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4, 에피소드 16: 티모시 밴더버그

티모시 밴더버그 (30세)씨는 시드니에서 사는 한국계 호주인 입양아다. 자라나면서 밴더버그 씨는 지역 한국 입양아 캠프와 일하게 되었으며 계속 한국에 관해 관심을 가져왔다. 한국과 한국인들과 많은 교류를 해온 밴더버그 씨는 그 경험을 통해 정체성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되었다. 

티모시: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티모시 밴더버그입니다. 30세이고 한국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자라났습니다. 호주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제 가족과 같이 생활하면서 자랐어요. 어머니 아버지 둘 다 호주인이지만, 아버지는 네덜란드계 이민자 가문 출신이시고, 어머니는 오래된 영국 이민자 가문 출신이죠. 우리 가족에는 입양아 출신인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고, 어머니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여동생 하나, 그리고 호주 내부에서 입양된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습니다. 자라면서 저와 입양아 형제자매들이 동네에서 거의 유일한 아시아계였어요. 물론 동네에 우리가 아는 한국계 입양아나 콜롬비아계 입양아를 입양한 가족들이 있었고 그 가족들도 비슷한 이야기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가족의 어려움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상투적이긴 하지만 우리를 백인이라고 생각해서 초등학교 때도 힘들었어요. 물론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긴 했지만 얼마나 다른 정체성을 가졌는지 몰랐죠. 호주에서는 황인이면서 백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바나나라고 하고 미국에서는 트윙키라고 하더군요. 물론 저는 아시아계가 전혀 노랗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서구 호주 가정에서 서구식으로 자라서 정신이 서구화되어 있었어요. 다행히 우리 가족은 샛별 한글 학교와 인연이 있었죠. 샛별 한글 학교는 한국 캠프 겸 학교이고,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는 한국 여성과 그 가족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입양아들이 다른 입양아들과 교류하고 놀 기회를 제공하고 1년에 한 번 샛별 캠프를 개최하죠. 공원에 놀러 가서 며칠 동안 캠핑하고 한국 요리를 해 먹고 한국 문화 활동을 하고 수영이나 크리켓과 같은 운동도 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 문화 캠프에서 크리켓을 했군요?

티모시: 네. 그래서 호주/한국 문화 캠프에 더 가까웠죠. 많은 한국계 호주 입양아들이 호주에서 인기 많은 운동을 했어요. 최대한 주변에 섞여 들어가고 맞아 들어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게 사람의 본능인 것 같아요. 인종에 상관없이 주변에 맞아 들어가려고 하죠.

팟캐스트: 성장 과정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흥미로운 가족 구성이던데 입양아 출신 형제자매들도 한국 출신이었나요?

티모시: 네. 제 입양된 남동생과 여동생들은 한국에서 입양됐습니다. 물론 한국의 다른 가족들로부터 입양됐죠. 우리 전부 한국계 호주 입양아긴 해도 우리가 전부 다르게 생겨서 거리감이 있었어요. 우리 성장기 때도 너희들은 전부 다른 가족 출신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았지만 백인 가족에서 자라나는 아시아계라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죠. 같은 인종이나 같은 민족 사이에서의 입양이라면 가족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고, 외모 차이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아서 부모가 입양에 대해서 말해야 할 시점을 결정해야 합니다. 너무 이른 시점에 말하면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너무 나중에 이야기하면 부모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죠. 

팟캐스트: 부모님이 인종 문제에 대해서 별로 언급을 안 하셨죠?

티모시: 부모님이 인종 문제를 인식하시긴 하셨지만, 대응을 다르게 하셨죠. 우리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려 주시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셨지만, 동시에 어떤 일도 강제하지 않으셨습니다. 캠프에 가서 너의 문화를 배우자!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만약에 가고 싶지 않다면 보내지 않으셨고, 대신 기회를 제공하셨죠. 저는 캠프 참여가 마음에 들었어요. 제 나이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아서 서로 친해졌습니다. 애들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고, 다시 만난다고 해도 어디에서 만났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즐거웠어요. 제 형제자매들도 같은 캠프에 참여했죠. 그 애들이 캠프를 즐겼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 남동생 같은 경우는 좀 더 내향적이에요. 반사회적인 정도는 아니고 개인의 시간을 즐기는 편이에요. 나이 차이가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제 남동생보다 5살 더 나이가 많고, 제 여동생은 남동생과 3살 차이가 나죠. 그래서 제 여동생과 8살 차이가 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직접 낳은 여동생과 저는 13살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가장 어린 호주에서 입양된 동생과는 26세 차이가 나죠. 입양된 형제들과 나이 차이가 심하지만, 그럭저럭 넘어갈 정도입니다. 하지만 제 부모님의 친자식은 이번에 17살이 되었죠. 나이 차이가 커서 가까운 관계는 아니지만, 가족으로는 적당히 가깝다고 생각해요. 호주에서 입양된 형제자매들은 입양 과정 자체를 다르게 받아들였다고 생각합니다. 제 남동생과 입양 이야기를 안 하고 가족 이야기를 하기는 어렵긴 하지만, 제가 남동생을 지지해주고 남동생이 저를 지지해준다는 사실을 남동생이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티모시: 자라면서 샛별 캠프에 자주 참여했습니다. 한국 음식을 어른들과 자주 요리했죠. 거기 캠프에 참여하던 사람들 대부분 어린 애들이었어요. 나이 많은 한국계 입양아는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청소년기가 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고 뛰쳐나가게 되니까요.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자기만의 친구 집단을 만들어 부모님의 관리에서 벗어나니 숫자가 줄었다고도 생각합니다. 부모님의 관리 여부로 사람이 달라지기 마련이죠. 그건 입양아에게도 해당한다고 봅니다. 부모님이 있어서 입양 관련 불평을 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일은 나쁘지 않지만, 입양 가족 관계의 일부입니다. 부모님을 미워하거나 싫어하지는 않지만, 부모님은 입양아가 아니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마련이죠. 

티모시: 50년대부터 한국 입양아를 받아온 미국보다 호주 한국 입양아 사회는 젊은 편입니다. 나이 많은 입양아들 자체가 드물죠. 가장 나이가 많은 입양아들은 40세에서 45세 정도로 추측됩니다. 끽해야 80년대부터죠. 물론 그 이전에 입양된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호주의 한국계 입양 자체가 한국전쟁 때의 입양 이후로 시작된 지라 그때의 입양아들, 전쟁 입양아들은 미국에서 호주로 이주한 입양아들이 아니라면 거의 없어요. 미국으로의 입양은 호주로의 입양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입양은 입양아 숫자가 많은 편이죠. 반면에 호주의 한국인 입양아는 3600명 정도밖에 안 돼요. 이러한 숫자 차이가 다른 분위기를 만듭니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미네소타와 같이 입양아가 많은 지역이 많죠. 그래서 다른 입양아를 알 가능성이 꽤 커요. 아니면 입양아 친구와 같이 자랐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호주의 경우에는 혼자서 자라거나 아니면 한 명 정도의 입양아 가족과 같이 자라는 일이 많았죠. 이런 성장 배경에서 정체성과 연대감을 만드는 방법은 캠프에 참여하거나 입양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호주의 입양아 사회 자체는 과거보다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호주는 미국보다는 작지만 거대한 나라이죠. 차이점은 호주는 해안가에 몰려 살고, 미국은 미국 전체에 흩어져 산다는 점입니다. 호주 서부에서 동부로 여행하는 일은 힘들고, 시간도 차로 7일이나 걸리죠. 호주는 아주 거대한 나라고, 입양아들이 특정 지역에 모여 있지 않고 호주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호주의 어떤 입양아들은 다른 입양아들을 30세가 넘은 뒤에 만난 예도 있죠.

팟캐스트: 많은 호주 입양아들이 티모시 씨가 설명한 대로 시골 마을에 흩어져서 성장했다고 생각하시나요?

티모시: 제가 생각하기로는 시골 마을에서 성장한 입양아들도 많지만 도시 교외의 백인 위주 동네에서도 입양아들이 많이 자랐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자라난 지역인 시드니의 예를 들어보죠. 시드니 교외에는 이민자들이 많이 정착한 지역들이 있었어요. 스트랫필드는 한국인과 인도인 인구가 많은 지역이고, 한국인들이 많이 정착한 지역이라 한국계 이민자들이 많이 몰려들었죠. 과거에는 다른 곳이 코리아타운이었지만 스트랫필드로 코리아 타운이 옮겨졌고 그 지역은 지금 베트남/차이나타운으로 바뀌었습니다. 캐버 매너에 가보면 베트남 이민자들이 많아요. 또한 다른 지역을 보면,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유럽계 이민자들이 많습니다. 다른 지역들마다 주류가 되는 인종들이 다르죠. 백인 부모들은 그런 지역에서 입양아들을 키웠습니다.

팟캐스트: 백인 위주의 지역인 교외에서 자라났다는 말이군요?

티모시: 네. 보통 부모의 고향이 그런 곳이거나, 아니라고 해도 적응하기 쉬운 곳이니까요. 하지만 그분들이 아시아계가 주류인 지역에서 살려고 하면 문화적, 인종적 교육이 부족하다 보니 적응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죠. 교육 과정에서 빠진 중요한 부분이 다른 문화의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과서나, 책이나, 대중매체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문화를 전부 이해하려면 직접 살아봐야 하죠. 그래서 관계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한국, 인도, 중국에서 입양하는 부모들이 입양아들을 인종적으로 다양한 지역에서 키우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아이들을 인종적으로 다양한 곳에서 키우려고 노력하고 있나요? 아니면 여전히 백인 부모들이 백인 지역에서 다른 인종인 입양아들을 키우는 추세가 지속하고 있나요? 

티모시: 많은 부모가 여전히 백인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그 부모들의 고향이 그 지역과 가깝고, 그러한 면이 중시되기 마련이니까요. 요즘은 다인종 간 입양아가 가족에 가지고 오는 인종 정체성이 주목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 성장 시기보다는 많이 나아졌죠. 주거 환경은 여러 가지 요소에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주거 비용이나 통근 문제도 있죠. 직장에서 10분에서 15분 정도 거리라면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요. 

티모시: 최근 입양아 가족의 부모들과 이야기를 해본 결과 인종적으로 다양한 지역으로 이사하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아이들에게 문화적 경험을 제공하려고 하더군요. 문화와 정체성을 좀 더 중시하는 가정교육을 하려고 하고, 한국 음식점에 데리고 가고, 한국 문화를 경험하게 하는 외부 경험도 늘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한국인들이 많은 지역으로 이사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문화를 가르치려고 하고 있죠. 그리고 한국인들이 많은 지역으로 이사한다고 해도 입양아로서 한국인들과 교류하기 어렵기 마련입니다. 이건 한국에서 살았을 때도 느꼈던 감정인데, 한국인들과 닮았고,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가지고 있지 않죠. 그래서 호주에서 한국인들이 많은 지역에서 산다고 해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구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정체성 발달에 또 다른 문제를 끼칠 수 있죠. 한국인들을 만나도 한국인들이 왜 한국어를 못하는지 묻고, 한국인들처럼 보여도 한국인처럼 활동하지 않으니, 소외되는 상황을 입양아에게 또 다른 정체성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고, 한국어를 배우고, 문화를 배우니 그러한 문제가 줄어들 수 있지만, 기본적인 버릇이나 행동은 가족과 부모님에게 영향을 받으니 문제가 될 수 있죠. 

팟캐스트: 티모시 씨는 다인종 간 입양을 한 양부모가 백인 위주 지역에서 사는 일 자체는 문제로 여기시지 않는군요?

티모시: 사람들이 어디에서 사는지를 문제 삼지 않고, 부모가 한국 문화의 중요성을 알려주는지에 대한 여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죠. 문화를 알려주는 일은 어렵다고 봅니다. 백인 위주 지역이나 아시아계가 없는 지역에서 살게 된다면 입양아는 자라고 있는 지역의 사회적 분위기에 맞아 들어가기 위해서 백인 아이의 정체성을 선택하려고 하겠죠. 사실 시대의 차이점도 있다고 봐요. 제가 학교에 다녔을 때와 지금은 다양성이 훨씬 넓어졌다는 점에서 아주 큰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자란 지역에서 자란 비슷한 나잇대의 입양아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학교나 지역에서 유일한 아시아계이거나, 입양아였다고 해요. 많아도 2명 정도밖에 없었고, 학교 모두가 아시아계 2명을 서로 연관시켰기 때문에 오히려 친하게 지내지 않으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하죠. 모두가 아시아계끼리 친할 것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오히려 멀어진 셈이에요. 하지만 현재 학교에 다니는 입양아들과 이야기를 하면 학교에 30명 정도 아시아계가 있거나 25명, 아니면 학교 대부분이 아시아계라고 언급을 합니다. 이민으로 인해서 사회가 바뀌었어요.

팟캐스트: 부모님이 왜 아이들을 입양하려고 하셨는지 아시나요? 그리고 특이한 가족의 일부가 된 기분은 어땠나요?

티모시: 어머니와 아버지가 입양하시게 된 이유는 어머니가 불임이셨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노력하셨지만, 아이를 가지실 수 없었고, 그래도 아이를 키우려고 하셨기에 입양을 선택하셨죠. 첫 선택지인 스리랑카에서 아이를 입양하려고 했지만, 당시 스리랑카 입양 체계 자체가 심각하게 부패해 아이 입양 제도가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고, 인신매매 문제도 있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입양하면 아이를 빼앗기거나 그 부정부패의 일부가 될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었죠. 부모님은 그러한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으셨고, 다음으로 주어진 선택지인 콜롬비아와 대한민국을 두고 고민하셨어요. 그때 콜롬비아 입양 제도는 정식적인 입양 체계가 구성되어 있지 않았죠. 반면에 한국 입양 제도는 어느 정도 체계가 잡혀 있어서 한국을 선택했습니다. 

티모시: 호주에서 해외, 정확히는 한국 입양을 하려면 가족이 아이를 키울 자격이 있는지 조사를 받죠. 그 조사 과정만 2년이 걸리고 한국을 2번 방문해야 합니다. 아기를 받기 전에 한번 방문해서 서류 절차를 거치고 조사를 받죠. 2번째에는 아이를 직접 데리러 한국에 와야 합니다. 대리로 아이를 받으러 오는 일은 불가하고 가족들이 직접 한국에 와서 아이를 데리고 가야 해요. 의학적 문제나 비행이 불가능해서 데리러 가지 못한다면 예외가 있는지는 모릅니다. 아마 상황마다 다르게 대응하겠죠. 하지만 대부분 입양 가족들이 한국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서 한국을 2번 방문해야 합니다. 절차 일부로 아이가 어떤 나라 출신인지 알기 위해서 부모가 한국을 방문하는 일이 권장되죠. 전 이런 절차가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모르지만, 부모가 한국을 방문하는 절차 자체가 좋다고 생각해요. 아이의 출신 국가를 아예 방문할 의사가 없다면, 그 나라로부터 입양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티모시 씨의 부모님이 티모시 씨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 한국을 방문하셨나요?

티모시: 네. 그렇게 하셔야 했죠. 하지만 동시에 그 두 분이 한국을 방문하려고 하셨어요. 두 분이 저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 한국에 방문했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전 제가 5살 때 제 남동생을 데리러 갈 때 부모님과 동행했죠. 제가 그 여행에서 기억나는 일은 몇 가지 없습니다. 그때 한국을 가기 위해서는 일본을 거쳐야 했어요. 일본인지 한국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일본으로 추측되는 곳에서 일본 사람들이 저를 보고 관심을 보였습니다. 보통 일본이나 한국에서 백인 부부가 황인 아이를 데리고 있다면 귀엽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입양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그 제도 자체가 무시당하는 편이에요. 보통 입양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 입양 사례는 잘 모릅니다. 어쨌든 한국 여행 뒤, 호주 집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남동생을 안게 되었죠. 그리고 안고 나서 몇 분 만에 제 새 옷에 토를 했습니다. 요즘도 농담하죠. 네가 나에게 토해서 처음에는 네가 싫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제가 그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놀랐습니다.

팟캐스트: 제가 티모시 씨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으로 돌아가면 그렇게 특이한 가족 안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티모시: 전 제가 특이한 가족의 일부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자라나면서 가족이 특이하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죠. 우리 가족이 다르다는 사실 자체는 인식했지만, 우리 가족이 특이하니 어쩌지? 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전 제가 평범하다고 생각했고 제가 자라면서 생긴 문제가 제 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이러한 문제가 내 입양과 다인종 간 입양 가족, 그리고 제 주거지 때문이었다고 인식했죠. 그때는 제가 괴롭힘당하는 이유가 제가 다르고 안경을 써서 괴롭힘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 간 입양으로 인해서 생기는 차이점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죠. 저 자신을 아시아계나 한국인으로 인식하지 않았어요. 물론 그 두 가지 정체성을 알고 있었지만, 그 정체성을 저라고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티모시: 지금은 절 괴롭히던 아이들이 절 괴롭히던 이유 대부분 그 아이들의 집안 문제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죠. 초등학교 때 제 친구의 친구가 저를 괴롭히고 했습니다. 5학년 때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 제 안전 도우미로 선정되었어요. 이 학생들이 저를 괴롭힘 안 당하도록 도와줘야 했죠. 하지만 그 둘도 제대로 일을 하지 않고 오히려 절 괴롭히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그 친구의 친구가 저를 위해서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저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또 자신의 가정 문제 때문에 저에게 화풀이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사람을 괴롭히는 이유는 괴롭히는 사람의 개인 가정사 문제이거나 피해자가 가해자들과 다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죠. 아시아인에 대한 교육이 학교나 집에서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왜 달랐는지 몰랐고 그게 폭력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 와서는 문화적 정체성과 인종적 정체성에 대한 지식, 다양성에 대한 교육을 학교에서 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랄 때 백인 위주였던 것과 많이 달라졌죠. 

팟캐스트: 자랄 때 괴롭힘을 심하게 당하셨군요. 인종차별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하시나요?

티모시: 칭총 차이나맨이라고 불리거나, 눈을 찢거나, 그런 괴롭힘을 주로 당했죠. 애들이 의도적으로 인종차별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아주 복잡한 주제지만 제 생각으로는 그 친구들이 아시아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애들이 아시아에 대해서 알 방법은 영화와 대중매체의 묘사였죠. 그 시대에 영화에 아시아계가 나왔다면 공부 벌레, 악인, 아니면 무술가이고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다양성이 늘어나면서 아시아계가 멋있고 훌륭하다는 묘사도 늘어났어요. 하지만 그때 영화에서 나온 아시아계의 묘사는 대부분 부정적이었죠. 대부분은 단순히 배경에 나오는 엑스트라이거나 스쿨 오브 락에 나온 것처럼 공부 벌레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매력적인 사람으로 묘사되지 않았고, 사람처럼 묘사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제가 성장할 때는 아시아계 여자애들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금발 푸른 눈인 백인 여자애들을 더 좋아했어요. 제가 백인 친구들과 같이 자랐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주변 환경에 맞춰 흥미도 생기는 법이죠. 전 아시아인들이 못생겼다고 생각했어요. 아시아인들을 잘 보지 못했고, 본다고 해도 제가 본 영화와 매체로 인해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죠. 데이트 상대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에 학교에 아시아인들도 얼마 없어서 매력적으로 느낄 시간도 없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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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시: 전 한국에 8번 방문했습니다. 첫 방문은 제가 5살이었을 때고 잘 기억나지 않아요. 5살이었고 부모님과 같이 다녔기에 한 두 가지 일만 기억나죠. 15살 때 운이 좋아서 프로그램의 일원로 한국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평범한 15살보다는 성숙했지만 동시에 경험을 받아들이기에는 어렸다고 생각하죠. 제 어머니와 같이 한국에 방문했고, 짧은 여행이었어요. 나이를 충분히 먹어서 여러 가지를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에게 아주 중요한 경험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할 나이였어요. 그래도 아주 좋은 여행이었죠. 15살인 저에게 있어서는 한국에 돌아간다는 생각보다는 우와! 외국에 놀러 가는 휴가에 제가 돈을 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더 중요했습니다. 제가 태어난 나라를 방문하는 중요한 일이었지만 피부로 느낄 수가 없었죠. 또 다른 15살 입양아가 같이 여행을 했던 기억이 나요. 프로그램 구성 자체도 아주 좋았죠. 한국계 입양아를 데리고 있는 가족이 한국 여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선택지였습니다. 어린 한국계 입양아들이 한국 경험을 하게 하는 일은 좋지만, 아이들이 얼마나 받아들일지 모르고, 어떤 영향을 받을지 모르죠. 어쨌든 그 프로그램에 참여한 나이가 많은 입양아는 저를 포함해 2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입양아와 제 차이점은 전 제가 동의해서 여행에 따라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어머니가 가지 않겠냐고 물었고 제가 동의했죠. 하지만 다른 입양아는 지금 생각해보니 호텔에 남아 있으려고 했고 화를 자주 냈습니다. 한국에 오고 싶지 않았는데 강제로 왔던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가 그 애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알려주려고 노력을 했지만, 그 애는 준비가 안 됐었다고 생각해요. 

티모시: 그 여행을 시작한 뒤부터 제 정체성 탐색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물론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데는 5년 정도 걸렸어요. 프로그램 5년 뒤에 프로그램을 준비한 사람의 딸이 저에게 연락을 해왔죠. 보통 부모님이 그러한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직접 이야기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저에게 연락해서 장학금 제도가 있는 데 관심이 있냐고 했죠. 전 세계 한국계 입양아를 대상으로 80명의 입양아를 한국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였고, 한국계 호주 입양아들을 위해서는 5명에서 10명 정도의 자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장학금 제도를 사용해서 한국에서 공부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이야기를 잠시 2004년으로 되돌려 보죠. 한국에 가기 전에 우리 가족의 친구분이 한국인들을 호주에 2주에서 3주 정도 생활하게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적응하도록 돕는 일을 도와줄 수 있냐고 저에게 묻더군요. 그 일이 참 좋았던 게 강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가족 친구분이 한국인이 이렇게 많이 올 텐데, 와서 도와주면 한국 음식도 먹고 교류도 할 수 있다고 권유하셨어요. 아르바이트보다는 자원봉사에 가까운 일이었고, 제 펜팔 친구도 일하다가 만났어요. 처음은 편지로 시작했다가 다음은 이메일로 바뀌었죠. 몇 달간 서로 연락을 하다가 제가 2005년 9월에 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언제 한국에 가는지 이메일로 써서 보냈죠. 친구의 아버지가 대구에서 제가 지내던 곳인 강원도 설악산까지 그 친구를 운전해줬습니다. 그 친구가 도착했을 때 밤 11시쯤 됐죠. 한국에서 처음으로 친구와 만나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친구가 저에게 한국산 자명종을 선물로 줬어요.

팟캐스트: 자명종을 묘사해주실 수 있나요?

티모시: 불도그 모양인데 알람을 맞추면 일어나지 않으면 문다는 노래를 한국어로 부르는 자명종이죠.

팟캐스트: 오 멋있네요.

티모시: 아주 좋은 자명종이었죠. 부모님은 싫어하셨습니다. 우리 집이 L자 모양이라 한쪽에는 제 방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부모님의 방이었는데 자명종이 부모님을 깨우지만 정작 저는 깨우지 않았거든요. 

티모시: 건전지 수명이 아주 오래가서 조금 무서웠던 것 같아요. 9년 뒤에 가서야 건전지 수명을 다 됐죠. 다시 돌아가서, 그 애가 7시간이 걸려서 저를 만나러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놀랐습니다. 중간 지점에서 만날 수도 있었겠지만, 제가 밖으로 나갈 수 없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때가 주중이기도 했고 교환학생이었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잠시 정리를 하자면, 호주에서 만난 한국 친구와 만난 것이 어머니와 한국을 방문한 뒤였나요?

티모시: 그렇죠.

팟캐스트: 그리고 7시간 동안 친구가 밤길을 달려와서 티모시 씨를 만나러 왔군요. 

티모시: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티모시 씨가 꽤 좋은 친구였나 보군요?

티모시: 네. 펜팔 자체가 흥미로운 경험이었죠. 1년 정도 편지를 나누다 그 친구가 호주에 놀러 왔어요. 최초로 한국인과 가진 깊이 있는 교류였죠. 다른 교류들도 의미가 없지는 않았지만, 한국인과 우정을 쌓은 첫 경험이었습니다. 거기에 서구 경험이 있지만, 한국 출신인 친구여서 더욱더 귀중한 경험이었죠. 한국에 사는 사람 중 일부는 외국에 관해서 관심이 없어요. 여행할 돈이 없고 다른 문화 경험할 여유가 없다는 사람도 있고, 영어를 배우려고 학 관심도 있지만,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에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죠. 한국을 떠나서 여행도 해보고 싶고 다른 나라에서도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쨌든 그러한 모험심이 있는 친구와 고전적인 방식으로 편지로 연락하면서 우정을 쌓아서 좋았습니다. 나중에는 이메일로 쓰긴 했죠. 2005년 가족 여행 때는 펜팔 친구가 절 만나러 호스트 가족이 살던 곳으로 오기도 했습니다. 우리 가족과 호스트 가족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우리가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 유일하게 서로 연락을 계속 주고받은 가족이었죠. 대부분 가족은 연락이 끊겼거든요. 제 고향인 한국에서 혼자 지내지 않으면서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사람들과 지내고, 그러면서도 제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우리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에 비중을 두지 않았죠. 만약에 우리가 호스트 가족과 그냥 만났다면, 제가 한국인인데 한국어를 말하지 못해서 이상하게 여겼겠죠. 하지만 프로그램 일부로 만났기 때문에 우리 상황을 알고 있었고, 우리가 적응하도록 도와줄 수 있었어요. 여행을 갔을 때 순천에 있는 호스트 가족과 같이 지냈습니다. 그 가족의 아들과 같이 합기도 수업을 받았어요. 어렸을 때 당수를 배운 적이 있어서 금방 적응했죠. 물론 같이 지낸 시간은 하루 정도였습니다. 하룻밤 동안 거기에서 지내고 아침 일찍 떠나는 일정이었지만, 그 뒤로도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어요. 그 가족의 아버지는 수학 선생님이었고, 어머니는 영어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소통하기 편했고, 가족들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티모시: 2010년에 80명의 다른 입양아들과 같이 한국 장학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그때는 19살 때였죠. 이 장학 프로그램 지도자도 19살이었어요. 그 친구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학교 축제가 있는데도 술을 못 마시게 해야 했으니까요. 결국, 프로그램과 학생들이 협상해서 술은 마실 수 있지만 너무 마셔서 프로그램에 지장이 가거나 사고를 치면 프로그램에서 쫓아내기로 했죠. 딱 좋은 결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술 마시지 않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니까요. 전 세계에서 모인 80명의 입양아가 프로그램에 참여했죠. 다양한 입양아들을 만났습니다. 80명이 넘는 사람들이라 전부 기억하지 못하지만, 친구가 된 사람들은 기억하죠. 우리가 입양아라서 좀 더 친구가 되기 쉬웠다고 생각합니다. 입양아 사회의 입양아들 일부가 우리는 입양아니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전 그 사고방식에 동의하지 않아요. 입양아라고 해서 서로 친구가 되지는 않습니다. 한국계 입양아들은 한국인이면서 입양아라는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이지만, 서로 사람이기 때문에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친구가 되어야 하지는 않죠. 물론 입양아들끼리 친밀감을 가질 수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아주 친한 친구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단순한 지인 관계여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서로 알아가다가, 서로 마음이 맞으면 친구가 되죠. 호주 입양아들이 좀 더 그런 쪽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고 지내는 지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혼에 초대할 정도로 깊은 관계를 쉽게 맺지는 않아요. 소통해야 할 때는 소통하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삶이 있고, 관계가 있습니다. 친구는 그러한 친밀한 관계에서 탄생하기 마련이죠. 

티모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을 때 제가 태어난 병원에 방문했어요. 재건축을 위해서 문을 닫은 상태였습니다. 다음에는 동방사회복지회에 가서 입양 서류 조사를 진행했죠. 제 친구가 한국어와 영어를 둘 다 잘해서 번역이 필요하면 부탁하라고 했어요. 저는 친구에게 사실대로 번역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가끔 번역가나 통역가가 내용을 너무 순화시키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단순히 사실을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죠. 사람들이 이렇게 내용을 순화하는 이유를 알지만, 직접 사실을 이야기해야 할 때 못하는 예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15살 때 제 위탁 가정 아버지를 만났어요. 그분이 저를 기억하셨고 제 위탁 가정 어머니에 관해 이야기를 하셨죠. 우리가 만나기 몇 달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위탁 가정 아버지가 저희를 만나러 오고 저를 기억했다는 사실이 대단했죠. 그리고 아들들도 저를 기억하고 있다고 했어요. 그때 저는 위탁 가정 아버지가 저에게 어떤 관계인지 알고 있었지만, 반응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때 제가 위탁 가정 아버지에게 들은 제 배경 이야기는 친어머니가 미혼모였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이사했고, 어머니와 맺어질 수 없어서 저를 입양에 맡겼다는 이야기였죠. 다음에 들었을 때는 여행의 실수였다는 이야기였고, 그다음에는 하룻밤의 불장난으로 제가 태어났다고 했지만, 마지막으로 들었을 때는 강간 문제로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전부 아주 다른 이야기이죠. 첫 이야기는 사랑했지만 맺어질 수 없었고, 두 번째는 실수이기 했지만, 사회적으로 문제 되는 이야기였지만, 마지막 이야기는 정말로 달랐습니다. 사랑했지만 맺어질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서 강간으로 넘어갈 수 있다니 문제가 심각했죠.

티모시: 그래서 사람들이 번역해주는 제 배경 이야기에 대해서 믿음을 잃었고, 제도 자체에 믿음을 잃었습니다. 직역할 용기가 없는지, 아니면 입양 서류에 나와 있는 대로 번역하지 않고 입양아들에게 좀 더 편안한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서 의역을 하는지 알 수가 없죠.

팟캐스트: 어떨 때는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는 이야기군요? 

티모시: 제가 네 가지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됐는데 넷 다 다른 이야기라면 이상할 수밖에 없죠. 대부분 입양아는 친어머니를 찾아요. 친아버지를 찾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입양아 사회에서 친 아버지들은 그렇게 좋은 평가를 못 받으니까요.

팟캐스트: 사회 복지사에게 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야기가 달랐는지 물어봤나요? 

티모시: 사회 복지사에게 질문하지 않았지만 아마 해야 했겠죠. 5번째로 한국에 돌아갔던 때는 2009년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돈을 내야 했지만 정말로 알고 싶었어요. 제 친구와 같이 여행을 했는데 이 친구는 회의주의자라 거짓말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듣는다면 저에게 말해줄 수 있었죠. 입양아들과 동방사회복지회에 대한 조사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절대 복지회를 믿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와요. 물론 제가 그게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관점도 압니다. 입양아들이 입양기관을 안 믿고 자기만의 사실을 믿으려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번역 자체가 어렵죠. 의미를 어떻게 완벽하게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있을까요? 번역 중에 뜻 중 일부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2019년에 제 친구와 같이 갔을 때 방에 못 들어가게 하더라고요. 이상했죠. 보통 가족은 들여보내기 마련인데 친구의 남편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2010년에 제가 최종 조사를 하기 위해서 방문했을 때는 제 친구가 같이 들어올 수 있었어요. 그들이 말하기를 2005년에는 제 친어머니와 연락이 닿았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어머니가 모든 정보를 부정하고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15년이나 지났으니 이해가 되긴 했죠.

티모시: 하지만 2010년에도 다시 조사했는데, 2016년에야 2005년에 어머니가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2010년에도 어머니가 연락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저에게 했지만, 복지회에서 2005년에 이미 연락하지 말라고 화를 냈다는 이야기를 저에게 말해주지 않았죠. 그걸 듣고 나니 화가 났습니다. 어머니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제가 입양기관에 방문해서 이 편지를 보내주거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 달라고 부탁했으니까요. 하지만 2005년에 입양기관이 어머니에게 연락했을 때 화를 냈고 연락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저에게 알려주지 않았으니 그런 일이 일어났죠. 2005년에 어머니가 연락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2010년 조사를 하지 않고 다른 접근 방식을 취했을 겁니다. 입양기관은 입양아에게 사건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보만 알려줘요. 아니면 꼭 알려줘야 하는 정보만 가르쳐주죠. 직접 하는 질문만 대답해줍니다. 입양기관들이 사업으로 활동하는지, 아니면 입양아의 안위를 위해서 움직이는지 알 수 없어요. 입양기관들과 입양아들 사이에 깊은 골이 존재하죠. 제 서류 조사, 제 입양 서류, 제 한국 부모의 이름, 그분들의 출생지, 형제자매, 그리고 다른 정보를 원하는데 한국 제도가 개인정보에 더 비중을 두게 되어서 정보 대부분을 검열합니다. 성은 알려주지만 이름 자체는 검열하죠. 그래서 새로운 서류 양식이 생겼고, 전 복지회에 한국 서류를 한글로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번역된 서류가 아니라 원본을 달라고 요청했죠. 그럼 제가 번역을 할 수 있는 친구에게 가져갈 수 있고 어떻게 번역되는지 원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요. 번역 자체에 복잡한 관계성이 있는데 많은 사람이 그걸 망각한다고 봅니다. 직역이 있고 의역이 있죠. 두 번역 방식은 차이점이 크다고 봐요. 제가 한국 서류가 있으면 제가 한국어를 배워서 그걸 직접 읽을 수 있겠죠. 친구나 다른 사람과 같이 번역해서 진짜 사실에 가깝게 정보를 얻어낼 수도 있습니다. 현재 기관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믿음이 가지 않아요.

팟캐스트: 현재는 이 모든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시죠?

티모시: 조사 절차는 대부분 끝마친 상황입니다. 유전적 조사도 생각해보고 있고요. 한국에 2년간 살면서 문화적 정체성을 많이 구축했죠. 아주 힘들었죠. 생각해보니 그 한국 경험에 대해서 집중해야 했네요. 

팟캐스트: 한국에 언제부터 언제까지 사셨죠? 

티모시: 2013년에서 2015년까지 한국에서 살았죠. 작은 시골 마을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살았어요. 그 생활이 제 정체성 구축에 큰 도움을 줬습니다. 미국인이건 호주인이건 많은 한국계 이민자들이 한국에 가서 자기 정체성을 찾죠. 이민자들은 한국인이지만 외국에서 자라서 집에서는 한국어를 하지만 밖에서는 외국어를 합니다. 입양아들과 비슷하지만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요. 한국에서의 첫 6달은 아주 힘들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다른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서 마음에 안 드는 일을 말하면 제가 한국 방식은 이렇다고 한국을 위해서 변명하려고 했죠. 하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노동과 관련해서 큰 문화적 차이가 있었어요. 미국과 호주의 노동 윤리는 한국의 노동 윤리와 아주 다릅니다. 한국 특유의 계급 체계에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그들에게 이득이 되면 저를 한국인으로 취급하지만, 이득이 되지 않으면 절 한국인으로 취급하지 않았죠. 스포츠의 예를 들면 두 개의 팀이 있고 능력이 비슷하다면 더 오랫동안 경기를 해온 팀을 선택해 응원하겠죠. 더 많은 경험이 있으니 그 선택 자체는 나쁘지 않아요. 그래서 선생 일할 때 비슷하게 대우받아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1년 일한 선생보다 2년 일한 선생을 더 대우해 주는 것이 맞죠. 한국 문화라고 하길래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1년 더 지나서 똑같은 상황에 놓였죠.

티모시: 제가 2년 있었고, 저보다 2살 어린 후임은 1년만 있었는데 후임을 더 좋게 대우해 주더군요. 제가 왜 그렇게 되느냐고 묻자 한국 문화라고 하더군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입양아들이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차별이 존재했죠. 한국 내부에도 이러한 차별이 존재했습니다. 순수 한국인들과 한국계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고, 한국인이라고 인정받지 못하죠. 한국에서 2년간 교육자로 일하면서 첫 6개월은 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었고 제가 좀 더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한국 정체성을 무시했으니 더 채워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때는 제가 절반은 한국인, 절반은 호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2년이 끝나고 나니 저는 한국인이면서 동시에 호주인이고 그게 제 정체성임을 깨달았죠. 한국인의 정체성은 퍼센티지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한국 문화를 배울 수는 있겠지만 호주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완벽하게 한국에서 자란 한국인들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을 따라 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한국인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티모시: 이 문제를 제가 받아들이면서 정리할 때, 다른 친구가 축구에 비교해서 이걸 설명했죠. 저에게 한국과 호주가 월드컵 경기를 치른다면 누굴 응원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 말에 저는 둘 다 응원하겠다고 말했죠. 둘 다 내가 사랑하는 국가이니 누가 이기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답했죠. 전 한국인이자 호주인이니, 누가 이기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죽고 사는 문제라면 어떤 나라를 응원하겠냐고 물었죠. 전 제가 호주에서 자라났으니 호주를 응원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렇게 문답을 주고받으니 제가 얼마나 한국인인지, 얼마나 호주인인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 두 가지 정체성이 저 자신을 만들고, 한국 정체성과 호주 정체성을 사용해서 저 자신을 규정하죠. 전 40%, 50%, 한국 문화를 얼마나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항상 정체성이 숫자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자라난 사람이죠. 두 가지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도 괜찮아요. 전 제가 한국계 호주인보다는 호주계 한국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티모시 씨, 사람들이 SNS로 티모시 씨를 구독하거나 찾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죠? 

티모시: 페이스북에 Tim Kim이라는 계정이 있어요. 한국 이름인 김천엽이 계정에 붙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