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6, 열 한번째 에피소드 : “우리의 몸은 항상 생존모드에요” – 정울림

“어떤 때는 내가 정말 스웨덴 사람이 맞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어요. 특히 외국에 있을 때요. 스웨덴 사람들끼리 만났을 때 우리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또 어떤 때는 제가 너무나도 한국인 같아요.” 

리사 울림 호블럼은 한국계 스웨덴인이며 삽화가, 만화가이자 활동가입니다. 최근 작인 “Palimpsest”는 친부모를 찾는 그의 실제 여정을 담은 그래픽노블(만화형태의 소설)인데요 그 여정이 미로찾기와도 같습니다. 어떤 땐 허위로 작성된 문서와 씨름해야 했고 또 생애 초기의  작은 기억이 후에 어떻게 크게 작용하는지도 경험해야 했습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리사씨는 애착, 엄마가 되는 여정, 그리고 상실의 경험이 그녀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제 이름은 리사 울림 호블럼이고 현재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6년째 살고 있어요. 마흔 다섯살인데 제 나이가 아직 실감이 안나네요. 

어떻게 뉴질랜드에서 살게 되었죠?

제 파트너와 두 아이와 함께 스웨덴에서 살고 있었는데 오래전부터 떠나고 싶었었어요. 제 파트너는 영국인인데 항상 스웨덴이 자기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래서 기회가 되면 같은 영어권이면서 동시에 동양인들 비중이 높은 곳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을 하던 중에 마침 파트너에게 대학에서 오퍼가 들어왔어요. 박사과정 중 이었거든요. 다른 곳도 알아보던 중이었는데 마침 이곳 오클랜드 대학에서 제의가 와서 결정했어요. 그래서 바로 물건을 정리하고 짐을 싸서 왔어요. 우리 둘 다 그 전에 한번도 와본 적도 없는데 말이죠. 운이 좋았어요. 그리고 지금 아주 만족하고 있어요. 

그전에 한번도 가본적도 없었는데요?

제 파트너가 호주에 와본적은 있어요. 그런데 이 두 나라는 완전히 다른 나라거든요. 사람들이 대략 뭉뚱그려 생각하긴 하지만요. 

맞아요. 같은 나라가 아닌데 미국인들은 다 똑같다고 생각해요. 

스웨덴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저기 남반구 어디쯤 있는 나라들 그리고 같은 나라의 식민지(역자 주- 영국)였으니 비슷할거라고요. 그런데 실제로는 굉장히 다르거든요. 아주 아름답고 멋지고 고요한 곳이에요. 

뉴질랜드를 떠올리면 그렇게 인종적으로 다양할것 같지는 않은데, 제가 아는 친구중에 뉴질랜드 국적의 중국계 친구가 있거든요. 중국계가 많나요?

네. 아시안도 많고 태평양제도쪽 사람들도 많은데 물론 어디를 가느냐에 따라 달라요. 뉴질랜드가 제가 그동안 가본 곳들에 비교하면 인종적으로 아주 다양한 곳이기는 하지만 꼭 그런것만은 아니에요. 물론 오클랜드(역자 주-뉴질랜드의 수도)의 경우는 그렇죠. 하지만 아직도 백인위주의 곳이 많고요. 마오리족과 태평양제도 쪽이 주를 이루고 다른 인종은 없는 곳도 있고요. 오클랜드는 동아시아쪽 인구 비율이 꽤 높고 빠르게 늘어나고 있기도 하고요. 뉴질랜드 역사를 보면 백인들이 이곳에 도착했을때 중국인들도 거의 같은 시기에 왔거든요. 그러니 중국인들도 뉴질랜드 정착 역사가 아주 긴데 역사는 항상 뭐랄까 백인 특히 영국인 후손들과 마오리 족이 먼저 정착했고 태평양제도쪽 사람들과 중국인들 그리고 그 밖에 다른 아시안 이민자들은 항상 나중에 온 사람들 그리고 골칫거리인 사람들로 그려지죠. 그들도 이 곳에 오랫동안, 골드러쉬(역자 주- 1850년경 호주에서 금이 발견되자 유럽등지로부터 사람들이 몰려듬)  때부터  있었거든요.  미국도 그렇잖아요. 아시안들이 아주 오랫동안 거주했는데 항상 다른 민족들에 비해 “이민자들” 혹은 미국에 “받아들여진” 사람들로 묘사되죠. 

맞아요. 영원한 “외국인”이죠. 벌써 3-4세대나 살았는데도 말이죠.

다른 유럽쪽 피는 아무리 많이 섞여도 백인이고 미국인이잔아요. 그런데 아시안의 경우에는 항상 정착민이고 외국인이죠. 여기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리사씨는 자신의 출신을 어디라고 생각하나요? 본거지를 떠나서 사는 사람으로서 말이에요. 

이민자죠. 굉장히 복잡한 주제이고 내가 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지는 항상 변해요. 내가 당시에 어디에 있고 누구와 있고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어떤 때는 내가 정말 스웨덴 사람이 맞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어요. 특히 외국에 있을 때요. 스웨덴 사람들끼리 만났을때 우리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또 어떤 때는 제가 너무나도 한국인 같아요. 나의 “한국인임”(역자 주 – Koreaness) 이 항상 좋기만 한건 아니지만요. 두 나라에 다 가깝게 느끼고 한국에 대해 뭔가 나긋한 감정도 있지만, 이 나라가 우리를 어떻게 취급했고 지금도 취급하나를 생각하면 화도 나고 실망스럽고요. 그래서 그냥 특정 출신이 아닌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라고 느낄때도 있어요. 아주 복잡한 문제죠. 외국에 살면서 내 스스로 나를 외국인이라고 여기는건 괜찮아요. 여기서 꽤 마음 편하게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누가 나를 외국인이라고 생각하면 그런가보다 하죠. 그런데 그런 일이 스웨덴에서 일어나면 굉장히 의기소침해지고 화나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외국인이면서도 외국인이면 안되거든요. 저를 보면 제가 자기들과 같다고 생각하다가 제가 한국어를 못하는걸 알게 되면 그때부터 이야기가 달라지죠. 설명을 해야 되잖아요. 왜 겉모습은 똑같은데 행동하는건 다른지 왜 공감을 못하는지 말이에요. 그리고 그런것들이 상처가 되죠.  

다른 입양인들, 특히 자기 감정을 많이 들여다본 입양인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들어봤어요. 그들이 제 3의 장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제 3의 장소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고요. 그곳이 입양인 중심의 모임이 됐건 아니건 간에 말이죠. 우리가 입양된 나라나 태어난 나라가 아닌 제 3의 나라에서 말이에요. 리사씨는 실제로 지금 제 3의 나라에 있잔아요. 

저도 그런것 같아요. 항상 이리저리 옮겨왔고 제 삶을 그게 가능한 삶으로 만들어왔죠. 열 여덟살인가 아홉살때에 스웨덴에서 스페인으로 갔는데 그 이후로 항상 다른 나라에 사는 것을 꿈꾸고 바래왔어요. 돈을 모으려고 6개월동안 힘든 일을 한적도 있고요. 노르웨이에서 돈을 모으려고 생선가공 공장에서 하루에 14시간씩 일한 적도 있었고요. 그 후에 남미의 브라질로 가서 기차를 타고 여행했고요. 계속 그래왔어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왜 그렇게 항상 멀리 가버리냐는 질문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 질문을 받을때면 속상하기도 했는데 그땐 제가 저의 입양에 대한 탐구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이었어요. 조금 나이가 들어 되돌아 보니 그땐 그 어디에도 매이기가 싫었던것 같아요. 그래서 3-4년은 걸리는 대학에 들어가거나 할수가 없었죠. 그래서 항상 한 학기만에 끝내고 다음 과정을 할지 결정하는 단기 코스를 듣거나 했어요. 그래서 일도 저임금 일용직만 구해서 했죠. 언제든 그만두고 바로 떠날수 있게요. 다른 사람들이 했던 표현대로 하면 항상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것 같아요. 지금 돌아보면 그런 삶에서는 – 물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셈이긴 하지만 -조금 오래 머물렀다 싶으면 뭔가 갇히는 느낌이 들고 기대치가 생기게 되고 그러면 집이라고 느끼게 되고 그러잖아요. 

그 어느 곳도 집이라고 느끼지 못했어요. 새로움을 느끼는 것이 좋았고 낯설음을 느끼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그편이 편했던것 같아요.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고 느꼈으니까요. 그리고 나에 대해서 잘 몰랐기도 했고. 그게 아마도 제가 그때를 헤쳐나갔던 방식 같아요. 실제로는 문제를 회피한거였지만요.

왠지 알것 같아요. 사람들이 “도망”친다고 표현했을때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나요?

그때는 동의못했죠. 화도 많이 냈고요. 그때는 그저 내가 다른 문화를 동경해서 그런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사람들이 항상 이제 스물 다섯살이니 좀 정착해야 하지 않겠냐 라던가 이제 서른이니 가정을 꾸려야 하지 않겠니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계속 그 생활을 하다가 결국에는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서 이제는 같이 옮겨다니게 되었어요. 그에게는 또 그만의 숙제가 있고요.  아무튼 새로운 곳에 대한 동경도 이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을것 같아요. 

제가 보기엔 뭔가 더 심오한 이유가 있을것 같아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잖아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고 마침에 어느정도 지점에 다다르면 정착을 해야 할것 같은 기대치가 생긴다고요. 평생 어디에도 뿌리가 없다고 느꼈던 사람한테 그게 어떤 의미일까요?

글쎄요. 저도 답을 모르겠어요. 한 곳 정착해서 오랫동안 산 사람들 예를 들어 20년 이상 살았다는 사람들 집에 가보면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 가득차 있고 그러잖아요. 그런걸 볼때면 굉장히 부럽기도 하고 서럽기도 해요. 나도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치만 바로 뭔가 갇혀 있다는 느낌도 들고요. 저는 그렇게 감상적인 편이 아니거든요. 물건들에 연연해 하지 않고 바로바로 버려버리는 편이에요. 간직하고 있는 물건이 몇개 안되어요. 제가 한국에서 올때 입었던 내복이랑 베넷저고리 정도만 가지고 있어요. 다른건 바로 가차없이 버려버려요. 물건에 애착을 느끼고 연연해하는 편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한곳에서 오래 살며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보관하는 사람들을 보면 뭔가 안전망이 있고 돌아갈 곳이 있어서 좋겠다는 생각은 해요. 

그건 네가 어디에 있든 항상 네 가족들이 알고 있고 그것이 서로서로에게 안전망이니까요. 그래서 그런 느낌들은 내가 결코 알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우리는 너무 많은 상실을 경험 했잖아요. 가족과 관련된 감정이고요. 꼭 크리스마스가 가족을 위한 때 라서는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때 가족들 생각을 많이 해요. TV에서 가족영화들만 주구장창 보여주잔아요. 진짜 별로인 영화들도 있는데 그래도 항상 재밌게 보는데 뭐랄까 마조히즘(주 – 피학대도착증)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크리스마스 영화에는 항상 외로운 사람이나 고아나 혹은 부모가 없는 성인등이 나오잖아요. 그리고 그 주인공들이 누군가를 만나는데 그 누군가의 가족들이 그 주인공을 받아주고 바로 안락함을 느끼고 하는 그런 클리셰로 가득 찬 영화들이요. 가족들간의 끈끈한 사랑 뭐 이런 주제를 찬양하는 영화들 말이에요. 그럴때면 나도 이런 가족들이 있으면 좋겠는 생각도 들지만 막상 제가 그런 상황에 있거나 초대를 받거나 하면 왠지 숨이 막히고 그만 자리를 뜨고 싶고 그래요. 

가족들이 헤어지거나 하는 영화속의 장면들이 입양인들에게 상처를 줄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끈끈한 가족애를 보여주는 장면들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물론 모든 가족들이 다 그렇게 끈끈한 것은 아니고 크리스마스 가족영화들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도 안되지만 그래도 쓸쓸해지거든요.

그럴수도 있겠네요. 몇 군데 와 닿았던 부분이 있는데  물건등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고 했잔아요. 관계를 맺는데도 그런 편인가요?

그런 것 같아요. 왜냐면 관계에 너무 집착해서 그들을 괴롭히는 지경까지가곤 했었거든요. 그리고 사람들이 뒤에서 “재는 전화를 하면 안 끊어서 너무 힘들어”라거나 “너무 열성적이야”하는 이야기를 친구들한테 들었어요. 저는 친구들한테 충실한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너무 부담스러웠나봐요.  그래서 그때부터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항상 멀리 있었으니까요. 자연스러운 일이 됐어요.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또 언젠가는 멀어져야 될것을 아니까 힘들었죠.  

그리고 일반적으로 봤을때도 저한테 더 힘든일인것 같기도 해요. 항상 뭐랄까 크리스마스 영화에서처럼 친한 친구그룹에 끼고 싶었어요. 네 다섯명이서 모든 걸 같이 하는 그런 그룹이요. 그런데 저는 항상 “아싸”였고 그런 그룹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저를 초대해주기는 하는데 항상 초대 받기만 하고 핵심 멤버가 되지는 못했어요. 항상 손님이었죠. 그리고 친한 친구가 생기면 항상 더 부담스러웠어요. 무슨 일이 생겨서 관계가 끊어질 것만 같았고요. 

그래서 굳이 친해지려고 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더 힘들어지 니까요. 요즘엔 SNS덕에 멀리 떨어져 있어도 친구 관계를 유지 할 수 있잖아요. 저는 그게 더 편한 것 같아요.  무슨 일이라도 해줄 친한 친구들이 몇 있는데 멀리 떨어져 있으니 저로 인해 부담스러움을 느낄 일이 없으니까요. 멀리 떨어져 있는것이 다행이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제 생각엔 우리가 입양되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어요. 우리가 포기되었다는 사실이요. 리사씨가 말하는 동안 저도 많은 부분이 와 닿았는데 저도 같은 고민을 했거든요. 답이 없는 난제이고 역설적인기도 해요. 우리는 어떤 안정적인 관계의 중심이 되고 싶어하고 깊은 뿌리를 내리고 싶어하지만 너무 어려서 겪은 일때문에 동시에 관계안에서 갇혔다고 느끼기도 하고요. 혹은 너무 가까워지면 또 떠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고요. 그러니 차라리 관계를 안 맺어버리는게 쉬울수도 있죠. 간절히 원하지만 막상 갖게 되면 떠나게되죠. 빨리 식상해져버리거나 새로운 관계가 필요해서 일수도 있지만 결국엔 사람이나 장소에 너무 정들게 될까봐 두려운거죠

맞아요. 지금은 안그러지만 한동안 힘들어 했던일이 뭐냐면 제가 저와 각각 친했던 두 친구를 소개해서 서로 친구가 되고 나면 왠지 그 둘이 친해져서 나를 더이상 안 볼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어요. 실제로 그런 일이 몇번 있었거든요. 서로 몰랐던 두 친구가 저를 통해 알게 되었고 처음엔 셋이 항상 같이 어울리다가 언젠가부터 둘이서만 만나더라고요. 저를 빼고요. 어릴때 그런일이 몇번 있었는데 성숙하게 대처를 하지 못했죠. 성인이 되고나서도 그런일이 일어났을땐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와 친했던 것보다 자기들끼리 더 친해질수도 있겠다는 사실때문에 제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걸 깨달았어요. 좀 우스운 생각이긴 하지만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잔아요. 그래서 차라리 처음부터 친해지지 말자라고 생각했죠. 제가 굉장히 외로운 사람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그런건 또 아니고요. 아무튼 지금은 새로운 관계를 맺는 나만의 방식이 있어요. 이제는 저를 보호해야하니까요. 

또 하나 와 닿는 부분이 있는데요 다른 많은 입양인들도 친구 관계나 연인 관계가 복잡하고 어렵다고 해요. 친구나 연인 관계에서 많이 힘들어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제 경우에도 친구 관계에서 제가 먼저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마다 내가 너무 관계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그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건 물론 개인상담시간에나 가져가야 하는 질문이겠지만 입양되었다는 사실때문에 그런것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관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서 실망하거나 상처받게 되면 그게 너무 고통스럽죠. 

맞아요. 저는 심지어는 제가 너무 부담스럽고 제가 제 주변 사람들이 다 완벽하길 바란다는 말까지 들었어요. 제 생각엔 엄마와 자식 사이의 유대감과 관련이 있는것 같아요. 처음에 태어났을때는 모든 것이 완벽하고 조화롭잔아요. 어쩌면 유토피아에 가까운 상황이죠. 그런데 그 상황이 파괴되고 그때부터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야 하잖아요. 그토록 아름답고 가까웠던 관계가 한 순간에 날아가고 억지로 떨어졌잖아요. 점진적으로 일어난것도 아니고 갑자기요.  태어났으니 엄마와 함께 조금 있어야 하는데 바로 옮겨졌죠. 그때를 상상하면 그냥 암흑같아요. 그 갓난 아기한테 그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품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여기저기 맡겨지다가 결국엔 고아원으로 보내졌죠. 고아원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고 해도 생애 초기의 결정적인 엄마와의 시간을 대신하진 못하죠. 말하긴 좀 민망하지만 그래서 그런 관계를 제가 항상 열망하는 것 같아요. 모든 관계에서요. 친밀함의 가능성이 있는 관계 말이에요. 그래서 갓난 아기 적에 경험했던 그 빈자리를 메꾸려고 하나봐요. 그렇지만 이미 소용없죠. 다시는 일어날수 없죠. 

제 아이들하고 아주 끈끈하다고 느껴요. 아이들이 막 태어났을때 그런 완전무결한 상태를 느꼈거든요. 그런데 그애들이 아이들이고 저는 엄마잔아요. 제가 그 안정감을 줘야하는 존재죠. 저도 저를 향한 그 모든 것을 망라하는 안전함을 느끼고 싶은데 저는 그걸 가질수 없잖아요. 더이상 아이가 아니니까요. 아주 내면이 고요하고 모든것을 다 내어주는 연인을 만났다 해도 이미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더이상 같지 않아요. 제가 생각했던 방향과 다른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네요(웃음) 

그럼 단체활동운동저항시민조직활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요?

그냥 좀 놀랐어요. 이런 일들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을 안하고 살았거든요. 생각하면 너무 힘들어서요. 그런데 말하니 좋네요. 그냥 좀 의외라서요. 대개 사람들이 저에게 연락을 해올때면 주로 제가 하는 작품활동이나 시민운동에 대한 거고 이런 감정적인일에 대한것은 아니었거든요. 

제가 원래 좀 호기심이 많아요. 저는 엄마는 아니지만  리사씨가 아이를 낳았을 당시 이야기를 했을때말이에요. 리사씨는 아이때 그런 안전한 애착관계를 못 가졌잔아요. 갓난아기이건 혹은 조금 더 큰 아이라도 뭔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죠. 엄마가 없어졌고 애착을 주는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비록 이성적으로 뭔가를 알지는 못하더라도 몸속에 감지되고 각인되죠. 그래서 리사씨가 아이를 낳았을 때 리사씨는 그런 애착을 아이들한테 줄수 있었나요? 본인은 받지 못했더라도?

둘째 아이한테는 그럴수 있었는데 첫째한테는 그러질 못했어요. 아이가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물론 항상 함께 있었지만 산후우울증이 심하게 왔었거든요. 분만 도중에 갑자기 트라우마가 심하게 찾아왔어요. 너무 심각했는데 그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죠. 그래서 그 뒤로 스웨덴 의료시스템에 악감정이 생겼어요. 지금도요. 스웨덴 정부에서 입양인들을 위한 지원이 전혀 없었거든요. 입양인이면 정서적으로 임신시 고위험군에 속한다는걸 알려줬어야 해요. 성폭력 피해자이거나 부모를 잃었거나 하면 별도의 지원이 나가거든요. 그런데 우리의 존재는 안보이나봐요. 우리 입양인들은 부모를 잃은 것이 아니고 부모를 얻었다고 생각해요. 인식의 차이가 있죠. 우리에겐 마치 부모가 죽은 거나 마찬가지 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안해요. 

그런 특수한 상황에서 임신을 하면 여러 지원들을 많이 받을 수 있는데 저는 아무런 지원도 못 받았어요. 왜냐면 입양은 좋은 거니까요(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준비가 안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모든 사실이 제가 고위험군이라고 말해주고 있는데 말이죠. 진통이 와서 분만실에 있는데 갑자기 제가 제 엄마인것처럼 느껴지는 거에요. 그리고 이 진통이 오면 아이를 잃어야 한다는걸 알고 있는 거에요. 진통이 시작되기 전에 아이를 지킬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죠. 분만실에서 진통을 견디기 위해 아이를 품에 안는 상상을 해보라고 하잖아요. 지금 이 고통이 모두 그 순간을 위한거다 라고요. 그런데 저는 이 사람들이 내 아기를 뺏어가려고 그런다. 곧 아이를 잃을 거다. 이렇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분만의 고통도 정말 힘들었지만 감정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제 생모한테 감정이입이 되어서 마침내 아이가 나왔을때 아이가 울잔아요. 그런데 저는 아이가 저를 곧 떠나야 하는 것을 알아서 운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은 그냥 울잖아요. 제가 없어서 우는 것도 아니고 그냥요. 그런데 전 아이의 모든 울음을 자기가 곧 버려지니까 그걸 알고 우는거라고 해석했어요. 그래서 그런 모든 상황들이 너무 힘들어서 곧 우울증이 찾아왔죠.  산후우울증이라는 것이 꼭 트라우마가 있어야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아주 흔한 일이죠. 그런데 문제는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다는 거에요. 일차적으로는 제 스스로 저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몰랐고 임신 외에도 환경적으로도 상황이 많이 안좋았었거든요. 여러가지로 형편이 안 좋을때였어요. 

상황이 많이 안좋은 때였나봐요.

네. 실직에 집도 없었고 다른 문제도 많았어요. 굉장히 힘들고 도움도 받지 못하던 상황이었어요. 저와 제 파트너 모두 많이 외롭고 두려웠어요. 결국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상담을 받게 되었는데 또 상담사가 너무 별로였어요. 백인남자였는데 남자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출산을 경험한 여자였으면 그래도 좀 낫지 않았을까 생각은 들어요. 제 고통이 어려서 부모로부터 떨어져 입양이 되었다는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 근처로도 못갔어요. 

그래서 상담사로부터 엄마가 된 사실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즐겨라 도데체 뭐가 힘드냐라는 식의 조언만 주구장창 듣다가 끝났어요. 결국엔 너무 화가 나서 나한데 맞는 도움을 직접 찾아나서게 되었요. 이런 식의 도움보다는 누군가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엔 찾아 나섰고 적절한 도움을 받게 되었어요. 입양과 관련된 도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었어요.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왜 그렇게 아이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는지만 물어봤으면 됐을텐데.

그쵸. 제가 아이한테 너무 내 자신을 투사하고 있었다는것만 누가 알아챘어도 말이죠. 아이가 내가 자기를 버릴거라고 생각해서 우는거다 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러면서도 동시에 아이한테 질투심을 느꼈어요. 제 아이는 엄마한테 이렇게 가까이 있고 모유를 먹고 누군가가 옆에서 잘 돌봐주잔아요. 저는 그러질 못했으니까요. 너무 상실감이 느껴지는데 도대체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왜냐면 동시에 아이를 돌봐야 하니까요. 내 몸을 돌보는게 아니라. 아무튼 엉망이었죠. 그때 누군가가 조금만 힌트를 줬더라면 상황이 훨씬 나았을거라 생각해요.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후회가 되거든요. 그때 너무 감정적으로 힘들어서 그 시간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어요. 그래서 아이가 그때를 떠올리는 말을 하면 너무 미안해요. 갓난 아기였을때 조금 더 나은 엄마였어야 되는데 하고 말이죠. 아이한테 조금더 잘 대해줬더라면, 이러것 저런것을 해줬었더라면 하고 자책을 많이 해요. 지금 열두살이거든요.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후회가 되고 그때의 나를 혼내주고 싶어요. 

그럼 둘째 딸아이 하고는 어땠나요? 무언가 달랐나요?

그랬죠. 둘째가 태어나기 전까지 그 2년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죠. 그 사이에 저의 입양에 대해 파기 시작어요. 물리적, 환경적인 부분보다 정서적인 면과 관련된 부분을 말이에요. 그러니 많은 변화가 있었던 셈이죠. 그리고 이제는 좀 예상가능한 문제가 되었잔아요. 그래서 먼저 이런일이 나에게 있었다 그러니 이런 지원이 필요하다고 먼저 밝히고 받을수 있는 의료 서비스를 다 받았어요. 그러니 지원을 잘 해주더라고요. 필요한것을 명확히 알고 있으니 도움을 주는 것도 쉬웠나봐요. 모르면 힘들죠. 

그래서 도움도 많이 받고 특히 감정적인 부분을 많이 들여다봤어요. 그래서 둘째가 태어났을때 그냥 너무 행복했어요. 물론 몸은 너무 힘들었죠. 하지만 감정적으로 온전히 아이와 함께 할수 있었고 아이가 운다고 해서 나때문에 우는것이 아니고 괜찮은거다라는걸 알았죠. 그리고 이미 아이를 2년이나 키워서 아이를 만져도 아이가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죠. 손에 익었으니까죠. 기저귀가는 것이나 씻기는것등을 할때 허둥대지 않았죠. 갓난 아기때는 씻기는 것도 너무 엄두가 안나잔아요. 그래서 아이와 애착을 키우는데만 집중할수 있었어요. 

둘째는 또 다른 성격더라고요. 둘째는 항상 안겨있기를 좋아했는데 그 부분이 저에게 많은 힐링이 된것 같아요. 거의 6개월을 제 배위에서 잤거든요. 저도 알았고요. 그 아이가 그걸 필요로 한다는 것을요. 그 아이가 어떤 트라우마가 있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그냥 아기라서 그런거라는걸요. 그래서 그걸 줄수 있었고 더 가까워 질수 있었죠.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물어보신 것이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게 뭐였죠?

저는 아이를 낳아보지는 않았지만 현 의료체계에서 입양인에 대한 지원이 없잔아요. 어찌보면 우리도 트라우마를 이겨내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잔아요.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어요. 

그래요. 그게 큰 문제죠. 우리가 왜 스스로 트라우마 전문가가 되어야하죠?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한테 트라우마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인정하지도 않을 거에요. 우리 자신도 모르고요. 그리고 그 모른다는 사실때문에 언젠가 더 큰 트라우마를 겪을 수도 있죠. 트라우마는 항상 그런 식으로 작동 하잖아요. 우리의 몸이 항상 생존모드라는 사실도 모르고요.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입양되었다는 사실이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하잔아요. 그러도록 사람들이 바라고 우리도 그렇게 세뇌되었으니까요. 새로운 가족이 생겼으니까 된거다 라고요. 그리고 그렇게 생각안하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거라고 가스라이팅(역자 주-심리적 조종)을 당해 왔잖아요. 

그래서 문제를 만들지 않도록 너무 많은 질문을 하지 않도록 배웠죠. 안그럼 우리 가족 뿐만 아니라 다른 입양인들한테 상처를 줄수 있다고요. 우리 입양인들은 주변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하니까요(웃음). 그래서 많은 입양인들이 이 문제를 깊게 묻어두고 이런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갑자기 인생의 어떤 큰 계기가 되는 사건이 찾아오면 이것이 갑자기 사느냐 죽느냐 하는 정도 수준의 문제가 되어버리죠. 임신출산강좌 같은데 가보면 어린시절의 기억이 많이 떠오를거니 대비를 하라고 알려주잖아요. 그러면 다들 입양부모가 어떻게 키웠는지를 떠올리죠. 그런데 입양 이전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해요. 입양과 동시에 인생이 시작되었으니 입양 이전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교육받잖아요. 그래서 어린 시절에 너무나 잔인하게 부모로부터 떨어진 사실은 다들 기억을 안하죠.

 유전질환등 가족력이 없으니 무방비 상태로 인생의 각각 다른 단계들을 거쳐나가야하죠. 우리는 의학적으로 유령이나 마찬가지에요. 우리 스스로 경험하고 스스로 전문가가 해요. 아무런 교과서나 매뉴얼도 없는 채로요. 

네. 전문가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암흑속에 갇혀있죠. 많은 경우에 입양기관이나 친부모쪽에서 우리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경우가 많죠. 입양부모도 정보를 알고 있는데 아이들한테는 안 보여주기도 하고요. 그래서 전문가이기도 하고 아예 차단되어 있기도 하고요. 아직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면 참 의외에요. 보통사람과 다름 없다고 생각하죠. 아직 그리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없어서 잘 모를수도 있어요. 다들 각각 힘든 사정이 있으니까요. 제가 보기엔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는것 같은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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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냥 그 사람들이 무지해서 그냥 지나가는 아무한테나 그러는 거라고. 그런데 내가 동양인이니까 그런 말을 한거잔아요. 칭총(역자 주-동양인/중국인에 대한 멸칭) 내가 백인에 금발머리였어도 그런말을 했을까요? 그래서 인종차별이 아니라고 그냥 그들이 무지해서 그런거다, 너를 찍어서 말한 것도 아니었잖니 라고요. 그래서 그런 부분이 엄청 열받게 하는데 그건 또 입양과는 별도의 이슈죠. 사람들은 누구나 골칫거리들이 있잔아요 그래서 굳이 관여하고 싶지 않으니 문제를 문제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거죠.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그저 나는 너무 운이 없이 태어났나보다 하고 생각했었어요. 사람들한테 나한테 일어난 일을 설명하면 그냥 운이 없었던 거라고 했으니까요. 버스가 나를 그냥 지나치고 사람들이 날 안도와주고 나한테 소리지르고 무례하고 했던 일들이 그냥 오늘 하루 재수가 없어서 그랬나보다 생각했어요.  그 사람들이 오늘 기분이 안좋았나봐 그렇게 사람들이 저한테 말했으니까요. 너를 못봐서 그런거야 혹은 네가 외국인 유학생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거야 라고요. 항상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해명하려 했죠. 그래서 나는 왜 항상 일진이 안좋은 사람들하고만 맞닥트리려야 하나 하고 생각했죠. 

그러다가 제 파트너를 만나고 나서야 그게 인종차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외부자의 시선으로 더 넓게 볼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건 행운이죠. 그들은 이 상황에 덜 익숙하니 같은 상황을 다른 눈으로 보잖아요. 그리고 학연이나 지연등에 매이지 않았으니 편을 안들어도 되고요. 아무튼 그가 저랑 같이 살러 처음에 스웨덴에 왔을때 아주 놀라더라고요. “사람들이 너한테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하는지 여태까지 몰랐어?”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쳐다보는지 너를 보고 수근 대는지 여태 몰랐냐고요. 저는 그래서 여기는 항상 그렇다라고 했더니 그가 “그게 바로 인종차별이야” 라고 하더라고요. 외부인이 와서 지적을 해주고 나니 저에게도 그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때쯤부터 인종차별이 대한 여러 논의가 시작되었고 SNS가 특히 도움이 많이 됐지요. 저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때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어요. 내 전 인생이 인종차별속에 던져져 있었구나,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그렇게 애썼구나 하는 것들을요. 인종차별인것이 명백할때도 있지만 안그럴때도 많잔아요. 

그리고 항상 해명이 되죠. 

네 그때가 큰 계기가 되었어요. 

우리 백인 입양부모들이 여섯살 짜리 아이한테 “네 말이 맞아. 그건 인종차별이야”라고 말해줬다면 어땠을까요?  분명히 해주고 알려주고 또 네 느낌이 맞다고 해줬다면요. 

그러니까요. 

그런데 그러지 않았죠. 

제가 요즘 여러 이슈에 대해 열심히 활동을 하는 지금도 제가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하면 저희 부모님은 그냥 아무 말이 없으세요.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55세 이상들만 모여사는 은퇴촌 같은 곳에 사셨거든요. 스톡홀롬에 백인 중산층 이상만 사는 곳이죠. 거길 갔는데 그 전에도 여러번 방문한적이 있었고요. 한번은 어떤 사람이 저에게 여기서 뭐하는 거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부모님이 여기 산다고 했더니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냐고 하네요. 그게 아니고 우리 부모님이 여기 산다고 햇더니 이름을 대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거짓할 하는건지 시험을 해본거죠. “그 사람들 바로 저기 저집에 사는 사람들이지?” 하면서요. 그래서 아니라고 저집이 아니고 이집이라고 아무튼 그런 식으로 제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가 충분해지고 나서야 포기하더라고요 그래서 저희 부모님한테 말했더니 그 사람이 조금 웃긴 사람이라서 그래 하고 그냥 웃고 넘어갔어요. 다른 때는 환경미화원인 줄로 여겨졌던 때도 있고요 혹은 가사보조원인 줄로 여겨졌던 적도 있고요. 아무튼 방문할때마다 여러 질문을 받아야 했죠. 그런데 저희 부모님은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으셨죠. 너무 분명한일들인데 말이죠. 

아이들이 프레시안(역자 주 – 한국의 인터넷 신문)에 글을 기고 했다면서요. 어떻게 하게 된거죠?

들어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스웨덴한국인모임(Swedish Korean Adaptees)이라는 곳에서 활동하고 있었어요. 지난 몇년간 열심히 해서 한국의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정서도 제출했어요. 마침 그 시기부터 조직된 덴마크의 입양인들하고도 연합했어요. 그들도 그들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했거든요. 프레시안 측에서 입양인들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이나 배우자들의 목소리도 듣고 싶다고 해서 많은 글이 올라왔는데 우리 아이들한테 이야기했더니 아이들도 너무 하고 싶어라 했어요. 입양에 대해 궁금한것이 아주 많거든요. 어떻게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요

그래서 아이들도 한마디를 거들고 싶어햇어요. 그래서 저는 저 대로 쓰고 파트너가 아이들을 도와서 셋이 함께 글을 썼어요. 제가 끼면 아무래도 영향을 줄까봐 저는 빠지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파트너가 아이들을 각각 인터뷰 하고 나서 그걸 옮겨 적었더라고요. 도입부만 그가 쓰고 나며지는 거의 그대로 싣었다고 하더라고요. 순서 정도만 바꾸고요. 아이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살리고 싶었대요. 그래서 그냥 아이들의 대화 같은 느낌을 받으실거에요. 

아이들이 쓴 내용 중에 의외의 부분은 없었나요? 

제가 제일 놀랐던 부분은 아이들이 상당히 강경하더라고요. 강제로 입양보낸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말이에요. 여기서는 그들이 악인이자 적이니까요. 아마도 제 파트너가 그부분을 좀 순화시켰을거에요. 아들아이가 아주 신랄하게 표현을 해서 파트너가 다르게 표현해보라고 부탁했대요. (웃음) 제가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들이 벌을 받기를 원해요. 그리고 서서히 엄마의 입양이 자신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아이들이 알아가고 있어요. 한국에 친척들이 있는지, 왜 할머니 할아버지는 못만나는지, 이제는 만날 준비가 되었는지 아이들이 거의 매일 물어보거든요. 삼촌 이모가 있는지, 엄마의 형제자매들이 엄마의 존재에 대해서 아는지, 다음번에 한국에 가면 만날수 있는지 등등요. 그들이 자기들에 대해서 아는지, 우리를 생각하는지등등 궁금한 것도 많고 지난 번에 물어본 이후에 혹시 엄마가 더 알아낸것이 있는지 확인하고요. 자기 친구들한테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답을 해줄수 있는 것들이 몇개 없으니까요. 대가족이나 혹은 친척간에 친밀하게 지내고 물리적으로도도 가깝게 살고 몇 세대씩 거슬러 조상들을 따질수 있는 친구들도 있는데 자기들은 그러질 못하니까요. 언어도 마찬가지에요. 그리고 특히 이쪽에 사는 사람들은 언어를 두개 혹은 세개씩 하는것이 희귀한 일이 아니잖아요. 아주 멋지죠. 그래서 이곳이 더 좋기도 한데. 제 아이들도 스웨덴어와 영어 이중언어구사를 하긴 하지만 사람들이 한국어를 할거라고 기대하는데 못하니까요. 스웨덴인도 아니고 영국인도 아니고 한국사람처럼 생겼어요. 그리고 항상 왜 한국말을 못하는지 계속 설명해야 하고요. 실제 한국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고 제가 어설프게 간신히 흉내내서 만든 한국문화를 경험해야 하니까요. 그럴때면 뭐랄까 문화적 도용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아이들은 점점 커가고 생각도 감정도 커가는데 이제는 저만의 상실이 아니라 그들도 그들만의 이야기에 상실을 경험하는것 같아요. 

아이들이 그들만의 상실을 경험한다는 사실이 예상 밖이었나요?

그렇진 않아요. 공부를 많이 했거든요. 이런 질문들에 관심이 많고 제가 하는 일이 쓰고 그리는 일이고 또 활동가이다보니 항상 이런 일들에 관여해왔고 그래서 많이 참여하고 또 공부를 많이 했어요. 그리고 이쪽 지역에서는 제국주의 식민지와 대량학살등을 경험한 원주민들이 있기 때문에 세대간의 단절 및 손실이라는 주제가 아주 큰 화두거든요. 그리고 그 모든 주제를 입양하고도 연관 지을수 있어요. 그래서 이 트라우마가 어떻게 세대간에 전달이 되는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요. 제 아이들은 아직 어리지만 다른 많은 입양인들의 자녀들이 목소리를 더 내기 시작했어요. 이제 대부분의 입양인들이 부모가 되었잖아요. 부모가 그 자신의 입양스토리에 관심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들 자신의 상실 즉 정체성문제나 뿌리가 없다고 느끼는 거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들을 말이에요. 그들이 스스로 입양인이 아니라는 사실만 빼고는 우리의 입양스토리와 거의 흡사하죠. 그래서 그런 면에서 제 아이들도 그걸 경험할거라 생각하고 준비를 하려고 그런 질문들을 대비하고 있어요. 

그 글은 프레시안에 실렸는데요 제 아이들이 소개됐어요. 한인입양인 엄마에게서 태어나서 스웨덴에서 태어났고 뉴질랜드에서 자라고 있다고요. 아들아이의 이름은 테디인데요 축구를 좋아해요. 축구가 그 아이의 전 세상이에요. 딸아이의 이름은 포피인데 토끼와 발레를 좋아하고 만들기도 좋아해요. 귀엽네요. 세계여러나라에서 모인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니는데 백인이 한명밖에 없대요. 아주 의외죠. 우리가 사는 동네가 아주 백인 위주 동네거든요. 아이들 반에 동양인이 많아서 너무 좋아요. 

아이들 모두 한국에 두번 다녀왔는데 처음에 갔을때 제 친모를 찾았는데 그건 기억을 못해요. 한살하고 세살이었거든요. 그리고 조금 큰 후에 다시 한번 갔었는데 그때 제 아버지를 찾으려고 했었는데 못 찾았어요. 그래서 저의 이야기에 아주 궁금한게 많아요. 제 파트너가 아이들을 인터뷰했을때 아이들한테 이렇게 저렇게 말해야 한다고 미리 교육시키거나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인터뷰 질문이 아무래도 그런 내용을 담고 있었겟죠.  그러니 아주 진솔한 이야기에요.  제 딸 포피의 편지에요

우리 엄마는 슬프대요. 엄마의 엄마와 함께 할수 없고 엄마의 형제자매들과 아빠에 대해서 알수 없어서요. 한국에서 자라지 못해서 속상하고요. 엄마가 스웨덴에 살때 엄마만 동양인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백인이었대요. 사람들이 엄마가 다른 나라에서 왔다고 엄마에게 못되게 굴었대요. 엄마는 사람들이 한국말을 하면 못알아 들어서 속상하대요. 내 학교의 친구들이 친척들이나 조상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나만 한국에 가족들이 없어요. 한국말을 못해도 괜찮지만 언젠가는 배우고 싶어요. 내 친구들은 모두 자기 조상들의 말을 할수 있거든요. 저만 할머니할아버지의 말을 못해요. 너무 많은 아이들이 가족으로 부터 떨어져 다른 나라로 보내졌대요. 너무 나쁜 일이에요. 우리 엄마한테 거짓말을 하고 엄마의 정보를 조작해서 다른 나라로 보낸 사람들은 벌을 받아야 해요. 엄마가 스웨덴으로 입양되지 않았다면 나는 맛없는 스웨덴 죽을 먹지 않고 대신 맛있는 한국음식을 먹을수 있었을텐데 말이에요. 

포피가 지금 몇살이죠?

10살이에요. 여기서 말하는 맛없는 스웨덴 죽은 실제로는 맛있어요. 쌀로 만든 죽인데 크리스마스에 먹는 음식이에요. 일년에 한번 만드는데 아이가 안 좋아하거든요. 한국 죽도 만드는데 그건 좋아하고요. 이건 테디가 쓴 내용이에요. 

우리 엄마가 슬픈것 같다. 한국에서 입양보내져서.  우리 엄마는 사람들이 엄마를 엄마의 엄마로부터 떼어내서 화났다. 그리고 엄마의 엄마가 엄마의 여동생을 못 만나게 해서 화났다. 왜냐면 상황이 복잡해져서라고 한다. 우리엄마한테 이런 일을 한 사람들은 모두 감옥에 가야한다. 나도 속상하다. 한국 사촌들을 만나고 싶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모두 만나고 싶다. 한국에 가서 만나면 정말 재미있을것 같다.  같이 맛있는 음식 특히 부산에 있는 시장에서 그릴에 구운 생선도 먹으면 좋겠다. 학교 친구들은 내가 중국에서 온줄 안다. 어떤 애들은 나를 보고 칭총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건 인종차별이다. 한국에서 한 학기동안 다니러 온 애가 있었는데 그 애는 영어를 잘 못했다. 나는 그애한테 한국어로 말하고 싶었는데 못했다. 그리고 그애는 서울로 돌아가버렸다. 

나는 손흥민 선수를 좋아한다. 그가 나와 같은 한국인인데 우리 팀인 토튼햄을 위해서 뛰니 너무 좋다. 손흥민 선수를 보면 나도 멋지게 되고 싶다. 나는 한국인이다. 한국인인것이 좋고 한국에 또 가고 싶고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 친구도 만들고 싶다. 한국에 할아버지가 많이 아프다고 들었는데 우리의 존재를 몰라서 못만난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할머니에게 엄마와 친구가 되라고 말하고 싶다. 할머니한테 할머니의 가족들한테 우리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고 싶다.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한국에 가서 같이 지내면 좋겠다. 우리 엄마가 할머니의 가족들하고 친구가 되면 좋겠다. 

아이들 성격이 확연히 다른것이 느껴지죠? 테디는 외향적이고 활동적이에요. 그래서 조용하고 내성적인 우리 셋하고는 많이 달라요. 사람들을 좋아해서 대가족을 원하고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죠. 이 글에서도 보면 모든 사람들을 다 만나고 싶대잔아요. 모두 친구가 되어서 함께 모여  같이 맛있는거 먹자고요. 테디가 한국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중에 하나가 대가족이 있는 친구집에 방문해서 함께 요리해서 먹으면서 떠들고 놀았거든요. 그게 좋았나봐요. 그래서 가족이 생기면 그렇게 될것 같은가봐요. 귀엽기도 하고 안스럽기도 하죠. 다른 사람들은 절대 모를거에요. 

한가지 와 닿는 부분이 테디가 입양인들하고 똑 같네요. 받아들여지고 싶어하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싶어하고 그러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는. 

그래서 왜 복잡한 일인지 왜 할머니 할아버지가 엄마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는지를 이해시키려고 설명해주었는데 아직 아이가 이해하기는 좀 힘든가봐요. 

아직 가족들한테는 공개가 안되었나보네요. 리사씨의 존재가. 

 작가이자 예술가잔아요. 그 부분을 많이 못 다뤘네요. 할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요. 작가로서의 활동에 대해 좀 이야기해줄래요? 어떻게 하면 작품을 볼수 있는지 도요.

지금까지 두권의 그래픽 노블(역자 주 – 만화 소설)을 출간했어요. 하나는 Palimpsest (역자 주 – “오래된 종이 위에 다시 쓰다”이라는 뜻)라는 소설인데 영어로도 번역이 되어서 스웨덴 사람들 말고 다른 사람들도 읽을 수 있어요. 제 뿌리를 찾는 여정을 담은 책이에요. 또한 입양과정중에 있었던 조작이나 입양기관들의 부패등을 알게 되었을때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과정을 그리고 있어요. 두번째 책은 직접적으로 제 이야기는 아니지만 첫번째 책의 2편 같은 느낌인데 칠레입양인을 다루고 있어요. 마리아 디에마르와 그녀의 입양오빠가 칠레에서 각각의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스웨덴으로 왔거든요. 지금 활동가가 되어서 아동입양에 대한 일을 많이 하고 있어요. 아동입양과정중에 일어나는 부정등을 알리는 일부터 칠레의 사기입양등을 고발하는 일 등등요. 아주 대단한 활동가인데 그녀의 이야기에 저도 자극을 많이 받고 또 그녀가 해주는 활동들이 너무 고마워서 그녀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었어요. 활동가들은 아무런 보상도 못 받잖아요. 개인 시간을 내서 싸워야 하고 또 모든 걸 바쳐 전념해야 하고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굉장히 멋지지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제일 주력하는 분야인 입양과정에서의 조작과 부정을 조명하는 일이기도 해요. 이렇게 두 권이 있고 마리아에 대한 책도 곧 영어와 스페인어로 번역이 되기를 바래요. 칠레 사람들도 읽을수 있도록요. 

두번째 책 제목이 뭐라고 했죠?

아직 번역이 안되어서 정해진 영어제목은 없는데 일단 “Excavated Earth(역자 주 – 파헤쳐지는 세상)”이라고 했어요. 글자 그대로 번역한거에요. 

스웨덴어로 쓰여졌나요?

네. 올해 초해 나왔어요. 

스펠링이 어떻게 되나요?

Palimpsest요. 그리스어인데 오래된 문서에 글씨들이 바래지고 나면 그 위에 다시 쓰고 다시 쓰고 하는 과정을 부르는 말인데 우리의 입양과정에서 우리한테 일어났던 일을 묘사하는 말로 딱이라고 생각했어요. 입양 이전의 삶이 있고 입양 후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잔아요. 우리의 기록이 지워지고 다시 쓰여졌고요. 새로운 신원이 부여 됐잖아요. 아름다운 말인데 참 복잡한의미를 담고 있죠. 만화소설이에요. 둘 다요. 인스타그램을 활발히 까지는 아니지만 주로 사용해요. 제 작품이나 근황 혹은 견해등을 보시려면 인스타그램이 제일 빠를거에요. 입양에 대해 새로운 소식등이 나올때 공유하기도 하고 짧은 견해를 올리기도 하고 맘에 안드는 뉴스거리들을 볼때 도 자주 올리고요. 너무 자주 있어서 문제지만요. 

아이디가 Chung.woolrim 인가요? 네, 맞아요.  

오늘 이렇게 나와주어서 고마워요. 우리가 처음에 의도한 대로 이야기가 흘러가진 않았지만 너무 좋았어요. 내밀한 이야기까지 해주어서 너무 고마워요. 많이 와 닿았어요. 앞으로도 계속 연락이 닿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놀랐어요. 이야기나 활동이야기만 해서 지루한것 보다는 나았을것 같아요. 가끔씩 개인적인 이야기를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 팟캐스트 들으면 되겠네요. 너무 많이 공개를  했나 싶기도 하고요. 

후회되면 말씀하세요.  전 너무 좋았어요. 전 엄마는 아니지만 많은 입양인들이 아이들을 키우며 리사씨가 경험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문제들을 겪더라고요. 이야기를 정말 잘 해준것 같아요. 마치 내가 직접 경험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산후 우울증에 대한 부분이냐 분만중에 있었던 트라우마이야기 말이에요. 그런 이야기는 여기서 듣지 않았다면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거에요. 

말하자면 할 이야기는 더 많은데 조금더 관련 연구가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책도 있고 많은 입양인들이 부모가 되면서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는 있어요. 이제는 우리가 모두 그 나이이니까요. 많은 입양인들이 부모가 되면서 그런 일들을 경험할때 “안개를 뚫고 나오다(Coming out of the fog)”라는 표현을 자주 하는데 저도 제가 부모가 되기 전까지는 저의 입양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그 말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많은 입양인들이 다들 그 시기에 목소리를 내거나 활동가가 되거나 하죠. 부모가 되는 일이 정말 큰일이니까요. 다른 생명체를 돌봐야 한다는 인생의 큰 변화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 배우게 되는 시기이니까요. 그래서 상실과 고통이 함께 수반되는데 그렇게 반가운 일들은 아니죠. 내가 어떤 트라우마가 있었는데 그걸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고 또 알아서도 안되었었다는 자각이 수반되니까요. 

제 경우에는 상실과 함께 엄청난 분노가 찾아오고 심하게 실망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온거나 마찬가지죠. 그리고 그걸로 만족해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마침내 나중에 모든 걸 알게 되었다고 해도 얻을수 있는 것은 없죠.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입양되었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받을 수 있는 도움은 없고요. 내 스스로 빈칸을 채워야 했죠.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의료체계에서 입양인에 대한 도움은 없어요. 그러는 동안 우리는 서서히 꺼져가고 있고요. 

                                                                                                         번역 : 전유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