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3, 에파소드 18: 사샤 라이더

영국 교외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면서 사립학교에 다니고, 기숙학교를 다닌 사샤 라이더 씨 (48세)를 영국에서 자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배경에서 자라났다. 하지만 샤샤 씨는 한국 입양아며, 다른 한국계 입양아들처럼 백인 위주의 사회에서 자라나면서 불편함과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다. 샤샤 씨는 정신적 치유 방법과 배경을 인정하게 된 계기, 그리고 관련된 자각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현재 샤샤 씨는 다른 사람들의 무의식을 꿈을 통해 해방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사샤: 제 이름은 샤샤 라이더입니다. 48세이고, 뉴멕시코 주 산타페시에서 거주하고 있죠. 인천에 있는 해성보육원에서 입양되었어요. 생후 몇 개월밖에 안 된 아기였습니다. 정확히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는 모르죠. 제 양부모님이 관련된 자료를 받지 못했어요. 3살 반에 영국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전 외동딸이었고, 양부모님도 둘 다 외동딸과 외동아들이었죠. 양아버지는 유엔을 위해서 일하고 있던 과학자였어요.

팟캐스트: 성장한 그곳에 관해서 이야기해주세요.

사샤: 영국 중부에 있는 워윅셔 지역에서 성장했습니다. 셰익스피어로 유명한 지역이죠. 제가 어른이 된 뒤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니 기묘한 시절을 보냈지만, 그때의 저에게는 평범한 어린 시절이었어요. 작은 마을 근교에서 고립된 채로 자랐죠. 우리 지역 사회, 가족 친구들 전부 백인이었고 여학교를 다녔어요. 항상 고립되고 괴리된 느낌을 받았지만 이유를 몰랐습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이 한국에 관해서 이야기했나요?

샤샤: 조금 이야기해줬죠. 아버지는 한국과 한국에서 일했던 경험을 좋아하셨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문화 계급상으로 한국에 적응하기 힘들어하셨죠. 스스로 인종차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주 인종차별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계셨어요.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낮게 보셨습니다. 어머니가 그러한 이야기를 직접 저에게 꺼내지 않으셨죠. 하지만 어머니가 무의식적으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서 보인 부정적인 표현을 통해 알 수 있었어요. 한식이 전부 이상한 냄새가 났다고 하셨고, 한국 사람들을 영어 이름으로 부르고는 했죠. 아버지 기사를 존이라고 불렀지만, 당연히 존이라는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세계관에서는 한국 사람들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 존재했어요. 아주 신식민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계셨죠.

팟캐스트: 부모님이 왜 한국에서 입양하셨는지 물어보셨나요? 물어보지 않았다면 왜 그러셨는지 추측할 수 있나요?

샤샤: 제 부모님은 서울에 살고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유엔에서의 직장을 즐기고 계셨죠. 부모님이 불임이라서 입양하셨다고 했어요. 부모님이 해준 이야기는 그 정도가 다였습니다. 한국에서 살고 계셨으니 한국 아이를 입양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죠. 부모님이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데 영국 아이를 입양하긴 어려웠습니다. 제 성장기에는 입양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이 언급하려고 하지 않는 이야기였어요.

팟캐스트: 샤샤 씨는 제가 인터뷰한 입양아 중 첫 영국 출신이십니다. 영국에는 강한 국가주의가 존재하나요? 자라면서 영국인의 자긍심이 강조되었나요? 그러한 분위기를 느끼고 문제점을 느끼셨나요?

사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이해되는 일이 많아요. 과거에는 비교 기준이 없었죠. 지금 되돌아보면 어렸을 때 인종차별을 겪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사람들이 저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팟캐스트: 샤샤 씨, 어떤 종류의 인종차별을 당하셨죠?

사샤: 무의식적인 차별을 가장 많이 당했어요. 어머니와 같이 상점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저를 빤히 쳐다보고는 했죠. 백인 위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다르게 생긴 제가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궁금해했지만, 저에게 질문할 수 없었죠. 사람들이 저와 어머니를 보고 상상을 했어요. 중국계 남편과 사이에서 낳은 아이일까? 저 여성의 아이일까? 남베트남 난민일까? 이라는 질문을 저를 바라보면서 생각했지만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문들의 담긴 눈으로 저를 봤지만, 왜 그러는지 몰랐죠. 한국인 정체성 자체를 몰랐어요. 제가 다르게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한국 문화에 대해서 전혀 몰랐고, 교육도 전혀 받지 못했고, 아시아계와의 교류도 없었습니다. 제 안에 존재하는 아시아계 정체성을 자각하고 저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죠. 혈통적으로 존재하는 정체성을 양육과 교육으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오래 걸렸어요. 예를 들면 저는 평생 고추와 마늘을 좋아해 왔습니다. 이게 혈통적인 이유라고 생각하면 편하죠.

팟캐스트: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이네요. 저는 절임 종류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사샤: 저도 그래요. 절임 종류를 아주 좋아하죠. 제가 어렸을 때, 그러니 70년대에 어머니가 칵테일에 첨가하고 하던 고급 피클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몰래 냉장고에 가서 피클 주스를 꺼내 마시고는 했어요.

팟캐스트: 재밌는 이야기이네요. 한국 정체성에 대해서 그렇게 깊은 연결성을 느끼지 못하셨군요. 많은 입양아처럼 아시아 문화 자체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자라셨나요? 

샤샤: 그때 저는 아시아계 문화에 대해서 부끄러워했어요. 하지만 그 감정이 부끄러움이라는 사실을 몰랐죠. 영국에서 아시아계 사람들은 낮게 평가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영국에는 중국 음식점이 있고, 조그마한 중국계 사회가 존재했어요. 홍콩과 영국과의 관계 때문이었죠. 하지만 중국계 영국인 중 성공한 사람의 예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평범한 이민자의 이야기예요. 돈이 없이 타국에 와서, 이민 온 나라의 언어를 잘 못 하면서 본국인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살아남으려고 했죠. 중국계 이민자로 이루어진 마을은 중국계 음식점과 피시 앤드 칩스를 만들면서 살았어요. 중국인들을 백인 사회는 낮잡아 봤습니다. 그런 하층민 취급받는 중국인과 똑같은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았죠. 

팟캐스트: 거기에 샤샤 씨의 억양을 들어보니. 정확히 어떤 억양인지는 모르지만, 고급 계층 억양이네요?

사샤: 네. 제가 가지고 자란 억양은 사람들이 BBC 영어라고 하는 억양을 가지고 자랐죠. 하지만 제가 미국서 꽤 오랫동안 살아서 억양이 섞인 느낌입니다. 

팟캐스트: 사람들이 들으면 뉴질랜드나 다른 곳에서 왔냐고 하겠군요?

사샤: 그런 반응을 받는 때도 있어요. 아 남아공 출신인가요? 이라고 묻죠. 특정 단어는 미국식으로 발음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어떤 단어는 미국식으로 발음하면 아주 이상하게 들리죠.

팟캐스트: 흥미롭네요. 어떤 단어가 그렇죠?

사샤: 전 여전히 토마토를 토마토라고 발음해요. 토메이토라고 발음하면 아주 이상하게 느껴지죠. 알루미늄이라고 해도 그냥 괜찮습니다. 영국에서는 알루미늄이라고 발음하거든요. 그걸 제외하고도 여러 속담이나, 은어나 속어의 문제도 있죠.

팟캐스트: 관련된 예를 좀 들어줄 수 있나요?

사샤: 제가 특정한 문장이나 숙어를 쓰면 사람들이 이해 못 하는 경우가 많죠. 며칠 전에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고 있었어요. 남성이 강아지를 보고 칭찬을 하니 제가 “Terror way”(충격적)인 아이라고 했죠. 영국에서는 그 단어가 활력이 넘친다는 뜻입니다. 강아지가 두 살이라 힘이 넘치거든요. 하지만 그분이 단어를 들으니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저를 봤죠. 아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구나. 이라고 생각하고 설명을 해야 했습니다. 그 단어 말고도 제가 사용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단어들이 있죠. 제 강아지를 Scamp(말썽꾸러기)라고 부르기도 해요. 영국에서는 그 단어는 말썽꾸러기를 뜻하는 말이지만, 미국에서는 Scamp가 뭔 뜻이죠? 이라고 묻습니다.

팟캐스트: 전혀 모르겠네요. 어떤 시점부터 bloke(멍청이)라는 단어도 안 쓰셨겠네요?

사샤: 전 런던 출신이 아니라 그 단어를 별로 쓰지 않아요. 런던-코크니에서 많이 쓰는 단어들이 있죠. 전 그 단어들을 알고 농담에는 사용합니다. 하지만 농담용이 아니라면 사용하지 않아요. 런던에는 인사를 하면 와치야! 이라고 답하는 풍습이 있죠. 전 그런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자라지 않았지만 런던 친구들과는 그런 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팟캐스트: 샤샤 씨의 억양이 상류층 느낌이 나는데, 억양을 통해서 외모로 맞아 들어가지 못하는 사회에서도 받아들여졌나요? 

사샤: 그러기도 했지만 편안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고급 억양을 통해서 사람들이 저를 선입견을 가지고 대했고 축복보다는 장벽에 더 가까웠죠. 어렸을 때는 왜 이런 문제가 있는지 몰랐는데, 고급 억양이 적대감을 불러일으켰어요. 소수인종으로 영국에 이민을 와서 빈곤한 최하층민으로 대우받는 일은 문제지만, 상류 계층 억양을 통해 영국인들 대부분보다 더 상류 계층으로 인식되는 일도 문제입니다.

팟캐스트: 출세주의자로 보였다는 이야기인가요?

사샤: 사람들이 저를 출세주의자로 인식했던 점은 문제가 아니었어요. 사람들이 부모님을 동반하지 않은 채로 저를 만났을 때 저를 부잣집 딸이라고 생각했죠. 제가 가진 억양이 가능할 정도로 고급 교육이 가능한 부유층 출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사람들에게 있어서 혼란스러운 존재였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그러한 억양을 배울 수 있는 교육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기숙학교 이야기인가요?

사샤: 기숙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제가 이런 억양을 가지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때였습니다. 저는 사립 초등학교에 다녔죠. 영국 계급 제도는 단순히 억양으로만 갈리지 않아요. 사람의 용어 사용으로도 계급이 갈리고 구분하게 됩니다. 

팟캐스트: 단순히 단어 선택만으로도 계급이 갈린다고요?

사샤: 네 그랬습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이 부유하셨나요?

샤샤: 중상류층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제 아버지가 개인 사업을 운영하셨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우리 집이 더 부유해 보였을 수도 있죠. 제 어머니는 매우 물질주의적 사람이라 큰 집과 비싼 차를 원했습니다. 

팟캐스트: 입양아로서 자라나면서 입양아라는 언급을 꺼렸나요? 

사샤: 제가 피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이 질문하면 결국 입양아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입양아가 가지는 문화적 무게에 대해서 전혀 몰랐어요. 관련 정보도 없었고, 어린아이들은 그런 문제를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아주 불편하게 느껴지는 질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입양되었다고 이야기를 하면 왜 입양되었는지 묻고는 했죠. 그럼 답으로 제가 들은 이야기를 해줄 수밖에 없었어요. 제 친부모님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한국어는 할 수 있는지 물어봤죠. 어렸을 때는 그런 질문이 고통스러웠고, 고통을 줄이는 법을 찾지 못했어요. 항상 불편하고, 부끄럽고,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팟캐스트: 기숙학교를 다니는 경험은 어땠나요? 마음에 들었나요?

샤샤: 끔찍했어요. 제가 다녔던 기숙학교는 매우 고전적인 학풍을 가진 학교였죠. 

팟캐스트: 계속해주세요.

사샤: 오래된 남학교였는데, 제가 다니기 얼마 전 여학생들도 받아 주기 시작했죠. 하지만 여성 비율이 20% 이하였고 여학생들은 이류 학생이었습니다. 학교 제도 자체가 오래된 영국 기숙학교 제도였어요. 집단 괴롭힘과 육체적 폭력이 난무했죠. 선생들은 아주 나이가 많았고 우리 모두 성으로 불렀습니다. 아주 나이 많은 선생이 우리 성을 보면서 “아! XXX 군인가! 자네 아버지를 내가 가르쳤네!”라고 했어요. 오래된 영국 인맥 주의가 드러났죠. 기숙학교는 권력과 학대에 기반을 둔 제도였어요. 영국 출신 작가인 조지 오웰이 이 문제에 대해서 잘 설명했다고 생각합니다. 파리 대왕이나 다름없는 제도였죠. 복잡한 권력과 조종 제도가 구축되어 있어서 아이들이 서로 물어뜯고 밀고하고 공격했기 때문에 안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어요. 선생과 학생들이 대립하는 구도가 아니라 개개인이 세계와 맞서 싸워야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팟캐스트: 기숙학교이니 그곳에서 거주하셨죠? 

사샤: 그랬죠.

팟캐스트: 그렇다면 괴롭힘을 피하기도 어려웠겠고, 정신적 지원을 받기도 어려웠겠군요?

샤샤: 정신적 지원을 받는 일 자체가 적었죠. 외동딸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상황에 부닥쳐 있어 아예 지원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팟캐스트: 연애는 어땠나요? 연애를 하실 수 있었나요? 아니면 다르다고 느껴지는 상황에서 연애에 접근할 수 있었나요? 

사샤: 제가 성장하고 나서는 이국적인 매력이 있다고 평가받았죠. 어렸을 때는 저 자신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몰랐어요. 아름다운 한국 여성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비교 상대의 부재 속에서 자라나면서 비교 상대가 없었으니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이상의 해석을 할 수 없었죠. 제가 매력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어요. 그 결과 남자아이들이 저를 매력적으로 생각하는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서구 여성의 매력이 최고라고 인식했죠. 굴곡이 있는 몸매, 긴 눈썹, 큰 눈, 웨이브 진 머리 등의 서구적 매력을 높이 평가했어요. 제 내부에 있는 아시아인의 아름다움이 어떨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팟캐스트: 화장을 해서 눈을 크게 보이려고 했나요?

사샤: 사실 아예 화장하지 않았어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몰랐죠. 어머니와 같이 화장이나 관련된 교류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화장을 가르쳐주거나, 브래지어를 사주거나 그런 일을 하지 않았어요. 그 관련 정보를 전혀 모른 채로 자랐죠. 제 얼굴이 다르게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서, 잡지에 나온 대로 화장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대안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몰랐죠. 그래서 화장을 하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70년대와 80년대에 자라나면서 아시아계 여성이나, 아시아인의 모습을 TV, 영화, 잡지에서 보신 적이 있나요?

사샤: 아주 적었죠. 잡지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어요. 영화나 텔레비전에서는 가끔 보긴 했지만, 매우 비하적인 모습으로 나왔습니다. 영화에서 찰리 챈(가공의 형사 캐릭터, 황인 분장을 한 백인이 연기했다.) 이 나오거나, 아시아계 여성을 혼혈 여성이 연기하고는 했죠. 그 혼혈 여성도 백인 혈통이 더 짙었어요. 

팟캐스트: 무슨 소리인지 알겠네요.

샤샤: 아시아계의 아름다움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 채로 자랐어요. 70년대 초반에 뉴욕의 친구를 방문했을 때 케이블 TV를 보게 됐죠. 그 시절의 영국은 TV 채널 자체가 적어서 아주 희귀한 경험이었습니다. 채널을 넘기다가 한국 채널을 보게 되었어요. 한국에서 수입해온 드라마들이 방영되고 있었고, 그 드라마로 처음 한국인들을 보게 되었죠. 한국인들이 저와 닮았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동시에 아시아계가 전부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런던으로 이주하셨는데, 그 이주로 어떤 깨달음을 얻으셨나요?

사샤: 런던으로의 이주는 대단했어요. 아주 큰 대도시이고, 세계적인 도시죠. 미국으로 치면 맨해튼과 같은 곳입니다. 제가 도착하자마자 더 편안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팟캐스트: 사람들이 샤샤 씨가 쓰는 고급 억양 때문에 대응하기 어려워하지는 않았나요?

사샤: 그랬지만, 큰 도시의 장점은 익명성이죠. 삶이 빠르게 흘러가고,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여요. 작은 마을이나 동네처럼 다른 사람들이 사람들의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큰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그러한 사실에 자유를 느꼈어요. 제가 삶을 살 수 있고 사람들이 저에게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죠. 

팟캐스트: 샤샤 씨의 런던 생활에 대해 깊이 들어가기 전에 샤샤 씨의 부모님에 관해서 묻고 싶네요. 부모님과 친밀하지 않은, 적어도 감정적으로 가깝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내신 것으로 보이는데, 부모님 두 분 다 외동아들과 외동딸이었던 점이 영향을 끼쳤다고 보시나요? 

사샤: 어렸을 적의 부모님과 저의 관계는 기이한 오류였죠. 부모님을 매우 사랑했고 제 세상의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부모님 두 분 다 망가진 사람들이었어요. 성인이 되기 전까지 어머니와 아주 가까운 관계였죠. 제 교우관계가 작았고, 거기에 어머니가 원하는 이야기를 돌려줄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제가 개인적인 정체성을 구축하기 시작하자 우리 관계가 붕괴했습니다. 제 관점이 어머니와 달랐죠.

팟캐스트: 어머니가 샤샤 씨에게 원했던 결과는 무엇이었죠?

사샤: 어머니는 제가 백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평범해지기를 원했죠. 대학에 가고 부유한 남성과 결혼한 다음 물질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서 어머니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부자인 남성과 결혼하기를 원했고, 결혼이 출세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셨죠. 어머니는 평범함에 대해서 이상한 기준을 가지고 계셨고 어머니도 그 기준에 맞아 들어가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제가 그 기준에 맞아 들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머니도 내면적으로 상당히 기묘한 분이셨거든요. 

팟캐스트: 현재 부모님과는 친밀한 관계인가요?

사샤: 제 양어머니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죠.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어요. 어머니가 어떤 분이셨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복잡한 관계였기 때문에 이해가 어려웠죠.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생각을 해보니 이해를 하고 동정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어머니와의 관계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느껴집니다. 죽음이 삶을 끝낼지는 몰라도 관계를 끝내지 않죠. 시간이 지날수록 양어머니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사랑이 다시 자라나는 느낌이 듭니다. 현재 어머니를 어렸을 때처럼 소중히 여기지만 그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중히 여기는 느낌이 들죠. 어머니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어요. 아주 좋은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인식할 수 있을지 몰랐거든요. 

사샤: 어머니와 저 사이에는 여러 문제가 있었고 깊은 분노를 품고 있었어요. 힘을 놓고 주도권 싸움과 분노가 계속되고 있었죠. 제가 뒤로 물러났습니다. 어머니와 싸우고 싶지 않고, 저 자신을 어머니에게 보여주면 싸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더 그렇게 싸울 이유가 없었죠. 어머니와 평화를 유지하고 일정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관계 자체를 끊고 싶지 않았지만,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저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어요. 저 자신을 드러내면 결국 싸움밖에 일어나지 않았죠. 

팟캐스트: 꽤 고통스러운 경험이었겠군요?

사샤: 네 고통스러웠죠. 입양아 경험 중 상당수가 고통스럽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떠셨나요?

사샤: 아버지는 일 중독자셨습니다. 아버지와 자주 교류를 하지 않았죠. 교류할 때는 꽤 잘 맞았어요. 아버지와 저는 서로 좋아했고, 아버지는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공통점이 많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죠. 제가 개인적 정체성을 구축하기 시작하자 그 관계가 흐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제 아버지는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어떤 면에는 아버지가 많이 열린 관점을 가지고 계셨지만, 어떤 면으로 보면 그 시대와 그 문화에 맞는 관점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다양한 선입견이 있었죠. 아버지가 아주 똑똑하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런 선입견을 품고 계셔서 답답했어요. 아버지의 지능이 아버지의 편견을 없애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보수적 정치관점이 그랬죠. 할머니는 빈민층이었고, 아버지는 노동자 집안에서 자라나셨습니다. 2차 세계대전 도중에 자라나서 여러 고생을 하셨어요. 아버지가 좋은 학업 성적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에 장학금으로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었죠. 하지만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노동자 계급 인식을 잊고 보수적인 관점을 취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관점 변화가 좋지 않다고 봤어요. 저는 사회주의적인 정치관을 가지고 있는데, 노동자 계급 출신 아버지가 사회주의자적 관점을 공유하지 않아서 실망하고는 했습니다. 아버지가 가진 편견의 예는 아버지가 가진 흑인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어요. 제가 흑인 남성을 사귀었으면 거부하셨겠죠. 아버지가 한국인들을 존중하고 편견이 없다고 이야기하셨지만, 한국인과 사귀었다고 해도 거부하셨을 겁니다.

팟캐스트: 말과 행동이 다르셨군요?

사샤: 네. 무의식적으로 그러셨습니다.

팟캐스트: 제 부모님과 비슷한 느낌이 드네요. 그런 행동을 보면 부모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궁금하게 되죠.

사샤: 네. 부모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하게 되죠. 모든 아이가 가진 걱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입양아들은 우리가 처한 상황 때문에 그 문제에 더 신경을 쓰게 되죠. 부모님이 저에게 기대하는 요구를 달성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부모님이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부모님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연극을 하게 되었어요. 부모님이 그 모습을 원했기 때문에 그 모습을 연기했죠. 청소년기에는 그러한 일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저 자신을 자각하고 정체성을 구축하게 되었는데 부모님은 그러한 면을 받아들일 수 없었죠.

팟캐스트: 입양아들은 형태를 바꾸는 데 익숙해지고 환경에 맞추는 데 익숙해지죠. 

사샤: 네. 그런 재능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생각해보면 축복이지만 저주라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에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지 신경을 써야 해요. 제가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로 그런 연기를 하게 되기 때문에 순간 제가 뭘 하고 있는지 놀라게 됩니다.

팟캐스트: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이 된다는 뜻이죠? 

사샤: 네. 사람들 비위를 맞추려고 하게 되죠. 제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으면 그런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모르는 사람을 단체로 만나거나, 약간 불안하다는 느낌이 들면 비위 맞추는 샤샤 라이더 연극을 하게 되죠. 제가 비위를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 아주 기분 나쁩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 자신을 엄격하게 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오래된 버릇은 없애기 어렵고, 요즘은 제가 비위를 맞춘다는 사실을 알죠. 비위 맞추는 일을 시작할지도 모르지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멈출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 런던에서 다른 한국계 입양아들을 만난 적이 있나요?

사샤: 아뇨. 런던에서 다른 한국계 입양아들을 만난 적이 없어요. 제가 온라인으로 찾아봤을 때 한국 전쟁 이후로 제가 영국으로 입양된 72명의 입양아 중 1명이었습니다.

팟캐스트: 놀랍네요. 아주 적은 숫자의 한국계 입양아가 영국으로 입양됐군요? 왜 그런지 알아보셨나요?

사샤: 왜 영국에서 한국 입양아를 아주 적게 받아들였는지 몰라요. 하지만 제 부모님의 경우에는 달랐죠. 제 부모님이 한국에서 거주하면서 일하고 계실 때 입양하셨습니다. 제가 지내고 있던 고아원은 유네스코에서 운영하고 있던 고아원이었고, 아버지는 유엔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쉽게 입양할 수 있었죠.

팟캐스트: 영국 시민권 문제는 어떻게 됐죠? 영국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나요?

사샤: 3살 반 때 우리 가족이 한국에서 영국으로 돌아왔죠. 그때 영국 시민권을 받았습니다. 관련 절차가 어땠는지 모르지만, 어머니가 관련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했던 방식이 저를 매우 불안하게 했어요. 입양아들이 정통성에 대해서 가지는 문제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죠. 양어머니가 영국 국적을 받을 수 있도록 기적을 만들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결과 제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영국 국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제가 백인이었다면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겠죠.

팟캐스트: 국적이 박탈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하셨나요?

사샤: 국적이나 여권이 박탈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무서운 분위기가 이야기에 배여 있었습니다. 거절을 당하거나 버림받을 수 있다는 느낌이 항상 들었거든요. 

팟캐스트: 진짜 영국인이 아니라는 식이었나요?

사샤: 네. 진짜 영국인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죠. 피노키오가 진짜 소년이 되고 싶어서 했던 이야기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이 입양해줬으니 고마워해야 하고, 자비에 고마워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나요?

사샤: 제가 운이 좋다고 교육받았죠. 영국은 한국보다 낫고, 영국인들이 한국인보다 낫다고 교육받았어요. 한국에서 살기보다 영국에서 살 수 있으니 운이 좋고, 한국이 나쁘다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백인 부모에게 입양되어서 나쁜 운명으로부터 구원받았고, 좋은 운명을 선물 받았다는 인식을 하게 됐죠.

팟캐스트: 그러한 인식에 대해서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샤: 지금 되돌아보면 제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점이 웃기죠. 전 동북아시아를 고대 세계라고 생각했고, 유럽을 구세계, 미국을 신세계라고 인식했어요. 영국의 역사와 식민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문제에 대한 무지에 대해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제국주의와 식민지가 고통과 문제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았죠. 동시에 제 일부는 당신들은 후진국 출신이고 나는 오래된 문명국 출신이라고 인식했습니다. 영국에는 오래된 역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영국 최초의 유대인 수상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30대에 수상이 되었는데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백인 위주의 영국 의회에서 큰 반감을 샀죠. 그가 취임 연설을 할 때 그 반감을 언급하기로 했습니다. “당신들 조상들이 진흙 속에서 뒹굴 때 내 조상들은 솔로몬의 신전을 지었습니다.” 그게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이죠. 제 문화적 유산은 오래되고 대단한 유산이고, 현재 영국인들이 그걸 이해하지 못하니 웃긴 일입니다. 그런 의견은 저에게 있어서 아무런 무게도 없죠. 어떤 사실에 기반을 둬 있지 않고 단순한 무지니까요.

팟캐스트: 30대에 런던으로 이주하셨나요?

사샤: 16살에 가출해서 런던으로 이주했죠. 

팟캐스트: 가출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나요?

사샤: 네. 그렇게 못 견딜 정도로 힘들었어요. 

팟캐스트: 어떻게 런던까지 가셨죠? 런던은 비정하고 차가운 도시인데요.

사샤: 지금 되돌아보면 제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젊었을 때는 무모하기 마련이죠. 

팟캐스트: 자기 스스로가 무적으로 느껴지는 때죠.

사샤: 네. 그렇습니다. 뭐가 됐든 제가 처해 있는 상황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서 뛰쳐나왔죠. 그리고 런던으로 갔어요.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큰 도시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아주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때는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성공하지 못하면 죽는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어떻게 런던에서 지내셨죠? 임시 숙소에서 지내셨나요? 친구라도 있었나요?

사샤: 런던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하지만 북 런던에 자식이 독립해서 방을 세놓는다는 광고를 봤어요. 아주 싼 방이었고 주 단위로 방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저금해둔 돈으로 기차표를 샀고, 일주일 치 요금을 냈죠. 

팟캐스트: 그래서 일주일간 지낼 곳이 생겼으니 일을 빨리 찾아야 했겠군요?

사샤: 제가 런던에서 얻은 첫 직장은 마을 중심에 있는 가게였죠. 약간 더 고급스러운 옷을 파는 양장점이었습니다. 제 나이를 속이고 취업했어요. 그때 영국에서는 주민등록증이 필요 없었죠. 그래서 주인에게 19살이라고 말했고 주인이 그걸 믿었어요. 같은 브랜드의 옷을 입고 들어가서 브랜드의 옷을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취직이 됐죠. 제가 뭘 하는지 전혀 몰랐지만, 판매일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억양이 취직에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시나요?

사샤: 네 물론이죠. 가게 손님들과 똑같은 억양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제가 고급 억양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취직하지 못했겠죠.

팟캐스트: 흥미롭네요

사샤: 제가 이방인이 아니라 그들의 일부로 인식되는 계기였습니다. 이방인은 적이지만, 그들은 안전하고 백인 중산층끼리 모여 있으면 안전하다는 인식이었죠. 제 억양이 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문이었어요. 영국에서 전화로 저와 이야기를 하면 백인 중산층 여성이 들립니다. 백인 중산층은 제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자 아주 운이 좋았다는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주었죠. 하지만 제가 인도계를 비롯한 이민자 사회와 교류하기 시작한 뒤에 제가 입양되었고, 백인 부모님과 영국에서 자라났다는 이야기를 하자, 이민자 대부분이 저에게 연민을 보였어요.

팟캐스트: 연민을 보였군요?

샤샤: 제가 무언가를 잃었으니까요. 이민자들처럼 무언가를 잃었죠. 물론 그 사람들이 어머니를 잃지는 않았지만, 고향을 떠나서 새로운 국가와 문화에 적응하려고 하고,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만난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반응을 받은 일이 아주 기이했죠. 

팟캐스트: 다른 유색인종 사회와 교류를 했던 경험은 어땠죠?

사샤: 약간 압도되는 기분이 들었어요. 저 자신의 슬픔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직접 마주하니 무섭기도 하고 제 감정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런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바로 연민을 표시하니 놀랐죠. 항상 강한 모습을 보이는 데 익숙했지만, 연민을 받는 일은 익숙하지 않았어요. 제 고통을 인식해야 했고, 인식 자체가 힘들었기 때문에 고통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 연민이 친절함이라는 사실도 알았고 이민자들과 백인들의 인식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알았지만 무서웠기 때문에 깊게 들어가지 않았죠.

팟캐스트: 이민자들과 다른 런던의 사람들이 샤샤 씨에게 친밀감을 느꼈지만, 샤샤 씨가 감당하기 힘들어서 감정적 연대를 거부했군요?

사샤: 사람들이 저에게 친밀감을 느끼기보다는 제가 제 나라와 문화에게서 괴리되었다는 사실에 동정심을 느꼈죠.

팟캐스트: 흠.

사샤: 제 교육, 양육, 삶의 방식이 제가 백인 여성처럼 행동하게 했죠. 사람들이 저의 상황에 있어서 동정심을 표했지만 동시에 제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가 아시아계 외모를 하고 있지만 제 행동은 백인이나 다름없었어요. 특히 백인의 특권을 사용하는 모습이 백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팟캐스트: 미국에서 산 지 얼마나 되셨죠?

사샤: 제가 28살 때 미국으로 이주했죠. 하지만 중간에 미국에서 상당 기간 동안 나가 있었어요. 지금이 미국에서 거주하는 두 번째 경험입니다. 

팟캐스트: 현재 미국이 인종, 사회 경제, 정치로 분열되어 있는데 샤샤 씨가 이 논쟁에서 어디에 맞는다고 생각하시죠?

사샤: 제가 이 논쟁에서 가장 맞는다고 느껴지는 곳은 전통문화입니다. 전 세계의 전통문화를 들여다보면, 여러 시대에 걸쳐서 같은 이야기를 해왔죠. 지혜를 이야기해왔어요. 우리 머릿속에 들어있는 가짜 생각들에 영향을 너무 심하게 받아서, 마음이 알고 있는 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미국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가 발전, 기술, 자본주의의 이름으로 마음이 절대로 지지해주지 않을 결정을 내렸죠.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사람, 자연,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사회가 거대한 기계장치로 변해서 모든 것을 잡아먹게 되죠. 우리는 이 사실을 아주 오랫동안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그 사실을 무시해왔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통에 있어서 일어나는 문제와 분쟁은 소통능력의 붕괴 때문이죠. 인간 모두가 가족이나 다름없고, 결국 큰 차이가 없어요. 우리 모두 과로, 공포,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공포와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희망과 공포가 있고, 그 감정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죠. 사람은 결국 전부 비슷해요.

팟캐스트: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에 친밀감을 느끼나요?

사샤: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 자체와 교류가 없어요. 뉴멕시코에는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가 얼마 없죠. 산타페에는 한인 교회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전 기독교인도 아니고, 제가 주변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미국인 정체성을 더 강조한다고 하더군요. 다른 나라에서 이민 오면 미국인이 된다고 하고, 그게 미국의 사상이죠. 유럽과 영국에서는 영국에서 태어나도 절대로 영국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겁니다. 영국인들이 저를 영국인으로 받아들이려면 여러 세대가 지나야 한다고 봐요. 반면에 미국에서는 미국에 와서 살고 있다면 미국인이라고 받아들여지죠. 그런 인식을 받아들이지는 못했어요. 미국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도 미국인이라는 생각이라는 들지 않습니다. 지금 미국 문화와 그 뜻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자기 자신을 영국인으로 인식하시나요, 좀 더 국제적인 사람으로 인식하시나요?

사샤: 복잡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요. 전 제가 영국인이라고 생각하죠. 영국에서 자란 영국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시아계라는 느낌도 들어요. 한국인 자체의 정체성을 가졌는지는 의문이 들죠. 한국 문화 자체를 많이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은 희미하지만, 아시아계의 정체성을 확실히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유럽인의 정체성도 가지고 있어요. 파리에서도 어느 정도 거주했고, 많은 유럽인 친구들이 있죠.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애정이 있고 콜롬비아에서도 거주했습니다. 히스패닉 정체성도 가지고 있어요. 특이한 점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저는 성격이 좋은 편이지만 프랑스어를 사용할 때는 성격이 상당히 더럽죠. 결국, 저에게 있어서 정체성은 인간의 정체성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에게서 분리된 정체성과 다시 연결되고 싶어요. 제 아시아 정체성과 다시 연결망을 구축하는 일이 중요하죠. 아시아인 정체성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입양과 관련된 감정을 정리하는 일도 중요했어요. 삶에 있어서 그 문제도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서 이 팟캐스트를 듣고 한국 입양아 정체성을 자각한 기분이 들어요. 이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러한 정보를 전혀 몰랐습니다.

팟캐스트: 이미 물어봤지만, 입양아 이야기에서 편안함과 친밀감을 느끼시는 이유가 무엇이죠?

사샤: 제가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해줬죠. 백인 위주 환경에서 자라난 입양아들은 극단적인 소외의 경험을 겪는 경우가 많아요. 어릴 때 왜 그런 소외를 겪고,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입양아들이 제가 겪었던 문제를 똑같이 겪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제 경험이 평범해지는 느낌이 들죠. 예를 들면 과도한 노력, 완벽주의자, 사회적인 편견 아래에서 양육, 아시아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 페티쉬화, 아시아 남성의 남성성 박탈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백인 위주 사회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듣고 자기 자신을 다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좋았죠. 이러한 이야기들이 이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었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들었습니다. 미네소타에서 온 사람이 70년대 영국에서 성장한 사람과도 똑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고, 같은 집단에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어요. 우리가 서로 몰랐지만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고, 제가 혼자가 아니고, 이상하거나, 괴짜가 아니라 평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죠. 저도 이상한 상황에 적응해야 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팟캐스트: 샤샤 씨, 입양아들이 입양아의 경험을 안개 속을 헤쳐 나오는 비유와 옷장 안에서 나온다는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고는 하죠. 샤샤 씨는 그러한 설명에 동감하시는 편인가요? 

사샤: 네 그런 설명에 동감하는 편이죠. 많은 사람이 제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백인 부모님을 밑에서 양육되었고, 백인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입양아 정체성을 탐구하지 못했죠. 제가 그 정체성을 피하고 있었어요. 고통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그 정체성을 탐구하려고 시작한 뒤로부터 여러 가지를 배웠고, 저 신을 인식하는 관점을 뒤바꿨습니다. 옷장 밖으로 나오는 비유에 동감하는 편이죠. 적어도 내부적인 단계에서는 그래요. 저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단계를 거쳤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숨긴 복잡한 감정을 처리하고, 들이고 정리할 수 있어야 했어요. 여러 요소를 압축시켜 놓고 무시하기보다는 치료와 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죠. 그러한 일 자체가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팟캐스트: 자기 자신을 좀 더 사랑하고 인정하게 되셨군요?

사샤: 네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감정을 억눌러 두면, 그 감정이 시간 속에 멈춰 있게 되죠. 어렸을 때의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고, 처리하지 않아서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 그 감정을 처리하게 되었어요. 감정을 처리하기 시작하자, 제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문제나, 부끄러워했던 문제가 제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죠. 많은 경우에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길을 열어준 셈입니다. 저에게는 잘못이 없었고, 이상한 상황에 대한 평범한 대응이었죠.

팟캐스트: 자아 찾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인간관계? 자아 찾기? 아니면 다른 문제라도 생겼나요?

사샤: 특정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흔한 변화를 겪었죠. 고통이 너무 심해서 더 기억을 억누르고 무시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야 했어요. 더 무시할 수 없었죠.

팟캐스트: 폭발할 기분이 들었나요?

사샤: 선택지가 없다는 기분이 들었죠. 저에게 선택지가 주어졌다면 이 문제를 바로 직시하지 않았을 겁니다. 결국,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더 참을 수 없었고 제 문제를 마주해야 했죠. 문제 해결이 무척이나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서 문제를 최대한 회피했습니다. 문제를 마주하고 나니 그 문제를 무시할 수 없었어요. 더 되돌아갈 수 없었죠.

팟캐스트: 무슨 일이 일어났죠? 일을 더 할 수 없었나요? 친구들과 교류를 할 수 없었나요?

사샤: 어떤 사람들은 업보라고 할지도 모르는 문제들이 동시에 일어났죠. 연애 관계가 실패했고, 얼마 있지 않아서 양어머니가 저에게 연락해서 말기 암 진단을 받았고, 6달밖에 못 산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영국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과 같이 지내면서 어머니를 병간호했습니다. 사실 어머니의 중병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겠죠.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리 셋 다 외동딸 외동아들이었고, 우리를 도와줄 친척이 없었어요. 부모님이 저에게 연락할 정도였다면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죠. 부모님을 돕고 싶었어요. 희생해야 한다는 느낌도 없었고, 바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팟캐스트: 그렇게 바로 부모님을 돕겠다는 결정을 내려서 놀랐나요?

사샤: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에는 놀라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애연가에 알코올 중독자셨습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이 도와 달라고 한 사실이 놀라웠나요? 그리고 샤샤 씨가 돌아가기로 한 일 자체가 놀라웠나요?

사샤: 어머니가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으셨어요.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손을 뻗지는 않았죠. 도와줄 수 있냐고 묻지 않았어요. 항상 어머니에게 있어서 존경했던 면은 어머니의 힘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단점 중 하나는 감정적인 연결이 부족하다는 점이었어요. 어머니가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힘들었겠죠. 어머니의 특별한 방식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렇다고 진짜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그걸 듣고 가고 싶어지셨군요?

사샤: 네. 그냥 바로 비행기에 타고 집에 돌아갔죠. 다른 선택을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딱히 놀라운 선택도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죠. 미친 사람이긴 절 키워준 사람이었으니까요. 

팟캐스트: 어머니를 사랑하셨군요?

사샤: 어머니를 사랑했죠. 어머니가 저에게 연락해서 기뻤습니다. 어머니가 말기 암 진단을 받으셨을 때는 이미 수명이 몇들 밖에 남아 있지 않았어요.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운이 좋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어머니와 연락을 하고 계셨나요?

사샤: 어머니와 계속 연락을 하고 있긴 했지만, 어머니와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어요. 어머니에게 저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에 교류 자체는 가벼웠습니다.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이야기하긴 했지만, 매우 표면적인 대화였죠. 그렇게 즐겁지 않은 교류였어요. 

팟캐스트: 어머니와 샤샤 씨 둘 다 어떤 결론에 도달하셨군요?

사샤: 네. 우리 둘 다 휴전을 선언했고, 무언의 합의에 도달했죠. 제가 어머니를 화나게 하지 않으면, 어머니도 저에게 공격적으로 나오지 않겠다고 했어요. 우리가 그러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긴 했지만, 그 결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깊이 사랑하지 않아도 제가 어머니를 깊이 사랑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이 동등하게 부여될 이유는 없으니 괜찮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어머니와 같이 보낸 마지막 시간은 어떠셨죠?

사샤: 끔찍했죠. 어머니가 죽어가고 계셨기 때문에 마지막 결정권을 가지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어요. 어머니에게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나쁘게 대했지만, 어머니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었어요. 암을 앓아서 죽는다는 궁극의 패를 가지고 있었죠. 

팟캐스트: 어머니와 입양에 대한 마지막 대화를 나누거나, 샤샤 씨가 느낀 고통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나요?

사샤: 아뇨. 전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나르시시스트였어요. 모든 문제가 항상 어머니 중심으로 돌아갔죠. 어머니가 암에 걸리고 난 뒤에는 모든 일을 어머니 중심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 문제에 대해서 어머니와 이야기할 가능성이 없었죠. 어머니를 깊게 사랑하긴 했지만, 어머니는 저를 깊게 사랑하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저에게 관심이 없었고 기대만 하셨습니다. 

팟캐스트: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자라나지 않았군요?

사샤: 아뇨. 금발이 되지도 못했고 부잣집 남자랑도 결혼하지 못했으니까요. 신데렐라가 되지 못했습니다.

팟캐스트: 어머니가 짜놓은 계획을 따라가지 못한 셈이군요?

사샤: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를 미워할 수 없었죠. 어머니도 그러한 가르침을 받고 자라셨으니까요. 어머니의 방식대로 제가 행복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잘못된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셔서 슬프긴 했죠. 

팟캐스트: 그렇게 말씀하시니 확실히 감명 깊네요. 우리 친부모나 친척들에 대해서 모든 입양아가 겪는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사샤: 그렇죠. 물론 모든 입양이 복잡하고, 입양아의 이야기는 전부 특별합니다. 다인종 간 입양은 더더욱 복잡하죠. 너무 다양한 이야기가 엮여 있어요. 현대 시대에는 입양아든 아니든 좋은 부모가 되는 방법에 대해서 모두가 각자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문제도 있죠. 

팟캐스트: 부모님에 대해서 아주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니 대단하네요. 

사샤: 지금 와서 어머니에 대해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운이 좋다고 생각하죠. 전 감정을 처리하고 받아들였을 때 부모님에게 가진 애정이 전부 사라질까 봐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죠. 문제는 시작할 때 그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어요. 가지고 있던 많은 환상을 놓아줘야 했습니다. 그 일은 항상 어렵죠. 놔줘야 했던 환상 중 하나는 어머니가 저를 사랑했다는 환상이었죠. 어머니는 절 사랑하지 않았어요. 어머니의 방식대로 저를 사랑했지만, 진짜 사랑은 아니었죠. 여전히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유지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일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죠.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보존하고 유지할 수 있을지 몰랐어요.

팟캐스트: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슬픔도 느끼셨겠지만, 많은 입양아는 그 경험이 깨달음을 얻게 해주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샤샤 씨는 어떠셨나요?

사샤: 아버지는 어머니가 암에 걸리기 전에 뇌졸중에 걸리셔서 좌뇌 기능이 날아가셨죠. 아버지는 아직도 살아 계시지만, 제 아버지였던 사람은 아닙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셨어요. 그래서 실질적으로 생각해보면 제 양부모 두 분 다 잃었다고 생각하죠. 저는 결혼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어요. 다시 고아가 된 셈입니다. 전 현재 48세이니 딱히 문제는 되지 않아요.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었죠. 어머니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제 면모가 어머니에게 상처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한, 제 안에 어머니를 화나서 하거나, 슬프게 하거나,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아이가 있는 기분이었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주 자유로워진 기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지만, 좌뇌가 마비되어서 저를 나쁘게 판단하실 수 없죠. 아주 낡게 들리고 뉴에이지풍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모두가 내부의 아이에 관해서 이야기해요. 저도 내부의 아이를 건강한 방법으로 키운다는 느낌이 듭니다. 양부모님에게 받을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을 내부의 어린이에게 제공할 수 있죠. 아직도 해결해야 하는 일이 많지만 제가 직접 해결할 수 있어요. 아주 긍정적인 자율성이 부여되었습니다. 누구도 제 삶을 조정할 수 없죠. 저만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내부에 사랑, 치료, 이해가 필요한 부분을 직접 마주 보고 해결할 수 있어요. 그런 점이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그 치료 방법이 궁금하네요. 샤샤 씨 자신을 위해서 뭘 하고 계시죠? 

사샤: 아주 많은 일을 하고 있죠. 현재 2살 먹은 강아지와 같이 살고 있어요. 살면서 항상 개를 원했지만, 부모님은 결국 개를 입양하지 않았습니다. 어른이 되고 난 뒤에는 개를 키울 장소가 없었죠. 아버지를 돌보던 와중에 아버지를 돌보는 일이 끝나고, 다시 혼자 살게 되면 반드시 개를 입양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강아지를 입양하고 난 뒤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원하던 욕망을 충족할 수 있었어요. 제 안의 강아지를 원했던 소녀에게 강아지를 줄 수 있었죠. 

팟캐스트: 강아지 이름이 어떻게 되죠?

사샤: 제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강아지 이름은 부(Boo)에요. 6kg이 나가고 백색 털을 가진 치와와와 퍼그 잡종이에요. 어머니와 같이 개 농장에서 구출된 강아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와 부 둘 다 힘든 시작을 겪은 셈이죠. 제 삶에서 아주 소중한 존재입니다. 어머니의 역할을 하게 된 셈이죠. 

팟캐스트: 무슨 소리인지 알겠네요.

사샤: 어린아이의 어머니가 되려는 욕구는 없었지만, 항상 강아지를 원했어요. 

팟캐스트: 강아지는 조건 없는 사랑을 주기도 하니까요.

사샤: 그렇죠. 항상 만나면 기뻐해 주고 좋은 기분 상태를 유지해주는 훌륭한 상대이죠. 

팟캐스트: 흠

사샤: 거기에 나쁜 말도 하지 않죠.

팟캐스트: 딱히 다른 모습을 취할 필요도 없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면 되니까요.

사샤: 그렇죠.

팟캐스트: 한국에 돌아가신 적이 있나요?

사샤: 아직 한국에 돌아간 적은 없어요. 제 마음속 일부가 한국을 체험해 보려고 하고 있죠. 한국 문화보다는 한국의 땅 그 자체를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세계 곳곳의 땅과 교류를 하면서 여러 감명 깊은 경험을 했거든요. 어떤 곳에 가면 기분 좋은 경험을 하기도 했고, 반대로 다른 곳에서는 땅이 저를 밀어내는 느낌이었죠. 한국 땅과 그 환경에 제 몸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상황이 맞아 들면, 제가 한국에 가겠다고 마음먹고 실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한국에 가게 될 상황이 있다면, 한국에 가게 되겠죠.

팟캐스트: 샤샤 씨의 입양 서류를 확인하거나, 샤샤 씨의 기원을 조사해볼 생각은 없으셨나요? 

사샤: 양부모님이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라서 절 돌볼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저에게 해줬죠. 하지만 친아버지가 진짜 가난한 농부였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제 친어머니가 진짜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어요. 양어머니가 여러 가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친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알았죠. 아주 오래전부터 본능적으로 친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고, 친족을 찾아보려고 노력하지 않았어요. 20대에 인도네시아에서 사람들과 여행을 했는데 사람 중 1명이 이 섬에 아주 유명한 무당이 있는데 만나러 가보지 않겠냐고 말을 꺼냈죠.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지만, 한번 해보자고 하고 갔습니다. 시골에 있는 무당의 거처까지 갔어요. 다른 사람들은 저에게 어떤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저는 아무런 기대도 없이 갔죠. 무당의 반응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를 보더니 통역가를 통해서 당신 친어머니는 이미 죽었지만, 친아버지는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친아버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죠. 모두가 아버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상한 소리이긴 하지만, 1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친아버지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았죠. 하지만 무당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친아버지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여자라서 그럴지도 모르고, 특이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친아버지를 만나는 일은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죠. 하지만 만약에 친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면 아주 대단한 경험일 겁니다. 

팟캐스트: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탐구해 보신 적 있나요?

사샤: 개인적으로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죠. 우리가 어머니 안에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씨앗을 뿌릴지는 몰라도, 탄생은 어머니 내부에서 일어나기 마련이죠. 거기에 여성이기 때문에 다인종 간 입양아로서 저 자신을 볼 수 있는 상대를 원했어요. 이해될지는 모르지만 그런 상대를 찾은 곳은 여성적인 장소였습니다. 어렸을 때 자라면서 좋은 남자를 자주 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남자에 대해서 그렇게 좋은 관점을 가지지 않고 자랐다고 생각합니다. 약간 기이하게 들릴 수도 있는 소리지만, 본능적으로 친아버지가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입양 서류를 직접 확인하셨나요? 관련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나요?

사샤: 제 입양 서류 자체가 문제가 많았죠. 제가 지내고 있던 고아원은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는 한국 수녀들이 운영하고 있었어요. 제가 공식적으로 입양된 시기는 영국에서 3살 반 때 공식적으로 부모님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영국 국적을 받았죠. 그래서 관련 정보가 거의 없어요. 양어머니가 저에게 말해주시길 제 생일을 어머니가 선택해야 했다고 합니다. 고아원에서 제 생일을 몰랐고, 가난한 농부 이야기를 해줬다고 했죠. 입양 절차와 관련해서 항상 비밀과 불편함이 공존하고 있었어요. 30대 후반에 겨우 입양 서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제 출생지가 그냥 경기라고 쓰여 있었죠. 제가 이해하기로 경기는 서울 주변 지역이에요

팟캐스트: 그렇죠.

사샤: 제 예측으로는 영국 국적을 얻기 위해서 입양 서류에 제 출생지를 적어야 했는데, 부모님이 출생지를 몰라서 한국 서류에서 지역을 하나 뽑아와서 적어냈다고 봐요. 도시나 마을의 이름을 적었다고 생각하셨겠죠. 하지만 사실 도의 이름이었습니다. 거기에 고아원이 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죠. 고아원 출신 다른 입양아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관련 정보를 얻었어요. 마지막 정보는 양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저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팟캐스트: 그 정보는 어떻게 알아내셨죠?

사샤: 꿈을 통해서 알아냈습니다. 저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다양한 꿈을 꿔요. 사실에 기반을 둬 있는 꿈이라는 사실을 알았죠. 양아버지에게 정보원을 숨기고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때 아버지는 대화 자체는 힘들었지만, 여전히 지성을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단어를 말할 수는 있었지만,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죠. 같이 아침을 먹으면서 입양 관련 조사를 했는데 저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울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버지가 큰 죄책감을 느끼고 살아오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죠. 아버지가 비밀을 숨겨 오셨고 그 사실을 밝혀서 안심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정보를 많이 알고 계셨는지는 몰라요. 정보 자체가 적었다고 생각하고 뇌졸중이 오셨기 때문에 관련 정보를 이야기해주실 수 없었죠. 제가 미치지 않았고, 감정, 꿈, 관련 정보가 사실을 알아서 기뻤습니다.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저 자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팟캐스트: 꿈에서 쌍둥이 형제를 만나거나 그러셨나요?

사샤: 꿈속 삶에서는 시간이 연속적으로 흘러가지 않아요. 형제를 만나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죠. 제가 꿈에서 본 광경은 아기일 때 겪은 이별과 관련된 고통이었습니다. 형제를 기억했던 어린 시절에 느꼈던 감정도 섞여 있었어요. 제 꿈속에서 6살의 저는 형제를 기억하죠. 특정 나이를 넘어서자 살아남기 위해서 형제 관련 정보를 잊어버려야 했습니다. 꿈속의 삶은 그러한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이었어요. 꿈을 통해서 미래를 예지하는 일은 없었고,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일도 드뭅니다. 삶 자체가 무척이나 흥미롭기 마련이죠. 그래서 무당이나, 점을 일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던 이유도 거기에 있어요. 전 미래를 알고 싶지 않고, 사람들이 특정한 생각을 주입하는 일도 원치 않습니다. 세상사는 운명대로 흘러가기 마련이고, 다양한 방향으로 미래를 준비할 수 있지만, 결과를 확정할 수는 없죠. 결과를 확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미래는 불확정해도 괜찮아요. 아기일 때 형제와 떨어진 일이 큰 고통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그 기억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없었죠. 북미 원주민들이 영혼을 되찾는 일이라고 부르는 행동을 통해 기억과 잃어버린 부분을 찾아가면서 가장 최초의 관계를 맺은 상대와 더 가까워지는 기분입니다. 그러한 관계가 물리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모르죠. 현실에서 형제와 다시 만날지는 몰라요. 제가 아는 일은 육체와 영혼에 그 관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관계와는 계속 교류할 수 있죠. 

팟캐스트: 그래서 꿈과 관련된 일을 직업으로 삼으셨나요?

사샤: 네. 전 꿈 분석가입니다.

팟캐스트: 꿈 분석가라는 직업은 뭘 하는 직업이죠?

사샤: 현대 사회에서 꿈 분석가라고 하면 칼 융을 많이 생각하죠. 현대 서구 문명에서는 확실히 칼 융이 꿈 분석을 시작했어요. 융이 꿈 분석을 통해서 치료하는 방식을 구축했습니다. 하지만 꿈 분석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인류의 전통이에요. 전 세계의 사람들과 문화가 시대에 걸쳐서 꿈을 통해서 가르침을 얻으려고 했죠. 꿈 분석가로서 하는 일은 꿈을 번역하는 일입니다. 꿈의 언어는 집단적이지만 동시에 개인적이에요. 꿈에 자주 나타나는 요소는 사람들의 역사에 있어서 계속 나타났던 요소들이죠. 우리가 나무에서 내려왔을 때부터 쌓여온 정보입니다. 거기에 개인적인 서사도 존재해요. 개인적으로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서 겪은 일이 꿈에 반영되죠. 꿈 분석가로서 하는 일은 꿈을 번역하고 안내하는 일입니다. 꿈에는 시간, 문화, 장소를 뛰어넘는 인간으로의 본질이 존재해요. 꿈을 탐험할 때 꿈의 언어를 번역해주고 안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죠. 꿈을 혼자서 탐험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팟캐스트: 사람들과 같이 꿈에 대해 상담을 하시나요?

사샤: 네. 사람들과 꿈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꿈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죠. 나중에 시간이 가면서 개개인이 개인의 꿈 지식과 사회가 모아온 꿈의 지식을 배우게 됩니다. 가면 갈수록 제 역할이 줄어들어요. 궁극적으로는 꿈과 관련된 도움을 줄 필요가 없어져야 하죠. 다른 면으로 보면 꿈을 탐구하는 동료가 되어주는 셈입니다. 꿈에 들어가면 항상 혼자이죠. 현실로 돌아오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 어려운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 있고, 관련해서 소외될 수가 있어요. 꿈에서 아주 힘든 경험을 했을 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으니 자기 혼자서 고생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단순히 사람을 가르치는 일만이 아니라 꿈과 관련해서 교류를 나누는 일이기도 하죠. 그런 꿈속의 경험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되어주고, 그 사람을 이끌어주는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외로운 경험이 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어요.

팟캐스트: 사람들에게 그런 꿈 관련 교육을 자주 해줘야 하나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인가요?

사샤: 사람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가르쳐 줘야 하고 두 가지 부류로 나뉘어요. 삶에 있어서 특정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죠. 사람들은 꿈이 특정한 문제에 대해서 조언을 해주려고 한다고 생각하지만, 무슨 조언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저와 1번만 이야기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그 사람들에게는 꿈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있지만, 여러분이 뭘 해야 하는지는 모른다고 이야기를 해주고 끝나는 경우가 있죠. 다른 사람들은 꿈의 삶이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꿈을 정기적으로 꾸고, 꿈과 관련된 이야기를 정기적으로 나눕니다.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꿈속에서의 경험은 현실에서의 경험만큼 중요하죠. 이 사람들과 꿈속 여행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일은 무척이나 쉬워요. 물론 제가 그 사람들에게 몇 가지 중요한 점을 가르쳐줘야 하지만, 동시에 이 사람들은 꿈에 이미 익숙하므로 적응도 빠릅니다. 꿈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지만,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팟캐스트: 이게 일종의 치료 요법인가요? 이런 활동을 하게 된 배경이 있나요?

사샤: 융 계통 심리학을 런던에서 배웠습니다. 활동 방식이 평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평범한 일에는 관심이 없죠. 일주일마다 제 사무실에 와서 상담해야 하지 않습니다. 저는 친구로서 이 일에 접근하고 있어요. 매주 올 이유는 없죠. 사람들이 오고 싶을 때 예약을 하고 옵니다. 사람들이 꿈을 꾸지 않거나, 꿈 상담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예약을 하지 않고 서로 만나지 않아요. 만약에 꿈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을 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죠. 서구 학문적 관점으로 보면 제 교육 자체는 융 계통의 심리학과 분석에 기반을 두고 있어요. 하지만 저 자신은 꿈 분석가이자, 해설가, 그리고 친구라고 저를 정의하죠.

팟캐스트: 우리 꿈이 왜 존재한다고 생각하시죠?

사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하는 일이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융이 비유하기를 정식을 빙산이라고 보면 물 밖으로 나온 빙산의 끝이 우리의 의식이에요. 그 밑에 거대한 빙산의 본체가 있지만 물 밑에 있으므로 우리는 보지 못하죠. 그 가려진 빙산이 우리의 무의식이고 우리의 삶을 조정합니다. 꿈은 우리가 무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이죠. 꿈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점을 보여준다고 했을 때의 뜻은, 꿈이 우리가 더 큰 그림을 보게 도와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는 일과가 의식적으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죠.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 일들이 사람의 삶에 손해를 끼칠 수 있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알아야 할 정보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홍보하실 웹사이트가 있나요?

사샤: 아뇨. 없어요. 지금까지 제 작업은 개인적 추천과 입소문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저에게 연락하고 싶다면 꿈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환영합니다. 첫 상담에서는 서로 맞을지 확인하기 위해서 전화로 무료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요. 제 이메일은 saschia.ryder@gmail.com입니다.

팟캐스트: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사샤: 저도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기뻤어요. 이 에피소드 청취를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