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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3, 에파소드16: 수키 잘랄리

수키 잘랄리 씨 (56세)는 한국에서 12세에서 14세 사이의 나이에 입양되었다. 잘랄리 씨는 자신의 나이를 정확히 알고 있지 않으며, 서류가 조작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나이에 몇 년 정도의 오류가 있다. 수키 잘랄리/전숙자 씨는 미국에서 새 이름과 정체성을 얻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은 한국 고아원에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제 한국계 입양아 1세대로서 잘랄리 씨는 누구도 자신의 가족과 비슷한 가족 형태를 본 적이 없는 중서부 지역에서 자랐다. 잘랄리 씨는 새로운 언어, 문화와 삶의 방식에 적응해야 했지만 여러 복잡한 문제를 뚫고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잘랄리 씨는 자기 자신을 믿고 자신의 의지로 지금의 길을 찾아 걸어가고 있다. 

수키: 제 이름은 수키 잘랄리이고 56세입니다. 독신 여성이죠. 

팟캐스트: 어디에서 살고 계시죠?

수키: 미네소타 주 고옴 밸리 시에서 살고 있어요. 5살 때부터 휴전선 근처 동두천에 있는 고아원에서 살았죠. 부모님이 5살 때 저를 고아원에 맡겼습니다. 딸이 태어났을 때 최면 치료를 받았고, 5살 때 고아원에 맡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부모님에게 작별인사를 하던 시점을 기억해냈죠.

팟캐스트: 그때까지는 기억하지 못하셨나요?

수키: 고아원에서 살던 시점부터 제가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던 시점까지는 기억하죠. 그래서 고아원에 맡겨졌을 때 아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압니다.

팟캐스트: 그 최면 치료를 받을 때 부모님의 외모가 기억이 나셨나요? 

수키: 아뇨. 고아원 입구에서 부모님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흐릿한 기억밖에 나지 않습니다. 부모님 둘 다 아프다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결핵 말기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기침하고 설사를 심각하게 하고 있었죠. 어머니는 독감에 걸려서 죽어가고 계셨어요. 두 분 다 저를 돌볼 수 없어서 미국 적십자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데리고 왔고 미군이 도와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제 삶에 가지고 있던 의문이 해소되었죠. 부모님이 절 버리지 않았고 구하기 위해서 고아원에 맡겼습니다. 지금까지 부모님이 저를 버리려고 고아원에 맡긴 줄 알고 있었거든요. 

팟캐스트: 정확히 60년대 어느 연도에 태어나셨다고 생각하시나요?

수키: 1964년에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팟캐스트: 그 시기에 결핵이 한국에서 꽤 심각했나요? 

수키: 네. 그 시기에는 한국에 의료 체계 자체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았어요. 특히 동두천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죠. 우리는 동두천 외곽의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어서 택시를 타고 2시간은 가야 병원에 갈 수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얼마나 오랫동안 고아원에서 지내셨다고 생각하시나요?

수키: 제가 입양되기 전까지 그곳에서 계속 지냈죠. 12살에서 14살이 되기 전까지 살았어요.

팟캐스트: 그 뒤로 입양되었군요?

수키: 그 뒤에 입양되었죠. 

팟캐스트: 한국에서의 기억이 많으시겠네요?

수키: 고아원에 살면서 놀던 시간이 거의 없었어요. 일요일에 미군들이 오면 놀고는 했죠. 같이 배드민턴을 치고는 했습니다. 부활절에는 부활절 달걀을 들고 오곤 했어요. 그걸 제외하면 고아원에서 계속 일을 했습니다. 청소, 요리, 정원, 농사, 수확, 세공 등을 했습니다.

팟캐스트: 적십자가 운영하는 고아원이었지만 미군이 깊게 연관이 되어 있었나요? 

수키: 네. 동두천에 있던 캠프 케이시와 다른 미국 주둔지와 가까웠어요. 미군들이 고아원에 자원봉사를 왔죠. 

팟캐스트: 미국인들을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수키: 아주 상냥하다고 생각했죠. 그 사람들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팟캐스트: 사탕을 나눠주거나 그랬나요?

수키: 우리와 같이 놀아주면서 즐겁게 해줬죠. 오빠나 언니 같은 느낌이었어요. 절 성당이나 교회에 데리고 가 주었습니다. 또 우리를 태우고 군부대에 데리고 가서 뷔페식 식사를 하게 해주고는 했죠. 더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먹고는 했어요. 며칠간 밥을 못 먹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과식하고 나면 아팠습니다.

팟캐스트: 고아원에서 말이죠?

수키: 네 3일에서 나흘 동안 한 끼도 못 먹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미군이 우리를 위해서 옷과 식량을 제공해 줬어요. 분유와 호밀빵만 먹으면서 3일을 버티고는 했죠. 우리가 굶고 있어도 호밀빵의 흰 부분이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집어내고는 했습니다. 미군들이 우리에게 준 옷에도 이가 있었거든요. 우리가 손가락으로 일일이 이를 잡아내서 죽인 다음에 옷을 빨아서 입었죠. 

팟캐스트: 기부받은 옷에 이가 있었군요?

수키: 그래서 호밀빵의 흰 부분이 이라고 생각했죠. 건강에 좋은 부분이라고 생각도 못 했어요.

팟캐스트: 아주 힘든 환경이었군요?

수키: 힘들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죠. 사실 꽤 행복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장난감이 없어서 망가진 그릇과 인형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그런데도 행복했죠. 그 상황을 제외한 다른 상황을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시간을 일하면서 보냈어요. 8살 때 미국 장군이 저를 입양하려고 했습니다. 서류를 다 작성하고 미국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셨죠. 저에게 가장 슬펐던 날은 장군이 절 데리러 오기로 하던 날에 헬리콥터 사고로 사망했던 날이었어요.

팟캐스트: 입양하러 오던 날에 사고로 사망했군요?

수키: 네. 온종일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팟캐스트: 입양되고 싶다고 생각하셨나요?

수키: 입양이라는 일 자체를 몰랐다고 생각해요. 그 시기에는 입양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죠. 흥미롭게도 입양되는 아이 중 상당수가 유럽으로 입양되었어요. 덴마크, 독일, 제와 친구들 몇 명은 미국 중서부로 입양되었죠.

팟캐스트: 어느 나라로 입양될지 알고 계셨군요?

수키: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는 몰랐지만, 유럽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죠. 유럽이 어디에 있는지 알 정도의 지식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그때 어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고아원에 있을 때 부모님을 그리워하셨나요, 아니면 부모님이 돌아와서 방문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셨나요?

수키: 제가 의도적으로 기억을 막았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어머니가 되기 전까지 부모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죠. 18살에서 결혼해서 21세에 첫 딸 미트라가 태어났어요. 미트라가 태어나는 날 바로 전까지 부모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딸을 품에 안고 나서야 어머니가 저를 얼마나 그리워할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죠.

팟캐스트: 수키 씨의 아이를 직접 품에 안고 나서야 그분들에 대해서 생각하셨군요?

수키: 제 어머니가 저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생각했고, 지금도 어머니에 대해서 매일 생각하고 있죠. 항상 어머니를 찾으려고 합니다. 왜 어머니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죠. 아버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아요. 아버지가 키가 크고 병약하셨다는 사실밖에 모르죠. 

팟캐스트: 부모님의 사진이라도 있나요?

수키: 아뇨. 제 나이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아이들은 가족사진을 들고 왔던 경우가 많죠. 제가 미국에 도착한 뒤 다음 날에는 머리를 단발머리 커트로 잘랐어요. 남자아이처럼 보인다고 펑펑 울었습니다. 제가 허리까지 닿는 긴 머리를 하고 있었죠. 이 제거를 위해서 머리를 잘랐는데 했는데 펑펑 울었어요.

팟캐스트: 무서웠겠네요.

수키: 네. 전 제 머리를 자르고 싶지 않았어요. 남자애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죠. 

팟캐스트: 친어머니가 어떻게 생기셨었죠?

수키: 친어머니가 항상 긴 머리를 머리핀으로 묶어 두셨다는 사실만 생각나지 않아요. 둥근 얼굴을 가지고 아름다웠다고 기억합니다. 

팟캐스트: 어머니의 성격은 기억나시나요? 

수키: 별로 기억나지 않아요. 같이 얼음 썰매를 타러 갔을 때가 생각나요. 날이 달린 나무판에 앉은 채로 꼬챙이로 움직이면서 탔죠.

팟캐스트: 얼마나 탈 수 있었죠?

수키: 1인용이었어요.

팟캐스트: 일인용이었군요.

수키: 겨울에 논을 얼린 곳 위에서 썰매를 탔는데, 벼 뿌리가 남아 있는 곳은 불룩 튀어나와 있고는 해서 넘어지고는 했어요. 제가 타던 썰매가 멈춰서 화나던 기억이 나죠. 

팟캐스트: 매우 사교적인 아이였을 것 같은데 그랬나요?

수키: 네. 적어도 저는 그랬다고 생각해요. 아주 독립적인 아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같이 놀던 아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애가 죽었죠. 7살이나 8살 때 제 품 안에서 죽었어요. 그 애에게 물을 수저로 먹이던 생각이 납니다. 일주일마다 장례식장에서 사람이 왔죠.

팟캐스트: 매주 사람이 왔다고요?

수키: 네. 매주 애들이 병이나 영양실조 때문에 죽어 나갔죠. 주로 금요일에 장례식장에서 와서 시체를 싣고 갔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아기들이 죽어 나갔기 때문에 손수레에 태울 수 있었지만, 친구는 7~8살이었기 때문에 손수레에 담을 수 없어서 다음 주에 올 때까지 보관해야 한다고 했죠. 그래서 제 친구의 시체를 제 침대 밑에 보관해야 했어요

팟캐스트: 그런….

수키: 그리고 그 침대 위에서 자야 했죠. 시체가 밑에 있는 상황에서 자야 했어요.

팟캐스트: 아주…….

수키: 네 그랬죠. 친구의 몸이 썩기 시작하자 친구를 창고로 옮겨야 했어요. 장례식장에서 사람을 보내지 않을지도 몰랐고 냄새가 나기 시작했으니까요. 연탄을 보관하던 창고였어요. 고아원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연탄을 때서 난방을 했죠. 제 친구의 시체를 제가 옮겨서 그곳에 뒀어요. 연탄이 친구의 냄새를 가려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거기 들어가 보니 손자국이 남아 있어서 그곳을 항상 무서워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연탄을 옮기면서 손자국이 남아 있었겠지만, 저는 친구의 귀신이 남긴 흔적이라 생각하고 그 창고를 무서워하게 됐어요. 

팟캐스트: 어렸으니 매우 무서웠겠죠.

수키: 네네. 

팟캐스트: 아이들을 돌보고 이끄는 역할이라니 신기하네요

수키: 네. 제가 보모 역할을 맡았죠.

팟캐스트: 보모로서 정확히 무슨 역할을 하셨죠

수키: 다른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맡았어요. 날마다 고아원 앞에 버려진 아기들을 데리고 와서 아기들을 돌봐야 했죠. 겨울에는 얼어버린 아이들을 따뜻하게 해줘야 했어요. 욕조에 아이들을 담그면 어떨 때는 아이들이 되살아나기도 했지만 어떨 때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팟캐스트: 이때 10살에서 11살이셨죠? 여러 죽음을 보셨겠지만 평범하다고 느끼셨겠군요?

수키: 저에게는 평범하다고 느꼈죠. 제가 기억나는 무섭고 끔찍한 광경이 있습니다. 고아원에서 애들과 같이 벽을 타고 노는 일을 즐겼어요. DMZ 근처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집을 나누는 큰 담장들이 있었어요. 제가 좋아하던 일은 그 담장을 걸어 올라가서 담장 위를 걷고는 하는 일이었습니다. 고아원 담장 벽을 한 바퀴 돌고는 했어요.

팟캐스트: 겁이 없으셨군요.

수키: 네 그랬죠. 하지만 어느 날 깜짝 놀랐습니다. 제 친구의 시체를 가지고 간 곳을 봤는데 거기에서 아이들의 시체를 태우고 있던 화로를 봤죠. 뼈밖에 안 남아 있더군요. 장례식장에서 사람이 안 오면 고아원에서 아이들의 뼈를 태운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습니다.

팟캐스트: 큰 충격이었겠군요?

수키: 애들을 화로에서 불태운다는 사실을 몰랐죠. 큰 충격이었어요. 

팟캐스트: 죽음을 두려워하셨나요?

수키: 아니요. 

팟캐스트: 아기들이 매일 버려졌나요?

수키: 매일 같이 아기들이 고아원 정문에 남겨져 있었죠.

팟캐스트: 정문 앞에 버려져 있었나요?

수키: 정문 앞에 아이들을 담요에 싼 다음 바구니에 담아서 놨죠. 

팟캐스트: 아이들이 울고 있었겠군요?

수키: 아이들이 울고 있기도 했죠. 한 4시~5시에 일어났어요. 그때 아직 어둠 속에서 부모들이 아이를 놓고 갔습니다. 그래서 5시에 가면 아이들이 놓여 있었죠.

팟캐스트: 슬픈 이야기이네요. 그 아이들이 언제 올지 알고 기다리셨나요?

수키: 제가 너무 늦으면 얼어 죽거나 울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거든요. 

팟캐스트: 고아원에서 하나의 큰 가족같이 지냈나요? 아니면 아이들이 너무 많고 입양되고, 죽거나 그래서 느슨한 관계를 맺고 있었나요?

수키: 제가 고아원에서 지내고 있을 때는 커다란 식당이 있었어요. 그곳에서 같이 식사를 했죠. 매일 2끼씩 식사를 하고 같이 먹었죠. 

팟캐스트: 뭘 먹었죠?

수키: 쌀밥, 김치, 국이었습니다.

팟캐스트: 국에 뭔가 들어가 있었죠? 

수키: 두부, 돼지고기 비계, 콩나물 등이 들어가 있었죠. 비계를 넣어서 지방을 제공해서 굶어 죽게 하지 않게 하려는 일이었습니다. 요리사 선생님과 같이 요리하던 기억이 나요. 사골이 있어서 그걸 끓여서 국물을 내고는 했습니다. 가장 좋아했던 부분은 골수였죠. 우유가 없었기 때문에 골수를 통해서 뼈를 단단하게 할 수 있었어요.

팟캐스트: 수키 씨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죠? 수키 씨의 물품을 가지고 가라고 하셨나요?

수키: 아뇨. 미국에서 입양된다는 이야기를 해줬고 아주 아름다운 옷을 입혀줬어요. 갈색 치마랑 흰색 스웨터를 입혀줬는데, 그 옷을 제 아이들이 태어날 때까지 간직했죠. 그리고 제가 울 것을 알아서 손수건을 줬습니다. 제가 고아원을 떠났을 때 가족을 떠나게 되어서 아주 슬펐죠. 그곳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여기가 제집인데 어디로 가는지 몰랐습니다. 이별 파티를 할 때 저는 펑펑 울었어요. 제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환영 파티를 해줬는데 이별 파티로 알고 또 울었죠. 전 생일을 1번도 축하해본 적도 없어서, 한 달 지나고 나서 깜짝 생일 파티를 했는데, 또 이별 파티로 알아서 또 울었습니다.

팟캐스트: 도착했을 때의 생각과 인상이 떠오르나요? 미네소타주에 도착하셨죠? 

수키: 네. 제 어머니들이 기억이 나요. 저에게는 두 명의 어머니가 있었죠. 제가 처음으로 미혼모에게 입양된 한국 아이였습니다. 어머니 이름은 아델라인 홀란드였고 학교 선생님이셨죠. 그분이 저를 공식적으로 입양하셨어요. 제 큰 이모이자 카롤라 홀란드가 또다른 어머니의 역할을 하셨습니다. 둘 다 결혼하지 않으셨고 둘 다 저를 키워 주셨죠. 두 분 다 교육학과 간호학 석사 학위를 따고 졸업하신, 미국에서 석사 학위를 딴 최초의 여성 중 일부이셨어요. 아주 대단한 분들이셨고, 자랑스러운 어머니들입니다. 그 2분이 저를 공항에서 데리고 오기 위해서 왔었죠. 눈이 제 머리까지 쌓여 있던 기억이 나요. 그 해에 어마어마한 폭설이 왔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휘발유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없었는데, 어머니의 차에 문제가 조금 있어서 휘발유 냄새가 계속 나는 바람에 머리가 계속 아팠죠. 휘발유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없어서 차에서 계속 두통을 겪었어요. 그 뒤에도 스트레스와 적응하면서 심한 두통을 견뎌야 했습니다. 제가 집에 도착했을 때 2분이 한국어와 영어가 동시에 적힌 엽서를 여러 곳에 준비해 두셨죠. 배고프다, 아프다, 학교 선생님이라서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통에 대한 단어가 없었어요. 

팟캐스트: 그러니 영어-한국어 단어장을 만들어 두셨다는 건가요? 

수키: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영어-한국어 단어장을 만들어 두셨죠.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 사회복지사께서 도와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한국어와 영어를 찾아서 단어장을 만들어서 벽에 붙여줬다고요? 읽고 쓰실 수 있었나요?

수키: 네. 한국어를 읽고 쓸 수 있었죠.

팟캐스트: 모두 영어를 하는 미국에 갑자기 떨어져서 어떤 반응을 하셨죠? 

수키: 전 영어를 한마디도 못 했는데, 도착하고 나서 다음 날 교회에서 사람들이 와서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절 둘러싸고 기도를 한 다음에 집의 모든 방에서 기도했죠. 사람들이 보수적인 기독교인이라 제가 해외에서 사악한 귀신이나 악마를 데리고 왔을지도 몰랐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음주의적 기독교인으로 지미 슈와거, 태미 페이비거 같은 유명 목사를 따르는 사람들이었어요.

팟캐스트: 복음주의적이었군요?

수키: 네. 그래서 축복인지, 정화인지, 세례인지 몰랐지만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죠. 하지만 적어도 저를 씻기고 정화하려는 느낌이었습니다. 창고나 옷장에도 들어가서 기도를 했거든요.

팟캐스트: 그 광경을 보고 무서워하셨나요?

수키: 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으니까요.

팟캐스트: 주변에 다른 아시아계 사람들이 있었나요?

수키: 아뇨. 제가 살고 있던 마을, 미네소타주 오웨타나에서 유일한 아시아계였죠.

팟캐스트: 오웨타나요?

수키: 네. 그래서 학교에 걸어갈 때마다 사람들이 가는 길을 멈추고 저를 바라보고는 했죠. 

팟캐스트: 미네소타주 남부에 있는 작은 도시로군요?

수키: 네. 

팟캐스트: 수키 씨가 자라난 70년대에 그곳이 어땠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몇 명이 살았는지, 인종구성은 어땠나요? 북유럽계가 많았나요?

수키: 네. 북유럽계가 많았고, 특히 노르웨이계가 많았어요. 70년대에는 그냥 백인밖에 없었죠. 제가 본 다른 인종은 광산과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서 올라온 멕시코인들밖에 없었고, 아시아계는 전혀 보지 못했어요.

팟캐스트: 인구는 어느 정도 있었나요? 2000명 정도 살았나요? 

수키: 그 시기에는 만 명…. 보다는 적었어요. 우리는 농장에서 살았고 마을에서 16㎞ 정도 떨어진 곳에서 살았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에 가야 했고, 통학 버스가 우리 집에서 가장 나중에 섰고, 그 뒤로 학교로 갔어요. 어렸을 때 심하게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팟캐스트: 안 그래도 괴롭힘을 당했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수키: 네 꽤 심하게 괴롭힘을 당했죠. 제가 마지막에 탔기 때문에 항상 버스 뒤로 가야 했고, 모두를 지나쳐야 했어요. 

팟캐스트: 모두가 괴롭혔군요?

수키: 홍콩 푸이, 중국 여자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인종차별적 단어를 저에게 말했죠. 아주 끔찍했어요. 아직도 기억나는 남자애가 있습니다. 스티브 멜비라는 애였죠. 그 애를 찾아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만뒀어요.

팟캐스트: 멜비라는 성이 매우 노르웨이적 이름이군요.

수키: 네. 그 애가 제 이웃이었죠. 그 애가 절 괴롭히는 데 참여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날 붉은 머리였던 그 애가 제 옷을 잡아당겨서 몹시 화가 났던 기억이 납니다. 그다음 날에는 학교에서 음악회를 여는 날이라 머리 인두를 가지고 갔었는데, 그 애가 너무 화나게 해서 머리 인두로 얼굴을 후려쳤어요. 애가 피를 흘리기 시작했는데도 버스 운전사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죠. 운전사도 애들이 너무 괴롭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지금 벌어졌다면 큰일이 되었겠죠.

팟캐스트: 운전사도 수키 씨가 괴롭힘당했다는 사실을 알았군요?

수키: 운전사도 제가 괴롭힘당하는 사실을 알았으니 개입하지 않았죠. 그렇게 화내고 나니 다시 괴롭히지 않았어요. 또 다른 사건이 기억이 나는데, 소프트볼 연습을 해야 해서 가방을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어떤 남자애가 저를 또 괴롭혀서 방망이로 그 애의 무릎을 때렸죠. 다시 괴롭히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용감해지기 위해서 힘을 썼던 느낌이네요.

수키: 네 그랬죠. 

팟캐스트: 어머니와 이모를 둘 다 엄마라고 부르셨나요?

수키: 네.

팟캐스트: 어머니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고 이야기를 하셨나요?

수키: 괴롭힘을 당한다고 이야기를 하긴 했죠. 그래서 어머니와 같이 등교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6km를 걸어서 학교를 등교하기 시작했어요.

팟캐스트: 16km를 걸어서 등교하셨다고요.

수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어요. 제가 운이 좋았던 점은 어머니가 2학년 선생이었다는 점이었죠. 어머니에게 읽는 법을 배웠던 때가 기억이 납니다. 영어를 제대로 배우고, 맞춤법을 배우기를 원했어요. 항상 어머니와 학교에 같이 갔고, 학교가 끝난 뒤에도 공부했죠. 그 시기에는 영어가 제2외국어인 아이를 위한 교육 과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애인 버스를 타고 추가 교육을 받으러 갔어요. 그래서 애들이 제가 바보로 알고 더 놀렸죠. 

팟캐스트: 장애를 앓았다고 놀렸군요?

수키: 제가 장애를 앓았다고 놀렸죠. 그러한 놀림이 제가 장애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게 했죠. 학교도 다녔고, 여름 학교도 다녔고, 영어를 열심히 배워서 1학년 월반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16살에 GED 시험을 봤죠.

팟캐스트: 12살~13살에 미국에 와서 그런 성과를 취하다니 대단하네요.

수키: 이 마을도 마음에 안 들고 주민들도 마음에 안 드니 이 마을에서 나가려면 대학교에 들어가고 GED를 보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여름 학교, 아침 학교, 방과 후 학교에도 참여했습니다. GED를 통과하고 로체스터 전문대에 입학한 뒤 미네소타 대학교로 전교했고, 로체스터 감리교 병원에서 일하면서 장학금을 받았어요.

팟캐스트: 그때 한국을 그리워하셨나요?

수키: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전 고아원에 만족하고 있었어요. 왜 미국에 와서 이런 사람들이 괴롭히는지 몰랐죠.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살고 싶지 않았죠. 물론 한국에서는 얻지 못할 대단한 기회를 받았어요.

팟캐스트: 더 많은 식사를 할 수 있었죠?

수키: 네. 어머니들이 제 방에 음식을 숨기고 했다고 웃으셨죠. 내일 밥을 먹지 못할지 몰라서 항상 숨기고 했거든요.

팟캐스트: 하지만 그렇게 풍요로웠는데도 행복하지 않으셨군요?

수키: 아뇨. 고아원에서 평온하게 살고 있었거든요. 일하면서 아기들을 돌보고,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만족하고 있었죠. 입양된 뒤로 약간 나아졌지만, 시골 농장에서 살면서 혼자 지내다가 마을로 이사했어요.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다가 발견한 집을 보고 어머니에게 농장을 팔고 마을로 이사하자고 했죠.

팟캐스트: 상업 농장이었나요?

수키: 아뇨. 평범한 농장이었죠. 제 삼촌이 소를 키우고 대두를 키우긴 했지만 그렇게 진지하게 하는 일은 아니었어요. 농장을 사용하기 위해서 대두, 옥수수를 키우고 밭도 있었지만, 땅을 놀리지 않기 위해서 하는 농사였죠. 하지만 저는….

팟캐스트: 마을로 이사하고 싶어서 하셨군요?

수키: 네.

팟캐스트: 어머니에게 있어서 수키 씨가 일종의 계획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수키: 네. 어머니는 절 키울 수 있어서 무척이나 행복하셨죠. 지역 신문에서 저에게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제가 지역에 처음으로 들어온 한국인이었고 어머니가 지역에서 최초로 입양을 한 독신 여성이었으니까요. 지역 신문에 관련 기사가 실릴 정도로 유명한 일이었죠. 두 분 다 용감하신 분들이었습니다. 두 분 다 결혼하지 않으셨고, 남자친구도 없는데도 저를 키워 주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들에게 좀 더 감사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전 청소년기에 반항적이었죠.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고 싶지 않고, 강제로 저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했어요. 저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머니들이 저를 어머니들과 비슷하게 만들지 않으면 인정하지 생각했죠. 어머니들과 싸우고 가출했어요. 제 물품을 전부 상자에 넣고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로체스터 전문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도망쳤습니다.

팟캐스트: 어머니들이 수키 씨를 구원했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런 반응이었으니 놀라셨겠네요.

수키: 네. 어머님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연락마저 끊었나요?

수키: 네. 어머님들은 제가 어디에 있는지 2년에서 3년 정도 몰랐습니다. 6개월 정도 위탁가정에서 지냈어요. 제가 집을 떠났을 때….

팟캐스트: 이게 집에서 나왔을 때 이야기인가요?

수키: 아니 그 전의 이야기이죠. 위탁가정에서 GED 시험을 치고 대학에 갈 수 있었어요.

팟캐스트: 상황이 그렇게 악화하였군요? 집에서 도망쳐야 할 정도로 말이죠.

수키: 네. 더 그곳에서 살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죠.

팟캐스트: 두 분이 매우 통제적이었다는 느낌이 드네요.

수키: 매우 통제적인 분들이었죠.

팟캐스트: 그런데도 어머니들에 대해서 존경심을 가지고 계시군요?

수키: 네. 두 분이 더 나은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죠. 저에게 맞는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셨지만, 좁은 시야를 가지고 세상을 보면 더 나은 방법을 모르기 마련입니다. 어머니들은 더 나은 방법을 몰랐어요. 제 외할머니는 더 나빴죠. 할머니가 저를 질투했던 기억이 나요. 딸들의 관심이 전부 저에게 쏠려 있었으니 질투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가 끝난 뒤에는 할머니 집에서 지냈는데 지팡이로 혼내거나 겁을 주기도 했죠.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면 아동 학대였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학교 이후에 혼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들이 일을 끝낼 때까지 할머니와 같이 지내야 했습니다. 어느 날 겁먹고 화장실에 숨어 있던 기억이 나죠. 그러자 할머니가 문을 쾅쾅 두드리면서 화장실에서 너무 시간을 보낸다고 나오라고 화를 냈어요. 결국, 할머니와 사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창문을 통해서 밖에서 나가서 돌아다니기도 했어요.

팟캐스트: 가족들을 용서하셨나요?

수키: 네. 그렇습니다. 저를 상처 입히려고 한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저에게 맞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죠. 저를 기독교인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거기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기도 했어요. 물론 그분들이 저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일은 좋지 않았죠. 제가 잘못된 것처럼 느꼈어요. 그래서 진짜 부모라면 자기의 자식을 그렇게 대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그분들이 수키 씨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수키: 네. 사랑하셨죠. 확실히 저를 사랑했어요. 

팟캐스트: 수키 씨가 그분들을 사랑하셨나요?

수키: 음…. 네. 하지만 동시에 사랑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 아이들을 가진 뒤에 그분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죠. 그분들이 나이를 먹고 나서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절 입양하셨을 때 64 세셨거든요. 제 막내아들이 태어났을 때 제 어머니들이 돌아가셨죠. 마지막 시간을 요양원에서 같이 보냈습니다. 어머니들의 마지막 시간에 우리의 관계를 다시 구축하고 만들면서 보냈어요. 

수키: 제 어머니 중 한 분이 2차 세계대전 참전자이셨습니다.

팟캐스트: 오.

수키: 네. 어머니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사람들을 도왔죠.

팟캐스트: 아델라인 씨가 2차 세계대전 참전자이셨다고요?

수키: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우와 대단하네요.

수키: 2차 세계대전에 지원자로 참여한 여성 중 한 분이셨죠.

팟캐스트: 청소년일 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나요?

수키: 네.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깊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8살이 되자마자 한국에 다시 돌아갔어요.

팟캐스트: 한국에 돌아가셨군요! 어떻게 돌아가시게 됐죠?

수키: 대학교 1학년생이었을 때였습니다. 그때 미네소타 대학교로 전교를 했죠.

팟캐스트: 미네소타 주립 대학교 말이죠?

수키: 네. 

팟캐스트: 알겠습니다.

수키: 그러니 대학교 2학년에 입학하기 전의 여름방학이었습니다. 동두천에 가서 제 부모님을 찾으려고 했죠.

팟캐스트: 한국에 갈 정도로 돈을 모았나요?

수키: 네. 

팟캐스트: 한국어를 여전히 기억하고 계셨나요?

수키: 네. 지금은 훨씬 실력이 나아졌지만, 그때는 한국어를 많이 잊어버린 상태였죠.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팟캐스트: 언어를 안 쓰다 보니 실력이 떨어졌군요?

수키: 네. 한국에 최초로 돌아간 때였습니다. 여기에 방문했을 때의 여권이 있어요. 1983년 6월이었죠.

팟캐스트: 한국 여권이네요?

수키: 네

팟캐스트: 미국 국적을 받지 못하셨나요?

수키: 적어도 그때는 아직 시민권을 받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한국 여권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가셨군요? 입국할 때 관련 질문을 했나요?

수키: 아뇨. 전혀요.

팟캐스트: 21살 때 돌아가셨나요?

수키: 아뇨. 21세일 때 결혼해서 장녀를 낳았으니까 18살 때 돌아갔죠.

팟캐스트: 처음 돌아갔을 때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셨죠?

수키: 운이 좋게도 대학교에서 한국 여자애를 알았어요. 한국에 가족이 있던 애였죠. 그래서 그 집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 애가 한국에서 지내고 있어서 같이 지내자고 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으로 돌아갈 최고의 기회였군요?

수키: 네 그랬습니다. 친구와 같이 서울에서 지내면서 하루 날을 잡아서 친구 오빠와 함께 동두천으로 가서 기록을 찾아보려고 했어요. 가보니 고아원이 장애인 고아원으로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그곳을 관리하던 사람들, 지내던 사람들이 전부 바뀌었죠. 마을에 돌아가서 학교나 다른 곳을 찾아다니자 사람들이 저를 보고 왜 돌아왔는지 물었어요. 한국에는 이제 저에게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금문교의 나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절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죠. 마을에 살던 아주머니 1명만이 저를 기억해 주셨어요. 아주머니는 여기에 남아 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한국에 남아 있다면 누가 절 농부와 결혼시킬 것이니 미국에 가서 교육을 받으라고 충고하셨죠. 

팟캐스트: 모두가 미국에서의 삶이 낫다고 생각했군요? 

수키: 네 그랬죠. 객관적으로 봐도 저에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입양되지 않았다면 교육받지도 못하고 누구와 빠르게 결혼해서 시장이나 고아원에서 일해야 했겠죠. 저에게 일어난 일 중 가장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비록 한국에서 행복하셨다고 해도 말이죠? 

수키: 네. 전 이 세상 모든 선택과 문제에는 업보가 섞여 있다고 생각해요. 입양된 일도 미래 업보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죠. 지금 과거의 모든 일과 평화를 이룬 상태입니다. 21년간의 결혼과 16년간의 이혼 상태도 모두 일어나야 했다고 생각해요. 지금 현재 상황에 닿기 위해서 모두가 일어나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거리를 걸을 때 과거의 삶이 전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큰 충격을 받으셨겠네요? 

수키: 제가 고아원에 돌아갔을 때 말인가요?

팟캐스트: 네.

수키: 네. 제가 떠난 고향이 아니었어요. 

팟캐스트: 알고 있던 사람들은 흩어졌고요.

수키: 네. 그다음에는 제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학교의 사진을 찍었죠. 제가 다니던 교실 자리에 화장실이 들어서 있더군요. 그 학교도 부수고 다음 해에 다시 지었습니다. 아주 재미있었어요. 

팟캐스트: 한국에서는 어떤 곳도 영원하지 않죠. 모두가 바뀌니까요.

수키: 그렇죠.

팟캐스트: 고아원에 어떤 기록이 남아 있었나요?

수키: 아뇨. 모든 기록을 소각했다고 하더군요. 한국 전쟁 이후에 많은 기록이 불탔다고 했습니다. 서울 경찰서에 가서 관련된 기록을 찾기를 원했지만 60년대 기록들이 전부 소각되어서 찾을 수 없다고 했죠. 

팟캐스트: 실망하셨겠군요.

수키: 네. 그래도 멈출 생각은 없습니다. 여전히 한국에 돌아가고 싶죠.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제 가족을 찾고 싶어요. 저와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이 형제자매를 찾으려고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는 제 유전자 정보를 유전자 조사 프로그램에 등록했고 그 정보를 사람들이 조사를 해주려고 하는 중이에요. 또 해외 입양인 연대에도 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있죠. 다음 단계로는 직장에서 안식년을 가지고 3달에서 4달 정도 한국에서 지내면서 관련 조사를 하려고 합니다. 경찰을 방문하고 도시 기록도 찾아보면서 제가 찾을 수 있는 것을 찾아보려고 해요. 2년 전에 한국에 다시 방문했고 대전에 있는 친구 집에서 지냈죠. 하지만 동두천과 4시간이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당일 여행으로 동두천에 갈 수 없었고, 호텔에서 지내야 했죠. 그래서 친구 가족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어요. 그때는 시간이 있다면 부모님을 찾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을 알고 즐기고, 여행하는 데 시간을 보냈죠. 

팟캐스트: 몇 년 전의 방문은 그렇게 보내셨군요?

수키: 네. 하지만 이번에 방문하게 된다면 조사에 집중할 예정이죠. 사실 유전자 조사 프로그램에서 관련 조사를 홍보하기 위해서 한국에 방문할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조사를 받으면 관련 친척들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COVID-19 전염병 때문에 관련 행사가 전부 중단되었죠. 하지만 이게 정리되고 나면 다시 사람들을 돕기 시작할 겁니다. 그 행사를 시작하면 관련 연락처를 찾아서 조사도 같이 진행할 예정이죠. 그렇다면 저 자신에 대해서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계 입양아 사회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듣는다면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서 무언가의 결론을 낼 수 있다면 좋겠죠. 우리에게 무언가 일어났고, 불완전한 점이 존재해요.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운이 좋은 편입니다. 불운하지 않고 행운아예요. 이 과정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었죠. 저는 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확신이 있고 저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최면 치료를 통해서 부모님이 제 삶을 구하려고 고아원에 맡겼다는 사실을 알고 부모님에 대해서 결론을 낼 수 있었어요. 아이 두 명을 낳고 나서 자기 강화에 대한 토론회에 참가하게 되었죠.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수행에 관한 내용이었고, 토론회 이름은 랜드마크 팜이었습니다. 전 세계적인 토론회이죠. 그렇게 토론회에 참가하면서 공부를 하니 어머니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어머니의 영혼이 제 곁에 있고 직접 볼 수 없어도 영혼이 항상 같이 있고, 항상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니 매우 편안해지는 기분이었죠. 어머니의 영혼은 항상 제 곁에 계시니까요.

팟캐스트: 처음 한국에 돌아가셨을 때 미국 시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어떻게 생각하셨죠? 

수키: 제가 한국 여권을 가지고 있긴 했죠.

팟캐스트: 네. 그것 때문에 어떤 기분이 들었죠?

수키: 기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외계인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많은 관광객이 한국에 방문하기 시작했지만, 한국계 입양아들은 많이 귀국하지 않았던 시점이었으니까요.

팟캐스트: 언제 한국에 귀국하셨죠?

수키: 1983년에 귀국했습니다. 한국계 입양아 중 극히 일부만이 한국에 돌아왔던 상황이었죠.

팟캐스트: 수키 씨에게 일어난 상황과 왜 그런지 사람들에게 설명하면 대부분은 사람들이 이해를 못 했겠군요?

수키: 제가 한국 여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한국인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했죠. 

팟캐스트: 여권을 봐도 될까요?

수키: 네. 이 여자애가 이민 간 뒤 부모님에게 한국어를 배우지 않았다고 생각했겠죠.

팟캐스트: 한국 이름이 전숙자이신가요?

수키: 네. 전숙자입니다. 제 이름이죠. 

팟캐스트: 여권 사진이 아주 아름답네요.

수키: 감사합니다. 

팟캐스트: 한국에서 외계인처럼 느껴졌고,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했나요? 

수키: 제 대학교 친구와 같이 지냈기 때문에 한국에 적응하기는 쉬웠죠. 하지만 한국어를 몰라서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저를 보고 고아라고 불렀어요. 그 시기에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주제가 아니었죠.

팟캐스트: 입양아라고 부르지 않았군요?

수키: 아뇨. 그렇게 부르지 않았어요. 그 시기 한국에서는 입양 자체를 언급하는 일 자체가 터부였습니다. 국가적으로 부끄럽다고 느끼고 있었죠. 국가적 문제이지만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러니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한국 여권에 찍힌 사진이 한국에 출국했을 때의 사진인가요? 

수키: 아뇨. 그때 저는 여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국제 여행이 가능한 서류를 통해서 출국할 수 있었죠.

팟캐스트: 여행 서류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수키: 제 서류에 제 이름이 전주희라고 적혀 있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 이름이 아니었죠.

팟캐스트: 그러니까 입양되었을 때 다른 이름이 주어졌다는 말인가요?

수키: 네. 저에게 주어진 가짜 이름이었죠. 심지어 가짜 생일도 주어졌어요. 제 입양되었을 때의 이름은 줄리 홀란드였습니다. 주희라는 이름을 발음할 수 없어서 줄리라는 이름을 대신 줬어요. 

팟캐스트: 하지만 미국에 도착해서 부모님에게 이름이 주희가 아니라고 말씀하셨군요?

수키: 네. 제가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제 이름이 계속 줄리 홀란드였죠.

팟캐스트: 줄리라는 이름을 받아들이고 생활하셨군요?

수키: 네. 가출할 때까지 줄리 홀란드라는 이름을 사용했죠. 가출하고 나서 신세를 진 위탁 가정의 아버지가 변호사였습니다. 그분의 도움을 받아서 제 이름을 전숙자로 다시 바꿀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일을 시작하자 사람들이 숙자라는 이름을 발음하지 못해서 저를 수키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그냥 제 이름을 수키로 바꾸었죠. 그래서 제 이름이 수키 잘랄리가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아 그래서 이름을 공식적으로 수키로 바꾸셨나요?

수키: 전숙희, 수키 전으로 바꾸었습니다.

팟캐스트: 입양되었을 때 왜 이름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수키: 주희라는 이름이 좀 더 고급스러운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제가 나이가 많은 아이라서 관련 문제에 얽히고 싶지 않아서 가짜 생일과 이름을 줬을지도 모르죠.

팟캐스트: 수키 씨가 입양되었을 때 입양 서류에 수키 씨의 나이를 어떻게 표기했죠?

수키: 음…. 미국에 왔을 때 12살에서 14살 정도였다고 기억하는데, 서류에는 제가 9살이라고 적혀 있었죠. 

팟캐스트: 생일을 언제 축하하시나요? 아니면 생일 자체를 축하하지 않나요?

수키: 6월 2일이 저에게 주어진 생일이었죠. 하지만 나중에 제 할머니 생일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하지만 그 날짜 자체도 사회복지제도가 저에게 준 생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진짜 생일이 아닙니다. 저에게 여러 이름과 서류가 주어져 있는 셈이죠.

팟캐스트: 언제 시민이 되셨죠

수키: 19….

팟캐스트: 미국 시민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수키: 제가 아이를 가진 뒤였죠. 제 딸이 한 살이었던 시점이었죠.

팟캐스트: 장녀 미트라 씨를 낳은 뒤였군요?

수키: 네. 아직도 시민권을 딴 날이 기억이 나요. 1986년 12월 17일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시민권을 따기 위해서 신청을 하셨군요? 

수키: 네. 1986년…. 아 아직 딸을 낳기 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애가 봄에 태어났죠. 임신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요. 그 애가 1986년 3월에 태어났습니다. 

팟캐스트: 로체스터에서 전남편을 만났나요?

수키: 네.

팟캐스트: 이란 출신이었나요?

수키: 그이 이름은 후세인 잘랄리였고, 이란에서 유학 온 남자였고, 이란 혁명이 일어났을 때 즈음에 유학 왔던 사람이었죠. 저도 외국인이었고, 그이도 외국인이었어요.

팟캐스트: 수키 씨를 사람들이 외국인으로 생각했나요? 아니면 수키 씨가 스스로 외국인이라고 생각했나요?

수키: 제가 저 자신을 외국인이라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정말요?

수키: 네. 우리 둘 다 국제 동호회에 소속되어 있었어요. 제가 회계였고 그 이가 서기였죠. 회장이 보기에 그이가 저를 좋아하는 것이 보여서 서로를 소개해줬습니다. 회장이 졸업 파티 겸 깜짝 데이트를 주선해줬어요. 제가 특정 버스 역에 가면 그이가 버스 역에서 만나서 파티로 데리고 가기로 되어 있었죠. 우리 둘 다 차가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후세인 씨가 수키 씨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나요?

수키: 제가 동물학 수업을 듣고 나면 그이가 생물학 수업을 들었죠. 회장, 마거릿이 말하기를 후세인이 절 보고 싶어서 생물학 수업을 하는 동안 밖에서 저를 기다렸다고 했어요. 그걸 본 마거릿이 우리 둘을 이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를 깜짝 데이트에 초대해줬습니다.

팟캐스트: 그 시기에 두 분이 아주 흥미로운 연인이었겠네요? 이란인 남성과 한국인 여성 커플이었으니까요.

수키: 대학교 때 사귀면서 파르시어를 하는 법을 배웠죠.

팟캐스트: 오. 그래요?

수키: 전 파르시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죠.

팟캐스트: 언어와 관련된 재능을 가지고 있군요?

수키: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더군요.

팟캐스트: 몇 달 만에 파르시어를 배우셨군요.

수키: 네.

팟캐스트: 후세인 씨에게서만 배웠나요?

수키: 그 이와 친구들에게서 배웠어요. 우리가 고학생이라서 같이 모여서 요리하고, 카드 게임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란의 정치가 불안정한 시기였어요. 미국 인질 사건이 일어나던 시점이라 서로 앉아서 몇 시간 동안 정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저는 옆에서 들으면서 파르시어를 빠르게 배웠죠.

팟캐스트: 대단하네요.

수키: 감사합니다. 

팟캐스트: 그 시기에 이란인이 미 중서부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죠?

수키: 그 시기에 아주 부유한 아랍인 학생들이 대학교에 입학하기 시작했고, 대학교들은 그런 사람들을 원했죠. 이런 학생들이 보통 등록금보다 3배에서 4배 정도 더 내고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외국 학생들을 불러들여서 학교를 금전적으로 지탱하자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그러한 변화 때문에 제가 받아들여지는 기분이 들었죠. 그 시기 자체가 특이한 시기였어요. 많은 미국 인질들이 이란에 잡혀 있었기 때문에 후세인이 이란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겨야 했어요.

팟캐스트: 후세인 씨가 이슬람교도인가요?

수키: 부모님이 이슬람교였죠. 하지만 후세인 자체는 독실한 이슬람교도가 아니었어요. 자기 자신을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소개하긴 했지만 1번도 기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시부모님은 자주 기도하셨어요.

팟캐스트: 그 시기에 미국에서 이슬람교도에 대한 적대심이 있었나요? 

수키: 아뇨. 그 시기에는 이슬람교 극단주의 테러 자체가 없었으니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았죠. 물론 이란 미국 인질 문제는 약간 문제가 있긴 했습니다. 

팟캐스트: 이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나요?

수키: 그이가 미국에 왔을 때 16살이었고, 제가 그이를 만났을 때 18살이었습니다. 전 그때 19살이었어요. 그이와 만나서 얼마 안 있어서 결혼했어요. 그이에게 저는 연애하고 싶지 않고 결혼해서 가족을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반면에 그이는 대학교 학위를 따고 난 뒤에 결혼하려고 했죠. 86년에는 한국에 돌아가서 살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 돌아갔던 이유도 한국에서 살 수 있는지 알려고 갔었죠.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처리해야 하는 서류가 너무 많았고, 처음부터 다시 만들기에는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동시기에 그이도 이란에 귀국해야 했는데, 이란에서 나오지 못할 않을 가능성이 있어서 위험한 일이었죠. 하지만 운이 좋게도 그이가 이란에서 돌아왔습니다. 그이의 아버지가 말하기를 가족 전체가 이란에서 빠져나와서 미국에 이민할 예정이니 미국 시민권을 따라고 충고해줬죠. 후세인이 이란에서 돌아와서 저에게 프러포즈했고 일주일 뒤에 결혼했습니다.

팟캐스트: 결혼은 법원에서 하셨나요? 아니면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하셨나요?

수키: 우리 아파트에서 결혼식을 했죠. 원룸식 아파트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50명의 사람이 왔습니다. 웨딩 케이크를 제가 직접 구웠고 시어머니가 음식을 전부 하셨죠. 시더 스퀘어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지역에서 게토라고 할 지역이었어요. 백달러 정도 식료품을 사고 난 뒤에 결혼했죠. 오전에 법원에 가서 법적으로 결혼을 하고, 오후에 이맘을 찾아서 우리 아파트에서 결혼식을 진행했어요.

팟캐스트: 그때 삶이 어떻게 수키 씨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지 생각해봤나요? 아주 신기한 경험이었으니까요.

수키: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었으니까요. 제가 갈 수 있었던 길이 참 많았죠. 

팟캐스트: 그다음에 딸을 바로 가지셨나요?

수키: 딸 미트라를 21살 때 가졌고, 장남인 비잔을 2년 뒤에 가졌습니다. 미트라가 태어났을 때 저는 아직 대학생이었어요. 아직 대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상태였죠. 아들 비잔이 태어났을 때는 제가 치위생사로 일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제 남편… 제 전남편…

팟캐스트: 전남편….

수키: 네. 전남편은 대학교를 아직도 다니고 있었어요. 그리고 9년 뒤에 제 셋째 아이, 막내아들인 시루스를 가졌습니다. 세 명 다 파르시어를 배웠습니다.

팟캐스트: 셋 다 한국 이름인가요? 아니면….

수키: 페르시아 이름이죠. 그 애들에게 역사적인 이름을 주고 싶었어요. 우리가 독실한 이슬람교도가 아니라 이슬람교 이름은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름들을 주고 싶었죠. 웨스트뱅크 국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페르시아의 역사적 이름을 찾아서 확인했습니다. 딸의 이름은 태양의 여신 미트라와 그 종교에서 이름을 따왔죠. 장남의 이름인 디잔은 페르시아의 역사적 전사의 이름을 따왔어요. 막내 아들의 이름은 시루스인데, 유대인을 해방시킨 키루스 대제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팟캐스트: 셋 다 대단한 이름이네요

수키: 그렇죠.

팟캐스트: 미트라 잘랄리 씨가 미네소타 민주당에서 큰 두각을 드러내는 정치인이라고 들었어요.

수키: 네. 세인트 폴 시의회 시의원이고 현재 2번째 임기를 지내고 있죠. 최연소 여성 시의원이었지만 올해에 또 다른 몽족 여성이 당선되면서 자리를 내줬습니다.

팟캐스트: 아드님들은 무엇을 하고 있죠?

수키: 비잔은 행동심리학에서 석사를 땄어요. 현재 자율형 공립학교에서 교육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른 쪽으로 전직해서 현재는 유기농 쇠고기 판매업을 창업했죠. 최고급 유기농 쇠고기를 호주가 아니라 와이오밍에서 직송해 판매하는 사업이에요. 제 막내아들 시루스는 25세이고 환경 엔지니어입니다. 지역 대학교를 졸업했고 라이프타임 피트니스(미국 헬스장 체인)를 위해서 일하고 있죠.

팟캐스트: 그 헬스장 체인 말이군요?

수키: 네. 사우스 데일에 있는 옥상 수영장이 있는 지점을 그 애가 디자인했죠.

팟캐스트: 아이들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우시겠어요.

수키: 세 명 다 아주 자랑스럽죠. 하지만 좋은 아빠를 두기도 했어요. 후세인은 지금도 그렇지만 좋은 아빠였습니다.

팟캐스트: 후세인 씨가 치과의사가 되셨죠?

수키: 네. 결국에는 치과의사가 되었죠. 

팟캐스트: 수키 씨의 아이들이 성장할 때 아이들이 어떻게 정체성을 규정했죠? 자기 자신을 한국계라고 생각했나요?

수키: 네 그랬다고 생각했어요. 어렸을 때는 확실히 한국계라고 생각했죠. 한인 교회도 다니고 한인 주일 학교도 다녔습니다.

팟캐스트: 애들에게 한국어로 말하기도 했나요?

수키: 네. 하지만 한국어 자체는 얼마 못해요. 한국 음식은 아주 좋아합니다. 요리도 해서 먹기도 하지만, 한국어는 못하죠. 하지만 한국에 돌아가서 한국을 배우려고 해요.

팟캐스트: 돌아간 적이 있나요? 애들을 데리고 한국에 가본 적이 있나요?

수키: 아뇨. 하지만 그러고 싶습니다. 운이 좋다면 이게 다 정리되고 나서 내년에 가고 싶어요.

팟캐스트: 안식년을 취하시면서 말이죠?

수키: 네. 대신 우리 애들 세 명은 파르시어를 무척이나 잘해요. 제 시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었고, 애들을 대신 봐주셨죠. 그래서 애들에게 파르시어를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애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도 한국계 친척이 없어서 못 쓸 테니 애들 아빠의 언어를 가르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게 하는 일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팟캐스트: 집에서 수키 씨가 파르시어를 사용하기도 하셨죠?

수키: 네. 의도적으로 파르시어를 사용했습니다. 우리 애들이 적어도 제 문화적 역사나 그 애들 아버지의 문화적 역사를 알고 배워서, 자기 정체성을 공고히 했으면 했죠. 언어는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에요. 제가 미국에서 적응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영어를 몰랐기 때문이죠. 그러한 불편함을 애들에게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수키 씨가 한국 문화를 잃어버려서 느꼈던 감정을 애들에게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군요?

수키: 네. 한국 문화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대학교 때 한국계 학생들과 깊은 교류를 했습니다. 한국어를 다시 배우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한국어 실력을 갈고닦았어요. 한국 학생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다시 한국어를 배울 수 있었죠. 그러고 나서야 훨씬 기분이 나아졌어요.

팟캐스트: 한국어도 유창하게 하실 수 있군요?

수키: 꽤 하는 편이죠. 물론 여전히 많이 배워야 합니다. 요즘은 쓰기와 맞춤법 관련해서 공부 중이에요.

팟캐스트: 한국 유학생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한국어를 배우려고 했을 때 겪었던 문제가 있었나요? 한국어를 예전에 배워서 훨씬 쉽게 다시 배울 수 있었나요?

수키: 네. 한국어 자체는 다시 쉽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인들이 쓰는 단어가 어렵거나 그랬나요? 좀 더 고급스러운 단어를 사용했나요?

수키: 네. 한국에서 미국으로 왔을 때 어린아이의 한국어 실력을 갖추고 왔죠. 거기에 항상 어른들에게 말을 해야 했어요. 저와 비슷한 연령대의 한국인들과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비슷한 연령대의 애들과 이야기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팟캐스트: 존댓말을 했지만, 친구들 사이에서는 반말해야 하니까요.

수키: 친구들이 그걸 듣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친구이니까 괜찮다고 했죠

팟캐스트: 수키 씨가 젊은 엄마이셨죠?

수키: 그랬죠.

팟캐스트: 교외에서 사셨나요?

수키: 처음 미네소타주 플리머스시로 이주했습니다. 거기에서 집을 사서 살았죠. 거기에서 뉴 브라이튼에서 치과를 개업해 그곳으로 출근했어요. 우리 둘 다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 창업하기로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저는 후세인이 치과의사 면허를 따는 동안 치위생사로 4년간 다른 치과에서 일했죠. 그다음에 한 6개월 정도 다른 병원에서 일하고, 우리 치과를 따로 열기로 했습니다. 그 시기에는 한국계 치과의사들이 극히 드물었죠. 그래서 이란계 사회와 한국계 사회를 동시에 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저희 첫 고객들이 이란인과 한국인들이었죠.

팟캐스트: 아 수키 씨가 한국어로 광고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군요?

수키: 네. 거기에 한국계 치과 의사가 없었으니 그렇게 시작하고, 다른 고객들도 따라왔죠.

팟캐스트: 시부모님이 수키 씨를 받아들여 주셨나요?

수키: 네. 서로 마음이 맞았습니다. 얼마 전에 2분을 만나고 왔죠. 처음부터 너는 우리 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딸이다. 이라고 말씀하셨어요. 한 4일 정도 그분들과 같이 지내고 왔습니다. 그분들과 같이 한국 슈퍼마켓에 가서 그분들이 좋아하는 한국 음식과 물품을 챙겨드리는 일부터 시작하죠.

팟캐스트: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죠?

수키: 한국 음식을 전체적으로 좋아하시죠.

팟캐스트: 몇 가지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수키: 잡채를 가장 좋아하세요. 갈비도 아주 좋아하시죠. 탕이나 국 종류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지만 만두, 오징어 볶음도 아주 좋아하십니다.

팟캐스트: 아이들이 모두 어른이니 묻고 싶은 일이 있는데, 입양아들의 트라우마가 아이들에게 이어진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관련 문제를 겪은 적이 있나요?

수키: 아뇨. 그런 적은 없어요.

팟캐스트: 알겠습니다.

수키: 제 딸은 입양아의 자식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저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서 아이들도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저도 관련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아이들이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아이들이 자기 혈통이나 배경에 관해서 묻고는 하나요?

수키: 제 딸은 자주 물어보고 서로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애들이 본격적으로 궁금해할 시기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가족을 꾸리게 되면 그때부터 저에게 질문하겠죠. 지금은 단순히 흥미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수키 씨가 아이를 가져서 부모님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게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수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특히 아이들이 자라면서 특정 시기를 넘어가면 더더욱 그랬겠군요?

수키: 네. 졸업식, 시상식을 보면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보여드리고 싶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아이들을 보면서 엄마를 더 닮았다고 생각하신 적 있나요?

수키: 좋은 질문이네요. 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제 막내아들, 시루스는 매우 동아시아계처럼 생겼고 키도 무척 크죠. 아버지도 키가 무척 컸습니다. 시루스는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외모예요. 제 딸 미트라는 제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둥그런 얼굴이죠. 반면에 장남 비잔은 아빠와 많이 닮았습니다.

팟캐스트: 이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수키: 네. 

팟캐스트: 16년 전에 이혼하셨다고 들었고 지금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수키: 네. 처음에는 아주 충격적인 경험이었어요. 지금의 제 상태였다면 계속 결혼하고 있었을 겁니다. 제 결혼과 이혼은 제가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그러한 문제를 치료해야 했군요?

수키: 네. 그러한 문제가 결혼 생활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저 자신도 우울증에 걸려 있었지만 저는 그런 상황을 몰랐고 누구도 몰랐죠. 저 자신이 망가지거나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러한 문제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는 결혼 생활을 못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후세인은 활동을 위한 결혼 생활을 했어요. 젊었을 때는 서로 즐겁게 지냈지만, 우리 삶이 너무 빠르게 바뀌어서 활동을 위한 결혼 생활이 되었죠.

팟캐스트: 부모님이 너무 빠르게 되었군요.

수키: 데이트를 한 적이 없죠. 바로 결혼했고, 학교에 다니고, 아이를 가졌어요. 그래서 연인으로서 서로 마음을 나누고 친한 친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그때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셨죠? 랜드마크 팜? 프로그램? 아니면 치료?

수키: 정신 상담을 받았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최면 치료도 받았죠. 두 치료가 제 문제에 대해서 결론을 낼 수 있게 도와줬습니다.

팟캐스트: 입양 문제에 대해서 말이군요?

수키: 제 입양 문제에 대해서 결론을 내게 해줬고, 제 안에 있는 공허와 상실의 감정도 확인하고 견디게 해줬죠. 랜드마크 팜은 저에게 있어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그 토론회는 자기 스스로 공부하고 단련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다면 큰 도움이 되지 않아요. 랜드마크 팜과 세미나는 열심히 노력해야 해야 하죠. 그 토론회에 대해서 노력을 해서 무언가를 얻어갈 생각이라면 매우 좋은 결과를 얻어 낼 수 있습니다. 랜드마크 팜 관련 프로그램을 많이 진행했는데, 제가 낸 결론은 전 망가져 있지 않고 완성되어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살면서 여러 가지 문제점을 겪고 과거에 살아남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해왔죠. 이 모든 일이 모여서 저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모두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우리의 길을 되짚어 봐요. 그렇게 하면서 살아남기 위해서 적응하게 되죠. 충분하지 않거나, 사랑받지 않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자신을 바꾸게 됩니다. 많은 입양아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고 생각해요. 어떤 점이 부족하고 나빠서 왜 저를 사랑하지 못하고 버렸을까? 이런 생각이 삶 자체를 부여잡게 되고, 직업….

팟캐스트: 연애…

수키: 연애… 제가 이혼하고 나서 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노력했어요. 저 자신에 대해서 만족하게 사랑하게 되었으니 지금 현재의 지식을 가지고 제가 결혼했다면 결혼 생활이 달랐겠죠. 그러한 정신적 문제가 저에게 문제를 끼쳤으니까요. 후세인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저와 저 자신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죠.

팟캐스트: 독신 생활을 어떻게 생각하시죠?

수키: 흠. 그렇네요. 몇 번 연애했는데 청혼을 받은 적도 꽤 있었습니다. 제가 이혼한 뒤로 제 마음이 확실히 이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기로 했죠. 지금까지도 그러한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세 번 청혼 받았는데 전부 좋은 느낌이 들지 않았죠. 현재 독신 생활은 꽤 마음에 듭니다. 괜찮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훌륭한 친구들이 있고, 돈도 그럭저럭 잘 벌고 있고, 경제적으로 독립한 상황이고, 건강도 좋습니다. 제 삶에 남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죠. 지금은 남자가 아주 대단한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어서 제가 딱히 놓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관심이 없습니다. 전 14살, 아니 살면서 자신을 관리하면서 돌봤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수키 씨, 친어머니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수키: 여전히 희망을 품고 있죠. 지금은 좋은 남자를 찾는 일보다 어머니를 찾는 일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남는 시간이 있다면 저에게 형제나 자매가 있는지 알고 싶어요. 그 사람들이 제 가족이죠. 물론 제 아이들도 제 가족이지만,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 가족을 찾는 일이 연애를 하고 그러는 일보다 더 중요하죠. 정체성의 중심이고, 밤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가 죽기 이전에 어머니와 가족을 찾기 위해서 모든 일을 하고 싶어요. 절대 포기하지 않겠죠. 지금까지는 여러 가지 삶의 문제가 있어서 미뤄왔습니다. 아이들 양육, 제 직업 등이 있어서 바쁘게 달려왔는데, 지금은 아이들도 다 자랐고 더 책임이 없으니 시간을 투자하고 싶어요.

Season 2, Episode 14:호정 아우데나에르데

저는 호정 아우데나에르데입니다. 최근에 한국 서울로 이사왔으며, 이곳에 산지는 이제 약 3주 정도 되었네요. 나이는 45살입니다. 저는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로 보내졌습니다. SWS를 통해서 입양되었는데, 서울 지국으로 보내진 후 바로 위탁가정에서 지내게 되었으나 정확한 날짜나 기간에 대해서는 몰라요. 서울에서 지내다가 로마에 살고 있는 플래미쉬 벨기에 출신의 부모님에게 입양되었어요. 아버지는 전자공학 박사셨는데, 제가 입양된 지 6개월 후 교수직 위임을 받아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가족은 벨기에로 가 짐을 정리하고 시민권과 관련된 서류 절차를 완료한 후, 미국 위스콘신주 매디슨으로 가게 됐죠.

그때 몇 살이었죠?

입양되었을 때가 26개월이었어요. 그리고 저희 가족이 11월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저는 2월생이니 만 3살이 되지 않은 때였죠. 이 모든 일들이 만 세 살이 되기 전에 일어났습니다.

외동이었나요?

아니요, 피가 섞이지 않은 오빠가 있어요. 오빠도 입양되었는데, 부모님이 네덜란드에 살 때 입양하셨죠. 저희 부모님은 결혼 후에 바로 외국으로 이주하셨고, 그 후로는 한번도 벨기에에 사신 적이 없어요. 먼저 네덜란드로 간 후, 이탈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죠. 미국에서도 아버지의 직업 특성상 이사를 많이 다녔어요. 모두 큰 대학교가 있는 도시들이었죠. 순서대로 말해 보자면, 매디슨, 메릴랜드, 다시 매디슨(매디슨에서는 몇 번이나 살았어요), 시애틀, 다시 매디슨, 그리고 뉴욕주립대가 있는 뉴팔츠라는 도시였어요. 그 후 저희 부모님은 별거를 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미국 동부 지역에 계속 머무르시고,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저는 다시 매디슨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18살이 되던 해 뉴욕시로 가서 살게 됐죠.

본인이 미국인이라고 느꼈나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집에서는 플래미쉬(벨기에 북부지방에서 쓰이는 언어)를 썼고 집안 분위기도 유럽풍이 강했어요. 저는 한 번도 벨기에에 살았던 경험이 없기 때문에 플래미쉬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지만, 집에서 쓰는 언어는 플래미쉬였죠. 부모님은 저희가 매우 좋은 교육을 받기를 바라셨어요. 여기서 교육이란, 단순히 학업만이 아니라 스포츠, 음악 등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빠랑 저는 다양한 방과 후 활동을 했는데, 학교와 그런 방과 후 활동은 전부 다 미국식이었죠. 집 밖에서는 이렇게 미국 친구들과 어울렸기 때문에, 두 세계를 왔다갔다 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다 어느날 흥미로운 일이 생겼어요. 부모님의 별거 전인지 그 후인지 시기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제가 더 이상 플레미쉬가 아닌 영어만 사용하게 된 거예요. 집에서는 몰라도, 밖에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영어만 쓰고 싶어 했어요. 최근에 알게 된 언어학자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이민 가정의 자녀들에게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자기들 생각에 영향력이 더 크다고 느껴지는 언어가 생기면서 그 언어만 사용하기를 원하게 되죠.”

그러니 저에게 있어서, 그게 영어었던 거예요. 플래미쉬는 다른 언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수의 사람만 사용하는 언어예요. 벨기에 중에서도 일부 지역에서만 사용하죠. 어린 마음에도 플레미쉬가 소수 언어라는 게 느껴졌나 봐요. 그리고 부모님이 비록 유럽인이긴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민자라는 소수자 신분이잖아요. 오빠와 저는 한국인이지만 부모님은 벨기에인이고, 우리는 미국에 살고 있고. 이런 인종 및 문화가 여럿 섞여 있는 환경인데다, 당시는 70년대였으니까 정치적인 면에서도 지금과는 매우 달랐죠. 인종차별도 존재했고요. 그래서 미국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강렬했던 것 같아요. 미국인으로서 그 안에 섞여들고 싶었죠. 현실적으로는 절대 그렇게 될 수 없는데도 말이에요.

그런 정체성과 관련해서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게 매우 힘들었을 것 같아요.

하하, 네, 조금 그랬죠.

이 복잡한 이야기를 매번 반복해야 하는 거잖아요.

맞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웃긴데, 당시에 저는 정체성 문제로 스스로를 참 많이도 괴롭혔어요. 사람들을 만나면 항상, 정말 매번,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을 받거든요. 제일 처음 물어보는 게 그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무슨 답을 듣고 싶어 하는지, 제 인종과 관련된 답을 듣고 싶어 한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시간을 끌면서 정확한 답을 주지 않았어요.

매디슨 출신이라고 이야기했나요?

그때 그때 우리가 살던 곳의 이름을 대곤 했어요. 그럼 상대방은 “사는 곳 말고… 고향은 어디…?” 라고 묻곤 했죠. 제가 국적이 벨기에라고 대답하면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고, 계속 그런 질문들이 이어졌어요. 도대체 당신이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고 묻고 싶을 때까지 말이죠. “제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알고 싶은 건가요? 출생지는…” 그렇지만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는 건 제게 매우 어려운 일이었어요. 진행자님도 저랑 비슷한 나이고 미국으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잘 아시겠지만, 저희 부모님들은 저희가 주변 환경에 잘 동화되기를 바라셨잖아요.

맞아요.

입양 기관에서도 부모의 문화권에 상관없이, 그 문화권에 아이를 동화시키라고 권하고요. 그랬기 때문에,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제가 다른 행성에서 왔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았어요. 너무나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졌으니까요. 벨기에 국적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였어요. 매우 낯설게 느껴졌죠. 벨기에에 대해 잘 모르니까요.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말하자면, 2중으로 이방인인 거잖아요.

맞아요. 게다가 이사를 자주 다녀서 매번 이방인 같았죠. 독특한 이름 때문에 전학한 학교에 첫 등교하는 날은 항상 괴로웠어요. 선생님이 출석을 부를 때마다 앞일이 예상되는 거죠. 게다가 알파벳 순으로 출석을 부르는데 제 성은 A로 시작하잖아요. 선생님이 이름을 보고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서 침묵이 길어질 때면, 제가 먼저 손을 들고 말했어요. “네, 저 여기 있어요.”

병원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죠. 저도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르다 멈칫 하면 그냥 제가 먼저 말하거든요.

네, 맞아요. 그리고 제 이름이 정말 어렵잖아요. 부모님께서 제 한국 이름은 그대로 가져왔는데, 성은 플래미쉬로 되어 있으니까요. 10자가 넘는 데다가 모음은 또 얼마나 많은지…

쉬운 이름으로 바꾸고 싶은 유혹은 없었나요? Hannah나 뭐 다른 것으로요.

당연히 그런 마음이 있었죠. 제 이름은 매우 특이에요. 왜냐하면 부모님이 저의 한국 이름을 그대로 붙여 주셨지만, 플래미쉬를 사용하기 때문에, J(ㅈ)를 Y(이)로 발음해요. 그래서 저는 평생 ‘호영’으로 불렸어요. 어느 시점에서는 ‘호영’이 아닌 ‘호정’이라고 발음하는 거라는 걸 알았지만 ‘호영’이 이미 익숙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계속 썼어요. 그리고 제가 한국에 와서 아빠(친부)를 만났을 때, 아빠는 왜 자꾸 제가 이름을 ‘호영’이라고 하는지 물었죠. 한국에서는 ‘ㅈ’ 과 ‘ㅇ’이 완전 다른 글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저를 호영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호정’이 맞는 거죠. 그리고 아빠가 또 묻더라고요. ‘근데 왜 ‘호정’이야? 내가 지어준 이름은 ‘효정’인데…’

입양인들에게 이름은 언제나 흥미롭긴 하지만 저는 제 이름을 정말 싫어했어요. 한국에서 이름은 두 글자(호와 정)로 나뉘어져 있죠. 그치만 저는 언제부터인가 이름을 한 단어로 붙여서 썼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가끔 저를 ‘호’라고 불렀는데, 특히 힙합이 막 유행하기 시작하던 80년대에 ‘호'(매춘부, 음탕한 여자를 뜻하는 ‘whore’를 힙합에서는 ‘hoe’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음)라는 이름은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창피한 이름이었죠. 누가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고 싶겠어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가게 되었을 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죠. “지금이 이름을 바꾸기 매우 적절한 시기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될 테니, 지금 이름을 바꾸렴.” 그렇지만 스스로 이름을 정한다는 게 정말 쉽지 않더군요.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어야 할까?’ 생각하면서 저는 많은 아이디어를 떠올렸어요. 부모님은 J를 ‘이’로 발음하셨기 때문에, 저를 ‘호영’이라고 불렀지만 어머니가 저를 부르던 별명은 ‘정이(Jungie)’였거든요. 그래서 준(June)이나 주노(Juno)와 같은 이름을 생각했었죠. ‘주노’라는 이름은 꽤 심각하게 고려했었기 때문에 사람들한테 저를 ‘주노’라고 불러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호영’이라는 이름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주노’라고 부를 때는 반응하지 않았죠. ‘호정’도 마찬가지에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사람들이 ‘호정’이라고 부르면 그게 저를 부르는 건지 몰랐죠. 이름이란 참 신기해요.

1999년에 저는 처음으로 인도 마이솔에 요가 수련을 하러 갔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매우 많은 시간을 보냈죠. 2007년이 되어서야 바르셀로나로 옮기게 되었어요. 2001년부터 2006년에는 뉴질랜드 출신의 파트너와 함께였는데, 그 당시 저희는 정해놓은 베이스가 없었어요. 파트너는 뉴질랜드, 저는 인도가 우리의 베이스라고 생각했죠. 인도에서 선생님과 수련을 하고, 여러 나라에서 요가를 가르쳤어요.

궁금한 게 있어요. 인도나 다른 나라에서도 정체성과 관련해서 같은 질문을 받았었나요? 아니면 질문이 조금 달랐나요?

확실히 달랐어요. 제가 요가에 정말 진지하게 임하게 되었을 때, 특히 인도에 가게 되었을 때, 친숙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영적인 연결’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비슷한 느낌이 있었어요. 그리고 재미있는 건, 한국에 처음 왔을 때도 그렇고 매번 한여름에 방문했는데, 한국의 무더위 때문에 인도가 더 친숙하게 느껴진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영적으로 연결된 것도 있고 인도는 저에게 확실히 특별한 면이 있어요. 사람들이 저에게 물어보는 것도 다르고, 커뮤니티도 훨씬 영적이죠. 인도 마이솔에서는 수련생 중 몇 명만 인도인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었어요. 인도인들조차 그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이고요. 서양의 다른 국가에서 자랐거나 인도의 다른 지역에서 마이솔로 수련을 위해 온 경우였죠. 진짜 마이솔 출신 수련생은 극소수였어요. 이렇게 다들 이방인이다 보니 모두가 동등한 입장이었고, 그게 저한테는 기분 좋은 변화였어요.

친부모님에 대해서 얼마나 이야기하실 수 있나요?

궁금하신 점에 대해 다 이야기할 수 있어요.

2007년에 친부모님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되신 거죠?

제가 유럽으로 돌아가게 된 이유부터 말씀드리면 이 질문에 답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단 한 번도 미국 시민권자였던 적이 없어요. 그 당시 벨기에에서는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시민권자가 아니라 영주권자로 미국에 살고 있었죠. 그런데 9/11 테러가 발생하고 나서 이민법이 대폭 바뀌었어요. 이전에 ‘영주권’이라고 하면 평생 유효한 것이었는데, 갑자기 10년이라는 유효기간이 생겨버린 거죠.

권리가 축소된 거네요.

그렇죠. 그리고 10년마다 갱신해야 할 뿐만 아니라 1년에 6개월 이상 미국에 실질적으로 거주해야 한다는 규정도 생겼어요. 아니면 외국에 살더라도 6개월마다 한 번씩 미국에 다시 들어와야 했죠. 그런데 당시 저는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다 보니까 입국 시기를 한 번 놓쳤고, 영주권이 박탈됐죠. 미국에 있어야 할 큰 이유를 느끼지 못했던 데다가, 유럽연합 체제에서는 (벨기에 국적으로) 유럽에 사는 게 수월했어요. 그래서 유럽에서 요가를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됐죠. 당시에 뉴질랜드 파트너와 함께였는데, 그 사람과 함께하는 삶은 항상 여름 속에 사는 것 같았어요. 항상 여름인 시기에 맞춰 남반구와 북반구를 옮겨 다니면서 지냈죠. 그러다 그 사람과 헤어진 후 마드리드에서 요가를 가르치는 일을 맡았어요.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지금까지의 생활과는 완전히 달랐죠. 그리고 당시에 저는 매우 금욕적이고 절제된 삶을 살고 있었어요. 이별 후유증도 심하게 앓았는데, 저에게 이별은 항상 어려운 일이에요. 삶의 여러 가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명상을 많이 했어요. 당시 제가 품었던 질문 중 하나도 헤어짐, 이별에 대한 것이었어요. 왜 저는 항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지 하는 질문이요. 저는 양부모님과도, 입양된 오빠와도 관계가 원활하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제 생각보다 훨씬 뿌리 깊은 원인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겪는 정체성의 문제가 입양되었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불현듯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 과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 거죠. 입양이 아니라 친부모와의 이별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말이에요.

당시 제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생일이 가까워지면 항상 ‘나의 뿌리는 어디이고 부모님은 누구지?’ 같은 질문들이 떠오르곤 하거든요. 입양된 사람들이 자신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면서 던지는 온갖 질문들이요. 그래서 인터넷에 저의 입양을 주선했던 기관인 SWS를 검색했어요. 웹페이지는 전부 한글로 되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작게 영어로 ‘입양 후 서비스’라고 써있더군요. 클릭했더니 이름과 생년월일, 문의글을 남길 수 있는 창이 떴어요. 16살에 독립할 때 양부모님께서 입양 관련 서류를 주셨기 때문에, 저는 그 서류에 있는 정보를 입력했어요. 저의 이름, 이탈리아로 입양되었다는 것, 양부모님이 벨기에 출신이라는 것, 입양 서류 번호, 그리고 친아버지의 이름….

친아버지의 이름도 알고 계셨어요?

네, 서류에 이름이 있었어요. 제가 갖고 있던 정보를 모두 입력한 후, 입양기관에 있는 정보를 모두 저에게 알려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한 달 가까이 답변을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시 한번 문의글을 남겼죠. 한 달 전 쯤 글을 남겼는데, 혹시 받아보지 못했냐고 말이죠. 그러자 바로 연락이 왔어요.

“보내주신 정보 잘 받았습니다. 신원 확인을 위해 본인 신분증 2종류를 제출해 주시면, 관련 서류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신분증을 보냈더니 바로 이렇게 답변이 오더군요.

“신원을 확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입양 서류 전체를 찾을 수 있었고, 친부모의 소재를 파악한 후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제 생일이 2월 18일인데, 처음 이메일을 보낸 게 1월이었으니까 답변을 받았을 때는 제 생일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아쉬탕가 요가는 달의 움직임, 음력에 따라 수련을 하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해요. 입양기관에서 다시 연락을 해 온 게 4월의 신월이었어요  2개월 만에 다시 연락이 온 것이니, 매우 빠른 편이었죠.

친아버지뿐만 아니라 친어머니도 찾았다고 했는데, 저에게는 정말 뜻밖의 일이었죠. 왜냐하면, 입양 서류에 친어머니 이름은 없었거든요. 보통은 입양 서류에 친부모에 대한 설명이 두세 줄 정도고, 그것조차 없는 경우도 있잖아요. 제 서류에는 설명이 3줄이었는데, 이런 내용이었어요. “친모가 아이를 1년 동안 키웠지만 그 후 친부에게 아이를 맡김.” 그래서 저는 자라면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입양 서류를 본 후부터, 친어머니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아이를 친부에게 맡기고 떠난 사람이라고 하니, 의식적으로 친모를 전혀 떠올리지 않았죠. 이름도 몰랐기 때문에 아예 제 머릿속에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친부모님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후, 몇 년 동안 가만히 계셨던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당시 저는 너무 놀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입양기관에 답장을 써서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자세히 알려달라고 했죠. 보통은 편지를 주고받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당연히 언어가 안 통할 테니 입양기관에서 편지를 번역해주겠다고 했어요. 아, 그리고 친부모를 찾았다고 연락하면서 몇 가지 정보를 더 알려줬었어요. 친아버지는 저와 연락할 의향이 있다는 것, 친부모님은 서로 헤어진 상태라는 것 등이요. 제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은 결혼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미혼모였던 거죠. 그리고 또 알려준 정보는, 어머니가 10년 전에 뇌졸중을 앓았다는 것이었어요. 당시가 2007년이었으니까, 뇌졸중이 일어난 건 1997년 즈음이었겠죠. 정확한 날짜는 알려주지 않았어요.

친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전신마비가 와서 말을 못 한다고 했어요. 엄청난 충격이었죠. 이런 상황 때문에 친모 대신 외삼촌이 저와 연락할 의향이 있지만, 친어머니 상태를 고려할 때 어머니가 저를 만나는 건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다고 했죠. 그래서 엄마 쪽으로는 섣불리 행동을 취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아빠가 저에게 먼저 편지를 썼는데, 거기에 제가 답장을 하면서 아빠와는 자연스럽게 연락을 주고받았어요. 편지를 세 번쯤 주고받고 전화번호도 교환했죠. 그때 저는 격변의 시기에 있었어요. 막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로 옮겨서 아쉬탕가 요가 스튜디오를 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죠. 당시에는 스마트폰이 아직 나오기 전이니까, 노키아 폴더폰을 사용했는데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온 거예요. 당시 국제통화는 품질이 좋지 않았잖아요? 듣기만 해도 거리감이 느껴지고, 목소리가 울렸죠. 상대방이 “여보세요? 네 아빠다.”라고 하는데 너무 깜짝 놀라서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어요. 아빠가 영어를 조금 할 줄 아셨는데, “스페인 간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때 제일 처음 든 생각은 ‘맙소사, 나는 준비가 안 됐는데!’였어요. 그래서 제가 입양기관에 편지를 쓸 테니까 그쪽이랑 먼저 이야기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입양기관에 편지를 썼죠. ‘아빠가 오신다는데, 저는 시간이 더 필요해요. 이사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어요.’ 당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던 데다가 친아버지를 만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였어요. 완벽히 준비가 갖춰진 상태에서 만나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일이 너무 빨리 진행된다고 느꼈거든요. 그래서 비행기 표를 사기 전에 저에게 미리 말해달라고, 시간을 좀 달라고 입양기관을 통해 전달했어요. 그러고 나서는 아빠도, 저도 약간 멈췄던 것 같아요. 한 걸음 물러선 거죠. 당시 저는 요가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면서 바르셀로나에 자리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어요. 그 후로 한두 번쯤 편지가 더 온 후 연락이 끊겼어요. 그때가 2007년 여름이었고, 저는 2009년 1월에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면서 그 사람에게 저의 이런 이야기를 조금씩 하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 그 사람이 “네가 한국에 가는 게 좋겠어.”라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친아버지가 위암이 있었는데 좀 좋아지셨거든요. 그러니 친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만나 뵙는 게 어떻냐는 거죠. 저는 그냥 넘기려고 했는데, 그게 제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라며 계속 권했어요.

무엇이 두려웠나요? 왜 망설이신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망설이길 잘한 것 같아요. 엄청난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게 아닐까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가 망설였던 건 사실이에요. 저를 중심으로 한 엄청난 비밀을 발견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아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었나요?

네. 정확한 실체는 알 수 없었지만, 전혀 모르는 것을 마주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어요.

한국에 가서 친부모님을 만나는 이야기를 파트너와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면서, SWS에 연락해 “한국에 갈 예정이며 친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제가 특별히 ‘아빠’를 만나고 싶다고 한 건 그동안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이에요. ‘아직 살아계신다면’ 만나고 싶다고 했죠. 왜냐하면 연락을 주고받은 지 이미 5년이 지났기 때문에 아빠의 건강 상태에 대해 확신할 수가 없었거든요. 어쨌든 ‘한국에 갈 예정’이라고 이야기했죠.  

그랬더니 얼마 있다가 SWS에서 연락이 와서, 아빠가 중간에 이사를 해서 소재 파악이 조금 힘들었지만 결국엔 아빠를 다시 찾았고, 저를 만나실 의향이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알겠다, 8월에 한국에 가겠다.”라고 답했죠. 그리고 재미있는 건, 제 파트너인 브루노와 함께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 않는 곳을 많이 갔었거든요. 사람들이 쉽게 갈 수 없는 외진 곳일수록 더 좋다는 게 저희 생각이었죠. 브루노는 저와 함께 한국에 오기 위해 8월을 통째로 휴가 냈는데, 스페인의 일반적인 직장인 생활을 하는 브루노에게 한 달은 엄청난 시간이었죠. 그래서 이왕 한국으로 갈 거면 북한도 가보는 게 어떻냐고 브루노가 제안했어요. 그래서 제가 입양 후 처음으로 다시 밟았던 한국 땅은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었어요. 먼저 북한 여행을 하고 아빠를 만나러 남한으로 왔죠.

북한 여행이 가능하기는 한가요? 여행사를 통해서 간 건가요?

저는 벨기에 국적을, 브루노는 스페인 국적을 가지고 있어요. 스페인 여행사를 통해 투어를 신청했고, 일행 규모는 상관없었어요. 2명이어도 되고 심지어 한 명이어도 가능하죠.

벨기에 국적이었기 때문에 미국인보다 북한 여행이 쉬웠던 거군요.

확실히 그래요. 제가 알기로 지금은 미국인의 북한 여행이 완전히 금지되었을 거예요. 어쨌든 저희는 북한을 열흘 동안 여행했어요. 신기한 건, 아빠의 고향이 북한이라는 거예요. 입양 서류에는 아빠가 중국 출신이라고 기재되어 있어서 당시에는 몰랐어요. 중국 만주가 아빠 고향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제 생각에는 아마 한때 북한에 속했던 지역 출신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까 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 제가 반은 중국인이라고 생각했죠.

북한 출신이라고 하면 입양이 어려울까 봐요?

아마도요. 아무래도 입양기관에서는 친부가 북한 출신이라고 밝히지 않을 것 같아요. 아무튼 북한 여행은 정말 흥미로웠어요. 특히 최근 남북 대화가 활발히 일어나고 있잖아요. 통일에 대한 논의는 항상 있었지만, 현재 정권에서는 논의가 더 활발한 것 같아요. 하지만 사람들이 북한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다면 어떨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통일에 대한 논의가 있기는 하겠지만… 북한은 정말 다른 세상이거든요.

만약 남한을 먼저 방문한 후 북한에 갔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해요. 북한은, 뭐랄까, 타임캡슐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는 느낌이었어요. 여행자는 북한이 공개를 허용하는 것만 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말이죠. 비행기에서 내린 순간부터 항상 가이드 2명과 운전사가 저희와 함께 다녔어요. 가이드가 2명인 이유는 너무 많은 정보를 발설하지 않도록 서로 감시하기 위한 거라고 해요. 핸드폰은 공항에 맡겨야 하고, 여행하는 내내, 호텔 방에 있는 때만 빼고는 가이드 2명이 항상 저희를 따라다녔어요. 심지어 호텔에서도 로비에서는 가이드와 함께 있어야 했죠. 저희랑 함께 앉아서 대화를 하거나 식사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매 순간 감시당하는 거예요.

북한은 매력적이면서도 이상하고 초현실적인 곳이었어요. 매 순간 의심하게 되거든요. 하루는 가이드가 저희를 공원에 데려갔는데, 사람들이 소풍을 즐기고 있더라고요. 그러면 ‘이건 그냥 쇼가 아닐까? 설정이 아닐까?’ 이런 의문이 드는 거죠. 저희는 가이드가 보여주는 것만 볼 수 있으니까요. 정해진 식당에서만 식사를 할 수 있고, 정해진 장소만 방문할 수 있어요. 저희가 북한 여행 일정을 열흘이나 잡은 이유는, 아주 외진 곳에 있는 산악지대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장마 때문에 홍수로 다리가 유실되어서 갈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게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그냥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는 수밖에요. 북한은 매력적이면서 확실히 이상한 곳이었지만, 동시에 매우 인간적으로 느껴졌어요. 북한 주민들도 사람이잖아요. 여행하면서 가정집을 방문하고 사람들과 일대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사람들도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일 뿐, 그냥 사람이더라고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북한에서 남한으로 바로 올 수는 없어요. 그래서 저희는 베이징을 경유해서 서울로 왔죠. 아직 6~7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북한에 있다가 기술의 최첨단에 있는 한국에 오니… SWS는 강남에 있는데, 북한과 극명한 대비를 이뤘죠. 저는 인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개발도상국에 익숙한 편이었어요. 그리고 한국이 가난했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요. 그래서 한국이 이제는 많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발전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북한을 보고 온 직후라 그런지….    

충격이 컸군요.

매우 충격적이었어요. 북한에서 받은 것과는 정반대의 충격이었죠.

서울의 SWS 지사를 방문한 후 대구로 내려갔어요. 다른 입양기관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SWS는 처음 제가 연락했을 때부터 항상 투명하게 정보를 공유했었어요. 아빠가 직접 저를 입양 보낸 것이기 때문에 제 서류가 더 잘 갖춰진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저희 오빠는 길거리의 박스에 버려진 채 발견되었기 때문에 아무런 정보가 없거든요. 그런데 저의 경우는, 아버지가 직접 저를 입양기관에 맡기면서 이름도 알려줬기 때문에 상황이 달랐어요. 그리고 저한테 입양 서류를 보여줬을 때, 지금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제가 운이 좋았을 수도 있는데, 방에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저 혼자 서류를 볼 수 있게 해줬어요. 서류 대부분이 한글로 되어 있어서 제가 읽을 수는 없었지만, 이런 일은 아주 예외적인 거예요. 어릴 때는 오빠 말고는 주변에 입양인이 거의 없었지만, 최근에 IKAA(세계 한인 입양인 협회) 모임에 참여해서 입양인들의 다양한 사연을 접했는데, 입양기관에서 정보를 숨긴다든가 서류를 보여주지 않거나 일부만 보여주는 등 제가 했던 경험과는 완전 다른 사례가 아주 많더라고요.

아무튼 대구로 내려가서 SWS 대구 지사에서 아빠를 만났어요. 방에 저랑 브루노가 들어갔는데, 거기에 아빠와 나이 든 여성, 어린 아이, 그리고 다른 여자 2명이 더 있었어요. 아빠가 저를 처음 보자마자 한 말은 “많이 컸구나!”였어요. (웃음) 저를 아기 때 보고 그 후에 처음 본 것인데다 제가 아빠보다 키가 컸거든요. 그러니까 많이 큰 게 맞죠. 그렇게 아빠를 만났는데 이상하게도 저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어요. 친아버지란 사실 말고는 완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아빠는 제가 어릴 적에 대한 기억이 아주 많았거든요. 아빠 입장에서는 그 만남이 감동적이었겠죠. 같이 있던 나이 든 여성은 아빠의 형수님이었어요.

다른 2명의 여성 중 한 명은 통역사였고, 다른 한 명은 SWS 직원이었고요. 아빠와 저의 만남을 보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어요. 그런데 저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어요. 그게 충격 때문인지 트라우마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거죠. 어쨌든 인사를 나눈 후 본격적으로 앉아서 서로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입양 서류에 있던 정보를 바탕으로 통역사를 통해 질문을 했는데, 아빠가 하는 대답은 서류에 있는 거랑 완전히 다른 거예요. 어느 시점에서는 제가 브루노에게 “이 사람, 우리 아빠가 아닌 것 같아.”라고 입 모양으로 말할 정도였죠.

(웃음) 이름이나 주민등록번호는 서류와 일치하는데, 중국 만주 출신이 아니라 고향이 북한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아빠가 의대생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실상은 전혀 달랐어요

대학생이 아니었나요?

대학생이었는데 막 제대한 직후였다고 해요. 이런 식으로 제가 입양 서류에서 본 정보와는 많이 달랐어요. 게다가 제가 아빠를 닮지 않았기 때문에, 친딸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죠. 하지만 아빠는 제가 친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저희 아빠가 맞았어요.

그러면 엄마를 닮았나요?

네, 엄마를 더 많이 닮았어요. 재미있는 점은, 제가 그동안 인도를 포함해 여름인 곳에서만 지냈기 때문에 피부가 많이 까맸거든요. 머리도 아주 길었고요. 제가 요가를 수련하면서 인도에서 오래 지냈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아빠의 형수님 되시는 분이 제 손을 어루만졌던가, 뺨을 쓰다듬으셨던가… 아무튼 저를 보면서 “그동안 고생을 좀 한 것 같구나.”라고 하시더군요. (웃음)

피부가 까매서요?

네, 제가 약간 히피처럼 보였겠죠. 그리고 하는 말이 “너희 엄마는 정말 피부가 하얬단다.” 마치 피부가 하얀 것이 좋은 것처럼요. 계속해서 하얀 피부 이야기를 하는데(웃음), 저는 전혀 그렇지 않았죠. 피부색은 아빠를 더 닮았어요. 아빠는 텃밭을 가꾸셔서 햇빛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피부가 아주 까맣거든요. 그러니 제가 아빠를 닮은 유일한 점이라면 피부색이었어요. 그리고 엄마와는…

결국 엄마를 만났나요?

네, 만났어요. 그 이야기를 하자면… 이 인터뷰 며칠이나 할 수 있죠? (웃음) 농담이고요. 결국 엄마를 만났어요. 입양인들은 대부분 주변에 나와 닮은 사람이 없는 환경에서 평생 살게 되잖아요?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난다는 건 적응이 필요한 일이더군요. 당시 한국을 방문해서 찍은 사진을 계속 들여다볼수록 이제는 닮은 점이 보여요. 하지만 당시엔 닮았다고 못 느꼈죠. 닮은 사람이 없는 것에 너무 익숙해지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서 나와 닮은 점을 알아차리는 게 정말 어려워요.

아빠와의 첫 만남으로 다시 돌아가자면, 그 자리에서 아빠가 결혼해서 자녀가 3명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데 아빠의 가족 중 누구도 저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어요. 아빠는 결혼 전에 자식이 한 명 있었으며 입양 보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입양인과 친부모의 만남에서는 모든 의사소통이 통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잖아요. 대화 내용이 얼마나 충실하게 통역되는지도 알기 어렵죠.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는 아빠가 한참을 이야기했는데 통역은 몇 마디밖에 안 해주는 거예요. 제가 “진짜 그게 다예요?”라고 물을 정도였죠.

맞아요, 막 20분 동안 이야기했는데 말이죠. (웃음)

네, 분명히 몇 마디보다는 많이 말한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런데 제가 그렇게 물으면 “네, 그게 다예요.”라는 답이 돌아오니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그만큼 통역사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하니까요. 어쨌든 그렇게 대화가 오가는 중에 아빠의 결혼 소식을 전하면서 통역사가 하는 말이, 아빠의 가족이 저에 대해 모르고, 알아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알면 안 된다고요?”라고 제가 반문했더니, 아빠가 결혼하기 위해서는 혼외자식이 있어서는 안 되니 아이는 없는 것으로 해야 했다고 대답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전 그저 알겠다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아빠는 저랑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정말 노력했어요. 저희가 한국에 있는 동안 총 4일을 아빠와 함께 보냈어요. 연속해서 4일을 만난 건 아니었는데, 아빠에겐 다른 자식 3명이 있었고 그중 둘은 결혼해서 아이가 한 명씩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빠가 이틀 동안은 손주를 돌보러 가야 했어요. 하지만 저희를 만날 때는 아빠가 가족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어요. 아침 8시부터 저희가 묵는 호텔로 데리러 와서, 하루 종일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말이죠. 하루는 저희를 부산에 데려가서 자갈치 시장이랑 이것저것 구경도 시켜주셨어요. 그리고는 저녁 8시가 되어서야 다시 호텔로 저희를 데려다주셨죠. 아빠는 우리가 가족이라고 생각해서 그랬겠지만, 호텔 방까지 따라 들어와서 객실 슬리퍼를 신고 의자에 앉곤 했어요. 그러면 저는 ‘와, 지금까지 온종일 같이 있었는데, 집에는 도대체 언제 가시는 거지?’ 싶은 생각이 드는 거죠. (웃음)

그리고 아빠와 SWS에서 처음 만났을 때를 제외하곤 통역사 없이 만났어요. 많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게, 서로 함께 있다는 게 중요했죠. 아빠가 영어를 조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손짓, 발짓으로 어떻게든 의사소통은 가능했어요. 아빠가 정말 노력을 많이 하셨죠. 브루노와 제가 해인사에서 며칠 동안 템플 스테이를 했는데, 아빠가 해인사까지 데려다주시고 마지막 날에 데리러도 오셨어요. 그리고 중간에 갑자기 찾아오기도 하셨죠. “그냥 오후에 시간이 비어서 너를 보러 왔어.”라고 하시더군요. 확실히 저를 아끼신다는 게 느껴졌어요.

통역사가 함께 있었던 첫 만남에서 아빠는 저에게 큰 죄책감을 갖고 있다고 했어요. 그런 죄책감 때문에 결국 위암이 온 거라고 말이죠. 아빠가 엄마에 대한 질문도 많이 했어요. 지금 어디 있는지 같은 걸 물어봤죠. 아직 엄마를 만나지 못했고, 어디 사시는지 모르고, 엄마가 뇌졸중을 앓았다는 이야기를 해드렸는데… 뭐랄까, 아직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 같았어요. 아빠가 하는 질문이나, 끈질기게 계속 물어보는 점에서요. 신기한 건, 두 분 모두 아직 대구에 사신다는 거예요. 같은 도시에 계신 거죠.

첫 번째 만남에서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반면, 대구역에서 아빠와 헤어지면서는 달랐어요. 제가 울었거든요. 헤어짐에 유난히 서툰 탓인 것 같아요. 무언가가 제 감정을 건드린 거죠. 지난 며칠을 함께 보낸데다 언제 아빠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여러 이유로 눈물이 났어요. 당시로서는 제가 한국에 다시 오게 될지, 앞일을 몰랐으니까요. 바르셀로나에서 요가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었고 매우 바쁘던 시기였어요. 요가 티칭에 대한 책임감도 매우 컸죠. 한국에 언제 다시 올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헤어지는 거였으니까 무척 가슴이 아팠죠. 그렇게 저희는 바르셀로나로 돌아왔고, 그 후에는 제가 먼저 아빠에게 연락하지 않았어요. 가족들에게 저를 숨기고 싶은 아빠의 마음을 존중한 거죠. 진행자님이나 제가 입양을 갔던 그 시기에는 지금과 달라서 모든 게 비밀리에 진행되었잖아요. 저희 어머니(입양모)가 이렇게 말해주셨거든요. 저랑 오빠를 입양하면서 ‘아이를 절대 한국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한국과의 모든 인연을 끊겠다’라는 내용의 서약서를 작성했어야 했다고요.

정말요?

네, 어머니 말씀은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친부모님을 찾았을 때 어머니가 많이 놀라셨어요. 그렇게나 비밀로 치부되었는데 어떻게 친부모를 찾았는지 모르겠다는 거죠. 제 느낌이지만, 마냥 기뻐하시지만은 않았어요. 어쨌든 당시에는 입양이 매우 비밀스럽게 진행되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아이를 입양 보내면서 본인 이름을 밝혔잖아요. 언젠가 호정씨와 다시 만나게 될 거라 기대하시지 않았을까요?

그 부분은 잘 모르겠어요. 이름을 기록에 남기시긴 했지만, 친권 포기 각서를 쓰셨으니까요. 여기서 또 신기한 점은, 제가 SWS에서 본 입양 서류에 이 포기 각서도 있었는데, 저는 사실 이 서류를 보면 안 되는 거였어요. 방에 혼자 앉아서 서류를 보다가 담당 직원이 들어오길래 제가 그 서류를 가리키며 “이건 무슨 내용이에요?”라고 물었어요. 그 페이지만 좀 달라 보였거든요. 그랬더니 직원이 당황하면서 “그 서류는 보시면 안 되는 건데…”라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입양 과정에서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 일종의 서약을 하는 거예요. 아빠는 아버지로서 저에 대한 모든 친권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쓰고, 양부모님은 한국과 연락을 모두 끊겠다고 서약한 거죠.

처음 아빠를 만나고 온 후 6개월 정도는 아빠가 저에게 연락하시다가 점점 연락이 뜸해졌어요. 2012년 8월에 첫 만남이 있었는데, 다시 아빠한테서 연락이 온 건 2014년 10월이었으니까 2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였죠. 당시 저는 인도에서 수련하고 있었는데, 아빠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병원’이라는 말은 알 수 있었어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죠. 인도 마이솔의 수련생들 사이에는 매우 국제적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어요. 그곳에 한국인도 있었고 재미교포도 함께 수련을 하고 있었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아빠와 영상통화를 했고, 암이 재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전이가 일어나서 뇌종양이 생겼고, 뇌수술을 2번이나 했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종양이 더 퍼져 뇌 기능을 상실하기 전에 저와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으니 한국으로 올 수 있냐고 물으셨어요. 앞으로 증상이 얼마나 악화될지 의사도 알 수 없었거든요. 당시 브루노는 바르셀로나에 있었는데, 제가 전화를 걸어서 상황을 설명하고 아빠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한국에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어요. 브루노가 흔쾌히 함께 가주겠다고 했죠. 저는 작별 인사를 위해 가는 것이라면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한국 방문일 테니 엄마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다고 말했어요.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연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요. 브루노는 저를 적극 지지해줬어요. 그래서 저는 SWS에 다시 연락해서, “아빠의 연락을 받고 한국에 다시 가려고 한다,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라고 했죠. 2007년에 SWS의 연락을 받았을 때, 엄마가 뇌졸중을 앓았지만 외삼촌은 저와 만날 의향이 있다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엄마쪽 가족을 만날 수 있게 연결해 달라고 부탁했죠. 며칠 후 답변이 왔는데, 외삼촌은 저를 만날 의향이 있지만, 조건이 있다고 하더군요. 제가 친아버지나 그쪽 가족을 아직 만나지 않았다면, 이라는 조건이요. 친부를 이미 만났다면, 저와 만나지 않겠다는 거였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뭔가 사연이 있다는 걸 직감했죠. 제가 친아버지를 만난 건 이미 SWS도 아는 사실이었지만, 외삼촌에게는 제가 아빠를 만난 적이 없고, 삼촌을 만나 엄마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고 전해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답변이 와서, 삼촌이 저를 만나는 데는 동의했지만, 엄마의 건강 상태 때문에 아직 제가 엄마를 만나는 건 안 된다고 했어요. 삼촌을 설득하고 싶다고 SWS에 이야기했더니, 그건 제가 하기 나름이니까 우선 외삼촌을 만나서 뭐든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외삼촌을 만나기 전에 알아둘 것이 하나 더 있다면서 SWS에서 이메일이 왔는데, 외삼촌이 시각장애인이라고 거예요. ‘아, 시각장애인이라니…’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당시에는 정확히 깨닫지 못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제가 SWS에 답장을 써서, 외삼촌에게 엄마 사진을 가져올 수 있는지 물어봐 달라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에 사진이 거의 없을 거다”라는 답변이 왔어요(웃음). 그때야 아차 싶었죠.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사진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제야 많은 것들이 와닿기 시작했어요. 외삼촌은 제가 엄마를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결정권을 쥔 사람인데, 앞이 안 보이니 제가 엄마를 닮았는지에 이야기해 줄 수 없고… 매우 묘하고 복잡한 기분이 들었죠.

외삼촌이 호정씨를 직접 본다면 설득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군요?

맞아요. 하지만 어쨌든 외삼촌을 만나고 싶다고 SWS에 답장을 썼어요. 그리고 도착 첫날, 아니면 둘째 날에 삼촌과 만나는 일정을 잡았을 거예요. 방문 일정이 열흘밖에 안 됐고, 아빠와도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만나야 했으니 일정이 빡빡했어요. 그렇게 만날 약속을 잡았는데, 출발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 아빠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어요. “네가 한국에 오더라도 못 만날 거다”라고요.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지 정말 당황스러웠죠. 그래서 입양기관에 이메일을 써서 “방금 이런 문자를 받았다, 이번 여행 자체가 임종 전에 아빠를 만나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한 것인데, 이게 무슨 일이냐”라고 물었죠. 게다가 이미 아빠를 만났기 때문에, 작별 인사를 하는 것도 저한테는 매우 중요했어요. 기분이 정말 이상하고, 다시 아빠에게 버림받는 기분이었죠. SWS에 연락을 취해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알아봐 줄 수 있냐고 부탁했어요.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아빠 가족 중에 저에 대해 알게 된 사람이 있는 것 같고, 제가 아빠와 연락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죠. 제가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지만 어쨌든 한국에 갈 예정이며, 아빠를 만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했더니, SWS에서는 “최선을 다해보겠다”라는 답을 주었죠. 그렇게 아빠를 다시 만나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브루노가 “아빠와의 첫 만남에 같이 나왔던 그 여자아이한테 편지를 써봐”라고 했었거든요. 어떻게 된 일이냐면, 처음 아빠를 만나는 자리에 형수님이 같이 나왔다고 했잖아요? 그 형수님이 본인 손녀도 같이 데려왔었어요. 그런데 당시 통역사가 특정 단어가 영어로 생각나지 않아서 통역을 못 하고 있을 때…

아이가 영어를 더 잘했던 건가요?

네, 그 단어를 영어로 통역해줬죠. 그 만남에서 그때까지 아이의 존재를 거의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가 제 눈에 띈 거예요. 누구냐고 물었더니, “이분이 할머니이고, 이분은 할머니의 시동생”이라고 설명하면서, 자기는 미국에서 태어나서 일리노이에 사는데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에 잠깐 들어와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이번 방학은 진짜 최고예요. 저한테 숨겨진 육촌 고모가 있었다니!”라고 하는 거예요. 상황을 설명하자면, 아빠에게 형님이 계신데 그분은 상당히 부유한 편이어서 자식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고, 그중 한 명이 미국 시카고에 살면서 대형 건축회사에 다니고 있었어요. 이 여자아이는 그 딸이었고요. 물론 저는 이런 상황에 대해 당시에 전혀 몰랐죠.

그래서 그 아이가 첫 만남에 함께했군요…

네, 그리고 헤어지면서 그 아이랑 이메일 주소를 주고받았어요. 그렇지만 브루노가 그 제안을 했을 때,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나는 숨겨야 하는 존재라고. 그 아이가 가족들에게 내 얘기를 했을 리 없어.”라고 말했죠. 하지만 브루노는 “내가 아이 셋을 둔 아빠로서 장담하는데, 걔는 분명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부모님께 바로 말했을 거야”라고 하더군요. 저는 비밀을 끝까지 지키는 입이 무거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 아이도 비밀을 지켰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어쨌든 그 아이에게 이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을 받지 못한 채 서울에 도착했죠. 아빠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애나(그 여자아이)한테 연락도 없는 상태로요. 그리고 외삼촌을 만나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너무나 가슴 아픈 이야기였어요. 외삼촌과의 만남은 아빠를 만났을 때와 완전히 달랐어요. 일단 입양기관 사무실에서 만난 게 아니었거든요. 저희가 묵는 호텔로 외삼촌이 찾아왔고, SWS에서 제공하는 통역 서비스도 없었어요. 그때가 크리스마스와 새해 연휴가 있는 시기여서 모두가 휴가 중이었거든요. 그래도 다행이었던 게, 브루노의 아들이 런던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당시 룸메이트가 한국인이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한테 연락해서 지금 도움이 절실한 상황인데 통역을 도와줄 수 있는지 물었고, 도움을 받게 됐죠. 외삼촌은 아들, 누님과 함께 오셨어요. 시각장애인이니까 아들이 옆에서 길 안내를 도왔죠. 외삼촌과의 만남은 아빠와의 만남과 다르게 굉장히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였어요.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이, 처음 만나서 자리에 앉기 전에 외삼촌이 발을 헛디디셨어요. 제가 붙잡아드리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제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시는 거예요. 저랑은 손끝도 닿고 싶지 않다는 듯한 느낌이었죠.

아무튼 자리에 앉아 외삼촌은 당신이 아시는 범위 내에서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앞을 못 보시는 분이니까, 아무래도 정보가 제한적이었죠. 저는 외삼촌이 어쩌다 시력을 잃으셨는지에 관해서 묻지 않았어요. 한국에서는 어른에게 그런 이야기를 묻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기도 하고, 아주 개인적인 부분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외삼촌이 하시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기만 했어요. 그러다 중간중간 엄마에 관한 질문을 몇 개 했던 것 같긴 해요. 엄마는 8남매 중 한 명이었는데, 그중 2명은 일찍 죽어서 6남매로 자랐고, 지금은 두 분이 더 돌아가셔서 4남매라고 해요. 그 자리에 함께 나오셨던 큰이모, 외삼촌, 엄마, 그리고 그 아래로 외삼촌이 한 명 더 있는 거죠. 그리고 4남매는 이복 남매였어요. 저희 엄마가 5살 때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외할아버지가 재혼을 하시고 작은 외삼촌을 낳은 거죠. 그리고 그전에도 외할아버지께서 재혼을 몇 번 하셨던 것 같은데, 왜냐하면 엄마와 그 앞을 볼 수 없는 외삼촌만 부모님이 같았거든요.

엄마가 5살 때 두 분의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외할아버지는 재혼하신 후 자식을 한 명 더 낳았지만, 엄마가 7살 때 외할아버지도 돌아가시게 돼요. 그러니 엄마는 새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거죠. 새어머니 입장에서는 남편의 전처 자식을 갑자기 떠맡게 됐고, 한 명은 앞을 못 보는 아이니까, 그 생활이 쉽지는 않았겠죠. 그리고 시각장애인인 외삼촌이 집안의 가장 노릇을 했어요. 가부장제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가 가장이 되잖아요. 그러니 나이가 가장 많았던 삼촌이 가족을 책임져야 했었겠죠. 원래 엄마네 가족은 대구 근처 지방에 살고 있었는데, 삼촌이 대구에 있는 시각장애인 특수대학에 다니게 되면서 엄마와 함께 대구로 이사를 했어요.

당시 두 분은 아주 작은 방에서 함께 지냈고, 엄마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그러다 아빠를 만난 거예요. 엄마가 외삼촌에게 임신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삼촌은 앞이 보이지 않으니 엄마가 임신한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해요. 그러다 어느 날 방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렸고, 그때서야 엄마가 아이를 낳았다고 털어놓았다고 해요. 저는 이 이야기가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한 방에서 함께 지내는 가족인데, 어떻게 임신과 출산 사실을 오빠에게조차 이야기를 못 할 수 있죠? 임신 기간 내내, 또 혼자 아이를 낳으면서 엄마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생각하면 정말 충격적이고 마음이 아프죠.

어쨌든, 엄마가 아빠에게 저를 맡겼던 이유는 가난 때문이었어요. 부모도 없는 매우 가난한 처지였으니까요. 저희 부모님은 사회 계층이 완전 달랐던 거죠. 외삼촌 말로는, 그런 집안 차이 때문에 아빠네 가족이 두 분의 결혼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거래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제가 아빠와 연락하는 사이라면 저를 만나고 싶지 않다던 외삼촌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아빠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컸던 거죠. 외삼촌이 보기에 엄마와 결혼하지 않은 아빠의 행동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고, 또 삼촌은 아빠가 저를 입양 보낸 사실도 전혀 몰랐어요. 외삼촌과 엄마가 저를 아빠에게 보냈던 이유는, 물론 엄마가 미혼모였던 것도 있지만, 아빠네 집이 부자였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자식이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를 따라가잖아요. 그러니 엄마나 외삼촌은 제가 아빠한테 가면 더 나은 삶을 살거라 생각하고 저를 맡긴 후 모든 연락을 끊었대요. 아빠를 두 번 다시 보지 않았죠. 그리고 두 분은 제가 한국에서, 아빠네 가족 손에 길러질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당시 아빠가 형님분 내외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도 아이가 있으니…

그 집에서 잘 키워줄 거라고 생각했던 거군요.

네, 그리고 아빠한테는 남동생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죠. 제 생각에 삼촌은 제가 해외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에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직접적으로 표현하신 건 아니지만, 외삼촌이 아빠와 그 가족을 미워한다는 느낌은 확실히 있었어요. 외삼촌이 기대하셨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었으니까요.

엄마는 그 후로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은 적이 없었고, 47살이 되던 해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전신마비가 오고 말을 못 하게 됐죠. 엄마의 인생이 어땠을지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엄마를 직접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강렬해졌죠. 직접 만나 두 눈을 바라보면서 괜찮냐고 묻고 싶었어요. 너무나 불행한 인생을 살았으니까요. 외삼촌과 만나는 자리에 삼촌의 누님도 함께 나오셨는데, 제 생각엔 그 누님이 삼촌을 설득했던 것 같아요. 두 분이 한국어로 대화를 잠시 나누신 후에 외삼촌이 “그래, 엄마를 만나게 해주마.”라고 하셨거든요. 그 자리에 외삼촌과 함께 나온 아들분(저한테는 사촌인 셈이죠)과 같이 병원에 가도록 일정을 잡았어요. 언제 갈 수 있냐고 묻길래, 다음 날은 SWS와 일정이 있어서 안 되지만 그 이후로는 언제든 가능하다고 했죠. 그렇게 사촌과 함께 KTX를 타고 엄마를 만나러 갈 약속을 잡았어요.

한편 저에게는 여전히 아빠와의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남아있었죠. 그다음 날이 SWS와 만나는 날이었는데, 그날 밤 한밤중에 눈이 떠졌는데 그 후론 잠이 안 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메일을 확인했는데 애나한테 답장이 와 있었어요. 제가 누구인지 당연히 기억한다면서, 부모님께 저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자기 아빠한테 전화하라며 전화번호를 알려줬어요. 바로 스카이프로 전화를 걸었더니 그쪽도 전화를 바로 받더군요. “호정씨, 그동안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아이한테 당신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너무 놀라운 소식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호정씨 아버지가 가족 내에서 골칫덩어리라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제가 먼저 연락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네요. 지금이라도 도와드릴게요.”

저는 왜 아빠가 저와 만나지 않으려 하는지, 아빠네 가족의 상황이 어떤지 물어봤어요. 2012년에 제가 아빠를 만났을 때, 아빠가 결혼해서 3명의 자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요. 아빠가 저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던 건, 아직 아이들이 어릴 때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서 아내와 자식들을 버렸다는 사실이었어요. 그러니 그 아이들은 홀어머니 밑에서 아주 어렵게 자랐던 거죠. 따돌림도 많이 받고요. 한국에서는 이른바 ‘정상’이라는 범주를 벗어나면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거든요. 요즘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더 심했죠. 저는 직접 겪지 않았으니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런 것 같아요.

어쨌든 미국에 사는 그 사촌의 말에 따르면, 아빠의 자녀들은 매우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고, 사촌은 그 아이들과 거의 함께 자랐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친남매나 다름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아빠가 위암 판정을 받았을 때, 아빠와 새 가정을 꾸렸던 그 여자는 아빠를 버렸고, 아빠는 다시 가족에게 돌아갔어요. 가족들이 아빠를 다시 받아주긴 했지만, 집안 내에서 아빠에 대한 미움이 엄청나다는 거예요.

그제서야 어떤 상황인지 보이기 시작했어요. 아빠가 제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사실을 전부 알려주진 않은 거죠. 물론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겠죠. 친부모와의 재회란 그런 것 같아요.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를 입양 보냈다는 사실을 용서받으려는 건 아니지만, 본인의 어려웠던 상황만 이야기하는 거죠.

어쨌든, 외삼촌과 만난 다음 날 SWS에 갔더니 아빠의 가족이 편지를 보내왔다면서 건네줬어요. 가족 중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은 한 여성이 SWS에 전화를 걸어왔고, 그 후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를 번역했으니 읽어보라고 했어요. 편지를 읽어보니, 아빠의 3남매 중 둘째가 쓴 것이더군요. 첫째는 약간의 장애가 있어서 둘째가 쓴 것 같았어요. 내용은 이미 사촌에게서 들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어요. 아빠가 어렸을 때 자식들을 버렸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고요. 저의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 채 살다가, 아빠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되자 저에 대해 털어놓았는데, 자기는 이 사실을 엄마나 다른 형제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고 했어요. 너무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아빠가 다른 여자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있고 그 사실을 숨긴 채 결혼한 것이라고 엄마에게 말할 수 없다고 적혀 있었어요.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죠. 제가 친부모님을 찾겠다고 했을 때, 저는 그 누구의 삶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저 저에 대해 더욱 깊은 이해를 얻고 싶었기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어요. 제가 누구인지, 왜 이런 감정들을 느끼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죠. 자라면서 저는 항상 슬픔, 우울, 노스탤지어, 비밀 같은 것에 마음이 끌렸거든요. 이랬던 이유를, 저에 대해 점차 알아가면서 이해하기 시작했죠. 우리는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잖아요. 저의 과거를 알자 제 성격을 더욱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실제로 후성유전학(epigenetics) 연구 결과에 의하면, 생애 첫 3년뿐만 아니라 태아가 자궁에 있을 때 일어난 일도 한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해요. 그렇게 물려받게 되는 트라우마가 단순히 과학적인 사실일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영향을 미친다고 해요. 저는 이런 것들을 실제로 믿어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경험에서 우러나온 거죠. . 겉으로 보면, 저는 입양을 통해 아주 많은 기회를 얻었어요. 물론 뿌리를 잃고 떠돌아 다닌다는 이방인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좋은 가정에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죠. 그러다가 양부모님의 별거와 이혼을 계기로 큰 전환점을 맞았던 것 같아요. 그 일을 계기로 가족들이 서로 간에, 또 각자 안고 있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졌고 그 후로 각자 매우 다른 삶을 살게 됐죠. 헤어짐에 대해 제가 갖는 근본적인 어려움도 이 때 깨닫게 되었어요. 물론, 그때는 너무 어려서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니 브루노와 헤어진 것이 매우 궁금한데요. 헤어짐의 연속이었던 역사 위에 또 다른 헤어짐을 쓰게 된 거잖아요. 뭔가 홀로 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었나요? 당신의 생각이 궁금해요.

성인 이후로 형성된 저의 모든 파트너 관계 중에서 브루노와의 이별은 가장 의식적으로 내린 결정이에요. 저와 브루노가 헤어진 이유가 단순히 저는 한국에 있고 싶은데 브루노는 그걸 원하지 않아서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것도 하나의 이유이긴 하지만요. 저희 둘의 관계에서 다른 부분은 크게 문제가 없어요. 물론 둘 사이의 관계, 최근에 브루노 전 부인의 죽음으로 인한 가족 관계의 변화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이 길은 당분간 제가 혼자 걸어야 할 길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한국으로 매번 길게 여행 올 때마다 그냥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혼자서 경험해 나가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말이죠. 다른 사람의 요구나 필요를 신경 쓰거나 배려하는 것을 지금 당장은 생각하기 어려워요. 브루노도 이 점을 잘 이해하고, 항상 저에게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해요. 저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은 매우 자신 있어요. 하지만 브루노는 제가 저를 아끼고 돌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가르쳐 줬죠. 아마 지금이 그럴 시기인 것 같아요. 관계에 있어서 전 항상 저 자신을 잃어버려요. 상대방에게 너무 집중해서, 그들의 삶에 순응하고 그게 저의 삶이 되어버리죠. 그러다 보면 제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잊게 되곤 해요. 지금은 그런 성향을 극복하는 시기인 거죠.

맞아요. 브루노가 큰 역할을 했죠. 브루노는 저보다 18살 연상이고 장성한 자녀가 3명 있어요.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 심지어 요기나 명상가를 통틀어서도, 가장 자아가 안정적이고 균형 잡힌 사람이죠. (웃음) 매우 강인하고 현명한 사람이에요. 제가 지금까지 걸었던 길을 브루노가 아닌 다른 사람과 걷는 것은 상상할 수 없어요. 그리고 본인의 행복보다 저의 행복을 위해 저를 놓아준 유일한 파트너이기도 해요. 저희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많은 대화를 나눠요. 이별로 인생이 망가질 만큼 절망하는 건 아니지만, 브루노도 이별로 힘들어하고 있어요. 지난주에 편지를 쓰면서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저를 보내줄 용기를 내줘서 매우 고맙다고요. 저는 먼저 헤어지자고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저희는 지금도 연락을 하지만, 한국으로 오기 전 몇 달간은 매우 힘들었어요. 패닉 상태와도 같았죠. 그에게 매일 묻곤 했어요. “우리가 헤어지는 게 맞는 걸까? 그게 최선일 걸까?” 그러면 브루노는 그저 가라고 말해 주었고, 그렇게 제가 한국에 오게 된 거죠. 그리고 이게 맞다고 느껴져요. 몇 가지 덧붙이자면, 하나는 아빠가 아직 살아계신다는 거예요. 2014년 이후로 연락을 하지 않았지만, 제가 알기로는 그래요.

결국 아빠를 만나 작별 인사를 했나요?

네, 사촌이 제 이복 자매를 설득하면서 중간에서 많이 도와주었어요. 제가 아빠와 계속 연락하는 건 반대하더라도 최소한 작별 인사를 하게 해 달라고요. 그렇게 해서 아빠를 만나 인사를 나눴어요. SWS를 통해 외삼촌을 만났고, 엄마도 만나러 갔어요. 아빠를 만났던 것과 비교하자면 엄마와의 만남은 매우 감정적이었어요. 요양병원 같은 시설에 계신 엄마를 사촌과 함께 보러 갔는데, 엄마는 저희가 오는 것도 모르셨어요. 사촌이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를 하는데, 제 사진 몇 장 가지고 본인이 먼저 병실에 올라가서 엄마에게 보여주고 만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로비 의자에 앉아 기다렸어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마다 계속 그쪽을 쳐다봤죠. 그 순간은 정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어요. 마치 관찰자로서 상황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마침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나타났어요. 엄마는 휠체어에 앉아 계셨는데, 보자마자 눈물이 펑펑 났어요. 브루노도 울고 제 사촌도 울었죠. 엄마는 우시지는 않았지만 격한 감정을 느끼시는 것 같았어요. 눈물을 흘린 건 아니지만 느낄 수 있었죠.

왜 아빠와의 만남에서는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흘렸나요?

이미 엄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엄마의 신체적인 상황도 그랬고요. 그리고 엄마는 말을 못 하니까 저한테 당신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줄 수 없잖아요. 글씨를 쓸 수도 없고 의사소통이 어려운 상태니까. 저는 영원히 엄마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알 수는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엄마가 호정씨를 알아보신 거죠?

네,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저를 알아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저 느낌일 뿐이지만 말이죠. 매우 추운 날이었어요. 12월 29일이었죠. 우리는 엄마의 병실로 올라갔지만 전 준비가 안 된 상태였죠. 지금은 12인실로 옮기셨지만, 당시에는 엄마가 10인실에서 지내셨는데, 병실에 있는 환자들이 모두 뇌 기능 장애와 신체 마비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다들 정도는 조금씩 달랐지만요. 삶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장면이었죠. 삶의 유한성이나 연약함 같은 것에 대해서요. 엄마와 몇 시간을 함께 보낸 후 다시 헤어짐의 시간이 왔는데, 매우 가슴이 미어졌던 순간이었어요. 복잡한 감정을 느꼈죠.

그리고 12월 31일에 아빠를 만났어요. 하지만 이번 만남은 2012년의 만남과는 매우 달랐죠. 엄마를 만난 후이기도 했고, 특히 2012년에는 알지 못했던 아빠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까요. 2012년 만남에서는 ‘아빠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라는 열린 마음이었고, 조금은 알게 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014년에는 ‘아빠가 누군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제가 2012년에 만났던 사람은 아빠의 진짜 모습이 아니잖아요.’ 이런 마음이었어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마음속으로 아빠를 믿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과 거리감을 품은 상태였죠.

하지만 역시나 브루노는 제게 섣불리 아빠에 대해 판단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어요. 아빠가 왜 그 여자를 떠나서 가족에게 다시 돌아갔는지 저는 모르니까요. 관계에 있어서 누구나 그럴 수 있다며 말이죠.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고 했죠. 그리고 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지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 어려웠죠. 아무튼 그렇게 아빠를 만나는 자리에 나갔어요. 통역사분이 저희와 함께했죠. “아빠네 가족이 저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더니 아빠는 그렇다고 답했어요. “가족들 모두가 알고 있나요?”라고 되물었더니 또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아빠를 믿을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아빠의 3남매 중 한 명만 저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 이복 자매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죠. 아마 제가 듣고 싶은 말만 이야기해주려고 아빠가 그랬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가 아는 사실과 다른 대답을 하는 아빠의 말을 들으니, 절반의 진실만 말하는 아빠를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더군요.

아빠에게 2012년에 했던 것과 비슷한 질문을 많이 던졌어요. 하지만 뇌수술의 후유증으로 2년간 노화가 급격히 진행되어서 기억이 예전 같지 않으셨어요. 2012년에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제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하시는 부분이 있었는데 더 심해진 거죠. 친부모와의 재회에 대해 묻는 다른 입양인들에게 제가 항상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 2014년 당시에는 입양인 커뮤니티에 대해 전혀 모르다가 2016년부터 커뮤니티 모임에 나가게 되었어요. 2014년에 한국에 와서 엄마와 아빠를 만났던 일이 저에겐 정말 힘들었기 때문이죠. 새해를 맞이하기 전날인 2014년 12월 31일에 아빠를 만나서 마지막 인사를 했어요. 그러고는 대구의 호텔 방에 돌아와 침대에 앉아서 브루노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머리가 고장 난 것 같아.” 흥미로웠던 것은, 보통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부서졌다(heart is broken)고 표현하는데, 저는 머리가 고장 난 것 같다고 표현했다는 거예요. 가슴이 찢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머릿속에 멍해지면서 정말 아무 생각이 안 났거든요. 만약 제가 친부모님과 재회하기 전에,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누군가 저에게 이야기해줬더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했을 거예요. 지어내기조차 힘든 이야기죠.

그동안 제가 갖고 있던 모든 생각을 뒤흔드는 사건이었죠. 입양아로서 우리는 뿌리에 대해 알고 싶어 해요. 그래서 끊임없이 찾고 질문을 던지곤 하죠. 기억이 안 나는 일도 기억하고 싶어 해요. 무의식에 있는 것들을 깨우고 싶어 하죠. 하지만 부모님들은 정반대예요. 잊고 싶어 하죠. 무의식 깊은 곳에 파묻어 버린 채 다 잊어버리고 새 출발을 하고 싶으신 거죠. 트라우마를 남기는 아픈 경험이었다면 특히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출산과 입양 경험은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죠. 상황이 매우 절박하기 때문에 입양을 보내는 거잖아요. 상황이 좋아서 아이를 포기하고 입양을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입양이란 양측 모두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인 것 같아요.

저는 항상 정화(purity)에 집착하다시피 했고 스스로를 정화하려고 노력했어요. 어느 순간부터인가, 제가 엄청나게 큰 잘못을 저질렀거나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저를 버린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10살 때 양부모님이 별거를 하게 되면서 그 생각이 더 강해진 것 같아요. 어린아이들은 세상이 모두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모든 게 자신 탓인 것만 같죠. 그래서 저도 이 모든 일이 저에게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서 일어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해왔던 모든 치유(healing)가 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 같아요. 최대한 깨끗해지고 싶었기 때문에 인도를 갔고, 그런 영적인 커뮤니티에서 저는 항상 잘 지냈어요. 뭔가 다른 느낌이죠.

힘을 주는 곳이군요.

정확해요. 하지만 바르셀로나에서는 다시 힘들었고, 그래서 Plum Village라는 곳에서 리트릿에 참여했어요. 그곳에서 또 한 번의 엄청난 변화를 겪었죠. 저는 오랜 시간 동안 제가 겪은 고통에 대해 타인과 나눌 수 없었어요. 하지만 리트릿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저의 속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었죠. Plum Village에서는 서로 마음을 나누는 일, 자비심으로 듣기(deep listening), 사랑으로 말하기(loving speech), 비폭력적인 의사소통을 수련해요. 치유를 위한 훌륭한 방법들이죠.

2014년 이후로 아빠와 연락을 하지 않았어요. 엄마는 제가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뵙고 있어요. 두 번째 한국 방문이 워낙 강렬하기도 했고 아빠와 작별 인사를 하는 슬픔도 있었지만, 그 방문 후에 제가 그렇게 힘들었던 이유 중 하나는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에요. 그저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병원에 찾아갔고, 엄마는 제가 오는 줄도 몰랐던 데다가 불과 몇 시간 후에 돌아왔으니까요. 엄마는 계속 마비 상태로, 말도 못 하는 상태로 10인실 병실에 다른 환자들과 함께 있는데 말이죠.

답을 찾고 싶은 마음에 시작했던 일이 커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죄책감인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엄마를 보면 이런 생각도 들거든요. ‘도대체 뇌 기능이 얼마나 작동하고, 얼마나 인지 능력이 있는 걸까?’ 뇌의 특정 부분이 망가져서 의사소통도 못 하고, 글을 읽지도 못하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어요. 엄마와 눈을 마주쳤을 때, 엄마는 저를 알아봤어요.

호정씨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신을 돌보고 사랑하는 일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것 같아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지금 한국으로 돌아온 것도, 영적 수련을 하는 것도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져요. 한국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 이번에는 한국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바라는 게 있나요?

아니요, 특별히 없어요. 저는 지금까지 항상 앞일을 계획하지 않고 사는 편이었거든요. 저는 매우 논리적인 부모님 밑에서 컸어요. 엔지니어이자 과학자인 아버지에게 있어 비논리적인 일,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일은 의미 없는 일이죠. 동시에 매우 현실적이기도 하죠. 어렸을 때 저를 불러 앉혀서 향후 5년 계획에 대해 묻곤 했었어요. 그럼 전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죠. 저는 계획을 세우는 편이 아니에요. 친부모님과의 만남도 계획한 일이 아니었죠. 제 삶의 어느 시점에서라도 과거 5년을 돌아보면, 아무것도 계획대로 일어난 일이 없어요. 그냥 일어나는 대로 마주한 거죠.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지금 이 자리에서 팟캐스트에 출연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도 하지 못했죠. 그래서 저는 삶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그럴수록 더 좋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의식적인 선택을 내리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의식적인 선택은, 말씀하신 것처럼, 스스로를 돌보는 일에서 시작되죠. 물론 이런 선택들이 모두 좋을 수는 없겠죠. 2014년 말에 엄마를 만나고 최근까지, 그 만남을 후회한 것은 아니지만 과연 그게 올바른 일이었는지 자꾸 돌이켜봤어요. 부모님을 찾아서 다시 만난 일이 과연 좋은 선택이었나 하고 말이죠. 그 후에 제가 너무 많이 힘들었거든요.

이게 모두 호정씨 스스로가 자신을 용서하는 과정들이었다고 생각하나요?

제 자신에 대한 용서, 그리고 아까 말했듯 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됐죠. 무조건적으로, 온전히 나를 사랑하는 법을요.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거나, 파트너에 의지하거나, 엄마나 아빠로부터 어떠한 보상이나 치유를 얻는 게 아니라, 제가 스스로에게 사랑을 주는 거죠. 우리가 엄마의 자궁에 있을 때, 태어날 때, 어렸을 때, 자라면서 받지 못했던 것들, 그동안 느꼈던 모든 감정들… 이런 것들을 모두 털고 일어나 스스로를 돌보고 사랑하는 것. 그게 우리 모두가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한글 번역: 주현아 & 장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