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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4, 에피소드 8: 헤더 슐츠

Audio available Dec. 3, 2020 at 7 am EST.

36세인 헤더 슐츠는 탄생 4개월 차에 한국에서 뉴욕주 롱 아일랜드에 사는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헤더는 어렸을 때 어머니를 병으로 잃고 새롭게 집을 공유하게 된 양어머니와 의붓자매에게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어린 시절 내내 애썼다. 슬픔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던 헤더는 친가 할머니에게서 지지와 사랑을 찾아냈다. 자신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운 뒤, 헤더는 자신 마음속의 깊은 슬픔과 문제가 있는 가족 관계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현재 헤더는 교육자이자, 연설자이며, 다른 사람들의 과거의 고통과 트라우마를 해결해주는 치료자이다. 헤더는 NBC 뉴스에 자신의 삶에 관해서 쓴 수필을 투고했으며 Also Known As NYC의 이사 자리를 포함해, 입양아 사회에서 지도적 자리를 맡고 있다.

헤더: 제 이름은 헤더 슐츠입니다. 뉴욕시 퀸스에 있는 서니사이드에서 살고 있습니다. 한국 이름은 허미영입니다. 현재 저는 버룩 대학교에서 공개연설,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과 홍보작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버룩 대학교는 제 모교이기도 합니다. 제 언론학 학사를 버룩 대학교에서 땄고, 또한 제 행정학 석사도 이곳에서 수료했죠. 그리고 이 팟캐스트에서 제 입양 일대기를 공유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팟캐스트: 헤더 씨, 나이가 몇 세시죠?

헤더: 36세입니다. 막 36세가 되었어요. 제 생일은 7월 4일이에요. 물론 제 입양 기록에 따르면 제 생일이 7월 4일이지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기록상으로 그렇게 되어 있으니 지난 36년간 그렇게 살아왔죠. 진짜 생물학적 생일인지 확인하려고 한 적은 없어요.

팟캐스트: 생일을 국가적 휴일(미국의 독립 기념일. 7월 4일이다)과 공유하고 계시네요. 그러한 사실이 헤더 씨가 생일을 더 즐기게 했나요? 아니면 헤더 씨의 삶에 있어서 문제가 되었나요?

헤더: 전 항상 제 생일에 받는 주목을 좋아했어요. 제가 어렸을 때는 독립 기념일을 축하하는 폭죽들이 전부 절 위해서 터트리는 폭죽인 줄 알았죠. 제가 미국과 생일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던 겁니다. 아 폭죽들이 전부 날 위한 거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한국에 처음으로 되돌아갔을 때가 2014년이었습니다. 막 30살이 되었을 때였죠. 혼자 3주간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서울에서 불꽃놀이를 봤어요. 서울에서 불꽃놀이 구경은 정말 비교할 수 없는 경험이죠. 제가 태어난 도시에서 불꽃놀이를 보는 일은 기적적인 경험이었어요. 전 생일에 손실을 경험해본 적은 없습니다. 물론 다른 날들은 손실에 대한 슬픔을 받아들이고 경험하는 날들이기도 하죠. 예를 들면 제가 제 입양 어머니를 잃었던 날이 있습니다. 1995년에 제가 10살일 때 돌아가셨죠. 그때 어머니 연세가 39세였습니다. 전 어머니의 생신인 6월 12일을 축하할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인 1월 28일도 기억하고 추모하죠. 이 두 날이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쳐요. 지난달에 퀸스에 어머니의 묘소를 방문했습니다. 혼자 꽃을 들고 갔었죠. 어머니에게 말도 걸고, 어머니의 애청곡이었던 시스터 슬레지의 위아패밀리도 틀어 드렸습니다. 매년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죠.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과 생일에 가서 하는 일입니다. 제 입양 부모님께서 저를 입양하셨을 때, 저는 4개월밖에 안 됐었고, 부모님의 첫 아이였습니다. 그렇게 제 삶을 외동딸로 시작했죠. 

헤더: 하지만 나중에 부모님께서 이혼하시고 아버지가 이미 이혼 경력이 있는 여성분과 결혼하셨죠. 그분은 첫 번째 결혼에서 2명의 딸을 두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양어머니와 의붓 자매들이 집으로 들어왔죠. 그래서 저에게 관심이 집중되지 않고 아버지, 제 장난감, 그리고 우리 집을 의붓 자매와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웠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와 양어머니가 제 이복동생을 93년에 낳으셨죠. 저보다 9살 연하입니다. 

팟캐스트: 가족에서 유일한 국제 입양아시군요.

헤더: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그 상황은 상상하기도 어렵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10~11살에 그런 변화를 겪으셨는데, 어떻게 받아들이셨나요? 아주 많은 고통과 슬픔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헤더: 지금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의 저는 슬픔, 상실, 그리고 분노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20대가 될 때까지 그 감정들을 직접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단지 질병인 다발성 경화증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죠. 거의 최종 단계에는 제 이모가 절 어머니 병문안에 데리고 갔어요. 그 단계에서 어머니는 말을 하지 못하셨죠. 식사도 영양보급관을 통해서 하셨어요. 그런 상태의 어머니를 보는 일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절 보면 기뻐하셨죠.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제가 있을 때는 병원 빙고를 이기지 못하셨는데, 제가 없을 때는 자주 이기셨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어머니 병원에 방문할 때의 좋은 기억들이 있어요.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항상 아프셨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처음 입양하셨을 때 어머니는 이미 휠체어를 사용하고 계셨죠. 그리고 펜실베이니아 기반 러브더칠드런 입양 기관에 다발성 경화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셨습니다. 건강 상태에 대한 의심을 피하고자 사촌이 쓰고 있던 깁스를 빌려 다리를 부러진 것 같이 연기해 기관을 속이셨죠. 어머니께서 그렇게 해서라도 절 입양하려고 하셨어요. 

팟캐스트: 어머니가 대화가 가능하실 때 어머니와 나눴던 마지막 대화들을 기억하시나요? 

헤더: 어머니와 한 대화 자체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어머니가 제가 사랑받고 특별하게 느껴지게 하신 일은 기억해요. 어머니는 자신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드는데 중점을 두셨어요. 예를 들면 어머니는 저에게 “난 나 자신이 좋아”라는 책을 주셨어요. 어머니가 책을 바꿔서 제 이름이 들어가게 했죠. 그 책이 절 특별하게 해준 기분이었고, 여전히 그 책을 가지고 있어요. 어머니를 생각하다가 슬퍼지면 그 책을 보면서 마음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또 어머니께서는 제가 어른이 되면 읽기를 바라면서 1984년에서 1987년까지 일기를 쓰셨어요. 제가 2014년 첫 한국 방문을 마치고 오자 아버지가 그 일기를 저에게 주셨죠. 그전까지 이러한 일기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이 일기에는 입양 과정이 적혀 있었고, 제 이름이 왜 꽃의 이름을 따서 헤더가 되었는지도 적혀 있었죠. 거기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제 사진을 처음 받고 느낀 감정에 대해서도 적혀 있었고요. 그리고 시민권 부여와 동화 과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그 과정 전부가 저에게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죠. 많은 입양아가 절차를 밟지 않아서 시민권자들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추방당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니까요. 

팟캐스트: 퀸스에서 자라셨나요?

헤더: 제가 자란 곳은 롱 아일랜드의 파밍데일이라는 마을이었습니다. 서퍼 카운티와 나소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이죠. 

팟캐스트: 인종 구성이 다양한 곳이었나요?

헤더: 아뇨. 백인이 절대다수였죠.

팟캐스트: 성장할 때의 경험은 어떠셨나요? 부모님이 인종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셨고 부모님이 인종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아니면 언급하지 않으셨나요?

헤더: 언급하지 않으셨어요. 어머니 측의 가족분들이 이야기하기를 어머니는 절 한국계 학교에 보내고 싶어서 하셨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어머니의 건강 문제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죠. 어머니가 쓰신 일기에는 어머니는 제 출신지를 잊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언급하면서 제 한국 유산을 존중한다고 하셨어요. 제 돌 때도 최대한 전통을 존중하려고 하셨습니다. 한국식 복장을 입히고, 과일도 준비하고 최대한 전통적으로 만들려고 하셨어요. 제 아버지, 양어머니 그리고 의붓 자매들과는 인종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편한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한국인이고 아시아계라는 사실은 알았어요. 제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던 일이었고 확실히 저에게 문제가 되었죠. 제가 어렸을 때는 외향적인 아이라서 밖에서 많이 시간을 보냈어요. 그래서 지금보다 훨씬 까무잡잡했습니다. 그래서 신경이 쓰였죠. 전 한국 바비인형을 하나 가지고 있어서 그거만 가지고 놀았어요.

팟캐스트: 바비인형을 가지고 계셨군요!

헤더: 네! 아름다운 분홍색 머리에 예쁜 한복을 입고 있어서 항상 가지고 놀았어요. 제 의붓 자매들은 백인 바비인형을 가지고 놀았죠. 전 백인 바비인형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 아시아계, 그리고 한국계 혈통에 대해서 자부심을 품고 있었으니까요. 

헤더: 전 실히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사망하신 뒤에 양어머니께서 “네 어머니는 아팠어. 널 입양해서는 안 됐어.”라고 말한 뒤에는 더더욱 그랬죠. 그 발언은 지금까지도 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고, 어린이였던 저에게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 뒤, 왜 양어머니가 절 싫어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했어요. 저 자신의 문제를 마주 보고 생각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양어머니께서 직접 말해준 적은 없지만, 전 아버지의 첫사랑을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였으니까요. 그래서 저를 위험하게 여긴 겁니다. 물론 제 관점이고 양어머니에게 직접 들은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인식해서 양어머니를 용서할 수 있었어요. 양어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 감정적으로 저를 학대했죠. 집에서 지내면서 편하지가 않았어요. 방에 지내면서 책을 읽고 공부에 집중했죠. 전 모범생이었고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클라리넷도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양어머니는 제가 클라리넷 연습을 하지 못하게 하기도 했어요.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아버지는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 알고 계셨나요?

헤더: 어머니의 일기와 사진첩을 보면, 어머니, 저 그리고 아버지만 있었을 때는 아버지가 절 소중히 여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양어머니와 결혼했을 때 모든 게 바뀌었죠. 그리고 아버지와 저의 관계는 멀어졌습니다. 특히 1985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더욱 그랬죠. 그때 머라이어 캐리의 원 스위트 데이라는 노래가 발표되었죠. 항상 그 음악을 들으면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어머니가 항상 절 지켜보고 계시고, 어머니와 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죠. 그저 여기에 물리적으로 계시지 않을 뿐입니다.

-머라이어 캐리의 원 스위트 데이-

헤더: 하지만 아버지와 양어머니와의 고통스러운 관계에 대해서 직접적인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어요. 

팟캐스트: 입양아의 관점으로서 보면, 물론 어려서 인식하기도 어려웠겠지만, 이러한 상실과 입양까지 더하면 상황의 관리 자체가 불가능했겠군요? 

헤더: 제가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노력할 수 있는 만큼 노력했죠. 제 공부를 통해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어요. 제 아버지와 제 양어머니는 제가 공부를 잘하라고 압박을 주지는 않았어요. 그냥 제가 원해서 공부를 했죠. 누구도 숙제를 강제로 시킬 필요가 없었고 시험공부를 시키지 않았어요. 공부와 음악이 그런 고통스러운 시기를 버티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음악을 통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을 견뎠어요. 좋은 친구들의 지지도 도움이 되었죠. 

팟캐스트: 그리고 지금은 아주 다양성이 높은 지역인 사니사이드에서 살기로 선택하셨죠. 의도적으로 그곳을 선택하신 건가요? 

헤더: 제 성장기로 되돌아가면, 아버지, 양어머니, 의붓 자매, 그리고 이복 남동생과 20세까지 같이 살았죠. 그 시기에는 좋지 않은 상대와 연애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절 학대하던 남자친구와 같이 지내기 위해서 우리 집을 떠났죠. 차에서 지내고, 모텔에서 지내고, 친구 집에서 지내거나 그랬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제 할머니, 사실 제가 미국에 처음으로 내렸을 때 절 처음으로 안았던 분이기도 했죠. 그리고 할머니는 어머니가 그 사실을 가지고 자기를 용서 안 해줬다고 지금까지 농담하세요. 왜냐하면, 어머니는 방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할머니가 반대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반대쪽에서 제가 들어왔거든요. 

헤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할머니가 저를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21세 생일이 되기 전이었죠. 할머니께서, 자기 손녀가 차에서 사는 꼴은 못 보겠다고 하셨거든요. 제 상황을 할머니에게 알려준 것이 아버지였습니다. 그렇게 할머니가 제 목숨을 구해주셨어요. 할머니 덕분에 다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호프스트라 대학교에 재적하고 있었는데, 버룩 대학교로 편입할 수 있었어요. 그 뒤로는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죠. 할머니와 같이 지내면서 집에 다시 편안한 곳이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죠. 할머니의 동거인, 저에게는 고모와 같은 분이죠. 2017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제 삶에 있어 강한 여성의 본보기가 되어 주셨어요. 할머니가 또한 자기 친구들에게 저를 소개해 주었고, 그분들도 제 할머니나 다름없는 분들이 되셨습니다. 그분들이 제 삶을 원래의 궤도로 돌려놓는 데 도움을 주셨습니다. 상담도 받았고, 그것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를 보고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죠. 

헤더: 서니사이드의 문제로 다시 돌아와서, 할머니와 2005년에서 2018년까지 같이 살았고 그 뒤로는 제 약혼자와 동거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최근 몇 년간 서니사이드에서 생활했죠. 이 동네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팟캐스트: 할머니와 같이 지낼 때는 어디 사셨죠?

헤더: 롱 아일랜드 곳곳에서 지냈어요. 벨모어, 사이아시드, 리넨헐스와 라플센터에서도 살았죠. 할머니는 방랑벽이 있으셔서 자주 이사를 하셨어요. 저에게 요리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팟캐스트: 그렇게 돋보이지는 않지만 약간 보이는 억양이 있는데 롱 아일랜드 억양인가요?

헤더: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할머니께서 아버지가 헤더 씨를 충분히 지지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생각하셨나요? 적어도 헤더 씨는 그렇게 느끼셨나요? 

헤더: 그때는 확실히 그렇게 느꼈습니다. 제 할머니와 관련 이야기도 깊게 나눴어요. 할머니께서 제가 겪고 있는 문제를 알았습니다. 제가 할머니 집에 방문할 때마다 저를 보셨으니까요. 할머니 집 방문을 항상 좋아했습니다. 직접 빵도 구워 주셨고, 기르고 있던 개들을 위한 견용 쿠키들도 구우셨죠. 어렸을 때 양어머니가 할머니와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했던 것이 기억이 나요.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죠. 제 할머니인데 말이에요. 아주 질투심이 많고 불안정하셨죠.

팟캐스트: 할머니와 헤더 씨의 깊은 관계를 알고 질투했던 거겠지요. 다른 아이들보다 할머니와 더 가까운 관계였나요?

헤더: 네.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제가 언급하는 할머니는 제 친할머니입니다.

팟캐스트: 하지만 의붓 자매들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고 계셨죠? 

헤더: 네

팟캐스트: 그 사실이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르겠네요. 많은 입양아는 어린 시절을 살아남은 뒤 자기 자신을 찾아낸다는 공통점이 있죠. 그러한 일이 헤더 씨가 집에서 나와 할머니와 살게 되면서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헤더: 고등학교 때는 제 몸에 대한 만족을 못 했어요. 그래서 제 몸을 큰 셔츠, 스웨터, 헐렁한 바지 등을 입어서 가렸어요. 제가 그랬던 이유가 양어머니가 제가 중학교 때 탱크톱을 입었다고 잔소리를 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탱크톱이나 노출이 많은 옷을 고등학교 때 입기를 꺼렸죠. 제가 할머니와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 할머니가 제 여성성을 받아들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제 몸에 맞는 옷을 입는 일이었죠. 

팟캐스트: 이야기를 들어보니 양어머니가 당신을 정말 마음에 안 들어서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인종차별적인 면모도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헤더: 당연히 있지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카페테리아에 혼자 앉아 있었어요. 한국인 교환학생이 제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김밥을 저에게 처음으로 먹여주었죠. 김밥을 처음 먹었을 때가 제 첫 한국 음식 경험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김밥을 아주 좋아하죠. 그리고 그 친구는 우리 집 근처에서 지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친구가 집으로 초대하고, 가족들을 소개해 주고 어머니는 저에게 요리도 해주고 싶어서 하셨죠. 그래서 양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놀러 가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양어머니가 가면 안 된다고 막으셨죠. “넌 미국인이야! 한국인이 아니라!”라고 말했어요. 한국 친구 집에 가는 것을 그런 이유로 막았고, 그래서 아주 화났습니다. 그리고 그전에도 여러 인종차별적인 말을 하기도 했어요.

팟캐스트: 언제부터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과 한국 혈통과 다시 연결점을 찾으려고 했나요?

헤더: 버룩 대학교에서 언론학 학사로 2008년에 졸업했습니다. 그때는 대침체가 한창이었죠. 그래서 제가 계획했던 언론계 취직이 증발해 버렸어요. 그래서 그것에 맞춰 계획을 바꿔야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프로그램 하나를 찾았고 응모했습니다. 그런데 찾아보니 이 회사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가 좀 있더라고요.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사기를 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한국을 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제가 버룩 대학교에서 2014년에 석사학위를 따고, 제가 30살이 되었을 때, 절 항상 지원해주신 할머니께서 생일선물 겸 졸업 선물로 여행을 하고 싶냐, 파티하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하고 싶다고 답했죠. 처음으로 생각이 난 나라는 한국이었습니다. 그래서 2014년 10월에 3주간 한국으로 여행을 갔죠. 가족 친구와 같이 지내면서 서울, 부산과 제주도를 방문했습니다. 할머니가 선물로 저에게 표를 주셨죠. 지금까지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행 가기 전에 NBC 뉴스에 왜 한국에 돌아갔는지에 대한 경험 수필 두 개를 투고했습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주에 두 수필이 출판되었죠. 그 뒤로 입양아들이 SNS로 저에게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영화 트윈스터의 주연이던 샘 버터민이 트위터로 연락해 제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고 하기도 했고요. 

헤더: 그리고 전 미국에 돌아오고 나서 입양아 사회와 교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몰두하기 시작하면 정말 한없이 몰두하거든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사회의 일부가 되었죠. AKA의 이사회의 일원으로 2015~2016년에 재직했고, 또 다른 입양아 단체인 올투게더나우 브루클린의 유소년기 입양아 지원 그룹을 운영했습니다. 또 이 모든 것을 하면서 2018년에 문을 닫은 또 다른 입양아 NGO 자선단체인 DAI 홍보담당관이자 관리자로서 일했죠. 이렇게 일하면서 입양아와 관련된 전체적인 관계를 알게 되었고 저 자신, 그리고 친어머니를 용서하기 위한 단계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저 자신의 입양아 감정만을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친어머니의 감정은 생각하지 않았고, 어머니의 감정도 생각해보지 않았고, 입양과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AKA, 올투게더나우, DAI에서 일한 경험을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직에서 동시에 일해서 나중에 DAI가 폐업한다는 소식을 듣고 약간 마음을 놓은 점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곳에서 동시에 일하다 보니 제 모든 일이 전부 입양과 관련되었거든요. 디스 이즈 어스와 같은 입양과 관련된 영화와 대중매체도 잔뜩 소비했습니다. 너무 많아서 압도당하는 기분이었죠. 그래서 DAI에서 해고되고, AKA의 이사직도 퇴임한 뒤 버룩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죠.

팟캐스트: 여러 가지 이야기할 것이 많네요. 우선 한국으로의 여행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제가 한국에 처음으로 착륙할 때가 기억이 나네요. 헤더 씨는 어떻게 느끼셨나요?

헤더: 제가 느낀 최고의 감정 중 하나였습니다. 저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잔뜩 있었으니까요. 오던 중에 비행기 자리 옆에 앉아 계시던 중년 여성분과 친해졌습니다. 우선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탄 뒤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서울행 비행기로 갈아탔죠. 그 비행기에서 중년 미망인과 좋은 대화를 나누면서 친해졌어요. 그분과 부산과 제주도도 같이 여행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그 공항에 도착하니 그분께서 “같은 민족끼리 있구나!”라고 하셨고 저도 “네 그렇네요!”라고 답했죠. 백인 가족과 백인 마을에서 자라난 저에게는 같은 원형 얼굴, 아몬드형 눈, 비슷한 코를 가진 사람들과 같이 있다는 사실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팟캐스트: 항상 이방인이었던 삶이지만, 이곳에 내리고 나서 30초 만에 더 이방인 같이 느껴지지 않는 느낌이죠. 

헤더: 그렇죠.

팟캐스트: 언어의 장벽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셨죠? 

헤더: 가족 친구분과 같이 지냈고 그분이 제 이야기를 아셨기 때문에 주말에 같이 시간을 보냈고, 휘하 직원분들을 소개해 줬습니다. 그분들이 저에게 서울을 구경시켜 주셨고요. 낮에는 좀 더 관광객 같은 일을 혼자 했습니다. 물론 영어를 못하는데 서울 지하철로 돌아 다니는 데는 문제도 많았어요. 많이 힘들었죠. 물론 한국어 소책자를 들고 다니긴 했지만, 그것도 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젊은 한국인들이 영어를 할 수 있어서 제가 지하철을 돌아다니는 데 도움을 도와주었죠. 택시 같은 경우에는 가족 친구분이 북한산 근처에 살아서 그쪽 주소만 보여주기도 했어요. 한국어를 못해 소통을 못 하니 기사님이 이 주소를 찾아갈 수 있기를 비는 거죠. 그래서 언어의 장벽으로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하지만 가족 친구와 그분의 연결망으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어요. 내부인과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혼자서 경복궁이나 남산 타워를 방문할 때는 외부인 같았어요

팟캐스트: 입양아들은 여러 환경에 적응하고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마련이죠. 다른 사람들이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라고 생각한 적 있나요? 

헤더: 제가 한국에 있을 때는 그런 오해를 받은 적은 없어요. 하지만 가족 친구를 통해 사귄 한국 친구들은 제 입양 이야기를 몰랐다면 그냥 평범한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말했어요. 자연스럽게 한국인다운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팟캐스트: 예를 들어주실 수 있나요? 

헤더: 제가 대화할 때 활동적이긴 하지만 정확히 어떤 면이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게 했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여행 중에 기분 좋게 만들어준 일 중 하나였죠. 

팟캐스트: 다른 경험들은 어땠나요? 바닥에서 자는 일이나, 양반다리라던가, 그런 일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나요?

헤더: 2014년에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절에서 하룻밤 숙박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불교에 대해서 배우려고 그랬었죠. 그리고 가부좌를 하고 명상을 하고, 주지 스님과 차를 마시는 경험은 감명이 깊었습니다. 할머니가 같이 갔으면 했지만, 할머니는 거절하셨어요. 그리고 제가 한국에서 돌아오자 할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같이 가고 싶지 않아서 아니었지. 그 여행은 너 혼자 해야 하는 여행이니까. 라고 말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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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첫 한국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일기를 쓰셨다면 어떤 내용을 적으셨을 건가요?

헤더: 집에 돌아와서 기뻤고, 제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제가 산 선물들을 줄 생각에 흥분했습니다. 한국에서의 경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텀블러(Tumblr, SNS 사이트)도 개설했어요. 한국에 가기 전에 만들어서 한국에서의 경험을 묘사하려고 했죠. 하지만 3주간 열심히 작성하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친구들이 그걸 통해서 제 경험을 확인하고 있기도 했죠. 그래서 미국에 돌아와서 제 경험을 할머니와 공유하고 싶었어요. 다른 면에서는 돌아가고 싶지 않기도 했습니다. 

팟캐스트: 입양 기관을 방문하셨거나 친부모님 조사를 하셨나요? 하고 싶으셨거나 준비는 되셨었나요? 

헤더: 2014년 10월 이전까지 제 언론학 전공을 살려서 최대한 조사할 수 있는 것은 다 조사했습니다. 입양 기관인 동부사회복지회와 연락해 제 서류를 확인할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제 삼촌이 이웃을 소개해 주셨고, 그 이웃분은 미주중앙일보에서 일하고 계셨죠. 그분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결과, 그분이 미주중앙일보에 제 여행에 관한 기사를 2014년 8월에 미주중앙일보에 기재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조사를 최대한 해서 여행을 준비하려고 했죠. 하지만 그때는 입양아 사회와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아서 그들의 자원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제 가족 친구가 사회복지사와의 방문에 같이 가셨죠.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하실 수 있으니까요. 이러한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제 입양 서류를 확인하는 일은 감정적으로 힘들었으니까요.

팟캐스트: 그곳에 있었을 때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 운이 좋으셨네요. 그리고 서류에 별로 정보가 없었던 것 같은데, 사실인가요? 

헤더: 한국에 가기 전에 사회복지사가 저와 공유한 정보는 얼마 없었습니다. 제 친부모가 결혼한 상태였고, 두 친형제가 있어서 3번째 아이를 돌볼 수 없어서 입양에 맡겨졌다고 하더군요. 동부사회복지회와 만난 뒤 아주 답답했습니다. 그들이 어머니에 대해서 제공한 정보는 어머니의 이름 허옥자뿐이었어요. 어머니의 이름이 쓰여 있는 종이도 주지 않더군요. 또 저에게 제공하는 정보를 골라내서 제공하기만 했습니다. 심지어 저에게 준 정보에서도 어머니의 이름을 검열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머니의 이름을 기억했고, 가족 친구도 그 이름을 기억했죠. 제가 뉴욕에 돌아오고 나서 사회복지사와 연락했습니다. 그리고 사회복지사가 KS에 연락해 친부모 조사를 할 수 있냐고 물었죠. 그리고 나중에 사회복지사가 와서 정보가 너무 적어서 KS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 일을 들으니 몹시 화가 나더군요. 첫 한국 여행을 하고 나서 제 친어머니를 더 찾고 싶었거든요. 

헤더: 그래도 친부모 조사는 계속되었습니다. 동부사회복지회나 입양 기관을 통한 조사는 그걸로 끝이었지만, 23 and Me(유전자 조사 업체)을 통한 검사를 2015년 1월에 했죠. 그리고 2015년 10월에 LA에서 저의 5촌이 연락을 해왔습니다. 그 5촌이 2016년 11월에 자기 아버지가 자신을 방문했을 때 23 and Me 검사를 받게 했죠. 그리고 그분이 4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지금 다섯 남성분의 이름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제 친아버지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지금 제5촌이 한국 친척들에게 연락해 정보를 찾고 있는데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몇 친척들은 그러한 정보 공유를 하려고 들지 않더군요. 하지만 5촌은 노력해줬고, 한글과 한자로 쓰여 있는 족보도 공유해줬습니다. 전 그 족보를 2019년 10월에 서울 여행을 가기 전에 해외입양인연대와 공유했어요. 

팟캐스트: 5촌이 그렇게 개방적으로 교류를 했다니 대단하네요. 사람들이 말하기를 입양아라는 사실을 바로 밝히지 말라고 하는데, 발견하셨을 때 어떻게 접근하셨나요? 

헤더: 5촌이 저에게 연락을 먼저 해왔고, 제가 제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전화번호도 나눴어요. 지금도, 제가 문자를 보내면 바로 문자를 돌려주죠. 아주 개방적이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줬어요. 

팟캐스트: 5촌이 왜 직접 찾아야 했죠? 한국인 친척 관계는 보통 아주 친밀해서 그렇게 깊게 찾아야 할 이유가 없는데요.

헤더: 좋은 질문이네요. 정확히는 몰라요. 물론 5촌이 자주 말하기도 했고 여러 대화도 했지만, 그래도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저에게 연락해서 도와줬던 게 고마웠어요. 

팟캐스트: 나이가 비슷한가요?

헤더: 저보다 연상이고, 아내와 두 아이가 있고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어요.

팟캐스트: 그분이 아버지를 설득해서 검사를 받게 했군요? 

헤더: 제4촌 되시는, 그러니까 5촌분의 아버지분은 미얀마에 살고 계셨어요. 그리고 2016년 11월에 휴가 겸 아들 가족을 방문했던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설득해서 유전자 검사를 받게 했고 그분이 제4촌인 사실이 밝혀졌던 거죠. 

팟캐스트: 그 결과를 들으셨을 때 어떠셨나요?

헤더: 제 퍼즐의 또 다른 조각이 맞춰졌으니 아주 기뻤죠. 그다음에는 12월 친부모 조사 결과가 나와서 조금 답답해졌습니다. 지난 10월에 제 약혼자와 같이 서울에 있었을 때 해외입양인연대(GOAL)과 NCRC와 만났습니다. 2014년의 첫 방문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거든요. 입양아들을 위해 제공되는 정보가 더 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단체들이 제 조사를 맡아 준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꼈습니다. GOAL은 입양아들이 운영하는 조직이라 제 상황을 이해해줄 수 있으니까요. 2차 한국 방문은 제가 입양아 사회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그 사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확실히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12월에 GOAL이 저에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카카오톡으로 관련 직원과 같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죠. 그래서 관련 정보를 공유해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연락에서 NCRC가 제 친어머니와 3분간 연락을 취했다고 했어요. 어머니가 충격을 받아서 저와 연락하거나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하더군요. 어머니 주소로 편지를 보냈는데, 반송되었다고 합니다. 제 친어머니에 대해서 찾고 있었는데 친어머니가 살아 계시고, 제가 찾는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리고 그 소리를 듣자마자 울기 시작했죠. 그리고 4일 뒤에 GOAL을 통해서 관련 연락이 또 왔어요. 뉴욕 출신의 또 다른 헤더라는 이름의 입양아와 서류를 혼동했다는 겁니다. 

팟캐스트: 이런.

헤더: 그리고 NCRC에서 사과 이메일을 장문으로 보냈습니다. 지금까지 답장을 안 했어요. 몹시 화가 났거든요. 한 감정에서 다른 감정으로 감정이 요동을 쳤습니다. 제 친어머니를 찾았고, 통화도 했고, 저 자신에 대해서도 알았는데 그걸 앗아간 셈이죠. 제가 첫 정보를 알고 나자 제 가족들과 친구들과 공유했고 모두 저를 보조하면서 최대한 제 친부모를 찾는 데 도움을 주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 사람들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친구들과 가족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기가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가장 친한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는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지난 몇 달간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가 있었어요. 그리고 NCRC를 용서할 수 있었죠. 일부러 그런 일이 아니었고 실수였으니까요. 그리고 그 답장을 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작년 12월 15일에 저에게 보내준 이메일은 아직 답장을 못 했어요. 

팟캐스트: 이 과정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은, 과정을 시작하게 되면 온갖 감정과 시간의 흐름이 일보전진 이보후퇴와 같다는 것이죠. 그런 답답한 감정과 정답을 찾는 일은 어렵고요. 

헤더: 카오미씨(팟캐스트 진행자). 그러한 과정이 제가 왜 친어머니를 찾게 되는지 생각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제 약혼자와 한국 2차 여행을 가기 전에 많은 한국인 입양아 친구들이 친어머니를 찾아서 한국에서 친어머니와 만났거든요. 질투가 났죠. 그리고 그 질투가 난다는 사실도 지난 몇 달간 직접 겪어보고 나서야 인식했어요. 그리고 그러한 감정을 제 입양아 친구에게 털어놓았는데, 그 친구가 제가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저와 공감해주었습니다. 이러한 진짜 대화를 나눠도 부끄럽거나 평가받는 기분을 느끼게 하지 않는 IKAA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친어머니를 찾는다면 좋겠지만, 못 찾아도 괜찮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행위가 저를 완성하지 않고, 지금 저 자신만으로 충분하니까요. 그런 사실을 알았습니다.

팟캐스트: 작년에 2차 여행을 갔을 때 약혼자와 관계는 어땠나요? 한국에 처음으로 방문하는데 헤더 씨가 가이드나 문화적 번역가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나요? 

헤더: 그런 감정은 느끼지 않았어요. 약혼자가 처음 한국에 오는 일이었지만 GOAL과 NCRC와의 회의를 방문 중에 잡아야 했는지 이해해 줬고 저를 지지해줬어요. 그리고 약혼자와 같이 이미 방문했던 장소들인 경복궁 등을 방문했죠. 그리고 제가 왔을 때 없었던 체험을 해보기도 했어요. 제가 처음 방문했을 때 경복궁에서는 한복 대여가 안 됐거든요. 하지만 두 번째 방문 때는 됐죠. 그래서 한복을 빌려 입고 경복궁을 거닐었어요. 특별한 경험이었죠. 그리고 AKA 인맥을 사용해서 동대문에 가서 수제 한복을 맞췄어요. 그게 2차 한국 여행에서 저를 위해서 유일하게 샀던 물건이죠. 

팟캐스트: 첫 여행을 언급하셨을 때 다시 집에 빠르게 돌아와서 소중한 사람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고 하셨죠. 그래서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는 점이 아주 특별하셨겠네요. 

헤더: 네. 그리고 그이가 북한산에 있는 절에서 저에게 결혼해달라고 그이의 생일에 프러포즈했습니다.

팟캐스트: 우와…. 날짜가 언제였죠?

헤더: 10월 20일이었습니다. 물론 같이 한국 여행하면서 프러포즈하리라는 사실을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어떤 시점에 할지 몰랐고, 그이의 생일에 할 줄도 몰랐어요. 거기에 제 출생지인 서울에서 해줬으니 아주 특별했죠. 그가 누구인지 그가 어떻게 저를 사랑하고 존중하는지에 대한 증명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약혼자분이 흑인이시죠?

헤더: 네

팟캐스트: 백인 가족이 이해 못 했던 점을 이해해준다고 생각하나요? 

헤더: 인종에 대해서 매일 이야기하죠. 전 흑인이 아니지만 다른 인종 입양아로서 백인 가족과 백인 동네에서 자라면서 인종차별을 경험했어요. 이방인의 경험이 있죠. 그래서 관련된 대화를 깊게 나눌 수 있다는 점을 기쁘게 생각해요. 

팟캐스트: 유전자 조사를 통해서 알아낸 다른 사촌들과 연락을 해보려고 했나요? 특히 5촌이 이름을 준 남성들 말이죠. 헤더 씨의 사촌일 수도 있는 분들이고, 친아버지일 수도 있지요?

헤더: 그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이 제 친아버지인지 확신하고 있지 않아요. 그리고 한국에서 그 사람들과 연락하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5분 중 2분은 죽었고 세분은 지금 한국에서 거주하고 계시는데, GOAL과 NCRC와 같이 조사했을 때는 친어머니를 먼저 찾고 친아버지는 나중에 찾자고 했고, 저도 동의했죠. 

팟캐스트: 그 분야에서는 아직 조사 가능성이 남은 거군요.

헤더: 네. 

팟캐스트: 한국과의 관계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었다고 생각하시나요?

헤더: 어렸을 때는 3학년 때까지는 한국과의 연결성을 느끼지 않았어요. 어떤 국가에 대한 역사를 조사해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어요. 그리고 당연히 한국을 선택했습니다. 조사하면서 한국 전쟁에 대해서도 배웠고, 돌아가신 제 할아버지가 한국 전쟁 참전 군인이라는 점도 알았죠. 그래서 첫 한국 여행 때 부산에 있는 한국 참전군인 묘지를 방문했죠. 미국 깃발과 한국 깃발이 휘날리는 광경을 보면서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 한국 여행에 대한 2번째 NBC 뉴스 수필에 그 사진을 첨부했죠. 그때 저는 확실히 저는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팟캐스트: 입양아들은 소속감과 관련해서 고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에 갔던 일이 한국에 대한 소속감을 강화해줬나요? 아니면 2번째 여행이 미국에 대한 소속감을 강화해줬나요?

헤더: 많은 한국 입양아들이 한국에 가면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몇 년간 한국에서 지내는 결정을 합니다. 그리고 저도 2008년에 버룩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그 절차를 밟을지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무서워져서 그만뒀습니다. 현재 저는 36세입니다. 그리고 저번 한국에서의 경험을 봤을 때, 전 한국에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괜찮죠. 제가 뉴욕에 살다가 한국에 사는 것이나, 한국을 매년 방문하거나, 그런 행위들이 절 더 한국인으로 만들거나 덜 한국인으로 만들지는 않으니까요. 그런 감정은 이 뉴욕시에 존재하는 강한 입양아 사회가 없었다면 느낄 수 없었겠지요. 또 제가 첫 여행을 끝내고 난 뒤에 패션 몰을 자주 들리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미용실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인데, 제가 첫 한국 여행을 끝내고 난 뒤로 거기 단골이 되었죠. 제 한국 유산을 다시 찾아내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전 제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팟캐스트: 퀸스에 살고 있으시다고 하니 아쿠아피나 관련 논란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데요. 그가 대화 방법이 흑인 문화를 도용하고 있다는 주장이라던가, 반대쪽에서는 퀸스에서 아시아인들과 같이 자라면 그렇게 된다는 주장을 하는데, 헤더 씨의 의견은 어떤가요?

헤더: 전 아쿠아피나씨의 팬이에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의 연기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성공에 대해서도 무척이나 기뻤고요. 제 약혼자와 함께 코미디 센트럴에 아쿠아피나의 프로그램이 나올 때마다 꼭 챙겨보죠. 그리고 제 의견으로는 아쿠아피나의 대화 방법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전부 환경의 창조물입니다. 퀸스는 뉴욕시의 일부죠. 그리고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지만, 특정 지역, 특히 도심에서 살고 있다면 문화적 교류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팟캐스트: 현재 직업과 그리고 그 직업에 입양아의 정체성을 적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헤더: 제 교육 과정에 제 입양아 정체성을 확실히 적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공개연설,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과 홍보작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 수업에 학생들과 연결망을 구축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입양아로서 저의 경험에 대해서 매우 취약하죠. 그리고 입양아로서 정체성 혼란을 어렸을 때부터 20대 초반까지 고생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20대 중반에 아시아계 미국인 언론인 협회 등 아시아계 단체에 가입해 아시아계 사회의 일부가 되려고 하려고 했죠. 왜냐하면, 어렸을 때 그런 경험이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약점이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저와 좀 더 쉽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항상 말하기를 날 너무 우러러보지 말라고 합니다. 전 여러 문제를 겪었고 지금도 여러 문제를 겪고 있죠. 완벽한 것은 없고 삶은 롤러코스터와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학생들에게 제 약점을 공유하죠. 그리고 저는 긍정적인 사고와 영감의 영향력에 대해서 높게 평가합니다. 그래서 학생들과 고취되는 음악을 공유하기도 하죠. 학생들에게 알리시아 키즈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오브 마인드를 틀기도 했습니다. 전 알리시아 키즈나 쏜 힐같은 가수를 좋아해요. 중학교 때부터 R&B나 힙합과 같은 장르와 많이 공감해왔죠. 음악이 저를 항상 지탱해 왔거든요. 그리고 제가 하려는 일을 의료상의 관점이 아니라 치료의 관점에서 다가가려고 해요. 

팟캐스트: 10살짜리 자기 자신에게 지금의 자기 자신이 말할 수 있다면, 뭘 이야기해주고 싶으신가요?

헤더: 10살 때 어머니를 잃었어요. 10살짜리 저에게 사랑받을 수 있고, 특별하고,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멋있다고 긍정적인 확인을 해주고 싶어요. 자신감과 사랑, 보살피는 마음으로 채워주고 싶습니다. 제가 10살 때는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어요. 항상 어렸을 때 정신 관리의 일부로 글쓰기를 했죠. 어렸을 때 일기가 있었어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일기에 작성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일기가 사라졌어요. 누가 제 일기를 가져갔는지 지금은 예측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뒤로는 제 일기를 작성하기를 꺼리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는 감정을 관리하기가 힘들었어요. 

팟캐스트: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 글을 쓰실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쓰실 수 있게 도울 수 있으시죠.

헤더: 카오미씨, 2010년부터 10년간 전 회고록을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 호밀 밭의 파수꾼을 읽고 나서 회고록을 써야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호밀 밭의 파수꾼을 가르쳐준 선생님에게 그 이야기를 했지요. 전 그때 16살이었지만 선생님이 시간을 들여서 써보렴. 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 기억이 나요. 그래서 2010년까지 작성을 시작하지 않았죠. 2010년에 버룩 대학교에서 교수님을 만났고 그분이 수업에서 회고록을 가르치고 있었죠. 그래서 그분 수업을 듣고 제 회고록을 작성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제 이야기를 작성하면서 회고록을 다양한 관점으로 쓰고 싶다고 생각했죠. 

헤더: 그 관점 중 하나가 어머니의 관점이었습니다. 9남매의 일원이었고, 청소년기에 입양 기관에 맡겨졌었죠. 몹시 어려운 삶을 겪었고 어머니의 형제, 자매, 사촌과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모든 것에 대해서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중간에 태어난 아이로서 7살때 동생들을 돌봐야 했고 그것도 큰 문제였다고 하더군요. 거기에 제 외할머니는 개 사육사이기도 해서 아이들만큼이나 개들도 항상 있었다고 해요. 9명이나 있는 애들이 충분히 잘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침대를 교대로 사용해야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게 가능한 이유는 제가 어머니의 일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저에게 6년 전에 주신 것인데 지금까지도 전부 읽지 못했어요. 어머니의 일기를 직접 읽는 일은 아주 감정적인 일이죠. 일기 시작 부분에서 어머니의 필체는 아름답고 깔끔하지만, 나중으로 갈수록 더욱더 악필이 되어가요. 경화증으로 인해서 글쓰기가 어려워졌으니까요. 그래서 일기를 읽는 것 자체가 어려워요. 일기를 전부 읽어버리면 어머니의 일부를 잃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일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비논리적이라는 일도 알지만 지난 6년간 제가 가지고 있던 공포입니다.

팟캐스트: 어머니께서는 자신의 병이 불치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을 테니, 헤더 씨가 그 글을 읽을 그거로 생각하고 일기를 작성하셨던 건가요?

헤더: 어머니께서 제 글을 읽기 원하셨어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저를 조건 없이 사랑했다는 점, 입양 과정과 단계, 드라이브 인 영화의 경험, 제가 땡깡 부리는 일이라든가 그런 일들이 담겨 있죠. 만약에 제가 제 약혼자와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똑같이 해주고 싶어요. 일기를 작성해서 나중에 읽어서 아이일 때의 경험을 어땠는지 알 수 있게 하는 거죠. 

팟캐스트: 사람들이 SNS로 헤더씨를 구독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헤더: 제 SNS 계정은 트위터, 인스타그램은 Heather J Schultz입니다. 제 개인 이메일은 Heather.J.Schultz@gmail.com입니다.

팟캐스트: 그리고 헤더씨가 쓰신 기사는 구글을 통해서 찾을 수 있나요?

헤더: 네 그렇습니다. Heather Schultz로 검색하면 제가 2014년에 쓴 두 수필을 찾으실 수 있어요.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헤더씨

헤더: 감사합니다. 카오미씨.

시즌 4, 에피소드 7: 토마스 융커

Audio available at 5 pm EST on Monday, Nov. 23, 2020.

21세인 토마스 융커는 한국에서 덴마크로 유아일 때 입양되어 자랐고 항상 출생지인 한국에 관심을 가진 채로 자라났다. 2019년에 그는 휴학하고 한국으로 이주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한국에서 그는 한국 뿌리를 찾고, 새로운 친구를 만들고 삶에 관해서 탐구하며 입양이 어떻게 그의 삶을 바꾸었는지 생각했다. 이 인터뷰는 2020년 초반에 그가 9개월간의 한국 생활을 마치고 막 덴마크로 돌아온 뒤에 진행되었다. 

토마스: 제 이름은 토마스 융커라고 합니다. 덴마크의 작은 마을 하닝 출신이죠. 50,000명의 거주자가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덴마크어 자기소개) 

팟캐스트: 최근 한국에 가서 거주하셨죠?

토마스: 네 그렇습니다. 9달 거주했죠. 덴마크에 돌아온 지 10일이 되었습니다. 한 1년 전에 할 일을 찾고 있었습니다. 휴학했거든요. 덴마크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 중간에 잠시 휴학을 하는 일은 아주 평범합니다. 그래서 휴학을 했죠. 성장하면서 항상 한국에 일정 기간 동안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가기 좋은 시간대라고 생각해서 한국으로 이주하려고 했습니다.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했고, 아파트도 구했죠. 그리고 한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이주하기 이전에 일자리와 아파트를 찾아서 입사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바로 이주를 해서 빠르고 손쉬웠습니다. 

토마스: 2002년에 제 부모님과 함께 여동생을 데리러 한국에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고작 3살이라서 별로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리고 2019년 여름에 한국에 부모님과 함께 휴가를 왔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생활이 한국에서의 최초 장기 거주였던 셈이네요. 

팟캐스트: 처음 도착하셨을 때 아주 기쁘셨겠네요.

토마스: 네. 한국은 저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죠. 전 한국 혈통이고 한국 유산을 물려받았으니까요. 제가 혼자 왔고, 아는 사람도 없고, 나라도 잘 모르는 상황에의 생활은 중요한 경험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생활하는 것에 힘들기도 했지만 대단한 경험이었지요.

팟캐스트: 많은 입양아가 언급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는 경험도 해보셨나요?

토마스: 네 확실히 느꼈습니다. 제가 사는 덴마크 지역은 인종 구성이 다양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한국에 왔을 때 제가 살고 있던 지역과는 달리 한국은 좀 더 인종적으로 저와 비슷했고 그래서 잘 섞여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팟캐스트: 어떤 일을 하셨다고 했죠? 교육 분야에서 일하셨다고 들었는데요.

토마스: 네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처음에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2달 뒤에는 학원에서 나와서 7달 동안은 개인 과외를 했어요. 

팟캐스트: 한국에서 놀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토마스: 한국에서 가장 놀란 점은, 한국에 휴가를 가면 한국 사람들과 가까이 생활하지 않죠. 그냥 여행하면서 구경하니까요. 하지만 한국에서 직접 살다 보니 한국 사람들과 교류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은 경쟁적인 국가입니다. 사회적인 구조, 교류, 직업, 모든 일이 덴마크와 비교했을 때 훨씬 치열합니다. 그래서 제 나잇대의 한국 친구들은 더 많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더라고요. 그게 저를 가장 놀라게 한 점입니다. 제 부모님과 같이 한국에서 휴가를 보낼 때는 느끼지 못했거든요. 제가 가끔 방문할 때는 사람들이 겪는 경험을 느끼지 못했으니 그 경험들을 절 가장 놀라게 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 친구들은 어떻게 사귀셨죠?

토마스: 덴마크에서는 항상 여러 운동을 했기 때문에 한국에 왔을 때도 계속 그 운동을 지속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왔을 때 아마추어 축구팀에 들어갔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 또래의 한국인 친구를 많이 만들 수 있었어요. 그 친구들이 절 받아주어서 운이 좋았죠.

팟캐스트: 거기에서 의사소통은 어떻게 하셨죠? 한국어를 하실 수 있나요?

토마스: 조금은 합니다. 제가 한국에 왔을 때는 안녕하세요. 정도밖에 못 했어요. 하지만 한국에 왔을 때 개인 과외를 받았어요. 한국에서 꽤 오랫동안 지낼 거라는 사실을 알았고 한국 문화에 적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9달 동안 제 한국어가 많이 발전했어요. 처음에 한국 친구들과 대화할 때는 좀 이상했습니다. 친구들 영어는 괜찮긴 했지만 유창하지는 않았고 제 한국어도 마찬가지였죠. 그래서 제가 영어를 가르쳐주고 친구들은 저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줘서 많이 발전했습니다. 

팟캐스트: 사람들이 토마스 씨를 볼 때 뭔가 다른 특징을 발견했나요?> 아니면 그냥 한국인으로 봤나요?

토마스: 많은 사람이 절 보기만 해서는 평범한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 자라난 한국인이요. 제 외모가 한국식일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제가 말하기 시작하면 외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팟캐스트: 여성분들은 어땠나요? 한국에서 데이트해보신 적은 있나요?

토마스: 네. 한국에서 데이트한 적 있습니다. 한국에서 여자친구를 4달에서 5달 정도 사귄 적이 있고, 다른 여성들과 데이트도 몇 번 해본 적이 있죠. 흥미롭고 재밌는 시간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인종 구성이 다양하지 않은 지역 출신이라고 하셨죠. 덴마크 여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진다고 생각하신 적이 있나요?

토마스: 음…. 덴마크에서 여성 문제가 있었던 적은 없어요. 관련 문제로 실패한 적도 없습니다. 물론 한국에서 한국 여성들과 데이트할 때는 한국 여성들이 저를 외모적으로 다르다고 인식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덴마크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그냥 다른 방식으로 매력적이죠.

팟캐스트: 확실히 매력적인 분이니 확실히 다른 국가에서도 여성과 만나는 데 어려움을 겪지는 않으시겠네요.

토마스: 저 자신을 그렇게 자화자찬하는 성격은 아닌지라 잘 모르겠지만 한국 여성을 만난 경험 자체가 좋았다고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한국 여성과 덴마크 여성과는 차이점이 있나요?

토마스: 여러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제가 덴마크에서 성장했으니 제가 진지하게 누군가와 교제를 한다면 유럽 사고방식, 정확히는 덴마크 사고방식을 가진 상대와 더 잘 맞겠죠. 한국 여성들의 경우는…. 물론 전부 다 그렇지는 않지만, 상당수가 유럽 여성보다는 더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럽보다 자유주의적인 면이 덜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한국 여성 중 상당수가 결혼하기 전까지 부모님과 같이 생활하죠. 결혼 전까지 부모님과 생활하는 경우가 많으니 국 여성 중 상당수의 사고방식이 덴마크 여성보다 덜 성숙한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덴마크 여성들은 더 이른 시점에 독립해서 더 빠르게 성장하기 때문이죠. 

토마스: 다른 예를 들자면…. 워낙 다양한 예가 있어서 하나만 집어내기가 어렵네요. 동성애나, 다양성에 대한 관점도 있습니다. 유럽 사고방식이 좀 더 개방적이고 한국 사고방식은 좀 더 보수적이죠. 적어도 제 경험은 그랬습니다.

토마스: 여자친구와의 경험이 떠오르네요. 한국에서 지낼 때 장기간 교제한 여자친구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전 21살이었고 그분은 30살이었죠. 저보다 9살 연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놀랐던 점은 저와 데이트할 때 부모님에게 전화해서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친구와 있다고 하던가, 일하고 있다든가. 처음에는 농담으로 알았습니다. 30살인데 말이죠. 하지만 농담이 아니었죠.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일 중 하나였습니다.

팟캐스트: 한국 음주 문화는 어땠나요? 덴마크와 비슷했나요?

토마스: 좀 더 거칠다고 봅니다. 항상 자라면서 덴마크 음주 문화가 거칠다고 생각했지만, 한국 문화와 비교할 바는 못되죠. 금요일, 화요일, 수요일, 주중에도 어디든지 술집에 가면 빈 소주병과 취한 사람들을 볼 수 있죠. 처음 봤을 때는 기묘하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가면 적응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놀면서 술 마시는 법을 잘 안다고 볼 수 있네요. 

팟캐스트: 한국 문화에서 가장 마음에 든 점은 무엇이었나요?

토마스: 제가 한국에서 가장 마음에 든 점은 패션 문화였습니다. 한국의 패션 문화를 즐겼고,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자신의 외모에 관심을 가지는 점이 좋았습니다. 모두가 멋지게 보이려고 노력하죠. 물론 나쁜 면모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너무 과도하기도 하고, 사회적인 압박도 있습니다. 모두가 외모에 신경 쓴다는 점은 대단하지만 동시에 스트레스받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주 문화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노래방 문화도 좋았고 한국 문화에 대해서 마음에 든 것이 많았습니다.

팟캐스트: 미국인들은 유럽인들이 항상 패션적으로 앞서 있다고 생각하는데, 한국인들이 덴마크인들보다 더 패션적으로 낫다고 생각하시나요?

토마스: 예. 어떤 면에서는 한국 패션이 덴마크 패션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봅니다. 두 나라의 패션은 최소주의적 경향이 있고 둘 다 제 마음에 들거든요. 그래서 덴마크 패션 자체는 비슷하다고 보지만 차이점은 많은 한국인이 매일 잘 차려입는다는 점입니다. 매일 외양을 바꾸죠. 

팟캐스트: 특히 여성들에게서 항상 보기 좋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죠. 그리고 알고 계실지 모르지만, 여성들이 메이크업을 버리고 꾸미지 않는 운동이 있었어요.

토마스: 네. 봤습니다. 관련 사회적 압박이 너무 강해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봅니다. 이러한 저항 운동이 생기는 이유라고 생각하고요. 여성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도 알고 공감합니다. 

팟캐스트: 한국에 있었을 때 더 덴마크인의 정체성을 느꼈나요?

토마스: 덴마크인의 정체성이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었을 때 어떤 관점에서는 정말 고향에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덴마크에서보다 주변에 저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로 가득한 광경과 제가 한국인이라고 생각해서 한국어로 편하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들도 있었죠.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제 덴마크인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하기도 되었습니다. 제가 한국어로 말하면 한국인이 아니라는 점을 눈치챘고, 제가 영어로 말해도 한국 영어와 다른 악센트를 가지고 있어서 한국인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챘죠. 제 친구들이나 지인들과 이야기할 때도 우리가 어떤 토론을 할 때 똑같은 나이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알았고 더 덴마크와의 관계를 자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체성을 자각하기도 했지만, 아니라고 할 수 있네요.

팟캐스트: 한국에 가셨을 때 친부모 탐사를 진행하셨나요? 아니면 자료만 받으셨나요?

토마스: 한국에 돌아가기 이전에 친어머니와 연락이 되었습니다. 제 친어머니와 저는 홀트 기관을 통해서 연락되어서 서로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죠. 매달 서로의 상황과 정보를 교환했습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어머니께서는 절 만날 수 없어요. 절 입양 보내고 난 뒤에 새로운 남성분과 만나서 결혼하셨죠. 두 아이를 낳았고 지금까지도 행복하게 지내고 계셔요. 즉 저와 직접 교류를 하실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해요. 너무 위험하기도 하고, 남편이 알아낸다면 어머니와 이혼하실 수도 있겠죠. 그래서 어머니의 삶을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아요. 이미 저와 이메일을 하는 것 자체로도 충분히 위험을 감당하고 계시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존중하기 때문에 좀 더 일을 진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팟캐스트: 처음에는 실망하셨겠군요?

토마스: 처음에는 당연히 실망했죠. 물론 무시당했다든가 그런 느낌은 아니었지만 실망했고 시간을 두고 생각을 해보니 어머니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오히려 용감하고 선량한 사람이었죠.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고 가족들에게 버림받을 수 있는데도 저에게 반응해 주셨으니까요. 그리고 계속 비밀리에 연락했고요. 저와 이메일을 해준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했죠.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감정적인 판단이었고, 그 뒤에는 감사했습니다.

팟캐스트: 친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나요? 그리고 그 일을 말씀드릴 수 있었나요? 

토마스: 네. 어머니에게 말씀드리고 싶었던 일을 말할 수 있었어요. 대화보다 이메일이 좋은 점은 말하고 싶은 모든 일을 말하고 바꾸고 조정할 수 있다는 점이죠. 

팟캐스트: 영어로 작성하셨나요?

토마스: 네 영어로 작성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영어를 못하시지만, 홀트 기관에서 한국어로 번역해 어머니에게 전달해주었죠. 홀트 기관에서 어머니와 저의 연결 고리가 되어주었습니다. 물론 직접 교류는 금지였습니다. 그래도 제가 원하는 말을 할 수 있었고, 제가 원하는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친어머니를 직접 모르지만, 전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고, 어머니가 절 입양시킨 것에 대해서 어떤 원망도 품고 있지 않고, 제가 덴마크에서 받은 삶을 소중히 여기고 있고, 어머니가 잘 지내면 좋겠다고 말했죠. 제가 말하고 싶었던 말을 전부 할 수 있었습니다. 

토마스: 제가 9달에서 10 달 정도 한국에서 살아보니 어머니가 느끼셨을 압박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되더군요. 친구와의 대화, 그들의 관점, 감정, 부모,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을 들어보니 확실히 어머니에게 있어서 어려운 상황이더군요. 그리고 1년간 한국에서 생활해보니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토마스 씨는 젊으시니, 나중에 가면 어머니와 직접 만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토마스: 네. 그게 제 희망 사항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강제로 만나지는 않을 겁니다.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강제적으로 친어머니를 만난다고 해도 행복하지 않을 겁니다. 어머니께서 준비가 안 된 채로 만나면 저만 만족할 테고, 그럼 저도 기쁘지 않겠죠. 의미가 없어지는 일입니다. 둘 다 원할 때 만나야죠. 한국은 계속 바뀌고 있고 더욱더 현대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태어난 뒤 21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죠. 그러니 앞으로 21년 동안 더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어머니와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입양아들에게 있어서 친부모의 정보가 인권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시나요?

토마스: 음…. 인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부모를 반드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불가능한 경우도 많습니다. 제가 친어머니와 연락이 된 뒤, 한국에서 살면서 이해한 사실이죠. 어떤 경우에는 부모의 정보를 찾을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그래서 인권이면 좋겠지만 않은 이유도 이해합니다. 이 문제에서도 양면성이 존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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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다른 입양아들처럼 한국에 있었을 때, 입양되지 않았으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해 상상해 보신 적이 있나요? 

토마스: 네 물론이죠. 한국의 거리를 걸으면서 마천루들을 볼 때마다 제 삶이 어땠을까, 제 성격이 어땠을까 가정해본 적이 있습니다. 확실히 달랐겠죠. 그래서 입양되지 않고 평범한 한국인 가정에서 자라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 적도 있습니다. 

팟캐스트: 2019년에는 양부모님도 같이 왔었지요?

토마스: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그분들도 한국에 관심이 있고 토마스 씨를 지원해주시고 있나요? 

토마스: 네. 두 분 다 한국에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어머니께서 항상 K-드라마를 자주 보거든요. 그래서 두 분 다 저를 지원하셨고, 제가 덴마크의 삶에 감사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부모님들은 제가 듣고 말할 수 있을 때부터 저의 유산이나, 제가 왜 부모님과 다르게 생겼는지, 어디 출신인지 언제든지 물어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제 부모님에게 졸업 선물로 3명이 같이 한국에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죠. 부모님들은 당연히 동의하셨습니다. 부모님도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제 고향 문화도 알고 싶어 하셨습니다. 제게 부모님이 해준 또 다른 말은 제가 한국인일 수도 있고, 덴마크인일 수도 있고, 두 부모님이 있다고 생각해도 되고, 네 명의 부모님이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며,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는 너희를 지지해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살고 싶다면 지지해줄 거고, 덴마크에서 살아도 지지해준다고 말씀하셨죠. 정말 감사할 뿐입니다. 

팟캐스트: 대단하네요.

토마스: 네. 정말 대단한 부모님이시죠. 

팟캐스트: 한국에 가셨을 때 9달만 지낼 그거로 생각하셨나요? 아니면 어쩌다 보니 기간이 짧아지게 됐나요?

토마스: 9달보다 적게 있을지 많이 있을지 정하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한국에서 살고 싶어서 갔고 매일매일 경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최근에 고향에 돌아온 이유는 한국에 직장이 있었지만, 제가 2021년 8월에 진행해야 하는 석사 학위가 있어서 돈을 모아야 해서 돌아왔습니다. 물론 이론적으로 한국에 살면서 돈을 벌 수도 있겠지만 국제적 대도시에서 사는 남성이 돈을 모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겠죠. 서울에는 흥미로운 일들이 너무 많고 즐기고 싶거든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우선 덴마크에 돌아와서 1년간 돈을 모은 뒤 대학교 진학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어떤 전공인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토마스: 한국학 석사입니다. 1년 동안은 한국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웁니다. 다음 2년은 문화와 역사를 배우고 마지막 해에는 아시아 문화의 차이점등을 배우죠. 아주 흥미로운 방식이에요. 

팟캐스트: 9개월 동안만 한국에서 살다 오셨지만, 문화적 충격을 겪으셨나요? 두 나라가 문화적으로 차이가 심하니까요.

토마스: 확실히 차이가 나죠. 몇 가지 느낀 점이 있습니다. 덴마크 직행 항로가 없어서 서울에서 암스테르담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서울에서 암스테르담행 비행기에는 많은 한국인이 탑승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암스테르담에서 덴마크행 비행기를 타니 덴마크인과 네덜란드인들만 있더군요. 그래서 스튜어디스가 저에게 물을 마시겠냐고 물었고, 전 고개를 끄덕였죠. 하지만 한국에 있는 것이 아니니 덴마크어나 영어로 대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죠. 한국에 있을 때 고개를 끄덕이는 게 쓸모가 많아서 그게 버릇이 된 거죠. 덴마크에서는 바꿔야 할 작은 일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덴마크와 한국 간 문화적 차이가 커서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을 떠났을 때 슬프셨나요?

토마스: 저만의 결정이었다면 아직도 한국에 남아 있었을 겁니다. 한국을 떠날 준비가 안 되어 있었죠.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준비가 안 되어 있었어요. 많은 한국인 친구들이 있었고, 대도시에서 사는 혼자 사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하루하루가 모험 같았죠. 매일 다른 일이 있었고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모든 일을 진심으로 경험했고 제 문화를 직접 경험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고향과도 같은 느낌을 받았고 현재 한국을 떠나는 일은 실망스러운 기분이었습니다. 특히 덴마크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죠.

팟캐스트: 현재 지금 알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생각하시면, 다시 한국에 돌아가 거주하고 싶나요? 

토마스: 단언하기 어렵네요.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될까의 문제입니다. 제가 한국 여성과 결혼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렇게 될지도 모르고요. 한국에서 살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확실히 한국에서 살 수 있어요. 하지만 살지 않을 수도 있죠. 여러 가능성이 공존합니다. 한국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팟캐스트: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단언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경쟁적인 직업 문화 같은 문제 때문인가요?

토마스: 네. 물론 어떤 면에서는 마음에 들지만, 너무 심한 예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을 무척 좋아하긴 하지만 동시에 덴마크도 마음에 들거든요. 편한 모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곳에서 산다는 점이 큰 장점이 되죠. 덴마크에 친구들도 많고, 가족도 있고 덴마크 문화도 좋아합니다. 그래서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워요. 덴마크에서 자랐으니 여기에서 지속해서 살아갈 겁니다. 

팟캐스트: 향수를 느낀 덴마크 문화는 무엇인가요? 놀란 점도 있나요?

토마스: 제가 한국에 있었을 때는 물론 좋은 친구들도 많았고 좋은 대화도 많았지만, 친구들은 영어를 잘 하지 못하고, 저도 한국어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대화가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았죠. 반면에 덴마크어로의 대화는 좀 더 자유로웠습니다. 또 덴마크 유머도 그리웠습니다. 덴마크식의 자유주의적 사고도 그리웠고요. 한국에서는 어떤 농담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어떤 대화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 규정이 되어 있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되어 있어 친구들이 제 대화를 교정해주었죠. 물론 친한 한국 친구들이 있어서 그 문화를 배울 수 있었지만, 덴마크의 사회적 규범이 그립기도 했습니다. 

팟캐스트: 다시 아기가 된 기분이셨겠네요. 

토마스: 네 확실히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여자친구들이 저를 항상 가르쳐주었습니다. 무엇을 해도 되고, 무엇은 하면 안 되고, 어떤 상황에서 맞고 틀린 일을 가르쳐 주었지요. 다시 유아 단계로 돌아가서 제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다시 배우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전부 다 다시 배운 것은 아니지만 많이 배웠죠.

팟캐스트: 덴마크에 돌아간 지 몇 주정도 지났는데, 한국이 토마스 씨를 바꿨다는 느낌이 드나요?

토마스: 네. 한국에 가기 전에는 100% 덴마크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생활했지만, 한국에서의 생활이 제 관점을 넓혀 주었습니다. 한국 친구들에게 배운 정보를 제가 받아들였고 제 일부가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가르쳐 준 지식에 대해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좀 더 한국인 같은 느낌이 들고 한국인 같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덴마크 유머에 대해서 언급하셨는데, 덴마크 유머가 정확히 무엇인가요?

토마스: 좋은 예가 하나 있는데요. 제 친구와의 이야기입니다. 친구와 같이 인터넷으로 옷을 보던 도중이었습니다. 한국 인스타그램을 기반으로 하는 신생기업 쇼핑몰이었고요. 그래서 한국 신용카드로만 결제할 수 있었고, 그때는 제 친구에게 현금을 준 다음에 절 위해서 결제할 수 있는지 물었죠. 친구는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마음을 바꿔서 주문을 취소하고 돈을 돌려 달라고 했죠. 그래서 친구가 지금 돈이 필요하냐고 물었습니다. 그 말에 저는 아니 돈은 필요 없어- 라고 농담 식으로 말했습니다. 덴마크에서는 그런 농담이 흔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우리가 좋은 친구니까- 라는 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전 친구가 이해한 줄 알았어요. 웃었거든요. 하지만 나중에 제가 돈을 돌려 달라고 이야기하니 친구가 돈을 써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째서 돈을 썼는지 물어봤는데, 친구가 돈을 가져도 된다고 그랬던 것 아니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제가 농담이었다고 하니 친구가 그게 농담이었냐고 되물었습니다. 덴마크에서는 통할 농담이었고, 돈도 돌려받긴 했죠. 그렇게 많은 액수는 아니었고요. 하지만 소통의 문제, 그리고 언어적 차이점에 만들어낸 문제라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덴마크 친구들이라면 돈 가져도 된다고 이야기를 해도 농담이라는 걸 인식할 거라는 말이죠?

토마스: 네. 이미 그 친구에게 비싼 생일 선물도 줬거든요. 그래서 아 그래. 내가 가진 거 다 가지고 가. 생일 선물도 받았으니까. 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어요.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거죠. 문화적 차이점에 대한 소소하게 재밌는 이야기였습니다.

팟캐스트: 제가 한국에서 돌아왔을 때 느꼈던 사실은 대단한 경험을 겪고 난 뒤라 전 바뀌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죠. 토마스 씨도 자신은 바뀌었지만, 남들은 바뀌지 않은 그런 느낌을 받으셨나요? 

토마스: 네. 저도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겪은 일을 말해도 전부 이해하지 못하죠. 거기에 없었으니까요. 운이 좋게도 제 친구들은 제가 겪은 일을 이해해주려고 노력했죠. 그리고 제가 하던 일을 알려고 했고요. 하지만 전부 이해하지 못하고, 제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없죠. 제가 한국이 아닌 나라에서 1년간 살았다고 해도 한국에서 살았던 1년과는 달랐을 겁니다. 한국은 저에게 특별한 나라니까요. 그래서 친구들은 제 경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요. 물론 친구들이 최대한 노력하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외롭죠. 

팟캐스트: 여동생도 한국 입양아 출신이라고 하셨죠?

토마스: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하지만 토마스 씨보다 어리신 거죠?

토마스: 네. 18살입니다. 저보다 3살 어린이죠.

팟캐스트: 여동생분은 토마스 씨와 관점이 다르다고 생각하나요?

토마스: 네. 확실히 다릅니다. 개인마다 관점이 다르죠. 저는 항상 제 고향에 대해서 흥미를 느꼈지만 제 여동생 같은 경우에는 한국에 관심이 없었죠. 무관심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여동생의 경우 자기 자신을 순수한 덴마크인으로 봅니다. 그래서 부모님께서 저와 제 여동생을 다르게 대하셨지만, 저와 제 여동생에게 저희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토마스: 덴마크에는 백인 친구들밖에 없어요. 제가 백인 친구들만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제 출신 지역은 인종적으로 다양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불만을 가진 적은 없어요. 친구들과 걷고 있으면 제가 덴마크 출신이라고 모두 인식하죠. 하지만 한번 한국 출신 여성과 같이 덴마크에서 데이트했습니다. 놀이공원에 갔는데 모든 직원이 영어로 대답하더군요. 아시아계 관광객이 많으니까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제가 완벽하게 덴마크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제가 덴마크어로 답하면, 사람들이 그걸 듣고 제가 덴마크인이라는 사실을 아니,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왜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인식하는지 이해도 합니다. 많은 관광객이 오고 가니까요. 인종차별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차이점을 느끼기는 하지만 분노할 일은 아니죠.

팟캐스트: 한국에서 1년 정도 살아보려고 하거나 관심이 있는 입양아들에게 줄 수 있는 조언이 있나요?

토마스: 제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은 최대한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즐겨라! 입니다. 고향에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기쁘게 생각하고 한국 문화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한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매일 한국을 느끼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토마스: 네. 모국에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기회입니다. 최대한 즐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토마스 씨. 토마스 씨에게 연락하거나 SNS상으로 구독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토마스: 인스타그램이 있습니다. Thomas Juncker 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져 있어요.있어요.

시즌 4, 에피소드 6: 벤자민 화이트

Audio available at 7 am EST on November 9, 2020.

출생지인 한국에 파병된 미 육군 중위 벤자민 화이트는 26세이며 한국계 입양아다. 그는 게이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체성을 가진 그가 군인이자, 한국계로서 사회가 그가 가진 모든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국가에서 다른 한국인과의 관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벤자민: 제 이름은 벤자민 화이트입니다. 대한민국 전주에서 강기석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뒤로 입양되어서 세인트루이스 근교에서 자랐습니다. 

팟캐스트: 지금은 미군 소속으로 서울에 배치되어 계신 거군요?

벤자민: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입대한 지 얼마나 지났죠? 

벤자민: 전 장교 직위로 2016년에 입대했습니다. 대학교 학위를 따는 동안 ROTC를 진행했고, 대학교 졸업 후 미 육군에 육군 소위로 입대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어떤 학문을 전공하셨죠?

벤자민: 정부, 국제 업무와 관련된 전공입니다. 정치학과 외교학 학사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팟캐스트: 외교관이 되긴 위한 진로인가요?

벤자민: 네. 제 꿈은 외교관이 되거나 적어도 국제 정치과 활동과 관련된 정부 부처에서 일하는 겁니다. 국무부에서 일하거나 국방부에서 일하면 좋겠습니다. 제 꿈의 직업입니다. 

팟캐스트: 임관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럼 장교 교육을 받으시면서 한국에 배치되실 생각을 하셨나요? 

벤자민: 군대에 입대하면서 여러 방법으로 장교가 될 수 있습니다. 서양의 경우에는 대부분 병사는 사병과 부사관입니다.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팟캐스트: 다른 두 진로가 있는 셈이로군요? 그렇죠?

벤자민: 네. 다른 두 진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주어진 정보와 시간과 관련해서 장교가 더 좋은 진로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2016년에 임관했을 때 미 육군 화학 병과로 배정되었습니다. 화학 병과란 미군이 상대하게 되는 CBRN… 화학, 생물학, 방사능, 그리고 핵무기 관련 문제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병과입니다. 그리고 제가 비교적으로 신병이었을 때 다음 부대로 배치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부대로 배치될 때 선호 지역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생각했습니다. “한국에 미군 기지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어.” 그래서 선호 지역 세 곳을 전부 한국 기지로 선택했습니다. 입양되고 나서 다시 한국에 돌아와 본 적이 없었으니 했던 선택이었습니다. 나중에 연락이 와서 한국에 배치되고 싶냐는 질문이 왔습니다. 가고 싶다고 했고, 그 선택을 한 시기가 2017년이었습니다. 보통 가족이 없이 혼자 배치되는 군인의 경우 1년의 파병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연장 신청이 가능해, 계속 연장 복무를 했습니다.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아주 즐거웠기 때문입니다. 문화, 음식, 사람들, 고향에 돌아온 기분인, 아주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팟캐스트: 그리고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벤자민: 26세입니다. 

팟캐스트: 한국에 파병된 군인으로서 생활을 즐기셨다고 하셨죠. 한국에 있으면서 양면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벤자민: 네 그런 경우가 확실히 존재합니다. 평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에 있으면서,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과 지내고, 비슷한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지내면 그런 느낌이 듭니다. 확실히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한국에 살면서 느껴지는 평범함이 존재합니다. 저만 아니라 많은 한국계 입양아들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다문화, 다인종 환경에서 다양한 가족들과 자라나게 되기 마련이니까요. 저는 미국 중서부 출신인데, 중서부의 인종 구성은 다양하지 않은 편입니다. 그래서 항상 평범한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눈에 띄게 됩니다. 적어도 제 경험으로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평범하게 지내면서 주변에 섞여 들어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한 이득이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 이름을 쓰신 적도 있나요?

벤자민: 아닙니다. 한국 사람들과 교류할 때만 사용했습니다. 많은 분이 절 한국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제 한국군 친구들이 화이트나 벤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기석이나 강이라고 부르기를 선호했습니다. 아무래도 한국어로 부르기에는 더 쉬우니까요. 그래서 이름을 혼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입양아로,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방법입니다. 

팟캐스트: 성장하시면서 사람들이 화이트 씨가 백인일 그것으로 생각하기도 했군요?

벤자민: 네. 제가 한국에 와서 배치된 부대마다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배치될 때마다 배치 목록이 부대에 전달됩니다. 따라서 어떤 병사가 부대에 배치될지 미리 압니다. 벤자민 화이트라는 이름을 볼 때마다 백인이 오는 줄 알지만, 제가 배치될 때나 회의에 참석해서 “제가 벤 화이트입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놀랍니다. 전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전 여기 일하려고 왔고, 그런 반응은 흔하게 겪었습니다. 

팟캐스트: 청취자분들이 군대 생활에 대해서 잘 모르니, 하루 생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해서 알려주실 수 있나요? 물론 군대 생활이니 보안상 알려주실 수 없는 경우도 많겠지만요. 

벤자민: 군대 생활은 아주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다 정해져 있습니다. 물론 예정되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경우도 빈번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오전 4시 반에 기상합니다. 5시에 육체 단련 이전 운동을 하기 위해서 친구들과 체육관에서 만납니다. 6시 반에는 조회를 위해 모든 군인이 모입니다. 그 뒤로 한 시간 정도 신체 단련을 합니다. 9시 반까지 출근해야 하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좀 더 일찍 출근해서 9시에 출근합니다. 조용할 때 저에게 온 이메일들이나 일거리를 확인합니다. 그 뒤로 17시, 오후 5시까지 일합니다. 그 와중에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육하거나, 교육 감수하거나, 장교로서 여러 회의에 참여합니다. 하루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계획이 진행되는지에 따라서 생활도 달라집니다. 

벤자민: 제 현재 보직은 미 육군 의장대 소속입니다. 한국에서 여러 행사 절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달의 경우에는 한국 전쟁 70주년 추모식과 일주일 전에 일어난 휴전협정문 작성 기념식을 준비하느라 아주 바빴습니다. 물론 두 행사 전부 훌륭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둘 다 찬사를 받았습니다. 

팟캐스트: 부통령 마이크 펜스가 방한했을 때 그곳에 있었나요?

벤자민: 네. 우리 의장대가 유해 송환 식을 진행했습니다. 147명의 한국군 유해가 하와이에서 한국으로 송환되었고 문재인 대통령도 그 절차에 참여하셨습니다. 또한, 유엔군 유해를 하와이로 송환해 관련 조사를 하는 절차에도 우리가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다국적 명령체계에서 일하는 일은 꽤 희귀한 경험입니다. 송환을 시행하는 주체 국가, 그리고 한국 전쟁 때 지원을 했던 참여국들도 참여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동맹국 간의 공통점을 확인하는 일도 흥미로운 절차입니다.

팟캐스트: 군대 생활을 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벤자민: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한국에 배치되는 명령을 받은 뒤에 한국에 도착해, 돌아왔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였습니다. 이곳이 어머니가 살던 곳이고, 제가 태어난 땅이지만, 돌아오기 23년이 걸렸습니다. 그 상황 자체가 제가 살면서 잊지 못할 일입니다. 물론 개인적 입양아 관점의 기억입니다. 군대와 일의 관점으로 보면 훨씬 더 복잡합니다. 관련 기억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친구를 만든 기억, 훈련을 받을 때의 기억도 있습니다. 군대에 있어서 특수한 경험은 여러 사람과 같은 기억을 공유한다는 점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말하듯이 기분 나쁜 일도 수용해야 합니다. 훈련은 어렵고 지루하며 사람을 마모되게 합니다. 그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동료들, 휘하 병사들, 그리고 친구들이 그 상황을 낫게 하거나 더 끔찍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상황은 힘들고 어렵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서로를 도와주고 그 상황에서 가장 좋은 점을 찾았던 상황입니다. 물론 힘들고 나쁘긴 했습니다. 

팟캐스트: 자신의 한계를 시험한다는 느낌이군요?

벤자민: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장교로서 4년간 복무한 뒤 복무연장을 고려하게 되나요? 결정 방법이 어떻게 되죠? 

벤자민: 저와 같이 ROTC 장학금 과정을 거치게 되면 특정 기간을 복무해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됩니다. 미 육군이 제 대학 교육을 위해서 비용을 냈으니 그 대신 일정 기간을 미 육군에서 복무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의무복무 기간 이후에도 군대에 남아 있을 예정입니다. 최소 20년간은 복무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어떻게 진행될지 보면서 결정되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만난 상급자들, 동료들과 사람들은 전부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주 특수한 경험입니다. 다양한 배경, 환경,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만나게 되고 일을 하게 됩니다. 제가 군대에 입대하지 않았다면 미국을 대표하는 다양성을 접할 기회는 없었을 겁니다.

팟캐스트: 23년 만에 다시 한국에 도착했을 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오셨죠? 미국을 대표한다는 생각을 하시고 오셨나요?

벤자민: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만약에 한국에 오게 된다면 군대 관련 방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입대는 항상 선택지에 존재했습니다. 전 군인 사회에서 자랐습니다. 스콧 공군 기지 근처에서 자라면서 군인들이 항상 주변에 있었습니다. 군인들의 경험을 들으면서 자랐고, 한국 파병 경험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입대가 한국 파병과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 자체는 대학 때, 죄송합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현실화되지 않았습니다. 대학 지원을 하면서 군 생활을 제 진로 중 하나로 염두에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군 생활을 진로로 정했을 때 기회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어디에 배치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고, 그 기회를 잡았습니다. 물론 확정적인 배치는 아닙니다. 만약에 미 정부에서 당신이 더 필요한 곳이 있다고 정하면 그쪽으로 배치가 되게 됩니다. 제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 육군에서 한국에 파병 여부를 물었고 제가 그 기회를 잡아, 3년 뒤에 이곳에 있습니다. 

팟캐스트: 벤자민씨가 한국계 입양아라서 한국 배치에 이득을 본 그거로 생각하시나요?

벤자민: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건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미군에 이렇게 아시아계, 그리고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복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특정 배치 방법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군대에서는 여러 정보를 제공하고 누가 어디로 가고 싶어서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과 친족들 때문에 많은 한국계 미국인 군인들과 아시아계 군인들이 한국으로 오고 싶어서 합니다. 한국계 미국인 군인 중 상당수가 한국에 친척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군에서도 한국계이니 한국에 파병되어도 된다는 판단을 하고 저를 이곳에 배치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군인들은 한국에 파병되면 고생하게 됩니다. 한국은 독일이나 이탈리아에 있는 기지들보다 훨씬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예 다른 문화이고, 언어를 표기하는 데 있어서 다른 알파벳을 사용하고, 많은 사람이 영어를 하지 못하고 음식도 다릅니다. 따라서 18살의 젊은 군인이 한국에 파병되면 당연히 고생하게 됩니다. 한국에 파병되는 많은 군인이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경우에는 한국의 좋은 점을 찾고 한국이 제공할 좋은 기회를 찾아야 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을 좋은 파병지로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주한미군 지도층이 한국을 좋은 파병지로 보이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평택 기지를 신축했다고 들었는데요.

벤자민: 아 네. 평택 기지 자체는 한국에 오랫동안 존재했습니다. 이 기지 자체를 지은 시기 자체는 기억할 수 없지만 최근 아주 크게 확장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서울 용산 기지의 철수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최소 3, 5000명이 넘는 인원이 평택과 캠프 험프리즈에 주둔하게 된다고 예측합니다. 중요 명령체계 상당수가 평택으로 이전했고 대부분 사람이 험프리즈를 통해 배치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아파트 건물도 신축하고 있고, 인프라도 신축 중입니다. 작은 미국 마을과 같습니다. 

팟캐스트: 지금 3,5000명이 주둔 중이라는 건가요? 아니면 미래에 그렇게 된다는 건가요?

벤자민: 미래에 3,5000명이 된다는 뜻입니다. 현재는 2,2000명 정도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친부모나 친족 조사를 하고 싶으신 적이 있었나요?

벤자민: 네. 사실 지금도 친족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몇 번 시도를 해보긴 했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파병되었을 때 조사를 시작하기 좋은 시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많이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이 아니니 또 다른 조사를 시작해 진행 중입니다. 제가 원했던 것보다 좀 더 어려운 상황이지만 조사 자체가 어렵다는 사실을 예측하였습니다.

팟캐스트: 어떤 문제를 겪고 계시죠?

벤자민: 사실 부모님의 이름과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년월일, 출생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을 찾으려고 하는 일 자체는 어렵습니다. 주민등록번호를 제공하지 않으셨고 이사를 여러 번 하셔서 더 찾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점을 이으면서 어디로 이사 갔는지 찾아내는 일이라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서울 경찰청에서 제 조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경찰에 연락하셔서 조사하셨군요?

벤자민: 네. 

팟캐스트: 군인이라서 그런 방법을 사용하실 수 있었나요? 물론 입증하시라는 말은 아닙니다.

벤자민: 네. 그렇습니다. 적어도 이 경우에는 그렇다고 봅니다. 제가 친분을 나누게 된 한국군 원사님께서 저에게 서울 경찰청에서 근무하시고 있는 동기분을 소개하셨습니다. 원사님이 헌병 출신이십니다. 제 이야기를 동기분에게 설명하셨고, 상관분에게도 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원사님과 같이 경찰청에 방문해서 인터뷰와 상담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경찰청에서 절 도와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뒤로 좋은 연락망을 구축해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있습니다. 제가 군인이라서 운이 좋았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의 많은 일은 인맥에 기반을 뒀고, 사람 관계와 인맥에 따라서 여러 가능성이 열리죠.

벤자민: 동의합니다. 직급과 인맥이 한국에서는 아주 중요합니다. 미군 소속이라는 점이 이런 면에서는 작은 이득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국에서 관계 형성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홍대나 다른 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한국에서 성장했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신적 있나요?

벤자민: 네. 그렇습니다. 과거를 생각하면서, 여기로 이주를 했다면, 여기에서 자라났다면 어땠을까, 어떤 직업을 가졌을까, 무엇을 하고 있겠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물론 제가 이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판단을 하고 있어서, 그들의 입장이 되었다면 또 다른 관점을 가졌을 겁니다.

팟캐스트: 여자애들이 오빠라고 부르고 그런 일 말이죠? 

벤자민: 네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사람들과 인연을 만드는 방식은 미국에서는 없던 방식입니다. 인종적으로 비슷한 사람들이 한국에서 자라나면서 자신들의 삶을 즐기는 광경을 보면 당연히 그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팟캐스트: 사람들이 형이라고 부르면 특별한 감정을 가지게 되나요? 

벤자민: 네. 특별한 애정 표현 방식입니다. 형이라고 불리게 되면 기쁜 느낌입니다.

팟캐스트: 받아들여졌다는 느낌인가요?

벤자민: 네 작은 환영의 표시인 셈입니다. 특히 한국 문화와 같이 자라나지 않은 배경의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다른 한국 군인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자주 교류를 하시는 편인가요?

벤자민: 자주 교류를 나누는 편입니다. 제 전 보직에서는 많은 한국 군인들과 훈련을 진행했고 한국군과의 합동 훈련 관련 연락을 진행하는 일을 맡기도 했습니다. 제가 한국계이기도 하고,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싶어서 하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관점으로 보면 한국계 입양아로서 한국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일도 하겠지만 동시에 세계 최고의 군대인 미군을 위해서 일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 욕구가 제 동기이고, 한국군 부대들과 관계를 맺고 훈련을 계획하고 진행합니다. 제 휘하 군인들이 가장 훌륭하게 해낸, 그리고 즐긴 훈련 중 상당수가 한국군과의 합동 훈련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개인적으로 기쁘고 무언가 해낸 것 같은 감정이 듭니다. 특히 제 휘하 병사들이 훈련에서 무언가 더 많이 얻어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문화적 교류와 같은 느낌이 듭니다. 특히 훈련 중에 한국군과 자주 진행하는 행사 중 하나는 MRE 교환입니다.

벤자민: MRE는 즉각 취식형 식품입니다. 미군 MRE를 한국군의 MRE를 교환해 먹습니다. 한국군과 미군의 전투식량을 먹어보는 셈인데, 저, 제 휘하 군인들, 같이 훈련하는 한국군에 있어서 흥미로운 경험입니다. 다른 훈련, 다른 문화, 다른 방식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일하게 됩니다. 

팟캐스트: MRE에 관해서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벤자민: 네. 군대에서 만들어 놓은 전투식량으로, 훈련 시 아침, 점심, 저녁으로 먹을 수 있는 식량입니다. 이미 포장되어 나오고 전식과 후식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24개의 메뉴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팟캐스트: 예를 몇 개 들어주실 수 있나요?

벤자민: 소고기 라비올리가 있습니다. 이미 포장되어 나오고 3년간의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차갑게 먹거나 뜨겁게 먹기도 합니다. 시간이 없다면 차갑게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그냥 먹을 수 있고,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게 좋지도 않지만, 훈련 중에는 필요한 물건입니다. 음식과 에너지가 필요하니까요. 또 다양한 과자와 간식도 있습니다. 사과 소스도 있고 쿠키나 스키틀즈도 동봉되어 있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한국 MRE가 더 낫나요? 아니면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인가요?

벤자민: 한국 MRE도 맛있긴 했지만, 문제는 메뉴가 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볶음밥 종류와 김치, 소시지, 밥, 김, 다른 부분도 있지만 소시지 대신 콩 밖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시지가 있는 MRE가 가장 맛있었습니다. 

벤자민: 그리고 한국군에서 사용하는 가열 방법이 더 낫다고 봅니다. 미군의 경우에는 물을 넣어 가열하는 방식인데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한국군 전투식량의 경우에는 잡아당기면 데워집니다. 5분에서 10분 뒤에는 가열되어서 먹을 수가 있습니다. 따뜻한 음식을 빠르게 먹을 수 있으니 한국 전투식량이 그 부분에서는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 군인들이 미국 전투식량과 교환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경우가 많나요? 아니면 교환해달라고 부탁해야 하나요?

벤자민: 일종의 화폐와 같이 기능합니다. 미국식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군인들도 다른 전투식량을 먹어보고 싶어서 합니다. 따라서 쌍방 간의 교환이 이루어질 이유가 있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한국 군인들은 MRE에 관심이 별로 없나요?

벤자민: 아뇨. 항상 관심이 있습니다. 서로 교환하면서 즐거움을 찾게 됩니다.

팟캐스트: 한국 군인들과 훈련하시면서 입양되지 않으셨다면 한국군에 입대하셨을 거라는 생각은 해보셨나요? 적어도 2년간 의무 복무를 해야 하니까요.

벤자민: 그렇게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제 직무 수행에 워낙 관심을 쏟다 보니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생각해 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한국군이나, 경찰이나, 사회 복무를 진행하게 되었을 겁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이 맞는다면 최근 18개월로 복무기간을 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네. 18개월에서 2년 정도 의무 복무를 해야 했을 겁니다. DMZ를 순찰하면서 파주 지역에서 근무하는 전방 군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 일어날 수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저에게 일어난 일은 잘 압니다. 현재 저는 미군 장교가 되어서 한국에서 복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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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한국에서 장기간 살기로 한 입양아들 대부분이 입양, 한국의 입양에 대한 정책,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 복잡한 감정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셨는지, 그리고 한미동맹의 일부인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벤자민: 제 한국에서의 경험은 아주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한국에 있게 된 사실이 아주 기쁩니다. 현재로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미국에 귀국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문제가 있는 경우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제가 한국에서 가졌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는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과 같은 외모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한국인으로 인식하고 한국어로 말을 걸어오고, 말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레스토랑이나 다른 곳에 가면 항상 저에게 한국어로 말을 걸어옵니다. 물론 전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한국어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어를 매우 잘 한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반응이 바뀝니다. 사람들이 농담이지만, 한국어를 더 잘하면 돌아와라, 한국어를 더 잘해야 한다고 반응합니다. 농담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제가 혼나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이건 제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전 한국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습니다.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무지가 절 신경 쓰게 만드는 일들입니다. 

벤자민: 다른 문제는 사람들이 원할 때만 제가 한국인이 된다는 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국인이 아니어야 할 때는 전 그냥 미국인입니다. 그게 또 다른 문제입니다. 전 한국인입니다. 한국 혈통의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그러니 제가 한국어를 못한다고 한국인이 아니라고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이유로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일은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러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 회의입니다. 제가 회의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절 벤 화이트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제가 한국인이나 한국계 미국인이냐고 묻습니다. 제가 그렇다고 답하면 사람들이 저에게 친절하게 대응해줍니다. 동시에 자신들의 이득을 얻을 수 없는 회의면 어차피 외국인이지 라는 반응을 합니다. 결국, 자기들의 이득을 위한 행동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팟캐스트: 한국에서 장기간 지내는 한국계 입양아들은 정치적 문제나, 문화적 문제, 그리고 자신의 혈통을 다시 찾기 위해서 한국으로 이주하는 것 같아요.

벤자민: 네 그렇습니다. 저도 문화적 문제로 제 혈통과 제 근원을 찾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적어도 4살이나 5살 때부터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 부모님들은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저와 공유하고 가르쳐 주실 상냥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탐구하게 도왔습니다. 또한, 지역에 있던 한국 교회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매주 토요일에 예배를 드릴 때 한국어 교육도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작은 한국 사회와의 연결을 가지고 성장했습니다. 한국 문화 행사와 유산 행사를 진행하고 음식도 소개해주고, 문화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성장하면서 한국에 가고 싶다, 제 친부모를 찾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습니다. 물론 한국으로 여행가기에는 문제가 좀 많았습니다. 시간 문제가 가장 컸습니다. 하지만 돌아오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제 혈통과 유산을 진짜 한국에서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코리아타운에서 얻을 수 없는 경험입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자면 제 혈통과 뿌리를 찾고 싶어서 한국에 항상 오고 싶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에 와서 그걸 실제로 하실 수 있었나요?

벤자민: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제가 만난 많은 분이 제 탐구를 도왔습니다. 제가 만난 한국 군인 분들이 많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만난 한국계 미국인 군인 중 몇몇은 저와 같은 입양아였습니다. 또한,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입양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입양아 군인 사회가 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군대 내부에도 입양아 사회가 있군요.

벤자민: 네 확실히 그러한 사회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도움이 됩니다. 한국군도 한국계 입양아들이 미국에서 자라서 군인이 되었다는 점에 흥미를 느낍니다. 보통 경우에는 한국계 미국인과 더 자주 교류를 하지 한국계 미국 입양아들과는 교류할 기회가 적으니까 더 흥미를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인들이 입양아들에 대해 가진 인식이나 관념이 바뀌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여전히 인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벤자민: 제가 묻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저에게 묻지 않는다면 입양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 정부가 한국계 입양아들이 한국에서 친부모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더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 친부모를 찾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일들은 한국의 개인정보 보호법들이었습니다. 그 법을 우회하려고 하는 일이나, 정보 자체를 찾는 일이 아주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제가 입양 기관이나 관련 조직에 찾아가면 “관련 서류가 없어서 정보를 제공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사람들이 입양아들을 돕고 싶지 않거나, 적어도 관심이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이 바뀌어서 한국이 이러한 법안이 부모님을 찾는 입양아들의 탐색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으면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제가 이 주제에 가진 불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 친부모의 성함이 자주 볼 수 있는 이름인가요?

벤자민: 제 어머니의 성함은 아주 흔한 이름이지만, 제 아버지의 성함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 친어머니에 대해서 더 많은 정보가 있습니다. 문제는 어머니께서 자주 이사를 하시는 편이라 주거지를 찾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팟캐스트: 친어머니를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계시나요?

벤자민: 네. 이미 오랫동안 염두에 두고 준비해온 가능성입니다. 해외 입양아기도하고 긴 시간이 지났으니 더 그렇습니다. 정신적으로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머니의 주거지도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다양한 방법으로 어머니를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얻은 정보는 어머니의 최근 주거지였습니다. 전 그 사실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말하기 끔찍한 일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준비를 해왔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팟캐스트: 입양 자료에 왜 입양 제도에 맡겨졌는지에 대한 정보는 있었나요? 

벤자민: 제 자료에 따르면 두 분 다 미성년자였고 교육을 끝내고 싶어서 하셨기 때문에 저를 입양 제도에 맡기게 됐습니다.

팟캐스트: 그렇군요. 그럼 부모님이 아직 젊으시겠네요?

벤자민: 네 아주 젊을 겁니다.

팟캐스트: 한국으로 이주하려는 입양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있나요?

벤자민: 전 여기 오길 원했습니다. 한국 문화를 경험하고 싶고, 같은 혈통의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면 한국에 와야 합니다. 이 경험 자체가 아주 가치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만 살거나 코리아타운만 방문하는 것만으로는 문화 경험에 한계가 있어, 뿌리를 찾는 데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돌아올 생각이 약간만 있다고 하더라도 뿌리를 찾기 위해서 한국 방문을 추천합니다. 물론 뿌리 찾기를 원하지 않는 분들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하고 싶다면 오시는 것이 바르다고 봅니다. 아주 좋은 경험이기도 하고 최소 2주간은 지내면서 한국을 만끽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한국 생활이 한국 방문과 다르다는 의견에 동의하시나요?

벤자민: 네. 한국을 여행 목적으로 방문했다면 다른 경험이었을 겁니다. 한국 문화를 전부 경험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말에 부산을 방문하는 등, 중요한 점만 경험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한국에 살게 된다면 한국 제도와 한국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로 이사하고, 친구들과 같이 식사하는 행동이 그렇습니다. 친구들을 만들고, 그들과 연계를 하고 한국의 일상과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 경험이 생활과 관광의 차이점을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어려운 질문이지만 20년 뒤의 자신 모습을 어디에 두고 계시나요? 한국? 아니면?

벤자민: 저의 진로를 위해서 여러 준비를 했습니다.

팟캐스트: 20년 계획을 하셨나요?

벤자민: 네 계획했습니다. 여러 진로 계획이 있습니다. 여전히 미군에서 복무하고 있다면 외국 근무 장교로서 대사관에서 외교관들의 조언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국무부 직원으로서 정부와 일하거나 국방부에서 국제, 동아시아 관련으로 일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원이나 상원의원이 되기 위해서 일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 미래 계획이 있습니다. 

팟캐스트: BLM 깃발이 주한 미국 대사관에도 걸렸고. LGBTQ 깃발도 걸렸다가 내려갔죠. 그 사실과 관련해서 의견이 있나요? 

벤자민: 우선 LBGTQ 깃발이 먼저 걸렸습니다. 과거에도 여러 번, 현재 주한 미국 대사이신 해리 해리스 임기 중에도 걸렸습니다. 보기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반응이 달랐습니다. BLM 깃발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인터뷰를 하면서 한국도 1910-20년 일본 제국 아래에서 압제를 당한 적이 있으니 이해한다고 말을 하셨습니다. 즉 우리 과거로 인해서 그 사실을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해 자체를 선별적으로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즉 사회 정의나 사회 평등의 일부는 과거와 연관이 있으므로 지지하지만, 전체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동의하지 않는 점은 의도적으로 무시합니다. 이러한 논쟁에는 항상 구멍이 있지만 그래도 미국 대사관이 다양성과 포함성을 알리고, 미국의 존재 이유를 보여줬고, 대사관에서 성 정체성과 BLM을 지지해줬다는 점에서 높이 사고 싶습니다. 

팟캐스트: 군대에서 게이이시고, 한국에서 게이이시면서 어떤 것을 배우셨나요? 삶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경우가 많았나요?

벤자민: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제 성정체성을 숨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이야기하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직장 환경에서는 서로 알고 지낼 필요는 없는 정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하러 왔고, 그 일을 끝내는 데 집중하려고 합니다. 제 직업윤리는 제 일이 제 능력과 저 자신에 관해서 설명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직접 저에게 와서 “여자친구가 있나요? 아니면 게이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여자친구는 없지만 게이입니다.”라고 답합니다. 항상 진실을 말하려고 노력하죠. 물론 한국군 관련해서는 좀 더 복잡합니다. 한국군에게 제 성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은 좀 더 어렵습니다. 한국군 내부에서 LGBTQ에 대한 적대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LGBTQ 성정체성을 가진 군인들이 군 당국에 발각되었고 감옥에 갔습니다. 동성애를 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군이었나요?

벤자민: 네. 한국군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군에게 커밍아웃 하는 데에는 불편합니다. 알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동시에 일과 상관이 없는 사실입니다. 물론 한국군 모두가 차별적이나 편견을 가지고 절 바라볼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험을 무릎 쓸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군에서 복무하고 있는 친구들이 저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3년이나 이곳에 지내면 여러 가지 일을 겪게 되고 그중 하나가 친구들이 저에 대한 평가하는 일이었습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친구들은 절 잘 생겼다고 하고, 미국인이기도 하니 인기 좋을 거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받아넘겼고, 친구들이 이해하지만 묻기에는 부끄럽고, 저도 알려주기는 모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친구들 대부분이 알아챈 것 같다고요?

벤자민: 대부분 한국 친구들과 미국 친구들은 다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말하지 않은 친구들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결국, 군대가 보수적인 사회로 보이지만 그리고 실제로 그렇기도 합니다. 하지만 LGBTQ 문제에 대해서 지지해주는 군인들을 많이 만났고 그러한 지원하고 있다는 점이 있습니다. 서로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지만, 서로를 지켜주는 겁니다. 보수주의자이건, 중도주의자든 저를 지원해주고 저도 그들을 믿고요.

팟캐스트: 군대의 태도가 많이 변화한 느낌이네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묻지 않고 말하지 않기(미국 클린턴 행정부 시기 시행되었던 미군 정책. 미군 군인의 성 정체성을 문제 삼지 않는 대신, 밝히지도 않게 했다.) 정책에 대해서 논의했죠? 

벤자민: 네. 최근 미군에서 다양성과 포함을 추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화에 관한 관심도 늘었습니다. 미국은 거대한 인종의 용광로이고 군인들에게 그 다양성을 가르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물론 보수적이나 무지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팟캐스트: 현재의 정책은 어떻지요? 성 정체성 권리와 같은 권리가 지켜지고 있나요?

벤자민: 제가 현재 이해하는 바로는 그렇습니다. 몇 년 전에 법안이 통과된 뒤로 정확한 정보까지는 알아 두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적어도 게이라는 사실을 공유해도 될 정도의 환경은 되었군요?

벤자민: 네 그렇습니다. 성 소수자라고 해도 같은 권리와 이득을 보장받고 있습니다.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팟캐스트: 현재 교제 관계가 있나요?

벤자민: 현재 교제 관계는 없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인들과 교제하신 적이 있나요?

벤자민: 네. 그리고 다른 관계와 다른 바 없습니다. 두 한국인이 같이 게이입니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문화적 차이와 언어의 장벽을 넘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게이든, 레즈비언이든, 이성애자든 교제하면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한국인과 교제하는 다른 친구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문화의 장벽 극복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장벽입니다. 

팟캐스트: 또한 한국 문화적으로 사람들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일이 영향을 끼친다고 보셨나요? 미국인이시니 정체성에 대해서는 좀 더 개방적일 수 있지요?

벤자민: 네. 미국인들이 가진 특권 중 하나입니다. 제가 가족들에게 성정체성을 밝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친구들에게도 밝힌 거야?”라고 묻습니다. 그럼 저는 “그렇지.”라고 답합니다. 그럼 더 놀랍니다.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주 친한 친구들에게만 털어놓거나 누구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한국보다 미국에서의 개방성이 대단한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미국을 부러워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미국인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 미국인 상대를 만나고 싶나요, 아니면 한국인 상대를 만나고 싶나요?

벤자민: 국적은 의미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이해해주고, 제 직업과 제 진로를 이해해줄 수 있는 상대를 원합니다. 군대에 있다 보니 직업 시간이 복잡하고 이상할 때가 많고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 상대에게 원하는 면모는 이해심과 호환성입니다. 물론 한국계 미국인이나 아시아계 미국인이 상대면 좋겠습니다. 비슷한 문화와 배경을 가지고 있으니 서로 이해하기 쉽고, 한국 요리도 해줄 수도 있을 겁니다. (웃음)

팟캐스트: 한국인은 생각해 보셨나요?

벤자민: 절 이해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아 그리고 군인이라 문제가 있는 점도 있습니다. 많은 군인이 한국에서 1년 동안 파병 나와 있다가 돌아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군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주저하게 됩니다. 사람을 알아 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불안정성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팟캐스트: 미군 장교이고 공식적으로 게이라는 점도 신기하겠군요?

벤자민: 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못 믿습니다. 괴롭힘을 당하거나 문제가 있는지 묻습니다. 하지만 그걸 막는 규칙들이 존재하니 괜찮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지휘 계통도 믿고, 좋은 친구들도 많고, 동료들도 있습니다.

팟캐스트: 벤자민씨에게 연락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인스타그램이나 다른 것이 있나요?

벤자민: 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이메일 계정이 있으니 연락해주시면 됩니다. 꿈을 포기하지 마시고 계속 노력하십시오. 문제는 극복할 수 있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문제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팟캐스트: 차가운 라비올리를 먹고 나면 또 다른 날이 오죠.

벤자민: 네 그렇습니다. 다음 날은 또 다른 날입니다.

시즌 4, 에피소드 5: 그레이스 뉴턴

Audio available Oct. 27, 2020 at 7 a.m. EST.

중국계 입양아 그레이스 뉴턴 (26세)는 성장과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산업적 제도인 국제 입양에 대한 학습에 관한 이야기를 공유한다. 외동딸로서 뉴턴 씨는 부모와 깊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국제적, 다인종 간 입양의 역사를 공부하게 되면서 부모와 어려운 논의를 하게 되었다. 뉴턴 씨의 탐구심과 진실에 대한 욕구는 여러 번의 중국 방문으로 이어졌고, 각 방문에서 다른 관점을 얻어 올 수 있었다. 뉴턴 씨는 날카롭고 비판적인 비평을 주기적으로 공유하고 있으며, 입양아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그레이스: 제 이름은 그레이스 뉴턴입니다. 제가 3살 때 난징에서 입양되었죠. 제 중국식 이름은 추핑화입니다. 가장 최근 중국 여행으로 이 이름을 고아원의 보모께서 지었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 사실을 알게 되어서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전 위스콘신주 매디슨에서 자라났습니다. 백인 인구가 다수인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시아계 여성이 지나가면 손가락질하지 말라고 주의 주던 기억이 나요. 아주 특수한 경험이었습니다. 우와 나와 닮은 사람이네. 그리고 트윈시티(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세인트 폴 지역)에 있는 매칼리스터 대학교에 진학했을 때 아시아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찾았고 입양아의 정체성도 찾았죠. 부모님의 품을 떠나 새로운 도시에서의 삶을 시작했던 일로 다른 사람들이 저를 인식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죠. 제 고향에서는 사람들은 절 부모님의 딸로 인식했고, 저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대학교에 오니 저는 그냥 평범한 아시아계 미국인이었고, 입양아인지, 어떤 배경의 아시아계 미국인인지는 사람들이 몰랐습니다. 그래서 취약하고 노출된 느낌을 받았죠.

그레이스: 대학교는 저에게 있어서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1학년 때 “국제적 관점-국제적 다인종 간 입양에 대한 인종, 정치, 제국적 해석”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한국계 입양아 교수님이 가르치는 강의였죠. 전 중국계 입양아 중에서는 나이가 많은 편입니다. 중국 국제 입양이 1991년에 시작되었죠. 그래서 입양아 행사 같은 데에서 중국계 입양아들에게 있어서 관리자, 지도자 역할을 맡는 데 익숙해져 있었어요. 그래서 이 교수님을 만난 일이 최초로 저보다 나이가 많은 아시아계 입양아와 관계를 맺은 일이었죠. 아주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입양아들은 고립된 경우가 많죠. 가족에게 있어서 첫 입양아이거나, 첫 아시아계 일원인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인종적 교범이나 우리의 정체성에 맞는 스승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교수님이 가르치는 그 강의를 듣고, 다섯 명의 다인종 간 입양아 친구들을 사귀었어요. 그때 최초로 입양아 친구 집단을 만들었어요. 개별 중국계 입양아 친구들이 있긴 했지만, 한곳에 모여서 서로를 아는 친구 집단이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죠. 유대감이 형성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입양에 대해서 새롭게 보게 되었고요. 입양의 역사와 언론에서 언급되는 입양의 문제점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강한 뒤, 제가 배운 것을 더 확인하고 싶었고, 저에게 있어서 강의가 끝난 것 같지 않았어요. 그래서 여름에 집에 갔을 때 블로그를 시작했죠. 제 블로그 Red Thread Broken입니다. 처음에는 제가 입양에 대해서 생각하고,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와 저, 그리고 제 친구들의 경험을 비교해 보기 위해서 사용했어요. 그리고 처음 시작한 이유보다 훨씬 거대한 계획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레이스: The Land of Gazillion Adoptees(수많은 입양아의 땅) 블로그 창립자 케빈 보머스가 저에게 연락해왔고 Family with Children from Asia Midwest(아시아 출신 아이들의 가족 중서부 지부)의 지도부도 연락을 해왔고, 같이 봉사활동도 진행했습니다. 새롭지 못하지만 대단한 경험이었죠. 하지만 미국, 그리고 나아가서 전 세계의 입양아들과 저를 연결해주었고 전문적으로, 개인적으로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또한, 일반적으로는 제가 몰랐을 다양한 입양아 단체도 알게 되었죠. 현재 전 KAAN, the Korean American Adoptee Adoptive Family Network(한국계 미국인 입양아 입양 가족 단체)의 자문 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중국계 입양아인 제가 한국계 입양아 단체에서 일하고 있다니 조금 웃기긴 하지만, KAAN은 모든 입양아를 환영하고 있어요. 또한, 모든 다인종 간 입양아들 사이에 출신 국가와 상관없이 많은 공통점과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우선 현재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그레이스: 26세입니다.

팟캐스트: 좋아요. 그 강의에서 한국계 입양아 교수와 다인종 간 입양을 공부할 때 다른 입양아들도 있었다고 하셨는데, 전부 한국계 입양아였나요? 

그레이스: 1명은 중국계, 1명은 한국계, 1명은 과테말라계, 그리고 다른 한 명은 파라과이계였죠.

팟캐스트: 강의에서 가르친 내용은 어땠나요? 한국 입양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쳤나요? 그렇다면 중국계 입양아로서 한국 입양 역사에 대해서 배우는 느낌은 어땠죠? 

그레이스: 수업 자료는 한국계 입양아들이 작성한 자료들이 많았어요. 제인 정 트렌카가 쓴 피의 언어라던가, 한국계 입양아 케빈 보머스를 알게 되기도 했죠. 하지만 다른 자료들은 다른 지역의 입양아들에 대한 자료기도 했습니다. 호주의 다인종 간 입양과 뿌리 찾기에 대해서도 배웠어요. 문화적 인종학살과 애버리지니 인구의 제거를 위해서 진행되었던 계획 일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호주 식민 시기에 시행되었던 정책으로 애버리지니 아이들을 고향과 사회에서 빼앗아 백인 사회와 백인 가정에서 키워, 백인 사회에 익숙하게 만드는 계획이었죠. 그렇게 되면 애버리지니들이 백인과 결혼할 것이고, 백인 혼혈을 통해 애버리지니를 지워버린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상당히 끔찍한 계획이었죠. 또한, 미국 원주민 기숙학교에 대해서도 배웠어요. 이 정책도 호주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죠. 그리고 고아 거래도 배웠습니다. 이 강의가 한국인 입양아의 관점을 넘어선 다양한 입양 경험에 대해서 가르치는 데 성공했다고 봐요. 오히려 저는 미네소타주 입양아 사회가 좀 더 한국인 입양아들에게 관점이 맞춰져 있다고 봤어요. 물론 같이 수업을 들은 입양아 친구들이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팟캐스트: 이러한 입양의 어두운 역사적 배경과 뿌리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부모님과 입양의 문제에 대해서…. 아니 그 이전에 부모님과 입양이나 정치에 관해서 이야기해보신 적이 있나요?

그레이스: 제 부모님은 항상 입양과 중국에 대해서 열린 태도를 보이면서 저를 대하셨죠. 매주 토요일마다 중국 학교에 다녔고 설날마다 홍바오(중국 새뱃돈, 붉은 봉투에 넣어준다)를 주셨습니다. 다른 중국 문화적 활동도 했어요. 그리고 매년 중국계 입양 가족을 위한 중국 캠프도 참여했죠. 부모님은 저와 아시아 미국인의 정체성을 항상 지지해 주셨고 제 중국인 정체성과 아시아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여길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입양과 관련해서는 제가 성장기 때 어머니가 “내 최고의 기쁨은 누군가의 슬픔으로 만들어져 있어.” 라고 말하셨어요. 그래서 저와 어머니가 아는 적은 지식 내에서 열린 대화를 나누었죠. 그리고 대학교 강의에서 이러한 정보를 배우고 나니 부모님이 그 정보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셨죠. 중국에서 입양하실 때 공식적이고 깨끗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입양을 하셨거든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입양하시려고 할 때 중남미 입양은 부정부패로 중단됐고, 베트남 입양도 부정부패로 중단되었다가 지난 몇 년 동안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이렇게 여자애들이 고아원에 많았던 이유는 계획생육정책과 유교적 전통의 남아선호사상, 아들은 부모를 돌보게 되지만 딸은 결혼하면 남의 가족이 된다- 라는 복잡한 사상의 연결 때문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사람들이 중국에서 버려진 여자아이들을 도우려 했죠.

그레이스: 그래서 중국계 입양아들은 크게 두 세대로 나눌 수가 있어요. 첫 세대는 고학력, 고연령대의 부모들이 대부분 여자애를 입양한 경우입니다. 다음 세대의 중국 아이들은 장애인이 많아요. 입양하는 부모들도 젊고, 더 많은 모금 계획들에 존재해요. 그 세대의 차이점이 흥미롭다고 생각했죠. 제 부모님에게 국제적 입양이 거대한 국제적 절차이자 산업이고 요구와 공급이 있고 아이들이 상품처럼 거래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부모님, 특히 어머니는 저와 입양아 사회에서 떨어진 채로,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그것을 받아들이셔야 했어요. 저는 입양아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어요. 또 이 수업이 미네소타 저녁에 진행되는 수업이었죠. 저녁 7시에 10시까지 진행됐고, 밤 열 시에 울면서 학교 건물에서 걸어 나오곤 했습니다. 그리고 밤에 그것도 힘들 때는 좋은 대화가 나오기 힘들죠. 감정적으로 좋지 않은 과정이었고 어머니에게 자주 전화를 드렸어요. 그래서 그 강의를 3단계로 받아들였습니다. 첫 과정은 분노였습니다. 입양 제도에 대한 분노, 아니 처음에는 교수님에 대한 분노였죠. 제가 배우고 있는 모든 사실을 거부하고 싶었습니다. 다음 단계는 깊은 슬픔이었어요. 저의 어린 시절과 유아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 슬픔을 되새기는 과정이었죠.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그 경험과 역사를 결합하고 정보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제가 받아들이고 싶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단계였습니다. 저와 제 부모님에게 있어서 감정적으로 힘든 시기였어요. 

팟캐스트: 이해가 되네요. 그 시기에 부모님이 그레이스 씨와의 친밀함을 잃고 있다고 걱정했고, 그레이스 씨는 부모님도 입양 제도의 일부라 불편했나요? 

그레이스: 네. 제가 강의를 듣기 전이 생각이 납니다. 막 입학했고 그 강의 수강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농담으로 “강의를 듣고 우리가 제국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라고 하셨죠. 우리의 관계가 바뀌고 있고 이러한 변화 때문에 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는 공포가 조금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와 부모님의 관계에 있어 이러한 대화를 나누는데 여러 가지 이점이 있었어요. 우선 저는 외동딸입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아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죠. 그리고 이 가까운 관계가 이러한 복잡한 대화를 진행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이점은 부모님이 그렇게 종교적인 분들이 아니라는 점이죠. 그분들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입양을 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 영향이 자신들의 입양 과정과 제도에 의문을 가지는 입양아들에게 다른 문제를 부여하거든요. 이 모든 것이 신의 계획인가? 라는 의문이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부모님이 저를 입양한 이유가 불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이 아이를 가지고 싶다- 라고 생각하시긴 했지만 그게 절 입양한 이유는 아니었죠. 불임 문제로 입양된 입양아들은 그러한 문제도 겪어야 하거든요. 그들이 대안적인 선택이었다는 문제를 마주 봐야 하죠. 거기에 제가 외동딸이라 우리 가족, 제 개인에게 입양 제도와 인종이 미치는 영향을 알아가는 감정적인 과정을 거칠 때 부모님이 돌봐야 할 다른 형제자매들이 없어서 저에게 에너지를 전부 쏟을 수 있었던 것도 운이 좋았죠. 그래서 부모님이 저와 같이 이 새로운 길을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부모님과 같이 이러한 입양 과정에 대한 정보를 이해하시면서 관계가 더 돈독해지신 것 같네요. 어머니와 같이 컨벤션에서 발표도 하셨다고 들었는데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그레이스: 발표의 이름은 이제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딸이 성인이 되면서 어머니와 딸의 관계 변화에 적응하는 것에 대한 발표였죠. 그리고 발표한 내용은 제가 바로 전에 언급한 입양 사회에서 우리들의 경험을 수용하는 절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기억이 희미하고 제 어머니가 발표한 부분을 제가 대신 설명하고 싶지는 않아요. 어머니는 저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료이며, 지지자입니다. 제가 블로그를 만들었을 때 어머니에게 이 블로그를 시작할 것이라고 설명해 드렸어요. 어머니는 일기를 쓰면 안 될까? 라고 말씀하셨죠. 인터넷에 있는 나쁜 사람들이 저를 스토킹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상당한 기간 동안 익명으로 블로그를 운영했어요. 제가 입양에 대한 블로그를 운영하고 입양 사회에서의 인종, 권력, 자본의 영향에 관해서 이야기한다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냐.”이라고 묻습니다. 부모님이 절 적극적으로 지지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이 아주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약간의 거부감이 있긴 했지만, 저의 안전에 관련된 일로서 어머니의 본능 때문이었지, 제 감정과 제 일에 반감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팟캐스트: 대단하네요. 저도 그레이스 씨의 블로그를 구독하고, 국제 입양아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죠. 비판적인 관점으로 입양에 대해서 논하고요. 그리고 매우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시죠. 많은 입양아가 그러한 표현과 비판을 하려고 하지만 부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무서워서 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감정이나 생각, 입양에 대해 분노하거나 답답한 점을 말하지 못하죠. 입양에 대해서 비판하지 못하는 겁니다. 물론 사람들이 그레이스 씨의 가족에 대해서 알지는 못하겠지만 가족분들이 그레이스 씨를 지지해 주니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중국 입양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해보죠. 어떻게 시작됐는지에 대한 요약을 해줄 수 있나요?

그레이스: 네. 중국이 계획생육정책을 1979년에 시작했습니다. 중국은 그 시점에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겪고 있었고, 그 인구 증가를 지탱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 하에 시행된 정책이었죠. 그래서 가족 숫자를 줄이기 위한 선전 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공식 정책이 시작되었고 수만 명의 여성에게 강제 불임 수술이 시행되었습니다. 수많은 강제 낙태도 진행되었고요. 그리고 90년대 초반에 중국이 국제 입양을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여자아이들이 버려졌기 때문이죠. 중국 정부가 이 제도를 만들었을 때 부잣집은 돈을 내고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수 있었지만 보통 가정은 그러한 비용을 낼 수 없었죠. 중국에서 아이를 입양 제도에 맡기는 행위는 당시에는 불법이었고 아이 살해는 불법에 비윤리적이었어요. 그래서 여성은 아이를 한 명밖에 낳을 수 없고, 한 명 이상 낳게 되면 합법적으로 그 아이를 처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익명으로 여자아이들을 버리는 일이 늘어났습니다. 몇몇 아이들은 편지나 장신구와 함께 버려졌죠. 하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만약에 아이를 버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떤 보복과 문제가 생길지 겁을 냈기 때문이죠. 이러한 사실은 어린아이들에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친부모가 아이를 버리거나, 문 앞에 두거나, 상자에 넣어서 가게 앞에 버리니까요. 하지만 많은 아이가 아침이나 출근 시간 직전에 버려졌다고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바로 찾아서 경찰이나 고아원에 인계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러한 과정이 중국 입양 제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레이스: 처음에는 많은 아이가 여자아이들이었어요. 중국 가족들은 아들을 중시했기 때문이죠. 그 뒤로 2004년까지 중국 입양은 계속 성장하다가 후난성 추문이 터졌어요. 이 추문은 천 명의 아이들이 가족들에게 납치되어 인신매매되어 고아들의 숫자를 유지하기 위해서 6개의 고아원에 공유된 추문이었어요. 그 추문이 터졌을 때 고아나 적어도 부모의 허락을 받아서 아이들을 입양했다고 생각한 많은 입양 부모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의 아이들이 납치된 아이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요. 그 시점에서 중국 입양이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죠. 

팟캐스트: 중국 정부에 있어서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정부가 가진 문제 반발 중 일부였나요?

그레이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몰라요. 중국에서 많은 납치 사건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중국은 인구가 많다 보니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정부에서 관련 반발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어요. 중국 정부는 비판점이 많다 보니 당연한 일이죠. 그래도 그 사건이 사람들이 이러한 입양 절차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사실을 알게 했습니다. 친척들이 강제로 부모가 아이들을 입양하게 하는 이야기도 많아요. 정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팟캐스트: 중국 입양의 장점 중 하나가 아이들이 친부모에게 버림받아 친부모와의 연결이 없이 깔끔하게 이별한다는 점이고, 양부모들이 그러한 사실을 매력적으로 여겼기 때문에 중국 입양 제도가 빠르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그레이스: 많은 국제 입양에 있어서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입양 부모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경우가 있죠. 국내 입양보다 국제 입양이 친부모가 아이들에게 나타날 가능성이 적다고요. 그러니 그런 깔끔한 이별을 선호하는 것도 말이 되죠. 국제 입양의 입양아들이 친부모를 찾으려고 해도 긴 시간이 지난 뒤죠. 국내 입양의 경우 입양아들의 정보와 친부모와의 인연이 유지되는 경우가 많고요. 

팟캐스트: 절 포함한 입양아들이 고아라고 인식됐지만, 현재는 많은 입양아가 친가족을 찾고 있죠. 우리가 진정한 고아가 아니라 친족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레이스: 네 그렇습니다. 저번 학기에 국제 아동 복지에 대한 수업을 들었어요. 그리고 제도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인도계 입양아와 교류하게 됐습니다. 아동을 고아원에서 좀 더 가족과 같은 입양 가정 제도에서 돌보는 방식으로 변화하는 제도화에서 일하고 있었죠. 지표에 따르면 현재 고아원에서 지내고 있는 아이들 80%가 1명 이상의 생존하고 있는 부모가 있다고 하더군요. 고아원에서 지내고 있는 아동 중 대다수가 진짜 고아가 아니라는 거죠. 부모들이 고아원에 아이를 맡기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가난이고, 두 번째 이유는 아이들의 교육입니다. 그래서 국제 입양 제도와 관련된 자본, 특히 서구 자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죠. 국제 입양은 각 아동 당 2만 달러에서 5만 달러가 듭니다. 사람들이 그 많은 자본을 아이들의 고향, 사회와 가족들에게 투자한다면 얼마나 많은 아이가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을지 생각할 때가 있어요.

팟캐스트: 유전자 검사로 인해서 중국 입양아들이 얼마나 영향을 받았나요? 거의 어떤 정보도 주어지지 않고 입양되고, 단체도 개입되지 않아, 서류도 없이 입양된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유전자 조사가 그분들의 친부모 조사에 큰 영향을 끼쳤나요?

그레이스: 네. 현재 중국계 입양아 사회는 유전자 검사를 위해서는 23 and Me(미국의 유전자 검사 회사)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전자는 아주 흥미로워요. 개개인에게 있어서 특별하고 입양아들을 중국에 있는 친척이나 입양된 형제자매들과 이어줄 수 있으니까요. 유전자 검사의 문제 하나는 양부모가 자식들이 어린이면 대리 검사가 가능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있어요. 그 문제에는 복잡한 감정이 있어요. 국제 입양된 뒤 최대한 빠르게 조사를 시작하면 입양아들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죠. 하지만 입양아들의 의사 문제가 있죠.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느냐, 미래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유전자 정보를 데이터베이스에 맡기는 행위의 의미를 아는가, 등의 문제가 있죠. 하지만 전 많은 어린 중국계 입양아들이 유전자 검사를 통해 형제자매를 찾거나 친척을 찾은 사례를 알고 있어요. 입양아가 형제자매에 대한 정보, 가족 유전병 여부 등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은 특권이죠. 저도 23 and Me 검사를 진행했지만, 항상 무언가를 빼놓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제 친척이 Ancestry.com(미국의 또 다른 유전자 검사 회사)이나 다른 유전자 검사 회사를 사용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친부모 조사를 할 때 최대한 할 수 있는 조사는 어디까지인가? 라는 점을 요즘 자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레이스: 중국계 입양아 중 상당수가 미혼모에게 입양되어 자랐습니다. 중국이 미혼 입양을 허락한 몇 안 되는 국가였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현대 중국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시죠? 심각한 성비 불균형을 겪고 있고 남성들이 결혼하려면 부모를 파산시킬 정도의 비용을 들여야 하니까요.

그레이스: 계획생육정책의 뜻하지 않은 영향이겠죠. 답답한 부분은 인구 전문가들이 중국 정부가 계획생육정책을 수정해 두 명의 아이를 허락하지 않으면 퇴직하는 사람들을 대체하고 성별 균형을 맞출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해왔다는 점이에요. 계획생육정책 자체도 3년 정책이고 그 뒤로는 천천히 제거되어야 했을 정책이었지만 더 길게 유지되었고 과학자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진행되었죠. 그래서 이러한 성별 불균형이 존재하는 국가들에 큰 문제가 닥쳤다고 봐요. 중국 남성들의 결혼 불가나, 동남아 지역이나 중국으로의 신부 매매, 남성이 더 많은 사회의 성폭행이나 폭력 사건 증가 등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이 중국인들에게 끼치는 나쁜 영향이나 중국 입양아들의 탄생에 미친 영향을 보면 화가 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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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중국을 3번 방문했습니다. 첫 방문은 13살 때였죠. 부모님과 같이 유산 여행을 하면서 방문했어요. 3주간 방문했고 베이징, 시안, 상하이를 단체 여행으로 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도중에 고향 마을들을 따로 방문했어요. 그리고 그 고향 마을 방문 때 여행사가 가족들을 위해서 통역사들을 붙여주었습니다. 두 번째 방문은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같이 갔었죠. 일주일간 두 명의 선생님의 인솔하에 간 여행이었습니다. 제가 부모님에게 관광객으로 중국에 가는 일이 저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설득하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에는 입양과 관련된 일러 갔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중국에서 단순한 관광객이 될 수 없다는 사실만을 알았죠. 그리고 세 번째 방문은 유학 목적이었습니다. 제 고향인 난징에서 3달에서 4달 동안 유학을 했어요.

팟캐스트: 중국과의 관계가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어떻게 바뀌고 변화했죠? 특히 3번째 방문 때 직접 거주한 뒤에는 어떻게 바뀌었나요?

그레이스 : 중국과의 관계는 제가 자라면서 좀 더 친밀하게 변했다고 생각해요. 제가 어렸을 때 중국의 사진을 구글로 찾아보면서 중국의 사진들이 친숙해 보이길 원했지만 그렇지 않았죠. 토요일 중국 학교도 다녔고 중국 문화 경험도 있었습니다. 다큐멘터리도 보고, 영화도 봤죠. 하지만 그것들을 이해할 맥락은 얼마 없었어요. 13살 때의 여행이 독특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국적이지만 동시에 편안한 경험이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적응을 잘하지 못했죠. 그 여행을 하면서 한 번도 화변기를 사용하지 않고 넘어갔던 기억이 있어요. 위업이라면 위업인 셈입니다. 고등학교 때 여행은 똑똑한 기분이 들었어요. 이미 한번 중국에 와서 이 도시들을 본 적이 있었죠. 다른 애들이 가지지 못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더 아시아인 같고 더 지식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애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었죠. 난징에서 한 학기 동안 유학할 때는 좀 더 복잡하고 감정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어학연수와 관련된 프로그램 일부로 갔었죠. 중국어에 집중하고 저에게 있어서 아주 감정적인 교육 과정이4었어요. 중국 국적인 사람들과 저는 달랐죠. 중국에서 자라고 중국 문화를 알고 있는 중국 대학생들과는 달랐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제가 매우 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제 것이어야 하는 언어를 다시 소유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고향이어야 하는 도시를 다시 소유하는 과정이기도 했어요. 

그레이스: 제가 중국에 거주하던 학기 동안 제 고아원에서 절 돌본 보모님과 만났습니다. 제가 13살 때 첫 여행 때 이미 재회했던 분이죠. 그분을 다시 만나서 기뻤습니다. 그리고 유학 도중 그분과 다시 만났을 때 그분이 제 중국 이름인 핑화를 주셨다는 것을 알았죠. 제가 중국에 대해서 배운 점은 제가 돌아갈 때마다 저에 대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제가 원하는 모든 답과 조각을 찾을 수는 없을 거라는 점입니다. 저에게 제가 원하는 모든 정보가 금보자기에 포장된 채로 주어지지는 않을 테죠. 적은 정보를 차근차근 모아가는 과정이에요. 하지만 그 정보들이 저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팟캐스트: 중국의 어떤 면이 그레이스 씨에게 편안하게 다가왔나요? 중국이 이국적이었지만 어떤 면으로는 친숙하다고 하셨죠. 

그레이스: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제가 유학 중에 쓴 일기에는 제가 중국에 막 도착하기 전에 이렇게 썼죠. “내 발이 땅에 닿자, 내 마음이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물론 그렇게 쉽지는 않았죠. 하지만 아시아계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 묘하게 편안한 느낌이 들었죠. 제 백인 친구들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제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냄새, 색깔, 그리고 음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죠. 그리고 중국에 있을 때 친부모 조사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찾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했죠. 그래서 제가 2살 때 저를 찾아서 보호한 경찰서를 찾아갔습니다. 경찰서에 갔을 때 제 통역사가 경찰관에게 친부모 조사를 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경찰이 저를 보더니 “아주 아름다운 분이네요. 왜 친부모가 이런 아가씨를 버렸을까.”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예상하던 반응은 아니었죠. 그리고 다른 젊은 경찰분은 1996년 기록을 찾고 있다고 이야기하니 상당히 귀찮다는 반응을 보였어요. “전산화 이전의 기록이네요.” “네 알고 있어요.”라고 답했죠. 그래서 물리적 기록을 찾아냈고 별 내용은 없었어요. 누가 절 데리고 왔는지, 제가 뭘 입고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었죠. 그래서 제 조사는 바로 멈춰버렸어요. 더 조사할 기반이 없었죠. 그리고 제 통역가는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고 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제가 2살 때 버려졌으니 미혼모가 낳아 조부모들이 키웠을 가능성이 있고 더 저를 키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죠. 아니면 제 부모님이 안후이성 출신이면서 난징을 방문했다가 절 잃어버렸고 다시 안후이성으로 돌아가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습니다. 제가 이 도시에 와서 고향을 찾고 저 자신을 찾으려고 했는데 와 보니 난징이 제 고향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죠. 중국을 떠난 뒤에 제 고향을 잃어버렸고 제 마음속에서 다시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저를 덮쳐왔습니다. 중국과의 친밀감 중 일부는 제가 다시 제 고향을 찾으려고 하는 의지 때문이었는데 고향이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것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팟캐스트: 그레이스 씨가 원하는 과거가 있나요? 

그레이스: 흥미롭네요. 제가 자라면서 많은 친구는 남동생이 있었어요. 2살 연하인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죠. 그래서 친구들과 놀면서 남동생들과는 친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알았고 이야기도 나눴어요. 그래서 제가 2살 때 버려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중국의 역사를 연관해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제에게도 2살 어린 남동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제가 버려진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어요.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아기일 때 버려집니다. 태어난 뒤 며칠도 지나지 않아서 버려지죠. 그래서 전 그 과거의 가능성을 좋아해요. 남동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해 보죠. 전 외동딸이라서 제가 어렸을 때는 저를 봐줄 오빠나 제가 돌볼 수 있는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그걸 가지고 있지 않으니 친 형제자매가 있다면 아주 흥미로울 것 같고, 제가 원하는 과거입니다. 

그레이스: 조사 지원자들과 현장에서 연구를 진행해 미국에 정보를 가지고 오려는 분들이 있죠. 한국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TV 프로그램이나 뉴스에 나가서 이야기를 공유하는 때도 있습니다. 중국 입양아들은 고향이나 마을에 사진과 자기 정보를 담은 포스터를 만들어서 붙이는 경우도 많아요. 그리고 그러한 포스터를 인터넷으로 공유하기도 하죠. 중국 트위터인 웨이보나 중국 SNS인 위챗도 자주 사용됩니다. 이 포스터는 성공 가능성이 지역마다 달라져요. 저 같은 경우에는…. 난징은 8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대도시에 대학교들이 많은 도시고, 교통 중심지이기도 하죠. 인구 유동률이 높은 곳입니다. 그래서 포스터들은 작은 마을 출신이거나 어디에서 왔는지 정확히 안다면 더 효과적이라고 봐요.

팟캐스트: 아버지가 아이를 다리에 놓고 갔는데, 매번 버린 날마다 아버지가 돌아가서 다리에서 기다리는 영상을 본 적이 있어요. 그런 영상을 보시면 감정적이게 되나요?

그레이스: 당연하죠. 한국 입양아 상봉, 중국 입양아 상봉을 보면 감정적이게 되죠. 가족 상봉을 보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해요. 

팟캐스트: 중국에 있었을 때 중국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나요? 북경어를 하실 수 있지만 그래도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눈치챘죠?

그레이스: 중국에 있을 때 많은 사람이 제가 한국인이냐고 묻더군요. 사람들이 제가 아시아인처럼 보이지만 북경어를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한 거죠. 제 출신지와 관련해 싸워야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제가 중국에 갔을 때 모든 사람에게 입양됐다는 사실을 공유하지 않으려고 했죠. 제 친구들, 룸메이트, 긴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는 입양 사실을 공유했지만, 한번 만나고 말 사람들은 알 필요가 없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제 북경어 실력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출신지를 물으면 미국 출신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럼, 사람들이 이렇게 답했죠. “하지만 중국인 같이 보이는데.” 전 그럼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자랐다고 답했습니다. 그럼 많은 사람이 이민자라고 짐작했겠죠. 하지만 그중 한 사람이 “아 그럼 부모님이 중국인인가?”라고 물었고 저는 미국인이라고 답했어요. 그러니 그 사람은 이해를 못 했습니다. 제가 수업을 같이 듣던 동기가 말하기를 제가 말을 하지 않으면 진짜 중국인으로 보인다고 언급을 했죠. 그리고 중국 여행객이나 다른 사람들이 길을 물어보거나 다른 질문을 하기도 했어요. 제가 잘 모르겠다고 답하면 그 사람들이 “미안해요!”라고 말하고 멀어졌습니다. 

그레이스: 한번은 그 어학연수를 같이 듣는 친구들과 잠시 여행을 하기 위해서 내륙으로 들어갔었는데 쑤저우로 가는 길에 가장 빠르고 비싼 열차를 탔고, 돌아오는 길에는 가장 싼 열차를 탔어요. 시골 사람들이 잔뜩 타고 있었죠. 사람들이 서 있고 앉아 있는 도중에 한 사람이 제 왼쪽에 앉아 있었고 제가 일기를 영어로 작성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옆에 앉은 분과 대화를 하게 되었죠. 그분이 왜 제가 영어로 일기를 작성하는지 물었어요. 그리고 제가 미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해줬습니다. 그분이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죠. 제가 아는 많은 사람이 중국 입양아의 숫자가 무척 많은데도 우리의 존재를 몰랐어요. 그래서 이 사람과 흥미로운 대화를 나눴죠. 그리고 제가 이해 못 하겠는 말을 해서 이해 못 했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앞에 앉아 있던 분이 그걸 어떻게 이해 못 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차 사람들이 전부 어떻게 그걸 이해 못 하냐는 듯이 보았죠. 그리고 제가 대화하는 분이 저를 옹호하려고 일기를 잠시 가지고 가시더니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이거 봐라. 중국어로 쓰인 글은 없고 영어로 되어 있잖아!”라고 말씀하셨고, 저는 그거 보면서 일기를 돌려 달라고 하고 있었죠.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저에게 와서는 신기한 것을 보듯이 질문하고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하듯이 말이죠. 한 애가 저에게 와서 바로 앉아서 절 보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인을 만나보는 것이 처음이라고 말이죠. 제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장소에 따라 아주 달랐던 것 같아요. 전 대부분 시간을 대학에서 보냈죠. 대학교에서는 많은 중국인이 외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어요. 하지만 다른 지역으로 가면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어려워했습니다.

팟캐스트: 이야기를 들으니 입양아들이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자란다는 점이 떠올랐어요. 미국에서 자란 입양아들은 외국인이 아니고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죠. 하지만 모국에 돌아가면 모국인이라는 점도 증명해야 합니다. 그레이스 씨 같은 경우에는 중국인이면서 동시에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죠.

그레이스: 네. 자라나면서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라, 어디에서 왔느냐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돌아가니 제가 미국에서 살았던 어떤 기간보다 더 제 미국인의 정체성을 지키고 미국인의 정체성을 증명해야 해야 했어요. 중국에 있을 때 가장 미국인으로서 정체성을 느끼면서 동시에 중국인의 정체성도 느꼈습니다. 제 미국인의 정체성이 제가 놀라는 정보들과 제가 중국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놀라움 등으로 느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중국인의 뿌리와 중국의 역사, 중국에서의 삶을 알 수 있었어요. 그러한 두 정체성을 동시에 자각하는 것은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좀 더 깊이 조사 단체와 연계해서 친부모 조사를 진행하고 싶나요? 아니면 현재로서는 지금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레이스: 조사는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해요. 좋은 정신 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입양아들은 고통스러운 상처가 있고 조사 결과가 상처를 치유해줄지 아니면 상처를 더 깊게 할지 알 수가 없죠. 여러 가지 방면으로 준비가 되어야 있어야 한다고 봐요. 원치 않은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죠. 2015년에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 아무런 정보도 찾지 못했던 점에 몹시 화가 났던 기억이 있어요. 중국에 갈 때마다 제 이야기의 새로운 조각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죠. 그리고 다음에도 그럴 것 같아요. 나중에는 다시 조사를 시작하겠죠. 그래도 적어도 처음의 실망감을 극복하고 아무것도 찾지 못할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팟캐스트: 지금도 블로그를 운영하고 계시는데 지속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유지하는 데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데 유지하는 이유와 목적을 이야기해주셨으면 해요. 

그레이스: 제가 블로그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개인용이었습니다. 수업을 듣고 제 감정을 정리하기 위한 수단이었죠. 그리고 제가 다른 입양아들에게서 공감하는 메시지나 가족들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받기 시작하면서 자부심을 느끼기 시작했죠. 제가 제 블로그를 2013년에 시작했을 때는 페이스북에 어른이나 청소년이 주축이 된 입양아 그룹들이 얼마 없었어요. 전부 자신들의 입양아 경험을 소화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죠. 현재는 그러한 사람들이 이해 동료를 찾을 수 있는 곳이 더 많죠. 하지만 그러한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 동기 중 하나였죠. 제 중요한 자극 중 하나는 입양아에 대해서 더 널리 알리고 국제 입양 논조를 다양화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입양의 불편한 점도 알리고 입양은 단순히 한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평생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며 그 정체성이 시간이 걸려 바뀐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죠. 또 대학원의 전공이 입양, 아동 복지와 관련되어 있죠. 그리고 불우아동과 관련된 복지에서는 아동의 환경을 최대한 바꾸지 않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쳐요. 하지만 국제 입양은 모든 것을 바꾸죠. 더 많은 것을 바꾸는 개입 방법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입양과 가족, 그리고 아동 복지와 가족유지에 대해 더 깊고 복잡한 대화를 하는 겁니다. 

팟캐스트: 또 KAAN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계시죠?

그레이스: 네. KAAN의 자문 위원회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어요. 현재 KAAN은 입양아들의 구성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한국계 입양아가 많이 줄었어요. 입양아 자체가 줄었고, 이러한 변화하는 입양아 사회의 구성을 도와줄 제도를 구축하는 일이 필요하죠. KAAN의 도움을 받는데 약간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거부감이 아니라 흥미는 있었지만 제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의 확신이 없었죠. 제가 중국계 입양아였으니까요. 제가 이메일을 보냈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받긴 했지만, 여전히 확실치 않았죠. 그래서 제 한국계 입양아 친구와 같이 자원봉사를 신청했어요. 제가 맞지 않는다면 그 친구가 제 안전망이 되어줄거라고 생각했죠. 아주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모두가 저를 환영해주었고 사회에 맞아 들어갔죠. 다음 해의 KAAN 회의에서 토론에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딸들이라고 하는 블로그를 하는 입양아 여성들의 토론이었어요. 두 번째라서 그런지 많은 사람과 대화를 하는데 좀 더 편안함을 느꼈어요. 더 많은 사람이 저에게 접촉해왔죠. 제 블로그를 읽었거나 저번 해에 참여한 저를 기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계속 참여하게 되는 대단한 회의였죠. 그리고 KAAN에서 만든 인연은 개인적으로, 직업적으로도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서 지역적으로도 연락을 계속 취하고, 편지로도 연락을 취하고 있습니다. 또한, KAAN은 입양아 출신 교수님들이 많이 참여하기 때문에 저의 대학원 진학과 대학원 탐사에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KAAN에 많은 멘토가 있고 조언 위원회 참여가 입양 사회에 더 개입하게 했고 지도력과 전문적인 기술을 배울 수 있었죠. 제가 중국계 입양아지만 KAAN이 제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그레이스의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한국계 입양아나 중국계 입양아에게 자신들의 정체성 때문에 불편하다고 여길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소리과 플랫폼을 가지고 한국 중심의 단체와 교류하는 일에 대해 조언해줄 수 있나요?

그레이스: 전국적, 그리고 세대 간의 교류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연상의 한국계 입양아들과의 교류는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도 생각하게 했죠. 이미 청소년 자식들을 둔 한국계 입양아들도 만났고, 그분들은 그분들의 자식들이 입양과 인종에 대해서 질문한 것에 대해서 말해주었습니다. 입양아 자손의 관점도 생각하게 되었죠. 결혼, 다인종 간의 교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관점들이 아주 귀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손쉽게 물어볼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다른 중국계 입양아들에게도 물어볼 수 있는 일들이 아니죠. 중국계 입양아들 대부분은 아직 이러한 발전 단계에 접어들지 못했거든요. 이러한 세대 간 입양아 간의 교류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그리고 출신 국가와 상관없이 입양아 간에는 여러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입양아와 입양 부모들이 손실, 그리움, 문화적 소외를 겪어요. 이 현상은 단순히 국가적으로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입양아가 전체적으로 겪는 일이죠. 물론 중국인 입양아만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득이 있고 한국인 입양아만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도 이득이 있습니다. 예들 들면 친부모 조사 같은 경우에는 그러한 장소에서 같이 공유가 좀 더 쉽죠. 다른 국가들마다 규제, 절차와 역사가 다르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경험이 서로 함께하고 교차하는 것을 배우는 일이 제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이득이 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장소 중 하나는 다인종 간 다국간 입양아 사회라고 생각해요. 중국계가 아니어도 괜찮죠. 공유되는 감정과 상실감, 그리고 이해를 공유하고 있으니까요.

팟캐스트: 블로그 공유라던가 다른 하고 싶은 일은 없으신가요? SNS 계정을 구독하고 싶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되죠?

그레이스: 우선 제 블로그인 Red Thread Broken (https://redthreadbroken.wordpress.com)이 있고요, Red Thread Broken 명의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계정도 운영 중이고, 트위터로는 Grace Pighwa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청자분들이 2021년에 KAAN에서 뵐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레이스: 운이 좋다면 2021년에는 KAAN이 현실에서 개최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저도 거기에 있겠죠.

시즌 4, 에피소드 4: 제니 해준 윌스

Audio available 10/12/20 at 7 am CST.

한국계 입양아 캐나다인 제니 해준 윌스 39세는 2019년 회고록인 언니, 혈통으로 이어져 있지 않음. 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회고록은 친가족과 만난 뒤 그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시간, 언어, 장벽, 아이 압류와 국제 비밀 입양, 부모 간의 실패로 인해 멀어진 이복 언니에게 쓰는 편지의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입양아들 간의 문제도 고발한다. 소수자 집단이 자신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성폭행에 대해서 숨기고 보호하며, 그러한 방식을 부수고 고발한 행위에 따라오는 공포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윌스는 입양아들이 한국에 돌아와 가족을 찾고 뿌리를 찾기 위해 입양아들이 겪어야 하는 감정적 노동과 취약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국제 입양과 탐색 방식이 입양아들이 과정, 가족 그리고 정체성을 찾으려고 할 때 어떻게 관련 지원이나 개인적 자유를 빼앗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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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 전 제니 해준 윌스입니다. 만 39세이고 캐나다 매니토바주 위니펙에 살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선호하는 인칭대명사는 She/Her입니다. 

제니: 언니, 절 믿지 못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전 친어머니에 대해서 어렸을 때부터 직접 만났을 때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그 사진을 봤을 때……. 무언가를 만졌을 때, 아주 뜨거워서 얼음장 같다고 느껴본 적이 있나요? 사랑에 급격히 빠져서 죽을 것 같은 느낌은? 그 전까지는 전 제 친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 못했어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죠. 입양되지 않은 일반인들과 한국계가 아닌 사람들의 좋은 의도로 한 경고를 받아들여서 문화적으로 넘을 수 없는 경계가 있다고 인식했죠. 그 사람들은 어머니들이 우리를 잊고 삶을 이어가고, 과거에 우리를 원치 않았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인식이 강해질 뿐이라고 말했어요. 차이마저도 우리가 좋은 삶을 입양된 국가와 가족과 함께 보내면서 친 어머니들의 삶을 방해하는 일은 이기적이라고 말했죠. 우리가 숨어서 지내는 일이 맞는다고 했죠. 숨겨야 할 일이고, 정당하지 않은 일이니까요. 

제니: 제 회고록의 첫 부분은 한국 가족과의 재회입니다. 첫 페이지들부터 나와요. 다른 입양 회고록들과는 다른 시작이죠. 보통 입양 회고록들은 어릴 때부터 시작해서 시간대별로 진행됩니다. 제 회고록은 재결합부터 시작해서 그 사건으로 인한 영향과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그리고 약간 이야기가 진행된 뒤 시작하는 이 문단에서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친언니와 이야기를 하게 되죠. 

팟캐스트: 그러니까 이 부분은 큰 언니한테 보내는 이야기란 말이죠. 가장 친밀하지 않은 가족 중 하나로 보이는데 왜 언니에게 편지를 쓰셨죠? 

제니: 우선 팟캐스트에 초청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 팟캐스트의 애청자로서 여기에서 인터뷰하게 되어서 아주 기뻐요. 과거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최고의 재회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 질문이 창작에 대한 두 개의 질문을 하시고 있는 기분이라 더 좋네요. 첫 번째 질문은 왜 이 책이 작은 부분들로, 이 작은 장면과 시점으로 나뉘어져 있냐는 질문이죠. 짧게 대답하자면 이 책은 시집으로 시작했어요. 그 뒤에 정리가 되어서 서사가 부여됐죠. 제가 시를 쓸 때는 사람들의 기억처럼 조각난 채로 저에게 영감이 내려와요. 그래서 제가 처음으로 한국에 갔던 뒤 7년에서 8년 뒤에 이 시들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죠. 그래서 이러한 이미지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요. 논리적이지 않고, 아이디어들의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죠. 그래서 이 책에서 그러한 사고방식에 따라오는 작성과정을 반영하고 싶었어요. 제가 느낀 다른 질문은 이 책에서 왜 이런 언니에게 직접적인 질문이나 편지형식으로 글을 작성했냐는 의문이에요. 제가 그런 스타일을 선택한 이유는 제가 직접 대화하지 못할 상대이기 때문이죠. 언어적 장벽이 있으니까요. 동시에 언니와 여러 문제에 대해서 대화를 하지 못한다는 의미기도 하죠. 거기에 더해서 혈통적인 문제도 있어요. 제 언니는 제 어머니와 혈통적으로 관계가 없거든요. 전 제 어머니와 가장 깊게 연관이 있죠. 그래서 그러한 혈통적 문제가 직접적 대화를 어렵게 해요. 그리고 눈치 채셨을 지도 모르지만 편지에서 가장 직접적인 감정이 드러나요. 물론 제 언니에 대한 감정은 아니죠. 하지만 분노와 정치적 수사가 가장 잘 드러나게 되어요. 거기에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하죠. 독자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독자 대상으로 직접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이에요. 세세한 대화를 할 수 있는 문학적 전략이기도 하죠. 대화라는 문학적 장치를 사용하면서 심문하는 느낌은 줄이고 정보 전달을 하게 되어요.

팟캐스트: 아 네. 이해가 되네요. 그리고 책을 아직 읽지 못한 청취자 분들을 위한 질문인데요. 제니씨가 관계와 장벽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어려운 점은 그 언니분과 이복자매라는 점 때문이죠. 아버지와 친어머니의 관계가 그 당시에는 불륜 관계였고, 아버지가 언니분의 어머니와 결혼한 상태로 제니씨의 친어머니와 관계를 맺었으니까요. 그래서 제니씨가 그 언니분의 삶에 나타난 일이 그 언니 분에게 문제를 일으켰나요?

제니: 네. 제 존재 자체가 제 부모님과 제 친척들에게 부모님의 문제를 보여주는 셈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시점에 제가 삶에 나타나는 일은……. 물론 저도 성인이었고 언니도 성인이었지만 서로의 복잡한 문제에 대한 인식이 되었죠. 충분히 비유적인가요?

제니: 제가 태어난 뒤에, 제 친할아버지가 저에게 이름을 주셨죠. 그 다음에 저를 호적에서 지우는 서류에 서명하셨고요. 그 결과 제 상태를 확인하시던 어머니에게서 절 빼앗아 가셨죠. 어머니에게는 제 젖은 머리에 입맞춤을 할 시간 밖에 주어지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저를 잃어버리셨죠. 어머니의 입에는 어머니 자궁에서 나온 검은 내용물이 짙게 남아 있었고요. 30년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그 이름은 제시카, 킴벌리, 메간과 같은 한국인들에게는 맞지 않는 이름으로 바뀌었죠. 한국인들에게는 다양한 이유로 불가능한 이름이죠.

제니: 제가 대답하는 이름이지만, 제가 그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는 저한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익숙하기 때문이죠. 저에게 맞는 이름이 아니죠. 처음부터 전 제 피부색을 바꾸려고 노력했어요. 영어와 프랑스어를 동시에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고, 포크와 나이프를 옆에 놓고 식사해야 했죠. 크림, 러시아 캐서롤, 아이리시 세터, 형식과 가죽 교회용 신발의 삶에 맞춰 들어가야 했어요. 콘체르토, 가죽 신발 그리고 메이플 설탕 캔디에 묻혀 제 친어머니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죠.

팟캐스트: 제니씨의 대화 방식은 매우 운율적이네요. 자연적인가요 아니면 어떤 사람들에게 배운 기술인가요? 

제니: 아 감사해요.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자연스러운 재능과 사회에서 배운 능력을 구분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러한 개인의 성장에 관련된 이야기는 이 팟캐스트에서 많이 나오겠지만 말이죠. 제가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적은 없으니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어요. 작가로서 한 번도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본 적은 없죠. 하지만 사회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전 문학 교수이고, 항상 무언가를 읽고 있고, 시를 사랑하니까요. 거기에 문학적인 표현을 쓰기 좋아하기도 하죠. 그래서 관련 문학과 자료들로 주변을 채워요. 그래서 카오미(팟캐스트 호스트)씨가 받고 있는 느낌은 자연적이기도 하고 사회적이겠죠. 인터뷰할 때 마다 질문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당신의 스타일을 어떻게 묘사하시나요?” 라고 물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끔찍한 것들을 아름답게 보이게 만들려고 해요. 끔찍한 것들을 아름다운 단어로 묘사하죠. 그러한 부조리가 제가 문학을 읽을 때 저한테 큰 영향을 남기거든요.

팟캐스트: 제가 책을 읽을 때 눈에 띄었던 사실이 생각나네요. 처음에 시를 먼저 쓰셨고 나중에 서사를 붙여 넣었다고 하셨죠. 제가 책을 읽었을 때 제니씨의 책은 아주 영화 같았어요. 읽었을 때 장면이 떠올랐죠. 그게 제니씨가 나중에 하나로 묶으려고 한 생각들일지도 모르겠네요. 독자로서 이런 짤막한 묘사들과 놀라운 이미지가 아주 자세히 묘사되는 것을 읽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죠. 언제부터 회고록을 쓰실 생각을 하셨고 회고록을 이러한 기억들을 모으기 시작하나요?

제니: 자료를 모으는 행동은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어요. 전 일기를 쓰지도 않죠. 하지만 전 그림에 기반을 두고, 생각하고 글을 써요. 그래서 기억은 제 뇌에 고정하기 어려운 그림들과 기호를 통해서 저에게 다가와요. 그래서 영상적인 느낌이 나는 글이 쓰여 졌을지도 몰라요. 아니면 제 삶의 극적인 면모가 그러한 영화적 서사를 부여했을지도 모르죠. 제가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을 때는 회고록을 쓰려고 하지 않았어요. 안식년에 논문을 쓰고 있었죠. 아직 끝내지 못했어요. 물론 지금은 그 진로로 돌아가지는 않겠죠. 학문적인 책을 써야 했어요. 하지만 대신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죠. 중학교 이후로 처음으로 교육을 하거나 공부를 하지 않고 있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빈 시간에 제 머릿속에서 이러한 시들이 한밤중에 흘러나오기 시작한 거죠. 90페이지 정도 쓰고 나서야 이게 책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하필이면 안식년 말미여서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그때 시에 대한 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초기에 서서히 길어지기 시작하자 소설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사실 논픽션 책을 쓸 생각은 없었어요. 개인사에는 부끄럼을 타는 성격이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픽션 계통으로 쓰려고 글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최대한 양보해서 창조적인 논픽션 계통을 써볼까도 생각했죠. 하지만 출판 관련 과정에서 회고록으로 변모했어요. 전 제가 회고록을 쓰게 된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하지만 누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뭐 어떤 사람들은 그럴지 모르지만 전 그럴 생각이 없었어요. 하지만 그게 제 여정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그게 2016년이었죠. 그리고 책이 출판된 건 2019년 9월이었어요. 아주 빠르게 진행됐죠. 

팟캐스트: 많은 입양아들은 친부모를 찾고 싶어 하지 않거나 적어도 삶의 후반부에나 그걸 시도하죠. 그 조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그 시점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제니: 제가 보스턴으로 이사했을 때였어요. 그 때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타서 미국에서 살고 있었죠. 제가 처음으로 어른 입양아들을 만났을 때기도 했었죠. 그 이전 봄에 아시아계 미국인 연구협회에서 입양아 어른들을 만났고, 그중 상당수가 보스턴에서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같이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죠. 아주 대단한 시기였어요. 캐나다에서, 특히 제 세대 같은 경우에는……. 전 조사를 진행하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동시에 어른 입양아를 처음으로 만날 수 있을 정도의 나이였죠. 제가 30살 언저리였을 때였어요. 제가 감명 받았던 이유를 대자면, 캐나다에서는 미국처럼 입양아들이 서로를 만날 기회가 얼마 없어요. 지역성이라든가, 인구 구성이 전부 이런 일에 영향을 끼치죠. 미국 입양아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됐는데 항상 친부모 조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항상 흥미로운 주제였죠. 누가 찾고 있다, 찾지 않는다, 문제다, 항상 누군가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그 사람들 주변에 있으면서 어떤 물리적인 형상이 만들어졌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을 해줬으니까요. 그래서 생각했죠. 해봐야지. 하지만 사실 걸린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릴 거라고 믿어버렸어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 걸리죠. 아예 접촉을 못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그래서 제가 그때 생각하기를 지금 27세에서 28세일때 이 조사를 시작하면 몇 년 걸릴 테니 그 동안 감정 정리를 하고 정신 건강관리도 해야지 라는 생각을 했죠. 하지만 모든 일이 너무 빠르게 일어났고 그리고 모든 것을 멈추거나 느리게 다음에는 제가 겁을 먹고 있었어요. 그래서 첫 편지 교환의 시간에는 전 아직도 보스턴에서 살고 있었죠.

팟캐스트: 조사를 시작했을 때 같은 미국 입양아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네요. 캐나다 입양아들과 미국 입양아들의 정체성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정체성만 아니라 지역의 유일한 아시아계 아이와 같은 성장 이야기도 비슷했나요?

제니: 네. 하지만 동시에 아니죠. 제가 미국에서 만난 입양아들의 경우, 이미 입양아 단체를 통해서 만났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주변에 다른 입양아가 있는 일은 흔했고 특히 한국 입양아 같은 경우에는 주변에 비슷한 입양아가 있는 것은 평범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죠. 캐나다의 다른 입양아들도 비슷했어요. 제가 토론토에서 몇 명의 입양아를 만난 경우가 있는데 토론토에서 미국과 비슷한 단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미국 입양아들이 주축이라고도 하더군요. 밴쿠버에서도 입양아 몇 명을 만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이 사람들의 경우 다른 입양아들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50대에서 60대가 넘었는데도 말이죠. 그리고 그러한 캐나다의 사례가 제 경험과 비슷하다고 봐요. 캐나다의 경우 대도시가 적어요. 거기에 거리도 있죠. 대도시 출신이라고 해도 미국과는 다르죠. 뉴욕에서 보스턴까지는 몇 시간 내로 여행할 수 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제가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는 토론토죠. 오대호를 거쳐 가야 하니 운전 시간만 20시간 넘게 걸려요. 그래서 경험이 달라요. 또 인종관련 이야기가 있어요. 아니면 이야기가 없다고 해야 하나요? 하지만 표현 방식이 다르죠. 며칠 뒤에 관련 모음집을 출간할 예정이에요. “입양과 다문화”라는 모음집이죠. 그 모음집의 기반이 된 논문은 인디고 윌링과 토비아스 후비넷이 쓴 논문인데 다문화 입양아나 아이로서 자란 장소는 다양하기 때문에 다문화 가정으로 자라는 일 자체를 커다란 한가지의 무언가로 인식하면 안 되고 다양하고 흥미로운 배경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저술하고 있어요. 저도 동의하는 바에요. 제가 미국에서 느낀 일을 생각하면 말이죠.

팟캐스트: 주변 사람들에 있어서 아주 보호적이라고 이야기하셨죠. 책을 읽으면서 제가 느낀 사실중 하나는 입양 부모님이나 입양 가족에 대해서 잘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어요. 행동 몇 가지, 물건 몇 가지나 환경으로 추측할 수는 있죠. 그래서 어디에서 성장하셨고 그 시간대나 그러한 감정을 공유해 주실 수 있나요? 

제니: 네. 그 사실을 알아차려 주셔서 고마워요. 전 항상 이야기를 할 때는 동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주도성과 객관성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경험에서는 말이죠. 하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입양 가족은 최대한 떨어트려 놓으려고 생각했어요. 또 인종 정치적인 전략이라고도 생각해요. 단순히 입양아들뿐만 아니라 주류 입양 가족, 주류 백인 가족이나 주류 서구 가족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죠. 그래서 한국계의 혈통과 관련해서 집중하고 싶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토론토에서 한 시간 떨어진 소도시에서 성장했어요. 굿리드 홈페이지에 올라온 제 프로필을 보고 “아니 이 도시를 작은 마을이라고 한다고?” 라고 놀라던데 제가 작성한게 아닙니다. 제 편집자가 그렇게 작성한거죠. 10만명 정도의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에요. 그때는 확실히 그랬고 지금은 덜하지만 매우 인종적으로 통일되어 있고 계급적으로 나뉘어져 있는 도시죠. 그래서 입양된 사람들에게는 인종적으로 소외되는 느낌이 들 수 있어요. 저는 백인으로 가득한 교외에서 자랐죠. 남부 온타리오 지대의 도시였어요. 그리고 전 공업지대인 도시였죠. 그래서 그러한 배경에서 오는 계급적, 인종적 난해함이 있는 도시였어요. 그래서 복잡한 곳이었죠. 하지만 토론토로 대학에 가기 위해서 이사한 뒤에 그 복잡함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과거에 이상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문제죠. 어렸을 때 불편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논의할 기반이 없었어요. 왜 불편한지 말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제가 이런 쪽에서는 아주 운이 좋은 편이에요. 박사학위도 가지고 있고 인종학을 가르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항상 생각하고 있죠. 하지만 그곳에서 항상 맞아 들어가지 않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리고 저한테는 그걸 제대로 설명하거나 논의할 방법이 없었죠. 물론 듣고 있는 분들과 이 팟캐스트 참여자들도 비슷한 경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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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합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죠. 회고록을 쓰는 분들이 가족들의 사생활을 지키려고 했다고 들었어요. 회고록 자체가 개인적인 삶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그 합의를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이해가 가요. 독자의 알 권리라고 언급하기에는 그렇지만, 이야기를 진실하게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걱정하시나요? 

제니: 네. 좋은 질문이네요. 하지만 이런 형식으로 말해지는 것은 처음이에요. 제가 생각해볼 만한 질문이네요. 이 회고록을 쓰고 있을 때 생각했던 일은 타인의 보호만이 아니라, 사실 거의 대부분이 저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었어요. 제가 아주 선량하고 희생적인 사람이라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죠. 회고록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이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나 공유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를 섬세하게 계산해내요. 합의만이 아니라 경계도 생각해야 해야 하죠. 제 경계와 한계에 대해서 알고 제가 공유할 이야기를 생각하고 숨길 이야기도 생각해요.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는 공유하고 숨기고 싶은 이야기는 숨길 권리가 있으니까요. 전 독자에게 이야기에서 A지점에서 B지점으로, B지점에서 C지점으로 갈 수 있을 정도의 정보를 제공하는 거죠. 그리고 제 편집자가 그 일에 큰 도움을 줬어요. 한번은 편집자가 이야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해를 위해서 이야기를 시간대 순서로 정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리고 빈 공간을 지적하면서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면 뭐가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언급해 줬죠. 그래서 저는 독자를 문학적인 요소로 생각하지만 제가 원하지 않는 정보까지 제공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껴본 적은 없어요. 그 이유는 특히 이야기, 창조, 설명과 직접적인 관련 없는 사람들이라면,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들의 한계를 이해하고 우리가 그 권리를 다시 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제 독자 분들이 그 사실을 이해하신다면 좋겠네요. 

팟캐스트: 물론이죠. 하지만 전 욕심쟁이 독자라서 더 많이 알고 싶거든요. 하지만 전 책에 만족했고 제니씨가 제공하지 않은 정보가 없어서 제가 덜 만족했다고 느끼지는 않았어요. 

제니: 또 제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작가로서 건축 자재를 다 치워야 한다. 글을 건축한 뒤, 그것에 쓰인 자재들을 치우고, 독자들이 중간 부분에서 작가와 만나줄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독자들이 그 빈 공간을 채워 넣어 주고 그 이야기에 감명을 받고, 같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고 봤어요. 공생적 관계인거죠.

팟캐스트: 아 저도 그런 관점으로 본적이 있어요. 페이지를 다 읽고, 문단을 다 읽고 나서 말이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생략도 아름다운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작가들이 독자에게 있어서 일을 하게 하는 거죠.

제니: 네. 감사해요. 독자에게 있어서 독자를 믿는 관대함으로 보였으면 해요. 제가 모든 이야기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이죠. 독자들이 관심을 가져 주셔서 제가 조금 수줍어하거나 부끄러워해도 된다는 믿음이고요. 

팟캐스트: 제니씨는 엄마가 다시 만난 지 꽤 지났는데, 당신을 전부 이해하신다고 생각하나요? 또 다른 질문이지만, 엄마와 같이 계시면 달라지세요? 

제니: 엄마가 저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제 안에 슬픔이 있다는 사실은 아세요. 아이 안에 그런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슬프죠. 거기에 제대로 소통할 수 없다면 더더욱 그래요. 그래서 이런 만남들이 걱정으로 가득하죠. 이런 강렬한 감정적 연결을 가지고 있지만, 제 경우에는 언어의 한계가 있어서 소통의 한계가 있어요. 고통의 잔재만 남죠. 그 사실을 알고, 해결하고, 상대해야 하는 문제가 많아요. 그곳에 같이 있으면, 계속되는 존재감이 기쁨, 고통, 슬픔, 분노와 공포와 엮이고 소통할 수 없죠. 제가 엄마와 함께 있으면 다른 사람이 되는 이유가 언어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문화적 불안함과 적응 부족도 있죠. 엄마는 절 아기나 어린애처럼 대하셔요. 그리고 제가 소통할 때 어린아이 정도의 언어를 사용하기도 하죠. 그래서 어느 면에서 보면 제2의 유년기라고 할 수 있어요. 가능성의 재구성인 셈이에요. 하지만 동시에 매우 이상하죠. 자신의 일을 스스로 관리하는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소중한 사람과는 관계 발달이 지체되는 상황이니까요. 

팟캐스트: 고통의 잔재가 남는다는 표현이 아름답네요. 엄마를 언어적, 시간적, 문화적 장벽 때문에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말이죠.

제니: 시간이 흐르고 나서 엄마와 제 여동생의 앞에 제가 나타났다는 사실의 무게를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 재회의 첫해에 집중하지 않는 일 자체가 어렵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받아낼 시기에요. 잃어버린 관계를 다시 찾는 시간이죠. 그래서 그 시기의 기쁨에 빨려 들어가기 쉬운 것 같아요. 저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죠. 그리고 환상과 이상을 마음속에 품게 돼요. 하지만 부모도 결국 사람에 불과하죠. 그래서 어렵고 실망하게 되요. 하지만 전 부모를 찾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해요.

팟캐스트: 한국에 돌아가 살았던 시절은 행복한 시간이었나요?

제니: 한국 입양 기관에서 제 한국 엄마와 연락이 아주 빨리 닿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가 서류를 보낸 지 일주일 만에 연락이 닿았거든요. 엄청나게 빠른 일이었죠. 그리고 한 9개월 정도 서로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서로를 알아갔어요. 한 달에 한번 꼴이었죠. 그렇게 자주는 아니었어요. 엄마는 삶에 여러 제한이 있어서 개방적으로 저와 연락을 지속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었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서로 만나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아직 대학원을 다니던 중이어서 교환학생을 지원했고, 그리고 한국에서 살고 있던 입양아들과 연락을 했어요. 연구 여행이 됐죠. 좀 이상하긴 했어요. 하지만 그게 제가 한국에서 지내는 교환학생 기간 동안 무엇을 할 지 결정했죠. 그리고 한국에 도착한 뒤 바로 다음날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났어요. 모두 제가 왜 한국에 갔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서울에 4달에서 5달 정도 지냈어요. 한국 여행도 많이 다녔죠. 물론 제가 제 졸업 논문을 준비하던 기간이었으니 그런 측면에서는 제가 그런 일을 진행하기에는 최악의 시점이라고 할 수 있었죠. 특히 제 논문은 입양에 관련한 논문이었고 그러한 논문을 쓰면서 이런 감정적인 일을 하는 것은 그리 좋은 결정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제가 취직하기 전이었고 다른 일들이 생기기 전이었기 때문에 진행하기 좋은 시점이었죠. 대학원생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고 돈도 있었으니까요.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학원생이라서 운이 좋았죠. 

팟캐스트: 확실히 신기한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입양과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자신의 입양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 자체가 아무 복잡했을 것 같네요.

제니: 네. 너무 많은 생각을 해야 했어요. 조금 과도한 일이기도 했죠. 제가 입양에 대해서 배웠던 모든 것이 제 회고록을 쓸 때 반영되었어요. 자주 일어나는 일, 진행 방향, 인기 좋은 일 모든 것을 알았죠. 그리고 그 모든 지식을 가지고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적용을 해보려고 했어요.

팟캐스트: 입양아 모임과 함께 하실 때 고통과 트라우마를 보셨고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와, 그리고 혼자서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방법을 보셨죠. 그게 충격적이셨나요? 그리고 이러한 트라우마를 같이 해결하는 모임과 접촉했을 때의 대응 방식은 어쩌셨죠?

제니: 그렇죠. 좋은 질문이네요. 미국에서 만난 입양아들과 만날 때는 평범하게 놀았어요. 스포츠 게임을 보러 가거나 독서모임을 하거나 그랬죠. 물론 진지한 이야기도 했지요. 하지만 한국에 온 입양아들이 원하는 일은 자신들에게서 빼앗긴 것들을 되찾는 일이었죠. 감정적으로 슬픔, 정당함, 분노로 가득하고, 동시에 주변에 섞여 들어갈 수 있고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 사이에 있을 수 있다는 기쁨이 있죠. 어머니와 할머니가 만든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요. 모순적인 기쁨과 정당한 권리에 대한 요구가 있죠. 하지만 동시에 소속감이 없고, 그리고 입양아일때 매일 이런 삶을 누리지 못했다는 분노도 섞여 있어요. 그래서 감정적인 폭탄이에요. 거기에 더해서 어떤 사람들은 동시에 조사를 진행하고 있어요. 감정적으로 혼란스럽고 어려운데다가, 어떤 결과가 나오던 힘든 일이죠. 그래서 제가 만난 사람들은 동시에 가장 즐겁고 기뻐하는 태도와 가장 파괴적이고 이기적인 태도를 동시에 보이고 있었어요. 물론 제가 도덕적인 판결을 내릴 수는 없어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는 조금 이기적이게 될 수 있죠. 살면서 거의 처음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 할 수 있는 곳이니까요. 그래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 회고록을 생각해보면 항상 과용이나 무모함에는 항상 결과가 따라와요. 그리고 많은 소수자 집단이나 고통 받은 집단은 내부의 고통이 있고 따라서 내부적인 해가 있죠. 그래서 이 입양아 사회를 이상적으로 묘사하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적으로 봐야 한다는 거죠.

팟캐스트: 항상 사실을 전하는 일이 중요하죠. 모두가 자기 자신의 진실을 이야기하지만, 중요한 일에 대한 통합적인 진실도 중요하죠. 그러고 보니 언급하셨던 것이 서울 입양아 게스트하우스에서 당한 성폭행에 대해서 언급하셨죠. 제가 2017년에 같은 게스트하우스에 성폭행 관련 문의를 했을 때 그런 일은 없었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공적으로 이런 일을 고발하고 그 고발에 대한 반발에 대해서 걱정하시지는 않았나요? 

제니: 제가 생각하기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겪거나, 보거나 경험한 고통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말하는데 있어서 저항감이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그런 상황, 입양아 간의 상해는 제가 겪은 최초의 고통이 아니거든요. 저에게는 그렇게 특이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살면서 그러한 문제를 겪어왔고 말해왔으니까요. 전 제 경험이 부정당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저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니까요. 제 공포는 제 자신이 마음속에서 우리 집단과 우리 집단 내부의 남성에 대해 얼마나 말하고 얼마나 보호해야 하는지 논쟁하는 데에서 나와요. 다양한 집단에서 일어나는 일이죠.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 대해서 관대하고 특정 문제에 대해서 과도하게 옹호하고 비밀을 지키는 일이죠. 그래서 저에게 가장 큰 문제는 얼마나 내 혈족과 사람들에 대해서 얼마나 폭로하느냐 숨기느냐의 제죠. 그리고 비입양아나 백인들 같은 주류 사회의 인식에서 이런 문제는 얼마나 숨겨야 하죠? 특히 주류 사회에서 이러한 문제를 보고 악용해 다른 종류의 폭력을 정당화할 수도 있으니까요. 한 사람의 경험을 사용해서 제노포비아를 일으킬 수 있고, 반아시아계 인종감정을 불러일으킨다던가, 반대쪽에서 반감을 일으킨다던가. 악용할 방법이 많죠. 그래서 이런 이야기에 있어서 얼마나 숨기고, 얼마나 사람들을 지키고, 언제 지키는 행위를 멈춰야 하는지가 제 가장 큰 문제지요.

제니: 이러한 조사를 하게 되면 가족이나 부모님이 동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이러한 조사를 진행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험한 상황에 놓는 경우가 많아요. 상황이 그들을 위험하게 만드는 거라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불공정함이 우리 집단 안에서 드러나기 마련이죠. 그래서 탄생지 조사, 뿌리 탐색이라고 부르던 이 여행 자체에 제도적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게스트 하우스라든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죠. 제도적으로 결함이 있어요. 우리들은 아주 절실한 상태이고 그렇기 때문에 게스트 하우스에서 타인을 믿고 룸메이트를 하거나, 모르는 상대에게 신뢰를 보내야 하니까요.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자주 이러한 일을 해야 하니까 우리의 안전에 위협이 가는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빈번하죠. 하지만 이 방식이 우리가 조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에요. 제도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죠. 그리고 뿌리를 찾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는 입양아들의 나이는 가면 갈수록 어려지요. 물론 전 입양 부모들이 이러한 뿌리 찾기 여행을 지원해주고 응원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18세 정도 되는 아이들이 뿌리 찾기 여행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듣고 여행을 혼자 가게 되면 혼자서 이런 문제를 겪게 되죠.

팟캐스트: 네 동의해요. 아주 위험한 과정이죠. 이러한 과정을 혼자 겪으면서 어떤 도움도 받지 않으니까요. 친구들과 떨어져 있고 혼자서 해야 하니까 말이죠.

제니: 어떤 경우에는 친구들에게도 숨겨야 하니까요. 친구들에게 따라오라고 할 수도 없죠. 아주 개인적이고 감정적이고, 개인적이고 불편한 일이니까요. 

팟캐스트: 그리고 소통이나 다른 문제를 담당하는 입양기관들은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적으로 인식되니까요. 그러니 입양기관과도 상대를 해야 해요. 

제니: 모두를 믿을 수 없지만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해지는 순간이니까요. 하지만 경험의 일부에요. 입양아들이 모이면 서로의 정보와 이야기를 하게 되죠. 그러면서 친밀함과 믿음이 쌓이게 되어요. 그리고 다른 어른 입양아를 만난 적이 없다면 처음으로 이런 감정을 느껴 보는 감정이죠. 그래서 믿음과 경계에 대한 본능이 이러한 관계로 흐려져요. 전 이런 문제가 피해자 잘못이라고 하지 않아요.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도 아니고요. 우리가 우리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은 맞아요. 위험에 처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으니까요. 그것이 문제죠.

제니: 우리 같은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은 상처 입었다고 하죠. 망가졌다고 하고요. 머리를 흔들면서 우리가 한국 부모, 형제, 자매, 친척을 찾으려는 광경을 바라봐요. 다양한 유전자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개인 기업에 우리 유전자를 넘겨주고 우리가 친척을 찾을 가능성에 희망을 거는 것을 보죠. 우리가 탄생 국가에서 여행자가 되는 광경을 봐요. 게스트하우스에서 게스트하우스로 넘어가면서 돈과 자존심을 잃어가면서 떠도는 모습을 보죠. 우리에 대해서 책을 쓰죠. 입양 기관에 가서 읽을 수도 없고 읽어서는 안 되는 입양 서류를 찾으려고 애를 쓴다고 적어요. 술을 마시고 넘어지는 우리를 보고 웃죠. 우리가 똑같은 이유로 길을 헤매고 있는 사람들과 하룻밤을 보내면서 상담 받는 것과 비슷하다고 위로하는 광경을 봐요. 이름을 발음하지도 못하고, 다시는 보지도 않을 한국인 남자들과 하룻밤을 보내는 우리를 경멸하는 듯이 보죠. 아빠 문제인가? 라고 비웃어요. 

팟캐스트: 지금까지 받은 독자의 감상이나 반응은 어떤 기분이셨죠? 놀라운 감상이 있었나요? 

제니: 음……. 캐나다에서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어요. 단순히 독자들만 아니라 평론가들도 고평가를 해줬죠. 신인 작가로서 이런 반응을 얻어서 꽤 놀랐어요. 특히 캐나다의 흑인, 북미 원주민, 그리고 다른 유색인종 작가들의 대단한 재능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랬죠. 그래서 아주 좋은 일이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줬어요. 하지만 제가 놀란 일은 제 성장기 때의 지인들이 이 책을 읽고 저에게 연락을 해왔던 점이었어요. 특이한 일이죠. 대부분의 경우 좋은 감정이긴 했지만, 어떨 때는 저에게 잘 대해주지 않았던 사람들도 저에게 연락을 해왔죠. 그런 경우에는 그렇게 좋지 않았어요. 그런 사람들은 기억을 똑같이 하고 있지 않거나 잊어버린 경우도 많더라고요. 그런 면에서는 놀랐지요. 그래도 대부분의 경우 좋은 반응이었어요.

팟캐스트: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네요. 아주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책이니까요. 이러한 흐름을 타서 더 집필을 하실 예정이 있나요? 이미 무언가를 쓰고 계시나요?

제니: 소설을 쓰고 있어요. 4부작이 될 예정이죠. 짐 존스의 한국계 입양아들이 모티브가 될 것 같아요. 물론 적지 않은 면을 따왔지만 모든 면을 따온 것도 아니죠. 지금 현재 작업상으로는 대부분 한국 배경이에요. 아주 흥미롭죠. 아주 많은 한국 여류 소설가들의 책을 읽고 있거든요. 물론 번역되어 출간된 소설들이지만 한국 문화에 대한 교육이라 아주 흥미로운 주제에요. 민족지적인 관점만이나, 음식이나 그런 이야기도 아니죠.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배울 수가 있었어요. 물건, 관계,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식을 알 수 있었고 어떤 것들보다 더 제 문학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꿔줬죠. 아주 대단한 작가들의 책을 읽고 그들의 방향을 따라가려고 하는 연구라 아주 즐거운 과정이에요 

팟캐스트: 지금 한국 문학에 있어서 아주 흥미로운 시기가 아닌가요? 세대가 교체되면서 젊은 작가들이 등장하고 있으니까요

제니: 아주 대단하죠. 반전도 대단하고 개연성이 있어요. 읽은 책 전부다 전부 대단하고 멋있어요. 현대 한국 작가들의 이야기 전개는 아주 정교해요. 거기에 아주 짧은 책들은 아주 정교하죠. 복잡하면서도 캐릭터들이 표현되는 방식이 아주 혁신적이고 실험적이에요. 아주 멋지고 대담하죠. 그리고 전 전부 좋아요. 

팟캐스트: 제니씨가 나타나서 부모님이 재결합하셨죠. 그 현실에 대해서 큰 무게감을 느껴 보신적이 있나요? 다른 입양아들은 제니씨의 상황을 보고 “만점이네! 조사도 성공했고 널 찾아서 부모님도 재결합하셨네!” 라고 했겠죠. 이런 상황이 또다른 압박으로 작용했는지 알고 싶어요.

제니: 네. 그게 제 경험을 책을 만들려고 한 또 다른 이유였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 상황을 듣고 대단한 이야기라고 했거든요. 아이가 바다 건너 먼 나라로 입양되고 부모는 아이를 입양시키고 나서 인연이 끊어 졌지만, 아이가 되돌아와 다시 한번 로맨틱한 관계를 만들게 됐다는 이야기. 많은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 같다, 영화를 써야한다 이야기했죠. 확실히 한국 드라마 같긴 했죠. 처음에는 확실히 대단한 느낌이었어요. 다시 한 번 시도를 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였으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이상하고 특이했어요. 제 부모님이 같이 저를 어린애 대하듯이 대화를 하셨죠. 부모님이 서로 누굴 더 좋아하는지 물어보시기도 하셨고요. 그리고 부모님을 기쁘게 하려고 어린애처럼 엄마일까, 아빠일까? 답했어요. 아주 이상했죠. 그러한 이상한 관계는 지나갔어요. 하지만 제 책에 언급되었던 대로 긴장감도 높았죠. 아빠와 엄마의의 관계에서는 통제 문제가 있었어요. 특히 저 자신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기 시작하니 더더욱 그랬죠. 그 뒤로는 꽤 무섭고 괴로워졌어요. 어머니의 삶에 이런 사람을 다시 데리고 돌아온 일이 잘하는 일일까? 하지만 어머니는 행복해 보이셨어요. 하지만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였죠. 제가 언어 장벽 문제로 정보를 25% 정도밖에 얻어내지 못했다는 문제도 있었죠. 

팟캐스트: 제가 책을 읽었을 때 남성 캐릭터들도 등장하더군요. 그때의 남자친구에서 현재의 남편까지 보았는데 책에서는 물리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 같더군요. 의존 상대나 안정적인 피난처로 생각 하는 것이 보였어요. 하지만 아빠의 경우에는 좀 더 입체적인 캐릭터지만 더 파괴적이고 피해적인 행동이 심했다고 언급하셨죠. 그리고 여동생과의 관계 묘사까지 감안했을 때 이 책이 페미니스트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시나요?

제니: 네. 제가 하는 모든 일이 페미니스트적 관점을 가지고 있어요. 부정할 수 없죠. 처음부터 제가 여성의 관계에 집중하려고 했죠. 어머니-딸, 할머니-손녀, 자매 간의 관계에 더 집중하려고 했어요. 저에게는 두명의 한국 형제가 있지만 이 회고록만 읽으면 모르겠죠.

팟캐스트: 많은 사람들이 집필은 치료라고 이야기하죠. 책을 쓴 이유가 제니씨의 치료였는지는 모르지만 책이 제니씨를 치료해줬나요? 

제니: 부분적으로는 그랬죠. 우리 입양아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해서,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저에게 이야기를 해왔어요. 그런 면으로는 확실히 치료를 해줬죠. 확실히 인정받는 느낌이고요. 보살핌, 사랑,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죠. 그러한 상황에서 확실히 대단한 이야기가 나타나죠. 전 저 자신을 치료해주거나, 문제를 해결할 책을 쓰기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글 쓰는 과정은 그렇지 않았죠. 제가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고 많은 책을 읽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제가 책의 일부를 읽으면 그런 느낌이 들어요. 감정을 가장 깊게 느끼게 되죠. 책을 쓰는 과정이 아니라 읽는 과정이 제 존재를 확인해주었죠. 그래서 괜찮다고 인정해줬죠.

팟캐스트: 오늘 와서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니씨

제니: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팟캐스트 청취자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려요.

–유호형 번역

시즌 4, 에피소드 1: 션서

션 서는 33세의 한국 출신 호주 입양아로 삶에서 여러 비극을 겪었다. 파푸아 뉴기니와 피지에서 가족과 함께 외국인으로 살면서 가난과 특권 정치에 어렸을 때부터 휘말렸다. 하지만 가족의 붕괴가 서의 삶을 바뀌게 해 백인이 주류인 호주 시골로 날아가게 했다. 서는 2019년 IKAA 모임에 참여했고, 다른 입양아들의 커뮤니티, 특히 호주 입양아들과의 연결을 찾아냈다. 이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이다.

션: 제 이름은 션 시어 헤드릭이라고 합니다. 제 중간 이름은 입양 전 이름에서 따왔어요. 한국어로는 서지만 전 시어라고 발음하죠. 하지만 그게 입양 부모님들이 준 이름이죠. 나이는 만 32세입니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호주 가족에게 입양되었죠. 멜버른에서 3시간 걸리는 와논볼스라는 마을에 입양되었어요. 제가 입양 상황에 대해서 아는 일은… 사실 꽤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생물학적 어머니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아주 짜증 나는 일이죠. 제가 아는 이야기는 제 생물학적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교제 중이었다고 해요. 서로 다른 지역의 가발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가발 회사가 망했다고 해요. 아버지와의 연락이 끊기고 난 뒤 어머니가 임신 사실을 아셨죠. 다른 자료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사실이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주 자세한 자료는 있어요. 제 부모님, 부모님의 가족, 출생 장소, 3명의 아들과 2명의 딸 중 셋째였다는 사실, 어머니의 육체적 특징, 키, 유전병이 없다는 증명도요. 하지만 절 입양시키신 이유는 감정적인 상태와 금전적인 문제로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때에는 입양이 제일 나은 선택이었던 셈이죠. 흥미롭게도 산부인과의 이름도 언급하더라고요. 나중에 이야기하죠.

션: 출생 6개월 때 입양되어서 호주로 왔어요. 어머니는 영국인이었고 아버지는 호주인이었죠. 우리 가족은 이 와논볼스 마을에서 첫 6년 정도 같이 살았어요. 마을 근교에서 땅을 가진 채로 살았죠. 꽤 괜찮은 시골이었죠. 하지만 다시 마을로 돌아왔어요. 제가 학교에 가야 했거든요. 하지만 동시에 아버지가 파푸아 뉴기니에서 일할 기회를 얻어서, 파푸아 뉴기니로 갔죠. 아버지는 엔지니어셨어요. 제조업계에서 일하셔서 그쪽에 있는 큰 제조 공장에서 일하셨죠. 그 시절에는 엔지니어가 되려면 대학을 나와야 했고, 아버지는 공대 출신이셨어요. 두 분께서는 불임이셨어요. 어머니께서 젊으셨을 때 수술을 받으셨거든요. 두 분은 관계를 맺으시면서 아이를 가질 거라고 생각은 안 하셨다고 해요. 물리적으로 가질 수 없어서 인지는 모르지만요. 하지만 관계를 이어 나가시면서 관심을 가지게 되셨다고 해요. 호주 내부에서의 입양도 찾아보셨지만, 호주 내부 입양에 관한 법이 마음에 안 드셨다고 해요. 호주에는 친부모가 입양 보낸 자식에게 항상 연락할 권리가 있거든요. 그래서 불편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우연히 일하시다가 아시아계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여성분을 보셨죠. 어머니께서는 꽤 직접적인 분이시라, 다가가서 “당신 아이인가요?”라고 물어보셨다고 해요. 그러니 상대방이 “네.”라고 답하시자 “남편분이 중국인이신가요? 아니면 입양하신 건가요?”라고 물어보셨다고 해요. 알고 보니 그 여성분이 아이를 한국에서 입양하셨더군요. 그러한 연결을 통해서 제 부모님이 절 입양하시게 된 거죠. 그 상황에서 다른 입양 가족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었던 사실이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물론 항상 옆에 살지는 않았어요.

션: 제가 한 여섯 살쯤 제 아버지가 파푸아 뉴기니로 전근을 가셨죠. 하지만 그전에 한국에 가셔서 제 여동생을 입양하셨어요. 제가 3살인가 4살 때였죠. 그렇게 저희 4인 가족이 파푸아 뉴기니로 이사를 했어요. 해외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경험은 흥미로웠죠. 당시의 파푸아 뉴기니는 상당히 치안이 안 좋았어요. 그래서 거대한 보안 주택지에서 해외 가족 둘과 같이 살았죠. 2층 높이의 철조망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지역이라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었어요. 기억이 아주 자세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러한 안전 조치에 대한 이유는 기억이 나요. 파푸아 뉴기니에서 살 때 첫 자전거를 받았어요. 반짝반짝 윤이 나는 예쁜 붉은 자전거였어요. 연습용 바퀴도 달려 있었죠. 크리스마스에 받아서 온종일 타고 다녔어요. 그런데 다음날에 보니까 없더라고요. 그리고 보안 주택지의 정문이 활짝 열려 있었죠. 경비원이 일보다는 그 자전거를 더 원한다고 생각하고 자전거를 훔친 거죠. 경비원은 다시 보지 못했어요. 빈곤함이 엄청났던 거죠.

션: 거기 살면서 불운한 일을 겪었어요. 파티에 참여했는데 거기 수영장 문을 누가 열어 놨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우리 가족은 여동생을 수영장 사고로 잃었어요. 우리 가족 셋에게 있어서 아주 큰 충격이었어요. 그리고 그 상황이 저희 부모님이 이혼하는 과정까지 이어졌어요. 바로는 아니었지만요. 충격과 슬픔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봐요. 하지만 그 이후로 파푸아 뉴기니에서 바로 또 다른 아이를 입양하는 결정을 하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제가 외동으로 자라는 일에 대해 걱정을 하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에게는 아직도 고통스러운 기억이라 길게 이야기해 본 적이 없어요. 이해하고 존중하는 일이죠. 그래서 제 여동생이 죽고 난 뒤 1년이 되지 않아 제 남동생을 입양했어요. 아주 빨리 일어났죠. 그러기로 한 이유가 한국에서 입양하는 과정은 길고 준비가 필요하지만, 파푸아 뉴기니에서 살고 있었으니 파푸아 뉴기니에서의 입양은 좀 더 쉬웠기 때문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제 남동생이 생겼어요. 하지만 몇 달 동안만 데리고 있었죠. 비밀 입양이어야 했지만 입양한 아이의 가족이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았고, 경비원이 그 가족을 알아서 우리 주택지에 들여보내 줬거든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돈을 요구했고 그러한 문제 때문에 아이를 파양해야 했어요. 힘든 시기였어요. 그리고 그 뒤로 우리 가족이 피지로 옮겨갔죠.

션: 제가 8살이었을 때였어요.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몰랐죠. 그 일이 가족과 저에게 얼마나 힘들고 충격적이었는지 이해를 못 했어요. 하지만 피지에서 다시 깔끔하게 시작하려고 했죠. 아버지가 더 나은 일을 받으셨어요. 공장 전체 관리자가 되셨죠. 피지는 정말 대단했어요. 아주 다른 환경이었죠. 사람들이 훨씬 친절했고 주말마다 밖에 외출해서 사람들과 교류도 가능할 정도로 안전했어요. 꽤 좋은 삶을 살게 됐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전 약간 고생을 하고 있었어요. 초등학교를 네 번 전학했어야 했으니까 조금 화가 났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1년 정도 있다가 부모님이 다른 아이를 원한다는 결정을 내리셨어요. 그렇게 해서 제 또 다른 여동생을 입양하셨죠. 그렇게 제가 인도계 여동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꽤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기억하는 일이 하나 있어요. 저희 인도 여동생을 입양했을 때 어머니가 저에게 이렇게 물었죠. “새 여동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그 말에 저는 이렇게 답했죠. “이번 여동생은 데리고 있을 건가요?”

션: 그게 제가 어렸을 때의 사고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또 다른 일은 전 그때 아홉 살이었어요. 그래서 제 여동생과 큰 나이 차가 있었죠. 9살짜리 꼬마 남자애…. 적어도 저는 아기에 관해서 관심이 없었어요. 뭐 전 저 혼자서 노는 것도 좋아하는 행복한 꼬마였어요. 하지만 그 나이 차가 저를 소외시킨 것 같기도 해요. 우리 가족은 위층에 침실이 두개, 아래층에 침실이 세 개가 있는 큰 집에 살았어요. 그래서 위층에 우리 전부 있을 수가 없었죠. 그래서 제가 아래층 침실을 썼는데 약간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어요.

션: 하지만 여동생을 데리고 있던 게 1년도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때 아버지가 일 가시기 전에 저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하셨죠. 아버지는 “네가 잘 못 한 게 아니지만 네 엄마와 내가 이혼을 하게 됐단다. 그래서 넌 호주로 가서 살아야 해. 난 여기 있게 되고.”라고 말씀하셨어요. 충격적이었죠. 어린 아이일 때도 말이죠. 그 정도로 관계에 문제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랑 어머니랑 제 여동생이 와논볼스로 돌아왔죠. 음…. 이혼은 보통 이혼이래도 아주 엉망이죠. 해외에서 막 입양한 아이를 데리고 오는 일은 더 힘들죠. 개인적으로는 피지 학교는 아주 좋았어요. 국제 학교에 다녔는데 아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다녔죠. 30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다녔으니까요. 인종 문제도 전혀 없었고 그냥 머리카락 색이 좀 다른 정도였죠. 그 나잇대에는 인종차별 같은 건 없으니까요. 하지만 와논볼스는 3000명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어요. 제가 학교에서는 유일한 아시아계였죠. 마을에서도 몇 명 안됐고요. 부모님 이혼에 슬퍼하고, 5번째 초등학교 전학을 하고, 그리고 자기감정을 이해하거나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어요.

션: 그때 어머니에게서 최초로 약함을 본 것 같아요. 물론 부정적인 뜻은 아니에요. 부모님의 인간적인 면을 처음으로 보게 되는 거죠. 그런 경험을 하는 시기는 보통 십 대잖아요. 하지만 어머니의 세계가 붕괴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그 일도 힘들었죠. 그렇게 저희는 다시 와논볼스에서 삶을 재구성하려고 했어요. 그래도 다행이었던 점은 제 1학년 때의 친구들이 아직도 와논볼스에 살고 있었다는 점이죠. 저희가 와논볼스로 돌아간 큰 이유이기도 했어요. 어머니가 저에게 물었죠. “와논볼스에 돌아갈 수도 있단다. 가족과 친구들이 거기에 있지. 아니면 멜버른으로 갈 수도 있단다.” 어머니의 형제가 거기에 살고 있었고 친구들도 있었거든요. 딱히 후회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생각해요. 멜버른이라고 말했다면 제 삶이 어떻게 변했을지요. 큰 도시에서 자랐으면 좀 더 쉬웠을까? 뭐 그렇다고 해도 돌아와서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일은 즐거웠어요.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죠. 물론 여러 문제가 있는 삶이긴 했어요. 어머니는 우울증에 걸리셨고, 전 10살 남자애였고 여동생과는 9살 차이가 났죠.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뭐가 잘못되었던 건지, 아버지가 저에게 이혼한다고 말씀해주신 충격적 대화 등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그리고 여동생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났던 것 같아요. 물론 9살 차이 나는 남매가 같은 집에서 산다고 해도 그리 친밀한 관계가 될 것 같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러한 충격과 문제가 있는 상황 때문에 같이 살긴 했어도 그리 친밀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상당히 차가운 관계였죠. 그러한 관계는 제 잘못이고 지금도 후회하는 일이에요. 여동생이 절 필요로 했지만 제 문제를 해결하느라 도움을 못 줬으니까요.

션: 그 시기에는 전 재능이 많은 학생이었어요. 그때 어머니가 저에게 “미안하구나! 션. 네 숙제를 못 도와줄 것 같아. 도움이 필요하면 학교에서 찾아야 할 것 같구나.”라고 말씀하셨죠. 이러한 상황들이 합쳐져서 제가 독립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아마 너무 독립적이게 되었던 것 같기도 해요. 여러 특이한 상황들, 입양, 해외에서 외국인으로 살기, 그리고 제가 왜 이런 감정을 가지는지 이해하는 일 때문에 제가 아주 독립적인 성향이 있게 되었어요. 예를 들면 제가 아주 심하게 따돌림을 당했을 때 전 이유를 알고 있었어요. 제가 그 학교에서 유일한 아시아계였으니까요. 모두랑 다르게 생겼고 그래서 괴롭히는 애들의 말이 저를 깊게 상처 입혔죠. 꽤 감정적인 아이였다고 생각해요. 특정 당해서 계속 괴롭힘 당했죠. 저희보다 먼저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했던 친구 가족이 미국에서 일하다가 고등학교를 위해서 호주로 돌아왔어요. 제나랑 저는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었죠. 그래서 매우 친했어요. 여러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고 가족끼리도 친한 친구였죠. 그래서 학교 외부에서도 서로 만났죠. 흥미로웠어요. 학년에서 단둘인 아시아계였죠. 그래서 조별과제 같은 일을 하게 되면 친구들이 저희에게 물었죠. 남매 관계인지, 그리고 서로 업어 줄 수 있는지 물었죠. 괜찮겠냐고. 제나와 저 둘 다 아주 부끄러워했어요. 그 뒤로는 학교에서 서로 만나지 않으려고 했죠. 전 최대한 다른 애들과 맞아 들어가려고 했어요. 딴 애들이 제가 아시아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면 할 정도로요.

션: 그 일과 관련해서, 시골 마을에서 다문화가정이면 눈에 띄게 마련이죠. 가족과 함께 길을 걷고 있거나 슈퍼에 가면 사람들이 저희를 항상 쳐다봤어요. 항상 그러한 시선을 느꼈죠. 전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보이고 싶었어요. 하지만 평범하게 보이는 일 자체가 문제였죠. 고등학교 시절은 대학 입학을 위해서 기다리는 시절이었어요. 항상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멜버른으로 가고 싶었어요. 와논볼스는 너무 좁았죠. 그리고 제 해외 경험이 저를 좀 더 다양한 배경의 사람이 있는 곳으로 절 이끌었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아주 즐거운 시기가 시작됐어요. 십 대는 힘들었죠. 사춘기는 어떤 아이한테나 힘들고요. 여자애들이 절 좋아했으면 싶고, 인기 많은 애와 친해지고 싶고, 전 최대한 섞여 들어가려고 노력했어요.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랬지만 적어도 학업적으로 전 큰 성공을 거뒀어요.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죠. 그래서 학교에서 그렇게 큰 노력을 하려고 한 것 같지는 않아요. 수업에서 노력하는 일은 멋있지 않으니까 하지 않았고 운동하는 일은 멋있으니까 운동을 더 하려고 했죠. 그 일이 맞건 틀리건 적응을 했어요. 많이 도움이 되었죠. 많은 애가 절 외계인 보듯이 봤던 것 같아요. 다가가기 어려운 아이라는 거죠. 제가 말이 별로 없던 것도 문제긴 했겠죠. 어쨌든 행동 변화가 저에게 도움을 주긴 했어요.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가진 그것처럼 어떤 편견도 없이 다른 애들과 교류하는 일 자체가 어려웠죠.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 항상 편견을 가졌죠. 그래서 항상 맞아 들어가지 않고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 갈 때가 되자 아주 기뻤죠. 오랫동안 기다려온 기회였으니까요.

션: 멜버른에 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도시를 걸어 다니는 일이었어요. 멜버른과는 친숙했죠. 친척들이 거기에 살고 있고 학교 여행으로도 여러 번 갔으니까요.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아무도 저에게 신경 쓰지 않고 사람들과 섞인다는 사실에 기뻐했죠. 그리고 그곳에서 생활이 제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자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때까지는 제 아시아계 정체성을 밀어냈죠. 제 입양아 친구들은 고등학교 때 친부모를 찾아냈어요. 그리고 한국에 큰 관심을 가지고 한국어도 배웠죠. 친구들이 저도 같이하라고 압박을 넣었죠. 전 거부했어요. 그러고 싶지 않고 관심도 없었으니까요. 대학교 1학년 때 두 아시아 남자들과 조별과제를 하게 됐어요. 흥미로운 경험이었죠. 아시아계 가정에서 자란 아시아계 친구들은 그 애들이 처음이었으니까요. 아주 친절한 애들이었어요. 둘 다 멜버른 출신이었죠. 그 애들이 악의는 없었지만 웃으면서 “션 너 너무 바나나 같아. 가장 호주인 같은 호주인 같이 생기지 않은 호주인이야.” 라고 말했어요. 그때 웃긴 했지만 충격이었어요. 아시아계 애들마저도 절 밀어내는구나 하고요. 그 경험으로 아시아계와도 멀어진 기분이었어요. 저와 맞지 않는 다른 그룹이라는 느낌이었죠.

션: 그때 한국이 호주에서 더 큰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죠. 정확히 말하자면 서구 세계에서 더 큰 존재감을 가지게 되었어요. 한국 고깃집이 나타났고, K-POP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어요.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흥미롭고 멋있는 일이 됐죠. 한국 정체성에서 약간 떨어져 있던 저로서는 흥미롭네. 좀 더 알아볼까?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죠. 그러한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니 제 생물학적 어머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죠. 제 주변에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생물학적 부모를 만난 친구가 둘이나 있었으니 더욱더 흥미를 느꼈죠. 그래서 조금씩 찾기 시작했어요. 조금 무섭기도 했죠. 아주 외국의 일이기도 하고, 어렸을 때 그런 고생을 했는데 다시 인생을 복잡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요. 제가 20대 중반일 때야 친부모를 찾기 위한 일을 시작했죠. 제가 친어머니를 만나고 싶다기보다는 단순한 흥미가 더 컸어요. 무의식적으로 흥미를 느끼고 있었고 논리적으로는 나이가 먹고 나서 알고 싶어졌을 때 알지 못하게 되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절차를 시작하고 절차 도중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절차를 밟으려고 동방사회복지회에 직접 연락했어요. 그러니 제가 거주하는 주 정부 관련 부처로 연결을 해주더군요. 사회복지사를 배정받았고, 여러 번 논의를 했어요. 논의 중 하나는 상담 관련에 집중되어 있었고요. 연결과 재결합을 위한 구조 자체는 좋았지만, 예산이 없었어요. 그래서 엄청 느리게 움직였죠. 그래서 1년 정도 걸려서 호주 내부에 있는 제 서류를 찾고 기관의 반응을 기다렸죠. 전 기대가 그렇게 크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회복지사 분의 의견으로는 절차에 대해서 아주 좋은 대응을 하고 있다고 하셨죠. 그리고 딱 기대할 수 있는 만큼 기대하고 있다고 평가하셨죠. 대학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전화가 기억이 나요.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정보를 기관 기록과 대조했는데 관련 정보가 없고 입양 부모 정보도 없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끝났죠. 두 감정을 느꼈어요. 첫 감정은 안심이었죠.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감정. 하지만 그 뒤로 실망으로 발전하더군요.

션: 그 이후로 한국에 관한 관심은 꽤 낮아졌어요. 제 첫 한국 여행은 사실 의도하지 않았었어요. 고등학교 때 일본어를 배웠고 아주 좋아했죠. 그때 제 교제 상대가 일본 여행 표를 손에 넣어서 우리 둘 다 일본에 가기로 했죠. 일본에 집중하고 일본에 대해서 배운 곳을 방문하고 그러려고 했죠. 그런데 그때 교제 상대가 “한국이 바로 옆 나라인데 한국도 가볼까? 당신 고향이잖아.”라고 말했죠. 그래서 동의했죠. 딱히 생각하지 않고 있었지만 말이죠. 한국 음식은 좋아하고 K-POP도 좋아하긴 했지만, 한국 자체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그래서 여행지로도 생각하지 않았죠. 그리고 제 친부모를 찾을 수 없어서 딱히 갈 생각도 없었죠. 그래서 여행지에 추가했죠. 여행가기 딱 좋을 때였어요. 제 소꿉친구 제나가 한국에 영어를 가르치러 가서 적응을 잘 하고 있었거든요. 첫 여행지는 일본이었고 제가 기대했던 것 그 이상이었어요. 돌아다니기 편했죠. 그리고 한국에 도착했어요. 제가 생각하지 않았던 일 중 하나가 한국이 저에게 감정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것이었어요. 한국에 가니 압도되는 느낌이었죠. 일본도 흥미롭긴 했어요. 제가 방문한 첫 아시아계 국가였고 아시아인들이 주류였죠. 하지만 한국에 가니 그러한 감정이 5배는 증폭된 기분이었어요. 도착하니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감정들이 떠올랐죠. 한국에서 계속 살았다면 삶이 어땠을까? 그리고 주변에 걷는 사람들과 저의 비슷함을 느꼈고요. 반대로 그 사람들도 저에게 그런 감정을 느낀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저한테 길을 물었죠. 혼란스러운 경험이었어요. 처음에 저한테 한국어로 말을 걸고, 제가 영어로 답하면, 영어를 할 수 있는 분들은 영어로 답했죠. 그 사람들이 제가 한국어를 못한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고 심판하는 듯이 봤어요. 예를 들면 밤에 길을 걷고 있는데 취한 사람이 길을 물었죠. 그래서 제가 “아 저 영어밖에 못합니다.” 라고 영어로 대답했고 그러자 취한 분이 “아 죄송합니다. 한국인인 줄 알았어요. 어디 출신이세요?”라고 영어로 대답했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 출신입니다.”라고 답했죠.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면서 걸어가 버리시더라고요. 이상했어요.

션: 말하자면 첫 한국 여행을 그리 즐기지 못했어요. 힘든 일이었고 일본보다 모든 일이 조금씩 더 불편했어요. 일본 같은 경우에는 구글 맵스를 사용하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죠. 한국에서는 구글 맵스가 안 통하더라고요. 그래서 한국 지도 앱을 사용해야 했죠. 친구와 친구의 남자친구를 만나는 일은 즐거웠지만 동시에 어려웠어요. 다시 돌아와서 좋은 휴가였지만 한국은 잘 모르겠네. 라고 생각했죠. 그 이유가 한국에 관광객으로 방문해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평범한 일이긴 하죠. 결혼식 때문에 한국에 갔던 두번째 방문 때 좀 더 사람들과 가깝게 교류할 수 있었고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좋은 장소들을 찾아낸 셈이죠. 두번째 여행에서 인천공항을 통해서 떠날 때 상당히 감정적인 기분이 들었죠. 꽤나 놀라운 일이었어요. 전 그렇게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거든요. 제 마음속에서 집을 떠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놀랍고 제 정체성을 확인하게 해주는 계기였죠. 전 다른 사람들보다 제 정체성을 찾는 일에 늦었어요. 한국에 간 첫 여행 때가 26세에서 27세 사이였죠.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늦은 편이었어요. 거기에 저는 제 직업에 집중하는 편이라 일자리를 잡았을 때부터 거기에 집중을 많이 했죠. 제 독립성을 통해서 제 직업은 제가 마음대로 관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래서 저의 20대 동안 해외에 사는 일은 제 관심에서 벗어난 일이었어요. 그래도 만약에 과거로 돌아간다면 20대에 한국에 살면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제 뿌리를 찾으려고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전 다른 선택을 했죠. 제 직업에 좀 더 집중하게 됐고, 이 COVID-19가 끝나면 한국에 더 자주 가고 싶어요.

션: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저희 부모님이 이혼하고 나서 아버지께서는 몇 년간 피지에서 계셨어요. 그리고 이혼하기 전부터 직장에서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어머니가 이혼하기 전에 그 사실을 알았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중요하지는 않죠. 그리고 아버지는 저희에게 전화하시고는 했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멜버른으로 돌아오시고 난 뒤에는 여동생과 같이 주말에 방문하고는 했어요. 아버지가 피지에서 돌아오셨을 때는 재혼하신 뒤였죠. 그리고 새어머니께서는 전 결혼에서 가진 아들이 한 명 있었어요. 그 뒤로 딸도 하나 가지셨고요. 그래서 이복 여동생도 가지게 된 거죠. 아버지는 저희와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내셨어요. 매주 전화도 하셨고 긴 주말이 있으면 멜버른에 가서 같이 지내기도 했죠. 꽤 특이한 경험이었어요. 그 새로운 가족과 같이 지내야 했으니까요. 적어도 제 머릿속에서 아버지가 만든 새 가족을 전 그렇게 불렀어요. 같이 보내는 시간이 항상 어려웠어요. 제가 13살쯤 됐을 때 아버지를 일부분만 가지는 일은 힘들다고 결론을 내렸고 아버지와 연락하고 싶지 않다고 결정을 내렸어요.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전화하던 때에 어머니에게 “더 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죠. 그리고 어머니가 받아들이셨고요. 겨우 몇 년 전에야 아버지와 멀어졌고 서로 이야기도 안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아주 강한 언어 사용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그 시기에 아직도 어린아이로서는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일이 저에게 충격을 주었죠. 제가 잃어버린 두 번째 가족인 셈이죠.

션: 20대 때 여러 감정적 변화를 겪었어요. 20대 초반에 제가 여러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하지만 그 문제를 마주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죠. 진지한 연애를 해본 적도 없었고,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일도 어려웠고, 분노하지만 왜 분노하는지 몰랐어요. 물론 밖에서 보면 전 멀쩡해 보였죠. 그러한 문제를 내부에서 처리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이 제 삶의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어렵게 했어요. 다행히도 제 주치의가 좋은 분이셨어요. 제가 다른 문제로 병원에 가 있을 때 저한테 질문하셨고 전 많은 문제가 있다고 답했죠. 의욕도 없고, 감정 기복도 심하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시니 의사 선생님께서 정신과 전문의인 친구를 소개해 줄 테니 상담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죠. 저 같은 경우에는 정신과 상담이나 상담 자체와 그리 좋은 경험이 없었어요. 부모님 이혼 뒤에 어머니가 저와 제 여동생이 상담을 받게 하셨죠. 그렇게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그래서 상담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주치의 선생님이 추천해준 전문의와 만났고 아주 상담이 잘 진행됐죠. 그리고 거의 처음으로 제가 가진 온갖 문제를 설명할 수 있었죠. 첫 여동생의 사망, 남동생 입양 실패, 이혼, 국가 변화, 인종적 정체성,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죠. 그때 주치의 선생님에게 고마워하고 있어요. 그러한 문제를 알아주셨으니까요. 그렇게 제 삶을 개선하게 해주시고 정신상태도 개선하게 해주셨죠.

팟캐스트: 아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감정도 거기에 끼어 있었나요?

션: 네. 관련된 여러 감정이 있었죠. 슬픔, 실망, 분노, 왜 이 가족에게 입양되었지? 라는 감정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어요. 물론 단순한 감정이었죠. 제 어머니는 제가 아는 여성 중에 가장 강한 여성이세요.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저랑 제 여동생을 키워내셨죠. 저랑 제 여동생 둘 다 제대로 된 어른이 됐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입양아로서 세계 어디든 입양될 수 있었는데 라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한때는 왜 이 가족에 입양되었고, 왜 아버지가 저희를 입양했는데 책임을 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그러한 불만을 느끼기도 했어요. 그러한 이유가 이혼하지 않고 가족을 유지할 이유는 아니라는 것을 알죠. 그런 결혼은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요. 하지만 어렸을 때는 그런 생각을 못 했죠.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느낌이네요. 아버지와는 20년간 말도 안 나눠 봤으니까요. 그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저에게 이득이 될 것 같지는 않아요. 어머니나 제 여동생이 다시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서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도 궁금하죠. 그러한 복잡함은 제 삶에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지금의 가족들을 소중히 여기고 싶어요.

션: 제가 앞에 언급했다시피 제 입양 서류에 제 산부인과가 언급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드렸죠. 제 입양 관련 정보를 더 깊숙이 찾아본 결과 입양아들이 동양사회복지회와 일하는 데 겪는 어려움을 알았고, 복지회의 투명성과 협조성 문제에 대해서도 알게 됐죠. 그래서 4년 전에 해외입양인연대와 연락해서 2차 조사를 부탁했죠. 해외에 사는 제가 생각해도 제 서류에는 많은 정보가 있었거든요. 어머니의 본명, 나이, 출신 지역, 산부인과 등의 정보가 있었죠. 그래서 입양인연대와 연락해서 같이 찾기 시작했죠. 아주 협조적이었고 연대에서 산부인과를 찾아냈어요. 하지만 이미 폐업한 뒤였죠. 하지만 그 소유 의사를 찾아냈다고 했죠. 그래서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병원 측에서 개인정보 보호 문제로 정보를 제공할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단서가 있는데도 정보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상당히 답답했죠. 또 제 서류에는 제가 안양 지부에서 입양되었다고 적혀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 안양 지부는 존재하지 않죠. 그래서 제 어머니가 절 찾으려고 해도 찾을 길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막다른 길에 도달했죠. 그 시기에 또 한창 유전자 검사가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23 and me이나 Ancestry.com 같은 사기업 검사들이죠. 그래서 제가 순수 한국인인지 혼혈인지 궁금해서 한번 검사를 해봤어요. 첫 검사가 특이했는데 그 전에는 유전자 자료가 부족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제가 자료를 받았을 때 제가 100% 동아시아계라고 떴거든요.

션: 150불이나 지급했는데. 전에 몰랐던 사실을 알았네- 라는 느낌이죠. 그리고 유전자 관련 정보가 떴는데 사촌일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흥미롭다고 생각했죠. 사촌? 가까운 친척이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연락하니 등록된 사람의 아내와 유전자 정보가 섞여서 아내 쪽이 친척일지도 모른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의 아내와 연락을 했죠. 하지만 답이 없었어요. 여러 번 연락했는데도 답이 없었죠. 그래서 아 관심이 없나 보다. 실망스럽네. 라고 그만뒀죠. 또 다른 막다른 길이었던 거에요. 그리고 그 검사 등록이 1년 정도 가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그 검사기관 측에서 자료를 잘못 확인했다고 언급하면서 그 아내분이 저의 이복 자매이거나 이모일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주 가까운 친척이죠. 그래서 뭘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쪽에서 저한테 이름을 제공해줬고, 링크드인에서 그분의 이름을 찾았어요. 그리고 한 달 정도 그 정보를 가지고 고심했죠. 개인정보 침해인가? 만약에 제가 여러 번 연락했는데도 답이 없었다면 그걸 존중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결국 메시지 하나 보내는 일은 큰 문제가 없겠지 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메시지를 보냈어요. 그리고 그녀가 답을 해줬죠. 남편이 이야기를 해주기는 했는데 아이를 낳고 그러다 보니 바빠서 답을 못했다는 거예요.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 시작했어요. 그쪽도 입양아여서 친부모를 찾을까? 라고 생각했다고 해요. 하지만 그녀의 상황에서 얼마나 어려울지 알고 그만뒀다고 해요. 그녀의 경우 미국으로 입양되었는데 관련 정보가 전혀 없었다고 해요. 입양 관련 자료를 찾아보려고 하니 권한이 없다고 거절당했다고 하고요. 그래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한국에 직접 가서 탐문이었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너무 가능성이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냥 삶을 살아가기로 한 거죠. 그 뒤로 페이스북으로 연락을 나누다가 영상 통화를 하기도 했어요. 꽤 흥미로운 경험이었죠. 저와 비슷한 얼굴 특징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사람에게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어요. 그리고 말의 억양이 달라도 저희가 생각하는 방식과 인식이 비슷했어요. 흥미로웠죠. 지금은 저희 둘 다 바쁘게 살아가고 있고 시간대도 달라서 계속 연락하기에는 힘들지만, 미래에는 계속 이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어요. 이 COVID-19 이전에는 내년 4월쯤에 뉴욕에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지금은 무리죠. 그래도 그러한 혈육이 있다는 사실이 희망적이죠.

팟캐스트: 이복이거나 의붓남매인 건가요?

션: 네. 저보다 3살 연상이니, 고모나 이모일 가능성은 낮죠. 이복이거나 의붓남매일 가능성이 크겠죠. 저희 유전자를 유전학자들에게 직접 분석을 맡기면 어느 부모 쪽인지 확실히 알 수 있겠죠. 하지만 저와 그녀가 동의하는 사실은 저희의 유전적 연결이 저희 친부모를 찾는 데는 도움이 안 될 거라는 사실이이에요. 그저 흥미로운 사실이겠죠. 제가 친부모를 찾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은 친어머니나 친아버지와 의미 있는 인연을 만들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또 다른 사실은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일이었어요. 서로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나서, 비슷한 경험을 했더군요.

팟캐스트: 한국에 있는 가족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가까운 핏줄을 찾을 수 있다니 대단하네요. 저기, 동방사회복지회가 션 씨의 어머니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션 씨에게 넘겨주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션: 제가 하지 않은 일이 있는데…. 서류 확인을 안 했어요. 저한테 넘겨준 서류에 어머니의 본명이 적혀 있어요. 나이, 고향도 적혀 있죠. 제가 원한다면 미래에 그 서류를 볼 수 있겠죠. 고향 마을에 가서 확인할 수도 있고요. 그리고 저도 동의해요. 그 사람들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겠죠. 하지만 더 찾으려면 시간과 금전적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겠죠. 거기에 현재의 COVID-19 사태로 인한 장벽도 있고요. 하지만 미래에 더 확인해 볼 것 같기는 해요. 

팟캐스트: 션. 제가 들은 바로는 이렇게 찾았는데, 발견한 사람이 또다시 션 씨를 실망하게 할까 봐 주저하고 있는 부분도 있으신 것 같은데. 저도 그럴 거예요. 실망하는 일이 두려운 거죠.

션: 네.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특히 연대에 연락해서 2번째 조사를 부탁했을 때는 그랬죠. 처음에 정부 기관과 일했을 때는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연대를 통해서 일했을 때는 좀 더 직접적이었어요. 전 최대한 외교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했죠. 제가 충분히 노력한다면 어머니를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관심도 보여주지 않은 어머니의 삶에 침입해도 되는가? 절 찾고 싶어서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했죠. 만약에 찾았는데 저를 만나고 싶지 않다면, 그 결과가 저를 부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을 거예요. 그때 보던 상담사님과 이 이야기를 자주 나눴어요. 그분은 이렇게 반응하셨죠. “전부 맞는 반응이고 그렇게 마음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션. 하지만 자기 보호 적이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 조언을 듣고 저 자신을 위해서 찾는 일이라고 인정할 수 있었어요. 제 삶에 항상 가지고 있던 간격이고 지금까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더 알고 싶은 간격이었죠.

션: 제가 알 권리가 있는지는 아주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제가 알 수 있는 것이라면 제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두 번째 조사를 의뢰한 거죠.

팟캐스트: 많은 정보를 가지고 계시죠. 어머니 이름, 어머니의 고향도 알고 있고요. 꽤 높을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준비된 뒤에 하셔야겠지만요.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발품 좀 팔아야 할지도 모르고 한국에 가셔야 할지도 모르죠. 큰 책임이 따르는 일이에요.

션: 네. 좀 더 큰 이야기를 하자면, 작년에 처음으로 IKAA 모임에 참여하게 됐어요. 아주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30대에서 40대 사이가 아닌 입양아들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 모임이었죠. 그 경험이 저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탐구하고 입양아 사회에 이바지하고 싶게 했어요. 우연히 그 시기에 호주 TV에서 국제 입양에 대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죠. 그리고 입양아들에게 관점을 맞추려고 했어요. 많은 매체가 입양 부모에게 많은 관심을 두고 이 프로그램도 그런 관점의 에피소드를 방영했지만, 이번에는 변화를 주려고 한 거죠. 제가 그 프로그램에 참여한 7명의 입양아 중 하나였고, 저희 경험을 프로그램에서 이야기하게 됐죠. 이 팟캐스트에서 언급한 비슷한 이야기를 그 프로그램에서도 진행했어요. 그게 TV에서 방영됐고 제 SNS에도 공유했죠. 우선 첫째로 제가 어렸을 때도 그러한 경험을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요. 그랬다면 제가 그렇게 소외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두 번째로 제 프로그램을 보고 저에게 다가온 사람들에게 약간 압도된 느낌이었어요. 많은 사람이 저를 지지해줬죠. 제 가장 친한 친구들, 심지어 제 어머니마저도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고 그러한 문제를 겪고 있는지 몰랐다고 이야기하셨죠. 아주 성취감이 들었어요. 또 그러한 TV 프로그램이나 이 팟캐스트와 같은 매체의 중요성도 깨닫게 해주었죠. 정보 공유의 중요성을 알게 된 거예요. 제가 만약에 어렸을 때 간접적인 정보, 저한테 직접 오지 않고 나중에 제가 직접 찾아볼 수 있는 정보가 있었다면 제가 생각하고 있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아요. 물론 젊은 남성들을 대표해서 하는 말은 아니죠. 그 세대와 공감하고 감정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거든요. 그리고 만약 제가 어렸을 때 제가 살던 마을에 멘토 프로그램 같은 교육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전 거부했을 거예요. 하지만 덜 침해적인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많은 도움이 됐겠죠. 제가 그때 보지 않았다고 해도 나중에 볼 수 있었겠죠. 사람들이 지원해야 하는 제도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를 자주 겪으니까요. 지방 같은 곳에서는 더더욱 그렇죠. 다른 입양아들과 다른 경험을 겪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요즘 제가 큰 흥미를 느낀 분야 중 하나에요. IKAA에서 입양아 다큐멘터리 상영회도 가졌고, 질문과 답변 회도 가졌죠. 60 쌍의 입양 부모가 와서 토론에 참여해 주셨어요. 아주 큰 성취감을 느꼈죠. 제 상황을 지금 보면 몇 년간 제가 그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될 일에 고생했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리고 계속 그 동기를 위해서 이바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요.

팟캐스트: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저도 션 씨처럼 한국에 가기 전에 일본에 먼저 갔었죠. 션 씨라던가 다른 입양아들에게 있어서 일본이 한국보다 좀 더 안전한 3국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적어도 중압감이 덜 한 곳이 될 수도 있다고 보시나요?

션: 네. 당연히 그렇게 볼 수 있다고 봐요. 해외 일반인들은 보통 한국보다는 일본에 대해서 더 잘 안다고 봐요. 물론 그 간격이 좁혀지고 있긴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그렇죠. 초밥, 사무라이, 도쿄 같은 정보를 알지만, 한국은 그런 정보가 없죠. 또 접근성이 달라요. 호주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관광지가 일본, 그 중에서도 도쿄죠. 웃긴 이야기지만 제 현재 직장이 일본 기업이에요. 현재 정규직이 되기 전에도 1년 정도 그들을 위해서 일했죠. 한국과 일본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감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저 같은 경우에도, 완벽하게 한국인도 아니지만, 호주인도 아닌, 둘이 섞인 정체성을 가진 경우에도 그 역사를 알고 나니 일본 기업에서 일해도 되는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아주 이상한 관점이죠. 전 호주인이잖아요. 하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죠. 도요타에서 일하는 한국인과도 수치심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눴죠. 입양아 정체성의 문제라고도 봐요. 항상 생각해 봐야 할 문제죠.

팟캐스트: 션 씨. 앞에서 어렸을 때 많은 상실을 경험하셨다고 했죠. 제대로 생각할 수 있기도 전에 말이죠. 많은 트라우마가 엮여 있을 것 같아요. 그러한 결과로 관계를 맺거나 신뢰를 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셨죠. 지금도 해결하는 데 노력하고 있는가요? 그리고 지금까지 보완하는 데 성공하셨나요?

션: 네. 지난 3년간 그런 변화와 관련해서 큰 발전을 이뤘다고 봐요. 지금까지는 중간 기간의 연애를 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2년을 넘어가는 데 문제가 있었죠. 그 넘어가는 상태에서 문제 중 하나는 2년 정도 같이 있다 보면 이 연애가 진지한지, 가족 관련해서 이야기도 나오고 아이나 결혼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게 되죠. 그러한 상황에서 제 반응이 그렇게 긍정적이지는 않았어요. 전 결혼과 아이에 대해서 상당히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한 관계는 영구적이니까요. 하지만 처음 연애할 때는 그러한 감정을 잘 이해하고 있지 못했고 그러한 일은 제 잘못이죠. 여성의 관점에서, 또 연애의 관점에서 보면 연애가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확인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맞다고 봐요. 저의 20대 중반에는 그러한 진지한 연애를 할 각오가 안 되어 있었고 무서워했죠. 거기에 압도된 느낌도 있었어요. 그래서 제 연애 상대에서 파괴적으로 대응한 것 같아요. 왜 압박하느냐, 왜 그리 빨리 움직이고 싶어서 하느냐- 라는 식으로요. 물론 2년이 관계를 아는데 충분한 시간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제가 이러한 논의에 접근한 방법은 건전하지 않았고 많은 관계를 파괴해버린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발전해 나가면서 그러한 문제를 알게 됐어요. 애착 관계에 대해서도 많이 읽었고 관계에 대해서 이해하는 일이 과거의 제 반응을 이해하게 해줬죠. 제 어린 시절에 대한 이해가 제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됐죠. 전 지금 제 삶에서 최고의 시점에 도달해 있다고 생각해요. 저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제 삶을 좋게 발전시켰어요. 좋은 친구들도 많고, 부정적인 감정도 적고, 현재 직업도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죠. 생존, 경제, 자가 지원 같은 경우에는 제가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션: 연애는 항상 문제였죠. 특히 연애할 때는 준비 안 된 결정을 내려야 하고 숨 막힌다고 불평하면서 연애하지 않을 때는 외로웠죠. 살면서 엄청 멋진 일들을 많이 겪었어요. 특히 작년에 TV에도 나오면서 그렇죠. 하지만 누구와도 그러한 경험을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이 외로웠어요. 그래서 지난 몇년 동안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죠. 지금은 호주계 한국인과 연애를 하고 있어요. 제가 한국인을 찾아다닌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러한 이야기를 나눠 보는 일이 도움이 된다고 봐요. 지금 여자친구의 경우 10살 때 한국을 떠나와서 호주에 이민을 왔거든요. 그래서 입양아들이 가진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죠. 그래서 그녀와 더 깊은 관계를 맺고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 것 같아요. 특히 COVID-19 때문에 서로와의 시간이 늘어나서 이러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도 도움이 됐죠.

팟캐스트: 이러한 인터뷰를 하고 팟캐스트에 오기 위해서 감정적으로 안정되어야 하고 자신을 마주 봐야 하니, 아주 많은 일을 하신 것 같아요. 제가 지금 여쭤봐도 될지는 모르겠고, 너무 이를지도 모르지만,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으실 것 같나요? 아니면 지금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인가요?

션: 네. 이 문제에 대해 상담을 했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죠. 확실히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보긴 해요. 그러한 결과가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는 여부로 나오지 않아도 말이죠. 다른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봐요. 결국, 균형의 문제죠. 저 자신에 대해서 생각을 하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안위를 생각하느냐의 문제죠. 현재는 아버지를 찾아가서 대화해서 얻는 이득이 손해를 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상황을 입양과 가족의 문제에서 보면 흥미롭겠지만 적어도 제 생각으로는 아버지는 이미 새 가족을 가지고 계셔요. 애도 3명이나 있죠. 제9년에서 10년간의 인생에서의 아버지를 확실히 아버지라고 인정했고 결정을 존중해요. 입양아들이 입양 부모들에게 고마워하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요. 하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부모님에게 고마워요. 적어도 9년 동안 전통적 가족과 함께 좋은 삶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제가 가진 가족들에게 더 노력을 쏟고 싶어요.

션: 아 그리고 어른이 된 뒤로 저와 제 여동생은 훨씬 더 가까워졌어요. 우리가 좀 더 나이를 먹고 나서 좀 더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죠. 여동생이 자라면서 평범한 어린애 동생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갔으니까요. 그리고 저보다 9살이나 어린이면서도 어린 두 명의 딸을 둔 엄마이기도 하죠. 그 경험 자체가 저에게 큰 도움이 됐다고 봐요. 무감정하고 차가운 사람이고 아이들을 무서워하지만, 제 조카들에게 느끼는 애정을 느끼니 그러한 감정들이 사라졌어요. 지금까지 저는 이러한 기준이 맞춰지지 않으면 아이를 가질 수 없어- 라는 식으로 아이 가지는 일을 미뤄 왔거든요. 하지만 20대 초반인 제 여동생이 가족들로 보여준 결과는 그러한 기준이 없어도 좋은 가정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었죠. 제 감정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죠. 제가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여동생에게서 배운 게 아주 컸어요. 입양 부모들이 입양아들이 어머니가 될 때 이러한 감정을 겪었을 것 같지만, 제 여동생이 아이를 가졌을 때 어머니가 임신한 적이 없어도 이러한 조언을 했지만 해주지 못해서 고생했고, 신생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둘 다 몰랐고요. 이러한 경험이 가족들을 더 가깝게 엮어준 것 같아요. 지난 주말에 가족들을 방문했어요. 제 조카들의 두 살 생일 기념이자 어머니 71세 생신 기념이었죠. 같이 저녁을 먹었죠. 제 조카들이 강제가 아니라 처음으로 직접 와줬죠. 원래는 좀 시간이 걸리는데 이번에는 션 삼촌- 하면서 저에게 온 다음에 같이 놀 수 있었죠. 아주 기뻤어요. 그리고 저녁을 같이 먹는데 어머니가 71세가 됐구나. 라고 말하고는 부정적인 면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을 보자꾸나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제가 여러 가지 상담을 하고 있고 여러 일을 하고 계신 걸 알고 어머니는 최대한 지지해주려고 하셨죠. 이해하기 어려워하시지만요. 어머니가 항상 사랑해주시고 지원해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어요. 입양아들이 자라면서 부모를 이해할 수 없어서 하는 일이 저는 이해할 수 없었어요. 25세쯤에야 그런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리고 사랑받으면서 자란 것에 감사했고 여러 일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저번에 입양아를 돕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에 대해서 질문받았죠. 입양아들이 지원받아야 할 일은 많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근본적 문제 해결이라고 생각해요. 미혼모들을 잘 지원해 주지 않는 한국 같은 나라의 미혼모들을 돕고, 현재 뿌리 적 문제를 해결하고, 현재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하는 일이죠. 물론 지금은 확실한 답이 없긴 하지만 이러한 미혼모들이 아이를 입양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면 슬프죠.

즌 3, 에피소드 21, 카오미 이

주의: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음

카오미 리 씨 (49세)는 생후 6개월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카오미 씨는 미네소타주 시골에서 인종적으로 고립되어 가족의 외동딸이자 유일한 입양아로 자라면서 미네소타주 다른 아이들과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무를 타고, 눈 요새를 짓고, 성가대에서 노래하고 클라리넷과 배구를 배웠다. 하지만 카오미 씨는 자기 자신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카오미 씨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너무 일찍 끝내 버린 고통스러운 비밀을 가지고 있다. 11살 때 카오미 씨는 성적인 학대를 당했고, 그 학대는 가족의 비밀이 되어 비밀을 숨기고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친부모가 어떤 정보도 남기지 않고 자신을 버려, 찾을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는 점이 또 다른 상처가 되어 마음속에 열 수 없는 금고가 되었다. 카오미 씨는 부모의 학대를 자신의 입양 기관인 한국 홀트아동복지회와 몰리 홀트에게 보고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한다. 복지회의 누구도 사과하거나 고통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고, 그 반응은 실망적이면서도 충격적이었다. 이 시즌 최종 에피소드에서 카오미 씨는 2016년에 처음으로 팟캐스트에 참여해 입양과 학대, 유기에 대한 감정에 대해 인터뷰한 알리시아 순 씨와 같이 이야기를 한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카오미: 제 이름은 카오미 게이츠입니다. 한국 이름은 이소라이고, 미네소타주 세인트 폴에서 살고 있으며, 49세입니다. 

팟캐스트(알리시아): 여기에 질문이 적혀 있는데 그냥 아무 시점에서 진행할까요?

카오미: 전 1970년대에 태어났고, 제가 발견되었을 때 탄생 뒤 11일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서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평택 군청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제가 어떻게 거기에 도착했는지, 누가 발견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11일생일 때 발견되었죠. 사람들이 어떻게 제가 11일생인지 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배운 바로는 이소라는 한국어 이름이고, 70년대에는 흔하지 않은 이름이었다고 하더군요. 제 연령대에 유명 가수 이소라가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나중에 유명해지긴 했지만, 소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30대와 20대에서 더 흔하게 보이죠. 제가 한국에서 한국어를 배울 때 소라라는 이름이 예시로 나오더군요. 한국어 이름이 좀 더 인기를 끌다가 다시 한자 이름으로 돌아간 느낌이 듭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는 한국어 이름이 인기가 없었죠. 어떤 사람이 말해주기를 시대를 고려했을 때 약간 특이한 이름이라고 했어요. 이름 뜻은 조개류를 뜻합니다. 제 친어머니에 대해서 가진 몇 안 되는 실마리이죠. 어머니가 평범하지 않았다는 증거일지도 몰라요. 제 이름을 어머니가 지어줬다면 그렇다고 봅니다. 

카오미: 제가 양육되었던 고아원에 방문하기도 했죠. 대부분의 고아원들이 그렇듯이 이전을 해서 원래 장소에 있지도 않고 더 고아원이 아니라 양로원이더군요. 양로원장이 고아원이 닫기 전의 원장이었습니다. 그분에게 제 이야기와 제 이름을 말해주자, 소라라는 이름은 고아원에서 지어주는 이름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줬어요. 제가 고아원에서 이름을 받았다면 한자 이름을 받았을 겁니다. 미국으로 치면 자기 아이의 이름을 운명이라고 짓는 일과 비슷할지도 모르죠. 잘 모르겠네요. 제 친가족이나 친어머니에 대해서 정보가 전혀 없죠. 많은 입양아가 비슷한 배경 이야기를 받았다는 사실도 압니다. 저에게 가짜라고 해도 배경 이야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기도 하죠. 

카오미: 제 부모님이 대학생이었는지, 둘이 사랑을 했지만, 양가 부모님의 반대로 헤어져야 했는지, 그런 이야기를 알고 싶죠. 전 그런 배경 이야기도 받지 못했습니다. 전 고아원에서 이틀 정도 지내다가 바로 홀트 아동복지회로 넘겨졌다고 하죠. 거기에서 위탁가정에 맡겨졌다고 해요. 서류가 특이한데, 어떤 방면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하지만 다른 방면에 대해서는 정보가 별로 없죠. 이름도 없고 어디에서 지냈는지에 대한 정보도 없습니다. 제 위탁 아버지는 건축계에서 타일 기능사로 일하셨고, 위탁 어머니는 전업주부셨다고 해요. 이상한 상세정보긴 하지만, 이분들 이름도 없었죠. 홀트아동복지회에 부탁해서 위탁 부모님을 찾을 수 있냐고 물었지만, 그때 그 시절은 워낙 혼란스러웠고, 많은 위탁 부모님들이 와서 아이를 돌봐서, 정보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가 고아원/양로원에 돌아가서 관련 자료가 있는지 물어봤어요. 하지만 자료가 전부 처분됐다고 했죠. 너무 탐사를 늦게 시작했고, 왜 제가 이렇게 늦게 자료를 찾기 시작했는지 책망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어쨌든 자료가 전부 처분되었고, 남아 있지 않다고 들었죠. 하지만 창고에서 먼지가 덮인 골판지 상자를 찾아서 꺼내 왔는데, 그 안에 사진이 가득 들어있더군요. 원하면 기념품으로 가지고 가라고 이야기를 했죠. 그걸 보니 고아들에 대해서 얼마나 신경을 쓰지 않았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카오미: 입양아의 이야기가 어떤 이름도 없이 상자 어딘가에 담긴 채로 잊혔죠. 고아들이 어떤 건물 앞에 모여 있는 사진 하나를 찾은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불만족스러운 경험이었죠. 저는 위탁가정에서 4달 정도 지내다가, 제가 5개월에서 6개월 정도 나이를 먹었을 때 미네소타주의 부부에게 입양되었습니다. 제 부모님은 미네소타주 북부에 있는 마을에서 살고 있었는데, 공식적으로 마을이라고 인정받았으니 아마 15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사는 작은 마을에 입양되었죠. 아버지가 루터 교회 목사였고 친자식은 없었어요. 제가 3살 때 그 마을에서 이사를 나왔으니 거기에서의 기억은 없지만, 저에게 있어서 큰 변화가 그 마을에서 일어났습니다. 제 입양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친자식을 낳았죠. 제가 아기일 때 입양되었지만 얼마 있지 않아 어머니가 임신하셨어요. 저와 제 남동생은 18개월 나이 차이가 납니다. 제 동생과 제 나이 차이를 계산해보니 몹시 화가 났죠. 물론 그때는 사람들이 가족계획 같은 개념이 없었고, 모든 아이가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제가 그 시기에 아기로서 필요한 돌봄을 받았는지, 부모님과 애착을 생성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그러지 못했다고 생각하죠. 

카오미: 어머니와 저는 서로 애착 관계를 생성하는데 고생했고, 어머니가 없는 아이 같다고 생각했어요. 전 저 자신을 스스로 키웠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남동생이 제가 도착하고 나서 바로 태어나 남동생을 돌보는 데 신경을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남동생이 더 어렸지만 비슷한 연령대였죠. 어머니가 항상 저에게서 남동생을 지키려고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놀면 서로 싸우기도 하는데, 제가 항상 잘못했고, 항상 벌을 받았어요. 적어도 제 인식 상에서는 그랬죠. 제 어머니와 제 남동생은 깊은 유대 관계가 있어요. 항상 그랬고 지금도 그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유대 관계 문제에 대해서 최근까지 생각하지 않았는데, 저에게 있어서 고통이 되었어요. 전 항상 다른 사람은 사랑을 받지만 저는 사랑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고 그 결과 질투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삶에서 다른 사람들이 더 나은 대접을 받거나, 귀염을 받는 일에 대해서 문제를 가지게 되었죠. 이런 삶의 태도가 저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 문제 해결법 중 하나는 이런 감정과 반응의 뿌리가 어디에서 나오고, 제가 왜 그렇게 반응하는지 알아보는 일입니다. 저에게 남동생 2명이 있고 제 부모님의 친자식이죠. 입양아들이 양부모를 닮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지만, 저의 경우에는 본성과 양육의 싸움에서 본성이 이겼어요. 전 항상 튀는 아이였죠. 제 남동생들은 부모님과 성격과 관심사가 비슷했습니다. 저는 항상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여행하고, 배우고, 모험하는 일을 좋아했죠. 어머니는 정반대였어요. 항상 저에게 왜 세계를 돌아다니려 하는지 물었습니다. 세계에 관한 관심이 없으셨죠. 제가 왜 유학을 가려 하는지, 외국으로 살러 가려 하는지, 왜 미네소타주를 떠나려고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셨습니다. 제가 미네소타주 밖으로 대학교에 가려고 하니 부모님이 반대하셨어요. 제가 너무 멀리 살러 간다고 생각하셨죠.

팟캐스트: 미네소타주 밖으로 대학교에 가려고 한 이유가 카오미 씨의 성격과 관련된 문제였나요? 아니면 가족들과 멀리 떨어지려고 하신 일이었나요?

카오미: 가족들과 떨어지고 싶기도 했지만 저는 매우 독립적인 성격이기도 하죠. 실질적으로 저 자신을 혼자 양육하다 보니 독립적인 면이 주목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 제 어머니와 장벽을 만들어서 미네소타에는 같이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자신을 돌봐야 했으니 적어도 부모님이 저를 대놓고 내버려 두는 곳으로 가는 일이 낫다고 생각했죠. 멀리 떨어져 있으면 적어도 멀리 떨어져 있으니 어머니가 저에게 전화하지 않고, 가깝게 지내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 와서는 과도한 걱정이었다는 생각을 알죠. 현재 어머니와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미네소타주 세인트 폴에서 지내는데도 서로 연락하지 않으니까요. 현재 연락을 하지 않는 이유는 의도적입니다. 어머니와 의도적으로 관계를 멀리하고 저 자신을 치료하고 있죠. 현재 상담도 받고 있는데, 제가 갖은 고통 상당수가 제가 아기일 때 버림받은 고통, 제 첫 위탁 가족과의 이별,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한 일, 부모님과 연관 관계를 맺지 못한 일 등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어요. 생후 6개월의 아기가 주변 환경이 뒤바뀌고, 다른 나라에서, 다른 언어, 다른 냄새, 다른 사람들이 있는 환경에 적응했죠. 현재 6개월 생 아기에게 그러한 환경 변화는 큰 문제가 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아이들의 반응과 감정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안다고 생각하죠. 

카오미: 3살 이후에 또 다른 작은 마을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800명 정도의 사람이 사는 미네소타주 시골 마을이었죠. 제가 유일한 유색인종이었어요. 단순히 유일한 아시아계가 아니라 아예 유일한 유색인종이었습니다. 또 다른 입양아들과 교류하지도 않았고 입양아 캠프도 참여하지 못했어요. 제가 70년대와 80년대에 자라났지만, 입양아 캠프들이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때가 80년대 중반이어서 그 캠프 시기를 놓쳤습니다. 많은 입양아와 비슷하게 입양아 캠프에 참여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한국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일은 나쁘다고 생각했죠. 저 자신에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 특성을 강조하고 비슷한 입양아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관심이 없었죠. 지금 제가 어머니에게 왜 더 한국과 관련된 경험을 시켜주지 않았는지 물으면, 어머니는 제가 가려 하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사실이긴 했지만, 저는 부모가 가진 통찰이 없었죠. 많은 사람이 제 부모님이 그 시기에는 최선의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제 형제들과 차이점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인종을 인식하지 않는 방법이었어요. 현대에는 접근 방식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죠. 특히 사람들의 자아 구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압니다. 다른 부모님들은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죠. 어떤 부모들은 더 많은 접근성을 제공하려고 노력했거나, 백인 위주의 지역에 유색인종 아이를 입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복잡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카오미: 그때 그 시기에 입양 기관들이 부모들에게 해준 조언에 기반을 둔 방식이긴 했지만, 부모님을 완벽하게 용서할 수도 없죠. 제 가족을 포함한 많은 가족에게 해당하는 일이지만, 백인 가족이 한국을 포함한 다른 국가에서 아이를 입양할 때, 아이의 나라에 관해 관심이 없는 일이 많아요. 제 부모님도 한국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물론 관심도가 너무 높아서 아예 한국인처럼 활동하는 백인 부모도 있죠. 과도한 한국에 관한 관심도 입양아들이 한국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게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가족이 전혀 관심이 없는데 한국에 관심을 가지는 일 자체가 힘들죠. 그러한 관점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가족에 최대한 맞아 들어가려고 하죠. 제가 유일하게 아는 가족이 한국에 관해서 관심이 없다고 하니 저도 한국에 감정적인 연결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카오미: 입양아들이 스스로 감정적인 연결이 없다고 하면 부모가 기뻐하는 경우가 많죠. 양부모가 충분하고, 애들이 망가지지 않았다는 증거로 받아들이니까요. 입양아들이 부모를 만족하게 하려고 감정적인 연결이 없다고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이 저에게 중요하지 않아요, 거기에서 태어났지만 제 삶은 잘 풀렸죠. 이런 이야기를 우리 양부모들이 원하죠. 입양아와 양부모 사이에 의견충돌이 생기게 됩니다. 양부모가 거부하는 진실을 숨기면 모두 행복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고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게 됩니다.

팟캐스트: 카오미 씨가 보통 입양아들이 받는 배경 이야기를 받지 않으셨다고 하지만, 그 시기 한국계 입양아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이야기는 우리가 한국에서 구원받았다는 서사입니다. 구원자, 운이 좋은 아이 같은 흔한 이야기이죠. 거기에 카오미 씨의 부모님은 목사였으니 그러한 직책이 그러한 서사에 큰 영향을 끼쳤나요? 그러한 배경은 제 경험에 있어서 한국과의 괴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국에서 구원받았으니 당연히 큰 의미가 없다는 접근 방식이었죠. 그러한 접근 방식이 카오미 씨의 가족에게도 영향을 끼쳤나요? 

카오미: 예. 부모님이 한국을 묘사할 때 후진국으로 묘사하셨죠. 물론 제가 입양될 때는 아직 한국은 전쟁에서 회복 중인 개발도상국이었어요. 우리가 아는 반짝이는 서울의 이미지도 없었습니다. 한국에 가서 서울만 방문한다면 새로운 대도시만 보게 되지만, 한국에서 화려한 도시 개발 자체는 최근에 일어난 일이죠. 아버지가 자주 하던 농담이 있는데 악의가 있는 농담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간접적으로 미국에서 자라서 다행이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하신 셈이에요. 어쨌든 아버지가 항상 하시던 말은 제가 한국에 있었다면 밥과 생선 머리만 먹어야 했다고 하셨죠. 아버지가 부적절한 농담을 하는 사람이었고 농담이었지만, 그런 이야기가 저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미국에서 이렇게 좋은 음식을 먹고 자라는데 한국에서 살았다면 생선 머리를 먹어야 하죠. 누가 생선 머리를 먹으려고 하겠어요? 그런 한국을 후진국으로 묘사하고, 원시적인 곳으로 묘사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항상 감사를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도 문제였어요.

카오미: 아버지가 목사이기 때문에 부모님은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어요. 최근에 어머니에게 저의 종교적인 구원을 위해서 입양했는지 물었습니다. 어머니의 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이었어요. 인구 조절 문제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입양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미국/서양 우월주의적 관점에서 나온 대답이라고 생각하죠.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 백인 국가가 아닌 나라들이 인구 조절도 못 하고 인구가 폭증하고 있다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나라들이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지 못하고 인구 조절도 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어요. 입양해서 나라들을 돕자는 인식이 있습니다. 물론 이게 제 예측이지만 인구 과밀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아이를 입양한다는 관점으로 보였어요. 잘 모르지만, 미국 70년대에는 인구 과잉이 큰 문화적 문제로 인식됐다고 하죠. 부모님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인구 과잉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통해 입양했습니다. 또 제가 내재화한 문제가 있는데, 제가 부모님이 입양하려고 한 아이가 아니었다는 점이에요. 부모님은 한국에서 다른 아이를 입양하려고 했지만, 그 애가 폐렴으로 죽어서 제가 대신 입양되었죠. 그러한 인식이 항상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머니가 죽은 아이의 사진을 보관하셨어요. 항상 제가 대체 입양아나, 대체품이라는 느낌이 들었죠. 거기에 아이가 없는 사람으로서 어머니가 사진에 많은 희망과 꿈을 담았고 그래서 지금까지 그 사진을 보관해 뒀습니다. 어머니가 그 아이를 받지 않고 저를 대신 받았죠. 저는 항상 대체품이었고, 어머니에게 있어서 만족스럽지 않고, 어머니가 원치 않은 아이였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카오미: 어렸을 때 대체품이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자존감 문제가 생겼고 불안했어요. 제 입양아 정체성에 대해서 논의하는데 시간이 걸린 이유는 아버지가 절 성적으로 학대했기 때문이죠. 아버지가 목사였는데도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저에게 있어서 항상 복잡한 문제였어요. 아버지는 마을에서 존경받는 명사였고, 일요일마다 하나님의 말을 설교하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모여서 일요일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야 했죠. 그렇지만 저는 아버지의 어두운 비밀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이 성적 학대를 알리지 말라고 한 적은 없지만, 분위기상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어요. 우리 집에는 3명의 아이가 있었고, 작은 마을이니 모두가 목사 가족인 우리 집에 주목하고 있었죠. 첫 학대를 당했던 때는 제가 11살 때였어요. 제가 뭘 할 수 있는지 몰랐죠. 만약 경찰에 신고했다면 가족이 분열되었을 겁니다. 11살의 아이였던 저는 경찰을 부를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고, 가족을 분열시키고 싶지 않았죠. 어머니는 저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어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조용하게 대응했습니다. 

팟캐스트: 어머니가 알고 계셨나요? 맥락 이해가 어렵네요.

카오미: 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도록 하죠. 어머니가 저를 내버려 두고 남동생과 막냇동생에 대해서 애정을 쏟았어요. 그 빈 자리를 아버지가 대신했고 저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자라날 때 아버지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느꼈어요. 그 관심과 방치가 연관되어 있는지는 모르죠. 아버지가 저에게 애정을 보여서 어머니가 동생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였는지, 아니면 반대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아주 비슷하죠. 그래서 서로 더 이해했는지도 몰라요. 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행복하지 않은 결혼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지적으로 서로 교감할 수 없었고, 저는 왜 부모님이 결혼했는지도 모르죠. 아버지가 더 고등 교육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단순히 고등학교 졸업을 한 뒤 속기사가 되셨지만, 아버지는 대학교에 입학한 뒤, 신학 대학교에 들어가서 목사 안수를 받았죠. 아버지와 저는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지만, 어느 순간에 가까운 관계의 장벽이 무너졌다고 생각해요. 아버지와 낮잠을 자는 일도 어린 여자애에게는 흔한 일이죠. 아버지 무릎에 앉거나 그런 일도 평범하지만, 제 아버지는 그래도 되는 때가 지났어도 제가 계속 그러도록 했어요. 아버지와 저는 친밀한 관계라 노스다코타주에 있는 친척 목장에 놀러 갔을 때도 말을 같이 타기도 했어요. 아버지가 말을 잘 탄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저에게 누우라고 했죠. 평범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곳을 만지기 시작했어요. 이러한 일이 잘못됐고 이상하다고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자각하지 못했던 이유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너무 깊어서 이러한 일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팟캐스트: 아버지가 어른이었으니 더욱 그랬겠군요? 거기에 아버지를 믿었으니까요.

카오미: 네. 그렇죠. 성폭력 생존자나, 아동 성폭력 생존자가 느끼는 유체 이탈된 느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제 몸 밖에서 나와 있다는 생각을 하면 좀 더 버티기 쉬웠어요. 감각을 전부 집중해서 그 일이 일어날 때 몸 밖으로 유체이탈을 하는 방식으로 대응했죠. 그러한 대응이 성인이 되고 나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제 몸과 감정이 서로 맞지 않는 기분이 들죠. 몸과 감정을 서로 연결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해요.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많은 상황에서, 특히 20대에서 30대에 저 자신에 대해서 확신이 없었을 때 애들에게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묻고는 했죠.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했고, 이런 상황이 일어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묻고 했어요.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내가 어떻게 너의 감정을 알 수 있느냐고 반응했죠. 아이들이 레인지가 만지면 뜨겁다는 사실을 알고 본능적으로 하지 않는 반응과 제 감정 반응이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감정적 반응 성장에 있어서 어렸을 때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죠. 저에게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 계속 지속하였고, 학대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과 몸을 분리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생존 방법이긴 했지만, 이 일이 지금까지 저에게 문제를 일으키고 있고 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고, 누가 저에게 나쁜 일을 하거나 부정적으로 대응하면 반응하기 어렵죠.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일 자체가 어렵고, 자연스러운 감정적 대응을 하기도 힘듭니다. 감정적인 반응이 멈춰버려요. 제 감정과 의견을 믿지 않기도 하죠. 

카오미: 아버지의 성추행이 오랫동안 진행되지는 않았어요. 한번은 확실히 일어났었고, 다른 일들이 있었을 수도 있죠. 적어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알았습니다. 어머니에게도 말할 수 없었죠. 제가 어머니에게 말했는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고백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머니도 제가 성추행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추행도 결국 어느 순간에는 멈췄어요. 어머니가 말하기를 아버지가 멈춘 이유가 어머니가 멈추라고 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6학년 이후로 청소년기로 접어들면서 화장을 하고 싶지 않고, 몸을 드러내는 옷을 입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성욕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죠. 성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무성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그런 복장을 하고 다녀도 괜찮았어요. 절 제외하고 1명의 아시아계가 있고, 나머지는 백인인 공립학교였죠. 제가 중학교 1학년에서 2학년에도 또다시 이사했는데, 그 마을에서는 아무도 우리 가족을 몰랐고, 그래서 더 많은 인종 차별을 겪었습니다. 한 남자애가 국(Gook, 아시아계 비하 단어)이라고 저를 부르기도 했고, 자기가 중국어라고 생각하는 말을 하기도 했죠. 괴롭힘도 당했습니다. 다른 곳에 비해서 편하지 않은 학교 환경이었고 저는 소외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때에 다른 반에 입양안지, 중국계인지 모르겠지만 또 다른 아시아계 아이가 전학 왔고 그 애도 소외되었죠. 지금도 그 애에 대해서 생각해요. 그 애가 전학 왔을 때 그 애의 친구가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둘 다 표적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의 집중을 받고 싶지 않았어요. 만약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면 서로 지탱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 그러지 않았죠. 친구가 없어서 학교생활이 힘들었습니다. 

카오미: 제 성적 학대는 어렸을 때 자랐던 마을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렸을 때의 마을에는 절 지지해주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죠. 유치원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같이 자란 친구들이 있었고 서로를 전부 잘 알았어요. 다른 애들처럼 백인 아이같이 행동하면 인종적으로 소외되는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그 아이들이 집단의 일부로 카오미 씨를 받아들이고 익숙해져 있었군요? 흔한 일이죠.

카오미: 그랬죠. 하지만 제 청소년기에는 제 아버지와 관계가 멀어지고 아버지에게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전형적인 반응이지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죠. 청소년기에 자라나면서 성적으로 학대당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팟캐스트: 질문을 해도 괜찮나요? 질문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카오미: 언제든지 질문하고 싶을 때 하세요. 지금 혼자서 불평하고 하는 셈이나 다름없습니다. 

팟캐스트: 아니에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으니 약간 압도됐을 뿐입니다. 몇 가지 질문이 있어요. 제 이야기와 제 자매의 이야기와 비슷한 점도 있는데, 여러 가지가 일어나고 있었네요? 그래서 우선 이사를 하게 된 이유가 이러한 성적 학대와 관련이 있었나요? 가족들이 이런 문제를 자각하고 마을에서 이사를 간 건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로 이사를 나가게 됐나요?

카오미: 제 어머니를 제외하고 아무도 제 아버지가 저를 성적으로 학대했는지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이 정보가 알려질까 무서워서 이사했다던가 그런 느낌은 없었나요?

카오미: 아뇨. 그 성적 학대가 처음으로 일어났던 때가 제가 11살 때였는데,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이사를 하였거든요. 거기에 제가 이런 일을 겪었다고 사람들에게 고백하지도 않았죠. 기억에서 그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학대 자체를 오랫동안 기억하지도 못했습니다. 루터교 목사들은 몇 년마다 다른 마을로 이사를 해야 해요. 우리 가족은 이미 그곳에 오랫동안 있었죠. 

팟캐스트: 부모님이 두려웠나요? 어머니와도 복잡한 관계를 맺고 계시고, 아버지와는 복잡하면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까요. 자기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고 했나요? 아니면 육체의 변화를 숨기려고 한 이유가 부모님이 두려웠기 때문인가요?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없고 드러낼 수 없어서 숨기려고 하셨나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야기만 들으면 힘들고 외로운 삶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카오미: 그 질문들이 전부 정답이라고 생각해요. 저 자신을 성적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자기 성적인 매력을 자각하고, 모험하고 드러내야 할 때 그러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죠. 그러한 매력을 드러내는 일 자체가 위험한 일로 인식되었어요. 그런 성적 변화 자체를 멈추고 싶었죠. 고등학교 때는 쉬웠습니다. 아무도 저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고등학교 때는 마치 지구상에 내려선 외계인 같은 느낌이 들었죠. 누구도 절 무도회에 데려갈 생각도 하지 않았고, 집에 데려가서 여자친구로 소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소외당하고 다른 사람인데 어떻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이라는 감정이었군요?

카오미: 네. 아무도 절 여자친구로 인식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팟캐스트: 카오미 씨가 백인이 아니었으니까요.

카오미: 네. 백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사실 남자애들이 저를 여성으로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고등학교 같은 반에 남자애들이 몇 명 없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저를 매력적으로 보거나, 흥미롭게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죠. 이상한 일입니다. 아버지가 저를 성적으로 건들기는 했지만, 매력적으로 봐서 그랬다고 생각되지는 않아요. 힘이나, 친밀감이나, 울타리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욕망의 대상이 되는 일이 나쁘다고 생각했죠. 생존자처럼 그 마을과 제 가족에게서 떨어져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을에서 나가서 대학교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생존 본능이 감정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좋은 목사의 딸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한번은 가출한 적도 있는데, 그렇게 멀리 가지도 못했고 친구 집에서 지내다가 돌아왔죠. 

카오미: 어머니와 제가 서로 경쟁 관계에 놓인 느낌이 들어서 전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가끔 서로 같이 쇼핑을 하거나 점심을 같이 먹고는 했지만 서로 둘이서 시간을 보낸 때는 적었어요. 항상 남동생들과 같이 어머니와 시간을 보냈지 어머니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 적은 없었죠. 살면서 어머니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고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와 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결과 어머니와의 관계가 끊어졌고, 외롭고 소외된 시간을 보내야 했죠. 그러다가 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23세에 처음으로 사람과 키스했어요. 제가 일본에서 지내고 있을 때의 일이었죠. 아시아에서 지내고 있었고, 그이는 일본인이었습니다. 그 경험이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죠. 저 자신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물론 그러한 느낌이 두렵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팟캐스트: 그때 부모님과 관계가 어땠나요? 물론 아직도 그분들에게 애정을 품고 있을 수도 있죠. 그런 생각을 하는 일 자체가 이상하긴 한데, 부모님에게 지지를 받으셨나요? 관련된 질문인데, 멀리 있는 대학교에 진학했는데 충분한 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셨나요?

카오미: 저 자신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저의 미래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죠. 한 학기를 해외에서 공부할 수 있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홍콩에 갔습니다. 홍콩 방문이 최초 아시아 방문이었죠. 홍콩 경험이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잡지와 간판에 아름다운 아시아계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자라나면서 전혀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죠. 아주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절 매력적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외계인처럼 느껴지지 않고 여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시아계 주류인 국가에서 느꼈던 감정이었죠. 제 눈을 열어주었어요. 입양에 대해서 생각하고, 입양이 긍정적인 일이었나, 부정적인 일이었나 생각했죠. 1990년대에 학생 연구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보조금을 받았습니다. 여름을 연구에 소모했죠. 그때 저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서 탐구하고, 이 팟캐스트를 시작하게 될 기반을 닦았죠. 학부생으로 지내면서 제 입양에 대해서 생각을 했어요. 제 교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부분의 입양아 출신인 사회복지사, 입양 연구가, 입양 비판 학자들이 90년대에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죠. 입양아들이 주축이 되어 연구한 입양 연구가 제가 학부생일 때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어요. 제가 처음 시작했을 때는 관련 연구가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공부한 연구들은 백인 연구가들에 의해 진행된 연구였고, 연구자이기도 했고, 입양에 관심이 있던 백인 부모가 주축이 되었죠. 그러한 연구들 상당수가 특정한 결과를 원했습니다. 인터뷰한 입양아들은 인종과 상관없이 대부분이 아이들이었어요. 백인 부모의 지원을 받는 아이들에게 물으면 당연히 입양이 좋다는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죠. 

팟캐스트: 그런 인터뷰를 통해서 백인 연구자들이 믿고 싶은 사실을 만든 거죠.

카오미: 연구를 하면서 입양아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자기 자신을 입양된 국가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를 했죠. 한국계 입양아면서도 스칸디나비아인, 스웨덴인으로 인식했다고 합니다. 그때는 그렇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저는 저를 노르웨이계나 덴마크계로 인식하지 않고 아시아계로 인식했습니다. 몇몇 입양아들이 자기 자신을 스웨덴인이나 노르웨이인으로 생각해서 특이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죠. 지금 그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다른 답을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러한 인식이 그렇게 특이하지도 않았고, 제 학부생 연구서는 입양 자체는 긍정적이지만, 부모가 더 큰 노력을 해야 한다고 결론을 냈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똑같은 결론에 도달할지는 모르죠. 그때는 입양 긍정파나 부정파 중 하나를 정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그때까지는 성적 학대를 받았다는 자각을 하지 못했을 때기도 했습니다.

카오미: 대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일본에 영어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일본에서 3년간 살았습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살았어요. 3년 살고 난 뒤 돌아보니 일본에서 참 많은 일이 일어났죠. 25살이 되었을 때였고, 과거를 짚어보다가 성적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냈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다시 미국 문화에 적응하면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어요. 아버지와 제 할머니에게 분노하고 있었죠. 할머니도 이 문제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어머니도 알고 있었지만, 할머니에게 분노하는 일이 더 쉬웠습니다. 제 부모님이 아니었으니까요. 제 할머니도 이런 성적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야기하지 않았죠. 저에게 위로, 지지, 보호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어느 시기에도 제 삶에 있던 어른들이 저에게 상담을 권유해주거나, 지원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정신적 지지나, 대화도 해주지 않았군요?

카오미: 네. 아무런 지원도 없었죠. 지금 되돌아보면 어머니가 그 가족에 남아 있던 점에 화가 났다고 생각해요. 전 어머니가 아버지가 딸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그러한 환경에서 딸을 8년 넘게 살게 할 수 있었는지 이해 가지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생존했는지 잘 모르겠죠. 

팟캐스트: 나중에 어머니와 성적 학대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신 것 같은데,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와 카오미 씨가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를 하고 싶나요? 하지만 저는 어머니와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더 알고 싶네요.

카오미: 전 화가 나 있었죠. 남동생들은 이런 이야기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충격을 받았어요. 가족 내부에서 얼마나 비밀을 지키려고 노력했는지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남동생들이 어린아이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전혀 몰랐죠. 지금까지도 남동생들이 이야기하려는 주제가 아닙니다. 2009년에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고, 남동생들은 아버지의 좋은 기억들을 남겨두려고 하죠. 동생들은 제가 아버지의 기억을 망가트리는 일을 원치 않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는 일 자체가 어려웠어요. 제가 아버지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일 자체가 어렵죠. 전 아버지를 사랑하긴 했습니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웠고, 아버지가 절 항상 지지해주셨죠. 제가 뭘 원하거나, 하려고 하거나,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 학자금 대출을 받을 때도 지원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지지해주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저와 너무 달라서 제가 하려고 하는 일에 가치를 보지 못하셨죠. 아버지가 제가 하려는 일에 대해서 가치를 보고 지원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도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복잡해요. 제가 상담을 받을 때, 상담사가 아버지가 성적으로 카오미 씨를 학대하고 약점을 사용해서 욕망을 채웠는데, 어떻게 그를 사랑할 수 있는지 묻죠. 전부 맞는 말이에요. 지금까지도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일 자체가 힘듭니다. 그 이유로 아버지와의 관계가 계속 이어졌죠. 아버지가 저를 성적으로 학대했고, 그 문제에는 화를 냈어요. 아버지 때문에 저에게 남자 친구가 없고, 남성에 대해서 불편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제가 관계를 맺지 못 하는 일에 대한 핑계가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책임이 있다고 느껴요. 하지만 이 관계에는 양면성이 존재하죠. 문제가 있거나, 나라 반대편으로 이주해야 하거나, 다른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준 사람이 아버지였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돕지 않았죠. 하지만 아버지가 저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 사람이기도 했어요. 이 이야기의 교훈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일까요?

팟캐스트: 현실에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는 없죠. 그러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냥 일상을 살아갈 뿐이죠.

카오미: 사람을 신뢰하는 데 큰 문제를 겪었어요. 제가 기자가 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하죠. 많은 기자가 그런 이유로 기자가 되기를 선택합니다. 진실을 찾기 위한 여정과 고통이 이러한 직업을 선택하게 했다고 하죠. 제가 의도적으로 기자를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팟캐스트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하고 지난 몇 년간 팟캐스트가 지속한 이유라고 생각해요. 이 팟캐스트를 진행하기 위해서 시간을 많이 들였습니다. 단순히 인터뷰만이 아니라 다른 일에도 시간을 들였죠.

팟캐스트: 편집이라던가 다른 일에도 시간을 들이셨죠?

카오미: 편집만이 아니라 음악과 다른 일에 시간을 들이고 있죠. 이런 일을 돈이나 명예를 위해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해야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고 있죠. 아주 오랫동안 제 이야기를 못 한 시기를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입양아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제공하고 싶습니다. 입양아들과 같이 앉아서 이야기하다 보면 사람들이 밝히려던 이야기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밝히고는 하죠. 그 이유 중 하나는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경험을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와 같은 가족 문제를 겪지 않았다고 해도 서로의 경험을 이해하는 일이 아주 강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이 팟캐스트를 들으면 입양아와 입양아가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일에 대한 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카오미: 제가 팟캐스트를 계속 진행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한국에서 지내면서 받던 지원금이 끝난 뒤에도 이런 이야기를 공유하는데 가치를 느꼈습니다. 다른 입양아들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었고, 이런 이야기를 미화하고 싶지 않았죠. 진짜 고통, 학대, 입양아들에게 일어난 나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이런 진짜 이야기들을 입양아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 전달되는 뉴스에서는 듣지 못합니다. 진실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물론 입양아 중 일부는 입양에 대해서 특정한 서사를 지키려고 하죠. 그런 사람들은 입양과 관련된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팟캐스트에서는 그런 진실을 숨기려고 하지 않죠. 그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고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숨기고 이제 괜찮으니 괜찮고, 석사 학위도 있고 좋은 일도 있으니 괜찮다고 넘어갈 수는 없어요.

팟캐스트: 그런 접근 방식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카오미 씨가 하는 일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카오미 씨가 두 입양아가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셨죠. 하지만 동시에 특정한 답과 결과를 기대하지 않고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비 입양아들이나 입양 가족과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들은 좋은 결말과 좋은 이야기를 원합니다. 어떤 입양아들은 이런 진실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죠. 모든 입양아가 이러한 이야기에 있어서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으니까요. 제 한국에서의 첫해에 관한 이야기를 입양아들이 별로 들으려고 않는다고 생각했죠. 그러한 이야기를 안전하게 할 수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개인 상담이나 단체 상담을 제외하고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죠. 이러한 다양한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팟캐스트를 운영하시고 있다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카오미 씨가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이유도 아주 명백하죠. 보통 입양아들이 이야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아시니까요. 전 카오미 씨가 하는 일과 카오미 씨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카오미: 감사합니다. 저도 알리시아 씨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카오미: 제가 그러한 방황을 멈추고 입양아의 정체성을 받아들였던 때가 4년에서 5년 전이었습니다. 2015년이 저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해였죠. 그때 저는 이미 40대 중반이 되었던 시점이었어요. 제 직업에 몰두하고 있었고, 자주 이주하면서 제 입양아 정체성이나 입양이나 한국에 대한 감정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 없다가 40대에 들어와서 이 입양아의 정체성을 탐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단순히 40대에 접어든 나이만이 아니라 다양한 문제가 겹쳐서 이러한 자아 찾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이 모든 문제에 있어서 제가 가진 문제와 왜 자꾸 고생하는지 알아보려고 했죠. 길이 한국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본능적으로 문제의 근원이 한국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나중에 해결하겠다고, 중요하지 않다고 무시하다가 나중에 더 무시할 수 없는 단계까지 도달했어요. 많은 사람이 겪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길이 전부 한국으로 이어지고, 길을 걸어갈 준비를 해야 하죠. 그래서 한국에 방문하게 되었어요. 온라인상에 있는 입양아 사회와 인연을 구축하고 한국 입양아 문화에 대해서 모든 정보를 배우려고 할 때는 순진했습니다. 사람들을 찾아서 인연을 맺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했죠. 하지만 동시에 아주 무서운 일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정신적 충격을 받아온 집단이기도 하고, 각자 상담과 지원을 받고 있으며 모두가 조금이나마 문제를 안고 있어요. 하지만 그 문제를 몰랐죠. 문제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카오미: 전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서 입양되었어요. 홀트아동복지회의 사회복지사에게 저에게 일어난 문제에 대해서 편지를 썼죠. 40대에 들어서 제가 성적으로 학대당했다는 이야기를 그 사람들에게 했습니다. 입양 이전에 시험과 정신적 조사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었어요. 물론 그때는 아무런 기준도 없었겠죠. 그렇게 홀트아동복지회에 이메일을 썼는데 놀라지 않았더군요. 하지만 몰리 홀트에게 연락이 닿았죠. 이 홀트아동복지회 창립자인 홀트 부부의 딸이었습니다. 몰리는 이미 노인이 된 상태였고 일산에서 살고 있었죠. 일산은 아직도 장애 고아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제가 몰리 홀트와 연락이 닿은 이유는 제 이야기가 고위층으로 올라가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죠. 홀트아동복지회의 이사회가 이 정보를 알기를 원했지만 대신 몰리 홀트와 연락이 닿았어요. 몰리 홀트의 이메일 주소를 받아서 이메일을 보냈죠. 몰리의 반응은 아주 이상했습니다. 몰리는 제가 기자라는 사실을 보고 그래도 교육은 받았으니 됐지 않느냐, 70년대에 한국에서는 아이들은 마구 죽어 나갔으니 살아있으니 기뻐해야 하고, 교육도 받았으니 좋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했어요. 입양기관에서 보일 반응은 아니라고 생각했죠. 제가 겪은 문제에 대해서 미안해하고 일이 더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좋은 정책이 적용되었다고 안심시켜주거나, 상담을 추천해줄 거라고 생각했죠. 입양기관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니 성적으로 학대당한 일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반응할 줄은 몰랐습니다. 성적으로 학대를 받아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식의 반응이었어요. 

카오미: 그러한 반응을 듣고 입양아 페이스북 그룹에 가서 다른 입양아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리는지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몰리 홀트에게 이메일을 작성해서 비슷한 대답이 나오는지 알려 달라고 부탁했죠. 그렇게 페이스북에 올린 뒤 나온 반응이 저에게 있어서 충격이었습니다. 입양아들의 공간도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몇몇 입양아들은 저를 거짓말쟁이라고 추궁하거나, 홀트 가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다니 안된다고 비난했어요. 또한, 행복한 입양아 서사를 지지하는 입양아들도 있어서, 그러한 기회를 준 사람들을 어떻게 비판할 수 있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모독적인 말을 한 듯이 취급되었고, 상처를 입었어요.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결국 페이스북 그룹 관리자가 글을 삭제해야 했죠.

팟캐스트: 양부모에게 당한 학대 관련해서 거짓말을 했다고 추궁했나요? 아니면 몰리 홀트의 반응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다고 추궁했나요?

카오미: 몰리 홀트의 반응과 관련해서 거짓말을 한다는 추궁을 받았고, 입양 절차와 정책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 취급을 받았어요. 사실 그러한 문제에 있어서 가장 좋은 대응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제 정신적 충격에 대응하려고 하는 일이었습니다. 입양 기관과 제 문제와 관련해서 상담하고 싶어서 찾아간 사람에게 받은 대응을 이해하려고 한 일이었죠. 정의가 없는 듯이 느껴졌어요. 입양 절차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죠.

팟캐스트: 카오미 씨의 반응을 이해해요. 저도 그러한 반응을 많이 보고 느꼈으니까요. 제 친부모님도 어떤 부정적인 일이 일어났어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어요. 제 친가족도 제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였죠. 하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접근이 맞을지도 모르죠. 한국 가족의 관점에서, 입양으로 이득을 본 사람들 처지에서는 맞는 관점일지도 몰라요.

카오미: 그러한 반응 때문에 다시 입양아들과의 교류를 끊고 숨어들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할 수 없고, 입양아 사회와 움직일 때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이야기를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죠. 

팟캐스트: 학대의 이야기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법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입양아 대부분은 그러한 폭탄을 가지고 있으므로 공정하지는 않지만,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이야기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골라내야 하죠. 생존자의 정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일 중 하나입니다.

카오미: 그렇죠. 그때는 확실히 순진했어요. 지금은 페이스북 그룹에 들어가서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일 자체가 문제라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그때는 제가 느꼈던 본능적인 감정에 대한 지지나 이해가 필요했죠. 하지만 원했던 이해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집에서 임종시설 치료를 받아야 했어요. 전립선암을 앓으면서 죽어가고 계셨죠. 큰 고통을 겪어서 모르핀을 맞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집에 갈 때마다 아버지가 사과하시고, 저에게 용서를 구하고 계셨어요. 그 사과를 들을 때마다 복잡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학대는 항상 제가 들고 다니던 목발과 같았고 아직 아버지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죠. 아버지에게 항상 할 이야기가 있었어요. 날 학대하지 않았는지 몰아붙일 수 있었죠. 아버지가 죽어가던 동안, 아버지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래서 더 분노했어요. 아버지가 원한다고 저에게 용서를 요구할 수 있는지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차갑게 나오는 일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죠. 10년 후에 마음이 바뀌어서 용서할 수 있었는데 용서를 못 했다고 하면 후회할지도 몰랐습니다.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죠. 결국, 아버지를 용서했어요. 그래도 잊지 못할 겁니다. 

카오미: 제 아버지의 사과가 텅 빈 사과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유가 아버지가 스스로에 대해 변명을 했기 때문이죠. 자기 어머니가 그리 좋게 대우해주지 않았고,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했어요. 어머니로 인해서 고통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과를 하는데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어른이자 부모로서 행동을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 점이 큰 문제였죠. 제가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아프게 한 뒤에 제가 성적으로 학대를 받아서 그랬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좀 과장된 비유이긴 했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팟캐스트: 그게 차이점이죠? 카오미 씨는 그러한 태도로 살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카오미 씨는 남을 상처 입히려고 하지 않죠. 카오미 씨의 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고 끝까지 그러한 결론을 믿었죠. 하지만 카오미 씨는 그러지 않았죠. 그런 결론보다 훨씬 나은 일을 하셨고, 자신을 위한 훌륭한 탐구를 떠나서 더 나은 결론을 냈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자신이 고통받았다고 남이 고통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되지 않을 겁니다. 항상 과거의 특정 사건을 우리가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핑계로 대지 않죠. 우리는 똑같은 일을 반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죄송해요. 약간 제 할 말만 했네요.

카오미: 아뇨. 정확하게 말해주셨어요.

팟캐스트: 저도 이해해요. 제 인생의 문제이기도 했으니까요. 카오미 씨가 결론을 낼 수 있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안타깝네요. 아버지와 제대로 된 담판을 짓지 못한 일도 문제죠. 그 대화에서 아버지가 주권을 잡고 있었다니 더 안타깝죠. 하지만 아버지와 담판을 지은 결론에 만족하시나요?

카오미: 알리시아가 말했지만, 더 나은 결과를 낼 수도 있었겠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결론을 내지는 않았으니까요. 아버지가 암으로 죽어가는 도중이었으니 시간이 없었습니다. 저도 약간 비관적으로 보는 관점이 있는데, 만약에 아버지가 암으로 죽어가지 않았다면 용서를 구했을까요? 우리가 서로 거리가 멀어진 상태는 아니었지만 동시에 친밀한 상태도 아니었죠. 아버지에게서 오랫동안 멀리 거리를 둬왔으니까요. 또 다른 복잡한 문제는 제가 어머니에게 가진 분노였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가진 양면성 때문에 부모님에게 잘못을 묻는 일 자체가 어렵죠. 부모님이 밥을 먹여주고, 양육해줬고, 어머니만의 방식으로 절 사랑한다는 사실도 알아요. 하지만 그 방식이 제 남동생들에 대한 사랑과는 달랐죠. 특히 제 바로 밑 남동생에 대한 사랑과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 둘은 친밀해요. 어머니는 자신이 남동생을 더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한 적이 없죠. 그 사실도 문제였습니다. 최근까지는 그 사실은 어쩔 수 없고, 제가 입양된 가족은 그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했어요. 상담을 받으면서 어머니가 준 차별 자체가 아주 원시적인 상처이고, 그 상처가 치료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래서 아예 어머니와의 연락을 끊어야 했어요. 

팟캐스트: 제 다음 질문과도 연관되어 있네요.

카오미: 어머니에게 이 반응은 제가 11살 때 해야 했을 일이지만, 11살 때는 힘도 능력도 없어서 불가능했다고 설명했죠. 하지만 저에게 일어났던 일이 문제였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고 거리를 둬야 했습니다. 제가 고통받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그 학대를 용인한 사람들과 거리를 둬야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학대를 막아 주기를 원했던 일 자체가 과도한 요구였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어머니가 절 사랑해줬다면 저에게 안전한 장소를 제공해줄 수 있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어머니는 절 돕지 않았어요. 어머니도 그 사실을 알고 제가 연락을 끊기 전에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버지가 저를 실망하게 했던 문제에 집중하고 제 문제 대부분이 아버지와 성적 학대와 관련이 있었어요.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무시해서 많은 문제가 생겼다고 보죠. 전 항상 사람들에게 용인되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어머니가 주지 않은 사랑을 추구하고 있어요. 그러한 사랑 추구가 제 친구 관계에서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카오미: 친구에게 요구하기는 너무 큰 감정이니까요. 친구들을 사귀는 일은 좋고, 저도 친한 친구들이 있지만, 모든 사람이 그러한 감정적인 지지를 원치 않고 많은 사람이 그러한 지지를 할 수 있는 단계에 놓여 있지도 않죠. 전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한 감정적인 지지를 원하지만 자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깊은 감정적인 연결을 원하는 이유는 아버지에게서 사람들 사이에 경계를 두는 건강한 방식을 배우지 못해서 그렇죠. 제가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 중 하나이고, 그 문제 해결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 긍정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려고 하고 있고, 치유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확실히 치유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자신을 보호하고 사랑하기 위한 일을 하지 않으면 치료할 수 없죠. 아이일 때 제 주변의 사람들은 절 지켜주거나 사랑해주지 않았어요. 지금 저는 저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을 배워 나가고 있죠. 그 단계 중 하나는 잠시일지도 모르고, 평생일지도 모르지만,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일입니다. 어머니가 80살이 넘으셨고,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죠. 제가 치료를 완료하고 어머니와 화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질문이에요. 

팟캐스트: 카오미 씨가 사람들의 경계를 찾기 위한 탐색을 하고 있다는 점이 자랑스럽네요. 많은 입양아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탐구하는 일은 중요한 문제죠.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이러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는 알지만, 입양아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입양아들은 자기 자신의 고통스러운 일과 문제를 무시하고 인식하지 않는 데 익숙해져 있지만, 결국 어떤 방향으로는 드러나기 마련이죠. 카오미 씨가 말했지만, 사람들 간의 관계, 사랑, 기대에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저와 제 자매도 이 문제로 자주 이야기를 나누지만, 직접 이 문제를 언급하고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죠.

카오미: 그렇죠.

팟캐스트: 카오미 씨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서 안타깝지만, 동시에 카오미 씨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 무척이나 기뻐요.

카오미: 현재 제가 좋은 단계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이미 더 강한 기분이 들고, 현재 자주 사람들이 하기 좋아하는 이야기가 자기애와 자기관리지만,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죠. 입양아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자랄 때 받지 못했던 사랑을 주거나,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일을 저도 지속하고 배우고 싶어요. 지금 그러한 일을 하고, 행복을 위해서 건강한 성장 단계를 밟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모든 이야기를 지금까지 공유하지 못했던 이유라고 생각하고요. 감정과 문제를 해결하는 중이고, 한국에서 1년 동안 지내고 온 경험도 치유를 위한 절차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 자체가 맞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저 자신을 다시 고아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상황이 아주 무서운 상황이죠. 현재 남동생 중 하나와 남동생의 가족과는 아직 친밀하게 지내고 있지만, 좋은 어머니가 아니었다고 해도 양어머니와의 관계를 끊는 일 자체가 무서운 일입니다. 제 곁에 어떤 사람이 남아 있는지 생각하게 되죠. 현재 저는 연애 관계를 맺고 있지 않고, 아이들도 없고, 아내나 남편도 없습니다. 여전히 제가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문제예요. 쉽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절 사랑하기 위한 단계 중 하나라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제가 카오미 씨의 경험 자체, 분노, 이야기를 전부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제 성적 학대와 제 여동생의 성적 학대를 알고 있으니 그러한 접근 방식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저도 가족도, 애인도 없는 독거 상황이지만 저 자신을 돌보려고 생각 중이고 저도 문제 있는 가족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했거든요. 자기 자신을 믿고, 자신이 하려는 일이 맞는다고 생각해야 해요. 그게 우리 상황에 있어서 큰 문제 중 하나죠. 누구도 우리의 선택이 맞았다고 하지 않고, 몰리 홀트가 우리를 위해서 상황을 고쳐주지도 않고, 우리 같이 망가진 사람이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우리 자기 자신만이 우리의 이야기를 알고 우리 자기 자신만이 관리할 수 있죠.

카오미: 고마워요. 알리시아 씨

팟캐스트: 절 믿고 인터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오미 씨.

카오미: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네요.

알리시아: 그렇네요.

시즌 3, 에파소드 20: 심재현

심재현 씨(38세)는 한국에서 입양되어 미네소타 가족의 고명딸이자, 막내딸, 그리고 입양아 가족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재현 씨의 삶에는 다양한 입양아들과의 교류가 있었고 재현 씨의 가족은 재현 씨의 한국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특이한 절차를 걸쳤다. 그러한 부모님과 깊은 관계가 재현 씨의 정신적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재현 씨는 친가족을 만난 뒤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재현: 제 이름은 심재현입니다. 38세이고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남부에서 거주하고 있죠. 제가 선호하는 대명사는 They/Them과 She/Her이에요. 저 자신을 호칭하는 명칭을 여러 번 바꿔 오기도 했습니다. 저 자신을 젠더퀴어(남성/여성 두 구분법을 넘어선 성정체성을 통합해 부르는 정체성)라고 인지한 적도 있었고, 퀴어(성소수자 전체를 포함하는 단어, 정체성을 묘사할 때 사용되면 성 소수자 정체성 전체에 포함되는 정체성을 뜻하는 단어이다.)라고 인식한 적도 있어요. 현재 제 성적 정체성인 논 바이너리(남성/여성에 묶여 있지 않은 성 정체성)가 가장 편안하게 느껴지는 정체성이죠. 어렸을 때 사람들이 선머슴 같다고 그랬습니다. 항상 여성적 정체성이나 남성적 정체성에 대해서 특별한 관련성을 느끼지 않았고, 육체에 관련된 정체성을 느끼지 않았어요. 사실 현재 이름은 몇 년 전에 바꾼 이름이죠. 현재 이름은 약간 남성적인 느낌이 드는 이름이에요.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재현이라는 이름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의 이름입니다. 재연이라는 이름이 여성적 이름이고, 친부모님이 저에게 지어줬던 이름이었죠. 재현이라는 이름은 서류에 잘못 기재된 이름이었습니다. 제가 논 바이너리이기 때문에 한국 이름을 사용하기로 했을 때 잘못 기재된 이름인 재현을 쓰기로 했죠. 성별에 규정되지 않는 느낌을 부여해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인들만 알 수 있는 비밀 표시이기도 해요.

팟캐스트: 아주 멋있네요. 다른 사람들이 그 이름에 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나요?

재현: 한국인 성 소수자들을 포함한 한국인 몇 명이 제 이름에 관해서 이야기했죠. 제가 스스로 이름을 정했는지, 주어진 이름이었는지, 찾은 친척에게서 따온 이름이었는지 묻고는 했어요. 사람들이 친아버지 이름이나 형제, 아니면 찾아낸 다른 친척들 이름을 따왔는지 궁금해했죠. 부모님이 무학력이었기 때문에 사회복지사가 대신 서류를 작성해줬다고 추정을 하는데, 서류를 작성하다가 연에 선이 두 개가 그어져서 현이 되었고 그게 서류에 남은 겁니다.

팟캐스트: 논 바이너리나 그런 성 소수자 담론이 최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언제부터 재현 씨 스스로가 단순한 선머슴처럼 느껴지지 않았나요?

재현: 선머슴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적이 없어요. 전 오빠 3명 밑에서 자랐죠. 3명 다 양부모님의 친자식입니다. 막내라서 오빠들이 하던 일을 전부 따라 하고 싶었어요. 오빠들이 남자애들이니, 70~80년대 남자애들과 교류하면서 자랐고, 저도 그런 교류를 따라 하고 싶었죠. 동시에 여자아이의 활동도 병행했습니다. 12년간 춤도 췄고, 제 삶에 있어서 큰 부분을 차지했죠. 포인트 슈즈(춤을 추는데 필요한 신발)도 신고, 튀튀를 입기 위해서 어린 시절 내내 노력했어요. 하지만 춤을 추고 있지 않을 때는 오빠들과 밖에서 놀고, 더러워지고, 자전거도 타고, 오빠들과 같이 우리 동네 여자애들이 하지 않는 일을 했습니다.

팟캐스트: 어디에서 성장하셨죠?

재현: 뉴 호프에서 자라났습니다. 미니애폴리스 북서부에 있는 교외 지역이죠. 두 부모님과 3명의 오빠가 있는 백인 중산층 가족에서 자라났어요. 아버지가 아직도 같은 집에서 여자 친구와 같지 지내고 계시죠.

팟캐스트: 언제부터 한국 정체성을 자각하고 연결성을 구축하게 되셨죠?

재현: 한국 정체성을 거부했던 때가 기억나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이 팟캐스트에서 증언한 내용과 다른 입양아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전 운이 좋은 편이었죠. 제 부모님은 사회복지 계열에서 일하는 교육자이셨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이를 입양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계셨죠. 물론 시대의 한계로 인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종적 인식은 가지고 있지 못하셨지만, 아이들에게 있어서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제 정체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저는 한국인이고,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오빠들과 다른 방법으로 가족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부모님이 항상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하고 싶었다고 이야기를 해줬고, 입양에 대한 서사를 부모님이 이해하고 관련된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또한, 한국에 대한 연결성을 항상 유지해주려고 노력하셨어요. 거기에 제가 항상 그 한국과 관련된 활동을 할지에 대해서 선택하게 해줬죠.

팟캐스트: 부모님이 재현 씨가 가족이 되는 절차에 대해서 인식이 있었다는 이야기의 뜻이 어떤 뜻인가요? 인종적인 인식이 없었다고 해도 부모님이 어떤 말과 일을 하셨죠?

재현: 전 생후 6개월 때 입양되었습니다. 입양아들은 입양아의 삶은 입양아가 입양 가족에 도착할 때부터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이전의 삶은 지워지죠. 입양아들은 입양되기 전부터 삶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아요. 우리가 다른 가족에 입양된 이유는 우리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저의 입양되기 이전의 삶을 무시하지 않았어요. 비록 6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었고, 제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했죠. 다른 삶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곳에서 왔으며, 다른 가족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어요. 이러한 이야기는 다른 입양아들은 자주 듣지 못하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입양아들은 입양된 나라에 도착한 날을 축하한다고 해요. 저는 미국에 도착한 날을 알긴 알지만, 그날을 기념한 적은 없죠.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중요한 날은 아닙니다. 제 부모님이 제가 비행기를 타고 허공에서 튀어나오지 않았고, 이미 역사가 있는 사람이었음을 존중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입양아 캠프에 참여하려고 하셨나요? 아니면 오빠들이 하지 않으니 가고 싶지 않으려고 했나요?

재현: 네. 입양아 캠프에 몇 년 동안 계속 참여했고, 어떤 친구를 캠프에서 계속 만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이디라는 친구였는데, 캠프에서만 만나는 친구였죠. 그래서 그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캠프에 가는 일이 즐거웠어요. 캠프 자체는 평범했습니다. 다른 한국 입양아들과 같이 지낼 수 있는 일은 즐거웠지만, 교육자 어머니 밑에서 다른 입양 가족들과 살았기 때문에 살면서 수많은 입양아를 만나서 친구가 되었고, 그중에는 많은 한국계 입양아 친구들이 있었죠. 제 동네에도 두 명의 한국계 입양아 여자애들이 있었습니다. 제 이웃이었고, 저를 여동생이나 다름없이 취급했어요. 그랬기 때문에 1명은 절 무시했고 다른 1명은 절 괴롭혔습니다. 그렇게 제 부모님이 보낸 한국계 관련 행사를 제외하고도 이렇게 많은 한국계와의 접촉이 있었어요. 

팟캐스트: 매끄럽게 캠프와 집 생활을 오고 갈 수 있었겠네요? 한주만 한국인이었다가 다시 백인 사회에 포함되거나 그런 일은 없었겠네요.

재현: 약간 문제가 있긴 했습니다. 제가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저만 한국 문화에 관심이 있었죠. 우리 집에는 한국 나무 인형도 있었고, 아버지는 아직도 행복이라는 단어가 새겨진 짚으로 만들어진 한국 장식품도 가지고 계십니다. 한국에서 수입한 도자기도 있었어요. 하지만 오빠들이 한국에 대해서 배우거나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문화는 혼자 탐구하고 저만의 방식으로 찾아내야 했죠. 과거에 돌아가서 부모님에게 절 키우는 법에 대해 조언할 수 있다면 저 혼자 한국 문화에 대해서 접근하게 하는 방식을 바꾸라고 조언할 겁니다. 좀 더 매끄럽게 한국인의 정체성과 제 현실의 정체성을 연결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죠.

팟캐스트: 네. 백인 가족이 유색인종 아이를 입양하거나 한국 아이를 입양해도 백인 가족은 변하지 않는다고 많은 사회학적, 입양 관련 연구가 입증했죠. 백인 가족이 유색인종 아이를 입양해도 다문화 가정으로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백인 가족 구성원들이 유색인종 아이들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았죠.

재현: 운이 좋게도 제가 한국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어요. 그리고 저랑 나이가 가깝고 친한 오빠가 한국에 몇 주 동안 방문해서 제 친언니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주 기묘한 경험이었죠. 오빠는 제 이야기에 대해서 알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제 친가족과 가진 복잡한 관계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와서 한국에 와서 저의 전혀 다른 면모를 볼 수 있게 되었죠.

팟캐스트: 오빠가 한국에서의 경험을 하고 나서 관계가 변화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재현: 어른이 되고 나서 서로의 관계가 바뀌긴 했지만 그건 힘의 변화가 아니라 서로가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인식했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재현 씨의 논 바이너리 정체성을 언제부터 자각하게 되었나요? 아니면 항상 어느 정도 인식하고 계셨나요?

재현: 몇 년 전에 저 스스로 논 바이너리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트랜스 문화와 트랜스 정체성에 관한 공부를 해도 동감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비록 논 바이너리 자체가 트랜스젠더 정체성 밑에 들어가긴 해도 저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트랜스젠더의 사고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트랜스젠더나 논바아너리 정체성과 관련되어 사람들이 겪는 문제 중 상당수를 저는 겪지 않았죠. 제가 신체 이형 문제를 겪기는 하지만 제 삶에 너무 큰 부정적 영향을 끼쳐서 의학적 도움을 받아야 하거나 관련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의 문제는 겪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런 문제에 관련해서 제가 스스로 이성애자가 아니라고 인식하는 데 시간을 쓰고 싶지 않기도 하죠. 전 트랜스젠더가 아니에요. 하지만 전 이성애자도 아니고 제 정확한 정체성을 모릅니다.

팟캐스트: 고등학교에 다닐 때, 평범한 교외 고등학교에 다니셨죠?

재현: 네.

팟캐스트: 고등학교 때 안전한 장소를 찾아서 교류할 수 있었나요?

재현: 네. 중학교 때부터 친구들이 있었죠. 남아메리카에서 입양된 입양아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 여동생도 남아메리카 입양아였습니다. 그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처음에는 몰랐지만, 우리 모두 성 소수자였어요. 거기에 대부분이 유색인종이었죠. 무의식적으로 고등학교 때 성 소수자 유색인종 집단을 구성했던 셈입니다. 나중에 공식적으로 GSA(Gay-Straight Alliance, LGBTQ+ 학생들과 그 학생들을 지지해주는 이성애자 학생들이 회원이 되는 미국 학생 단체, 1998년에 시작됨)로 변했죠. LGBTQ+에, 입양아에, 유색인종인 친구들이 있었고 우리가 같이 정체성을 탐구할 수 있었습니다. 제 친구들은 어렸을 때 성적 학대를 당하기도 했는데 관련해서 우리의 정체성과 성인이 되어가면서 그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같이 의논하기도 했어요. 우리가 그 나이에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모르는 정보를 공유하기도 했죠. 서로의 모든 약점을 공유했고, 같이 정보를 찾고 탐구했어요.

팟캐스트: 대단하네요.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청소년, 중학교 때 관련 논의를 바로 시작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있어서 성 소수자 정체성과 입양아 정체성을 찾아냈으니까요. 

재현: 네. 제가 운이 아주 좋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다니던 중학교도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죠. 중학교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중학교를 5학년에서 중학교 2학년까지 다녔데, 친구들과 함께 이상한 일을 할 수 있었어요.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이성애자가 아니라는 자각과 이상한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인식도 할 수 있었죠.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경험을 못 하는 경우가 많으니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 부모님은 사람들에게 개방적인 태도를 유지하시죠. 제가 중학교 2학년이나 3학년에 아버지에게 이야기하기 어려워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제 친구 중 하나가 부모님에게 자기 성정체성을 고백하려고 했고, 제 아버지가 친구 어머니의 직장 동료라서 아버지에게 먼저 알리려고 했어요. 아버지에게 말을 한순간 아버지가 “아 그 친구 봤을 때부터 알았다.” 이렇게 답하셨죠. 아 그래요? 이라고 제가 답하자 아버지는 “너도 알다시피 나도 게이 친구들이 많지. 그 애를 12살 때 처음 봤을 때부터 게이인 줄 알았다.” 이렇게 답하셨어요.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가족에서 자라나서 다행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영화나 배우 중에 우러러본 사람이 있었나요?

재현: 제가 어렸을 때 록키 호러 픽쳐쇼(Rocky Horror Picture Show)를 좋아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그 영화를 주제로 발표를 진행하기도 했죠. 제가 그 영화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제가 논 바이너리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계기였다고 생각해요. 그 영화에서 나오는 변화와 퀴어함이 좋았습니다. 그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데 두려움이 없었고, 그런 캐릭터들을 제가 우러러봤습니다. 제가 록키 호러 픽쳐 쇼 관련 발표를 했을 때 다른 애들은 향, 전자 기타, 마릴린 먼로, 카누에 대해서 발표를 했죠.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에 대해 발표를 했어요. 제가 중학교 때 했던 활동 중에 가장 중요하게 느껴지는 활동입니다.

팟캐스트: 자신이 외부인이라는 상태를 확실히 받아들이고 인정하셨군요? 

재현: 그렇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제 가족은 항상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무언가를 하거나 이야기를 하라고 가르쳤어요. 항상 앞에 나서서 의견을 표시하는 사람이 되었고, 가족과 제가 항상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제 정체성을 받아들일 수 있었죠. 저에게는 성 소수자 아시아계 친구들이 있고, 줌을 통해서 같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성 소수자들의 교류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그런 교류를 하고 있을 때 친구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죠. 보통 어떤 교류 집단을 정할 때면 성 소수자 집단을 선택하거나 유색인종 집단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다른 친구들은 둘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둘 다 교류할 수 있다고 충고를 해줬어요. 그 친구가 다른 집단들을 조사해서 또 다른 유색인종 성 소수자 집단을 만들어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친구가 직접 만들어야 하니 복잡한 문제죠. 다행히 저와 제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런 유색인종 성 소수자 집단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집단이 다른 친구에게 유색인종이자 성 소수자가 될 수 있다고 충고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듣고 있는 청취자들에게도 하고 싶은 충고인데, 살면서 어떤 특성을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반대를 물리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든 특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주변 사람들이 그러한 특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청취자 여러분의 자유로운 삶에 있어서 해가 된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훌륭한 말이네요. 한국계 입양아 사회에는 성 소수자를 위한 공간이 없다고 느끼신 일도 있나요?

재현: 한국계 입양아 사회에서는 그러한 공간이 없죠. 성 소수자를 위한 공간은 한국계 입양아 사회와는 아무래도 좀 더 다른 상황에서 필요로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국계 입양아를 하나로 묶고 한국계 입양아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는 우리의 흥미나 정치관과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고, 일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죠. 입양아 사회에서 그러한 점이 제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문제가 됩니다. 다른 입양아들보다 좀 더 좌파적이고 주류적 관점을 비판하기 어려울 때도 있으니까요. 입양아 사회에서 성 소수자를 받아주는 공간을 찾는 일 자체는 쉽습니다. 2020년이니 많은 사람이 성 소수자가 주변에 많이 존재하고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고, 큰 문제가 되지 않죠. 한국계 입양아 사회에 동성애 혐오나 성 소수자 적대감을 느끼지 않았어요. 제가 입양아 사회에서 드러내기를 주저하는 성향은 정치적 성향입니다. 입양 제도에 대해서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고, 국제 입양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고 있고, 현 정부 제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에요. 미국에서 이민자들이 정부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일 자체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죠. 미국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식으로 반응이 나옵니다. 하지만 입양아는 강제적으로 이민자가 된 셈이니 우리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사항이죠. 심지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일 자체마저도 평범한 이민자들과는 다릅니다. 고국에서의 반응도 다르죠. 그래서 입양아 사회에서 긴 대화를 나누는 일이 고생이에요. 입양아 사회 자체가 부모 백인들에게 영향을 받아서 백인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입양아들이 백인 가족을 바꾸게 만드는 일이, 백인 친구가 백인 가족들을 바꾸게 하는 일보다 어렵죠. 대화 자체가 어려운 문제예요. 거기에 더해서 저도 이 문제에서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도 제 가족과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해요. 가족과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일 자체가 어렵죠. 제 가족 일부와는 대화를 나누지 않고, 왜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동시에 입양아들은 제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니 제가 못하더라도 더 나아지기를 원하죠. 위선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요.

팟캐스트: 다른 입양아들과 관련해서 입양아들은 자연스러운 동질감을 느끼게 마련인데 다른 입양아들이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는 일을 알면 더 실망하게 되죠. 가장 비슷하다고 느꼈던 사람마저 동의하지 않는 셈이니까요.

재현: 그렇죠. 사람들이 다인종 간 관계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일 자체가 흥미로워요. 단순히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의 팟캐스트만이 아니라 다른 팟캐스트에서도 비슷한 주제를 다뤘죠. 저는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나, 유색인종 성 소수자와 주로 사귀었습니다. 유색인종 남성이나 백인 성 소수자와 사귀는데, 문제를 겪고 있었어요. 교차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일상적인 문제에 엮이면 인식 자체가 사라졌죠. 문제 자체를 다루기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단순히 백인 남성을 상대한다면 우리가 서로 다른 시점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하기가 쉬웠습니다. 유색인종 성 소수자를 상대할 때는 서로의 교차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기 쉬웠어요. 아예 교차성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거나, 교차성을 완벽히 이해하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더 쉬웠습니다. 중간에서 어느 정도의 이해만 하는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일보다는 더 쉬웠죠

팟캐스트: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이네요.

재현: 네. 그러한 상황이 현재 제가 놓여 있는 상황이고, 그러한 상황에 대해서 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면모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할 수 있죠. 

팟캐스트: 재현 씨의 연인은 주로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었나요?

재현: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물론 현재 연인은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죠.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최대한 관점을 열어서 다양한 사람들과 연애를 하고 있어요. 몇몇 경우에는 제가 연애하지 않으려고 했던 상대와 연애를 하게 됐죠. 예를 들면 과거에는 저는 교차성에 대해서 충분한 이해도를 가지지 못한 사람과는 연애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즈음에는 유색인종 이성애자 연인과 젠더가 인종 문제처럼 큰 문제인지에 대해서 논쟁을 했어요. 저는 그렇다고 말했고, 제 연인은 그렇지 않다고 답했죠. 젠더가 인종만큼이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이성애자이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고 반응했어요. 그때는 확실히 우리 둘이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죠. 그러한 싸움은 이러한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백인 이성애자 남성과의 논쟁보다 더 큰 상처를 입혔죠. 백인 이성애자 남성의 경우에는 단순히 처음부터 시작하자, 구글로 배우자. 이런 이야기로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제 연애 상대를 넓혀서 다양한 문제를 겪고 있고, 저에게 있어서 어떤 일이 가장 괜찮을지 고민하고 있기도 하죠. 

팟캐스트: 앞에 말했지만, 입양아 사회보다 유색인종 성 소수자 사회에 더 편안함을 느끼신다고 하셨죠. 물론 두 사회에 전부 맞지는 않지만, 현재는 유색인종 성 소수자 사회가 좀 더 편안하신 거죠?

재현: 네. 많은 입양아가 한국인 입양아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 설명 안 해도 되는 일이 많아서 편하다고 이야기를 하죠. 제가 유색인종 성 소수자들과 시간을 보내면 18가지 문제를 설명 안 해도 사람들이 이해를 해주기 때문에 아주 멋있고 편해요. 우리 모두 비슷한 지점에서 시작할 수 있으니 편합니다. 이렇게 서로가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과 교류하게 되면 교류에서 좀 더 기쁨을 느낄 수 있고, 더 많은 공통점을 찾게 되면, 친우 관계가 더 깊어지죠. 그러니 새롭게 진입하는 사회에 그러한 요소가 이미 존재한다면 사람과의 관계를 더 빠르게 구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말이나 힘든 일을 겪을 때 그러한 좋은 관계를 맺었기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기 마련이죠. 그러한 상황에서 사람들과 논의를 할 수 있는 일 자체가 더 좋게 느껴졌습니다.

팟캐스트: 재현 씨와 제가 둘 다 미네소타주 트윈 시티(미니애폴리스-세인트 폴 메갈로폴리스 지역을 부르는 말, 강을 놓고 두 도시가 붙어서 하나의 생활 구역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지역에 살고 있지요. 이 지역의 아시아계 성 소수자 사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잘 조직되어 있나요, 아니면 점조직으로 분할되어 있나요?

재현: 점조직으로 분할되어 있다고 생각하죠. 물론 남부 미니애폴리스 지역에는 강한 아시아계 성 소수자 사회가 구축되어 있습니다. 지역에 사는 친구 중 6명 정도가 유색인종 성 소수자고 이 사회의 구성원이죠. 자연스럽게 서로를 찾아내게 되었어요. 미니애폴리스에서 성 소수자 가족 저녁 행사가 한 달에 한 번 개최되고는 했는데, 돌아가면서 서로 요리를 가지고 모이는 집 파티였습니다. 그 행사를 주도한 사람들이 전부 아시아계였죠. 물론 의도적은 아니었어요. 그걸 제외하고도 몇 개의 아시아계 성 소수자 집단이 있어서 꽤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네소타주에 존재하는 아시아계 사회에 막 진입하기 했어요. 2014년 말에 미니애폴리스로 다시 돌아왔죠. 작년부터 아시아계 사회에 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들이었으니 성 소수자들을 찾는 일 자체는 쉬웠죠. 다른 사회에도 스스로 자신의 성소수성을 인정하고 열린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서 서로를 찾는 일이 쉬웠어요. 입양아 사회에서도 그렇게 열린 태도를 보이는 성 소수자들이 늘어나게 될 예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고등학교 이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재현: 고등학교 이후에 어떤 생활을 했느냐고요…. 미네소타주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PSEO를 했어요. PSEO의 뜻은 고등학교 이후 진학 프로그램이라는 뜻이 있는데, 고등학교에서 대학교 학점을 딸 수 프로그램이죠.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교에서 학점을 따기 시작했어요. 학생 대부분은 이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큰 대학교에 진학하지만 전 반대로 백인 위주의 작은 대학교로 들어갔습니다. 미네소타주 모어헤드로 이주해서 거기에서 공부하기 시작했죠. 거기로 간 이유는 좋은 중국-일본어 학과가 있었기 때문이고, 고등학교에서 배우기 시작한 일본어-중국어를 계속 공부하고 싶었어요. 거기에 더 부모님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모어헤드로 독립했죠.

팟캐스트: 중국어와 일본어를 동시에 공부하셨나요? 

재현: 일본어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배우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중국어, 그중 북경어를 배우기 시작했죠. 계속 그렇게 공부를 계속했고, 대학교 전공도 일본어/중국어 복수 전공이었습니다. 동북아의 세 언어를 배울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죠. 어렸을 때부터 한국어를 가끔 배웠거든요. 언어를 배우면서 인식한 사실은 세 언어의 교차적 영향과 변화였습니다. 중국 본토에서는 한자 간체자를 쓰지만, 대만에서는 정체자를 쓰죠. 한국과 일본에 한자가 언제 전래하였는지에 대해서 간체자인지, 아니면 정체자인지 바뀌는 경우가 많아요. 한국은 정체자를 쓰는 경우가 많고, 일본은 간체자를 쓰는 경우가 많지만, 정체자도 많이 씁니다. 전부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예요. 제 동거인이 대학교때 언어학을 전공해서 서로 언어학에 대해서 논의하고도 합니다. 아주 재밌죠. 

재현: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을 때 한국 여자애와 같은 반이 되었어요. 그걸 들은 어머니는 한국 가족과 친해져야 한다고 마음먹고 그 애의 어머니와 친한 친구가 되었죠. 어머니가 한국 가족의 미국 적응 도우미가 되었어요. 어머니가 한국 가족과 친해진 이유는 제가 한국 문화를 접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죠. 특히 어머니가 제공할 수 없는 한국 문화를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한국 할머니와 교류가 있었죠. 할머니가 저에게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주시기도 하고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셨고, 제가 이해 못 하지만 한국어로 항상 말을 걸기도 했어요. 마음과 영혼에 깊이 영향을 끼친 교류를 할 수 있었죠. 나이 먹고 나서 한국을 공부할 때 좀 더 깊숙한 영향을 끼쳤고, 실수했을 때 더 실망하기도 했어요. 제가 왜 이런 단순한 단어를 모르는지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어나 일본어를 배울 때 느끼지 않았던 감정이었어요. 배운 적이 없으니 단어를 모르는 일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재현: 살면서 다양한 국가에서 살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팟캐스트에서 말할 주제라고 생각해요. 대학교 때 일본에서 1년 정도 살았고, 한국에서 성인이 된 뒤 2년간 거주했고, 영국에서 1년 정도 살았고, 태국에서도 몇 년 살았죠. 여러 지역에서 아시아인으로서 사는 경험이 있죠. 지역마다 확실히 다른 경험입니다. 사람들이 교류하는 방식이 다르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방식도 다르죠. 카오미 씨가 한국에서 이런 경험을 하셨는지 모르지만, 꽤 흔한 경험이라고 들었어요. 사람들과 같이 영어로 말하다 보면 왜 영어를 하느냐고 한국 사람들이 적대적으로 나온다고 하죠. 일본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그런 반응을 받으면 무시했어요. 하지만 한국에서 그런 반응을 겪으니 감정적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제가 예측하지 못했던 반응을 하게 됐죠. 제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감정적인 문제가 있었거나, 적어도 한국에서 살면서 해결해야 하는 감정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한국 사람들이 영어로 이야기를 했다고 시비를 걸어왔다고요?

재현: 네. 그렇죠. 영어로 말했다고 시비를 걸어오고는 했습니다. 2008년도에서 2010년까지 서울에서 살았어요. 서울에서 미국인, 한국계 입양아, 한국인들로 구성된 아시아인 집단과 같이 영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특히 백인이나 흑인이 없으면 나이 많은 노인들이 저희에게 잔소리하거나 때리고는 했습니다. 왜 예의 없게 영어를 사용하느냐, 한국 문화를 버릴 셈이냐 그렇게 잔소리를 했지요. 그럼 우리 중 1명이 한국어로 아니 우리는 사실 외국인이에요, 그래서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다고 설명을 해야 했죠. 일본에서도 그런 반응을 보기도 했습니다. 제가 중국인이나 한국인이라고 인식을 하고 저에게 그런 반응을 했죠. 한국인이었으니 반은 맞은 셈이었어요. 제가 일본에서 2002년에서 2003년까지 살 때 제가 살던 지역에서 한국인과 중국인에 대한 반응은 미국인들이 남미 출신 히스패닉들을 대하는 반응과 비슷했습니다. 

재현: 중국인이나 한국인이 일본에 와서 일본인들의 직업을 빼앗고, 저임금 노동자이니 그렇게 좋게 대우해주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만연했고, 그런 인식하고 저를 대했죠.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면, 특히 미국식 영어를 사용하면 사람들이 저를 대우하는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미국인이라고 밝히는 순간 확실히 대접이 바뀌었어요. 하지만 다른 한국인이나 재일교포들과 같이 일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서로 소통하고 있으면 나이 많은 일본인들이 왜 일본어를 쓰지 않느냐- 그렇게 잔소리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제가 일본어를 많이 쓰지 않은 이유가 그런 사람들 때문이었거든요. 물론 한국에서 그런 반응을 보인 한국 사람들이 잘못하기도 했지만, 한국에서도 제가 한국어를 많이 쓰지 않은 이유는 한국 사회에도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일본에서는 어디에서 지내고 계셨죠?

재현: 마쿠하리라는 지역에서 지냈습니다. 치바현에 있지만 도쿄도 맞닿아 있고, 도쿄만에 접한 지역이었죠. 도쿄에 있는 매립지역과 가까운 곳에 제 학교가 있었어요. 

팟캐스트: 그때도 중성적인 외모를 하고 계셨나요?

재현: 사실 지금도 중성적인 외모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육체 모습 자체가 전통적으로 여성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죠. 수영도 해서 많은 사람이 수영복 모습을 본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상당 기간은 장발하고 다녔어요. 18살 때 삭발을 하고 다닌 적도 있지만, 장발한 아시아계 사람을 보면 많은 사람이 여성스럽다고 하죠. 그래서 사람들이 가진 인식과 여성성을 밀어내려고 더 노력해야 했지만, 동시에 성별에 있어서 평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뛰어넘으려고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항상 남성 대명사를 쓰고 여성 대명사를 쓴 적이 없었죠.

팟캐스트: 일본에서 젊은 사람들이 자주 그런다고 하더군요.

재현: 네. 일본에서도 매우 흔해진 상황입니다. 제가 일본에서 살 때 여자인 친구들이 그런 남성 대명사를 쓰는 일 자체가 멋있다고 했어요. 물론 저는 이게 멋 부리는 문제가 아니라 여성 대명사를 쓰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죠. 친구들은 사람들이 평범하게 그러니 그래도 괜찮다고 이야기했어요. 일본 친구들이 보통 하지 않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바보 취급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줬습니다.

팟캐스트: 외국에서 거주할 때 사람들에게 성소수자적 정체성이 드러났는지 궁금하네요.

재현: 많은 나라에서는 성소수자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그 이유는 국가에서 살 때 집중하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저 자신에 집중하지 않고 있었고, 주로 무언가를 배우거나, 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대학교 때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서 일본에 갔죠. 일본에서 한 일 모두가 일본어를 배우려고 한 일이었어요. 한국에 갔던 이유는 양어머니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서 갔었습니다. 성 소수자 사회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어요. 영국에서 살았을 때는 백인 이성애자 남성과 결혼한 상태였죠. 제가 영국으로 이사한 이유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살 때는 일만 했어요. 전남편이 학교에 다니기 위한 자금을 대야 했기 때문이죠. 태국에서 살 때는 미얀마에서 넘어온 로힝야 난민들을 돕는 일을 했기 때문에 성 소수자 사회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어요.

팟캐스트: 왜 양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서 한국에 가셨죠?

재현: 항상 한국에 가고 싶었죠. 오래전부터 한국에 꼭 방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대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 트윈 시티 지역으로 이사를 와서 지냈습니다. 여기에서 살면서 항상 언제 한국에 가지? 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4단계 유방암 진단을 받았어요. 어머니는 이미 제가 어렸을 때 유방암에 걸렸다가 나은 적이 있으므로 놀라지는 않았지만 슬펐습니다. 어머니가 암에서 회복한 지 10주년을 축하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갈비뼈에 이상한 고통을 느껴서 병원에 방문했더니 암이 골반, 폐, 뇌까지 퍼졌다고 하더군요. 꽤 짧은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어머니의 연령대 때문에 공격적인 치료방법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죠. 어머니 곁에서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서 원하지 않는 일을 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트윈 시티 지역에서 몇달간 지냈어요. 일하다가 구글링을 하게 됐고,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다른 한국 입양아의 블로그를 찾았고, 그의 경험을 보게 되었죠. 그곳에서 필요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가서 정신적으로 붕괴할지, 문제가 있을지, 힘들지, 아니면 한국 사회에 들어가는 일이 어려운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어요. 블로그 주인과 연락을 해서 서로 교류를 했고, 3주 뒤에 어머니의 생일에 맞춰서 한국으로 출발했죠. 제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미네소타 주에서는 제 자신을 탐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팟캐스트: 양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한국에 가셨군요?

재현: 네. 양어머니가 사망하신 뒤 4달 뒤에 한국으로 출발했죠.

팟캐스트: 양어머니를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어머님이 재현 씨가 한국에 가기를 원했다고 생각해요.

재현: 네. 어머니는 그런 문제에 있어서 대단한 분이셨죠. 물론 미국 중서부에서 자란 백인 여성이었고, 따라서 세계관에 한계가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 모두 세계관에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절 잘 대해 주셨어요. 어머니는 절 입양하셨을 때 아주 잘 돌봐 주셨죠. 어머니가 필요로 하는 일보다 저를 위해 주셨습니다. 제가 후회하는 일이기도 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의 생일에 맞춰서 한국에 가기로 한 이유는 어머니가 항상 함께 한국에 방문하려고 하셨기 때문이죠.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고국 방문 프로그램을 같이할지 물었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권유였죠. 물론 어머니와 아버지가 저에게 한국 관련된 일을 하자고 하면 항상 권유였습니다. 이런 일을 해볼까? 이걸 해보자? 하고 싶으면 같이 하자. 이런 식이었어요. 양어머니가 내가 여권도 있겠다 같이 고국 방문을 하지 않겠냐? 이라고 권유를 하셨죠. 관련 정보를 확인하기 시작하셨고, 고국 방문을 한 다른 사람과도 이야기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너랑 꼭 하고 싶구나. 너랑 네 아버지랑 같이 한국에 가보고 싶구나. 이라고 하셨죠. 하지만 어머니에게 처음 한국 방문할 때는 혼자 방문하고 싶어요. 이라고 대답했죠. 어머니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제가 거부를 해도 아주 느긋한 반응이셨죠. 다음 날에 우리 마음에 상처를 입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저에게 이야기를 해줬어요. 혼자 가서 한국을 탐구해야 한다면 제 마음을 존중해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고국 방문 프로그램에도 참여하지 않았어요. 제가 한국에 방문하고 싶은 방법이 아니었죠. 부모님이 필요한 시간을 주셨고, 그렇게 저만의 특이한 방식으로 그 문제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재현: 이미 언급했지만 많은 입양아와 같이 성장했죠. 단순히 입양아 아이들과 같이 자랐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어른이 된 입양아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 부모님은 다른 입양된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었죠. 입양된 친구들이 입양된 아이에게 그런 일을 하면 미움받을 수 있다고 조언해줬습니다. 제 삶에 저와 비슷한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부모님 연령대의 조언자들이 있었죠. 제 부모님이 잘 들어주지 않거나, 어려운 주제가 있으면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어른이 있었어요.

팟캐스트: 아주 대단하네요. 한국에서의 2년 동안의 경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아주 대단한 시간을 보내셨겠네요?

재현: 네. 그랬죠. 서울에서 평범하게 영어 선생으로 일했습니다. 지하상가에서 싼 드레스를 잔뜩 구매하기도 했고, 한국 음식을 잔뜩 먹기도 했고, 클럽들도 방문했고, 영국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 사람과 동거하게 되었어요. 한국에서 흔한 일입니다.

팟캐스트: 한국에서 1년 동안 살아보면서 느꼈던 점은 한국에서 연애하려고 하는 서구 남성들 대부분이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 여성을 원했다고 생각했는데, 재현 씨도 비슷한 느낌을 받으셨나요?

재현: 웃기게도 제가 결혼한 남성, 좋은 사람이기도 하니 그 사람의 이름을 쓰겠어요. 알렉스였죠. 알렉스가 친구들과 한국인과 데이트를 할지에 대한 내기를 했다고 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걸 듣고 아니 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냐고 놀랐어요. 알렉스는 그 말에 알지만, 적어도 네가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이 아니지 않으냐고 했죠. 그 말에 동의하긴 했지만 그런 내기를 하고 저를 그런 내기에 포함하는 일은 문제라고 언급했습니다. 확실히 한국에서 그런 태도를 보인 서양 출신 남자들을 만났죠. 외국인과 연애하려고 하는 한국인들도 많이 만났지만, 외국인 같은 외모를 가진 외국인과 연애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적었어요. 연애 방식과 정반대의 느낌이었죠. 전 외모는 상관이 없고 정치적으로 맞는 사람을 원하는데, 그 사람들은 정치적 관점이나 성격은 상관없고 외모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팟캐스트: 외면이 상관없고 내면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한국에서는 많은 곳에서 외면이 내면보다 중요한 경우가 많죠. 

재현: 네. 한국에서는 확실히 외면이 중요하죠.

팟캐스트: 그래서 한국에서 외국인들도 많이 만나셨나요?

재현: 네 그랬죠. 대부분 시간을 다른 외국인들과 시간을 보냈어요. CDI 학원에서 일하면서 다른 외국인 강사들과 친하게 지냈죠. 제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90명의 사람과 함께 오리엔테이션을 들었어요. 그중 10명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죠. 학원 내부에서 친구들이 있었고, 그리고 제 이웃에 특이한 노인분과 친해졌습니다. 제 친구가 피자 가게에서 만난 노인이었는데, 아 백인이네. 내 애들도 영어 하는데 친해지지 않겠나? 이런 식으로 다가오셔서 서로 친하게 지내게 됐죠. 그분의 자식들과 친하게 지내게 됐습니다. 대학생이었고, 아직도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제 외할머니가 그 지역에서 살고 지냈어요.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이야기인데, 이 팟캐스트에서는 이야기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재현: 전 갑작스럽게 한국에 가기로 결정을 내렸고, F-4 비자 덕분에 서류 처리가 빠르게 진행되었죠. 제가 한국에 가볼까? 생각한 뒤 1달 만에 한국에 오게 되었어요. 한국에 왔을 때는 이미 오래전에 제 친가족과 연락이 닿은 뒤였죠. 제 언니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제가 언니에게 한국을 방문한다는 연락을 했고, 언니는 저에게 핸드폰 번호를 보내줬죠. 한국에 도착한 뒤 핸드폰을 개통하고 제가 지내는 곳의 지하철역을 언니에게 보내줬어요. 그러자 여동생이 자기 자란 곳이고, 외할머니가 지내는 동네라고 이야기해줬습니다. 제가 지내게 된 아파트가 언니가 자란 곳에서 6블록 떨어진 곳이었죠.

팟캐스트: 서울이 엄청난 대도시인데 그런 우연이라니 대단하네요.

재현: 거기에 제가 지내게 된 아파트 구조도 언니가 자랄 때 쓰던 아파트 구조와 똑같았고, 할머니가 지내고 있던 아파트와 똑같았습니다.

팟캐스트: 친가족들이 왜 재현 씨가 입양되었는지 이야기해줬나요?

재현: 네. 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친부모님은 결혼한 상태였고 이미 아이가 둘이 있었습니다. 두 명의 언니가 있어요. 맏언니는 3살 연상이고, 둘째 언니는 1살 연상이죠. 너무 가난해서 3번째 아이를 키울 역량이 없었습니다. 아니 사실 언니들을 키울 역량도 없었어요. 제가 태어나고 나서 바로 고아원에 맡겨졌기 때문에 제 생일을 알고 있죠. 심지어 제 서류에는 제 출생 시간도 적혀 있어요. 어머니가 절 그렇게 빠르게 고아원에 맡겼습니다. 제 서류에는 아버지를 알 수 없으며, 미혼모의 자식이라고 가짜 정보가 적혀졌죠. 그렇게 정보를 적어서 해외 입양이 되도록 유도했어요. 언니들은 제가 태어났는지 모르고 자라났습니다. 제가 10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잘나가던 노래방을 김포에 소유하고 계셨는데, 그 땅이 수용되어서 대규모의 보상금을 받았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그 보상금을 새 사업에 투자하지 않고 보상금을 가지고 어머니와 언니들을 남기고 잠적했죠. 이미 언니들은 부모님이 일할 수 있도록 외가가 키우고 있었습니다. 제가 17살일 때 건강 관련 조사를 하기로 마음먹었죠. 가슴에 양성종양이 있었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서 조사를 진행했어요. 제 양어머니도 유방암 생존자였으니 제 종양에 대해서 걱정을 하셨습니다. 제가 건강 관련 조사를 진행했을 때 한국에서는 친어머니가 친언니에게 제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했어요. 언니는 어머니가 임신했던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기였으니까요. 그래서 그쪽에서 입양 기록을 개방했고, 그 뒤 제가 건강 관련 조사를 시작했죠.

팟캐스트: 만약에 어머니와 언니가 정보를 개방하지 않았다면 친가족을 찾지 못했을지도 모르네요?

재현: 네. 만약에 기록이 개방되지 않았다면 많은 입양아가 겪는 우리 담당이 아닙니다. 이쪽으로 가보세요. 이라는 고난을 겪어야 했을지도 모르죠. 언니와 외할아버지가 기록을 개방하도록 설득했어요. 그래서 미국에서 관련 서류를 요구하는 연락을 보내자, 기록이 개방되었기 때문에 입양 기관에서 “아 서류도 보내 드릴 수 있고, 정보가 개방되어서 친가족과 연락할 수 있는데 연락하겠어요?”라고 이야기를 해서 바로 친가족과 연락이 닿았죠.

팟캐스트: 17살에 친가족을 찾으셨군요? 

재현: 네.

팟캐스트: 바로 연락을 하셨나요? 아니면 기다리셨나요? 

재현: 아주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이 안 나요. 처음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을 때는 언니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언니 이름은 심주연이에요. 맏언니 이름은 심자연입니다. 그리고 제 이름은 원래대로라면 심재연이 되어야 했죠. 하지만 뭐 이미 말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주연 언니가 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친구의 어머니가 우리 가족을 대신해서 주연 언니와 직접 만났어요. 

팟캐스트: 한국에서 말이죠?

재현: 네. 제 한국 친구 어머니가 한국에 돌아가서 가족을 만나고 있었는데 저희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직접 너희 언니와 만나서 외모도 보고, 뭔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해주겠다!”라고 하셨고, 지하철역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그리고 친구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딱히 이야기해볼 이유도 없이 외모를 보니 제 언니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주연 언니와 제가 가족 중에 가장 닮았기 때문이죠. 그 뒤로 주연 언니와 제가 계속 교류를 했어요. 어느 날 자연 언니가 집에 와서 학교 선생이라 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 주연 언니와 제가 주고받던 편지를 발견했죠. 문제는 주연 언니와 친어머니가 자연 언니에게 저에게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 내부에서 문제가 일어났어요. 추석을 친가족과 같이 보낼 때 자연 언니는 저에게 말도 걸지 않았습니다. 저와의 관계를 구축할 가능성을 잃어서인지, 아니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를 어떻게 대할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런 복잡한 감정이 가족 중 저에게 집중되어 있죠. 절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감정적 대응을 하기 쉬울 겁니다. 하지만 자연 언니가 장녀이기 때문에 가족과 교류하는 데 문제가 생기기도 해요. 친어머니와 처음으로 연락이 닿아서 한국에 방문해서 만나려고 할 때, 어머니가 절 만나는 일을 거부했죠. 자연 언니가 저를 만나는 일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저와 관련해서 문제가 있었고, 그러한 감정적 부채 때문에 가족이 할 수 있는 일과 교류할 방법이 제한되었어요. 

팟캐스트: 자연 씨가 재현 씨 때문에 아버지가 야반도주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하시나요? 

재현: 잘 몰라요. 너무 다양한 가능성이 있어서 뭐라고 할 수가 없죠. 다른 형제자매와 만난 입양아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대단한 점이 있죠. 형제자매들을 보고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해서 고려할 수 있어요. 좋은 삶을 살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나쁜 삶을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둘 다 장단점이 있다고 보죠. 과거에는 친부모님에 대해서 상상할 때 아주 성공한 삶을 살고 있어서 가족에 다시 환영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제 상황을 놓고 비교할 수 있는 언니들이 있어서 좀 더 현실적인 관점으로 제 상황을 판단할 수 있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또한, 언니들에게 있어서도 제가 삶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를 상상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봐요. 언니들도 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른이 되어서 갑자기 알게 됐으니 어렵겠죠. 평생 고민했는데도 알 수가 없었으니 이해가 갑니다. 

팟캐스트: 맞는 말이죠. 결국에는 친어머니를 만나셨죠?

재현: 네.

팟캐스트: 그 경험은 어떠셨나요?

재현: 그 시기에는 라이브저널(블로그 사이트)을 애용하고 있었어요. 제가 일본에서 살고 있었고,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친가족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한국에 방문해서 돌아다녔어요. 먹을 수 있는 한국 음식을 전부 먹어봤죠. 한국에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는 일본을 떠날 때였어요. 일본을 기차를 통해서 여행한 다음에 부산으로 페리를 타고 갔고,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갔죠. 그 여행을 하면서 주연 언니를 만날 예정을 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연 언니만 만나게 될 예정이었죠. 어머니가 주 6일제로 일하셨기 때문에 휴가를 낼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연 언니를 처음 만나고 난 뒤에 어머니를 만날 계획을 짜고 있었죠. 동방사회복지회를 통해서 입양되었는데 그 단체에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고 있었어요. 게스트하우스에서 있다가 사무실이 있는 1층에 내려왔을 때 아주 귀여운 케이크가 있었습니다. 여러 캐릭터로 장식된 케이크였는데, 거기 있던 직원이 “재현 씨 어머니가 가지고 온 케이크에요.”라고 말했죠. 그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를 만날 예정이 없었기 때문에 깜짝 놀랐어요. 거기에 준비되어 있던 작은 방에 들어가니 거기 어머니가 계셨죠. 친어머니를 갑작스럽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그렇군요.

재현: 아주 이상했어요. 그리고 절반 정도밖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죠. 저랑 혈연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예상을 했지만, 절 낳아준 사람을 만나게 될지는 몰랐습니다. 

팟캐스트: 주연 언니와는 관계가 더 낫나요?

재현: 주연 언니와 가장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긴 하지만, 그 관계도 상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소통과 교류에 있어서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죠. 사람들과 계속 연락을 나누는 일을 잘 못 해요. 제 입양 가족과도 마찬가지이고, 친구와도 마찬가지죠. 제가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제 단점입니다. 제 한국 가족과도 마찬가지죠. 가끔 페이스북을 통해서 연락하고 있어요.

팟캐스트: 사람들이 가족과의 재회에 관해서 물어보면 어떤 요소에 관해서 물어보나요? 물론 물어볼 요소가 많기는 하지만, 재회하더라도 친가족과 관계를 구축하는 일은 어렵고, 상실과 죄책감 위에 장기간의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어렵지 않나요?

재현: 제가 이 팟캐스트 관련으로 아주 좋다고 생각하는 면 중 하나는 입양아의 관점에서 입양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죠. 대부분 입양아는 그러한 관점을 들을 수 없는 문화에서 자라났어요. 우리 세대와 그 이전의 입양아들은 입양 부모들이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자라났고, 그런 이야기들은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입양 부모님의 관점에서 나온 이야기 때문에 친가족과의 재회에 대해서 뭔가 미화된 관점이 생기게 되었어요. 친가족과 재회한 다른 입양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각자 다른 경험을 했죠. 한국에 살면서 친가족을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아버지가 계속 저녁을 같이 먹자고 찾아오는데 더 버틸 수가 없다는 이야기, 어머니와 만났는데 어머니에게 이런저런 일을 보고해야 하고 강제로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제 가족은 그렇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그렇게 깊은 관계를 구축하고 싶었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죠. 아마 그럴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관계를 보고 저런 관계가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자유를 가지고 부모님의 관리를 받지 않는 일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죠. 부모님이 저를 입양시켰을 때 그럴 기회를 잃었으니 부모 노릇을 할 권리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친구들과 제가 직접 실시간으로 겪었던 일이고, 우리 이야기가 더 널리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조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친부모를 찾으면 현실적인 기대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면 좋겠죠. 친가족도 사람들이고, 또 다른 삶을 살아왔으니, 기대에 맞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러한 일이 괜찮다고 알려주고 싶어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관계를 맺지 않는다고 해도 그 관계는 소중하죠. 6살 때 꿈꿨던 완벽한 관계는 아니지만, 긍정적이고 좋은 관계입니다.

팟캐스트: 정확한 이야기에요. 저는 제 친가족을 찾지 못했죠. 찾고 있기는 하지만 힘들고 복잡한 여정입니다. 

재현: 그렇죠. 입양아로서는 한국에서의 일을 주동적으로 주도할 기회가 아주 적어요. 단순히 대중과의 교류만이 아니라 가족과 소통을 하고 정보를 주고받는 데에 있어서 주도권이 거의 없습니다. 국제 입양이 사람들을 국가와 문화로부터 사람들을 찢어 놓죠. 언어 사용 능력과 언어에 대한 접근성 자체가 떨어지는 일이 큰 비극입니다. 입양아들에게 있어서 모국의 언어를 접촉할 방법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죠. 어머니와 주연 언니를 만났을 때의 경험 자체가 매우 특이했습니다. 제가 라이브저널로 블로그 글을 작성했는데, 양어머니가 그걸 보고 인쇄해서 저에게 다시 읽어주고는 했어요. 제가 아직도 뭐라고 썼는지 기억하고 있죠. 양어머니는 아주 좋아하셨지만, 저는 평범하다고 생각합니다.

재현: 제가 그 경험을 묘사하기로는 커다란 마시멜로를 원했는데 자그마한 시리얼에 담겨오는 마시멜로를 받은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제 친어머니를 만나면 모든 텅 빈 곳이 채워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물론 몇몇 빈 곳이 채워졌지만 예상했던 경험은 아니었죠. 그런 느낌은 친가족과 만나면서 쭉 지속하였습니다. 입양 기관에서 통역가를 붙여줘서 같이 점심을 먹었어요. 3일 뒤에는 직접 가정에 방문해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직접 제가 맡겨졌던 고아원에 찾아와서 저를 버스에 태우고 다시 집으로 데리고 가셨죠. 전 생각하지 못했는데 양어머니가 이야기하시기를 친어머니의 정서적 치유와 회복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양어머니가 어머니의 관점으로 좋은 회복 단계에 관해서 이야기해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친가족 집에 가도 대화를 나눌 수 없었죠. 제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없었고, 어머니는 영어를 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때 인터넷상에서 가장 쓸모 있던 번역기는 바벨 피시였는데, 좋은 번역기는 아니었어요. 언니와 제가 동시에 할 수 있는 언어는 중국어였습니다. 그래서 서로 기본적인 중국어를 통해서 이야기했어요. 거기에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일본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어로 대화를 나눴죠. 외할아버지가 저를 맞아 주기 위해서 인사를 영어로 배우셨고 감동적이었습니다. 하지만 3일간 그렇게 힘들게 소통을 했죠. 육체 언어와 서로를 바라보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러한 언어적 장벽이 서로 관계를 구축하지 못한 이유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서로 언어적으로 소통하지 못했기 때문에 깊은 관계를 구축하지 못했죠. 제가 언어적 면모에 집중하는 이유는 제가 다른 언어를 배웠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입양아로서 입양아들이 이야기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친가족을 다시 만나는 경험은 아주 귀중했어요. 특히 미국 국내 입양과 미국에서 국내 입양이 일어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랬죠. 미국 원주민과 관련된 기숙학교와 강제 입양 문제를 생각해 보면 그런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 일본이 한국을 점령했던 적이 있는데, 그런 점령자의 언어를 사용하기 껄끄럽지 않았나요?

재현: 아주 이상하고 기묘한 경험이었죠. 사실 제 친구 할머니와 신기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이 친구 할머니는 제가 같이 자란 한국 할머니였습니다. 

팟캐스트: 미국에서 같이 자란 그분이군요?

재현: 네. 그분은 미국에서 살았고, 제가 초등학교 다니는 동안 계속 알고 지냈죠.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분과 다시 만났고, 같이 수도원에서 지내게 됐는데, 할머니가 데리고 오신 영어 학교 친구분과 셋이서 같이 지낼 수 있었어요. 친구 할머니는 일본어를 할 수 있었죠.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한국에서 사셨기 때문에 그때 시점의 일본어로 언어가 고정되어 있었어요. 할머니의 젊은 시절과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국계 입양아들, 한국 문화, 그리고 한국 입양 절차에 대해서 깊은 이해하고 있던 저도 한국어를 배울 수 없어서 다른 아시아계 언어를 배워야 했죠. 그 언어는 한국과 특정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제가 한국 사람 중 일부와 소통하는데 쓸 수 있었고요. 아주 복잡한 지리 정치학적 문제이지만 그 기억은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기회가 아니었다면 할머니와 그런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겠죠.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재현 씨.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재현: 네. 아주 대단한 경험이었어요. 다시 현실에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소수인종 문화 발전에 대해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죠. 입양아 사회가 신경 써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다인종 입양아 사회가 더 신경 써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죠. 백인 부모 밑에서 자라나면 유색인종이면서 사회와 교류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됩니다. 저는 관련된 지식을 배웠죠. 경찰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했어요. 아버지는 경찰과 같이 활동할 때 경찰들이 아시아계 아이들을 자주 멈춰 세우는 일을 봤기 때문에 관련된 충고를 해 주셨죠. 제가 유일하게 그러한 충고를 받은 입양압니다. 그러한 작은 면에서 우리는 우리 부모님이 준비할 수 없는 위협에 노출되어 있고, 사회가 유색인종 청소년층을 노리고 있는데 우리 부모님은 우리를 보호해줄 수 없을 때가 있기 때문이죠.

시즌 3, 에파소드 19: 다니엘 강윤 나오가드

이번 팟캐스트의 참여자, 다니엘 강윤 나오가드 씨(33세)는 한국에서 덴마크로 생후 3개월에 입양되었다. 다니엘 씨는 백인 중심의 환경에서 자라난 경험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입양된 나라를 떠나 런던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정착하게 된 사연을 설명한다. 자신의 직업에 집중해왔지만, 최근에 다니엘 씨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 자신과 동떨어진 부분을 찾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생활 경험을 통해 다니엘 씨는 자신에게 뜻깊은 방식으로 자신의 근원을 배우고 탐구하게 되었다. 

다니엘: 제 이름은 다니엘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니엘 강윤 노아가드에요 덴마크 발음으로 하면 나오가드죠. 1986년, 생후 3개월에 한국에서 덴마크로 입양되었어요. 

팟캐스트: 그럼 현재 나이가 어느 정도 되시죠?

다니엘: 현재 33세입니다. 올해 34세가 될 예정이죠. 영국 런던에서 살고 있어요. 공부하기 위해서 덴마크에서 13년 전에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습니다. 거기에서 7년 정도 살다가 런던으로 와서 6년 정도 살고 있죠.

팟캐스트: 그 소개를 덴마크어로 해 주실 수 있나요?

다니엘: (덴마크어 소개) 

팟캐스트: 대부분 소통을 영어로 하시나요? 

다니엘: 네. 덴마크에서 이주했을 때부터 그랬죠. 현재 제 덴마크어는 상당히 녹슨 상태입니다. 20대에 이주해 나왔는데 그때의 은어를 아직 사용하고 있죠. 그래서 덴마크에 돌아가면 오래된 은어를 쓴다고 친구들이 놀립니다. 현재 친구와 함께 런던에 독립 스튜디오를 차렸고, 친구는 스위스 출신이기 때문에 영어로 대화하고 있죠. 제 작업 대부분은 영국 내부에서 진행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영어로 일을 하고, 고급 교육 상당수를 영어로 배웠고, 여자친구도 영어를 사용합니다.

팟캐스트: 언제 덴마크를 떠나셨죠? 

다니엘: 아마 20세에서 21세 때입니다. 공부하기 위해서 덴마크를 떠났죠. 덴마크에서 나오기 1년 전에 부모님에게서 독립했고, 암스테르담에 있는 예술 대학에 원서를 작성해 운이 좋게도 합격했습니다.

팟캐스트: 덴마크 아이들이 학교 진학을 위해서 덴마크를 떠나는 일이 흔한가요?

다니엘: 네. 흔한 편이죠. 제가 다니던 네덜란드 학교에도 덴마크인들이 많았어요. 제 모교는 그래픽 디자인으로 유명한 학교였습니다. 덴마크인들이 1년이나 6개월 정도 교환학생으로 타국의 대학교에 다니다가, 다시 덴마크 학교로 돌아가는 일은 흔하죠. 저는 제 대학교 생활을 전부 암스테르담에서 보냈어요.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암스테르담에서 2년에서 3년 정도 더 지내게 됐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 일을 좀 받아서 진행하게 되었거든요.

팟캐스트: 런던에서 다니엘 씨를 어떻게 받아들였죠? 사람들이 다니엘 씨를 만나면 질문을 했나요? 물론 런던 자체가 국제적인 도시이니 반응이 달랐겠죠.

다니엘: 런던의 인종적 다양성 덕분에 런던에서 처음으로 편안하다고 느꼈습니다. 동시에 여러 질문을 받고 아직도 질문을 받아서 놀라고는 하죠. 특이하게도 흑인들이 주로 질문을 해요. 예의 바르면 어디 출신인지 물어보고는 합니다. 예의 바르지 않으면 일본어나 중국어로 말을 걸어오기도 해요. 그 날 기분에 따라서 좋게 대응하거나, 부정적으로 대응하기도 하죠. 사람들의 인식을 문제 삼기도 해요. 

팟캐스트: 덴마크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데 주저하기도 하시나요?

다니엘: 덴마크인이라는 정보를 밝히는 데 주저하기도 하죠. 암스테르담에서는 덴마크 국적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는 여전히 인종차별이 심해요. 물론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배경이 존재하죠. 거기에 제국주의적 관점도 존재합니다. 전 금발 푸른 눈이 아니니, 덴마크인이 아니라고 하기도 해요. 물론 금발 푸른 눈인 덴마크인 자체가 적죠. 항상 저 자신한테 출신을 묻는 사람들 90%가 흥미를 느끼고 묻는다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좋은 의도라는 사실을 알지만, 기분이 안 좋으면 좋은 반응은 안 나오죠. 전 덴마크의 백인 위주 사회에서 자랐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유일한 아시아계 아이였고, 고등학교에서도 5명 중 1명이었어요. 덴마크에서 자라면서 항상 제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백인이라고 생각했죠. 거울을 봐도 아시아계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죠. 암스테르담, 아니 런던에 와서야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고 아시아계라는 자각이 들었습니다. 저 자신을 아시아계라고 규정할 수 있게 되었어요. 아주 이상하게 들린다는 사실을 압니다. 딱 봐도 제가 아시아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죠. 하지만 제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제 내면은 부모님과 닮았습니다. 백인 중산층의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어요. 제 외면과 내면은 맞지 않고, 계속 내면과 외면의 싸움을 하는 셈이죠. 

팟캐스트: 인종이나 정체성에 대해서 다니엘 씨의 사고방식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다니엘: 네. 그렇다고 생각하죠. 최근 다양한 이유로 정신과 상담을 받기 시작했어요. 상담을 통해서 저 자신과 제 감정, 제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제 내면에서 감정이 받아들여지고, 외면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저 자신이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는지 좀 더 생각하게 되었죠. 제가 아시아인이지만 진짜 아시아인이 아니므로 사람들이 절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아주 복잡해요. 카오미 씨도 입양아들이 이러한 복잡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시겠죠. 런던이라고 해도 저는 여전히 백인 위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고, 아시아계는 여전히 소수 인종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 내부의 가치에 따라서 제 가치가 정해진다는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어요. 그래서 소수 인종의 상황과 제 가치 판단이 서로 충돌하게 되죠. 저는 동시에 이 두 가지 상황을 하나로 합쳐서 인식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항상 고민하고 생각하는 문제예요.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해야 하죠. 

팟캐스트: 다니엘 씨가 성장한 마을에 관해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작은 마을이었나요?

다니엘: 네. 거의 마을 정도의 소도시였죠. 3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청소년기에 마을에 사는 동갑내기들을 전부 알 정도였죠. 학교가 3개였어도 서로를 전부 알았습니다. 같은 파티에 참여하거나, 서로 사촌이거나, 그런 식으로 이어진 작은 사회였어요.

팟캐스트: 다니엘 씨가 가족에서 유일한 입양안가요?

다니엘: 아뇨. 남동생이 입양압니다.

팟캐스트: 한국에서 입양되었나요?

다니엘: 네 한국 입양아죠. 저보다 5살 어린입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에게는 친자식이 있나요?

다니엘: 아뇨. 없습니다. 

팟캐스트: 자라면서 가족이 인종에 대해서 논의를 했나요?

다니엘: 아뇨. 아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를 듣거나 관련된 공부를 한 뒤 인종 인식의 중요성을 알았죠. 전 부모님에게 고마워하고 있어요. 절 소중하게 생각해준 가족입니다. 저랑 제 동생은 2세대 덴마크 아시아계 이주자이죠. 하지만 백인인 부모님이 같은 인종이 아닌 아이들을 입양하기 위한 준비가 된 채로 우리를 입양하지는 않았어요. 80년대에는 인종 인식 자체가 부족했죠. 물론 LGBTQ 운동과 인종 운동이 활성화되긴 했지만, 다인종 간 입양 자체 인식을 위한 운동은 비교적 신규 운동이에요. 우리 가족은 어머니가 제가 이민자로 인식되는 일을 무서워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인종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덴마크의 80년대와 90년대에 코펜하겐에 이민자 갱 문제가 있었거든요. 중동 이민자가 범죄와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을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물론 대중 매체의 보도도 있었고 아주 복잡한 문제였죠. 

팟캐스트: 반이민 감정 문제가 생겼군요?

다니엘: 네. 반이민 감정이 생겨났습니다. 그 시기에 많은 터키인이 독일과 덴마크로 이주했죠. 70년대에 직업 이민을 왔는데, 영국과 마찬가지로 많은 인종차별의 대상이 되었고, 직업을 빼앗는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제 어머니는 제가 그런 “나쁜 이민자”처럼 보이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인식 자체가 문제라는 사실을 알죠. 그 인식에 제가 나쁘게 반응했습니다. 저는 청소년기에 꽤 말썽을 피웠거든요. 적어도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셨죠. 

팟캐스트: 다니엘 씨 친구들은 다니엘 씨를 알고 그런 질문을 하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기 자신이 덴마크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노력하셨나요?

다니엘: 아뇨, 전 최대한 주변 환경에 맞아 들어가려고 했지만, 제가 더 덴마크인이라고 증명하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많은 사람이 스칸디나비아 문화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문화, 음식, 언어를 물어보려고 하지만 저는 딱히 제 친구들보다 더 덴마크인이라고 증명하려고 한 적이 없죠. 

팟캐스트: 스칸디나비아 문화에 대한 큰 관심이라니 정확히 어떤 느낌이죠?

다니엘: 영국에서만 인기를 끌고 있는지 모르지만,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의 편안한 문화, 후게(Hygge)에 대해서 책이 나오고 있거든요. 편안함, 느긋한 분위기로 번역이 되는데, 덴마크어의 단어 숫자가 적다 보니 후게는 여러 곳에 쓰이고 있죠. 후게가 편안한 시간 자체를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후게 여러 형용사가 붙으면 좀 더 다양한 뜻을 가지게 되기도 해요. 사람들이 후게라는 단어가 어떤 뜻이고 어떻게 하면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는지 묻습니다. 덴마크 사람들은 여전히 애국적이죠. 생일날에 국기를 달아 놓는 나라기도 하니까요. 많은 나라에서 그런 일을 하면 극우적으로 인식될 수 있으니 대충 감이 잡히죠.

팟캐스트: 생일날에 국기를 밖에 건다고요? 

다니엘: 네. 거기에 생일 케이크가 있는 탁자에 깃발을 걸기도 합니다. 뭐 다른 나라에서도 국가적 휴일에 국기를 걸지요?

팟캐스트: 미국 독립기념일 같은 날에는 당연히 그렇죠. 

다니엘: 하지만 우리는 생일날에도 깃발을 내걸거나 달기도 해요. 덴마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식품으로는 호밀빵이 있죠. 런던과 영국에서는 보기 힘든 음식입니다. 아니 물론 찾으면 나오긴 하지만 덴마크 호밀빵과 같지 않아요. 영국에서는 비싸죠. 덴마크에서는 주식입니다.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먹는데, 샐러드를 내용물로 넣은 다음에 주로 점심때 자주 먹어요. 모든 덴마크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음식이죠. 하지만 영국에 살다 보니 매일 10파운드씩 내고 호밀빵을 먹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자주 먹지 못해요. 거기에 몇 년 전에 채식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많은 전통 덴마크 음식들이 육류 위주라는 점이죠. 예를 들면 명절 음식 상당수는 생선 기반입니다. 청어를 많이 먹는데 이제 그런 음식을 먹지 못해요.

팟캐스트: 한국 정체성과 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두게 된 때를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다니엘: 저랑 제 동생은 항상 우리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시작부터 우리의 배경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제 입양 사실에 대해서 열린 태도를 보여주셨죠. 우리가 관련 정보에 대해서 궁금해하면 관련 정보를 제공해주려고 노력하셨어요. 하지만 최근까지 관심이 없었고, 남동생은 아직도 친가족을 찾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입양된 가족에게 감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3년에서 4년 전까지는 관심이 없었죠. 물론 자라면서 부모님과의 갈등이 없지는 않았지만, 항상 제 가족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어요. 그래서 친가족을 찾을 이유를 느끼지 못했죠. 제 부모님이 저를 사랑해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줬으니 친가족을 찾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상담을 받고 나서, 한국 친부모님과 저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하고, 관련 기사를 읽고 나니 인식이 바뀌었어요. 특히 한국계 입양아들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듣고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죠. 입양아들이 성장하면서 그리고 어른이 되고 나서 마주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길래 상담을 받게 되셨나요? 

다니엘: 제가 암스테르담에서 지내고 있을 때 정신과를 방문했죠. 입양아 문제가 아니라 좀 더 다양한 정신적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러한 대화가 입양아 문제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어린아이 때의 반응이 지금의 반응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자주 싸우시고는 했습니다. 그러면 노래를 틀어 놓고 그걸 피하려고 했죠. 그런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화가 나거나, 겁이 나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최대한 그 문제를 피하려고 합니다. 의사 선생님과 같이 상담하면서 생후 3개월 동안 고아원에서의 경험이 제 행동에 영향을 끼쳤는지 이야기를 하고는 했어요. 고아원에서 자신을 돌봐 줄 사람이 없이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하다 보니, 혼자 있는 상황이 익숙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혼자 있는 일이 편안하니 이해되는 설명이었죠. 삶에 있어서 고독이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사귀고 헤어졌어요. 그런 관계를 맺는 동안 저는 항상 같은 길을 쭉 걷고 있었고, 사람들이 삶에 오고 갔고, 저에게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죠. 사람들이 가까이 오는 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과대해석일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에게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는 데 문제가 있죠. 제가 상대해야 하는 문제 중 상당수는 입양아라서 겪는 문제예요. 자부심, 자각, 자신을 증명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세계에 있을 자리를 만들려고 하면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죠. 

팟캐스트: 세계에 있을 자리를 증명하려고 하는 느낌인가요?

다니엘: 네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저를 데리고 오려고 돈을 내셨죠. 아주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부모님이 칭찬을 해주거나, 사랑하고 멋있다고 하실 때마다 높은 기준을 유지해서 부모님의 사랑을 유지하려고 했어요. 그렇게 느끼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떤 단계에서는 부정적이지만, 동시에 많은 긍정적인 결과도 달성했다고 봐요. 현재 런던을 집처럼 느끼고 있죠.

팟캐스트: 현재 연애 관계를 유지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요.

다니엘: 네.

팟캐스트: 여성분인가요?

다니엘: 네.

팟캐스트: 백인인가요?

다니엘: 아뇨. 제 여자친구는 자기 스스로 흑인이라고 규정합니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났지만, 호주에서 자라났죠. 

팟캐스트: 전형적인 런던 시민이군요?

다니엘: 네 그런 느낌이죠. 

팟캐스트: 현재 연애 관계를 통해서 과거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다니엘: 우리가 지난여름부터 사귀기 시작했는데,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여자친구의 도움도 컸죠. 제 경우에는 연애 관계에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자각을 하게 되었다고 봐요. 지금까지 연애 관계에서 제 일과 취미에 더 관심을 뒀다고 봅니다. 지금은 과거의 연애 관계가 그러한 관심사 때문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죠. 공부나 일을 항상 연애 관계보다 우선시했어요. 여자친구는 솔직하고, 우리 서로 직업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그래서 여자친구에게 무언가를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집니다. 여자친구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아요. 우리가 같이 있을 때 제가 그런 느낌이 듭니다. 여자친구에게 있어서 항상 고마워하는 이유이죠.

팟캐스트: 과거 연애 관계 대부분은 백인 여성과 관계를 맺었나요?

다니엘: 대부분은 백인 여성이 대상이었죠. 물론 다른 인종도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연애를 많이 하지 않았어요. 백인, 흑인, 아시아인도 있었죠. 물론 백인 위주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다른 인종과 만날 기회가 얼마 없긴 했습니다.

팟캐스트: 아시아계 여성을 사귀었을 때, 그 사람은 비 입양아였죠?

다니엘: 네.

팟캐스트: 그런 비 입양아 아시아인들과 교류하게 되니 어떤 감정을 느끼셨나요?

다니엘: 네. 물론 여자친구의 가족을 만날 정도로 진지하게 사귀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여자친구는 한국 출신이었기 때문에 한국 음식, 요리에 관심이 많았고, 여자친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한국 문화와의 첫 교류는 아니었지만, 한국 문화와 가장 깊게 교류했던 때였어요. 항상 여러 가지 질문을 하려고 했지만 전 여자친구가 모른다고 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답했기 때문에 답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한국 문화에 대해서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경험이라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한국에서 한 이야기를 얼마나 아시나요?

다니엘: 작년에 한국에 돌아간 적이 있어요. 한국에 친구가 있죠. 암스테르담에서 한국인 친구들과 같이 살고 지내기도 했습니다. 작년 방문이 2번째 방문이었습니다. 한국 친구들과 암스테르담에서 동거할 때 여름방학을 지내기 위해서 한국을 방문했고, 그게 최초 한국 방문이었죠. 그 친구가 저에게 한국 요리를 가르쳐줬고, 한국 요리를 많이 해줬어요. 그 친구와 같이 국제 사업을 진행해 볼까 생각 중입니다. 암스테르담에서 살 때 처음으로 돌아갔는데 그게 10년 전에서 9년 전이었죠. 그때 간 이유는 한국 요리를 먹고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 갔습니다. 한국에서의 경험은 아주 대단했지만, 갈 때의 경험도 값졌어요. 갈 때 그리 신경 쓰지 않았죠. 또 다른 휴가로 한국에 가서 놀자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한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렇게 큰 의미가 없었죠.

팟캐스트: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여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군요?

다니엘: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정반대였죠. 그 당시의 여자친구가 저보다 더 기뻐했습니다. 한국 첫 방문 때는 놀고먹었어요. 하지만 비행기에서 내려서 한국에 도착했던 때는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내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모두가 저와 비슷하게 생겼죠. 사람들이 저에게 한국어로 말을 걸었어요. 제가 한국인 같이 생겼으니 당연하지만, 바보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는 영어로 답하고 많은 사람이 말을 멈추고 멀어졌죠. 부끄러워했다고 생각해요. 한국에 절 돌봐주고 챙겨줄 친구들이 있어서 운이 좋았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에 방문하는 많은 입양아가 느끼는 섞여 들어가는 감정을 느꼈군요. 

다니엘: 네.

팟캐스트: 장발이라서 눈에 띄었나요? 

다니엘: 음. 장발이라서 아무래도 눈에 띄었죠. 물론 장발이 그리 드물지는 않지만, 제 복장까지 합쳐서 눈에 띄었다고 생각해요. 한국이 다양성을 가진 나라이긴 하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이 패션에 신경을 씁니다. 모두가 아주 잘 차려입고 있죠. 사람이 많고 그 사람들이 전부 다른 방식으로 차려입고 있어서, 제가 방문했을 때 가장 옷을 못 입고 있는 사람들은 교환학생으로 온 서양 사람들이었어요. 한국에서 저는 맞아 들어갔지만, 제가 방문한 곳 중 몇 곳은 한국 사람들보다 백인이 많았죠. 아주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만, 아주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는 여전히 강한 전통과 절차가 남아 있지만 동시에 기술적으로 아주 발전해 있어요. 

팟캐스트: 저번에 한국에 방문했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다니엘: 모든 요소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긴 휴가를 가기도 했고, 저 자신이 되어서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즐길 수 있었어요. 한국을 3주간 혼자 방문했고, 그 전에 카오미 씨의 팟캐스트를 듣고, 공부하면서 어린 시절에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는 제 과거를 조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친부모 조사를 하려고 했죠. 덴마크에 왔을 때 받았던 입양 서류를 챙겼고, 덴마크 한국 입양아 단체인 코리아 클럽의 회원이 되었죠. 그 사람들을 통해서 입양 기관과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쉽게 조사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 사람들과 연락하는 일이 생각보다 쉬웠죠. 그다음에 준비하고, 기관에 말해서 특정 기간 동안 한국에 방문한다고 말을 해서, 조사를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어요. 기관의 담당자가 아주 친절하게 특정 날짜까지 정보를 찾아보고 정보를 제공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날이 운이 좋게도 제 생일이었죠. 그 날이 되자 아주 큰 일이 되었습니다. 혼자 기관을 방문했고, 날씨가 나빠서 비도 내리고 있었고, 제 생일이었어요. 하지만 기관에서는 어떤 자료도 찾을 수 없었다고 이야기했죠. 친부모님이 거주지에 대해서 거짓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방문한 날에는 실망했지만, 그 뒤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절차가 아주 빠르고 진행되었기 때문에 제 마음속에서 큰 충격적 문제로 자리 잡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실망스럽기는 했죠. 서류에 적혀 있던 형제자매들에게 연락했으면 좋았겠지만, 기관에서 그럴 역량이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서류에 왜 다니엘 씨가 입양되었는지 나와 있었나요?

다니엘: 경제적인 이유였습니다. 저는 4번째 자식이었고, 아버지는 택시 운전사였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였죠. 누나가 둘에 형이 하나였어요. 어머니 나이가 30대 후반, 40대 초반이었습니다. 늦둥이기도 했고, 경제적인 이유로 입양되었어요.

팟캐스트: 좀 생각을 해봤을 텐데, 자료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정보 자체가 찾기 어렵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나요?

다니엘: 운이 안 좋다고 생각하죠.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렇게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가장 흥미를 느끼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입양아들의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이죠. 매일매일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장소를 찾을 수밖에 없어요. 다인종 입양과 그 뜻에 관한 연구는 적었죠. 입양아가 자라서 어른이 되고 나면 정신적 문제를 겪으면 하나둘 정도는 찾아서 치료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겹겹이 쌓인 문제라 관리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입양, 인종 간의 문제도 있고 매우 복잡한 문제죠.

팟캐스트: 친가족과는 만날 수 없었지만, 한국 자체와 연결성을 구축하려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다니엘: 네. 물론이죠. 당연합니다. 다양한 이유로 한국과 연결성을 구축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앞에 언급한 한국 친구들을 만들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아주 좋은 친구들이 되었어요. 제가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 친구들은 제가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외국에서 유학하고 있던 한국 학생들이죠?

다니엘: 네 그렇습니다. 좋은 친구들이 되었어요. 그 애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았기 때문에 무의식적인 흥미가 있었다고 생각하죠. 음식을 매개로 친해졌는데, 친구 중 하나가 요리를 좋아했기 때문에 저에게 요리를 해주기도 했어요. 친구 중 하나는 입양 문제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일이 슬프다고 이야기했지만, 입양이 되었든 아니든 한국인이고 우리에게 있어서 형제나 남매나 다름없다고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아주 편안한 느낌이 들었죠. 저 자신이 한국인 같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인이 저를 받아들여 주었으니까요. 거기에 문화적인 경험도 아주 좋았죠.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 친구들이 저를 봐줬죠. 제가 한국에서 지내던 기간 동안 친구가 방을 내주었습니다.

팟캐스트: 다른 입양아들과의 관계는 있나요? 그 입양아들과 친구들인가요? 아니면 아예 입양아들과의 관계가 있긴 한가요?

다니엘: 한국 출신 입양아 친구는 없어요. 우리 가족, 적어도 제 부모님은 다른 한국 입양아 가족과 친하게 지내고 있지만, 저는 그쪽과 교류를 하고 있지 않죠.

팟캐스트: 성장하면서 만난 다른 아시아계 사람 중에 입양아가 있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다니엘: 제가 덴마크에서 살 때 말인가요?

팟캐스트: 네. 덴마크에서 거주할 때 입양아를 만났다고 생각하시나요?

다니엘: 네. 만약에 아시아계 애 중에 한국계 입양아가 있었다면 제가 만난 첫 입양아였겠죠. 십중팔구 입양아들이었을 겁니다. 스웨덴이나 덴마크에서 한국인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면 십중팔구 한국계 입양아라고 생각하죠. 다가가서 입양안지 묻지는 않았어요. 물론 다른 사람들과 그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일은 좋아하죠. 흥미로운 주제이니까요. 뉴욕 타임스의 기사를 읽었을 때 확실히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다른 한국 입양아들과 연계를 만들려고 하는 욕구는 없어요. 입양아들과 이야기를 하고 관계를 만들려고 하지 않죠. 하지만 그건 제 성격과도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혼자 하는 일을 좋아해요. 제가 무언가에 흥미를 느끼면 모든 것을 알려고 합니다. 입양 관련 정보도 그렇게 배우고 있어요. 파리에 입양된 한국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대단한 이야기였죠.

팟캐스트: 미국 입양아들과 유럽 입양아들의 경험이 다른 것 같군요.

다니엘: 지금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명한 한국계 미국인이 많죠. 요리 업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데이비드 창이 서해안 지역에서 유명하고, 연예계에서도 이름을 떨치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많습니다. 미국에 한국인 사회가 더 안정적으로 구축되어 있다고 봐요. 물론 저는 미국 동해안 지역만 방문하긴 했죠. 도시마다 작은 한국인 사회가 만들어져 있었어요. 미국에는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과 직업상 방문자들이 많죠. 반면에 덴마크는 매우 백인 위주 사회입니다. 항상 눈에 띄고, 아시아계라면 더더욱 그렇죠. 만약에 유색인종이 있다면 대부분 아랍계이고, 그 사람들은 이제 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했지만, 아시아계는 여전히 인구에서 매우 적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고 눈에 띄게 되어요.

팟캐스트: 다니엘 씨, 덴마크에서 사람들이 영어로 말을 걸어오거나 그랬나요?

다니엘: 네. 하지만 최근 6년에서 7년 사이에 더 영어로 말을 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느낌입니다. 제가 덴마크에 방문할 때마다 그런 변화를 느끼죠. 특히 코펜하겐을 중심으로 덴마크어를 하지 못하는 인구가 늘었어요. 그래서 덴마크인들 입장에서는 영어밖에 못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난 셈이죠. 런던에서 덴마크인들을 만나면 보통 영어로 저에게 말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제 이름을 모르고 외모만 봤을 때 그렇게 반응하는 일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사람들이 다니엘 씨의 이름에 반응하는 경우가 많나요? 특히 다니엘 씨의 성을 보고 특이하다는 반응을 하나요?

다니엘: 덴마크 성이니까요?

팟캐스트: 네.

다니엘: 네 그렇습니다. 특히 제 덴마크 성은 보통 영어 사용자가 발음하기 불가능하므로 더더욱 그렇죠. A가 두 개 겹치면 덴마크에서는 아예 다른 단어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팟캐스트: 다니엘 씨가 한국과 관련해서 다음으로 할 일은 무엇인가요?

다니엘: 이번 가을에 제 덴마크 가족과 같이 한국에 방문할 예정이었죠.

팟캐스트: 남동생분도 같이 참여할 예정이었나요?

다니엘: 네. 하지만 가족 휴가라서 참여할 예정이었죠. 남동생은 한국에 관심이 없거든요. 하지만 저도 28살 때는 한국에 관심이 없었으니 비슷한 느낌입니다. 사실 제 어머니가 제 친가족을 찾아보라고 계속 권유하고 계시죠. 제가 친가족을 찾는 데 있어서 저보다 더 열정적으로 접근하고 계세요. 최대한 빠르게 한국에 방문하고 싶죠. 제 여자친구와 같이 한국을 방문할지를 논의를 나눴습니다. 서울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보냈으니, 서울이 물론 대도시이긴 하지만 어떻게 돌아다닐지 알고, 친구들도 있으니 친구들을 만나러 가고 싶어요. 한국의 평범한 생활을 즐겨보고 싶죠. 관광보다는 친구들과 같이 지내고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에서 생활해볼 생각은 해보셨나요?

다니엘: 확실히 생각해보긴 했어요. 지금도 생각해보는 일입니다. 확실히 몇 년 정도 한국에서 지내면서 일할 수 있으면 좋은 경험이 되겠죠. 하지만 한국에서 정착해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물론 제가 덴마크에서 자랐으니 아마 정착한다면 덴마크에서 살고 싶은 느낌이 있죠. 항상 어디를 가든 덴마크에 귀국해서 살 수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인식 자체가 사실이 아니지만, 전 항상 그렇게 생각하죠. 

팟캐스트: 그 후게라는 사고방식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군요?

다니엘: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에 방문했을 때, 한국에서의 삶이 어땠을지 상상해본 적이 있나요?

다니엘: 네 물론이죠. 여기에서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제가 입양되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생각합니다. 한국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광경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하죠. 제가 너무 극적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영화에 나온 사람들처럼 지하에서 살아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팟캐스트: 사기꾼으로 살아가야 했다는 이야기이죠?

다니엘: 네. 하지만 한국에 있는 제 친구들은 꽤 좋은 삶을 살았죠. 한국은 문화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성장하고, 살고, 일하기에 힘든 나라라고 생각해요. 런던에서 사는 일 자체는 무척이나 힘들지만, 서울 생활은 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다니엘 씨, 친가족을 계속 찾아보려고 하실 건가요?

다니엘: 제 입양 기관은 친가족을 더 찾아보고 싶으면 흥신소를 사용하라고 추천했죠. 제가 지금 투자할 수 있는 비용이 아닙니다. 제 부모님이 가짜 정보를 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죠.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났고 그 흐름에 맞춰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 친가족에 대해서 여전히 흥미가 있죠. 하지만 다른 문제에 집중하고 싶고, 찾는다고 찾을 수 없는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현재 삶에 집중하고 싶어요. 물론 언제든지 바뀔 수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습니다.

시즌 3, 에파소드 18: 사샤 라이더

영국 교외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면서 사립학교에 다니고, 기숙학교를 다닌 사샤 라이더 씨 (48세)를 영국에서 자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배경에서 자라났다. 하지만 샤샤 씨는 한국 입양아며, 다른 한국계 입양아들처럼 백인 위주의 사회에서 자라나면서 불편함과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다. 샤샤 씨는 정신적 치유 방법과 배경을 인정하게 된 계기, 그리고 관련된 자각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현재 샤샤 씨는 다른 사람들의 무의식을 꿈을 통해 해방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사샤: 제 이름은 샤샤 라이더입니다. 48세이고, 뉴멕시코 주 산타페시에서 거주하고 있죠. 인천에 있는 해성보육원에서 입양되었어요. 생후 몇 개월밖에 안 된 아기였습니다. 정확히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는 모르죠. 제 양부모님이 관련된 자료를 받지 못했어요. 3살 반에 영국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전 외동딸이었고, 양부모님도 둘 다 외동딸과 외동아들이었죠. 양아버지는 유엔을 위해서 일하고 있던 과학자였어요.

팟캐스트: 성장한 그곳에 관해서 이야기해주세요.

사샤: 영국 중부에 있는 워윅셔 지역에서 성장했습니다. 셰익스피어로 유명한 지역이죠. 제가 어른이 된 뒤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니 기묘한 시절을 보냈지만, 그때의 저에게는 평범한 어린 시절이었어요. 작은 마을 근교에서 고립된 채로 자랐죠. 우리 지역 사회, 가족 친구들 전부 백인이었고 여학교를 다녔어요. 항상 고립되고 괴리된 느낌을 받았지만 이유를 몰랐습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이 한국에 관해서 이야기했나요?

샤샤: 조금 이야기해줬죠. 아버지는 한국과 한국에서 일했던 경험을 좋아하셨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문화 계급상으로 한국에 적응하기 힘들어하셨죠. 스스로 인종차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주 인종차별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계셨어요.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낮게 보셨습니다. 어머니가 그러한 이야기를 직접 저에게 꺼내지 않으셨죠. 하지만 어머니가 무의식적으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서 보인 부정적인 표현을 통해 알 수 있었어요. 한식이 전부 이상한 냄새가 났다고 하셨고, 한국 사람들을 영어 이름으로 부르고는 했죠. 아버지 기사를 존이라고 불렀지만, 당연히 존이라는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세계관에서는 한국 사람들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 존재했어요. 아주 신식민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계셨죠.

팟캐스트: 부모님이 왜 한국에서 입양하셨는지 물어보셨나요? 물어보지 않았다면 왜 그러셨는지 추측할 수 있나요?

샤샤: 제 부모님은 서울에 살고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유엔에서의 직장을 즐기고 계셨죠. 부모님이 불임이라서 입양하셨다고 했어요. 부모님이 해준 이야기는 그 정도가 다였습니다. 한국에서 살고 계셨으니 한국 아이를 입양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죠. 부모님이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데 영국 아이를 입양하긴 어려웠습니다. 제 성장기에는 입양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이 언급하려고 하지 않는 이야기였어요.

팟캐스트: 샤샤 씨는 제가 인터뷰한 입양아 중 첫 영국 출신이십니다. 영국에는 강한 국가주의가 존재하나요? 자라면서 영국인의 자긍심이 강조되었나요? 그러한 분위기를 느끼고 문제점을 느끼셨나요?

사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이해되는 일이 많아요. 과거에는 비교 기준이 없었죠. 지금 되돌아보면 어렸을 때 인종차별을 겪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사람들이 저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팟캐스트: 샤샤 씨, 어떤 종류의 인종차별을 당하셨죠?

사샤: 무의식적인 차별을 가장 많이 당했어요. 어머니와 같이 상점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저를 빤히 쳐다보고는 했죠. 백인 위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다르게 생긴 제가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궁금해했지만, 저에게 질문할 수 없었죠. 사람들이 저와 어머니를 보고 상상을 했어요. 중국계 남편과 사이에서 낳은 아이일까? 저 여성의 아이일까? 남베트남 난민일까? 이라는 질문을 저를 바라보면서 생각했지만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문들의 담긴 눈으로 저를 봤지만, 왜 그러는지 몰랐죠. 한국인 정체성 자체를 몰랐어요. 제가 다르게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한국 문화에 대해서 전혀 몰랐고, 교육도 전혀 받지 못했고, 아시아계와의 교류도 없었습니다. 제 안에 존재하는 아시아계 정체성을 자각하고 저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죠. 혈통적으로 존재하는 정체성을 양육과 교육으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오래 걸렸어요. 예를 들면 저는 평생 고추와 마늘을 좋아해 왔습니다. 이게 혈통적인 이유라고 생각하면 편하죠.

팟캐스트: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이네요. 저는 절임 종류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사샤: 저도 그래요. 절임 종류를 아주 좋아하죠. 제가 어렸을 때, 그러니 70년대에 어머니가 칵테일에 첨가하고 하던 고급 피클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몰래 냉장고에 가서 피클 주스를 꺼내 마시고는 했어요.

팟캐스트: 재밌는 이야기이네요. 한국 정체성에 대해서 그렇게 깊은 연결성을 느끼지 못하셨군요. 많은 입양아처럼 아시아 문화 자체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자라셨나요? 

샤샤: 그때 저는 아시아계 문화에 대해서 부끄러워했어요. 하지만 그 감정이 부끄러움이라는 사실을 몰랐죠. 영국에서 아시아계 사람들은 낮게 평가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영국에는 중국 음식점이 있고, 조그마한 중국계 사회가 존재했어요. 홍콩과 영국과의 관계 때문이었죠. 하지만 중국계 영국인 중 성공한 사람의 예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평범한 이민자의 이야기예요. 돈이 없이 타국에 와서, 이민 온 나라의 언어를 잘 못 하면서 본국인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살아남으려고 했죠. 중국계 이민자로 이루어진 마을은 중국계 음식점과 피시 앤드 칩스를 만들면서 살았어요. 중국인들을 백인 사회는 낮잡아 봤습니다. 그런 하층민 취급받는 중국인과 똑같은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았죠. 

팟캐스트: 거기에 샤샤 씨의 억양을 들어보니. 정확히 어떤 억양인지는 모르지만, 고급 계층 억양이네요?

사샤: 네. 제가 가지고 자란 억양은 사람들이 BBC 영어라고 하는 억양을 가지고 자랐죠. 하지만 제가 미국서 꽤 오랫동안 살아서 억양이 섞인 느낌입니다. 

팟캐스트: 사람들이 들으면 뉴질랜드나 다른 곳에서 왔냐고 하겠군요?

사샤: 그런 반응을 받는 때도 있어요. 아 남아공 출신인가요? 이라고 묻죠. 특정 단어는 미국식으로 발음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어떤 단어는 미국식으로 발음하면 아주 이상하게 들리죠.

팟캐스트: 흥미롭네요. 어떤 단어가 그렇죠?

사샤: 전 여전히 토마토를 토마토라고 발음해요. 토메이토라고 발음하면 아주 이상하게 느껴지죠. 알루미늄이라고 해도 그냥 괜찮습니다. 영국에서는 알루미늄이라고 발음하거든요. 그걸 제외하고도 여러 속담이나, 은어나 속어의 문제도 있죠.

팟캐스트: 관련된 예를 좀 들어줄 수 있나요?

사샤: 제가 특정한 문장이나 숙어를 쓰면 사람들이 이해 못 하는 경우가 많죠. 며칠 전에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고 있었어요. 남성이 강아지를 보고 칭찬을 하니 제가 “Terror way”(충격적)인 아이라고 했죠. 영국에서는 그 단어가 활력이 넘친다는 뜻입니다. 강아지가 두 살이라 힘이 넘치거든요. 하지만 그분이 단어를 들으니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저를 봤죠. 아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구나. 이라고 생각하고 설명을 해야 했습니다. 그 단어 말고도 제가 사용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단어들이 있죠. 제 강아지를 Scamp(말썽꾸러기)라고 부르기도 해요. 영국에서는 그 단어는 말썽꾸러기를 뜻하는 말이지만, 미국에서는 Scamp가 뭔 뜻이죠? 이라고 묻습니다.

팟캐스트: 전혀 모르겠네요. 어떤 시점부터 bloke(멍청이)라는 단어도 안 쓰셨겠네요?

사샤: 전 런던 출신이 아니라 그 단어를 별로 쓰지 않아요. 런던-코크니에서 많이 쓰는 단어들이 있죠. 전 그 단어들을 알고 농담에는 사용합니다. 하지만 농담용이 아니라면 사용하지 않아요. 런던에는 인사를 하면 와치야! 이라고 답하는 풍습이 있죠. 전 그런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자라지 않았지만 런던 친구들과는 그런 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팟캐스트: 샤샤 씨의 억양이 상류층 느낌이 나는데, 억양을 통해서 외모로 맞아 들어가지 못하는 사회에서도 받아들여졌나요? 

사샤: 그러기도 했지만 편안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고급 억양을 통해서 사람들이 저를 선입견을 가지고 대했고 축복보다는 장벽에 더 가까웠죠. 어렸을 때는 왜 이런 문제가 있는지 몰랐는데, 고급 억양이 적대감을 불러일으켰어요. 소수인종으로 영국에 이민을 와서 빈곤한 최하층민으로 대우받는 일은 문제지만, 상류 계층 억양을 통해 영국인들 대부분보다 더 상류 계층으로 인식되는 일도 문제입니다.

팟캐스트: 출세주의자로 보였다는 이야기인가요?

사샤: 사람들이 저를 출세주의자로 인식했던 점은 문제가 아니었어요. 사람들이 부모님을 동반하지 않은 채로 저를 만났을 때 저를 부잣집 딸이라고 생각했죠. 제가 가진 억양이 가능할 정도로 고급 교육이 가능한 부유층 출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사람들에게 있어서 혼란스러운 존재였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그러한 억양을 배울 수 있는 교육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기숙학교 이야기인가요?

사샤: 기숙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제가 이런 억양을 가지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때였습니다. 저는 사립 초등학교에 다녔죠. 영국 계급 제도는 단순히 억양으로만 갈리지 않아요. 사람의 용어 사용으로도 계급이 갈리고 구분하게 됩니다. 

팟캐스트: 단순히 단어 선택만으로도 계급이 갈린다고요?

사샤: 네 그랬습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이 부유하셨나요?

샤샤: 중상류층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제 아버지가 개인 사업을 운영하셨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우리 집이 더 부유해 보였을 수도 있죠. 제 어머니는 매우 물질주의적 사람이라 큰 집과 비싼 차를 원했습니다. 

팟캐스트: 입양아로서 자라나면서 입양아라는 언급을 꺼렸나요? 

사샤: 제가 피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이 질문하면 결국 입양아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입양아가 가지는 문화적 무게에 대해서 전혀 몰랐어요. 관련 정보도 없었고, 어린아이들은 그런 문제를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아주 불편하게 느껴지는 질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입양되었다고 이야기를 하면 왜 입양되었는지 묻고는 했죠. 그럼 답으로 제가 들은 이야기를 해줄 수밖에 없었어요. 제 친부모님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한국어는 할 수 있는지 물어봤죠. 어렸을 때는 그런 질문이 고통스러웠고, 고통을 줄이는 법을 찾지 못했어요. 항상 불편하고, 부끄럽고,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팟캐스트: 기숙학교를 다니는 경험은 어땠나요? 마음에 들었나요?

샤샤: 끔찍했어요. 제가 다녔던 기숙학교는 매우 고전적인 학풍을 가진 학교였죠. 

팟캐스트: 계속해주세요.

사샤: 오래된 남학교였는데, 제가 다니기 얼마 전 여학생들도 받아 주기 시작했죠. 하지만 여성 비율이 20% 이하였고 여학생들은 이류 학생이었습니다. 학교 제도 자체가 오래된 영국 기숙학교 제도였어요. 집단 괴롭힘과 육체적 폭력이 난무했죠. 선생들은 아주 나이가 많았고 우리 모두 성으로 불렀습니다. 아주 나이 많은 선생이 우리 성을 보면서 “아! XXX 군인가! 자네 아버지를 내가 가르쳤네!”라고 했어요. 오래된 영국 인맥 주의가 드러났죠. 기숙학교는 권력과 학대에 기반을 둔 제도였어요. 영국 출신 작가인 조지 오웰이 이 문제에 대해서 잘 설명했다고 생각합니다. 파리 대왕이나 다름없는 제도였죠. 복잡한 권력과 조종 제도가 구축되어 있어서 아이들이 서로 물어뜯고 밀고하고 공격했기 때문에 안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어요. 선생과 학생들이 대립하는 구도가 아니라 개개인이 세계와 맞서 싸워야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팟캐스트: 기숙학교이니 그곳에서 거주하셨죠? 

사샤: 그랬죠.

팟캐스트: 그렇다면 괴롭힘을 피하기도 어려웠겠고, 정신적 지원을 받기도 어려웠겠군요?

샤샤: 정신적 지원을 받는 일 자체가 적었죠. 외동딸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상황에 부닥쳐 있어 아예 지원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팟캐스트: 연애는 어땠나요? 연애를 하실 수 있었나요? 아니면 다르다고 느껴지는 상황에서 연애에 접근할 수 있었나요? 

사샤: 제가 성장하고 나서는 이국적인 매력이 있다고 평가받았죠. 어렸을 때는 저 자신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몰랐어요. 아름다운 한국 여성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비교 상대의 부재 속에서 자라나면서 비교 상대가 없었으니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이상의 해석을 할 수 없었죠. 제가 매력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어요. 그 결과 남자아이들이 저를 매력적으로 생각하는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서구 여성의 매력이 최고라고 인식했죠. 굴곡이 있는 몸매, 긴 눈썹, 큰 눈, 웨이브 진 머리 등의 서구적 매력을 높이 평가했어요. 제 내부에 있는 아시아인의 아름다움이 어떨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팟캐스트: 화장을 해서 눈을 크게 보이려고 했나요?

사샤: 사실 아예 화장하지 않았어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몰랐죠. 어머니와 같이 화장이나 관련된 교류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화장을 가르쳐주거나, 브래지어를 사주거나 그런 일을 하지 않았어요. 그 관련 정보를 전혀 모른 채로 자랐죠. 제 얼굴이 다르게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서, 잡지에 나온 대로 화장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대안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몰랐죠. 그래서 화장을 하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70년대와 80년대에 자라나면서 아시아계 여성이나, 아시아인의 모습을 TV, 영화, 잡지에서 보신 적이 있나요?

사샤: 아주 적었죠. 잡지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어요. 영화나 텔레비전에서는 가끔 보긴 했지만, 매우 비하적인 모습으로 나왔습니다. 영화에서 찰리 챈(가공의 형사 캐릭터, 황인 분장을 한 백인이 연기했다.) 이 나오거나, 아시아계 여성을 혼혈 여성이 연기하고는 했죠. 그 혼혈 여성도 백인 혈통이 더 짙었어요. 

팟캐스트: 무슨 소리인지 알겠네요.

샤샤: 아시아계의 아름다움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 채로 자랐어요. 70년대 초반에 뉴욕의 친구를 방문했을 때 케이블 TV를 보게 됐죠. 그 시절의 영국은 TV 채널 자체가 적어서 아주 희귀한 경험이었습니다. 채널을 넘기다가 한국 채널을 보게 되었어요. 한국에서 수입해온 드라마들이 방영되고 있었고, 그 드라마로 처음 한국인들을 보게 되었죠. 한국인들이 저와 닮았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동시에 아시아계가 전부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런던으로 이주하셨는데, 그 이주로 어떤 깨달음을 얻으셨나요?

사샤: 런던으로의 이주는 대단했어요. 아주 큰 대도시이고, 세계적인 도시죠. 미국으로 치면 맨해튼과 같은 곳입니다. 제가 도착하자마자 더 편안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팟캐스트: 사람들이 샤샤 씨가 쓰는 고급 억양 때문에 대응하기 어려워하지는 않았나요?

사샤: 그랬지만, 큰 도시의 장점은 익명성이죠. 삶이 빠르게 흘러가고,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여요. 작은 마을이나 동네처럼 다른 사람들이 사람들의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큰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그러한 사실에 자유를 느꼈어요. 제가 삶을 살 수 있고 사람들이 저에게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죠. 

팟캐스트: 샤샤 씨의 런던 생활에 대해 깊이 들어가기 전에 샤샤 씨의 부모님에 관해서 묻고 싶네요. 부모님과 친밀하지 않은, 적어도 감정적으로 가깝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내신 것으로 보이는데, 부모님 두 분 다 외동아들과 외동딸이었던 점이 영향을 끼쳤다고 보시나요? 

사샤: 어렸을 적의 부모님과 저의 관계는 기이한 오류였죠. 부모님을 매우 사랑했고 제 세상의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부모님 두 분 다 망가진 사람들이었어요. 성인이 되기 전까지 어머니와 아주 가까운 관계였죠. 제 교우관계가 작았고, 거기에 어머니가 원하는 이야기를 돌려줄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제가 개인적인 정체성을 구축하기 시작하자 우리 관계가 붕괴했습니다. 제 관점이 어머니와 달랐죠.

팟캐스트: 어머니가 샤샤 씨에게 원했던 결과는 무엇이었죠?

사샤: 어머니는 제가 백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평범해지기를 원했죠. 대학에 가고 부유한 남성과 결혼한 다음 물질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서 어머니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부자인 남성과 결혼하기를 원했고, 결혼이 출세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셨죠. 어머니는 평범함에 대해서 이상한 기준을 가지고 계셨고 어머니도 그 기준에 맞아 들어가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제가 그 기준에 맞아 들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머니도 내면적으로 상당히 기묘한 분이셨거든요. 

팟캐스트: 현재 부모님과는 친밀한 관계인가요?

사샤: 제 양어머니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죠.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어요. 어머니가 어떤 분이셨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복잡한 관계였기 때문에 이해가 어려웠죠.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생각을 해보니 이해를 하고 동정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어머니와의 관계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느껴집니다. 죽음이 삶을 끝낼지는 몰라도 관계를 끝내지 않죠. 시간이 지날수록 양어머니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사랑이 다시 자라나는 느낌이 듭니다. 현재 어머니를 어렸을 때처럼 소중히 여기지만 그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중히 여기는 느낌이 들죠. 어머니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어요. 아주 좋은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인식할 수 있을지 몰랐거든요. 

사샤: 어머니와 저 사이에는 여러 문제가 있었고 깊은 분노를 품고 있었어요. 힘을 놓고 주도권 싸움과 분노가 계속되고 있었죠. 제가 뒤로 물러났습니다. 어머니와 싸우고 싶지 않고, 저 자신을 어머니에게 보여주면 싸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더 그렇게 싸울 이유가 없었죠. 어머니와 평화를 유지하고 일정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관계 자체를 끊고 싶지 않았지만,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저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어요. 저 자신을 드러내면 결국 싸움밖에 일어나지 않았죠. 

팟캐스트: 꽤 고통스러운 경험이었겠군요?

사샤: 네 고통스러웠죠. 입양아 경험 중 상당수가 고통스럽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떠셨나요?

사샤: 아버지는 일 중독자셨습니다. 아버지와 자주 교류를 하지 않았죠. 교류할 때는 꽤 잘 맞았어요. 아버지와 저는 서로 좋아했고, 아버지는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공통점이 많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죠. 제가 개인적 정체성을 구축하기 시작하자 그 관계가 흐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제 아버지는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어떤 면에는 아버지가 많이 열린 관점을 가지고 계셨지만, 어떤 면으로 보면 그 시대와 그 문화에 맞는 관점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다양한 선입견이 있었죠. 아버지가 아주 똑똑하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런 선입견을 품고 계셔서 답답했어요. 아버지의 지능이 아버지의 편견을 없애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보수적 정치관점이 그랬죠. 할머니는 빈민층이었고, 아버지는 노동자 집안에서 자라나셨습니다. 2차 세계대전 도중에 자라나서 여러 고생을 하셨어요. 아버지가 좋은 학업 성적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에 장학금으로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었죠. 하지만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노동자 계급 인식을 잊고 보수적인 관점을 취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관점 변화가 좋지 않다고 봤어요. 저는 사회주의적인 정치관을 가지고 있는데, 노동자 계급 출신 아버지가 사회주의자적 관점을 공유하지 않아서 실망하고는 했습니다. 아버지가 가진 편견의 예는 아버지가 가진 흑인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어요. 제가 흑인 남성을 사귀었으면 거부하셨겠죠. 아버지가 한국인들을 존중하고 편견이 없다고 이야기하셨지만, 한국인과 사귀었다고 해도 거부하셨을 겁니다.

팟캐스트: 말과 행동이 다르셨군요?

사샤: 네. 무의식적으로 그러셨습니다.

팟캐스트: 제 부모님과 비슷한 느낌이 드네요. 그런 행동을 보면 부모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궁금하게 되죠.

사샤: 네. 부모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하게 되죠. 모든 아이가 가진 걱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입양아들은 우리가 처한 상황 때문에 그 문제에 더 신경을 쓰게 되죠. 부모님이 저에게 기대하는 요구를 달성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부모님이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부모님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연극을 하게 되었어요. 부모님이 그 모습을 원했기 때문에 그 모습을 연기했죠. 청소년기에는 그러한 일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저 자신을 자각하고 정체성을 구축하게 되었는데 부모님은 그러한 면을 받아들일 수 없었죠.

팟캐스트: 입양아들은 형태를 바꾸는 데 익숙해지고 환경에 맞추는 데 익숙해지죠. 

사샤: 네. 그런 재능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생각해보면 축복이지만 저주라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에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지 신경을 써야 해요. 제가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로 그런 연기를 하게 되기 때문에 순간 제가 뭘 하고 있는지 놀라게 됩니다.

팟캐스트: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이 된다는 뜻이죠? 

사샤: 네. 사람들 비위를 맞추려고 하게 되죠. 제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으면 그런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모르는 사람을 단체로 만나거나, 약간 불안하다는 느낌이 들면 비위 맞추는 샤샤 라이더 연극을 하게 되죠. 제가 비위를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 아주 기분 나쁩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 자신을 엄격하게 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오래된 버릇은 없애기 어렵고, 요즘은 제가 비위를 맞춘다는 사실을 알죠. 비위 맞추는 일을 시작할지도 모르지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멈출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 런던에서 다른 한국계 입양아들을 만난 적이 있나요?

사샤: 아뇨. 런던에서 다른 한국계 입양아들을 만난 적이 없어요. 제가 온라인으로 찾아봤을 때 한국 전쟁 이후로 제가 영국으로 입양된 72명의 입양아 중 1명이었습니다.

팟캐스트: 놀랍네요. 아주 적은 숫자의 한국계 입양아가 영국으로 입양됐군요? 왜 그런지 알아보셨나요?

사샤: 왜 영국에서 한국 입양아를 아주 적게 받아들였는지 몰라요. 하지만 제 부모님의 경우에는 달랐죠. 제 부모님이 한국에서 거주하면서 일하고 계실 때 입양하셨습니다. 제가 지내고 있던 고아원은 유네스코에서 운영하고 있던 고아원이었고, 아버지는 유엔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쉽게 입양할 수 있었죠.

팟캐스트: 영국 시민권 문제는 어떻게 됐죠? 영국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나요?

사샤: 3살 반 때 우리 가족이 한국에서 영국으로 돌아왔죠. 그때 영국 시민권을 받았습니다. 관련 절차가 어땠는지 모르지만, 어머니가 관련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했던 방식이 저를 매우 불안하게 했어요. 입양아들이 정통성에 대해서 가지는 문제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죠. 양어머니가 영국 국적을 받을 수 있도록 기적을 만들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결과 제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영국 국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제가 백인이었다면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겠죠.

팟캐스트: 국적이 박탈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하셨나요?

사샤: 국적이나 여권이 박탈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무서운 분위기가 이야기에 배여 있었습니다. 거절을 당하거나 버림받을 수 있다는 느낌이 항상 들었거든요. 

팟캐스트: 진짜 영국인이 아니라는 식이었나요?

사샤: 네. 진짜 영국인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죠. 피노키오가 진짜 소년이 되고 싶어서 했던 이야기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이 입양해줬으니 고마워해야 하고, 자비에 고마워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나요?

사샤: 제가 운이 좋다고 교육받았죠. 영국은 한국보다 낫고, 영국인들이 한국인보다 낫다고 교육받았어요. 한국에서 살기보다 영국에서 살 수 있으니 운이 좋고, 한국이 나쁘다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백인 부모에게 입양되어서 나쁜 운명으로부터 구원받았고, 좋은 운명을 선물 받았다는 인식을 하게 됐죠.

팟캐스트: 그러한 인식에 대해서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샤: 지금 되돌아보면 제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점이 웃기죠. 전 동북아시아를 고대 세계라고 생각했고, 유럽을 구세계, 미국을 신세계라고 인식했어요. 영국의 역사와 식민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문제에 대한 무지에 대해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제국주의와 식민지가 고통과 문제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았죠. 동시에 제 일부는 당신들은 후진국 출신이고 나는 오래된 문명국 출신이라고 인식했습니다. 영국에는 오래된 역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영국 최초의 유대인 수상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30대에 수상이 되었는데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백인 위주의 영국 의회에서 큰 반감을 샀죠. 그가 취임 연설을 할 때 그 반감을 언급하기로 했습니다. “당신들 조상들이 진흙 속에서 뒹굴 때 내 조상들은 솔로몬의 신전을 지었습니다.” 그게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이죠. 제 문화적 유산은 오래되고 대단한 유산이고, 현재 영국인들이 그걸 이해하지 못하니 웃긴 일입니다. 그런 의견은 저에게 있어서 아무런 무게도 없죠. 어떤 사실에 기반을 둬 있지 않고 단순한 무지니까요.

팟캐스트: 30대에 런던으로 이주하셨나요?

사샤: 16살에 가출해서 런던으로 이주했죠. 

팟캐스트: 가출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나요?

사샤: 네. 그렇게 못 견딜 정도로 힘들었어요. 

팟캐스트: 어떻게 런던까지 가셨죠? 런던은 비정하고 차가운 도시인데요.

사샤: 지금 되돌아보면 제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젊었을 때는 무모하기 마련이죠. 

팟캐스트: 자기 스스로가 무적으로 느껴지는 때죠.

사샤: 네. 그렇습니다. 뭐가 됐든 제가 처해 있는 상황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서 뛰쳐나왔죠. 그리고 런던으로 갔어요.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큰 도시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아주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때는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성공하지 못하면 죽는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어떻게 런던에서 지내셨죠? 임시 숙소에서 지내셨나요? 친구라도 있었나요?

사샤: 런던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하지만 북 런던에 자식이 독립해서 방을 세놓는다는 광고를 봤어요. 아주 싼 방이었고 주 단위로 방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저금해둔 돈으로 기차표를 샀고, 일주일 치 요금을 냈죠. 

팟캐스트: 그래서 일주일간 지낼 곳이 생겼으니 일을 빨리 찾아야 했겠군요?

사샤: 제가 런던에서 얻은 첫 직장은 마을 중심에 있는 가게였죠. 약간 더 고급스러운 옷을 파는 양장점이었습니다. 제 나이를 속이고 취업했어요. 그때 영국에서는 주민등록증이 필요 없었죠. 그래서 주인에게 19살이라고 말했고 주인이 그걸 믿었어요. 같은 브랜드의 옷을 입고 들어가서 브랜드의 옷을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취직이 됐죠. 제가 뭘 하는지 전혀 몰랐지만, 판매일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억양이 취직에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시나요?

사샤: 네 물론이죠. 가게 손님들과 똑같은 억양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제가 고급 억양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취직하지 못했겠죠.

팟캐스트: 흥미롭네요

사샤: 제가 이방인이 아니라 그들의 일부로 인식되는 계기였습니다. 이방인은 적이지만, 그들은 안전하고 백인 중산층끼리 모여 있으면 안전하다는 인식이었죠. 제 억양이 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문이었어요. 영국에서 전화로 저와 이야기를 하면 백인 중산층 여성이 들립니다. 백인 중산층은 제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자 아주 운이 좋았다는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주었죠. 하지만 제가 인도계를 비롯한 이민자 사회와 교류하기 시작한 뒤에 제가 입양되었고, 백인 부모님과 영국에서 자라났다는 이야기를 하자, 이민자 대부분이 저에게 연민을 보였어요.

팟캐스트: 연민을 보였군요?

샤샤: 제가 무언가를 잃었으니까요. 이민자들처럼 무언가를 잃었죠. 물론 그 사람들이 어머니를 잃지는 않았지만, 고향을 떠나서 새로운 국가와 문화에 적응하려고 하고,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만난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반응을 받은 일이 아주 기이했죠. 

팟캐스트: 다른 유색인종 사회와 교류를 했던 경험은 어땠죠?

사샤: 약간 압도되는 기분이 들었어요. 저 자신의 슬픔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직접 마주하니 무섭기도 하고 제 감정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런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바로 연민을 표시하니 놀랐죠. 항상 강한 모습을 보이는 데 익숙했지만, 연민을 받는 일은 익숙하지 않았어요. 제 고통을 인식해야 했고, 인식 자체가 힘들었기 때문에 고통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 연민이 친절함이라는 사실도 알았고 이민자들과 백인들의 인식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알았지만 무서웠기 때문에 깊게 들어가지 않았죠.

팟캐스트: 이민자들과 다른 런던의 사람들이 샤샤 씨에게 친밀감을 느꼈지만, 샤샤 씨가 감당하기 힘들어서 감정적 연대를 거부했군요?

사샤: 사람들이 저에게 친밀감을 느끼기보다는 제가 제 나라와 문화에게서 괴리되었다는 사실에 동정심을 느꼈죠.

팟캐스트: 흠.

사샤: 제 교육, 양육, 삶의 방식이 제가 백인 여성처럼 행동하게 했죠. 사람들이 저의 상황에 있어서 동정심을 표했지만 동시에 제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가 아시아계 외모를 하고 있지만 제 행동은 백인이나 다름없었어요. 특히 백인의 특권을 사용하는 모습이 백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팟캐스트: 미국에서 산 지 얼마나 되셨죠?

사샤: 제가 28살 때 미국으로 이주했죠. 하지만 중간에 미국에서 상당 기간 동안 나가 있었어요. 지금이 미국에서 거주하는 두 번째 경험입니다. 

팟캐스트: 현재 미국이 인종, 사회 경제, 정치로 분열되어 있는데 샤샤 씨가 이 논쟁에서 어디에 맞는다고 생각하시죠?

사샤: 제가 이 논쟁에서 가장 맞는다고 느껴지는 곳은 전통문화입니다. 전 세계의 전통문화를 들여다보면, 여러 시대에 걸쳐서 같은 이야기를 해왔죠. 지혜를 이야기해왔어요. 우리 머릿속에 들어있는 가짜 생각들에 영향을 너무 심하게 받아서, 마음이 알고 있는 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미국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가 발전, 기술, 자본주의의 이름으로 마음이 절대로 지지해주지 않을 결정을 내렸죠.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사람, 자연,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사회가 거대한 기계장치로 변해서 모든 것을 잡아먹게 되죠. 우리는 이 사실을 아주 오랫동안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그 사실을 무시해왔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통에 있어서 일어나는 문제와 분쟁은 소통능력의 붕괴 때문이죠. 인간 모두가 가족이나 다름없고, 결국 큰 차이가 없어요. 우리 모두 과로, 공포,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공포와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희망과 공포가 있고, 그 감정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죠. 사람은 결국 전부 비슷해요.

팟캐스트: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에 친밀감을 느끼나요?

사샤: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 자체와 교류가 없어요. 뉴멕시코에는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가 얼마 없죠. 산타페에는 한인 교회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전 기독교인도 아니고, 제가 주변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미국인 정체성을 더 강조한다고 하더군요. 다른 나라에서 이민 오면 미국인이 된다고 하고, 그게 미국의 사상이죠. 유럽과 영국에서는 영국에서 태어나도 절대로 영국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겁니다. 영국인들이 저를 영국인으로 받아들이려면 여러 세대가 지나야 한다고 봐요. 반면에 미국에서는 미국에 와서 살고 있다면 미국인이라고 받아들여지죠. 그런 인식을 받아들이지는 못했어요. 미국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도 미국인이라는 생각이라는 들지 않습니다. 지금 미국 문화와 그 뜻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자기 자신을 영국인으로 인식하시나요, 좀 더 국제적인 사람으로 인식하시나요?

사샤: 복잡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요. 전 제가 영국인이라고 생각하죠. 영국에서 자란 영국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시아계라는 느낌도 들어요. 한국인 자체의 정체성을 가졌는지는 의문이 들죠. 한국 문화 자체를 많이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은 희미하지만, 아시아계의 정체성을 확실히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유럽인의 정체성도 가지고 있어요. 파리에서도 어느 정도 거주했고, 많은 유럽인 친구들이 있죠.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애정이 있고 콜롬비아에서도 거주했습니다. 히스패닉 정체성도 가지고 있어요. 특이한 점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저는 성격이 좋은 편이지만 프랑스어를 사용할 때는 성격이 상당히 더럽죠. 결국, 저에게 있어서 정체성은 인간의 정체성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에게서 분리된 정체성과 다시 연결되고 싶어요. 제 아시아 정체성과 다시 연결망을 구축하는 일이 중요하죠. 아시아인 정체성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입양과 관련된 감정을 정리하는 일도 중요했어요. 삶에 있어서 그 문제도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서 이 팟캐스트를 듣고 한국 입양아 정체성을 자각한 기분이 들어요. 이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러한 정보를 전혀 몰랐습니다.

팟캐스트: 이미 물어봤지만, 입양아 이야기에서 편안함과 친밀감을 느끼시는 이유가 무엇이죠?

사샤: 제가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해줬죠. 백인 위주 환경에서 자라난 입양아들은 극단적인 소외의 경험을 겪는 경우가 많아요. 어릴 때 왜 그런 소외를 겪고,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입양아들이 제가 겪었던 문제를 똑같이 겪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제 경험이 평범해지는 느낌이 들죠. 예를 들면 과도한 노력, 완벽주의자, 사회적인 편견 아래에서 양육, 아시아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 페티쉬화, 아시아 남성의 남성성 박탈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백인 위주 사회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듣고 자기 자신을 다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좋았죠. 이러한 이야기들이 이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었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들었습니다. 미네소타에서 온 사람이 70년대 영국에서 성장한 사람과도 똑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고, 같은 집단에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어요. 우리가 서로 몰랐지만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고, 제가 혼자가 아니고, 이상하거나, 괴짜가 아니라 평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죠. 저도 이상한 상황에 적응해야 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팟캐스트: 샤샤 씨, 입양아들이 입양아의 경험을 안개 속을 헤쳐 나오는 비유와 옷장 안에서 나온다는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고는 하죠. 샤샤 씨는 그러한 설명에 동감하시는 편인가요? 

사샤: 네 그런 설명에 동감하는 편이죠. 많은 사람이 제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백인 부모님을 밑에서 양육되었고, 백인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입양아 정체성을 탐구하지 못했죠. 제가 그 정체성을 피하고 있었어요. 고통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그 정체성을 탐구하려고 시작한 뒤로부터 여러 가지를 배웠고, 저 신을 인식하는 관점을 뒤바꿨습니다. 옷장 밖으로 나오는 비유에 동감하는 편이죠. 적어도 내부적인 단계에서는 그래요. 저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단계를 거쳤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숨긴 복잡한 감정을 처리하고, 들이고 정리할 수 있어야 했어요. 여러 요소를 압축시켜 놓고 무시하기보다는 치료와 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죠. 그러한 일 자체가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팟캐스트: 자기 자신을 좀 더 사랑하고 인정하게 되셨군요?

사샤: 네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감정을 억눌러 두면, 그 감정이 시간 속에 멈춰 있게 되죠. 어렸을 때의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고, 처리하지 않아서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 그 감정을 처리하게 되었어요. 감정을 처리하기 시작하자, 제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문제나, 부끄러워했던 문제가 제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죠. 많은 경우에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길을 열어준 셈입니다. 저에게는 잘못이 없었고, 이상한 상황에 대한 평범한 대응이었죠.

팟캐스트: 자아 찾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인간관계? 자아 찾기? 아니면 다른 문제라도 생겼나요?

사샤: 특정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흔한 변화를 겪었죠. 고통이 너무 심해서 더 기억을 억누르고 무시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야 했어요. 더 무시할 수 없었죠.

팟캐스트: 폭발할 기분이 들었나요?

사샤: 선택지가 없다는 기분이 들었죠. 저에게 선택지가 주어졌다면 이 문제를 바로 직시하지 않았을 겁니다. 결국,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더 참을 수 없었고 제 문제를 마주해야 했죠. 문제 해결이 무척이나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서 문제를 최대한 회피했습니다. 문제를 마주하고 나니 그 문제를 무시할 수 없었어요. 더 되돌아갈 수 없었죠.

팟캐스트: 무슨 일이 일어났죠? 일을 더 할 수 없었나요? 친구들과 교류를 할 수 없었나요?

사샤: 어떤 사람들은 업보라고 할지도 모르는 문제들이 동시에 일어났죠. 연애 관계가 실패했고, 얼마 있지 않아서 양어머니가 저에게 연락해서 말기 암 진단을 받았고, 6달밖에 못 산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영국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과 같이 지내면서 어머니를 병간호했습니다. 사실 어머니의 중병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겠죠.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리 셋 다 외동딸 외동아들이었고, 우리를 도와줄 친척이 없었어요. 부모님이 저에게 연락할 정도였다면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죠. 부모님을 돕고 싶었어요. 희생해야 한다는 느낌도 없었고, 바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팟캐스트: 그렇게 바로 부모님을 돕겠다는 결정을 내려서 놀랐나요?

사샤: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에는 놀라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애연가에 알코올 중독자셨습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이 도와 달라고 한 사실이 놀라웠나요? 그리고 샤샤 씨가 돌아가기로 한 일 자체가 놀라웠나요?

사샤: 어머니가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으셨어요.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손을 뻗지는 않았죠. 도와줄 수 있냐고 묻지 않았어요. 항상 어머니에게 있어서 존경했던 면은 어머니의 힘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단점 중 하나는 감정적인 연결이 부족하다는 점이었어요. 어머니가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힘들었겠죠. 어머니의 특별한 방식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렇다고 진짜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그걸 듣고 가고 싶어지셨군요?

사샤: 네. 그냥 바로 비행기에 타고 집에 돌아갔죠. 다른 선택을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딱히 놀라운 선택도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죠. 미친 사람이긴 절 키워준 사람이었으니까요. 

팟캐스트: 어머니를 사랑하셨군요?

사샤: 어머니를 사랑했죠. 어머니가 저에게 연락해서 기뻤습니다. 어머니가 말기 암 진단을 받으셨을 때는 이미 수명이 몇들 밖에 남아 있지 않았어요.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운이 좋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어머니와 연락을 하고 계셨나요?

사샤: 어머니와 계속 연락을 하고 있긴 했지만, 어머니와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어요. 어머니에게 저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에 교류 자체는 가벼웠습니다.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이야기하긴 했지만, 매우 표면적인 대화였죠. 그렇게 즐겁지 않은 교류였어요. 

팟캐스트: 어머니와 샤샤 씨 둘 다 어떤 결론에 도달하셨군요?

사샤: 네. 우리 둘 다 휴전을 선언했고, 무언의 합의에 도달했죠. 제가 어머니를 화나게 하지 않으면, 어머니도 저에게 공격적으로 나오지 않겠다고 했어요. 우리가 그러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긴 했지만, 그 결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깊이 사랑하지 않아도 제가 어머니를 깊이 사랑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이 동등하게 부여될 이유는 없으니 괜찮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어머니와 같이 보낸 마지막 시간은 어떠셨죠?

사샤: 끔찍했죠. 어머니가 죽어가고 계셨기 때문에 마지막 결정권을 가지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어요. 어머니에게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나쁘게 대했지만, 어머니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었어요. 암을 앓아서 죽는다는 궁극의 패를 가지고 있었죠. 

팟캐스트: 어머니와 입양에 대한 마지막 대화를 나누거나, 샤샤 씨가 느낀 고통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나요?

사샤: 아뇨. 전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나르시시스트였어요. 모든 문제가 항상 어머니 중심으로 돌아갔죠. 어머니가 암에 걸리고 난 뒤에는 모든 일을 어머니 중심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 문제에 대해서 어머니와 이야기할 가능성이 없었죠. 어머니를 깊게 사랑하긴 했지만, 어머니는 저를 깊게 사랑하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저에게 관심이 없었고 기대만 하셨습니다. 

팟캐스트: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자라나지 않았군요?

사샤: 아뇨. 금발이 되지도 못했고 부잣집 남자랑도 결혼하지 못했으니까요. 신데렐라가 되지 못했습니다.

팟캐스트: 어머니가 짜놓은 계획을 따라가지 못한 셈이군요?

사샤: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를 미워할 수 없었죠. 어머니도 그러한 가르침을 받고 자라셨으니까요. 어머니의 방식대로 제가 행복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잘못된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셔서 슬프긴 했죠. 

팟캐스트: 그렇게 말씀하시니 확실히 감명 깊네요. 우리 친부모나 친척들에 대해서 모든 입양아가 겪는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사샤: 그렇죠. 물론 모든 입양이 복잡하고, 입양아의 이야기는 전부 특별합니다. 다인종 간 입양은 더더욱 복잡하죠. 너무 다양한 이야기가 엮여 있어요. 현대 시대에는 입양아든 아니든 좋은 부모가 되는 방법에 대해서 모두가 각자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문제도 있죠. 

팟캐스트: 부모님에 대해서 아주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니 대단하네요. 

사샤: 지금 와서 어머니에 대해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운이 좋다고 생각하죠. 전 감정을 처리하고 받아들였을 때 부모님에게 가진 애정이 전부 사라질까 봐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죠. 문제는 시작할 때 그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어요. 가지고 있던 많은 환상을 놓아줘야 했습니다. 그 일은 항상 어렵죠. 놔줘야 했던 환상 중 하나는 어머니가 저를 사랑했다는 환상이었죠. 어머니는 절 사랑하지 않았어요. 어머니의 방식대로 저를 사랑했지만, 진짜 사랑은 아니었죠. 여전히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유지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일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죠.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보존하고 유지할 수 있을지 몰랐어요.

팟캐스트: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슬픔도 느끼셨겠지만, 많은 입양아는 그 경험이 깨달음을 얻게 해주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샤샤 씨는 어떠셨나요?

사샤: 아버지는 어머니가 암에 걸리기 전에 뇌졸중에 걸리셔서 좌뇌 기능이 날아가셨죠. 아버지는 아직도 살아 계시지만, 제 아버지였던 사람은 아닙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셨어요. 그래서 실질적으로 생각해보면 제 양부모 두 분 다 잃었다고 생각하죠. 저는 결혼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어요. 다시 고아가 된 셈입니다. 전 현재 48세이니 딱히 문제는 되지 않아요.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었죠. 어머니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제 면모가 어머니에게 상처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한, 제 안에 어머니를 화나서 하거나, 슬프게 하거나,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아이가 있는 기분이었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주 자유로워진 기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지만, 좌뇌가 마비되어서 저를 나쁘게 판단하실 수 없죠. 아주 낡게 들리고 뉴에이지풍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모두가 내부의 아이에 관해서 이야기해요. 저도 내부의 아이를 건강한 방법으로 키운다는 느낌이 듭니다. 양부모님에게 받을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을 내부의 어린이에게 제공할 수 있죠. 아직도 해결해야 하는 일이 많지만 제가 직접 해결할 수 있어요. 아주 긍정적인 자율성이 부여되었습니다. 누구도 제 삶을 조정할 수 없죠. 저만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내부에 사랑, 치료, 이해가 필요한 부분을 직접 마주 보고 해결할 수 있어요. 그런 점이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그 치료 방법이 궁금하네요. 샤샤 씨 자신을 위해서 뭘 하고 계시죠? 

사샤: 아주 많은 일을 하고 있죠. 현재 2살 먹은 강아지와 같이 살고 있어요. 살면서 항상 개를 원했지만, 부모님은 결국 개를 입양하지 않았습니다. 어른이 되고 난 뒤에는 개를 키울 장소가 없었죠. 아버지를 돌보던 와중에 아버지를 돌보는 일이 끝나고, 다시 혼자 살게 되면 반드시 개를 입양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강아지를 입양하고 난 뒤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원하던 욕망을 충족할 수 있었어요. 제 안의 강아지를 원했던 소녀에게 강아지를 줄 수 있었죠. 

팟캐스트: 강아지 이름이 어떻게 되죠?

사샤: 제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강아지 이름은 부(Boo)에요. 6kg이 나가고 백색 털을 가진 치와와와 퍼그 잡종이에요. 어머니와 같이 개 농장에서 구출된 강아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와 부 둘 다 힘든 시작을 겪은 셈이죠. 제 삶에서 아주 소중한 존재입니다. 어머니의 역할을 하게 된 셈이죠. 

팟캐스트: 무슨 소리인지 알겠네요.

사샤: 어린아이의 어머니가 되려는 욕구는 없었지만, 항상 강아지를 원했어요. 

팟캐스트: 강아지는 조건 없는 사랑을 주기도 하니까요.

사샤: 그렇죠. 항상 만나면 기뻐해 주고 좋은 기분 상태를 유지해주는 훌륭한 상대이죠. 

팟캐스트: 흠

사샤: 거기에 나쁜 말도 하지 않죠.

팟캐스트: 딱히 다른 모습을 취할 필요도 없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면 되니까요.

사샤: 그렇죠.

팟캐스트: 한국에 돌아가신 적이 있나요?

사샤: 아직 한국에 돌아간 적은 없어요. 제 마음속 일부가 한국을 체험해 보려고 하고 있죠. 한국 문화보다는 한국의 땅 그 자체를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세계 곳곳의 땅과 교류를 하면서 여러 감명 깊은 경험을 했거든요. 어떤 곳에 가면 기분 좋은 경험을 하기도 했고, 반대로 다른 곳에서는 땅이 저를 밀어내는 느낌이었죠. 한국 땅과 그 환경에 제 몸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상황이 맞아 들면, 제가 한국에 가겠다고 마음먹고 실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한국에 가게 될 상황이 있다면, 한국에 가게 되겠죠.

팟캐스트: 샤샤 씨의 입양 서류를 확인하거나, 샤샤 씨의 기원을 조사해볼 생각은 없으셨나요? 

사샤: 양부모님이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라서 절 돌볼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저에게 해줬죠. 하지만 친아버지가 진짜 가난한 농부였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제 친어머니가 진짜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어요. 양어머니가 여러 가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친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알았죠. 아주 오래전부터 본능적으로 친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고, 친족을 찾아보려고 노력하지 않았어요. 20대에 인도네시아에서 사람들과 여행을 했는데 사람 중 1명이 이 섬에 아주 유명한 무당이 있는데 만나러 가보지 않겠냐고 말을 꺼냈죠.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지만, 한번 해보자고 하고 갔습니다. 시골에 있는 무당의 거처까지 갔어요. 다른 사람들은 저에게 어떤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저는 아무런 기대도 없이 갔죠. 무당의 반응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를 보더니 통역가를 통해서 당신 친어머니는 이미 죽었지만, 친아버지는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친아버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죠. 모두가 아버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상한 소리이긴 하지만, 1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친아버지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았죠. 하지만 무당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친아버지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여자라서 그럴지도 모르고, 특이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친아버지를 만나는 일은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죠. 하지만 만약에 친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면 아주 대단한 경험일 겁니다. 

팟캐스트: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탐구해 보신 적 있나요?

사샤: 개인적으로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죠. 우리가 어머니 안에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씨앗을 뿌릴지는 몰라도, 탄생은 어머니 내부에서 일어나기 마련이죠. 거기에 여성이기 때문에 다인종 간 입양아로서 저 자신을 볼 수 있는 상대를 원했어요. 이해될지는 모르지만 그런 상대를 찾은 곳은 여성적인 장소였습니다. 어렸을 때 자라면서 좋은 남자를 자주 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남자에 대해서 그렇게 좋은 관점을 가지지 않고 자랐다고 생각합니다. 약간 기이하게 들릴 수도 있는 소리지만, 본능적으로 친아버지가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입양 서류를 직접 확인하셨나요? 관련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나요?

사샤: 제 입양 서류 자체가 문제가 많았죠. 제가 지내고 있던 고아원은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는 한국 수녀들이 운영하고 있었어요. 제가 공식적으로 입양된 시기는 영국에서 3살 반 때 공식적으로 부모님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영국 국적을 받았죠. 그래서 관련 정보가 거의 없어요. 양어머니가 저에게 말해주시길 제 생일을 어머니가 선택해야 했다고 합니다. 고아원에서 제 생일을 몰랐고, 가난한 농부 이야기를 해줬다고 했죠. 입양 절차와 관련해서 항상 비밀과 불편함이 공존하고 있었어요. 30대 후반에 겨우 입양 서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제 출생지가 그냥 경기라고 쓰여 있었죠. 제가 이해하기로 경기는 서울 주변 지역이에요

팟캐스트: 그렇죠.

사샤: 제 예측으로는 영국 국적을 얻기 위해서 입양 서류에 제 출생지를 적어야 했는데, 부모님이 출생지를 몰라서 한국 서류에서 지역을 하나 뽑아와서 적어냈다고 봐요. 도시나 마을의 이름을 적었다고 생각하셨겠죠. 하지만 사실 도의 이름이었습니다. 거기에 고아원이 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죠. 고아원 출신 다른 입양아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관련 정보를 얻었어요. 마지막 정보는 양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저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팟캐스트: 그 정보는 어떻게 알아내셨죠?

사샤: 꿈을 통해서 알아냈습니다. 저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다양한 꿈을 꿔요. 사실에 기반을 둬 있는 꿈이라는 사실을 알았죠. 양아버지에게 정보원을 숨기고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때 아버지는 대화 자체는 힘들었지만, 여전히 지성을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단어를 말할 수는 있었지만,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죠. 같이 아침을 먹으면서 입양 관련 조사를 했는데 저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울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버지가 큰 죄책감을 느끼고 살아오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죠. 아버지가 비밀을 숨겨 오셨고 그 사실을 밝혀서 안심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정보를 많이 알고 계셨는지는 몰라요. 정보 자체가 적었다고 생각하고 뇌졸중이 오셨기 때문에 관련 정보를 이야기해주실 수 없었죠. 제가 미치지 않았고, 감정, 꿈, 관련 정보가 사실을 알아서 기뻤습니다.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저 자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팟캐스트: 꿈에서 쌍둥이 형제를 만나거나 그러셨나요?

사샤: 꿈속 삶에서는 시간이 연속적으로 흘러가지 않아요. 형제를 만나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죠. 제가 꿈에서 본 광경은 아기일 때 겪은 이별과 관련된 고통이었습니다. 형제를 기억했던 어린 시절에 느꼈던 감정도 섞여 있었어요. 제 꿈속에서 6살의 저는 형제를 기억하죠. 특정 나이를 넘어서자 살아남기 위해서 형제 관련 정보를 잊어버려야 했습니다. 꿈속의 삶은 그러한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이었어요. 꿈을 통해서 미래를 예지하는 일은 없었고,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일도 드뭅니다. 삶 자체가 무척이나 흥미롭기 마련이죠. 그래서 무당이나, 점을 일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던 이유도 거기에 있어요. 전 미래를 알고 싶지 않고, 사람들이 특정한 생각을 주입하는 일도 원치 않습니다. 세상사는 운명대로 흘러가기 마련이고, 다양한 방향으로 미래를 준비할 수 있지만, 결과를 확정할 수는 없죠. 결과를 확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미래는 불확정해도 괜찮아요. 아기일 때 형제와 떨어진 일이 큰 고통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그 기억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없었죠. 북미 원주민들이 영혼을 되찾는 일이라고 부르는 행동을 통해 기억과 잃어버린 부분을 찾아가면서 가장 최초의 관계를 맺은 상대와 더 가까워지는 기분입니다. 그러한 관계가 물리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모르죠. 현실에서 형제와 다시 만날지는 몰라요. 제가 아는 일은 육체와 영혼에 그 관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관계와는 계속 교류할 수 있죠. 

팟캐스트: 그래서 꿈과 관련된 일을 직업으로 삼으셨나요?

사샤: 네. 전 꿈 분석가입니다.

팟캐스트: 꿈 분석가라는 직업은 뭘 하는 직업이죠?

사샤: 현대 사회에서 꿈 분석가라고 하면 칼 융을 많이 생각하죠. 현대 서구 문명에서는 확실히 칼 융이 꿈 분석을 시작했어요. 융이 꿈 분석을 통해서 치료하는 방식을 구축했습니다. 하지만 꿈 분석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인류의 전통이에요. 전 세계의 사람들과 문화가 시대에 걸쳐서 꿈을 통해서 가르침을 얻으려고 했죠. 꿈 분석가로서 하는 일은 꿈을 번역하는 일입니다. 꿈의 언어는 집단적이지만 동시에 개인적이에요. 꿈에 자주 나타나는 요소는 사람들의 역사에 있어서 계속 나타났던 요소들이죠. 우리가 나무에서 내려왔을 때부터 쌓여온 정보입니다. 거기에 개인적인 서사도 존재해요. 개인적으로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서 겪은 일이 꿈에 반영되죠. 꿈 분석가로서 하는 일은 꿈을 번역하고 안내하는 일입니다. 꿈에는 시간, 문화, 장소를 뛰어넘는 인간으로의 본질이 존재해요. 꿈을 탐험할 때 꿈의 언어를 번역해주고 안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죠. 꿈을 혼자서 탐험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팟캐스트: 사람들과 같이 꿈에 대해 상담을 하시나요?

사샤: 네. 사람들과 꿈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꿈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죠. 나중에 시간이 가면서 개개인이 개인의 꿈 지식과 사회가 모아온 꿈의 지식을 배우게 됩니다. 가면 갈수록 제 역할이 줄어들어요. 궁극적으로는 꿈과 관련된 도움을 줄 필요가 없어져야 하죠. 다른 면으로 보면 꿈을 탐구하는 동료가 되어주는 셈입니다. 꿈에 들어가면 항상 혼자이죠. 현실로 돌아오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 어려운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 있고, 관련해서 소외될 수가 있어요. 꿈에서 아주 힘든 경험을 했을 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으니 자기 혼자서 고생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단순히 사람을 가르치는 일만이 아니라 꿈과 관련해서 교류를 나누는 일이기도 하죠. 그런 꿈속의 경험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되어주고, 그 사람을 이끌어주는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외로운 경험이 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어요.

팟캐스트: 사람들에게 그런 꿈 관련 교육을 자주 해줘야 하나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인가요?

사샤: 사람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가르쳐 줘야 하고 두 가지 부류로 나뉘어요. 삶에 있어서 특정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죠. 사람들은 꿈이 특정한 문제에 대해서 조언을 해주려고 한다고 생각하지만, 무슨 조언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저와 1번만 이야기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그 사람들에게는 꿈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있지만, 여러분이 뭘 해야 하는지는 모른다고 이야기를 해주고 끝나는 경우가 있죠. 다른 사람들은 꿈의 삶이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꿈을 정기적으로 꾸고, 꿈과 관련된 이야기를 정기적으로 나눕니다.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꿈속에서의 경험은 현실에서의 경험만큼 중요하죠. 이 사람들과 꿈속 여행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일은 무척이나 쉬워요. 물론 제가 그 사람들에게 몇 가지 중요한 점을 가르쳐줘야 하지만, 동시에 이 사람들은 꿈에 이미 익숙하므로 적응도 빠릅니다. 꿈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지만,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팟캐스트: 이게 일종의 치료 요법인가요? 이런 활동을 하게 된 배경이 있나요?

사샤: 융 계통 심리학을 런던에서 배웠습니다. 활동 방식이 평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평범한 일에는 관심이 없죠. 일주일마다 제 사무실에 와서 상담해야 하지 않습니다. 저는 친구로서 이 일에 접근하고 있어요. 매주 올 이유는 없죠. 사람들이 오고 싶을 때 예약을 하고 옵니다. 사람들이 꿈을 꾸지 않거나, 꿈 상담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예약을 하지 않고 서로 만나지 않아요. 만약에 꿈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을 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죠. 서구 학문적 관점으로 보면 제 교육 자체는 융 계통의 심리학과 분석에 기반을 두고 있어요. 하지만 저 자신은 꿈 분석가이자, 해설가, 그리고 친구라고 저를 정의하죠.

팟캐스트: 우리 꿈이 왜 존재한다고 생각하시죠?

사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하는 일이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융이 비유하기를 정식을 빙산이라고 보면 물 밖으로 나온 빙산의 끝이 우리의 의식이에요. 그 밑에 거대한 빙산의 본체가 있지만 물 밑에 있으므로 우리는 보지 못하죠. 그 가려진 빙산이 우리의 무의식이고 우리의 삶을 조정합니다. 꿈은 우리가 무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이죠. 꿈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점을 보여준다고 했을 때의 뜻은, 꿈이 우리가 더 큰 그림을 보게 도와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는 일과가 의식적으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죠.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 일들이 사람의 삶에 손해를 끼칠 수 있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알아야 할 정보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홍보하실 웹사이트가 있나요?

사샤: 아뇨. 없어요. 지금까지 제 작업은 개인적 추천과 입소문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저에게 연락하고 싶다면 꿈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환영합니다. 첫 상담에서는 서로 맞을지 확인하기 위해서 전화로 무료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요. 제 이메일은 saschia.ryder@gmail.com입니다.

팟캐스트: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사샤: 저도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기뻤어요. 이 에피소드 청취를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