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4, 에피소드 17: 순희 엥겔스토프

덴마크 영화 제작자이자 한국계 입양아인 순희 엥겔스토프 (38세), 본명 신순희 씨는 Adapted 팟캐스트에서 자신이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포 겟 미 낫 (물망초, Forget Me Not)”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영화는 여러 한국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아이를 입양 제도에 맡길지, 아니면 자신들이 키울지에 대한 선택을 놓고 고민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엥겔스토프 씨는 영화 말고도 유년기에 아프리카에서 백인 부모와 같이 생활했던 기억과 덴마크의 작은 마을에서 겪은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순희: 제 이름은 순희 엥겔스토프이고, 한국 이름은 신순희입니다. 현재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거주하고 있어요. 전 부산에서 1982년에 태어났고, 남광아동복지원에서 양육되다가 생후 4개월에 덴마크로 왔죠. (덴마크어 자기 소개) 

팟캐스트: 이런 이야기로 시작하긴 좀 그렇지만, 전에 우리 팟캐스트를 들으셨나요 순희씨? 

순희: 에피소드 몇 개는 들었죠. 

팟캐스트: 이 이야기들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셨죠?

순희: 다르지만 동시에 비슷하죠. 모든 이야기가 그랬습니다. 제 이야기가 이 팟캐스트에서 나온 이야기에서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어요. 세세한 이야기는 다르죠. 하지만 전체적으로 입양아들의 이야기는 비슷한 점이 많다고 느낍니다. 

순희: 저는 덴마크의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백인 사회에서 성장했죠. 제가 유일한 아시아인이었고, 제가 마을을 걷고 있다 보면 사람들이 제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싶어했어요. 도시보다는 마을에 가까운 작은 사회였고, 아시아인이 마을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특이한 일로 인식되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사람이 없어서 어렸을 때부터 외로웠던 기억이 나죠. 누구도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인식하고 저와 이야기할 수도 없었어요. 사실 지금도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일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을 떠나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지금도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안전한 곳이었죠.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코펜하겐으로 떠나야 했어요. 

팟캐스트: 마을 이름이 뭐죠?

순희: 마이아입니다. 제블린드 지역에 있는 피요르드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이죠. 커다란 흰색 교회가 있고, 조약돌로 된 길이 있고, 마을 중심에 큰 나무가 자라는 아주 오래된 마을이고, 아주 아름다운 동네입니다.

팟캐스트: 어렸을 때부터 그곳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지 않았나요? 아니면 맞지 않는다고 느꼈나요? 

순희: 언급하신 감정 둘 다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어요. 부모님이 절 입양하셨을 때는 코펜하겐 근교에서 사셨죠. 제가 3살 때 부모님이 저를 데리고 보츠와나에 있는 난민 캠프로 가셨습니다. 거기에서 3년간 살았고, 보츠와나에서도 전 맞아 들어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가 덴마크에 돌아왔을 때 제 정체성은 흑인에 가까웠죠. 어렸을 적에 많은 아프리카계 흑인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3년이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어요.

팟캐스트: 부모님 두 분이 선교사였나요?

순희: 아뇨. 기독교 관련은 아니었어요. 정치적 좌파의 봉사활동에 더 가까웠죠. 그 시절에는 아이를 가질 수 없거나 다른 나라를 돕고 싶다면, 타국에서 아이를 입양하는 행동이 진보적이라고 인식되었습니다. 그 시절의 국제입양은 그렇게 정치적 진보 입양이나 종교적 입양 두 가지로 나뉘었죠. 제 부모님은 정치적 진보파여서 국제입양을 하셨고요. 

팟캐스트: 구세주 관점에 대해서도 들어 보셨겠군요?

순희: 네. 종교적인 면모를 제외한 구세주 관점이었죠. 세계 인구 과잉을 막아야 한다, 세계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으니 도와줘야 한다, 그러한 인식이 있었어요. 

팟캐스트: 그러한 면모 때문에 부모님이 보츠와나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 하셨군요?

순희: 네. 그런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덴마크에서 돈을 받아서 활동하는 공식적인 직업이기도 했죠. 덴마크 정부의 지원을 받아 타국에 가서 자신의 재능을 통해 사람을 돕는 일이었어요. 제 아버지는 목수라 사람들에게 목공을 가르치셨고, 사람들이 목수로서 일할 수 있도록 설계도와 기술을 전수하셨습니다. 제 어머니는 사회 복지 공무원이었고요.

팟캐스트: 백인 부모를 가진 아시아계 3살 꼬마가 보츠와나에 가셨군요?

순희: 네. 그런 셈이죠. 

팟캐스트: 아주 신기한 조합이네요.

순희: 아주 특이한 경험이었어요. 가족 모두가 달에서 지구로 온 사람들처럼 주변 환경에 충격을 받았죠. 부모님이 저를 그분들의 아이로 받아들인 곳도 보츠와나였죠. 칼리하리 사막에서 부시족을 만났을 때가 생각이 나요. 부시족의 눈은 흑인중에서도 얇은 편이라 아시아계 눈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제가 부시족을 뚫어지게 보던 느낌이 나고 그 사람들도 저를 똑같이 바라봤죠. 제가 가진 최초의 기억 중 하나입니다.

팟캐스트: 어렸을 때 자기 스스로를 흑인과 구분했나요? 아니면 친구들과 똑같다고 생각했나요? 친구들이 흑인이었나요?

순희: 흑백혼혈과 흑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몇명은 백인이기도 했죠. 전 인종보다는 계급에 대해서 더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특권 계급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애들보다 더 장난감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고, 그걸 제외하고 형편이 훨씬 나았죠. 그 기억 자체가 꽤 고통스러운 기억입니다.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을 그 애들은 선택하지 못했으니까요. 제가 더 장난감이 더 많았고, 애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밖에 설명하지 못하겠습니다.

팟캐스트: 아이일 때는 장난감이나 옷으로 자기들의 차이점을 인식하죠. 친구들도 그런 인식을 했을 겁니다. 그러한 차이가 여러분의 관계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너무 어려서 인식을 못했나요?

순희: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적응한 뒤에는 덴마크에 돌아가서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사람들이 그리워서 덴마크로 돌아가고 싶어하긴 했지만 힘들었죠. 어렸을 때 친한 친구였던 호주에 사는 백인계 케냐인과 다시 연락이 닿았습니다. 이게 제 기억이라 애매하지만, 제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기억인데, 제가 장난감을 가지고 있어도 누구도 저와 같이 놀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보츠와나에 오니 제가 놀 아이들을 선택할 수 있었죠. 

팟캐스트: 어렸을 때부터 특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군요?

순희: 네. 

팟캐스트: 그때의 다른 기억들을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아주 특이한 어린 시절이라 궁금하네요.

순희: 이렇게 공식적으로 이야기해본 적도 없는 것 같아요. 친구들과 제 애인과 이야기했을 뿐이죠. 부모님에게 있어서는 아주 대단한 모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제가 어렸고 제 기억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부모님과는 다른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제 친구가 엉덩이를 맞았지만 전 맞지 않았습니다. 양육 방법에 있어서 문화적 차이를 느꼈어요. 제 부모님은 제 엉덩이를 때린 적이 없기 때문에 친구들이 그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꼈죠. 신발 안 신고 뛰어다니기도 했고, 애들과 같이 놀면서 토마토 캔을 깐 다음에 불에 직접 데워서 먹기도 했어요. 덴마크와는 다른 독특한 경험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집에서 부모님과 덴마크어로 말했겠군요?

순희: 네 모국어는 덴마크어지만 동시에 영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덴마크에 돌아왔을 때는 영어를 상당수 잊어버렸죠.

팟캐스트: 영어를 모국어처럼 쓴 이유가 친구들과 사용했기 때문인가요?

순희: 네. 보츠와나에서 친구들과 같이 영어를 썼어요.

팟캐스트: 친구들이 영어를 사용했군요?

순희: 애들 중 일부는 그랬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서로 놀 수 있었어요.

팟캐스트: 덴마크에 귀국하셨을 때 몇 살이셨죠?

순희: 여섯살이었어요. 춥고, 어두운데다가 항상 신발을 신어야 했고 보츠와나에 두고온 고양이들이 그리웠습니다. 부모님이 다른 직업을 구하셨고요. 사실 어렸을 때라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부모님이 덴마크의 최고 대도시인 코펜하겐에서 일자리를 새로 잡아 일했지만 행복하지 않으셨죠. 그래서 덴마크 시골을 돌아다니다가 작은 마을을 발견했고, 그 마을에 있는 집에 반했습니다. 정원도 딸려 있는 커다란 집이었죠. 사실 고양이를 키우는 3명 가족이 살기에는 너무 컸어요. 전화가 오면 집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부모님을 찾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부모님이 백인 위주의 작은 사회로 이주하고 싶어하셨나요? 

순희: 네. 부모님은 코펜하겐 근교에서 자라나셨죠. 그래서 그 지역으로 내려가서 좀 더 자연에 가까운 삶을 살고 싶어하셨어요. 부모님이 말씀 하시길, 환경을 바꾸고 좀 더 평온한 삶을 원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작은 마을로 이사했죠. 

팟캐스트: 어렸을 때의 정체성은 어떠셨나요? 자기 스스로를 덴마크 아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순희: 뭐가 일어나는지 정확히 몰랐지만 제가 이사한 지역에 최대한 맞아 들어가려고 노력해서 별로 관련된 생각은 하지 않았고 정체성에 대해서 논하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최대한 백인이 되려고 노력한거 같습니다. 적어도 20대 초반이 되기 전까지는 계속 노력했어요. 20대 초반에 처음으로 한국과 조우하고 나서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관점도 바뀌었어요.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백인의 정체성이 어느정도 섞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이 국제적인 경험이 있으셨죠. 인종 정치나 백인의 특권 같은 문제에 대해서 순희씨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나요?

순희: 아뇨. 우리는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요. 물론 나누려고 노력은 하긴 했죠. 아버지는 옛날에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최근 그런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대화를 `나누는 일 자체가 덴마크와 스칸다나비아 지역에서 어렵다고 봐요. 

팟캐스트: 인종 자체가 금기 취급 받는 주제이기 때문인가요?

순희: 금기인 주제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특정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러한 사고방식의 선의와 좋은 의도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면 공격적으로 반응하기도 하거든요. 확실히 입증 가능한 증거가 없이는 대화하기 어려운 주제입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이 성장 과정에서 순희 씨가 고생했다는 사실을 알았나요? 아니면 순희씨는 자라면서 문제를 겪지 않았나요? 예를 들면 애들이 다르게 대우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나요? 

순희: 확실히 대우 자체가 달랐다고 생각해요. 어떨 때는 더 긍정적으로 대우 받았을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더 부정적으로 대우받기도 했습니다. 항상 제가 다르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다른 점도 알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항상 저에게 다른 질문을 해오고 다르게 대우했죠. 항상 그런 차이점을 알면서 제 자신의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대화를 나눌 어른이나 선배가 없었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어디 출신인지, 어디 탄생지인지, 왜 친어머니가 입양을 맡겼는지 같은 비슷한 질문을 계속 받으셨겠군요?

순희: 네 그랬습니다. 아니면 진짜 엄마는 누구니? 진짜 부모님은 누구니? 이라는 질문을 했어요. 아니면 이누이트족 출신 그린란드인으로 착각했죠. 그래서 사람들에게 계속 저에 대한 설명을 해야 했습니다.

팟캐스트: 아주 지치는 일이죠. 안그런가요?

순희: 그렇습니다. 항상 그런 질문을 받으면 질문을 되돌려주지 않는 것 자체가 힘들죠. 취재를 하는 경험이 많다 보니 더 그렇기도 해요.

팟캐스트: 성장하면서 자신의 차이점으로 긍정적인 경험도 하셨는데, 그 예를 좀 들어주실 수 있나요?

순희: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관심 자체를 받는 일이 힘들었습니다. 유치원 선생님이나 1학년 선생님이 절 데리고 가서 무릎에 앉혀 주시고는 하셨죠. 하지만 다른 애들에게 해주지 않았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이상했던 일이었습니다. 약간 무섭기도 하네요. 그러니까 다른 애들과는 전혀 다른 관심을 받았죠. 하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아주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그냥 다른 사람들과 비슷해지고 싶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다 그러잖아요.

팟캐스트: 뭔가 특별하다는 느낌을 받으신 적이 있나요? 자신이 특출나다고 생각하신 적은?

순희: 네. 그렇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제가 노력해서 얻어낸 특별함이 아니었죠. 제 외모 때문에 얻어진 얕고, 이해가 가지 않는 특별함이었어요.

팟캐스트: 저도 자라면서 비슷한 기분이 들어서 순희 씨도 이런 기분을 느껴는지 묻고 싶네요. 자신이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나요?

순희: (웃음) 아뇨. 하지만 지금 와서는 확실히 그런 느낌이 드네요. 제 부모님이 저를 최대한 압박에서 보호해주시려고 노력하셨습니다. 물론 소외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죠. 그래서 저는 승마와 동물 키우기에 취미를 붙였어요. 제가 기분이 안좋거나 불안하면 동물과 같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동물들이 부정적인 감정을 흡수해줘서 돌아왔을 때는 기분이 많이 나아져 있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제가 가지고 있던 짐가방을 싸고는 했어요. 제 곰인형, 마실 것 같은 것을 넣고 휙 나가고는 했습니다. 물론 떠날 곳은 없긴 했지만, 안전한 마을이라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친구와 만나고는 했어요. 하지만 자연 속을 정처 없이 걷고는 했죠. 부모님이 심각하게 걱정하게 만들었어요. 

순희: 제가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어느 정도 예측은 할 수 있기는 해요. 그 때는 주변 상황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곳에 더이상 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 제 부모님이 여전히 절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어요. 하지만 정확히 말하라면 잘 모르겠네요.

팟캐스트: 지금 생각해보시면 왜 순희 씨가 그렇게 돌아다녔다고 생각하시나요?

순희: 그 마을에서 떠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그 마을에서 편안하지 았았을 수도 있죠. 다른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때도 매우 호기심이 많고 용감한 아이였어요. 

팟캐스트: 아기일 때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 본적이 있나요?

순희: 네. 제 부모님이 그런 쪽으로는 개방적이셨거든요. 제가 코펜하겐 공항에서 부모님에게 넘겨지고 나서 부모님이 제 방의 벽에 커다란 세계 지도를 거셨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프랑스, 그리고 덴마크로 점선을 그리셨어요. 부모님은 그 때부터 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기 시작하셨죠. 어머니는 절 처음 안으셨을 때 절 안고 집을 돌아다니면서 저에 대해서 아셨던 정보를 저에게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정보를 말해줘야 했을 때를 위한 좋은 예행 연습이었다고 생각해요. 어머니가 제 역사에 대해서 아는 모든 이야기를 해주려고 한 일이 기쁘죠.

팟캐스트: 처음 돌아가셨던 때가 언제죠?

순희: 2002년에 처음으로 돌아갔어요. 

팟캐스트: 나이가 어떻게 되셨지요?

순희: 20살이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에 돌아가신 이유가 있었나요? 친부모 조사를 하기 위해서 였나요, 아니면 한국 자체가 관심이 생겼었나요? 

순희: 부모님은 항상 가족이 같이 한국 여행을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보츠와나까지 갈 수 있었는데 왜 한국은 못가겠니? 이라는 인식이셨죠. 하지만 그때는 달에 가는 것만큼 이나 어려웠죠. 그래서 1년 정도 돈을 모았고 2002년 10월에 한국으로 가족 여행을 떠났어요. 제 부모님과 제가 한국으로 떠났죠. 홀트아동복지회를 방문하기 위해서 서울에 갔습니다. 부산에 있는 남광아동복지원도 방문했죠. 입양 부모와 입양아가 이러한 뿌리 찾기 여행과 친부모 조사를 같이 하는 일이 드문지는 몰라요. 제 부모님이 백인이라서 그런지 두 분 다 좋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한국 서울에서 걷고 있는데 차가 멈추더니 노인 분이 나와서 두분에게 사과를 주시고 다시 차를 타고 가시더군요. 두 분이 서울에 있다는 점 자체가 기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두분이 그렇게 좋게 대접 받는데 저는 거의 투명한 사람 취급인 것이 정말 신기했어요. 그냥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서 어머니가 절 찾을 수 없어서 놀라고는 했죠. 아주 이상한 일이긴 합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이 친부모 조사를 진행했죠. 남광아동복지원에 직접 방문했고, 제 부모님과 같이 방문해서 원장이 특별 취급을 해줬다고 생각해요. 특히 제 아버지의 존재감이 컸습니다.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일하는 통역가의 도움을 받아 남광아동복지원에서 보관하던 자료를 받았죠. 통역가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불안해 했습니다. 제 어머니가 사회 복지 분야에서 일하셔서 이러한 문제에서는 정답을 줄 때까지 사람을 압박하기 때문이죠. 

순희: 결과적으로 우리 가족은 더 많은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었어요. 남광복지원에서 친어머니의 이름을 받아서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홀트의 통역가가 며칠 뒤에 우리 가족에게 연락을 줬어요. 제 어머니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3명이었고, 3명에게 전부 연락을 했고, 그중 1명이 딸을 입양시킨 사실을 인정했지만, 절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제 친 아버지가 아닌 새로운 남자와 결혼해서 가족을 꾸렸고 저보다 5살 연하인 딸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이 제 친어머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큰 충격을 받았죠. 제가 이 조사를 위해서 준비가 되지도 않았는데 제가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나라가 있고, 이상한 질문을 하지 않고 그냥 저를 한국인으로 받아들여 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어요. 지금까지 친어머니를 단순한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으로 인식한 충격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으로 인식하자 한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걸 적용할 수 있었죠. 제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여성들이 있었고, 제 가족일 수도 있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아주 큰 충격이었죠. 친어머니 조사와 관련된 뉴스를 듣고 나니 그쪽에서 요금을 요구하더군요.

팟캐스트: 고아원에서 돈을 원했나요? 아니면 통역가가?

순희: 고아원이 돈을 원했죠.

팟캐스트: 좀 이상하네요. 

순희: 네 그랬어요. 그리고 분위기가 우리가 돈을 좀 더 내면 정보를 더 받을 수 있다는 뉘앙스였죠. 우리 부모님은 이러한 정보를 받았는데도 돈 한 푼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어머니에 대해서 아는 정보는 거의 없죠. 그 이후에도 조사를 진행했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어요. 1년 정도 시간을 들여서 한국에 얼마나 많은 신복순이 있는지 찾은 뒤에 편지를 썼습니다. 한국에 37명의 신복순 씨가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신복순 씨들이 사는 지역에 있는 경찰서들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렇게 해서 신복순 씨들에게 제 편지를 전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었죠. 그렇게 했는데도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신복순 씨 전부를 찾을 수도 없기도 했죠. 

팟캐스트: 남광아동복지원에서 그 3명중 누가 아이를 입양시킨 사람이었는지 확인시켜주었나요?

순희: 더이상 정보를 받을 수 없었어요.

팟캐스트: 돈을 더 넘겨주지 않는 이상 말이죠?

순희: 네. 아마 그랬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입양 부모님이 그 추가 요금 요구를 보고 아주 기분 나빠하셨죠. 

팟캐스트: 아주 충격적인 경험이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20살이고 친부모를 찾을 준비가 안되어 있는지 되어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찾지 못한다면 아주 큰 충격이겠죠. 어떤 답을 받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거부당했으니까요.

순희: 네 그렇습니다. 통역가의 사무실에서 울기 시작했죠. 통역가 선생이 그런 반응을 예상치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 계속 사과하더군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죠. 하지만 그 이후에 여행 동안 제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혼자서 서울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죠. 어쩌다 보니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던 다른 입양아들과 만났습니다. 덴마크 입양아도 있었어요. 다른 한국계 입양아와 이러한 이야기를 나눈 최초의 경험이었죠. 아주 큰 충격이었고, 제 삶에 있어서 위기였습니다. 제 부모님은 한국 전통 문화와 관련된 곳을 여행하려고 돌아다니셨고, 저는 따로 안지 며칠 안된 입양아 남자와 여행을 하다가 서울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제 첫 조사로 인해서 충격 받고, 마음에 상처를 입어서 이후 몇년 동안 고생했어요. 제가 코펜하겐으로 이사를 가야겠다고 부모님에게 간청했고, 그래서 제 어머니가 덴마크 한국계 입양아 협회에 가입하기 위한 입회비를 저를 위해서 대신 내주셨어요. 그 입양아 사회가 저를 도와주고 제 입양아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 이야기를 교환할 수 있었죠. 그리고 그 충격적인 경험이 저에게 계속 공포로 남지 않았던 이유가 그 입양아 사회안에서 활발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순희씨와 부모님의 한국 여행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게 되네요. 그분들을 계속 부모로 생각했는데 한국에서는 그분들이 눈에 띄고 순희 씨가 사회에 섞여 들어가셨겠죠.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그분들을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하셨나요?

순희: 네 그렇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동시에 제 부모님이 저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빠르게 깨달았습니다. 부모님이 도울 수 없고 제가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래서 부모님과 같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 자체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고통스러웠죠. 

팟캐스트: 아 이해가 되요. 그렇게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나서 차밭을 방문하거나 그런 관광 여행을 지속할 수는 없죠.

순희: 네 그렇죠. 아주 시끄러운 부산 자갈치시장 근처에 있는 호텔방이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침대에 앉아서 한국이 정말 대단한 나라라고 말했죠. 한국에서 만드는 물건들, 한국의 성장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침대에 누워서 한국이 정말로 끔찍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한국에 대해서 이렇게 긍정적이라서 오히려 화가 났죠. 저는 조사 결과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 한국에 대해서 긍정적일 수 없었습니다. 저는 한국에 화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한국을 좋아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죠. 아버지가 그렇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시기에 저도 긍정적인 반응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국에 돌아갈 때마다 한국을 다시 되돌려 받는 느낌입니다. 작은 발걸음을 내딛는 느낌이죠. 

-광고-

순희: 제가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화의 이름은 Forget Me Not(포겟 미 낫, 물망초) 입니다. 제주도에 있는 미혼모 시설 애서원에서 지내고 있는 3명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에요. 세명 다 임신했지만 결혼하지 않은 상태라는 문제를 겪고 있죠. 애서원에서 지내면서 출산을 하게 되고 아이를 계속 키워야 하는지, 아니면 입양 제도에 맡겨야 하는지 고민을 하게 되죠

-영화 일부-

순희: 그래서 2003년에, 2004년이었나 잘 기억나지 않지만 InKAS 모국 방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서울에 방문했어요.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실용적인 일을 하도록 돕기도 했죠. 그 방문 모임을 했었는데, 그 때 한국 여성들이 길에서 입양 기관들이 자신들의 아이를 훔쳐갔다고 시위하는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여성들이 누구고 왜 아이를 빼앗겼다고 시위하는지 궁금했어요. 우리의 모임과 그 시위를 연관 짓지 못했죠. 그 다음에 모국 방문 관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치 공장도 방문하고, 한복도 입고, 한지 제작도 참여했어요. 아주 좋았죠. 관광 마지막에는 우리 모두 관광버스에 탔는데, 여러 나라에서 온 입양아들이 모여 있었어요. 그리고 시골로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모두 어디로 가는지 몰랐어요. 그래서 시골에 있는 시설 앞에 멈췄죠. 시설 앞에 내리니 수녀들이 저희를 맞이해주더군요. 그리고 우리가 들어가니 미혼모를 위한 시설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미혼모들이 지내고 있는 시설이었는데 우리가 왜 여기에 방문했고, 우리가 거기에서 무슨 대화를 나눠야 할 지 몰랐죠. 하지만 미혼모들이 집단을 이루고 우리 입양아들이 집단을 이뤄서 서로를 보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처음으로 와서 불안한 성장한 입양아들이 미혼모 한국인들과 교류하고 있었죠. 우리가 정확히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통역가를 통해서 대화를 해야 했거든요. 하지만 우리가 떠날 때 만삭인 미혼모가 저에게 와서 “입양되어서 행복하셨나요?” 이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저는 어떤 말을 할지 몰랐죠. 그때 저는 예라고 답하긴 했지만, 제가 가진 입양 제도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전부 담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분이 저에게 그런 질문을 한 의도는 명백했죠. 그 때 제가 입양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  젊은 입양아들에게 그런 질문을 해야 하는  미혼모 시설에 살고 있는 미혼모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선택은 중요하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하고, 불가능하기도 한 선택이죠. 어떻게 호칭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게 계속 제 기억에 남았습니다. 

순희: 덴마크에 돌아와서 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했어요. 어떤 전공을 해서 어떻게 살지 고민했죠. 전 건축가가 되고 싶었지만, 실패했고 대신 사진 전공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사진 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아버지가 암에 걸려서 급격히 몸이 안 좋아지셨어요. 그래서 다큐멘터리 계획의 제 입양 부모님의 사진을 아주 많이 찍었죠. 하지만 단순히 사진으로는 부족하고,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을 영상으로 찍기 시작했죠. 그게 제가 만든 첫 영화가 되었어요. 아버지가 암 말기가 되었을 때 어머니가 아버지를 돌보셨습니다. 그 과정을 찍은 영상이 제 최초 영화가 되었고, 그 영화를 기반으로 영화 학교에 지원했고, 입학할 수 있게 됐죠. 그 첫 영화 촬영과 아버지의 사망, 상실, 입양 이야기의 충격이 제가 한국에 돌아가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습니다. 직접 찾을 방법도 없고, 어머니에게 연락할 방법도 없지만, 제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었죠. 그 상황에서 어머니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알고 싶었어요. 

팟캐스트: 포 겟 미 낫을 직접 보니 아주 훌륭한 다큐멘터리였습니다. 제가 느낀 바로는 순희 씨가 순희 씨의 친어머니를 좀 더 이해하고 답을 찾기 위해서 찍은 영화라고 느꼈는데, 실제로 그랬나요?

순희: 네. 제가 영화를 찍게 된 동기였습니다. 다른 여성의 상황을 통해서 많은 일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물론 제가 1982년에 태어났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그래도 제가 2012년부터 2017년까지 5년 동안 영화를 찍을 때 겪은 일들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 영화 촬영 자체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서 온갖 이야기를 알게 되고 미혼모들의 상태를 알게 된 계기가 되었죠. 아주 충격적인 상태를 알게 되었습니다. 전 긍정적인 미혼모의 이야기를 찍고 싶었어요. 한명을 찾아서 아이를 데리고 있기 위해서 싸워서 승리한 사람의 이야기를 찍고 싶었습니다. 촬영을 시작할 때 마다 제가 촬영하는 미혼모가 아이를 데리고 키워낼 것이라고 믿었어요. 

순희: 슬픔과 체념이 있죠. 제가 촬영한 여성들 대부분이 젊은 편이었기 때문에 청소년 기의 고통도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반발의 시기기도 해요. 그래서 자신들의 삶을 살거고, 남들이 하는 일을 하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지만 이들에 대한 지원이 너무 적죠. 그러한 지원 부족이 입양 제도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항상 입양이 선택지로 존재하고, 모두가 알고, 이러한 어려운 문제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이 제도에 엮인 사람들의 사고 방식에 아주 깊게 박혀 있었습니다. 저는 그걸 보고 입양을 그렇게 쉽게 맡길 수 있고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다면 좋지 않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이런 여성들을 만났을 때, 아주 어리지만 아이들을 돌보겠다는 의지가 강하고 계획도 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계획이 무너지고, 압박을 받게 되죠. 이 미혼모들이 아주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계속 싸워나가야 하는 일을 봐야 하는 것이 아주 슬프더군요. 

순희: 네.

팟캐스트: 슬픔이 존재하죠. 

순희: 네. 거기에 슬픔이 존재하고, 제가 만난 미혼모들 전부 아이들을 키우고 싶어했어요. 그게 제가 알게 된 사실중 가장 대단한 일이었죠.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소속감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제 어머니에 대한 믿음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 어머니도 비슷한 압박을 받고 선택지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팟캐스트: 5년간 한국에서 지내면서 이 여성들을 촬영한 경험이 어머니를 용서하게 도움을 줬나요? 그리고 어머니가 순희씨와 연락을 하지 않으려는 이유도 이해가 됐나요?

순희: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친어머니에 대해서 화가 난 적은 없었죠.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친어머니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화가 나있었어요. 제 성인 시절 대부분을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촬영하면서 보냈죠. 덴마크와 한국을 오가면서 지낼 수 있는 특권도 있었습니다. 친어머니와 저 사이에 강력한 연결이 존재하고, 친어머니의 기척을 제 안에서 느껴요. 젊은 어머니들이 감정적으로 자신을 끊어내는 모습을 봤고, 아이들이 감정적으로 끊어지는 광경을 봤습니다. 그런 충격적 광경을 제 앞에서 보니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어요. 하지만 아이와 어머니 둘 다에게 있어 심각한 손실을 가져다주는 광경을 보니 제 자신에 대한 용서와 자기애를 가질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제가 어른으로서 고생하거나 확신이 없으면 그러한 광경을 기억하고 그러한 고생과 불안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죠. 제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제 한국 가족에 가진 분노, 불안함, 슬픔을 내부화해서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을 압니다. 

팟캐스트: 그 임신한 미혼모와 나눈 입양되어서 행복하다는 대화가 순희 씨의 마음에 걸리지 않나요? 만약 그 대화를 오늘 나눴다면 다르게 대답하셨을 것 같나요?

순희: 만약 오늘 그 대화를 나눴다면 입양되어서 행복하다고 하다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불행하다고 하지도 않았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제가 좋게 대답했다고 생각하지 않죠. 제가 아무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전 어디에나 소속되어 있는 셈입니다. 전 한국에 계속 있을 수가 없어요. 아마 계속 한국에서 살면 미쳐버릴지도 모르죠. 현재 COVID-19 사태로 인해서 제가 여행을 다닐 수 없어서 답답하기도 합니다.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이나 다른 다양성을 가진 곳으로 갈 수 없다는 점이 슬프죠. 제가 덴마크에서 너무 오랫동안 있다 보니 정신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미래에 어떻게 바뀌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환경 재난도 있고 여러가지 문제가 있으니 말이죠. 하지만 제가 한국에 돌아가지 않는 삶은 생각할 수 없어요. 한국은 제 삶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부입니다. 

팟캐스트: 순희 씨가 찍은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상실과 슬픔에 대한 영화죠. 순희 씨가 괜찮으시다면, 순희 씨의 입양 아버지의 최후의 순간들을 찍었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순희: 제 입양 아버지와 저는 매우 친밀한 관계였어요. 제 입양 어머니와는 다른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부모로서의 욕구가 달랐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죠. 제가 아버지와 친밀했던 이유는 제 건축가로의 꿈을 아버지가 키워주셨고, 저에게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죠. 하지만 아버지와의 그 친밀한 관계를 소중히 여기기 시작한 것은 제가 어느 정도 성장한 뒤였습니다. 제 입양 어머니는 우리 가족에 있어서 닻이나 다름 없었고요. 아버지를 보내드리는 일 자체가 힘들었죠. 시간이 멈춘 것 같이 흐르지 않고, 소중한 가족을 죽기 기다리는 과정은… 말하기 어려운데, 진…

팟캐스트: 진공과 같나요?

순희: 네. 진공에서 기다리는 것과 같죠.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때 아버지의 영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와 같이 찍은 어렸을 적의 영상도 없고, 아버지의 목소리도 녹음되어 있지 않았죠. 절 위해서라도 그 영상과 소리를 기록해둬야 했어요. 제가 그렇게 영상과 녹음을 남겨둔 사실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보지는 않지만 제가 가서 가족의 일부를 기억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죠. 거기에 제가 외동딸이고, 친척들도 없어서 가족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남겼다는 점도 좋습니다. 

팟캐스트: 입양아라서 친부모를 아는 방법이 없으니 입양 부모가 사라지게 되기 전에 그분들의 기억을 보존하는 일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죠. 

순희: 네. 저에게 있어서 그러한 기억 보존은 사진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면서 아버지에 대해서 알아가고, 어머니가 아버지를 돌보는 일을 보고, 아버지가 어머니 곁에서 아름다우면서 존엄있게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세상에 대해 작별을 고하는 일,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악을 마지막으로 듣는 일 등 모든 일들이 귀중했어요. 

팟캐스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네요.

순희: 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본지 꽤 되었네요. 입양아가 가지는 소외감이 존재하죠. 전 제 친척들과 그렇게 친밀한 느낌이 들지 않아요. 친척들과 같이 자라지 않았죠. 거기에 친척들은 미국과 영국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 가족과 그 흔적을 기억할 마지막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어떻게 자기 관리를 하시죠? 심각한 주제들을 많이 다루시니 중요한 것 같은데 말이죠.

순희: 아 네. 포 겟 미 낫 편집을 하다가 정신적으로 붕괴점에 도달했었어요. 360 시간이 넘는 여성들의 한국어 영상이 있었고, 평범한 한국어도 아니라 제주도 사투리로 대화하는 영상이었습니다. 편집하기 어려운 영상이었죠. 그리고 그 영상 전체 번역을 의뢰해야 했어요. 그뒤 몇년 간 계속 다큐멘터리를 편집하면서 제 직업을 위한 편집도 진행했습니다. 제가 전혀 모르는 타인을 전문적인 이유 때문에 제 작업실에 초대해서 제 최악의 트라우마를 공유하는 일은 아주 어려웠어요. 방안에서 한국에서 좋은 경험과 나쁜 경험을 계속 일하면서 느껴야 하는 일도 힘들었죠. 그 계획을 계속 진행하면서 저에게 계속 충격을 주는 셈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겪는 충격보다 더 힘들었을 겁니다. 물론 대부분의 입양아들이 항상 느끼는 감정이지만, 저는 그 감정안으로 들어가야 이해하고 그 기반으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여성의 이야기, 그들의 삶, 아이들의 이야기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꼈어요. 미혼모들이 자신의 삶, 마음, 우정에 저를 받아들여 주었고 그들의 삶과 문제를 묘사해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을 느꼈습니다. 물론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익명으로 나와서 그들의 개인 정보를 보호하고 있어요. 어쨌든 그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면서 건강 관리 하는 일 자체가 어려웠죠. 계속 배우면서 여전히 흥미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건강을 헤쳐가면서 까지 일을 하려고 하는 버릇을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러한 성향도 입양과 관련된 문제가 아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미혼모들의 이야기가 순희 씨를 정신적으로 치료하는데 도움을 주었나요?

순희: 개인적으로 제가 미혼모들의 삶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이 제 삶 자체와 제가 어떻게 이런 삶을 살게 됐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저에게 모성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죠. 여러 여성들이 같이 서로를 도우면서 아이를 낳고, 감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지지해주는 환경이었어요. 제가 보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광경이었죠. 제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한국 아이들에게 이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을 알게 되고 배우면서 그 일이 자연스럽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았죠. 

팟캐스트: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거리를 유지하셨죠? 부모가 아이를 계속 키우면 의절하겠다고 하는 일이나, 지원해주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계속 촬영을 하셨죠? 그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았나요?

순희: 네. 거기에서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면서 일하는 법을 배워야 했죠. 여러 덴마크 카메라맨들이 저와 함께 일하기 위해서 왔지만 대부분 단기로 일했어요. 제주도에서 길게 지내면서 일할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죠. 제주도에서 사회학자를 만났고 제 촬영을 도와주었죠. 포 겟 미 낫 촬영시에 제 조감독으로 일해주었습니다. 전 한국어를 못해서 부끄럽지만, 요즘은 제 자신을 용서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모르는 채로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안다고 해도 어느정도 세세한 부분은 모르고 분위기만 알았죠. 제 촬영을 도와준 신지가 가끔 촬영 도중에 번역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혼자 촬영했어요. 사람이 언어를 몰라도 주변 상황만 보고 뭐가 일어나는지 알 수 있는지 경험했죠. 촬영하면 할수록 주변을 이해하지 못하는 촬영 상황에 적응해나가기 시작했죠. 그리고 언어를 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게 되었고요. 저 자신을 도구로 사용해서 그 여성들의 상황을 잡아내려고 했습니다. 상세한 사항은 이해할수 없었지만 대체적인 변화와 문제는 이해할 수 있었고, 큰 변화도 알 수 있었으니까요. 분위기가 바뀌거나, 사람들이 대화를 멈추거나, 화를 내거나 하는 사실로 알 수 있었습니다. 편집 과정에서 비로소 사람들의 대화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었죠. 

팟캐스트: 순희 씨의 말은, 촬영 도중에 모든 정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신다는 건가요?

순희: 네.

팟캐스트: 너무 감정적으로 힘들고 어려울테니까요?

순희: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감독으로의 책임을 지고 선을 긋는 게 어려웠나요? 감독이니 너무 개입하면 안된다는 선을 지켜야 하니까요.

순희: 전 언론인 교육을 받지 않았어요. 조금 다른 방법으로 교육을 받았고 제 영화도 그런 영향을 받았습니다. 관찰자적 다큐멘터리이죠. 전 이 다큐멘터리에서 큰 영향을 끼치고, 또 관객에게 제가 이 여성들을 관찰하고 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벽에 붙은 파리처럼 관찰할 수 가 없죠. 객관적으로 이러한 영상들을 볼 수 없습니다. 눈에 확 띄이게 마련이고 모두가 인식하게 되죠. 그러한 인식을 받아들이고 더 진실되게 그 영상을 담아내고 싶었어요. 제가 노력해도 전문가적 선을 그을 수 없었을 겁니다. 감정적으로 불가능했을테니까요. 아마 다시 똑같은 다큐멘터리는 못 찍을 거 같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힘을 이 다큐멘터리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죠. 물론 지금도 입양 관련된 다른 작업을 하고 있긴 하지만 다시 그러한 다큐멘터리는 만들수 없을거에요. 

팟캐스트: 아마 로맨틱 코미디 같은 가벼운 영화를 찍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순희: 네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항상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직업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아이를 가지기 전까지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이 다큐멘터리는 아주 대단해요. 심오하면서도 입양아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봅니다. 아주 감동적이기도 하고요. 한국인들도 꼭 봐야 할 다큐멘터리라고 봅니다. 물론 한국에서 보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들었어요. 그 상황에 변화는 생겼나요?

순희: 큰 전개 변화가 있었어요. 한국에서의 영화 배급 계약을 맺었습니다. 한국에서 예산도 받았고, 현재 한국 공동 제작자들도 있죠. 2013년에 다큐멘터리 필름 페스티벌에서 공모상을 받았을 때부터 한국의 지원을 받고 싶었고, 한국에서 상영될 수 있다고 믿었죠. 한국에서 영화관 배급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2021년 5월말이나 6월으로 예상하고 있어요. 100% 확실한 것은 아니죠. 현재 제가 원하는 일은 한국의 미혼 부모/미혼모 관련 기관들과 국제 입양 사회의 대표들과 같이 일해서 한국의 미혼 부모 문제를 지원하는 일입니다. 아마 이번 5월에 한국에 가서 2주간 격리된 뒤 이 영화를 홍보하려고 해요. 

팟캐스트: 한국에서 어떤 반응을 얻기 원하시죠? 어떤 영향을 주기를 원하시죠?

순희: 사회에 여성에게 체계적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주면 좋겠습니다. 한국에서 미혼모가 아이를 돌보고 싶어하면, 국내 입양하는 부부보다 더 적은 지원을 받게 되니까요. 한국이 미혼모들을 더 지원해야 한다고 보죠.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해서 좀 더 개방적으로 다가가야 하고, 남성들이 책임을 저야 하고, 아이의 출생지에 대해서 거짓말할 수 없도록 출생 신고 절차도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누가 아이를 놓고 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베이비 박스 제도도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11번째로 부유한 강국이니 자국의 시민들을 지원해주고, 아이들을 돌봐줘야 해요. 일본보다 더 낮은 출산율을 가지고 있으니 이 모든 일이 전부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봅니다. 여성과 가족이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지원해 줘야 해요.

팟캐스트: 아주 좋은 인터뷰였습니다. 물론 순희 씨의 삶 극히 일부만 알게 됐지만, 오늘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팟캐스트에 참여해주셔서 감사를 표하고 싶어요.

순희: 제가 더 감사하죠. 좋은 대화였어요.

팟캐스트: 순희씨, 사람들이 어떻게 순희 씨를 찾고 영화를 볼 수 있죠?

순희: 제 계정과 영화와 위한 페이스 북 계정이 따로 있습니다. 페이스북에서 친구 신청을 하시거나 페이스북 페이지에 좋아요를 눌러 주시기만 해도 좋아요. 영화 페이스북 페이지에 한국 개봉과 발 맞춰 많은 업데이트가 있을 예정이라 입양아 사회와 그 과정을 공유하고 싶죠. 또 북미 배급사 그래스호퍼 필름과도 배급 계약을 맺었어요. 북미 배급은 그 회사가 담당하게 되겠죠. 영화를 보고 싶으시다면 Vimeo에 올라와 있으니 거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 학교에 지원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