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3, 에파소드 19: 다니엘 강윤 나오가드

이번 팟캐스트의 참여자, 다니엘 강윤 나오가드 씨(33세)는 한국에서 덴마크로 생후 3개월에 입양되었다. 다니엘 씨는 백인 중심의 환경에서 자라난 경험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입양된 나라를 떠나 런던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정착하게 된 사연을 설명한다. 자신의 직업에 집중해왔지만, 최근에 다니엘 씨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 자신과 동떨어진 부분을 찾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생활 경험을 통해 다니엘 씨는 자신에게 뜻깊은 방식으로 자신의 근원을 배우고 탐구하게 되었다. 

다니엘: 제 이름은 다니엘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니엘 강윤 노아가드에요 덴마크 발음으로 하면 나오가드죠. 1986년, 생후 3개월에 한국에서 덴마크로 입양되었어요. 

팟캐스트: 그럼 현재 나이가 어느 정도 되시죠?

다니엘: 현재 33세입니다. 올해 34세가 될 예정이죠. 영국 런던에서 살고 있어요. 공부하기 위해서 덴마크에서 13년 전에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습니다. 거기에서 7년 정도 살다가 런던으로 와서 6년 정도 살고 있죠.

팟캐스트: 그 소개를 덴마크어로 해 주실 수 있나요?

다니엘: (덴마크어 소개) 

팟캐스트: 대부분 소통을 영어로 하시나요? 

다니엘: 네. 덴마크에서 이주했을 때부터 그랬죠. 현재 제 덴마크어는 상당히 녹슨 상태입니다. 20대에 이주해 나왔는데 그때의 은어를 아직 사용하고 있죠. 그래서 덴마크에 돌아가면 오래된 은어를 쓴다고 친구들이 놀립니다. 현재 친구와 함께 런던에 독립 스튜디오를 차렸고, 친구는 스위스 출신이기 때문에 영어로 대화하고 있죠. 제 작업 대부분은 영국 내부에서 진행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영어로 일을 하고, 고급 교육 상당수를 영어로 배웠고, 여자친구도 영어를 사용합니다.

팟캐스트: 언제 덴마크를 떠나셨죠? 

다니엘: 아마 20세에서 21세 때입니다. 공부하기 위해서 덴마크를 떠났죠. 덴마크에서 나오기 1년 전에 부모님에게서 독립했고, 암스테르담에 있는 예술 대학에 원서를 작성해 운이 좋게도 합격했습니다.

팟캐스트: 덴마크 아이들이 학교 진학을 위해서 덴마크를 떠나는 일이 흔한가요?

다니엘: 네. 흔한 편이죠. 제가 다니던 네덜란드 학교에도 덴마크인들이 많았어요. 제 모교는 그래픽 디자인으로 유명한 학교였습니다. 덴마크인들이 1년이나 6개월 정도 교환학생으로 타국의 대학교에 다니다가, 다시 덴마크 학교로 돌아가는 일은 흔하죠. 저는 제 대학교 생활을 전부 암스테르담에서 보냈어요.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암스테르담에서 2년에서 3년 정도 더 지내게 됐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 일을 좀 받아서 진행하게 되었거든요.

팟캐스트: 런던에서 다니엘 씨를 어떻게 받아들였죠? 사람들이 다니엘 씨를 만나면 질문을 했나요? 물론 런던 자체가 국제적인 도시이니 반응이 달랐겠죠.

다니엘: 런던의 인종적 다양성 덕분에 런던에서 처음으로 편안하다고 느꼈습니다. 동시에 여러 질문을 받고 아직도 질문을 받아서 놀라고는 하죠. 특이하게도 흑인들이 주로 질문을 해요. 예의 바르면 어디 출신인지 물어보고는 합니다. 예의 바르지 않으면 일본어나 중국어로 말을 걸어오기도 해요. 그 날 기분에 따라서 좋게 대응하거나, 부정적으로 대응하기도 하죠. 사람들의 인식을 문제 삼기도 해요. 

팟캐스트: 덴마크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데 주저하기도 하시나요?

다니엘: 덴마크인이라는 정보를 밝히는 데 주저하기도 하죠. 암스테르담에서는 덴마크 국적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는 여전히 인종차별이 심해요. 물론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배경이 존재하죠. 거기에 제국주의적 관점도 존재합니다. 전 금발 푸른 눈이 아니니, 덴마크인이 아니라고 하기도 해요. 물론 금발 푸른 눈인 덴마크인 자체가 적죠. 항상 저 자신한테 출신을 묻는 사람들 90%가 흥미를 느끼고 묻는다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좋은 의도라는 사실을 알지만, 기분이 안 좋으면 좋은 반응은 안 나오죠. 전 덴마크의 백인 위주 사회에서 자랐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유일한 아시아계 아이였고, 고등학교에서도 5명 중 1명이었어요. 덴마크에서 자라면서 항상 제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백인이라고 생각했죠. 거울을 봐도 아시아계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죠. 암스테르담, 아니 런던에 와서야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고 아시아계라는 자각이 들었습니다. 저 자신을 아시아계라고 규정할 수 있게 되었어요. 아주 이상하게 들린다는 사실을 압니다. 딱 봐도 제가 아시아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죠. 하지만 제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제 내면은 부모님과 닮았습니다. 백인 중산층의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어요. 제 외면과 내면은 맞지 않고, 계속 내면과 외면의 싸움을 하는 셈이죠. 

팟캐스트: 인종이나 정체성에 대해서 다니엘 씨의 사고방식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다니엘: 네. 그렇다고 생각하죠. 최근 다양한 이유로 정신과 상담을 받기 시작했어요. 상담을 통해서 저 자신과 제 감정, 제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제 내면에서 감정이 받아들여지고, 외면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저 자신이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는지 좀 더 생각하게 되었죠. 제가 아시아인이지만 진짜 아시아인이 아니므로 사람들이 절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아주 복잡해요. 카오미 씨도 입양아들이 이러한 복잡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시겠죠. 런던이라고 해도 저는 여전히 백인 위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고, 아시아계는 여전히 소수 인종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 내부의 가치에 따라서 제 가치가 정해진다는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어요. 그래서 소수 인종의 상황과 제 가치 판단이 서로 충돌하게 되죠. 저는 동시에 이 두 가지 상황을 하나로 합쳐서 인식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항상 고민하고 생각하는 문제예요.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해야 하죠. 

팟캐스트: 다니엘 씨가 성장한 마을에 관해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작은 마을이었나요?

다니엘: 네. 거의 마을 정도의 소도시였죠. 3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청소년기에 마을에 사는 동갑내기들을 전부 알 정도였죠. 학교가 3개였어도 서로를 전부 알았습니다. 같은 파티에 참여하거나, 서로 사촌이거나, 그런 식으로 이어진 작은 사회였어요.

팟캐스트: 다니엘 씨가 가족에서 유일한 입양안가요?

다니엘: 아뇨. 남동생이 입양압니다.

팟캐스트: 한국에서 입양되었나요?

다니엘: 네 한국 입양아죠. 저보다 5살 어린입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에게는 친자식이 있나요?

다니엘: 아뇨. 없습니다. 

팟캐스트: 자라면서 가족이 인종에 대해서 논의를 했나요?

다니엘: 아뇨. 아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를 듣거나 관련된 공부를 한 뒤 인종 인식의 중요성을 알았죠. 전 부모님에게 고마워하고 있어요. 절 소중하게 생각해준 가족입니다. 저랑 제 동생은 2세대 덴마크 아시아계 이주자이죠. 하지만 백인인 부모님이 같은 인종이 아닌 아이들을 입양하기 위한 준비가 된 채로 우리를 입양하지는 않았어요. 80년대에는 인종 인식 자체가 부족했죠. 물론 LGBTQ 운동과 인종 운동이 활성화되긴 했지만, 다인종 간 입양 자체 인식을 위한 운동은 비교적 신규 운동이에요. 우리 가족은 어머니가 제가 이민자로 인식되는 일을 무서워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인종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덴마크의 80년대와 90년대에 코펜하겐에 이민자 갱 문제가 있었거든요. 중동 이민자가 범죄와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을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물론 대중 매체의 보도도 있었고 아주 복잡한 문제였죠. 

팟캐스트: 반이민 감정 문제가 생겼군요?

다니엘: 네. 반이민 감정이 생겨났습니다. 그 시기에 많은 터키인이 독일과 덴마크로 이주했죠. 70년대에 직업 이민을 왔는데, 영국과 마찬가지로 많은 인종차별의 대상이 되었고, 직업을 빼앗는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제 어머니는 제가 그런 “나쁜 이민자”처럼 보이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인식 자체가 문제라는 사실을 알죠. 그 인식에 제가 나쁘게 반응했습니다. 저는 청소년기에 꽤 말썽을 피웠거든요. 적어도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셨죠. 

팟캐스트: 다니엘 씨 친구들은 다니엘 씨를 알고 그런 질문을 하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기 자신이 덴마크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노력하셨나요?

다니엘: 아뇨, 전 최대한 주변 환경에 맞아 들어가려고 했지만, 제가 더 덴마크인이라고 증명하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많은 사람이 스칸디나비아 문화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문화, 음식, 언어를 물어보려고 하지만 저는 딱히 제 친구들보다 더 덴마크인이라고 증명하려고 한 적이 없죠. 

팟캐스트: 스칸디나비아 문화에 대한 큰 관심이라니 정확히 어떤 느낌이죠?

다니엘: 영국에서만 인기를 끌고 있는지 모르지만,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의 편안한 문화, 후게(Hygge)에 대해서 책이 나오고 있거든요. 편안함, 느긋한 분위기로 번역이 되는데, 덴마크어의 단어 숫자가 적다 보니 후게는 여러 곳에 쓰이고 있죠. 후게가 편안한 시간 자체를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후게 여러 형용사가 붙으면 좀 더 다양한 뜻을 가지게 되기도 해요. 사람들이 후게라는 단어가 어떤 뜻이고 어떻게 하면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는지 묻습니다. 덴마크 사람들은 여전히 애국적이죠. 생일날에 국기를 달아 놓는 나라기도 하니까요. 많은 나라에서 그런 일을 하면 극우적으로 인식될 수 있으니 대충 감이 잡히죠.

팟캐스트: 생일날에 국기를 밖에 건다고요? 

다니엘: 네. 거기에 생일 케이크가 있는 탁자에 깃발을 걸기도 합니다. 뭐 다른 나라에서도 국가적 휴일에 국기를 걸지요?

팟캐스트: 미국 독립기념일 같은 날에는 당연히 그렇죠. 

다니엘: 하지만 우리는 생일날에도 깃발을 내걸거나 달기도 해요. 덴마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식품으로는 호밀빵이 있죠. 런던과 영국에서는 보기 힘든 음식입니다. 아니 물론 찾으면 나오긴 하지만 덴마크 호밀빵과 같지 않아요. 영국에서는 비싸죠. 덴마크에서는 주식입니다.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먹는데, 샐러드를 내용물로 넣은 다음에 주로 점심때 자주 먹어요. 모든 덴마크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음식이죠. 하지만 영국에 살다 보니 매일 10파운드씩 내고 호밀빵을 먹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자주 먹지 못해요. 거기에 몇 년 전에 채식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많은 전통 덴마크 음식들이 육류 위주라는 점이죠. 예를 들면 명절 음식 상당수는 생선 기반입니다. 청어를 많이 먹는데 이제 그런 음식을 먹지 못해요.

팟캐스트: 한국 정체성과 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두게 된 때를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다니엘: 저랑 제 동생은 항상 우리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시작부터 우리의 배경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제 입양 사실에 대해서 열린 태도를 보여주셨죠. 우리가 관련 정보에 대해서 궁금해하면 관련 정보를 제공해주려고 노력하셨어요. 하지만 최근까지 관심이 없었고, 남동생은 아직도 친가족을 찾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입양된 가족에게 감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3년에서 4년 전까지는 관심이 없었죠. 물론 자라면서 부모님과의 갈등이 없지는 않았지만, 항상 제 가족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어요. 그래서 친가족을 찾을 이유를 느끼지 못했죠. 제 부모님이 저를 사랑해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줬으니 친가족을 찾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상담을 받고 나서, 한국 친부모님과 저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하고, 관련 기사를 읽고 나니 인식이 바뀌었어요. 특히 한국계 입양아들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듣고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죠. 입양아들이 성장하면서 그리고 어른이 되고 나서 마주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길래 상담을 받게 되셨나요? 

다니엘: 제가 암스테르담에서 지내고 있을 때 정신과를 방문했죠. 입양아 문제가 아니라 좀 더 다양한 정신적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러한 대화가 입양아 문제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어린아이 때의 반응이 지금의 반응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자주 싸우시고는 했습니다. 그러면 노래를 틀어 놓고 그걸 피하려고 했죠. 그런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화가 나거나, 겁이 나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최대한 그 문제를 피하려고 합니다. 의사 선생님과 같이 상담하면서 생후 3개월 동안 고아원에서의 경험이 제 행동에 영향을 끼쳤는지 이야기를 하고는 했어요. 고아원에서 자신을 돌봐 줄 사람이 없이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하다 보니, 혼자 있는 상황이 익숙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혼자 있는 일이 편안하니 이해되는 설명이었죠. 삶에 있어서 고독이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사귀고 헤어졌어요. 그런 관계를 맺는 동안 저는 항상 같은 길을 쭉 걷고 있었고, 사람들이 삶에 오고 갔고, 저에게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죠. 사람들이 가까이 오는 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과대해석일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에게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는 데 문제가 있죠. 제가 상대해야 하는 문제 중 상당수는 입양아라서 겪는 문제예요. 자부심, 자각, 자신을 증명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세계에 있을 자리를 만들려고 하면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죠. 

팟캐스트: 세계에 있을 자리를 증명하려고 하는 느낌인가요?

다니엘: 네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저를 데리고 오려고 돈을 내셨죠. 아주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부모님이 칭찬을 해주거나, 사랑하고 멋있다고 하실 때마다 높은 기준을 유지해서 부모님의 사랑을 유지하려고 했어요. 그렇게 느끼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떤 단계에서는 부정적이지만, 동시에 많은 긍정적인 결과도 달성했다고 봐요. 현재 런던을 집처럼 느끼고 있죠.

팟캐스트: 현재 연애 관계를 유지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요.

다니엘: 네.

팟캐스트: 여성분인가요?

다니엘: 네.

팟캐스트: 백인인가요?

다니엘: 아뇨. 제 여자친구는 자기 스스로 흑인이라고 규정합니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났지만, 호주에서 자라났죠. 

팟캐스트: 전형적인 런던 시민이군요?

다니엘: 네 그런 느낌이죠. 

팟캐스트: 현재 연애 관계를 통해서 과거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다니엘: 우리가 지난여름부터 사귀기 시작했는데,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여자친구의 도움도 컸죠. 제 경우에는 연애 관계에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자각을 하게 되었다고 봐요. 지금까지 연애 관계에서 제 일과 취미에 더 관심을 뒀다고 봅니다. 지금은 과거의 연애 관계가 그러한 관심사 때문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죠. 공부나 일을 항상 연애 관계보다 우선시했어요. 여자친구는 솔직하고, 우리 서로 직업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그래서 여자친구에게 무언가를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집니다. 여자친구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아요. 우리가 같이 있을 때 제가 그런 느낌이 듭니다. 여자친구에게 있어서 항상 고마워하는 이유이죠.

팟캐스트: 과거 연애 관계 대부분은 백인 여성과 관계를 맺었나요?

다니엘: 대부분은 백인 여성이 대상이었죠. 물론 다른 인종도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연애를 많이 하지 않았어요. 백인, 흑인, 아시아인도 있었죠. 물론 백인 위주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다른 인종과 만날 기회가 얼마 없긴 했습니다.

팟캐스트: 아시아계 여성을 사귀었을 때, 그 사람은 비 입양아였죠?

다니엘: 네.

팟캐스트: 그런 비 입양아 아시아인들과 교류하게 되니 어떤 감정을 느끼셨나요?

다니엘: 네. 물론 여자친구의 가족을 만날 정도로 진지하게 사귀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여자친구는 한국 출신이었기 때문에 한국 음식, 요리에 관심이 많았고, 여자친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한국 문화와의 첫 교류는 아니었지만, 한국 문화와 가장 깊게 교류했던 때였어요. 항상 여러 가지 질문을 하려고 했지만 전 여자친구가 모른다고 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답했기 때문에 답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한국 문화에 대해서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경험이라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한국에서 한 이야기를 얼마나 아시나요?

다니엘: 작년에 한국에 돌아간 적이 있어요. 한국에 친구가 있죠. 암스테르담에서 한국인 친구들과 같이 살고 지내기도 했습니다. 작년 방문이 2번째 방문이었습니다. 한국 친구들과 암스테르담에서 동거할 때 여름방학을 지내기 위해서 한국을 방문했고, 그게 최초 한국 방문이었죠. 그 친구가 저에게 한국 요리를 가르쳐줬고, 한국 요리를 많이 해줬어요. 그 친구와 같이 국제 사업을 진행해 볼까 생각 중입니다. 암스테르담에서 살 때 처음으로 돌아갔는데 그게 10년 전에서 9년 전이었죠. 그때 간 이유는 한국 요리를 먹고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 갔습니다. 한국에서의 경험은 아주 대단했지만, 갈 때의 경험도 값졌어요. 갈 때 그리 신경 쓰지 않았죠. 또 다른 휴가로 한국에 가서 놀자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한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렇게 큰 의미가 없었죠.

팟캐스트: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여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군요?

다니엘: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정반대였죠. 그 당시의 여자친구가 저보다 더 기뻐했습니다. 한국 첫 방문 때는 놀고먹었어요. 하지만 비행기에서 내려서 한국에 도착했던 때는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내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모두가 저와 비슷하게 생겼죠. 사람들이 저에게 한국어로 말을 걸었어요. 제가 한국인 같이 생겼으니 당연하지만, 바보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는 영어로 답하고 많은 사람이 말을 멈추고 멀어졌죠. 부끄러워했다고 생각해요. 한국에 절 돌봐주고 챙겨줄 친구들이 있어서 운이 좋았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에 방문하는 많은 입양아가 느끼는 섞여 들어가는 감정을 느꼈군요. 

다니엘: 네.

팟캐스트: 장발이라서 눈에 띄었나요? 

다니엘: 음. 장발이라서 아무래도 눈에 띄었죠. 물론 장발이 그리 드물지는 않지만, 제 복장까지 합쳐서 눈에 띄었다고 생각해요. 한국이 다양성을 가진 나라이긴 하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이 패션에 신경을 씁니다. 모두가 아주 잘 차려입고 있죠. 사람이 많고 그 사람들이 전부 다른 방식으로 차려입고 있어서, 제가 방문했을 때 가장 옷을 못 입고 있는 사람들은 교환학생으로 온 서양 사람들이었어요. 한국에서 저는 맞아 들어갔지만, 제가 방문한 곳 중 몇 곳은 한국 사람들보다 백인이 많았죠. 아주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만, 아주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는 여전히 강한 전통과 절차가 남아 있지만 동시에 기술적으로 아주 발전해 있어요. 

팟캐스트: 저번에 한국에 방문했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다니엘: 모든 요소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긴 휴가를 가기도 했고, 저 자신이 되어서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즐길 수 있었어요. 한국을 3주간 혼자 방문했고, 그 전에 카오미 씨의 팟캐스트를 듣고, 공부하면서 어린 시절에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는 제 과거를 조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친부모 조사를 하려고 했죠. 덴마크에 왔을 때 받았던 입양 서류를 챙겼고, 덴마크 한국 입양아 단체인 코리아 클럽의 회원이 되었죠. 그 사람들을 통해서 입양 기관과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쉽게 조사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 사람들과 연락하는 일이 생각보다 쉬웠죠. 그다음에 준비하고, 기관에 말해서 특정 기간 동안 한국에 방문한다고 말을 해서, 조사를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어요. 기관의 담당자가 아주 친절하게 특정 날짜까지 정보를 찾아보고 정보를 제공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날이 운이 좋게도 제 생일이었죠. 그 날이 되자 아주 큰 일이 되었습니다. 혼자 기관을 방문했고, 날씨가 나빠서 비도 내리고 있었고, 제 생일이었어요. 하지만 기관에서는 어떤 자료도 찾을 수 없었다고 이야기했죠. 친부모님이 거주지에 대해서 거짓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방문한 날에는 실망했지만, 그 뒤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절차가 아주 빠르고 진행되었기 때문에 제 마음속에서 큰 충격적 문제로 자리 잡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실망스럽기는 했죠. 서류에 적혀 있던 형제자매들에게 연락했으면 좋았겠지만, 기관에서 그럴 역량이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서류에 왜 다니엘 씨가 입양되었는지 나와 있었나요?

다니엘: 경제적인 이유였습니다. 저는 4번째 자식이었고, 아버지는 택시 운전사였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였죠. 누나가 둘에 형이 하나였어요. 어머니 나이가 30대 후반, 40대 초반이었습니다. 늦둥이기도 했고, 경제적인 이유로 입양되었어요.

팟캐스트: 좀 생각을 해봤을 텐데, 자료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정보 자체가 찾기 어렵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나요?

다니엘: 운이 안 좋다고 생각하죠.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렇게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가장 흥미를 느끼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입양아들의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이죠. 매일매일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장소를 찾을 수밖에 없어요. 다인종 입양과 그 뜻에 관한 연구는 적었죠. 입양아가 자라서 어른이 되고 나면 정신적 문제를 겪으면 하나둘 정도는 찾아서 치료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겹겹이 쌓인 문제라 관리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입양, 인종 간의 문제도 있고 매우 복잡한 문제죠.

팟캐스트: 친가족과는 만날 수 없었지만, 한국 자체와 연결성을 구축하려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다니엘: 네. 물론이죠. 당연합니다. 다양한 이유로 한국과 연결성을 구축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앞에 언급한 한국 친구들을 만들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아주 좋은 친구들이 되었어요. 제가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 친구들은 제가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외국에서 유학하고 있던 한국 학생들이죠?

다니엘: 네 그렇습니다. 좋은 친구들이 되었어요. 그 애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았기 때문에 무의식적인 흥미가 있었다고 생각하죠. 음식을 매개로 친해졌는데, 친구 중 하나가 요리를 좋아했기 때문에 저에게 요리를 해주기도 했어요. 친구 중 하나는 입양 문제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일이 슬프다고 이야기했지만, 입양이 되었든 아니든 한국인이고 우리에게 있어서 형제나 남매나 다름없다고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아주 편안한 느낌이 들었죠. 저 자신이 한국인 같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인이 저를 받아들여 주었으니까요. 거기에 문화적인 경험도 아주 좋았죠.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 친구들이 저를 봐줬죠. 제가 한국에서 지내던 기간 동안 친구가 방을 내주었습니다.

팟캐스트: 다른 입양아들과의 관계는 있나요? 그 입양아들과 친구들인가요? 아니면 아예 입양아들과의 관계가 있긴 한가요?

다니엘: 한국 출신 입양아 친구는 없어요. 우리 가족, 적어도 제 부모님은 다른 한국 입양아 가족과 친하게 지내고 있지만, 저는 그쪽과 교류를 하고 있지 않죠.

팟캐스트: 성장하면서 만난 다른 아시아계 사람 중에 입양아가 있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다니엘: 제가 덴마크에서 살 때 말인가요?

팟캐스트: 네. 덴마크에서 거주할 때 입양아를 만났다고 생각하시나요?

다니엘: 네. 만약에 아시아계 애 중에 한국계 입양아가 있었다면 제가 만난 첫 입양아였겠죠. 십중팔구 입양아들이었을 겁니다. 스웨덴이나 덴마크에서 한국인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면 십중팔구 한국계 입양아라고 생각하죠. 다가가서 입양안지 묻지는 않았어요. 물론 다른 사람들과 그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일은 좋아하죠. 흥미로운 주제이니까요. 뉴욕 타임스의 기사를 읽었을 때 확실히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다른 한국 입양아들과 연계를 만들려고 하는 욕구는 없어요. 입양아들과 이야기를 하고 관계를 만들려고 하지 않죠. 하지만 그건 제 성격과도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혼자 하는 일을 좋아해요. 제가 무언가에 흥미를 느끼면 모든 것을 알려고 합니다. 입양 관련 정보도 그렇게 배우고 있어요. 파리에 입양된 한국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대단한 이야기였죠.

팟캐스트: 미국 입양아들과 유럽 입양아들의 경험이 다른 것 같군요.

다니엘: 지금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명한 한국계 미국인이 많죠. 요리 업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데이비드 창이 서해안 지역에서 유명하고, 연예계에서도 이름을 떨치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많습니다. 미국에 한국인 사회가 더 안정적으로 구축되어 있다고 봐요. 물론 저는 미국 동해안 지역만 방문하긴 했죠. 도시마다 작은 한국인 사회가 만들어져 있었어요. 미국에는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과 직업상 방문자들이 많죠. 반면에 덴마크는 매우 백인 위주 사회입니다. 항상 눈에 띄고, 아시아계라면 더더욱 그렇죠. 만약에 유색인종이 있다면 대부분 아랍계이고, 그 사람들은 이제 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했지만, 아시아계는 여전히 인구에서 매우 적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고 눈에 띄게 되어요.

팟캐스트: 다니엘 씨, 덴마크에서 사람들이 영어로 말을 걸어오거나 그랬나요?

다니엘: 네. 하지만 최근 6년에서 7년 사이에 더 영어로 말을 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느낌입니다. 제가 덴마크에 방문할 때마다 그런 변화를 느끼죠. 특히 코펜하겐을 중심으로 덴마크어를 하지 못하는 인구가 늘었어요. 그래서 덴마크인들 입장에서는 영어밖에 못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난 셈이죠. 런던에서 덴마크인들을 만나면 보통 영어로 저에게 말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제 이름을 모르고 외모만 봤을 때 그렇게 반응하는 일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사람들이 다니엘 씨의 이름에 반응하는 경우가 많나요? 특히 다니엘 씨의 성을 보고 특이하다는 반응을 하나요?

다니엘: 덴마크 성이니까요?

팟캐스트: 네.

다니엘: 네 그렇습니다. 특히 제 덴마크 성은 보통 영어 사용자가 발음하기 불가능하므로 더더욱 그렇죠. A가 두 개 겹치면 덴마크에서는 아예 다른 단어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팟캐스트: 다니엘 씨가 한국과 관련해서 다음으로 할 일은 무엇인가요?

다니엘: 이번 가을에 제 덴마크 가족과 같이 한국에 방문할 예정이었죠.

팟캐스트: 남동생분도 같이 참여할 예정이었나요?

다니엘: 네. 하지만 가족 휴가라서 참여할 예정이었죠. 남동생은 한국에 관심이 없거든요. 하지만 저도 28살 때는 한국에 관심이 없었으니 비슷한 느낌입니다. 사실 제 어머니가 제 친가족을 찾아보라고 계속 권유하고 계시죠. 제가 친가족을 찾는 데 있어서 저보다 더 열정적으로 접근하고 계세요. 최대한 빠르게 한국에 방문하고 싶죠. 제 여자친구와 같이 한국을 방문할지를 논의를 나눴습니다. 서울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보냈으니, 서울이 물론 대도시이긴 하지만 어떻게 돌아다닐지 알고, 친구들도 있으니 친구들을 만나러 가고 싶어요. 한국의 평범한 생활을 즐겨보고 싶죠. 관광보다는 친구들과 같이 지내고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에서 생활해볼 생각은 해보셨나요?

다니엘: 확실히 생각해보긴 했어요. 지금도 생각해보는 일입니다. 확실히 몇 년 정도 한국에서 지내면서 일할 수 있으면 좋은 경험이 되겠죠. 하지만 한국에서 정착해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물론 제가 덴마크에서 자랐으니 아마 정착한다면 덴마크에서 살고 싶은 느낌이 있죠. 항상 어디를 가든 덴마크에 귀국해서 살 수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인식 자체가 사실이 아니지만, 전 항상 그렇게 생각하죠. 

팟캐스트: 그 후게라는 사고방식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군요?

다니엘: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에 방문했을 때, 한국에서의 삶이 어땠을지 상상해본 적이 있나요?

다니엘: 네 물론이죠. 여기에서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제가 입양되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생각합니다. 한국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광경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하죠. 제가 너무 극적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영화에 나온 사람들처럼 지하에서 살아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팟캐스트: 사기꾼으로 살아가야 했다는 이야기이죠?

다니엘: 네. 하지만 한국에 있는 제 친구들은 꽤 좋은 삶을 살았죠. 한국은 문화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성장하고, 살고, 일하기에 힘든 나라라고 생각해요. 런던에서 사는 일 자체는 무척이나 힘들지만, 서울 생활은 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다니엘 씨, 친가족을 계속 찾아보려고 하실 건가요?

다니엘: 제 입양 기관은 친가족을 더 찾아보고 싶으면 흥신소를 사용하라고 추천했죠. 제가 지금 투자할 수 있는 비용이 아닙니다. 제 부모님이 가짜 정보를 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죠.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났고 그 흐름에 맞춰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 친가족에 대해서 여전히 흥미가 있죠. 하지만 다른 문제에 집중하고 싶고, 찾는다고 찾을 수 없는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현재 삶에 집중하고 싶어요. 물론 언제든지 바뀔 수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