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5, Episode 10: 아픔, 그리고 용서

“상처받고 아파하는 것의 최종 단계는 놓아버리는 것인데 이 놓아버리는 것이 바로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하는 용서죠”

제 이름은 조이(JO-YI)이고 제가 다시 지은 이름이에요. 한국식으로 하면 김조이가 되겠네요. 제가 미국에 왔을때 이름 철자를 바꿔서 조이 김 메러디스 데이비스( JO-EY Kim Meredith Davis)라는 이름을 받았거든요. 이십대가 되니까 갑자기 너무 진절머리가 나더라구요. 다른 사람들이 저에 대해 이런 저런 사실들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요.. 그래서 이름을 최대한 다시 원래 대로 돌렸어요. JoYi로 철자를 바꾸고 성도 Rhyss라고 제가 선택했어요. 그 어디 와도 연고가 없는 이름이죠.. 그래서 지금 제 이름은 조이 김 뤼스 (JoYi Kim Rhyss)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 

뤼스라는 이름을 스스로 선택했다고요? 

맞아요. 제 세 아이들과 제가 같이 쓰는 이름이에요. “강인함”, “열렬함” 이런 뜻인데 저하고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해요..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죠?

51살이에요. 생일이 두개죠. 3월에 있는 생일이 나중에 알게된 생일이에요. 3월 23일이 제 진짜 생일이라 그때가 되면 52살이 되겠네요. 그런데 미국 시민권에는 4월 23일로 되어 있어요. 다른 입양인들 처럼 나에 대한 사실들이 막 만들어진거죠. 친엄마를 찾았을때 내 진짜 생일을 알게 됐죠. 그날이 입양된 날이기도 하고요. 아무튼. 제 생일은 3월 23일이고요 답을 짧게 하기가 어려운 질문이에요. 

피부가 너무 좋아보이네요. 스스로의 정체성을 뭐라고 생각하나요?

흑인인 여성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살짝 갸우뚱 하기도 하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거의 자동적으로 흑인 여성으로 절 보거든요. 그리고 제가 다른 흑인들을 볼때 느끼거나 알아챌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한국인들을 볼때는 그러지 못하는 것들을요. 그리고 아홉살까지 한국에 살았는데 그 기억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인임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지금 스물 두살인 제 딸아이가 왜 엄마는 아시아인 인것을 내세우지 않냐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하대요. 그 애는 어릴적부터 미네소타의 콘코르디아 한국어 캠프에 가고 싶어 해서 제가 보낸적도 있고요. 그래서 중학교 이후로 한국어 학교에도 가고 저한테 한국 음식도 만들어 달라고 하고 그랬어요. 꽤 성가셨죠(웃음). 지금은 제가 혼혈이라는 것을 받아 들이고 한국에도 가봤을 정도구요.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미국에 사는 흑인인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요. 

아홉살 때, 입양이 될 당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어떤 기억이 남아 있나요? 

기억이 별로 없어요.. 그리고 제 기억을 제가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어요. 항상 제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던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많은 부분이 굉장히 흐릿해요. 엄마와 같이 부산에서 살았다는 것, 그리고 친 오빠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사를 많이 다녔던 것이 기억나고 몇몇 장면들이 스치듯이 떠올라요. 많이 울었던 것, 항상 도망다녀야 했던 것, 놀림을 당했던 것들이 때려 맞듯이 떠오르는 장면들이에요. 뭐랄까 갑자기 헉! 하고 통증이 오는데 동시에 이젠 더이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도하는 그런 기억이요. 

제가 제 일 – 상실, 트라우마 상담-등을 할때 공개하는 이야기인데요. 제 첫 기억은 엄마한테 오빠가 어디갔냐고 묻던 기억이에요. 어느날 갑자기 오빠가 없어져 버렸어요. 같은 혼혈이라 저와 비슷하게 생기고 어느 정도는 저를 보호해주고 그래서 제가 많이 따랐던 그런 오빠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어요. 그때 제가 다섯살이었으니까 오빠는 아마 열살정도 됐었을거에요. 그 뒤로 아무 소식도 없었죠. 아무도 저한테 오빠가 어디로 간건지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말을 안했어요. 그런데 그때 저희 같은 혼혈 아이들이 많이 없어졌다는건 알고 있었어요. 이미 그때에도 우리가 혼혈이라서 한국사람들이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언젠간 나도 멀리 보내질수도 있다는 것도요. 그게 제 첫 기억 아니 어쩌면 세상에 대한 첫 인식이었을수도 있어요. 

 그리고 제가 여덟살 반 정도 됐을때 1978년 10월이었죠. 그때 엄마가 저를 Father Keane’s home for Amerasian youth(역자 주: 미국인 킨 신부가 설립한 혼혈아동들을 위한 시설)에 맡겼어요. 거기서 6개월쯤 있었어요. 혼혈아이들을 위한 곳이었는데 백인혼혈아이들이랑 한국인 아이들만 받아주고 흑인 혼혈 아이들은 안 받으려 했어요.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애들 중에서도 우리는 더 아랫계급이라는 것을 고아원에서까지  확인받아야 했던거죠. 거기서 6개월 정도 머물렀어요. 꽤 짧은 시간이죠. 제 기억이 확실하지 않을수도 있고요 항상 제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어요. 생존모드에 있었다고 나 할까요? 최대한 조용히 눈에 안 띄게 말이에요. 그렇게 버텼던 것 같아요. 얼굴에 흉터가 있는데 돌에 맞아서 생겼다는 것은 기억이 나요. “N-word”(역자 주- “Nigger, 깜** )로 불리는게 일상이었고 매번 도망가고 숨어야 했던 기억이 나요. 엄마가 울지만 말고 차라리 더 빨리 도망치라고 제게 말했던 것도 기억나고요. 놀림받지 않게요. 

엄마가 친척들을 방문할때면 같이 못 들어가고 저만치 떨어져서 엄마가 나올때까지 기다려야했어요. 그게 할머니와 할아버지였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가 흑인이라 같이 못들어가고 밖에서 기다려야 했던것은 분명히 알았어요. 다른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이건 내 나라가 아니구나 하는걸 분명히 알았죠. 나는 여기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요. 인종차별이 아예 노골적이었어요 아예 대놓고 얼굴에 대고 하는 수준이었어요. 여기 미네소타주가 자랑하는 티나지 않는 은근한 인종차별이 아니고요. (웃음) 물론 그것도 처음엔 문화충격이긴 했어요. 적어도 한국에서는 내가 설자리는 분명했었거든요. 어딜가나 야유와 조롱을 받을거라는 것을 알았고 그게 일상이었어요. 어른들이나 아이나 똑같았어요. 

지금 이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중년에 접어들면서 힘든 시기가 찾아왔거든요.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잖아요. 내가 누군지 그런 것들이요. 그때 제가 살았던 고아원을 검색해봤어요. 어떤 다큐멘터리를 찾았는데 뤽 스몰란(Rick Smolan)과 나타샤 프뤄스( Natasha Pruss)의 테드톡이었죠. 뤽이 그 몇년 전에 책을 출간했대요. 그가 20대 때 타임지의 사진기자로 활동했는데. 나타샤라는 한국의 어느 산 중턱마을에서 찾아낸 아주 활기찬 여자아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대요. 그 사진기자의 눈에 다른 혼혈 아이들은 마치 좀비 같았는데 나타샤는 눈에 생기가 돌고 밝은 기운이 가득했다네요.. 그 기자의 나레이션이 너무 짜증나서 스크린 너머로 한대 후려 치고 싶었지만 혹시 나의 과거에 대한 어떤 실마리라도 찾을수 있을까 해서 좀 화가나도 그 것을 계속 보고 있었어요. 화면도 오래되고 아무튼 좀 별로였는데 갑자기 화면이 바뀌면서 어떤 사진이 나왔는데 거기에 제가 나온 거에요!!!  사진속에 제가 있었어요. 그때가 기억나요. 엄마가 날 놓고 가버린 것이 너무 트라우마가 커서 고아원에 남겨졌던 날 말고는 다른 기억이 없는데 그 날은 기억이 나요. 갑자기 사람들이 저한테 잘해주고 머리를 빗겨주고 새옷을 입혀줬어요. 나타샤를 위해 사진을 찍는 날이었던 거에요!! 나타샤랑 저랑 둘이 나이가 좀 많은 편에 속했어요. 나타샤는 열한두살 정도 였을거고 저는 아마 여덟살이었을거에요. 우리 둘다 더 어린 아이들을 안고 있었어요.. 나레이션에서 그 사진작가가 말하길 다른 아이들은 눈에 생기가 없고 영혼이 없어 보인다고 마치 좀비처럼 그냥 흐느적거린다고 말을 하더라고요. 정확히 그가 그렇게 말한건 아니고 제가 대충 기억하기론 암튼 그 비슷하게 말했어요.. 그러면서 사진들을 보여주는데 그가 말하는 그 좀비같은 아이가 바로 나더라구요.. 나타샤는 사랑스러운 아이고요. 제가 바로 그 영혼이 없어보이는 아이였고요.. 그 뒤로 나타샤를 만났는데 아주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아예 백인으로 보였어요. 백인 혼혈인데 그냥 백인으로요.. 그러니 아마도 백인구원자의 시각에서 그 젊은 남자 기자가 어린 나타샤를 봤을때 어떻게든 구해주고 싶었겠죠. 딱 그림이 그려지잖아요. 그쵸?

그리고 지금도 난 그 서사를 벗어나지 못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대요. 평생을 그것과 싸워왔는데 말이에요. 저는 같은 인간이 못되고 그냥 주변을 배회하는 존재인거죠. 나도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증명해야 하고  “너는 대체 정체가 뭐니?” 라는 질문에 항상 답을 해야 했죠. 그 질문을 받는 다는 것 자체가 내가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다는 거잖아요. 

그 비디오를 보면 모든 사람들이 저를 좀비라고 생각할거에요.. 그러니 저한테 한국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뭐냐고 물어보면 어떤 1차적인 기억이 없다고 말해요. 저는 항상 좀비였으니까요. 

굉장히 힘들었겠네요. 살기 위해서 어쩌면 기억을 놔버린 것일수도 있죠.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요. 엄마가 고아원에 데려다주던 날이 기억이 안난다고 했던가요? 아니면 혹시 기억나는 것이 있나요?

엄마랑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나요. 엄마가 날 고아원에 놓고 돌아서서 가던 기억은 나요. 그게 무슨 상황인지 분명히 알았던것 같아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던것 같은데 가끔은 그것이 제가 지금 한국어를 못해서 인가 싶을때도 있어요. 그때의 기억은 한국어로 되어 있을텐데 미국에 온 이후로 한국어를 잃어버렸으니까요. 아마도 그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해요. 어떤 말도 기억이 안나는데 그냥 알았다는 것만 기억나요. 내가 여기서 나갈수 있을때까지 여기서 살아야 한다는것을 알았다는 것만요. 

그럼 미국에서의 제일 첫 기억은 뭐죠? 

미네소타 공항에 내린거요.. 카오미씨의 경우와는 또 다르게 입양부모에게 이미 아들이 둘이나 있었어요. 다섯살짜리와 한살짜리가 있었는데 고아원에서부터 이미 아이들을 돌봤어가지고 한살짜리가 막 뛰어가니까 제가 쫒아갔어요. 눈폭풍을 뚫고 어떤 친척집에 갔는데 거기서 오즈의 마법사를 봤어요. 미네소타에 도착한 첫날 밤에요. 나중에 알고보니 사촌들이었어요. 다들 저를 보며 좋아라 했고. 그들을 보며 저도 그럴려고 흉내를 냈던 기억이 나요. 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행복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누군가가 행동을 잘 하라고 미리 귀띰을 해준것 같기도 하고요. 안그럼 다시 돌려보내질수도 있다고요. 그 전에 고아원에서 입양을 갔던 친구 하나가 다시 돌아왔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초기 몇년간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빨리 배워야 한다고 항상 의식적으로 노력했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그날밤에 모두가 흥분한 상태로 이불을 바닥에 깔아놓고 잠옷을 입고 누워 오즈의 마법사를 보는데 저는 생각했어죠. ‘그래 지금은 이걸 하는거야’ 이렇게요. 돌아보면 그렇게 항상 내 스스로를 의식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봤어요 내 몸 밖에서 내가 하는 일을요. 그런식으로 기억이 여러겹으로 존재해요. 

그 후로 미네소타의 스프링타운이라는 작은 마을로 갔어요. 인구가 1000명 남짓이었는데 그곳에 제 입양아버지가 루터교 목사로 부임했거든요. 노르웨이 후손들이 사는 마을이라서 마을의 표지판도 노르웨이어로 되어 있었어요. 미국의 가장 큰 노르웨이 공동체였어요. 아무튼 갑자기 이 잘 모르는 사람들을 엄마아빠라고 부르며 살기 시작했죠. 다섯살 짜리는 진짜 제 속을 많이 썩였고 계속 울고 절 힘들게 했어요. 한 살짜리를 돌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죠. 고아원에서부터 애를 어떻게 보는지 배웠으니까요. 가끔씩은 애보는 사람이 필요해서 나를 입양했나 싶은 순간도 있었어요. 온지 얼마 안되었을 때 벌써 저 혼자 밤새 애를 봐야했던 적도 있었어요. 그때 열살도 되기 전이었거든요. 지금 기준으로는 말도 안되지만 그땐 오래전이니까요. 그때도 아직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애를 맡기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아무튼 그렇게 제 미국에서의 삶이 시작됐죠. 그 후로 학교에서 ESL(제 2외국어서의 영어)도 듣고 백인만 가득한 아주 작은 마을에 익숙해져 갔죠. 다들 같은 학교를 가던 아주 작은 마을이었는데 거기에 몇년을 살다가 아이오와주 데모인으로 이사를 갔다가 또 캔자스주 토피카로 이사를 갔어요. 그렇게 이사를 할때마다 사람들하고 사귀는 것이 조금씩 힘들어졌어요. 조금씩 나이를 더 먹으며 조금씩 더 어색하고 불편해졌으니까요.

지금은 입양 가족 모두하고 연을 끊었어요. 오랫동안 거의 반강제로 인연을 이어오다 그렇게 된지 얼마 안 됐어요. 한국에서는 제가 제일 막내였다가 오빠가 어느날 사라졌죠. 그리고 이 집에 입양이 되고 나서는 갑자기 제가 제일 맏이가 되더니 온갖 책임이 맡겨졌잖아요. 제일 큰애이자 유일한 딸이 된거에요. 갑자기 두 어린 동생을 돌볼 책임이 생긴 큰 누나가 된거에요. 그리고 나서 5년쯤 후에 한국에서 다른 아이를 또 입양해서 이젠 그애가 막내가 되었고 저는 네 아이 중에 첫째가 되었죠. 둘은 입양한 아이들이고 둘은 친자식들이었죠. 그때로 돌아가서 어떤 연구같은 것을 해보면 참 재밌을것 같아요. 공교롭게도 입양된 저희 둘은 꽤 힘든 시간을 보냈고 친자식들은 세상의 잣대로 봤을때 꽤 성공한 삶을 살고 있으니까요. 

제 입양부모님은 모두 똑같이 키웠다고 항변을 할지도 모르죠. 그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르고요. 서로 다른 것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똑같이 키우면 어떻게 되겠냐구요. 아무튼 여러가지로 복잡한 상황이었어요. 데모인으로 이사를 갔을때가 중학생이었거든요. 그때는 많이 친해지고 정을 붙이려고 노력을 했어요. 그러다가 캔자스주 토피카로 또 이사를 갔죠. 가는 곳마다 제가 유일한 흑인이었어요. 그리고 커가면서 점점 더 흑인의 모습이 나오더라구요. 그렇지만 저는 말을 잘했어요. 영어를 빨리 배우고 싶어서 엄청 노력도 했고요.. 흑인 액센트 없이 백인처럼 말하려고요, 그래서 항상 의식적으로 노력을 많이 했어요. 80년대에는 인종차별이 지금과는 달랐어요. 장난 아니었죠. 제 친구들이 항상 인종차별적인 농담을 하다가 ‘맞아, 그런데 너는 아니야!. 너는 그들과 다르잖아! 이런 식이었죠. 이런 식으로 저는 흑인이었지만 흑인과 다르다고 취급됐어요.. 저희 부모님도 항상 그런식이었고 그것이 항상 혼란스러웠죠. 그러다가 제 입양아버지가 목사직을 포기하고 정신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해서 캔자스주 토피카로 이사를 가게 되었어요. 메닝거병원에서 일을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자신의 흑인인 큰딸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진단을 내리곤 저를 정신병원에 한달동안 입원시켰어요. 그때도 저는 생각했죠. ‘이젠 내가 아픈 사람 역할까지 해야 하는구나’ 하고요. 우리 형제자매들한테도 누나가 많이 아파서 우리 가족한테 이렇게 많은 사건사고가 일어나는 거라고 말을 했고요. 

몇년 전까지도 아무도 그 일을 거론하지 않았죠. 그러다가 다시 저를 그렇게 취급하는 것이 보여서 제가 그때 인연을 끊었어요. 제가 살기 위해서요. 버릴 인연은 버리고 슬퍼할것은 슬퍼하는 과정속에서요. 어떠한 체도 하지 않고 굳이 어떠한 화해도 필요하지 않았고요.  제가 그들의 소망을 못 이뤄줬겠죠. 딸을 가진다는 것에 대한 환상 같은 거 말이에요. 아이를 꼭 네명을 가지고 싶었대요. 아버지라는 사람이 사남매 였어서 말이에요. 그래서 아이를 넷을 가지고 싶었는데 아마도 더 낳지 못했나봐요. 

이렇게 저렇게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집도 아니었어요. 입양을 꼭 하고 싶어했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어쩌다가 시기와 조건이 맞아서 하게 된거죠. 그때는 루터교 목사가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하는 것이 뭔가 유행같은 일이었으니까요. 얼마나 많은 한인 입양인이 루터교 목사들에 의해 입양됐는지 알고 싶네요.  루터교가 난민을 위해 캠프를 열기도 했었고. 암튼 그때 목사들이 입양을 많이 했죠. 저를 열심히 키워주신건 알겠는데 저를 진심으로 원했어서 였는지는 모르겟어요. 그리고 그때도 그걸 알았던것 같아요. 본능적으로요. 성인이 되고 나서 갑자기 될대로 되라 하는 마음이 들어서 엄마에게 물어봤어요. 우리를 그렇게 원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입양한거냐고요. 그랬더니 엄마 왈 “네 아빠가 넷을 원했어서”였어요. 뭔가 복잡한 상황이 있었던거죠. 그러니까 제가 그들의 미완성인 꿈을 이루기 위해 있어야했던 거에요. 

어떤 기독교적 소명이나 백인 구원자적인 생각에서였을까요?

그럴수도 있고요 그들 개인적인 소망일수도 있고요. 넷을 원했는데 둘 밖에 낳질 못했으니 입양을 하는게 어떨까 이런 마인드 였던 거죠. 그게 전부에요. 미스터리죠. 공개를 안하니 개인적인 이야기니까 더 파지도 못하고요. 아무튼 그게 제가 들은 이야기에요. 그리고 다섯살 짜리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대요. 마더테레사 수녀 고아원을 통해서요. 수속을 다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취소가 됐다네요. 천주교 집안으로 보내고 싶었는데 우리가 장로교라서요. 너무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취소가 되어서 너무 마음이 아팠고 그 뒤로 저를 선택했다고요. 그 말을 듣고 제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을 해보세요. 안그래도 버려졌는데 입양부모한테도 첫번째 옵션이 아니었다는 말을 들었을때 어땠겠냐고요. 그리고 또 그 말을 굳이 저한테 한 의도는 또 뭡니까. 인도에서 오기로 했던 다섯살 짜리 아이가 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말을요. 마치 제가 와서 그들의 꿈이 못 이루어진것 같이요.  암튼 진짜 힘들었어요. 

스스로 흑인인 여성이라고 생각한다고 했잖아요. 흑인들 사이에서는 어땠나요? 바로 받아들여졌나요 아니면 그것도 힘들었나요?

물론 힘들었죠. 그리고 흑인들도 그 출신 배경이 아주 다 다르니까요. 

혹시 ‘너무 백인처럼 군다’ 이런 소리를 들었나요?

그것도 그렇고요, 흑인 사회에서도 컬리리즘(같은 유색인종 내에서도 피부색이 진한 정도에 따라 더 차별받는 경향, Shadism이라고도 한다)이 심하죠. .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진짜 한국인임에 그 정도의 차이가 있잖아요. 흑인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죠. 그러니 어떤 모임에서 저를 원할까 혹은 어떤 팀을 위해 뛰고 싶나를  생각해보면 저는 흑인이죠. 당연히 한국인 팀 보다는 흑인팀을 먼저 선택하겠죠. 집이라고 생각하는 곳이 어딘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지에 따른 결정이죠.

그런데 돌아보면 저도 정말 반흑인정서를 가지고 있었어요.  미네소타의 스프링 그로브나 아이오와의 데모인에서 학교다닐 때 저만 흑인이었고. 그래서 제가 흑인인것이 너무 너무 싫었죠. 캔자스 토피카에 살때 제 친한 친구하나가 차에 회초리를 싣고 다녔는데 그 친구는 그걸 “깜**들아 똑바로해라” 회초리 라고 불렀어요. 그 친구가 제 베프였다니까요. 그럴만큼 흑인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강했죠. 어느날 지나가다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봤어요. 제 스스로 생각하는 제 모습은 앞머리를 내린 백인 소녀였거든요. 그런데 거울에서 나를 바라보는 내 모습은 그게 아니어서 너무 충격이었죠. 학교에서 유전자에 대해서 배울때 두 세대안에 흑인 유전자가 없어질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선 순수 100퍼 백인을 만나서 흑인 유전자를 지우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하고 계산을 해봤던 기억이 나요. 그런생각이 어떻게 가능했겠어요? 인종차별적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저의 흑인임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런 제가 어떻게 하면 흑인인 손자손녀를 안 만들수 있을까 하고 궁리를 했었다는 사실이 너무 슬프죠. 어린아이가 말이에요. 

그 뒤로 좀 많이 돌고 돌아서 결국  Shattuck St Mary’s을 졸업했어요. 정신병원에서 나오고 나니 집을 나와서 기숙학교에 가는게 좋겠더라고요.. 그래서 기숙학교인 그곳에서 고등학교 3학년과 4학년을 보냈어요. 한 학년 전체가 33명 뿐이었는데 그곳에 다른 입양인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는 입양된 사실이나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길 거부했죠.  혹시 유일한 흑인 학생이었나요? 아니요. 다른 흑인 여학생이 한명 더 있었고 그 친구도 입양됐었는데 그 친구도 자신을 백인이라고 생각하더라고요. 그리고 선배중에 흑인이 한명 있었고 나머지는 혼혈이거나 했었어요. 비싼 사립학교라 사우디아라비아같은 데서 오는 외국인 학생들이 있었죠. 제 친한 친구도 그런 경우였는데 얼마나 부자인지는 몰라도 두번이나 약물과 알콜 사용으로 퇴학을 당하고도 다시 돌아오더라고요. (웃음)

그 다음에 학생이 한 1000명 정도 다니는 퀘이커교에서 운영하는 학교로 갔어요.  제가 마음이 편하려면 학생이 1000명 정도는 되어야 되나봐요. 인디애나주 리치몬드에 있는 작은 학교였죠. KKK단의 수도나 마찬가지인 오하이오주 데이튼에서 40분 밖에 안 떨어져 있는 곳이었어요. 80년대 말이었으니까 아직 기세가 등등할 때였는데 왜 자꾸 그런데로만 다니게 되었는지 몰라요. 그 학교에 흑인 학생이 54명이 있었어요. 그걸 알게된 계기가 갑자기 그 학생들이 나한테 와서 아는척을 하며 모임에 나오라고 초대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집에 갔는데 그때 그 장면이 지금도 영화의 한장면처럼 눈에 선해요. 갑자기 시간이 멈춘듯 모든 장면이 슬로우 모션처럼 돌아가더라고요. 그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이 흑인이었어요. 음악이 요란하게 흐르고 테이블에는 빨간 파티컵들이 흩어져 있고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지 뭐하는지 암튼. 그때 뭔가 제 안에서 감전이 된듯 왠지 그 순간이 너무 편안하고 좋았어요.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요. 그 후 얼마 안 있다가 모든걸 그만두고 케냐로 가서 6개월 동안 지냈고 그 후에는 자메이카에 가서 몇년을 살았죠. 미네소타로 돌아와서는 African spirituality community(역자 가제 : 흑인 영성 모임) 에 가입해서 푹 빠져서 지냈어요. 한번 하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거든요 

이렇게 흑인 사회를 여행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운것 같아요. 백인들 안에서 사는 것은 답이 아니었으니까요. 제 자신을 극도로 혐오했고 그래서 제 주변에 모든 것 모든 사람들과도 더 단절이 되어갔었죠. 항상 자살을 생각했어요. 입양인들의 자살비율이 보통 사람들보다 네배나 높잖아요.  항상 머릿속으로 자살하고 싶은 생각과 싸웠어요. 항상요.  아예 죽든가 아님 뭐라도 바꿔보든가 둘중에 하나였죠. 그러다가 드디어 저의 이 몸과 마음이 편할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게 되었죠. 흑인인 저의 몸이 편해진 장소말이에요. 그 역시 흑인인 이 몸이었죠. 그 뒤로도 많은 계기가 있었는데 그게 컸어요. 

내 몸이 편안해지고 내 스스로 내 몸의 주인이 되는 그런 거죠. 

네. 위축되지 않아도 되고 스스로를 작게 만들지 않아도 되는거요. 제가 머리도 엄청 크고 (주-흑인의 둥그런 머리스타일을 말한다) 입술도 크고 흑인 여성들의 특징을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너무 오랫동안 부끄러워 했어요. 항상 삐쩍 마른 금발에 앞머리를 내린 백인 여자애들과 같이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애들이 항상 지적질을 하곤 했죠. 그런데 웃긴건 지금은 오히려 입술을 도톰하게 보이려고 돈을 쓰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땐 그게 전혀 귀여운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아무튼 그런 애들을 찾아서 지적질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드디어 내 몸이 편하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흑인이나 황갈색 인종들이 주로 사는 곳으로 여행을 해보니 제 외모가 전혀 튀지 않는 거에요. 외국인인 것이 티가나긴 했지만  제가 흑인인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는 않았죠. 그렇게 제 스스로를 편하게 느끼기 시작했어요. 제 피부색부터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조이씨가 혼혈인것이나 백인가정에서 자란것을 알았을 때 그 새로운 사람들이 조이씨를 받아들여 줬나요? 아니면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나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살면서 한번도 어딘가에 확실히 속한다고 느껴본적이 없었어요. 항상 바람잘날이 없었고 언제나 생존이 달린 긴박한 상황에 처해있었으니까요. 자메이카에서 사귄 사람이 아주 폭력적이었어요.. 마침내 탈출했을때는 아이가 하나 저에게 남았고요. 그래서 그 뒤로는 싱글맘으로서 생존이 최우선 과제였죠. 그동안 하던 고민은 다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먹여살릴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정신줄을 놓지 않고 헤쳐나가며 살아남아야 할까가 됐죠. 갑자기 해결해야 되는 고민이 달라진거죠 사람들이 궁금해하긴해요. 여기처럼 다인종이 섞여 사는 곳에서도 출생배경등을 궁금해하죠. 그래서 지금은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대답하는 방법을 배운것 같아요. 제 성장환경 때문인지 너무 가까운 관계의 사람을 만들지는 않아요. 그러면 속깊은 이야기까지 안해도 되니까요. 친해졌는데 제 배경을 알고 나면 싫어졌다고 하는게 싫으니까요. 이게 답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네요.  

싱글맘이 된 것이 친엄마도 역시 싱글맘이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나요? 혹시 더 크게 다가오던가요?

저는 한국의 친엄마에 대해서 항상 좋게 말해봤어요. 같이 살기도 했으니까요. 살가운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엄마가 한번이라도 나를 안아줬던 적이 있었나 기억을 해보려고 했는데 없더라고요. 아홉살까지 같이 있었잖아요. 엄마는 굉장히 단호하고 수완이 좋은 분이었어요. 엄마랑 같이 있을때는 모든 것이 명확하고 분명했죠.. 길을 찾아다니거나 할때 말이에요. DMZ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던 터라 군인들을 자주 마주치고는 했었는데 그럴때도 엄마는 쫄지 않았더랬어요.. 일도 잘 하고 자신있는 사람이랄까요? 그래서 그걸 기억하며 엄마처럼 나도 강하게 이겨내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엄마라면 내가 이렇게 하길 원하겠지 라고 생각하면서요. 엄마를 내 마음속에 롤모델로 삼았다고나 할까요?  

엄마도 싱글맘 이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오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실은 지금은 아버지를 찾는데 주력하고 있거든요. 아무튼. 엄마가 그토록 강인한 분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다른 같은 처지의 여성들보다 저를 더 오랫동안 데리고 있을수 있었다는 사실이 저한테 말해주는게 크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강인한” 싱글맘이라는 글자가 나에게 각인되어 있는 것 같아요. 적절한 순간에 도움이나 개입이 있었다면 어떻게 피할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그런 삶을 살아왔네요. 아마 누군가가 제 삶을 영화로 봤다면 ‘저러다가 곧 애가 생길텐데’ 라고 생각했을거에요. 결국 그렇게 됐고요. 좀 웃기기도 한데 그냥 너무 뻔한 결말이잖아요. 

조금 일찍 정신을 차렸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때 엄마 생각을 많이 했죠. 엄마가 만약 내가 그런 폭력적인 관계속에 있는 걸 안다면 내 등짝을 한대 때리며 정신차리라고 했을거야 하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그 관계속에서 나왔죠. 그떄 제 아이 얼굴을 바라보며 제 아이는 그렇게 안 키우겠다고 결심하고 죽기를 작정하고 도망나와서 아이를 키웠어요. 돌아보면 그래도 잘 키운것 같아요. 지금 다 성인이 됐고 다들 잘 컸어요. 물론 실수도 많이 하고 많이 힘들었죠. 그렇지만 어떤 지표가 되어주는 것 그 역시 싱글맘이었던 제 엄마가 있었다고나 할까요?

삶이 굴곡이 많았네요. 건강하지 않은 관계에도 있어봤고. 어떤 면에서는 자초한 것도 있고요. 왜 그랬던것 같아요? 무언가를 찾고 있었나요? 그게 사랑받는 것이었나요 아니면 받아들여지는 것이었나요? 

지금은 그 질문 확실히 답을 할수 있어요. 오랫동안 살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많은 워크샵을 진행했는데 그러면서 많은 부분을 끄집어 내서 들여다볼수 있었어요. 지금 돌아보면 너무 가슴이 아픈데 전혀 어딘가에 속하지 못하고 기쁘지 않았어요. 그리고 왜인지 그 이유를 몰랐죠. 사람들은 다 가족이 있고 혹은 서로 챙겨주는 누군가가 있는데 저는 그냥 혼자서 배회했어요. 그래서 최근까지도 누군가가 저에게 호의를 보이며 초대를 하면 냅다 달려갔죠. 저는 무조건 예스였어요. 한번도 내가 뭘 원하는지를 스스로 묻지 않았죠. 20대 30대 까지도요. 마치 고아처럼 그냥 나를 데려가기만 해주세요 같은 태도로 말이에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요. 그러면 무조건 따라갈테니 하고요. 그리고 그게 저를 더 외롭게 만들었고요.  

상대방에게 자신을 맞췄군요. 

네. 완전요. 내가 왜 그 사람들하고 만났나 하고 그때를 돌아보면 강을 둥둥 떠내려가다가 물에 떠 있는 잔해들을 붙잡았던 식이었던것 같아요. 그 사람들이 그 잔해나 쓰레기였다는 건 아니고요. 그 사람들도 나름은 다 좋은 사람들이었을거에요. 그런데 서로 도움이 안되는 관계들이었던 거죠. 그렇게 떠내려 가다가 한동안 붙잡고 있고 그러다가 다시 떠내려가다가 하는 식이었죠. 마흔이 넘어가며 돌아보니 제가 그동안 나를 너무 망가트렸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천천히 작업을 시작했어요. 천천히 이번엔 끝까지요. 그런데 무엇을 찾아 가고 있는지는 몰랐어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한테만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왜 없는지 그 이유를 몰랐거든요. 

왜 그런지 통 모르겠더라고요. 종교적인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왜 나만 자꾸 시험에 드는지 그 이유를요. 왜 나만 하꾸 시련에 들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지 말이에요. 그때 사람들이 저를 비난하며 썼던 말들이 제가 이기적이고 사죄할줄을 몰라서 그랫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행복한 삶을 살 자격이 없다고요. 그 말을 20대 내내 지고 살았고요. 그 누구라도 저를 데려가면 너는 감사해야 한다고요. 그 말들이 내내 짐이 되어 제가 관계를 맺는데 작용을 했죠. 자기들도 피폐한 상대로 자기들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절 입양을 한 사람들이 저한테 자기한테 고마워해야 한다고 말하는 꼴이었죠. 어떤 부스러기라도 감사하라고요.  그런 말들을 어떻게 떨쳐내겠어요. 어떻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떨쳐내버리겠냐고요. .

그래서 그 말들이 저에게 각인된채 살았죠. 안그럼 임신 기간내내 두드려 맞는 관계에 어떻게 놓였겠어요? 평생 그런 말들을 듣고 살지 않았다면 그런 관계를 시작하지도 않았겠죠. 그게 제 평가에요. 20대때 내가 누군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히 답할수 있었다면 그런 관계과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 거에요.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죠. 

지금 하고 있는 일하고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말해주세요. 

그 이야기를 하려면 1988년으로 돌아가야 해요. 여름방학에 할일을 찾다가 미네소타의 바운더리 워터에 있는 캠프에서 일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곳이었죠. 백인 기독교인들이 주로 오는 캠프였는데 일년에 몇번은 도시빈민가 흑인 아이들을 초청했어요. .그리고 당연한듯 저를 지도교사로 지명했죠. 한국에서 태어나서 백인만 있는 스프링 그로브에서 자란 저를요. 피부색만 보고 판단을 한겨죠. 피부색은 안본다 안 중요하다고 말해도 결국은 본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80년대부터 고위험 계층과 일을 했던 거에요. 도움이 많이 필요한 청소년들이나 혹은 그런 흑인과 황갈색 인들을 위해 일하는 백인들과 함께 일하게 됐어요. 그러니 그때부터 그런 세계에 있게 된것이죠. 

그리고 제가 좀 잘 했나봐요. 사람들이 저한테 묻더라고요. 학생들이 네 말은 더 잘 듣는것 같다고요. 그래서 그 질문을 안고 가게 되었죠. 평생을 사회복지와 교육과정을 만드는데 기여해왔어요.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학군에서 제가 다양성 담당 정책관이었거든요. 직원에 8000명이 넘는 큰 학군이었는데 주당 32시간 일하는 제가 유일한 직원이었죠. 다양성에 대한 정책을 미네아폴리스에서 그 정도로 취급한거죠. 끔찍하죠.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말도 안되나 하는 고민을 항상 안고 살기 때문에 그런 질문들에 답할수 있는 일을 하게 된거죠. 어떻게 하면 나와 그리고 다른 단절된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질수 있나 하는 질문말이에요 가르친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도 듣게 만드는 것 말이에요. 제가 강의를 할때면 실감나게 해요. 특히 학생들이 차분히 앉아서 제 이야기를 듣고 과제를 끝내요 그래서 항상 그 부분이 궁금했어요. 

저도 학교를 중간에 관두고 자메이카에 갔다가 돌아와서 학부를 마쳤잔아요. 그런데 공부하고 싶었던 것이 확실히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냥 그때그때 되는 대로 했었어요.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항상 궁금한것은 있었어요. 언젠가는 답을 찾아야 될것 같은 것 말이에요. 그것이 아이들이 왜 내 이야기는 잘 들을까 였어요. 답을 찾기 시작했죠. 보통 교사들은 인종차별자로 몰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그래야 함에도 불구하고 또 자신들에게 그럴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딱부러지게 다루지 못하는 교사들이 많아요. 그러니 결핍이있는 아이들을 결핍이 있는 어른들이 다뤄야 하고, 다들 미친듯이 문제 해결을 하려고는 하는데 정작 중요한 문제 즉 결핍이 있을때는 그게 수학이 됐든 과학이 됐든 그 어떤 공부를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이 안되는 거죠. 저도 그걸 한참 후에야 깨닫게 됐어요.  

제가 정신병원에 있을때 기억나는 것들중에 몇몇이 굉장히 끔찍하거든요. 사람들 앞에서 옷을 다 벗어야 된다거나 내가 먹는 음식들을 모두 다 무게를 재야 한다거나 손을 뒤로 잡고 걸어야 한다거나 혹은 내가 자살할까봐 사람들이 나를 감시한다거나 하는 등등요. 그런데 그 중에서 어떤 큰 박스 같은 공간에 들어가 누워서 녹음된 명상테잎을 들어야 하는 것이 있었어요. 숨을 깊게 마시고 마음을 편안히 하세요 뭐 그런 식이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게 참 좋게 느껴지더라고요. 뭔지는 모르겠는데 좋은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그 마음챙김을 항상 마음에 새기기 시작했죠. 언제부터 그걸 마음챙김이라고 불렀는지도 모르겠어요. 우리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내 안의 수면을 진정시키고 너의 수면도. 진정시키고 이런 식으로요.. 그래서 캠프에 지도교사를 할때도 그걸 적용했어요. 도시 빈민 아이들이 캠핑을 와서 휴대용 변기에 볼일을 못본다고 난리 칠때나 호수가의 물이라고 안 먹는다고 할때등등 아이들을 달래서 하게 해야했죠. 그때 저도 어렸지만 그래도 열심히 고민을 해서 그래 일단 이 문제를 해결을 하자 그러면 먼저 나 사진을 진정시키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뭐가 필요할까 이런 식으로 찬찬히 생각을 정리해나갔어요. 일단 이 아이들을 인간으로 대하자. 흑인이나 빈곤층 아이들이 아닌 일단 그냥 개인으로 보자이런 식으로 시작했어요. 그 다음에는 그걸 다른 사람들한테도 적용하게 시작햇고 그랬더니 이래저래 지원도 받게 되고 사람들이 강의 요청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이 마음챙김일에 주력하게 되었고 지금도 여기 하와이에서 계속 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2000년에 아까 말씀드린 그 다큐멘터리았을때 그 기자라는 사람을 찾아 나섰어요. 당신이 말한 그 좀비를 직접 보여주겠어 이런 마음으로요. 미친듯이 모든 연줄을 다 동원해보니 결국 그 사람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전화를 했고 또 마침 그 시기에 이 용서와 화해에 프로그램도 시작했어요.. 제가 지원받은 사업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도 그쪽이었고요. 그러다가 그 나타샤가 저를 찾아서는 Korea and Me 라는 프로그램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고 혼혈 아이들을 한국으로 데려가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대요. 그리고 그 10년쯤 전에 제가 제 친엄마를 찾았는데 그것이 그닥 좋은 재회가 아니었어요. 엄마가 꽤 심술궂고 많이 어두운 사람이더라고요. 제 결혼식 이틀전에 그냥 가버릴 정도로요. 제 오빠도 찾았었는데 오빠가 신부입장때 같이 들어가주기로 했었거든요. 그런데 결국 나타나지 않았어요. 정말 헐이었죠. 그래서 그 즈음 10여년간 실은 아픔이 더 쌓였어요. 마음 챙김 프로그램도 진행하는 동시에 또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나타샤가 저한테 연락을 했을때 한국에 같이 가기로 결심했죠. 용서와 화해를 하기로 했으니 진짜로 해보자 하는 마음에서요. 가짜로 용서를 할수는 없으니까요. 기금지원도 받으니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잖아요. 맞죠?(웃음) 그래서 엄마한테 연락을 해서 지금 한국에 가니 한번 만나자고 했어요. 그러니 제가 찾아가면 문이나 열어달라고요. 그리고 용서 프로그램 참가하고 그 뒤로 이어지는 워크샵에도 참가해서 내가 고통받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도 알아봤죠. 

치유하시는 분들이 저를 딱 보면 알것 같나봐요. 고통이 많다는 것을요. 저를 보면 “몸안에 화가 가득하네요” 라고 말해요. 그럼 저는 “그래 화로 가득찬 흑인 여자가 보이겠지” 하고 생각해요. 그게 사실일테니까요. 아무튼 결국엔 그 일들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놓아 버릴것은 놓아버리는데요. 그리고 결국엔 저도 스탠포트에서 운영하는 용서프로그램에 지도자 과정을 밟았죠. 그 후엔 계속 이 마음챙김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데 결국엔 제 자신을 다스리는데 그 목적이 있어요. 저도 결핍이 많은 사람인데 상대방도 그런 경우에는 우리의 감정을 담당하는 전두엽까지 가담시키게 되죠 70%나요. 일단 일이 잘 안돌아가기 시작하면  제 몸이 선택하는 기본 감정은 분노에요. 그래서 갑자기 분노 게이지가 0퍼센트에서 100퍼센트까지 치솟죠. 그럴때면 정신줄을 놓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막 분노에 찬 말을 퍼부어대거나 했었어요. 그런식으로 나를 내 감정으로부터 내 스스로 분리시켰던것 같아요. 

아무튼 이렇게 제 안에 쌓였던 많은 이야기들을 털어냈죠. 그래서 제 안에 제 스스로를 감당할수 있는 공간이 생기게요. 그리고 그 단계들이 저의 이 굳어진 감정과 머리에 와 닿더라고요. 왜냐하면 저는 한번에 확 빠져드는 타입이 아니었거든요. 제가 비록 이 마음챙김에 대해서 설파를 하고는 있지만 처음에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마음속에 한을 놓아버러요” 어쩌고 저쩌고 하면 눈살을 찌부렸거든요. 헛소리하시네 하구요. 일단 시작하면 한번에 확 변화가 오는 그런 타입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 스탠포드 용서와 화해 프로그램은 1단계 2단계 3단계 각 단계별로 과정이 잘 나눠져 있고 우리의 뇌를 공부해요. 결국은 뇌가 관여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일단 뇌와 감정에 대해서 공부를 좀 한 다음에 내 자신을 알고 내 자신을 듣는 연습을 하죠. 그 전에는 제가 제 자신으로부터 너무 동떨어져있던지라 해보지 못했던 것들이에요. 그런데 이 과정을 시작하니 내 자신을 진정시키고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그런데 실은 제가 했던 일은 제 이성과 감정을 불러온것 뿐이었죠. 그 사이 너무 많은 고통을 겪은 제 이성과 감정 말이에요. 그저 버티느라 산산이 부서지고 서로 다투고 논쟁하던 제 이성과 감정이요. 이 과정을 하며 일단 제 마음의 소리를 듣고 이런 저런 제 자신을 인정하게 됐어요. 이게 바로 나 조이이고 이런 저런 모습들을 어떻게 끌어안아야 할까. 하고요. 이런 모든 것들이 말이 되더라고요. 이미 마음챙김에 대한 일을 시작했었기 때문에 이 용서 프로그램의 일련의 과정들이 설득력이 있게 느껴졌어요. 

그 뒤론 제가 추진력이 좀 있는 편이거든요. “Forgive for Good”(역자 주 “나를 위한 선택, 용서”라는 제목으로 국내 번역, 출간되었다) 이라는 책을 쓴 지금도 스탠포드에서 교수로 있는 프레드 러스킨을 만났어요. 전형적인 60대 백인 남자 교수인데 이미 90년대부터 하와이에 와서 강의를 했었거든요. 제가 그랬죠. 당신이 하는 연구도 좋고 다 좋은데 이걸 어떻게 제도화 시킬것인지 어떻게 널리 퍼트릴것인지 가 문제라고. 내가 한번 해보겠다. 그랬더니 그 분이 아주 적극적으로 나서줘서 몇년 동안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제가 항상 강의를 하기 전에 말해요. 나는 박사도 아니고 연구자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관련 분야에 대한 아주 풍부한 인생경험이 있다. 이런식으로 학위를 비롯해서 저에게 없는 것에 대해 먼저 사과를 하고 시작했었어요. 그런데 제가 대중앞에서 말을 좀 잘 하거든요. 그래서 어느 순간 사과하며 시작하기를 멈췄어요. 다들 이론은 빵빵한데 그 이론을 실천하지를 않잖아요. 용서와 화해작업이 얼마나 좋은지는 다 알죠. 그 사람들 중에는 워크샵을 50회나 넘게 가본 사람도 있는 걸요. 그런데 다들 그냥 서로 헐뜯기만 하고 징징대기만 하고요. 몸과 마음연결을 하지 않고 체화시키는 연습을 하지 않는게 문제죠. 거기서 오는 기쁨을 실제로 느껴봐야 되는데 말이죠. 실제로 해보는것이 중요하지 얼마나 책을 많이 읽었고 어떤 학위가 있고 이름 뒤에 붙은 알파벳이 몇개인지는 (역자 주- 전문가 타이틀을 말한다)-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요. 얼마나 실생활에 그 이론을 적용해봤느냐가 중요하죠. 그걸 파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가 해보니 됐다고 하죠. 정신병원에 갇혀 있을때부터 시작했으니까요. 15살때니 아주 오래전이요(웃음). 알기만 하고 실제로 실천을 안하면 소용이 없잖아요. 제가 운영하는 센터는 저와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여러방면으로 실행해보는 곳이에요. 저는 사람들이 실제로 이 마음챙김를 실습할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에요. 그럴려면 지금 현재의 나에 충실해야 해요. 뭐가 됐든 받아들이고 일을 만드려고 애쓰는 부분을 놔버려야 해요.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나를 진정시키려고 혹은 놓으려고 애쓰는 것은 아니에요. 애쓰지 않는것 부터 시작해야 하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해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생각보다 힘든데 그러다 보면 갑자기 엄마가 한번도 안아주지 않았던 것이 떠오르기도 하거든요. 또 제 양부모가 저를 그닥 원하지 않았다는 것도 떠오르고요. 그러면 또 울고요. 그러면 많이 지치죠. . 그러다가 깨달았어요. 제가 한번도 진심으로 슬퍼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그냥 잊어버리려고 하고 털어버리려고만 했거든요. 먹는 것으로 해결하고 술도 많이 마셨어요. 약에 취해보기도 했죠. 그렇게 힘든 감정들이 찾아올때면 제일 처음으로 찾은 것이 음식이었거든요. 배가 터질때까지 먹고나서는 배가 아프니까 이제 그 전에 힘들었던 감정들은 잊어버리고 마는 식이었죠. 제가 알면서 그랬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제가 제 감정으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이었죠. 

현재의 나에 집중하는 것이 쉽게 들리지만 꽤 가혹하기도 해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다 보면 고통도 수반되거든요. 꽤 오랫동안 이 작업을 해온 저조차도 아직도 고통스러울때가 있어요. 그래서 주변에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서 이 작업을 계속 하고 또 필요한 사람도 도울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용기를 좀더 낼수 있을까 행복이란 것은 도데체 어떻게 만들수 있는 것인가 놓는 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등등을 가르쳐요. 그런데 가르친다기 보다는 복돋우는 것이죠. 저는 일종의 치어리더라고 생각해요. 엉덩이를 대고 앉아서 호흡에 집중하며 지금 이 순간 나를 기분좋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본는 식으로요. 그러다 보면 저도 같이 하게 되고요. 저를 위한 직업이죠. 

누구를 용서해야 했나요? 그리고 어떻게 용서했나요?

우리가 스탠포드 대학의 용서프로젝트를 통해 하는 작업은 일단 놓는 것이에요. 나를 위해서요. 가해자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요. 그래서 일단은 내 힘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고요. 내 이야기를 할때 중요한 것은 나한테 상처준 사람들이 누군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해요. 가감없이요. 지금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하는 거요. 그래서 제 인생의 악당들을 나열해보자면 일단은 제 엄마죠. 그리고 제가 알지도 못하는 아빠와, 한국이라는 나라, 킨 신부와 가톨릭 교회죠..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애들을 입양보냈죠. 고아원도 그렇고 입양부모도요. 

그리고 저를 별종취급했던 모든 선생님들이요. 넌 도데체 뭐니 하면서요. 그리고 이름도 얼굴도 기억안나는 수많은 사람들도 그렇고. 저랑 안좋게 엮였던 그전에 만났던 남자들이나 저를 도와줄거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던 친구들도요. 다들 결국엔 제가 이 용서 작업을 하는데 궁극적으로는 기여를 햇죠. 그들의 공통 분모는 저잖아요. (웃음) 이렇게 제 삶의 악당들을 나열해보는 작업을 여러번 해봤어요. 일단은 폭력적이었던 제 전남편이 있고요. 양부모님도 그렇고요 제 친엄마 도요.  제가 실제 이 용서프로젝트를 진행할때면 항상 떠오르는 사람은 제 친엄마에요. 그 상처가 깊은가봐요. 그 전에는 엄마때문에 내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면 내가 생각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게 되거든요. 그리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것은 우리가 우리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요. 그 전에는 누군가가 나한테 전화를 해서 미안하다고 말을 해야 용서가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러면 내가 좀 불리해지죠. 그 중에 많은 수가 이미 죽은 사람들일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나한테 전화를 해서 사과 할수 없으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죠? 교회에 가서 신의 은총을 빌어야 하나요? 신만이 할수 있는 일이라서? 헷갈리죠. 그래서 좀 다른 방식으로 하기로 했죠. 제가 깨닫게 된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 어떤 사람들은 충분히 아파하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너무 넘치게 아파한다는 것이었어요. 아예 안하거나 너무 많이 하거나요. 상처받고 아파하는 것의 최종 단계는 놓아버리는 것인데 이 놓아버리는 것이 바로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하는 용서죠. 그래서 제가 가만히 앉아서 명상을 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이 모든 이야기들이 떠오르면서 결국에는 꺼이꺼이 울게 되요. 제가 그 과정을 안했기 때문이에요. 생존하느라 바빠서요. 한번 버려져 뵜으니까 또 버려져도 괜찮아. 난 헤쳐나갈거야 하고 그냥 넘어간거에요. 그러면 안됐었는데. 그건 아파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아무튼 그걸 받아들이고 충분히 아파했죠. . 

또 내 스스로 파워가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아냈어요. 40대가 되어서 까지도 엄마와 양부모와 전남편을 을 탓하며 술을 마시고 먹어댔어요. 지금은 죽고 없는대도요.  내 나이 40대에도 뚱뚱하고 인생이 비참한 이 모든 것을 그들을 탓했죠.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이 모든 것들이 말이 안되더라고요. 그리고 이것들을 놓아버리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하고 생각하게 시작했어요. 그 답의 일부는 내 스스로 그럴 힘이 있음을 깨닫고 내 스스로 설정한 기대치를 돌아보는 것이었어요. 내 스스로 이 인생을 어떻게 설계했었는지를 돌아보고 그 일부는 해체하고요. 내 스스로를 용서하고 내가 스스로 내렸던 결정들을 왜 그랬는지 돌아보고요 놓아버리고 그랬던 나를 한편으로는. 존중해주고요. 

카오미씨가 했던 질문이 실은 이 스스로를 용서하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하고도 곤란한 질문이에요. 내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 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내가 원하는게 뭔지 알아? 그때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다시 써보고 제 스스로를 탓하지 않아보면 제가 원했던 것은 그냥 가정에 속하는 것이었어요. 조건없이 사랑받는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사랑이요. 그래서 지금 그걸 다 큰 아이들이 있는 지금의 제 상황에 비춰보면 다시 어떤질문을 해야할지 알게 되죠. 내가 지금도 그걸 원한다면 내 아이들과 함께 어떻게 그런 가정을 만들수 있을까 겠죠. 우리 아이들이 나와 똑같이 단절감을 느끼지 않게요. 

한국의 엄마는 어떻게 찾았고 그 뒤로 그 관계는 어떻게 이어가고 있나요?

엄마와 헤어졌을때 제가 아홉살이었죠.. 내내 엄마를 찾았고 사람들도 찾기 쉬울거라고 했어요. 제가 기억하고 있는 이름도 많았고 가지고 있는 서류도 있었고요. 그런데 장로교 사회복지회에 연락을 해봤더니 그 고아원이 화재로 없어졌다는 등등 이래저래 못찾는 이유만 내놓더라고요. 제가 그당시 고아들을 구하러 루마니아까지 갔었다는 사회복지사하고도 연락이 닿았어요. 그런데 그분도 제 엄마를 찾을수 없다고 연락을 해도 답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2005년에 제 세아이들을 데리고 하와이로 이사를 갔고 그러면서 이 사회복지 관련일을 포기하자고 생각했어요. 돈도 벌어야 하고 하와이에서 정착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부동산 중개업을 시작했는데 적성에 안맞고 싫어서 금방 그만뒀어요. 그런데 그때 일했던 한 사무실에서 이름이 킴이라는 한국인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한국에 가족들을 만나러 간다는거에요. 하와이에는 한국인이 많잖아요. 한국어도 연습하고 할 기회가 많았죠. 항상 버킷리스트에만 있긴 하지만요. 암튼 그래서 그 친구한테 한국에 가면 혹시 이런이런 사람을 찾아봐줄수 있냐고 부탁했죠. 기대도 안하고 그냥 반쯤은 진심도 아니었어요. 30년 넘게 똑같이 사람들한테 같은 부탁을 해왔었거든요. 그래서 그때도 한번 말이나 해보자 싶었죠.  그랬더니 그 친구가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참 이상한 부탁이죠?(웃음). 아무튼 그 친구가 한국으로 가고난지 이틀인가 지나서 전화가 왔는데 받자마자 감이 왔어요. 살짝 격앙된 톤으로 조이 하며 제 이름을 부르는데 받자마자 감이 오더라고요. 엄마를 찾은것 같대요. 그때 제가 부동산 일을 관두고 다시 사회복지 쪽으로 일을 하려고 면접을 보러가던 길이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더니 그 친구가 제가 이메일을 받을테니 몇가지 질문에 답을 하래요. 그러면 그쪽에서 정보를 보내주겠다고요.  그래서 그날 밤에 집에가서 답장을 보내고 나니 그쪽에서 엄마의 연락처를 보내왔어요. 그리고 혹시 오빠의 연락처도 원하냐고하네요. 세상에나 평생을 그렇게 찾아다녔는데 갑자기 한순간에 모든 것이 몰려오더라고요. 갑자기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았죠 

항상 그런식이죠. 흔적도 없다가 갑자기 번쩍 하고 나타나죠. 

네. 그래서 이젠 이 모든 마음의 고통과 두통이 사라지고 드디어 모든게 더 나아지겠지 생각했죠. 그래서 오빠한테 먼저 전화를 했어요. 오빠가 영어를 했었거든요. 언어장벽이 제일 큰 문제가 될거라는걸 알았으니까요. 오빠가 미국으로 입양됐다고는 알고 있었어요. 어디로 갔는지 등등 자세한 사항은 모르고요. 그래서 부푼 가슴으로 오빠한테 전화를 했는데 통화를 시작한지 몇분 만에 크게 실망했어요.. 오빠가 그러길 저를 전혀 찾아보지 않았대요. 오빠는 미국으로 입양이 되었고 양아버지에게 한국인 와이프가 있었는데 그들이 오빠를 학대한 모양이더라고요. 그 부부는 이혼을 했고 그 아버지가 오빠를 한국으로 다시 데려온 다음 우리 엄마와 결혼했대요. 그러니 세 가족이 함께 산 것이죠. 오빠 이름이 “영”인데 그 뒤로 미국에 와서 군에 입대를 해서 한국에 배치가 됐었고요. 한국말도 하고 엄마와 아직도 잘 지내고 있었고요. 그런 말을 들으며 그러면서 나를 찾아볼 생각도 안했단 말이지 하며 화가 났어요.. 뭘 기대했는지를 모르겠지만 제가 원했던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죠. 어떻게 그럴수가 있죠? 자기들은 같이 살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는지. 너무 아프고 힘들었어요. 다시 버려지는 기분이었죠. 

오빠가 하와이로 저를 보러 오겠다고 했어요. 고맙게도요. 그런데 실상은 새로 사귄 여친을 데리고 하와이 반대편에 있는 호텔로 가서 지냈어요.. 좋으면서도 이게 뭔가 싶었죠. 그런데 제가 너무 뚱뚱하다면 뭐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사람을 보내 엄마를 데려오겠다는거에요. 엄마가 제 결혼식에 올수 있게요. 너무 좋았죠. 그래서 제가 엄마를 픽업하러 오하우 공항으로 갔거든요. 엄마가 저를 보자마자 차에서 나오지도 않고 팔짱을 끼고 저를 위아래로 훓어보며 한다는 소리가 “네 오빠가 말한것만큼 뚱뚱하지는 않네” 였어요. 영어로요. 그게 첫마디였어요. 면상을 한대 갈겨버리고 싶은 감정과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이 복잡하게 엉키더라고요,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이 관계를 잘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그 뒤로 계속 내리막이었어요. 계속 제 엉덩이가 얼마나 큰지 집은 왜 이리 더럽냐는 제 사촌이랑 저를 비교하면서요. 둥 저도 되받아치고 싶었어요. 그 애는 엄마가 버리지 않았으니까요 하면서요. 퍼붓고 싸우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알러지가 있다고 방에서 안나오더니 내 결혼식 이틀전에 가버렸어요.  

이게 모두 하와이에 있을때 일어난 일인가요?

네 2008년에요. 엉망이었죠. 이런식으로 가면 안되는 거였는데. 실은 입양이야기나 친부모와의 재회가 많은 경우 이런식으로 가잖아요. 

조이씨를 또 버린거네요. 

완전요. 완전 엉망이고 뒤죽박죽이었어요. 말했듯이 그럴때면 분노로 아예 집을 태워버리든지 아님 아예 침묵하든지 했다고 했잖아요. 이번에는 멈춰서 기다렸어요. 신혼이기도 했고 어떻게든 이겨내야 햇어요. 그래서 일단 침묵하며 다시 연락을 끈었죠.  

이해가 되네요. 

오빠는 저한테 연락을 꾸준히 했어요. 뭐랄까 살짝 어색한 관계를 이어갔죠. 무슨 일이 있거나 하면 연락을 하는 사이정도 였어요. 그런데 오빠는 결혼을 했는데도 저한테 말을 안했더라고요. 딸도 있었는데 그애가 지금 서른살이 됐어요. 그 애랑 저랑 연결이 되어서 지난 크리스마스에도 여기에 왔었어요. 조금씩 관계를 쌓아갔는데 그땐 제가 그게 성에 안찼었어요. 지금은 그 부분에 대해 서운하고 그러진 않아요. 오빠도 크면서 많이 힘들었고 자신을 잊은채 살아야 했으니까요. 이야기를 좀 나눠보니 왜 지금 이렇게 됐는지 알겠더라고요. 

제가 그 조카를 보러 샌안토니오에 갔을때 조카가 엄마랑 언성을 높이며 통화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엄마를 오라고 하라고 했죠. 그러니까 오빠의 전부인과 식사를 하게 됐죠. 그게 바로 지난 여름에 있던 일이에요. 멕시코인이었는데 살갑고 호들갑 떠는게 딱 내스타일이었어요. 그런데 다시한번 성급한 판단을 내린것을 후회하게 만드는 순간이 왔어요. 그녀가 그러대요 남편이 너를 찾아야겠다는 이야기를 항상 하면서 살았다고요. 오빠가 저한테는 한번도 저를 찾지 않았다고 했었거든요. 오빠랑 처음 이야기를 했을때 오빠가 저한테 솔직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었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한번도 찾은적이 없다고 했어요. 나중에 오빠랑 다시 관계를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을때 그것이 이유가 되기로 했었는데 나중에 오빠의 전부인의 말을 들어보니 오빠가 저를 찾았다잖아요. 

그래서 또 잘못 알고 10년을 보냈구나하고 후회했죠. 도데체 우리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이야기들을 얼마나 또 넘겨 짚으며 만들어내며 사는지 몰라요. 또 다른 깨달음이었죠. 듣기를 잘했죠. 미안하기도 했고요. 오빠가 막 속이야기를 하는 타잎이 아니었으니까요. 사람들하고 관계맺고 연결하고 하는 타입이 아니에요. 저랑은 다르죠. 그게 오빠가 살아남아온 방식이니까요. 남자입양인들 한테서 그런 모습을 많이 봐요. 그러면 달리 접근해야죠. 남자 입양인들은 잘 꺼내놓지 않아요. 여자입양인들은 서로 살아온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는데 남자입양인들은 과거는 과거다 이런 입장이죠. 제 오빠도 딱 그랬고요. 그래서 지금은 오빠의 방식을 존중해요. 오빠가 마치 저처럼 반응해주기를 원했었나봐요. 제가 원했던 방식으로요. 저는 오빠가 나를 어떻게 찾아봤고 어떻게 그리워했고 나에 대해서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시시콜콜 말해주길 바랬는데 오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거죠. 

그렇다면 우리의 친가족이나 입양가족이 우리가 원했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런일이 꽤 흔하죠. 항상 안고 살아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고 걱정이기도 하고요. 그게 엄마가 됐든 아빠가 됐든 파트너든 형제자매이든간에 그 모든 삶에 굴곡들에는 악당이 됐든 혹은 나를 보호해주는데 실패를 한 사람들이 있죠. 이건 비단 입양인들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친엄마손에 자랐는데 엄마가 약물중독자였던 경우도 있잔아요. 그 엄마의 삶을 생각하면 또 속상하죠. 아무도 약물중독자가 되고 싶어서 되진 않으니까요.. 사람들은 모두 다 각각 힘든일들이 있고 그것들을 이겨내려 노력하니 질문을 바꿔봐요. 이 사람들이 겪어낸 고통은 뭘까?하고요. 그럼 좀 낫지 않아요? 그럼 그 사람들의 각각의 여정이 다른 각도에서 보이고 그러다 보면 그들이 나한테 빚진것도 없다고 느끼게 될거에요. 다른 각도에서 보이니까요. 제 아이들도 저한테 더 많은 것을 원하죠. 이것도 해달라 이렇게 되어달라 이런 식으로요. 그럼 애들한테 “엄마가 얼마나 쌔빠지게 노력해서 이만큼 정신줄 잡고 사는줄 아니? 그걸 알면 엄마한테 어떻게 이러니?” 말해요. 

저 또한 이래저래 남들보다는 많이 유리한 입장에 있었죠. 기회도 많았고요. 가끔 제 친엄마가 어떠한 환경에서 살아와야 했나를 생각해보기도 해요. 그때 당시의 한국의 상황은 어땠는지. 그때 그 장로교 사회복지 센터는 어땠는지. 아이들을 그냥 납치해서 보내버렸었잔아요. 서류도 위조하고. 숨어다녔던 기억이 나거든요. 왜 숨었겠어요? 갑자기 차가 멈춰서 애들을 실어가버리니까요. 제 엄마는 나름 엄마가 아는 방식으로 엄마가 버틸 수 있을때까지 싸웠던거죠. 그러니 제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엄마에게는 있겠죠. 한국인 여자가 아이를 포기했다. 이게 저에 대한 딱 한줄의 사실이죠. 고통스러운 사실이죠. 그런데 더 고통스러운 것은 상대방의 이야기는 못들어 본채 저 혼자서 다시 이야기를 지어내야 한다는 점이죠. 

우리의 이야기는 각각 다 달라도 힘들어하는 방식은 비슷 하더라구요. 부모나 혹은 부모로부터의 보호가 어때야 하는지에 혹은 어떤 방식으로 자랐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대치가 있고 또 현실을 또 각각의 왜곡된 시선으로 보죠. 어떤 사람들은 현실을 아예 분간을 못하고요. 제가 하와이에 산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다들 와우 너무 좋겠다 그러는데 그럼 저는 속으로 물가가 얼마나 비싼데요 하고 불평하죠. 제가 실제로 살면서 느끼는 하와이의 삶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리는 것하고 차이가 있죠. 그러니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할때도 그 왜곡된 현실인식이 반영되죠. 입양인이든 조실부모를 했든 부모한테 학대를 받았든 스스로를 학대하든 우리의 삶은 항상 내가 생각하기에 그랬어야 되는 삶과 실제로 일어난 삶의 차이에 대한 것이죠. 그리고 성장하며 그 이야기를 가지고 어떻게 했는지요. 우리가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도요. 

저한테 도움이 된 요소가 하나 있어요. 항상 우리가 고통받는 방식엔 세가지가 있어요. 이 두 버전 사이에 간극이 클때. 그리고 계속 되새기며 파고들어요. 그러다가 누군가를 비난해야하죠. 이 불편한 감정에 대해서요. 그러다보면 우리의 뇌가 계속 조심하라고 경고를 주고요. 결국 그걸 놓아버리고 나아가지 않는한 뇌가 자꾸 우리를 휘젓죠. 그러다가 결국 삶의 목표를 추구하거나 삶을 살아가는것을 방해하는 정도까지 이르게 되면 우리는 그 이야기의 간극 자체를 탓해요. 그런데 말로는 엄마를 비난한다고 말해요. 사연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요. 엄마가 어쩌구 저쩌구해서 엄마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그래서 먹어야 되고 그래서 움직이지 못하고 그래서 이래저래 괴롭고 불안하다고요. 즉 우리가 연결을 지어요. 나한테 있는 이런 고통스러운 이야기들과 스스로 주체가되어서 당당히 행동하지 못하는 것을 연결지어요. 

그리고 입양인으로서 우리의 이야기는 단체로 무시당해왔죠. 우리의 이야기의 일부분을 남들이 가져다가 마음대로 바꾸고 떠들어댔죠.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요. 이 용서작업의 제일 첫 단계가 바로 누군가가 들어주는 것이거든요. 카오미씨가 이렇게 입양인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있잖아요.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들이죠. 너무 슬픈 이야기들이요. 그런데 곧 누군가는 나타나서 우리 면전에다 대로 우리가 얼마나 운이 좋아는지 선택받았다느니 축복받았다는둥 혹은 감사해야한다는둥의 이야기를 늘어놓겠죠. 진짜 짜증 지대로에요. 진짜 극혐이에요. 

그럼 말해야죠. 그날 나는 내 문화를 잃어버렸다고요. 내 언어와 음식과, 나를 인종차별하던 친구들까지도요. 나를 괴롭히던 친구들이었지만 적어도 나한테 익숙 했잖아요. 내가 잘알던 것들이란 말이에요. 내 나라였다고요. 비록 그 나라가 나를 원하진 않았지만 내가 알던 나라였다고요. 그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졌죠. 그리고 갑자기 네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를 축하하래요. 얼굴에 두껍게 가면을 쓰고 살면서 왜 나는 이렇게 비참한지를 생각해야 하죠. 그러면서 어떻게 한 사람이 건강한 삶을 살기를 바라나요? 다른 이야기하기를 하라고 사람들이 끈임없이 강요하는데 말이죠. 치유라는 것이 결국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잔아요. 듣기 싫은 다른 사람이 원하는 이야기를 억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고요. 내 스스로 내 이야기를 먼저 듣고 그 다음 목소리를 내야죠.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있죠? (웃음) 제가 말이 좀 많아요. 하루종일도 할수 있어요. 그런데 오랫동안 그러질 못한적도 잇었어요. 회의시간에도 맨 뒤에 앉아서 제발 눈에 띠지 않기를 제발 아무도 나한테 말시키지 않기를 바랬던 적도 있어요. 그냥 없어져버리고 싶었죠. 그러면 치유가 안되죠. 그러니 카오미씨가 백명이 넘게 인터뷰를 했다고 하면 그만큼의 힐링이 일어난거에요.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를 듣고요.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비록 반박당하는 한이 있더라도요. 지금도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힘있는 백인들이 나서서 제가 틀리다고 하겠죠. 진짜가 아니라고요. 마치 그 영상처럼 말이에요. 마침내 그 영상을 없애버리고 제가 나서서 말할때가 온거에요. 당신이 뭐라 생각하든 상관없다고. 나한데는 끔찍한 일이었다고. 그리고 그렇게 기억하는 것에 대해 나는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요. 돌아가서 그때의 엄마를 보면 그때 그렇게 나를 막 대해줘서 고마워요. 진짜로 고마워요. 라고 말할거에요. 그러다보면 내 목소리를 내고 내 스스로를 막 대했던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런 행동들을 멈출수도 있겠죠. 제 삶에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쳤으니까요. 입양인들이 목소리를 낼 공간을 마련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지나간 팟캐스트를 다 듣진 못하겠지만 할일 목록에 넣어 놓을게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조이씨와 연락할수 있죠?

The practice center.org 가 제 웹사이트 주소고 admin@thepracticecenter.org 가 이제일 주소입니다. 제 이름이 독특해서 소셜미디어에서 쉽게 찾을수 있어요.  검색도 쉽게 되고요. J O Y I <laugh> R H Y S S. 전화번호도 찾을수 있어요. 문자를 보내셔도 되고 이메일을 보내셔도 됩니다.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되고요. 유투브에 영상도 많이 있어요. 용서과정과 마음챙김 작업에 대해서 설명하는 영상도 있고 실제 상담자와 인터뷰를 한 내용도 있어요. 필요하시면 저와 함께 같이 이 작업을 해보면 좋겠어요. 관심 있으신 분들 연락 주시면 미리 대화를 나눠볼수도 있고요. 

              번역 : 전유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