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4, 에피소드 11: 리아 니콜스

Audio available January 11, 2021 at 12:00 pm EST.

리아 니콜스 (34세)는 미국 백인 가족에게 국제적으로 입양된 뒤 성장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다시 찾아가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리아 씨는 인종적 정의와 생산의 권리를 소중히 여기며 다른 아시아계 입양아를 위한 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 리아 씨는 한국의 생물학적 가족과 재회하는 데 성공했다. 리아 씨는 미국 가족과의 관계 변화를 포함한 가족과의 재회와 예상하지 못한 여러 측면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리아: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리아 니콜스이고 한국 이름은 유영진입니다. 34세이고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에서 거주 중이죠. 지난달은 제 부모님과 함께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시에서 지냈습니다. 

팟캐스트: 지난 한 달 동안 로체스터시에 귀향하셨다고 하셨는데, 로체스터시에서 성장하셨죠?

리아: 네. 고등학교 시절 이후로 부모님과 가장 오랫동안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인들 중심의 교외에서 지내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죠. 보도가 먹을 것을 주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정갈하고, 마당이 전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카펫으로 덮여 있는 바닥과 다이어트 코크 등… 모든 것이 너무 깨끗해요. 또한, 모든 것이 편하고 익숙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어렸을 적의 고립된 기분이 기억나고 어린이로서 이곳에서 성장했던 시기를 떠올리게 만들어요. 성인의 관점으로 다시 그 기억을 더듬는 일이 치료의 일부인 셈입니다. 어렸을 때 아시아계로서 이곳에서 자라나며 고립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나요. 핵가족으로 이루어진 동네에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죠. 사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몇 주 전에 동아시아계 가족을 처음으로 봤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어요. 

팟캐스트: 문화적 충격이었겠네요. 인종적으로 다양하고 좀 더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 와서 더더욱 그렇지 않았나요?

리아: 네. 문화적 충격이 있었어요. 트레버 노아(미국의 유명 코미디언)가 미국을 50개의 다른 국가들이 묶여 있는 나라라고 묘사한 적이 있죠. 지역적으로 문화적인 차이가 아주 극적이니까요. 어떤 경우에는 웃기기도 했습니다. 로체스터에 돌아와서 슈퍼를 갔는데 델리 미트가 따로 분류된 것을 보고 추억에 젖기도 했어요. 샌프란시스코 지역에는 델리 미트를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분류하지 않죠. 제 부모님이 사는 이 교외 지역에 대한 향수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여기 와서 처음으로 Black Lives Matter(BLM,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경찰에 의한 흑인 살해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사회운동)과 프라이드 깃발을 보고 놀란 기억이 나요. 그때가 6월 말이라서 성 소수자 인권의 달 마지막이었죠. 샌프란시스코는 정치적으로 아주 역동적인 곳이기 때문에 정치 관련해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BLM과 프라이드 깃발을 보니 아주 기분이 좋았죠. 아주 용감하다고 생각했죠. 이 지역에서 소수자의 상징과 진보적인 관점을 보여주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그걸 보면, 더 소수자로서 살고 싶지 않고,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고 말하는 데 두려워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게 로체스터에서 지내면서 느낀 감정이었죠.

팟캐스트: 부모님과 정치에 관해서 이야기하시나요?

리아: 자주 하죠. 하지만 어떨 때는 하지 않아요. 저에게 얼마나 체력이 있는지에 따라서 다릅니다. 며칠 전의 이야기인데, 아침에 일어나서 부엌에 들어가니 인종차별주의자가 안되는 방법에 대해서 읽고 있는 아버지가 있었죠. 그리고 옆에 어머니가 엘레나 김이 쓴 “입양의 영역”(Adopted Territory)을 읽고 있었어요. 그걸 보면 부모님이 발전하려는 모습이 보여서 좋습니다. 제가 그분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준 기분이에요. 그리고 그분들은 바뀌려고 노력하고 계시죠. 하지만 그 두 분과 대화를 하면 지칩니다. 우선 술도 한 잔 정도 해야 하고, 옆에 개도 둬야 하죠. 두 분이 키우고 있는 개가 옆에 있으면 상황이 너무 격화되는 것을 막아줘요. 어머니는 우리가 정치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자기가 주제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뭔가 잘못된 이야기를 할까 걱정하십니다. 그리고 전 두 분께 정의, 공평함, 그리고 다인종 간 입양에 대해서 이해하는 데는 다양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고, 마음에서 나오는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려고 하죠. 개와 함께 넷플릭스를 보면서 논쟁이 오고 갑니다. 제 양어머니는 제 친어머니가 겪었을 경험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래서 양어머니에게 여성과 인간의 관점에서 설명해 드려야 했죠. 양어머니는 제가 친어머니가 저를 놓아줬어야 했을 때와 이야기를 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양어머니에게 친어머니에게 있어 아주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고 이야기를 드렸죠. 남편이 둘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 며칠 전에 죽어서 아이를 입양 제도에 맡겨야 했고, 아이가 없어졌는데, 아이를 낳은 뒤의 육체적 변화를 계속 겪어야 하는 여성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우리가 복숭아 파이를 만드는 동안 이야기를 드렸어요. 어머니가 울면서 그런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고 이야기하셨죠. 그래서 인종 정의와 생산의 권리, 그리고 다른 많은 사회 정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지식도 중요하지만, 인간적인 공감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부모님과 성장한 경험은 어땠나요? 외동딸이신가요?

리아: 저와 마찬가지로 입양된 여동생 케이트가 있습니다. 한국계 입양아고 저보다 3살 연하입니다. 그리고 성장 과정이 어땠냐고요? 음…. 현재 5년 계획을 부모님과 진행 중입니다. 이게 매우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래도 이거 관련해서 이야기는 하고 싶죠. 그리고 그분들 곁에서 30일 넘게 있다 보니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와 이야기할 수 있어서 기쁘네요. 60대 미만인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주 기쁩니다. 그분들이 저를 이해하려고 뻗어 나오려고 하고 계시죠. 상당한 기간 그분들과 멀어져 있었거든요. 그분들이 제 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저를 아시아계 여성, 한국계 미국인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 곁에 있는 것이 안전한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 방문 자체가 하나의 큰 여정이었죠. 제가 자라날 때는 우리는 입양이나 인종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백인의 취약성(White Fragility, 백인이 인종 문제 관련해서 대화하기 어려워하는 사회적 문제, 로빈 디앤젤로가 저술한 동명의 서적에서 언급된 단어이다) 문제도 처리하셔야 했나요? 

리아: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현재 미국, 특히 백인이 이러한 변화를 겪을 때 입양아로서 변화를 같이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백인의 연약함이라는 용어가 있어서 좋습니다. 예를 들어서 엊그제 어머니와 이야기를 할 때, 어머니가 약간 방어적인 태세를 보인 적이 있었죠. 그러자 제가 손가락을 들어서 어머니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기시켜 드렸고, 어머니가 “이게 백인의 취약성”이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책의 저자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고 싶어요. 전 부모님에게 인종적 정의를 알려주기 위해서 부모님에게 팟캐스트 백인을 보기(Seeing White)를 소개해 드렸죠. 그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제가 배운 일은, 백인도 대표성이 필요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팟캐스트는 인종과 백인 정체성에 관해서 이야기하거든요. 백인을 보다 팟캐스트의 호스트는 미네소타주 만카토시 출신의 백인 남성이죠. 그래서 부모님에게 “여기 부모님과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 인종적 정의에 대해서 말하는 팟캐스트에요.”라고 드렸어요. 그 팟캐스트 이전에도 여러 연구를 부모님에게 보여드렸지만 공감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인종 문제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비슷한 지역 출신에, 비슷한 나잇대의 백인 남성에게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지금도 생각하면 흥미로운 일이네요. 

팟캐스트: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사용해서 인종 정의에 대해서 입양아들이 부모와 대화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부모에게 자신들의 문제를 이해하게 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리아: 네. 그렇다고 봅니다. 전 국가적으로 일어나는 인종적 차별이 백인만이 아니라 히스패닉, 아시아계의 인식도 일깨웠고, 사회에 만연한 반흑인적 인식에 대한 모두의 인식을 강화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부모님과의 관계가 멀어진 적이 있다고 언급하셨죠. 언제부터 관계가 멀어지셨죠? 말이 안 통하게 된 시점이 언제인가요? 

리아: 제 삶에 있어서 어둡기 짝이 없는 시점이었죠. 꽤 과거로 돌아가야 해요. 제가 한국 가족과 재회하고 난 뒤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은 아니었어요. 재회한 뒤 몇 년이 지나고 난 뒤였죠. 사실 부모님의 문제보다는 제 변화의 과정의 일부 때문이었습니다. 제 의견을 표출하고, 거리를 만들고, 제 어른의 삶에서 중요한 것을 결정하는 과정 일부였죠. 

팟캐스트: 한국 부모님을 만난 슬픔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리아: 아마 그렇다고 생각해요. 사실 아직도 그러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죠.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 인식을 나와 같이 배우지 않거나, 적어도 배우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 둘의 관계는 좋은 관계가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팟캐스트: 부모님과 관계를 재구축한 것이 언제였죠? 

리아: 부모님이 백인의 정체성에 대한 9개의 팟캐스트를 다 듣고 나면 이야기를 하죠. 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실제로 하셨어요. 그리고 저와 같이 배우고 계시죠. 부모님에게 저도 한국계 미국인이자 피부색이 옅은 아시아계 미국인이 가진 소수자의 정체성, 그리고 특권자의 정체성을 배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모두 같은 여정을 진행하기에 그런 이야기를 하면 겸손해지는 기분이죠. 예를 들면 한국 입양 제도에 대해서 더 배웠어요. 한국 전쟁 도중에 8명의 한국인 아이를 입양해 미국으로의 한국인 입양을 시작한 헤리 홀트와 버사 홀트에 대해서도 배웠죠. 이 둘은 아이오와주 디모인 출신인데, 제 부모님 고향인 아이오와주 이퀘스틴에서 한시간 거리에 있는 도시입니다. 현재 과거의 기록들을 읽으면서 공부를 하는 중인데, 제 부모님을 평범한 백인 부부인 해리 홀트와 버사 홀트와 연관짓게 되어서, 그러한 사고 과정을 처리하고 있어요. 부모님이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이 입양 제도의 일부라는 점을 인식하게 됩니다. 하지만 더이상 부모님에게 화낼 힘이 없어요. 이제는 제도적인 백인 우월주의와 생식의 권리 문제에 더 화가 나죠. 

리아: 전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지가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첫 입양이 시작된 시기와 관련된 강렬한 이미지를 찾고 있죠.

팟캐스트: 성장한 장소와 같이 성장한 문화에 대해서 비판적이신데, 어떻게 리아 씨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아니면 자신의 진짜 정체성이나 진정성에 문제가 되었나요? 

리아: 네. 정체성 구축에 문제가 생겼죠. 어렸을 때는 활기 넘치고 행복한 아이였죠. 흔한 현상일지도 모르지만, 청소년이 되자 아주 내성적으로 변했어요. 제가 길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변에 제가 따를 수 있는 아시아계 어른이 없었지만, 제가 필요로 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리아씨에게 거울이 되어줄 사람이 없었군요.

리아: 네 거울이 없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 입양 역사에 있어서 좋지 않은 시점에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겟 아웃이나 헝거 게임과 비슷한 느낌으로 미네소타 주의 한국인 입양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기도 하죠. 그래서 그런 영화를 만들기 싶은 분이 있다면 저에게 연락을 주세요. 전 1985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986년에 입양되었죠. 이 시기에 가장 많은 한국계 입양아들이 미국으로 입양되었어요. 1984년에 첫 홀트 입양아가 32세의 나이에 자살로 삶을 마감했죠.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과 관련된 국제 입양 비판도 나왔습니다. 국제적으로 봤을 때 한국이 건강한 경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으니까요. 또한, 미국에서 다문화와 피부색 차별 철폐 문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시점이었죠. 킴 박 넬슨(Kim Park Nelson, 한국계 입양아 미국인 미네소타 주립 대학교 교수) 교수의 책에서 한국계 입양아가 가장 많은 두 지역이 백인들 위주로 인종적으로 안정된 미네소타주와 스웨덴인 이유를 배웠어요. 자신들의 백인 사회에 유색인종인 아이들을 들여놓아도 문제가 없다는 순진함 때문이었죠. 

팟캐스트: 특히 아시아계 아이들이 그랬죠?

리아: 네. 그리고 92년에 우디 앨런-순이 프레빈 스캔들이 있었죠. 순이는 우디 앨런의 여자친구였던 미아 패로우의 수양딸이었죠. 그게 제가 유일하게 대중 매체로 접한 한국계 입양아였습니다. 어렸을 때 제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아주 끔찍했고, 정신 건강에 나쁜 영향을 끼쳤죠. 제 아버지와 결혼을 해야 하는 걸까요? 제가 유일하게 알던 입양아였으니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 시기 자체가 공포 영화와 같이 매우 안 좋았다고 해야겠죠. 

팟캐스트: 현재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계시죠. 의도적으로 아시아계 미국인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이주하셨나요?

리아: 네. 물론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20대 초반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동해안이든 서해안이든 해안가 지역에 살고 싶었고, 항상 눈에 띄는 소수인종이었던 기억이 있어서 도시의 익명성도 중요했습니다. 전 대학을 위스콘신주 매디슨시에서 나왔어요. 도시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경험이 좋았죠. 대학교 2학년 때, 2006년에 이화여대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한 경험도 있어요. 그 교환학생 경험 때 사귄 한국계 미국인 친구들은 여전히 좋은 친구들이죠. 그 친구들 전부 해안 지역 출신이었습니다. 동해안 출신도 있었고 서해안 출신도 있었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모두 자기소개할 때 제가 위스콘신주 매디슨시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애 중 하나가 “위스콘신? 거기가 어디죠?”라고 말했어요. 그때 제가 한국계 미국인들은 미국 중서부 지역에는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리고 그걸 받아들였습니다. 카오미씨는 나오미 고(Naomi Ko)라는 분을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네요. 코미디언 겸 배우인데 현재 나이스(NICE) 드라마 파일럿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미네소타 주에서 성장하는 한국계 미국인의 경험을 그린 드라마죠. 그리고 한국계 미국인이 어디에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NICE 드라마의 일부-

나오미: 안녕하세요. 선생님

의사: 안녕하세요.

여성: 좋네요.

의사: 조사 결과를 나오미 씨에게 말씀드려야 하는데….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암이 재발하셨습니다. 다른 종양이 발견되었고 악성입니다. 

리아: 남부 출신의 아시아계 미국인 친구들도 있어요. 한 친구는 현재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대표성이 다양해지는 것 같아서 좋아요. 

팟캐스트: 이화여대에서 교환학생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다른 한국계 미국인들과 섞이려고 노력하셨나요? 하셨다면 그들과 맞는다고 느끼셨나요, 아니면 같은 입양아 경험이 없어서 섞이지 못한다고 생각하셨나요?

리아: 사실 우리는 밖에 나가서 술도 마시고, 같이 놀았어요. 제가 거기 갔을 때 20살이었기 때문에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점이 좋다고 생각했죠. 왜냐하면, 미국에서는 21세가 되어야 술을 마실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19살 이후에 마실 수 있었으니까요. 제가 사귄 친구들 대부분이 제가 같이 한국어 수업을 들은 동기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친구들도 한국 부모를 가지고 있더라도 대부분 한국어를 못했죠. 그래도 제가 다른 애들과 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대학교 한국어 수업을 들을 때, 절반은 한국계 미국인이었고, 다른 절반은 백인과 다른 인종인 아이들이었죠. U자로 앉아서 한국계와 나머지가 갈렸고, 저는 백인 애들과 같이 앉았습니다. 2년 전에 배웠지만,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한국어 수업에서 한국인 애들은 어느 정도 기반 지식이 있었지만, 저는 백인들과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으니까요. 제가 같이 공부를 해야 하면 백인 애들과 같이했습니다. 그 수업들을 같이 들으면서 다른 입양아들을 만났고, 그 과정이 제 입양에 대한 인식을 넓혀 주었죠. 그리고 제가 입양 제도 자체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팟캐스트: 한 학기 동안 계셨나요? 아니면 1년? 

리아: 여름학기 동안 이화여대를 다녔습니다. 장마 기간과 몹시 더운 여름이 겹쳤죠. 제가 교환학생으로 가기 위해서 사용한 프로그램은 아이들의 집 사회(Children’s Home Society, 미국의 가족 아동 사회단체)가 주최했어요. 그래서 그들의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대학교 2학년의 여름을 한국 이화여대에서 공부하면서 보냈죠. 그 프로그램에서 해주는 패키지여행도 참여했습니다. 여행자의 경험을 했죠. 그 여행에서 기억이 나는 경험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백인들이 인솔하는 한국인 애 중 하나로서 느끼는 자격지심이었죠. 우리가 한국인들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그리고 다른 여행에서 기억난 것은 저희가 고아원을 방문했을 때였죠. 그 고아원을 방문하고 난 뒤 상실과 슬픔에 대해 받아들이는 절차를 겪은 것 같아요. 아이들과 놀고 난 뒤 숙소로 돌아와야 했을 때 아이가 저를 놓아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걸 보고 났더니 감정 조절이 안 되더군요. 그리고 그 두 가지 기억이 그 여행에서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팟캐스트: 그럼, 사람들의 고아원 기습 방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리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좋은 질문이네요. 네. 상당히 끔찍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방문한 고아원이 아직 운영 중인지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좀 더 조사해보니 미혼 임산부를 위한 기숙사와 가까이 있더군요. 그래서 기숙사와 고아원과 입양 기관이 전부 연결되어 있었고 그것 자체가 상당히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행 자체에서 관광에 집중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고기 눈을 먹고 모두가 비명을 지르고, 한국이 미국과 다른 점에 집중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우리가 한 행동 상당수가 그랬죠. 그리고 제가 겪은 다른 한국 문화 여행에도 적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원민속촌에 가는 경험은 현재 한국과는 동떨어진 과거의 한국을 보여줬죠. 현재에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돌아온 다음에 여행 관련 논의를 나누신 적은 있나요?

리아: 아뇨. 전혀 없어요.

팟캐스트: 한국에서 20세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겠네요?

리아: 네. 혼자서 한국에서 생활하는 것은 독특한 경험이었습니다.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가 언급하니 학교 지원 여행도 갔던 경험이 기억이 나네요. 기억나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학교 행사들에 참여했는데 3시인데도 불구하고 부어라 마셔라 했던 했죠. 한국 문화의 그러한 면이 정말 좋아요. 술을 통해 장벽을 부수고 서로 공감하고 연결됩니다. 음식과 술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고 연결되는 문화가 좋아요. 

팟캐스트: 그때부터 입양 문제를 처리하고 있었나요, 아니면 그때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나요? 

리아: 그때는 전혀 그런 문제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죠. 그래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요. 물론 무의식적으로는 인식했을지도 모르지만, 전 한국 영화관에서 말린 오징어와 팝콘 먹는 게 좋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술 마시러 다니는 것만 신경 썼어요. 

리아: 요즘은 제 본능대로 하려고 하죠. 왜냐하면, 그때 한국에서 한국어 공부하기로 한 이유를 제대로 설명 못 했으니까요. 그때는 아마 정신적으로 그걸 설명하거나 주장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하고 싶었죠. 본능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영화 제작은 어떻게 하게 되셨죠?

리아: 영화 제작을 하게 된 이유는 제가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아 좀 더 좋은 대답이 필요하겠네요. 사실 제 전공은 건축학인데, 그 분야가 엘리트적이고 파괴적인지 배웠죠. 사실 4년간 도시계획 건축가로 일하면서 사회계획과 도시개발 영역에서의 인종적 차별이 얼마나 심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하면서 많은 사람이 모든 인종에게 공평한 주거지를 제공하고, 노숙자들에게도 기본적인 복지를 제공하려고 하는 것을 보았는데도 말이죠. 아 진짜 좋은 대답이 필요한데요. 제가 항상 영화를 좋아했고, 청소년기에는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에 있는 할리우드 비디오(미국의 비디오 대여점 체인)에서 아르바이트했죠. 제가 고등학교 때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영화관에서 일해서 많은 영화를 꾸준히 볼 수 있었고요. 거기에 할리우드 비디오 직원들은 무료로 영화 3개를 빌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2시에 제 일이 끝나면 그 무료 영화를 빌려서 영화를 봤죠. 그 영화들이 제가 원래는 접촉하지 못할 교외 동네 바깥 세계를 저에게 소개해주었습니다. 저스틴 린 감독의 배터 럭 투모로우라는 영화를 본 기억이 나요. 아시아계 미국인이 등장하는 제가 본 첫 영화였죠

-배터 럭 투모로우 영화의 트레일러-

리아: 이러한 영화들이 제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 이야기 서사, 그리고 백인 구세주 서사와 입양 제도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게 해줬죠. 이러한 서사가 미국 사회에 너무 깊게 파고 들어가 있어요. 제가 영화를 만들고 이미지를 만들 때 즐기는 일 중 하나가 이러한 서사를 다시 찾아와서 입양아, 소수자 입장의 이야기를 만드는 겁니다. 전 제도적 변화가 일어나려면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보죠. 제도적 변화와 문화적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보고, 문화적 변화가 제도적 변화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에바 데브레네의 팟캐스트를 들으면 국가의 탄생(1915년 미국 영화, 중요 영화 기법을 처음 대중화시킨 것으로 유명하나, 백인우월주의 단체 KKK단을 미화하는 인종차별주의적 영화이기도 하다) 힘에 관해서도 이야기하죠. 1915년에 개봉한 이 인종 차별적인 영화가 흑인들에 대한 편견들을 대중화시켰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계속 축적되다 보면 문화에 새겨지게 되죠. 그리고 미국에는 제가 바꾸고 싶은 거대한 입양아 서사가 있어요. 그리고 카오미 씨의 팟캐스트를 들으면 희망을 품게 됩니다. 입양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책, 영화, 예술을 통해서 내면서 백인 구세주 서사를 부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리아: 입양아들이 만든 영화들도 제 정체성 구축에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입양아 영화인들이 존재하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뻐요. 다이앤 보셰이 리엠(Deanne Borshay Liem), 김요라 비욜(Kimura Byol), 태미 추(Tammy Chu), 우니 르콩트(Ounie Lecomte), 이분은 프랑스계 영화인이죠. 그리고 덴마크 영화 리턴을 만든 분이 누구셨죠? 말린 최(Marlene Choi)일겁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아시아계 미국인 역사에서 입양아들은 그렇게 주목받지 못하죠. 대중적으로 접할 수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 서적에서 그 사실이 드러난다고 봐요. 에리카 리가 저술한 아시아계 미국의 건설(Making of Asian America)에서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역사에 입양아들도 포함했습니다. 전 지금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 친구가 있어요. 제가 친구들 사이에서는 소수자라 친구들에게 입양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데 지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계 미국인의 자격에 대한 인식을 느끼고 있기도 하죠. 2세대 이민자, 1.5대 이민자, 부모님이 이민자라는 거대한 서사가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의 주류가 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시아계 부모를 가지고 있지만, 미국에서 오랫동안 지낸 4세대와 5세대 아시아계 이민자들과 동감을 많이 하고 있죠. 아시아계 미국인들과 입양아에 더해 인종 정체성의 중간성으로 고민하기도 하는 아시아계 혼혈과도 많이 동감합니다. 그러니 아시아계 입양아의 역사가 아시아계 미국인 역사의 일부이고, 그 서사의 일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제가 희망을 품는 이유 중 하나는 아시아계 입양아의 숫자입니다. 한국계 미국인인 10명 중 한 명은 입양아죠. 이 숫자 자체가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그 숫자를 사람들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숫자의 힘이 느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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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 입양아들이 1세대 이민자로 분류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그 분류를 느낀 계기는 한국에서 제 조카를 봤을 때였죠. 제 한국 가족들이 이모가 미국에 살고 있고, 미국에 가서 영어를 배울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줬다고 하더군요. 그걸 들으니 제가 1세대 이민자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 가족에서 유일하게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자였으니까요. 

팟캐스트: 다른 말로 하자면 한국인 가족과 만나기 전까지는 1세대 이민자라고 인식을 못 하셨다는 거군요.

리아: 네.

팟캐스트: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뭐로 분류하셨을 것 같나요?

리아: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 한 달간 고향에 돌아와 있다 보니 머릿속이 다이어트 코카콜라로 가득 찬 있듯이 흐릿해요. 그래도 지난 몇 달간 용어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입양아(adoptee)라는 용어 자체도 제가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고민했죠. 레이철 카드지 가네시(Rachel Kaadzi Ghansah) 작가님이 노예라는 용어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사람은 노예가 될 수 없었다고 적었죠. 노예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만 “노예”가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에서 노숙 생활하는 노숙자들도, 노숙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있지만, 노숙자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는 없죠. 그래서 입양아라는 용어의 뜻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친어머니(birth mother)라는 용어도 잘 알려졌지만, 다른 관련 용어에 대해서도 흥미를 느끼고 공부를 해보려고 해요. 또한 다인종 간(transracial) 이라는 용어도 논란이 되었죠. 입양아 관점에서 그러한 용어를 분석한 글도 읽었습니다. 리사 말리 롤린스(Lisa Marie Rollins)가 레이철 돌레잘 스캔들 이후에 작성한 글을 읽었죠. 그 글에서는 입양아들은 자신들의 가족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인종간 용어를 사용해 다른 인종의 부모를 가진 입양 가족들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입양아들이 다인종 간이라는 용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트랜스젠더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선택으로 그런 성정체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다인종 간 가족은 사람의 선택으로 만들어진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입양 부모의 관점에서 바라본 의견이라 흥미로웠죠. 

팟캐스트: 리아 씨가 좋아하시는 용어는 뭐가 있나요?

리아: 정확히는 모르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물론 TRA(Transracial Adoptee, 다인종 간 입양아)나 KAD(Korean adoptee, 한국계 입양아)라는 용어가 있어서 기뻐요. 그러한 약어를 사용해서 사회와 교류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이름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자세히 논의 해본 적도 없어요.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제 양어머니가 저에게 전화하셨죠. 그리고 제 이름을 바꿔서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교회에서 노예제도에 대한 세미나를 참여하셨는데, 미국 노예제도에서는 노예를 구매할 때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해서 노예들의 이름을 바꿨다고 배웠기 때문이었어요. 양어머니가 그렇게 저에게 사과했던 사실이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뭐 그 시기에는 웃고 넘어갔습니다. 아 그래도 로체스터에서 중학교 시절을 영진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보내서 다행이야- 이라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양어머니가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사과를 하신 행위 자체가 고마웠어요. 저는 그 한국 이름과 저를 한국 가족들이 한국 이름으로 저를 불렀을 때까지 연결 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수양 부모님이 저를 이제 리아라고 부르고 영진이라고 불러주지 않아요. 그 호칭이 조금 그립기는 해요. 수양 부모님께 다시 저를 영진이라고 불러달라 요청할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호칭 변화가 제가 예측하지 못한 일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름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면, 아시아계 미국인들 사이에서 소외된 느낌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맞지 않는 이름 때문에 아시아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느낌이죠. 예를 들면 몇몇 영화제는 감독들을 정체성에 따라서 분류하죠. 제 이름이 백인 같으니 항상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분류되어 있지 않아요. 그러한 일들이 제가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리아: 사실 전 제 친가족을 제가 먼저 찾아 나서지 않았습니다. 제가 27세일 때 제 친가족이 저에게 연락해왔죠.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편지를 받았어요. 제 고아원을 통해서 제 엄마가 저에게 편지를 쓴 거죠. 엄마는 저를 만나자고 요구하지 않았고, 제가 무사한지 연락을 하셨습니다. 아주 흥미로운데, 다른 입양아들에게 듣기로는 입양 제도의 여정과 입양 제도에 대한 인식이 빨리 일어난다고 했는데, 제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이렇게 빨랐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약간 우습죠. 그때는 좀 더 입양아 블로그와 페이스북 그룹이 많았던 시기였어요. Land of Gazillion Adoptees(백만 명 입양아의 땅, 한국계 미국 입양아들을 위한 블로그)와 같은 블로그를 구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정치적인 이유로 입양 제도가 운용됐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죠. 그래서 저는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부끄럽죠. 현재 밀레니얼-Gen Z 세대 입양아들은 완벽히 깨어있고 지식도 풍부합니다. 어린 입양아들은 고등학생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전 고등학생일 때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리아: 그래서 제가 친어머니에게 27세일 때 편지를 받았죠. 그리고 말하기 부끄럽지만, 처음에는 그 편지를 무시했습니다. 1년 정도 무시했죠. 그 뒤 매우 정중한 어조로 어머니에게 답장을 되돌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저를 찾으려고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1년간 받아들이고 난 뒤, 어머니와 다른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서 한국에 가기로 했죠.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편지의 부분은 본문이 아니었어요. “내 아가야”로 시작되는 서문이었죠. 제 친어머니의 마음속에는 제가 여전히 아기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20대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고, 상실의 감정을 비로소 느끼게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그걸 느끼고도 1년 정도 일을 미루셨군요.

리아: 너무 감정적으로 무겁기도 했고, 제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감정 상태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디 특별한 곳에 보관해두고 나중에 준비가 되면 받아들이려고 했죠.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 편지에 답하고 싶었고 제가 원하는 방법으로 이 접촉을 상대하고 싶었습니다. 친가족들을 억지로 만나고 싶지 않았고, 일정 방식으로 행동하라는 압박을 받고 싶지 않았죠. 제가 준비됐을 때 가족들을 만나고 싶었어요. 그 편지를 가지고 1년 정도 고민했죠. 사실 지금 그 편지가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잘 보관해야 하는데 말이죠. 그래서 2014년에 한국을 방문했고 동행인으로 제 한국계 입양아 여동생을 데리고 갔습니다. 사실 여동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동행했다면 편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저에게 큰 위안이 되어주었죠. 제 친가족과 입양 가족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리아: 그래서 동방사회복지회 건물에 있는 작은 방에서 친가족을 만났어요. 그 재회와 재회한 뒤 같이 보낸 며칠 동안의 시간에서 제가 가장 예측하지 못했던 일은…. 그 재회가 즐거웠다는 점입니다. 전 재회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해요. 아주 즐거웠고 전부 여성이었죠. 저, 제 입양된 여동생, 제 어머니와 제 언니가 같이 만났어요. 그래서 평범하게 여성 모임 느낌이었습니다. 대전에 있는 가족들 집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면서 요리도 같이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매니큐어를 발라주고, 사진첩도 같이 봤죠. 보통 다큐멘터리나 다른 재회에 대한 묘사가 항상 슬프고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즐거울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충격과 슬픔도 느끼긴 했지만, 더 좋은 경험이 많았어요. 또한, 한국 가족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고, 보수적인 한국 가족에 대한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20대 후반인 제가 결혼하지 않고 아이가 없다는 사실에 화를 내실 줄 알았죠. 하지만 그 시점의 언니도 20대 후반, 아니 30대 초반이었는데 미혼이었습니다. 제 친어머니, 엄마도 사실 결혼하지 않으셨죠. 그래서 전부 미혼 여성으로 산다는 점이 더 좋기도 했어요. 

리아: 제 한국 가족과 제 입양 과정을 생각해보면 다른 가족 구조와 형태, 그리고 가족의 정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게 합니다. 이성애적, 노먼 록웰풍(Norman Rockwell, 미국의 화가, 전후 미국 사회상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전후 핵가족과 다른 가족의 형태 말이죠. 여행에서 기억에 남았던 또 다른 일은 제 아버지, 아빠의 무덤을 방문한 일이었어요. 한국 묘지를 방문했습니다.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그 경험도 무척이나 즐거웠어요. 한국 묘지와 그 문화가 미국 묘지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죠. 묘지 경험 자체가 활기찼습니다. 묘지에 도착하자 가족들과 웃는 애들, 강아지들도 있었어요. 거대한 공원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들어가자 아이스크림 트럭도 있었고 언니가 “나중에 아이스크림 사 먹자.”라고 했죠. 마치 축제에 온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식사를 했습니다. 김밥을 먹고 초콜릿을 후식으로 먹었죠. 그리고 무덤에 올라가자 아빠 무덤에 소주를 좀 붓고 아버지에게 말을 걸고, 가지고 온 꽃을 무덤 비석 앞 꽃병에 꽂아 두었습니다.

팟캐스트: 미국인들은 묘지로 소풍을 가지는 않죠.

리아: 우리는 묘지가 무섭죠. 묘지를 지나칠 때마다 숨을 참는 경우도 많고요

팟캐스트: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머니와 언니를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과 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네요?

리아: 제가 미화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첫 만남은 아주 좋은 경험이었어요. 언니가 영어를 잘해서 통역가나 도우미로 활약했죠. 언니 덕분에 경험이 더 쉬워졌습니다. 엄마와 언니 없이 만난 적이 몇 번 있는데 그때는 파파고나 번역 앱을 사용해서 소통해야 했죠. 그 경험 자체가 재밌고 인연을 쌓는 일이지만, 가족에 영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운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전부 여성인 가족 구조가 도움이 됐어요. 시작부터 더 친밀하게 연결될 수 있었죠. 

팟캐스트: 왜 입양이 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들으셨나요?

리아: 좀 더 자세히 물어볼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그 사건과 관련된 사실 위주가 아니라, 입양 시기에 관련된 감정을 배웠어요. 제 친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3주 전에 뇌졸중으로 사망하셨죠. 제 엄마는 아버지를 잃고 과부로서 아이 두 명을 키워야 하는 문제 때문에 감정적 충격을 받으셨어요. 그래서 쉬운 이야기라고 할 수 없지만, 과정 자체는 이렇습니다.

팟캐스트: 미혼 상태라 어머니가 자유로워서 리아 씨와 연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관계가 바뀌었나요? 가족들과 다시 만나셨나요? 장거리로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지 않나요?

리아: 네. 지난 몇 년간 3번 만났습니다. 지난겨울에 한번, 전 가을에도 만났죠. 2018년 추석 때 가족들을 방문했어요. 추석은 한국 추수 감사절인데, 그 경험은 제가 평생 소중히 여길 기억이죠.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친척들도 만나서 확실히 큰 가족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어요. 외가는 7남매고, 친가는 6남매였습니다. 두 분 다 대가족 출신이었고 그렇게 친척을 만나는 것은 제가 자라면서 느낀 경험과는 달랐죠. 미국에서는 교외서 살면서 친척과도 가깝지 않았는데, 한국에서는 이렇게 많은 친척이 생겼으니까요. 새로운 가족과 사회에 포함된 기분이었습니다. 그 경험이 2018년이었죠. 추석을 시골에 있는 제 이모 집에서 보냈습니다. 그 이전까지 서울이나 대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서울 바깥의 경험을 해본 것 자체가 신선했어요. 산에 가서 밤을 수확했는데 아주 즐거웠습니다. 이모가 아주 대단하셨죠. 거대한 밤나무를 몽둥이로 쳐서 밤을 떨어트리고 발로 밟아서 까고…. 그리고 먹고, 마시고, 늦게까지 놀고, 술 게임도 하면서 아주 즐거웠습니다. 같이 보낸 추석이 친가족과 보낸 두 번째 경험이라 매우 불안했어요. 오히려 첫 번째보다 더 불안했죠. 그래서 제가 유일하게 알고 있던 가족과 재회한 입양아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제가 그 입양아가 가족과 다시 만났다는 사실을 안 이유는 뉴욕 타임스지에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죠. 그래서 가족을 만난 입양아들을 위한 정보와 자원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입양아들을 위한 재회를 위한 자료 보관소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재회를 한 입양아 중 상당수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미국에서 살면서 한국 가족과 연락하려는 사람을 위한 지원은 여전히 부족하죠. 

팟캐스트: 영화 제작자로 재회를 영상으로 찍을 생각은 안 했나요? 

리아: 조금 찍긴 했어요. 니콜 정(Nicole Jung)의 인터뷰를 듣고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더군요. 재회하고 난 뒤에 바로 영화를 찍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어요. 이러한 친척들을 가지고 있고 이 모든 게 아름답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제가 지식으로 가득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요소를 확인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모든 일이 더 복잡하고 어려워졌죠. 저는 한국 가족과 재회 그 자체보다 재회와 관련된 요소에 더 불만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전 영화를 만들기는 하겠지만, 다른 입양아 영화들과 같은 훌륭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입양아의 기쁨과 관련한 영화를 찍고 싶죠. 대부분 영화는 입양아의 트라우마와 관련되어 있거든요. 그리고 젊었을 때부터 입양아들이 한국을 즐기고 자신의 즐거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영화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목적은 입양아의 기쁨이에요.

팟캐스트: 재회가 반복할수록 여러 가지가 복잡해졌다고 하셨는데,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리아: 제가 한국 가족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지난 겨울이었고, 그때는 한 달 동안 한국에서 거주했습니다. 이유는 언니가 결혼해서 조카가 태어났거든요. 제가 이모가 되었죠. 저보다 어린 친척을 보게 될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또 엄마가 아기를 안고 모성을 보이는 모습을 보니 감정적으로 흔들리더군요. 아기 때 그러한 유대를 만들지 못했죠. 하지만 그러한 감정 자체를 예측하지 못해서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또한, 그 방문 때 제 수양 여동생의 한국 남자친구도 만났어요. 저번 한국 방문 때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제 수양 여동생을 만나기도 했죠. 제 수양 여동생은 제가 한국 가족과 만난 만큼 제 한국 가족과 만났어요. 하지만 이번에 입양 가족의 복잡함을 더 깊게 알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입양 부모와 입양아의 관계가 아니라 입양 형제자매 간의 관계 문제도 알게 되었죠. 처음으로 자매에게 다른 가족이 생겼다는 것에 대한 상실감과 긴장감이 생겼어요. 그리고 그러한 감정선에 관해서 준비되어있지 않았죠. 아무도 이러한 형제자매 간의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생각해보면 제가 아주 순진했다는 생각이 들죠. 여동생은 언니가 이모가 된다면, 내 아이의 언니가 먼저 되지, 한국 가족의 이모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고백했어요. 여동생도 예측하지 못한 감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감정에 관해서 이야기한 적도 없고 감정적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으니까요.

팟캐스트: 자신의 언니를 공유해야 한다는 감정과 싸워야 했군요?

리아: 네 그렇습니다. 거기에 여동생한테는 현재 한국에서 사는 입양아들이 많으니, 그 경험을 놓치고 싶지 않은 감정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현재 한국에서 살려고 하는 한국계 입양아들이 늘어나고 있죠. 입양아를 위한 지원 제도와 대표성이 한국에 어느 정도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여동생의 자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보죠. 물론 여전히 대화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고 있어요. 카오미 씨가 이야기했지만 모든 입양아의 경험은 다릅니다. 저와 제 여동생은 같은 국가 출신에 같은 집에서 자라났어요. 하지만 입양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다르고 입양에 대한 감정도 다르죠.

팟캐스트: 리아 씨는 한국에 돌아가서 거주하실 의향이 있나요?

리아: 네. 영화를 만들고 싶거든요. 사실 COVID-19 사태가 터지기 전에 봄에 한국에 가서 영화를 찍으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2021년에 모든 일이 정리된다면 한국에 갈지도 모르겠네요. 

팟캐스트: 영화는 자전적인 이야기인가요?

리아: 가상의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서사가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현재 입양에 대해서 서사가 있는 영화가 있는지 생각을 해보는데 제가 기억할 수 있는 영화는 한국계 프랑스 입양아가 찍은 브레이브 뉴 라이프입니다. 카오미 씨는 보신 적이 있나요? 

팟캐스트: 아뇨

리아: 진짜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감독의 삶을 기반으로 했지만, 서사가 있는 가상 영화죠. 이미 수많은 좋은 다큐멘터리들이 세상에 있으니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는 사실이 좋았어요. 제가 고향 집에 돌아온 뒤 제 입양서류를 읽어 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몰랐던 내용을 알게 되었죠. 그리고 그중 하나는 제 수양 부모님이 제 언니를 입양할 수 있냐고 물었던 점입니다. 제 언니는 제 친어머니 손에서 자랐고 여전히 한국에서 살고 있죠. 그리고 제 양부모님, 동방사회복지회, 그리고 제 친어머니가 연락한 편지들도 발견했어요.

팟캐스트: 그리고 부모님이 이런 이야기를 못 들었군요?

리아: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그 사실을 알게 되니 여러 방면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편으로는 입양에 맡겨지지 않은 아이를 요구한다는 사실 자체가 역겹고 끔찍한 일이었죠. 입양 자체를 고려하지 않은 아이를 요구했다는 사실이 저에게 매우 역겹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제 부모님에게 그 문제를 인지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비록 오래전이었지만 말이죠. 그래서 제 수양 부모님이 제 친어머니의 상황을 알고, 언니도 입양을 맡길지에 대해서 사회복지단체를 통해서 물어봤고 친어머니는 제 언니는 돌볼 것이라고 답장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대화를 나눠야 했다는 사실이 슬프죠. 친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지키고 어머니의 권리를 지켜야 했다는 사실이 끔찍해요. 이 사실을 저번 주에 처음으로 알았는데 이걸 듣고 든 생각이 제 언니가 한국에서 자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꼭 언니와 이야기를 해봐야 하지만 제가 가진 한국에서, 한국 가족과의 성장 욕구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죠. 아직도 그런 욕망이 있어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한국에서, 한국 가족과 자라나고 싶었다는 욕망을 직접 마주 보게 했죠. 

리아: 제 친어머니에 대한 분노는 없습니다. 어머니가 고생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니까요.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고, 알게 되고, 슬픔을 알게 되자 어머니의 인간성을 알게 된 느낌이죠. 제 수양 부모님에 대해서도 지난 한 달간 같이 지내면서 생활하면서 그분들의 인간성과 경험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 수양 부모님에 대한 분노가 있긴 해요. 하지만 그분들도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적, 백인우월주의적 제도에 맞춰서 핵가족을 만들고 한국 아이들을 입양했던 거죠. 한국 전쟁, 양공주 문제, 한국 미혼모에 대한 지원 부족으로 생겨난 수많은 고아, 사회복지와 안전망 부재 등이 저를 더 분노케 합니다. 또한, 이것이 BLM 운동과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백인 구세주 서사와 백인 자경단 서사와 연관이 있지요. 백인들이 들어가서 돕는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손해를 끼치는 이야기입니다. 

팟캐스트: 사회적, 경제적 문제도 있겠네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니 자매를 둘 다 입양하고 싶다는 느낌이 강하네요.

리아: 우선 언급을 해두자면, 제가 이 에피소드를 듣고 제 감정에 대해서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자의 관점으로 보면서 제가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리아: 사실 팟캐스트에서 제가 엘레나와 함께 만들고 시각적 연대표에 관해서 이야기할 생각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엘레나 김 씨인가요? 

리아: 네. 지난 1년간 엘레나와 같이 일하면서 한국 입양아 역사의 시각적 연대표를 만들고 있었죠.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아계 미국인 역사를 배우면서 알았는데 자신의 역사와 근원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래서 이 계획에 아주 큰 기대하고 있어요. 입양아 그리고 영화 제작자로서 시각 정보의 힘을 알고 있고 이러한 정보를 학계에서 뽑아서 입양아 대중에게 전달하고 싶습니다. 현재 이 계획을 위한 예산을 모금하고 있어요.

팟캐스트: 시각적 연대표가 정확히 무엇이죠?

리아: 지금 찾아내고 있는 도중이지만 설명을 하자면 접근성이 높고, 입양아 역사를 아시아계 이민자의 경험을 엮어내려고 하고 있어요. 미국 원주민 기숙 학교의 역사를 1880년대의 중국인 배제법과 이민자 국적법의 도입, 한국 입양아와 베트남 입양아의 역사 등을 하나로 연결한 연대표입니다. 그러한 시각적 연결의 시도는 지금까지 없었고, 그러한 정보를 만들어 제공하고 싶어요. 물론 입양아들이 이것 관련 조사와 연구를 하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학자가 되어서 감사할 뿐입니다. 제가 배운 입양아 관련 정보는 전부 거기에서 나왔으니까요. 

팟캐스트: 리아 씨가 만들 작품들이 기대되네요. 기발한 아이디어와 계획이 있으시니까요.

리아: 감사합니다. 저도 매우 기대하고 있어요. 엘레나와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었지만 격리되어 있어서 만나지는 못했죠. 그래도 이번 가을부터 계획을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팟캐스트: 또한 입양아의 기쁨이라는 아이디어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요.

리아: 아주 중요한 관점이라고 생각해요. 흑인 영화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죠. 그린 북, 노예 12년, 문라이트 같은 흑인이 가진 트라우마에 대한 영화나, 흑인이나 입양아와 같이 핍박받는 정체성에 대한 영화는 많죠. 

팟캐스트: 리아 씨를 사람들이 구독하거나 연락하고 싶으면 어떻게 할 수 있죠?

리아: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어요. 마마(Mrawmrawsf)라는 이름이죠. 또한,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있는 훌륭한 단체와 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아누피라는 이름이었지만 현재는 Mpower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죠. 그리고 백인 구세주 서사에서 벗어난 입양아 서사들도 언급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나이지리아 출신 감독이 찍은 루츠(Roots)라는 미니 시리즈에요. 현재 훌루에서 방영중인 스릴러죠. 다인종간 입양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을 합니다. 옥타비아 스펜서와 나오미 왓츠도 등장하죠. 아주 흥미로운 작품이에요. 그리고 현재 저는 다른 다큐멘터리를 위한 애니메이션도 제작 중입니다. 우리의 딸(Our Daughters)라는 작품인데 동남아시아 커플과 인도계 커플이 각자 백인 쌍둥이를 입양하는 이야기죠. 그 이야기를 사람들이 보기를 원해요. 다인종간 입양에 대한 편견을 많이 없애 주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