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계 입양아 그레이스 뉴턴 (26세)는 성장과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산업적 제도인 국제 입양에 대한 학습에 관한 이야기를 공유한다. 외동딸로서 뉴턴 씨는 부모와 깊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국제적, 다인종 간 입양의 역사를 공부하게 되면서 부모와 어려운 논의를 하게 되었다. 뉴턴 씨의 탐구심과 진실에 대한 욕구는 여러 번의 중국 방문으로 이어졌고, 각 방문에서 다른 관점을 얻어 올 수 있었다. 뉴턴 씨는 날카롭고 비판적인 비평을 주기적으로 공유하고 있으며, 입양아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그레이스: 제 이름은 그레이스 뉴턴입니다. 제가 3살 때 난징에서 입양되었죠. 제 중국식 이름은 추핑화입니다. 가장 최근 중국 여행으로 이 이름을 고아원의 보모께서 지었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 사실을 알게 되어서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전 위스콘신주 매디슨에서 자라났습니다. 백인 인구가 다수인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시아계 여성이 지나가면 손가락질하지 말라고 주의 주던 기억이 나요. 아주 특수한 경험이었습니다. 우와 나와 닮은 사람이네. 그리고 트윈시티(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세인트 폴 지역)에 있는 매칼리스터 대학교에 진학했을 때 아시아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찾았고 입양아의 정체성도 찾았죠. 부모님의 품을 떠나 새로운 도시에서의 삶을 시작했던 일로 다른 사람들이 저를 인식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죠. 제 고향에서는 사람들은 절 부모님의 딸로 인식했고, 저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대학교에 오니 저는 그냥 평범한 아시아계 미국인이었고, 입양아인지, 어떤 배경의 아시아계 미국인인지는 사람들이 몰랐습니다. 그래서 취약하고 노출된 느낌을 받았죠.
그레이스: 대학교는 저에게 있어서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1학년 때 “국제적 관점-국제적 다인종 간 입양에 대한 인종, 정치, 제국적 해석”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한국계 입양아 교수님이 가르치는 강의였죠. 전 중국계 입양아 중에서는 나이가 많은 편입니다. 중국 국제 입양이 1991년에 시작되었죠. 그래서 입양아 행사 같은 데에서 중국계 입양아들에게 있어서 관리자, 지도자 역할을 맡는 데 익숙해져 있었어요. 그래서 이 교수님을 만난 일이 최초로 저보다 나이가 많은 아시아계 입양아와 관계를 맺은 일이었죠. 아주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입양아들은 고립된 경우가 많죠. 가족에게 있어서 첫 입양아이거나, 첫 아시아계 일원인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인종적 교범이나 우리의 정체성에 맞는 스승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교수님이 가르치는 그 강의를 듣고, 다섯 명의 다인종 간 입양아 친구들을 사귀었어요. 그때 최초로 입양아 친구 집단을 만들었어요. 개별 중국계 입양아 친구들이 있긴 했지만, 한곳에 모여서 서로를 아는 친구 집단이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죠. 유대감이 형성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입양에 대해서 새롭게 보게 되었고요. 입양의 역사와 언론에서 언급되는 입양의 문제점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강한 뒤, 제가 배운 것을 더 확인하고 싶었고, 저에게 있어서 강의가 끝난 것 같지 않았어요. 그래서 여름에 집에 갔을 때 블로그를 시작했죠. 제 블로그 Red Thread Broken입니다. 처음에는 제가 입양에 대해서 생각하고,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와 저, 그리고 제 친구들의 경험을 비교해 보기 위해서 사용했어요. 그리고 처음 시작한 이유보다 훨씬 거대한 계획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레이스: The Land of Gazillion Adoptees(수많은 입양아의 땅) 블로그 창립자 케빈 보머스가 저에게 연락해왔고 Family with Children from Asia Midwest(아시아 출신 아이들의 가족 중서부 지부)의 지도부도 연락을 해왔고, 같이 봉사활동도 진행했습니다. 새롭지 못하지만 대단한 경험이었죠. 하지만 미국, 그리고 나아가서 전 세계의 입양아들과 저를 연결해주었고 전문적으로, 개인적으로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또한, 일반적으로는 제가 몰랐을 다양한 입양아 단체도 알게 되었죠. 현재 전 KAAN, the Korean American Adoptee Adoptive Family Network(한국계 미국인 입양아 입양 가족 단체)의 자문 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중국계 입양아인 제가 한국계 입양아 단체에서 일하고 있다니 조금 웃기긴 하지만, KAAN은 모든 입양아를 환영하고 있어요. 또한, 모든 다인종 간 입양아들 사이에 출신 국가와 상관없이 많은 공통점과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우선 현재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그레이스: 26세입니다.
팟캐스트: 좋아요. 그 강의에서 한국계 입양아 교수와 다인종 간 입양을 공부할 때 다른 입양아들도 있었다고 하셨는데, 전부 한국계 입양아였나요?
그레이스: 1명은 중국계, 1명은 한국계, 1명은 과테말라계, 그리고 다른 한 명은 파라과이계였죠.
팟캐스트: 강의에서 가르친 내용은 어땠나요? 한국 입양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쳤나요? 그렇다면 중국계 입양아로서 한국 입양 역사에 대해서 배우는 느낌은 어땠죠?
그레이스: 수업 자료는 한국계 입양아들이 작성한 자료들이 많았어요. 제인 정 트렌카가 쓴 피의 언어라던가, 한국계 입양아 케빈 보머스를 알게 되기도 했죠. 하지만 다른 자료들은 다른 지역의 입양아들에 대한 자료기도 했습니다. 호주의 다인종 간 입양과 뿌리 찾기에 대해서도 배웠어요. 문화적 인종학살과 애버리지니 인구의 제거를 위해서 진행되었던 계획 일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호주 식민 시기에 시행되었던 정책으로 애버리지니 아이들을 고향과 사회에서 빼앗아 백인 사회와 백인 가정에서 키워, 백인 사회에 익숙하게 만드는 계획이었죠. 그렇게 되면 애버리지니들이 백인과 결혼할 것이고, 백인 혼혈을 통해 애버리지니를 지워버린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상당히 끔찍한 계획이었죠. 또한, 미국 원주민 기숙학교에 대해서도 배웠어요. 이 정책도 호주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죠. 그리고 고아 거래도 배웠습니다. 이 강의가 한국인 입양아의 관점을 넘어선 다양한 입양 경험에 대해서 가르치는 데 성공했다고 봐요. 오히려 저는 미네소타주 입양아 사회가 좀 더 한국인 입양아들에게 관점이 맞춰져 있다고 봤어요. 물론 같이 수업을 들은 입양아 친구들이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팟캐스트: 이러한 입양의 어두운 역사적 배경과 뿌리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부모님과 입양의 문제에 대해서…. 아니 그 이전에 부모님과 입양이나 정치에 관해서 이야기해보신 적이 있나요?
그레이스: 제 부모님은 항상 입양과 중국에 대해서 열린 태도를 보이면서 저를 대하셨죠. 매주 토요일마다 중국 학교에 다녔고 설날마다 홍바오(중국 새뱃돈, 붉은 봉투에 넣어준다)를 주셨습니다. 다른 중국 문화적 활동도 했어요. 그리고 매년 중국계 입양 가족을 위한 중국 캠프도 참여했죠. 부모님은 저와 아시아 미국인의 정체성을 항상 지지해 주셨고 제 중국인 정체성과 아시아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여길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입양과 관련해서는 제가 성장기 때 어머니가 “내 최고의 기쁨은 누군가의 슬픔으로 만들어져 있어.” 라고 말하셨어요. 그래서 저와 어머니가 아는 적은 지식 내에서 열린 대화를 나누었죠. 그리고 대학교 강의에서 이러한 정보를 배우고 나니 부모님이 그 정보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셨죠. 중국에서 입양하실 때 공식적이고 깨끗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입양을 하셨거든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입양하시려고 할 때 중남미 입양은 부정부패로 중단됐고, 베트남 입양도 부정부패로 중단되었다가 지난 몇 년 동안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이렇게 여자애들이 고아원에 많았던 이유는 계획생육정책과 유교적 전통의 남아선호사상, 아들은 부모를 돌보게 되지만 딸은 결혼하면 남의 가족이 된다- 라는 복잡한 사상의 연결 때문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사람들이 중국에서 버려진 여자아이들을 도우려 했죠.
그레이스: 그래서 중국계 입양아들은 크게 두 세대로 나눌 수가 있어요. 첫 세대는 고학력, 고연령대의 부모들이 대부분 여자애를 입양한 경우입니다. 다음 세대의 중국 아이들은 장애인이 많아요. 입양하는 부모들도 젊고, 더 많은 모금 계획들에 존재해요. 그 세대의 차이점이 흥미롭다고 생각했죠. 제 부모님에게 국제적 입양이 거대한 국제적 절차이자 산업이고 요구와 공급이 있고 아이들이 상품처럼 거래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부모님, 특히 어머니는 저와 입양아 사회에서 떨어진 채로,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그것을 받아들이셔야 했어요. 저는 입양아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어요. 또 이 수업이 미네소타 저녁에 진행되는 수업이었죠. 저녁 7시에 10시까지 진행됐고, 밤 열 시에 울면서 학교 건물에서 걸어 나오곤 했습니다. 그리고 밤에 그것도 힘들 때는 좋은 대화가 나오기 힘들죠. 감정적으로 좋지 않은 과정이었고 어머니에게 자주 전화를 드렸어요. 그래서 그 강의를 3단계로 받아들였습니다. 첫 과정은 분노였습니다. 입양 제도에 대한 분노, 아니 처음에는 교수님에 대한 분노였죠. 제가 배우고 있는 모든 사실을 거부하고 싶었습니다. 다음 단계는 깊은 슬픔이었어요. 저의 어린 시절과 유아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 슬픔을 되새기는 과정이었죠.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그 경험과 역사를 결합하고 정보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제가 받아들이고 싶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단계였습니다. 저와 제 부모님에게 있어서 감정적으로 힘든 시기였어요.
팟캐스트: 이해가 되네요. 그 시기에 부모님이 그레이스 씨와의 친밀함을 잃고 있다고 걱정했고, 그레이스 씨는 부모님도 입양 제도의 일부라 불편했나요?
그레이스: 네. 제가 강의를 듣기 전이 생각이 납니다. 막 입학했고 그 강의 수강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농담으로 “강의를 듣고 우리가 제국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라고 하셨죠. 우리의 관계가 바뀌고 있고 이러한 변화 때문에 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는 공포가 조금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와 부모님의 관계에 있어 이러한 대화를 나누는데 여러 가지 이점이 있었어요. 우선 저는 외동딸입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아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죠. 그리고 이 가까운 관계가 이러한 복잡한 대화를 진행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이점은 부모님이 그렇게 종교적인 분들이 아니라는 점이죠. 그분들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입양을 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 영향이 자신들의 입양 과정과 제도에 의문을 가지는 입양아들에게 다른 문제를 부여하거든요. 이 모든 것이 신의 계획인가? 라는 의문이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부모님이 저를 입양한 이유가 불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이 아이를 가지고 싶다- 라고 생각하시긴 했지만 그게 절 입양한 이유는 아니었죠. 불임 문제로 입양된 입양아들은 그러한 문제도 겪어야 하거든요. 그들이 대안적인 선택이었다는 문제를 마주 봐야 하죠. 거기에 제가 외동딸이라 우리 가족, 제 개인에게 입양 제도와 인종이 미치는 영향을 알아가는 감정적인 과정을 거칠 때 부모님이 돌봐야 할 다른 형제자매들이 없어서 저에게 에너지를 전부 쏟을 수 있었던 것도 운이 좋았죠. 그래서 부모님이 저와 같이 이 새로운 길을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부모님과 같이 이러한 입양 과정에 대한 정보를 이해하시면서 관계가 더 돈독해지신 것 같네요. 어머니와 같이 컨벤션에서 발표도 하셨다고 들었는데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그레이스: 발표의 이름은 이제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딸이 성인이 되면서 어머니와 딸의 관계 변화에 적응하는 것에 대한 발표였죠. 그리고 발표한 내용은 제가 바로 전에 언급한 입양 사회에서 우리들의 경험을 수용하는 절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기억이 희미하고 제 어머니가 발표한 부분을 제가 대신 설명하고 싶지는 않아요. 어머니는 저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료이며, 지지자입니다. 제가 블로그를 만들었을 때 어머니에게 이 블로그를 시작할 것이라고 설명해 드렸어요. 어머니는 일기를 쓰면 안 될까? 라고 말씀하셨죠. 인터넷에 있는 나쁜 사람들이 저를 스토킹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상당한 기간 동안 익명으로 블로그를 운영했어요. 제가 입양에 대한 블로그를 운영하고 입양 사회에서의 인종, 권력, 자본의 영향에 관해서 이야기한다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냐.”이라고 묻습니다. 부모님이 절 적극적으로 지지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이 아주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약간의 거부감이 있긴 했지만, 저의 안전에 관련된 일로서 어머니의 본능 때문이었지, 제 감정과 제 일에 반감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팟캐스트: 대단하네요. 저도 그레이스 씨의 블로그를 구독하고, 국제 입양아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죠. 비판적인 관점으로 입양에 대해서 논하고요. 그리고 매우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시죠. 많은 입양아가 그러한 표현과 비판을 하려고 하지만 부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무서워서 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감정이나 생각, 입양에 대해 분노하거나 답답한 점을 말하지 못하죠. 입양에 대해서 비판하지 못하는 겁니다. 물론 사람들이 그레이스 씨의 가족에 대해서 알지는 못하겠지만 가족분들이 그레이스 씨를 지지해 주니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중국 입양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해보죠. 어떻게 시작됐는지에 대한 요약을 해줄 수 있나요?
그레이스: 네. 중국이 계획생육정책을 1979년에 시작했습니다. 중국은 그 시점에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겪고 있었고, 그 인구 증가를 지탱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 하에 시행된 정책이었죠. 그래서 가족 숫자를 줄이기 위한 선전 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공식 정책이 시작되었고 수만 명의 여성에게 강제 불임 수술이 시행되었습니다. 수많은 강제 낙태도 진행되었고요. 그리고 90년대 초반에 중국이 국제 입양을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여자아이들이 버려졌기 때문이죠. 중국 정부가 이 제도를 만들었을 때 부잣집은 돈을 내고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수 있었지만 보통 가정은 그러한 비용을 낼 수 없었죠. 중국에서 아이를 입양 제도에 맡기는 행위는 당시에는 불법이었고 아이 살해는 불법에 비윤리적이었어요. 그래서 여성은 아이를 한 명밖에 낳을 수 없고, 한 명 이상 낳게 되면 합법적으로 그 아이를 처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익명으로 여자아이들을 버리는 일이 늘어났습니다. 몇몇 아이들은 편지나 장신구와 함께 버려졌죠. 하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만약에 아이를 버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떤 보복과 문제가 생길지 겁을 냈기 때문이죠. 이러한 사실은 어린아이들에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친부모가 아이를 버리거나, 문 앞에 두거나, 상자에 넣어서 가게 앞에 버리니까요. 하지만 많은 아이가 아침이나 출근 시간 직전에 버려졌다고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바로 찾아서 경찰이나 고아원에 인계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러한 과정이 중국 입양 제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레이스: 처음에는 많은 아이가 여자아이들이었어요. 중국 가족들은 아들을 중시했기 때문이죠. 그 뒤로 2004년까지 중국 입양은 계속 성장하다가 후난성 추문이 터졌어요. 이 추문은 천 명의 아이들이 가족들에게 납치되어 인신매매되어 고아들의 숫자를 유지하기 위해서 6개의 고아원에 공유된 추문이었어요. 그 추문이 터졌을 때 고아나 적어도 부모의 허락을 받아서 아이들을 입양했다고 생각한 많은 입양 부모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의 아이들이 납치된 아이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요. 그 시점에서 중국 입양이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죠.
팟캐스트: 중국 정부에 있어서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정부가 가진 문제 반발 중 일부였나요?
그레이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몰라요. 중국에서 많은 납치 사건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중국은 인구가 많다 보니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정부에서 관련 반발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어요. 중국 정부는 비판점이 많다 보니 당연한 일이죠. 그래도 그 사건이 사람들이 이러한 입양 절차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사실을 알게 했습니다. 친척들이 강제로 부모가 아이들을 입양하게 하는 이야기도 많아요. 정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팟캐스트: 중국 입양의 장점 중 하나가 아이들이 친부모에게 버림받아 친부모와의 연결이 없이 깔끔하게 이별한다는 점이고, 양부모들이 그러한 사실을 매력적으로 여겼기 때문에 중국 입양 제도가 빠르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그레이스: 많은 국제 입양에 있어서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입양 부모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경우가 있죠. 국내 입양보다 국제 입양이 친부모가 아이들에게 나타날 가능성이 적다고요. 그러니 그런 깔끔한 이별을 선호하는 것도 말이 되죠. 국제 입양의 입양아들이 친부모를 찾으려고 해도 긴 시간이 지난 뒤죠. 국내 입양의 경우 입양아들의 정보와 친부모와의 인연이 유지되는 경우가 많고요.
팟캐스트: 절 포함한 입양아들이 고아라고 인식됐지만, 현재는 많은 입양아가 친가족을 찾고 있죠. 우리가 진정한 고아가 아니라 친족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레이스: 네 그렇습니다. 저번 학기에 국제 아동 복지에 대한 수업을 들었어요. 그리고 제도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인도계 입양아와 교류하게 됐습니다. 아동을 고아원에서 좀 더 가족과 같은 입양 가정 제도에서 돌보는 방식으로 변화하는 제도화에서 일하고 있었죠. 지표에 따르면 현재 고아원에서 지내고 있는 아이들 80%가 1명 이상의 생존하고 있는 부모가 있다고 하더군요. 고아원에서 지내고 있는 아동 중 대다수가 진짜 고아가 아니라는 거죠. 부모들이 고아원에 아이를 맡기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가난이고, 두 번째 이유는 아이들의 교육입니다. 그래서 국제 입양 제도와 관련된 자본, 특히 서구 자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죠. 국제 입양은 각 아동 당 2만 달러에서 5만 달러가 듭니다. 사람들이 그 많은 자본을 아이들의 고향, 사회와 가족들에게 투자한다면 얼마나 많은 아이가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을지 생각할 때가 있어요.
팟캐스트: 유전자 검사로 인해서 중국 입양아들이 얼마나 영향을 받았나요? 거의 어떤 정보도 주어지지 않고 입양되고, 단체도 개입되지 않아, 서류도 없이 입양된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유전자 조사가 그분들의 친부모 조사에 큰 영향을 끼쳤나요?
그레이스: 네. 현재 중국계 입양아 사회는 유전자 검사를 위해서는 23 and Me(미국의 유전자 검사 회사)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전자는 아주 흥미로워요. 개개인에게 있어서 특별하고 입양아들을 중국에 있는 친척이나 입양된 형제자매들과 이어줄 수 있으니까요. 유전자 검사의 문제 하나는 양부모가 자식들이 어린이면 대리 검사가 가능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있어요. 그 문제에는 복잡한 감정이 있어요. 국제 입양된 뒤 최대한 빠르게 조사를 시작하면 입양아들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죠. 하지만 입양아들의 의사 문제가 있죠.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느냐, 미래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유전자 정보를 데이터베이스에 맡기는 행위의 의미를 아는가, 등의 문제가 있죠. 하지만 전 많은 어린 중국계 입양아들이 유전자 검사를 통해 형제자매를 찾거나 친척을 찾은 사례를 알고 있어요. 입양아가 형제자매에 대한 정보, 가족 유전병 여부 등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은 특권이죠. 저도 23 and Me 검사를 진행했지만, 항상 무언가를 빼놓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제 친척이 Ancestry.com(미국의 또 다른 유전자 검사 회사)이나 다른 유전자 검사 회사를 사용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친부모 조사를 할 때 최대한 할 수 있는 조사는 어디까지인가? 라는 점을 요즘 자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레이스: 중국계 입양아 중 상당수가 미혼모에게 입양되어 자랐습니다. 중국이 미혼 입양을 허락한 몇 안 되는 국가였기 때문이죠.
팟캐스트: 현대 중국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시죠? 심각한 성비 불균형을 겪고 있고 남성들이 결혼하려면 부모를 파산시킬 정도의 비용을 들여야 하니까요.
그레이스: 계획생육정책의 뜻하지 않은 영향이겠죠. 답답한 부분은 인구 전문가들이 중국 정부가 계획생육정책을 수정해 두 명의 아이를 허락하지 않으면 퇴직하는 사람들을 대체하고 성별 균형을 맞출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해왔다는 점이에요. 계획생육정책 자체도 3년 정책이고 그 뒤로는 천천히 제거되어야 했을 정책이었지만 더 길게 유지되었고 과학자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진행되었죠. 그래서 이러한 성별 불균형이 존재하는 국가들에 큰 문제가 닥쳤다고 봐요. 중국 남성들의 결혼 불가나, 동남아 지역이나 중국으로의 신부 매매, 남성이 더 많은 사회의 성폭행이나 폭력 사건 증가 등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이 중국인들에게 끼치는 나쁜 영향이나 중국 입양아들의 탄생에 미친 영향을 보면 화가 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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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중국을 3번 방문했습니다. 첫 방문은 13살 때였죠. 부모님과 같이 유산 여행을 하면서 방문했어요. 3주간 방문했고 베이징, 시안, 상하이를 단체 여행으로 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도중에 고향 마을들을 따로 방문했어요. 그리고 그 고향 마을 방문 때 여행사가 가족들을 위해서 통역사들을 붙여주었습니다. 두 번째 방문은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같이 갔었죠. 일주일간 두 명의 선생님의 인솔하에 간 여행이었습니다. 제가 부모님에게 관광객으로 중국에 가는 일이 저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설득하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에는 입양과 관련된 일러 갔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중국에서 단순한 관광객이 될 수 없다는 사실만을 알았죠. 그리고 세 번째 방문은 유학 목적이었습니다. 제 고향인 난징에서 3달에서 4달 동안 유학을 했어요.
팟캐스트: 중국과의 관계가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어떻게 바뀌고 변화했죠? 특히 3번째 방문 때 직접 거주한 뒤에는 어떻게 바뀌었나요?
그레이스 : 중국과의 관계는 제가 자라면서 좀 더 친밀하게 변했다고 생각해요. 제가 어렸을 때 중국의 사진을 구글로 찾아보면서 중국의 사진들이 친숙해 보이길 원했지만 그렇지 않았죠. 토요일 중국 학교도 다녔고 중국 문화 경험도 있었습니다. 다큐멘터리도 보고, 영화도 봤죠. 하지만 그것들을 이해할 맥락은 얼마 없었어요. 13살 때의 여행이 독특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국적이지만 동시에 편안한 경험이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적응을 잘하지 못했죠. 그 여행을 하면서 한 번도 화변기를 사용하지 않고 넘어갔던 기억이 있어요. 위업이라면 위업인 셈입니다. 고등학교 때 여행은 똑똑한 기분이 들었어요. 이미 한번 중국에 와서 이 도시들을 본 적이 있었죠. 다른 애들이 가지지 못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더 아시아인 같고 더 지식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애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었죠. 난징에서 한 학기 동안 유학할 때는 좀 더 복잡하고 감정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어학연수와 관련된 프로그램 일부로 갔었죠. 중국어에 집중하고 저에게 있어서 아주 감정적인 교육 과정이4었어요. 중국 국적인 사람들과 저는 달랐죠. 중국에서 자라고 중국 문화를 알고 있는 중국 대학생들과는 달랐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제가 매우 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제 것이어야 하는 언어를 다시 소유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고향이어야 하는 도시를 다시 소유하는 과정이기도 했어요.
그레이스: 제가 중국에 거주하던 학기 동안 제 고아원에서 절 돌본 보모님과 만났습니다. 제가 13살 때 첫 여행 때 이미 재회했던 분이죠. 그분을 다시 만나서 기뻤습니다. 그리고 유학 도중 그분과 다시 만났을 때 그분이 제 중국 이름인 핑화를 주셨다는 것을 알았죠. 제가 중국에 대해서 배운 점은 제가 돌아갈 때마다 저에 대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제가 원하는 모든 답과 조각을 찾을 수는 없을 거라는 점입니다. 저에게 제가 원하는 모든 정보가 금보자기에 포장된 채로 주어지지는 않을 테죠. 적은 정보를 차근차근 모아가는 과정이에요. 하지만 그 정보들이 저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팟캐스트: 중국의 어떤 면이 그레이스 씨에게 편안하게 다가왔나요? 중국이 이국적이었지만 어떤 면으로는 친숙하다고 하셨죠.
그레이스: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제가 유학 중에 쓴 일기에는 제가 중국에 막 도착하기 전에 이렇게 썼죠. “내 발이 땅에 닿자, 내 마음이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물론 그렇게 쉽지는 않았죠. 하지만 아시아계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 묘하게 편안한 느낌이 들었죠. 제 백인 친구들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제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냄새, 색깔, 그리고 음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죠. 그리고 중국에 있을 때 친부모 조사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찾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했죠. 그래서 제가 2살 때 저를 찾아서 보호한 경찰서를 찾아갔습니다. 경찰서에 갔을 때 제 통역사가 경찰관에게 친부모 조사를 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경찰이 저를 보더니 “아주 아름다운 분이네요. 왜 친부모가 이런 아가씨를 버렸을까.”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예상하던 반응은 아니었죠. 그리고 다른 젊은 경찰분은 1996년 기록을 찾고 있다고 이야기하니 상당히 귀찮다는 반응을 보였어요. “전산화 이전의 기록이네요.” “네 알고 있어요.”라고 답했죠. 그래서 물리적 기록을 찾아냈고 별 내용은 없었어요. 누가 절 데리고 왔는지, 제가 뭘 입고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었죠. 그래서 제 조사는 바로 멈춰버렸어요. 더 조사할 기반이 없었죠. 그리고 제 통역가는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고 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제가 2살 때 버려졌으니 미혼모가 낳아 조부모들이 키웠을 가능성이 있고 더 저를 키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죠. 아니면 제 부모님이 안후이성 출신이면서 난징을 방문했다가 절 잃어버렸고 다시 안후이성으로 돌아가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습니다. 제가 이 도시에 와서 고향을 찾고 저 자신을 찾으려고 했는데 와 보니 난징이 제 고향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죠. 중국을 떠난 뒤에 제 고향을 잃어버렸고 제 마음속에서 다시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저를 덮쳐왔습니다. 중국과의 친밀감 중 일부는 제가 다시 제 고향을 찾으려고 하는 의지 때문이었는데 고향이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것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팟캐스트: 그레이스 씨가 원하는 과거가 있나요?
그레이스: 흥미롭네요. 제가 자라면서 많은 친구는 남동생이 있었어요. 2살 연하인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죠. 그래서 친구들과 놀면서 남동생들과는 친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알았고 이야기도 나눴어요. 그래서 제가 2살 때 버려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중국의 역사를 연관해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제에게도 2살 어린 남동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제가 버려진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어요.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아기일 때 버려집니다. 태어난 뒤 며칠도 지나지 않아서 버려지죠. 그래서 전 그 과거의 가능성을 좋아해요. 남동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해 보죠. 전 외동딸이라서 제가 어렸을 때는 저를 봐줄 오빠나 제가 돌볼 수 있는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그걸 가지고 있지 않으니 친 형제자매가 있다면 아주 흥미로울 것 같고, 제가 원하는 과거입니다.
그레이스: 조사 지원자들과 현장에서 연구를 진행해 미국에 정보를 가지고 오려는 분들이 있죠. 한국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TV 프로그램이나 뉴스에 나가서 이야기를 공유하는 때도 있습니다. 중국 입양아들은 고향이나 마을에 사진과 자기 정보를 담은 포스터를 만들어서 붙이는 경우도 많아요. 그리고 그러한 포스터를 인터넷으로 공유하기도 하죠. 중국 트위터인 웨이보나 중국 SNS인 위챗도 자주 사용됩니다. 이 포스터는 성공 가능성이 지역마다 달라져요. 저 같은 경우에는…. 난징은 8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대도시에 대학교들이 많은 도시고, 교통 중심지이기도 하죠. 인구 유동률이 높은 곳입니다. 그래서 포스터들은 작은 마을 출신이거나 어디에서 왔는지 정확히 안다면 더 효과적이라고 봐요.
팟캐스트: 아버지가 아이를 다리에 놓고 갔는데, 매번 버린 날마다 아버지가 돌아가서 다리에서 기다리는 영상을 본 적이 있어요. 그런 영상을 보시면 감정적이게 되나요?
그레이스: 당연하죠. 한국 입양아 상봉, 중국 입양아 상봉을 보면 감정적이게 되죠. 가족 상봉을 보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해요.
팟캐스트: 중국에 있었을 때 중국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나요? 북경어를 하실 수 있지만 그래도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눈치챘죠?
그레이스: 중국에 있을 때 많은 사람이 제가 한국인이냐고 묻더군요. 사람들이 제가 아시아인처럼 보이지만 북경어를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한 거죠. 제 출신지와 관련해 싸워야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제가 중국에 갔을 때 모든 사람에게 입양됐다는 사실을 공유하지 않으려고 했죠. 제 친구들, 룸메이트, 긴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는 입양 사실을 공유했지만, 한번 만나고 말 사람들은 알 필요가 없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제 북경어 실력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출신지를 물으면 미국 출신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럼, 사람들이 이렇게 답했죠. “하지만 중국인 같이 보이는데.” 전 그럼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자랐다고 답했습니다. 그럼 많은 사람이 이민자라고 짐작했겠죠. 하지만 그중 한 사람이 “아 그럼 부모님이 중국인인가?”라고 물었고 저는 미국인이라고 답했어요. 그러니 그 사람은 이해를 못 했습니다. 제가 수업을 같이 듣던 동기가 말하기를 제가 말을 하지 않으면 진짜 중국인으로 보인다고 언급을 했죠. 그리고 중국 여행객이나 다른 사람들이 길을 물어보거나 다른 질문을 하기도 했어요. 제가 잘 모르겠다고 답하면 그 사람들이 “미안해요!”라고 말하고 멀어졌습니다.
그레이스: 한번은 그 어학연수를 같이 듣는 친구들과 잠시 여행을 하기 위해서 내륙으로 들어갔었는데 쑤저우로 가는 길에 가장 빠르고 비싼 열차를 탔고, 돌아오는 길에는 가장 싼 열차를 탔어요. 시골 사람들이 잔뜩 타고 있었죠. 사람들이 서 있고 앉아 있는 도중에 한 사람이 제 왼쪽에 앉아 있었고 제가 일기를 영어로 작성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옆에 앉은 분과 대화를 하게 되었죠. 그분이 왜 제가 영어로 일기를 작성하는지 물었어요. 그리고 제가 미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해줬습니다. 그분이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죠. 제가 아는 많은 사람이 중국 입양아의 숫자가 무척 많은데도 우리의 존재를 몰랐어요. 그래서 이 사람과 흥미로운 대화를 나눴죠. 그리고 제가 이해 못 하겠는 말을 해서 이해 못 했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앞에 앉아 있던 분이 그걸 어떻게 이해 못 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차 사람들이 전부 어떻게 그걸 이해 못 하냐는 듯이 보았죠. 그리고 제가 대화하는 분이 저를 옹호하려고 일기를 잠시 가지고 가시더니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이거 봐라. 중국어로 쓰인 글은 없고 영어로 되어 있잖아!”라고 말씀하셨고, 저는 그거 보면서 일기를 돌려 달라고 하고 있었죠.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저에게 와서는 신기한 것을 보듯이 질문하고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하듯이 말이죠. 한 애가 저에게 와서 바로 앉아서 절 보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인을 만나보는 것이 처음이라고 말이죠. 제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장소에 따라 아주 달랐던 것 같아요. 전 대부분 시간을 대학에서 보냈죠. 대학교에서는 많은 중국인이 외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어요. 하지만 다른 지역으로 가면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어려워했습니다.
팟캐스트: 이야기를 들으니 입양아들이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자란다는 점이 떠올랐어요. 미국에서 자란 입양아들은 외국인이 아니고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죠. 하지만 모국에 돌아가면 모국인이라는 점도 증명해야 합니다. 그레이스 씨 같은 경우에는 중국인이면서 동시에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죠.
그레이스: 네. 자라나면서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라, 어디에서 왔느냐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돌아가니 제가 미국에서 살았던 어떤 기간보다 더 제 미국인의 정체성을 지키고 미국인의 정체성을 증명해야 해야 했어요. 중국에 있을 때 가장 미국인으로서 정체성을 느끼면서 동시에 중국인의 정체성도 느꼈습니다. 제 미국인의 정체성이 제가 놀라는 정보들과 제가 중국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놀라움 등으로 느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중국인의 뿌리와 중국의 역사, 중국에서의 삶을 알 수 있었어요. 그러한 두 정체성을 동시에 자각하는 것은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좀 더 깊이 조사 단체와 연계해서 친부모 조사를 진행하고 싶나요? 아니면 현재로서는 지금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레이스: 조사는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해요. 좋은 정신 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입양아들은 고통스러운 상처가 있고 조사 결과가 상처를 치유해줄지 아니면 상처를 더 깊게 할지 알 수가 없죠. 여러 가지 방면으로 준비가 되어야 있어야 한다고 봐요. 원치 않은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죠. 2015년에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 아무런 정보도 찾지 못했던 점에 몹시 화가 났던 기억이 있어요. 중국에 갈 때마다 제 이야기의 새로운 조각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죠. 그리고 다음에도 그럴 것 같아요. 나중에는 다시 조사를 시작하겠죠. 그래도 적어도 처음의 실망감을 극복하고 아무것도 찾지 못할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팟캐스트: 지금도 블로그를 운영하고 계시는데 지속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유지하는 데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데 유지하는 이유와 목적을 이야기해주셨으면 해요.
그레이스: 제가 블로그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개인용이었습니다. 수업을 듣고 제 감정을 정리하기 위한 수단이었죠. 그리고 제가 다른 입양아들에게서 공감하는 메시지나 가족들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받기 시작하면서 자부심을 느끼기 시작했죠. 제가 제 블로그를 2013년에 시작했을 때는 페이스북에 어른이나 청소년이 주축이 된 입양아 그룹들이 얼마 없었어요. 전부 자신들의 입양아 경험을 소화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죠. 현재는 그러한 사람들이 이해 동료를 찾을 수 있는 곳이 더 많죠. 하지만 그러한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 동기 중 하나였죠. 제 중요한 자극 중 하나는 입양아에 대해서 더 널리 알리고 국제 입양 논조를 다양화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입양의 불편한 점도 알리고 입양은 단순히 한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평생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며 그 정체성이 시간이 걸려 바뀐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죠. 또 대학원의 전공이 입양, 아동 복지와 관련되어 있죠. 그리고 불우아동과 관련된 복지에서는 아동의 환경을 최대한 바꾸지 않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쳐요. 하지만 국제 입양은 모든 것을 바꾸죠. 더 많은 것을 바꾸는 개입 방법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입양과 가족, 그리고 아동 복지와 가족유지에 대해 더 깊고 복잡한 대화를 하는 겁니다.
팟캐스트: 또 KAAN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계시죠?
그레이스: 네. KAAN의 자문 위원회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어요. 현재 KAAN은 입양아들의 구성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한국계 입양아가 많이 줄었어요. 입양아 자체가 줄었고, 이러한 변화하는 입양아 사회의 구성을 도와줄 제도를 구축하는 일이 필요하죠. KAAN의 도움을 받는데 약간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거부감이 아니라 흥미는 있었지만 제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의 확신이 없었죠. 제가 중국계 입양아였으니까요. 제가 이메일을 보냈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받긴 했지만, 여전히 확실치 않았죠. 그래서 제 한국계 입양아 친구와 같이 자원봉사를 신청했어요. 제가 맞지 않는다면 그 친구가 제 안전망이 되어줄거라고 생각했죠. 아주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모두가 저를 환영해주었고 사회에 맞아 들어갔죠. 다음 해의 KAAN 회의에서 토론에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딸들이라고 하는 블로그를 하는 입양아 여성들의 토론이었어요. 두 번째라서 그런지 많은 사람과 대화를 하는데 좀 더 편안함을 느꼈어요. 더 많은 사람이 저에게 접촉해왔죠. 제 블로그를 읽었거나 저번 해에 참여한 저를 기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계속 참여하게 되는 대단한 회의였죠. 그리고 KAAN에서 만든 인연은 개인적으로, 직업적으로도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서 지역적으로도 연락을 계속 취하고, 편지로도 연락을 취하고 있습니다. 또한, KAAN은 입양아 출신 교수님들이 많이 참여하기 때문에 저의 대학원 진학과 대학원 탐사에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KAAN에 많은 멘토가 있고 조언 위원회 참여가 입양 사회에 더 개입하게 했고 지도력과 전문적인 기술을 배울 수 있었죠. 제가 중국계 입양아지만 KAAN이 제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그레이스의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한국계 입양아나 중국계 입양아에게 자신들의 정체성 때문에 불편하다고 여길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소리과 플랫폼을 가지고 한국 중심의 단체와 교류하는 일에 대해 조언해줄 수 있나요?
그레이스: 전국적, 그리고 세대 간의 교류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연상의 한국계 입양아들과의 교류는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도 생각하게 했죠. 이미 청소년 자식들을 둔 한국계 입양아들도 만났고, 그분들은 그분들의 자식들이 입양과 인종에 대해서 질문한 것에 대해서 말해주었습니다. 입양아 자손의 관점도 생각하게 되었죠. 결혼, 다인종 간의 교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관점들이 아주 귀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손쉽게 물어볼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다른 중국계 입양아들에게도 물어볼 수 있는 일들이 아니죠. 중국계 입양아들 대부분은 아직 이러한 발전 단계에 접어들지 못했거든요. 이러한 세대 간 입양아 간의 교류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그리고 출신 국가와 상관없이 입양아 간에는 여러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입양아와 입양 부모들이 손실, 그리움, 문화적 소외를 겪어요. 이 현상은 단순히 국가적으로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입양아가 전체적으로 겪는 일이죠. 물론 중국인 입양아만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득이 있고 한국인 입양아만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도 이득이 있습니다. 예들 들면 친부모 조사 같은 경우에는 그러한 장소에서 같이 공유가 좀 더 쉽죠. 다른 국가들마다 규제, 절차와 역사가 다르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경험이 서로 함께하고 교차하는 것을 배우는 일이 제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이득이 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장소 중 하나는 다인종 간 다국간 입양아 사회라고 생각해요. 중국계가 아니어도 괜찮죠. 공유되는 감정과 상실감, 그리고 이해를 공유하고 있으니까요.
팟캐스트: 블로그 공유라던가 다른 하고 싶은 일은 없으신가요? SNS 계정을 구독하고 싶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되죠?
그레이스: 우선 제 블로그인 Red Thread Broken (https://redthreadbroken.wordpress.com)이 있고요, Red Thread Broken 명의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계정도 운영 중이고, 트위터로는 Grace Pighwa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청자분들이 2021년에 KAAN에서 뵐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레이스: 운이 좋다면 2021년에는 KAAN이 현실에서 개최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저도 거기에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