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6, 에피소드 6: 젠이 뢰멜스버그와 퍼즐 조각

“ ‘그냥 잘 안 맞는 퍼즐이 아니라 다른 퍼즐 박스에 잘 못 들어온 퍼즐 조각’ 같다고 느꼈어요.”

이번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하나도 못 보며 미국 중서부에서 자랐습니다. 다른 많은 입양인들 처럼요. 그는 한국인임에 대해 수십년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남달리 취급되던 스스로를 애써 못 본척 하며 살아오다 마침내 한국을 찾았습니다. 한국을 찾으며, 그리고 글을 쓰며, 심지어는 한국을 사랑하는 법을 그녀의 아들로부터 배우며 그녀는 온전한 자신이 되었습니다. 젠이씨를 만나보시죠.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젠이 레멜스버그이고 아이오와주 마리온에 살고 있어요. 곧 쉰 한살이 되네요.

아이오와주에서 자랐나요?

네, 평생을 아이오와를 떠난적이 없어요(웃음). 누가 전체 주민이 2-3천명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동네에서 자랐다고 하면 제가 코웃음을 치며 “우리 동네는 전체 주민이 700명 뿐이었거든!” 하고 말하곤 해요. 저만 유일하게 백인이 아니었어요. 지금은 그곳에서 50키로 정도 떨어진 Cedar Rapids라는 도시 쪽으로 옮겨 가서 살아요. 

이름 스펠링에 숨져진 뒷 이야기가 있나요? 스펠링이 특이해요. 

제가 입양인의 목소리 글쓰기 그룹(Adoptee Voices Writing Group)에 서 활동하고 있는데 안그래도 바로 얼마전에 이를 주제로 글쓰기를 했었어요. “내 이름에 숨겨진 뜻”(What’s in your name?) 이라는 주제였는데 모임의 여러 입양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부분이 우리 이름이 여러번 바뀌었다는 사실이었어요. 제 이름도 제가 아는 한 지금까지 네 번이 바뀌었거든요. 그중에 두번은 제가 원해서 였고요. 진짜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제 입양 서류와 여권에 있던 이름은 윤선영이고 미국에 와서 제가 받은 이름은 제니 엘리자베스 맥칼럼( Jenny Elizabeth McCallum)이에요. 그리고 그 이름으로 쭉 살았죠. 제니퍼의 준말인 제니가 아니고 그냥 제니라는 것을 강조하며 자랐는데 엄마쪽의 증조할머니와 아버지쪽의 증조할머니 두분이 모두 제니셨대요. 피도 안 통했는데 제가 양쪽 할머니의 이름을 물려받았다는 것이 좀 이상하긴 하죠. 한번도 만난적도 없는데 제가 이 분들을 따라 이름 지어졌다는 것이요. 

아무튼 역사가 좀 긴데 그래서 한동안 제니 엘리자베스 맥칼럼으로 행복하게 살아오다가 제 입양가족들하고 관계가 삐꺽대기 시작하면서 그 이름을 따라 살아가기 싫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제 남편을 만났을때 만약에 결혼하게 되면 이 이름을 따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제니 엘리자베스 뢰멜스버그가 되었죠. 이 지역에서도 그 이름으로 두루두루 알려졌어요. 그냥 제니라고 하지 않고 항상 “제니 뢰멜스버그” 이렇게 붙여서요.  그리고 그때 제가 미용실을 시작하고 이름을 스튜디오 젠이라고 지었어요. 그때 스펠링을 Zhen라고 붙였는데 그때 제가 쓰던 제품이름이기도 했고 한국제품이라고 들었거든요. 젠(역자-한문”진”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이 한국어로 아름다움이라는 뜻이라면서요. 그래서 제 샵이름을 그렇게 붙였는데 그 뒤에 그 지역에 심한 홍수가 나서 그 지역이 모두 다 침수가 되었어요. 제 샵도 완전 망가졌는데 그래서 샵 이름을 못 쓰게 된 것이 너무 속상하더라고요. 그때 제 이름 철자를  그렇게 바꿔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정식으로 이름을 바꿨고 그러고 나니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꼭 한글 같기도 하고 한국의 “ㅈ”이 마치 알파벳 Z랑 비슷하기도 하잔아요. 마치 제가 제 스스로 제 이름을 지은 것 같고 원래 이름인 제니와 발음은 거의 같으면서도 마치 한국 이름 같리기도 하고요. 제가 제 이름을 스스로 지은 것 같아 뭔가 더 의기양양해지는것 같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 젠이(Zhen E)가 되었지요. 

그랬군요. 몰랐어요. 그런데 듣고 보니 완전 말이 되네요. 제 이름(카오미) 도 입양부모님이 지어주셨는데 일본에서 입양되어온 제 아버지의 사촌을 따라서 지었대요. 그러니까 제 이름이 일본식인거죠. 저는 그분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데 가족안에 유일한 동양인들이라는 이유로 이름을 따라서 지은거죠. (웃음)

말도 안돼죠. 

그러니까요. 일본 이름이니까요. 

일본이랑 한국이랑 다른 나라인지도 모르고.

그러니까요. 그리고 그 뒤로 이 이름이 제 정체성이 되어버렸잔아요. 

사람들이 일본인이냐고 물어보나요?

네 항상요.

저는 가끔씩 중국인이냐고 물어봐질때가 있어요. Xhen이 중국식 성이니까 사람들이 Zhen을 보면 중국식일거라고 생각되나봐요. 사람들이 중국사람 아닌거 맞냐고 물어봐요. 그럼 “백퍼” 아니라고 하죠. (웃음)

뢰멜스버그(Rammelsberg)는 독일식 이름이잖아요, 맞나요?

네, 완전 독일 이름이에요. Ramel은 천둥이라는 뜻이고 Berg는 산이에요. 그러니 천둥치는 산(Thunder Mountain)이라는 뜻이에요. 마치 디즈니랜드 놀이기구이름 같죠? (웃음)

예전에 큰 상점에서 일하는 것들이 아직 위험하지 않을때에 한 유명 상점에서 일한 적이 있었어요. 명찰을 착용하고 일했었는데 그때는 이름 스펠링을 바꾸기 전이었어요. 한 여자분이 제 이름을 읽더니 “뢰멜스버그는 독일식 이름이잖아요?” 라고 하더라고요. 마치 제가 이름을 위조하기라도 했다는 뉘앙스로요. 그래서 제가 제 결혼전 이름은 맥칼럼이었다고 했더니 놀라며 “그건 아일랜드 식 이름이잖아요!” 그러더군요. 그래서 제가 “더 정확히 하면 스코틀랜드랑 아일랜드 식이죠” 라고 덧붙인 다음에야 입양되었다고 설명했죠.  그랬더니 갑자기 엄청 미안해하는 얼굴을 하대요. 물론 저도 바로 대답을 안하고 그 여자가 스스로 멍청하다고 느끼게끔 시간을 끌기도 했고요. 아무렇게나 지껄이지 말라고요(웃음) 아무튼 제니 엘리자베스 맥칼럼이나 제니 엘리자베스 뢰멜스버그나 사람들이 이름만 보면 이 한국인의 얼굴을 상상하기 힘든건 사실이죠(웃음)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가요?

이미 말했듯이 여러모로 굉장히 자신있어진것 같아요. 특히 저의 “한국인임”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도움이 됐어요. 제가 두살때 버려져 이곳으로 오게 됐는데 그때는 한국말을 할수 있었을 거에요. 그런데 지금은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너무 속상해요. 한국어가 제가 처음으로 배운 말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힘든 것을 보며 뭐랄까 제 문화유산를 빼앗긴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특히 제 입양가족이 세대간의 유대가 굉장히 끈끈한 편이었거든요. 제 입양어머니가 요리를 굉장히 잘하시는 분이었는데 가족 대대로 딸에서 딸로 구두로만 전해져 오는 레시피도 있고 그래요. 계절이 바뀔때면 같이 모여서 저장음식도 만들고요. 매년 양배추로 사우어크랏 (역자 주 – 독일식 양배추 절임)을 만드느라 엄청난 양의 양배추를 썰고 요리해서 저장하는 것을 보며 자랐어요. 한국에도 그런 문화가 있을텐데 저는 모르잖아요. 함께 모여서 김치를 만들고 하는 그런 것들이요. 저도 요리를 꽤 잘하는 편이라 독일쪽이랑 영국쪽 음식들은 꽤 잘 만들어요. 제가 자라면서 먹은 것들이요. 자다가도 번쩍 일어나서 그레이비(역자 주 – 고기 육수를 걸쭉하게 졸인 소스)를 만들라면 만들수 있거든요. 그런데 한국 음식은 만들려면 하나하나 신경써서 해야하죠.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어요. 

한때 제가 한국인임을 지우고 살고 싶었던 적이 있었어요. 사람들은 계속 제가 아시안음을 일깨워주는데 저는 그냥 미국인으로 보이고 싶었거든요. 항상 백인들에 둘러쌓여 있었고 저도 그들과 같다고 느꼈으니까요. 제가 백인이 아닌건 알았지만 달라보이고 싶지 않았죠. 그래서 저의 이런 아시안임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꽤 걸렸는데 막상 그 여정을 시작하고 또 이름을 바꾸고 나니 뭐랄까 나를 찾는 여정을 이젠 본격적으로 시작한것 같았어요. 미국인인것 또한 나 자신이지만 한국인임도 나니까요. 

우리가 2016년에 처음 만났죠? 젠이씨는 굉장히 재미있는 분이더라고요. 지난번에 한국에 갔을때는 다쳤다면서요? 한국인임을 되찾는 과정이 험난해보여요.  맞나요?

네. 제가 입양인 작가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는데요 꼭 한국인 입양인만 있는 것은 아니고 모든 입양인들이 다 참여 가능한 그룹이에요. 대부분 미국내입양이요. 한국인 입양인도 있고요. 거기서 시간을 정해 놓고 글을 쓴 다음에 앞에 나와서 발표하는 시간을 갖는 데 그때  “그냥 안 들어 맞는 퍼즐이 아니라 다른 퍼즐 박스에 잘 못 들어온 퍼즐 조각(“feeling like not just a puzzle piece that doesn’t quite fit, but a puzzle piece that actually is in the wrong puzzle completely”) 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모양이 비슷해 보이지만 아무리 끼우려고 노력해도 절대로 딱 들어맞을 수 없는 퍼즐 조각이요. 제가 그런것 같아요.

그때 우리가 만났을때가 저의 첫 한국 방문이었어요. 아들 아이도 같이 갔었는데 그때 제가 좀 많이 힘든 상태였어요. 그리고 한국에 갈때마다 무슨 일이 생기고 특히 지난번에는 제가 다치기까지 했어요. 그래서 제가 애증의 관계라고 표현을 해요. 한국에 가는 것이 좋긴 좋으니까요. 미국 중서부 아이오와에서 나고 자란 제 남편도 한국을 너무 좋아해요. 원래 낯선곳에 가고 새로운 것을 하기를 별로 안좋아하는 사람인데도요. 한국 문화가 너무 좋고 한국 사람들이 서로 챙겨주는 것이 너무 좋대요. 그런데 저는 왠지 동떨어진 느낌이 들때가 많아요. 제가 한국어는 못하지만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는 감으로 알아듣거든요. 그래서 한국 사람 같은데 왜 한국어를 못하는지 궁금해 하거나 하는 것은 바로 알아채거든요. “미쿡사람입니다~” 라고 이야기 해요. 입양됐다고 밝히지는 않아요 그럼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까요. 아무튼 언어장벽도 그렇고요. 한국인이지만 완전한 한국인이 아니라서 달리 취급받는 그런 것이 있어요. 관광투어를 갔는데 제가 미국인인것을 알고 처음부터 아예 한국인 대접을 안하더라고요. 그럼 조금 힘들죠. 백퍼! 한국인이 아니라고 취급받는 그런 항상 그런 느낌이요. 그러면 굉장히 불편하고 어색하죠. 한국인인데 한국말을 왜 못해 하며  왠지 무언의 질책을 당하는 것 같고요. 

한국에 네번 갔었잔아요. 갈때마다 매번 느끼는 것이 달라지나요? 그때그때 다른 것들을 깨닫나요?

그럼요. 제일 처음 갔을때는 제 남편이 그렇게 장기간 비행을 하고 멀리 가본 적이 처음이었어요. 비행기 여행 자체를 그렇게 많이 해본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저도 제가 준비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준비가 안되어 있었고요. 그런데 제 남편이 한국말을 하나도 못하는데도 지하철등 타고 다니는 것을 너무 잘  파악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부분은 걱정할 것이 없었죠. 길 잃어버릴 걱정을 한번도 안했어요. 남편이 마치 전생에 와보기라도 한 양 잘 찾아다녔어요. 주소 시스템이 달라서 먼저 동네를 찾은 다음 그런 식으로 찾아다녀야 하잔아요. 그런데 남편에 너무 잘 찾아다녔어요. 

어떤 계기로 그때 2016년에 한국에 간건 가요?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에요. 그 전에는 한국에 가봐야 겠다는 생각도, 친가족을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도 없었거든요. 아들아이가 대학에 지원을 할때 제가 한번 물어봤어요. 입학 원서에 인적 사항을 기입할 때 백인이라고 하는지 아시안이라고 하는지요. 그랬더니 아시안이라고 체크한다고 하더라고요. “당연한거 아냐?” 이런 반응이었죠. 그래서 그때 아들아이가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아들아이가 그러더라구요. “우리 엄마가 되게 멋진데 한국사람이잖아”라고요. 저를 아시안 롤모델로 생각하고 있었나봐요. 제가 바람직한 모델이던 아니건 간에요. 제가 아이한테는 하나의 롤 모델이었고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었던 거죠. 그때 알았어요. 아이가 아시안임에 대해서 스스로 좋게 생각한다는 것을요. 

그래서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 난 아시안인것이 그닥 달갑지 않았나 하고 깊게 생각해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마침내 한국에 가보기로 하고 비행기표도 사고 페이스북에도 한국에 간다고 올렸죠.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트윈스터(Twinsters)라는 다큐멘터리가 넷플릭스에 있다고 보라고 추천을 했어요. 그래서 봤는데 거기서 IKAA(International Korean adoptee Associations 국제한국인입양인모임) 에 대해서 들었어요. 검색을 해봤더니 삼년에 한번씩 열린다고 하는데 마침 그해 여름에 열리는 거에요. 그때가 대낮 이었는데 일하는 남편한테 바로 전화를 해서 흥분한채로 이야기했죠. “입양인들을 위한 컨퍼런스가 열리는데  세상에 우리 원래 계획보다 3주 정도 늦게 열린대” 라고요. 그랬더니 남편이 원래 여정을 취소하고 IKAA가 열리는 기간으로 다시 예약하자고 해주더라고요. 그래서 비용도 더 들었지만 원래 일정을 취소하고 IKAA에 참가하러 갔어요. 그것이 일단은 일차 이유였죠. 그런데 그때는 다른 입양인들하고도 어울려야 했는데 그러진 못했어요. 제 입양에 대해 깊게 들여다보지 않았던 때였거든요. 다른 입양인들하고 어울려 본적도 없었고요. 

그럼 그때가 막 첫 걸음을 떼었던 때였군요. 

제 또래 입양인들하고 어울려 본적이 없었어요. 제가 알던 입양인은 모두 제가 알바로 돌봐주던 어린아이들뿐이었거든요. 입양인들과 어울려보지 않았었어요. 

IKAA 에 대해서 부연설명을 좀 하자면 전세계의 입양인들이 모이는 행사에요. 삼년에 한번씩 서울에서 열리고 여러 입양인 단체들이 모두 모이기도 하고요. 

그 뒤로 코비드로 인해 잠정 중단됐었죠. 이번에 2023년에 열릴 IKAA에 제가 준비위원으로 활동중이에요. 그러니 아주 먼길을 온 셈이죠.(웃음)

진짜 먼 길을 왔네요. 처음에 봤을때는 꽤 힘들어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혹시 감정이 정리가 안 됐었나요? 그렇게 많은 입양인들을 한꺼번에 본 것이 처음이라서?

그러기도 했고 너무 큰 기대를 하기도 해서 좀 실망하기도 했고요. 제 출신 나라에 처음으로 돌아간 것이었잖아요. 그 자체만으로도 감정적으로 너무 벅차죠. 그런데 저처럼 처음 한국을 찾은 입양인들에 대한 별도의 지원들이 없었어요. 그 부분이 굉장히 크거든요. 그래서 한국에 처음으로 간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감정을 잘 살펴보라고 이야기 하곤 해요.  감정적으로 과부하가 걸릴수도 있으니까요. 우리가 떠나온 나라를 처음으로 다시 방문하는 일이 결코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그 자체로도 힘들었는데 같은 입양인들을 만나면 친해져서 바로 터놓고 이야기 할수 있는 상황이 될것이라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한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죠. 그게 힘들었어요. 왜냐면 제가 보통 사람을 되게 쉽게 사귀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이 입양인이라는 사람들은 뭐랄까 한명 한명이 책 한권 분량의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죠.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고 살아온 환경도 다 달랐으니까요. 입양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가 비슷한 사람들인것은 아니니까요. 

만나면 자동적으로 동질감을 느끼고 뭔가 통할거라고 생각했군요

그런데 제가 원하던 수준의 동질감을 느끼기엔 너무 시간도 짧고 역부족이었죠. 제가 입양인이라서인지는 몰라도 항상 주변에 사람들을 만들어두려고 하잔아요. 그래서 그렇게 노력했는데 잘 안 되다가 끝날때 쯤 쿠킹클래스에서 카오미 당신을 만나고 또 그룹 모임에서 저랑 같은 나이대 사람들을 만나니 그때쯤 드디어 뭔가 사람들과 통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 전까지는 제 아들 또래의 입양인들하고 활동을 같이 하게 되었는데 그건 제가 원하던 바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때 저를 시카고 입양인 모임으로 초대해준 크리스 디트리치(Chris Detrych)도 만났어요. 아주 더운 날이었는데 고궁투어를 갔었거든요. 명찰에 이름과 사는 나라가 적혀있어서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모두가 중서부(midwest)에서 온 것을 알게 되었죠. 우리는 아이오와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 친구도 아이오와에서 산적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호구조사를 하다보니 저희가 살고 있는 도시에 그 친구가 산 적도 있더라구요. 

그래서 대화를 나누다가 제가 아이오와에서도 입양인 모임을 시작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가 시카고의 입양인 모임으로 초대를 해주었어요. 대도시인 시카고하고 아이오와는 환경이 많이 달랐지만요. 아이오와에서는 다들 멀리 떨어져 살고 어떤 친구는 아이오와 내에서도 네 시간을 운전해야 서로를 만날수 있어요. 그래서 아이오와에서는 온라인 모임이 아주 유용했어요. 팬대믹 기간동안이 오히려 더 도움이 된것 같아요. 아무튼 마침 아들아이가 시카고에서 한시간 떨어진 밀워키에 있기도 했었고 그래서 시카고로 입양인 모임을 자주 나가서 모임에 대해서 배우고 입양인들하고 어울릴수 있었죠.  그러다 보니 한국에 방문할때마다 도움도 받게 되었죠. 최근에 갔을때만 빼고는 제가 한국에 갈때마다 크리스 그 친구가 항상 한국에 있기도 했고요. 그래서 우리가 한국 갈때마다 너도 꼭 있어야 해 하고 농담도 하고 그랬는데 지난 마지막 방문때 제가 하필 발목을 다쳤는데 그 때는 그 친구가 없었어요. 그래서 니탓이라고 농담도 했고요. IKAA 말고 그냥 방문했을때도 신기하게 그 친구가 한국에 있었던 적도 있었죠. 

2019년 IKAA에도 갔었는데 그때 마침 같은 한국인 입양인이던 제 며느리에게 아들아이가 프로포즈를 했어요. 오빠랑 둘이 모두 한인 입양인이거든요. 그래서 IKAA 에 같이 가자고 설득해서 그 애 가족도 같이 갔는데 그애에겐 그때가 입양과 관련된 모임에 처음으로 갔던 것이었어요. 그때 양가 가족이 다 있었는데 아들아이가 프로포즈를 하고 그 뒤로 팬데믹 중에 결혼해서 지금 아이도 있어요. 그래서 이번 여름에 다 같이 IKAA에 다시 같이 갈 예정이에요. 

한국에 처음 가거나 이런 대규모의 입양인 모임에 간다고 해도 바로 상처가 치유되고 도움을 받을수 있는건 아니잖아요. 그러니 아주 힘든 상황이 생길수도 있고 그래서 며느리가 처음 모임에 갔을때 젠이씨가 옆에서 설명해주고 같이 있어준것이 굉장히 도움이 되었겠네요. 

모든 프로그램에 다 참가를 해야 되는 건 아니다 라는걸 알려줬죠. 그게 제가 했던 실수거든요. 많은 감정이 올라올 수 있으니 네 마음을 자주 들여다보고 괜찮으니 힘들면 낮잠을 자거나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해줬죠.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잖아요. 그러기 보단 너를 먼저 살피라고요. 내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나와 비슷한 상태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힘들잖아요. 그런 조언들이 도움이 많이 된것 같더라고요. 같이 한복도 맞췄어요. 특별한 경험이었죠. 

며느라가 같은 입양인이라는 것이 어떤 느낌인가요

불편하게 생각할수도 있으니 입양인 모임을 가라고 권하거나 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저한테도 시간이 꽤 걸렸고 40대가 넘어서야 다른 입양인들을 찾기 시작했으니까요. 제가 어릴때는 그런 조언들을 들을수도 없었고 또 지역이 너무 떨어져있다보니 다른 입양인들을 마주칠일도 없었어요. 하지만 만나고 싶어했었던 기억은 나요. 다른 입양인 혹은 꼭 입양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한국인이라도 주변에 좀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고는 했었어요. 그러다가 저희 지역에 다른 가족이 한국에서 입양을 했는데 그애들은 저보다 너무 어렸어요. 제가 베이비시터를 할 정도였어서 그들은 별 도움이 안 됐었죠. 저의 존재가 그 아이들에게 도움이 됐을수는 있겠네요. 후에 알게된 사실인데 제 입양부모님이 저를 입양하는 것을 보고 그 가족들도 입양을 결심했대요. 저희 가족이 화목해보였나봐요. (웃음) 

입양에 대해서 깊게 들여다보고 있는 지금은 SNS나 제 글에 입양에 대해서 많이 쓰거든요. 제 글에 동의할수 없는 사람들도 많은걸 알아요. 아직도 많은 입양인들이 입양신화의 그늘안에서 입양은 너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잖아요. 그래서 한국정부에 입양인의 정보를 공개하라는 요구를 하는데 동참했어요. 입양이  불법적으로 진행된 증거가 점점 드러나고 있으니까요.

저도요. 

한 300명이 넘게 신청을 했잖아요. 

앞으로도 더 늘어날 예정이고요. 

맞아요. 최근에 더 많은 열람기회를 오픈했다고 하니 좋은 일이지요. 점점 더 늘어나고 있어요. 그러니 사람들도 더 많이 신청하겠지요. 잘 된 일이고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에 처음 갔을때 도착 전에 이미 필요한 서류작업을 마치고 저를 입양보낸 기관인 홀트를 방문했거든요. 처음에는 한국으로 연락하라고 하다가 그 다음에는 오레곤에 있는 기관으로 연락하라고 하다가 다시 한국으로 연락하라고 하다가 결국 제 기록을 찾았다고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라고 하대요. 그런데 그 정보가 제 부모님이 알고 있던 것과 달랐어요. 제 입양어머니가 제 기록을 아주 잘 보관해두셨었거든요. 그래서 무슨 말인지는 비록 몰랐어도 제 파일을 제가 보관하고 있다가 그 파일을 한국까지 가지고 갔었어요. 홀트에 연락을 해서 약속 잡고 입양 후 서비스를 신청했어요. 그 사람들이 엄청 두꺼운 파일을 들고 나왔는데 저한테는 첫 세장 정도만 보여주는거에요 . 더 있는데 왜 안보여주냐고 물어보니까 안된다고 보여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제 임시 보호자가 누구였는지 그런 것들을 안보여 주더라고요. 다른 아이들의 정보가 들어 있을수도 있다면서요.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출구가 없는 게임을 하는 것 같았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 인지 알수도 없었고요. 너무 막막하고 힘든 상황이었죠. 

 325 Camera에 DNA 등록도 했어요. 게스트하우스인 뿌리의 집에도 등록해 두고 경찰서 몇군데에 남겨 두기도 했어요. 그런데 화나는 것은 확실한 답이 없고 사람들도 답하기를 회피하는 거에요. 그러니 저에 대한 정보라고 제가 들은 것들이 진짜인지도 확인할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제가 발견 됐을때 남겨진 노트가 있었대요. 거기에 제 생년월일과 한국 이름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에 의하면 제가 알고 있는 저의 생일과 제 이름이 진짜에요. 그렇다면 제 두살 생일 이틀 후에 제가 발견됐다는 거거든요. 한겨울에요. 그리고 제가 안양시에서 발견됐대요. 그래서 그곳 시청에 찾아가 혹시 제가 출생등록이 되었었는지를 물었어요. 그랬는데 아니래요. 그러니 내가 한번도 정식으로 등록된 적이 없었구나 한국의 시스템상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구나 하며 방심하고 있다가 한번 훅 얻어맞는 느낌이었죠. 그리고 갑자기 저희보고 이 트럭에 타라고 하더라고요. 왜 타라고 하는지는 모르고 그냥 탔는데 갑자기 여기저기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데리고 다니더니 갑자기 내려서 사진을 찍으래요. 그래서 영문도 모르고 아무 생각없이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말하길 이 곳이 제가 발견된 곳 근처라서 그렇대요. 미리 말해줬으면 좀 자세히 보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졌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대충 지나가게 만든 다음에 말해주고요. 그리고 그게 확실한지 아닌지도 모르고요. 아무튼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더 헷갈리고 계획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죠. 그래서 그 뒤에 통역사를 고용해서 다시 가봤는데 통역사도 그닥 열심히 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요. 그래서 지금은 출신 찾기를 무한 보류한 상태에요. 그냥 막다른 골목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엄청 당황스럽고 화가 낫겠네요. 영문도 모르고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그 장소가 그렇게 의미있는 곳인줄 알았을때요. 

아무 설명도 없이 그냥 사진 찍으라고. 저희는 갑자기 왠 사진? 이런 반응이었고요. 저한테 그랬잖아요. 유머감각 있고 재밌는 사람이라고요. 이 모든 상황이 좀 웃겼는데 저희가 처음 제 서류를 들고 안양에 있는 경찰서를 찾아갔을때요 거기 젊은 경찰관들이 신이 나서 제 서류를 하나하나 읽어보다가 저희를 조사관 같은 사람한테 데리고 갔어요. 그러느라 저희한테 경찰차 뒷자리에 타라는 거에요. (웃음) 그래서 우리 셋이 경찰차 뒷자리에 타고 있는 사진을 찍어서 페이스 북에 올렸어요. “말도 안통하는 외국에서 제일 피해야 할일은 경찰차에 타는 것이지” 라고 써서요.  경찰들이 아주 친절하게 도와줬는데 개인정보보호법때문에 다른 건 말해줄수 없지만 저를 발견한 사람을 찾은 것 같다고 그런데 자꾸 죽었다라고(dead) 하는거에요. 그래서 누가 죽었냐고 했더니 제가 발견 된 장소에 살았던 그 노부부가 돌아가셨대요. 그 자식들은 살아있어서 혹시라도 저를 발견한 날에 대해서 기억을 할까 싶어서 연락을 해봤는데 그 분들이 관여하길 꺼려하신다고 해서 그 뒤로 접었어요. 그 기록도 사실인지 아닌지 알수도 없고요. 

홀트에서 정보를 더 가지고 있는데 젠이씨한테 알려주지 않는다고 믿나요?

네. 지금 이 이야기도 간추려서 말씀드린 거예요.  그것이 우리가 한국정부와 한국사회복지 서비스 그리고 홀트에 공개를 요구하는 거에요. 입양인들마다 각각 다른 두 종류의 서류가 존재하는걸 입양인들이 알았죠. 그리고 입양인인 우리가 들은 우리가 어떻게 발견됐는지 어떡하다가 입양까지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죠.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제 서류는 조작된것이고 홀트가 진짜 서류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해요. 

인권에 관한 사항이라고 생각하나요?

네. 서류 조작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기 전에도 입양이 마치 인신매매와도 같다고 말해왔어요. 돈을 지불하면 인신매매인거잖아요. 입양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그리고 인권침해이기도 하죠. 우리가 위조된 서류를 통해 보내졌고 또 물건 처럼 거래됐다는 증거가 있죠. 홀트가 해외 입양 할당량을 못채웠다고 써있는 문서를 찾았잔아요. 우리를 어떻게 홀트에서 관리하게 되었는지 그 부분이 인권침해일수도 있죠. 우리가 혹시라도 납치 됐을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생각만 해도 메스껍죠. 제가 발견됐을 당시에 저는 두살이었고 이미 말도 할줄 알았고 대소변도 가릴줄 알았대요. 제가 길을 잃어버린건지 아니면 누군가 나를 그냥 낚아챈것인지 누가 알겠어요. 

그래요. 발견됐을때 두살이었다고 하니 도데체 어떤 상황이었는지 너무 많은 의문이 생기죠. 납치 당한건지 아니면 길을 잃어버린건지 말이에요. 

카오미씨도 기억하죠? 입양인 모임에 갔을때 이런 세션이 있었어요. “친가족 찾기에 실패한” 주제로 그룹모임이 열렸는데 그때 질문중의 하나가 “가장 두려운 것은?” 이었어요. 그때는 이런 문서조작이나 위법의 가능성도 아직 수면위로 드러나지 않았을때였거든요. 그때 생각이 들기를 만약에 제 부모님이 저를 키울 형편이 안되어서, 예를 들면 제 동생이 생겼다거나 해서 저는 입양 보내고 다른 형제자매들은 계속 키웠다면이었어요(흐느낌).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것같아요. 왜 나를 보낸 것인지 왜 나를 계속 키우기로 결정 안한것인지 왜 나였는지 하는 회의말이에요. 그 후에 이런 저런 문서조작의 가능성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물론 혹시라고 내가 강제로 납치를 당했거나 불법적으로 거래되거나 했다면 그것또한 정말 끔찍한 일이겠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울 사실은 저만 입양보내고 다른 자식들은 키웠다는 가정이에요. 그래서 내심 진실을 알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어요. 

이 친가족을 찾는 과정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너무 부담이 크죠. 굉장히 심난하고 해도해도 끝이 없는 텅빈 구멍을 채우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나 자신의 출신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한 다는 사실이요. 막막하고 부질없는 노력 같기도 하고 사람들이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 것도요. 그 사람들이 정부관료일수도 있고 입양기관쪽 사람일수도 있고요. 일을 진행하기가 진짜 너무 힘들죠. 

주변사람들한테도 이제 가족찾는것은 그만 하겠다고 말했어요. 여기 저기 정보를 남겨 두었고 뉴스에도 나왔었으니까요. 방송출연을 한것은 아니지만 저에 대한 기사가 나왔었거든요. 제 남편 회사가 서울 강남에도 사무실이 있는데 동료들이 제가 나온 기사를 보고 남편한테 연락해온적도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제 입양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쓴 연극에 대해 KBS와 인터뷰를 한적도 있고요. 그때 제 가족 찾기에 대해서도 인터뷰를 했으니까요. 그래서 할수 있는 일은 이제 다 한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적극적으로 찾는 일은 중단한 상태에요. 제  DNA와 일치하는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모르겠지만 그건 활률이 적고요. 지금 아무도 저를 찾고 있는 것 같지 않아보이는데 그래서 차라리 잘 된건지도 모르겠어요. 

다른 입양인들이 노력도 별로 하지 않았는데 가족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축하를 해주고 싶지만 솔직히 좀 속상하죠.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지만요. 사람들은 다 각각 사연이 다르니까요. 그렇지만 그렇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과는 별개로 속상한것은 사실이고 어쩔수 없이 받아들이는 거죠. 되면 좋고 안되어도 어쩔수 없다는 마음으로요. 그 사람들한테도 “쉬운”일은 아닐거라고 생각해요. 새 가족을 찾았다고 해서 갑자기 삶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어떨때는 일이 더 꼬이고 복잡해지기도 하잖아요. 아무튼 친가족도 함께 찾고 있으면 서로 찾는 것이 훨씬 쉬워지죠. 물론 쉬운게 진짜 쉽다는 말은 아니지만요. 그런데 지금 현재로서는 아무도 저를 찾고 있는것 같아 보이지 않고 그래서 막다른 골목에 와 있는 것 같아요. 정부에서는 개인정보 보호때문이라고 자꾸 핑계를 대잖아요. 그래서 일단 적극적으로 찾는 것은 멈췄지만 제 정보를 여기저기 남겨두었으니 누구라도 맞는 사람이 나타나길 바라는 것이 지금 제 유일한 희망이에요. 

몇 회전에 덴마크 한인입양인권리찾기모임의 피터 묄러가 나왔었잔아요. 그들의 활동으로부터 바라는 것이 있을까요?

그분들의 활동이 성공해서 우리가 우리의 정보를 열람할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우리가 입양에 까지 이르게 되었는지요. 그리고 필요하다면 관련자 처벌까지도요. 이미 많은 수의 인권침해사례가 드러나고 있잔아요. 그리고 성범죄자인것을 알고도 아이들을 입양보낸 사실도 드러나고 있죠. 너무 끔찍하죠. 제 입양부모님한테도 친아들이 있었는데 그 오빠가 저를 성추행했어요. 그 사실이 알려지자 저희둘만 집에 남아있지 못하게 되었었는데 그 뒤로 한동안 잊고 살았어요. 입양되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죠. 그 뒤로 삶이 순탄하게 뻗어나가는것 같았거든요. 그러다가 그 사실이 다시 떠올라 괴로워서 가족들한테 그 이야기를 꺼냈고 그래서 지금 입양부모하고 연을 끈고 살게 되었어요. 그러니 입양을 보낼때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확실히 따져보고 입양을 보냈어야죠. 그러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너무 화나는 일이에요. 그러니 관련자들이 꼭 책임을 졌으면 좋겠어요. 

혹시 저에 대해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아동성학대 피해자에요. 문제는 이 가족들이 아동을 성적으로 추행하고 학대한것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가족들이 어떻게 대응했냐죠. 아니면 아예 대응 자체를 안했거나요. 

저도 그부분에 있어서 고통을 겪었어요. 나중에 성인이 된 후에요. 그래서 지금 입양가족하고 절연하게 된 계기가 됐는데 성추행은 둘째 치고라도 저를 심리적으로 조종(Grooming)하려고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더 힘들었어요. 그리고 그게 더 충격이었고요. 

그루밍이라니 어떤 상황이었죠?

그럴수 밖에 없었다. 혹은 네가 먼저 원해서 한거였다 이런 식으로요. 

입양오빠가요?

네, 계속 저를  그루밍 했고 그 사실이 드러난 뒤에는 그냥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묻혀버렸어요. 아무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이상했던 것이 우리 가족이 평소에 이런 저런 사안에 대해서 대화를 많이 나누는 편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이야기는 바로 묻혀버렸어요. 그러다가 제가 나중에 그 일을 꺼냈어요. 그때 왜 그 일을 해결해주지 않았냐고, 오빠한테 뭐라고 하기나 한거냐고요. 그부분이 제일 힘들었어요. 아무도 그 일을 문제삼지 않는 것이요. 

그리고 그 뒤로 분노조절문제까지 생기게 한 문제가 있었는데 제가 미혼모인 상태로 지금 제 아들을 임신을 했어요. 그때 제 양아버지가 원래도 그리 다정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때 저를 너무 심하게 대했어요. 도움이 필요한 저를 보듬어주기는 커녕 저를 더 불안하고 불편하게 만들었죠. 감정적 학대 수준으로요. 그때 진짜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때 마침  오빠도 이혼을 하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그 오빠는 아들아이와 같이 집에 들어와서 살게 해줬어요. 저는 거의 쫓겨나다 시피 하며 집을 나와야 했고요. 제가 미혼모가 되어서 우리 가족의 치부를 온천하에 드러나게 된것 마냥 말이에요. 안팎으로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으로 보이고 싶었는데 말이죠. 오빠가 저한테 한 짓이 제가 저지른 잘못보다 더 심한 잘못인데 오빠의 죄는 은폐되고 어려울때 집에 다시 받아들여졌잔아요. 한편으로는 오빠는 친 자식이라 그랬나 싶기도 해요. 항상 오빠 편을 들었었거든요.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작용을 한것 같아요. 

그래서 제 아이의 이름을 지을때도 아이를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해주자 싶었어요. 아이의 아빠 이름이 제이슨이고 저는 제니였던지라 아이 이름도 같은 “J”가 들어간 이름을 해주고 싶어서 조든이라고 이름을 짓고 제 성인 맥칼럼을 붙여 주었는데 미들 네임으로 아버지의 미들네임인 유진Eugene을 붙여주었어요. 아버지가 그 아이에게 잘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요.  그 계획이 잘 먹혀들어가서 제 아이가 아버지가 예뻐하는 손자가 되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실때도 그 말씀을 하실 정도로요. 아이를 보호하려던 제 작전이 성공한것이었죠. 좀 서글픈 작전이긴 했지만요. 

정작 젠이씨는 필요할때 보호받지 못했었잔아요. 

그냥 알았어요. 이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요. 나는 보호받지 못하고 학대당했어도 말이에요. 그래서 아버지가 아이한테는 함부로 하지 못했어요. 그 어린 나이에도 저는 알았던 거예요. 이름이 뭐라고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을요. 아이는 본인의 미들네임을 별로라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엄청 중요한 안전장치였던 셈이에요. (흐느낌)

이런 일들이 자존감에 영향을 미쳤나요?

가끔씩은요. 의구심이라는 씨앗은 그 뿌리를 정말 빨리 내리니까요. 하지만 저는 대체로 이상하게 자신감이 넘치는 편이었어요. 

머리스타일도 안경도 독특하고 개성이 넘치는 편이잖아요. 네, 완전 자신감 넘쳐 보여요. 

네. 대체로 자신있는 편이에요. 내 능력을 알고 승부욕도 좀 있고요. 일을 한번 시작하면 제대로 해내는 편이고 잘 안된다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편이에요.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크게 성공하는 것을 보면 저도 조금 낙담하기도 하고 그러죠. 그래도 조금 의기소침해하다가 다시 시작하고요. 제가 글을 좀 잘 쓰는 편인데 글 쓰면서 많은 일들을 이겨내기도 했어요. 최근에 제 친구가 운영하는 극장에 제가 쓴 연극대본을 제출했는데 보기좋게 거절당했거든요. 말했듯이 의구심라는 씨앗은 너무 잘 자라잔아요. 그래서 아 나는 역시 안되나봐 그냥 때려 쳐야지 하고 생각했죠. 의욕도 없어지고 자신도 없어지고 하니 제가 속해 있는 입양인글쓰기 모임에서도 잘 못 쓸정도로요. 평소라면 잘은 못 써도 쉽게 써내려갔었거든요. 그러다가 최근에 두 가지 일이 일어났어요. 한국에서 발목을 다친 이후로 뭐랄까 몸이 회복해야 되는 상황이 이르니 동력이 떨어졌나봐요. 그래서 지금 조금 그런 상황이고요. 또 다른 일들도 있었고 아무튼 그런 일들이 제 글쓰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꾸준히 쓰고는 있어요. 계속 써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요 그래야 이 모든 일들을 이겨낼수 있꺼든요. 매번 출판될만한 멋진 작품을 써야 하는건 아니니까요. 그냥 그래야 되니까 계속 쓰는거죠. 

그래서 암튼 저는 꽤 스스로 자신있는 편이고 낙천적이고 항상 이상하게도 모든 일에  밑도 끝도 없이 밝았어요. 좀 이상하죠.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꽤 현실주의자이기도 해요. 되게 부정적이고 꼬였기도 하고요. 어떤땐 비관적이기도 하기도 하고요. 저한테 끔찍한 일을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사람들한테서 좋은 면을 많이 보려고 해요. 아마 제 정신건강에 그리 좋은 일은 아닐것 같같죠?(웃음) 아무튼 사람들한테 좋은 면을 본다고 해서 널 용서해, 나를 계속 학대해 그러는건 아니에요. 따질 일이 있으면 따지기도 해요. 

젠이씨가 사는 그 지역에서는 입양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쉽지 않을 거예요

맞아요. 보통 그런 아름다운 입양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제가 내는 목소리에 불편함을 표시해요. 그럼 저는 당신 사연이 완벽하든 아니든 어쨌거나 우리의 입양은 트라우마로부터 시작된거아니냐고 받아치죠. 맞잖아요. 

우리 입양인 글쓰기 모임에 속해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아주 아름다운 입양사연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무런 트라우마가 없거나 의견이 없거나 하는 것은 아니죠. 사람들이 이 글쓰기 모임을 좋아하는 이유가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라서에요. 항상 모든 이야기들이 “입양한” 사람 위주였으니까요. 입양가족들한테 상처주는 것이 두려워서 하지 못했던 그런 이야기들 말이에요. 아마 입양 가족들은 그들이 이렇게 느낀다는 것을 모를수도 있고요. 우리는 완벽한 가정이니까 하고 말이에요. 그래서 입양인들이 입양부모한테 상처를 주거나 혹은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해서 말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을 드러낼수 있는 안전한 공간인것이죠. 아무튼 제가 말하는 바가 그거에요. 각각의 입양 사연은 다 다르다는 것을요. 

한국에서도 정부나 아니면 입양단체등이 젠이씨가 입을 좀 다물어 줬으면 한다고 느끼나요?

네 그렇게 느낀적이 있어요. 제가 한국에 가서 왜 한국말을 못하냐는 질문을 받을때마다 제가 입양되었다고 안 밝혀요. 왜냐하면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거든요. 갑자기 다들 당황하고 마치 못할말이라도 한것 같은 분위기가 되죠. 왜냐하면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기 때문이에요. 제가 제 입양부모를 찾는 포스터를 만들어서 돌릴때도 사람들은 알고싶어 하지 않더라고요. 읽으려고도 하지 않고요. 네 마치 그런일은 없었다는 것처럼 행동해요.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너무 속상한데 왜냐하면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잔아요. 당신들의 역사에서 아주 큰 일이었다고요. 인종청소였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죠. 피터가 지금 밝히고 있잖아요. 인종청소의 일환이었다고요. 아마도 진짜일거에요. 일본 식민지를 겪은 것도 그렇고. 군대도 주둔했고요. 그러니 혼혈도 많았을 것이고 그런 아이들이 한국인속에 섞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겠죠. 그러니 제가 저의 출신찾기를 하려고 여기저기 묻고 다닐때 사람들이 입을 다무는 것이죠. 통제할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니까요. 그러다가 DNA기술이 등장하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죠. 갑자기 가족들을 서로 찾기 시작 했잖아요. 정부가 곧 나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금방 밝혀질 일이니까요.

갑자기 20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사회로부터 지워놓고 이 사람들이 나중에 돌아와서 어떤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자 가정을 지켜야 하고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는 둥 하고 변명을 하잖아요. 이렇게 사람들을 보내버린 그 근원이 정부인데요. 

그 부분이 제가 미국의 지인들한테 제 친가족 찾기를 설명할때 어려운 점이에요. 미국에도 가족찾는 토크쇼가 있잖아요. “내가 바로 당신의 아들입니다

“(I was your son)같은 프로그램 말이에요. 한국에서는 친부모를 찾았다고 하더라도 바로 연락해서 제가 딸이라고 혹은 아들이라고 밝히면서 자동으로 만날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개인정보보호법때문이라고 해요. 왜냐면 갑자기 친모나 친부의 삶에 영향을 줄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연락을 하기를 꺼려하죠. 그러니까 친모나 친부의 권리만 중요하고 내 권리와 감정은 아닌거죠. 내 삶은 송두리째 도둑맞았는데도 불구하고요. 

나는 그냥 왜 였는지만 알고 싶을 뿐인데 말이에요. 그리고 가족과의 재회가 항상 해피엔딩인것만은 아니잖아요. 친가족을 찾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제가 누누히 이야기 해요. 가족을 찾은 후에 더 마음 아픈 일들이 벌어질수도 있고 혹은 복잡한 상황이 생길수도 있고 또 가족을 찾았다고 해서 그동안 가졌던 모든 의문들이 해소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궁금한 것들이 더 생기기도 하고요. 그러니 가족들과 다시 만나는 것이 항상 좋은 일 많은 아니에요. 저도 그냥 왜 인지를 알고 싶어요. 어떤 일이 있었던건지요. 

입양인 대부분이 그런 이유로 가족을 찾죠.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요. 친가족과 관계를 맺는 것도 좋겠지만 그때문에 가족을 찾는 것은 아니죠. 나 라는 존재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고 싶은 거죠. 

맞아요. 제가 딱 그래요. 가족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에요. 남편도 있고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도 있어요. 재밌는 것이 아들아이는 한국인혼혈이고 며느리는 100퍼 한국인이잖아요. 그러니 제 손녀는 거의 한국인인셈이죠. 제 아빠보다 더요. 그리고 지금 제가 이렇게 한국인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잖아요. 제 인생의 다른 시기 즉 한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화제를 돌리곤 하던 그런때가 있었는데 그때 나를 알아왔던 사람들이 이제 제가 한국에도 가고 한국 요리도 하고 한국에 대한 포스팅도 하니까 “그럼, 그렇지” 이런 눈치에요. 그리고 아들 내외도 이런 저를 너무 좋아하는데 제가 제 손녀아이와 유일하게 혈연으로 연결된 조부모인거잔아요. 며느리는 입양됐고 제 남편은 제가 아들아이를 낳고나서 만났으니까요. 그러니 손녀와 피가 통하는 조부모는 저 뿐인거죠. 그리고 제가 그 아이에게 한국과의 끈이 되어 줄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요. 열심히 배워서 적용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리고 며느리 스카일라도 열심히 한국에 대해서 배우고 있고 아들아이는 이상하게도 어려서부터 항상 그래왔어요. 그래서 제가 아이들에게 해주는 음식들을 보며 제 손녀가 내 한국 할머니가 해준거야 하고 기억할 날이 오겠죠. 그렇게 우리 가족만의 전통을 새로 쌓아하는거잖아요. 저 스스로는 비록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놓쳤지만 제 아이들에게는 기회를 주고 싶어요. 

미혼모로서 가족의 지원없이 혼자 아이를 낳았을때 말이에요. 그때 한국의 엄마를 생각했나요?

네, 아주 많이요. 우리 엄마도 이런 상황이었을까?  엄마의 삶이 나에게도 대물려진걸까 하는 생각들이요. 어떤 반복되는 패턴인가 하는 생각들이요. 아주 많이 했어요. 그리고 지금 내가 싱글맘으로서 느끼는 이런 감정, 아이를 바라볼때 드는 생각들을 엄마도 느꼈을까 하고요. 그래서 그부분을 제 연극 속에서 친엄마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에 반영했어요. 내가 가졌던 고민들을 엄마도 가졌을까 궁금했거든요. 제가 아이를 막 낳을때 든 생각이 아이가 백인에 더 가깝기를 바랬어요. 아이 낳는 순간에 드는 생각치곤 참 이상하죠. 제가 살면서 겪었던 문제들을 아이는 겪지 않기를 바랬거든요. 태어난 아이 얼굴을 보니 백인에 더 가깝게보여서 안도했던 기억이 나요. 그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좀 씁쓸하지만요. 제 엄마는 한국에서 한국 아이를 낳은 거니 그 걱정은 안해도 됐었겠지만서도요. 그때 제 친엄마와 내 삶이 비슷해진다는 생각을 지울수 없었어요. 

사전에 부탁은 안했지만 혹시 젠이씨의 작품을 좀 읽어줄 수 있나요? 연극작품이나 혹시 다른 것이라도요?

연극은 다른 데서 읽었고요. 제가 지난번에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쓴 시가 있어요. 14시간이 넘는 비행시간동안 머릿속에 떠오른 내용을 저장해두었다가 나중에 옮겨 적은거에요. 뒤에 영상과 함께 낭독할수 있도록 쓴거에요. 

제목은 Yellow입니다. 

노랑  

그것은 두살의 내가 이 이국땅으로 올때 입었던, 

소매에 파란 글씨의 홀트 로고가 있던 작은 원피스.

노랑

그것은 내 입양엄마의 머리색. 

그리고 엄마가 나를 안을때 엄마 주위로 쏟아지던 따듯하던 햇살. 

나는 이제 안전하다고 느꼈고 그녀와 바로 사랑에 빠졌어. 

노랑

나를 “고양이”라고 소리치게 만든, 

나의 새 집에서 나를 반겨준 뚱뚱하던 고양이의 눈. 

그것은 내 입양부모가 처음 들은 나의 목소리였고 그들은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었대. 

노랑

그것은 아주 어린나이부터 좋아할 수도, 가깝지도,

그리고 살갑지도 않았던 내 양아버지의 수염. 

노랑

그것은 경계의 색. 오늘은 아빠가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제발 오빠와 단 둘이만 남겨지지 않기를.  

노랑

그것은 안심이 될때까지, 

자장가를 들으며 잠에 들때까지 쭉쭉 빨았던, 

내가 좋아하던 치발기의 플라스틱.

노랑 

그것은 나만 백인이 아니라고 

“봐라, 저것들 중국놈들 일본놈들 더러운 손발들”하고 

학교에서 외쳐대던 녀석들.

노랑 

낯선 장소에 들어갈때 

사람들이 친절할지 아니면 싸늘할지 몰라 졸였던 내 마음

노랑

자기도 첫날이라 너무 떨린다며 같이 앉자고 청해준 

내 첫 친한 친구를 만난 그 스쿨버스

노랑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내 차를 몰았을 때 

내 얼굴로 내리쬐던 햇살과 내 머리카락 사이로 지나가던 바람. 

우린 볼륨을 높이고 모든 걱정이 사라진 듯 

가슴이 터지도록 소리를 질렀지.

노랑 

‘드디어 동양여자하고 해본다’라는 듯 

내 위로 나를 짓누르던 남자들의 가쁜 숨결

노랑

그것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내 이름을 물었을 때 네가 몰던 차

노랑 

우리가 부푼 가슴을 안고 처음으로 함께 등산을 했을때 

발 밑에서 부스러지던 나뭇잎의 색

난 우리가 함께 할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어.

노랑

평생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할 때 우리 손을 예쁘게 장식했던 금반지

노랑

우리의 사내아이를 감쌌던 포대기. 

그 아이는 

마치 우리를 다 안다는 듯이 그리고 믿는 다는 듯이 우리를 올려다봤고 

내 마음은 

내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사랑으로 가득찼어. 

노랑

반딧불과 수만개의 생일 촛불들, 자전거들과 캠핑 

그리고 

노랑

그것은 네가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던 날 네 목에 둘렀던 졸업가운

노랑

우리가 다시 찾은 그 나라에서 

네가 지금의 네 부인에게 프로포즈 했을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

감추고 싶었던 나와는 달리 넌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했지 

지금은 너와 함께 나도 자랑스러워.

노랑 

판테믹으로 못 할줄로만 알았던 네 결혼식 때 네 가슴에 꽂아 주었던 부케. 

노랑 

미국으로 올 때 내가 입었던 원피스, 

더 이상 버려지고 발견되고 보내버려진 아이가 입었던 치욕의 원피스가 아니지.  

소매에 파란 글씨의 홀트 로고가 있는 노란 원피스

지금은 너의 며느리와 너의 손녀 자스민 나리가 입는 원피스.

청취자들이 젠이씨에게 연락하고 싶으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요?

페이스북에서 찾을수 있어요. 제가 페이스북 조상님 수준이에요. 아직 아무도 페이스북을 모를때 시작했거든요. 페이스북이 제일 쉬울 거에요. 이메일도 있긴 하지만요. 제 이름을 검색하시면 되는데 예전에 “Princes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페북에서 정책을 바꿔서 모두 실명으로 전환해야 했을때 제 Zhen E Remmelsberg로 계정을 다시 만들었어요. 그때 화가 많이 났는데 페북에서 예명으로 활동하던 예술가나 예능인들도 실명을로 다 바꿔야 했거든요. Zhen E Remmelsgerg입니다. 

젠이씨 오늘 이야기 고맙습니다. 음악을 협찬해주는 제이진씨도 고맙습니다. 더 많은 음악을 듣고 싶으시면 jaejinmusic.com. 을 찾아주세요. Kimberly Kaminski 와 다른 모든 후원인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매달 이 팟캐스트가 지속되도록 도움주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이 팟캐스트를 후워하고 싶으시면patreon.com/adapted podcast 를 찾아주세요. 다음에 뵐때까지 안녕히 계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