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omig의 모든 글

시즌 4, 에피소드 24: 마리 킨더

Audio available 4/26/21 at 12:00 EST.

2016년에 마리 킨더 씨, 한국 이름 창마리 씨 (33세)는 런던의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 스티브 씨와 함께 한국에서 여섯 동안 살며 친어머니를 찾기 시작했다. 킨더 씨의 친부모 조사는 슬픔과 실망을 하게 했지만, 그 고통을 한국 화장품을 통해 치료하며 한국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창구로 삼았다. 현재 킨더 씨의 영국 기반 한국 화장품 판매회사 뷰티 앤 서울(Beauty and Seoul)은 4년 넘게 성공적인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킨더 씨는 한국에 대한 관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관점, 자신이 살아오면서 배운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마리: 제 이름은 마리 킨더입니다. 현재 런던에 살고 있어요. 오늘 런던의 날씨는 맑은데, 런던에서는 특이한 날씨죠. 제 한국 이름은 창마리입니다. 제 양부모님이 제 한국 이름을 남겨뒀죠. 몇 달 있으면 34세가 됩니다.

팟캐스트: 현재 런던에 살고 계시지만 마리 씨의 국적도 하나의 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이죠?

마리: 네 거기에도 깊은 이야기가 엮여 있죠.

팟캐스트: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마리: 사람들이 제 억양을 듣고 어디 출신 억양인지 구분을 못 하죠. 영국 억양도 아니고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제 부모님이 저를 입양하셨을 때 우리 가족은 호주에 살고 있었죠. 그래서 전 호주 국적을 가지고 있어요. 어머니는 영국-아일랜드계이고 제 아버지는 네덜란드인이죠. 제 결혼 이전 성은 네덜란드계 성인 밴 하켄이었어요. 그런 환경에서 11살 때 호주에서 도쿄로 이주해 몇 년간 지냈죠. 제 고등학교 시절은 암스테르담에서 지냈습니다. 대학교는 영국에서 나왔고 영국에서 살기 시작했죠. 결혼한 상대는 웨일스인이에요. 다양한 국가들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팟캐스트: 확실히 호주 억양이 들리기는 하는데 다른 억양도 들리기도 하네요. 저도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억양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우리가 공감을 잘하는 사람들이라 다른 사람과의 억양을 맞춰준다고 생각해요. 

마리: 저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죠. 8년간 미국 국제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미국식 억양이 나오기도 합니다. 특히 미국인과 이야기할 때 자주 드러나죠.

팟캐스트: 사람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뉴질랜드 출신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나요? 

마리: 많은 사람이 제가 호주 출신이라고 생각하죠. 호주 억양을 없앴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듣기로는 여전히 그 억양이 남아있는 모양입니다.

팟캐스트: 마리 씨를 한국에서 만났을 때는 이러한 배경을 몰랐는데 사람들과 교류할 때 과거를 전부 소개하지는 않으니 당연한 일이죠. 마리 씨가 일본에서 거주했는지는 몰랐습니다.

마리: 네. 2년간 일본에서 거주했죠. 일본에서의 경험은 좋았어요. 11살에서 12살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전부 즐기지 못하긴 했지만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 뒤로 몇 번 돌아가기도 했지만,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살면서 국제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일본을 전부 경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죠. 도쿄를 아주 좋아했어요. 아주 좋은 도시였습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셨죠? 교육 업계에 종사하셨나요?

마리: 아버지가 영국통신에서 일하고 계셨죠. 부모님은 항상 여행을 좋아했어요. 부모님은 중동에서 만나고 8달 만에 결혼하셨고, 지난 40년간 금실 좋은 부부로 지내셨죠. 아버지가 호주로 이사해야 부부가 같이 호주로 이사했어요.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어렸을 적 여름방학 때는 같이 가족들과 여행을 다녔던 기억이 있죠. 아버지는 해외발령 자체를 즐기셨고, 아시아에 발령받을 기회가 생기자 부모님이 둘 다 가자고 결정하시고 이사하셨습니다. 저는 자주 이사해야 하는 상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11살 아이는 친구가 있는 곳에서 다른 나라의 학교로 전학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그러한 경험이 마리 씨의 적응력을 높여줬나요? 학교를 자주 바꾸거나 군인 아이들이라 자주 이주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시간을 들이기 어려워서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마리 씨의 경우는 어땠나요?

마리: 제가 친구들을 사귀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초등학교 때는 꽤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였죠. 하지만 항상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환경에 놓이고 수많은 학교에 다니다 보니 저에게 자신감을 자주 생겼습니다. 그래도 4살 때부터 가장 친했던 내 소꿉친구야- 이런 사람들을 보면 조금 질투를 하기도 하죠. 그러한 깊은 친구 관계는 없으니까요. 아니면 사람들이 친구는 몇 명 없는데 오래된 친구 관계를 유지해온 때도 부럽습니다. 이렇게 국제적인 생활을 하면 아는 사람은 많지만 진정한 친구 관계는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죠. 현재 런던에 정착한 상황에서 저와 가장 친밀한 친구들은 런던에 있는 친구들이에요. 런던에 고작 12년만 살았으니 좀 신기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특이한 성장 과정이라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왜 마리 씨의 부모님이 한국에서 입양하셨는지 아시나요? 그리고 외동딸이셨나요? 

마리: 네. 외동딸입니다. 제 부모님은 불임이었죠. 제 어머니가 여러 번 유산하셨고 그래서 입양을 염두에 두고 계셨어요. 전 1984년에 태어났는데, 그때 한국은 국제입양의 본산지였죠. 현재 영국 주 국제 입양 국가는 중국이지만 그때는 수많은 사람이 한국에서 입양하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에게 다른 국가에서 입양하고 싶지 않았냐고 물었는데 한국이 눈에 띄셨다고 하셨죠. 어머니가 한국에서 입양하신 사람을 알고 계셔서 그게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동방사회복지회를 통해서 입양 절차를 시작하셨고, 어머니 말로는 몇 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서류 준비와 인증 등에 시간이 걸렸다고 하셨죠. 관련된 이야기인데 전 항상 부모님에게 남동생을 입양해달라고 부탁했어요. 항상 남동생을 원했죠. 부모님이 또 다른 아이를 입양하려고 생각도 해보셨지만 제가 워낙 말썽꾸러기라서 부모님이 저로 만족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해야겠네요

팟캐스트: 부모님과 관계는 돈독한가요?

마리: 운이 좋게도 부모님과 관계가 아주 돈독한 편이죠. 코로나 이전에는 부모님을 만나러 2주마다 1번씩 부모님 집에 방문했어요. 현재 부모님은 런던에서 몇 시간 떨어진 영국 교외에서 살고 계시죠. 부모님과 관계가 돈독해서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마리 씨의 근처에 살기 위해서 이사했나요?

마리: 네. 그러셨죠. 제 부모님은 원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살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런던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한다고 하니 너무 멀다고 하셨죠. 그 말에 저는 비행기로 15분 거리인데 그리 멀지 않다고 했지만, 부모님이 영국으로 이사를 오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영국에 와서 정착하셨습니다. 

팟캐스트: 현재 마리 씨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하면 당연히 한국인의 정체성도 가지고 계시겠지만 그 정체성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자기소개 방법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나요?

마리: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저 자신을 소개하는 일에 자신감이 붙었다고 생각해요. 저를 한국계 영국인이라고 소개하죠. 한국계라는 점을 먼저 언급해요. 제가 청소년기와 20대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다르죠. 그때는 저를 한국계라고 소개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저 자신을 영국계 호주인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렇게 저를 소개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제 출신지를 다시 물었습니다. 그 말에 저는 영국계 호주인이라고 다시 말해야 했죠. 제 한국계 배경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34년이 지나고 나서야 제 한국계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제가 한국계 영국인이라고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제 한국계 배경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꽤 걸렸어요. 

팟캐스트: 한국에 처음으로 돌아간 때는 언제였나요? 혼자 한국을 방문하셨나요? 아니면 부모님이나 스티브 씨(마리 킨더 씨의 남편)와 방문하셨나요?

마리: 제가 어렸을 때, 9살 때 제 부모님과 같이 방문했습니다. 그때 방문은 잘 기억나지 않고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일주일간 학교 안 가도 되고 휴가를 보낸다는 느낌이었죠. 제 조국이고 제 출신국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으로 되돌아간 때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관련된 기억이 잘 나지 않죠. 가 23살 때 스티브와 같이 갔을 때가 처음으로 제대로 한국에 방문했던 때였어요. 그때는 한국을 제 출신국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에 그렇게 관심이 없었고, 제 부모님이 한국에 방문하라고 권유하셨죠. 저와 스티브를 위한 비행기 표가 있으니 한국에 방문해서 시간을 좀 보내고 한국이 어떤 곳인지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조국을 아는 일은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공짜로 표도 받았겠다 가자고 했죠.

팟캐스트: 공짜 표도 있고 사실상 공짜 여행이니 가도 손해는 없다고 생각하셨군요?

마리: 네. 그렇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결혼 선물이었나요?

마리: 결혼 선물은 아니었죠. 부모님이 꽤 오랫동안 계획하셨는지는 몰라요. 제가 한국에 가야 한다고 생각할 때까지 부모님이 기다리려고 했지만, 너무 오래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한국에 처음으로 방문할 때는 관련 지식이 전혀 없었어요. K POP과 K-드라마가 큰 문화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몰랐죠. 한국에 대한 어떤 인식도 없었습니다. 한국 음식이 어떤 맛인지도 몰랐죠. 하지만 2주간 한국을 여행하면서 한국과 사랑에 빠졌어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계속 울었습니다. 그때 스티브에게 한국 문화를 이제 겨우 알게 됐고, 계속 체험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죠. 하지만 그때는 한국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랐어요.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죠. 아직도 첫 한국 방문 때 찍은 사진을 다시 돌아보고는 해요. 좋은 기억입니다.

팟캐스트: 마리 씨의 블로그에서 읽었는지 아니면 스티브 씨가 이야기했는지 기억이 잘 안 지만, 제가 리 씨와 친구이기도 하니, 기억하기로는 첫 한국 방문 이후로 한국을 떠나려고 할 때 감정적 붕괴를 겪어서 스티브가 걱정했다고 들었어요.

마리: 우리는 여행에 여러 가지 경험을 꽉 채워 넣으려고 했죠. 여행은 좋았고 매일 즐겁게 일어났어요. 하지만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창문 밖의 풍경을 보면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몇 주간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니 감정 조절이 안 되어서 울기 시작했고, 돌아와서도 울고 있었죠. 옆에서 그 모든 일을 보고 있던 스티브도 마음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스티브도 제 고통을 이해하고 제 기분을 알았어요.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제가 사랑에 빠지고, 제 고향이라는 느낌이 드는 한국을 떠나야 하니 화가 났죠. 다시 한국에 돌아올 수 있을지 몰랐으니까요. 

팟캐스트: 그 여행을 계기로 마리 씨의 입양아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한국에 그러한 감정적 연결성을 느끼셨나요?

마리: 한국에서 돌아온 뒤 몇 달 동안 상당히 우울했죠. 그리고 한국에 집착하게 되었어요. 한국에 전혀 관심이 없다가 한국 요리를 시험해보고, 한국 음악을 듣고, 한국 드라마를 보고 20년 동안 제가 경험하지 못한 문화를 전부 경험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문화 흡수를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 한국에 형제나 자매가 있을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러한 의문이 제가 왜 입양되었는지, 어떻게 입양 제도에 맡겨지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했죠. 그렇게 친부모 조사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입양 기관에 돌아가서 본격적으로 친부모 조사를 시작했던 때는 어느 시기였죠?

마리: 제 첫 2주간 여행 동안 동방사회복지회를 방문해서 제 서류를 확인하고 위탁 가정을 방문했죠. 사실상 정신 건강을 유지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어요. 돌아온 뒤 몇 년이 지나고 나서 조사를 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방사회복지회를 통해서 조사를 시작했지만, 동시에 제가 입양되었던 호주 정부 기관을 통해서 조사를 시작했죠.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조사였어요. 제 입양 서류에는 이미 아주 많은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죠. 친부모가 어떻게 만났는지, 친부모의 학교, 이름, 고등학교까지 전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사 자체가 편하게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팟캐스트: 아주 많은 정보가 있었네요? 

마리: 네. 아주 많은 정보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검열되어 있었지만, 아버지가 제가 어렸을 때 따로 원본 서류를 복사하셨는데, 그 서류는 검열되어 있지 않았죠. 그래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어요.

팟캐스트: 오. 우리가 알아야 하는 정보인데 그렇게 확보를 해야 하니 문제가 있네요.

마리: 그렇죠. 우리가 알아야 하는 정보이죠. 그래서 처음에는 아주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다른 한국계 입양아를 만나본 적이 없어서 그 절차가 어떻게 진행될지 그리고 제가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전혀 몰랐죠. 그때 제가 영화 트윈스터즈(Twinsters)를 보게 됐어요.

-영화 트윈스터스 발췌-

영화 대사: 그 애도 한국에서 11월 9일에 저와 같이 입양됐죠.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출생신고는 서울에서 받았어요. 저와 똑같습니다. 

-발췌 끝-

마리: 한국에서 IKAA(국제입양인연대)에서 개최하는 회담이 열려서 거기 가서 다른 입양아를 만나겠다고 생각했죠. 겸사겸사 친부모 조사를 해보려고도 생각했습니다. 스티브와 저는 친부모 조사를 위해서 장기 휴가를 받아서 한국에서 살아 보려고 생각했어요. 동방사회복지회와 같이 일하려고 생각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낙관적인 생각이었습니다. 2016년에 저는 런던의 직장을 그만뒀고, 스티브는 안식년을 받아서 한국에서 6개월 동안 살면서 친어머니를 찾기로 했죠. 제가 생각하기로는 일이 아주 쉽게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의 작은 도시 출신이셨나요?

마리: 제 자료에 따르면 제 친부모님들은 군산에서 사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군산은 충청남도 대전 근처에 있는 도시인데, 한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흔하다면 흔한 소도시에요. 아주 작은 곳이죠. 제 자료에 따르면 제 부모님은 서로 다른 계급 출신이었다고 해요. 아버지는 농사꾼의 아들로 그렇게 학교에 관심은 없었지만, 육체적인 능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반면에 어머니는 수줍음이 많고 공부를 잘하는 중산층 출신이었다고 하죠. 어머니는 부모님의 압력으로 아버지와 헤어졌는데 어머니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자기 오빠가 공부하고 있던 대전으로 도망쳐서 대전에서 제가 태어났고, 제가 서울로 보내졌다고 하더군요.

팟캐스트: 부모님이 고등학교 시절 연인이었군요?

마리: 거기에 다른 계급 출신이었죠. 로맨스 영화 같네요.

팟캐스트: 그렇네요. 하지만 그렇게 정보가 많았고, 사회도 작은 편이었는데 왜 찾는 데 문제가 있었죠? 

마리: 입양 기관과 관련해서 전혀 진행이 전혀 되지 않았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이름이 제 서류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고 했죠. 

팟캐스트: 기관에서 이름들을 인정하지 않았다고요?

마리: 제 서류에 기록된 부모님의 이름과는 다르다고 하면서 저에게 서류를 보내줬는데, 그 서류는 검열되어 있었죠. 그리고 동부사회복지회에서 전혀 절 돕지 않았습니다. 상태가 괜찮아 보이니 친부모 조사를 해서 이득을 볼 수가 없다는 식으로 언급하면서 조사를 계속 회피했어요. 제가 만약에 그때 좀 더 싸울 힘이 있었다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겁니다. 다른 조사 방식도 확인해봤어요. 입양아들 조사를 도와주는 기관과도 일했고, 심지어 흥신소도 고용해서 제가 찾을 수 있는 정보가 있는지 알아봤죠. 하지만 정보를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찾은 유일한 정보는 제 친어머니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았고, 자료에 언급된 정보와 맞는 사람을 찾았다고 했을 때의 정보였어요. 이 조사는 흥신소를 통해서 얻은 정보였죠.

팟캐스트: 흥신소를 고용하셨군요?

마리: 네. 제가 정보를 찾기 위해서 고용했죠. 그 사람들이 군산의 지도를 보여주고 조사 절차를 전부 도와줬어요. 동방사회복지회에서 전혀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흥신소에서 대부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번역 도중에 이야기가 섞여서 정확한 정보는 모르지만, 어머니가 잘 만나려고 하지 않았는지, 동명이인이었는지, 그쪽이 최대한 노력을 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흥신소에서 연락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흥신소에서 다시 조사를 해보려고 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머니가 직접 동방사회복지회를 통해서 저에게 연락을 해오지 않는 이상 정보를 더 알 수가 없죠. 그렇게 해서 결론이 났습니다. 그 일이 6개월 한국 거주 기간 중 몇 달을 차지했죠. 저는 그 모든 일을 최악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제 정보를 보고, 제 사진을 봤는데도 절 만나고 싶어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저에게 실망하고 계신다고 생각했어요. 그일 자체가 큰 충격이었습니다. 한국에 오면서 많은 기회를 포기하고 와야 했고 스티브도 여러 가지 기회를 포기해야 했죠. 6개월 여행에서의 2개월 차였고, 아주 쉽게 부모님을 찾아서 제 이복동생이나 이부동생들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와보니 어떤 정보도 얻을 수가 없었어요. 그일 자체가 아주 힘들었습니다. 제 부모님을 보고 싶었지만, 제가 한국에 와있었고,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이 모든 일에 잘못 접근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팟캐스트: 움직이지 않는 벽을 무너트리려고 노력하는 기분이셨군요?

마리: 네. 그렇습니다. 제가 말했지만,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중요하죠. 지금 제가 훨씬 성장하고 안정된 뒤에 과거를 보면 그때 기관을 더 압박해서 제 서류를 보려고 해야 했지만, 그때는 다른 입양아들과 교류를 한 적도 없었어요. 절차도 전혀 몰랐고, 제가 봐도 되는 서류를 알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저를 도와줄 통역가도 없었죠. 통역과 번역을 통해서 저를 도와줄 사람도 없었어요. 나중에 제가 다시 돌아가서 해볼지도 모르지만, 용기와 힘을 다시 모아서 접근해야 합니다.

팟캐스트: 시간이 흐르고 난 지금은 그때를 어떻게 생각하시죠?

마리: 다른 입양아들의 생각은 모르지만, 제 경우에는 잊은 적이 없어요. 그때 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결론이 났다고 설득하려고 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자기 스스로 생각했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친부모와 관계가 중요하지 않고,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과거를 알 권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 전부를 알 수만 있다면 제 이야기에 대한 결론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죠. 매일 제 배경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제가 결론을 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팟캐스트: 런던에서 좋은 삶을 살고 있고, 좋은 관계를 맺고 있으니 친부모님을 찾지 못한 일을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았죠?

마리: 네. 사실 그 일에 죄책감이 연관되어 있기도 해요. 양부모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친한 친구들도 많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고, 성공한 사업가이기도 하죠. 표면적으로 보면 성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성공한 삶을 살고 있어도 자신의 근원을 모른다는 사실이 절 놓아주지 않아요. 평생이 지나도 그 욕구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자신의 근원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죠.

-광고-

마리: 제가 생각하기로는 동방사회복지회에 돌아가는 일 자체가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조사를 하지 말아야 하고 제 감정에 관해서 이야기했던 일 자체가 화가 나죠. 

팟캐스트: 그래도 어느 정도는 괜찮아 보이시네요.

마리: 결국 그 기관이 결정할 일은 아니니까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 일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충분히 모으면 다시 도전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벌써 4년이나 지났죠. 하지만 다시 한국에 가서 몇 달 동안 조사를 진행할 수 있는 정신 상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꼭 진행할 겁니다.

팟캐스트: 마리 씨는 직장에서 퇴직하시고, 스티브 씨는 안식년을 얻은 뒤에 한국에 아파트를 빌리셨군요? 지금 생각해보시면 한국에서의 생활은 어떠셨나요? 6달 동안 한국에 계셨죠?

마리: 처음 몇 달간은 한국에서 생활한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했죠. 하지만 조사가 갑자기 끝나고 나니 그 흥분이 가라앉았어요. 제가 한국에 오기로 한 일이 옳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생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블로그를 시작했어요. 블로그에 제 친부모 조사에 대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제가 한국에서 사용해 본 화장품에 대한 평론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2013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방문했을 때는 한국 화장품 업계가 그렇게 거대한지 몰랐죠.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을 시작한 뒤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어요. 스티브와 저는 그 주목도를 보고 한국에서의 남는 시간을 사용해서 사업을 일구고, 한국 화장품을 영국으로 수입해볼까 생각했습니다. 한국 화장품이 미국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지만, 그때는 누구도 영국 시장을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처음으로 한국 화장품을 영국으로 수입할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2013년-14년에 한국에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한국에서 돌아오면서 옷 가방 하나를 화장품으로 채워와서 친구들에게 써보라고 했죠. 스티브가 제가 이렇게 좋아하는 일을 사람들과 같이 공유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이라고 했고 서로 웃고 말았습니다. 제 꿈의 직업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죠. 제 사업을 열어서 한국 화장품을 영국으로 수입하고 싶다고 이야기하고는 했지만 꿈에 불과했어요. 6개월간의 한국 거주 기간 중 마지막 달은 사업 계획을 작성하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기업을 최대한 많이 만나 회의를 하고, 많은 화장품을 시험해보고, SNS 관련 그룹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그다음에 영국에 돌아와서 2달 동안 준비를 하고 뷰티 앤 서울(Beauty and Seoul)을 창업했죠.

팟캐스트: 한국에서 아직 창업하기 전에 화장품 기업들을 만나고 다니는 일이 어려웠나요? 회의를 잡는 일도 어려웠죠?

마리: 네. 제가 계속 화장품 회사들에 전화하는 사진이 있어요. 전 전화하는 일 자체를 기분이 가장 좋을 때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스티브가 저에게 긴장하지 말라고 조언을 해줘야 했어요. 전화했을 때 사람들이 영어를 하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연락이 안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한국에서는 화장품 엑스포나 컨벤션을 자주 했고 그런 거기에 가서 참여 기업들과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요. K-Beauty 무역 박람회도 많이 열려서 거기에서 우리가 막 만든 명함을 뿌리고 다녔죠. 강남에 있는 부티크에 가서 정장을 맞춰 입고 박람회에 참여했습니다. 그때는 웹사이트도 없었고, 그냥 계획만 있었을 뿐이었고, 우리는 계획을 소개하고 다녔어요. 그렇게 한국을 떠날 때 이름과 연락처 몇 가지를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처음 시작했을 때는 작게 시작했어요. 6개에서 7개 정도의 브랜드를 수입해서 팔기 시작했죠. 4년 전에 그렇게 시작했는데 이렇게 성장한 사실을 보니 자랑스럽습니다.

팟캐스트: 이 사진에는 스티브 씨가 같이 사진에 찍혀 있지 않지만, 스티브 씨가 다른 일들을 도와주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매우 열정적이었습니다. 스티브가 처음부터 이 사업에 긍정적이었나요?

마리: 네. 스티브는 페이스 마스크 사용하는 일을 좋아해요. 항상 제 상품을 사용하고, 제가 가진 가장 비싼 화장품도 사용해보죠. 스티브도 화장품 사업을 좋아했습니다. 원래는 얼굴을 비누로 씻는 일을 제외하면 화장 자체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라 더더욱 신기했어요. 

팟캐스트: 현재는 10단계 피부관리 프로그램도 하고 있나요?

마리: 네. 지금은 저보다 훨씬 더 복잡한 절차를 거치죠. 저는 아침에 빠르게 준비해야 하니 10단계를 전부 할 수 없고, 최대한 빠르게 피부를 좋은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맞는 준비 단계를 거쳐요. 스티브는 그 10단계를 저녁에 합니다. 에센스, 세럼도 바르고, 새롭게 들어온 상품도 실험해보고, 면도한 뒤에 어떤 상품을 써야 할지, 이 모이스처라이저를 써야 할지 물어보고 피부관리를 좋아해요.

팟캐스트: 처음으로 시트 마스크도 써보고, 에튀드 하우스, 이니스프리 같은 화장품 판매점을 보니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한국과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나요?

마리: 한국에 처음 갔을 때 음식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갔죠. 김치를 처음 먹어본 적도 있습니다. 지금 첫 여행에 대해서 생각하면 아주 신기해요. 한국 음식이 어떤 맛일지 잘 몰라서 서양 음식을 먹으려고 했고, 음식 자체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 와서는 한국 음식을 좋아하지만, 그때는 그랬습니다. 한국어도 전혀 몰랐고, K-POP도 전혀 몰랐어요. 한국에 대해서 깊은 연결성을 만들 요소가 없었죠. 하지만 항상 화장품을 사용해보고 써보는 일은 좋아했어요. 그래서 한국 화장품 자체가 저의 흥미와 열정의 대상이 되었죠. 새로운 재료와 상품이 가득한 세계였습니다. 쿠션들을 보고 아주 대단한 발명품이라고 생각했고, 한국 문화와 연결되는 계기가 되어주었어요. 한국 상품을 사용하니 더 한국인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BB 쿠션을 사용하면 더 한국인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제가 입양되지 않았다면 BB 쿠션을 썼을 텐데 한국에서 그 BB 쿠션을 쓰고 있었죠. 그렇게 작은 일이지만, 그때는 제가 한국과의 연결성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그게 제 최초 여행에서의 경험이었죠. 2주 반이 지나고 나자, 한국 음식과 사랑에 빠졌고, K-POP도 잔뜩 내려받았고, K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지만, 한국과 최초로 연결성을 만들었던 계기는 한국 화장품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언제부터 화장품 회사들이 마리 씨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죠?

마리: 몇몇 회사들은 절 보고 거부하거나 최소 구매액이 수만 파운드가 넘어갔는데, 신생 기업으로는 그 구매 요구를 따라갈 수 없었죠. 이게 제 한국인 특성일지는 모르지만, 제가 생각하기로 나중에 충분히 성장해서 회사들이 제가 자기들의 브랜드를 팔아 주기를 원하길 만들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사업을 계속 진행해 나갔죠. 스티브는 그런 이유로 사업을 진행하고 발전시키다니 평범하지 않다고 농담하고는 했습니다.

팟캐스트: 미래에 가면 회사들이 나에게 전화를 하게 만들겠다고 생각하셨군요? 

마리: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이라는 느낌으로 접근했죠. 어쨌든 그렇게 부정적인 회사들이 좀 있었어요. 그때는 영국은 신규 시장이었고, 대부분의 회사가 아시아 시장이나 북미 시장에 더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엄청나게 성장했죠. 우리가 영국에서 와서 물어보는 일은 새로운 시장을 열어볼 수 있는 일이었어요. 운이 좋게도 많은 회사가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봤죠. 하지만 몇몇 회사들은 어떤 기준을 통과하고 오라고 우리를 거절했습니다. 사실 그 기준을 달성하고 난 뒤에 다시 돌아가서 하는 협상이 가장 즐거운 협상이죠. 아 네. 그 기준을 통과해서 이제 다시 사업을 논의하고 싶은데요.

팟캐스트: 그러한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보냈을 때의 감각을 기억하시나요?

마리: 아주 좋았죠.

팟캐스트: 그 뒤에 축하하고는 했나요?

마리: 네. 전화하면서 항상 긴장하고 있었으니 웃겼죠. 하지만 회의에서는 최대한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이려고 했고 그게 끝나고 나서 성공했다는 반응을 보였어요.

팟캐스트: 지금 돌아가면 VIP이신가요? 

마리: 우리는 화장품 회사들과 친밀해질 수 있어서 운이 좋았죠. 지난 4년간 여러 번 회사들을 방문해서 소통을 해왔습니다.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같이 식사도 하고, 몇몇 브랜드들은 우리를 통해서 체험 판매장과 스파도 열었기 때문에 관련해서 홍보도 되니 운이 좋았죠. 

팟캐스트: 스티브도 그런 대우를 같이 받나요?

마리: 네. 당연하죠. 스티브가 저만 그렇게 대우를 받게 두지 않죠. 뷰티 앤 서울을 처음 시작했을 때 좋았던 점은 한국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도 있었어요. 이 사업이 없었다면 한국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을 기회가 없었겠지만, 이러한 협상을 통해서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과 좋은 친구가 되었고, 그 친구들과 만나서 식사를 하게 되면 잘 못 하니 부끄럽긴 하지만 한국어를 연습하게 되었죠. 이 친구들이 저에게 새로운 요리를 소개해주려고 하고 여러 가지 새로운 문화를 소개해주기도 했어요. 한국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서 이득을 본 점 중 하나였습니다.

팟캐스트: 영국에서 한국 화장품 판매 사업을 어떻게 진행하셨죠?

마리: 우리가 처음으로 사업을 열었을 때 운이 좋았죠. 이미 SNS와 블로그를 통해서 제 이름을 어느 정도 알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미 수만 명의 사람이 이미 절 알고 있었죠.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이미 기다리고 있는 고객들이 존재했어요. SNS를 통해서 오신 분들도 있었고, 블로그를 통해서 오신 분들 있었고, 블로그를 통해서 우리 사업을 도와주려는 분들도 많았죠. 한국 화장품을 검색해보면 항상 영국 검색 엔진 위에 올라오기도 했고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첫해에는 어떤 이벤트나 행사에서 말할 기회가 있으면 전부 받아들였어요. 아주 힘들었습니다. 6개월간 해외에서 지내다가 영국에 돌아온 상태였고, 저는 무직이었고 영국에 돌아오면 다시 취직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사업을 처음 시작해서 이득을 얻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정규직에 취직해 일하면서 동시에 뷰티 앤 서울 사업을 주말과 퇴근 이후에 진행했습니다. 그래도 사업 시작 첫날의 판매량을 보고 이 사업에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진행했어요. 제가 노력한 이유는 이 사업에 진입해서 가장 먼저 성공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 모든 힘을 다해 노력하고 최대한 열심히 하려고 했죠. 여가 시간에 경영학 공부도 하고. 판매제안서에 관해서도 공부하고, 인스타그램 관리법도 배우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그렇게 성장했죠.

팟캐스트: 현재 규모가 어느 정도 되시죠? 물론 공유하기 어려운 정보도 있겠지만, 전용 창고의 사진을 봤던 기억이 나서요.

마리: 네! 전용 창고도 있고 직원도 4명이나 고용해서 거기를 관리하고 있어요. 4명 다 프리랜서로 고용했죠. 지금 현재 사업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 아버지가 처음 사업 시작할 때 사업장 구축과 상품 구매를 위한 융자를 해 주셨어요. 아버지도 꽤 사업가로서의 재주가 있으셔서 여러 부업도 하시고, 프리랜서 일도 하셨습니다. 현재는 은퇴한 상태라 아버지에게 좀 일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죠. 아버지의 말로는 소기업은 2년 내로 성공하지 못하면 실패하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2년이 지나고 나면 제가 성공하든 성공하지 않든 융자를 갚아야 한다고 하셨죠. 그게 융자 조건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융자를 4달 만에 갚을 수 있었어요. 그게 저와 아버지에게 이 사업에 미래가 있고 우리가 계속 열정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면 더 성공할 수 있다는 증거로 보였죠.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한국 화장품 판매 기업들이 영국에 상륙하고 있어요. 거의 매달 하나씩 새로 창업하는 느낌이죠. 하지만 제 이야기를 더하고, 우리가 영국 한국 화장품 판매 기업의 선구자 중 하나라는 사실을 더해서, 전 뷰티 앤 서울을 얼굴이 없는 무기질적인 기업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고객들과 소통하고, 제 얼굴을 SNS에 걸어 놓고, 친구로서 상품을 추천해주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그냥 한국 화장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국 화장품이 인기를 끌게 되니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더 개인적인 깊은 관계를 맺고 싶었죠. 그러한 접근 방식이 우리 사업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현재 마리 씨의 마음에 가장 드는 상품 몇 가지를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마리: 음…. 현재 제가 애용하고 있는 모이스처라이저는 헤이미쉬 모이스처 젤 크림이에요. 현재 영국의 따뜻해지고 있는 날씨에 맞춰 가볍게 사용하기 좋은 모이스처라이저죠. 피부에 닿으면 시원한 느낌이 드는 모이스처라이저입니다. 

팟캐스트: 수박 모이스처라이저인가요?

마리: 네. 수박 모이스처라이저에요.

팟캐스트: 저도 아주 좋아해요. 

마리: 네. 주원료가 수박 추출물이죠. 하지만 수박 향이 나지 않아서 좋은 제품이에요. 

팟캐스트: 그리고 무겁지도 않고요.

마리: 무겁지 않지만, 수분공급을 해줘서 좋은 제품이죠. 모이스처라이저는 그 제품이 마음에 듭니다. 그다음으로 마음에 드는 제품은 시오리스 에세너죠. 에세너는 에센스와 토너를 하나로 합친 제품으로 시오리스에서 직접 개발한 신규 제품이에요. 쑥과 녹차가 들어 있어서 안정되고 정화되는 느낌이 듭니다. 전 얼굴이 쉽게 빨개지는데, 이 제품을 쓰고 났더니 많이 도움이 됐어요.

팟캐스트: 저도 안면홍조증이 있어요. 현재 영상에 보이실 겁니다(팟캐스트 인터뷰를 영상 통화로 진행 중) 

마리: 한국 혈통 문제일지도 모르겠네요. 제 뺨이 자주 마르고 빨갛게 되고는 하는데 시오리스 에세너가 큰 도움이 됐죠. 거기에 유리병에 담겨 판매되어서 환경 보존적인 소비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팟캐스트: 한국 화장품이 왜 다른 나라 화장품들보다 낫다고 이야기가 많이 되는데, 이게 단순히 판매 전략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마리: 제가 한국 화장품을 한국 화장품과 피부관리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해야 한다면, 화장품 산업계에서도 한국 화장품이 사용하는 배합방법이 프랑스와 미국에서 사용하는 배합방법보다 10년에서 15년 정도 더 앞서 있다고 인정한다고 이야기할 겁니다. 그러한 잡지 기사들과 함께 한국 화장품이 영국에 상륙해 메리케이에서 팔리기 시작할 때 발간되기 시작했죠.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피부를 관리하고 외모를 관리하는 일을 자랑스러워합니다. 화장을 짙게 하기보다는 피부를 관리하려고 해요 특히 서양에서 자란 제가 보면, 서양에서는 피부에 잡티가 있다면 그 잡티를 컨실러로 숨기려고 하죠. 화장에 접근하는 방식이 달라요. 그렇게 피부관리에 대한 높은 관심이 화장품 기업이 혁신과 기술 발전에 투자하게 했고, 새롭고 대단한 배합방법을 개발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값싸고 고품질의 화장품을 생산할 수 있었죠. 거기에 고도의 경쟁을 통해서 미국, 프랑스 브랜드와 비교하면 가격을 낮게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한국 화장품을 소개할 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죠. 친구들이 한국 화장품을 파는 사업을 시작한다고? 이라고 궁금했습니다. 친구들에게 써보라고 상품을 나눠줬고, 친구들이 사용해보니 그 상품들과 사랑에 빠졌고, 그 결과 4년 뒤 지금도 같은 상품을 저에게 사서 사용하고 있어요. 그런 광경은 보기 좋죠. 모두에게 맞는 화장품이 있습니다. 저에게 맞는 상품이 다른 사람에게는 맞지 않기도 하고요. 어떤 사람에게는 달팽이 크림은 너무 과도한 물건일지도 모르죠.

팟캐스트: 너무 단순화시키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마리 씨는 꿈을 원하셨고 그 꿈을 쟁취하셨죠. 그런 진취적인 접근을 친부모 조사에 적용해 볼 생각은 안 했나요?

마리: (웃음)

팟캐스트: 안된다는 대답을 듣고도 계속 노력을 하셨으니까요.

마리: 알죠. 알아요.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특히 다른 입양아들과 이야기를 하면 항상 진취적이고 용맹한 사람이고, 그게 개인적인 삶이나, 사회적인 생활이나, 사업에도 드러나는데, 그 친부모 조사에만 다가가면 제가 정신적인 장벽에 부딪히는 느낌입니다. 과거보다 지금의 제가 훨씬 자신감이 넘쳐요. 지금 저는 저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배경을 받아들이고, 정신 건강상으로도 많이 나아졌죠. 나쁜 일이 일어나면 사람을 성장하게 하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성장의 결과가 현재의 저 자신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 친부모님을 찾았다면 뷰티 앤 서울을 시작하지 않았을 겁니다. 꽤 기묘한 생각이죠. 적어도 지금은 제가 그런 문제에 접근할 준비가 더 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똑같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있죠. 그렇게 되면 더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그런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 중이죠. 용기를 내서 동방사회복지회에 들어가서 제 정보를 달라고 요구를 하고 조사를 할 필요 없다는 소리를 없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고 도와줄 만한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팟캐스트: 한국 드라마처럼 동방사회복지회에 12명의 정장 입은 한국 남자들을 끌고 가야 할지도 몰라요. 사람들을 동원하는 방법이 한국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빠른 방법이죠.

마리: 런던 기반 기업과 같이 일하던 좋은 친구가 한국에 살고 있죠. 한국에 방문하면 그 친구가 항상 같이 가서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친구는 한국계 미국인이고, 한국어를 잘하거든요. 그냥 말만 하면 바로 도와주겠다고 했죠. 그러한 언어적 소통 여부도 성공 여부를 가린다고 생각합니다. 방문 자체가 정신적으로 힘든데, 언어적 장벽까지 더해지면 힘들어지죠. 그런 언어적 도움이 있다면 더 도움이 될 겁니다. 다음에 다시 동방사회복지회를 방문할 때는 사람을 대동할 예정이에요. 전에 동방사회복지회를 방문했을 때는 스티브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죠. 스티브도 들어오지 못한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스티브가 들어왔어도 큰 도움은 되지 못했을 겁니다.

팟캐스트: 제 자료에는 별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이런 행동까지 할 이유는 못 느꼈지만, 다른 친부모 조사를 더 깊게 진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국어를 잘하고 강한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한다고 하더군요. 한국 아줌마나 강한 언니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안된다고 해도 전혀 듣지 말고, 난리를 피면서 시끄러운 외국인이 되어야 한다면 해야 한다고 해요. 한국 사람들은 그런 문제에 반응하죠. 평범하게 협조하면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된다고 합니다.

마리: 저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팟캐스트: 큰 힘이 들기 마련이죠.

마리: 적어도 후자의 문제는 직접 경험했죠. 그냥 동의하면서 물었더니 결국 진행이 안 되더군요.

팟캐스트: 그리고 우리가 입양아로서 항상 예의 바르게 정보의 극히 일부를 받는 데 익숙해져 있죠. 하지만 더 많은 정보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마리 씨는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마리: 거기에 우리는 영상도 가지고 있거든요. 부모님에게 자료를 받으러 갈 때 스티브가 영상을 전부 찍었죠. 제 부모님이 고등학교에서 만났다는 사실이나 그런 부모님이 가진 자료를 전부 영상으로 남겼습니다. 하지만 저는 친어머니들이 자신의 신상을 보호하고 싶어서 가명을 대거나 친구의 이름을 대기도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기관에서 가명을 통해 사람들에게 연락을 보내면 그 연락을 받은 사람들은 잘 모르거나 모른다고 하기도 한다고 해요. 아주 힘들죠. 결론을 내고 싶은데 어머니를 만나기는 했는지, 어머니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는지, 어머니가 준비가 안 됐다고 했는지, 대답하지 못하겠다고 했는지, 어머니의 태도는 어땠는지, 어머니와 연락을 했는지, 거짓말을 했는지, 사실이나 거짓말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팟캐스트: 사람들이 마리 씨를 구독하거나 연락하고 싶으면 어떤 방식을 사용해야 하죠?

마리: 인스타그램이 가장 좋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죠. @Beauty_and_Seoul이 뷰티앤서울 계정입니다. 제 개인 계정은 @Mareekinder 인스타그램이에요. 2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다른 입양아들을 만나지 못해서 다른 입양아들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만나고 싶습니다. 서로 과거를 공유하니까요.

시즌 4, 에피소드 23: 제시 헤일

Audio available on Monday, April 19, 2021 at 7 am ET.

제시 헤일 씨, 한국 이름 송진주 (23세) 씨는 어린이일 때 한국에서 위스콘신으로 입양되었다. 현재 진주 씨는 한국에서 암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진주 씨는 친부모를 찾는 데 성공했으며 이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제시: 제 이름은 제시 진주 헤일입니다. 한국 이름은 송진주예요. 대한민국 양산시에 거주하고 있죠. 미국 위스콘신주 뉴 베를린에서 자랐으니 큰 거주지의 변화를 겪었습니다. 현재 23세예요.

팟캐스트: 양산 시는 어디에 있죠?

제시: 대한민국 남부에 있는 도시입니다. 한국 제2의 도시인 부산 바로 옆에 있죠. 남해안 근처에 존재하는 도시예요.

팟캐스트: 한국으로 이주하기로 한 이유가 뭐죠?

제시: 한국에 이주할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어학연수를 위해서 부산에 두 달간 방문했기 때문이죠. 2달 동안 학생 신분으로 부산에서 거주했어요. 그 2달 연수 이후에 미국에서 지내다가 한국으로 오기로 했습니다. 대학교 졸업을 하고 일자리를 찾고 있었는데, 어학연수 동안 만난 사람에게 제 전공 분야의 직장에 대해 연락해 자리를 얻었거든요. 한국에 이주한 이유 중 하나는 직장과 취업 때문이었죠. 그 시기에 제가 해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제 친부모님도 찾았어요. 한국에 이주할 다양한 이유가 있었죠. 여행과 새로운 도전을 좋아하는 성격도 한국 이주에 도움을 줬어요.

팟캐스트: 한국에 언제 이주하셨죠?

제시: 2019년 3월 말 사이에서 4월 초에 한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양산시에 있는 스타트업 생명공학 기업에서 암 연구를 하고 있어요. 제가 사는 지역은 부산대학교 병원 양산 캠퍼스와 연관된 곳이죠. 제가 이 일에 대해서 처음으로 알게 된 때는 부산대학교로 어학연수를 왔을 때였습니다. 한국어 관련 회담을 위해서 부산에 갔는데, 저와 똑같은 전공에서 똑같은 주제를 연구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죠. 전 학부생 신분으로도 어느 정도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거든요. 그 사람과 친해지고 난 뒤에 취직하고 싶으면 연락하라고 저에게 명함을 줬습니다. 제가 구직하던 도중에 명함을 기억하고 연락을 했죠. 면접하고 난 뒤에 취직에 관한 이야기가 진행되기 시작했어요. 최대한 빨리 한국으로 이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한국으로 이주한 뒤 미국에서 하던 연구를 지속했습니다. 경력자로 취직할 수 있었던 일이 도움이 됐죠. 부업으로 영어 학원에서 성인 대상 영어 교육도 할 생각이라 한국 영어 교육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몹시 어렵더군요. 한국에 이주했을 때 제 전공과 관련이 없는 신규 분야에 취직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한국에 이주하면서 전공을 살린 취직을 하는 독특한 경험을 하셨군요?

제시: 네. 아주 대단한 경험이었죠. 비자의 예를 들어도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연구 비자도 있었지만, F-4 비자로 한국에 오기로 했죠. 아주 좋은 비자이거든요. 한국에 오니 언어 장벽 문제를 제외하면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제 전공을 살린 일을 하는 일은 훌륭한 기회였고 영어 선생일 보다 돈을 잘 벌었으니 한국 이주에 있어서 좋은 시작이었다고 생각해요. 한국에 왔을 때부터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로 이주하면 많은 안정성을 잃게 되는데 저에게 안정적인 직장이 있다는 사실이 큰 도움이 되었죠. 상사들도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았고, 회사에서 일하는 외국인들도 많아서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상사 상당수도 미국에서 공부해서 한국인들이었지만 제가 겪는 문제에 대해서 이해를 해줬고, 제 적응 기간 동안 관용을 보여줬죠. 생명공학 기업이라 작업에 대한 유연성을 보여줬기 때문에 작업하는 데 유연성이 있어야 하는 저에게 도움이 됐어요. 제가 관심을 가진 주제를 연구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스타트업 기업이라면 흔한 하루에 20시간씩 직장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그런 기업 문화는 아니군요?

제시: 그렇지는 않지만, 한국에서 대학교에 가고 여기에서 박사학위를 따면 그렇게 되죠. 제가 한국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진행하라는 격려를 받고도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안 따기로 한 이유기도 합니다. 제 작업 시간은 평범한 편인데, 서양 국가에 적용되는 기준 덕분이라고 생각하죠. 평범하게 8시간을 일하고, 연구에서도 유연성이 존재해요. 어떤 연구는 긴 시간이 걸리니 시간을 더 들여야 하는 예도 있고, 그런 상황이라면, 다른 날에는 더 길게 쉴 수도 있게 되어 있어서 연구할 때 있어서 좋은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주말에도 일해야 하는 단점이 있기도 하죠. 취직했을 때는 한국어 공부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한국어로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소통이 제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았고, 사람들이 제 한국어 이해도를 과대평가하는 경우가 많아서, 제가 이해를 못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결과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았고, 상사들이 제가 왜 사람들이 원하는 일을 하지 않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았죠. 단순히 상사들뿐만이 아니라 제 동료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 동료가 많습니다. 그래서 동료들과 상사들을 위해서 언어적 다리가 되어주는 경우가 많죠. 

제시: 전 한국인이면서 동시에 외국인이니 그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어서 기뻐요. 미국인의 모험심이 발휘되어서 그 역할을 하는 데 있어서 두려움이 없죠. 영어를 더 써야 한다고 조언을 하기도 합니다. 상층부에서 더 영어를 쓰라는 격려를 받기도 하죠. 우리 기업은 영어 사용 국가에도 진출하려고 노력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영어 사용이 좋은 선택이었죠. 한국 직원들이 영어를 배우려고 노력하게 되었고, 소통의 오류가 있을 거라는 인식을 하고, 영어를 쓰기 어려워하는 한국 직원들을 격려하는 역할도 합니다. 우리 회사에도 저나 외국인 직원들과 대화하지 않으려는 직원들이 있어요. 이게 국적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인식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직장에서 영어를 사용하기로 한 결정이 제 한국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해줬어요. 제 한국어를 한국 사람들이 이해 못 하지만, 동시에 제가 한국 사람들의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 쌍방의 이해 부족을 아는 일이 중요했죠. 한국어를 말하려고 하면 사람들의 인식 자체가 달라지는 일이 느껴졌습니다. 제가 금발 머리를 선호하는데 염색을 풀고 검은 머리를 해야 하기도 했어요. 머리도 자르고 제 팀에 섞여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제 팀은 제 나이 또래의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적응이 어려웠고 성공하지 못했죠. 제가 한국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염색을 풀기로 한 선택이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회사가 다른 건물로 이사했고 이러한 변화가 적응에 도움이 되었죠. 사람들이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절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절 저로 봐줬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영어 사용이 동료들과 동급의 레벨에서 소통할 수 있게 해주기도 했겠네요. 동료들이 제시 씨를 외국인으로 생각하게 했으니까요.

제시: 네 그렇습니다. 제가 그러기로 했죠. 저와 비슷한 상황에 부닥친 입양아 중 일부는 한국어를 매끄럽게 해요. 하지만 그 사람들도 어떤 상황에서는 영어를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한국어를 하거나, 모국어를 합니다. 저는 한국어를 잘못 하므로 사람둘에게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줘야 해요. 제 경험, 인식, 반응이 다르다고 사람들에게 영어를 하면서 알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거기에 젊으시니 존댓말을 자주 사용해야 해서 어렵죠?

제시: 네 거기에 호칭도 다양하니까요. 제 직장에서 그런 언어 장벽과 외국인들이 존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주니 다행이죠. 제 외국인 동료 일부는 한국어를 아예 쓰지 않으려는 경우도 있고 그 이유를 이해해요. 한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한국인들은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한국인들은 왜 한국어를 잘 못 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외국인이 한국어를 잘 하지 못하면 한국인들은 공격받는 기분이 들고 모욕당한 기분이 들죠. 하지만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사람은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 해요. 존댓말이라는 개념이 모국어에는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화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그렇게 동료들 간의 다리가 될 수 있었군요?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조언해줄 수 있으니까요. 

제시: 네. 외국인들에게는 그런 말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해주고, 반면에 한국인에게는 외국인이라 이해 못 하고 한국어를 배우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죠. 이러한 예측과 반응이 어른이 되어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데 특히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실수하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거나, 사람을 불쾌하게 하거나 비웃음을 당하는 일을 무서워하니까요. 제 직장에서 소통을 늘리기 위해서는 양측이 전부 이해를 했는지 확인하거나, 적어도 쌍방이 서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도록 해야 하죠. 서로를 평가하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의 문화 중 하나는 상대방에 대한 지속적인 평가를 한다는 점이에요. 자신들의 영어 실력을 평가하고, 동시에 남들의 한국어 실력도 평가하죠.

팟캐스트: 친부모님을 어떻게 찾게 되셨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제시: 앞에 말했지만, 부산에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습니다. 주말에 관광하려고 친구들과 서울에 올라가기로 했죠. 제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지하철역 하나가 입양기관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봤어요. 그걸 보니 제가 지금 어른이 됐으니 제 친부모 조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하지만 입양기관은 주중에만 열었습니다. 주말 동안 서울을 구경하고 어학연수 수업을 들으러 부산으로 내려와야 했죠. 연수 관리자가 제 상황을 이해해주고 편의를 봐줬습니다. 제가 관리자에게 한국에 있을 때 친부모 조사를 진행하고 싶은데 주중에 방문해야 하니 서울에 하루 더 있을 수 있냐고 문의했어요. 월요일에 수업을 빠져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죠. 관리자는 제 상황을 이해하고 제시 씨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응원해 주셨어요. 그래서 월요일에 입양기관을 방문했고 4시에야 상담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 서류를 볼 수 있었어요. 제가 16살 때 처음으로 봤을 때와 다르지 않았죠. 입양기관에 친부모 조사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과거에도 생각을 해봤고, 다른 사람들의 친부모 조사를 듣고 고민하기도 했죠. 하지만 저는 모든 관련 조사를 할 수 있으면 해보려는 사람이고, 모든 질문의 대답을 알아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조사를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2018년 여름에 친부모 조사를 시작했어요.

팟캐스트: 입양기관에서 친부모님에게 연락했나요? 단체가 그 정도의 정보는 가지고 있었나요?

제시: 네.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었죠. 어학연수가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간 다음 제 생활을 지속했어요. 제가 대학교에서 또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전에 보낸 이메일을 봤냐는 이메일이었죠. 거기에 제 친어머니와 연락이 되어서 어머니가 만나려고 하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걸 읽고 전 이메일 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을 했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친아버지가 친부모 조사에 바로 대답을 줘서 입양기관에서 저에게 연락했지만, 그 이메일이 스팸 함으로 가서 이메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행히도 2번째 이메일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죠. 만약에 받지 못했다면 제 조사 방향이 달라졌을 것이고, 당연히 제 삶도 바뀌었을 겁니다.

팟캐스트: 친아버지가 직접 연락을 하셨나요? 

제시: 친아버지가 기관을 통해서 저에게 이메일을 보내셨죠. 제가 이메일을 확인하고 나서 답장을 썼습니다. 입양기관에서 편지를 편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한국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한글과 영어로 제 연락처를 포함한 편지를 2부 작성해서 보냈어요. 직접적인 소통을 위해서 이메일, 카카오 아이디와 저에게 연락할 다른 방법을 적어서 보냈죠. 그다음에는 아버지와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었어요. 어머니와는 카카오톡을 통해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헤어진 상태였고 제가 입양 제도에 맡겨진 뒤에는 만난 적이 없었죠. 그래서 따로 연락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듣기도 했어요. 아버지가 어머니보다는 더 연락하기 편했죠. 어머니는 가족을 꾸린 상태여서, 어머니와 연락할 시간이 적었고, 두 분 다 제 입양을 슬픔과 연관해서 연락하기 힘들었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언어적 장벽까지 더해지니 소통하기 힘들었습니다. 자신의 아이이지만 성인이고 알지 못하는 타인이니까요.

팟캐스트: 조사를 시작할 때 친부모님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나요? 아니면 홀트가 알아서 정보를 찾을 수 있었나요?

제시: 제가 어른이 되고 난 뒤에 친부모 조사를 시작하고 나서야 친부모님의 이름을 알 수 있었어요. 제가 이름을 몰랐던 이유 중 하나는 제 한국어 능력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을 받고 있었고, 약간의 한국어를 배워서 어느 정도 해독능력이 있었고, 어떤 정보를 찾아야 하는지 알았어요. 그래서 정보를 약간 알 수 있었지만, 친부모님의 이름 전부를 저에게 줄 수 없었죠. 하지만 제가 어른이 되어서 한 친부모 조사를 통해서 얻은 좋은 정보 중 하나는 친부모님의 성이었죠. 최 씨와 송 씨였습니다. 제가 조사를 하면서 찾은 선물 중 하나였죠. 하지만 제가 조사를 시작하면서 제 첫 역사였기 때문에 매우 귀중했어요. 작은 정보였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가졌습니다.

팟캐스트: 처음에 친부모님과 연락이 됐다는 이메일을 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셨나요?

제시: 이미 말을 했지만, 그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 있었죠. 너무 그 조사에 희망을 걸고 싶지 않았어요. 많은 사람이 친부모를 만나거나,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큰 희망을 걸고 있지 않았죠. 제 목표는 그냥 제 친부모님의 사진을 얻는 일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었어요. 친부모님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고 저를 만나려고 기관에 답을 줬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 해체된 가족에 대한 문화적 장벽과 다른 문제가 있는데도 답을 해서 놀랐죠. 아주 기뻤고 아주 신기했어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죠. 입양아로서 여러 문제를 겪지만, 동시에 이런 흥미롭고 특별한 경험도 할 수 있습니다. 설명하기 힘들죠

팟캐스트: 슬픈 감정도 느끼셨나요? 부모님을 잃으셨다가 다시 찾은 셈이죠?

제시: 슬픔은 제가 부모님을 만났을 때 느꼈죠. 제 친아버지는 여전히 미혼이셨고, 절 잃고 다시 회복하지 못하신 느낌이었어요. 거기에 다른 문제도 겪었던 느낌이었습니다. 제 친어머니도 만났는데 제 친어머니를 직접 만났을 때야 슬픈 감정을 느끼고 제가 잃은 가족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죠. 다행히도 제 양부모님이 아주 대단합니다. 이번 주말에 양어머니가 한국에 방문하실 예정이에요. 미국에 저를 지탱해주고 지원해주시는 부모님이 있었으니 제가 갈망이나 상실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제 양부모님은 제 입양아의 슬픔을 이해하고 저에게 슬퍼할 시간을 주셨죠. 제 양어머니는 저에게 아름다운 조언도 해줬어요. 전 항상 제 친어머니를 잃어서 슬퍼했죠. 제가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양어머니에게 제가 어머니를 친어머니만큼 사랑할 수 없다고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양어머니가 어느 날은 친어머니를 더 사랑할 수도 있고, 어느 날은 날 더 사랑할 수 있지만, 괜찮다고 했죠. 그 말이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제가 어른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저에게 이런 대화를 했다고 이야기를 해줬어요. 다른 가족과 부모가 입양아의 문제와 정체성을 못하는데 어머니는 이해해줘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양어머니가 그런 경험이 없는데도 통찰력을 보이실 수 있다니 신기하네요. 입양아 친구를 두고 계셨나요? 아니면 다른 경험이 있으셨나요?

제시: 어머니가 그런 통찰력을 보이실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어머니가 행동 건강과 정신건강 영역에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족 치료와 통합을 위해서 일하시고, 트라우마 기반 치료에도 관련되어 있어요. 치료를 직접 적용하는 쪽은 아닙니다. 프로그램 작성과 관리 쪽에서 일하시죠. 밀워키 쪽 정신건강 관련 기관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공식 명칭은 랩어라운드 밀워키 (Wraparound Milwaukee)이고, 어머니는 그곳에서 30년 동안 일하셨어요. 두 번에서 3번 정도 은퇴하셨지만 그래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도와주고 계시죠. 거기에서 하는 일이 좋은 일들이고, 프로그램들도 가족을 돕는 데 큰 역할을 하거든요.

팟캐스트: 가족들의 통합에 도움을 준다는 말이시군요?

제시: 가족의 통합을 돕는 일을 하시죠. 어머니가 가진 트라우마와 어머니의 경험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돕는다고 생각해요. 어머니가 태어나기 전에 가족이 언니를 잃었죠. 그런 배경에서 자라나시고, 어른이 되면서 그런 분위기를 받아들이고 인정하셨다고 생각해요. 물론 제가 어머니가 아니니 어머니를 대신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 형제자매를 키우고,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삶에 관점을 가지고 아이들을 소중히 여길 수 있도록 어머니를 크게 도왔다고 생각합니다. 

제시: 모두가 친어머니와 양어머니를 비교하고, 누가 어느 면에서 더 나은지, 누구에게 더 친밀감을 느끼는지 알려고 하죠. 하지만 두 분과의 관계는 전혀 다른 느낌이에요. 전 사람과의 관계에서 있어서 흑백으로 나누는 사람이 아닙니다. 전 모든 친구 관계, 연애 관계, 가족관계가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고 아주 다양한 모습을 할 수 있다고 믿죠. 제가 두 어머니에게 느끼는 감정은 제가 더 많은 지지를 받는다는 느낌이죠. 제 양어머니는 항상 저에게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항상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줄 수 있고 한 사람이나, 가족이나, 혈족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양어머니에게서 그러한 교육을 받아서 친가족과의 관계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죠. 단순히 양부모님을 사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친부모도 사랑할 수 있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같은 사랑은 아니라 다른 사랑이죠. 다른 외양을 하고 있고 다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여전히 사랑입니다. 연결이 있고 공통된 경험이 있어요. 단순히 친어머니, 친아버지, 양어머니, 양아버지로 국한되지 않죠. 한국에도 다른 어머니와 아버지와 같은 분들이 계시고, 절 생각해주시는 사람들이 많으니 가족이 더 커지는 셈입니다. 아주 좋은 경향이라고 생각해요. 

-광고-

제시: 미국에 계시는 양부모님에게 다양한 지식을 배웠지만, 친부모님을 만났을 때 우리 둘이 닮았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서로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죠. 유전자 조사를 안 해도 친아버지의 딸이라는 느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우리 둘 다 심한 비염이 있어요. 서로 만났을 때 아버지가 비염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저도 아버지와 만나기 전에 이미 비염 수술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같이 지내는 동안 논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전형적 한국적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매우 이해심이 깊죠. 아버지에게 소리치거나 아버지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보이는 일을 해도 아버지는 제가 자랑스럽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딸이 가질 성격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도 고집이 세거나 화를 낼 때도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러한 기질은 아버지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해요. 제 친어머니는 1번밖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훨씬 조용하고 소극적이시지만 동시에 현명하고 상냥하시죠. 어머니와 공감했어요. 어머니가 제집에서 하룻밤을 묵으실 때 어머니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하셨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통해서 저와 소통하셨고, 제 입양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다른 이상한 이야기를 하자면 전 긴 발가락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 사람들을 발가락으로 꼬집고는 했죠. 친아버지가 계단에 앉아서 제가 제 발가락으로 아버지의 강아지들을 꼬집는 모습을 보시고 친어머니도 발가락으로 그러셨다고 했어요. 어머니와 그러한 공통점이 있다니 매우 신기하다고 생각했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친부모님과 만났을 때 부모님의 삶이 있고, 제시 씨의 삶도 있었는데, 제시 씨의 아버지가 제시 씨와 더 깊은 관계를 맺고 개인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군요? 

제시: 네. 확실히 그랬죠. 아버지에게 가족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여러 트라우마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삶이 힘들어졌죠. 아버지가 그러한 문제를 오랫동안 겪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버지의 삶에 나타나서 아버지의 삶에 변화가 줬죠. 전 삶이 잘 안 풀릴 때는 주변 환경을 바꾸는 것이 좋다는 지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직접 그런 변화를 선택하지는 않으셨겠죠. 아버지의 삶에 제가 나타난 것이 아버지에게 필요로 하는 변화를 줬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아버지가 빠진 수렁에서 빠져나오게 도와줬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아버지는 고생하고 계셨고, 지금도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서 고생하고 계시죠.

팟캐스트: 정신적 문제였나요? 아니면 직업적 문제였나요?

제시: 아버지에게 정신건강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도 알다시피 한국의 정신건강 관리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이 정신 치료를 받지 못했어요. 거기에 아버지는 대학교 진학도 못 하셔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해 답답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제가 미국에서 배울 수 있었던 기술을 아버지는 배울 수 없었죠. 사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배우지 못한 기술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버지가 미국인인 저와 교류하는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서로 전혀 다른 문화적 기준이 있고,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니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죠. 하지만 아버지의 직업상 비는 시간이 더 많았고, 겨울에는 제가 지내는 곳에 와서 같이 지낼 수 있었어요. 아버지가 저에게 항상 요리를 해주며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제가 라디오에 출연할 때는 아버지가 점심 도시락을 만들어 줬고, 아버지의 차를 빌려주시기도 했죠. 아버지가 볶음밥을 만들어주고 치즈를 얹어 주셨는데 작은 하트 모양으로 만들어서 볶음밥에 박아 주셨어요. 애정을 듬뿍 담은 도시락을 만들어주셨고, 아주 좋았죠. 왜냐하면, 아버지가 오시기 전까지는 냉장고를 사용하지도 않았거든요. 전 요리를 하지 못하고, 한국에 이주하는 데 있어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살고 있는지, 장기 휴가인지 고민했죠. 한국에서 사는 다른 외국인들은 1년에서 2년 정도 지내기 때문에 저도 그 종도 지낸다고 생각하고 한국에 정착하는 일이 힘들었어요. 특히 제 가족이 미국에서 살고 있었으니 정신적으로 큰 장벽이 있었습니다. 한 발은 한국에 있지만 한 발은 외국에 두고 있는 셈이었죠. 아버지가 한국을 집처럼 느끼는 데 도움을 주셨어요. 거기에 제집에 둘 중고 가구도 잔뜩 구해 주셔서 금방 집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집에 올 때마다 새로운 탁자가 있고, 새로운 의자가 있고 그랬죠.

팟캐스트: 아주 따뜻한 느낌이네요. 아버지가 제시 씨에 대한 애정을 제시를 돌봐 주면서 표현하셨군요.

제시: 네. 제가 아버지의 유일한 딸이에요. 저에게 이복 오빠가 1명 있지만, 아버지와 교류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돌보는 경험은 새로운 경험이었고, 제가 성인이니 아버지에게 새로운 사고 유연성을 부여했다고 생각해요. 아버지가 저에게 부모의 애정을 보여주셨습니다. 물론 아버지의 부모 역할 중 일부는 저에게 곤란하기도 했죠. 전 독립적이고 혼자서 생활할 수 있어요. 제가 요리를 하지 못해도 저 자신을 돌볼 수 있죠. 아버지와 같이 생활할 때 소통의 문제가 있어서 이런 도움은 필요 없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왜 돕지 못하는지 이해 못 하셨습니다. 소통 문제가 있긴 했지만, 항상 아버지가 저를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아버지와 작은 다툼을 하거나, 큰 싸움을 해도 아버지가 항상 신경 쓴다는 사실을 알았죠. 아버지가 절 잃고 싶어서 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의 전통적인 관점을 어느 정도 접어두고, 제 곁에 있기 위한 흐름에 타셨죠. 제 미국 부모님의 말씀을 빌리면 제시의 흐름을 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유연성을 보이고 절 이해해주고 서로 힘들어도 우리 관계를 중시해준다는 점이 아주 좋았어요. 서로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에 대해서 많이 배웠고, 아주 역동적인 관계입니다. 22년의 관계를 1년에서 2년 동안 압축해서 보내고 있죠.

팟캐스트: 아버지가 결혼하지 않으셨나요?

제시: 아뇨. 결혼한 적 없어요. 

팟캐스트: 한국 사회에서 평범한 사람은 아니네요? 아저씨이면서 미혼이고, 그러한 특이성이 제시 씨와의 관계를 도와준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버지도 평범하지 않고 사회에 맞아 들어가지 않으니까요.

제시: 좋은 관찰이네요. 그러한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지금 들어보니 아버지가 평범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가 한번 결혼하셨던 적은 있는데 이혼을 했다고 생각해요. 평범하지 않죠. 특히 90년대 초반이었으니까요. 또 다른 아이를 가지고 아이를 입양에 맡기고 난 뒤 삶을 살아오셨는데 생활이 평범하지 않았죠. 그 경험이 아버지와 제가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항상 흐름에 저항한다고 생각하죠. 적어도 저는 한국에 맞아 들어가지 않거든요. 우리가 같이 이 상황을 헤쳐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한국의 문제점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마음에 안 드는 점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라오스에서 살고 싶다고 하실 때도 있거든요. 아버지의 그런 갑갑함을 이해하고, 사회가 자신을 거부한다는 느낌도 이해하죠.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생각해요. 아버지는 사회에 맞아 들어가지 않고 프리랜서입니다. 유전적인 문제일지도 몰라요. 우리는 서로의 자유를 만끽하지만, 사회는 그렇지 않죠. 

팟캐스트: 한국에 있으면서 입양아에 대한 차별을 겪으셨나요?

제시: 그러한 차별을 겪는다고 생각하고 준비했지만, 그렇게 충격적인 일은 없었어요. 사람들 대부분이 예의 바르게 대응했죠. 한국인처럼 보이지만 한국어를 말하지 않는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제가 한국어를 못하는 사실을 알고 오해로 인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죠. 하지만 제 경험 자체가 매우 부드러웠던 이유가 한국 사회에 적응한 입양아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입양아 중 일부는 꽤 좋지 않은 경험을 한 경우도 많지만 많은 입양아가 꽤 오랫동안 한국에서 지내면서 선례를 만들었죠. 다른 한국인들에게 입양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렸습니다. 한국에 많은 서구화된 국제 입양아들이 많고, 한국인들이 그런 입양아들과 자주 접촉하면 그런 편견과 차별을 많이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이전에 온 입양아들이 F-4 비자를 만들고, 여기에서 살고 일하기로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제가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로 입양되어서 이점이 있기도 하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로 입양된 입양아들은 한국에 와서 직장을 얻는데도 고생을 합니다. 영어 선생으로 일하는 친구들 대부분이 이 일은 일시적이고 시험 삼아 하는 일이라고 말해요. 1년에서 2년 정도 한국에서 일하다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서 자신들의 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전 운이 좋았죠. 제 이전에 있던 사람들이 길을 닦아줬고, 그 입양아들이 역경을 넘었고, 입양아에 대한 인식을 바꿔줬으니까요. 입양아 사회가 노력하고, 이런 인터뷰와 한국 입양아들이 한국에 돌아와서 TV에 나오고, 유전자 조사도 하고, 그러한 일들이 입양아 인식을 강화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적응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됐죠. 어렸을 때 전 편식이 심했어요. 지금에 와서는 뭐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제시: 한국 음식은 대단하죠. 한국 음식이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어요. 약간 한국 요리에 대한 지식은 있었습니다. 설날에 한인 교회에 가면 무료로 한국 음식을 제공했죠. 잡채, 불고기, 제가 좋아하지 않는 김치 등 한국 요리가 많았어요. 전 불고기를 미국에서 자주 즐겨 먹었는데, 한국에서는 그렇게 인기가 많지 않았죠. 제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는 삼계탕이에요. 통닭을 국물에 넣고 3일 동안 끓여내는데, 맵지 않게 먹을 수 있어서 어머니에게 소개해 드리는 데 도움이 되겠죠. 한국에는 좋은 닭고기 요리가 많아요. 부산에서 비롯된 요리라고 생각하는데 찜닭도 있습니다. 간장에 끓여낸 닭고기 요리인데, 당면, 당근, 감자, 만두, 떡이 들어가요. 아주 맛있죠. 한국에 방문하거나 1번도 먹어보지 못한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는 합니다. 사람들에게 권하면 대부분 사람이 좋아하죠. 한국에는 그런 맛있는 요리도 있고, 사람들 앞에서 직접 요리하는 일도 잘 해요. 고기 굽는 것도 있고, 볶음밥도 있고, 닭갈비도 있어서 전부 싱싱하고 맛있습니다. 한국 요리에서 제가 가진 문제 중 하나는 채식주의자로 사는 일이 어렵다는 점이죠. 2018년에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채식주의자였습니다. 한국에 살면서 닭고기를 먹기 시작했고, 이제는 저에게 주어지는 요리 대부분은 그냥 먹게 됐어요. 약간 뒤로 물러난 느낌이죠. 비빔밥 같은 좋은 채식 요리도 있고, 돌솥비빔밥도 있는데 뜨거운 돌솥에서 밥을 비비면 달걀이 그 안에서 익는 데 아주 맛있어요. 아주 특이한 음식점이 많죠. 예를 들면 떡볶이는 떡과 어묵이 들어가고 다양한 소스 기반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제집 근처에는 떡볶이 뷔페가 있어서 떡, 만두, 라면을 고르고, 소스도 섞어 넣어서 만들 수 있어요. 다양한 레스토랑들이 많고 어디에나 있죠.

팟캐스트: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어묵과 국물을 마시는 것도 좋죠.

제시: 포장마차도 많아요. 자갈치시장 옆에 남포구에 많이 있습니다. 부산영화제로 유명한 지역도 있죠. 포장마차가 잔뜩 있는데 그중 하나가 게 껍데기를 비운 다음에 그 안에 치즈, 게살, 양파로 채운 다음에 눈앞에서 구워 줍니다. 진짜 맛있어요. 부산 해산물은 맛있고 어디에나 있죠. 

팟캐스트: 다른 입양아들처럼 서울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실망감을 느끼나요? 아니면 부산에 있어서 좋다고 느끼나요? 

제시: 그 질문을 하다니 흥미롭네요. 얼마 전에 서울에 기반을 둔 국제 입양아 잡지인 IM Magazine에서 인터뷰했는데 거기에서도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서울에 살 생각을 해봤냐고 했죠. 전 서울에 살 생각도 없었습니다. 전 부산에서 어학연수를 했고, 이 지역에서 직장을 얻었죠. 거기에 전 운이 좋아서 16살 때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어요. 서울, 부산, 제주, 대전, 그리고 제가 태어난 충주도 방문했습니다. 제가 방문한 지역 중 가장 마음에 든 곳이 부산이었어요. 모래사장도 가고, 밤 문화도 즐기고 쇼핑도 했죠. 서울도 괜찮았고 쇼핑도 즐거웠지만, 부산이 깊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부산이 제 마음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죠. 저는 밀워키 출신입니다. 대학교도 위스콘신 밀워키에서 나왔어요. 미시간호 바로 옆에 있는 해안가 지역입니다. 물과 해안가에 사는 생활이 저에게 있어서는 고향이라는 느낌이 들죠. 부산은 그런 의미에서 집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작은 섬들이 있고, 해안들이 많고, 해안가들도 방파제 때문에 밀워키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서울에 대해서 질투가 나지 않습니다. 물론 서울에 있는 입양아 사회가 크긴 하지만, 다행히도 부산과 주변 지역에 작지만 아주 잘 연결된 입양아 사회가 있어서 그 사람들과 2년 가까이 교류하고 있었어요. 물론 전 매우 사교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서울에 살고 있었으면 여러 사람을 만나서 지쳤을지도 모릅니다. 이 작은 도시인 양산에서도 여러 사람을 만나고 있어요. 지금 현재 COVID-19 사태에서도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죠. 온라인 언어 교류도 하고 있고, 영어 교육도 시작했고, 방역 수칙이 그렇게 강하지 않아서 카페를 가거나 음식점도 가고 있습니다. 이래서 서울에서는 너무 많은 교류를 해서 지칠지도 몰라요. 물론 이 COVID-19가 잦아들면 서울에 다시 방문하고 싶습니다. 서울 입양아 사회를 알게 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거든요. 하지만 질투는 나지 않아요. 지금 제가 지내는 곳이 마음에 듭니다.

제시: 운이 좋게도 저는 자라면서 많은 입양아를 알았어요. 많은 입양아는 한국에 방문해서야 처음으로 다른 입양아를 만나게 되죠. 특히 한국계 입양이 그리 대중화되지 않았던 다른 나라 출신 입양아의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한국에 와서 알게 된 새로운 정보였어요. 저는 미국에서 한국 입양아 사회와 연관되어 있었고, 수많은 입양아를 만날 수 있었거든요. 제 부모님이 저에게 준 또 다른 좋은 기회였습니다. 물론 전 모든 한국 입양아를 만나야겠다는 갈망을 느낀 적은 없어요. 제가 만난 한국계 입양아 전원이 마음에 들었고, 입양아들과 이야기를 하는 일을 즐깁니다. 거기에 입양아들과 대화를 하려고 하긴 하지만 한국에서의 한국 입양아 사회는 미국 입양아 사회와 다른 느낌이죠. 우리가 흩어져 있고 숫자가 적으니까요. 서울에서 살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도 있습니다. 서울에 수많은 자원이 몰려 있으므로 지방에서 살고 있으면 아무래도 스스로 생존해야 하죠.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고, GOAL(해외입양인연대) 같은 입양아 단체에 도움을 요청할 수 없습니다. GOAL에 접촉해서 행사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많은 입양아를 만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지방에는 그러한 행사가 별로 없죠.

팟캐스트: 알고 계실지는 모르지만, 저도 서울에서 1년 정도 거주한 적이 있죠. 제가 서울을 떠날 때가 생각나네요. 40대 미혼 여성이었죠.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답답했던 기업이 납니다. 물론 한국에서 좋은 경험도 많았어요. 많은 사람이 2년 정도 지내다 보면 한국이 많이 나아진다고 합니다. 제시 씨도 그런 경험을 하셨나요?

제시: 네. 확실히 그래요. 한국에서 지내는 첫해는 어려웠죠. 적응하기도 힘들었고, 친구들, 가족들과 떨어지는 일도 어려웠습니다. 우울해지기도 했고 여러 가지 역경이 있었죠. 거기에 취직해서 일하는 일 자체도 어려웠지만 그건 다른 문제예요. 문화적 차이로 인한 문제도 많죠. 제가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라는 인식과 그 인식으로 인한 소통 문제도 심각했어요. 앞에 이야기했지만, 한국에 정착할까 말까 고민하는 상태에서 한국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문제도 어려웠죠. 새롭게 사람을 만나도 1년 정도 있으면 헤어져야 하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삶이 2년 차가 되자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죠. 우선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를 한 일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한국에 있는 외국인 거주자 사회와 더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직장에서 영어만 쓰기 시작해서 사람들이 제가 미국인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하게 됐죠. 한국에 확실히 적응하게 됐습니다. 사실 한국에서 1년 정도만 지낼 수도 있었어요. 2020년 5월에 1년 거주가 끝났을 때가 한창 COVID-19가 한국을 덮치던 때였지만 미국을 덮치기 전이었죠.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갈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시: 제가 미국에 돌아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해요. 한국에 1년 더 지내니, 한국에 정착하게 되고, 한국에서 무엇을 할지 정하게 해줬죠. 단순히 한국에서 생존할 뿐만 아니라 성장할 수 있게 되었어요. 한국에서 첫 1년에는 여러 가지 일을 했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2년 차에는 좀 더 느긋하게 접근할 수 있었어요. 제가 한국에 지내기로 했고, 제가 한국에서 겪을 일을 알면서도 한국에서 지내기로 했죠. 한국에 와서 지내기로 할 때 한국에서 생활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옵니다. 하지만 얼마나 한국이 어려울지 몰라요. 그래서 한국에서 2년 이상 지내기로 하면 한국에서 1년 더 지내기로 했고, 한국 문제를 알지만 그걸 받아들인다는 결정을 내리는 셈입니다. 한국에서 겪을 문제가 괜찮고, 그걸 받아들일 수 있으며 1년 더 지낸다고 결정을 내리게 되면 한국에서 더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2년 차 생활이 저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마지막 질문을 하자면, 제시 씨는 양어머니가 한국에 방문하면 어머니와 같이 어떤 경험을 하고 싶으시죠? 

제시: 저번에 어머니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는 어머니와 같이 일본에 방문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결정이었어요. 지금은 일본에 방문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에는 어머니에게 제가 지내고 있던 양산시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제가 한국에 정착하면서 만든 삶을 어머니에게 보여드리고 싶죠. 차도 구매해서 어머니에게 다양한 곳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설악산 여행도 계획했죠. 하지만 제가 어머니와 하고 싶은 가장 큰 일은 양산시에서의 제 생활을 보여드리고 싶고, 부산에서 제가 좋아하는 곳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보여드리려고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한국에서 지냈던 첫해에는, 어머니가 방문했을 때 저는 한국의 모든 곳을 보려고 하고, 모든 일을 하려고 하고, 모든 나라를 방문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제가 한국에 삶을 만들었고 그 삶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어머니와 같이 제 친아버지를 방문하려고 합니다. 친아버지도 저희가 온다는 사실도 알고 있죠. 사실 어머니가 한국을 방문하게 되어서 친아버지에게 다시 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약간 오랫동안 서로 연락을 안 했거든요. 그리고 어머니에게 제 남자친구인 아담도 소개해 드리고 싶죠. 그래서 어머니가 오시는 달 전체를 휴가로 받아서 한국 곳곳을 보여드리려고 해요. 그런 휴가를 받을 수 있어서 운이 좋았죠.

팟캐스트: 사람들이 제시 씨를 구독하고 싶거나 연락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죠?

제시: 페이스북 계정이 있습니다. Jessyehale이라고 되어 있죠. 제주 초콜릿 박물관에서 여러 표지판을 들고 있는 사진이 제 프로필입니다. 인스타그램도 똑같은 이름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구독해주시면 되죠. 질문이 있거나, 더 정보를 알고 싶으시거나, 한국으로 이주하고 싶은 분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싶으니 연락해주세요. 여러분들과 교류하고 싶습니다.

시즌 4, 에피소드 22: 앨리 디 레이시

Audio available April 13, 2021 at 7 am ET.

앨리 디 레이시 (25세) 씨는 두 살 때 중국에서 영국으로 입양되었다. 에든버러에서 기혼자로 반인종차별주의 활동가로 일하는 디 레이시 씨는 인종적 고립 속에서 성장하며 겪어온 인종 차별 경험과 COVID-19 사태로 인해 자신이 겪고 있는 인종 차별에 관해 이야기한다. 디 레이시 씨는 자신의 과거를 조사해, 자신의 과거를 더 모르게 된 사실을 공유한다. 

앨리: 제 이름은 앨리 디 레이시입니다. 중국에서 입양되었죠. 고아원에서 저에게 준 이름은 중국어 발음이 안 좋긴 하지만 양이룬이에요. 이름의 뜻은 아침 나뭇잎에 매달린 아침 이슬을 뜻한다고 합니다. 현재 25세이지만, 여전히 12살처럼 보이죠. 에든버러에서 살고 있고 에든버러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한 뒤 지난 7년간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대학교에서는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전공했죠.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어요. 몹시 어려운 주제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에든버러로 온 이유가 전공 때문이었죠. 영국에서 유일하게 중국어 학위와 러시아어 학위를 딸 수 있는 학교가 에든버러에 있습니다. 

팟캐스트: 에든버러 대학교인가요?

앨리: 네. 에든버러 대학교입니다. 제가 따려고 했던 학위는 아주 특수한 학위였죠. 고등학교서 대학교 전공을 고를 때는 미래에 대해서 전혀 다른 꿈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전 대학교를 고를 때, 간첩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어/중국어 전공을 선택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좋은 간첩이 되지 못했겠지만, 대학교 전공을 선택할 때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팟캐스트: 고전적 냉전 시대의 간첩을 생각하셨군요?

앨리: 아직 어려서 간첩이라는 일에 대해서 순진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죠. 이걸 하면 간첩이 될 가능성이 있어서 이걸 하겠다는 식으로 접근했어요. 나중에 가서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죠.

팟캐스트: 앨리 씨는 영국 시민인가요?

앨리: 네. 그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하겠죠. 제 양부모님은 영국 백인이십니다. 그러니 그 두 분께 입양된 저도 2살 반에 영국 시민권을 받았어요.

팟캐스트: 알겠습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에서 자라지는 않으셨죠?

앨리: 아뇨. 사실 저는 잉글랜드에 있는 옥스퍼드시에서 자랐습니다. 물론 제 발음에 영국 억양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건 제 성장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제 가장 친한 소꿉친구가 캐나다인이에요. 그래서 북미풍의 억양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죠. 제 녹음된 목소리를 들어보면 제 억양이 자주 바뀌어요. 영국 억양을 쓸 때도 있고 미국 억양을 쓸 때도 있습니다.

팟캐스트: 단순히 억양만 들으면 영국에서 장기간 사는 캐나다인이나 미국인이라는 느낌이네요.

앨리: 그런 소리를 자주 듣죠. 에든버러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에든버러에 방문하신 적이 있나요?

팟캐스트: 방문해본 적이 있어요.

앨리: 오 언제 방문하셨죠? 

팟캐스트: 관련해서 이야기를 좀 한 적이 있는데, 옛날에 킹스크로스에서 기차를 타고 에든버러에 방문했죠. 축제 기간이었고, 친구 집에도 방문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도시였죠. 앨리 씨의 비디오를 보니 에든버러의 풍경이 기억나더군요.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앨리: 아주 아름다운 도시이면서 다문화적 도시이죠. 제 억양이 더 미국적으로 변한 이유 중 하나가 에든버러가 매우 국제적인 도시라 그래요. 많은 사람이 국제적인 억양을 가지게 됩니다. 

팟캐스트: 영국 억양은 특정 계급 선입견과 연관이 있는데, 국제 억양은 어떤 영향을 끼치나요? 사람들이 앨리 씨를 판단하는데 어렵게 하나요? 아니면 계급 구분을 거부하는 새로운 억양인가요? 

앨리: 네. 영국에서는 억양으로 계급을 나누는 일이 큰 문제죠. 영국에는 인종 문제가 아니라 계급 문제도 존재해요. 우리가 익히 아는 영국 억양은 표준 발음(Received Pronunciation)이라고 합니다.

팟캐스트: 소위 말하는 고급 억양이군요?

앨리: 그렇습니다. 그리고 표준 발음은 아 발음과 긴 모음이 많아요. 목욕탕(Bath)을 바스로 발음하지만, 영국 북쪽에선 배스로 발음하죠. 북쪽 발음은 강세가 들어가죠. 저는 영국 발음이 강하지 않지만,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부스라고 발음하기도 해요. 반면에 남쪽에서는 바스라고 발음을 합니다. U 발음과 A 발음의 중간이죠. 언어학적으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계급 차별의 동기도 되고, 억양에 따라 상대방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영국에는 수많은 방언과 억양이 존재하니까요. 거기에 인종까지 더해지면 더 심해지죠. 영국에는 이민자가 많은데, 영국식 억양이 아니라 다른 억양의 영어를 하면 눈에 띄게 됩니다. 결국, 더 많은 선입견과 편견의 대상이 되죠. 주로 소수 민족과 노동 계급이 차별의 대상이 되어요. 아주 흥미로운 주제이고,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과거 이야기로 들어가고 싶지만 우선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Girl with many faces)에서 먼저 시작하죠.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 영상-

앨리: 전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입니다. 하지만 어떤 얼굴도 제가 선택한 얼굴이 아니죠. 집이 마음은 둔 곳이라면, 제집은 항상 부서져 있었어요. 서류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전 정돈되어 있고 법규를 지킵니다. 하지만 전 겨우 두 살 때 서류에서 선택되었어요. 제 얼굴은 성공과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 상징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저 자신일 뿐이죠. 입양이 아름답고, 상냥하고, 옳은 일이라는 인식이 있어요. 문제가 있다면 사람의 문제일 뿐이죠. 갈색 아이를 데리고 와서 하얀 옷을 입힌다고 달라지지 않아요. 그 아이들의 색을 지우고, 언어를 빼앗은 뒤에도 성장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 애의….

-영상 편집됨-

앨리: 사실 그 영상에서 약간 떨어져야 했어요. 영상을 올리고 난 뒤에 고작 몇십 명에서 몇백 명이 보면 운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아내가 며칠 전에 말해주기를 페이스북에서만 영상이 26만 번 조회됐다고 하더군요. 아주 대단한 일이죠. 그리고 인스타그램에도 비디오가 올라와 있습니다. 전 기술에는 조예가 없어서 관련 영상 조회 수도 모르고 아내가 어떻게 정보를 얻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제 영상을 봐줬으니 대단하다고 생각하죠. 서로 연락을 했을 때 이미 들으셨지만, 사람들과 교류하는 일은 신기해요. 사람들이 연락하면 서로 이해하면서 교류하며 영적인 연결을 구축할 수 있지만, 동시에 사람들을 직접 만난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니 아주 이상한 경험입니다. 사람들을 알게 되지만 직접 알지 못하니까요. 

팟캐스트: 많은 입양아가 앨리 씨에게 연락을 해왔나요?

앨리: 죄책감이 느껴지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람들과 그렇게 깊게 교류하지 않았어요. 물론 메시지를 받으면 답신을 하려고 했죠. 하지만 30~40개가 넘는 메시지를 받으니 15개의 메시지에만 답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저에게 연락해서 제 영상을 보고 공감했다고 하는 일 자체가 매우 감명 깊었죠.

팟캐스트: 어떻게 그 영상을 찍게 되셨죠?

앨리: 그거 자체만으로도 이야기 하나가 나오네요. 전 상 운동권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성별 기반 폭력 반대 운동과도 깊은 관계가 맺었죠. 제가 한 아이 정책을 시행하던 중국에서 입양되었으니 성차별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성별 기반 폭력의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제, 남아선호사상 등이 연관되어 있으니 더 끔찍하죠. 과거에 성차별 반대 운동을 꾸준히 진행해왔지만 인종 차별에 대해 운동은 하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할 수 있을지 몰랐고, 그 시점에는 그 운동과 연관될 좋은 이유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든버러에서 2020년 12월에 에든버러 대학교의 학생이 동아시아계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공격당했어요. 8명에서 9명의 사람에게 집단 구타를 당했죠. 그 학생은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지역 사회에서 큰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제 친구와 저도 영국 거주 아시아인이었기 때문에 같이 모여서 이런 혐오 범죄를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COVID-19 사태 이전에도 반아시아계 인종 차별은 존재했지만, 사태가 일어난 뒤로 인종 차별이 급증해서 더는 차별을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앨리: 그래서 에든버러 인종 차별 폭로(Racism Unmasked Edinburgh) 단체를 창립했어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습니다. 저의 현명한 아내가 SNS 마케팅을 통해 우리 단체를 도와줬기 때문에 온라인상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죠. 여러 기자에게 연락했고, 그 기자 중 하나가 우리를 BBC와 연결해 줬어요. COVID-19 혐오 범죄와 관련된 기사를 쓰는 BBC의 부서에서 저를 인터뷰했습니다. 요약하자면, 페이스북을 통해서 언론에서 일하는 유색인종들을 위한 단체와 접촉했어요. 반아시아계 인종 차별 문제 인식을 높이고, 혐오 범죄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으니 기자들이 도와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 영상을 같이 촬영하게 될 진 링이 연락을 해왔죠. 진이 절 능력이 닿는 대로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혐오 범죄에 대한 영상을 찍을 예정이었어요. 하지만 온라인 통화로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삶에 관해서 이야기하니 이야기 흐름이 바뀌었죠. 진 링은 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 시민입니다. 진에게 제 삶과 제 과거를 공유했어요. 진은 그걸 듣고 입양과 중국 입양아의 영국에서의 삶에 대해서 영상을 찍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전 그걸 듣고 좋다고 했고, 진은 생각해둔 영상 아이디어가 있는지 저에게 물었죠. 제가 생각해둔 연설문이 있으니 그걸 바꾸면 된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거짓말이었습니다. 정확히 생각해둔 연설문은 없었죠. 하지만 마이클 잭슨의 노래대로 거짓말을 계속해서라도 성공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연설문이 있다고 말한 뒤 2시간 동안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의 대본을 적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썼던 글들을 대화체로 바꿔서 적었어요. 과정이 아주 흥미로웠죠. 제 아내가 제가 처음으로 이런 종류의 글을 쓰는 셈인데 걱정이 안 되냐고 물었고, 저는 유튜브로 강의를 들으면 된다고 답했습니다.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 영상 재시작-

앨리: 전 저에게 일어난 일을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도 옹호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부모님이 저를 입양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절 입양하지 않아도 됐다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죠. 제가 이러한 생각을 공적으로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무서워서 못해요. 입양아들이 조용히 망가진 과거를 넘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영원히 중국인이 될 수 없지만 동시에 백인도 되지 못하겠죠. 그래서 이 과거를 단순히 넘길 수 없다고 생각해요.

-영상 편집됨-

앨리: 지금 생각해보면 그 영상은 개인적 힘의 표시였을 뿐만 아니라 분노의 표시였다고 생각해요. 제가 표현할 수 있었던 가장 복잡한 감정이었다고 생각하죠. 과거에 저는 입양에 관해서 이야기한 적도 있고 중국 기반 입양 단체인 어머니 사랑의 다리(Mother’s Bridge of Love)와 같이 활동했습니다. 사랑의 다리는 신란이라는 이름의 훌륭한 기자가 운영하는 단체이죠. 신란 씨는 “중국의 선량한 여성들”(Good Women of China)이라는 책을 출판한 작가이기도 해요. 그 책은 중국 역사 동안 여성들이 받아온 대우와 비극에 대해서 저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불안정하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 그리고 문화대혁명 시기의 여성 대우에 대해서도 저술하고 있죠. 문화대혁명 시기는 홀로 놓고 봐도 흥미로운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신란 씨는 그 책의 후속작으로 “중국에서 어머니는 기억한다.”(Somewhere in China, Mother Remembers) 이라는 책을 저술했죠. 이 주제도 매우 흥미로웠어요. 90년대에 버려진 중국계 고아들이 많았죠. 여성이 대부분이었는데 신란 씨는 그 고아들의 친어머니들을 익명으로 인터뷰했고, 이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은 말을 받아 적어서 그 사람들 대신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출판했습니다. 아주 강력하고 아주 무거운 내용들이었죠. 제 고등학교 과제의 일환으로 저는 신란 씨에게 연락을 해서 인터뷰를 하게 됐습니다. 대단한 기자이자 작가가 영국 고등학생에게 시간을 내줬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신란 씨가 제 이야기를 들었고, 저의 글을 쓸 생각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 친어머니에게 편지를 썼어요. 아주 무거운 내용이긴 했지만 동시에 저는 15살에서 16살 정도의 나이였죠. 아직도 인터넷 어딘가에 올라와 있을 겁니다. 제가 신란 씨에게 편지를 보내자, 신란 씨가 중국어로 편지를 번역해서 어머니 사랑의 다리 단체 내에 있는 친어머니들에게 줬다고 합니다. 물론 그분들 중에 제 친어머니가 있을 가능성은 아주 적지만, 입양아가 그러한 글을 써서 친어머니들에게 그런 편지를 전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편지 작성이 제가 입양 관련해서 한 일 중 가장 훌륭한 일이었지만 주제의 논점이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앨리: 반면에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 영상은 제가 알지 못하는 어머니, 얼굴이 없는 여성을 찾으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국제 입양아로서 자라면서 겪었던 차별과 고통과 관련된 사회 청문회를 여는 셈이었죠. 입양아는 가족, 친구에게서 그런 문제를 겪게 됩니다. 물론 의도적인 차별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과 피부색이 다르면 당연히 소외되는 느낌을 받게 되죠.

팟캐스트: 그 영상을 제가 감명 깊게 봤던 이유는 입양의 복잡함을 잘 잡아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입양아들이 입양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지만 백인 가족이나 친구들과는 이런 대화를 나누기 어렵고 아예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경우가 나은 경우도 많죠. 반면에 앨리 씨의 영상이 감명 깊었던 이유는 이런 주제를 직접 언급하고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앨리: 쉽지는 않았어요.

팟캐스트: 영상에서 말한 대사가 과거에 이야기하고 싶었던 말이었나요?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앨리: 네. 영상을 찍을 때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어요. 그 사실 자체가 상당히 역설적이죠. 제 부모님이 입양 문제에 대해서 깊게 파고들어서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영상을 찍기 이전에, 정확히는 BBC 인터뷰 이전에 부모님에게 내용이 너무 분열적이거나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게 했습니다. 확인을 받는 일 자체가 입양아의 검열 문제와 입양아가 완벽하지 못해서 죄책감을 가지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봐요. 부모님에게 글을 검사받는 과정에서도 제 일부는 부모님이 괜찮지 않다고 해도 그냥 진행해야 할지 걱정했죠. 결국,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영상은 결과적으로 제 부모님과 타협으로 만들어진 영상이었습니다. 부모님을 존중하고, 모욕하지 않으면서 영상을 만들려고 노력했죠. 영상 중간에 제가 제 가족을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해야 했죠. 제가 글을 쓰면서 이 영상에 가장 큰 반발을 하는 사람들이 다른 양부모들과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하는 백인들, 제가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백인들이 되리라 예측했거든요. 세상의 일이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 있는 균형을 찾고 싶었습니다. 저에게 시간이 더 주어지고 관점이 넓었다면 제가 말하려고 하는 사실 자체를 잘 설명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는 입양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앨리: 하지만 제 영상의 댓글 중 상당수는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전 최대한 그 영상의 댓글에 반응하려고 했고, 부정적인 댓글에도 반응하려고 했어요. 제가 들으려고 한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영상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은 우리가 입양 자체를 하지 말아야 말고 아이들을 그냥 고아원에 내버려 두고 고통받게 해야 하냐는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영상에서 입양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죠. 고통이 많은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무시하는 사실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입양이 고아로 사는 일보다는 나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무시하는 일도 문제입니다. 네. 입양아의 삶이 고아의 삶보다는 낫죠. 하지만 고아의 고통과 입양아의 고통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어요. 입양되는 일이 고아에게 있어서는 가장 나은 일이고, 가족이 없는 아이가 안전하게 양육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어야 하는 일은 맞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이 잃은 삶과 문화에 대해서 슬픔을 표시할 수도 있는 일이고 그 감정이 있다고 해서 입양 자체를 부정하는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어요. 

앨리: 우리 입양아들이 입양아의 이야기와 고통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입양아들의 이야기, 고통, 분노가 전부 자신의 소유이고 다른 사람이 개입할 수 없죠.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승인,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어요. 제가 영상을 찍을 때도 부모님의 동의를 얻었는데 이 영상을 찍는 일은 위선적인지 고민했죠. 결국, 부모님의 뜻과 제 이야기의 균형을 찾아야 했어요. 편한 정답도 없고 맞는 답도 없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막 해버리고, 후폭풍을 신경 쓰지 않는 길도 있었죠. 하지만 제 분노를 드러내면서도 그 분노를 공손하게 표현하려고 했다고 생각해요. 사회 전체에게 보내는 이야기지만 어린이, 특히 입양아 어린이들은 분노를 건강하게, 그리고 생산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감정을 지우고 묻는 법을 배우고, 결국 삶을 조정받게 되죠. 분노는 부정적이고 나쁜 감정으로 인식됩니다. 분노하고 있다면 분노를 없애고, 놓아주거나 억제하라고 배우죠. 분노가 개인의 잘못이고 문제라는 인식 자체가 양부모들, 나아가서는 사회가 입양아의 분노에 가지고 있는 책임을 없애게 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분노를 받아들이고 처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가 말했듯이 이러한 상황에서의 분노는 당연한 일이죠. 이런 가족의 상실에서 입양이라는 요소를 빼봅시다. 어떤 사람이 가족을 교통사고로 전부 잃었다면 사람이 장례식에 와서 그래도 좋은 일을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 적어도 넌 살아남았다고 위로하지는 않죠

팟캐스트: 차에 같이 타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하지는 않죠. 

앨리: 그러지 않죠. 왜 이 상황에 행복하지 않은 지, 왜 화를 내는지 묻지 않아요. 가족 전체를 잃었지만 적어도 분노를 조절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큰 과장이 들어간 이야기긴 하지만 다른 슬픔과 분노는 사람들이 동정해주고 공감해주죠. 하지만 입양은 그러지 않아서 화가 납니다. 그 이유는 국제적 입양에 따라오는 거대한 무의식적 인종 차별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백인 구세주 콤플렉스에 관해서 이야기하고는 하죠. 하지만 이러한 인식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어요. 유색인종 아이를 입양하는 백인 부모들이 전부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 부모님과 저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제 부모님과 저는 관련 서적도 작성하고 있어요. 적어도 제 부모님과 저는 객관적이고 균형적으로 서로의 관계를 볼 수 있는 관계를 맺고 있죠. 하지만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저의 어린 시절은 완벽하지 않았어요. 제 부모님은 항상 인종 차별이나 무의식적 미묘한 차별과 같은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하는데 거부감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죠. 제 부모님이 저에게 그러한 환경을 제공해서 훨씬 더 강하게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입양아가 저처럼 운이 좋은 환경에서 자라나지 못했다는 사실도 알아요. 우리 가족은 부모가 구세주처럼 인식되는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하고는 했죠. 부유한 1세계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나가서 아이들을 입양하니까요. 가난하고 뒤처져 있는 국가들에 가서 이 불쌍한 고아들을 입양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고, 어떤 가치도 없고 미래도 없는 아이들에게 삶을 선물한다는 인식이 있어요. 그러한 인식 자체가 입양아에게 큰 해가 된다고 생각하죠. 문제가 있는 감사 문화가 입양아를 망가트린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항상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하고 기대에 맞춰야 한다는 압박이 존재하죠. 그러한 감정은 처리하기 힘들어요. 

팟캐스트: 전부 말이 되네요. 힘의 역학과 차이가 입양아들에게 더 나은 삶을 준다는 인식을 강화합니다. 고아들에게 더 나은 삶의 기준을 제공해주고 가난한 나라 출신의 아이에게 부유한 나라의 기회를 준다고 생각하게 하죠. 아주 흥미로운 일이예요.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관계를 반대로 하면 그러한 관계가 성립할지 의문입니다. 중국의 부유한 가족들이 미국 백인 아이들을 입양하기 시작한다면 세계가 그러한 관계를 잘 받아들일지 의문이죠.

앨리: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생각해보면 좋게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카오미 씨가 맞아요. 대중매체의 국제 입양 묘사에서는 항상 부유한 백인 가족들이 다른 국가에 가서 타국의 아이들을 입양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돌아간다면 그 사실 자체가 받아들여질까요? 전 세계적인 분노를 일으킬지도 모르고 더 큰 중국 공포증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미국 언론이 반중국 선전을 방송하는 광경이 그려지네요. 부유한 중국인들이 미국 아이들을 훔쳐간다는 방송을 할 겁니다. 사회적으로 그러한 불편함이 있다고 생각해요. 많은 유색인종이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 한정된 관점으로 접근하게 되죠. 제가 서양 문명을 싫어하는 사람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서양 민주주의의 장점과 활동 방식에 대해서 확실히 이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중국이 구식이고 구닥다리라는 묘사가 대중매체에 넘쳐나는 일도 사실입니다. 항상 중국에 초점을 맞추면 이 사람들이 구식이고, 박쥐나 먹는 비현실적인 사람들이라고 묘사하죠. 이 사람들이 비좁은 아파트에 다닥다닥 모여 살고 이런 가난한 천민들의 삶을 보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한 묘사는 중국의 극히 일부만을 과장해서 보여줄 뿐입니다. 중국은 아주 강한 영향을 세계에 끼치고 있는 신흥 강국이에요. 경제적, 기술적인 발전은 아주 놀라울 정도이죠. 제가 2019년에 관련 통계를 보고 있었는데 중국의 특허 신청이 미국의 특허 신청을 뛰어넘었어요. 그래서 중국을 그렇게 후진국으로 묘사하는 일 자체가 사실적이지 않죠. 물론 동아시아 입양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앨리: 아프리카가 가난한 지역이라고 묘사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해요. 아프리카에도 얼마든지 부유한 지역이 많죠. 아프리카 자체를 하나의 지역으로 엮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아프리카는 아주 넓고 거대한 지역이니까요. 사람들이 아프리카, 아시아라는 거대한 지역을 하나로 인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아프리카라고 하면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라고 생각하죠. 아프리카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화와 인종에 대해 인식을 하지 못합니다. 남아프리카, 짐바브웨, 이집트가 동시에 아프리카 대륙 안에 존재하죠. 거기에 인종적 차이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많은 서양인이 그 차이점과 깊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인식의 문제는 아시아에도 존재하죠. 사람들이 아시아라고 말하면 보통 중국을 생각하지만, 아시아는 아주 드넓은 지역인데, 아시아를 중국으로 인식하는 일 자체가 문제가 많아요. 아시아에 수많은 국가가 있는데 전부 중국이라고 부르는 일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앨리 씨, 현재 전 세계적으로 반아시아계 증오범죄가 증가하고 있는데, 앨리 씨도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폭언을 들은 적이 있나요?

앨리: 자주 들었죠. 

팟캐스트: 입양아로서 그러한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

앨리: 솔직하게 말하자면, 충격적이고 모욕적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너무 많이 들은 이야기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이미 다 알고 있어요. 그 사실 자체가 아주 슬프죠. 슬픈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라면서 자주 들은 이야기라 이미 익숙해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 때 유일한 아시아계로서 생활하는 일에는 매우 익숙해져 있었죠. 제 고등학교에만 학생이 2000명이 있었는데 그중 4명에서 5명이 유색인종이었죠. 제가 약간 과장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숫자가 아주 적었습니다. 아시아계는 5명 정도밖에 없었고 그중 하나가 제 자매였죠. 아시아계는 제 성장기에는 아주 극소수 인종이었습니다. 아시아계 집단이 있지도 않았어요. 학교 전체에서 저를 그 아시아계 여자애로 인식했죠. 그래서 항상 인종 차별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항상 눈에 띄기 마련이고,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독창성이 없는 차별을 들으면 오히려 실망하게 되어요. 좀 더 기발한 모욕을 할 수 없었나? 이라는 기분이 들죠. 하지만 COVID-19가 퍼지고 나서 생활이 좀 더 어려워졌습니다. 집 밖에 나가려고 해도 준비를 해야 하죠. 전 권리 운동을 하면서 자아를 찾을 수 있었어요. 제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활동을 하면서 가끔 문제아들과 싸우는 일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밖에서 전혀 보호받지 못하고, 영국의 인종혐오 범죄가 증가하고, 사람이 다치고 죽는 일을 보게 되니 두려워요. 아시아계의 외모를 하고 밖에 나가면 공격받을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 인종 차별 자들에게 한 말 중 좋은 말 몇 가지만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앨리: 여러 가지 말을 준비하죠. 어떨 때는 그 말에 대답해주고 같이 대화할 때도 있어요. 그리 생산적인 일도 아니고, 어른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제가 중국 시민이라고 생각하고 저에게 차별적인 말을 하면, 제가 그냥 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이 대응하죠. 사람들이 차별적인 말을 반복하게 만들어요. 그러다 보면 그 사람들도 자기들이 말하는 이야기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고 도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제 출신지를 물을 때도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영국에서 왔다고 대답하는 때도 있죠. 그렇게 대답하면 진짜 어디에서 왔는지 묻습니다. 그럼 저도 영국 옥스퍼드 출신이라고 대답하죠. 옥스퍼드는 영국 남부에 있고, 아주 부유한 동네에, 유명한 대학교도 있는 곳이에요. 

팟캐스트: 아주 유명하죠.

앨리: 하지만 대부분은 대응을 안 하려고 하죠. 몹시 나쁜 일입니다. 제가 눈치챈 또 다른 일은 영국 태생 아시아계와 이주 아시아계 사이의 차별이었죠. 전 영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중국계 영국인도 아니죠. 하지만 운이 좋게도 그러한 배경과 비슷한 성장환경에서 자라났어요. 전 어렸을 때부터 영국 영어를 배우면서 자랐고, 그래서 특수한 억양이 없죠. 사람들이 제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제가 영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사실이 절 더 고통스럽게 만들죠. 제 친구 중 일부는 중국 출신인데 중국식 억양을 가지고 있고, 제가 가진 언어적 보호막이 없습니다. 제가 몇 달 전에 음식을 포장하러 갔을 때 코로나바이러스를 원치 않는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죠. 그 말에 저는 “코로나라니 뭔 소리예요? 전 여기에서 23년간 계속 살았는데요.” 그렇게 대답하자 사람들이 제가 영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사과를 한 다음 말하는 방식을 바꾸더군요. 전 좋은 아시아계 중 하나이니 괜찮다는 인식이었죠. 이 말이 이해가 되나요?

팟캐스트: 그 이야기도 매우 무서운 이야기이네요. 우리가 가지고 성장한 백인의 특권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한 셈이죠?

앨리: 그렇죠.

팟캐스트: 너는 괜찮다.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우리의 일부라는 인정이죠.

앨리: 하지만 그건 칭찬이 아니죠. 사람들이 저에게 칭찬이라고 이상한 소리를 한 경우가 너무 많았고, 전부 모욕이나 다름없었어요. 하지만 제가 화를 내면 사람들이 놀라더군요. 영어 실력이 아주 좋다고 칭찬을 하면 제가 모국어이니 당연히 잘하죠? 이라고 답하고, 제 개인적인 생활에서도 남자들이 저에게 다가와서 “아시아인은 취향이 아니지만 넌 귀엽네.”라고 하던가 “아시아계 여자애치고는 귀엽네.”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런 소리를 계속 듣다 보니 여성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했을지도 몰라요. 뭐 농담이지만, 그런 인종차별적 발언을 해도 사람들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일이 문제라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페티시 문제도 있죠.

앨리: 아주 심각해요. 오리엔탈리즘까지 합하면 아주 끔찍하죠. 제 정보를 많이 공유하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제가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남자와 데이트를 그만둔 이유 중 하나지만, 그 남자가 갑자기 “나 아시아계를 먹어 본 적이 없어.” 이런 소리를 하더군요. 음식도 아니고 뭔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죠. 많은 아시아계 남성들의 경우는 정반대였습니다. 아시아계 남성들은 항상 조롱의 대상이죠. 너무 화가 나서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없네요. 전 아름답고 잘생긴 친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들이 연애할 때마다 인종 차별을 겪는 경우가 많아요. 백인 여성들도 인종 차별을 하죠. 난 아시아계 남자에는 관심 없어. 크기가 작거든. 이런 소리를 하고 다녀요. 이러한 개인적인 이야기가 마구 남발됩니다. 대중매체가 이런 문제에 있어서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아시아계 남성들을 매력적이지 않게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시아계 남성들이 작고, 약하고, 쓸데없다는 묘사가 많죠. 그리고 아시아계가 그런 선입견을 받아들이게 된 일도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요. 

팟캐스트: 물론 현재에 와서는 BTS나 한류 스타들 때문에 아시아계 남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여성들이 늘어났나요? 그게 페티시의 일부라고 생각하시나요?

앨리: 아주 이상하죠. 아시아계 남성들에게 조금 기분 좋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동시에 페티시적인 접근이고 충격적인 접근이죠. 제 동아시아계 남성 친구들은 아시아계 남성에게 적대적인 환경에서 자라왔는데 갑자기 아시아계 남성, 특히 한국계 남성과 데이트하는 일이 유행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제 배경은 좀 독특하긴 하지만 LBGTQ+ 사회에서도 이런 유행은 마찬가지죠. 제 전 여친도 한국계라면 뭐든지 다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제가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제가 한국계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니 전 여자 친구의 반응은 이상했습니다. 보통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은 과거의 배경이 뒤흔들린 일에 대해서 걱정을 하는데 제 전 여자 친구는 한국인과 사귀고 있다니 대단하네! 이런 반응을 보이면서 기뻐했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배경을 알게 된 이야기를 하자면, 19살 때 제 배경과 혈통을 알기 위해서 중국에 방문했죠. 그 방문 결정 자체도 매우 갑작스럽게 내려진 일이어서 제 부모님이 기뻐하지 않았죠. 19살에 중국어도 못하는 상황에서 혼자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제 출신지의 고아원을 방문했죠.

팟캐스트: 어디에 있죠?

앨리: 양저우라는 곳에 있어요. 양저우식 볶음밥으로 유명하죠. 백만 명의 거주자가 있지만, 중국 기준으로는 소도시입니다. 상하이에서 다섯 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죠. 고아원에 도착해서 제 서류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어요. 제가 입양되었을 때의 고아원장은 아니었지만 고아원장이 나와서 제 서류 작성을 잘못했다고 이야기했죠. 처음에 듣고 뭔 소리인지 이해를 못할 때 고아원에서 저에게 설명을 했습니다. 제가 다른 고아원에서 이전된 고아였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해안가 출신 도시인 둥타이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그걸 듣고 괜찮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이번에는 제가 중국계인 한국계인지 모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입양 절차에 연관된 많은 입양아가 한국계였기 때문이죠. 고아원에서 서류가 분실되었기에 제가 중국계 고아인지 한국계 고아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지역에는 조선족 거주지와 북한인 이민자가 많으므로 정확한 민족 출신을 알 수 없다고 했어요.

팟캐스트: 그 조선족 거주지가, 일본 제국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만든 거주지였나요? 아니면 독립군 계통 거주지였나요?

앨리: 아마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거주지라고 생각합니다. 고아원에서는 제가 한국계나 한국계 혼혈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를 해줬어요. 적어도 그 한국계 혈통이 대한민국 혈통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둥타이에 있는 한국계 거주자들은 북한 출신이거든요. 그 사실을 알게 되니 답답했죠. 사실을 알아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약에 둥타이에 가서 제 혈통을 찾으려고 해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요. 아주 웃긴 이야기이기도 한데, 제가 중국에 있을 때 절 보고 모두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중국 억양을 안 가지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지만 많은 사람이 저에게 와서 한국인인지 물었죠. 그걸 들으면 저는 그렇다고 답했어요. 제가 한국인이라고 답하는 일이 제가 영국인이라고 하는 일보다 훨씬 쉬웠습니다. 사람들에게 제가 영국인이라고 할 때마다 저를 믿지 않았거든요. 그 외모로 영국인이라니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고,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한국인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했죠.

팟캐스트: 자라나면서 사람들이 타국에서 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입양된 곳으로 돌아가니 그곳 사람들도 타국 출신이라고 인식하다니 아주 역설적이네요.

앨리: 네 그렇죠. 이상했습니다. 사실 그곳을 방문하는 일 자체가 저에게 있어서 큰 충격이었죠. 1번도 제가 중국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어요. 제가 중국에서 입양되었으니 당연히 중국계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고아원에서 한국계이거나, 혼혈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묘했습니다. 이제 제 혈통에 대해서 아는 사실이 없었죠. 제가 모른다는 사실만 알았어요. 

-광고-

앨리: 모두 이런 경험을 했는지는 몰라요.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저와 제 입양아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우리가 고아원 입구에 생년월일이 쓰인 카드가 붙여진 포대기에 넣어진 채로 남겨져 있었다고 이야기를 해주시고는 했죠. 제 부모님이 저에게 말해주신 이야기가 이랬고, 그 이야기를 믿으면서 자랐습니다. 그 이야기를 의심할 이유가 없었어요. 하지만 제가 고아원에 갔을 때 고아원에서 이야기는 거짓말이라고 말해줬습니다. 모든 고아에게 주는 배경이라고 이야기했죠. 제가 이런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던 이유가 제가 중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이야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소통의 오류가 적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뭐가 사실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 사실 그 배경 이야기가 나온 이유가 번역 오류 때문이었죠. 부모님이 저를 입양하셨을 때 번역가가 제가 생후 5일이라고 서류를 번역해줬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고아원에 비치된 제 서류를 직접 읽어보니 5일이 아니라 5달이었죠. 5일과 5달은 아주 큰 차이가 나요. 둥타이 고아원에서 양저우 고아원으로 이전될 때 나이였습니다. 제가 아는 정보에 의하면 둥타이 고아원은 과잉수용 상태였다고 합니다. 수많은 여자아이가 버려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한 고아원에서 다른 고아원으로 아이들을 이주시키는 제도가 만들어졌고, 그렇게 해서 제가 둥타이에서 양저우로 옮기게 됐습니다. 사실 중국 방문 때 시간이 없어서 둥타이는 방문하지 못했어요. 둥타이가 어떤 곳인지 알고 싶어서 한번은 방문하고 싶습니다. 해안가 도시라는 정보는 알지만, 제가 아는 정보는 이게 다예요.

팟캐스트: 둥타이 고아원의 과잉수용으로 인해서 다른 고아원으로 보내지셨군요? 그럼 부모님이나 다른 정보는 없나요?

앨리: 관련 정보는 전혀 없습니다. 불확실성이 너무 많고,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제 삶 전체를 거짓말로 도배한 셈이었죠. 제가 언제 태어났고, 어디 출신이었고, 입양되었을 때 나이가 어땠는지 전부 거짓말이었습니다. 제 출생 시기가 적힌 종이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거짓말이었죠. 고아원장이 저에게 제 생일은 제 진짜 출생 일자가 아니라, 고아원에서 마음에 든 날짜를 생일로 정해줬다고 했습니다. 그걸 듣고 나니 제 삶에서 뭐가 진짜였는지 의심이 갔죠. 몹시 화가 났어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사람들의 이야기도 믿을 수 있는지 의심이 갔습니다.

팟캐스트: 그 사실을 알고 난 뒤에 생일 축하하는 데 문제가 생겼나요? 아니면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생일을 축하할 수 있었나요?

앨리: 받아들이기 어려웠죠. 저는 제가 안 과거 배경이 전부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더 많은 사실을 알기 위해서 중국에 갔고. 19년간 그 정보를 믿으면서 자랐는데, 40분 만에 모든 사실 바뀌었고, 불확실성이 너무 많이 늘어나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고아원에서 맛있는 점심을 대접해줘서 고맙다고 하고 나왔어요. 그 뒤 몇 시간 넘게 울었던 기억이 나고, 간신히 호텔에 돌아가서 제 부모님에게 연락을 드렸죠. 제가 혼자 부모님의 압박에서 벗어나 저 혼자 사실을 찾으려고 했는데 역설적이지만 그때 어머니에게 울면서 여기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일이 기억이 납니다. 그 방문 이후 몇 년 동안 생일에는…. 제가 벌써 25살이라니 나이를 많이 먹었네요. 제가 현재 25살입니다. 어쨌든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그 방문 이후 몇 년 동안 생일이 어려웠던 기억이 나죠. 생일이 될 때마다 오 오늘 생일이네- 아닌가? 이런 반응을 보이고는 했거든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반응이 부드러워졌죠. 저에게 생일은 확실히 존재하고, 제가 생일이라고 축하하는 때와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으니, 아예 생일이 아니라 생월을 축하하게 됐습니다. 달 내내 제 탄생을 축하하죠. 

앨리: 제가 한국계이거나 한국계 혼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매우 기묘했어요. 양저우에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어서 다시 고아원에 방문했습니다. 주변 상황이 많이 바뀌었어요. 우선 가장 큰 변화는 국내 입양 허용이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입양될 때는 국내 입양이 불가능했거든요. 그래서 고아원에서 지내는 아이들의 숫자가 훨씬 줄었고, 1자녀 정책도 완화되어서 많은 사실이 바뀌었습니다. 고아원에 방문해서 직접 아이들도 만날 수 있었죠. 아이들과 직접 만나는 경험 자체가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애들처럼 생활한 적이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고아들의 구성 자체가 바뀌어서 많은 아이가 장애인이었어요. 거기에 제가 입양되었을 때는 여자애들뿐이었는데 성비도 바뀌었습니다. 오후 내내 고아원에서 이름이 귀여운 한 소년과 시간을 보냈어요. 제가 거기 갔을 때 갈색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그 가방을 당겨서 제 시선을 끌고는 했죠. 그 경험이 제 기억에 남았고, 제가 가야 하니 그 남자애가 매우 슬퍼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 생각에는 저, 중국 중국인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고 생각해요. 

앨리: 제가 학위를 따기 위해서 노력할 때, 학위를 따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제가 평범하게 자랐다면 알았을 언어를 다시 배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이 저에게 얼마나 감정적 영향을 끼칠지 생각하지 못했죠. 제가 중국에 갔을 때 중국어 실력 부족이 얼마나 저에게 영향을 끼칠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중국어를 못한다고 바보 같다고 하는 중국인이 많았죠. 제 능력 부족이 저를 얼마나 슬프게 할지 몰랐어요. 제가 아무리 노력하고 집중해도 진짜 중국인이 말하는 중국어를 따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슬펐죠. 제가 영국 백인들 사이에서 자랄 때는 항상 제가 그 사람들에게서 소외된 기분이었죠. 하지만 제가 중국에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소외된 기분이었어요. 제가 왜 중국에 가면 더 나아진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중국에 방문했을 때 아주 텅 빈 기분이었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는 기분이었습니다. 문화의 틈새에 사는 사람의 문제였죠. 중국인들이 저에게 긍정적으로 반응했을 때는 제가 중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와 제가 한국인이거나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고, 서양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죠.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중국인으로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중국인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었을 때는 제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뿐이었습니다.

팟캐스트: 고향에 돌아가서 같은 민족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그 일 자체가 불가능했군요? 

앨리: 네. 되찾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죠. 결국, 문제는 제가 대화를 나눈 사람 중 상당수가 제가 동아시아인처럼 생겼지만, 중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지 이해를 못 했기에 생겼습니다. 그러한 혼란과 의문은 사람들이 사실적이라고 논리적이라고 인식한 대답을 찾았을 때나 사라졌죠.

팟캐스트: 간첩 교육을 받았다면 이런 상황에서 쓸모가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앨리: 제 부모님도 똑같은 말을 하셨어요. 중국에 발령되어서 주변에 섞여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이라고 반응하셨죠. 그때 저는 제가 중국어를 쉽게 배우고, 중국에 섞여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중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자 언어의 복잡함을 이해했죠. 전 중국어를 하는 일은 어렵고, 아무리 중국어를 연습해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어요.

팟캐스트: 중국어를 대학교 때 배우셨죠? 그 이전에도 배우셨나요?

앨리: 아뇨. 대학교 때 들어가서야 본격적으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죠. 몹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전 자연스럽게 중국어를 배우지 못했어요. 전 중국어를 쉽게 배울 수 있다고 오만한 착각을 했지만 몹시 어려운 언어였습니다. 

팟캐스트: 다른 백인 학우들이 앨리 씨보다 중국어를 더 잘하는 예도 있었나요? 그럴 때 앨리 씨는 어떤 기분이 들었죠?

앨리: 백인 친구들이 단순히 저보다 중국어를 잘한다는 사실보다 더 영향을 끼친 일이 있었어요. 제가 학과 친구들과 중국어 학생을 위한 파티에 가거나, 중국에 방문하면 최대한 중국어를 많이 쓰려고 했죠. 제가 중국어를 제대로 말하려고 하고 좋은 주제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면 저와 대화하는 중국 사람들의 반응은 평범했어요. 반면에 백인인 제 아내는 중국어를 잘 하지 못하고 관련 학위도 없는데 중국어 몇 단어를 하면 중국 사람들이 아내를 칭찬해줬죠. 그러한 이중 잣대가 저에게 있어서 큰 역경이 되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노력하고, 중국어 실력을 키우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았죠. 심지어 지금도 제 노력과 실력을 사람들이 인식했으면 합니다. 예를 들면 파티에 제 아내를 데리고 가면 제 아내가 중국어로 인사를 하거나 중국어로 널 사랑해, 라는 조그마한 중국어 단어를 합니다. 제가 제 아내에게 가르쳐준 단어를 사용하니 귀엽죠. 하지만 백인들이 중국어를 배우는 일을 더 높이 평가하니 제 노력이 의미가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도 중국어를 모국어로 배우지 않고 자란 영국 사람이고, 제 부모님도 중국어를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제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10배는 더 노력해야 했죠.

팟캐스트: 한국에서도 한국 입양아 상대로 그러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요. 한국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 하는 일이 우리 잘못이고, 한국인이나, 중국인이 아닌 타국인, 특히 백인이 한국어나 중국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해도 말하는 일 자체가 높이 평가되죠. 저 외국인들이 노력하고, 자신을 개선하려 한다고 인식합니다.

앨리: 중국에서 사람들은 절 한국인으로 인식했죠.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중국 사람들에게 대화하려고 하면 중국어를 하려고 한다고 더 높은 평가를 해줬어요. 제가 영국인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일보다 더 높이 평가를 해줬습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제가 영국인이라 중국어를 잘 못 한다고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저를 믿지 않았어요. 제가 아무리 매끄러운 영어를 해도 믿지 않았죠. 영어로 말을 바꿔서 이렇게 영어를 잘하니 전 영국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이 저를 믿지 못했어요. 제가 영국인일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들에게는 믿기지 않는 일이었죠. 제가 대화를 한 사람 모두가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추궁했어요. 중국인들이 저와 대화를 나눠준 이유는 친구의 친구라는 이유 때문이었죠.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 이 친구의 친구이니 넌 믿을 수 있구나. 모국어가 영어인 이유는 영국에서 자랐기 때문이고 그래서 영국인이구나.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제 이야기를 믿어줬죠. 왜 사람들이 그렇게 저를 믿지 못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제가 한국인이라고 말하고 다닌 이유도 거기에 있었죠. 제가 중국어로 말하려고 하면 사람들이 절 모자란 사람으로 알았거든요. 저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소개하기 전까지는 제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죠. 제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제가 국제 입양아라는 사실보다 그 사람들에게는 더 믿기 쉬운 사실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중국에 방문하셨을 때 주변을 돌아보면서 주변에 나이가 많은 여성들이 어머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찾아보셨나요? 아니면 중국에서 자라났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생각하신 적은 있나요?

앨리: 그러기도 했고, 그러지 않기도 했죠. 적어도 고아원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그런 상상을 했습니다. 제 출신지를 방문했을 때는 누구든지 제 어머니일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제 삶 자체가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더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달 출신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으니까요. 중국에 방문했을 때 중국에서 생활하면 어떨지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중국으로 이주할까 생각했죠. 하지만 중국에서는 지내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웠어요. 틈새가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제가 직접 중국에 방문해서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과 거리가 여전히 존재했죠. 그리고 고아원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는 계획이 바뀌었습니다. 현재는 COVID-19 때문에 어디 여행을 가지 못하지만, 유행이 끝나고 나면 한국을 방문해볼 생각이에요. 제가 생각해보지도 못한 배경이죠. 하지만 지금은 아무거나 해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전 중국도 방문했고, 중국어도 배우고, 중국 문화를 배우기 위해서 평생 노력했어요. 하지만 제가 중국에 방문하니 고아원에서 제 출신지도 모르고, 제 혈통이 한국계일지도 모른다고 했죠. 그 반전 자체가 워낙 저에게 큰 충격을 줘서 한국을 직접 방문해야 하기로 했습니다. 정답도 없고,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모르죠. 물론 카오미 씨도 아시겠지만 23 and Me나 Ancestry.com(유전자 조사 회사들)이 있으니 유전자 검사를 해볼까 생각도 했죠. 제가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알아서 제 민족에 대한 결론을 내고 싶었어요.

앨리: 제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연애를 하고 관계를 맺은 사람은 태국 입양아 남자였어요. 서로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죠. 둘 다 백인 가족에 입양된 아시아계였습니다. 그때는 이러한 배경이 제가 필요로 하는 요소이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영혼의 단짝이 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했죠. 제가 그러한 생각을 했던 이유는 서로 비슷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고, 서로와 비슷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설명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 아내와 만나서 사랑에 빠져서 결혼한 뒤에 생각해보면 제 아내는 제 첫 연인처럼 제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죠. 하지만 굳이 아내가 절 이해해주기 원하지 않아요. 아내는 단순히 제 이야기를 들어주고 문제를 같이 생각해주면서 저를 많이 도와줍니다. 전 제 아내를 사랑하고, 우리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요. 매우 깊고 감정적인 관계이죠. 하지만 아내와의 관계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일은 입양에 관한 대화입니다. 제 아내, 캣은 저에게 공간을 줘요. 다른 입양아와 교제하면서 느낀 문제는 둘 다 입양아의 정체성과 과거에 대한 깊은 트라우마, 불안정성, 고통을 서로 가지고 있는데, 우리의 관계에서 그 2명분의 고통을 관리할 수 없다는 문제였습니다. 서로의 문제를 전부 신경 쓸 수 없었고, 우리의 정체성이 너무 망가져 있었어요. 그때 우리의 관계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전 더 혼란스러워졌고, 서로에게서 필요한 도움을 절반만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 아내와의 관계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저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되고, 제가 충분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아내가 저 자신을 고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전 항상 강하지 않습니다. 많은 입양아에게 있어서 정신 건강은 아주 심각한 문제죠. 영국에서 입양아들의 자살 시도율은 평균 자살 시도율보다 4배나 되고 끔찍한 일이예요. 아주 무거운 주제지만, 사실이죠. 부모에게 버림받고, 문화, 고향, 사람들에게서 괴리되니 아주 힘든 일입니다. 백인 여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일은, 제가 괜찮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있다는 점이에요. 아내는 절 가르치려 들지 않고, 절 구하거나 고치려고 하지도 않죠. 

앨리: 전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입니다. 하지만 어떤 얼굴도 제가 선택한 얼굴이 아니죠. 집은 마음은 둔 곳이라면, 제집은 항상 부서져 있었어요. 서류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전 정돈되어 있고 법규를 지킵니다. 하지만 제가 겨우 두 살일 때 서류에서 선택되었어요. 제 얼굴은 성공과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저 자신일 뿐이죠. 입양이 아름답고, 상냥하고, 옳은 일이라는 인식이 있어요. 문제가 있다면 사람의 문제일 뿐이죠. 갈색 아이를 데리고 와서 하얀 옷을 입힌다고 달라지지 않아요. 그 아이들의 색을 지우고, 언어를 빼앗은 뒤에도 성장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사회가 선을 지우는 광경을 봐요. 소녀는 웃는 법을 배우고, 모든 일이 괜찮다고 연기하는 법을 배우죠. 트라우마는 사람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할 때를 제외하고는 사실이에요. 유색인종 아이들이 구원받는 일은 돈이 되는 일입니다. 입양은 단순하지 않고, 존경할 일도 아니죠. 전 제 고향을 잃었고, 제 이름도 잃었어요. 다시는 완벽해지지 않겠죠. 

앨리: 전 제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이 저에게 준 사랑에 고마워합니다. 제 가족이 절 지금 있게 해줬고 그 사실을 변하지 않아요. 가족은 저에게 강해지라고, 제 목소리를 쓰라고 했죠. 전 저에게 일어난 일을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도 옹호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부모님이 저를 입양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절 입양하지 않아도 됐다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죠. 제가 이러한 생각을 공적으로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무서워서 못해요. 입양아들이 조용히 망가진 과거를 넘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영원히 중국인이 될 수 없지만 동시에 백인도 되지 못하겠죠. 그래서 이 과거를 단순히 넘길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저와 같은 사람을 위한 장소는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제 얼굴은 항상 바뀝니다. 인종에 집착하는 세계에서 저와 같은 사람을 위한 장소는 없죠. 아무도 입양과 입양아가 겪은 일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입양아가 공개적으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말하면 배은망덕하다고 비판을 받죠. 가족이 있지 않으냐, 신이 베푼 은혜를 생각해라, 넌 괜찮다, 이러한 말들은 제 고통을 줄여주려고 한 말이었습니다. 

앨리: 무지가 시끄러워지면 대화를 바꿔야 하죠. 사람들이 분노하지 않도록 대화를 조심해야 해요. 하지만 이러한 어려운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전 괜찮지만, 괜찮지 않아요. 입양의 의미 자체를 좋아하지 않죠. 제가 은혜를 몰라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고마워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고통을 받을 수 있죠. 입양아들이 겪는 역경을 사람들이 이해해줬으면 할 뿐이에요. 사람들이 좋은 의도로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우리의 고통을 쉽게 해주지 않고 더는 연기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이 삶을 사는 사람이고, 가면을 매일 바꿔 쓰는 사람이죠. 저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는 일에 너무 익숙해졌고, 얼굴을 너무 자주 바꿔서 횟수를 기억하지 못해요. 전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지만, 모두 제 얼굴이죠. 전 제 이야기를 하고 싶고,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합니다. 입양아들이 마이크를 잡고 전통에 저항하고 있고, 전 제 인생 전체를 말하기 위해서 기다렸고, 이제 여러분들이 들을 시점이에요.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앨리 씨와 연락을 하거나, 구독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죠?

앨리: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어요. 잠겨 있지만, 친구 신청을 하면 받아줍니다. Racism Unmasked 인스타그램 계정이 트롤들의 공격을 받아서 개인 계정을 잠가야 했어요. 또 다른 문제죠. 그래서 인스타그램 계정도 있고, 페이스북 계정도 있습니다. Allie De Lacy로 검색하시면 됩니다. 프랑스 계통 이름이라 앨리 디 레시라고 발음하기도 하죠. 참 고급스럽네요. 어쨌든 인스타그램도 페이스북도 똑같습니다.

시즌 4, 에피소드 21: 로버트 칼라브레타 이

Audio available April 5, 2021 at 7 am ET.

주의: 자해, 아동 학대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성적 학대 포함)

로버트 칼라브레타 이 (35세) 씨는 한국에서 미국의 학대 가정으로 입양되었다. 로버트 씨는 미시간주에서 뉴욕주로 이주하면서 힘든 성장기를 보냈고 16살에 독립해 친구들의 우정과 뉴욕주 이타카 한인 교회의 도움으로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로버트 씨의 이야기에는 홀트의 정보 부족 통보, 가족과의 재회, 그리고 그가 인신매매의 희생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등, 여러 반전이 있다.

로버트: 제 이름은 로버트 리입니다. 적어도 리로 바꾸려고 하고 있죠. 현재는 제가 입양될 때 주어진 성인 칼라브레타를 쓰고 있어요. 이번 COVID-19 때문에 시간 인지 능력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올해로 35세가 됩니다. 그리고 현재는 뉴욕주 퀸스에서 살고 있어요.

팟캐스트: 식도락의 중심지에서 살고 있군요.

로버트: 단순히 식도락만 아니라 제가 눈에 띄지 않는 첫 거주지이기도 했습니다. 이 선웨이 지역에서 사는 이득 중 하나는 미국에서 아시아계 인구가 주류인 지역 사회 중 하나라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점이죠. 밖에 나가서 식사해도 어떤 사람의 주목도 받지 않아요. 

팟캐스트: 칼라브레타는 이탈리아계 성인가요? 

로버트: 네. 이탈리아계 성이죠.

팟캐스트: 그 성과 관련해서 재밌는 이야기가 많겠군요?

로버트: 네. 몇 년 전에 뉴욕주 북부에 있는 화이트 플레인 시에서 보험 회사들을 대신해서 카센터들을 관리하는 일을 했죠. 그 카센터 중 상당수는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카센터들과 협상하는 일은 어려웠지만, 제가 성을 밝히면 분위기가 바뀌더군요. “오 이탈리아인이네요? 지미! 이분도 이탈리아인이래!” 이러면서 협상이 훨씬 쉬워졌습니다. 제가 성을 바꾸게 되면 그러한 이득을 잃게 되겠죠. 

팟캐스트: 뉴욕주 북부에서 자랐나요? 아니면 다른 곳에서 자라나셨나요? 

로버트: 제가 생후 6개월에 입양되었을 때, 제 수양 가족은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시 교외에 살고 있었죠. 6살 이후로는 뉴욕주 중심부 이타카에서 자랐습니다. 사람은 200명이고 2000마리의 양이 사는 아주 작은 마을이죠.

팟캐스트: 상상이 가는 광경이지만,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로버트: 이타카는 마을에 신호등이 없어요. 신호판 정도는 있었죠. 저보다 3살 어린 한국에서 입양된 여동생이 있었어요. 물론 혈연관계는 없습니다. 우리 둘만 백인이 아닌 주민이었죠. 따라서 다른 애들에게 온갖 인종 차별을 겪었습니다. 애들이 우리에게 돌을 던지기도 했고, 다른 인종 차별을 당하기도 했죠. 백인들에게 소외를 당해서 때문에 20대가 되자 백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워야 했어요. 살기 위해서 싸우기도 해야 했습니다. 어른이 되자 이 모든 일을 받아들이고 절 치료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죠. 

팟캐스트: 어린 시절에 괴롭힘을 당하셨군요?

로버트: 싸움에서 진 적은 없지만, 그때의 충격과 트라우마가 아직도 생생하죠. 뉴욕시 중심에서 벗어나면 몸이 긴장되고 정신 상태가 혼란스러워지는 경험을 자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죠. 주변 사람에게 잡히거나 공격받는 상황에 항상 대비하다 보면 정신적으로 힘들거든요.

팟캐스트: 부모님에게 이런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었나요? 그분들이 이 문제를 아셨나요?

로버트: 제 삶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어요. 전 제가 16살일 때 독립했습니다. 그때는 왜 독립했는지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방치와 학대에서 벗어나려고 독립했죠. 16살 때 독립하고 나서는 칼라브레타 가족과는 교류가 얼마 없었습니다. 저를 내버려 두는 가정환경에서 벗어나야 했고, 독립이 제 생존 방법이었어요. 

팟캐스트: 두 아시아계 아이들을 뉴욕주 한복판의 작은 마을에 입양해놓고 그러한 고통을 양부모님이 전혀 몰랐다니 충격적이네요. 왜 칼라브레타 가족이 그곳으로 이사를 했죠? 직업상의 문제였나요? 

로버트: 또 다른 설명을 해야 하는 문제네요. 우리를 입양한 가족의 남성 성인은 빌이었어요.

팟캐스트: 그 사람들을 양부모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군요? 

로버트: 네. 그 사람들을 양부모님이라고 부르면 저와 제 여동생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를 입양한 남자 빌은 목사였고 이타카 마을 교회에서 목사로 일했죠. 물론 그의 직업만 목사였지 그가 한 일은 감옥에 가고도 남았을 일이었어요. 우리를 입양한 여성도 그랬죠. 빌과 지니 둘 다 나쁜 사람들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어떤 학대를 당했는지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제 양아버지도 목사였는데, 전 양아버지에게 성적으로 학대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로버트 씨의 이야기가 슬프게도 익숙하네요.

로버트: 이런 이야기를 공유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에는 운이 좋게도 물리적인 학대였죠. 제 여동생은 충격적이고 어두운 학대를 당했어요.

팟캐스트: 로버트 씨의 여동생도 성적으로 학대를 당했군요?

로버트: 네. 그리고 전 4년 전까지 제 여동생이 성적 학대를 당했는지 몰랐습니다. 제 여동생의 이야기를 대신하고 싶지는 않아요. 여동생을 보호하고 싶죠. 제 여동생도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과 연결을 끊었습니다. 이러한 여동생의 독립과 학대를 알게 된 과정도 어이가 없어요. 4년 전에 출장을 가기 위해서 마을을 방문했을 때 빌이 저에게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제 여동생과의 교류가 끊긴 이유가 자기가 그 애를 성적으로 학대했기 때문이라고 저에게 말했어요. 하지만 거짓말이었죠. 빌 말로는 여동생을 입양한 뒤 1년만 성적으로 학대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동생은 빌이 12년 동안 자신을 학대했다고 하더군요. 우리를 입양했던 성인 여성, 지니도 이 학대의 공범자였습니다. 제 여동생이 지니에게 이러한 학대가 일어나고 있다고 호소했지만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으니까요. 어느 시점부터 학대 방조가 범죄가 되는지 궁금하죠. 그러한 일이 계속 일어나는지 몰랐다면 어머니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4년 전에 그런 사실을 알게 되고 나자 전 자유로워졌죠. 더 제 유년 시절의 기억을 추억할 필요가 없고, 더는 제 과거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과거는 제가 기억하던 대로의 악몽이었죠. 아시아계의 죄책감 서사는 아시아계 입양아에게는 두 배로 적용됩니다. 사람들은 입양아들이 양부모를 돕고, 기분 좋게 하고, 행복하게 하려고 왔다고 해요. 입양아들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좋게 보려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보죠. 여동생의 학대 사실을 알게 되자,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생겼던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었어요. 제가 나쁜 아들이라 16살 때 그 집에서 도망치지 않았죠. 빌과 지니 밑에서의 노예 생활에서 도망쳤습니다. 20대에는 제가 살 곳이 없던 경우도 있었어요. 전 대학교 등록금과 생활비를 전부 학자금 대출과 아르바이트로 충당했죠. 그 결과 살 곳이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요. 

팟캐스트: 같은 가정에서 자라는 형제자매들이 다른 형제와 자매들에게 가해지는 학대를 모를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죠. 지금 로버트 씨가 되돌아보면 여동생에게 가해지는 학대의 조짐이 보였나요? 아니면 주변 성인들이 그러한 학대를 숨기는데 능했나요?

로버트: 지금 그 이야기를 하시니 흥미로운 점은, 전 학대 사실을 알게 되자 제가 부모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죽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전 그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인지 몰랐죠. 그 사람들이 우리를 잘 키우려고 노력했지만, 우리가 그 노력을 이해하지 못해서 독립해야 했다 서사가 사라졌습니다. 그 사람들을 더는 사람으로 볼 수 없었어요. 제가 학대 사실을 알았냐는 질문에 답을 하자면 몰랐습니다. 하지만 어디서 나왔는지는 몰라도 무의식적으로 그 애를 보호하려고 하던 방법이 있었죠. 우리는 서로 신체 접촉이 별로 없었고, 여동생의 육체적 문제에 관심을 두거나 접근 자체가 금기였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의 말을 끝내줄 수 있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으니 괜찮았죠. 학대 사실을 제가 직접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무의식적으로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동생의 학대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제가 죄책감을 느꼈다고 생각해요. 제가 직접 학대를 받지 않아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 상황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도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로버트 씨는 성장하면서 가족이 부끄럽다고 생각했나요? 

로버트: 네. 제 청소년 초반기에는 아시아계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죠. 제가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아시아계, 한국계 정체성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제 경험이 입양아 사회와 연관된 다양한 관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죠. 많은 입양아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인종과 주변 사람들의 인종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제 여동생과 저는 한국에 대해 거의 몰랐지만, 백인 사회가 우리를 거부해서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른 입양아들보다 더 빠르게 자각하게 됐어요. 전 어쩌다 보니 한인 교회의 청소년부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빌과 지니는 한인 교회에 다니기를 원치 않았지만 저는 거기 참여했고, 다른 한국인들과 교류할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저의 한국인 정체성을 교회 참여를 통해서 구축할 수 있었죠. 

팟캐스트: 작은 마을에서 어떻게 한인 사회와 접촉할 수 있었죠? 한인 교회는 어떻게 접촉하게 되었나요?

로버트: 이야기를 좀 더 이상해지지만, 전 2학년 때부터 재택교육을 받았어요. 목사네 자식이라는 특이점에 재택교육을 받았다는 점까지 더해서 더 이상한 사람이 되었죠. 물론 재택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이야기도 아니고, 재택교육도 제대로 하면 좋은 경우도 많지만, 제가 받은 재택교육은 책을 잔뜩 받고 제가 알아서 공부해야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3학년 이후부터는 독학으로 공부를 했죠. 재택교육의 필요조건 중 하나는 외국어였어요. 이타카 한인 교회가 있어서 제가 가서 한국어 수업을 들었습니다. 제가 12살에서 13살 때였어요. 거기에 10명에 12명 한인 아이들로 구성된 정도의 청소년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 애들이 제 진정한 가족이 되어주었습니다.

팟캐스트: 그게 제가 가진 또 다른 질문의 답이네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고, 동시에 아시아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정체성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자원이 어디에 있었나 궁금했는데, 한인 교회와 교회 사람들이 있어서 로버트 씨의 한국 문화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었군요? 

로버트: 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들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미국의 경제지) 잡지가 있었는데 일본 수상의 사진이 나와서 그 사진을 잘라내서 보관했죠. 제가 찾을 수 있는 아시아계 정체성은 전부 찾아서 모았어요. 제 옷장 내부에 상자가 하나 있었고 그 안에 제 아시아계 정체성을 만들려는 노력이 담겨 있었습니다. 대부분 잡지에서 오려낸 짧은 기사들이었어요. 90년대 미국 시골이라 AOL 인터넷이 겨우 들어온 수준이었으니 인터넷을 통해 정체성을 찾는 일은 어려웠습니다.

팟캐스트: 잡지를 잘라서 앨범을 만드셨나요?? 

로버트: 네 그런 셈이죠. 전 북한에 관한 기사도 모아서 수집했습니다. 그때 왜인인지는 몰라도 미국 잡지에 북한에 관한 기사가 많이 실렸죠. 북한 병사들의 얼굴이 저와 비슷해 보였고, 저는 친밀감과 동질감에 굶주려 있었죠. 

팟캐스트: 로버트 씨는 한국 가족에 대해 생각을 하고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나요? 아니면 아예 생각하지 않았나요? 한인 교회에 가서, 한인 교회 친구들과 놀고 그 친구들 부모님과 일을 하면서 한국 가족이나 한국 기원에 대해서 생각하셨나요?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셨나요? 

로버트: 청소년 남자애라면 여자애를 사귀는 일, 차를 사는 일, 누가 더 근육질인지에 대해 신경을 쓰기 마련이죠. 저는 한인 교회 친구들 집에 놀러 가서 친구들 부모님이 한국어로 애들 이름을 부르고, 밥 먹으라고 부르는 일이 기억에 남아요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전 외로웠습니다. 그때 제 부모님이 누구인지 물어보면 빌과 지니를 지목했겠지만, 동시에 전 한인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그런 가족 관계를 원했죠. 친구들 부모님이 친구들에게 게임 그만하고, 좀 더 공부하라는 잔소리마저 부러웠습니다. 집에서 방치된 기간이 길어서 그런지 그런 관심을 받는다는 생각만 해도 아주 기뻤죠.

팟캐스트: 로버트 씨가 어떻게 방치되었는지 예를 좀 들어줄 수 있나요?

로버트: 제 양이모가 말해주시기를, 빌과 지니가 제가 어렸을 때 벌을 준다고 저를 어두운 지하실에 가뒀다고 하더군요. 양이모는 자기 자매와 자기 자매의 남편이 이렇게 저랑 제 여동생을 대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더군요. 이제 우리는 입양아가 잘못하면 아이를 어디 가두거나 외롭게 하지 말고, 가족이 모여서 아이의 잘못을 짚어주고,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다독여야 입양아들이 가진 공포를 관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빌과 지니는 그러지 않았죠. 오히려 제가 가진 공포를 증폭시켰고, 결국 전 살기 위해서 그 집에서 도망쳐 나와야 했습니다. 빌은 저에게 너무 화가 나서 이 방에서 안 나가면 절 죽이겠다고 했어요. 그러한 분노를 받아내야 하는 사실 자체가 아주 무서웠죠. 물론 과장일지도 모르지만 어렸을 때의 저는 그 협박이 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팟캐스트: 듣기만 해도 긴장되고 불안해지네요. 

로버트: 네. 좀 더 물리적인 학대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너무 충격적이니까요. 

팟캐스트: 16살에 짐을 싸서 그 집에서 나오셨다고 했는데, 어디로 가셨는지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로버트: 제가 16살에 독립했던 이유는, 전자 기타 때문이었습니다. 제 입양 가족은 보수적인 집이었죠. 제가 전자 기타를 소지할 수 없다고 그 둘이 선언했어요. 그게 계기였습니다. 더는 그 집에서 지낼 수 없겠다고 생각했죠. 전 재택교육을 받아서 고등학교 교육을 16살 때 끝낼 수 있었고, 전문대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대학교로 진학하긴 했지만, 그 전문대에 일본인 친구가 있었어요. 나카지마 히로키라는 이름의 친구였죠. 일본 전과자 출신으로, 갱생하고 나서 미국에서 사업을 공부하기 위해서 유학 온 친구였습니다. 아주 뛰어난 전자 기타 연주자였고, 전 히로키에게서 전자 기타를 샀어요. 저와 히로키와 아주 빠르게 친해졌고, 전 히로키의 룸메이트가 되었어요. 히로키와 온갖 즐거운 이야기를 공유했습니다. 학대와 방치로 가득한 집에서 살다가 저와 비슷하게 생기고, 절 친형처럼 챙겨주는 사람과 같이 살게 되니 아주 좋았어요. 히로키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찾으려고 노력했죠. 히로키는 제가 그 집에서 나와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팟캐스트: 히로키 씨의 이야기는 전직 전과자가 미국에 와서 삶을 다시 바꾸려고 하는 이야기고, 로버트 씨의 이야기는 자유를 되찾는 이야기군요. 두 분은 반항아라고 하긴 그렇지만, 서로 닮았다고 생각하셨나요?

로버트: 서로 닮았기 때문에 히로키가 저를 받아들여 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반항아여서 같이 락 앤 롤에 빠졌다고 생각하고요.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도 생겼죠. 제 삶을 위해서 최고의 전자 기타리스트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전부 히로키 덕분이죠. 

팟캐스트: 밤새 연주를 하고, 일본 음식을 먹는 그런 장면이 떠오르네요. 히로키가 오므라이스를 만들어주거나 그랬나요?

로버트: 네. 히로키와 제 우정은 저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해줬죠. 은행 계좌에 5달러밖에 없을 때 히로키가 저를 먹여 살려줬어요. 히로키와 저는 기타를 들고 어디든지 같이 다녔죠. 같이 동네 슈퍼마켓을 돌아다니면서, 히로키가 카트를 밀고 제가 카트에 앉은 채로 기타와 앰프를 들고 연주하고는 했습니다. 어디 가든지 연주를 했어요. 히로키가 오래된 밴 하나를 가지고 있어서 그걸 몰고 다니면서 같이 돌아다니기도 했죠.

팟캐스트: 둘이서 커버 밴드였나요, 아니면 독자적인 노래도 작곡해서 연주했나요?

로버트: 저랑 히로키 둘 다 U2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U2 노래를 많이 연주하고는 했죠. 

팟캐스트: 돈을 벌기 위해서 공연하기도 했나요? 식사 비용이나 연료비를 공연비로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벌었나요? 

로버트: 몇 번 그런 적이 있어요. 전문대 카페테리아 중심에서 앰프에 기타를 꽂고 카페테리아 전체를 위해서 연주하기도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드디어 자유를 처음으로 찾은 사람이 잃을 것도 없고, 자기 자신을 찾고 있다면 당연히 그런 일도 일어나기 마련이죠. 

-광고-

팟캐스트: 히로키 씨를 마지막으로 본 때가 언제죠? 

로버트: 제가 주립 대학교에 진학했을 때가 마지막이었죠. 그 뒤로 히로키가 뭘 했는지는 모릅니다. 

팟캐스트: 서로 헤어질 때 작별인사를 했나요? 

로버트: 제가 대학교에 진학할 때 나이가 17살~18살 정도였어요. 우리는 친한 친구였고, 같이 한 일의 추억을 가지고 웃었죠. 히로키를 다시 찾을 수 있다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다시 범죄의 길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죠. 야쿠자는 아니었겠지만, 일본 범죄조직의 일부였다고 들었습니다. 

팟캐스트: 문신이나 염색을 하고 있었나요? 

로버트: 네. 염색한 머리는 미국에 왔을 때는 이미 색이 빠졌지만, 적어도 제가 본 사진에서 나온 청소년기의 히로키는 머리도 염색하고 문신도 있었죠. 그래도 아주 멋진 사람이었어요. 

팟캐스트: 계속 연락을 하지 않았군요? 영화처럼 그렇게 서로 헤어지고 끝났나요? 

로버트: 어떻게 헤어지게 됐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냥 주립 대학교가 있던 뉴욕주 버펄로시로 이사하는데 바빴던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사하면서 여러 가지가 바뀌었죠. 히로키가 먼저 일본에 돌아갔을지도 몰라요. 히로키가 저에게 먼저 작별인사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히로키에게 작별인사를 먼저 하지 않았던 기억밖에 없죠.

팟캐스트: 그다음에는 무슨 일을 하셨죠? 다음 이야기는 뭐로 하고 싶으시죠?

로버트: 음…. 결혼을 했죠. 

팟캐스트: 오 결혼을 하셨군요? 상대는 누구였죠?

로버트: 사라 리와 결혼했죠. 동명의 빵 가게는 관계없습니다. 제 아내는 한국계 미국인이고 8년 전에 결혼했어요. 대학교 졸업 후에 서로를 만났죠. 아내는 석사 학위를 준비하고 있었고, 전 버펄로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대학교 입학 뒤에도 버펄로 한인 교회를 찾아서 사회적 교류를 할 수 있었죠. 제 아내도 한인 교회에서 만났고, 아내를 만난 첫날 집에 돌아와서 제 동거인들에게 아내와 결혼할 운명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삶에서 운명을 느낄 때가 있고, 이 운명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죠. 물론 제 아내를 놓고 저와 경쟁하던 다른 3명의 남성과 싸워서 이겨야 했으니 큰 성공이라고 볼 수 있어요.

팟캐스트: 다른 남성들과 경쟁해서 승리하면 더 교제 상대를 소중하게 여기게 되는 법이죠.

로버트: 그렇기는 하네요. 그래도 제 경쟁자들도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팟캐스트: 로버트 씨가 어렸을 때 한인 교회에서 좋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한인 교회와 사회를 찾으신 이유는 이해하는데, 로버트 씨는 한국어를 못하시죠? 거기에 빌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품었을 것 같은데, 한인 교회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셨네요?

로버트: 꽤 오랫동안 기독교에 대해서 반감을 품었죠. 사실 전 한인 교회에 가서 한국 사람들을 만나고, 한국 사회를 느끼고, 공짜 한국 음식을 먹었습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가지는 않았어요.

팟캐스트: 한인 교회에서는 항상 음식을 제공해주죠.

로버트: 네. 항상 음식이 있어요. 그래서 벗어나기 힘들죠. 항상 주변에 저를 잘 대해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전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고, 대학교 때는 주변에 두기 좋은 사람은 아니었어요. 사람은 보통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는 경우가 많아서 기억을 믿을 수 없지만,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저는 대학교 때 분노에 가득 차 있었고 그 분노를 세상에 뿜어내려고 했죠.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가 제가 한국어를 못한다고 하셨는데, 네 그렇죠. 한국어를 못하면서 한국인들 주변에서 지내는 한국계 입양아들은 자신이 한국인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물론 전 한국인이지만, 다른 한국인들이 저를 한국인으로 보지 않았죠. 그래서 한국인들도 입양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한국인들의 농담이나, 관련 정보를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에게 다가온 멋지고, 다정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눈치를 보고 저에게 농담을 설명해 주는 경우가 많았죠. 입양아는 입양된 나라의 사회에도, 본국의 사회에도 맞아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게 됩니다. 제가 대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이었죠. 카오미 씨의 질문이 제가 한국어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말이 삼천포로 빠졌네요. 

팟캐스트: 로버트 씨의 분노를 이해합니다. 로버트 씨의 분노가 자기 앞길을 망치거나, 자기 파괴적이라고 생각하셨나요? 

로버트: 제가 겪은 방치가 얼마나 흔했는지 모르지만, 방치 상태가 일상이 된 바람에, 평범의 기준이 아주 낮아졌죠. 그래서 결혼하고 나서 배울 것이 많았습니다. 제가 평범하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문제가 많았어요. 그걸 인식하고 고치려면, 제가 비인간적 고생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니 힘들었습니다. 제 과거를 재인식하고 뭐가 맞고 뭐가 틀렸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긴 시간을 보내야 했죠. 지금도 그런 과정과 절차를 거쳐서 사랑, 그중에서도 전체적인 사랑에 대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어른이 되었을 때, 제 마음은 스위스 치즈처럼 수많은 구멍이 뚫려 있었죠. 전체적으로 누굴 사랑하고 돌보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카오미 씨가 빌이 제가 기독교에 대해서 반감을 품게 했냐고 물었는데, 확실히 기독교에 대해서 반감을 품게 되었죠. 그 반감 중 일부는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제 경험에 따라서 하나님이 절 버렸다고 생각했어요. 전 버려지는 일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입양아에게 있어서 버려지는 일은 큰 트라우마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에게 가졌던 질문도 그랬죠.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 대학교 때 가진 분노의 뿌리를 찾아보면, 우주에 대한 분노였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개인적인 분노였고, 신에 대한 분노였죠. 하지만 신앙으로 만들어진 사회에서 활동하면서, 분노에 가득 찬 저에게 조건 없는 사랑과 도움을 주고, 용서해주며, 어떤 대가도 원치 않는 사람들을 만나니, 그 사람들의 신앙을 거부할 수 없었고, 저에게 신앙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세상에는 파괴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알았고, 제가 느끼고 있는 사회적 신앙과 사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팟캐스트: 로버트 씨가 만나게 된 한국계 이민자 사회, 아니, 로버트 씨가 찾아간 한국계 이민자 사회가 로버트 씨가 어렸을 때 느끼지 못했던 사랑과 가치를 느끼게 해줬군요?

로버트: 네. 제가 현재 퀸스에서 사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지역 교회에서 만난 사람 중 일부가 제가 크리스마스 휴가 때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들 집에 절 초대해줬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국계 집에서 지내면서 그 사람들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가족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느낀 사랑은 대단했어요. 제가 많은 가족을 가지게 된 느낌이었죠.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 그분들이 부모 역할을 해줬습니다. 말이 또 삼천포로 흘렀네요. 제가 가진 분노가 저를 다치게 했는지 질문하셨죠. 네 저를 다치게 했습니다. 제 청소년기에 자해했죠. 스트레스를 조절하기 위해서 몸에 상처를 내고는 했어요. 저 자신에 대한 분노였는지, 버림받은 고통을 조정하기 위한 행동이었는지는 모릅니다. 아마 둘 다 일지도 모르죠. 자신에게 벌을 주는 행위였지만 외로움을 관리하기 위한 행동이었어요. 물론 이러한 자해행위를 옹호하거나, 권장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 왼팔은 지금도 흉터투성이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런 사실을 밝히는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죠. 제가 살아남기 위해서 한 행동 중 일부이고, 저 자신이 느끼던 고통과 정신적 갈등의 일부였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로버트 씨가 느낀 정신적 고통을 물리적 고통을 통해서 풀었군요?

로버트: 네. 적어도 그 물리적 고통은 조절할 수 있으니까요. 물리적 고통은 왔다가 가죠. 생각해보면 파괴적이지만 동시에 편안한 느낌이 듭니다. 항상 조정할 수 없는 버림받았다는 고통, 외로움의 고통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적어도 물리적 고통은 자신이 고통을 가하고, 느끼고, 치유하는 단계를 관리할 수 있어요. 망가진 방식이긴 하지만 고통을 조정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물론 자해를 권장하지 않고, 이런 인식에는 큰 문제가 있죠.

팟캐스트: 자해를 얼마나 하셨죠?

로버트: 집에서 지내고 있을 때 자해를 시작했고, 1년에서 2년 정도 지속하다가 제가 이사를 나왔습니다. 다시 언급하긴 좀 그렇지만 히로키와 같이 지낸 시간은 희열로 가득 찬 시간이었죠. 

팟캐스트: 로버트 씨와 히로키 씨가 같이 연주하면서 자유와 행복을 만끽하는 광경을 보고 싶네요. 

로버트: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했죠. 그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았으니까요. 

팟캐스트: 그래서 그 입양 가족과 관계는 어떻게 됐죠? 결국, 관계를 진짜로 끊어 낼 수 있었나요?

로버트: 올해 내로 제 성을 바꾸게 되는데, 그게 제가 법적으로 그 둘과 관계를 끊어내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겠죠.

팟캐스트: 계속 칼라브레타 성에 복잡한 감정을 가져서 그 성을 유지하셨나요? 아니면 그 성에 대해서 다른 감정을 품어서 성을 유지하셨나요?

로버트: 이 질문이 제 삶의 전환점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4년 전에 빌이 여동생에게 가했던 학대를 밝히자, 빌과 지니, 그리고 저의 어린 시절에 대한 모든 감정적 연결이 끊어졌죠. 저의 어린 시절, 제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가족의 죽음을 추모해야 했어요. 저의 어린 시절과 가족은 저에게 있어서 진짜였습니다. 하지만 과거는 부서졌고 추억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 둘은 죽은 셈이었죠. 그러한 죽음의 단점은 장례식을 치를 수도 없고, 그들을 위한 추모를 할 시간도 없다는 점입니다. 한 2년 정도 우울했고, 제 한국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죠. 전 제 한국 이름도 몰랐어요. 나중에 중요해지는 사실이긴 하지만, 제 서류에 기록된 한국 이름은 이성수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이성수라는 이름 자체도 저와 관련된 사회복지사에게서 받은 정보였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라는 성도 주어진 성이고, 성수라는 이름도 주어진 이름이었죠. 그래서 진짜 이름이 없었습니다. 칼라브레타 가족이 준 성은 쓸 수 없지만, 제 진짜 이름은 아무도 몰랐어요. 제가 가진 정보는 단지 한국에서 입양될 때 주어진 K-86 서류 번호뿐이었습니다. 그게 제가 가진 진짜 정체성에 가장 가까웠죠. 그때부터 제 친가족을 찾아야 한다는 욕구를 느꼈어요. 제 진짜 이름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친부모 조사를 시작했죠. 그게 2년 전이었습니다. 이 팟캐스트를 듣고 있는 분 중 상당수는 알고 계시겠지만 아주 무섭죠. 자신의 삶에서 공포를 마주하면서 자기 자신을 위험에 노출하는 일이니까요. 친부모 조사를 안 한 입양아들에게도 조사를 안 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주 무서운 일이니까요. 누구도 그 조사를 하는데 용감하게 돌진하지 않죠. 조사를 진행하고, 어떤 경우에는 부모를 찾지 못한 입양아들을 칭찬하고 싶어요.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용감한 사람들입니다. 그 조사를 하는 데만 큰 용기가 필요하고 사람들이 그 용기를 인식해야 하죠.

팟캐스트: 유기가 입양아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공포인데 그걸 직접 마주하고 고통을 다시 겪어야 하니까요. 로버트 씨 말대로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로버트: 어렸을 때부터 꾸던 꿈은 무언가 저를 쫓아오는 악몽이었습니다. 항상 돌아서서 뭔지 바라보기 무서웠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한 악몽들이 버림받는 일에 대한 공포이고, 아주 무서운 일이예요. 전 제 친부모 조사를 하기 위해서 배서니 입양 기관을 통해 홀트아동복지회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홀트아동복지회가 몇 달 뒤에 저에게 다시 연락해서 저와 관련된 정보가 전혀 없고, 제 친부모님이 어떤 정보도 남기지 않았다고 했죠. 그 이메일을 받고 나니 제가 또 다른 부모님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친부모님을 찾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하지만 실제로 제가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자, 친부모님의 부고를 들은 기분이었어요. 다시 슬픔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입양아들이 유독 나쁜 경우에 놓이는데, 이러한 슬픔을 관리하기 위한 사회적 절차가 없기 때문이죠. 만약에 가족이 죽으면 그 가족의 장례식을 하고, 가족을 잃게 된 일을 받아들이고 끝을 낼 수 있어요. 하지만 친부모 조사를 했는데, 친부모를 찾을 수 없거나, 그들이 입양아를 만나려고 않으면 그 슬픔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슬픔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고민했어요. 제가 현재 이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AKA(Also-Known-As, 뉴욕시 기반 국제 한국계 입양아 단체)를 통해서 여러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이 팟캐스트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인데, 한국 입양 기관이 거짓말을 한다는 이야기를 여기서도 들었거든요. 여러 입양아가 입양 기관이 자신들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저도 그런 경우일지도 모르고, 홀트아동복지회가 저에게 말하지 않은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동권리보장원(NCRC)을 통해서 한국 가족 조사를 진행했죠. 그쪽에서 따로 조사를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감정적 혼란을 겪어야 했죠. 다시 가족을 찾지 못했다는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이게 2019년 겨울에 일어났던 일이었어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 조사를 하기 위해서 제 서류를 한국에 보냈죠. 

로버트: 친부모 조사를 하던 도중에 제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신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진짜 목사가 되었어요. 제가 목사가 된 일에도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있죠. 제가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던 날의 아침이었습니다. 제가 일어나서 이메일을 확인해보니 아동권리보장원을 통해서 제 아버지를 찾았다는 연락이 들어와 있었어요. 제가 15분 뒤에 사람들 앞에서 연설해야 하는데 이 정보를 알게 되었죠. 그래서 그 자리에 앉아서 울었습니다. 서럽게 운 것도 아니고 모든 힘이 빠져서 그냥 거기 앉아서 울었죠. 감정적인 소모가 너무 크기도 했고, 서럽게 울고 싶었지만, 힘이 빠져서 그냥 앉아서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장원에서 조사를 하고 싶냐 물었고, 전 당연히 동의했죠. 첫 편지가 보냈는데, 그 집에 사람이 없어서 반송됐다고 하더군요. 보장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고, 다시 편지를 보내겠다고 연락을 했습니다. 제 친아버지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고, 다시 반송됐죠. 보장원에서는 3번 이후로는 우리가 더 연락할 수 없고, 이 정보를 경찰에 넘겨줘야 하고, 제가 다른 방법으로 조사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전 다시 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3번째 편지를 보냈을 때 제 아버지와 연락이 닿았고, 그 소식을 제가 연설 이전에 받았던 이메일로 받았죠. 이메일에는 제 아버지가 보장원에게 연락을 해왔고, 절 기억한다고 했죠. 아버지가 울면서 저에게 미안하다고 하셨고, 절 잊은 적이 없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둘 다 살아 계시고, 동생도 두 명이나 있다고 했어요. 그걸 듣고 나니 시간이 멈추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세상이 뒤집히는 기분이었죠. 이게 2020년 1월이라 아직 COVID-19가 세상을 휘감기 전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어요. 아버지가 문학 교수는 아니지만, 아버지가 쓴 편지는 따뜻했습니다. 아버지가 절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우리가 서로를 찾아서 기쁘고, 같이 미래를 공유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편지에 쓰여 있었어요. 

로버트: 아버지가 저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 2가지 흥미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왜 자꾸 보장원이라는 곳에서 편지가 오는지 몰라서 편지를 열어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3번째 편지를 열어봤고, 거기에 1986년생 이성수 씨가 가족을 찾고 있는데 정보를 안다면 이 번호로 연락을 달라고 쓰여 있었다고 하더군요. 1986년에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맞는데, 이성수는 아버지의 성함이었죠. 제가 쓰고 있던 한국 이름인 이성수가 제 아버지의 성함이었습니다. 제가 아버지에게 답장할 때, 아버지가 이렇게 사과하시지만, 아버지는 제 이름으로 곁에 같이 있었다고 편지를 썼죠. 제가 제 정체성의 일부로 붙잡고 있던 제 이름이 아버지와 연관되어 있었어요. 제가 알게 된 또 다른 정보는 병원이 저를 고아원에 넘겼을 거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머니가 제가 태어난 사실을 확인하고 제 손가락과 발가락을 보고 간호사에게 넘겼는데 그게 어머니가 저를 본 마지막이었죠. 병원에서 제 몸 상태가 안 좋다고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고 하더군요. 어머니가 절 임신하고 계셨을 때 어머니 건강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어머니에게 제가 죽었다고 하고, 병원에게 장례 절차를 맡기는 서류를 작성하게 했죠. 보통 부모들은 죽은 아기를 받아서 따로 장례를 치르려고 않으니까요. 그래서 제 가족 전체가 제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슬퍼했습니다. 제가 장남이었는데 태어나자마자 죽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게 제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34년 뒤에 자기들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놀라셨죠. 

로버트: 어머니가 제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해서 저에게 연락하는 데 3달이나 걸렸습니다. 어머니는 불교 신자인데, 절 위해서 불교에서 아이가 죽고 난 뒤에 하는 추도식을 세 번이나 하셨어요. 저를 놓아주기 위해서 해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훨씬 더 빠르게 연락을 하셨죠. 그리고 어머니와 화상 통화를 할 수 있었어요. 아동발달 심리학자가 말하길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자라지만, 태어나고 나서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세상을 인식한다고 하죠. 사람들이 가진 트라우마 대부분이 우리를 보고 웃는 어머니의 얼굴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고 어머니 얼굴에서 제 얼굴을 봤어요. 제가 어렸을 때 가지고 있던 아시아계 사람들의 사진이 아니라 진짜 어머니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게 됐습니다. 제 어머니는 대단하고 현명한 여성이죠. 제 얼굴을 어머니 얼굴에서 보게 되니 그걸로 충분했어요. 그리고 COVID-19가 전 세계를 덮쳤습니다. 어머니와 화상 통화로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지금까지 아버지의 이름을 써왔으니 어머니가 저에게 새 이름을 지어 달라고 했어요. 어머니가 직접 조사를 해서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제 강제입양으로 인해서 고통을 겪은 사람 중에서 어머니가 가장 깊은 고통을 느끼셨으니 어머니가 절 다시 받아들일 기회를 드리고 싶었어요. 제 한국 이름은 이한일입니다. 하늘이 아니라 한일입니다. 그리고 제 성도 리로 바꿀 예정이에요. 제 생일도 서류에 적혀 있던 생일과 달랐습니다. 제 이름도 달랐죠. 35세에 자기 생일과 자기 이름을 알게 되는 경험은 뭐라고 할 수 없었어요. 다시 입양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아예 입양을 취소하고 다시 복귀하는 느낌에 더 가까웠습니다. 제 친가족이 진짜 가족이라고 느낄 수 있었어요. 이제 매주 연락을 하죠. 어머니에게는 적어도 매주 한 번 연락을 드리고, 제 형제자매들과도 매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다시 가족을 찾은 셈이에요. 제가 가족들에게 운명과 확률을 뛰어넘어서 죽음에서 되돌아간 셈입니다. 제가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생각과 기독교로 다시 이야기가 돌아오게 되네요.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했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죠. 제 고통을 정당화하고 축소하려는 행동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삶이 이어져 있고, 고통이 하나님의 이야기 중 일부라면, 우리가 세상에서 시련을 겪는 이유는 하나님의 곁에서 영원히 평온을 찾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그런 경험을 조금씩 한다고 생각하고, 제가 운이 좋게도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아주 대단한 이야기이네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확률의 이야기기도 합니다. 어떤 날에는 어디에서 잘지도 몰랐는데, 역경을 넘어서 결국 그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간 셈이니까요. 

로버트: 가족과 같이 제주도로 여행을 간 적이 있어요. 제주도에 가 보셨는지는 모르지만, 밤에 오징어 어선들이 바다로 출항합니다. 그리고 조명을 켜서 오징어들을 유인하죠. 막 해가 질 무렵에 제주도의 상공에서 바다에 불이 켜지는 아주 아름다운 광경을 봤어요. 그 광경을 보니, 제가 아주 오랫동안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바다에 저와 같은 빛들이 같이 떠 있고,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주 무섭고 두려웠던 광경이 아름답게 보였죠. 바다에서 혼자 표류하던 저 주변에 이제 가족이 있었어요. 제가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을 때 이야기입니다. 인천공항에 내리기 30분 전에 좌석에 누워 있었어요. COVID-19 사태 덕분에 자리들이 비어 있었고, 밤이라서 불이 꺼져 있었죠. 공중에 뜬 채로 어둠 속에 아이처럼 웅크려 있었어요. 한국에 도착하면 어머니를 만나게 될 예정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두 번째 탄생과 가장 가까운 시점이라고 생각했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고, 그 과정을 기억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팟캐스트: 분노도 느끼셨나요? 부모님에게서 35년간 강제로 떨어지게 되어서 분노하셨나요?

로버트: 남동생이랑 여동생의 사진을 봤을 때 감정이 가장 격해졌죠. 제 여동생은 저보다 한 살 어려서 저와 세대가 비슷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자랐다면 비슷한 여동생과 비슷한 생활을 했겠죠. 동생들의 생활 광경을 사진으로 보니 사진 안으로 들어가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죠. 대신 어머니가 제가 가지고 온 어렸을 때의 사진을 가족 앨범에 넣어서 가족 앨범을 꾸미셨어요. 그래서 지금 보면 가족 앨범에 제 사진도 끼어 있어서 기쁩니다. 질문으로 돌아가면, 제가 느낀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좌절감이었어요. 과거로 돌아가서 어머니, 아버지가 싸우고 무서워할 때 같이 있고 싶었죠. 부모님이 제 고등학교 입학 때 같이 있었으면 했고, 그분들 곁에 있었으면 했습니다. 시간이라는 벽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제 이모가 해준 말이 있죠. 거기 있었을 때 제 조부모와 삼촌, 이모, 고모들을 만나는 대단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분들을 만날 때 이모가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한일아. 네가 만약에 여기 남아 있었다면, 너희 부모님이 아들 한 명으로 만족해서 여동생과 남동생이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관점이 또 바뀌었죠. 커다란 모순이었어요. 제 한국의 생활과 동생들, 둘 다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여동생과 남동생은 둘 다 대단한 애들이고 전 그 애들을 사랑해요. 그 둘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죠. 그런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로버트: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 어머니와 같이 14일 동안 격리되었어요. 그 격리 기간은 전혀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대단한 경험이었죠.

팟캐스트: 로버트 씨가 한국에 가족이 있으니 따로 격리되지 않고 바로 가족과 만날 수 있었군요?

로버트: 네. NCRC가 홀트와 같이 가정 격리가 가능하도록 도와줬죠. 홀트가 저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도움이 됐던 때였습니다. 홀트아동복지회를 깎아내리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홀트가 보내준 서류 중 유일하게 그 서류가 제가 한국 가족과 진짜 가족이라는 점을 증명해줬죠.

팟캐스트: 홀트가 왜 아무런 정보가 없다고 했는지, 왜 그런 정보 오류를 냈는지, 서류를 잘못 읽었는지 질문하지 않았나요? 어떻게 병원이 로버트 씨를 매매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았나요?

로버트: 우선, 제가 아는 일은 이게 저만 아니라 다른 입양아들에게도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한 10년 전에 고아 판매망을 한국에서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한국 아이들을 국제 입양시켜서 한국 경제가 큰 이득을 봤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겠죠. 제 납치와 매매가 그 이야기에 맞아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상품에서 부당함의 대상으로 자신의 인식을 바꾸는 일은 어렵죠. 현재 저는 제 시작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이야기는 부당함과 잔혹함에서 시작했으니까요. 적어도 제도에 대한 관리가 부족했다고 생각하죠. 어머니는 병원에 여러 번 돌아가서 제가 어디에 묻혔는지 질문했습니다. 병원은 어머니가 서류를 작성했으니 제가 어디에 묻혔는지 알 권리가 없다고 했죠. 제 부모님은 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고 노력했었는지만 알 수 없었어요. 이 일이 일어난 병원은 대구적십자병원이었는데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병원입니다. 인신매매 관련 스캔들인지는 모르지만 스캔들때문에 문을 닫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80년대에 이런 작은 병원들에서 납치와 인신매매가 일어났다고 하더군요. 제 부모님이 그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병원들은 주로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영업했고, 제 부모님은 그때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으니까요. 부모님이 사실을 알아도 병원에 맞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부모님을 상대로 이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서류를 작성하게 만들어서 관련 권리도 빼앗았군요. 홀트는 뭐라고 했나요?

로버트: 홀트에게는 이런 추궁을 하지 않았어요. 홀트에 대해서 너무 화가 나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하죠? 우리 가족의 삶 자체가 뒤집혔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면 멈추게 하고 과거의 부정행위를 밝히는 일이었어요. 과거의 부정행위 고발은 생각해볼 예정입니다. 그 부정행위를 고발할 방법이 있다면 그 길을 확인해보고 싶죠. 하지만 지금은 이 고통을 받아들이고 제 새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 집중하고 싶습니다. 

팟캐스트: 남동생과 여동생이 로버트 씨를 형이나 오빠로 부르기 시작했나요?

로버트: 네. 그 둘이 저를 형이나 오빠로 불러준 순간 음악을 들은 기분이었죠. 둘 다 저를 빠르게 받아들여 줬어요. 제 친가족은 아주 따뜻하고 멋진 가족입니다. 아버지는 최소주의적인 맞춤 가구를 만드는 목수시고, 어머니는 레스토랑을 운영하십니다. 제 여동생은 신생기업에서 일하고, 제 남동생은 대구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죠. 제 가족이 이렇게 성공한 모습을 보니 아주 자랑스러웠습니다. 제 어머니와 적은 시간을 같이 보냈는데도 서로 비슷하니 아주 이상하면서도 재밌죠. 

팟캐스트: 어머니와의 공통점을 몇 개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로버트: 우리 둘 다 외향적이고, 사교적이면서, 친구를 만들 수 있고, 사업가이죠. 예술적인 재능이 있고, 전화와 키를 놓은 곳을 잊어버리기도 해요. 그래서 집에서 나갈 때마다 우리 핸드폰을 찾으러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핸드폰을 까먹었는지 묻죠. 어머니가 요리하실 때 다섯 가지 요리를 동시에 시작하셔서 모든 요리를 동시에 진행하는데 제가 일하는 방식과 비슷하죠. 물론 저는 시작한 모든 일을 끝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문제가 생깁니다. 물론 아버지와 닮은 점도 많아요. 아버지는 B형이고 어머니는 A형이고 전 AB형이죠. 제 부모님의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전부 물려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제가 어머니를 더 닮았다고 하시죠.

팟캐스트: 가족과 만난 지 1년 정도 지났나요?

로버트: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그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지만, 이 만남이 로버트 씨를 바꾸셨다고 생각하나요? 바꿨다면, 어떤 식으로 로버트 씨의 삶을 바꿨죠?

로버트: 네. 제 삶을 바꿨습니다. 제 정체성을 꽃병으로 묘사한다면, 여전히 깨져 있고 망가져 있지만, 이제 그 꽃병에 아름다운 꽃들이 꽂혀 있죠. 적어도 제가 묘사한다면 그런 느낌이에요. 여전히 내면의 버릇과 정신적인 문제는 존재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문제에 대한 답이 훨씬 빠르고 쉽게 나오고, 제 삶에서 그 문제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제 삶에 있어서 큰 변화를 하나 꼽으라면…. 잘 모르겠지만, 가족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한다는 점이죠. 제 부모님의 건강에 대해서 걱정하고, 제 동생들이 더 좋은 직업을 가지기 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가족에 대한 걱정과 곤란을 봤지만, 지금까지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사람들이 왜 그런 가족에 대해 생각을 하는지 알았지만, 마음속 깊이 이해하지는 못했죠. 가족에 대한 감정과 걱정을 이해하게 되자 상당히 충격적이었어요. 부모님이 나이가 드시면 그분들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가족에 대해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하죠. 모든 일에 최대한 감사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친부모와 이런 관계를 맺고 다시 만날 수 있는 입양아들은 아주 적죠. 그래서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짜증이 나거나 답답한 일도 제가 감사할 수 있는 일이 되죠. 조금만 생각하면 몇 년 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아버지가 세 번째 편지를 열어보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했겠죠.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로버트 씨. 사람들이 로버트 씨와 연락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죠?

로버트: Y_o_o_l_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습니다. 또 hanillee0507@gmail.com 으로 이메일을 보내셔도 되고 페이스북에 Robert Hanil lee 계정이 있으니 페이스북 DM으로 연락을 주시면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어요.

시즌 4, 에피소드 20: 재클린 웰스

Audio available March 30, 2021 at 7 am ET.

한국계 미국인 입양아 재클린 웰스 (33세), 한국 이름 최예나 씨는 음악가, 장신구 디자이너, 한국계 입양아 사회 지도자의 삶에 대한 정보를 인터뷰를 통해 공유한다. 재클린 씨의 삶에 관한 이야기와 한국 가족과의 재회, 모든 사건에 대한 감상을 들어보자. 

재클린: 제 이름은 재클린 웰스입니다. 뉴욕시 브루클린에서 살고 있고 매사추세츠주 출신이죠. 한국 이름은 최예나에요. 장신구 디자이너 겸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국제입양아 단체인 Also-Know-As(AKA)의 이사회에서 활동하고 있고 현재 33세예요. 제가 19살일 때 제 수양 가족과 고국 순방 계획을 통해서 한국에 방문할 수 있었죠. 최초로 많은 한국계 입양아들을 만났고 같이 한국에 방문했습니다. 한국에서 많은 사회복지사가 만났고 데브라가 그중 하나였어요. 데브라와 제 양부모님이 제 친어머니를 찾아보라고 권유했죠. 대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걸고 데브라와 같이 편지를 작성하고 번역해서 제 사진, 가족 사진, 친구들 사진을 첨부해서 보냈어요. 주변 사람들이 연락이 온다면 좋겠지만 못 받을지도 모르니 희망을 걸지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저는 19살이었고, 매우 미국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죠. 제 아시아계 정체성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9살 청춘일 때 삶은 복잡하고, 전 정체성을 구축하지 않은 상태였어요. 그래도 지금의 저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죠. 

팟캐스트: 재클린 씨에게 음악적 영향을 끼친 음악가들은 누구였나요? 19살 때 주로 들은 음악가들은 누구였죠? 

재클린: 이모(EMO)계나 하드코어계 음악에 빠져있었죠. 피오나 애플, 라디오헤드, 포셀린 포어헤드, 데스캣 등의 밴드를 가장 즐겨 들었어요. 제가 가장 좋아한 밴드는 브라이트 아이즈였습니다. 우울한 분위기가 드는 음악이라면 다 좋아했죠. 유명한 밴드 중심으로 들었던 것 같아요. 음악은 저에게 인생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뜻과는 다르게 대학교에서 음악 전공이었어요.

팟캐스트: 현재는 밝은 성격인데 청소년기에는 꽤 우울한 성격이셨나요?

재클린: 젊었을 때도 밝은 성격이었지만 외양적으로는 EMO였다고 봅니다. 적어도 3년 동안은 검은색 옷만 입고 다녔죠. 물론 지금도 검은색 옷만 입고 다니긴 하지만, 이건 실용성의 문제지 취향의 문제는 아닙니다

팟캐스트: 고수(Goth, 미국의 패션 유행 중 하나)셨나요?

재클린 : 고스보다는 EMO에 더 가까웠어요.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 시절 매사추세츠 출신이라면 차이점을 알죠. 하지만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설명하자면 고스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 사악하게 좋네! (wicked good!) 같은 단어도 사용하셨나요?

재클린: 전 사악하다는 말을 평범하게 사용해요.

팟캐스트: 아주 흥미롭네요. 한국 여행에서 양부모님이 친부모 조사에 더 적극적이셨다고 하셨죠?

재클린: 우리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왔으면 친부모 조사를 진행해보자! 이라는 느낌이었어요. 제 부모님은 좀 더 나이가 많으시니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계셨죠. 하지만 전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다른 입양아들과 달리 친어머니 조사 자체를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입양아 대부분과는 달리 친부모 조사와 친부모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친부모 조사는 되면 좋지만 안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굳이 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죠.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제 삶을 바꾼 아주 중요한 일이었죠. 하지만 그때는 친부모 조사의 의미 자체를 잘 몰랐고, 지금도 저에게 직접 중요한 일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아요. 

팟캐스트: 제가 보기에는 재클린 씨와 양부모님의 관계가 아주 가까워 보였습니다. 많은 입양아는 자신의 삶에서 뭔가 부족해서 친부모 조사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죠. 재클린 씨는 그러한 부족함이 없어서 조사에 적극적이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재클린: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친어머니에게서 한국어로 된 답장을 받았습니다. 그 편지에는 제가 어디에서 왔고 왜 저를 입양 제도에 맡겼는지 이야기가 적혀 있었어요. 저에 대한 아주 좋은 이야기가 적혀 있었고 저에게 가족사진도 보내주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에 관한 이야기를 가족에게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만나기는 어렵다고 연락을 해왔죠. 어머니가 이야기를 공유할 정도로 편한 상황이 아니었어요.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아서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했죠. 사진을 받을 수 받아서 기뻤습니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느꼈어요.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느꼈습니다. 오 이 사진들 대단하네. 하지만 어머니가 만나고 싶지 않다니 별수 없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때는 그랬죠. 주변 사람들이 절 보고 화나지 않았는지 걱정했지만 전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왜 화나지 않았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팟캐스트: 사진을 보니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재클린: 가족이 전부 저와 닮았더군요. 특히 형제들은 그렇죠. 제 두 남동생은 저보다 5살에서 7살 어린데 쌍둥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사진을 받았을 때는 12살이었고, 그 애들은 19살이었지만 둘 다 저와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팟캐스트: 잠깐만요, 가족이 전부 있었는데도 재클린 씨가 입양되었다고요?

재클린: 나중에 더 많은 정보를 받았지만 제가 처음으로 받은 정보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부모님은 고등학교 때 서로를 만나서 사귀게 되었고,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키웠다고 해요. 그리고 제 친아버지가 군대에 입대했죠. 친아버지가 입대하고 난 뒤에 친어머니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친아버지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낙태를 하기로 결정을 내렸죠. 적어도 제가 들은 이야기는 그래요. 하지만 친어머니가 낙태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이를 낳기로 한 뒤에 친아버지를 면회하러 갈 때 긴 코트 등을 입어서 임신 여부를 숨겼다고 하더군요. 친어머니가 말랐기 때문에 숨길 수 있었다고 생각하죠. 처음부터 친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친어머니가 저를 낳은 뒤 2일 만에 제가 입양 제도에 맡겨졌죠. 친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있던 2일 동안 제가 입양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팟캐스트: 지금은 아버지가 재클린 씨의 입양에 대해서 알지만, 친어머니가 친아버지에게는 나중에 알려주신 모양이군요?

재클린: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래서 아무도 몰랐죠.

팟캐스트: 재클린 씨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숨겼군요?

재클린: 제 할머니 할아버지를 포함해서 모두에게 숨겼다고 합니다. 

팟캐스트: 재클린 씨를 낙태할 예정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겠네요?

재클린: 이런 상황이나 다른 상황에서 저는 다른 사람 처지에서 생각해요.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친어머니 입장이었다면 저도 낙태를 하려고 했을 겁니다. 19살 미혼에 교제하고 있는 남자를 믿지 못한다면 저도 낙태를 하려고 했겠죠. 친어머니를 이해합니다. 특히 한국이라면 더더욱 그래요. 나중에 아버지가 그 낙태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자 그 이야기도 말이 된다고 생각했죠. 아버지도 19살 미혼에 군대에 징병 되어 있고 거기에 양가 부모님의 반대까지 있었으니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인 반응이었을 겁니다. 거기에 저는 두 분을 잘 알지 못하거든요.

팟캐스트: 거기에 임신 사실이 알려졌다면 양가 부모님이 둘을 갈라놨을지도 모르고요.

재클린: 그렇죠. 어머니가 임신을 지속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고 봐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죠. 저를 입양 제도에 맡겨서 큰 죄책감을 느끼고 사셨다고 합니다. 지난 30년간 그 사실이 어머니를 괴롭혀 왔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제 남동생도 저에게 어머니가 매일 교회에 가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모두 어머니가 아주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가족들은 왜 그런지 몰랐죠. 어머니는 술·담배를 안 하십니다. 반면에 제 친아버지는 소주 두 병 마시는 애주가에 애연가예요. 어머니가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죄책감에 종교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았죠. 다른 문제는 어머니와 호텔에서 최초로 만났을 때 어머니는 제가 분노로 차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대중매체가 입양아를 묘사할 때 입양아들을 분노에 가득 차 있고 복수심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로 묘사한다고 어머니가 이야기해줬어요. 물론 그런 경우도 있죠. 하지만 어머니가 그러한 이유로 저를 만나기 무서워했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입양아들이 한국 대중매체에서 살인범같이 묘사된다는 말인가요? 한국에 돌아와서 가족을 찾아내려고 하니까요?

재클린: 어머니가 대중매체, 특히 다큐멘터리를 많이 봤는데 거기 나오는 입양아들 대부분이 분노하고 성격도 어두웠다고 합니다. 사실 저도 화가 많이 난 적도 있고 성격도 어두웠던 적이 있죠. 하지만 친어머니를 상대로 분노한 적은 없어요. 어떤 사람들이든 분노하고 어두울 수 있죠. 제 남동생들도 힙합을 좋아하고 1명은 문신도 하고 있는데도 입양아는 아니니까요. 어쨌든 결론만 이야기하면 종교가 확실히 영향을 끼쳤고 만약에 어머니가 저를 계속 데리고 계셨다면 힘들었을 겁니다. 친어머니가 생각해보셨는데 아주 힘든 삶이 예상되었다고 하셨죠. 돈도 없고, 미혼모, 아버지와의 관계도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에 가난과 한국이라는 배경까지 있었죠. 그래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그리고 한국 방문 이후에 미국에 돌아와서 음악계에 입문했나요?

재클린: 네. 저는 3살 때부터 음악에 심취해 있었죠.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작곡을 하고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어요. 고등학교 때는 음악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300명 정도의 아이들과 함께 음악 수업을 받았고, 제 삶의 일부였죠. 오히려 제 여행 이후에 음악을 잃었어요. 여행 때문이 아니라 여행 이후 대학 생활이 매우 백인적인 경험이었기 때문에 뭐가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몰랐기 때문이죠. 제가 젊기도 했고 그때는 아직 사람들에게 문화적 존중이나 자각이 부족했어요. 요가를 배우거나,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는 문화가 전혀 없었죠. 그런 쪽에 관심이 있어서 사람들이 직접 찾아보지 않으면 접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하는 일을 따라 하기 바빴고, 제가 사귀는 친구들은 삶을 최대한 즐기면서 살고,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대학교 경험 자체가 길을 잃은 느낌이었죠. 음악을 조금 하긴 했지만, 대학교 생활을 하면서 저 자신을 잃어버렸고 지금까지 저 자신을 다시 찾아내려고 노력해온 느낌입니다. 친구 몇 명이 자기 자신을 관리하지 않고 막 놀았어요. 노스이스턴대학교(보스턴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좋은 대학교이긴 했지만, 음악 전공이라 그렇게 학점 따기는 어렵지 않았죠. 그런 대학교에 다닐 수 있어서 운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편하게 대학교에 다닐 수 있어서 부끄럽죠. 

팟캐스트: 삶을 최대한 즐기면서 사셨군요?

재클린: 좋게 즐기지는 않았지만, 네. 확실히 삶을 즐기면서 살았죠.

팟캐스트: 재클린 씨 자신이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재클린: 네 그렇죠. 이유는 모르지만 제 내부에 EMO적인 면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는 당연히 그렇지 않았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제 삶의 대부분 동안 저는 사악하게 빛나면서 동시에 사악하게 어두웠다고 생각해요. 행복하고 밝은 면을 가지면서 동시에 어두운 영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재치가 넘치고, 아름다운데 남자애들이 아주 재클린 씨를 좋아했겠군요?

재클린: 아뇨.

팟캐스트: 이성 교제와 관련된 질문인데, 그 시기에 남자애들에게 관심이 있었나요? 교제는 자주 하셨나요?

재클린: 우리가 친구라서 관련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전 사랑 자체를 좋아해요. 실연, 아름다움, 강렬함, 짝사랑 등 사랑의 모든 부분을 좋아하죠. 전 사랑이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정 중 가장 강렬한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만 그렇게 느낀다고 해도, 누구를 보고 첫눈에 반하는 느낌은 예술가, 음악가, EMO에게는 놀랍고 찾기 어려운 감정이죠. 동시에 진정한 사랑을 찾는 일은 몹시 어렵지만 다양한 일에서 사랑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항상 사랑에 매료되었고 관련 음악에도 끌렸습니다. 

팟캐스트: 짝사랑이나 사랑 자체를 하는 일에 중독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재클린: 네 확실히 사랑에 미쳐 있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현재는 제 과거와 현재의 괴리가 깊어졌어요. 과거와 지금의 저는 다릅니다. 물론 전부 제 일부이고 제 과거를 없애는 일은 아니지만, 제가 바뀌고 발전했죠. 모두가 그렇게 변화하지만 전 지난 몇 년 동안 바뀌려고 노력했습니다. 단순히 변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과거를 통해서 배우려고 했어요. 대학교 때는 어렸고 주변 사람들을 따라 바뀌었죠. 그래서 주변의 변화에 따라 자기 자신을 맡기니 이상한 인간관계에 휘말렸습니다. 지금은 제가 어떤 변화를 할지 직접 정해요. 그래서 휘말리지 않고 목적을 가지고 살죠. 제가 가장 처음 데이트를 했던 때는 13살, 중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저에 대한 많은 요소가 바뀌었는데, 흥미롭게도 저는 여전히 고향 마을의 사람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어요. 전 20살 때까지 계속 같은 마을에서 살았죠. 

-재클린의 음악-

팟캐스트: 입양아들은 백인 지역에서 자라나면 아시아계라서 맞아 들어가지 않거나 차별당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죠. 재클린 씨도 그렇게 느꼈나요, 아니면 사람들의 일부로 맞아 들어간다고 느끼셨나요?

재클린: 우선 가장 마지막 질문부터 답하자면, 제가 6학년부터 고등학교, 대학교부터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은 바뀌어 왔습니다. 제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이니 지금 질문과도 연관이 있어요. 제가 자라면서 살던 마을에서 몇 안 되는 아시아계로서 제가 다르다는 사실을 6학년 때 알았습니다. 제 차이점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6학년은 사랑과 연관된 시기였죠. 남자애들에게 사랑받고 싶었지만, 그 애들은 백인 여자애들을 좋아했습니다. 물론 절 좋아해 주는 애들이 있긴 했지만 전 한 남자애를 좋아했어요. 하지만 그 남자애는 제가 4학년 때 제 가장 친한 친구를 좋아한다고 저에게 이야기했죠. 귀여운 백인 여자애였는데, 사실 아직도 친한 친구입니다. 우리가 그 애에게 학교에서 저와 제 친구 중 누가 마음에 드는지 물어보고 생각해보고 전화해 달라고 했죠. 그 애가 우리에게 동시에 전화해서 제 친구가 좋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걸 듣고 나니 제가 아시아계라서 거절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애가 아시아계를 싫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죠. 제가 아시아계라 다른 여자애들만큼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8살에서 10살 사이였으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죠. 사실 인종 문제도 아니었지만 전 오랫동안 그렇다고 느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우울했지만 그렇게 우울할 일도 아니었죠. 어렸을 때의 경험이라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중국이라는 단어만 꺼내도 몸에서 땀이 나고는 했어요. 6학년 때는 매우 소심했죠. 하지만 제가 중학교 3학년이 되니 무언가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페티쉬적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아시아계 여성이라는 정체성 자체에 오랫동안 널 사랑해 줄게- 이라는 식으로 성적인 의미가 부여되었죠.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중학교 3학년 이후로 제 아시아계 정체성에 어느 정도 편안함을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아시아계 학우들이 더 많이 늘어났죠.

팟캐스트: 청소년기에는 이런 성적 신호에 어떤 반응을 보이셨나요?

재클린: 그러한 표시가 어떤 뜻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때는 인식 자체가 어려웠죠. 미투 운동 이전이었고, 인종 차별 인식 운동도 없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지난주 애틀랜타 총기 난사 사건 이후로 계속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비탈길에서 굴러떨어지는 돌과 같이 그러한 탈의실에서 주고받는 농담에서 시작해서 실제로 일어나는 비극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았죠. 사람을 물건처럼 취급할 뿐만 아니라 아주 무례한 일입니다. 칭찬하는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죠. 그렇게 시작해서 비인간적 취급으로 진행하다가 살인으로 발전합니다. 물론 제가 이러한 주제에서 전문가는 아니지만 인종 차별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죠. 아주 힘든 한주였어요.

팟캐스트: 재클린 씨가 교제했던 남자들의 변화를 보면 재클린 씨의 변화를 볼 수 있다는 말을 하셨는데…. 그게 재클린 씨가 하고 싶었던 말인가요?

재클린: 네 저와 제가 만나는 남자는 같이 변화했죠. 현재는 교제 자체가 줄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대학교 때에는 항상 누군가를 만나고 다녔어요. 지금은 제가 아주 마음에 든 사람이 아니면 교제 자체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제가 교제할 상대의 진실함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좋은 판단인지는 모르지만, 서로가 같은 목적으로 만나는지도 확인하죠. 전 지금 33세니까요. 21세일 때 마냥 행동할 수 없습니다.

팟캐스트: 그렇죠. 다른 질문이 있는데 음악을 다시 시작하신 때가 언제였나요?

재클린: 딱히 음악을 그만뒀던 적은 없어요. 항상 음악과 함께했죠. 하지만 파도와 같이 음악도 높은 곳과 낮은 곳이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친어머니나 친가족을 위한 음악을 작곡하신 적이 있나요? 어떤 음악을 작곡하셨고, 하시고 싶으셨죠?

재클린: 아주 흥미로운 질문이네요. 제 친어머니를 위해서 “웃음(Laugh)”이라는 노래를 작곡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작곡 자체는 제 생각이 아니었어요. 이희선 씨의 생각이었죠. 희선 씨는 3개의 구절을 작성해왔습니다. 하나는 길을 잃은 입양아 래퍼의 관점, 두 번째 구절은 친어머니의 관점, 그리고 3번째 구절은 양어머니의 관점을 반영하는 가사였죠. 희선 씨가 이 구절을 위한 후크를 써줄 수 있냐고 했죠. 후크는 구절들 사이에 들어가는 후렴구인데, 저한테 8마디에서 16마디 정도의 후크를 써서 이 세 목소리를 묶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걸 듣고 나니 아주 기본적인 해답이 떠올랐죠. 말로 하면 그렇게 멋져 보이지는 않지만, 사랑입니다. 그 셋은 전부 사랑, 이해, 속죄를 원하니까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후크를 쓰는 일틐 아주 쉬웠습니다. 아주 빠르게 작성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 노래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세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사랑으로 노래가 마무리되어서 슬픔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요.

-노래 웃음(Laugh)-

재클린: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예요. 제가 작곡한 노래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노래 중 하나이죠. 희선 씨가 쓰자고 한 노래였지만 아주 대단한 노래라, 제 친어머니에게 이 노래를 들려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친어머니가 아주 좋아하셨거든요.

-노래 웃음(Laugh)-

팟캐스트: 왜 친어머니에 대한, 아니면 친어머니를 위한 노래를 작곡하지 않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수많은 입양아 음악가들이 한번은 다루는 주제인데 말이죠.

재클린: 우리가 이미 이야기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한번 말했지만 저는 친어머니에 대한 큰 갈망이 없었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노래를 쓰고 싶다는 갈망이 없었죠. 2번째 이유는 제가 주로 쓰던 음악은 사랑 노래이거나 실연 노래였습니다. 둘 다 제가 쓰기 좋아하는 주제이죠. 많은 사람이 제 우울한 노래들만 듣고, 제가 우울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절 아는 사람들은 제가 자신이 만난 사람 중 가장 밝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죠. 전 음악가가 노래를 만들 때 자신의 시간 중 일부를 꺼내서 만든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죠. 전 노래를 작곡할 때 한 시간 이내로 작곡합니다. 제 노래는 제 모든 면모를 드러내지 않죠. 자아 성찰이나 제 일부가 담기게 되고, 슬픔과 음악은 서로 함께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슬플 때는 음악과 함께하고, 제가 슬프면 슬픈 음악을 작곡하게 됩니다. 제가 행복할 때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죠. 집에서 울면서 피아노 음악을 작곡하고 싶지는 않아요.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양부모님과 관계는 어떻죠?

재클린: 부모님과 관계는 아주 친밀해요. 제 청소년기에 두 분이 이혼하셨고, 그때는 지금과 같이 친밀하지 않았죠. 물론 그때도 친밀하긴 했지만 전 반항아였고, 부모님에게 화도 자주 냈습니다. 제가 바뀌었다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청소년기에는 말썽꾸러기였어요. 

팟캐스트: 그리고 양부모님의 친자식인 오빠가 있죠?

재클린: 남동생이에요. 그리고 그 애는 순하고 좋은 애입니다. 

팟캐스트: 그리고 그 애는 입양아가 아니고요?

재클린: 네. 백인 남동생이죠. #Whitebrother인 셈이죠

팟캐스트: #Whitebrother라니.

재클린: 제 친구들이 사용하는 은어예요. 4년 전 남동생에게 제가 방해되지 않았는지 물어본 적이 있죠. 제가 더 많이 관심을 받거나, 빼앗았다고 생각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남동생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답했어요. 하지만 제가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제가 청소년일 때 여러 가지 문제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제 남동생은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았죠. 부모님이 현명하게 대처하셨습니다. 어떤 아이를 선호한다는 표시를 하지 않았고 우리를 공평하게 대해줘서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어요. 물론 형제자매가 더 많았다면 상황이 달랐을 겁니다. 아마 부모님의 가족에서도 비슷한 일이 생겨서 자기 자식들에게는 그런 경험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삶에 대해서 배운 일 중 상당수는 제 부모님에게서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자각이 있었죠. 예를 들면, 제 입양아 친구나 입양아 사회에서는 부모가 입양아를 백인처럼 대하면서 인종에 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죠. 하지만 제 부모님은 그러지 않으셨어요. 어머니날에는 제 친어머니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친어머니의 용기와 대단함에 관해서 이야기하자고 하셨죠. 한국 음식을 먹으러 자주 다니기도 했고, 한국 문화 학교에 데리고 가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는 그런 활동을 싫어하긴 했지만, 부모님께서 노력하셨다는 점이 중요하죠. 부모님이 완벽하지 않지만, 제가 다른 입양아들과 다른 경험을 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재클린 씨는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셨네요. 저도 입양된 뒤에 양부모님이 친자식을 가시셨죠. 그분들이 왜 입양을 하려고 했는지 이야기해줬나요?

재클린: 네. 왜 입양하려고 하셨는지 이야기해줬죠. 어머니가 난임이었든요. 그래서 입양을 하려고 하셨고, 2번째 입양을 한국에서 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도중에 어머니가 제 남동생을 임신했다는 사실을 아셨죠. 그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부모님은 한국에서 애를 입양하고 동시에 남동생도 낳으시려고 했지만, 입양 기관에서 입양을 거절했습니다. 모든 관심이 한 아이에게 집중되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죠. 부모님은 그 사실에 슬퍼하셨습니다. 

팟캐스트: 친어머니에게 거리를 두는 느낌인데 양어머니에게 미안해서 그러신 면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재클린: 아뇨. 그렇다면 적어도 말은 되겠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제 친어머니와 같이 시간을 보낼 때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아 확실히 양부모님이 관련 정보 조사를 항상 지지해줬다고 하셨죠? 

재클린: 단순한 지지만이 아니라 제 친어머니를 초대해서 같이 지내려고 하셨어요. 제 양부모님이 자각을 가지고 지지를 해줘서 그분들에게 분노하지 않았죠. 그분들에게 항상 제가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어렸을 때 제 부모님이 저를 완벽하게 만들려고 한 느낌이 있긴 했죠. 우리 아시아 애가 피아노나 축구를 하는 모습을 봐- 이런 느낌이었지만, 제가 반발해서 멈췄습니다. 양부모님은 아시아계 아이를 백인 위주 사회에 데리고 오는 일의 무게를 자각하지 못했고, 알았다면 좀 더 아시아계가 많은 곳으로 이사를 하였을 거라고 저에게 사과하시죠. 저는 그 말에 부모님이 몰랐고, 최선을 다했으니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를 드려요. 물론 제가 성장할 때 다른 아시아계 사람들을 봤다면 좀 더 안정적으로 자랄 수 있었을 겁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에 관해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재클린: 제 아버지는 지금 유타주에 거주하고 계시고 어머니는 메인주에 살고 계시죠. 그래서 사람들이 제가 메인 출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고향 방문할 때는 메인으로 돌아가니까요. 둘 다 매우 밝은 사람들입니다. 매우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들이죠. 두 분의 성격은 다르지만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계셔요. 제 어머니는 부끄러움이 많은 내향적 성격이고 반대로 제 아버지는 외향적인 사람입니다. 파티도 좋아하고 주변 분위기를 잘 아시죠. 누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가서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줍니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과도 같이 잘 지낼 수 있어요. 제 부모님 둘 다 매우 자유주의적이시죠. 어머니는 거의 사회주의자나 다름없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봉사활동과 관련되어 있었어요. 그렇게 종교적이지는 않았고 히피와 비슷한 느낌으로 생활했습니다. 두 분은 서로 싫어할 부분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친구로 남았죠. 그분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어요. 선한 일을 하고, 서로에게 진실을 이야기하고,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더라도 사실을 이야기하는 일을 배웠습니다. 두 분 다 저에게 좋은 모범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두 부모님에게 여러 가지 면모를 배우셨지만, 아버지 쪽을 많이 닮으신 것 같네요.

재클린: 네. 확실히 외양적으로는 아버지와 많이 닮았죠. 사실 내부적으로도 그럴지도 몰라요. 아주 깊이가 있는 분이죠. 겉에서만 봐서는 그 깊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가 없었다면 전 이미 죽었을 겁니다. 제 목숨을 수십 번이나 구해 주셨죠. 어머니가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의 삶을 찾아냈다고 생각해요. 그 이전에는 저와 제 남동생을 양육하는 데 신경을 쓰셨습니다. 어머니의 삶에 있어서 양육에 집중하는 생활은 좋지 않았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좋았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머니가 저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어머니의 지지를 통해서 버틸 수 있었죠. 전 한 10년 정도 그렇게 좋은 생활을 하지 못했는데, 그런 저를 어머니가 도와줬고, 그래서 어머니에게 항상 감사합니다.

-광고

팟캐스트: 재클린 씨와 2016년에 개최된 모임에서 처음 만났죠. 그때 서로 마음이 맞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자주 보지는 않았지만 서로 만날 때마다 마음이 맞았다고 생각해요.

재클린: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가 웃는 모습이 기억이 나네요.

팟캐스트: 네. 그랬죠.

재클린: 아주 재밌었어요.

팟캐스트: 그 뒤로 제가 한국에 갔을 때, 데브라 씨가 재클린 씨도 한국에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때 친부모 조사 중이라고 생각했죠. 그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나요?

재클린: 그때는 제가 평생을 함께해온 두 한국계 입양아 단체인 보스턴 한국 입양아 단체(Boston Korean Adoptees, BKA)와 DMZ를 건너는 여성들(Women Cross DMZ, WCDMZ)에 가입했을 때였죠. 전 20대 중반이었고 한국인 정체성을 제대로 탐구해 보려고 하려고 했습니다. 데브라 씨를 2006년에 만났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2016년에야 한국에 돌아갔어요. 2016년에 저는 26세였죠. 제 친어머니에게 다시 연락을 했습니다. 제가 다시 한국에 돌아왔는데 만나주실 수 있는지 물었어요. 친어머니는 제가 직접 저를 만날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걸 듣고 화가 나지 않았죠. 왜 그랬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친어머니가 저를 10년이나 지났는데도 만나주지 않으니 아예 만나주지 않을 것이라고 단념했습니다. 친어머니가 건강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슬프긴 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어요. 친어머니가 건강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니 아주 슬펐죠.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제가 삶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친부모를 만날 이유가 없었죠. 오히려 제 친어머니가 저를 만나고 저에게 의지할까 무서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도 가능성이 있지만, 그때는 무엇이 일어날지 불확실했고 친어머니가 만남을 거절했죠. 그걸 듣고 저는 어머니가 몸이 안 좋다고 생각했어요.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면 왜 단순한 만남도 거부하는지 궁금했고, 친어머니가 걱정되었습니다. 친어머니가 학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죠. 학대를 받지 않는다면, 왜 친어머니가 바람을 피워서 아이를 가진 것도 아니고 친아버지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숨기겠어요? 친아버지가 좋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2016년은 제 삶에 있어서 가장 좋은 시기였어요. 전 아주 건강했고 행복했죠. 슬픔과 우울에서 빠져나온 상태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일하면서 일도 잘 풀리고 있었어요. 더 삶에 있어서 고생하고 있지도 않았죠. 25세 이후로는 직업이 궤도에 올라 잘 풀리기 시작했고 29세 때는 진짜 어른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룬 성공이 자랑스러웠죠.

팟캐스트: 재클린 씨를 만났을 때 재클린 씨의 머리카락과 흘러내리는 옷이 기억이 나네요, 보호-시크(Boho-chic, 미국의 패션 스타일)적 스타일이라 아주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재클린: 전 그렇게 멋있게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가 그렇게 봐줬으니 다행이네요.

팟캐스트: 입양아 사회에 참여하고, 친구도 만들고, 보스턴 입양아들과 활동하다가 AKA에 참여하게 되셨는데 어떤 경험이었나요?

재클린: 전 2013년에 막 입양아 사회의 일부가 되었죠.

팟캐스트: 그럼 정말로 막 들어왔던 시기였겠네요?

재클린: 네. 

팟캐스트: 그리고 입양아 사회의 신입이셨군요.

재클린: 네. 제가 어떤 사회에 입문하게 되었는지 전혀 몰랐죠. 입양아가 아닌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돌아가니 어떤 경험이었냐고 그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각국에서 모인 비슷한 연령대의 한국 입양아들을 5성 호텔에 모아 놓고 이야기를 하는 TV 쇼에 참여한 느낌이었다고 답했죠. 제가 기억나는 입양아 중 하나는 이탈리아에서 온 입양아였는데 행동이나 모든 것이 이탈리아인 같은 한국계 입양아였어요.

 팟캐스트: 스테파노 씨요?

재클린: 아 네. 스테판 씨요. 이탈리아인 그 자체였지만 동시에 한국인이었죠. 모임에 수많은 억양과 발음이 있었지만 전부 한국인이었습니다. 친구들이 그걸 듣고 놀랐지만, 전 놀라는 친구들에게 TV 쇼와 비슷하다고 이야기해줬어요. 서울 캠프(2015) 영화를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그 영화와 비슷하죠. 서울에 있는 5성 호텔에서 진행되는 입양아들 모임이라니 TV 쇼의 기반이 될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확실히 TV 쇼 같았죠.

재클린: 그랬습니다. AKA 이사회에 참가하기 전까지는 입양아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일의 무게 자체를 몰랐어요. 지금은 우리 입양아 사회가 가진 무게를 알고 거기에 참여하는 입양아들에게 가지는 무게와 참여하는 집단들에 대해서 알지만, 그때는 이 모든 게 새로운 신입 입양아였죠. 

팟캐스트: 그 모임에서 공연도 하셨죠. 기억이 나요.

재클린: 공연 경험도 대단했죠. 루크 맥퀸 씨가 페이스북에 공고를 올려서 음악가인 입양아가 있다면 입양아 공연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공연장도 있고, 장비도 다 준비되어 있다고 공고를 했죠. 그걸 보고, 제 꿈이 현실로 이뤄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재클린의 공연-

팟캐스트: 대중 공연을 하신 때가 그때가 처음이었나요?

재클린: 음…. 보스턴 입양아 단체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몇 번 했던 경험이 있죠. 

팟캐스트: 입양아들 앞에서 공연하니 어땠나요? 무겁게 느껴졌나요? 아니면 기뻤나요? 

재클린: 아주 기분 좋았어요. 공연하기 편하게 아주 좋은 음향 장비를 제공해준 루크 씨에게 감사하고 싶어요. 끝나고 나자 누군가가 저에게 “누가 그런 실연 경험을 하게 만들었죠?”라고 질문했고, 제가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5개의 슬픈 노래를 연속으로 불렀거든요. 제가 공연하고 싶었던 노래들만 골라서 공연했죠

-재클린의 노래-

팟캐스트: 재클린 씨의 노래들은 사랑에 대한 노래들인가요?

재클린: 네. 모두 스포티파이와 아이튠즈에 올라와 있죠. 

팟캐스트: 재클린 씨의 전 남자친구들이 재클린 씨의 노래에 나오나요?

재클린: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재클린 씨의 고통을 사용해서 예술을 만드시는군요.

재클린: 전 남자친구들이 반발심을 표시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그 노래들을 좋아했죠.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노래가 있다니 재밌다고 했습니다. 전 제 전 교제 상대들과 여전히 연락하는 기묘한 사람이에요. 제가 가진 특성 중 하나이죠.

팟캐스트: 부모님이 이혼하셨는데도 친하게 지내셨으니 이해가 가네요.

재클린: 그렇죠. 사람이 가장 친밀해질 수 있는 상대는 같이 동거하거나 사랑을 한 상대입니다. 대부분 사이가 틀어지게 전에 그들이 누구였는지 알고,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죠. 그들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도 알게 되고 용서해 줄 수 있게 되죠. 물론 실연이 고통스럽다면 당분간 연락을 하지 않지만 결국 다시 연락하게 됩니다.

팟캐스트: 연애에 관련된 노래를 작곡하실 때 노래 나오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나요? 아니면 전 남자친구들의 여러 요소를 조합하시나요?

재클린: 다양한 요소를 조합해서 만들려고 합니다. 제가 지난 몇 년간 비슷한 느낌의 사람들을 만나와서 그렇게 어렵지 않죠. 여러 사람, 특히 여성들이 동감하는 내용을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노래에 나오는 과정을 똑같이 겪었다고 하더군요. 여성 측도 마찬가지지만, 30대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연애 시장에서 서서히 감정적으로 도움을 줄 수 없는 남성들이 늘기 때문입니다. 여성들에게 받은 호응이 아주 대단했습니다. 

팟캐스트: 전 남자친구가 그 노래를 나에 관해서 썼느냐 묻고, 사실이 아니라고 한 적도 있나요?

재클린: 대답하지 않도록 하죠. 하지만 제가 데이트하지 않은 남성 친구들이 그 노래들에 이입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도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밀어낸 경험이 있다고 했거든요. 특히 이번 COVID-19 격리 시기에 제가 쓴 노래들이 더욱더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최대한 많은 사람이 이입할 수 있도록 노래를 작곡했죠.

팟캐스트: 노래에서 애착이 중요한 주제인가요?

재클린: 애착, 서로 주고받는 사랑, 짝사랑, 타이밍,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밀어내는 사람 등 다양한 주제가 있죠. 제 여성 친구들이 제 노래에서 주로 짚어내는 주제예요. 단순히 입양아들뿐만이 아니라 여성 친구들 전부가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격리 중에 작곡한 다른 노래인 내가 알 모든 일(All I’ll Ever Know)은 사랑에 대한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길을 잃었는데 이유를 모르는 사람에 대한 노래였죠. 많은 사람이 COVID-19 유행을 겪으면서 바깥세상과 접촉하지 못하는 현재 상황 때문인지 노래에 공감하더군요. 제가 작곡하고 싶었던 노래였고 관련 주제와 관련해서 제 삶에 결론을 내줬다고 생각해요. 물론 완벽한 결론을 내주지는 않았습니다. 이 노래를 발매했으니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죠. 물론 모든 사람이 이야기를 공유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취약한 이야기를 공유하면 고통에서 사람을 해방해 줄 수도 있어요. 물론 전 어두운 주제를 별로 다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모두와 이야기를 공유할 필요도 없고, 모두가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재클린 씨가 음악을 대중에게 공개하고 청자와의 관계를 구축했는데, 그 일이 재클린 씨가 해방감을 느끼고 감정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나요? 

재클린: 네. 항상 그랬다고 생각해요. 제가 자란 마을에서는 EMO가 많았어요. 제 후배 중에도 잔뜩 있었죠. 저에게 연락해서 제가 작곡한 노래가 실연 시기를 뚫고 나오는데, 우울증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이야기를 해줬죠. 청소년기에 성장하면서 제 노래가 다른 사람을 도와줬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음악이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죠.

-재클린의 노래-

팟캐스트: 2016년으로 돌아가 보죠. 그때 루나 씨를 만나셨죠?

재클린: 루나! 

팟캐스트: 그때 루나 씨를 처음으로 만나셨나요?

재클린: 아뇨. 뉴욕시에서 개최된 AKA 20주년 행사에서 만났죠. 서울에서 만나기 전 몇 달 전에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하지만 서울에서 서로 깊게 알게 되었죠. 

팟캐스트: 루나 씨의 첫인상이 어땠나요?

재클린: 아주 좋았어요. 사악하게 착했고, 아주 정직하고 느긋한 사람이었습니다.

팟캐스트: 물론 루나 씨가 영어도 하지만 한국계 입양안데 노르웨이어를 해서 좀 특이하다고 생각했나요? 

재클린: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했죠. 노르웨이계 억양을 가지고 있어서 신기했죠. 동시에 한국인데도 영어가 제2 언어이고 노르웨이어가 제1 언어라는 사실 자체가 아주 재미있었어요.

팟캐스트: 루나 씨의 행동거지는 유럽인이라는 점도 그렇고요. 

재클린: 네. 참여자 대부분이 미국인이니 그러한 행동과 분위기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있었죠. 

팟캐스트: 예를 들어줄 수 있나요?

재클린: 루나는 훨씬 직설적이죠. 자신이 생각하는 사실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물론 루나는 좋은 사람이지만 화법이 워낙 직설적이라 실수로 사람을 헤아리거나 신경 쓰지 않는 화법으로 보여서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경우도 많아요. 한국계 입양아 사회에서 우리가 서로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전 처음으로 미국인이 아닌 사람을 사귀게 되었어요. 전 미국계 백인이 아닌 사람과 사귄 적도 얼마 없었죠.

팟캐스트: 재클린 씨가 처음으로 사귄 아시아계 남자친구였나요?

재클린: 아시아계-백인 혼혈과 고등학교 때 사귄 적이 있었지만, 그 친구는 백인에 더 가까웠어요. 사실 우리 둘 다 그랬다고 생각해요. 서양 사회에서 아시아계 남자가 주목받지 못하는 경향은 제가 흥미가 있는 주제입니다. 잘못된 일이니까요. 

팟캐스트: 제가 흥미롭게 생각한 면은, 재클린 씨가 입양아 사회에 들어와서 자신의 입양아 정체성을 자각하고, 또 다른 한국계 입양아와 사귀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재클린 씨의 모든 요소가 하나로 완성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나요?

재클린: 아뇨.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러기를 원했죠. 그래서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어요. 말을 좀 정리하죠. 한국계 입양아 사회의 판결과 분노는 무서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입양아들은 방송에서 입양아와의 연애 관계를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지 분노하는 경우가 많아요. 입양아들의 그런 반응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루나와 저는 서로가 연애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일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우리 둘은 친구이고 서로를 존중하죠. 과거의 연애에 대해서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이제 과거의 추억입니다. 지금은 루나도 저도 서로 다른 연인이 있고 서로가 행복하기를 원해요. 제 삶에 연관되었던 사람들은 전부 제가 루나와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죠. 제 삶의 일부였고 제 성장의 일부였던 사람입니다. 모두가 제가 누구를 언급하는지 아는데 그와 헤어졌다고 해서 다시 언급하지 않을 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죠. 루나는 좋은 사람이에요. 모두가 한국계 입양아 커플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니 이야기할 이유가 있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여러분 커플 명이 루나린이었나요? 재클루나였나요?

재클린: 커플 명은 없었어요. 제 이름도 루나의 이름도 사람들이 철자만 보고 발음할 수 없었죠. 전 루나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팟캐스트: 루나 씨에게 재클린 씨가 첫 한국계 입양아 여자친구였나요?

재클린: 당연히 아니죠. 루나는 저보다 13살 연상이고 20살 때부터 한국계 입양아 사회에서 활동해왔으니까요. 저는 막 한국계 입양아 사회에 참여한 신입이었습니다. 다른 입양아들이 루나가 다른 입양아와 교제해서 화가 나지 않는지 물어보고는 했죠. 당연히 그렇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한국계 입양아 사회 내부에서 연애하는 경험은 어땠나요? 작은 사회이니 그것과 관련된 문제가 재클린 씨를 신경 쓰게 했나요?

재클린: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루나에 대한 거짓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긴 했죠. 그래서 그를 변호하려고 했어요. 물론 모든 연애 관계가 완벽하지 않으니 하소연을 친구들에게 하면 뜬소문이 흘러나가기 마련이죠. 제가 한국계 입양아 사회 내부에서 연애하지 않았다면 관련 문제를 겪지 않아도 됐을 겁니다.

재클린: 그러한 뜬소문들이 저를 막지는 않았습니다. 한국계 입양아 사회 내부에서 연애하면 좋지 않다, 너무 큰 문제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입양아들 사이에 있었죠. 그걸 듣고 저는 동의하기도 했지만 동의하지 않기도 했어요. 일반화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입양아 사회에서 데이트한 좋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팟캐스트: 저도 동의해요. 한국계 입양아 남성과 여성 둘 다 자기들에게는 한국계 입양아와 데이트를 하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죠.

재클린: 그런 이야기는 꽤 모욕적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과 교제하고 싶다는 말은 아니지만,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거절하고 사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일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친어머니를 만나셨죠? 

재클린: 네 결국 2018년에 친어머니를 만났습니다. 한국 관련 이벤트로 다시 한국에 방문한 상태였죠. 친어머니에게 다시 연락을 드렸어요. 이번에는 아주 짧게 다시 한국에 왔으니 만나고 싶으면 만나자고 연락을 했습니다.

팟캐스트: 왜 친어머니가 두 번이나 거절했는데 다시 만나자고 연락을 하셨죠? 친어머니가 마음을 바꿔 먹었기를 기대하셨나요?

재클린: 제 친구 로니의 생각이었죠. 로니는 40살이고 저와 같이 한국에 와있었는데, 로니가 자기가 대신 연락해주겠다고 이야기했죠. 로니가 한국어를 하기 때문에 저 대신 연락을 해줘서 제가 한국에 있다고 이야기하고 일을 진행해줬습니다. 저는 친어머니의 거절을 상해서 긴 편지도 쓰지 않았고, 딱히 화가 나지도 않았어요. WCDMZ 관련 작업으로 계속 바빴고, DMZ를 따라 걷기 활동에 평화 집회도 준비하고 있어서 아주 바빴죠. 그 와중에 로니가 모든 준비를 다 끝내 놓고 “아 만나시겠다고 하시던데.”라고 저에게 말했죠. 당연히 놀랐어요. 서울에서 3시간 떨어진 곳에 있는 호텔 방에서 둘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레이스라는 이름의 통역가를 고용해서 아침 일찍 그곳으로 갔죠. 그렇게 친어머니를 만났어요. 

팟캐스트: 그렇게 갑작스럽게 만났는데 어떤 생각을 하고 계셨죠? 친어머니가 예라고 말해서 놀랐나요?

재클린: 아주 많이 놀랐죠. 거기에 아주 좋은 시기기도 했어요. 요가 학교를 막 끝내서 육체와 정신이 아주 안정적이었거든요. 요가 학교 자체가 아주 부르주아적이고 백인답지만 제가 간 학교는 정통 요가 학교라서 정신과 육체의 균형, 영혼, 병과 육체, 스트레스의 연관성에 관해서 이야기했죠. 그러한 고통에서 생각으로 자유롭게 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죠. 과거의 충격이나 기억을 확인하고, 지금까지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배웠어요. 200시간 정도 요가 교육을 받고 한국에 갔습니다. 그다음에 바로 친어머니가 저를 만나려고 하셨죠. 만나기 좋은 시점이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친어머니와의 만남에 관해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재클린: 아주 좋았습니다. 제 친구 로니와 통역가 그레이스 씨가 같이 호텔에 가서 문을 두드렸죠. 친어머니가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아주 한국적인 분이더군요. 지금과는 달리 한국 문화에 그렇게 익숙하지 않아서 놀랐죠. 영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시고, 화장한 상태에서도 매우 창백하셨고, 거기에 파마머리도 하고 계셨습니다. 어머니 행동과 패션도 전부 한국적이고, 저와 달라 공감할 수 없었어요. 어머니가 떠시면서 저를 안았고, 저를 안으신 채로 소파로 걸어가시기 시작하셨죠. 전 그 상황에 공감이 가지 않아서 울고 있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에 대해서 잘 몰랐으니까요. 그러니 공감을 하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었죠. 

팟캐스트: 그 모든 상황과 관련해서 약간 무덤덤한 기분이 들었나요?

재클린: 네 그렇습니다. 제가 모르는 사람이 제 앞에 있고, 여러 감정이 들어야 하는데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어요.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만날 수 있어서 기뻤고, 친어머니와 훌륭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불안하지 않았죠. 사실 공감하지 못하거나 무덤덤했던 것이 아니라, 친어머니를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반응했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제가 진짜 공감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몰라요

-재클린의 음악-

팟캐스트: 제가 재클린 씨가 입양아와 관련된 모든 일을 입양과 관련하는 이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지만, 재클린 씨가 친어머니에게 약간 무심한 태도를 보였던 이유가 친어머니가 재클린 씨를 거부한 후유증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재클린: 그랬다면 말이라도 되겠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전 거절을 당하면 아주 깊은 영향을 받죠.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기기 때문에 제 생애의 모든 거절을 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친어머니가 저를 거부한 느낌은 들지 않았어요. 친어머니와 같이 시간을 보내면 특별한 시간을 보내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여러 번 같이 시간을 보냈죠. 제 친어머니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지만, 제 양어머니와 느낀 친밀감 백 분의 1 정도밖에 느끼지 않았어요. 양어머니와 저와의 관계 사이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아예 없습니다. 사실 제 양어머니는 제가 친어머니와 같이 살러 간다고 해도 응원해 주시겠죠. 뭐 실제로 응원해 주실지는 모르지만, 양어머니와의 관계에는 빈틈이 없었습니다. 제가 나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친어머니가 필요 없었죠. 제가 19살이었을 때 제 입양과 관련해서 처음으로 배웠을 때부터 제 이야기를 알았고, 이미 결론을 냈기 때문에 이렇게 반응했다고 생각합니다. 입양아 사회에 참여하는 입양아들은 입양아 숫자에 비하면 숫자가 적죠. 하지만 입양아 사회에 참여하는 입양아 대부분은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이 사회에 참여했고 서로를 찾아냈습니다. 사람들이 제가 친어머니에 대해서 강렬하게 반응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이상하다고 여기는 감정을 이해해요. 전 친어머니를 아주 사랑하지만, 그 감정은 먼 친척 고모나 이모에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합니다. 그분들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그분들을 알게 되어서 좋죠. 제가 친어머니에게 느끼는 감정이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하고 나니 그렇게 좋게 들리지는 않네요.

팟캐스트: 아뇨. 사실적으로 느껴져요. 

재클린: 친어머니가 제 이모나 고모같이 느껴져요. 제가 잃어버린 이모나 고모같이 느껴지죠. 제가 아이를 가진다면 다르게 느낄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이런 문제에서 거리감을 느껴요. 그렇게 대단한 문제가 아니었죠. 오히려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서 분노나 슬픔을 느껴서 고생하지는 않았거든요. 

팟캐스트: 친어머니가 재클린 씨와 더 깊은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현재 상황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시나요?

재클린: 저도 비슷한 질문을 저 자신에게 한 적이 있어요. 친어머니가 저에게 더 깊은 관계를 맺으려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친어머니와 제가 서로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친어머니가 어른일 때 저를 놔줘야 했기 때문에 저에게 좀 더 깊은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하죠. 전 친어머니와 떨어졌을 때 아기였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합니다. 물론 제 몸에는 영향을 끼쳤겠지만 기억하지 못하죠. 제 양부모님이 저보다 훨씬 감정적으로 이 문제에 반응하셨죠. 오 두 사람이 드디어 만났구나! 이라는 느낌입니다. 제 양어머니는 제가 친어머니를 만난다고 하니 흥분하셔서 친어머니를 만나는 날에 계단에서 구르시기도 했어요. 두 분 다 아주 깊게 신경 쓰시죠.

팟캐스트: 양부모님이 재클린 씨보다 더 신경을 쓰니 이상한 기분이었겠네요?

재클린: 아주 이상했죠. 두 분께 전 괜찮다고 말씀을 드렸고, 제 형제들인 조니, 형진, 필진과 저는 비슷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큰 영향을 받지 않았어요. 그래서 단순히 저만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 이 일이 일어나니 대단하다고 기뻐했지만, 누구도 울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팟캐스트: 다른 가족들과는 언제 만났죠?

재클린: 어머니와 만나고 나서 얼마 안 있어 만났죠. 제 남동생들은 절 만나러 2번 만나러 왔었고 서로 아주 친밀해요. 남동생이 제 노래인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Say You Don’t Love Me)에 나오죠. 제가 가장 빠르게 친해진 사람 중 하나였어요. 남동생은 내향적이고 저는 외향적으로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아주 똑같았습니다. 남동생이 저를 받아들이고 누나로 인정해줘서 운이 좋다고 생각하죠. 제 남동생에게 느끼는 감정이 아주 강하다고 생각해요. 입양과 관련해서 제 남동생과 만들어낸 관계가 아주 특별하다는 사실을 알죠. 그리고 제 남동생이 제 가족 중 저를 진정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같이 2달을 같이 보냈기 때문에 절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뉴욕에 와서 같이 지냈군요?

재클린: 남동생이 저를 알고 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죠. 물론 다른 가족들도 절 알긴 합니다. 

팟캐스트: 아주 특별하다고 생각하는데, 남동생이 래퍼죠? 

재클린: 네.

팟캐스트: 그리고 서로 음악을 통해서 협업을 할 수 있었죠?

재클린: 네 기적과도 같이 서로 음악을 할 수 있었어요.

팟캐스트: 그 음악적인 협력에서 혈연이 중요하게 느껴졌다고 생각하나요?

재클린: 아주 특별했다고 생각하죠. 제 친어머니, 그리고 남동생에게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가족에 영향을 끼쳤는지 물어봤습니다. 남동생은 가족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이야기를 해줬고, 그 해답이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재클린과 남동생의 노래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Say You Don’t Love Me)- 

재클린: 전 평생 제가 왜 이런지 고민했어요. 제가 입양아라서 그런가? 제 백인 부모 때문인가? 제 친부모의 유전자 때문인가? 전 제가 왜 이런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모른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재클린 씨가 친가족과 같이 밥을 먹는 사진을 봤는데, 그럴 때는 친가족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죠? 오래전에 잃어버린 조카같이 대하나요?

재클린: 아뇨. 친가족들에 있어서 저는 잃어버린 딸이죠. 제 친아버지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다고 칭찬하는 일을 그만하라고 해야 합니다. 전 천사가 아니니까요. 다시 말하면 저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입양아 친구들과 사연을 들어보면 친어머니를 모르고, 입양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 모르는 사실이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하죠. 그러한 관점도 이해해요. 특히 입양된 가족에 따라서 이러한 정보를 알려고 하는 욕구가 커지기 마련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들에게도 제 결과와 비슷한 결과가 나왔으면 해요. 물론 그 사람들과 자리를 바꿔서 제 이야기를 주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제 결과를 제가 노력해서 얻었다고 생각되지 않기도 해요. 제가 이 결과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죠. 어쩌다 보니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입양아가 왜 제가 이렇게 운이 좋았는지 궁금하게 생각하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제가 평생 무언가를 원했는데. 다른 사람이 무언가를 쉽게 손에 넣으면 당연히 화가 나겠죠. 그런 반응이 왜 나오는지 이해합니다. 관련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죠. 왜 저에게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모르니까요. 카오미 씨는 제가 쓴 글을 읽어서 아시겠지만, 제가 우울증으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는 사람들은 제가 우울증으로 고생해서 이런 보답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 그런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지만, 제 이야기도 계속 편하다가 친가족도 만났는데 전부 착하고 좋았다- 이런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제가 살면서 여러 번 죽을 뻔했죠. 한두 번 자살시도를 했다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제 삶에 있어서 빠진 요소인지는 모르지만, 저도 조금씩 삶에 일어나는 좋은 일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친가족을 만난 일도 좋은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제가 조정해서 일어난 일은 아니었죠.

팟캐스트: 우리가 연애 관계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를 했는데 재클린 씨가 지금 교제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재클린: 네. 제 삶에서 찾고 있던 파트너라고 생각해요. 그와 같이 보내기 전까지 삶이 이렇게 편하고 좋았는지 몰랐죠. 제가 그를 찾으려고 아주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자아 성찰도 했고 직접 찾아내려고 노력했죠. 다른 사람으로 만족하고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시즌 4, 에피소드 19: 달시 미들스테드

내용 주의: 자살 시도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 

한국계 입양아 달시 미들스테드 (49세) 씨는 여러 역경을 넘어왔다. 그런데도 미들스테드 씨의 신앙과 봉사는 미들스테드 씨에게 희망을 주었다. 미들스테드 씨는 2살에 대한민국에서 입양되어 네브래스카주의 농업 마을에서 학대와 고통을 견디면서 성장했다. 그런 감정적 상처에도 불구하고 미들스테드 씨는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았고, 가족을 만들어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달시: 제 이름은 달시 진 미들스테드이고, 한국 이름은 이복실입니다. 제 입양 기록에 따르면 1972년 1월 29일에 태어났지만, 거기에도 물음표가 붙어 있어서 제 생일은 불명이죠. 현재 49세이며 미국 텍사스주 뉴 브론펠즈 시에 살고 있고, 2년 반 전에 이 도시로 이사를 왔어요. 네브래스카주에서 자라고, 애리조나주에서 거주하다가 텍사스주에서 거주하는 중입니다.

팟캐스트:  뉴 브론펠즈는 어디에 있는 도시인가요? 남쪽 휴스턴시 근처인가요?

달시: 샌안토니오 시와 오스틴 시 사이, I-35 고속도로에 걸쳐 있어요. 샌안토니오에서 30분 정도 북쪽으로 운전하면 나오고, 오스틴 시에서는 45분 남쪽으로 운전하다가 보면 나오는 도시입니다.

팟캐스트: 알겠습니다. 왜 텍사스주로 이주하셨죠?

달시: 제 직업 때문입니다. 미국 루터교 텍사스 지부의 집사이자 부목사로 일하고 있거든요. 

팟캐스트: 그럼 정식 목사인가요? 

달시: 루터 교회에서 집사 역할을 맡고 있죠. 원래는 부목사 직위를 맡고 있었는데 ELCA가 직위 개편을 하면서 전부 집사로 개편했습니다. 1년 전에 집사들도 임명직으로 개편을 했죠.

팟캐스트: 아시아계 여성이 ELCA에서 집사로 활동하는 일이 희귀한 일인가요, 아니면 요즘 들어서는 구성원이 다양화되었나요?

달시: 집사 자체는 희귀한 편이지만 구성원 자체는 다양화되었습니다. 많은 한국계 입양아들이 목사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목사들도 여러 명 있죠. ELCA에서 한국계 입양아들이 서로 모여서 집단을 만들려고 하고 있기도 합니다.

팟캐스트: 그렇게 한국계 입양아들이 개신교에서 큰 영향을 발휘하는 이유가 많은 한국계 입양아들이 기독교 집안으로 입양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달시: 아주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제 연령대의 한국계 입양아들이 입양될 때 많은 입양기관들이 루터 교회나 다른 개신교회와 연관되어 있었죠. 예를 들면 제 미국 입양기관은 오클라호마 털사에 있는 딜런 인터내셔널이었는데, 동방사회복지회와 같이 기독교 성전을 하고 있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협조 기관이었습니다. 이러한 입양아 사이의 기독교 강세 경향 일부는 많은 기독교 계통 입양기관들이 한국 입양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교회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종교적인 집안에서 자라나셨나요?

달시: 네. 교회 제도 내부에서 성장했습니다. 침례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ELCA로 개편되기 이전의 미국 루터 교회에서 성장했죠. 제 부모님은 우리 가족을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게 하는 엄격한 분들이었어요. 주일 학교, 견진성사, 교회 청년회도 다녔습니다. 식사 전에도, 자기 전에도 기도했죠. 아주 종교적인 집안이었어요.

팟캐스트: 저도 그러한 종교 행사에 참여하면서 성장했죠. 전 그런 교육을 받으면서 반발했습니다. 현재 전 교회에 다니지 않아요. 하지만 달시 씨는 그러한 종교적 교육에 반발심을 가지지 않으셨군요? 

달시: 사실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종교 교육으로 인해서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부모님, 특히 어머니가 종교를 무기로 사용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다른 입양아들의 이야기에서도 많이 나오는 이야기이죠. 부모님과 떨어진 뒤의 삶에서 다른 신도들을 만나고, 신앙과 신의 가르침을 다시 배웠습니다. 그 경험이 제 삶을 여기까지 이끌었고, 제가 목회자의 길을 걷게 했다고 생각해요. 전 네브래스카에 있는 캠프에 참여했죠. 제가 자라는 동안 가장 힘든 시기에 참여했던 캠프였고, 저는 그때 신앙에 의문을 가지고 해답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곳 인솔자들은 다정하고 이해심이 깊었고, 저에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었어요. 그때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들의 신앙심을 기르기 위해서는 신앙심을 무기로 사용하지 말고 신앙의 모범이 될 사람을 따르게 하는 일이 더 올바르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달시: 저는 제가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그때 이야기를 들으면 제가 학대당했다고 하고, 저도 동의하죠. 전 항상 부모님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왜 나를 이렇게 학대하지?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저와 제 남매들을 왜 보호해주지 않는지 생각했죠. 제가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은 신앙을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부모님은 항상 교회에 가면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하고, 신앙과 관련된 일을 해야 한다고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가르쳤죠.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잘못하면 교회 청년회에 참가할 수 없었지만, 교회는 가야 했어요. 

팟캐스트: 달시 씨를 조용하게 만들려고 신앙을 사용했다는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달시 씨가 말썽을 부리면 달시 씨의 신앙심을 빼앗으려고 했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학대를 학대로 보이지 않게 사용했다는 말인가요? 

달시: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고통받을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지 묻게 했죠. 우리가 어떤 문제를 일으켜도 항상 교회는 가야 했어요. 전 힘든 시기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지? 이라고 질문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러한 비극들을 일어나게 하는지 의문을 가졌어요.

팟캐스트: 그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죠?

달시: 많은 상담을 받았고,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모범 신도들을 만나서 해결했어요. 신도들이 저에게 하나님을 설명해줬죠. 하나님은 벌하는 자, 사악한 존재, 사람들이 사악해질 이유가 아니며, 인간의 원죄 때문에 인간 세상에 문제가 생긴다고 설명해줬습니다. 가르침과 저를 이끌어주면서 신앙 멘토가 되어준 모범 신도들을 통해서 선량한 하나님이라는 인식을 만들 수 있었어요. 지금에 와서는 제가 외롭다고 생각할 때 항상 하나님이 제 곁에 있다는 인식으로 위안을 얻죠. 그것이 지금 제 신앙입니다.

팟캐스트: 아주 흥미롭네요. 달시 씨.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이 달시 씨를 버렸는지 의문을 가졌지만, 캠프에 가서 하나님과 더 가까운 느낌을 받았나요? 관련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했나요? 아니면 더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됐나요? 

달시: 캠프에서는 소외감을 안 느꼈어요. 전 살면서 자살 충동을 느끼고 자살하려고 한 적도 있었죠. 하나님과 더 가까운 곳에 가고 싶었습니다. 제가 죽으면 천국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천국은 어떤 고통, 슬픔, 어려움도 없고 행복한 생활을 보낼 수 있는 곳이라고 배웠고 지구에서 부정적인 감정과 문제와 씨름하는 일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질문하기 좀 그렇지만 달시 씨의 삶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나요? 

달시: 짧게 설명하자면, 그리고 제 관점에서 설명하는 일이라고 언급을 하고 시작하자면, 전 아주 권위적인 집안에서 자라났습니다. 부모님은 매우 엄격하셨죠. 친구들을 집에 초대할 수도 없었고 친구네 집에 놀러 갈 수도 없었어요. 아주 엄격한 취침 시간과 규범이 있었습니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맞았어요. 식사할 때 일정량 이상을 먹을 수 없어서 영양부족이기도 했고,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습니다. 나중에 와서야 평범한 가정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죠. 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계속 맞았는데, 더는 버틸 수가 없었어요. 친구들 집에 놀러 갈 수도 없었고, 친구들을 초대할 수도 없었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주 외로운 기분이 들었어요. TV나 라디오도 없이 자랐죠. 물론 그 2개가 없어서 이점도 있긴 했어요. 제 형제자매들은 상상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회적으로 고립된 기분이었죠. 학교에서는 조롱당하고, 더는 버틸 수 없었고,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냥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구도 절 원치 않고 사랑해주지 않으니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진짜 자살 시도를 하니 어머니는 제가 죽는 살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답했어요. `절 상대할 시간이 없다고 저에게 말했죠. 그때 제 부모님이 이혼한 상황이었는데 아버지를 볼 수도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었어요.

팟캐스트: 왜 부모님이 한국에서 입양하셨죠?

달시: 좋은 질문이네요. 전 장녀입니다. 바로 밑에 한국계 입양아인 남동생이 있죠. 그 밑에 국내 입양아인 여동생 둘이 있어요. 우리 남매 전부가 항상 그런 질문을 했죠. 왜 부모님이 입양하셨을까? 제 아버지는 어머니가 불임이라 입양하셨다고 했어요. 반면에 어머니는 책을 읽고 난 뒤에 입양할 마음을 먹었다고 하셨죠. 지금 한국 입양 제도와 한국 입양 역사를 공부하고 있어요. 제가 2살에 입양이 되었는데, 입양된 날이 부모가 아이들을 구하는 날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종교적인 집안이 입양하는 경우가 많죠. 네브래스카에서의 어린 시절은 어떠셨죠? 

달시: 시골 농장에서 사람들과 고립된 채로 자랐고, 주변 사람들도 저와 전혀 닮지 않았죠. 제 사촌이 한국에서 입양되었기 때문에 사촌을 가끔 봤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은 때는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교 사이였어요. 제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친구 집에 놀러 갈 수도, 친구를 불러올 수도 없어서 항상 외로웠습니다. 아주 고독한 때였죠. 

팟캐스트: 남매들 사이는 좋았나요?

달시: 남매들 사이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주변에 같이 놀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TV도 없었고 라디오도 없었기 때문에 같이 밖에서 놀아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문을 잠그고 우리를 집안에 들여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밖에서 있어야 했죠. 취침 시간도 엄격했고 중학교 때도 8시에 잠들어야 했습니다. 아주 힘든 시간이었어요.

팟캐스트: 양부모가 아이들을 억제하고 음식의 양마저 조절하는 이야기는 슬프게도 전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을 당하셨는지에 아시나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시면 이유를 알 수 있나요? 

달시: 지금 와서 왜 부모님이 우리 형제자매들을 그렇게 양육했는지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요소 중 하나는 부모님이 더 나은 방법을 몰랐다고 생각해요. 또 다른 요소는 우리 집이 가난했기 때문이죠. 어머니는 전업주부이셨고 아버지는 타이어 가게에서 일하면서 돈을 많이 벌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돈이 부족했습니다. 4명의 아이와 2명의 어른을 위한 충분한 음식을 제공해야 했기 때문에 우리가 먹을 양을 관리하려고 했죠. 부모님이 이혼하고 어머니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했어요. 우리 가족이 복지 배급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복지 배급으로 나온 치즈를 받아서 먹었고, 식품권 배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먹는 양마저 조절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그 시대에는 다른 아이들이 비슷하게 양육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달시 씨 가족만 그랬다고 생각하시나요? 달시 씨 가족이 다르다는 사실을 언제 아셨죠?

달시: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우리 가족이 다른 가족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 저는 기억 자체가 별로 없습니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합쳐서 기억 자체가 별로 없죠. 저에게 남아 있는 기억들도 선명하지 않아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애들이 다른 친구들과 같이 하교하고, 다른 집에 놀러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부모님에게 친구 집에 놀러 갈 수 있는지 묻자, 안된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왜 안되는지 묻자 뺨을 맞았죠. 그런 일이 일어나면 더는 묻지 않게 됩니다.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다른 친구 집에 놀러 가지 못하게 했던 이유는 몰라요. TV도 없이 사는 환경이 부끄럽다면 친구들을 초대 못 하게 할 수도 있죠. 하지만 왜 친구 집에 놀러 가는 일까지 금지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팟캐스트: 정신적으로 학대당하셨고 거기에 육체적으로도 학대당하셨군요?

달시: 그랬습니다.

팟캐스트: 거기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셨겠군요?

달시: 네. 고등학교 때 자살 시도도 그곳에서 빠져나가려고 한 방법이었어요. 자살 시도가 실패하자 결국 가출을 했죠. 어머니가 일하러 갔을 때 편지를 쓰고 제 동생들을 모아서 더 여기에 있을 수 없다고 한 뒤에 친구를 불렀어요. 선생님으로 일하던 친구가 저를 데리러 왔고 제 아버지 집으로 절 데리고 가줬습니다. 전 제 아버지를 못 본 지 몇 년이 넘은 상태였죠. 아버지를 보러 갈 수 없었거든요.

팟캐스트: 그래서 아버지가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겠군요?

달시: 네. 전혀 몰랐습니다.

팟캐스트: 어머니에게 자살한다고 말했을 때 그냥 죽으라고 했다고 들었는데….

달시: 네. 그랬죠.

팟캐스트: 끔찍하네요. 아주 심한 고통을 겪으셨겠네요.

달시: 그랬습니다.

팟캐스트: 자살 방법은 뭐였죠? 약을 먹으려고 하셨나요? 아니면….

달시: 제 손목을 가위로 자르려고 했죠. 고등학교 1학년 때 심리학 수업을 들었는데 그때 일기를 쓰게 되었고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글을 쓰게 됐습니다. 그걸 본 제 선생님이 학교 상담사를 불렀고, 학교에서 저와 제 어머니를 불러서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단순히 제가 관심을 끌려고 이러는 거라고 말씀하셨죠. 

팟캐스트: 다행히도 자살 시도가 실패한 뒤에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서 가출하셨군요.

달시: 네. 제 아버지 집에 보내줬죠. 거기에서 한 달 정도 지냈습니다. 아버지는 재혼하신 상태였고 전 양어머니와 그렇게 잘 맞지 않았어요. 그분은 이미 4명의 남자애를 키운 상태라, 아버지에게 “이미 내 아이들도 다 키웠으니 네 애까지 키울 여유는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됐어요. 그때가 9월이었는데, 아버지가 제 병실에 들어오시더니 우리와 같이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거주지를 찾아야 했죠. 다시 어머니와 같이 사는 지옥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어요.

팟캐스트: 이때 달시 씨 나이가 어떻게 되셨죠?

달시: 17살이었습니다. 

팟캐스트: 17살 학생이 갈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죠?

달시: 그렇죠. 결국, 제 부모님의 친구를 부르게 됐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그분이 제가 입원해 있던 병원에 와서 제가 그분 집에서 지낼 수 있다고 하셨죠. 전 그분들을 제 양부모님이라고 불러요. 하지만 그 결과로 제 부모님과 양부모님의 친구 관계가 깨졌습니다. 제 부모님은 양부모님의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았죠. 제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양부모님이 법적 보호인이 되려고 하셨고, 제 부모님이 동의하시면서 양부모님이 제 법적 보호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 고등학교 생활을 양부모님과 보낼 수 있었죠.

팟캐스트: 자라면서 사랑받았다고 생각하시나요?

달시: 아뇨. 한국에서 잘못된 애를 보냈다고 듣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말로는 어머니가 입양기관에서 받은 사진과 제가 달랐다고 하더군요. 듣기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화가 나셨을 때, 한국에서 널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었다고 저에게 소리치시고는 했죠. 마지막으로 제가 뚱뚱하고 멍청하다고 조롱하고는 했습니다. 이러한 말들을 들으니 사랑받는 기분도 들지 않았고 받아들여지는 기분도 들지 않았어요. 친구들과 시간도 보내지 못했으니 사회적으로도 고립되었죠. 아주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자유가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달시: 여러 감정을 소화하려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 어머니가 오기를 거부하셨죠. 대학교 졸업식에도 오지 않으셨어요. 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식에 오긴 하셨어요. 어머니에게 대답을 듣기 위해서 연락을 했지만, 전화를 끊었죠. 어머니가 절 원치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원했지만,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문제를 받아들이고 상대해야 할지 몰랐다고 생각해요. 아버지는 독일계 집안에서 9명의 형제자매와 같이 자랐죠. 고등학교 중퇴생이기도 하셨습니다. 아직도 왜 부모님이 입양하시기로 하셨고, 입양 허가를 어떻게 받았는지도 몰라요. 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었고, 어머니는 고등학교 졸업생이긴 했지만, 대학교 졸업생은 아니었죠. 요즘이었다면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어서 입양 자체가 불가능했을 겁니다.

달시: 적어도 그때 입양 기준은 통과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입양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기도 하지만, 옛날 입양은 비용이 많이 안 들었습니다. 부모님은 한국에 가서 저랑 제 남동생을 데리고 와야 하지 않았어요. 시카고 공항에서 우리를 맞이했죠. 제 두 동생은 국내 입양이었기 때문에 바로 국내에서 입양되었습니다.

팟캐스트: 어릴 때 겪은 문제로 인해서 자해하기 시작하셨나요?

달시: 저 자신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건강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죠. 꽤 자주 자살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자살 시도를 하고 나서도 자살에 대해서 생각했죠. 자살에 대한 생각이 안 나는 경우가 없었죠. 트라우마에서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상담을 받으면서도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고생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는 했죠. 제대로 밥을 먹지 않기도 하고, 저 자신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했습니다. 제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팟캐스트: 어머니만 이런 학대를 하셨나요? 아니면 아버지도 학대에 동참하셨나요?

달시: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어머니만 저에게 이러셨죠.

팟캐스트: 팟캐스트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걱정을 하셨나요, 아니면 이러한 개인적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었나요?

달시: 좀 걱정되긴 했어요. 하지만 다른 팟캐스트 에피소드를 듣고 나니 이러한 문제를 저 혼자만 겪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죠. 다른 입양아들도 비슷한 문제나 상황을 겪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든 입양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완벽하지 않은 입양이라고 해도 괜찮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일종의 구원이군요?

달시: 네 그렇습니다. 현재 저는 괜찮아요. 제가 이렇게 괜찮아진 이유는 신의 은총, 좋은 친구들과 가족, 삶의 긍정적인 면모를 보여준 스승들이 제 삶의 긍정적인 면모를 보여줬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네브래스카의 농촌 마을에서 성장하셨군요. 작은 마을이니 서로서로 아는 곳이었죠? 달시 씨의 학대 사실이 숨겨졌나요? 다른 사람들이 몰랐다고 생각하세요?

달시: 알았지만 동시에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SNS로 다시 연락이 닿은 동네 사람들이 저에게 와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몰랐다고 이야기를 해줬죠. 친구들은 저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도울 방법을 몰랐습니다.

팟캐스트: 70년대였고, 중서부의 농촌 지역이라 그러한 문제를 아예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 문제도 있었겠군요?

달시: 네 그렇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이러한 문화가 좋지 않은 상황에 놓인 아이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죠. 그러한 상황에서 경찰이나 다른 공공기관에 신고가 들어가지 않았는지 궁금하네요.

달시: 사실 신고가 들어갔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아동복지국이 나와서 우리에게 질문한다고 부모님이 모아서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할 이야기를 정해주었죠. 4명 전부 소파에 모여서 앉아 있었고 어머니가 집을 돌아다니면서 집을 청소했습니다. 네. 마을의 누군가가 아동복지국에 연락했어요. 하지만 충분한 증거가 없어서 우리 형제자매들을 부모님에게 떼어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너무 자주 일어나죠. 제가 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심리학을 공부해서 왜 그런지 배웠고, 관련 분야 봉사 활동을 10년간 진행하면서 아동 학대와 방치 문제를 처리했는데, 우리 가족 상황과 비슷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더군요. 

-광고-

팟캐스트: 친어머니에 대해 생각하신 적이 있나요? 만약에 친어머니가 달시 씨에게 일어날 일을 알았다면, 상황이 다르게 진행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나요? 많은 친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볼 수 없고, 돈도 없고, 남편도 없으니, 아이들에게 더 좋은 미래를 주기 위해서 입양 제도에 아이들을 맡겨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죠. 한국인들로서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하는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입양아들도 더 나은 삶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요. 달시 씨도 다른 선택지에 대해 생각을 하시나요?

달시: 네. 한국에서 자랐다면 제 삶이 어떻게 달랐을까 생각하죠. 어른이 되고 나서도 제 친어머니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친어머니를 찾기 위해서 노력했고 지금도 찾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제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고, 어머니가 저를 학대했기 때문에 진짜 모녀 관계를 원하고 제 친어머니를 찾고 싶어요. 친어머니에게 저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편지를 쓰기도 했죠. 하지만 제 친어머니를 원망하지는 않아요. 어머니가 저에게 사과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친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친어머니들 대부분이 입양 과정에서 아이와 떨어지는 고통을 설명하기 때문에 울게 되죠. 친어머니들은 아이들을 항상 기억한다고 해요.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제 친어머니도 절 계속 생각하거나 적어도 생각했다고 생각합니다. 제 친어머니가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친부모 조사는 진행하셨나요? 한국에 돌아가신 적은 있나요?

달시: 한국에 2번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2001년과 2016년에 한국을 방문했죠. 제 첫 한국 방문은 제 입양기관을 통한 방문이었어요. 입양기관에서 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뒤 얼마 안 있어서 방문하게 됐습니다. 대학교 수업 과제를 위해서 그쪽에 연락하게 됐죠. 입양과 관련된 과제였는데 제 부모님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서 입양기관에 연락했어요. 대학교 때 그 연락하기 전까지는 제가 입양에 맡겨진 지역도 어디인지 몰랐습니다. 연락하고 나서야 제가 어디에서 어떻게 입양되었는지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제 상황을 알게 되자 입양기관에서 놀라면서 사과했습니다. 하지만 입양기관 잘못이 아니었죠. 입양기관은 그 상황에서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니까요. 하지만 입양기관이 제 상황을 듣고 사죄하는 의미에서 조국 방문 여행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감정적인 유대감이 느껴졌고, 경험 자체가 매우 감동적이었죠. 돌아와서 좋았습니다. 유전자 검사는 하지 못했지만 제가 지냈던 고아원이 있었던 자리에 방문할 수 있었어요. 2016년에도 조국 방문 여행의 일부로 한국에 왔고, 고아원 자리도 다시 방문했습니다. 2016년에는 제가 좀 더 나이를 먹은 뒤라, 좀 더 무게 있는 방문이었죠. 한국에 다시 방문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고아원 출신 고아들과 다시 연락망을 구축했습니다. 그 연락망 구축이 제 조사 결말의 일부라고 할 수 있어요. 

팟캐스트: 고아원 이름이 어떻게 되죠?

달시: 동두천시에 있던 양주 고아원입니다. 그 고아원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배우고 있죠. 전 서울 북쪽에 있지만 의정부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DMZ 근처의 지역에서 태어났거나, 발견되었어요.

팟캐스트: 그 고아원에 대해서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나요?

달시: 나이가 어느 정도 먹은 뒤에 입양된 입양아들은 그 고아원에 대한 끔찍한 기억이 있죠. 

팟캐스트: 달시 씨가 지내던 곳이 좋지 않은 곳이었는데 달시 씨가 보내진 곳도 좋지 않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어땠나요? 

달시: 우선 제가 2살 때 입양되었기 때문에 한국 기억이 없습니다. 기억 자체가 억압되었는지 아니면 너무 어려서 기억을 하지 못하는지는 모르죠. 한편으로는 기억하지 못해서 그 기억을 가지고 자라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면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받은 삶과 기억도 그리 축복받은 삶과 기억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기억이 저에게 더 좋았을까 고민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미국에서 살았던 삶을 염두에 둔다고 해도, 입양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현재 제 생활, 저에게 주어진 기회,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고, 한국 고아원에서 끔찍한 생활을 하면서 자랐다면 제가 어디 있을지 생각해봤습니다. 아마 준비도 안 된 채로 거리에 내몰렸을 겁니다. 한국 고아들이 대부분 그러한 결과에 도달한다고 들었어요. 

팟캐스트: 달시 씨의 이야기는 회복과 생존의 이야기군요. 달시 씨의 어린 시절 자체가 생존하는 이야기입니다. 달시 씨의 이야기 일부에 대해서 공감해요. 어린 아이일 때 생존의 방식을 만들죠. 누가 자기를 도울 수 있는지 알고 인공적인 부모 관계를 만들게 됩니다. 달시 씨도 그런 일을 겪으셨나요? 

달시: 물론이죠. 이미 말했지만, 가족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인공적인 부모 역할을 해준 분들이 있었죠. 그분들 중 몇몇은 자기를 어머니로 불러도 좋다고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러한 이야기가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은 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단순히 입양아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죠. 제 입양 가족은 제 진짜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이 제 가족이긴 하고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절 사랑해주고 받아들여 주는 사람들이 제 진짜 가족이죠. 그러한 사람들이 제 삶에 있고 그 사람들이 있어서 기쁘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대학교 이후에는 어떻게 생활하셨죠? 어디로 가시게 됐나요?

달시: 대학교 졸업 이후에는 네브래스카주에 몇 년 동안 지냈어요. 그곳에서 지내면서 보이스 타운(Boys Town, 네브래스카주 기반 자선단체)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일은 즐거웠죠. 다양한 지식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보이즈 타운은 청소년들을 위한 보호 단체로, 아이들이 소년원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도착하게 되는 곳이죠. 그곳에서 아이들이 가족에서 같이 지내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저는 거기에서 가족 보조 선생으로 일했죠. 보이즈 타운에서 지내게 되는 아이들은 가족 선생들과 같이 진짜 가족과 지내게 됩니다. 8명의 아이들이 같은 집에서 지내게 되어요. 8명의 남자애나 8명의 여자애가 같은 집에서 지내게 되죠. 일하는 법을 배우고, 학교도 가고, 필요로 하는 상담도 받게 됩니다. 이 애들 대부분이 사회적 교류를 하는 법을 모르거나 사회적 스트레스를 상대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사회적 기술도 가르쳐요. 비행 청소년들을 위한 훌륭한 시설이죠. 그곳에서 6년간 일했습니다.

팟캐스트: 잠시 묻고 싶은 일이 있는데, 이러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정서적인 치유에 도움이 되었나요?

달시: 예. 정서적인 치유에 도움이 되었죠. 아이들 상당수가 제가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아이들 상당수가 학대당하면서 자랐으니까요. 제 삶을 고친 제가 그 경험을 통해서 다른 아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점이 좋았죠. 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여름 캠프에서 일했고, 대학교 교회에서도 활동하면서 멘토 가족도 있었어요. 그 가족과 여전히 연락하고 있습니다. 제 신앙이 대학교에서는 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죠. 제 친구는 교회 청소년 지도자였는데 그 친구와 함께 청소년 지도를 돕고, 대학교 청년 교회의 일을 도왔어요. 제가 일을 잘하는 것을 보자 친구가 다른 교회에서 청소년 지도자로 일해보라고 권유했습니다. 그걸 듣고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캠프를 가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설파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니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다른 교회에 청소년 지도자 신청을 했고 4년 정도 청소년 지도자로 일했습니다. 제 캠프 지도자 시기와 그 청소년 지도자 시기의 경험이 제가 종교 쪽으로 진로를 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애리조나 교회에서 15년간 일하다가 텍사스 교회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자살 충동은 잦아들었나요?

달시: 네 그렇습니다. 자살 충동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우울함, 소외감, 외로움, 의심이 남아 있죠. 전 여전히 신실한 신도지만 이러한 감정을 제 목사님과 공유했습니다. 현재 이 COVID-19 유행이 제 마음속에 큰 의심을 만들었거든요. 왜 이런 비극과 슬픔이 일어나고 있죠? 하지만 동시에 저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이 희망을 주시고 저희를 인도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죠. 자세히 설명하지는 못하지요. 

달시: 하나님이 어떤 이유로 삶에 어떤 일을 일어나게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한 이유로 현재 유행이 일어났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의 큰 시련이라고 보는 관점이죠. 전 그런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지구에 있으면서 온갖 고통을 겪는 이유는 원죄 때문이죠. 하지만 이런 시련이 하나님이 우리가 가진 사랑, 선, 품위를 더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 또한 천국에서 받을 기쁨을 더 높여준다고 봅니다. 말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제 관점이죠. 전 제가 망가진 가족에서 자란 이유가, 제 경험으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기회를 받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러한 경험을 겪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을 이 방식으로 도울 수 없었겠죠. 하지만 제가 만약에 절 사랑해주는 가족 밑에서 자라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고 해도 사람들을 다른 방법으로 도와줬을 겁니다. 제 인생 이야기를 자주 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의 동정이 싫기 때문입니다. 불쌍한 달시가 끔찍한 삶을 살았다는 동정을 받고 싶지 않아요. 전 제 삶을 그런 이야기로 소비하고 싶지 않죠. 놀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지구에 오게 된 이유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하나님의 뜻대로 최고의 사람이 되려고 왔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은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죠. 

달시: 자주 들은 말이네요. 제가 있어서 가장 힘든 기간은 고난 주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힘들죠. 학대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 하나님이나 교회에 적응하기 어려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왜 그런지 이해해요. 사실 저도 좋은 신도들이 저를 어려운 시기에 이끌어주지 않았다면 교회와 연관이 있거나, 깊은 신앙심을 가지지 못했을 겁니다. 적어도 전 그렇게 믿어요.

팟캐스트: 고난 주간이 다시 다가오는데 달시 씨는 그 기간을 어떻게 버티나요?

달시: 전 자아 고찰을 통해서 고난 주간이 가진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인간의 고통을 아신다고 생각하죠. 하나님이 예수님이 우리의 고통을 대속하게 하셔서 저희의 원죄를 씻어 주셨다고 생각해요. 힘든 시기이고 자아 성찰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달시: 저에게 있어서 관계는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쉽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저에 관해서 물어본다면, 특히 직장 동료들에게 저에 관해서 물어보면 제가 매우 사교적인 사람이라고 할 겁니다. 전 자원을 어떻게 찾아낼지 알고 있고 사람들을 서로 엮어내고 연락하는데 재능이 있어요. 거기에 사람들도 많이 알죠. 하지만 관계의 깊이가 다릅니다. 전 친구가 많이 있지만, 관계는 깊지 않죠. 제가 깊은 관계를 맺는 데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결혼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하죠. 아이를 가지지 않은 이유기도 하고요. 결혼은 하고 싶고, 남편을 가지고 가족을 꾸리고 싶습니다. 노력했다면 심리적 굴레를 뛰어넘고 그러한 길에 접어들 수 있었겠지만, 실패가 무서워서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심리학에서도 심리적 굴레를 뛰어넘지 못하면 양육의 굴레를 다시 반복하게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 자체가 저에게는 공포였고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죠. 연애 관계를 멀리하게 되었고 아직도 신뢰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입니다. 제가 여전히 혼자이고 깊은 친구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개인적인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답하고 싶으면 답해주세요. 친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달시: 친어머니에게 저에게 삶을 주셔서 감사하고, 어머니가 그때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일을 해줘서 감사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제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괜찮고 어머니의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죠. 어머니가 행복한 삶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하고 싶어요.

팟캐스트: 10살 때의 달시 씨에게는 어떤 말을 해주시고 싶죠?

달시: 음…. 아마 어른들이 말하는 모든 이야기를 믿지 말고,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 싸우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그때는 못했던 일입니다.

팟캐스트: 달시 씨 감사합니다. 여기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네요. 달시 씨의 이야기를 공유해줘서 고맙습니다. 많은 사람이 공감할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생존, 회복, 힘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달시: 감사합니다. 이 인터뷰를 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카오미 씨가 진행하신 이 팟캐스트에도 감사하고 싶습니다. 이 팟캐스트를 듣고 제가 혼자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서 감동했거든요.

시즌 4, 에피소드 18: 선미 마르틴

한국계 입양아 선미 마르틴 씨(39세)는 3살 반이었을 때 한국에서 남부 독일로 입양되었다. 마르틴 씨는 자신의 입양에 대한 관점이 세월이 지나면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이야기하고, 어떻게 자신의 직업이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에서 SNS 디자이너로 바뀌고, 입양아를 위한 치료 공간이자 수양 공간인 누마루의 창업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선미: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선미입니다. 제가 3살 반이었을 때 대한민국 부산에서 입양되었죠. 지난달에 39세가 되었어요. 제 부모님은 독일인이시고 전 독일 남부에서 자랐죠.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네요. (독일어 자기소개)

팟캐스트: 선미 씨가 3살 반에 입양되었다는 사실은 몰랐어요. 한국 기억이 남아 있나요?

선미: 아뇨. 한국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어요. 거대한 기억의 공백만이 남아 있을 뿐이죠. 제가 가진 정보는 제가 발견된 곳의 주소입니다. 그 주소가 사실인지도 몰라요. 2014년에 독일에서 홀트아동복지회에 연락했을 때 그들이 제공한 정보이죠. 그 자료는 제 입양 서류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발견된 곳의 주소를 제가 받았고 그곳을 직접 방문했죠. 그곳을 방문하면 제 기억이 되살아날지 알고 싶었어요. 제가 알고 있는 또 다른 사실은 제가 독일에 오기 전 6개월 동안 부산에 있는 고아원에서 지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를 찾아서 경찰에 맡기고 갔을 때의 기록이 제 서류에 남아 있죠. 하지만 저에게 있는 정보는 그 정보밖에 없습니다.

팟캐스트: 어떻게 고아원에 넘겨지게 되었는지도 모르시는군요?

선미: 모릅니다. 사실 지금 조사를 좀 더 진행해서 정보를 더 얻으려고 기다리는 중이죠. NCRC에서 제 원본 서류가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고, 또 다른 유전자 검사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이미 2번이나 유전자 검사를 진행했어요. 한번은 한국 뿌리의 집 게스트하우스에서 진행했고, 다른 검사는 패밀리 트리 DNA(Family Tree DNA) 회사의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지금 하려는 검사는 주독 대한영사관에서 진행하는 유전자 검사이죠. 제가 아는 바로는 제가 할 수 있는 유전자 검사 중 가장 나은 검사라고 하더군요. 한국 정부가 제공하는 공식 유전자 검사인지라, 한국 경찰 유전자 정보와 대조할 수 있다고 합니다. 

팟캐스트: 선미 씨, 그 조사들을 진행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선미: 제 친어머니를 찾기 위해서 조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조사 자체를 시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냥 조사를 진행하기에는 양부모님에게 죄송했기 때문이죠. 특히 제 양어머니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일찍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친어머니를 찾고 싶다는 욕망을 숨겼어요. 지금은 양부모님과 입양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더 탄탄한 관계를 구축했고, 그분들을 더 잘 이해했으며, 양어머니가 조사를 응원해 주셨어요. 그렇게 양어머니에게 허락을 받아서 좀 더 적극적으로 조사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낳아준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고, 제가 누구인지, 제 근원에 대해 본능적으로 알고 싶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저에게 제 친부모를 찾는 일이 중요해진 때는 5년에서 6년 전입니다. 그 뒤로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어요. 10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참 신기하죠. 선미 씨도 갑자기 최근에 관심이 생기셨나요? 아니면 항상 친어머니를 찾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나요? 

선미: 어렸을 때부터 알고 싶었지만, 행동으로 옮길 정도의 욕망은 아니었어요. 6년 전부터 행동으로 옮길 정도의 욕망이 되었고, 자세한 조사를 시작하기 시작했죠. 누가 절 도와줄 수 있는지 찾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좀 더 찾고 나니 지원 제도가 존재하고 연락을 해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시설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죠. 

팟캐스트: 양부모님으로부터 선미 씨가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이 큰 영향을 끼쳤나요?

선미: 네.

팟캐스트: 과거에는 양부모님, 특히 양어머니를 상처 입히는 일이 두려우셨다고 하셨죠. 양어머니의 태도가 바뀌셨나요? 아니면 선미가 양어머니의 거부나 충격 때문에 걱정하신 건가요? 어떤 관계였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선미: 물론입니다. 양어머니와 저의 관계가 시간이 바뀌면서 많이 바뀌었죠. 처음 시작할 때, 저는 가족에 적응하는 데 집중했고 양부모님은 저에게 최대한 안전하고, 편안하고, 성장하기 편한 환경을 제공해주시는 데 집중했어요. 하지만 제 양어머니와 깊은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양아버지와는 좀 더 깊은 관계를 맺었어요. 제가 양어머니에게 적응하지 못한 이유는 또 다른 어머니를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 그리고 제 친어머니가 저를 거부했기 때문에 양어머니도 절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양어머니가 제 삶에 들어오시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어요. 이러한 이유로 초기에는 양어머니와 깊은 관계를 맺기 어려웠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제가 18살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제 입양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되었고, 큰 문제가 되었어요. 정체성 혼란을 겪기 시작했죠. 제 정체성 혼란에 대해서 양어머니가 감정적으로 반응하셨습니다. 제 혼란을 이해하지 못하셨죠. 양어머니는 저에게 이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감정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양어머니가 가졌던 최악의 공포가 사실이 되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선미 씨가 입양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으니까요.

선미: 네. 거기에 저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전 기분이 안 좋았고, 길을 잃고,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있었죠. 양부모님에게 제 감정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단어를 찾지 못했고, 그래서 양부모님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셨죠. 전 감정적으로도 준비가 안 되어 있었고, 양어머니와 관계가 안 좋아졌어요. 양어머니가 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집에서 이사 나왔습니다. 그 뒤로 몇 년간 양부모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어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귀향하긴 했지만, 양부모님이 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유대감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양어머니와 제 관계가 바뀌었죠. 하지만 다시 관계를 수복할 수 있었고 지금은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친구 간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죠. 아주 아름다운 관계라고 생각해요. 저와 양어머니 둘 다 과거의 감정에 대해서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양어머니가 제 친어머니 조사를 지지해준 것도 큰 도움이 됐죠. 양어머니는 제가 친어머니를 찾는 꿈을 꾸시기도 했다고 해요. 그러한 사실을 저에게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양어머니가 제 친부모 조사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계세요.

팟캐스트: 좋은 이야기군요. 독일에서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외동딸이셨나요?

선미: 아뇨. 양부모님의 친딸인 자매가 1명 있죠. 저보다 3살 많은 언니입니다. 제가 도착했을 때 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준 좋은 언니였어요. 여동생이자 놀이 상대가 생겼다는 사실에 아주 기뻐했죠. 최근에 제 입양 서류를 다시 읽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부모님이 독일 입양 기관에 쓴 편지를 찾았습니다. 이 편지들을 처음 읽어보니 제 부모님의 감정적인 변화를 느낄 수 있었죠. 4년간 서류 작업을 준비하면서 저에 대한 기대와 기다림이 담겨 있는 편지들이었어요. 그 편지에는 제 언니가 새로운 동생이 생기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제 언니는 저에게 질투하지 않았어요. 가족에 침입해서 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죠. 절 열렬히 환영해줬습니다. 그렇게 좋은 놀이 상대되었어요. 

선미: 독일에서의 성장 과정은 복잡한 감정 문제와 함께하는 과정이었죠. 성장할 때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과거를 돌아보니 확실히 그랬습니다. 사람의 기억이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는지 생각해보면 왜 이런지 알 수 있었죠. 사람은 과거를 기억할 때 최대한 좋은 면을 기억하려고 해요. 제가 과거를 기억해보면 기쁨과 사랑이 기억납니다. 하지만 많은 외로움과 슬픔도 기억이 나죠.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독서를 통해서 도망쳤어요. 전 독서를 사랑했고, 제 방에 있는 의자가 제 피난처였습니다. 거기 앉아서 판타지 세계와 책들 안으로 들어갔어요. 같이 놀 친구들도 있었지만, 토요일에는 같이 놀 친구들을 찾았지만 아무도 저와 놀아주지 않던 기억도 나죠. 실망감, 거절된 기분,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같이 돌아다닐 친구 집단을 만들어야 했어요. 친구들이 있었고 적어도 어린 시절보다는 친구 집단을 만들기 쉬웠습니다. 더 외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어요. 학교에 한국계 남자애가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입양아였나요?

선미: 아뇨. 입양아는 아니었어요. 한국 가족과 독일에서 사는 애였죠. 하지만 그 애가 주변에 있으면 최대한 무시하려고 하고 아무 일도 같이하려고 하지 않았죠. 백인 애들과 섞이고 싶었고 제 한국 정체성을 인식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팟캐스트: 그러니까 선미 씨가 그 남자애를 거부했군요? 남자애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고?

선미: 그냥 무시하는 것에 가까웠어요. 하지만 그 남자애도 적극적으로 저와 놀거나 교류하려고 하지 않았으니 양방향 무시에 더 가까웠다고 봅니다.

팟캐스트: 어렸을 때는 같이 놀 친구를 찾기 어려우셨다고 하셨죠. 작은 마을에서 자라셨나요?

선미: 네 꽤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인구가 한 20만 명 정도 하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선미 씨에게 질문한 이유는 유럽의 작은 마을 기준이 미국의 작은 마을 기준과 달라서 그렇습니다. 제가 자란 마을은 800명 정도 사는 곳이었거든요. 하지만 전부 상대적이니 20만 명이 작은 마을로 보일 수도 있겠죠.

선미: 이게 언어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작은 마을이라고 생각하면 사실 소도시에 더 가깝습니다. 800명이라고 하면 마을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동네라고 부르죠. 언어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독일인들도 제가 자란 곳을 작은 마을이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중간 크기의 마을이라고 언급하겠죠.

팟캐스트: 그러한 크기의 지역 사회를 선미 씨는 마을이라고 부르고, 제가 자라난 크기의 지역 사회를 선미 씨는 동네라고 부르겠군요?

선미: 네.

팟캐스트: 아주 흥미롭네요.

선미: 적어도 제 관점에서는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이러한 인터뷰를 진행할 때마다 사회적 차이점이 존재하거든요. 우리가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저의 1 언어이고 선미 씨의 1언더가 아니니 저에게 더 이점이 있을지도 모르죠. 거기에 사회적, 문화적 언어 사용의 차이점이 있으니 그러한 차이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어렸을 때 소외되었다는 느낌이 받으셨다 하셨죠. 그때는 자기 자신을 아시아계라고 생각하지 않으셨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시아계라서 그랬다고 생각하시나요?

선미: 네. 제가 어렸을 때 제가 내성적이라서 소외된 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시아계라서 그랬기도 했다고 생각해요. 그때는 그러한 인종적 측면을 인식하지 못했죠. 제가 소외감을 느꼈다고 생각하지만, 제 부모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다른 아이들과 노는 광경을 봤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외롭다고 느낀 때가 있고, 그때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판타지 세계와 책들에 매료된 이유도 그것 때문이라고 봐요. 밖에 나가서 애들과 상대하지 않아도 됐으니까요. 많은 아이들이 저를 받아주려고 했지만 동시에 저를 거부하는 애들도 많았습니다. 미묘한 차별도 많았죠. 하지만 제 가족과 가족들의 친구들은 저를 받아들여 줬어요. 그래도 제가 소외감을 느끼던 때가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좋아하던 판타지 소설들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선미: 호빗이나 독일 판타지 소설들을 좋아했죠. 다른 환상적 세계를 배경으로 영웅들, 모험들이 있는 세계를 여행하는 이야기를 좋아했습니다. 

팟캐스트: 독일에서 자라면서 다른 독일인들이 선미 씨나 선미 씨의 가족을 바라보거나 특이한 질문을 받거나 그러셨나요? 미국에서 입양 가족들은 그런 일을 자주 겪거든요.

선미: 네 항상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봤죠.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를 보고는 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백인 가족에 아시아인 꼬마가 끼어 있는지 궁금해했죠. 그러한 문제가 너무 많았고, 저를 만지려고 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런 일들이 싫었습니다.

팟캐스트: 그러한 상황에서 대응을 어떻게 하려고 하셨죠? 화를 내셨나요? 

선미: 잘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하지만 제 부모님이 독일 입양기관인 테라존에 보내야 했던 제 성장 과정에 대한 편지를 읽었죠. 제 아버지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테라존에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이러한 문제를 겪었다는 사실 자체를 편지를 읽고 알았어요. 아버지가 편지에 쓴 이야기에 따르면 사람들이 저를 만지려고 했고 제가 그런 행동을 싫어했다고 했습니다. 편지에 따르면 제가 화를 내면서 아버지 뒤에 숨었다고 하더군요.

팟캐스트: 선미 씨가 원치 않은 관심을 받아서 그랬군요?

선미: 네. 그런 관심을 원치 않았어요. 

팟캐스트: 선미 씨가 입양된 뒤에도 입양기관에 부모님이 계속 보고를 해야 했나요?

선미: 네.

팟캐스트: 얼마나 자주 보고를 해야 했죠?

선미: 사실 입양 6개월 이후에 1번만 보고해야 했다고 합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바로는 그렇고 부모님이 기록해두신 바로는 그래요. 부모님이 저와 관련해서 보관할 수 있는 모든 자료는 보관해 두셨죠. 보관해 둔 편지들은 부모님이 보내려고 작성해둔 편지들의 초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이 왜 한국에서 입양하셨는지 아시나요?

선미: 독일 내부 입양보다 외국에서 입양하는 과정이 훨씬 쉽고 빨랐기 때문이죠. 입양기관에서 국제 입양을 하겠냐고 물었고, 부모님은 안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셨어요. 하지만 부모님은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지 증명해야 했습니다.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도 지지해주겠다는 추천서를 받아야 했죠.

팟캐스트: 자라면서 백인 정체성을 가지셨나요? 

선미: 전 거울을 보면서 제 피부색을 보지 않았죠. 제 한국 정체성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 사실을 아는 이유는 제가 2008년에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제가 지하철에 내린 뒤 주변을 보면서 “아,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에요. 아,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 내 정체성이 이렇구나.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이상한 일이죠. 제가 매일 거울을 보면서 눈이 다르고, 코가 다르고, 외모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는데도 그 의미를 알게 된 때는 한국을 방문하고 난 뒤였으니까요. 제가 성장하고 난 뒤 제가 왜 그랬는지 이해했습니다. 항상 저는 백인처럼 보이고 싶었어요. 곱슬머리를 가지고 싶었고, 큰 파란 눈을 가지고 싶었죠. 제가 12살 때 눈 화장을 연습하고 있을 때 다른 친구들이 하는 화장을 따라 할 수 없다는 점에 화가 났었죠. 그런 일들이 기억이 납니다. 또 독일 패션 잡지를 보면서 따라 할 수 있는 아시아계 여성이 없었죠. 포스터, 잡지에도 항상 백인 여성만 등장했으니 제 정체성을 자각할 수 없었고 편하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이성 교제는 어땠나요? 사람들이 선입견을 품고 선미 씨를 대했나요? 아니면 사람들이 페티쉬를 가지고 선미 씨를 대했나요?

선미: 그러한 경우가 많다고 다른 아시아계 여성들에게 많이 들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페티쉬라고 언급할 정도로 심하지 않았어요. 물론 아시아계 여성을 좋아하는 남성과 교제한 적은 있지만 딱 1번이었죠. 다른 남성들의 경우에는 이 사람들이 선미와 교제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제가 지금 그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답은 다를지도 모르지만 제가 경험한 바로는 제 한국 정체성에 매료되어서 교제한 경우는 없는 것 같아요.

팟캐스트: 젊었을 때 교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나요? 아니면 평범한 교제를 하셨나요? 

선미: 교제 자체는 평범했지만 늦게 시작했어요. 제 몸 자체에 대해서 자각하는 데 오래 걸려서 늦었죠. 저 자신을 찾고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이성 교제를 하고 남성들과 이야기를 하는 데 오래 걸렸어요.

팟캐스트: 언제부터 데이트를 시작하셨죠?

선미: 첫 남자친구, 정확히 말하자면 짝사랑 상대에게 입 맞췄을 때가 16살이었죠.

팟캐스트: 16살이 늦었다고 할 수 있나요?

선미: 독일 기준으로는 꽤 늦은 편이에요. 제 친구들은 12살 때 이미 학교 뒤에서 남자애들과 키스했죠. 애들에게 질투했지만 동시에 괜찮기도 했어요. 연애 욕구가 없었습니다. 전 내성적이었고, 나중에 남성들에게 다가가서 서로 소통하는 법을 배웠죠. 그래서 늦게 시작했지만 평범하게 이성 교제를 진행했고, 첫 남자친구는 제가 18살이 되고 나서야 사귀기 시작했죠.

팟캐스트: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미국에서 자라나는 입양아들은 항상 자기 자신을 외국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죠. 물론 선미 씨가 뉴욕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다는 것도 알지만 우리 입양아들은 항상 외국인 취급이죠. 우리가 미네소타, 뉴저지 출신인데 항상 진짜 출신 국가는 어디인지 묻습니다. 그러한 경험을 독일에서 하셨나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선미 씨가 독일인이라는 증거를 보여줘야 했나요?

선미: 마지막 질문부터 답하자면 제가 100% 독일인이라는 증거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전 100% 독일인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보수적이고, 지루하고, 규율을 지키는 독일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싶지 않았죠. 그래서 100% 독일인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어디에서 왔느냐? 이라는 질문은 확실히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 독일어가 완벽하면서 어디에서 배웠는지 묻는 일도 수백 번이나 들었죠. 베를린에서는 그런 질문을 받지 않습니다. 물론 제 아시아계 친구들은 베를린에서 그런 질문을 받았다고 해요. 하지만 저는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은 없죠.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 제가 자란 곳에서는 많이 들었습니다.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는 사실은 모두 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동시에 질문 자체가 낡았죠. 저에게 있어서 더 좋은 질문은 어디로 가실 예정이죠? 왜 여기에 있죠? 이라는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현대 세상에서 어디 출신인지 묻는 말은 의미가 없죠.

팟캐스트: 많은 사람에게는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질문이지만, 이러한 질문 자체가 우리에게 있어서 이 나라는 우리의 나라가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죠.

선미: 확실히 사람을 구분하는 질문입니다. 이 나라에 맞지 않는다, 다르다, 우리는 여기에 있을 수 있지만 너는 아니다, 이라는 느낌이죠. 서로 같이 이 나라에 있을 수는 없다는 느낌의 질문이에요. 웃긴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광고- 

팟캐스트: 대학은 어디에서 다니셨죠?

선미: 마인츠시에서 다녔습니다. 프랑크푸르트시에서 가깝죠. 마인츠는 요한네스 구텐베르크가 처음으로 활자인쇄를 대중화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제가 거기에서 공부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죠. 제가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었고 출판, 편집 디자인, 활판술 전문 디자인 학교가 마인츠에 있었거든요. 

팟캐스트: 왜 디자인 분야에 흥미를 느끼게 되셨죠? 그런 시각 분야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선미: 네. 항상 무언가를 만들고 자신을 창조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시각적인 분야에도 흥미가 있었지만, 형태와 기능에도 관심을 가졌어요. 특히 인쇄 매체와 관련해서 흥미를 느꼈습니다. 항상 책을 좋아했고, 다양한 종이 종류, 제본 방식에 대해서도 흥미를 느꼈죠. 현재는 제본 방식 자체가 다양하지 않아요. 그림의 힘과 그림만으로 전달할 수 있는 서사에 대해서도 흥미를 느꼈습니다. 

팟캐스트: 잡지도 자가출판하시고 그러셨나요?

선미: 네. 활자인쇄도 그때 배웠죠. 그때 처음으로 활자 크기 6의 실제 크기를 보고 놀랐습니다. 과거에는 그렇게 작은 활자를 전부 손으로 움직였어요. 현대에는 우리가 전부 디지털 인쇄와 출판을 사용하니 잊히고 있는 기술이지만 아직도 수제 인쇄를 하는 곳이 남아 있죠. 

팟캐스트: 아직도 그래픽 디자이너 일을 하고 계시나요? 

선미: 아뇨. 지금은 아닙니다. 제가 그래픽 디자이너 일을 그만두게 된 일은 사실 제 개인적 문제 해결과도 연결되어 있어요.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창작 업계에서 일하게 됐고, 브랜드 업계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우선 컴퓨터 앞에서 오랫동안 일해야 하고, 대부분은 가짜 정체성을 만드는 일이었어요. 브랜드의 세계를 만들고, 세계의 모든 것이 빛나야 하죠. 대부분은 아주 얕은 서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제 일에 더 깊은 뜻과 목표를 원했어요. 뉴욕에서 일하다가 베를린으로 이사했을 때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문화 중심지에서 살게 됐죠. 행사 관리자를 사람들이 찾고 있었어요. 지역 사회 만찬, 정치 토론회, 문화 워크숍, 음식 워크숍, 팝업 저녁 등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그 행사들을 준비하고 관리하는 경험과 좋은 목적을 위해서 사람들을 모으는 일에 푹 빠졌어요. 사회적 활동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전 사회적인 사람이라서 그 일에 더 적성이 맞았죠. 그렇게 새로운 목적과 직업을 찾게 되었어요. 물론 계속 부업으로 디자이너 일을 했지만 제 열정은 이미 행사 관리자로 옮겨간 뒤였습니다. 

팟캐스트: 제가 틀렸다면 정정해주세요. 이 직업상의 변화가 선미 씨의 정체성 진화와 연관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입양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거나 가짜 정체성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겉으로 드러내는 정체성과 우리 내부의 정체성이 다른 경우이죠. 선미 씨가 브랜드 분야에서 현재 직업으로 옮겨 가시는 예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입양아들도 자신의 외부 정체성을 브랜드화하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선미 씨가 일에서도 진짜 정체성을 찾게 된 이유가 선미 씨의 개인적 정체성을 찾는 과정과 연관되었나 싶었죠.

선미: 네. 저도 동의합니다. 네. 진정한 저를 표현하고 싶었죠. 그리고 진정한 저를 표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아직도 발전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제 진정한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가 말씀하신 대로 입양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브랜드화합니다. 제가 그런 용어를 사용한 적은 없지만 지금 들어보니 확실히 맞는다는 느낌이 들어요. 제가 어떻게 제 정체성을 브랜드화했는지, 제 정체성은 어떤 브랜드인지 생각이 듭니다. 저의 경우에는 완벽주의 문제가 있었어요. 지금은 그걸 많이 놓아준 상태지만 지금도 그걸 놓아주려고 노력하고 있죠. 일을 완벽하게 하려고 하고, 디자인학과 출신인지라 시각적으로 모든 것이 완벽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방이 더러운 상태와 방이 깨끗한 상태에서는 분위기가 확실히 다르죠. 자기 주변의 세상을 만들 때 시각적인 차이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시각적 면모에 집착하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팟캐스트: 이걸 브랜드화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네요. 하지만 입양아들이 다양한 정체성을 실험해보고,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껴야 하는지 주변 사람들이 명령하고 우리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주죠. 그 결과 우리 내부의 정체성과 외부의 정체성이 맞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다양한 정체성을 시험해보고 입양아들에게 맞는 정체성을 찾게 되죠. 

선미: 우리가 여러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고, 그 정체성을 탐사하는 일은 훌륭한 일이죠. 제 입양아의 정체성이 제 전체 정체성의 일부이지만, 제 정체성의 전부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입양아의 정체성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죠. 잊어버린 감정과 기억들이 남아 있었고, 제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저는 창작자이고, 딸이며, 외향적인 사람이고, 사람들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사람에게는 다양한 정체성과 관심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전 음식을 좋아하고, 요리하기도 좋아하고, 환경 보존, 자연을 좋아합니다. 사람에게는 다양한 정체성이 있고 그 정체성을 탐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대단하죠.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는 일 자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단순히 독일에 있는 한국계 입양아라는 정체성에 갇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분류되고 입양된 저 자신에 대해서 계속 설명해야 했죠. 사람들이 계속 질문할 때 대답하기 위해서 만든 정답도 가지고 있었어요. 한국에서 온 입양아라고 자동으로 말하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계속 묻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정답을 전부 준비해 뒀죠. 제가 입양아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일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처음부터 저에게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으니까요. 사실 너무 명백해서 숨길 수도 없었죠. 하지만 부모님이 매일 같이 그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질문하면 네가 입양아라고 답하고 우리가 네 부모라는 이야기를 해주라고 말씀하셨죠. 그래서 입양아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깊게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어요. 내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나와 친한 친구가 아니라면 입양아라서 느끼는 감정을 공유하지는 않았죠. 제가 입양에 대해서 가진 감정을 이해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제 마음속 깊숙한 곳을 봐야 했습니다.

팟캐스트: 개인적 정보에 대해서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셨군요?

선미: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뉴욕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어떻게 뉴욕에서 살게 되셨죠? 우리가 서로 만난 곳도 뉴욕이었으니까요. 

선미: 항상 독일을 떠나고 싶었어요. 최대한 빨리 떠나고 싶었죠. 제가 가고 싶었던 곳은 런던이었습니다.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까우면서 말도 통하는 곳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출신의 남자와 만났습니다. 그 사람 덕분에 뉴욕에 이주하게 됐죠. 그 사람과는 결국 헤어지게 됐지만, 전 뉴욕시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사실 그 사람과 잘 안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뉴욕시에서 연애하는 경험과 혼자서 뉴욕시를 경험하는 일은 서로 다른 일이죠. 저 자신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 과거의 삶으로부터 자유롭게 모험을 하는 기분이었고, 새로운 저 자신을 만들 수 있었어요. 물론 제가 다른 이름을 사용하면서 다른 배경을 가지고 활동하지는 않았고, 제가 누구인지 거짓말하지는 않았지만, 저 자신을 드러내고 찾는 데 있어서 훨씬 자유로웠습니다. 문화의 용광로에 들어가서 사회를 만끽할 수 있었죠. 어디에서 왔는지 사람들이 묻지 않았고, 묻는다고 해도 독일과는 다른 의도가 느껴졌죠. 아주 편안하고 문화적으로 다양한 환경이었습니다. 문화, 예술, 디자인, 박물관 등은 온갖 행사가 끝없이 존재했죠. 항상 구글에 검사해서 무료 행사가 어디에서 어떻게 개최되는지 찾아보고 최대한 도시를 즐기려고 했습니다. 

팟캐스트: 선미 씨와 처음으로 만났을 때가 기억나네요. 선미 씨가 아주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파란 마스카라를 하고 있어서 아주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 디자이너이기도 하셨고 삶을 계속 즐기고 계셔서 국제 시민이라는 감상을 받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꽤 신기한 점은 우리가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죠. 물론 지금 만났다면 선미 씨의 배경에 큰 관심을 가졌겠지만 그때는 제가 저 자신 내부를 탐색하고 제 입양아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하지 않아서 깊게 관심을 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선미 씨가 한국 입양아였고 우리가 서로 그러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알았지만 왜 서로 친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지금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을 때야 서로 더 깊은 관계를 맺게 됐으니 신기하다고 생각합니다.

선미: 네 그렇네요.

팟캐스트: 절 어떻게 생각하셨죠?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서로 알고 있는 지인이 있어서 만났죠?

선미: 아주 시끄러웠던 파티가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카오미 씨랑 제가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입양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나죠. 지금 생각해보면 카오미 씨는 아주 부정적인 관점으로 입양을 바라봤고, 전 긍정적으로 봤었습니다. 물론 지금 와서는 제 입양에 대한 관점이 다양화됐어요. 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했죠. 우리 둘 다 관점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때 카오미 씨가 몹시 부정적이라고 생각했어요.

팟캐스트: 그때는 확실히 그랬죠.

선미: 그때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정을 쌓을 수도 있었겠지만, 현재 지금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지금이 중요하죠.

팟캐스트: 그때 언급을 하셔서 좋네요. 그 대화 자체는 전 기억하지 못하지만, 선미 씨가 말한 대로 확실히 부정적이었을 가능성이 크죠. 그리고 선미 씨가 입양에 대해서 긍정적이었다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헤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른 입양아를 만나고 서로 입양에 대한 관점에 이야기하면, 그 관점이 입양아의 중심을 차지하고, 삶과 다른 문제에 대한 관점에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관점의 차이를 극복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죠. 

선미: 그렇습니다. 거기에 그러한 관점 차이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가 어렵죠. 공통적인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공감하기 쉽기 마련인데, 다른 사람이 그 의견에 공감하지 않는다면 서로 마음을 열기 어렵고, 믿음이 서로 다르다고 선을 긋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젊기도 했죠.

팟캐스트: 양날의 검이면서 동전의 양면이죠. 우리 둘 다 입양아의 경험이 있습니다. 선미 씨는 독일에서, 저는 미국 중서부에서 자라났죠. 선미 씨의 경험 중 일부는 제가 이해할 수 있죠. 하지만 다른 가족 관계, 다른 부모님, 선미 씨도 다른 사람이니 주변 환경에 대한 반응이 저와는 달라요. 차이점이 많습니다. 동전의 다른 면이 차이점이죠. 모든 입양아에게는 서로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는 동전의 한 면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다른 면은 차이점을 부여해서 입양아들의 경험을 독특하게 만들죠. 

선미: 우리가 배경 문화를 잃고 친어머니를 잃은 면에서 공감하게 되죠. 모두 그런 감정을 공유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적 정체성 문제로 인해서 갈등하는 문제도 공유한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가족 경험에서 차이가 나게 되죠. 

팟캐스트: 서로 만날 때 개개인의 정체성에 따라서도 차이점이 생기게 되기도 하고요.

선미: 네 그렇죠. 입양 제도 자체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지 따라서 차이점도 생기게 되고요. 저도 과거에는 입양은 좋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입양 제도 자체가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고, 다양한 문제가 있는 제도라고 생각해요. 이러한 문제를 스스로 배우기도 했고 다른 입양아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배웠고, 이 팟캐스트와 같은 방송을 들으면서 배웠어요. 다양한 이야기들이 제 관점을 넓혀주었습니다. 제 경험을 이러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다양한 일을 배웠죠. 과거에 카오미 씨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이해하고 분노를 이해하면서도 많은 점을 배웠어요. 이러한 공부가 입양과 입양 정치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언제부터 국제 입양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이해하게 되셨나요? 깊은 이해가 아니더라도 좀 더 국제 입양을 비판적으로 보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선미: 제가 입양에 대해서 좀 더 공부하고 배우기 시작하면서 관점이 바뀌기 시작했죠. 입양 관련 기사, 논문,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보고 공부했어요. 저 자신의 입양에 대한 탐색을 돌이켜보니 단계적으로 발생했습니다. 제 삶의 변화와 함께 입양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죠. 18세에 처음으로 제 정체성과 제 배경에 대한 혼란을 겪었어요. 제 한국인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을 했죠. 그다음 대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삶의 선택지를 생각하면서 정체성과 입양의 문제가 다시 생각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8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방문해서 정체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기 시작했어요. 시립 도서관에 방문해서 정체성 구성과 입양에 관한 책을 잔뜩 빌려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감정적인 해소 방법을 찾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 살면서 항상 세상이 왜 이렇게 굴러가는지 알려고 했고 호기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연구를 시작하고 난 뒤 여러 서적을 읽고, 입양아들의 이야기를 읽으니 입양에 대한 트라우마와 부정적인 경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좀 더 입양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구축하게 된 것 같습니다.

팟캐스트: 2008년에 한국에 처음으로 방문하셨을 때의 기억을 공유해주실 수 있나요? 

선미: 제 두 번째 방문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첫 번째 방문은 탐색 목적이 더 강했고, 그래서 제 몸에서 빠져나가서 3인칭으로 관측하는 기분이 들었고, 마치 관광객과 같은 느낌이었죠.

팟캐스트: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된 기분이었나요?

선미: 네. 제가 서울에 있었고, 호스텔이었나, 호텔이었나, 창문이 없는 방을 빌렸어요. 시차로 인한 피로로 인해서 몸이 안 좋아졌고 이틀을 앓았죠. 고열로 앓으면서 간판, 차량, 소리, 냄새 등으로 고생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제가 지내던 지역에 있는 가게에 방문했는데 온갖 공예 재료가 잔뜩 쌓여 있었죠. 제가 그 시점에는 공예에 빠져 있어서 그것들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나요. 제가 종이 20장만 사고 싶다고 하자, 그 가게는 난색을 보였죠. 도매상이라 500장 단위로 판다고 했고, 그때야 제가 도매상에 걸어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른 곳은 천들로 가득한 창고형 도매상도 있었어요. 그걸 보고 매료되었죠. 제가 운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가 한국에 이미 친구가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만난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제 관광 가이드로 매일 저를 안내해줬죠. 자기 친구들에게도 소개를 해줬고 여러 한국 음식도 소개해줬습니다. 한국어도 잘 해서 저를 위해서 통역도 해줘서 제가 그곳에서 소통 문제로 고생하지는 않았죠. 

팟캐스트: 그때 시각적으로 어떤 면이 가장 깊게 인상에 남았죠? 서울은 시각적으로는 어떤 도시였나요? 

선미: 저는 디자인적으로 최소주의를 추구하는 디자이너였기 때문에 서울은 복잡하고 색이 너무 다양해서 이상하다고 느꼈죠. 하지만 동시에 서울은 아주 흥미로웠어요. 골목보다 새롭게 볼 것이 있고 탐험하고 싶은 곳이 있었습니다. 아주 많은 사진을 찍었고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어요. 그래도 서울에는 오랫동안 지낼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감각적으로 과다인 곳이었거든요. 시각만이 아니라, 청각적으로도 시끄러웠습니다.

팟캐스트: 독일의 미학과는 아주 다르죠?

선미: 네. 아주 달랐습니다.

팟캐스트: 독일은 정리된 미학을 선호하죠?

선미: 네. 도로는 깨끗하고, 질서와 제도가 잡혀 있고, 모든 것을 위한 제도가 존재하죠. 물론 한국의 지하철은 완벽하게 작동합니다. 절대 연착은 없죠. 서울에도 다양한 제도와 구조가 존재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혼돈도 같이 있어요.

팟캐스트: 첫 방문 때 서울이 아주 혼란스럽다고 느껴서 스트레스를 받으셨겠지만, 동시에 집에 돌아온 기분도 들었나요? 기억이 없이 처음으로 서울에 돌아왔는데도 편안한 기분이었나요?

선미: 네. 그러한 기분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러한 기분을 더 확실하게 느낀 지점은 제가 두 번째 방문했을 때였죠. 두 번째 방문 때는 카오미 씨도 만난 제 남자친구 케빈과 같이 갔습니다. 또 서울이 아니라 지방을 구경하고 다녔어요. 두 번째 여행에서는 다른 한국의 면모도 보고 싶었습니다. 거대 도시와 서구화된 한국이 아니라 시골과 전통적 한국도 보고 싶었어요. 그 경험의 일부로 절 체험도 진행했죠.

팟캐스트: 어디에서 했는지 기억나시나요?

선미: 경주에서 했던 것 같아요. 순두부도 먹고, 명상도 하고,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4일 정도 거기에서 지냈죠. 지역 에어BNB를 빌려서 지냈어요. 그 집 주인님은 치과 의사이셨는데 우리를 좋아하셨어요. 우리는 차도 없었고, 주변에 지역 행사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집주인님이 한국 음식점을 데리고 다녔어요. 진짜 한국 요리를 먹여주고 싶다고 매일 저녁에 다른 음식점을 데리고 다니셨죠. 삼계탕 백숙 집에도 데려다주셨는데 닭 한 마리를 통째로 가지고 와서 맨손으로 닭을 해체해 주더군요. 그리고 뼈를 가지고 가서 나중에는 그걸로 닭죽을 해줬죠. 아주 전통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소속감을 느꼈고 연결성을 느꼈어요. 그래서 두 번째 방문 때 더 깊은 소속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깊은 슬픔을 느꼈죠. 편안했지만 동시에 거기에 있으면서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 슬픔을 느낀 이유는 제가 잃어버렸지만 찾으려고 하는 문화가 있고 되찾는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생겼다고 생각해요. 최대한 한국 문화에 빠져들려고 했지만, 남들의 강요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항상 쉽지는 않았어요. 물론 쉬웠던 적도 있죠. 사람을 많이 만나지 않았지만 에어BNB 주인인 치과의사가 기억이 납니다. 제 이야기에 관해서 물어보았고,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밝히자 이야기가 멈췄죠. 그 의사가 알려고 하지 않는 느낌을 받았어요. 지금은 국제 입양과 국제 입양아에 대한 부끄러움이 한국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죠. 사람들이 저를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많은 사람과 접촉하지 않기도 했죠. 서울에서는 뿌리의 집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냈어요. 김 박사님과 이야기한 경험은 아주 좋았습니다. 그분과 3시간 정도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제 이야기와 제 여정에 관해서 이야기했던 것 자체가 좋은 경험이었죠. 

팟캐스트: 누마루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선미: 네. 누마루는 베를린에서 시작한 대화 만찬입니다. 다문화적 정체성의 중간성에 대해서 더 많은 사람을 모아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된 일이죠. 만찬으로 시작한 누마루는 현재 입양아를 위한 전자 공간으로 발전했습니다. 제가 다른 입양아들을 돕고 싶다는 제 천직을 찾았기 때문이죠. 현재 누마루는 깊은 교류하고, 용기를 가진 정신적 여정을 하고, 입양아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가상 플랫폼이자 인터넷 공간입니다. 전 무거운 상담 공간과는 다른 제가 필요로 했던 전체적이고 창조적인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다른 방식으로 깊이를 탐구하고 감정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좀 더 영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제 문제를 해결하고 균형 잡힌 삶을 찾고 싶었죠. 제 문제를 기회로 삼아 좀 더 성장하고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겪고 있는 다른 입양아들도 돕고 싶었고요. 다른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진심을 드러내며, 서로를 알고, 듣고, 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서로를 보게 된다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고, 서로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면 입양아의 정체성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동질성, 동정심, 연결이 필요하다고 보고, 남들을 공격하는 일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그게 누마루이죠. 더 알고 싶은 분들은 제 웹사이트인 Numaru.space에서 배우실 수 있고, 아니면 Sunmee@numaru.space로 이메일을 보내주셔도 됩니다. 아니면 제 인스타그램 계정인 numaru.truebelonging를 방문하셔도 좋아요. 여러분과의 교류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시즌 4, 에피소드 17: 순희 엥겔스토프

덴마크 영화 제작자이자 한국계 입양아인 순희 엥겔스토프 (38세), 본명 신순희 씨는 Adapted 팟캐스트에서 자신이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포 겟 미 낫 (물망초, Forget Me Not)”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영화는 여러 한국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아이를 입양 제도에 맡길지, 아니면 자신들이 키울지에 대한 선택을 놓고 고민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엥겔스토프 씨는 영화 말고도 유년기에 아프리카에서 백인 부모와 같이 생활했던 기억과 덴마크의 작은 마을에서 겪은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순희: 제 이름은 순희 엥겔스토프이고, 한국 이름은 신순희입니다. 현재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거주하고 있어요. 전 부산에서 1982년에 태어났고, 남광아동복지원에서 양육되다가 생후 4개월에 덴마크로 왔죠. (덴마크어 자기 소개) 

팟캐스트: 이런 이야기로 시작하긴 좀 그렇지만, 전에 우리 팟캐스트를 들으셨나요 순희씨? 

순희: 에피소드 몇 개는 들었죠. 

팟캐스트: 이 이야기들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셨죠?

순희: 다르지만 동시에 비슷하죠. 모든 이야기가 그랬습니다. 제 이야기가 이 팟캐스트에서 나온 이야기에서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어요. 세세한 이야기는 다르죠. 하지만 전체적으로 입양아들의 이야기는 비슷한 점이 많다고 느낍니다. 

순희: 저는 덴마크의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백인 사회에서 성장했죠. 제가 유일한 아시아인이었고, 제가 마을을 걷고 있다 보면 사람들이 제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싶어했어요. 도시보다는 마을에 가까운 작은 사회였고, 아시아인이 마을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특이한 일로 인식되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사람이 없어서 어렸을 때부터 외로웠던 기억이 나죠. 누구도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인식하고 저와 이야기할 수도 없었어요. 사실 지금도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일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을 떠나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지금도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안전한 곳이었죠.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코펜하겐으로 떠나야 했어요. 

팟캐스트: 마을 이름이 뭐죠?

순희: 마이아입니다. 제블린드 지역에 있는 피요르드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이죠. 커다란 흰색 교회가 있고, 조약돌로 된 길이 있고, 마을 중심에 큰 나무가 자라는 아주 오래된 마을이고, 아주 아름다운 동네입니다.

팟캐스트: 어렸을 때부터 그곳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지 않았나요? 아니면 맞지 않는다고 느꼈나요? 

순희: 언급하신 감정 둘 다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어요. 부모님이 절 입양하셨을 때는 코펜하겐 근교에서 사셨죠. 제가 3살 때 부모님이 저를 데리고 보츠와나에 있는 난민 캠프로 가셨습니다. 거기에서 3년간 살았고, 보츠와나에서도 전 맞아 들어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가 덴마크에 돌아왔을 때 제 정체성은 흑인에 가까웠죠. 어렸을 적에 많은 아프리카계 흑인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3년이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어요.

팟캐스트: 부모님 두 분이 선교사였나요?

순희: 아뇨. 기독교 관련은 아니었어요. 정치적 좌파의 봉사활동에 더 가까웠죠. 그 시절에는 아이를 가질 수 없거나 다른 나라를 돕고 싶다면, 타국에서 아이를 입양하는 행동이 진보적이라고 인식되었습니다. 그 시절의 국제입양은 그렇게 정치적 진보 입양이나 종교적 입양 두 가지로 나뉘었죠. 제 부모님은 정치적 진보파여서 국제입양을 하셨고요. 

팟캐스트: 구세주 관점에 대해서도 들어 보셨겠군요?

순희: 네. 종교적인 면모를 제외한 구세주 관점이었죠. 세계 인구 과잉을 막아야 한다, 세계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으니 도와줘야 한다, 그러한 인식이 있었어요. 

팟캐스트: 그러한 면모 때문에 부모님이 보츠와나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 하셨군요?

순희: 네. 그런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덴마크에서 돈을 받아서 활동하는 공식적인 직업이기도 했죠. 덴마크 정부의 지원을 받아 타국에 가서 자신의 재능을 통해 사람을 돕는 일이었어요. 제 아버지는 목수라 사람들에게 목공을 가르치셨고, 사람들이 목수로서 일할 수 있도록 설계도와 기술을 전수하셨습니다. 제 어머니는 사회 복지 공무원이었고요.

팟캐스트: 백인 부모를 가진 아시아계 3살 꼬마가 보츠와나에 가셨군요?

순희: 네. 그런 셈이죠. 

팟캐스트: 아주 신기한 조합이네요.

순희: 아주 특이한 경험이었어요. 가족 모두가 달에서 지구로 온 사람들처럼 주변 환경에 충격을 받았죠. 부모님이 저를 그분들의 아이로 받아들인 곳도 보츠와나였죠. 칼리하리 사막에서 부시족을 만났을 때가 생각이 나요. 부시족의 눈은 흑인중에서도 얇은 편이라 아시아계 눈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제가 부시족을 뚫어지게 보던 느낌이 나고 그 사람들도 저를 똑같이 바라봤죠. 제가 가진 최초의 기억 중 하나입니다.

팟캐스트: 어렸을 때 자기 스스로를 흑인과 구분했나요? 아니면 친구들과 똑같다고 생각했나요? 친구들이 흑인이었나요?

순희: 흑백혼혈과 흑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몇명은 백인이기도 했죠. 전 인종보다는 계급에 대해서 더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특권 계급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애들보다 더 장난감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고, 그걸 제외하고 형편이 훨씬 나았죠. 그 기억 자체가 꽤 고통스러운 기억입니다.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을 그 애들은 선택하지 못했으니까요. 제가 더 장난감이 더 많았고, 애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밖에 설명하지 못하겠습니다.

팟캐스트: 아이일 때는 장난감이나 옷으로 자기들의 차이점을 인식하죠. 친구들도 그런 인식을 했을 겁니다. 그러한 차이가 여러분의 관계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너무 어려서 인식을 못했나요?

순희: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적응한 뒤에는 덴마크에 돌아가서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사람들이 그리워서 덴마크로 돌아가고 싶어하긴 했지만 힘들었죠. 어렸을 때 친한 친구였던 호주에 사는 백인계 케냐인과 다시 연락이 닿았습니다. 이게 제 기억이라 애매하지만, 제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기억인데, 제가 장난감을 가지고 있어도 누구도 저와 같이 놀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보츠와나에 오니 제가 놀 아이들을 선택할 수 있었죠. 

팟캐스트: 어렸을 때부터 특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군요?

순희: 네. 

팟캐스트: 그때의 다른 기억들을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아주 특이한 어린 시절이라 궁금하네요.

순희: 이렇게 공식적으로 이야기해본 적도 없는 것 같아요. 친구들과 제 애인과 이야기했을 뿐이죠. 부모님에게 있어서는 아주 대단한 모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제가 어렸고 제 기억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부모님과는 다른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제 친구가 엉덩이를 맞았지만 전 맞지 않았습니다. 양육 방법에 있어서 문화적 차이를 느꼈어요. 제 부모님은 제 엉덩이를 때린 적이 없기 때문에 친구들이 그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꼈죠. 신발 안 신고 뛰어다니기도 했고, 애들과 같이 놀면서 토마토 캔을 깐 다음에 불에 직접 데워서 먹기도 했어요. 덴마크와는 다른 독특한 경험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집에서 부모님과 덴마크어로 말했겠군요?

순희: 네 모국어는 덴마크어지만 동시에 영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덴마크에 돌아왔을 때는 영어를 상당수 잊어버렸죠.

팟캐스트: 영어를 모국어처럼 쓴 이유가 친구들과 사용했기 때문인가요?

순희: 네. 보츠와나에서 친구들과 같이 영어를 썼어요.

팟캐스트: 친구들이 영어를 사용했군요?

순희: 애들 중 일부는 그랬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서로 놀 수 있었어요.

팟캐스트: 덴마크에 귀국하셨을 때 몇 살이셨죠?

순희: 여섯살이었어요. 춥고, 어두운데다가 항상 신발을 신어야 했고 보츠와나에 두고온 고양이들이 그리웠습니다. 부모님이 다른 직업을 구하셨고요. 사실 어렸을 때라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부모님이 덴마크의 최고 대도시인 코펜하겐에서 일자리를 새로 잡아 일했지만 행복하지 않으셨죠. 그래서 덴마크 시골을 돌아다니다가 작은 마을을 발견했고, 그 마을에 있는 집에 반했습니다. 정원도 딸려 있는 커다란 집이었죠. 사실 고양이를 키우는 3명 가족이 살기에는 너무 컸어요. 전화가 오면 집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부모님을 찾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부모님이 백인 위주의 작은 사회로 이주하고 싶어하셨나요? 

순희: 네. 부모님은 코펜하겐 근교에서 자라나셨죠. 그래서 그 지역으로 내려가서 좀 더 자연에 가까운 삶을 살고 싶어하셨어요. 부모님이 말씀 하시길, 환경을 바꾸고 좀 더 평온한 삶을 원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작은 마을로 이사했죠. 

팟캐스트: 어렸을 때의 정체성은 어떠셨나요? 자기 스스로를 덴마크 아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순희: 뭐가 일어나는지 정확히 몰랐지만 제가 이사한 지역에 최대한 맞아 들어가려고 노력해서 별로 관련된 생각은 하지 않았고 정체성에 대해서 논하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최대한 백인이 되려고 노력한거 같습니다. 적어도 20대 초반이 되기 전까지는 계속 노력했어요. 20대 초반에 처음으로 한국과 조우하고 나서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관점도 바뀌었어요.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백인의 정체성이 어느정도 섞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이 국제적인 경험이 있으셨죠. 인종 정치나 백인의 특권 같은 문제에 대해서 순희씨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나요?

순희: 아뇨. 우리는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요. 물론 나누려고 노력은 하긴 했죠. 아버지는 옛날에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최근 그런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대화를 `나누는 일 자체가 덴마크와 스칸다나비아 지역에서 어렵다고 봐요. 

팟캐스트: 인종 자체가 금기 취급 받는 주제이기 때문인가요?

순희: 금기인 주제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특정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러한 사고방식의 선의와 좋은 의도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면 공격적으로 반응하기도 하거든요. 확실히 입증 가능한 증거가 없이는 대화하기 어려운 주제입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이 성장 과정에서 순희 씨가 고생했다는 사실을 알았나요? 아니면 순희씨는 자라면서 문제를 겪지 않았나요? 예를 들면 애들이 다르게 대우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나요? 

순희: 확실히 대우 자체가 달랐다고 생각해요. 어떨 때는 더 긍정적으로 대우 받았을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더 부정적으로 대우받기도 했습니다. 항상 제가 다르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다른 점도 알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항상 저에게 다른 질문을 해오고 다르게 대우했죠. 항상 그런 차이점을 알면서 제 자신의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대화를 나눌 어른이나 선배가 없었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어디 출신인지, 어디 탄생지인지, 왜 친어머니가 입양을 맡겼는지 같은 비슷한 질문을 계속 받으셨겠군요?

순희: 네 그랬습니다. 아니면 진짜 엄마는 누구니? 진짜 부모님은 누구니? 이라는 질문을 했어요. 아니면 이누이트족 출신 그린란드인으로 착각했죠. 그래서 사람들에게 계속 저에 대한 설명을 해야 했습니다.

팟캐스트: 아주 지치는 일이죠. 안그런가요?

순희: 그렇습니다. 항상 그런 질문을 받으면 질문을 되돌려주지 않는 것 자체가 힘들죠. 취재를 하는 경험이 많다 보니 더 그렇기도 해요.

팟캐스트: 성장하면서 자신의 차이점으로 긍정적인 경험도 하셨는데, 그 예를 좀 들어주실 수 있나요?

순희: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관심 자체를 받는 일이 힘들었습니다. 유치원 선생님이나 1학년 선생님이 절 데리고 가서 무릎에 앉혀 주시고는 하셨죠. 하지만 다른 애들에게 해주지 않았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이상했던 일이었습니다. 약간 무섭기도 하네요. 그러니까 다른 애들과는 전혀 다른 관심을 받았죠. 하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아주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그냥 다른 사람들과 비슷해지고 싶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다 그러잖아요.

팟캐스트: 뭔가 특별하다는 느낌을 받으신 적이 있나요? 자신이 특출나다고 생각하신 적은?

순희: 네. 그렇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제가 노력해서 얻어낸 특별함이 아니었죠. 제 외모 때문에 얻어진 얕고, 이해가 가지 않는 특별함이었어요.

팟캐스트: 저도 자라면서 비슷한 기분이 들어서 순희 씨도 이런 기분을 느껴는지 묻고 싶네요. 자신이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나요?

순희: (웃음) 아뇨. 하지만 지금 와서는 확실히 그런 느낌이 드네요. 제 부모님이 저를 최대한 압박에서 보호해주시려고 노력하셨습니다. 물론 소외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죠. 그래서 저는 승마와 동물 키우기에 취미를 붙였어요. 제가 기분이 안좋거나 불안하면 동물과 같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동물들이 부정적인 감정을 흡수해줘서 돌아왔을 때는 기분이 많이 나아져 있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제가 가지고 있던 짐가방을 싸고는 했어요. 제 곰인형, 마실 것 같은 것을 넣고 휙 나가고는 했습니다. 물론 떠날 곳은 없긴 했지만, 안전한 마을이라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친구와 만나고는 했어요. 하지만 자연 속을 정처 없이 걷고는 했죠. 부모님이 심각하게 걱정하게 만들었어요. 

순희: 제가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어느 정도 예측은 할 수 있기는 해요. 그 때는 주변 상황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곳에 더이상 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 제 부모님이 여전히 절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어요. 하지만 정확히 말하라면 잘 모르겠네요.

팟캐스트: 지금 생각해보시면 왜 순희 씨가 그렇게 돌아다녔다고 생각하시나요?

순희: 그 마을에서 떠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그 마을에서 편안하지 았았을 수도 있죠. 다른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때도 매우 호기심이 많고 용감한 아이였어요. 

팟캐스트: 아기일 때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 본적이 있나요?

순희: 네. 제 부모님이 그런 쪽으로는 개방적이셨거든요. 제가 코펜하겐 공항에서 부모님에게 넘겨지고 나서 부모님이 제 방의 벽에 커다란 세계 지도를 거셨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프랑스, 그리고 덴마크로 점선을 그리셨어요. 부모님은 그 때부터 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기 시작하셨죠. 어머니는 절 처음 안으셨을 때 절 안고 집을 돌아다니면서 저에 대해서 아셨던 정보를 저에게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정보를 말해줘야 했을 때를 위한 좋은 예행 연습이었다고 생각해요. 어머니가 제 역사에 대해서 아는 모든 이야기를 해주려고 한 일이 기쁘죠.

팟캐스트: 처음 돌아가셨던 때가 언제죠?

순희: 2002년에 처음으로 돌아갔어요. 

팟캐스트: 나이가 어떻게 되셨지요?

순희: 20살이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에 돌아가신 이유가 있었나요? 친부모 조사를 하기 위해서 였나요, 아니면 한국 자체가 관심이 생겼었나요? 

순희: 부모님은 항상 가족이 같이 한국 여행을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보츠와나까지 갈 수 있었는데 왜 한국은 못가겠니? 이라는 인식이셨죠. 하지만 그때는 달에 가는 것만큼 이나 어려웠죠. 그래서 1년 정도 돈을 모았고 2002년 10월에 한국으로 가족 여행을 떠났어요. 제 부모님과 제가 한국으로 떠났죠. 홀트아동복지회를 방문하기 위해서 서울에 갔습니다. 부산에 있는 남광아동복지원도 방문했죠. 입양 부모와 입양아가 이러한 뿌리 찾기 여행과 친부모 조사를 같이 하는 일이 드문지는 몰라요. 제 부모님이 백인이라서 그런지 두 분 다 좋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한국 서울에서 걷고 있는데 차가 멈추더니 노인 분이 나와서 두분에게 사과를 주시고 다시 차를 타고 가시더군요. 두 분이 서울에 있다는 점 자체가 기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두분이 그렇게 좋게 대접 받는데 저는 거의 투명한 사람 취급인 것이 정말 신기했어요. 그냥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서 어머니가 절 찾을 수 없어서 놀라고는 했죠. 아주 이상한 일이긴 합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이 친부모 조사를 진행했죠. 남광아동복지원에 직접 방문했고, 제 부모님과 같이 방문해서 원장이 특별 취급을 해줬다고 생각해요. 특히 제 아버지의 존재감이 컸습니다.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일하는 통역가의 도움을 받아 남광아동복지원에서 보관하던 자료를 받았죠. 통역가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불안해 했습니다. 제 어머니가 사회 복지 분야에서 일하셔서 이러한 문제에서는 정답을 줄 때까지 사람을 압박하기 때문이죠. 

순희: 결과적으로 우리 가족은 더 많은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었어요. 남광복지원에서 친어머니의 이름을 받아서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홀트의 통역가가 며칠 뒤에 우리 가족에게 연락을 줬어요. 제 어머니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3명이었고, 3명에게 전부 연락을 했고, 그중 1명이 딸을 입양시킨 사실을 인정했지만, 절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제 친 아버지가 아닌 새로운 남자와 결혼해서 가족을 꾸렸고 저보다 5살 연하인 딸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이 제 친어머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큰 충격을 받았죠. 제가 이 조사를 위해서 준비가 되지도 않았는데 제가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나라가 있고, 이상한 질문을 하지 않고 그냥 저를 한국인으로 받아들여 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어요. 지금까지 친어머니를 단순한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으로 인식한 충격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으로 인식하자 한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걸 적용할 수 있었죠. 제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여성들이 있었고, 제 가족일 수도 있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아주 큰 충격이었죠. 친어머니 조사와 관련된 뉴스를 듣고 나니 그쪽에서 요금을 요구하더군요.

팟캐스트: 고아원에서 돈을 원했나요? 아니면 통역가가?

순희: 고아원이 돈을 원했죠.

팟캐스트: 좀 이상하네요. 

순희: 네 그랬어요. 그리고 분위기가 우리가 돈을 좀 더 내면 정보를 더 받을 수 있다는 뉘앙스였죠. 우리 부모님은 이러한 정보를 받았는데도 돈 한 푼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어머니에 대해서 아는 정보는 거의 없죠. 그 이후에도 조사를 진행했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어요. 1년 정도 시간을 들여서 한국에 얼마나 많은 신복순이 있는지 찾은 뒤에 편지를 썼습니다. 한국에 37명의 신복순 씨가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신복순 씨들이 사는 지역에 있는 경찰서들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렇게 해서 신복순 씨들에게 제 편지를 전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었죠. 그렇게 했는데도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신복순 씨 전부를 찾을 수도 없기도 했죠. 

팟캐스트: 남광아동복지원에서 그 3명중 누가 아이를 입양시킨 사람이었는지 확인시켜주었나요?

순희: 더이상 정보를 받을 수 없었어요.

팟캐스트: 돈을 더 넘겨주지 않는 이상 말이죠?

순희: 네. 아마 그랬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입양 부모님이 그 추가 요금 요구를 보고 아주 기분 나빠하셨죠. 

팟캐스트: 아주 충격적인 경험이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20살이고 친부모를 찾을 준비가 안되어 있는지 되어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찾지 못한다면 아주 큰 충격이겠죠. 어떤 답을 받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거부당했으니까요.

순희: 네 그렇습니다. 통역가의 사무실에서 울기 시작했죠. 통역가 선생이 그런 반응을 예상치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 계속 사과하더군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죠. 하지만 그 이후에 여행 동안 제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혼자서 서울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죠. 어쩌다 보니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던 다른 입양아들과 만났습니다. 덴마크 입양아도 있었어요. 다른 한국계 입양아와 이러한 이야기를 나눈 최초의 경험이었죠. 아주 큰 충격이었고, 제 삶에 있어서 위기였습니다. 제 부모님은 한국 전통 문화와 관련된 곳을 여행하려고 돌아다니셨고, 저는 따로 안지 며칠 안된 입양아 남자와 여행을 하다가 서울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제 첫 조사로 인해서 충격 받고, 마음에 상처를 입어서 이후 몇년 동안 고생했어요. 제가 코펜하겐으로 이사를 가야겠다고 부모님에게 간청했고, 그래서 제 어머니가 덴마크 한국계 입양아 협회에 가입하기 위한 입회비를 저를 위해서 대신 내주셨어요. 그 입양아 사회가 저를 도와주고 제 입양아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 이야기를 교환할 수 있었죠. 그리고 그 충격적인 경험이 저에게 계속 공포로 남지 않았던 이유가 그 입양아 사회안에서 활발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순희씨와 부모님의 한국 여행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게 되네요. 그분들을 계속 부모로 생각했는데 한국에서는 그분들이 눈에 띄고 순희 씨가 사회에 섞여 들어가셨겠죠.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그분들을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하셨나요?

순희: 네 그렇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동시에 제 부모님이 저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빠르게 깨달았습니다. 부모님이 도울 수 없고 제가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래서 부모님과 같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 자체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고통스러웠죠. 

팟캐스트: 아 이해가 되요. 그렇게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나서 차밭을 방문하거나 그런 관광 여행을 지속할 수는 없죠.

순희: 네 그렇죠. 아주 시끄러운 부산 자갈치시장 근처에 있는 호텔방이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침대에 앉아서 한국이 정말 대단한 나라라고 말했죠. 한국에서 만드는 물건들, 한국의 성장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침대에 누워서 한국이 정말로 끔찍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한국에 대해서 이렇게 긍정적이라서 오히려 화가 났죠. 저는 조사 결과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 한국에 대해서 긍정적일 수 없었습니다. 저는 한국에 화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한국을 좋아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죠. 아버지가 그렇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시기에 저도 긍정적인 반응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국에 돌아갈 때마다 한국을 다시 되돌려 받는 느낌입니다. 작은 발걸음을 내딛는 느낌이죠. 

-광고-

순희: 제가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화의 이름은 Forget Me Not(포겟 미 낫, 물망초) 입니다. 제주도에 있는 미혼모 시설 애서원에서 지내고 있는 3명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에요. 세명 다 임신했지만 결혼하지 않은 상태라는 문제를 겪고 있죠. 애서원에서 지내면서 출산을 하게 되고 아이를 계속 키워야 하는지, 아니면 입양 제도에 맡겨야 하는지 고민을 하게 되죠

-영화 일부-

순희: 그래서 2003년에, 2004년이었나 잘 기억나지 않지만 InKAS 모국 방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서울에 방문했어요.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실용적인 일을 하도록 돕기도 했죠. 그 방문 모임을 했었는데, 그 때 한국 여성들이 길에서 입양 기관들이 자신들의 아이를 훔쳐갔다고 시위하는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여성들이 누구고 왜 아이를 빼앗겼다고 시위하는지 궁금했어요. 우리의 모임과 그 시위를 연관 짓지 못했죠. 그 다음에 모국 방문 관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치 공장도 방문하고, 한복도 입고, 한지 제작도 참여했어요. 아주 좋았죠. 관광 마지막에는 우리 모두 관광버스에 탔는데, 여러 나라에서 온 입양아들이 모여 있었어요. 그리고 시골로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모두 어디로 가는지 몰랐어요. 그래서 시골에 있는 시설 앞에 멈췄죠. 시설 앞에 내리니 수녀들이 저희를 맞이해주더군요. 그리고 우리가 들어가니 미혼모를 위한 시설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미혼모들이 지내고 있는 시설이었는데 우리가 왜 여기에 방문했고, 우리가 거기에서 무슨 대화를 나눠야 할 지 몰랐죠. 하지만 미혼모들이 집단을 이루고 우리 입양아들이 집단을 이뤄서 서로를 보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처음으로 와서 불안한 성장한 입양아들이 미혼모 한국인들과 교류하고 있었죠. 우리가 정확히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통역가를 통해서 대화를 해야 했거든요. 하지만 우리가 떠날 때 만삭인 미혼모가 저에게 와서 “입양되어서 행복하셨나요?” 이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저는 어떤 말을 할지 몰랐죠. 그때 저는 예라고 답하긴 했지만, 제가 가진 입양 제도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전부 담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분이 저에게 그런 질문을 한 의도는 명백했죠. 그 때 제가 입양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  젊은 입양아들에게 그런 질문을 해야 하는  미혼모 시설에 살고 있는 미혼모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선택은 중요하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하고, 불가능하기도 한 선택이죠. 어떻게 호칭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게 계속 제 기억에 남았습니다. 

순희: 덴마크에 돌아와서 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했어요. 어떤 전공을 해서 어떻게 살지 고민했죠. 전 건축가가 되고 싶었지만, 실패했고 대신 사진 전공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사진 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아버지가 암에 걸려서 급격히 몸이 안 좋아지셨어요. 그래서 다큐멘터리 계획의 제 입양 부모님의 사진을 아주 많이 찍었죠. 하지만 단순히 사진으로는 부족하고,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을 영상으로 찍기 시작했죠. 그게 제가 만든 첫 영화가 되었어요. 아버지가 암 말기가 되었을 때 어머니가 아버지를 돌보셨습니다. 그 과정을 찍은 영상이 제 최초 영화가 되었고, 그 영화를 기반으로 영화 학교에 지원했고, 입학할 수 있게 됐죠. 그 첫 영화 촬영과 아버지의 사망, 상실, 입양 이야기의 충격이 제가 한국에 돌아가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습니다. 직접 찾을 방법도 없고, 어머니에게 연락할 방법도 없지만, 제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었죠. 그 상황에서 어머니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알고 싶었어요. 

팟캐스트: 포 겟 미 낫을 직접 보니 아주 훌륭한 다큐멘터리였습니다. 제가 느낀 바로는 순희 씨가 순희 씨의 친어머니를 좀 더 이해하고 답을 찾기 위해서 찍은 영화라고 느꼈는데, 실제로 그랬나요?

순희: 네. 제가 영화를 찍게 된 동기였습니다. 다른 여성의 상황을 통해서 많은 일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물론 제가 1982년에 태어났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그래도 제가 2012년부터 2017년까지 5년 동안 영화를 찍을 때 겪은 일들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 영화 촬영 자체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서 온갖 이야기를 알게 되고 미혼모들의 상태를 알게 된 계기가 되었죠. 아주 충격적인 상태를 알게 되었습니다. 전 긍정적인 미혼모의 이야기를 찍고 싶었어요. 한명을 찾아서 아이를 데리고 있기 위해서 싸워서 승리한 사람의 이야기를 찍고 싶었습니다. 촬영을 시작할 때 마다 제가 촬영하는 미혼모가 아이를 데리고 키워낼 것이라고 믿었어요. 

순희: 슬픔과 체념이 있죠. 제가 촬영한 여성들 대부분이 젊은 편이었기 때문에 청소년 기의 고통도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반발의 시기기도 해요. 그래서 자신들의 삶을 살거고, 남들이 하는 일을 하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지만 이들에 대한 지원이 너무 적죠. 그러한 지원 부족이 입양 제도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항상 입양이 선택지로 존재하고, 모두가 알고, 이러한 어려운 문제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이 제도에 엮인 사람들의 사고 방식에 아주 깊게 박혀 있었습니다. 저는 그걸 보고 입양을 그렇게 쉽게 맡길 수 있고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다면 좋지 않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이런 여성들을 만났을 때, 아주 어리지만 아이들을 돌보겠다는 의지가 강하고 계획도 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계획이 무너지고, 압박을 받게 되죠. 이 미혼모들이 아주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계속 싸워나가야 하는 일을 봐야 하는 것이 아주 슬프더군요. 

순희: 네.

팟캐스트: 슬픔이 존재하죠. 

순희: 네. 거기에 슬픔이 존재하고, 제가 만난 미혼모들 전부 아이들을 키우고 싶어했어요. 그게 제가 알게 된 사실중 가장 대단한 일이었죠.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소속감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제 어머니에 대한 믿음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 어머니도 비슷한 압박을 받고 선택지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팟캐스트: 5년간 한국에서 지내면서 이 여성들을 촬영한 경험이 어머니를 용서하게 도움을 줬나요? 그리고 어머니가 순희씨와 연락을 하지 않으려는 이유도 이해가 됐나요?

순희: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친어머니에 대해서 화가 난 적은 없었죠.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친어머니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화가 나있었어요. 제 성인 시절 대부분을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촬영하면서 보냈죠. 덴마크와 한국을 오가면서 지낼 수 있는 특권도 있었습니다. 친어머니와 저 사이에 강력한 연결이 존재하고, 친어머니의 기척을 제 안에서 느껴요. 젊은 어머니들이 감정적으로 자신을 끊어내는 모습을 봤고, 아이들이 감정적으로 끊어지는 광경을 봤습니다. 그런 충격적 광경을 제 앞에서 보니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어요. 하지만 아이와 어머니 둘 다에게 있어 심각한 손실을 가져다주는 광경을 보니 제 자신에 대한 용서와 자기애를 가질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제가 어른으로서 고생하거나 확신이 없으면 그러한 광경을 기억하고 그러한 고생과 불안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죠. 제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제 한국 가족에 가진 분노, 불안함, 슬픔을 내부화해서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을 압니다. 

팟캐스트: 그 임신한 미혼모와 나눈 입양되어서 행복하다는 대화가 순희 씨의 마음에 걸리지 않나요? 만약 그 대화를 오늘 나눴다면 다르게 대답하셨을 것 같나요?

순희: 만약 오늘 그 대화를 나눴다면 입양되어서 행복하다고 하다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불행하다고 하지도 않았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제가 좋게 대답했다고 생각하지 않죠. 제가 아무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전 어디에나 소속되어 있는 셈입니다. 전 한국에 계속 있을 수가 없어요. 아마 계속 한국에서 살면 미쳐버릴지도 모르죠. 현재 COVID-19 사태로 인해서 제가 여행을 다닐 수 없어서 답답하기도 합니다.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이나 다른 다양성을 가진 곳으로 갈 수 없다는 점이 슬프죠. 제가 덴마크에서 너무 오랫동안 있다 보니 정신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미래에 어떻게 바뀌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환경 재난도 있고 여러가지 문제가 있으니 말이죠. 하지만 제가 한국에 돌아가지 않는 삶은 생각할 수 없어요. 한국은 제 삶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부입니다. 

팟캐스트: 순희 씨가 찍은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상실과 슬픔에 대한 영화죠. 순희 씨가 괜찮으시다면, 순희 씨의 입양 아버지의 최후의 순간들을 찍었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순희: 제 입양 아버지와 저는 매우 친밀한 관계였어요. 제 입양 어머니와는 다른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부모로서의 욕구가 달랐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죠. 제가 아버지와 친밀했던 이유는 제 건축가로의 꿈을 아버지가 키워주셨고, 저에게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죠. 하지만 아버지와의 그 친밀한 관계를 소중히 여기기 시작한 것은 제가 어느 정도 성장한 뒤였습니다. 제 입양 어머니는 우리 가족에 있어서 닻이나 다름 없었고요. 아버지를 보내드리는 일 자체가 힘들었죠. 시간이 멈춘 것 같이 흐르지 않고, 소중한 가족을 죽기 기다리는 과정은… 말하기 어려운데, 진…

팟캐스트: 진공과 같나요?

순희: 네. 진공에서 기다리는 것과 같죠.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때 아버지의 영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와 같이 찍은 어렸을 적의 영상도 없고, 아버지의 목소리도 녹음되어 있지 않았죠. 절 위해서라도 그 영상과 소리를 기록해둬야 했어요. 제가 그렇게 영상과 녹음을 남겨둔 사실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보지는 않지만 제가 가서 가족의 일부를 기억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죠. 거기에 제가 외동딸이고, 친척들도 없어서 가족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남겼다는 점도 좋습니다. 

팟캐스트: 입양아라서 친부모를 아는 방법이 없으니 입양 부모가 사라지게 되기 전에 그분들의 기억을 보존하는 일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죠. 

순희: 네. 저에게 있어서 그러한 기억 보존은 사진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면서 아버지에 대해서 알아가고, 어머니가 아버지를 돌보는 일을 보고, 아버지가 어머니 곁에서 아름다우면서 존엄있게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세상에 대해 작별을 고하는 일,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악을 마지막으로 듣는 일 등 모든 일들이 귀중했어요. 

팟캐스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네요.

순희: 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본지 꽤 되었네요. 입양아가 가지는 소외감이 존재하죠. 전 제 친척들과 그렇게 친밀한 느낌이 들지 않아요. 친척들과 같이 자라지 않았죠. 거기에 친척들은 미국과 영국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 가족과 그 흔적을 기억할 마지막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어떻게 자기 관리를 하시죠? 심각한 주제들을 많이 다루시니 중요한 것 같은데 말이죠.

순희: 아 네. 포 겟 미 낫 편집을 하다가 정신적으로 붕괴점에 도달했었어요. 360 시간이 넘는 여성들의 한국어 영상이 있었고, 평범한 한국어도 아니라 제주도 사투리로 대화하는 영상이었습니다. 편집하기 어려운 영상이었죠. 그리고 그 영상 전체 번역을 의뢰해야 했어요. 그뒤 몇년 간 계속 다큐멘터리를 편집하면서 제 직업을 위한 편집도 진행했습니다. 제가 전혀 모르는 타인을 전문적인 이유 때문에 제 작업실에 초대해서 제 최악의 트라우마를 공유하는 일은 아주 어려웠어요. 방안에서 한국에서 좋은 경험과 나쁜 경험을 계속 일하면서 느껴야 하는 일도 힘들었죠. 그 계획을 계속 진행하면서 저에게 계속 충격을 주는 셈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겪는 충격보다 더 힘들었을 겁니다. 물론 대부분의 입양아들이 항상 느끼는 감정이지만, 저는 그 감정안으로 들어가야 이해하고 그 기반으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여성의 이야기, 그들의 삶, 아이들의 이야기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꼈어요. 미혼모들이 자신의 삶, 마음, 우정에 저를 받아들여 주었고 그들의 삶과 문제를 묘사해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을 느꼈습니다. 물론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익명으로 나와서 그들의 개인 정보를 보호하고 있어요. 어쨌든 그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면서 건강 관리 하는 일 자체가 어려웠죠. 계속 배우면서 여전히 흥미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건강을 헤쳐가면서 까지 일을 하려고 하는 버릇을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러한 성향도 입양과 관련된 문제가 아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미혼모들의 이야기가 순희 씨를 정신적으로 치료하는데 도움을 주었나요?

순희: 개인적으로 제가 미혼모들의 삶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이 제 삶 자체와 제가 어떻게 이런 삶을 살게 됐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저에게 모성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죠. 여러 여성들이 같이 서로를 도우면서 아이를 낳고, 감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지지해주는 환경이었어요. 제가 보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광경이었죠. 제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한국 아이들에게 이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을 알게 되고 배우면서 그 일이 자연스럽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았죠. 

팟캐스트: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거리를 유지하셨죠? 부모가 아이를 계속 키우면 의절하겠다고 하는 일이나, 지원해주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계속 촬영을 하셨죠? 그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았나요?

순희: 네. 거기에서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면서 일하는 법을 배워야 했죠. 여러 덴마크 카메라맨들이 저와 함께 일하기 위해서 왔지만 대부분 단기로 일했어요. 제주도에서 길게 지내면서 일할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죠. 제주도에서 사회학자를 만났고 제 촬영을 도와주었죠. 포 겟 미 낫 촬영시에 제 조감독으로 일해주었습니다. 전 한국어를 못해서 부끄럽지만, 요즘은 제 자신을 용서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모르는 채로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안다고 해도 어느정도 세세한 부분은 모르고 분위기만 알았죠. 제 촬영을 도와준 신지가 가끔 촬영 도중에 번역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혼자 촬영했어요. 사람이 언어를 몰라도 주변 상황만 보고 뭐가 일어나는지 알 수 있는지 경험했죠. 촬영하면 할수록 주변을 이해하지 못하는 촬영 상황에 적응해나가기 시작했죠. 그리고 언어를 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게 되었고요. 저 자신을 도구로 사용해서 그 여성들의 상황을 잡아내려고 했습니다. 상세한 사항은 이해할수 없었지만 대체적인 변화와 문제는 이해할 수 있었고, 큰 변화도 알 수 있었으니까요. 분위기가 바뀌거나, 사람들이 대화를 멈추거나, 화를 내거나 하는 사실로 알 수 있었습니다. 편집 과정에서 비로소 사람들의 대화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었죠. 

팟캐스트: 순희 씨의 말은, 촬영 도중에 모든 정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신다는 건가요?

순희: 네.

팟캐스트: 너무 감정적으로 힘들고 어려울테니까요?

순희: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감독으로의 책임을 지고 선을 긋는 게 어려웠나요? 감독이니 너무 개입하면 안된다는 선을 지켜야 하니까요.

순희: 전 언론인 교육을 받지 않았어요. 조금 다른 방법으로 교육을 받았고 제 영화도 그런 영향을 받았습니다. 관찰자적 다큐멘터리이죠. 전 이 다큐멘터리에서 큰 영향을 끼치고, 또 관객에게 제가 이 여성들을 관찰하고 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벽에 붙은 파리처럼 관찰할 수 가 없죠. 객관적으로 이러한 영상들을 볼 수 없습니다. 눈에 확 띄이게 마련이고 모두가 인식하게 되죠. 그러한 인식을 받아들이고 더 진실되게 그 영상을 담아내고 싶었어요. 제가 노력해도 전문가적 선을 그을 수 없었을 겁니다. 감정적으로 불가능했을테니까요. 아마 다시 똑같은 다큐멘터리는 못 찍을 거 같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힘을 이 다큐멘터리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죠. 물론 지금도 입양 관련된 다른 작업을 하고 있긴 하지만 다시 그러한 다큐멘터리는 만들수 없을거에요. 

팟캐스트: 아마 로맨틱 코미디 같은 가벼운 영화를 찍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순희: 네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항상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직업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아이를 가지기 전까지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이 다큐멘터리는 아주 대단해요. 심오하면서도 입양아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봅니다. 아주 감동적이기도 하고요. 한국인들도 꼭 봐야 할 다큐멘터리라고 봅니다. 물론 한국에서 보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들었어요. 그 상황에 변화는 생겼나요?

순희: 큰 전개 변화가 있었어요. 한국에서의 영화 배급 계약을 맺었습니다. 한국에서 예산도 받았고, 현재 한국 공동 제작자들도 있죠. 2013년에 다큐멘터리 필름 페스티벌에서 공모상을 받았을 때부터 한국의 지원을 받고 싶었고, 한국에서 상영될 수 있다고 믿었죠. 한국에서 영화관 배급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2021년 5월말이나 6월으로 예상하고 있어요. 100% 확실한 것은 아니죠. 현재 제가 원하는 일은 한국의 미혼 부모/미혼모 관련 기관들과 국제 입양 사회의 대표들과 같이 일해서 한국의 미혼 부모 문제를 지원하는 일입니다. 아마 이번 5월에 한국에 가서 2주간 격리된 뒤 이 영화를 홍보하려고 해요. 

팟캐스트: 한국에서 어떤 반응을 얻기 원하시죠? 어떤 영향을 주기를 원하시죠?

순희: 사회에 여성에게 체계적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주면 좋겠습니다. 한국에서 미혼모가 아이를 돌보고 싶어하면, 국내 입양하는 부부보다 더 적은 지원을 받게 되니까요. 한국이 미혼모들을 더 지원해야 한다고 보죠.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해서 좀 더 개방적으로 다가가야 하고, 남성들이 책임을 저야 하고, 아이의 출생지에 대해서 거짓말할 수 없도록 출생 신고 절차도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누가 아이를 놓고 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베이비 박스 제도도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11번째로 부유한 강국이니 자국의 시민들을 지원해주고, 아이들을 돌봐줘야 해요. 일본보다 더 낮은 출산율을 가지고 있으니 이 모든 일이 전부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봅니다. 여성과 가족이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지원해 줘야 해요.

팟캐스트: 아주 좋은 인터뷰였습니다. 물론 순희 씨의 삶 극히 일부만 알게 됐지만, 오늘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팟캐스트에 참여해주셔서 감사를 표하고 싶어요.

순희: 제가 더 감사하죠. 좋은 대화였어요.

팟캐스트: 순희씨, 사람들이 어떻게 순희 씨를 찾고 영화를 볼 수 있죠?

순희: 제 계정과 영화와 위한 페이스 북 계정이 따로 있습니다. 페이스북에서 친구 신청을 하시거나 페이스북 페이지에 좋아요를 눌러 주시기만 해도 좋아요. 영화 페이스북 페이지에 한국 개봉과 발 맞춰 많은 업데이트가 있을 예정이라 입양아 사회와 그 과정을 공유하고 싶죠. 또 북미 배급사 그래스호퍼 필름과도 배급 계약을 맺었어요. 북미 배급은 그 회사가 담당하게 되겠죠. 영화를 보고 싶으시다면 Vimeo에 올라와 있으니 거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 학교에 지원했어요.

시즌 4, 에피소드 16: 티모시 밴더버그

티모시 밴더버그 (30세)씨는 시드니에서 사는 한국계 호주인 입양아다. 자라나면서 밴더버그 씨는 지역 한국 입양아 캠프와 일하게 되었으며 계속 한국에 관해 관심을 가져왔다. 한국과 한국인들과 많은 교류를 해온 밴더버그 씨는 그 경험을 통해 정체성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되었다. 

티모시: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티모시 밴더버그입니다. 30세이고 한국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자라났습니다. 호주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제 가족과 같이 생활하면서 자랐어요. 어머니 아버지 둘 다 호주인이지만, 아버지는 네덜란드계 이민자 가문 출신이시고, 어머니는 오래된 영국 이민자 가문 출신이죠. 우리 가족에는 입양아 출신인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고, 어머니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여동생 하나, 그리고 호주 내부에서 입양된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습니다. 자라면서 저와 입양아 형제자매들이 동네에서 거의 유일한 아시아계였어요. 물론 동네에 우리가 아는 한국계 입양아나 콜롬비아계 입양아를 입양한 가족들이 있었고 그 가족들도 비슷한 이야기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가족의 어려움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상투적이긴 하지만 우리를 백인이라고 생각해서 초등학교 때도 힘들었어요. 물론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긴 했지만 얼마나 다른 정체성을 가졌는지 몰랐죠. 호주에서는 황인이면서 백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바나나라고 하고 미국에서는 트윙키라고 하더군요. 물론 저는 아시아계가 전혀 노랗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서구 호주 가정에서 서구식으로 자라서 정신이 서구화되어 있었어요. 다행히 우리 가족은 샛별 한글 학교와 인연이 있었죠. 샛별 한글 학교는 한국 캠프 겸 학교이고,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는 한국 여성과 그 가족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입양아들이 다른 입양아들과 교류하고 놀 기회를 제공하고 1년에 한 번 샛별 캠프를 개최하죠. 공원에 놀러 가서 며칠 동안 캠핑하고 한국 요리를 해 먹고 한국 문화 활동을 하고 수영이나 크리켓과 같은 운동도 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 문화 캠프에서 크리켓을 했군요?

티모시: 네. 그래서 호주/한국 문화 캠프에 더 가까웠죠. 많은 한국계 호주 입양아들이 호주에서 인기 많은 운동을 했어요. 최대한 주변에 섞여 들어가고 맞아 들어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게 사람의 본능인 것 같아요. 인종에 상관없이 주변에 맞아 들어가려고 하죠.

팟캐스트: 성장 과정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흥미로운 가족 구성이던데 입양아 출신 형제자매들도 한국 출신이었나요?

티모시: 네. 제 입양된 남동생과 여동생들은 한국에서 입양됐습니다. 물론 한국의 다른 가족들로부터 입양됐죠. 우리 전부 한국계 호주 입양아긴 해도 우리가 전부 다르게 생겨서 거리감이 있었어요. 우리 성장기 때도 너희들은 전부 다른 가족 출신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았지만 백인 가족에서 자라나는 아시아계라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죠. 같은 인종이나 같은 민족 사이에서의 입양이라면 가족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고, 외모 차이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아서 부모가 입양에 대해서 말해야 할 시점을 결정해야 합니다. 너무 이른 시점에 말하면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너무 나중에 이야기하면 부모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죠. 

팟캐스트: 부모님이 인종 문제에 대해서 별로 언급을 안 하셨죠?

티모시: 부모님이 인종 문제를 인식하시긴 하셨지만, 대응을 다르게 하셨죠. 우리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려 주시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셨지만, 동시에 어떤 일도 강제하지 않으셨습니다. 캠프에 가서 너의 문화를 배우자!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만약에 가고 싶지 않다면 보내지 않으셨고, 대신 기회를 제공하셨죠. 저는 캠프 참여가 마음에 들었어요. 제 나이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아서 서로 친해졌습니다. 애들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고, 다시 만난다고 해도 어디에서 만났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즐거웠어요. 제 형제자매들도 같은 캠프에 참여했죠. 그 애들이 캠프를 즐겼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 남동생 같은 경우는 좀 더 내향적이에요. 반사회적인 정도는 아니고 개인의 시간을 즐기는 편이에요. 나이 차이가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제 남동생보다 5살 더 나이가 많고, 제 여동생은 남동생과 3살 차이가 나죠. 그래서 제 여동생과 8살 차이가 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직접 낳은 여동생과 저는 13살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가장 어린 호주에서 입양된 동생과는 26세 차이가 나죠. 입양된 형제들과 나이 차이가 심하지만, 그럭저럭 넘어갈 정도입니다. 하지만 제 부모님의 친자식은 이번에 17살이 되었죠. 나이 차이가 커서 가까운 관계는 아니지만, 가족으로는 적당히 가깝다고 생각해요. 호주에서 입양된 형제자매들은 입양 과정 자체를 다르게 받아들였다고 생각합니다. 제 남동생과 입양 이야기를 안 하고 가족 이야기를 하기는 어렵긴 하지만, 제가 남동생을 지지해주고 남동생이 저를 지지해준다는 사실을 남동생이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티모시: 자라면서 샛별 캠프에 자주 참여했습니다. 한국 음식을 어른들과 자주 요리했죠. 거기 캠프에 참여하던 사람들 대부분 어린 애들이었어요. 나이 많은 한국계 입양아는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청소년기가 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고 뛰쳐나가게 되니까요.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자기만의 친구 집단을 만들어 부모님의 관리에서 벗어나니 숫자가 줄었다고도 생각합니다. 부모님의 관리 여부로 사람이 달라지기 마련이죠. 그건 입양아에게도 해당한다고 봅니다. 부모님이 있어서 입양 관련 불평을 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일은 나쁘지 않지만, 입양 가족 관계의 일부입니다. 부모님을 미워하거나 싫어하지는 않지만, 부모님은 입양아가 아니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마련이죠. 

티모시: 50년대부터 한국 입양아를 받아온 미국보다 호주 한국 입양아 사회는 젊은 편입니다. 나이 많은 입양아들 자체가 드물죠. 가장 나이가 많은 입양아들은 40세에서 45세 정도로 추측됩니다. 끽해야 80년대부터죠. 물론 그 이전에 입양된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호주의 한국계 입양 자체가 한국전쟁 때의 입양 이후로 시작된 지라 그때의 입양아들, 전쟁 입양아들은 미국에서 호주로 이주한 입양아들이 아니라면 거의 없어요. 미국으로의 입양은 호주로의 입양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입양은 입양아 숫자가 많은 편이죠. 반면에 호주의 한국인 입양아는 3600명 정도밖에 안 돼요. 이러한 숫자 차이가 다른 분위기를 만듭니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미네소타와 같이 입양아가 많은 지역이 많죠. 그래서 다른 입양아를 알 가능성이 꽤 커요. 아니면 입양아 친구와 같이 자랐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호주의 경우에는 혼자서 자라거나 아니면 한 명 정도의 입양아 가족과 같이 자라는 일이 많았죠. 이런 성장 배경에서 정체성과 연대감을 만드는 방법은 캠프에 참여하거나 입양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호주의 입양아 사회 자체는 과거보다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호주는 미국보다는 작지만 거대한 나라이죠. 차이점은 호주는 해안가에 몰려 살고, 미국은 미국 전체에 흩어져 산다는 점입니다. 호주 서부에서 동부로 여행하는 일은 힘들고, 시간도 차로 7일이나 걸리죠. 호주는 아주 거대한 나라고, 입양아들이 특정 지역에 모여 있지 않고 호주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호주의 어떤 입양아들은 다른 입양아들을 30세가 넘은 뒤에 만난 예도 있죠.

팟캐스트: 많은 호주 입양아들이 티모시 씨가 설명한 대로 시골 마을에 흩어져서 성장했다고 생각하시나요?

티모시: 제가 생각하기로는 시골 마을에서 성장한 입양아들도 많지만 도시 교외의 백인 위주 동네에서도 입양아들이 많이 자랐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자라난 지역인 시드니의 예를 들어보죠. 시드니 교외에는 이민자들이 많이 정착한 지역들이 있었어요. 스트랫필드는 한국인과 인도인 인구가 많은 지역이고, 한국인들이 많이 정착한 지역이라 한국계 이민자들이 많이 몰려들었죠. 과거에는 다른 곳이 코리아타운이었지만 스트랫필드로 코리아 타운이 옮겨졌고 그 지역은 지금 베트남/차이나타운으로 바뀌었습니다. 캐버 매너에 가보면 베트남 이민자들이 많아요. 또한 다른 지역을 보면,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유럽계 이민자들이 많습니다. 다른 지역들마다 주류가 되는 인종들이 다르죠. 백인 부모들은 그런 지역에서 입양아들을 키웠습니다.

팟캐스트: 백인 위주의 지역인 교외에서 자라났다는 말이군요?

티모시: 네. 보통 부모의 고향이 그런 곳이거나, 아니라고 해도 적응하기 쉬운 곳이니까요. 하지만 그분들이 아시아계가 주류인 지역에서 살려고 하면 문화적, 인종적 교육이 부족하다 보니 적응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죠. 교육 과정에서 빠진 중요한 부분이 다른 문화의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과서나, 책이나, 대중매체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문화를 전부 이해하려면 직접 살아봐야 하죠. 그래서 관계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한국, 인도, 중국에서 입양하는 부모들이 입양아들을 인종적으로 다양한 지역에서 키우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아이들을 인종적으로 다양한 곳에서 키우려고 노력하고 있나요? 아니면 여전히 백인 부모들이 백인 지역에서 다른 인종인 입양아들을 키우는 추세가 지속하고 있나요? 

티모시: 많은 부모가 여전히 백인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그 부모들의 고향이 그 지역과 가깝고, 그러한 면이 중시되기 마련이니까요. 요즘은 다인종 간 입양아가 가족에 가지고 오는 인종 정체성이 주목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 성장 시기보다는 많이 나아졌죠. 주거 환경은 여러 가지 요소에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주거 비용이나 통근 문제도 있죠. 직장에서 10분에서 15분 정도 거리라면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요. 

티모시: 최근 입양아 가족의 부모들과 이야기를 해본 결과 인종적으로 다양한 지역으로 이사하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아이들에게 문화적 경험을 제공하려고 하더군요. 문화와 정체성을 좀 더 중시하는 가정교육을 하려고 하고, 한국 음식점에 데리고 가고, 한국 문화를 경험하게 하는 외부 경험도 늘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한국인들이 많은 지역으로 이사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문화를 가르치려고 하고 있죠. 그리고 한국인들이 많은 지역으로 이사한다고 해도 입양아로서 한국인들과 교류하기 어렵기 마련입니다. 이건 한국에서 살았을 때도 느꼈던 감정인데, 한국인들과 닮았고,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가지고 있지 않죠. 그래서 호주에서 한국인들이 많은 지역에서 산다고 해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구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정체성 발달에 또 다른 문제를 끼칠 수 있죠. 한국인들을 만나도 한국인들이 왜 한국어를 못하는지 묻고, 한국인들처럼 보여도 한국인처럼 활동하지 않으니, 소외되는 상황을 입양아에게 또 다른 정체성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고, 한국어를 배우고, 문화를 배우니 그러한 문제가 줄어들 수 있지만, 기본적인 버릇이나 행동은 가족과 부모님에게 영향을 받으니 문제가 될 수 있죠. 

팟캐스트: 티모시 씨는 다인종 간 입양을 한 양부모가 백인 위주 지역에서 사는 일 자체는 문제로 여기시지 않는군요?

티모시: 사람들이 어디에서 사는지를 문제 삼지 않고, 부모가 한국 문화의 중요성을 알려주는지에 대한 여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죠. 문화를 알려주는 일은 어렵다고 봅니다. 백인 위주 지역이나 아시아계가 없는 지역에서 살게 된다면 입양아는 자라고 있는 지역의 사회적 분위기에 맞아 들어가기 위해서 백인 아이의 정체성을 선택하려고 하겠죠. 사실 시대의 차이점도 있다고 봐요. 제가 학교에 다녔을 때와 지금은 다양성이 훨씬 넓어졌다는 점에서 아주 큰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자란 지역에서 자란 비슷한 나잇대의 입양아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학교나 지역에서 유일한 아시아계이거나, 입양아였다고 해요. 많아도 2명 정도밖에 없었고, 학교 모두가 아시아계 2명을 서로 연관시켰기 때문에 오히려 친하게 지내지 않으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하죠. 모두가 아시아계끼리 친할 것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오히려 멀어진 셈이에요. 하지만 현재 학교에 다니는 입양아들과 이야기를 하면 학교에 30명 정도 아시아계가 있거나 25명, 아니면 학교 대부분이 아시아계라고 언급을 합니다. 이민으로 인해서 사회가 바뀌었어요.

팟캐스트: 부모님이 왜 아이들을 입양하려고 하셨는지 아시나요? 그리고 특이한 가족의 일부가 된 기분은 어땠나요?

티모시: 어머니와 아버지가 입양하시게 된 이유는 어머니가 불임이셨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노력하셨지만, 아이를 가지실 수 없었고, 그래도 아이를 키우려고 하셨기에 입양을 선택하셨죠. 첫 선택지인 스리랑카에서 아이를 입양하려고 했지만, 당시 스리랑카 입양 체계 자체가 심각하게 부패해 아이 입양 제도가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고, 인신매매 문제도 있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입양하면 아이를 빼앗기거나 그 부정부패의 일부가 될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었죠. 부모님은 그러한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으셨고, 다음으로 주어진 선택지인 콜롬비아와 대한민국을 두고 고민하셨어요. 그때 콜롬비아 입양 제도는 정식적인 입양 체계가 구성되어 있지 않았죠. 반면에 한국 입양 제도는 어느 정도 체계가 잡혀 있어서 한국을 선택했습니다. 

티모시: 호주에서 해외, 정확히는 한국 입양을 하려면 가족이 아이를 키울 자격이 있는지 조사를 받죠. 그 조사 과정만 2년이 걸리고 한국을 2번 방문해야 합니다. 아기를 받기 전에 한번 방문해서 서류 절차를 거치고 조사를 받죠. 2번째에는 아이를 직접 데리러 한국에 와야 합니다. 대리로 아이를 받으러 오는 일은 불가하고 가족들이 직접 한국에 와서 아이를 데리고 가야 해요. 의학적 문제나 비행이 불가능해서 데리러 가지 못한다면 예외가 있는지는 모릅니다. 아마 상황마다 다르게 대응하겠죠. 하지만 대부분 입양 가족들이 한국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서 한국을 2번 방문해야 합니다. 절차 일부로 아이가 어떤 나라 출신인지 알기 위해서 부모가 한국을 방문하는 일이 권장되죠. 전 이런 절차가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모르지만, 부모가 한국을 방문하는 절차 자체가 좋다고 생각해요. 아이의 출신 국가를 아예 방문할 의사가 없다면, 그 나라로부터 입양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티모시 씨의 부모님이 티모시 씨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 한국을 방문하셨나요?

티모시: 네. 그렇게 하셔야 했죠. 하지만 동시에 그 두 분이 한국을 방문하려고 하셨어요. 두 분이 저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 한국에 방문했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전 제가 5살 때 제 남동생을 데리러 갈 때 부모님과 동행했죠. 제가 그 여행에서 기억나는 일은 몇 가지 없습니다. 그때 한국을 가기 위해서는 일본을 거쳐야 했어요. 일본인지 한국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일본으로 추측되는 곳에서 일본 사람들이 저를 보고 관심을 보였습니다. 보통 일본이나 한국에서 백인 부부가 황인 아이를 데리고 있다면 귀엽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입양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그 제도 자체가 무시당하는 편이에요. 보통 입양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 입양 사례는 잘 모릅니다. 어쨌든 한국 여행 뒤, 호주 집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남동생을 안게 되었죠. 그리고 안고 나서 몇 분 만에 제 새 옷에 토를 했습니다. 요즘도 농담하죠. 네가 나에게 토해서 처음에는 네가 싫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제가 그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놀랐습니다.

팟캐스트: 제가 티모시 씨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으로 돌아가면 그렇게 특이한 가족 안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티모시: 전 제가 특이한 가족의 일부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자라나면서 가족이 특이하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죠. 우리 가족이 다르다는 사실 자체는 인식했지만, 우리 가족이 특이하니 어쩌지? 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전 제가 평범하다고 생각했고 제가 자라면서 생긴 문제가 제 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이러한 문제가 내 입양과 다인종 간 입양 가족, 그리고 제 주거지 때문이었다고 인식했죠. 그때는 제가 괴롭힘당하는 이유가 제가 다르고 안경을 써서 괴롭힘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 간 입양으로 인해서 생기는 차이점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죠. 저 자신을 아시아계나 한국인으로 인식하지 않았어요. 물론 그 두 가지 정체성을 알고 있었지만, 그 정체성을 저라고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티모시: 지금은 절 괴롭히던 아이들이 절 괴롭히던 이유 대부분 그 아이들의 집안 문제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죠. 초등학교 때 제 친구의 친구가 저를 괴롭히고 했습니다. 5학년 때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 제 안전 도우미로 선정되었어요. 이 학생들이 저를 괴롭힘 안 당하도록 도와줘야 했죠. 하지만 그 둘도 제대로 일을 하지 않고 오히려 절 괴롭히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그 친구의 친구가 저를 위해서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저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또 자신의 가정 문제 때문에 저에게 화풀이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사람을 괴롭히는 이유는 괴롭히는 사람의 개인 가정사 문제이거나 피해자가 가해자들과 다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죠. 아시아인에 대한 교육이 학교나 집에서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왜 달랐는지 몰랐고 그게 폭력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 와서는 문화적 정체성과 인종적 정체성에 대한 지식, 다양성에 대한 교육을 학교에서 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랄 때 백인 위주였던 것과 많이 달라졌죠. 

팟캐스트: 자랄 때 괴롭힘을 심하게 당하셨군요. 인종차별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하시나요?

티모시: 칭총 차이나맨이라고 불리거나, 눈을 찢거나, 그런 괴롭힘을 주로 당했죠. 애들이 의도적으로 인종차별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아주 복잡한 주제지만 제 생각으로는 그 친구들이 아시아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애들이 아시아에 대해서 알 방법은 영화와 대중매체의 묘사였죠. 그 시대에 영화에 아시아계가 나왔다면 공부 벌레, 악인, 아니면 무술가이고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다양성이 늘어나면서 아시아계가 멋있고 훌륭하다는 묘사도 늘어났어요. 하지만 그때 영화에서 나온 아시아계의 묘사는 대부분 부정적이었죠. 대부분은 단순히 배경에 나오는 엑스트라이거나 스쿨 오브 락에 나온 것처럼 공부 벌레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매력적인 사람으로 묘사되지 않았고, 사람처럼 묘사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제가 성장할 때는 아시아계 여자애들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금발 푸른 눈인 백인 여자애들을 더 좋아했어요. 제가 백인 친구들과 같이 자랐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주변 환경에 맞춰 흥미도 생기는 법이죠. 전 아시아인들이 못생겼다고 생각했어요. 아시아인들을 잘 보지 못했고, 본다고 해도 제가 본 영화와 매체로 인해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죠. 데이트 상대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에 학교에 아시아인들도 얼마 없어서 매력적으로 느낄 시간도 없었다고 생각해요. 

-광고-

티모시: 전 한국에 8번 방문했습니다. 첫 방문은 제가 5살이었을 때고 잘 기억나지 않아요. 5살이었고 부모님과 같이 다녔기에 한 두 가지 일만 기억나죠. 15살 때 운이 좋아서 프로그램의 일원로 한국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평범한 15살보다는 성숙했지만 동시에 경험을 받아들이기에는 어렸다고 생각하죠. 제 어머니와 같이 한국에 방문했고, 짧은 여행이었어요. 나이를 충분히 먹어서 여러 가지를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에게 아주 중요한 경험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할 나이였어요. 그래도 아주 좋은 여행이었죠. 15살인 저에게 있어서는 한국에 돌아간다는 생각보다는 우와! 외국에 놀러 가는 휴가에 제가 돈을 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더 중요했습니다. 제가 태어난 나라를 방문하는 중요한 일이었지만 피부로 느낄 수가 없었죠. 또 다른 15살 입양아가 같이 여행을 했던 기억이 나요. 프로그램 구성 자체도 아주 좋았죠. 한국계 입양아를 데리고 있는 가족이 한국 여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선택지였습니다. 어린 한국계 입양아들이 한국 경험을 하게 하는 일은 좋지만, 아이들이 얼마나 받아들일지 모르고, 어떤 영향을 받을지 모르죠. 어쨌든 그 프로그램에 참여한 나이가 많은 입양아는 저를 포함해 2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입양아와 제 차이점은 전 제가 동의해서 여행에 따라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어머니가 가지 않겠냐고 물었고 제가 동의했죠. 하지만 다른 입양아는 지금 생각해보니 호텔에 남아 있으려고 했고 화를 자주 냈습니다. 한국에 오고 싶지 않았는데 강제로 왔던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가 그 애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알려주려고 노력을 했지만, 그 애는 준비가 안 됐었다고 생각해요. 

티모시: 그 여행을 시작한 뒤부터 제 정체성 탐색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물론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데는 5년 정도 걸렸어요. 프로그램 5년 뒤에 프로그램을 준비한 사람의 딸이 저에게 연락을 해왔죠. 보통 부모님이 그러한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직접 이야기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저에게 연락해서 장학금 제도가 있는 데 관심이 있냐고 했죠. 전 세계 한국계 입양아를 대상으로 80명의 입양아를 한국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였고, 한국계 호주 입양아들을 위해서는 5명에서 10명 정도의 자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장학금 제도를 사용해서 한국에서 공부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이야기를 잠시 2004년으로 되돌려 보죠. 한국에 가기 전에 우리 가족의 친구분이 한국인들을 호주에 2주에서 3주 정도 생활하게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적응하도록 돕는 일을 도와줄 수 있냐고 저에게 묻더군요. 그 일이 참 좋았던 게 강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가족 친구분이 한국인이 이렇게 많이 올 텐데, 와서 도와주면 한국 음식도 먹고 교류도 할 수 있다고 권유하셨어요. 아르바이트보다는 자원봉사에 가까운 일이었고, 제 펜팔 친구도 일하다가 만났어요. 처음은 편지로 시작했다가 다음은 이메일로 바뀌었죠. 몇 달간 서로 연락을 하다가 제가 2005년 9월에 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언제 한국에 가는지 이메일로 써서 보냈죠. 친구의 아버지가 대구에서 제가 지내던 곳인 강원도 설악산까지 그 친구를 운전해줬습니다. 그 친구가 도착했을 때 밤 11시쯤 됐죠. 한국에서 처음으로 친구와 만나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친구가 저에게 한국산 자명종을 선물로 줬어요.

팟캐스트: 자명종을 묘사해주실 수 있나요?

티모시: 불도그 모양인데 알람을 맞추면 일어나지 않으면 문다는 노래를 한국어로 부르는 자명종이죠.

팟캐스트: 오 멋있네요.

티모시: 아주 좋은 자명종이었죠. 부모님은 싫어하셨습니다. 우리 집이 L자 모양이라 한쪽에는 제 방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부모님의 방이었는데 자명종이 부모님을 깨우지만 정작 저는 깨우지 않았거든요. 

티모시: 건전지 수명이 아주 오래가서 조금 무서웠던 것 같아요. 9년 뒤에 가서야 건전지 수명을 다 됐죠. 다시 돌아가서, 그 애가 7시간이 걸려서 저를 만나러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놀랐습니다. 중간 지점에서 만날 수도 있었겠지만, 제가 밖으로 나갈 수 없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때가 주중이기도 했고 교환학생이었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잠시 정리를 하자면, 호주에서 만난 한국 친구와 만난 것이 어머니와 한국을 방문한 뒤였나요?

티모시: 그렇죠.

팟캐스트: 그리고 7시간 동안 친구가 밤길을 달려와서 티모시 씨를 만나러 왔군요. 

티모시: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티모시 씨가 꽤 좋은 친구였나 보군요?

티모시: 네. 펜팔 자체가 흥미로운 경험이었죠. 1년 정도 편지를 나누다 그 친구가 호주에 놀러 왔어요. 최초로 한국인과 가진 깊이 있는 교류였죠. 다른 교류들도 의미가 없지는 않았지만, 한국인과 우정을 쌓은 첫 경험이었습니다. 거기에 서구 경험이 있지만, 한국 출신인 친구여서 더욱더 귀중한 경험이었죠. 한국에 사는 사람 중 일부는 외국에 관해서 관심이 없어요. 여행할 돈이 없고 다른 문화 경험할 여유가 없다는 사람도 있고, 영어를 배우려고 학 관심도 있지만,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에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죠. 한국을 떠나서 여행도 해보고 싶고 다른 나라에서도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쨌든 그러한 모험심이 있는 친구와 고전적인 방식으로 편지로 연락하면서 우정을 쌓아서 좋았습니다. 나중에는 이메일로 쓰긴 했죠. 2005년 가족 여행 때는 펜팔 친구가 절 만나러 호스트 가족이 살던 곳으로 오기도 했습니다. 우리 가족과 호스트 가족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우리가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 유일하게 서로 연락을 계속 주고받은 가족이었죠. 대부분 가족은 연락이 끊겼거든요. 제 고향인 한국에서 혼자 지내지 않으면서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사람들과 지내고, 그러면서도 제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우리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에 비중을 두지 않았죠. 만약에 우리가 호스트 가족과 그냥 만났다면, 제가 한국인인데 한국어를 말하지 못해서 이상하게 여겼겠죠. 하지만 프로그램 일부로 만났기 때문에 우리 상황을 알고 있었고, 우리가 적응하도록 도와줄 수 있었어요. 여행을 갔을 때 순천에 있는 호스트 가족과 같이 지냈습니다. 그 가족의 아들과 같이 합기도 수업을 받았어요. 어렸을 때 당수를 배운 적이 있어서 금방 적응했죠. 물론 같이 지낸 시간은 하루 정도였습니다. 하룻밤 동안 거기에서 지내고 아침 일찍 떠나는 일정이었지만, 그 뒤로도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어요. 그 가족의 아버지는 수학 선생님이었고, 어머니는 영어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소통하기 편했고, 가족들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티모시: 2010년에 80명의 다른 입양아들과 같이 한국 장학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그때는 19살 때였죠. 이 장학 프로그램 지도자도 19살이었어요. 그 친구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학교 축제가 있는데도 술을 못 마시게 해야 했으니까요. 결국, 프로그램과 학생들이 협상해서 술은 마실 수 있지만 너무 마셔서 프로그램에 지장이 가거나 사고를 치면 프로그램에서 쫓아내기로 했죠. 딱 좋은 결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술 마시지 않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니까요. 전 세계에서 모인 80명의 입양아가 프로그램에 참여했죠. 다양한 입양아들을 만났습니다. 80명이 넘는 사람들이라 전부 기억하지 못하지만, 친구가 된 사람들은 기억하죠. 우리가 입양아라서 좀 더 친구가 되기 쉬웠다고 생각합니다. 입양아 사회의 입양아들 일부가 우리는 입양아니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전 그 사고방식에 동의하지 않아요. 입양아라고 해서 서로 친구가 되지는 않습니다. 한국계 입양아들은 한국인이면서 입양아라는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이지만, 서로 사람이기 때문에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친구가 되어야 하지는 않죠. 물론 입양아들끼리 친밀감을 가질 수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아주 친한 친구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단순한 지인 관계여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서로 알아가다가, 서로 마음이 맞으면 친구가 되죠. 호주 입양아들이 좀 더 그런 쪽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고 지내는 지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혼에 초대할 정도로 깊은 관계를 쉽게 맺지는 않아요. 소통해야 할 때는 소통하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삶이 있고, 관계가 있습니다. 친구는 그러한 친밀한 관계에서 탄생하기 마련이죠. 

티모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을 때 제가 태어난 병원에 방문했어요. 재건축을 위해서 문을 닫은 상태였습니다. 다음에는 동방사회복지회에 가서 입양 서류 조사를 진행했죠. 제 친구가 한국어와 영어를 둘 다 잘해서 번역이 필요하면 부탁하라고 했어요. 저는 친구에게 사실대로 번역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가끔 번역가나 통역가가 내용을 너무 순화시키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단순히 사실을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죠. 사람들이 이렇게 내용을 순화하는 이유를 알지만, 직접 사실을 이야기해야 할 때 못하는 예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15살 때 제 위탁 가정 아버지를 만났어요. 그분이 저를 기억하셨고 제 위탁 가정 어머니에 관해 이야기를 하셨죠. 우리가 만나기 몇 달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위탁 가정 아버지가 저희를 만나러 오고 저를 기억했다는 사실이 대단했죠. 그리고 아들들도 저를 기억하고 있다고 했어요. 그때 저는 위탁 가정 아버지가 저에게 어떤 관계인지 알고 있었지만, 반응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때 제가 위탁 가정 아버지에게 들은 제 배경 이야기는 친어머니가 미혼모였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이사했고, 어머니와 맺어질 수 없어서 저를 입양에 맡겼다는 이야기였죠. 다음에 들었을 때는 여행의 실수였다는 이야기였고, 그다음에는 하룻밤의 불장난으로 제가 태어났다고 했지만, 마지막으로 들었을 때는 강간 문제로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전부 아주 다른 이야기이죠. 첫 이야기는 사랑했지만 맺어질 수 없었고, 두 번째는 실수이기 했지만, 사회적으로 문제 되는 이야기였지만, 마지막 이야기는 정말로 달랐습니다. 사랑했지만 맺어질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서 강간으로 넘어갈 수 있다니 문제가 심각했죠.

티모시: 그래서 사람들이 번역해주는 제 배경 이야기에 대해서 믿음을 잃었고, 제도 자체에 믿음을 잃었습니다. 직역할 용기가 없는지, 아니면 입양 서류에 나와 있는 대로 번역하지 않고 입양아들에게 좀 더 편안한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서 의역을 하는지 알 수가 없죠.

팟캐스트: 어떨 때는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는 이야기군요? 

티모시: 제가 네 가지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됐는데 넷 다 다른 이야기라면 이상할 수밖에 없죠. 대부분 입양아는 친어머니를 찾아요. 친아버지를 찾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입양아 사회에서 친 아버지들은 그렇게 좋은 평가를 못 받으니까요.

팟캐스트: 사회 복지사에게 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야기가 달랐는지 물어봤나요? 

티모시: 사회 복지사에게 질문하지 않았지만 아마 해야 했겠죠. 5번째로 한국에 돌아갔던 때는 2009년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돈을 내야 했지만 정말로 알고 싶었어요. 제 친구와 같이 여행을 했는데 이 친구는 회의주의자라 거짓말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듣는다면 저에게 말해줄 수 있었죠. 입양아들과 동방사회복지회에 대한 조사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절대 복지회를 믿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와요. 물론 제가 그게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관점도 압니다. 입양아들이 입양기관을 안 믿고 자기만의 사실을 믿으려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번역 자체가 어렵죠. 의미를 어떻게 완벽하게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있을까요? 번역 중에 뜻 중 일부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2019년에 제 친구와 같이 갔을 때 방에 못 들어가게 하더라고요. 이상했죠. 보통 가족은 들여보내기 마련인데 친구의 남편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2010년에 제가 최종 조사를 하기 위해서 방문했을 때는 제 친구가 같이 들어올 수 있었어요. 그들이 말하기를 2005년에는 제 친어머니와 연락이 닿았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어머니가 모든 정보를 부정하고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15년이나 지났으니 이해가 되긴 했죠.

티모시: 하지만 2010년에도 다시 조사했는데, 2016년에야 2005년에 어머니가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2010년에도 어머니가 연락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저에게 했지만, 복지회에서 2005년에 이미 연락하지 말라고 화를 냈다는 이야기를 저에게 말해주지 않았죠. 그걸 듣고 나니 화가 났습니다. 어머니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제가 입양기관에 방문해서 이 편지를 보내주거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 달라고 부탁했으니까요. 하지만 2005년에 입양기관이 어머니에게 연락했을 때 화를 냈고 연락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저에게 알려주지 않았으니 그런 일이 일어났죠. 2005년에 어머니가 연락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2010년 조사를 하지 않고 다른 접근 방식을 취했을 겁니다. 입양기관은 입양아에게 사건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보만 알려줘요. 아니면 꼭 알려줘야 하는 정보만 가르쳐주죠. 직접 하는 질문만 대답해줍니다. 입양기관들이 사업으로 활동하는지, 아니면 입양아의 안위를 위해서 움직이는지 알 수 없어요. 입양기관들과 입양아들 사이에 깊은 골이 존재하죠. 제 서류 조사, 제 입양 서류, 제 한국 부모의 이름, 그분들의 출생지, 형제자매, 그리고 다른 정보를 원하는데 한국 제도가 개인정보에 더 비중을 두게 되어서 정보 대부분을 검열합니다. 성은 알려주지만 이름 자체는 검열하죠. 그래서 새로운 서류 양식이 생겼고, 전 복지회에 한국 서류를 한글로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번역된 서류가 아니라 원본을 달라고 요청했죠. 그럼 제가 번역을 할 수 있는 친구에게 가져갈 수 있고 어떻게 번역되는지 원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요. 번역 자체에 복잡한 관계성이 있는데 많은 사람이 그걸 망각한다고 봅니다. 직역이 있고 의역이 있죠. 두 번역 방식은 차이점이 크다고 봐요. 제가 한국 서류가 있으면 제가 한국어를 배워서 그걸 직접 읽을 수 있겠죠. 친구나 다른 사람과 같이 번역해서 진짜 사실에 가깝게 정보를 얻어낼 수도 있습니다. 현재 기관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믿음이 가지 않아요.

팟캐스트: 현재는 이 모든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시죠?

티모시: 조사 절차는 대부분 끝마친 상황입니다. 유전적 조사도 생각해보고 있고요. 한국에 2년간 살면서 문화적 정체성을 많이 구축했죠. 아주 힘들었죠. 생각해보니 그 한국 경험에 대해서 집중해야 했네요. 

팟캐스트: 한국에 언제부터 언제까지 사셨죠? 

티모시: 2013년에서 2015년까지 한국에서 살았죠. 작은 시골 마을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살았어요. 그 생활이 제 정체성 구축에 큰 도움을 줬습니다. 미국인이건 호주인이건 많은 한국계 이민자들이 한국에 가서 자기 정체성을 찾죠. 이민자들은 한국인이지만 외국에서 자라서 집에서는 한국어를 하지만 밖에서는 외국어를 합니다. 입양아들과 비슷하지만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요. 한국에서의 첫 6달은 아주 힘들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다른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서 마음에 안 드는 일을 말하면 제가 한국 방식은 이렇다고 한국을 위해서 변명하려고 했죠. 하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노동과 관련해서 큰 문화적 차이가 있었어요. 미국과 호주의 노동 윤리는 한국의 노동 윤리와 아주 다릅니다. 한국 특유의 계급 체계에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그들에게 이득이 되면 저를 한국인으로 취급하지만, 이득이 되지 않으면 절 한국인으로 취급하지 않았죠. 스포츠의 예를 들면 두 개의 팀이 있고 능력이 비슷하다면 더 오랫동안 경기를 해온 팀을 선택해 응원하겠죠. 더 많은 경험이 있으니 그 선택 자체는 나쁘지 않아요. 그래서 선생 일할 때 비슷하게 대우받아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1년 일한 선생보다 2년 일한 선생을 더 대우해 주는 것이 맞죠. 한국 문화라고 하길래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1년 더 지나서 똑같은 상황에 놓였죠.

티모시: 제가 2년 있었고, 저보다 2살 어린 후임은 1년만 있었는데 후임을 더 좋게 대우해 주더군요. 제가 왜 그렇게 되느냐고 묻자 한국 문화라고 하더군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입양아들이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차별이 존재했죠. 한국 내부에도 이러한 차별이 존재했습니다. 순수 한국인들과 한국계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고, 한국인이라고 인정받지 못하죠. 한국에서 2년간 교육자로 일하면서 첫 6개월은 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었고 제가 좀 더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한국 정체성을 무시했으니 더 채워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때는 제가 절반은 한국인, 절반은 호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2년이 끝나고 나니 저는 한국인이면서 동시에 호주인이고 그게 제 정체성임을 깨달았죠. 한국인의 정체성은 퍼센티지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한국 문화를 배울 수는 있겠지만 호주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완벽하게 한국에서 자란 한국인들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을 따라 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한국인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티모시: 이 문제를 제가 받아들이면서 정리할 때, 다른 친구가 축구에 비교해서 이걸 설명했죠. 저에게 한국과 호주가 월드컵 경기를 치른다면 누굴 응원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 말에 저는 둘 다 응원하겠다고 말했죠. 둘 다 내가 사랑하는 국가이니 누가 이기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답했죠. 전 한국인이자 호주인이니, 누가 이기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죽고 사는 문제라면 어떤 나라를 응원하겠냐고 물었죠. 전 제가 호주에서 자라났으니 호주를 응원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렇게 문답을 주고받으니 제가 얼마나 한국인인지, 얼마나 호주인인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 두 가지 정체성이 저 자신을 만들고, 한국 정체성과 호주 정체성을 사용해서 저 자신을 규정하죠. 전 40%, 50%, 한국 문화를 얼마나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항상 정체성이 숫자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자라난 사람이죠. 두 가지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도 괜찮아요. 전 제가 한국계 호주인보다는 호주계 한국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티모시 씨, 사람들이 SNS로 티모시 씨를 구독하거나 찾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죠? 

티모시: 페이스북에 Tim Kim이라는 계정이 있어요. 한국 이름인 김천엽이 계정에 붙어 있습니다..

Season 4, Episode 15: 선아 마리 레이번

Audio available Feb. 22, 2021 at 12:00 ET.

한국계 입양아 선아 마리 레이번 (38세)는 생후 4개월 만에 한국에서 미국 테네시주로 입양되었다. 양어머니가 어렸을 때 돌아가시고, 학교에서 흑인도 백인도 아닌 채로 삶을 헤쳐 나가야 했던 레이번 씨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감정을 숨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육자, 연설자, 코치, 팟캐스트 진행자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최근 레이번 씨는 개인적 정체성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름을 한국 정체성을 반영하도록 바꾸었다. 

선아: 안녕하세요! 선아 마리 레이번이라고 합니다! 38세이긴 한데, 나이 기억하는 게 어렵네요. 시간이라는 게 다 그렇죠. 뭐. 현재 제가 자란 고향인 테네시주 멤피스에 돌아와서 지내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테네시주에서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선아: 전 멤피스에서 자라났는데 멤피스는 흑인과 백인의 비중이 높은 도시에요. 역사적으로 흑인과 백인의 비중이 높은 도시였죠. 물론 현대에 들어서서는 좀 더 인종적으로 다양해지고 있죠. 히스패닉 인구도 늘었고, 아프리카 흑인계 인구와 아시아계 인구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멤피스에는 중국계 인구도 많았죠. 물론 역사적으로 중국계 멤피스인들은 무시되어 온 경향이 있어요. 이야기가 딴 길로 샜으니 다시 돌아가면, 제가 자란 동네는 랄리라는 동네였는데 흑인과 백인 비중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제 학교, 동네에서는 백인이나 흑인이 아닌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죠. 자라면서 백인에 섞이거나 흑인에 섞이거나 둘 중 하나를 정해야 했어요. 적어도 제가 사는 동네는 다른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제가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다른 멤피스 출신 한국계 입양아를 만났어요. 그리고 그가 말하길 “입양아 단체와 활동하기도 했고…” 그걸 들은 저는 “뭐요?”라고 답했죠. 제가 경험해보지 못해서 이야기를 들어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팟캐스트: 선아 씨가 다닌 학교는 자발적 인종적 구분이 되어 있었나요? 백인들과 흑인 애들이 서로 따로 놀았나요? 아니면 좀 더 통합된 분위기였나요? 

선아: 살면서 여러 학교에 다녔죠. 그래서 다닌 학교마다 답이 달라요. 초등학교 때는 제가 유치원, 초등학교 1학년, 2학년을 다 다른 학교에 다녀서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백인 위주의 초등학교를 계속 다녔죠. 거기에는 제가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자발적인 분리가 있었어요. 중학교는 아주 큰 중학교에 갔죠. 다양한 집단의 아이들이 있었어요. 인종, 취미, 음악, 기타 등으로 집단이 나뉘었죠. 그래서 중학교 때는 확실히 인종 분리가 있었죠. 고등학교는 제 동네에 있는 고등학교에 갔습니다. 거기는 대부분 흑인이 사는 곳이었어요. 그래서 다른 인종들이 인종적 분리가 일어날 정도로 많지 않았죠. 물론 2명 정도의 백인 애들이 따로 돌아다니긴 했지만 서로 사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애들을 제외하면 흑인이 아닌 애들이 너무 적어서 아예 따로 집단을 만들 수 없는 수준이었죠. 

팟캐스트: 그때는 어떤 정체성을 가지셨다고 생각하시나요?

선아: 살면서 다양한 정체성을 거쳐 갔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가 어디에 맞는지 찾으려고 생각했죠. 중학교 이전까지는 백인 친구들과 더 공감하고 더 맞았다고 생각해요. 백인 가족들과 같이 자라났고, 백인 정체성이 더 강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고등학교를 골라 입학할 수가 없었어요. 특수 교육 제도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점수가 나빠져서 떨어져 나왔죠. 중학교-청소년기의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정체성 문제, 어머니의 사망, 거대 중학교 적응 문제가 있어서 결국 제가 배정받은 고등학교에 갔어요. 그 고등학교는 흑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제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죠. 수많은 흑인 친구들을 보면서 그들의 정체성, 친구들, 인연, 사회에 대해서 배웠고, 사고방식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중학교는 국가적으로 인정받는 중학교였고 따라서 자원도 많았죠. 하지만 제 지역 학교를 와보니 사람과 예산이 적은 공립학교였어요. 시점의 변화를 겪으니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공평한 기반을 가지고 공평한 기회를 받는다는 관점이 무너졌죠. 모든 것에 대한 사고방식이 바뀌었어요. 그리고 인종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차이점은 인종 구성밖에 없었거든요. 

팟캐스트: 사람들이 선아 씨를 어떻게 인식하셨죠?

선아: 고등학교 때는 제가 입양아였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제가 흑인 위주 학교의 유일한 아시아계였기 때문이었기 때문에 절 아시아계라고 인식했을 뿐이었죠. 반면에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똑같은 아이들과 계속 학교를 같이 다녔기 때문에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서로 가족들에 대해서 알았고, 형제자매가 있는지, 이혼했는지, 부모 혼자 키우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았어요. 그래서 제 초등학교 친구들은 제 어머니가 죽었고,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제 입양아의 정체성이 더 컸죠. 사람들이 제 가족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학교에 아주 다양한 가족 형태가 있었고, 서로 정보를 알고 있어서 정체성에 하나 더 추가된 정도였습니다. 제 입양 사실이 한번 언급되었던 일은 초등학교 시절에 친구와 말다툼을 했을 때였어요. 그 애가 저에게 “내 엄마는 날 사랑해서 입양 제도에 맡기지는 않았다고!”라고 말했죠. 물론 우리가 그런 생각을 이미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고, 애가 저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한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애는 할머니가 키우던 애였어요. 자기 자신의 상황을 감추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 같았죠. 그 애도 어머니와 살고 있지 않았고, 양육할 수 없어서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그 애와 다르게 백인 부모님이 학교에 데리러 오거나 하는 일들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숨길 수 없었고, 그래서 이런 말을 하기 쉬운 상대였어요. 

팟캐스트: 애들과의 소속감 문제 때문에 동네 고등학교로 진학했을 때 백인 부모님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나요? 

선아: 아주 좋은 질문이네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다니던 중학교를 계속 안 다녀도 됐기 때문이죠. 제가 중학교와 연계된 고등학교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의 친구들과 사이가 틀어졌기 때문이죠. 하지만 제가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그 친구들이 마음에 안 들어도 같이 다녀야 하고 고등학교 때까지 봐야 했습니다. 같은 학교에 다닌다면 계속 봐야 할 그 친구들과 헤어지고 새로운 학교에 갈 수 있어서 기뻤을 뿐이죠. 

팟캐스트: 새롭게 선아 씨의 이미지를 바꿀 기회였군요?

선아: 그랬습니다. 사실 아는 사람이 없으니 새로운 학교에 가는 일이 매우 무서웠어요. 하지만 동시에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가 말한 것처럼 새로운 시작을 할 기회였죠. 그래서 최대한 즐겁게 새로운 학교생활을 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중학교 때 영재 교육을 받았을 정도면 성적 우수자였죠?

선아: 네.

팟캐스트: 그래서 성적 우수자나 모범생으로 규정되거나 관련 선입견 문제를 겪은 적이 있나요? 

선아: 제가 어렸을 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절 포함해서 아시아계가 2명 밖에 없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좀 더 신경 쓰이기 시작했죠. 아시아계이니 성적이 좋겠지, 좋게 나오겠지라는 선입견과 기대를 받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선생님이 저를 1학년 더 빠르게 월반하게 하려고 했죠. 제 독해 능력 덕분에 부모님에게 월반을 권유했고, 월반하게 되었어요. 아버지가 말하기를 나이 많은 애들 사이에서 적응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적응하기 어려운 이유는 나이 많은 애들 때문이 아니었어요. 제가 멤피스에서 사는 아시아계 입양아였기 때문이었죠. 나이 문제는 그리 큰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팟캐스트: 많은 입양아는 인종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자랐죠. 

선아: 그랬죠. 인종은 최대한 언급되지 않았고, 문제가 있다고 해도 우리 가족 내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문제였습니다. 인종 문제는 흑인 사회에서 일어나는 흑인 문제이지, 우리가 직접 겪는 문제는 아니었죠. 전 이 나라는 기회의 땅이며, 평등의 땅이니, 열심히 노력하고 일하면 뭐든지 이뤄 낼 수 있고, 다른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개인의 책임과 선택 문제라고 교육받고 자랐어요. 그리고 배운 사실을 전부 다 믿었습니다. 전 그런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고, 제 부모님이 저에게 말하는 일이었고 전 제 부모님을 믿었죠. 어른이니까, 삶이 그런 식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인식 자체를 못하거나, 나중에나 인식해서 적응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제가 어렸을 때 그러한 선입견을 깨부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렸을 때 사실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전에도 들은 적이 있는데, 아주 힘드셨겠군요? 그때 선아 씨가 외동딸이셨나요?

선아: 네. 외동딸이었고 아주 완벽히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어머니 관련 문제를 다 겪는 느낌이었어요. 어머니가 제가 9살이었나 10살 때 유방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이미 치료할 수 없는 시점까지 전이가 되어 있었죠. 그래서 부모님은 어머니가 최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기로 했어요. 그래서 제 어머니의 암이 진행되면서 어머니가 아니게 되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습니다. 아이로서 어머니가 하는 말이나, 어머니가 하지 못 하는 일 등, 어머니가 변화해서 이해할 수가 없는데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했죠. 아주 힘든 경험이었어요. 거기에 더해서 제가 이러한 슬픔에 대한 대응력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않았고, 그 뒤 몇 년 동안 울지 않았어요. 따라서 억압과 관계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가 뒤따라왔죠. 정신적으로 아주 불안정한 몇 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또 다른 어머니를 잃었다는 감정과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버림받은 기분을 느껴야 했어요. 

팟캐스트: 그때 또 다른 어머니를 잃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셨나요?

선아: 아뇨. 그렇게 인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는 이미 입양에 대한 여러 가지 억눌린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죠. 제가 이러한 감정을 인식하게 된 이유는 제 아버지가 저를 정신 상담을 하게 해주었기 때문이었어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제 감정을 이해하고 인정하게 도우려고 하는 상담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죠. 분노와 슬픔 같은 아주 기본적인 감정부터 인식하고 인정하는 일부터 시작하게 되었고, 상담사는 감정을 찾아서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이야기를 하셨어요. 이게 필기 형식이었는지, 구어 형식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단어 연결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온 단어 중 하나가 어머니였어요. 어머니와 여성 관련 단어가 잔뜩 있었지만, 그 단어들과 제가 연관시킨 단어들이 전부 부정적이었죠. 무책임하다, 접근 불가능하다, 등 나쁜 단어들로 가득했습니다. 어머니, 여성, 부모,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감정이 가득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상담 자체도 매우 짧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제가 도움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상담사한테서 상담 치료사에게 인계해줬죠. 첫 번째 상담사는 기본적인 상담을 해주시는 분이셨고, 이분은 진짜 상담 치료를 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상담 치료사가 저에게 처음으로 한 말은 만약에 상담 치료사를 계속 바꿔야 한다면 문제는 저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었죠. 전 고작 어린 애였고 10명이나 20명을 넘어갔다면 모를까 이번이 제 두 번째 상담사였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이상했어요. 그래서 그 상담 치료사에게는 다시 가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잘하셨네요. 

선아: 네 듣고 나니 어이가 없었어요.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거나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버림받는 기분에 대한 수용 절차를 시작하셨던 것 같네요.

선아: 네.

팟캐스트: 삶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계셨으니까요.

선아: 그렇죠.

팟캐스트: 무의식적으로 친어머니에 대해서도 그런 감정을 가졌을 수도 있었겠네요.

선아: 네 그렇습니다. 그때는 친어머니에 대해서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거든요. 정확히 말하자면 인식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은 하고 있지 않았죠. 그 시점에는 제 삶에 두 명의 어머니를 둘 정도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아버지와는 친밀한 관계였나요?

선아: 네. 아주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시는 분은 아니었어요. 적어도 언어적으로는 그랬죠. 설명하기 어렵지만, 아버지는 항상 절 사랑하신다고 하고, 현재는 다른 주에 살고 있지만 직접 만나면 애정 표현도 하고, 서로 안기도 하고, 제 삶의 중요한 일에 반드시 참여하셨습니다.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모든 행사를 보시는 부담스러운 아버지였어요.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런 애정이 필요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여러 연극, 연주회가 있었고 아버지는 제가 참여하는 연극과 연주회에 항상 참여하셨죠. 전 치어리더였고 아버지는 제가 나가는 모든 스포츠 대회에 참가하셨고, 댄스팀에도 참여했는데 아버지는 거기에도 계셨습니다. 초등학교 때 일인데 멤피스 오페라와 공동 공연을 하게 될 기회가 있었어요. 그리고 부모님에게 표를 나눠줬는데 가장 윗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공연할 때 그 윗자리를 보니 아버지가 몸을 흔들면서 우리 공연을 보고 있더군요. 아주 부끄러웠죠. 아버지는 항상 행사에 참여하셨습니다. 하지만 애정을 말로 표현하지 않았어요. 어떤 부모님은 말을 하는 편이지만, 우리는 안 그랬죠. 우리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그러한 관계가 지속하였나요? 

선아: 약간씩 감정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긴 했죠. 하지만 자주 나누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들어서 조금 늘어나긴 했어요. 4년 전에 아버지가 재혼하셔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죠. 아버지가 재혼하신 여성분은 아이가 있어요. 그리고 재혼하시자 아버지의 사고방식이나 기분이 바뀌는 것을 느꼈습니다. 대화 관련해서 좀 더 열린 태도를 보이시게 되어서 흥미로워요. 아버지를 단순히 아버지가 아니라 똑같은 어른으로 보는 경험은 이상하지만 동시에 아주 재밌었죠.

팟캐스트: 그래서 그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와 선아 씨뿐이었군요? 선아 씨가 자라는 동안 재혼도 안 하셨나요?

선아: 네. 아주 오랫동안 둘이서 지냈죠. 뭐 제가 학사학위를 따고 난 뒤에는 조금 데이트를 시작하셨지만, 그렇게 진지하게 만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그저 우리 둘뿐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아버지와 단둘이 다니다 보니 선아 씨와 아버지를 보고 선아 씨를 외국인 아내로 생각하지는 않았나요? 

선아: 네. 그런데 그러한 착각을 제 청소년 초기부터 받았어요. 아주 끔찍한 일이지만 청소년 초기에 아버지와 함께 장을 보러 갔던 일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은퇴한 해병이시라 군부대에서 살고 있었어요. 군부대 내부라서 더 그런 오해를 하기 쉬웠던 것 같습니다. 군인들이 아시아계 아내를 두는 일은 흔했고, 제 앞이나 뒤의 사람도 그런 식으로 오해를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소리를 듣고 좀 끔찍했죠. 아시아계 여성들이 젊어 보이긴 해도 전 1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아주 기분 나쁜 일이었습니다.

팟캐스트: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좀 해보죠. 그때 친구들이 대부분 흑인이었나요?

선아: 네 그렇습니다. 친구 만드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긴 했죠. 물론 애들이 흑인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친구를 만드는 데 관심이 없었어요. 제가 같은 중학교와 연관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아서 기뻤던 이유는 제 친구들 전원이 가짜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청소년기에 있어서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저에게는 꽤 충격이었습니다. 전부 거짓말을 하고, 서로 뒤에서 욕을 했죠. 이게 우정이라면 이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관계와 관련된 문제가 많아서. 고등학교 시작할 때는 학교에 가고 수업만 듣자고 생각했습니다.

팟캐스트: 주변을 경계하셨다는 말이군요?

선아: 네. 하지만 결국 친구를 만들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제 친구가 된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학교에 유일한 아시아계 여자애와 친구가 된다는 일이 어땠을까요? 그 애에게 말을 걸어보면 이상할지 아니면 평범할지 의문을 가졌나? 이라는 질문을 하게 되죠. 

팟캐스트: 선입견 문제가 있었나요? 아니면 남자애들 관련해서 페티쉬 문제도 있었나요? 

선아: 제가 과거를 되돌아보니 그러한 문제가 많았죠. 제 고등학교 1학년 때 제가 그 학년에서 유일한 아시아계 학생이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 같이 편견 섞인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가라테, 쿵후, 태권도를 할 수 있느냐, 코니 청(Connie Chung, 미국의 유명 아시아계 기자)이나 브루스 리(이소룡)의 친척이냐, 가족이 세탁소, 슈퍼마켓, 중국 레스토랑을 운영하느냐, 그 레스토랑에서 사느냐, 거의 매일 같이 그런 소리를 들어야 했죠. 다행히도 제가 말을 잘하는 편이었기에 때문에 그런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제가 이러한 말에 쉽게 상처받거나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라 다행이었죠. 사람들이 저에게 익숙해질 때까지 그런 소리를 계속 들어야 했어요. 

팟캐스트: 남자애들 관련해서는 페티쉬 문제가 있었나요?

선아: 예. 하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아시아계 여성과 성적 판타지에 관해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랬죠. 하지만 동시에 남자애들이 저와 데이트를 하고 싶어서 하는 애들이 없었기 때문이 아녔어요. 아시아계 여성이 성적으로 개방되어 있다던가, 순종적이라던가, 남자애들이 하자는 대로 하자던가, 그러한 이야기가 들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누구도 저와 데이트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터부 취급이었나요?

선아: 그럴지도 모르죠? 그래도 아무도 데이트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하면 안 되겠네요. 하지만 사람들이 저에게 한 성희롱이나, 성적 농담이나, 헛소리와 사람들이 저와 데이트하려고 하는 비중은 반비례했습니다. 

팟캐스트: 그때 매력적이라고 자기 자신을 느꼈나요?

선아: 아뇨. 성적 대상화가 되었지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죠.

팟캐스트: 둘은 아주 다른 일이니까요.

선아: 그렇죠. 성적 대상화가 된 기분은 들었지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저 자신과 제 외모에 만족하거나, 기쁘거나, 편하지 않았죠. 

팟캐스트: 그때부터 인종 정치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보시나요?

선아: 네 그렇다고 생각하죠. 제가 학교에 가서 첫 수업을 들었을 때부터 제공되는 정보, 자원, 교과서, 기회의 차이를 보고 확실히 그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공평하지 않았으니까요. 모든 사람이 동등한 기회와 선택지를 받는다고 배우면서 자랐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매우 화가 났죠. 그때의 저는 이미 충분히 화난 아이였지만, 그 분노가 어떤 초점에 맞춰졌다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팟캐스트: 학교들 사이에서 느낀 차이점들이 무엇이었나요?

선아: 우선 교과서들부터 달랐죠. 우선, 제가 다니던 중학교는 교과서가 전부 신품이었습니다. 반면에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교과서가 충분치 않거나, 오래된 교과서나, 아니면 너덜너덜한 교과서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거기에 더해서 제 고등학교에는 급식실이 없었습니다. 지자체의 관리 구역이 바뀌면서 관련 건설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급식실이 건설되지 않았던 거죠. 아이들이 밥을 먹을 권리도 없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팟캐스트: 시설들이 관리되지 않거나, 좋지 않거나….

선아: 그렇죠.

팟캐스트: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일도 있죠.

선아: 네 그렇습니다.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죠.

팟캐스트: 선아 씨,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시점이 고등학교 이후였나요?

선아: 고등학교 졸업하고 난 뒤 한참 지난 뒤였습니다. 멤피스에 입양아들도 많았고, 아시아계 집단이 교외에 얼마든지 있다고 들었지만 제가 자란 동네와 제가 살아가는 삶에는 없었어요. 그래서 혼자서 집단의 정체성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아시아인을 살면서 몇 명 만나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겠어요? 한국인을 만난 적도 없는데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질 수 없죠. 제 학교에 중국/백인 혼혈인 아이가 있었고, 일본계 쌍둥이를 알고 있었지만, 정작 한국계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계 정체성의 뜻을 몰랐어요. 그래서 대학교를 멤피스로 진학했습니다. 멤피스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가게 되었어요. 그렇게 한국계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서서 한국인들과 같이 서 있는 경험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죠. 

팟캐스트: 한국에 관심이 있어서 교환학생을 신청하셨던 거죠?

선아: 네. 관심이 있었어요. 하지만 자라면서 변화했죠. 제가 어렸을 때는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관심을 충족할 방법이 없다면 관심이 떨어지게 되죠. 인터넷이 생기기 전이니 제가 도서관에 가서 입양, 입양아, 제 경험에 관한 책을 찾아서 읽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제 지역 도서관에는 관련 정보가 전혀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입양아에 의한 정보는 없었겠군요.

선아: 네. 적어도 그 시기에는 없었죠. 제 부모님이 말해주실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었고 입양에 대한 기억은 매우 달랐습니다. 그분들은 한국을 개발도상국으로 인식하셨으니까요. 정보를 찾을 수 없으니 물어보지 않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연설을 들었어요. 시스터 소울자(Sister Souljah, 미국의 유명 흑인 운동가)의 연설이었는데 그분이 우리 학교 교정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논란이 될 정도였습니다. 흑인 학생과 대담을 하는데 “역사, 뿌리와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죠.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 무언가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라고 생각했죠. 다음 날에 기숙사에 돌아와 보니 교환학생 홍보 포스터가 붙어 있었습니다. 광고 문구가 “아시아를 상상하라!” 이었죠. 그걸 보니 좋아! 상상하자! 이라고 생각하고 바로 교환학생을 신청하러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 담당관이 교환학생을 하고 싶다고 하자 매우 기뻐하면서 친절하게 도움을 줬어요. 어디를 언제 어떻게 갈지 계획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국에 가고 싶고, 다음 학기에 가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자 그분께서 “좋습니다!”라고 답했죠. 그렇게 해서 다음 학기에 한국에 갈 수 있었습니다. 

-광고-

선아: 제가 한국에 가게 되고, 장학금을 받아서 갈 돈도 있었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니, 제 삶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어요. 한국에 가면 이걸 하고, 하지 말라는 충고를 해줬고, 그걸 들으니 전문가들이 이렇게 많았으면 제가 자라날 때 이야기를 해주지?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 그런 이야기를 최대한 듣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죠. 선입견을 품고 가서, 그 선입견과 한국을 비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국 방문에 대해서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비행기에 타고 나서, 주변 사람들이 다 한국인이고, 승무원들이 한국어로 말을 걸기도 했습니다. 제 옆에 앉아 있던 남성이 저를 도와줬어요. 제가 뭐가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뭔 음식인지도 모르고, 뭐가 일어나는지도 몰랐죠. 

팟캐스트: 김치를 보고 놀라기도 했나요?

선아: 네. 김치가 뭐지? 이게 다 뭐지, 빨간 소스는 뭐지? 이라고 놀라면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아주 신기한 곳이었지만 동시에 제가 어디로 가야 할지, 말을 하는 방법도 모르고, 심지어 공항을 나가는 방법도 몰랐죠. 그렇게 길을 헤매다 제 가이드를 해줄 학생이 와서 만나서 대학교로 가게 됐습니다. 수원에 있는 아주대학교와의 교류 프로그램이라,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꽤 오랫동안 가야 했죠. 버스를 타고 가면서 소소한 것들이 기억이 나요. 주변 사람들이 전부 비슷하게 생겼고, 버스 운전사도 저와 비슷하게 생겼고, 청소부들도 저와 비슷하게 생겼고,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평범한 일을 하고 있었고 그 경험이 매우 편안했습니다. 

팟캐스트: 제가 한국에 돌아갔을 때는 너무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고 있었고, 그래서 한국을 경험하고 제 뿌리를 찾을 수 없었죠. 물론 제가 한국에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한국을 경험하고, 연결을 만들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선아: 네.

팟캐스트: 선아 씨도 그러한 방어적인 태세로 한국에 접근했나요? 

선아: 네. 제가 한국에 갈 예정이었지만, 한국에 가서 제 뿌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 가족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제가 매우 방어적으로 접근했다고 볼 수 있겠죠. 제가 한국에 돌아간다고 하니 많은 사람이 갑자기 한국 전문가가 된 다음에 하던 이야기가 친어머니를 찾을지, 진짜 가족 조사 여부에 관해서 물어보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저와 제 가족에 대해서 생각하던 관점이 튀어나왔고,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문제가 있긴 했지만, 전 여러 명의 어머니나 여러 가족을 허용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해 있지 않았어요. 제가 제 친가족을 찾으면, 제 입양 가족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했죠. 그분들에게 모욕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에 제가 어디에서 왔고, 한국에 대한 정보를 알기 위해서 갔죠.

팟캐스트: 한국 첫 방문에서 재밌던 일은 있었나요?

선아: 한국 요리를 좋아해서 최대한 많이 먹으려고 했어요. 성공해서 미국에 돌아왔을 때 살이 7kg 나 쪄왔습니다. 한국 음식은 훨씬 싸고 접근성도 편했죠. 길마다 온갖 음식점이 있고 그걸 전부 먹었어요. 삼겹살은 천국의 선물같이 맛있고 대단했습니다. 교수님과 마셔도 괜찮고, 학교에서 마셔도 괜찮은 소주도 좋았어요. 음식의 종류가 아주 많았죠. 거기에 같이 지낸 사람들도 좋았습니다. 20명이 넘는 국제 교환학생들이 있었고, 같은 기숙사에서 지냈죠.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는 일도 아주 즐거웠어요. 미국에서 온 애들이 있었고, 독일에서 온 애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온 애들도 있었죠. 그리고 여행하기 쉬운 곳에 있었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제주도에 가서 아름다운 풍경도 봤고, 등산도 했고, 아주 아름다웠어요. 여행하기 쉽고, 음식도 맛있고 한국의 생활이 아주 좋았습니다. 좀 더 길게 지내고 싶었어요.

팟캐스트: 새로운 세계가 열린 기분이셨군요?

선아: 네 그렇죠. 음식을 제외하고 한국에 가서 가장 좋았던 일은 눈에 띄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군중 속에 섞여 들어갈 수 있었어요.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거나, 이상한 질문을 하거나 단순히 사람이 될 수 있었죠. 그냥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었어요. 그 사실에 매우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팟캐스트: 처음으로 맞아 들어갔으니까요?

선아: 네 그렇습니다. 최초로 주변과 섞여들어 갈 수 있었죠. 

팟캐스트: 다른 입양아들과도 만난 적이 있나요? 교환학생 중의 한 명이 입양아였나요? 아니면 한국에 와있는 입양아를 만났나요?

선아: 아뇨. 만나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한국인들이 선아 씨에게 어떻게 반응했나요?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나요?

선아: 아뇨. 사람들이 전 보고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절 확실히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어요. 길을 걸어가다 보면 사람들이 길을 물어보더라고요. 그럼 제가 한국말을 못한다고 답하고는 했죠. 그럼,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절 보더니 사과했습니다. 제가 알게 된 학생들은 아주 한국인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했죠. 그 애들이 제가 더 한국인 같게 느끼게 하려고 거짓말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기뻤고 한국인 얼굴을 가지고 있다니 대단한 느낌이었습니다. 국제 입양아는 주변에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죠. 한국어가 내부에 잠재되어 있으니 노력하면 한국어를 말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그리고 저는 그걸 듣고. 그래. 내가 내 뇌의 일부를 개방해서 한국어를 기억해내면, 내 4개월간의 지식이 나를 도와주겠지! 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어를 배우셨나요?

선아: 네. 모든 교환학생이 배웠죠. 아주 대단한 선생님이 있었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지낼 때는 한국어를 많이 배웠습니다. 저에게 아무도 영어로 말을 걸지 않았으니까요.

팟캐스트: 연습을 많이 하게 되었군요?

선아: 네. 연습도 많이 하고 많이 듣게 됐죠. 그래서 돌아다니고, 식사 주문은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하지만 다시 미국에 돌아오니 그 실력이 다시 녹슬어버렸어요. 

팟캐스트: 선아 씨는 똑똑하고 성실하니, 공부를 잘 하시는 데 익숙하시겠죠? 한국어 수업 때는 배우는데 고생을 하셨나요? 

선아: 아뇨.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어 배우는 것도 쉽게 하셨군요? 

선아: 네 쉬웠습니다. 전 한국어가 꽤 쉽다고 생각해요. 압박을 받지 않았죠. 몇몇 사람들이 뇌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는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어요. 한국어가 음성 언어라 한글을 배우고 나면 한국어를 읽어서 이해할 수 있어서 초기에는 배우기 쉬운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국어 전체를 배우는 일은 어렵지만, 적어도 단어를 배우는 일과, 문자를 배우는 일은 쉽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그 경험이 현재 직업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요?

선아: 그렇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하죠. 사회학자이자 한국 입양을 공부하는 제 직업의 기반을 닦았다고 보긴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니라고 생각해요. 해외에서 공부한 뒤 멤피스에 돌아오니 제가 지내던 환경은 똑같았죠. 수천 명의 한국인이 갑자기 제 삶에 추가되지도 않았고 한국계 입양아를 단 한 명만 만났으니까요. 그래서 현실적으로 한국계 입양아 사회가 존재하고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돌아왔을 때 그냥 일상으로 복귀한 셈이었으니까요. 그다음에는 계속 멤피스에서 몇 년간 지냈고, 그 결과 다른 한국인들이나 한국계 입양아를 만날 수 없어, 한국인이나 한국계 입양아의 정체성을 구축할 수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그렇다면 국제입양에 대해서 어떻게 공부를 시작하시게 되셨죠?

선아: 항상 생각하던 일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정보가 없었거든요. 자신과 관련된 정보가 전혀 없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입니다. 지역 사회에서도 존재하지 않고, 책에서도 드러나지 않고,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죠. 그래서 이런 공부를 해서 다른 사람들이 제가 느낀 기분을 다시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제 갈망을 이루는 데는 꽤 오래 걸렸어요. 전 사회학 교수가 되고 싶었고, 한국계 입양아, 인종, 정체성에 대해서 더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대학교를 2005년에 졸업했지만, 대학원에는 2012년에나 진학했죠. 전 교수가 되고 싶었고 박사학위를 따고 싶었지만, 제가 대학원을 진학하고 싶었던 대학교가 제 진학을 거부했습니다.

팟캐스트: 그렇다면 그 대학교와 대학원 진학 기간 사이에는 무엇을 하셨죠?

선아: 인생을 살고 취직해야 했죠. 먹고 살려면 일해야 하니까요.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했습니다. 취직을 사람들이 쉽다고 생각하는 데 어려운 일이에요. 제가 5월에 졸업했는데 8월에나 취직할 수 있었죠. 그리고 제가 취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리타가 멤피스를 강타했고, 그래서 그 피해 지원과 복구를 위해서 제가 서류를 넣었던 멤피스 사회 복지 시설 쪽에 예산이 배정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목록에 등록된 사람들을 고용하려고 했고 한창 구직 중이었던 저는 인터뷰하겠다고 했죠. 그리고 사람들이 제 전공과 맞는 일은 아니라고 했지만 저는 돈 버는 일이라면 저랑 맞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직접 도울 수 있는 일을 하고,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사회 복지를 할 수 있어서 기뻤죠. 그다음 아동 복지와 관련해서 일했습니다. 아동 복지는 수많은 행정절차와 체계 때문에 사람들을 직접 도울 수 없어서 아주 답답한 일이죠. 일하면서 제 꿈을 이루기 위해서 동시에 대학원에 지원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대학원들은 여전히 저를 거부했습니다. 일어나지 않을 일 때문에 삶을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계속 지원하는데도 떨어졌으니 결국 꿈을 놓아줘야 했죠. 꿈을 놓아주니 아주 자유로워진 느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가지에 계속 집중하고 있었는데 이제 여러 기회가 열렸고, 뭐든지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한다고 매일 술 마시고 슬퍼하는 것보다는 뭐든지 해보기로 했습니다. 사회 복지 관련 일을 그만두고 나이트클럽에서 한 4년 정도 일해봤죠. 

팟캐스트: 그럼 어떻게 다시 그 사회 복지로 복귀하게 되셨죠?

선아: 제가 나이트클럽과 관련된 삶을 살아보니 즐겁긴 했어요. 사람들은 나이트클럽과 바에 가서 즐기려고 나오죠. 동시에 사회와 정체성과 관련된 삶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는 정체성에 깊은 관심이 있었죠.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정체성을 어떻게 결정하는지, 그리고 첫인상과 기대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관심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사회학자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대학원에 지원해보기로 했어요. 만약에 받아들여지면, 대학원을 가고, 아니면 MBA를 따려고 했죠. 제가 일을 좀 해보니 단순히 NGO나 사회 복지가 아닌 사업에서도 일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대학원에 들어갈 수 있었죠. 좋아. 성공했으니 해볼까?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아: 제가 연구하고 싶은 주제인 정체성과 심리학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어떻게 조사해야 하는지도 알아서 입학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동시에 제가 알고 있는 교수님이 제 대학원 입학을 추천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죠. 대학원도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인맥 문제이고, 특히 아주 훌륭한 후보들이 많은 분야에서는 사람의 추천이 들어가야 합니다. 제가 연구하고 싶은 주제는 두 가지였는데, 운이 좋게도 두 가지 다 할 수 있었죠. 하나는 제 삶과 정체성 관리였고, 다른 주제는 한국 입양과 정체성에 관한 연구였습니다. 그 두 가지가 제 목표였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노력했죠. 하지만 그때에도 입양아 사회에 참여하지 않았고, 입양아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메릴랜드 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고 워싱턴 DC 지역에서 살기 시작하자 한국 입양아들과 만날 수 있었고, 제가 연구를 시작하면서 입양아 사회의 일부가 되기 시작했죠.

팟캐스트: 워싱턴 DC에서 얼마나 지내셨죠?

선아: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서 6년 동안 거기에서 생활했죠.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의문점을 가지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만, 입양아들은 입양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정체성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죠. 우리가 입양아 사회에 들어가면 그냥 또다시 맞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됩니다. 저도 그런 느낌을 느꼈어요. 어돕션 링크스 DC(Adoption Links DC, 워싱턴 DC 기반 입양아 단체)에 대해서 배우고 페이스북에 가입했습니다. 하지만 입양아를 직접 만나기는 무서웠어요. 아주 흔한 일이죠. 입양아들도 마음에 안 들고, 공통점이 없다면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지 않을까 무서웠습니다. 

선아: 하지만 직접 만나고 나니 공통점이 많았어요. 우리가 어렸을 때 일어난 입양이 우리를 하나로 엮어줄지 궁금했지만, 입양이 우리의 삶에 비슷한 방식으로 영향을 주더군요. 인종, 민족, 소속감, 미국인의 정체성 등이 비슷하게 우리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가 아시아인이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소속감, 시민권, 그리고 가족 구성에 대해서 생각하는 점이 비슷하더군요. 모든 일이 제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가족에서 유일한 아시아인인 경험, 사람들이 아버지와 결혼할 줄 알거나, 다른 입양아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편안하더군요. 그러한 경험들이 저 자신에 대해서 좀 더 만족할 수 있게 도와주었죠. 전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저 자신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제 백인 가족과 인종과 인종차별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동정을 받거나, 판정을 받지 않기 위해서 입양아들이 아닌 사람들과 입양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죠. 사람들이 입양 부모가 친부모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때도 많으니까요. 제가 누구인지 받아들였고,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었어요. 다른 입양아들과의 교류가 저 자신과 제가 누구인지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주었죠.

팟캐스트: 설명하기 어렵지만, 입양아들이 전부 타인이지만 서로에 대한 연대감이 바로 생겨나는 일이 있지 않나요?

선아: 네 그렇습니다. 설명하기 어렵죠. 입양아 사회 경험이 없거나 그렇게 깊게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한 연대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입양아 사회에 깊이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짜 그러한 연대감이 생깁니다. 왜 이러한 감정이 생기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었는데 이러한 연대감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흥미롭기도 하죠. 원래는 제가 친부모 조사를 하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친부모 조사를 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제 이름을 바꾸기도 했고, 이 경험을 하는 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팟캐스트: 입양아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보게 되는 느낌이네요. 친부모 조사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한국에 방문하는 일에 대해서 20세 때에 어떻게 하겠다고 마음을 먹어도 30세나 40세 때에는 마음이 바뀌니까요. 시간이 바뀌면서 나이를 먹고 삶을 경험하면서 감상이 바뀌게 되죠.

선아: 그렇죠.

팟캐스트: 입양아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한 적이 30세 때였죠?

선아: 네

팟캐스트: 선아 씨와 동갑인 입양아들이 처음으로 한국 정체성에 관심을 가지거나 다른 입양아들과 최초로 접촉하려는 일도 많았나요?

선아: 네. 아주 많았어요. 아주 흔했죠. 30대에서 40대가 넘은 사람들이 한국계 입양아 사회에 처음으로 접촉해왔습니다. 정체성 확립을 청소년기나, 20살 초반에 자연스럽게 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입양아 사회에는 나이를 좀 먹고 난 뒤에 자기 정체성을 생각하게 된 사람들이 많았어요. 아이를 가진 뒤에 가족과 자기 정체성을 생각해보고 온 사람들, 아니면 자아 성찰이 가능할 정도로 성공하거나 자원을 확보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단순히 한국에 돌아가는 일만 아니라 입양아 컨벤션 같은 데 참여하기 위해서라도 자금이 필요하니까요.

팟캐스트: 한국 이름으로 개명하는데 얼마나 생각을 해보시고 바꾸셨죠? 

선아: 제가 한국 이름으로 개명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때는 20대 중반 때였습니다. 그때는 단순한 아이디어였죠. 이름 자체가 바꾸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하라며 말리기도 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 생각을 그만두고 꽤 오랫동안 살았죠. 

팟캐스트: 아버지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셨나요? 

선아: 네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이름을 바꾸는 데 방해가 되던 생각이나 부끄러움이 한 번에 해결이 되었죠. 대학원에 다니면서 입양아 사회와 교류하고, 아버지가 교제하시다가 재혼하시고, 가족의 개념이 바뀌는 일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법적으로, 아니면 사회적으로 자기의 이름을 한국 정체성을 반영하도록 바꾸는 일이 많다는 일을 배웠어요. 이러한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니 더 생각하게 됐고, 더 받아들이기 쉬워졌고, 아버지가 재혼 과정에 들어가니, 제가 가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약혼하시고 난 뒤에 제 최초의 친부모 조사를 시작했어요. 우리 가족에 대한 개념이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제 친부모를 찾기 시작해도 아버지가 상처 입거나 화내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죠. 아버지가 좋은 생각이라고 응원하셨어요. 물론 10년 전에도 반응이 똑같았을지는 모르죠. 개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그걸 응원해주실 때 YOLO(You only live once, 한 번만 사니 삶을 즐기라는 유행어) 이라는 단어도 쓰셔서 제 아버지인가 아니면 다른 누구인가 고민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어머니가 제가 본명을 쓰고 싶다면 쓰게 해주라고 하셨다고 했죠. 물론 전 그걸 듣고 언제 그러셨는지, 제가 왜 이걸 몰랐는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니 기분이 좋았죠.

팟캐스트: 아버지의 재혼이 선아 씨가 가진 유일한 가족의 책임을 덜어준 것 같나요?

선아: 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제가 자신이 가진 유일한 가족이라고 말하고는 하셨습니다. 물론 아버지에게는 형제자매도 있었지만 각자 가족이 있었으니 제가 유일한 가족이었죠.

팟캐스트: 아버지가 그렇게 나오시는데, 다 좋은데 제 뿌리를 찾으러 한국에 갔다 오겠다고 할 수는 없죠.

선아: 네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재혼하시자, 저와 아버지에게 새로운 문이 열렸어요. 아버지가 새로운 아내가 생겼고, 아버지가 기대고 서로 지탱할 수 있는 분이 있으니 우리의 관계를 더 좋게 발전시켜 주었습니다. 

팟캐스트: 개명과정은 어땠나요?

선아: 네. 그러니 2018년 12월 13일에 개명을 했습니다. 5월 28일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멤피스에 취직해서 8월 18일에 멤피스로 돌아왔죠. 제 삶의 새로운 단계에 돌입했습니다. 9월 시카고에서 열린 KAS 한국 입양아 주말 축제에 참여했죠. 거기에서 제이슨 레이놀즈가 한국, 중국 입양아들의 `개명에 대해서 강의를 했습니다. 저도 그의 강의를 들어본 적이 있죠. 하지만 그날 그의 강의를 듣고 나서 개명을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앞에 말했던 것처럼, 모든 일이 맞아 들어가서 제 개명하기로 했어요. 처음에 생각하기로는 1년 내로 이름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IKAA(세계한인입양인협회) 관련 행사로 한국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어서, 개명하고 여권을 바꾸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했죠. 제 친구들에게도 이름을 바꾸겠다고 언급했는데 모두가 저를 지지해줬어요. 제가 갑자기 바꾸겠다고 했지만, 주변 사람 전부가 지지를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왜 이름을 바꾸는데 기다리는지 물었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 않느냐고 되물었어요. 그걸 들으니 확실히 그렇구나, 이라고 생각해서 구글에서 찾아봤습니다. 테네시주에서는 개명 비용을 내고 신청하기만 그만이죠. 단순히 돈만 내면 됩니다. 

팟캐스트: 아주 쉽네요?

선아: 네. 아주 쉽죠. 서류를 작성하고, 증빙 서류를 가지고 와서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돈을 내고 나면 그걸로 끝입니다. 다른 주에서는 신문에서 이름을 바꿨다고 선언하거나, 다른 일을 해야 하지만, 테네시주에서는 그냥 돈만 내면 됐죠. 그래서 확인한 다음 지역 법원에 내려가서 개명하고 싶고, 입양아고, 관련 서류도 가지고 왔으니 이름을 바꿀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법원 직원들이 이야기하더니 가능하다고 말하고, 제가 돈을 냈어요. 언제 이름이 바뀌느냐고 묻자, 직원들이 다음 주에 올 수 있냐고 했습니다. 제가 가능하다고 답했죠. 그게 다였습니다. 다음 주에 돌아오자 이혼이나 다른 이유로 개명을 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성과 이름을 동시에 바꾸더군요. 판사가 빚을 피하고자 개명을 하느냐, 등의 기본적인 질문을 했고 그 뒤로 개명을 했죠.

팟캐스트: 판사에게 개명 이유를 뭐라고 말씀하셨죠.

선아: 제가 태어났을 때의 이름으로 개명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죠. 그러자 판사도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이네요! 이라고 지지해주었습니다. 제가 법을 어기기거나 그러지 않았고, 판사도 일하는 것뿐이었기에 매끄럽게 진행이 되었죠.

팟캐스트: 개명하기 전의 이름이 뭐였죠?

선아: 웬디였습니다.

팟캐스트: 개명하신 뒤에 전환 기간은 어땠나요? 친구들이 선아 씨를 계속 웬디라고 불렀나요? 아니면 바로 선아라고 불러줬나요?

선아: 금방 바뀌었습니다. 제 친구들이 개명을 지지해 줘서, 법적으로 개명하기 이전에도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줬죠. 절 전부 지지해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제 개명된 이름을 알려주면서 많이 도와줬어요. 고향에 돌아와서 이름을 바꾸는 일은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몇 년 만의 지인들을 만나면서 제가 이름을 바꿨다고 알려줘야 했습니다. 제가 새로운 도시로 이사를 가면 새로운 이름을 쓰는 것으로 끝났겠지만, 여기에서는 그렇지 않았죠. 

팟캐스트: 고등학교 때의 친구들이요?

선아: 네. 심지어 제가 몇 달 전에 입사한 직장에서도 개명을 알려줘야 했지만, 모두 손쉽게 개명을 받아들여 줬습니다. 아무도 거부하지 않았어요. 어떤 사람들이 “네 이름을 이걸로 배웠으니 나에게 있어 네 이름은 항상 이거일 거야.”라고 하는 경우가 있지만, 저는 그런 경험은 없었죠. 가족들이 개명한 제 이름을 어려워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친구와 직장 동료들은 저를 지지해줬습니다. 아주 대단한 경험이었죠.

팟캐스트: 이름을 바꿨을 때 어머니에 대해서 생각하셨나요?

선아: 어떤 어머니 말씀이시죠?

팟캐스트: 아 그렇죠. 친어머니와 양어머니 두분 다 포함입니다. 

선아: 아뇨. 두 분 다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 친어머니가 제 이름을 지어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 이름이 자신의 한국 가족과 연결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죠. 실제로 한국 가족이 한국 이름을 지은 예도 있어요. 하지만 저의 경우에는 제 한국 어머니가 제 이름을 짓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입양 서류에 너무 많은 거짓 정보가 기록되어 있어 정확히 알 수 없죠. 제가 가진 정보로 생각해보면 한국 어머니가 제 이름을 지었다면 놀랍겠네요. 전 한국 가족과 더 깊은 유대감을 추구해서 제 한국 이름을 되찾지 않았습니다. 제 한국인의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 중 하나로 제 한국 이름을 되찾았죠. 세상에 제 정체성을 한국계 입양아 미국인으로 선언하기 위한 개명이었지, 제 친어머니와의 연결성을 되찾기 위한 개명은 아니었어요. 

팟캐스트: 하지만 성은 계속 남겨두셨네요?

선아: 네.

팟캐스트: 성을 남긴 것도 선아 씨의 선택이었나요?

선아: 네. 너무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법적으로는 그렇지 않겠지만 사회적으로, 그리고 소통하는 데 문제가 된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제가 결혼하게 된다면 제 성을 또 바꿔야 하니 딱히 바꿀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제 한국 이름을 이름으로 쓰고, 제 중간 이름을 제 입양 가족이 준 이름, 친가 쪽 할머니 이름인 마리를 보존하고, 제 성은 제가 결혼하게 되면 남편 가족 이름으로 바뀌겠죠. 그렇게 된다면 이름 전체가 제 정체성을 상징하는 이름이 생각해요. 

팟캐스트: 레이번이라는 성을 보존한 이유는 선아 씨의 입양아 정체성을 상징하는 일이기도 했겠군요? 

선아: 네 그랬습니다.

팟캐스트: 선아 씨의 친부모 조사는 어떻게 되었나요? G19 IKAA 회의에 참여하셨나요?

선아: 네.

팟캐스트: 그럼 그때 친부모 조사를 진행하셨나요? 

선아: 제가 친부모 조사를 2번 진행했습니다. 지난 2번 IKAA 회의에 참여하려고 한국에 방문했거든요. 첫 조사는 2016년 IKAA 회의 때 진행했죠. 한국에 가니 조사를 해보자는 사고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의 벼락치기 수준으로 생각해서 진행했죠. 어돕션 링크스 DC의 회원 중 한명인 스티븐이 자신의 조사에 대해서 말해줬는데, 친부모 조사는 단순히 입양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친어머니가 원하는 일이 될 수 있다고 했어요. 친어머니가 저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시작하기 위한 동기가 되어주었습니다. 서류를 작성해서 조사를 해보고 뭐가 일어나는지 보자고 생각했어요. 2016년에는 아버지가 결혼을 준비하시고 가족 관련 일도 일어나고 있었죠. 그리고 제 친어머니를 찾아서 연락했다고 입양 기관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연락을 받았지만, 답을 하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저와 접촉을 거부했다 연락이 왔죠. 당시에는 저는 안심했습니다. 그때에는 이미 미국 관련 문제가 쌓여 있었기 때문이죠. 제가 만나보지 못한 여성과 아버지가 재혼하실 예정이라 가족 문제를 이미 해결해야 했고, 그래서 친가족과의 접촉은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때, 친어머니가 접촉을 거부했을 때 약간이지만 안심했습니다. 

선아: 저번 IKAA 행사로 한국에 방문하니 다시 한번 조사를 해보자고 생각했죠. 다시 연락하고 어머니가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쉽게 안다는 사실이 이상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또 대답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이번에는 안심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조사하고 싶었으니까요. 단순히 충동적으로 한국에 오니 찾자고 생각하지 않았죠. 제가 원해서 진행한 조사였습니다. 그 결과 제 감정도 다르게 반응했어요. 왜 제 친어머니가 저의 접근을 거부하는지, 제가 잘못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나? 이라는 의문도 들었죠. 입양 제도 연구자로서 부모가 왜 연락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서 잘 압니다. 결혼했을 수도 있죠. 아니면 문제로 취급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사생아를 낳았다는 일 자체가 부끄러울 수도 있고, 수백만 가지의 상황적 문제가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개인적인 문제고, 개인으로 부모와의 연결을 다시 찾고 싶을 때는 개인적인 문제로 여겨지게 됩니다. 저에게 어떤 문제가 있길래 제 친모가 만남을 거부할까요? 왜 어머니가 자식을 찾으려고 않죠? 제가 충분하지 않은 느낌이 들고 상처를 입게 되고 감정적으로 불안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제가 아직도 감정적으로 불안정하고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모성, 어머니와 아이에 비중을 두고 세상에 많은 일이 개인적 문제로 끝나지 않죠. 특히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타인들의 문제가 큽니다. 하지만 그게 개인적 문제에 영향을 끼치면,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기 쉽기 마련이죠. 

팟캐스트: 입양 기관이 뭐라고 했나요? 연락이 오지 않았으니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나요?

선아: 네 그러더군요. 한국에 살고 있던 친구가 입양 기관들은 입양아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했죠. 입양 기관들이 연락하지 않은 채로 입양아들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아예 일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 관련 영수증을 요구하거나, 다른 정보를 요구할 수 있다고 조언을 해줬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는 제가 그 모든 일을 할 힘이 모자랐죠.

팟캐스트: 감정적으로 아주 힘든 일이긴 하죠. 

선아: 네 그렇습니다. 물론 자료를 보기 위해서 예약을 할 수도 있지만 전 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죠.

팟캐스트: 선아 씨의 입양 서류를 보지 않았군요?

선아: 네. 왜 그러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팟캐스트: 입양 기관이 이름, 연락처, 주소를 아는데도 선아 씨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아서 화가 났나요?

선아: 네. 아니 잠깐만요. 사실 어머니 이름을 아는 것 같습니다. 음…. 하지만 신빙성이 부족하죠. 제 서류에 기록되어 있는 어머니의 이름, 그리고 생년 월일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 서류상 자료가 사실이라면 정보를 알고 있죠. 하지만 어머니의 주소나 연락처는 모릅니다. 

팟캐스트: 어머니와 연락이 됐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이렇게 멀다는 점이 답답하시나요? 

선아: 그런 방식으로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네요. 그런 이유가 친어머니가 저와 연락을 하고 싶지 않다면, 연락을 안 할 권리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입양아 중 일부가 어머니를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머니를 찾으려고 하죠. 이미 말했지만, 저에게는 이름이 있고 생일이 있어요. 이 두 정보가 있으니 제가 어머니를 찾아내려고 한다면 찾아낼 수 있겠지만, 어머니가 그 문을 열고 싶지 않다면 열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제로 어머니를 만나고 싶지 않고, 그 가능성에 거부감을 느껴요.

팟캐스트: 그래서 다음으로 하실 일은 무엇인가요? 

선아: 삶에서 말인가요?

팟캐스트: 네 그렇죠.

선아: 제가 다음에 할 일은…. 개인적인 일과 직업적인 일로 나뉘네요. 직업과 관련된 일은 한국 입양, 한국 입양아들의 시민권, 소속감, 가족에 관한 책을 쓰고 있습니다. 한국계 입양아의 소속감, 가족, 시민권이 매체와 정책으로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시민권, 가족, 사람에 대한 정의를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에요. 책의 원고를 끝내고 있고, 출판 계약을 맺어서 여러분들과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 멤피스 출신이나, 거주민들을 초대해 그분들이 지역과 국제적 문화, 오락, 정치에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언어적으로 효율적(Verbally Effective)이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죠. 친한 친구와 함께 어려운 아름다움(Difficult Beauty) 이라는 팟캐스트도 진행하고 있어요. 여성적인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직업, 아름다움, 가족에 관해서 이야기하죠. 남자친구와 함께 어떤 컵이 우리 컵이지? (Which Cup is Mine?) 팟캐스트를 하나 더 진행하고 있어요.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지었는데, 교제 상대와 이야기를 해야 하는 불편한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위한 팟캐스트죠. 제가 제 직업을 위해서 진행하고 있는 일들입니다. 

선아: 개인적으로 제가 하는 일은 좀 더 저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좀 더 약점을 드러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제가 살면서 항상 혼자 있고, 버림을 받을까 무서워했고, 그 모든 일이 저에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이 일은 저에게 깨달음과 같아요. 제가 개명을 하면서 제가 더 개방적이게 되고 저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도움을 줬다고 봅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끼쳤죠. 그래서 전 지금 제 약점을 받아들이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봅니다. 제가 이런 단계에 도달할지는 몰랐죠. 하지만 좋고, 나쁘고, 끔찍한 자기 자신을 100%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쁘고 즐거워요. 다른 사람들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도 기쁘죠

팟캐스트: 현재 남자친구와의 교제 관계를 이러한 변화 덕분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선아: 여러 가지 변화와 요소의 융합이라고 생각하죠. 제 이름을 되찾은 일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도와주었다고 생각해요. 저 자신을 숨기며 부끄러워하는 일에서 저를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러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죠.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숨기려고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알게 됩니다. 힘을 낭비하고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셈이에요. 제 이름을 되찾은 일이 저 자신을 재구축하게 해주게 도와주었고, 제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도움을 줬습니다. 전 선아이고, 한국인이고, 입양아고, 이 모든 것이 저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도와줬어요. 그리고 현재 남자친구와 관계가 이러한 사고방식을 현실화하는 데 도움을 줬죠. 가르시아와 내가 교제하기 시작했을 때 저 자신이 무서워하는 일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움을 줬습니다. 그중 하나는 절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인식하고 대화하는 일이었죠. 제가 이 말을 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면, 그 말이 제가 해야 하는 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벽을 만들려고 하는데 절 이해하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서 동시에 제 문제를 지적하고 바뀌게 하는 일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 내 잘못을 인정하게 만드네. 정말 싫다. 이러는 식이었죠

팟캐스트: 가르시아 씨가 선아 씨가 개방적으로 되도록 만들었군요?

선아: 네. 그가 저에게 개방적으로 되어도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죠.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고, 약해져도 된다는 확신을 줍니다. 

팟캐스트: 과거에 교제 관계들을 의도적으로 망치거나, 끊거나 그런 일이 있었나요? 

선아: 네. 사람들에게 날카롭게 나가서 제가 책임을 지지 않거나, 약점을 보이지 않거나, 성장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거기에 데이트 상대들도 나쁜 상대만 골랐습니다. 아니 나쁜 상대들은 아니었죠. 성공하지 못할 상대들을 의도적으로 선택해서 교제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약해지거나, 성장하거나, 사람들의 반응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도록 했어요. 

팟캐스트: 개방과 성장이 넘치는 삶의 지점에 도달하신 것 같네요. 아주 흥미로워 보여요. 행운을 빕니다.

선아: 아주 흥미롭죠. 성장이 보이지만 어떻게 성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무언가 일어나고 변화하고 있죠. 그래서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 아주 좋아요. 

팟캐스트: 사람들이 선아 씨와 연락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아: 아 네. 인터넷을 통해서 저와 연락할 수 있습니다. 트위터에서 저는 @SunAhMarieOnly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중이고, 페이스북에도 SunAhMarieOnly이라는 계정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페이스북 활동을 거의 하고 있지 않아요. SunAhMarieOnly 계정인 인스타그램과 트위터를 따라오시면 제 홈페이지와 제 팟캐스트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자주 활동을 하고 있어요. 트위터는 개인용으로 사용할지, 직업용으로 사용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그리고 다이어트하고 싶으면 페이스북 계정을 구독하면 되나요? 

선아: 아 고마워요. 

팟캐스트: 대단하더군요. 보고 있으면 저도 다이어트하고 싶어져요.

선아: 에너지가 넘쳐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