고등학교때부터 시작됐었죠. 페미니즘까지는 아니었더라도 인종과 지역에 대해서, 이 나라에서 한인 입양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비백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특히 이미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뭘 의미하나 이런 문제들에 대한 고민을 벌써 하고 있었는데. 미네소타에 오니 뭐랄까 불모지에 온 것같은 기분이었어요. 여기는 주된 정서가 인종차별 같은거는 말을 꺼내지 않는 분위기였죠. “여러 인종들이 모여 살게 됐으니 인종차별도 없어졌고 이제 모두 똑같이 취급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그런 수준이었죠.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요.

그러다가 20년이나 머물게 되었네요.

30년이 거의 다 되가요. 이번 가을이면요. 아직도 좀 힘들어요. 제가 집순이라서 겨울스포츠를 안좋아하거든요. 겨울 너무 싫어하는데. 겨울이 너무 길죠. (웃음) 제가 오랫동안 몸담을 수 있는 모임이 있는 것에 감사해요. 제가 처음 시작했을 때는 많이 없었는데 지금은 유색인 작가모임이 인원이 많아요. 탄탄한 모임 같아요. 서로 많이 지지해주고요. 이 범아시안모임에 참 감사한 것이 그냥 중국인 모임만 있고 한국인 모임만 하는것이 아니에요. 물론 나라들 고유의 개성이나 문화들은 있지만요.

그래서 항상 다른 그룹들 다른 이웃나라 그룹들에도 최대한 많이 참여하고 맡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하려고 해요. 너무 미화하는것은 아니지만 이 예술 영역에서 유색인종작가들은 서로 정말 많이 도와요. 적어도 제가 아는 사람들은요.  서로 치켜 세워주고 같이 만들어나가죠. 경쟁한거나 영역싸움 이런거 없이요. 특히나 시쪽에서는 어짜피 돈이 안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냥 좋아서 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니면 다른걸 못해서 하기도 하고 아니면 안할 수가 없어서 하는 경우도 있고요. 특히나 시의 경우에는 사랑해서 하는 노동이죠. 구술이 가능한 예술이기때문에 사람들을 모을수 있고 접근하기도 쉽고요

시를 쓸때 돈이 드는 것이 아니잖아요. 때로는 펜도 필요없을때도 있어요. 그냥 말로 해도 되니까요. 그래서 제가 계속 이 쪽에 몸담고 있게 되는것 같아요. 예술 속에서의 교류,  영감같은거요. 제 생각엔 전 미국에서 우리 모임이 제일 잘 되는것 같아요. 동부나 서부쪽 사람들말을 들어봐도요. 일단 물가가 비싸니까 생활하기가 힘들고 그러니 모임이 여기 같을수가 없죠.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힘들고요. 그러니 세분화도 많이 되어있고요. 그냥 제 생각일수도 있죠.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의견이 있겠지만요.

지금의 유색인종작가들을 보면 많은 경우에 이민 이주과정에서 가족들이 겪은 외상, 부모세대와의 단절등이 주요 소재잖아요.  그런면에서 한인입양인작가들이 다른 이민작가들과 연대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까요?

굉장히 훌륭한 질문이에요. 물론 그래요. 이렇게 왕성 했던 적이 없어요. 입양인 작가들은 미국에서 성장한 1.5세 작가들하고 함께 공유하는 것이 많죠. 두개 혹은 세개의 문화속에서 자란 사람들이잔아요. 그런데 제 주변에 한인1.5세 작가들을 보면 그들 각각 자기 삶에 녹아든 고유의 문화는 있겠지만 한인1세 부모들로부터 지난 이야기나 고생한 이야기 혹은 조상들이 어떤 일을 겪었나 혹은 한국의 역사를 듣고 자란것은 아니더라고요. 1.5세들이 한국어를 못하는 경우도 많고요.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 한국어를 포기한 경우도 많고요.

미국인처럼 보였으면 해서요?

네. 그래서 마치 벤다이어그램 같은 모양이 되는것같아요. 겹치는 부분도 많으나 다른 부분도 큰. 지금까지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일반적으로 한인 입양인 작가들을 많이 포용해주는듯 해요. 그런데 소설쪽으로 가면 좀 다르다고 느껴요. 시쪽은 아무래도 이야기가 좀 덜하다보니까요. 제가 그런 서사시쪽을 안 쓰기도 하고요. 아무튼 소설이나 회고록쪽에서는 좀 이야기가 다른것 같아요. 다만 유색인종으로서 매일의 삶에서 방황하는 모습에서는 공통점이 더 크다고 봐야죠. 

게이트키핑(역자 주 – 결정권자가 보도 할 만한 이슈를 취사선택하는 함.)으로 인해 다 같이 힘들어하니 다 같이 맞서야 하는것도 많고요. 그러니 각각의 분야에 대한 개성은 존중하지만 조직을 너무 나눌 필요는 없다고 봐요. 우리의 경험이 모두 같다고는 말할 수 없죠. 그렇다고 하더라고 외로울 수도 있죠. 제 주변에 입양인들중에서도 그속에서 자란 사람들도 있어요. 같은 아시안들 사이에서 자랐어도 끼지 못한다고 느끼거나 외부자라고 느낄수도 있는거고요. 아쿠는 네가 어디서 자랏고 성인이 되었을때 어디에서 살아가는가에 달려있는것 같아요. 다른점이 분명히 있어요.

다른 한인작가들 사이에서 존재를 인정받는것 같나요?

잘 모르겠어요. 그런것 같기도 하고. 소설이랑 회고록분야는 아무래도 배경이나 스토리면에서 다루는 이야기의 범위가 넓잔아요. 살도 많이 붙고. 장르의 차이겠죠.

문학쪽을 잘 모른는 사람들을 위해서 설명을 더 해주실래요? 소설쪽이 왜 더 힘든건가요? 우리의 경험이 우리가 자란 백인 세상으로부터 만들어진거라서?

제가 한인 작가들이나 혹은 다른 유색인종 작가들 특히 제 나이 또래나 조금 더 나이든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같은 문화권에서 온 멘토같은 동료나 선배들을 찾기 힘들어요. 그것도 힘들고 은근히 자기 뜻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도 힘들고요. 지금도 많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죠. 지금 제가 가르치는 젊은 세대 작가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도 똑같대요. 장르에 관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보면 소설의 경우에 입양인 캐릭터가 비입양인과 상대를 할수도 있고 여러명의 입양인 캐릭터가 그냥 한인캐릭터 혹은 그냥 다른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들어 낼수도 있고요. 그래서 마치 포켓볼처럼 서로 주거니받거니 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서로 어떻게 감정적으로 영향을 주는지도 그릴수도 있고 시공간내에서 스토리라인을 그려낼수가 있잔아요. 그런데 제가 쓰는 시는 등장인물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어떤 시공간을 따라서 등장인물들이 연관되어서 움직이는 그런 세상이 아니죠. 어떤 존재에 관한 한 상황에서 조금더 감정적인 경험에 대한 거고 이미지나 느낌에 대한 거죠. 일시적인 상황일 수도 있고요. 혹은 언어 자체에 관한것일수도 있죠. 그래서 쓰는 시에 따라서 품이 더 들어갈수도 있고요.

그래서 조금 더 표현주의적이 될 수도 있고  인상파처럼 보여줄 수도 있고요 뚝뚝 끈기기도 하고요. 일부러 어지럽게 만들기도 하고요. 물론 소설에서도 가능하죠. 저는 장르간에 차이가 있다는 말을 별로 믿지 않는 편이에요. 물론 전문정을 획득하는 과정은 또 다른 이야기이지만요. 어떤 전문가의 영역에 들어가면 어떤 다른점들이 분명히 있지요. 지난 백년동안 미국내 아시안작가들이 쓴 소설을 보면 이민이야와 부모와 자식  세대간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가 주죠. 특히 성장소설 등을 보면요.  우리는 그곳에 못들어가죠.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우리는 한국가족을 접할 기회가 없었잔아요. 우리가 가족과 같이 오지 않았기도 하고 그들의 손에 큰것도 아니고 떨어져 자랐잔아요.

그런 면에서 좀 소외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입양인으로서의 내 이야기가 담겨있는 소설을 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쓰려고요. 십대들을 위한 소설을 쓰고는 싶은데 아직은 잠정적이에요. 인간복제에 대한 이야기인데 거기에 입양도 들어가 있고요. 하지만 입양인의 삶이 어떤가 그런 이야기는 또 아니고요.  입양인들의 회고록들이 참 좋고 그  중에 굉장한 작품들도 있어요.

입양인이라는 경험이 이 모든 창의력이나 상상력을 배가시켜주는것 같아요. 우리는 뭐랄까 유령과 함께 살고 있잖아요. 우리 주변을 유령이 배회하는 것 같달까요?  혹시 선영씨도 비슷하게 느끼나요? 우리의 삶 안에 유령이 있다고?

고마워요. 그 이야기를 꺼내주어서. 맞아요. 한국인들은 어떻게 보면 20세기 내내 진행된 전쟁과 그 상흔으로 고통에 시달리며 살고 있죠. 입양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미네소타 주립 대학의  Dr. Pauline Boss의 표현대로 애매한 상실(역자 주-Ambiguous loss)에요. 애매한 상실인 이유가 끝도 없고 실체도 없으니까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실체도 없고 어떤 경우엔 전해지는 이야기도 없잔아요. 예를 들어 전쟁중에 실종되어 유해도 찾을 수 없는 친적이라던가 납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가족들처럼 실체도 없고 정황도 없어요.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요.

관계라는 것이 우리 인류라는 종족의 전부나 마찬가지인데 우리의 건강과 행복을 결정하는데 핵심적인 가족관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는 것이 제일 힘들죠. 우리의 행복,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개념, 나 자신에 대한 의식도 마찬가지로 필수적이고요. 그런데 그건 양방향인이기도 해요. 우리의 존재가 비밀 존재일때가 많잖아요.그게 평생 친부모한테 고통을 주죠. 그러면 그것이 우리의 형제자매들한테 영향을 끼치겠죠. 그들이 우리에 대해 알던 알지 못하던요. 비밀이라는것이 그 비밀을 쥐고 있는 사람 주변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니까요. 그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한테도요. 그러니까 뭔가 있어요. 어쩌면 이중의 유령과도 같은 존재죠. 우리가 귀신한테 홀림과 동시에 우리 자체가 살아있는 유령이 되어 친부모가 됐든 우리의 존재를 아는 조부모가 됐든 우리가 유령이 되어 그들의 삶을 홀리고 있죠. 그리고 우리 입양인의 존재가 한국을 흔들고 있잖아요. 몸을 놓고 벌어지는 한국의 정치 상황이나 고아 수출등에 관해서요. 정치적으로나 시민사회에서 귀속될 권리를 빼앗긴 사람으로서 말이에요. 

그래서 이 유령의 비유가 적절한것 같아요. Avery Gordon 의 “Ghostly Matters: Hunting and the Sociological Imagination(역자 가제 – 유령에 관한 :  유령에 들림과 사회적 상상)”을 추천하고 싶어요. 미국의 백인 인류학자에요. 또 Grace Cho의 첫 책 “Hunting the Korean Diaspora(역자 가제 : 한인 이주 뒤흔들기”와 최근 책인 “Taste like War”(역자 가제 : 전쟁의 맛) 를 추천하고 싶어요. 이 책들이 제가 “Hunting(역자 주- 유령들림) 에 대해서 파고들 때 항상 보게 되는 책이에요. Grace Cho는 인류학자라서 항상 광범위하게 조사해보죠. 입양인은 아니고 한국인 엄마 백인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우리가 외국에 오래 살다가 돌아오면 신용유령이라고 한다고 들었어요. 신용을 쌓을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병원에서도 마찬가지에요. 가족력을 모르니까 의료기록에 있어서는 유령이나 마찬가지죠.

“Invisible Asians(역자 가제 : 보이지 않는 아시안들)”이라는 Dr. Kim Park Nelson의 책이 있어요. 일인 식민지(역자 주 – Colony of One)” 라는 개념을 그가 명명했거나 아니면 다른 학자가 고안한 개념을 썼던가 할거에요. 그 제목이 참 와 닿더라고요. 책이 나온지는 꽤 됐을거에요. 우리 입양인들은 너무 고립되어 있고 자라면서도 다른 입양인들이나 다른 한국인 모임이나 한국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분리되어 살았기 때문에 그 1인식민지라는 개념이 우리가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실존적 존재였는지를 보여주죠. 그래서 제가 어디가서 강연을 하거나 할 기회가 생기면 입양이라는 것이 왜 어떤 실존적 상황인지 그냥 단순히 집이 생기고 가족이 생기고 먹을 것이 생겨서 좋은 것이 아니라는 걸 설명하려고 해요. 가족이 생기고 음식이 생기고 집이 다시 생겼어도 학대받고 그러잖아요.

작품을 한 편 더 읽어줄 수 있나요?

그럼요. 이건 더 입양에 관한 것인데 아주 짧아요. 제목은 “Our Country Laundered Us (역자 가제 : 내 나라가 나를 세탁해버렸다. )”에요. 고아세탁이라고 아 이름이 생각이 안나는데 중년이 되니 이러네요. David Smolan이 명명한 개념일거에요. 그도 한인 입양인의 부모인데 법학과 교수인가 그렇죠.

내 나라가우리를 세탁해버렸다.

그것도 종이 위에.

숲도, 빵 부스러기도, 조약돌도

계모도, 아빠도, 죽은 엄마도

빗자루도, 새 장도, 설탕도

파리도, 혓바닥도

기지촌 여자들도.

계속되는 세탁소리.

술집들과 기지촌도,

얼룩말도, 낙타도, 양도,

여물통도.

신과 그의 천사들도, 악마도,

출생도, 사건도.

하얀 빛도, 열기도, 욕설도, 화염도.

한밤중의 희생적 비행

마침내 깨끗해졌다.

굉장히 시적이고 상징적이에요.

고마워요. 이건 뭐랄까 헨젤과 그레텔 같은 이야기에요. 예수와 마리아 같은 시일수도 있고요. 제 어린시절로 부터 떠오르는 원형같은 이미지죠. 이런 원형의 가족같은 이미지가 계속 떠올라요. 왜냐하면 버려진 아이들의 이미지가 항상 가슴속에 있거든요.

미국가족들이 작품속에 등장하기도 하나요?

그런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이름을 쓰고 하진 않지만요. 하지만 항상 존재하죠. 오빠가 있는데 오빠도 입양됐거든요. 그런데 오빠는 미국내 같은 백인간에 그것도 가까운 지역에서 입양됐어요. 친부모가 아마 아직 결혼전이었던가 그래서였을거에요. 그런데 그건 부차적인 이야기이고요. 아무튼 그래서 다른  입양인과 함께 자라기는 했지만 그와 나는 다른 인종이기때문에 그에 따른 각각 다른 경험을 했고 그것이 가족간의 친밀감을 쌓는데 다른 역할을 했겠죠. 그래서 그런 것들에 대해 항상 생각을 하죠. 그리고 그에게 지금 아이들도 있거든요. 그래서 백인 입양인의 백인 자녀들은 또 어떻게 자라날까 하는것도 그 다음으로 생각해볼 주제고요

제 아이들의 경우에는 부모가 둘다 입양인인 혼혈아이들이죠. 애들 아빠도 입양인인데 그의 경우엔 가족 내 입양이었어요.  얼마전에 Ancestry.com을 통해서 멕시코에 있는 친부와 할머니를 찾았어요. 항상 이 핵가족에 대해서 생각해요. 마음속에 항상 어떤 인형의 집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극장 같은 집이요. 한 곳에는 내 입양가족이 있고 한쪽에는 한국의 가족이 있어요. 그리고 아버지하고는 거의 10년간 연을 끊고 살다가 연로해지시고 사실 날이 얼마 안남게 되었을 때 다시 화해했어요. 아버지가 반이민자 슬로건 같은 것에 빠지셔서 대학때부터 연을 끊었거든요. 도무지 관계를 이어가는것이 불가능했었죠. 나도 그런것을 듣고 그냥 넘겨버릴 수가 없었고 서로 한치의 양보도 안했죠. 그런데 그 뒤로 조금 유해지시기도 했고 병세도 악화되고 그래서 그냥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더라고요. 부모님은 제가 대학때 이혼하셔서 그때부터 따로 사셨고요. 엄마는 아직도 건강하세요

78세이신데 일리노이주 시골에 사시고요.  제 입장에서 말하자면 엄마랑 가깝다고는 할수 없을것 같네요. 사이는 좋은 편이고요. 깊은 이야기까지 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지만요. 제 책도 읽으신적도 없어요. 책 읽는 스타일이 아니셔서요. 사는 이야기 서루 공유하고 아이들도 보여드리고 그런정도요. 그러니 이 정도면 좋은 사이라고 할수 있겠죠. 하지만 입양인으로서 항상 부모로부터 멀게 느껴졌었어요. 오빠랑도 잘 지내고요. 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더 가까워진것 같아요.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요. 우리가 같이 자랐다는 것이 고맙고 우리가 어린시절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이 아주 다르기는 하지만 같이 자란 형제자매가 있다는 사실이 고맙고요. 그리고 엄청 싸웠어요. 그래서 회복력이나 끈기 같은것을 기를 수 있었죠. (웃음)

입양인들과 이렇게 계속 연결되는 것이 우연일까요?

아니죠. 분명히 이 세계에 갇혀 있어요. 아이들 아빠와 이혼 이후에 만났던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임시보호 경험이 있거나 입양되기를 기다렸었거나 혹은 입양인이거나 아니면 부모가 입양인인 사람들이었어요. 제가 일부러 그렇게 찾아다닌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보면 입양인의 경험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사람하고는 가까워질 수가 없으니까요. 꼭 한인입양인일 필요는 없고요. 하지만 입양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죠. 그래서 일부러 계획을 하고 의식을 하는건 아니지만 항상 그렇게 됐어요. 아이들 아빠조차도요.

그런 사람들에게 끌리는 군요.

(웃음) 맞아요. 꼭 상처에 끌리는 것같아요. 그렇게 건강한것 같지는 않죠? 확실한 건 어떤 식으로든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한테 끌린다는 거에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우리중의 많은 수가 인종차별주의자속에서 자랐다고 했잔아요. 자기가 인종차별주의자인지도 모르는 양부모들 말이죠. 그것이 아이들을 키우는데 어떤 영향을 주는 것 같나요? 지금 성인이 다 됐잔아요. 그래서 아이들을 키우는데 있어서 조금더 의식적으로 인종차별적인 요소를 없애려고 노력하나요?

물론이죠. 제 애들은 몸만 성인인 아이들이에요. 딸아이는 아직 대학생이고 아들아이는 직장생활을 하긴 하지만 아직 애들이죠. Z세대 중에서 좀 나이든 쪽이라고 할까요? 모두 상당히 긴 어린시절을 보냈죠. 사회가 변했으니까요. 제 부모님은 그래도 다른 미네소타의 친구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본바에 의하면 상당히 괜찮은 분들이셨던것 같아요. 시카고주변에서 자랐기 때문에 인종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는것 자체가 금기시되고 그러진 않았거든요. 아예 심한 인종차별주의자이거나 아니면 다른인종과 친구이거나 그랬죠. 서로 다른 인종 간에 친구가 될수 있었어요. 왜냐하면 시카고 자체도 꽤 인종분리가 심한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유색인종이 아주 많았고 그래서 일터에서 같이 일하거나 이웃이 되거나 다양한 음식을 접하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에요.

제 부모님은 저를 같은 백인으로 취급하거나 하지는 않으셨어요.  특히 미네소타로 입양된 저와 같은 또래들과는 달리 말이죠. 저희 부모님은 제가 한국인이지만 미국 시민이기도 하다는걸 항상 강조하셨죠. “People of color(역자 주-유색인종)”이라는 말을 쓰거나 하지도 않으셨어요. 저를 백인만의 특정한 문화나 행동양식등에 맞추려고 하지는 않으셨죠. 어떤 이념을 추종한다거나 하지 않으셨어요. 복음주의 신도들처럼 저를 어떤 백인구원자적인 시각으로 보거나 하지도 않으셨죠. 다른 입양인들이 겪은 것처럼 말이에요. 어려서부터 인종이라는 것에 굉장이 눈을 떴는데 중학교 교장선생님이 흑인이기도 하셨고요. 엄마가 본인도 모르는새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할때 저는 그게 다 느껴졌어요. 제가 자란 일리노이 부룩필드 근처는 중심가로부터 20분 정도 떨어진 곳이라 폴란드인, 아이리쉬인, 라틴아메리카 사람들, 이태리 사람들이 많았어요. 모두 노동자계급들 이었죠. 그리고 우리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철길이 있었는데 그 철로 주변으로 흑인들이 모여 살았거든요. 우리 사회가 차별적이니까요. 그런데 엄마가 “유색인종들이 많이 사는 곳을 지나갈때는 조심해야 해” 라고 말할 때 굉장히 인종차별적이었죠.  물론 제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줄은 알았지만 어쩜보면 그런 것들이 다 미디어등을 통해 각인된거잔아요. 본인이  직접 흑인들한테 해꼬지를 당했던 것도 아니고. 아무튼 그럴때 인종차별적이었죠. 

그리고 우리 아빠쪽 가족들은 모두 시카고 남부쪽 출신들이고 지금도 다들 그 근방에 살아요. 그래서 N-word를 쓰는게 일상적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조심했어요. 그냥 튀어나올 까봐요. 그리고 제가 또 굉장히 경계할때가 있었는데 가족들이 외식을 하거나 할때면 사람들이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항상 알고 있었어요. 저는 다르다는 걸요. 그리고 인종으로 사람을 달리보는게 너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가 부모가 되고 나서 아이들을 인종적으로 다양한 학교에 보내고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곳에 사는 것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아이들 주변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으면 했거든요. 그들 주변에 있는 어른들이 여러 다른 사람이 되도록 말이죠. 특히 아시안들이요. 그래서 아이들이 어떤 롤모델을 가질수 있고 우리 아이들이 특출나지 않고 튀지 않도록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물려주는 것이 힘든가요?

글쎄요, 그건 애들한테 물어봐야 되는데. 2018년에 아이들을 한국에 데려갔었는데 그렇게 할수 있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갈때마다 힘들거든요.

마음 편한 여행은 아니죠.

네 쉬운 여행은 아니에요. 갈때마다 준비할 것이 너무 많고 매번 다르죠. 그리고 이제는 심정적으로 감정이 격해지고 하는 단계는 지났지만 그래도 준비할 것이 많아요. 그래서 애들한테도 항상 뭘 좀 더해줬어야 하나 하고 느껴요. 한국어 학교에도 좀 보냈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아마 제가 말을 꺼냈었는데 애들이 싫다고 그랬었을거에요. 그래도 항상 좀 더 했어야 되는데 좀 더 할 걸 그렇게 생각하는거죠.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할만큼 한것 같아요. 아이들과 항상 이 입양이라는 것에 대해 공유했고 알만큼 알고 있고요. 한국음식이나 물건등요. 그리고 그때는 요즘같은 스트리밍서비스도 없었잔아요.

그때는 넷플릭스만 틀면 한국 드라마가 나오는 시대도 아니었고요. 요즘처럼 한류다 K-culture가 융성하던 때도 아니었고요. 지금은 그래서 같이 “기생충”영화도 보고 많이 쉬워졌어요. 그리고 아이들 아빠가 한인도 아니니 쉽지 않죠. 하지만 또 그냥 개인이면 되는거잖아요. 아이들한테 한국인 조부모를 못 준 것이 짠하기도 하고 한국인 사촌들이 없는것이 미안하기도 하죠. 그래서 아이들이 대가족 출신인 사람들에 비해서 뭔가 뿌리가 없다고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요. 왜 그쪽은 소말리아 가족들이 라던가 하는게 없잖아요.  그래서 아이들한테 최대한 뿌리를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혹시라도 아이들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내가 미안하죠.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요. 그렇게 느끼는것이 이상하지 않고 나한테 화내도 괜찮다라고요. 그건 일생을 통해 계속 변할테니까요.

입양과정에 대해 알게 된 사실들이 있나요?

네. 제 서류에 의하면 실은 서류가 두 개에요. 하나는 제가 홀트에서 발견됐다고 하고 하나는 서울의 한 파출소에서 발견되어서 홀트로 보내졌다고 하고. 그리고 서류에 의하면 임시보호 가정에서 6개월 정도 있었다고 하는데 제가 발견됐을때 9개월 정도로 보였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미국에 온것은 13개월이었고요. 감기 등으로 출발이 지연이 되었다고 는 하는데 아무튼 뭐가 앞뒤가 좀 안 맞아요. . 물론 이 입양이라는 모든 일이 앞뒤가 안 맞지만요. 그리고 제 임시보호 가정엔 어른 네명과 개가 한마리가 있었대요. 홀트에 가서 조사를 좀 했는데 통역사를 데리고 가서 제 서류를 보자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이만큼이 우리가 공개할수 있는거다 하면서 보여주더라고요. 제가 볼수 없는 서류들도 많았고요. 제 생각엔 친부모에 대한 어떤 1급 비밀 같은것도 아닌것 같은데 말이죠. 제 임시보호 관련 서류로 보였죠. 그것도 제가 알면 안되는 거였고요. 그런데 제가 미국으로 입양되어 올 때 텍사스의 기독 선교단에서 나를 데려와줬거든요. 그때 저를 데리고 와준 분을 페이스북을 통해서 찾긴 했어요. 나이가 좀 많아서 그분하고 실제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던 것 같고 자녀분들과 이야기를 좀 했어요. 그게 제가 아는 다예요

그럼 그걸로 출신 찾기는 끝난건가요?

그런 셈이죠. DNA테스트도 두번이나 했는데 가까운 친척은 찾을수 없었어요. 10촌 넘어가는 사람들만 미국, 한국, 베트남, 중국에 퍼져있더라고요. 그래서 아주 가까운 DNA가 나타나거나  제 가족들이 홀트에 찾아가서 저를 먼저 찾지 않는 이상은 힘들다고 봐요. 제가 서류에 제 기록을 남겨 놓고 왔거든요 제 이름등등요. 티비에 나갔던 것도 아니고 광고를 낸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 더 할 일은 없다고 봐요. 제 생일이나 발견 날짜등이 다 정확하지 않아서요. 만약 누군가가 날 찾고 있고 날짜를 대략이라도 기억하고 있다면 그래도 그것이 단초가 될수는 있을텐데 그런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더 이상 할수 있는것이 없다고 봐요. 많이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해요.

오늘 나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영씨 책은 어떻게 구할수 있죠?

온라인으로 구입하신다면 BOOKSHOP.ORG으로 구입하실 것을 추천해요. 독립서점들을 후원하는 곳이거든요. 혹시 미네소타에 계시다면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Moon Palace, 세인트폴에 있는 Next Chapter,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Birch Bark에서 구할수 있어요. 세인트폴에 있는 Subtext도 항상 제 책을 너무 잘 다뤄주고요. Majors and Quinn도 좋고 어디든 가시면 구할수 있어요. 출판사인 Coffee House 를 통해서 사셔도 되고요. 그런데 이런 동네서점들이 요즘 너무 멋지거든요.

다른 작품들은 뭐가 있나요?

“Outsiders Within:Writing on Transracial Adoption (역자 가제 – 내부의 외부자들: 타인종간 입양에 관하여)” 가 있어요. 2판이 작년에 미네소타대학 출판부에서 나왔어요. 제가 Jane Jeon Tranka 그리고 Julia Chinyere Oparah와 함께 감수한 책이고 50여명의 공동저자가 있는 책이죠. 대부분이 비백인이고요. 그중에는 입양인 출신인 학자들도 있고 아닌 사람들도 있는데 모두 입양관련 연구에 동참해주는 분들이죠.  작년에 나온 음식에 관한 책 “What we hunger for:Refugees and Immigrant stories about food and family(역자 가제 : 우리가 먹고 싶은 것: 난민과 이민자들의 음식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 도 있고요. 미네소타 역사출판사에서 나온 책이에요. 어디서든 구하실수 있어요. “A Good Time for the Truth and Race in Minnesota(역자 가제 – 진실을 마주할 시간 : 미네소타의 인종적 진실에 관하여)” 도 있고요. 2016년에 나왔는데 지금도 쉽게 구하실수 있어요. 슬프지만 지금도 유색인종들에 대한 폭력이 만연하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책도 두권 있고요. “쿠퍼의 레슨”이라는 책이고요 한국어와 영어 두가지 버전이 있어요. 시카고에 있는 Lee and Low출판사에서 나왔죠. 그리고 제가 공동집필한 그림책이 10월에 나와요. 다코타출신으로 미네소타에서 활동하는 Diane Wilson 그리고 미네소타에 사는 동화작가  John Coy 와 흑인 혼혈입양인이자 소설가 그리고 전집 편집자인 Shannon Gibney와 함께 쓴 책이에요. “Where We Come From(역자 가제 : 우리는 어디에서 왔나)”에요. 10월에 출판 예정이에요. 우리의 모두의 조상들에 관한 이야기가 잘 역여서 그려지는데 인간 진화에 대한 큰 그림을 보여준다고도 할수 있어요.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더 기대됩니다.

저도 정말 고마워요.카오미씨.

선영씨 고맙습니다. 이 팟캐스트를 후원해주시는 분들과 매 시즌 돌아와주시는 청취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잠시 여름 휴가를 가질 예정이에요. 그 사이 혹시 놓친 에피소드가 없는지 찾아 들어주세요. 입양에 관한 다른 팟캐스트들을 찾아 들어보기에도 좋은 시간이 될거에요. 아니면 잠시 다 내려놓고 쉼을 갖는것도 좋겠어요.

                                                          (번역 : 전유근 )

Season 5, Episode 10: 아픔, 그리고 용서

“상처받고 아파하는 것의 최종 단계는 놓아버리는 것인데 이 놓아버리는 것이 바로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하는 용서죠”

제 이름은 조이(JO-YI)이고 제가 다시 지은 이름이에요. 한국식으로 하면 김조이가 되겠네요. 제가 미국에 왔을때 이름 철자를 바꿔서 조이 김 메러디스 데이비스( JO-EY Kim Meredith Davis)라는 이름을 받았거든요. 이십대가 되니까 갑자기 너무 진절머리가 나더라구요. 다른 사람들이 저에 대해 이런 저런 사실들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요.. 그래서 이름을 최대한 다시 원래 대로 돌렸어요. JoYi로 철자를 바꾸고 성도 Rhyss라고 제가 선택했어요. 그 어디 와도 연고가 없는 이름이죠.. 그래서 지금 제 이름은 조이 김 뤼스 (JoYi Kim Rhyss)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 

뤼스라는 이름을 스스로 선택했다고요? 

맞아요. 제 세 아이들과 제가 같이 쓰는 이름이에요. “강인함”, “열렬함” 이런 뜻인데 저하고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해요..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죠?

51살이에요. 생일이 두개죠. 3월에 있는 생일이 나중에 알게된 생일이에요. 3월 23일이 제 진짜 생일이라 그때가 되면 52살이 되겠네요. 그런데 미국 시민권에는 4월 23일로 되어 있어요. 다른 입양인들 처럼 나에 대한 사실들이 막 만들어진거죠. 친엄마를 찾았을때 내 진짜 생일을 알게 됐죠. 그날이 입양된 날이기도 하고요. 아무튼. 제 생일은 3월 23일이고요 답을 짧게 하기가 어려운 질문이에요. 

피부가 너무 좋아보이네요. 스스로의 정체성을 뭐라고 생각하나요?

흑인인 여성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살짝 갸우뚱 하기도 하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거의 자동적으로 흑인 여성으로 절 보거든요. 그리고 제가 다른 흑인들을 볼때 느끼거나 알아챌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한국인들을 볼때는 그러지 못하는 것들을요. 그리고 아홉살까지 한국에 살았는데 그 기억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인임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지금 스물 두살인 제 딸아이가 왜 엄마는 아시아인 인것을 내세우지 않냐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하대요. 그 애는 어릴적부터 미네소타의 콘코르디아 한국어 캠프에 가고 싶어 해서 제가 보낸적도 있고요. 그래서 중학교 이후로 한국어 학교에도 가고 저한테 한국 음식도 만들어 달라고 하고 그랬어요. 꽤 성가셨죠(웃음). 지금은 제가 혼혈이라는 것을 받아 들이고 한국에도 가봤을 정도구요.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미국에 사는 흑인인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요. 

아홉살 때, 입양이 될 당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어떤 기억이 남아 있나요? 

기억이 별로 없어요.. 그리고 제 기억을 제가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어요. 항상 제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던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많은 부분이 굉장히 흐릿해요. 엄마와 같이 부산에서 살았다는 것, 그리고 친 오빠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사를 많이 다녔던 것이 기억나고 몇몇 장면들이 스치듯이 떠올라요. 많이 울었던 것, 항상 도망다녀야 했던 것, 놀림을 당했던 것들이 때려 맞듯이 떠오르는 장면들이에요. 뭐랄까 갑자기 헉! 하고 통증이 오는데 동시에 이젠 더이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도하는 그런 기억이요. 

제가 제 일 – 상실, 트라우마 상담-등을 할때 공개하는 이야기인데요. 제 첫 기억은 엄마한테 오빠가 어디갔냐고 묻던 기억이에요. 어느날 갑자기 오빠가 없어져 버렸어요. 같은 혼혈이라 저와 비슷하게 생기고 어느 정도는 저를 보호해주고 그래서 제가 많이 따랐던 그런 오빠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어요. 그때 제가 다섯살이었으니까 오빠는 아마 열살정도 됐었을거에요. 그 뒤로 아무 소식도 없었죠. 아무도 저한테 오빠가 어디로 간건지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말을 안했어요. 그런데 그때 저희 같은 혼혈 아이들이 많이 없어졌다는건 알고 있었어요. 이미 그때에도 우리가 혼혈이라서 한국사람들이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언젠간 나도 멀리 보내질수도 있다는 것도요. 그게 제 첫 기억 아니 어쩌면 세상에 대한 첫 인식이었을수도 있어요. 

 그리고 제가 여덟살 반 정도 됐을때 1978년 10월이었죠. 그때 엄마가 저를 Father Keane’s home for Amerasian youth(역자 주: 미국인 킨 신부가 설립한 혼혈아동들을 위한 시설)에 맡겼어요. 거기서 6개월쯤 있었어요. 혼혈아이들을 위한 곳이었는데 백인혼혈아이들이랑 한국인 아이들만 받아주고 흑인 혼혈 아이들은 안 받으려 했어요.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애들 중에서도 우리는 더 아랫계급이라는 것을 고아원에서까지  확인받아야 했던거죠. 거기서 6개월 정도 머물렀어요. 꽤 짧은 시간이죠. 제 기억이 확실하지 않을수도 있고요 항상 제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어요. 생존모드에 있었다고 나 할까요? 최대한 조용히 눈에 안 띄게 말이에요. 그렇게 버텼던 것 같아요. 얼굴에 흉터가 있는데 돌에 맞아서 생겼다는 것은 기억이 나요. “N-word”(역자 주- “Nigger, 깜** )로 불리는게 일상이었고 매번 도망가고 숨어야 했던 기억이 나요. 엄마가 울지만 말고 차라리 더 빨리 도망치라고 제게 말했던 것도 기억나고요. 놀림받지 않게요. 

엄마가 친척들을 방문할때면 같이 못 들어가고 저만치 떨어져서 엄마가 나올때까지 기다려야했어요. 그게 할머니와 할아버지였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가 흑인이라 같이 못들어가고 밖에서 기다려야 했던것은 분명히 알았어요. 다른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이건 내 나라가 아니구나 하는걸 분명히 알았죠. 나는 여기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요. 인종차별이 아예 노골적이었어요 아예 대놓고 얼굴에 대고 하는 수준이었어요. 여기 미네소타주가 자랑하는 티나지 않는 은근한 인종차별이 아니고요. (웃음) 물론 그것도 처음엔 문화충격이긴 했어요. 적어도 한국에서는 내가 설자리는 분명했었거든요. 어딜가나 야유와 조롱을 받을거라는 것을 알았고 그게 일상이었어요. 어른들이나 아이나 똑같았어요. 

지금 이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중년에 접어들면서 힘든 시기가 찾아왔거든요.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잖아요. 내가 누군지 그런 것들이요. 그때 제가 살았던 고아원을 검색해봤어요. 어떤 다큐멘터리를 찾았는데 뤽 스몰란(Rick Smolan)과 나타샤 프뤄스( Natasha Pruss)의 테드톡이었죠. 뤽이 그 몇년 전에 책을 출간했대요. 그가 20대 때 타임지의 사진기자로 활동했는데. 나타샤라는 한국의 어느 산 중턱마을에서 찾아낸 아주 활기찬 여자아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대요. 그 사진기자의 눈에 다른 혼혈 아이들은 마치 좀비 같았는데 나타샤는 눈에 생기가 돌고 밝은 기운이 가득했다네요.. 그 기자의 나레이션이 너무 짜증나서 스크린 너머로 한대 후려 치고 싶었지만 혹시 나의 과거에 대한 어떤 실마리라도 찾을수 있을까 해서 좀 화가나도 그 것을 계속 보고 있었어요. 화면도 오래되고 아무튼 좀 별로였는데 갑자기 화면이 바뀌면서 어떤 사진이 나왔는데 거기에 제가 나온 거에요!!!  사진속에 제가 있었어요. 그때가 기억나요. 엄마가 날 놓고 가버린 것이 너무 트라우마가 커서 고아원에 남겨졌던 날 말고는 다른 기억이 없는데 그 날은 기억이 나요. 갑자기 사람들이 저한테 잘해주고 머리를 빗겨주고 새옷을 입혀줬어요. 나타샤를 위해 사진을 찍는 날이었던 거에요!! 나타샤랑 저랑 둘이 나이가 좀 많은 편에 속했어요. 나타샤는 열한두살 정도 였을거고 저는 아마 여덟살이었을거에요. 우리 둘다 더 어린 아이들을 안고 있었어요.. 나레이션에서 그 사진작가가 말하길 다른 아이들은 눈에 생기가 없고 영혼이 없어 보인다고 마치 좀비처럼 그냥 흐느적거린다고 말을 하더라고요. 정확히 그가 그렇게 말한건 아니고 제가 대충 기억하기론 암튼 그 비슷하게 말했어요.. 그러면서 사진들을 보여주는데 그가 말하는 그 좀비같은 아이가 바로 나더라구요.. 나타샤는 사랑스러운 아이고요. 제가 바로 그 영혼이 없어보이는 아이였고요.. 그 뒤로 나타샤를 만났는데 아주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아예 백인으로 보였어요. 백인 혼혈인데 그냥 백인으로요.. 그러니 아마도 백인구원자의 시각에서 그 젊은 남자 기자가 어린 나타샤를 봤을때 어떻게든 구해주고 싶었겠죠. 딱 그림이 그려지잖아요. 그쵸?

그리고 지금도 난 그 서사를 벗어나지 못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대요. 평생을 그것과 싸워왔는데 말이에요. 저는 같은 인간이 못되고 그냥 주변을 배회하는 존재인거죠. 나도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증명해야 하고  “너는 대체 정체가 뭐니?” 라는 질문에 항상 답을 해야 했죠. 그 질문을 받는 다는 것 자체가 내가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다는 거잖아요. 

그 비디오를 보면 모든 사람들이 저를 좀비라고 생각할거에요.. 그러니 저한테 한국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뭐냐고 물어보면 어떤 1차적인 기억이 없다고 말해요. 저는 항상 좀비였으니까요. 

굉장히 힘들었겠네요. 살기 위해서 어쩌면 기억을 놔버린 것일수도 있죠.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요. 엄마가 고아원에 데려다주던 날이 기억이 안난다고 했던가요? 아니면 혹시 기억나는 것이 있나요?

엄마랑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나요. 엄마가 날 고아원에 놓고 돌아서서 가던 기억은 나요. 그게 무슨 상황인지 분명히 알았던것 같아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던것 같은데 가끔은 그것이 제가 지금 한국어를 못해서 인가 싶을때도 있어요. 그때의 기억은 한국어로 되어 있을텐데 미국에 온 이후로 한국어를 잃어버렸으니까요. 아마도 그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해요. 어떤 말도 기억이 안나는데 그냥 알았다는 것만 기억나요. 내가 여기서 나갈수 있을때까지 여기서 살아야 한다는것을 알았다는 것만요. 

그럼 미국에서의 제일 첫 기억은 뭐죠? 

미네소타 공항에 내린거요.. 카오미씨의 경우와는 또 다르게 입양부모에게 이미 아들이 둘이나 있었어요. 다섯살짜리와 한살짜리가 있었는데 고아원에서부터 이미 아이들을 돌봤어가지고 한살짜리가 막 뛰어가니까 제가 쫒아갔어요. 눈폭풍을 뚫고 어떤 친척집에 갔는데 거기서 오즈의 마법사를 봤어요. 미네소타에 도착한 첫날 밤에요. 나중에 알고보니 사촌들이었어요. 다들 저를 보며 좋아라 했고. 그들을 보며 저도 그럴려고 흉내를 냈던 기억이 나요. 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행복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누군가가 행동을 잘 하라고 미리 귀띰을 해준것 같기도 하고요. 안그럼 다시 돌려보내질수도 있다고요. 그 전에 고아원에서 입양을 갔던 친구 하나가 다시 돌아왔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초기 몇년간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빨리 배워야 한다고 항상 의식적으로 노력했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그날밤에 모두가 흥분한 상태로 이불을 바닥에 깔아놓고 잠옷을 입고 누워 오즈의 마법사를 보는데 저는 생각했어죠. ‘그래 지금은 이걸 하는거야’ 이렇게요. 돌아보면 그렇게 항상 내 스스로를 의식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봤어요 내 몸 밖에서 내가 하는 일을요. 그런식으로 기억이 여러겹으로 존재해요. 

그 후로 미네소타의 스프링타운이라는 작은 마을로 갔어요. 인구가 1000명 남짓이었는데 그곳에 제 입양아버지가 루터교 목사로 부임했거든요. 노르웨이 후손들이 사는 마을이라서 마을의 표지판도 노르웨이어로 되어 있었어요. 미국의 가장 큰 노르웨이 공동체였어요. 아무튼 갑자기 이 잘 모르는 사람들을 엄마아빠라고 부르며 살기 시작했죠. 다섯살 짜리는 진짜 제 속을 많이 썩였고 계속 울고 절 힘들게 했어요. 한 살짜리를 돌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죠. 고아원에서부터 애를 어떻게 보는지 배웠으니까요. 가끔씩은 애보는 사람이 필요해서 나를 입양했나 싶은 순간도 있었어요. 온지 얼마 안되었을 때 벌써 저 혼자 밤새 애를 봐야했던 적도 있었어요. 그때 열살도 되기 전이었거든요. 지금 기준으로는 말도 안되지만 그땐 오래전이니까요. 그때도 아직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애를 맡기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아무튼 그렇게 제 미국에서의 삶이 시작됐죠. 그 후로 학교에서 ESL(제 2외국어서의 영어)도 듣고 백인만 가득한 아주 작은 마을에 익숙해져 갔죠. 다들 같은 학교를 가던 아주 작은 마을이었는데 거기에 몇년을 살다가 아이오와주 데모인으로 이사를 갔다가 또 캔자스주 토피카로 이사를 갔어요. 그렇게 이사를 할때마다 사람들하고 사귀는 것이 조금씩 힘들어졌어요. 조금씩 나이를 더 먹으며 조금씩 더 어색하고 불편해졌으니까요.

지금은 입양 가족 모두하고 연을 끊었어요. 오랫동안 거의 반강제로 인연을 이어오다 그렇게 된지 얼마 안 됐어요. 한국에서는 제가 제일 막내였다가 오빠가 어느날 사라졌죠. 그리고 이 집에 입양이 되고 나서는 갑자기 제가 제일 맏이가 되더니 온갖 책임이 맡겨졌잖아요. 제일 큰애이자 유일한 딸이 된거에요. 갑자기 두 어린 동생을 돌볼 책임이 생긴 큰 누나가 된거에요. 그리고 나서 5년쯤 후에 한국에서 다른 아이를 또 입양해서 이젠 그애가 막내가 되었고 저는 네 아이 중에 첫째가 되었죠. 둘은 입양한 아이들이고 둘은 친자식들이었죠. 그때로 돌아가서 어떤 연구같은 것을 해보면 참 재밌을것 같아요. 공교롭게도 입양된 저희 둘은 꽤 힘든 시간을 보냈고 친자식들은 세상의 잣대로 봤을때 꽤 성공한 삶을 살고 있으니까요. 

제 입양부모님은 모두 똑같이 키웠다고 항변을 할지도 모르죠. 그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르고요. 서로 다른 것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똑같이 키우면 어떻게 되겠냐구요. 아무튼 여러가지로 복잡한 상황이었어요. 데모인으로 이사를 갔을때가 중학생이었거든요. 그때는 많이 친해지고 정을 붙이려고 노력을 했어요. 그러다가 캔자스주 토피카로 또 이사를 갔죠. 가는 곳마다 제가 유일한 흑인이었어요. 그리고 커가면서 점점 더 흑인의 모습이 나오더라구요. 그렇지만 저는 말을 잘했어요. 영어를 빨리 배우고 싶어서 엄청 노력도 했고요.. 흑인 액센트 없이 백인처럼 말하려고요, 그래서 항상 의식적으로 노력을 많이 했어요. 80년대에는 인종차별이 지금과는 달랐어요. 장난 아니었죠. 제 친구들이 항상 인종차별적인 농담을 하다가 ‘맞아, 그런데 너는 아니야!. 너는 그들과 다르잖아! 이런 식이었죠. 이런 식으로 저는 흑인이었지만 흑인과 다르다고 취급됐어요.. 저희 부모님도 항상 그런식이었고 그것이 항상 혼란스러웠죠. 그러다가 제 입양아버지가 목사직을 포기하고 정신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해서 캔자스주 토피카로 이사를 가게 되었어요. 메닝거병원에서 일을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자신의 흑인인 큰딸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진단을 내리곤 저를 정신병원에 한달동안 입원시켰어요. 그때도 저는 생각했죠. ‘이젠 내가 아픈 사람 역할까지 해야 하는구나’ 하고요. 우리 형제자매들한테도 누나가 많이 아파서 우리 가족한테 이렇게 많은 사건사고가 일어나는 거라고 말을 했고요. 

몇년 전까지도 아무도 그 일을 거론하지 않았죠. 그러다가 다시 저를 그렇게 취급하는 것이 보여서 제가 그때 인연을 끊었어요. 제가 살기 위해서요. 버릴 인연은 버리고 슬퍼할것은 슬퍼하는 과정속에서요. 어떠한 체도 하지 않고 굳이 어떠한 화해도 필요하지 않았고요.  제가 그들의 소망을 못 이뤄줬겠죠. 딸을 가진다는 것에 대한 환상 같은 거 말이에요. 아이를 꼭 네명을 가지고 싶었대요. 아버지라는 사람이 사남매 였어서 말이에요. 그래서 아이를 넷을 가지고 싶었는데 아마도 더 낳지 못했나봐요. 

이렇게 저렇게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집도 아니었어요. 입양을 꼭 하고 싶어했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어쩌다가 시기와 조건이 맞아서 하게 된거죠. 그때는 루터교 목사가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하는 것이 뭔가 유행같은 일이었으니까요. 얼마나 많은 한인 입양인이 루터교 목사들에 의해 입양됐는지 알고 싶네요.  루터교가 난민을 위해 캠프를 열기도 했었고. 암튼 그때 목사들이 입양을 많이 했죠. 저를 열심히 키워주신건 알겠는데 저를 진심으로 원했어서 였는지는 모르겟어요. 그리고 그때도 그걸 알았던것 같아요. 본능적으로요. 성인이 되고 나서 갑자기 될대로 되라 하는 마음이 들어서 엄마에게 물어봤어요. 우리를 그렇게 원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입양한거냐고요. 그랬더니 엄마 왈 “네 아빠가 넷을 원했어서”였어요. 뭔가 복잡한 상황이 있었던거죠. 그러니까 제가 그들의 미완성인 꿈을 이루기 위해 있어야했던 거에요. 

어떤 기독교적 소명이나 백인 구원자적인 생각에서였을까요?

그럴수도 있고요 그들 개인적인 소망일수도 있고요. 넷을 원했는데 둘 밖에 낳질 못했으니 입양을 하는게 어떨까 이런 마인드 였던 거죠. 그게 전부에요. 미스터리죠. 공개를 안하니 개인적인 이야기니까 더 파지도 못하고요. 아무튼 그게 제가 들은 이야기에요. 그리고 다섯살 짜리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대요. 마더테레사 수녀 고아원을 통해서요. 수속을 다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취소가 됐다네요. 천주교 집안으로 보내고 싶었는데 우리가 장로교라서요. 너무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취소가 되어서 너무 마음이 아팠고 그 뒤로 저를 선택했다고요. 그 말을 듣고 제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을 해보세요. 안그래도 버려졌는데 입양부모한테도 첫번째 옵션이 아니었다는 말을 들었을때 어땠겠냐고요. 그리고 또 그 말을 굳이 저한테 한 의도는 또 뭡니까. 인도에서 오기로 했던 다섯살 짜리 아이가 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말을요. 마치 제가 와서 그들의 꿈이 못 이루어진것 같이요.  암튼 진짜 힘들었어요. 

스스로 흑인인 여성이라고 생각한다고 했잖아요. 흑인들 사이에서는 어땠나요? 바로 받아들여졌나요 아니면 그것도 힘들었나요?

물론 힘들었죠. 그리고 흑인들도 그 출신 배경이 아주 다 다르니까요. 

혹시 ‘너무 백인처럼 군다’ 이런 소리를 들었나요?

그것도 그렇고요, 흑인 사회에서도 컬리리즘(같은 유색인종 내에서도 피부색이 진한 정도에 따라 더 차별받는 경향, Shadism이라고도 한다)이 심하죠. .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진짜 한국인임에 그 정도의 차이가 있잖아요. 흑인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죠. 그러니 어떤 모임에서 저를 원할까 혹은 어떤 팀을 위해 뛰고 싶나를  생각해보면 저는 흑인이죠. 당연히 한국인 팀 보다는 흑인팀을 먼저 선택하겠죠. 집이라고 생각하는 곳이 어딘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지에 따른 결정이죠.

그런데 돌아보면 저도 정말 반흑인정서를 가지고 있었어요.  미네소타의 스프링 그로브나 아이오와의 데모인에서 학교다닐 때 저만 흑인이었고. 그래서 제가 흑인인것이 너무 너무 싫었죠. 캔자스 토피카에 살때 제 친한 친구하나가 차에 회초리를 싣고 다녔는데 그 친구는 그걸 “깜**들아 똑바로해라” 회초리 라고 불렀어요. 그 친구가 제 베프였다니까요. 그럴만큼 흑인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강했죠. 어느날 지나가다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봤어요. 제 스스로 생각하는 제 모습은 앞머리를 내린 백인 소녀였거든요. 그런데 거울에서 나를 바라보는 내 모습은 그게 아니어서 너무 충격이었죠. 학교에서 유전자에 대해서 배울때 두 세대안에 흑인 유전자가 없어질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선 순수 100퍼 백인을 만나서 흑인 유전자를 지우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하고 계산을 해봤던 기억이 나요. 그런생각이 어떻게 가능했겠어요? 인종차별적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저의 흑인임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런 제가 어떻게 하면 흑인인 손자손녀를 안 만들수 있을까 하고 궁리를 했었다는 사실이 너무 슬프죠. 어린아이가 말이에요. 

그 뒤로 좀 많이 돌고 돌아서 결국  Shattuck St Mary’s을 졸업했어요. 정신병원에서 나오고 나니 집을 나와서 기숙학교에 가는게 좋겠더라고요.. 그래서 기숙학교인 그곳에서 고등학교 3학년과 4학년을 보냈어요. 한 학년 전체가 33명 뿐이었는데 그곳에 다른 입양인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는 입양된 사실이나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길 거부했죠.  혹시 유일한 흑인 학생이었나요? 아니요. 다른 흑인 여학생이 한명 더 있었고 그 친구도 입양됐었는데 그 친구도 자신을 백인이라고 생각하더라고요. 그리고 선배중에 흑인이 한명 있었고 나머지는 혼혈이거나 했었어요. 비싼 사립학교라 사우디아라비아같은 데서 오는 외국인 학생들이 있었죠. 제 친한 친구도 그런 경우였는데 얼마나 부자인지는 몰라도 두번이나 약물과 알콜 사용으로 퇴학을 당하고도 다시 돌아오더라고요. (웃음)

그 다음에 학생이 한 1000명 정도 다니는 퀘이커교에서 운영하는 학교로 갔어요.  제가 마음이 편하려면 학생이 1000명 정도는 되어야 되나봐요. 인디애나주 리치몬드에 있는 작은 학교였죠. KKK단의 수도나 마찬가지인 오하이오주 데이튼에서 40분 밖에 안 떨어져 있는 곳이었어요. 80년대 말이었으니까 아직 기세가 등등할 때였는데 왜 자꾸 그런데로만 다니게 되었는지 몰라요. 그 학교에 흑인 학생이 54명이 있었어요. 그걸 알게된 계기가 갑자기 그 학생들이 나한테 와서 아는척을 하며 모임에 나오라고 초대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집에 갔는데 그때 그 장면이 지금도 영화의 한장면처럼 눈에 선해요. 갑자기 시간이 멈춘듯 모든 장면이 슬로우 모션처럼 돌아가더라고요. 그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이 흑인이었어요. 음악이 요란하게 흐르고 테이블에는 빨간 파티컵들이 흩어져 있고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지 뭐하는지 암튼. 그때 뭔가 제 안에서 감전이 된듯 왠지 그 순간이 너무 편안하고 좋았어요.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요. 그 후 얼마 안 있다가 모든걸 그만두고 케냐로 가서 6개월 동안 지냈고 그 후에는 자메이카에 가서 몇년을 살았죠. 미네소타로 돌아와서는 African spirituality community(역자 가제 : 흑인 영성 모임) 에 가입해서 푹 빠져서 지냈어요. 한번 하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거든요 

이렇게 흑인 사회를 여행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운것 같아요. 백인들 안에서 사는 것은 답이 아니었으니까요. 제 자신을 극도로 혐오했고 그래서 제 주변에 모든 것 모든 사람들과도 더 단절이 되어갔었죠. 항상 자살을 생각했어요. 입양인들의 자살비율이 보통 사람들보다 네배나 높잖아요.  항상 머릿속으로 자살하고 싶은 생각과 싸웠어요. 항상요.  아예 죽든가 아님 뭐라도 바꿔보든가 둘중에 하나였죠. 그러다가 드디어 저의 이 몸과 마음이 편할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게 되었죠. 흑인인 저의 몸이 편해진 장소말이에요. 그 역시 흑인인 이 몸이었죠. 그 뒤로도 많은 계기가 있었는데 그게 컸어요. 

내 몸이 편안해지고 내 스스로 내 몸의 주인이 되는 그런 거죠. 

네. 위축되지 않아도 되고 스스로를 작게 만들지 않아도 되는거요. 제가 머리도 엄청 크고 (주-흑인의 둥그런 머리스타일을 말한다) 입술도 크고 흑인 여성들의 특징을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너무 오랫동안 부끄러워 했어요. 항상 삐쩍 마른 금발에 앞머리를 내린 백인 여자애들과 같이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애들이 항상 지적질을 하곤 했죠. 그런데 웃긴건 지금은 오히려 입술을 도톰하게 보이려고 돈을 쓰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땐 그게 전혀 귀여운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아무튼 그런 애들을 찾아서 지적질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드디어 내 몸이 편하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흑인이나 황갈색 인종들이 주로 사는 곳으로 여행을 해보니 제 외모가 전혀 튀지 않는 거에요. 외국인인 것이 티가나긴 했지만  제가 흑인인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는 않았죠. 그렇게 제 스스로를 편하게 느끼기 시작했어요. 제 피부색부터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조이씨가 혼혈인것이나 백인가정에서 자란것을 알았을 때 그 새로운 사람들이 조이씨를 받아들여 줬나요? 아니면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나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살면서 한번도 어딘가에 확실히 속한다고 느껴본적이 없었어요. 항상 바람잘날이 없었고 언제나 생존이 달린 긴박한 상황에 처해있었으니까요. 자메이카에서 사귄 사람이 아주 폭력적이었어요.. 마침내 탈출했을때는 아이가 하나 저에게 남았고요. 그래서 그 뒤로는 싱글맘으로서 생존이 최우선 과제였죠. 그동안 하던 고민은 다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먹여살릴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정신줄을 놓지 않고 헤쳐나가며 살아남아야 할까가 됐죠. 갑자기 해결해야 되는 고민이 달라진거죠 사람들이 궁금해하긴해요. 여기처럼 다인종이 섞여 사는 곳에서도 출생배경등을 궁금해하죠. 그래서 지금은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대답하는 방법을 배운것 같아요. 제 성장환경 때문인지 너무 가까운 관계의 사람을 만들지는 않아요. 그러면 속깊은 이야기까지 안해도 되니까요. 친해졌는데 제 배경을 알고 나면 싫어졌다고 하는게 싫으니까요. 이게 답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네요.  

싱글맘이 된 것이 친엄마도 역시 싱글맘이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나요? 혹시 더 크게 다가오던가요?

저는 한국의 친엄마에 대해서 항상 좋게 말해봤어요. 같이 살기도 했으니까요. 살가운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엄마가 한번이라도 나를 안아줬던 적이 있었나 기억을 해보려고 했는데 없더라고요. 아홉살까지 같이 있었잖아요. 엄마는 굉장히 단호하고 수완이 좋은 분이었어요. 엄마랑 같이 있을때는 모든 것이 명확하고 분명했죠.. 길을 찾아다니거나 할때 말이에요. DMZ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던 터라 군인들을 자주 마주치고는 했었는데 그럴때도 엄마는 쫄지 않았더랬어요.. 일도 잘 하고 자신있는 사람이랄까요? 그래서 그걸 기억하며 엄마처럼 나도 강하게 이겨내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엄마라면 내가 이렇게 하길 원하겠지 라고 생각하면서요. 엄마를 내 마음속에 롤모델로 삼았다고나 할까요?  

엄마도 싱글맘 이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오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실은 지금은 아버지를 찾는데 주력하고 있거든요. 아무튼. 엄마가 그토록 강인한 분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다른 같은 처지의 여성들보다 저를 더 오랫동안 데리고 있을수 있었다는 사실이 저한테 말해주는게 크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강인한” 싱글맘이라는 글자가 나에게 각인되어 있는 것 같아요. 적절한 순간에 도움이나 개입이 있었다면 어떻게 피할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그런 삶을 살아왔네요. 아마 누군가가 제 삶을 영화로 봤다면 ‘저러다가 곧 애가 생길텐데’ 라고 생각했을거에요. 결국 그렇게 됐고요. 좀 웃기기도 한데 그냥 너무 뻔한 결말이잖아요. 

조금 일찍 정신을 차렸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때 엄마 생각을 많이 했죠. 엄마가 만약 내가 그런 폭력적인 관계속에 있는 걸 안다면 내 등짝을 한대 때리며 정신차리라고 했을거야 하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그 관계속에서 나왔죠. 그떄 제 아이 얼굴을 바라보며 제 아이는 그렇게 안 키우겠다고 결심하고 죽기를 작정하고 도망나와서 아이를 키웠어요. 돌아보면 그래도 잘 키운것 같아요. 지금 다 성인이 됐고 다들 잘 컸어요. 물론 실수도 많이 하고 많이 힘들었죠. 그렇지만 어떤 지표가 되어주는 것 그 역시 싱글맘이었던 제 엄마가 있었다고나 할까요?

삶이 굴곡이 많았네요. 건강하지 않은 관계에도 있어봤고. 어떤 면에서는 자초한 것도 있고요. 왜 그랬던것 같아요? 무언가를 찾고 있었나요? 그게 사랑받는 것이었나요 아니면 받아들여지는 것이었나요? 

지금은 그 질문 확실히 답을 할수 있어요. 오랫동안 살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많은 워크샵을 진행했는데 그러면서 많은 부분을 끄집어 내서 들여다볼수 있었어요. 지금 돌아보면 너무 가슴이 아픈데 전혀 어딘가에 속하지 못하고 기쁘지 않았어요. 그리고 왜인지 그 이유를 몰랐죠. 사람들은 다 가족이 있고 혹은 서로 챙겨주는 누군가가 있는데 저는 그냥 혼자서 배회했어요. 그래서 최근까지도 누군가가 저에게 호의를 보이며 초대를 하면 냅다 달려갔죠. 저는 무조건 예스였어요. 한번도 내가 뭘 원하는지를 스스로 묻지 않았죠. 20대 30대 까지도요. 마치 고아처럼 그냥 나를 데려가기만 해주세요 같은 태도로 말이에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요. 그러면 무조건 따라갈테니 하고요. 그리고 그게 저를 더 외롭게 만들었고요.  

상대방에게 자신을 맞췄군요. 

네. 완전요. 내가 왜 그 사람들하고 만났나 하고 그때를 돌아보면 강을 둥둥 떠내려가다가 물에 떠 있는 잔해들을 붙잡았던 식이었던것 같아요. 그 사람들이 그 잔해나 쓰레기였다는 건 아니고요. 그 사람들도 나름은 다 좋은 사람들이었을거에요. 그런데 서로 도움이 안되는 관계들이었던 거죠. 그렇게 떠내려 가다가 한동안 붙잡고 있고 그러다가 다시 떠내려가다가 하는 식이었죠. 마흔이 넘어가며 돌아보니 제가 그동안 나를 너무 망가트렸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천천히 작업을 시작했어요. 천천히 이번엔 끝까지요. 그런데 무엇을 찾아 가고 있는지는 몰랐어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한테만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왜 없는지 그 이유를 몰랐거든요. 

왜 그런지 통 모르겠더라고요. 종교적인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왜 나만 자꾸 시험에 드는지 그 이유를요. 왜 나만 하꾸 시련에 들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지 말이에요. 그때 사람들이 저를 비난하며 썼던 말들이 제가 이기적이고 사죄할줄을 몰라서 그랫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행복한 삶을 살 자격이 없다고요. 그 말을 20대 내내 지고 살았고요. 그 누구라도 저를 데려가면 너는 감사해야 한다고요. 그 말들이 내내 짐이 되어 제가 관계를 맺는데 작용을 했죠. 자기들도 피폐한 상대로 자기들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절 입양을 한 사람들이 저한테 자기한테 고마워해야 한다고 말하는 꼴이었죠. 어떤 부스러기라도 감사하라고요.  그런 말들을 어떻게 떨쳐내겠어요. 어떻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떨쳐내버리겠냐고요. .

그래서 그 말들이 저에게 각인된채 살았죠. 안그럼 임신 기간내내 두드려 맞는 관계에 어떻게 놓였겠어요? 평생 그런 말들을 듣고 살지 않았다면 그런 관계를 시작하지도 않았겠죠. 그게 제 평가에요. 20대때 내가 누군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히 답할수 있었다면 그런 관계과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 거에요.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죠. 

지금 하고 있는 일하고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말해주세요. 

그 이야기를 하려면 1988년으로 돌아가야 해요. 여름방학에 할일을 찾다가 미네소타의 바운더리 워터에 있는 캠프에서 일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곳이었죠. 백인 기독교인들이 주로 오는 캠프였는데 일년에 몇번은 도시빈민가 흑인 아이들을 초청했어요. .그리고 당연한듯 저를 지도교사로 지명했죠. 한국에서 태어나서 백인만 있는 스프링 그로브에서 자란 저를요. 피부색만 보고 판단을 한겨죠. 피부색은 안본다 안 중요하다고 말해도 결국은 본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80년대부터 고위험 계층과 일을 했던 거에요. 도움이 많이 필요한 청소년들이나 혹은 그런 흑인과 황갈색 인들을 위해 일하는 백인들과 함께 일하게 됐어요. 그러니 그때부터 그런 세계에 있게 된것이죠. 

그리고 제가 좀 잘 했나봐요. 사람들이 저한테 묻더라고요. 학생들이 네 말은 더 잘 듣는것 같다고요. 그래서 그 질문을 안고 가게 되었죠. 평생을 사회복지와 교육과정을 만드는데 기여해왔어요.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학군에서 제가 다양성 담당 정책관이었거든요. 직원에 8000명이 넘는 큰 학군이었는데 주당 32시간 일하는 제가 유일한 직원이었죠. 다양성에 대한 정책을 미네아폴리스에서 그 정도로 취급한거죠. 끔찍하죠.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말도 안되나 하는 고민을 항상 안고 살기 때문에 그런 질문들에 답할수 있는 일을 하게 된거죠. 어떻게 하면 나와 그리고 다른 단절된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질수 있나 하는 질문말이에요 가르친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도 듣게 만드는 것 말이에요. 제가 강의를 할때면 실감나게 해요. 특히 학생들이 차분히 앉아서 제 이야기를 듣고 과제를 끝내요 그래서 항상 그 부분이 궁금했어요. 

저도 학교를 중간에 관두고 자메이카에 갔다가 돌아와서 학부를 마쳤잔아요. 그런데 공부하고 싶었던 것이 확실히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냥 그때그때 되는 대로 했었어요.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항상 궁금한것은 있었어요. 언젠가는 답을 찾아야 될것 같은 것 말이에요. 그것이 아이들이 왜 내 이야기는 잘 들을까 였어요. 답을 찾기 시작했죠. 보통 교사들은 인종차별자로 몰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그래야 함에도 불구하고 또 자신들에게 그럴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딱부러지게 다루지 못하는 교사들이 많아요. 그러니 결핍이있는 아이들을 결핍이 있는 어른들이 다뤄야 하고, 다들 미친듯이 문제 해결을 하려고는 하는데 정작 중요한 문제 즉 결핍이 있을때는 그게 수학이 됐든 과학이 됐든 그 어떤 공부를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이 안되는 거죠. 저도 그걸 한참 후에야 깨닫게 됐어요.  

제가 정신병원에 있을때 기억나는 것들중에 몇몇이 굉장히 끔찍하거든요. 사람들 앞에서 옷을 다 벗어야 된다거나 내가 먹는 음식들을 모두 다 무게를 재야 한다거나 손을 뒤로 잡고 걸어야 한다거나 혹은 내가 자살할까봐 사람들이 나를 감시한다거나 하는 등등요. 그런데 그 중에서 어떤 큰 박스 같은 공간에 들어가 누워서 녹음된 명상테잎을 들어야 하는 것이 있었어요. 숨을 깊게 마시고 마음을 편안히 하세요 뭐 그런 식이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게 참 좋게 느껴지더라고요. 뭔지는 모르겠는데 좋은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그 마음챙김을 항상 마음에 새기기 시작했죠. 언제부터 그걸 마음챙김이라고 불렀는지도 모르겠어요. 우리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내 안의 수면을 진정시키고 너의 수면도. 진정시키고 이런 식으로요.. 그래서 캠프에 지도교사를 할때도 그걸 적용했어요. 도시 빈민 아이들이 캠핑을 와서 휴대용 변기에 볼일을 못본다고 난리 칠때나 호수가의 물이라고 안 먹는다고 할때등등 아이들을 달래서 하게 해야했죠. 그때 저도 어렸지만 그래도 열심히 고민을 해서 그래 일단 이 문제를 해결을 하자 그러면 먼저 나 사진을 진정시키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뭐가 필요할까 이런 식으로 찬찬히 생각을 정리해나갔어요. 일단 이 아이들을 인간으로 대하자. 흑인이나 빈곤층 아이들이 아닌 일단 그냥 개인으로 보자이런 식으로 시작했어요. 그 다음에는 그걸 다른 사람들한테도 적용하게 시작햇고 그랬더니 이래저래 지원도 받게 되고 사람들이 강의 요청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이 마음챙김일에 주력하게 되었고 지금도 여기 하와이에서 계속 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2000년에 아까 말씀드린 그 다큐멘터리았을때 그 기자라는 사람을 찾아 나섰어요. 당신이 말한 그 좀비를 직접 보여주겠어 이런 마음으로요. 미친듯이 모든 연줄을 다 동원해보니 결국 그 사람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전화를 했고 또 마침 그 시기에 이 용서와 화해에 프로그램도 시작했어요.. 제가 지원받은 사업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도 그쪽이었고요. 그러다가 그 나타샤가 저를 찾아서는 Korea and Me 라는 프로그램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고 혼혈 아이들을 한국으로 데려가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대요. 그리고 그 10년쯤 전에 제가 제 친엄마를 찾았는데 그것이 그닥 좋은 재회가 아니었어요. 엄마가 꽤 심술궂고 많이 어두운 사람이더라고요. 제 결혼식 이틀전에 그냥 가버릴 정도로요. 제 오빠도 찾았었는데 오빠가 신부입장때 같이 들어가주기로 했었거든요. 그런데 결국 나타나지 않았어요. 정말 헐이었죠. 그래서 그 즈음 10여년간 실은 아픔이 더 쌓였어요. 마음 챙김 프로그램도 진행하는 동시에 또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나타샤가 저한테 연락을 했을때 한국에 같이 가기로 결심했죠. 용서와 화해를 하기로 했으니 진짜로 해보자 하는 마음에서요. 가짜로 용서를 할수는 없으니까요. 기금지원도 받으니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잖아요. 맞죠?(웃음) 그래서 엄마한테 연락을 해서 지금 한국에 가니 한번 만나자고 했어요. 그러니 제가 찾아가면 문이나 열어달라고요. 그리고 용서 프로그램 참가하고 그 뒤로 이어지는 워크샵에도 참가해서 내가 고통받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도 알아봤죠. 

치유하시는 분들이 저를 딱 보면 알것 같나봐요. 고통이 많다는 것을요. 저를 보면 “몸안에 화가 가득하네요” 라고 말해요. 그럼 저는 “그래 화로 가득찬 흑인 여자가 보이겠지” 하고 생각해요. 그게 사실일테니까요. 아무튼 결국엔 그 일들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놓아 버릴것은 놓아버리는데요. 그리고 결국엔 저도 스탠포트에서 운영하는 용서프로그램에 지도자 과정을 밟았죠. 그 후엔 계속 이 마음챙김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데 결국엔 제 자신을 다스리는데 그 목적이 있어요. 저도 결핍이 많은 사람인데 상대방도 그런 경우에는 우리의 감정을 담당하는 전두엽까지 가담시키게 되죠 70%나요. 일단 일이 잘 안돌아가기 시작하면  제 몸이 선택하는 기본 감정은 분노에요. 그래서 갑자기 분노 게이지가 0퍼센트에서 100퍼센트까지 치솟죠. 그럴때면 정신줄을 놓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막 분노에 찬 말을 퍼부어대거나 했었어요. 그런식으로 나를 내 감정으로부터 내 스스로 분리시켰던것 같아요. 

아무튼 이렇게 제 안에 쌓였던 많은 이야기들을 털어냈죠. 그래서 제 안에 제 스스로를 감당할수 있는 공간이 생기게요. 그리고 그 단계들이 저의 이 굳어진 감정과 머리에 와 닿더라고요. 왜냐하면 저는 한번에 확 빠져드는 타입이 아니었거든요. 제가 비록 이 마음챙김에 대해서 설파를 하고는 있지만 처음에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마음속에 한을 놓아버러요” 어쩌고 저쩌고 하면 눈살을 찌부렸거든요. 헛소리하시네 하구요. 일단 시작하면 한번에 확 변화가 오는 그런 타입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 스탠포드 용서와 화해 프로그램은 1단계 2단계 3단계 각 단계별로 과정이 잘 나눠져 있고 우리의 뇌를 공부해요. 결국은 뇌가 관여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일단 뇌와 감정에 대해서 공부를 좀 한 다음에 내 자신을 알고 내 자신을 듣는 연습을 하죠. 그 전에는 제가 제 자신으로부터 너무 동떨어져있던지라 해보지 못했던 것들이에요. 그런데 이 과정을 시작하니 내 자신을 진정시키고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그런데 실은 제가 했던 일은 제 이성과 감정을 불러온것 뿐이었죠. 그 사이 너무 많은 고통을 겪은 제 이성과 감정 말이에요. 그저 버티느라 산산이 부서지고 서로 다투고 논쟁하던 제 이성과 감정이요. 이 과정을 하며 일단 제 마음의 소리를 듣고 이런 저런 제 자신을 인정하게 됐어요. 이게 바로 나 조이이고 이런 저런 모습들을 어떻게 끌어안아야 할까. 하고요. 이런 모든 것들이 말이 되더라고요. 이미 마음챙김에 대한 일을 시작했었기 때문에 이 용서 프로그램의 일련의 과정들이 설득력이 있게 느껴졌어요. 

그 뒤론 제가 추진력이 좀 있는 편이거든요. “Forgive for Good”(역자 주 “나를 위한 선택, 용서”라는 제목으로 국내 번역, 출간되었다) 이라는 책을 쓴 지금도 스탠포드에서 교수로 있는 프레드 러스킨을 만났어요. 전형적인 60대 백인 남자 교수인데 이미 90년대부터 하와이에 와서 강의를 했었거든요. 제가 그랬죠. 당신이 하는 연구도 좋고 다 좋은데 이걸 어떻게 제도화 시킬것인지 어떻게 널리 퍼트릴것인지 가 문제라고. 내가 한번 해보겠다. 그랬더니 그 분이 아주 적극적으로 나서줘서 몇년 동안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제가 항상 강의를 하기 전에 말해요. 나는 박사도 아니고 연구자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관련 분야에 대한 아주 풍부한 인생경험이 있다. 이런식으로 학위를 비롯해서 저에게 없는 것에 대해 먼저 사과를 하고 시작했었어요. 그런데 제가 대중앞에서 말을 좀 잘 하거든요. 그래서 어느 순간 사과하며 시작하기를 멈췄어요. 다들 이론은 빵빵한데 그 이론을 실천하지를 않잖아요. 용서와 화해작업이 얼마나 좋은지는 다 알죠. 그 사람들 중에는 워크샵을 50회나 넘게 가본 사람도 있는 걸요. 그런데 다들 그냥 서로 헐뜯기만 하고 징징대기만 하고요. 몸과 마음연결을 하지 않고 체화시키는 연습을 하지 않는게 문제죠. 거기서 오는 기쁨을 실제로 느껴봐야 되는데 말이죠. 실제로 해보는것이 중요하지 얼마나 책을 많이 읽었고 어떤 학위가 있고 이름 뒤에 붙은 알파벳이 몇개인지는 (역자 주- 전문가 타이틀을 말한다)-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요. 얼마나 실생활에 그 이론을 적용해봤느냐가 중요하죠. 그걸 파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가 해보니 됐다고 하죠. 정신병원에 갇혀 있을때부터 시작했으니까요. 15살때니 아주 오래전이요(웃음). 알기만 하고 실제로 실천을 안하면 소용이 없잖아요. 제가 운영하는 센터는 저와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여러방면으로 실행해보는 곳이에요. 저는 사람들이 실제로 이 마음챙김를 실습할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에요. 그럴려면 지금 현재의 나에 충실해야 해요. 뭐가 됐든 받아들이고 일을 만드려고 애쓰는 부분을 놔버려야 해요.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나를 진정시키려고 혹은 놓으려고 애쓰는 것은 아니에요. 애쓰지 않는것 부터 시작해야 하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해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생각보다 힘든데 그러다 보면 갑자기 엄마가 한번도 안아주지 않았던 것이 떠오르기도 하거든요. 또 제 양부모가 저를 그닥 원하지 않았다는 것도 떠오르고요. 그러면 또 울고요. 그러면 많이 지치죠. . 그러다가 깨달았어요. 제가 한번도 진심으로 슬퍼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그냥 잊어버리려고 하고 털어버리려고만 했거든요. 먹는 것으로 해결하고 술도 많이 마셨어요. 약에 취해보기도 했죠. 그렇게 힘든 감정들이 찾아올때면 제일 처음으로 찾은 것이 음식이었거든요. 배가 터질때까지 먹고나서는 배가 아프니까 이제 그 전에 힘들었던 감정들은 잊어버리고 마는 식이었죠. 제가 알면서 그랬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제가 제 감정으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이었죠. 

현재의 나에 집중하는 것이 쉽게 들리지만 꽤 가혹하기도 해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다 보면 고통도 수반되거든요. 꽤 오랫동안 이 작업을 해온 저조차도 아직도 고통스러울때가 있어요. 그래서 주변에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서 이 작업을 계속 하고 또 필요한 사람도 도울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용기를 좀더 낼수 있을까 행복이란 것은 도데체 어떻게 만들수 있는 것인가 놓는 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등등을 가르쳐요. 그런데 가르친다기 보다는 복돋우는 것이죠. 저는 일종의 치어리더라고 생각해요. 엉덩이를 대고 앉아서 호흡에 집중하며 지금 이 순간 나를 기분좋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본는 식으로요. 그러다 보면 저도 같이 하게 되고요. 저를 위한 직업이죠. 

누구를 용서해야 했나요? 그리고 어떻게 용서했나요?

우리가 스탠포드 대학의 용서프로젝트를 통해 하는 작업은 일단 놓는 것이에요. 나를 위해서요. 가해자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요. 그래서 일단은 내 힘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고요. 내 이야기를 할때 중요한 것은 나한테 상처준 사람들이 누군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해요. 가감없이요. 지금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하는 거요. 그래서 제 인생의 악당들을 나열해보자면 일단은 제 엄마죠. 그리고 제가 알지도 못하는 아빠와, 한국이라는 나라, 킨 신부와 가톨릭 교회죠..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애들을 입양보냈죠. 고아원도 그렇고 입양부모도요. 

그리고 저를 별종취급했던 모든 선생님들이요. 넌 도데체 뭐니 하면서요. 그리고 이름도 얼굴도 기억안나는 수많은 사람들도 그렇고. 저랑 안좋게 엮였던 그전에 만났던 남자들이나 저를 도와줄거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던 친구들도요. 다들 결국엔 제가 이 용서 작업을 하는데 궁극적으로는 기여를 햇죠. 그들의 공통 분모는 저잖아요. (웃음) 이렇게 제 삶의 악당들을 나열해보는 작업을 여러번 해봤어요. 일단은 폭력적이었던 제 전남편이 있고요. 양부모님도 그렇고요 제 친엄마 도요.  제가 실제 이 용서프로젝트를 진행할때면 항상 떠오르는 사람은 제 친엄마에요. 그 상처가 깊은가봐요. 그 전에는 엄마때문에 내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면 내가 생각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게 되거든요. 그리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것은 우리가 우리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요. 그 전에는 누군가가 나한테 전화를 해서 미안하다고 말을 해야 용서가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러면 내가 좀 불리해지죠. 그 중에 많은 수가 이미 죽은 사람들일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나한테 전화를 해서 사과 할수 없으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죠? 교회에 가서 신의 은총을 빌어야 하나요? 신만이 할수 있는 일이라서? 헷갈리죠. 그래서 좀 다른 방식으로 하기로 했죠. 제가 깨닫게 된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 어떤 사람들은 충분히 아파하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너무 넘치게 아파한다는 것이었어요. 아예 안하거나 너무 많이 하거나요. 상처받고 아파하는 것의 최종 단계는 놓아버리는 것인데 이 놓아버리는 것이 바로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하는 용서죠. 그래서 제가 가만히 앉아서 명상을 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이 모든 이야기들이 떠오르면서 결국에는 꺼이꺼이 울게 되요. 제가 그 과정을 안했기 때문이에요. 생존하느라 바빠서요. 한번 버려져 뵜으니까 또 버려져도 괜찮아. 난 헤쳐나갈거야 하고 그냥 넘어간거에요. 그러면 안됐었는데. 그건 아파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아무튼 그걸 받아들이고 충분히 아파했죠. . 

또 내 스스로 파워가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아냈어요. 40대가 되어서 까지도 엄마와 양부모와 전남편을 을 탓하며 술을 마시고 먹어댔어요. 지금은 죽고 없는대도요.  내 나이 40대에도 뚱뚱하고 인생이 비참한 이 모든 것을 그들을 탓했죠.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이 모든 것들이 말이 안되더라고요. 그리고 이것들을 놓아버리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하고 생각하게 시작했어요. 그 답의 일부는 내 스스로 그럴 힘이 있음을 깨닫고 내 스스로 설정한 기대치를 돌아보는 것이었어요. 내 스스로 이 인생을 어떻게 설계했었는지를 돌아보고 그 일부는 해체하고요. 내 스스로를 용서하고 내가 스스로 내렸던 결정들을 왜 그랬는지 돌아보고요 놓아버리고 그랬던 나를 한편으로는. 존중해주고요. 

카오미씨가 했던 질문이 실은 이 스스로를 용서하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하고도 곤란한 질문이에요. 내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 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내가 원하는게 뭔지 알아? 그때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다시 써보고 제 스스로를 탓하지 않아보면 제가 원했던 것은 그냥 가정에 속하는 것이었어요. 조건없이 사랑받는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사랑이요. 그래서 지금 그걸 다 큰 아이들이 있는 지금의 제 상황에 비춰보면 다시 어떤질문을 해야할지 알게 되죠. 내가 지금도 그걸 원한다면 내 아이들과 함께 어떻게 그런 가정을 만들수 있을까 겠죠. 우리 아이들이 나와 똑같이 단절감을 느끼지 않게요. 

한국의 엄마는 어떻게 찾았고 그 뒤로 그 관계는 어떻게 이어가고 있나요?

엄마와 헤어졌을때 제가 아홉살이었죠.. 내내 엄마를 찾았고 사람들도 찾기 쉬울거라고 했어요. 제가 기억하고 있는 이름도 많았고 가지고 있는 서류도 있었고요. 그런데 장로교 사회복지회에 연락을 해봤더니 그 고아원이 화재로 없어졌다는 등등 이래저래 못찾는 이유만 내놓더라고요. 제가 그당시 고아들을 구하러 루마니아까지 갔었다는 사회복지사하고도 연락이 닿았어요. 그런데 그분도 제 엄마를 찾을수 없다고 연락을 해도 답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2005년에 제 세아이들을 데리고 하와이로 이사를 갔고 그러면서 이 사회복지 관련일을 포기하자고 생각했어요. 돈도 벌어야 하고 하와이에서 정착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부동산 중개업을 시작했는데 적성에 안맞고 싫어서 금방 그만뒀어요. 그런데 그때 일했던 한 사무실에서 이름이 킴이라는 한국인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한국에 가족들을 만나러 간다는거에요. 하와이에는 한국인이 많잖아요. 한국어도 연습하고 할 기회가 많았죠. 항상 버킷리스트에만 있긴 하지만요. 암튼 그래서 그 친구한테 한국에 가면 혹시 이런이런 사람을 찾아봐줄수 있냐고 부탁했죠. 기대도 안하고 그냥 반쯤은 진심도 아니었어요. 30년 넘게 똑같이 사람들한테 같은 부탁을 해왔었거든요. 그래서 그때도 한번 말이나 해보자 싶었죠.  그랬더니 그 친구가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참 이상한 부탁이죠?(웃음). 아무튼 그 친구가 한국으로 가고난지 이틀인가 지나서 전화가 왔는데 받자마자 감이 왔어요. 살짝 격앙된 톤으로 조이 하며 제 이름을 부르는데 받자마자 감이 오더라고요. 엄마를 찾은것 같대요. 그때 제가 부동산 일을 관두고 다시 사회복지 쪽으로 일을 하려고 면접을 보러가던 길이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더니 그 친구가 제가 이메일을 받을테니 몇가지 질문에 답을 하래요. 그러면 그쪽에서 정보를 보내주겠다고요.  그래서 그날 밤에 집에가서 답장을 보내고 나니 그쪽에서 엄마의 연락처를 보내왔어요. 그리고 혹시 오빠의 연락처도 원하냐고하네요. 세상에나 평생을 그렇게 찾아다녔는데 갑자기 한순간에 모든 것이 몰려오더라고요. 갑자기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았죠 

항상 그런식이죠. 흔적도 없다가 갑자기 번쩍 하고 나타나죠. 

네. 그래서 이젠 이 모든 마음의 고통과 두통이 사라지고 드디어 모든게 더 나아지겠지 생각했죠. 그래서 오빠한테 먼저 전화를 했어요. 오빠가 영어를 했었거든요. 언어장벽이 제일 큰 문제가 될거라는걸 알았으니까요. 오빠가 미국으로 입양됐다고는 알고 있었어요. 어디로 갔는지 등등 자세한 사항은 모르고요. 그래서 부푼 가슴으로 오빠한테 전화를 했는데 통화를 시작한지 몇분 만에 크게 실망했어요.. 오빠가 그러길 저를 전혀 찾아보지 않았대요. 오빠는 미국으로 입양이 되었고 양아버지에게 한국인 와이프가 있었는데 그들이 오빠를 학대한 모양이더라고요. 그 부부는 이혼을 했고 그 아버지가 오빠를 한국으로 다시 데려온 다음 우리 엄마와 결혼했대요. 그러니 세 가족이 함께 산 것이죠. 오빠 이름이 “영”인데 그 뒤로 미국에 와서 군에 입대를 해서 한국에 배치가 됐었고요. 한국말도 하고 엄마와 아직도 잘 지내고 있었고요. 그런 말을 들으며 그러면서 나를 찾아볼 생각도 안했단 말이지 하며 화가 났어요.. 뭘 기대했는지를 모르겠지만 제가 원했던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죠. 어떻게 그럴수가 있죠? 자기들은 같이 살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는지. 너무 아프고 힘들었어요. 다시 버려지는 기분이었죠. 

오빠가 하와이로 저를 보러 오겠다고 했어요. 고맙게도요. 그런데 실상은 새로 사귄 여친을 데리고 하와이 반대편에 있는 호텔로 가서 지냈어요.. 좋으면서도 이게 뭔가 싶었죠. 그런데 제가 너무 뚱뚱하다면 뭐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사람을 보내 엄마를 데려오겠다는거에요. 엄마가 제 결혼식에 올수 있게요. 너무 좋았죠. 그래서 제가 엄마를 픽업하러 오하우 공항으로 갔거든요. 엄마가 저를 보자마자 차에서 나오지도 않고 팔짱을 끼고 저를 위아래로 훓어보며 한다는 소리가 “네 오빠가 말한것만큼 뚱뚱하지는 않네” 였어요. 영어로요. 그게 첫마디였어요. 면상을 한대 갈겨버리고 싶은 감정과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이 복잡하게 엉키더라고요,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이 관계를 잘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그 뒤로 계속 내리막이었어요. 계속 제 엉덩이가 얼마나 큰지 집은 왜 이리 더럽냐는 제 사촌이랑 저를 비교하면서요. 둥 저도 되받아치고 싶었어요. 그 애는 엄마가 버리지 않았으니까요 하면서요. 퍼붓고 싸우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알러지가 있다고 방에서 안나오더니 내 결혼식 이틀전에 가버렸어요.  

이게 모두 하와이에 있을때 일어난 일인가요?

네 2008년에요. 엉망이었죠. 이런식으로 가면 안되는 거였는데. 실은 입양이야기나 친부모와의 재회가 많은 경우 이런식으로 가잖아요. 

조이씨를 또 버린거네요. 

완전요. 완전 엉망이고 뒤죽박죽이었어요. 말했듯이 그럴때면 분노로 아예 집을 태워버리든지 아님 아예 침묵하든지 했다고 했잖아요. 이번에는 멈춰서 기다렸어요. 신혼이기도 했고 어떻게든 이겨내야 햇어요. 그래서 일단 침묵하며 다시 연락을 끈었죠.  

이해가 되네요. 

오빠는 저한테 연락을 꾸준히 했어요. 뭐랄까 살짝 어색한 관계를 이어갔죠. 무슨 일이 있거나 하면 연락을 하는 사이정도 였어요. 그런데 오빠는 결혼을 했는데도 저한테 말을 안했더라고요. 딸도 있었는데 그애가 지금 서른살이 됐어요. 그 애랑 저랑 연결이 되어서 지난 크리스마스에도 여기에 왔었어요. 조금씩 관계를 쌓아갔는데 그땐 제가 그게 성에 안찼었어요. 지금은 그 부분에 대해 서운하고 그러진 않아요. 오빠도 크면서 많이 힘들었고 자신을 잊은채 살아야 했으니까요. 이야기를 좀 나눠보니 왜 지금 이렇게 됐는지 알겠더라고요. 

제가 그 조카를 보러 샌안토니오에 갔을때 조카가 엄마랑 언성을 높이며 통화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엄마를 오라고 하라고 했죠. 그러니까 오빠의 전부인과 식사를 하게 됐죠. 그게 바로 지난 여름에 있던 일이에요. 멕시코인이었는데 살갑고 호들갑 떠는게 딱 내스타일이었어요. 그런데 다시한번 성급한 판단을 내린것을 후회하게 만드는 순간이 왔어요. 그녀가 그러대요 남편이 너를 찾아야겠다는 이야기를 항상 하면서 살았다고요. 오빠가 저한테는 한번도 저를 찾지 않았다고 했었거든요. 오빠랑 처음 이야기를 했을때 오빠가 저한테 솔직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었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한번도 찾은적이 없다고 했어요. 나중에 오빠랑 다시 관계를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을때 그것이 이유가 되기로 했었는데 나중에 오빠의 전부인의 말을 들어보니 오빠가 저를 찾았다잖아요. 

그래서 또 잘못 알고 10년을 보냈구나하고 후회했죠. 도데체 우리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이야기들을 얼마나 또 넘겨 짚으며 만들어내며 사는지 몰라요. 또 다른 깨달음이었죠. 듣기를 잘했죠. 미안하기도 했고요. 오빠가 막 속이야기를 하는 타잎이 아니었으니까요. 사람들하고 관계맺고 연결하고 하는 타입이 아니에요. 저랑은 다르죠. 그게 오빠가 살아남아온 방식이니까요. 남자입양인들 한테서 그런 모습을 많이 봐요. 그러면 달리 접근해야죠. 남자 입양인들은 잘 꺼내놓지 않아요. 여자입양인들은 서로 살아온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는데 남자입양인들은 과거는 과거다 이런 입장이죠. 제 오빠도 딱 그랬고요. 그래서 지금은 오빠의 방식을 존중해요. 오빠가 마치 저처럼 반응해주기를 원했었나봐요. 제가 원했던 방식으로요. 저는 오빠가 나를 어떻게 찾아봤고 어떻게 그리워했고 나에 대해서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시시콜콜 말해주길 바랬는데 오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거죠. 

그렇다면 우리의 친가족이나 입양가족이 우리가 원했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런일이 꽤 흔하죠. 항상 안고 살아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고 걱정이기도 하고요. 그게 엄마가 됐든 아빠가 됐든 파트너든 형제자매이든간에 그 모든 삶에 굴곡들에는 악당이 됐든 혹은 나를 보호해주는데 실패를 한 사람들이 있죠. 이건 비단 입양인들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친엄마손에 자랐는데 엄마가 약물중독자였던 경우도 있잔아요. 그 엄마의 삶을 생각하면 또 속상하죠. 아무도 약물중독자가 되고 싶어서 되진 않으니까요.. 사람들은 모두 다 각각 힘든일들이 있고 그것들을 이겨내려 노력하니 질문을 바꿔봐요. 이 사람들이 겪어낸 고통은 뭘까?하고요. 그럼 좀 낫지 않아요? 그럼 그 사람들의 각각의 여정이 다른 각도에서 보이고 그러다 보면 그들이 나한테 빚진것도 없다고 느끼게 될거에요. 다른 각도에서 보이니까요. 제 아이들도 저한테 더 많은 것을 원하죠. 이것도 해달라 이렇게 되어달라 이런 식으로요. 그럼 애들한테 “엄마가 얼마나 쌔빠지게 노력해서 이만큼 정신줄 잡고 사는줄 아니? 그걸 알면 엄마한테 어떻게 이러니?” 말해요. 

저 또한 이래저래 남들보다는 많이 유리한 입장에 있었죠. 기회도 많았고요. 가끔 제 친엄마가 어떠한 환경에서 살아와야 했나를 생각해보기도 해요. 그때 당시의 한국의 상황은 어땠는지. 그때 그 장로교 사회복지 센터는 어땠는지. 아이들을 그냥 납치해서 보내버렸었잔아요. 서류도 위조하고. 숨어다녔던 기억이 나거든요. 왜 숨었겠어요? 갑자기 차가 멈춰서 애들을 실어가버리니까요. 제 엄마는 나름 엄마가 아는 방식으로 엄마가 버틸 수 있을때까지 싸웠던거죠. 그러니 제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엄마에게는 있겠죠. 한국인 여자가 아이를 포기했다. 이게 저에 대한 딱 한줄의 사실이죠. 고통스러운 사실이죠. 그런데 더 고통스러운 것은 상대방의 이야기는 못들어 본채 저 혼자서 다시 이야기를 지어내야 한다는 점이죠. 

우리의 이야기는 각각 다 달라도 힘들어하는 방식은 비슷 하더라구요. 부모나 혹은 부모로부터의 보호가 어때야 하는지에 혹은 어떤 방식으로 자랐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대치가 있고 또 현실을 또 각각의 왜곡된 시선으로 보죠. 어떤 사람들은 현실을 아예 분간을 못하고요. 제가 하와이에 산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다들 와우 너무 좋겠다 그러는데 그럼 저는 속으로 물가가 얼마나 비싼데요 하고 불평하죠. 제가 실제로 살면서 느끼는 하와이의 삶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리는 것하고 차이가 있죠. 그러니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할때도 그 왜곡된 현실인식이 반영되죠. 입양인이든 조실부모를 했든 부모한테 학대를 받았든 스스로를 학대하든 우리의 삶은 항상 내가 생각하기에 그랬어야 되는 삶과 실제로 일어난 삶의 차이에 대한 것이죠. 그리고 성장하며 그 이야기를 가지고 어떻게 했는지요. 우리가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도요. 

저한테 도움이 된 요소가 하나 있어요. 항상 우리가 고통받는 방식엔 세가지가 있어요. 이 두 버전 사이에 간극이 클때. 그리고 계속 되새기며 파고들어요. 그러다가 누군가를 비난해야하죠. 이 불편한 감정에 대해서요. 그러다보면 우리의 뇌가 계속 조심하라고 경고를 주고요. 결국 그걸 놓아버리고 나아가지 않는한 뇌가 자꾸 우리를 휘젓죠. 그러다가 결국 삶의 목표를 추구하거나 삶을 살아가는것을 방해하는 정도까지 이르게 되면 우리는 그 이야기의 간극 자체를 탓해요. 그런데 말로는 엄마를 비난한다고 말해요. 사연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요. 엄마가 어쩌구 저쩌구해서 엄마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그래서 먹어야 되고 그래서 움직이지 못하고 그래서 이래저래 괴롭고 불안하다고요. 즉 우리가 연결을 지어요. 나한테 있는 이런 고통스러운 이야기들과 스스로 주체가되어서 당당히 행동하지 못하는 것을 연결지어요. 

그리고 입양인으로서 우리의 이야기는 단체로 무시당해왔죠. 우리의 이야기의 일부분을 남들이 가져다가 마음대로 바꾸고 떠들어댔죠.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요. 이 용서작업의 제일 첫 단계가 바로 누군가가 들어주는 것이거든요. 카오미씨가 이렇게 입양인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있잖아요.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들이죠. 너무 슬픈 이야기들이요. 그런데 곧 누군가는 나타나서 우리 면전에다 대로 우리가 얼마나 운이 좋아는지 선택받았다느니 축복받았다는둥 혹은 감사해야한다는둥의 이야기를 늘어놓겠죠. 진짜 짜증 지대로에요. 진짜 극혐이에요. 

그럼 말해야죠. 그날 나는 내 문화를 잃어버렸다고요. 내 언어와 음식과, 나를 인종차별하던 친구들까지도요. 나를 괴롭히던 친구들이었지만 적어도 나한테 익숙 했잖아요. 내가 잘알던 것들이란 말이에요. 내 나라였다고요. 비록 그 나라가 나를 원하진 않았지만 내가 알던 나라였다고요. 그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졌죠. 그리고 갑자기 네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를 축하하래요. 얼굴에 두껍게 가면을 쓰고 살면서 왜 나는 이렇게 비참한지를 생각해야 하죠. 그러면서 어떻게 한 사람이 건강한 삶을 살기를 바라나요? 다른 이야기하기를 하라고 사람들이 끈임없이 강요하는데 말이죠. 치유라는 것이 결국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잔아요. 듣기 싫은 다른 사람이 원하는 이야기를 억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고요. 내 스스로 내 이야기를 먼저 듣고 그 다음 목소리를 내야죠.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있죠? (웃음) 제가 말이 좀 많아요. 하루종일도 할수 있어요. 그런데 오랫동안 그러질 못한적도 잇었어요. 회의시간에도 맨 뒤에 앉아서 제발 눈에 띠지 않기를 제발 아무도 나한테 말시키지 않기를 바랬던 적도 있어요. 그냥 없어져버리고 싶었죠. 그러면 치유가 안되죠. 그러니 카오미씨가 백명이 넘게 인터뷰를 했다고 하면 그만큼의 힐링이 일어난거에요.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를 듣고요.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비록 반박당하는 한이 있더라도요. 지금도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힘있는 백인들이 나서서 제가 틀리다고 하겠죠. 진짜가 아니라고요. 마치 그 영상처럼 말이에요. 마침내 그 영상을 없애버리고 제가 나서서 말할때가 온거에요. 당신이 뭐라 생각하든 상관없다고. 나한데는 끔찍한 일이었다고. 그리고 그렇게 기억하는 것에 대해 나는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요. 돌아가서 그때의 엄마를 보면 그때 그렇게 나를 막 대해줘서 고마워요. 진짜로 고마워요. 라고 말할거에요. 그러다보면 내 목소리를 내고 내 스스로를 막 대했던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런 행동들을 멈출수도 있겠죠. 제 삶에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쳤으니까요. 입양인들이 목소리를 낼 공간을 마련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지나간 팟캐스트를 다 듣진 못하겠지만 할일 목록에 넣어 놓을게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조이씨와 연락할수 있죠?

The practice center.org 가 제 웹사이트 주소고 admin@thepracticecenter.org 가 이제일 주소입니다. 제 이름이 독특해서 소셜미디어에서 쉽게 찾을수 있어요.  검색도 쉽게 되고요. J O Y I <laugh> R H Y S S. 전화번호도 찾을수 있어요. 문자를 보내셔도 되고 이메일을 보내셔도 됩니다.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되고요. 유투브에 영상도 많이 있어요. 용서과정과 마음챙김 작업에 대해서 설명하는 영상도 있고 실제 상담자와 인터뷰를 한 내용도 있어요. 필요하시면 저와 함께 같이 이 작업을 해보면 좋겠어요. 관심 있으신 분들 연락 주시면 미리 대화를 나눠볼수도 있고요. 

              번역 : 전유근 

즌 4, 에피소드 25, 수잔 게이타

시즌 4, 에피소드 25, 수잔 게이타

어댑티드 팟캐스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호스트 카오미 리입니다. 

“어렸을 때 한국과 연관되고 싶지 않아했을 때, 제 부모님은 저를 존중한다면서 제 의사를 따라줬지만, 사실 제가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내면화했다는 점을 간과했던거죠.” 

어댑티드 팟캐스트에서는 전세계에 거주하는 해외입양인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이번주에는 미국 동부에 사는 수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수는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사는 해외입양인이자, 루터교회 목사이자, 양성애자입니다. 그동안 수가 이렇게 다양한 공동체에 속하면서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교류해왔는지에 대해 그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수를 소개합니다. 

수: 제 이름은 수잔 게이타이고 She/Her/Hers 대명사를 사용해요. 제 한국이름은 이형호라고 알고있어요. 현재는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북서쪽으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48세이고요. 제가 출생에 대해 아는 건 대부분 부모님이 받은 서류에 있는 내용이에요. 친어머니는 절 낳고 의학적 관리 미흡으로 바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친아버지는 3달 동안 아마 보모같은 분의 도움을 받으며 저를 키우려고 했던것 같지만, 결국 사회복지기관에 맡겼다고 해요. 제가 알기로는 당시 사회의 분위기상 남자가 혼자서 딸을 키우는 게 녹록치 않았던걸로 알고 있어요. 친부모님은 서류상으로는 양부모님보다 2살 정도 나이가 더 많아요. 딱히 젊었던 것도 아니고, 혼인도 한 상태였고, 다른 아이도 없었죠. 만약 아버지가 재혼하셨다면, 저한테 이복동생이 있을 수도 있겠죠.

팟캐스트: 저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미혼여성이나 미혼남성이 혼자 애키우는게 쉽지 않죠 – 주변의 편견이 많으니까요. 친부모님의 직업은 아세요? 농부였나요? 

수: 아버지가 판매원이였대요. 

팟캐스트: 네, 수의 고향은 어디인가요? 

수: 서울입니다. 왠지 모르겠지만 늘 제가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어른이 되서 다시 서류를 보고, 그 뒤에 구글이 생기고 나서는 (웃음) 주소로 검색할 수 있잖아요, 주소로 찾아봤더니 서울시에서 태어났더라고요.

팟캐스트: 유아로 입양되었죠?

수: 네 6개월 때 입양되었습니다.

팟캐스트: 어디로 입양되었죠?

수: 부모님이 뉴저지주 북부에서 살고 계셨어요. 뉴저지 포세이트 카운티에서 자랐습니다. 뉴욕시 근교였죠. 제가 1학년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죠. 그러고 웨스트체스터(뉴욕주에 있는 지역 – 번역주)로 이사를 가서 8학년때까지 살다가 다시 브롱스로 갔어요. 아마 우리가족은 웨스트체스터에서 브롱스로 이사한 유일한 가족이지 아닐까 싶어요 (웃음). 그곳에서도 몇 년 살다가 롱 아일랜드로 이사했죠. 하지만 전 롱 아일랜드에서 지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을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1년 더 빨리 진학할 수 있는 대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대학교에 일찍 입학했어요. 저에게는 사실 입양인인 오빠가 있는데요, 국내입양인이라 백인이죠. 3살 반 정도 나이가 많아요. 사람들에게 농담삼아 저는 수입산이고 오빠는 국내산이라고 이야기해요. 오빠와 저, 부모님이 한 가족이었죠. 제가 입양되었을 때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유치원에 들어갈 때 어머니가 간호사로 일하면서 저희를 키웠어요. 동시에 파트타임으로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제가 8학년 때 졸업을 하셨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제 부모님 두 분 다 목사였어요. 

팟캐스트: 목사 부모님은 엄격하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두 분도 그러셨나요? 

수: 아뇨. 엄격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어요. 두 분 다 공정하신 분이셨죠. 뉴욕주에서 자라면서, 저희 부모님은 루터교 목사였는데요 – 청취자들은 물론 루터교를 잘 알고있겠지만 (웃음) – 당시 대부분이 루터교를 거의 몰랐습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거나 목사의 아이들이라고 주목을 받지 않았죠. 부모님은 공정하신 분들이셨어요. 애정이 깊은 분들이기도 하셨습니다. 제 오빠는 항상 말썽꾸러기였죠. 부모님이 오빠때문에 고생을 하셨는데요, 부모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열심히 하셨습니다. 두 분 모두 건강한 가정에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물림을 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셨어요.

팟캐스트: 브롱스를 제외하면 백인 위주의 동네에서 지내셨군요?

수: 음…. 재밌는 사실은 웨스트체스터는 백인 위주의 동네였죠. 하지만 항상 반에서 서너명 정도의 아이들은 아시아인이었어요. 80년대였으니 일본 기업인들이 뉴욕을 한창 오갔을 때죠. 그래서 아시아 국가에서 온 아시아인들이 있었고, 1세대도 있었습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저를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학교에 갔을 때 담임 선생님이 절 보고 푹하고 한숨을 쉬더니, “애가 영어는 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대요(웃음). 못하는 애들이 워낙 많았어서 그랬죠. 어머니는 “애가 수다를 멈추지 않아서 걱정이에요”라고 답을 했대요(웃음). 어렸을 때 수다쟁이 었다고 하더라고요. 아시아인들 몇명과 친하기는 했지만 아시아인들과 자연스럽게 친구집단을 형성하지는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아시아인을 봤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친해지고 싶었나요? 관심이 갔나요? 

수: 그 아이들의 도시락을 보고 부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도시락 상자를 열면 맛있는 밥 향기가 났죠. 제 어머니는 아무리 노력해도 밥은 하실 수 없었거든요. 그런 점이 부러웠어요.

팟캐스트: 어머니에게 도시락을 만들어달라고 안했어요? 

수: 부탁하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밥을 잘 못하는걸 알고있으니까요. 

팟캐스트: 도시락을 따라잡기는 어렵겠죠. 아주 예쁘니까요.

수: 네 그랬죠. 아시아인 친구 몇명과 친하게 지냈어요. 비슷한 레벨의 반에 배정되었거든요. 물론 제 초등학교 때 가장 친한 친구는 이탈리아인이었어요. 그 친구가 기억하기로는 저와 로버트 리 둘만 독보적으로 독서반에 있었다고 해요. 다른 애들보다 똑똑했거든요.

팟캐스트: 아 아시아인이라 같은 반에 들어간게 아니라 모범생이어서 들어간거군요? 

수: 네, 당연하죠. 둘 다 공부를 잘했어요. 아시아인이니까요. 

팟캐스트: 그런 선입견에 반발하신 적은 없나요? 전 그랬어요, 고등학교 때 똑똑한 아시아인이라는 선입견이 싫어서 B를 받는 평범한 학생인게 좋았거든요. 

수: 제가 다닌 학교이름이 브라운과학고등학교였는데요, 입학시험이 있는 학교였죠. 한국계 미국인들이 정말 많았어요. 저는 그 애들을 보면 약간 겁을 먹었어요. 걔내들은 진짜 한국인들이니까요. 물론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 좀 친하게 지내긴 했지만 제가 각별히 친하게 지낸 친구들은 아니었죠. 저와 다르다는 게 느껴졌어요.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애들이 전부 공부를 잘했어서, 다른 일반 학교와는 다른 방식의 관계들이 있었어요. 

팟캐스트: 그럼 자라면서 외모 콤플렉스는 느끼지 않으셨나요?

수: 제 외모(의 차이)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어요. 외모를 싫어했기보다는 의식하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에, 나중에 느꼈던 감정은 놀라움이었죠. 스스로 제가 백인처럼 생겼다고 생각했거든요. 거울을 봐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죠. 제게 아주 강렬한 기억이라, 나중에 입양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다른 입양인들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는 걸 알게되면서 신기했어요. 제 외모를 싫어했다고는 할 수 없어요. 아예 인식을 못 했으니까요.

팟캐스트: 일종의 부정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수: 네, 하지만 적극적 부정이라기보다는 자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부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백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부모님은 저에게 늘 제가 한국인이라고 이야기 해주셨지만, 제가 아마 7살인가 8살 때 부모님께 제가 한국인인 부분은 얼굴밖에 없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어요. 물론 인지적으로는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렇지만 머릿속으로 제가 상상하던 저의 모습은 거울에서 보이는 제 모습과 달랐어요. 

제가 다른 입양인들을 찾아 만나기 시작한 건 2000년이었습니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탐구하기 시작했을 때였죠. 90년대에서 2000년대 무렵이었어요. 30세 정도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때부터 유색인종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자각도 하게 되었죠.

팟캐스트: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수: 신학대학 덕분이었죠(웃음). 신학대학에 입학하면서 스스로를 많이 돌아보게 되었어요. 제가 초대되었던 행사의 영향도 받았고요. 플로리다에서 유색인종 학생을 위한 전액 지원되는 행사가 있었어요. 잠깐 망설이긴 했지만, 플로리다로 공짜로 여행을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참여했죠. 큰 교회에서 주최하는 행사로 신학대학교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었어요. 저희(유색인종)는 무료였고요. 그 때부터 제가 유색인종이라는 자각을 하기 시작했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했죠. 입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 건 중국 여자애를 입양한 백인여성과 같이 지낼 때였어요. 중국입양인 부모단체의 멤버였고 단체가 여는 행사에 성인입양인을 패널로 초청하고 싶어했죠. 그 단체가 KAtCH(시카고 한국계 입양아, 시카고 기반 한국계 입양아 단체)에 연락을 했습니다. 위스콘신 밀워키에는 자생적인 입양인 단체가 없었기 때문에 KAtCH에 연락을 했어요.

팟캐스트: 그 때 밀워키에서 살고 계셨군요?

수: 신학대학에 1999~2003년까지 재학했었고, 2003년에 밀워키로 이사했어요. 밀워키에서 살면서 입양인부모를 위한 행사에 패널로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입양인의 정체성과 입양 현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났어요.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잘 하고 있는지랑 중국에서 입양한 아이들이 잘 자라줄지를 궁금해 했죠. 그런 질문에 저는 ‘저는 잘 자란 거 같습니다. 그렇지만…’이라고 대답했던게 기억나는데요, 그 때부터 국제입양을 사회적 문제로서 접근하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KAtCH와 같이 활동하기 시작했고, 위스콘신에 사는 한국인 입양인들을 만나기 시작했어요. 그 이후 같이 살던 여성과 중국을 방문해서 둘째 아이를 입양할 때 동행했습니다.

팟캐스트: 그 동거인과 연애 관계를 맺고 계셨나요?

수: 네 연애 관계를 맺고 있었죠. 공식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이혼을 하는 중이었고, 저의 친한 친구였던 그 여성이 동거를 제안했어요. 괜찮은 생각이었죠 (웃음), 어차피 이사를 나와야 했고, 친구가  미혼모였기 때문에 제가 도와줄수 있다고도 생각했어요. 제가 중국 방문에서 생생히 기억하는 일이 있는데, 광저우에 막 도착했을 때에요. 저와 제 친구, 친구의 딸이 같이 있었는데, 딸이 주변사람들의 시선에 많이 당황해 하더라고요. 자기가 엄마랑 같이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아시아인인 저랑 같이 있으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고 나중에 말하더라고요. 

팟캐스트: 아이가 수와 같이 있으면 이상해 보이지 않아서 신경을 안썼다는 거죠?

수: 네. 

팟캐스트: 중국에서만 일어난 일인가요? 아니면 다른 곳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나요?

수: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죠.

팟캐스트: 네.

수: 중국이었죠. 

팟캐스트: 근데 밀워키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수: 확실히 그랬을 수도 있지만, 말로 표현지는 않았어요. 

팟캐스트: 그 아이에게 부모이기도 했나요? 

수: 그 애의 삶에서 딸을 지지해주는 부모의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나이가 더 많은 다국적입양인으로써 아이의 경험을 이끌어주고 싶었죠. 아이의 경험이 평범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엄마와 제 관계가 멀어졌어요. 아이의 엄마가 제가 부모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그 애의 관계로 인해서 위협감을 느꼈으니까요. 

팟캐스트: 두 분이 연인 관계였을 때도 그랬나요?

수: 그랬죠. (웃음) 아주 복잡한 관계였습니다.

팟캐스트: 얼마나 그 관계를 지속하셨죠?

수: 2년 정도요.

팟캐스트: 팟캐스트에서 이야기하 는 데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수: 이정도의 수준에서는 괜찮아요.

팟캐스트: 아 다행이네요. 그분과의 관계가 첫번째 동성관계였나요?

수: 네. 첫 관계였죠.

팟캐스트: 어떤 성정체성을 가지고 계세요?

수: 양성애자입니다. 현재는 남성과 결혼한 상태이고, 예전에도 남성과 결혼한 적이 있죠.

팟캐스트: 언제부터 양성애자라는 사실을 아셨죠?

수: 대학교 때부터 알았어요. 대학교에서 제 성적 지향성과 감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죠.

팟캐스트: 그런 끌림을 거부하려고 하셨나요?

수: 네. 하지만 제가 이 여성과 교제할 때에는 부모님에게도 말씀을 드렸고 소통하려고 노력했죠. 저는 제 부모님에게 교제 사실을 알렸지만, 파트너는 자신의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았어요. 관계가 꽤 진행되었음에도요. 어머니에게 양성애에 관해서 설명하던 때가 기억이 나네요(웃음). 어머니가 이해하시려고 노력을 부단히 하셨어요. 그 때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는데요, 당시에는 사람들이 그런 지향성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니까요 (웃음). 뭐 지금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때는 성적 난잡함이 아니라, 사람의 성과 상관없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는걸 잘 몰랐을 때죠.  

팟캐스트: 중국입양인부모들을 만났을 때로 시점을 돌려보죠. 

수: 네.

팟캐스트: 그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불편했나요? 

수: 그 땐 망설였지만, 나중에 보면 입양인 부모들이 원하는 이야기나 선입견을 깨줄 수 있었던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어떤 이야기를 듣고싶어 했나요?

수: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듣고 싶어했어요. 좋은부모로서의 정당성을 부여받길 원했죠. 하지만 그런 말을 해줄 수 없었어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정확한 답안이 없죠. 그때 생각하게 된 게, 어렸을 때 한국과 연관되는 걸 거부했을 때, 부모님이 저를 존중한다면서 제 의사를 따라줬지만, 사실은 제가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내면화했다는 걸 간과한거죠. 굉장히 미묘한 일이죠. 부모님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올바른 일을 했으니까요. 입양인부모들은 정답과 국제입양을 한 행동에 대한 인정을 간절히 원했고, 제가 최선의 길을 추천해주기를 바랬습니다.

팟캐스트: 그러한 해답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공정하지 못하네요. 

수: 그렇죠, 물론 그 사람들이 저에게 그런 답을 원한다고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뭘 원하는지 느낄 수 있었죠. 하지만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그런 곳에 가면 불임인 부부도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 입양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거나 비판적으로 말하면 그 사람들이 가진 부모의 꿈을 파괴하게 되는 셈이니 말하기가 복잡하죠. 큰 압박입니다. 물론 수 씨는 이런 문답을 할 때 30세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난 뒤였지만, 더 어린 입양아들이 입양기관에 의해서 이런 복잡한 상황에 놓이니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수: 네 그렇습니다.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둘 다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일이었죠. 저에게 있어서 입양은 좋고 나쁜 일이었으니까요. 제 초등학교 때 가장 친한 친구가 불임 문제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친구에게 입양을 권유했죠. 저도 입양되었고, 입양, 입양제도와 관련해서 큰 문제는 없으니까요. 친구는 그 말에 하지만 피로 이어진 아이를 원한다고 대답했죠. 하지만 저는 자라면서 제 부모님이 진짜 부모님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항상 제 부모님을 진짜라고 생각했죠. 매우 복잡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서로 대립하는 관점을 동시에 가질 수 있어요. 

팟캐스트: 대립하는 관점이라니 정확히 어떤 의미이시죠?

수: 음…. 입양은 좋거나 나쁜 일이 아닙니다.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죠. 적어도 제가 가진 입양에 대해서 가진 관점은 그래요.

팟캐스트: 그 강연에서 입양 부모에게 준 다른 조언은 뭐가 있었나요?

수: 조언을 해주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조언을 원하지만 저는 조언을 주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했죠. 이 모든 일이 제가 타 인종 간 입양을 한 백인 입양 부모와 연인 관계를 맺고 있는 동안 일어났어요. 

팟캐스트: 그 입양 부모들을 아주 답답하게 만들었겠군요? 지금 만약에 똑같은 상황에 놓인다고 한다면, 똑같은 말을 할 건가요?

수: 지금 제가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선언보다는 질문을 더 많이 하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부모들에게 자기 스스로 질문을 던지라고 하고 싶죠. 

팟캐스트: 질문의 예를 몇 가지 들어 줄 수 있나요?

수: 왜 입양을 하고 싶나요? 왜 국제적 입양과 타 인종 간 입양을 고려하고 계십니까? 두려운 점은 있나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려우십니까? 이런 식의 질문을 하게 하고 싶죠. 입양 부모들의 동기를 알아내고, 공포를 알아내는 일입니다. 부모가 되어야 결혼 생활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그러한 인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부모의 정체성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처음에는 제가 입양 부모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교환 학생들을 집에서 지내게 하기도 했고, 유아 위탁 가정으로도 활동했으며, 입양아를 키우던 여성과 연인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죠. 무의식적으로 제 어머니가 출산과정 중에 죽었으니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가져야 할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가지고 싶다면 선택지는 입양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선택지가 없이 부모가 되었죠. 왜 그랬는지, 목적이 뭐였는지 몰랐습니다. 그때 저는 연인도 없었고, 돈도 없었지만, 부모가 되고 싶다고 선언했고, 부모가 되었어요.

팟캐스트: 선택지가 없었다니, 실수로 임신하셨나요?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었나요?

수: 실수라고 하지 않겠지만….

팟캐스트: 아이를 가지려고 계획하고 있지는 않은 상황에서 아이를 가지셨군요?

수: 네.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아이를 가진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때 제가 관계를 상대와는 결혼하지 않았죠. 제가 임신하게 된다면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결혼을 했고, 현재 남편이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그러니까 현재 남편과 재혼을 하셨는데, 아이를 가지고 난 뒤에 재혼했군요?

수: 네.

팟캐스트: 남편과 사귀실 때 아이를 가지는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남편분이 긍정적이셨군요?

수: 네.

팟캐스트: 알겠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백인인가요?

수: 푸에르토리코인이에요

팟캐스트: 오. 알겠습니다.

수: 저와 그이의 딸 그레이스가 태어난 지 몇 달 안 지나서 그 사람의 장녀가 18살이 되었죠. 그이와 저는 아주 달라요. 저도 의도적으로 제 주변에 있는 사람과 다른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레이스가 1살 반 정도 되었을 때 그이와 제가 결혼했죠. 

팟캐스트: 그때 나이가 37세 정도 되셨지요?

수: 38세였습니다. 

팟캐스트: 노산이라 생길 문제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으셨나요?

수: 확실히 제가 고위험군에 해당하긴 했어요. 거기에 전 희소병 환자이기도 해요. 아주 희귀한 병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저번에 입양아 포럼에 같은 병을 가진 사람에 관해서 물어보려고 하다가 까먹었습니다. 국소피부경화증이라고 하는 병이에요. 내부 경화증과 비슷하지만, 내부 경화증은 장기까지 경화시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는 병이지만, 제가 가진 병은 피부가 경화되고 근육이 위축되는 병입니다. 현재 제 다리 중 하나가 다른 다리보다 더 커요. 국소피부경화증을 앓고 있는 다리가 다른 다리보다 더 작고, 피부가 수축한 상태이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그걸 보고, 제가 화상을 입었다고 인식하고는 합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피부가 더 신축하지 않는 병이죠. 그리고 제 복부 피부가 더 신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생각했어요. 임신하고 나면 복부가 부풀어 오르기 마련이니까요.

팟캐스트: 하지만 복부의 피부가 늘어나지 않으니 문제가 되었군요?

수: 제 복부 피부의 반은 신축성이 남아 있었지만, 나머지 반이 신축성이 없었죠. 어떻게 제 육체가 제 임신에 반응할지 흥미로웠습니다.

팟캐스트: 그 국소피부경화증은 나이를 먹으면서 어떻게 변화하죠? 수 씨가 신경 써야 할 정도의 중병인가요?

수: 그렇게 심각한 병은 아닙니다. 제가 병원을 방문하면 의사들에게 제 질병에 대해서 가르쳐 줘야 할 정도예요. 의사도 잘 모르는 질병이죠. 제가 4살 때 이 병이 있다고 진단을 받았고 자라면서 조금씩 퍼지긴 했지만, 그렇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위험할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죠.

팟캐스트: 아주 어렸을 때 그 병 진단을 받았는데, 부모님이….

수: 제 부모님이 걱정했는지 궁금하세요? 당연히 걱정하셨죠. 사실 관련 수술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 다리들의 길이가 맞지 않아서 의사들이 다리 성장을 멈춰서 다리 길이를 맞추기 위한 수술을 언제 해야 할지 서로 토론하고 있었죠. 저의 긴 다리 쪽의 성장을 특정 시기에 멈춰서, 제가 성장을 끝낼 무렵에는 제 두 다리의 길이가 비슷하게 만들려고 했어요. 어머니가 한국에서 한국인 성장 표를 가지고 와야 했습니다. 미국 의사들이 “한국인이라 성장 속도가 다를지도 모른다.”라고 우려를 표현했기 때문이죠. 의사들이 생각보다 더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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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국소피부경화증을 가진 사람들은 증세의 사진을 올리기도 하는데, 그 사진을 보면 약간 놀라요. 좋은 방향으로 놀랍니다. 제 다리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다리를 본 적이 없죠. 한국 입양아들과 처음 만났을 때나, 다른 사람과 공통점을 찾았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는 합니다. 현실에서는 국소 피부경화증을 앓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죠. 한국 입양아의 경우는 과거에 한국 입양아를 만난 적이 있지만, 그 사람들이 한국 입양안지 자각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한국 입양아 사회와 만났을 때의 기분과 국소경화증 환자 집단과 교류했을 때의 기분이 비슷하군요?

수: 네. 저와 비슷한 다리를 가진 사람을 보는 과정이 그랬죠.

팟캐스트: 확실히 그렇네요. 공통점을 가진 다른 사람과 만나게 되는 일이니까요.

수: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국소피부경화증이 얼마나 희소병인지 알고 있나요?

수: 초 희소병입니다. 숫자 자체는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제가 방문한 의사 대부분이 들어보지 못했을 정도로 희귀하죠. 

팟캐스트: 수 씨가 입양 부모와 연인 관계였다는 사실을 다시 짚고 싶네요. 제가 만난 입양아 중에서는 처음으로 입양 부모 연인을 두셨거든요. 물론 제가 아는 한국계 입양아 중 몇 명이 입양 부모가 된 경우가 있긴 하지만, 수 씨의 경우에는 그 당시의 연인이 입양 부모였고, 다인종 간 입양이었죠. 그 관계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수: 제 전 여자친구는 관련 문화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죠. 그래서 저와 여자친구의 관계가 제 한국인 입양아의 특성과 연관이 있었는지 항상 궁금했어요.

팟캐스트: 아 묻고 싶었던 주제이네요. 이상하다고 느꼈나요? 이상했나요?

수: 입양 부모가 입양아와 관계를 한다는 사실이 말이죠?

팟캐스트: 한국계 입양아와 같이 연인 관계를 맺고 있는데 중국에서 두 명의 아이를 입양했다니, 백인 구세주 콤플렉스와 관련되어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수: 음…. 전 여자친구가 입양하기로 한 이유 중 하나는 여자친구가 미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같이 생활하면서 확실히 그 미혼 상태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했고, 그때 저는 미혼 상태에서 여자친구가 부모가 될 방법은 입양밖에 없어서 입양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죠. 여자친구가 부모가 되기 원해서 입양했지,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입양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 전 여자친구와 저의 관계가 지속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 2명의 관계가 비밀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저와 제 전 여자친구의 직업 때문에 서로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발표할 수 없었죠.

팟캐스트: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전 여자친구 집에서 수 씨가 방을 빌리고 있다고 생각했나요?

수: 네. 아이들 돌보는 일도 도우면서 같이 동거하고 있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교회에서 목사로 일하고 계시죠?

수: 네.

팟캐스트: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숨겨야 했던 이유가 목사 일 때문이었나요?

수: 네. 그때 교회 상층부에서는 그런 관계를 허용하지 않았거든요. 

팟캐스트: 동성연애나 결혼을 할 수 없었군요. 미국 복음주의 루터 교회(ELCA, 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America) 이었나요? 

수: 네. 공식 지침이 우리가 헤어지고 난 뒤 1년 뒤에 바뀌었죠.

팟캐스트: 그런…. 그 비밀 관계가 연인 관계가 실패한 원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적어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나요?

수: 아뇨. 궁극적으로 비밀 관계 때문에 우리 관계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처음부터 우리 관계가 건강하게 시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죠. 같이 상담도 받아보고 우리가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해보려고 노력을 해야 할지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죠.

팟캐스트: 왜 목사의 길을 걷게 되셨죠? 항상 목사의 길에 관심이 있었나요?

수: 아뇨. 제가 처음으로 목사에 진지하게 접근하기 시작했을 때는 대학교 졸업하고 난 뒤 사회 정의와 관련된 일을 하려고 했을 때였죠. 저는 사회 정의적 활동이 신앙과 영적 활동과 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어요. 그때는 제는 컴퓨터 공학 업계에서 일하면서 돈도 많이 벌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었죠. 하지만 공부해야 할지 몰랐어요. 신학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지만, 목사가 되고 싶었는지도 몰랐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다음 문이 열리고 다음 단계를 밟다 보니 목사가 되었죠. 지금도 제가 목사가 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서 기반이 필요하고, 그 기반은 사람과의 관계에 기반을 둬 있죠. 답을 아는 일보다는 같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요. 초등학교 때 저는 행복한 아이였죠. 그래도 다른 애들과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다르다고 느꼈죠. 입양아였기도 했지만, 주변 사람들보다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뉴욕에 스카스데일과 이스트체스터의 경계 지역에 살고 있었으니 여러가지 면모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느꼈죠. 입양아 경험이 제가 사람과의 관계를 추구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제 부모님은 제 오빠가 절 좋아하기를 원했고, 깊은 관계를 원했다고 했어요. 하지만 오빠가 가지고 있던 문제가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게 했죠. 오빠가 저를 버렸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오빠와 제 관계가 아예 멀어지지는 않았지만, 오빠가 먼저 저에게 연락하지는 않아요. 오빠에게 이메일을 하거나, 페이스북으로 연락하면 반갑게 맞아 주긴 하지만 정기적인 교류를 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오빠와 저는 서로를 좋아해요. 하지만 서로 차이가 심하게 나죠. 최근 오빠에게 입양아의 경험에 관해서 물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빠의 친가족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지 물어보고 싶었죠.

팟캐스트: 교회에서는 인연을 느끼나요?

수: 교회에서 인연을 느낀다고 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교회를 통해서 만나는 사람과 인연을 느낍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앙을 가지고 신앙과 영적 여행을 떠나면서 느끼는 인연을 느끼죠. 

팟캐스트: 신앙과 영적 경험이 수 씨에게 아주 중요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수 씨가 그 두 가지 요소에 대해서 말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요? 항상 수 씨 곁에 있으면서 수 씨가 어려운 경험을 할 때 도와줬나요? 

수: 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 적은 없어요. 여러 시점에 기독교와 관련해서 여러 문제를 겪기도 했지만, 제 신앙심은 하나님을 성령으로 믿고 기반이자 힘이라고 생각해요. 전 하나님이 여러 가지 일을 일어나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비극이나 나쁜 일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나타나서 돕는다고 생각하죠. 미국 흑인 여성의 경험에 기반을 둔 여성주의 신학에서 로렌 윌리엄스가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설명할 수 없는 일 대부분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죠. 적어도 제가 설명할 수 없는 좋은 일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과의 인연이 만들어지는 일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죠. 제가 한국 문화와 배경을 배우게 된 이유는 한국에서 태어나 8살에서 10살 사이에 미국에 이민을 온 한국 여성과 만나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색 신앙 프로그램에 같이 참여하고 있었죠. 사색 신앙은 침묵 속에서 신앙을 생각해보는 활동이었습니다. 그분도 모태 신앙이고 다시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어요.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만난 뒤에 서로 친해졌죠. 그 친구를 통해서 영적 탐구, 설교, 신학에 흥미가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 사회와의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20년 전에도 이 사회와 관계를 맺었지만, 그때는 관심이 없어서 거리를 뒀습니다. 제가 한국계 입양아라는 이야기를 꺼내자, 80명의 회원 중에 4명의 아시아계 다인종 간 입양아들의 대화를 나누게 되었죠. 지금 현재 다음 단계의 길은 저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계획을 하고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적어도 그 길에 대해서 열린 태도를 유지하고 어떤 길이 될지는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