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4, 에피소드 19: 달시 미들스테드

내용 주의: 자살 시도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 

한국계 입양아 달시 미들스테드 (49세) 씨는 여러 역경을 넘어왔다. 그런데도 미들스테드 씨의 신앙과 봉사는 미들스테드 씨에게 희망을 주었다. 미들스테드 씨는 2살에 대한민국에서 입양되어 네브래스카주의 농업 마을에서 학대와 고통을 견디면서 성장했다. 그런 감정적 상처에도 불구하고 미들스테드 씨는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았고, 가족을 만들어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달시: 제 이름은 달시 진 미들스테드이고, 한국 이름은 이복실입니다. 제 입양 기록에 따르면 1972년 1월 29일에 태어났지만, 거기에도 물음표가 붙어 있어서 제 생일은 불명이죠. 현재 49세이며 미국 텍사스주 뉴 브론펠즈 시에 살고 있고, 2년 반 전에 이 도시로 이사를 왔어요. 네브래스카주에서 자라고, 애리조나주에서 거주하다가 텍사스주에서 거주하는 중입니다.

팟캐스트:  뉴 브론펠즈는 어디에 있는 도시인가요? 남쪽 휴스턴시 근처인가요?

달시: 샌안토니오 시와 오스틴 시 사이, I-35 고속도로에 걸쳐 있어요. 샌안토니오에서 30분 정도 북쪽으로 운전하면 나오고, 오스틴 시에서는 45분 남쪽으로 운전하다가 보면 나오는 도시입니다.

팟캐스트: 알겠습니다. 왜 텍사스주로 이주하셨죠?

달시: 제 직업 때문입니다. 미국 루터교 텍사스 지부의 집사이자 부목사로 일하고 있거든요. 

팟캐스트: 그럼 정식 목사인가요? 

달시: 루터 교회에서 집사 역할을 맡고 있죠. 원래는 부목사 직위를 맡고 있었는데 ELCA가 직위 개편을 하면서 전부 집사로 개편했습니다. 1년 전에 집사들도 임명직으로 개편을 했죠.

팟캐스트: 아시아계 여성이 ELCA에서 집사로 활동하는 일이 희귀한 일인가요, 아니면 요즘 들어서는 구성원이 다양화되었나요?

달시: 집사 자체는 희귀한 편이지만 구성원 자체는 다양화되었습니다. 많은 한국계 입양아들이 목사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목사들도 여러 명 있죠. ELCA에서 한국계 입양아들이 서로 모여서 집단을 만들려고 하고 있기도 합니다.

팟캐스트: 그렇게 한국계 입양아들이 개신교에서 큰 영향을 발휘하는 이유가 많은 한국계 입양아들이 기독교 집안으로 입양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달시: 아주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제 연령대의 한국계 입양아들이 입양될 때 많은 입양기관들이 루터 교회나 다른 개신교회와 연관되어 있었죠. 예를 들면 제 미국 입양기관은 오클라호마 털사에 있는 딜런 인터내셔널이었는데, 동방사회복지회와 같이 기독교 성전을 하고 있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협조 기관이었습니다. 이러한 입양아 사이의 기독교 강세 경향 일부는 많은 기독교 계통 입양기관들이 한국 입양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교회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종교적인 집안에서 자라나셨나요?

달시: 네. 교회 제도 내부에서 성장했습니다. 침례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ELCA로 개편되기 이전의 미국 루터 교회에서 성장했죠. 제 부모님은 우리 가족을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게 하는 엄격한 분들이었어요. 주일 학교, 견진성사, 교회 청년회도 다녔습니다. 식사 전에도, 자기 전에도 기도했죠. 아주 종교적인 집안이었어요.

팟캐스트: 저도 그러한 종교 행사에 참여하면서 성장했죠. 전 그런 교육을 받으면서 반발했습니다. 현재 전 교회에 다니지 않아요. 하지만 달시 씨는 그러한 종교적 교육에 반발심을 가지지 않으셨군요? 

달시: 사실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종교 교육으로 인해서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부모님, 특히 어머니가 종교를 무기로 사용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다른 입양아들의 이야기에서도 많이 나오는 이야기이죠. 부모님과 떨어진 뒤의 삶에서 다른 신도들을 만나고, 신앙과 신의 가르침을 다시 배웠습니다. 그 경험이 제 삶을 여기까지 이끌었고, 제가 목회자의 길을 걷게 했다고 생각해요. 전 네브래스카에 있는 캠프에 참여했죠. 제가 자라는 동안 가장 힘든 시기에 참여했던 캠프였고, 저는 그때 신앙에 의문을 가지고 해답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곳 인솔자들은 다정하고 이해심이 깊었고, 저에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었어요. 그때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들의 신앙심을 기르기 위해서는 신앙심을 무기로 사용하지 말고 신앙의 모범이 될 사람을 따르게 하는 일이 더 올바르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달시: 저는 제가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그때 이야기를 들으면 제가 학대당했다고 하고, 저도 동의하죠. 전 항상 부모님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왜 나를 이렇게 학대하지?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저와 제 남매들을 왜 보호해주지 않는지 생각했죠. 제가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은 신앙을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부모님은 항상 교회에 가면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하고, 신앙과 관련된 일을 해야 한다고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가르쳤죠.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잘못하면 교회 청년회에 참가할 수 없었지만, 교회는 가야 했어요. 

팟캐스트: 달시 씨를 조용하게 만들려고 신앙을 사용했다는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달시 씨가 말썽을 부리면 달시 씨의 신앙심을 빼앗으려고 했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학대를 학대로 보이지 않게 사용했다는 말인가요? 

달시: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고통받을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지 묻게 했죠. 우리가 어떤 문제를 일으켜도 항상 교회는 가야 했어요. 전 힘든 시기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지? 이라고 질문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러한 비극들을 일어나게 하는지 의문을 가졌어요.

팟캐스트: 그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죠?

달시: 많은 상담을 받았고,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모범 신도들을 만나서 해결했어요. 신도들이 저에게 하나님을 설명해줬죠. 하나님은 벌하는 자, 사악한 존재, 사람들이 사악해질 이유가 아니며, 인간의 원죄 때문에 인간 세상에 문제가 생긴다고 설명해줬습니다. 가르침과 저를 이끌어주면서 신앙 멘토가 되어준 모범 신도들을 통해서 선량한 하나님이라는 인식을 만들 수 있었어요. 지금에 와서는 제가 외롭다고 생각할 때 항상 하나님이 제 곁에 있다는 인식으로 위안을 얻죠. 그것이 지금 제 신앙입니다.

팟캐스트: 아주 흥미롭네요. 달시 씨.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이 달시 씨를 버렸는지 의문을 가졌지만, 캠프에 가서 하나님과 더 가까운 느낌을 받았나요? 관련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했나요? 아니면 더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됐나요? 

달시: 캠프에서는 소외감을 안 느꼈어요. 전 살면서 자살 충동을 느끼고 자살하려고 한 적도 있었죠. 하나님과 더 가까운 곳에 가고 싶었습니다. 제가 죽으면 천국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천국은 어떤 고통, 슬픔, 어려움도 없고 행복한 생활을 보낼 수 있는 곳이라고 배웠고 지구에서 부정적인 감정과 문제와 씨름하는 일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질문하기 좀 그렇지만 달시 씨의 삶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나요? 

달시: 짧게 설명하자면, 그리고 제 관점에서 설명하는 일이라고 언급을 하고 시작하자면, 전 아주 권위적인 집안에서 자라났습니다. 부모님은 매우 엄격하셨죠. 친구들을 집에 초대할 수도 없었고 친구네 집에 놀러 갈 수도 없었어요. 아주 엄격한 취침 시간과 규범이 있었습니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맞았어요. 식사할 때 일정량 이상을 먹을 수 없어서 영양부족이기도 했고,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습니다. 나중에 와서야 평범한 가정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죠. 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계속 맞았는데, 더는 버틸 수가 없었어요. 친구들 집에 놀러 갈 수도 없었고, 친구들을 초대할 수도 없었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주 외로운 기분이 들었어요. TV나 라디오도 없이 자랐죠. 물론 그 2개가 없어서 이점도 있긴 했어요. 제 형제자매들은 상상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회적으로 고립된 기분이었죠. 학교에서는 조롱당하고, 더는 버틸 수 없었고,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냥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구도 절 원치 않고 사랑해주지 않으니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진짜 자살 시도를 하니 어머니는 제가 죽는 살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답했어요. `절 상대할 시간이 없다고 저에게 말했죠. 그때 제 부모님이 이혼한 상황이었는데 아버지를 볼 수도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었어요.

팟캐스트: 왜 부모님이 한국에서 입양하셨죠?

달시: 좋은 질문이네요. 전 장녀입니다. 바로 밑에 한국계 입양아인 남동생이 있죠. 그 밑에 국내 입양아인 여동생 둘이 있어요. 우리 남매 전부가 항상 그런 질문을 했죠. 왜 부모님이 입양하셨을까? 제 아버지는 어머니가 불임이라 입양하셨다고 했어요. 반면에 어머니는 책을 읽고 난 뒤에 입양할 마음을 먹었다고 하셨죠. 지금 한국 입양 제도와 한국 입양 역사를 공부하고 있어요. 제가 2살에 입양이 되었는데, 입양된 날이 부모가 아이들을 구하는 날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종교적인 집안이 입양하는 경우가 많죠. 네브래스카에서의 어린 시절은 어떠셨죠? 

달시: 시골 농장에서 사람들과 고립된 채로 자랐고, 주변 사람들도 저와 전혀 닮지 않았죠. 제 사촌이 한국에서 입양되었기 때문에 사촌을 가끔 봤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은 때는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교 사이였어요. 제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친구 집에 놀러 갈 수도, 친구를 불러올 수도 없어서 항상 외로웠습니다. 아주 고독한 때였죠. 

팟캐스트: 남매들 사이는 좋았나요?

달시: 남매들 사이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주변에 같이 놀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TV도 없었고 라디오도 없었기 때문에 같이 밖에서 놀아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문을 잠그고 우리를 집안에 들여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밖에서 있어야 했죠. 취침 시간도 엄격했고 중학교 때도 8시에 잠들어야 했습니다. 아주 힘든 시간이었어요.

팟캐스트: 양부모가 아이들을 억제하고 음식의 양마저 조절하는 이야기는 슬프게도 전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을 당하셨는지에 아시나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시면 이유를 알 수 있나요? 

달시: 지금 와서 왜 부모님이 우리 형제자매들을 그렇게 양육했는지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요소 중 하나는 부모님이 더 나은 방법을 몰랐다고 생각해요. 또 다른 요소는 우리 집이 가난했기 때문이죠. 어머니는 전업주부이셨고 아버지는 타이어 가게에서 일하면서 돈을 많이 벌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돈이 부족했습니다. 4명의 아이와 2명의 어른을 위한 충분한 음식을 제공해야 했기 때문에 우리가 먹을 양을 관리하려고 했죠. 부모님이 이혼하고 어머니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했어요. 우리 가족이 복지 배급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복지 배급으로 나온 치즈를 받아서 먹었고, 식품권 배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먹는 양마저 조절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그 시대에는 다른 아이들이 비슷하게 양육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달시 씨 가족만 그랬다고 생각하시나요? 달시 씨 가족이 다르다는 사실을 언제 아셨죠?

달시: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우리 가족이 다른 가족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 저는 기억 자체가 별로 없습니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합쳐서 기억 자체가 별로 없죠. 저에게 남아 있는 기억들도 선명하지 않아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애들이 다른 친구들과 같이 하교하고, 다른 집에 놀러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부모님에게 친구 집에 놀러 갈 수 있는지 묻자, 안된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왜 안되는지 묻자 뺨을 맞았죠. 그런 일이 일어나면 더는 묻지 않게 됩니다.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다른 친구 집에 놀러 가지 못하게 했던 이유는 몰라요. TV도 없이 사는 환경이 부끄럽다면 친구들을 초대 못 하게 할 수도 있죠. 하지만 왜 친구 집에 놀러 가는 일까지 금지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팟캐스트: 정신적으로 학대당하셨고 거기에 육체적으로도 학대당하셨군요?

달시: 그랬습니다.

팟캐스트: 거기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셨겠군요?

달시: 네. 고등학교 때 자살 시도도 그곳에서 빠져나가려고 한 방법이었어요. 자살 시도가 실패하자 결국 가출을 했죠. 어머니가 일하러 갔을 때 편지를 쓰고 제 동생들을 모아서 더 여기에 있을 수 없다고 한 뒤에 친구를 불렀어요. 선생님으로 일하던 친구가 저를 데리러 왔고 제 아버지 집으로 절 데리고 가줬습니다. 전 제 아버지를 못 본 지 몇 년이 넘은 상태였죠. 아버지를 보러 갈 수 없었거든요.

팟캐스트: 그래서 아버지가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겠군요?

달시: 네. 전혀 몰랐습니다.

팟캐스트: 어머니에게 자살한다고 말했을 때 그냥 죽으라고 했다고 들었는데….

달시: 네. 그랬죠.

팟캐스트: 끔찍하네요. 아주 심한 고통을 겪으셨겠네요.

달시: 그랬습니다.

팟캐스트: 자살 방법은 뭐였죠? 약을 먹으려고 하셨나요? 아니면….

달시: 제 손목을 가위로 자르려고 했죠. 고등학교 1학년 때 심리학 수업을 들었는데 그때 일기를 쓰게 되었고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글을 쓰게 됐습니다. 그걸 본 제 선생님이 학교 상담사를 불렀고, 학교에서 저와 제 어머니를 불러서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단순히 제가 관심을 끌려고 이러는 거라고 말씀하셨죠. 

팟캐스트: 다행히도 자살 시도가 실패한 뒤에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서 가출하셨군요.

달시: 네. 제 아버지 집에 보내줬죠. 거기에서 한 달 정도 지냈습니다. 아버지는 재혼하신 상태였고 전 양어머니와 그렇게 잘 맞지 않았어요. 그분은 이미 4명의 남자애를 키운 상태라, 아버지에게 “이미 내 아이들도 다 키웠으니 네 애까지 키울 여유는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됐어요. 그때가 9월이었는데, 아버지가 제 병실에 들어오시더니 우리와 같이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거주지를 찾아야 했죠. 다시 어머니와 같이 사는 지옥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어요.

팟캐스트: 이때 달시 씨 나이가 어떻게 되셨죠?

달시: 17살이었습니다. 

팟캐스트: 17살 학생이 갈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죠?

달시: 그렇죠. 결국, 제 부모님의 친구를 부르게 됐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그분이 제가 입원해 있던 병원에 와서 제가 그분 집에서 지낼 수 있다고 하셨죠. 전 그분들을 제 양부모님이라고 불러요. 하지만 그 결과로 제 부모님과 양부모님의 친구 관계가 깨졌습니다. 제 부모님은 양부모님의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았죠. 제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양부모님이 법적 보호인이 되려고 하셨고, 제 부모님이 동의하시면서 양부모님이 제 법적 보호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 고등학교 생활을 양부모님과 보낼 수 있었죠.

팟캐스트: 자라면서 사랑받았다고 생각하시나요?

달시: 아뇨. 한국에서 잘못된 애를 보냈다고 듣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말로는 어머니가 입양기관에서 받은 사진과 제가 달랐다고 하더군요. 듣기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화가 나셨을 때, 한국에서 널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었다고 저에게 소리치시고는 했죠. 마지막으로 제가 뚱뚱하고 멍청하다고 조롱하고는 했습니다. 이러한 말들을 들으니 사랑받는 기분도 들지 않았고 받아들여지는 기분도 들지 않았어요. 친구들과 시간도 보내지 못했으니 사회적으로도 고립되었죠. 아주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자유가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달시: 여러 감정을 소화하려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 어머니가 오기를 거부하셨죠. 대학교 졸업식에도 오지 않으셨어요. 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식에 오긴 하셨어요. 어머니에게 대답을 듣기 위해서 연락을 했지만, 전화를 끊었죠. 어머니가 절 원치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원했지만,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문제를 받아들이고 상대해야 할지 몰랐다고 생각해요. 아버지는 독일계 집안에서 9명의 형제자매와 같이 자랐죠. 고등학교 중퇴생이기도 하셨습니다. 아직도 왜 부모님이 입양하시기로 하셨고, 입양 허가를 어떻게 받았는지도 몰라요. 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었고, 어머니는 고등학교 졸업생이긴 했지만, 대학교 졸업생은 아니었죠. 요즘이었다면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어서 입양 자체가 불가능했을 겁니다.

달시: 적어도 그때 입양 기준은 통과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입양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기도 하지만, 옛날 입양은 비용이 많이 안 들었습니다. 부모님은 한국에 가서 저랑 제 남동생을 데리고 와야 하지 않았어요. 시카고 공항에서 우리를 맞이했죠. 제 두 동생은 국내 입양이었기 때문에 바로 국내에서 입양되었습니다.

팟캐스트: 어릴 때 겪은 문제로 인해서 자해하기 시작하셨나요?

달시: 저 자신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건강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죠. 꽤 자주 자살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자살 시도를 하고 나서도 자살에 대해서 생각했죠. 자살에 대한 생각이 안 나는 경우가 없었죠. 트라우마에서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상담을 받으면서도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고생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는 했죠. 제대로 밥을 먹지 않기도 하고, 저 자신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했습니다. 제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팟캐스트: 어머니만 이런 학대를 하셨나요? 아니면 아버지도 학대에 동참하셨나요?

달시: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어머니만 저에게 이러셨죠.

팟캐스트: 팟캐스트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걱정을 하셨나요, 아니면 이러한 개인적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었나요?

달시: 좀 걱정되긴 했어요. 하지만 다른 팟캐스트 에피소드를 듣고 나니 이러한 문제를 저 혼자만 겪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죠. 다른 입양아들도 비슷한 문제나 상황을 겪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든 입양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완벽하지 않은 입양이라고 해도 괜찮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일종의 구원이군요?

달시: 네 그렇습니다. 현재 저는 괜찮아요. 제가 이렇게 괜찮아진 이유는 신의 은총, 좋은 친구들과 가족, 삶의 긍정적인 면모를 보여준 스승들이 제 삶의 긍정적인 면모를 보여줬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네브래스카의 농촌 마을에서 성장하셨군요. 작은 마을이니 서로서로 아는 곳이었죠? 달시 씨의 학대 사실이 숨겨졌나요? 다른 사람들이 몰랐다고 생각하세요?

달시: 알았지만 동시에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SNS로 다시 연락이 닿은 동네 사람들이 저에게 와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몰랐다고 이야기를 해줬죠. 친구들은 저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도울 방법을 몰랐습니다.

팟캐스트: 70년대였고, 중서부의 농촌 지역이라 그러한 문제를 아예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 문제도 있었겠군요?

달시: 네 그렇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이러한 문화가 좋지 않은 상황에 놓인 아이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죠. 그러한 상황에서 경찰이나 다른 공공기관에 신고가 들어가지 않았는지 궁금하네요.

달시: 사실 신고가 들어갔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아동복지국이 나와서 우리에게 질문한다고 부모님이 모아서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할 이야기를 정해주었죠. 4명 전부 소파에 모여서 앉아 있었고 어머니가 집을 돌아다니면서 집을 청소했습니다. 네. 마을의 누군가가 아동복지국에 연락했어요. 하지만 충분한 증거가 없어서 우리 형제자매들을 부모님에게 떼어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너무 자주 일어나죠. 제가 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심리학을 공부해서 왜 그런지 배웠고, 관련 분야 봉사 활동을 10년간 진행하면서 아동 학대와 방치 문제를 처리했는데, 우리 가족 상황과 비슷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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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친어머니에 대해 생각하신 적이 있나요? 만약에 친어머니가 달시 씨에게 일어날 일을 알았다면, 상황이 다르게 진행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나요? 많은 친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볼 수 없고, 돈도 없고, 남편도 없으니, 아이들에게 더 좋은 미래를 주기 위해서 입양 제도에 아이들을 맡겨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죠. 한국인들로서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하는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입양아들도 더 나은 삶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요. 달시 씨도 다른 선택지에 대해 생각을 하시나요?

달시: 네. 한국에서 자랐다면 제 삶이 어떻게 달랐을까 생각하죠. 어른이 되고 나서도 제 친어머니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친어머니를 찾기 위해서 노력했고 지금도 찾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제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고, 어머니가 저를 학대했기 때문에 진짜 모녀 관계를 원하고 제 친어머니를 찾고 싶어요. 친어머니에게 저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편지를 쓰기도 했죠. 하지만 제 친어머니를 원망하지는 않아요. 어머니가 저에게 사과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친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친어머니들 대부분이 입양 과정에서 아이와 떨어지는 고통을 설명하기 때문에 울게 되죠. 친어머니들은 아이들을 항상 기억한다고 해요.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제 친어머니도 절 계속 생각하거나 적어도 생각했다고 생각합니다. 제 친어머니가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친부모 조사는 진행하셨나요? 한국에 돌아가신 적은 있나요?

달시: 한국에 2번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2001년과 2016년에 한국을 방문했죠. 제 첫 한국 방문은 제 입양기관을 통한 방문이었어요. 입양기관에서 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뒤 얼마 안 있어서 방문하게 됐습니다. 대학교 수업 과제를 위해서 그쪽에 연락하게 됐죠. 입양과 관련된 과제였는데 제 부모님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서 입양기관에 연락했어요. 대학교 때 그 연락하기 전까지는 제가 입양에 맡겨진 지역도 어디인지 몰랐습니다. 연락하고 나서야 제가 어디에서 어떻게 입양되었는지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제 상황을 알게 되자 입양기관에서 놀라면서 사과했습니다. 하지만 입양기관 잘못이 아니었죠. 입양기관은 그 상황에서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니까요. 하지만 입양기관이 제 상황을 듣고 사죄하는 의미에서 조국 방문 여행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감정적인 유대감이 느껴졌고, 경험 자체가 매우 감동적이었죠. 돌아와서 좋았습니다. 유전자 검사는 하지 못했지만 제가 지냈던 고아원이 있었던 자리에 방문할 수 있었어요. 2016년에도 조국 방문 여행의 일부로 한국에 왔고, 고아원 자리도 다시 방문했습니다. 2016년에는 제가 좀 더 나이를 먹은 뒤라, 좀 더 무게 있는 방문이었죠. 한국에 다시 방문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고아원 출신 고아들과 다시 연락망을 구축했습니다. 그 연락망 구축이 제 조사 결말의 일부라고 할 수 있어요. 

팟캐스트: 고아원 이름이 어떻게 되죠?

달시: 동두천시에 있던 양주 고아원입니다. 그 고아원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배우고 있죠. 전 서울 북쪽에 있지만 의정부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DMZ 근처의 지역에서 태어났거나, 발견되었어요.

팟캐스트: 그 고아원에 대해서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나요?

달시: 나이가 어느 정도 먹은 뒤에 입양된 입양아들은 그 고아원에 대한 끔찍한 기억이 있죠. 

팟캐스트: 달시 씨가 지내던 곳이 좋지 않은 곳이었는데 달시 씨가 보내진 곳도 좋지 않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어땠나요? 

달시: 우선 제가 2살 때 입양되었기 때문에 한국 기억이 없습니다. 기억 자체가 억압되었는지 아니면 너무 어려서 기억을 하지 못하는지는 모르죠. 한편으로는 기억하지 못해서 그 기억을 가지고 자라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면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받은 삶과 기억도 그리 축복받은 삶과 기억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기억이 저에게 더 좋았을까 고민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미국에서 살았던 삶을 염두에 둔다고 해도, 입양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현재 제 생활, 저에게 주어진 기회,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고, 한국 고아원에서 끔찍한 생활을 하면서 자랐다면 제가 어디 있을지 생각해봤습니다. 아마 준비도 안 된 채로 거리에 내몰렸을 겁니다. 한국 고아들이 대부분 그러한 결과에 도달한다고 들었어요. 

팟캐스트: 달시 씨의 이야기는 회복과 생존의 이야기군요. 달시 씨의 어린 시절 자체가 생존하는 이야기입니다. 달시 씨의 이야기 일부에 대해서 공감해요. 어린 아이일 때 생존의 방식을 만들죠. 누가 자기를 도울 수 있는지 알고 인공적인 부모 관계를 만들게 됩니다. 달시 씨도 그런 일을 겪으셨나요? 

달시: 물론이죠. 이미 말했지만, 가족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인공적인 부모 역할을 해준 분들이 있었죠. 그분들 중 몇몇은 자기를 어머니로 불러도 좋다고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러한 이야기가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은 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단순히 입양아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죠. 제 입양 가족은 제 진짜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이 제 가족이긴 하고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절 사랑해주고 받아들여 주는 사람들이 제 진짜 가족이죠. 그러한 사람들이 제 삶에 있고 그 사람들이 있어서 기쁘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대학교 이후에는 어떻게 생활하셨죠? 어디로 가시게 됐나요?

달시: 대학교 졸업 이후에는 네브래스카주에 몇 년 동안 지냈어요. 그곳에서 지내면서 보이스 타운(Boys Town, 네브래스카주 기반 자선단체)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일은 즐거웠죠. 다양한 지식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보이즈 타운은 청소년들을 위한 보호 단체로, 아이들이 소년원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도착하게 되는 곳이죠. 그곳에서 아이들이 가족에서 같이 지내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저는 거기에서 가족 보조 선생으로 일했죠. 보이즈 타운에서 지내게 되는 아이들은 가족 선생들과 같이 진짜 가족과 지내게 됩니다. 8명의 아이들이 같은 집에서 지내게 되어요. 8명의 남자애나 8명의 여자애가 같은 집에서 지내게 되죠. 일하는 법을 배우고, 학교도 가고, 필요로 하는 상담도 받게 됩니다. 이 애들 대부분이 사회적 교류를 하는 법을 모르거나 사회적 스트레스를 상대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사회적 기술도 가르쳐요. 비행 청소년들을 위한 훌륭한 시설이죠. 그곳에서 6년간 일했습니다.

팟캐스트: 잠시 묻고 싶은 일이 있는데, 이러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정서적인 치유에 도움이 되었나요?

달시: 예. 정서적인 치유에 도움이 되었죠. 아이들 상당수가 제가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아이들 상당수가 학대당하면서 자랐으니까요. 제 삶을 고친 제가 그 경험을 통해서 다른 아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점이 좋았죠. 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여름 캠프에서 일했고, 대학교 교회에서도 활동하면서 멘토 가족도 있었어요. 그 가족과 여전히 연락하고 있습니다. 제 신앙이 대학교에서는 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죠. 제 친구는 교회 청소년 지도자였는데 그 친구와 함께 청소년 지도를 돕고, 대학교 청년 교회의 일을 도왔어요. 제가 일을 잘하는 것을 보자 친구가 다른 교회에서 청소년 지도자로 일해보라고 권유했습니다. 그걸 듣고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캠프를 가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설파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니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다른 교회에 청소년 지도자 신청을 했고 4년 정도 청소년 지도자로 일했습니다. 제 캠프 지도자 시기와 그 청소년 지도자 시기의 경험이 제가 종교 쪽으로 진로를 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애리조나 교회에서 15년간 일하다가 텍사스 교회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자살 충동은 잦아들었나요?

달시: 네 그렇습니다. 자살 충동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우울함, 소외감, 외로움, 의심이 남아 있죠. 전 여전히 신실한 신도지만 이러한 감정을 제 목사님과 공유했습니다. 현재 이 COVID-19 유행이 제 마음속에 큰 의심을 만들었거든요. 왜 이런 비극과 슬픔이 일어나고 있죠? 하지만 동시에 저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이 희망을 주시고 저희를 인도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죠. 자세히 설명하지는 못하지요. 

달시: 하나님이 어떤 이유로 삶에 어떤 일을 일어나게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한 이유로 현재 유행이 일어났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의 큰 시련이라고 보는 관점이죠. 전 그런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지구에 있으면서 온갖 고통을 겪는 이유는 원죄 때문이죠. 하지만 이런 시련이 하나님이 우리가 가진 사랑, 선, 품위를 더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 또한 천국에서 받을 기쁨을 더 높여준다고 봅니다. 말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제 관점이죠. 전 제가 망가진 가족에서 자란 이유가, 제 경험으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기회를 받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러한 경험을 겪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을 이 방식으로 도울 수 없었겠죠. 하지만 제가 만약에 절 사랑해주는 가족 밑에서 자라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고 해도 사람들을 다른 방법으로 도와줬을 겁니다. 제 인생 이야기를 자주 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의 동정이 싫기 때문입니다. 불쌍한 달시가 끔찍한 삶을 살았다는 동정을 받고 싶지 않아요. 전 제 삶을 그런 이야기로 소비하고 싶지 않죠. 놀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지구에 오게 된 이유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하나님의 뜻대로 최고의 사람이 되려고 왔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은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죠. 

달시: 자주 들은 말이네요. 제가 있어서 가장 힘든 기간은 고난 주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힘들죠. 학대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 하나님이나 교회에 적응하기 어려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왜 그런지 이해해요. 사실 저도 좋은 신도들이 저를 어려운 시기에 이끌어주지 않았다면 교회와 연관이 있거나, 깊은 신앙심을 가지지 못했을 겁니다. 적어도 전 그렇게 믿어요.

팟캐스트: 고난 주간이 다시 다가오는데 달시 씨는 그 기간을 어떻게 버티나요?

달시: 전 자아 고찰을 통해서 고난 주간이 가진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인간의 고통을 아신다고 생각하죠. 하나님이 예수님이 우리의 고통을 대속하게 하셔서 저희의 원죄를 씻어 주셨다고 생각해요. 힘든 시기이고 자아 성찰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달시: 저에게 있어서 관계는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쉽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저에 관해서 물어본다면, 특히 직장 동료들에게 저에 관해서 물어보면 제가 매우 사교적인 사람이라고 할 겁니다. 전 자원을 어떻게 찾아낼지 알고 있고 사람들을 서로 엮어내고 연락하는데 재능이 있어요. 거기에 사람들도 많이 알죠. 하지만 관계의 깊이가 다릅니다. 전 친구가 많이 있지만, 관계는 깊지 않죠. 제가 깊은 관계를 맺는 데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결혼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하죠. 아이를 가지지 않은 이유기도 하고요. 결혼은 하고 싶고, 남편을 가지고 가족을 꾸리고 싶습니다. 노력했다면 심리적 굴레를 뛰어넘고 그러한 길에 접어들 수 있었겠지만, 실패가 무서워서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심리학에서도 심리적 굴레를 뛰어넘지 못하면 양육의 굴레를 다시 반복하게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 자체가 저에게는 공포였고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죠. 연애 관계를 멀리하게 되었고 아직도 신뢰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입니다. 제가 여전히 혼자이고 깊은 친구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개인적인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답하고 싶으면 답해주세요. 친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달시: 친어머니에게 저에게 삶을 주셔서 감사하고, 어머니가 그때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일을 해줘서 감사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제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괜찮고 어머니의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죠. 어머니가 행복한 삶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하고 싶어요.

팟캐스트: 10살 때의 달시 씨에게는 어떤 말을 해주시고 싶죠?

달시: 음…. 아마 어른들이 말하는 모든 이야기를 믿지 말고,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 싸우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그때는 못했던 일입니다.

팟캐스트: 달시 씨 감사합니다. 여기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네요. 달시 씨의 이야기를 공유해줘서 고맙습니다. 많은 사람이 공감할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생존, 회복, 힘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달시: 감사합니다. 이 인터뷰를 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카오미 씨가 진행하신 이 팟캐스트에도 감사하고 싶습니다. 이 팟캐스트를 듣고 제가 혼자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서 감동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