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미국인 입양아 테라 푸트너 (44세)는 어릴 때의 재입양, 폭력적인 입양 생활, 그리고 미국 입양 제도에서 살아남았다. 이러한 어릴 때의 경험이 테라 씨가 내부 관찰과 글쓰기에 집중하게 했다. 최근 테라 씨는 자신의 창의력을 통해 온라인 플랫폼인 유니버설 아시안(The Universal Asian)을 만들었다.
*재입양과 성적 학대를 비롯한 아동학대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 욕설 포함
테라: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테라 푸트너입니다. 한국 이름은 엄순희이죠. 현재 도쿄에서 살고 있지만 다음 달에 프랑스로 이주할 예정이고 현재 나이는 44세입니다. 은퇴는 아니지만, 우리 가족은 삶의 다음 단계를 프랑스에서 보내자고 계획하고 있었어요. 5년 주기 계획이었지만 브렉시트가 확정되고, 저와 제 남편이 COVID-19로 인해서 재택근무를 하게 되니 사무실에 나갈 일이 없어졌죠. 저는 3월부터 사무실로 출퇴근하지 않았어요. 일본에서의 생활은 괜찮았고 제 남편도 일본을 좋아했지만, 밖에 나가면 사람들과 바로 마주칠 정도로 붐비는 곳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상황이 맞아 들어가서 프랑스에서 집을 얻기 쉽도록 프랑스 영주권을 얻는 절차를 시작했죠. 그래서 우리가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고 결정을 해도 항상 프랑스를 최종 목적지로 둘 수 있도록 준비를 했어요
팟캐스트: 이름 발음이 타라인가요 아니면 테라인가요?
테라: 테라입니다. 하지만 제 남편은 저를 타라라고 불러요. 영국 발음으로는 타라라고 하거든요.
팟캐스트: 한국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주실 수 있나요?
테라: 그러죠. 전 제 서류에 적혀 있던 정보만 알고 있어요. 신뢰 여부가 불분명한 자료입니다. 그래도 서류에 따르면 전 제 친어머니와 함께 1년 반 정도를 살았어요. 그다음에는 위탁 가정에 맡겨졌죠. 그리고 SWS(대한사회복지회)를 통해서 입양 제도에 맡겨졌습니다. 1979년에 오리건주 포틀랜드시로 보내졌죠. 2살 반에서 3살 정도의 나이였어요. 첫 입양 가족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고, 약간의 기억 파편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11살과 13살 연상인 오빠들이 있었죠. 그리고 그 가족과 2년에서 1년 반 정도 지냈어요. 하지만 그 가족은 서류가 거짓으로 작성되었고, 제가 그들이 원했던 아기가 아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전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래서 다른 위탁 가정에 맡겨졌죠. 제가 아는 바로는 그때는 파양이 아니라 실험적인 분리였고, 포틀랜드에서 맥민빌로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다섯 살 정도 되었을 때인데, 잘 기억이 나지 않죠. 하지만 제가 아주 행복해 보이는 사진이 있고, 그 사진에 한 여성이 같이 나와 있어요. 제가 나온 사진 대부분은 딱딱하고, 지금도 딱딱하게 사진을 찍는 편이죠. 하지만 그 사진은 제 인생에 찍은 사진 중 유일하게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 나와 있는 사진입니다. 전 사진에 나온 사람이 누군지 몰랐어요.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그분은 절 입양하려고 했지만, 첫 가족이 절 파양한 뒤 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절 입양하려고 했던 위탁 어머니가 미혼모라는 이유로 그분의 입양 신청을 거부했죠. 그리고 오리건주 골든 비치에 있는 저보다 어린 남자아이가 있는 가정으로 절 보냈습니다. 거기에서 또 2년에서 3년 정도 더 지냈다고 생각해요. 7살 때 그곳을 떠났기 때문이죠. 두 번째 양어머니에게 끔찍한 학대를 받았기 때문에 힘든 생활을 보냈습니다. 학교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죠. 아마 제가 학교에 말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또 오리건주 브루킹스에 있는 위탁 가정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에서는 1년 정도 지냈죠. 거기에서 제 마지막 양부모님, 그러니까 현재의 부모님이 등장하셨습니다. 그분들은 미국 국내 입양을 하려고 했어요요. 그리고 그때는 제가 미국 국내 입양 제도 안에 있었죠. 그분들은 나이를 좀 먹은 아이를 입양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목록 가장 위에 있었고, 제가 8살일 때 제 부모님이 저를 입양하셨죠. 그때부터는 아주 좋았어요. 제 가족을 사랑하지만, 가족들과 만나기 위해서 끔찍한 8년을 버텨야 했습니다.
테라: 제 두 번째 입양 가족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학대는 항상 기억에 남죠. 첫 기억은 말을 해도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하는 기억이기 때문에 그 기억은 아마 첫 가족과의 기억이라고 생각해요. 그 경험이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죠. 예를 들면 소통할 때 말하기보다 쓰기를 중시하게 되었어요. 그 뒤로는 8살 때까지의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8살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죠. 제가 기억을 하지 못 하는 일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 가족들을 기억하고 싶었거든요. 14살이 되어서야 그곳에서 계속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기를 매일 작성해서 뭐가 일어나는지 기록했고, 지금까지도 일기를 작성하고 있어요
팟캐스트: 트라우마에 트라우마를 얹은 것 같네요
테라: 네
팟캐스트: 부모님과 같이 지낼 수 있다고 믿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하셨죠. 그러한 경험이 테라 씨를 내향적이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받게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테라: 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전 제 생각을 안에 담아주는 편이었죠. 어머니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기억 중 하나는 제가 화를 냈을 때라고 하더군요. 제가 보통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좀 더 감정을 드러내게 됐지만, 지금까지도 그러는 면이 있죠. 예를 들면 선물을 열고 내용물을 보고 고맙다고 하고 다시 선물을 상자에 넣고 제 방으로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제 방안에서 선물이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정했어요. 물론 마음에 안 들어도 해도 언급을 안 했죠. 화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최대한 완벽해지려고 노력했어요. 완벽한 아이가 되려고 했고 그게 제가 원했던 정체성이었죠. 그리고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어요. 제 남편과 이야기를 하면 재밌는 일이 많죠. 사람에 대해서 저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만, 남편은 긍정적인 관점에서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저는 부정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전 사람들은 항상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들에게서 실망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죠. 남편은 모든 사람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사람들이 그를 실망하게 할 것을 알지만, 그것이 사람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정적인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는 사람들에게 항상 두 번째 기회를 줍니다. 전 그렇지 않죠.
팟캐스트: 서로의 그러한 면을 알고 계시군요
테라: 네.
팟캐스트: 그 이야기를 하시면서 살아오시면서 첫 번째 가정과 두 번째 가정에 느낀 분노와 고통이 느껴졌어요.
테라: 네. 항상 그런 문제가 있었어요. 아니 물론 지금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그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데 문제는 없죠. 특히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러한 일이 쉬워졌어요. 하지만 30대 중반까지는 화를 내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전 자라면서 분노를 밖으로 표출하거나 반항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반항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원하는 일을 위해서 제도를 바꾸고,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죠. 공이 바람을 되돌리기 전까지 공에 바람을 최대한 불어넣어 보는 일입니다. 그래서 한계를 사람이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최대한 그 한계 내부에서 활동하려고 하죠. 제가 화가 나면, 그걸 좀 가지고 생각을 하다가, 뭘 할 수 있겠어? 이라고 생각하고 그 분노를 가라앉히거나, 무시하거나, 그 분노를 뛰어넘으려고 합니다. 이게 건강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분노를 잡아 두려고 하지 않아요. 과거는 과거일 뿐이죠. 물론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과거도 저의 일부가 되었으니까요. 하와이에서 입양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걸 들은 제 형제가 “우와 부럽겠다, 하와이로 입양될 수 있었는데 오리건에 갇혔잖아!”라고 한 적이 있죠. 그렇게 농담하면 할수록 받아들이기 쉬워져요. 물론 제가 원하면 화를 낼 수도 있지만, 그럴 이유를 느끼지 못합니다.
테라: 전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분석하려고 노력하죠. 그래서 논리적이나 합리적인 결론이 나지 않으면 최대한 나눠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감정적인 대응은 가장 나중에 와요. 2주에서 3주, 한 달, 심지어 몇 년 뒤에 갑자기 튀어나올 수 있죠. 사람들이 그걸 보고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걸 해결하려고 스스로 감정 조절도 하고, 관련 정보의 독서도 하면서 계속 노력하고 있죠.
팟캐스트: 3살짜리가 어떻게 사람을 속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네요
테라: 그러니까요.
팟캐스트: 약속된 능력보다 더 못하다는 의미였을까요? 그 일이 완벽 해지려고 하는 성격의 기반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무의식적으로 다시 분류되는 것을 두려워하셔서 말이죠.
테라: 제가 그렇게 분류되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제가 15살에서 16살 때 제 서류를 읽고 나서야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죠.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제가 같이 지냈던 첫 가족은 저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다. 첫 가족에게서 받은 영향은 여전히 무의식 속 깊숙하게 묻혀 있거나 제 일부가 된 느낌이죠. 첫 가족과 뭐가 일어났는지는 잘 모르고 기억만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기억들을 판단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기억들이 사실인지도 모르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제가 행복하게 웃고 있던 사진에 나온 위탁 가정의 어머니를 찾았죠. 그분을 찾아서 행복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항상 가지고 있던 기억 중 일부는 첫 가족의 기억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 위탁 과정에서 생긴 기억이었습니다. 그 사실 자체가 아주 흥미로웠고 첫 번째 가족에 대해서 배운 어떤 것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었어요. 물론 제가 그 사람들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첫 번째 가족과 연락을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그러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가족이 제가 완벽해지려는 성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제가 모르는 이유로 혼나는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5살 꼬마가 뭘 알겠어요? 그 가족은 제가 2살짜리 남동생을 돌보기를 원했습니다. 그 애의 기저귀를 갈아주기를 원했지만 그러지 못했고 그래서 혼났죠. 5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애 기저귀를 갈아주는 법을 알겠어요? 구석에서 벽을 보고 몇 시간 동안이나 서 있고는 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을 때 어떻게 눈에 안 띄게 되는지 생각했던 것 같아요. 사실 벽을 보고 있을 때가 가장 평온했죠. 제가 왼손잡이인데 거기에 있을 때는 강제로 오른손을 써야 했습니다. 그러한 일도 제 성격에 영향을 끼쳤다고 봐요. 그 가족은 제가 왼손을 쓰니 사악하다는 증거라고 저에게 말하고 했죠. 지금은 제가 문제가 있던 것이 아니라, 그 두 번째 가족의 어머니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하는 일은 아이와 관련 없는 경우도 많죠.
테라: 그래서 저는 두 번째 어머니에게 아주 오랫동안 분노해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화나기보다는 흥미롭죠. 옛날 인터넷 포럼에서 Adopted.com에 두 번째 어머니가 올린 글을 봤습니다. 어떻게 찾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전화번호가 있더군요. 그래서 그분에게 전화했죠. 하지만 이사를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같이 살던 룸메이트분이 있어서 그분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어머니의 근황과 행방을 물어봤죠. 아주 흥미로운 정보 교환이었습니다. 두 번째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죠. 들어보니 어머니가 소시오패스 적 성향이 있었지만, 현재 알코올 중독자를 위한 상담사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듣고 제가 경험했던 여자가 맞는지 놀랐어요. 그리고 어머니의 아들, 그러니까 제가 돌봐야 했던 어린 소년에게 연락했죠. 서로 직접 대화하지 않았지만, 그는 저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가 어머니에게 이야기해준다고 했지만, 그 뒤로 연락은 오지 않았고 신경 쓰이지 않죠. 더 의미 있는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다른 문제는 제가 현 가족을 만나기 전까지 있었던 위탁 가정이었습니다.
테라: 제 위탁 가정의 아버지가 저를 성적으로 학대했거든요. 하지만 그 사건과 관련해서 부정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두 번째 가족에게서 느낀 충격과 고통이 너무 심해서 위탁 가정의 아버지가 저에게 준 관심과 소위 “애정”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같아요. 나중에 진짜 가족들과 만나고 난 뒤에도 말이죠. 물론 제 현재 가족과 제 아버지가 알았을 때는 엄청난 일로 발전했습니다. 위탁 가정의 아버지는 고소당했고,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했어요. 그걸 보고 약간 미안해졌습니다. 제 잘못은 아니지만 제가 말한 것으로 시작했죠. 평범한 대화에서 시작했어요. 부모님이 저를 앉혀 놓고 과거가 기억나는지 물었죠. 서류를 같이 읽으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기억이 나는지 물어봤습니다. 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류에서는 첫 가족의 큰 오빠가 저를 성추행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군요. 아버지가 기억이 나는지 물었죠. 전 그 말에 “언제 이야기를 하는 거죠?”라고 답했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뭐?”라고 되물었습니다. 위탁 가정 아버지 관련 문제는 보고가 안 됐었거든요. 그래서 큰 문제로 비화했죠. 위탁 가정의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가 기억이 납니다. 비행기를 타고 있었는데 자다가 깨서 무언가를 느꼈죠. 그리고 내리자마자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와서 그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리고 그걸 듣고 감정이 요동쳤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오리건주 공화당원의 전형이었기 때문에 죽었으니 잘됐군. 이라고 말했죠. 저는 그 남자를 악당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슬퍼했어요. 물론 지금 와서는 죽은 것이 기쁘지는 않지만 적어도 어떤 종류의 처벌은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경험이 제가 튀지 않고 숨으려는 경향에 영향을 끼쳤죠.
팟캐스트: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고 들으니 끔찍하네요. 성폭력 생존자이시군요.
테라: 네.
팟캐스트: 테라 씨가 설명하신 화장하지 않고 헐렁한 옷을 입는 행위가 그러한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아서 일수도 있겠군요. 사람들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느껴본 적은 있습니까? 사랑의 과정과 감정이 힘드셨나요?
테라: 첫 연애는 14살이었습니다. 현재는 평범한 일이지만 그때는 조숙한 아이들이 하는 일이었죠. 그때는 평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깊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전 사귀고 싶지 않았지만, 주변의 압박 때문에 사귀었죠. 그렇다고 해서 난잡한 젊은 시절을 보내지는 않았어요. 현재 전 두 번째 결혼을 한 상태이고 첫 번째 결혼 이후에도 남자친구들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지한 일부일처주의자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보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저는 성관계에 감정을 섞지 않는 방법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몇 번 원나잇 스탠드도 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친구들과 공유하면 친구들이 놀라면서 왜 그랬냐고 묻고는 했죠. 그럼 제가 필요했으니까. 이라고 답하고 했어요. 감정적인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한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전 그렇게 신체접촉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제 남편은 신체접촉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남편과의 신체접촉은 좋아하죠. 하지만 전 사람을 안는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물론 다른 사람들이 하니 저도 하게 되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사람들에게 애정을 표시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래도 극단적인 성격도 아니라, 극단적인 일은 하지 않았죠. 교제를 여러 번 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저에게 감정적으로 다가오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서양 사회가 성적 관계에 감정을 연관 지어서 어려움을 겪었어요. 남자들이 성적 관계를 맺고 난 뒤 저에게 감정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죠. 그래서 제 남자친구들이 성적 관계든, 정신적인 관계이든 좀 더 감정적인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저도 깊은 감정이 있긴 했지만, 표현법을 몰랐고, 차갑다는 평가를 많이 받고는 했습니다. 제가 감정이나 사랑을 많이 표현하면 사람들이 저를 지배하거나 조종할 것이라고 믿었고, 그 일을 막으려고 했어요. 지난 10년에 들어서서야 겨우 평범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됐죠.
팟캐스트: 인간관계에 대한 태도가 변화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테라: 음… 제가 22세 때 첫 결혼을 했습니다. 29세 때 이혼을 했죠. 제가 34세에서 35세가 되었을 때였어요. 뉴질랜드 출신의 남성과 교제를 했습니다. 그 사람은 결혼…. 아니 아이를 가지고 싶어서 했어요. 결혼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아이를 가지기를 원했죠. 하지만 전 아이를 가지고 싶었던 적이 없어요. 물론 아이를 가진다면 3명에서 5명 정도의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극단적이긴 했죠.
팟캐스트: 확실히 좀 극단적이네요.
테라: 그렇죠? 아예 안 가지거나 잔뜩 가지거나 둘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제 나이가 34세 정도였고 아이를 가질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죠. 그래서 제 아버지에게 왜 아이를 가지고 싶었는지 물어보게 되었어요. 아버지의 대답은 저에게 그렇게 좋은 해답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남자친구와는 잘 안 될 것 같았고, 헤어졌어요. 그리고 아이를 가지고 싶어서 하지 않는 남성과 교제를 시작했죠. 결혼하고 싶어서 하지도 않았고, 아이도 가지고 싶어서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둘이서 거의 완벽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어요. 물론 주변에서 보면 왜 사귀느냐? 이라고 평가될 만한 관계였죠. 미래도 없었고, 우리 둘이 선생이라 두세 달 동안 혼자서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다시 만나고, 그런 관계를 서로가 좋아했어요. 같이 석 달 넘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말이죠. 같이 동거하기도 했고, 그 관계 자체가 아주 자유로운 관계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관계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들으니 제가 평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들게 했죠. 저 자신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저를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과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도록 해야 했어요. 나중에는 제가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평범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다른 욕구가 있었어요. 좀 더 안정적인 관계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았죠.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좀 더 안정적이고, 유대감이 있으며, 평범한 관계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 남자친구와 서서히 멀어지다가 헤어졌죠. 준비해서 크리스마스에 헤어지고 월말에 제가 그 집에서 나왔습니다. 한 달 정도 제 감정을 정리하는 데 시간을 보냈어요. 그리고 혼자서 여행을 떠났죠. 그 여행을 하면서 제가 제 연애 상대에게 원하는 모든 점을 적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은지도 적었죠. 그게 2월 초였고, 지금의 남편을 밸런타인데이에 만났어요. 남편은 제가 원하던 모든 것에 맞아 들어갔고, 그걸 보고 “당신은 도대체 누구세요?”라고 되었습니다. 거기에 그이도 런던에서 온 입양아였죠. 제가 원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모든 조건이 맞아 들어갔어요.
팟캐스트: 어떤 조건들이었죠?
테라: 우선 정신적으로도, 그리고 다른 측면으로도 인생의 주도권을 잡은 사람을 원했어요. 제가 가진 문제가 너무 많아서 상대방의 문제를 도와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죠. 전 아이를 원치 않았지만, 그이는 이미 아이를 두 명 가지고 있었어요. 어른인 딸이 두 명이었습니다. 그 방면으로는 문제가 없었죠. 그리고 미국인이 아닌 상대를 원했어요. 제가 이미 미국인의 정체성이 희미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인의 영향을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돈이 있는 상대를 원했죠. 재정과 관련해서는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현재는 우리 둘 다 안정적이에요. 다른 조건들도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죠. 하지만 결론적으로…. 아 기억났습니다. 제가 그를 사랑해주는 것보다 그가 저를 사랑해주기를 원했어요. 이상한 믿음이기는 하지만 저는 여성이 남성을 좋아하는 것보다 남성이 여성을 더 좋아해야 한다고 믿죠. 사회적 권력 구조를 보았을 때 여성이 남성을 더 좋아하면 남성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자기를 바꾸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남성이 여성을 더 좋아하면, 여성은 자기 자신 그대로 사랑을 받으면서 재능을 꽃피울 수 있거든요. 물론 사랑 자체는 교류입니다. 하지만 사회에서 힘을 가진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권력 구조하에서는 여성이 남성을 더 좋아하는 구조는 잘 작동하지 않다고 보죠. 물론 입양아들에게만 적용되는 특수한 경우일지도 모르지만 제가 본 커플 중 상당수가 남성이 여성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사랑을 어떻게 측정하죠?
테라: 음…. 잘 모르겠네요. 그이가 제 문제를 더 많이 받아줍니다. 물론 저는 문제에 대한 높은 기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좀 더 순화된 표현을 하자면, 얼마나 남편이 저를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겠죠. 하지만 단순히 그 문제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반발을 해도 그쪽에서 잔소리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죠. 작은 행동과 말의 방식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단순히 인정의 문제가 아니죠. 인정받고 싶다고 말하는 일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봐요. 그이는 저를 받아들여 주지만 동시에 저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시해 절 더 낫게 만들죠. 하지만 제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방식은 아닙니다. 한번 심각하게 제 문제에 대해서 그이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제가 집을 나갈 뻔한 뒤로는 그러지 않죠. 물론 지금은 농담으로 언급할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시하고 도전을 통해 둘 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죠. 하지만 우리 둘 다 끝에는 제가 먼저 포기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야기를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개인적인 질문이라면 죄송하고, 남편을 떠날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항상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특히 그렇게 변동적인 가족 관계를 겪으셨으니까요.
테라: 적어도 이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이전에는 항상 그런 준비를 했습니다. 이 관계에서는 큰 문제가 있었어요. 서로가 만난 아부다비에서 큰 문제가 있었죠. 그래서 1년도 안 되어 결혼했어요. 그래서 그가 아니라 그 상황에서 가느냐, 아니면 남아서 도울지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이를 혼자 남겨두고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때 그를 절대로 떠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우리 사이에 건강의 문제가 생기거나, 50년 동안 같이 지내면서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해야 하죠. 물론 전 항상 일할 수 있고, 뭔 일이 생기던 살아남을 수 있어요. 어떻게 되든 제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혼자서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러한 생각의 변화가 큰 영향을 끼쳤죠. 과거에는 항상 저 혼자 자립하고 싶고 저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현재 COVID-19 사태 때문에 집에 혼자 있고 싶을 때는 있죠. 그래도 이전에는 혼자 여행을 하고, 혼자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돌아다니고 싶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여행하는 일도 좋겠지만 남편이 있으면 더 즐거울 겁니다. 그이가 주변에 있으면 더 즐겁고 행복하죠. 이 이사만 해도 우리의 접근 방식이 달라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처리하는 임기응변 형과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야 하는 관리형으로 접근합니다. 제 남편은 결국에는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사람이고, 그래서 이사는 제 방식대로 하고 있죠. 하지만 그래서 더 재밌어요. 그리고 모든 것이 더 편안하죠. 제 삶에서 다른 사람에게 처음으로 그런 감정을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그이에게 책임감을 느끼지 않거든요. 그이를 꼭 행복하게 해 줘야 한다, 해줘야 한다는 무게감이 없고 그저 서로 함께할 뿐이죠. 우리가 지난 5년간 보낸 결혼 생활이 저를 현실에 엮어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지 생각하기도 하죠. 남편에게 기대게 되었고, 그이가 없는 삶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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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일본과 오랜 인연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테라: 네.
팟캐스트: 그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테라: 네. 미국에서는 고등학교 때 외국어를 전공해야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죠. 사실 그때도 평범한 일은 하려고 하지 않았죠. 그래서 모두가 배우는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어는 제 취향이 아니었고, 독일어는 저에게 쓸모가 없었죠. 하지만 그때는 일본 거품 경제의 정점이었고 오리건주와 일본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학교에서 제가 배우고 싶었던 한국어에 가장 가까운 언어가 일본어였습니다. 사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일본어 수업을 해서 운이 좋았죠. 그렇게 해서 일본과 첫 관계를 맞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일본어 수업에서 아주 대단한 일본어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분은 우선 일본어 욕을 먼저 가르쳐 주실 정도로 유쾌하신 분이었죠. 하지만 이상하게도 일본 문화는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문화 관련해서 배울 때마다 “뭐 하는 나라야?”라는 감상을 느꼈어요. 일본을 항상 한국으로의 관문으로 생각했던 것 같죠. 제가 어렸을 때는 세계를 여행하며 국제 사업에서 종사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밖에서 살 생각은 제가 교환학생으로 생활하기 전까지는 해보지 않았죠. 그리고 교환학생도 제가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했어요.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왔을 때는 아주 실망했습니다. 제 정체성 혼란을 겪었던 곳이기도 했어요. 모두가 절 일본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전 일본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이고, 일본인보다는 한국인에 가깝죠. 특히 한국을 몇 번 방문하고서 알게 되었죠. 하지만 동시에 전 도전과 고난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계속 일본에 돌아오게 되었죠. 일본에 세 번째로 방문했을 때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람들에게 일본인이라고 말하고 다녀도 사람들이 믿었죠. 사람들에게 제가 한국계 미국인 입양아고 백인 부모 밑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 지쳤기 때문에 그냥 제가 일본인이라고 말하고 다녔어요. 입양아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는 시선에 지치기도 했죠. 그래서 제가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있을 때 하숙을 했던 가족의 성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이타마현에서 왔고 두 자매가 있는 평범한 일본인이라고 말하고 다니기 시작했죠. 사람들이 그 말을 믿더라고요.
팟캐스트: 그러니까 일본계 미국인도 아니라 진짜 일본인으로 받아들여질 정도였다고요?
테라: 네. 전 제 억양을 바꿀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전화로 사람들과 이야기하면 제가 일본어를 외국어로 배웠다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직접 이야기하면 상황이 조금 달라지기는 하죠. 제 행동거지가 일본인 같지 않거든요. 전 또 정중한 일본어를 하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높임말 사용은 못 한다고 말하고 다닙니다. 하지만 인제 와서는 대부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요. 하지만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죠. 예를 들면 남편이 COVID-19 검사를 받아야 해서 전화로 일본 병원과 대화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제 출신지를 물었어요. 당연하다는 듯이 제가 외국인과 결혼한 일본인 아내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제가 미국 출신이라고 하니까 깜짝 놀라더군요. 그 정도의 일본어 회화 실력을 갖추게 되니 일본에서의 삶이 훨씬 쉬워졌습니다. 그리고 일본을 떠나서 아부다비에서 9년 정도 살았죠. 아부다비는 또 다른 세계였어요. 그리고 일본에 다시 돌아오니 일본 문화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서구식 사고로 일본 문화를 평가하고 싶은 일이 많지만 말이죠. 제가 일본을 사랑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본의 진가를 제대로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한국에도 살아보고 싶습니다. 첫 번째 방문은 킴… 킴 톰슨을 아시죠? 8살, 9살 때부터 친구였고 캠프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어요. 그래서 킴을 만나러 한국에 방문했습니다. 아주 이상한 경험이었어요. 전 한국어를 못하죠. 한국어를 배우려고 여러 번 노력했지만 어째서인지 한국어를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전 일본어와 스페인어를 할 수 있고, 프랑스어를 배우는 중이고 아랍어도 어느 정도 독해할 수 있죠. 그러니 언어적 문제가 아니라 제 정신적 문제라고 봐요. 왜냐하면, 제가 한국어를 배울 수 없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한국에 갔을 때 한국어를 못한다는 문제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습니다. 아주 편안했어요. 다른 곳으로 여행 가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지 못 알아들을 때 불안감이 들었는데 한국에서는 주변 일을 모르고 걸어 다녀도 편안했습니다. 아주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어서 한국어 배우는 일은 포기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한국에서 살고 싶고, 실제로 몇 번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어른으로서 저 정체성을 구축할 때 일본에 왔고, 그래서 한국보다 일본이 더 편안해요.
테라: 성장하면서 항상 제 친어머니, 친아버지, 그분들의 나이에 대한 정보는 항상 제 서류에 기록되어 있었어요. 그래도 제 친부모를 찾으려고 하는 욕구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때 제 친구 킴이 한국으로 이주했죠. 킴은 어떤 정보도 없었어요. 말 그대로 문 앞에 버려진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둘 다 친부모에 대해서 다른 접근 방식이 있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친부모를 찾는 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킴이 한국에 간 뒤 “한번 해보지?”라고 저에게 권유했고, 그 말에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어요. 제가 막 30대 초반이 되었을 때라 한번 해보기로 했죠. 그래서 대한사회복지회에 연락해서 제가 가진 정보를 제공하고 관련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년 반 뒤에 이메일을 받았는데, 복지회에서 가족들에게 연락했지만, 저에 대해서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가족은 6남매에 4명의 딸, 그리고 두 명의 아들이 있었고, 제 어머니의 이름을 가진 사람은 차녀였다고 했습니다. 딸들은 미국에 이민하였고, 두 명의 아들들은 한국에 살고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하와이에서 이민해서 사는 자매 중 하나가 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죠. 그분이 말하기를 만약에 가족이라면 대화를 나눠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딘가의 공항에서 그분에게 전화를 걸어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분 말로는 제 친어머니의 이름을 가진 분이 저와 소통을 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조현병이나 그런 종류의 정신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제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는지 의문을 표시하셨습니다. 제가 태어난 연도에 따르면 제 친어머니로 기록된 분은 17살이었는데, 제 서류에는 제 어머니가 21세라고 기록되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 이모로 추정되는 분에게 유전자 조사를 부탁드렸죠. 그래서 그분이 저에게 정보를 조금씩 제공해줬어요. 제 어머니로 추정되는 분이 다른 자매들과 닮지 않았고, 그리고 만약에 저를 가졌다면 그게 제 어머니가 정신병을 앓게 된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하셨죠. 그렇게 저에게 조금씩 정보를 제공했고 저는 그 정보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유전자 검사를 했는데,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더군요.
테라: 그래서 그 정보를 들고 대한사회복지회에 문의했죠. 왜 이런 일이 가능한지 물었습니다. 복지회에서는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모르겠다고 했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정보를 사서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제 친아버지를 찾기 위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기록에 따르면 제 친아버지는 감옥에 투옥된 상태였어요. 하지만 아버지의 투옥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친어머니도 친아버지 조사도 전부 막다른 길에 도달했어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친어머니로 추정되는 사람이 자매들과 외모가 닮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떠올렸죠. 그리고 그분이 미군과 결혼해서 미국에서 두 명의 딸을 뒀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리고 그 둘을 페이스북으로 찾아서 삶에 지장을 주고 싶지는 않지만, 가족 역사에서 좀 이상한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니 적어도 제가 안심할 수 있도록 유전자 검사를 받아주실 수 있는지 물었어요. 그래서 그 두 분도 유전자 검사를 해줬습니다. 그 결과 그 둘도 저와 혈연관계는 없었어요. 하지만 그 두 분과 이모분은 혈연관계가 있었죠. 그래서 저는 그 가족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제 친부모에 관련된 일은 거대한 의문점이죠. 삶의 커다란 아이러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항상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전 문 앞에 버려진 사람들보다 상황이 안 좋죠. 전 부모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테라: 그래서 조사를 멈추었습니다. 다음 단계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거든요. 해외입양인연대(GOAL)에 연락해서 도움을 받을지 생각했고, 아니면 흥신소를 고용해야 하나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제상상속에서 저는 북한 마피아 출신 아이이고 그들의 보호 아래서 빼앗긴 아이라고 상상하기도 해요. 아니면 공주 이야기를 쓰기도 하죠. 하지만 제 유전자 정보로 추측하기로는 제 아버지가 북한 출신일 가능성이 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감옥에 있었고, 아버지가 기록에 남아 있지 않고 찾을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가 북한에 송환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음 단계는 북한 관련 조사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보가 뒤바뀐 입양아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봤죠. 그리고 그 사람도 대한사회복지회와 관련된 입양아였기 때문에 의문점이 생깁니다. 그곳에서 저에게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고, 다른 가족과 연결해주고 끝내려고 했을지도 모르죠. 아니면 진짜 정보가 뒤섞였을 수도 있고, 친어머니가 정보를 사서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지금 잘 모르는 상태이고, 제가 조사를 계속할 충분한 흥미가 없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관련해서 계속 질문을 하시죠. 이러한 조사 관련 프로그램을 좋아하시고, 수사 프로그램도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면서 친부모와의 유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좀 더 깊은 인연을 찾을 이유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이 조사는 흥미 위주이고, 현재로서는 조사를 더 진행할 동기가 없죠. 물론 언젠가는 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가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진행 못 할 뿐이에요.
팟캐스트: 조사 결과가 그렇게 허무해서 슬프거나 고통스럽나요?
테라: 그렇지는 않아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잘 모르겠다고 해야겠죠. 그렇게 슬프지는 않습니다. 그저 흥미로울 뿐이죠.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어요. 왜 여성이 서류에 거짓 정보를 기재해야 할 정도로 자신의 정보를 숨겨야 하는지 알고 싶죠. 그리고 왜 남의 가족을 이러한 문제에 끌어들이지도 말고 싶습니다. 제가 그 가족의 삶에 혼란을 줘서 미안한 감정이 있어요. 자신들의 자매에게 사생아가 있었는지 고민하게 만드는 상황을 만들어서 미안하죠. 제가 겪었어야 하는 경험을 그 사람들에게 겪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고통을 느끼고 있지는 않고 흥미를 느꼈을 뿐이에요. 그래서 다음 단계는 한국에 가서 직접 대한사회복지회와 문제를 상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에 더 뒷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팟캐스트: 테라 씨, 인터뷰가 한 시간이 넘어갔는데 테라 씨가 만든 유니버설 아시안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테라: 물론이죠. 유니버설 아시안은 온라인 잡지에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형태는 온라인 잡지보다는 플랫폼에 더 가깝습니다. 제가 여러 국가를 여행했지만, 그곳 사람들이 제가 그 나라 출신이라고 생각하는 일에서 유니버설 아시안의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제가 어디를 가든 스며들고 주변 환경에 녹아들 수 있었기 때문이죠. 제가 아시아 국가에 가면 워낙 잘 섞여 들어가 간첩으로 활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농담에서 모든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니버설 아시안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 책을 쓰면서 우리 아시아인 사회에 수많은 이야기와 다른 필요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리고 책을 쓰다가 보니 COVID-19가 세계를 덮쳤습니다. 그러자 책상 앞에 앉아서 교육용 자료를 만드는 일 빼고 다른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2020년 5월과 6월 사이에 제 친구 킴한테 연락해서 이러한 잡지에 대한 생각이 있고, 단순히 입양아가 아니라 아시아인들을 위한 잡지를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죠. 같이 준비하니 국제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아시아인들의 경험과 문제가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죠. 모두의 경험은 독특하지만, 동시에 비슷한 점이 있어요. 그래서 킴의 보조를 받으면서 6월에 시작했습니다. 지난 4달 동안 계속 성장해왔죠. 아직도 조각들이지만, 이제 그래픽과 그림도 조금 있어요.
테라: 그래서 제가 원하는 결과는 플랫폼 형태입니다. 사람들이 와서 경험을 이야기하고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사회와 비슷한 모습을 원해요. 제가 인스타그램에 접속할 때마다 여러 사람이 모임을 만들어서 대단한 일을 하고 있지만 찾기가 어렵다는 점을 알게 되었죠. 그 모임의 일부가 아니면 그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국제 입양아의 경험으로 저와 비슷한 사람 자체를 찾는 일이 고생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죠. 그래서 킴과 저는 펜팔이 되었습니다. 외모에 대한 바보 같은 농담을 듣고, 아시아인에게 맞는 화장을 하는 방법을 모르는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으니까요. 제가 화장이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해서 다행이었지만, 나중에 유튜브가 나오자, 20대 뷰티 유튜버들을 보고, 제가 화장을 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미국 대중매체와 잡지를 보면 아시아인들이 별로 나오지 않죠. 흑인, 백인, 히스패닉, 혼혈들이 나오긴 하지만 아시아계 자체를 보기가 어려워요. 나온다 해도 이국적인 복장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튀는 복장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는 보수적이라 보라색 머리카락이나 붉은 눈화장 같은 화장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시아계가 대중매체에 나오면 대부분 그런 모습으로 나왔죠. 그래서 이 플랫폼이 모든 관점을 제공할 수 있기를 원해요. 그리고 미용도 도입하려고 하고 있고, 정신 건강 관련 정보도 제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플랫폼 자체가 균형 잡힌 내용을 제공해주기를 원해요. 입양아 측에는 불행한 이야기와 소식이 많죠. 저는 입양아 사회의 그러한 면도 받아들이고 싶지만, 긍정적인 이야기도 플랫폼에 놓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플랫폼에 와서 그냥 입양아들이나 아시아인들의 불행을 이야기하는 곳이라 평가를 하게 두고 싶지 않아요. 입양아들과 아시아인이 겪는 불행과 문제도 실존하지만, 동시에 입양아들과 아시아인들이 이뤄낸 일도 분명히 존재하죠. 그래서 그게 제 계획입니다.
팟캐스트: 만약에 유니버설 아시안에게 테라 씨 본인의 이야기를 올리게 되면 제목은 어떻게 지으실 예정이죠?
테라: 음…. 제목이라…. 생각을 해봐야겠네요. 잘 모르겠습니다.
팟캐스트: 테라 씨 본인의 이야기를 유니버설 아시안에 올릴 생각이 있으신가요?
테라: 잘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편집부가 그렇게 직접 개입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나중에 성장해서 좀 더 유연성이 생긴다면 다를지도 모르죠. 그래서 제가 그 글을 직접 올릴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책을 쓰고 있고 그 책의 이름도 유니버설 아시안으로 생각하고 있죠. 그래도 제목을 바꿀까 생각하고 있어요. 제 삶을 기반으로 한 비문학과 문학을 포함한 더 많은 이야기를 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목은 잘 생각나지 않네요. 상담과 자기 계발의 일환 중 하나로 제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글을 썼죠. 그리고 제 머릿속에 남은 이야기 중 하나는 제가 다른 이들의 길을 안내해주는 영혼이라는 글이었습니다. 그것이 저를 설명해주는 가장 좋은 설명인 것 같아요. 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주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사람들 뒤에서 사람들을 돕고 지도해주는 사람이죠. 그래서 유니버설 아시안이라는 이 플랫폼으로 다른 사람들의 표현을 도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해온 모든 일이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삶의 기복들, 좋은 일들과 나쁜 일들이 균형 잡힌 관점을 준다고 생각해요. 물론 저 자신이 균형 잡힌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제 관점을 균형적으로 조정해서 사람들이 왜 그런 인식을 하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하죠. 큰 그림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이 유니버설 아시안을 지원하고 싶거나 테라 씨와 연락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들을 위한 방법이 있나요?
테라: universalasian@gmail.com 이메일이 있고, universalasian.com 사이트도 있습니다. 아시아인 관련이라면 모든 이야기를 받고 있어요. 그리고 유튜브 채널도 시작해 요가 영상도 올릴 예정입니다. 만나서 팬 미팅이나 줌을 통한 파티도 진행해볼 생각이에요. 아시아인 사회를 하나로 끌어모으고 싶죠. 모든 것을 해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