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3, 에파소드16: 수키 잘랄리

수키 잘랄리 씨 (56세)는 한국에서 12세에서 14세 사이의 나이에 입양되었다. 잘랄리 씨는 자신의 나이를 정확히 알고 있지 않으며, 서류가 조작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나이에 몇 년 정도의 오류가 있다. 수키 잘랄리/전숙자 씨는 미국에서 새 이름과 정체성을 얻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은 한국 고아원에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제 한국계 입양아 1세대로서 잘랄리 씨는 누구도 자신의 가족과 비슷한 가족 형태를 본 적이 없는 중서부 지역에서 자랐다. 잘랄리 씨는 새로운 언어, 문화와 삶의 방식에 적응해야 했지만 여러 복잡한 문제를 뚫고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잘랄리 씨는 자기 자신을 믿고 자신의 의지로 지금의 길을 찾아 걸어가고 있다. 

수키: 제 이름은 수키 잘랄리이고 56세입니다. 독신 여성이죠. 

팟캐스트: 어디에서 살고 계시죠?

수키: 미네소타 주 고옴 밸리 시에서 살고 있어요. 5살 때부터 휴전선 근처 동두천에 있는 고아원에서 살았죠. 부모님이 5살 때 저를 고아원에 맡겼습니다. 딸이 태어났을 때 최면 치료를 받았고, 5살 때 고아원에 맡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부모님에게 작별인사를 하던 시점을 기억해냈죠.

팟캐스트: 그때까지는 기억하지 못하셨나요?

수키: 고아원에서 살던 시점부터 제가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던 시점까지는 기억하죠. 그래서 고아원에 맡겨졌을 때 아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압니다.

팟캐스트: 그 최면 치료를 받을 때 부모님의 외모가 기억이 나셨나요? 

수키: 아뇨. 고아원 입구에서 부모님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흐릿한 기억밖에 나지 않습니다. 부모님 둘 다 아프다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결핵 말기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기침하고 설사를 심각하게 하고 있었죠. 어머니는 독감에 걸려서 죽어가고 계셨어요. 두 분 다 저를 돌볼 수 없어서 미국 적십자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데리고 왔고 미군이 도와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제 삶에 가지고 있던 의문이 해소되었죠. 부모님이 절 버리지 않았고 구하기 위해서 고아원에 맡겼습니다. 지금까지 부모님이 저를 버리려고 고아원에 맡긴 줄 알고 있었거든요. 

팟캐스트: 정확히 60년대 어느 연도에 태어나셨다고 생각하시나요?

수키: 1964년에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팟캐스트: 그 시기에 결핵이 한국에서 꽤 심각했나요? 

수키: 네. 그 시기에는 한국에 의료 체계 자체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았어요. 특히 동두천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죠. 우리는 동두천 외곽의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어서 택시를 타고 2시간은 가야 병원에 갈 수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얼마나 오랫동안 고아원에서 지내셨다고 생각하시나요?

수키: 제가 입양되기 전까지 그곳에서 계속 지냈죠. 12살에서 14살이 되기 전까지 살았어요.

팟캐스트: 그 뒤로 입양되었군요?

수키: 그 뒤에 입양되었죠. 

팟캐스트: 한국에서의 기억이 많으시겠네요?

수키: 고아원에 살면서 놀던 시간이 거의 없었어요. 일요일에 미군들이 오면 놀고는 했죠. 같이 배드민턴을 치고는 했습니다. 부활절에는 부활절 달걀을 들고 오곤 했어요. 그걸 제외하면 고아원에서 계속 일을 했습니다. 청소, 요리, 정원, 농사, 수확, 세공 등을 했습니다.

팟캐스트: 적십자가 운영하는 고아원이었지만 미군이 깊게 연관이 되어 있었나요? 

수키: 네. 동두천에 있던 캠프 케이시와 다른 미국 주둔지와 가까웠어요. 미군들이 고아원에 자원봉사를 왔죠. 

팟캐스트: 미국인들을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수키: 아주 상냥하다고 생각했죠. 그 사람들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팟캐스트: 사탕을 나눠주거나 그랬나요?

수키: 우리와 같이 놀아주면서 즐겁게 해줬죠. 오빠나 언니 같은 느낌이었어요. 절 성당이나 교회에 데리고 가 주었습니다. 또 우리를 태우고 군부대에 데리고 가서 뷔페식 식사를 하게 해주고는 했죠. 더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먹고는 했어요. 며칠간 밥을 못 먹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과식하고 나면 아팠습니다.

팟캐스트: 고아원에서 말이죠?

수키: 네 3일에서 나흘 동안 한 끼도 못 먹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미군이 우리를 위해서 옷과 식량을 제공해 줬어요. 분유와 호밀빵만 먹으면서 3일을 버티고는 했죠. 우리가 굶고 있어도 호밀빵의 흰 부분이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집어내고는 했습니다. 미군들이 우리에게 준 옷에도 이가 있었거든요. 우리가 손가락으로 일일이 이를 잡아내서 죽인 다음에 옷을 빨아서 입었죠. 

팟캐스트: 기부받은 옷에 이가 있었군요?

수키: 그래서 호밀빵의 흰 부분이 이라고 생각했죠. 건강에 좋은 부분이라고 생각도 못 했어요.

팟캐스트: 아주 힘든 환경이었군요?

수키: 힘들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죠. 사실 꽤 행복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장난감이 없어서 망가진 그릇과 인형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그런데도 행복했죠. 그 상황을 제외한 다른 상황을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시간을 일하면서 보냈어요. 8살 때 미국 장군이 저를 입양하려고 했습니다. 서류를 다 작성하고 미국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셨죠. 저에게 가장 슬펐던 날은 장군이 절 데리러 오기로 하던 날에 헬리콥터 사고로 사망했던 날이었어요.

팟캐스트: 입양하러 오던 날에 사고로 사망했군요?

수키: 네. 온종일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팟캐스트: 입양되고 싶다고 생각하셨나요?

수키: 입양이라는 일 자체를 몰랐다고 생각해요. 그 시기에는 입양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죠. 흥미롭게도 입양되는 아이 중 상당수가 유럽으로 입양되었어요. 덴마크, 독일, 제와 친구들 몇 명은 미국 중서부로 입양되었죠.

팟캐스트: 어느 나라로 입양될지 알고 계셨군요?

수키: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는 몰랐지만, 유럽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죠. 유럽이 어디에 있는지 알 정도의 지식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그때 어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고아원에 있을 때 부모님을 그리워하셨나요, 아니면 부모님이 돌아와서 방문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셨나요?

수키: 제가 의도적으로 기억을 막았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어머니가 되기 전까지 부모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죠. 18살에서 결혼해서 21세에 첫 딸 미트라가 태어났어요. 미트라가 태어나는 날 바로 전까지 부모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딸을 품에 안고 나서야 어머니가 저를 얼마나 그리워할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죠.

팟캐스트: 수키 씨의 아이를 직접 품에 안고 나서야 그분들에 대해서 생각하셨군요?

수키: 제 어머니가 저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생각했고, 지금도 어머니에 대해서 매일 생각하고 있죠. 항상 어머니를 찾으려고 합니다. 왜 어머니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죠. 아버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아요. 아버지가 키가 크고 병약하셨다는 사실밖에 모르죠. 

팟캐스트: 부모님의 사진이라도 있나요?

수키: 아뇨. 제 나이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아이들은 가족사진을 들고 왔던 경우가 많죠. 제가 미국에 도착한 뒤 다음 날에는 머리를 단발머리 커트로 잘랐어요. 남자아이처럼 보인다고 펑펑 울었습니다. 제가 허리까지 닿는 긴 머리를 하고 있었죠. 이 제거를 위해서 머리를 잘랐는데 했는데 펑펑 울었어요.

팟캐스트: 무서웠겠네요.

수키: 네. 전 제 머리를 자르고 싶지 않았어요. 남자애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죠. 

팟캐스트: 친어머니가 어떻게 생기셨었죠?

수키: 친어머니가 항상 긴 머리를 머리핀으로 묶어 두셨다는 사실만 생각나지 않아요. 둥근 얼굴을 가지고 아름다웠다고 기억합니다. 

팟캐스트: 어머니의 성격은 기억나시나요? 

수키: 별로 기억나지 않아요. 같이 얼음 썰매를 타러 갔을 때가 생각나요. 날이 달린 나무판에 앉은 채로 꼬챙이로 움직이면서 탔죠.

팟캐스트: 얼마나 탈 수 있었죠?

수키: 1인용이었어요.

팟캐스트: 일인용이었군요.

수키: 겨울에 논을 얼린 곳 위에서 썰매를 탔는데, 벼 뿌리가 남아 있는 곳은 불룩 튀어나와 있고는 해서 넘어지고는 했어요. 제가 타던 썰매가 멈춰서 화나던 기억이 나죠. 

팟캐스트: 매우 사교적인 아이였을 것 같은데 그랬나요?

수키: 네. 적어도 저는 그랬다고 생각해요. 아주 독립적인 아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같이 놀던 아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애가 죽었죠. 7살이나 8살 때 제 품 안에서 죽었어요. 그 애에게 물을 수저로 먹이던 생각이 납니다. 일주일마다 장례식장에서 사람이 왔죠.

팟캐스트: 매주 사람이 왔다고요?

수키: 네. 매주 애들이 병이나 영양실조 때문에 죽어 나갔죠. 주로 금요일에 장례식장에서 와서 시체를 싣고 갔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아기들이 죽어 나갔기 때문에 손수레에 태울 수 있었지만, 친구는 7~8살이었기 때문에 손수레에 담을 수 없어서 다음 주에 올 때까지 보관해야 한다고 했죠. 그래서 제 친구의 시체를 제 침대 밑에 보관해야 했어요

팟캐스트: 그런….

수키: 그리고 그 침대 위에서 자야 했죠. 시체가 밑에 있는 상황에서 자야 했어요.

팟캐스트: 아주…….

수키: 네 그랬죠. 친구의 몸이 썩기 시작하자 친구를 창고로 옮겨야 했어요. 장례식장에서 사람을 보내지 않을지도 몰랐고 냄새가 나기 시작했으니까요. 연탄을 보관하던 창고였어요. 고아원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연탄을 때서 난방을 했죠. 제 친구의 시체를 제가 옮겨서 그곳에 뒀어요. 연탄이 친구의 냄새를 가려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거기 들어가 보니 손자국이 남아 있어서 그곳을 항상 무서워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연탄을 옮기면서 손자국이 남아 있었겠지만, 저는 친구의 귀신이 남긴 흔적이라 생각하고 그 창고를 무서워하게 됐어요. 

팟캐스트: 어렸으니 매우 무서웠겠죠.

수키: 네네. 

팟캐스트: 아이들을 돌보고 이끄는 역할이라니 신기하네요

수키: 네. 제가 보모 역할을 맡았죠.

팟캐스트: 보모로서 정확히 무슨 역할을 하셨죠

수키: 다른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맡았어요. 날마다 고아원 앞에 버려진 아기들을 데리고 와서 아기들을 돌봐야 했죠. 겨울에는 얼어버린 아이들을 따뜻하게 해줘야 했어요. 욕조에 아이들을 담그면 어떨 때는 아이들이 되살아나기도 했지만 어떨 때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팟캐스트: 이때 10살에서 11살이셨죠? 여러 죽음을 보셨겠지만 평범하다고 느끼셨겠군요?

수키: 저에게는 평범하다고 느꼈죠. 제가 기억나는 무섭고 끔찍한 광경이 있습니다. 고아원에서 애들과 같이 벽을 타고 노는 일을 즐겼어요. DMZ 근처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집을 나누는 큰 담장들이 있었어요. 제가 좋아하던 일은 그 담장을 걸어 올라가서 담장 위를 걷고는 하는 일이었습니다. 고아원 담장 벽을 한 바퀴 돌고는 했어요.

팟캐스트: 겁이 없으셨군요.

수키: 네 그랬죠. 하지만 어느 날 깜짝 놀랐습니다. 제 친구의 시체를 가지고 간 곳을 봤는데 거기에서 아이들의 시체를 태우고 있던 화로를 봤죠. 뼈밖에 안 남아 있더군요. 장례식장에서 사람이 안 오면 고아원에서 아이들의 뼈를 태운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습니다.

팟캐스트: 큰 충격이었겠군요?

수키: 애들을 화로에서 불태운다는 사실을 몰랐죠. 큰 충격이었어요. 

팟캐스트: 죽음을 두려워하셨나요?

수키: 아니요. 

팟캐스트: 아기들이 매일 버려졌나요?

수키: 매일 같이 아기들이 고아원 정문에 남겨져 있었죠.

팟캐스트: 정문 앞에 버려져 있었나요?

수키: 정문 앞에 아이들을 담요에 싼 다음 바구니에 담아서 놨죠. 

팟캐스트: 아이들이 울고 있었겠군요?

수키: 아이들이 울고 있기도 했죠. 한 4시~5시에 일어났어요. 그때 아직 어둠 속에서 부모들이 아이를 놓고 갔습니다. 그래서 5시에 가면 아이들이 놓여 있었죠.

팟캐스트: 슬픈 이야기이네요. 그 아이들이 언제 올지 알고 기다리셨나요?

수키: 제가 너무 늦으면 얼어 죽거나 울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거든요. 

팟캐스트: 고아원에서 하나의 큰 가족같이 지냈나요? 아니면 아이들이 너무 많고 입양되고, 죽거나 그래서 느슨한 관계를 맺고 있었나요?

수키: 제가 고아원에서 지내고 있을 때는 커다란 식당이 있었어요. 그곳에서 같이 식사를 했죠. 매일 2끼씩 식사를 하고 같이 먹었죠. 

팟캐스트: 뭘 먹었죠?

수키: 쌀밥, 김치, 국이었습니다.

팟캐스트: 국에 뭔가 들어가 있었죠? 

수키: 두부, 돼지고기 비계, 콩나물 등이 들어가 있었죠. 비계를 넣어서 지방을 제공해서 굶어 죽게 하지 않게 하려는 일이었습니다. 요리사 선생님과 같이 요리하던 기억이 나요. 사골이 있어서 그걸 끓여서 국물을 내고는 했습니다. 가장 좋아했던 부분은 골수였죠. 우유가 없었기 때문에 골수를 통해서 뼈를 단단하게 할 수 있었어요.

팟캐스트: 수키 씨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죠? 수키 씨의 물품을 가지고 가라고 하셨나요?

수키: 아뇨. 미국에서 입양된다는 이야기를 해줬고 아주 아름다운 옷을 입혀줬어요. 갈색 치마랑 흰색 스웨터를 입혀줬는데, 그 옷을 제 아이들이 태어날 때까지 간직했죠. 그리고 제가 울 것을 알아서 손수건을 줬습니다. 제가 고아원을 떠났을 때 가족을 떠나게 되어서 아주 슬펐죠. 그곳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여기가 제집인데 어디로 가는지 몰랐습니다. 이별 파티를 할 때 저는 펑펑 울었어요. 제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환영 파티를 해줬는데 이별 파티로 알고 또 울었죠. 전 생일을 1번도 축하해본 적도 없어서, 한 달 지나고 나서 깜짝 생일 파티를 했는데, 또 이별 파티로 알아서 또 울었습니다.

팟캐스트: 도착했을 때의 생각과 인상이 떠오르나요? 미네소타주에 도착하셨죠? 

수키: 네. 제 어머니들이 기억이 나요. 저에게는 두 명의 어머니가 있었죠. 제가 처음으로 미혼모에게 입양된 한국 아이였습니다. 어머니 이름은 아델라인 홀란드였고 학교 선생님이셨죠. 그분이 저를 공식적으로 입양하셨어요. 제 큰 이모이자 카롤라 홀란드가 또다른 어머니의 역할을 하셨습니다. 둘 다 결혼하지 않으셨고 둘 다 저를 키워 주셨죠. 두 분 다 교육학과 간호학 석사 학위를 따고 졸업하신, 미국에서 석사 학위를 딴 최초의 여성 중 일부이셨어요. 아주 대단한 분들이셨고, 자랑스러운 어머니들입니다. 그 2분이 저를 공항에서 데리고 오기 위해서 왔었죠. 눈이 제 머리까지 쌓여 있던 기억이 나요. 그 해에 어마어마한 폭설이 왔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휘발유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없었는데, 어머니의 차에 문제가 조금 있어서 휘발유 냄새가 계속 나는 바람에 머리가 계속 아팠죠. 휘발유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없어서 차에서 계속 두통을 겪었어요. 그 뒤에도 스트레스와 적응하면서 심한 두통을 견뎌야 했습니다. 제가 집에 도착했을 때 2분이 한국어와 영어가 동시에 적힌 엽서를 여러 곳에 준비해 두셨죠. 배고프다, 아프다, 학교 선생님이라서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통에 대한 단어가 없었어요. 

팟캐스트: 그러니 영어-한국어 단어장을 만들어 두셨다는 건가요? 

수키: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영어-한국어 단어장을 만들어 두셨죠.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 사회복지사께서 도와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한국어와 영어를 찾아서 단어장을 만들어서 벽에 붙여줬다고요? 읽고 쓰실 수 있었나요?

수키: 네. 한국어를 읽고 쓸 수 있었죠.

팟캐스트: 모두 영어를 하는 미국에 갑자기 떨어져서 어떤 반응을 하셨죠? 

수키: 전 영어를 한마디도 못 했는데, 도착하고 나서 다음 날 교회에서 사람들이 와서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절 둘러싸고 기도를 한 다음에 집의 모든 방에서 기도했죠. 사람들이 보수적인 기독교인이라 제가 해외에서 사악한 귀신이나 악마를 데리고 왔을지도 몰랐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음주의적 기독교인으로 지미 슈와거, 태미 페이비거 같은 유명 목사를 따르는 사람들이었어요.

팟캐스트: 복음주의적이었군요?

수키: 네. 그래서 축복인지, 정화인지, 세례인지 몰랐지만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죠. 하지만 적어도 저를 씻기고 정화하려는 느낌이었습니다. 창고나 옷장에도 들어가서 기도를 했거든요.

팟캐스트: 그 광경을 보고 무서워하셨나요?

수키: 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으니까요.

팟캐스트: 주변에 다른 아시아계 사람들이 있었나요?

수키: 아뇨. 제가 살고 있던 마을, 미네소타주 오웨타나에서 유일한 아시아계였죠.

팟캐스트: 오웨타나요?

수키: 네. 그래서 학교에 걸어갈 때마다 사람들이 가는 길을 멈추고 저를 바라보고는 했죠. 

팟캐스트: 미네소타주 남부에 있는 작은 도시로군요?

수키: 네. 

팟캐스트: 수키 씨가 자라난 70년대에 그곳이 어땠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몇 명이 살았는지, 인종구성은 어땠나요? 북유럽계가 많았나요?

수키: 네. 북유럽계가 많았고, 특히 노르웨이계가 많았어요. 70년대에는 그냥 백인밖에 없었죠. 제가 본 다른 인종은 광산과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서 올라온 멕시코인들밖에 없었고, 아시아계는 전혀 보지 못했어요.

팟캐스트: 인구는 어느 정도 있었나요? 2000명 정도 살았나요? 

수키: 그 시기에는 만 명…. 보다는 적었어요. 우리는 농장에서 살았고 마을에서 16㎞ 정도 떨어진 곳에서 살았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에 가야 했고, 통학 버스가 우리 집에서 가장 나중에 섰고, 그 뒤로 학교로 갔어요. 어렸을 때 심하게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팟캐스트: 안 그래도 괴롭힘을 당했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수키: 네 꽤 심하게 괴롭힘을 당했죠. 제가 마지막에 탔기 때문에 항상 버스 뒤로 가야 했고, 모두를 지나쳐야 했어요. 

팟캐스트: 모두가 괴롭혔군요?

수키: 홍콩 푸이, 중국 여자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인종차별적 단어를 저에게 말했죠. 아주 끔찍했어요. 아직도 기억나는 남자애가 있습니다. 스티브 멜비라는 애였죠. 그 애를 찾아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만뒀어요.

팟캐스트: 멜비라는 성이 매우 노르웨이적 이름이군요.

수키: 네. 그 애가 제 이웃이었죠. 그 애가 절 괴롭히는 데 참여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날 붉은 머리였던 그 애가 제 옷을 잡아당겨서 몹시 화가 났던 기억이 납니다. 그다음 날에는 학교에서 음악회를 여는 날이라 머리 인두를 가지고 갔었는데, 그 애가 너무 화나게 해서 머리 인두로 얼굴을 후려쳤어요. 애가 피를 흘리기 시작했는데도 버스 운전사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죠. 운전사도 애들이 너무 괴롭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지금 벌어졌다면 큰일이 되었겠죠.

팟캐스트: 운전사도 수키 씨가 괴롭힘당했다는 사실을 알았군요?

수키: 운전사도 제가 괴롭힘당하는 사실을 알았으니 개입하지 않았죠. 그렇게 화내고 나니 다시 괴롭히지 않았어요. 또 다른 사건이 기억이 나는데, 소프트볼 연습을 해야 해서 가방을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어떤 남자애가 저를 또 괴롭혀서 방망이로 그 애의 무릎을 때렸죠. 다시 괴롭히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용감해지기 위해서 힘을 썼던 느낌이네요.

수키: 네 그랬죠. 

팟캐스트: 어머니와 이모를 둘 다 엄마라고 부르셨나요?

수키: 네.

팟캐스트: 어머니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고 이야기를 하셨나요?

수키: 괴롭힘을 당한다고 이야기를 하긴 했죠. 그래서 어머니와 같이 등교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6km를 걸어서 학교를 등교하기 시작했어요.

팟캐스트: 16km를 걸어서 등교하셨다고요.

수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어요. 제가 운이 좋았던 점은 어머니가 2학년 선생이었다는 점이었죠. 어머니에게 읽는 법을 배웠던 때가 기억이 납니다. 영어를 제대로 배우고, 맞춤법을 배우기를 원했어요. 항상 어머니와 학교에 같이 갔고, 학교가 끝난 뒤에도 공부했죠. 그 시기에는 영어가 제2외국어인 아이를 위한 교육 과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애인 버스를 타고 추가 교육을 받으러 갔어요. 그래서 애들이 제가 바보로 알고 더 놀렸죠. 

팟캐스트: 장애를 앓았다고 놀렸군요?

수키: 제가 장애를 앓았다고 놀렸죠. 그러한 놀림이 제가 장애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게 했죠. 학교도 다녔고, 여름 학교도 다녔고, 영어를 열심히 배워서 1학년 월반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16살에 GED 시험을 봤죠.

팟캐스트: 12살~13살에 미국에 와서 그런 성과를 취하다니 대단하네요.

수키: 이 마을도 마음에 안 들고 주민들도 마음에 안 드니 이 마을에서 나가려면 대학교에 들어가고 GED를 보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여름 학교, 아침 학교, 방과 후 학교에도 참여했습니다. GED를 통과하고 로체스터 전문대에 입학한 뒤 미네소타 대학교로 전교했고, 로체스터 감리교 병원에서 일하면서 장학금을 받았어요.

팟캐스트: 그때 한국을 그리워하셨나요?

수키: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전 고아원에 만족하고 있었어요. 왜 미국에 와서 이런 사람들이 괴롭히는지 몰랐죠.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살고 싶지 않았죠. 물론 한국에서는 얻지 못할 대단한 기회를 받았어요.

팟캐스트: 더 많은 식사를 할 수 있었죠?

수키: 네. 어머니들이 제 방에 음식을 숨기고 했다고 웃으셨죠. 내일 밥을 먹지 못할지 몰라서 항상 숨기고 했거든요.

팟캐스트: 하지만 그렇게 풍요로웠는데도 행복하지 않으셨군요?

수키: 아뇨. 고아원에서 평온하게 살고 있었거든요. 일하면서 아기들을 돌보고,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만족하고 있었죠. 입양된 뒤로 약간 나아졌지만, 시골 농장에서 살면서 혼자 지내다가 마을로 이사했어요.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다가 발견한 집을 보고 어머니에게 농장을 팔고 마을로 이사하자고 했죠.

팟캐스트: 상업 농장이었나요?

수키: 아뇨. 평범한 농장이었죠. 제 삼촌이 소를 키우고 대두를 키우긴 했지만 그렇게 진지하게 하는 일은 아니었어요. 농장을 사용하기 위해서 대두, 옥수수를 키우고 밭도 있었지만, 땅을 놀리지 않기 위해서 하는 농사였죠. 하지만 저는….

팟캐스트: 마을로 이사하고 싶어서 하셨군요?

수키: 네.

팟캐스트: 어머니에게 있어서 수키 씨가 일종의 계획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수키: 네. 어머니는 절 키울 수 있어서 무척이나 행복하셨죠. 지역 신문에서 저에게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제가 지역에 처음으로 들어온 한국인이었고 어머니가 지역에서 최초로 입양을 한 독신 여성이었으니까요. 지역 신문에 관련 기사가 실릴 정도로 유명한 일이었죠. 두 분 다 용감하신 분들이었습니다. 두 분 다 결혼하지 않으셨고, 남자친구도 없는데도 저를 키워 주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들에게 좀 더 감사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전 청소년기에 반항적이었죠.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고 싶지 않고, 강제로 저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했어요. 저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머니들이 저를 어머니들과 비슷하게 만들지 않으면 인정하지 생각했죠. 어머니들과 싸우고 가출했어요. 제 물품을 전부 상자에 넣고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로체스터 전문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도망쳤습니다.

팟캐스트: 어머니들이 수키 씨를 구원했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런 반응이었으니 놀라셨겠네요.

수키: 네. 어머님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연락마저 끊었나요?

수키: 네. 어머님들은 제가 어디에 있는지 2년에서 3년 정도 몰랐습니다. 6개월 정도 위탁가정에서 지냈어요. 제가 집을 떠났을 때….

팟캐스트: 이게 집에서 나왔을 때 이야기인가요?

수키: 아니 그 전의 이야기이죠. 위탁가정에서 GED 시험을 치고 대학에 갈 수 있었어요.

팟캐스트: 상황이 그렇게 악화하였군요? 집에서 도망쳐야 할 정도로 말이죠.

수키: 네. 더 그곳에서 살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죠.

팟캐스트: 두 분이 매우 통제적이었다는 느낌이 드네요.

수키: 매우 통제적인 분들이었죠.

팟캐스트: 그런데도 어머니들에 대해서 존경심을 가지고 계시군요?

수키: 네. 두 분이 더 나은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죠. 저에게 맞는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셨지만, 좁은 시야를 가지고 세상을 보면 더 나은 방법을 모르기 마련입니다. 어머니들은 더 나은 방법을 몰랐어요. 제 외할머니는 더 나빴죠. 할머니가 저를 질투했던 기억이 나요. 딸들의 관심이 전부 저에게 쏠려 있었으니 질투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가 끝난 뒤에는 할머니 집에서 지냈는데 지팡이로 혼내거나 겁을 주기도 했죠.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면 아동 학대였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학교 이후에 혼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들이 일을 끝낼 때까지 할머니와 같이 지내야 했습니다. 어느 날 겁먹고 화장실에 숨어 있던 기억이 나죠. 그러자 할머니가 문을 쾅쾅 두드리면서 화장실에서 너무 시간을 보낸다고 나오라고 화를 냈어요. 결국, 할머니와 사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창문을 통해서 밖에서 나가서 돌아다니기도 했어요.

팟캐스트: 가족들을 용서하셨나요?

수키: 네. 그렇습니다. 저를 상처 입히려고 한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저에게 맞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죠. 저를 기독교인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거기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기도 했어요. 물론 그분들이 저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일은 좋지 않았죠. 제가 잘못된 것처럼 느꼈어요. 그래서 진짜 부모라면 자기의 자식을 그렇게 대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그분들이 수키 씨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수키: 네. 사랑하셨죠. 확실히 저를 사랑했어요. 

팟캐스트: 수키 씨가 그분들을 사랑하셨나요?

수키: 음…. 네. 하지만 동시에 사랑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 아이들을 가진 뒤에 그분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죠. 그분들이 나이를 먹고 나서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절 입양하셨을 때 64 세셨거든요. 제 막내아들이 태어났을 때 제 어머니들이 돌아가셨죠. 마지막 시간을 요양원에서 같이 보냈습니다. 어머니들의 마지막 시간에 우리의 관계를 다시 구축하고 만들면서 보냈어요. 

수키: 제 어머니 중 한 분이 2차 세계대전 참전자이셨습니다.

팟캐스트: 오.

수키: 네. 어머니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사람들을 도왔죠.

팟캐스트: 아델라인 씨가 2차 세계대전 참전자이셨다고요?

수키: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우와 대단하네요.

수키: 2차 세계대전에 지원자로 참여한 여성 중 한 분이셨죠.

팟캐스트: 청소년일 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나요?

수키: 네.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깊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8살이 되자마자 한국에 다시 돌아갔어요.

팟캐스트: 한국에 돌아가셨군요! 어떻게 돌아가시게 됐죠?

수키: 대학교 1학년생이었을 때였습니다. 그때 미네소타 대학교로 전교를 했죠.

팟캐스트: 미네소타 주립 대학교 말이죠?

수키: 네. 

팟캐스트: 알겠습니다.

수키: 그러니 대학교 2학년에 입학하기 전의 여름방학이었습니다. 동두천에 가서 제 부모님을 찾으려고 했죠.

팟캐스트: 한국에 갈 정도로 돈을 모았나요?

수키: 네. 

팟캐스트: 한국어를 여전히 기억하고 계셨나요?

수키: 네. 지금은 훨씬 실력이 나아졌지만, 그때는 한국어를 많이 잊어버린 상태였죠.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팟캐스트: 언어를 안 쓰다 보니 실력이 떨어졌군요?

수키: 네. 한국에 최초로 돌아간 때였습니다. 여기에 방문했을 때의 여권이 있어요. 1983년 6월이었죠.

팟캐스트: 한국 여권이네요?

수키: 네

팟캐스트: 미국 국적을 받지 못하셨나요?

수키: 적어도 그때는 아직 시민권을 받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한국 여권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가셨군요? 입국할 때 관련 질문을 했나요?

수키: 아뇨. 전혀요.

팟캐스트: 21살 때 돌아가셨나요?

수키: 아뇨. 21세일 때 결혼해서 장녀를 낳았으니까 18살 때 돌아갔죠.

팟캐스트: 처음 돌아갔을 때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셨죠?

수키: 운이 좋게도 대학교에서 한국 여자애를 알았어요. 한국에 가족이 있던 애였죠. 그래서 그 집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 애가 한국에서 지내고 있어서 같이 지내자고 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으로 돌아갈 최고의 기회였군요?

수키: 네 그랬습니다. 친구와 같이 서울에서 지내면서 하루 날을 잡아서 친구 오빠와 함께 동두천으로 가서 기록을 찾아보려고 했어요. 가보니 고아원이 장애인 고아원으로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그곳을 관리하던 사람들, 지내던 사람들이 전부 바뀌었죠. 마을에 돌아가서 학교나 다른 곳을 찾아다니자 사람들이 저를 보고 왜 돌아왔는지 물었어요. 한국에는 이제 저에게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금문교의 나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절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죠. 마을에 살던 아주머니 1명만이 저를 기억해 주셨어요. 아주머니는 여기에 남아 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한국에 남아 있다면 누가 절 농부와 결혼시킬 것이니 미국에 가서 교육을 받으라고 충고하셨죠. 

팟캐스트: 모두가 미국에서의 삶이 낫다고 생각했군요? 

수키: 네 그랬죠. 객관적으로 봐도 저에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입양되지 않았다면 교육받지도 못하고 누구와 빠르게 결혼해서 시장이나 고아원에서 일해야 했겠죠. 저에게 일어난 일 중 가장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비록 한국에서 행복하셨다고 해도 말이죠? 

수키: 네. 전 이 세상 모든 선택과 문제에는 업보가 섞여 있다고 생각해요. 입양된 일도 미래 업보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죠. 지금 과거의 모든 일과 평화를 이룬 상태입니다. 21년간의 결혼과 16년간의 이혼 상태도 모두 일어나야 했다고 생각해요. 지금 현재 상황에 닿기 위해서 모두가 일어나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거리를 걸을 때 과거의 삶이 전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큰 충격을 받으셨겠네요? 

수키: 제가 고아원에 돌아갔을 때 말인가요?

팟캐스트: 네.

수키: 네. 제가 떠난 고향이 아니었어요. 

팟캐스트: 알고 있던 사람들은 흩어졌고요.

수키: 네. 그다음에는 제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학교의 사진을 찍었죠. 제가 다니던 교실 자리에 화장실이 들어서 있더군요. 그 학교도 부수고 다음 해에 다시 지었습니다. 아주 재미있었어요. 

팟캐스트: 한국에서는 어떤 곳도 영원하지 않죠. 모두가 바뀌니까요.

수키: 그렇죠.

팟캐스트: 고아원에 어떤 기록이 남아 있었나요?

수키: 아뇨. 모든 기록을 소각했다고 하더군요. 한국 전쟁 이후에 많은 기록이 불탔다고 했습니다. 서울 경찰서에 가서 관련된 기록을 찾기를 원했지만 60년대 기록들이 전부 소각되어서 찾을 수 없다고 했죠. 

팟캐스트: 실망하셨겠군요.

수키: 네. 그래도 멈출 생각은 없습니다. 여전히 한국에 돌아가고 싶죠.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제 가족을 찾고 싶어요. 저와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이 형제자매를 찾으려고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는 제 유전자 정보를 유전자 조사 프로그램에 등록했고 그 정보를 사람들이 조사를 해주려고 하는 중이에요. 또 해외 입양인 연대에도 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있죠. 다음 단계로는 직장에서 안식년을 가지고 3달에서 4달 정도 한국에서 지내면서 관련 조사를 하려고 합니다. 경찰을 방문하고 도시 기록도 찾아보면서 제가 찾을 수 있는 것을 찾아보려고 해요. 2년 전에 한국에 다시 방문했고 대전에 있는 친구 집에서 지냈죠. 하지만 동두천과 4시간이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당일 여행으로 동두천에 갈 수 없었고, 호텔에서 지내야 했죠. 그래서 친구 가족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어요. 그때는 시간이 있다면 부모님을 찾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을 알고 즐기고, 여행하는 데 시간을 보냈죠. 

팟캐스트: 몇 년 전의 방문은 그렇게 보내셨군요?

수키: 네. 하지만 이번에 방문하게 된다면 조사에 집중할 예정이죠. 사실 유전자 조사 프로그램에서 관련 조사를 홍보하기 위해서 한국에 방문할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조사를 받으면 관련 친척들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COVID-19 전염병 때문에 관련 행사가 전부 중단되었죠. 하지만 이게 정리되고 나면 다시 사람들을 돕기 시작할 겁니다. 그 행사를 시작하면 관련 연락처를 찾아서 조사도 같이 진행할 예정이죠. 그렇다면 저 자신에 대해서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계 입양아 사회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듣는다면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서 무언가의 결론을 낼 수 있다면 좋겠죠. 우리에게 무언가 일어났고, 불완전한 점이 존재해요.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운이 좋은 편입니다. 불운하지 않고 행운아예요. 이 과정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었죠. 저는 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확신이 있고 저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최면 치료를 통해서 부모님이 제 삶을 구하려고 고아원에 맡겼다는 사실을 알고 부모님에 대해서 결론을 낼 수 있었어요. 아이 두 명을 낳고 나서 자기 강화에 대한 토론회에 참가하게 되었죠.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수행에 관한 내용이었고, 토론회 이름은 랜드마크 팜이었습니다. 전 세계적인 토론회이죠. 그렇게 토론회에 참가하면서 공부를 하니 어머니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어머니의 영혼이 제 곁에 있고 직접 볼 수 없어도 영혼이 항상 같이 있고, 항상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니 매우 편안해지는 기분이었죠. 어머니의 영혼은 항상 제 곁에 계시니까요.

팟캐스트: 처음 한국에 돌아가셨을 때 미국 시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어떻게 생각하셨죠? 

수키: 제가 한국 여권을 가지고 있긴 했죠.

팟캐스트: 네. 그것 때문에 어떤 기분이 들었죠?

수키: 기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외계인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많은 관광객이 한국에 방문하기 시작했지만, 한국계 입양아들은 많이 귀국하지 않았던 시점이었으니까요.

팟캐스트: 언제 한국에 귀국하셨죠?

수키: 1983년에 귀국했습니다. 한국계 입양아 중 극히 일부만이 한국에 돌아왔던 상황이었죠.

팟캐스트: 수키 씨에게 일어난 상황과 왜 그런지 사람들에게 설명하면 대부분은 사람들이 이해를 못 했겠군요?

수키: 제가 한국 여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한국인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했죠. 

팟캐스트: 여권을 봐도 될까요?

수키: 네. 이 여자애가 이민 간 뒤 부모님에게 한국어를 배우지 않았다고 생각했겠죠.

팟캐스트: 한국 이름이 전숙자이신가요?

수키: 네. 전숙자입니다. 제 이름이죠. 

팟캐스트: 여권 사진이 아주 아름답네요.

수키: 감사합니다. 

팟캐스트: 한국에서 외계인처럼 느껴졌고,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했나요? 

수키: 제 대학교 친구와 같이 지냈기 때문에 한국에 적응하기는 쉬웠죠. 하지만 한국어를 몰라서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저를 보고 고아라고 불렀어요. 그 시기에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주제가 아니었죠.

팟캐스트: 입양아라고 부르지 않았군요?

수키: 아뇨. 그렇게 부르지 않았어요. 그 시기 한국에서는 입양 자체를 언급하는 일 자체가 터부였습니다. 국가적으로 부끄럽다고 느끼고 있었죠. 국가적 문제이지만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러니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한국 여권에 찍힌 사진이 한국에 출국했을 때의 사진인가요? 

수키: 아뇨. 그때 저는 여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국제 여행이 가능한 서류를 통해서 출국할 수 있었죠.

팟캐스트: 여행 서류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수키: 제 서류에 제 이름이 전주희라고 적혀 있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 이름이 아니었죠.

팟캐스트: 그러니까 입양되었을 때 다른 이름이 주어졌다는 말인가요?

수키: 네. 저에게 주어진 가짜 이름이었죠. 심지어 가짜 생일도 주어졌어요. 제 입양되었을 때의 이름은 줄리 홀란드였습니다. 주희라는 이름을 발음할 수 없어서 줄리라는 이름을 대신 줬어요. 

팟캐스트: 하지만 미국에 도착해서 부모님에게 이름이 주희가 아니라고 말씀하셨군요?

수키: 네. 제가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제 이름이 계속 줄리 홀란드였죠.

팟캐스트: 줄리라는 이름을 받아들이고 생활하셨군요?

수키: 네. 가출할 때까지 줄리 홀란드라는 이름을 사용했죠. 가출하고 나서 신세를 진 위탁 가정의 아버지가 변호사였습니다. 그분의 도움을 받아서 제 이름을 전숙자로 다시 바꿀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일을 시작하자 사람들이 숙자라는 이름을 발음하지 못해서 저를 수키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그냥 제 이름을 수키로 바꾸었죠. 그래서 제 이름이 수키 잘랄리가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아 그래서 이름을 공식적으로 수키로 바꾸셨나요?

수키: 전숙희, 수키 전으로 바꾸었습니다.

팟캐스트: 입양되었을 때 왜 이름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수키: 주희라는 이름이 좀 더 고급스러운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제가 나이가 많은 아이라서 관련 문제에 얽히고 싶지 않아서 가짜 생일과 이름을 줬을지도 모르죠.

팟캐스트: 수키 씨가 입양되었을 때 입양 서류에 수키 씨의 나이를 어떻게 표기했죠?

수키: 음…. 미국에 왔을 때 12살에서 14살 정도였다고 기억하는데, 서류에는 제가 9살이라고 적혀 있었죠. 

팟캐스트: 생일을 언제 축하하시나요? 아니면 생일 자체를 축하하지 않나요?

수키: 6월 2일이 저에게 주어진 생일이었죠. 하지만 나중에 제 할머니 생일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하지만 그 날짜 자체도 사회복지제도가 저에게 준 생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진짜 생일이 아닙니다. 저에게 여러 이름과 서류가 주어져 있는 셈이죠.

팟캐스트: 언제 시민이 되셨죠

수키: 19….

팟캐스트: 미국 시민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수키: 제가 아이를 가진 뒤였죠. 제 딸이 한 살이었던 시점이었죠.

팟캐스트: 장녀 미트라 씨를 낳은 뒤였군요?

수키: 네. 아직도 시민권을 딴 날이 기억이 나요. 1986년 12월 17일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시민권을 따기 위해서 신청을 하셨군요? 

수키: 네. 1986년…. 아 아직 딸을 낳기 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애가 봄에 태어났죠. 임신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요. 그 애가 1986년 3월에 태어났습니다. 

팟캐스트: 로체스터에서 전남편을 만났나요?

수키: 네.

팟캐스트: 이란 출신이었나요?

수키: 그이 이름은 후세인 잘랄리였고, 이란에서 유학 온 남자였고, 이란 혁명이 일어났을 때 즈음에 유학 왔던 사람이었죠. 저도 외국인이었고, 그이도 외국인이었어요.

팟캐스트: 수키 씨를 사람들이 외국인으로 생각했나요? 아니면 수키 씨가 스스로 외국인이라고 생각했나요?

수키: 제가 저 자신을 외국인이라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정말요?

수키: 네. 우리 둘 다 국제 동호회에 소속되어 있었어요. 제가 회계였고 그 이가 서기였죠. 회장이 보기에 그이가 저를 좋아하는 것이 보여서 서로를 소개해줬습니다. 회장이 졸업 파티 겸 깜짝 데이트를 주선해줬어요. 제가 특정 버스 역에 가면 그이가 버스 역에서 만나서 파티로 데리고 가기로 되어 있었죠. 우리 둘 다 차가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후세인 씨가 수키 씨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나요?

수키: 제가 동물학 수업을 듣고 나면 그이가 생물학 수업을 들었죠. 회장, 마거릿이 말하기를 후세인이 절 보고 싶어서 생물학 수업을 하는 동안 밖에서 저를 기다렸다고 했어요. 그걸 본 마거릿이 우리 둘을 이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를 깜짝 데이트에 초대해줬습니다.

팟캐스트: 그 시기에 두 분이 아주 흥미로운 연인이었겠네요? 이란인 남성과 한국인 여성 커플이었으니까요.

수키: 대학교 때 사귀면서 파르시어를 하는 법을 배웠죠.

팟캐스트: 오. 그래요?

수키: 전 파르시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죠.

팟캐스트: 언어와 관련된 재능을 가지고 있군요?

수키: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더군요.

팟캐스트: 몇 달 만에 파르시어를 배우셨군요.

수키: 네.

팟캐스트: 후세인 씨에게서만 배웠나요?

수키: 그 이와 친구들에게서 배웠어요. 우리가 고학생이라서 같이 모여서 요리하고, 카드 게임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란의 정치가 불안정한 시기였어요. 미국 인질 사건이 일어나던 시점이라 서로 앉아서 몇 시간 동안 정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저는 옆에서 들으면서 파르시어를 빠르게 배웠죠.

팟캐스트: 대단하네요.

수키: 감사합니다. 

팟캐스트: 그 시기에 이란인이 미 중서부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죠?

수키: 그 시기에 아주 부유한 아랍인 학생들이 대학교에 입학하기 시작했고, 대학교들은 그런 사람들을 원했죠. 이런 학생들이 보통 등록금보다 3배에서 4배 정도 더 내고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외국 학생들을 불러들여서 학교를 금전적으로 지탱하자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그러한 변화 때문에 제가 받아들여지는 기분이 들었죠. 그 시기 자체가 특이한 시기였어요. 많은 미국 인질들이 이란에 잡혀 있었기 때문에 후세인이 이란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겨야 했어요.

팟캐스트: 후세인 씨가 이슬람교도인가요?

수키: 부모님이 이슬람교였죠. 하지만 후세인 자체는 독실한 이슬람교도가 아니었어요. 자기 자신을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소개하긴 했지만 1번도 기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시부모님은 자주 기도하셨어요.

팟캐스트: 그 시기에 미국에서 이슬람교도에 대한 적대심이 있었나요? 

수키: 아뇨. 그 시기에는 이슬람교 극단주의 테러 자체가 없었으니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았죠. 물론 이란 미국 인질 문제는 약간 문제가 있긴 했습니다. 

팟캐스트: 이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나요?

수키: 그이가 미국에 왔을 때 16살이었고, 제가 그이를 만났을 때 18살이었습니다. 전 그때 19살이었어요. 그이와 만나서 얼마 안 있어서 결혼했어요. 그이에게 저는 연애하고 싶지 않고 결혼해서 가족을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반면에 그이는 대학교 학위를 따고 난 뒤에 결혼하려고 했죠. 86년에는 한국에 돌아가서 살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 돌아갔던 이유도 한국에서 살 수 있는지 알려고 갔었죠.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처리해야 하는 서류가 너무 많았고, 처음부터 다시 만들기에는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동시기에 그이도 이란에 귀국해야 했는데, 이란에서 나오지 못할 않을 가능성이 있어서 위험한 일이었죠. 하지만 운이 좋게도 그이가 이란에서 돌아왔습니다. 그이의 아버지가 말하기를 가족 전체가 이란에서 빠져나와서 미국에 이민할 예정이니 미국 시민권을 따라고 충고해줬죠. 후세인이 이란에서 돌아와서 저에게 프러포즈했고 일주일 뒤에 결혼했습니다.

팟캐스트: 결혼은 법원에서 하셨나요? 아니면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하셨나요?

수키: 우리 아파트에서 결혼식을 했죠. 원룸식 아파트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50명의 사람이 왔습니다. 웨딩 케이크를 제가 직접 구웠고 시어머니가 음식을 전부 하셨죠. 시더 스퀘어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지역에서 게토라고 할 지역이었어요. 백달러 정도 식료품을 사고 난 뒤에 결혼했죠. 오전에 법원에 가서 법적으로 결혼을 하고, 오후에 이맘을 찾아서 우리 아파트에서 결혼식을 진행했어요.

팟캐스트: 그때 삶이 어떻게 수키 씨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지 생각해봤나요? 아주 신기한 경험이었으니까요.

수키: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었으니까요. 제가 갈 수 있었던 길이 참 많았죠. 

팟캐스트: 그다음에 딸을 바로 가지셨나요?

수키: 딸 미트라를 21살 때 가졌고, 장남인 비잔을 2년 뒤에 가졌습니다. 미트라가 태어났을 때 저는 아직 대학생이었어요. 아직 대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상태였죠. 아들 비잔이 태어났을 때는 제가 치위생사로 일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제 남편… 제 전남편…

팟캐스트: 전남편….

수키: 네. 전남편은 대학교를 아직도 다니고 있었어요. 그리고 9년 뒤에 제 셋째 아이, 막내아들인 시루스를 가졌습니다. 세 명 다 파르시어를 배웠습니다.

팟캐스트: 셋 다 한국 이름인가요? 아니면….

수키: 페르시아 이름이죠. 그 애들에게 역사적인 이름을 주고 싶었어요. 우리가 독실한 이슬람교도가 아니라 이슬람교 이름은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름들을 주고 싶었죠. 웨스트뱅크 국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페르시아의 역사적 이름을 찾아서 확인했습니다. 딸의 이름은 태양의 여신 미트라와 그 종교에서 이름을 따왔죠. 장남의 이름인 디잔은 페르시아의 역사적 전사의 이름을 따왔어요. 막내 아들의 이름은 시루스인데, 유대인을 해방시킨 키루스 대제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팟캐스트: 셋 다 대단한 이름이네요

수키: 그렇죠.

팟캐스트: 미트라 잘랄리 씨가 미네소타 민주당에서 큰 두각을 드러내는 정치인이라고 들었어요.

수키: 네. 세인트 폴 시의회 시의원이고 현재 2번째 임기를 지내고 있죠. 최연소 여성 시의원이었지만 올해에 또 다른 몽족 여성이 당선되면서 자리를 내줬습니다.

팟캐스트: 아드님들은 무엇을 하고 있죠?

수키: 비잔은 행동심리학에서 석사를 땄어요. 현재 자율형 공립학교에서 교육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른 쪽으로 전직해서 현재는 유기농 쇠고기 판매업을 창업했죠. 최고급 유기농 쇠고기를 호주가 아니라 와이오밍에서 직송해 판매하는 사업이에요. 제 막내아들 시루스는 25세이고 환경 엔지니어입니다. 지역 대학교를 졸업했고 라이프타임 피트니스(미국 헬스장 체인)를 위해서 일하고 있죠.

팟캐스트: 그 헬스장 체인 말이군요?

수키: 네. 사우스 데일에 있는 옥상 수영장이 있는 지점을 그 애가 디자인했죠.

팟캐스트: 아이들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우시겠어요.

수키: 세 명 다 아주 자랑스럽죠. 하지만 좋은 아빠를 두기도 했어요. 후세인은 지금도 그렇지만 좋은 아빠였습니다.

팟캐스트: 후세인 씨가 치과의사가 되셨죠?

수키: 네. 결국에는 치과의사가 되었죠. 

팟캐스트: 수키 씨의 아이들이 성장할 때 아이들이 어떻게 정체성을 규정했죠? 자기 자신을 한국계라고 생각했나요?

수키: 네 그랬다고 생각했어요. 어렸을 때는 확실히 한국계라고 생각했죠. 한인 교회도 다니고 한인 주일 학교도 다녔습니다.

팟캐스트: 애들에게 한국어로 말하기도 했나요?

수키: 네. 하지만 한국어 자체는 얼마 못해요. 한국 음식은 아주 좋아합니다. 요리도 해서 먹기도 하지만, 한국어는 못하죠. 하지만 한국에 돌아가서 한국을 배우려고 해요.

팟캐스트: 돌아간 적이 있나요? 애들을 데리고 한국에 가본 적이 있나요?

수키: 아뇨. 하지만 그러고 싶습니다. 운이 좋다면 이게 다 정리되고 나서 내년에 가고 싶어요.

팟캐스트: 안식년을 취하시면서 말이죠?

수키: 네. 대신 우리 애들 세 명은 파르시어를 무척이나 잘해요. 제 시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었고, 애들을 대신 봐주셨죠. 그래서 애들에게 파르시어를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애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도 한국계 친척이 없어서 못 쓸 테니 애들 아빠의 언어를 가르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게 하는 일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팟캐스트: 집에서 수키 씨가 파르시어를 사용하기도 하셨죠?

수키: 네. 의도적으로 파르시어를 사용했습니다. 우리 애들이 적어도 제 문화적 역사나 그 애들 아버지의 문화적 역사를 알고 배워서, 자기 정체성을 공고히 했으면 했죠. 언어는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에요. 제가 미국에서 적응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영어를 몰랐기 때문이죠. 그러한 불편함을 애들에게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수키 씨가 한국 문화를 잃어버려서 느꼈던 감정을 애들에게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군요?

수키: 네. 한국 문화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대학교 때 한국계 학생들과 깊은 교류를 했습니다. 한국어를 다시 배우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한국어 실력을 갈고닦았어요. 한국 학생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다시 한국어를 배울 수 있었죠. 그러고 나서야 훨씬 기분이 나아졌어요.

팟캐스트: 한국어도 유창하게 하실 수 있군요?

수키: 꽤 하는 편이죠. 물론 여전히 많이 배워야 합니다. 요즘은 쓰기와 맞춤법 관련해서 공부 중이에요.

팟캐스트: 한국 유학생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한국어를 배우려고 했을 때 겪었던 문제가 있었나요? 한국어를 예전에 배워서 훨씬 쉽게 다시 배울 수 있었나요?

수키: 네. 한국어 자체는 다시 쉽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인들이 쓰는 단어가 어렵거나 그랬나요? 좀 더 고급스러운 단어를 사용했나요?

수키: 네. 한국에서 미국으로 왔을 때 어린아이의 한국어 실력을 갖추고 왔죠. 거기에 항상 어른들에게 말을 해야 했어요. 저와 비슷한 연령대의 한국인들과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비슷한 연령대의 애들과 이야기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팟캐스트: 존댓말을 했지만, 친구들 사이에서는 반말해야 하니까요.

수키: 친구들이 그걸 듣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친구이니까 괜찮다고 했죠

팟캐스트: 수키 씨가 젊은 엄마이셨죠?

수키: 그랬죠.

팟캐스트: 교외에서 사셨나요?

수키: 처음 미네소타주 플리머스시로 이주했습니다. 거기에서 집을 사서 살았죠. 거기에서 뉴 브라이튼에서 치과를 개업해 그곳으로 출근했어요. 우리 둘 다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 창업하기로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저는 후세인이 치과의사 면허를 따는 동안 치위생사로 4년간 다른 치과에서 일했죠. 그다음에 한 6개월 정도 다른 병원에서 일하고, 우리 치과를 따로 열기로 했습니다. 그 시기에는 한국계 치과의사들이 극히 드물었죠. 그래서 이란계 사회와 한국계 사회를 동시에 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저희 첫 고객들이 이란인과 한국인들이었죠.

팟캐스트: 아 수키 씨가 한국어로 광고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군요?

수키: 네. 거기에 한국계 치과 의사가 없었으니 그렇게 시작하고, 다른 고객들도 따라왔죠.

팟캐스트: 시부모님이 수키 씨를 받아들여 주셨나요?

수키: 네. 서로 마음이 맞았습니다. 얼마 전에 2분을 만나고 왔죠. 처음부터 너는 우리 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딸이다. 이라고 말씀하셨어요. 한 4일 정도 그분들과 같이 지내고 왔습니다. 그분들과 같이 한국 슈퍼마켓에 가서 그분들이 좋아하는 한국 음식과 물품을 챙겨드리는 일부터 시작하죠.

팟캐스트: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죠?

수키: 한국 음식을 전체적으로 좋아하시죠.

팟캐스트: 몇 가지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수키: 잡채를 가장 좋아하세요. 갈비도 아주 좋아하시죠. 탕이나 국 종류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지만 만두, 오징어 볶음도 아주 좋아하십니다.

팟캐스트: 아이들이 모두 어른이니 묻고 싶은 일이 있는데, 입양아들의 트라우마가 아이들에게 이어진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관련 문제를 겪은 적이 있나요?

수키: 아뇨. 그런 적은 없어요.

팟캐스트: 알겠습니다.

수키: 제 딸은 입양아의 자식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저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서 아이들도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저도 관련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아이들이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아이들이 자기 혈통이나 배경에 관해서 묻고는 하나요?

수키: 제 딸은 자주 물어보고 서로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애들이 본격적으로 궁금해할 시기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가족을 꾸리게 되면 그때부터 저에게 질문하겠죠. 지금은 단순히 흥미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수키 씨가 아이를 가져서 부모님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게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수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특히 아이들이 자라면서 특정 시기를 넘어가면 더더욱 그랬겠군요?

수키: 네. 졸업식, 시상식을 보면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보여드리고 싶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아이들을 보면서 엄마를 더 닮았다고 생각하신 적 있나요?

수키: 좋은 질문이네요. 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제 막내아들, 시루스는 매우 동아시아계처럼 생겼고 키도 무척 크죠. 아버지도 키가 무척 컸습니다. 시루스는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외모예요. 제 딸 미트라는 제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둥그런 얼굴이죠. 반면에 장남 비잔은 아빠와 많이 닮았습니다.

팟캐스트: 이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수키: 네. 

팟캐스트: 16년 전에 이혼하셨다고 들었고 지금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수키: 네. 처음에는 아주 충격적인 경험이었어요. 지금의 제 상태였다면 계속 결혼하고 있었을 겁니다. 제 결혼과 이혼은 제가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그러한 문제를 치료해야 했군요?

수키: 네. 그러한 문제가 결혼 생활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저 자신도 우울증에 걸려 있었지만 저는 그런 상황을 몰랐고 누구도 몰랐죠. 저 자신이 망가지거나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러한 문제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는 결혼 생활을 못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후세인은 활동을 위한 결혼 생활을 했어요. 젊었을 때는 서로 즐겁게 지냈지만, 우리 삶이 너무 빠르게 바뀌어서 활동을 위한 결혼 생활이 되었죠.

팟캐스트: 부모님이 너무 빠르게 되었군요.

수키: 데이트를 한 적이 없죠. 바로 결혼했고, 학교에 다니고, 아이를 가졌어요. 그래서 연인으로서 서로 마음을 나누고 친한 친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그때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셨죠? 랜드마크 팜? 프로그램? 아니면 치료?

수키: 정신 상담을 받았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최면 치료도 받았죠. 두 치료가 제 문제에 대해서 결론을 낼 수 있게 도와줬습니다.

팟캐스트: 입양 문제에 대해서 말이군요?

수키: 제 입양 문제에 대해서 결론을 내게 해줬고, 제 안에 있는 공허와 상실의 감정도 확인하고 견디게 해줬죠. 랜드마크 팜은 저에게 있어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그 토론회는 자기 스스로 공부하고 단련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다면 큰 도움이 되지 않아요. 랜드마크 팜과 세미나는 열심히 노력해야 해야 하죠. 그 토론회에 대해서 노력을 해서 무언가를 얻어갈 생각이라면 매우 좋은 결과를 얻어 낼 수 있습니다. 랜드마크 팜 관련 프로그램을 많이 진행했는데, 제가 낸 결론은 전 망가져 있지 않고 완성되어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살면서 여러 가지 문제점을 겪고 과거에 살아남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해왔죠. 이 모든 일이 모여서 저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모두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우리의 길을 되짚어 봐요. 그렇게 하면서 살아남기 위해서 적응하게 되죠. 충분하지 않거나, 사랑받지 않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자신을 바꾸게 됩니다. 많은 입양아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고 생각해요. 어떤 점이 부족하고 나빠서 왜 저를 사랑하지 못하고 버렸을까? 이런 생각이 삶 자체를 부여잡게 되고, 직업….

팟캐스트: 연애…

수키: 연애… 제가 이혼하고 나서 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노력했어요. 저 자신에 대해서 만족하게 사랑하게 되었으니 지금 현재의 지식을 가지고 제가 결혼했다면 결혼 생활이 달랐겠죠. 그러한 정신적 문제가 저에게 문제를 끼쳤으니까요. 후세인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저와 저 자신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죠.

팟캐스트: 독신 생활을 어떻게 생각하시죠?

수키: 흠. 그렇네요. 몇 번 연애했는데 청혼을 받은 적도 꽤 있었습니다. 제가 이혼한 뒤로 제 마음이 확실히 이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기로 했죠. 지금까지도 그러한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세 번 청혼 받았는데 전부 좋은 느낌이 들지 않았죠. 현재 독신 생활은 꽤 마음에 듭니다. 괜찮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훌륭한 친구들이 있고, 돈도 그럭저럭 잘 벌고 있고, 경제적으로 독립한 상황이고, 건강도 좋습니다. 제 삶에 남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죠. 지금은 남자가 아주 대단한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어서 제가 딱히 놓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관심이 없습니다. 전 14살, 아니 살면서 자신을 관리하면서 돌봤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수키 씨, 친어머니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수키: 여전히 희망을 품고 있죠. 지금은 좋은 남자를 찾는 일보다 어머니를 찾는 일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남는 시간이 있다면 저에게 형제나 자매가 있는지 알고 싶어요. 그 사람들이 제 가족이죠. 물론 제 아이들도 제 가족이지만,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 가족을 찾는 일이 연애를 하고 그러는 일보다 더 중요하죠. 정체성의 중심이고, 밤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가 죽기 이전에 어머니와 가족을 찾기 위해서 모든 일을 하고 싶어요. 절대 포기하지 않겠죠. 지금까지는 여러 가지 삶의 문제가 있어서 미뤄왔습니다. 아이들 양육, 제 직업 등이 있어서 바쁘게 달려왔는데, 지금은 아이들도 다 자랐고 더 책임이 없으니 시간을 투자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