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에 문신이 있는걸 보니 부모가 되찾고 싶어 했던것 같은데 이렇게 버려졌으니 입양보내도 되겠다’ 고 입양기관 담당자가 판단했대요.”
이번 주인공 사라 존스(Sara Jones)는 “혹시 내가 나온 테드 톡 봤어요? 조회수가 200만명 정도 되는데..” 라고 말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사람입니다. 다른 많은 우리입양인들과 마찬가지로 사라도 자신의 나이를 정확히 모른다고 합니다. 다만, 한국의 아버지가 그를 입양보낼 계획이 없었던 것만은 확실히 압니다. 그 증거가 있으니까요.
제 이름은 사라 존스에요. 1977년에 미국의 유타주로 입양되었어요. 그 뒤로 이곳에서 자라며 경력도 쌓았고 지금도 살고 있어요. 저를 지칭하는 대명사로는 “그녀”를 씁니다. 법적으로는 48세이지만 몇년 전에 친가족을 찾았을 때 제 진짜 생일을 알았는데 실제로는 제가 8달 일찍 태어났더라고요. 중년의 나이에 내 나이가 실제로는 내가 알던 것보다 더 많았음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반색할 만한 사실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또 그래서였나보다 하고 이해가 되는 것들이 있었고요. 그러니 마흔 아홉인셈이죠. 오늘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 사는 곳은 어디죠?
유타주의 솔트레이크 시에 살고 있어요.
테드톡에서도 다뤘지만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된 이야기를 좀 해주시겠어요?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테드 톡을 보셔도 됩니다.(https://youtu.be/8kjN1PnEGhA) 대략 말씀드리면 이제는 친가족을 찾을때가 된 것 같다고 느낀 때가 왔어요. 그리고 저는 운이 좋은 경우인데 제 몸에 입양되던 당시에 남겨진 것이 분명한 표시가 있었거든요. 신분확인을 위해 그게 있는 거라는 감이 있었고요. 왼쪽 팔 앞부분에 있었는데 어릴때 제 양부모가 수술로 그 문신을 제거해버렸었어요. 당시에 세살이었는데 이 미국에서 그런 문신을 가지고 살아가면 힘들거라고 생각하셨나봐요. 70년대였으니까요. 미국 문화에 동화되어서 살아가야 되는데 그런 이상한 문신이 있으면 힘들거라고요. 아무튼 그 문신 덕에 가족중의 일부를 찾을수 있었고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전부 다 찾은 것은 아니고요. 그래서 오늘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부분이 우리가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 현실이에요. 우리가 어디서 왔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는 현실이요.
와우, 굉장히 궁금하네요. 그래서 아직도 그 표식이 남아 있나요?
네. 성형수술로 제거됐었어요. 그때는 그게 유일한 방법이었대요. 그래서 팔에 희미하게 흉터만 조금 남아있었는데 어릴때 사진을 보면 가리고 있더라고요. 햇빛을 받으면 흉터가 진해질수 있으니까요. 아주 희미해서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 봐야만 보이는 정도였죠. “나에 대한 특이한 사실” 같은 토크 주제가 나오면 “내가 실은 문신이 있는데.”하는 정도의 소재였어요. 이 곳이 아주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곳이고 또 문신의 모양이 사람들이 그리 반겨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살면서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왔고요. 흔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어서 친부모를 찾겠다는 결심을 했을때 네임펜으로 문신 모양을 따라서 다시 그린후 그 사진을 가지고 여기 저기에 올렸죠.
십자가 모양이었나요?
무슨 표시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십자가 모양 혹은 알파벳 “X”에 가깝긴 한데 그 밑에 점 네개가 있었고요. 저희 부모님도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셨고요. 제 입양 서류에 그에 대한 언급이 있긴 한데 그들도 모른다고 적혀있더라고요. 혹은 알아도 모른척 했거나요(웃음). 이곳 유타에는 70년대 80년대에 동양인 비율이 1퍼센트에서 1.5퍼센트 정도였어요. 지금은 주 전역에 2.5 퍼센트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거의 대도시 근처에 집중되어 있긴 하지만요. 솔트레이크시만 따져보면 아시안 비율이 6-7%정도 되는데 생각보다 꽤 높죠. 아무튼 그때는 아시안을 만나기만 하면 왠지 말을 걸어야 할것 같고 그랬어요. 그래서 대화를 하게 되면 물어보기도 했어요. 혹시 이 모양이 무슨 뜻인지 아는지 본적이 있는지 혹시 중국쪽 상징인지 불교쪽인지 등등요. 그런데 확실히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 문신을 가지고 어떻게 했나요? 문신 덕에 찾게 되었나요?
진짜는 그때부터였죠. 입양되었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잘 몰랐으니까요. 일단 제 정보를 한국인들에게 뿌려야했죠. 입양 기록에 적힌 제가 태어났다는 도시는 알고 있었어요. 당시에 약 8천명 정도가 Korea Adoption Service(아동권리보장원)를 통해 가족 찾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곳에 제 정보를 입력할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어요. 어떤 핵심 키워드를 입력할수가 있게 되어 있었는데 저만 유일하게 “문신”이 핵심 키워드였어요. 꽤 특히하잖아요. 그리고 그곳 이외에도 페이스북등등 여기 저기에 제 정보를 올렸죠. 사람들도 많이 퍼날라주고요. 너무 감사했어요. 그때 페이스북에 한 그룹이 생겼는데 아동권리보장원에 있는 정보를 샅샅이 훑어서 퍼날라주던 그룹이었어요. 특히 어떤 특이한 정보가 있어서 친부모 찾기에 유리하겠다고 생각되는 포스팅들을 말이에요. 그 그룹은 특히 납치당한 아이들에 대한 정보를 많이 올려주었고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 그룹을 팔로우했는데 제가 그들의 마흔 아홉번째 포스팅이었거든요. 그걸 제 오빠의 지인이 보고 그 문신을 알아본거에요.
그러니까 오빠의 친구가 오빠한테 연락을 한거네요. 오빠한테도 같은 문신이 있었고 그걸 친구가 봤었나봐요?
네. 저에게 오빠가 둘이 있었는데 오빠들이 다 같은 문신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우리를 고아원으로 보낼때 잠시 맡겨만 둘 계획이었었나봐요.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때는 포기각서 같은 것을 썼어야 했나봐요. 그래서 그러기로 결정을 했을때 나중에 찾기 쉬우라고 아버지가 우리들의 팔에 문신을 새긴거죠. 70년대에는 이미 해외입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였고 그래서 우리를 못 찾을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을 한거죠. 오빠들은 결국 그 고아원에 8년이나 머물렀더라고요. 해외입양을 안가고요. 둘이서 같이 있었고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와 가족들과 함께 살았대요. 그런데 한국에는 문신에 대한 편견같은 것들이 있어서 친구들한테 놀림을 당했대요. 성형수술로 제거할만한 형편이 안 되었으니까요. 오빠들도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내왔는지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그들만의 사연이 있었던 거에요. 그 문신을 보고 우리 오빠들한테 연락했던 그 친구분이 그러길 제 오빠들이 그 문신만 보면 해외로 입양보내진 여동생이 생각나서 힘들어 했다고 기억하더라고요. 다들 너무 분노했고 특히 아버지가 많이 힘들어하셨대요.
그럼 이렇게 가족을 되찾게 된 과정이 상당히 빨리 진행되었나요? 마음의 준비는 되어있었나요?
준비가 되어있었다고 딱히 말하진 못하겠어요(웃음) 가족과의 재회는 빨리 진행이 됐죠. 이래저래 넘어야 할 장벽들이 조금씩은 있었죠. 진짜 큰 장벽은 막상 재회를 하고 나서 찾아왔죠. 일단 엄청난 언어의 장벽이 있잖아요. 통역이 항상 정확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모두가 다 저를 찾아서 기쁜 마음으로 소통을 한다는 것은 알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럴거면 도데체 나를 왜 찾아낸거야’ 같은 의문은 전혀 안들었어요. 그런 사례들도 있잖아요. 그래서 한국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일도 즐거웠고요. DNA 검사 결과는 좀 의외였지만 다른 모든 증거들이 맞아 떨었거든요. 그래서 만날 계획을 바로 잡았어요. 그때는 제가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막상 그 순간이 되면 엄청난 양의 새로운 감정들이 밀려 오잖아요. 엄청나고 엄청 지칠만큼에요.
그리고 그때 이곳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네 입양부모님들은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였어요. 거의 모든 사람들이요. 대답하기 지칠만큼요. 그래서 지인들이 같이 점심이나 먹으며 이야기 하자는 이런 말들이 다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 하는 것도 너무 지치고 무엇보다 아직 저에게도 낯설고 또 현재진행형 이었잖아요. 다들 너무 잘 됐다고 해피엔딩이라고 이야기 좀 더 해달라고 하는데 너무 지칠정도였죠. 특히 이 모든 일들을 멀리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어떤 축하 이벤트 정도로 생각하고 잘됐다고 포옹해주고 박수쳐주거나 하는등의 미국인의 관점과 방식들이 좀 빈정상하더라고요. 실제로는 굉장히 복잡하고 무거운 문제인데 말이죠.
가족들이 강제로 헤어져야 했고 아동인신매매였을수도 있는 그런 심각한 상황이죠 아버지가 해외로 보내질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포기각서를 썼던 안썼던간에 말이죠.
맞아요. 요즘 상실(역자 주 – Grief)의 개념이 많은 화두가 되어서 반갑기도 해요. 보통 입양인들 본인이 느끼는 상실감을 많이 생각하는데 우리 아버지가 느꼈을 상실감을요. 아빠가 다치셔서 우리를 보러 자주 못 왔었대요. 그래서 할머니가 대신 보러 오곤 했었는데 어느날 막내 손녀가 입양을 위해 다른 고아원으로 보내졌다고 하더래요. 그냥 통보를 받은 거죠. 그래서 아버지가 느꼈을 상실감을 생각해봐요. 찾을 수 있는 방도도 없었고 뭐랄까 아이가 죽은 거나 마찬가지 잖아요.
그래서 저는 아이가 다른 나라로 입양을 가게 되면 그 가족들 전체가 죽는거나 마찬가지라고 봐요. 되돌릴수도 없고 되돌릴 권리도 없고요. 그냥 잊어버리고 살거나 해야죠. 사랑했던 사람이 죽은 거나 마찬가지죠. 그래서 테드톡에도 나갔던 거에요. 실은 솔트레이크 시티의 TEDx(역자 주 – 특정 지역인들이 모여서 여는 강연회)였는데 테드톡 담당자들이 TED로 뽑아줬어요. 아무튼 그런 감정들이 입양인들에게는 아주 분명한데 일반 사람들은 알길이 없죠.
주변 사람들 특히 비입양인들로부터 제일 많이 들었던 질문중에 하나가 “친가족을 만나는 것에 대해 입양부모가 어떻게 생각할까?” 라고 했잖아요. 그 질문이 왜 그렇게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걸까요? 이 일이 입양부모의 허락이라도 받아야 하는 일로 보여지나봐요.
양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할때 아주 쉬운 질문이지만 그런 질문을 받을때 내가 심정이 어떤지를 모르고 묻는 것 같아요. 다른 입양인들도 똑같이 느낀다고 가정하진 않을게요. 제 경우에는 그런 질문을 받으면 제 입양부모와의 지난 45년 세월이 다 떠오르거든요. 좋은 때도 있었고 안좋을 때도 있잖아요. 문제는 입양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차원을 넘어서 내가 선택한 답에 대해 해명을 해야 한다는 거에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제 선택을 정당화해야 하는 거죠. 그게 너무 스트레스였어요. 그래서 그냥 “이건 온전히 내 개인의 일이야” 라고 핵심만 대답하곤 했어요. 제가 그때 나이가 마흔이 넘었었는데 오년전이었으니 마흔 셋쯤 되었을때에요. 나이가 중요한건 아니지만
완전히 성장한 개인이죠
그렇죠. 다 큰 여자이고 이건 내 일이라고요. 누구 허락을 받을 일이 아니라고요. 내 남편에게조차도요.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죠. 그렇다고 해도 동의를 구해야 할 문제는 아니죠. 문제는 우리 입양인들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할때마다 항상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수 있도록 이해시켜주어야 할것만 같은 입장에 있어요. 그래서 오히려 더 스트레스였던 것은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그런 질문들을 하는데 저에게는 가볍게 답할수 있는 질문들이 아니었다라는 거죠. 그들이 제가 왜 그래야 하는지 아님 왜 안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해명을 들을 권리가 있는것도 아니고요.
이 사회가 우리 입양인들은 그저 감사하며 살아야 하고 친부모 찾기를 하면 배은망덕한거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으니 그런 생각없는 질문들이 튀어나오는 거죠. 혹시라도 입양부모가 상처받는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그들의 감정을 우선시하면서요.
평생을 다른 사람의 기분을 먼저 살피며 살았잔아요. 또 그래야 하는거죠. 내가 잘못했을지도 모른다는, 평생 내 모든 행동의 밑바닥에 깔렸있던 감정말이에요. 그 사람들은 자기들을 뭘 물어보는지도 모를거에요. 그래서 혹시라도 주변에 입양된 사람이 있어 대화를 할때 이런 부분을 배려해 줄수 있도록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참 유익한것 같아요. 아무튼 서로 깊게 아는 사이이거나 하면 그래 실은 이래하며서 이야기를 해줄수도 있지만 아무 생각없이 그냥 치고 들어오는 그런 무지한 수준들도 있잔아요. 물론 다들 악한 의도는 없죠. 사람들도 다 너무 깊고 예민한 주제만 아니면 다들 배우고 싶어할 거라 생각해요
그런데 또 미세차별인 경우도 있잖아요. 쉽게 힘든 경우인데. 그런 경우 피드백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도 중요하죠. 그냥 대충 넘겨버리고 말아햐 하는지 아니면 이 사람이 들을 귀가 있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인지 항상 상황판단을 해야 하죠. 그런 부담이 항상 있는 것이 억울하지만 사실이에요.
한국에서 가족들과 재회했을때의 이야기를 좀 해주실래요? 어떤 생각과 느낌 이었는지 말이에요. 어떤 입양인들에게는 어쩌면 평생 경험할수 없는 일 일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아직 대중에는 공개안 한 이야기가 있어요.(웃음) 만감이 교차하는 상황이었어요.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할 상황이었죠. 장거리 비행등 모든 것이 지치죠. 그리고 방송 촬영이라는 복병도 있었고요. 출발하기전 미국에서부터 촬영을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었어요.인천공항에서 세관을 지나서 특정 게이트로 나가야 하잖아요. 담당피디로부터 어느 게이트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문자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막 게이트를 나가려고 하는 참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공항 직원이 다른 게이트로 나가야 한다고 하는 거에요. 바로 게이트 앞에 서있었는데 말이에요. 제 남편이 한국어를 조금 할줄 알아서 통역앱등을 총 동원해서 바로 이 게이트 앞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곳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는데도 안된다고 다른 게이트로 나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니 여기 지금 이사람들은 다 뭐냐고 이 사람들은 다 이 게이트로 나가는데 왜 우리는 안되냐고 도데체 우리한테 왜 이러는거냐고 항의했어요. 이해가 안되었죠. 오빠랑 방송 관계자들이 바로 저 문앞에서 몇시간째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다른 게이트로 가라고 말하기가 너무 미안한 상황이었거든요. 조금 스테레오 타입을 동원해서 말해보자면 한국의 부정적인 면을 그 직원이 보여줬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우린 그냥 갈거라고. 사람들이 기다린다고 우리 그냥 이 게이트로 나갈거라고 막 성질을 부렸어요. 그랬더니 보내주더라고요. 그래서 그 영상을 보시면 제가 웃고있다가 갑자기 표정이 확 굳는걸 보실수 있어요. 안그래도 힘든데 말이죠. 공항 빠져나가기가 그렇게 힘들줄 누가 알았겠어요. 오빠들은 이 이야기를 몰라요. 제 입장에서는 ‘설마 지금? 여기에서까지 세상이 나한테 이렇게 팍팍할까’하며 살짝 울컥한 기분이었거든요. 제 남편과 아이들은 제가 한번씩 폭발하는 것에 익숙해서 ‘지금 엄마 건들면 안돼’ 이런 분위기였고요.
첫 만남은 아주 기뻤죠. 물론 핸드폰등으로 텍스트를 사용해야했지만 나랑 똑같이 생긴 사람들을 마주하는 기분이 좋았어요. 동시에 시각적인 정보를 마음속으로 빨리빨리 평가를 해야 하잖아요. 일단 시각적으로 외적인 면을 평가해야하죠. 오빠들이랑 포옹을 했는데 저랑 몸집이 비슷하더라고요. 제가 미국에서는 많이 작은 편이거든요. 오빠들이랑 키가 비슷하네 두상이 똑같네 등등의 정보가 즉각적으로 들어오고 알아채고 관찰하고 하는 평가들이요. 그리고 수십년을 걱정하고 궁금해하다가 마침내 만난 기쁨도 그렇고요. 오빠들이 궁금해 했던것과 제가 궁금해햇던 것은 많이 달랐어요. 저희 오빠들은 제 어릴때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니 오빠들에게는 큰 아픔이었죠. 막내동생을 잃어버렸다는. 살아 있기는 하는지 화목한 가정을 만났을지 하는 걱정들 말이에요. 그래서 오빠들이 알고싶어했던 것과 제가 알고 싶어햇던 것이 달랐죠. 저는 우리 가족들은 어떻게 생긴 사람들일까 하는 궁금함이었고요. 저는 어릴때 읽었던 “꼬마고아 애니”스토리말고는 지금까지 한번도 제 남편과 아이들을 잃는다는 상상도 해본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 모든 가족들과 오빠들이 생겼다는 것이 피부로 와 닿았죠. 저는 자매들하고만 자랐거든요. 그래서 제 입장에서는 많은 것을 관찰하고 머릿속으로 정리해야 하는 순간었지만 오빠들 입장에서는 지난 수십년간의 세월동안 쌓여진 원망과 아픔들이 터져나오고 해소되는 시간이었죠. 그 사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저를 다시 찾은 것을 못 보시기 때문에 더 원통했을것이고요. 그래서 오빠들은 오빠들 나름대로 해소할 것들이 있었고 저와는 달랐죠. 그렇지만 한 마음으로 기쁜것은 같았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때 분노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잔아요. 오빠들도 그랬을까요?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아버지에 대해 분노했을수도 있고 사회나 한국 정부에 대해 분노했을수도 잇고요. 사라씨도 분노를 느꼈나요 아니면 아직인가요?
그럼요. 가족들은 찾기 전부터 많이 화나 있었어요. 저는 다른 입양인들처럼 저의 입양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었어요. 아니 그러도록 제가 저를 놔두질 않았죠. 그래서 마침내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분하고 원통한 감정이 올라 오더라고요. 제 앞에 깊게 자리하고 있었지만 한번도 다뤄지지 않았던 감정 말이에요. 그 감정을 정확히 이름을 붙이지는 못하겠어요. 지금은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도 거짓과 허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잔아요. 그런데 제가 입양기관에 연락해서 혹시 70년대에 전주에서 온 문신이 있었던 여자 아이를 기억하는냐고 물었거든요. 그랬더니 굉장히 상투적인 형식으로 당신의 생일은 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정보의 전부입니다. 하는 답이 돌아왔어요. 제가 묻지도 않았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제 진짜 생일을 알고 있었던 거죠. 저는 평생을 몰랐는데 말이죠. 제 삼촌이 확인을 해줬어요. 제 생일이 삼촌의 생일에 가까웠었대요. 년도는 달라도 날짜가 하루이틀 정도만 차이났었대요. 그들이 제 정보를 40년 넘게 가지고 있었고 저는 몰랐다는 거죠.
그리고 또 분노했던 순간이 입양기관에서 제가 버려졌다고 주장했잔아요. 제 기록에 남겨진 서류가 있었는데 흔치 않은 일이죠. 담당자가 남겨둔 서류에 의하면 “팔에 문신이 있는걸 보니 부모가 다시 찾길 원한 모양인데 이렇게 버려졌으니 해외로 보내도 되겠다” 라고 써있었어요. 버려졌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그들이 규정할수 있죠? 저는 오빠들이랑 같이 맡겨졌고 모두 같은 문신도 있었잔아요. 그리고 근처 지역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가 누구의 자식들인지 알았을수도 있고요. 그런데도 가족과 떼어내서 해외로 보내버렸잔아요. 그런 결정을 누가 할수 있는거죠? 서류에 적혀 있던 말도안되는 결정을 어떻게 할수 있는거냐고요. 그리고 법적으로 “포기”됐으면 해외로 보내도 되는거였냐고요.
수많은 아이들이 이렇게 “버려졌다”는 꼬리표를 달고 해외로 입양이 되었다는 이 억울함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 “버려졌다”라는 단어가 그 아이들이 성장하며 자존감을 쌓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저만 영향을 받은건 아닐거에요. 저는 버려진것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다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고 그것들이 쌓이죠. 그러니 이 분노는 아주 자연스런 반응이에요. 제 경우에는 제가 해외로 입양됐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어요. 저에겐 가족이 있었잖아요. 고아원에서 계속 자랐다면 완전 끔찍했겠죠. 우리 오빠들이 그랬대요. 제 미래가 핑크빛이었을 거라고 말하는건 아니지만 굳이 나라 밖으로 보내질 이유까진 없었다는 거죠. 그리고 평생을 “더 잘 된 일이야. 너무 감사하지. 이렇게 교육도 받고 기회도 얻고. 자랄수 있었잔아”… 그런 메시지와 싸우며 살아가지 않을수 있었다는 거죠. 오빠들처럼 저도 집으로 돌아갔을거에요. 결국 성매매 여성이 되었거나 아니면 궁핍한 생활을 하지 않고요. 저희 가족들이 저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아니고 한국에서 고아로 자랐다면 어땠을지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잃어버린 놓쳐버린 모든 것들을 이젠 되찾을수 없잖아요. 그냥 감내해야죠. 어떻게든요.
굉장히 심오한 경험이었을거에요. 우리 입양인 모두가 내가 한국에 계속 살았다면 어땠을까하고 시나리오를 써보는 내적경험을 하잖아요. 이것은 한국이 좋고 이것은 미국이 좋고 하며 비교 해보기도 하고요. 사라씨의 경우에는 솔트레이크 시티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강연도 하고 그 분야의 전문가이고 남편도 저명하시고 아이들도 둘이나 있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었구나 하고 생각할수도 있죠. 친가족과 재회를 했을때 사회경제적지위의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잖아요. 한국의 가족들이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했을 수도 있고요. 그런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였나요? 그리고 한국에 살았다면 삶이 어땠을지 그림이 그려졌나요?
한국에 살았으면 좋았을점 부터 시작해볼까요? 가족들을 만나서 오래전에 그 궁핍했던 때로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들어보니 고생을 참 많이 했더라고요. 그리고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버지가 굉장히 똑똑하고 전략적인 분이셨대요. 과감한 성격이었고요. 제가 그 부분을 많이 닮았어요. 저는 운 좋게도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었지만 저도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요. 그래서 제 삶을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 볼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서 감사하죠. 내 가족이 그렇게 안 좋은 상황속에서도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었고 나한테도 그런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어서 다행이었어요. 제 오빠들은 택시운전을 하고 있는데 택시운전사가 그렇게 안좋은 직업인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한국에서 살았으면 맞이했을 최악의 상황인건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지금 특히 이곳 미국에서는 모든 것을 계급적으로 봐요. 한국도 물론 그렇지만요. 어른들이 우리를 위해 미리 내려 놓은 결정 속에서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갖게 되었느냐에 따라 우리를 평가하죠. 지금 하는 이 이야기가 Adoptees Citizenship Act (역자 주 – 입양인 시민권 조례, 다른 나라에서 미국으로 입양되어 온 사람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주기 위한 법률. 2023년 현재 아직도 미결 )의 미래의 활동 주제로 이어질 수도 있는데요 저는 제가 성공한 입양인(역자 주 – Model Adaptee)의 모델로 쓰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저를 보며 ‘저 사람을 좀 봐. 입양되어서 저렇게 잘 살게 되었잔아. 좋은 교육도 받고 기회도 많이 누리고. 그러니 입양은 좋은거야’ 라고요. 그런데 다 그런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성공한 입양인이라는 신화가 사라졌으면 해요. 그리고 제가 사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고 인지도도 있기 때문에 입양이 되면 다 저렇게 잘 되나보다 하는 인식이 저로 인해 퍼질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아요. 사람들이 입양제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더 깊이 들여다 보며 실제로는 이런 문제들이 있구나 하고 알아보게 해야 되는데 말이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네 운이 좋았네 그러니 불평하지 마 이런 식의 대화 보다는 조금 더 깊은 대화가 있었으면 어떨까 해요. 오래되어서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다 가졌다고 생각이 될때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는 쉽다(It is really easy to think that you haven’t lost anything when it seems like you have everything).”라는 말을 테드톡에서 했었어요.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런 특권들을 모두 잘 알고 있고요 그리고 그 특권들이 이 입양시스템 안의 문제들을 찾아내서 해결책을 찾아보는데 큰 도움이 되는 특권들이죠. 그래서 그런 특권들을 이제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써보려고 해요. 나한테 다른 사람한테 없는 이런 특권들이 있으니 이제는 그걸 이용해보자 하는 생각이에요. 굉장히 복잡하지만요. 카오미씨는 입양인들을 많이 인터뷰했으니 잘 알겠지만 다들 저 같은 경험들이 있는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일단 문제를 한번이라도 깊게 들여다본 경험을 한 입양인들이라면 그냥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이 입양에 대해서 고민하는지 아닌지 말할수는 없다는 것을 알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 사람의 외적인 성공지표로 그 사람이 입양제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면 안되죠.
맞는 말이에요. 입양에 대해 흔히들 쉽게 하는 말중에 하나가 가족과 재회를 하면 새로운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죠. 가족과의 재회를 함과 동시에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서 알게 되잖아요. 친가족을 찾았으니 이제 가족이 더 생긴거라고만 생각하고 동시에 그들을 더 잘 알게 될 기회는 잃어버렸다는 것은 생각 안하죠.
그 이야기를 꺼내줘서 너무 고맙네요. 가족들과 재회했다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기쁘기만 할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아직도 딱 들어맞는 말을 찾지 못했는데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것은 아니잖아요. 제 오빠들이나 삼촌과 고모이모들은 저를 되찾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들을 되찾은 것이 아니죠. 그리고 서로간의 언어장벽이 있다는 상황이 어떤건지를 사람들은 몰라요. 그래서 부모를 찾았는데 같은 언어로 소통할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워요. 만났다고 해서 바로 끈끈한 정이 들거나 하는건 아니고 말이죠. 지난 9월에 코비드 이후 4년만에 처음으로 다시 가족을 만났는데 뭐랄까 두번째 데이트를 하는 느낌이었어요.
아직도 조금씩 서로 알아가는 단계고 마치 달팽이처럼 아주 천천히 알아가는데 많이 지치죠. 한국어를 배우려고도 해봤는데 일도 해야하고 가족도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게 쉬운일이 아니고요. 언어를 배우려면 아예 몰입해야 하잔아요. 그리고 살아온 이야기같은 깊은 이야기까지 하려면 도달해야 하는 단계가 있으니 그것도 쉽지 않고요. 그러니 어쩌면 되찾았지만 전부 되찾은것은 아니죠. 그리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잖아요. 그 잃어버린 시간들과 죄책감같은 것들까지도요. 이렇게 쉽게 찾을줄 알았다면 이렇게 가능할줄 알았다면 좀더 일찍 찾아볼걸 같은 생각들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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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오래 기다린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고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왜 그들은 나를 찾지 않았지? 왜 나만 죄책감에 시달려야해? 왜 내가 다 해야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뭐 누구를 책망하고 그러자는 것은 아니고 그런저런 생각의 파편들이 생긴다는 말이죠. 모든것이 참 복잡해요. 나 자신과 그런 생각들에 대해 혼자 묻고 답해요. (웃음) 그래서 재회나 가족의 확대 보다는 회복이라는 말이 맞는것 같고요. 그렇다고 해도 완전한 회복 아니죠. 영원히 회복 못할 것들이 있으니까요.
사라씨가 성공한 만큼 돌려주고 싶다고 했잔아요. 사라씨 같은 기회를 얻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에요. 미국 시민권에 대한 거죠?
솔직히 이번에 너무 크게 실망을 했어요. 이번 116번째 입법회기에서 결의안이 통과되지 않았거든요. 너무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사는 곳의 주상원의원이 유타주의 의석을 가진 최초의 아시아계 여성이에요.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해서 유타로 와서 경력을 쌓은 사람인데 어느날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해외입양과 입양인시민권부여법안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그가 그럼 결의안을 채택해보자고 하더라고요. 시민권은 연방법인데 주결의안이 어떻게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자고 그녀가 저를 설득했어요. 제가 그 전에 주경제와 관련해서 결의안을 채택해본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쪽도 내가 할수 있는 일이 되겠다 싶었어요. 다른 주와 도시에서도 입양인 시민권에 대해서 결의안을 채택했기때문에요. 그래서 그때는 제가 아직 Adoptees for Justice(역자 주 – 2018년에 입양, 이민, 인종 그리고 사회적 정의를 위해 결성된 입양인 주도의 국제 조직)에 직접 관여하기 전이라 그쪽에 연락을 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같이 연대하고 싶다고 했더니 유타주에도 활동을 하고 싶어하는 입양인이 있었냐며 반기더라고요.
이쪽 유타주는 의회대표자들이 전부 공화당이거든요. 그래서 초당적인 법안을 통화시키려 할때는 공화당의원들의 협조를 많이 받아내는 것이 정말 중요해요. 민주당의 협조는 받아내기가 쉬워요. 그래서 이렇게 두 당의 협조를 모두 받아내는 것을 전략적으로 도왔죠. 상원이랑 하원 모두 사법위원회에서활동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었거든요. 제가 왕년에 변호사였었던 터라 모든 분야를 알면 위험할정도로만 알아요(웃음). 그래서 이런쪽에 제가 도움이 될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홍보하고 언론의 주목을 끄는 등의 활동을 조직하고 관심을 이끌어냈죠.
미국만이 시민권을 자동으로 주지 않는 나라에요. 좀 창피하죠. 다른 나라는 이런 문제가 없어요. 지금 벌써 9년째인데 그럼 Adoptees for Justice에서 10년이나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우리 법안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헛점을 바로잡기 위해서요. 그러니 올해 이 일이 마무리 됐음 좋겠어요. 솔직히 저는 그 전에는 시민권이 없는 사람을 만난적이 없어요. 이일을 하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추방당할 걱정속에 법에 안 걸리기만을 바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저도 알게 되었어요. 요즘 이민법이 제일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이슈잖아요. 자칫 하나 아주 작은 일에도 출신국으로 내쫒길수 있죠. 한국인 입양인들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고 26개국이 해당되는 것으로 알아요. 그래서 저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도 해봤어요. 모두 저와 마찬가지로 평생을 유타에서 보낸 사람들이요. 그러면서 이 시민권에 대해서 제가 얼마나 당연하게 생각해 왔는지 알게 됐죠.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들을 정치적 지도자들이 이 일에 관심을 가지고 해결하는데 동참하도록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혹시라도 여러분께서도 관심이 있다면 동참하는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싶어요. 그리고 필요하면 저 같은 사람들이 각각의 지역 정치인들을 동참시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안내해드릴수 있어요. Adoptees for Justice가 오래 이 일을 해왔고 전문가들도 많이 관여하고 있고 미국 전역에서 멋지게 해오고 있어요. 제가 비영리 단체와 일을 많이 해봤는데 이 Adoptees for Justice가 일을 진짜 잘 하더라고요. 그러니 같이 활동하고 싶으시면 시간낭비는 아닐거에요.
대략 현 상황을 좀 알려주시겠어요? 시민권이 없는 해외입양인들이 이 나라에 몇명이나 있고 이런 일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요.
지금 대략 이만 오천명에서 오만명 정도의 해외 입양인들이 시민권이 없는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 중에 많은 수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순간 갑자기 여권이 필요하다거나 연방정부와 관련된 일을 하려 한다거나 할때 갑자기 알게 되는 거죠. 은퇴후에 의료보험이 필요해서 지원했는데 갑자기 자기가 미국 시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상황을 상상해보세요. 많은 경우에 비자를 받아서 미국에 들어왔기 때문에 사회보장 번호도 있고 이미 세금을 내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모를수 있어요. 만약에 이렇게 몰랐던 경우에는 부모가 귀화절차를 밟지 않았거나 몰랐거나 혹은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랬을거에요. 어떤 입양인들은 임시보호가정으로 보내지기도 하고 다시 입양이 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이유는 정말 많은데 그 중에서 입양인 자신이 잘못한 경우는 하나도 없죠. 시민권이 없는 것이 그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요. 그래서 2000년에 절차를 조금 간소화 하는 법이 만들어 졌는데 그 말은 그 전까지는 관련법안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에요. 몇몇 입양인 부모들이 해외입양절차를 간소화 하고 해외입양인들에게 시민권을 자동부여하자는 의견을 의회에 내었어요. 저도 열네살까지 시민권이 없었어요. 입양은 세살에 됐는데 말이죠. 그래서 의회에서 합법적인 입양에 대해서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상정이 되었는데 아무런 법률적 하자가 없는데 왜인지 계속 통과가 안 되고 있어요.
만약 입법이 되면 미성년 입양인에게는 모두 해당이 될거라고 해요. 성인 입양인은 아니고요. 입양인들이 입법과정에 참여를 안하니 생기는 일이죠. 실제 이 일에 영향을 끼칠수 있는 사람들중에 입양인들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이 Adoptees for Justice 팀하고 같이 일하는 것을 좋아해요. 입양인들이 주체가 되는 조직이니까요. 같이 조사하고 연구해서 이제는 영향력을 미칠수가 있게 되었어요. 사소한 법률적 문제만 고치면 되는데 문제는 제일 첫 발을 2000년에 떼었는데 2001년에 911이 터지고 그 뒤로 10년이 지났죠. 그리고 한 대통령이 이민을 굉장히 어려운 주제로 만들어 버렸죠. 우리가 고치고자 하는 법은 가족에 대한 법이고 거기에 이민관련 세부조항만 하나 고치면 되는건데 말이에요. 생물학적 형제지간인경우 시민권을 줄수 있는데 입양형제는 줄수 없어요. 아주 불평등하죠. 혈통 우선인거죠. 입양이 됐건 안됐건 같은 권리를 부여받아야 되는데 아닌거죠.
그래서 이걸 고쳐야 하는데 자꾸 지금 정치적으로 뜨거운 이민관련 이슈로 분류되어 법안이 표류하고 있어요. 2000년에 처음 이 운동이 시작됐을때 이렇게 오래 걸리리라곤 다들 생각 못했을거에요.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다들 삶을 살아가야 하잖아요. 살면서 잘못도 저지르고 그러다가 사법처리를 당할 일이 생기면 그때가서야 시민권이 없는 것을 알고 형을 살고 나오면 바로 추방당해버려요. 너무 끔찍하고 몰인정한 처벌이죠. 우리 친자식들이면 그렇게 하겠냐고요. 제가 자꾸 언성이 높아지는데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나서 그래요. 그냥 앞뒤가 안 들어맞아서 더 화가 나나봐요. 이런일이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너무 화나요.
그래서 내가 도움이 될수 있는 일이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저처럼 사업경력이 있거나 아니면 의회에 아는 사람이 있거나 해야 동참할수 있는건 아니에요. 여러분 지역구의 정치인들을 움직이시면 되어요. 지역구 유권자가 하는 말이면 듣거든요. 미국에 사시는 경우에는 하원의원과 상원의원한테 의견을 전달할수 있는 권리가 있어요. 그들은 들어야하고요. 그들이 이 일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요? 아닐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의견을 전달할 수 있으니 Adoptees for Justice에서는 원하시면 도움을 드릴수 있어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등등에 대해서요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요. 저도 이 일을 하면서 공부를 많이 했거든요. 그 전에 회사소속 변호사였어서 이민법등에 대해서는 전혀 도움이 안되었었어요. 다른 분들한테도 좋은 기회가 될거에요.
유타주는 공화당이 우세인 주잖아요.
네 아주 보수적이죠.
그럼 의회쪽 사람들한테 어떤 식으로 접근하죠? 반응은 어떤가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원하는 것들이 크게 다르지 않아요. 유타주가 가족을 아주 우선시 하는 곳이거든요. 일단 여러분이 사는 곳과도 접점을 찾아서 공략해보세요. 유타는 전통적으로 난민들에게도 굉장히 우호적인 곳이었어요. 70년대에 제가 어렸을때 저희 집에도 난민들이 같이 살았던 적이 있었고 임시보호를 한적도 있었어요. 그래서 임보형제자매랑 가족들도 많이 생겼어요. 그래서 그렇게 난민들을 환대했던 역사가 있고 가족우선주의에요. 가족이 기본이고 아이들을 정말 중요시 하죠. 유타주가 유소년인구 비율이 미국 내에서 제일 높은 주 중에 하나일거에요. 그리고 또 한가지 유타가 특이한 점은 커뮤니티가 작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일들이 더 빨리 추진되기도 해요. 캘리포니아 같은 곳은 경우가 다르겠지만요. 그래서 어디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지를 아는 거죠.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시작할때 이렇게 말하는 거죠. 우리 유타에서는 이렇게 가족을 우선시하고 아이들을 중요시하고 난민들을 환영해왔는데 유타의 가정에 합법적으로 입양된 아이들이 작은 법률상의 하자로 인해 시민권이 없는 경우가 있다. 라고 운을 떼는 거죠. 그러면 다들 세상에 말도 안된다면 놀라요. 몰랐다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몰라서 문제인거죠. 한가족에 친자식들은 시민권이 있고 입양된 자식들은 시민권이 없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고 잘못된거 아니냐고 말하면 다들 동의해요.
가족에 대한 일이니까요. 우리가 가족의 중요함을 믿고 입양이 아이들에게 가족을 찾아줄수 있는 길이라고 믿는다면 여기에 잘못이 있다는 것에도 동의해야죠. 물론 그후 법을 어떻게 개선하느냐로 들어가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지만 일단은 그렇게 자기한테 시민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을 알아야죠. 시민권이 없다는 것을 알되 된 후에는 이민온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민법을 상대해야 되는데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백인인 미국 시민들이니 더 어렵고 힘든 상황에 빠지는 것이지요. 거기다가 이민법이 너무 복잡해서 변호사를 고용해야 되는데 보통은 그럴 여력이 없죠. 그리고 그럴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사회경제적 여건이 안되는 경우가 대부분 이구요. 그리고 거기까지 갈수 있다 하더라도 이 사안에 대해서 경험이 있는 변호사를 만나기가 힘들죠. 이민알선기관들도 이 사안에 대해 알고 있고 대비가 되어 있는 경우가 거의 없고요. 그러니 이리저리 옮겨다니게 되는 거고요. 이일이 얼마나 복잡한 문제인지 사람들은 몰라요. 이런 상황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사람들은 모른다고요. 사람들한테 알리고 이 일에 동참하게 하는 일은 차라리 쉬운 일이에요.
일단 사람들이 동참하고 나면 그들과 연합해서 그들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슈와 연합해서 공동전선을 펴야해요. 정치인들은 항상 자기 지역구의 유권자들이 어떤일에 관심이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지역구의원이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럼 좋구요. 입양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도 좋구요. 국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것도 좋아요. 왜냐면 군대쪽이 해외 입양이 이루어지는 제일 큰 경로거든요. 이렇게 지역구 의원이 중요한 기치로 내건 사업들이 있으면 그것과 이 입양인 시민권을 어떻게든 엮을 수 있어요. 그런식으로 연합해서 지지를 이끌어내는 거에요. 유타의 경우는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우리 상원의원이 일단 구두로 약속을 했거든요. 최종 문안을 볼때까지는 아무도 공식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아요. 이번 하원에 있는 모든 의원들이 일단 구두로 지지해준다고 약속을 했어요. 물론 끝날때까지 가봐야 알겠지만 그래서 항상 커뮤니케이션채널을 열어둬야 하고요. 보통은 다들 동의해줘요. 말이 된다 싶으면 토를 달지 않고요. 그렇지만 법안이 통과되는 과정을 잘 알고 어떤 변수들이 있는지도 잘 알아야 해요.
범죄를 저질러서 수감된 입양인들의 경우에 어떤 장애가 있을까요? 이 법안을 지지하기를 꺼려하는 이유가 시민권을 범죄자들한테도 그냥 줘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나온다고 들었어요.
그 부분이 아무래도 제일 큰 걸림돌이 되는 부분이죠. 문제는 실제 현실을 입법가들한테 알리는 거에요. 첫번째로 그들 모두 아이들일때 미국 의회의 승인에 따라서 미국에 입양이 됐어요. 의회가 이 일을 승인했으니까요. 그러니 이 문제는 의회의 문제라고 봐야해요. 입양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고요. 그리고 두번째로는 그들이 처벌을 받잔아요. 미국이라는 이 나라에서 우리는 정당한 처벌과 그 효과를 믿죠. 그런데 처벌을 한다음에 출신국으로 되돌려보내는것이 정당할까요? 가족도 없고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곳으로요. 이건 명백히 부당한 처사에요. 그런데 이것이 바로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죠. 특히나 그들이 저지르는 잘못들이 어떤 중대범죄가 아니에요. 그런 경우는 아주 극소수죠. 아무리 잔인한 연쇄살인범이라 하더라도 미국 밖으로 보내버리지는 않잔아요. 그래야 될지도 모르겠지만요(웃음) 농담이에요.
이런일은 중단된지 오래에요. 몇백년전에요. 영국에서 범죄자들을 호주로 보냈었잖아요. 그러다가 중단했죠. 그런데 왜 이민이 정치적으로 뜨거운 현안이라는 이유로 몇백년전에 중단한 일을 입양인들이 다시 겪어야 하나요. 우리가 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미국의 근본적인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지금의 이 정치적 상황때문에 우리의 원칙에 위배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잖아요. 의회의 지도자들이 미국의 원칙을 다시 좀 공부를 해야해요(웃음) 그런데 정치적 현안에 밀려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 중에는 몇몇 우리나라의 근본적 토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이 런일을 하기 위해서는 아주 강하고 자신있는 지도자가 필요해요.
관련해서 떠오르는 이름이 밋 롬니 상원의원인데요 당을 초월해서 원칙에 입각해서 표결하겠다고 했잖아요. 이 법안과 관련한 그의 입장은 어떤가요?
롬니 의원실과 이에 관련해서 아주 긍정적인 대화를 나눴죠. 롬니 의원이 법사위원회 소속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입법이라는 것이 국회의 상임위원회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런 위원회들의 리더들과 일을 해나가야 하거든요. 롬니 의원은 우리가 적정한 선에서 서로 문안을 맞추면 우리를 지지해줄거라고 생각해요. 상원의원 두명과 하원 네명 모두 만장일치로 지지를 받는다면 엄청난 일이 될거에요. 그 전에도 그런적이 있었거든요. 최근 결혼 존중법에서도 그런적이 있지요. 만장일치로 초당적으로 지난 의회에서 통과가 됐잔아요. 그러니 이번에도 또 가능하다고 봐요. 모두 다들 긍정적이라고 의사를 표하고 있고 롬니 의원 같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것을 본다면 더 파급효과가 크겠죠. 그쪽이 지금 제 공략지점이에요.
나중에 혹시 법적 도움을 구할일이 생기면 사라씨를 꼭 찾아갈게요. 말씀 한번 똑부러지게 잘하시네요.
제가 카오미씨라면 NAKASEC(역자 주 – National Korean American Service & Education Consortium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 미교협)을 부르겠어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꼭 드라마들이 있기 마련이잔아요. 입양인들 모임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이 NACASEC에서 일처리하는 것을 봤는데 추방된 사람들을 그냥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걸 봤어요. 이미 추방된 사람들을 그냥 포기했버렸다면 아마도 이 법안을 이미 통과시켰을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이미 소외된 사람들까지 챙기는 것을 보고 감동 받았어요. 그래서 혹시라도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들한테 나를 위해 싸워달라고 부탁할거에요. 지난 몇년간 그들과 함께 일하며 얼마나 꾸준히 이 일에 전념하는지를 봐왔어요. 그래서 더더욱 입양인들이 주축이 되는 단체가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른 단체들도 이 입양인 시민권 관련 법안을 위해 일하고 있지만 그냥 어떻게든 법안만 통과시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살릴수 있는 길을 만들려 하더라고요. 그 하나하나의 길이 각각 다를지라도요. 그래서 저는 NAKASEC을 찾아갈래요. (웃음)
남편도 있고 자녀들도 있지요? 아이들은 대학생인가요?
큰애가 스무살이고 둘째는 열 여섯살이에요.
한국의 가족들과 재회하고 한국쪽의 출신과 정체성을 찾게 된 일이 가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그부분에 대해서 말해줄수 있나요?
그럼요. 실은 친가족을 찾을 결심을 한 주요 계기가 큰애가 한국의 가족들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어요. 입양인들 각각이 이 사안에 대해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겟고 제게 동의를 구하는 것도 잘했다고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지만 저는 뭐랄까 책임감을 좀 느꼈어요. 제가 입양인이라는 사실이 저만의 문제가 아니고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더라고요. 특히나 제 아이들이 소위 잘나가는 소수인종을 찾아보기 힘든 곳에서 자라났잔아요. 학교도 모두 백인일색이고 그러니 각자가 자신의 인종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있겠죠. 그래서 한국의 가족이라도 찾으면 아이들의 몇몇 질문들에 스스로 답을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여러모로 나와 내 가족들 모두에게 좋겠다 해서 시작을 했는데 이렇게 빨리 찾게 될줄은 몰랐죠. 어떤 사람들은 몇년씩 걸리기도 하잖아요. 저도 가족들을 찾았다고 했을때 다른 사람들 만큼이나 놀랐어요. 그런데 아이들한테 자신들이 동양인이라는 것에 어떤 연결고리가 생겨서 좋은것 같아요. 그전에는 “그래 나 아시안이야, 그래서 뭐?” 이랬을거에요. 우리가 자랄때 그랬잖아요. 그냥 뭔가 위축되고 심리적으로 불편하고 내세울 것이 없었잖아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동떨어져 있는 그런 느낌말이에요. 그런데 가족을 찾고난 지난 5년간 본인들이 편한 수준에서 많이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것 같아요. 두 아이가 받아들이는 것이 다른 것도 보기에 재미있구요. 뭐랄까 본인들의 모습에 더 자신감이 있어보여요. 물론 다른 방법으로도 그렇게 될수 있었겠지만 가족들과의 재회가 분명 어떤 역할을 한것 같기도 해요.
남편분의 입장에서 말해보자면 그 전에는 그냥 아시안계 미국여인과 결혼해서 살고 있었다면 지금은 한국여인과 결혼한것 같군 이런 느낌을 받을까요? 사라씨가 느끼는 바도요?
실은 제 남편이 한국에서 저보다 더 오래 살았었어요. 정말요? 남편이 예수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의 선교사로 제가 태어난 한국 전주시 근방에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활동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처음 만났을때 이미 한국말을 너무 잘했어요. 지금도 잘하고요. 한국음식 너무 사랑하고요.
백인인가요?
네. 백인이에요. 참 아이러니한것이 제가 태어난 지역에 그도 살았고 우리가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됐잖아요. 혹시라도 그가 우리 가족중에 한사람이라도 마주쳤을지도 모를일이죠. 물론 그때는 제 아버지와 오빠들이 서울로 이사간 후였지만요. 그런데 선교사였기 때문에 한국여인과는 결혼할수 없었나봐요. 그런데 저는 어떻게 보면 한국인이 아니잖아요. 백인으로 교육받고 성장 했잖아요. 그래서 살면서 서로 낯설고 달라서 힘든점은 없었어요. 그 사람과 결혼해서 살며 그 사이 제가 더 한국인이 되거나 한것도 아니었고요.
같이 한국 드라마도 보는데 남편은 알아듣는데 저는 그러질 못하니까 가끔 샘도 나고 그래요. 그래서 우리 사이에 어떤 묘한 긴장감이 있어요. 남편이 저보다 한국에 대해서 더 잘 아는것 때문에요. 그리고 남편이 저보다 더 한국적이에요. 얼마전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같이 보는데 그 자기소개 도입부를 보면서 이거 “회문(palindrome앞으로 읽거나 뒤로 읽어도 같은)이네”라고 하는 거에요. 저는 몰랐거든요. 저는 5회정도까지 볼때도 몰랐어요. 글쓰는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 최선을 다해서 번역을 했겠지만 몰랐거든요. 그런데 남편은 딱 듣고 알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부분을 캐치 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 샘도 나고 그러죠.
회문이 뭐에요?
시작하는 소리와 끝나는 소리가 같은 거에요. Race car 라는 단어의 경우 거꾸로 써도 똑같죠. 그런데 우영우는 한국어로 이 회문을 말했기 때문에 저는 들어도 몰랐던 거죠. 남편은 한번에 듣고 알아챘고요. 너무 샘나죠.
한국에 처음 돌아갔을때 기분이 꽤 묘했을것 같아요
한국에 처음 간것은 1999년이었어요. 제가 일하던 법률회사에서 인턴을 하며 한국에서 두달간 지낼 수 있었거든요. 그때 당시 약혼자였던 남편이 한국에 와서 마지막 몇 주를 함께 보냈어요. 함께 거리를 다니면 사람들이 저에게 한국어로 말을 해서 제가 남편을 쳐다보면 남편이 저에게 통역을 해주고 그렇게 삼단계를 거치다 보니 사람들이 저는 한국어를 못하고 남편은 한국어를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랬죠. 인사동인가에서 쇼핑을 하는데 남편이 한국말을 못하는 줄알고 상점 점원이 가격을 더 올려부르라고 자기들끼리 말하는 것을 남편이 들었대요. 그래서 계산대에서 무슨이야기 하는지 다 들었다고 말했더니 그들이 너무 민망해했어요.
그래서 더 깎아 줬나요? 아니면 바가지를 씨웠나요?
바가지를 쓴것 같지는 않아요. 우리가 알아챘으니까요. (웃음)
그래서 한국의 가족들을 찾게 되니 사람들이 그럼 남편이 통역을 전담해주면 되겠네 하고 생각하는데 그부분에 있어서 많이 조심하려고 해요. 남편한테 그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요. 최대한 통역해주실 분을 찾아보거나 하려고 해요. 통역이 남편의 의무가 아니기도 하고 제가 제 가족과의 관계를 찾아가는데 있어서 남편한테 너무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계속 주지하려고 해요. 그냥 남편이 제 가족들하고 소통하는데 있어서 항상 한국어로 말해야 하는건 아니라고요. 그래도 항상 저보다 더 많이 소통하고 서로 많이 좋아하고 그러죠. 그럴때면 저도 정말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고 싶구요.
혹시 청취자들이 사라씨와 소통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대환영이에요. 친가족찾기를 하는데 제가 도움을 드릴수 있는 부분은 별로 없을 거에요. 저는 운이 아주 좋은 편이었잖아요. 그래서 그부분에 대해서 제가 조언을 해드릴 것은 별로 없을것 같지만 그래도 연락주시는것은 대환영입니다. 제가 처음 저희 지역 테드톡에 나갔을때 연락이 많이 왔엇거든요. 그리고 나서 메인 테드에 올라갔더니 갑자기 뭔가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테드에서 유명인이 되었다고 사람들이 막 그러더니 갑자기 메시지들이 뜸해지고 연락이 안오더라고요. 사람들이 저에게 연락하기를 바랬던것도 아니지만 제가 너무 유명져서해서 접근불가 한사람이라고 이렇게 생각했나봐요. 그런거 아니고 연락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제가 혹시라도 도움이 된다면요.
제가 도움이 될수 있는 가장 큰 방법은 아마도 여러분이 입양인 시민권 법안운동에 참여하고 싶으신 경우일거에요. 공유할수 있는 자료도 많고 함꼐 할수 있는 다른 조직도 많아요. 저는 거기에 조금더 경영적이고 실제적인 관점을 더한 도움을 드리고 있어요. 제가 상담사도 아니고 어떤 정신적인 상처 같은 부분을 도와드릴 어떤 자격도 없어요. 저도 상담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고요. 이 일에 경험이 많고 준비가 된 상담사들도 많이 있고요. 이런 소리를 하니까 제가 더 다가가기 힘든 사람으로 보이네요
제 이메일 주소는 sara@inclusionpro.com입니다.
저에게도 종종 입양인들이 연락을 해오시곤 해요. 친부모 찾기나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활동등과 관련해서요. 그런데 한가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어요. 우리가 입양인 커뮤니티를 위해 좋은 마음으로 봉사하고 싶은건 분명해요. 저도 다른 입양인들로부터 좋은 충고도 듣고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선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일전에 제 직장으로 저에게 연락처를 남겨주신 분에게 전화를 했어요. 저를 NPR에서 들으셨대요. 그래서 입양과 관련된 잘못된 시스템등등에 대해서 의견을 주셨는데 두시간 가까이 통화를 하게 되었어요. 물론 필요한 도움을 받지 못한채 고립된 분들도 많이 계시고 다른 입양인의 경험을 처음 접하는 분들도 물론 계시겠죠. 다만 도움을 청하실때 다른 사람들의 시간과 노동은 좀 분명히 알아주셨으면 해요
그것에 더해서요 Adoptees for Justice의 활동이나 입양인 시민권 부여법 관련 활동이나 혹시 시민권이 없이 살고 계시다면 NAKASEC을 접촉해보시길 추천해요. 저는 사회정의와 관련한 전문가가 아니거든요. 그 사람들은 이 일을 몇십년 동안 해왔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바로 답을 줄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를 찾아오셔도 저는 아마 다시 그쪽으로 보낼거에요. 홈페이지는 adoptees for justice.org입니다. 법안이 통과되는데 힘을 보태고 싶으시거나 혹은 시민권이 없이 살아가는 입양인이라면 꼭 연락해보세요.
오늘 나와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저도요. 카오미씨가 하는 일도 계속 잘 진행되길 바래요.
번역 : 전유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