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4, 에피소드 14: 요나스 구리시

Audio available on Monday, Feb. 15, 2021 at 7 am EST.

요나스 구리시(34세)는 출생 3개월 뒤 한국에서 노르웨이로 입양된 입양아다. 요나스 씨는 그의 입양에 대해서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부모와 한국계 입양아인 누나와 자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최근 요나스 씨는 유전자를 사용해서 생물학적 혈육을 찾으려고 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시도에 대해서 두려움도 가지고 있다. 

요나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요나스 구리시라고 합니다. 전 현재 34세이고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살고 있죠. 노르웨이 IT 상담사 기업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어요. 제가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노르웨이 오슬로로 왔습니다. 제 한국 이름은 최달림이죠.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제대로 발음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노르웨이어 자기소개-

팟캐스트: 구리시라는 성이 프랑스계인가요?

요나스: 구리시라는 성은 노르웨이계 성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르웨이 이름인 구리크에서 비롯된 성이죠. 그리고 이게 18세기 후반에 제 고조할아버지가 이 이름을 독일화해서 구리시로 바꾸셨습니다. 그 시기에는 노르웨이식 이름을 독일 이름으로 바꾸는 일이 유행했다고 들었어요. 그 시기에는 독일이 거대한 산업 제국으로 성장했고, 노르웨이의 중요 무역 상대국이었습니다. 석유가 나기 전이라 노르웨이는 작은 어업국에 불과했죠. 제가 공부한 내용에 따르면 독일식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사회적 계급 상승을 노리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 독일식의 이름을 가진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봤는데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오래된 노르웨이식 이름을 독일식 이름으로 바꿨다고 했습니다.

팟캐스트: 생후 3개월 만에 입양되었다고 하셨죠. 한국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시는가요?

요나스: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한국에 방문해서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려고 했죠. 제가 아는 일은 제가 병원에서 태어났고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입양되기로 결정되었다는 겁니다. 병원에서 제 친어머니와 헤어진 뒤, 위탁 가정에서 노르웨이 입양을 준비했고 노르웨이에 왔다는 사실을 알았죠. 제가 21살이 될 때까지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첫 한국 방문은 대단한 경험이었죠. 제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입양 기관에 가서 제 서류를 확인했습니다. 그 기관에서 입양아들에 대한 서류를 보관해두고 있었는데, 대부분 한국어로 되어 있었고, 그래서 저에게 번역해준 내용을 제외하고는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기관에서는 어머니의 이름이 서류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해줬고, 제 배경 이야기는 제 노르웨이 서류에 적혀 있던 이야기와 똑같았죠. 젊은 미혼모였고, 경제적으로 저를 키우기 어려운 상태였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제가 정보를 알고 난 뒤, 어머니를 찾고 싶었는데도 저에게 어머니의 이름을 제공해주지 않았죠. 그 당시에는 어머니를 찾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머니의 현재 상황을 알 수 없고, 어머니가 새롭게 가족을 만들었거나, 저의 탄생이 비밀 수도 있으니 어머니를 위해서 꽤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죠. 하지만 저는 그냥 어머니를 찾아서 저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묻고 싶었을 뿐이고, 어머니가 저를 걱정했다면, 저는 괜찮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잘 자라고 좋은 삶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죠. 

요나스: 하지만 어머니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더 깊게 찾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현재로서 제 한국 뿌리에 대해서 아는 정보는 이게 다입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입양 기관이 어머니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군요?

요나스: 네 그렇습니다. 자료에 기록되어 있지만, 비밀로 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정보를 더 알고 싶다면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가서 서류를 읽고 번역해줄 사람을 구해서 가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저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저에게 번역해서 제공해준 정보는 아주 적었거든요. 

팟캐스트: 요나스 씨는 그러한 정보 제공 부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알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요나스: 좋은 질문이네요. 적어도 제가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문화적으로 어머니가 미혼모로 아이를 가지고 입양에 맡겼다는 사실이 큰 문제라는 사실을 알죠. 그래서 제가 어머니를 갑작스럽게 찾아가서 혼란스럽게 하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요. 어머니에 대한 정보를 알고는 싶지만 그런 문제 때문에 걱정스럽습니다. 

팟캐스트: 어머니의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입양 기관에서 어머니에게 연락을 안 했다면, 요나스 씨의 어머니가 어떻게 반응할지 아무도 모르지 않나요? 

요나스: 그렇죠.

팟캐스트: 그래서 어머니의 반응이 어떨지도 모르는데 입양 기관이 어머니를 당신으로부터 지키고 있다니 상당히 부당하다고 느껴지네요. 어머니가 반응하지 않았는데 어머니의 나쁜 반응을 가정하고 있지 않나요?

요나스: 그렇죠. 입양 기관의 예측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거기에 제 연락처를 남겨두고 왔어요. 어머니가 입양 기관을 찾아가서 제가 어머니를 찾으러 왔었는지 확인한다면 어머니가 저를 찾을 수 있도록 말이죠. 하지만 제가 입양 기관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이야기들에 대해서 들은 바에 따르면 어머니가 이미 저를 찾아서 입양 기관에 방문했을지도 모르지만, 어머니에게 저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러한 문제로 인해서 어두운 역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노르웨이에 투위라 포 스콜더라는 이름의 조상에 대해서 조사하는 TV 프로그램이 있어요. 호스트와 그 휘하의 팀이 게스트로 나온 사람들의 친척을 찾아서 다시 만나게 해주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리고 그 쇼에서 홀트 아동복지회를 방문했는데, 그 쇼에서 나온 여성이 폴더를 잡고 도망쳐 나왔죠. 제가 받은 비슷한 정보 통제를 받아서 화가 났던 모양이에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서류에 적힌 정보가 우리 정보기 때문에 불법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저는 폴더를 가지고 도망치지는 않았죠.

팟캐스트: 입양아들이 이 문제 관련해서 권리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네요.

요나스: 네 그렇습니다. 저도 그 사실을 이해했어요. 전 한국에 두 번 방문했죠. 첫 번째 방문 때도, 두 번째 방문 때도 많은 한국계 입양아들을 알게 됐습니다. 뿌리의 집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면서 프랑스, 미국, 덴마크 등에서 온 입양아들의 이야기들을 들었어요. 그리고 국제입양에 따른 수많은 입양아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제가 그곳에서 알게 된 많은 입양아는 한국에 다시 방문했습니다. 그중 일부는 한국에 정착했어요. 전 다른 나라에서 자랐는데 한국으로 이주하는 입양아들을 보고 놀랐죠. 저에게 노르웨이는 제 고향이니까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한국에 다시 돌아가서 자신의 뿌리를 찾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니 다른 사람들의 입양 경험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입양되었다 해도 한국과의 연결이 훨씬 더 강력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죠.

요나스: 한국을 방문했을 때 특별한 감정을 느꼈어요. 물론 저는 백지 이론에 동의하는 바가 있습니다. 전 생후 3개월 때 한국을 떠나 노르웨이로 와서 자랐기 때문에 제가 배운 것을 알고, 한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동시에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항상 알고 있었죠. 그 사실이 문제는 아니었지만, 소속감의 문제를 가지고 왔어요. 자신이 어디에 소속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 제가 입양 부모님과 입양아 누나와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제가 그곳에 빠르게 소속감을 느끼게 된 것이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한국 말고도 다른 국가에 여행을 간 적도 있지만, 한국의 거리를 걸으면서 저와 닮은 사람들을 보는 경험은 해보지 못했죠. 

요나스: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 사이를 걷다 보면 그 사람들 사이에 더 쉽게 섞여 들어갈 수 있죠. 제가 그냥 걸으면서 사람들 사이에 녹아 들어가는 경험 자체가 아주 흥미로웠어요. 한국을 돌아다니다 얼마 안 있어 서양적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을 보면 여행자구나! 이라고 구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죠. 아주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한국을 방문하고 있는 방문객이죠. 전 한국 여권이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제가 한국 출신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죠

팟캐스트: 한국에 방문하지 않으셨는데도 한국이 아주 편안하다는 사실이 대단하지 않나요? 

요나스: 네 그렇습니다. 제가 찾고 있던 단어가 바로 편안함이에요. 한국에 방문해서 편안함을 느꼈어요. 

팟캐스트: 한국인들이 요나스 씨를 어떻게 받아들였죠?

요나스: 대부분은 저에게 한국어로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최대한 예의 바르게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고 대답했죠. 그리고 대부분은 사람들이 중국인이냐고 물어봤어요. 아니라고 대답하고 입양아라고 답했습니다. 제가 한국어로 입양아라는 단어를 배워서 대답할 수 있었죠. 그걸 들으면 사람 대부분이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그게 제가 한국에서 받았던 대부분의 반응이었습니다. 제가 실제로 느낀 것과는 정반대였죠. 저는 입양되어서 딱히 나쁜 점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저에게 동정할 이유가 없었지요.

팟캐스트: 동정받을 이유가 없다는 거군요?

요나스: 네 그렇습니다. 불운하다는 듯이 저를 보더군요. 하지만 제가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그러한 관점도 이해했죠. 제가 만난 다른 입양아들은 입양과 관련해서 그렇게 운이 좋지 않거나, 아니면 그렇게 운이 좋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입양아들에 대해서 그렇게 인식하는 이유도 알았죠. 하지만 저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요나스 씨, 자라면서 친어머니가 요나스 씨를 태어나자마자 입양 제도에 맡겼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셨죠?

요나스: 네

팟캐스트: 그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정리하셨나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나요? 아니면 어머니에게 동감하셨나요? 그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셨죠?

요나스: 어머니가 저를 입양시킨 일을 최대한 합리화하려고 했죠. 어머니는 절 돌볼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전 아이가 없으니 아이를 입양시켜야 할 정도의 상황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제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제 부모님은 숨기지 않았고 항상 저에게 이야기를 해주셨죠. 어머니가 경제적으로 절 기를 수 없어 입양 제도에 맡겼고, 그래서 입양 부모님이 저를 받아 키우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어요. 노르웨이에서 잘 받아준 입양 어머니는 불임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저와 제 누나를 그 두 분을 위한 선물이나 다름없었다고 이야기하시고는 했어요. 그래서 노르웨이에서 항상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제 친어머니의 선택을 합리적이었다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서야 감정적으로 얼마나 힘든 선택이었는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얼마나 힘들었을까 예상하기도 힘들죠. 

팟캐스트: 한국에 대해서 한 가지 더 묻고 싶은데, 노르웨이 음식은 한국 음식과 꽤 다르죠? 노르웨이 음식이 좀 더 밋밋한데 한국 음식은 더 맵지요. 그래서 한국 음식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나요? 

요나스: 처음으로 말하자면, 노르웨이 음식은 꽤 국제적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전통적인 노르웨이 음식들은 특별한 때에만 먹죠. 그래서 매일 먹는 음식은 이탈리아 요리, 중국 요리, 베트남 요리를 포함한 다양한 음식들입니다. 

팟캐스트: 노르웨이인들이 연어를 매일 먹는다는 이야기는 선입견인가요?

요나스: 네. 선입견이에요. 전 국제적인 식단을 먹고 자랐습니다. 부모님이 자랐을 때는 노르웨이 전통 음식을 먹고 자라셨겠죠. 그 시절 노르웨이는 국제화가 덜 되어 있었고 요리 문화도 덜 퍼져 있었어요. 제 아버지는 어른이 되어서야 피자를 맛보셨습니다. 한국 요리 같은 경우에는 제가 자라면서 몇 번 먹어 본 적은 있죠. 왜냐하면, 입양 가족을 위한 여름 캠프에 참여했거든요. 그리고 그 여름 캠프에서 한국 요리를 대접하고는 했죠. 저에게는 좀 이상했습니다. 그런 종류의 향신료가 들어간 요리를 먹는 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제가 나이를 먹어서 사춘기 후반부에 접어들자 한국 요리를 먹는데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는 다양한 한국 음식점을 돌아다녔죠. 한국 친구들이 다양한 한국 음식을 먹여줬어요. 지난 2-3년 동안 한국 음식이 노르웨이에서 대중적인 음식 중 하나가 됐죠. 그전에는 동아시아 음식이라면 중국 음식이 대세였고, 그 중국 음식들도 노르웨이식으로 변한 중국 음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많은 일본 음식점과 한국 음식점이 늘어났죠. 그래서 현재의 노르웨이에서는 외식으로 한국 음식을 먹기가 편해졌어요.

팟캐스트: 한국에서 한국 음식을 먹을 때 단순히 한국 음식을 즐겼나요? 아니면 한국에서 자랐다면 먹었을, 그리고 엄마가 먹던 음식이라서 좀 더 깊은 연결을 느꼈나요?

요나스: 그런 생각을 했죠. 제가 한국에서 자랐다면 매일 먹었을 수도 있는 음식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 있어서 문제를 느끼지는 않았어요. 저는 음식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단순히 한국 음식만이 아니라 다양한 음식을 즐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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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스: 전 노르웨이 동부, 오슬로와 같은 지역의 작은 해안 소도시인 샌더피오드에서 자라났어요. 샌더피오드는 15000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소도시이죠. 제가 자라났을 때는 40000명 정도가 살고 있었어요. 느긋한 생활을 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라나면 주변에서 사는 또래 아이들을 알게 되죠. 다른 학교에 친구들이 골고루 분포해 있게 됩니다. 전부 같은 학교에 다니지는 않으니까요. 친구들과 같이 축구와 핸드볼, 테니스를 했죠. 그리고 태권도는 아니었지만 어렸을 때 무술도 배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의 기억 대부분은 스포츠 활동으로 가득했고 그 모두를 즐겼어요.

팟캐스트: 한국인이라서 다르게 취급되었던 경험은 있나요? 

요나스: 괴롭힘은 당하지 않았어요. 적어도 심하지는 않았죠. 물론 눈에 띄긴 했습니다. 특히 초등학교 때는 제가 유일하게 아시아계 출신 아이였죠. 하지만 전체적으로 사랑이 넘치는 환경이었어요. 모두 서로에게 친절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싸우면서 크고 서로에게 악의를 가질 수 있긴 하지만, 제가 특별히 더 괴롭힘당하거나 그런 일은 없었어요. 거기에 제 아버지가 괴롭힘당할 때 대응하는 방법에 대해서 좋은 가르침을 주시기도 하셨죠. 괴롭힘당하는 것을 당연시하지 말고 당당히 일어나서 맞서라고 하셨습니다. 그 조언이 저에게 그러한 상황에서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을 줄 수도 있었어요. 전 운이 좋았습니다. 

팟캐스트: 백인 부모 밑에서 자란 많은 입양아가 부모님들이 인종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인종적으로 무감각했다고 증언하는데, 요나스 씨의 가족은 어떠셨나요?

요나스: 어려운 질문이군요. 저는 항상 제가 다른 인종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노르웨이에서는 대체로 인종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죠. 인종 자체를 언급하는 일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물론 인종차별이 있지만 다른 인종 출신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우리는 인류라는 종 하나에 속해 있고 단 하나의 인류만 있고 문화가 다를 뿐이라고 교육받았습니다. 교육 자체가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고, 다른 가치를 중시하는 문화에서 온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일이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가르쳤죠. 미국에서 언급되는 인종적 차이보다, 노르웨이에서는 문화적 차이에 대해서 논했습니다. 인종 자체가 언급되어서는 안 될 용어 취급이었지요. 

팟캐스트: 요나스 씨의 부모님이 왜 한국에서 입양하셨죠? 

요나스: 그때는 1986년이었고 그때는 다른 나라들보다 한국에서 입양하기가 훨씬 쉬웠습니다. 제가 배우기로는 80년대에 한국에서의 입양 비율 자체가 높았다고 들었어요.

팟캐스트: 부모님이 요나스 씨가 한국에 대해서 배우려고 하는 노력을 지지하셨다고 생각하시나요? 캠프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하셨죠? 입양 부모님이 그런 문제에 겁을 먹는 경우가 많지요. 캠프에 갈 수도 있지만, 한국에 방문하려고 하면 슬퍼하시거나 그런 일이 많으니까요.

요나스: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관련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만약에 제가 한국으로 가서 친어머니를 찾으면 입양 어머니가 저를 빼앗긴 느낌이 들지 않을지 고민한 적도 있죠. 하지만 그러한 걱정을 저에게 보여주신 적이 없습니다. 제 가족은 한국에 가는 일에 지지를 해줬어요. 제 어머니도 누나와 함께 제가 한국에 가기 몇 년 전에 한국에 가신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한국에 가신 적이 없지만 가지 않은 이유는 아버지가 편식이 심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한국에서 먹을 것을 찾을 수 없을까 걱정하셨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가 돌아와서 “아빠 맥도날드도 피자도 있어요. 문제없어요.”라고 말씀드렸죠. 사실 요즘 들어서 아버지도 새로운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하고 계셔요.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하려고 노력하고 한국 음식도 먹으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한국에 방문하실 것 같아요.

팟캐스트: 요나스 씨, 다른 형제자매와 같이 자란 입양아들에 관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입양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거나, 한국에 대해서도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경우가 많고, 형제 자매간에도 한국에 관한 관심이 있거나 없거나 갈린다고 하더군요. 요나스 씨의 경험은 어땠죠?

요나스: 제 누나는 저보다 2년 먼저, 저와 같이 아기일 때 입양되었습니다.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진짜 남매는 아니죠. 그래도 자라면서 서로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누나와는 입양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누나도 저와 비슷할 정도로 한국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가 주로 이야기하는 주제는 우리에게 직접 영향을 끼치는 주제였습니다. 청소년기의 성장과 학교, 직업과 관련된 이야기를 주로 했고 한국과 누나의 경험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는 하지 않았죠. 그래도 누나는 장녀였으니 입양아로 자라는 일을 처음 배워야 했고, 제가 누나에게 입양아의 경험을 배웠으니, 누나가 경험했을 문제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도 없어요. 하지만 동시에 제가 말하기는 어렵지만, 여성과 남성의 성장할 때의 차이로 제 문제는 좀 더 단순했을 가능성도 있죠. 제 관심사는 주로 축구와 핸드볼, 여자애들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요나스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국이 좀 더 인종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 같은데, 노르웨이는 인종 자체를 큰 차이로 보지 않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나요? 

요나스: 사회적으로 그러한 경향이 있죠. 물론 인종에 대해서 좀 더 신경을 쓰는 개인들과 단체들이 있고, 이들은 백인 순수성과 관련해서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노르웨이 사회의 극히 일부이고, 그 사람들은 상당히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그런 사람들과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고 하죠. 사람은 친구들을 고를 수 있고, 사회적 집단도 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친구와 사회적 집단을 정하는 방식은 가치에 따르죠. 

팟캐스트: 오슬로에서의 삶은 어떻죠? 그리고 언제 오슬로로 이주하셨나요?

요나스: 2015년에 오슬로로 이주했죠. 저에게 있어서 오슬로는 완벽한 크기의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전 공부와 일을 위해서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거주한 적도 있고, 영국 런던에서도 살았고, 스웨덴에서도 산 적이 있어요. 오슬로는 새로운 사람들을 매일 만날 수 있을 정도로 크지만, 동시에 아는 사람들을 항상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작죠. 그래서 오슬로를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오슬로로 이사 왔을 때는 오슬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런던에 살다 보니 오슬로가 너무 작다고 생각했죠. 전 크고 빠른 런던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 곳이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지금 오슬로에 제가 만든 사회적 인맥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런던에서는 오래 지내지 않았죠. 그래서 여러 곳에서 살아봤지만, 전 오슬로에 정착해서 살 것 같습니다.

팟캐스트: 살아보신 곳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어디죠?

요나스: 각자 다른 매력이 있었죠. 리스본은 아주 재밌는 곳이었습니다. 기후는 아주 좋았고, 사람들도 친밀했고, 음식이 정말 훌륭했죠. 한국에서는 소속감을 느꼈고, 서울은 아주 즐겁고, 볼 것도 할 것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을 고를 수는 없네요.

팟캐스트: 서울에 살아보려고 하신 적이 있나요?

요나스: 두 번째 한국에 방문했을 때는 휴가 겸 관광형 방문이었죠. 처음에는 제 뿌리를 찾고 문화를 경험하려고 했다면 두 번째 방문 때는 관광을 더 많이 하고, 더 나가서 놀기도 했고 3주간 지내면서 데이트도 몇 번 했습니다.

팟캐스트: 오 대단하네요.

요나스: 그래서 일하다 보면 한국에서 살게 될 수 있겠다. 이라고 생각했어요. 몇 년간 한국에서 살아 볼 생각도 했죠. 하지만 제 직업이 제가 가는 곳을 정했습니다. 그래서 이사는 대부분 직업과 관련해서 움직였고 현재는 정착한 기분입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현재로서는 정착하신 건가요?

요나스: 네. 오슬로에서는 지난 6년간 살았죠. 제가 자란 고향을 제외하고는 가장 오랫동안 살아온 곳입니다.

팟캐스트: 오슬로에 살면서 사람들이 영어로 말을 걸어온 적이 있나요?

요나스: 아뇨. 사람들이 여행객이라서 영어밖에 못하는 경우라면 그랬지만, 다른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저를 다른 노르웨이인과 똑같이 대해줬죠. 다른 노르웨이인이 저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던 일은 없었습니다. 스웨덴에서 1년 정도 일하면서 살아본 적이 있죠. 그리고 스웨덴에서도 그런 일을 겪은 적은 없어요. 문화적으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은 아주 가까운 국가들이죠. 전 한국에 느끼는 소속감을 노르웨이에도 느낍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속감을 덴마크와 스웨덴에도 느끼죠. 각자의 언어로 소통이 되니까요. 

팟캐스트: 그러니까 스웨덴에서는 사람들이 스웨덴어로 말을 걸고….

요나스: 그럼 제가 노르웨이어로 대답하고는 했죠.

팟캐스트: 그럼 서로 의사소통이 됐다는 말이군요?

요나스: 네 그렇죠. 저는 스웨덴인과 덴마크인과 대화를 하고 이해할 수 있죠. 언어가 아주 비슷하거든요. 그래서 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덴마크어가 좀 더 이상한 억양이 있어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덴마크 친구들과 덴마크어와 노르웨이어로 의사소통은 충분히 가능해요. 물론 단어 한 두 개 정도는 이해 못 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건 설명하기 쉽죠.

팟캐스트: 한국계 뿌리 찾기에서 변화한 일이 있나요?

요나스: 작년에 유전자 검사를 했습니다. 처음에 유전자 검사 결과를 받았을 때 놀랐죠. 제가 한국인이 아니라고 했거든요. 제가 일본인이라고 했죠. 몽골인 20%, 중국인/베트남인 30% 그리고 일본인 유전자가 50%라고 주장했습니다. 한국인은 전혀 없었죠. 나중에 가서야 유전자 데이터베이스가 충분히 자료가 없어서 오류를 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현재는 제가 한국인/일본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전자 조사를 기반으로 제 뿌리를 찾는 것이 제 현재 조사의 일부이죠. 그리고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아주 먼 친척들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 유전자 조사 창에 제 형제나 자매가 나타난다면 연락을 해볼 생각이에요.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찾는다고 해도 시간대와 제 삶 때문에 연락을 지속하기는 어렵겠죠. 물론 다시 한국을 방문하고 싶습니다. 몇 년 전에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제가 현재 만나고 있는 여자친구는 한국이나 일본을 방문해 본 적이 없어서, COVID-19 이 상황이 해결되고 나면 한국과 일본을 방문해서 제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요. 

팟캐스트: 친척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계시군요? 

요나스: 네 희망을 품고 있죠. 하지만 동시에 제가 무엇을 찾을지 걱정되기도 해요. 제가 친어머니를 찾아서 모든 게 괜찮고, 저도 건강하다고 말하고 싶기도 해요. 하지만 친어머니를 찾았는데, 도움이나 간호가 필요한 상태면 어쩌죠?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걱정이 됩니다. 갑자기 혈육이라고 나타난 사람이 생면부지의 타인을 돌봐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이 뿌리 찾기를 끝내기 위해서 친척을 찾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이 뿌리 찾기가 결론이 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준비하지 않은 다양한 문제를 접하게 되면 어쩔지 걱정합니다. 

요나스: 직업과 관련해서는 제가 현재 원하는 지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여자친구가 있고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죠. 그리고 현재 저는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이야기를 할 지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삶에서 별로 모자란 것이 없죠. 삶에서 현재 빠진 것이 있다면 여행 여부인데, 이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팟캐스트: 미래에 혈연을 나눈 친자식을 가지고 싶나요? 

요나스: 네. 물론이죠. 그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고 관련된 질문도 있죠. 입양하면 어떨지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에 저랑 제 여자친구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 노르웨이 부모님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지 고민되죠. 아직 그 시점까지는 도달해 있지 않습니다. 아마 올해 아이를 가지지 않을 거고, 내년에도 가지지 않을 테니 그렇게 빠르게 정할 일은 아니죠. 

팟캐스트: 요나스 씨를 닮은 아이를 보는 것을 기대하시나요?

요나스: 네. 그렇습니다. 아주 기쁘겠죠. 절 닮은 아이를 보면 아주 흥미롭기도 할 겁니다. 어렸을 때 저를 닮았다면, 악동일 터라 좀 힘들겠지요. 

팟캐스트: (노르웨이어 인사) 감사합니다. 요나스 씨.

요나스: (노르웨이어 대답)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