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4, 에피소드 23: 제시 헤일

Audio available on Monday, April 19, 2021 at 7 am ET.

제시 헤일 씨, 한국 이름 송진주 (23세) 씨는 어린이일 때 한국에서 위스콘신으로 입양되었다. 현재 진주 씨는 한국에서 암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진주 씨는 친부모를 찾는 데 성공했으며 이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제시: 제 이름은 제시 진주 헤일입니다. 한국 이름은 송진주예요. 대한민국 양산시에 거주하고 있죠. 미국 위스콘신주 뉴 베를린에서 자랐으니 큰 거주지의 변화를 겪었습니다. 현재 23세예요.

팟캐스트: 양산 시는 어디에 있죠?

제시: 대한민국 남부에 있는 도시입니다. 한국 제2의 도시인 부산 바로 옆에 있죠. 남해안 근처에 존재하는 도시예요.

팟캐스트: 한국으로 이주하기로 한 이유가 뭐죠?

제시: 한국에 이주할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어학연수를 위해서 부산에 두 달간 방문했기 때문이죠. 2달 동안 학생 신분으로 부산에서 거주했어요. 그 2달 연수 이후에 미국에서 지내다가 한국으로 오기로 했습니다. 대학교 졸업을 하고 일자리를 찾고 있었는데, 어학연수 동안 만난 사람에게 제 전공 분야의 직장에 대해 연락해 자리를 얻었거든요. 한국에 이주한 이유 중 하나는 직장과 취업 때문이었죠. 그 시기에 제가 해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제 친부모님도 찾았어요. 한국에 이주할 다양한 이유가 있었죠. 여행과 새로운 도전을 좋아하는 성격도 한국 이주에 도움을 줬어요.

팟캐스트: 한국에 언제 이주하셨죠?

제시: 2019년 3월 말 사이에서 4월 초에 한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양산시에 있는 스타트업 생명공학 기업에서 암 연구를 하고 있어요. 제가 사는 지역은 부산대학교 병원 양산 캠퍼스와 연관된 곳이죠. 제가 이 일에 대해서 처음으로 알게 된 때는 부산대학교로 어학연수를 왔을 때였습니다. 한국어 관련 회담을 위해서 부산에 갔는데, 저와 똑같은 전공에서 똑같은 주제를 연구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죠. 전 학부생 신분으로도 어느 정도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거든요. 그 사람과 친해지고 난 뒤에 취직하고 싶으면 연락하라고 저에게 명함을 줬습니다. 제가 구직하던 도중에 명함을 기억하고 연락을 했죠. 면접하고 난 뒤에 취직에 관한 이야기가 진행되기 시작했어요. 최대한 빨리 한국으로 이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한국으로 이주한 뒤 미국에서 하던 연구를 지속했습니다. 경력자로 취직할 수 있었던 일이 도움이 됐죠. 부업으로 영어 학원에서 성인 대상 영어 교육도 할 생각이라 한국 영어 교육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몹시 어렵더군요. 한국에 이주했을 때 제 전공과 관련이 없는 신규 분야에 취직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한국에 이주하면서 전공을 살린 취직을 하는 독특한 경험을 하셨군요?

제시: 네. 아주 대단한 경험이었죠. 비자의 예를 들어도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연구 비자도 있었지만, F-4 비자로 한국에 오기로 했죠. 아주 좋은 비자이거든요. 한국에 오니 언어 장벽 문제를 제외하면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제 전공을 살린 일을 하는 일은 훌륭한 기회였고 영어 선생일 보다 돈을 잘 벌었으니 한국 이주에 있어서 좋은 시작이었다고 생각해요. 한국에 왔을 때부터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로 이주하면 많은 안정성을 잃게 되는데 저에게 안정적인 직장이 있다는 사실이 큰 도움이 되었죠. 상사들도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았고, 회사에서 일하는 외국인들도 많아서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상사 상당수도 미국에서 공부해서 한국인들이었지만 제가 겪는 문제에 대해서 이해를 해줬고, 제 적응 기간 동안 관용을 보여줬죠. 생명공학 기업이라 작업에 대한 유연성을 보여줬기 때문에 작업하는 데 유연성이 있어야 하는 저에게 도움이 됐어요. 제가 관심을 가진 주제를 연구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스타트업 기업이라면 흔한 하루에 20시간씩 직장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그런 기업 문화는 아니군요?

제시: 그렇지는 않지만, 한국에서 대학교에 가고 여기에서 박사학위를 따면 그렇게 되죠. 제가 한국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진행하라는 격려를 받고도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안 따기로 한 이유기도 합니다. 제 작업 시간은 평범한 편인데, 서양 국가에 적용되는 기준 덕분이라고 생각하죠. 평범하게 8시간을 일하고, 연구에서도 유연성이 존재해요. 어떤 연구는 긴 시간이 걸리니 시간을 더 들여야 하는 예도 있고, 그런 상황이라면, 다른 날에는 더 길게 쉴 수도 있게 되어 있어서 연구할 때 있어서 좋은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주말에도 일해야 하는 단점이 있기도 하죠. 취직했을 때는 한국어 공부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한국어로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소통이 제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았고, 사람들이 제 한국어 이해도를 과대평가하는 경우가 많아서, 제가 이해를 못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결과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았고, 상사들이 제가 왜 사람들이 원하는 일을 하지 않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았죠. 단순히 상사들뿐만이 아니라 제 동료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 동료가 많습니다. 그래서 동료들과 상사들을 위해서 언어적 다리가 되어주는 경우가 많죠. 

제시: 전 한국인이면서 동시에 외국인이니 그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어서 기뻐요. 미국인의 모험심이 발휘되어서 그 역할을 하는 데 있어서 두려움이 없죠. 영어를 더 써야 한다고 조언을 하기도 합니다. 상층부에서 더 영어를 쓰라는 격려를 받기도 하죠. 우리 기업은 영어 사용 국가에도 진출하려고 노력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영어 사용이 좋은 선택이었죠. 한국 직원들이 영어를 배우려고 노력하게 되었고, 소통의 오류가 있을 거라는 인식을 하고, 영어를 쓰기 어려워하는 한국 직원들을 격려하는 역할도 합니다. 우리 회사에도 저나 외국인 직원들과 대화하지 않으려는 직원들이 있어요. 이게 국적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인식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직장에서 영어를 사용하기로 한 결정이 제 한국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해줬어요. 제 한국어를 한국 사람들이 이해 못 하지만, 동시에 제가 한국 사람들의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 쌍방의 이해 부족을 아는 일이 중요했죠. 한국어를 말하려고 하면 사람들의 인식 자체가 달라지는 일이 느껴졌습니다. 제가 금발 머리를 선호하는데 염색을 풀고 검은 머리를 해야 하기도 했어요. 머리도 자르고 제 팀에 섞여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제 팀은 제 나이 또래의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적응이 어려웠고 성공하지 못했죠. 제가 한국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염색을 풀기로 한 선택이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회사가 다른 건물로 이사했고 이러한 변화가 적응에 도움이 되었죠. 사람들이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절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절 저로 봐줬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영어 사용이 동료들과 동급의 레벨에서 소통할 수 있게 해주기도 했겠네요. 동료들이 제시 씨를 외국인으로 생각하게 했으니까요.

제시: 네 그렇습니다. 제가 그러기로 했죠. 저와 비슷한 상황에 부닥친 입양아 중 일부는 한국어를 매끄럽게 해요. 하지만 그 사람들도 어떤 상황에서는 영어를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한국어를 하거나, 모국어를 합니다. 저는 한국어를 잘못 하므로 사람둘에게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줘야 해요. 제 경험, 인식, 반응이 다르다고 사람들에게 영어를 하면서 알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거기에 젊으시니 존댓말을 자주 사용해야 해서 어렵죠?

제시: 네 거기에 호칭도 다양하니까요. 제 직장에서 그런 언어 장벽과 외국인들이 존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주니 다행이죠. 제 외국인 동료 일부는 한국어를 아예 쓰지 않으려는 경우도 있고 그 이유를 이해해요. 한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한국인들은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한국인들은 왜 한국어를 잘 못 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외국인이 한국어를 잘 하지 못하면 한국인들은 공격받는 기분이 들고 모욕당한 기분이 들죠. 하지만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사람은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 해요. 존댓말이라는 개념이 모국어에는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화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그렇게 동료들 간의 다리가 될 수 있었군요?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조언해줄 수 있으니까요. 

제시: 네. 외국인들에게는 그런 말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해주고, 반면에 한국인에게는 외국인이라 이해 못 하고 한국어를 배우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죠. 이러한 예측과 반응이 어른이 되어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데 특히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실수하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거나, 사람을 불쾌하게 하거나 비웃음을 당하는 일을 무서워하니까요. 제 직장에서 소통을 늘리기 위해서는 양측이 전부 이해를 했는지 확인하거나, 적어도 쌍방이 서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도록 해야 하죠. 서로를 평가하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의 문화 중 하나는 상대방에 대한 지속적인 평가를 한다는 점이에요. 자신들의 영어 실력을 평가하고, 동시에 남들의 한국어 실력도 평가하죠.

팟캐스트: 친부모님을 어떻게 찾게 되셨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제시: 앞에 말했지만, 부산에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습니다. 주말에 관광하려고 친구들과 서울에 올라가기로 했죠. 제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지하철역 하나가 입양기관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봤어요. 그걸 보니 제가 지금 어른이 됐으니 제 친부모 조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하지만 입양기관은 주중에만 열었습니다. 주말 동안 서울을 구경하고 어학연수 수업을 들으러 부산으로 내려와야 했죠. 연수 관리자가 제 상황을 이해해주고 편의를 봐줬습니다. 제가 관리자에게 한국에 있을 때 친부모 조사를 진행하고 싶은데 주중에 방문해야 하니 서울에 하루 더 있을 수 있냐고 문의했어요. 월요일에 수업을 빠져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죠. 관리자는 제 상황을 이해하고 제시 씨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응원해 주셨어요. 그래서 월요일에 입양기관을 방문했고 4시에야 상담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 서류를 볼 수 있었어요. 제가 16살 때 처음으로 봤을 때와 다르지 않았죠. 입양기관에 친부모 조사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과거에도 생각을 해봤고, 다른 사람들의 친부모 조사를 듣고 고민하기도 했죠. 하지만 저는 모든 관련 조사를 할 수 있으면 해보려는 사람이고, 모든 질문의 대답을 알아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조사를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2018년 여름에 친부모 조사를 시작했어요.

팟캐스트: 입양기관에서 친부모님에게 연락했나요? 단체가 그 정도의 정보는 가지고 있었나요?

제시: 네.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었죠. 어학연수가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간 다음 제 생활을 지속했어요. 제가 대학교에서 또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전에 보낸 이메일을 봤냐는 이메일이었죠. 거기에 제 친어머니와 연락이 되어서 어머니가 만나려고 하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걸 읽고 전 이메일 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을 했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친아버지가 친부모 조사에 바로 대답을 줘서 입양기관에서 저에게 연락했지만, 그 이메일이 스팸 함으로 가서 이메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행히도 2번째 이메일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죠. 만약에 받지 못했다면 제 조사 방향이 달라졌을 것이고, 당연히 제 삶도 바뀌었을 겁니다.

팟캐스트: 친아버지가 직접 연락을 하셨나요? 

제시: 친아버지가 기관을 통해서 저에게 이메일을 보내셨죠. 제가 이메일을 확인하고 나서 답장을 썼습니다. 입양기관에서 편지를 편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한국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한글과 영어로 제 연락처를 포함한 편지를 2부 작성해서 보냈어요. 직접적인 소통을 위해서 이메일, 카카오 아이디와 저에게 연락할 다른 방법을 적어서 보냈죠. 그다음에는 아버지와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었어요. 어머니와는 카카오톡을 통해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헤어진 상태였고 제가 입양 제도에 맡겨진 뒤에는 만난 적이 없었죠. 그래서 따로 연락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듣기도 했어요. 아버지가 어머니보다는 더 연락하기 편했죠. 어머니는 가족을 꾸린 상태여서, 어머니와 연락할 시간이 적었고, 두 분 다 제 입양을 슬픔과 연관해서 연락하기 힘들었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언어적 장벽까지 더해지니 소통하기 힘들었습니다. 자신의 아이이지만 성인이고 알지 못하는 타인이니까요.

팟캐스트: 조사를 시작할 때 친부모님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나요? 아니면 홀트가 알아서 정보를 찾을 수 있었나요?

제시: 제가 어른이 되고 난 뒤에 친부모 조사를 시작하고 나서야 친부모님의 이름을 알 수 있었어요. 제가 이름을 몰랐던 이유 중 하나는 제 한국어 능력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을 받고 있었고, 약간의 한국어를 배워서 어느 정도 해독능력이 있었고, 어떤 정보를 찾아야 하는지 알았어요. 그래서 정보를 약간 알 수 있었지만, 친부모님의 이름 전부를 저에게 줄 수 없었죠. 하지만 제가 어른이 되어서 한 친부모 조사를 통해서 얻은 좋은 정보 중 하나는 친부모님의 성이었죠. 최 씨와 송 씨였습니다. 제가 조사를 하면서 찾은 선물 중 하나였죠. 하지만 제가 조사를 시작하면서 제 첫 역사였기 때문에 매우 귀중했어요. 작은 정보였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가졌습니다.

팟캐스트: 처음에 친부모님과 연락이 됐다는 이메일을 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셨나요?

제시: 이미 말을 했지만, 그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 있었죠. 너무 그 조사에 희망을 걸고 싶지 않았어요. 많은 사람이 친부모를 만나거나,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큰 희망을 걸고 있지 않았죠. 제 목표는 그냥 제 친부모님의 사진을 얻는 일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었어요. 친부모님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고 저를 만나려고 기관에 답을 줬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 해체된 가족에 대한 문화적 장벽과 다른 문제가 있는데도 답을 해서 놀랐죠. 아주 기뻤고 아주 신기했어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죠. 입양아로서 여러 문제를 겪지만, 동시에 이런 흥미롭고 특별한 경험도 할 수 있습니다. 설명하기 힘들죠

팟캐스트: 슬픈 감정도 느끼셨나요? 부모님을 잃으셨다가 다시 찾은 셈이죠?

제시: 슬픔은 제가 부모님을 만났을 때 느꼈죠. 제 친아버지는 여전히 미혼이셨고, 절 잃고 다시 회복하지 못하신 느낌이었어요. 거기에 다른 문제도 겪었던 느낌이었습니다. 제 친어머니도 만났는데 제 친어머니를 직접 만났을 때야 슬픈 감정을 느끼고 제가 잃은 가족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죠. 다행히도 제 양부모님이 아주 대단합니다. 이번 주말에 양어머니가 한국에 방문하실 예정이에요. 미국에 저를 지탱해주고 지원해주시는 부모님이 있었으니 제가 갈망이나 상실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제 양부모님은 제 입양아의 슬픔을 이해하고 저에게 슬퍼할 시간을 주셨죠. 제 양어머니는 저에게 아름다운 조언도 해줬어요. 전 항상 제 친어머니를 잃어서 슬퍼했죠. 제가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양어머니에게 제가 어머니를 친어머니만큼 사랑할 수 없다고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양어머니가 어느 날은 친어머니를 더 사랑할 수도 있고, 어느 날은 날 더 사랑할 수 있지만, 괜찮다고 했죠. 그 말이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제가 어른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저에게 이런 대화를 했다고 이야기를 해줬어요. 다른 가족과 부모가 입양아의 문제와 정체성을 못하는데 어머니는 이해해줘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양어머니가 그런 경험이 없는데도 통찰력을 보이실 수 있다니 신기하네요. 입양아 친구를 두고 계셨나요? 아니면 다른 경험이 있으셨나요?

제시: 어머니가 그런 통찰력을 보이실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어머니가 행동 건강과 정신건강 영역에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족 치료와 통합을 위해서 일하시고, 트라우마 기반 치료에도 관련되어 있어요. 치료를 직접 적용하는 쪽은 아닙니다. 프로그램 작성과 관리 쪽에서 일하시죠. 밀워키 쪽 정신건강 관련 기관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공식 명칭은 랩어라운드 밀워키 (Wraparound Milwaukee)이고, 어머니는 그곳에서 30년 동안 일하셨어요. 두 번에서 3번 정도 은퇴하셨지만 그래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도와주고 계시죠. 거기에서 하는 일이 좋은 일들이고, 프로그램들도 가족을 돕는 데 큰 역할을 하거든요.

팟캐스트: 가족들의 통합에 도움을 준다는 말이시군요?

제시: 가족의 통합을 돕는 일을 하시죠. 어머니가 가진 트라우마와 어머니의 경험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돕는다고 생각해요. 어머니가 태어나기 전에 가족이 언니를 잃었죠. 그런 배경에서 자라나시고, 어른이 되면서 그런 분위기를 받아들이고 인정하셨다고 생각해요. 물론 제가 어머니가 아니니 어머니를 대신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 형제자매를 키우고,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삶에 관점을 가지고 아이들을 소중히 여길 수 있도록 어머니를 크게 도왔다고 생각합니다. 

제시: 모두가 친어머니와 양어머니를 비교하고, 누가 어느 면에서 더 나은지, 누구에게 더 친밀감을 느끼는지 알려고 하죠. 하지만 두 분과의 관계는 전혀 다른 느낌이에요. 전 사람과의 관계에서 있어서 흑백으로 나누는 사람이 아닙니다. 전 모든 친구 관계, 연애 관계, 가족관계가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고 아주 다양한 모습을 할 수 있다고 믿죠. 제가 두 어머니에게 느끼는 감정은 제가 더 많은 지지를 받는다는 느낌이죠. 제 양어머니는 항상 저에게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항상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줄 수 있고 한 사람이나, 가족이나, 혈족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양어머니에게서 그러한 교육을 받아서 친가족과의 관계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죠. 단순히 양부모님을 사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친부모도 사랑할 수 있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같은 사랑은 아니라 다른 사랑이죠. 다른 외양을 하고 있고 다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여전히 사랑입니다. 연결이 있고 공통된 경험이 있어요. 단순히 친어머니, 친아버지, 양어머니, 양아버지로 국한되지 않죠. 한국에도 다른 어머니와 아버지와 같은 분들이 계시고, 절 생각해주시는 사람들이 많으니 가족이 더 커지는 셈입니다. 아주 좋은 경향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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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미국에 계시는 양부모님에게 다양한 지식을 배웠지만, 친부모님을 만났을 때 우리 둘이 닮았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서로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죠. 유전자 조사를 안 해도 친아버지의 딸이라는 느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우리 둘 다 심한 비염이 있어요. 서로 만났을 때 아버지가 비염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저도 아버지와 만나기 전에 이미 비염 수술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같이 지내는 동안 논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전형적 한국적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매우 이해심이 깊죠. 아버지에게 소리치거나 아버지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보이는 일을 해도 아버지는 제가 자랑스럽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딸이 가질 성격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도 고집이 세거나 화를 낼 때도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러한 기질은 아버지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해요. 제 친어머니는 1번밖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훨씬 조용하고 소극적이시지만 동시에 현명하고 상냥하시죠. 어머니와 공감했어요. 어머니가 제집에서 하룻밤을 묵으실 때 어머니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하셨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통해서 저와 소통하셨고, 제 입양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다른 이상한 이야기를 하자면 전 긴 발가락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 사람들을 발가락으로 꼬집고는 했죠. 친아버지가 계단에 앉아서 제가 제 발가락으로 아버지의 강아지들을 꼬집는 모습을 보시고 친어머니도 발가락으로 그러셨다고 했어요. 어머니와 그러한 공통점이 있다니 매우 신기하다고 생각했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친부모님과 만났을 때 부모님의 삶이 있고, 제시 씨의 삶도 있었는데, 제시 씨의 아버지가 제시 씨와 더 깊은 관계를 맺고 개인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군요? 

제시: 네. 확실히 그랬죠. 아버지에게 가족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여러 트라우마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삶이 힘들어졌죠. 아버지가 그러한 문제를 오랫동안 겪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버지의 삶에 나타나서 아버지의 삶에 변화가 줬죠. 전 삶이 잘 안 풀릴 때는 주변 환경을 바꾸는 것이 좋다는 지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직접 그런 변화를 선택하지는 않으셨겠죠. 아버지의 삶에 제가 나타난 것이 아버지에게 필요로 하는 변화를 줬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아버지가 빠진 수렁에서 빠져나오게 도와줬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아버지는 고생하고 계셨고, 지금도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서 고생하고 계시죠.

팟캐스트: 정신적 문제였나요? 아니면 직업적 문제였나요?

제시: 아버지에게 정신건강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도 알다시피 한국의 정신건강 관리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이 정신 치료를 받지 못했어요. 거기에 아버지는 대학교 진학도 못 하셔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해 답답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제가 미국에서 배울 수 있었던 기술을 아버지는 배울 수 없었죠. 사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배우지 못한 기술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버지가 미국인인 저와 교류하는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서로 전혀 다른 문화적 기준이 있고,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니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죠. 하지만 아버지의 직업상 비는 시간이 더 많았고, 겨울에는 제가 지내는 곳에 와서 같이 지낼 수 있었어요. 아버지가 저에게 항상 요리를 해주며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제가 라디오에 출연할 때는 아버지가 점심 도시락을 만들어 줬고, 아버지의 차를 빌려주시기도 했죠. 아버지가 볶음밥을 만들어주고 치즈를 얹어 주셨는데 작은 하트 모양으로 만들어서 볶음밥에 박아 주셨어요. 애정을 듬뿍 담은 도시락을 만들어주셨고, 아주 좋았죠. 왜냐하면, 아버지가 오시기 전까지는 냉장고를 사용하지도 않았거든요. 전 요리를 하지 못하고, 한국에 이주하는 데 있어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살고 있는지, 장기 휴가인지 고민했죠. 한국에서 사는 다른 외국인들은 1년에서 2년 정도 지내기 때문에 저도 그 종도 지낸다고 생각하고 한국에 정착하는 일이 힘들었어요. 특히 제 가족이 미국에서 살고 있었으니 정신적으로 큰 장벽이 있었습니다. 한 발은 한국에 있지만 한 발은 외국에 두고 있는 셈이었죠. 아버지가 한국을 집처럼 느끼는 데 도움을 주셨어요. 거기에 제집에 둘 중고 가구도 잔뜩 구해 주셔서 금방 집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집에 올 때마다 새로운 탁자가 있고, 새로운 의자가 있고 그랬죠.

팟캐스트: 아주 따뜻한 느낌이네요. 아버지가 제시 씨에 대한 애정을 제시를 돌봐 주면서 표현하셨군요.

제시: 네. 제가 아버지의 유일한 딸이에요. 저에게 이복 오빠가 1명 있지만, 아버지와 교류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돌보는 경험은 새로운 경험이었고, 제가 성인이니 아버지에게 새로운 사고 유연성을 부여했다고 생각해요. 아버지가 저에게 부모의 애정을 보여주셨습니다. 물론 아버지의 부모 역할 중 일부는 저에게 곤란하기도 했죠. 전 독립적이고 혼자서 생활할 수 있어요. 제가 요리를 하지 못해도 저 자신을 돌볼 수 있죠. 아버지와 같이 생활할 때 소통의 문제가 있어서 이런 도움은 필요 없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왜 돕지 못하는지 이해 못 하셨습니다. 소통 문제가 있긴 했지만, 항상 아버지가 저를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아버지와 작은 다툼을 하거나, 큰 싸움을 해도 아버지가 항상 신경 쓴다는 사실을 알았죠. 아버지가 절 잃고 싶어서 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의 전통적인 관점을 어느 정도 접어두고, 제 곁에 있기 위한 흐름에 타셨죠. 제 미국 부모님의 말씀을 빌리면 제시의 흐름을 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유연성을 보이고 절 이해해주고 서로 힘들어도 우리 관계를 중시해준다는 점이 아주 좋았어요. 서로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에 대해서 많이 배웠고, 아주 역동적인 관계입니다. 22년의 관계를 1년에서 2년 동안 압축해서 보내고 있죠.

팟캐스트: 아버지가 결혼하지 않으셨나요?

제시: 아뇨. 결혼한 적 없어요. 

팟캐스트: 한국 사회에서 평범한 사람은 아니네요? 아저씨이면서 미혼이고, 그러한 특이성이 제시 씨와의 관계를 도와준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버지도 평범하지 않고 사회에 맞아 들어가지 않으니까요.

제시: 좋은 관찰이네요. 그러한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지금 들어보니 아버지가 평범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가 한번 결혼하셨던 적은 있는데 이혼을 했다고 생각해요. 평범하지 않죠. 특히 90년대 초반이었으니까요. 또 다른 아이를 가지고 아이를 입양에 맡기고 난 뒤 삶을 살아오셨는데 생활이 평범하지 않았죠. 그 경험이 아버지와 제가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항상 흐름에 저항한다고 생각하죠. 적어도 저는 한국에 맞아 들어가지 않거든요. 우리가 같이 이 상황을 헤쳐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한국의 문제점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마음에 안 드는 점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라오스에서 살고 싶다고 하실 때도 있거든요. 아버지의 그런 갑갑함을 이해하고, 사회가 자신을 거부한다는 느낌도 이해하죠.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생각해요. 아버지는 사회에 맞아 들어가지 않고 프리랜서입니다. 유전적인 문제일지도 몰라요. 우리는 서로의 자유를 만끽하지만, 사회는 그렇지 않죠. 

팟캐스트: 한국에 있으면서 입양아에 대한 차별을 겪으셨나요?

제시: 그러한 차별을 겪는다고 생각하고 준비했지만, 그렇게 충격적인 일은 없었어요. 사람들 대부분이 예의 바르게 대응했죠. 한국인처럼 보이지만 한국어를 말하지 않는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제가 한국어를 못하는 사실을 알고 오해로 인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죠. 하지만 제 경험 자체가 매우 부드러웠던 이유가 한국 사회에 적응한 입양아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입양아 중 일부는 꽤 좋지 않은 경험을 한 경우도 많지만 많은 입양아가 꽤 오랫동안 한국에서 지내면서 선례를 만들었죠. 다른 한국인들에게 입양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렸습니다. 한국에 많은 서구화된 국제 입양아들이 많고, 한국인들이 그런 입양아들과 자주 접촉하면 그런 편견과 차별을 많이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이전에 온 입양아들이 F-4 비자를 만들고, 여기에서 살고 일하기로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제가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로 입양되어서 이점이 있기도 하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로 입양된 입양아들은 한국에 와서 직장을 얻는데도 고생을 합니다. 영어 선생으로 일하는 친구들 대부분이 이 일은 일시적이고 시험 삼아 하는 일이라고 말해요. 1년에서 2년 정도 한국에서 일하다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서 자신들의 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전 운이 좋았죠. 제 이전에 있던 사람들이 길을 닦아줬고, 그 입양아들이 역경을 넘었고, 입양아에 대한 인식을 바꿔줬으니까요. 입양아 사회가 노력하고, 이런 인터뷰와 한국 입양아들이 한국에 돌아와서 TV에 나오고, 유전자 조사도 하고, 그러한 일들이 입양아 인식을 강화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적응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됐죠. 어렸을 때 전 편식이 심했어요. 지금에 와서는 뭐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제시: 한국 음식은 대단하죠. 한국 음식이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어요. 약간 한국 요리에 대한 지식은 있었습니다. 설날에 한인 교회에 가면 무료로 한국 음식을 제공했죠. 잡채, 불고기, 제가 좋아하지 않는 김치 등 한국 요리가 많았어요. 전 불고기를 미국에서 자주 즐겨 먹었는데, 한국에서는 그렇게 인기가 많지 않았죠. 제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는 삼계탕이에요. 통닭을 국물에 넣고 3일 동안 끓여내는데, 맵지 않게 먹을 수 있어서 어머니에게 소개해 드리는 데 도움이 되겠죠. 한국에는 좋은 닭고기 요리가 많아요. 부산에서 비롯된 요리라고 생각하는데 찜닭도 있습니다. 간장에 끓여낸 닭고기 요리인데, 당면, 당근, 감자, 만두, 떡이 들어가요. 아주 맛있죠. 한국에 방문하거나 1번도 먹어보지 못한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는 합니다. 사람들에게 권하면 대부분 사람이 좋아하죠. 한국에는 그런 맛있는 요리도 있고, 사람들 앞에서 직접 요리하는 일도 잘 해요. 고기 굽는 것도 있고, 볶음밥도 있고, 닭갈비도 있어서 전부 싱싱하고 맛있습니다. 한국 요리에서 제가 가진 문제 중 하나는 채식주의자로 사는 일이 어렵다는 점이죠. 2018년에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채식주의자였습니다. 한국에 살면서 닭고기를 먹기 시작했고, 이제는 저에게 주어지는 요리 대부분은 그냥 먹게 됐어요. 약간 뒤로 물러난 느낌이죠. 비빔밥 같은 좋은 채식 요리도 있고, 돌솥비빔밥도 있는데 뜨거운 돌솥에서 밥을 비비면 달걀이 그 안에서 익는 데 아주 맛있어요. 아주 특이한 음식점이 많죠. 예를 들면 떡볶이는 떡과 어묵이 들어가고 다양한 소스 기반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제집 근처에는 떡볶이 뷔페가 있어서 떡, 만두, 라면을 고르고, 소스도 섞어 넣어서 만들 수 있어요. 다양한 레스토랑들이 많고 어디에나 있죠.

팟캐스트: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어묵과 국물을 마시는 것도 좋죠.

제시: 포장마차도 많아요. 자갈치시장 옆에 남포구에 많이 있습니다. 부산영화제로 유명한 지역도 있죠. 포장마차가 잔뜩 있는데 그중 하나가 게 껍데기를 비운 다음에 그 안에 치즈, 게살, 양파로 채운 다음에 눈앞에서 구워 줍니다. 진짜 맛있어요. 부산 해산물은 맛있고 어디에나 있죠. 

팟캐스트: 다른 입양아들처럼 서울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실망감을 느끼나요? 아니면 부산에 있어서 좋다고 느끼나요? 

제시: 그 질문을 하다니 흥미롭네요. 얼마 전에 서울에 기반을 둔 국제 입양아 잡지인 IM Magazine에서 인터뷰했는데 거기에서도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서울에 살 생각을 해봤냐고 했죠. 전 서울에 살 생각도 없었습니다. 전 부산에서 어학연수를 했고, 이 지역에서 직장을 얻었죠. 거기에 전 운이 좋아서 16살 때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어요. 서울, 부산, 제주, 대전, 그리고 제가 태어난 충주도 방문했습니다. 제가 방문한 지역 중 가장 마음에 든 곳이 부산이었어요. 모래사장도 가고, 밤 문화도 즐기고 쇼핑도 했죠. 서울도 괜찮았고 쇼핑도 즐거웠지만, 부산이 깊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부산이 제 마음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죠. 저는 밀워키 출신입니다. 대학교도 위스콘신 밀워키에서 나왔어요. 미시간호 바로 옆에 있는 해안가 지역입니다. 물과 해안가에 사는 생활이 저에게 있어서는 고향이라는 느낌이 들죠. 부산은 그런 의미에서 집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작은 섬들이 있고, 해안들이 많고, 해안가들도 방파제 때문에 밀워키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서울에 대해서 질투가 나지 않습니다. 물론 서울에 있는 입양아 사회가 크긴 하지만, 다행히도 부산과 주변 지역에 작지만 아주 잘 연결된 입양아 사회가 있어서 그 사람들과 2년 가까이 교류하고 있었어요. 물론 전 매우 사교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서울에 살고 있었으면 여러 사람을 만나서 지쳤을지도 모릅니다. 이 작은 도시인 양산에서도 여러 사람을 만나고 있어요. 지금 현재 COVID-19 사태에서도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죠. 온라인 언어 교류도 하고 있고, 영어 교육도 시작했고, 방역 수칙이 그렇게 강하지 않아서 카페를 가거나 음식점도 가고 있습니다. 이래서 서울에서는 너무 많은 교류를 해서 지칠지도 몰라요. 물론 이 COVID-19가 잦아들면 서울에 다시 방문하고 싶습니다. 서울 입양아 사회를 알게 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거든요. 하지만 질투는 나지 않아요. 지금 제가 지내는 곳이 마음에 듭니다.

제시: 운이 좋게도 저는 자라면서 많은 입양아를 알았어요. 많은 입양아는 한국에 방문해서야 처음으로 다른 입양아를 만나게 되죠. 특히 한국계 입양이 그리 대중화되지 않았던 다른 나라 출신 입양아의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한국에 와서 알게 된 새로운 정보였어요. 저는 미국에서 한국 입양아 사회와 연관되어 있었고, 수많은 입양아를 만날 수 있었거든요. 제 부모님이 저에게 준 또 다른 좋은 기회였습니다. 물론 전 모든 한국 입양아를 만나야겠다는 갈망을 느낀 적은 없어요. 제가 만난 한국계 입양아 전원이 마음에 들었고, 입양아들과 이야기를 하는 일을 즐깁니다. 거기에 입양아들과 대화를 하려고 하긴 하지만 한국에서의 한국 입양아 사회는 미국 입양아 사회와 다른 느낌이죠. 우리가 흩어져 있고 숫자가 적으니까요. 서울에서 살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도 있습니다. 서울에 수많은 자원이 몰려 있으므로 지방에서 살고 있으면 아무래도 스스로 생존해야 하죠.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고, GOAL(해외입양인연대) 같은 입양아 단체에 도움을 요청할 수 없습니다. GOAL에 접촉해서 행사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많은 입양아를 만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지방에는 그러한 행사가 별로 없죠.

팟캐스트: 알고 계실지는 모르지만, 저도 서울에서 1년 정도 거주한 적이 있죠. 제가 서울을 떠날 때가 생각나네요. 40대 미혼 여성이었죠.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답답했던 기업이 납니다. 물론 한국에서 좋은 경험도 많았어요. 많은 사람이 2년 정도 지내다 보면 한국이 많이 나아진다고 합니다. 제시 씨도 그런 경험을 하셨나요?

제시: 네. 확실히 그래요. 한국에서 지내는 첫해는 어려웠죠. 적응하기도 힘들었고, 친구들, 가족들과 떨어지는 일도 어려웠습니다. 우울해지기도 했고 여러 가지 역경이 있었죠. 거기에 취직해서 일하는 일 자체도 어려웠지만 그건 다른 문제예요. 문화적 차이로 인한 문제도 많죠. 제가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라는 인식과 그 인식으로 인한 소통 문제도 심각했어요. 앞에 이야기했지만, 한국에 정착할까 말까 고민하는 상태에서 한국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문제도 어려웠죠. 새롭게 사람을 만나도 1년 정도 있으면 헤어져야 하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삶이 2년 차가 되자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죠. 우선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를 한 일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한국에 있는 외국인 거주자 사회와 더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직장에서 영어만 쓰기 시작해서 사람들이 제가 미국인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하게 됐죠. 한국에 확실히 적응하게 됐습니다. 사실 한국에서 1년 정도만 지낼 수도 있었어요. 2020년 5월에 1년 거주가 끝났을 때가 한창 COVID-19가 한국을 덮치던 때였지만 미국을 덮치기 전이었죠.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갈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시: 제가 미국에 돌아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해요. 한국에 1년 더 지내니, 한국에 정착하게 되고, 한국에서 무엇을 할지 정하게 해줬죠. 단순히 한국에서 생존할 뿐만 아니라 성장할 수 있게 되었어요. 한국에서 첫 1년에는 여러 가지 일을 했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2년 차에는 좀 더 느긋하게 접근할 수 있었어요. 제가 한국에 지내기로 했고, 제가 한국에서 겪을 일을 알면서도 한국에서 지내기로 했죠. 한국에 와서 지내기로 할 때 한국에서 생활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옵니다. 하지만 얼마나 한국이 어려울지 몰라요. 그래서 한국에서 2년 이상 지내기로 하면 한국에서 1년 더 지내기로 했고, 한국 문제를 알지만 그걸 받아들인다는 결정을 내리는 셈입니다. 한국에서 겪을 문제가 괜찮고, 그걸 받아들일 수 있으며 1년 더 지낸다고 결정을 내리게 되면 한국에서 더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2년 차 생활이 저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마지막 질문을 하자면, 제시 씨는 양어머니가 한국에 방문하면 어머니와 같이 어떤 경험을 하고 싶으시죠? 

제시: 저번에 어머니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는 어머니와 같이 일본에 방문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결정이었어요. 지금은 일본에 방문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에는 어머니에게 제가 지내고 있던 양산시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제가 한국에 정착하면서 만든 삶을 어머니에게 보여드리고 싶죠. 차도 구매해서 어머니에게 다양한 곳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설악산 여행도 계획했죠. 하지만 제가 어머니와 하고 싶은 가장 큰 일은 양산시에서의 제 생활을 보여드리고 싶고, 부산에서 제가 좋아하는 곳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보여드리려고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한국에서 지냈던 첫해에는, 어머니가 방문했을 때 저는 한국의 모든 곳을 보려고 하고, 모든 일을 하려고 하고, 모든 나라를 방문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제가 한국에 삶을 만들었고 그 삶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어머니와 같이 제 친아버지를 방문하려고 합니다. 친아버지도 저희가 온다는 사실도 알고 있죠. 사실 어머니가 한국을 방문하게 되어서 친아버지에게 다시 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약간 오랫동안 서로 연락을 안 했거든요. 그리고 어머니에게 제 남자친구인 아담도 소개해 드리고 싶죠. 그래서 어머니가 오시는 달 전체를 휴가로 받아서 한국 곳곳을 보여드리려고 해요. 그런 휴가를 받을 수 있어서 운이 좋았죠.

팟캐스트: 사람들이 제시 씨를 구독하고 싶거나 연락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죠?

제시: 페이스북 계정이 있습니다. Jessyehale이라고 되어 있죠. 제주 초콜릿 박물관에서 여러 표지판을 들고 있는 사진이 제 프로필입니다. 인스타그램도 똑같은 이름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구독해주시면 되죠. 질문이 있거나, 더 정보를 알고 싶으시거나, 한국으로 이주하고 싶은 분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싶으니 연락해주세요. 여러분들과 교류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