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루킴(He/Him 대명사 선호)(34세) 씨는 한국에서 입양되어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 교외에서 자라났다. 루킴 씨의 정체성은 백인 위주 사회에서 성장하다가 아시아계 남성의 정체성과 자기 자신의 육체를 인정하면서 성장했다. 현재 그는 무용수이자 인종 권리 운동가 그리고 다른 입양아들의 동료로서 활동하고 있다. 루킴 씨는 다인종간 연인 관계(아시아계 남성과 흑인 여성) 경험과 관측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선입견과 편견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한다.
커트: 제 이름은 커트 루킴입니다. 선호하는 대명사는 He/Him이고,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의 자랑스러운 시민이죠. 게자리-사자자리이고 현재 34세예요.
팟캐스트: 커트 씨, 최근에 결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커트: 네. 결혼했습니다.
팟캐스트: 몇 달 전이라고 들었어요.
커트: 네. 2019년 9월에 결혼했죠. 제 자신을 소개하는데 큰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제가 결혼하기 전 성은 블룸버그였어요. 커트 블룸버그라는 이름을 보고 서류 통과시키는데 제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놀랬죠. 제 아내와 같이 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 블룸버그라는 성이 싫고, 아내가 성을 안 받았으면 했어요. 그때 어렸을 때 기억이 났습니다. 초등학교 때 그림과 같은 미술 선생님이 계셨죠. 항상 편한 복장을 하고 다녔고 목소리도 크셨습니다. 그분의 성이 라만-차프카였죠. 라만이나 차프카라는 성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의 성인지 몰랐지만 궁금증이 많은 초등학생이라 선생님에게 어떻게 그런 성을 가지게 되었는지 물었어요. 선생님은 아내와 성을 같이 합쳐서 공유하게 됐다고 했죠. 그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양부모님이 제 한국 성인 김을 이름에 남겨두셨어요. 아내의 결혼 전 성은 러셀이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성을 합쳐서 루킴이라는 성을 쓰고 있죠. 입양아로서 미국계 흑인인 아내를 두고 이 성을 쓰는 일이 역사적, 맥락 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해요. 이 성을 쓰는 다음 세대를 낳고 키우는 일이 어떤 상징성을 가지게 될지 흥미롭습니다.
팟캐스트: 성을 바꾸시면서 제국주의, 노예 이름, 백인의 이름을 가지게 된 문제 등에 대해서 생각하셨나요?
커트: 네. 그렇습니다. 교육 업계에서 종사하는데, 학생들이 블룸버그 씨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어요. 저에게 맞는 성이 아니었고 그렇게 불려도 기분이 좋지 않아서 이름으로 부르게 했죠. 하지만 성을 바꾸고 난 뒤에는 루킴 씨라고 부르게 합니다. 루킴이 저에게 맞고 자랑스럽게 느낄 수 있는 좋은 성이라고 생각해요. 아내의 경우에는, 사실 우리 둘 다 성을 어떻게 바꾸고 알려야 하는지 생각해야 했습니다. 둘 다 공적활동과 사회운동도 하고 있죠. 사람들에게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직업이라 적응하는데 신경을 쓰였어요. 친구들은 아주 좋아했고 비슷한 일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가족들도 제가 성을 바꾸는 일에 긍정적으로 반응했죠. 물론 하겠다고 통보를 했던 일도 도움이 됐어요. 제가 바꿀 생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지 않고 아내와 결혼할 때 성을 바꾼다고 통보를 했습니다. 가족들은 긍정적으로 반응했죠. 다른 변화는 입양아 정체성에 대한 접근성이었어요. 이제 루킴이 제 성이니 블룸버그라는 성을 쓸 때와 다르게 확실히 드러나지 않죠.
팟캐스트: 옛날에 블룸버그라는 성을 썼을 때는 사람들이 백인을 기대했죠? 반면에 루킴이라는 성을 쓰면 성과 이름이 맞아 들어가나요?
커트: 네. 확실히 맞아 들어가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느낌이 들어요. 아시아계 성이기도 하고, 김이라는 성을 듣고 한국계 성이라고 사람들이 추측할 수도 있죠. 입양아 정체성을 보여주느냐, 아니면 자연스럽게 알려줄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블룸버그 성을 사용할 때는 입양아 정체성이 겉으로 드러나 있었고 설명해야 했어요. 요즘은 정보 공유를 조정할 수 있어서 훨씬 낫죠.
팟캐스트: 성을 김으로 바꾸려고 생각하신 적이 있나요?
커트: 아뇨. 제 이름은 커트 로버트 킴 블룸버그였습니다. 입양아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성을 바꾸기도 했어요. 성을 바꾼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정보를 배울 수 있었지만 여러 문제 때문에 성을 바꾸고 싶지는 않았죠. 판사 앞에서 설명을 하고 싶지 않았고, 성 변경 비용을 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장벽을 만들었고, 구조적 문제 때문에 그렇게 바꾸고 싶지 않았다고 보죠.
팟캐스트: 커트 씨 아내, 재스민 씨가 미국계 흑인이죠?
커트: 네.
팟캐스트: 흑인 여성들과 연애를 해오셨나요?
커트: 아 좋은 질문이네요. 미네소타에서 자라는 입양아는 백인 위주 사회를 겪게 되죠. 따라서 제 여자 친구들 대부분은 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정치적으로 활동적이게 되고 인종 정체성을 이해하게 되자, 유색인종들과 연인관계를 맺고 싶어 졌어요. 온라인으로 연애를 할 때, 여러 사이트들을 둘러보게 됐죠. 그런 사이트에서 항상 유색인종 파트너를 찾고 있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찾다가 아시아계 남성-흑인 여성이라는 개념을 찾게 되었어요. 아시아계 남성-흑인 여성 연인(AMBW) 사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배우게 되었죠. 몇몇 사람들은 그 관계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기도 하지만, 그 사회에 직접 참여해보면 다른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면과 문제점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아시아계 남성-흑인 여성 연인 관계와 흑인 남성-아시아계 여성 연인관계 사이에 서로 다른 점이 있나요? 균형 관계가 다른 느낌인가요?
커트: 네 확실히 그렇다고 봅니다. 성별 표현에는 확실히 차이점이 존재하고, 유독한 남성성과 고밀도 남성성을 유색인종 남성이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죠. 가부장제가 여성을 소유물로 보게 하는 관점도 있고요. 재스민과 같이 길을 걸어갈 때 흑인 남성들이 시비를 걸거나 평가하고는 했습니다.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의 일부인 셈이죠. 물론 항상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팟캐스트: 흑인 남성들이 비판적인 말을 한다고요?
커트: 네. 적어도 제가 미네소타에서 살면서 그런 경험을 겪었어요.
팟캐스트: 두 분이 연애한지 얼마나 되셨죠?
커트: 우리가 얼마나 연애를 했냐고요? 이런 재스민에게 혼나게 생겼네요. 날짜를 정확히 기억해야 하는데…….
팟캐스트: 이런.
커트: 4년 4개월 사귀었죠.
팟캐스트: 그러하군요. 재스민 씨와 같이 연애를 할 때 사회적으로 반응이 있었나요?
커트: 대부분의 경우 아주 잘 어울린다, 아주 귀엽다, 아이들이 기대된다, 이런 반응들이 있었죠. 전부 좋고 훌륭한 반응이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가질 흑인-아시아계 혼혈 아이들이 인종차별을 없앨 수 있다는 인식도 있었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죠. 부정적인 반응은 그리 심하지 않았어요. 물론 백인 부모 밑에서 자란 입양아가 전통적 핵가족 밑에서 자란 흑인 여성과 연애하는 일 자체의 문제는 있었습니다. 여러 편견과 선입견이 나타났고, 그래서 사람들을 인종적 선입견을 끼고 보지 않고 사람 자체로 보기 위해서 노력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죠.
팟캐스트: 그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몇 가지 예를 들어줄 수 있나요?
커트: 물론이죠. 우선 결혼식 자체가 아주 힘들었어요.
팟캐스트: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군요?
커트: 네.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다른 점을 보게 되었죠. 예를 들면 제 들러리는 두 명의 남성 정체성을 가진 생물학적 유색인종 여성에 4명의 유색인종 여성이었고 재스민의 들러리는 전부 유색인종 여성이었어요.
팟캐스트: 들러리들이 그랬다는 말이군요?
커트: 네
팟캐스트: 알겠습니다.
커트: 전통을 부수고 있는 셈이죠. 모두가 결혼식에 왔을 때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무섭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을 어떻게 앉혀야 할지 대해서도 고민했죠. 가족들의 문제도 있었고, 사고 대처에 대해서도 고민했습니다. 결혼식이니 사람들이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했어요. 서로 다른 집단이 어떻게 교류하는지 생각해야 했죠.
팟캐스트: 커트 씨의 백인 가족과 재스민 씨의 흑인 가족들, 그리고 두 분의 친구들이 어떻게 교류하는 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했군요?
커트: 네 그렇습니다. 입양 가족의 관점, 친구들의 관점, 거기에 미네소타 주밖에서 오는 재스민 가족의 관점 문제도 있었죠. 여러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지만 교류가 아름답고 훌륭했어요. 하객들을 어떻게 앉혀야 하는지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누구 옆에 누구를 앉힐 지, 테이블을 어떻게 배분할지, 인종적으로 테이블을 분리해야 하는지 고민했죠. 그 자리 선정은 즐겁기도 했지만 동시에 스트레스 받는 경험이었어요. 어떤 면에서는 전통적인 면모를 남기고 싶었어요. 우리가제임스 J 힐에서 결혼식을 진행할 때 가족들을 상석에 앉혔죠.
팟캐스트: 좋은 곳에서 결혼하셨네요?
커트: 네. 입장 통로가 없이 원형의 장소에서 결혼식을 했어요. 우리 경험을 중심으로 결혼을 진행하고 싶었고, 결혼이 서로의 가장 좋은 면을 사랑하고, 최악을 받아들이는 일이 되게 하고 싶었죠. 전통적인 나를 완성시켜준다, 나은 반쪽이다, 그런 서사는 강화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 둘 다 이미 완성된 사람들이지만, 서로 만나서 교류하면서 더 나아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팟캐스트: 재스민 씨와의 관계가 왜 유지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커트: 좋은 질문이네요. 우리는 범블 인터넷 웹사이트를 통해서 만났죠. 한 달 반 정도 전자 우편과 전화로 교류를 했습니다. 한 달 반이 지나고 나서야 직접 만나서 데이트를 시작했죠. 처음 관계를 맺기 시작할 때 가치, 소중한 물건, 정치, 인종, 관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고, 서로의 감정에 이해하고 시작했어요. 제가 입양아이고 백인 가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팟캐스트: 처음 사귀기 시작하셨을 때 아시아 남성-흑인 여성 사회를 찾아서 신기하다고 생각하셨나요? 지역 사회인지, 아니면 국가적 사회인지 모르겠지만 아시아계 남성을 매력적으로 느끼는 흑인 여성 사회를 찾으셨군요?
커트: 제가 처음 AMBW라는 단어를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블로그나 텀블러에서 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걸 처음 찾게 된 이유가 수많은 멋진 유색인종 사람들이 백인들과 사귀고 있는 사실을 봤기 때문이죠. 그런 연인 관계가 나쁘지 않지만, 그 관계가 무엇을 뜻하고, 인종 정의와 인종적 평등을 찾기 위해서 노력할 때, 사랑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궁금했어요. 복잡한 문제이고 다이너마이트와 같이 위험한 주제이기도 하죠. 그래도 AMBW 사회를 찾아서 안정을 찾았어요. 아시아계와 흑인을 매력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사회적 정의와 인종적 평등을 사랑을 통해 구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습니다. 거기에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죠. 사람들을 이국적으로 보거나, 페티쉬적으로 인식하고, 유색인종에게 판타지를 구현하려고 하는 문제가 있었어요.
커트: 유튜브에 아주 흥미로운 영상들이 존재해요. 펑 브라더스(미국의 중국계 미국인 유튜버 채널)에도 흥미로운 영상이 올라와 있죠.
-영상 발췌
흑인 여성: 아시아계 남성들이 흑인 여성들에 관심이 있다고 하지만 누구도 말을 걸지 않으니 사실인지 모르죠.
코러스: 아시아계 남성들이 직접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시아계 남성: 데이트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떤 면모를 기대를 한다면 자기 스스로도 그런 면모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MC: 그렇죠.
MC: 왜 더 많은 아시아계 남성이 흑인 여성들과 교류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흑인 여성: 엉덩이에 압도되지 마세요.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세요. 우리가 먹는 것을 좋아하니까요
MC: 음식 이야기를 하셨나요? 엉덩이 이야기를 하셨나요?
흑인 여성: 엉덩이 이야기이죠!
-영상 발췌 끝
커트: 그 채널에서 AMBW 연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선입견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본국에 많은 연결이 많은 1세대 아시아계 이민자들에게 더 관심이 있는지, 아니면 미국에 적응한 아시아계에 흥미가 있는지 묻기도 하고 아시아계 사회에 깊게 파고 들어갔죠. 아시아계 미국인과 미국의 관계, 흑인 사회와 아시아계와의 관계 등을 파고들어 가면서 우리 모두가 사람이고, 백인 우월주의적 제도가 미국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인간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인지, 제가 연구하다가 본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백인 부모들에게 충고로 다인종간 연애를 할 생각이 없다면 다인종간 입양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죠. 커트 씨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나요?
커트: 1번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본적이 없지만 흥미로운 관점이네요.
팟캐스트: 그 관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커트: 그러니 입양 부모가 다인종간 연애를 할 생각이 없다면 다인종간 입양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이죠. 네. 확실히 말이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취향이 사람들의 편견이나 인종차별적인 관점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해요. 피부색으로 사람을 판단할 뿐만 아니라 흰 피부가 검은 피부보다 더 매력적이라고 인식하죠. 60년대에 흑인 사회 운동가들이 나와서 백인들이 흑인 아이들을 입양하지 말라고 주장했습니다. 흑인 아이들은 흑인 가정에서 자라나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역사적으로 입양 부모들이 유색인종 아이들을 입양해서 여러 문제가 생겼죠. 연애 같은 경우에는 사랑은 사랑이고 특정 사람들을 매력적으로 느끼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발언을 통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편견을 무시할 수 있죠. 연애에 대해서는 쉽게 이야기합니다. 아시아계가 매력적으로 느끼지 않고, 다른 정체성이 매력적이지 않다고 쉽게 말해요. 하지만 모든 인종, 성정체성, 성지향성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존재하죠. 사람들의 정신이 그러한 다양성에 존재하는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팟캐스트: 한국계 입양아 남성으로서 백인 주류 사회에서의 연애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커트: 네 물론이죠. 제가 자라면서 첫 사랑은 베키 존슨이라고 하는 여자애였습니다. 금발, 푸른 눈이었고 백스트리트 보이즈의 닉 카터를 좋아하는 여자애였어요.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같이 무도회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죠. 그 애가 생각해보겠다고 하더니 거절했습니다. 거절당하니 아주 슬펐어요
팟캐스트: 그렇죠.
커트: 그때는 제 인종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베키가 백인이고 닉 카터가 백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죠. 하지만 언어적으로 제가 더 백인 여성이나 백인을 더 매력적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쾌락과 욕구에 대해서는 아시아계 남성이나 남성 정체성, 그리고 성 지향성을 가진 사람들이 여성을 압도하고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부장제와 이성애 정상성을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많은 경우에는 아시아계 남성, 입양아만 아니라 남성 전체가 자기 가치를 자기가 상대하는 성적 파트너의 숫자로 결정된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고등학교 때 거절당했던 일이 트라우마가 됐나요? 아니면 그냥 극복하셨나요? 커트 씨는 매우 자신감이 넘치시니까요.
커트: 아 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죠. 저는 대학교 남학생 사교 클럽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뾰족하게 머리를 하고 다니고 야생적으로 입고 다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럽네요. 하지만 제가 대학교 남학생 사교 클럽에 들어가 있었고 아주 즐거웠죠. 거기에 친구와 같이 웹사이트 Hot or Not.com에 등록했습니다. Hot or Not.com은…….
팟캐스트: 커트 씨가 만든 웹사이트가 아니군요?
커트: 아뇨. 우리 둘이 만든 웹사이트는 아니고 대학교 생활을 하다가 찾게 된 웹사이트입니다.
팟캐스트: 아 그렇죠. 저도 Hot or Not.com은 들어봤거든요.
커트: 네. 이 웹사이트를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설명을 하자면, 사진을 올리는 사이트인데, 그 사진을 보고 사람들이 1에서 10까지 외모를 평가하는 사이트였죠.
팟캐스트: Tinder(데이팅 앱)의 전신이라는 느낌이죠. 물론 여러 가지 기능이 없긴 했어요.
커트: 그렇죠. 그때는 인터넷에 얼굴을 내놓으면 인터넷의 변덕에 휘둘리게 됐었습니다. 친구와 제가 서로 내기를 했던 기억이 나요. 우리 둘 다 사진을 올리고 누가 더 높이 평가받는지 내기를 했죠. 친구는 백인 남성이었습니다. 인종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고, 순진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 사진을 거기에 올렸어요. 친구는 9점을 받았고, 제가 6점을 받았죠. 그게 제 상황을 보여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 저를 보는 모습이 다르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됐어요. 그런 문제가 저를 고민하게 만들고 자신감을 빼앗기도 했습니다. 그때 제가 춤을 추기 시작했죠. 리버 폴즈에 있는 위스콘신 주립 대에 입학했어요. 거기에서 현대 무용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행진 악단에 들어가 있었는데 열정적으로 하지는 않았어요. 물론 악단 경험은 대단했죠. 다른 주로 여행하기도 하고, 대회에 참여하기도 하고, 육체에 대한 교육을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무용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었죠. 대학교에서 운동선수서 무용수로 전공을 바꾸는 일도 꽤 쉬웠어요. 무용 자체도 마음에 들었고 여성들과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 더 좋았습니다. 제가 하는 일 자체가 달성감이 있고 육체적인 단련을 요구하니 마음에 들었죠. 자신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알았고,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받았어요. Hot or Not.com과 첫사랑에게 거절당한 경험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동시에 무용을 시작하면서 남자 무용수나 부드러운 남성에게 사람들이 보이는 호모포비아적 관점이나, 적대적 반응을 받아내야 했어요. 다른 문화에서는 강한 전사들이 최고의 무용수이기도 하죠. 미국 문화에서 없는 점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운동선수들이 최고의 운동을 할 수도 있지만 부드러울 수도 있고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죠.
커트: 제가 백인 여성과 연애를 하고 있을 때 아시아계 남성들이 잘 했다고 저에게 칭찬을 해주고는 했죠.
팟캐스트: 잘했어! 이런 느낌이었나요?
커트: 제가 무언가를 성공했다는 느낌이었죠. 특정 파트너와 연애해서 인종적인 계급 상승을 이뤄냈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러한 반응이 이상하고 불편했어요. 하지만 동시에 백인들과 연애할 때 정체성 정치와 인종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서로 맞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저와 관점을 공유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않는 연인을 가지는 일은 실망스러웠죠. 그러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유색인종 연인이라면 좀 더 인식이 넓지 않을까 기대했죠. 대부분의 경우 그랬지만, 미국에 퍼진 백인우월주의때문에 유색인종인데 문제가 있는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제 인식이 성장했다고 생각하지만, 미네소타에서 살고 있었으니 유색인종 자체가 적었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인터넷으로 다른 주의 유색인종 여성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팟캐스트: 여행을 자주 해야 하니 돈이 많이 들었겠네요.
커트: 네. 하지만 제 관점에서는 좋았습니다. 다른 주에 있는 다른 도시를 방문할 수 있었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지내고 있었으니 만약에 연애가 실패해도 큰 문제는 없었죠. 그 때는 다른 유색인종들과 연애하고 싶어 하는 유색인종들이 있다는 점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뭔가 인정받는 기분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커트 씨가 가지고 있었지만 자각하지 못했던 편견을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나요?
커트: 편견이요? 네 물론이죠.
팟캐스트: 백인 가족에게 입양되어 자란 한국계 입양아들의 경우 무의식적으로 백인의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죠.
커트: 네. 그렇죠. 더럽거나 사람들이 평가할 수 있는 문제를 공식적으로 논의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우리가 변화하고 개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동시에 자기 자신의 과거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와 같이 골프를 보러 갔었어요. 미니애폴리스 메트로 돔에서 일어나는 경기였죠.
팟캐스트: 커트 씨는 교외에서 사셨군요?
커트: 네. 교외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에 유색인종 다섯 명이 있었고 서로 친한 친구였죠.
팟캐스트: 오 그래요?
커트: 네. 제가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는지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35W 고속도로에서 내려서 워싱턴 방면 출구로 나오는 순간 찰칵하고 어머니가 차문을 닫으셨죠. 왜 그러는지 정확히 몰랐지만, 미니애폴리스 도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교외에 사는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에 문을 잠근다는 사실은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해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지만 내면적으로 무언가 영향을 끼쳤겠죠. 그 일에 연인 관계에 영향을 끼쳐서 흑인 여성이 시끄럽고, 공격적이고, 사람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아내와 이야기를 할 때 논의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제가 인종차별적 관점을 통해서 아내를 보고 있는지 생각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관점 문제는 언급하기 어려운 문제죠. 하지만 다인종간 연애를 하고 있는 연인들이 직시해야 할 문제이고, 오랫동안 사귀고 싶다면 확실히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팟캐스트: 인종 정의와 관련된 일을 어떻게 시작하셨죠?
커트: 좋은 질문이네요. 미네소타 주립대 대학원에 들어가서 무용학과에 입학하고 공부를 시작하면서 인종 인식 부족 상태에서 빠져나왔습니다. 무대에 서서 백인으로서 춤을 추면, 관객들이 그 인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니까요. 자신의 인식을 변화시켜야 했습니다.
팟캐스트: 커트 씨가 자기 스스로를 백인으로 생각하셨군요?
커트: 네.
팟캐스트: 커트 블룸버그라는 이름 자체가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군요?
커트: 네. 그 이름이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셈이었죠. 직접 말하니 상당히 부끄럽지만 제 과거이니 받아들여야 합니다. 절 도와준 사람이 두 유색인종 여성이었죠. 저와 같이 인종, 입양 경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도와줬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단체와 접촉하기 시작했어요. 미네소타 주립대에는 융합된 목소리(Voice is merging) 이라는 단체가 있어요. 2011년에 VICE와 영상 토론회를 진행했는데,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다른 유색인종이 직접 마이크 앞에 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광경을 봤어요. 다른 사람들이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저도 인종차별과 관련된 못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저 스스로가 가진 인종,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 시점부터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무엇이고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생각하기 시작했죠.
팟캐스트: 재탄생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커트: 네. 재탄생, 진화, 새로운 모습이 되는 느낌이었죠. 정확히 말하자면 제 경험을 묘사할 말을 찾았다는 느낌이었어요. 존재에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면 인식과 관점을 바꾸기 마련이죠. 제가 인종차별을 당했고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있으니 그냥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라고 받아들이는 일과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팟캐스트: 입양아들은 성장한 뒤에도 우리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없고 표현할 상태도 아닌 경우가 많죠.
커트: 우리 입양아 사회가 가진 기회이자 시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학의 비유를 들자면 처음부터 고등수학을 풀 수는 없죠. 기본 산수부터 시작해야 해요. 제가 인종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노력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관련된 실수를 할 기회도 없었죠.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면 우리가 모든 정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실패에 제한을 두죠. 그러한 행위가 우리의 가능성을 찾을 방법을 제한해요. 우리의 경험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입양아들이 사회 운동과 인종 정의 단체에서 경험을 공유하면 사람들이 이해해준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다른 사회에서 다른 경험을 했다고 해도 공통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이민자 사회에서도 부모가 왜 미국에 이민을 왔는지 숨기거나, 집에서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았던 경험이 있죠. 전부 미국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지 고민한 경험이 있어요. 그러한 경험이 부족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적응이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무용으로 다시 돌아가 보죠.
커트: 네 그러죠.
팟캐스트: 어떤 종류의 무용을 하셨죠? 현대 무용이었나요?
커트: 네. 현대 무용입니다. 춤추고 있는 모습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뭐지? 이런 감정을 느끼는 무용이죠. 행위 예술 기반 현대 미술이죠. 물론 현대라는 말 자체가 어디에나 쓰일 수 있는 단어이긴 해요. 제가 공부한 미네소타 대학교가 현대 무용에 특화되어 있는 대학교였고, 미니애폴리스-세인트 폴 트윈 시티 지역에서 5년에서 6년간 무용수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무용을 하긴 하지만, 지금은 일을 골라 하는 편이죠.
팟캐스트: 출근할 일을 고르시는 군요?
커트: 네 그렇습니다. 9시에서 5시까지의 스케줄에 맞춰 출근하고 리허설도 할 수 없으니까요. 제가 젊었을 때 할 수 있던 일을 이제는 못하죠. 전 무용이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는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육체를 좀 더 받아들여야 하는 행동이거든요. 단순히 제 정체성과 자아를 지성인의 관점으로 보기보다 더 가깝죠.
팟캐스트: 좀 더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커트: 물론입니다. 우리는 인종에 대해서 지적 공간에서 논하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직접 춤을 추고 있을 때는 육체, 정신, 뼈, 근육에 접근해야 합니다. 세포에 새겨진 기억에 접근해야 해요. 많은 원주민 문화들이 혈통 기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죠. 육체 자체가 선조들에게서 주어진 선물이라고 인식합니다. 입양아들 그리고 저는 정확한 출신을 모르지만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제 선조들과 연결망인 셈이죠. 무용수로서 활동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연결을 자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제가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비행의 감각을 느끼지 못하고, 사람의 몸에 깃들어 있는 가능성을 알지 못했겠죠. 들어가기 힘든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대단한 곳이라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인종 정체성을 커트 씨의 무용에 접목하기 시작한 시점이 유색 인종 여성들과 교류하기 시작했을 때였죠?
커트: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커트 씨의 무용이 어떻게 바뀌었죠?
커트: 아주 좋은 질문이네요. 육체에 대한 인식이 가장 먼저 바뀌었죠. 제가 같이 일한 회사 중 하나에서 회사의 인종적 구성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안무가가 있었습니다. 그 안무가는 차이점에 대한 무용 공연을 하고 싶어 했어요. 제가 그걸 보고 생각한 점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우선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그게 직업이었고 삶을 바친 일이었죠. 두 번째 느낌은 불편이었어요. 왜 백인 남성이 이 유색인종들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어 하는지 불편했죠. 이런 유색인종들을 모아서 백인 남성의 관점을 그려내는 일이 기회주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무용이 바뀐 이유는, 제 육체가 백인 남성이 원하는 정치적 도구가 아니고,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운동가들이 NPA(Network of Politicized Adoptee, 정치화된 입양아 연대) 와 연대해 입양아들과 움직이고 API(아사아인과 태평양 지역인)과 연대해 BLM 운동을 진행하는 등 같이 움직이고 함께 하는 모습, 시위대를 조직해서 구호를 외치고, 말하고, 움직이고, 살고, 숨 쉬게 하는 세계에서 함께 하고 싶었죠. 움직임은 그러한 세상에 들어가기 위한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팟캐스트: NPA를 시작한 사람들 중 한명이었나요?
커트: 아뇨. 그래도 현재 운영 위원회의 일원입니다. NPA는 정치화된 입양아 연대의 약자예요. 우리의 주 목적은 입양아 사회를 강화해 입양아의 삶을 개선하기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목표를 위해서 입양아 제도 자체를 개선하고, 입양아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죠. 2011년에 입양 부모들이 제공해주지 못하는 입양아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독서 협회이자 풀뿌리 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집중 대상은 이야기, 문학, 입양아에 의한 장학제도 등이었어요. 현재 우리는 중서부 혼합(Midwest Mixed, 미국 중서부 지역 기반 다인종, 혼혈, 다인종 입양아등의 연합 사회 운동 단체)과 연대해서 입양아 토론회도 열고 있고, 킴 박 넬슨(한국계 입양아 미국인 박사) 박사와 같이 협동해서 미국 다인종간 입양의 역사와 문화 1기를 만들었고, 현재 2기를 제작하는 중입니다. 이 시리즈에서는 미국 지난 100년간의 입양 정책과 적용에 대해 탐구하죠. 여러 토론회에서도 활동하고 있고, 그중 하나에서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와도 만났죠.
팟캐스트: 그랬죠.
커트: 오는 6월에는 협동 입양아 동반자 분열이라는 워크숍을 준비 중입니다. 입양아와 동반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는 워크숍이죠.
팟캐스트: 다른 토론회에도 참여하시나요?
커트: 콜로라도에서 열리는 토론회에 참여할 예정이에요.
팟캐스트: 콜로라도 토론회라… 좋네요.
커트: 네. 이야기 설명회도 열고, 입양아 다리(Adoptee Bridge, 미국 미네소타 기반 입양아 단체), 크리스티 하이만과 합작해서 올해 1월에 최초로 입양아 수련회를 미네소타 주 샌드 스틸에서 개최했죠. 미네소타 시골에서 자라서 살고 있는 다른 입양아들과 같이 활동할 수 있는 경험이 좋았어요. 미네소타 시골에서 겪는 경험은 트윈 시티 지역에서 자라나는 경험과 다릅니다. 저는 트윈 시티 지역에서 자라나서 훨씬 운이 좋았죠. 적어도 다른 유색인종들, 그리고 입양아들과 교류가 가능했으니까요.
팟캐스트: 이런 작업을 하시면서 뭘 얻으시나요?
커트: 다양한 결과를 얻죠. 성취감도 얻고, 배우는 점도 많고, 성장도 합니다. 한국계 입양아 인구가 줄고 있어요. 한국에서 나오는 입양아 숫자 자체가 줄고 있죠. 반면에 중국계 입양아들이 많이 증가했고, 아이들 중 최연장자가 현재 청소년입니다. 몇 년 뒤에 그 아이들이 주류가 되어서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경험에 대해서 글을 쓰기 시작하겠죠. 이미 조직을 만들고 연대하고 있어요. 현재 제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한국계 입양아 인구보다 중국계 입양아들이 더 늘어나면 어떻게 입양아들이 교류하고 연결될지에 대한 변화입니다. 지금까지 한국계 입양아들이 입양아 사회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결과 많은 예술, 많은 장학금, 많은 매체들이 한국계 중심이었는데, 이제 우리가 어떻게 다른 입양아 형제자매들과 교류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할 시점이 되었어요. 아주 흥미로운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문제를 만들기도 하겠지만 그러면서 강고한 경험과 변화를 겪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사람들이 정치화된 입양아 연대라는 이름 자체를 무서워한다고 생각하나요? 특히 정치화라는 단어를 사람들이 꺼려하나요?
커트: 정치화라는 단어 자체를 사람들이 꺼려하고 두려워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래야 하죠. 정치화라는 단어 자체가 사람들이 꺼려하고 어려워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해요. 그 단어 자체가 여러 가지 뜻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단체에게 있어서는 개인 서사보다 더 큰 흐름이 있다는 뜻이에요. 어떤 제도가 입양아의 삶에 영향을 끼쳤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단어이죠. 제국주의이든, 자본주의이든, 백인 우월주의이든, 정치화는 그러한 영향을 요약해서 설명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단체와 공간을 찾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표시이기도 하죠. 입양아이기 때문에 같은 인종 정체성과 다른 정체성을 공유하니 교류하고 싶다는 관점과 정치적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과 어려운 논의를 하고 싶다는 관점에는 차이가 있으니까요. 지금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러한 공간이 모두를 위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죠. 어느 사회이든지 다양한 관점을 가진 공간이 필요하니까요. 입양아이든, 성소수자이든, 사회운동가이든, 여성이든, 전부 다 다양한 관점을 가진 공간이 필요합니다. NPA가 저와 다른 입양아들에게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서사에 대한 이해만이 아니라 그 서사가 큰 제도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게 해줬죠. 최근 우리가 좀 더 대중적이고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자 다른 다인종 입양아들도 우리와 비슷한 단체를 만들고 비슷한 관계를 구축하고 싶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한 가지 정체성에만 국한되지 않고 더 거대한 사회 정의 운동이 벌어지고 있고, 그래서 연대의 힘이 나온다고 생각하죠.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연대를 이끌어내고 변화를 만들 수 있는 대화를 나누는 일이예요.
팟캐스트: 입양아의 힘이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커트: 네. 계속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죠. 주류 매체는 입양아들에게 입양아 사회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입양아 주도 공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항상 표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입양아들이 찾으면 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팟캐스트: 한국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요?
커트: 네. 한국 좋죠. 좋은 나라입니다.
팟캐스트: 언제 한국에 돌아가셨나요?
커트: 성가대 여행에 붙어서 대학 시절에 한국에 방문했어요. 이미 말했지만 대학은 백인 위주인 위스콘신 주립 대를 나왔거든요. 우리 지휘자가 한국인이라 그가 여행을 준비했죠. 그 경험 자체는 아주 긍정적이었지만 동시에 힘들었어요. 한국어를 못하는데 사람들이 받아들여 줄까, 이런 걱정을 했죠.
팟캐스트: 한국인처럼 느껴질지 의문이 드셨군요?
커트: 한국에 맞는 기분이 들지 궁금했죠.
팟캐스트: 그랬군요. 한국 여행이 커트 씨에게는 어땠나요? 한국이 좋다고 생각하고, 한국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나요?
커트: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저는 한국에 개방적인 태도로 접근하지 않았어요. 한국에서 불편했던 경험이 더 기억에 남았죠. 사람들이 저에게 다가와서 한국어로 말을 걸었지만, 제가 대답을 하지 못하니 이상한 얼굴로 봤던 경험만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러한 경험들을 한국에 대한 반감으로 바꾸었어요. 여행 이후로 제 마음을 치료하고, 한국계 입양아들을 한국어를 하지 않는 국가로 입양시켰으니 별수 없다고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제가 한국어를 배우지 않아서, 양부모님이 한국 문화를 배우게 하려고 했지만 제가 관심이 없어서 배우지 않았다고 자책하지 않는데도 시간이 걸렸죠.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시간이 걸렸어요.
팟캐스트: 고통스러운 일이지요.
커트: 제도적으로 한국 문화와 한국어를 배울 수 없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제가 가진 한국에 대한 불편함과 거부감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었죠.
팟캐스트: 그 뒤로 한국에 다시 방문하셨나요?
커트: 2015년에 KEEP을 통해서 북한에 방문했어요. 뉴욕 기반의 북한 교육 체험 프로그램(Korean Education Exposure Program)이죠. 그때는 아주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적어도 저는 대단한 경험을 했어요. 비자나 다른 소소한 문제가 있긴 했지만 좋았죠. 제가 남성이라서 같이 갔던 여성들보다 안전하다고 느꼈을 지도 모릅니다. 한반도의 역사를 배우고, 한국 전쟁 이후에 김일성이 일본에 학생을 보내서 재일교포를 지원해 줬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재일교포는 일본에서 자란 한국계 일본인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물론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죠. 하지만 김일성이 재일교포들을 다시 한반도로 불러들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남한이든 북한이든 우리를 다시 불러들이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어요. 한반도는 가난하고 전쟁을 겪은 국가라서 입양아들을 없애야 한다는 서사를 배웠는데, 북한에서 북한 아이들을 최대한 지키려고 하고, 또한 해외의 국민들을 도왔다는 서사를 들으니 저의 정신에 있어서 큰 안정을 가지고 왔습니다.
팟캐스트: 일본에 대한 이야기군요?
커트: 네. 일본만이 아니라 북한이 세계 곳곳에 한국 이민자를 위한 학교를 세우고 북한으로 사람들을 돌아오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팟캐스트: 4년-5년 전에 돌아갔을 때, 그리고 지금의 커트 씨는 한국에 만연한 가부장제를 어떻게 느끼셨나요? 커트 씨가 남자로 취급되어서 일종의 특권을 받았다고 생각하나요?
커트: 네 물론이죠. 입양아의 관점에서도 많은 이득을 봤다고 생각합니다. 제 친부모 조사를 했을 때 제 친어머니가 세 명의 아이가 있었고, 유부녀였는데, 야유회에 갔다가 유부남을 만났고……. 제가 태어났죠.
팟캐스트: 그 이야기가 커트 씨의 배경 이야기군요?
커트: 제 친아버지가 어머니가 임신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관계를 끊었고, 친어머니가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시니,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이혼했고, 친어머니가 저 혼자 저를 키우려고 했지만 못하셨다고 하더군요. 저는 사랑으로 인해서 태어난 아이지만 동시에 남자들이 책임을 지지 않아서 생긴 문제이기도 하죠. 가부장제가 입양아들의 세계 인식과 존재에 영향을 끼치고, 가부장제가 군사화나 육체 권리에 영향을 끼치는 일을 볼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 KEEP 프로그램과 무엇을 하고 계셨죠? 북한에는 왜 방문하셨나요? 의료 물품을 전해주기 위해서 방문하셨나요?
커트: 네. 주목적은 의료물품 지원이었지만 미국과 북한 간의 분쟁 때문에 북한이 의료물품 지원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3주간 시민, 학생 그리고 정부 요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어떤 생활을 보내고 있는지, 그리고 같은 민족과 전쟁을 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토론했죠. 우리가 한반도에 대해서 배우고, 한반도의 군사화, 중국을 남한 군대를 통해 견제하는 움직임, 한반도 평화 추구와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어요.
팟캐스트: 한국에서 그렇게 좋은 경험을 하지 않았는데 왜 다시 돌아가시게 되셨죠?
커트: 다른 아시아계와 교류하고 생활한 경험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API 회담, 유색인종 작가와 시인들이 모여서 미국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논한 로프트 문학관 이퀄리브리엄 토론회도 있었죠. 토론회에서 미군이 다른 나라에서 하고 있는 일과 왜 흑인과 다른 유색인종들이 전쟁 때문에 난민이 되어서 미국으로 오는지에 대해서 토론했습니다. 다른 한국계 입양아가 북한을 방문한 경험에 대해서 발표를 했고 그 발표를 듣고 북한에서의 경험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그래서 북한 방문 프로그램을 신청했고, 받아들여져서 북한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팟캐스트: 그 여행에서 감명 깊었던 점이 무엇인가요?
커트: 북한 방문 자체가 대단한 경험이었죠. 북한에서 아주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다시 돌아와서 입국 심사 때 2시간 정도 심문을 받았어요.
팟캐스트: 커트 씨가 북한에서 본 것이나 뭘 했는지 물어봤나 보군요?
커트: 네. 북한에서는 안전하다고 느꼈지만, 미국에 돌아오니 안전하지 않고 압박을 받았던 점이 특이했죠. 북한에 방문했다는 이유로 제가 왜 북한에 방문했는지 묻고, 제 짐을 뒤져보고, 제 몸을 전부 검사하고 따로 방에 들어가서 저를 심문했어요. 트럼프 행정부와 정책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미국은 미국이 싫어하는 사람들을 들어오지 않게 하는 일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팟캐스트: 같이 방문한 사람들이 전부 입양아였나요?
커트: 아뇨. 총 9명이 있었죠. 그중 3명이 입양아였습니다. 여러 지역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중서부 출신, 동부 출신, 서부 출신, 남부 출신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제가 중서부 대표로 참여했죠. 한반도에 대한 진실과 화해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에 방문하면 한국에 소속감을 느끼나요?
커트: 좋은 질문이네요. 물론 제 에고는 어디를 방문하든 소속감을 느끼고 주변 사람들에게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한국에 가면 가짜같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충분하지 않다는 감정에서 비롯되는 문제이죠. 제가 미국에 있던 한국에 있던 계속 생각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죠?
커트: 예술과 사회 운동 조직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노력하죠. 창조를 하면서 그걸 풀어내려고 합니다. 총기난사, 아시아인 민권 운동, 흑인 민권 운동, 경찰 폭력 반대 운동을 반대하기 위해서 사람들 같이 연대하면서 저항하는 광경이 저에게 있어서 치유예요. 이러한 믿음을 혼자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 세상에 문제가 있고 그걸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일, 세상이 잘못되어 있고 그 사실을 보고 인식하는 일입니다. 2016년에 필라난도 카스틸이 경찰에게 살해당했을 때 미네소타 주 박람회를 개최를 막기 위한 시위가 벌어졌죠. 그 시위에 아시아인들이 참여하니 연대가 가능하겠다고 느껴서 아시아계-태평양계 BLM 트윈 시티 지부를 설립했어요. 아시아계-태평양계 사회 운동과 BLM과의 연대를 추구가 목적이었고, 경찰 폭력, 경찰 군사화 등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토론하고 활동하면서 정신적으로 치유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거기에 북한에서의 경험까지 더해서 이러한 대화에 제가 지원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죠. 단순히 입양아가 아닌 아시아계 미국인, 유색인종, 흑인 사회의 자유를 지지한 동료로서 이 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팟캐스트: 이 활동이 커트 씨에게 활력을 준다는 사실이 보이네요.
커트: 네 그렇습니다. 제 일부는 이 가능성에서 많은 기쁨을 느껴요. 사람들이 시위할 때 같이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는 모습을 보면 설명하기 어렵지만 마법적이죠. 직접 보고 느껴야 하는 감정이고 다른 어떤 방식으로 그 행동을 복제할 수 없어요. 하지만 움직임과 예술이 그 찰나의 아름다움을 보여줘야 하고, 항상 잡아낼 수는 없지만 그곳에 있다면 확실히 영향을 받을 수 있죠.
팟캐스트: 뭔가 하고 싶다고 하셨죠?
커트: 네. 창조와 사회 운동 조직에 있어서 제가 좋아하는 점은 다른 조직들을 연대해 이끄는 사회자의 역할을 하는 일을 좋아해요. 미스 사이공 보이콧 연대를 조직해서 오드웨이 극장에서 미스 사이공 공연을 막았던 때가 생각이 나는데…….
팟캐스트: 배경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나요? 관련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커트: 오드웨이 극장은 미네소타 세인트폴에 있는 연극 극장인데, 미스 사이공이라는 연극을 다시 공연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연극은 베트남 전쟁 말기가 배경이고, 설명하기 어려운데, 백인 구세주, 미국 군대 미화, 베트남 여성이 미군과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고 미군에게 아이를 맡기는 서사가 나오는데, 이 모든 배경이 사이공이죠. 다른 집회 구성원들은 이 연극에 대해서 훨씬 정교한 묘사를 썼어요. 우리 세인트 폴 시민 사회가 세 번이나 시위를 하면서 미스 사이공과 이 서사는 우리 사회에 맞지 않고, 세인트폴에 거주하고 있는 베트남인이나 몽족의 서사에 맞지 않는 묘사이며, 오드웨이 극장이 공공시설이고 공공 기금을 지원받으니 시민의 주장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오드웨이에서 3번째 미스 사이공 공연을 결정하자, 단순히 교육이나 연대가 아니라 오드웨이 밖에 있는 프로스펙트 공원 점거 시위를 하고 싶었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만이 아니라 연대자들과 함께 대규모 시위를 진행하기로 했죠. 변화, 창조, 시인도 초대해서 시도 발표할 예정이었고, 단순히 미스 사이공에서 보여주는 모습보다 더 깊은 문화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로 했어요. 개인적으로 아주 대단한 계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관련 이야기를 하자면, 이 시위와 관련된 안무를 만들어서 카오미 씨와 공유하고 싶거든요.
팟캐스트: 일어나야 하나요?
커트: 아뇨. 그 시위 때 아주 즐거웠죠. 세 가지 안무가 있어요. “이 연극을 멈춰라 이 공연을 멈춰라 미스 사이공은 가야 한다!” “이 연극을 멈춰라 이 공연을 멈춰라! 미스 사이공은 가야 하다!” “거짓말도 그만! 고통도 그만! 미스 사이공이 뇌를 오염시킨다!” “거짓말은 그만! 고통도 그만! 미스 사이공이 뇌를 오염시킨다!” “멈출 수 없고, 멈추지 않고, 이 연극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이 연극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멈출 수 없고 멈추지 않고, 이 연극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이 연극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