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4, 에피소드 18: 선미 마르틴

한국계 입양아 선미 마르틴 씨(39세)는 3살 반이었을 때 한국에서 남부 독일로 입양되었다. 마르틴 씨는 자신의 입양에 대한 관점이 세월이 지나면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이야기하고, 어떻게 자신의 직업이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에서 SNS 디자이너로 바뀌고, 입양아를 위한 치료 공간이자 수양 공간인 누마루의 창업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선미: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선미입니다. 제가 3살 반이었을 때 대한민국 부산에서 입양되었죠. 지난달에 39세가 되었어요. 제 부모님은 독일인이시고 전 독일 남부에서 자랐죠.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네요. (독일어 자기소개)

팟캐스트: 선미 씨가 3살 반에 입양되었다는 사실은 몰랐어요. 한국 기억이 남아 있나요?

선미: 아뇨. 한국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어요. 거대한 기억의 공백만이 남아 있을 뿐이죠. 제가 가진 정보는 제가 발견된 곳의 주소입니다. 그 주소가 사실인지도 몰라요. 2014년에 독일에서 홀트아동복지회에 연락했을 때 그들이 제공한 정보이죠. 그 자료는 제 입양 서류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발견된 곳의 주소를 제가 받았고 그곳을 직접 방문했죠. 그곳을 방문하면 제 기억이 되살아날지 알고 싶었어요. 제가 알고 있는 또 다른 사실은 제가 독일에 오기 전 6개월 동안 부산에 있는 고아원에서 지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를 찾아서 경찰에 맡기고 갔을 때의 기록이 제 서류에 남아 있죠. 하지만 저에게 있는 정보는 그 정보밖에 없습니다.

팟캐스트: 어떻게 고아원에 넘겨지게 되었는지도 모르시는군요?

선미: 모릅니다. 사실 지금 조사를 좀 더 진행해서 정보를 더 얻으려고 기다리는 중이죠. NCRC에서 제 원본 서류가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고, 또 다른 유전자 검사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이미 2번이나 유전자 검사를 진행했어요. 한번은 한국 뿌리의 집 게스트하우스에서 진행했고, 다른 검사는 패밀리 트리 DNA(Family Tree DNA) 회사의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지금 하려는 검사는 주독 대한영사관에서 진행하는 유전자 검사이죠. 제가 아는 바로는 제가 할 수 있는 유전자 검사 중 가장 나은 검사라고 하더군요. 한국 정부가 제공하는 공식 유전자 검사인지라, 한국 경찰 유전자 정보와 대조할 수 있다고 합니다. 

팟캐스트: 선미 씨, 그 조사들을 진행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선미: 제 친어머니를 찾기 위해서 조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조사 자체를 시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냥 조사를 진행하기에는 양부모님에게 죄송했기 때문이죠. 특히 제 양어머니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일찍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친어머니를 찾고 싶다는 욕망을 숨겼어요. 지금은 양부모님과 입양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더 탄탄한 관계를 구축했고, 그분들을 더 잘 이해했으며, 양어머니가 조사를 응원해 주셨어요. 그렇게 양어머니에게 허락을 받아서 좀 더 적극적으로 조사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낳아준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고, 제가 누구인지, 제 근원에 대해 본능적으로 알고 싶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저에게 제 친부모를 찾는 일이 중요해진 때는 5년에서 6년 전입니다. 그 뒤로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어요. 10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참 신기하죠. 선미 씨도 갑자기 최근에 관심이 생기셨나요? 아니면 항상 친어머니를 찾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나요? 

선미: 어렸을 때부터 알고 싶었지만, 행동으로 옮길 정도의 욕망은 아니었어요. 6년 전부터 행동으로 옮길 정도의 욕망이 되었고, 자세한 조사를 시작하기 시작했죠. 누가 절 도와줄 수 있는지 찾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좀 더 찾고 나니 지원 제도가 존재하고 연락을 해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시설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죠. 

팟캐스트: 양부모님으로부터 선미 씨가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이 큰 영향을 끼쳤나요?

선미: 네.

팟캐스트: 과거에는 양부모님, 특히 양어머니를 상처 입히는 일이 두려우셨다고 하셨죠. 양어머니의 태도가 바뀌셨나요? 아니면 선미가 양어머니의 거부나 충격 때문에 걱정하신 건가요? 어떤 관계였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선미: 물론입니다. 양어머니와 저의 관계가 시간이 바뀌면서 많이 바뀌었죠. 처음 시작할 때, 저는 가족에 적응하는 데 집중했고 양부모님은 저에게 최대한 안전하고, 편안하고, 성장하기 편한 환경을 제공해주시는 데 집중했어요. 하지만 제 양어머니와 깊은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양아버지와는 좀 더 깊은 관계를 맺었어요. 제가 양어머니에게 적응하지 못한 이유는 또 다른 어머니를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 그리고 제 친어머니가 저를 거부했기 때문에 양어머니도 절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양어머니가 제 삶에 들어오시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어요. 이러한 이유로 초기에는 양어머니와 깊은 관계를 맺기 어려웠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제가 18살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제 입양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되었고, 큰 문제가 되었어요. 정체성 혼란을 겪기 시작했죠. 제 정체성 혼란에 대해서 양어머니가 감정적으로 반응하셨습니다. 제 혼란을 이해하지 못하셨죠. 양어머니는 저에게 이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감정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양어머니가 가졌던 최악의 공포가 사실이 되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선미 씨가 입양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으니까요.

선미: 네. 거기에 저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전 기분이 안 좋았고, 길을 잃고,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있었죠. 양부모님에게 제 감정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단어를 찾지 못했고, 그래서 양부모님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셨죠. 전 감정적으로도 준비가 안 되어 있었고, 양어머니와 관계가 안 좋아졌어요. 양어머니가 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집에서 이사 나왔습니다. 그 뒤로 몇 년간 양부모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어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귀향하긴 했지만, 양부모님이 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유대감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양어머니와 제 관계가 바뀌었죠. 하지만 다시 관계를 수복할 수 있었고 지금은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친구 간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죠. 아주 아름다운 관계라고 생각해요. 저와 양어머니 둘 다 과거의 감정에 대해서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양어머니가 제 친어머니 조사를 지지해준 것도 큰 도움이 됐죠. 양어머니는 제가 친어머니를 찾는 꿈을 꾸시기도 했다고 해요. 그러한 사실을 저에게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양어머니가 제 친부모 조사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계세요.

팟캐스트: 좋은 이야기군요. 독일에서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외동딸이셨나요?

선미: 아뇨. 양부모님의 친딸인 자매가 1명 있죠. 저보다 3살 많은 언니입니다. 제가 도착했을 때 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준 좋은 언니였어요. 여동생이자 놀이 상대가 생겼다는 사실에 아주 기뻐했죠. 최근에 제 입양 서류를 다시 읽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부모님이 독일 입양 기관에 쓴 편지를 찾았습니다. 이 편지들을 처음 읽어보니 제 부모님의 감정적인 변화를 느낄 수 있었죠. 4년간 서류 작업을 준비하면서 저에 대한 기대와 기다림이 담겨 있는 편지들이었어요. 그 편지에는 제 언니가 새로운 동생이 생기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제 언니는 저에게 질투하지 않았어요. 가족에 침입해서 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죠. 절 열렬히 환영해줬습니다. 그렇게 좋은 놀이 상대되었어요. 

선미: 독일에서의 성장 과정은 복잡한 감정 문제와 함께하는 과정이었죠. 성장할 때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과거를 돌아보니 확실히 그랬습니다. 사람의 기억이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는지 생각해보면 왜 이런지 알 수 있었죠. 사람은 과거를 기억할 때 최대한 좋은 면을 기억하려고 해요. 제가 과거를 기억해보면 기쁨과 사랑이 기억납니다. 하지만 많은 외로움과 슬픔도 기억이 나죠.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독서를 통해서 도망쳤어요. 전 독서를 사랑했고, 제 방에 있는 의자가 제 피난처였습니다. 거기 앉아서 판타지 세계와 책들 안으로 들어갔어요. 같이 놀 친구들도 있었지만, 토요일에는 같이 놀 친구들을 찾았지만 아무도 저와 놀아주지 않던 기억도 나죠. 실망감, 거절된 기분,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같이 돌아다닐 친구 집단을 만들어야 했어요. 친구들이 있었고 적어도 어린 시절보다는 친구 집단을 만들기 쉬웠습니다. 더 외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어요. 학교에 한국계 남자애가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입양아였나요?

선미: 아뇨. 입양아는 아니었어요. 한국 가족과 독일에서 사는 애였죠. 하지만 그 애가 주변에 있으면 최대한 무시하려고 하고 아무 일도 같이하려고 하지 않았죠. 백인 애들과 섞이고 싶었고 제 한국 정체성을 인식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팟캐스트: 그러니까 선미 씨가 그 남자애를 거부했군요? 남자애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고?

선미: 그냥 무시하는 것에 가까웠어요. 하지만 그 남자애도 적극적으로 저와 놀거나 교류하려고 하지 않았으니 양방향 무시에 더 가까웠다고 봅니다.

팟캐스트: 어렸을 때는 같이 놀 친구를 찾기 어려우셨다고 하셨죠. 작은 마을에서 자라셨나요?

선미: 네 꽤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인구가 한 20만 명 정도 하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선미 씨에게 질문한 이유는 유럽의 작은 마을 기준이 미국의 작은 마을 기준과 달라서 그렇습니다. 제가 자란 마을은 800명 정도 사는 곳이었거든요. 하지만 전부 상대적이니 20만 명이 작은 마을로 보일 수도 있겠죠.

선미: 이게 언어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작은 마을이라고 생각하면 사실 소도시에 더 가깝습니다. 800명이라고 하면 마을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동네라고 부르죠. 언어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독일인들도 제가 자란 곳을 작은 마을이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중간 크기의 마을이라고 언급하겠죠.

팟캐스트: 그러한 크기의 지역 사회를 선미 씨는 마을이라고 부르고, 제가 자라난 크기의 지역 사회를 선미 씨는 동네라고 부르겠군요?

선미: 네.

팟캐스트: 아주 흥미롭네요.

선미: 적어도 제 관점에서는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이러한 인터뷰를 진행할 때마다 사회적 차이점이 존재하거든요. 우리가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저의 1 언어이고 선미 씨의 1언더가 아니니 저에게 더 이점이 있을지도 모르죠. 거기에 사회적, 문화적 언어 사용의 차이점이 있으니 그러한 차이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어렸을 때 소외되었다는 느낌이 받으셨다 하셨죠. 그때는 자기 자신을 아시아계라고 생각하지 않으셨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시아계라서 그랬다고 생각하시나요?

선미: 네. 제가 어렸을 때 제가 내성적이라서 소외된 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시아계라서 그랬기도 했다고 생각해요. 그때는 그러한 인종적 측면을 인식하지 못했죠. 제가 소외감을 느꼈다고 생각하지만, 제 부모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다른 아이들과 노는 광경을 봤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외롭다고 느낀 때가 있고, 그때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판타지 세계와 책들에 매료된 이유도 그것 때문이라고 봐요. 밖에 나가서 애들과 상대하지 않아도 됐으니까요. 많은 아이들이 저를 받아주려고 했지만 동시에 저를 거부하는 애들도 많았습니다. 미묘한 차별도 많았죠. 하지만 제 가족과 가족들의 친구들은 저를 받아들여 줬어요. 그래도 제가 소외감을 느끼던 때가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좋아하던 판타지 소설들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선미: 호빗이나 독일 판타지 소설들을 좋아했죠. 다른 환상적 세계를 배경으로 영웅들, 모험들이 있는 세계를 여행하는 이야기를 좋아했습니다. 

팟캐스트: 독일에서 자라면서 다른 독일인들이 선미 씨나 선미 씨의 가족을 바라보거나 특이한 질문을 받거나 그러셨나요? 미국에서 입양 가족들은 그런 일을 자주 겪거든요.

선미: 네 항상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봤죠.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를 보고는 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백인 가족에 아시아인 꼬마가 끼어 있는지 궁금해했죠. 그러한 문제가 너무 많았고, 저를 만지려고 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런 일들이 싫었습니다.

팟캐스트: 그러한 상황에서 대응을 어떻게 하려고 하셨죠? 화를 내셨나요? 

선미: 잘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하지만 제 부모님이 독일 입양기관인 테라존에 보내야 했던 제 성장 과정에 대한 편지를 읽었죠. 제 아버지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테라존에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이러한 문제를 겪었다는 사실 자체를 편지를 읽고 알았어요. 아버지가 편지에 쓴 이야기에 따르면 사람들이 저를 만지려고 했고 제가 그런 행동을 싫어했다고 했습니다. 편지에 따르면 제가 화를 내면서 아버지 뒤에 숨었다고 하더군요.

팟캐스트: 선미 씨가 원치 않은 관심을 받아서 그랬군요?

선미: 네. 그런 관심을 원치 않았어요. 

팟캐스트: 선미 씨가 입양된 뒤에도 입양기관에 부모님이 계속 보고를 해야 했나요?

선미: 네.

팟캐스트: 얼마나 자주 보고를 해야 했죠?

선미: 사실 입양 6개월 이후에 1번만 보고해야 했다고 합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바로는 그렇고 부모님이 기록해두신 바로는 그래요. 부모님이 저와 관련해서 보관할 수 있는 모든 자료는 보관해 두셨죠. 보관해 둔 편지들은 부모님이 보내려고 작성해둔 편지들의 초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이 왜 한국에서 입양하셨는지 아시나요?

선미: 독일 내부 입양보다 외국에서 입양하는 과정이 훨씬 쉽고 빨랐기 때문이죠. 입양기관에서 국제 입양을 하겠냐고 물었고, 부모님은 안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셨어요. 하지만 부모님은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지 증명해야 했습니다.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도 지지해주겠다는 추천서를 받아야 했죠.

팟캐스트: 자라면서 백인 정체성을 가지셨나요? 

선미: 전 거울을 보면서 제 피부색을 보지 않았죠. 제 한국 정체성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 사실을 아는 이유는 제가 2008년에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제가 지하철에 내린 뒤 주변을 보면서 “아,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에요. 아,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 내 정체성이 이렇구나.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이상한 일이죠. 제가 매일 거울을 보면서 눈이 다르고, 코가 다르고, 외모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는데도 그 의미를 알게 된 때는 한국을 방문하고 난 뒤였으니까요. 제가 성장하고 난 뒤 제가 왜 그랬는지 이해했습니다. 항상 저는 백인처럼 보이고 싶었어요. 곱슬머리를 가지고 싶었고, 큰 파란 눈을 가지고 싶었죠. 제가 12살 때 눈 화장을 연습하고 있을 때 다른 친구들이 하는 화장을 따라 할 수 없다는 점에 화가 났었죠. 그런 일들이 기억이 납니다. 또 독일 패션 잡지를 보면서 따라 할 수 있는 아시아계 여성이 없었죠. 포스터, 잡지에도 항상 백인 여성만 등장했으니 제 정체성을 자각할 수 없었고 편하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이성 교제는 어땠나요? 사람들이 선입견을 품고 선미 씨를 대했나요? 아니면 사람들이 페티쉬를 가지고 선미 씨를 대했나요?

선미: 그러한 경우가 많다고 다른 아시아계 여성들에게 많이 들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페티쉬라고 언급할 정도로 심하지 않았어요. 물론 아시아계 여성을 좋아하는 남성과 교제한 적은 있지만 딱 1번이었죠. 다른 남성들의 경우에는 이 사람들이 선미와 교제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제가 지금 그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답은 다를지도 모르지만 제가 경험한 바로는 제 한국 정체성에 매료되어서 교제한 경우는 없는 것 같아요.

팟캐스트: 젊었을 때 교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나요? 아니면 평범한 교제를 하셨나요? 

선미: 교제 자체는 평범했지만 늦게 시작했어요. 제 몸 자체에 대해서 자각하는 데 오래 걸려서 늦었죠. 저 자신을 찾고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이성 교제를 하고 남성들과 이야기를 하는 데 오래 걸렸어요.

팟캐스트: 언제부터 데이트를 시작하셨죠?

선미: 첫 남자친구, 정확히 말하자면 짝사랑 상대에게 입 맞췄을 때가 16살이었죠.

팟캐스트: 16살이 늦었다고 할 수 있나요?

선미: 독일 기준으로는 꽤 늦은 편이에요. 제 친구들은 12살 때 이미 학교 뒤에서 남자애들과 키스했죠. 애들에게 질투했지만 동시에 괜찮기도 했어요. 연애 욕구가 없었습니다. 전 내성적이었고, 나중에 남성들에게 다가가서 서로 소통하는 법을 배웠죠. 그래서 늦게 시작했지만 평범하게 이성 교제를 진행했고, 첫 남자친구는 제가 18살이 되고 나서야 사귀기 시작했죠.

팟캐스트: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미국에서 자라나는 입양아들은 항상 자기 자신을 외국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죠. 물론 선미 씨가 뉴욕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다는 것도 알지만 우리 입양아들은 항상 외국인 취급이죠. 우리가 미네소타, 뉴저지 출신인데 항상 진짜 출신 국가는 어디인지 묻습니다. 그러한 경험을 독일에서 하셨나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선미 씨가 독일인이라는 증거를 보여줘야 했나요?

선미: 마지막 질문부터 답하자면 제가 100% 독일인이라는 증거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전 100% 독일인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보수적이고, 지루하고, 규율을 지키는 독일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싶지 않았죠. 그래서 100% 독일인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어디에서 왔느냐? 이라는 질문은 확실히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 독일어가 완벽하면서 어디에서 배웠는지 묻는 일도 수백 번이나 들었죠. 베를린에서는 그런 질문을 받지 않습니다. 물론 제 아시아계 친구들은 베를린에서 그런 질문을 받았다고 해요. 하지만 저는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은 없죠.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 제가 자란 곳에서는 많이 들었습니다.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는 사실은 모두 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동시에 질문 자체가 낡았죠. 저에게 있어서 더 좋은 질문은 어디로 가실 예정이죠? 왜 여기에 있죠? 이라는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현대 세상에서 어디 출신인지 묻는 말은 의미가 없죠.

팟캐스트: 많은 사람에게는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질문이지만, 이러한 질문 자체가 우리에게 있어서 이 나라는 우리의 나라가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죠.

선미: 확실히 사람을 구분하는 질문입니다. 이 나라에 맞지 않는다, 다르다, 우리는 여기에 있을 수 있지만 너는 아니다, 이라는 느낌이죠. 서로 같이 이 나라에 있을 수는 없다는 느낌의 질문이에요. 웃긴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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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대학은 어디에서 다니셨죠?

선미: 마인츠시에서 다녔습니다. 프랑크푸르트시에서 가깝죠. 마인츠는 요한네스 구텐베르크가 처음으로 활자인쇄를 대중화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제가 거기에서 공부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죠. 제가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었고 출판, 편집 디자인, 활판술 전문 디자인 학교가 마인츠에 있었거든요. 

팟캐스트: 왜 디자인 분야에 흥미를 느끼게 되셨죠? 그런 시각 분야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선미: 네. 항상 무언가를 만들고 자신을 창조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시각적인 분야에도 흥미가 있었지만, 형태와 기능에도 관심을 가졌어요. 특히 인쇄 매체와 관련해서 흥미를 느꼈습니다. 항상 책을 좋아했고, 다양한 종이 종류, 제본 방식에 대해서도 흥미를 느꼈죠. 현재는 제본 방식 자체가 다양하지 않아요. 그림의 힘과 그림만으로 전달할 수 있는 서사에 대해서도 흥미를 느꼈습니다. 

팟캐스트: 잡지도 자가출판하시고 그러셨나요?

선미: 네. 활자인쇄도 그때 배웠죠. 그때 처음으로 활자 크기 6의 실제 크기를 보고 놀랐습니다. 과거에는 그렇게 작은 활자를 전부 손으로 움직였어요. 현대에는 우리가 전부 디지털 인쇄와 출판을 사용하니 잊히고 있는 기술이지만 아직도 수제 인쇄를 하는 곳이 남아 있죠. 

팟캐스트: 아직도 그래픽 디자이너 일을 하고 계시나요? 

선미: 아뇨. 지금은 아닙니다. 제가 그래픽 디자이너 일을 그만두게 된 일은 사실 제 개인적 문제 해결과도 연결되어 있어요.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창작 업계에서 일하게 됐고, 브랜드 업계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우선 컴퓨터 앞에서 오랫동안 일해야 하고, 대부분은 가짜 정체성을 만드는 일이었어요. 브랜드의 세계를 만들고, 세계의 모든 것이 빛나야 하죠. 대부분은 아주 얕은 서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제 일에 더 깊은 뜻과 목표를 원했어요. 뉴욕에서 일하다가 베를린으로 이사했을 때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문화 중심지에서 살게 됐죠. 행사 관리자를 사람들이 찾고 있었어요. 지역 사회 만찬, 정치 토론회, 문화 워크숍, 음식 워크숍, 팝업 저녁 등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그 행사들을 준비하고 관리하는 경험과 좋은 목적을 위해서 사람들을 모으는 일에 푹 빠졌어요. 사회적 활동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전 사회적인 사람이라서 그 일에 더 적성이 맞았죠. 그렇게 새로운 목적과 직업을 찾게 되었어요. 물론 계속 부업으로 디자이너 일을 했지만 제 열정은 이미 행사 관리자로 옮겨간 뒤였습니다. 

팟캐스트: 제가 틀렸다면 정정해주세요. 이 직업상의 변화가 선미 씨의 정체성 진화와 연관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입양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거나 가짜 정체성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겉으로 드러내는 정체성과 우리 내부의 정체성이 다른 경우이죠. 선미 씨가 브랜드 분야에서 현재 직업으로 옮겨 가시는 예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입양아들도 자신의 외부 정체성을 브랜드화하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선미 씨가 일에서도 진짜 정체성을 찾게 된 이유가 선미 씨의 개인적 정체성을 찾는 과정과 연관되었나 싶었죠.

선미: 네. 저도 동의합니다. 네. 진정한 저를 표현하고 싶었죠. 그리고 진정한 저를 표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아직도 발전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제 진정한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가 말씀하신 대로 입양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브랜드화합니다. 제가 그런 용어를 사용한 적은 없지만 지금 들어보니 확실히 맞는다는 느낌이 들어요. 제가 어떻게 제 정체성을 브랜드화했는지, 제 정체성은 어떤 브랜드인지 생각이 듭니다. 저의 경우에는 완벽주의 문제가 있었어요. 지금은 그걸 많이 놓아준 상태지만 지금도 그걸 놓아주려고 노력하고 있죠. 일을 완벽하게 하려고 하고, 디자인학과 출신인지라 시각적으로 모든 것이 완벽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방이 더러운 상태와 방이 깨끗한 상태에서는 분위기가 확실히 다르죠. 자기 주변의 세상을 만들 때 시각적인 차이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시각적 면모에 집착하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팟캐스트: 이걸 브랜드화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네요. 하지만 입양아들이 다양한 정체성을 실험해보고,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껴야 하는지 주변 사람들이 명령하고 우리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주죠. 그 결과 우리 내부의 정체성과 외부의 정체성이 맞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다양한 정체성을 시험해보고 입양아들에게 맞는 정체성을 찾게 되죠. 

선미: 우리가 여러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고, 그 정체성을 탐사하는 일은 훌륭한 일이죠. 제 입양아의 정체성이 제 전체 정체성의 일부이지만, 제 정체성의 전부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입양아의 정체성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죠. 잊어버린 감정과 기억들이 남아 있었고, 제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저는 창작자이고, 딸이며, 외향적인 사람이고, 사람들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사람에게는 다양한 정체성과 관심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전 음식을 좋아하고, 요리하기도 좋아하고, 환경 보존, 자연을 좋아합니다. 사람에게는 다양한 정체성이 있고 그 정체성을 탐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대단하죠.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는 일 자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단순히 독일에 있는 한국계 입양아라는 정체성에 갇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분류되고 입양된 저 자신에 대해서 계속 설명해야 했죠. 사람들이 계속 질문할 때 대답하기 위해서 만든 정답도 가지고 있었어요. 한국에서 온 입양아라고 자동으로 말하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계속 묻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정답을 전부 준비해 뒀죠. 제가 입양아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일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처음부터 저에게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으니까요. 사실 너무 명백해서 숨길 수도 없었죠. 하지만 부모님이 매일 같이 그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질문하면 네가 입양아라고 답하고 우리가 네 부모라는 이야기를 해주라고 말씀하셨죠. 그래서 입양아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깊게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어요. 내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나와 친한 친구가 아니라면 입양아라서 느끼는 감정을 공유하지는 않았죠. 제가 입양에 대해서 가진 감정을 이해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제 마음속 깊숙한 곳을 봐야 했습니다.

팟캐스트: 개인적 정보에 대해서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셨군요?

선미: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뉴욕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어떻게 뉴욕에서 살게 되셨죠? 우리가 서로 만난 곳도 뉴욕이었으니까요. 

선미: 항상 독일을 떠나고 싶었어요. 최대한 빨리 떠나고 싶었죠. 제가 가고 싶었던 곳은 런던이었습니다.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까우면서 말도 통하는 곳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출신의 남자와 만났습니다. 그 사람 덕분에 뉴욕에 이주하게 됐죠. 그 사람과는 결국 헤어지게 됐지만, 전 뉴욕시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사실 그 사람과 잘 안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뉴욕시에서 연애하는 경험과 혼자서 뉴욕시를 경험하는 일은 서로 다른 일이죠. 저 자신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 과거의 삶으로부터 자유롭게 모험을 하는 기분이었고, 새로운 저 자신을 만들 수 있었어요. 물론 제가 다른 이름을 사용하면서 다른 배경을 가지고 활동하지는 않았고, 제가 누구인지 거짓말하지는 않았지만, 저 자신을 드러내고 찾는 데 있어서 훨씬 자유로웠습니다. 문화의 용광로에 들어가서 사회를 만끽할 수 있었죠. 어디에서 왔는지 사람들이 묻지 않았고, 묻는다고 해도 독일과는 다른 의도가 느껴졌죠. 아주 편안하고 문화적으로 다양한 환경이었습니다. 문화, 예술, 디자인, 박물관 등은 온갖 행사가 끝없이 존재했죠. 항상 구글에 검사해서 무료 행사가 어디에서 어떻게 개최되는지 찾아보고 최대한 도시를 즐기려고 했습니다. 

팟캐스트: 선미 씨와 처음으로 만났을 때가 기억나네요. 선미 씨가 아주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파란 마스카라를 하고 있어서 아주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 디자이너이기도 하셨고 삶을 계속 즐기고 계셔서 국제 시민이라는 감상을 받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꽤 신기한 점은 우리가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죠. 물론 지금 만났다면 선미 씨의 배경에 큰 관심을 가졌겠지만 그때는 제가 저 자신 내부를 탐색하고 제 입양아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하지 않아서 깊게 관심을 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선미 씨가 한국 입양아였고 우리가 서로 그러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알았지만 왜 서로 친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지금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을 때야 서로 더 깊은 관계를 맺게 됐으니 신기하다고 생각합니다.

선미: 네 그렇네요.

팟캐스트: 절 어떻게 생각하셨죠?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서로 알고 있는 지인이 있어서 만났죠?

선미: 아주 시끄러웠던 파티가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카오미 씨랑 제가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입양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나죠. 지금 생각해보면 카오미 씨는 아주 부정적인 관점으로 입양을 바라봤고, 전 긍정적으로 봤었습니다. 물론 지금 와서는 제 입양에 대한 관점이 다양화됐어요. 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했죠. 우리 둘 다 관점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때 카오미 씨가 몹시 부정적이라고 생각했어요.

팟캐스트: 그때는 확실히 그랬죠.

선미: 그때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정을 쌓을 수도 있었겠지만, 현재 지금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지금이 중요하죠.

팟캐스트: 그때 언급을 하셔서 좋네요. 그 대화 자체는 전 기억하지 못하지만, 선미 씨가 말한 대로 확실히 부정적이었을 가능성이 크죠. 그리고 선미 씨가 입양에 대해서 긍정적이었다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헤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른 입양아를 만나고 서로 입양에 대한 관점에 이야기하면, 그 관점이 입양아의 중심을 차지하고, 삶과 다른 문제에 대한 관점에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관점의 차이를 극복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죠. 

선미: 그렇습니다. 거기에 그러한 관점 차이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가 어렵죠. 공통적인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공감하기 쉽기 마련인데, 다른 사람이 그 의견에 공감하지 않는다면 서로 마음을 열기 어렵고, 믿음이 서로 다르다고 선을 긋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젊기도 했죠.

팟캐스트: 양날의 검이면서 동전의 양면이죠. 우리 둘 다 입양아의 경험이 있습니다. 선미 씨는 독일에서, 저는 미국 중서부에서 자라났죠. 선미 씨의 경험 중 일부는 제가 이해할 수 있죠. 하지만 다른 가족 관계, 다른 부모님, 선미 씨도 다른 사람이니 주변 환경에 대한 반응이 저와는 달라요. 차이점이 많습니다. 동전의 다른 면이 차이점이죠. 모든 입양아에게는 서로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는 동전의 한 면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다른 면은 차이점을 부여해서 입양아들의 경험을 독특하게 만들죠. 

선미: 우리가 배경 문화를 잃고 친어머니를 잃은 면에서 공감하게 되죠. 모두 그런 감정을 공유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적 정체성 문제로 인해서 갈등하는 문제도 공유한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가족 경험에서 차이가 나게 되죠. 

팟캐스트: 서로 만날 때 개개인의 정체성에 따라서도 차이점이 생기게 되기도 하고요.

선미: 네 그렇죠. 입양 제도 자체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지 따라서 차이점도 생기게 되고요. 저도 과거에는 입양은 좋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입양 제도 자체가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고, 다양한 문제가 있는 제도라고 생각해요. 이러한 문제를 스스로 배우기도 했고 다른 입양아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배웠고, 이 팟캐스트와 같은 방송을 들으면서 배웠어요. 다양한 이야기들이 제 관점을 넓혀주었습니다. 제 경험을 이러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다양한 일을 배웠죠. 과거에 카오미 씨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이해하고 분노를 이해하면서도 많은 점을 배웠어요. 이러한 공부가 입양과 입양 정치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언제부터 국제 입양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이해하게 되셨나요? 깊은 이해가 아니더라도 좀 더 국제 입양을 비판적으로 보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선미: 제가 입양에 대해서 좀 더 공부하고 배우기 시작하면서 관점이 바뀌기 시작했죠. 입양 관련 기사, 논문,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보고 공부했어요. 저 자신의 입양에 대한 탐색을 돌이켜보니 단계적으로 발생했습니다. 제 삶의 변화와 함께 입양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죠. 18세에 처음으로 제 정체성과 제 배경에 대한 혼란을 겪었어요. 제 한국인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을 했죠. 그다음 대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삶의 선택지를 생각하면서 정체성과 입양의 문제가 다시 생각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8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방문해서 정체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기 시작했어요. 시립 도서관에 방문해서 정체성 구성과 입양에 관한 책을 잔뜩 빌려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감정적인 해소 방법을 찾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 살면서 항상 세상이 왜 이렇게 굴러가는지 알려고 했고 호기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연구를 시작하고 난 뒤 여러 서적을 읽고, 입양아들의 이야기를 읽으니 입양에 대한 트라우마와 부정적인 경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좀 더 입양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구축하게 된 것 같습니다.

팟캐스트: 2008년에 한국에 처음으로 방문하셨을 때의 기억을 공유해주실 수 있나요? 

선미: 제 두 번째 방문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첫 번째 방문은 탐색 목적이 더 강했고, 그래서 제 몸에서 빠져나가서 3인칭으로 관측하는 기분이 들었고, 마치 관광객과 같은 느낌이었죠.

팟캐스트: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된 기분이었나요?

선미: 네. 제가 서울에 있었고, 호스텔이었나, 호텔이었나, 창문이 없는 방을 빌렸어요. 시차로 인한 피로로 인해서 몸이 안 좋아졌고 이틀을 앓았죠. 고열로 앓으면서 간판, 차량, 소리, 냄새 등으로 고생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제가 지내던 지역에 있는 가게에 방문했는데 온갖 공예 재료가 잔뜩 쌓여 있었죠. 제가 그 시점에는 공예에 빠져 있어서 그것들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나요. 제가 종이 20장만 사고 싶다고 하자, 그 가게는 난색을 보였죠. 도매상이라 500장 단위로 판다고 했고, 그때야 제가 도매상에 걸어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른 곳은 천들로 가득한 창고형 도매상도 있었어요. 그걸 보고 매료되었죠. 제가 운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가 한국에 이미 친구가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만난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제 관광 가이드로 매일 저를 안내해줬죠. 자기 친구들에게도 소개를 해줬고 여러 한국 음식도 소개해줬습니다. 한국어도 잘 해서 저를 위해서 통역도 해줘서 제가 그곳에서 소통 문제로 고생하지는 않았죠. 

팟캐스트: 그때 시각적으로 어떤 면이 가장 깊게 인상에 남았죠? 서울은 시각적으로는 어떤 도시였나요? 

선미: 저는 디자인적으로 최소주의를 추구하는 디자이너였기 때문에 서울은 복잡하고 색이 너무 다양해서 이상하다고 느꼈죠. 하지만 동시에 서울은 아주 흥미로웠어요. 골목보다 새롭게 볼 것이 있고 탐험하고 싶은 곳이 있었습니다. 아주 많은 사진을 찍었고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어요. 그래도 서울에는 오랫동안 지낼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감각적으로 과다인 곳이었거든요. 시각만이 아니라, 청각적으로도 시끄러웠습니다.

팟캐스트: 독일의 미학과는 아주 다르죠?

선미: 네. 아주 달랐습니다.

팟캐스트: 독일은 정리된 미학을 선호하죠?

선미: 네. 도로는 깨끗하고, 질서와 제도가 잡혀 있고, 모든 것을 위한 제도가 존재하죠. 물론 한국의 지하철은 완벽하게 작동합니다. 절대 연착은 없죠. 서울에도 다양한 제도와 구조가 존재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혼돈도 같이 있어요.

팟캐스트: 첫 방문 때 서울이 아주 혼란스럽다고 느껴서 스트레스를 받으셨겠지만, 동시에 집에 돌아온 기분도 들었나요? 기억이 없이 처음으로 서울에 돌아왔는데도 편안한 기분이었나요?

선미: 네. 그러한 기분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러한 기분을 더 확실하게 느낀 지점은 제가 두 번째 방문했을 때였죠. 두 번째 방문 때는 카오미 씨도 만난 제 남자친구 케빈과 같이 갔습니다. 또 서울이 아니라 지방을 구경하고 다녔어요. 두 번째 여행에서는 다른 한국의 면모도 보고 싶었습니다. 거대 도시와 서구화된 한국이 아니라 시골과 전통적 한국도 보고 싶었어요. 그 경험의 일부로 절 체험도 진행했죠.

팟캐스트: 어디에서 했는지 기억나시나요?

선미: 경주에서 했던 것 같아요. 순두부도 먹고, 명상도 하고,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4일 정도 거기에서 지냈죠. 지역 에어BNB를 빌려서 지냈어요. 그 집 주인님은 치과 의사이셨는데 우리를 좋아하셨어요. 우리는 차도 없었고, 주변에 지역 행사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집주인님이 한국 음식점을 데리고 다녔어요. 진짜 한국 요리를 먹여주고 싶다고 매일 저녁에 다른 음식점을 데리고 다니셨죠. 삼계탕 백숙 집에도 데려다주셨는데 닭 한 마리를 통째로 가지고 와서 맨손으로 닭을 해체해 주더군요. 그리고 뼈를 가지고 가서 나중에는 그걸로 닭죽을 해줬죠. 아주 전통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소속감을 느꼈고 연결성을 느꼈어요. 그래서 두 번째 방문 때 더 깊은 소속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깊은 슬픔을 느꼈죠. 편안했지만 동시에 거기에 있으면서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 슬픔을 느낀 이유는 제가 잃어버렸지만 찾으려고 하는 문화가 있고 되찾는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생겼다고 생각해요. 최대한 한국 문화에 빠져들려고 했지만, 남들의 강요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항상 쉽지는 않았어요. 물론 쉬웠던 적도 있죠. 사람을 많이 만나지 않았지만 에어BNB 주인인 치과의사가 기억이 납니다. 제 이야기에 관해서 물어보았고,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밝히자 이야기가 멈췄죠. 그 의사가 알려고 하지 않는 느낌을 받았어요. 지금은 국제 입양과 국제 입양아에 대한 부끄러움이 한국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죠. 사람들이 저를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많은 사람과 접촉하지 않기도 했죠. 서울에서는 뿌리의 집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냈어요. 김 박사님과 이야기한 경험은 아주 좋았습니다. 그분과 3시간 정도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제 이야기와 제 여정에 관해서 이야기했던 것 자체가 좋은 경험이었죠. 

팟캐스트: 누마루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선미: 네. 누마루는 베를린에서 시작한 대화 만찬입니다. 다문화적 정체성의 중간성에 대해서 더 많은 사람을 모아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된 일이죠. 만찬으로 시작한 누마루는 현재 입양아를 위한 전자 공간으로 발전했습니다. 제가 다른 입양아들을 돕고 싶다는 제 천직을 찾았기 때문이죠. 현재 누마루는 깊은 교류하고, 용기를 가진 정신적 여정을 하고, 입양아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가상 플랫폼이자 인터넷 공간입니다. 전 무거운 상담 공간과는 다른 제가 필요로 했던 전체적이고 창조적인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다른 방식으로 깊이를 탐구하고 감정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좀 더 영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제 문제를 해결하고 균형 잡힌 삶을 찾고 싶었죠. 제 문제를 기회로 삼아 좀 더 성장하고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겪고 있는 다른 입양아들도 돕고 싶었고요. 다른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진심을 드러내며, 서로를 알고, 듣고, 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서로를 보게 된다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고, 서로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면 입양아의 정체성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동질성, 동정심, 연결이 필요하다고 보고, 남들을 공격하는 일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그게 누마루이죠. 더 알고 싶은 분들은 제 웹사이트인 Numaru.space에서 배우실 수 있고, 아니면 Sunmee@numaru.space로 이메일을 보내주셔도 됩니다. 아니면 제 인스타그램 계정인 numaru.truebelonging를 방문하셔도 좋아요. 여러분과의 교류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