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3, 에파소드 20: 심재현

심재현 씨(38세)는 한국에서 입양되어 미네소타 가족의 고명딸이자, 막내딸, 그리고 입양아 가족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재현 씨의 삶에는 다양한 입양아들과의 교류가 있었고 재현 씨의 가족은 재현 씨의 한국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특이한 절차를 걸쳤다. 그러한 부모님과 깊은 관계가 재현 씨의 정신적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재현 씨는 친가족을 만난 뒤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재현: 제 이름은 심재현입니다. 38세이고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남부에서 거주하고 있죠. 제가 선호하는 대명사는 They/Them과 She/Her이에요. 저 자신을 호칭하는 명칭을 여러 번 바꿔 오기도 했습니다. 저 자신을 젠더퀴어(남성/여성 두 구분법을 넘어선 성정체성을 통합해 부르는 정체성)라고 인지한 적도 있었고, 퀴어(성소수자 전체를 포함하는 단어, 정체성을 묘사할 때 사용되면 성 소수자 정체성 전체에 포함되는 정체성을 뜻하는 단어이다.)라고 인식한 적도 있어요. 현재 제 성적 정체성인 논 바이너리(남성/여성에 묶여 있지 않은 성 정체성)가 가장 편안하게 느껴지는 정체성이죠. 어렸을 때 사람들이 선머슴 같다고 그랬습니다. 항상 여성적 정체성이나 남성적 정체성에 대해서 특별한 관련성을 느끼지 않았고, 육체에 관련된 정체성을 느끼지 않았어요. 사실 현재 이름은 몇 년 전에 바꾼 이름이죠. 현재 이름은 약간 남성적인 느낌이 드는 이름이에요.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재현이라는 이름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의 이름입니다. 재연이라는 이름이 여성적 이름이고, 친부모님이 저에게 지어줬던 이름이었죠. 재현이라는 이름은 서류에 잘못 기재된 이름이었습니다. 제가 논 바이너리이기 때문에 한국 이름을 사용하기로 했을 때 잘못 기재된 이름인 재현을 쓰기로 했죠. 성별에 규정되지 않는 느낌을 부여해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인들만 알 수 있는 비밀 표시이기도 해요.

팟캐스트: 아주 멋있네요. 다른 사람들이 그 이름에 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나요?

재현: 한국인 성 소수자들을 포함한 한국인 몇 명이 제 이름에 관해서 이야기했죠. 제가 스스로 이름을 정했는지, 주어진 이름이었는지, 찾은 친척에게서 따온 이름이었는지 묻고는 했어요. 사람들이 친아버지 이름이나 형제, 아니면 찾아낸 다른 친척들 이름을 따왔는지 궁금해했죠. 부모님이 무학력이었기 때문에 사회복지사가 대신 서류를 작성해줬다고 추정을 하는데, 서류를 작성하다가 연에 선이 두 개가 그어져서 현이 되었고 그게 서류에 남은 겁니다.

팟캐스트: 논 바이너리나 그런 성 소수자 담론이 최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언제부터 재현 씨 스스로가 단순한 선머슴처럼 느껴지지 않았나요?

재현: 선머슴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적이 없어요. 전 오빠 3명 밑에서 자랐죠. 3명 다 양부모님의 친자식입니다. 막내라서 오빠들이 하던 일을 전부 따라 하고 싶었어요. 오빠들이 남자애들이니, 70~80년대 남자애들과 교류하면서 자랐고, 저도 그런 교류를 따라 하고 싶었죠. 동시에 여자아이의 활동도 병행했습니다. 12년간 춤도 췄고, 제 삶에 있어서 큰 부분을 차지했죠. 포인트 슈즈(춤을 추는데 필요한 신발)도 신고, 튀튀를 입기 위해서 어린 시절 내내 노력했어요. 하지만 춤을 추고 있지 않을 때는 오빠들과 밖에서 놀고, 더러워지고, 자전거도 타고, 오빠들과 같이 우리 동네 여자애들이 하지 않는 일을 했습니다.

팟캐스트: 어디에서 성장하셨죠?

재현: 뉴 호프에서 자라났습니다. 미니애폴리스 북서부에 있는 교외 지역이죠. 두 부모님과 3명의 오빠가 있는 백인 중산층 가족에서 자라났어요. 아버지가 아직도 같은 집에서 여자 친구와 같지 지내고 계시죠.

팟캐스트: 언제부터 한국 정체성을 자각하고 연결성을 구축하게 되셨죠?

재현: 한국 정체성을 거부했던 때가 기억나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이 팟캐스트에서 증언한 내용과 다른 입양아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전 운이 좋은 편이었죠. 제 부모님은 사회복지 계열에서 일하는 교육자이셨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이를 입양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계셨죠. 물론 시대의 한계로 인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종적 인식은 가지고 있지 못하셨지만, 아이들에게 있어서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제 정체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저는 한국인이고,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오빠들과 다른 방법으로 가족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부모님이 항상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하고 싶었다고 이야기를 해줬고, 입양에 대한 서사를 부모님이 이해하고 관련된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또한, 한국에 대한 연결성을 항상 유지해주려고 노력하셨어요. 거기에 제가 항상 그 한국과 관련된 활동을 할지에 대해서 선택하게 해줬죠.

팟캐스트: 부모님이 재현 씨가 가족이 되는 절차에 대해서 인식이 있었다는 이야기의 뜻이 어떤 뜻인가요? 인종적인 인식이 없었다고 해도 부모님이 어떤 말과 일을 하셨죠?

재현: 전 생후 6개월 때 입양되었습니다. 입양아들은 입양아의 삶은 입양아가 입양 가족에 도착할 때부터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이전의 삶은 지워지죠. 입양아들은 입양되기 전부터 삶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아요. 우리가 다른 가족에 입양된 이유는 우리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저의 입양되기 이전의 삶을 무시하지 않았어요. 비록 6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었고, 제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했죠. 다른 삶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곳에서 왔으며, 다른 가족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어요. 이러한 이야기는 다른 입양아들은 자주 듣지 못하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입양아들은 입양된 나라에 도착한 날을 축하한다고 해요. 저는 미국에 도착한 날을 알긴 알지만, 그날을 기념한 적은 없죠.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중요한 날은 아닙니다. 제 부모님이 제가 비행기를 타고 허공에서 튀어나오지 않았고, 이미 역사가 있는 사람이었음을 존중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입양아 캠프에 참여하려고 하셨나요? 아니면 오빠들이 하지 않으니 가고 싶지 않으려고 했나요?

재현: 네. 입양아 캠프에 몇 년 동안 계속 참여했고, 어떤 친구를 캠프에서 계속 만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이디라는 친구였는데, 캠프에서만 만나는 친구였죠. 그래서 그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캠프에 가는 일이 즐거웠어요. 캠프 자체는 평범했습니다. 다른 한국 입양아들과 같이 지낼 수 있는 일은 즐거웠지만, 교육자 어머니 밑에서 다른 입양 가족들과 살았기 때문에 살면서 수많은 입양아를 만나서 친구가 되었고, 그중에는 많은 한국계 입양아 친구들이 있었죠. 제 동네에도 두 명의 한국계 입양아 여자애들이 있었습니다. 제 이웃이었고, 저를 여동생이나 다름없이 취급했어요. 그랬기 때문에 1명은 절 무시했고 다른 1명은 절 괴롭혔습니다. 그렇게 제 부모님이 보낸 한국계 관련 행사를 제외하고도 이렇게 많은 한국계와의 접촉이 있었어요. 

팟캐스트: 매끄럽게 캠프와 집 생활을 오고 갈 수 있었겠네요? 한주만 한국인이었다가 다시 백인 사회에 포함되거나 그런 일은 없었겠네요.

재현: 약간 문제가 있긴 했습니다. 제가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저만 한국 문화에 관심이 있었죠. 우리 집에는 한국 나무 인형도 있었고, 아버지는 아직도 행복이라는 단어가 새겨진 짚으로 만들어진 한국 장식품도 가지고 계십니다. 한국에서 수입한 도자기도 있었어요. 하지만 오빠들이 한국에 대해서 배우거나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문화는 혼자 탐구하고 저만의 방식으로 찾아내야 했죠. 과거에 돌아가서 부모님에게 절 키우는 법에 대해 조언할 수 있다면 저 혼자 한국 문화에 대해서 접근하게 하는 방식을 바꾸라고 조언할 겁니다. 좀 더 매끄럽게 한국인의 정체성과 제 현실의 정체성을 연결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죠.

팟캐스트: 네. 백인 가족이 유색인종 아이를 입양하거나 한국 아이를 입양해도 백인 가족은 변하지 않는다고 많은 사회학적, 입양 관련 연구가 입증했죠. 백인 가족이 유색인종 아이를 입양해도 다문화 가정으로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백인 가족 구성원들이 유색인종 아이들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았죠.

재현: 운이 좋게도 제가 한국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어요. 그리고 저랑 나이가 가깝고 친한 오빠가 한국에 몇 주 동안 방문해서 제 친언니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주 기묘한 경험이었죠. 오빠는 제 이야기에 대해서 알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제 친가족과 가진 복잡한 관계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와서 한국에 와서 저의 전혀 다른 면모를 볼 수 있게 되었죠.

팟캐스트: 오빠가 한국에서의 경험을 하고 나서 관계가 변화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재현: 어른이 되고 나서 서로의 관계가 바뀌긴 했지만 그건 힘의 변화가 아니라 서로가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인식했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재현 씨의 논 바이너리 정체성을 언제부터 자각하게 되었나요? 아니면 항상 어느 정도 인식하고 계셨나요?

재현: 몇 년 전에 저 스스로 논 바이너리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트랜스 문화와 트랜스 정체성에 관한 공부를 해도 동감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비록 논 바이너리 자체가 트랜스젠더 정체성 밑에 들어가긴 해도 저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트랜스젠더의 사고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트랜스젠더나 논바아너리 정체성과 관련되어 사람들이 겪는 문제 중 상당수를 저는 겪지 않았죠. 제가 신체 이형 문제를 겪기는 하지만 제 삶에 너무 큰 부정적 영향을 끼쳐서 의학적 도움을 받아야 하거나 관련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의 문제는 겪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런 문제에 관련해서 제가 스스로 이성애자가 아니라고 인식하는 데 시간을 쓰고 싶지 않기도 하죠. 전 트랜스젠더가 아니에요. 하지만 전 이성애자도 아니고 제 정확한 정체성을 모릅니다.

팟캐스트: 고등학교에 다닐 때, 평범한 교외 고등학교에 다니셨죠?

재현: 네.

팟캐스트: 고등학교 때 안전한 장소를 찾아서 교류할 수 있었나요?

재현: 네. 중학교 때부터 친구들이 있었죠. 남아메리카에서 입양된 입양아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 여동생도 남아메리카 입양아였습니다. 그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처음에는 몰랐지만, 우리 모두 성 소수자였어요. 거기에 대부분이 유색인종이었죠. 무의식적으로 고등학교 때 성 소수자 유색인종 집단을 구성했던 셈입니다. 나중에 공식적으로 GSA(Gay-Straight Alliance, LGBTQ+ 학생들과 그 학생들을 지지해주는 이성애자 학생들이 회원이 되는 미국 학생 단체, 1998년에 시작됨)로 변했죠. LGBTQ+에, 입양아에, 유색인종인 친구들이 있었고 우리가 같이 정체성을 탐구할 수 있었습니다. 제 친구들은 어렸을 때 성적 학대를 당하기도 했는데 관련해서 우리의 정체성과 성인이 되어가면서 그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같이 의논하기도 했어요. 우리가 그 나이에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모르는 정보를 공유하기도 했죠. 서로의 모든 약점을 공유했고, 같이 정보를 찾고 탐구했어요.

팟캐스트: 대단하네요.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청소년, 중학교 때 관련 논의를 바로 시작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있어서 성 소수자 정체성과 입양아 정체성을 찾아냈으니까요. 

재현: 네. 제가 운이 아주 좋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다니던 중학교도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죠. 중학교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중학교를 5학년에서 중학교 2학년까지 다녔데, 친구들과 함께 이상한 일을 할 수 있었어요.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이성애자가 아니라는 자각과 이상한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인식도 할 수 있었죠.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경험을 못 하는 경우가 많으니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 부모님은 사람들에게 개방적인 태도를 유지하시죠. 제가 중학교 2학년이나 3학년에 아버지에게 이야기하기 어려워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제 친구 중 하나가 부모님에게 자기 성정체성을 고백하려고 했고, 제 아버지가 친구 어머니의 직장 동료라서 아버지에게 먼저 알리려고 했어요. 아버지에게 말을 한순간 아버지가 “아 그 친구 봤을 때부터 알았다.” 이렇게 답하셨죠. 아 그래요? 이라고 제가 답하자 아버지는 “너도 알다시피 나도 게이 친구들이 많지. 그 애를 12살 때 처음 봤을 때부터 게이인 줄 알았다.” 이렇게 답하셨어요.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가족에서 자라나서 다행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영화나 배우 중에 우러러본 사람이 있었나요?

재현: 제가 어렸을 때 록키 호러 픽쳐쇼(Rocky Horror Picture Show)를 좋아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그 영화를 주제로 발표를 진행하기도 했죠. 제가 그 영화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제가 논 바이너리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계기였다고 생각해요. 그 영화에서 나오는 변화와 퀴어함이 좋았습니다. 그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데 두려움이 없었고, 그런 캐릭터들을 제가 우러러봤습니다. 제가 록키 호러 픽쳐 쇼 관련 발표를 했을 때 다른 애들은 향, 전자 기타, 마릴린 먼로, 카누에 대해서 발표를 했죠.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에 대해 발표를 했어요. 제가 중학교 때 했던 활동 중에 가장 중요하게 느껴지는 활동입니다.

팟캐스트: 자신이 외부인이라는 상태를 확실히 받아들이고 인정하셨군요? 

재현: 그렇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제 가족은 항상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무언가를 하거나 이야기를 하라고 가르쳤어요. 항상 앞에 나서서 의견을 표시하는 사람이 되었고, 가족과 제가 항상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제 정체성을 받아들일 수 있었죠. 저에게는 성 소수자 아시아계 친구들이 있고, 줌을 통해서 같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성 소수자들의 교류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그런 교류를 하고 있을 때 친구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죠. 보통 어떤 교류 집단을 정할 때면 성 소수자 집단을 선택하거나 유색인종 집단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다른 친구들은 둘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둘 다 교류할 수 있다고 충고를 해줬어요. 그 친구가 다른 집단들을 조사해서 또 다른 유색인종 성 소수자 집단을 만들어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친구가 직접 만들어야 하니 복잡한 문제죠. 다행히 저와 제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런 유색인종 성 소수자 집단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집단이 다른 친구에게 유색인종이자 성 소수자가 될 수 있다고 충고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듣고 있는 청취자들에게도 하고 싶은 충고인데, 살면서 어떤 특성을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반대를 물리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든 특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주변 사람들이 그러한 특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청취자 여러분의 자유로운 삶에 있어서 해가 된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훌륭한 말이네요. 한국계 입양아 사회에는 성 소수자를 위한 공간이 없다고 느끼신 일도 있나요?

재현: 한국계 입양아 사회에서는 그러한 공간이 없죠. 성 소수자를 위한 공간은 한국계 입양아 사회와는 아무래도 좀 더 다른 상황에서 필요로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국계 입양아를 하나로 묶고 한국계 입양아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는 우리의 흥미나 정치관과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고, 일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죠. 입양아 사회에서 그러한 점이 제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문제가 됩니다. 다른 입양아들보다 좀 더 좌파적이고 주류적 관점을 비판하기 어려울 때도 있으니까요. 입양아 사회에서 성 소수자를 받아주는 공간을 찾는 일 자체는 쉽습니다. 2020년이니 많은 사람이 성 소수자가 주변에 많이 존재하고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고, 큰 문제가 되지 않죠. 한국계 입양아 사회에 동성애 혐오나 성 소수자 적대감을 느끼지 않았어요. 제가 입양아 사회에서 드러내기를 주저하는 성향은 정치적 성향입니다. 입양 제도에 대해서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고, 국제 입양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고 있고, 현 정부 제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에요. 미국에서 이민자들이 정부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일 자체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죠. 미국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식으로 반응이 나옵니다. 하지만 입양아는 강제적으로 이민자가 된 셈이니 우리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사항이죠. 심지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일 자체마저도 평범한 이민자들과는 다릅니다. 고국에서의 반응도 다르죠. 그래서 입양아 사회에서 긴 대화를 나누는 일이 고생이에요. 입양아 사회 자체가 부모 백인들에게 영향을 받아서 백인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입양아들이 백인 가족을 바꾸게 만드는 일이, 백인 친구가 백인 가족들을 바꾸게 하는 일보다 어렵죠. 대화 자체가 어려운 문제예요. 거기에 더해서 저도 이 문제에서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도 제 가족과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해요. 가족과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일 자체가 어렵죠. 제 가족 일부와는 대화를 나누지 않고, 왜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동시에 입양아들은 제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니 제가 못하더라도 더 나아지기를 원하죠. 위선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요.

팟캐스트: 다른 입양아들과 관련해서 입양아들은 자연스러운 동질감을 느끼게 마련인데 다른 입양아들이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는 일을 알면 더 실망하게 되죠. 가장 비슷하다고 느꼈던 사람마저 동의하지 않는 셈이니까요.

재현: 그렇죠. 사람들이 다인종 간 관계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일 자체가 흥미로워요. 단순히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의 팟캐스트만이 아니라 다른 팟캐스트에서도 비슷한 주제를 다뤘죠. 저는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나, 유색인종 성 소수자와 주로 사귀었습니다. 유색인종 남성이나 백인 성 소수자와 사귀는데, 문제를 겪고 있었어요. 교차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일상적인 문제에 엮이면 인식 자체가 사라졌죠. 문제 자체를 다루기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단순히 백인 남성을 상대한다면 우리가 서로 다른 시점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하기가 쉬웠습니다. 유색인종 성 소수자를 상대할 때는 서로의 교차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기 쉬웠어요. 아예 교차성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거나, 교차성을 완벽히 이해하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더 쉬웠습니다. 중간에서 어느 정도의 이해만 하는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일보다는 더 쉬웠죠

팟캐스트: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이네요.

재현: 네. 그러한 상황이 현재 제가 놓여 있는 상황이고, 그러한 상황에 대해서 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면모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할 수 있죠. 

팟캐스트: 재현 씨의 연인은 주로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었나요?

재현: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물론 현재 연인은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죠.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최대한 관점을 열어서 다양한 사람들과 연애를 하고 있어요. 몇몇 경우에는 제가 연애하지 않으려고 했던 상대와 연애를 하게 됐죠. 예를 들면 과거에는 저는 교차성에 대해서 충분한 이해도를 가지지 못한 사람과는 연애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즈음에는 유색인종 이성애자 연인과 젠더가 인종 문제처럼 큰 문제인지에 대해서 논쟁을 했어요. 저는 그렇다고 말했고, 제 연인은 그렇지 않다고 답했죠. 젠더가 인종만큼이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이성애자이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고 반응했어요. 그때는 확실히 우리 둘이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죠. 그러한 싸움은 이러한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백인 이성애자 남성과의 논쟁보다 더 큰 상처를 입혔죠. 백인 이성애자 남성의 경우에는 단순히 처음부터 시작하자, 구글로 배우자. 이런 이야기로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제 연애 상대를 넓혀서 다양한 문제를 겪고 있고, 저에게 있어서 어떤 일이 가장 괜찮을지 고민하고 있기도 하죠. 

팟캐스트: 앞에 말했지만, 입양아 사회보다 유색인종 성 소수자 사회에 더 편안함을 느끼신다고 하셨죠. 물론 두 사회에 전부 맞지는 않지만, 현재는 유색인종 성 소수자 사회가 좀 더 편안하신 거죠?

재현: 네. 많은 입양아가 한국인 입양아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 설명 안 해도 되는 일이 많아서 편하다고 이야기를 하죠. 제가 유색인종 성 소수자들과 시간을 보내면 18가지 문제를 설명 안 해도 사람들이 이해를 해주기 때문에 아주 멋있고 편해요. 우리 모두 비슷한 지점에서 시작할 수 있으니 편합니다. 이렇게 서로가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과 교류하게 되면 교류에서 좀 더 기쁨을 느낄 수 있고, 더 많은 공통점을 찾게 되면, 친우 관계가 더 깊어지죠. 그러니 새롭게 진입하는 사회에 그러한 요소가 이미 존재한다면 사람과의 관계를 더 빠르게 구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말이나 힘든 일을 겪을 때 그러한 좋은 관계를 맺었기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기 마련이죠. 그러한 상황에서 사람들과 논의를 할 수 있는 일 자체가 더 좋게 느껴졌습니다.

팟캐스트: 재현 씨와 제가 둘 다 미네소타주 트윈 시티(미니애폴리스-세인트 폴 메갈로폴리스 지역을 부르는 말, 강을 놓고 두 도시가 붙어서 하나의 생활 구역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지역에 살고 있지요. 이 지역의 아시아계 성 소수자 사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잘 조직되어 있나요, 아니면 점조직으로 분할되어 있나요?

재현: 점조직으로 분할되어 있다고 생각하죠. 물론 남부 미니애폴리스 지역에는 강한 아시아계 성 소수자 사회가 구축되어 있습니다. 지역에 사는 친구 중 6명 정도가 유색인종 성 소수자고 이 사회의 구성원이죠. 자연스럽게 서로를 찾아내게 되었어요. 미니애폴리스에서 성 소수자 가족 저녁 행사가 한 달에 한 번 개최되고는 했는데, 돌아가면서 서로 요리를 가지고 모이는 집 파티였습니다. 그 행사를 주도한 사람들이 전부 아시아계였죠. 물론 의도적은 아니었어요. 그걸 제외하고도 몇 개의 아시아계 성 소수자 집단이 있어서 꽤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네소타주에 존재하는 아시아계 사회에 막 진입하기 했어요. 2014년 말에 미니애폴리스로 다시 돌아왔죠. 작년부터 아시아계 사회에 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들이었으니 성 소수자들을 찾는 일 자체는 쉬웠죠. 다른 사회에도 스스로 자신의 성소수성을 인정하고 열린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서 서로를 찾는 일이 쉬웠어요. 입양아 사회에서도 그렇게 열린 태도를 보이는 성 소수자들이 늘어나게 될 예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고등학교 이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재현: 고등학교 이후에 어떤 생활을 했느냐고요…. 미네소타주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PSEO를 했어요. PSEO의 뜻은 고등학교 이후 진학 프로그램이라는 뜻이 있는데, 고등학교에서 대학교 학점을 딸 수 프로그램이죠.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교에서 학점을 따기 시작했어요. 학생 대부분은 이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큰 대학교에 진학하지만 전 반대로 백인 위주의 작은 대학교로 들어갔습니다. 미네소타주 모어헤드로 이주해서 거기에서 공부하기 시작했죠. 거기로 간 이유는 좋은 중국-일본어 학과가 있었기 때문이고, 고등학교에서 배우기 시작한 일본어-중국어를 계속 공부하고 싶었어요. 거기에 더 부모님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모어헤드로 독립했죠.

팟캐스트: 중국어와 일본어를 동시에 공부하셨나요? 

재현: 일본어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배우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중국어, 그중 북경어를 배우기 시작했죠. 계속 그렇게 공부를 계속했고, 대학교 전공도 일본어/중국어 복수 전공이었습니다. 동북아의 세 언어를 배울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죠. 어렸을 때부터 한국어를 가끔 배웠거든요. 언어를 배우면서 인식한 사실은 세 언어의 교차적 영향과 변화였습니다. 중국 본토에서는 한자 간체자를 쓰지만, 대만에서는 정체자를 쓰죠. 한국과 일본에 한자가 언제 전래하였는지에 대해서 간체자인지, 아니면 정체자인지 바뀌는 경우가 많아요. 한국은 정체자를 쓰는 경우가 많고, 일본은 간체자를 쓰는 경우가 많지만, 정체자도 많이 씁니다. 전부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예요. 제 동거인이 대학교때 언어학을 전공해서 서로 언어학에 대해서 논의하고도 합니다. 아주 재밌죠. 

재현: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을 때 한국 여자애와 같은 반이 되었어요. 그걸 들은 어머니는 한국 가족과 친해져야 한다고 마음먹고 그 애의 어머니와 친한 친구가 되었죠. 어머니가 한국 가족의 미국 적응 도우미가 되었어요. 어머니가 한국 가족과 친해진 이유는 제가 한국 문화를 접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죠. 특히 어머니가 제공할 수 없는 한국 문화를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한국 할머니와 교류가 있었죠. 할머니가 저에게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주시기도 하고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셨고, 제가 이해 못 하지만 한국어로 항상 말을 걸기도 했어요. 마음과 영혼에 깊이 영향을 끼친 교류를 할 수 있었죠. 나이 먹고 나서 한국을 공부할 때 좀 더 깊숙한 영향을 끼쳤고, 실수했을 때 더 실망하기도 했어요. 제가 왜 이런 단순한 단어를 모르는지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어나 일본어를 배울 때 느끼지 않았던 감정이었어요. 배운 적이 없으니 단어를 모르는 일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재현: 살면서 다양한 국가에서 살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팟캐스트에서 말할 주제라고 생각해요. 대학교 때 일본에서 1년 정도 살았고, 한국에서 성인이 된 뒤 2년간 거주했고, 영국에서 1년 정도 살았고, 태국에서도 몇 년 살았죠. 여러 지역에서 아시아인으로서 사는 경험이 있죠. 지역마다 확실히 다른 경험입니다. 사람들이 교류하는 방식이 다르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방식도 다르죠. 카오미 씨가 한국에서 이런 경험을 하셨는지 모르지만, 꽤 흔한 경험이라고 들었어요. 사람들과 같이 영어로 말하다 보면 왜 영어를 하느냐고 한국 사람들이 적대적으로 나온다고 하죠. 일본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그런 반응을 받으면 무시했어요. 하지만 한국에서 그런 반응을 겪으니 감정적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제가 예측하지 못했던 반응을 하게 됐죠. 제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감정적인 문제가 있었거나, 적어도 한국에서 살면서 해결해야 하는 감정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한국 사람들이 영어로 이야기를 했다고 시비를 걸어왔다고요?

재현: 네. 그렇죠. 영어로 말했다고 시비를 걸어오고는 했습니다. 2008년도에서 2010년까지 서울에서 살았어요. 서울에서 미국인, 한국계 입양아, 한국인들로 구성된 아시아인 집단과 같이 영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특히 백인이나 흑인이 없으면 나이 많은 노인들이 저희에게 잔소리하거나 때리고는 했습니다. 왜 예의 없게 영어를 사용하느냐, 한국 문화를 버릴 셈이냐 그렇게 잔소리를 했지요. 그럼 우리 중 1명이 한국어로 아니 우리는 사실 외국인이에요, 그래서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다고 설명을 해야 했죠. 일본에서도 그런 반응을 보기도 했습니다. 제가 중국인이나 한국인이라고 인식을 하고 저에게 그런 반응을 했죠. 한국인이었으니 반은 맞은 셈이었어요. 제가 일본에서 2002년에서 2003년까지 살 때 제가 살던 지역에서 한국인과 중국인에 대한 반응은 미국인들이 남미 출신 히스패닉들을 대하는 반응과 비슷했습니다. 

재현: 중국인이나 한국인이 일본에 와서 일본인들의 직업을 빼앗고, 저임금 노동자이니 그렇게 좋게 대우해주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만연했고, 그런 인식하고 저를 대했죠.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면, 특히 미국식 영어를 사용하면 사람들이 저를 대우하는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미국인이라고 밝히는 순간 확실히 대접이 바뀌었어요. 하지만 다른 한국인이나 재일교포들과 같이 일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서로 소통하고 있으면 나이 많은 일본인들이 왜 일본어를 쓰지 않느냐- 그렇게 잔소리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제가 일본어를 많이 쓰지 않은 이유가 그런 사람들 때문이었거든요. 물론 한국에서 그런 반응을 보인 한국 사람들이 잘못하기도 했지만, 한국에서도 제가 한국어를 많이 쓰지 않은 이유는 한국 사회에도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일본에서는 어디에서 지내고 계셨죠?

재현: 마쿠하리라는 지역에서 지냈습니다. 치바현에 있지만 도쿄도 맞닿아 있고, 도쿄만에 접한 지역이었죠. 도쿄에 있는 매립지역과 가까운 곳에 제 학교가 있었어요. 

팟캐스트: 그때도 중성적인 외모를 하고 계셨나요?

재현: 사실 지금도 중성적인 외모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육체 모습 자체가 전통적으로 여성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죠. 수영도 해서 많은 사람이 수영복 모습을 본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상당 기간은 장발하고 다녔어요. 18살 때 삭발을 하고 다닌 적도 있지만, 장발한 아시아계 사람을 보면 많은 사람이 여성스럽다고 하죠. 그래서 사람들이 가진 인식과 여성성을 밀어내려고 더 노력해야 했지만, 동시에 성별에 있어서 평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뛰어넘으려고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항상 남성 대명사를 쓰고 여성 대명사를 쓴 적이 없었죠.

팟캐스트: 일본에서 젊은 사람들이 자주 그런다고 하더군요.

재현: 네. 일본에서도 매우 흔해진 상황입니다. 제가 일본에서 살 때 여자인 친구들이 그런 남성 대명사를 쓰는 일 자체가 멋있다고 했어요. 물론 저는 이게 멋 부리는 문제가 아니라 여성 대명사를 쓰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죠. 친구들은 사람들이 평범하게 그러니 그래도 괜찮다고 이야기했어요. 일본 친구들이 보통 하지 않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바보 취급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줬습니다.

팟캐스트: 외국에서 거주할 때 사람들에게 성소수자적 정체성이 드러났는지 궁금하네요.

재현: 많은 나라에서는 성소수자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그 이유는 국가에서 살 때 집중하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저 자신에 집중하지 않고 있었고, 주로 무언가를 배우거나, 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대학교 때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서 일본에 갔죠. 일본에서 한 일 모두가 일본어를 배우려고 한 일이었어요. 한국에 갔던 이유는 양어머니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서 갔었습니다. 성 소수자 사회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어요. 영국에서 살았을 때는 백인 이성애자 남성과 결혼한 상태였죠. 제가 영국으로 이사한 이유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살 때는 일만 했어요. 전남편이 학교에 다니기 위한 자금을 대야 했기 때문이죠. 태국에서 살 때는 미얀마에서 넘어온 로힝야 난민들을 돕는 일을 했기 때문에 성 소수자 사회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어요.

팟캐스트: 왜 양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서 한국에 가셨죠?

재현: 항상 한국에 가고 싶었죠. 오래전부터 한국에 꼭 방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대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 트윈 시티 지역으로 이사를 와서 지냈습니다. 여기에서 살면서 항상 언제 한국에 가지? 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4단계 유방암 진단을 받았어요. 어머니는 이미 제가 어렸을 때 유방암에 걸렸다가 나은 적이 있으므로 놀라지는 않았지만 슬펐습니다. 어머니가 암에서 회복한 지 10주년을 축하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갈비뼈에 이상한 고통을 느껴서 병원에 방문했더니 암이 골반, 폐, 뇌까지 퍼졌다고 하더군요. 꽤 짧은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어머니의 연령대 때문에 공격적인 치료방법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죠. 어머니 곁에서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서 원하지 않는 일을 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트윈 시티 지역에서 몇달간 지냈어요. 일하다가 구글링을 하게 됐고,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다른 한국 입양아의 블로그를 찾았고, 그의 경험을 보게 되었죠. 그곳에서 필요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가서 정신적으로 붕괴할지, 문제가 있을지, 힘들지, 아니면 한국 사회에 들어가는 일이 어려운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어요. 블로그 주인과 연락을 해서 서로 교류를 했고, 3주 뒤에 어머니의 생일에 맞춰서 한국으로 출발했죠. 제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미네소타 주에서는 제 자신을 탐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팟캐스트: 양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한국에 가셨군요?

재현: 네. 양어머니가 사망하신 뒤 4달 뒤에 한국으로 출발했죠.

팟캐스트: 양어머니를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어머님이 재현 씨가 한국에 가기를 원했다고 생각해요.

재현: 네. 어머니는 그런 문제에 있어서 대단한 분이셨죠. 물론 미국 중서부에서 자란 백인 여성이었고, 따라서 세계관에 한계가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 모두 세계관에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절 잘 대해 주셨어요. 어머니는 절 입양하셨을 때 아주 잘 돌봐 주셨죠. 어머니가 필요로 하는 일보다 저를 위해 주셨습니다. 제가 후회하는 일이기도 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의 생일에 맞춰서 한국에 가기로 한 이유는 어머니가 항상 함께 한국에 방문하려고 하셨기 때문이죠.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고국 방문 프로그램을 같이할지 물었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권유였죠. 물론 어머니와 아버지가 저에게 한국 관련된 일을 하자고 하면 항상 권유였습니다. 이런 일을 해볼까? 이걸 해보자? 하고 싶으면 같이 하자. 이런 식이었어요. 양어머니가 내가 여권도 있겠다 같이 고국 방문을 하지 않겠냐? 이라고 권유를 하셨죠. 관련 정보를 확인하기 시작하셨고, 고국 방문을 한 다른 사람과도 이야기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너랑 꼭 하고 싶구나. 너랑 네 아버지랑 같이 한국에 가보고 싶구나. 이라고 하셨죠. 하지만 어머니에게 처음 한국 방문할 때는 혼자 방문하고 싶어요. 이라고 대답했죠. 어머니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제가 거부를 해도 아주 느긋한 반응이셨죠. 다음 날에 우리 마음에 상처를 입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저에게 이야기를 해줬어요. 혼자 가서 한국을 탐구해야 한다면 제 마음을 존중해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고국 방문 프로그램에도 참여하지 않았어요. 제가 한국에 방문하고 싶은 방법이 아니었죠. 부모님이 필요한 시간을 주셨고, 그렇게 저만의 특이한 방식으로 그 문제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재현: 이미 언급했지만 많은 입양아와 같이 성장했죠. 단순히 입양아 아이들과 같이 자랐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어른이 된 입양아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 부모님은 다른 입양된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었죠. 입양된 친구들이 입양된 아이에게 그런 일을 하면 미움받을 수 있다고 조언해줬습니다. 제 삶에 저와 비슷한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부모님 연령대의 조언자들이 있었죠. 제 부모님이 잘 들어주지 않거나, 어려운 주제가 있으면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어른이 있었어요.

팟캐스트: 아주 대단하네요. 한국에서의 2년 동안의 경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아주 대단한 시간을 보내셨겠네요?

재현: 네. 그랬죠. 서울에서 평범하게 영어 선생으로 일했습니다. 지하상가에서 싼 드레스를 잔뜩 구매하기도 했고, 한국 음식을 잔뜩 먹기도 했고, 클럽들도 방문했고, 영국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 사람과 동거하게 되었어요. 한국에서 흔한 일입니다.

팟캐스트: 한국에서 1년 동안 살아보면서 느꼈던 점은 한국에서 연애하려고 하는 서구 남성들 대부분이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 여성을 원했다고 생각했는데, 재현 씨도 비슷한 느낌을 받으셨나요?

재현: 웃기게도 제가 결혼한 남성, 좋은 사람이기도 하니 그 사람의 이름을 쓰겠어요. 알렉스였죠. 알렉스가 친구들과 한국인과 데이트를 할지에 대한 내기를 했다고 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걸 듣고 아니 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냐고 놀랐어요. 알렉스는 그 말에 알지만, 적어도 네가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이 아니지 않으냐고 했죠. 그 말에 동의하긴 했지만 그런 내기를 하고 저를 그런 내기에 포함하는 일은 문제라고 언급했습니다. 확실히 한국에서 그런 태도를 보인 서양 출신 남자들을 만났죠. 외국인과 연애하려고 하는 한국인들도 많이 만났지만, 외국인 같은 외모를 가진 외국인과 연애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적었어요. 연애 방식과 정반대의 느낌이었죠. 전 외모는 상관이 없고 정치적으로 맞는 사람을 원하는데, 그 사람들은 정치적 관점이나 성격은 상관없고 외모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팟캐스트: 외면이 상관없고 내면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한국에서는 많은 곳에서 외면이 내면보다 중요한 경우가 많죠. 

재현: 네. 한국에서는 확실히 외면이 중요하죠.

팟캐스트: 그래서 한국에서 외국인들도 많이 만나셨나요?

재현: 네 그랬죠. 대부분 시간을 다른 외국인들과 시간을 보냈어요. CDI 학원에서 일하면서 다른 외국인 강사들과 친하게 지냈죠. 제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90명의 사람과 함께 오리엔테이션을 들었어요. 그중 10명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죠. 학원 내부에서 친구들이 있었고, 그리고 제 이웃에 특이한 노인분과 친해졌습니다. 제 친구가 피자 가게에서 만난 노인이었는데, 아 백인이네. 내 애들도 영어 하는데 친해지지 않겠나? 이런 식으로 다가오셔서 서로 친하게 지내게 됐죠. 그분의 자식들과 친하게 지내게 됐습니다. 대학생이었고, 아직도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제 외할머니가 그 지역에서 살고 지냈어요.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이야기인데, 이 팟캐스트에서는 이야기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재현: 전 갑작스럽게 한국에 가기로 결정을 내렸고, F-4 비자 덕분에 서류 처리가 빠르게 진행되었죠. 제가 한국에 가볼까? 생각한 뒤 1달 만에 한국에 오게 되었어요. 한국에 왔을 때는 이미 오래전에 제 친가족과 연락이 닿은 뒤였죠. 제 언니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제가 언니에게 한국을 방문한다는 연락을 했고, 언니는 저에게 핸드폰 번호를 보내줬죠. 한국에 도착한 뒤 핸드폰을 개통하고 제가 지내는 곳의 지하철역을 언니에게 보내줬어요. 그러자 여동생이 자기 자란 곳이고, 외할머니가 지내는 동네라고 이야기해줬습니다. 제가 지내게 된 아파트가 언니가 자란 곳에서 6블록 떨어진 곳이었죠.

팟캐스트: 서울이 엄청난 대도시인데 그런 우연이라니 대단하네요.

재현: 거기에 제가 지내게 된 아파트 구조도 언니가 자랄 때 쓰던 아파트 구조와 똑같았고, 할머니가 지내고 있던 아파트와 똑같았습니다.

팟캐스트: 친가족들이 왜 재현 씨가 입양되었는지 이야기해줬나요?

재현: 네. 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친부모님은 결혼한 상태였고 이미 아이가 둘이 있었습니다. 두 명의 언니가 있어요. 맏언니는 3살 연상이고, 둘째 언니는 1살 연상이죠. 너무 가난해서 3번째 아이를 키울 역량이 없었습니다. 아니 사실 언니들을 키울 역량도 없었어요. 제가 태어나고 나서 바로 고아원에 맡겨졌기 때문에 제 생일을 알고 있죠. 심지어 제 서류에는 제 출생 시간도 적혀 있어요. 어머니가 절 그렇게 빠르게 고아원에 맡겼습니다. 제 서류에는 아버지를 알 수 없으며, 미혼모의 자식이라고 가짜 정보가 적혀졌죠. 그렇게 정보를 적어서 해외 입양이 되도록 유도했어요. 언니들은 제가 태어났는지 모르고 자라났습니다. 제가 10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잘나가던 노래방을 김포에 소유하고 계셨는데, 그 땅이 수용되어서 대규모의 보상금을 받았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그 보상금을 새 사업에 투자하지 않고 보상금을 가지고 어머니와 언니들을 남기고 잠적했죠. 이미 언니들은 부모님이 일할 수 있도록 외가가 키우고 있었습니다. 제가 17살일 때 건강 관련 조사를 하기로 마음먹었죠. 가슴에 양성종양이 있었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서 조사를 진행했어요. 제 양어머니도 유방암 생존자였으니 제 종양에 대해서 걱정을 하셨습니다. 제가 건강 관련 조사를 진행했을 때 한국에서는 친어머니가 친언니에게 제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했어요. 언니는 어머니가 임신했던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기였으니까요. 그래서 그쪽에서 입양 기록을 개방했고, 그 뒤 제가 건강 관련 조사를 시작했죠.

팟캐스트: 만약에 어머니와 언니가 정보를 개방하지 않았다면 친가족을 찾지 못했을지도 모르네요?

재현: 네. 만약에 기록이 개방되지 않았다면 많은 입양아가 겪는 우리 담당이 아닙니다. 이쪽으로 가보세요. 이라는 고난을 겪어야 했을지도 모르죠. 언니와 외할아버지가 기록을 개방하도록 설득했어요. 그래서 미국에서 관련 서류를 요구하는 연락을 보내자, 기록이 개방되었기 때문에 입양 기관에서 “아 서류도 보내 드릴 수 있고, 정보가 개방되어서 친가족과 연락할 수 있는데 연락하겠어요?”라고 이야기를 해서 바로 친가족과 연락이 닿았죠.

팟캐스트: 17살에 친가족을 찾으셨군요? 

재현: 네.

팟캐스트: 바로 연락을 하셨나요? 아니면 기다리셨나요? 

재현: 아주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이 안 나요. 처음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을 때는 언니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언니 이름은 심주연이에요. 맏언니 이름은 심자연입니다. 그리고 제 이름은 원래대로라면 심재연이 되어야 했죠. 하지만 뭐 이미 말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주연 언니가 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친구의 어머니가 우리 가족을 대신해서 주연 언니와 직접 만났어요. 

팟캐스트: 한국에서 말이죠?

재현: 네. 제 한국 친구 어머니가 한국에 돌아가서 가족을 만나고 있었는데 저희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직접 너희 언니와 만나서 외모도 보고, 뭔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해주겠다!”라고 하셨고, 지하철역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그리고 친구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딱히 이야기해볼 이유도 없이 외모를 보니 제 언니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주연 언니와 제가 가족 중에 가장 닮았기 때문이죠. 그 뒤로 주연 언니와 제가 계속 교류를 했어요. 어느 날 자연 언니가 집에 와서 학교 선생이라 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 주연 언니와 제가 주고받던 편지를 발견했죠. 문제는 주연 언니와 친어머니가 자연 언니에게 저에게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 내부에서 문제가 일어났어요. 추석을 친가족과 같이 보낼 때 자연 언니는 저에게 말도 걸지 않았습니다. 저와의 관계를 구축할 가능성을 잃어서인지, 아니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를 어떻게 대할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런 복잡한 감정이 가족 중 저에게 집중되어 있죠. 절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감정적 대응을 하기 쉬울 겁니다. 하지만 자연 언니가 장녀이기 때문에 가족과 교류하는 데 문제가 생기기도 해요. 친어머니와 처음으로 연락이 닿아서 한국에 방문해서 만나려고 할 때, 어머니가 절 만나는 일을 거부했죠. 자연 언니가 저를 만나는 일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저와 관련해서 문제가 있었고, 그러한 감정적 부채 때문에 가족이 할 수 있는 일과 교류할 방법이 제한되었어요. 

팟캐스트: 자연 씨가 재현 씨 때문에 아버지가 야반도주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하시나요? 

재현: 잘 몰라요. 너무 다양한 가능성이 있어서 뭐라고 할 수가 없죠. 다른 형제자매와 만난 입양아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대단한 점이 있죠. 형제자매들을 보고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해서 고려할 수 있어요. 좋은 삶을 살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나쁜 삶을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둘 다 장단점이 있다고 보죠. 과거에는 친부모님에 대해서 상상할 때 아주 성공한 삶을 살고 있어서 가족에 다시 환영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제 상황을 놓고 비교할 수 있는 언니들이 있어서 좀 더 현실적인 관점으로 제 상황을 판단할 수 있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또한, 언니들에게 있어서도 제가 삶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를 상상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봐요. 언니들도 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른이 되어서 갑자기 알게 됐으니 어렵겠죠. 평생 고민했는데도 알 수가 없었으니 이해가 갑니다. 

팟캐스트: 맞는 말이죠. 결국에는 친어머니를 만나셨죠?

재현: 네.

팟캐스트: 그 경험은 어떠셨나요?

재현: 그 시기에는 라이브저널(블로그 사이트)을 애용하고 있었어요. 제가 일본에서 살고 있었고,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친가족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한국에 방문해서 돌아다녔어요. 먹을 수 있는 한국 음식을 전부 먹어봤죠. 한국에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는 일본을 떠날 때였어요. 일본을 기차를 통해서 여행한 다음에 부산으로 페리를 타고 갔고,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갔죠. 그 여행을 하면서 주연 언니를 만날 예정을 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연 언니만 만나게 될 예정이었죠. 어머니가 주 6일제로 일하셨기 때문에 휴가를 낼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연 언니를 처음 만나고 난 뒤에 어머니를 만날 계획을 짜고 있었죠. 동방사회복지회를 통해서 입양되었는데 그 단체에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고 있었어요. 게스트하우스에서 있다가 사무실이 있는 1층에 내려왔을 때 아주 귀여운 케이크가 있었습니다. 여러 캐릭터로 장식된 케이크였는데, 거기 있던 직원이 “재현 씨 어머니가 가지고 온 케이크에요.”라고 말했죠. 그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를 만날 예정이 없었기 때문에 깜짝 놀랐어요. 거기에 준비되어 있던 작은 방에 들어가니 거기 어머니가 계셨죠. 친어머니를 갑작스럽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그렇군요.

재현: 아주 이상했어요. 그리고 절반 정도밖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죠. 저랑 혈연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예상을 했지만, 절 낳아준 사람을 만나게 될지는 몰랐습니다. 

팟캐스트: 주연 언니와는 관계가 더 낫나요?

재현: 주연 언니와 가장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긴 하지만, 그 관계도 상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소통과 교류에 있어서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죠. 사람들과 계속 연락을 나누는 일을 잘 못 해요. 제 입양 가족과도 마찬가지이고, 친구와도 마찬가지죠. 제가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제 단점입니다. 제 한국 가족과도 마찬가지죠. 가끔 페이스북을 통해서 연락하고 있어요.

팟캐스트: 사람들이 가족과의 재회에 관해서 물어보면 어떤 요소에 관해서 물어보나요? 물론 물어볼 요소가 많기는 하지만, 재회하더라도 친가족과 관계를 구축하는 일은 어렵고, 상실과 죄책감 위에 장기간의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어렵지 않나요?

재현: 제가 이 팟캐스트 관련으로 아주 좋다고 생각하는 면 중 하나는 입양아의 관점에서 입양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죠. 대부분 입양아는 그러한 관점을 들을 수 없는 문화에서 자라났어요. 우리 세대와 그 이전의 입양아들은 입양 부모들이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자라났고, 그런 이야기들은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입양 부모님의 관점에서 나온 이야기 때문에 친가족과의 재회에 대해서 뭔가 미화된 관점이 생기게 되었어요. 친가족과 재회한 다른 입양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각자 다른 경험을 했죠. 한국에 살면서 친가족을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아버지가 계속 저녁을 같이 먹자고 찾아오는데 더 버틸 수가 없다는 이야기, 어머니와 만났는데 어머니에게 이런저런 일을 보고해야 하고 강제로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제 가족은 그렇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그렇게 깊은 관계를 구축하고 싶었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죠. 아마 그럴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관계를 보고 저런 관계가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자유를 가지고 부모님의 관리를 받지 않는 일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죠. 부모님이 저를 입양시켰을 때 그럴 기회를 잃었으니 부모 노릇을 할 권리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친구들과 제가 직접 실시간으로 겪었던 일이고, 우리 이야기가 더 널리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조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친부모를 찾으면 현실적인 기대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면 좋겠죠. 친가족도 사람들이고, 또 다른 삶을 살아왔으니, 기대에 맞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러한 일이 괜찮다고 알려주고 싶어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관계를 맺지 않는다고 해도 그 관계는 소중하죠. 6살 때 꿈꿨던 완벽한 관계는 아니지만, 긍정적이고 좋은 관계입니다.

팟캐스트: 정확한 이야기에요. 저는 제 친가족을 찾지 못했죠. 찾고 있기는 하지만 힘들고 복잡한 여정입니다. 

재현: 그렇죠. 입양아로서는 한국에서의 일을 주동적으로 주도할 기회가 아주 적어요. 단순히 대중과의 교류만이 아니라 가족과 소통을 하고 정보를 주고받는 데에 있어서 주도권이 거의 없습니다. 국제 입양이 사람들을 국가와 문화로부터 사람들을 찢어 놓죠. 언어 사용 능력과 언어에 대한 접근성 자체가 떨어지는 일이 큰 비극입니다. 입양아들에게 있어서 모국의 언어를 접촉할 방법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죠. 어머니와 주연 언니를 만났을 때의 경험 자체가 매우 특이했습니다. 제가 라이브저널로 블로그 글을 작성했는데, 양어머니가 그걸 보고 인쇄해서 저에게 다시 읽어주고는 했어요. 제가 아직도 뭐라고 썼는지 기억하고 있죠. 양어머니는 아주 좋아하셨지만, 저는 평범하다고 생각합니다.

재현: 제가 그 경험을 묘사하기로는 커다란 마시멜로를 원했는데 자그마한 시리얼에 담겨오는 마시멜로를 받은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제 친어머니를 만나면 모든 텅 빈 곳이 채워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물론 몇몇 빈 곳이 채워졌지만 예상했던 경험은 아니었죠. 그런 느낌은 친가족과 만나면서 쭉 지속하였습니다. 입양 기관에서 통역가를 붙여줘서 같이 점심을 먹었어요. 3일 뒤에는 직접 가정에 방문해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직접 제가 맡겨졌던 고아원에 찾아와서 저를 버스에 태우고 다시 집으로 데리고 가셨죠. 전 생각하지 못했는데 양어머니가 이야기하시기를 친어머니의 정서적 치유와 회복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양어머니가 어머니의 관점으로 좋은 회복 단계에 관해서 이야기해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친가족 집에 가도 대화를 나눌 수 없었죠. 제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없었고, 어머니는 영어를 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때 인터넷상에서 가장 쓸모 있던 번역기는 바벨 피시였는데, 좋은 번역기는 아니었어요. 언니와 제가 동시에 할 수 있는 언어는 중국어였습니다. 그래서 서로 기본적인 중국어를 통해서 이야기했어요. 거기에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일본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어로 대화를 나눴죠. 외할아버지가 저를 맞아 주기 위해서 인사를 영어로 배우셨고 감동적이었습니다. 하지만 3일간 그렇게 힘들게 소통을 했죠. 육체 언어와 서로를 바라보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러한 언어적 장벽이 서로 관계를 구축하지 못한 이유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서로 언어적으로 소통하지 못했기 때문에 깊은 관계를 구축하지 못했죠. 제가 언어적 면모에 집중하는 이유는 제가 다른 언어를 배웠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입양아로서 입양아들이 이야기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친가족을 다시 만나는 경험은 아주 귀중했어요. 특히 미국 국내 입양과 미국에서 국내 입양이 일어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랬죠. 미국 원주민과 관련된 기숙학교와 강제 입양 문제를 생각해 보면 그런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 일본이 한국을 점령했던 적이 있는데, 그런 점령자의 언어를 사용하기 껄끄럽지 않았나요?

재현: 아주 이상하고 기묘한 경험이었죠. 사실 제 친구 할머니와 신기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이 친구 할머니는 제가 같이 자란 한국 할머니였습니다. 

팟캐스트: 미국에서 같이 자란 그분이군요?

재현: 네. 그분은 미국에서 살았고, 제가 초등학교 다니는 동안 계속 알고 지냈죠.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분과 다시 만났고, 같이 수도원에서 지내게 됐는데, 할머니가 데리고 오신 영어 학교 친구분과 셋이서 같이 지낼 수 있었어요. 친구 할머니는 일본어를 할 수 있었죠.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한국에서 사셨기 때문에 그때 시점의 일본어로 언어가 고정되어 있었어요. 할머니의 젊은 시절과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국계 입양아들, 한국 문화, 그리고 한국 입양 절차에 대해서 깊은 이해하고 있던 저도 한국어를 배울 수 없어서 다른 아시아계 언어를 배워야 했죠. 그 언어는 한국과 특정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제가 한국 사람 중 일부와 소통하는데 쓸 수 있었고요. 아주 복잡한 지리 정치학적 문제이지만 그 기억은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기회가 아니었다면 할머니와 그런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겠죠.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재현 씨.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재현: 네. 아주 대단한 경험이었어요. 다시 현실에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소수인종 문화 발전에 대해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죠. 입양아 사회가 신경 써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다인종 입양아 사회가 더 신경 써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죠. 백인 부모 밑에서 자라나면 유색인종이면서 사회와 교류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됩니다. 저는 관련된 지식을 배웠죠. 경찰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했어요. 아버지는 경찰과 같이 활동할 때 경찰들이 아시아계 아이들을 자주 멈춰 세우는 일을 봤기 때문에 관련된 충고를 해 주셨죠. 제가 유일하게 그러한 충고를 받은 입양압니다. 그러한 작은 면에서 우리는 우리 부모님이 준비할 수 없는 위협에 노출되어 있고, 사회가 유색인종 청소년층을 노리고 있는데 우리 부모님은 우리를 보호해줄 수 없을 때가 있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