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4, Episode 15: 선아 마리 레이번

Audio available Feb. 22, 2021 at 12:00 ET.

한국계 입양아 선아 마리 레이번 (38세)는 생후 4개월 만에 한국에서 미국 테네시주로 입양되었다. 양어머니가 어렸을 때 돌아가시고, 학교에서 흑인도 백인도 아닌 채로 삶을 헤쳐 나가야 했던 레이번 씨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감정을 숨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육자, 연설자, 코치, 팟캐스트 진행자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최근 레이번 씨는 개인적 정체성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름을 한국 정체성을 반영하도록 바꾸었다. 

선아: 안녕하세요! 선아 마리 레이번이라고 합니다! 38세이긴 한데, 나이 기억하는 게 어렵네요. 시간이라는 게 다 그렇죠. 뭐. 현재 제가 자란 고향인 테네시주 멤피스에 돌아와서 지내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테네시주에서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선아: 전 멤피스에서 자라났는데 멤피스는 흑인과 백인의 비중이 높은 도시에요. 역사적으로 흑인과 백인의 비중이 높은 도시였죠. 물론 현대에 들어서서는 좀 더 인종적으로 다양해지고 있죠. 히스패닉 인구도 늘었고, 아프리카 흑인계 인구와 아시아계 인구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멤피스에는 중국계 인구도 많았죠. 물론 역사적으로 중국계 멤피스인들은 무시되어 온 경향이 있어요. 이야기가 딴 길로 샜으니 다시 돌아가면, 제가 자란 동네는 랄리라는 동네였는데 흑인과 백인 비중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제 학교, 동네에서는 백인이나 흑인이 아닌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죠. 자라면서 백인에 섞이거나 흑인에 섞이거나 둘 중 하나를 정해야 했어요. 적어도 제가 사는 동네는 다른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제가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다른 멤피스 출신 한국계 입양아를 만났어요. 그리고 그가 말하길 “입양아 단체와 활동하기도 했고…” 그걸 들은 저는 “뭐요?”라고 답했죠. 제가 경험해보지 못해서 이야기를 들어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팟캐스트: 선아 씨가 다닌 학교는 자발적 인종적 구분이 되어 있었나요? 백인들과 흑인 애들이 서로 따로 놀았나요? 아니면 좀 더 통합된 분위기였나요? 

선아: 살면서 여러 학교에 다녔죠. 그래서 다닌 학교마다 답이 달라요. 초등학교 때는 제가 유치원, 초등학교 1학년, 2학년을 다 다른 학교에 다녀서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백인 위주의 초등학교를 계속 다녔죠. 거기에는 제가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자발적인 분리가 있었어요. 중학교는 아주 큰 중학교에 갔죠. 다양한 집단의 아이들이 있었어요. 인종, 취미, 음악, 기타 등으로 집단이 나뉘었죠. 그래서 중학교 때는 확실히 인종 분리가 있었죠. 고등학교는 제 동네에 있는 고등학교에 갔습니다. 거기는 대부분 흑인이 사는 곳이었어요. 그래서 다른 인종들이 인종적 분리가 일어날 정도로 많지 않았죠. 물론 2명 정도의 백인 애들이 따로 돌아다니긴 했지만 서로 사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애들을 제외하면 흑인이 아닌 애들이 너무 적어서 아예 따로 집단을 만들 수 없는 수준이었죠. 

팟캐스트: 그때는 어떤 정체성을 가지셨다고 생각하시나요?

선아: 살면서 다양한 정체성을 거쳐 갔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가 어디에 맞는지 찾으려고 생각했죠. 중학교 이전까지는 백인 친구들과 더 공감하고 더 맞았다고 생각해요. 백인 가족들과 같이 자라났고, 백인 정체성이 더 강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고등학교를 골라 입학할 수가 없었어요. 특수 교육 제도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점수가 나빠져서 떨어져 나왔죠. 중학교-청소년기의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정체성 문제, 어머니의 사망, 거대 중학교 적응 문제가 있어서 결국 제가 배정받은 고등학교에 갔어요. 그 고등학교는 흑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제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죠. 수많은 흑인 친구들을 보면서 그들의 정체성, 친구들, 인연, 사회에 대해서 배웠고, 사고방식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중학교는 국가적으로 인정받는 중학교였고 따라서 자원도 많았죠. 하지만 제 지역 학교를 와보니 사람과 예산이 적은 공립학교였어요. 시점의 변화를 겪으니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공평한 기반을 가지고 공평한 기회를 받는다는 관점이 무너졌죠. 모든 것에 대한 사고방식이 바뀌었어요. 그리고 인종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차이점은 인종 구성밖에 없었거든요. 

팟캐스트: 사람들이 선아 씨를 어떻게 인식하셨죠?

선아: 고등학교 때는 제가 입양아였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제가 흑인 위주 학교의 유일한 아시아계였기 때문이었기 때문에 절 아시아계라고 인식했을 뿐이었죠. 반면에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똑같은 아이들과 계속 학교를 같이 다녔기 때문에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서로 가족들에 대해서 알았고, 형제자매가 있는지, 이혼했는지, 부모 혼자 키우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았어요. 그래서 제 초등학교 친구들은 제 어머니가 죽었고,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제 입양아의 정체성이 더 컸죠. 사람들이 제 가족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학교에 아주 다양한 가족 형태가 있었고, 서로 정보를 알고 있어서 정체성에 하나 더 추가된 정도였습니다. 제 입양 사실이 한번 언급되었던 일은 초등학교 시절에 친구와 말다툼을 했을 때였어요. 그 애가 저에게 “내 엄마는 날 사랑해서 입양 제도에 맡기지는 않았다고!”라고 말했죠. 물론 우리가 그런 생각을 이미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고, 애가 저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한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애는 할머니가 키우던 애였어요. 자기 자신의 상황을 감추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 같았죠. 그 애도 어머니와 살고 있지 않았고, 양육할 수 없어서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그 애와 다르게 백인 부모님이 학교에 데리러 오거나 하는 일들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숨길 수 없었고, 그래서 이런 말을 하기 쉬운 상대였어요. 

팟캐스트: 애들과의 소속감 문제 때문에 동네 고등학교로 진학했을 때 백인 부모님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나요? 

선아: 아주 좋은 질문이네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다니던 중학교를 계속 안 다녀도 됐기 때문이죠. 제가 중학교와 연계된 고등학교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의 친구들과 사이가 틀어졌기 때문이죠. 하지만 제가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그 친구들이 마음에 안 들어도 같이 다녀야 하고 고등학교 때까지 봐야 했습니다. 같은 학교에 다닌다면 계속 봐야 할 그 친구들과 헤어지고 새로운 학교에 갈 수 있어서 기뻤을 뿐이죠. 

팟캐스트: 새롭게 선아 씨의 이미지를 바꿀 기회였군요?

선아: 그랬습니다. 사실 아는 사람이 없으니 새로운 학교에 가는 일이 매우 무서웠어요. 하지만 동시에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가 말한 것처럼 새로운 시작을 할 기회였죠. 그래서 최대한 즐겁게 새로운 학교생활을 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중학교 때 영재 교육을 받았을 정도면 성적 우수자였죠?

선아: 네.

팟캐스트: 그래서 성적 우수자나 모범생으로 규정되거나 관련 선입견 문제를 겪은 적이 있나요? 

선아: 제가 어렸을 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절 포함해서 아시아계가 2명 밖에 없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좀 더 신경 쓰이기 시작했죠. 아시아계이니 성적이 좋겠지, 좋게 나오겠지라는 선입견과 기대를 받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선생님이 저를 1학년 더 빠르게 월반하게 하려고 했죠. 제 독해 능력 덕분에 부모님에게 월반을 권유했고, 월반하게 되었어요. 아버지가 말하기를 나이 많은 애들 사이에서 적응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적응하기 어려운 이유는 나이 많은 애들 때문이 아니었어요. 제가 멤피스에서 사는 아시아계 입양아였기 때문이었죠. 나이 문제는 그리 큰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팟캐스트: 많은 입양아는 인종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자랐죠. 

선아: 그랬죠. 인종은 최대한 언급되지 않았고, 문제가 있다고 해도 우리 가족 내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문제였습니다. 인종 문제는 흑인 사회에서 일어나는 흑인 문제이지, 우리가 직접 겪는 문제는 아니었죠. 전 이 나라는 기회의 땅이며, 평등의 땅이니, 열심히 노력하고 일하면 뭐든지 이뤄 낼 수 있고, 다른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개인의 책임과 선택 문제라고 교육받고 자랐어요. 그리고 배운 사실을 전부 다 믿었습니다. 전 그런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고, 제 부모님이 저에게 말하는 일이었고 전 제 부모님을 믿었죠. 어른이니까, 삶이 그런 식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인식 자체를 못하거나, 나중에나 인식해서 적응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제가 어렸을 때 그러한 선입견을 깨부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렸을 때 사실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전에도 들은 적이 있는데, 아주 힘드셨겠군요? 그때 선아 씨가 외동딸이셨나요?

선아: 네. 외동딸이었고 아주 완벽히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어머니 관련 문제를 다 겪는 느낌이었어요. 어머니가 제가 9살이었나 10살 때 유방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이미 치료할 수 없는 시점까지 전이가 되어 있었죠. 그래서 부모님은 어머니가 최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기로 했어요. 그래서 제 어머니의 암이 진행되면서 어머니가 아니게 되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습니다. 아이로서 어머니가 하는 말이나, 어머니가 하지 못 하는 일 등, 어머니가 변화해서 이해할 수가 없는데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했죠. 아주 힘든 경험이었어요. 거기에 더해서 제가 이러한 슬픔에 대한 대응력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않았고, 그 뒤 몇 년 동안 울지 않았어요. 따라서 억압과 관계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가 뒤따라왔죠. 정신적으로 아주 불안정한 몇 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또 다른 어머니를 잃었다는 감정과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버림받은 기분을 느껴야 했어요. 

팟캐스트: 그때 또 다른 어머니를 잃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셨나요?

선아: 아뇨. 그렇게 인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는 이미 입양에 대한 여러 가지 억눌린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죠. 제가 이러한 감정을 인식하게 된 이유는 제 아버지가 저를 정신 상담을 하게 해주었기 때문이었어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제 감정을 이해하고 인정하게 도우려고 하는 상담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죠. 분노와 슬픔 같은 아주 기본적인 감정부터 인식하고 인정하는 일부터 시작하게 되었고, 상담사는 감정을 찾아서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이야기를 하셨어요. 이게 필기 형식이었는지, 구어 형식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단어 연결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온 단어 중 하나가 어머니였어요. 어머니와 여성 관련 단어가 잔뜩 있었지만, 그 단어들과 제가 연관시킨 단어들이 전부 부정적이었죠. 무책임하다, 접근 불가능하다, 등 나쁜 단어들로 가득했습니다. 어머니, 여성, 부모,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감정이 가득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상담 자체도 매우 짧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제가 도움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상담사한테서 상담 치료사에게 인계해줬죠. 첫 번째 상담사는 기본적인 상담을 해주시는 분이셨고, 이분은 진짜 상담 치료를 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상담 치료사가 저에게 처음으로 한 말은 만약에 상담 치료사를 계속 바꿔야 한다면 문제는 저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었죠. 전 고작 어린 애였고 10명이나 20명을 넘어갔다면 모를까 이번이 제 두 번째 상담사였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이상했어요. 그래서 그 상담 치료사에게는 다시 가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잘하셨네요. 

선아: 네 듣고 나니 어이가 없었어요.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거나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버림받는 기분에 대한 수용 절차를 시작하셨던 것 같네요.

선아: 네.

팟캐스트: 삶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계셨으니까요.

선아: 그렇죠.

팟캐스트: 무의식적으로 친어머니에 대해서도 그런 감정을 가졌을 수도 있었겠네요.

선아: 네 그렇습니다. 그때는 친어머니에 대해서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거든요. 정확히 말하자면 인식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은 하고 있지 않았죠. 그 시점에는 제 삶에 두 명의 어머니를 둘 정도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아버지와는 친밀한 관계였나요?

선아: 네. 아주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시는 분은 아니었어요. 적어도 언어적으로는 그랬죠. 설명하기 어렵지만, 아버지는 항상 절 사랑하신다고 하고, 현재는 다른 주에 살고 있지만 직접 만나면 애정 표현도 하고, 서로 안기도 하고, 제 삶의 중요한 일에 반드시 참여하셨습니다.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모든 행사를 보시는 부담스러운 아버지였어요.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런 애정이 필요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여러 연극, 연주회가 있었고 아버지는 제가 참여하는 연극과 연주회에 항상 참여하셨죠. 전 치어리더였고 아버지는 제가 나가는 모든 스포츠 대회에 참가하셨고, 댄스팀에도 참여했는데 아버지는 거기에도 계셨습니다. 초등학교 때 일인데 멤피스 오페라와 공동 공연을 하게 될 기회가 있었어요. 그리고 부모님에게 표를 나눠줬는데 가장 윗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공연할 때 그 윗자리를 보니 아버지가 몸을 흔들면서 우리 공연을 보고 있더군요. 아주 부끄러웠죠. 아버지는 항상 행사에 참여하셨습니다. 하지만 애정을 말로 표현하지 않았어요. 어떤 부모님은 말을 하는 편이지만, 우리는 안 그랬죠. 우리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그러한 관계가 지속하였나요? 

선아: 약간씩 감정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긴 했죠. 하지만 자주 나누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들어서 조금 늘어나긴 했어요. 4년 전에 아버지가 재혼하셔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죠. 아버지가 재혼하신 여성분은 아이가 있어요. 그리고 재혼하시자 아버지의 사고방식이나 기분이 바뀌는 것을 느꼈습니다. 대화 관련해서 좀 더 열린 태도를 보이시게 되어서 흥미로워요. 아버지를 단순히 아버지가 아니라 똑같은 어른으로 보는 경험은 이상하지만 동시에 아주 재밌었죠.

팟캐스트: 그래서 그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와 선아 씨뿐이었군요? 선아 씨가 자라는 동안 재혼도 안 하셨나요?

선아: 네. 아주 오랫동안 둘이서 지냈죠. 뭐 제가 학사학위를 따고 난 뒤에는 조금 데이트를 시작하셨지만, 그렇게 진지하게 만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그저 우리 둘뿐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아버지와 단둘이 다니다 보니 선아 씨와 아버지를 보고 선아 씨를 외국인 아내로 생각하지는 않았나요? 

선아: 네. 그런데 그러한 착각을 제 청소년 초기부터 받았어요. 아주 끔찍한 일이지만 청소년 초기에 아버지와 함께 장을 보러 갔던 일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은퇴한 해병이시라 군부대에서 살고 있었어요. 군부대 내부라서 더 그런 오해를 하기 쉬웠던 것 같습니다. 군인들이 아시아계 아내를 두는 일은 흔했고, 제 앞이나 뒤의 사람도 그런 식으로 오해를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소리를 듣고 좀 끔찍했죠. 아시아계 여성들이 젊어 보이긴 해도 전 1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아주 기분 나쁜 일이었습니다.

팟캐스트: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좀 해보죠. 그때 친구들이 대부분 흑인이었나요?

선아: 네 그렇습니다. 친구 만드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긴 했죠. 물론 애들이 흑인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친구를 만드는 데 관심이 없었어요. 제가 같은 중학교와 연관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아서 기뻤던 이유는 제 친구들 전원이 가짜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청소년기에 있어서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저에게는 꽤 충격이었습니다. 전부 거짓말을 하고, 서로 뒤에서 욕을 했죠. 이게 우정이라면 이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관계와 관련된 문제가 많아서. 고등학교 시작할 때는 학교에 가고 수업만 듣자고 생각했습니다.

팟캐스트: 주변을 경계하셨다는 말이군요?

선아: 네. 하지만 결국 친구를 만들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제 친구가 된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학교에 유일한 아시아계 여자애와 친구가 된다는 일이 어땠을까요? 그 애에게 말을 걸어보면 이상할지 아니면 평범할지 의문을 가졌나? 이라는 질문을 하게 되죠. 

팟캐스트: 선입견 문제가 있었나요? 아니면 남자애들 관련해서 페티쉬 문제도 있었나요? 

선아: 제가 과거를 되돌아보니 그러한 문제가 많았죠. 제 고등학교 1학년 때 제가 그 학년에서 유일한 아시아계 학생이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 같이 편견 섞인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가라테, 쿵후, 태권도를 할 수 있느냐, 코니 청(Connie Chung, 미국의 유명 아시아계 기자)이나 브루스 리(이소룡)의 친척이냐, 가족이 세탁소, 슈퍼마켓, 중국 레스토랑을 운영하느냐, 그 레스토랑에서 사느냐, 거의 매일 같이 그런 소리를 들어야 했죠. 다행히도 제가 말을 잘하는 편이었기에 때문에 그런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제가 이러한 말에 쉽게 상처받거나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라 다행이었죠. 사람들이 저에게 익숙해질 때까지 그런 소리를 계속 들어야 했어요. 

팟캐스트: 남자애들 관련해서는 페티쉬 문제가 있었나요?

선아: 예. 하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아시아계 여성과 성적 판타지에 관해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랬죠. 하지만 동시에 남자애들이 저와 데이트를 하고 싶어서 하는 애들이 없었기 때문이 아녔어요. 아시아계 여성이 성적으로 개방되어 있다던가, 순종적이라던가, 남자애들이 하자는 대로 하자던가, 그러한 이야기가 들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누구도 저와 데이트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터부 취급이었나요?

선아: 그럴지도 모르죠? 그래도 아무도 데이트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하면 안 되겠네요. 하지만 사람들이 저에게 한 성희롱이나, 성적 농담이나, 헛소리와 사람들이 저와 데이트하려고 하는 비중은 반비례했습니다. 

팟캐스트: 그때 매력적이라고 자기 자신을 느꼈나요?

선아: 아뇨. 성적 대상화가 되었지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죠.

팟캐스트: 둘은 아주 다른 일이니까요.

선아: 그렇죠. 성적 대상화가 된 기분은 들었지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저 자신과 제 외모에 만족하거나, 기쁘거나, 편하지 않았죠. 

팟캐스트: 그때부터 인종 정치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보시나요?

선아: 네 그렇다고 생각하죠. 제가 학교에 가서 첫 수업을 들었을 때부터 제공되는 정보, 자원, 교과서, 기회의 차이를 보고 확실히 그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공평하지 않았으니까요. 모든 사람이 동등한 기회와 선택지를 받는다고 배우면서 자랐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매우 화가 났죠. 그때의 저는 이미 충분히 화난 아이였지만, 그 분노가 어떤 초점에 맞춰졌다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팟캐스트: 학교들 사이에서 느낀 차이점들이 무엇이었나요?

선아: 우선 교과서들부터 달랐죠. 우선, 제가 다니던 중학교는 교과서가 전부 신품이었습니다. 반면에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교과서가 충분치 않거나, 오래된 교과서나, 아니면 너덜너덜한 교과서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거기에 더해서 제 고등학교에는 급식실이 없었습니다. 지자체의 관리 구역이 바뀌면서 관련 건설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급식실이 건설되지 않았던 거죠. 아이들이 밥을 먹을 권리도 없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팟캐스트: 시설들이 관리되지 않거나, 좋지 않거나….

선아: 그렇죠.

팟캐스트: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일도 있죠.

선아: 네 그렇습니다.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죠.

팟캐스트: 선아 씨,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시점이 고등학교 이후였나요?

선아: 고등학교 졸업하고 난 뒤 한참 지난 뒤였습니다. 멤피스에 입양아들도 많았고, 아시아계 집단이 교외에 얼마든지 있다고 들었지만 제가 자란 동네와 제가 살아가는 삶에는 없었어요. 그래서 혼자서 집단의 정체성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아시아인을 살면서 몇 명 만나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겠어요? 한국인을 만난 적도 없는데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질 수 없죠. 제 학교에 중국/백인 혼혈인 아이가 있었고, 일본계 쌍둥이를 알고 있었지만, 정작 한국계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계 정체성의 뜻을 몰랐어요. 그래서 대학교를 멤피스로 진학했습니다. 멤피스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가게 되었어요. 그렇게 한국계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서서 한국인들과 같이 서 있는 경험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죠. 

팟캐스트: 한국에 관심이 있어서 교환학생을 신청하셨던 거죠?

선아: 네. 관심이 있었어요. 하지만 자라면서 변화했죠. 제가 어렸을 때는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관심을 충족할 방법이 없다면 관심이 떨어지게 되죠. 인터넷이 생기기 전이니 제가 도서관에 가서 입양, 입양아, 제 경험에 관한 책을 찾아서 읽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제 지역 도서관에는 관련 정보가 전혀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입양아에 의한 정보는 없었겠군요.

선아: 네. 적어도 그 시기에는 없었죠. 제 부모님이 말해주실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었고 입양에 대한 기억은 매우 달랐습니다. 그분들은 한국을 개발도상국으로 인식하셨으니까요. 정보를 찾을 수 없으니 물어보지 않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연설을 들었어요. 시스터 소울자(Sister Souljah, 미국의 유명 흑인 운동가)의 연설이었는데 그분이 우리 학교 교정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논란이 될 정도였습니다. 흑인 학생과 대담을 하는데 “역사, 뿌리와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죠.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 무언가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라고 생각했죠. 다음 날에 기숙사에 돌아와 보니 교환학생 홍보 포스터가 붙어 있었습니다. 광고 문구가 “아시아를 상상하라!” 이었죠. 그걸 보니 좋아! 상상하자! 이라고 생각하고 바로 교환학생을 신청하러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 담당관이 교환학생을 하고 싶다고 하자 매우 기뻐하면서 친절하게 도움을 줬어요. 어디를 언제 어떻게 갈지 계획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국에 가고 싶고, 다음 학기에 가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자 그분께서 “좋습니다!”라고 답했죠. 그렇게 해서 다음 학기에 한국에 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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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아: 제가 한국에 가게 되고, 장학금을 받아서 갈 돈도 있었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니, 제 삶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어요. 한국에 가면 이걸 하고, 하지 말라는 충고를 해줬고, 그걸 들으니 전문가들이 이렇게 많았으면 제가 자라날 때 이야기를 해주지?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 그런 이야기를 최대한 듣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죠. 선입견을 품고 가서, 그 선입견과 한국을 비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국 방문에 대해서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비행기에 타고 나서, 주변 사람들이 다 한국인이고, 승무원들이 한국어로 말을 걸기도 했습니다. 제 옆에 앉아 있던 남성이 저를 도와줬어요. 제가 뭐가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뭔 음식인지도 모르고, 뭐가 일어나는지도 몰랐죠. 

팟캐스트: 김치를 보고 놀라기도 했나요?

선아: 네. 김치가 뭐지? 이게 다 뭐지, 빨간 소스는 뭐지? 이라고 놀라면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아주 신기한 곳이었지만 동시에 제가 어디로 가야 할지, 말을 하는 방법도 모르고, 심지어 공항을 나가는 방법도 몰랐죠. 그렇게 길을 헤매다 제 가이드를 해줄 학생이 와서 만나서 대학교로 가게 됐습니다. 수원에 있는 아주대학교와의 교류 프로그램이라,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꽤 오랫동안 가야 했죠. 버스를 타고 가면서 소소한 것들이 기억이 나요. 주변 사람들이 전부 비슷하게 생겼고, 버스 운전사도 저와 비슷하게 생겼고, 청소부들도 저와 비슷하게 생겼고,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평범한 일을 하고 있었고 그 경험이 매우 편안했습니다. 

팟캐스트: 제가 한국에 돌아갔을 때는 너무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고 있었고, 그래서 한국을 경험하고 제 뿌리를 찾을 수 없었죠. 물론 제가 한국에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한국을 경험하고, 연결을 만들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선아: 네.

팟캐스트: 선아 씨도 그러한 방어적인 태세로 한국에 접근했나요? 

선아: 네. 제가 한국에 갈 예정이었지만, 한국에 가서 제 뿌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 가족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제가 매우 방어적으로 접근했다고 볼 수 있겠죠. 제가 한국에 돌아간다고 하니 많은 사람이 갑자기 한국 전문가가 된 다음에 하던 이야기가 친어머니를 찾을지, 진짜 가족 조사 여부에 관해서 물어보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저와 제 가족에 대해서 생각하던 관점이 튀어나왔고,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문제가 있긴 했지만, 전 여러 명의 어머니나 여러 가족을 허용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해 있지 않았어요. 제가 제 친가족을 찾으면, 제 입양 가족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했죠. 그분들에게 모욕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에 제가 어디에서 왔고, 한국에 대한 정보를 알기 위해서 갔죠.

팟캐스트: 한국 첫 방문에서 재밌던 일은 있었나요?

선아: 한국 요리를 좋아해서 최대한 많이 먹으려고 했어요. 성공해서 미국에 돌아왔을 때 살이 7kg 나 쪄왔습니다. 한국 음식은 훨씬 싸고 접근성도 편했죠. 길마다 온갖 음식점이 있고 그걸 전부 먹었어요. 삼겹살은 천국의 선물같이 맛있고 대단했습니다. 교수님과 마셔도 괜찮고, 학교에서 마셔도 괜찮은 소주도 좋았어요. 음식의 종류가 아주 많았죠. 거기에 같이 지낸 사람들도 좋았습니다. 20명이 넘는 국제 교환학생들이 있었고, 같은 기숙사에서 지냈죠.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는 일도 아주 즐거웠어요. 미국에서 온 애들이 있었고, 독일에서 온 애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온 애들도 있었죠. 그리고 여행하기 쉬운 곳에 있었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제주도에 가서 아름다운 풍경도 봤고, 등산도 했고, 아주 아름다웠어요. 여행하기 쉽고, 음식도 맛있고 한국의 생활이 아주 좋았습니다. 좀 더 길게 지내고 싶었어요.

팟캐스트: 새로운 세계가 열린 기분이셨군요?

선아: 네 그렇죠. 음식을 제외하고 한국에 가서 가장 좋았던 일은 눈에 띄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군중 속에 섞여 들어갈 수 있었어요.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거나, 이상한 질문을 하거나 단순히 사람이 될 수 있었죠. 그냥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었어요. 그 사실에 매우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팟캐스트: 처음으로 맞아 들어갔으니까요?

선아: 네 그렇습니다. 최초로 주변과 섞여들어 갈 수 있었죠. 

팟캐스트: 다른 입양아들과도 만난 적이 있나요? 교환학생 중의 한 명이 입양아였나요? 아니면 한국에 와있는 입양아를 만났나요?

선아: 아뇨. 만나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한국인들이 선아 씨에게 어떻게 반응했나요?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나요?

선아: 아뇨. 사람들이 전 보고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절 확실히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어요. 길을 걸어가다 보면 사람들이 길을 물어보더라고요. 그럼 제가 한국말을 못한다고 답하고는 했죠. 그럼,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절 보더니 사과했습니다. 제가 알게 된 학생들은 아주 한국인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했죠. 그 애들이 제가 더 한국인 같게 느끼게 하려고 거짓말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기뻤고 한국인 얼굴을 가지고 있다니 대단한 느낌이었습니다. 국제 입양아는 주변에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죠. 한국어가 내부에 잠재되어 있으니 노력하면 한국어를 말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그리고 저는 그걸 듣고. 그래. 내가 내 뇌의 일부를 개방해서 한국어를 기억해내면, 내 4개월간의 지식이 나를 도와주겠지! 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어를 배우셨나요?

선아: 네. 모든 교환학생이 배웠죠. 아주 대단한 선생님이 있었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지낼 때는 한국어를 많이 배웠습니다. 저에게 아무도 영어로 말을 걸지 않았으니까요.

팟캐스트: 연습을 많이 하게 되었군요?

선아: 네. 연습도 많이 하고 많이 듣게 됐죠. 그래서 돌아다니고, 식사 주문은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하지만 다시 미국에 돌아오니 그 실력이 다시 녹슬어버렸어요. 

팟캐스트: 선아 씨는 똑똑하고 성실하니, 공부를 잘 하시는 데 익숙하시겠죠? 한국어 수업 때는 배우는데 고생을 하셨나요? 

선아: 아뇨.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어 배우는 것도 쉽게 하셨군요? 

선아: 네 쉬웠습니다. 전 한국어가 꽤 쉽다고 생각해요. 압박을 받지 않았죠. 몇몇 사람들이 뇌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는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어요. 한국어가 음성 언어라 한글을 배우고 나면 한국어를 읽어서 이해할 수 있어서 초기에는 배우기 쉬운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국어 전체를 배우는 일은 어렵지만, 적어도 단어를 배우는 일과, 문자를 배우는 일은 쉽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그 경험이 현재 직업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요?

선아: 그렇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하죠. 사회학자이자 한국 입양을 공부하는 제 직업의 기반을 닦았다고 보긴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니라고 생각해요. 해외에서 공부한 뒤 멤피스에 돌아오니 제가 지내던 환경은 똑같았죠. 수천 명의 한국인이 갑자기 제 삶에 추가되지도 않았고 한국계 입양아를 단 한 명만 만났으니까요. 그래서 현실적으로 한국계 입양아 사회가 존재하고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돌아왔을 때 그냥 일상으로 복귀한 셈이었으니까요. 그다음에는 계속 멤피스에서 몇 년간 지냈고, 그 결과 다른 한국인들이나 한국계 입양아를 만날 수 없어, 한국인이나 한국계 입양아의 정체성을 구축할 수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그렇다면 국제입양에 대해서 어떻게 공부를 시작하시게 되셨죠?

선아: 항상 생각하던 일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정보가 없었거든요. 자신과 관련된 정보가 전혀 없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입니다. 지역 사회에서도 존재하지 않고, 책에서도 드러나지 않고,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죠. 그래서 이런 공부를 해서 다른 사람들이 제가 느낀 기분을 다시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제 갈망을 이루는 데는 꽤 오래 걸렸어요. 전 사회학 교수가 되고 싶었고, 한국계 입양아, 인종, 정체성에 대해서 더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대학교를 2005년에 졸업했지만, 대학원에는 2012년에나 진학했죠. 전 교수가 되고 싶었고 박사학위를 따고 싶었지만, 제가 대학원을 진학하고 싶었던 대학교가 제 진학을 거부했습니다.

팟캐스트: 그렇다면 그 대학교와 대학원 진학 기간 사이에는 무엇을 하셨죠?

선아: 인생을 살고 취직해야 했죠. 먹고 살려면 일해야 하니까요.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했습니다. 취직을 사람들이 쉽다고 생각하는 데 어려운 일이에요. 제가 5월에 졸업했는데 8월에나 취직할 수 있었죠. 그리고 제가 취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리타가 멤피스를 강타했고, 그래서 그 피해 지원과 복구를 위해서 제가 서류를 넣었던 멤피스 사회 복지 시설 쪽에 예산이 배정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목록에 등록된 사람들을 고용하려고 했고 한창 구직 중이었던 저는 인터뷰하겠다고 했죠. 그리고 사람들이 제 전공과 맞는 일은 아니라고 했지만 저는 돈 버는 일이라면 저랑 맞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직접 도울 수 있는 일을 하고,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사회 복지를 할 수 있어서 기뻤죠. 그다음 아동 복지와 관련해서 일했습니다. 아동 복지는 수많은 행정절차와 체계 때문에 사람들을 직접 도울 수 없어서 아주 답답한 일이죠. 일하면서 제 꿈을 이루기 위해서 동시에 대학원에 지원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대학원들은 여전히 저를 거부했습니다. 일어나지 않을 일 때문에 삶을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계속 지원하는데도 떨어졌으니 결국 꿈을 놓아줘야 했죠. 꿈을 놓아주니 아주 자유로워진 느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가지에 계속 집중하고 있었는데 이제 여러 기회가 열렸고, 뭐든지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한다고 매일 술 마시고 슬퍼하는 것보다는 뭐든지 해보기로 했습니다. 사회 복지 관련 일을 그만두고 나이트클럽에서 한 4년 정도 일해봤죠. 

팟캐스트: 그럼 어떻게 다시 그 사회 복지로 복귀하게 되셨죠?

선아: 제가 나이트클럽과 관련된 삶을 살아보니 즐겁긴 했어요. 사람들은 나이트클럽과 바에 가서 즐기려고 나오죠. 동시에 사회와 정체성과 관련된 삶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는 정체성에 깊은 관심이 있었죠.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정체성을 어떻게 결정하는지, 그리고 첫인상과 기대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관심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사회학자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대학원에 지원해보기로 했어요. 만약에 받아들여지면, 대학원을 가고, 아니면 MBA를 따려고 했죠. 제가 일을 좀 해보니 단순히 NGO나 사회 복지가 아닌 사업에서도 일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대학원에 들어갈 수 있었죠. 좋아. 성공했으니 해볼까?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아: 제가 연구하고 싶은 주제인 정체성과 심리학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어떻게 조사해야 하는지도 알아서 입학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동시에 제가 알고 있는 교수님이 제 대학원 입학을 추천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죠. 대학원도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인맥 문제이고, 특히 아주 훌륭한 후보들이 많은 분야에서는 사람의 추천이 들어가야 합니다. 제가 연구하고 싶은 주제는 두 가지였는데, 운이 좋게도 두 가지 다 할 수 있었죠. 하나는 제 삶과 정체성 관리였고, 다른 주제는 한국 입양과 정체성에 관한 연구였습니다. 그 두 가지가 제 목표였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노력했죠. 하지만 그때에도 입양아 사회에 참여하지 않았고, 입양아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메릴랜드 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고 워싱턴 DC 지역에서 살기 시작하자 한국 입양아들과 만날 수 있었고, 제가 연구를 시작하면서 입양아 사회의 일부가 되기 시작했죠.

팟캐스트: 워싱턴 DC에서 얼마나 지내셨죠?

선아: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서 6년 동안 거기에서 생활했죠.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의문점을 가지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만, 입양아들은 입양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정체성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죠. 우리가 입양아 사회에 들어가면 그냥 또다시 맞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됩니다. 저도 그런 느낌을 느꼈어요. 어돕션 링크스 DC(Adoption Links DC, 워싱턴 DC 기반 입양아 단체)에 대해서 배우고 페이스북에 가입했습니다. 하지만 입양아를 직접 만나기는 무서웠어요. 아주 흔한 일이죠. 입양아들도 마음에 안 들고, 공통점이 없다면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지 않을까 무서웠습니다. 

선아: 하지만 직접 만나고 나니 공통점이 많았어요. 우리가 어렸을 때 일어난 입양이 우리를 하나로 엮어줄지 궁금했지만, 입양이 우리의 삶에 비슷한 방식으로 영향을 주더군요. 인종, 민족, 소속감, 미국인의 정체성 등이 비슷하게 우리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가 아시아인이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소속감, 시민권, 그리고 가족 구성에 대해서 생각하는 점이 비슷하더군요. 모든 일이 제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가족에서 유일한 아시아인인 경험, 사람들이 아버지와 결혼할 줄 알거나, 다른 입양아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편안하더군요. 그러한 경험들이 저 자신에 대해서 좀 더 만족할 수 있게 도와주었죠. 전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저 자신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제 백인 가족과 인종과 인종차별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동정을 받거나, 판정을 받지 않기 위해서 입양아들이 아닌 사람들과 입양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죠. 사람들이 입양 부모가 친부모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때도 많으니까요. 제가 누구인지 받아들였고,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었어요. 다른 입양아들과의 교류가 저 자신과 제가 누구인지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주었죠.

팟캐스트: 설명하기 어렵지만, 입양아들이 전부 타인이지만 서로에 대한 연대감이 바로 생겨나는 일이 있지 않나요?

선아: 네 그렇습니다. 설명하기 어렵죠. 입양아 사회 경험이 없거나 그렇게 깊게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한 연대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입양아 사회에 깊이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짜 그러한 연대감이 생깁니다. 왜 이러한 감정이 생기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었는데 이러한 연대감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흥미롭기도 하죠. 원래는 제가 친부모 조사를 하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친부모 조사를 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제 이름을 바꾸기도 했고, 이 경험을 하는 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팟캐스트: 입양아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보게 되는 느낌이네요. 친부모 조사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한국에 방문하는 일에 대해서 20세 때에 어떻게 하겠다고 마음을 먹어도 30세나 40세 때에는 마음이 바뀌니까요. 시간이 바뀌면서 나이를 먹고 삶을 경험하면서 감상이 바뀌게 되죠.

선아: 그렇죠.

팟캐스트: 입양아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한 적이 30세 때였죠?

선아: 네

팟캐스트: 선아 씨와 동갑인 입양아들이 처음으로 한국 정체성에 관심을 가지거나 다른 입양아들과 최초로 접촉하려는 일도 많았나요?

선아: 네. 아주 많았어요. 아주 흔했죠. 30대에서 40대가 넘은 사람들이 한국계 입양아 사회에 처음으로 접촉해왔습니다. 정체성 확립을 청소년기나, 20살 초반에 자연스럽게 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입양아 사회에는 나이를 좀 먹고 난 뒤에 자기 정체성을 생각하게 된 사람들이 많았어요. 아이를 가진 뒤에 가족과 자기 정체성을 생각해보고 온 사람들, 아니면 자아 성찰이 가능할 정도로 성공하거나 자원을 확보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단순히 한국에 돌아가는 일만 아니라 입양아 컨벤션 같은 데 참여하기 위해서라도 자금이 필요하니까요.

팟캐스트: 한국 이름으로 개명하는데 얼마나 생각을 해보시고 바꾸셨죠? 

선아: 제가 한국 이름으로 개명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때는 20대 중반 때였습니다. 그때는 단순한 아이디어였죠. 이름 자체가 바꾸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하라며 말리기도 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 생각을 그만두고 꽤 오랫동안 살았죠. 

팟캐스트: 아버지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셨나요? 

선아: 네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이름을 바꾸는 데 방해가 되던 생각이나 부끄러움이 한 번에 해결이 되었죠. 대학원에 다니면서 입양아 사회와 교류하고, 아버지가 교제하시다가 재혼하시고, 가족의 개념이 바뀌는 일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법적으로, 아니면 사회적으로 자기의 이름을 한국 정체성을 반영하도록 바꾸는 일이 많다는 일을 배웠어요. 이러한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니 더 생각하게 됐고, 더 받아들이기 쉬워졌고, 아버지가 재혼 과정에 들어가니, 제가 가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약혼하시고 난 뒤에 제 최초의 친부모 조사를 시작했어요. 우리 가족에 대한 개념이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제 친부모를 찾기 시작해도 아버지가 상처 입거나 화내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죠. 아버지가 좋은 생각이라고 응원하셨어요. 물론 10년 전에도 반응이 똑같았을지는 모르죠. 개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그걸 응원해주실 때 YOLO(You only live once, 한 번만 사니 삶을 즐기라는 유행어) 이라는 단어도 쓰셔서 제 아버지인가 아니면 다른 누구인가 고민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어머니가 제가 본명을 쓰고 싶다면 쓰게 해주라고 하셨다고 했죠. 물론 전 그걸 듣고 언제 그러셨는지, 제가 왜 이걸 몰랐는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니 기분이 좋았죠.

팟캐스트: 아버지의 재혼이 선아 씨가 가진 유일한 가족의 책임을 덜어준 것 같나요?

선아: 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제가 자신이 가진 유일한 가족이라고 말하고는 하셨습니다. 물론 아버지에게는 형제자매도 있었지만 각자 가족이 있었으니 제가 유일한 가족이었죠.

팟캐스트: 아버지가 그렇게 나오시는데, 다 좋은데 제 뿌리를 찾으러 한국에 갔다 오겠다고 할 수는 없죠.

선아: 네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재혼하시자, 저와 아버지에게 새로운 문이 열렸어요. 아버지가 새로운 아내가 생겼고, 아버지가 기대고 서로 지탱할 수 있는 분이 있으니 우리의 관계를 더 좋게 발전시켜 주었습니다. 

팟캐스트: 개명과정은 어땠나요?

선아: 네. 그러니 2018년 12월 13일에 개명을 했습니다. 5월 28일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멤피스에 취직해서 8월 18일에 멤피스로 돌아왔죠. 제 삶의 새로운 단계에 돌입했습니다. 9월 시카고에서 열린 KAS 한국 입양아 주말 축제에 참여했죠. 거기에서 제이슨 레이놀즈가 한국, 중국 입양아들의 `개명에 대해서 강의를 했습니다. 저도 그의 강의를 들어본 적이 있죠. 하지만 그날 그의 강의를 듣고 나서 개명을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앞에 말했던 것처럼, 모든 일이 맞아 들어가서 제 개명하기로 했어요. 처음에 생각하기로는 1년 내로 이름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IKAA(세계한인입양인협회) 관련 행사로 한국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어서, 개명하고 여권을 바꾸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했죠. 제 친구들에게도 이름을 바꾸겠다고 언급했는데 모두가 저를 지지해줬어요. 제가 갑자기 바꾸겠다고 했지만, 주변 사람 전부가 지지를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왜 이름을 바꾸는데 기다리는지 물었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 않느냐고 되물었어요. 그걸 들으니 확실히 그렇구나, 이라고 생각해서 구글에서 찾아봤습니다. 테네시주에서는 개명 비용을 내고 신청하기만 그만이죠. 단순히 돈만 내면 됩니다. 

팟캐스트: 아주 쉽네요?

선아: 네. 아주 쉽죠. 서류를 작성하고, 증빙 서류를 가지고 와서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돈을 내고 나면 그걸로 끝입니다. 다른 주에서는 신문에서 이름을 바꿨다고 선언하거나, 다른 일을 해야 하지만, 테네시주에서는 그냥 돈만 내면 됐죠. 그래서 확인한 다음 지역 법원에 내려가서 개명하고 싶고, 입양아고, 관련 서류도 가지고 왔으니 이름을 바꿀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법원 직원들이 이야기하더니 가능하다고 말하고, 제가 돈을 냈어요. 언제 이름이 바뀌느냐고 묻자, 직원들이 다음 주에 올 수 있냐고 했습니다. 제가 가능하다고 답했죠. 그게 다였습니다. 다음 주에 돌아오자 이혼이나 다른 이유로 개명을 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성과 이름을 동시에 바꾸더군요. 판사가 빚을 피하고자 개명을 하느냐, 등의 기본적인 질문을 했고 그 뒤로 개명을 했죠.

팟캐스트: 판사에게 개명 이유를 뭐라고 말씀하셨죠.

선아: 제가 태어났을 때의 이름으로 개명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죠. 그러자 판사도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이네요! 이라고 지지해주었습니다. 제가 법을 어기기거나 그러지 않았고, 판사도 일하는 것뿐이었기에 매끄럽게 진행이 되었죠.

팟캐스트: 개명하기 전의 이름이 뭐였죠?

선아: 웬디였습니다.

팟캐스트: 개명하신 뒤에 전환 기간은 어땠나요? 친구들이 선아 씨를 계속 웬디라고 불렀나요? 아니면 바로 선아라고 불러줬나요?

선아: 금방 바뀌었습니다. 제 친구들이 개명을 지지해 줘서, 법적으로 개명하기 이전에도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줬죠. 절 전부 지지해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제 개명된 이름을 알려주면서 많이 도와줬어요. 고향에 돌아와서 이름을 바꾸는 일은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몇 년 만의 지인들을 만나면서 제가 이름을 바꿨다고 알려줘야 했습니다. 제가 새로운 도시로 이사를 가면 새로운 이름을 쓰는 것으로 끝났겠지만, 여기에서는 그렇지 않았죠. 

팟캐스트: 고등학교 때의 친구들이요?

선아: 네. 심지어 제가 몇 달 전에 입사한 직장에서도 개명을 알려줘야 했지만, 모두 손쉽게 개명을 받아들여 줬습니다. 아무도 거부하지 않았어요. 어떤 사람들이 “네 이름을 이걸로 배웠으니 나에게 있어 네 이름은 항상 이거일 거야.”라고 하는 경우가 있지만, 저는 그런 경험은 없었죠. 가족들이 개명한 제 이름을 어려워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친구와 직장 동료들은 저를 지지해줬습니다. 아주 대단한 경험이었죠.

팟캐스트: 이름을 바꿨을 때 어머니에 대해서 생각하셨나요?

선아: 어떤 어머니 말씀이시죠?

팟캐스트: 아 그렇죠. 친어머니와 양어머니 두분 다 포함입니다. 

선아: 아뇨. 두 분 다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 친어머니가 제 이름을 지어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 이름이 자신의 한국 가족과 연결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죠. 실제로 한국 가족이 한국 이름을 지은 예도 있어요. 하지만 저의 경우에는 제 한국 어머니가 제 이름을 짓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입양 서류에 너무 많은 거짓 정보가 기록되어 있어 정확히 알 수 없죠. 제가 가진 정보로 생각해보면 한국 어머니가 제 이름을 지었다면 놀랍겠네요. 전 한국 가족과 더 깊은 유대감을 추구해서 제 한국 이름을 되찾지 않았습니다. 제 한국인의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 중 하나로 제 한국 이름을 되찾았죠. 세상에 제 정체성을 한국계 입양아 미국인으로 선언하기 위한 개명이었지, 제 친어머니와의 연결성을 되찾기 위한 개명은 아니었어요. 

팟캐스트: 하지만 성은 계속 남겨두셨네요?

선아: 네.

팟캐스트: 성을 남긴 것도 선아 씨의 선택이었나요?

선아: 네. 너무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법적으로는 그렇지 않겠지만 사회적으로, 그리고 소통하는 데 문제가 된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제가 결혼하게 된다면 제 성을 또 바꿔야 하니 딱히 바꿀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제 한국 이름을 이름으로 쓰고, 제 중간 이름을 제 입양 가족이 준 이름, 친가 쪽 할머니 이름인 마리를 보존하고, 제 성은 제가 결혼하게 되면 남편 가족 이름으로 바뀌겠죠. 그렇게 된다면 이름 전체가 제 정체성을 상징하는 이름이 생각해요. 

팟캐스트: 레이번이라는 성을 보존한 이유는 선아 씨의 입양아 정체성을 상징하는 일이기도 했겠군요? 

선아: 네 그랬습니다.

팟캐스트: 선아 씨의 친부모 조사는 어떻게 되었나요? G19 IKAA 회의에 참여하셨나요?

선아: 네.

팟캐스트: 그럼 그때 친부모 조사를 진행하셨나요? 

선아: 제가 친부모 조사를 2번 진행했습니다. 지난 2번 IKAA 회의에 참여하려고 한국에 방문했거든요. 첫 조사는 2016년 IKAA 회의 때 진행했죠. 한국에 가니 조사를 해보자는 사고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의 벼락치기 수준으로 생각해서 진행했죠. 어돕션 링크스 DC의 회원 중 한명인 스티븐이 자신의 조사에 대해서 말해줬는데, 친부모 조사는 단순히 입양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친어머니가 원하는 일이 될 수 있다고 했어요. 친어머니가 저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시작하기 위한 동기가 되어주었습니다. 서류를 작성해서 조사를 해보고 뭐가 일어나는지 보자고 생각했어요. 2016년에는 아버지가 결혼을 준비하시고 가족 관련 일도 일어나고 있었죠. 그리고 제 친어머니를 찾아서 연락했다고 입양 기관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연락을 받았지만, 답을 하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저와 접촉을 거부했다 연락이 왔죠. 당시에는 저는 안심했습니다. 그때에는 이미 미국 관련 문제가 쌓여 있었기 때문이죠. 제가 만나보지 못한 여성과 아버지가 재혼하실 예정이라 가족 문제를 이미 해결해야 했고, 그래서 친가족과의 접촉은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때, 친어머니가 접촉을 거부했을 때 약간이지만 안심했습니다. 

선아: 저번 IKAA 행사로 한국에 방문하니 다시 한번 조사를 해보자고 생각했죠. 다시 연락하고 어머니가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쉽게 안다는 사실이 이상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또 대답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이번에는 안심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조사하고 싶었으니까요. 단순히 충동적으로 한국에 오니 찾자고 생각하지 않았죠. 제가 원해서 진행한 조사였습니다. 그 결과 제 감정도 다르게 반응했어요. 왜 제 친어머니가 저의 접근을 거부하는지, 제가 잘못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나? 이라는 의문도 들었죠. 입양 제도 연구자로서 부모가 왜 연락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서 잘 압니다. 결혼했을 수도 있죠. 아니면 문제로 취급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사생아를 낳았다는 일 자체가 부끄러울 수도 있고, 수백만 가지의 상황적 문제가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개인적인 문제고, 개인으로 부모와의 연결을 다시 찾고 싶을 때는 개인적인 문제로 여겨지게 됩니다. 저에게 어떤 문제가 있길래 제 친모가 만남을 거부할까요? 왜 어머니가 자식을 찾으려고 않죠? 제가 충분하지 않은 느낌이 들고 상처를 입게 되고 감정적으로 불안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제가 아직도 감정적으로 불안정하고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모성, 어머니와 아이에 비중을 두고 세상에 많은 일이 개인적 문제로 끝나지 않죠. 특히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타인들의 문제가 큽니다. 하지만 그게 개인적 문제에 영향을 끼치면,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기 쉽기 마련이죠. 

팟캐스트: 입양 기관이 뭐라고 했나요? 연락이 오지 않았으니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나요?

선아: 네 그러더군요. 한국에 살고 있던 친구가 입양 기관들은 입양아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했죠. 입양 기관들이 연락하지 않은 채로 입양아들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아예 일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 관련 영수증을 요구하거나, 다른 정보를 요구할 수 있다고 조언을 해줬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는 제가 그 모든 일을 할 힘이 모자랐죠.

팟캐스트: 감정적으로 아주 힘든 일이긴 하죠. 

선아: 네 그렇습니다. 물론 자료를 보기 위해서 예약을 할 수도 있지만 전 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죠.

팟캐스트: 선아 씨의 입양 서류를 보지 않았군요?

선아: 네. 왜 그러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팟캐스트: 입양 기관이 이름, 연락처, 주소를 아는데도 선아 씨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아서 화가 났나요?

선아: 네. 아니 잠깐만요. 사실 어머니 이름을 아는 것 같습니다. 음…. 하지만 신빙성이 부족하죠. 제 서류에 기록되어 있는 어머니의 이름, 그리고 생년 월일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 서류상 자료가 사실이라면 정보를 알고 있죠. 하지만 어머니의 주소나 연락처는 모릅니다. 

팟캐스트: 어머니와 연락이 됐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이렇게 멀다는 점이 답답하시나요? 

선아: 그런 방식으로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네요. 그런 이유가 친어머니가 저와 연락을 하고 싶지 않다면, 연락을 안 할 권리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입양아 중 일부가 어머니를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머니를 찾으려고 하죠. 이미 말했지만, 저에게는 이름이 있고 생일이 있어요. 이 두 정보가 있으니 제가 어머니를 찾아내려고 한다면 찾아낼 수 있겠지만, 어머니가 그 문을 열고 싶지 않다면 열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제로 어머니를 만나고 싶지 않고, 그 가능성에 거부감을 느껴요.

팟캐스트: 그래서 다음으로 하실 일은 무엇인가요? 

선아: 삶에서 말인가요?

팟캐스트: 네 그렇죠.

선아: 제가 다음에 할 일은…. 개인적인 일과 직업적인 일로 나뉘네요. 직업과 관련된 일은 한국 입양, 한국 입양아들의 시민권, 소속감, 가족에 관한 책을 쓰고 있습니다. 한국계 입양아의 소속감, 가족, 시민권이 매체와 정책으로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시민권, 가족, 사람에 대한 정의를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에요. 책의 원고를 끝내고 있고, 출판 계약을 맺어서 여러분들과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 멤피스 출신이나, 거주민들을 초대해 그분들이 지역과 국제적 문화, 오락, 정치에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언어적으로 효율적(Verbally Effective)이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죠. 친한 친구와 함께 어려운 아름다움(Difficult Beauty) 이라는 팟캐스트도 진행하고 있어요. 여성적인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직업, 아름다움, 가족에 관해서 이야기하죠. 남자친구와 함께 어떤 컵이 우리 컵이지? (Which Cup is Mine?) 팟캐스트를 하나 더 진행하고 있어요.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지었는데, 교제 상대와 이야기를 해야 하는 불편한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위한 팟캐스트죠. 제가 제 직업을 위해서 진행하고 있는 일들입니다. 

선아: 개인적으로 제가 하는 일은 좀 더 저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좀 더 약점을 드러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제가 살면서 항상 혼자 있고, 버림을 받을까 무서워했고, 그 모든 일이 저에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이 일은 저에게 깨달음과 같아요. 제가 개명을 하면서 제가 더 개방적이게 되고 저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도움을 줬다고 봅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끼쳤죠. 그래서 전 지금 제 약점을 받아들이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봅니다. 제가 이런 단계에 도달할지는 몰랐죠. 하지만 좋고, 나쁘고, 끔찍한 자기 자신을 100%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쁘고 즐거워요. 다른 사람들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도 기쁘죠

팟캐스트: 현재 남자친구와의 교제 관계를 이러한 변화 덕분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선아: 여러 가지 변화와 요소의 융합이라고 생각하죠. 제 이름을 되찾은 일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도와주었다고 생각해요. 저 자신을 숨기며 부끄러워하는 일에서 저를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러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죠.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숨기려고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알게 됩니다. 힘을 낭비하고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셈이에요. 제 이름을 되찾은 일이 저 자신을 재구축하게 해주게 도와주었고, 제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도움을 줬습니다. 전 선아이고, 한국인이고, 입양아고, 이 모든 것이 저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도와줬어요. 그리고 현재 남자친구와 관계가 이러한 사고방식을 현실화하는 데 도움을 줬죠. 가르시아와 내가 교제하기 시작했을 때 저 자신이 무서워하는 일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움을 줬습니다. 그중 하나는 절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인식하고 대화하는 일이었죠. 제가 이 말을 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면, 그 말이 제가 해야 하는 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벽을 만들려고 하는데 절 이해하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서 동시에 제 문제를 지적하고 바뀌게 하는 일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 내 잘못을 인정하게 만드네. 정말 싫다. 이러는 식이었죠

팟캐스트: 가르시아 씨가 선아 씨가 개방적으로 되도록 만들었군요?

선아: 네. 그가 저에게 개방적으로 되어도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죠.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고, 약해져도 된다는 확신을 줍니다. 

팟캐스트: 과거에 교제 관계들을 의도적으로 망치거나, 끊거나 그런 일이 있었나요? 

선아: 네. 사람들에게 날카롭게 나가서 제가 책임을 지지 않거나, 약점을 보이지 않거나, 성장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거기에 데이트 상대들도 나쁜 상대만 골랐습니다. 아니 나쁜 상대들은 아니었죠. 성공하지 못할 상대들을 의도적으로 선택해서 교제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약해지거나, 성장하거나, 사람들의 반응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도록 했어요. 

팟캐스트: 개방과 성장이 넘치는 삶의 지점에 도달하신 것 같네요. 아주 흥미로워 보여요. 행운을 빕니다.

선아: 아주 흥미롭죠. 성장이 보이지만 어떻게 성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무언가 일어나고 변화하고 있죠. 그래서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 아주 좋아요. 

팟캐스트: 사람들이 선아 씨와 연락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아: 아 네. 인터넷을 통해서 저와 연락할 수 있습니다. 트위터에서 저는 @SunAhMarieOnly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중이고, 페이스북에도 SunAhMarieOnly이라는 계정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페이스북 활동을 거의 하고 있지 않아요. SunAhMarieOnly 계정인 인스타그램과 트위터를 따라오시면 제 홈페이지와 제 팟캐스트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자주 활동을 하고 있어요. 트위터는 개인용으로 사용할지, 직업용으로 사용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그리고 다이어트하고 싶으면 페이스북 계정을 구독하면 되나요? 

선아: 아 고마워요. 

팟캐스트: 대단하더군요. 보고 있으면 저도 다이어트하고 싶어져요.

선아: 에너지가 넘쳐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