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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6, 열 세번 째 에피소드: 마이클 제섭

안녕하세요. 팟캐스트 “어답티드” 시즌 6, 열 세번 째 에피소드를 지금 시작합니다. 

이 팟캐스트는 한국 해외입양인들의 목소리에 그 중심을 둡니다. 입양인들이야 말로 입양에 관한 한 전문가들이죠. 저는 카오미 리이고 저 또한 한국에서 입양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목소리는 아름다운 사연만을 원하는 입양 기관과 정부 혹은 양부모에 의해  지워지곤 했습니다. 실제 우리의 삶은 그것보다는 더 복잡했는데 말이죠. 이 팟캐스트는 그 이야기를 되 찾고자 합니다. 

“글쎄요,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수 있다. 뭐 그런 관점이라면 모르겠지만, 입양된 아이라는 사실을 놓고봤을 때 고작 여섯살 짜리 아이가 그렇게까지 해야했던 이유는 뭘까요?”

마이클 제섭은 아버지이자, 스포츠 지도자이자 한국인 입양인입니다. 그 또한 한 여인의 아들이지만 엄마에 대한 기억은 없습니다. 인식했던 아니던 그는 평생을 친엄마로부터 떨어졌다는 상처를 이겨내며 살아왔습니다. 지금 그는 그의 지식과 재능을 사회에 나누고 있습니다. 마이클의 이야기입니다. 

마이클 제섭(이하 마이클) : 제 이름은 마이클 제섭이고 올해 마흔여섯입니다. 캘리포니아주 마운틴 뷰에 살고 있습니다. 

카오미 리 (이하 카오미) :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마이클 : 태어난 때 부터 시작하죠.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13개월 때 길에서 발견되어 고아원으로 보내졌다고 해요. 며칠 뒤에 임시보호가정에 6개월간 맡겨졌고 정명찬이라는 이름을 받았어요. 그 후 19개월에 미국의 짐 제섭, 리타 제섭 부부에게 입양되었고 마이클 제섭이 되었어요. 지금도 이름으로 살고 있고요.

카오미 : 양부모로부터 왜 입양했는지에 대해서 들었나요? 아이를 가질수 없어서?

마이클 : 네. 아이를 가질수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입양하기로 결정한거고. 

카오미 :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친부모와 일년 정도를 같이 살았을 수도 있다는 점이네요. 

마이클 : 맞아요. 실은 그 전에는 그 점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었는데 2018년에 한국에 갔을 때 누군가가 그 점을 짚어줬어요. 다른 입양인들과 함께 제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당신 부모님이 당신을 계속 키우고 싶어했던 것 같네요 라고 하더라고요. 그 때 버스안에 있었는데 엄청난 충격이었던 기억이 지금도 나요. 보통 입양 서류에 별로 정보가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물었더니 너를 13개월이나 키웠고 건강에도 이상이 없었으니  그건 계속 키우고 싶었던거라고요. 많이 놀랐고 그때 마음이 너무 이상했어요. 내 과거나 출생에 대한 그 어떤 정보라도 중요하니까요. 딱히 설명할 순 없지만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었어요. 

카오미 : 맞아요. 기록에는 그냥 아기때 입양되었다고만 되어 있으니까 실제 타임라인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잖아요. 하지만 좀 더 찬찬히 생각해보면 추측컨데 그 기간동안 엄마와 다른 가족들이 당신을 돌봤고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니까요. 물론 그게 더 많은 질문거리를 주긴 하겠겠지만요. 

마이클 : 글쎄요. 쉬운 일이 아니죠. 내 뿌리 찾는 일이요. 최근에 의정부의 입양인들과 연결이 되었어요. 제가 의정부에서 발견되었다고 하거든요. 제 입양기록에 의하면 제가 쉼터 같은 데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보호소 같은 그런 곳이죠. 그런데 의정부가 DMZ근처라서 그 쪽 출신 입양인들이 미군과 한국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경우가 많고, 많은 경우는 어느 정도 자란 후에 입양이 되었기 때문에, 그 때 그 곳에 살았던 기억이 있죠. 그래서 그분들이 저를 위해 조사를 좀 해주었는데 그 때 당시에 그 곳엔 남자들을 위한 쉼터 혹은 보호소 같은 곳은 없었다고 해요. 좀 이상하죠. 그 외 다른 몇 가지도 앞뒤가 안 맞고요. 그래서 내 입양서류가 과연 얼마나 정확한가? 그냥 조작된건가? 다른 입양인들한테도 그런 경우가 많잖아요. 도대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참. 

카오미 : 안 그래도 서류조작이 아닌가 하고 말하려던 참이에요. 나에 대한 기록이 허위일수도 있다는 걸 중년이 된 나이에 알 때 기분이 어떤가요? 

마이클 : 무언가 더 많은 것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화가 나고 그러진 않았고요. 물론 화도 났지만 그보다는 뭐랄까 더 참담한 기분이에요. 출구가 없는 게임을 하는 것 같은. 굳이 해야 하나 혹은 그냥 관둘까 하는 생각도 들고. 감정이 복받쳐 오르거나 의심스럽고 불분명한 상황일땐 그냥 잊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럴수록 그냥 부딪혀 보는게 제 방식이기도 하고요.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요. 

카오미 : 캘리포니아 북부로 입양되었다고 했죠?

마이클 : 네, 캘리포니아주 사라토가요. 

카오미 : 어린시절은 어땠나요?

마이클 : 두 가지 측면이 있어요. 외적인 부분에서는 아주 좋았어요. 제가 운동을 잘했거든요. 남자아이로서 운동을 잘한다는 게 또래들과 어울리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됐죠. 제가 굉장히 내성적이고 체구도 작고 말도 똑부러지게 못했지만 운동을 잘하니까 동양인인거랑 상관없이 금방 어울리게 됐죠. 경기를 하면 항상 1순위로 지명되거나 팀 캡틴이 되거나 했으니까요. 그로 인해 적어도 안심이 되고 어딘가에 속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됐죠. 그것이 성장하는데 굉장히 큰 부분이었어요요. 

내적인 부분을 보자면 항상  외로웠던 것 같아요. 제 부모님은 환경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은 다 해주셨지만 정서적인 면에서는, 글쎄요. 지금 돌아보면 우리 부모님도 나름 힘들었죠. 아버지가 알콜 중독이셨는데 주변을 힘들게 하거나 했던 건 아니고 그냥 방문 닫고 들어가서 안나오는 그런. 그리고 엄마는 그런 아버지와 사느라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나 싶고요. 엄마한테도 엄마 나름의 문제들이 있었고요.

그리고 그때는 아마도 우리가 처음이라 그랬던 것 같은데 입양아들에게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아무도 몰랐죠. 그래서 그냥 같은 백인인라고 간주하고 당신들이 알아서 해라 이런 식이었죠. 그래서 자라는 동안 아시안문화를 전혀 접하지도 못했고 실제로 전 제가 백인인줄 알았어요. 그런 부분이 힘들었죠. 그냥 항상 혼자인 기분이었는데 그걸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했죠. 부모님한테도요. 지금까지 한번도 그 부분에 대해서 부모님과 솔직한 이야기를 해보지 못한 것 같아요. 항상 “잘 지내요. 별 일 없어요” 이런 대화만 했죠. 

카오미 : 굉장히 표면적인?

마이클 : 네. 아주 표면적인 대화요.. 아마도 룸메이트와의 대화보다도 더 표면적이었을 거에요. 룸메이트들은 가끔씩 술이라도 한잔씩 하며 이야기하잔아요. 그 당시에는 술도 못 마셨고.

카오미 : 그렇죠. 외동이었나요?

마이클 : 네 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어요. 역시 한국에서 입양되었고요.

카오미 : 그럼 여동생과도 그런 표면적인 관계였나요? 혹은 가족들 사이가 다 그랬나요?

마이클 : 네, 우리 가족은 그랬어요. 그렇게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죠. 어렸을 때는 그래도 동생과 꽤 가까웠던것 같은데 중고등학교에 진학해 팀운동을 시작하고 대회에 많이 나가게 되면서 제가 집에 많이 없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된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친구들 무리에 끼고 싶어서 내가 거리를 두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친구들하고 있을 때는 어린 여동생이 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멀어진 것 같아요. 

카오미 : 항상 전투적으로 살았던 것 같은데 맞나요? 생존을 위한 투쟁 같은. 언젠가 저한테 엄청난 이야기를 들려줬잔아요. 생존 본능에 관한.

마이클  : 맞아요. 어릴 때는 내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이 내가 운동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땐 그냥 뭐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생각했죠. 과거는 과거일 뿐 앞으로 일어날 일과는 상관없다고. 지금 이 순간만이 중요하고 지금 이 순간에 네가 뭘 하는지가 너를 결정한다고. 그런 마음가짐이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었어요. 말씀하신대로 저는 항상 전투적이었어요. 그땐 그런 줄도 몰랐지만. 그리고 전 모두가 다 그런 줄 알았어요. 테니스 선수로서 승부욕이 강한 것이 굉장히 강점이었는데 지금 생각 해보면 그저 승부욕이라기 보다는 생존 본능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두살 반정도 되었을때 저희 부모님이 제가 온 지 일년이 된 기념을 하고자 휴가를 갔다고 해요. 스누피 여행가방에 짐을 싸서 차를 타고 Long Beach에 가서 멕시코로 크루즈 여행을 할 계획이었대요. 그런데 제가 차 안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서는 한마디도 안 하더래요. 롱비치에 있는 호텔까지 일곱시간 정도를 가는 내내 말이죠. 저희 부모님은 제가 왜 저러나 싶었죠. 그 다음날 크루즈를 타고 방에 가서 짐을 풀렀더니 그제야 제가 침대에서 방방뛰며 평소의 저로 돌아갔대요. 

그래서 휴가에서 돌아온 후에 엄마가 입양기관 담당자한테 전화를 해서 설명을 했더니, 아마도 내가 또 버려지는 줄 알고 그랬을 거라고 했대요. 두살 반짜리 아이가 어떻게 그걸 알고 그랬는지 진짜 기가 막히죠. 입양에 대해서 많이 연구하다 보니 언어 이전에 우리 몸에 각인된, 우리가 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는 그런 것들이 있는것 같아요. 승부욕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되돌아가 보자면 어떤 사람들은 이기려고 싸우고 어떤 사람들은 지지 않기 위해서 싸우는데, 제 경우엔 생존을 위해서 경기를 했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에 제가 했던 모든것을 돌아보면 다시금 버려질 상황에 놓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카오미 : 아마도 그 13개월때의 기억때문이 아닐까요? 의식적인 기억이 있든, 없든 간에 말이죠. 그 나이에 가족과 헤어진 것이 큰 트라우마로 남아있었을 테니까요.

마이클 : 그랬을지도 모르죠. 제 입양기록을 보면 한가지 더 힘들었을 점은 제가 임시보호 엄마에게 정이 많이 들었었다고 해요. 아무래도 고아원보다는 임시보호 가정이 나았을 테고, 그 나이에 6개월이란 긴 시간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임시보호 엄마와 애착이 생겼는데 또 헤어져야 했으니. 임시보호 가정이 고아원에 있었던 것보다는 나았겠지만 그래도 고아원에만 있었다면 바로 끊어질 관계를 맺지는 않아도 되었을텐데요요. 

카오미 :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나요?

마이클 : 글쎄요 

카오미 : 성인이 된 후에도 말이에요.

마이클 : 관계가 끊어지는 것에 대해서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냥 사람을 잃는다기 보다 가까운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불안은 있죠. 관계가 아주 가까워지면 불안해져요. 어려워지고요. 친한 친구 혹은 완전 친한 친구보다 그냥 적당히 친한 사이가 되는게 낫죠. 뭔가 위험해 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항상 이 정도면 충분하다 하고 적당히 선을 긋죠. 

카오미 : 그럼 사람들한테 가깝게 다가가거나 서로 의지하는 관계를 맺는 것이 소용없다고 느껴질 정도인가요? 이 관계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에?

마이클 : 제가 의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그런것 같아요.  의식적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실제가 그러니까요. ㅋㅋ

 카오미 : 통계로 입증되나봐요 (웃음)

마이클 : 맞아요. 무의식적인 불안이 분명히 있는것 같아요.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둔다거나 안전 장치를 마련하거나 해요. 내 자신을 엄청 바쁘게 만든다거나 하는. 일종의 방어기제죠. 그런 모든 일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는 게 참 무섭죠 

카오미 : 여섯살 때 일어났던 그 이야기를 해주세요. 조금 마음이 아픈 이야기인데 살아남기 위해 애썼던 이야기..

마이클 :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만화를 너무 좋아해서 생긴 이야기이기도 하고요ㅋㅋ. 초등학교 1학년 여섯살 때 였어요.  우리 학교에서 연례 모금행사로 걷기 대회를 했는데 1등  상이 컬러티비였어요. 토요일 아침마다 볼트론, 썬더캣, 지아이조 같은 만화를 봤었는데 

카오미 : 스머프는요

마이클 : 맞아요. 스머프도 있었죠. 스머프 안좋아 한 사람이 누가 있어요? (웃음) 

그 해 1등 상이 컬러티비 였어요. 토요일 아침마다 춥게 티비를 봤거든요 그래서  내 방, 내 침대에서  따듯하게 티비를 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엄마에게 엄마 이번 걷기대회1등 상품이 컬러티비래. 내가 1등하면 그 티비 내 방에 놔도 돼요? 하고 물었죠. 그랬더니 그래라 하는거에요. 그래서 그럼 케이블도 연결해 줄 거예요? 하고 물었더니 당연하지 그러는거에요. 아주 기분이 좋았죠.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설마 이 애가 일등을 하겠어 라고 생각했을거에요. 아직 일학년이고 일등하려면 5-6학년 애들을 이겨야 되는데. 여섯살 짜리가 열 한살 열 두살 애들을 이겨야 되는거니까요.

카오미 : 체구도 작은 편이라고 했었죠?

마이클 : 맞아요. 꽤 작은 편이었어요. 검은 머리에 키도 작은 전형적인 아시안이었죠. 아무튼 대회날이 다가왔고 나보다 큰 아이들과 함께 경기를 시작했죠. 아침 8시 경이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갈수록 어떤 아이들은 좀 쉬기도 하고 어떤 애들은 내내 걷기만 했고 어떤 애들은 뛰었고요. 나는 내내 가볍게 뛰었는데 한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 세 시간이 지나자 거의 모든 아이들이 중간에 쉬는데 나는 계속 했어요. 어떤 애들은 쉬었다가 다시 뛰는 애들도 있었고요. 점심시간이 되자 많은 애들이 가서 점심을 먹는데 나는 엄마에게 핫도그와 콜라를 가져다 달라고 해서 그걸 먹으면서 계속 걸었어요. 그때는 콜라가 스포츠 음료였거든요. 

카오미 : 최고의 건강음료였죠

마이클 : 그랬죠. ㅋㅋ  오후 세시 쯤 경기가 끝날 때가 되니 다른 아이들이 늦게라도 마일리지를 더하려 돌아왔는데, 저는 그때까지도 쉬지 않았어요. 계속 걸었던거죠.  화장실에 갔었는지도 기억이 안나요. 그 뒤에 이틀 정도 걷지 못했던 기억이 나는데, 제가 그날 25마일(역자 주 – 대략 40킬로미터) 을 걸었더라고요. 

다행히 그 날이 토요일이어서 하루 이틀정도 회복할 시간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 금요일이 되었어요.

카오미 : 교사들이나 학교 담당자들이 걱정도 안 됐었나봐요? 이 어린아이가 이렇게 많이 걸어도 괜찮은지?

마이클 : 글쎄요. 그때는 스포츠 사이언스 이런것도 없었잖아요. 한 여름에 훈련을 할 때도 물 마셔야 되면 니가 약해서 그런거야, 물 안마셔도 돼. 그래서 세시간 동안 물도 없이 훈련하는 그런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니 괜찮았다고 봐요. 어쨌든 금요일이 됐고 조회를 하는데, 3등 발표를 하고, 2등을 발표하고, 교장선생님이 1등 마이클 제섭! 하고 발표를 했는데, 그 순간 체육관이 조용해졌어요. 5-6학년은 서로 다들 알잖아요. 그런데 1학년의 이름은 모르니까 다들 두리번거렸어요. 그리고 우리반 애들은 이게 진짜인가 싶었겠죠. 제가 단상에 올라가서 컬러티비를 받았는데 그때가 참 기념비적인 순간이었어요.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해낼 수 있구나 라는 걸 깨달았던 순간이랄까. 그런데 참 자랑스러우면서도 짠한 기억이에요.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어, 이런 관점에서라면 몰라도, 입양된 아이라는 점에서 여섯살 짜리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를 생각해보면 굉장히 짠하죠. 

카오미 : 많이 속상하네요. 그래서 방에 티비를 놓았나요? 케이블도요?

마이클 : 네. 부모님이 약속을 끝까지 지켰어요. (웃음)

그 티비를 대학에 가서까지 계속 가지고 있었어요. 기숙사에 가지고 갔죠. 

카오미 : 지금은 어디에 있나요

마이클 : 그것까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확실한 건 대학 시절에는 계속 가지고 있었어요. 

카오미 : 그 경험이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확실히 북돋아 주었겠어요. 후에 운동선수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신체적 강점이나 지구력같은 것들 말이죠. 

카오미 : 네. 제가 워낙 운동을 잘 하기도 했지만 타고난 능력 만큼 중요한 것은 얼마나 더 이기고 싶어 하느냐에요. 전 그걸 어린 나이에 배웠던 것 같아요. 혹은 누가 더 이기고 싶어하느냐가 승부를 결정하는데 심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직관적으로 알았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항상 누구보다 더 더 이기고 싶었어요. 진심으로 이기고 싶었고 지금 돌아보면 이기기 위해 죽을 수도 있었어요. 이기기 위해서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내가 더 겪어야지 하는 그런 마음.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지 하는 마음이요.

카오미 : 완전 진심이었네요. 진적도 있었나요?

마이클 : 그랬죠. 때때로 경기에서 질 때면 너무 괴로웠어요. 세상이, 적어도 내 세상이 망하는 것 같았어요. 

카오미 : 그렇다면 죽을만큼 혹은 죽더라도 이기고 싶었던 그 마음도 일종의 생존기제였을까요?

마이클 : 그렇죠. 그런데 그때는 그렇게 생각을 안했고 남들도 다 그런줄 알았어요. 그땐 그냥 제가 남들보다 더 승부욕이 강한 줄로만 알았어요.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특히 테니스 코치가 되어 후배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보니 그런 승부욕은 훈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포어핸드나 백핸드, 올바른 자세, 그리고 어떤 요령같은 것들은 가르칠 수 있지만, 승부욕은 가르치기가 굉장히 어렵죠. 어떤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이기고 싶다거나 지는게 싫다거나 하는 감정을 어떻게 가르치겠어죠?

카오미 : 그런게 바로 킬러 본능이라는 건가요?

마이클 : 맞아요. 킬러 본능이요.  그런건 가르칠수가 없어요. 타고나는거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가능할지도 모르죠. ㅋㅋ 

카오미 : 그렇다면 지금 돌아보건대 입양되었다는 사실 덕에 킬러본능을 키울 수 있었네요. 

마이클 : 맞아요. 아주 어린 나이부터 모든 것에서 이겨야만 직성이 풀렸어요. 그냥 재미로 하는 게임은 없었어요. 죽거나 살거나 둘중 하나였죠. 

카오미 : 그렇다면 상당히 진지한 편이기도 했나요요?

마이클 : 네, 굉장히 진지한 아이였어요. 모든면에서 심각했죠.  

카오미 : 그래요? 지금 제가 보는 마이클은 느긋하고 낙천적인 성격에 항상 아재개그를 날리는 그런 사람인데, 재밌네요. 지금의 그런 성격들은 마이클이 일부러 노력해서 얻게 된건가요? 그렇게 진지한 아이였다면요.

마이클 : 맞아요. 지난 몇 년 동안 그쪽으로 많이 노력했어요. 긴장을 풀고 조금은 즐길 수 있도록요. 또 최근에는 대인관계 기술을 단련하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불과 일이년 전까지도 지금의 저와는 많이 달랐어요. 많이 수줍었고, 나 자신에 대해 확신이 별로 없었고, 내성적이었죠. 아마 방구석 외향형이었을거에요. 지금은 사람들이 제가 한 때 그랬었다고 하면 안 믿어요.  연습하면 다 좋아지죠. 연습하면 못할 것이 없잖아요. 조금 더 쉬울 순 있겠죠. 타고나면요.  하지만 대부분 꾸준히 연습하면 적어도 능숙하게는 되죠. 

카오미 : 왜 테니스였죠?

마이클 : 왜 테니스를 했냐고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카오미 : 가족들이 모두 테니스를 치고 그런것도 아니었잖잖아요, 맞죠?

마이클 : 네. 테니스는 다섯살때 시작했어요.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그땐 인터넷도 셀폰도 없고. 여름이면 아이들이 할 일도 없고 많이 지루해 하잖아요. 그래서 주변을 뒤지고 다니다가 차고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테니스 라켓과 공을 발견한 거에요. 차고 문을 향해 공을 치기 시작했는데, 그때 테니스를 하는 이웃이 오더니 우리 부모님한테 나를 테니스 캠프에 데려가보라고 했어요. 제가 잘 한다고요. 진짜 잘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죠. 그래서 부모님이 저를 테니스 캠프에 등록했고 매 여름마다 테니스를 쳤어요 그리고 아홉살이 되던 해에는 일년 내내 테니스를 쳤어요. 그런데 그때는 축구랑 야구도 했고요. 

한 야구 게임이 기억이 나는데요, 플레이오프였고 우리가 지고 있었어요. 저는 2루에 있었고 6회말 이었어요. 어린이야구라 6회까지만 해요. 우리가 몇 점 차로 지고 있었는데 우리 팀이 안타를 쳤어요. 그래서 제가 삼루 그리고 홈까지 가서 동점이 되었죠. 제 뒤를 따라 다른 주자가 또 들어왔고, 우리는 이겼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 때 상대팀이 삼루로 공을 다시 던져서 아웃이 된거에요. 제 뒤에 들어온 주자가 삼루 베이스를 안 밟아서 아웃이 된거였죠. 

카오미 : 아이고

마이클 : 아마 그때를 계기로 테니스에 올인 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기억나는데 다른 사람이 나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 나 혼자 하는게 낫다, 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카오미 : 유년시절을 거의 혼자 보냈다고 했잖아요, 맞죠?

마이클 : 네.

카오미 : 그러고 보면 혼자서 하는 스포츠에 끌린 것이 자연스럽네요. 

마이클 : 테니스는 진짜 고독한 운동이에요. 코트에 혼자 서 있잖아요. 얼마 전까지는 코칭도 못했어요. 오로지 나와 내 상대 둘 뿐이었죠. 테니스를 해보지 않았다면 알기 힘든 감정인데요, 정신력이라는 측면에서, 혼자하는 스포츠가 더 힘든 점이 있어요. 테니스를 얼마나 잘 하는지보다 얼마나 성숙한 사람인지가 더 중요하죠. 코트에 서 있으면 멘탈이 털리거든요. 나 자신에 대한 회의 같은 것들 말이에요. 운동을  하며 그런 경험을 한다는 것이 참 재밌죠. 테니스는 한번 하면 푹 빠지게 되는 운동이에요. 하다보면 광신도가 되죠. 사람들이 재미로 하는 운동이 아니에요. 말로는 재밌어서 한다고 하는데 아니죠.  테니스는 재미없어요. 잔인하죠. 비참해지고 싶으면 테니스를 쳐보세요. 테니스 홍보하는데 도움이 안되겠는데요ㅋㅋ 엄청난 내적 성찰이 필요한 운동이에요. 자기 자신을 찾는 과정에 있거나 혼자가 더 편하거나 뭔가 이루어야 한다거나 자신을 몰아 붙이고 싶은 사람들에게 잘 맞아요.

카오미 : 테니스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까지 올랐었죠. 아닌가요?

마이클 : 그랬죠. 프로생활까지 했으니까요.  꽤 잘 나갔어요. 18세 이하 랭킹 미국 2위까지 했어요. 페퍼다인 대학 대표였고 프로리그 세컨티어에서 3년간 뛰었어요. 아주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때까지는 저도 아주 잘했어요. 제 개인적인 목표는 거의 다 이뤘으니까요. 

그런데 탑 레벨에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장난이 아니거든요. 승부욕이 다가 아니에요. 그 정도 레벨에서는 승부욕은 다들 기본이거든요. 지역에서 뛸 때는 계속 이기기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프로레벨이 되면 넘어야 할 난관이 너무 많죠. 훈련도 그렇고요. 그 때 부터는 개인운동이 아닌 팀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당신을 맡겨야 해요. 코칭을 받고 바뀔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해요. 그런데 전 그러지 못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제 코치들이 절 어떻게 감당했나 싶어요. 

카오미 : 왜였죠? 왜 가르치기 힘들었나요?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나요?

마이클 : 듣기 좋은 것만 들었죠. 제가 많이 예민했어요. 듣기 좋은 것만 듣고, 싫은건 안 듣고. 그리고 방어적이었어요. 방어적이면 가르칠 수가 없거든요. 방어적인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긴 해요. 고집스럽다는건 확고하다는것을 의미하기도 하니까요. 저는 뭐랄까 좀 고지식했어요. 내 포어핸드나 서브가 좀 부족해도 열심히만 하면 될거라고 생각했어요. 예외 없이요. 그런데 그 정도 레벨에 올라가면 그 어떤 약점도 있으면 안되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그런 건설적인 비판을 못 받아 들였어요. 그분들이 하는 말이 다 일리가 있었는데도요. 내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그 점을 파고들테니 그걸 고쳐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말이에요요. 

그런 점이 제가 조금 더 발전하는데 큰 장애물이 되었죠. 그리고 또 사람을 상대하는 기술이요. 좋은 선수가 되려면 그런 것도 굉장히 중요했는데 제가 사람들과 말을 잘 하지 못했어요. 팀을 모으고 잘 꾸려가려면, 나에게 맞는 코치, 스타일, 매니저 등 결정할 것이 너무 많았고, 돈이 한없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자금이 있으면 그걸 또 어디에 쓸지 결정해야 해요.  이 대회에 나갈까 저 대회에 나갈까, 자격은 되는데 급이 높은 대회는 혹시나 지게 되면 수익이 전혀 없을테고, 나은 성적을 낼 수 있고 상금도 탈수 있는 작은 규모의 대회를 나갈까, 그런데 그건 또 경력에는 도움이 안되고 하는 것들이요.

혹은 그냥 집에서 훈련하면서 그 돈으로 코치를 고용해서 단점을 좀 보완할까, 아니면 경기에 나가서 랭킹을 좀 올릴까, 나한테 맞는 코치는 어떻게 찾을까, 코치인터뷰는 어떻게 해야 하나, 코칭 철학이 있는지 혹은 내가 이런 이런 점이 부족한데 어떻게 지도할 것인지 물어야 되고 등등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지 어려운 점이 많았어요. 그때는 인터넷도 없고 셀폰도 없으니 어떤 코치가 괜찮은지, 심지어는 연락처 찾기도 힘들었으니까요. 끝이 없는 고민이었죠. 그리고 나한테 그런 재능들이 다 있었다고 해도 힘들었을거에요. 누군가를 내 삶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부터가 힘들었거든요. 코칭이라는 관계,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받기로 선택한다는 것은 참 용기가 필요하고, 제 자신이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거든요. 나를 드러내고 그래서 도울 수 있도록 해야 되는데 저는 지나치게 독불장군이었어요. 다른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다는 고집이 나를 딱 거기까지만 가도록 만들었죠.  

그런 부분들이 끝나지 않는 고민이었어요. 맞는 팀을 찾고, 잘 꾸려나갈수 있는 능력이요. 

카오미 : 그럼 그런 모든 성향들이 입양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마이클 : 한 90%정도는 그런 것 같아요. 그 이상일 수도 있고요. 그런 점에 대해서 마흔살이 되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거든요. 항상 입양된 사실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혹은 과거는 중요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너에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중요하다. 미래를 봐야지. 내 과거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내 스스로 나를 정의한다. 뭐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으니까요

카오미 : 뒤 돌아 보지 말고 앞만 봐, 뭐 이런거요?

마이클 : 네. 과거는 나를 정의하지 못해. 나는 내 스스로 정의한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나를 찾는 이 여정이 조금 늦어진 것 같아요. 

이렇게 여정이 늦어진 또 다른 이유는, 어떤 외적인 동기가 없었다는 거에요. 제 생각에 인간은 외적인 동기에 크게 좌우되는 존재에요. 요즘은 모두 내적 동기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결국은 내적 동기도 외부로부터 오는 거잖아요. 제 경우에 테니스 쪽으로 잘 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어떤 조직에 소속감을 느끼고 있었고, 나의 뿌리 같은 것에 깊이 파고들 필요가 없었어요. 나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할 필요 말이죠. 그럴 용기도 없었고요.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굉장히 무서운 질문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남에게 뒤지기 싫어하는 성격 덕에 나의 뿌리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게 된 것 같기도 해요. 처음 내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들여다보기 시작했을때, Renee Brown의 팟캐스트를 들었거든요. 창피함과 약함에 관한 에피소드였는데 참 와 닿았어요. 가장 큰 용기는 약해지는 것이라는 거에요. 그 이유들이 모두 타당했어요. 그래서 지기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강한 사람으로서, 나는 용기가 있으니까 해봐도 되겠다. 할 수 있겠다. 이런 생각으로 뛰어들었죠. 어떻게 보면, 경쟁심 강하고 지기 싫어하는 내 성격에 불을 지른거죠. 그래서 뛰어 들었어요. 뛰어들기 전에 잘 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냥 뛰어 들었어요. 상담 치료도 받고, 입양에 관한 책도 읽고, 유투브도 보며 몇년을 보냈어요. 팟캐스트는 못들었죠. 그 땐 이 팟캐스트가 없었으니까요.  

카오미 : 그럼 그때가 대략 2015년 즈음이었겠네요. 제가 2016년에 시작했으니까요. 

마이클 : 그렇죠 

카오미 : 어떤 계기로 이런 성찰을 시작한건가요?

마이클 : 2015년에 당시 와이프와 별거를 시작했어요. 아이들하고도 헤어지게 됐고요. 그 때 많이 힘든 시기였어요. 그러면서 나에 대한 질문들을 하게 됐어요. 시간이 많기도 했고요. 직업도 직업이고 부모가 되면 주변을 돌아 볼 시간이 없잖아요. 그런데 그 때 그 일들을 겪으면서 주변을 좀 돌아보고 질문할 시간이 생긴거죠. 그래서 시작된 거에요. 

카오미 : 많이 힘들었겠네요. 결혼생활을 얼마나 했나요?

마이클 : 20년 이상이요.

카오미 : 그래서 결국엔 결혼생활을 정리하게 됐군요? 

마이클 : 네, 노력을 한다고 했는데 많이 힘들었어요. 관계를 잘 맺으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하잖아요. 이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는 나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내가 나를 잘 모른다는 사실은 이미 알았던 것 같네요. 그 사실을 항상 숨겼을 뿐이죠. 그 사실을 마주할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고요.

카오미 : 아버지로서는 어땠나요? 부모 역할을 하는데, 입양되었다는 사실이 영향을 끼쳤나요?

마이클 : 확실히 그랬어요. 특히 지난 몇 년 간에는 더욱 더요. 왜냐하면 이제는 나 혼자 해내야 하잖아요. 그 전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그냥 애들 엄마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됐었거든요.

그래서 그냥 내 스타일대로 해보자 싶었죠. 그 전에는 생각도 안 해 본 것들이요. 좀 시간이 걸렸어요. 헤쳐나가는데. 

카오미 : 친구같은 아빠인가요?

마이클 : 그런 편이에요. 제가 보기에 그건 자랄 때 양육환경, 그러니까 부모가 어떻게 키웠는지에, 그래서 어떻게 느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은데요. 자랄 때 난 항상 두려웠어요. 그래서 항상 모범생이었죠. 성적도 A만 받았고요. 문제가 될만한 일은 피했어요.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 기억나는 일이 있어요. 집에 가려고 엄마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건물 앞에서 공을 가지고 놀면 안되잖아요. 애들도 많고 차고 있고, 위험하니까요. 그런데 지금도 이름이 기억나는데, 현재는 테네시에 살고 있는 커트라는 친구가 풋볼을 저에게게 던졌어요. “받아봐” 그러면서요. 그러니 어떻게 안받아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공 던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죠. 그래서 나는 공을 안 던지고 돌려줬어요. 그랬더니 그 녀석이 나한테 다시 공을 던지는 거에요. 저는 던지지 말라고 정색을 했어요. 그래서 교장실로 불려갔는데 전 정말 큰일났구나 싶었어요. 집에 가서도 마당에 숨어있었어요. 엄마가 절 찾으시는데 뒷마당에서 혼자 숨어있었던 기억이 나요. 그냥 너무 무서웠어요. 그 후에도 기억은 잘 안나지만 어떤 말썽을 피운적이 있는데, 결국엔 도망을 갔었어요. 이제 끝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돌려 보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항상 했었어요. 

카오미 : 만약 제가 그때로 돌아가서 마이클의 정신분석을 해본다면 (웃음) 마이클은 항상 일종의 연기를 하고 있었던 거네요. 그 누구도 화나게 하지 않고, 마이클을 다시 돌려 보내버리고 싶어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마이클 : 그때는 그렇게 해야 내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었나봐요. 부모 역할로 돌아가보면 참 어려운 점이, 내가 너무 엄한가 하는 생각도 있어요. 입장을 바꿔 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아요. 내 입장에서는 그냥 눈길 한번에 애들이 알아서 해야 되고, 부모가 하는 말은 다 심각하게 받아 들여야죠. 제 부모님은 저한테 두 번 말할 필요가 없었어요. 무언가 하라고 말 할 필요조차 없었죠. 매일 아홉시 반이면 알아서 자고, 일곱시면 일어나고, 숙제도 매일 알아서 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내 애들한테는 아흔 여덟번 말해야 해요. 환경이 너무 좋은거죠. 불안해 할 일이 전혀 없거든요. 부모가 항상 지지해주고요. 가끔씩 화가 날때는 닥치고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해, 할 수도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부분이 저에게는 어려워요. 저희 부모님이 저에게 그랬다면 너무 힘들었을 것 같거든요.   

카오미 : 아이들에게서 자신을 보나요?

마이클 : 네. 아이들이 커 갈수록 더욱 더요. 인간성이나 품행같은 자연스러운 성향들이 표출될 때 참 재밌어요. 이런게 유전자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외부 환경의 영향일까 궁금하기도 하고요. 아이들이 나와 닮은 것을 볼때마다 내 핏줄이라 그런건지 아니면 나한테 배워서 그런건지, 그런 닮은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참 재밌어요. 

카오미 : 묻고 싶은게 있는데요. 우리가 같이 아는 지인중에 호정씨가 있잖아요. 시즌 2에 나왔었던. 호정씨하고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마이클 : 2018년에 친부모 찾기를 시작해서 서울 뿌리의 집(한인 해외 입양인들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 에 묵게 되었죠. 새벽 6시 쯤에 한국에 도착해서 8-9시 경에 숙소에서 체크인을 하는데, 마침 호정씨는 체크아웃을 하는 중이었고,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게 됐어요. 그래서 이런 저런 모험들을 함께 하게 되었죠. 여러곳을 같이 다녔는데, 호정씨는 정말 대단했어요. 뿌리의 집도 정말 좋았고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죠. 호정씨는 정말 훌륭한 상담가에요.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는데, 뭐랄까 엄청난 아우라가 있고, 하는 모든 말들이 깊이가 있고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그곳에서 여러 활동들을 할 때 나를 도와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정말 특별했죠. 함께 미혼모 시설에 갔었던 기억이 나요. “I wish you a beautiful life” 란 책을 우리 둘 다 읽었거든요. 미혼모 시설에서 아이를 입양보내기 전에 카운슬링의 일환으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편지를 쓰는데 그걸 엮어서 나온 책이에요. 그 책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책일거에요. 내가 읽은 책 중에서 제일 슬펐거든요. 그래서 쉼터에 방문했을 때, 원장으로부터 책에 사인도 받았어요. 시설을 둘러 본 후에 잠깐 카페테리아에서 쉬고 있을 때였어요. 그 곳에서 기금 마련을 위한 바자회 같은 것이 열리고 있었는데, 우리 옆 테이블에 열 일곱, 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들이 앉았어요. 그때 통역해주시는 분이 넌지시 우리에게 그 소녀들이 다음주에 출산 예정이고 아이들을 입양 보낼거라고 말해 주시더라고요. 

그때 참 마음이 말할 수 없이 복잡했어요. 뭐랄까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간 느낌었죠. 내가 바로 그 아이였겠구나 하는 감정. 그런 순간에 그런 경험들을 함께 이해하고 소화할 사람이 옆에 있어서 너무 감사했죠. 또 함께 고아원도 방문해서 아기들도 안아봤거든요. 솔직히 그건 그리 큰 감흥이 없었어요. 너무 정신없었거든요. 그런데 그곳에 한 아이가 곧 생일이고 나이가 다 되어서 곧 고아원을 나가야 한다고, 혹시 상품권같은 선물을 해주면 아이한테 큰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해서, 

그래서 큰 아이들이 지내는 곳으로 가서 지금 17살이라는 곧 18살이 되는 그 아이에게 상품권을 줬는데, 그 아이가 우는거에요. 그때 저도 울컥하더라고요.  아이가 너무 감사해 하면서 울먹거리는데, 고아원에서 자랐으니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주는 선물을 많이 못 받아봤겠구나 싶어서 많이 짠했어요. 아직까지 한국에선 사회적으로 고아라면 많이 무시당하고 천대받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그 경험이, 내가 지금쯤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다른 삶에 대해, 내가 만약에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어요. 물론 언제나 우리는 20개쯤은 되는 “만약에”의 상상을 하며 사니까요. 그런식으로 호정씨와 많은 경험을 함께 했어요. 호정씨는 또 제가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것인지 정리하는 데도 상당한 도움을 줬어요. 꽤 의미있는 조언들이요. 

카오미 :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데요?

마이클 : 그 후에도 계속 연락하며 지냈거든요. 지금은 플럼 빌리지에서 안수를 받고  

카오미 : 수도자가 되었죠? 맞죠?

마이클 : 네. 딱 어울려요. 그녀만의 타고난 평안함이 있잔아요. 

카오미 :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죠. 

마이클 : 맞아요. 제가 아이들 키우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했어요. 그녀는 훌륭한 상담가잖아요. 내 이야기를 듣고 말하길 플럼 빌리지 (Plum Villiage- 역자 주 프랑스에 위치한 불교 사찰)에 수양을 하러 오는 부모들이 말이에요, 그들이 제일 원하는 것이 뭔지 아냐고 물으면서, 바로 아이들의 행복이래요. 그런데 아이들한테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치려면 뭘 해야 하는지 아느냐, 그건 바로 네 자신이 행복해지는 거라고요. 모든 부모들이 아이들한테 좋은 걸 해주고 가르치려고 하는데 그렇다고 아이들이 배우는건 아니다. 아이들은 네가 보여주는걸 배운다고요. 

그게 많이 와 닿았어요. 특히 요즘에는, 적어도 제가 사는 곳에서는, 아이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물론 그것도 중요하죠. 그런데 많은 경우에 그러려면 부모 자신의 행복을 포기해야 하거든요, 그때 이해가 됐어요. 한명의 부모로서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고요, 그렇다면 어떤 모습을 아이들한테 보여줘야 할지 고민들이 시작됐죠. 이런 것들이 지금의 제가 아이들을 어떻게 대할지 결정하는데 중요한 동기가 됐어요. 지금 저의 양육방식은 아이들이 가졌으면 하는 모습들을 내가 먼저 보여주는 것이에요. 어떤 특별한 습관을 가지기를 원하면 그 습관을 내가 먼저 길러야죠. 이거해라 저거해라 잔소리만 하는게 아니라요. 잔소리는 쉽지만, 어차피 애들은 안 듣잖아요. 아이들이 뭐가 되기를 원하거나 하기를 원하면 내가 먼저 그 모습이 되어야죠. 

카오미 : 저도 호정씨를 알지만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죠. 호정씨가 모든 답을 알고 있는것도 아니고 본인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겠지만, 다양한 삶의 경험에서 오는 통찰력 같은게 있어요. 그때의 그 한국방문에서 호정씨의 존재가 의미하는건 무엇이었나요? 어머니의 같은 표상 같은 존재였나요? 그때나 혹은 그 뒤에도요?

마이클 : 좋은 질문이네요. 뭐라 답하기는 어려운데

카오미 : 어렵죠. 둘 사이에 유대가 깊었던 것 같아서요.

마이클 : 네. 깊은 공감대가 있었죠.

카오미 : 둘이 만난 것도 아주 우연이었잔아요. 한국에 가지 않았다면 절대 만날 수 없었겠죠. 

마이클 : 제가 10분만 늦게 도착했어도 못만났겠죠. 

카오미 : 몇 분만 늦었어도요, 

마이클 : 맞아요. 못 만날 뻔 했죠. 그 후에도 오랫동안 연락하며 지냈는데, 이 입양인 모임이 대단한 점은 우리가 서로에게서 각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에요. 서로 배우기도 하고, 무엇보다 각자의 경험에 대해 언어를 부여할수 있다는거에요. 언어는 강한 힘이 있어요. 언어를 통해 우리만의 이야기에 어떤 힘이 생기고 우리가 원하는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호정씨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잡한 경험이나 감정들에 딱 맞는 표현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졌어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감정들을 해석해서 정확한 말로 설명해줘요. 도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굉장히 위로가 되요. 이걸 어떻게 더 잘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겠어요. 카오미씨도 잘 알잖아요. 호정씨를. 

카오미 : 너무 캐묻는것 같지만 마이클이 그랬잖아요. 사람들이 떠나갈까봐 미리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고요. 호정씨하고는 어땠나요?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그것도 마이클을 버리고 떠나간 것으로 느껴졌나요?

마이클 : 저때문에 수도원에 갔다고 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네요(웃음)

카오미 : 아니면 이제 관계를 잃는 것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나요?

마이클 : 글쎄요, 항상 조금 더 거리를 두긴 해요.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자신을 잘 보호하는 거겠죠.

카오미 : 아이들한테 직접 보여주기로 했다고 했잖아요. 아이들이 행복하길 바란다면 스스로 행복해져야 한다고.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행복을 찾고 있나요?

마이클 :네. 지인들과의 관계를 통해서죠. 많이 사귀고 같이 뭔가를 하고 그런거요. 항상 현재 진행형이죠.  매일, 매달, 매년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하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에요. 내 자신도 찾고요. 내 자신이 되는 것이 항상 어려워요. 그래서 최근 몇년간 글쓰기를 시작했어요. 상담의 일부로 시작했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내 감정을 말로 표현해내고 내 경험과 감정을 소화하는 작업이요. 그게 한 방법이에요. 

카오미 : 학생들을 지도하는 쪽으로도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 같은데요, 어떻게 보면 마이클이 선수였을때 받았으면 했던 그런 코칭을, 혹은 그런 코치가 되어주면서 성취감을 느끼기도 하나요? 

마이클 : 학생들을 지도하는게 뭐랄까 소명처럼 느껴져요. 너무 재미있고 내가 온전한 내가 되는 느낌이에요. 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인생의 목적도 있고요.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요? 전 각각의 제 학생들이 마음만 먹으면 뭐든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어요. 제 학생들도 저의 그 부분을 높이 사주는 것 같아요. 그리고 학생들이 그 길을 가는데 약간의 코칭이라도 제가 어떤 역할을 한다는것이 참 영광이죠. 자녀교육과도 같은 원칙이죠. 내가 먼저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요. 내 학생들이 열심히 하길 바라면 내가 먼저 열심히 해야 하고, 집중하길 바라면 내가 집중해야 하고요. 그 모습이 됨으로써 가르치는거죠. 말로도 가르칠 수 있고, 유튜브로 봐도 되지만. 유튜브에 없는게 없잖아요. 그렇지만 그 핵심은 어떻게 배울수 있을까요? 제가 심어주려고 하는게 바로 그거에요. 

카오미 : 앞에서 이야기 했던 것들 중 하나가 생존본능이었잖아요. 이기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런데 그 투지만 있었을 때는 오히려 이기기가 힘들고, 얻고 싶은걸 얻는게 더 힘들었던 것처럼 보여지네요. 그 부분은 이제 받아들이게 되었나요? 그런 갈망말이에요. 혹은 내 선에서 콘트롤 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나요?

마이클 : 아주 많더라고요 (웃음)

카오미 : 어릴땐 그것이 삶의 동력이 되어준 것 같은데요, 지금은 어떤가요? 마흔 여섯이 된 지금에도 그런가요? 아니면 인생관이 바뀌었나요?

마이클 : 제 내면을 들여다보는 여정을 시작한 이후에 확실히 덜 경쟁적이 되었어요. 외부에서 해야할 싸움이 따로 있고 내면에서 해야할 싸움이 있는것 같아요. 성취, 성공이 외부에서의 게임이라면 내부에서 해야하는 싸움이 바로 우리가 가야할 길이죠. 지금까지는 그쪽으로 투자를 안했었고요. 이겨야만 한다는 갈망은 지금도 있지만, 제 주된 관심사는 이제 그쪽에 있지 않아요. 내 관심사는 주로 나 자신과 나의 움직이는 동기, 나를 자극 하는 것은 무엇인지, 무슨일을 하건 나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것 등에 있어요. 

카오미 : 치유가 되었다고 느끼나요? 어떤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마이클 : 맞아요. 힐링이에요. 내가 어디 다녀오기라도 했나?하고 느낄정도로요. 예전의 나를 생각해보면 지금의 제가 훨씬 자신이 있고요. 예전엔 사람들하고 눈도 못 마주치고 뭔가 내 자신이 부끄럽고 확신이 안 들고 그랬거든요. 지금이 훨씬 낫죠 5년 전보다요. 

카오미 : 혹시 직접 쓴 글 중에, 읽어주고 싶은것이 있나요?

마이클 : 네. 지금 쓰고 있는 책이 있어요. 진도는 전혀 안나가고 있지만  “테니스의 기술, 너만의 경기를 해라” 가 제목인데. 글이 안 써지고 막힐때면 그냥 다른 주제에 대해서 계속 썼어요. 입양이나 사는 이야기, 관계 이야기 같은 것들요. 여행이나 그림, 혹은 어떤 경험같은. 지난 9월 Bay to LA*=(**미국 캘리포니아 한인입양인모임)에 다녀와서 쓴 것을 읽어볼까 해요 

카오미 : 우리가 거기서 만났었죠.

마이클 : 네. 지난 9월 BAY TO LA에서요.

카오미 : 설마 저에 대해서 쓴건 아니죠?  농담이에요 (웃음)

마이클 : 다른 입양인들과 함께 한 날은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거대한 집단 에너지 같은. 물론 그 후에 어떤 허탈함도 있었고요. 그때 쓴거에요. 제목은 Surrender(항복)입니다. 

웃었다. 울지 않으려고

미소지었다. 찡그리지 않으려고

바쁘게 보냈다. 외롭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을 치켜 세웠다. 내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음악을 들었다. 그래서 나를 안 들으려고

다른 사람을 돕는다. 나를 필요 없으려고

시를 쓴다. 

나를 표현하려고

관심을 다른데 두려고. 

해는 없고 구름은 있고 

눈에는 비가 오고.

생각이 천둥치고

고통은 번쩍이고.. 

밸런스를 어떻게 찾을까.

춤을 출.

익사하지 않을. 

카오미 : 밝은 시는 아니네요. 

마이클 : 외적 균형에 대한 시에요. 항상 웃지만. 웃음으로 감추는거죠. 

카오미 : 하나 더 읽어줄 수 있어요? 입양과 관계된 것도 있나요?

마이클 : 하나 더 읽을게요. 이건 시는 아니고. 생각만 해도 울컥하는데. 다른 입양인이 그러더라고요. 입양기관에 편지를 남겨 놓으라고요. 엄마한테요.  이것도 일종의 테라피 같은건데. 이건 제가 엄마한테 쓴 편지에요.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엄마 

이 편지는 제 평생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에요.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도 너무 많고 물어보고 싶은 것들도 많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네요. 저는 저의 이 고통과 슬픔을 지우려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자랐는데, 19개월에 이곳에 도착했을때 양부모님이 마이클이라는 이름을 지어줬어요. 어린 시절에는 모든게 두려웠지만, 강하고, 결단력 있고, 강건했어요. 나의 이런 점들은 혹시 엄마를 닮은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어요. 낯선 언어와 문화, 그리고 가족관계도 모두 잘 헤쳐나갔어요. 

제 새 가족들을 기쁘게 해주고, 또 제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어요. 고등학교랑 대학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요. 운동을 잘해서 전세계를 돌며 프로 테니스 선수 생활도 했어요. 지금은 샌프란시스코에 살아요. 두 아이가 있는데 매들린과 가브리엘이에요. 매들린은 열세살인데 의지가 강하고 집중력도 뛰어나고 착해요. 카브리엘은 열살인데 주변을 밝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요. 왠지 나중에 연예인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엄마가 이 애들을 만나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사람들을 항상 존중하고 함부로 평가하지 않으려고 해요. 착하고요. 아마 제 주변 사람들이 저에 대해 그렇게 들 말할거에요. 엄마도 저를 자랑스러워 하셨으면 좋겠어요. 지금 테니스 교습소를 운영하고 있고 제가 테니스를 가르쳐요. 제 지역에서 꽤 인정받으면서, 제 학생들이 잘 되도록 돕고 있어요. 그래도 항상 가슴 한구석이 비어있는 것 같아요. 엄마를 안고 엄마의 따뜻한 품을 느끼는 꿈을 꿔요. 제가 엄마 목소리를 알아볼 수 있을까 궁금해요. 저를 보내기로 한 결정이 너무너무 힘들었다는 것 알아요. 그로 인해 너무 많이 고통받지 않았기를 바래요. 

전 잘 살고 있어요. 엄마를 원망하지 않고 좋은 마음만 가득해요. 이번 생에 언젠가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래요. 안되면 다음 생에서라도요. 그때까지 마음과 영혼이 평안하고 행복하길 바라요. 제 옆의 빈자리는 제가 잘 간직할게요.  엄마를 위한 자리에요.. 

저도 눈물이 나네요. 이 편지를 이렇게 팟캐스트에서 전세계를 통해 읽는다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텐데요. 우리 모두 마이클의 마음을 조금 들여다 봤네요. 고마워요. 

이 팟캐스트를 해줘서 고마워요. 다른 모두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에 대해 정말 많이 배워요. 이렇게 내 이야기를 할 기회를 줘서 고마워요. 

카오미 : 언젠가 2탄도 있겠죠? 사람들이 마이클에게 연락하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되죠?

마이클 :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해요. 10sjourney인스타그램이에요.

카오미 : 아..  10is 테니스군요

마이클 : 네 

카오미 : 무슨말인가 했어요..ㅋ

마이클 : 그쵸. 혹은 페이스북에서 마이클 제섭을 찾으면 됩니다. 

카오미 : 고맙습니다. 마이클. 지금 새벽시간인데요, 내일 하루 너무 피곤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야기 들려주고 약한 모습 보여줘서 고마워요. 

마이클 당신은 굉장히 특별한 사람입니다. 고맙습니다. 오프닝 뮤직을 협찬해주고 있는 제이진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더 많은 곡을 듣기를 원하시면 제이진닷컴을 찾아주세요. 앤드류 헨리씨와 다른 후원자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지원으로 이 한인 입양인들을 위한 퍗캐스트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후원자가 되시면 에피소드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들으실 수 있어요. 앤드류처럼 후원자가 되기를 원하시면  홈페이지를 방문해주세요. 다음에 뵐 때까지 잘 지내세요.       

                                                                                                         번역 : 전유근

시즌 6, 에피소드 6: 젠이 뢰멜스버그와 퍼즐 조각

“ ‘그냥 잘 안 맞는 퍼즐이 아니라 다른 퍼즐 박스에 잘 못 들어온 퍼즐 조각’ 같다고 느꼈어요.”

이번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하나도 못 보며 미국 중서부에서 자랐습니다. 다른 많은 입양인들 처럼요. 그는 한국인임에 대해 수십년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남달리 취급되던 스스로를 애써 못 본척 하며 살아오다 마침내 한국을 찾았습니다. 한국을 찾으며, 그리고 글을 쓰며, 심지어는 한국을 사랑하는 법을 그녀의 아들로부터 배우며 그녀는 온전한 자신이 되었습니다. 젠이씨를 만나보시죠.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젠이 레멜스버그이고 아이오와주 마리온에 살고 있어요. 곧 쉰 한살이 되네요.

아이오와주에서 자랐나요?

네, 평생을 아이오와를 떠난적이 없어요(웃음). 누가 전체 주민이 2-3천명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동네에서 자랐다고 하면 제가 코웃음을 치며 “우리 동네는 전체 주민이 700명 뿐이었거든!” 하고 말하곤 해요. 저만 유일하게 백인이 아니었어요. 지금은 그곳에서 50키로 정도 떨어진 Cedar Rapids라는 도시 쪽으로 옮겨 가서 살아요. 

이름 스펠링에 숨져진 뒷 이야기가 있나요? 스펠링이 특이해요. 

제가 입양인의 목소리 글쓰기 그룹(Adoptee Voices Writing Group)에 서 활동하고 있는데 안그래도 바로 얼마전에 이를 주제로 글쓰기를 했었어요. “내 이름에 숨겨진 뜻”(What’s in your name?) 이라는 주제였는데 모임의 여러 입양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부분이 우리 이름이 여러번 바뀌었다는 사실이었어요. 제 이름도 제가 아는 한 지금까지 네 번이 바뀌었거든요. 그중에 두번은 제가 원해서 였고요. 진짜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제 입양 서류와 여권에 있던 이름은 윤선영이고 미국에 와서 제가 받은 이름은 제니 엘리자베스 맥칼럼( Jenny Elizabeth McCallum)이에요. 그리고 그 이름으로 쭉 살았죠. 제니퍼의 준말인 제니가 아니고 그냥 제니라는 것을 강조하며 자랐는데 엄마쪽의 증조할머니와 아버지쪽의 증조할머니 두분이 모두 제니셨대요. 피도 안 통했는데 제가 양쪽 할머니의 이름을 물려받았다는 것이 좀 이상하긴 하죠. 한번도 만난적도 없는데 제가 이 분들을 따라 이름 지어졌다는 것이요. 

아무튼 역사가 좀 긴데 그래서 한동안 제니 엘리자베스 맥칼럼으로 행복하게 살아오다가 제 입양가족들하고 관계가 삐꺽대기 시작하면서 그 이름을 따라 살아가기 싫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제 남편을 만났을때 만약에 결혼하게 되면 이 이름을 따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제니 엘리자베스 뢰멜스버그가 되었죠. 이 지역에서도 그 이름으로 두루두루 알려졌어요. 그냥 제니라고 하지 않고 항상 “제니 뢰멜스버그” 이렇게 붙여서요.  그리고 그때 제가 미용실을 시작하고 이름을 스튜디오 젠이라고 지었어요. 그때 스펠링을 Zhen라고 붙였는데 그때 제가 쓰던 제품이름이기도 했고 한국제품이라고 들었거든요. 젠(역자-한문”진”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이 한국어로 아름다움이라는 뜻이라면서요. 그래서 제 샵이름을 그렇게 붙였는데 그 뒤에 그 지역에 심한 홍수가 나서 그 지역이 모두 다 침수가 되었어요. 제 샵도 완전 망가졌는데 그래서 샵 이름을 못 쓰게 된 것이 너무 속상하더라고요. 그때 제 이름 철자를  그렇게 바꿔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정식으로 이름을 바꿨고 그러고 나니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꼭 한글 같기도 하고 한국의 “ㅈ”이 마치 알파벳 Z랑 비슷하기도 하잔아요. 마치 제가 제 스스로 제 이름을 지은 것 같고 원래 이름인 제니와 발음은 거의 같으면서도 마치 한국 이름 같리기도 하고요. 제가 제 이름을 스스로 지은 것 같아 뭔가 더 의기양양해지는것 같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 젠이(Zhen E)가 되었지요. 

그랬군요. 몰랐어요. 그런데 듣고 보니 완전 말이 되네요. 제 이름(카오미) 도 입양부모님이 지어주셨는데 일본에서 입양되어온 제 아버지의 사촌을 따라서 지었대요. 그러니까 제 이름이 일본식인거죠. 저는 그분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데 가족안에 유일한 동양인들이라는 이유로 이름을 따라서 지은거죠. (웃음)

말도 안돼죠. 

그러니까요. 일본 이름이니까요. 

일본이랑 한국이랑 다른 나라인지도 모르고.

그러니까요. 그리고 그 뒤로 이 이름이 제 정체성이 되어버렸잔아요. 

사람들이 일본인이냐고 물어보나요?

네 항상요.

저는 가끔씩 중국인이냐고 물어봐질때가 있어요. Xhen이 중국식 성이니까 사람들이 Zhen을 보면 중국식일거라고 생각되나봐요. 사람들이 중국사람 아닌거 맞냐고 물어봐요. 그럼 “백퍼” 아니라고 하죠. (웃음)

뢰멜스버그(Rammelsberg)는 독일식 이름이잖아요, 맞나요?

네, 완전 독일 이름이에요. Ramel은 천둥이라는 뜻이고 Berg는 산이에요. 그러니 천둥치는 산(Thunder Mountain)이라는 뜻이에요. 마치 디즈니랜드 놀이기구이름 같죠? (웃음)

예전에 큰 상점에서 일하는 것들이 아직 위험하지 않을때에 한 유명 상점에서 일한 적이 있었어요. 명찰을 착용하고 일했었는데 그때는 이름 스펠링을 바꾸기 전이었어요. 한 여자분이 제 이름을 읽더니 “뢰멜스버그는 독일식 이름이잖아요?” 라고 하더라고요. 마치 제가 이름을 위조하기라도 했다는 뉘앙스로요. 그래서 제가 제 결혼전 이름은 맥칼럼이었다고 했더니 놀라며 “그건 아일랜드 식 이름이잖아요!” 그러더군요. 그래서 제가 “더 정확히 하면 스코틀랜드랑 아일랜드 식이죠” 라고 덧붙인 다음에야 입양되었다고 설명했죠.  그랬더니 갑자기 엄청 미안해하는 얼굴을 하대요. 물론 저도 바로 대답을 안하고 그 여자가 스스로 멍청하다고 느끼게끔 시간을 끌기도 했고요. 아무렇게나 지껄이지 말라고요(웃음) 아무튼 제니 엘리자베스 맥칼럼이나 제니 엘리자베스 뢰멜스버그나 사람들이 이름만 보면 이 한국인의 얼굴을 상상하기 힘든건 사실이죠(웃음)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가요?

이미 말했듯이 여러모로 굉장히 자신있어진것 같아요. 특히 저의 “한국인임”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도움이 됐어요. 제가 두살때 버려져 이곳으로 오게 됐는데 그때는 한국말을 할수 있었을 거에요. 그런데 지금은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너무 속상해요. 한국어가 제가 처음으로 배운 말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힘든 것을 보며 뭐랄까 제 문화유산를 빼앗긴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특히 제 입양가족이 세대간의 유대가 굉장히 끈끈한 편이었거든요. 제 입양어머니가 요리를 굉장히 잘하시는 분이었는데 가족 대대로 딸에서 딸로 구두로만 전해져 오는 레시피도 있고 그래요. 계절이 바뀔때면 같이 모여서 저장음식도 만들고요. 매년 양배추로 사우어크랏 (역자 주 – 독일식 양배추 절임)을 만드느라 엄청난 양의 양배추를 썰고 요리해서 저장하는 것을 보며 자랐어요. 한국에도 그런 문화가 있을텐데 저는 모르잖아요. 함께 모여서 김치를 만들고 하는 그런 것들이요. 저도 요리를 꽤 잘하는 편이라 독일쪽이랑 영국쪽 음식들은 꽤 잘 만들어요. 제가 자라면서 먹은 것들이요. 자다가도 번쩍 일어나서 그레이비(역자 주 – 고기 육수를 걸쭉하게 졸인 소스)를 만들라면 만들수 있거든요. 그런데 한국 음식은 만들려면 하나하나 신경써서 해야하죠.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어요. 

한때 제가 한국인임을 지우고 살고 싶었던 적이 있었어요. 사람들은 계속 제가 아시안음을 일깨워주는데 저는 그냥 미국인으로 보이고 싶었거든요. 항상 백인들에 둘러쌓여 있었고 저도 그들과 같다고 느꼈으니까요. 제가 백인이 아닌건 알았지만 달라보이고 싶지 않았죠. 그래서 저의 이런 아시안임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꽤 걸렸는데 막상 그 여정을 시작하고 또 이름을 바꾸고 나니 뭐랄까 나를 찾는 여정을 이젠 본격적으로 시작한것 같았어요. 미국인인것 또한 나 자신이지만 한국인임도 나니까요. 

우리가 2016년에 처음 만났죠? 젠이씨는 굉장히 재미있는 분이더라고요. 지난번에 한국에 갔을때는 다쳤다면서요? 한국인임을 되찾는 과정이 험난해보여요.  맞나요?

네. 제가 입양인 작가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는데요 꼭 한국인 입양인만 있는 것은 아니고 모든 입양인들이 다 참여 가능한 그룹이에요. 대부분 미국내입양이요. 한국인 입양인도 있고요. 거기서 시간을 정해 놓고 글을 쓴 다음에 앞에 나와서 발표하는 시간을 갖는 데 그때  “그냥 안 들어 맞는 퍼즐이 아니라 다른 퍼즐 박스에 잘 못 들어온 퍼즐 조각(“feeling like not just a puzzle piece that doesn’t quite fit, but a puzzle piece that actually is in the wrong puzzle completely”) 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모양이 비슷해 보이지만 아무리 끼우려고 노력해도 절대로 딱 들어맞을 수 없는 퍼즐 조각이요. 제가 그런것 같아요.

그때 우리가 만났을때가 저의 첫 한국 방문이었어요. 아들 아이도 같이 갔었는데 그때 제가 좀 많이 힘든 상태였어요. 그리고 한국에 갈때마다 무슨 일이 생기고 특히 지난번에는 제가 다치기까지 했어요. 그래서 제가 애증의 관계라고 표현을 해요. 한국에 가는 것이 좋긴 좋으니까요. 미국 중서부 아이오와에서 나고 자란 제 남편도 한국을 너무 좋아해요. 원래 낯선곳에 가고 새로운 것을 하기를 별로 안좋아하는 사람인데도요. 한국 문화가 너무 좋고 한국 사람들이 서로 챙겨주는 것이 너무 좋대요. 그런데 저는 왠지 동떨어진 느낌이 들때가 많아요. 제가 한국어는 못하지만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는 감으로 알아듣거든요. 그래서 한국 사람 같은데 왜 한국어를 못하는지 궁금해 하거나 하는 것은 바로 알아채거든요. “미쿡사람입니다~” 라고 이야기 해요. 입양됐다고 밝히지는 않아요 그럼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까요. 아무튼 언어장벽도 그렇고요. 한국인이지만 완전한 한국인이 아니라서 달리 취급받는 그런 것이 있어요. 관광투어를 갔는데 제가 미국인인것을 알고 처음부터 아예 한국인 대접을 안하더라고요. 그럼 조금 힘들죠. 백퍼! 한국인이 아니라고 취급받는 그런 항상 그런 느낌이요. 그러면 굉장히 불편하고 어색하죠. 한국인인데 한국말을 왜 못해 하며  왠지 무언의 질책을 당하는 것 같고요. 

한국에 네번 갔었잔아요. 갈때마다 매번 느끼는 것이 달라지나요? 그때그때 다른 것들을 깨닫나요?

그럼요. 제일 처음 갔을때는 제 남편이 그렇게 장기간 비행을 하고 멀리 가본 적이 처음이었어요. 비행기 여행 자체를 그렇게 많이 해본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저도 제가 준비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준비가 안되어 있었고요. 그런데 제 남편이 한국말을 하나도 못하는데도 지하철등 타고 다니는 것을 너무 잘  파악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부분은 걱정할 것이 없었죠. 길 잃어버릴 걱정을 한번도 안했어요. 남편이 마치 전생에 와보기라도 한 양 잘 찾아다녔어요. 주소 시스템이 달라서 먼저 동네를 찾은 다음 그런 식으로 찾아다녀야 하잔아요. 그런데 남편에 너무 잘 찾아다녔어요. 

어떤 계기로 그때 2016년에 한국에 간건 가요?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에요. 그 전에는 한국에 가봐야 겠다는 생각도, 친가족을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도 없었거든요. 아들아이가 대학에 지원을 할때 제가 한번 물어봤어요. 입학 원서에 인적 사항을 기입할 때 백인이라고 하는지 아시안이라고 하는지요. 그랬더니 아시안이라고 체크한다고 하더라고요. “당연한거 아냐?” 이런 반응이었죠. 그래서 그때 아들아이가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아들아이가 그러더라구요. “우리 엄마가 되게 멋진데 한국사람이잖아”라고요. 저를 아시안 롤모델로 생각하고 있었나봐요. 제가 바람직한 모델이던 아니건 간에요. 제가 아이한테는 하나의 롤 모델이었고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었던 거죠. 그때 알았어요. 아이가 아시안임에 대해서 스스로 좋게 생각한다는 것을요. 

그래서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 난 아시안인것이 그닥 달갑지 않았나 하고 깊게 생각해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마침내 한국에 가보기로 하고 비행기표도 사고 페이스북에도 한국에 간다고 올렸죠.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트윈스터(Twinsters)라는 다큐멘터리가 넷플릭스에 있다고 보라고 추천을 했어요. 그래서 봤는데 거기서 IKAA(International Korean adoptee Associations 국제한국인입양인모임) 에 대해서 들었어요. 검색을 해봤더니 삼년에 한번씩 열린다고 하는데 마침 그해 여름에 열리는 거에요. 그때가 대낮 이었는데 일하는 남편한테 바로 전화를 해서 흥분한채로 이야기했죠. “입양인들을 위한 컨퍼런스가 열리는데  세상에 우리 원래 계획보다 3주 정도 늦게 열린대” 라고요. 그랬더니 남편이 원래 여정을 취소하고 IKAA가 열리는 기간으로 다시 예약하자고 해주더라고요. 그래서 비용도 더 들었지만 원래 일정을 취소하고 IKAA에 참가하러 갔어요. 그것이 일단은 일차 이유였죠. 그런데 그때는 다른 입양인들하고도 어울려야 했는데 그러진 못했어요. 제 입양에 대해 깊게 들여다보지 않았던 때였거든요. 다른 입양인들하고 어울려 본적도 없었고요. 

그럼 그때가 막 첫 걸음을 떼었던 때였군요. 

제 또래 입양인들하고 어울려 본적이 없었어요. 제가 알던 입양인은 모두 제가 알바로 돌봐주던 어린아이들뿐이었거든요. 입양인들과 어울려보지 않았었어요. 

IKAA 에 대해서 부연설명을 좀 하자면 전세계의 입양인들이 모이는 행사에요. 삼년에 한번씩 서울에서 열리고 여러 입양인 단체들이 모두 모이기도 하고요. 

그 뒤로 코비드로 인해 잠정 중단됐었죠. 이번에 2023년에 열릴 IKAA에 제가 준비위원으로 활동중이에요. 그러니 아주 먼길을 온 셈이죠.(웃음)

진짜 먼 길을 왔네요. 처음에 봤을때는 꽤 힘들어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혹시 감정이 정리가 안 됐었나요? 그렇게 많은 입양인들을 한꺼번에 본 것이 처음이라서?

그러기도 했고 너무 큰 기대를 하기도 해서 좀 실망하기도 했고요. 제 출신 나라에 처음으로 돌아간 것이었잖아요. 그 자체만으로도 감정적으로 너무 벅차죠. 그런데 저처럼 처음 한국을 찾은 입양인들에 대한 별도의 지원들이 없었어요. 그 부분이 굉장히 크거든요. 그래서 한국에 처음으로 간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감정을 잘 살펴보라고 이야기 하곤 해요.  감정적으로 과부하가 걸릴수도 있으니까요. 우리가 떠나온 나라를 처음으로 다시 방문하는 일이 결코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그 자체로도 힘들었는데 같은 입양인들을 만나면 친해져서 바로 터놓고 이야기 할수 있는 상황이 될것이라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한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죠. 그게 힘들었어요. 왜냐면 제가 보통 사람을 되게 쉽게 사귀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이 입양인이라는 사람들은 뭐랄까 한명 한명이 책 한권 분량의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죠.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고 살아온 환경도 다 달랐으니까요. 입양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가 비슷한 사람들인것은 아니니까요. 

만나면 자동적으로 동질감을 느끼고 뭔가 통할거라고 생각했군요

그런데 제가 원하던 수준의 동질감을 느끼기엔 너무 시간도 짧고 역부족이었죠. 제가 입양인이라서인지는 몰라도 항상 주변에 사람들을 만들어두려고 하잔아요. 그래서 그렇게 노력했는데 잘 안 되다가 끝날때 쯤 쿠킹클래스에서 카오미 당신을 만나고 또 그룹 모임에서 저랑 같은 나이대 사람들을 만나니 그때쯤 드디어 뭔가 사람들과 통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 전까지는 제 아들 또래의 입양인들하고 활동을 같이 하게 되었는데 그건 제가 원하던 바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때 저를 시카고 입양인 모임으로 초대해준 크리스 디트리치(Chris Detrych)도 만났어요. 아주 더운 날이었는데 고궁투어를 갔었거든요. 명찰에 이름과 사는 나라가 적혀있어서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모두가 중서부(midwest)에서 온 것을 알게 되었죠. 우리는 아이오와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 친구도 아이오와에서 산적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호구조사를 하다보니 저희가 살고 있는 도시에 그 친구가 산 적도 있더라구요. 

그래서 대화를 나누다가 제가 아이오와에서도 입양인 모임을 시작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가 시카고의 입양인 모임으로 초대를 해주었어요. 대도시인 시카고하고 아이오와는 환경이 많이 달랐지만요. 아이오와에서는 다들 멀리 떨어져 살고 어떤 친구는 아이오와 내에서도 네 시간을 운전해야 서로를 만날수 있어요. 그래서 아이오와에서는 온라인 모임이 아주 유용했어요. 팬대믹 기간동안이 오히려 더 도움이 된것 같아요. 아무튼 마침 아들아이가 시카고에서 한시간 떨어진 밀워키에 있기도 했었고 그래서 시카고로 입양인 모임을 자주 나가서 모임에 대해서 배우고 입양인들하고 어울릴수 있었죠.  그러다 보니 한국에 방문할때마다 도움도 받게 되었죠. 최근에 갔을때만 빼고는 제가 한국에 갈때마다 크리스 그 친구가 항상 한국에 있기도 했고요. 그래서 우리가 한국 갈때마다 너도 꼭 있어야 해 하고 농담도 하고 그랬는데 지난 마지막 방문때 제가 하필 발목을 다쳤는데 그 때는 그 친구가 없었어요. 그래서 니탓이라고 농담도 했고요. IKAA 말고 그냥 방문했을때도 신기하게 그 친구가 한국에 있었던 적도 있었죠. 

2019년 IKAA에도 갔었는데 그때 마침 같은 한국인 입양인이던 제 며느리에게 아들아이가 프로포즈를 했어요. 오빠랑 둘이 모두 한인 입양인이거든요. 그래서 IKAA 에 같이 가자고 설득해서 그 애 가족도 같이 갔는데 그애에겐 그때가 입양과 관련된 모임에 처음으로 갔던 것이었어요. 그때 양가 가족이 다 있었는데 아들아이가 프로포즈를 하고 그 뒤로 팬데믹 중에 결혼해서 지금 아이도 있어요. 그래서 이번 여름에 다 같이 IKAA에 다시 같이 갈 예정이에요. 

한국에 처음 가거나 이런 대규모의 입양인 모임에 간다고 해도 바로 상처가 치유되고 도움을 받을수 있는건 아니잖아요. 그러니 아주 힘든 상황이 생길수도 있고 그래서 며느리가 처음 모임에 갔을때 젠이씨가 옆에서 설명해주고 같이 있어준것이 굉장히 도움이 되었겠네요. 

모든 프로그램에 다 참가를 해야 되는 건 아니다 라는걸 알려줬죠. 그게 제가 했던 실수거든요. 많은 감정이 올라올 수 있으니 네 마음을 자주 들여다보고 괜찮으니 힘들면 낮잠을 자거나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해줬죠.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잖아요. 그러기 보단 너를 먼저 살피라고요. 내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나와 비슷한 상태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힘들잖아요. 그런 조언들이 도움이 많이 된것 같더라고요. 같이 한복도 맞췄어요. 특별한 경험이었죠. 

며느라가 같은 입양인이라는 것이 어떤 느낌인가요

불편하게 생각할수도 있으니 입양인 모임을 가라고 권하거나 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저한테도 시간이 꽤 걸렸고 40대가 넘어서야 다른 입양인들을 찾기 시작했으니까요. 제가 어릴때는 그런 조언들을 들을수도 없었고 또 지역이 너무 떨어져있다보니 다른 입양인들을 마주칠일도 없었어요. 하지만 만나고 싶어했었던 기억은 나요. 다른 입양인 혹은 꼭 입양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한국인이라도 주변에 좀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고는 했었어요. 그러다가 저희 지역에 다른 가족이 한국에서 입양을 했는데 그애들은 저보다 너무 어렸어요. 제가 베이비시터를 할 정도였어서 그들은 별 도움이 안 됐었죠. 저의 존재가 그 아이들에게 도움이 됐을수는 있겠네요. 후에 알게된 사실인데 제 입양부모님이 저를 입양하는 것을 보고 그 가족들도 입양을 결심했대요. 저희 가족이 화목해보였나봐요. (웃음) 

입양에 대해서 깊게 들여다보고 있는 지금은 SNS나 제 글에 입양에 대해서 많이 쓰거든요. 제 글에 동의할수 없는 사람들도 많은걸 알아요. 아직도 많은 입양인들이 입양신화의 그늘안에서 입양은 너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잖아요. 그래서 한국정부에 입양인의 정보를 공개하라는 요구를 하는데 동참했어요. 입양이  불법적으로 진행된 증거가 점점 드러나고 있으니까요.

저도요. 

한 300명이 넘게 신청을 했잖아요. 

앞으로도 더 늘어날 예정이고요. 

맞아요. 최근에 더 많은 열람기회를 오픈했다고 하니 좋은 일이지요. 점점 더 늘어나고 있어요. 그러니 사람들도 더 많이 신청하겠지요. 잘 된 일이고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에 처음 갔을때 도착 전에 이미 필요한 서류작업을 마치고 저를 입양보낸 기관인 홀트를 방문했거든요. 처음에는 한국으로 연락하라고 하다가 그 다음에는 오레곤에 있는 기관으로 연락하라고 하다가 다시 한국으로 연락하라고 하다가 결국 제 기록을 찾았다고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라고 하대요. 그런데 그 정보가 제 부모님이 알고 있던 것과 달랐어요. 제 입양어머니가 제 기록을 아주 잘 보관해두셨었거든요. 그래서 무슨 말인지는 비록 몰랐어도 제 파일을 제가 보관하고 있다가 그 파일을 한국까지 가지고 갔었어요. 홀트에 연락을 해서 약속 잡고 입양 후 서비스를 신청했어요. 그 사람들이 엄청 두꺼운 파일을 들고 나왔는데 저한테는 첫 세장 정도만 보여주는거에요 . 더 있는데 왜 안보여주냐고 물어보니까 안된다고 보여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제 임시 보호자가 누구였는지 그런 것들을 안보여 주더라고요. 다른 아이들의 정보가 들어 있을수도 있다면서요.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출구가 없는 게임을 하는 것 같았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 인지 알수도 없었고요. 너무 막막하고 힘든 상황이었죠. 

 325 Camera에 DNA 등록도 했어요. 게스트하우스인 뿌리의 집에도 등록해 두고 경찰서 몇군데에 남겨 두기도 했어요. 그런데 화나는 것은 확실한 답이 없고 사람들도 답하기를 회피하는 거에요. 그러니 저에 대한 정보라고 제가 들은 것들이 진짜인지도 확인할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제가 발견 됐을때 남겨진 노트가 있었대요. 거기에 제 생년월일과 한국 이름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에 의하면 제가 알고 있는 저의 생일과 제 이름이 진짜에요. 그렇다면 제 두살 생일 이틀 후에 제가 발견됐다는 거거든요. 한겨울에요. 그리고 제가 안양시에서 발견됐대요. 그래서 그곳 시청에 찾아가 혹시 제가 출생등록이 되었었는지를 물었어요. 그랬는데 아니래요. 그러니 내가 한번도 정식으로 등록된 적이 없었구나 한국의 시스템상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구나 하며 방심하고 있다가 한번 훅 얻어맞는 느낌이었죠. 그리고 갑자기 저희보고 이 트럭에 타라고 하더라고요. 왜 타라고 하는지는 모르고 그냥 탔는데 갑자기 여기저기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데리고 다니더니 갑자기 내려서 사진을 찍으래요. 그래서 영문도 모르고 아무 생각없이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말하길 이 곳이 제가 발견된 곳 근처라서 그렇대요. 미리 말해줬으면 좀 자세히 보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졌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대충 지나가게 만든 다음에 말해주고요. 그리고 그게 확실한지 아닌지도 모르고요. 아무튼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더 헷갈리고 계획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죠. 그래서 그 뒤에 통역사를 고용해서 다시 가봤는데 통역사도 그닥 열심히 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요. 그래서 지금은 출신 찾기를 무한 보류한 상태에요. 그냥 막다른 골목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엄청 당황스럽고 화가 낫겠네요. 영문도 모르고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그 장소가 그렇게 의미있는 곳인줄 알았을때요. 

아무 설명도 없이 그냥 사진 찍으라고. 저희는 갑자기 왠 사진? 이런 반응이었고요. 저한테 그랬잖아요. 유머감각 있고 재밌는 사람이라고요. 이 모든 상황이 좀 웃겼는데 저희가 처음 제 서류를 들고 안양에 있는 경찰서를 찾아갔을때요 거기 젊은 경찰관들이 신이 나서 제 서류를 하나하나 읽어보다가 저희를 조사관 같은 사람한테 데리고 갔어요. 그러느라 저희한테 경찰차 뒷자리에 타라는 거에요. (웃음) 그래서 우리 셋이 경찰차 뒷자리에 타고 있는 사진을 찍어서 페이스 북에 올렸어요. “말도 안통하는 외국에서 제일 피해야 할일은 경찰차에 타는 것이지” 라고 써서요.  경찰들이 아주 친절하게 도와줬는데 개인정보보호법때문에 다른 건 말해줄수 없지만 저를 발견한 사람을 찾은 것 같다고 그런데 자꾸 죽었다라고(dead) 하는거에요. 그래서 누가 죽었냐고 했더니 제가 발견 된 장소에 살았던 그 노부부가 돌아가셨대요. 그 자식들은 살아있어서 혹시라도 저를 발견한 날에 대해서 기억을 할까 싶어서 연락을 해봤는데 그 분들이 관여하길 꺼려하신다고 해서 그 뒤로 접었어요. 그 기록도 사실인지 아닌지 알수도 없고요. 

홀트에서 정보를 더 가지고 있는데 젠이씨한테 알려주지 않는다고 믿나요?

네. 지금 이 이야기도 간추려서 말씀드린 거예요.  그것이 우리가 한국정부와 한국사회복지 서비스 그리고 홀트에 공개를 요구하는 거에요. 입양인들마다 각각 다른 두 종류의 서류가 존재하는걸 입양인들이 알았죠. 그리고 입양인인 우리가 들은 우리가 어떻게 발견됐는지 어떡하다가 입양까지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죠.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제 서류는 조작된것이고 홀트가 진짜 서류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해요. 

인권에 관한 사항이라고 생각하나요?

네. 서류 조작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기 전에도 입양이 마치 인신매매와도 같다고 말해왔어요. 돈을 지불하면 인신매매인거잖아요. 입양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그리고 인권침해이기도 하죠. 우리가 위조된 서류를 통해 보내졌고 또 물건 처럼 거래됐다는 증거가 있죠. 홀트가 해외 입양 할당량을 못채웠다고 써있는 문서를 찾았잔아요. 우리를 어떻게 홀트에서 관리하게 되었는지 그 부분이 인권침해일수도 있죠. 우리가 혹시라도 납치 됐을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생각만 해도 메스껍죠. 제가 발견됐을 당시에 저는 두살이었고 이미 말도 할줄 알았고 대소변도 가릴줄 알았대요. 제가 길을 잃어버린건지 아니면 누군가 나를 그냥 낚아챈것인지 누가 알겠어요. 

그래요. 발견됐을때 두살이었다고 하니 도데체 어떤 상황이었는지 너무 많은 의문이 생기죠. 납치 당한건지 아니면 길을 잃어버린건지 말이에요. 

카오미씨도 기억하죠? 입양인 모임에 갔을때 이런 세션이 있었어요. “친가족 찾기에 실패한” 주제로 그룹모임이 열렸는데 그때 질문중의 하나가 “가장 두려운 것은?” 이었어요. 그때는 이런 문서조작이나 위법의 가능성도 아직 수면위로 드러나지 않았을때였거든요. 그때 생각이 들기를 만약에 제 부모님이 저를 키울 형편이 안되어서, 예를 들면 제 동생이 생겼다거나 해서 저는 입양 보내고 다른 형제자매들은 계속 키웠다면이었어요(흐느낌).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것같아요. 왜 나를 보낸 것인지 왜 나를 계속 키우기로 결정 안한것인지 왜 나였는지 하는 회의말이에요. 그 후에 이런 저런 문서조작의 가능성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물론 혹시라고 내가 강제로 납치를 당했거나 불법적으로 거래되거나 했다면 그것또한 정말 끔찍한 일이겠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울 사실은 저만 입양보내고 다른 자식들은 키웠다는 가정이에요. 그래서 내심 진실을 알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어요. 

이 친가족을 찾는 과정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너무 부담이 크죠. 굉장히 심난하고 해도해도 끝이 없는 텅빈 구멍을 채우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나 자신의 출신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한 다는 사실이요. 막막하고 부질없는 노력 같기도 하고 사람들이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 것도요. 그 사람들이 정부관료일수도 있고 입양기관쪽 사람일수도 있고요. 일을 진행하기가 진짜 너무 힘들죠. 

주변사람들한테도 이제 가족찾는것은 그만 하겠다고 말했어요. 여기 저기 정보를 남겨 두었고 뉴스에도 나왔었으니까요. 방송출연을 한것은 아니지만 저에 대한 기사가 나왔었거든요. 제 남편 회사가 서울 강남에도 사무실이 있는데 동료들이 제가 나온 기사를 보고 남편한테 연락해온적도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제 입양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쓴 연극에 대해 KBS와 인터뷰를 한적도 있고요. 그때 제 가족 찾기에 대해서도 인터뷰를 했으니까요. 그래서 할수 있는 일은 이제 다 한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적극적으로 찾는 일은 중단한 상태에요. 제  DNA와 일치하는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모르겠지만 그건 활률이 적고요. 지금 아무도 저를 찾고 있는 것 같지 않아보이는데 그래서 차라리 잘 된건지도 모르겠어요. 

다른 입양인들이 노력도 별로 하지 않았는데 가족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축하를 해주고 싶지만 솔직히 좀 속상하죠.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지만요. 사람들은 다 각각 사연이 다르니까요. 그렇지만 그렇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과는 별개로 속상한것은 사실이고 어쩔수 없이 받아들이는 거죠. 되면 좋고 안되어도 어쩔수 없다는 마음으로요. 그 사람들한테도 “쉬운”일은 아닐거라고 생각해요. 새 가족을 찾았다고 해서 갑자기 삶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어떨때는 일이 더 꼬이고 복잡해지기도 하잖아요. 아무튼 친가족도 함께 찾고 있으면 서로 찾는 것이 훨씬 쉬워지죠. 물론 쉬운게 진짜 쉽다는 말은 아니지만요. 그런데 지금 현재로서는 아무도 저를 찾고 있는것 같아 보이지 않고 그래서 막다른 골목에 와 있는 것 같아요. 정부에서는 개인정보 보호때문이라고 자꾸 핑계를 대잖아요. 그래서 일단 적극적으로 찾는 것은 멈췄지만 제 정보를 여기저기 남겨두었으니 누구라도 맞는 사람이 나타나길 바라는 것이 지금 제 유일한 희망이에요. 

몇 회전에 덴마크 한인입양인권리찾기모임의 피터 묄러가 나왔었잔아요. 그들의 활동으로부터 바라는 것이 있을까요?

그분들의 활동이 성공해서 우리가 우리의 정보를 열람할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우리가 입양에 까지 이르게 되었는지요. 그리고 필요하다면 관련자 처벌까지도요. 이미 많은 수의 인권침해사례가 드러나고 있잔아요. 그리고 성범죄자인것을 알고도 아이들을 입양보낸 사실도 드러나고 있죠. 너무 끔찍하죠. 제 입양부모님한테도 친아들이 있었는데 그 오빠가 저를 성추행했어요. 그 사실이 알려지자 저희둘만 집에 남아있지 못하게 되었었는데 그 뒤로 한동안 잊고 살았어요. 입양되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죠. 그 뒤로 삶이 순탄하게 뻗어나가는것 같았거든요. 그러다가 그 사실이 다시 떠올라 괴로워서 가족들한테 그 이야기를 꺼냈고 그래서 지금 입양부모하고 연을 끈고 살게 되었어요. 그러니 입양을 보낼때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확실히 따져보고 입양을 보냈어야죠. 그러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너무 화나는 일이에요. 그러니 관련자들이 꼭 책임을 졌으면 좋겠어요. 

혹시 저에 대해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아동성학대 피해자에요. 문제는 이 가족들이 아동을 성적으로 추행하고 학대한것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가족들이 어떻게 대응했냐죠. 아니면 아예 대응 자체를 안했거나요. 

저도 그부분에 있어서 고통을 겪었어요. 나중에 성인이 된 후에요. 그래서 지금 입양가족하고 절연하게 된 계기가 됐는데 성추행은 둘째 치고라도 저를 심리적으로 조종(Grooming)하려고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더 힘들었어요. 그리고 그게 더 충격이었고요. 

그루밍이라니 어떤 상황이었죠?

그럴수 밖에 없었다. 혹은 네가 먼저 원해서 한거였다 이런 식으로요. 

입양오빠가요?

네, 계속 저를  그루밍 했고 그 사실이 드러난 뒤에는 그냥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묻혀버렸어요. 아무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이상했던 것이 우리 가족이 평소에 이런 저런 사안에 대해서 대화를 많이 나누는 편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이야기는 바로 묻혀버렸어요. 그러다가 제가 나중에 그 일을 꺼냈어요. 그때 왜 그 일을 해결해주지 않았냐고, 오빠한테 뭐라고 하기나 한거냐고요. 그부분이 제일 힘들었어요. 아무도 그 일을 문제삼지 않는 것이요. 

그리고 그 뒤로 분노조절문제까지 생기게 한 문제가 있었는데 제가 미혼모인 상태로 지금 제 아들을 임신을 했어요. 그때 제 양아버지가 원래도 그리 다정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때 저를 너무 심하게 대했어요. 도움이 필요한 저를 보듬어주기는 커녕 저를 더 불안하고 불편하게 만들었죠. 감정적 학대 수준으로요. 그때 진짜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때 마침  오빠도 이혼을 하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그 오빠는 아들아이와 같이 집에 들어와서 살게 해줬어요. 저는 거의 쫓겨나다 시피 하며 집을 나와야 했고요. 제가 미혼모가 되어서 우리 가족의 치부를 온천하에 드러나게 된것 마냥 말이에요. 안팎으로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으로 보이고 싶었는데 말이죠. 오빠가 저한테 한 짓이 제가 저지른 잘못보다 더 심한 잘못인데 오빠의 죄는 은폐되고 어려울때 집에 다시 받아들여졌잔아요. 한편으로는 오빠는 친 자식이라 그랬나 싶기도 해요. 항상 오빠 편을 들었었거든요.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작용을 한것 같아요. 

그래서 제 아이의 이름을 지을때도 아이를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해주자 싶었어요. 아이의 아빠 이름이 제이슨이고 저는 제니였던지라 아이 이름도 같은 “J”가 들어간 이름을 해주고 싶어서 조든이라고 이름을 짓고 제 성인 맥칼럼을 붙여 주었는데 미들 네임으로 아버지의 미들네임인 유진Eugene을 붙여주었어요. 아버지가 그 아이에게 잘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요.  그 계획이 잘 먹혀들어가서 제 아이가 아버지가 예뻐하는 손자가 되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실때도 그 말씀을 하실 정도로요. 아이를 보호하려던 제 작전이 성공한것이었죠. 좀 서글픈 작전이긴 했지만요. 

정작 젠이씨는 필요할때 보호받지 못했었잔아요. 

그냥 알았어요. 이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요. 나는 보호받지 못하고 학대당했어도 말이에요. 그래서 아버지가 아이한테는 함부로 하지 못했어요. 그 어린 나이에도 저는 알았던 거예요. 이름이 뭐라고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을요. 아이는 본인의 미들네임을 별로라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엄청 중요한 안전장치였던 셈이에요. (흐느낌)

이런 일들이 자존감에 영향을 미쳤나요?

가끔씩은요. 의구심이라는 씨앗은 그 뿌리를 정말 빨리 내리니까요. 하지만 저는 대체로 이상하게 자신감이 넘치는 편이었어요. 

머리스타일도 안경도 독특하고 개성이 넘치는 편이잖아요. 네, 완전 자신감 넘쳐 보여요. 

네. 대체로 자신있는 편이에요. 내 능력을 알고 승부욕도 좀 있고요. 일을 한번 시작하면 제대로 해내는 편이고 잘 안된다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편이에요.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크게 성공하는 것을 보면 저도 조금 낙담하기도 하고 그러죠. 그래도 조금 의기소침해하다가 다시 시작하고요. 제가 글을 좀 잘 쓰는 편인데 글 쓰면서 많은 일들을 이겨내기도 했어요. 최근에 제 친구가 운영하는 극장에 제가 쓴 연극대본을 제출했는데 보기좋게 거절당했거든요. 말했듯이 의구심라는 씨앗은 너무 잘 자라잔아요. 그래서 아 나는 역시 안되나봐 그냥 때려 쳐야지 하고 생각했죠. 의욕도 없어지고 자신도 없어지고 하니 제가 속해 있는 입양인글쓰기 모임에서도 잘 못 쓸정도로요. 평소라면 잘은 못 써도 쉽게 써내려갔었거든요. 그러다가 최근에 두 가지 일이 일어났어요. 한국에서 발목을 다친 이후로 뭐랄까 몸이 회복해야 되는 상황이 이르니 동력이 떨어졌나봐요. 그래서 지금 조금 그런 상황이고요. 또 다른 일들도 있었고 아무튼 그런 일들이 제 글쓰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꾸준히 쓰고는 있어요. 계속 써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요 그래야 이 모든 일들을 이겨낼수 있꺼든요. 매번 출판될만한 멋진 작품을 써야 하는건 아니니까요. 그냥 그래야 되니까 계속 쓰는거죠. 

그래서 암튼 저는 꽤 스스로 자신있는 편이고 낙천적이고 항상 이상하게도 모든 일에  밑도 끝도 없이 밝았어요. 좀 이상하죠.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꽤 현실주의자이기도 해요. 되게 부정적이고 꼬였기도 하고요. 어떤땐 비관적이기도 하기도 하고요. 저한테 끔찍한 일을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사람들한테서 좋은 면을 많이 보려고 해요. 아마 제 정신건강에 그리 좋은 일은 아닐것 같같죠?(웃음) 아무튼 사람들한테 좋은 면을 본다고 해서 널 용서해, 나를 계속 학대해 그러는건 아니에요. 따질 일이 있으면 따지기도 해요. 

젠이씨가 사는 그 지역에서는 입양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쉽지 않을 거예요

맞아요. 보통 그런 아름다운 입양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제가 내는 목소리에 불편함을 표시해요. 그럼 저는 당신 사연이 완벽하든 아니든 어쨌거나 우리의 입양은 트라우마로부터 시작된거아니냐고 받아치죠. 맞잖아요. 

우리 입양인 글쓰기 모임에 속해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아주 아름다운 입양사연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무런 트라우마가 없거나 의견이 없거나 하는 것은 아니죠. 사람들이 이 글쓰기 모임을 좋아하는 이유가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라서에요. 항상 모든 이야기들이 “입양한” 사람 위주였으니까요. 입양가족들한테 상처주는 것이 두려워서 하지 못했던 그런 이야기들 말이에요. 아마 입양 가족들은 그들이 이렇게 느낀다는 것을 모를수도 있고요. 우리는 완벽한 가정이니까 하고 말이에요. 그래서 입양인들이 입양부모한테 상처를 주거나 혹은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해서 말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을 드러낼수 있는 안전한 공간인것이죠. 아무튼 제가 말하는 바가 그거에요. 각각의 입양 사연은 다 다르다는 것을요. 

한국에서도 정부나 아니면 입양단체등이 젠이씨가 입을 좀 다물어 줬으면 한다고 느끼나요?

네 그렇게 느낀적이 있어요. 제가 한국에 가서 왜 한국말을 못하냐는 질문을 받을때마다 제가 입양되었다고 안 밝혀요. 왜냐하면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거든요. 갑자기 다들 당황하고 마치 못할말이라도 한것 같은 분위기가 되죠. 왜냐하면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기 때문이에요. 제가 제 입양부모를 찾는 포스터를 만들어서 돌릴때도 사람들은 알고싶어 하지 않더라고요. 읽으려고도 하지 않고요. 네 마치 그런일은 없었다는 것처럼 행동해요.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너무 속상한데 왜냐하면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잔아요. 당신들의 역사에서 아주 큰 일이었다고요. 인종청소였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죠. 피터가 지금 밝히고 있잖아요. 인종청소의 일환이었다고요. 아마도 진짜일거에요. 일본 식민지를 겪은 것도 그렇고. 군대도 주둔했고요. 그러니 혼혈도 많았을 것이고 그런 아이들이 한국인속에 섞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겠죠. 그러니 제가 저의 출신찾기를 하려고 여기저기 묻고 다닐때 사람들이 입을 다무는 것이죠. 통제할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니까요. 그러다가 DNA기술이 등장하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죠. 갑자기 가족들을 서로 찾기 시작 했잖아요. 정부가 곧 나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금방 밝혀질 일이니까요.

갑자기 20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사회로부터 지워놓고 이 사람들이 나중에 돌아와서 어떤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자 가정을 지켜야 하고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는 둥 하고 변명을 하잖아요. 이렇게 사람들을 보내버린 그 근원이 정부인데요. 

그 부분이 제가 미국의 지인들한테 제 친가족 찾기를 설명할때 어려운 점이에요. 미국에도 가족찾는 토크쇼가 있잖아요. “내가 바로 당신의 아들입니다

“(I was your son)같은 프로그램 말이에요. 한국에서는 친부모를 찾았다고 하더라도 바로 연락해서 제가 딸이라고 혹은 아들이라고 밝히면서 자동으로 만날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개인정보보호법때문이라고 해요. 왜냐면 갑자기 친모나 친부의 삶에 영향을 줄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연락을 하기를 꺼려하죠. 그러니까 친모나 친부의 권리만 중요하고 내 권리와 감정은 아닌거죠. 내 삶은 송두리째 도둑맞았는데도 불구하고요. 

나는 그냥 왜 였는지만 알고 싶을 뿐인데 말이에요. 그리고 가족과의 재회가 항상 해피엔딩인것만은 아니잖아요. 친가족을 찾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제가 누누히 이야기 해요. 가족을 찾은 후에 더 마음 아픈 일들이 벌어질수도 있고 혹은 복잡한 상황이 생길수도 있고 또 가족을 찾았다고 해서 그동안 가졌던 모든 의문들이 해소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궁금한 것들이 더 생기기도 하고요. 그러니 가족들과 다시 만나는 것이 항상 좋은 일 많은 아니에요. 저도 그냥 왜 인지를 알고 싶어요. 어떤 일이 있었던건지요. 

입양인 대부분이 그런 이유로 가족을 찾죠.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요. 친가족과 관계를 맺는 것도 좋겠지만 그때문에 가족을 찾는 것은 아니죠. 나 라는 존재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고 싶은 거죠. 

맞아요. 제가 딱 그래요. 가족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에요. 남편도 있고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도 있어요. 재밌는 것이 아들아이는 한국인혼혈이고 며느리는 100퍼 한국인이잖아요. 그러니 제 손녀는 거의 한국인인셈이죠. 제 아빠보다 더요. 그리고 지금 제가 이렇게 한국인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잖아요. 제 인생의 다른 시기 즉 한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화제를 돌리곤 하던 그런때가 있었는데 그때 나를 알아왔던 사람들이 이제 제가 한국에도 가고 한국 요리도 하고 한국에 대한 포스팅도 하니까 “그럼, 그렇지” 이런 눈치에요. 그리고 아들 내외도 이런 저를 너무 좋아하는데 제가 제 손녀아이와 유일하게 혈연으로 연결된 조부모인거잔아요. 며느리는 입양됐고 제 남편은 제가 아들아이를 낳고나서 만났으니까요. 그러니 손녀와 피가 통하는 조부모는 저 뿐인거죠. 그리고 제가 그 아이에게 한국과의 끈이 되어 줄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요. 열심히 배워서 적용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리고 며느리 스카일라도 열심히 한국에 대해서 배우고 있고 아들아이는 이상하게도 어려서부터 항상 그래왔어요. 그래서 제가 아이들에게 해주는 음식들을 보며 제 손녀가 내 한국 할머니가 해준거야 하고 기억할 날이 오겠죠. 그렇게 우리 가족만의 전통을 새로 쌓아하는거잖아요. 저 스스로는 비록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놓쳤지만 제 아이들에게는 기회를 주고 싶어요. 

미혼모로서 가족의 지원없이 혼자 아이를 낳았을때 말이에요. 그때 한국의 엄마를 생각했나요?

네, 아주 많이요. 우리 엄마도 이런 상황이었을까?  엄마의 삶이 나에게도 대물려진걸까 하는 생각들이요. 어떤 반복되는 패턴인가 하는 생각들이요. 아주 많이 했어요. 그리고 지금 내가 싱글맘으로서 느끼는 이런 감정, 아이를 바라볼때 드는 생각들을 엄마도 느꼈을까 하고요. 그래서 그부분을 제 연극 속에서 친엄마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에 반영했어요. 내가 가졌던 고민들을 엄마도 가졌을까 궁금했거든요. 제가 아이를 막 낳을때 든 생각이 아이가 백인에 더 가깝기를 바랬어요. 아이 낳는 순간에 드는 생각치곤 참 이상하죠. 제가 살면서 겪었던 문제들을 아이는 겪지 않기를 바랬거든요. 태어난 아이 얼굴을 보니 백인에 더 가깝게보여서 안도했던 기억이 나요. 그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좀 씁쓸하지만요. 제 엄마는 한국에서 한국 아이를 낳은 거니 그 걱정은 안해도 됐었겠지만서도요. 그때 제 친엄마와 내 삶이 비슷해진다는 생각을 지울수 없었어요. 

사전에 부탁은 안했지만 혹시 젠이씨의 작품을 좀 읽어줄 수 있나요? 연극작품이나 혹시 다른 것이라도요?

연극은 다른 데서 읽었고요. 제가 지난번에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쓴 시가 있어요. 14시간이 넘는 비행시간동안 머릿속에 떠오른 내용을 저장해두었다가 나중에 옮겨 적은거에요. 뒤에 영상과 함께 낭독할수 있도록 쓴거에요. 

제목은 Yellow입니다. 

노랑  

그것은 두살의 내가 이 이국땅으로 올때 입었던, 

소매에 파란 글씨의 홀트 로고가 있던 작은 원피스.

노랑

그것은 내 입양엄마의 머리색. 

그리고 엄마가 나를 안을때 엄마 주위로 쏟아지던 따듯하던 햇살. 

나는 이제 안전하다고 느꼈고 그녀와 바로 사랑에 빠졌어. 

노랑

나를 “고양이”라고 소리치게 만든, 

나의 새 집에서 나를 반겨준 뚱뚱하던 고양이의 눈. 

그것은 내 입양부모가 처음 들은 나의 목소리였고 그들은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었대. 

노랑

그것은 아주 어린나이부터 좋아할 수도, 가깝지도,

그리고 살갑지도 않았던 내 양아버지의 수염. 

노랑

그것은 경계의 색. 오늘은 아빠가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제발 오빠와 단 둘이만 남겨지지 않기를.  

노랑

그것은 안심이 될때까지, 

자장가를 들으며 잠에 들때까지 쭉쭉 빨았던, 

내가 좋아하던 치발기의 플라스틱.

노랑 

그것은 나만 백인이 아니라고 

“봐라, 저것들 중국놈들 일본놈들 더러운 손발들”하고 

학교에서 외쳐대던 녀석들.

노랑 

낯선 장소에 들어갈때 

사람들이 친절할지 아니면 싸늘할지 몰라 졸였던 내 마음

노랑

자기도 첫날이라 너무 떨린다며 같이 앉자고 청해준 

내 첫 친한 친구를 만난 그 스쿨버스

노랑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내 차를 몰았을 때 

내 얼굴로 내리쬐던 햇살과 내 머리카락 사이로 지나가던 바람. 

우린 볼륨을 높이고 모든 걱정이 사라진 듯 

가슴이 터지도록 소리를 질렀지.

노랑 

‘드디어 동양여자하고 해본다’라는 듯 

내 위로 나를 짓누르던 남자들의 가쁜 숨결

노랑

그것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내 이름을 물었을 때 네가 몰던 차

노랑 

우리가 부푼 가슴을 안고 처음으로 함께 등산을 했을때 

발 밑에서 부스러지던 나뭇잎의 색

난 우리가 함께 할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어.

노랑

평생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할 때 우리 손을 예쁘게 장식했던 금반지

노랑

우리의 사내아이를 감쌌던 포대기. 

그 아이는 

마치 우리를 다 안다는 듯이 그리고 믿는 다는 듯이 우리를 올려다봤고 

내 마음은 

내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사랑으로 가득찼어. 

노랑

반딧불과 수만개의 생일 촛불들, 자전거들과 캠핑 

그리고 

노랑

그것은 네가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던 날 네 목에 둘렀던 졸업가운

노랑

우리가 다시 찾은 그 나라에서 

네가 지금의 네 부인에게 프로포즈 했을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

감추고 싶었던 나와는 달리 넌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했지 

지금은 너와 함께 나도 자랑스러워.

노랑 

판테믹으로 못 할줄로만 알았던 네 결혼식 때 네 가슴에 꽂아 주었던 부케. 

노랑 

미국으로 올 때 내가 입었던 원피스, 

더 이상 버려지고 발견되고 보내버려진 아이가 입었던 치욕의 원피스가 아니지.  

소매에 파란 글씨의 홀트 로고가 있는 노란 원피스

지금은 너의 며느리와 너의 손녀 자스민 나리가 입는 원피스.

청취자들이 젠이씨에게 연락하고 싶으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요?

페이스북에서 찾을수 있어요. 제가 페이스북 조상님 수준이에요. 아직 아무도 페이스북을 모를때 시작했거든요. 페이스북이 제일 쉬울 거에요. 이메일도 있긴 하지만요. 제 이름을 검색하시면 되는데 예전에 “Princes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페북에서 정책을 바꿔서 모두 실명으로 전환해야 했을때 제 Zhen E Remmelsberg로 계정을 다시 만들었어요. 그때 화가 많이 났는데 페북에서 예명으로 활동하던 예술가나 예능인들도 실명을로 다 바꿔야 했거든요. Zhen E Remmelsgerg입니다. 

젠이씨 오늘 이야기 고맙습니다. 음악을 협찬해주는 제이진씨도 고맙습니다. 더 많은 음악을 듣고 싶으시면 jaejinmusic.com. 을 찾아주세요. Kimberly Kaminski 와 다른 모든 후원인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매달 이 팟캐스트가 지속되도록 도움주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이 팟캐스트를 후워하고 싶으시면patreon.com/adapted podcast 를 찾아주세요. 다음에 뵐때까지 안녕히 계셔요, 

시즌5의 마지막 에피소드: 신선영+호랑이에게 바치는 연가 

어답티트 팟캐스트 시즌5의 마지막 에피소드, 지금 시작합니다.

안녕하세요, 한인 입양인들을 위해 처음으로 생긴 팟캐스트의 호스트 카오미입니다. 이 팟캐스트에서는 지금까지 120여명을 인터뷰하며 해외한인입양인들의 경험을 담아왔습니다. 오프닝 음악을 협찬해주시는 제이진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더 듣기를 원하시면 jaejinmusic.com을 찾아주세요.

“ 우리의 건강과 행복을 결정하는데 핵심적인 가족관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는 것이 제일 힘들죠”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시인이자 대학 교수인 신선영을 만나봅니다. 가장 최근에 출간된 시집“The Wet Hex(역자 가제 : 젖은 주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유령같은 존재로서의 입양인, 입양인으로서 문학의 세계를 넘나듬기그리고 가족 관계 안에서의 인종적 자각등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 봅니다. 

제 이름은 신선영이고 대명사로 그녀/그들을 사용합니다. 48세이고 미네아폴리스에 살고 있어요.

저희 팟캐스트에 나와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함께 이야기 나눌 일이 정말 기대됩니다.

고맙습니다.

새 책을 출간 했잖아요. 그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이번에 나온 책은 시집인데요 지난 6월 14일에 출판됐어요. 제목은 “The Wet Hex (역자 가제 : 젖은 주문)”입니다.  제 네번째 시집이고 Coffee House 출판사에서 나왔어요.

책을 써온지는 얼마나 되었죠?

25년 정도요.

주로 쓰는 내용은 입양과 관련된 그러니까 입양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경험에 대한 내용인가요?

글쎄요. 책을 하나하나 뗴어 놓고 보면 그렇게 느끼지 않을수도 있어요. 하지만 입양인이라는 사실이 내가 쓰고 관계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미쳤어요. 특히나 타국으로, 타인종간에 입양되었다는 사실이 내가 어떻게 사고하고 쓰는지, 내가 어떻게 나의 책과 나의 문학에 다가가는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가르치는 지에도 모두 영향을 주니까요.

“The Wet Hex(역자 가제 : 젖은 주문)”는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죠?

일종에 대량 멸종에 대한 프로젝트를 하다가 시작되었어요. 진화라는 관점에서 인류인 우리는 어디쯤에 있나하는 물음에서요. 진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역사의 모든 단계는 전환기잖아요. 그런 관점에서 지금의 호모사피엔스는 어떤 전환적 존재인가 하는 그런 의문에서 시작됐어요. 인종이나 국가, 기후, 종들간의 평등, 생태계, 한국문화의 여러 면들을 생각하게 되면서요. 제 양아버지가 2017년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어떤 시들은 상실에 관한 여러 면들을 다루고 있기도 하고요. 사후세계라든지 지하세계에 대한 생각들.  그런 생각들에서 시작됐어요.

입양인으로서의 우리는 어찌보면 같은 한 세대라고 생각돼요. 언젠가 닥쳐올 죽음 그리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요즘 많이 하거든요. 가족 그리고 나의 기원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는데 중년을 넘긴 입양인들이 많이 그러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이 책도 선영씨가 나이들어가는 과정인가요? 이런 주제들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하죠. 2020년에 팬데믹이 시작됐잖아요. 그때도 이 책을 쓰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 책 뒤에 있는  작가서문이 유난히 길어지게 되었죠. 팬데믹을 겪으며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우리가 얼마서 서로 긴밀하게 엮여있나, 공공보건등등을 생각하게 되었잔아요. 입양인들의 입장에서 수명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가족력이 없기 때문에 의학적으로 더 취약하죠. 예상수명이 얼마인가같은 질문에서 답할 근거가 없죠. “우리 할머니가 100살까지 사셨고 우리 엄마도 80대 치곤 굉장히 건강해” 이런게 없으니까요, 거기다가 원래의 문화나 생화습관이나 환경으로부터도 떨어져 살았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카톨릭 가정에서 자랐는데 아주 대가족이었어요. 그래서 자라면서 장례식에도 많이 참석했어요. 카톨릭에서는 죽음이 굉장히 큰 부분이니까요. 그러다가 자연스레 제 작품의 일부가 되었죠. 그리고 나이들어가며 아마 45살을 넘으면서부터인가봐요. 그때 자각을 했죠. 내가 이 사회에서 어떤 “어린 노인”의 단계에 들어서는 구나 하고요. 지금 “Z”세대들이 성인이 되었잔아요. 큰 변화죠. 그러니 우리가 벌써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세대인 거잖아요. 가장 어린 알파세대로 부터.

물론 이런것들도 다 다 임의적은 개념이죠. 한번 밀레니얼 세대가 오고 나니까 그 뒤에 바로 “Z”세대가 바로 따라오고. 뭔가 엄청난 주목을 받았잔아요. 우리 “X”세대가 줄 수 있었던, 그리고 우리가 받았던 것 혹은 우리의 역량을 넘어서는 관심을 요구하고요. 우리는 좀더 자유롭게 자라났잔아요. 우리 세대가 이제 나이가 들어가고 우리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것을 보게 되었죠. 그래서 그런 부분이 항상 제 화두에요. 항상 무엇을 뒤에 남길 것이고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를 생각하죠. 그리고 영어선생으로서 시공간을 초월한 작품들을 가르치잖아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같은 작품들이요. 2000년이 지났는데도 지금도 생생한 작품이죠.

물론 번역이 잘 되어서 그렇기도 하지만요. 전쟁, 희생, 가족들간의 비밀이나 불화, 파워, 젠더, 영역 싸움 같은 주제들은 변하지 않아요. 제 세번째 시집에 그 “안티고네”가 많이 녹아들어있어요. 남북전쟁때의 가족의 혈통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며 누군가는 파멸하는 내용이죠. 아무튼 그게 제가 기웃거리는 주제들이에요. 그리고 지금은 나이듦에 대한 주제로 많이 기울고 있어요. 제 아이들이 25살 21살이에요. 저는 꽤 어린 엄마였고 지금도 상대적으로 젊은 엄마죠. 성인이 된 아이들의.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가면서 제 엄마 역할도 계속 변하는 것도 참 재밌고요. 결론적으로 각각의 세대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해요. 특히 제가 대학에서 일을 하다보니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당면한 문제와 그들 세대의 불안은 무엇인가에 대해서요. 매년 저는 늙어가지만 제가 가르치는 그들은 같은 나이대에 있으니까요.

이 젊은 세대들의 불안에 대해 저도 아주 깊이 공감해요. 그리고 지금 초중고에 다니는 학생들에 대해서도요. 제가 아이들을 위한 책도 쓰거든요. 지난주에는 한 학교를 방문했어요. 아이들이 이렇게나 갑지고 소중한 존재들인데 이 나라는 생명을 존중하지 않아요. 아이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죠. 교사들도, 여자들도, 성소수자들도 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런 저런 폭력에 노출되어 있죠. 작가들이란 사회적으로 깊이 관여하고 여러 당면주제들을 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도 항상 이런 이슈들에 대해 쓰는 사람들이에요. 한국 작가들이나 입양인 작가들이나 재미교포작가들이나 모두요. 우리는 모두 집단적으로 트라우마, 고통, 걱정 속에 살고 있잖아요. 물론 희망적이고 재미있는 일도 일어나지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지배구조에 대해서 어떤 대안을 제시해야죠.

다른 입양관련 활동가들은 우리의 존재가 소멸되기를 바라잔아요. 없어져야 한다고요. 이것또한 같은 맥락일까요? 내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맞는.

그렇죠.  오랫동안 생각을 해봤어요. 한국인 해외입양은 없어져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입양들을 위한 활동가들, 미혼모들을 위한 활동가들, 재생산권을 위한 활동가, 가족유지 활동가들 모두 큰 변화를 만들어냈죠. 그런데 제 친척중에 같이 한국에서 입양된 사촌이 있어요. 시카고에서 같이 자란. 저보다 다섯살 정도 어린데요. 여덟살인가? 암튼  그 친구가 몇 년전에 한국에서 입양을 했어요. 세살짜리 여자아이를요. 그 아이 개인을 놓고 봤을땐 집이 생긴거죠. 그래서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고 비록 예전 같은 한인대거입양은 없어졌다고 하더라도요. 그 수준으로 다시 돌아가면 안되고요. 

기후 변화나, 이민, 추방 그리고 한국이 됐든 우크라이나가 됐든 혹은 그 다음 어느 나라가 됐든 사회 불안정을 겪는 나라들, 여성억압, 강제 이주 이런 것들이 제가 깊게 생각하는 주제들이에요. 제가 전문 활동가나 법안을 만든다거나 그럴수는 없지만 적어도 제 분야-제 수업시간이나 제가 쓰는 언어로 사람들과 소통할때 항상 그런 부분들을 인식하고 자료를 나누고 다른 사람들이 이뤄놓은 자료들을 나누려고 해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고 우리는 어디에 있고 어디에서 왔고 미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등에 대해서요. 우리가 입양인으로서 하는 이런 모든 일들도 이 사회의 다양한 담론들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임신중절권이든 임시보호가 됐든 혹은 사회복지, 시민권등의 모든 부분에요.

쓰는 내용이 어떻게 변해왔나요?

그 질문을 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변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어요. 책을 한권씩 낼때마다 다루는 것이 다르긴 하지만 제가 주로 천착하는 주제가 있거든요. 지난번에 나온 시집에서는 환대의 정치학과 손님됨에 대해서 다뤘어요. 손님과 주인이라는 언어와 그 관계가 흥미로웠거든요. 지금은 조금 더 환경적으로 생태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쓰려고 노력해요. 생태시인이라고 하든가요? 기후와 종의 생존등에 관한것들요. 그런쪽으로 제 주제가 변해왔다고도 할수 있겠네요. 하지만 제가 쭉 해오고 있는 것들은 특히 시쪽으로는 제가 원자료수집(역자 주-SOURCE DOCUMENTS)에 관심이 있어요.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다른 사람들이 한 말 – 그게 프로파간다가 됐든 다른 작가들이 쓴 말이든 – 샘플링하고 모아붙이고 하는 작업을 해요. 일종의 업사이클링이죠. 그게 제가 계속 해오고 있는 작업들이에요.  전설이나 동화에도 관심이 있고요.

이번 책에는 한국을 많이 언급 했잖아요. DMZ라던지 휴전선이라던지, 고아라던지, 조금 더 개인적인 경험이 녹아들어있나요?

네. 이번엔 더 내 이야기 같아요. 내 개인의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느끼기도 하고요. 한국에 다섯번 갔었고 그 중에 두번 DMZ에 갔었어요. 제 모든 책들은 디아스포라 (주:이산, 원래의 거주지를 떠나 삶)로서 이곳의 삶과 그곳의 삶 사이의 차이를 붙들고 씨름하는 거에요. 한국과 미국의 관계도 아시아 지역의 정치적 변동과 함께 발전하고 있는 것도 나와 아주 관련이 깊다고 느껴져요. Books and BOBA 팟캐스트에서 한국인 소설가 조셉 하가 나와서 그의 데뷔 소설 “Nuclear Family(역자 가제 – 핵가족) 에 대해서 말하는것을 들었어요. 저도 한 권 구입했어요 . 그래서 이 현재 진형형인 상실과 슬픔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죠. 전쟁이 끝난지 70년이나 되었는데도 갈라지고 떨어져 살아야 되는 사람들말이에요. 엄밀히 따지면 한국은 아직  전쟁중이니까요. 아직도 이산가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고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많이 돌아가셨고 혹은 다들 사실 날이 얼마 안 남았고요. 굉장히 슬픈 일이죠.

입양인으로서 모국과 다시 이어지는데 굉장한 노력이 들어요. 기회비용이랄까요. 한국에 가기 위해서 많은 비용이 들고 역사를 공부하는 것들이요. 그걸 다른 내적 성장에 썼다면 – 테라피 같은 거요. 물론 테라피도 많이 받기도 했고요(웃음). 아무튼 평생을 가는 작업이에요. 또 제 아이들이 닻없이 표류하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무언가를 물려주고 싶기도 해요. 비록 한국에 다른 가족들이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굉장히 훌륭한 질문이었어요. 네. 개인적인 이야기맞아요.  비록 제 매일의 생활이나 어린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그것들이 재미없거나 중요하지 않았어서라기 보다는 한인입양인으로서의 저의 경험은 뭐랄까 조금더 집단적인 경험 같아요.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하잖아요. 백인우월주의라던가, 가족들간에 신념체계라던가, 입양 그리고 미국인으로 흡수, 동화되는 과정등 말이에요. 그래서 그래서 저의 개인의 경험이 시 안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는 않아요. 감추려고 하거나 그런건 아니고요. 저는 다 보여주는 사람이거든요.

시를 읽어줄 수 있을까요?

그럴까요? 제 친구 Sue Hwang을 위해서 쓴시인데 그 중에서 조금 읽어볼게요. 그  친구는 여덟살때 가족과 함께 이민온 한국계 미국인이에요. 몇 년전에 그 친구가 첫 책 “Bodega(역자 가제:잡화점)”를 냈을때 그 친구가 우리에게 여럿이 같이 책을 읽고 모두 “Bodega”라는 제목으로 시를 써달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그때 Bodega라는 제목으로 썼다가 나중에 “Behind This Door is a Siberian Tiger(역자 가제 : 문밖에 시베리아 호랑이가 있어)”라고 다시 제목을 붙였어요.

호랑이 해에 태어난 아이

사과를 쪼갤 운명의 아이

성냥첩을 모으고

들판에 서서 불의 언어를 하네.

시인은 해를 시샘하게 만들어.

마법을 부리 도록.

작아도록.

빈 통나무 속으로 숨어들 도록.

발톱을 무디게 만들 도록.

그 발톱은 지난 달의 달빛을 비춰

빛에 대해 말해볼까?

네 엄마는 그걸 어떻게 발음하지?

아빠는 어떻게 묻어버리지?

오빠는 어떻게 그걸 담보로 잡히지?

신이 약속한

모든 것을 걸면서.

어떤 내용이죠?

돌려표현하고 있는데요. 지금 DMZ가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자연 그대로의 땅이 되었잖아요. 지난 70년 동안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일본군의 강제 점령과 제국주의 합병이전까지 한반도 전역에 호랑이가 있었는데 지금 다 사라졌죠. 시베리아 호랑이와 UMER 호랑이 모두 이제는 자연속에서는 찾아볼수가 없죠. 그리고 제가 호랑이 해에 태어났어요. 산호랑이의 해에요. 그래서 제가 호랑이에 집착하는 것일수도 있고요. 그리고 “Lady or the Tiger? (역자 주-여주인인가 호랑이 인가?)” 라는 단편하고도 관련이 조금 있고요. 80-90년대에 미국에서 자랐다면 학교에서 많이 읽었을 거예요. 선택과 그 미지의 결과에 관한 이야기이죠. 문 뒤에 있는 것이 위험인지 보물인지 알지 못하는.

그리고 하나의 중요한 모티브는 복권추첨이에요. 고아들과 입양인들이 알지 못하는 가족들한테 보내진다는 것이 말이에요. 아이들을 다른 아이로 바꿔치기 했던 것과 같은 입양과정에서의 부조리들 말이에요. 입양부모한테는 이 아이를 데려갈 것이라고 해 놓고 그 아이가 죽거나 친부모가 나타나거나 하면 다른 아이를 보낸다거나 했던 것 같은거요. Deann Borshay Liem의 “In the Matter of Chan Jung Hee”(주-”차정희에 관하여”)라는 영화에서와 같이요. 입양기관에서 이름을 “차정희”라고 하라고 시켰다고 하잔아요. 뭐라고 이름붙이기도 난해한 그런 문제죠. 독자에 따라서는 그리 심각한 문제라고 느껴지지 않을수도 있고요.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의 생존에 대한 연가이죠. 생존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가 하는 물음이기도 하고. 여기서 호랑이는 인간에 의해 그 존재가 위협받고 있는 모든 존재들을 나타내는 거죠.

입양인들이 처한 위험과 우리를 향한 폭력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요. 물론 그 정도의 차이가 어마어마하지만 모든 입양인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버려지고 포기되었다는 면에서요. 그리고 이 미국이라는 인종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나라, 외국인을 원하지 않는 나라에 보내졌죠. 지난 트럼프 정부때 이걸 썼어요. 외국인 혐오, 속함belong, 등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요. 그렇다고 제발 우리를 받아주세요 우리는 여기 사람이에요 그런 뜻은 아이네요. 우리가 원래 살았던 땅도 아니고 착취한 땅이잔아요. 저도 어떻게 보면 점령하러 온 사람에 속하죠. 물론 내가 원해서 오게 된건 아니지만요. 이런 것들이 그 시를 쓸때 아니 모든 시를 쓸때 항상 생각하는 것들이죠. 한국에서 온 소녀라는 존재가 겪는 감정적 부침같은 것들이요.

제가 너무 넘겨짚는 것일수도 있지만 작품속에 폭력이 많이 보여요. 맞나요?

정말 그래요. 제 모든 작품들이 폭력에 관한 것이에요. 제 전집과 아이들을 위한 책들이 모두 마찬가지로 폭력에 반응하는 각각 다른 모습들을 다루고 있어요. 인권침해 혹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와는 달리 설명되는 문제들, 우리가 어떤 이념적 싸움에서 하나의 볼모나 담보로 사용되는 것과 같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에요. 제 개인적으로 보자면 제 양아버지가 아주 화가 많은 사람이었어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저도 화가 많아요. 만약에 우리가 여자이고 내가 먼저 화를 내지 않으면 평생을 뇌사상태 처럼 살아가야 하잖아요. 여자들은 화가 나 있고  아시안 여자들은 화가 나 있다 라는 것은 이제 말 하면 입아프죠. 물론 우리는 다 각각 다른 개인들이지만요.

이 세상이 너무 한심해요. 세상에 폭력이 너무 만연해요. 나이를 불문하고 여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어디에나 있죠. 어디든 안전하지 않아요. 성감별임신중절로 인해 세상을 태어나지 못한 여자아기들에 대해서도 생각을 끊임없이 해요. 남아선호사상때문에 성별의 불균형이 있는 곳들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화가 나요. 너무 속상하고요. 그래서 최대한 큰 목소리를 내려고 해요.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에게든 아닌 사람들에게든요. 세상엔 폭력이 너무 만연하고 그게 제가 세상을 보는 렌즈에요. 물론 기적도 많지만요.

참 멋진 사람들도 많지요. 아름다움 사랑 보살핌도 많고요. 저는 이상주의자이기도 하지만 작가로서 혹은 공공의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이 사회를 비판하는 일이 제가 할일이라고 생각해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폭력을 폭력이라고 부르는 일이요. 이 사회가 이젠 너무 당연시 하고 체념해버린것 같기도 하지만요. 그래서 문학을 파는 이유도 그거 같아요. 그게 제가 쓰는 주제이요 특히 시를 쓸때는요.

책 감수도 했었죠

네. “진실 마주할 시간 : 미네소타의 인종에 관하여(역자 가제, 원제 – A Good Time For The Truth: Race In Minnesota)”란 책이요

미국내에서 가장 백인비율이 높은 곳중에 하나잖아요. 그런 곳에서 자라는 건 어땠나요?

전 실은 일리노이에서 자랐어요. 미네소타가 아니고요. 그래서 제가 처음에 미네소타에 왔을때 제 작업에 큰 화두가 되어줬죠. 보스톤 대학으로 진학을 했다가 세인트폴에 있는 맥갈리스터 컬리지로 편입을 했어요. 그래서 그때 처음 세인트폴에 왔을때 그때 아주 큰 문화충격을 받았어죠. 그때 첫 날 도착해서 당시 남자친구하고 주변을 돌아보는데 미네소타가 처음이었거든요. 교회랑 주류삽이 왜 이렇게 많지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참 이상했죠. 그리고 주변이 온통 백인들 뿐이었어요. 백인세상이었죠.

그리고 바로 적응을 하면서 보니 티비 뉴스에 나오는 사람도 모두 백인, 라디오에 나오는 사람도 백인, 의회도 백인, 그 어떤 관공서도 다 백인, 학교 교장들도 백인, 교수들도 백인.. 끝도 없죠. 1992년 가을의 이야기이니까요. 제가 처음 여기 왔을때가요. 그대 90년대에는 90%이상이 백인인 주 였어요. 지금은 84%가 백인인 주이고요. 물론 트윈시티 (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와 세인트폴)주변은 그때도 상당히 더 갈색(역자 주- 서남 아시아 인을 비롯한  다양한 인종)이었지만요.  50년 전 이야기에요. 그런데 단지 백인이 많아서 그랬던건 아니에요. 저도 백인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주변 환경은 좀더 다문화였거든요. 다양한 인종이 모여사는 도시근처에서 자랐으니까요. 그런데 미네소타에서는 인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금기시되는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첫날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여기 오기전부터 이미 전 내가 유색인종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인종주의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페미니즘적으로 사고하고 있었고요. 그 모든것이 중고등학교때부터 시작됐었죠. 페미니즘까지는 아니었더라도 인종과 지역에 대해서, 이 나라에서 한인 입양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비백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특히 이미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뭘 의미하나 이런 문제들에 대한 고민을 벌써 하고 있었는데. 미네소타에 오니 뭐랄까 불모지에 온 것같은 기분이었어요. 여기는 주된 정서가 인종차별 같은거는 말을 꺼내지 않는 분위기였죠. “여러 인종들이 모여 살게 됐으니 인종차별도 없어졌고 이제 모두 똑같이 취급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그런 수준이었죠.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요.

그러다가 20년이나 머물게 되었네요.

30년이 거의 다 되가요. 이번 가을이면요. 아직도 좀 힘들어요. 제가 집순이라서 겨울스포츠를 안좋아하거든요. 겨울 너무 싫어하는데. 겨울이 너무 길죠. (웃음) 제가 오랫동안 몸담을 수 있는 모임이 있는 것에 감사해요. 제가 처음 시작했을 때는 많이 없었는데 지금은 유색인 작가모임이 인원이 많아요. 탄탄한 모임 같아요. 서로 많이 지지해주고요. 이 범아시안모임에 참 감사한 것이 그냥 중국인 모임만 있고 한국인 모임만 하는것이 아니에요. 물론 나라들 고유의 개성이나 문화들은 있지만요.

그래서 항상 다른 그룹들 다른 이웃나라 그룹들에도 최대한 많이 참여하고 맡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하려고 해요. 너무 미화하는것은 아니지만 이 예술 영역에서 유색인종작가들은 서로 정말 많이 도와요. 적어도 제가 아는 사람들은요.  서로 치켜 세워주고 같이 만들어나가죠. 경쟁한거나 영역싸움 이런거 없이요. 특히나 시쪽에서는 어짜피 돈이 안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냥 좋아서 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니면 다른걸 못해서 하기도 하고 아니면 안할 수가 없어서 하는 경우도 있고요. 특히나 시의 경우에는 사랑해서 하는 노동이죠. 구술이 가능한 예술이기때문에 사람들을 모을수 있고 접근하기도 쉽고요

시를 쓸때 돈이 드는 것이 아니잖아요. 때로는 펜도 필요없을때도 있어요. 그냥 말로 해도 되니까요. 그래서 제가 계속 이 쪽에 몸담고 있게 되는것 같아요. 예술 속에서의 교류,  영감같은거요. 제 생각엔 전 미국에서 우리 모임이 제일 잘 되는것 같아요. 동부나 서부쪽 사람들말을 들어봐도요. 일단 물가가 비싸니까 생활하기가 힘들고 그러니 모임이 여기 같을수가 없죠.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힘들고요. 그러니 세분화도 많이 되어있고요. 그냥 제 생각일수도 있죠.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의견이 있겠지만요.

지금의 유색인종작가들을 보면 많은 경우에 이민 이주과정에서 가족들이 겪은 외상, 부모세대와의 단절등이 주요 소재잖아요.  그런면에서 한인입양인작가들이 다른 이민작가들과 연대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까요?

굉장히 훌륭한 질문이에요. 물론 그래요. 이렇게 왕성 했던 적이 없어요. 입양인 작가들은 미국에서 성장한 1.5세 작가들하고 함께 공유하는 것이 많죠. 두개 혹은 세개의 문화속에서 자란 사람들이잔아요. 그런데 제 주변에 한인1.5세 작가들을 보면 그들 각각 자기 삶에 녹아든 고유의 문화는 있겠지만 한인1세 부모들로부터 지난 이야기나 고생한 이야기 혹은 조상들이 어떤 일을 겪었나 혹은 한국의 역사를 듣고 자란것은 아니더라고요. 1.5세들이 한국어를 못하는 경우도 많고요.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 한국어를 포기한 경우도 많고요.

미국인처럼 보였으면 해서요?

네. 그래서 마치 벤다이어그램 같은 모양이 되는것같아요. 겹치는 부분도 많으나 다른 부분도 큰. 지금까지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일반적으로 한인 입양인 작가들을 많이 포용해주는듯 해요. 그런데 소설쪽으로 가면 좀 다르다고 느껴요. 시쪽은 아무래도 이야기가 좀 덜하다보니까요. 제가 그런 서사시쪽을 안 쓰기도 하고요. 아무튼 소설이나 회고록쪽에서는 좀 이야기가 다른것 같아요. 다만 유색인종으로서 매일의 삶에서 방황하는 모습에서는 공통점이 더 크다고 봐야죠. 

게이트키핑(역자 주 – 결정권자가 보도 할 만한 이슈를 취사선택하는 함.)으로 인해 다 같이 힘들어하니 다 같이 맞서야 하는것도 많고요. 그러니 각각의 분야에 대한 개성은 존중하지만 조직을 너무 나눌 필요는 없다고 봐요. 우리의 경험이 모두 같다고는 말할 수 없죠. 그렇다고 하더라고 외로울 수도 있죠. 제 주변에 입양인들중에서도 그속에서 자란 사람들도 있어요. 같은 아시안들 사이에서 자랐어도 끼지 못한다고 느끼거나 외부자라고 느낄수도 있는거고요. 아쿠는 네가 어디서 자랏고 성인이 되었을때 어디에서 살아가는가에 달려있는것 같아요. 다른점이 분명히 있어요.

다른 한인작가들 사이에서 존재를 인정받는것 같나요?

잘 모르겠어요. 그런것 같기도 하고. 소설이랑 회고록분야는 아무래도 배경이나 스토리면에서 다루는 이야기의 범위가 넓잔아요. 살도 많이 붙고. 장르의 차이겠죠.

문학쪽을 잘 모른는 사람들을 위해서 설명을 더 해주실래요? 소설쪽이 왜 더 힘든건가요? 우리의 경험이 우리가 자란 백인 세상으로부터 만들어진거라서?

제가 한인 작가들이나 혹은 다른 유색인종 작가들 특히 제 나이 또래나 조금 더 나이든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같은 문화권에서 온 멘토같은 동료나 선배들을 찾기 힘들어요. 그것도 힘들고 은근히 자기 뜻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도 힘들고요. 지금도 많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죠. 지금 제가 가르치는 젊은 세대 작가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도 똑같대요. 장르에 관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보면 소설의 경우에 입양인 캐릭터가 비입양인과 상대를 할수도 있고 여러명의 입양인 캐릭터가 그냥 한인캐릭터 혹은 그냥 다른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들어 낼수도 있고요. 그래서 마치 포켓볼처럼 서로 주거니받거니 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서로 어떻게 감정적으로 영향을 주는지도 그릴수도 있고 시공간내에서 스토리라인을 그려낼수가 있잔아요. 그런데 제가 쓰는 시는 등장인물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어떤 시공간을 따라서 등장인물들이 연관되어서 움직이는 그런 세상이 아니죠. 어떤 존재에 관한 한 상황에서 조금더 감정적인 경험에 대한 거고 이미지나 느낌에 대한 거죠. 일시적인 상황일 수도 있고요. 혹은 언어 자체에 관한것일수도 있죠. 그래서 쓰는 시에 따라서 품이 더 들어갈수도 있고요.

그래서 조금 더 표현주의적이 될 수도 있고  인상파처럼 보여줄 수도 있고요 뚝뚝 끈기기도 하고요. 일부러 어지럽게 만들기도 하고요. 물론 소설에서도 가능하죠. 저는 장르간에 차이가 있다는 말을 별로 믿지 않는 편이에요. 물론 전문정을 획득하는 과정은 또 다른 이야기이지만요. 어떤 전문가의 영역에 들어가면 어떤 다른점들이 분명히 있지요. 지난 백년동안 미국내 아시안작가들이 쓴 소설을 보면 이민이야와 부모와 자식  세대간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가 주죠. 특히 성장소설 등을 보면요.  우리는 그곳에 못들어가죠.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우리는 한국가족을 접할 기회가 없었잔아요. 우리가 가족과 같이 오지 않았기도 하고 그들의 손에 큰것도 아니고 떨어져 자랐잔아요.

그런 면에서 좀 소외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입양인으로서의 내 이야기가 담겨있는 소설을 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쓰려고요. 십대들을 위한 소설을 쓰고는 싶은데 아직은 잠정적이에요. 인간복제에 대한 이야기인데 거기에 입양도 들어가 있고요. 하지만 입양인의 삶이 어떤가 그런 이야기는 또 아니고요.  입양인들의 회고록들이 참 좋고 그  중에 굉장한 작품들도 있어요.

입양인이라는 경험이 이 모든 창의력이나 상상력을 배가시켜주는것 같아요. 우리는 뭐랄까 유령과 함께 살고 있잖아요. 우리 주변을 유령이 배회하는 것 같달까요?  혹시 선영씨도 비슷하게 느끼나요? 우리의 삶 안에 유령이 있다고?

고마워요. 그 이야기를 꺼내주어서. 맞아요. 한국인들은 어떻게 보면 20세기 내내 진행된 전쟁과 그 상흔으로 고통에 시달리며 살고 있죠. 입양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미네소타 주립 대학의  Dr. Pauline Boss의 표현대로 애매한 상실(역자 주-Ambiguous loss)에요. 애매한 상실인 이유가 끝도 없고 실체도 없으니까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실체도 없고 어떤 경우엔 전해지는 이야기도 없잔아요. 예를 들어 전쟁중에 실종되어 유해도 찾을 수 없는 친적이라던가 납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가족들처럼 실체도 없고 정황도 없어요.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요.

관계라는 것이 우리 인류라는 종족의 전부나 마찬가지인데 우리의 건강과 행복을 결정하는데 핵심적인 가족관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는 것이 제일 힘들죠. 우리의 행복,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개념, 나 자신에 대한 의식도 마찬가지로 필수적이고요. 그런데 그건 양방향인이기도 해요. 우리의 존재가 비밀 존재일때가 많잖아요.그게 평생 친부모한테 고통을 주죠. 그러면 그것이 우리의 형제자매들한테 영향을 끼치겠죠. 그들이 우리에 대해 알던 알지 못하던요. 비밀이라는것이 그 비밀을 쥐고 있는 사람 주변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니까요. 그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한테도요. 그러니까 뭔가 있어요. 어쩌면 이중의 유령과도 같은 존재죠. 우리가 귀신한테 홀림과 동시에 우리 자체가 살아있는 유령이 되어 친부모가 됐든 우리의 존재를 아는 조부모가 됐든 우리가 유령이 되어 그들의 삶을 홀리고 있죠. 그리고 우리 입양인의 존재가 한국을 흔들고 있잖아요. 몸을 놓고 벌어지는 한국의 정치 상황이나 고아 수출등에 관해서요. 정치적으로나 시민사회에서 귀속될 권리를 빼앗긴 사람으로서 말이에요. 

그래서 이 유령의 비유가 적절한것 같아요. Avery Gordon 의 “Ghostly Matters: Hunting and the Sociological Imagination(역자 가제 – 유령에 관한 :  유령에 들림과 사회적 상상)”을 추천하고 싶어요. 미국의 백인 인류학자에요. 또 Grace Cho의 첫 책 “Hunting the Korean Diaspora(역자 가제 : 한인 이주 뒤흔들기”와 최근 책인 “Taste like War”(역자 가제 : 전쟁의 맛) 를 추천하고 싶어요. 이 책들이 제가 “Hunting(역자 주- 유령들림) 에 대해서 파고들 때 항상 보게 되는 책이에요. Grace Cho는 인류학자라서 항상 광범위하게 조사해보죠. 입양인은 아니고 한국인 엄마 백인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우리가 외국에 오래 살다가 돌아오면 신용유령이라고 한다고 들었어요. 신용을 쌓을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병원에서도 마찬가지에요. 가족력을 모르니까 의료기록에 있어서는 유령이나 마찬가지죠.

“Invisible Asians(역자 가제 : 보이지 않는 아시안들)”이라는 Dr. Kim Park Nelson의 책이 있어요. 일인 식민지(역자 주 – Colony of One)” 라는 개념을 그가 명명했거나 아니면 다른 학자가 고안한 개념을 썼던가 할거에요. 그 제목이 참 와 닿더라고요. 책이 나온지는 꽤 됐을거에요. 우리 입양인들은 너무 고립되어 있고 자라면서도 다른 입양인들이나 다른 한국인 모임이나 한국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분리되어 살았기 때문에 그 1인식민지라는 개념이 우리가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실존적 존재였는지를 보여주죠. 그래서 제가 어디가서 강연을 하거나 할 기회가 생기면 입양이라는 것이 왜 어떤 실존적 상황인지 그냥 단순히 집이 생기고 가족이 생기고 먹을 것이 생겨서 좋은 것이 아니라는 걸 설명하려고 해요. 가족이 생기고 음식이 생기고 집이 다시 생겼어도 학대받고 그러잖아요.

작품을 한 편 더 읽어줄 수 있나요?

그럼요. 이건 더 입양에 관한 것인데 아주 짧아요. 제목은 “Our Country Laundered Us (역자 가제 : 내 나라가 나를 세탁해버렸다. )”에요. 고아세탁이라고 아 이름이 생각이 안나는데 중년이 되니 이러네요. David Smolan이 명명한 개념일거에요. 그도 한인 입양인의 부모인데 법학과 교수인가 그렇죠.

내 나라가우리를 세탁해버렸다.

그것도 종이 위에.

숲도, 빵 부스러기도, 조약돌도

계모도, 아빠도, 죽은 엄마도

빗자루도, 새 장도, 설탕도

파리도, 혓바닥도

기지촌 여자들도.

계속되는 세탁소리.

술집들과 기지촌도,

얼룩말도, 낙타도, 양도,

여물통도.

신과 그의 천사들도, 악마도,

출생도, 사건도.

하얀 빛도, 열기도, 욕설도, 화염도.

한밤중의 희생적 비행

마침내 깨끗해졌다.

굉장히 시적이고 상징적이에요.

고마워요. 이건 뭐랄까 헨젤과 그레텔 같은 이야기에요. 예수와 마리아 같은 시일수도 있고요. 제 어린시절로 부터 떠오르는 원형같은 이미지죠. 이런 원형의 가족같은 이미지가 계속 떠올라요. 왜냐하면 버려진 아이들의 이미지가 항상 가슴속에 있거든요.

미국가족들이 작품속에 등장하기도 하나요?

그런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이름을 쓰고 하진 않지만요. 하지만 항상 존재하죠. 오빠가 있는데 오빠도 입양됐거든요. 그런데 오빠는 미국내 같은 백인간에 그것도 가까운 지역에서 입양됐어요. 친부모가 아마 아직 결혼전이었던가 그래서였을거에요. 그런데 그건 부차적인 이야기이고요. 아무튼 그래서 다른  입양인과 함께 자라기는 했지만 그와 나는 다른 인종이기때문에 그에 따른 각각 다른 경험을 했고 그것이 가족간의 친밀감을 쌓는데 다른 역할을 했겠죠. 그래서 그런 것들에 대해 항상 생각을 하죠. 그리고 그에게 지금 아이들도 있거든요. 그래서 백인 입양인의 백인 자녀들은 또 어떻게 자라날까 하는것도 그 다음으로 생각해볼 주제고요

제 아이들의 경우에는 부모가 둘다 입양인인 혼혈아이들이죠. 애들 아빠도 입양인인데 그의 경우엔 가족 내 입양이었어요.  얼마전에 Ancestry.com을 통해서 멕시코에 있는 친부와 할머니를 찾았어요. 항상 이 핵가족에 대해서 생각해요. 마음속에 항상 어떤 인형의 집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극장 같은 집이요. 한 곳에는 내 입양가족이 있고 한쪽에는 한국의 가족이 있어요. 그리고 아버지하고는 거의 10년간 연을 끊고 살다가 연로해지시고 사실 날이 얼마 안남게 되었을 때 다시 화해했어요. 아버지가 반이민자 슬로건 같은 것에 빠지셔서 대학때부터 연을 끊었거든요. 도무지 관계를 이어가는것이 불가능했었죠. 나도 그런것을 듣고 그냥 넘겨버릴 수가 없었고 서로 한치의 양보도 안했죠. 그런데 그 뒤로 조금 유해지시기도 했고 병세도 악화되고 그래서 그냥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더라고요. 부모님은 제가 대학때 이혼하셔서 그때부터 따로 사셨고요. 엄마는 아직도 건강하세요

78세이신데 일리노이주 시골에 사시고요.  제 입장에서 말하자면 엄마랑 가깝다고는 할수 없을것 같네요. 사이는 좋은 편이고요. 깊은 이야기까지 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지만요. 제 책도 읽으신적도 없어요. 책 읽는 스타일이 아니셔서요. 사는 이야기 서루 공유하고 아이들도 보여드리고 그런정도요. 그러니 이 정도면 좋은 사이라고 할수 있겠죠. 하지만 입양인으로서 항상 부모로부터 멀게 느껴졌었어요. 오빠랑도 잘 지내고요. 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더 가까워진것 같아요.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요. 우리가 같이 자랐다는 것이 고맙고 우리가 어린시절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이 아주 다르기는 하지만 같이 자란 형제자매가 있다는 사실이 고맙고요. 그리고 엄청 싸웠어요. 그래서 회복력이나 끈기 같은것을 기를 수 있었죠. (웃음)

입양인들과 이렇게 계속 연결되는 것이 우연일까요?

아니죠. 분명히 이 세계에 갇혀 있어요. 아이들 아빠와 이혼 이후에 만났던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임시보호 경험이 있거나 입양되기를 기다렸었거나 혹은 입양인이거나 아니면 부모가 입양인인 사람들이었어요. 제가 일부러 그렇게 찾아다닌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보면 입양인의 경험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사람하고는 가까워질 수가 없으니까요. 꼭 한인입양인일 필요는 없고요. 하지만 입양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죠. 그래서 일부러 계획을 하고 의식을 하는건 아니지만 항상 그렇게 됐어요. 아이들 아빠조차도요.

그런 사람들에게 끌리는 군요.

(웃음) 맞아요. 꼭 상처에 끌리는 것같아요. 그렇게 건강한것 같지는 않죠? 확실한 건 어떤 식으로든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한테 끌린다는 거에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우리중의 많은 수가 인종차별주의자속에서 자랐다고 했잔아요. 자기가 인종차별주의자인지도 모르는 양부모들 말이죠. 그것이 아이들을 키우는데 어떤 영향을 주는 것 같나요? 지금 성인이 다 됐잔아요. 그래서 아이들을 키우는데 있어서 조금더 의식적으로 인종차별적인 요소를 없애려고 노력하나요?

물론이죠. 제 애들은 몸만 성인인 아이들이에요. 딸아이는 아직 대학생이고 아들아이는 직장생활을 하긴 하지만 아직 애들이죠. Z세대 중에서 좀 나이든 쪽이라고 할까요? 모두 상당히 긴 어린시절을 보냈죠. 사회가 변했으니까요. 제 부모님은 그래도 다른 미네소타의 친구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본바에 의하면 상당히 괜찮은 분들이셨던것 같아요. 시카고주변에서 자랐기 때문에 인종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는것 자체가 금기시되고 그러진 않았거든요. 아예 심한 인종차별주의자이거나 아니면 다른인종과 친구이거나 그랬죠. 서로 다른 인종 간에 친구가 될수 있었어요. 왜냐하면 시카고 자체도 꽤 인종분리가 심한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유색인종이 아주 많았고 그래서 일터에서 같이 일하거나 이웃이 되거나 다양한 음식을 접하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에요.

제 부모님은 저를 같은 백인으로 취급하거나 하지는 않으셨어요.  특히 미네소타로 입양된 저와 같은 또래들과는 달리 말이죠. 저희 부모님은 제가 한국인이지만 미국 시민이기도 하다는걸 항상 강조하셨죠. “People of color(역자 주-유색인종)”이라는 말을 쓰거나 하지도 않으셨어요. 저를 백인만의 특정한 문화나 행동양식등에 맞추려고 하지는 않으셨죠. 어떤 이념을 추종한다거나 하지 않으셨어요. 복음주의 신도들처럼 저를 어떤 백인구원자적인 시각으로 보거나 하지도 않으셨죠. 다른 입양인들이 겪은 것처럼 말이에요. 어려서부터 인종이라는 것에 굉장이 눈을 떴는데 중학교 교장선생님이 흑인이기도 하셨고요. 엄마가 본인도 모르는새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할때 저는 그게 다 느껴졌어요. 제가 자란 일리노이 부룩필드 근처는 중심가로부터 20분 정도 떨어진 곳이라 폴란드인, 아이리쉬인, 라틴아메리카 사람들, 이태리 사람들이 많았어요. 모두 노동자계급들 이었죠. 그리고 우리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철길이 있었는데 그 철로 주변으로 흑인들이 모여 살았거든요. 우리 사회가 차별적이니까요. 그런데 엄마가 “유색인종들이 많이 사는 곳을 지나갈때는 조심해야 해” 라고 말할 때 굉장히 인종차별적이었죠.  물론 제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줄은 알았지만 어쩜보면 그런 것들이 다 미디어등을 통해 각인된거잔아요. 본인이  직접 흑인들한테 해꼬지를 당했던 것도 아니고. 아무튼 그럴때 인종차별적이었죠. 

그리고 우리 아빠쪽 가족들은 모두 시카고 남부쪽 출신들이고 지금도 다들 그 근방에 살아요. 그래서 N-word를 쓰는게 일상적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조심했어요. 그냥 튀어나올 까봐요. 그리고 제가 또 굉장히 경계할때가 있었는데 가족들이 외식을 하거나 할때면 사람들이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항상 알고 있었어요. 저는 다르다는 걸요. 그리고 인종으로 사람을 달리보는게 너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가 부모가 되고 나서 아이들을 인종적으로 다양한 학교에 보내고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곳에 사는 것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아이들 주변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으면 했거든요. 그들 주변에 있는 어른들이 여러 다른 사람이 되도록 말이죠. 특히 아시안들이요. 그래서 아이들이 어떤 롤모델을 가질수 있고 우리 아이들이 특출나지 않고 튀지 않도록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물려주는 것이 힘든가요?

글쎄요, 그건 애들한테 물어봐야 되는데. 2018년에 아이들을 한국에 데려갔었는데 그렇게 할수 있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갈때마다 힘들거든요.

마음 편한 여행은 아니죠.

네 쉬운 여행은 아니에요. 갈때마다 준비할 것이 너무 많고 매번 다르죠. 그리고 이제는 심정적으로 감정이 격해지고 하는 단계는 지났지만 그래도 준비할 것이 많아요. 그래서 애들한테도 항상 뭘 좀 더해줬어야 하나 하고 느껴요. 한국어 학교에도 좀 보냈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아마 제가 말을 꺼냈었는데 애들이 싫다고 그랬었을거에요. 그래도 항상 좀 더 했어야 되는데 좀 더 할 걸 그렇게 생각하는거죠.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할만큼 한것 같아요. 아이들과 항상 이 입양이라는 것에 대해 공유했고 알만큼 알고 있고요. 한국음식이나 물건등요. 그리고 그때는 요즘같은 스트리밍서비스도 없었잔아요.

그때는 넷플릭스만 틀면 한국 드라마가 나오는 시대도 아니었고요. 요즘처럼 한류다 K-culture가 융성하던 때도 아니었고요. 지금은 그래서 같이 “기생충”영화도 보고 많이 쉬워졌어요. 그리고 아이들 아빠가 한인도 아니니 쉽지 않죠. 하지만 또 그냥 개인이면 되는거잖아요. 아이들한테 한국인 조부모를 못 준 것이 짠하기도 하고 한국인 사촌들이 없는것이 미안하기도 하죠. 그래서 아이들이 대가족 출신인 사람들에 비해서 뭔가 뿌리가 없다고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요. 왜 그쪽은 소말리아 가족들이 라던가 하는게 없잖아요.  그래서 아이들한테 최대한 뿌리를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혹시라도 아이들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내가 미안하죠.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요. 그렇게 느끼는것이 이상하지 않고 나한테 화내도 괜찮다라고요. 그건 일생을 통해 계속 변할테니까요.

입양과정에 대해 알게 된 사실들이 있나요?

네. 제 서류에 의하면 실은 서류가 두 개에요. 하나는 제가 홀트에서 발견됐다고 하고 하나는 서울의 한 파출소에서 발견되어서 홀트로 보내졌다고 하고. 그리고 서류에 의하면 임시보호 가정에서 6개월 정도 있었다고 하는데 제가 발견됐을때 9개월 정도로 보였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미국에 온것은 13개월이었고요. 감기 등으로 출발이 지연이 되었다고 는 하는데 아무튼 뭐가 앞뒤가 좀 안 맞아요. . 물론 이 입양이라는 모든 일이 앞뒤가 안 맞지만요. 그리고 제 임시보호 가정엔 어른 네명과 개가 한마리가 있었대요. 홀트에 가서 조사를 좀 했는데 통역사를 데리고 가서 제 서류를 보자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이만큼이 우리가 공개할수 있는거다 하면서 보여주더라고요. 제가 볼수 없는 서류들도 많았고요. 제 생각엔 친부모에 대한 어떤 1급 비밀 같은것도 아닌것 같은데 말이죠. 제 임시보호 관련 서류로 보였죠. 그것도 제가 알면 안되는 거였고요. 그런데 제가 미국으로 입양되어 올 때 텍사스의 기독 선교단에서 나를 데려와줬거든요. 그때 저를 데리고 와준 분을 페이스북을 통해서 찾긴 했어요. 나이가 좀 많아서 그분하고 실제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던 것 같고 자녀분들과 이야기를 좀 했어요. 그게 제가 아는 다예요

그럼 그걸로 출신 찾기는 끝난건가요?

그런 셈이죠. DNA테스트도 두번이나 했는데 가까운 친척은 찾을수 없었어요. 10촌 넘어가는 사람들만 미국, 한국, 베트남, 중국에 퍼져있더라고요. 그래서 아주 가까운 DNA가 나타나거나  제 가족들이 홀트에 찾아가서 저를 먼저 찾지 않는 이상은 힘들다고 봐요. 제가 서류에 제 기록을 남겨 놓고 왔거든요 제 이름등등요. 티비에 나갔던 것도 아니고 광고를 낸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 더 할 일은 없다고 봐요. 제 생일이나 발견 날짜등이 다 정확하지 않아서요. 만약 누군가가 날 찾고 있고 날짜를 대략이라도 기억하고 있다면 그래도 그것이 단초가 될수는 있을텐데 그런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더 이상 할수 있는것이 없다고 봐요. 많이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해요.

오늘 나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영씨 책은 어떻게 구할수 있죠?

온라인으로 구입하신다면 BOOKSHOP.ORG으로 구입하실 것을 추천해요. 독립서점들을 후원하는 곳이거든요. 혹시 미네소타에 계시다면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Moon Palace, 세인트폴에 있는 Next Chapter,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Birch Bark에서 구할수 있어요. 세인트폴에 있는 Subtext도 항상 제 책을 너무 잘 다뤄주고요. Majors and Quinn도 좋고 어디든 가시면 구할수 있어요. 출판사인 Coffee House 를 통해서 사셔도 되고요. 그런데 이런 동네서점들이 요즘 너무 멋지거든요.

다른 작품들은 뭐가 있나요?

“Outsiders Within:Writing on Transracial Adoption (역자 가제 – 내부의 외부자들: 타인종간 입양에 관하여)” 가 있어요. 2판이 작년에 미네소타대학 출판부에서 나왔어요. 제가 Jane Jeon Tranka 그리고 Julia Chinyere Oparah와 함께 감수한 책이고 50여명의 공동저자가 있는 책이죠. 대부분이 비백인이고요. 그중에는 입양인 출신인 학자들도 있고 아닌 사람들도 있는데 모두 입양관련 연구에 동참해주는 분들이죠.  작년에 나온 음식에 관한 책 “What we hunger for:Refugees and Immigrant stories about food and family(역자 가제 : 우리가 먹고 싶은 것: 난민과 이민자들의 음식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 도 있고요. 미네소타 역사출판사에서 나온 책이에요. 어디서든 구하실수 있어요. “A Good Time for the Truth and Race in Minnesota(역자 가제 – 진실을 마주할 시간 : 미네소타의 인종적 진실에 관하여)” 도 있고요. 2016년에 나왔는데 지금도 쉽게 구하실수 있어요. 슬프지만 지금도 유색인종들에 대한 폭력이 만연하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책도 두권 있고요. “쿠퍼의 레슨”이라는 책이고요 한국어와 영어 두가지 버전이 있어요. 시카고에 있는 Lee and Low출판사에서 나왔죠. 그리고 제가 공동집필한 그림책이 10월에 나와요. 다코타출신으로 미네소타에서 활동하는 Diane Wilson 그리고 미네소타에 사는 동화작가  John Coy 와 흑인 혼혈입양인이자 소설가 그리고 전집 편집자인 Shannon Gibney와 함께 쓴 책이에요. “Where We Come From(역자 가제 : 우리는 어디에서 왔나)”에요. 10월에 출판 예정이에요. 우리의 모두의 조상들에 관한 이야기가 잘 역여서 그려지는데 인간 진화에 대한 큰 그림을 보여준다고도 할수 있어요.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더 기대됩니다.

저도 정말 고마워요.카오미씨.

선영씨 고맙습니다. 이 팟캐스트를 후원해주시는 분들과 매 시즌 돌아와주시는 청취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잠시 여름 휴가를 가질 예정이에요. 그 사이 혹시 놓친 에피소드가 없는지 찾아 들어주세요. 입양에 관한 다른 팟캐스트들을 찾아 들어보기에도 좋은 시간이 될거에요. 아니면 잠시 다 내려놓고 쉼을 갖는것도 좋겠어요.

                                                          (번역 : 전유근 )

시즌 4, 에피소드 13: 라스무스 바텔센

Audio available on Sunday, Feb. 7, at 10 pm EST.

21세 때 삶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하던 때를 기억해보자. 거기에 코펜하겐에서 한국계 다인종 간 입양아로서 국제적 유행병이 돌아, 아시아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을 겪고, 한국으로의 첫 여행에서 친가족들을 만나는 데 성공하고, 한국 이모가 보낸 이모지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경험도 추가해, 미래의 가능성이 무한해 보이는 시기의 이야기를 라스무스에게 한번 들어보자. 

라스무스: 제 이름은 라스무스 바텔센입니다. 21세이고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살고 있죠. 제 한국 이름은 명훈입니다. 

-덴마크어 자기소개

팟캐스트: 코펜하겐시에서 성장하셨군요?

라스무스: 네. 

팟캐스트: 라스무스 씨, 스칸디나비아 출신 입양아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특히 코펜하겐 같은 경우에는 혼자 다니면 사람들이 국제 교환학생으로 본다던데 사실인가요?

라스무스: 네. 사실입니다.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요. 라트비약이라는 이름의 덴마크 슈퍼마켓 겸 편의점이 있는데, 많은 사람이 와서 “오 외국인인가요? 덴마크에 교환학생으로 온 건가요?”라고 물어보죠. 그러면 제가 덴마크어로 “아뇨. 전 덴마크인입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럼, 사람들이 “미안해요. 미안해요. 잘 몰랐어요.”라고 답하고 저는 괜찮다고 답해요. 그리고 친구들이랑 돌아다니다 보면 사람들이 저에게 비자나 여권을 보여 달라고 할 때도 있죠. 그걸 생각하면 저랑 제 친구들이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팟캐스트: 백인 친구들과 나가서 술을 마실 때 그런 일이 발생하는 거죠?

라스무스: 네. 클럽에서 ID를 확인하죠. 하지만 ID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제가 21살처럼 보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보고 17살로 생각하고, 전 제 친구들에게 제가 21살인 것을 증명해달라고 부탁해야 하죠. 아무도 제 나이를 믿지 않아요. 

팟캐스트: 친구들 사이에서는 농담거리이겠군요.

라스무스: 그렇죠

팟캐스트: 하지만 동시에 짜증이 나기도 하나요?

라스무스: 처음에는 그랬죠. 전 덴마크인이고 실제로 덴마크인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행위 자체에 화가 나기보다는 불안해졌습니다. 왜 저에게 그렇게 대우를 하는 걸까? 뒤의 사람이나 다른 유색 인종들에게는 왜 그러지 않지? 이라고 질문을 던졌죠. 그 사람들이 악의를 가지고 그런 것도 아니고, 적대감도 없었어요. 그래도 그러한 행동에서 생기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덴마크인인데도, 미국인인데도, 독일인인데도 불안한 감정이 생기게 되죠. 

팟캐스트: 그곳에 속하지 않는다는 감정이군요?

라스무스: 그렇습니다. 입양아의 삶 중 큰 부분이 그러한 감정을 가지는 일이라고 생각하죠. 특정 장소에 속하거나, 자유를 느끼거나, 어떤 곳에 속한다는 감정이에요. 전 입양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3명의 아이 중 두 번째 아이였기 때문에 더 그분들에게 인식되고 싶었죠. 제 형이나 제 여동생이 더 관심을 받는다고 생각했어요. 길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관심에서 벗어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제 가족을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죠. 그래서 더 불안과 자기 회의를 느꼈어요. 긴장감과 염려에 휘말리게도 했습니다. 그게 제가 가졌던, 그리고 지금도 가지고 있는 문제죠. 항상 제가 저에게 말해야 하는 일은, 제가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하고 있고, 부모님도 저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최대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요. 

팟캐스트: 충분하지 않다는 기분이군요?

라스무스: 네. 그렇습니다.

라스무스: 요즘 상담을 받다가 최근 끝났죠. 중요 상담 주제는 불안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한밤중에 땀 범벅이 된 채로 일어나서 숨을 쉬기 어려울 때도 있었어요. 그래서 상담이 저를 크게 도와주었다고 생각하죠. 자기 회의와 가치 인식에 도움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일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일 자체가 도움이 되죠. 

팟캐스트: 그리고 대화를 하면서 모든 일이 괜찮다고 해줄 수 있는 상대가 있는 것이 좋죠.

라스무스: 네. 자유롭고 안전한 장소에 있고, 원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죠. 

팟캐스트: 이 팟캐스트를 계속 듣고 계셨다고 하셨는데, 다른 입양아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도움이 됐나요? 

라스무스: 다른 사람들이 저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고 같이 공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도움을 받고 있어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감정을 받아들이고 처리할 수 있죠. 

팟캐스트: 라스무스 씨가 겪는 문제가 생각보다 흔하다는 사실이 말이죠? 

라스무스: 네 그렇습니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일이 이상하지 않죠.

팟캐스트: 한국계 입양아들 상당수는 백인 위주의 작은 마을이나 도시로 입양되는 경우가 많죠. 코펜하겐은 더 국제적이고 다 인종적인 도시가 아닌가요?

라스무스: 코펜하겐은 확실히 국제적인 도시라고 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는 제가 유일한 유색인종은 아니었죠. 하지만 한국계나 중국계로 보이는 유일한 아이였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이 절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착각했습니다. 

팟캐스트: 미국에서의 인종 관계에 대해서 읽어서 알 텐데, 덴마크에서는 인종 관계에 차이점이 있나요? 

라스무스: 미국의 상황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COVID-19를 대응하면서 큰 문제를 겪었어요. 아시아계들이 너희가 온 곳으로 돌아가라는 등,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등 인종차별을 겪었죠. 단순히 우리가 그들과 닮지 않고 아시아계의 외모를 가졌다고 우리가 덴마크에 있으면 안 되며, COVID-19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팟캐스트: 라스무스 씨도 그러한 문제를 겪었나요?

라스무스: 네. 저도 겪었어요. 어느 날 슈퍼에서 쇼핑하고 집에 가던 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니는데 백인들이 모여서 서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주변을 지나가니 멀리 피하면서 저를 이상한 눈으로 봤습니다. 제가 COVID-19 바이러스인 마냥 저를 바라봤죠.

라스무스: 우리 가족은 아이가 세 명이 있고, 우리 셋 다 한국계 입양아죠.

팟캐스트: 한국에서 입양된 두 형제자매가 있으신 거군요?

라스무스: 그래서 자라나면서 전 한국계라서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죠. 애들이 자주 제 한국 이름인 명을 뒤틀어서 욕으로 만들어서 놀렸어요. 그래서 학교에 안 가려고 자주 아픈 척을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제 어머니는 간호사라서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깐깐했죠. 

팟캐스트: 아픈 척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군요.

라스무스: 네. 제가 아픈 척을 한다는 사실을 아셨죠.

팟캐스트: 어떤 식으로 사람들이 라스무스 씨를 놀렸죠?

라스무스: 중국 머리라던가, 그런 식으로 불렀습니다. 제 눈을 가지고 놀리기도 했죠. 제대로 볼 수 없을 거라고 놀리기도 했어요. 대부분 다 어린아이들이 놀릴 만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은 얼마든지 사악해질 수 있죠.

팟캐스트: 그렇죠. 사실 입양 부모님들은 대부분은 아시아계 아이들이 어떤 경험을 겪는지 모른다고 생각해요. 

라스무스: 모르죠. 하지만 제 어머니의 경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최대한 대응을 하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담임 선생님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물었어요. 그리고 제가 고개를 젓고 제가 직접 담임 선생님에게 말했습니다. 한 주정도 멈추더군요. 

팟캐스트: 그리고 다시 시작했군요?

라스무스: 그리고 다시 시작됐죠. 또 다른 웃긴 점을 가진 애를 찾아서 그 애를 놀릴 때까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었어요. 다시 괴롭힘당하고 싶지 않았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하는 데 돕지 못해서 끔찍했습니다. 

팟캐스트: 그저 주목이 다른 사람으로 넘어가서 안심하는 감정이 더 강했겠군요? 

라스무스: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하지만 어렸을 때 괴롭히는 애들에게 맞서는 일은 어렵지요. 

라스무스: 제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 우리 어머니가 커다란 칠판을 들고 학교에 가서 제가 한국에서 입양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한국 음식을 가지고 와서 소개해줬습니다. 수업 하나를 거기에 사용했어요. 그러고 났더니 괴롭힘이 멈췄죠.

팟캐스트: 어머니가 그런 일을 해서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라스무스: 어머니가 그렇게 해서 아주 기뻤죠. 어머니가 절 구해준 영웅이었어요.

팟캐스트: 애들이 라스무스 씨를 놀린 이유 중 일부가 라스무스 씨를 이해 못 해서 그랬다고 생각하나요?

라스무스: 네 그렇다고 생각해요. 애들은 저에게 농담하거나 놀리는 정도라고 생각했겠지만, 한국계 입양아에게는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입양아들은 여러 가지 문제에서 불안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잘 모른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21세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지만, 한국 이름을 쓸 생각을 하신 적이 있나요? 아니면 한 번이라도 한국 이름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나요? 

라스무스: 네. 제 한국 이름을 제 중간 이름에 넣으려고 생각하고 있죠. 현재는 단순히 라스무스 명 베텔센인데, 명훈으로 훈자를 넣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자라면서 학교에 친구는 있었나요. 라스무스 씨?

라스무스: 네. 친구들은 있었죠.

팟캐스트: 그러니 친구를 만드는 일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군요.

라스무스: 예. 친구 사귀는 데는 문제가 없었죠. 어머니가 그렇게 절 소개해준 뒤로는 꽤 평범하게 친구들과 축구도 하고 운동도 같이하면서 친해졌어요. 

팟캐스트: 교제는 어땠나요? 하기 어려웠나요?

라스무스: 음…. 네. 아무래도 그렇죠. 상대방에게 저 자신을 그래도 표현할 만한 자신감이 모자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저를 소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죠. 

팟캐스트: 그러한 관계에서 인종을 라스무스 씨가 뛰어넘어야 하는 문제라고 인식했나요?

라스무스: 네. 그렇게 느끼는 경우가 아주 많았죠. 아시아인의 정체성이나 입양아의 정체성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 항상 분노에 차 있었죠. 입양아의 정체성을 잘 몰랐고 왜 친어머니에게 버림받았는지 몰랐기 때문에 분노가 가득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친어머니가 왜 그래야 했는지 알고 부모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감정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알죠. 그래서 지금은 친어머니에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팟캐스트: 한국 문화, 음식, 드라마 그리고 K-POP에 대해서 더 알려진 환경에서 자라나는 일은 어땠나요? 그리고 라스무스 씨가 관심을 가진 한국 문화는 따로 있나요? 

라스무스: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죠. 문화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팟캐스트: BTS와 같은 한국 음악가들이 스타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끄는 것을 보고 자랑스러웠나요? 라스무스 씨와 똑같이 생겼는데 인기를 끌고 있었으니 말이죠. 

라스무스: 네. 한국 사람들이 저렇게 인기를 끈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동시에 친구들에게 K-POP를 좋아한다고 하기에는 좀 그랬죠. 사실 덴마크에서는 K-POP이 아직 그렇게 큰 인기를 끌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이 랩이나 팝을 들을 때 저 혼자 K-POP과 한국 드라마를 본다고 할 수 없었죠. 사실 최근에야 제 부모님에게 K-POP과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말씀드렸어요. 

팟캐스트: 현재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가 있으신가요?

라스무스: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첫사랑은 처음이지만(넷플릭스) 이라는 드라마에요. 친구들에 관한 내용이고 주인공이 대학교에 막 입학했다는 설정입니다. 그리고 데이트에 대해서 배우려고 하는 내용이죠. 가장 친한 친구에게 짝사랑하고 있었지만 가장 친한 친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몰라요. 그리고 그 가장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가출해서 집이 없어지게 되는 이야기로 진행이 되죠. 그리고 저는 이 모든 내용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비슷한 나이의 대학교 학생이라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 이입할 수 있었어요. 

팟캐스트: 로맨스 관련해서는 한국과 덴마크의 문화적 차이를 느끼셨나요?

라스무스: 네 그렇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덴마크 사람들보다 이런 쪽에 관련해서는 더 소극적인 것 같아요. 덴마크의 경우는 훨씬 더 적극적이고 솔직하죠. TV 매체는 더욱더 그래요.

팟캐스트: 성적 순수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죠?

라스무스: 네 그렇습니다. 성적 순수성이 있어요. 그런데 그게 웃기지는 않고 흥미로웠죠.

팟캐스트: 다른 이야기지만, 입양된 뒤 한국에는 언제 처음으로 돌아가셨죠? 

라스무스: 제가 처음으로 한국에 돌아간 때는 지난 12월이었어요. 아주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죠. 제 입양 부모님과 제 여동생과 한국을 방문했죠.

팟캐스트: 여동생인가요? 누나인가요?

라스무스: 제 여동생이죠. 저보다 4살 연하입니다. 

팟캐스트: 아직 고등학생이겠군요?

라스무스: 네 그렇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생이 되죠. 제가 비행기에서 보고 놀랐던 점은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이 가득했다는 점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같이 타고 있던 중국 학생이 있었죠. 그리고 저에게 중국어로 말을 걸었어요. 아주 재밌는 경험이었죠.

팟캐스트: 백인 부모님과 같이 있었는데도 말이죠?

라스무스: 네 그렇죠. 하지만 저는 제 여동생과 따로 앉아 있었거든요. 부모님은 저희 뒷줄에 앉아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그게 입양아의 공통적인 경험 중 하나이죠.

라스무스: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실 계획이 있는 입양아분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 한국에 가는 비행기에서 중국어로 말을 걸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팟캐스트: 그래서 여행으로 한국에 돌아갔군요. 첫인상은 어떠셨죠?

라스무스: 처음 내리자마자 몹시 춥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한국에 와서 아주 기뻤어요. 제 출생 국가를 직접 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에 차를 타고 우리가 지내게 될 집으로 갔어요. 주변 풍경은 대단했고, 주변에 저와 닮은 얼굴이 가득했죠.

팟캐스트: 그리고 사람들이 한국어로 말을 걸었겠군요?

라스무스: 네! 사람들이 자주 저를 멈추고 한국어로 말을 걸었죠. 그리고 제가 놀라서 한국어로 네라고 답하니 사람이 계속 말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계속 말을 걸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어요.

팟캐스트: 하지만 거기에 있었을 때 한국어 몇 단어 정도는 배우셨죠? 

라스무스: 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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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왜 라스무스 씨의 가족이 한국을 방문하셨죠? 계획적인 여행이었나요? 부모님이 가려고 하셨나요? 아니면 여동생이 원했나요?

라스무스: 아주 재밌는 이야기입니다. 계획된 방문이 아니었죠. 사실 우리는 호주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실제로 호주도 방문했지만, 어머니가 “오! 한국 항공권을 아주 싸게 구했다”라고 하시면서 한국을 일주일 정도 거치자고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아주 행복했어요. 그래서 제 한국 가족과 연락을 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이모에게 연락을 시도했고, 금요일에 출발해서 일요일에 도착했죠. 그다음에 입양 기관에서 제 친척들을 만나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팟캐스트: 어떻게 그분들을 찾으셨죠? 이름이 서류에 있었나요?

라스무스: 아뇨. 제가 그 입양 기관에 제 친어머니를 찾으려고 조사 의뢰를 했죠. 입양 기관에서 저에게 연락했고 제 이모와 대신 연락이 되었어요. 

팟캐스트: 이모요?

라스무스: 네. 어머니의 언니, 큰 이모였죠. 그리고 가족들과 만나기 위해서 계획을 세웠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이모와 이모부를 만났군요?

라스무스: 네.

팟캐스트: 그 경험은 어떠셨죠?

라스무스: 아주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힘들기도 했어요. 시차로 인한 피로가 심각했죠. 그분들이 절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불안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도 많았죠.

팟캐스트: 그분들이 라스무스 씨를 평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군요.

라스무스: 네. 하지만 두 분 다 상냥하시고 친절하셨죠. 이모가 저를 보고 울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하셨고, 제 이모부도 무척이나 기뻐하셨어요. 

팟캐스트: 이분들이 정확히 라스무스 씨와 관계가 어떻게 되죠?

라스무스: 제 어머니의 언니와 남편, 큰이모와 큰 이모부였어요. 

팟캐스트: 그래서 그 두 분이 왜 라스무스 씨가 입양되었는지 설명했나요?

라스무스: 어머니가 17살에 임신해서 18살 때 저를 가졌다는 사실을 설명하셨죠. 그리고 제가 입양 제도에 맡겨진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이모와 이모부가 대신 맡아서 키우려고 했지만, 두 분의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않아서 대신 저를 입양 제도에 맡겼다고 했죠. 

팟캐스트: 친어머니가 라스무스 씨를 돌볼 수 없던 이유는 어머니가 미혼모였기 때문인가요?

라스무스: 미혼모이셨고, 고등학교도 졸업 못 한 상태였다고 해요. 고등학교 2학년 이후로 고등학교에 못 가셨다고 하셨죠.

팟캐스트: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셨나요?

라스무스: 네. 하지만 어머니가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하신 상태이고, 남편이 어머니가 미혼모였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남편이 그 사실을 아는 것이 무섭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하면서 만나려고 준비를 하고 있죠.

팟캐스트: 어머니의 사진을 보셨나요?

라스무스: 네 사진을 봤습니다. 젊더군요.

팟캐스트: 한 40세 정도 되셨겠군요?

라스무스: 39세였습니다.

팟캐스트: 39세라…. 이부형제나 자매들이 있나요?

라스무스: 네. 여동생이 있다고 하더군요. 

팟캐스트: 이 모든 정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죠?

라스무스: 아주 감사해요. 결국, 모든 정보를 취합해서 생각했을 때 고맙다는 생각이 들죠. 제 한국 뿌리를 알게 되고 한국에 오게 된 것도 기분이 좋고, 제 한국 친척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물론 아직 어머니와는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주 고맙죠. 

팟캐스트: 라스무스 씨처럼 혈육을 만나는 일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강력한 경험이었나요? 

라스무스: 아주 강력한 경험이었죠. 사실 끝나고 나서 저 자신에 대해서 실망했어요. 제가 물었어야 했을 것 같았는데 내가 울지 못했기 때문이죠. 감정에 휘말려서 뭐가 일어나는지 정확히 인식할 수가 없었어요. 

팟캐스트: 덴마크 부모님이 동행했던 일이 도움이 됐다고 보나요? 아니면 문제가 됐다고 보시나요?

라스무스: 도움이 됐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도 됐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제 입양 부모님이 제가 그분들을 버리고 떠나서 친척들과 지낸다고 생각하는 일이 무서웠거든요. 그래서 부모님과 여동생과 그 문제와 관련해서 진지한 대화를 한국으로 가기 전에 나눴죠. 하지만 동시에 그분들이 있어서 안전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곳에서 저를 지지해주시면서 제 안전망이 되셨습니다.

팟캐스트: 입양 부모님이 한국에 관한 관심을 지원해주셨나요? 관련해서 불안감을 느끼지는 않으셨나요?

라스무스: 둘 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항상 저를 지지하셨죠. 하지만 모든 입양 부모님들이 그런 분야에서는 불안감을 가진다고 생각해요. 아니 불안감이 아니라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대부분은 아이들을 지지해준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개인적인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부모님의 특정한 말이나 행동에서 그러한 공포를 느끼신 적이 있나요?

라스무스: 네. 사실 이건 한국에서 돌아오고 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한국 친척들과 계속 연락을 나누고 있었죠. 이모가 저에게 문자를 보내면 제가 그 문자에 답하는 식이었어요. 그래서 휴대전화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입양 부모님에게 제 이모가 뭔 이야기를 했는지 설명해드렸어요. 그때 아버지는 아주 기뻐하셨지만, 어머니는 약간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죠. 

팟캐스트: 그 삶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겠군요?

라스무스: 네 그렇습니다. 그러한 기분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한국 가족과 서로 소통은 어떻게 하시나요?

라스무스: 카카오톡을 사용해서 하고 있어요

팟캐스트: 번역은 파파고와 같은 번역 앱을 사용하시나요?

라스무스: 네. 처음에는 파파고를 사용해서 연락했지만, 나중에는 이모가 영어로 문자로 보내시기 시작해서 이해하기 쉬워졌죠. 

팟캐스트: 이모지를 많이 사용하시는 편인가요?

라스무스: 전 사용하지 않지만, 이모는 많이 사용하시는 편이에요. 전 이모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냥 글을 써서 보내는 편입니다. 하지만 이모는 이모지를 아주 좋아하죠. 그래서 그 이모지가 무슨 뜻인지 해독하려고 해요. 

팟캐스트: 이모님이 이모지를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전 세계적으로 통하는 뜻이 있기 때문인가요?

라스무스: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모지를 보면 보통 제 친구들과 저 또래를 위한 소통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제 부모 세대가 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보통 이모나 어머니에게 연락할 때는 이모지를 안 쓰고 평범하게 연락하려고 하죠. 

팟캐스트: 어머니와 직접 연락이 되나요? 비밀리에 연락하시는 건가요?

라스무스: 네. 어머니와 연락이 됩니다. 비밀리에 연락하는지는 모르지만, 저와 문자로 연락하고 있죠.

팟캐스트: 어머니와의 교류는 어떤가요?

라스무스: 잘 되고 있어요. 제 한국 어머니를 알게 되면서 관계를 구축하니, 특정한 목적을 달성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팟캐스트: 친척들과 연락이 닿은 뒤로 반년이 넘었지요? 

라스무스: 네

팟캐스트: 카카오톡으로 연락을 계속 지속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나요? 

라스무스: 전혀 그렇지 않고,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죠.

팟캐스트: 얼마나 자주 그분들과 연락을 하시죠? 

라스무스: 가끔 연락하죠. 그분들이 저에게 먼저 연락을 주실 때도 있고, 제가 먼저 연락을 하면 항상 대답을 해주세요. 하지만 그분들이 항상 이야기를 하기를 제 덴마크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를 원한다고 하십니다. 그분들은 제 덴마크 가족들을 존중해주시고, 그 가족이 절 사랑해주고 지원해줘서 기뻐하시죠. 그래서 제가 덴마크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주면서 동시에 저와 연락을 지속하고 있어요

팟캐스트: 라스무스 씨, 한국 친어머니와 덴마크 입양 어머니에게 가진 사랑이 서로 다른 사랑인지에 대해서 논의해보거나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라스무스: 네. 생각 해본 적이 있어요. 설명하자면 덴마크 어머니에 대해서는 키워준 애정을 품고 있죠. 하지만 동시에 한국 어머니를 역경을 뛰어넘어서 찾았고, 서로 연락하면서 만든 애정이 있어요. 그러니 저는 두 분 다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친어머니와는 단계적으로 애정을 쌓아가고 있다면 제 입양 어머니와는 애정 10단계에 도달해 있다고 봐야 하겠죠. 덴마크 어머니와 저는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거든요. 하지만 한국 어머니와의 관계는 이제야 3단계를 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의 삶의 일부가 되려고 하고 있죠.

팟캐스트: 한국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었던 일이 있나요?

라스무스: 한국 어머니에게 어떤 증오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어머니가 절 입양시킨 일을 이해하고 어머니가 절 입양시켜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만약에 어머니가 절 입양시키지 않았다면 현재의 입양 가족들과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팟캐스트: 입양 결정 자체는 어머니가 내리셨군요?

라스무스: 네. 어머니가 결정하셨지만, 어머니의 어머니, 그러니까 제 외할머니가 승인하셨죠. 어머니는 그때 미성년자였거든요. 

팟캐스트: 친아버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요?

라스무스: 친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친구 생일파티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만 들었죠 

팟캐스트: 그러니까 하룻밤의 유흥이었을 가능성이 있군요?

라스무스: 그렇죠.

팟캐스트: 아버지를 찾고 싶은 욕망이 있나요?

라스무스: 잘 모르겠어요. 현재 어머니의 가족과의 교류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한국 가족들과 만나고, 한국 어머니와의 연락이 라스무스 씨를 바꾸었다고 생각하나요? 

라스무스: 제 한국에 대한 인식을 더 강하게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더 한국인 같은 느낌이 들죠. 물론 그 말이 제가 덴마크인의 정체성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더 한국인의 정체성이 강해지고, 한국인의 뿌리가 느껴지고, 한국 유산이 제 일부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팟캐스트: 전에는 그렇게 느끼지 않으셨군요?

라스무스: 예. 전에는 덴마크 입양 부모님에게 왜 친부모님이 아닌지 물어본 적이 있죠. 만약에 그 두 분이 친부모님이었다면 제가 겪는 문제 중 대부분은 겪지 않았을 겁니다.

팟캐스트: 과거에는 입양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욕구가 있었군요?

라스무스: 네. 과거에는 제가 입양아가 아니었으면 좋겠고 제 입양 어머니가 제 친어머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팟캐스트: 라스무스 씨, 이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지는 모르겠고, 원하지 않으신다면 안 하셔도 되지만, 형과 여동생도 한국에서 입양된 입양아라고 들었는데, 라스무스 씨가 친가족과 다시 재회했으니 형과 여동생도 가족과 재회했는지 알고 싶네요. 만약에 그러지 못했다면 라스무스 씨의 재회가 질투를 유발했나요? 아니면 형과 여동생도 가족을 찾으려고 노력했는데 못 찾아서 상황이 어색해지기도 했나요?

라스무스: 적어도 제 여동생에 관련해서는 제가 부모를 찾아서 기뻐해 줬고 질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적극적으로 저를 지지해줬죠. 그리고 저에게 질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여동생이 가족을 찾고 싶어서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중에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지금은 현재 상황에 만족하고 있죠.

팟캐스트: 형이 있다고도 들었는데요.

라스무스: 네. 형이 있죠. 형은 가족을 찾고 싶어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형에 대해서는 잘 모르죠. 현재 의학을 전공하고 있고, 대화를 별로 나누지 않습니다. 

팟캐스트: 이상한 일은 아니네요. 그냥 형과 여동생과는 가족과의 재회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를 안 한 셈이니까요.

라스무스: 형과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제 여동생과는 이야기를 나눴죠. 그리고 제가 한국에 가진 관심에 관해서도 이야기했어요. 여동생은 저를 계속 지지해줬습니다. 여동생은 BTS를 듣기 시작했고 그래서 여동생과 더 많은 한국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행복하죠.

팟캐스트: 한국 문화가 마음에 드셨나요?

라스무스: 한국 문화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한국에 가니 제가 아주 키가 커진 기분이었어요. 

팟캐스트: 키가 아주 많이 커진 기분이었다고요?

라스무스: 네. 제가 174cm인데, 덴마크에서는 이게 큰 키가 아니죠. 하지만 한국에서는 충분히 큰 키라, 아주 대단한 경험이었어요.

팟캐스트: 여성을 좋아하시죠?

라스무스: 네. 

팟캐스트: 한국에서 관심을 받으셨죠?

라스무스: 네. 관련해서 재밌는 이야기가 있는데, 두 번째 날에 한국 여자애들이 저를 멈춰 세우더니 한국말로 말을 걸었죠. 그리고 제가 얼어붙어서 제대로 답을 못하니 제가 노래를 듣고 있던 핸드폰을 가지고 가서 카카오톡과 인스타그램에 자기들을 친구로 추가하더군요.

팟캐스트: 오…. 꽤 적극적인 행동이네요? 하지만 나중에 라스무스 씨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죠?

라스무스: 네. 다섯 번째 질문에 대답을 안 했을 때 그 사실을 알았죠.

팟캐스트: 핸드폰도 봤을 거고요.

라스무스: 네. 

팟캐스트: 그 일로 아주 기분이 좋았겠네요?

라스무스: 네. 아주 기분이 좋았죠. 아주 재밌기도 했고요.

팟캐스트: 한국에서 시간을 더 보낼 생각은 없나요?

라스무스: 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죠. 한국에 돌아가서 더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어요. 음식도 먹고 싶고, 패션도 경험해보고 싶고, K-POP과 한국 드라마도 경험하고 싶습니다.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을 경험하고 싶죠

팟캐스트: 한국에서 거주하고 싶지는 않나요?

라스무스: 예. 한국에서 살아볼까 생각해봤어요.

팟캐스트: 미래에 원하는 일은 있나요? 어머니의 가족에게 인정을 받고 싶나요? 아니면 그 가족들과 만나고 싶나요?

라스무스: 제가 원하는 일은 제 한국 가족 모두를 알게 되는 일이죠. 한국 가족 모두와 만나서 한명씩 서로 알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 가족의 일부가 된 느낌을 받고 싶어요. 

팟캐스트: 20년 뒤의 미래에 라스무스 씨가 뭘 할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라스무스: 한국에서 살면서 가족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한국에서 말이죠?

라스무스: 네. 그리고 덴마크와 한국을 자주 여행하면서 입양 가족과도 같이 지내려고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