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Season 4 (시즌 4)

시즌 4, 에피소드 5: 그레이스 뉴턴

Audio available Oct. 27, 2020 at 7 a.m. EST.

중국계 입양아 그레이스 뉴턴 (26세)는 성장과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산업적 제도인 국제 입양에 대한 학습에 관한 이야기를 공유한다. 외동딸로서 뉴턴 씨는 부모와 깊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국제적, 다인종 간 입양의 역사를 공부하게 되면서 부모와 어려운 논의를 하게 되었다. 뉴턴 씨의 탐구심과 진실에 대한 욕구는 여러 번의 중국 방문으로 이어졌고, 각 방문에서 다른 관점을 얻어 올 수 있었다. 뉴턴 씨는 날카롭고 비판적인 비평을 주기적으로 공유하고 있으며, 입양아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그레이스: 제 이름은 그레이스 뉴턴입니다. 제가 3살 때 난징에서 입양되었죠. 제 중국식 이름은 추핑화입니다. 가장 최근 중국 여행으로 이 이름을 고아원의 보모께서 지었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 사실을 알게 되어서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전 위스콘신주 매디슨에서 자라났습니다. 백인 인구가 다수인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시아계 여성이 지나가면 손가락질하지 말라고 주의 주던 기억이 나요. 아주 특수한 경험이었습니다. 우와 나와 닮은 사람이네. 그리고 트윈시티(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세인트 폴 지역)에 있는 매칼리스터 대학교에 진학했을 때 아시아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찾았고 입양아의 정체성도 찾았죠. 부모님의 품을 떠나 새로운 도시에서의 삶을 시작했던 일로 다른 사람들이 저를 인식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죠. 제 고향에서는 사람들은 절 부모님의 딸로 인식했고, 저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대학교에 오니 저는 그냥 평범한 아시아계 미국인이었고, 입양아인지, 어떤 배경의 아시아계 미국인인지는 사람들이 몰랐습니다. 그래서 취약하고 노출된 느낌을 받았죠.

그레이스: 대학교는 저에게 있어서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1학년 때 “국제적 관점-국제적 다인종 간 입양에 대한 인종, 정치, 제국적 해석”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한국계 입양아 교수님이 가르치는 강의였죠. 전 중국계 입양아 중에서는 나이가 많은 편입니다. 중국 국제 입양이 1991년에 시작되었죠. 그래서 입양아 행사 같은 데에서 중국계 입양아들에게 있어서 관리자, 지도자 역할을 맡는 데 익숙해져 있었어요. 그래서 이 교수님을 만난 일이 최초로 저보다 나이가 많은 아시아계 입양아와 관계를 맺은 일이었죠. 아주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입양아들은 고립된 경우가 많죠. 가족에게 있어서 첫 입양아이거나, 첫 아시아계 일원인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인종적 교범이나 우리의 정체성에 맞는 스승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교수님이 가르치는 그 강의를 듣고, 다섯 명의 다인종 간 입양아 친구들을 사귀었어요. 그때 최초로 입양아 친구 집단을 만들었어요. 개별 중국계 입양아 친구들이 있긴 했지만, 한곳에 모여서 서로를 아는 친구 집단이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죠. 유대감이 형성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입양에 대해서 새롭게 보게 되었고요. 입양의 역사와 언론에서 언급되는 입양의 문제점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강한 뒤, 제가 배운 것을 더 확인하고 싶었고, 저에게 있어서 강의가 끝난 것 같지 않았어요. 그래서 여름에 집에 갔을 때 블로그를 시작했죠. 제 블로그 Red Thread Broken입니다. 처음에는 제가 입양에 대해서 생각하고,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와 저, 그리고 제 친구들의 경험을 비교해 보기 위해서 사용했어요. 그리고 처음 시작한 이유보다 훨씬 거대한 계획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레이스: The Land of Gazillion Adoptees(수많은 입양아의 땅) 블로그 창립자 케빈 보머스가 저에게 연락해왔고 Family with Children from Asia Midwest(아시아 출신 아이들의 가족 중서부 지부)의 지도부도 연락을 해왔고, 같이 봉사활동도 진행했습니다. 새롭지 못하지만 대단한 경험이었죠. 하지만 미국, 그리고 나아가서 전 세계의 입양아들과 저를 연결해주었고 전문적으로, 개인적으로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또한, 일반적으로는 제가 몰랐을 다양한 입양아 단체도 알게 되었죠. 현재 전 KAAN, the Korean American Adoptee Adoptive Family Network(한국계 미국인 입양아 입양 가족 단체)의 자문 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중국계 입양아인 제가 한국계 입양아 단체에서 일하고 있다니 조금 웃기긴 하지만, KAAN은 모든 입양아를 환영하고 있어요. 또한, 모든 다인종 간 입양아들 사이에 출신 국가와 상관없이 많은 공통점과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우선 현재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그레이스: 26세입니다.

팟캐스트: 좋아요. 그 강의에서 한국계 입양아 교수와 다인종 간 입양을 공부할 때 다른 입양아들도 있었다고 하셨는데, 전부 한국계 입양아였나요? 

그레이스: 1명은 중국계, 1명은 한국계, 1명은 과테말라계, 그리고 다른 한 명은 파라과이계였죠.

팟캐스트: 강의에서 가르친 내용은 어땠나요? 한국 입양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쳤나요? 그렇다면 중국계 입양아로서 한국 입양 역사에 대해서 배우는 느낌은 어땠죠? 

그레이스: 수업 자료는 한국계 입양아들이 작성한 자료들이 많았어요. 제인 정 트렌카가 쓴 피의 언어라던가, 한국계 입양아 케빈 보머스를 알게 되기도 했죠. 하지만 다른 자료들은 다른 지역의 입양아들에 대한 자료기도 했습니다. 호주의 다인종 간 입양과 뿌리 찾기에 대해서도 배웠어요. 문화적 인종학살과 애버리지니 인구의 제거를 위해서 진행되었던 계획 일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호주 식민 시기에 시행되었던 정책으로 애버리지니 아이들을 고향과 사회에서 빼앗아 백인 사회와 백인 가정에서 키워, 백인 사회에 익숙하게 만드는 계획이었죠. 그렇게 되면 애버리지니들이 백인과 결혼할 것이고, 백인 혼혈을 통해 애버리지니를 지워버린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상당히 끔찍한 계획이었죠. 또한, 미국 원주민 기숙학교에 대해서도 배웠어요. 이 정책도 호주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죠. 그리고 고아 거래도 배웠습니다. 이 강의가 한국인 입양아의 관점을 넘어선 다양한 입양 경험에 대해서 가르치는 데 성공했다고 봐요. 오히려 저는 미네소타주 입양아 사회가 좀 더 한국인 입양아들에게 관점이 맞춰져 있다고 봤어요. 물론 같이 수업을 들은 입양아 친구들이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팟캐스트: 이러한 입양의 어두운 역사적 배경과 뿌리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부모님과 입양의 문제에 대해서…. 아니 그 이전에 부모님과 입양이나 정치에 관해서 이야기해보신 적이 있나요?

그레이스: 제 부모님은 항상 입양과 중국에 대해서 열린 태도를 보이면서 저를 대하셨죠. 매주 토요일마다 중국 학교에 다녔고 설날마다 홍바오(중국 새뱃돈, 붉은 봉투에 넣어준다)를 주셨습니다. 다른 중국 문화적 활동도 했어요. 그리고 매년 중국계 입양 가족을 위한 중국 캠프도 참여했죠. 부모님은 저와 아시아 미국인의 정체성을 항상 지지해 주셨고 제 중국인 정체성과 아시아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여길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입양과 관련해서는 제가 성장기 때 어머니가 “내 최고의 기쁨은 누군가의 슬픔으로 만들어져 있어.” 라고 말하셨어요. 그래서 저와 어머니가 아는 적은 지식 내에서 열린 대화를 나누었죠. 그리고 대학교 강의에서 이러한 정보를 배우고 나니 부모님이 그 정보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셨죠. 중국에서 입양하실 때 공식적이고 깨끗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입양을 하셨거든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입양하시려고 할 때 중남미 입양은 부정부패로 중단됐고, 베트남 입양도 부정부패로 중단되었다가 지난 몇 년 동안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이렇게 여자애들이 고아원에 많았던 이유는 계획생육정책과 유교적 전통의 남아선호사상, 아들은 부모를 돌보게 되지만 딸은 결혼하면 남의 가족이 된다- 라는 복잡한 사상의 연결 때문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사람들이 중국에서 버려진 여자아이들을 도우려 했죠.

그레이스: 그래서 중국계 입양아들은 크게 두 세대로 나눌 수가 있어요. 첫 세대는 고학력, 고연령대의 부모들이 대부분 여자애를 입양한 경우입니다. 다음 세대의 중국 아이들은 장애인이 많아요. 입양하는 부모들도 젊고, 더 많은 모금 계획들에 존재해요. 그 세대의 차이점이 흥미롭다고 생각했죠. 제 부모님에게 국제적 입양이 거대한 국제적 절차이자 산업이고 요구와 공급이 있고 아이들이 상품처럼 거래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부모님, 특히 어머니는 저와 입양아 사회에서 떨어진 채로,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그것을 받아들이셔야 했어요. 저는 입양아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어요. 또 이 수업이 미네소타 저녁에 진행되는 수업이었죠. 저녁 7시에 10시까지 진행됐고, 밤 열 시에 울면서 학교 건물에서 걸어 나오곤 했습니다. 그리고 밤에 그것도 힘들 때는 좋은 대화가 나오기 힘들죠. 감정적으로 좋지 않은 과정이었고 어머니에게 자주 전화를 드렸어요. 그래서 그 강의를 3단계로 받아들였습니다. 첫 과정은 분노였습니다. 입양 제도에 대한 분노, 아니 처음에는 교수님에 대한 분노였죠. 제가 배우고 있는 모든 사실을 거부하고 싶었습니다. 다음 단계는 깊은 슬픔이었어요. 저의 어린 시절과 유아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 슬픔을 되새기는 과정이었죠.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그 경험과 역사를 결합하고 정보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제가 받아들이고 싶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단계였습니다. 저와 제 부모님에게 있어서 감정적으로 힘든 시기였어요. 

팟캐스트: 이해가 되네요. 그 시기에 부모님이 그레이스 씨와의 친밀함을 잃고 있다고 걱정했고, 그레이스 씨는 부모님도 입양 제도의 일부라 불편했나요? 

그레이스: 네. 제가 강의를 듣기 전이 생각이 납니다. 막 입학했고 그 강의 수강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농담으로 “강의를 듣고 우리가 제국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라고 하셨죠. 우리의 관계가 바뀌고 있고 이러한 변화 때문에 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는 공포가 조금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와 부모님의 관계에 있어 이러한 대화를 나누는데 여러 가지 이점이 있었어요. 우선 저는 외동딸입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아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죠. 그리고 이 가까운 관계가 이러한 복잡한 대화를 진행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이점은 부모님이 그렇게 종교적인 분들이 아니라는 점이죠. 그분들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입양을 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 영향이 자신들의 입양 과정과 제도에 의문을 가지는 입양아들에게 다른 문제를 부여하거든요. 이 모든 것이 신의 계획인가? 라는 의문이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부모님이 저를 입양한 이유가 불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이 아이를 가지고 싶다- 라고 생각하시긴 했지만 그게 절 입양한 이유는 아니었죠. 불임 문제로 입양된 입양아들은 그러한 문제도 겪어야 하거든요. 그들이 대안적인 선택이었다는 문제를 마주 봐야 하죠. 거기에 제가 외동딸이라 우리 가족, 제 개인에게 입양 제도와 인종이 미치는 영향을 알아가는 감정적인 과정을 거칠 때 부모님이 돌봐야 할 다른 형제자매들이 없어서 저에게 에너지를 전부 쏟을 수 있었던 것도 운이 좋았죠. 그래서 부모님이 저와 같이 이 새로운 길을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부모님과 같이 이러한 입양 과정에 대한 정보를 이해하시면서 관계가 더 돈독해지신 것 같네요. 어머니와 같이 컨벤션에서 발표도 하셨다고 들었는데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그레이스: 발표의 이름은 이제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딸이 성인이 되면서 어머니와 딸의 관계 변화에 적응하는 것에 대한 발표였죠. 그리고 발표한 내용은 제가 바로 전에 언급한 입양 사회에서 우리들의 경험을 수용하는 절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기억이 희미하고 제 어머니가 발표한 부분을 제가 대신 설명하고 싶지는 않아요. 어머니는 저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료이며, 지지자입니다. 제가 블로그를 만들었을 때 어머니에게 이 블로그를 시작할 것이라고 설명해 드렸어요. 어머니는 일기를 쓰면 안 될까? 라고 말씀하셨죠. 인터넷에 있는 나쁜 사람들이 저를 스토킹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상당한 기간 동안 익명으로 블로그를 운영했어요. 제가 입양에 대한 블로그를 운영하고 입양 사회에서의 인종, 권력, 자본의 영향에 관해서 이야기한다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냐.”이라고 묻습니다. 부모님이 절 적극적으로 지지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이 아주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약간의 거부감이 있긴 했지만, 저의 안전에 관련된 일로서 어머니의 본능 때문이었지, 제 감정과 제 일에 반감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팟캐스트: 대단하네요. 저도 그레이스 씨의 블로그를 구독하고, 국제 입양아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죠. 비판적인 관점으로 입양에 대해서 논하고요. 그리고 매우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시죠. 많은 입양아가 그러한 표현과 비판을 하려고 하지만 부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무서워서 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감정이나 생각, 입양에 대해 분노하거나 답답한 점을 말하지 못하죠. 입양에 대해서 비판하지 못하는 겁니다. 물론 사람들이 그레이스 씨의 가족에 대해서 알지는 못하겠지만 가족분들이 그레이스 씨를 지지해 주니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중국 입양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해보죠. 어떻게 시작됐는지에 대한 요약을 해줄 수 있나요?

그레이스: 네. 중국이 계획생육정책을 1979년에 시작했습니다. 중국은 그 시점에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겪고 있었고, 그 인구 증가를 지탱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 하에 시행된 정책이었죠. 그래서 가족 숫자를 줄이기 위한 선전 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공식 정책이 시작되었고 수만 명의 여성에게 강제 불임 수술이 시행되었습니다. 수많은 강제 낙태도 진행되었고요. 그리고 90년대 초반에 중국이 국제 입양을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여자아이들이 버려졌기 때문이죠. 중국 정부가 이 제도를 만들었을 때 부잣집은 돈을 내고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수 있었지만 보통 가정은 그러한 비용을 낼 수 없었죠. 중국에서 아이를 입양 제도에 맡기는 행위는 당시에는 불법이었고 아이 살해는 불법에 비윤리적이었어요. 그래서 여성은 아이를 한 명밖에 낳을 수 없고, 한 명 이상 낳게 되면 합법적으로 그 아이를 처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익명으로 여자아이들을 버리는 일이 늘어났습니다. 몇몇 아이들은 편지나 장신구와 함께 버려졌죠. 하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만약에 아이를 버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떤 보복과 문제가 생길지 겁을 냈기 때문이죠. 이러한 사실은 어린아이들에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친부모가 아이를 버리거나, 문 앞에 두거나, 상자에 넣어서 가게 앞에 버리니까요. 하지만 많은 아이가 아침이나 출근 시간 직전에 버려졌다고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바로 찾아서 경찰이나 고아원에 인계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러한 과정이 중국 입양 제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레이스: 처음에는 많은 아이가 여자아이들이었어요. 중국 가족들은 아들을 중시했기 때문이죠. 그 뒤로 2004년까지 중국 입양은 계속 성장하다가 후난성 추문이 터졌어요. 이 추문은 천 명의 아이들이 가족들에게 납치되어 인신매매되어 고아들의 숫자를 유지하기 위해서 6개의 고아원에 공유된 추문이었어요. 그 추문이 터졌을 때 고아나 적어도 부모의 허락을 받아서 아이들을 입양했다고 생각한 많은 입양 부모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의 아이들이 납치된 아이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요. 그 시점에서 중국 입양이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죠. 

팟캐스트: 중국 정부에 있어서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정부가 가진 문제 반발 중 일부였나요?

그레이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몰라요. 중국에서 많은 납치 사건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중국은 인구가 많다 보니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정부에서 관련 반발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어요. 중국 정부는 비판점이 많다 보니 당연한 일이죠. 그래도 그 사건이 사람들이 이러한 입양 절차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사실을 알게 했습니다. 친척들이 강제로 부모가 아이들을 입양하게 하는 이야기도 많아요. 정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팟캐스트: 중국 입양의 장점 중 하나가 아이들이 친부모에게 버림받아 친부모와의 연결이 없이 깔끔하게 이별한다는 점이고, 양부모들이 그러한 사실을 매력적으로 여겼기 때문에 중국 입양 제도가 빠르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그레이스: 많은 국제 입양에 있어서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입양 부모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경우가 있죠. 국내 입양보다 국제 입양이 친부모가 아이들에게 나타날 가능성이 적다고요. 그러니 그런 깔끔한 이별을 선호하는 것도 말이 되죠. 국제 입양의 입양아들이 친부모를 찾으려고 해도 긴 시간이 지난 뒤죠. 국내 입양의 경우 입양아들의 정보와 친부모와의 인연이 유지되는 경우가 많고요. 

팟캐스트: 절 포함한 입양아들이 고아라고 인식됐지만, 현재는 많은 입양아가 친가족을 찾고 있죠. 우리가 진정한 고아가 아니라 친족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레이스: 네 그렇습니다. 저번 학기에 국제 아동 복지에 대한 수업을 들었어요. 그리고 제도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인도계 입양아와 교류하게 됐습니다. 아동을 고아원에서 좀 더 가족과 같은 입양 가정 제도에서 돌보는 방식으로 변화하는 제도화에서 일하고 있었죠. 지표에 따르면 현재 고아원에서 지내고 있는 아이들 80%가 1명 이상의 생존하고 있는 부모가 있다고 하더군요. 고아원에서 지내고 있는 아동 중 대다수가 진짜 고아가 아니라는 거죠. 부모들이 고아원에 아이를 맡기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가난이고, 두 번째 이유는 아이들의 교육입니다. 그래서 국제 입양 제도와 관련된 자본, 특히 서구 자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죠. 국제 입양은 각 아동 당 2만 달러에서 5만 달러가 듭니다. 사람들이 그 많은 자본을 아이들의 고향, 사회와 가족들에게 투자한다면 얼마나 많은 아이가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을지 생각할 때가 있어요.

팟캐스트: 유전자 검사로 인해서 중국 입양아들이 얼마나 영향을 받았나요? 거의 어떤 정보도 주어지지 않고 입양되고, 단체도 개입되지 않아, 서류도 없이 입양된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유전자 조사가 그분들의 친부모 조사에 큰 영향을 끼쳤나요?

그레이스: 네. 현재 중국계 입양아 사회는 유전자 검사를 위해서는 23 and Me(미국의 유전자 검사 회사)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전자는 아주 흥미로워요. 개개인에게 있어서 특별하고 입양아들을 중국에 있는 친척이나 입양된 형제자매들과 이어줄 수 있으니까요. 유전자 검사의 문제 하나는 양부모가 자식들이 어린이면 대리 검사가 가능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있어요. 그 문제에는 복잡한 감정이 있어요. 국제 입양된 뒤 최대한 빠르게 조사를 시작하면 입양아들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죠. 하지만 입양아들의 의사 문제가 있죠.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느냐, 미래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유전자 정보를 데이터베이스에 맡기는 행위의 의미를 아는가, 등의 문제가 있죠. 하지만 전 많은 어린 중국계 입양아들이 유전자 검사를 통해 형제자매를 찾거나 친척을 찾은 사례를 알고 있어요. 입양아가 형제자매에 대한 정보, 가족 유전병 여부 등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은 특권이죠. 저도 23 and Me 검사를 진행했지만, 항상 무언가를 빼놓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제 친척이 Ancestry.com(미국의 또 다른 유전자 검사 회사)이나 다른 유전자 검사 회사를 사용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친부모 조사를 할 때 최대한 할 수 있는 조사는 어디까지인가? 라는 점을 요즘 자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레이스: 중국계 입양아 중 상당수가 미혼모에게 입양되어 자랐습니다. 중국이 미혼 입양을 허락한 몇 안 되는 국가였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현대 중국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시죠? 심각한 성비 불균형을 겪고 있고 남성들이 결혼하려면 부모를 파산시킬 정도의 비용을 들여야 하니까요.

그레이스: 계획생육정책의 뜻하지 않은 영향이겠죠. 답답한 부분은 인구 전문가들이 중국 정부가 계획생육정책을 수정해 두 명의 아이를 허락하지 않으면 퇴직하는 사람들을 대체하고 성별 균형을 맞출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해왔다는 점이에요. 계획생육정책 자체도 3년 정책이고 그 뒤로는 천천히 제거되어야 했을 정책이었지만 더 길게 유지되었고 과학자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진행되었죠. 그래서 이러한 성별 불균형이 존재하는 국가들에 큰 문제가 닥쳤다고 봐요. 중국 남성들의 결혼 불가나, 동남아 지역이나 중국으로의 신부 매매, 남성이 더 많은 사회의 성폭행이나 폭력 사건 증가 등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이 중국인들에게 끼치는 나쁜 영향이나 중국 입양아들의 탄생에 미친 영향을 보면 화가 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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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중국을 3번 방문했습니다. 첫 방문은 13살 때였죠. 부모님과 같이 유산 여행을 하면서 방문했어요. 3주간 방문했고 베이징, 시안, 상하이를 단체 여행으로 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도중에 고향 마을들을 따로 방문했어요. 그리고 그 고향 마을 방문 때 여행사가 가족들을 위해서 통역사들을 붙여주었습니다. 두 번째 방문은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같이 갔었죠. 일주일간 두 명의 선생님의 인솔하에 간 여행이었습니다. 제가 부모님에게 관광객으로 중국에 가는 일이 저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설득하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에는 입양과 관련된 일러 갔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중국에서 단순한 관광객이 될 수 없다는 사실만을 알았죠. 그리고 세 번째 방문은 유학 목적이었습니다. 제 고향인 난징에서 3달에서 4달 동안 유학을 했어요.

팟캐스트: 중국과의 관계가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어떻게 바뀌고 변화했죠? 특히 3번째 방문 때 직접 거주한 뒤에는 어떻게 바뀌었나요?

그레이스 : 중국과의 관계는 제가 자라면서 좀 더 친밀하게 변했다고 생각해요. 제가 어렸을 때 중국의 사진을 구글로 찾아보면서 중국의 사진들이 친숙해 보이길 원했지만 그렇지 않았죠. 토요일 중국 학교도 다녔고 중국 문화 경험도 있었습니다. 다큐멘터리도 보고, 영화도 봤죠. 하지만 그것들을 이해할 맥락은 얼마 없었어요. 13살 때의 여행이 독특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국적이지만 동시에 편안한 경험이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적응을 잘하지 못했죠. 그 여행을 하면서 한 번도 화변기를 사용하지 않고 넘어갔던 기억이 있어요. 위업이라면 위업인 셈입니다. 고등학교 때 여행은 똑똑한 기분이 들었어요. 이미 한번 중국에 와서 이 도시들을 본 적이 있었죠. 다른 애들이 가지지 못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더 아시아인 같고 더 지식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애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었죠. 난징에서 한 학기 동안 유학할 때는 좀 더 복잡하고 감정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어학연수와 관련된 프로그램 일부로 갔었죠. 중국어에 집중하고 저에게 있어서 아주 감정적인 교육 과정이4었어요. 중국 국적인 사람들과 저는 달랐죠. 중국에서 자라고 중국 문화를 알고 있는 중국 대학생들과는 달랐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제가 매우 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제 것이어야 하는 언어를 다시 소유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고향이어야 하는 도시를 다시 소유하는 과정이기도 했어요. 

그레이스: 제가 중국에 거주하던 학기 동안 제 고아원에서 절 돌본 보모님과 만났습니다. 제가 13살 때 첫 여행 때 이미 재회했던 분이죠. 그분을 다시 만나서 기뻤습니다. 그리고 유학 도중 그분과 다시 만났을 때 그분이 제 중국 이름인 핑화를 주셨다는 것을 알았죠. 제가 중국에 대해서 배운 점은 제가 돌아갈 때마다 저에 대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제가 원하는 모든 답과 조각을 찾을 수는 없을 거라는 점입니다. 저에게 제가 원하는 모든 정보가 금보자기에 포장된 채로 주어지지는 않을 테죠. 적은 정보를 차근차근 모아가는 과정이에요. 하지만 그 정보들이 저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팟캐스트: 중국의 어떤 면이 그레이스 씨에게 편안하게 다가왔나요? 중국이 이국적이었지만 어떤 면으로는 친숙하다고 하셨죠. 

그레이스: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제가 유학 중에 쓴 일기에는 제가 중국에 막 도착하기 전에 이렇게 썼죠. “내 발이 땅에 닿자, 내 마음이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물론 그렇게 쉽지는 않았죠. 하지만 아시아계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 묘하게 편안한 느낌이 들었죠. 제 백인 친구들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제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냄새, 색깔, 그리고 음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죠. 그리고 중국에 있을 때 친부모 조사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찾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했죠. 그래서 제가 2살 때 저를 찾아서 보호한 경찰서를 찾아갔습니다. 경찰서에 갔을 때 제 통역사가 경찰관에게 친부모 조사를 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경찰이 저를 보더니 “아주 아름다운 분이네요. 왜 친부모가 이런 아가씨를 버렸을까.”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예상하던 반응은 아니었죠. 그리고 다른 젊은 경찰분은 1996년 기록을 찾고 있다고 이야기하니 상당히 귀찮다는 반응을 보였어요. “전산화 이전의 기록이네요.” “네 알고 있어요.”라고 답했죠. 그래서 물리적 기록을 찾아냈고 별 내용은 없었어요. 누가 절 데리고 왔는지, 제가 뭘 입고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었죠. 그래서 제 조사는 바로 멈춰버렸어요. 더 조사할 기반이 없었죠. 그리고 제 통역가는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고 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제가 2살 때 버려졌으니 미혼모가 낳아 조부모들이 키웠을 가능성이 있고 더 저를 키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죠. 아니면 제 부모님이 안후이성 출신이면서 난징을 방문했다가 절 잃어버렸고 다시 안후이성으로 돌아가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습니다. 제가 이 도시에 와서 고향을 찾고 저 자신을 찾으려고 했는데 와 보니 난징이 제 고향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죠. 중국을 떠난 뒤에 제 고향을 잃어버렸고 제 마음속에서 다시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저를 덮쳐왔습니다. 중국과의 친밀감 중 일부는 제가 다시 제 고향을 찾으려고 하는 의지 때문이었는데 고향이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것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팟캐스트: 그레이스 씨가 원하는 과거가 있나요? 

그레이스: 흥미롭네요. 제가 자라면서 많은 친구는 남동생이 있었어요. 2살 연하인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죠. 그래서 친구들과 놀면서 남동생들과는 친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알았고 이야기도 나눴어요. 그래서 제가 2살 때 버려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중국의 역사를 연관해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제에게도 2살 어린 남동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제가 버려진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어요.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아기일 때 버려집니다. 태어난 뒤 며칠도 지나지 않아서 버려지죠. 그래서 전 그 과거의 가능성을 좋아해요. 남동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해 보죠. 전 외동딸이라서 제가 어렸을 때는 저를 봐줄 오빠나 제가 돌볼 수 있는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그걸 가지고 있지 않으니 친 형제자매가 있다면 아주 흥미로울 것 같고, 제가 원하는 과거입니다. 

그레이스: 조사 지원자들과 현장에서 연구를 진행해 미국에 정보를 가지고 오려는 분들이 있죠. 한국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TV 프로그램이나 뉴스에 나가서 이야기를 공유하는 때도 있습니다. 중국 입양아들은 고향이나 마을에 사진과 자기 정보를 담은 포스터를 만들어서 붙이는 경우도 많아요. 그리고 그러한 포스터를 인터넷으로 공유하기도 하죠. 중국 트위터인 웨이보나 중국 SNS인 위챗도 자주 사용됩니다. 이 포스터는 성공 가능성이 지역마다 달라져요. 저 같은 경우에는…. 난징은 8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대도시에 대학교들이 많은 도시고, 교통 중심지이기도 하죠. 인구 유동률이 높은 곳입니다. 그래서 포스터들은 작은 마을 출신이거나 어디에서 왔는지 정확히 안다면 더 효과적이라고 봐요.

팟캐스트: 아버지가 아이를 다리에 놓고 갔는데, 매번 버린 날마다 아버지가 돌아가서 다리에서 기다리는 영상을 본 적이 있어요. 그런 영상을 보시면 감정적이게 되나요?

그레이스: 당연하죠. 한국 입양아 상봉, 중국 입양아 상봉을 보면 감정적이게 되죠. 가족 상봉을 보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해요. 

팟캐스트: 중국에 있었을 때 중국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나요? 북경어를 하실 수 있지만 그래도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눈치챘죠?

그레이스: 중국에 있을 때 많은 사람이 제가 한국인이냐고 묻더군요. 사람들이 제가 아시아인처럼 보이지만 북경어를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한 거죠. 제 출신지와 관련해 싸워야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제가 중국에 갔을 때 모든 사람에게 입양됐다는 사실을 공유하지 않으려고 했죠. 제 친구들, 룸메이트, 긴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는 입양 사실을 공유했지만, 한번 만나고 말 사람들은 알 필요가 없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제 북경어 실력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출신지를 물으면 미국 출신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럼, 사람들이 이렇게 답했죠. “하지만 중국인 같이 보이는데.” 전 그럼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자랐다고 답했습니다. 그럼 많은 사람이 이민자라고 짐작했겠죠. 하지만 그중 한 사람이 “아 그럼 부모님이 중국인인가?”라고 물었고 저는 미국인이라고 답했어요. 그러니 그 사람은 이해를 못 했습니다. 제가 수업을 같이 듣던 동기가 말하기를 제가 말을 하지 않으면 진짜 중국인으로 보인다고 언급을 했죠. 그리고 중국 여행객이나 다른 사람들이 길을 물어보거나 다른 질문을 하기도 했어요. 제가 잘 모르겠다고 답하면 그 사람들이 “미안해요!”라고 말하고 멀어졌습니다. 

그레이스: 한번은 그 어학연수를 같이 듣는 친구들과 잠시 여행을 하기 위해서 내륙으로 들어갔었는데 쑤저우로 가는 길에 가장 빠르고 비싼 열차를 탔고, 돌아오는 길에는 가장 싼 열차를 탔어요. 시골 사람들이 잔뜩 타고 있었죠. 사람들이 서 있고 앉아 있는 도중에 한 사람이 제 왼쪽에 앉아 있었고 제가 일기를 영어로 작성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옆에 앉은 분과 대화를 하게 되었죠. 그분이 왜 제가 영어로 일기를 작성하는지 물었어요. 그리고 제가 미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해줬습니다. 그분이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죠. 제가 아는 많은 사람이 중국 입양아의 숫자가 무척 많은데도 우리의 존재를 몰랐어요. 그래서 이 사람과 흥미로운 대화를 나눴죠. 그리고 제가 이해 못 하겠는 말을 해서 이해 못 했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앞에 앉아 있던 분이 그걸 어떻게 이해 못 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차 사람들이 전부 어떻게 그걸 이해 못 하냐는 듯이 보았죠. 그리고 제가 대화하는 분이 저를 옹호하려고 일기를 잠시 가지고 가시더니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이거 봐라. 중국어로 쓰인 글은 없고 영어로 되어 있잖아!”라고 말씀하셨고, 저는 그거 보면서 일기를 돌려 달라고 하고 있었죠.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저에게 와서는 신기한 것을 보듯이 질문하고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하듯이 말이죠. 한 애가 저에게 와서 바로 앉아서 절 보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인을 만나보는 것이 처음이라고 말이죠. 제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장소에 따라 아주 달랐던 것 같아요. 전 대부분 시간을 대학에서 보냈죠. 대학교에서는 많은 중국인이 외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어요. 하지만 다른 지역으로 가면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어려워했습니다.

팟캐스트: 이야기를 들으니 입양아들이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자란다는 점이 떠올랐어요. 미국에서 자란 입양아들은 외국인이 아니고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죠. 하지만 모국에 돌아가면 모국인이라는 점도 증명해야 합니다. 그레이스 씨 같은 경우에는 중국인이면서 동시에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죠.

그레이스: 네. 자라나면서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라, 어디에서 왔느냐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돌아가니 제가 미국에서 살았던 어떤 기간보다 더 제 미국인의 정체성을 지키고 미국인의 정체성을 증명해야 해야 했어요. 중국에 있을 때 가장 미국인으로서 정체성을 느끼면서 동시에 중국인의 정체성도 느꼈습니다. 제 미국인의 정체성이 제가 놀라는 정보들과 제가 중국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놀라움 등으로 느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중국인의 뿌리와 중국의 역사, 중국에서의 삶을 알 수 있었어요. 그러한 두 정체성을 동시에 자각하는 것은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좀 더 깊이 조사 단체와 연계해서 친부모 조사를 진행하고 싶나요? 아니면 현재로서는 지금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레이스: 조사는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해요. 좋은 정신 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입양아들은 고통스러운 상처가 있고 조사 결과가 상처를 치유해줄지 아니면 상처를 더 깊게 할지 알 수가 없죠. 여러 가지 방면으로 준비가 되어야 있어야 한다고 봐요. 원치 않은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죠. 2015년에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 아무런 정보도 찾지 못했던 점에 몹시 화가 났던 기억이 있어요. 중국에 갈 때마다 제 이야기의 새로운 조각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죠. 그리고 다음에도 그럴 것 같아요. 나중에는 다시 조사를 시작하겠죠. 그래도 적어도 처음의 실망감을 극복하고 아무것도 찾지 못할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팟캐스트: 지금도 블로그를 운영하고 계시는데 지속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유지하는 데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데 유지하는 이유와 목적을 이야기해주셨으면 해요. 

그레이스: 제가 블로그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개인용이었습니다. 수업을 듣고 제 감정을 정리하기 위한 수단이었죠. 그리고 제가 다른 입양아들에게서 공감하는 메시지나 가족들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받기 시작하면서 자부심을 느끼기 시작했죠. 제가 제 블로그를 2013년에 시작했을 때는 페이스북에 어른이나 청소년이 주축이 된 입양아 그룹들이 얼마 없었어요. 전부 자신들의 입양아 경험을 소화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죠. 현재는 그러한 사람들이 이해 동료를 찾을 수 있는 곳이 더 많죠. 하지만 그러한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 동기 중 하나였죠. 제 중요한 자극 중 하나는 입양아에 대해서 더 널리 알리고 국제 입양 논조를 다양화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입양의 불편한 점도 알리고 입양은 단순히 한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평생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며 그 정체성이 시간이 걸려 바뀐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죠. 또 대학원의 전공이 입양, 아동 복지와 관련되어 있죠. 그리고 불우아동과 관련된 복지에서는 아동의 환경을 최대한 바꾸지 않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쳐요. 하지만 국제 입양은 모든 것을 바꾸죠. 더 많은 것을 바꾸는 개입 방법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입양과 가족, 그리고 아동 복지와 가족유지에 대해 더 깊고 복잡한 대화를 하는 겁니다. 

팟캐스트: 또 KAAN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계시죠?

그레이스: 네. KAAN의 자문 위원회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어요. 현재 KAAN은 입양아들의 구성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한국계 입양아가 많이 줄었어요. 입양아 자체가 줄었고, 이러한 변화하는 입양아 사회의 구성을 도와줄 제도를 구축하는 일이 필요하죠. KAAN의 도움을 받는데 약간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거부감이 아니라 흥미는 있었지만 제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의 확신이 없었죠. 제가 중국계 입양아였으니까요. 제가 이메일을 보냈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받긴 했지만, 여전히 확실치 않았죠. 그래서 제 한국계 입양아 친구와 같이 자원봉사를 신청했어요. 제가 맞지 않는다면 그 친구가 제 안전망이 되어줄거라고 생각했죠. 아주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모두가 저를 환영해주었고 사회에 맞아 들어갔죠. 다음 해의 KAAN 회의에서 토론에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딸들이라고 하는 블로그를 하는 입양아 여성들의 토론이었어요. 두 번째라서 그런지 많은 사람과 대화를 하는데 좀 더 편안함을 느꼈어요. 더 많은 사람이 저에게 접촉해왔죠. 제 블로그를 읽었거나 저번 해에 참여한 저를 기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계속 참여하게 되는 대단한 회의였죠. 그리고 KAAN에서 만든 인연은 개인적으로, 직업적으로도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서 지역적으로도 연락을 계속 취하고, 편지로도 연락을 취하고 있습니다. 또한, KAAN은 입양아 출신 교수님들이 많이 참여하기 때문에 저의 대학원 진학과 대학원 탐사에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KAAN에 많은 멘토가 있고 조언 위원회 참여가 입양 사회에 더 개입하게 했고 지도력과 전문적인 기술을 배울 수 있었죠. 제가 중국계 입양아지만 KAAN이 제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그레이스의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한국계 입양아나 중국계 입양아에게 자신들의 정체성 때문에 불편하다고 여길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소리과 플랫폼을 가지고 한국 중심의 단체와 교류하는 일에 대해 조언해줄 수 있나요?

그레이스: 전국적, 그리고 세대 간의 교류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연상의 한국계 입양아들과의 교류는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도 생각하게 했죠. 이미 청소년 자식들을 둔 한국계 입양아들도 만났고, 그분들은 그분들의 자식들이 입양과 인종에 대해서 질문한 것에 대해서 말해주었습니다. 입양아 자손의 관점도 생각하게 되었죠. 결혼, 다인종 간의 교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관점들이 아주 귀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손쉽게 물어볼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다른 중국계 입양아들에게도 물어볼 수 있는 일들이 아니죠. 중국계 입양아들 대부분은 아직 이러한 발전 단계에 접어들지 못했거든요. 이러한 세대 간 입양아 간의 교류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그리고 출신 국가와 상관없이 입양아 간에는 여러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입양아와 입양 부모들이 손실, 그리움, 문화적 소외를 겪어요. 이 현상은 단순히 국가적으로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입양아가 전체적으로 겪는 일이죠. 물론 중국인 입양아만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득이 있고 한국인 입양아만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도 이득이 있습니다. 예들 들면 친부모 조사 같은 경우에는 그러한 장소에서 같이 공유가 좀 더 쉽죠. 다른 국가들마다 규제, 절차와 역사가 다르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경험이 서로 함께하고 교차하는 것을 배우는 일이 제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이득이 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장소 중 하나는 다인종 간 다국간 입양아 사회라고 생각해요. 중국계가 아니어도 괜찮죠. 공유되는 감정과 상실감, 그리고 이해를 공유하고 있으니까요.

팟캐스트: 블로그 공유라던가 다른 하고 싶은 일은 없으신가요? SNS 계정을 구독하고 싶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되죠?

그레이스: 우선 제 블로그인 Red Thread Broken (https://redthreadbroken.wordpress.com)이 있고요, Red Thread Broken 명의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계정도 운영 중이고, 트위터로는 Grace Pighwa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청자분들이 2021년에 KAAN에서 뵐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레이스: 운이 좋다면 2021년에는 KAAN이 현실에서 개최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저도 거기에 있겠죠.

시즌 4, 에피소드 4: 제니 해준 윌스

Audio available 10/12/20 at 7 am CST.

한국계 입양아 캐나다인 제니 해준 윌스 39세는 2019년 회고록인 언니, 혈통으로 이어져 있지 않음. 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회고록은 친가족과 만난 뒤 그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시간, 언어, 장벽, 아이 압류와 국제 비밀 입양, 부모 간의 실패로 인해 멀어진 이복 언니에게 쓰는 편지의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입양아들 간의 문제도 고발한다. 소수자 집단이 자신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성폭행에 대해서 숨기고 보호하며, 그러한 방식을 부수고 고발한 행위에 따라오는 공포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윌스는 입양아들이 한국에 돌아와 가족을 찾고 뿌리를 찾기 위해 입양아들이 겪어야 하는 감정적 노동과 취약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국제 입양과 탐색 방식이 입양아들이 과정, 가족 그리고 정체성을 찾으려고 할 때 어떻게 관련 지원이나 개인적 자유를 빼앗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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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 전 제니 해준 윌스입니다. 만 39세이고 캐나다 매니토바주 위니펙에 살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선호하는 인칭대명사는 She/Her입니다. 

제니: 언니, 절 믿지 못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전 친어머니에 대해서 어렸을 때부터 직접 만났을 때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그 사진을 봤을 때……. 무언가를 만졌을 때, 아주 뜨거워서 얼음장 같다고 느껴본 적이 있나요? 사랑에 급격히 빠져서 죽을 것 같은 느낌은? 그 전까지는 전 제 친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 못했어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죠. 입양되지 않은 일반인들과 한국계가 아닌 사람들의 좋은 의도로 한 경고를 받아들여서 문화적으로 넘을 수 없는 경계가 있다고 인식했죠. 그 사람들은 어머니들이 우리를 잊고 삶을 이어가고, 과거에 우리를 원치 않았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인식이 강해질 뿐이라고 말했어요. 차이마저도 우리가 좋은 삶을 입양된 국가와 가족과 함께 보내면서 친 어머니들의 삶을 방해하는 일은 이기적이라고 말했죠. 우리가 숨어서 지내는 일이 맞는다고 했죠. 숨겨야 할 일이고, 정당하지 않은 일이니까요. 

제니: 제 회고록의 첫 부분은 한국 가족과의 재회입니다. 첫 페이지들부터 나와요. 다른 입양 회고록들과는 다른 시작이죠. 보통 입양 회고록들은 어릴 때부터 시작해서 시간대별로 진행됩니다. 제 회고록은 재결합부터 시작해서 그 사건으로 인한 영향과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그리고 약간 이야기가 진행된 뒤 시작하는 이 문단에서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친언니와 이야기를 하게 되죠. 

팟캐스트: 그러니까 이 부분은 큰 언니한테 보내는 이야기란 말이죠. 가장 친밀하지 않은 가족 중 하나로 보이는데 왜 언니에게 편지를 쓰셨죠? 

제니: 우선 팟캐스트에 초청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 팟캐스트의 애청자로서 여기에서 인터뷰하게 되어서 아주 기뻐요. 과거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최고의 재회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 질문이 창작에 대한 두 개의 질문을 하시고 있는 기분이라 더 좋네요. 첫 번째 질문은 왜 이 책이 작은 부분들로, 이 작은 장면과 시점으로 나뉘어져 있냐는 질문이죠. 짧게 대답하자면 이 책은 시집으로 시작했어요. 그 뒤에 정리가 되어서 서사가 부여됐죠. 제가 시를 쓸 때는 사람들의 기억처럼 조각난 채로 저에게 영감이 내려와요. 그래서 제가 처음으로 한국에 갔던 뒤 7년에서 8년 뒤에 이 시들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죠. 그래서 이러한 이미지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요. 논리적이지 않고, 아이디어들의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죠. 그래서 이 책에서 그러한 사고방식에 따라오는 작성과정을 반영하고 싶었어요. 제가 느낀 다른 질문은 이 책에서 왜 이런 언니에게 직접적인 질문이나 편지형식으로 글을 작성했냐는 의문이에요. 제가 그런 스타일을 선택한 이유는 제가 직접 대화하지 못할 상대이기 때문이죠. 언어적 장벽이 있으니까요. 동시에 언니와 여러 문제에 대해서 대화를 하지 못한다는 의미기도 하죠. 거기에 더해서 혈통적인 문제도 있어요. 제 언니는 제 어머니와 혈통적으로 관계가 없거든요. 전 제 어머니와 가장 깊게 연관이 있죠. 그래서 그러한 혈통적 문제가 직접적 대화를 어렵게 해요. 그리고 눈치 채셨을 지도 모르지만 편지에서 가장 직접적인 감정이 드러나요. 물론 제 언니에 대한 감정은 아니죠. 하지만 분노와 정치적 수사가 가장 잘 드러나게 되어요. 거기에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하죠. 독자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독자 대상으로 직접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이에요. 세세한 대화를 할 수 있는 문학적 전략이기도 하죠. 대화라는 문학적 장치를 사용하면서 심문하는 느낌은 줄이고 정보 전달을 하게 되어요.

팟캐스트: 아 네. 이해가 되네요. 그리고 책을 아직 읽지 못한 청취자 분들을 위한 질문인데요. 제니씨가 관계와 장벽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어려운 점은 그 언니분과 이복자매라는 점 때문이죠. 아버지와 친어머니의 관계가 그 당시에는 불륜 관계였고, 아버지가 언니분의 어머니와 결혼한 상태로 제니씨의 친어머니와 관계를 맺었으니까요. 그래서 제니씨가 그 언니분의 삶에 나타난 일이 그 언니 분에게 문제를 일으켰나요?

제니: 네. 제 존재 자체가 제 부모님과 제 친척들에게 부모님의 문제를 보여주는 셈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시점에 제가 삶에 나타나는 일은……. 물론 저도 성인이었고 언니도 성인이었지만 서로의 복잡한 문제에 대한 인식이 되었죠. 충분히 비유적인가요?

제니: 제가 태어난 뒤에, 제 친할아버지가 저에게 이름을 주셨죠. 그 다음에 저를 호적에서 지우는 서류에 서명하셨고요. 그 결과 제 상태를 확인하시던 어머니에게서 절 빼앗아 가셨죠. 어머니에게는 제 젖은 머리에 입맞춤을 할 시간 밖에 주어지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저를 잃어버리셨죠. 어머니의 입에는 어머니 자궁에서 나온 검은 내용물이 짙게 남아 있었고요. 30년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그 이름은 제시카, 킴벌리, 메간과 같은 한국인들에게는 맞지 않는 이름으로 바뀌었죠. 한국인들에게는 다양한 이유로 불가능한 이름이죠.

제니: 제가 대답하는 이름이지만, 제가 그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는 저한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익숙하기 때문이죠. 저에게 맞는 이름이 아니죠. 처음부터 전 제 피부색을 바꾸려고 노력했어요. 영어와 프랑스어를 동시에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고, 포크와 나이프를 옆에 놓고 식사해야 했죠. 크림, 러시아 캐서롤, 아이리시 세터, 형식과 가죽 교회용 신발의 삶에 맞춰 들어가야 했어요. 콘체르토, 가죽 신발 그리고 메이플 설탕 캔디에 묻혀 제 친어머니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죠.

팟캐스트: 제니씨의 대화 방식은 매우 운율적이네요. 자연적인가요 아니면 어떤 사람들에게 배운 기술인가요? 

제니: 아 감사해요.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자연스러운 재능과 사회에서 배운 능력을 구분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러한 개인의 성장에 관련된 이야기는 이 팟캐스트에서 많이 나오겠지만 말이죠. 제가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적은 없으니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어요. 작가로서 한 번도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본 적은 없죠. 하지만 사회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전 문학 교수이고, 항상 무언가를 읽고 있고, 시를 사랑하니까요. 거기에 문학적인 표현을 쓰기 좋아하기도 하죠. 그래서 관련 문학과 자료들로 주변을 채워요. 그래서 카오미(팟캐스트 호스트)씨가 받고 있는 느낌은 자연적이기도 하고 사회적이겠죠. 인터뷰할 때 마다 질문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당신의 스타일을 어떻게 묘사하시나요?” 라고 물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끔찍한 것들을 아름답게 보이게 만들려고 해요. 끔찍한 것들을 아름다운 단어로 묘사하죠. 그러한 부조리가 제가 문학을 읽을 때 저한테 큰 영향을 남기거든요.

팟캐스트: 제가 책을 읽을 때 눈에 띄었던 사실이 생각나네요. 처음에 시를 먼저 쓰셨고 나중에 서사를 붙여 넣었다고 하셨죠. 제가 책을 읽었을 때 제니씨의 책은 아주 영화 같았어요. 읽었을 때 장면이 떠올랐죠. 그게 제니씨가 나중에 하나로 묶으려고 한 생각들일지도 모르겠네요. 독자로서 이런 짤막한 묘사들과 놀라운 이미지가 아주 자세히 묘사되는 것을 읽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죠. 언제부터 회고록을 쓰실 생각을 하셨고 회고록을 이러한 기억들을 모으기 시작하나요?

제니: 자료를 모으는 행동은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어요. 전 일기를 쓰지도 않죠. 하지만 전 그림에 기반을 두고, 생각하고 글을 써요. 그래서 기억은 제 뇌에 고정하기 어려운 그림들과 기호를 통해서 저에게 다가와요. 그래서 영상적인 느낌이 나는 글이 쓰여 졌을지도 몰라요. 아니면 제 삶의 극적인 면모가 그러한 영화적 서사를 부여했을지도 모르죠. 제가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을 때는 회고록을 쓰려고 하지 않았어요. 안식년에 논문을 쓰고 있었죠. 아직 끝내지 못했어요. 물론 지금은 그 진로로 돌아가지는 않겠죠. 학문적인 책을 써야 했어요. 하지만 대신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죠. 중학교 이후로 처음으로 교육을 하거나 공부를 하지 않고 있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빈 시간에 제 머릿속에서 이러한 시들이 한밤중에 흘러나오기 시작한 거죠. 90페이지 정도 쓰고 나서야 이게 책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하필이면 안식년 말미여서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그때 시에 대한 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초기에 서서히 길어지기 시작하자 소설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사실 논픽션 책을 쓸 생각은 없었어요. 개인사에는 부끄럼을 타는 성격이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픽션 계통으로 쓰려고 글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최대한 양보해서 창조적인 논픽션 계통을 써볼까도 생각했죠. 하지만 출판 관련 과정에서 회고록으로 변모했어요. 전 제가 회고록을 쓰게 된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하지만 누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뭐 어떤 사람들은 그럴지 모르지만 전 그럴 생각이 없었어요. 하지만 그게 제 여정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그게 2016년이었죠. 그리고 책이 출판된 건 2019년 9월이었어요. 아주 빠르게 진행됐죠. 

팟캐스트: 많은 입양아들은 친부모를 찾고 싶어 하지 않거나 적어도 삶의 후반부에나 그걸 시도하죠. 그 조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그 시점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제니: 제가 보스턴으로 이사했을 때였어요. 그 때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타서 미국에서 살고 있었죠. 제가 처음으로 어른 입양아들을 만났을 때기도 했었죠. 그 이전 봄에 아시아계 미국인 연구협회에서 입양아 어른들을 만났고, 그중 상당수가 보스턴에서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같이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죠. 아주 대단한 시기였어요. 캐나다에서, 특히 제 세대 같은 경우에는……. 전 조사를 진행하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동시에 어른 입양아를 처음으로 만날 수 있을 정도의 나이였죠. 제가 30살 언저리였을 때였어요. 제가 감명 받았던 이유를 대자면, 캐나다에서는 미국처럼 입양아들이 서로를 만날 기회가 얼마 없어요. 지역성이라든가, 인구 구성이 전부 이런 일에 영향을 끼치죠. 미국 입양아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됐는데 항상 친부모 조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항상 흥미로운 주제였죠. 누가 찾고 있다, 찾지 않는다, 문제다, 항상 누군가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그 사람들 주변에 있으면서 어떤 물리적인 형상이 만들어졌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을 해줬으니까요. 그래서 생각했죠. 해봐야지. 하지만 사실 걸린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릴 거라고 믿어버렸어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 걸리죠. 아예 접촉을 못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그래서 제가 그때 생각하기를 지금 27세에서 28세일때 이 조사를 시작하면 몇 년 걸릴 테니 그 동안 감정 정리를 하고 정신 건강관리도 해야지 라는 생각을 했죠. 하지만 모든 일이 너무 빠르게 일어났고 그리고 모든 것을 멈추거나 느리게 다음에는 제가 겁을 먹고 있었어요. 그래서 첫 편지 교환의 시간에는 전 아직도 보스턴에서 살고 있었죠.

팟캐스트: 조사를 시작했을 때 같은 미국 입양아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네요. 캐나다 입양아들과 미국 입양아들의 정체성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정체성만 아니라 지역의 유일한 아시아계 아이와 같은 성장 이야기도 비슷했나요?

제니: 네. 하지만 동시에 아니죠. 제가 미국에서 만난 입양아들의 경우, 이미 입양아 단체를 통해서 만났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주변에 다른 입양아가 있는 일은 흔했고 특히 한국 입양아 같은 경우에는 주변에 비슷한 입양아가 있는 것은 평범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죠. 캐나다의 다른 입양아들도 비슷했어요. 제가 토론토에서 몇 명의 입양아를 만난 경우가 있는데 토론토에서 미국과 비슷한 단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미국 입양아들이 주축이라고도 하더군요. 밴쿠버에서도 입양아 몇 명을 만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이 사람들의 경우 다른 입양아들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50대에서 60대가 넘었는데도 말이죠. 그리고 그러한 캐나다의 사례가 제 경험과 비슷하다고 봐요. 캐나다의 경우 대도시가 적어요. 거기에 거리도 있죠. 대도시 출신이라고 해도 미국과는 다르죠. 뉴욕에서 보스턴까지는 몇 시간 내로 여행할 수 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제가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는 토론토죠. 오대호를 거쳐 가야 하니 운전 시간만 20시간 넘게 걸려요. 그래서 경험이 달라요. 또 인종관련 이야기가 있어요. 아니면 이야기가 없다고 해야 하나요? 하지만 표현 방식이 다르죠. 며칠 뒤에 관련 모음집을 출간할 예정이에요. “입양과 다문화”라는 모음집이죠. 그 모음집의 기반이 된 논문은 인디고 윌링과 토비아스 후비넷이 쓴 논문인데 다문화 입양아나 아이로서 자란 장소는 다양하기 때문에 다문화 가정으로 자라는 일 자체를 커다란 한가지의 무언가로 인식하면 안 되고 다양하고 흥미로운 배경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저술하고 있어요. 저도 동의하는 바에요. 제가 미국에서 느낀 일을 생각하면 말이죠.

팟캐스트: 주변 사람들에 있어서 아주 보호적이라고 이야기하셨죠. 책을 읽으면서 제가 느낀 사실중 하나는 입양 부모님이나 입양 가족에 대해서 잘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어요. 행동 몇 가지, 물건 몇 가지나 환경으로 추측할 수는 있죠. 그래서 어디에서 성장하셨고 그 시간대나 그러한 감정을 공유해 주실 수 있나요? 

제니: 네. 그 사실을 알아차려 주셔서 고마워요. 전 항상 이야기를 할 때는 동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주도성과 객관성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경험에서는 말이죠. 하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입양 가족은 최대한 떨어트려 놓으려고 생각했어요. 또 인종 정치적인 전략이라고도 생각해요. 단순히 입양아들뿐만 아니라 주류 입양 가족, 주류 백인 가족이나 주류 서구 가족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죠. 그래서 한국계의 혈통과 관련해서 집중하고 싶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토론토에서 한 시간 떨어진 소도시에서 성장했어요. 굿리드 홈페이지에 올라온 제 프로필을 보고 “아니 이 도시를 작은 마을이라고 한다고?” 라고 놀라던데 제가 작성한게 아닙니다. 제 편집자가 그렇게 작성한거죠. 10만명 정도의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에요. 그때는 확실히 그랬고 지금은 덜하지만 매우 인종적으로 통일되어 있고 계급적으로 나뉘어져 있는 도시죠. 그래서 입양된 사람들에게는 인종적으로 소외되는 느낌이 들 수 있어요. 저는 백인으로 가득한 교외에서 자랐죠. 남부 온타리오 지대의 도시였어요. 그리고 전 공업지대인 도시였죠. 그래서 그러한 배경에서 오는 계급적, 인종적 난해함이 있는 도시였어요. 그래서 복잡한 곳이었죠. 하지만 토론토로 대학에 가기 위해서 이사한 뒤에 그 복잡함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과거에 이상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문제죠. 어렸을 때 불편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논의할 기반이 없었어요. 왜 불편한지 말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제가 이런 쪽에서는 아주 운이 좋은 편이에요. 박사학위도 가지고 있고 인종학을 가르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항상 생각하고 있죠. 하지만 그곳에서 항상 맞아 들어가지 않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리고 저한테는 그걸 제대로 설명하거나 논의할 방법이 없었죠. 물론 듣고 있는 분들과 이 팟캐스트 참여자들도 비슷한 경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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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합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죠. 회고록을 쓰는 분들이 가족들의 사생활을 지키려고 했다고 들었어요. 회고록 자체가 개인적인 삶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그 합의를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이해가 가요. 독자의 알 권리라고 언급하기에는 그렇지만, 이야기를 진실하게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걱정하시나요? 

제니: 네. 좋은 질문이네요. 하지만 이런 형식으로 말해지는 것은 처음이에요. 제가 생각해볼 만한 질문이네요. 이 회고록을 쓰고 있을 때 생각했던 일은 타인의 보호만이 아니라, 사실 거의 대부분이 저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었어요. 제가 아주 선량하고 희생적인 사람이라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죠. 회고록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이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나 공유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를 섬세하게 계산해내요. 합의만이 아니라 경계도 생각해야 해야 하죠. 제 경계와 한계에 대해서 알고 제가 공유할 이야기를 생각하고 숨길 이야기도 생각해요.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는 공유하고 숨기고 싶은 이야기는 숨길 권리가 있으니까요. 전 독자에게 이야기에서 A지점에서 B지점으로, B지점에서 C지점으로 갈 수 있을 정도의 정보를 제공하는 거죠. 그리고 제 편집자가 그 일에 큰 도움을 줬어요. 한번은 편집자가 이야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해를 위해서 이야기를 시간대 순서로 정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리고 빈 공간을 지적하면서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면 뭐가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언급해 줬죠. 그래서 저는 독자를 문학적인 요소로 생각하지만 제가 원하지 않는 정보까지 제공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껴본 적은 없어요. 그 이유는 특히 이야기, 창조, 설명과 직접적인 관련 없는 사람들이라면,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들의 한계를 이해하고 우리가 그 권리를 다시 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제 독자 분들이 그 사실을 이해하신다면 좋겠네요. 

팟캐스트: 물론이죠. 하지만 전 욕심쟁이 독자라서 더 많이 알고 싶거든요. 하지만 전 책에 만족했고 제니씨가 제공하지 않은 정보가 없어서 제가 덜 만족했다고 느끼지는 않았어요. 

제니: 또 제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작가로서 건축 자재를 다 치워야 한다. 글을 건축한 뒤, 그것에 쓰인 자재들을 치우고, 독자들이 중간 부분에서 작가와 만나줄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독자들이 그 빈 공간을 채워 넣어 주고 그 이야기에 감명을 받고, 같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고 봤어요. 공생적 관계인거죠.

팟캐스트: 아 저도 그런 관점으로 본적이 있어요. 페이지를 다 읽고, 문단을 다 읽고 나서 말이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생략도 아름다운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작가들이 독자에게 있어서 일을 하게 하는 거죠.

제니: 네. 감사해요. 독자에게 있어서 독자를 믿는 관대함으로 보였으면 해요. 제가 모든 이야기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이죠. 독자들이 관심을 가져 주셔서 제가 조금 수줍어하거나 부끄러워해도 된다는 믿음이고요. 

팟캐스트: 제니씨는 엄마가 다시 만난 지 꽤 지났는데, 당신을 전부 이해하신다고 생각하나요? 또 다른 질문이지만, 엄마와 같이 계시면 달라지세요? 

제니: 엄마가 저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제 안에 슬픔이 있다는 사실은 아세요. 아이 안에 그런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슬프죠. 거기에 제대로 소통할 수 없다면 더더욱 그래요. 그래서 이런 만남들이 걱정으로 가득하죠. 이런 강렬한 감정적 연결을 가지고 있지만, 제 경우에는 언어의 한계가 있어서 소통의 한계가 있어요. 고통의 잔재만 남죠. 그 사실을 알고, 해결하고, 상대해야 하는 문제가 많아요. 그곳에 같이 있으면, 계속되는 존재감이 기쁨, 고통, 슬픔, 분노와 공포와 엮이고 소통할 수 없죠. 제가 엄마와 함께 있으면 다른 사람이 되는 이유가 언어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문화적 불안함과 적응 부족도 있죠. 엄마는 절 아기나 어린애처럼 대하셔요. 그리고 제가 소통할 때 어린아이 정도의 언어를 사용하기도 하죠. 그래서 어느 면에서 보면 제2의 유년기라고 할 수 있어요. 가능성의 재구성인 셈이에요. 하지만 동시에 매우 이상하죠. 자신의 일을 스스로 관리하는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소중한 사람과는 관계 발달이 지체되는 상황이니까요. 

팟캐스트: 고통의 잔재가 남는다는 표현이 아름답네요. 엄마를 언어적, 시간적, 문화적 장벽 때문에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말이죠.

제니: 시간이 흐르고 나서 엄마와 제 여동생의 앞에 제가 나타났다는 사실의 무게를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 재회의 첫해에 집중하지 않는 일 자체가 어렵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받아낼 시기에요. 잃어버린 관계를 다시 찾는 시간이죠. 그래서 그 시기의 기쁨에 빨려 들어가기 쉬운 것 같아요. 저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죠. 그리고 환상과 이상을 마음속에 품게 돼요. 하지만 부모도 결국 사람에 불과하죠. 그래서 어렵고 실망하게 되요. 하지만 전 부모를 찾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해요.

팟캐스트: 한국에 돌아가 살았던 시절은 행복한 시간이었나요?

제니: 한국 입양 기관에서 제 한국 엄마와 연락이 아주 빨리 닿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가 서류를 보낸 지 일주일 만에 연락이 닿았거든요. 엄청나게 빠른 일이었죠. 그리고 한 9개월 정도 서로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서로를 알아갔어요. 한 달에 한번 꼴이었죠. 그렇게 자주는 아니었어요. 엄마는 삶에 여러 제한이 있어서 개방적으로 저와 연락을 지속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었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서로 만나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아직 대학원을 다니던 중이어서 교환학생을 지원했고, 그리고 한국에서 살고 있던 입양아들과 연락을 했어요. 연구 여행이 됐죠. 좀 이상하긴 했어요. 하지만 그게 제가 한국에서 지내는 교환학생 기간 동안 무엇을 할 지 결정했죠. 그리고 한국에 도착한 뒤 바로 다음날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났어요. 모두 제가 왜 한국에 갔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서울에 4달에서 5달 정도 지냈어요. 한국 여행도 많이 다녔죠. 물론 제가 제 졸업 논문을 준비하던 기간이었으니 그런 측면에서는 제가 그런 일을 진행하기에는 최악의 시점이라고 할 수 있었죠. 특히 제 논문은 입양에 관련한 논문이었고 그러한 논문을 쓰면서 이런 감정적인 일을 하는 것은 그리 좋은 결정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제가 취직하기 전이었고 다른 일들이 생기기 전이었기 때문에 진행하기 좋은 시점이었죠. 대학원생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고 돈도 있었으니까요.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학원생이라서 운이 좋았죠. 

팟캐스트: 확실히 신기한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입양과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자신의 입양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 자체가 아무 복잡했을 것 같네요.

제니: 네. 너무 많은 생각을 해야 했어요. 조금 과도한 일이기도 했죠. 제가 입양에 대해서 배웠던 모든 것이 제 회고록을 쓸 때 반영되었어요. 자주 일어나는 일, 진행 방향, 인기 좋은 일 모든 것을 알았죠. 그리고 그 모든 지식을 가지고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적용을 해보려고 했어요.

팟캐스트: 입양아 모임과 함께 하실 때 고통과 트라우마를 보셨고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와, 그리고 혼자서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방법을 보셨죠. 그게 충격적이셨나요? 그리고 이러한 트라우마를 같이 해결하는 모임과 접촉했을 때의 대응 방식은 어쩌셨죠?

제니: 그렇죠. 좋은 질문이네요. 미국에서 만난 입양아들과 만날 때는 평범하게 놀았어요. 스포츠 게임을 보러 가거나 독서모임을 하거나 그랬죠. 물론 진지한 이야기도 했지요. 하지만 한국에 온 입양아들이 원하는 일은 자신들에게서 빼앗긴 것들을 되찾는 일이었죠. 감정적으로 슬픔, 정당함, 분노로 가득하고, 동시에 주변에 섞여 들어갈 수 있고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 사이에 있을 수 있다는 기쁨이 있죠. 어머니와 할머니가 만든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요. 모순적인 기쁨과 정당한 권리에 대한 요구가 있죠. 하지만 동시에 소속감이 없고, 그리고 입양아일때 매일 이런 삶을 누리지 못했다는 분노도 섞여 있어요. 그래서 감정적인 폭탄이에요. 거기에 더해서 어떤 사람들은 동시에 조사를 진행하고 있어요. 감정적으로 혼란스럽고 어려운데다가, 어떤 결과가 나오던 힘든 일이죠. 그래서 제가 만난 사람들은 동시에 가장 즐겁고 기뻐하는 태도와 가장 파괴적이고 이기적인 태도를 동시에 보이고 있었어요. 물론 제가 도덕적인 판결을 내릴 수는 없어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는 조금 이기적이게 될 수 있죠. 살면서 거의 처음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 할 수 있는 곳이니까요. 그래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 회고록을 생각해보면 항상 과용이나 무모함에는 항상 결과가 따라와요. 그리고 많은 소수자 집단이나 고통 받은 집단은 내부의 고통이 있고 따라서 내부적인 해가 있죠. 그래서 이 입양아 사회를 이상적으로 묘사하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적으로 봐야 한다는 거죠.

팟캐스트: 항상 사실을 전하는 일이 중요하죠. 모두가 자기 자신의 진실을 이야기하지만, 중요한 일에 대한 통합적인 진실도 중요하죠. 그러고 보니 언급하셨던 것이 서울 입양아 게스트하우스에서 당한 성폭행에 대해서 언급하셨죠. 제가 2017년에 같은 게스트하우스에 성폭행 관련 문의를 했을 때 그런 일은 없었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공적으로 이런 일을 고발하고 그 고발에 대한 반발에 대해서 걱정하시지는 않았나요? 

제니: 제가 생각하기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겪거나, 보거나 경험한 고통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말하는데 있어서 저항감이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그런 상황, 입양아 간의 상해는 제가 겪은 최초의 고통이 아니거든요. 저에게는 그렇게 특이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살면서 그러한 문제를 겪어왔고 말해왔으니까요. 전 제 경험이 부정당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저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니까요. 제 공포는 제 자신이 마음속에서 우리 집단과 우리 집단 내부의 남성에 대해 얼마나 말하고 얼마나 보호해야 하는지 논쟁하는 데에서 나와요. 다양한 집단에서 일어나는 일이죠.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 대해서 관대하고 특정 문제에 대해서 과도하게 옹호하고 비밀을 지키는 일이죠. 그래서 저에게 가장 큰 문제는 얼마나 내 혈족과 사람들에 대해서 얼마나 폭로하느냐 숨기느냐의 제죠. 그리고 비입양아나 백인들 같은 주류 사회의 인식에서 이런 문제는 얼마나 숨겨야 하죠? 특히 주류 사회에서 이러한 문제를 보고 악용해 다른 종류의 폭력을 정당화할 수도 있으니까요. 한 사람의 경험을 사용해서 제노포비아를 일으킬 수 있고, 반아시아계 인종감정을 불러일으킨다던가, 반대쪽에서 반감을 일으킨다던가. 악용할 방법이 많죠. 그래서 이런 이야기에 있어서 얼마나 숨기고, 얼마나 사람들을 지키고, 언제 지키는 행위를 멈춰야 하는지가 제 가장 큰 문제지요.

제니: 이러한 조사를 하게 되면 가족이나 부모님이 동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이러한 조사를 진행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험한 상황에 놓는 경우가 많아요. 상황이 그들을 위험하게 만드는 거라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불공정함이 우리 집단 안에서 드러나기 마련이죠. 그래서 탄생지 조사, 뿌리 탐색이라고 부르던 이 여행 자체에 제도적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게스트 하우스라든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죠. 제도적으로 결함이 있어요. 우리들은 아주 절실한 상태이고 그렇기 때문에 게스트 하우스에서 타인을 믿고 룸메이트를 하거나, 모르는 상대에게 신뢰를 보내야 하니까요.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자주 이러한 일을 해야 하니까 우리의 안전에 위협이 가는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빈번하죠. 하지만 이 방식이 우리가 조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에요. 제도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죠. 그리고 뿌리를 찾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는 입양아들의 나이는 가면 갈수록 어려지요. 물론 전 입양 부모들이 이러한 뿌리 찾기 여행을 지원해주고 응원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18세 정도 되는 아이들이 뿌리 찾기 여행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듣고 여행을 혼자 가게 되면 혼자서 이런 문제를 겪게 되죠.

팟캐스트: 네 동의해요. 아주 위험한 과정이죠. 이러한 과정을 혼자 겪으면서 어떤 도움도 받지 않으니까요. 친구들과 떨어져 있고 혼자서 해야 하니까 말이죠.

제니: 어떤 경우에는 친구들에게도 숨겨야 하니까요. 친구들에게 따라오라고 할 수도 없죠. 아주 개인적이고 감정적이고, 개인적이고 불편한 일이니까요. 

팟캐스트: 그리고 소통이나 다른 문제를 담당하는 입양기관들은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적으로 인식되니까요. 그러니 입양기관과도 상대를 해야 해요. 

제니: 모두를 믿을 수 없지만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해지는 순간이니까요. 하지만 경험의 일부에요. 입양아들이 모이면 서로의 정보와 이야기를 하게 되죠. 그러면서 친밀함과 믿음이 쌓이게 되어요. 그리고 다른 어른 입양아를 만난 적이 없다면 처음으로 이런 감정을 느껴 보는 감정이죠. 그래서 믿음과 경계에 대한 본능이 이러한 관계로 흐려져요. 전 이런 문제가 피해자 잘못이라고 하지 않아요.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도 아니고요. 우리가 우리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은 맞아요. 위험에 처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으니까요. 그것이 문제죠.

제니: 우리 같은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은 상처 입었다고 하죠. 망가졌다고 하고요. 머리를 흔들면서 우리가 한국 부모, 형제, 자매, 친척을 찾으려는 광경을 바라봐요. 다양한 유전자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개인 기업에 우리 유전자를 넘겨주고 우리가 친척을 찾을 가능성에 희망을 거는 것을 보죠. 우리가 탄생 국가에서 여행자가 되는 광경을 봐요. 게스트하우스에서 게스트하우스로 넘어가면서 돈과 자존심을 잃어가면서 떠도는 모습을 보죠. 우리에 대해서 책을 쓰죠. 입양 기관에 가서 읽을 수도 없고 읽어서는 안 되는 입양 서류를 찾으려고 애를 쓴다고 적어요. 술을 마시고 넘어지는 우리를 보고 웃죠. 우리가 똑같은 이유로 길을 헤매고 있는 사람들과 하룻밤을 보내면서 상담 받는 것과 비슷하다고 위로하는 광경을 봐요. 이름을 발음하지도 못하고, 다시는 보지도 않을 한국인 남자들과 하룻밤을 보내는 우리를 경멸하는 듯이 보죠. 아빠 문제인가? 라고 비웃어요. 

팟캐스트: 지금까지 받은 독자의 감상이나 반응은 어떤 기분이셨죠? 놀라운 감상이 있었나요? 

제니: 음……. 캐나다에서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어요. 단순히 독자들만 아니라 평론가들도 고평가를 해줬죠. 신인 작가로서 이런 반응을 얻어서 꽤 놀랐어요. 특히 캐나다의 흑인, 북미 원주민, 그리고 다른 유색인종 작가들의 대단한 재능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랬죠. 그래서 아주 좋은 일이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줬어요. 하지만 제가 놀란 일은 제 성장기 때의 지인들이 이 책을 읽고 저에게 연락을 해왔던 점이었어요. 특이한 일이죠. 대부분의 경우 좋은 감정이긴 했지만, 어떨 때는 저에게 잘 대해주지 않았던 사람들도 저에게 연락을 해왔죠. 그런 경우에는 그렇게 좋지 않았어요. 그런 사람들은 기억을 똑같이 하고 있지 않거나 잊어버린 경우도 많더라고요. 그런 면에서는 놀랐지요. 그래도 대부분의 경우 좋은 반응이었어요.

팟캐스트: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네요. 아주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책이니까요. 이러한 흐름을 타서 더 집필을 하실 예정이 있나요? 이미 무언가를 쓰고 계시나요?

제니: 소설을 쓰고 있어요. 4부작이 될 예정이죠. 짐 존스의 한국계 입양아들이 모티브가 될 것 같아요. 물론 적지 않은 면을 따왔지만 모든 면을 따온 것도 아니죠. 지금 현재 작업상으로는 대부분 한국 배경이에요. 아주 흥미롭죠. 아주 많은 한국 여류 소설가들의 책을 읽고 있거든요. 물론 번역되어 출간된 소설들이지만 한국 문화에 대한 교육이라 아주 흥미로운 주제에요. 민족지적인 관점만이나, 음식이나 그런 이야기도 아니죠.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배울 수가 있었어요. 물건, 관계,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식을 알 수 있었고 어떤 것들보다 더 제 문학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꿔줬죠. 아주 대단한 작가들의 책을 읽고 그들의 방향을 따라가려고 하는 연구라 아주 즐거운 과정이에요 

팟캐스트: 지금 한국 문학에 있어서 아주 흥미로운 시기가 아닌가요? 세대가 교체되면서 젊은 작가들이 등장하고 있으니까요

제니: 아주 대단하죠. 반전도 대단하고 개연성이 있어요. 읽은 책 전부다 전부 대단하고 멋있어요. 현대 한국 작가들의 이야기 전개는 아주 정교해요. 거기에 아주 짧은 책들은 아주 정교하죠. 복잡하면서도 캐릭터들이 표현되는 방식이 아주 혁신적이고 실험적이에요. 아주 멋지고 대담하죠. 그리고 전 전부 좋아요. 

팟캐스트: 제니씨가 나타나서 부모님이 재결합하셨죠. 그 현실에 대해서 큰 무게감을 느껴 보신적이 있나요? 다른 입양아들은 제니씨의 상황을 보고 “만점이네! 조사도 성공했고 널 찾아서 부모님도 재결합하셨네!” 라고 했겠죠. 이런 상황이 또다른 압박으로 작용했는지 알고 싶어요.

제니: 네. 그게 제 경험을 책을 만들려고 한 또 다른 이유였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 상황을 듣고 대단한 이야기라고 했거든요. 아이가 바다 건너 먼 나라로 입양되고 부모는 아이를 입양시키고 나서 인연이 끊어 졌지만, 아이가 되돌아와 다시 한번 로맨틱한 관계를 만들게 됐다는 이야기. 많은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 같다, 영화를 써야한다 이야기했죠. 확실히 한국 드라마 같긴 했죠. 처음에는 확실히 대단한 느낌이었어요. 다시 한 번 시도를 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였으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이상하고 특이했어요. 제 부모님이 같이 저를 어린애 대하듯이 대화를 하셨죠. 부모님이 서로 누굴 더 좋아하는지 물어보시기도 하셨고요. 그리고 부모님을 기쁘게 하려고 어린애처럼 엄마일까, 아빠일까? 답했어요. 아주 이상했죠. 그러한 이상한 관계는 지나갔어요. 하지만 제 책에 언급되었던 대로 긴장감도 높았죠. 아빠와 엄마의의 관계에서는 통제 문제가 있었어요. 특히 저 자신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기 시작하니 더더욱 그랬죠. 그 뒤로는 꽤 무섭고 괴로워졌어요. 어머니의 삶에 이런 사람을 다시 데리고 돌아온 일이 잘하는 일일까? 하지만 어머니는 행복해 보이셨어요. 하지만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였죠. 제가 언어 장벽 문제로 정보를 25% 정도밖에 얻어내지 못했다는 문제도 있었죠. 

팟캐스트: 제가 책을 읽었을 때 남성 캐릭터들도 등장하더군요. 그때의 남자친구에서 현재의 남편까지 보았는데 책에서는 물리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 같더군요. 의존 상대나 안정적인 피난처로 생각 하는 것이 보였어요. 하지만 아빠의 경우에는 좀 더 입체적인 캐릭터지만 더 파괴적이고 피해적인 행동이 심했다고 언급하셨죠. 그리고 여동생과의 관계 묘사까지 감안했을 때 이 책이 페미니스트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시나요?

제니: 네. 제가 하는 모든 일이 페미니스트적 관점을 가지고 있어요. 부정할 수 없죠. 처음부터 제가 여성의 관계에 집중하려고 했죠. 어머니-딸, 할머니-손녀, 자매 간의 관계에 더 집중하려고 했어요. 저에게는 두명의 한국 형제가 있지만 이 회고록만 읽으면 모르겠죠.

팟캐스트: 많은 사람들이 집필은 치료라고 이야기하죠. 책을 쓴 이유가 제니씨의 치료였는지는 모르지만 책이 제니씨를 치료해줬나요? 

제니: 부분적으로는 그랬죠. 우리 입양아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해서,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저에게 이야기를 해왔어요. 그런 면으로는 확실히 치료를 해줬죠. 확실히 인정받는 느낌이고요. 보살핌, 사랑,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죠. 그러한 상황에서 확실히 대단한 이야기가 나타나죠. 전 저 자신을 치료해주거나, 문제를 해결할 책을 쓰기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글 쓰는 과정은 그렇지 않았죠. 제가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고 많은 책을 읽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제가 책의 일부를 읽으면 그런 느낌이 들어요. 감정을 가장 깊게 느끼게 되죠. 책을 쓰는 과정이 아니라 읽는 과정이 제 존재를 확인해주었죠. 그래서 괜찮다고 인정해줬죠.

팟캐스트: 오늘 와서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니씨

제니: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팟캐스트 청취자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려요.

–유호형 번역

시즌 4, 에피소드 3: 다니엘 제레마이어 페르손은

다니엘 제레마이어 페르손은 2살 때 한국에서 스웨덴 부부에게 입양되었고 시골에서 인종차별과 따돌림을 당했다. 런던의 무용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그가 말과 행동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한국에 자신의 혈통적 뿌리를 찾기 위해서 갔을 때 페르손은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한국에 대한 연결은 찾은 페르손은 스웨덴의 삶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다니엘: 제 이름은 다니엘 제레마이어 페르손입니다. 한국 이름은 제레미 양이고요. 27세입니다. 스웨덴 남쪽 출신 실비라는 마을 출신이죠. 사과로 유명해서 사과 마을이라고 불립니다. 인구 1400명 정도의 작은 마을입니다. 사실상 시골이죠. 아 그리고 제가 마을 이름에서 He와 In을 발음하고는 했는데 틀린 것 같네요. (스웨덴어 자기소개). 지금 현재 저는 말뫼에서 살고 있습니다. 2018년에 런던에서 스웨덴으로 왔죠. 런던에서 7년 정도 살았고요. 거기에서 일하고 공부하려고 갔죠. 하지만 고향에 항상 돌아오고 싶었어요. 말뫼는 제 고향과 같이 스웨덴 남부에 있어요. 나라 반대쪽에 있긴 해도 말이죠.

팟캐스트: 그래서 런던은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다니엘: 런던은 정말 대단했어요.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이 있고 화려하죠. 하지만 동시에 혼란스럽고 평화를 찾기 어렵기도 했어요. 작은 마을 출신인 저는 도착하자마자 충격을 받았죠.  안정된 느낌이 없었어요. 항상 움직이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느낌이었죠.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목이 막히는 느낌? 딱 필요한 만큼만 있다가 스웨덴으로 돌아오려고 했죠.

팟캐스트: 성장의 시간이었군요.

다니엘: 네. 런던에는 무용 학교에 진학하려고 갔죠. 제 학사 학위를 현대 무용으로 땄어요. 그 뒤에는 독일 베를린으로 넘어가서 공부를 계속하려고 했죠. 하지만 런던에서 공연을 계약했고 일하기 위해서 남았죠. 하지만 그 일이 다른 일을 가지고 오고 그렇게 되더라고요. 어느새 7년이 넘어갔고 떠나야 했어요.

팟캐스트: 런던에 계실 때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나요? 런던이 한국도 스웨덴도 아닌 3자의 공간이었으니까요.

다니엘: 네 런던 방문이 확실히 저에게 새로운 자각을 하게 해주었죠. 어렸을 때부터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 왔습니다. 제 부모님과 친구들과 이야기해왔고 항상 무의식중에 마음에 두고 있었죠. 런던에 왔을 때 수많은 국적의 사람들과 다른 한국인들을 만나자 무언가를 다시 찾고 싶은 욕구를 느꼈어요. 그게 무엇이고 어떻게 되어 있는지 찾고 싶었죠. 마지막 학년에 최종 프로젝트를 제 생물학적 부모를 찾는 일이 제 공연자와 댄서로서의 활동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연구로 정했어요. 1년을 그 생각을 제 프로젝트로 만드는 데 사용했죠.

팟캐스트: 그걸 어떻게 현실화시키셨죠?

다니엘: 그 우리가 학교 2년 차에 마지막 연도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그 주제를 정한다는 사실을 들었어요. 그때 제가 제 입양아의 자아를 안전한 환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제 일을 도와줄 선생과 대화를 나눌 상대도 있었고요. 제가 혼자 하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느낌이었어요. 그때 고작 20살이어서 확실히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죠. 그 1년 동안 스웨덴 입양 단체와 연락하고, 한국 사회복지단체와 연락해서 제 생물학적 부모를 찾는 일을 시작했죠. 제 입양 서류를 읽고, 부모님과 이야기하고, 같은 학교에 있던 입양아 친구와 이야기도 했죠. 그 친구도 한국 출신이었지만 덴마크인이었어요. 여러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직접 한국에 가기로 했죠. 2014년 일이었어요. 150개 정도의 영상 일기를 찍었어요. 변화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제가 찾은 정보가 제 생각을 바꾸고 댄서로서의 공연 방식을 바꾸고 제 사고방식을 바꾸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뭔가 변화하고 있고 자유로운 느낌을 받았죠. 제 선생님이 이 일이 댄서로서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었다고 말해 주셨고요. 더 높이 보고 더 멀리 보게 됐고, 사람들과 더 많이 만나고 좀 더 깔끔한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게 절차의 시작이었고, 1년 동안 조사하다가 드디어 한국으로 가게 됐죠.

팟캐스트: 한국에 가시게 된 거네요.

다니엘: 네. 서울에 가게 됐어요. 이 결정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어요. 부모님이 제가 혼자 여행하는 데 동의할지 걱정이 됐죠. 어머니 같은 경우에는 같이 가시고 싶어서 하신 것 같지만, 제가 혼자 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3주하고도 반 정도 있었죠. 아주 무서웠어요. 한국어를 혼자 오디오와 교과서를 통해 독학했죠. 그래서 기본적인 한글은 읽을 수 있었지만 특히 한국어 같은 언어는 1년 동안 배울 수는 없죠.

팟캐스트: 그렇죠. 아 한국 사람들이 말을 걸기도 했나요? 아니면 사람들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나요?

다니엘: 사람들이 와서 말을 걸었죠. 대답하지는 못했지만 겸손하고 착하게 대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불편해하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은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이해해줬어요. 제가 입양아라고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미안해한 뒤 떨어지려고 하더라고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왜 불편하게 생각하는지. 지금은 입양아라는 사실이 몇몇 사람들에게는 꽤 무거운 주제라는 걸 이해하게 됐죠.

팟캐스트: 우리 같은 경우에는 입양아라는 사실이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한국에 와서 입양아라는 소리를 하니, 문제가 되는 말을 했거나, 나쁜 말을 했거나, 말을 하지 말아야 했거나, 숨겨야 하는 사실을 들었다는 반응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셨나요? 우리는 그런 사실을 숨겨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잖아요?

다니엘: 그렇죠. 이러한 입양에 대한 인식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항상 알았고 저희 사회나, 부모님도 투명했고요. 입양 서류도 제가 어렸을 때부터 청소년기까지 항상 볼 수 있었어요. 딱히 읽을 필요는 못 느꼈지만, 항상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한국에 와서 사람들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반응이 신기했죠. 제가 이러한 상황에 어떤 반응일지 잘 몰라서 최대한 이해하려고 했죠. 입양아를 더 많이 만나고 나니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게 됐어요. 죄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지내는 동안 많은 사람이 사과하러 왔어요. 흥미로웠죠. 다른 사람들에게 제 입양에 대한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지만, 사회적으로 죄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팟캐스트: 서울에 있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나요?

다니엘: 아주 미래적인 환경과 전통이 공존하고 있었어요. 미래에 있는 느낌이 들었죠. 건축이나 도시의 모습, 그리고 크기가 특히 그런 느낌을 강화해줬어요. 미래에 있는 느낌이 들었죠. 건축이나 도시의 모습, 그리고 크기가 특히 그런 느낌을 강화해줬어요. 하지만 전통적이고 오래된 느낌도 들었죠. 사찰들, 흩어져 있는 한옥, 전통 시장, 이러한 두 가지의 다른 시간대가 섞여 있었죠. 그리고 색채는 필터가 씌워져 있었던 것 같았어요. 도착했을 때 도시 전체에 SNS용 필터가 덧씌워져 있는 느낌이었죠. 모든 것이 음…. 선명….

팟캐스트: 선명하지 않다고요?

다니엘: 예. 베이지색과 밝은 색들이 많았어요. 옥색과 회색….

팟캐스트: 스웨덴은 다른 느낌인가?

다니엘: 녹색이 많고, 선명하죠. 붉은색과 노란색의 집이 많아요. 60년대 70년대에 그런 건축이 유행했거든요

팟캐스트: 붉고 노란 집이요?

다니엘: 네. 시골 쪽으로 오면 원색의 집들이 많고요. 그게 북유럽식이에요.

팟캐스트: 원색의 필터라는 느낌이군요.

다니엘: 네. 따뜻한 느낌의 강한 색이죠.

팟캐스트: 쿨톤인가요?

다니엘: 네. 한국은 좀 더 조용한 색이죠. 기술과 네온사인을 제외 하면요. 그쪽은 아주 특별한 색깔이었어요. 미래적으로 다른 느낌이었죠.

팟캐스트: 이동은 어떻게 하셨죠? 한국 친구가 있으셨나요?

다니엘: 카루트라는 곳의 주소가 있었어요. 입양아를 위한 호스텔이죠. 커스터 김이라는 분과 아내이신 공씨가 같이 운영하고 있어요. 전세계 출신 입양아들이 지내고 있죠. 그게 제가 가진 유일한 정보였어요. 거기에서 지내게 되어서 택시 운전사분께 주소를 건네 드렸고 거기까지 태워다 주셨죠. 거기에서 다른 입양아들을 만나려고 했어요.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 노르웨이, 덴마크, 미국, 호주 등….

팟캐스트: 입양기관을 알아보고 방문하려고 했나요?

다니엘: 아 네. 3일 동안 서울에 적응하고 호스텔의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서울을 돌아다니면서 움직이는 방법, 교통수단 사용법, 다른 실용적 방법을 배우고 다른 사람들과 경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3일 뒤에 입양기관에 가서 면담을 잡았죠. 호스텔에서 만든 덴마크 친구와 같이 갔어요. 택시 타고 가면서 “왠지 익숙해”라는 생각을 했어요. 머릿속에서 뭔가 기억이 나는 느낌이고, 창문을 열고 밖을 보는 느낌이었고요. 그리고 2분 뒤에 입양기관에 도착했어요. 거기에서 제가 출발했던 거죠. 하지만 그리 가까운지 몰랐어요. 기묘한 감정이었어요. 전에는 이야기한 적이 없지만 제 몸 전체가 이 장소를 기억하는 느낌이었어요. 데자뷔라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몸을 뒤덮은 이 확실한 감정이 느껴졌어요. 이 감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여기 있었다는 느낌. 하지만 방향성이 없지만 동시에 정확한 느낌이었어요.

다니엘: 제 입양 서류에는 제 생물학적 부모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있었어요. 20대 초반이었고 결혼하지 않았었고 따라서 제 생물학적 조부모님들은 제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몰랐죠. 서류에 따르면 절 태어난 뒤에 1년간 키우려고 했고 제가 그 두 분 사이에서 자랄 수도 있었어요. 생물학적 어머니의 경우 예술학교 졸업생이었고 제 아버지는 군대에 있었죠. 같이 동거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고요. 따로 살고 있다가 관계를 맺었다고 봤어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한국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애 낳는 일은 금기라고 들었어요. 특히 그런 어린 나이에는 말이죠. 동거도 안 한 상태면 더더욱 금기였죠. 아주 고생하셨을 겁니다. 임신 사실을 숨기고 절 1년이나 키우려고 했던 사실이 말이죠. 그러한 고생과 의지를 생각하면, 그리고 아이를 키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 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죠. 그리고 제가 다른 가족에 입양되어서 그 가족에게도 애착을 뒀다는 사실이 입양 서류에 기록되어 있어요. 특히 입양 어머니한테 말이죠. 약간 나이가 드셨고 입양아 양육 경험이 있던 분이라고 하더군요. 입양 제도에 맡겨지고 입양되기 전까지 아이를 돌보는 곳이었다고 해요.

팟캐스트: 그 입양 부모님에 맡겨졌을 때 만 1살이셨다는 거죠?

다니엘: 네. 그리고 8달 동안 있다가 제 수양부모님들이 스웨덴에서 한국으로 와서 데리고 가셨죠. 부모님들이 말씀하시길 제 입양 어머니를 놓고 가는데 거부감을 표했다고 하더군요. 제가 애착을 뒀다고 하니까, 아주 충격적인 경험이었을 겁니다. 아마 택시에서 느낀 감정과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요. 제가 그곳을 떠날 때 비명 지르고 울고 있었을 테니까. 아주 많이 생각한 일이지만, 몸에 남아있는 기억이 있어서 트라우마 적인 경험을 몸에 새겨지는 거죠.

팟캐스트: 부모님들이 데리고 갈 때 택시를 쓰셨을지도 모르겠네요.

다니엘: 네. 택시를 탔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절 들어 올려서 창문 쪽을 보게 하셨다고 하셨고요. 입양기관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해줬다고 했어요. 그렇게 어릴 때 기억은 없다지만 무언가 무의식에 남아있는 사실이 있겠죠.

팟캐스트: 네.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요. 하지만 1살 때 입양 제도에 맡겨졌으면 충격이었겠네요. 1년간 어머니가 키웠다면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않나요?

다니엘: 네. 거기에 전 사람들에게 애착심을 쉽게 기르고 작별을 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니까요. 사회적이지만 작별하는 일은 어려워요. 다른 이유로 정신 상담을 받을 때 애착 문제가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마 입양과 다른 가족들에게 보내진 것과 연관이 있었을 겁니다.

팟캐스트: 생물학적 부모님 이름이 있나요? 아니면 찾고 싶지 않으려고 하지 않으셨나요?

다니엘: 네 이름이 있어요. 입양기관에서 두 사람과 연락이 됐었죠. 입양기관에서 두 분과 연락이 됐었죠. 생물학적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과요. 헤어지셨다고 하더라고요. 생물학적 어머니께서 사회복지사에게 말하기를 절 입양 보낸 뒤 얼마 안 있어 감당할 수가 없어서 헤어지셨다고 하더라고요. 연인으로 남아 있을 수 없으셨다고 해요. 전화로 이야기하는데 슬퍼하시더라고요. 저에게 계속 사과하시면서 선택지가 없으셨다고 했어요. 아주 감정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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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제가 직접 대화하지 않았고 사회복지사를 통해 이야기했어요. 어머니께서는 저한테 연락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요. 제가 어머니를 찾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요. 제 연락처를 가지고 있으시니 대화하고 싶다면 연락할 수도 있고요. 40대 중반이시니 그렇게 늦지도 않았지요. 하지만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을 겁니다. 일어나면 일어나는 일이죠. 기다리기에는 제 삶이 있으니까요. 제 아버지 같은 경우에는 처음에는 연락이 안 됐고 서너 번 연락하고 난 뒤 에야 그쪽에서 연락을 해왔죠. 새로운 가족이 있고 새로운 삶이 있고, 아내가 저에 대해서 모르니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연락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정확히 제가 찾아서 뭔 문제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그쪽에서 제 연락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요. 아 물론 아들과 딸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군요. 제 이복동생들이죠. 스웨덴에도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어요. 생물학적 형제자매가 있다는 생각을 하니 꽤 낫더군요.

팟캐스트: 아버지가 다시 연락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떤 느낌이셨죠?

다니엘: 제가 그분들을 찾으려고 하는데 아주 오랫동안 시간이 걸렸어요. 아주 긴 과정이었어요.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어요. 그래서 그분들을 만나고 싶었죠. 물론 기대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많은 입양아가 생물학적 부모를 만나지 못하죠. 하지만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여행 도중에 그 두 분을 만나는 상상을 자주 했죠. 그래서 사회복지사께 제가 거기에 3주 반을 지내고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드렸어요. 그리고 마음을 바꾼다면 바로 만날 수 있다고요. 그 나이에 받아들이기 힘들었죠. 아직도 정체성을 찾고 있었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찾던 시점이니까요. 아주 슬픈 시간을 보냈어요. 하지만 다른 입양아들과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하고 여행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다양한 지식을 쌓았어요. 호스텔에 매일 모여서 매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죠. 어떤 사람들은 생물학적 부모를 만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찾지도 못하고 경험이 전부 달랐어요.

팟캐스트: 저 같은 경우에는 생물학적 부모의 정보도 없고 만나지도 못했죠. 슬픔과 분노가 섞인 감정을 느끼셨을 것 같네요. 그분들에게 아주 가까이 가서, 사회복지사들이 그분들과 이야기도 하고 그분들이 누구인지도 아는데 만날 수 없었으니까요.

다니엘: 아주 답답했죠. 사회복지사 앞에 앉아 있었을 때…. 제가 그분을 두 번 만났죠. 여행 처음에, 그리고 끝에 만났고요. 하지만 복지사분이 가진 제 서류를 뺏어서 제가 직접 번호가 있는지 확인하고 직접 전화하고 싶었죠. 진짜 답답했어요. 물론 만나지도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하지만 아주 깊이 원하잖아요. 한국에 있고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더욱 그렇죠. 저 사람인가? 이 사람들인가? 하면서 길가는 사람들을 보기도 했어요. 거기에 이름이 비슷한 사람들도 확인했죠. 알파벳으로도 있었지만, 한글로도 이름이 있었거든요. 한국 친구들을 만나서 번역을 부탁했고 그래서 몇몇 사람들을 발견해서 시작했죠. 결국, 찾지는 못했어요. 하던 도중에 결론에 도달했죠. 찾으러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이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입양된 뒤 처음으로 한국에…. 아니 사실 한국에 한 번 더 온 적이 있었죠. 제 여동생을 데리러 갔었죠. 그 애도 한국 출신 입양아거든요. 여러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이곳에서 자라나 이 문화를 누리며 자랐다면 어땠을까?

팟캐스트: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죠. 왜 생물학적 어머니는 당신을 만나지 못한다고 하셨죠?

다니엘: 어머니는 만나고 싶어서 하셨지만…. 어머니에게도 새로운 가족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제 존재를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런 상황에서 절 만나기는 무서우셨다고. 그런 상황에서 전화로 우시더군요. 저에게는 흥미로운 상황이었죠. 사회복지사께 제가 볼 수는 없으니 목소리라도 묘사해주실 수 있는지 여쭈어봤어요. 복지사님은 어머니께서는 따뜻하고 안정되고, 맑은 목소리를 가지고 계셨지만, 아버지는 강하고 날카로운 군대식 목소리를 가졌다고 하시더군요. 아주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제 친구들이 제가 부드럽게 말하지만 필요할 때는 강하게 말할 수도 있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부모님과 연관되어 있다는 느낌을 줬어요.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연결이 있다고 생각했죠. 그분들이 어떤지 제 머릿속에서 상상했어요.

팟캐스트: 어머니가 미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많은 생각을 했었나요?

다니엘: 네 아주 많죠.

팟캐스트: 다니엘 씨도 예술에 종사하시니까요.

다니엘: 네. 이것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했죠. 14살 때 처음으로 서류를 읽었을 때 예술학교 선생이면서 예술 대학 졸업생이라는 사실을 알았죠. 그때도 춤을 추고 있었으니 두 개가 연결됐죠. 어머니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니엘: 물론 전 댄서고 어머니께서는 고급 예술과 미술 쪽에 더 조예가 있었지만 창조적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 아버지가 군대 쪽이시니 육체적인 일을 하시니까 그래서 아닐까 하고. 뭔가 의문이 있었는데 해답이 나오더라고요. 항상 강하고 가능하다는 느낌이 있었고, 강해지고 능력을 키우려고 노력을 했었는데 연결이 있었던 거고요.

팟캐스트: 양부모님이 예술적이었나요? 아니면 춤이 그분들과는 딱히 상관이 없던 일인가요?

다니엘: 어머니께서 젊을 때 밴드에 소속되어 있으셨죠. 노래하시는 것도 좋아하시고요. 뮤지컬도 좋아하시고. 그래서 제가 뮤지컬보다는 현대 무용에 관심을 보이시니까 실망하시더라고요. 젊었을 때는 창조적이셨죠. 지금은 조금 줄어들긴 하셨지만. 아버지는 음악에 관심이 있으셨어요. 드럼 연주자셨다가 레스토랑 업계에서 일도 하시고 지금은 목수시죠. 예술적인 가족은 아니라고 볼 수 있겠네요.

팟캐스트: 다니엘, 생물학적 부모님의 사진이라도 본 적 있나요? 그분들이 젊었을 때라던가?

다니엘: 아무것도 못 봤어요. 제 생물학적 부모님은 본적 없고 생긴 것도 모르죠. 그분들의 외모가 제 궁금증 중 하나였죠. 어렸을 때부터 그분들의 외모에 대해서 궁금해했어요. 외모 중심적이고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외모를 알고 비교할 수 있다는 점이 말이죠. 입양된 여동생이 있어서 운이 좋았어요. 저희 둘이 한국인이지만 외모는 완전히 다르죠. 하지만 그 애도 큰 아몬드형 눈을 가졌고 저도 그렇고요. 비슷한 피부색도 가지고 있어요. 제가 좀 더 검긴 하지만. 저랑 그 애랑 닮았죠. 그래서 자랄 때 동생이 없었다면 제가 어떤 감정을 가졌을지 모르겠어요. 주변에 보고 연결성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죠. 거기에 더해서 생물학적 부모를 찾는 일로 그분들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아마 저랑 아주 다른 사람이겠죠. 아주 닮은 점이 없을지도 모르고요. 생물학적 부모님들은 제 부모님이 될 수 없을 거예요. 제 부모님은 키워 주신 분들이니까. 하지만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제 외모가 왜 이런지 제 코는 왜 이런지는 알게 된 것 같아요.

다니엘: 학교에서 부모를 데리고 오는 날에는 부모님들을 보고 서로 닮았네- 그러잖아요. 전 그런 경험이 없었어요. 다른 애들을 보고 조금 질투하기도 했죠. 네 질투했어요. 저도 제 부모님을 보고제가 부모님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팟캐스트: 다른 입양아들이 생물학적 부모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질투하기 쉬웠나요? 고통이라든가?

다니엘: 네 감정적이었죠. 아주 충격적인 만남도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생각해 보지 않은 일들이었어요. 거기에 나쁜 경험일 수도 있죠. 그러한 자각을 하기 어려웠어요. 그 사람들도 서로 만날 때 기대 감정이 있고 그 기대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면 아주 충격적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경험을 하고 싶었어요. 미국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스칸디나비아에는 입양아들이 생물학적 부모를 만나게 되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만날 때는 아주 감동적이죠. 그 프로그램을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오랫동안 봤어요. 10년에서 15년간 봤죠. 그 프로그램이 제 부모님과 다시 만나는 꿈에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TV에 기반을 둔다니 이상한 느낌이지만 저한테는 그랬어요.

팟캐스트: 음 그럼 다니엘 서류에는 그분들 연락 기록이 없다면 다니엘에게 주어진 기록은 검열된 기록이었나요? 가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던가?

다니엘: 생물학적 어머니가 저에게 연락하겠다고 하지는 않으셨지만, 사회복지사께서 궁금함과 기대가 깃든 목소리라고 하긴 하셨어요. 거기에 직접 자필로 편지를 써서 번역되었죠. 그러니까 생물학적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 다 읽어보셨죠. 그리고 좋은 양육 환경에 안심을 표하고 좀 더 알고 싶어서 하는 것 같았지만 더 넘을 용기가 없으신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 이상을 요구하고 싶지는 않았죠. 전 이미 팔을 벌렸고 문은 열려있으니 오고 싶을 때 오실 수 있다는 거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요. 제 태생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시간이 가면서 오고 간 거죠. 하지만 더 한국과 이어진 느낌이 들어요. 작년에도 갔다 왔어요. 그때는 댄스 예술가로서 행위 예술의 다양성, 접근성 그리고 포용성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간 거였죠. 한국에서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는 셈이죠. 한국에서 더 많이 일하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한국인들을 스웨덴에서 일하게 하고 싶기도 하고요. 여기에 한국인이 늘었으면 좋겠어요. 네. 스웨덴에 접근성과 대표성이 더 필요해요. 아주 하얀 국가거든요.

팟캐스트: 아 그거 관련해서 질문하고 싶었는데, 성장할 때 매력적인 느낌이 들거나 그러셨나요? 다수 백인 국가에 아주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살잖아요? 거기에 한국에서는 매력적인 느낌이 드셨나요?

다니엘: 아주 흥미로운 질문이네요. 제가 이거 관련해서 자주 이야기했으니까요. 아시아인 남자로서 자라나면서, 아시아인들이 남성적인 이미지로 유명하지는 않잖아요. 거기에 스칸디나비아 하면 바이킹이잖아요. 그래서 남자가 강하고 좀 더 투박하다는 느낌이 있죠. 반면에 한국 사람들은 좀 더 마르고 한국 사람들은 예쁘다- 라는 소리를 많이 하잖아요. 그런 느낌이죠. 스웨덴에서 제가 매력적이라고 느낀 적은 여러 번 있죠. 아 그리고 제가 게이라는 점을 짚고 가죠. 이 상황이 문제를 낫게 만들어주지는 않죠. 많은 게이 남성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공포를 약간씩 느끼고 있거든요. 따라서 남성성을 추구하고 그게 게이 커뮤니티에서는 자연스러운 느낌이 되는 정도에요. 아시아인들은 게이 커뮤니티에서 문제를 겪게 되는 거죠. 데이트 사이트 같은 데 가보면 사람들이 “아시아인, 흑인, 여성스러운 사람 안 받습니다.”라고 프로필에 써놓죠. 아주 대놓고 말이죠. 그래서 소수자 집단 안에 소수자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이러한 경험은 런던에서는 덜 겪었어요. 더 많은 국적과 인종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으니까요. 사람들이 다른 얼굴을 보는 데 익숙하고 모두가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죠. 하지만 스웨덴에서는 제가 그 전형적인 매력은 가지고 있지 않긴 해요. 한국에 왔을 때는 2014년에 처음에 왔을 때는, 약간 적응하지 못한 면도 있었지만, 확실히 외양이 있었죠.

다니엘: 한국의 게이 커뮤니티에는 접근하지 못하긴 했어요. 아주 완벽히 숨겨져 있으니까요. 스웨덴은 LGBTQ 인권에서는 매우 진보적인 나라지만 한국은 그렇게까지 발전해 있지는 않죠. 앞으로 미래에는 그렇게 됐으면 좋겠지만요. 여자애들이 절 보면서 웃는 거예요. 흥미로운 경험이었어요. 사람들이 절 보면서 관심을 가지고 말하고 싶어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거든요. 그래서 익숙치 않았죠. 그래서 대단했어요. 이거 이야기할 때 얼굴을 붉히게 되네요. 외모는 또 자랄 때 큰 문제죠. 혼자서 특이하게 보인다고 생각하면 그렇잖아요. 하지만 여기 오니까 갑자기 안보이게 되는거에요. 하지만 제가 와서 서구적인 행동거지를 가졌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분위기가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제 한국 친구들이 그러는데 “너 한국인이지만 한국인같이 행동 안하네.” 그러더라고요. 행동 같은게 말이죠.

팟캐스트: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스칸다나비아인들만의 특유의 행동이 있나요?

다니엘: 스웨덴 사람들은 거리를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해요. 여기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는 쉽죠. 항상 2미터에서 3미터 정도 떨어져 있으니까요. 조용한 사람들과 문화에요. 그래서 이 문화에서 약간 튀려면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약간 시끄럽거나, 약간 자기 주장을 하거나 그럼 확실히 튀죠. 덴마크 사람들과는 다르죠. 덴마크 사람들은 외향적이고, 직설적이고, 자기 생각을 말하고요. 스웨덴인들은 좀 더 간접적이고 돌려 말하지만 그래도 비판할 때는 하죠.

팟캐스트: 수동적 공격성이라고 할수 있나요?

다니엘: 네. 수동적 공격성이라고 할 수 있죠. 인종차별도 비슷해요. 여기에서 인종차별은 직접적인 거라고 인식하죠. 직접 가서 사람을 미워하는 일 말이죠. 하지만 여기는 사람의 생활 방식이나, 언어, 행동, 대화,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 등…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만 간접적으로 다치게 하죠. 스웨덴에서 흔히 하는 이야기가 미국인들은 시끄럽고 외향적이라고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스웨덴 문화가 아주 내향적이라 그렇다고 봐요. 그래서 카루트에서 다른 입양아와 저를 비교해보면 성장 경험이 달랐어요. 자유롭게 입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는지, 말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사항, 언제 알게 되었고, 자라난 곳에 대한 옹호 등… 요즘에는 국제적 입양의 경우 부모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좀 더 많이 배우게 되고, 입양아들이 겪을 문제에 대해서도 교육받아요. 제 부모님은 그런 교육을 받지 못하셨죠.

팟캐스트: 다니엘씨가 27세이시니, 27년 전만 해도 그런 정보가 없었군요.

다니엘: 아뇨. 사회복지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입양아를 키운 다른 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긴 했지만, 교육이나 정보나, 입양아 문제를 논의할 장소도 없었죠. 그래서 어렵게 배우셨다고 생각해요. 전 꽤 반항적이고, 시끄럽고, 주장이 강한 아이였으니까요. 제가 어렸을 때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무용 학교에 들어가려고 15살 때 집을 나왔거든요. 그때부터 독립성을 키웠고 좀 더 자기주장을 하고 싶었죠. 제 입양아로서, 그리고 인종차별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부모님으로서 그런 이야기를 듣는 일은 어려웠을 그거로 생각해요. 그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셨으니까요. 그래서 부모님에 대해서 나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요. 그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셨으니까요. 하지만 자란 뒤 보니 좀 달랐으면 하는 사실들이 있긴 했죠.

팟캐스트: 예를 들자면?

다니엘: 제가 학교에서 괴롭힘당했을 때, 제가 바뀌는 게 어떻냐고 말씀하시고는 했죠. 물론 나쁜 의도는 아니었고 이해를 잘 못 한 것일지도 몰라요.

팟캐스트: 다니엘 씨가 너무 섬세하다? 그런 뜻인가요?

다니엘: 네. 아니면 자기 자신이 되렴이라는 조언을 해주시고는 했죠. 하지만 그 조언에는 큰 문제가 있어요. 주변 사람들이 절 저로 보지 않는데 어떻게 제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겠어요? 이 사실이 사람들의 사회적 대응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오는데…. 예를 들면 제가 시장에 가면 많은 사람이 저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요. 제가 스웨덴어로 대답하면 몇몇 분들은 스웨덴어로 답하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영어로 계속 말하죠. 인식을 못 하는 거예요. 제가 그러한 상황에서 매번 대응해야 한다는 사실이 이상하죠.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저와 그 사람들이라는 구분이 생기는 거죠. 전 저 자신으로서 스웨덴인의 삶을 살려고 할 뿐인데 다른 사람들은 절 스웨덴인으로 보지 않죠. 제가 스웨덴 인하면 생각나는 전형에 맞아 들어가지 않으니까요. 결국, 제가 저 자신으로 있는 것이 아주 힘들죠. 아주 화나는 일이었어요. 항상 그 문제에 대해서 뭐라고 하기보다는 조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소란을 일으키거나 친구와 가족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이거 마음에 안 든다. 방해된다고 직접 말하게 됐죠. 제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들을 가르치고 대화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한국에 돌아갔던 일이 그러한 상황에서 말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나요?

다니엘: 네. 한국에 돌아간 일이 저에게 힘을 줬죠. 서구 문화에서 소수자인 저의 정체성을 찾는 데 도움이 됐어요. 한국에서는 저는 맥락의 한 부분이었죠. 따라서 튀지 않았어요. 뭐 특정 상황에서는 눈에 띄긴 했지만 제가 직접 만든 저의 특성 때문이었죠. 맞지 않는 점이 조금 있지만, 그 상황에서는 저의 문제였어요. 외부 관점에서 보면 아무도 모르죠. 제가 조금 다르다는 점을 알지도 모르지만 그런 경우에는 제가 게이인지 고민하지, 제 출신지를 고민하지는 않겠죠. 또 제 스웨덴 정체성을 찾는 데도 도움을 줬어요. 제가 우상시한 한국의 이미지가 확실하지 않았다는 거죠. 저는 매우 자유주의적인 스웨덴적 관점을 가지고 있지만 제 정체성과 크게 연관 짓지 않았었죠. 하지만 저의 정체성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2014년에 한국에 방문했을 때 제 가족과 친구들과 더 친밀한 기분이 들었죠. 가족들과 친구들을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된 기분이었고 더 깊게 받아들일 수 있었죠. 전에는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절 이해하지 못하고 같은 주파수에서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 느낌이었죠. 입양이나, 소수자로서의 관점 같은 일이요. 한국을 기준점으로 보니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좀 더 정확해진 느낌이에요. 사람들은 저와 비슷하고, 비록 매일 생활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제 주변에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죠.

팟캐스트: 아주 흥미롭네요. 자라나시면서 항상 사람들과 다르고,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다른 느낌이 들게 하셨다고 했죠. 하지만 한국에 가서 완벽하게 한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니 돌아와서 스웨덴 가족과 친구들과 더 가까워지셨다니 말이죠.

다니엘: 네 그 사실에 대해서 계속 생각해요. 2년에서 3년 동안 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했어요. 단순히 스웨덴이나 한국의 정체성이 아닌 그 중간에 있다는 정체성을 만들었죠. 이러한 정체성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입양아들이나 가족 중 다른 문화권 출신이 있다면 또 다른 문화 정체성이 있을 수도 있죠. 전 그러한 정체성을 가진게 괜찮다고 봐요. 그러한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거죠. 스웨덴 정체성으로 자신을 바꾸거나 한국 정체성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더 노력하는 일을 하지 않고 그 중간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예요. 거기에 독립된 정체성이 있고 그 정체성을 받아들이면 충분히 힘이 될 수 있어요. 우리가 힘이 있고, 목소리가 있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할 수 있죠. 아주 아름다운 일이죠. 전에 변화하려고 다른 정체성에 저를 끼워 넣으려고 할 때보다 훨씬 만족스러워요.

팟캐스트: 관련해서 다른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다니엘 씨. 스웨덴에서 아시아인이나 다른 인종인 분들을 만나면 스웨덴어로 말을 걸려고 하시나요?

다니엘: 네. 최대한 스웨덴어로 말하려고 하죠. 받는 사람들이 스웨덴어로 답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말이에요. 물론 대부분 틀리죠. 하지만 받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봐요. 거기에 느낄 수가 있다고 해야 하나…. 이상하나요? 하지만 전 상대방이 스웨덴 출신이라고 생각하는 게 상대를 외국인이나 해외 출신이라고 가정하는 일보다는 낫죠. 물론 사람들이 나쁜 의도로 그렇게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하지만 그러한 행동이 필요 없는 제외를 일으킨다고 봐요. 좀 더 포괄적으로 생각하고 싶은 거죠.

다니엘: 또 어렸을 때 항상 완벽한 스웨덴어에 신경을 써서, 약간 고전적으로 말하고는 했어요. 몹시 어려운 책들도 많이 읽었고, 학교에서 스웨덴어를 가장 잘했죠. 문법도 항상 좋았고요.

팟캐스트: 다른 사람들에게 다니엘 씨의 스웨덴어가 완벽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으셨나요?

다니엘: 네. 모두가 난 스웨덴인이고 스웨덴어를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잘하고 제가 완벽한 스웨덴어를 하면 누구도 와서 제가 스웨덴인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을 테니까요. 꽤 많은 도움을 줬다고 봐요. 스웨덴어를 말할 수 있으니 확실히 동화되는 느낌이 들었고 이미 말했다시피 제 청소년기에는 좀 더 자기주장이 강해졌거든요. 아이일 때 그런 스웨덴어에 대한 욕구가 제가 스웨덴어를 사용해 제 주장을 하고 교류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줬죠. 거기에 춤과 창조도 그 일부분이 됐죠. 제 춤 동작에 문자를 적용하고는 하거든요. 그래서 런던에서 스웨덴으로 돌아오고 싶어 한 부분도 있을지도 몰라요. 제 언어를 매일 사용하는 일은 영어를 사용하는 일보다 표현력을 높여주니까요. 그래서 스웨덴에 돌아왔을 때 다시 스웨덴어를 쓰고 말하는 일을 기대했죠.

팟캐스트: 문자를 많이 사용하신다는 뜻이 무엇이죠? 대화에 맞춰 춤을 춘다던가? 아니면….

다니엘: 네. 춤출 때 말을 하기도 하지만 춤출 때 해설을 깔기도 해요. 많은 소품이 문자 기반이기도 하고요. 댄서로서 일하면 연관된 사람들, 극장, 블랙박스, 대단한 공연을 하는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댄서로서 일할 때 중요한 절반은 소통이라고 봐요. 제대로 된 문서를 작성하고, 다른 사람들과 협력자들과 연락하고, 생각을 구성하고, 그래서 댄서로서 일할 때 언어는 아주 중요하죠. 사람들이 자주 잊는 일이긴 해요. 하지만 전 마음에 들어요. 전 글 쓰는 것도 좋아하거든요.

팟캐스트: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다니엘 씨가 스웨덴인이라고 증명하라고 고전 스웨덴어도 사용하셨다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뜻이죠? 할아버지가 말할 용어를 사용하신다던가 그런 느낌인가요? 아니면 안 쓰이는 오랜 스웨덴식이라던가?

다니엘: 아뇨.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다채로운 단어를 썼죠. 그걸 무기로 사용했어요. 사람들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거나 고향으로 돌아가라! 라는 소리나 끔찍한 소리를 하고는 했어요. 그리고 저는 언어와 단어를 통해서 사람들을 논파하는 데 사용했죠. 그리고 어떨 때는 제가 뭐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더라고요. 즉 제가 그 사람들보다 더 스웨덴인다웠다는 거죠. 어린애 같은 웃긴 일이긴 해요. 그 나이 때에는 자기방어를 위해서 뭐든지 하기 마련이잖아요. 그게 제 방식이었죠.

다니엘: 표면적이지 않은 차별이 더 위험해요. 사람들이 알지 못하면 해결할 수가 없죠. 보이지 않으면 부글부글 끓다가 터지게 됩니다. 제 친구들의 경우 인종차별이나 그런 거 보거나 들은 적 없는데, 일어나면 이야기해줘 그런 식으로 대답하죠. 친구들이 찾지 않는 이유는 친구들은 당하지 않으니 찾지 않는 거죠. 그런 친구들에게 절하로만 따라다녀 보라고 이야기해줘요. 직접 느껴보라고. 제가 그렇게 말하고 친구들이 따라와서 나가서 외식하고 밤 생활을 보내면, 친구들이 이렇게 말하죠. “네 말이 맞네.” 친구들이 그런 경험을 겪게 되면서 인식하게 되죠. 전 그런 일을 매번 겪고 익숙하니까요. 성희롱당하는 여성들에게도 비슷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남자들이 잘 모르거나 느끼지 못하는 거죠. 관심이 없으니까요. 경험할 이유도 없고. 물론 제가 여성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비슷한 일이니까요.

팟캐스트: 다니엘, 청취자들이 당신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서 하면 어떻게 알 수 있죠?

다니엘: 인스타그램 danieljeremiahp 계정이나, 페이스북 daniel.jeremiah.p 계정을 구독해주시면 되요. 페르손이라는 성은 영미권의 앤더슨과 같이 흔한 이름이거든요.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다니엘. 즐거운 대화였어요.

다니엘: 네

팟캐스트: 대화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즌 4, 에피소드 1: 션서

션 서는 33세의 한국 출신 호주 입양아로 삶에서 여러 비극을 겪었다. 파푸아 뉴기니와 피지에서 가족과 함께 외국인으로 살면서 가난과 특권 정치에 어렸을 때부터 휘말렸다. 하지만 가족의 붕괴가 서의 삶을 바뀌게 해 백인이 주류인 호주 시골로 날아가게 했다. 서는 2019년 IKAA 모임에 참여했고, 다른 입양아들의 커뮤니티, 특히 호주 입양아들과의 연결을 찾아냈다. 이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이다.

션: 제 이름은 션 시어 헤드릭이라고 합니다. 제 중간 이름은 입양 전 이름에서 따왔어요. 한국어로는 서지만 전 시어라고 발음하죠. 하지만 그게 입양 부모님들이 준 이름이죠. 나이는 만 32세입니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호주 가족에게 입양되었죠. 멜버른에서 3시간 걸리는 와논볼스라는 마을에 입양되었어요. 제가 입양 상황에 대해서 아는 일은… 사실 꽤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생물학적 어머니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아주 짜증 나는 일이죠. 제가 아는 이야기는 제 생물학적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교제 중이었다고 해요. 서로 다른 지역의 가발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가발 회사가 망했다고 해요. 아버지와의 연락이 끊기고 난 뒤 어머니가 임신 사실을 아셨죠. 다른 자료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사실이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주 자세한 자료는 있어요. 제 부모님, 부모님의 가족, 출생 장소, 3명의 아들과 2명의 딸 중 셋째였다는 사실, 어머니의 육체적 특징, 키, 유전병이 없다는 증명도요. 하지만 절 입양시키신 이유는 감정적인 상태와 금전적인 문제로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때에는 입양이 제일 나은 선택이었던 셈이죠. 흥미롭게도 산부인과의 이름도 언급하더라고요. 나중에 이야기하죠.

션: 출생 6개월 때 입양되어서 호주로 왔어요. 어머니는 영국인이었고 아버지는 호주인이었죠. 우리 가족은 이 와논볼스 마을에서 첫 6년 정도 같이 살았어요. 마을 근교에서 땅을 가진 채로 살았죠. 꽤 괜찮은 시골이었죠. 하지만 다시 마을로 돌아왔어요. 제가 학교에 가야 했거든요. 하지만 동시에 아버지가 파푸아 뉴기니에서 일할 기회를 얻어서, 파푸아 뉴기니로 갔죠. 아버지는 엔지니어셨어요. 제조업계에서 일하셔서 그쪽에 있는 큰 제조 공장에서 일하셨죠. 그 시절에는 엔지니어가 되려면 대학을 나와야 했고, 아버지는 공대 출신이셨어요. 두 분께서는 불임이셨어요. 어머니께서 젊으셨을 때 수술을 받으셨거든요. 두 분은 관계를 맺으시면서 아이를 가질 거라고 생각은 안 하셨다고 해요. 물리적으로 가질 수 없어서 인지는 모르지만요. 하지만 관계를 이어 나가시면서 관심을 가지게 되셨다고 해요. 호주 내부에서의 입양도 찾아보셨지만, 호주 내부 입양에 관한 법이 마음에 안 드셨다고 해요. 호주에는 친부모가 입양 보낸 자식에게 항상 연락할 권리가 있거든요. 그래서 불편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우연히 일하시다가 아시아계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여성분을 보셨죠. 어머니께서는 꽤 직접적인 분이시라, 다가가서 “당신 아이인가요?”라고 물어보셨다고 해요. 그러니 상대방이 “네.”라고 답하시자 “남편분이 중국인이신가요? 아니면 입양하신 건가요?”라고 물어보셨다고 해요. 알고 보니 그 여성분이 아이를 한국에서 입양하셨더군요. 그러한 연결을 통해서 제 부모님이 절 입양하시게 된 거죠. 그 상황에서 다른 입양 가족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었던 사실이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물론 항상 옆에 살지는 않았어요.

션: 제가 한 여섯 살쯤 제 아버지가 파푸아 뉴기니로 전근을 가셨죠. 하지만 그전에 한국에 가셔서 제 여동생을 입양하셨어요. 제가 3살인가 4살 때였죠. 그렇게 저희 4인 가족이 파푸아 뉴기니로 이사를 했어요. 해외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경험은 흥미로웠죠. 당시의 파푸아 뉴기니는 상당히 치안이 안 좋았어요. 그래서 거대한 보안 주택지에서 해외 가족 둘과 같이 살았죠. 2층 높이의 철조망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지역이라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었어요. 기억이 아주 자세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러한 안전 조치에 대한 이유는 기억이 나요. 파푸아 뉴기니에서 살 때 첫 자전거를 받았어요. 반짝반짝 윤이 나는 예쁜 붉은 자전거였어요. 연습용 바퀴도 달려 있었죠. 크리스마스에 받아서 온종일 타고 다녔어요. 그런데 다음날에 보니까 없더라고요. 그리고 보안 주택지의 정문이 활짝 열려 있었죠. 경비원이 일보다는 그 자전거를 더 원한다고 생각하고 자전거를 훔친 거죠. 경비원은 다시 보지 못했어요. 빈곤함이 엄청났던 거죠.

션: 거기 살면서 불운한 일을 겪었어요. 파티에 참여했는데 거기 수영장 문을 누가 열어 놨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우리 가족은 여동생을 수영장 사고로 잃었어요. 우리 가족 셋에게 있어서 아주 큰 충격이었어요. 그리고 그 상황이 저희 부모님이 이혼하는 과정까지 이어졌어요. 바로는 아니었지만요. 충격과 슬픔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봐요. 하지만 그 이후로 파푸아 뉴기니에서 바로 또 다른 아이를 입양하는 결정을 하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제가 외동으로 자라는 일에 대해 걱정을 하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에게는 아직도 고통스러운 기억이라 길게 이야기해 본 적이 없어요. 이해하고 존중하는 일이죠. 그래서 제 여동생이 죽고 난 뒤 1년이 되지 않아 제 남동생을 입양했어요. 아주 빨리 일어났죠. 그러기로 한 이유가 한국에서 입양하는 과정은 길고 준비가 필요하지만, 파푸아 뉴기니에서 살고 있었으니 파푸아 뉴기니에서의 입양은 좀 더 쉬웠기 때문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제 남동생이 생겼어요. 하지만 몇 달 동안만 데리고 있었죠. 비밀 입양이어야 했지만 입양한 아이의 가족이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았고, 경비원이 그 가족을 알아서 우리 주택지에 들여보내 줬거든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돈을 요구했고 그러한 문제 때문에 아이를 파양해야 했어요. 힘든 시기였어요. 그리고 그 뒤로 우리 가족이 피지로 옮겨갔죠.

션: 제가 8살이었을 때였어요.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몰랐죠. 그 일이 가족과 저에게 얼마나 힘들고 충격적이었는지 이해를 못 했어요. 하지만 피지에서 다시 깔끔하게 시작하려고 했죠. 아버지가 더 나은 일을 받으셨어요. 공장 전체 관리자가 되셨죠. 피지는 정말 대단했어요. 아주 다른 환경이었죠. 사람들이 훨씬 친절했고 주말마다 밖에 외출해서 사람들과 교류도 가능할 정도로 안전했어요. 꽤 좋은 삶을 살게 됐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전 약간 고생을 하고 있었어요. 초등학교를 네 번 전학했어야 했으니까 조금 화가 났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1년 정도 있다가 부모님이 다른 아이를 원한다는 결정을 내리셨어요. 그렇게 해서 제 또 다른 여동생을 입양하셨죠. 그렇게 제가 인도계 여동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꽤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기억하는 일이 하나 있어요. 저희 인도 여동생을 입양했을 때 어머니가 저에게 이렇게 물었죠. “새 여동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그 말에 저는 이렇게 답했죠. “이번 여동생은 데리고 있을 건가요?”

션: 그게 제가 어렸을 때의 사고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또 다른 일은 전 그때 아홉 살이었어요. 그래서 제 여동생과 큰 나이 차가 있었죠. 9살짜리 꼬마 남자애…. 적어도 저는 아기에 관해서 관심이 없었어요. 뭐 전 저 혼자서 노는 것도 좋아하는 행복한 꼬마였어요. 하지만 그 나이 차가 저를 소외시킨 것 같기도 해요. 우리 가족은 위층에 침실이 두개, 아래층에 침실이 세 개가 있는 큰 집에 살았어요. 그래서 위층에 우리 전부 있을 수가 없었죠. 그래서 제가 아래층 침실을 썼는데 약간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어요.

션: 하지만 여동생을 데리고 있던 게 1년도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때 아버지가 일 가시기 전에 저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하셨죠. 아버지는 “네가 잘 못 한 게 아니지만 네 엄마와 내가 이혼을 하게 됐단다. 그래서 넌 호주로 가서 살아야 해. 난 여기 있게 되고.”라고 말씀하셨어요. 충격적이었죠. 어린 아이일 때도 말이죠. 그 정도로 관계에 문제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랑 어머니랑 제 여동생이 와논볼스로 돌아왔죠. 음…. 이혼은 보통 이혼이래도 아주 엉망이죠. 해외에서 막 입양한 아이를 데리고 오는 일은 더 힘들죠. 개인적으로는 피지 학교는 아주 좋았어요. 국제 학교에 다녔는데 아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다녔죠. 30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다녔으니까요. 인종 문제도 전혀 없었고 그냥 머리카락 색이 좀 다른 정도였죠. 그 나잇대에는 인종차별 같은 건 없으니까요. 하지만 와논볼스는 3000명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어요. 제가 학교에서는 유일한 아시아계였죠. 마을에서도 몇 명 안됐고요. 부모님 이혼에 슬퍼하고, 5번째 초등학교 전학을 하고, 그리고 자기감정을 이해하거나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어요.

션: 그때 어머니에게서 최초로 약함을 본 것 같아요. 물론 부정적인 뜻은 아니에요. 부모님의 인간적인 면을 처음으로 보게 되는 거죠. 그런 경험을 하는 시기는 보통 십 대잖아요. 하지만 어머니의 세계가 붕괴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그 일도 힘들었죠. 그렇게 저희는 다시 와논볼스에서 삶을 재구성하려고 했어요. 그래도 다행이었던 점은 제 1학년 때의 친구들이 아직도 와논볼스에 살고 있었다는 점이죠. 저희가 와논볼스로 돌아간 큰 이유이기도 했어요. 어머니가 저에게 물었죠. “와논볼스에 돌아갈 수도 있단다. 가족과 친구들이 거기에 있지. 아니면 멜버른으로 갈 수도 있단다.” 어머니의 형제가 거기에 살고 있었고 친구들도 있었거든요. 딱히 후회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생각해요. 멜버른이라고 말했다면 제 삶이 어떻게 변했을지요. 큰 도시에서 자랐으면 좀 더 쉬웠을까? 뭐 그렇다고 해도 돌아와서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일은 즐거웠어요.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죠. 물론 여러 문제가 있는 삶이긴 했어요. 어머니는 우울증에 걸리셨고, 전 10살 남자애였고 여동생과는 9살 차이가 났죠.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뭐가 잘못되었던 건지, 아버지가 저에게 이혼한다고 말씀해주신 충격적 대화 등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그리고 여동생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났던 것 같아요. 물론 9살 차이 나는 남매가 같은 집에서 산다고 해도 그리 친밀한 관계가 될 것 같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러한 충격과 문제가 있는 상황 때문에 같이 살긴 했어도 그리 친밀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상당히 차가운 관계였죠. 그러한 관계는 제 잘못이고 지금도 후회하는 일이에요. 여동생이 절 필요로 했지만 제 문제를 해결하느라 도움을 못 줬으니까요.

션: 그 시기에는 전 재능이 많은 학생이었어요. 그때 어머니가 저에게 “미안하구나! 션. 네 숙제를 못 도와줄 것 같아. 도움이 필요하면 학교에서 찾아야 할 것 같구나.”라고 말씀하셨죠. 이러한 상황들이 합쳐져서 제가 독립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아마 너무 독립적이게 되었던 것 같기도 해요. 여러 특이한 상황들, 입양, 해외에서 외국인으로 살기, 그리고 제가 왜 이런 감정을 가지는지 이해하는 일 때문에 제가 아주 독립적인 성향이 있게 되었어요. 예를 들면 제가 아주 심하게 따돌림을 당했을 때 전 이유를 알고 있었어요. 제가 그 학교에서 유일한 아시아계였으니까요. 모두랑 다르게 생겼고 그래서 괴롭히는 애들의 말이 저를 깊게 상처 입혔죠. 꽤 감정적인 아이였다고 생각해요. 특정 당해서 계속 괴롭힘 당했죠. 저희보다 먼저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했던 친구 가족이 미국에서 일하다가 고등학교를 위해서 호주로 돌아왔어요. 제나랑 저는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었죠. 그래서 매우 친했어요. 여러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고 가족끼리도 친한 친구였죠. 그래서 학교 외부에서도 서로 만났죠. 흥미로웠어요. 학년에서 단둘인 아시아계였죠. 그래서 조별과제 같은 일을 하게 되면 친구들이 저희에게 물었죠. 남매 관계인지, 그리고 서로 업어 줄 수 있는지 물었죠. 괜찮겠냐고. 제나와 저 둘 다 아주 부끄러워했어요. 그 뒤로는 학교에서 서로 만나지 않으려고 했죠. 전 최대한 다른 애들과 맞아 들어가려고 했어요. 딴 애들이 제가 아시아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면 할 정도로요.

션: 그 일과 관련해서, 시골 마을에서 다문화가정이면 눈에 띄게 마련이죠. 가족과 함께 길을 걷고 있거나 슈퍼에 가면 사람들이 저희를 항상 쳐다봤어요. 항상 그러한 시선을 느꼈죠. 전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보이고 싶었어요. 하지만 평범하게 보이는 일 자체가 문제였죠. 고등학교 시절은 대학 입학을 위해서 기다리는 시절이었어요. 항상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멜버른으로 가고 싶었어요. 와논볼스는 너무 좁았죠. 그리고 제 해외 경험이 저를 좀 더 다양한 배경의 사람이 있는 곳으로 절 이끌었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아주 즐거운 시기가 시작됐어요. 십 대는 힘들었죠. 사춘기는 어떤 아이한테나 힘들고요. 여자애들이 절 좋아했으면 싶고, 인기 많은 애와 친해지고 싶고, 전 최대한 섞여 들어가려고 노력했어요.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랬지만 적어도 학업적으로 전 큰 성공을 거뒀어요.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죠. 그래서 학교에서 그렇게 큰 노력을 하려고 한 것 같지는 않아요. 수업에서 노력하는 일은 멋있지 않으니까 하지 않았고 운동하는 일은 멋있으니까 운동을 더 하려고 했죠. 그 일이 맞건 틀리건 적응을 했어요. 많이 도움이 되었죠. 많은 애가 절 외계인 보듯이 봤던 것 같아요. 다가가기 어려운 아이라는 거죠. 제가 말이 별로 없던 것도 문제긴 했겠죠. 어쨌든 행동 변화가 저에게 도움을 주긴 했어요.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가진 그것처럼 어떤 편견도 없이 다른 애들과 교류하는 일 자체가 어려웠죠.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 항상 편견을 가졌죠. 그래서 항상 맞아 들어가지 않고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 갈 때가 되자 아주 기뻤죠. 오랫동안 기다려온 기회였으니까요.

션: 멜버른에 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도시를 걸어 다니는 일이었어요. 멜버른과는 친숙했죠. 친척들이 거기에 살고 있고 학교 여행으로도 여러 번 갔으니까요.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아무도 저에게 신경 쓰지 않고 사람들과 섞인다는 사실에 기뻐했죠. 그리고 그곳에서 생활이 제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자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때까지는 제 아시아계 정체성을 밀어냈죠. 제 입양아 친구들은 고등학교 때 친부모를 찾아냈어요. 그리고 한국에 큰 관심을 가지고 한국어도 배웠죠. 친구들이 저도 같이하라고 압박을 넣었죠. 전 거부했어요. 그러고 싶지 않고 관심도 없었으니까요. 대학교 1학년 때 두 아시아 남자들과 조별과제를 하게 됐어요. 흥미로운 경험이었죠. 아시아계 가정에서 자란 아시아계 친구들은 그 애들이 처음이었으니까요. 아주 친절한 애들이었어요. 둘 다 멜버른 출신이었죠. 그 애들이 악의는 없었지만 웃으면서 “션 너 너무 바나나 같아. 가장 호주인 같은 호주인 같이 생기지 않은 호주인이야.” 라고 말했어요. 그때 웃긴 했지만 충격이었어요. 아시아계 애들마저도 절 밀어내는구나 하고요. 그 경험으로 아시아계와도 멀어진 기분이었어요. 저와 맞지 않는 다른 그룹이라는 느낌이었죠.

션: 그때 한국이 호주에서 더 큰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죠. 정확히 말하자면 서구 세계에서 더 큰 존재감을 가지게 되었어요. 한국 고깃집이 나타났고, K-POP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어요.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흥미롭고 멋있는 일이 됐죠. 한국 정체성에서 약간 떨어져 있던 저로서는 흥미롭네. 좀 더 알아볼까?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죠. 그러한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니 제 생물학적 어머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죠. 제 주변에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생물학적 부모를 만난 친구가 둘이나 있었으니 더욱더 흥미를 느꼈죠. 그래서 조금씩 찾기 시작했어요. 조금 무섭기도 했죠. 아주 외국의 일이기도 하고, 어렸을 때 그런 고생을 했는데 다시 인생을 복잡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요. 제가 20대 중반일 때야 친부모를 찾기 위한 일을 시작했죠. 제가 친어머니를 만나고 싶다기보다는 단순한 흥미가 더 컸어요. 무의식적으로 흥미를 느끼고 있었고 논리적으로는 나이가 먹고 나서 알고 싶어졌을 때 알지 못하게 되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절차를 시작하고 절차 도중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절차를 밟으려고 동방사회복지회에 직접 연락했어요. 그러니 제가 거주하는 주 정부 관련 부처로 연결을 해주더군요. 사회복지사를 배정받았고, 여러 번 논의를 했어요. 논의 중 하나는 상담 관련에 집중되어 있었고요. 연결과 재결합을 위한 구조 자체는 좋았지만, 예산이 없었어요. 그래서 엄청 느리게 움직였죠. 그래서 1년 정도 걸려서 호주 내부에 있는 제 서류를 찾고 기관의 반응을 기다렸죠. 전 기대가 그렇게 크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회복지사 분의 의견으로는 절차에 대해서 아주 좋은 대응을 하고 있다고 하셨죠. 그리고 딱 기대할 수 있는 만큼 기대하고 있다고 평가하셨죠. 대학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전화가 기억이 나요.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정보를 기관 기록과 대조했는데 관련 정보가 없고 입양 부모 정보도 없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끝났죠. 두 감정을 느꼈어요. 첫 감정은 안심이었죠.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감정. 하지만 그 뒤로 실망으로 발전하더군요.

션: 그 이후로 한국에 관한 관심은 꽤 낮아졌어요. 제 첫 한국 여행은 사실 의도하지 않았었어요. 고등학교 때 일본어를 배웠고 아주 좋아했죠. 그때 제 교제 상대가 일본 여행 표를 손에 넣어서 우리 둘 다 일본에 가기로 했죠. 일본에 집중하고 일본에 대해서 배운 곳을 방문하고 그러려고 했죠. 그런데 그때 교제 상대가 “한국이 바로 옆 나라인데 한국도 가볼까? 당신 고향이잖아.”라고 말했죠. 그래서 동의했죠. 딱히 생각하지 않고 있었지만 말이죠. 한국 음식은 좋아하고 K-POP도 좋아하긴 했지만, 한국 자체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그래서 여행지로도 생각하지 않았죠. 그리고 제 친부모를 찾을 수 없어서 딱히 갈 생각도 없었죠. 그래서 여행지에 추가했죠. 여행가기 딱 좋을 때였어요. 제 소꿉친구 제나가 한국에 영어를 가르치러 가서 적응을 잘 하고 있었거든요. 첫 여행지는 일본이었고 제가 기대했던 것 그 이상이었어요. 돌아다니기 편했죠. 그리고 한국에 도착했어요. 제가 생각하지 않았던 일 중 하나가 한국이 저에게 감정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것이었어요. 한국에 가니 압도되는 느낌이었죠. 일본도 흥미롭긴 했어요. 제가 방문한 첫 아시아계 국가였고 아시아인들이 주류였죠. 하지만 한국에 가니 그러한 감정이 5배는 증폭된 기분이었어요. 도착하니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감정들이 떠올랐죠. 한국에서 계속 살았다면 삶이 어땠을까? 그리고 주변에 걷는 사람들과 저의 비슷함을 느꼈고요. 반대로 그 사람들도 저에게 그런 감정을 느낀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저한테 길을 물었죠. 혼란스러운 경험이었어요. 처음에 저한테 한국어로 말을 걸고, 제가 영어로 답하면, 영어를 할 수 있는 분들은 영어로 답했죠. 그 사람들이 제가 한국어를 못한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고 심판하는 듯이 봤어요. 예를 들면 밤에 길을 걷고 있는데 취한 사람이 길을 물었죠. 그래서 제가 “아 저 영어밖에 못합니다.” 라고 영어로 대답했고 그러자 취한 분이 “아 죄송합니다. 한국인인 줄 알았어요. 어디 출신이세요?”라고 영어로 대답했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 출신입니다.”라고 답했죠.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면서 걸어가 버리시더라고요. 이상했어요.

션: 말하자면 첫 한국 여행을 그리 즐기지 못했어요. 힘든 일이었고 일본보다 모든 일이 조금씩 더 불편했어요. 일본 같은 경우에는 구글 맵스를 사용하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죠. 한국에서는 구글 맵스가 안 통하더라고요. 그래서 한국 지도 앱을 사용해야 했죠. 친구와 친구의 남자친구를 만나는 일은 즐거웠지만 동시에 어려웠어요. 다시 돌아와서 좋은 휴가였지만 한국은 잘 모르겠네. 라고 생각했죠. 그 이유가 한국에 관광객으로 방문해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평범한 일이긴 하죠. 결혼식 때문에 한국에 갔던 두번째 방문 때 좀 더 사람들과 가깝게 교류할 수 있었고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좋은 장소들을 찾아낸 셈이죠. 두번째 여행에서 인천공항을 통해서 떠날 때 상당히 감정적인 기분이 들었죠. 꽤나 놀라운 일이었어요. 전 그렇게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거든요. 제 마음속에서 집을 떠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놀랍고 제 정체성을 확인하게 해주는 계기였죠. 전 다른 사람들보다 제 정체성을 찾는 일에 늦었어요. 한국에 간 첫 여행 때가 26세에서 27세 사이였죠.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늦은 편이었어요. 거기에 저는 제 직업에 집중하는 편이라 일자리를 잡았을 때부터 거기에 집중을 많이 했죠. 제 독립성을 통해서 제 직업은 제가 마음대로 관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래서 저의 20대 동안 해외에 사는 일은 제 관심에서 벗어난 일이었어요. 그래도 만약에 과거로 돌아간다면 20대에 한국에 살면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제 뿌리를 찾으려고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전 다른 선택을 했죠. 제 직업에 좀 더 집중하게 됐고, 이 COVID-19가 끝나면 한국에 더 자주 가고 싶어요.

션: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저희 부모님이 이혼하고 나서 아버지께서는 몇 년간 피지에서 계셨어요. 그리고 이혼하기 전부터 직장에서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어머니가 이혼하기 전에 그 사실을 알았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중요하지는 않죠. 그리고 아버지는 저희에게 전화하시고는 했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멜버른으로 돌아오시고 난 뒤에는 여동생과 같이 주말에 방문하고는 했어요. 아버지가 피지에서 돌아오셨을 때는 재혼하신 뒤였죠. 그리고 새어머니께서는 전 결혼에서 가진 아들이 한 명 있었어요. 그 뒤로 딸도 하나 가지셨고요. 그래서 이복 여동생도 가지게 된 거죠. 아버지는 저희와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내셨어요. 매주 전화도 하셨고 긴 주말이 있으면 멜버른에 가서 같이 지내기도 했죠. 꽤 특이한 경험이었어요. 그 새로운 가족과 같이 지내야 했으니까요. 적어도 제 머릿속에서 아버지가 만든 새 가족을 전 그렇게 불렀어요. 같이 보내는 시간이 항상 어려웠어요. 제가 13살쯤 됐을 때 아버지를 일부분만 가지는 일은 힘들다고 결론을 내렸고 아버지와 연락하고 싶지 않다고 결정을 내렸어요.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전화하던 때에 어머니에게 “더 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죠. 그리고 어머니가 받아들이셨고요. 겨우 몇 년 전에야 아버지와 멀어졌고 서로 이야기도 안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아주 강한 언어 사용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그 시기에 아직도 어린아이로서는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일이 저에게 충격을 주었죠. 제가 잃어버린 두 번째 가족인 셈이죠.

션: 20대 때 여러 감정적 변화를 겪었어요. 20대 초반에 제가 여러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하지만 그 문제를 마주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죠. 진지한 연애를 해본 적도 없었고,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일도 어려웠고, 분노하지만 왜 분노하는지 몰랐어요. 물론 밖에서 보면 전 멀쩡해 보였죠. 그러한 문제를 내부에서 처리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이 제 삶의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어렵게 했어요. 다행히도 제 주치의가 좋은 분이셨어요. 제가 다른 문제로 병원에 가 있을 때 저한테 질문하셨고 전 많은 문제가 있다고 답했죠. 의욕도 없고, 감정 기복도 심하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시니 의사 선생님께서 정신과 전문의인 친구를 소개해 줄 테니 상담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죠. 저 같은 경우에는 정신과 상담이나 상담 자체와 그리 좋은 경험이 없었어요. 부모님 이혼 뒤에 어머니가 저와 제 여동생이 상담을 받게 하셨죠. 그렇게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그래서 상담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주치의 선생님이 추천해준 전문의와 만났고 아주 상담이 잘 진행됐죠. 그리고 거의 처음으로 제가 가진 온갖 문제를 설명할 수 있었죠. 첫 여동생의 사망, 남동생 입양 실패, 이혼, 국가 변화, 인종적 정체성,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죠. 그때 주치의 선생님에게 고마워하고 있어요. 그러한 문제를 알아주셨으니까요. 그렇게 제 삶을 개선하게 해주시고 정신상태도 개선하게 해주셨죠.

팟캐스트: 아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감정도 거기에 끼어 있었나요?

션: 네. 관련된 여러 감정이 있었죠. 슬픔, 실망, 분노, 왜 이 가족에게 입양되었지? 라는 감정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어요. 물론 단순한 감정이었죠. 제 어머니는 제가 아는 여성 중에 가장 강한 여성이세요.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저랑 제 여동생을 키워내셨죠. 저랑 제 여동생 둘 다 제대로 된 어른이 됐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입양아로서 세계 어디든 입양될 수 있었는데 라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한때는 왜 이 가족에 입양되었고, 왜 아버지가 저희를 입양했는데 책임을 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그러한 불만을 느끼기도 했어요. 그러한 이유가 이혼하지 않고 가족을 유지할 이유는 아니라는 것을 알죠. 그런 결혼은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요. 하지만 어렸을 때는 그런 생각을 못 했죠.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느낌이네요. 아버지와는 20년간 말도 안 나눠 봤으니까요. 그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저에게 이득이 될 것 같지는 않아요. 어머니나 제 여동생이 다시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서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도 궁금하죠. 그러한 복잡함은 제 삶에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지금의 가족들을 소중히 여기고 싶어요.

션: 제가 앞에 언급했다시피 제 입양 서류에 제 산부인과가 언급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드렸죠. 제 입양 관련 정보를 더 깊숙이 찾아본 결과 입양아들이 동양사회복지회와 일하는 데 겪는 어려움을 알았고, 복지회의 투명성과 협조성 문제에 대해서도 알게 됐죠. 그래서 4년 전에 해외입양인연대와 연락해서 2차 조사를 부탁했죠. 해외에 사는 제가 생각해도 제 서류에는 많은 정보가 있었거든요. 어머니의 본명, 나이, 출신 지역, 산부인과 등의 정보가 있었죠. 그래서 입양인연대와 연락해서 같이 찾기 시작했죠. 아주 협조적이었고 연대에서 산부인과를 찾아냈어요. 하지만 이미 폐업한 뒤였죠. 하지만 그 소유 의사를 찾아냈다고 했죠. 그래서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병원 측에서 개인정보 보호 문제로 정보를 제공할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단서가 있는데도 정보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상당히 답답했죠. 또 제 서류에는 제가 안양 지부에서 입양되었다고 적혀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 안양 지부는 존재하지 않죠. 그래서 제 어머니가 절 찾으려고 해도 찾을 길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막다른 길에 도달했죠. 그 시기에 또 한창 유전자 검사가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23 and me이나 Ancestry.com 같은 사기업 검사들이죠. 그래서 제가 순수 한국인인지 혼혈인지 궁금해서 한번 검사를 해봤어요. 첫 검사가 특이했는데 그 전에는 유전자 자료가 부족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제가 자료를 받았을 때 제가 100% 동아시아계라고 떴거든요.

션: 150불이나 지급했는데. 전에 몰랐던 사실을 알았네- 라는 느낌이죠. 그리고 유전자 관련 정보가 떴는데 사촌일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흥미롭다고 생각했죠. 사촌? 가까운 친척이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연락하니 등록된 사람의 아내와 유전자 정보가 섞여서 아내 쪽이 친척일지도 모른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의 아내와 연락을 했죠. 하지만 답이 없었어요. 여러 번 연락했는데도 답이 없었죠. 그래서 아 관심이 없나 보다. 실망스럽네. 라고 그만뒀죠. 또 다른 막다른 길이었던 거에요. 그리고 그 검사 등록이 1년 정도 가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그 검사기관 측에서 자료를 잘못 확인했다고 언급하면서 그 아내분이 저의 이복 자매이거나 이모일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주 가까운 친척이죠. 그래서 뭘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쪽에서 저한테 이름을 제공해줬고, 링크드인에서 그분의 이름을 찾았어요. 그리고 한 달 정도 그 정보를 가지고 고심했죠. 개인정보 침해인가? 만약에 제가 여러 번 연락했는데도 답이 없었다면 그걸 존중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결국 메시지 하나 보내는 일은 큰 문제가 없겠지 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메시지를 보냈어요. 그리고 그녀가 답을 해줬죠. 남편이 이야기를 해주기는 했는데 아이를 낳고 그러다 보니 바빠서 답을 못했다는 거예요.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 시작했어요. 그쪽도 입양아여서 친부모를 찾을까? 라고 생각했다고 해요. 하지만 그녀의 상황에서 얼마나 어려울지 알고 그만뒀다고 해요. 그녀의 경우 미국으로 입양되었는데 관련 정보가 전혀 없었다고 해요. 입양 관련 자료를 찾아보려고 하니 권한이 없다고 거절당했다고 하고요. 그래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한국에 직접 가서 탐문이었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너무 가능성이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냥 삶을 살아가기로 한 거죠. 그 뒤로 페이스북으로 연락을 나누다가 영상 통화를 하기도 했어요. 꽤 흥미로운 경험이었죠. 저와 비슷한 얼굴 특징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사람에게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어요. 그리고 말의 억양이 달라도 저희가 생각하는 방식과 인식이 비슷했어요. 흥미로웠죠. 지금은 저희 둘 다 바쁘게 살아가고 있고 시간대도 달라서 계속 연락하기에는 힘들지만, 미래에는 계속 이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어요. 이 COVID-19 이전에는 내년 4월쯤에 뉴욕에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지금은 무리죠. 그래도 그러한 혈육이 있다는 사실이 희망적이죠.

팟캐스트: 이복이거나 의붓남매인 건가요?

션: 네. 저보다 3살 연상이니, 고모나 이모일 가능성은 낮죠. 이복이거나 의붓남매일 가능성이 크겠죠. 저희 유전자를 유전학자들에게 직접 분석을 맡기면 어느 부모 쪽인지 확실히 알 수 있겠죠. 하지만 저와 그녀가 동의하는 사실은 저희의 유전적 연결이 저희 친부모를 찾는 데는 도움이 안 될 거라는 사실이이에요. 그저 흥미로운 사실이겠죠. 제가 친부모를 찾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은 친어머니나 친아버지와 의미 있는 인연을 만들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또 다른 사실은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일이었어요. 서로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나서, 비슷한 경험을 했더군요.

팟캐스트: 한국에 있는 가족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가까운 핏줄을 찾을 수 있다니 대단하네요. 저기, 동방사회복지회가 션 씨의 어머니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션 씨에게 넘겨주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션: 제가 하지 않은 일이 있는데…. 서류 확인을 안 했어요. 저한테 넘겨준 서류에 어머니의 본명이 적혀 있어요. 나이, 고향도 적혀 있죠. 제가 원한다면 미래에 그 서류를 볼 수 있겠죠. 고향 마을에 가서 확인할 수도 있고요. 그리고 저도 동의해요. 그 사람들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겠죠. 하지만 더 찾으려면 시간과 금전적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겠죠. 거기에 현재의 COVID-19 사태로 인한 장벽도 있고요. 하지만 미래에 더 확인해 볼 것 같기는 해요. 

팟캐스트: 션. 제가 들은 바로는 이렇게 찾았는데, 발견한 사람이 또다시 션 씨를 실망하게 할까 봐 주저하고 있는 부분도 있으신 것 같은데. 저도 그럴 거예요. 실망하는 일이 두려운 거죠.

션: 네.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특히 연대에 연락해서 2번째 조사를 부탁했을 때는 그랬죠. 처음에 정부 기관과 일했을 때는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연대를 통해서 일했을 때는 좀 더 직접적이었어요. 전 최대한 외교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했죠. 제가 충분히 노력한다면 어머니를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관심도 보여주지 않은 어머니의 삶에 침입해도 되는가? 절 찾고 싶어서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했죠. 만약에 찾았는데 저를 만나고 싶지 않다면, 그 결과가 저를 부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을 거예요. 그때 보던 상담사님과 이 이야기를 자주 나눴어요. 그분은 이렇게 반응하셨죠. “전부 맞는 반응이고 그렇게 마음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션. 하지만 자기 보호 적이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 조언을 듣고 저 자신을 위해서 찾는 일이라고 인정할 수 있었어요. 제 삶에 항상 가지고 있던 간격이고 지금까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더 알고 싶은 간격이었죠.

션: 제가 알 권리가 있는지는 아주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제가 알 수 있는 것이라면 제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두 번째 조사를 의뢰한 거죠.

팟캐스트: 많은 정보를 가지고 계시죠. 어머니 이름, 어머니의 고향도 알고 있고요. 꽤 높을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준비된 뒤에 하셔야겠지만요.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발품 좀 팔아야 할지도 모르고 한국에 가셔야 할지도 모르죠. 큰 책임이 따르는 일이에요.

션: 네. 좀 더 큰 이야기를 하자면, 작년에 처음으로 IKAA 모임에 참여하게 됐어요. 아주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30대에서 40대 사이가 아닌 입양아들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 모임이었죠. 그 경험이 저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탐구하고 입양아 사회에 이바지하고 싶게 했어요. 우연히 그 시기에 호주 TV에서 국제 입양에 대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죠. 그리고 입양아들에게 관점을 맞추려고 했어요. 많은 매체가 입양 부모에게 많은 관심을 두고 이 프로그램도 그런 관점의 에피소드를 방영했지만, 이번에는 변화를 주려고 한 거죠. 제가 그 프로그램에 참여한 7명의 입양아 중 하나였고, 저희 경험을 프로그램에서 이야기하게 됐죠. 이 팟캐스트에서 언급한 비슷한 이야기를 그 프로그램에서도 진행했어요. 그게 TV에서 방영됐고 제 SNS에도 공유했죠. 우선 첫째로 제가 어렸을 때도 그러한 경험을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요. 그랬다면 제가 그렇게 소외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두 번째로 제 프로그램을 보고 저에게 다가온 사람들에게 약간 압도된 느낌이었어요. 많은 사람이 저를 지지해줬죠. 제 가장 친한 친구들, 심지어 제 어머니마저도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고 그러한 문제를 겪고 있는지 몰랐다고 이야기하셨죠. 아주 성취감이 들었어요. 또 그러한 TV 프로그램이나 이 팟캐스트와 같은 매체의 중요성도 깨닫게 해주었죠. 정보 공유의 중요성을 알게 된 거예요. 제가 만약에 어렸을 때 간접적인 정보, 저한테 직접 오지 않고 나중에 제가 직접 찾아볼 수 있는 정보가 있었다면 제가 생각하고 있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아요. 물론 젊은 남성들을 대표해서 하는 말은 아니죠. 그 세대와 공감하고 감정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거든요. 그리고 만약 제가 어렸을 때 제가 살던 마을에 멘토 프로그램 같은 교육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전 거부했을 거예요. 하지만 덜 침해적인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많은 도움이 됐겠죠. 제가 그때 보지 않았다고 해도 나중에 볼 수 있었겠죠. 사람들이 지원해야 하는 제도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를 자주 겪으니까요. 지방 같은 곳에서는 더더욱 그렇죠. 다른 입양아들과 다른 경험을 겪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요즘 제가 큰 흥미를 느낀 분야 중 하나에요. IKAA에서 입양아 다큐멘터리 상영회도 가졌고, 질문과 답변 회도 가졌죠. 60 쌍의 입양 부모가 와서 토론에 참여해 주셨어요. 아주 큰 성취감을 느꼈죠. 제 상황을 지금 보면 몇 년간 제가 그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될 일에 고생했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리고 계속 그 동기를 위해서 이바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요.

팟캐스트: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저도 션 씨처럼 한국에 가기 전에 일본에 먼저 갔었죠. 션 씨라던가 다른 입양아들에게 있어서 일본이 한국보다 좀 더 안전한 3국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적어도 중압감이 덜 한 곳이 될 수도 있다고 보시나요?

션: 네. 당연히 그렇게 볼 수 있다고 봐요. 해외 일반인들은 보통 한국보다는 일본에 대해서 더 잘 안다고 봐요. 물론 그 간격이 좁혀지고 있긴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그렇죠. 초밥, 사무라이, 도쿄 같은 정보를 알지만, 한국은 그런 정보가 없죠. 또 접근성이 달라요. 호주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관광지가 일본, 그 중에서도 도쿄죠. 웃긴 이야기지만 제 현재 직장이 일본 기업이에요. 현재 정규직이 되기 전에도 1년 정도 그들을 위해서 일했죠. 한국과 일본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감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저 같은 경우에도, 완벽하게 한국인도 아니지만, 호주인도 아닌, 둘이 섞인 정체성을 가진 경우에도 그 역사를 알고 나니 일본 기업에서 일해도 되는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아주 이상한 관점이죠. 전 호주인이잖아요. 하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죠. 도요타에서 일하는 한국인과도 수치심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눴죠. 입양아 정체성의 문제라고도 봐요. 항상 생각해 봐야 할 문제죠.

팟캐스트: 션 씨. 앞에서 어렸을 때 많은 상실을 경험하셨다고 했죠. 제대로 생각할 수 있기도 전에 말이죠. 많은 트라우마가 엮여 있을 것 같아요. 그러한 결과로 관계를 맺거나 신뢰를 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셨죠. 지금도 해결하는 데 노력하고 있는가요? 그리고 지금까지 보완하는 데 성공하셨나요?

션: 네. 지난 3년간 그런 변화와 관련해서 큰 발전을 이뤘다고 봐요. 지금까지는 중간 기간의 연애를 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2년을 넘어가는 데 문제가 있었죠. 그 넘어가는 상태에서 문제 중 하나는 2년 정도 같이 있다 보면 이 연애가 진지한지, 가족 관련해서 이야기도 나오고 아이나 결혼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게 되죠. 그러한 상황에서 제 반응이 그렇게 긍정적이지는 않았어요. 전 결혼과 아이에 대해서 상당히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한 관계는 영구적이니까요. 하지만 처음 연애할 때는 그러한 감정을 잘 이해하고 있지 못했고 그러한 일은 제 잘못이죠. 여성의 관점에서, 또 연애의 관점에서 보면 연애가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확인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맞다고 봐요. 저의 20대 중반에는 그러한 진지한 연애를 할 각오가 안 되어 있었고 무서워했죠. 거기에 압도된 느낌도 있었어요. 그래서 제 연애 상대에서 파괴적으로 대응한 것 같아요. 왜 압박하느냐, 왜 그리 빨리 움직이고 싶어서 하느냐- 라는 식으로요. 물론 2년이 관계를 아는데 충분한 시간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제가 이러한 논의에 접근한 방법은 건전하지 않았고 많은 관계를 파괴해버린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발전해 나가면서 그러한 문제를 알게 됐어요. 애착 관계에 대해서도 많이 읽었고 관계에 대해서 이해하는 일이 과거의 제 반응을 이해하게 해줬죠. 제 어린 시절에 대한 이해가 제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됐죠. 전 지금 제 삶에서 최고의 시점에 도달해 있다고 생각해요. 저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제 삶을 좋게 발전시켰어요. 좋은 친구들도 많고, 부정적인 감정도 적고, 현재 직업도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죠. 생존, 경제, 자가 지원 같은 경우에는 제가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션: 연애는 항상 문제였죠. 특히 연애할 때는 준비 안 된 결정을 내려야 하고 숨 막힌다고 불평하면서 연애하지 않을 때는 외로웠죠. 살면서 엄청 멋진 일들을 많이 겪었어요. 특히 작년에 TV에도 나오면서 그렇죠. 하지만 누구와도 그러한 경험을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이 외로웠어요. 그래서 지난 몇년 동안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죠. 지금은 호주계 한국인과 연애를 하고 있어요. 제가 한국인을 찾아다닌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러한 이야기를 나눠 보는 일이 도움이 된다고 봐요. 지금 여자친구의 경우 10살 때 한국을 떠나와서 호주에 이민을 왔거든요. 그래서 입양아들이 가진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죠. 그래서 그녀와 더 깊은 관계를 맺고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 것 같아요. 특히 COVID-19 때문에 서로와의 시간이 늘어나서 이러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도 도움이 됐죠.

팟캐스트: 이러한 인터뷰를 하고 팟캐스트에 오기 위해서 감정적으로 안정되어야 하고 자신을 마주 봐야 하니, 아주 많은 일을 하신 것 같아요. 제가 지금 여쭤봐도 될지는 모르겠고, 너무 이를지도 모르지만,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으실 것 같나요? 아니면 지금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인가요?

션: 네. 이 문제에 대해 상담을 했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죠. 확실히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보긴 해요. 그러한 결과가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는 여부로 나오지 않아도 말이죠. 다른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봐요. 결국, 균형의 문제죠. 저 자신에 대해서 생각을 하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안위를 생각하느냐의 문제죠. 현재는 아버지를 찾아가서 대화해서 얻는 이득이 손해를 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상황을 입양과 가족의 문제에서 보면 흥미롭겠지만 적어도 제 생각으로는 아버지는 이미 새 가족을 가지고 계셔요. 애도 3명이나 있죠. 제9년에서 10년간의 인생에서의 아버지를 확실히 아버지라고 인정했고 결정을 존중해요. 입양아들이 입양 부모들에게 고마워하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요. 하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부모님에게 고마워요. 적어도 9년 동안 전통적 가족과 함께 좋은 삶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제가 가진 가족들에게 더 노력을 쏟고 싶어요.

션: 아 그리고 어른이 된 뒤로 저와 제 여동생은 훨씬 더 가까워졌어요. 우리가 좀 더 나이를 먹고 나서 좀 더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죠. 여동생이 자라면서 평범한 어린애 동생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갔으니까요. 그리고 저보다 9살이나 어린이면서도 어린 두 명의 딸을 둔 엄마이기도 하죠. 그 경험 자체가 저에게 큰 도움이 됐다고 봐요. 무감정하고 차가운 사람이고 아이들을 무서워하지만, 제 조카들에게 느끼는 애정을 느끼니 그러한 감정들이 사라졌어요. 지금까지 저는 이러한 기준이 맞춰지지 않으면 아이를 가질 수 없어- 라는 식으로 아이 가지는 일을 미뤄 왔거든요. 하지만 20대 초반인 제 여동생이 가족들로 보여준 결과는 그러한 기준이 없어도 좋은 가정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었죠. 제 감정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죠. 제가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여동생에게서 배운 게 아주 컸어요. 입양 부모들이 입양아들이 어머니가 될 때 이러한 감정을 겪었을 것 같지만, 제 여동생이 아이를 가졌을 때 어머니가 임신한 적이 없어도 이러한 조언을 했지만 해주지 못해서 고생했고, 신생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둘 다 몰랐고요. 이러한 경험이 가족들을 더 가깝게 엮어준 것 같아요. 지난 주말에 가족들을 방문했어요. 제 조카들의 두 살 생일 기념이자 어머니 71세 생신 기념이었죠. 같이 저녁을 먹었죠. 제 조카들이 강제가 아니라 처음으로 직접 와줬죠. 원래는 좀 시간이 걸리는데 이번에는 션 삼촌- 하면서 저에게 온 다음에 같이 놀 수 있었죠. 아주 기뻤어요. 그리고 저녁을 같이 먹는데 어머니가 71세가 됐구나. 라고 말하고는 부정적인 면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을 보자꾸나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제가 여러 가지 상담을 하고 있고 여러 일을 하고 계신 걸 알고 어머니는 최대한 지지해주려고 하셨죠. 이해하기 어려워하시지만요. 어머니가 항상 사랑해주시고 지원해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어요. 입양아들이 자라면서 부모를 이해할 수 없어서 하는 일이 저는 이해할 수 없었어요. 25세쯤에야 그런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리고 사랑받으면서 자란 것에 감사했고 여러 일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저번에 입양아를 돕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에 대해서 질문받았죠. 입양아들이 지원받아야 할 일은 많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근본적 문제 해결이라고 생각해요. 미혼모들을 잘 지원해 주지 않는 한국 같은 나라의 미혼모들을 돕고, 현재 뿌리 적 문제를 해결하고, 현재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하는 일이죠. 물론 지금은 확실한 답이 없긴 하지만 이러한 미혼모들이 아이를 입양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면 슬프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