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Season 4 (시즌 4)

Season 4, Episode 15: 선아 마리 레이번

Audio available Feb. 22, 2021 at 12:00 ET.

한국계 입양아 선아 마리 레이번 (38세)는 생후 4개월 만에 한국에서 미국 테네시주로 입양되었다. 양어머니가 어렸을 때 돌아가시고, 학교에서 흑인도 백인도 아닌 채로 삶을 헤쳐 나가야 했던 레이번 씨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감정을 숨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육자, 연설자, 코치, 팟캐스트 진행자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최근 레이번 씨는 개인적 정체성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름을 한국 정체성을 반영하도록 바꾸었다. 

선아: 안녕하세요! 선아 마리 레이번이라고 합니다! 38세이긴 한데, 나이 기억하는 게 어렵네요. 시간이라는 게 다 그렇죠. 뭐. 현재 제가 자란 고향인 테네시주 멤피스에 돌아와서 지내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테네시주에서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선아: 전 멤피스에서 자라났는데 멤피스는 흑인과 백인의 비중이 높은 도시에요. 역사적으로 흑인과 백인의 비중이 높은 도시였죠. 물론 현대에 들어서서는 좀 더 인종적으로 다양해지고 있죠. 히스패닉 인구도 늘었고, 아프리카 흑인계 인구와 아시아계 인구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멤피스에는 중국계 인구도 많았죠. 물론 역사적으로 중국계 멤피스인들은 무시되어 온 경향이 있어요. 이야기가 딴 길로 샜으니 다시 돌아가면, 제가 자란 동네는 랄리라는 동네였는데 흑인과 백인 비중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제 학교, 동네에서는 백인이나 흑인이 아닌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죠. 자라면서 백인에 섞이거나 흑인에 섞이거나 둘 중 하나를 정해야 했어요. 적어도 제가 사는 동네는 다른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제가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다른 멤피스 출신 한국계 입양아를 만났어요. 그리고 그가 말하길 “입양아 단체와 활동하기도 했고…” 그걸 들은 저는 “뭐요?”라고 답했죠. 제가 경험해보지 못해서 이야기를 들어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팟캐스트: 선아 씨가 다닌 학교는 자발적 인종적 구분이 되어 있었나요? 백인들과 흑인 애들이 서로 따로 놀았나요? 아니면 좀 더 통합된 분위기였나요? 

선아: 살면서 여러 학교에 다녔죠. 그래서 다닌 학교마다 답이 달라요. 초등학교 때는 제가 유치원, 초등학교 1학년, 2학년을 다 다른 학교에 다녀서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백인 위주의 초등학교를 계속 다녔죠. 거기에는 제가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자발적인 분리가 있었어요. 중학교는 아주 큰 중학교에 갔죠. 다양한 집단의 아이들이 있었어요. 인종, 취미, 음악, 기타 등으로 집단이 나뉘었죠. 그래서 중학교 때는 확실히 인종 분리가 있었죠. 고등학교는 제 동네에 있는 고등학교에 갔습니다. 거기는 대부분 흑인이 사는 곳이었어요. 그래서 다른 인종들이 인종적 분리가 일어날 정도로 많지 않았죠. 물론 2명 정도의 백인 애들이 따로 돌아다니긴 했지만 서로 사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애들을 제외하면 흑인이 아닌 애들이 너무 적어서 아예 따로 집단을 만들 수 없는 수준이었죠. 

팟캐스트: 그때는 어떤 정체성을 가지셨다고 생각하시나요?

선아: 살면서 다양한 정체성을 거쳐 갔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가 어디에 맞는지 찾으려고 생각했죠. 중학교 이전까지는 백인 친구들과 더 공감하고 더 맞았다고 생각해요. 백인 가족들과 같이 자라났고, 백인 정체성이 더 강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고등학교를 골라 입학할 수가 없었어요. 특수 교육 제도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점수가 나빠져서 떨어져 나왔죠. 중학교-청소년기의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정체성 문제, 어머니의 사망, 거대 중학교 적응 문제가 있어서 결국 제가 배정받은 고등학교에 갔어요. 그 고등학교는 흑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제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죠. 수많은 흑인 친구들을 보면서 그들의 정체성, 친구들, 인연, 사회에 대해서 배웠고, 사고방식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중학교는 국가적으로 인정받는 중학교였고 따라서 자원도 많았죠. 하지만 제 지역 학교를 와보니 사람과 예산이 적은 공립학교였어요. 시점의 변화를 겪으니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공평한 기반을 가지고 공평한 기회를 받는다는 관점이 무너졌죠. 모든 것에 대한 사고방식이 바뀌었어요. 그리고 인종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차이점은 인종 구성밖에 없었거든요. 

팟캐스트: 사람들이 선아 씨를 어떻게 인식하셨죠?

선아: 고등학교 때는 제가 입양아였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제가 흑인 위주 학교의 유일한 아시아계였기 때문이었기 때문에 절 아시아계라고 인식했을 뿐이었죠. 반면에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똑같은 아이들과 계속 학교를 같이 다녔기 때문에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서로 가족들에 대해서 알았고, 형제자매가 있는지, 이혼했는지, 부모 혼자 키우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았어요. 그래서 제 초등학교 친구들은 제 어머니가 죽었고,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제 입양아의 정체성이 더 컸죠. 사람들이 제 가족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학교에 아주 다양한 가족 형태가 있었고, 서로 정보를 알고 있어서 정체성에 하나 더 추가된 정도였습니다. 제 입양 사실이 한번 언급되었던 일은 초등학교 시절에 친구와 말다툼을 했을 때였어요. 그 애가 저에게 “내 엄마는 날 사랑해서 입양 제도에 맡기지는 않았다고!”라고 말했죠. 물론 우리가 그런 생각을 이미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고, 애가 저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한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애는 할머니가 키우던 애였어요. 자기 자신의 상황을 감추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 같았죠. 그 애도 어머니와 살고 있지 않았고, 양육할 수 없어서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그 애와 다르게 백인 부모님이 학교에 데리러 오거나 하는 일들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숨길 수 없었고, 그래서 이런 말을 하기 쉬운 상대였어요. 

팟캐스트: 애들과의 소속감 문제 때문에 동네 고등학교로 진학했을 때 백인 부모님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나요? 

선아: 아주 좋은 질문이네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다니던 중학교를 계속 안 다녀도 됐기 때문이죠. 제가 중학교와 연계된 고등학교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의 친구들과 사이가 틀어졌기 때문이죠. 하지만 제가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그 친구들이 마음에 안 들어도 같이 다녀야 하고 고등학교 때까지 봐야 했습니다. 같은 학교에 다닌다면 계속 봐야 할 그 친구들과 헤어지고 새로운 학교에 갈 수 있어서 기뻤을 뿐이죠. 

팟캐스트: 새롭게 선아 씨의 이미지를 바꿀 기회였군요?

선아: 그랬습니다. 사실 아는 사람이 없으니 새로운 학교에 가는 일이 매우 무서웠어요. 하지만 동시에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가 말한 것처럼 새로운 시작을 할 기회였죠. 그래서 최대한 즐겁게 새로운 학교생활을 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중학교 때 영재 교육을 받았을 정도면 성적 우수자였죠?

선아: 네.

팟캐스트: 그래서 성적 우수자나 모범생으로 규정되거나 관련 선입견 문제를 겪은 적이 있나요? 

선아: 제가 어렸을 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절 포함해서 아시아계가 2명 밖에 없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좀 더 신경 쓰이기 시작했죠. 아시아계이니 성적이 좋겠지, 좋게 나오겠지라는 선입견과 기대를 받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선생님이 저를 1학년 더 빠르게 월반하게 하려고 했죠. 제 독해 능력 덕분에 부모님에게 월반을 권유했고, 월반하게 되었어요. 아버지가 말하기를 나이 많은 애들 사이에서 적응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적응하기 어려운 이유는 나이 많은 애들 때문이 아니었어요. 제가 멤피스에서 사는 아시아계 입양아였기 때문이었죠. 나이 문제는 그리 큰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팟캐스트: 많은 입양아는 인종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자랐죠. 

선아: 그랬죠. 인종은 최대한 언급되지 않았고, 문제가 있다고 해도 우리 가족 내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문제였습니다. 인종 문제는 흑인 사회에서 일어나는 흑인 문제이지, 우리가 직접 겪는 문제는 아니었죠. 전 이 나라는 기회의 땅이며, 평등의 땅이니, 열심히 노력하고 일하면 뭐든지 이뤄 낼 수 있고, 다른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개인의 책임과 선택 문제라고 교육받고 자랐어요. 그리고 배운 사실을 전부 다 믿었습니다. 전 그런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고, 제 부모님이 저에게 말하는 일이었고 전 제 부모님을 믿었죠. 어른이니까, 삶이 그런 식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인식 자체를 못하거나, 나중에나 인식해서 적응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제가 어렸을 때 그러한 선입견을 깨부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렸을 때 사실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전에도 들은 적이 있는데, 아주 힘드셨겠군요? 그때 선아 씨가 외동딸이셨나요?

선아: 네. 외동딸이었고 아주 완벽히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어머니 관련 문제를 다 겪는 느낌이었어요. 어머니가 제가 9살이었나 10살 때 유방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이미 치료할 수 없는 시점까지 전이가 되어 있었죠. 그래서 부모님은 어머니가 최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기로 했어요. 그래서 제 어머니의 암이 진행되면서 어머니가 아니게 되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습니다. 아이로서 어머니가 하는 말이나, 어머니가 하지 못 하는 일 등, 어머니가 변화해서 이해할 수가 없는데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했죠. 아주 힘든 경험이었어요. 거기에 더해서 제가 이러한 슬픔에 대한 대응력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않았고, 그 뒤 몇 년 동안 울지 않았어요. 따라서 억압과 관계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가 뒤따라왔죠. 정신적으로 아주 불안정한 몇 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또 다른 어머니를 잃었다는 감정과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버림받은 기분을 느껴야 했어요. 

팟캐스트: 그때 또 다른 어머니를 잃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셨나요?

선아: 아뇨. 그렇게 인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는 이미 입양에 대한 여러 가지 억눌린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죠. 제가 이러한 감정을 인식하게 된 이유는 제 아버지가 저를 정신 상담을 하게 해주었기 때문이었어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제 감정을 이해하고 인정하게 도우려고 하는 상담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죠. 분노와 슬픔 같은 아주 기본적인 감정부터 인식하고 인정하는 일부터 시작하게 되었고, 상담사는 감정을 찾아서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이야기를 하셨어요. 이게 필기 형식이었는지, 구어 형식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단어 연결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온 단어 중 하나가 어머니였어요. 어머니와 여성 관련 단어가 잔뜩 있었지만, 그 단어들과 제가 연관시킨 단어들이 전부 부정적이었죠. 무책임하다, 접근 불가능하다, 등 나쁜 단어들로 가득했습니다. 어머니, 여성, 부모,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감정이 가득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상담 자체도 매우 짧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제가 도움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상담사한테서 상담 치료사에게 인계해줬죠. 첫 번째 상담사는 기본적인 상담을 해주시는 분이셨고, 이분은 진짜 상담 치료를 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상담 치료사가 저에게 처음으로 한 말은 만약에 상담 치료사를 계속 바꿔야 한다면 문제는 저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었죠. 전 고작 어린 애였고 10명이나 20명을 넘어갔다면 모를까 이번이 제 두 번째 상담사였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이상했어요. 그래서 그 상담 치료사에게는 다시 가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잘하셨네요. 

선아: 네 듣고 나니 어이가 없었어요.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거나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버림받는 기분에 대한 수용 절차를 시작하셨던 것 같네요.

선아: 네.

팟캐스트: 삶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계셨으니까요.

선아: 그렇죠.

팟캐스트: 무의식적으로 친어머니에 대해서도 그런 감정을 가졌을 수도 있었겠네요.

선아: 네 그렇습니다. 그때는 친어머니에 대해서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거든요. 정확히 말하자면 인식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은 하고 있지 않았죠. 그 시점에는 제 삶에 두 명의 어머니를 둘 정도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아버지와는 친밀한 관계였나요?

선아: 네. 아주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시는 분은 아니었어요. 적어도 언어적으로는 그랬죠. 설명하기 어렵지만, 아버지는 항상 절 사랑하신다고 하고, 현재는 다른 주에 살고 있지만 직접 만나면 애정 표현도 하고, 서로 안기도 하고, 제 삶의 중요한 일에 반드시 참여하셨습니다.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모든 행사를 보시는 부담스러운 아버지였어요.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런 애정이 필요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여러 연극, 연주회가 있었고 아버지는 제가 참여하는 연극과 연주회에 항상 참여하셨죠. 전 치어리더였고 아버지는 제가 나가는 모든 스포츠 대회에 참가하셨고, 댄스팀에도 참여했는데 아버지는 거기에도 계셨습니다. 초등학교 때 일인데 멤피스 오페라와 공동 공연을 하게 될 기회가 있었어요. 그리고 부모님에게 표를 나눠줬는데 가장 윗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공연할 때 그 윗자리를 보니 아버지가 몸을 흔들면서 우리 공연을 보고 있더군요. 아주 부끄러웠죠. 아버지는 항상 행사에 참여하셨습니다. 하지만 애정을 말로 표현하지 않았어요. 어떤 부모님은 말을 하는 편이지만, 우리는 안 그랬죠. 우리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그러한 관계가 지속하였나요? 

선아: 약간씩 감정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긴 했죠. 하지만 자주 나누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들어서 조금 늘어나긴 했어요. 4년 전에 아버지가 재혼하셔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죠. 아버지가 재혼하신 여성분은 아이가 있어요. 그리고 재혼하시자 아버지의 사고방식이나 기분이 바뀌는 것을 느꼈습니다. 대화 관련해서 좀 더 열린 태도를 보이시게 되어서 흥미로워요. 아버지를 단순히 아버지가 아니라 똑같은 어른으로 보는 경험은 이상하지만 동시에 아주 재밌었죠.

팟캐스트: 그래서 그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와 선아 씨뿐이었군요? 선아 씨가 자라는 동안 재혼도 안 하셨나요?

선아: 네. 아주 오랫동안 둘이서 지냈죠. 뭐 제가 학사학위를 따고 난 뒤에는 조금 데이트를 시작하셨지만, 그렇게 진지하게 만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그저 우리 둘뿐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아버지와 단둘이 다니다 보니 선아 씨와 아버지를 보고 선아 씨를 외국인 아내로 생각하지는 않았나요? 

선아: 네. 그런데 그러한 착각을 제 청소년 초기부터 받았어요. 아주 끔찍한 일이지만 청소년 초기에 아버지와 함께 장을 보러 갔던 일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은퇴한 해병이시라 군부대에서 살고 있었어요. 군부대 내부라서 더 그런 오해를 하기 쉬웠던 것 같습니다. 군인들이 아시아계 아내를 두는 일은 흔했고, 제 앞이나 뒤의 사람도 그런 식으로 오해를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소리를 듣고 좀 끔찍했죠. 아시아계 여성들이 젊어 보이긴 해도 전 1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아주 기분 나쁜 일이었습니다.

팟캐스트: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좀 해보죠. 그때 친구들이 대부분 흑인이었나요?

선아: 네 그렇습니다. 친구 만드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긴 했죠. 물론 애들이 흑인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친구를 만드는 데 관심이 없었어요. 제가 같은 중학교와 연관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아서 기뻤던 이유는 제 친구들 전원이 가짜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청소년기에 있어서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저에게는 꽤 충격이었습니다. 전부 거짓말을 하고, 서로 뒤에서 욕을 했죠. 이게 우정이라면 이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관계와 관련된 문제가 많아서. 고등학교 시작할 때는 학교에 가고 수업만 듣자고 생각했습니다.

팟캐스트: 주변을 경계하셨다는 말이군요?

선아: 네. 하지만 결국 친구를 만들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제 친구가 된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학교에 유일한 아시아계 여자애와 친구가 된다는 일이 어땠을까요? 그 애에게 말을 걸어보면 이상할지 아니면 평범할지 의문을 가졌나? 이라는 질문을 하게 되죠. 

팟캐스트: 선입견 문제가 있었나요? 아니면 남자애들 관련해서 페티쉬 문제도 있었나요? 

선아: 제가 과거를 되돌아보니 그러한 문제가 많았죠. 제 고등학교 1학년 때 제가 그 학년에서 유일한 아시아계 학생이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 같이 편견 섞인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가라테, 쿵후, 태권도를 할 수 있느냐, 코니 청(Connie Chung, 미국의 유명 아시아계 기자)이나 브루스 리(이소룡)의 친척이냐, 가족이 세탁소, 슈퍼마켓, 중국 레스토랑을 운영하느냐, 그 레스토랑에서 사느냐, 거의 매일 같이 그런 소리를 들어야 했죠. 다행히도 제가 말을 잘하는 편이었기에 때문에 그런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제가 이러한 말에 쉽게 상처받거나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라 다행이었죠. 사람들이 저에게 익숙해질 때까지 그런 소리를 계속 들어야 했어요. 

팟캐스트: 남자애들 관련해서는 페티쉬 문제가 있었나요?

선아: 예. 하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아시아계 여성과 성적 판타지에 관해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랬죠. 하지만 동시에 남자애들이 저와 데이트를 하고 싶어서 하는 애들이 없었기 때문이 아녔어요. 아시아계 여성이 성적으로 개방되어 있다던가, 순종적이라던가, 남자애들이 하자는 대로 하자던가, 그러한 이야기가 들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누구도 저와 데이트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터부 취급이었나요?

선아: 그럴지도 모르죠? 그래도 아무도 데이트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하면 안 되겠네요. 하지만 사람들이 저에게 한 성희롱이나, 성적 농담이나, 헛소리와 사람들이 저와 데이트하려고 하는 비중은 반비례했습니다. 

팟캐스트: 그때 매력적이라고 자기 자신을 느꼈나요?

선아: 아뇨. 성적 대상화가 되었지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죠.

팟캐스트: 둘은 아주 다른 일이니까요.

선아: 그렇죠. 성적 대상화가 된 기분은 들었지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저 자신과 제 외모에 만족하거나, 기쁘거나, 편하지 않았죠. 

팟캐스트: 그때부터 인종 정치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보시나요?

선아: 네 그렇다고 생각하죠. 제가 학교에 가서 첫 수업을 들었을 때부터 제공되는 정보, 자원, 교과서, 기회의 차이를 보고 확실히 그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공평하지 않았으니까요. 모든 사람이 동등한 기회와 선택지를 받는다고 배우면서 자랐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매우 화가 났죠. 그때의 저는 이미 충분히 화난 아이였지만, 그 분노가 어떤 초점에 맞춰졌다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팟캐스트: 학교들 사이에서 느낀 차이점들이 무엇이었나요?

선아: 우선 교과서들부터 달랐죠. 우선, 제가 다니던 중학교는 교과서가 전부 신품이었습니다. 반면에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교과서가 충분치 않거나, 오래된 교과서나, 아니면 너덜너덜한 교과서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거기에 더해서 제 고등학교에는 급식실이 없었습니다. 지자체의 관리 구역이 바뀌면서 관련 건설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급식실이 건설되지 않았던 거죠. 아이들이 밥을 먹을 권리도 없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팟캐스트: 시설들이 관리되지 않거나, 좋지 않거나….

선아: 그렇죠.

팟캐스트: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일도 있죠.

선아: 네 그렇습니다.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죠.

팟캐스트: 선아 씨,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시점이 고등학교 이후였나요?

선아: 고등학교 졸업하고 난 뒤 한참 지난 뒤였습니다. 멤피스에 입양아들도 많았고, 아시아계 집단이 교외에 얼마든지 있다고 들었지만 제가 자란 동네와 제가 살아가는 삶에는 없었어요. 그래서 혼자서 집단의 정체성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아시아인을 살면서 몇 명 만나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겠어요? 한국인을 만난 적도 없는데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질 수 없죠. 제 학교에 중국/백인 혼혈인 아이가 있었고, 일본계 쌍둥이를 알고 있었지만, 정작 한국계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계 정체성의 뜻을 몰랐어요. 그래서 대학교를 멤피스로 진학했습니다. 멤피스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가게 되었어요. 그렇게 한국계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서서 한국인들과 같이 서 있는 경험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죠. 

팟캐스트: 한국에 관심이 있어서 교환학생을 신청하셨던 거죠?

선아: 네. 관심이 있었어요. 하지만 자라면서 변화했죠. 제가 어렸을 때는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관심을 충족할 방법이 없다면 관심이 떨어지게 되죠. 인터넷이 생기기 전이니 제가 도서관에 가서 입양, 입양아, 제 경험에 관한 책을 찾아서 읽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제 지역 도서관에는 관련 정보가 전혀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입양아에 의한 정보는 없었겠군요.

선아: 네. 적어도 그 시기에는 없었죠. 제 부모님이 말해주실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었고 입양에 대한 기억은 매우 달랐습니다. 그분들은 한국을 개발도상국으로 인식하셨으니까요. 정보를 찾을 수 없으니 물어보지 않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연설을 들었어요. 시스터 소울자(Sister Souljah, 미국의 유명 흑인 운동가)의 연설이었는데 그분이 우리 학교 교정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논란이 될 정도였습니다. 흑인 학생과 대담을 하는데 “역사, 뿌리와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죠.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 무언가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라고 생각했죠. 다음 날에 기숙사에 돌아와 보니 교환학생 홍보 포스터가 붙어 있었습니다. 광고 문구가 “아시아를 상상하라!” 이었죠. 그걸 보니 좋아! 상상하자! 이라고 생각하고 바로 교환학생을 신청하러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 담당관이 교환학생을 하고 싶다고 하자 매우 기뻐하면서 친절하게 도움을 줬어요. 어디를 언제 어떻게 갈지 계획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국에 가고 싶고, 다음 학기에 가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자 그분께서 “좋습니다!”라고 답했죠. 그렇게 해서 다음 학기에 한국에 갈 수 있었습니다. 

-광고-

선아: 제가 한국에 가게 되고, 장학금을 받아서 갈 돈도 있었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니, 제 삶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어요. 한국에 가면 이걸 하고, 하지 말라는 충고를 해줬고, 그걸 들으니 전문가들이 이렇게 많았으면 제가 자라날 때 이야기를 해주지?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 그런 이야기를 최대한 듣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죠. 선입견을 품고 가서, 그 선입견과 한국을 비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국 방문에 대해서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비행기에 타고 나서, 주변 사람들이 다 한국인이고, 승무원들이 한국어로 말을 걸기도 했습니다. 제 옆에 앉아 있던 남성이 저를 도와줬어요. 제가 뭐가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뭔 음식인지도 모르고, 뭐가 일어나는지도 몰랐죠. 

팟캐스트: 김치를 보고 놀라기도 했나요?

선아: 네. 김치가 뭐지? 이게 다 뭐지, 빨간 소스는 뭐지? 이라고 놀라면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아주 신기한 곳이었지만 동시에 제가 어디로 가야 할지, 말을 하는 방법도 모르고, 심지어 공항을 나가는 방법도 몰랐죠. 그렇게 길을 헤매다 제 가이드를 해줄 학생이 와서 만나서 대학교로 가게 됐습니다. 수원에 있는 아주대학교와의 교류 프로그램이라,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꽤 오랫동안 가야 했죠. 버스를 타고 가면서 소소한 것들이 기억이 나요. 주변 사람들이 전부 비슷하게 생겼고, 버스 운전사도 저와 비슷하게 생겼고, 청소부들도 저와 비슷하게 생겼고,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평범한 일을 하고 있었고 그 경험이 매우 편안했습니다. 

팟캐스트: 제가 한국에 돌아갔을 때는 너무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고 있었고, 그래서 한국을 경험하고 제 뿌리를 찾을 수 없었죠. 물론 제가 한국에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한국을 경험하고, 연결을 만들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선아: 네.

팟캐스트: 선아 씨도 그러한 방어적인 태세로 한국에 접근했나요? 

선아: 네. 제가 한국에 갈 예정이었지만, 한국에 가서 제 뿌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 가족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제가 매우 방어적으로 접근했다고 볼 수 있겠죠. 제가 한국에 돌아간다고 하니 많은 사람이 갑자기 한국 전문가가 된 다음에 하던 이야기가 친어머니를 찾을지, 진짜 가족 조사 여부에 관해서 물어보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저와 제 가족에 대해서 생각하던 관점이 튀어나왔고,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문제가 있긴 했지만, 전 여러 명의 어머니나 여러 가족을 허용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해 있지 않았어요. 제가 제 친가족을 찾으면, 제 입양 가족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했죠. 그분들에게 모욕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에 제가 어디에서 왔고, 한국에 대한 정보를 알기 위해서 갔죠.

팟캐스트: 한국 첫 방문에서 재밌던 일은 있었나요?

선아: 한국 요리를 좋아해서 최대한 많이 먹으려고 했어요. 성공해서 미국에 돌아왔을 때 살이 7kg 나 쪄왔습니다. 한국 음식은 훨씬 싸고 접근성도 편했죠. 길마다 온갖 음식점이 있고 그걸 전부 먹었어요. 삼겹살은 천국의 선물같이 맛있고 대단했습니다. 교수님과 마셔도 괜찮고, 학교에서 마셔도 괜찮은 소주도 좋았어요. 음식의 종류가 아주 많았죠. 거기에 같이 지낸 사람들도 좋았습니다. 20명이 넘는 국제 교환학생들이 있었고, 같은 기숙사에서 지냈죠.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는 일도 아주 즐거웠어요. 미국에서 온 애들이 있었고, 독일에서 온 애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온 애들도 있었죠. 그리고 여행하기 쉬운 곳에 있었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제주도에 가서 아름다운 풍경도 봤고, 등산도 했고, 아주 아름다웠어요. 여행하기 쉽고, 음식도 맛있고 한국의 생활이 아주 좋았습니다. 좀 더 길게 지내고 싶었어요.

팟캐스트: 새로운 세계가 열린 기분이셨군요?

선아: 네 그렇죠. 음식을 제외하고 한국에 가서 가장 좋았던 일은 눈에 띄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군중 속에 섞여 들어갈 수 있었어요.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거나, 이상한 질문을 하거나 단순히 사람이 될 수 있었죠. 그냥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었어요. 그 사실에 매우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팟캐스트: 처음으로 맞아 들어갔으니까요?

선아: 네 그렇습니다. 최초로 주변과 섞여들어 갈 수 있었죠. 

팟캐스트: 다른 입양아들과도 만난 적이 있나요? 교환학생 중의 한 명이 입양아였나요? 아니면 한국에 와있는 입양아를 만났나요?

선아: 아뇨. 만나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한국인들이 선아 씨에게 어떻게 반응했나요?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나요?

선아: 아뇨. 사람들이 전 보고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절 확실히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어요. 길을 걸어가다 보면 사람들이 길을 물어보더라고요. 그럼 제가 한국말을 못한다고 답하고는 했죠. 그럼,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절 보더니 사과했습니다. 제가 알게 된 학생들은 아주 한국인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했죠. 그 애들이 제가 더 한국인 같게 느끼게 하려고 거짓말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기뻤고 한국인 얼굴을 가지고 있다니 대단한 느낌이었습니다. 국제 입양아는 주변에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죠. 한국어가 내부에 잠재되어 있으니 노력하면 한국어를 말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그리고 저는 그걸 듣고. 그래. 내가 내 뇌의 일부를 개방해서 한국어를 기억해내면, 내 4개월간의 지식이 나를 도와주겠지! 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어를 배우셨나요?

선아: 네. 모든 교환학생이 배웠죠. 아주 대단한 선생님이 있었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지낼 때는 한국어를 많이 배웠습니다. 저에게 아무도 영어로 말을 걸지 않았으니까요.

팟캐스트: 연습을 많이 하게 되었군요?

선아: 네. 연습도 많이 하고 많이 듣게 됐죠. 그래서 돌아다니고, 식사 주문은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하지만 다시 미국에 돌아오니 그 실력이 다시 녹슬어버렸어요. 

팟캐스트: 선아 씨는 똑똑하고 성실하니, 공부를 잘 하시는 데 익숙하시겠죠? 한국어 수업 때는 배우는데 고생을 하셨나요? 

선아: 아뇨.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어 배우는 것도 쉽게 하셨군요? 

선아: 네 쉬웠습니다. 전 한국어가 꽤 쉽다고 생각해요. 압박을 받지 않았죠. 몇몇 사람들이 뇌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는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어요. 한국어가 음성 언어라 한글을 배우고 나면 한국어를 읽어서 이해할 수 있어서 초기에는 배우기 쉬운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국어 전체를 배우는 일은 어렵지만, 적어도 단어를 배우는 일과, 문자를 배우는 일은 쉽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그 경험이 현재 직업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요?

선아: 그렇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하죠. 사회학자이자 한국 입양을 공부하는 제 직업의 기반을 닦았다고 보긴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니라고 생각해요. 해외에서 공부한 뒤 멤피스에 돌아오니 제가 지내던 환경은 똑같았죠. 수천 명의 한국인이 갑자기 제 삶에 추가되지도 않았고 한국계 입양아를 단 한 명만 만났으니까요. 그래서 현실적으로 한국계 입양아 사회가 존재하고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돌아왔을 때 그냥 일상으로 복귀한 셈이었으니까요. 그다음에는 계속 멤피스에서 몇 년간 지냈고, 그 결과 다른 한국인들이나 한국계 입양아를 만날 수 없어, 한국인이나 한국계 입양아의 정체성을 구축할 수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그렇다면 국제입양에 대해서 어떻게 공부를 시작하시게 되셨죠?

선아: 항상 생각하던 일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정보가 없었거든요. 자신과 관련된 정보가 전혀 없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입니다. 지역 사회에서도 존재하지 않고, 책에서도 드러나지 않고,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죠. 그래서 이런 공부를 해서 다른 사람들이 제가 느낀 기분을 다시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제 갈망을 이루는 데는 꽤 오래 걸렸어요. 전 사회학 교수가 되고 싶었고, 한국계 입양아, 인종, 정체성에 대해서 더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대학교를 2005년에 졸업했지만, 대학원에는 2012년에나 진학했죠. 전 교수가 되고 싶었고 박사학위를 따고 싶었지만, 제가 대학원을 진학하고 싶었던 대학교가 제 진학을 거부했습니다.

팟캐스트: 그렇다면 그 대학교와 대학원 진학 기간 사이에는 무엇을 하셨죠?

선아: 인생을 살고 취직해야 했죠. 먹고 살려면 일해야 하니까요.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했습니다. 취직을 사람들이 쉽다고 생각하는 데 어려운 일이에요. 제가 5월에 졸업했는데 8월에나 취직할 수 있었죠. 그리고 제가 취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리타가 멤피스를 강타했고, 그래서 그 피해 지원과 복구를 위해서 제가 서류를 넣었던 멤피스 사회 복지 시설 쪽에 예산이 배정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목록에 등록된 사람들을 고용하려고 했고 한창 구직 중이었던 저는 인터뷰하겠다고 했죠. 그리고 사람들이 제 전공과 맞는 일은 아니라고 했지만 저는 돈 버는 일이라면 저랑 맞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직접 도울 수 있는 일을 하고,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사회 복지를 할 수 있어서 기뻤죠. 그다음 아동 복지와 관련해서 일했습니다. 아동 복지는 수많은 행정절차와 체계 때문에 사람들을 직접 도울 수 없어서 아주 답답한 일이죠. 일하면서 제 꿈을 이루기 위해서 동시에 대학원에 지원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대학원들은 여전히 저를 거부했습니다. 일어나지 않을 일 때문에 삶을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계속 지원하는데도 떨어졌으니 결국 꿈을 놓아줘야 했죠. 꿈을 놓아주니 아주 자유로워진 느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가지에 계속 집중하고 있었는데 이제 여러 기회가 열렸고, 뭐든지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한다고 매일 술 마시고 슬퍼하는 것보다는 뭐든지 해보기로 했습니다. 사회 복지 관련 일을 그만두고 나이트클럽에서 한 4년 정도 일해봤죠. 

팟캐스트: 그럼 어떻게 다시 그 사회 복지로 복귀하게 되셨죠?

선아: 제가 나이트클럽과 관련된 삶을 살아보니 즐겁긴 했어요. 사람들은 나이트클럽과 바에 가서 즐기려고 나오죠. 동시에 사회와 정체성과 관련된 삶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는 정체성에 깊은 관심이 있었죠.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정체성을 어떻게 결정하는지, 그리고 첫인상과 기대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관심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사회학자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대학원에 지원해보기로 했어요. 만약에 받아들여지면, 대학원을 가고, 아니면 MBA를 따려고 했죠. 제가 일을 좀 해보니 단순히 NGO나 사회 복지가 아닌 사업에서도 일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대학원에 들어갈 수 있었죠. 좋아. 성공했으니 해볼까?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아: 제가 연구하고 싶은 주제인 정체성과 심리학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어떻게 조사해야 하는지도 알아서 입학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동시에 제가 알고 있는 교수님이 제 대학원 입학을 추천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죠. 대학원도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인맥 문제이고, 특히 아주 훌륭한 후보들이 많은 분야에서는 사람의 추천이 들어가야 합니다. 제가 연구하고 싶은 주제는 두 가지였는데, 운이 좋게도 두 가지 다 할 수 있었죠. 하나는 제 삶과 정체성 관리였고, 다른 주제는 한국 입양과 정체성에 관한 연구였습니다. 그 두 가지가 제 목표였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노력했죠. 하지만 그때에도 입양아 사회에 참여하지 않았고, 입양아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메릴랜드 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고 워싱턴 DC 지역에서 살기 시작하자 한국 입양아들과 만날 수 있었고, 제가 연구를 시작하면서 입양아 사회의 일부가 되기 시작했죠.

팟캐스트: 워싱턴 DC에서 얼마나 지내셨죠?

선아: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서 6년 동안 거기에서 생활했죠.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의문점을 가지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만, 입양아들은 입양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정체성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죠. 우리가 입양아 사회에 들어가면 그냥 또다시 맞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됩니다. 저도 그런 느낌을 느꼈어요. 어돕션 링크스 DC(Adoption Links DC, 워싱턴 DC 기반 입양아 단체)에 대해서 배우고 페이스북에 가입했습니다. 하지만 입양아를 직접 만나기는 무서웠어요. 아주 흔한 일이죠. 입양아들도 마음에 안 들고, 공통점이 없다면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지 않을까 무서웠습니다. 

선아: 하지만 직접 만나고 나니 공통점이 많았어요. 우리가 어렸을 때 일어난 입양이 우리를 하나로 엮어줄지 궁금했지만, 입양이 우리의 삶에 비슷한 방식으로 영향을 주더군요. 인종, 민족, 소속감, 미국인의 정체성 등이 비슷하게 우리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가 아시아인이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소속감, 시민권, 그리고 가족 구성에 대해서 생각하는 점이 비슷하더군요. 모든 일이 제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가족에서 유일한 아시아인인 경험, 사람들이 아버지와 결혼할 줄 알거나, 다른 입양아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편안하더군요. 그러한 경험들이 저 자신에 대해서 좀 더 만족할 수 있게 도와주었죠. 전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저 자신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제 백인 가족과 인종과 인종차별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동정을 받거나, 판정을 받지 않기 위해서 입양아들이 아닌 사람들과 입양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죠. 사람들이 입양 부모가 친부모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때도 많으니까요. 제가 누구인지 받아들였고,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었어요. 다른 입양아들과의 교류가 저 자신과 제가 누구인지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주었죠.

팟캐스트: 설명하기 어렵지만, 입양아들이 전부 타인이지만 서로에 대한 연대감이 바로 생겨나는 일이 있지 않나요?

선아: 네 그렇습니다. 설명하기 어렵죠. 입양아 사회 경험이 없거나 그렇게 깊게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한 연대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입양아 사회에 깊이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짜 그러한 연대감이 생깁니다. 왜 이러한 감정이 생기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었는데 이러한 연대감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흥미롭기도 하죠. 원래는 제가 친부모 조사를 하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친부모 조사를 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제 이름을 바꾸기도 했고, 이 경험을 하는 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팟캐스트: 입양아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보게 되는 느낌이네요. 친부모 조사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한국에 방문하는 일에 대해서 20세 때에 어떻게 하겠다고 마음을 먹어도 30세나 40세 때에는 마음이 바뀌니까요. 시간이 바뀌면서 나이를 먹고 삶을 경험하면서 감상이 바뀌게 되죠.

선아: 그렇죠.

팟캐스트: 입양아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한 적이 30세 때였죠?

선아: 네

팟캐스트: 선아 씨와 동갑인 입양아들이 처음으로 한국 정체성에 관심을 가지거나 다른 입양아들과 최초로 접촉하려는 일도 많았나요?

선아: 네. 아주 많았어요. 아주 흔했죠. 30대에서 40대가 넘은 사람들이 한국계 입양아 사회에 처음으로 접촉해왔습니다. 정체성 확립을 청소년기나, 20살 초반에 자연스럽게 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입양아 사회에는 나이를 좀 먹고 난 뒤에 자기 정체성을 생각하게 된 사람들이 많았어요. 아이를 가진 뒤에 가족과 자기 정체성을 생각해보고 온 사람들, 아니면 자아 성찰이 가능할 정도로 성공하거나 자원을 확보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단순히 한국에 돌아가는 일만 아니라 입양아 컨벤션 같은 데 참여하기 위해서라도 자금이 필요하니까요.

팟캐스트: 한국 이름으로 개명하는데 얼마나 생각을 해보시고 바꾸셨죠? 

선아: 제가 한국 이름으로 개명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때는 20대 중반 때였습니다. 그때는 단순한 아이디어였죠. 이름 자체가 바꾸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하라며 말리기도 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 생각을 그만두고 꽤 오랫동안 살았죠. 

팟캐스트: 아버지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셨나요? 

선아: 네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이름을 바꾸는 데 방해가 되던 생각이나 부끄러움이 한 번에 해결이 되었죠. 대학원에 다니면서 입양아 사회와 교류하고, 아버지가 교제하시다가 재혼하시고, 가족의 개념이 바뀌는 일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법적으로, 아니면 사회적으로 자기의 이름을 한국 정체성을 반영하도록 바꾸는 일이 많다는 일을 배웠어요. 이러한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니 더 생각하게 됐고, 더 받아들이기 쉬워졌고, 아버지가 재혼 과정에 들어가니, 제가 가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약혼하시고 난 뒤에 제 최초의 친부모 조사를 시작했어요. 우리 가족에 대한 개념이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제 친부모를 찾기 시작해도 아버지가 상처 입거나 화내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죠. 아버지가 좋은 생각이라고 응원하셨어요. 물론 10년 전에도 반응이 똑같았을지는 모르죠. 개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그걸 응원해주실 때 YOLO(You only live once, 한 번만 사니 삶을 즐기라는 유행어) 이라는 단어도 쓰셔서 제 아버지인가 아니면 다른 누구인가 고민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어머니가 제가 본명을 쓰고 싶다면 쓰게 해주라고 하셨다고 했죠. 물론 전 그걸 듣고 언제 그러셨는지, 제가 왜 이걸 몰랐는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니 기분이 좋았죠.

팟캐스트: 아버지의 재혼이 선아 씨가 가진 유일한 가족의 책임을 덜어준 것 같나요?

선아: 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제가 자신이 가진 유일한 가족이라고 말하고는 하셨습니다. 물론 아버지에게는 형제자매도 있었지만 각자 가족이 있었으니 제가 유일한 가족이었죠.

팟캐스트: 아버지가 그렇게 나오시는데, 다 좋은데 제 뿌리를 찾으러 한국에 갔다 오겠다고 할 수는 없죠.

선아: 네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재혼하시자, 저와 아버지에게 새로운 문이 열렸어요. 아버지가 새로운 아내가 생겼고, 아버지가 기대고 서로 지탱할 수 있는 분이 있으니 우리의 관계를 더 좋게 발전시켜 주었습니다. 

팟캐스트: 개명과정은 어땠나요?

선아: 네. 그러니 2018년 12월 13일에 개명을 했습니다. 5월 28일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멤피스에 취직해서 8월 18일에 멤피스로 돌아왔죠. 제 삶의 새로운 단계에 돌입했습니다. 9월 시카고에서 열린 KAS 한국 입양아 주말 축제에 참여했죠. 거기에서 제이슨 레이놀즈가 한국, 중국 입양아들의 `개명에 대해서 강의를 했습니다. 저도 그의 강의를 들어본 적이 있죠. 하지만 그날 그의 강의를 듣고 나서 개명을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앞에 말했던 것처럼, 모든 일이 맞아 들어가서 제 개명하기로 했어요. 처음에 생각하기로는 1년 내로 이름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IKAA(세계한인입양인협회) 관련 행사로 한국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어서, 개명하고 여권을 바꾸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했죠. 제 친구들에게도 이름을 바꾸겠다고 언급했는데 모두가 저를 지지해줬어요. 제가 갑자기 바꾸겠다고 했지만, 주변 사람 전부가 지지를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왜 이름을 바꾸는데 기다리는지 물었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 않느냐고 되물었어요. 그걸 들으니 확실히 그렇구나, 이라고 생각해서 구글에서 찾아봤습니다. 테네시주에서는 개명 비용을 내고 신청하기만 그만이죠. 단순히 돈만 내면 됩니다. 

팟캐스트: 아주 쉽네요?

선아: 네. 아주 쉽죠. 서류를 작성하고, 증빙 서류를 가지고 와서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돈을 내고 나면 그걸로 끝입니다. 다른 주에서는 신문에서 이름을 바꿨다고 선언하거나, 다른 일을 해야 하지만, 테네시주에서는 그냥 돈만 내면 됐죠. 그래서 확인한 다음 지역 법원에 내려가서 개명하고 싶고, 입양아고, 관련 서류도 가지고 왔으니 이름을 바꿀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법원 직원들이 이야기하더니 가능하다고 말하고, 제가 돈을 냈어요. 언제 이름이 바뀌느냐고 묻자, 직원들이 다음 주에 올 수 있냐고 했습니다. 제가 가능하다고 답했죠. 그게 다였습니다. 다음 주에 돌아오자 이혼이나 다른 이유로 개명을 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성과 이름을 동시에 바꾸더군요. 판사가 빚을 피하고자 개명을 하느냐, 등의 기본적인 질문을 했고 그 뒤로 개명을 했죠.

팟캐스트: 판사에게 개명 이유를 뭐라고 말씀하셨죠.

선아: 제가 태어났을 때의 이름으로 개명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죠. 그러자 판사도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이네요! 이라고 지지해주었습니다. 제가 법을 어기기거나 그러지 않았고, 판사도 일하는 것뿐이었기에 매끄럽게 진행이 되었죠.

팟캐스트: 개명하기 전의 이름이 뭐였죠?

선아: 웬디였습니다.

팟캐스트: 개명하신 뒤에 전환 기간은 어땠나요? 친구들이 선아 씨를 계속 웬디라고 불렀나요? 아니면 바로 선아라고 불러줬나요?

선아: 금방 바뀌었습니다. 제 친구들이 개명을 지지해 줘서, 법적으로 개명하기 이전에도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줬죠. 절 전부 지지해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제 개명된 이름을 알려주면서 많이 도와줬어요. 고향에 돌아와서 이름을 바꾸는 일은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몇 년 만의 지인들을 만나면서 제가 이름을 바꿨다고 알려줘야 했습니다. 제가 새로운 도시로 이사를 가면 새로운 이름을 쓰는 것으로 끝났겠지만, 여기에서는 그렇지 않았죠. 

팟캐스트: 고등학교 때의 친구들이요?

선아: 네. 심지어 제가 몇 달 전에 입사한 직장에서도 개명을 알려줘야 했지만, 모두 손쉽게 개명을 받아들여 줬습니다. 아무도 거부하지 않았어요. 어떤 사람들이 “네 이름을 이걸로 배웠으니 나에게 있어 네 이름은 항상 이거일 거야.”라고 하는 경우가 있지만, 저는 그런 경험은 없었죠. 가족들이 개명한 제 이름을 어려워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친구와 직장 동료들은 저를 지지해줬습니다. 아주 대단한 경험이었죠.

팟캐스트: 이름을 바꿨을 때 어머니에 대해서 생각하셨나요?

선아: 어떤 어머니 말씀이시죠?

팟캐스트: 아 그렇죠. 친어머니와 양어머니 두분 다 포함입니다. 

선아: 아뇨. 두 분 다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 친어머니가 제 이름을 지어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 이름이 자신의 한국 가족과 연결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죠. 실제로 한국 가족이 한국 이름을 지은 예도 있어요. 하지만 저의 경우에는 제 한국 어머니가 제 이름을 짓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입양 서류에 너무 많은 거짓 정보가 기록되어 있어 정확히 알 수 없죠. 제가 가진 정보로 생각해보면 한국 어머니가 제 이름을 지었다면 놀랍겠네요. 전 한국 가족과 더 깊은 유대감을 추구해서 제 한국 이름을 되찾지 않았습니다. 제 한국인의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 중 하나로 제 한국 이름을 되찾았죠. 세상에 제 정체성을 한국계 입양아 미국인으로 선언하기 위한 개명이었지, 제 친어머니와의 연결성을 되찾기 위한 개명은 아니었어요. 

팟캐스트: 하지만 성은 계속 남겨두셨네요?

선아: 네.

팟캐스트: 성을 남긴 것도 선아 씨의 선택이었나요?

선아: 네. 너무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법적으로는 그렇지 않겠지만 사회적으로, 그리고 소통하는 데 문제가 된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제가 결혼하게 된다면 제 성을 또 바꿔야 하니 딱히 바꿀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제 한국 이름을 이름으로 쓰고, 제 중간 이름을 제 입양 가족이 준 이름, 친가 쪽 할머니 이름인 마리를 보존하고, 제 성은 제가 결혼하게 되면 남편 가족 이름으로 바뀌겠죠. 그렇게 된다면 이름 전체가 제 정체성을 상징하는 이름이 생각해요. 

팟캐스트: 레이번이라는 성을 보존한 이유는 선아 씨의 입양아 정체성을 상징하는 일이기도 했겠군요? 

선아: 네 그랬습니다.

팟캐스트: 선아 씨의 친부모 조사는 어떻게 되었나요? G19 IKAA 회의에 참여하셨나요?

선아: 네.

팟캐스트: 그럼 그때 친부모 조사를 진행하셨나요? 

선아: 제가 친부모 조사를 2번 진행했습니다. 지난 2번 IKAA 회의에 참여하려고 한국에 방문했거든요. 첫 조사는 2016년 IKAA 회의 때 진행했죠. 한국에 가니 조사를 해보자는 사고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의 벼락치기 수준으로 생각해서 진행했죠. 어돕션 링크스 DC의 회원 중 한명인 스티븐이 자신의 조사에 대해서 말해줬는데, 친부모 조사는 단순히 입양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친어머니가 원하는 일이 될 수 있다고 했어요. 친어머니가 저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시작하기 위한 동기가 되어주었습니다. 서류를 작성해서 조사를 해보고 뭐가 일어나는지 보자고 생각했어요. 2016년에는 아버지가 결혼을 준비하시고 가족 관련 일도 일어나고 있었죠. 그리고 제 친어머니를 찾아서 연락했다고 입양 기관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연락을 받았지만, 답을 하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저와 접촉을 거부했다 연락이 왔죠. 당시에는 저는 안심했습니다. 그때에는 이미 미국 관련 문제가 쌓여 있었기 때문이죠. 제가 만나보지 못한 여성과 아버지가 재혼하실 예정이라 가족 문제를 이미 해결해야 했고, 그래서 친가족과의 접촉은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때, 친어머니가 접촉을 거부했을 때 약간이지만 안심했습니다. 

선아: 저번 IKAA 행사로 한국에 방문하니 다시 한번 조사를 해보자고 생각했죠. 다시 연락하고 어머니가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쉽게 안다는 사실이 이상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또 대답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이번에는 안심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조사하고 싶었으니까요. 단순히 충동적으로 한국에 오니 찾자고 생각하지 않았죠. 제가 원해서 진행한 조사였습니다. 그 결과 제 감정도 다르게 반응했어요. 왜 제 친어머니가 저의 접근을 거부하는지, 제가 잘못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나? 이라는 의문도 들었죠. 입양 제도 연구자로서 부모가 왜 연락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서 잘 압니다. 결혼했을 수도 있죠. 아니면 문제로 취급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사생아를 낳았다는 일 자체가 부끄러울 수도 있고, 수백만 가지의 상황적 문제가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개인적인 문제고, 개인으로 부모와의 연결을 다시 찾고 싶을 때는 개인적인 문제로 여겨지게 됩니다. 저에게 어떤 문제가 있길래 제 친모가 만남을 거부할까요? 왜 어머니가 자식을 찾으려고 않죠? 제가 충분하지 않은 느낌이 들고 상처를 입게 되고 감정적으로 불안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제가 아직도 감정적으로 불안정하고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모성, 어머니와 아이에 비중을 두고 세상에 많은 일이 개인적 문제로 끝나지 않죠. 특히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타인들의 문제가 큽니다. 하지만 그게 개인적 문제에 영향을 끼치면,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기 쉽기 마련이죠. 

팟캐스트: 입양 기관이 뭐라고 했나요? 연락이 오지 않았으니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나요?

선아: 네 그러더군요. 한국에 살고 있던 친구가 입양 기관들은 입양아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했죠. 입양 기관들이 연락하지 않은 채로 입양아들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아예 일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 관련 영수증을 요구하거나, 다른 정보를 요구할 수 있다고 조언을 해줬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는 제가 그 모든 일을 할 힘이 모자랐죠.

팟캐스트: 감정적으로 아주 힘든 일이긴 하죠. 

선아: 네 그렇습니다. 물론 자료를 보기 위해서 예약을 할 수도 있지만 전 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죠.

팟캐스트: 선아 씨의 입양 서류를 보지 않았군요?

선아: 네. 왜 그러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팟캐스트: 입양 기관이 이름, 연락처, 주소를 아는데도 선아 씨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아서 화가 났나요?

선아: 네. 아니 잠깐만요. 사실 어머니 이름을 아는 것 같습니다. 음…. 하지만 신빙성이 부족하죠. 제 서류에 기록되어 있는 어머니의 이름, 그리고 생년 월일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 서류상 자료가 사실이라면 정보를 알고 있죠. 하지만 어머니의 주소나 연락처는 모릅니다. 

팟캐스트: 어머니와 연락이 됐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이렇게 멀다는 점이 답답하시나요? 

선아: 그런 방식으로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네요. 그런 이유가 친어머니가 저와 연락을 하고 싶지 않다면, 연락을 안 할 권리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입양아 중 일부가 어머니를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머니를 찾으려고 하죠. 이미 말했지만, 저에게는 이름이 있고 생일이 있어요. 이 두 정보가 있으니 제가 어머니를 찾아내려고 한다면 찾아낼 수 있겠지만, 어머니가 그 문을 열고 싶지 않다면 열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제로 어머니를 만나고 싶지 않고, 그 가능성에 거부감을 느껴요.

팟캐스트: 그래서 다음으로 하실 일은 무엇인가요? 

선아: 삶에서 말인가요?

팟캐스트: 네 그렇죠.

선아: 제가 다음에 할 일은…. 개인적인 일과 직업적인 일로 나뉘네요. 직업과 관련된 일은 한국 입양, 한국 입양아들의 시민권, 소속감, 가족에 관한 책을 쓰고 있습니다. 한국계 입양아의 소속감, 가족, 시민권이 매체와 정책으로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시민권, 가족, 사람에 대한 정의를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에요. 책의 원고를 끝내고 있고, 출판 계약을 맺어서 여러분들과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 멤피스 출신이나, 거주민들을 초대해 그분들이 지역과 국제적 문화, 오락, 정치에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언어적으로 효율적(Verbally Effective)이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죠. 친한 친구와 함께 어려운 아름다움(Difficult Beauty) 이라는 팟캐스트도 진행하고 있어요. 여성적인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직업, 아름다움, 가족에 관해서 이야기하죠. 남자친구와 함께 어떤 컵이 우리 컵이지? (Which Cup is Mine?) 팟캐스트를 하나 더 진행하고 있어요.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지었는데, 교제 상대와 이야기를 해야 하는 불편한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위한 팟캐스트죠. 제가 제 직업을 위해서 진행하고 있는 일들입니다. 

선아: 개인적으로 제가 하는 일은 좀 더 저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좀 더 약점을 드러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제가 살면서 항상 혼자 있고, 버림을 받을까 무서워했고, 그 모든 일이 저에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이 일은 저에게 깨달음과 같아요. 제가 개명을 하면서 제가 더 개방적이게 되고 저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도움을 줬다고 봅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끼쳤죠. 그래서 전 지금 제 약점을 받아들이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봅니다. 제가 이런 단계에 도달할지는 몰랐죠. 하지만 좋고, 나쁘고, 끔찍한 자기 자신을 100%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쁘고 즐거워요. 다른 사람들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도 기쁘죠

팟캐스트: 현재 남자친구와의 교제 관계를 이러한 변화 덕분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선아: 여러 가지 변화와 요소의 융합이라고 생각하죠. 제 이름을 되찾은 일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도와주었다고 생각해요. 저 자신을 숨기며 부끄러워하는 일에서 저를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러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죠.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숨기려고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알게 됩니다. 힘을 낭비하고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셈이에요. 제 이름을 되찾은 일이 저 자신을 재구축하게 해주게 도와주었고, 제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도움을 줬습니다. 전 선아이고, 한국인이고, 입양아고, 이 모든 것이 저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도와줬어요. 그리고 현재 남자친구와 관계가 이러한 사고방식을 현실화하는 데 도움을 줬죠. 가르시아와 내가 교제하기 시작했을 때 저 자신이 무서워하는 일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움을 줬습니다. 그중 하나는 절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인식하고 대화하는 일이었죠. 제가 이 말을 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면, 그 말이 제가 해야 하는 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벽을 만들려고 하는데 절 이해하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서 동시에 제 문제를 지적하고 바뀌게 하는 일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 내 잘못을 인정하게 만드네. 정말 싫다. 이러는 식이었죠

팟캐스트: 가르시아 씨가 선아 씨가 개방적으로 되도록 만들었군요?

선아: 네. 그가 저에게 개방적으로 되어도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죠.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고, 약해져도 된다는 확신을 줍니다. 

팟캐스트: 과거에 교제 관계들을 의도적으로 망치거나, 끊거나 그런 일이 있었나요? 

선아: 네. 사람들에게 날카롭게 나가서 제가 책임을 지지 않거나, 약점을 보이지 않거나, 성장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거기에 데이트 상대들도 나쁜 상대만 골랐습니다. 아니 나쁜 상대들은 아니었죠. 성공하지 못할 상대들을 의도적으로 선택해서 교제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약해지거나, 성장하거나, 사람들의 반응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도록 했어요. 

팟캐스트: 개방과 성장이 넘치는 삶의 지점에 도달하신 것 같네요. 아주 흥미로워 보여요. 행운을 빕니다.

선아: 아주 흥미롭죠. 성장이 보이지만 어떻게 성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무언가 일어나고 변화하고 있죠. 그래서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 아주 좋아요. 

팟캐스트: 사람들이 선아 씨와 연락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아: 아 네. 인터넷을 통해서 저와 연락할 수 있습니다. 트위터에서 저는 @SunAhMarieOnly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중이고, 페이스북에도 SunAhMarieOnly이라는 계정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페이스북 활동을 거의 하고 있지 않아요. SunAhMarieOnly 계정인 인스타그램과 트위터를 따라오시면 제 홈페이지와 제 팟캐스트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자주 활동을 하고 있어요. 트위터는 개인용으로 사용할지, 직업용으로 사용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그리고 다이어트하고 싶으면 페이스북 계정을 구독하면 되나요? 

선아: 아 고마워요. 

팟캐스트: 대단하더군요. 보고 있으면 저도 다이어트하고 싶어져요.

선아: 에너지가 넘쳐서 말이죠.

시즌 4, 에피소드 14: 요나스 구리시

Audio available on Monday, Feb. 15, 2021 at 7 am EST.

요나스 구리시(34세)는 출생 3개월 뒤 한국에서 노르웨이로 입양된 입양아다. 요나스 씨는 그의 입양에 대해서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부모와 한국계 입양아인 누나와 자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최근 요나스 씨는 유전자를 사용해서 생물학적 혈육을 찾으려고 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시도에 대해서 두려움도 가지고 있다. 

요나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요나스 구리시라고 합니다. 전 현재 34세이고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살고 있죠. 노르웨이 IT 상담사 기업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어요. 제가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노르웨이 오슬로로 왔습니다. 제 한국 이름은 최달림이죠.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제대로 발음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노르웨이어 자기소개-

팟캐스트: 구리시라는 성이 프랑스계인가요?

요나스: 구리시라는 성은 노르웨이계 성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르웨이 이름인 구리크에서 비롯된 성이죠. 그리고 이게 18세기 후반에 제 고조할아버지가 이 이름을 독일화해서 구리시로 바꾸셨습니다. 그 시기에는 노르웨이식 이름을 독일 이름으로 바꾸는 일이 유행했다고 들었어요. 그 시기에는 독일이 거대한 산업 제국으로 성장했고, 노르웨이의 중요 무역 상대국이었습니다. 석유가 나기 전이라 노르웨이는 작은 어업국에 불과했죠. 제가 공부한 내용에 따르면 독일식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사회적 계급 상승을 노리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 독일식의 이름을 가진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봤는데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오래된 노르웨이식 이름을 독일식 이름으로 바꿨다고 했습니다.

팟캐스트: 생후 3개월 만에 입양되었다고 하셨죠. 한국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시는가요?

요나스: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한국에 방문해서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려고 했죠. 제가 아는 일은 제가 병원에서 태어났고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입양되기로 결정되었다는 겁니다. 병원에서 제 친어머니와 헤어진 뒤, 위탁 가정에서 노르웨이 입양을 준비했고 노르웨이에 왔다는 사실을 알았죠. 제가 21살이 될 때까지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첫 한국 방문은 대단한 경험이었죠. 제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입양 기관에 가서 제 서류를 확인했습니다. 그 기관에서 입양아들에 대한 서류를 보관해두고 있었는데, 대부분 한국어로 되어 있었고, 그래서 저에게 번역해준 내용을 제외하고는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기관에서는 어머니의 이름이 서류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해줬고, 제 배경 이야기는 제 노르웨이 서류에 적혀 있던 이야기와 똑같았죠. 젊은 미혼모였고, 경제적으로 저를 키우기 어려운 상태였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제가 정보를 알고 난 뒤, 어머니를 찾고 싶었는데도 저에게 어머니의 이름을 제공해주지 않았죠. 그 당시에는 어머니를 찾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머니의 현재 상황을 알 수 없고, 어머니가 새롭게 가족을 만들었거나, 저의 탄생이 비밀 수도 있으니 어머니를 위해서 꽤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죠. 하지만 저는 그냥 어머니를 찾아서 저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묻고 싶었을 뿐이고, 어머니가 저를 걱정했다면, 저는 괜찮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잘 자라고 좋은 삶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죠. 

요나스: 하지만 어머니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더 깊게 찾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현재로서 제 한국 뿌리에 대해서 아는 정보는 이게 다입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입양 기관이 어머니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군요?

요나스: 네 그렇습니다. 자료에 기록되어 있지만, 비밀로 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정보를 더 알고 싶다면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가서 서류를 읽고 번역해줄 사람을 구해서 가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저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저에게 번역해서 제공해준 정보는 아주 적었거든요. 

팟캐스트: 요나스 씨는 그러한 정보 제공 부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알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요나스: 좋은 질문이네요. 적어도 제가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문화적으로 어머니가 미혼모로 아이를 가지고 입양에 맡겼다는 사실이 큰 문제라는 사실을 알죠. 그래서 제가 어머니를 갑작스럽게 찾아가서 혼란스럽게 하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요. 어머니에 대한 정보를 알고는 싶지만 그런 문제 때문에 걱정스럽습니다. 

팟캐스트: 어머니의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입양 기관에서 어머니에게 연락을 안 했다면, 요나스 씨의 어머니가 어떻게 반응할지 아무도 모르지 않나요? 

요나스: 그렇죠.

팟캐스트: 그래서 어머니의 반응이 어떨지도 모르는데 입양 기관이 어머니를 당신으로부터 지키고 있다니 상당히 부당하다고 느껴지네요. 어머니가 반응하지 않았는데 어머니의 나쁜 반응을 가정하고 있지 않나요?

요나스: 그렇죠. 입양 기관의 예측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거기에 제 연락처를 남겨두고 왔어요. 어머니가 입양 기관을 찾아가서 제가 어머니를 찾으러 왔었는지 확인한다면 어머니가 저를 찾을 수 있도록 말이죠. 하지만 제가 입양 기관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이야기들에 대해서 들은 바에 따르면 어머니가 이미 저를 찾아서 입양 기관에 방문했을지도 모르지만, 어머니에게 저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러한 문제로 인해서 어두운 역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노르웨이에 투위라 포 스콜더라는 이름의 조상에 대해서 조사하는 TV 프로그램이 있어요. 호스트와 그 휘하의 팀이 게스트로 나온 사람들의 친척을 찾아서 다시 만나게 해주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리고 그 쇼에서 홀트 아동복지회를 방문했는데, 그 쇼에서 나온 여성이 폴더를 잡고 도망쳐 나왔죠. 제가 받은 비슷한 정보 통제를 받아서 화가 났던 모양이에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서류에 적힌 정보가 우리 정보기 때문에 불법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저는 폴더를 가지고 도망치지는 않았죠.

팟캐스트: 입양아들이 이 문제 관련해서 권리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네요.

요나스: 네 그렇습니다. 저도 그 사실을 이해했어요. 전 한국에 두 번 방문했죠. 첫 번째 방문 때도, 두 번째 방문 때도 많은 한국계 입양아들을 알게 됐습니다. 뿌리의 집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면서 프랑스, 미국, 덴마크 등에서 온 입양아들의 이야기들을 들었어요. 그리고 국제입양에 따른 수많은 입양아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제가 그곳에서 알게 된 많은 입양아는 한국에 다시 방문했습니다. 그중 일부는 한국에 정착했어요. 전 다른 나라에서 자랐는데 한국으로 이주하는 입양아들을 보고 놀랐죠. 저에게 노르웨이는 제 고향이니까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한국에 다시 돌아가서 자신의 뿌리를 찾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니 다른 사람들의 입양 경험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입양되었다 해도 한국과의 연결이 훨씬 더 강력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죠.

요나스: 한국을 방문했을 때 특별한 감정을 느꼈어요. 물론 저는 백지 이론에 동의하는 바가 있습니다. 전 생후 3개월 때 한국을 떠나 노르웨이로 와서 자랐기 때문에 제가 배운 것을 알고, 한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동시에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항상 알고 있었죠. 그 사실이 문제는 아니었지만, 소속감의 문제를 가지고 왔어요. 자신이 어디에 소속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 제가 입양 부모님과 입양아 누나와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제가 그곳에 빠르게 소속감을 느끼게 된 것이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한국 말고도 다른 국가에 여행을 간 적도 있지만, 한국의 거리를 걸으면서 저와 닮은 사람들을 보는 경험은 해보지 못했죠. 

요나스: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 사이를 걷다 보면 그 사람들 사이에 더 쉽게 섞여 들어갈 수 있죠. 제가 그냥 걸으면서 사람들 사이에 녹아 들어가는 경험 자체가 아주 흥미로웠어요. 한국을 돌아다니다 얼마 안 있어 서양적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을 보면 여행자구나! 이라고 구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죠. 아주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한국을 방문하고 있는 방문객이죠. 전 한국 여권이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제가 한국 출신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죠

팟캐스트: 한국에 방문하지 않으셨는데도 한국이 아주 편안하다는 사실이 대단하지 않나요? 

요나스: 네 그렇습니다. 제가 찾고 있던 단어가 바로 편안함이에요. 한국에 방문해서 편안함을 느꼈어요. 

팟캐스트: 한국인들이 요나스 씨를 어떻게 받아들였죠?

요나스: 대부분은 저에게 한국어로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최대한 예의 바르게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고 대답했죠. 그리고 대부분은 사람들이 중국인이냐고 물어봤어요. 아니라고 대답하고 입양아라고 답했습니다. 제가 한국어로 입양아라는 단어를 배워서 대답할 수 있었죠. 그걸 들으면 사람 대부분이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그게 제가 한국에서 받았던 대부분의 반응이었습니다. 제가 실제로 느낀 것과는 정반대였죠. 저는 입양되어서 딱히 나쁜 점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저에게 동정할 이유가 없었지요.

팟캐스트: 동정받을 이유가 없다는 거군요?

요나스: 네 그렇습니다. 불운하다는 듯이 저를 보더군요. 하지만 제가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그러한 관점도 이해했죠. 제가 만난 다른 입양아들은 입양과 관련해서 그렇게 운이 좋지 않거나, 아니면 그렇게 운이 좋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입양아들에 대해서 그렇게 인식하는 이유도 알았죠. 하지만 저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요나스 씨, 자라면서 친어머니가 요나스 씨를 태어나자마자 입양 제도에 맡겼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셨죠?

요나스: 네

팟캐스트: 그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정리하셨나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나요? 아니면 어머니에게 동감하셨나요? 그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셨죠?

요나스: 어머니가 저를 입양시킨 일을 최대한 합리화하려고 했죠. 어머니는 절 돌볼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전 아이가 없으니 아이를 입양시켜야 할 정도의 상황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제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제 부모님은 숨기지 않았고 항상 저에게 이야기를 해주셨죠. 어머니가 경제적으로 절 기를 수 없어 입양 제도에 맡겼고, 그래서 입양 부모님이 저를 받아 키우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어요. 노르웨이에서 잘 받아준 입양 어머니는 불임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저와 제 누나를 그 두 분을 위한 선물이나 다름없었다고 이야기하시고는 했어요. 그래서 노르웨이에서 항상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제 친어머니의 선택을 합리적이었다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서야 감정적으로 얼마나 힘든 선택이었는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얼마나 힘들었을까 예상하기도 힘들죠. 

팟캐스트: 한국에 대해서 한 가지 더 묻고 싶은데, 노르웨이 음식은 한국 음식과 꽤 다르죠? 노르웨이 음식이 좀 더 밋밋한데 한국 음식은 더 맵지요. 그래서 한국 음식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나요? 

요나스: 처음으로 말하자면, 노르웨이 음식은 꽤 국제적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전통적인 노르웨이 음식들은 특별한 때에만 먹죠. 그래서 매일 먹는 음식은 이탈리아 요리, 중국 요리, 베트남 요리를 포함한 다양한 음식들입니다. 

팟캐스트: 노르웨이인들이 연어를 매일 먹는다는 이야기는 선입견인가요?

요나스: 네. 선입견이에요. 전 국제적인 식단을 먹고 자랐습니다. 부모님이 자랐을 때는 노르웨이 전통 음식을 먹고 자라셨겠죠. 그 시절 노르웨이는 국제화가 덜 되어 있었고 요리 문화도 덜 퍼져 있었어요. 제 아버지는 어른이 되어서야 피자를 맛보셨습니다. 한국 요리 같은 경우에는 제가 자라면서 몇 번 먹어 본 적은 있죠. 왜냐하면, 입양 가족을 위한 여름 캠프에 참여했거든요. 그리고 그 여름 캠프에서 한국 요리를 대접하고는 했죠. 저에게는 좀 이상했습니다. 그런 종류의 향신료가 들어간 요리를 먹는 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제가 나이를 먹어서 사춘기 후반부에 접어들자 한국 요리를 먹는데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는 다양한 한국 음식점을 돌아다녔죠. 한국 친구들이 다양한 한국 음식을 먹여줬어요. 지난 2-3년 동안 한국 음식이 노르웨이에서 대중적인 음식 중 하나가 됐죠. 그전에는 동아시아 음식이라면 중국 음식이 대세였고, 그 중국 음식들도 노르웨이식으로 변한 중국 음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많은 일본 음식점과 한국 음식점이 늘어났죠. 그래서 현재의 노르웨이에서는 외식으로 한국 음식을 먹기가 편해졌어요.

팟캐스트: 한국에서 한국 음식을 먹을 때 단순히 한국 음식을 즐겼나요? 아니면 한국에서 자랐다면 먹었을, 그리고 엄마가 먹던 음식이라서 좀 더 깊은 연결을 느꼈나요?

요나스: 그런 생각을 했죠. 제가 한국에서 자랐다면 매일 먹었을 수도 있는 음식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 있어서 문제를 느끼지는 않았어요. 저는 음식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단순히 한국 음식만이 아니라 다양한 음식을 즐기죠.

-광고-

요나스: 전 노르웨이 동부, 오슬로와 같은 지역의 작은 해안 소도시인 샌더피오드에서 자라났어요. 샌더피오드는 15000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소도시이죠. 제가 자라났을 때는 40000명 정도가 살고 있었어요. 느긋한 생활을 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라나면 주변에서 사는 또래 아이들을 알게 되죠. 다른 학교에 친구들이 골고루 분포해 있게 됩니다. 전부 같은 학교에 다니지는 않으니까요. 친구들과 같이 축구와 핸드볼, 테니스를 했죠. 그리고 태권도는 아니었지만 어렸을 때 무술도 배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의 기억 대부분은 스포츠 활동으로 가득했고 그 모두를 즐겼어요.

팟캐스트: 한국인이라서 다르게 취급되었던 경험은 있나요? 

요나스: 괴롭힘은 당하지 않았어요. 적어도 심하지는 않았죠. 물론 눈에 띄긴 했습니다. 특히 초등학교 때는 제가 유일하게 아시아계 출신 아이였죠. 하지만 전체적으로 사랑이 넘치는 환경이었어요. 모두 서로에게 친절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싸우면서 크고 서로에게 악의를 가질 수 있긴 하지만, 제가 특별히 더 괴롭힘당하거나 그런 일은 없었어요. 거기에 제 아버지가 괴롭힘당할 때 대응하는 방법에 대해서 좋은 가르침을 주시기도 하셨죠. 괴롭힘당하는 것을 당연시하지 말고 당당히 일어나서 맞서라고 하셨습니다. 그 조언이 저에게 그러한 상황에서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을 줄 수도 있었어요. 전 운이 좋았습니다. 

팟캐스트: 백인 부모 밑에서 자란 많은 입양아가 부모님들이 인종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인종적으로 무감각했다고 증언하는데, 요나스 씨의 가족은 어떠셨나요?

요나스: 어려운 질문이군요. 저는 항상 제가 다른 인종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노르웨이에서는 대체로 인종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죠. 인종 자체를 언급하는 일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물론 인종차별이 있지만 다른 인종 출신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우리는 인류라는 종 하나에 속해 있고 단 하나의 인류만 있고 문화가 다를 뿐이라고 교육받았습니다. 교육 자체가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고, 다른 가치를 중시하는 문화에서 온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일이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가르쳤죠. 미국에서 언급되는 인종적 차이보다, 노르웨이에서는 문화적 차이에 대해서 논했습니다. 인종 자체가 언급되어서는 안 될 용어 취급이었지요. 

팟캐스트: 요나스 씨의 부모님이 왜 한국에서 입양하셨죠? 

요나스: 그때는 1986년이었고 그때는 다른 나라들보다 한국에서 입양하기가 훨씬 쉬웠습니다. 제가 배우기로는 80년대에 한국에서의 입양 비율 자체가 높았다고 들었어요.

팟캐스트: 부모님이 요나스 씨가 한국에 대해서 배우려고 하는 노력을 지지하셨다고 생각하시나요? 캠프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하셨죠? 입양 부모님이 그런 문제에 겁을 먹는 경우가 많지요. 캠프에 갈 수도 있지만, 한국에 방문하려고 하면 슬퍼하시거나 그런 일이 많으니까요.

요나스: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관련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만약에 제가 한국으로 가서 친어머니를 찾으면 입양 어머니가 저를 빼앗긴 느낌이 들지 않을지 고민한 적도 있죠. 하지만 그러한 걱정을 저에게 보여주신 적이 없습니다. 제 가족은 한국에 가는 일에 지지를 해줬어요. 제 어머니도 누나와 함께 제가 한국에 가기 몇 년 전에 한국에 가신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한국에 가신 적이 없지만 가지 않은 이유는 아버지가 편식이 심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한국에서 먹을 것을 찾을 수 없을까 걱정하셨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가 돌아와서 “아빠 맥도날드도 피자도 있어요. 문제없어요.”라고 말씀드렸죠. 사실 요즘 들어서 아버지도 새로운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하고 계셔요.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하려고 노력하고 한국 음식도 먹으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한국에 방문하실 것 같아요.

팟캐스트: 요나스 씨, 다른 형제자매와 같이 자란 입양아들에 관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입양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거나, 한국에 대해서도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경우가 많고, 형제 자매간에도 한국에 관한 관심이 있거나 없거나 갈린다고 하더군요. 요나스 씨의 경험은 어땠죠?

요나스: 제 누나는 저보다 2년 먼저, 저와 같이 아기일 때 입양되었습니다.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진짜 남매는 아니죠. 그래도 자라면서 서로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누나와는 입양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누나도 저와 비슷할 정도로 한국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가 주로 이야기하는 주제는 우리에게 직접 영향을 끼치는 주제였습니다. 청소년기의 성장과 학교, 직업과 관련된 이야기를 주로 했고 한국과 누나의 경험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는 하지 않았죠. 그래도 누나는 장녀였으니 입양아로 자라는 일을 처음 배워야 했고, 제가 누나에게 입양아의 경험을 배웠으니, 누나가 경험했을 문제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도 없어요. 하지만 동시에 제가 말하기는 어렵지만, 여성과 남성의 성장할 때의 차이로 제 문제는 좀 더 단순했을 가능성도 있죠. 제 관심사는 주로 축구와 핸드볼, 여자애들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요나스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국이 좀 더 인종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 같은데, 노르웨이는 인종 자체를 큰 차이로 보지 않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나요? 

요나스: 사회적으로 그러한 경향이 있죠. 물론 인종에 대해서 좀 더 신경을 쓰는 개인들과 단체들이 있고, 이들은 백인 순수성과 관련해서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노르웨이 사회의 극히 일부이고, 그 사람들은 상당히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그런 사람들과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고 하죠. 사람은 친구들을 고를 수 있고, 사회적 집단도 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친구와 사회적 집단을 정하는 방식은 가치에 따르죠. 

팟캐스트: 오슬로에서의 삶은 어떻죠? 그리고 언제 오슬로로 이주하셨나요?

요나스: 2015년에 오슬로로 이주했죠. 저에게 있어서 오슬로는 완벽한 크기의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전 공부와 일을 위해서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거주한 적도 있고, 영국 런던에서도 살았고, 스웨덴에서도 산 적이 있어요. 오슬로는 새로운 사람들을 매일 만날 수 있을 정도로 크지만, 동시에 아는 사람들을 항상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작죠. 그래서 오슬로를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오슬로로 이사 왔을 때는 오슬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런던에 살다 보니 오슬로가 너무 작다고 생각했죠. 전 크고 빠른 런던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 곳이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지금 오슬로에 제가 만든 사회적 인맥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런던에서는 오래 지내지 않았죠. 그래서 여러 곳에서 살아봤지만, 전 오슬로에 정착해서 살 것 같습니다.

팟캐스트: 살아보신 곳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어디죠?

요나스: 각자 다른 매력이 있었죠. 리스본은 아주 재밌는 곳이었습니다. 기후는 아주 좋았고, 사람들도 친밀했고, 음식이 정말 훌륭했죠. 한국에서는 소속감을 느꼈고, 서울은 아주 즐겁고, 볼 것도 할 것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을 고를 수는 없네요.

팟캐스트: 서울에 살아보려고 하신 적이 있나요?

요나스: 두 번째 한국에 방문했을 때는 휴가 겸 관광형 방문이었죠. 처음에는 제 뿌리를 찾고 문화를 경험하려고 했다면 두 번째 방문 때는 관광을 더 많이 하고, 더 나가서 놀기도 했고 3주간 지내면서 데이트도 몇 번 했습니다.

팟캐스트: 오 대단하네요.

요나스: 그래서 일하다 보면 한국에서 살게 될 수 있겠다. 이라고 생각했어요. 몇 년간 한국에서 살아 볼 생각도 했죠. 하지만 제 직업이 제가 가는 곳을 정했습니다. 그래서 이사는 대부분 직업과 관련해서 움직였고 현재는 정착한 기분입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현재로서는 정착하신 건가요?

요나스: 네. 오슬로에서는 지난 6년간 살았죠. 제가 자란 고향을 제외하고는 가장 오랫동안 살아온 곳입니다.

팟캐스트: 오슬로에 살면서 사람들이 영어로 말을 걸어온 적이 있나요?

요나스: 아뇨. 사람들이 여행객이라서 영어밖에 못하는 경우라면 그랬지만, 다른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저를 다른 노르웨이인과 똑같이 대해줬죠. 다른 노르웨이인이 저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던 일은 없었습니다. 스웨덴에서 1년 정도 일하면서 살아본 적이 있죠. 그리고 스웨덴에서도 그런 일을 겪은 적은 없어요. 문화적으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은 아주 가까운 국가들이죠. 전 한국에 느끼는 소속감을 노르웨이에도 느낍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속감을 덴마크와 스웨덴에도 느끼죠. 각자의 언어로 소통이 되니까요. 

팟캐스트: 그러니까 스웨덴에서는 사람들이 스웨덴어로 말을 걸고….

요나스: 그럼 제가 노르웨이어로 대답하고는 했죠.

팟캐스트: 그럼 서로 의사소통이 됐다는 말이군요?

요나스: 네 그렇죠. 저는 스웨덴인과 덴마크인과 대화를 하고 이해할 수 있죠. 언어가 아주 비슷하거든요. 그래서 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덴마크어가 좀 더 이상한 억양이 있어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덴마크 친구들과 덴마크어와 노르웨이어로 의사소통은 충분히 가능해요. 물론 단어 한 두 개 정도는 이해 못 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건 설명하기 쉽죠.

팟캐스트: 한국계 뿌리 찾기에서 변화한 일이 있나요?

요나스: 작년에 유전자 검사를 했습니다. 처음에 유전자 검사 결과를 받았을 때 놀랐죠. 제가 한국인이 아니라고 했거든요. 제가 일본인이라고 했죠. 몽골인 20%, 중국인/베트남인 30% 그리고 일본인 유전자가 50%라고 주장했습니다. 한국인은 전혀 없었죠. 나중에 가서야 유전자 데이터베이스가 충분히 자료가 없어서 오류를 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현재는 제가 한국인/일본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전자 조사를 기반으로 제 뿌리를 찾는 것이 제 현재 조사의 일부이죠. 그리고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아주 먼 친척들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 유전자 조사 창에 제 형제나 자매가 나타난다면 연락을 해볼 생각이에요.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찾는다고 해도 시간대와 제 삶 때문에 연락을 지속하기는 어렵겠죠. 물론 다시 한국을 방문하고 싶습니다. 몇 년 전에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제가 현재 만나고 있는 여자친구는 한국이나 일본을 방문해 본 적이 없어서, COVID-19 이 상황이 해결되고 나면 한국과 일본을 방문해서 제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요. 

팟캐스트: 친척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계시군요? 

요나스: 네 희망을 품고 있죠. 하지만 동시에 제가 무엇을 찾을지 걱정되기도 해요. 제가 친어머니를 찾아서 모든 게 괜찮고, 저도 건강하다고 말하고 싶기도 해요. 하지만 친어머니를 찾았는데, 도움이나 간호가 필요한 상태면 어쩌죠?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걱정이 됩니다. 갑자기 혈육이라고 나타난 사람이 생면부지의 타인을 돌봐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이 뿌리 찾기를 끝내기 위해서 친척을 찾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이 뿌리 찾기가 결론이 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준비하지 않은 다양한 문제를 접하게 되면 어쩔지 걱정합니다. 

요나스: 직업과 관련해서는 제가 현재 원하는 지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여자친구가 있고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죠. 그리고 현재 저는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이야기를 할 지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삶에서 별로 모자란 것이 없죠. 삶에서 현재 빠진 것이 있다면 여행 여부인데, 이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팟캐스트: 미래에 혈연을 나눈 친자식을 가지고 싶나요? 

요나스: 네. 물론이죠. 그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고 관련된 질문도 있죠. 입양하면 어떨지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에 저랑 제 여자친구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 노르웨이 부모님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지 고민되죠. 아직 그 시점까지는 도달해 있지 않습니다. 아마 올해 아이를 가지지 않을 거고, 내년에도 가지지 않을 테니 그렇게 빠르게 정할 일은 아니죠. 

팟캐스트: 요나스 씨를 닮은 아이를 보는 것을 기대하시나요?

요나스: 네. 그렇습니다. 아주 기쁘겠죠. 절 닮은 아이를 보면 아주 흥미롭기도 할 겁니다. 어렸을 때 저를 닮았다면, 악동일 터라 좀 힘들겠지요. 

팟캐스트: (노르웨이어 인사) 감사합니다. 요나스 씨.

요나스: (노르웨이어 대답) 네.

시즌 4, 에피소드 13: 라스무스 바텔센

Audio available on Sunday, Feb. 7, at 10 pm EST.

21세 때 삶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하던 때를 기억해보자. 거기에 코펜하겐에서 한국계 다인종 간 입양아로서 국제적 유행병이 돌아, 아시아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을 겪고, 한국으로의 첫 여행에서 친가족들을 만나는 데 성공하고, 한국 이모가 보낸 이모지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경험도 추가해, 미래의 가능성이 무한해 보이는 시기의 이야기를 라스무스에게 한번 들어보자. 

라스무스: 제 이름은 라스무스 바텔센입니다. 21세이고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살고 있죠. 제 한국 이름은 명훈입니다. 

-덴마크어 자기소개

팟캐스트: 코펜하겐시에서 성장하셨군요?

라스무스: 네. 

팟캐스트: 라스무스 씨, 스칸디나비아 출신 입양아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특히 코펜하겐 같은 경우에는 혼자 다니면 사람들이 국제 교환학생으로 본다던데 사실인가요?

라스무스: 네. 사실입니다.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요. 라트비약이라는 이름의 덴마크 슈퍼마켓 겸 편의점이 있는데, 많은 사람이 와서 “오 외국인인가요? 덴마크에 교환학생으로 온 건가요?”라고 물어보죠. 그러면 제가 덴마크어로 “아뇨. 전 덴마크인입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럼, 사람들이 “미안해요. 미안해요. 잘 몰랐어요.”라고 답하고 저는 괜찮다고 답해요. 그리고 친구들이랑 돌아다니다 보면 사람들이 저에게 비자나 여권을 보여 달라고 할 때도 있죠. 그걸 생각하면 저랑 제 친구들이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팟캐스트: 백인 친구들과 나가서 술을 마실 때 그런 일이 발생하는 거죠?

라스무스: 네. 클럽에서 ID를 확인하죠. 하지만 ID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제가 21살처럼 보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보고 17살로 생각하고, 전 제 친구들에게 제가 21살인 것을 증명해달라고 부탁해야 하죠. 아무도 제 나이를 믿지 않아요. 

팟캐스트: 친구들 사이에서는 농담거리이겠군요.

라스무스: 그렇죠

팟캐스트: 하지만 동시에 짜증이 나기도 하나요?

라스무스: 처음에는 그랬죠. 전 덴마크인이고 실제로 덴마크인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행위 자체에 화가 나기보다는 불안해졌습니다. 왜 저에게 그렇게 대우를 하는 걸까? 뒤의 사람이나 다른 유색 인종들에게는 왜 그러지 않지? 이라고 질문을 던졌죠. 그 사람들이 악의를 가지고 그런 것도 아니고, 적대감도 없었어요. 그래도 그러한 행동에서 생기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덴마크인인데도, 미국인인데도, 독일인인데도 불안한 감정이 생기게 되죠. 

팟캐스트: 그곳에 속하지 않는다는 감정이군요?

라스무스: 그렇습니다. 입양아의 삶 중 큰 부분이 그러한 감정을 가지는 일이라고 생각하죠. 특정 장소에 속하거나, 자유를 느끼거나, 어떤 곳에 속한다는 감정이에요. 전 입양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3명의 아이 중 두 번째 아이였기 때문에 더 그분들에게 인식되고 싶었죠. 제 형이나 제 여동생이 더 관심을 받는다고 생각했어요. 길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관심에서 벗어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제 가족을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죠. 그래서 더 불안과 자기 회의를 느꼈어요. 긴장감과 염려에 휘말리게도 했습니다. 그게 제가 가졌던, 그리고 지금도 가지고 있는 문제죠. 항상 제가 저에게 말해야 하는 일은, 제가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하고 있고, 부모님도 저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최대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요. 

팟캐스트: 충분하지 않다는 기분이군요?

라스무스: 네. 그렇습니다.

라스무스: 요즘 상담을 받다가 최근 끝났죠. 중요 상담 주제는 불안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한밤중에 땀 범벅이 된 채로 일어나서 숨을 쉬기 어려울 때도 있었어요. 그래서 상담이 저를 크게 도와주었다고 생각하죠. 자기 회의와 가치 인식에 도움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일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일 자체가 도움이 되죠. 

팟캐스트: 그리고 대화를 하면서 모든 일이 괜찮다고 해줄 수 있는 상대가 있는 것이 좋죠.

라스무스: 네. 자유롭고 안전한 장소에 있고, 원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죠. 

팟캐스트: 이 팟캐스트를 계속 듣고 계셨다고 하셨는데, 다른 입양아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도움이 됐나요? 

라스무스: 다른 사람들이 저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고 같이 공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도움을 받고 있어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감정을 받아들이고 처리할 수 있죠. 

팟캐스트: 라스무스 씨가 겪는 문제가 생각보다 흔하다는 사실이 말이죠? 

라스무스: 네 그렇습니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일이 이상하지 않죠.

팟캐스트: 한국계 입양아들 상당수는 백인 위주의 작은 마을이나 도시로 입양되는 경우가 많죠. 코펜하겐은 더 국제적이고 다 인종적인 도시가 아닌가요?

라스무스: 코펜하겐은 확실히 국제적인 도시라고 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는 제가 유일한 유색인종은 아니었죠. 하지만 한국계나 중국계로 보이는 유일한 아이였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이 절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착각했습니다. 

팟캐스트: 미국에서의 인종 관계에 대해서 읽어서 알 텐데, 덴마크에서는 인종 관계에 차이점이 있나요? 

라스무스: 미국의 상황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COVID-19를 대응하면서 큰 문제를 겪었어요. 아시아계들이 너희가 온 곳으로 돌아가라는 등,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등 인종차별을 겪었죠. 단순히 우리가 그들과 닮지 않고 아시아계의 외모를 가졌다고 우리가 덴마크에 있으면 안 되며, COVID-19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팟캐스트: 라스무스 씨도 그러한 문제를 겪었나요?

라스무스: 네. 저도 겪었어요. 어느 날 슈퍼에서 쇼핑하고 집에 가던 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니는데 백인들이 모여서 서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주변을 지나가니 멀리 피하면서 저를 이상한 눈으로 봤습니다. 제가 COVID-19 바이러스인 마냥 저를 바라봤죠.

라스무스: 우리 가족은 아이가 세 명이 있고, 우리 셋 다 한국계 입양아죠.

팟캐스트: 한국에서 입양된 두 형제자매가 있으신 거군요?

라스무스: 그래서 자라나면서 전 한국계라서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죠. 애들이 자주 제 한국 이름인 명을 뒤틀어서 욕으로 만들어서 놀렸어요. 그래서 학교에 안 가려고 자주 아픈 척을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제 어머니는 간호사라서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깐깐했죠. 

팟캐스트: 아픈 척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군요.

라스무스: 네. 제가 아픈 척을 한다는 사실을 아셨죠.

팟캐스트: 어떤 식으로 사람들이 라스무스 씨를 놀렸죠?

라스무스: 중국 머리라던가, 그런 식으로 불렀습니다. 제 눈을 가지고 놀리기도 했죠. 제대로 볼 수 없을 거라고 놀리기도 했어요. 대부분 다 어린아이들이 놀릴 만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은 얼마든지 사악해질 수 있죠.

팟캐스트: 그렇죠. 사실 입양 부모님들은 대부분은 아시아계 아이들이 어떤 경험을 겪는지 모른다고 생각해요. 

라스무스: 모르죠. 하지만 제 어머니의 경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최대한 대응을 하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담임 선생님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물었어요. 그리고 제가 고개를 젓고 제가 직접 담임 선생님에게 말했습니다. 한 주정도 멈추더군요. 

팟캐스트: 그리고 다시 시작했군요?

라스무스: 그리고 다시 시작됐죠. 또 다른 웃긴 점을 가진 애를 찾아서 그 애를 놀릴 때까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었어요. 다시 괴롭힘당하고 싶지 않았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하는 데 돕지 못해서 끔찍했습니다. 

팟캐스트: 그저 주목이 다른 사람으로 넘어가서 안심하는 감정이 더 강했겠군요? 

라스무스: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하지만 어렸을 때 괴롭히는 애들에게 맞서는 일은 어렵지요. 

라스무스: 제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 우리 어머니가 커다란 칠판을 들고 학교에 가서 제가 한국에서 입양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한국 음식을 가지고 와서 소개해줬습니다. 수업 하나를 거기에 사용했어요. 그러고 났더니 괴롭힘이 멈췄죠.

팟캐스트: 어머니가 그런 일을 해서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라스무스: 어머니가 그렇게 해서 아주 기뻤죠. 어머니가 절 구해준 영웅이었어요.

팟캐스트: 애들이 라스무스 씨를 놀린 이유 중 일부가 라스무스 씨를 이해 못 해서 그랬다고 생각하나요?

라스무스: 네 그렇다고 생각해요. 애들은 저에게 농담하거나 놀리는 정도라고 생각했겠지만, 한국계 입양아에게는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입양아들은 여러 가지 문제에서 불안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잘 모른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21세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지만, 한국 이름을 쓸 생각을 하신 적이 있나요? 아니면 한 번이라도 한국 이름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나요? 

라스무스: 네. 제 한국 이름을 제 중간 이름에 넣으려고 생각하고 있죠. 현재는 단순히 라스무스 명 베텔센인데, 명훈으로 훈자를 넣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자라면서 학교에 친구는 있었나요. 라스무스 씨?

라스무스: 네. 친구들은 있었죠.

팟캐스트: 그러니 친구를 만드는 일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군요.

라스무스: 예. 친구 사귀는 데는 문제가 없었죠. 어머니가 그렇게 절 소개해준 뒤로는 꽤 평범하게 친구들과 축구도 하고 운동도 같이하면서 친해졌어요. 

팟캐스트: 교제는 어땠나요? 하기 어려웠나요?

라스무스: 음…. 네. 아무래도 그렇죠. 상대방에게 저 자신을 그래도 표현할 만한 자신감이 모자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저를 소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죠. 

팟캐스트: 그러한 관계에서 인종을 라스무스 씨가 뛰어넘어야 하는 문제라고 인식했나요?

라스무스: 네. 그렇게 느끼는 경우가 아주 많았죠. 아시아인의 정체성이나 입양아의 정체성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 항상 분노에 차 있었죠. 입양아의 정체성을 잘 몰랐고 왜 친어머니에게 버림받았는지 몰랐기 때문에 분노가 가득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친어머니가 왜 그래야 했는지 알고 부모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감정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알죠. 그래서 지금은 친어머니에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팟캐스트: 한국 문화, 음식, 드라마 그리고 K-POP에 대해서 더 알려진 환경에서 자라나는 일은 어땠나요? 그리고 라스무스 씨가 관심을 가진 한국 문화는 따로 있나요? 

라스무스: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죠. 문화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팟캐스트: BTS와 같은 한국 음악가들이 스타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끄는 것을 보고 자랑스러웠나요? 라스무스 씨와 똑같이 생겼는데 인기를 끌고 있었으니 말이죠. 

라스무스: 네. 한국 사람들이 저렇게 인기를 끈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동시에 친구들에게 K-POP를 좋아한다고 하기에는 좀 그랬죠. 사실 덴마크에서는 K-POP이 아직 그렇게 큰 인기를 끌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이 랩이나 팝을 들을 때 저 혼자 K-POP과 한국 드라마를 본다고 할 수 없었죠. 사실 최근에야 제 부모님에게 K-POP과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말씀드렸어요. 

팟캐스트: 현재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가 있으신가요?

라스무스: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첫사랑은 처음이지만(넷플릭스) 이라는 드라마에요. 친구들에 관한 내용이고 주인공이 대학교에 막 입학했다는 설정입니다. 그리고 데이트에 대해서 배우려고 하는 내용이죠. 가장 친한 친구에게 짝사랑하고 있었지만 가장 친한 친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몰라요. 그리고 그 가장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가출해서 집이 없어지게 되는 이야기로 진행이 되죠. 그리고 저는 이 모든 내용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비슷한 나이의 대학교 학생이라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 이입할 수 있었어요. 

팟캐스트: 로맨스 관련해서는 한국과 덴마크의 문화적 차이를 느끼셨나요?

라스무스: 네 그렇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덴마크 사람들보다 이런 쪽에 관련해서는 더 소극적인 것 같아요. 덴마크의 경우는 훨씬 더 적극적이고 솔직하죠. TV 매체는 더욱더 그래요.

팟캐스트: 성적 순수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죠?

라스무스: 네 그렇습니다. 성적 순수성이 있어요. 그런데 그게 웃기지는 않고 흥미로웠죠.

팟캐스트: 다른 이야기지만, 입양된 뒤 한국에는 언제 처음으로 돌아가셨죠? 

라스무스: 제가 처음으로 한국에 돌아간 때는 지난 12월이었어요. 아주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죠. 제 입양 부모님과 제 여동생과 한국을 방문했죠.

팟캐스트: 여동생인가요? 누나인가요?

라스무스: 제 여동생이죠. 저보다 4살 연하입니다. 

팟캐스트: 아직 고등학생이겠군요?

라스무스: 네 그렇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생이 되죠. 제가 비행기에서 보고 놀랐던 점은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이 가득했다는 점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같이 타고 있던 중국 학생이 있었죠. 그리고 저에게 중국어로 말을 걸었어요. 아주 재밌는 경험이었죠.

팟캐스트: 백인 부모님과 같이 있었는데도 말이죠?

라스무스: 네 그렇죠. 하지만 저는 제 여동생과 따로 앉아 있었거든요. 부모님은 저희 뒷줄에 앉아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그게 입양아의 공통적인 경험 중 하나이죠.

라스무스: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실 계획이 있는 입양아분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 한국에 가는 비행기에서 중국어로 말을 걸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팟캐스트: 그래서 여행으로 한국에 돌아갔군요. 첫인상은 어떠셨죠?

라스무스: 처음 내리자마자 몹시 춥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한국에 와서 아주 기뻤어요. 제 출생 국가를 직접 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에 차를 타고 우리가 지내게 될 집으로 갔어요. 주변 풍경은 대단했고, 주변에 저와 닮은 얼굴이 가득했죠.

팟캐스트: 그리고 사람들이 한국어로 말을 걸었겠군요?

라스무스: 네! 사람들이 자주 저를 멈추고 한국어로 말을 걸었죠. 그리고 제가 놀라서 한국어로 네라고 답하니 사람이 계속 말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계속 말을 걸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어요.

팟캐스트: 하지만 거기에 있었을 때 한국어 몇 단어 정도는 배우셨죠? 

라스무스: 네 그렇습니다.

-광고-

팟캐스트: 왜 라스무스 씨의 가족이 한국을 방문하셨죠? 계획적인 여행이었나요? 부모님이 가려고 하셨나요? 아니면 여동생이 원했나요?

라스무스: 아주 재밌는 이야기입니다. 계획된 방문이 아니었죠. 사실 우리는 호주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실제로 호주도 방문했지만, 어머니가 “오! 한국 항공권을 아주 싸게 구했다”라고 하시면서 한국을 일주일 정도 거치자고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아주 행복했어요. 그래서 제 한국 가족과 연락을 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이모에게 연락을 시도했고, 금요일에 출발해서 일요일에 도착했죠. 그다음에 입양 기관에서 제 친척들을 만나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팟캐스트: 어떻게 그분들을 찾으셨죠? 이름이 서류에 있었나요?

라스무스: 아뇨. 제가 그 입양 기관에 제 친어머니를 찾으려고 조사 의뢰를 했죠. 입양 기관에서 저에게 연락했고 제 이모와 대신 연락이 되었어요. 

팟캐스트: 이모요?

라스무스: 네. 어머니의 언니, 큰 이모였죠. 그리고 가족들과 만나기 위해서 계획을 세웠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이모와 이모부를 만났군요?

라스무스: 네.

팟캐스트: 그 경험은 어떠셨죠?

라스무스: 아주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힘들기도 했어요. 시차로 인한 피로가 심각했죠. 그분들이 절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불안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도 많았죠.

팟캐스트: 그분들이 라스무스 씨를 평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군요.

라스무스: 네. 하지만 두 분 다 상냥하시고 친절하셨죠. 이모가 저를 보고 울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하셨고, 제 이모부도 무척이나 기뻐하셨어요. 

팟캐스트: 이분들이 정확히 라스무스 씨와 관계가 어떻게 되죠?

라스무스: 제 어머니의 언니와 남편, 큰이모와 큰 이모부였어요. 

팟캐스트: 그래서 그 두 분이 왜 라스무스 씨가 입양되었는지 설명했나요?

라스무스: 어머니가 17살에 임신해서 18살 때 저를 가졌다는 사실을 설명하셨죠. 그리고 제가 입양 제도에 맡겨진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이모와 이모부가 대신 맡아서 키우려고 했지만, 두 분의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않아서 대신 저를 입양 제도에 맡겼다고 했죠. 

팟캐스트: 친어머니가 라스무스 씨를 돌볼 수 없던 이유는 어머니가 미혼모였기 때문인가요?

라스무스: 미혼모이셨고, 고등학교도 졸업 못 한 상태였다고 해요. 고등학교 2학년 이후로 고등학교에 못 가셨다고 하셨죠.

팟캐스트: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셨나요?

라스무스: 네. 하지만 어머니가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하신 상태이고, 남편이 어머니가 미혼모였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남편이 그 사실을 아는 것이 무섭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하면서 만나려고 준비를 하고 있죠.

팟캐스트: 어머니의 사진을 보셨나요?

라스무스: 네 사진을 봤습니다. 젊더군요.

팟캐스트: 한 40세 정도 되셨겠군요?

라스무스: 39세였습니다.

팟캐스트: 39세라…. 이부형제나 자매들이 있나요?

라스무스: 네. 여동생이 있다고 하더군요. 

팟캐스트: 이 모든 정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죠?

라스무스: 아주 감사해요. 결국, 모든 정보를 취합해서 생각했을 때 고맙다는 생각이 들죠. 제 한국 뿌리를 알게 되고 한국에 오게 된 것도 기분이 좋고, 제 한국 친척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물론 아직 어머니와는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주 고맙죠. 

팟캐스트: 라스무스 씨처럼 혈육을 만나는 일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강력한 경험이었나요? 

라스무스: 아주 강력한 경험이었죠. 사실 끝나고 나서 저 자신에 대해서 실망했어요. 제가 물었어야 했을 것 같았는데 내가 울지 못했기 때문이죠. 감정에 휘말려서 뭐가 일어나는지 정확히 인식할 수가 없었어요. 

팟캐스트: 덴마크 부모님이 동행했던 일이 도움이 됐다고 보나요? 아니면 문제가 됐다고 보시나요?

라스무스: 도움이 됐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도 됐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제 입양 부모님이 제가 그분들을 버리고 떠나서 친척들과 지낸다고 생각하는 일이 무서웠거든요. 그래서 부모님과 여동생과 그 문제와 관련해서 진지한 대화를 한국으로 가기 전에 나눴죠. 하지만 동시에 그분들이 있어서 안전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곳에서 저를 지지해주시면서 제 안전망이 되셨습니다.

팟캐스트: 입양 부모님이 한국에 관한 관심을 지원해주셨나요? 관련해서 불안감을 느끼지는 않으셨나요?

라스무스: 둘 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항상 저를 지지하셨죠. 하지만 모든 입양 부모님들이 그런 분야에서는 불안감을 가진다고 생각해요. 아니 불안감이 아니라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대부분은 아이들을 지지해준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개인적인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부모님의 특정한 말이나 행동에서 그러한 공포를 느끼신 적이 있나요?

라스무스: 네. 사실 이건 한국에서 돌아오고 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한국 친척들과 계속 연락을 나누고 있었죠. 이모가 저에게 문자를 보내면 제가 그 문자에 답하는 식이었어요. 그래서 휴대전화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입양 부모님에게 제 이모가 뭔 이야기를 했는지 설명해드렸어요. 그때 아버지는 아주 기뻐하셨지만, 어머니는 약간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죠. 

팟캐스트: 그 삶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겠군요?

라스무스: 네 그렇습니다. 그러한 기분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한국 가족과 서로 소통은 어떻게 하시나요?

라스무스: 카카오톡을 사용해서 하고 있어요

팟캐스트: 번역은 파파고와 같은 번역 앱을 사용하시나요?

라스무스: 네. 처음에는 파파고를 사용해서 연락했지만, 나중에는 이모가 영어로 문자로 보내시기 시작해서 이해하기 쉬워졌죠. 

팟캐스트: 이모지를 많이 사용하시는 편인가요?

라스무스: 전 사용하지 않지만, 이모는 많이 사용하시는 편이에요. 전 이모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냥 글을 써서 보내는 편입니다. 하지만 이모는 이모지를 아주 좋아하죠. 그래서 그 이모지가 무슨 뜻인지 해독하려고 해요. 

팟캐스트: 이모님이 이모지를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전 세계적으로 통하는 뜻이 있기 때문인가요?

라스무스: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모지를 보면 보통 제 친구들과 저 또래를 위한 소통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제 부모 세대가 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보통 이모나 어머니에게 연락할 때는 이모지를 안 쓰고 평범하게 연락하려고 하죠. 

팟캐스트: 어머니와 직접 연락이 되나요? 비밀리에 연락하시는 건가요?

라스무스: 네. 어머니와 연락이 됩니다. 비밀리에 연락하는지는 모르지만, 저와 문자로 연락하고 있죠.

팟캐스트: 어머니와의 교류는 어떤가요?

라스무스: 잘 되고 있어요. 제 한국 어머니를 알게 되면서 관계를 구축하니, 특정한 목적을 달성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팟캐스트: 친척들과 연락이 닿은 뒤로 반년이 넘었지요? 

라스무스: 네

팟캐스트: 카카오톡으로 연락을 계속 지속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나요? 

라스무스: 전혀 그렇지 않고,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죠.

팟캐스트: 얼마나 자주 그분들과 연락을 하시죠? 

라스무스: 가끔 연락하죠. 그분들이 저에게 먼저 연락을 주실 때도 있고, 제가 먼저 연락을 하면 항상 대답을 해주세요. 하지만 그분들이 항상 이야기를 하기를 제 덴마크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를 원한다고 하십니다. 그분들은 제 덴마크 가족들을 존중해주시고, 그 가족이 절 사랑해주고 지원해줘서 기뻐하시죠. 그래서 제가 덴마크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주면서 동시에 저와 연락을 지속하고 있어요

팟캐스트: 라스무스 씨, 한국 친어머니와 덴마크 입양 어머니에게 가진 사랑이 서로 다른 사랑인지에 대해서 논의해보거나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라스무스: 네. 생각 해본 적이 있어요. 설명하자면 덴마크 어머니에 대해서는 키워준 애정을 품고 있죠. 하지만 동시에 한국 어머니를 역경을 뛰어넘어서 찾았고, 서로 연락하면서 만든 애정이 있어요. 그러니 저는 두 분 다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친어머니와는 단계적으로 애정을 쌓아가고 있다면 제 입양 어머니와는 애정 10단계에 도달해 있다고 봐야 하겠죠. 덴마크 어머니와 저는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거든요. 하지만 한국 어머니와의 관계는 이제야 3단계를 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의 삶의 일부가 되려고 하고 있죠.

팟캐스트: 한국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었던 일이 있나요?

라스무스: 한국 어머니에게 어떤 증오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어머니가 절 입양시킨 일을 이해하고 어머니가 절 입양시켜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만약에 어머니가 절 입양시키지 않았다면 현재의 입양 가족들과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팟캐스트: 입양 결정 자체는 어머니가 내리셨군요?

라스무스: 네. 어머니가 결정하셨지만, 어머니의 어머니, 그러니까 제 외할머니가 승인하셨죠. 어머니는 그때 미성년자였거든요. 

팟캐스트: 친아버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요?

라스무스: 친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친구 생일파티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만 들었죠 

팟캐스트: 그러니까 하룻밤의 유흥이었을 가능성이 있군요?

라스무스: 그렇죠.

팟캐스트: 아버지를 찾고 싶은 욕망이 있나요?

라스무스: 잘 모르겠어요. 현재 어머니의 가족과의 교류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한국 가족들과 만나고, 한국 어머니와의 연락이 라스무스 씨를 바꾸었다고 생각하나요? 

라스무스: 제 한국에 대한 인식을 더 강하게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더 한국인 같은 느낌이 들죠. 물론 그 말이 제가 덴마크인의 정체성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더 한국인의 정체성이 강해지고, 한국인의 뿌리가 느껴지고, 한국 유산이 제 일부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팟캐스트: 전에는 그렇게 느끼지 않으셨군요?

라스무스: 예. 전에는 덴마크 입양 부모님에게 왜 친부모님이 아닌지 물어본 적이 있죠. 만약에 그 두 분이 친부모님이었다면 제가 겪는 문제 중 대부분은 겪지 않았을 겁니다.

팟캐스트: 과거에는 입양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욕구가 있었군요?

라스무스: 네. 과거에는 제가 입양아가 아니었으면 좋겠고 제 입양 어머니가 제 친어머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팟캐스트: 라스무스 씨, 이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지는 모르겠고, 원하지 않으신다면 안 하셔도 되지만, 형과 여동생도 한국에서 입양된 입양아라고 들었는데, 라스무스 씨가 친가족과 다시 재회했으니 형과 여동생도 가족과 재회했는지 알고 싶네요. 만약에 그러지 못했다면 라스무스 씨의 재회가 질투를 유발했나요? 아니면 형과 여동생도 가족을 찾으려고 노력했는데 못 찾아서 상황이 어색해지기도 했나요?

라스무스: 적어도 제 여동생에 관련해서는 제가 부모를 찾아서 기뻐해 줬고 질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적극적으로 저를 지지해줬죠. 그리고 저에게 질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여동생이 가족을 찾고 싶어서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중에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지금은 현재 상황에 만족하고 있죠.

팟캐스트: 형이 있다고도 들었는데요.

라스무스: 네. 형이 있죠. 형은 가족을 찾고 싶어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형에 대해서는 잘 모르죠. 현재 의학을 전공하고 있고, 대화를 별로 나누지 않습니다. 

팟캐스트: 이상한 일은 아니네요. 그냥 형과 여동생과는 가족과의 재회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를 안 한 셈이니까요.

라스무스: 형과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제 여동생과는 이야기를 나눴죠. 그리고 제가 한국에 가진 관심에 관해서도 이야기했어요. 여동생은 저를 계속 지지해줬습니다. 여동생은 BTS를 듣기 시작했고 그래서 여동생과 더 많은 한국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행복하죠.

팟캐스트: 한국 문화가 마음에 드셨나요?

라스무스: 한국 문화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한국에 가니 제가 아주 키가 커진 기분이었어요. 

팟캐스트: 키가 아주 많이 커진 기분이었다고요?

라스무스: 네. 제가 174cm인데, 덴마크에서는 이게 큰 키가 아니죠. 하지만 한국에서는 충분히 큰 키라, 아주 대단한 경험이었어요.

팟캐스트: 여성을 좋아하시죠?

라스무스: 네. 

팟캐스트: 한국에서 관심을 받으셨죠?

라스무스: 네. 관련해서 재밌는 이야기가 있는데, 두 번째 날에 한국 여자애들이 저를 멈춰 세우더니 한국말로 말을 걸었죠. 그리고 제가 얼어붙어서 제대로 답을 못하니 제가 노래를 듣고 있던 핸드폰을 가지고 가서 카카오톡과 인스타그램에 자기들을 친구로 추가하더군요.

팟캐스트: 오…. 꽤 적극적인 행동이네요? 하지만 나중에 라스무스 씨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죠?

라스무스: 네. 다섯 번째 질문에 대답을 안 했을 때 그 사실을 알았죠.

팟캐스트: 핸드폰도 봤을 거고요.

라스무스: 네. 

팟캐스트: 그 일로 아주 기분이 좋았겠네요?

라스무스: 네. 아주 기분이 좋았죠. 아주 재밌기도 했고요.

팟캐스트: 한국에서 시간을 더 보낼 생각은 없나요?

라스무스: 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죠. 한국에 돌아가서 더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어요. 음식도 먹고 싶고, 패션도 경험해보고 싶고, K-POP과 한국 드라마도 경험하고 싶습니다.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을 경험하고 싶죠

팟캐스트: 한국에서 거주하고 싶지는 않나요?

라스무스: 예. 한국에서 살아볼까 생각해봤어요.

팟캐스트: 미래에 원하는 일은 있나요? 어머니의 가족에게 인정을 받고 싶나요? 아니면 그 가족들과 만나고 싶나요?

라스무스: 제가 원하는 일은 제 한국 가족 모두를 알게 되는 일이죠. 한국 가족 모두와 만나서 한명씩 서로 알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 가족의 일부가 된 느낌을 받고 싶어요. 

팟캐스트: 20년 뒤의 미래에 라스무스 씨가 뭘 할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라스무스: 한국에서 살면서 가족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한국에서 말이죠?

라스무스: 네. 그리고 덴마크와 한국을 자주 여행하면서 입양 가족과도 같이 지내려고 하고 싶어요.

시즌 4, 에피소드 12: 테라 푸트너

Audio available 1/24/21 at 12:00 pm EST

한국계 미국인 입양아 테라 푸트너 (44세)는 어릴 때의 재입양, 폭력적인 입양 생활, 그리고 미국 입양 제도에서 살아남았다. 이러한 어릴 때의 경험이 테라 씨가 내부 관찰과 글쓰기에 집중하게 했다. 최근 테라 씨는 자신의 창의력을 통해 온라인 플랫폼인 유니버설 아시안(The Universal Asian)을 만들었다.

*재입양과 성적 학대를 비롯한 아동학대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 욕설 포함 

테라: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테라 푸트너입니다. 한국 이름은 엄순희이죠. 현재 도쿄에서 살고 있지만 다음 달에 프랑스로 이주할 예정이고 현재 나이는 44세입니다. 은퇴는 아니지만, 우리 가족은 삶의 다음 단계를 프랑스에서 보내자고 계획하고 있었어요. 5년 주기 계획이었지만 브렉시트가 확정되고, 저와 제 남편이 COVID-19로 인해서 재택근무를 하게 되니 사무실에 나갈 일이 없어졌죠. 저는 3월부터 사무실로 출퇴근하지 않았어요. 일본에서의 생활은 괜찮았고 제 남편도 일본을 좋아했지만, 밖에 나가면 사람들과 바로 마주칠 정도로 붐비는 곳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상황이 맞아 들어가서 프랑스에서 집을 얻기 쉽도록 프랑스 영주권을 얻는 절차를 시작했죠. 그래서 우리가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고 결정을 해도 항상 프랑스를 최종 목적지로 둘 수 있도록 준비를 했어요

팟캐스트: 이름 발음이 타라인가요 아니면 테라인가요?

테라: 테라입니다. 하지만 제 남편은 저를 타라라고 불러요. 영국 발음으로는 타라라고 하거든요. 

팟캐스트: 한국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주실 수 있나요?

테라: 그러죠. 전 제 서류에 적혀 있던 정보만 알고 있어요. 신뢰 여부가 불분명한 자료입니다. 그래도 서류에 따르면 전 제 친어머니와 함께 1년 반 정도를 살았어요. 그다음에는 위탁 가정에 맡겨졌죠. 그리고 SWS(대한사회복지회)를 통해서 입양 제도에 맡겨졌습니다. 1979년에 오리건주 포틀랜드시로 보내졌죠. 2살 반에서 3살 정도의 나이였어요. 첫 입양 가족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고, 약간의 기억 파편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11살과 13살 연상인 오빠들이 있었죠. 그리고 그 가족과 2년에서 1년 반 정도 지냈어요. 하지만 그 가족은 서류가 거짓으로 작성되었고, 제가 그들이 원했던 아기가 아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전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래서 다른 위탁 가정에 맡겨졌죠. 제가 아는 바로는 그때는 파양이 아니라 실험적인 분리였고, 포틀랜드에서 맥민빌로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다섯 살 정도 되었을 때인데, 잘 기억이 나지 않죠. 하지만 제가 아주 행복해 보이는 사진이 있고, 그 사진에 한 여성이 같이 나와 있어요. 제가 나온 사진 대부분은 딱딱하고, 지금도 딱딱하게 사진을 찍는 편이죠. 하지만 그 사진은 제 인생에 찍은 사진 중 유일하게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 나와 있는 사진입니다. 전 사진에 나온 사람이 누군지 몰랐어요.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그분은 절 입양하려고 했지만, 첫 가족이 절 파양한 뒤 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절 입양하려고 했던 위탁 어머니가 미혼모라는 이유로 그분의 입양 신청을 거부했죠. 그리고 오리건주 골든 비치에 있는 저보다 어린 남자아이가 있는 가정으로 절 보냈습니다. 거기에서 또 2년에서 3년 정도 더 지냈다고 생각해요. 7살 때 그곳을 떠났기 때문이죠. 두 번째 양어머니에게 끔찍한 학대를 받았기 때문에 힘든 생활을 보냈습니다. 학교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죠. 아마 제가 학교에 말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또 오리건주 브루킹스에 있는 위탁 가정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에서는 1년 정도 지냈죠. 거기에서 제 마지막 양부모님, 그러니까 현재의 부모님이 등장하셨습니다. 그분들은 미국 국내 입양을 하려고 했어요요. 그리고 그때는 제가 미국 국내 입양 제도 안에 있었죠. 그분들은 나이를 좀 먹은 아이를 입양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목록 가장 위에 있었고, 제가 8살일 때 제 부모님이 저를 입양하셨죠. 그때부터는 아주 좋았어요. 제 가족을 사랑하지만, 가족들과 만나기 위해서 끔찍한 8년을 버텨야 했습니다. 

테라: 제 두 번째 입양 가족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학대는 항상 기억에 남죠. 첫 기억은 말을 해도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하는 기억이기 때문에 그 기억은 아마 첫 가족과의 기억이라고 생각해요. 그 경험이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죠. 예를 들면 소통할 때 말하기보다 쓰기를 중시하게 되었어요. 그 뒤로는 8살 때까지의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8살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죠. 제가 기억을 하지 못 하는 일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 가족들을 기억하고 싶었거든요. 14살이 되어서야 그곳에서 계속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기를 매일 작성해서 뭐가 일어나는지 기록했고, 지금까지도 일기를 작성하고 있어요

팟캐스트: 트라우마에 트라우마를 얹은 것 같네요

테라: 네

팟캐스트: 부모님과 같이 지낼 수 있다고 믿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하셨죠. 그러한 경험이 테라 씨를 내향적이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받게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테라: 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전 제 생각을 안에 담아주는 편이었죠. 어머니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기억 중 하나는 제가 화를 냈을 때라고 하더군요. 제가 보통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좀 더 감정을 드러내게 됐지만, 지금까지도 그러는 면이 있죠. 예를 들면 선물을 열고 내용물을 보고 고맙다고 하고 다시 선물을 상자에 넣고 제 방으로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제 방안에서 선물이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정했어요. 물론 마음에 안 들어도 해도 언급을 안 했죠. 화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최대한 완벽해지려고 노력했어요. 완벽한 아이가 되려고 했고 그게 제가 원했던 정체성이었죠. 그리고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어요. 제 남편과 이야기를 하면 재밌는 일이 많죠. 사람에 대해서 저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만, 남편은 긍정적인 관점에서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저는 부정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전 사람들은 항상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들에게서 실망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죠. 남편은 모든 사람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사람들이 그를 실망하게 할 것을 알지만, 그것이 사람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정적인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는 사람들에게 항상 두 번째 기회를 줍니다. 전 그렇지 않죠. 

팟캐스트: 서로의 그러한 면을 알고 계시군요

테라: 네. 

팟캐스트: 그 이야기를 하시면서 살아오시면서 첫 번째 가정과 두 번째 가정에 느낀 분노와 고통이 느껴졌어요.

테라: 네. 항상 그런 문제가 있었어요. 아니 물론 지금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그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데 문제는 없죠. 특히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러한 일이 쉬워졌어요. 하지만 30대 중반까지는 화를 내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전 자라면서 분노를 밖으로 표출하거나 반항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반항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원하는 일을 위해서 제도를 바꾸고,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죠. 공이 바람을 되돌리기 전까지 공에 바람을 최대한 불어넣어 보는 일입니다. 그래서 한계를 사람이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최대한 그 한계 내부에서 활동하려고 하죠. 제가 화가 나면, 그걸 좀 가지고 생각을 하다가, 뭘 할 수 있겠어? 이라고 생각하고 그 분노를 가라앉히거나, 무시하거나, 그 분노를 뛰어넘으려고 합니다. 이게 건강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분노를 잡아 두려고 하지 않아요. 과거는 과거일 뿐이죠. 물론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과거도 저의 일부가 되었으니까요. 하와이에서 입양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걸 들은 제 형제가 “우와 부럽겠다, 하와이로 입양될 수 있었는데 오리건에 갇혔잖아!”라고 한 적이 있죠. 그렇게 농담하면 할수록 받아들이기 쉬워져요. 물론 제가 원하면 화를 낼 수도 있지만, 그럴 이유를 느끼지 못합니다. 

테라: 전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분석하려고 노력하죠. 그래서 논리적이나 합리적인 결론이 나지 않으면 최대한 나눠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감정적인 대응은 가장 나중에 와요. 2주에서 3주, 한 달, 심지어 몇 년 뒤에 갑자기 튀어나올 수 있죠. 사람들이 그걸 보고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걸 해결하려고 스스로 감정 조절도 하고, 관련 정보의 독서도 하면서 계속 노력하고 있죠. 

팟캐스트: 3살짜리가 어떻게 사람을 속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네요

테라: 그러니까요. 

팟캐스트: 약속된 능력보다 더 못하다는 의미였을까요? 그 일이 완벽 해지려고 하는 성격의 기반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무의식적으로 다시 분류되는 것을 두려워하셔서 말이죠.

테라: 제가 그렇게 분류되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제가 15살에서 16살 때 제 서류를 읽고 나서야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죠.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제가 같이 지냈던 첫 가족은 저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다. 첫 가족에게서 받은 영향은 여전히 무의식 속 깊숙하게 묻혀 있거나 제 일부가 된 느낌이죠. 첫 가족과 뭐가 일어났는지는 잘 모르고 기억만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기억들을 판단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기억들이 사실인지도 모르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제가 행복하게 웃고 있던 사진에 나온 위탁 가정의 어머니를 찾았죠. 그분을 찾아서 행복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항상 가지고 있던 기억 중 일부는 첫 가족의 기억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 위탁 과정에서 생긴 기억이었습니다. 그 사실 자체가 아주 흥미로웠고 첫 번째 가족에 대해서 배운 어떤 것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었어요. 물론 제가 그 사람들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첫 번째 가족과 연락을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그러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가족이 제가 완벽해지려는 성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제가 모르는 이유로 혼나는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5살 꼬마가 뭘 알겠어요? 그 가족은 제가 2살짜리 남동생을 돌보기를 원했습니다. 그 애의 기저귀를 갈아주기를 원했지만 그러지 못했고 그래서 혼났죠. 5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애 기저귀를 갈아주는 법을 알겠어요? 구석에서 벽을 보고 몇 시간 동안이나 서 있고는 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을 때 어떻게 눈에 안 띄게 되는지 생각했던 것 같아요. 사실 벽을 보고 있을 때가 가장 평온했죠. 제가 왼손잡이인데 거기에 있을 때는 강제로 오른손을 써야 했습니다. 그러한 일도 제 성격에 영향을 끼쳤다고 봐요. 그 가족은 제가 왼손을 쓰니 사악하다는 증거라고 저에게 말하고 했죠. 지금은 제가 문제가 있던 것이 아니라, 그 두 번째 가족의 어머니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하는 일은 아이와 관련 없는 경우도 많죠. 

테라: 그래서 저는 두 번째 어머니에게 아주 오랫동안 분노해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화나기보다는 흥미롭죠. 옛날 인터넷 포럼에서 Adopted.com에 두 번째 어머니가 올린 글을 봤습니다. 어떻게 찾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전화번호가 있더군요. 그래서 그분에게 전화했죠. 하지만 이사를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같이 살던 룸메이트분이 있어서 그분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어머니의 근황과 행방을 물어봤죠. 아주 흥미로운 정보 교환이었습니다. 두 번째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죠. 들어보니 어머니가 소시오패스 적 성향이 있었지만, 현재 알코올 중독자를 위한 상담사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듣고 제가 경험했던 여자가 맞는지 놀랐어요. 그리고 어머니의 아들, 그러니까 제가 돌봐야 했던 어린 소년에게 연락했죠. 서로 직접 대화하지 않았지만, 그는 저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가 어머니에게 이야기해준다고 했지만, 그 뒤로 연락은 오지 않았고 신경 쓰이지 않죠. 더 의미 있는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다른 문제는 제가 현 가족을 만나기 전까지 있었던 위탁 가정이었습니다. 

테라: 제 위탁 가정의 아버지가 저를 성적으로 학대했거든요. 하지만 그 사건과 관련해서 부정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두 번째 가족에게서 느낀 충격과 고통이 너무 심해서 위탁 가정의 아버지가 저에게 준 관심과 소위 “애정”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같아요. 나중에 진짜 가족들과 만나고 난 뒤에도 말이죠. 물론 제 현재 가족과 제 아버지가 알았을 때는 엄청난 일로 발전했습니다. 위탁 가정의 아버지는 고소당했고,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했어요. 그걸 보고 약간 미안해졌습니다. 제 잘못은 아니지만 제가 말한 것으로 시작했죠. 평범한 대화에서 시작했어요. 부모님이 저를 앉혀 놓고 과거가 기억나는지 물었죠. 서류를 같이 읽으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기억이 나는지 물어봤습니다. 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류에서는 첫 가족의 큰 오빠가 저를 성추행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군요. 아버지가 기억이 나는지 물었죠. 전 그 말에 “언제 이야기를 하는 거죠?”라고 답했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뭐?”라고 되물었습니다. 위탁 가정 아버지 관련 문제는 보고가 안 됐었거든요. 그래서 큰 문제로 비화했죠. 위탁 가정의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가 기억이 납니다. 비행기를 타고 있었는데 자다가 깨서 무언가를 느꼈죠. 그리고 내리자마자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와서 그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리고 그걸 듣고 감정이 요동쳤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오리건주 공화당원의 전형이었기 때문에 죽었으니 잘됐군. 이라고 말했죠. 저는 그 남자를 악당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슬퍼했어요. 물론 지금 와서는 죽은 것이 기쁘지는 않지만 적어도 어떤 종류의 처벌은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경험이 제가 튀지 않고 숨으려는 경향에 영향을 끼쳤죠. 

팟캐스트: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고 들으니 끔찍하네요. 성폭력 생존자이시군요.

테라: 네.

팟캐스트: 테라 씨가 설명하신 화장하지 않고 헐렁한 옷을 입는 행위가 그러한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아서 일수도 있겠군요. 사람들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느껴본 적은 있습니까? 사랑의 과정과 감정이 힘드셨나요?

테라: 첫 연애는 14살이었습니다. 현재는 평범한 일이지만 그때는 조숙한 아이들이 하는 일이었죠. 그때는 평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깊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전 사귀고 싶지 않았지만, 주변의 압박 때문에 사귀었죠. 그렇다고 해서 난잡한 젊은 시절을 보내지는 않았어요. 현재 전 두 번째 결혼을 한 상태이고 첫 번째 결혼 이후에도 남자친구들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지한 일부일처주의자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보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저는 성관계에 감정을 섞지 않는 방법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몇 번 원나잇 스탠드도 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친구들과 공유하면 친구들이 놀라면서 왜 그랬냐고 묻고는 했죠. 그럼 제가 필요했으니까. 이라고 답하고 했어요. 감정적인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한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전 그렇게 신체접촉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제 남편은 신체접촉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남편과의 신체접촉은 좋아하죠. 하지만 전 사람을 안는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물론 다른 사람들이 하니 저도 하게 되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사람들에게 애정을 표시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래도 극단적인 성격도 아니라, 극단적인 일은 하지 않았죠. 교제를 여러 번 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저에게 감정적으로 다가오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서양 사회가 성적 관계에 감정을 연관 지어서 어려움을 겪었어요. 남자들이 성적 관계를 맺고 난 뒤 저에게 감정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죠. 그래서 제 남자친구들이 성적 관계든, 정신적인 관계이든 좀 더 감정적인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저도 깊은 감정이 있긴 했지만, 표현법을 몰랐고, 차갑다는 평가를 많이 받고는 했습니다. 제가 감정이나 사랑을 많이 표현하면 사람들이 저를 지배하거나 조종할 것이라고 믿었고, 그 일을 막으려고 했어요. 지난 10년에 들어서서야 겨우 평범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됐죠. 

팟캐스트: 인간관계에 대한 태도가 변화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테라: 음… 제가 22세 때 첫 결혼을 했습니다. 29세 때 이혼을 했죠. 제가 34세에서 35세가 되었을 때였어요. 뉴질랜드 출신의 남성과 교제를 했습니다. 그 사람은 결혼…. 아니 아이를 가지고 싶어서 했어요. 결혼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아이를 가지기를 원했죠. 하지만 전 아이를 가지고 싶었던 적이 없어요. 물론 아이를 가진다면 3명에서 5명 정도의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극단적이긴 했죠.

팟캐스트: 확실히 좀 극단적이네요.

테라: 그렇죠? 아예 안 가지거나 잔뜩 가지거나 둘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제 나이가 34세 정도였고 아이를 가질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죠. 그래서 제 아버지에게 왜 아이를 가지고 싶었는지 물어보게 되었어요. 아버지의 대답은 저에게 그렇게 좋은 해답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남자친구와는 잘 안 될 것 같았고, 헤어졌어요. 그리고 아이를 가지고 싶어서 하지 않는 남성과 교제를 시작했죠. 결혼하고 싶어서 하지도 않았고, 아이도 가지고 싶어서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둘이서 거의 완벽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어요. 물론 주변에서 보면 왜 사귀느냐? 이라고 평가될 만한 관계였죠. 미래도 없었고, 우리 둘이 선생이라 두세 달 동안 혼자서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다시 만나고, 그런 관계를 서로가 좋아했어요. 같이 석 달 넘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말이죠. 같이 동거하기도 했고, 그 관계 자체가 아주 자유로운 관계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관계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들으니 제가 평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들게 했죠. 저 자신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저를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과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도록 해야 했어요. 나중에는 제가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평범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다른 욕구가 있었어요. 좀 더 안정적인 관계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았죠.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좀 더 안정적이고, 유대감이 있으며, 평범한 관계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 남자친구와 서서히 멀어지다가 헤어졌죠. 준비해서 크리스마스에 헤어지고 월말에 제가 그 집에서 나왔습니다. 한 달 정도 제 감정을 정리하는 데 시간을 보냈어요. 그리고 혼자서 여행을 떠났죠. 그 여행을 하면서 제가 제 연애 상대에게 원하는 모든 점을 적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은지도 적었죠. 그게 2월 초였고, 지금의 남편을 밸런타인데이에 만났어요. 남편은 제가 원하던 모든 것에 맞아 들어갔고, 그걸 보고 “당신은 도대체 누구세요?”라고 되었습니다. 거기에 그이도 런던에서 온 입양아였죠. 제가 원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모든 조건이 맞아 들어갔어요. 

팟캐스트: 어떤 조건들이었죠? 

테라: 우선 정신적으로도, 그리고 다른 측면으로도 인생의 주도권을 잡은 사람을 원했어요. 제가 가진 문제가 너무 많아서 상대방의 문제를 도와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죠. 전 아이를 원치 않았지만, 그이는 이미 아이를 두 명 가지고 있었어요. 어른인 딸이 두 명이었습니다. 그 방면으로는 문제가 없었죠. 그리고 미국인이 아닌 상대를 원했어요. 제가 이미 미국인의 정체성이 희미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인의 영향을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돈이 있는 상대를 원했죠. 재정과 관련해서는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현재는 우리 둘 다 안정적이에요. 다른 조건들도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죠. 하지만 결론적으로…. 아 기억났습니다. 제가 그를 사랑해주는 것보다 그가 저를 사랑해주기를 원했어요. 이상한 믿음이기는 하지만 저는 여성이 남성을 좋아하는 것보다 남성이 여성을 더 좋아해야 한다고 믿죠. 사회적 권력 구조를 보았을 때 여성이 남성을 더 좋아하면 남성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자기를 바꾸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남성이 여성을 더 좋아하면, 여성은 자기 자신 그대로 사랑을 받으면서 재능을 꽃피울 수 있거든요. 물론 사랑 자체는 교류입니다. 하지만 사회에서 힘을 가진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권력 구조하에서는 여성이 남성을 더 좋아하는 구조는 잘 작동하지 않다고 보죠. 물론 입양아들에게만 적용되는 특수한 경우일지도 모르지만 제가 본 커플 중 상당수가 남성이 여성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사랑을 어떻게 측정하죠?

테라: 음…. 잘 모르겠네요. 그이가 제 문제를 더 많이 받아줍니다. 물론 저는 문제에 대한 높은 기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좀 더 순화된 표현을 하자면, 얼마나 남편이 저를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겠죠. 하지만 단순히 그 문제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반발을 해도 그쪽에서 잔소리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죠. 작은 행동과 말의 방식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단순히 인정의 문제가 아니죠. 인정받고 싶다고 말하는 일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봐요. 그이는 저를 받아들여 주지만 동시에 저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시해 절 더 낫게 만들죠. 하지만 제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방식은 아닙니다. 한번 심각하게 제 문제에 대해서 그이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제가 집을 나갈 뻔한 뒤로는 그러지 않죠. 물론 지금은 농담으로 언급할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시하고 도전을 통해 둘 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죠. 하지만 우리 둘 다 끝에는 제가 먼저 포기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야기를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개인적인 질문이라면 죄송하고, 남편을 떠날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항상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특히 그렇게 변동적인 가족 관계를 겪으셨으니까요.

테라: 적어도 이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이전에는 항상 그런 준비를 했습니다. 이 관계에서는 큰 문제가 있었어요. 서로가 만난 아부다비에서 큰 문제가 있었죠. 그래서 1년도 안 되어 결혼했어요. 그래서 그가 아니라 그 상황에서 가느냐, 아니면 남아서 도울지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이를 혼자 남겨두고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때 그를 절대로 떠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우리 사이에 건강의 문제가 생기거나, 50년 동안 같이 지내면서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해야 하죠. 물론 전 항상 일할 수 있고, 뭔 일이 생기던 살아남을 수 있어요. 어떻게 되든 제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혼자서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러한 생각의 변화가 큰 영향을 끼쳤죠. 과거에는 항상 저 혼자 자립하고 싶고 저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현재 COVID-19 사태 때문에 집에 혼자 있고 싶을 때는 있죠. 그래도 이전에는 혼자 여행을 하고, 혼자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돌아다니고 싶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여행하는 일도 좋겠지만 남편이 있으면 더 즐거울 겁니다. 그이가 주변에 있으면 더 즐겁고 행복하죠. 이 이사만 해도 우리의 접근 방식이 달라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처리하는 임기응변 형과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야 하는 관리형으로 접근합니다. 제 남편은 결국에는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사람이고, 그래서 이사는 제 방식대로 하고 있죠. 하지만 그래서 더 재밌어요. 그리고 모든 것이 더 편안하죠. 제 삶에서 다른 사람에게 처음으로 그런 감정을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그이에게 책임감을 느끼지 않거든요. 그이를 꼭 행복하게 해 줘야 한다, 해줘야 한다는 무게감이 없고 그저 서로 함께할 뿐이죠. 우리가 지난 5년간 보낸 결혼 생활이 저를 현실에 엮어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지 생각하기도 하죠. 남편에게 기대게 되었고, 그이가 없는 삶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해요. 

-광고-

팟캐스트: 일본과 오랜 인연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테라: 네.

팟캐스트: 그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테라: 네. 미국에서는 고등학교 때 외국어를 전공해야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죠. 사실 그때도 평범한 일은 하려고 하지 않았죠. 그래서 모두가 배우는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어는 제 취향이 아니었고, 독일어는 저에게 쓸모가 없었죠. 하지만 그때는 일본 거품 경제의 정점이었고 오리건주와 일본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학교에서 제가 배우고 싶었던 한국어에 가장 가까운 언어가 일본어였습니다. 사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일본어 수업을 해서 운이 좋았죠. 그렇게 해서 일본과 첫 관계를 맞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일본어 수업에서 아주 대단한 일본어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분은 우선 일본어 욕을 먼저 가르쳐 주실 정도로 유쾌하신 분이었죠. 하지만 이상하게도 일본 문화는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문화 관련해서 배울 때마다 “뭐 하는 나라야?”라는 감상을 느꼈어요. 일본을 항상 한국으로의 관문으로 생각했던 것 같죠. 제가 어렸을 때는 세계를 여행하며 국제 사업에서 종사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밖에서 살 생각은 제가 교환학생으로 생활하기 전까지는 해보지 않았죠. 그리고 교환학생도 제가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했어요.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왔을 때는 아주 실망했습니다. 제 정체성 혼란을 겪었던 곳이기도 했어요. 모두가 절 일본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전 일본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이고, 일본인보다는 한국인에 가깝죠. 특히 한국을 몇 번 방문하고서 알게 되었죠. 하지만 동시에 전 도전과 고난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계속 일본에 돌아오게 되었죠. 일본에 세 번째로 방문했을 때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람들에게 일본인이라고 말하고 다녀도 사람들이 믿었죠. 사람들에게 제가 한국계 미국인 입양아고 백인 부모 밑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 지쳤기 때문에 그냥 제가 일본인이라고 말하고 다녔어요. 입양아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는 시선에 지치기도 했죠. 그래서 제가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있을 때 하숙을 했던 가족의 성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이타마현에서 왔고 두 자매가 있는 평범한 일본인이라고 말하고 다니기 시작했죠. 사람들이 그 말을 믿더라고요. 

팟캐스트: 그러니까 일본계 미국인도 아니라 진짜 일본인으로 받아들여질 정도였다고요?

테라: 네. 전 제 억양을 바꿀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전화로 사람들과 이야기하면 제가 일본어를 외국어로 배웠다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직접 이야기하면 상황이 조금 달라지기는 하죠. 제 행동거지가 일본인 같지 않거든요. 전 또 정중한 일본어를 하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높임말 사용은 못 한다고 말하고 다닙니다. 하지만 인제 와서는 대부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요. 하지만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죠. 예를 들면 남편이 COVID-19 검사를 받아야 해서 전화로 일본 병원과 대화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제 출신지를 물었어요. 당연하다는 듯이 제가 외국인과 결혼한 일본인 아내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제가 미국 출신이라고 하니까 깜짝 놀라더군요. 그 정도의 일본어 회화 실력을 갖추게 되니 일본에서의 삶이 훨씬 쉬워졌습니다. 그리고 일본을 떠나서 아부다비에서 9년 정도 살았죠. 아부다비는 또 다른 세계였어요. 그리고 일본에 다시 돌아오니 일본 문화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서구식 사고로 일본 문화를 평가하고 싶은 일이 많지만 말이죠. 제가 일본을 사랑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본의 진가를 제대로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한국에도 살아보고 싶습니다. 첫 번째 방문은 킴… 킴 톰슨을 아시죠? 8살, 9살 때부터 친구였고 캠프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어요. 그래서 킴을 만나러 한국에 방문했습니다. 아주 이상한 경험이었어요. 전 한국어를 못하죠. 한국어를 배우려고 여러 번 노력했지만 어째서인지 한국어를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전 일본어와 스페인어를 할 수 있고, 프랑스어를 배우는 중이고 아랍어도 어느 정도 독해할 수 있죠. 그러니 언어적 문제가 아니라 제 정신적 문제라고 봐요. 왜냐하면, 제가 한국어를 배울 수 없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한국에 갔을 때 한국어를 못한다는 문제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습니다. 아주 편안했어요. 다른 곳으로 여행 가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지 못 알아들을 때 불안감이 들었는데 한국에서는 주변 일을 모르고 걸어 다녀도 편안했습니다. 아주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어서 한국어 배우는 일은 포기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한국에서 살고 싶고, 실제로 몇 번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어른으로서 저 정체성을 구축할 때 일본에 왔고, 그래서 한국보다 일본이 더 편안해요. 

테라: 성장하면서 항상 제 친어머니, 친아버지, 그분들의 나이에 대한 정보는 항상 제 서류에 기록되어 있었어요. 그래도 제 친부모를 찾으려고 하는 욕구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때 제 친구 킴이 한국으로 이주했죠. 킴은 어떤 정보도 없었어요. 말 그대로 문 앞에 버려진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둘 다 친부모에 대해서 다른 접근 방식이 있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친부모를 찾는 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킴이 한국에 간 뒤 “한번 해보지?”라고 저에게 권유했고, 그 말에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어요. 제가 막 30대 초반이 되었을 때라 한번 해보기로 했죠. 그래서 대한사회복지회에 연락해서 제가 가진 정보를 제공하고 관련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년 반 뒤에 이메일을 받았는데, 복지회에서 가족들에게 연락했지만, 저에 대해서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가족은 6남매에 4명의 딸, 그리고 두 명의 아들이 있었고, 제 어머니의 이름을 가진 사람은 차녀였다고 했습니다. 딸들은 미국에 이민하였고, 두 명의 아들들은 한국에 살고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하와이에서 이민해서 사는 자매 중 하나가 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죠. 그분이 말하기를 만약에 가족이라면 대화를 나눠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딘가의 공항에서 그분에게 전화를 걸어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분 말로는 제 친어머니의 이름을 가진 분이 저와 소통을 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조현병이나 그런 종류의 정신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제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는지 의문을 표시하셨습니다. 제가 태어난 연도에 따르면 제 친어머니로 기록된 분은 17살이었는데, 제 서류에는 제 어머니가 21세라고 기록되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 이모로 추정되는 분에게 유전자 조사를 부탁드렸죠. 그래서 그분이 저에게 정보를 조금씩 제공해줬어요. 제 어머니로 추정되는 분이 다른 자매들과 닮지 않았고, 그리고 만약에 저를 가졌다면 그게 제 어머니가 정신병을 앓게 된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하셨죠. 그렇게 저에게 조금씩 정보를 제공했고 저는 그 정보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유전자 검사를 했는데,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더군요. 

테라: 그래서 그 정보를 들고 대한사회복지회에 문의했죠. 왜 이런 일이 가능한지 물었습니다. 복지회에서는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모르겠다고 했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정보를 사서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제 친아버지를 찾기 위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기록에 따르면 제 친아버지는 감옥에 투옥된 상태였어요. 하지만 아버지의 투옥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친어머니도 친아버지 조사도 전부 막다른 길에 도달했어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친어머니로 추정되는 사람이 자매들과 외모가 닮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떠올렸죠. 그리고 그분이 미군과 결혼해서 미국에서 두 명의 딸을 뒀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리고 그 둘을 페이스북으로 찾아서 삶에 지장을 주고 싶지는 않지만, 가족 역사에서 좀 이상한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니 적어도 제가 안심할 수 있도록 유전자 검사를 받아주실 수 있는지 물었어요. 그래서 그 두 분도 유전자 검사를 해줬습니다. 그 결과 그 둘도 저와 혈연관계는 없었어요. 하지만 그 두 분과 이모분은 혈연관계가 있었죠. 그래서 저는 그 가족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제 친부모에 관련된 일은 거대한 의문점이죠. 삶의 커다란 아이러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항상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전 문 앞에 버려진 사람들보다 상황이 안 좋죠. 전 부모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테라: 그래서 조사를 멈추었습니다. 다음 단계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거든요. 해외입양인연대(GOAL)에 연락해서 도움을 받을지 생각했고, 아니면 흥신소를 고용해야 하나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제상상속에서 저는 북한 마피아 출신 아이이고 그들의 보호 아래서 빼앗긴 아이라고 상상하기도 해요. 아니면 공주 이야기를 쓰기도 하죠. 하지만 제 유전자 정보로 추측하기로는 제 아버지가 북한 출신일 가능성이 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감옥에 있었고, 아버지가 기록에 남아 있지 않고 찾을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가 북한에 송환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음 단계는 북한 관련 조사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보가 뒤바뀐 입양아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봤죠. 그리고 그 사람도 대한사회복지회와 관련된 입양아였기 때문에 의문점이 생깁니다. 그곳에서 저에게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고, 다른 가족과 연결해주고 끝내려고 했을지도 모르죠. 아니면 진짜 정보가 뒤섞였을 수도 있고, 친어머니가 정보를 사서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지금 잘 모르는 상태이고, 제가 조사를 계속할 충분한 흥미가 없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관련해서 계속 질문을 하시죠. 이러한 조사 관련 프로그램을 좋아하시고, 수사 프로그램도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면서 친부모와의 유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좀 더 깊은 인연을 찾을 이유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이 조사는 흥미 위주이고, 현재로서는 조사를 더 진행할 동기가 없죠. 물론 언젠가는 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가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진행 못 할 뿐이에요.

팟캐스트: 조사 결과가 그렇게 허무해서 슬프거나 고통스럽나요?

테라: 그렇지는 않아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잘 모르겠다고 해야겠죠. 그렇게 슬프지는 않습니다. 그저 흥미로울 뿐이죠.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어요. 왜 여성이 서류에 거짓 정보를 기재해야 할 정도로 자신의 정보를 숨겨야 하는지 알고 싶죠. 그리고 왜 남의 가족을 이러한 문제에 끌어들이지도 말고 싶습니다. 제가 그 가족의 삶에 혼란을 줘서 미안한 감정이 있어요. 자신들의 자매에게 사생아가 있었는지 고민하게 만드는 상황을 만들어서 미안하죠. 제가 겪었어야 하는 경험을 그 사람들에게 겪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고통을 느끼고 있지는 않고 흥미를 느꼈을 뿐이에요. 그래서 다음 단계는 한국에 가서 직접 대한사회복지회와 문제를 상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에 더 뒷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팟캐스트: 테라 씨, 인터뷰가 한 시간이 넘어갔는데 테라 씨가 만든 유니버설 아시안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테라: 물론이죠. 유니버설 아시안은 온라인 잡지에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형태는 온라인 잡지보다는 플랫폼에 더 가깝습니다. 제가 여러 국가를 여행했지만, 그곳 사람들이 제가 그 나라 출신이라고 생각하는 일에서 유니버설 아시안의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제가 어디를 가든 스며들고 주변 환경에 녹아들 수 있었기 때문이죠. 제가 아시아 국가에 가면 워낙 잘 섞여 들어가 간첩으로 활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농담에서 모든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니버설 아시안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 책을 쓰면서 우리 아시아인 사회에 수많은 이야기와 다른 필요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리고 책을 쓰다가 보니 COVID-19가 세계를 덮쳤습니다. 그러자 책상 앞에 앉아서 교육용 자료를 만드는 일 빼고 다른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2020년 5월과 6월 사이에 제 친구 킴한테 연락해서 이러한 잡지에 대한 생각이 있고, 단순히 입양아가 아니라 아시아인들을 위한 잡지를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죠. 같이 준비하니 국제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아시아인들의 경험과 문제가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죠. 모두의 경험은 독특하지만, 동시에 비슷한 점이 있어요. 그래서 킴의 보조를 받으면서 6월에 시작했습니다. 지난 4달 동안 계속 성장해왔죠. 아직도 조각들이지만, 이제 그래픽과 그림도 조금 있어요. 

테라: 그래서 제가 원하는 결과는 플랫폼 형태입니다. 사람들이 와서 경험을 이야기하고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사회와 비슷한 모습을 원해요. 제가 인스타그램에 접속할 때마다 여러 사람이 모임을 만들어서 대단한 일을 하고 있지만 찾기가 어렵다는 점을 알게 되었죠. 그 모임의 일부가 아니면 그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국제 입양아의 경험으로 저와 비슷한 사람 자체를 찾는 일이 고생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죠. 그래서 킴과 저는 펜팔이 되었습니다. 외모에 대한 바보 같은 농담을 듣고, 아시아인에게 맞는 화장을 하는 방법을 모르는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으니까요. 제가 화장이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해서 다행이었지만, 나중에 유튜브가 나오자, 20대 뷰티 유튜버들을 보고, 제가 화장을 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미국 대중매체와 잡지를 보면 아시아인들이 별로 나오지 않죠. 흑인, 백인, 히스패닉, 혼혈들이 나오긴 하지만 아시아계 자체를 보기가 어려워요. 나온다 해도 이국적인 복장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튀는 복장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는 보수적이라 보라색 머리카락이나 붉은 눈화장 같은 화장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시아계가 대중매체에 나오면 대부분 그런 모습으로 나왔죠. 그래서 이 플랫폼이 모든 관점을 제공할 수 있기를 원해요. 그리고 미용도 도입하려고 하고 있고, 정신 건강 관련 정보도 제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플랫폼 자체가 균형 잡힌 내용을 제공해주기를 원해요. 입양아 측에는 불행한 이야기와 소식이 많죠. 저는 입양아 사회의 그러한 면도 받아들이고 싶지만, 긍정적인 이야기도 플랫폼에 놓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플랫폼에 와서 그냥 입양아들이나 아시아인들의 불행을 이야기하는 곳이라 평가를 하게 두고 싶지 않아요. 입양아들과 아시아인이 겪는 불행과 문제도 실존하지만, 동시에 입양아들과 아시아인들이 이뤄낸 일도 분명히 존재하죠. 그래서 그게 제 계획입니다.

팟캐스트: 만약에 유니버설 아시안에게 테라 씨 본인의 이야기를 올리게 되면 제목은 어떻게 지으실 예정이죠?

테라: 음…. 제목이라…. 생각을 해봐야겠네요. 잘 모르겠습니다.

팟캐스트: 테라 씨 본인의 이야기를 유니버설 아시안에 올릴 생각이 있으신가요? 

테라: 잘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편집부가 그렇게 직접 개입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나중에 성장해서 좀 더 유연성이 생긴다면 다를지도 모르죠. 그래서 제가 그 글을 직접 올릴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책을 쓰고 있고 그 책의 이름도 유니버설 아시안으로 생각하고 있죠. 그래도 제목을 바꿀까 생각하고 있어요. 제 삶을 기반으로 한 비문학과 문학을 포함한 더 많은 이야기를 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목은 잘 생각나지 않네요. 상담과 자기 계발의 일환 중 하나로 제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글을 썼죠. 그리고 제 머릿속에 남은 이야기 중 하나는 제가 다른 이들의 길을 안내해주는 영혼이라는 글이었습니다. 그것이 저를 설명해주는 가장 좋은 설명인 것 같아요. 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주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사람들 뒤에서 사람들을 돕고 지도해주는 사람이죠. 그래서 유니버설 아시안이라는 이 플랫폼으로 다른 사람들의 표현을 도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해온 모든 일이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삶의 기복들, 좋은 일들과 나쁜 일들이 균형 잡힌 관점을 준다고 생각해요. 물론 저 자신이 균형 잡힌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제 관점을 균형적으로 조정해서 사람들이 왜 그런 인식을 하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하죠. 큰 그림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이 유니버설 아시안을 지원하고 싶거나 테라 씨와 연락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들을 위한 방법이 있나요?

테라: universalasian@gmail.com 이메일이 있고, universalasian.com 사이트도 있습니다. 아시아인 관련이라면 모든 이야기를 받고 있어요. 그리고 유튜브 채널도 시작해 요가 영상도 올릴 예정입니다. 만나서 팬 미팅이나 줌을 통한 파티도 진행해볼 생각이에요. 아시아인 사회를 하나로 끌어모으고 싶죠. 모든 것을 해볼 생각입니다.

시즌 4, 에피소드 11: 리아 니콜스

Audio available January 11, 2021 at 12:00 pm EST.

리아 니콜스 (34세)는 미국 백인 가족에게 국제적으로 입양된 뒤 성장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다시 찾아가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리아 씨는 인종적 정의와 생산의 권리를 소중히 여기며 다른 아시아계 입양아를 위한 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 리아 씨는 한국의 생물학적 가족과 재회하는 데 성공했다. 리아 씨는 미국 가족과의 관계 변화를 포함한 가족과의 재회와 예상하지 못한 여러 측면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리아: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리아 니콜스이고 한국 이름은 유영진입니다. 34세이고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에서 거주 중이죠. 지난달은 제 부모님과 함께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시에서 지냈습니다. 

팟캐스트: 지난 한 달 동안 로체스터시에 귀향하셨다고 하셨는데, 로체스터시에서 성장하셨죠?

리아: 네. 고등학교 시절 이후로 부모님과 가장 오랫동안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인들 중심의 교외에서 지내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죠. 보도가 먹을 것을 주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정갈하고, 마당이 전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카펫으로 덮여 있는 바닥과 다이어트 코크 등… 모든 것이 너무 깨끗해요. 또한, 모든 것이 편하고 익숙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어렸을 적의 고립된 기분이 기억나고 어린이로서 이곳에서 성장했던 시기를 떠올리게 만들어요. 성인의 관점으로 다시 그 기억을 더듬는 일이 치료의 일부인 셈입니다. 어렸을 때 아시아계로서 이곳에서 자라나며 고립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나요. 핵가족으로 이루어진 동네에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죠. 사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몇 주 전에 동아시아계 가족을 처음으로 봤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어요. 

팟캐스트: 문화적 충격이었겠네요. 인종적으로 다양하고 좀 더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 와서 더더욱 그렇지 않았나요?

리아: 네. 문화적 충격이 있었어요. 트레버 노아(미국의 유명 코미디언)가 미국을 50개의 다른 국가들이 묶여 있는 나라라고 묘사한 적이 있죠. 지역적으로 문화적인 차이가 아주 극적이니까요. 어떤 경우에는 웃기기도 했습니다. 로체스터에 돌아와서 슈퍼를 갔는데 델리 미트가 따로 분류된 것을 보고 추억에 젖기도 했어요. 샌프란시스코 지역에는 델리 미트를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분류하지 않죠. 제 부모님이 사는 이 교외 지역에 대한 향수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여기 와서 처음으로 Black Lives Matter(BLM,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경찰에 의한 흑인 살해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사회운동)과 프라이드 깃발을 보고 놀란 기억이 나요. 그때가 6월 말이라서 성 소수자 인권의 달 마지막이었죠. 샌프란시스코는 정치적으로 아주 역동적인 곳이기 때문에 정치 관련해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BLM과 프라이드 깃발을 보니 아주 기분이 좋았죠. 아주 용감하다고 생각했죠. 이 지역에서 소수자의 상징과 진보적인 관점을 보여주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그걸 보면, 더 소수자로서 살고 싶지 않고,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고 말하는 데 두려워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게 로체스터에서 지내면서 느낀 감정이었죠.

팟캐스트: 부모님과 정치에 관해서 이야기하시나요?

리아: 자주 하죠. 하지만 어떨 때는 하지 않아요. 저에게 얼마나 체력이 있는지에 따라서 다릅니다. 며칠 전의 이야기인데, 아침에 일어나서 부엌에 들어가니 인종차별주의자가 안되는 방법에 대해서 읽고 있는 아버지가 있었죠. 그리고 옆에 어머니가 엘레나 김이 쓴 “입양의 영역”(Adopted Territory)을 읽고 있었어요. 그걸 보면 부모님이 발전하려는 모습이 보여서 좋습니다. 제가 그분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준 기분이에요. 그리고 그분들은 바뀌려고 노력하고 계시죠. 하지만 그 두 분과 대화를 하면 지칩니다. 우선 술도 한 잔 정도 해야 하고, 옆에 개도 둬야 하죠. 두 분이 키우고 있는 개가 옆에 있으면 상황이 너무 격화되는 것을 막아줘요. 어머니는 우리가 정치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자기가 주제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뭔가 잘못된 이야기를 할까 걱정하십니다. 그리고 전 두 분께 정의, 공평함, 그리고 다인종 간 입양에 대해서 이해하는 데는 다양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고, 마음에서 나오는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려고 하죠. 개와 함께 넷플릭스를 보면서 논쟁이 오고 갑니다. 제 양어머니는 제 친어머니가 겪었을 경험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래서 양어머니에게 여성과 인간의 관점에서 설명해 드려야 했죠. 양어머니는 제가 친어머니가 저를 놓아줬어야 했을 때와 이야기를 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양어머니에게 친어머니에게 있어 아주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고 이야기를 드렸죠. 남편이 둘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 며칠 전에 죽어서 아이를 입양 제도에 맡겨야 했고, 아이가 없어졌는데, 아이를 낳은 뒤의 육체적 변화를 계속 겪어야 하는 여성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우리가 복숭아 파이를 만드는 동안 이야기를 드렸어요. 어머니가 울면서 그런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고 이야기하셨죠. 그래서 인종 정의와 생산의 권리, 그리고 다른 많은 사회 정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지식도 중요하지만, 인간적인 공감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부모님과 성장한 경험은 어땠나요? 외동딸이신가요?

리아: 저와 마찬가지로 입양된 여동생 케이트가 있습니다. 한국계 입양아고 저보다 3살 연하입니다. 그리고 성장 과정이 어땠냐고요? 음…. 현재 5년 계획을 부모님과 진행 중입니다. 이게 매우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래도 이거 관련해서 이야기는 하고 싶죠. 그리고 그분들 곁에서 30일 넘게 있다 보니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와 이야기할 수 있어서 기쁘네요. 60대 미만인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주 기쁩니다. 그분들이 저를 이해하려고 뻗어 나오려고 하고 계시죠. 상당한 기간 그분들과 멀어져 있었거든요. 그분들이 제 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저를 아시아계 여성, 한국계 미국인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 곁에 있는 것이 안전한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 방문 자체가 하나의 큰 여정이었죠. 제가 자라날 때는 우리는 입양이나 인종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백인의 취약성(White Fragility, 백인이 인종 문제 관련해서 대화하기 어려워하는 사회적 문제, 로빈 디앤젤로가 저술한 동명의 서적에서 언급된 단어이다) 문제도 처리하셔야 했나요? 

리아: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현재 미국, 특히 백인이 이러한 변화를 겪을 때 입양아로서 변화를 같이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백인의 연약함이라는 용어가 있어서 좋습니다. 예를 들어서 엊그제 어머니와 이야기를 할 때, 어머니가 약간 방어적인 태세를 보인 적이 있었죠. 그러자 제가 손가락을 들어서 어머니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기시켜 드렸고, 어머니가 “이게 백인의 취약성”이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책의 저자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고 싶어요. 전 부모님에게 인종적 정의를 알려주기 위해서 부모님에게 팟캐스트 백인을 보기(Seeing White)를 소개해 드렸죠. 그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제가 배운 일은, 백인도 대표성이 필요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팟캐스트는 인종과 백인 정체성에 관해서 이야기하거든요. 백인을 보다 팟캐스트의 호스트는 미네소타주 만카토시 출신의 백인 남성이죠. 그래서 부모님에게 “여기 부모님과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 인종적 정의에 대해서 말하는 팟캐스트에요.”라고 드렸어요. 그 팟캐스트 이전에도 여러 연구를 부모님에게 보여드렸지만 공감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인종 문제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비슷한 지역 출신에, 비슷한 나잇대의 백인 남성에게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지금도 생각하면 흥미로운 일이네요. 

팟캐스트: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사용해서 인종 정의에 대해서 입양아들이 부모와 대화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부모에게 자신들의 문제를 이해하게 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리아: 네. 그렇다고 봅니다. 전 국가적으로 일어나는 인종적 차별이 백인만이 아니라 히스패닉, 아시아계의 인식도 일깨웠고, 사회에 만연한 반흑인적 인식에 대한 모두의 인식을 강화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부모님과의 관계가 멀어진 적이 있다고 언급하셨죠. 언제부터 관계가 멀어지셨죠? 말이 안 통하게 된 시점이 언제인가요? 

리아: 제 삶에 있어서 어둡기 짝이 없는 시점이었죠. 꽤 과거로 돌아가야 해요. 제가 한국 가족과 재회하고 난 뒤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은 아니었어요. 재회한 뒤 몇 년이 지나고 난 뒤였죠. 사실 부모님의 문제보다는 제 변화의 과정의 일부 때문이었습니다. 제 의견을 표출하고, 거리를 만들고, 제 어른의 삶에서 중요한 것을 결정하는 과정 일부였죠. 

팟캐스트: 한국 부모님을 만난 슬픔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리아: 아마 그렇다고 생각해요. 사실 아직도 그러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죠.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 인식을 나와 같이 배우지 않거나, 적어도 배우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 둘의 관계는 좋은 관계가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팟캐스트: 부모님과 관계를 재구축한 것이 언제였죠? 

리아: 부모님이 백인의 정체성에 대한 9개의 팟캐스트를 다 듣고 나면 이야기를 하죠. 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실제로 하셨어요. 그리고 저와 같이 배우고 계시죠. 부모님에게 저도 한국계 미국인이자 피부색이 옅은 아시아계 미국인이 가진 소수자의 정체성, 그리고 특권자의 정체성을 배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모두 같은 여정을 진행하기에 그런 이야기를 하면 겸손해지는 기분이죠. 예를 들면 한국 입양 제도에 대해서 더 배웠어요. 한국 전쟁 도중에 8명의 한국인 아이를 입양해 미국으로의 한국인 입양을 시작한 헤리 홀트와 버사 홀트에 대해서도 배웠죠. 이 둘은 아이오와주 디모인 출신인데, 제 부모님 고향인 아이오와주 이퀘스틴에서 한시간 거리에 있는 도시입니다. 현재 과거의 기록들을 읽으면서 공부를 하는 중인데, 제 부모님을 평범한 백인 부부인 해리 홀트와 버사 홀트와 연관짓게 되어서, 그러한 사고 과정을 처리하고 있어요. 부모님이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이 입양 제도의 일부라는 점을 인식하게 됩니다. 하지만 더이상 부모님에게 화낼 힘이 없어요. 이제는 제도적인 백인 우월주의와 생식의 권리 문제에 더 화가 나죠. 

리아: 전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지가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첫 입양이 시작된 시기와 관련된 강렬한 이미지를 찾고 있죠.

팟캐스트: 성장한 장소와 같이 성장한 문화에 대해서 비판적이신데, 어떻게 리아 씨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아니면 자신의 진짜 정체성이나 진정성에 문제가 되었나요? 

리아: 네. 정체성 구축에 문제가 생겼죠. 어렸을 때는 활기 넘치고 행복한 아이였죠. 흔한 현상일지도 모르지만, 청소년이 되자 아주 내성적으로 변했어요. 제가 길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변에 제가 따를 수 있는 아시아계 어른이 없었지만, 제가 필요로 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리아씨에게 거울이 되어줄 사람이 없었군요.

리아: 네 거울이 없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 입양 역사에 있어서 좋지 않은 시점에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겟 아웃이나 헝거 게임과 비슷한 느낌으로 미네소타 주의 한국인 입양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기도 하죠. 그래서 그런 영화를 만들기 싶은 분이 있다면 저에게 연락을 주세요. 전 1985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986년에 입양되었죠. 이 시기에 가장 많은 한국계 입양아들이 미국으로 입양되었어요. 1984년에 첫 홀트 입양아가 32세의 나이에 자살로 삶을 마감했죠.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과 관련된 국제 입양 비판도 나왔습니다. 국제적으로 봤을 때 한국이 건강한 경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으니까요. 또한, 미국에서 다문화와 피부색 차별 철폐 문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시점이었죠. 킴 박 넬슨(Kim Park Nelson, 한국계 입양아 미국인 미네소타 주립 대학교 교수) 교수의 책에서 한국계 입양아가 가장 많은 두 지역이 백인들 위주로 인종적으로 안정된 미네소타주와 스웨덴인 이유를 배웠어요. 자신들의 백인 사회에 유색인종인 아이들을 들여놓아도 문제가 없다는 순진함 때문이었죠. 

팟캐스트: 특히 아시아계 아이들이 그랬죠?

리아: 네. 그리고 92년에 우디 앨런-순이 프레빈 스캔들이 있었죠. 순이는 우디 앨런의 여자친구였던 미아 패로우의 수양딸이었죠. 그게 제가 유일하게 대중 매체로 접한 한국계 입양아였습니다. 어렸을 때 제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아주 끔찍했고, 정신 건강에 나쁜 영향을 끼쳤죠. 제 아버지와 결혼을 해야 하는 걸까요? 제가 유일하게 알던 입양아였으니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 시기 자체가 공포 영화와 같이 매우 안 좋았다고 해야겠죠. 

팟캐스트: 현재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계시죠. 의도적으로 아시아계 미국인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이주하셨나요?

리아: 네. 물론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20대 초반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동해안이든 서해안이든 해안가 지역에 살고 싶었고, 항상 눈에 띄는 소수인종이었던 기억이 있어서 도시의 익명성도 중요했습니다. 전 대학을 위스콘신주 매디슨시에서 나왔어요. 도시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경험이 좋았죠. 대학교 2학년 때, 2006년에 이화여대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한 경험도 있어요. 그 교환학생 경험 때 사귄 한국계 미국인 친구들은 여전히 좋은 친구들이죠. 그 친구들 전부 해안 지역 출신이었습니다. 동해안 출신도 있었고 서해안 출신도 있었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모두 자기소개할 때 제가 위스콘신주 매디슨시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애 중 하나가 “위스콘신? 거기가 어디죠?”라고 말했어요. 그때 제가 한국계 미국인들은 미국 중서부 지역에는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리고 그걸 받아들였습니다. 카오미씨는 나오미 고(Naomi Ko)라는 분을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네요. 코미디언 겸 배우인데 현재 나이스(NICE) 드라마 파일럿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미네소타 주에서 성장하는 한국계 미국인의 경험을 그린 드라마죠. 그리고 한국계 미국인이 어디에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NICE 드라마의 일부-

나오미: 안녕하세요. 선생님

의사: 안녕하세요.

여성: 좋네요.

의사: 조사 결과를 나오미 씨에게 말씀드려야 하는데….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암이 재발하셨습니다. 다른 종양이 발견되었고 악성입니다. 

리아: 남부 출신의 아시아계 미국인 친구들도 있어요. 한 친구는 현재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대표성이 다양해지는 것 같아서 좋아요. 

팟캐스트: 이화여대에서 교환학생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다른 한국계 미국인들과 섞이려고 노력하셨나요? 하셨다면 그들과 맞는다고 느끼셨나요, 아니면 같은 입양아 경험이 없어서 섞이지 못한다고 생각하셨나요?

리아: 사실 우리는 밖에 나가서 술도 마시고, 같이 놀았어요. 제가 거기 갔을 때 20살이었기 때문에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점이 좋다고 생각했죠. 왜냐하면, 미국에서는 21세가 되어야 술을 마실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19살 이후에 마실 수 있었으니까요. 제가 사귄 친구들 대부분이 제가 같이 한국어 수업을 들은 동기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친구들도 한국 부모를 가지고 있더라도 대부분 한국어를 못했죠. 그래도 제가 다른 애들과 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대학교 한국어 수업을 들을 때, 절반은 한국계 미국인이었고, 다른 절반은 백인과 다른 인종인 아이들이었죠. U자로 앉아서 한국계와 나머지가 갈렸고, 저는 백인 애들과 같이 앉았습니다. 2년 전에 배웠지만,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한국어 수업에서 한국인 애들은 어느 정도 기반 지식이 있었지만, 저는 백인들과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으니까요. 제가 같이 공부를 해야 하면 백인 애들과 같이했습니다. 그 수업들을 같이 들으면서 다른 입양아들을 만났고, 그 과정이 제 입양에 대한 인식을 넓혀 주었죠. 그리고 제가 입양 제도 자체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팟캐스트: 한 학기 동안 계셨나요? 아니면 1년? 

리아: 여름학기 동안 이화여대를 다녔습니다. 장마 기간과 몹시 더운 여름이 겹쳤죠. 제가 교환학생으로 가기 위해서 사용한 프로그램은 아이들의 집 사회(Children’s Home Society, 미국의 가족 아동 사회단체)가 주최했어요. 그래서 그들의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대학교 2학년의 여름을 한국 이화여대에서 공부하면서 보냈죠. 그 프로그램에서 해주는 패키지여행도 참여했습니다. 여행자의 경험을 했죠. 그 여행에서 기억이 나는 경험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백인들이 인솔하는 한국인 애 중 하나로서 느끼는 자격지심이었죠. 우리가 한국인들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그리고 다른 여행에서 기억난 것은 저희가 고아원을 방문했을 때였죠. 그 고아원을 방문하고 난 뒤 상실과 슬픔에 대해 받아들이는 절차를 겪은 것 같아요. 아이들과 놀고 난 뒤 숙소로 돌아와야 했을 때 아이가 저를 놓아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걸 보고 났더니 감정 조절이 안 되더군요. 그리고 그 두 가지 기억이 그 여행에서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팟캐스트: 그럼, 사람들의 고아원 기습 방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리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좋은 질문이네요. 네. 상당히 끔찍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방문한 고아원이 아직 운영 중인지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좀 더 조사해보니 미혼 임산부를 위한 기숙사와 가까이 있더군요. 그래서 기숙사와 고아원과 입양 기관이 전부 연결되어 있었고 그것 자체가 상당히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행 자체에서 관광에 집중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고기 눈을 먹고 모두가 비명을 지르고, 한국이 미국과 다른 점에 집중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우리가 한 행동 상당수가 그랬죠. 그리고 제가 겪은 다른 한국 문화 여행에도 적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원민속촌에 가는 경험은 현재 한국과는 동떨어진 과거의 한국을 보여줬죠. 현재에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돌아온 다음에 여행 관련 논의를 나누신 적은 있나요?

리아: 아뇨. 전혀 없어요.

팟캐스트: 한국에서 20세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겠네요?

리아: 네. 혼자서 한국에서 생활하는 것은 독특한 경험이었습니다.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가 언급하니 학교 지원 여행도 갔던 경험이 기억이 나네요. 기억나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학교 행사들에 참여했는데 3시인데도 불구하고 부어라 마셔라 했던 했죠. 한국 문화의 그러한 면이 정말 좋아요. 술을 통해 장벽을 부수고 서로 공감하고 연결됩니다. 음식과 술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고 연결되는 문화가 좋아요. 

팟캐스트: 그때부터 입양 문제를 처리하고 있었나요, 아니면 그때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나요? 

리아: 그때는 전혀 그런 문제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죠. 그래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요. 물론 무의식적으로는 인식했을지도 모르지만, 전 한국 영화관에서 말린 오징어와 팝콘 먹는 게 좋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술 마시러 다니는 것만 신경 썼어요. 

리아: 요즘은 제 본능대로 하려고 하죠. 왜냐하면, 그때 한국에서 한국어 공부하기로 한 이유를 제대로 설명 못 했으니까요. 그때는 아마 정신적으로 그걸 설명하거나 주장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하고 싶었죠. 본능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영화 제작은 어떻게 하게 되셨죠?

리아: 영화 제작을 하게 된 이유는 제가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아 좀 더 좋은 대답이 필요하겠네요. 사실 제 전공은 건축학인데, 그 분야가 엘리트적이고 파괴적인지 배웠죠. 사실 4년간 도시계획 건축가로 일하면서 사회계획과 도시개발 영역에서의 인종적 차별이 얼마나 심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하면서 많은 사람이 모든 인종에게 공평한 주거지를 제공하고, 노숙자들에게도 기본적인 복지를 제공하려고 하는 것을 보았는데도 말이죠. 아 진짜 좋은 대답이 필요한데요. 제가 항상 영화를 좋아했고, 청소년기에는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에 있는 할리우드 비디오(미국의 비디오 대여점 체인)에서 아르바이트했죠. 제가 고등학교 때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영화관에서 일해서 많은 영화를 꾸준히 볼 수 있었고요. 거기에 할리우드 비디오 직원들은 무료로 영화 3개를 빌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2시에 제 일이 끝나면 그 무료 영화를 빌려서 영화를 봤죠. 그 영화들이 제가 원래는 접촉하지 못할 교외 동네 바깥 세계를 저에게 소개해주었습니다. 저스틴 린 감독의 배터 럭 투모로우라는 영화를 본 기억이 나요. 아시아계 미국인이 등장하는 제가 본 첫 영화였죠

-배터 럭 투모로우 영화의 트레일러-

리아: 이러한 영화들이 제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 이야기 서사, 그리고 백인 구세주 서사와 입양 제도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게 해줬죠. 이러한 서사가 미국 사회에 너무 깊게 파고 들어가 있어요. 제가 영화를 만들고 이미지를 만들 때 즐기는 일 중 하나가 이러한 서사를 다시 찾아와서 입양아, 소수자 입장의 이야기를 만드는 겁니다. 전 제도적 변화가 일어나려면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보죠. 제도적 변화와 문화적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보고, 문화적 변화가 제도적 변화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에바 데브레네의 팟캐스트를 들으면 국가의 탄생(1915년 미국 영화, 중요 영화 기법을 처음 대중화시킨 것으로 유명하나, 백인우월주의 단체 KKK단을 미화하는 인종차별주의적 영화이기도 하다) 힘에 관해서도 이야기하죠. 1915년에 개봉한 이 인종 차별적인 영화가 흑인들에 대한 편견들을 대중화시켰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계속 축적되다 보면 문화에 새겨지게 되죠. 그리고 미국에는 제가 바꾸고 싶은 거대한 입양아 서사가 있어요. 그리고 카오미 씨의 팟캐스트를 들으면 희망을 품게 됩니다. 입양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책, 영화, 예술을 통해서 내면서 백인 구세주 서사를 부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리아: 입양아들이 만든 영화들도 제 정체성 구축에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입양아 영화인들이 존재하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뻐요. 다이앤 보셰이 리엠(Deanne Borshay Liem), 김요라 비욜(Kimura Byol), 태미 추(Tammy Chu), 우니 르콩트(Ounie Lecomte), 이분은 프랑스계 영화인이죠. 그리고 덴마크 영화 리턴을 만든 분이 누구셨죠? 말린 최(Marlene Choi)일겁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아시아계 미국인 역사에서 입양아들은 그렇게 주목받지 못하죠. 대중적으로 접할 수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 서적에서 그 사실이 드러난다고 봐요. 에리카 리가 저술한 아시아계 미국의 건설(Making of Asian America)에서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역사에 입양아들도 포함했습니다. 전 지금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 친구가 있어요. 제가 친구들 사이에서는 소수자라 친구들에게 입양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데 지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계 미국인의 자격에 대한 인식을 느끼고 있기도 하죠. 2세대 이민자, 1.5대 이민자, 부모님이 이민자라는 거대한 서사가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의 주류가 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시아계 부모를 가지고 있지만, 미국에서 오랫동안 지낸 4세대와 5세대 아시아계 이민자들과 동감을 많이 하고 있죠. 아시아계 미국인들과 입양아에 더해 인종 정체성의 중간성으로 고민하기도 하는 아시아계 혼혈과도 많이 동감합니다. 그러니 아시아계 입양아의 역사가 아시아계 미국인 역사의 일부이고, 그 서사의 일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제가 희망을 품는 이유 중 하나는 아시아계 입양아의 숫자입니다. 한국계 미국인인 10명 중 한 명은 입양아죠. 이 숫자 자체가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그 숫자를 사람들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숫자의 힘이 느껴지죠. 

-광고-

리아: 입양아들이 1세대 이민자로 분류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그 분류를 느낀 계기는 한국에서 제 조카를 봤을 때였죠. 제 한국 가족들이 이모가 미국에 살고 있고, 미국에 가서 영어를 배울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줬다고 하더군요. 그걸 들으니 제가 1세대 이민자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 가족에서 유일하게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자였으니까요. 

팟캐스트: 다른 말로 하자면 한국인 가족과 만나기 전까지는 1세대 이민자라고 인식을 못 하셨다는 거군요.

리아: 네.

팟캐스트: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뭐로 분류하셨을 것 같나요?

리아: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 한 달간 고향에 돌아와 있다 보니 머릿속이 다이어트 코카콜라로 가득 찬 있듯이 흐릿해요. 그래도 지난 몇 달간 용어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입양아(adoptee)라는 용어 자체도 제가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고민했죠. 레이철 카드지 가네시(Rachel Kaadzi Ghansah) 작가님이 노예라는 용어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사람은 노예가 될 수 없었다고 적었죠. 노예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만 “노예”가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에서 노숙 생활하는 노숙자들도, 노숙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있지만, 노숙자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는 없죠. 그래서 입양아라는 용어의 뜻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친어머니(birth mother)라는 용어도 잘 알려졌지만, 다른 관련 용어에 대해서도 흥미를 느끼고 공부를 해보려고 해요. 또한 다인종 간(transracial) 이라는 용어도 논란이 되었죠. 입양아 관점에서 그러한 용어를 분석한 글도 읽었습니다. 리사 말리 롤린스(Lisa Marie Rollins)가 레이철 돌레잘 스캔들 이후에 작성한 글을 읽었죠. 그 글에서는 입양아들은 자신들의 가족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인종간 용어를 사용해 다른 인종의 부모를 가진 입양 가족들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입양아들이 다인종 간이라는 용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트랜스젠더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선택으로 그런 성정체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다인종 간 가족은 사람의 선택으로 만들어진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입양 부모의 관점에서 바라본 의견이라 흥미로웠죠. 

팟캐스트: 리아 씨가 좋아하시는 용어는 뭐가 있나요?

리아: 정확히는 모르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물론 TRA(Transracial Adoptee, 다인종 간 입양아)나 KAD(Korean adoptee, 한국계 입양아)라는 용어가 있어서 기뻐요. 그러한 약어를 사용해서 사회와 교류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이름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자세히 논의 해본 적도 없어요.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제 양어머니가 저에게 전화하셨죠. 그리고 제 이름을 바꿔서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교회에서 노예제도에 대한 세미나를 참여하셨는데, 미국 노예제도에서는 노예를 구매할 때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해서 노예들의 이름을 바꿨다고 배웠기 때문이었어요. 양어머니가 그렇게 저에게 사과했던 사실이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뭐 그 시기에는 웃고 넘어갔습니다. 아 그래도 로체스터에서 중학교 시절을 영진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보내서 다행이야- 이라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양어머니가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사과를 하신 행위 자체가 고마웠어요. 저는 그 한국 이름과 저를 한국 가족들이 한국 이름으로 저를 불렀을 때까지 연결 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수양 부모님이 저를 이제 리아라고 부르고 영진이라고 불러주지 않아요. 그 호칭이 조금 그립기는 해요. 수양 부모님께 다시 저를 영진이라고 불러달라 요청할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호칭 변화가 제가 예측하지 못한 일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름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면, 아시아계 미국인들 사이에서 소외된 느낌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맞지 않는 이름 때문에 아시아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느낌이죠. 예를 들면 몇몇 영화제는 감독들을 정체성에 따라서 분류하죠. 제 이름이 백인 같으니 항상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분류되어 있지 않아요. 그러한 일들이 제가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리아: 사실 전 제 친가족을 제가 먼저 찾아 나서지 않았습니다. 제가 27세일 때 제 친가족이 저에게 연락해왔죠.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편지를 받았어요. 제 고아원을 통해서 제 엄마가 저에게 편지를 쓴 거죠. 엄마는 저를 만나자고 요구하지 않았고, 제가 무사한지 연락을 하셨습니다. 아주 흥미로운데, 다른 입양아들에게 듣기로는 입양 제도의 여정과 입양 제도에 대한 인식이 빨리 일어난다고 했는데, 제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이렇게 빨랐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약간 우습죠. 그때는 좀 더 입양아 블로그와 페이스북 그룹이 많았던 시기였어요. Land of Gazillion Adoptees(백만 명 입양아의 땅, 한국계 미국 입양아들을 위한 블로그)와 같은 블로그를 구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정치적인 이유로 입양 제도가 운용됐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죠. 그래서 저는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부끄럽죠. 현재 밀레니얼-Gen Z 세대 입양아들은 완벽히 깨어있고 지식도 풍부합니다. 어린 입양아들은 고등학생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전 고등학생일 때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리아: 그래서 제가 친어머니에게 27세일 때 편지를 받았죠. 그리고 말하기 부끄럽지만, 처음에는 그 편지를 무시했습니다. 1년 정도 무시했죠. 그 뒤 매우 정중한 어조로 어머니에게 답장을 되돌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저를 찾으려고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1년간 받아들이고 난 뒤, 어머니와 다른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서 한국에 가기로 했죠.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편지의 부분은 본문이 아니었어요. “내 아가야”로 시작되는 서문이었죠. 제 친어머니의 마음속에는 제가 여전히 아기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20대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고, 상실의 감정을 비로소 느끼게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그걸 느끼고도 1년 정도 일을 미루셨군요.

리아: 너무 감정적으로 무겁기도 했고, 제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감정 상태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디 특별한 곳에 보관해두고 나중에 준비가 되면 받아들이려고 했죠.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 편지에 답하고 싶었고 제가 원하는 방법으로 이 접촉을 상대하고 싶었습니다. 친가족들을 억지로 만나고 싶지 않았고, 일정 방식으로 행동하라는 압박을 받고 싶지 않았죠. 제가 준비됐을 때 가족들을 만나고 싶었어요. 그 편지를 가지고 1년 정도 고민했죠. 사실 지금 그 편지가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잘 보관해야 하는데 말이죠. 그래서 2014년에 한국을 방문했고 동행인으로 제 한국계 입양아 여동생을 데리고 갔습니다. 사실 여동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동행했다면 편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저에게 큰 위안이 되어주었죠. 제 친가족과 입양 가족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리아: 그래서 동방사회복지회 건물에 있는 작은 방에서 친가족을 만났어요. 그 재회와 재회한 뒤 같이 보낸 며칠 동안의 시간에서 제가 가장 예측하지 못했던 일은…. 그 재회가 즐거웠다는 점입니다. 전 재회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해요. 아주 즐거웠고 전부 여성이었죠. 저, 제 입양된 여동생, 제 어머니와 제 언니가 같이 만났어요. 그래서 평범하게 여성 모임 느낌이었습니다. 대전에 있는 가족들 집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면서 요리도 같이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매니큐어를 발라주고, 사진첩도 같이 봤죠. 보통 다큐멘터리나 다른 재회에 대한 묘사가 항상 슬프고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즐거울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충격과 슬픔도 느끼긴 했지만, 더 좋은 경험이 많았어요. 또한, 한국 가족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고, 보수적인 한국 가족에 대한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20대 후반인 제가 결혼하지 않고 아이가 없다는 사실에 화를 내실 줄 알았죠. 하지만 그 시점의 언니도 20대 후반, 아니 30대 초반이었는데 미혼이었습니다. 제 친어머니, 엄마도 사실 결혼하지 않으셨죠. 그래서 전부 미혼 여성으로 산다는 점이 더 좋기도 했어요. 

리아: 제 한국 가족과 제 입양 과정을 생각해보면 다른 가족 구조와 형태, 그리고 가족의 정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게 합니다. 이성애적, 노먼 록웰풍(Norman Rockwell, 미국의 화가, 전후 미국 사회상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전후 핵가족과 다른 가족의 형태 말이죠. 여행에서 기억에 남았던 또 다른 일은 제 아버지, 아빠의 무덤을 방문한 일이었어요. 한국 묘지를 방문했습니다.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그 경험도 무척이나 즐거웠어요. 한국 묘지와 그 문화가 미국 묘지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죠. 묘지 경험 자체가 활기찼습니다. 묘지에 도착하자 가족들과 웃는 애들, 강아지들도 있었어요. 거대한 공원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들어가자 아이스크림 트럭도 있었고 언니가 “나중에 아이스크림 사 먹자.”라고 했죠. 마치 축제에 온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식사를 했습니다. 김밥을 먹고 초콜릿을 후식으로 먹었죠. 그리고 무덤에 올라가자 아빠 무덤에 소주를 좀 붓고 아버지에게 말을 걸고, 가지고 온 꽃을 무덤 비석 앞 꽃병에 꽂아 두었습니다.

팟캐스트: 미국인들은 묘지로 소풍을 가지는 않죠.

리아: 우리는 묘지가 무섭죠. 묘지를 지나칠 때마다 숨을 참는 경우도 많고요

팟캐스트: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머니와 언니를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과 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네요?

리아: 제가 미화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첫 만남은 아주 좋은 경험이었어요. 언니가 영어를 잘해서 통역가나 도우미로 활약했죠. 언니 덕분에 경험이 더 쉬워졌습니다. 엄마와 언니 없이 만난 적이 몇 번 있는데 그때는 파파고나 번역 앱을 사용해서 소통해야 했죠. 그 경험 자체가 재밌고 인연을 쌓는 일이지만, 가족에 영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운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전부 여성인 가족 구조가 도움이 됐어요. 시작부터 더 친밀하게 연결될 수 있었죠. 

팟캐스트: 왜 입양이 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들으셨나요?

리아: 좀 더 자세히 물어볼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그 사건과 관련된 사실 위주가 아니라, 입양 시기에 관련된 감정을 배웠어요. 제 친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3주 전에 뇌졸중으로 사망하셨죠. 제 엄마는 아버지를 잃고 과부로서 아이 두 명을 키워야 하는 문제 때문에 감정적 충격을 받으셨어요. 그래서 쉬운 이야기라고 할 수 없지만, 과정 자체는 이렇습니다.

팟캐스트: 미혼 상태라 어머니가 자유로워서 리아 씨와 연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관계가 바뀌었나요? 가족들과 다시 만나셨나요? 장거리로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지 않나요?

리아: 네. 지난 몇 년간 3번 만났습니다. 지난겨울에 한번, 전 가을에도 만났죠. 2018년 추석 때 가족들을 방문했어요. 추석은 한국 추수 감사절인데, 그 경험은 제가 평생 소중히 여길 기억이죠.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친척들도 만나서 확실히 큰 가족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어요. 외가는 7남매고, 친가는 6남매였습니다. 두 분 다 대가족 출신이었고 그렇게 친척을 만나는 것은 제가 자라면서 느낀 경험과는 달랐죠. 미국에서는 교외서 살면서 친척과도 가깝지 않았는데, 한국에서는 이렇게 많은 친척이 생겼으니까요. 새로운 가족과 사회에 포함된 기분이었습니다. 그 경험이 2018년이었죠. 추석을 시골에 있는 제 이모 집에서 보냈습니다. 그 이전까지 서울이나 대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서울 바깥의 경험을 해본 것 자체가 신선했어요. 산에 가서 밤을 수확했는데 아주 즐거웠습니다. 이모가 아주 대단하셨죠. 거대한 밤나무를 몽둥이로 쳐서 밤을 떨어트리고 발로 밟아서 까고…. 그리고 먹고, 마시고, 늦게까지 놀고, 술 게임도 하면서 아주 즐거웠습니다. 같이 보낸 추석이 친가족과 보낸 두 번째 경험이라 매우 불안했어요. 오히려 첫 번째보다 더 불안했죠. 그래서 제가 유일하게 알고 있던 가족과 재회한 입양아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제가 그 입양아가 가족과 다시 만났다는 사실을 안 이유는 뉴욕 타임스지에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죠. 그래서 가족을 만난 입양아들을 위한 정보와 자원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입양아들을 위한 재회를 위한 자료 보관소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재회를 한 입양아 중 상당수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미국에서 살면서 한국 가족과 연락하려는 사람을 위한 지원은 여전히 부족하죠. 

팟캐스트: 영화 제작자로 재회를 영상으로 찍을 생각은 안 했나요? 

리아: 조금 찍긴 했어요. 니콜 정(Nicole Jung)의 인터뷰를 듣고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더군요. 재회하고 난 뒤에 바로 영화를 찍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어요. 이러한 친척들을 가지고 있고 이 모든 게 아름답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제가 지식으로 가득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요소를 확인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모든 일이 더 복잡하고 어려워졌죠. 저는 한국 가족과 재회 그 자체보다 재회와 관련된 요소에 더 불만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전 영화를 만들기는 하겠지만, 다른 입양아 영화들과 같은 훌륭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입양아의 기쁨과 관련한 영화를 찍고 싶죠. 대부분 영화는 입양아의 트라우마와 관련되어 있거든요. 그리고 젊었을 때부터 입양아들이 한국을 즐기고 자신의 즐거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영화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목적은 입양아의 기쁨이에요.

팟캐스트: 재회가 반복할수록 여러 가지가 복잡해졌다고 하셨는데,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리아: 제가 한국 가족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지난 겨울이었고, 그때는 한 달 동안 한국에서 거주했습니다. 이유는 언니가 결혼해서 조카가 태어났거든요. 제가 이모가 되었죠. 저보다 어린 친척을 보게 될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또 엄마가 아기를 안고 모성을 보이는 모습을 보니 감정적으로 흔들리더군요. 아기 때 그러한 유대를 만들지 못했죠. 하지만 그러한 감정 자체를 예측하지 못해서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또한, 그 방문 때 제 수양 여동생의 한국 남자친구도 만났어요. 저번 한국 방문 때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제 수양 여동생을 만나기도 했죠. 제 수양 여동생은 제가 한국 가족과 만난 만큼 제 한국 가족과 만났어요. 하지만 이번에 입양 가족의 복잡함을 더 깊게 알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입양 부모와 입양아의 관계가 아니라 입양 형제자매 간의 관계 문제도 알게 되었죠. 처음으로 자매에게 다른 가족이 생겼다는 것에 대한 상실감과 긴장감이 생겼어요. 그리고 그러한 감정선에 관해서 준비되어있지 않았죠. 아무도 이러한 형제자매 간의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생각해보면 제가 아주 순진했다는 생각이 들죠. 여동생은 언니가 이모가 된다면, 내 아이의 언니가 먼저 되지, 한국 가족의 이모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고백했어요. 여동생도 예측하지 못한 감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감정에 관해서 이야기한 적도 없고 감정적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으니까요.

팟캐스트: 자신의 언니를 공유해야 한다는 감정과 싸워야 했군요?

리아: 네 그렇습니다. 거기에 여동생한테는 현재 한국에서 사는 입양아들이 많으니, 그 경험을 놓치고 싶지 않은 감정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현재 한국에서 살려고 하는 한국계 입양아들이 늘어나고 있죠. 입양아를 위한 지원 제도와 대표성이 한국에 어느 정도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여동생의 자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보죠. 물론 여전히 대화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고 있어요. 카오미 씨가 이야기했지만 모든 입양아의 경험은 다릅니다. 저와 제 여동생은 같은 국가 출신에 같은 집에서 자라났어요. 하지만 입양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다르고 입양에 대한 감정도 다르죠.

팟캐스트: 리아 씨는 한국에 돌아가서 거주하실 의향이 있나요?

리아: 네. 영화를 만들고 싶거든요. 사실 COVID-19 사태가 터지기 전에 봄에 한국에 가서 영화를 찍으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2021년에 모든 일이 정리된다면 한국에 갈지도 모르겠네요. 

팟캐스트: 영화는 자전적인 이야기인가요?

리아: 가상의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서사가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현재 입양에 대해서 서사가 있는 영화가 있는지 생각을 해보는데 제가 기억할 수 있는 영화는 한국계 프랑스 입양아가 찍은 브레이브 뉴 라이프입니다. 카오미 씨는 보신 적이 있나요? 

팟캐스트: 아뇨

리아: 진짜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감독의 삶을 기반으로 했지만, 서사가 있는 가상 영화죠. 이미 수많은 좋은 다큐멘터리들이 세상에 있으니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는 사실이 좋았어요. 제가 고향 집에 돌아온 뒤 제 입양서류를 읽어 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몰랐던 내용을 알게 되었죠. 그리고 그중 하나는 제 수양 부모님이 제 언니를 입양할 수 있냐고 물었던 점입니다. 제 언니는 제 친어머니 손에서 자랐고 여전히 한국에서 살고 있죠. 그리고 제 양부모님, 동방사회복지회, 그리고 제 친어머니가 연락한 편지들도 발견했어요.

팟캐스트: 그리고 부모님이 이런 이야기를 못 들었군요?

리아: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그 사실을 알게 되니 여러 방면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편으로는 입양에 맡겨지지 않은 아이를 요구한다는 사실 자체가 역겹고 끔찍한 일이었죠. 입양 자체를 고려하지 않은 아이를 요구했다는 사실이 저에게 매우 역겹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제 부모님에게 그 문제를 인지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비록 오래전이었지만 말이죠. 그래서 제 수양 부모님이 제 친어머니의 상황을 알고, 언니도 입양을 맡길지에 대해서 사회복지단체를 통해서 물어봤고 친어머니는 제 언니는 돌볼 것이라고 답장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대화를 나눠야 했다는 사실이 슬프죠. 친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지키고 어머니의 권리를 지켜야 했다는 사실이 끔찍해요. 이 사실을 저번 주에 처음으로 알았는데 이걸 듣고 든 생각이 제 언니가 한국에서 자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꼭 언니와 이야기를 해봐야 하지만 제가 가진 한국에서, 한국 가족과의 성장 욕구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죠. 아직도 그런 욕망이 있어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한국에서, 한국 가족과 자라나고 싶었다는 욕망을 직접 마주 보게 했죠. 

리아: 제 친어머니에 대한 분노는 없습니다. 어머니가 고생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니까요.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고, 알게 되고, 슬픔을 알게 되자 어머니의 인간성을 알게 된 느낌이죠. 제 수양 부모님에 대해서도 지난 한 달간 같이 지내면서 생활하면서 그분들의 인간성과 경험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 수양 부모님에 대한 분노가 있긴 해요. 하지만 그분들도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적, 백인우월주의적 제도에 맞춰서 핵가족을 만들고 한국 아이들을 입양했던 거죠. 한국 전쟁, 양공주 문제, 한국 미혼모에 대한 지원 부족으로 생겨난 수많은 고아, 사회복지와 안전망 부재 등이 저를 더 분노케 합니다. 또한, 이것이 BLM 운동과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백인 구세주 서사와 백인 자경단 서사와 연관이 있지요. 백인들이 들어가서 돕는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손해를 끼치는 이야기입니다. 

팟캐스트: 사회적, 경제적 문제도 있겠네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니 자매를 둘 다 입양하고 싶다는 느낌이 강하네요.

리아: 우선 언급을 해두자면, 제가 이 에피소드를 듣고 제 감정에 대해서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자의 관점으로 보면서 제가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리아: 사실 팟캐스트에서 제가 엘레나와 함께 만들고 시각적 연대표에 관해서 이야기할 생각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엘레나 김 씨인가요? 

리아: 네. 지난 1년간 엘레나와 같이 일하면서 한국 입양아 역사의 시각적 연대표를 만들고 있었죠.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아계 미국인 역사를 배우면서 알았는데 자신의 역사와 근원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래서 이 계획에 아주 큰 기대하고 있어요. 입양아 그리고 영화 제작자로서 시각 정보의 힘을 알고 있고 이러한 정보를 학계에서 뽑아서 입양아 대중에게 전달하고 싶습니다. 현재 이 계획을 위한 예산을 모금하고 있어요.

팟캐스트: 시각적 연대표가 정확히 무엇이죠?

리아: 지금 찾아내고 있는 도중이지만 설명을 하자면 접근성이 높고, 입양아 역사를 아시아계 이민자의 경험을 엮어내려고 하고 있어요. 미국 원주민 기숙 학교의 역사를 1880년대의 중국인 배제법과 이민자 국적법의 도입, 한국 입양아와 베트남 입양아의 역사 등을 하나로 연결한 연대표입니다. 그러한 시각적 연결의 시도는 지금까지 없었고, 그러한 정보를 만들어 제공하고 싶어요. 물론 입양아들이 이것 관련 조사와 연구를 하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학자가 되어서 감사할 뿐입니다. 제가 배운 입양아 관련 정보는 전부 거기에서 나왔으니까요. 

팟캐스트: 리아 씨가 만들 작품들이 기대되네요. 기발한 아이디어와 계획이 있으시니까요.

리아: 감사합니다. 저도 매우 기대하고 있어요. 엘레나와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었지만 격리되어 있어서 만나지는 못했죠. 그래도 이번 가을부터 계획을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팟캐스트: 또한 입양아의 기쁨이라는 아이디어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요.

리아: 아주 중요한 관점이라고 생각해요. 흑인 영화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죠. 그린 북, 노예 12년, 문라이트 같은 흑인이 가진 트라우마에 대한 영화나, 흑인이나 입양아와 같이 핍박받는 정체성에 대한 영화는 많죠. 

팟캐스트: 리아 씨를 사람들이 구독하거나 연락하고 싶으면 어떻게 할 수 있죠?

리아: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어요. 마마(Mrawmrawsf)라는 이름이죠. 또한,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있는 훌륭한 단체와 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아누피라는 이름이었지만 현재는 Mpower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죠. 그리고 백인 구세주 서사에서 벗어난 입양아 서사들도 언급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나이지리아 출신 감독이 찍은 루츠(Roots)라는 미니 시리즈에요. 현재 훌루에서 방영중인 스릴러죠. 다인종간 입양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을 합니다. 옥타비아 스펜서와 나오미 왓츠도 등장하죠. 아주 흥미로운 작품이에요. 그리고 현재 저는 다른 다큐멘터리를 위한 애니메이션도 제작 중입니다. 우리의 딸(Our Daughters)라는 작품인데 동남아시아 커플과 인도계 커플이 각자 백인 쌍둥이를 입양하는 이야기죠. 그 이야기를 사람들이 보기를 원해요. 다인종간 입양에 대한 편견을 많이 없애 주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시즌 4, 에피소드 10: 제임스 스트레이커

Audio available 12/27/20 at 12:00 pm EST.

제임스 스트레이커(51세)는 다섯 살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그는 입양 시기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망가진 입양 가정에서의 성장, 자살 시도, 수도사 생활, 한국으로의 귀향과 한국 여성과의 결혼해 가족을 꾸리기까지의 정신적 충격과 문제를 해결하는데 몇십 년을 소모했다. 현재 그는 많은 상처를 치료하는 데 성공했지만, 아직도 치료해야 할 상처가 남아있다.

 제임스: 제 이름은 제임스 스트레이커입니다. 현재 미국 애리조나주 글렌데일시에서 살고 있죠. 피닉스 근교의 작은 도시입니다. 현재 51세이며 제가 선호하는 인칭 대명사는 He이죠. 제 입양 서류에 기재되어 있던 제 한국 이름은 박민규입니다. 

팟캐스트: 처음부터 시작하죠.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아시죠?

제임스: 현재 저는 큰 전환기를 맞이했고, 꼭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시기에 도달했죠. 저는 그러할 일을 해야 할 힘도 얻고 있고, 성장할 용기도 얻고 있어요. 제가 감명 깊게 본 말이 있는데 “삶은 개인의 용기에 따라 성장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51세가 되니 삶이 다시 성장하는 기분이에요 매일 개인적 인식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 성장하고 변화하죠. 하지만 청소년기가 닥치고 트라우마나 다른 것이 그 성장을 멈추는 일도 있습니다. 그리고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20년 정도 그 성장이 멈춰 있었어요. 13세에서 33세까지 뭘 하는지, 뭘 해야 할지 몰랐고,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했죠. 주머니도 없고 손도 없고 돌과 같이 20년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상황에 놓여 있죠. 이러한 변화의 큰 영향은 33세부터 지금까지 제가 한 일에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저에게는 목소리가 있고 신께서 이 목소리를 주셨다는 사실을 알죠. 매일 제 세계,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를 성장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어렸을 때 알았다면 좋았겠지만, 동시에 문제를 겪어야 성장하는 면도 있죠. 그게 제가 현재 알고 있는 점입니다.

팟캐스트: 많은 입양아가 이러한 여정을 중년에 시작하죠. 왜 그렇게 되는지에 대해서 개인적인 의견이 있나요? 그리고 제임스 씨의 여정도 그런 느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임스: 네 그렇습니다. 중년에 시작된 여정이 맞죠. 요즘 치료사를 만나고 있는데 그분께서 서 말씀하시길 “제임스 씨가 현재 겪고 있는 일은 51세에 상당히 흔한 일입니다.”라고 하더군요.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을 돌아보는 과정이라고 하더군요. 여기에서 오른쪽, 여기에서 왼쪽, 그리고 하지 않은 일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위기인 셈이죠. 하지만 저는 이 위기를 재난이나 긴급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전 위기를 결정의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중년은 자신의 선택과 자신의 미래와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생각할 때라고 생각해요. 이러한 선택들이 내가 원하는 길로 가는 데 도움이 될까? 라는 질문이 있죠.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주 위기를 겪는다고 봅니다. 입양아의 경우에는 더합니다. 입양아가 아닌 경우에는 그래도 삶의 계획과 변화에 어느 정도 계획을 세우고 영향을 끼칠 수 있죠. 하지만 입양아의 경우에는 비유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대부분 다른 사람이 만든 길을 따라가야 하고, 그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제가 다섯 살일 적에, 한국의 고아원에서 미국으로 입양되고 싶으니 물었다면, 아니라고 답했을 겁니다. 하지만 입양아인 이상 그냥 가야 했죠. 자기가 원치 않는다고 해도 남이 그걸 정해줘요. 감정적으로 사회적으로 극본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의 연극을 하게 되는 셈이죠. 

제임스: 많은 입양아가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일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만들어진 목소리가 아니라 자기 주도적인 목소리에 대해서 말이죠. 어머니가 뭘 말하면 그 말을 똑같이 하고, 사회가 입양에 대해서 말하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를 입양아들이 중년이 되기 전에…. 적어도 제 나이인 51세가 되기 전에는 자기의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고 봐요. 13세나 14세이어도 좋지만, 더 뒤에도 상관없죠. 적어도 제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지만 입양아의 경우에는 적당히 강해지고, 성공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치료된 뒤에야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고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죠. 세계를 망가트리지 않고 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입양아가 안개에서 벗어나는 느낌이라고 묘사합니다. 아주 많이 들은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하죠.

제임스: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비유지만, 적어도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전부 묘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일어나는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성장을 멈추거나 배움을 멈추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안개를 빠져나오는 일은 단계적인 일이고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죠. 그래서 사람이 안개를 빠져나왔다, 안개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이야기를 하면, 마치 안개를 빠져나오는 것이 하나의 시험처럼 여겨지게 되죠. 어떤 순간에 안개를 빠져나와서 그 증명서를 얻는 것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여기 6월 며칠에 안개를 빠져나왔다는 증명서가 있다는 접근은 사실과는 아주 다르죠. 삶의 어떤 부분이 안개가 끼고 찾기 어려워졌다가 다시 맑아지고는 해요. 그리고 다른 부분이 다시 안개가 끼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안개 속에서 길을 잃게 된다는 비유를 좋아하지 않아요. 정확하지 않은 비유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된다는 느낌이죠. 현재 저는 더 강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요구나 기대에 저 자신을 부응하려고 하지 않죠. 사람들의 기대를 제가 맞춰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치료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안개에서 빠져나와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많죠. 

팟캐스트: 무언가 제임스 씨 쪽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들리시나요?

제임스: 노트북 소리인 것 같네요. 자리를 옮길까요?

팟캐스트: 아니 계속 소리가 나서요. 

제임스: 노트북 내부 쿨러 소리라서 어쩔 수가 없네요.

팟캐스트: 별수 없죠. 제임스 씨 개인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30대 이후에 일어난 일이….

제임스: 원래의 길로 돌아가려고 했다는 일인가요?

팟캐스트: 아뇨. 세뇌를 해제하는 느낌이었나요? 아니면….

제임스: 약간 뒤로 돌아가 보죠. 제가 트라우마 속에서 길을 잃었던 20년간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그 20년간 트라우마가 삶을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되었죠. 전 다섯 살 때 입양되었어요. 5살과 6살 사이에 입양 과정을 거쳤다고 제 서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 대한민국 출신이고 제 입양 가족은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시에 살고 있었죠. 1975년 9월에 미국에 도착했고 입양 가족과 지내게 되었어요. 제 아버지는 오하이오 주립대를 갓 졸업한 전기 기사이었고 제 어머니는 전업주부셨습니다. 그 시기에 이미 네 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어요. 3명은 제 부모님의 친자식이었고 1명은 저와 같은 입양아였죠. 콜럼버스시 내부에서의 국내 입양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백인이고 아버지가 흑인인 흑백 혼혈이었죠. 그리고 제가 입양된 뒤에도 아이들이 늘어서 9명의 아이가 같은 집에서 생활하게 됐습니다. 5명의 입양아와 4명의 친자식이 같이 지내게 되었죠. 다른 한국계 입양아 둘과 여동생과 남동생이 늘었습니다. 추가된 입양아 모두 홀트를 통해서 입양된 비혈연 입양아였죠. 그래서 제가 가족에 추가됐을 때는 5명이었지만 나중에 3명이 더 입양됐고 부모님이 딸을 하나 낳아서 9명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9명의 아이까지 합해서 11명의 가족이 되었어요.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가 작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려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제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냥 미국인이 되고 싶었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죠. 

제임스: 전 제 과거를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트라우마 관련으로 기억을 억누르고 있다고 봐요. 트라우마 적인 기억을 억누르면서 제가 선호하는 기억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전 기억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어요. 제 형제자매들이 할머니가 왔을 때의 크리스마스를 기억하는지 물으면 기억하지 못한다고 답해야 해요. 그래서 자신의 입양되기 전의 삶을 기억하는 입양아들을 보면 항상 놀랍니다. 제 여동생이 가진 기억력에 대해서는 항상 놀라죠. 제 여동생과 아버지는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도 제가 입양되면서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제가 입양된 사실을 알고 있냐고 물었는데, 다인종 간 입양이니 당연히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특히 가족이 백인이고 전혀 다른 인종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냥 미국인이 되려고 했던 감정은 기억이 납니다. 사회에 맞아 들어가고 싶었죠. 이 주제에 대해서 글도 작성했는데, 그 연령대에 제가 되고 싶었던 상태를 잘 묘사했다고 봐요.

제임스: 전 콜럼버스시의 가톨릭 학교에 다녔었죠. 그리고 선생님과 같이 어떤 계획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나요. 그 옛날에 천장에 달아서 빛을 쪼여서 영상을 보여주는 프로젝터가 있었습니다. 애들이 전부 한 줄로 선 뒤에 빛을 받았죠. 그리고 선생님이 걸린 검은 종이에 우리의 그림자를 따라 그렸어요. 일종의 미술 놀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그림자 그림을 잘라낸 다음에 잡지들 신문을 잘라내서 우리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그림을 채워 넣게 되었죠.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채워 넣기 위해서 잡지들을 찾다가 미국 국기 배색으로 쓰인 “AMERICAN”이라는 글자를 찾았어요. 그걸 잘라서 제 이미지 정중앙에 놓았죠. 거기에 전 제가 운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대통령이 지미 카터였고 제 이름도 지미였습니다. 그래서 지미라는 이름을 잘라서 붙였죠. 이블 카니블(미국 70년대의 유명한 스턴트맨)의 사진도 붙였습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어요. 70년대의 아이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죠. 그리고 그를 닮고 싶었습니다. 그 사람은 미국인이었고, 용감했고, 온갖 일을 했죠. 그 사람과 닮고 싶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제 아버지는 제가 그냥 미국인이 되려 했다고 기억하시죠. 한국에 관해서 이야기하거나, 한국을 그리워하거나 한국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어요. 아마도 제가 한국을 잊어버렸을 겁니다. 아니면 제가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었고 이곳이 저의 새로운 집이고, 그냥 미국인이 되고 싶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어렸을 때 제가 미국인이 되려고 했다는 점이 아주 신기해요. 보통 아이들이 멕시코인이나 일본인이 되려고 한다 생각하지는 않죠. 하지만 저는 미국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어린 시절은 아름답고 즐거운 시절이었어요. 우리 가족은 행복했죠. 제가 10살쯤 됐을 때 아버지가 직업을 바꾸셨고 애리조나주 피닉스시로 이주했습니다. 청소년이 되게 바로 전인 시점이죠. 그리고 제가 13살이 되어서 청소년이 됐을 때…. 제 형제자매들이 동시에 청소년기에 진입했습니다. 전부 한 살에서 두 살 터울의 형제자매들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현재 두 아이를 가진 부모로서 청소년기에 접어든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죠. 귀여운 아이들이 자라나는 과정을 보는 것은 힘듭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점에서 보려고 해요. 특히 어머니의 관점에서 보려고 하죠. 우리가 자라면서 우리가 바뀌었고, 필요도 바뀌었습니다. 어머니 주변에 붙어 있지 않고 세상을 탐험하려고 했어요. 어머니들에게 있어서 그런 일은 어려울 수 있죠. 특히 어머니의 역할에 비중을 두는 여성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대가족을 두셨군요. 혼혈, 입양아에 친자식까지…. 행복하셨다고 했지만 스스로 자격지심을 가지거나 괴롭혀지거나 그런 일은 있었나요? 

제임스: 네 일어났죠.

팟캐스트: 가족들 사이에서도 말인가요?

\

제임스: 네. 슈퍼마켓 같은데 들리는 것도 큰일이었죠. 특히 우리가 나이 먹으면서 더더욱 그랬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 우리가 콜럼버스시에 살고 있었을 때 애들이 저를 “납작한 얼굴”이라고 놀리고는 했습니다. 그리고 그 놀릴 때마다 마음의 상처를 입었죠. 제가 한국인이라서 그런 놀림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런 예도 있었죠. 70년대까지만 해도 부모가 쇼핑할 동안 아이들이 차에서 기다릴 수 있었어요. 형제자매들과 스테이션 왜건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다른 차에서도 애들이 비슷하게 기다렸습니다. 과거에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오렌지 BMW 소형 버스를 타고 다녔어요. 그리고 부모님이 시어스에 쇼핑하러 들어가 있었고 우리는 밖에 주차한 채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두 차 안에 앉은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죠. 그리고 서로에게 욕을 하면서 놀았어요. 애들이 다 그렇듯이 말이죠. 제가 누나를 상당히 심하게 놀렸던 모양인지 누나가 “적어도 나는 레코드판처럼 납작한 얼굴은 아니지!”라고 받아쳤습니다. 그리고 그걸 듣자마자 즐거운 분위기가 순식간에 식었고 누나가 저에게 사과했죠. 지금 되돌아보면 남이나 다른 애들이 납작한 얼굴이라고 놀리면서 외모를 가지고 비난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가족들도 그렇다는 것은 아주 충격적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면 남들은 절 모르니 사실이 아니라고 저 자신에게 말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누나에게 들으니 충격이 심하더군요. 제가 못생겼고 납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물론 누나는 지금까지도 미안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누나는 저에게 항상 좋은 누나였기 때문에 이미 충분히 사과했다고 말해주죠. 하지만 누나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사건의 감정을 누나와 공유할 수 있었던 경험은 좋았어요. 저에게 있어서는 삶을 바꾸는 사건이었지만 누나는 기억하지 못했죠. 

팟캐스트: 선생님이 제임스 씨의 그림을 그렸을 때, 그 그림이 신경 쓰이셨나요?

제임스: 네. 그림을 보자 제 얼굴이 다른 애들보다 납작하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리고 지금까지도 제 얼굴이 납작하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감이 느껴져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의 하나는 한국으로의 귀향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아 얼굴이 납작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얼굴이고, 모두와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주 중요해요. 인종적, 유전적 거울과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가 못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팟캐스트: 부모님께서 왜 그렇게 많은 아이를 입양하셨죠? 

제임스: 네.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렸을 때도 자주 이야기를 했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이야기한 것과는 분위기가 달랐죠. 그때는 마치 극본과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입양은 아름답다! 동양에서 씨앗을 가지고 오자! 해리 홀트의 이야기. 성령이 날갯짓하게 하자! 그런 이야기였어요. 또 그분들이 부모가 되셨을 때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70년대 중반이었죠. 히피 혁명이 일어난 뒤였고, 대학교가 있는 도시에서 살고 계셨어요. 두 분의 고향인 작은 오하이오주의 마을과는 다른 자유주의적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두 분 다 이상주의적이고 큰 꿈을 품고 계셨어요. 어머니가 특히 더 그러셨죠. 어머니는 가톨릭교도로 자랐고, 큰 가족을 원하셨습니다. 항상 큰 가족을 원했다고 하셨고 왜 그랬는지 몰랐죠. 나중에 알게 됐어요. 하지만 어머니에게 있어서 큰 가족은 성경에 항상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마치 올리브 나뭇가지에 자란 올리브와 같고, 아이들은 축복인데 왜 더 가지려고 하지 않겠나요? 32명이든 48명이든 모든 축복을 다 받는 거죠. 그때는 그랬습니다. 

제임스: 최근에 아버지와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머니는 건강 문제가 있으셔서 멀리 나가시지 못해요. 아 물론 COVID-19 이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좋아하는 애플비즈(북미 패밀리 레스토랑 체인)에 가서 맥주 몇 잔을 주문하고 이야기를 시작했죠. 그때 아버지에게 사회 복지쪽으로 진로를 잡을 거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현재는 사회학쪽으로 바꾸기는 했지만요. 그리고 입양에 관해서 이야기하려고 했죠. 그래서 관련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중 하나는 어머니가 왜 큰 가족을 원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어머니가 원하는 일을 하셨거든요. 항상 그랬죠. 어머니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시는 분이 제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이유는 이랬죠. 어머니가 여름마다 미시간주에 있는 삼촌 집을 방문했고, 삼촌이 대가족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그 대가족을 행복과 평화의 이미지와 연관해서 대가족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가족 상황이 정반대였던 것도 한몫했죠. 어머니는 나이가 많은 오빠와 언니가 있어서 어머니가 중학생일 때 이미 오빠와 언니는 대학교로 독립해 나갔습니다. 제 이모는 어머니에게 차가웠어요. 제 외할아버지는 어머니를 학대했습니다. 어머니가 필요로 하던 감정적 지지대가 되어주지 못했죠. 반면에 어머니가 방문한 삼촌은 정반대였어요. 그림으로 그린듯한 완벽한 가족을 가진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어머니가 큰 가족을 원했습니다. 아 이야기를 보면 사람들이 왜 입양을 하고 싶어서 하는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아이를 입양하는 일은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어려운 일이죠.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입양을 한다면 입양아의 경험과 입양 부모의 경험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봅니다. 우선 이 주제는 넘어가죠. 

팟캐스트: 대가족이 된 이유가 어머니의 욕구 때문이었군요.

제임스: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최근에 아버지와 이 이야기를 나눴나요?

제임스: 몇 년 전이었죠.

팟캐스트: 대화를 나누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는 결과에 도달하기를 원하셨나요? 

제임스: 아버지에게 제가 인식하는 입양이 제가 자라나면서 배운 입양에 대한 인식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싶었습니다. 좀 더 현실적이고 전체적인 관점으로 입양을 보겠다는 의미였죠. 입양은 전부 좋은 과정도 아니고 전부 나쁜 과정도 아닙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진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어머니의 입양에 대한 욕구는 상호의존적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먹고 독립하기 시작하자 육체와 정신 건강상 불안을 겪기 시작하셨어요. 그 문제가 우리 가족을 찢어 놓고, 상황이 나빠졌죠. 아버지와 제가 가족 사이에 일어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야기하고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랐어요. 입양은 이 모든 일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입양은 해결책이자 쌍방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고 알려졌지만, 현실적으로 우리 가족의 경우에게는 쌍방에게 이득이 되는 일은 아니었어요. 카오미 씨도 알겠지만, 입양아들은 집도 있고, 밥도 먹을 수 있고 가족도 있으니 감사해야 한다고 배우죠. 하지만 사회는 입양아들에게 항상 감사하라고 가르치지만, 입양 가족에게 입양아를 키울 수 있으니 감사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입양 가족들이 원하는 일을 입양아들이 제공을 함에도 말이죠. 사회는 입양 가족들이 감사하지 않으면 그들을 비판하지 않아요.

제임스: 입양은 이중 잣대로 가득 하죠. 부조리하고 불합리합니다. 거짓말로 구성되어 있기도 해요. 영적인 단어로 장식된 거짓말로 가득한 과정입니다. 

팟캐스트: 아버님의 반응은 어떠셨죠?

제임스: 아버지는 그렇게 공감을 잘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저와는 다르죠. 전 어떤 사람과도 대화하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장점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어떨 때는 약점이기도 하죠. 아버지는 그렇지 않아요. 그래도 아버지가 이해하셨죠. 그리고 너무 많은 아이를 키웠다고 인정도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인정하셨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어요.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항상 말하는 전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진실을 말씀하셨어요.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이유기도 했죠. 진짜 사실을 알기 위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아버지가 반응하셨죠. 그래서 아버지가 저와 똑같은 입양에 대한 관점을 가지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버지가 제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에 대해서 알고, 저도 아버지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에 대해서 알죠. 그 사실을 기반으로 관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어머니 곁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고, 거기에 70대이시기도 하므로 힘이 얼마 없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일은 어머니를 돌보는 일이죠. 그리고 우리 형제자매들은 어른이 된 지금도 그 사실을 알고, 아버지가 도울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압니다. 

팟캐스트: 어머니와 똑같은 대화를 나누고 싶나요? 그리고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제임스: 그 대화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두렵네요. 여러 단계에서 말이죠. 인식적으로 가능할지도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네. 어머니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죠.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할 생각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제 어머니를 사랑해요. 아버지도 사랑하고 가족도 사랑하죠. 사랑하기 때문에 제가 진정으로 생각하는 것과 제 감정을 알아주기 바랍니다. 그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꾸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죠. 입양아로서 그분들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많은 입양아는 입양 부모가 죽기 전까지 자유롭다고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저도 그 기분을 이해하지만 동시에 자유를 느낄 방법이 죽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들으면 슬퍼지죠. 망가진 가족에서 자라면서, 물론 제 부모님은 노력하셨지만, 제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절 선택해준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길에서 누군가에게 1불만 달라고 부탁한 뒤, 그 사람이 75센트밖에 없다고 하면서 75센트를 주면, 그 사람에게 1불이 없다고 화를 내지 않고 고맙게 받겠죠. 제가 제 부모님과 가족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야 했어요. 감정적, 영적, 그리고 물리적으로 양육이나 가족 경험에 있어 우리 형제자매 모두가 1달러를 필요로 했지만 75센트밖에 받지 못한 셈이었습니다. 부모님에게 화를 낼 수도 있죠. 왜 25센트를 못 줬나요? 그래서 제가 망가졌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과거에 그런 적도 있어요. 하지만 계속 화난 채로 지낼 수는 없죠. 그러한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가지는 일은 위험하고 자기 자신을 헤칠 뿐입니다. 그러한 기능 장애를 최악의, 충격적 방식으로 겪게 되면 문제가 심하죠. 요즘은 어머니와 직접 만나는 것도 힘듭니다. 어머니를 볼 때마다 감정적으로 힘들고, 여러 가지 충격이 되살아나기 때문이죠. 그래서 지금 제가 가진 문제에서 벗어나려면 더 강해지고,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언젠가는 그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팟캐스트: 제임스 씨, 제임스 씨의 입양된 형제자매들과 친 형제자매들 간의 성장 경험이 다르다고 보시나요? 

제임스: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고 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전부 우리의 양육 방식이 완벽하지 않았다는 점에 동의해요. 그리고 우리가 대학을 가거나, 입대하거나 그래서 집에서 독립했을 때, 독립하고 싶어서 독립했다는 점도 모두 동의합니다. 모두 지금까지 그러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죠.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팟캐스트: 여러분이 왜 도망쳤는지 이해합니다. 너무 많은 애들, 방치, 힘들어하는 부모님 등….

제임스: 지금까지도 아주 통제적이죠.

팟캐스트: 어머니가 매우 통제적인 분이었단 말이었군요.

제임스: 네 어머니는 매우 통제적인 분이셨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 말에 고분고분하게 따르죠. 지금은 어느 정도 균형이 맞지만, 우리가 자랄 때는 그런 균형이 없었어요. 물론 행동을 통한 통제는 아니었습니다. 그거 입지 말아라, 저거 하지 말라는 식은 아니었어요. 감정을 통해서 사람을 통제하셨죠. 항상 모든 것을 어머니의 방식대로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어머니의 방식은 잘못됐었죠. 하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방식대로 해야 했어요. 바보 같은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도망치게 했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가족 의식을 반복하면서 연극을 하는 일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은 언제 처음으로 방문하셨죠?

제임스: 첫 귀국이요? 제가 30대 중반일 때였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지내고 있었죠. 그리고 막 제가 살기로 마음먹었던 수도원에서 나온 직후였어요. 30대 초반에 최악의 상황에 도달했죠. 자살 시도도 했습니다. 더 고통을 받고 싶지 않았고 너무나도 많은 문제와 고통이 있었어요. 긴 이야기를 짧게 하자면, 하나님에게 도움을 찾았고,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배운 모든 것이 가짜이고, 가짜라 배운 것이 진짜라고 배워야 했어요. 하나님이 저를 버린 것이 아니라 제가 하나님을 버렸던 거였죠. 그게 저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제가 안다고 생각한 것이 진실이 아니었어요. 세상도 제가 생각했던 것이 아니고, 하나님도 제가 생각했던 분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구축하고, 신앙을 다시 찾을 때 크게 도와줬던 분이 베네딕도회 수도사이셨죠. 캘리포니아 소노라시에 스카이팜이라는 은둔처를 건설하셔서 그곳에서 거주하셨습니다. 스카이팜은 아직도 소노라에 있죠. 지금은 사망하셨고 신탁이 은둔처를 인수했습니다. 수도사들이 그곳에 살면서 은둔처를 관리하고 있어요. 그분과 만난 것이 1997년 부활절이었습니다. 그곳이 아니라 좀 더 북쪽에 있는 이스턴 크리스천 수도원으로 그분과 함께 갔어요. 거기에서 일주일간 그분과 함께 지냈죠. 계속 기도하면서 수도사들과 함께 성경 공부를 진행했습니다. 피닉스로 이사하기 전, 어렸을 때 이후로 최초로 느낀 평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수도승의 삶이 저를 부르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수도원에서 몇 년 동안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마음의 치유를 진행했어요. 바닥을 닦고 창문을 닦고, 기도하면서 자연과 함께 살고, 나무도 자르고…. 수도원 특유의 조용하고 기도하는 삶이었죠. 저에게는 치료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야 제가 무엇으로부터 치료받고 있는지 알게 되었어요. 입양과 관련된 경험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족을 잃은 경험, 입양 가족에서의 트라우마 등이었죠.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수도원에는 인터넷 연결이 있었어요. 1990년대 후반이었는데도 말이죠. 수도원 컴퓨터에 넷스케이프가 있었습니다. 넷스케이프를 기억하시나요? 그리고 그걸 사용해서 한국 입양과 관련 정보 검색을 진행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그 검색을 통해서 수많은 정보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찾은 정보는 뉴욕 기반 입양아 단체였던 Also Known As, AKA였어요. 여러 가지 대단한 일을 하고 있었고 제 관점에서 제가 살고 싶었던 삶을 사는 입양아들의 단체였죠. 

팟캐스트: 건강한 입양아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제임스: 건강하고 행복해 보였어요. 평범한 사람들처럼 보였죠. 그리고 저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행복하거나 건강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망가졌다고 생각하셨군요

제임스: 네. 망가지고 부서져 졌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여기 제가 생각할 수도 없는 삶을 사는 입양아들이 있었죠. 그때는 하나님께서 제가 수도원에서 치료되고 은둔하기를 원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주기 원하는 것을 받으시죠. 하나님께서 의사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이것을 포기하기 원한다,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저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는 것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만약에 여러분이 의사가 되어서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에게 바치면 그분은 받아들이시겠죠. 우리가 어떤 것을 버리고 하나님에게 그것을 바치고 싶다면 하나님은 받으실 겁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어요.

팟캐스트: 청취자 중 일부는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제임스: 알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그러니까,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뜻인가요?

제임스: 네. 좀 더 비종교적으로 이야기를 하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전 항상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거의 유일하게 제가 기쁨을 찾은 일이 음악 감상이었죠. 제가 젊었을 때 조이 디비전이라는 밴드를 들었어요. 이 어둡고 강한 느낌이 드는 음악이었죠. 나중에는 U2도 들었어요. 이 둘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두 밴드이고, 어둠과 빛의 테마가 있다고 봅니다. 입양아로서 제가 가진 감정을 소화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어요. 하지만 이 음악들을 통해서 빛과 어둠을 찾았고 제 감정을 소화할 방법을 찾았죠. 그래서 기타를 사서 배웠습니다. 하지만 제가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음악 관련 물건을 전부 처리했거든요. 기타는 오만함의 상징이었고 음악도 오만함의 일부였기 때문에 제가 거부해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전 음악에 대해서 항상 갈등하고 있었어요. 음악은 영적이고 아름답지만 오만한 면도 존재하죠. 그래서 저는 음악을 전부 없애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제대로 음악을 볼 수 있었어요. 수도원 근처의 숲에서 기도하던 때가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우주에 음악을 버리고 순종하겠다고 기도했죠. 그리고 수도원으로 돌아왔어요. 식사하기 위해서 식당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더군요. 전에는 보지 못한 햇빛을 받으면서 놓여 있는 기타가 보였죠. 제가 몇 달 동안이나 수도원에 있었는데 보지 못한 기타였습니다. 제가 음악을 거부했지만, 우주가 기타를 연주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 작은 사건이 우주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에 대해서 알려주었죠. 하나님을 우리는 보통 가능성의 부재로 인식합니다. 저것을 할 수 없고, 이곳에 갈 수 없다는 식으로 인식을 해요. 하지만 전 우주와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기가 원하는 일을 선량한 의지로 하라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광고- 

제임스: 수도원에서 살면서 무언가를 놓아야 한다고 생각해도, 사실 그걸 놓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저는 제가 가족을 꾸리고, 아버지가 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꿈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전 사실 수도사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때는 제가 수도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기도하고 수도원에서 지내면서 생각이 바뀌었죠. 하나님이 제가 수도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우주가 제가 되려고 일을 받아들여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제가 수도원에 있든, 가족을 만들던 하나님을 잘 받아들여 줄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수도원에 있으면서 계속 독서를 했습니다. 수도원에는 큰 도서관이 있었고, 수많은 문학, 시, 신학, 철학과 수많은 지식의 보고였죠. 그리고 T.S. 엘리엇의 시를 계속 읽은 기억이 납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시인 중 한 분이에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성당의 살인>을 얽었죠. 그 시에서는 가장 큰 배신은 옳은 일을 옳지 않은 이유로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보니 제가 수도원에서 하는 일이 생각이 나더군요. 제가 옳은 일을 하는 것은 맞았고, 하나님에게 제 삶을 바치고 싶었지만, 옳지 않은 이유로 그 생활을 선택했습니다. 

팟캐스트: 수도원의 생활 덕분에 자살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제임스: 큰 도움을 주긴 했지만 역시 주변 사람들이 가장 큰 도움이 됐죠. 샌프란시스코의 버스 정류장에 홀로 남아있던 저를 데리러 와준 던스턴 신부님, 수도원의 수도사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이 도움을 주셨고, 제가 그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극복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은 일을 좋지 않은 이유로 하려고 하는 실수를 하려고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수도원을 떠났죠.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확실히 밝혀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좋은 일을 좋지 않은 이유로 할 수 있다는 자각이 제가 가장 큰 비극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었어요. 가장 큰 비극은 가장 나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비극은 두 번째로 좋은 선택지를 택하는 일이죠. 저에게 있어서 그것은 가장 최악의 선택을 하는 것보다 나쁘다고 봐요. 왜냐하면, 하나만 바꾸면 최고의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의미인데, 그것을 못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수도사가 되려고 했던 일은 두 번째로 좋은 선택을 하려는 일이었고, 두 번째로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삶의 방식은 아니죠? 그래서 수도원을 떠나게 되었어요. 물론 근처 지역에서 일하면서 관련 사회와의 연결망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에 가게 되었죠.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던 제 누나가 한국 혼혈인 동료와 같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누나가 저에 관해서 이야기했고, 그렇게 해서 저와 그분이 만났죠. 그 뒤로 그분 집에 초대되어 한국인인 어머님과 만나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한국 음식과 한국 문화를 느꼈습니다. 아주 즐겁고 대단한 경험이었어요. 그리고 그분, 정 씨가 한국에 돌아갈 것이라고 하셨고 같이 가지 않겠냐고 권유하셨죠. 전 그때까지 한국에 돌아간 적이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언급하시는 분이 동료분인가요, 동료분의 어머니이신가요?

제임스: 네 어머님이셨죠. 한국에 있는 가족을 만나러 갈 텐데 동행하지 않겠냐고 권유하셨습니다. 아주 기쁘게 동의했어요. 물론 그분은 아주 한국인이셨어요. 거기 있을 때 사워크림을 섞으려고 하자, 하지 말라고 호통치셨죠. 

팟캐스트: “아줌마”이셨네요.

제임스: 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아줌마”이셨죠. 하지만 한국에 간다는 것은 그러한 통제를 받아도 해야 할 경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그분께서 저를 돕고 여행안내자 노릇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엄청 좋은 경험이었죠. 구로구 고척동에 사는 그분의 가족들과 같이 지내게 됐어요. 이게 인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제가 언급한 이분 “정 씨”가 제 아내의 고모가 되십니다. 그러니 제 누나의 동료분은 제 아내의 사촌이 되는 셈이죠. 

팟캐스트: 결혼해서 가족이 되신 셈이군요.

제임스: 네. 결혼해서 그분들과 가족이 된 셈이죠. 지금 되돌아보면 꽤 재밌는 일이에요. 제가 한국에 방문해서 제 아내를 만났죠. 가족과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제가 같이 여행한 정의 조카였죠. 그리고 아내한테는 언니가 한 분 있었는데, 바로 근처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까이 살고 있었고, 지금도 그래요. 그렇게 같이 즐겁게 지냈죠. 그리고 제 아내와 저도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알 수 있죠. 아 정 고모님이 우리를 맺어주려고 그랬구나.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 아줌마들이 하기 좋아하는 일이니 확신이 갑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의도적으로 중매쟁이 노릇을 하셨다고 보신다고요.

제임스: 네 그렇습니다. 우리 부부에게 있어서는 행운이었지요. 그래서 가끔 농담으로, 신의 뜻으로 저와 제 아내가 만나서 결혼했지만 사실 정 고모의 뜻이 더 크지 않았을까? 이라고 이야기하고는 하죠. 

팟캐스트: 우선 약간 되돌아가 보죠. 다른 입양아들과 한국의 첫 방문이 달랐네요. 한국 가족과 같이 지냈으니까요

제임스: 단순 여행이 아니었죠.

팟캐스트: 네. 가족과 함께 지냈으니까요. 그래서 한국에 도착했을 때 어떤 느낌이셨죠?

제임스: 여름이었죠. 출국 전에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 제가 찾지 못한 저 자신을 찾는 나라를 방문하게 되는 것을 기다렸어요. 한국에 도착하니 공기, 냄새, 사람들이 전부 달랐죠. 한국 사람들과 한국 얼굴들로 둘러싸여 있고, 한국 동네를 걸어 다니는 행동 전부가 대단하고 힘든 경험이었어요. 거기에 거의 24시간 넘게 여행을 했으니 더더욱 그랬죠. 비행기 탑승, 내려서 움직이고 그런 것이 전부 힘들었습니다. 몸도 힘들었고 정신도 힘들었죠. 물론 같이 지낸 사람들은 좋았어요. 그게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 제가 같이 간 이모분이 장녀 이셨어요. 그래서 제가 더 편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죠. 다른 사람들이 제가 방문하는데 거부감을 표시하거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누나와 언니가 데리고 온 사람인데 거부할 수 없죠. 지금 돌아보면 운이 좋았습니다. 시장과 길을 걸어 다니면서 버스를 타고 매일 평범한 일상을 누렸어요. 고향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네. 아주 깊은 내부적이고 외부적인 고향의 느낌이 들었어요. 특히 육체적으로 고향이라는 느낌이 중요했어요. 그러한 감정은 미국에서는 한국계 입양아로서는 느끼기 어렵죠. 저에게 깊고 대단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때부터 그분들은 저를 가족의 일부로 받아들여 주셨죠. 그리고 제가 결혼한 뒤에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리고 저희 부부는 한국에서 결혼했죠. 

제임스: 그러니 설명을 하자면 제 아내는 이미 미국에서 거주 경험이 있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고모와 같이 지내면서 미국에서 대학교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향수병에 걸려서 한국으로 돌아온 상태였죠. 그래서 영주권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미국에서 영주권을 취소했고,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미국 시민에, 캘리포니아에서 아무런 연고도 없이 사는 싱글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으로 이주하게 되었죠. 아내와 교제하고 한국에서 살아보려고 말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3년간 살게 되었죠. 그리고 한국에서 결혼했습니다. 한국에서 제 아들이 태어났어요. 확실히 보통 입양아들이 관광객으로 겪는 한국 경험이 아니죠. 새로운 가족에 받아들여졌으니까요. 제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한국 부모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제 친부모님은 아니지만, 엄연히 제 부모입니다. 한국 부모인 셈이죠. 제 아이들에게는 한국 이름과 영어 이름을 둘 다 주었습니다. 영어 이름을 보통 쓰는 이름으로 주고 한국 이름을 중간 이름으로 주었죠. 그래서 한국에 갈 때마다 제 한국 가족들은 제 아이들을 한국 이름으로 부릅니다. 집에서는 영어를 섞어 쓰긴 하지만 제15살 딸은 자기 오빠를 여전히 “오빠”라고 하죠. 자라나면서 버릇이 된 겁니다. 그래서 한국 가족이 있던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고, 아주 대단한 경험이었어요.

팟캐스트: 제임스 씨, 언제부터 아내분을 사랑하신다고 느꼈죠?

제임스: 처음에는 그냥 평범한 친구 수준이었습니다. 동갑이라 이것저것 일을 같이하고 다녔죠. 같이 돌아다녔습니다. 그 왜 나이 많은 분들이 힘들어서 못 다니겠다고 하지만 사실 젊은 사람들이 같이 돌아다니길 원해서 하는 말이 있지요? 저도 요즘은 가끔 그러죠. 젊은 친구들끼리 서로 우정을 쌓기를 원하니까요. 그리고 정 고모가 하신 일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저기 멋진 곳을 돌아다녔어요. 인사동도 가고, 한강도 갔고, 같이 한국을 경험했습니다. 버스도 같이 타고, 지하철도 같이 타고 다녔죠. 뭐 당연히 서로 잘 맞았어요. 그리고 제가 떠날 때가 되자, 제가 아내한테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아내도 저에게 마음이 있었고요. 서로 만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가깝게 느껴지니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캘리포니아로 돌아갈 때가 되어서 돌아갔어요. 하지만 서로 연락을 계속 주고받았죠. 제가 떠나기 전에 이미 서로 연애 감정이 있었고 그것이 우리를 혼란하게 했습니다. 서로 전부 30대 초반이었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감정적 문제와 여러 가지 혼란 때문에 30대 초반이 될 때까지 제대로 된 연애도 못 했거든요. 제가 못생겼다고 생각했고 못 할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짝이라 생각하고 서로의 감정을 탐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처음부터 한국 여성과 결혼하고 한국 여성과 교제를 가지고 싶었어요. 

팟캐스트: 언제부터 그런 마음을 가지셨죠?

제임스: 수도원에서 더 지내고 싶지 않고 가족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할 때부터 한국 여성과 만나고 싶었죠. 그래서 그때부터 계획을 세웠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런 계획을 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입양되었을 때 저에게서 무언가를 빼앗긴 느낌이었어요. 물건이 아니라 여러 기회를 빼앗긴 기분이었죠. 한국에서 살아갈 기회를 빼앗기고, 한국 친구들을 사귈 기회, 한국어를 배울 기회, 한국 여자애들과 사귈 기회, 한국 동료들과 회식을 할 기회 등 많은 것이 저에게 빼앗긴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들을 다시 찾고 싶었어요. 제가 한국에 있었다면 가난하고 고아였다고 해도 가족을 가질 수 있었다고 확신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해서 확신이 있어서, 삼성의 후계자와 결혼하거나 그러지는 않겠지만 좋은 아내를 맞아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입양되면서 여러 가지의 거래가 있었다고 생각하셨던 거네요.

제임스: 네. 

팟캐스트: 한국인과 결혼하면 자기 자신의 정체성 구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셨나요?

제임스: 네 그것과 관련해서 다양한 이야기가 있죠. 재밌네요. 저번주에 우리가 문자로 연락하면서 제가 왜 한국 여성과 결혼하고 싶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요? 저에게 빼앗긴 기회를 다시 찾고 싶은 욕구가 있었습니다. 삶을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구성하고 싶었죠. 그리고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가 거래에 관해서 이야기하셨을 때, 거래된 것 중 가장 큰 것은 한 버전의 저와 다른 버전의 저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여성과 결혼하면 이 두 가지 버전의 저를 하나로 합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더 깊게 생각해보니 미국에서 자란 아시아계 남성의 이미지도 있다고 보죠. 제가 어렸을 때 저는 저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했어요. 전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미남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저를 잘 생겼다고 평가해준 적도 없지요. 그래서 절 멋있게 생각해줄 사람과 연애를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스스로 아주 괜찮게 생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죠. 그래서 미국의 기준이 아니라 한국 미의 기준으로 절 평가해 줄 한국 여성과 결혼하고 싶었어요. 그러한 평온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 여성은 제가 원하는 관점인 제가 입양되지 않았다면 제가 봤을 방식으로 저를 봐줄 것이니까요.

제임스: 카오미 씨도 알고 있지만, 저는 넷플릭스를 구독하고 있어요. 그리고 치어스(미국 시트콤)가 넷플릭스에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보기 시작했죠. 하지만 보니 우울해져서 끄고 뭐가 일어났는지 생각했습니다. 제가 아시아계로서 미국에서 느꼈던 투명함을 다시 느꼈어요. 치어스는 아시아계가 없죠. 만약에 있다고 해도 엑스트라이거나 더 나쁘면 농담거리로 나왔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미국에서 투명한, 존재감 없는 사람이었을 때의 기억을 나게 했어요. 그 쇼를 틀기만 해도 쓸모없음, 숨기, 그리고 투명함을 느끼게 됐죠. 단순히 우리 스스로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느낄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입양되지 않았다면 될 수 있었던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물론 지금 보면 웃기고, 왜 그걸 원했는지도 알 수 없고요. 과거에 될 수 있었던 사람이 되면, 현재의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겠죠.

팟캐스트: 역사를 바꾸고 싶어서 하셨군요.

제임스: 네. 그게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습니다. 입양제도에게 “나만의 계획이 있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죠. 

팟캐스트: 그리고 한국 문화를 나에게서 뺏어갈 수 없다고 외치고 싶었군요.

제임스: 네 그렇습니다. 입양이 저를 바다 건너 나라로 옮겼고 이러한 일을 하게 만들었지만, 한국에서 자라난 사람이 되겠다고 선언했죠. 

팟캐스트: 네 남성성을 빼앗기고, 인정받지 못한 채로 자라났다고 생각하셨다고 했죠. 한국에서 30대 초반 남성으로서 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고 보시나요?

제임스: 네. 사람들이 절 보고 잘 생겼다고 하더군요. 미국에서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죠. 물론 예의상으로 몇 번 듣기는 했죠. 할머니들이 주로 칭찬용으로 많이 쓰셨지만…. 한국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절 보고 잘 생겼다고 했습니다. 음.

팟캐스트: 아주 기분이 좋았겠네요.

제임스: 아주 좋았죠. 전 177cm 정도 되는 키라 한국에서는 키도 크고 잘생긴 사람 취급이었죠. 거기에 사람들이 저를 보고 똑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팟캐스트: 영어도 하시고요.

제임스: 네. 영어도 잘한다고 칭찬받아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성들만이 아니라 아이들도 제가 재밌고 좋은 선생님이라고 생각했죠. 한국에서 살 때는 영어를 가르쳤거든요. 아주 좋은 경험이었죠. 물론 좋은 경험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한국의 면이 있지만 동시에 왜 이런 거지? 이라고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면도 있죠. 하지만 그 나쁜 점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무언가를 사랑해야 한다면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사랑할 때와 똑같죠. 물론 그 말은 변화를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미국에서 변화를 추구하지 않았다면 미국의 상태가 어떨까요? 미국에서도 계속 변화가 일어나고 있죠. 그리고 한국에서 살면서, 경험하고, 평범한 삶을 사는 경험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 때마다 돌아가려고 하죠.

팟캐스트: 한국계 입양아 남성들에게는 한국인들이나 한국계 미국인과 맺어지려는 욕구가 있죠?

제임스: 잘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제가 모두를 대표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한국계 입양아 사회에 있으면 누가 누구와 맺어지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냥 사회의 일부로서 알게 되는 지식이죠. 그리고 이것을 보면 한국계 입양아 여성들은 비한국계와 많이 맺어지는데, 한국계 입양아 남성들의 경우 아시아계나 한국계와 맺어지는 경우가 많더군요. 물론 제 주변의 일이니 전부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가 본 주변 상황은 그랬죠. 왜 그러는지 이해해보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프로이트적으로 생각해 봤죠. 아니 물론 낡은 이론이기는 하지만 왜 오랫동안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계 입양아 여성들에게 있어서 보통 아버지가 한국계가 아니죠. 안전한 느낌이 들고, 보호해주고, 지탱해주고, 사랑해주는 상대가 말입니다. 한국계 입양아 여성이 그런 것을 찾지 않을 이유가 없죠. 그것이 부성의 기본이에요. 남편, 그리고 반려의 이미지 그 자체입니다. 한국계 입양아 여성의 경우에는 그러한 경험을 한국계 아버지에서 받은 적이 없어요. 오히려 정반대로, 얼굴이 없고 알지도 못하는 믿을 수 없는 상대입니다. 반면에 한국계 입양아 이성애자 남성은 어머니에 대한 이미지가 좀 다르죠. 물론 제가 모두를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를 다시 하고 싶어요. 저의 경우에는 어머니를 한국 어머니에게서 찾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입양 어머니였죠. 하지만 입양 가족이 붕괴했을 때 어머니와의 연결점도 붕괴한 것 같아요. 그래서 한국 입양아 남자들에게는 아시아계 여성, 그리고 한국계 여성에게서 어머니의 느낌을 찾고, 그래서 아내로 맞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전부 매우 프로이트적이죠.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느낌이 있어요. 정확히는 설명할 수 없지만 말이죠.

팟캐스트: 성별의 문제도 확실히 존재하겠죠. 거기에 한국 사회는 매우 가부장적이고 특정 성 역할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은 가정을 관리하고 돌보는 모습이죠. 그리고 입양아 여성들은 그러한 문화적 이해도가 없으니 대응성이 떨어질 수가 있겠네요. 

제임스: 알고 있는 것을 기반으로 일을 하기 마련이죠.

팟캐스트: 그리고 한국 남성들은 아무래도 자신들이 자란 것을 기반으로 여성 파트너들에게 역할을 요구하고 입양아 여성들은 그걸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제임스: 그렇지요.

팟캐스트: 입양아 남성들이 한국계 여성들과 맺어지면 반대로 한국계 여성들이 그러한 가정을 입양아 남성들에게 제공해줄 수 있죠. 

제임스: 성별 지정 역할과 사회적으로 파트너에게서 찾는 덕목도 있죠. 당연합니다. 사회학 수업을 들을 때 교재를 읽으면서 배우자를 선택하는 방법에 대해서 읽었어요. 가장 개인적인 일이니 가장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많은 사람이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화, 관습, 도덕 등 다양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 이상이죠. 아주 사회적인 활동입니다. 한국어를 배우는 일에 관련해서는 확실히 한국어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한국으로 처음 갔을 때 미래의 아내와 같이 간 곳은 서점이었습니다. 교보문고와 종로 문고에 같이 갔죠. 그리고 한국어 교육 교재를 잔뜩 구매했어요. 물론 초보였지만, 여섯 단계의 교재를 한꺼번에 구매했습니다. 이번이 첫 방문이었고, 다시 못 올 가능성도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다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많은 분이 제가 한국어를 배울 수 있었던 이유가 제 아내의 모국어가 한국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렇지 않아요. 전 한국어를 독학했고, 인터넷을 통해서 배웠죠. 그리고 여러 단어를 담은 상자들을 놓고 한국어와 영어 단어들을 서로 맞춰 보기도 했습니다. 여러 문법을 담은 공책들도 잔뜩 있었습니다. 왜는 이렇게 말하고, 단어 다음에는 이것을 말하고 등의 정보를 담은 공책들이었죠. 그리고 이것들을 사용해서 계속 공부를 했습니다. 웃긴 이야기지만 보통 이런 이야기에서는 제 아내가 저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전개가 되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그런 전개가 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둘이서 대화가 안 되면 영어를 통해서 대화를 풀어내는 경우가 많았죠. 그래서 제가 가끔 아내한테 이건 무엇이고 저건 무엇이냐는 수준의 작은 질문은 했지만, 한국어 대부분은 독학했습니다.

팟캐스트: 그럼 두 분의 소통은 영어로 주로 이루어지신 거군요?

제임스: 네. 아내는 영어를 잘합니다. 한국에서 영어 선생이었거든요.

팟캐스트: 그래서 제임스 씨의 한국어는 유창한가요? 

제임스: 유창하는 지는 않아요. 제 수준은 평범한 수준이죠. 한국어 듣기와 읽기가 가장 쉽습니다. 모든 정보가 제공되니까요. 말하기가 그다음으로 어렵지요. 그리고 쓰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죠. 듣기와 말하기는 그럭저럭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정확히 발음하지 않으면 소통이 어려워집니다. 너무 빨리 이야기하시면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제가 존댓말과 낮춤말을 잘 몰라서 관련 소통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죠. 예를 들면 반말은 가장 낮은 말로 친구들과 소통할 때 사용하지만, 가장 높은 존댓말은 하나님, 대통령, 왕에게 쓰는 말입니다. 그러니 저는 말할 때 이러한 높임말의 차이점을 모르니 조심해야 하죠.

팟캐스트: 그리고 한국계 가족이 잔뜩 있으시니 더 조심해야겠네요.

제임스: 다행히도 가족이라면, 오히려 반말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존댓말을 쓰려고 하죠. 최대한 말할 때 요를 많이 붙이려고 해요.

팟캐스트: 언어가 언급되었으니 궁금한 점이 있는데, 자식들이 이중언어 사용자인가요?

제임스: 아뇨. 이중언어 사용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와 제 아내 둘 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죠. 하지만 저희는 영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가르치면 둘 다 제대로 배우지 못할 줄 알았죠. 하지만 지금은 두 개 언어를 배우면 둘 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거짓이고 설화라는 사실을 압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걸 알았다면 다른 방식으로 교육을 진행했겠죠. 하지만 지금 아이들의 언어는 영어입니다. 물론 한국어 몇 개를 알고, 제 아들 같은 경우에는 고등학교 때 일본어를 전공했죠. 한국에 가면 물론 빨리 배우긴 하지만 쓰지 않으면 다시 잊어버려요. 그러니 한국에서 돌아오면 다시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이를 좀 더 먹고 나면 한국어를 좀 더 배울 겁니다. 그리고 적어도 저보다는 더 기회가 많겠죠. 한국에 가족들이 있고, 제가 있고 아내가 있으니까요. 적어도 제가 기대하는 바는 그렇습니다. 제가 지금 저한테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지 물으면 아이들은 아니라고 하겠죠. 하지만 20대가 넘어가면 달라질 겁니다. 

팟캐스트: 자식들 나이가 어떻게 되죠?

제임스: 17살과 15살입니다.

팟캐스트: 한국 가족의 일부가 되는 것의 치료적 측면에 관해서 이야기하셨는데, 제임스 씨가 직접 자식을 가진 것도 그러한 영향을 끼쳤나요?

제임스: 네. 다른 입양아들도 자식을 가지는 이야기를 했는데, 확실히 피가 이어진 가족이 생긴다는 사실 자체가 무게감이 다르죠.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피로 이어진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저의 경우에는 제 가족생활, 제 아내와 제 가족과의 관계가 절 존재하게 해줘요. 지금 카오미 씨와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전부 가족들 덕분이죠. 같이 경험하고, 자라나고, 공유한 경험 덕분입니다. 모두 같이 했다는 점이 제가 안전하게 치료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죠. 그 아이들이 태어난 때를 기억해요. 아내가 임신하고 있을 때도 기억하죠. 모든 감정도 기억합니다. 그리고 우리 집은 두 아이가 있어요. 한국으로 치면 완벽한 가족인 셈이죠. 첫 아이가 남자애인가요? 네. 완벽한 가족이네요! 이라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저는 모르겠네요. 어떤 가족 형태가 되었던 저에게는 완벽했을 겁니다. 물론 항상 편하지는 않았지만, 부모와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하고 공을 들여야 합니다. 남편이자 아버지의 역할은 항상 희생이 필요하죠. 제가 원한다고 생각했던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을 포기하면, 수많은 다른 일들과 가능성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자신만의 가족 품에서 치유를 찾고 가족을 키우고 돌보는 일은 아주 좋았습니다. 

제임스: 입양아로서 아이들을 좀 더 다르게 키우려고 노력했어요. 아이들에게 제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죠. 그래서 `아이들은 제가 가장 좋을 때와 나쁠 때를 봅니다. 아이들에게서 무언가를 숨기려고 하지 않아요. 제가 실수하면 실수했다는 것을 인정하죠. 그리고 그것이 삶이며 우리가 이것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줘요. 그 애들에게 제가 배우는데 너무나도 오래 걸린 일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물론 저도 그 애들이 알아서 배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죠. 아이를 키우는 경험은 좋은 선택이자 길이었습니다. 모든 나잇대의 아이들은 각자 천재성이 있죠. 그리고 지금 아이들은 청소년입니다. 항상 행복하고 즐겁던 아동 시절은 이제 지났어요. 하지만 그것을 대신할 것들이 아이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고 그것도 대단합니다. 그것도 같이 확인하고 공유할 수 있어요. 정말 대단하죠.

팟캐스트: 아이들에게 입양아의 트라우마를 물려줄 수 있다는 걱정이 있나요?

제임스: 네 있었죠. 그리고 아직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들의 육체에 있고, 정신에 있고 우리를 강하게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트라우마가 세대를 통해 전해진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이러한 트라우마가 저를 좀 더 세상에 대한 관점을 넓혀 주었고,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는 다르게 세상을 보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전부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죠. 입양된다는 것 자체가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상태이자, 분류이자 사건이면서 동시에 관점이죠. 그리고 그러한 관점을 소중하게 여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실 지금까지도 누구에게도 입양되는 경험을 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지금 현재 저는 51세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다른 사람이 입양 경험을 겪게 하고 싶은지에 대한 확신이 없죠. 그래도 저에게 일어난 방식과 제가 성장한 방식에는, 그 고통에서 얻은 무언가 있다고 봅니다. 그 지속하는 어둠과 빛 사이에서 발견한 관점이 있고, 충분히 그 가치가 있다고 봐요. 

제임스: 저는 자신의 불완전함과 망가짐을 인정하고 가면을 항상 쓰지 않는 사람들과 공감합니다. 이들은 입양아들을 만나고 교류한 경험에 기초하면, 제가 만난 가장 진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진실성은 우리의 시초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항상 중간에 있는 정체성이죠. 특히 다인종, 국가 간 입양아의 경우가 더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제가 한국에 가서 한국인 행세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진짜 한국인이 될 수는 없고, 그 사실을 이해합니다. 그것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지요. 전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없습니다. 항상 중간에 있어요. 물론 이것을 다양한 관점으로 볼 수 있죠. 실제로 제가 살면서 이 관점을 다양한 측면에서 보아왔습니다. 그리고 제 나이가 되자, 이 중간성이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입양아들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관점은 아주 귀중해요. 높은 가치와 통찰력이 있죠. 그래서 제가 아이들에게 트라우마를 물려주는 것에 대해서 걱정을 하고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미 트라우마를 물려줬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네. 그렇죠. 아버지가 무언가를 읽거나 피아노를 연주할 때 우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트라우마를 물려주는 셈입니다. 제가 그 애들에게 화를 낸다면 그것도 트라우마를 물려주는 셈이죠. 그래서 부모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거기에서 끝나지 않죠. 그것만 물려주면 그 애들에게 상처만 물려줍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에게 좋은 것도 물려주려고 노력해요. 그렇게 우리가 이걸 넘어설 것이라고 믿죠.

제임스: 결국 개인적인 문제와 전체적인 문제 간에 연결이 존재하죠. 입양아가 유리한 점 중 하나가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문제의 연결이 입양 문제 하나에 압축되어 존재하니까요. 그래서 수 세기 동안 창작자들을 매혹해 왔습니다. 신화와 문학을 보면 수많은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고아와 입양아들입니다. 슈퍼맨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팟캐스트: 배트맨도 있지요.

제임스: 배트맨도 고아죠. 루크 스카이워커도 있고, 정글북의 모글리, 타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죠. 단순 문학만 아니라 설화와 신화에도 많지요. 그래서 입양아 사회를 가지고 입양아들의 진실한 관계, 경험, 믿음, 감정과 태도를 공유하면 개인적인 문제에서 전체적인 문제로 이야기가 확장되고 수많은 사람이 우리의 이야기에서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제임스 씨. 사람들이 제임스 씨를 구독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제임스: 인스타그램 @strakerjames 개인 계정이 있습니다. 페이스북에서는 단순히 James Straker입니다. 인스타그램을 중점적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인스타그램에서 사람들이 덜 싸우는 것 같거든요. 인스타그램에 입양아 전문 계정도 있습니다. @the_ex_adoptee 계정입니다. 

팟캐스트: Ex adoptee 계정은 뭐 하는 계정이죠? 왜 그런 이름인가요?

제임스: 사회학을 배우고 있다가 계급에 대한 것을 배웠죠. 그리고 그러한 계급이 삶에 대해서 바뀐다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아내, 관리자와 같은 계급이 평생 사람을 따라오죠. 그런데 그렇다면 전 아내, 전 사장이라는 계급도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전 입양아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입양됐냐고 물어보면, 입양아였지만 이제는 전 입양아라고 답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러한 사회학적, 입양아적 경험, 입양아 경험의 넓이와 깊이에 대한 농담이죠. 그리고 제가 좀 유머 센스가 비틀려 있기도 하거든요.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제임스 씨.

제임스: 감사합니다.

Season 4, Episode 9: 제니 다그렌

Audio available on Dec. 15, 2020 at 12:00 pm EST.

제니 다그렌(46세)는 한국계 스웨덴 입양아다. 제니는 자신의 식욕 이상 항진증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신경증이 자신의 유기와 입양과 관련된 낮은 자존감과 연계되어 있었다는 깨달음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제니는 40대에 최초로 한국에 방문하기 전까지 자신의 한국계 뿌리를 피해왔다. 

제니: 제 이름은 제니 다그렌입니다. 스웨덴에 살고 있죠. 현재 45세입니다. (인터뷰 시 45세, 팟캐스트 게시 시 46세가 되었다) 후 6개월일 때 스웨덴으로 입양되었어요. 스웨덴 수도인 스톡홀름 근교의 주택단지에 살고 있죠. 결혼해서 아이가 두 명 있습니다. 그리고 회사를 운영하고 있죠. <스웨덴어 자기소개> 

제니: 작년 서울에 모임에 참여했을 때 다양한 국가로 입양된 한국계 입양아들을 만났는데 조금 이상했습니다. 육체 언어로 이탈리아 출신, 프랑스 출신인지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외모는 전부 비슷했어요. 

팟캐스트: 그 모임에 관해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제니: 이 모임은 3년마다 전 세계의 한국계 입양아들이 모이는 행사인데, 이번에 후원자 문제 때문에 다시 진행할지는 모르겠네요. 거대한 행사입니다. 2019년에는 700명에서 800명이 참여했죠. 80명 정도의 참여자들이 스웨덴에서 왔어요. 그리고 대부분 참여자가 가족과 함께 참여했습니다. 혼자 온 사람들도 있었어요. 대부분 참여자는 미국에서 왔죠. 

팟캐스트: 제니 씨, 이번에 모임에 처음으로 참여신가요?

제니: 모임 참여는 처음이었지만 한국 방문은 세 번째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참여했던 친구들이 있어서 이야기는 들었지요. 그래서 모든 것에 개방적인 태도로 접근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기대한 일은 다른 국가 출신 입양아들과 만나서 우리가 가진 공통점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그들의 사정을 듣는 일이었죠.

팟캐스트: 모임은 어땠나요?

제니: 좋았어요. 하지만 이미 한국에서의 경험이 있어서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제 첫 방문이었다면 한국을 다른 관점으로 인식했겠죠. 이미 방문 경험이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의견이긴 하지만 한국이 입양아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행사라고 생각해요. 실질적으로 한국이 입양아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정치적인 이유가 많이 개입되어 있다고 보죠. 그래서 사회적인 행사라고 생각해요. 흥미로운 워크숍들도 있죠. 한국이 우리를 위해서 한국의 좋은 면만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을 관광객으로 와서 보면 한국의 다른 면도 볼 수 있죠.

팟캐스트: 입양아로서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계시겠군요? 

제니: 네. 매우 그렇습니다. 아주 실망했죠. 입양 제도와 취급 절차에 대해서 배우면 배울수록 입양에 대한 실망감이 커졌거든요. 증명할 수는 없지만 제가 들은 바로는 많은 사람이 친부모를 찾으려고 입양기관에 연락하면 대부분은, 입양아의 신분을 알고 가족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입양아가 정보를 찾으려고 한다고 연락을 하죠. 그럼 가족들이 허락하면 진짜 정보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가족들이 정보 공유를 거부하면 정보 공유를 거부하거나 정보가 없다고 한다고 하더군요. 제도 자체가 친부모를 보호하게 되어 있죠. 한국이 우리가 존재함을 알지만, 우리에게 비밀을 숨기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아주 복잡한 문제입니다. 한국 출생인 사람들이 한국 법상으로 자신의 친부모를 알 권리가 없다는 점이 말이죠. 

제니: 알 수가 없죠.

팟캐스트: 국제 인권 문제가 있긴 하지만 한국은 관련 헤이그 협약도 승인하지 않았죠. 

제니: 하겠다고 했지만 하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제니 씨의 문제도 그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제니: 확신할 수가 없었어요.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확인했을 때 제가 무엇을 찾을지 두려웠기 때문이죠. 제 경우에는 거의 불가능했거든요. 대부분의 스웨덴 입양아들은 SBS…. 홀트와 같지만, 스웨덴 기반 입양 단체를 거쳐 입양됩니다. 저는 다른 입양아들과는 달리 그렇게 정보를 원하지는 않았죠. 그래도 한국에 왔을 때는 관련 정보를 얻을 가능성이 있을지 궁금했어요. 하지만 제가 찾을 정보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그 정보를 찾고 싶은지도 고민했습니다. 제 마음속에서 찾고 싶다는 쪽과 찾고 싶지 않은 쪽이 싸움을 벌였어요. 제 삶이 크게 바뀔 것이고 그러한 정보에 따라오는 감정을 제가 받아들이는 문제였죠. 

팟캐스트: 그렇죠. 그래서 입양 서류에는 관련 정보가 없나요?

제니: 네. 정보가 별로 없어요. 서류 상당수가 가짜 정보인 것 같습니다. 제 서류에 따르면 제가 발견된 횟수만 3번이에요. 그래서 서류의 신빙성이 상당히 떨어지죠. 그래서 제 뿌리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았을 때 아주 힘들고 슬펐습니다. 제 서류들을 보고, 제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서류에 따르면 저는 서울 북부에서 태어났고 강남 근처의 고아원에 맡겨졌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고아원이 있던 지역을 찾아갔죠. 이미 재개발이 진행되어 있었죠. 서류상으로는 그곳에서 4달에서 5달 정도 지내다가 스웨덴으로 입양되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서류가 사실이라는 점이 아닌 것을 알았을 때, 제가 믿고 있던 모든 것이 사라진 기분이었죠. 그 지역 출신도 아니고, 서울 북부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니까 말이죠. 모든 것이 암흑에 빠진 듯한 기분이었고 슬펐습니다. 

팟캐스트: 돌아가 보니 모든 것이 불타 없어졌다.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바뀌어서 고속도로가 들어섰다. 이런 일들 때문에 돌아갈 곳이 없다는 점이 아주 힘들죠. 

제니: 그렇죠. 그리고 진짜 이야기를 찾아서 진짜 가족을 만난 사람들을 아주 많이 만났어요. 그런 사람 중 상당수도 서류가 소실된 경우가 많았죠. 그래도 진짜 가족을 만나서 입양된 과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지만 매우 비극적이기도 하죠.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슬픔이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그 상황에 공감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한국에 처음으로 돌아간 때를 말해주실 수 있나요?

제니: 제가 43세일 때였습니다. 2017년이었죠. 그러니 최근이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을 짧은 시간 내에 세 번이나 방문하셨군요.

제니: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에 귀국했을 때 이미 40대셨군요. 뿌리 찾기에 관심이 없거나 별로 중심을 두지 않다가 중년 때 뿌리를 찾게 되셨나요? 

제니: 이 주제로 이야기하게 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전 입양아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고방식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최대한 비슷하게, 맞아 들어가려고 노력했죠. 그런데도 이 생각은 항상 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친밀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죠. 그래서 이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의 과정이었습니다. 제 딸이 한국에 관심을 가졌죠. 그래서 과정이 시작된 것 같아요. 딸은 한국에 방문하려고 했죠. 처음에는 한국어를 배우게 됐습니다. 한국어를 배우는 과정은 저에게 그렇게 좋게 끝나지 않았어요. 배우기 어려운 언어였습니다. 발음들도 어려웠고요. 한글 자체는 쉽게 배울 수 있었지만 말하기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다음에는 다른 입양 친구에게 또 다른 한국 관련 정보를 배웠고, 그다음에는 한국에 가게 됐지만, 방문 자체도 상당히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팟캐스트: 따님이 BTS나 K-POP 같은 문화 때문에 한국에 관심을 끌게 됐나요?

제니: 아뇨. 제가 한국태생이라고 관심을 가졌어요. 

팟캐스트: 제니 씨가 과거에 놓고 온 한국에 대해서 따님이 관심을 가지자 어떤 기분이 드셨나요? 

제니: 네. 말하고 싶던 주제입니다. 아주 행복했어요. 제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아이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움을 가졌죠. 전 한국 출신 입양아였으니까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괴롭혀지거나 제가 다른 외모를 가져서 기분 나쁠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딸이 한국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아주 기분이 좋았어요.

팟캐스트: 자라면서 괴롭혀진 경험이 있나요?

제니: 아뇨.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아주 이상하긴 하네요. 전 괴롭힘 당하지 않았고, 좋은 친구들과 평범한 가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웨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족이었죠. 그래서 과거에 대해서 나쁜 감정이 있을 이유가 없어요. 하지만 전 가지고 있었죠. 제가 버려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 정신적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정확히 왜인인지는 모르죠. 이러한 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어요. 평범한 아동 시절을 보냈고, 친구도 많았고, 직장을 얻는데도 문제가 없었죠. 그런데도 제 삶 대부분을 불행하게 살아왔습니다. 

팟캐스트: 아주 흥미롭네요. 가족도 있고, 괴롭힘도 안 당했고, 주변과 조화…

제니: 조화롭게 맞아 들어가지는 않았어요.

팟캐스트: 조화롭게 맞아 들어가지는 않았군요.

제니: 네. 하지만 괴롭힘당하지도 않았어요. 저는 유일한 아시아계였고 주변 사람들은 아시아인과의 접촉 경험이 없었고 외국 출신인 아이들도 없었죠. 전부 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스웨덴인이었어요.

팟캐스트: 전부 스웨덴인이었다고요?

제니: 정확히 말하자면 전부 스웨덴은 아니었죠. 저를 제외하고 두 명이 입양아였어요. 우리 셋만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겼었죠.

팟캐스트: 다른 사람들이 교환학생이거나 유학생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나요? 

제니: 한국 출신이라고 말하면 사람 대부분이 입양아라고 이해했습니다. 한국 출신 스웨덴 입양아들이 많았거든요. 물론 사람들이 질문하기도 했고 그런 경우에는 매우 방어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이 제가 평범하다고 인식하기를 원했기에 매우 방어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단순하게 어디 출신인지, 입양안지 물으면 입양아지만 다른 스웨덴인 가족과 똑같고 다른 것이 없다고 이야기를 시작했죠. 하지만 실제로 생각하면 달랐습니다. 다른 것이 당연하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똑같게 보이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똑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심지어 탄생 이야기도 똑같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죠. 사람들에게 백인 가족에 입양된 입양아의 삶이 다른 사람들과 같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았어요. 지금은 그걸 이해하죠. 지금은 제 아이들을 가졌고,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사람들에게 다르지 않다고 증명하려고 한 거군요. 

제니: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삶이 평범하다고 하셨고, 결혼도 하시고, 자식들도 있고, 직장도 좋은 직장을 가지고 계시고 그런 가족적 삶을 가지고 있는데도 공허감을 느꼈다는 점이 흥미롭네요.

제니: 네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공허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제가 기억할 수 있을 때부터 항상 제 속에서 걱정이 느껴졌습니다. 항상 불안감을 안고 살았죠. 

팟캐스트: 입양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제니: 네 지금은 알고 있죠. 항상 불안감에 젖어 있었어요. 15살에서 16살 때 첫 공황 발작을 겪었습니다. 제 마음속에 너무나도 많은 감정을 품었고 분출해야 했어요. 그리고 왜 그러는지 전혀 몰랐죠. 제가 미친 줄 알았습니다. 공황 발작을 겪기 전까지는 공황 발작에 대해 전혀 몰랐어요. 그래서 아무와도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감정을 가지고 관리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죠. 그래서 이러한 공황 발작 때문에 행사와 일을 피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17살이 되었을 때, 저는 식욕 이상 항진증과 같은 식이 장애를 겪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갔어요. 물론 입원하지는 않았고 통원치료를 받았습니다. 일주일에 7번 치료를 받으러 갔고, 식이 장애 전문 병동에서 24살이 될 때까지 치료를 받았죠. 아주 긴 시간 동안 식이 장애에 시달렸습니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입양의 트라우마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하셨죠. 하지만 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인정하기에는 너무 많은 죄책감을 안고 있었거든요. 제가 입양으로 인해서 이렇게 상태가 안 좋다면, 제 부모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게 될지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제 장애가 입양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죠. 하지만 사실 전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입양이 제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에는 몇 년이 걸렸습니다. 물론 관련되지 않은 문제도 있었겠지만, 저를 괴롭히는 큰 문제들은 입양 관련이었죠. 아직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요. 부모님이 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양육을 해줬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다른 문제가 있었던 것이죠.

팟캐스트: 네 지금은 더 많은 자료와 증거가 있어서 탄생 이전부터 어머니의 상태가 아이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하죠. 그리고 초기 몇 달간 무의식적인 영향을 끼친다고도 하고요.

제니: 네 그래서 초기 몇 년간 친모와 같이 지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하죠. 그러한 연결을 만들지 못했지만, 병원에서 이야기하기를 제 공황 발작은 제가 어머니에게서 떨어졌을 때의 느꼈던 공황과 연결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제 무의식에 남아서 영향을 끼치고 있죠. 대부분 입양아가 비슷한 감정과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러한 감정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무척이나 어려웠고, 제 감정을 받아들이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어요. 아직 그 상태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많은 일이 더 쉬워지겠지요. 

팟캐스트: 제니 씨, 외동딸인가요?

제니: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부모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셨나요?

제니: 네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최근 바뀌었습니다. 한국에 가까워지면서 바뀌었죠. 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말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을 죄책감들 때문에 말하지 못하고 있죠. 그래도 지금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분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잘 되면 좋겠죠. 이 팟캐스트에서 카오미 씨와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카오미 씨와 진실한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무서웠어요. 만약에 부모님이 듣는다면 부모님과 대화가 더 어려워질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해하시나요?

팟캐스트: 네. 입양아들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입양 부모님에게 직접 감정 표현이 어렵다는 것이죠. 그분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될까 봐 무서워하고, 그분들의 감정을 맞춰주고 싶고, 좋은 아이가 되고 싶어서 해요. 그리고 입양 제도의 방식 때문에 대부분 상황에서 입양아들의 감정적 성장을 멈추고, 문제를 발생시키죠. 그렇게 부모님과 감정적인 거리가 생긴다고 봐요. 그리고 나중에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하고 진짜 자기 자신을 되려고 하면, 과거의 우리를 알았던 부모님과 가족들은 변화하는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제니: 우리 같은 입양아들이 겪는 문제들이죠.

팟캐스트: 몹시 어렵죠. 입양 제도의 구성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 몰리게 되고 그건 공정하지 않아요. 

제니: 두 개의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입양 부모의 관점으로 보면 자신들과 닮지 않은 아이를 키우게 되는 셈이죠. 지금까지는 제가 화자였기 때문에 저에게 집중했어요. 저도 부모님과 닮지 않았죠. 매일 거울을 볼 때마다 그분들과 닮은 제모습을 보게 됩니다. 제가 느끼는 감성과 제 외모는 닮지 않았습니다. 저는 스웨덴식으로 키워져서 스웨덴인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스웨덴인처럼 생기지 않았죠. 영어로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팟캐스트: 아 괜찮습니다. 스웨덴어로 하셔도 괜찮아요.

제니: 파닉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2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기분이죠. 뭐라고 해야 하나…. 사람들이….

팟캐스트: 기대하고 있다고요?

제니: 네. 사람들이 입양아들에게 외모, 감정, 그리도 다양한 일을 기대하고 있어요. 제가 가면을 쓰고 다니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슬프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 일입니다. 살면서 부모님들 앞에서 울어본 적이 없었어요. 부모님이 그러지 말라고 한 적 없고 행동으로 지시한 적도 없죠. 그래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어요. 자신감이 없어도 항상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듯이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광고-

팟캐스트: 80년대 스웨덴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제니: 네

팟캐스트: 데이트를 하셨나요? 다른 남자아이들이 제니 씨를 매력적으로 보았나요? 아니면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셨나요?

제니: 데이트 관련해서는 문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핸드폰이 없었어요. 사람들에게 직접 전화를 해야 했죠. 관련 문제는 전혀 없었어요. 하지만 다른 입양아들은 그런 문제를 겪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괜찮았죠. 

팟캐스트: 성장하면서 아시아계 여성에 대한 선입견이나 아시아 페티시의 문제는 겪지 않으셨나요?

제니: 전 개인적으로 그런 문제는 겪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를 겪은 친구들이 많았어요. 친구들이 가게에 가면 나쁘게 대우받는 경우도 많았고, 사람들이 외모 관련으로 나쁘게 대우하는 때도 많았죠. 거기에 아시아계 여성에 대해서 다양한 반응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그렇게 대우받은 일은 없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죠. 

팟캐스트: 남편 되시는 분은 백인이시죠?

제니: 네. 스웨덴인이죠. 

팟캐스트: 언제 어떻게 만나셨나요?

제니: 서로의 직장이 있던 건물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접수처와 다른 것도 같이 공유했죠. 저 같은 경우에는 스웨덴 기업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이는 노르웨이 기업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일하는 기업은 본사는 다른 도시에 두고 있던 대기업이었죠. 그 시점에도 식욕 이상 항진증 판정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아주 오랫동안 치료와 일을 병행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상태가 너무 안 좋아졌고, 다시 장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했어요. 몸이 너무 아파서 일을 못 하는 경우를 뭐라고 하죠?

팟캐스트: 장애라던가 건강의 문제로 인한 휴직이었나요?

제니: 네. 그래서 반년에서 1년 정도 장기 휴직을 해야 했어요.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장기 휴직하기 3일…. 아니 2일 전에 만났죠. 어느 정도 대화를 하고 나서 그이에게 전화하고 싶으면 하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러자 그이가 당신의 전화번호를 모르는데 어떻게 연락을 할 수 있냐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 번호를 가지고 있으면 연락을 할 거냐고 물었죠. 그리고 그이가 할지도 모르죠. 번호를 주시면요. 라고 했어요. 그게 화요일에 나눈 대화였습니다. 그리고 금요일에 그이가 연락을 해왔고, 집으로 방문했죠. 식이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전 다른 이들과 식사를 할 수 없었어요. 그이에게 터놓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른 이들과 식사를 할 수가 없다고요. 제 증세에 관해서도 이야기했죠. 그리고 밤이 될 때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배웅했죠. 일요일에도 그가 왔고 그때부터 같이 살았어요. 

제니: 누구와 만날 생각은 없었어요. 사람과 교제를 시작하면 밖에서 대화하고, 데이트하고 그렇게 시작하죠. 하지만 우리 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식이 장애가 있었으니까요. 그이가 제가 화장실을 사용할 때 문을 잠그지 못하게 했죠. 제가 토하기 시작하면 들어와서 막아야 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꽤 특이한 관계로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그때는 그이는 21살이었으니까 나이도 상당히 어렸는데 말이죠. 그이가 12월생이니 거의 22세였고, 저는 24살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식욕 이상 항진증을 어떻게 극복하셨죠?

제니: 통원치료를 장기간 진행했습니다. 약도 꾸준히 먹었죠. 제가 생각하기로는 제 남편과의 관계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그분께서 도와줬군요.

제니: 그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오랫동안 이 증세로 고생했을지는 몰라요. 하지만 누군가와 만나서 그런 관계가 될 줄은 전혀 몰랐죠. 그래서 그이와 만나기 몇 년 전에 부모님에게 결혼해서 가족을 만들 수 없을 것 같으니 손자 손녀는 기대하시지 말라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팟캐스트: 왜 그렇게 생각하셨죠?

제니: 이상하게 보이시겠지만 입양아인 사실을 상대방들이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식이 장애를 앓게 되자 제가 버스 타기에도 너무 뚱뚱하다고 생각했죠.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자기 스스로에 대한 잘못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게 됩니다. 제가 역겹게 생겼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교류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더 고립되고 사람들과 교류가 끊기기 시작했어요. 버스에 타면 역겨운 사람이 버스를 탔다고 생각해서 버스를 피하게 되었습니다. 웃긴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실제로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생각이죠. 

팟캐스트: 그 당시에는 상당히 마르셨었죠. 오히려?

제니: 지금이 더 날씬하지만, 그 당시에도 살이 찐 것은 아니었어요. 많은 사람이 식이 장애를 앓는 이유가 외모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팟캐스트: 내부의 감정적 문제에 더 가깝죠?

제니: 네 그렇습니다. 마약 중독이거나 다른 병을 앓고 있으면 비슷한 증세가 나타나죠. 저는 식이 장애를 통해서 제 불안감을 해소했죠. 아주 파괴적인 불안 해소 방식이고, 사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끔찍한 영향을 끼칩니다. 모든 것이 끔찍하죠. 다시 그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면 어떻게 할지 몰라요. 다시 극복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아주 끔찍한 병이죠.

팟캐스트: 식욕 이상 항진증을 극복하면서 다른 사람과 최초로 먹은 식사에 대해서 기억하시나요?

제니: 네 기억해요. 채소를 곁들인 파스타를 어머니와 같이 먹었죠. 몇 년 만의 먹고 나서 토하지 않은 경우였습니다. 낫는 데 아주 오래 걸렸어요. 

팟캐스트: 식사 도중과 식사 후의 기분은 어땠나요? 

제니: 장기간의 상담과 약 복용으로 식사를 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해 있었어요. 적어도 먹고 나서 바로 토해야 하는 단계는 극복했죠. 물론 아주 힘들었습니다. 병 때문에 음식과 몸에 대한 관점이 뒤틀려 있었어요. 

팟캐스트: 그러한 경험이 제니 씨가 부모로서 행동하는 데 영향을 끼쳤나요?

제니: 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험으로 인해서 제 딸이 그러한 경험을 겪는다면 눈치챌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식욕 이상 항진증을 겪으면 오랫동안 평범해 보이죠. 하지만 거식증에 걸리면 몸이 말라가니 모두가 눈치를 채게 되죠. 하지만 항진증은 평범해 보여서 사람들이 눈치채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팟캐스트: 딸을 걱정하셔서 하신 준비는 무엇이 있나요?

제니: 준비는 따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좀 더 신경을 썼을 뿐이죠. 제 딸이 잘 먹게 되는 것을 원했고, 실제로 제 딸은 먹기를 좋아해요. 자기 자신의 외모에 만족하게 하고 모든 것이 괜찮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팟캐스트: 식욕 이상 항진증의 이유가 자신감 부족과 자아 존중이 부족해서 그랬던 만큼, 자식들의 자신감과 자아 존중을 성장시키려고 하셨는지 알고 싶었어요. 

제니: 네. 음식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사회에게 공격을 받지 않고, 제가 가진 스트레스와 공포를 느끼지 않기를 원했죠.

팟캐스트: 제니 씨의 공포와 고통을 물려줄까 봐 두려웠나요? 

제니: 네 그랬던 것 같습니다.

팟캐스트: 아주 흥미롭네요. 입양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제니 씨와 최초로 피로 이어진 가족 관계니까 말이죠.

제니: 네. 저의 관점에서만 말하는 거지만 아주 강력한 감정이죠. 제가 생각하기 전에 말하는 버릇이 있어서 다른 분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피로 이어진 가족이 있다는 것은 아주 큰 차이점을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이들을 낳고 유전자로 이어진 두 명의 아이를 가지게 되자, 제 입양 부모님과 가진 관계와는 다른 더 깊은 관계를 그 아이들과 가지게 된 기분이었습니다. 설명하기 어렵죠. 제가 아이를 가지게 되자 제 입양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어요. 우리 장남이 여섯 달이 되었을 때 아주 오랫동안 그 애를 데리고 있었던 기분이 들었죠. 그래서 제 남편에게 우리 아들이 제가 제 부모님에게 온 나이가 되었다고 말하니 그이가 저를 안아줬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누가 그런 것에 신경이나 썼을까 생각하니 아주 슬퍼졌고요.

팟캐스트: 친자식을 낳고 난 뒤 제니 씨가 입양된 나이까지 자란 것을 보니 특별한 감정을 느끼셨군요.

제니: 네 그렇습니다. 6개월이 긴 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저는 서류상으로는 제가 발견된 주에 태어났다고 되어 있었죠. 물론 사실이 아닌지는 모르지만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와 헤어진 셈입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이 제니 씨의 자식들과 친밀한 관계인가요?

제니: 네. 아버지 어머니는 손자 손녀들과 친밀한 관계죠.

팟캐스트: 항상 입양의 충격이 아이들에게 대물림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죠. 하지만 입양아의 아이들은 버림받지도 않았고 부모를 알기 때문에 관련 문제에서 좀 더 자유롭다고 합니다. 아직 아이들이 어린이지만, 아이들에게서 그러한 느낌을 받으시나요? .

제니: 정확히 어떤 말이시죠?

팟캐스트: 배경에 대한 의문이나, 다른 문제가 아이들에게 대물림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자식들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궁금해서요.

제니: 아니오. 그런 느낌은 받은 적이 없어요. 제 부모님이 그 아이들에게 있어서 뿌리 역할을 해주시고 있죠. 그리고 아이들도 제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련 문제는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걱정하는 문제는, 스웨덴의 입양아들은 한국 출신입니다. 그리고 많은 스웨덴 한국 입양아들이 입양 부모와의 어떤 연결고리도 없죠. 그 사실에 매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많은 입양아가 평범한 성장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수많은 입양아가 끔찍한 상황에 부닥쳐 있었거나 처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순진하게 입양아들이 좋은 상황에서 자라났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스웨덴의 입양아 중 절반이 끔찍한 상황에 부닥쳐 있더군요.

팟캐스트: 스웨덴에서 말이죠?

제니: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입양에 대해서 표현하기 위해서 음악도 사용하셨죠. 말해주실 수 있나요?

제니: 네. 저에게 음악은 치료 방법과 같아요. 저는 콘서트 피아니스트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지는 않죠. 그냥 평범하게 저를 위해서 연주하는 편입니다. 치료 절차인 셈이죠. 제가 처음으로 배운 감정 분출 방법의 하나였습니다. 두 살에서 세 살부터 피아노를 배웠죠. 어렸을 때부터 제 음악을 작곡했고 대부분 아주 슬픈 음악이었어요. 

팟캐스트: 음악을 작곡하셨군요?

제니: 네. 제가 가진 감정을 해소하려는 방법이었죠. 모든 음악이 외로움과 슬픔, 버림받는 일에 대한 것이었다는 것이 조금 무섭네요

-제니 다그렌이 이 작곡한 음악-

제니: 이 음악을 작곡한 시기는 제가 37세였을 때였어요. 꽤 이전에 작곡했죠. 

팟캐스트: 그때부터 이미 어머니이셨군요

제니: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이 음악을 작곡하고 난 뒤 감정이 바뀌셨나요?

제니: 아뇨. 바뀐 점은 입양 제도에 대해서 더 실망하고 더 충격을 받았다는 점이겠죠. 제가 한국에 가기 전까지는 입양 제도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전에는 입양을 부패나 인신매매와 연계해서 생각하지 않았죠.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많은 입양아가 구매됐고, 납치당한 경우도 많았고, 금전적인 거래와 부정부패가 많았다는 사실을 배웠거든요. 이 입양 제도 내부의 부정부패가 저를 입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려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입양에 대해서 낭만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어요. 입양이 아주 좋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입양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죠. 전 입양을 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아무리 좋은 생활을 보냈다고 해도 입양은 하지 않겠죠. 입양되면 자라면서 맞지 않고 남들과 닮지 않고, 슬픔을 가지고 자라나게 되어요. 하지만 동시에 집도 있고 물질적으로 풍요를 느끼면서 자라나게 되는 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이 더 중요한지 모르겠네요. 물질적으로 풍요하냐, 감정적으로 안정적인 것이 더 좋은지를 말이죠. 물론 입양아 중 일부는 그 두 가지를 전부 누리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무언가를 상실한 채로 살아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니: 입양한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전 병원에서 아주 긴 시간을 보냈어요. 의사들도 많이 만났죠. 16세에 골반을 다쳤고 15년간 관련 치료를 위해서 병원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첫 1년은 서서 지내야 했어요. 그리고 남편과 이 문제에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눴을 때, 남편은 의학적 요가를 권했죠. 그래서 다양한 문제를 위한 다양한 치료를 실험해봤습니다. 그리고 지속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위한 병원도 갔었고 다양한 일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요가를 시작하게 됐을 때 요가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고통의 시점이 친부모와 연관이 없어서 시작된 것 같다고 말씀하셨죠. 그리고 이건 요가식 접근 방법입니다. 모두에게 효과가 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에게는 맞았고, 맞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느끼고 있는 고통 중 상당수는 육체적인 고통이었고, 상당수가 제가 친어머니와의 관계 부재에서 나왔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이러한 고통을 가지는 것이 이상했어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치유였죠. 어떤 일을 겪어도 치유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가를 42세 때 시작했고 아주 큰 도움이 되었어요. 

팟캐스트: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죠? 

제니: 정답을 얻었기 때문이죠. 진짜 정답들을 얻었어요. 왜? 어떻게? 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제가 골반 부상을 입어서 골반이 뒤틀린 채로 굳어버렸어요. 요가에서는 첫 번째 차크라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뿌리에 관한 내용이죠. 0세에서 3세까지의 친모와의 관계와 연관되어 있어요. 하지만 저는 어떤 관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큰 문제가 있었죠. 하지만 요가를 통해서 치유될 수 있어요.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말이죠. 모두에게 맞지는 않지만, 저에게는 맞았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현재 고통을 덜 받는다고 생각하시나요?

제니: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고통을 받고 있어요. 그래도 이제 병원을 정기적으로 다니지 않아도 되죠.

팟캐스트: 사람들이 감정적 고통이 육체적 고통으로 드러난다고들 하죠. 

제니: 네 그렇죠.

제니: 감정적 고통이 육체적 고통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도 있겠네요?

제니: 네. 물리적인 고통으로 나타났다고 봐요. 그래서 요가가 저에게 맞았죠. 그리고 모두에게 추천해주고 싶습니다. 그래도 친부모와의 관계가 직접적인 현재의 상태에 영향을 끼친다는 말이 상당히 급진적일 수 있으니 여러분들이 원하는 대로 받아들여 주세요. 하지만 저에게는 맞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니 다그렌이 작곡한 음악-

제니: 전 감사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몇몇 사람들이 저에게 스웨덴으로 입양된 것을 감사하라고 하죠. 그러한 말을 아주 싫어합니다. 하지만 스웨덴 자체에서 자라난 것은 감사하게 여기고 있어요. 

팟캐스트: 음악은 계속하셨나요?

제니: 네. 했습니다. 

팟캐스트: 입양이나 다른 주제에 관련해서 하셨나요?

제니: 제가 음악을 작곡할 때는 입양에 집중해서 하지 않아요. 자연스럽게 나오는 편입니다. 단어와 음률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져요. 하지만 진행될 때의 느낌이 있죠. 상실, 외로움, 사랑받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제니 다그렌이 작곡한 음악-

제니: 그리고 자신의 가치가 더 낮다고 느껴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좋은 대화였습니다. 제니 씨.

제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팟캐스트: 오늘의 제니 다그렌 씨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더 말씀하실 것은 없나요? 

제니: 오늘의 저는 더 많은 것을 알지만 그래서 더 모른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맞나요? 

팟캐스트: 네. 더 많이 알면 알수록 더 모른다는 말이죠? 

제니: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더 말할 것은 없네요.

팟캐스트: 현재 스톡홀름 근처에서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다른 입양아들과의 관계를 유지 중인가요?

제니: 네. 한국계 입양아 친구들과 아직도 관계를 지속하고 있어요. 

팟캐스트: 20대나 고등학교 때의 친구들이 지금의 제니 씨를 만난다면 알아볼 것 같나요? 

제니: 제 외모를 통해서는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저 자신은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20대 때보다 더 외향적이고 더 행복하죠. 

팟캐스트: 슬픔을 마주 보고 처리하기 시작하셨으니까요?

제니: 네. 물론 시간이 걸릴 그것으로 생각하지만 전에 비해서 더 개방적으로 다가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입양아들에게 가끔 이 질문을 하고, 흥미로운 반응이 나오는데…. 24세 때에 고생하고 계셨죠?

제니: 제 삶 전체가 고난의 연속이었죠.

팟캐스트: 아 네. 그래서 20대 초반의 제니 씨에게 이야기해줄 수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나요?

제니: 자기 스스로 상냥하고 좀 더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팟캐스트: 그리고 삶이 알아서 해결되라고요?

제니: 네 그럴 것 같아요. 그래도 이 질문을 사전에 하셨으면 더 좋은 대답을 했을 겁니다.

팟캐스트: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니: 그래도 자기 스스로 상냥하고 좀 더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라고 하고 싶어요. 그리고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 자신감을 가지라고 하고 싶죠. 자기 자신에 확신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니까요.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제니 씨. 만나서 기뻤습니다.

제니: 저도 만나서 기뻤습니다. 

-제니 다그렌이 작곡한 음악-

시즌 4, 에피소드 8: 헤더 슐츠

Audio available Dec. 3, 2020 at 7 am EST.

36세인 헤더 슐츠는 탄생 4개월 차에 한국에서 뉴욕주 롱 아일랜드에 사는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헤더는 어렸을 때 어머니를 병으로 잃고 새롭게 집을 공유하게 된 양어머니와 의붓자매에게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어린 시절 내내 애썼다. 슬픔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던 헤더는 친가 할머니에게서 지지와 사랑을 찾아냈다. 자신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운 뒤, 헤더는 자신 마음속의 깊은 슬픔과 문제가 있는 가족 관계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현재 헤더는 교육자이자, 연설자이며, 다른 사람들의 과거의 고통과 트라우마를 해결해주는 치료자이다. 헤더는 NBC 뉴스에 자신의 삶에 관해서 쓴 수필을 투고했으며 Also Known As NYC의 이사 자리를 포함해, 입양아 사회에서 지도적 자리를 맡고 있다.

헤더: 제 이름은 헤더 슐츠입니다. 뉴욕시 퀸스에 있는 서니사이드에서 살고 있습니다. 한국 이름은 허미영입니다. 현재 저는 버룩 대학교에서 공개연설,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과 홍보작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버룩 대학교는 제 모교이기도 합니다. 제 언론학 학사를 버룩 대학교에서 땄고, 또한 제 행정학 석사도 이곳에서 수료했죠. 그리고 이 팟캐스트에서 제 입양 일대기를 공유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팟캐스트: 헤더 씨, 나이가 몇 세시죠?

헤더: 36세입니다. 막 36세가 되었어요. 제 생일은 7월 4일이에요. 물론 제 입양 기록에 따르면 제 생일이 7월 4일이지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기록상으로 그렇게 되어 있으니 지난 36년간 그렇게 살아왔죠. 진짜 생물학적 생일인지 확인하려고 한 적은 없어요.

팟캐스트: 생일을 국가적 휴일(미국의 독립 기념일. 7월 4일이다)과 공유하고 계시네요. 그러한 사실이 헤더 씨가 생일을 더 즐기게 했나요? 아니면 헤더 씨의 삶에 있어서 문제가 되었나요?

헤더: 전 항상 제 생일에 받는 주목을 좋아했어요. 제가 어렸을 때는 독립 기념일을 축하하는 폭죽들이 전부 절 위해서 터트리는 폭죽인 줄 알았죠. 제가 미국과 생일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던 겁니다. 아 폭죽들이 전부 날 위한 거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한국에 처음으로 되돌아갔을 때가 2014년이었습니다. 막 30살이 되었을 때였죠. 혼자 3주간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서울에서 불꽃놀이를 봤어요. 서울에서 불꽃놀이 구경은 정말 비교할 수 없는 경험이죠. 제가 태어난 도시에서 불꽃놀이를 보는 일은 기적적인 경험이었어요. 전 생일에 손실을 경험해본 적은 없습니다. 물론 다른 날들은 손실에 대한 슬픔을 받아들이고 경험하는 날들이기도 하죠. 예를 들면 제가 제 입양 어머니를 잃었던 날이 있습니다. 1995년에 제가 10살일 때 돌아가셨죠. 그때 어머니 연세가 39세였습니다. 전 어머니의 생신인 6월 12일을 축하할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인 1월 28일도 기억하고 추모하죠. 이 두 날이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쳐요. 지난달에 퀸스에 어머니의 묘소를 방문했습니다. 혼자 꽃을 들고 갔었죠. 어머니에게 말도 걸고, 어머니의 애청곡이었던 시스터 슬레지의 위아패밀리도 틀어 드렸습니다. 매년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죠.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과 생일에 가서 하는 일입니다. 제 입양 부모님께서 저를 입양하셨을 때, 저는 4개월밖에 안 됐었고, 부모님의 첫 아이였습니다. 그렇게 제 삶을 외동딸로 시작했죠. 

헤더: 하지만 나중에 부모님께서 이혼하시고 아버지가 이미 이혼 경력이 있는 여성분과 결혼하셨죠. 그분은 첫 번째 결혼에서 2명의 딸을 두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양어머니와 의붓 자매들이 집으로 들어왔죠. 그래서 저에게 관심이 집중되지 않고 아버지, 제 장난감, 그리고 우리 집을 의붓 자매와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웠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와 양어머니가 제 이복동생을 93년에 낳으셨죠. 저보다 9살 연하입니다. 

팟캐스트: 가족에서 유일한 국제 입양아시군요.

헤더: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그 상황은 상상하기도 어렵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10~11살에 그런 변화를 겪으셨는데, 어떻게 받아들이셨나요? 아주 많은 고통과 슬픔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헤더: 지금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의 저는 슬픔, 상실, 그리고 분노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20대가 될 때까지 그 감정들을 직접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단지 질병인 다발성 경화증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죠. 거의 최종 단계에는 제 이모가 절 어머니 병문안에 데리고 갔어요. 그 단계에서 어머니는 말을 하지 못하셨죠. 식사도 영양보급관을 통해서 하셨어요. 그런 상태의 어머니를 보는 일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절 보면 기뻐하셨죠.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제가 있을 때는 병원 빙고를 이기지 못하셨는데, 제가 없을 때는 자주 이기셨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어머니 병원에 방문할 때의 좋은 기억들이 있어요.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항상 아프셨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처음 입양하셨을 때 어머니는 이미 휠체어를 사용하고 계셨죠. 그리고 펜실베이니아 기반 러브더칠드런 입양 기관에 다발성 경화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셨습니다. 건강 상태에 대한 의심을 피하고자 사촌이 쓰고 있던 깁스를 빌려 다리를 부러진 것 같이 연기해 기관을 속이셨죠. 어머니께서 그렇게 해서라도 절 입양하려고 하셨어요. 

팟캐스트: 어머니가 대화가 가능하실 때 어머니와 나눴던 마지막 대화들을 기억하시나요? 

헤더: 어머니와 한 대화 자체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어머니가 제가 사랑받고 특별하게 느껴지게 하신 일은 기억해요. 어머니는 자신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드는데 중점을 두셨어요. 예를 들면 어머니는 저에게 “난 나 자신이 좋아”라는 책을 주셨어요. 어머니가 책을 바꿔서 제 이름이 들어가게 했죠. 그 책이 절 특별하게 해준 기분이었고, 여전히 그 책을 가지고 있어요. 어머니를 생각하다가 슬퍼지면 그 책을 보면서 마음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또 어머니께서는 제가 어른이 되면 읽기를 바라면서 1984년에서 1987년까지 일기를 쓰셨어요. 제가 2014년 첫 한국 방문을 마치고 오자 아버지가 그 일기를 저에게 주셨죠. 그전까지 이러한 일기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이 일기에는 입양 과정이 적혀 있었고, 제 이름이 왜 꽃의 이름을 따서 헤더가 되었는지도 적혀 있었죠. 거기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제 사진을 처음 받고 느낀 감정에 대해서도 적혀 있었고요. 그리고 시민권 부여와 동화 과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그 과정 전부가 저에게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죠. 많은 입양아가 절차를 밟지 않아서 시민권자들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추방당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니까요. 

팟캐스트: 퀸스에서 자라셨나요?

헤더: 제가 자란 곳은 롱 아일랜드의 파밍데일이라는 마을이었습니다. 서퍼 카운티와 나소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이죠. 

팟캐스트: 인종 구성이 다양한 곳이었나요?

헤더: 아뇨. 백인이 절대다수였죠.

팟캐스트: 성장할 때의 경험은 어떠셨나요? 부모님이 인종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셨고 부모님이 인종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아니면 언급하지 않으셨나요?

헤더: 언급하지 않으셨어요. 어머니 측의 가족분들이 이야기하기를 어머니는 절 한국계 학교에 보내고 싶어서 하셨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어머니의 건강 문제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죠. 어머니가 쓰신 일기에는 어머니는 제 출신지를 잊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언급하면서 제 한국 유산을 존중한다고 하셨어요. 제 돌 때도 최대한 전통을 존중하려고 하셨습니다. 한국식 복장을 입히고, 과일도 준비하고 최대한 전통적으로 만들려고 하셨어요. 제 아버지, 양어머니 그리고 의붓 자매들과는 인종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편한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한국인이고 아시아계라는 사실은 알았어요. 제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던 일이었고 확실히 저에게 문제가 되었죠. 제가 어렸을 때는 외향적인 아이라서 밖에서 많이 시간을 보냈어요. 그래서 지금보다 훨씬 까무잡잡했습니다. 그래서 신경이 쓰였죠. 전 한국 바비인형을 하나 가지고 있어서 그거만 가지고 놀았어요.

팟캐스트: 바비인형을 가지고 계셨군요!

헤더: 네! 아름다운 분홍색 머리에 예쁜 한복을 입고 있어서 항상 가지고 놀았어요. 제 의붓 자매들은 백인 바비인형을 가지고 놀았죠. 전 백인 바비인형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 아시아계, 그리고 한국계 혈통에 대해서 자부심을 품고 있었으니까요. 

헤더: 전 실히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사망하신 뒤에 양어머니께서 “네 어머니는 아팠어. 널 입양해서는 안 됐어.”라고 말한 뒤에는 더더욱 그랬죠. 그 발언은 지금까지도 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고, 어린이였던 저에게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 뒤, 왜 양어머니가 절 싫어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했어요. 저 자신의 문제를 마주 보고 생각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양어머니께서 직접 말해준 적은 없지만, 전 아버지의 첫사랑을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였으니까요. 그래서 저를 위험하게 여긴 겁니다. 물론 제 관점이고 양어머니에게 직접 들은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인식해서 양어머니를 용서할 수 있었어요. 양어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 감정적으로 저를 학대했죠. 집에서 지내면서 편하지가 않았어요. 방에 지내면서 책을 읽고 공부에 집중했죠. 전 모범생이었고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클라리넷도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양어머니는 제가 클라리넷 연습을 하지 못하게 하기도 했어요.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아버지는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 알고 계셨나요?

헤더: 어머니의 일기와 사진첩을 보면, 어머니, 저 그리고 아버지만 있었을 때는 아버지가 절 소중히 여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양어머니와 결혼했을 때 모든 게 바뀌었죠. 그리고 아버지와 저의 관계는 멀어졌습니다. 특히 1985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더욱 그랬죠. 그때 머라이어 캐리의 원 스위트 데이라는 노래가 발표되었죠. 항상 그 음악을 들으면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어머니가 항상 절 지켜보고 계시고, 어머니와 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죠. 그저 여기에 물리적으로 계시지 않을 뿐입니다.

-머라이어 캐리의 원 스위트 데이-

헤더: 하지만 아버지와 양어머니와의 고통스러운 관계에 대해서 직접적인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어요. 

팟캐스트: 입양아의 관점으로서 보면, 물론 어려서 인식하기도 어려웠겠지만, 이러한 상실과 입양까지 더하면 상황의 관리 자체가 불가능했겠군요? 

헤더: 제가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노력할 수 있는 만큼 노력했죠. 제 공부를 통해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어요. 제 아버지와 제 양어머니는 제가 공부를 잘하라고 압박을 주지는 않았어요. 그냥 제가 원해서 공부를 했죠. 누구도 숙제를 강제로 시킬 필요가 없었고 시험공부를 시키지 않았어요. 공부와 음악이 그런 고통스러운 시기를 버티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음악을 통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을 견뎠어요. 좋은 친구들의 지지도 도움이 되었죠. 

팟캐스트: 그리고 지금은 아주 다양성이 높은 지역인 사니사이드에서 살기로 선택하셨죠. 의도적으로 그곳을 선택하신 건가요? 

헤더: 제 성장기로 되돌아가면, 아버지, 양어머니, 의붓 자매, 그리고 이복 남동생과 20세까지 같이 살았죠. 그 시기에는 좋지 않은 상대와 연애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절 학대하던 남자친구와 같이 지내기 위해서 우리 집을 떠났죠. 차에서 지내고, 모텔에서 지내고, 친구 집에서 지내거나 그랬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제 할머니, 사실 제가 미국에 처음으로 내렸을 때 절 처음으로 안았던 분이기도 했죠. 그리고 할머니는 어머니가 그 사실을 가지고 자기를 용서 안 해줬다고 지금까지 농담하세요. 왜냐하면, 어머니는 방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할머니가 반대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반대쪽에서 제가 들어왔거든요. 

헤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할머니가 저를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21세 생일이 되기 전이었죠. 할머니께서, 자기 손녀가 차에서 사는 꼴은 못 보겠다고 하셨거든요. 제 상황을 할머니에게 알려준 것이 아버지였습니다. 그렇게 할머니가 제 목숨을 구해주셨어요. 할머니 덕분에 다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호프스트라 대학교에 재적하고 있었는데, 버룩 대학교로 편입할 수 있었어요. 그 뒤로는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죠. 할머니와 같이 지내면서 집에 다시 편안한 곳이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죠. 할머니의 동거인, 저에게는 고모와 같은 분이죠. 2017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제 삶에 있어 강한 여성의 본보기가 되어 주셨어요. 할머니가 또한 자기 친구들에게 저를 소개해 주었고, 그분들도 제 할머니나 다름없는 분들이 되셨습니다. 그분들이 제 삶을 원래의 궤도로 돌려놓는 데 도움을 주셨습니다. 상담도 받았고, 그것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를 보고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죠. 

헤더: 서니사이드의 문제로 다시 돌아와서, 할머니와 2005년에서 2018년까지 같이 살았고 그 뒤로는 제 약혼자와 동거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최근 몇 년간 서니사이드에서 생활했죠. 이 동네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팟캐스트: 할머니와 같이 지낼 때는 어디 사셨죠?

헤더: 롱 아일랜드 곳곳에서 지냈어요. 벨모어, 사이아시드, 리넨헐스와 라플센터에서도 살았죠. 할머니는 방랑벽이 있으셔서 자주 이사를 하셨어요. 저에게 요리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팟캐스트: 그렇게 돋보이지는 않지만 약간 보이는 억양이 있는데 롱 아일랜드 억양인가요?

헤더: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할머니께서 아버지가 헤더 씨를 충분히 지지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생각하셨나요? 적어도 헤더 씨는 그렇게 느끼셨나요? 

헤더: 그때는 확실히 그렇게 느꼈습니다. 제 할머니와 관련 이야기도 깊게 나눴어요. 할머니께서 제가 겪고 있는 문제를 알았습니다. 제가 할머니 집에 방문할 때마다 저를 보셨으니까요. 할머니 집 방문을 항상 좋아했습니다. 직접 빵도 구워 주셨고, 기르고 있던 개들을 위한 견용 쿠키들도 구우셨죠. 어렸을 때 양어머니가 할머니와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했던 것이 기억이 나요.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죠. 제 할머니인데 말이에요. 아주 질투심이 많고 불안정하셨죠.

팟캐스트: 할머니와 헤더 씨의 깊은 관계를 알고 질투했던 거겠지요. 다른 아이들보다 할머니와 더 가까운 관계였나요?

헤더: 네.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제가 언급하는 할머니는 제 친할머니입니다.

팟캐스트: 하지만 의붓 자매들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고 계셨죠? 

헤더: 네

팟캐스트: 그 사실이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르겠네요. 많은 입양아는 어린 시절을 살아남은 뒤 자기 자신을 찾아낸다는 공통점이 있죠. 그러한 일이 헤더 씨가 집에서 나와 할머니와 살게 되면서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헤더: 고등학교 때는 제 몸에 대한 만족을 못 했어요. 그래서 제 몸을 큰 셔츠, 스웨터, 헐렁한 바지 등을 입어서 가렸어요. 제가 그랬던 이유가 양어머니가 제가 중학교 때 탱크톱을 입었다고 잔소리를 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탱크톱이나 노출이 많은 옷을 고등학교 때 입기를 꺼렸죠. 제가 할머니와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 할머니가 제 여성성을 받아들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제 몸에 맞는 옷을 입는 일이었죠. 

팟캐스트: 이야기를 들어보니 양어머니가 당신을 정말 마음에 안 들어서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인종차별적인 면모도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헤더: 당연히 있지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카페테리아에 혼자 앉아 있었어요. 한국인 교환학생이 제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김밥을 저에게 처음으로 먹여주었죠. 김밥을 처음 먹었을 때가 제 첫 한국 음식 경험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김밥을 아주 좋아하죠. 그리고 그 친구는 우리 집 근처에서 지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친구가 집으로 초대하고, 가족들을 소개해 주고 어머니는 저에게 요리도 해주고 싶어서 하셨죠. 그래서 양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놀러 가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양어머니가 가면 안 된다고 막으셨죠. “넌 미국인이야! 한국인이 아니라!”라고 말했어요. 한국 친구 집에 가는 것을 그런 이유로 막았고, 그래서 아주 화났습니다. 그리고 그전에도 여러 인종차별적인 말을 하기도 했어요.

팟캐스트: 언제부터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과 한국 혈통과 다시 연결점을 찾으려고 했나요?

헤더: 버룩 대학교에서 언론학 학사로 2008년에 졸업했습니다. 그때는 대침체가 한창이었죠. 그래서 제가 계획했던 언론계 취직이 증발해 버렸어요. 그래서 그것에 맞춰 계획을 바꿔야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프로그램 하나를 찾았고 응모했습니다. 그런데 찾아보니 이 회사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가 좀 있더라고요.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사기를 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한국을 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제가 버룩 대학교에서 2014년에 석사학위를 따고, 제가 30살이 되었을 때, 절 항상 지원해주신 할머니께서 생일선물 겸 졸업 선물로 여행을 하고 싶냐, 파티하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하고 싶다고 답했죠. 처음으로 생각이 난 나라는 한국이었습니다. 그래서 2014년 10월에 3주간 한국으로 여행을 갔죠. 가족 친구와 같이 지내면서 서울, 부산과 제주도를 방문했습니다. 할머니가 선물로 저에게 표를 주셨죠. 지금까지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행 가기 전에 NBC 뉴스에 왜 한국에 돌아갔는지에 대한 경험 수필 두 개를 투고했습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주에 두 수필이 출판되었죠. 그 뒤로 입양아들이 SNS로 저에게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영화 트윈스터의 주연이던 샘 버터민이 트위터로 연락해 제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고 하기도 했고요. 

헤더: 그리고 전 미국에 돌아오고 나서 입양아 사회와 교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몰두하기 시작하면 정말 한없이 몰두하거든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사회의 일부가 되었죠. AKA의 이사회의 일원으로 2015~2016년에 재직했고, 또 다른 입양아 단체인 올투게더나우 브루클린의 유소년기 입양아 지원 그룹을 운영했습니다. 또 이 모든 것을 하면서 2018년에 문을 닫은 또 다른 입양아 NGO 자선단체인 DAI 홍보담당관이자 관리자로서 일했죠. 이렇게 일하면서 입양아와 관련된 전체적인 관계를 알게 되었고 저 자신, 그리고 친어머니를 용서하기 위한 단계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저 자신의 입양아 감정만을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친어머니의 감정은 생각하지 않았고, 어머니의 감정도 생각해보지 않았고, 입양과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AKA, 올투게더나우, DAI에서 일한 경험을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직에서 동시에 일해서 나중에 DAI가 폐업한다는 소식을 듣고 약간 마음을 놓은 점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곳에서 동시에 일하다 보니 제 모든 일이 전부 입양과 관련되었거든요. 디스 이즈 어스와 같은 입양과 관련된 영화와 대중매체도 잔뜩 소비했습니다. 너무 많아서 압도당하는 기분이었죠. 그래서 DAI에서 해고되고, AKA의 이사직도 퇴임한 뒤 버룩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죠.

팟캐스트: 여러 가지 이야기할 것이 많네요. 우선 한국으로의 여행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제가 한국에 처음으로 착륙할 때가 기억이 나네요. 헤더 씨는 어떻게 느끼셨나요?

헤더: 제가 느낀 최고의 감정 중 하나였습니다. 저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잔뜩 있었으니까요. 오던 중에 비행기 자리 옆에 앉아 계시던 중년 여성분과 친해졌습니다. 우선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탄 뒤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서울행 비행기로 갈아탔죠. 그 비행기에서 중년 미망인과 좋은 대화를 나누면서 친해졌어요. 그분과 부산과 제주도도 같이 여행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그 공항에 도착하니 그분께서 “같은 민족끼리 있구나!”라고 하셨고 저도 “네 그렇네요!”라고 답했죠. 백인 가족과 백인 마을에서 자라난 저에게는 같은 원형 얼굴, 아몬드형 눈, 비슷한 코를 가진 사람들과 같이 있다는 사실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팟캐스트: 항상 이방인이었던 삶이지만, 이곳에 내리고 나서 30초 만에 더 이방인 같이 느껴지지 않는 느낌이죠. 

헤더: 그렇죠.

팟캐스트: 언어의 장벽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셨죠? 

헤더: 가족 친구분과 같이 지냈고 그분이 제 이야기를 아셨기 때문에 주말에 같이 시간을 보냈고, 휘하 직원분들을 소개해 줬습니다. 그분들이 저에게 서울을 구경시켜 주셨고요. 낮에는 좀 더 관광객 같은 일을 혼자 했습니다. 물론 영어를 못하는데 서울 지하철로 돌아 다니는 데는 문제도 많았어요. 많이 힘들었죠. 물론 한국어 소책자를 들고 다니긴 했지만, 그것도 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젊은 한국인들이 영어를 할 수 있어서 제가 지하철을 돌아다니는 데 도움을 도와주었죠. 택시 같은 경우에는 가족 친구분이 북한산 근처에 살아서 그쪽 주소만 보여주기도 했어요. 한국어를 못해 소통을 못 하니 기사님이 이 주소를 찾아갈 수 있기를 비는 거죠. 그래서 언어의 장벽으로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하지만 가족 친구와 그분의 연결망으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어요. 내부인과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혼자서 경복궁이나 남산 타워를 방문할 때는 외부인 같았어요

팟캐스트: 입양아들은 여러 환경에 적응하고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마련이죠. 다른 사람들이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라고 생각한 적 있나요? 

헤더: 제가 한국에 있을 때는 그런 오해를 받은 적은 없어요. 하지만 가족 친구를 통해 사귄 한국 친구들은 제 입양 이야기를 몰랐다면 그냥 평범한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말했어요. 자연스럽게 한국인다운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팟캐스트: 예를 들어주실 수 있나요? 

헤더: 제가 대화할 때 활동적이긴 하지만 정확히 어떤 면이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게 했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여행 중에 기분 좋게 만들어준 일 중 하나였죠. 

팟캐스트: 다른 경험들은 어땠나요? 바닥에서 자는 일이나, 양반다리라던가, 그런 일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나요?

헤더: 2014년에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절에서 하룻밤 숙박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불교에 대해서 배우려고 그랬었죠. 그리고 가부좌를 하고 명상을 하고, 주지 스님과 차를 마시는 경험은 감명이 깊었습니다. 할머니가 같이 갔으면 했지만, 할머니는 거절하셨어요. 그리고 제가 한국에서 돌아오자 할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같이 가고 싶지 않아서 아니었지. 그 여행은 너 혼자 해야 하는 여행이니까. 라고 말해주셨습니다.

-광고-

팟캐스트: 첫 한국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일기를 쓰셨다면 어떤 내용을 적으셨을 건가요?

헤더: 집에 돌아와서 기뻤고, 제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제가 산 선물들을 줄 생각에 흥분했습니다. 한국에서의 경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텀블러(Tumblr, SNS 사이트)도 개설했어요. 한국에 가기 전에 만들어서 한국에서의 경험을 묘사하려고 했죠. 하지만 3주간 열심히 작성하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친구들이 그걸 통해서 제 경험을 확인하고 있기도 했죠. 그래서 미국에 돌아와서 제 경험을 할머니와 공유하고 싶었어요. 다른 면에서는 돌아가고 싶지 않기도 했습니다. 

팟캐스트: 입양 기관을 방문하셨거나 친부모님 조사를 하셨나요? 하고 싶으셨거나 준비는 되셨었나요? 

헤더: 2014년 10월 이전까지 제 언론학 전공을 살려서 최대한 조사할 수 있는 것은 다 조사했습니다. 입양 기관인 동부사회복지회와 연락해 제 서류를 확인할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제 삼촌이 이웃을 소개해 주셨고, 그 이웃분은 미주중앙일보에서 일하고 계셨죠. 그분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결과, 그분이 미주중앙일보에 제 여행에 관한 기사를 2014년 8월에 미주중앙일보에 기재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조사를 최대한 해서 여행을 준비하려고 했죠. 하지만 그때는 입양아 사회와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아서 그들의 자원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제 가족 친구가 사회복지사와의 방문에 같이 가셨죠.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하실 수 있으니까요. 이러한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제 입양 서류를 확인하는 일은 감정적으로 힘들었으니까요.

팟캐스트: 그곳에 있었을 때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 운이 좋으셨네요. 그리고 서류에 별로 정보가 없었던 것 같은데, 사실인가요? 

헤더: 한국에 가기 전에 사회복지사가 저와 공유한 정보는 얼마 없었습니다. 제 친부모가 결혼한 상태였고, 두 친형제가 있어서 3번째 아이를 돌볼 수 없어서 입양에 맡겨졌다고 하더군요. 동부사회복지회와 만난 뒤 아주 답답했습니다. 그들이 어머니에 대해서 제공한 정보는 어머니의 이름 허옥자뿐이었어요. 어머니의 이름이 쓰여 있는 종이도 주지 않더군요. 또 저에게 제공하는 정보를 골라내서 제공하기만 했습니다. 심지어 저에게 준 정보에서도 어머니의 이름을 검열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머니의 이름을 기억했고, 가족 친구도 그 이름을 기억했죠. 제가 뉴욕에 돌아오고 나서 사회복지사와 연락했습니다. 그리고 사회복지사가 KS에 연락해 친부모 조사를 할 수 있냐고 물었죠. 그리고 나중에 사회복지사가 와서 정보가 너무 적어서 KS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 일을 들으니 몹시 화가 나더군요. 첫 한국 여행을 하고 나서 제 친어머니를 더 찾고 싶었거든요. 

헤더: 그래도 친부모 조사는 계속되었습니다. 동부사회복지회나 입양 기관을 통한 조사는 그걸로 끝이었지만, 23 and Me(유전자 조사 업체)을 통한 검사를 2015년 1월에 했죠. 그리고 2015년 10월에 LA에서 저의 5촌이 연락을 해왔습니다. 그 5촌이 2016년 11월에 자기 아버지가 자신을 방문했을 때 23 and Me 검사를 받게 했죠. 그리고 그분이 4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지금 다섯 남성분의 이름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제 친아버지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지금 제5촌이 한국 친척들에게 연락해 정보를 찾고 있는데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몇 친척들은 그러한 정보 공유를 하려고 들지 않더군요. 하지만 5촌은 노력해줬고, 한글과 한자로 쓰여 있는 족보도 공유해줬습니다. 전 그 족보를 2019년 10월에 서울 여행을 가기 전에 해외입양인연대와 공유했어요. 

팟캐스트: 5촌이 그렇게 개방적으로 교류를 했다니 대단하네요. 사람들이 말하기를 입양아라는 사실을 바로 밝히지 말라고 하는데, 발견하셨을 때 어떻게 접근하셨나요? 

헤더: 5촌이 저에게 연락을 먼저 해왔고, 제가 제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전화번호도 나눴어요. 지금도, 제가 문자를 보내면 바로 문자를 돌려주죠. 아주 개방적이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줬어요. 

팟캐스트: 5촌이 왜 직접 찾아야 했죠? 한국인 친척 관계는 보통 아주 친밀해서 그렇게 깊게 찾아야 할 이유가 없는데요.

헤더: 좋은 질문이네요. 정확히는 몰라요. 물론 5촌이 자주 말하기도 했고 여러 대화도 했지만, 그래도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저에게 연락해서 도와줬던 게 고마웠어요. 

팟캐스트: 나이가 비슷한가요?

헤더: 저보다 연상이고, 아내와 두 아이가 있고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어요.

팟캐스트: 그분이 아버지를 설득해서 검사를 받게 했군요? 

헤더: 제4촌 되시는, 그러니까 5촌분의 아버지분은 미얀마에 살고 계셨어요. 그리고 2016년 11월에 휴가 겸 아들 가족을 방문했던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설득해서 유전자 검사를 받게 했고 그분이 제4촌인 사실이 밝혀졌던 거죠. 

팟캐스트: 그 결과를 들으셨을 때 어떠셨나요?

헤더: 제 퍼즐의 또 다른 조각이 맞춰졌으니 아주 기뻤죠. 그다음에는 12월 친부모 조사 결과가 나와서 조금 답답해졌습니다. 지난 10월에 제 약혼자와 같이 서울에 있었을 때 해외입양인연대(GOAL)과 NCRC와 만났습니다. 2014년의 첫 방문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거든요. 입양아들을 위해 제공되는 정보가 더 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단체들이 제 조사를 맡아 준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꼈습니다. GOAL은 입양아들이 운영하는 조직이라 제 상황을 이해해줄 수 있으니까요. 2차 한국 방문은 제가 입양아 사회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그 사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확실히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12월에 GOAL이 저에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카카오톡으로 관련 직원과 같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죠. 그래서 관련 정보를 공유해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연락에서 NCRC가 제 친어머니와 3분간 연락을 취했다고 했어요. 어머니가 충격을 받아서 저와 연락하거나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하더군요. 어머니 주소로 편지를 보냈는데, 반송되었다고 합니다. 제 친어머니에 대해서 찾고 있었는데 친어머니가 살아 계시고, 제가 찾는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리고 그 소리를 듣자마자 울기 시작했죠. 그리고 4일 뒤에 GOAL을 통해서 관련 연락이 또 왔어요. 뉴욕 출신의 또 다른 헤더라는 이름의 입양아와 서류를 혼동했다는 겁니다. 

팟캐스트: 이런.

헤더: 그리고 NCRC에서 사과 이메일을 장문으로 보냈습니다. 지금까지 답장을 안 했어요. 몹시 화가 났거든요. 한 감정에서 다른 감정으로 감정이 요동을 쳤습니다. 제 친어머니를 찾았고, 통화도 했고, 저 자신에 대해서도 알았는데 그걸 앗아간 셈이죠. 제가 첫 정보를 알고 나자 제 가족들과 친구들과 공유했고 모두 저를 보조하면서 최대한 제 친부모를 찾는 데 도움을 주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 사람들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친구들과 가족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기가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가장 친한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는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지난 몇 달간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가 있었어요. 그리고 NCRC를 용서할 수 있었죠. 일부러 그런 일이 아니었고 실수였으니까요. 그리고 그 답장을 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작년 12월 15일에 저에게 보내준 이메일은 아직 답장을 못 했어요. 

팟캐스트: 이 과정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은, 과정을 시작하게 되면 온갖 감정과 시간의 흐름이 일보전진 이보후퇴와 같다는 것이죠. 그런 답답한 감정과 정답을 찾는 일은 어렵고요. 

헤더: 카오미씨(팟캐스트 진행자). 그러한 과정이 제가 왜 친어머니를 찾게 되는지 생각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제 약혼자와 한국 2차 여행을 가기 전에 많은 한국인 입양아 친구들이 친어머니를 찾아서 한국에서 친어머니와 만났거든요. 질투가 났죠. 그리고 그 질투가 난다는 사실도 지난 몇 달간 직접 겪어보고 나서야 인식했어요. 그리고 그러한 감정을 제 입양아 친구에게 털어놓았는데, 그 친구가 제가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저와 공감해주었습니다. 이러한 진짜 대화를 나눠도 부끄럽거나 평가받는 기분을 느끼게 하지 않는 IKAA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친어머니를 찾는다면 좋겠지만, 못 찾아도 괜찮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행위가 저를 완성하지 않고, 지금 저 자신만으로 충분하니까요. 그런 사실을 알았습니다.

팟캐스트: 작년에 2차 여행을 갔을 때 약혼자와 관계는 어땠나요? 한국에 처음으로 방문하는데 헤더 씨가 가이드나 문화적 번역가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나요? 

헤더: 그런 감정은 느끼지 않았어요. 약혼자가 처음 한국에 오는 일이었지만 GOAL과 NCRC와의 회의를 방문 중에 잡아야 했는지 이해해 줬고 저를 지지해줬어요. 그리고 약혼자와 같이 이미 방문했던 장소들인 경복궁 등을 방문했죠. 그리고 제가 왔을 때 없었던 체험을 해보기도 했어요. 제가 처음 방문했을 때 경복궁에서는 한복 대여가 안 됐거든요. 하지만 두 번째 방문 때는 됐죠. 그래서 한복을 빌려 입고 경복궁을 거닐었어요. 특별한 경험이었죠. 그리고 AKA 인맥을 사용해서 동대문에 가서 수제 한복을 맞췄어요. 그게 2차 한국 여행에서 저를 위해서 유일하게 샀던 물건이죠. 

팟캐스트: 첫 여행을 언급하셨을 때 다시 집에 빠르게 돌아와서 소중한 사람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고 하셨죠. 그래서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는 점이 아주 특별하셨겠네요. 

헤더: 네. 그리고 그이가 북한산에 있는 절에서 저에게 결혼해달라고 그이의 생일에 프러포즈했습니다.

팟캐스트: 우와…. 날짜가 언제였죠?

헤더: 10월 20일이었습니다. 물론 같이 한국 여행하면서 프러포즈하리라는 사실을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어떤 시점에 할지 몰랐고, 그이의 생일에 할 줄도 몰랐어요. 거기에 제 출생지인 서울에서 해줬으니 아주 특별했죠. 그가 누구인지 그가 어떻게 저를 사랑하고 존중하는지에 대한 증명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약혼자분이 흑인이시죠?

헤더: 네

팟캐스트: 백인 가족이 이해 못 했던 점을 이해해준다고 생각하나요? 

헤더: 인종에 대해서 매일 이야기하죠. 전 흑인이 아니지만 다른 인종 입양아로서 백인 가족과 백인 동네에서 자라면서 인종차별을 경험했어요. 이방인의 경험이 있죠. 그래서 관련된 대화를 깊게 나눌 수 있다는 점을 기쁘게 생각해요. 

팟캐스트: 유전자 조사를 통해서 알아낸 다른 사촌들과 연락을 해보려고 했나요? 특히 5촌이 이름을 준 남성들 말이죠. 헤더 씨의 사촌일 수도 있는 분들이고, 친아버지일 수도 있지요?

헤더: 그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이 제 친아버지인지 확신하고 있지 않아요. 그리고 한국에서 그 사람들과 연락하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5분 중 2분은 죽었고 세분은 지금 한국에서 거주하고 계시는데, GOAL과 NCRC와 같이 조사했을 때는 친어머니를 먼저 찾고 친아버지는 나중에 찾자고 했고, 저도 동의했죠. 

팟캐스트: 그 분야에서는 아직 조사 가능성이 남은 거군요.

헤더: 네. 

팟캐스트: 한국과의 관계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었다고 생각하시나요?

헤더: 어렸을 때는 3학년 때까지는 한국과의 연결성을 느끼지 않았어요. 어떤 국가에 대한 역사를 조사해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어요. 그리고 당연히 한국을 선택했습니다. 조사하면서 한국 전쟁에 대해서도 배웠고, 돌아가신 제 할아버지가 한국 전쟁 참전 군인이라는 점도 알았죠. 그래서 첫 한국 여행 때 부산에 있는 한국 참전군인 묘지를 방문했죠. 미국 깃발과 한국 깃발이 휘날리는 광경을 보면서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 한국 여행에 대한 2번째 NBC 뉴스 수필에 그 사진을 첨부했죠. 그때 저는 확실히 저는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팟캐스트: 입양아들은 소속감과 관련해서 고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에 갔던 일이 한국에 대한 소속감을 강화해줬나요? 아니면 2번째 여행이 미국에 대한 소속감을 강화해줬나요?

헤더: 많은 한국 입양아들이 한국에 가면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몇 년간 한국에서 지내는 결정을 합니다. 그리고 저도 2008년에 버룩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그 절차를 밟을지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무서워져서 그만뒀습니다. 현재 저는 36세입니다. 그리고 저번 한국에서의 경험을 봤을 때, 전 한국에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괜찮죠. 제가 뉴욕에 살다가 한국에 사는 것이나, 한국을 매년 방문하거나, 그런 행위들이 절 더 한국인으로 만들거나 덜 한국인으로 만들지는 않으니까요. 그런 감정은 이 뉴욕시에 존재하는 강한 입양아 사회가 없었다면 느낄 수 없었겠지요. 또 제가 첫 여행을 끝내고 난 뒤에 패션 몰을 자주 들리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미용실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인데, 제가 첫 한국 여행을 끝내고 난 뒤로 거기 단골이 되었죠. 제 한국 유산을 다시 찾아내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전 제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팟캐스트: 퀸스에 살고 있으시다고 하니 아쿠아피나 관련 논란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데요. 그가 대화 방법이 흑인 문화를 도용하고 있다는 주장이라던가, 반대쪽에서는 퀸스에서 아시아인들과 같이 자라면 그렇게 된다는 주장을 하는데, 헤더 씨의 의견은 어떤가요?

헤더: 전 아쿠아피나씨의 팬이에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의 연기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성공에 대해서도 무척이나 기뻤고요. 제 약혼자와 함께 코미디 센트럴에 아쿠아피나의 프로그램이 나올 때마다 꼭 챙겨보죠. 그리고 제 의견으로는 아쿠아피나의 대화 방법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전부 환경의 창조물입니다. 퀸스는 뉴욕시의 일부죠. 그리고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지만, 특정 지역, 특히 도심에서 살고 있다면 문화적 교류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팟캐스트: 현재 직업과 그리고 그 직업에 입양아의 정체성을 적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헤더: 제 교육 과정에 제 입양아 정체성을 확실히 적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공개연설,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과 홍보작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 수업에 학생들과 연결망을 구축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입양아로서 저의 경험에 대해서 매우 취약하죠. 그리고 입양아로서 정체성 혼란을 어렸을 때부터 20대 초반까지 고생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20대 중반에 아시아계 미국인 언론인 협회 등 아시아계 단체에 가입해 아시아계 사회의 일부가 되려고 하려고 했죠. 왜냐하면, 어렸을 때 그런 경험이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약점이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저와 좀 더 쉽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항상 말하기를 날 너무 우러러보지 말라고 합니다. 전 여러 문제를 겪었고 지금도 여러 문제를 겪고 있죠. 완벽한 것은 없고 삶은 롤러코스터와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학생들에게 제 약점을 공유하죠. 그리고 저는 긍정적인 사고와 영감의 영향력에 대해서 높게 평가합니다. 그래서 학생들과 고취되는 음악을 공유하기도 하죠. 학생들에게 알리시아 키즈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오브 마인드를 틀기도 했습니다. 전 알리시아 키즈나 쏜 힐같은 가수를 좋아해요. 중학교 때부터 R&B나 힙합과 같은 장르와 많이 공감해왔죠. 음악이 저를 항상 지탱해 왔거든요. 그리고 제가 하려는 일을 의료상의 관점이 아니라 치료의 관점에서 다가가려고 해요. 

팟캐스트: 10살짜리 자기 자신에게 지금의 자기 자신이 말할 수 있다면, 뭘 이야기해주고 싶으신가요?

헤더: 10살 때 어머니를 잃었어요. 10살짜리 저에게 사랑받을 수 있고, 특별하고,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멋있다고 긍정적인 확인을 해주고 싶어요. 자신감과 사랑, 보살피는 마음으로 채워주고 싶습니다. 제가 10살 때는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어요. 항상 어렸을 때 정신 관리의 일부로 글쓰기를 했죠. 어렸을 때 일기가 있었어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일기에 작성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일기가 사라졌어요. 누가 제 일기를 가져갔는지 지금은 예측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뒤로는 제 일기를 작성하기를 꺼리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는 감정을 관리하기가 힘들었어요. 

팟캐스트: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 글을 쓰실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쓰실 수 있게 도울 수 있으시죠.

헤더: 카오미씨, 2010년부터 10년간 전 회고록을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 호밀 밭의 파수꾼을 읽고 나서 회고록을 써야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호밀 밭의 파수꾼을 가르쳐준 선생님에게 그 이야기를 했지요. 전 그때 16살이었지만 선생님이 시간을 들여서 써보렴. 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 기억이 나요. 그래서 2010년까지 작성을 시작하지 않았죠. 2010년에 버룩 대학교에서 교수님을 만났고 그분이 수업에서 회고록을 가르치고 있었죠. 그래서 그분 수업을 듣고 제 회고록을 작성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제 이야기를 작성하면서 회고록을 다양한 관점으로 쓰고 싶다고 생각했죠. 

헤더: 그 관점 중 하나가 어머니의 관점이었습니다. 9남매의 일원이었고, 청소년기에 입양 기관에 맡겨졌었죠. 몹시 어려운 삶을 겪었고 어머니의 형제, 자매, 사촌과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모든 것에 대해서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중간에 태어난 아이로서 7살때 동생들을 돌봐야 했고 그것도 큰 문제였다고 하더군요. 거기에 제 외할머니는 개 사육사이기도 해서 아이들만큼이나 개들도 항상 있었다고 해요. 9명이나 있는 애들이 충분히 잘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침대를 교대로 사용해야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게 가능한 이유는 제가 어머니의 일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저에게 6년 전에 주신 것인데 지금까지도 전부 읽지 못했어요. 어머니의 일기를 직접 읽는 일은 아주 감정적인 일이죠. 일기 시작 부분에서 어머니의 필체는 아름답고 깔끔하지만, 나중으로 갈수록 더욱더 악필이 되어가요. 경화증으로 인해서 글쓰기가 어려워졌으니까요. 그래서 일기를 읽는 것 자체가 어려워요. 일기를 전부 읽어버리면 어머니의 일부를 잃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일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비논리적이라는 일도 알지만 지난 6년간 제가 가지고 있던 공포입니다.

팟캐스트: 어머니께서는 자신의 병이 불치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을 테니, 헤더 씨가 그 글을 읽을 그거로 생각하고 일기를 작성하셨던 건가요?

헤더: 어머니께서 제 글을 읽기 원하셨어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저를 조건 없이 사랑했다는 점, 입양 과정과 단계, 드라이브 인 영화의 경험, 제가 땡깡 부리는 일이라든가 그런 일들이 담겨 있죠. 만약에 제가 제 약혼자와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똑같이 해주고 싶어요. 일기를 작성해서 나중에 읽어서 아이일 때의 경험을 어땠는지 알 수 있게 하는 거죠. 

팟캐스트: 사람들이 SNS로 헤더씨를 구독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헤더: 제 SNS 계정은 트위터, 인스타그램은 Heather J Schultz입니다. 제 개인 이메일은 Heather.J.Schultz@gmail.com입니다.

팟캐스트: 그리고 헤더씨가 쓰신 기사는 구글을 통해서 찾을 수 있나요?

헤더: 네 그렇습니다. Heather Schultz로 검색하면 제가 2014년에 쓴 두 수필을 찾으실 수 있어요.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헤더씨

헤더: 감사합니다. 카오미씨.

시즌 4, 에피소드 7: 토마스 융커

Audio available at 5 pm EST on Monday, Nov. 23, 2020.

21세인 토마스 융커는 한국에서 덴마크로 유아일 때 입양되어 자랐고 항상 출생지인 한국에 관심을 가진 채로 자라났다. 2019년에 그는 휴학하고 한국으로 이주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한국에서 그는 한국 뿌리를 찾고, 새로운 친구를 만들고 삶에 관해서 탐구하며 입양이 어떻게 그의 삶을 바꾸었는지 생각했다. 이 인터뷰는 2020년 초반에 그가 9개월간의 한국 생활을 마치고 막 덴마크로 돌아온 뒤에 진행되었다. 

토마스: 제 이름은 토마스 융커라고 합니다. 덴마크의 작은 마을 하닝 출신이죠. 50,000명의 거주자가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덴마크어 자기소개) 

팟캐스트: 최근 한국에 가서 거주하셨죠?

토마스: 네 그렇습니다. 9달 거주했죠. 덴마크에 돌아온 지 10일이 되었습니다. 한 1년 전에 할 일을 찾고 있었습니다. 휴학했거든요. 덴마크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 중간에 잠시 휴학을 하는 일은 아주 평범합니다. 그래서 휴학을 했죠. 성장하면서 항상 한국에 일정 기간 동안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가기 좋은 시간대라고 생각해서 한국으로 이주하려고 했습니다.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했고, 아파트도 구했죠. 그리고 한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이주하기 이전에 일자리와 아파트를 찾아서 입사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바로 이주를 해서 빠르고 손쉬웠습니다. 

토마스: 2002년에 제 부모님과 함께 여동생을 데리러 한국에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고작 3살이라서 별로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리고 2019년 여름에 한국에 부모님과 함께 휴가를 왔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생활이 한국에서의 최초 장기 거주였던 셈이네요. 

팟캐스트: 처음 도착하셨을 때 아주 기쁘셨겠네요.

토마스: 네. 한국은 저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죠. 전 한국 혈통이고 한국 유산을 물려받았으니까요. 제가 혼자 왔고, 아는 사람도 없고, 나라도 잘 모르는 상황에의 생활은 중요한 경험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생활하는 것에 힘들기도 했지만 대단한 경험이었지요.

팟캐스트: 많은 입양아가 언급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는 경험도 해보셨나요?

토마스: 네 확실히 느꼈습니다. 제가 사는 덴마크 지역은 인종 구성이 다양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한국에 왔을 때 제가 살고 있던 지역과는 달리 한국은 좀 더 인종적으로 저와 비슷했고 그래서 잘 섞여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팟캐스트: 어떤 일을 하셨다고 했죠? 교육 분야에서 일하셨다고 들었는데요.

토마스: 네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처음에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2달 뒤에는 학원에서 나와서 7달 동안은 개인 과외를 했어요. 

팟캐스트: 한국에서 놀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토마스: 한국에서 가장 놀란 점은, 한국에 휴가를 가면 한국 사람들과 가까이 생활하지 않죠. 그냥 여행하면서 구경하니까요. 하지만 한국에서 직접 살다 보니 한국 사람들과 교류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은 경쟁적인 국가입니다. 사회적인 구조, 교류, 직업, 모든 일이 덴마크와 비교했을 때 훨씬 치열합니다. 그래서 제 나잇대의 한국 친구들은 더 많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더라고요. 그게 저를 가장 놀라게 한 점입니다. 제 부모님과 같이 한국에서 휴가를 보낼 때는 느끼지 못했거든요. 제가 가끔 방문할 때는 사람들이 겪는 경험을 느끼지 못했으니 그 경험들을 절 가장 놀라게 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 친구들은 어떻게 사귀셨죠?

토마스: 덴마크에서는 항상 여러 운동을 했기 때문에 한국에 왔을 때도 계속 그 운동을 지속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왔을 때 아마추어 축구팀에 들어갔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 또래의 한국인 친구를 많이 만들 수 있었어요. 그 친구들이 절 받아주어서 운이 좋았죠.

팟캐스트: 거기에서 의사소통은 어떻게 하셨죠? 한국어를 하실 수 있나요?

토마스: 조금은 합니다. 제가 한국에 왔을 때는 안녕하세요. 정도밖에 못 했어요. 하지만 한국에 왔을 때 개인 과외를 받았어요. 한국에서 꽤 오랫동안 지낼 거라는 사실을 알았고 한국 문화에 적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9달 동안 제 한국어가 많이 발전했어요. 처음에 한국 친구들과 대화할 때는 좀 이상했습니다. 친구들 영어는 괜찮긴 했지만 유창하지는 않았고 제 한국어도 마찬가지였죠. 그래서 제가 영어를 가르쳐주고 친구들은 저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줘서 많이 발전했습니다. 

팟캐스트: 사람들이 토마스 씨를 볼 때 뭔가 다른 특징을 발견했나요?> 아니면 그냥 한국인으로 봤나요?

토마스: 많은 사람이 절 보기만 해서는 평범한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 자라난 한국인이요. 제 외모가 한국식일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제가 말하기 시작하면 외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팟캐스트: 여성분들은 어땠나요? 한국에서 데이트해보신 적은 있나요?

토마스: 네. 한국에서 데이트한 적 있습니다. 한국에서 여자친구를 4달에서 5달 정도 사귄 적이 있고, 다른 여성들과 데이트도 몇 번 해본 적이 있죠. 흥미롭고 재밌는 시간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인종 구성이 다양하지 않은 지역 출신이라고 하셨죠. 덴마크 여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진다고 생각하신 적이 있나요?

토마스: 음…. 덴마크에서 여성 문제가 있었던 적은 없어요. 관련 문제로 실패한 적도 없습니다. 물론 한국에서 한국 여성들과 데이트할 때는 한국 여성들이 저를 외모적으로 다르다고 인식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덴마크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그냥 다른 방식으로 매력적이죠.

팟캐스트: 확실히 매력적인 분이니 확실히 다른 국가에서도 여성과 만나는 데 어려움을 겪지는 않으시겠네요.

토마스: 저 자신을 그렇게 자화자찬하는 성격은 아닌지라 잘 모르겠지만 한국 여성을 만난 경험 자체가 좋았다고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한국 여성과 덴마크 여성과는 차이점이 있나요?

토마스: 여러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제가 덴마크에서 성장했으니 제가 진지하게 누군가와 교제를 한다면 유럽 사고방식, 정확히는 덴마크 사고방식을 가진 상대와 더 잘 맞겠죠. 한국 여성들의 경우는…. 물론 전부 다 그렇지는 않지만, 상당수가 유럽 여성보다는 더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럽보다 자유주의적인 면이 덜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한국 여성 중 상당수가 결혼하기 전까지 부모님과 같이 생활하죠. 결혼 전까지 부모님과 생활하는 경우가 많으니 국 여성 중 상당수의 사고방식이 덴마크 여성보다 덜 성숙한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덴마크 여성들은 더 이른 시점에 독립해서 더 빠르게 성장하기 때문이죠. 

토마스: 다른 예를 들자면…. 워낙 다양한 예가 있어서 하나만 집어내기가 어렵네요. 동성애나, 다양성에 대한 관점도 있습니다. 유럽 사고방식이 좀 더 개방적이고 한국 사고방식은 좀 더 보수적이죠. 적어도 제 경험은 그랬습니다.

토마스: 여자친구와의 경험이 떠오르네요. 한국에서 지낼 때 장기간 교제한 여자친구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전 21살이었고 그분은 30살이었죠. 저보다 9살 연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놀랐던 점은 저와 데이트할 때 부모님에게 전화해서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친구와 있다고 하던가, 일하고 있다든가. 처음에는 농담으로 알았습니다. 30살인데 말이죠. 하지만 농담이 아니었죠.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일 중 하나였습니다.

팟캐스트: 한국 음주 문화는 어땠나요? 덴마크와 비슷했나요?

토마스: 좀 더 거칠다고 봅니다. 항상 자라면서 덴마크 음주 문화가 거칠다고 생각했지만, 한국 문화와 비교할 바는 못되죠. 금요일, 화요일, 수요일, 주중에도 어디든지 술집에 가면 빈 소주병과 취한 사람들을 볼 수 있죠. 처음 봤을 때는 기묘하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가면 적응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놀면서 술 마시는 법을 잘 안다고 볼 수 있네요. 

팟캐스트: 한국 문화에서 가장 마음에 든 점은 무엇이었나요?

토마스: 제가 한국에서 가장 마음에 든 점은 패션 문화였습니다. 한국의 패션 문화를 즐겼고,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자신의 외모에 관심을 가지는 점이 좋았습니다. 모두가 멋지게 보이려고 노력하죠. 물론 나쁜 면모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너무 과도하기도 하고, 사회적인 압박도 있습니다. 모두가 외모에 신경 쓴다는 점은 대단하지만 동시에 스트레스받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주 문화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노래방 문화도 좋았고 한국 문화에 대해서 마음에 든 것이 많았습니다.

팟캐스트: 미국인들은 유럽인들이 항상 패션적으로 앞서 있다고 생각하는데, 한국인들이 덴마크인들보다 더 패션적으로 낫다고 생각하시나요?

토마스: 예. 어떤 면에서는 한국 패션이 덴마크 패션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봅니다. 두 나라의 패션은 최소주의적 경향이 있고 둘 다 제 마음에 들거든요. 그래서 덴마크 패션 자체는 비슷하다고 보지만 차이점은 많은 한국인이 매일 잘 차려입는다는 점입니다. 매일 외양을 바꾸죠. 

팟캐스트: 특히 여성들에게서 항상 보기 좋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죠. 그리고 알고 계실지 모르지만, 여성들이 메이크업을 버리고 꾸미지 않는 운동이 있었어요.

토마스: 네. 봤습니다. 관련 사회적 압박이 너무 강해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봅니다. 이러한 저항 운동이 생기는 이유라고 생각하고요. 여성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도 알고 공감합니다. 

팟캐스트: 한국에 있었을 때 더 덴마크인의 정체성을 느꼈나요?

토마스: 덴마크인의 정체성이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었을 때 어떤 관점에서는 정말 고향에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덴마크에서보다 주변에 저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로 가득한 광경과 제가 한국인이라고 생각해서 한국어로 편하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들도 있었죠.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제 덴마크인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하기도 되었습니다. 제가 한국어로 말하면 한국인이 아니라는 점을 눈치챘고, 제가 영어로 말해도 한국 영어와 다른 악센트를 가지고 있어서 한국인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챘죠. 제 친구들이나 지인들과 이야기할 때도 우리가 어떤 토론을 할 때 똑같은 나이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알았고 더 덴마크와의 관계를 자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체성을 자각하기도 했지만, 아니라고 할 수 있네요.

팟캐스트: 한국에 가셨을 때 친부모 탐사를 진행하셨나요? 아니면 자료만 받으셨나요?

토마스: 한국에 돌아가기 이전에 친어머니와 연락이 되었습니다. 제 친어머니와 저는 홀트 기관을 통해서 연락되어서 서로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죠. 매달 서로의 상황과 정보를 교환했습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어머니께서는 절 만날 수 없어요. 절 입양 보내고 난 뒤에 새로운 남성분과 만나서 결혼하셨죠. 두 아이를 낳았고 지금까지도 행복하게 지내고 계셔요. 즉 저와 직접 교류를 하실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해요. 너무 위험하기도 하고, 남편이 알아낸다면 어머니와 이혼하실 수도 있겠죠. 그래서 어머니의 삶을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아요. 이미 저와 이메일을 하는 것 자체로도 충분히 위험을 감당하고 계시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존중하기 때문에 좀 더 일을 진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팟캐스트: 처음에는 실망하셨겠군요?

토마스: 처음에는 당연히 실망했죠. 물론 무시당했다든가 그런 느낌은 아니었지만 실망했고 시간을 두고 생각을 해보니 어머니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오히려 용감하고 선량한 사람이었죠.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고 가족들에게 버림받을 수 있는데도 저에게 반응해 주셨으니까요. 그리고 계속 비밀리에 연락했고요. 저와 이메일을 해준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했죠.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감정적인 판단이었고, 그 뒤에는 감사했습니다.

팟캐스트: 친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나요? 그리고 그 일을 말씀드릴 수 있었나요? 

토마스: 네. 어머니에게 말씀드리고 싶었던 일을 말할 수 있었어요. 대화보다 이메일이 좋은 점은 말하고 싶은 모든 일을 말하고 바꾸고 조정할 수 있다는 점이죠. 

팟캐스트: 영어로 작성하셨나요?

토마스: 네 영어로 작성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영어를 못하시지만, 홀트 기관에서 한국어로 번역해 어머니에게 전달해주었죠. 홀트 기관에서 어머니와 저의 연결 고리가 되어주었습니다. 물론 직접 교류는 금지였습니다. 그래도 제가 원하는 말을 할 수 있었고, 제가 원하는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친어머니를 직접 모르지만, 전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고, 어머니가 절 입양시킨 것에 대해서 어떤 원망도 품고 있지 않고, 제가 덴마크에서 받은 삶을 소중히 여기고 있고, 어머니가 잘 지내면 좋겠다고 말했죠. 제가 말하고 싶었던 말을 전부 할 수 있었습니다. 

토마스: 제가 9달에서 10 달 정도 한국에서 살아보니 어머니가 느끼셨을 압박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되더군요. 친구와의 대화, 그들의 관점, 감정, 부모,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을 들어보니 확실히 어머니에게 있어서 어려운 상황이더군요. 그리고 1년간 한국에서 생활해보니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토마스 씨는 젊으시니, 나중에 가면 어머니와 직접 만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토마스: 네. 그게 제 희망 사항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강제로 만나지는 않을 겁니다.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강제적으로 친어머니를 만난다고 해도 행복하지 않을 겁니다. 어머니께서 준비가 안 된 채로 만나면 저만 만족할 테고, 그럼 저도 기쁘지 않겠죠. 의미가 없어지는 일입니다. 둘 다 원할 때 만나야죠. 한국은 계속 바뀌고 있고 더욱더 현대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태어난 뒤 21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죠. 그러니 앞으로 21년 동안 더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어머니와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입양아들에게 있어서 친부모의 정보가 인권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시나요?

토마스: 음…. 인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부모를 반드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불가능한 경우도 많습니다. 제가 친어머니와 연락이 된 뒤, 한국에서 살면서 이해한 사실이죠. 어떤 경우에는 부모의 정보를 찾을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그래서 인권이면 좋겠지만 않은 이유도 이해합니다. 이 문제에서도 양면성이 존재하네요.

-광고-

팟캐스트: 다른 입양아들처럼 한국에 있었을 때, 입양되지 않았으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해 상상해 보신 적이 있나요? 

토마스: 네 물론이죠. 한국의 거리를 걸으면서 마천루들을 볼 때마다 제 삶이 어땠을까, 제 성격이 어땠을까 가정해본 적이 있습니다. 확실히 달랐겠죠. 그래서 입양되지 않고 평범한 한국인 가정에서 자라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 적도 있습니다. 

팟캐스트: 2019년에는 양부모님도 같이 왔었지요?

토마스: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그분들도 한국에 관심이 있고 토마스 씨를 지원해주시고 있나요? 

토마스: 네. 두 분 다 한국에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어머니께서 항상 K-드라마를 자주 보거든요. 그래서 두 분 다 저를 지원하셨고, 제가 덴마크의 삶에 감사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부모님들은 제가 듣고 말할 수 있을 때부터 저의 유산이나, 제가 왜 부모님과 다르게 생겼는지, 어디 출신인지 언제든지 물어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제 부모님에게 졸업 선물로 3명이 같이 한국에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죠. 부모님들은 당연히 동의하셨습니다. 부모님도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제 고향 문화도 알고 싶어 하셨습니다. 제게 부모님이 해준 또 다른 말은 제가 한국인일 수도 있고, 덴마크인일 수도 있고, 두 부모님이 있다고 생각해도 되고, 네 명의 부모님이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며,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는 너희를 지지해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살고 싶다면 지지해줄 거고, 덴마크에서 살아도 지지해준다고 말씀하셨죠. 정말 감사할 뿐입니다. 

팟캐스트: 대단하네요.

토마스: 네. 정말 대단한 부모님이시죠. 

팟캐스트: 한국에 가셨을 때 9달만 지낼 그거로 생각하셨나요? 아니면 어쩌다 보니 기간이 짧아지게 됐나요?

토마스: 9달보다 적게 있을지 많이 있을지 정하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한국에서 살고 싶어서 갔고 매일매일 경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최근에 고향에 돌아온 이유는 한국에 직장이 있었지만, 제가 2021년 8월에 진행해야 하는 석사 학위가 있어서 돈을 모아야 해서 돌아왔습니다. 물론 이론적으로 한국에 살면서 돈을 벌 수도 있겠지만 국제적 대도시에서 사는 남성이 돈을 모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겠죠. 서울에는 흥미로운 일들이 너무 많고 즐기고 싶거든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우선 덴마크에 돌아와서 1년간 돈을 모은 뒤 대학교 진학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어떤 전공인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토마스: 한국학 석사입니다. 1년 동안은 한국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웁니다. 다음 2년은 문화와 역사를 배우고 마지막 해에는 아시아 문화의 차이점등을 배우죠. 아주 흥미로운 방식이에요. 

팟캐스트: 9개월 동안만 한국에서 살다 오셨지만, 문화적 충격을 겪으셨나요? 두 나라가 문화적으로 차이가 심하니까요.

토마스: 확실히 차이가 나죠. 몇 가지 느낀 점이 있습니다. 덴마크 직행 항로가 없어서 서울에서 암스테르담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서울에서 암스테르담행 비행기에는 많은 한국인이 탑승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암스테르담에서 덴마크행 비행기를 타니 덴마크인과 네덜란드인들만 있더군요. 그래서 스튜어디스가 저에게 물을 마시겠냐고 물었고, 전 고개를 끄덕였죠. 하지만 한국에 있는 것이 아니니 덴마크어나 영어로 대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죠. 한국에 있을 때 고개를 끄덕이는 게 쓸모가 많아서 그게 버릇이 된 거죠. 덴마크에서는 바꿔야 할 작은 일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덴마크와 한국 간 문화적 차이가 커서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을 떠났을 때 슬프셨나요?

토마스: 저만의 결정이었다면 아직도 한국에 남아 있었을 겁니다. 한국을 떠날 준비가 안 되어 있었죠.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준비가 안 되어 있었어요. 많은 한국인 친구들이 있었고, 대도시에서 사는 혼자 사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하루하루가 모험 같았죠. 매일 다른 일이 있었고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모든 일을 진심으로 경험했고 제 문화를 직접 경험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고향과도 같은 느낌을 받았고 현재 한국을 떠나는 일은 실망스러운 기분이었습니다. 특히 덴마크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죠.

팟캐스트: 현재 지금 알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생각하시면, 다시 한국에 돌아가 거주하고 싶나요? 

토마스: 단언하기 어렵네요.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될까의 문제입니다. 제가 한국 여성과 결혼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렇게 될지도 모르고요. 한국에서 살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확실히 한국에서 살 수 있어요. 하지만 살지 않을 수도 있죠. 여러 가능성이 공존합니다. 한국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팟캐스트: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단언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경쟁적인 직업 문화 같은 문제 때문인가요?

토마스: 네. 물론 어떤 면에서는 마음에 들지만, 너무 심한 예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을 무척 좋아하긴 하지만 동시에 덴마크도 마음에 들거든요. 편한 모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곳에서 산다는 점이 큰 장점이 되죠. 덴마크에 친구들도 많고, 가족도 있고 덴마크 문화도 좋아합니다. 그래서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워요. 덴마크에서 자랐으니 여기에서 지속해서 살아갈 겁니다. 

팟캐스트: 향수를 느낀 덴마크 문화는 무엇인가요? 놀란 점도 있나요?

토마스: 제가 한국에 있었을 때는 물론 좋은 친구들도 많았고 좋은 대화도 많았지만, 친구들은 영어를 잘 하지 못하고, 저도 한국어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대화가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았죠. 반면에 덴마크어로의 대화는 좀 더 자유로웠습니다. 또 덴마크 유머도 그리웠습니다. 덴마크식의 자유주의적 사고도 그리웠고요. 한국에서는 어떤 농담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어떤 대화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 규정이 되어 있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되어 있어 친구들이 제 대화를 교정해주었죠. 물론 친한 한국 친구들이 있어서 그 문화를 배울 수 있었지만, 덴마크의 사회적 규범이 그립기도 했습니다. 

팟캐스트: 다시 아기가 된 기분이셨겠네요. 

토마스: 네 확실히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여자친구들이 저를 항상 가르쳐주었습니다. 무엇을 해도 되고, 무엇은 하면 안 되고, 어떤 상황에서 맞고 틀린 일을 가르쳐 주었지요. 다시 유아 단계로 돌아가서 제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다시 배우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전부 다 다시 배운 것은 아니지만 많이 배웠죠.

팟캐스트: 덴마크에 돌아간 지 몇 주정도 지났는데, 한국이 토마스 씨를 바꿨다는 느낌이 드나요?

토마스: 네. 한국에 가기 전에는 100% 덴마크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생활했지만, 한국에서의 생활이 제 관점을 넓혀 주었습니다. 한국 친구들에게 배운 정보를 제가 받아들였고 제 일부가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가르쳐 준 지식에 대해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좀 더 한국인 같은 느낌이 들고 한국인 같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덴마크 유머에 대해서 언급하셨는데, 덴마크 유머가 정확히 무엇인가요?

토마스: 좋은 예가 하나 있는데요. 제 친구와의 이야기입니다. 친구와 같이 인터넷으로 옷을 보던 도중이었습니다. 한국 인스타그램을 기반으로 하는 신생기업 쇼핑몰이었고요. 그래서 한국 신용카드로만 결제할 수 있었고, 그때는 제 친구에게 현금을 준 다음에 절 위해서 결제할 수 있는지 물었죠. 친구는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마음을 바꿔서 주문을 취소하고 돈을 돌려 달라고 했죠. 그래서 친구가 지금 돈이 필요하냐고 물었습니다. 그 말에 저는 아니 돈은 필요 없어- 라고 농담 식으로 말했습니다. 덴마크에서는 그런 농담이 흔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우리가 좋은 친구니까- 라는 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전 친구가 이해한 줄 알았어요. 웃었거든요. 하지만 나중에 제가 돈을 돌려 달라고 이야기하니 친구가 돈을 써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째서 돈을 썼는지 물어봤는데, 친구가 돈을 가져도 된다고 그랬던 것 아니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제가 농담이었다고 하니 친구가 그게 농담이었냐고 되물었습니다. 덴마크에서는 통할 농담이었고, 돈도 돌려받긴 했죠. 그렇게 많은 액수는 아니었고요. 하지만 소통의 문제, 그리고 언어적 차이점에 만들어낸 문제라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덴마크 친구들이라면 돈 가져도 된다고 이야기를 해도 농담이라는 걸 인식할 거라는 말이죠?

토마스: 네. 이미 그 친구에게 비싼 생일 선물도 줬거든요. 그래서 아 그래. 내가 가진 거 다 가지고 가. 생일 선물도 받았으니까. 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어요.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거죠. 문화적 차이점에 대한 소소하게 재밌는 이야기였습니다.

팟캐스트: 제가 한국에서 돌아왔을 때 느꼈던 사실은 대단한 경험을 겪고 난 뒤라 전 바뀌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죠. 토마스 씨도 자신은 바뀌었지만, 남들은 바뀌지 않은 그런 느낌을 받으셨나요? 

토마스: 네. 저도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겪은 일을 말해도 전부 이해하지 못하죠. 거기에 없었으니까요. 운이 좋게도 제 친구들은 제가 겪은 일을 이해해주려고 노력했죠. 그리고 제가 하던 일을 알려고 했고요. 하지만 전부 이해하지 못하고, 제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없죠. 제가 한국이 아닌 나라에서 1년간 살았다고 해도 한국에서 살았던 1년과는 달랐을 겁니다. 한국은 저에게 특별한 나라니까요. 그래서 친구들은 제 경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요. 물론 친구들이 최대한 노력하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외롭죠. 

팟캐스트: 여동생도 한국 입양아 출신이라고 하셨죠?

토마스: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하지만 토마스 씨보다 어리신 거죠?

토마스: 네. 18살입니다. 저보다 3살 어린이죠.

팟캐스트: 여동생분은 토마스 씨와 관점이 다르다고 생각하나요?

토마스: 네. 확실히 다릅니다. 개인마다 관점이 다르죠. 저는 항상 제 고향에 대해서 흥미를 느꼈지만 제 여동생 같은 경우에는 한국에 관심이 없었죠. 무관심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여동생의 경우 자기 자신을 순수한 덴마크인으로 봅니다. 그래서 부모님께서 저와 제 여동생을 다르게 대하셨지만, 저와 제 여동생에게 저희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토마스: 덴마크에는 백인 친구들밖에 없어요. 제가 백인 친구들만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제 출신 지역은 인종적으로 다양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불만을 가진 적은 없어요. 친구들과 걷고 있으면 제가 덴마크 출신이라고 모두 인식하죠. 하지만 한번 한국 출신 여성과 같이 덴마크에서 데이트했습니다. 놀이공원에 갔는데 모든 직원이 영어로 대답하더군요. 아시아계 관광객이 많으니까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제가 완벽하게 덴마크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제가 덴마크어로 답하면, 사람들이 그걸 듣고 제가 덴마크인이라는 사실을 아니,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왜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인식하는지 이해도 합니다. 많은 관광객이 오고 가니까요. 인종차별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차이점을 느끼기는 하지만 분노할 일은 아니죠.

팟캐스트: 한국에서 1년 정도 살아보려고 하거나 관심이 있는 입양아들에게 줄 수 있는 조언이 있나요?

토마스: 제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은 최대한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즐겨라! 입니다. 고향에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기쁘게 생각하고 한국 문화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한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매일 한국을 느끼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토마스: 네. 모국에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기회입니다. 최대한 즐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토마스 씨. 토마스 씨에게 연락하거나 SNS상으로 구독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토마스: 인스타그램이 있습니다. Thomas Juncker 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져 있어요.있어요.

시즌 4, 에피소드 6: 벤자민 화이트

Audio available at 7 am EST on November 9, 2020.

출생지인 한국에 파병된 미 육군 중위 벤자민 화이트는 26세이며 한국계 입양아다. 그는 게이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체성을 가진 그가 군인이자, 한국계로서 사회가 그가 가진 모든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국가에서 다른 한국인과의 관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벤자민: 제 이름은 벤자민 화이트입니다. 대한민국 전주에서 강기석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뒤로 입양되어서 세인트루이스 근교에서 자랐습니다. 

팟캐스트: 지금은 미군 소속으로 서울에 배치되어 계신 거군요?

벤자민: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입대한 지 얼마나 지났죠? 

벤자민: 전 장교 직위로 2016년에 입대했습니다. 대학교 학위를 따는 동안 ROTC를 진행했고, 대학교 졸업 후 미 육군에 육군 소위로 입대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어떤 학문을 전공하셨죠?

벤자민: 정부, 국제 업무와 관련된 전공입니다. 정치학과 외교학 학사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팟캐스트: 외교관이 되긴 위한 진로인가요?

벤자민: 네. 제 꿈은 외교관이 되거나 적어도 국제 정치과 활동과 관련된 정부 부처에서 일하는 겁니다. 국무부에서 일하거나 국방부에서 일하면 좋겠습니다. 제 꿈의 직업입니다. 

팟캐스트: 임관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럼 장교 교육을 받으시면서 한국에 배치되실 생각을 하셨나요? 

벤자민: 군대에 입대하면서 여러 방법으로 장교가 될 수 있습니다. 서양의 경우에는 대부분 병사는 사병과 부사관입니다.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팟캐스트: 다른 두 진로가 있는 셈이로군요? 그렇죠?

벤자민: 네. 다른 두 진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주어진 정보와 시간과 관련해서 장교가 더 좋은 진로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2016년에 임관했을 때 미 육군 화학 병과로 배정되었습니다. 화학 병과란 미군이 상대하게 되는 CBRN… 화학, 생물학, 방사능, 그리고 핵무기 관련 문제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병과입니다. 그리고 제가 비교적으로 신병이었을 때 다음 부대로 배치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부대로 배치될 때 선호 지역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생각했습니다. “한국에 미군 기지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어.” 그래서 선호 지역 세 곳을 전부 한국 기지로 선택했습니다. 입양되고 나서 다시 한국에 돌아와 본 적이 없었으니 했던 선택이었습니다. 나중에 연락이 와서 한국에 배치되고 싶냐는 질문이 왔습니다. 가고 싶다고 했고, 그 선택을 한 시기가 2017년이었습니다. 보통 가족이 없이 혼자 배치되는 군인의 경우 1년의 파병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연장 신청이 가능해, 계속 연장 복무를 했습니다.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아주 즐거웠기 때문입니다. 문화, 음식, 사람들, 고향에 돌아온 기분인, 아주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팟캐스트: 그리고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벤자민: 26세입니다. 

팟캐스트: 한국에 파병된 군인으로서 생활을 즐기셨다고 하셨죠. 한국에 있으면서 양면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벤자민: 네 그런 경우가 확실히 존재합니다. 평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에 있으면서,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과 지내고, 비슷한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지내면 그런 느낌이 듭니다. 확실히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한국에 살면서 느껴지는 평범함이 존재합니다. 저만 아니라 많은 한국계 입양아들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다문화, 다인종 환경에서 다양한 가족들과 자라나게 되기 마련이니까요. 저는 미국 중서부 출신인데, 중서부의 인종 구성은 다양하지 않은 편입니다. 그래서 항상 평범한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눈에 띄게 됩니다. 적어도 제 경험으로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평범하게 지내면서 주변에 섞여 들어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한 이득이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 이름을 쓰신 적도 있나요?

벤자민: 아닙니다. 한국 사람들과 교류할 때만 사용했습니다. 많은 분이 절 한국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제 한국군 친구들이 화이트나 벤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기석이나 강이라고 부르기를 선호했습니다. 아무래도 한국어로 부르기에는 더 쉬우니까요. 그래서 이름을 혼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입양아로,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방법입니다. 

팟캐스트: 성장하시면서 사람들이 화이트 씨가 백인일 그것으로 생각하기도 했군요?

벤자민: 네. 제가 한국에 와서 배치된 부대마다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배치될 때마다 배치 목록이 부대에 전달됩니다. 따라서 어떤 병사가 부대에 배치될지 미리 압니다. 벤자민 화이트라는 이름을 볼 때마다 백인이 오는 줄 알지만, 제가 배치될 때나 회의에 참석해서 “제가 벤 화이트입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놀랍니다. 전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전 여기 일하려고 왔고, 그런 반응은 흔하게 겪었습니다. 

팟캐스트: 청취자분들이 군대 생활에 대해서 잘 모르니, 하루 생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해서 알려주실 수 있나요? 물론 군대 생활이니 보안상 알려주실 수 없는 경우도 많겠지만요. 

벤자민: 군대 생활은 아주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다 정해져 있습니다. 물론 예정되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경우도 빈번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오전 4시 반에 기상합니다. 5시에 육체 단련 이전 운동을 하기 위해서 친구들과 체육관에서 만납니다. 6시 반에는 조회를 위해 모든 군인이 모입니다. 그 뒤로 한 시간 정도 신체 단련을 합니다. 9시 반까지 출근해야 하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좀 더 일찍 출근해서 9시에 출근합니다. 조용할 때 저에게 온 이메일들이나 일거리를 확인합니다. 그 뒤로 17시, 오후 5시까지 일합니다. 그 와중에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육하거나, 교육 감수하거나, 장교로서 여러 회의에 참여합니다. 하루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계획이 진행되는지에 따라서 생활도 달라집니다. 

벤자민: 제 현재 보직은 미 육군 의장대 소속입니다. 한국에서 여러 행사 절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달의 경우에는 한국 전쟁 70주년 추모식과 일주일 전에 일어난 휴전협정문 작성 기념식을 준비하느라 아주 바빴습니다. 물론 두 행사 전부 훌륭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둘 다 찬사를 받았습니다. 

팟캐스트: 부통령 마이크 펜스가 방한했을 때 그곳에 있었나요?

벤자민: 네. 우리 의장대가 유해 송환 식을 진행했습니다. 147명의 한국군 유해가 하와이에서 한국으로 송환되었고 문재인 대통령도 그 절차에 참여하셨습니다. 또한, 유엔군 유해를 하와이로 송환해 관련 조사를 하는 절차에도 우리가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다국적 명령체계에서 일하는 일은 꽤 희귀한 경험입니다. 송환을 시행하는 주체 국가, 그리고 한국 전쟁 때 지원을 했던 참여국들도 참여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동맹국 간의 공통점을 확인하는 일도 흥미로운 절차입니다.

팟캐스트: 군대 생활을 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벤자민: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한국에 배치되는 명령을 받은 뒤에 한국에 도착해, 돌아왔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였습니다. 이곳이 어머니가 살던 곳이고, 제가 태어난 땅이지만, 돌아오기 23년이 걸렸습니다. 그 상황 자체가 제가 살면서 잊지 못할 일입니다. 물론 개인적 입양아 관점의 기억입니다. 군대와 일의 관점으로 보면 훨씬 더 복잡합니다. 관련 기억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친구를 만든 기억, 훈련을 받을 때의 기억도 있습니다. 군대에 있어서 특수한 경험은 여러 사람과 같은 기억을 공유한다는 점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말하듯이 기분 나쁜 일도 수용해야 합니다. 훈련은 어렵고 지루하며 사람을 마모되게 합니다. 그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동료들, 휘하 병사들, 그리고 친구들이 그 상황을 낫게 하거나 더 끔찍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상황은 힘들고 어렵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서로를 도와주고 그 상황에서 가장 좋은 점을 찾았던 상황입니다. 물론 힘들고 나쁘긴 했습니다. 

팟캐스트: 자신의 한계를 시험한다는 느낌이군요?

벤자민: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장교로서 4년간 복무한 뒤 복무연장을 고려하게 되나요? 결정 방법이 어떻게 되죠? 

벤자민: 저와 같이 ROTC 장학금 과정을 거치게 되면 특정 기간을 복무해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됩니다. 미 육군이 제 대학 교육을 위해서 비용을 냈으니 그 대신 일정 기간을 미 육군에서 복무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의무복무 기간 이후에도 군대에 남아 있을 예정입니다. 최소 20년간은 복무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어떻게 진행될지 보면서 결정되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만난 상급자들, 동료들과 사람들은 전부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주 특수한 경험입니다. 다양한 배경, 환경,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만나게 되고 일을 하게 됩니다. 제가 군대에 입대하지 않았다면 미국을 대표하는 다양성을 접할 기회는 없었을 겁니다.

팟캐스트: 23년 만에 다시 한국에 도착했을 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오셨죠? 미국을 대표한다는 생각을 하시고 오셨나요?

벤자민: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만약에 한국에 오게 된다면 군대 관련 방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입대는 항상 선택지에 존재했습니다. 전 군인 사회에서 자랐습니다. 스콧 공군 기지 근처에서 자라면서 군인들이 항상 주변에 있었습니다. 군인들의 경험을 들으면서 자랐고, 한국 파병 경험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입대가 한국 파병과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 자체는 대학 때, 죄송합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현실화되지 않았습니다. 대학 지원을 하면서 군 생활을 제 진로 중 하나로 염두에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군 생활을 진로로 정했을 때 기회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어디에 배치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고, 그 기회를 잡았습니다. 물론 확정적인 배치는 아닙니다. 만약에 미 정부에서 당신이 더 필요한 곳이 있다고 정하면 그쪽으로 배치가 되게 됩니다. 제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 육군에서 한국에 파병 여부를 물었고 제가 그 기회를 잡아, 3년 뒤에 이곳에 있습니다. 

팟캐스트: 벤자민씨가 한국계 입양아라서 한국 배치에 이득을 본 그거로 생각하시나요?

벤자민: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건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미군에 이렇게 아시아계, 그리고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복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특정 배치 방법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군대에서는 여러 정보를 제공하고 누가 어디로 가고 싶어서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과 친족들 때문에 많은 한국계 미국인 군인들과 아시아계 군인들이 한국으로 오고 싶어서 합니다. 한국계 미국인 군인 중 상당수가 한국에 친척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군에서도 한국계이니 한국에 파병되어도 된다는 판단을 하고 저를 이곳에 배치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군인들은 한국에 파병되면 고생하게 됩니다. 한국은 독일이나 이탈리아에 있는 기지들보다 훨씬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예 다른 문화이고, 언어를 표기하는 데 있어서 다른 알파벳을 사용하고, 많은 사람이 영어를 하지 못하고 음식도 다릅니다. 따라서 18살의 젊은 군인이 한국에 파병되면 당연히 고생하게 됩니다. 한국에 파병되는 많은 군인이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경우에는 한국의 좋은 점을 찾고 한국이 제공할 좋은 기회를 찾아야 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을 좋은 파병지로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주한미군 지도층이 한국을 좋은 파병지로 보이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평택 기지를 신축했다고 들었는데요.

벤자민: 아 네. 평택 기지 자체는 한국에 오랫동안 존재했습니다. 이 기지 자체를 지은 시기 자체는 기억할 수 없지만 최근 아주 크게 확장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서울 용산 기지의 철수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최소 3, 5000명이 넘는 인원이 평택과 캠프 험프리즈에 주둔하게 된다고 예측합니다. 중요 명령체계 상당수가 평택으로 이전했고 대부분 사람이 험프리즈를 통해 배치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아파트 건물도 신축하고 있고, 인프라도 신축 중입니다. 작은 미국 마을과 같습니다. 

팟캐스트: 지금 3,5000명이 주둔 중이라는 건가요? 아니면 미래에 그렇게 된다는 건가요?

벤자민: 미래에 3,5000명이 된다는 뜻입니다. 현재는 2,2000명 정도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친부모나 친족 조사를 하고 싶으신 적이 있었나요?

벤자민: 네. 사실 지금도 친족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몇 번 시도를 해보긴 했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파병되었을 때 조사를 시작하기 좋은 시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많이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이 아니니 또 다른 조사를 시작해 진행 중입니다. 제가 원했던 것보다 좀 더 어려운 상황이지만 조사 자체가 어렵다는 사실을 예측하였습니다.

팟캐스트: 어떤 문제를 겪고 계시죠?

벤자민: 사실 부모님의 이름과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년월일, 출생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을 찾으려고 하는 일 자체는 어렵습니다. 주민등록번호를 제공하지 않으셨고 이사를 여러 번 하셔서 더 찾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점을 이으면서 어디로 이사 갔는지 찾아내는 일이라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서울 경찰청에서 제 조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경찰에 연락하셔서 조사하셨군요?

벤자민: 네. 

팟캐스트: 군인이라서 그런 방법을 사용하실 수 있었나요? 물론 입증하시라는 말은 아닙니다.

벤자민: 네. 그렇습니다. 적어도 이 경우에는 그렇다고 봅니다. 제가 친분을 나누게 된 한국군 원사님께서 저에게 서울 경찰청에서 근무하시고 있는 동기분을 소개하셨습니다. 원사님이 헌병 출신이십니다. 제 이야기를 동기분에게 설명하셨고, 상관분에게도 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원사님과 같이 경찰청에 방문해서 인터뷰와 상담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경찰청에서 절 도와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뒤로 좋은 연락망을 구축해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있습니다. 제가 군인이라서 운이 좋았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의 많은 일은 인맥에 기반을 뒀고, 사람 관계와 인맥에 따라서 여러 가능성이 열리죠.

벤자민: 동의합니다. 직급과 인맥이 한국에서는 아주 중요합니다. 미군 소속이라는 점이 이런 면에서는 작은 이득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국에서 관계 형성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홍대나 다른 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한국에서 성장했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신적 있나요?

벤자민: 네. 그렇습니다. 과거를 생각하면서, 여기로 이주를 했다면, 여기에서 자라났다면 어땠을까, 어떤 직업을 가졌을까, 무엇을 하고 있겠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물론 제가 이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판단을 하고 있어서, 그들의 입장이 되었다면 또 다른 관점을 가졌을 겁니다.

팟캐스트: 여자애들이 오빠라고 부르고 그런 일 말이죠? 

벤자민: 네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사람들과 인연을 만드는 방식은 미국에서는 없던 방식입니다. 인종적으로 비슷한 사람들이 한국에서 자라나면서 자신들의 삶을 즐기는 광경을 보면 당연히 그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팟캐스트: 사람들이 형이라고 부르면 특별한 감정을 가지게 되나요? 

벤자민: 네. 특별한 애정 표현 방식입니다. 형이라고 불리게 되면 기쁜 느낌입니다.

팟캐스트: 받아들여졌다는 느낌인가요?

벤자민: 네 작은 환영의 표시인 셈입니다. 특히 한국 문화와 같이 자라나지 않은 배경의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다른 한국 군인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자주 교류를 하시는 편인가요?

벤자민: 자주 교류를 나누는 편입니다. 제 전 보직에서는 많은 한국 군인들과 훈련을 진행했고 한국군과의 합동 훈련 관련 연락을 진행하는 일을 맡기도 했습니다. 제가 한국계이기도 하고,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싶어서 하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관점으로 보면 한국계 입양아로서 한국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일도 하겠지만 동시에 세계 최고의 군대인 미군을 위해서 일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 욕구가 제 동기이고, 한국군 부대들과 관계를 맺고 훈련을 계획하고 진행합니다. 제 휘하 군인들이 가장 훌륭하게 해낸, 그리고 즐긴 훈련 중 상당수가 한국군과의 합동 훈련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개인적으로 기쁘고 무언가 해낸 것 같은 감정이 듭니다. 특히 제 휘하 병사들이 훈련에서 무언가 더 많이 얻어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문화적 교류와 같은 느낌이 듭니다. 특히 훈련 중에 한국군과 자주 진행하는 행사 중 하나는 MRE 교환입니다.

벤자민: MRE는 즉각 취식형 식품입니다. 미군 MRE를 한국군의 MRE를 교환해 먹습니다. 한국군과 미군의 전투식량을 먹어보는 셈인데, 저, 제 휘하 군인들, 같이 훈련하는 한국군에 있어서 흥미로운 경험입니다. 다른 훈련, 다른 문화, 다른 방식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일하게 됩니다. 

팟캐스트: MRE에 관해서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벤자민: 네. 군대에서 만들어 놓은 전투식량으로, 훈련 시 아침, 점심, 저녁으로 먹을 수 있는 식량입니다. 이미 포장되어 나오고 전식과 후식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24개의 메뉴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팟캐스트: 예를 몇 개 들어주실 수 있나요?

벤자민: 소고기 라비올리가 있습니다. 이미 포장되어 나오고 3년간의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차갑게 먹거나 뜨겁게 먹기도 합니다. 시간이 없다면 차갑게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그냥 먹을 수 있고,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게 좋지도 않지만, 훈련 중에는 필요한 물건입니다. 음식과 에너지가 필요하니까요. 또 다양한 과자와 간식도 있습니다. 사과 소스도 있고 쿠키나 스키틀즈도 동봉되어 있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한국 MRE가 더 낫나요? 아니면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인가요?

벤자민: 한국 MRE도 맛있긴 했지만, 문제는 메뉴가 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볶음밥 종류와 김치, 소시지, 밥, 김, 다른 부분도 있지만 소시지 대신 콩 밖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시지가 있는 MRE가 가장 맛있었습니다. 

벤자민: 그리고 한국군에서 사용하는 가열 방법이 더 낫다고 봅니다. 미군의 경우에는 물을 넣어 가열하는 방식인데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한국군 전투식량의 경우에는 잡아당기면 데워집니다. 5분에서 10분 뒤에는 가열되어서 먹을 수가 있습니다. 따뜻한 음식을 빠르게 먹을 수 있으니 한국 전투식량이 그 부분에서는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 군인들이 미국 전투식량과 교환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경우가 많나요? 아니면 교환해달라고 부탁해야 하나요?

벤자민: 일종의 화폐와 같이 기능합니다. 미국식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군인들도 다른 전투식량을 먹어보고 싶어서 합니다. 따라서 쌍방 간의 교환이 이루어질 이유가 있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한국 군인들은 MRE에 관심이 별로 없나요?

벤자민: 아뇨. 항상 관심이 있습니다. 서로 교환하면서 즐거움을 찾게 됩니다.

팟캐스트: 한국 군인들과 훈련하시면서 입양되지 않으셨다면 한국군에 입대하셨을 거라는 생각은 해보셨나요? 적어도 2년간 의무 복무를 해야 하니까요.

벤자민: 그렇게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제 직무 수행에 워낙 관심을 쏟다 보니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생각해 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한국군이나, 경찰이나, 사회 복무를 진행하게 되었을 겁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이 맞는다면 최근 18개월로 복무기간을 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네. 18개월에서 2년 정도 의무 복무를 해야 했을 겁니다. DMZ를 순찰하면서 파주 지역에서 근무하는 전방 군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 일어날 수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저에게 일어난 일은 잘 압니다. 현재 저는 미군 장교가 되어서 한국에서 복무하고 있습니다.

-광고-

팟캐스트: 한국에서 장기간 살기로 한 입양아들 대부분이 입양, 한국의 입양에 대한 정책,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 복잡한 감정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셨는지, 그리고 한미동맹의 일부인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벤자민: 제 한국에서의 경험은 아주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한국에 있게 된 사실이 아주 기쁩니다. 현재로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미국에 귀국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문제가 있는 경우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제가 한국에서 가졌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는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과 같은 외모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한국인으로 인식하고 한국어로 말을 걸어오고, 말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레스토랑이나 다른 곳에 가면 항상 저에게 한국어로 말을 걸어옵니다. 물론 전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한국어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어를 매우 잘 한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반응이 바뀝니다. 사람들이 농담이지만, 한국어를 더 잘하면 돌아와라, 한국어를 더 잘해야 한다고 반응합니다. 농담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제가 혼나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이건 제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전 한국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습니다.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무지가 절 신경 쓰게 만드는 일들입니다. 

벤자민: 다른 문제는 사람들이 원할 때만 제가 한국인이 된다는 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국인이 아니어야 할 때는 전 그냥 미국인입니다. 그게 또 다른 문제입니다. 전 한국인입니다. 한국 혈통의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그러니 제가 한국어를 못한다고 한국인이 아니라고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이유로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일은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러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 회의입니다. 제가 회의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절 벤 화이트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제가 한국인이나 한국계 미국인이냐고 묻습니다. 제가 그렇다고 답하면 사람들이 저에게 친절하게 대응해줍니다. 동시에 자신들의 이득을 얻을 수 없는 회의면 어차피 외국인이지 라는 반응을 합니다. 결국, 자기들의 이득을 위한 행동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팟캐스트: 한국에서 장기간 지내는 한국계 입양아들은 정치적 문제나, 문화적 문제, 그리고 자신의 혈통을 다시 찾기 위해서 한국으로 이주하는 것 같아요.

벤자민: 네 그렇습니다. 저도 문화적 문제로 제 혈통과 제 근원을 찾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적어도 4살이나 5살 때부터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 부모님들은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저와 공유하고 가르쳐 주실 상냥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탐구하게 도왔습니다. 또한, 지역에 있던 한국 교회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매주 토요일에 예배를 드릴 때 한국어 교육도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작은 한국 사회와의 연결을 가지고 성장했습니다. 한국 문화 행사와 유산 행사를 진행하고 음식도 소개해주고, 문화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성장하면서 한국에 가고 싶다, 제 친부모를 찾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습니다. 물론 한국으로 여행가기에는 문제가 좀 많았습니다. 시간 문제가 가장 컸습니다. 하지만 돌아오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제 혈통과 유산을 진짜 한국에서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코리아타운에서 얻을 수 없는 경험입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자면 제 혈통과 뿌리를 찾고 싶어서 한국에 항상 오고 싶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에 와서 그걸 실제로 하실 수 있었나요?

벤자민: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제가 만난 많은 분이 제 탐구를 도왔습니다. 제가 만난 한국 군인 분들이 많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만난 한국계 미국인 군인 중 몇몇은 저와 같은 입양아였습니다. 또한,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입양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입양아 군인 사회가 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군대 내부에도 입양아 사회가 있군요.

벤자민: 네 확실히 그러한 사회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도움이 됩니다. 한국군도 한국계 입양아들이 미국에서 자라서 군인이 되었다는 점에 흥미를 느낍니다. 보통 경우에는 한국계 미국인과 더 자주 교류를 하지 한국계 미국 입양아들과는 교류할 기회가 적으니까 더 흥미를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인들이 입양아들에 대해 가진 인식이나 관념이 바뀌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여전히 인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벤자민: 제가 묻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저에게 묻지 않는다면 입양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 정부가 한국계 입양아들이 한국에서 친부모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더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 친부모를 찾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일들은 한국의 개인정보 보호법들이었습니다. 그 법을 우회하려고 하는 일이나, 정보 자체를 찾는 일이 아주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제가 입양 기관이나 관련 조직에 찾아가면 “관련 서류가 없어서 정보를 제공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사람들이 입양아들을 돕고 싶지 않거나, 적어도 관심이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이 바뀌어서 한국이 이러한 법안이 부모님을 찾는 입양아들의 탐색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으면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제가 이 주제에 가진 불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 친부모의 성함이 자주 볼 수 있는 이름인가요?

벤자민: 제 어머니의 성함은 아주 흔한 이름이지만, 제 아버지의 성함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 친어머니에 대해서 더 많은 정보가 있습니다. 문제는 어머니께서 자주 이사를 하시는 편이라 주거지를 찾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팟캐스트: 친어머니를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계시나요?

벤자민: 네. 이미 오랫동안 염두에 두고 준비해온 가능성입니다. 해외 입양아기도하고 긴 시간이 지났으니 더 그렇습니다. 정신적으로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머니의 주거지도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다양한 방법으로 어머니를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얻은 정보는 어머니의 최근 주거지였습니다. 전 그 사실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말하기 끔찍한 일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준비를 해왔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팟캐스트: 입양 자료에 왜 입양 제도에 맡겨졌는지에 대한 정보는 있었나요? 

벤자민: 제 자료에 따르면 두 분 다 미성년자였고 교육을 끝내고 싶어서 하셨기 때문에 저를 입양 제도에 맡기게 됐습니다.

팟캐스트: 그렇군요. 그럼 부모님이 아직 젊으시겠네요?

벤자민: 네 아주 젊을 겁니다.

팟캐스트: 한국으로 이주하려는 입양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있나요?

벤자민: 전 여기 오길 원했습니다. 한국 문화를 경험하고 싶고, 같은 혈통의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면 한국에 와야 합니다. 이 경험 자체가 아주 가치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만 살거나 코리아타운만 방문하는 것만으로는 문화 경험에 한계가 있어, 뿌리를 찾는 데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돌아올 생각이 약간만 있다고 하더라도 뿌리를 찾기 위해서 한국 방문을 추천합니다. 물론 뿌리 찾기를 원하지 않는 분들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하고 싶다면 오시는 것이 바르다고 봅니다. 아주 좋은 경험이기도 하고 최소 2주간은 지내면서 한국을 만끽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한국 생활이 한국 방문과 다르다는 의견에 동의하시나요?

벤자민: 네. 한국을 여행 목적으로 방문했다면 다른 경험이었을 겁니다. 한국 문화를 전부 경험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말에 부산을 방문하는 등, 중요한 점만 경험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한국에 살게 된다면 한국 제도와 한국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로 이사하고, 친구들과 같이 식사하는 행동이 그렇습니다. 친구들을 만들고, 그들과 연계를 하고 한국의 일상과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 경험이 생활과 관광의 차이점을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어려운 질문이지만 20년 뒤의 자신 모습을 어디에 두고 계시나요? 한국? 아니면?

벤자민: 저의 진로를 위해서 여러 준비를 했습니다.

팟캐스트: 20년 계획을 하셨나요?

벤자민: 네 계획했습니다. 여러 진로 계획이 있습니다. 여전히 미군에서 복무하고 있다면 외국 근무 장교로서 대사관에서 외교관들의 조언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국무부 직원으로서 정부와 일하거나 국방부에서 국제, 동아시아 관련으로 일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원이나 상원의원이 되기 위해서 일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 미래 계획이 있습니다. 

팟캐스트: BLM 깃발이 주한 미국 대사관에도 걸렸고. LGBTQ 깃발도 걸렸다가 내려갔죠. 그 사실과 관련해서 의견이 있나요? 

벤자민: 우선 LBGTQ 깃발이 먼저 걸렸습니다. 과거에도 여러 번, 현재 주한 미국 대사이신 해리 해리스 임기 중에도 걸렸습니다. 보기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반응이 달랐습니다. BLM 깃발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인터뷰를 하면서 한국도 1910-20년 일본 제국 아래에서 압제를 당한 적이 있으니 이해한다고 말을 하셨습니다. 즉 우리 과거로 인해서 그 사실을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해 자체를 선별적으로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즉 사회 정의나 사회 평등의 일부는 과거와 연관이 있으므로 지지하지만, 전체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동의하지 않는 점은 의도적으로 무시합니다. 이러한 논쟁에는 항상 구멍이 있지만 그래도 미국 대사관이 다양성과 포함성을 알리고, 미국의 존재 이유를 보여줬고, 대사관에서 성 정체성과 BLM을 지지해줬다는 점에서 높이 사고 싶습니다. 

팟캐스트: 군대에서 게이이시고, 한국에서 게이이시면서 어떤 것을 배우셨나요? 삶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경우가 많았나요?

벤자민: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제 성정체성을 숨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이야기하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직장 환경에서는 서로 알고 지낼 필요는 없는 정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하러 왔고, 그 일을 끝내는 데 집중하려고 합니다. 제 직업윤리는 제 일이 제 능력과 저 자신에 관해서 설명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직접 저에게 와서 “여자친구가 있나요? 아니면 게이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여자친구는 없지만 게이입니다.”라고 답합니다. 항상 진실을 말하려고 노력하죠. 물론 한국군 관련해서는 좀 더 복잡합니다. 한국군에게 제 성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은 좀 더 어렵습니다. 한국군 내부에서 LGBTQ에 대한 적대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LGBTQ 성정체성을 가진 군인들이 군 당국에 발각되었고 감옥에 갔습니다. 동성애를 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군이었나요?

벤자민: 네. 한국군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군에게 커밍아웃 하는 데에는 불편합니다. 알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동시에 일과 상관이 없는 사실입니다. 물론 한국군 모두가 차별적이나 편견을 가지고 절 바라볼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험을 무릎 쓸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군에서 복무하고 있는 친구들이 저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3년이나 이곳에 지내면 여러 가지 일을 겪게 되고 그중 하나가 친구들이 저에 대한 평가하는 일이었습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친구들은 절 잘 생겼다고 하고, 미국인이기도 하니 인기 좋을 거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받아넘겼고, 친구들이 이해하지만 묻기에는 부끄럽고, 저도 알려주기는 모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친구들 대부분이 알아챈 것 같다고요?

벤자민: 대부분 한국 친구들과 미국 친구들은 다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말하지 않은 친구들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결국, 군대가 보수적인 사회로 보이지만 그리고 실제로 그렇기도 합니다. 하지만 LGBTQ 문제에 대해서 지지해주는 군인들을 많이 만났고 그러한 지원하고 있다는 점이 있습니다. 서로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지만, 서로를 지켜주는 겁니다. 보수주의자이건, 중도주의자든 저를 지원해주고 저도 그들을 믿고요.

팟캐스트: 군대의 태도가 많이 변화한 느낌이네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묻지 않고 말하지 않기(미국 클린턴 행정부 시기 시행되었던 미군 정책. 미군 군인의 성 정체성을 문제 삼지 않는 대신, 밝히지도 않게 했다.) 정책에 대해서 논의했죠? 

벤자민: 네. 최근 미군에서 다양성과 포함을 추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화에 관한 관심도 늘었습니다. 미국은 거대한 인종의 용광로이고 군인들에게 그 다양성을 가르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물론 보수적이나 무지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팟캐스트: 현재의 정책은 어떻지요? 성 정체성 권리와 같은 권리가 지켜지고 있나요?

벤자민: 제가 현재 이해하는 바로는 그렇습니다. 몇 년 전에 법안이 통과된 뒤로 정확한 정보까지는 알아 두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적어도 게이라는 사실을 공유해도 될 정도의 환경은 되었군요?

벤자민: 네 그렇습니다. 성 소수자라고 해도 같은 권리와 이득을 보장받고 있습니다.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팟캐스트: 현재 교제 관계가 있나요?

벤자민: 현재 교제 관계는 없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인들과 교제하신 적이 있나요?

벤자민: 네. 그리고 다른 관계와 다른 바 없습니다. 두 한국인이 같이 게이입니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문화적 차이와 언어의 장벽을 넘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게이든, 레즈비언이든, 이성애자든 교제하면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한국인과 교제하는 다른 친구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문화의 장벽 극복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장벽입니다. 

팟캐스트: 또한 한국 문화적으로 사람들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일이 영향을 끼친다고 보셨나요? 미국인이시니 정체성에 대해서는 좀 더 개방적일 수 있지요?

벤자민: 네. 미국인들이 가진 특권 중 하나입니다. 제가 가족들에게 성정체성을 밝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친구들에게도 밝힌 거야?”라고 묻습니다. 그럼 저는 “그렇지.”라고 답합니다. 그럼 더 놀랍니다.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주 친한 친구들에게만 털어놓거나 누구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한국보다 미국에서의 개방성이 대단한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미국을 부러워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미국인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 미국인 상대를 만나고 싶나요, 아니면 한국인 상대를 만나고 싶나요?

벤자민: 국적은 의미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이해해주고, 제 직업과 제 진로를 이해해줄 수 있는 상대를 원합니다. 군대에 있다 보니 직업 시간이 복잡하고 이상할 때가 많고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 상대에게 원하는 면모는 이해심과 호환성입니다. 물론 한국계 미국인이나 아시아계 미국인이 상대면 좋겠습니다. 비슷한 문화와 배경을 가지고 있으니 서로 이해하기 쉽고, 한국 요리도 해줄 수도 있을 겁니다. (웃음)

팟캐스트: 한국인은 생각해 보셨나요?

벤자민: 절 이해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아 그리고 군인이라 문제가 있는 점도 있습니다. 많은 군인이 한국에서 1년 동안 파병 나와 있다가 돌아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군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주저하게 됩니다. 사람을 알아 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불안정성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팟캐스트: 미군 장교이고 공식적으로 게이라는 점도 신기하겠군요?

벤자민: 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못 믿습니다. 괴롭힘을 당하거나 문제가 있는지 묻습니다. 하지만 그걸 막는 규칙들이 존재하니 괜찮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지휘 계통도 믿고, 좋은 친구들도 많고, 동료들도 있습니다.

팟캐스트: 벤자민씨에게 연락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인스타그램이나 다른 것이 있나요?

벤자민: 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이메일 계정이 있으니 연락해주시면 됩니다. 꿈을 포기하지 마시고 계속 노력하십시오. 문제는 극복할 수 있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문제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팟캐스트: 차가운 라비올리를 먹고 나면 또 다른 날이 오죠.

벤자민: 네 그렇습니다. 다음 날은 또 다른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