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4, 에피소드 8: 헤더 슐츠

Audio available Dec. 3, 2020 at 7 am EST.

36세인 헤더 슐츠는 탄생 4개월 차에 한국에서 뉴욕주 롱 아일랜드에 사는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헤더는 어렸을 때 어머니를 병으로 잃고 새롭게 집을 공유하게 된 양어머니와 의붓자매에게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어린 시절 내내 애썼다. 슬픔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던 헤더는 친가 할머니에게서 지지와 사랑을 찾아냈다. 자신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운 뒤, 헤더는 자신 마음속의 깊은 슬픔과 문제가 있는 가족 관계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현재 헤더는 교육자이자, 연설자이며, 다른 사람들의 과거의 고통과 트라우마를 해결해주는 치료자이다. 헤더는 NBC 뉴스에 자신의 삶에 관해서 쓴 수필을 투고했으며 Also Known As NYC의 이사 자리를 포함해, 입양아 사회에서 지도적 자리를 맡고 있다.

헤더: 제 이름은 헤더 슐츠입니다. 뉴욕시 퀸스에 있는 서니사이드에서 살고 있습니다. 한국 이름은 허미영입니다. 현재 저는 버룩 대학교에서 공개연설,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과 홍보작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버룩 대학교는 제 모교이기도 합니다. 제 언론학 학사를 버룩 대학교에서 땄고, 또한 제 행정학 석사도 이곳에서 수료했죠. 그리고 이 팟캐스트에서 제 입양 일대기를 공유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팟캐스트: 헤더 씨, 나이가 몇 세시죠?

헤더: 36세입니다. 막 36세가 되었어요. 제 생일은 7월 4일이에요. 물론 제 입양 기록에 따르면 제 생일이 7월 4일이지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기록상으로 그렇게 되어 있으니 지난 36년간 그렇게 살아왔죠. 진짜 생물학적 생일인지 확인하려고 한 적은 없어요.

팟캐스트: 생일을 국가적 휴일(미국의 독립 기념일. 7월 4일이다)과 공유하고 계시네요. 그러한 사실이 헤더 씨가 생일을 더 즐기게 했나요? 아니면 헤더 씨의 삶에 있어서 문제가 되었나요?

헤더: 전 항상 제 생일에 받는 주목을 좋아했어요. 제가 어렸을 때는 독립 기념일을 축하하는 폭죽들이 전부 절 위해서 터트리는 폭죽인 줄 알았죠. 제가 미국과 생일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던 겁니다. 아 폭죽들이 전부 날 위한 거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한국에 처음으로 되돌아갔을 때가 2014년이었습니다. 막 30살이 되었을 때였죠. 혼자 3주간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서울에서 불꽃놀이를 봤어요. 서울에서 불꽃놀이 구경은 정말 비교할 수 없는 경험이죠. 제가 태어난 도시에서 불꽃놀이를 보는 일은 기적적인 경험이었어요. 전 생일에 손실을 경험해본 적은 없습니다. 물론 다른 날들은 손실에 대한 슬픔을 받아들이고 경험하는 날들이기도 하죠. 예를 들면 제가 제 입양 어머니를 잃었던 날이 있습니다. 1995년에 제가 10살일 때 돌아가셨죠. 그때 어머니 연세가 39세였습니다. 전 어머니의 생신인 6월 12일을 축하할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인 1월 28일도 기억하고 추모하죠. 이 두 날이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쳐요. 지난달에 퀸스에 어머니의 묘소를 방문했습니다. 혼자 꽃을 들고 갔었죠. 어머니에게 말도 걸고, 어머니의 애청곡이었던 시스터 슬레지의 위아패밀리도 틀어 드렸습니다. 매년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죠.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과 생일에 가서 하는 일입니다. 제 입양 부모님께서 저를 입양하셨을 때, 저는 4개월밖에 안 됐었고, 부모님의 첫 아이였습니다. 그렇게 제 삶을 외동딸로 시작했죠. 

헤더: 하지만 나중에 부모님께서 이혼하시고 아버지가 이미 이혼 경력이 있는 여성분과 결혼하셨죠. 그분은 첫 번째 결혼에서 2명의 딸을 두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양어머니와 의붓 자매들이 집으로 들어왔죠. 그래서 저에게 관심이 집중되지 않고 아버지, 제 장난감, 그리고 우리 집을 의붓 자매와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웠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와 양어머니가 제 이복동생을 93년에 낳으셨죠. 저보다 9살 연하입니다. 

팟캐스트: 가족에서 유일한 국제 입양아시군요.

헤더: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그 상황은 상상하기도 어렵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10~11살에 그런 변화를 겪으셨는데, 어떻게 받아들이셨나요? 아주 많은 고통과 슬픔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헤더: 지금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의 저는 슬픔, 상실, 그리고 분노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20대가 될 때까지 그 감정들을 직접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단지 질병인 다발성 경화증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죠. 거의 최종 단계에는 제 이모가 절 어머니 병문안에 데리고 갔어요. 그 단계에서 어머니는 말을 하지 못하셨죠. 식사도 영양보급관을 통해서 하셨어요. 그런 상태의 어머니를 보는 일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절 보면 기뻐하셨죠.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제가 있을 때는 병원 빙고를 이기지 못하셨는데, 제가 없을 때는 자주 이기셨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어머니 병원에 방문할 때의 좋은 기억들이 있어요.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항상 아프셨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처음 입양하셨을 때 어머니는 이미 휠체어를 사용하고 계셨죠. 그리고 펜실베이니아 기반 러브더칠드런 입양 기관에 다발성 경화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셨습니다. 건강 상태에 대한 의심을 피하고자 사촌이 쓰고 있던 깁스를 빌려 다리를 부러진 것 같이 연기해 기관을 속이셨죠. 어머니께서 그렇게 해서라도 절 입양하려고 하셨어요. 

팟캐스트: 어머니가 대화가 가능하실 때 어머니와 나눴던 마지막 대화들을 기억하시나요? 

헤더: 어머니와 한 대화 자체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어머니가 제가 사랑받고 특별하게 느껴지게 하신 일은 기억해요. 어머니는 자신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드는데 중점을 두셨어요. 예를 들면 어머니는 저에게 “난 나 자신이 좋아”라는 책을 주셨어요. 어머니가 책을 바꿔서 제 이름이 들어가게 했죠. 그 책이 절 특별하게 해준 기분이었고, 여전히 그 책을 가지고 있어요. 어머니를 생각하다가 슬퍼지면 그 책을 보면서 마음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또 어머니께서는 제가 어른이 되면 읽기를 바라면서 1984년에서 1987년까지 일기를 쓰셨어요. 제가 2014년 첫 한국 방문을 마치고 오자 아버지가 그 일기를 저에게 주셨죠. 그전까지 이러한 일기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이 일기에는 입양 과정이 적혀 있었고, 제 이름이 왜 꽃의 이름을 따서 헤더가 되었는지도 적혀 있었죠. 거기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제 사진을 처음 받고 느낀 감정에 대해서도 적혀 있었고요. 그리고 시민권 부여와 동화 과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그 과정 전부가 저에게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죠. 많은 입양아가 절차를 밟지 않아서 시민권자들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추방당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니까요. 

팟캐스트: 퀸스에서 자라셨나요?

헤더: 제가 자란 곳은 롱 아일랜드의 파밍데일이라는 마을이었습니다. 서퍼 카운티와 나소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이죠. 

팟캐스트: 인종 구성이 다양한 곳이었나요?

헤더: 아뇨. 백인이 절대다수였죠.

팟캐스트: 성장할 때의 경험은 어떠셨나요? 부모님이 인종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셨고 부모님이 인종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아니면 언급하지 않으셨나요?

헤더: 언급하지 않으셨어요. 어머니 측의 가족분들이 이야기하기를 어머니는 절 한국계 학교에 보내고 싶어서 하셨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어머니의 건강 문제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죠. 어머니가 쓰신 일기에는 어머니는 제 출신지를 잊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언급하면서 제 한국 유산을 존중한다고 하셨어요. 제 돌 때도 최대한 전통을 존중하려고 하셨습니다. 한국식 복장을 입히고, 과일도 준비하고 최대한 전통적으로 만들려고 하셨어요. 제 아버지, 양어머니 그리고 의붓 자매들과는 인종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편한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한국인이고 아시아계라는 사실은 알았어요. 제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던 일이었고 확실히 저에게 문제가 되었죠. 제가 어렸을 때는 외향적인 아이라서 밖에서 많이 시간을 보냈어요. 그래서 지금보다 훨씬 까무잡잡했습니다. 그래서 신경이 쓰였죠. 전 한국 바비인형을 하나 가지고 있어서 그거만 가지고 놀았어요.

팟캐스트: 바비인형을 가지고 계셨군요!

헤더: 네! 아름다운 분홍색 머리에 예쁜 한복을 입고 있어서 항상 가지고 놀았어요. 제 의붓 자매들은 백인 바비인형을 가지고 놀았죠. 전 백인 바비인형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 아시아계, 그리고 한국계 혈통에 대해서 자부심을 품고 있었으니까요. 

헤더: 전 실히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사망하신 뒤에 양어머니께서 “네 어머니는 아팠어. 널 입양해서는 안 됐어.”라고 말한 뒤에는 더더욱 그랬죠. 그 발언은 지금까지도 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고, 어린이였던 저에게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 뒤, 왜 양어머니가 절 싫어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했어요. 저 자신의 문제를 마주 보고 생각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양어머니께서 직접 말해준 적은 없지만, 전 아버지의 첫사랑을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였으니까요. 그래서 저를 위험하게 여긴 겁니다. 물론 제 관점이고 양어머니에게 직접 들은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인식해서 양어머니를 용서할 수 있었어요. 양어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 감정적으로 저를 학대했죠. 집에서 지내면서 편하지가 않았어요. 방에 지내면서 책을 읽고 공부에 집중했죠. 전 모범생이었고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클라리넷도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양어머니는 제가 클라리넷 연습을 하지 못하게 하기도 했어요.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아버지는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 알고 계셨나요?

헤더: 어머니의 일기와 사진첩을 보면, 어머니, 저 그리고 아버지만 있었을 때는 아버지가 절 소중히 여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양어머니와 결혼했을 때 모든 게 바뀌었죠. 그리고 아버지와 저의 관계는 멀어졌습니다. 특히 1985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더욱 그랬죠. 그때 머라이어 캐리의 원 스위트 데이라는 노래가 발표되었죠. 항상 그 음악을 들으면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어머니가 항상 절 지켜보고 계시고, 어머니와 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죠. 그저 여기에 물리적으로 계시지 않을 뿐입니다.

-머라이어 캐리의 원 스위트 데이-

헤더: 하지만 아버지와 양어머니와의 고통스러운 관계에 대해서 직접적인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어요. 

팟캐스트: 입양아의 관점으로서 보면, 물론 어려서 인식하기도 어려웠겠지만, 이러한 상실과 입양까지 더하면 상황의 관리 자체가 불가능했겠군요? 

헤더: 제가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노력할 수 있는 만큼 노력했죠. 제 공부를 통해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어요. 제 아버지와 제 양어머니는 제가 공부를 잘하라고 압박을 주지는 않았어요. 그냥 제가 원해서 공부를 했죠. 누구도 숙제를 강제로 시킬 필요가 없었고 시험공부를 시키지 않았어요. 공부와 음악이 그런 고통스러운 시기를 버티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음악을 통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을 견뎠어요. 좋은 친구들의 지지도 도움이 되었죠. 

팟캐스트: 그리고 지금은 아주 다양성이 높은 지역인 사니사이드에서 살기로 선택하셨죠. 의도적으로 그곳을 선택하신 건가요? 

헤더: 제 성장기로 되돌아가면, 아버지, 양어머니, 의붓 자매, 그리고 이복 남동생과 20세까지 같이 살았죠. 그 시기에는 좋지 않은 상대와 연애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절 학대하던 남자친구와 같이 지내기 위해서 우리 집을 떠났죠. 차에서 지내고, 모텔에서 지내고, 친구 집에서 지내거나 그랬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제 할머니, 사실 제가 미국에 처음으로 내렸을 때 절 처음으로 안았던 분이기도 했죠. 그리고 할머니는 어머니가 그 사실을 가지고 자기를 용서 안 해줬다고 지금까지 농담하세요. 왜냐하면, 어머니는 방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할머니가 반대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반대쪽에서 제가 들어왔거든요. 

헤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할머니가 저를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21세 생일이 되기 전이었죠. 할머니께서, 자기 손녀가 차에서 사는 꼴은 못 보겠다고 하셨거든요. 제 상황을 할머니에게 알려준 것이 아버지였습니다. 그렇게 할머니가 제 목숨을 구해주셨어요. 할머니 덕분에 다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호프스트라 대학교에 재적하고 있었는데, 버룩 대학교로 편입할 수 있었어요. 그 뒤로는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죠. 할머니와 같이 지내면서 집에 다시 편안한 곳이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죠. 할머니의 동거인, 저에게는 고모와 같은 분이죠. 2017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제 삶에 있어 강한 여성의 본보기가 되어 주셨어요. 할머니가 또한 자기 친구들에게 저를 소개해 주었고, 그분들도 제 할머니나 다름없는 분들이 되셨습니다. 그분들이 제 삶을 원래의 궤도로 돌려놓는 데 도움을 주셨습니다. 상담도 받았고, 그것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를 보고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죠. 

헤더: 서니사이드의 문제로 다시 돌아와서, 할머니와 2005년에서 2018년까지 같이 살았고 그 뒤로는 제 약혼자와 동거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최근 몇 년간 서니사이드에서 생활했죠. 이 동네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팟캐스트: 할머니와 같이 지낼 때는 어디 사셨죠?

헤더: 롱 아일랜드 곳곳에서 지냈어요. 벨모어, 사이아시드, 리넨헐스와 라플센터에서도 살았죠. 할머니는 방랑벽이 있으셔서 자주 이사를 하셨어요. 저에게 요리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팟캐스트: 그렇게 돋보이지는 않지만 약간 보이는 억양이 있는데 롱 아일랜드 억양인가요?

헤더: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할머니께서 아버지가 헤더 씨를 충분히 지지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생각하셨나요? 적어도 헤더 씨는 그렇게 느끼셨나요? 

헤더: 그때는 확실히 그렇게 느꼈습니다. 제 할머니와 관련 이야기도 깊게 나눴어요. 할머니께서 제가 겪고 있는 문제를 알았습니다. 제가 할머니 집에 방문할 때마다 저를 보셨으니까요. 할머니 집 방문을 항상 좋아했습니다. 직접 빵도 구워 주셨고, 기르고 있던 개들을 위한 견용 쿠키들도 구우셨죠. 어렸을 때 양어머니가 할머니와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했던 것이 기억이 나요.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죠. 제 할머니인데 말이에요. 아주 질투심이 많고 불안정하셨죠.

팟캐스트: 할머니와 헤더 씨의 깊은 관계를 알고 질투했던 거겠지요. 다른 아이들보다 할머니와 더 가까운 관계였나요?

헤더: 네.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제가 언급하는 할머니는 제 친할머니입니다.

팟캐스트: 하지만 의붓 자매들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고 계셨죠? 

헤더: 네

팟캐스트: 그 사실이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르겠네요. 많은 입양아는 어린 시절을 살아남은 뒤 자기 자신을 찾아낸다는 공통점이 있죠. 그러한 일이 헤더 씨가 집에서 나와 할머니와 살게 되면서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헤더: 고등학교 때는 제 몸에 대한 만족을 못 했어요. 그래서 제 몸을 큰 셔츠, 스웨터, 헐렁한 바지 등을 입어서 가렸어요. 제가 그랬던 이유가 양어머니가 제가 중학교 때 탱크톱을 입었다고 잔소리를 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탱크톱이나 노출이 많은 옷을 고등학교 때 입기를 꺼렸죠. 제가 할머니와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 할머니가 제 여성성을 받아들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제 몸에 맞는 옷을 입는 일이었죠. 

팟캐스트: 이야기를 들어보니 양어머니가 당신을 정말 마음에 안 들어서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인종차별적인 면모도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헤더: 당연히 있지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카페테리아에 혼자 앉아 있었어요. 한국인 교환학생이 제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김밥을 저에게 처음으로 먹여주었죠. 김밥을 처음 먹었을 때가 제 첫 한국 음식 경험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김밥을 아주 좋아하죠. 그리고 그 친구는 우리 집 근처에서 지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친구가 집으로 초대하고, 가족들을 소개해 주고 어머니는 저에게 요리도 해주고 싶어서 하셨죠. 그래서 양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놀러 가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양어머니가 가면 안 된다고 막으셨죠. “넌 미국인이야! 한국인이 아니라!”라고 말했어요. 한국 친구 집에 가는 것을 그런 이유로 막았고, 그래서 아주 화났습니다. 그리고 그전에도 여러 인종차별적인 말을 하기도 했어요.

팟캐스트: 언제부터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과 한국 혈통과 다시 연결점을 찾으려고 했나요?

헤더: 버룩 대학교에서 언론학 학사로 2008년에 졸업했습니다. 그때는 대침체가 한창이었죠. 그래서 제가 계획했던 언론계 취직이 증발해 버렸어요. 그래서 그것에 맞춰 계획을 바꿔야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프로그램 하나를 찾았고 응모했습니다. 그런데 찾아보니 이 회사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가 좀 있더라고요.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사기를 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한국을 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제가 버룩 대학교에서 2014년에 석사학위를 따고, 제가 30살이 되었을 때, 절 항상 지원해주신 할머니께서 생일선물 겸 졸업 선물로 여행을 하고 싶냐, 파티하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하고 싶다고 답했죠. 처음으로 생각이 난 나라는 한국이었습니다. 그래서 2014년 10월에 3주간 한국으로 여행을 갔죠. 가족 친구와 같이 지내면서 서울, 부산과 제주도를 방문했습니다. 할머니가 선물로 저에게 표를 주셨죠. 지금까지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행 가기 전에 NBC 뉴스에 왜 한국에 돌아갔는지에 대한 경험 수필 두 개를 투고했습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주에 두 수필이 출판되었죠. 그 뒤로 입양아들이 SNS로 저에게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영화 트윈스터의 주연이던 샘 버터민이 트위터로 연락해 제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고 하기도 했고요. 

헤더: 그리고 전 미국에 돌아오고 나서 입양아 사회와 교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몰두하기 시작하면 정말 한없이 몰두하거든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사회의 일부가 되었죠. AKA의 이사회의 일원으로 2015~2016년에 재직했고, 또 다른 입양아 단체인 올투게더나우 브루클린의 유소년기 입양아 지원 그룹을 운영했습니다. 또 이 모든 것을 하면서 2018년에 문을 닫은 또 다른 입양아 NGO 자선단체인 DAI 홍보담당관이자 관리자로서 일했죠. 이렇게 일하면서 입양아와 관련된 전체적인 관계를 알게 되었고 저 자신, 그리고 친어머니를 용서하기 위한 단계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저 자신의 입양아 감정만을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친어머니의 감정은 생각하지 않았고, 어머니의 감정도 생각해보지 않았고, 입양과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AKA, 올투게더나우, DAI에서 일한 경험을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직에서 동시에 일해서 나중에 DAI가 폐업한다는 소식을 듣고 약간 마음을 놓은 점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곳에서 동시에 일하다 보니 제 모든 일이 전부 입양과 관련되었거든요. 디스 이즈 어스와 같은 입양과 관련된 영화와 대중매체도 잔뜩 소비했습니다. 너무 많아서 압도당하는 기분이었죠. 그래서 DAI에서 해고되고, AKA의 이사직도 퇴임한 뒤 버룩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죠.

팟캐스트: 여러 가지 이야기할 것이 많네요. 우선 한국으로의 여행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제가 한국에 처음으로 착륙할 때가 기억이 나네요. 헤더 씨는 어떻게 느끼셨나요?

헤더: 제가 느낀 최고의 감정 중 하나였습니다. 저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잔뜩 있었으니까요. 오던 중에 비행기 자리 옆에 앉아 계시던 중년 여성분과 친해졌습니다. 우선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탄 뒤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서울행 비행기로 갈아탔죠. 그 비행기에서 중년 미망인과 좋은 대화를 나누면서 친해졌어요. 그분과 부산과 제주도도 같이 여행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그 공항에 도착하니 그분께서 “같은 민족끼리 있구나!”라고 하셨고 저도 “네 그렇네요!”라고 답했죠. 백인 가족과 백인 마을에서 자라난 저에게는 같은 원형 얼굴, 아몬드형 눈, 비슷한 코를 가진 사람들과 같이 있다는 사실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팟캐스트: 항상 이방인이었던 삶이지만, 이곳에 내리고 나서 30초 만에 더 이방인 같이 느껴지지 않는 느낌이죠. 

헤더: 그렇죠.

팟캐스트: 언어의 장벽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셨죠? 

헤더: 가족 친구분과 같이 지냈고 그분이 제 이야기를 아셨기 때문에 주말에 같이 시간을 보냈고, 휘하 직원분들을 소개해 줬습니다. 그분들이 저에게 서울을 구경시켜 주셨고요. 낮에는 좀 더 관광객 같은 일을 혼자 했습니다. 물론 영어를 못하는데 서울 지하철로 돌아 다니는 데는 문제도 많았어요. 많이 힘들었죠. 물론 한국어 소책자를 들고 다니긴 했지만, 그것도 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젊은 한국인들이 영어를 할 수 있어서 제가 지하철을 돌아다니는 데 도움을 도와주었죠. 택시 같은 경우에는 가족 친구분이 북한산 근처에 살아서 그쪽 주소만 보여주기도 했어요. 한국어를 못해 소통을 못 하니 기사님이 이 주소를 찾아갈 수 있기를 비는 거죠. 그래서 언어의 장벽으로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하지만 가족 친구와 그분의 연결망으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어요. 내부인과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혼자서 경복궁이나 남산 타워를 방문할 때는 외부인 같았어요

팟캐스트: 입양아들은 여러 환경에 적응하고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마련이죠. 다른 사람들이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라고 생각한 적 있나요? 

헤더: 제가 한국에 있을 때는 그런 오해를 받은 적은 없어요. 하지만 가족 친구를 통해 사귄 한국 친구들은 제 입양 이야기를 몰랐다면 그냥 평범한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말했어요. 자연스럽게 한국인다운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팟캐스트: 예를 들어주실 수 있나요? 

헤더: 제가 대화할 때 활동적이긴 하지만 정확히 어떤 면이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게 했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여행 중에 기분 좋게 만들어준 일 중 하나였죠. 

팟캐스트: 다른 경험들은 어땠나요? 바닥에서 자는 일이나, 양반다리라던가, 그런 일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나요?

헤더: 2014년에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절에서 하룻밤 숙박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불교에 대해서 배우려고 그랬었죠. 그리고 가부좌를 하고 명상을 하고, 주지 스님과 차를 마시는 경험은 감명이 깊었습니다. 할머니가 같이 갔으면 했지만, 할머니는 거절하셨어요. 그리고 제가 한국에서 돌아오자 할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같이 가고 싶지 않아서 아니었지. 그 여행은 너 혼자 해야 하는 여행이니까. 라고 말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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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첫 한국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일기를 쓰셨다면 어떤 내용을 적으셨을 건가요?

헤더: 집에 돌아와서 기뻤고, 제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제가 산 선물들을 줄 생각에 흥분했습니다. 한국에서의 경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텀블러(Tumblr, SNS 사이트)도 개설했어요. 한국에 가기 전에 만들어서 한국에서의 경험을 묘사하려고 했죠. 하지만 3주간 열심히 작성하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친구들이 그걸 통해서 제 경험을 확인하고 있기도 했죠. 그래서 미국에 돌아와서 제 경험을 할머니와 공유하고 싶었어요. 다른 면에서는 돌아가고 싶지 않기도 했습니다. 

팟캐스트: 입양 기관을 방문하셨거나 친부모님 조사를 하셨나요? 하고 싶으셨거나 준비는 되셨었나요? 

헤더: 2014년 10월 이전까지 제 언론학 전공을 살려서 최대한 조사할 수 있는 것은 다 조사했습니다. 입양 기관인 동부사회복지회와 연락해 제 서류를 확인할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제 삼촌이 이웃을 소개해 주셨고, 그 이웃분은 미주중앙일보에서 일하고 계셨죠. 그분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결과, 그분이 미주중앙일보에 제 여행에 관한 기사를 2014년 8월에 미주중앙일보에 기재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조사를 최대한 해서 여행을 준비하려고 했죠. 하지만 그때는 입양아 사회와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아서 그들의 자원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제 가족 친구가 사회복지사와의 방문에 같이 가셨죠.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하실 수 있으니까요. 이러한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제 입양 서류를 확인하는 일은 감정적으로 힘들었으니까요.

팟캐스트: 그곳에 있었을 때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 운이 좋으셨네요. 그리고 서류에 별로 정보가 없었던 것 같은데, 사실인가요? 

헤더: 한국에 가기 전에 사회복지사가 저와 공유한 정보는 얼마 없었습니다. 제 친부모가 결혼한 상태였고, 두 친형제가 있어서 3번째 아이를 돌볼 수 없어서 입양에 맡겨졌다고 하더군요. 동부사회복지회와 만난 뒤 아주 답답했습니다. 그들이 어머니에 대해서 제공한 정보는 어머니의 이름 허옥자뿐이었어요. 어머니의 이름이 쓰여 있는 종이도 주지 않더군요. 또 저에게 제공하는 정보를 골라내서 제공하기만 했습니다. 심지어 저에게 준 정보에서도 어머니의 이름을 검열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머니의 이름을 기억했고, 가족 친구도 그 이름을 기억했죠. 제가 뉴욕에 돌아오고 나서 사회복지사와 연락했습니다. 그리고 사회복지사가 KS에 연락해 친부모 조사를 할 수 있냐고 물었죠. 그리고 나중에 사회복지사가 와서 정보가 너무 적어서 KS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 일을 들으니 몹시 화가 나더군요. 첫 한국 여행을 하고 나서 제 친어머니를 더 찾고 싶었거든요. 

헤더: 그래도 친부모 조사는 계속되었습니다. 동부사회복지회나 입양 기관을 통한 조사는 그걸로 끝이었지만, 23 and Me(유전자 조사 업체)을 통한 검사를 2015년 1월에 했죠. 그리고 2015년 10월에 LA에서 저의 5촌이 연락을 해왔습니다. 그 5촌이 2016년 11월에 자기 아버지가 자신을 방문했을 때 23 and Me 검사를 받게 했죠. 그리고 그분이 4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지금 다섯 남성분의 이름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제 친아버지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지금 제5촌이 한국 친척들에게 연락해 정보를 찾고 있는데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몇 친척들은 그러한 정보 공유를 하려고 들지 않더군요. 하지만 5촌은 노력해줬고, 한글과 한자로 쓰여 있는 족보도 공유해줬습니다. 전 그 족보를 2019년 10월에 서울 여행을 가기 전에 해외입양인연대와 공유했어요. 

팟캐스트: 5촌이 그렇게 개방적으로 교류를 했다니 대단하네요. 사람들이 말하기를 입양아라는 사실을 바로 밝히지 말라고 하는데, 발견하셨을 때 어떻게 접근하셨나요? 

헤더: 5촌이 저에게 연락을 먼저 해왔고, 제가 제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전화번호도 나눴어요. 지금도, 제가 문자를 보내면 바로 문자를 돌려주죠. 아주 개방적이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줬어요. 

팟캐스트: 5촌이 왜 직접 찾아야 했죠? 한국인 친척 관계는 보통 아주 친밀해서 그렇게 깊게 찾아야 할 이유가 없는데요.

헤더: 좋은 질문이네요. 정확히는 몰라요. 물론 5촌이 자주 말하기도 했고 여러 대화도 했지만, 그래도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저에게 연락해서 도와줬던 게 고마웠어요. 

팟캐스트: 나이가 비슷한가요?

헤더: 저보다 연상이고, 아내와 두 아이가 있고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어요.

팟캐스트: 그분이 아버지를 설득해서 검사를 받게 했군요? 

헤더: 제4촌 되시는, 그러니까 5촌분의 아버지분은 미얀마에 살고 계셨어요. 그리고 2016년 11월에 휴가 겸 아들 가족을 방문했던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설득해서 유전자 검사를 받게 했고 그분이 제4촌인 사실이 밝혀졌던 거죠. 

팟캐스트: 그 결과를 들으셨을 때 어떠셨나요?

헤더: 제 퍼즐의 또 다른 조각이 맞춰졌으니 아주 기뻤죠. 그다음에는 12월 친부모 조사 결과가 나와서 조금 답답해졌습니다. 지난 10월에 제 약혼자와 같이 서울에 있었을 때 해외입양인연대(GOAL)과 NCRC와 만났습니다. 2014년의 첫 방문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거든요. 입양아들을 위해 제공되는 정보가 더 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단체들이 제 조사를 맡아 준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꼈습니다. GOAL은 입양아들이 운영하는 조직이라 제 상황을 이해해줄 수 있으니까요. 2차 한국 방문은 제가 입양아 사회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그 사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확실히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12월에 GOAL이 저에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카카오톡으로 관련 직원과 같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죠. 그래서 관련 정보를 공유해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연락에서 NCRC가 제 친어머니와 3분간 연락을 취했다고 했어요. 어머니가 충격을 받아서 저와 연락하거나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하더군요. 어머니 주소로 편지를 보냈는데, 반송되었다고 합니다. 제 친어머니에 대해서 찾고 있었는데 친어머니가 살아 계시고, 제가 찾는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리고 그 소리를 듣자마자 울기 시작했죠. 그리고 4일 뒤에 GOAL을 통해서 관련 연락이 또 왔어요. 뉴욕 출신의 또 다른 헤더라는 이름의 입양아와 서류를 혼동했다는 겁니다. 

팟캐스트: 이런.

헤더: 그리고 NCRC에서 사과 이메일을 장문으로 보냈습니다. 지금까지 답장을 안 했어요. 몹시 화가 났거든요. 한 감정에서 다른 감정으로 감정이 요동을 쳤습니다. 제 친어머니를 찾았고, 통화도 했고, 저 자신에 대해서도 알았는데 그걸 앗아간 셈이죠. 제가 첫 정보를 알고 나자 제 가족들과 친구들과 공유했고 모두 저를 보조하면서 최대한 제 친부모를 찾는 데 도움을 주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 사람들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친구들과 가족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기가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가장 친한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는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지난 몇 달간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가 있었어요. 그리고 NCRC를 용서할 수 있었죠. 일부러 그런 일이 아니었고 실수였으니까요. 그리고 그 답장을 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작년 12월 15일에 저에게 보내준 이메일은 아직 답장을 못 했어요. 

팟캐스트: 이 과정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은, 과정을 시작하게 되면 온갖 감정과 시간의 흐름이 일보전진 이보후퇴와 같다는 것이죠. 그런 답답한 감정과 정답을 찾는 일은 어렵고요. 

헤더: 카오미씨(팟캐스트 진행자). 그러한 과정이 제가 왜 친어머니를 찾게 되는지 생각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제 약혼자와 한국 2차 여행을 가기 전에 많은 한국인 입양아 친구들이 친어머니를 찾아서 한국에서 친어머니와 만났거든요. 질투가 났죠. 그리고 그 질투가 난다는 사실도 지난 몇 달간 직접 겪어보고 나서야 인식했어요. 그리고 그러한 감정을 제 입양아 친구에게 털어놓았는데, 그 친구가 제가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저와 공감해주었습니다. 이러한 진짜 대화를 나눠도 부끄럽거나 평가받는 기분을 느끼게 하지 않는 IKAA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친어머니를 찾는다면 좋겠지만, 못 찾아도 괜찮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행위가 저를 완성하지 않고, 지금 저 자신만으로 충분하니까요. 그런 사실을 알았습니다.

팟캐스트: 작년에 2차 여행을 갔을 때 약혼자와 관계는 어땠나요? 한국에 처음으로 방문하는데 헤더 씨가 가이드나 문화적 번역가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나요? 

헤더: 그런 감정은 느끼지 않았어요. 약혼자가 처음 한국에 오는 일이었지만 GOAL과 NCRC와의 회의를 방문 중에 잡아야 했는지 이해해 줬고 저를 지지해줬어요. 그리고 약혼자와 같이 이미 방문했던 장소들인 경복궁 등을 방문했죠. 그리고 제가 왔을 때 없었던 체험을 해보기도 했어요. 제가 처음 방문했을 때 경복궁에서는 한복 대여가 안 됐거든요. 하지만 두 번째 방문 때는 됐죠. 그래서 한복을 빌려 입고 경복궁을 거닐었어요. 특별한 경험이었죠. 그리고 AKA 인맥을 사용해서 동대문에 가서 수제 한복을 맞췄어요. 그게 2차 한국 여행에서 저를 위해서 유일하게 샀던 물건이죠. 

팟캐스트: 첫 여행을 언급하셨을 때 다시 집에 빠르게 돌아와서 소중한 사람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고 하셨죠. 그래서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는 점이 아주 특별하셨겠네요. 

헤더: 네. 그리고 그이가 북한산에 있는 절에서 저에게 결혼해달라고 그이의 생일에 프러포즈했습니다.

팟캐스트: 우와…. 날짜가 언제였죠?

헤더: 10월 20일이었습니다. 물론 같이 한국 여행하면서 프러포즈하리라는 사실을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어떤 시점에 할지 몰랐고, 그이의 생일에 할 줄도 몰랐어요. 거기에 제 출생지인 서울에서 해줬으니 아주 특별했죠. 그가 누구인지 그가 어떻게 저를 사랑하고 존중하는지에 대한 증명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약혼자분이 흑인이시죠?

헤더: 네

팟캐스트: 백인 가족이 이해 못 했던 점을 이해해준다고 생각하나요? 

헤더: 인종에 대해서 매일 이야기하죠. 전 흑인이 아니지만 다른 인종 입양아로서 백인 가족과 백인 동네에서 자라면서 인종차별을 경험했어요. 이방인의 경험이 있죠. 그래서 관련된 대화를 깊게 나눌 수 있다는 점을 기쁘게 생각해요. 

팟캐스트: 유전자 조사를 통해서 알아낸 다른 사촌들과 연락을 해보려고 했나요? 특히 5촌이 이름을 준 남성들 말이죠. 헤더 씨의 사촌일 수도 있는 분들이고, 친아버지일 수도 있지요?

헤더: 그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이 제 친아버지인지 확신하고 있지 않아요. 그리고 한국에서 그 사람들과 연락하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5분 중 2분은 죽었고 세분은 지금 한국에서 거주하고 계시는데, GOAL과 NCRC와 같이 조사했을 때는 친어머니를 먼저 찾고 친아버지는 나중에 찾자고 했고, 저도 동의했죠. 

팟캐스트: 그 분야에서는 아직 조사 가능성이 남은 거군요.

헤더: 네. 

팟캐스트: 한국과의 관계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었다고 생각하시나요?

헤더: 어렸을 때는 3학년 때까지는 한국과의 연결성을 느끼지 않았어요. 어떤 국가에 대한 역사를 조사해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어요. 그리고 당연히 한국을 선택했습니다. 조사하면서 한국 전쟁에 대해서도 배웠고, 돌아가신 제 할아버지가 한국 전쟁 참전 군인이라는 점도 알았죠. 그래서 첫 한국 여행 때 부산에 있는 한국 참전군인 묘지를 방문했죠. 미국 깃발과 한국 깃발이 휘날리는 광경을 보면서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 한국 여행에 대한 2번째 NBC 뉴스 수필에 그 사진을 첨부했죠. 그때 저는 확실히 저는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팟캐스트: 입양아들은 소속감과 관련해서 고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에 갔던 일이 한국에 대한 소속감을 강화해줬나요? 아니면 2번째 여행이 미국에 대한 소속감을 강화해줬나요?

헤더: 많은 한국 입양아들이 한국에 가면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몇 년간 한국에서 지내는 결정을 합니다. 그리고 저도 2008년에 버룩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그 절차를 밟을지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무서워져서 그만뒀습니다. 현재 저는 36세입니다. 그리고 저번 한국에서의 경험을 봤을 때, 전 한국에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괜찮죠. 제가 뉴욕에 살다가 한국에 사는 것이나, 한국을 매년 방문하거나, 그런 행위들이 절 더 한국인으로 만들거나 덜 한국인으로 만들지는 않으니까요. 그런 감정은 이 뉴욕시에 존재하는 강한 입양아 사회가 없었다면 느낄 수 없었겠지요. 또 제가 첫 여행을 끝내고 난 뒤에 패션 몰을 자주 들리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미용실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인데, 제가 첫 한국 여행을 끝내고 난 뒤로 거기 단골이 되었죠. 제 한국 유산을 다시 찾아내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전 제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팟캐스트: 퀸스에 살고 있으시다고 하니 아쿠아피나 관련 논란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데요. 그가 대화 방법이 흑인 문화를 도용하고 있다는 주장이라던가, 반대쪽에서는 퀸스에서 아시아인들과 같이 자라면 그렇게 된다는 주장을 하는데, 헤더 씨의 의견은 어떤가요?

헤더: 전 아쿠아피나씨의 팬이에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의 연기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성공에 대해서도 무척이나 기뻤고요. 제 약혼자와 함께 코미디 센트럴에 아쿠아피나의 프로그램이 나올 때마다 꼭 챙겨보죠. 그리고 제 의견으로는 아쿠아피나의 대화 방법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전부 환경의 창조물입니다. 퀸스는 뉴욕시의 일부죠. 그리고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지만, 특정 지역, 특히 도심에서 살고 있다면 문화적 교류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팟캐스트: 현재 직업과 그리고 그 직업에 입양아의 정체성을 적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헤더: 제 교육 과정에 제 입양아 정체성을 확실히 적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공개연설,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과 홍보작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 수업에 학생들과 연결망을 구축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입양아로서 저의 경험에 대해서 매우 취약하죠. 그리고 입양아로서 정체성 혼란을 어렸을 때부터 20대 초반까지 고생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20대 중반에 아시아계 미국인 언론인 협회 등 아시아계 단체에 가입해 아시아계 사회의 일부가 되려고 하려고 했죠. 왜냐하면, 어렸을 때 그런 경험이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약점이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저와 좀 더 쉽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항상 말하기를 날 너무 우러러보지 말라고 합니다. 전 여러 문제를 겪었고 지금도 여러 문제를 겪고 있죠. 완벽한 것은 없고 삶은 롤러코스터와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학생들에게 제 약점을 공유하죠. 그리고 저는 긍정적인 사고와 영감의 영향력에 대해서 높게 평가합니다. 그래서 학생들과 고취되는 음악을 공유하기도 하죠. 학생들에게 알리시아 키즈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오브 마인드를 틀기도 했습니다. 전 알리시아 키즈나 쏜 힐같은 가수를 좋아해요. 중학교 때부터 R&B나 힙합과 같은 장르와 많이 공감해왔죠. 음악이 저를 항상 지탱해 왔거든요. 그리고 제가 하려는 일을 의료상의 관점이 아니라 치료의 관점에서 다가가려고 해요. 

팟캐스트: 10살짜리 자기 자신에게 지금의 자기 자신이 말할 수 있다면, 뭘 이야기해주고 싶으신가요?

헤더: 10살 때 어머니를 잃었어요. 10살짜리 저에게 사랑받을 수 있고, 특별하고,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멋있다고 긍정적인 확인을 해주고 싶어요. 자신감과 사랑, 보살피는 마음으로 채워주고 싶습니다. 제가 10살 때는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어요. 항상 어렸을 때 정신 관리의 일부로 글쓰기를 했죠. 어렸을 때 일기가 있었어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일기에 작성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일기가 사라졌어요. 누가 제 일기를 가져갔는지 지금은 예측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뒤로는 제 일기를 작성하기를 꺼리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는 감정을 관리하기가 힘들었어요. 

팟캐스트: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 글을 쓰실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쓰실 수 있게 도울 수 있으시죠.

헤더: 카오미씨, 2010년부터 10년간 전 회고록을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 호밀 밭의 파수꾼을 읽고 나서 회고록을 써야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호밀 밭의 파수꾼을 가르쳐준 선생님에게 그 이야기를 했지요. 전 그때 16살이었지만 선생님이 시간을 들여서 써보렴. 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 기억이 나요. 그래서 2010년까지 작성을 시작하지 않았죠. 2010년에 버룩 대학교에서 교수님을 만났고 그분이 수업에서 회고록을 가르치고 있었죠. 그래서 그분 수업을 듣고 제 회고록을 작성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제 이야기를 작성하면서 회고록을 다양한 관점으로 쓰고 싶다고 생각했죠. 

헤더: 그 관점 중 하나가 어머니의 관점이었습니다. 9남매의 일원이었고, 청소년기에 입양 기관에 맡겨졌었죠. 몹시 어려운 삶을 겪었고 어머니의 형제, 자매, 사촌과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모든 것에 대해서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중간에 태어난 아이로서 7살때 동생들을 돌봐야 했고 그것도 큰 문제였다고 하더군요. 거기에 제 외할머니는 개 사육사이기도 해서 아이들만큼이나 개들도 항상 있었다고 해요. 9명이나 있는 애들이 충분히 잘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침대를 교대로 사용해야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게 가능한 이유는 제가 어머니의 일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저에게 6년 전에 주신 것인데 지금까지도 전부 읽지 못했어요. 어머니의 일기를 직접 읽는 일은 아주 감정적인 일이죠. 일기 시작 부분에서 어머니의 필체는 아름답고 깔끔하지만, 나중으로 갈수록 더욱더 악필이 되어가요. 경화증으로 인해서 글쓰기가 어려워졌으니까요. 그래서 일기를 읽는 것 자체가 어려워요. 일기를 전부 읽어버리면 어머니의 일부를 잃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일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비논리적이라는 일도 알지만 지난 6년간 제가 가지고 있던 공포입니다.

팟캐스트: 어머니께서는 자신의 병이 불치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을 테니, 헤더 씨가 그 글을 읽을 그거로 생각하고 일기를 작성하셨던 건가요?

헤더: 어머니께서 제 글을 읽기 원하셨어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저를 조건 없이 사랑했다는 점, 입양 과정과 단계, 드라이브 인 영화의 경험, 제가 땡깡 부리는 일이라든가 그런 일들이 담겨 있죠. 만약에 제가 제 약혼자와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똑같이 해주고 싶어요. 일기를 작성해서 나중에 읽어서 아이일 때의 경험을 어땠는지 알 수 있게 하는 거죠. 

팟캐스트: 사람들이 SNS로 헤더씨를 구독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헤더: 제 SNS 계정은 트위터, 인스타그램은 Heather J Schultz입니다. 제 개인 이메일은 Heather.J.Schultz@gmail.com입니다.

팟캐스트: 그리고 헤더씨가 쓰신 기사는 구글을 통해서 찾을 수 있나요?

헤더: 네 그렇습니다. Heather Schultz로 검색하면 제가 2014년에 쓴 두 수필을 찾으실 수 있어요.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헤더씨

헤더: 감사합니다. 카오미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