즌 4, 에피소드 25, 수잔 게이타

시즌 4, 에피소드 25, 수잔 게이타

어댑티드 팟캐스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호스트 카오미 리입니다. 

“어렸을 때 한국과 연관되고 싶지 않아했을 때, 제 부모님은 저를 존중한다면서 제 의사를 따라줬지만, 사실 제가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내면화했다는 점을 간과했던거죠.” 

어댑티드 팟캐스트에서는 전세계에 거주하는 해외입양인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이번주에는 미국 동부에 사는 수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수는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사는 해외입양인이자, 루터교회 목사이자, 양성애자입니다. 그동안 수가 이렇게 다양한 공동체에 속하면서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교류해왔는지에 대해 그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수를 소개합니다. 

수: 제 이름은 수잔 게이타이고 She/Her/Hers 대명사를 사용해요. 제 한국이름은 이형호라고 알고있어요. 현재는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북서쪽으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48세이고요. 제가 출생에 대해 아는 건 대부분 부모님이 받은 서류에 있는 내용이에요. 친어머니는 절 낳고 의학적 관리 미흡으로 바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친아버지는 3달 동안 아마 보모같은 분의 도움을 받으며 저를 키우려고 했던것 같지만, 결국 사회복지기관에 맡겼다고 해요. 제가 알기로는 당시 사회의 분위기상 남자가 혼자서 딸을 키우는 게 녹록치 않았던걸로 알고 있어요. 친부모님은 서류상으로는 양부모님보다 2살 정도 나이가 더 많아요. 딱히 젊었던 것도 아니고, 혼인도 한 상태였고, 다른 아이도 없었죠. 만약 아버지가 재혼하셨다면, 저한테 이복동생이 있을 수도 있겠죠.

팟캐스트: 저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미혼여성이나 미혼남성이 혼자 애키우는게 쉽지 않죠 – 주변의 편견이 많으니까요. 친부모님의 직업은 아세요? 농부였나요? 

수: 아버지가 판매원이였대요. 

팟캐스트: 네, 수의 고향은 어디인가요? 

수: 서울입니다. 왠지 모르겠지만 늘 제가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어른이 되서 다시 서류를 보고, 그 뒤에 구글이 생기고 나서는 (웃음) 주소로 검색할 수 있잖아요, 주소로 찾아봤더니 서울시에서 태어났더라고요.

팟캐스트: 유아로 입양되었죠?

수: 네 6개월 때 입양되었습니다.

팟캐스트: 어디로 입양되었죠?

수: 부모님이 뉴저지주 북부에서 살고 계셨어요. 뉴저지 포세이트 카운티에서 자랐습니다. 뉴욕시 근교였죠. 제가 1학년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죠. 그러고 웨스트체스터(뉴욕주에 있는 지역 – 번역주)로 이사를 가서 8학년때까지 살다가 다시 브롱스로 갔어요. 아마 우리가족은 웨스트체스터에서 브롱스로 이사한 유일한 가족이지 아닐까 싶어요 (웃음). 그곳에서도 몇 년 살다가 롱 아일랜드로 이사했죠. 하지만 전 롱 아일랜드에서 지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을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1년 더 빨리 진학할 수 있는 대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대학교에 일찍 입학했어요. 저에게는 사실 입양인인 오빠가 있는데요, 국내입양인이라 백인이죠. 3살 반 정도 나이가 많아요. 사람들에게 농담삼아 저는 수입산이고 오빠는 국내산이라고 이야기해요. 오빠와 저, 부모님이 한 가족이었죠. 제가 입양되었을 때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유치원에 들어갈 때 어머니가 간호사로 일하면서 저희를 키웠어요. 동시에 파트타임으로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제가 8학년 때 졸업을 하셨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제 부모님 두 분 다 목사였어요. 

팟캐스트: 목사 부모님은 엄격하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두 분도 그러셨나요? 

수: 아뇨. 엄격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어요. 두 분 다 공정하신 분이셨죠. 뉴욕주에서 자라면서, 저희 부모님은 루터교 목사였는데요 – 청취자들은 물론 루터교를 잘 알고있겠지만 (웃음) – 당시 대부분이 루터교를 거의 몰랐습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거나 목사의 아이들이라고 주목을 받지 않았죠. 부모님은 공정하신 분들이셨어요. 애정이 깊은 분들이기도 하셨습니다. 제 오빠는 항상 말썽꾸러기였죠. 부모님이 오빠때문에 고생을 하셨는데요, 부모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열심히 하셨습니다. 두 분 모두 건강한 가정에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물림을 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셨어요.

팟캐스트: 브롱스를 제외하면 백인 위주의 동네에서 지내셨군요?

수: 음…. 재밌는 사실은 웨스트체스터는 백인 위주의 동네였죠. 하지만 항상 반에서 서너명 정도의 아이들은 아시아인이었어요. 80년대였으니 일본 기업인들이 뉴욕을 한창 오갔을 때죠. 그래서 아시아 국가에서 온 아시아인들이 있었고, 1세대도 있었습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저를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학교에 갔을 때 담임 선생님이 절 보고 푹하고 한숨을 쉬더니, “애가 영어는 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대요(웃음). 못하는 애들이 워낙 많았어서 그랬죠. 어머니는 “애가 수다를 멈추지 않아서 걱정이에요”라고 답을 했대요(웃음). 어렸을 때 수다쟁이 었다고 하더라고요. 아시아인들 몇명과 친하기는 했지만 아시아인들과 자연스럽게 친구집단을 형성하지는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아시아인을 봤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친해지고 싶었나요? 관심이 갔나요? 

수: 그 아이들의 도시락을 보고 부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도시락 상자를 열면 맛있는 밥 향기가 났죠. 제 어머니는 아무리 노력해도 밥은 하실 수 없었거든요. 그런 점이 부러웠어요.

팟캐스트: 어머니에게 도시락을 만들어달라고 안했어요? 

수: 부탁하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밥을 잘 못하는걸 알고있으니까요. 

팟캐스트: 도시락을 따라잡기는 어렵겠죠. 아주 예쁘니까요.

수: 네 그랬죠. 아시아인 친구 몇명과 친하게 지냈어요. 비슷한 레벨의 반에 배정되었거든요. 물론 제 초등학교 때 가장 친한 친구는 이탈리아인이었어요. 그 친구가 기억하기로는 저와 로버트 리 둘만 독보적으로 독서반에 있었다고 해요. 다른 애들보다 똑똑했거든요.

팟캐스트: 아 아시아인이라 같은 반에 들어간게 아니라 모범생이어서 들어간거군요? 

수: 네, 당연하죠. 둘 다 공부를 잘했어요. 아시아인이니까요. 

팟캐스트: 그런 선입견에 반발하신 적은 없나요? 전 그랬어요, 고등학교 때 똑똑한 아시아인이라는 선입견이 싫어서 B를 받는 평범한 학생인게 좋았거든요. 

수: 제가 다닌 학교이름이 브라운과학고등학교였는데요, 입학시험이 있는 학교였죠. 한국계 미국인들이 정말 많았어요. 저는 그 애들을 보면 약간 겁을 먹었어요. 걔내들은 진짜 한국인들이니까요. 물론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 좀 친하게 지내긴 했지만 제가 각별히 친하게 지낸 친구들은 아니었죠. 저와 다르다는 게 느껴졌어요.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애들이 전부 공부를 잘했어서, 다른 일반 학교와는 다른 방식의 관계들이 있었어요. 

팟캐스트: 그럼 자라면서 외모 콤플렉스는 느끼지 않으셨나요?

수: 제 외모(의 차이)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어요. 외모를 싫어했기보다는 의식하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에, 나중에 느꼈던 감정은 놀라움이었죠. 스스로 제가 백인처럼 생겼다고 생각했거든요. 거울을 봐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죠. 제게 아주 강렬한 기억이라, 나중에 입양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다른 입양인들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는 걸 알게되면서 신기했어요. 제 외모를 싫어했다고는 할 수 없어요. 아예 인식을 못 했으니까요.

팟캐스트: 일종의 부정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수: 네, 하지만 적극적 부정이라기보다는 자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부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백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부모님은 저에게 늘 제가 한국인이라고 이야기 해주셨지만, 제가 아마 7살인가 8살 때 부모님께 제가 한국인인 부분은 얼굴밖에 없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어요. 물론 인지적으로는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렇지만 머릿속으로 제가 상상하던 저의 모습은 거울에서 보이는 제 모습과 달랐어요. 

제가 다른 입양인들을 찾아 만나기 시작한 건 2000년이었습니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탐구하기 시작했을 때였죠. 90년대에서 2000년대 무렵이었어요. 30세 정도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때부터 유색인종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자각도 하게 되었죠.

팟캐스트: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수: 신학대학 덕분이었죠(웃음). 신학대학에 입학하면서 스스로를 많이 돌아보게 되었어요. 제가 초대되었던 행사의 영향도 받았고요. 플로리다에서 유색인종 학생을 위한 전액 지원되는 행사가 있었어요. 잠깐 망설이긴 했지만, 플로리다로 공짜로 여행을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참여했죠. 큰 교회에서 주최하는 행사로 신학대학교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었어요. 저희(유색인종)는 무료였고요. 그 때부터 제가 유색인종이라는 자각을 하기 시작했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했죠. 입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 건 중국 여자애를 입양한 백인여성과 같이 지낼 때였어요. 중국입양인 부모단체의 멤버였고 단체가 여는 행사에 성인입양인을 패널로 초청하고 싶어했죠. 그 단체가 KAtCH(시카고 한국계 입양아, 시카고 기반 한국계 입양아 단체)에 연락을 했습니다. 위스콘신 밀워키에는 자생적인 입양인 단체가 없었기 때문에 KAtCH에 연락을 했어요.

팟캐스트: 그 때 밀워키에서 살고 계셨군요?

수: 신학대학에 1999~2003년까지 재학했었고, 2003년에 밀워키로 이사했어요. 밀워키에서 살면서 입양인부모를 위한 행사에 패널로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입양인의 정체성과 입양 현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났어요.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잘 하고 있는지랑 중국에서 입양한 아이들이 잘 자라줄지를 궁금해 했죠. 그런 질문에 저는 ‘저는 잘 자란 거 같습니다. 그렇지만…’이라고 대답했던게 기억나는데요, 그 때부터 국제입양을 사회적 문제로서 접근하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KAtCH와 같이 활동하기 시작했고, 위스콘신에 사는 한국인 입양인들을 만나기 시작했어요. 그 이후 같이 살던 여성과 중국을 방문해서 둘째 아이를 입양할 때 동행했습니다.

팟캐스트: 그 동거인과 연애 관계를 맺고 계셨나요?

수: 네 연애 관계를 맺고 있었죠. 공식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이혼을 하는 중이었고, 저의 친한 친구였던 그 여성이 동거를 제안했어요. 괜찮은 생각이었죠 (웃음), 어차피 이사를 나와야 했고, 친구가  미혼모였기 때문에 제가 도와줄수 있다고도 생각했어요. 제가 중국 방문에서 생생히 기억하는 일이 있는데, 광저우에 막 도착했을 때에요. 저와 제 친구, 친구의 딸이 같이 있었는데, 딸이 주변사람들의 시선에 많이 당황해 하더라고요. 자기가 엄마랑 같이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아시아인인 저랑 같이 있으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고 나중에 말하더라고요. 

팟캐스트: 아이가 수와 같이 있으면 이상해 보이지 않아서 신경을 안썼다는 거죠?

수: 네. 

팟캐스트: 중국에서만 일어난 일인가요? 아니면 다른 곳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나요?

수: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죠.

팟캐스트: 네.

수: 중국이었죠. 

팟캐스트: 근데 밀워키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수: 확실히 그랬을 수도 있지만, 말로 표현지는 않았어요. 

팟캐스트: 그 아이에게 부모이기도 했나요? 

수: 그 애의 삶에서 딸을 지지해주는 부모의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나이가 더 많은 다국적입양인으로써 아이의 경험을 이끌어주고 싶었죠. 아이의 경험이 평범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엄마와 제 관계가 멀어졌어요. 아이의 엄마가 제가 부모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그 애의 관계로 인해서 위협감을 느꼈으니까요. 

팟캐스트: 두 분이 연인 관계였을 때도 그랬나요?

수: 그랬죠. (웃음) 아주 복잡한 관계였습니다.

팟캐스트: 얼마나 그 관계를 지속하셨죠?

수: 2년 정도요.

팟캐스트: 팟캐스트에서 이야기하 는 데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수: 이정도의 수준에서는 괜찮아요.

팟캐스트: 아 다행이네요. 그분과의 관계가 첫번째 동성관계였나요?

수: 네. 첫 관계였죠.

팟캐스트: 어떤 성정체성을 가지고 계세요?

수: 양성애자입니다. 현재는 남성과 결혼한 상태이고, 예전에도 남성과 결혼한 적이 있죠.

팟캐스트: 언제부터 양성애자라는 사실을 아셨죠?

수: 대학교 때부터 알았어요. 대학교에서 제 성적 지향성과 감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죠.

팟캐스트: 그런 끌림을 거부하려고 하셨나요?

수: 네. 하지만 제가 이 여성과 교제할 때에는 부모님에게도 말씀을 드렸고 소통하려고 노력했죠. 저는 제 부모님에게 교제 사실을 알렸지만, 파트너는 자신의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았어요. 관계가 꽤 진행되었음에도요. 어머니에게 양성애에 관해서 설명하던 때가 기억이 나네요(웃음). 어머니가 이해하시려고 노력을 부단히 하셨어요. 그 때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는데요, 당시에는 사람들이 그런 지향성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니까요 (웃음). 뭐 지금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때는 성적 난잡함이 아니라, 사람의 성과 상관없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는걸 잘 몰랐을 때죠.  

팟캐스트: 중국입양인부모들을 만났을 때로 시점을 돌려보죠. 

수: 네.

팟캐스트: 그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불편했나요? 

수: 그 땐 망설였지만, 나중에 보면 입양인 부모들이 원하는 이야기나 선입견을 깨줄 수 있었던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어떤 이야기를 듣고싶어 했나요?

수: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듣고 싶어했어요. 좋은부모로서의 정당성을 부여받길 원했죠. 하지만 그런 말을 해줄 수 없었어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정확한 답안이 없죠. 그때 생각하게 된 게, 어렸을 때 한국과 연관되는 걸 거부했을 때, 부모님이 저를 존중한다면서 제 의사를 따라줬지만, 사실은 제가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내면화했다는 걸 간과한거죠. 굉장히 미묘한 일이죠. 부모님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올바른 일을 했으니까요. 입양인부모들은 정답과 국제입양을 한 행동에 대한 인정을 간절히 원했고, 제가 최선의 길을 추천해주기를 바랬습니다.

팟캐스트: 그러한 해답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공정하지 못하네요. 

수: 그렇죠, 물론 그 사람들이 저에게 그런 답을 원한다고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뭘 원하는지 느낄 수 있었죠. 하지만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그런 곳에 가면 불임인 부부도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 입양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거나 비판적으로 말하면 그 사람들이 가진 부모의 꿈을 파괴하게 되는 셈이니 말하기가 복잡하죠. 큰 압박입니다. 물론 수 씨는 이런 문답을 할 때 30세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난 뒤였지만, 더 어린 입양아들이 입양기관에 의해서 이런 복잡한 상황에 놓이니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수: 네 그렇습니다.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둘 다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일이었죠. 저에게 있어서 입양은 좋고 나쁜 일이었으니까요. 제 초등학교 때 가장 친한 친구가 불임 문제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친구에게 입양을 권유했죠. 저도 입양되었고, 입양, 입양제도와 관련해서 큰 문제는 없으니까요. 친구는 그 말에 하지만 피로 이어진 아이를 원한다고 대답했죠. 하지만 저는 자라면서 제 부모님이 진짜 부모님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항상 제 부모님을 진짜라고 생각했죠. 매우 복잡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서로 대립하는 관점을 동시에 가질 수 있어요. 

팟캐스트: 대립하는 관점이라니 정확히 어떤 의미이시죠?

수: 음…. 입양은 좋거나 나쁜 일이 아닙니다.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죠. 적어도 제가 가진 입양에 대해서 가진 관점은 그래요.

팟캐스트: 그 강연에서 입양 부모에게 준 다른 조언은 뭐가 있었나요?

수: 조언을 해주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조언을 원하지만 저는 조언을 주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했죠. 이 모든 일이 제가 타 인종 간 입양을 한 백인 입양 부모와 연인 관계를 맺고 있는 동안 일어났어요. 

팟캐스트: 그 입양 부모들을 아주 답답하게 만들었겠군요? 지금 만약에 똑같은 상황에 놓인다고 한다면, 똑같은 말을 할 건가요?

수: 지금 제가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선언보다는 질문을 더 많이 하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부모들에게 자기 스스로 질문을 던지라고 하고 싶죠. 

팟캐스트: 질문의 예를 몇 가지 들어 줄 수 있나요?

수: 왜 입양을 하고 싶나요? 왜 국제적 입양과 타 인종 간 입양을 고려하고 계십니까? 두려운 점은 있나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려우십니까? 이런 식의 질문을 하게 하고 싶죠. 입양 부모들의 동기를 알아내고, 공포를 알아내는 일입니다. 부모가 되어야 결혼 생활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그러한 인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부모의 정체성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처음에는 제가 입양 부모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교환 학생들을 집에서 지내게 하기도 했고, 유아 위탁 가정으로도 활동했으며, 입양아를 키우던 여성과 연인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죠. 무의식적으로 제 어머니가 출산과정 중에 죽었으니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가져야 할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가지고 싶다면 선택지는 입양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선택지가 없이 부모가 되었죠. 왜 그랬는지, 목적이 뭐였는지 몰랐습니다. 그때 저는 연인도 없었고, 돈도 없었지만, 부모가 되고 싶다고 선언했고, 부모가 되었어요.

팟캐스트: 선택지가 없었다니, 실수로 임신하셨나요?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었나요?

수: 실수라고 하지 않겠지만….

팟캐스트: 아이를 가지려고 계획하고 있지는 않은 상황에서 아이를 가지셨군요?

수: 네.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아이를 가진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때 제가 관계를 상대와는 결혼하지 않았죠. 제가 임신하게 된다면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결혼을 했고, 현재 남편이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그러니까 현재 남편과 재혼을 하셨는데, 아이를 가지고 난 뒤에 재혼했군요?

수: 네.

팟캐스트: 남편과 사귀실 때 아이를 가지는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남편분이 긍정적이셨군요?

수: 네.

팟캐스트: 알겠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백인인가요?

수: 푸에르토리코인이에요

팟캐스트: 오. 알겠습니다.

수: 저와 그이의 딸 그레이스가 태어난 지 몇 달 안 지나서 그 사람의 장녀가 18살이 되었죠. 그이와 저는 아주 달라요. 저도 의도적으로 제 주변에 있는 사람과 다른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레이스가 1살 반 정도 되었을 때 그이와 제가 결혼했죠. 

팟캐스트: 그때 나이가 37세 정도 되셨지요?

수: 38세였습니다. 

팟캐스트: 노산이라 생길 문제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으셨나요?

수: 확실히 제가 고위험군에 해당하긴 했어요. 거기에 전 희소병 환자이기도 해요. 아주 희귀한 병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저번에 입양아 포럼에 같은 병을 가진 사람에 관해서 물어보려고 하다가 까먹었습니다. 국소피부경화증이라고 하는 병이에요. 내부 경화증과 비슷하지만, 내부 경화증은 장기까지 경화시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는 병이지만, 제가 가진 병은 피부가 경화되고 근육이 위축되는 병입니다. 현재 제 다리 중 하나가 다른 다리보다 더 커요. 국소피부경화증을 앓고 있는 다리가 다른 다리보다 더 작고, 피부가 수축한 상태이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그걸 보고, 제가 화상을 입었다고 인식하고는 합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피부가 더 신축하지 않는 병이죠. 그리고 제 복부 피부가 더 신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생각했어요. 임신하고 나면 복부가 부풀어 오르기 마련이니까요.

팟캐스트: 하지만 복부의 피부가 늘어나지 않으니 문제가 되었군요?

수: 제 복부 피부의 반은 신축성이 남아 있었지만, 나머지 반이 신축성이 없었죠. 어떻게 제 육체가 제 임신에 반응할지 흥미로웠습니다.

팟캐스트: 그 국소피부경화증은 나이를 먹으면서 어떻게 변화하죠? 수 씨가 신경 써야 할 정도의 중병인가요?

수: 그렇게 심각한 병은 아닙니다. 제가 병원을 방문하면 의사들에게 제 질병에 대해서 가르쳐 줘야 할 정도예요. 의사도 잘 모르는 질병이죠. 제가 4살 때 이 병이 있다고 진단을 받았고 자라면서 조금씩 퍼지긴 했지만, 그렇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위험할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죠.

팟캐스트: 아주 어렸을 때 그 병 진단을 받았는데, 부모님이….

수: 제 부모님이 걱정했는지 궁금하세요? 당연히 걱정하셨죠. 사실 관련 수술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 다리들의 길이가 맞지 않아서 의사들이 다리 성장을 멈춰서 다리 길이를 맞추기 위한 수술을 언제 해야 할지 서로 토론하고 있었죠. 저의 긴 다리 쪽의 성장을 특정 시기에 멈춰서, 제가 성장을 끝낼 무렵에는 제 두 다리의 길이가 비슷하게 만들려고 했어요. 어머니가 한국에서 한국인 성장 표를 가지고 와야 했습니다. 미국 의사들이 “한국인이라 성장 속도가 다를지도 모른다.”라고 우려를 표현했기 때문이죠. 의사들이 생각보다 더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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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국소피부경화증을 가진 사람들은 증세의 사진을 올리기도 하는데, 그 사진을 보면 약간 놀라요. 좋은 방향으로 놀랍니다. 제 다리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다리를 본 적이 없죠. 한국 입양아들과 처음 만났을 때나, 다른 사람과 공통점을 찾았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는 합니다. 현실에서는 국소 피부경화증을 앓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죠. 한국 입양아의 경우는 과거에 한국 입양아를 만난 적이 있지만, 그 사람들이 한국 입양안지 자각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한국 입양아 사회와 만났을 때의 기분과 국소경화증 환자 집단과 교류했을 때의 기분이 비슷하군요?

수: 네. 저와 비슷한 다리를 가진 사람을 보는 과정이 그랬죠.

팟캐스트: 확실히 그렇네요. 공통점을 가진 다른 사람과 만나게 되는 일이니까요.

수: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국소피부경화증이 얼마나 희소병인지 알고 있나요?

수: 초 희소병입니다. 숫자 자체는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제가 방문한 의사 대부분이 들어보지 못했을 정도로 희귀하죠. 

팟캐스트: 수 씨가 입양 부모와 연인 관계였다는 사실을 다시 짚고 싶네요. 제가 만난 입양아 중에서는 처음으로 입양 부모 연인을 두셨거든요. 물론 제가 아는 한국계 입양아 중 몇 명이 입양 부모가 된 경우가 있긴 하지만, 수 씨의 경우에는 그 당시의 연인이 입양 부모였고, 다인종 간 입양이었죠. 그 관계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수: 제 전 여자친구는 관련 문화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죠. 그래서 저와 여자친구의 관계가 제 한국인 입양아의 특성과 연관이 있었는지 항상 궁금했어요.

팟캐스트: 아 묻고 싶었던 주제이네요. 이상하다고 느꼈나요? 이상했나요?

수: 입양 부모가 입양아와 관계를 한다는 사실이 말이죠?

팟캐스트: 한국계 입양아와 같이 연인 관계를 맺고 있는데 중국에서 두 명의 아이를 입양했다니, 백인 구세주 콤플렉스와 관련되어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수: 음…. 전 여자친구가 입양하기로 한 이유 중 하나는 여자친구가 미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같이 생활하면서 확실히 그 미혼 상태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했고, 그때 저는 미혼 상태에서 여자친구가 부모가 될 방법은 입양밖에 없어서 입양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죠. 여자친구가 부모가 되기 원해서 입양했지,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입양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 전 여자친구와 저의 관계가 지속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 2명의 관계가 비밀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저와 제 전 여자친구의 직업 때문에 서로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발표할 수 없었죠.

팟캐스트: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전 여자친구 집에서 수 씨가 방을 빌리고 있다고 생각했나요?

수: 네. 아이들 돌보는 일도 도우면서 같이 동거하고 있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교회에서 목사로 일하고 계시죠?

수: 네.

팟캐스트: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숨겨야 했던 이유가 목사 일 때문이었나요?

수: 네. 그때 교회 상층부에서는 그런 관계를 허용하지 않았거든요. 

팟캐스트: 동성연애나 결혼을 할 수 없었군요. 미국 복음주의 루터 교회(ELCA, 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America) 이었나요? 

수: 네. 공식 지침이 우리가 헤어지고 난 뒤 1년 뒤에 바뀌었죠.

팟캐스트: 그런…. 그 비밀 관계가 연인 관계가 실패한 원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적어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나요?

수: 아뇨. 궁극적으로 비밀 관계 때문에 우리 관계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처음부터 우리 관계가 건강하게 시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죠. 같이 상담도 받아보고 우리가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해보려고 노력을 해야 할지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죠.

팟캐스트: 왜 목사의 길을 걷게 되셨죠? 항상 목사의 길에 관심이 있었나요?

수: 아뇨. 제가 처음으로 목사에 진지하게 접근하기 시작했을 때는 대학교 졸업하고 난 뒤 사회 정의와 관련된 일을 하려고 했을 때였죠. 저는 사회 정의적 활동이 신앙과 영적 활동과 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어요. 그때는 제는 컴퓨터 공학 업계에서 일하면서 돈도 많이 벌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었죠. 하지만 공부해야 할지 몰랐어요. 신학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지만, 목사가 되고 싶었는지도 몰랐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다음 문이 열리고 다음 단계를 밟다 보니 목사가 되었죠. 지금도 제가 목사가 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서 기반이 필요하고, 그 기반은 사람과의 관계에 기반을 둬 있죠. 답을 아는 일보다는 같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요. 초등학교 때 저는 행복한 아이였죠. 그래도 다른 애들과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다르다고 느꼈죠. 입양아였기도 했지만, 주변 사람들보다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뉴욕에 스카스데일과 이스트체스터의 경계 지역에 살고 있었으니 여러가지 면모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느꼈죠. 입양아 경험이 제가 사람과의 관계를 추구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제 부모님은 제 오빠가 절 좋아하기를 원했고, 깊은 관계를 원했다고 했어요. 하지만 오빠가 가지고 있던 문제가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게 했죠. 오빠가 저를 버렸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오빠와 제 관계가 아예 멀어지지는 않았지만, 오빠가 먼저 저에게 연락하지는 않아요. 오빠에게 이메일을 하거나, 페이스북으로 연락하면 반갑게 맞아 주긴 하지만 정기적인 교류를 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오빠와 저는 서로를 좋아해요. 하지만 서로 차이가 심하게 나죠. 최근 오빠에게 입양아의 경험에 관해서 물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빠의 친가족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지 물어보고 싶었죠.

팟캐스트: 교회에서는 인연을 느끼나요?

수: 교회에서 인연을 느낀다고 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교회를 통해서 만나는 사람과 인연을 느낍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앙을 가지고 신앙과 영적 여행을 떠나면서 느끼는 인연을 느끼죠. 

팟캐스트: 신앙과 영적 경험이 수 씨에게 아주 중요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수 씨가 그 두 가지 요소에 대해서 말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요? 항상 수 씨 곁에 있으면서 수 씨가 어려운 경험을 할 때 도와줬나요? 

수: 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 적은 없어요. 여러 시점에 기독교와 관련해서 여러 문제를 겪기도 했지만, 제 신앙심은 하나님을 성령으로 믿고 기반이자 힘이라고 생각해요. 전 하나님이 여러 가지 일을 일어나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비극이나 나쁜 일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나타나서 돕는다고 생각하죠. 미국 흑인 여성의 경험에 기반을 둔 여성주의 신학에서 로렌 윌리엄스가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설명할 수 없는 일 대부분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죠. 적어도 제가 설명할 수 없는 좋은 일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과의 인연이 만들어지는 일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죠. 제가 한국 문화와 배경을 배우게 된 이유는 한국에서 태어나 8살에서 10살 사이에 미국에 이민을 온 한국 여성과 만나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색 신앙 프로그램에 같이 참여하고 있었죠. 사색 신앙은 침묵 속에서 신앙을 생각해보는 활동이었습니다. 그분도 모태 신앙이고 다시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어요.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만난 뒤에 서로 친해졌죠. 그 친구를 통해서 영적 탐구, 설교, 신학에 흥미가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 사회와의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20년 전에도 이 사회와 관계를 맺었지만, 그때는 관심이 없어서 거리를 뒀습니다. 제가 한국계 입양아라는 이야기를 꺼내자, 80명의 회원 중에 4명의 아시아계 다인종 간 입양아들의 대화를 나누게 되었죠. 지금 현재 다음 단계의 길은 저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계획을 하고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적어도 그 길에 대해서 열린 태도를 유지하고 어떤 길이 될지는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