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이름은 에릭 풀(Eric Poole)입니다. 55살이고요 트윈시티(역자 주: 미국 미네소타주에 있는 미네아 폴리스 시와 세인트 폴 시를 말한다) 바로 남쪽에 있는 노스필드에 살고 있어요. 벌써 23년이나 살았네요. 큰 아이는 루치아라고 지금 아리조나 대학 1학년이에요., 둘째 말콤이 고등학생, 셋째 마일스가 중학생이라 매일 얼굴 맞대는 녀석들이고요. 아이들 엄마의 이름은 메리에요. 파고와 무어헤드 쪽 출신이죠. 대학에서 만났어요. 제가 노스다코타 대학을 다녔거든요. 풋볼 장학생으로요. 거기서 항공학을 접했죠. 아니 항공학이 절 찾아냈다고 해도 맞을 거에요(웃음). 그 뒤로 파일럿이 되었고 지금은 뉴욕에 베이스를 두고 있는 젯블루 항공사에서 조종사로 일하고 있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최고 조종사인데 다른 조종사들을 관리하는 역할이에요. 요즘은 새로 취항하게 된 뉴억공항 (Newark)을 기반으로 인사나 운영에도 관여하고 물론 비행도 하고요. 벌써 18년째 근무하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시간이 아주 짜릿한 비행이었다고나 할까요? 제 가치와 신념과 잘 맞는 회사를 만났어요. 아주 진보적이고 제가 추구하는 방향과 잘 맞아요. 처음에 채용됐을때는 거의 스타트업이나 다름 없는 작은 회사였거든요. 그랬기 때문에 제가 더 많은 역할을 할수 있었고 아주 재밌게 일해왔어요. 마치 회사가 제 일부와도 같다고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다들 입에 올리기 꺼려하는 주제가 있잖아요. 미국내 민간비행사에 흑인 조종사를 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요.
흑인 조종사 뿐만 아니라 유색인종 조종사 자체가 드물죠.
백인남성 일색인 분야에서 일하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
미네소타에서 단련이 되어서 그런지 별로 힘들진 않아요(웃음). 어딜 가나 항상 제가 “유일한” 상황에 익숙해있거든요.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훈련이 되어 있고 어릴때 한국에 있었을때에도 항상 주변인이었어요. 제 존재가 시작된 순간부터 이방인으로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깨달은것 같다고나 할까요?. 나만의 조타실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 처럼요.
그런 측면에서 제가 스스로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제가 일하고 잇는 이 분야에서 여성들과 유색인종들이 조종사가 될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하고자 노력했어요. 제일 큰 걸림돌은 역시 돈이에요.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들어요. 대학에서 장학금을 최대한 다 받았어도 간신히 학비와 기숙사비만 댈수 있었고 조종프로그램은 아예 별도였어요. 4년제 대학 학비의 두배 가까이 되는 비용이 조종훈련에만 들어가니까요. 그러니 굉장히 큰 걸림돌이죠. 두번째 걸림돌은 이 분야에 이미 몸을 담고 있는 가족이나 혹은 같은 인종의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기회는 커녕 보고 배우거나 영감을 받거나 할수 없는 거죠.
그래서 젯블루 와 함께 관련해서 많은 일을 하고 있어요. 회사에서 다른 흑인항공학종사자들, FAA(역자 가칭 : 미국 연방 항공국) 그리고 ACE(역자 가칭 : 미 항공 교육 협회) 와 연계해서 캠프와 같은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참여하게 됐죠. 다른 경로로는 전혀 조종학을 접해볼 기회가 없는 학생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죠.
비행을 마친 후에 승객들이 조종사가 유색인종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의의의 얼굴을 하는 것을 보며 은근히 고소했던 적은 없나요?
안 그래도 다른 흑인 조종사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가 있어요. 우리 항공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중에 하나가 파일럿들이 조종실에서 나와서 승객들과 직접 인사하기에요. 그래서 젯블루를 타시면 파일럿들이 보딩시에 입구에서 인사하는 것을 보실수 있어요. 이륙후에 안내방송으로만 인사하지 않고요. 처음에는 좀 떨리는데 갈수록 익숙해져요. 20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승객들하고 이런 저런 대화도 나누게 되었고요. 유색인종 조종사를 대하는 승객들의 반응이 대략 두 종류에요. 한가지 자주 일어나는 경우가 제가 흑인이라서 저를 조종사로 보지 않는 경우에요. 다른 한가지는 제가 흑인이라는 사실이 사람들한테 어떤 큰 감흥을 주는 경우고요. 어느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승객들이 보딩할때 인사를 하고 있었는데 한 여성 흑인여성노인분이 맨 앞자리에 타셨어요. 제가 안내방송을 마치자 그 분이 다가와선 떨리는 손으로 저를 잡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손을 내밀었더니 저를 안아주시더라고요. 제가 너무 자랑스러우시다며 남편분도 조종사가 되고 싶어 했다고. 제가 오늘 이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을 남편이 알면 아주 자랑스러워할거라고요. 저도 뭐랄까 가슴이 울컥했죠.
한편으로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휠체어를 타고 어르신이 타시고 아내분이 같이 타셨는데 가방을 무거워하시길래 제가 가방을 머리 위에 짐칸에 넣어 드리고 자리 찾는 것을 도와드렸죠. 그때 기내 사무장이 마침 제자리에 없었거든요. 그때 지상직 카운터 직원분이 오더니 저한테 “기장님 이제 다른 승객들이 탑승해도 될까요?” 라고 묻길래 그러라고 했죠. 일단 사무장한테 다시 한번 확인하라고요. 그랬더니 그 아내분이 당신이 기장이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옆에서 남편분이 “이 검*이가 올랜도까지 조종을 한다고?” 라고 하는 거에요. 그 아내분이 너무 당황하시며 목소리좀 낮추라고 남편을 꾸짖으셨어요. 다른 직원들 모두 아연실색을 했죠. 조종실에 들어갔더니 젊은 제 부기장이 도데체 지금이 몇년도인데 아직도 저런 말씀을 하냐며 황당해하더라고요. 그분 나이를 생각하면 제가 속상해 할일은 아니죠. 악의가 있어서 저를 그렇게 부른건 아닐테고 뭐랄까 아직 세상이 바뀐걸 모르시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날 다들 같이 저녁을 먹는데 굉장한 안줏거리가 되어줬죠. 그런 일들이 전혀 신경이 안쓰인것은 아니지만 좋은 쪽만 생각해야죠. 저를 바라보며 감동을 받으시는 분들이 계시기도 하니까요. 그분 남편분은 조종사가 되고싶어 하셨다는데 아마도 기회조차 얻지 못하셨을테니까요.
얼마전에 CNN에서 닐 디그래스 타이슨(Neil Degrasse Tyson)의 인터뷰를 봤어요. 진행자가 유일한 흑인 천문물리학자됢에 대해서 물었어요. 어린 세대들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하는 질문을요. 저도 비슷한 상황이잖아요. 그의 대답이 제가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것이더라고요. 그 대답이 뭐였냐면 조금 뒤집어서 생각해보자였어요. 유색인종 어린아이들이 우리의 존재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대로 백인들이 우리가 이런 위치에 있는 것을 보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고요. 왜냐하면 결국 경제를 움직이고 정책을 만들고 판을 새로 짜는 건 그들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수행할수 있는 그룹으로서 그들이 우리를 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고요. 저도 항상 그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왔어요. 여성이나 유색인종들을 쉽게 보기 힘든 위치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을 백인들에게도 보여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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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진짜로 일어났던 일인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는건지 자신있게 말하기가 힘들어요. 꿈만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어릴때의 상황인식이 분명하지 않았을수도 있고요. 그냥 분명하지 않아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엄마와 의정부에 살았던 기억이에요. 의정부는 한국의 DMZ와 서울 사이에 있는 도시 이름이에요. 미군부대가 있고요. 그곳을 지나는 냇가가 있었어요. 이 이야기를 와이프한테 해주면서 제 첫기억이 하필 버려졌다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물 한가운데 널찍한 바위가 있었는데 비가 많이 오면 수위가 상승해서 안보이다가 가물때는 물밖으로 드러나는 그런 바위였어요. 위험해서 사람들도 많이 빠져죽는 그런 곳이어서 어린애들은 절대 근처에 가지 말라고 하는 곳이었죠. 비만 많이 안오면 아주 아름다운 그런 곳이었죠. 어느날 엄마하고 같이 거기에 간 기억이 나요. 자리를 깔고 바위위에 앉아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마도 제가 잠이 들었나봐요. 잠에서 깨보니 엄마는 없고 그래서 막 울었어요. 엄마가 아마 잠시 자리를 비웠었을거에요. 아무튼 그게 제 첫 기억이에요. 그 다음 기억은 제가 잡지 Men’s Journal에서도 밝힌 이야기인데 엄마와 함께 기차를 탔는데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쉬쉬하던 기억에요. . 흑인 혼혈이 분명해보이는 아이를 앉고 있었으니까요.
또 그 후에 기억난 것이 함께 모여살던 정착촌 같은 것이 있었어요. 한국에 돌아갔을때 알게 되었는데 그곳의 이름이 텍사스 촌이었어요. 텍사스가 그곳에서는 성매매를 경멸적으로 부르는 말이더라고요. 그 곳에 사는 아이들은 모두 흑인 혼혈아이들이었어요. 그 안에서는 사람들이 저희를 잘 보살펴줬어요. 다른 한국 아이들과는 전혀 접촉이 없을 정도로요. 아마도 그때가 제 인생에서 저랑 비슷한 사람들하고 살았던 유일한 때인것 같아요. 우리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당할 뻔 했던 많은 부정적인 경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줬죠. 그 두가지가 제가 지니고 다녔던 기억이에요. 많은 부분이 분명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엄마는 기억나요.
엄마는 어떤 분 이었나요?
그게 엄마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혹은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자세한 사항은 기억나지 않고요. 마야 안젤루(Maya Angelou 미국의 유명 시인)가 한 말 중에 사람들은 니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가 아니라 니가 어떤 기분이 들게 만들었는지를 기억한다” (“It’s not how, what people say or what they do, it’s how they make you feel.”) 는 말이 있잖아요. 저도 그 느낌만 기억해요. 어린아이였으니까 엄마와 나의 삶을 어떤 언어의 형태로 기억할 수가 없었을테고요. 하지만 엄마를 생각하면 그냥 따스했던 것과 나를 돌봐줬던 것과 엄마가 나를 보호해줬던 것등의 감정이 기억나요. 그래서 엄마가 죽은 것을 알았을때 엄마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돌아가셨거든요. 너무 슬펐고요. 아마 네살쯤 됐었을 거에요.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해줬군요.
네. 아주 처음부터요.
그럼 엄마가 갑작스레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한국에 계속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어떤 근거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항상 미국에 가야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한국에 계속 산다면 엄마와 나 둘다의 앞날이 암울할거라는 것을 알았죠. 굉장히 가부장적인 사회였고 지금의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을테니까요. 극도의 빈곤한 제 3세계였죠. 제가 어릴때는 포장된 길도 아주 드물었어요.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남자들이 분뇨를 파다가 논에 거름을 줬던 것이 기억나요. 아주 낙후됐었죠. 이 모든 일이 한 세대안에 일어난 변화니까요. 그런 사회였으니 자신들을 위해 싸우러 와준 외국인 병사들이 뿌린 씨를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을거에요. 엄청난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겠죠. 그래서 미래가 밝지 않을거라는 것을 알았죠. 학교를 갈 기회도 못 얻었을테고 그래서 엄마가 어떻게든 미국으로 보내려고 했었던것 같아요. 아빠가 당연히 미군이었겠죠. 그래서 그랬는지 미군 부대 바로 주변에 모여 살았고요.
“모호한 상실(Ambiguous loss)”이라는 말이 있어요. 엄마가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것 같은데 마을사람들이 화장을 해서 모셨나요? 엄마가 돌아가신 것을 아는데 고인을 추모할러 방문할 곳이 없다는 사실은 어떤 느낌인가요?
그런 쪽으로 생각을 많이 해보진 않았어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생존에 직면했죠. 성인이 된 지금에야 이야기해볼수 있는 경험들이죠.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것은 분명히 알았던것 같아요. 엄마를 다시 볼수 없다는 것말이에요. 강건너에 엄마가 자주 다니던 절이 있었었어요. 제가 불교에 대해서 아는 건 하나도 없지만 엄마가 성매매를 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영적인 충족을 위해 절에 다녔던 거죠. 아마도 누군가가 설명을 해줬었겠죠. 엄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요. 그러나 이제 앞으로 엄마 없이 살아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죠. 매일 혼자 지냈는데 그게 어느 정도 기간이었는지 시간개념도 잊었고요. 한동안 마을 사람들이저를 돌봐줬어요. 엄마가 없을때 저를 돌봐주곤 하던 할머니도 계셨고요. 어떤 공동체가 있었군요. 네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나서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런 의식들이 있었죠. 그리고 혼혈아이들을 키우는 다른 집도 있었어요. 저보다 큰 애들이 있는 집에서 같이 지낸 것도 기억나는데 그집 아들이 저를 많이 때렸어요. 아무튼 당시 아이들은 그냥 어떤 지도나 보살핌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그냥 존재했었던거죠. 마치 소설 파리대왕 처럼요.
어머님과 다른 여성분들이 국가가 주도한 성매매종사자 였다는 사실도 언급해야 할것 같아요.
맞아요.
한국과 미국이 합작으로 힘든 환경에 놓인 여성들을 미군들을 위한 성매매를 하도록 주도했죠.
제가 강연이나 인터뷰등을 하게 될때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제 존재자체가 국제 정치학상으로 제일 안좋은 형태의 부산물이라고요. 한국전쟁으로 인해 두 나라가 공조하게 되었고 가난한 여성들을 성매매로 이끌고 거기에 미군이 가담했죠. 두 나라가 공모해서 여성들의 성병유무 검사를 실시하고 확인증을 발급했으니까요. 군인들을 보여주라고요. 그리고 그 공조의 부산물로 저 같은 어린아이들이 태어나게되었는데 그에 대해선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죠. 참 서글프죠.
그리고 그와 똑같이 일이 베트남에서도 벌어졌죠. 같은 이야기의 베트남 버전이요. Men’s Journal에 나간 제 기사가 입소문을 탔을때 어떤 젊은 여자분이 자기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다고 연락을 주셨어요. 그래서 아마 한국인아니면 베트남인인가 햇죠. 보통 그쪽 분들이 많이 연락을 주시니까요. 그랬는데 사실은 그 분이 동유럽출신이셨어요. 아버지가 소련군 군인 이었대요. 비슷한 일이 동유럽에서도 벌어진 것이죠. 그때 뭐랄까 한대 맞은 것 같더라고요. 미군이 주둔했던 곳이라면 그 어떤 곳에서도 이런 경우가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딸까요. 그리고 비단 미군 뿐만이 아니라 어떤 형태의 군대도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결국 제일 최전선에서 고통 받고 그 후폭풍 을 감당하는 것은 여자들과 아이들이니까요.
다른 혼혈아이들이 많이 있는 마을에서 자랐다고 했잖아요. 그러면서도 그곳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도 언젠가는 미국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하면서요. 혹시 미군 병사 특히 흑인병사들의 보살핌을 받기도 했나요 그래서 미국과 이어져있다고 느낄 수 있게?
제가 있던 마을에는 흑인 병사들이 많이 찾아왔었어요. 영어에도 그때 조금 친숙해진것 같고 음악이나 미국의 흑인문화나 패션스타일등이 낮설지 않았어요. 미국에 대한 저의 어떤 인상이나 관점 같은 것이 그때로부터 시작됐다고도 할수 있을거에요. 그 뒤로 홀트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가게 되었는데
제임스 싱글리(James Singly)라는 병사가 자주 찾아왔었어요. 모두 그를 그냥 싱글리라고 불렀고 또 애칭으로 Sergeant Pig (역자 의역 : 돼지 하사)라고 불렀어요. 덩치가 엄청 컸거든요. 그가 오면 모두 매달리고 올라타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흑인 혼혈 아이들한테 특별한 관심을 보였던것 같아요. 그도 그렇게 말했고요. 제가 Men’s Journal 일로 한국에 다시 돌아가 당시 고아원을 운영했던 몰리 홀트를 만났을때 그도 그랬어요. 싱글리가 흑인소년들만 좋아한다고 사람들이 불평했었다고요. 그런데 그녀도 그러더라고요. 흑인애들이 싱글리를 제일 필요로 했었다고요. 왜냐하면 입양이 되는 시기가 정해져 있는데 백인 혼혈애들은 들어오자마자 금방금방 입양이 되어서 나갔죠. 들어온지 몇달도 안되어서 유럽으로 많이 갔어요. 덴마크,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로요. 물론 미국이랑 캐나다로도 많이 갔고요. 물론 그때도 이런 사실들을 말로 표현하거나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던것은 아니지만 그냥 다들 알았죠. 그래서 백인혼혈애들하고는 안 놀았어요. 금방 갈거니까요. 그리고 같이 놀수 있었던 한국애들은 신체장애든 지적장애든 장애를 가진 애들 뿐이었고요. 고아원 전체를 통틀어서 말이에요. 입양이 되어야 하는데 혼혈이라고 또는 나이가 많다고 입양이 안되었으니까요. 그 사실을 싱글리가 너무 잘 알았던 거죠. 서울 시내쪽에 조금 큰 애들이 숙식하는 시설이 있었어요. 나이가 차서 입양이 되긴 글른 아이들이 모여 사는 일종의 그룹홈 같은 곳이요. 싱글리가 그곳도 종종 방문해서 아이들과 놀아줬어요. 슈바이처 같은 사람들을 박애주의자라고 하잔아요. 싱글리도 그런 셈이었죠.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자기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위해 자기의 휴일을 반납 한 거죠. 동기가 뭐였는지는 모르죠. 물어볼 기회도 없었죠. 미국으로 오면서 싱글리를 다시 못 만나게 됐으니까요. 물어봤어야 하는데 아쉬워요.
싱글리가 어떻게 대해줬는데요?
엄마랑 똑같았어요. 다정했고 잘해줬어요. 그때도 알았던것 같아요. 이 분이 여기에 올 의무가 없다는 것을요. 한번씩 빼먹는 토요일도 있었거든요. 하루종일 기다렸는데 안온적도 있었어요. 당연한거죠. 그런데 그런날은 우리들이 엄청 낙담했죠. 뭐랄까 한동안은 싱글리를 만나는 것이 우리의 존재이유같기도 했달까요. 그와 있을때는 우리가 이렇게 사회에서 내쳐진 혹은 잘못 태어난 아이들이라는 것을 잊을수 있었고 누군가와 진정으로 속한다고 느낄수 있었어요. 그때 그곳에 있던 아이들을 대신해서 말하건데 그와 보내는 시간이 그 시절의 최고의 기억이었다고 감히 말할수 있을것 같아요. 자신을 내어주고 우리를 고아원 밖으로 데리고 나가 세상 구경을 시켜줬어요. 지금은 정책이 어떨지 모르지만 싱글리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던 홀트도 감사하 고요.
일산에 있는 고아원에는 얼마나 있었던 건가요? 시설과 환경은 어땠나요?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안나지만 1973년 8월에 들어가서 75년 5월에 나왔어요. 8월 20일이 제 생일이라 기억해요. 물론 진짜 생일은 아니지만요. 그 관계자들이 날짜를 생일로 쓴거죠.
고아원에 입소한 날이 생일이 됐군요.
아마도 그때 한국에서는 생일이 그렇게 크게 축하할일이 아니지 않았나 싶어요. 태어나자마자 한살이 되고 해가 바뀌면 한살을 먹고 그랬잖아요. 그러니 그렇게 실제 나이보다 많은 나이를 제 나이라고 말했을거고 그렇게 기록이 됐겠죠. 입양인들 사이에서는 다들 친숙한 소재잖아요. 다들 진짜 나이를 모르는것 말이에요.
시설만 놓고 봤을때는 나쁘지 않았던것 같아요. 깨끗했어요. 2017년에 돌아갔을때 많이는 아니어도 건물이나 근처 지형등이 모두 제 기억 그대로 이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새로 지은 건물에 속했고 검소했지만 인간적이었던것 같아요. 지금도 기억나는건 종교행사가 많았다는 거에요. 성경공부도 매일 있었고 성경으로 영어공부도 했고 예배와 교회 행사도 많이 참석해야 했어요. 나쁜 일을 하면 벌받는다 같은 공포를 조장하는 신앙 같은 거였죠.
나중에 지옥에 간다 뭐 이런거요.
네. 제도화된 종교에 대해 좀 삐딱하게 말해보자면 그렇게 함으로 아이들을 통제할수 있는것 아니겠어요? 기독교에 대해서 입문을 그렇게 한거죠. 소화되기도 전에 막 들이부었달까?
2017년에 몰리 홀트를 만났다고 햇잖아요. 어떤 사람이던가요? 그리고 홀트에 대해서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일단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들이는 어떤 시설과 시스템을 만든 공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박수 칠일은 박수 쳐줘야죠. 자신들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던 기사도 있잖아요. 의도는 물론 순수했고 거룩했죠. 다만 그들이 만든 시스템 안에서 일어났던 모든 상호작용들이 다 그렇진 않았죠. 개인적으로 참 제 인생에서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일을 그곳에서 당했어요. 물론 가장 빛나는 순간들도 결국은 홀트를 통해 가게된 입양을 통해서 가능했지만요. 제 인생에 일어났던 일들의 대부분을 좋게 생각해요. 나쁜면과 좋은 면을 동시에 봐야 하니까요. 몰리를 만났을때 살짝 어색한 순간이 있었어요. 저한테 좋은 가족을 만났냐고 물었거든요. 그냥 표정으로 대답을 했어요. 궁극적으로는 다 잘 풀렸으니까요.
지금까지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이야기가 있어요. 제 와이프도 그러더라고요. 언젠가는 그곳에서 당한 육체적 성적 폭력을 공개해야 된다고요. 그런데 아마도 꼭꼭 숨겨놓고 살아서인지 아니면 생각하면 그때 당했던 고통이 연상되어인지는 몰라도 그동안 별로 생각이 안났어요. 너무 어릴때였으니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거나 수용할만한 지적 능력도 없었고요. 그리고 그 뒤로 그런 일들이 일상적이 되어버렸죠. 그러면 그걸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디죠. 다들 이렇게 사는가 보다 하고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를 모르니까요. 힘들었죠. 그 뒤로 그 기억을 묻어두고 살다시피 했던 이유가 그때를 떠올리며 제가 살아온 날을 반추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기 때문이죠.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으니까요. 한때는 내가 결혼을 할수 있을까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가질수는 있을까 의심했던 적도 있었어요. 그때의 아픈 기억들조차 제 일부분이니까요. 그래서 어릴때는 분노조절장애도 겪었고 싸움도 많이 했어요. 아마도 고아원에서 털어버리고 나오지 못한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싸워야만 했죠. 싸움으로 푸는 방법 밖에는 몰랐고요. 그래서 싸움을 잘 하게 됐죠.
그 뒤 미국에 오게 되었고 잘사는 백인들이 모여 살던 뉴호프 시 근교에 살게 되었어요. 미들레이크 초등학교에 들어갔죠. 저 말고도 유색인종 학생들이 있긴 했는데 아주 소수였죠. 아이들은 참 짖굳게 솔직하잖아요.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을때 상대방이 다르다 싶은 점만 부각시켜 공격하죠. 그러면 저는 여지없이 제가 할수 있는 방법으로 응징을 했고 당연히 교장실로 많이 불려갔죠. 저를 입양한 분들도 그런 일들로 많이 힘들어했는데 그 모든 일들이 고아원에서부터 쌓인 앙금같은 것이었죠. 그 이전에도 성폭력까지는 몰라도 아이들 간에 폭력은 있어왔고요.
성적으로 학대를 당했다는 건가요?
네
같은 고아원의 다른 아이들로부터?
네. 저보다 큰 아이들이요
홀트의 직원들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알고는 있지만 관리할 인력이 없었다거나 하는?
몰랐을거라고 하는 것이 그들 입장에서는 낫겠죠? 안다 하더라고 다들 쉬쉬하는 일이잖아요. 애들 사이에 그럴수도 있지 하면서요. 저도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도 않았고요. 그런 일을 당하는 입장이 되면 이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을 하면 후폭풍을 감당해야 된다는 것도 알죠. 성직자들이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뉴스에서도 보면 아이들이 아무한테도 말을 안하잖아요.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자체로 수치심을 느끼니까요.
제 경우에는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걸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죠. 이걸 누구한테 알려야 하는지 아닌지도 몰랐고요. 성직자들한테 성추행을 당하는 어린아이들의 기사를 접하면서 저도 같이 아파했어요. 제 경우는 그냥 저보다 큰 애들이 있고요. 그곳에 직원들 중에 그 누구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요. 적어도 제 경우에는요.
에릭씨도 저도 50대인데 그건 명백히 어른들의 책임이죠. 관리자들의 책임이고요. 합당한 관리감독이 부재했으니까요.
저를 입양한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잖아요. 너무 복잡해요. 그 분들이 그 사실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했다고 생각해요. 물론 50-60년대와 지금은 문화적으로도 너무 다르고 그때는 지금처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쉬쉬 했잖아요. 지금처럼 처벌을 받고 책임을 지고 그런일이 일어났을때 아이들이 안전하게 주변에 알리고 보호받을수 있게요.
혹시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알았던 걸까요? 성적으로 학대당했다는 사실을 알리면 입양이 안될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런 부분이 작용을 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적어도 저는 아니었어요.
생존을 위한 방어기제였을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말할수도 있죠.
마침내 입양이 될거라는 사실을 알았을때 어땠나요?
아주 우쭐했죠.
그 순간을 기억하나요?
아니요. 그렇지만 뭐랄까 해변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파도가 치기 시작하는 것을 어느 순간 감지하는 것처럼요. 어느 순간 직원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어요. 갑자기 잘해주고 뭐랄까 나를 단장시키기 시작했달까요? 갑자기 조금 더 적극적으로 영어를 가르쳤어요. 비영어권 국가로 입양가는 아이들도 있었잖아요. 그러니 알고 저를 준비시킨거였죠.
그래서 알았어요. 다시 파도의 비유를 하자면 어떤 거대한 파도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요. 거대한 파도에 맞닥트렸는데 괜찮은거죠. 아무튼 조금씩 변화가 생겼어요. 저도 알았고 제 주변에 모든 아이들도 알았고요. 다들 주시하고 있으니까요. 그걸 지켜보는 다른 아이들도 갑자기 좀더 단정해지려 애쓰고. 이도 잘 닦고 그렇게요. 개인위생이나 면역주사 같은 것도 미리 맞았으니까요. 입양간다는 소식을 알려주기도 전에요.
갑자기 그동안 못 누리던 것들이 가능해졌군요.
네. 딱 그랬어요. 적당한 비유는 아니지만 제가 지금 개들을 임시보호 하고 있어요. 유기견 보호센터와도 똑같죠. 입양갈곳이 정해지면 개들을 보낼 준비를 하잔아요. 똑같죠. 뉴스가 공표되는것이 아니고 그냥 서서히 은밀하게 준비가 시작되는거죠.
다른 아이들은 어땠을까 생각하게 되네요. 그런 변화들을 눈치채며 부러워했을 다른 아이들이요.
출발날짜가 다가오자 너무 서운하고 다들 고맙더라고요. 복잡한 감정이었죠. 그곳에선 다들 친구고 형제같았으니까요. 떠날 때가 되니까 알겠는 그런 것들이요. 그 감정들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어요. 떠날때가 되니까 떠나야 된다는 사실이 진짜 힘들었죠. 이상하게 그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네요. 그 부분을 짚어줘서 고마워요. 생각하니 좀 울컥하네요. 제 인생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 뒤로 그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나요?
홀트를 방문했으때 몰리 홀트로 부터 몇몇 아이들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요. 제프리 김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덴마크로 입양됐었는데 그 뒤로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됐대요. 그리고 같이 방을 썼던 친구들 중에 몇은 스웨덴으로 입양을 갔고 또 여기 미네소타로 온 친구도 있었고요.
미국으로 오며 뭐랄까 굉장히 축하받을 일인것 처럼 느껴졌죠. 드디어 집이 생겼구나 같은 느낌이요. 그때만 해도 미국엔 다 흑인들만 사는 줄 알았어요. 제가 주로 봐왔던 미국인들은 거의다 흑인들 이었으니까요. 저희들의 의식속엔 한국인이거나 아니면 미국인이거나 하는 이분법만 존재했어요. 그냥 피부색이 조금더 진하고 옅고 그정도의 차이로만 다가왔었어요. 미국인이거나 한국인 이거나 둘중에 하나일뿐이었죠. 제가 백인가정으로 입양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그걸 알았을때도 “헐” 이런 느낌 보다는 그냥 그런가보다 했던거죠. 밀튼 워싱턴 (시즌 2 출연한 흑인-한인 혼혈)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흑인 가정으로 입양된 그 친구와 저의 경험이 아주 다르더라고요.
아무튼 그때부터 힘든 여정이 시작됐죠. 미네소타의 도시 근교 백인 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 꽤 잘 사는 백인 가정으로 입양이 됐어요. 문화적으로 언어적으로 적응하는 것도 물론 힘들었죠. 지금은 없지만 어릴땐 아프로(Aro – 흑인들 고유의 헤어스타일) 머리에 커갈수록 머리가 점점 꼬여가더라고요. 그때는 아무도 저를 보고 아시안 혼혈이라고 생각을 안했어요. 그냥 피부색이 조금은 연한 흑인인가보다 했을거에요. 제가 도착한 날 그 즈음이었던것 같은데 할머니였나 할아버지였나 아무튼 저를 유심히 보고 계셨었나봐요. 그러더니 하는 말이 “한국애를 데려온다더니 피카니니(Picaninny 흑인 어린아이들을 비하해 표현하는 캐릭터) 데려왔네” 라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안쓰는 말이 된지 오래죠. 경멸적인 표현이니까요. 그렇게 한번 또 꼬였고요.
지금 어른이 된 후에 생각을 해봐요. 어떻게 태어나고 자랐는지가 잘 안 알려진 아이를 데려온다면 당연히 그 아이와 함께 많은 트라우마도 함께 오겠죠. 제가 딱 그런 경우였고요. 아이와 같이 살다보면 그 짐속에 있던 상처들도 하나씩 열리는데 그 상처들 혹은 폭력적인 성향들에 적절히 대처하거나 보듬어 줄 역량이 안돼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럴때마다 결국은 제가 혼나는 것으로 귀결되고 했죠. 좀 유별난 일을 한다고 벌을 많이 받았어요. 성장하면서 배우고 적응할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죠.
홀트도 그렇게 저를 입양했던 가족들도 그렇고 동기와 의도는 좋았겠죠. 자선 혹은 이타주의 같은 거였어요. 저를 입양했던 이유말이에요. 그런데 아이를 입양하는 것은 그 아이의 부모가 되어 주겠다는 거잖아요. 제 생각엔 저를 입양했던 사람들이 그 부분을 심각하게 고려해보지 않은것 같아요. 감당할수 없었던 일을 벌인거죠.
저 이전에도 한국인 남매를 입양했었어요. 저보다 일곱살 정도 많았었는데 그 입양이 안 좋게 끝났어요. 제가 미국에 왔을때 그 관계가 막 삐걱대기 시작하던때였죠. 그리고 에티오피아에서 온 남자아이도 임시보호하고 있었는데 그 형이 한국에서 입양된 누나와 나이가 거의 비슷했었어요. 에티오피아에서 내전을 피해 온 난민이었는데 심장수술이 필요해서 미네소타로 온 경우였죠. 그런데 그 형을 돌려보냈어요. 그 형이 저한테 나쁜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던거죠. 그 분들이 몰랐던 것은 그 형이 저에겐 그 가족과 저를 이어주는 끈 같은 존재였거든요. 자세한 내막은 저도 잘 모르지만 그 형이 흑인 문화와 흑인국가주의 이런 것들을 저한테 알려줬었는데. 그런것들을 문제라고 본것 같아요. 이 흑인 머리를 어떻게 손질하고 빗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크고 동그란 모양을 만들수 있는지 등등을 가르쳐줬죠. 저 한테는 마치 큰형같았어요. 그런데 입양부모가 보기엔 그 방향이 저한테 좋은 영향이 아니었죠. 그들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던거죠. (2부에서 계속)
번역 : 전유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