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4, 에피소드 3: 다니엘 제레마이어 페르손은

다니엘 제레마이어 페르손은 2살 때 한국에서 스웨덴 부부에게 입양되었고 시골에서 인종차별과 따돌림을 당했다. 런던의 무용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그가 말과 행동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한국에 자신의 혈통적 뿌리를 찾기 위해서 갔을 때 페르손은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한국에 대한 연결은 찾은 페르손은 스웨덴의 삶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다니엘: 제 이름은 다니엘 제레마이어 페르손입니다. 한국 이름은 제레미 양이고요. 27세입니다. 스웨덴 남쪽 출신 실비라는 마을 출신이죠. 사과로 유명해서 사과 마을이라고 불립니다. 인구 1400명 정도의 작은 마을입니다. 사실상 시골이죠. 아 그리고 제가 마을 이름에서 He와 In을 발음하고는 했는데 틀린 것 같네요. (스웨덴어 자기소개). 지금 현재 저는 말뫼에서 살고 있습니다. 2018년에 런던에서 스웨덴으로 왔죠. 런던에서 7년 정도 살았고요. 거기에서 일하고 공부하려고 갔죠. 하지만 고향에 항상 돌아오고 싶었어요. 말뫼는 제 고향과 같이 스웨덴 남부에 있어요. 나라 반대쪽에 있긴 해도 말이죠.

팟캐스트: 그래서 런던은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다니엘: 런던은 정말 대단했어요.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이 있고 화려하죠. 하지만 동시에 혼란스럽고 평화를 찾기 어렵기도 했어요. 작은 마을 출신인 저는 도착하자마자 충격을 받았죠.  안정된 느낌이 없었어요. 항상 움직이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느낌이었죠.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목이 막히는 느낌? 딱 필요한 만큼만 있다가 스웨덴으로 돌아오려고 했죠.

팟캐스트: 성장의 시간이었군요.

다니엘: 네. 런던에는 무용 학교에 진학하려고 갔죠. 제 학사 학위를 현대 무용으로 땄어요. 그 뒤에는 독일 베를린으로 넘어가서 공부를 계속하려고 했죠. 하지만 런던에서 공연을 계약했고 일하기 위해서 남았죠. 하지만 그 일이 다른 일을 가지고 오고 그렇게 되더라고요. 어느새 7년이 넘어갔고 떠나야 했어요.

팟캐스트: 런던에 계실 때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나요? 런던이 한국도 스웨덴도 아닌 3자의 공간이었으니까요.

다니엘: 네 런던 방문이 확실히 저에게 새로운 자각을 하게 해주었죠. 어렸을 때부터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 왔습니다. 제 부모님과 친구들과 이야기해왔고 항상 무의식중에 마음에 두고 있었죠. 런던에 왔을 때 수많은 국적의 사람들과 다른 한국인들을 만나자 무언가를 다시 찾고 싶은 욕구를 느꼈어요. 그게 무엇이고 어떻게 되어 있는지 찾고 싶었죠. 마지막 학년에 최종 프로젝트를 제 생물학적 부모를 찾는 일이 제 공연자와 댄서로서의 활동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연구로 정했어요. 1년을 그 생각을 제 프로젝트로 만드는 데 사용했죠.

팟캐스트: 그걸 어떻게 현실화시키셨죠?

다니엘: 그 우리가 학교 2년 차에 마지막 연도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그 주제를 정한다는 사실을 들었어요. 그때 제가 제 입양아의 자아를 안전한 환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제 일을 도와줄 선생과 대화를 나눌 상대도 있었고요. 제가 혼자 하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느낌이었어요. 그때 고작 20살이어서 확실히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죠. 그 1년 동안 스웨덴 입양 단체와 연락하고, 한국 사회복지단체와 연락해서 제 생물학적 부모를 찾는 일을 시작했죠. 제 입양 서류를 읽고, 부모님과 이야기하고, 같은 학교에 있던 입양아 친구와 이야기도 했죠. 그 친구도 한국 출신이었지만 덴마크인이었어요. 여러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직접 한국에 가기로 했죠. 2014년 일이었어요. 150개 정도의 영상 일기를 찍었어요. 변화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제가 찾은 정보가 제 생각을 바꾸고 댄서로서의 공연 방식을 바꾸고 제 사고방식을 바꾸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뭔가 변화하고 있고 자유로운 느낌을 받았죠. 제 선생님이 이 일이 댄서로서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었다고 말해 주셨고요. 더 높이 보고 더 멀리 보게 됐고, 사람들과 더 많이 만나고 좀 더 깔끔한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게 절차의 시작이었고, 1년 동안 조사하다가 드디어 한국으로 가게 됐죠.

팟캐스트: 한국에 가시게 된 거네요.

다니엘: 네. 서울에 가게 됐어요. 이 결정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어요. 부모님이 제가 혼자 여행하는 데 동의할지 걱정이 됐죠. 어머니 같은 경우에는 같이 가시고 싶어서 하신 것 같지만, 제가 혼자 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3주하고도 반 정도 있었죠. 아주 무서웠어요. 한국어를 혼자 오디오와 교과서를 통해 독학했죠. 그래서 기본적인 한글은 읽을 수 있었지만 특히 한국어 같은 언어는 1년 동안 배울 수는 없죠.

팟캐스트: 그렇죠. 아 한국 사람들이 말을 걸기도 했나요? 아니면 사람들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나요?

다니엘: 사람들이 와서 말을 걸었죠. 대답하지는 못했지만 겸손하고 착하게 대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불편해하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은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이해해줬어요. 제가 입양아라고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미안해한 뒤 떨어지려고 하더라고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왜 불편하게 생각하는지. 지금은 입양아라는 사실이 몇몇 사람들에게는 꽤 무거운 주제라는 걸 이해하게 됐죠.

팟캐스트: 우리 같은 경우에는 입양아라는 사실이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한국에 와서 입양아라는 소리를 하니, 문제가 되는 말을 했거나, 나쁜 말을 했거나, 말을 하지 말아야 했거나, 숨겨야 하는 사실을 들었다는 반응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셨나요? 우리는 그런 사실을 숨겨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잖아요?

다니엘: 그렇죠. 이러한 입양에 대한 인식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항상 알았고 저희 사회나, 부모님도 투명했고요. 입양 서류도 제가 어렸을 때부터 청소년기까지 항상 볼 수 있었어요. 딱히 읽을 필요는 못 느꼈지만, 항상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한국에 와서 사람들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반응이 신기했죠. 제가 이러한 상황에 어떤 반응일지 잘 몰라서 최대한 이해하려고 했죠. 입양아를 더 많이 만나고 나니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게 됐어요. 죄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지내는 동안 많은 사람이 사과하러 왔어요. 흥미로웠죠. 다른 사람들에게 제 입양에 대한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지만, 사회적으로 죄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팟캐스트: 서울에 있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나요?

다니엘: 아주 미래적인 환경과 전통이 공존하고 있었어요. 미래에 있는 느낌이 들었죠. 건축이나 도시의 모습, 그리고 크기가 특히 그런 느낌을 강화해줬어요. 미래에 있는 느낌이 들었죠. 건축이나 도시의 모습, 그리고 크기가 특히 그런 느낌을 강화해줬어요. 하지만 전통적이고 오래된 느낌도 들었죠. 사찰들, 흩어져 있는 한옥, 전통 시장, 이러한 두 가지의 다른 시간대가 섞여 있었죠. 그리고 색채는 필터가 씌워져 있었던 것 같았어요. 도착했을 때 도시 전체에 SNS용 필터가 덧씌워져 있는 느낌이었죠. 모든 것이 음…. 선명….

팟캐스트: 선명하지 않다고요?

다니엘: 예. 베이지색과 밝은 색들이 많았어요. 옥색과 회색….

팟캐스트: 스웨덴은 다른 느낌인가?

다니엘: 녹색이 많고, 선명하죠. 붉은색과 노란색의 집이 많아요. 60년대 70년대에 그런 건축이 유행했거든요

팟캐스트: 붉고 노란 집이요?

다니엘: 네. 시골 쪽으로 오면 원색의 집들이 많고요. 그게 북유럽식이에요.

팟캐스트: 원색의 필터라는 느낌이군요.

다니엘: 네. 따뜻한 느낌의 강한 색이죠.

팟캐스트: 쿨톤인가요?

다니엘: 네. 한국은 좀 더 조용한 색이죠. 기술과 네온사인을 제외 하면요. 그쪽은 아주 특별한 색깔이었어요. 미래적으로 다른 느낌이었죠.

팟캐스트: 이동은 어떻게 하셨죠? 한국 친구가 있으셨나요?

다니엘: 카루트라는 곳의 주소가 있었어요. 입양아를 위한 호스텔이죠. 커스터 김이라는 분과 아내이신 공씨가 같이 운영하고 있어요. 전세계 출신 입양아들이 지내고 있죠. 그게 제가 가진 유일한 정보였어요. 거기에서 지내게 되어서 택시 운전사분께 주소를 건네 드렸고 거기까지 태워다 주셨죠. 거기에서 다른 입양아들을 만나려고 했어요.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 노르웨이, 덴마크, 미국, 호주 등….

팟캐스트: 입양기관을 알아보고 방문하려고 했나요?

다니엘: 아 네. 3일 동안 서울에 적응하고 호스텔의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서울을 돌아다니면서 움직이는 방법, 교통수단 사용법, 다른 실용적 방법을 배우고 다른 사람들과 경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3일 뒤에 입양기관에 가서 면담을 잡았죠. 호스텔에서 만든 덴마크 친구와 같이 갔어요. 택시 타고 가면서 “왠지 익숙해”라는 생각을 했어요. 머릿속에서 뭔가 기억이 나는 느낌이고, 창문을 열고 밖을 보는 느낌이었고요. 그리고 2분 뒤에 입양기관에 도착했어요. 거기에서 제가 출발했던 거죠. 하지만 그리 가까운지 몰랐어요. 기묘한 감정이었어요. 전에는 이야기한 적이 없지만 제 몸 전체가 이 장소를 기억하는 느낌이었어요. 데자뷔라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몸을 뒤덮은 이 확실한 감정이 느껴졌어요. 이 감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여기 있었다는 느낌. 하지만 방향성이 없지만 동시에 정확한 느낌이었어요.

다니엘: 제 입양 서류에는 제 생물학적 부모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있었어요. 20대 초반이었고 결혼하지 않았었고 따라서 제 생물학적 조부모님들은 제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몰랐죠. 서류에 따르면 절 태어난 뒤에 1년간 키우려고 했고 제가 그 두 분 사이에서 자랄 수도 있었어요. 생물학적 어머니의 경우 예술학교 졸업생이었고 제 아버지는 군대에 있었죠. 같이 동거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고요. 따로 살고 있다가 관계를 맺었다고 봤어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한국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애 낳는 일은 금기라고 들었어요. 특히 그런 어린 나이에는 말이죠. 동거도 안 한 상태면 더더욱 금기였죠. 아주 고생하셨을 겁니다. 임신 사실을 숨기고 절 1년이나 키우려고 했던 사실이 말이죠. 그러한 고생과 의지를 생각하면, 그리고 아이를 키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 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죠. 그리고 제가 다른 가족에 입양되어서 그 가족에게도 애착을 뒀다는 사실이 입양 서류에 기록되어 있어요. 특히 입양 어머니한테 말이죠. 약간 나이가 드셨고 입양아 양육 경험이 있던 분이라고 하더군요. 입양 제도에 맡겨지고 입양되기 전까지 아이를 돌보는 곳이었다고 해요.

팟캐스트: 그 입양 부모님에 맡겨졌을 때 만 1살이셨다는 거죠?

다니엘: 네. 그리고 8달 동안 있다가 제 수양부모님들이 스웨덴에서 한국으로 와서 데리고 가셨죠. 부모님들이 말씀하시길 제 입양 어머니를 놓고 가는데 거부감을 표했다고 하더군요. 제가 애착을 뒀다고 하니까, 아주 충격적인 경험이었을 겁니다. 아마 택시에서 느낀 감정과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요. 제가 그곳을 떠날 때 비명 지르고 울고 있었을 테니까. 아주 많이 생각한 일이지만, 몸에 남아있는 기억이 있어서 트라우마 적인 경험을 몸에 새겨지는 거죠.

팟캐스트: 부모님들이 데리고 갈 때 택시를 쓰셨을지도 모르겠네요.

다니엘: 네. 택시를 탔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절 들어 올려서 창문 쪽을 보게 하셨다고 하셨고요. 입양기관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해줬다고 했어요. 그렇게 어릴 때 기억은 없다지만 무언가 무의식에 남아있는 사실이 있겠죠.

팟캐스트: 네.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요. 하지만 1살 때 입양 제도에 맡겨졌으면 충격이었겠네요. 1년간 어머니가 키웠다면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않나요?

다니엘: 네. 거기에 전 사람들에게 애착심을 쉽게 기르고 작별을 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니까요. 사회적이지만 작별하는 일은 어려워요. 다른 이유로 정신 상담을 받을 때 애착 문제가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마 입양과 다른 가족들에게 보내진 것과 연관이 있었을 겁니다.

팟캐스트: 생물학적 부모님 이름이 있나요? 아니면 찾고 싶지 않으려고 하지 않으셨나요?

다니엘: 네 이름이 있어요. 입양기관에서 두 사람과 연락이 됐었죠. 입양기관에서 두 분과 연락이 됐었죠. 생물학적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과요. 헤어지셨다고 하더라고요. 생물학적 어머니께서 사회복지사에게 말하기를 절 입양 보낸 뒤 얼마 안 있어 감당할 수가 없어서 헤어지셨다고 하더라고요. 연인으로 남아 있을 수 없으셨다고 해요. 전화로 이야기하는데 슬퍼하시더라고요. 저에게 계속 사과하시면서 선택지가 없으셨다고 했어요. 아주 감정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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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제가 직접 대화하지 않았고 사회복지사를 통해 이야기했어요. 어머니께서는 저한테 연락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요. 제가 어머니를 찾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요. 제 연락처를 가지고 있으시니 대화하고 싶다면 연락할 수도 있고요. 40대 중반이시니 그렇게 늦지도 않았지요. 하지만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을 겁니다. 일어나면 일어나는 일이죠. 기다리기에는 제 삶이 있으니까요. 제 아버지 같은 경우에는 처음에는 연락이 안 됐고 서너 번 연락하고 난 뒤 에야 그쪽에서 연락을 해왔죠. 새로운 가족이 있고 새로운 삶이 있고, 아내가 저에 대해서 모르니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연락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정확히 제가 찾아서 뭔 문제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그쪽에서 제 연락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요. 아 물론 아들과 딸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군요. 제 이복동생들이죠. 스웨덴에도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어요. 생물학적 형제자매가 있다는 생각을 하니 꽤 낫더군요.

팟캐스트: 아버지가 다시 연락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떤 느낌이셨죠?

다니엘: 제가 그분들을 찾으려고 하는데 아주 오랫동안 시간이 걸렸어요. 아주 긴 과정이었어요.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어요. 그래서 그분들을 만나고 싶었죠. 물론 기대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많은 입양아가 생물학적 부모를 만나지 못하죠. 하지만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여행 도중에 그 두 분을 만나는 상상을 자주 했죠. 그래서 사회복지사께 제가 거기에 3주 반을 지내고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드렸어요. 그리고 마음을 바꾼다면 바로 만날 수 있다고요. 그 나이에 받아들이기 힘들었죠. 아직도 정체성을 찾고 있었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찾던 시점이니까요. 아주 슬픈 시간을 보냈어요. 하지만 다른 입양아들과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하고 여행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다양한 지식을 쌓았어요. 호스텔에 매일 모여서 매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죠. 어떤 사람들은 생물학적 부모를 만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찾지도 못하고 경험이 전부 달랐어요.

팟캐스트: 저 같은 경우에는 생물학적 부모의 정보도 없고 만나지도 못했죠. 슬픔과 분노가 섞인 감정을 느끼셨을 것 같네요. 그분들에게 아주 가까이 가서, 사회복지사들이 그분들과 이야기도 하고 그분들이 누구인지도 아는데 만날 수 없었으니까요.

다니엘: 아주 답답했죠. 사회복지사 앞에 앉아 있었을 때…. 제가 그분을 두 번 만났죠. 여행 처음에, 그리고 끝에 만났고요. 하지만 복지사분이 가진 제 서류를 뺏어서 제가 직접 번호가 있는지 확인하고 직접 전화하고 싶었죠. 진짜 답답했어요. 물론 만나지도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하지만 아주 깊이 원하잖아요. 한국에 있고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더욱 그렇죠. 저 사람인가? 이 사람들인가? 하면서 길가는 사람들을 보기도 했어요. 거기에 이름이 비슷한 사람들도 확인했죠. 알파벳으로도 있었지만, 한글로도 이름이 있었거든요. 한국 친구들을 만나서 번역을 부탁했고 그래서 몇몇 사람들을 발견해서 시작했죠. 결국, 찾지는 못했어요. 하던 도중에 결론에 도달했죠. 찾으러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이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입양된 뒤 처음으로 한국에…. 아니 사실 한국에 한 번 더 온 적이 있었죠. 제 여동생을 데리러 갔었죠. 그 애도 한국 출신 입양아거든요. 여러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이곳에서 자라나 이 문화를 누리며 자랐다면 어땠을까?

팟캐스트: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죠. 왜 생물학적 어머니는 당신을 만나지 못한다고 하셨죠?

다니엘: 어머니는 만나고 싶어서 하셨지만…. 어머니에게도 새로운 가족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제 존재를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런 상황에서 절 만나기는 무서우셨다고. 그런 상황에서 전화로 우시더군요. 저에게는 흥미로운 상황이었죠. 사회복지사께 제가 볼 수는 없으니 목소리라도 묘사해주실 수 있는지 여쭈어봤어요. 복지사님은 어머니께서는 따뜻하고 안정되고, 맑은 목소리를 가지고 계셨지만, 아버지는 강하고 날카로운 군대식 목소리를 가졌다고 하시더군요. 아주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제 친구들이 제가 부드럽게 말하지만 필요할 때는 강하게 말할 수도 있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부모님과 연관되어 있다는 느낌을 줬어요.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연결이 있다고 생각했죠. 그분들이 어떤지 제 머릿속에서 상상했어요.

팟캐스트: 어머니가 미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많은 생각을 했었나요?

다니엘: 네 아주 많죠.

팟캐스트: 다니엘 씨도 예술에 종사하시니까요.

다니엘: 네. 이것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했죠. 14살 때 처음으로 서류를 읽었을 때 예술학교 선생이면서 예술 대학 졸업생이라는 사실을 알았죠. 그때도 춤을 추고 있었으니 두 개가 연결됐죠. 어머니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니엘: 물론 전 댄서고 어머니께서는 고급 예술과 미술 쪽에 더 조예가 있었지만 창조적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 아버지가 군대 쪽이시니 육체적인 일을 하시니까 그래서 아닐까 하고. 뭔가 의문이 있었는데 해답이 나오더라고요. 항상 강하고 가능하다는 느낌이 있었고, 강해지고 능력을 키우려고 노력을 했었는데 연결이 있었던 거고요.

팟캐스트: 양부모님이 예술적이었나요? 아니면 춤이 그분들과는 딱히 상관이 없던 일인가요?

다니엘: 어머니께서 젊을 때 밴드에 소속되어 있으셨죠. 노래하시는 것도 좋아하시고요. 뮤지컬도 좋아하시고. 그래서 제가 뮤지컬보다는 현대 무용에 관심을 보이시니까 실망하시더라고요. 젊었을 때는 창조적이셨죠. 지금은 조금 줄어들긴 하셨지만. 아버지는 음악에 관심이 있으셨어요. 드럼 연주자셨다가 레스토랑 업계에서 일도 하시고 지금은 목수시죠. 예술적인 가족은 아니라고 볼 수 있겠네요.

팟캐스트: 다니엘, 생물학적 부모님의 사진이라도 본 적 있나요? 그분들이 젊었을 때라던가?

다니엘: 아무것도 못 봤어요. 제 생물학적 부모님은 본적 없고 생긴 것도 모르죠. 그분들의 외모가 제 궁금증 중 하나였죠. 어렸을 때부터 그분들의 외모에 대해서 궁금해했어요. 외모 중심적이고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외모를 알고 비교할 수 있다는 점이 말이죠. 입양된 여동생이 있어서 운이 좋았어요. 저희 둘이 한국인이지만 외모는 완전히 다르죠. 하지만 그 애도 큰 아몬드형 눈을 가졌고 저도 그렇고요. 비슷한 피부색도 가지고 있어요. 제가 좀 더 검긴 하지만. 저랑 그 애랑 닮았죠. 그래서 자랄 때 동생이 없었다면 제가 어떤 감정을 가졌을지 모르겠어요. 주변에 보고 연결성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죠. 거기에 더해서 생물학적 부모를 찾는 일로 그분들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아마 저랑 아주 다른 사람이겠죠. 아주 닮은 점이 없을지도 모르고요. 생물학적 부모님들은 제 부모님이 될 수 없을 거예요. 제 부모님은 키워 주신 분들이니까. 하지만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제 외모가 왜 이런지 제 코는 왜 이런지는 알게 된 것 같아요.

다니엘: 학교에서 부모를 데리고 오는 날에는 부모님들을 보고 서로 닮았네- 그러잖아요. 전 그런 경험이 없었어요. 다른 애들을 보고 조금 질투하기도 했죠. 네 질투했어요. 저도 제 부모님을 보고제가 부모님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팟캐스트: 다른 입양아들이 생물학적 부모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질투하기 쉬웠나요? 고통이라든가?

다니엘: 네 감정적이었죠. 아주 충격적인 만남도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생각해 보지 않은 일들이었어요. 거기에 나쁜 경험일 수도 있죠. 그러한 자각을 하기 어려웠어요. 그 사람들도 서로 만날 때 기대 감정이 있고 그 기대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면 아주 충격적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경험을 하고 싶었어요. 미국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스칸디나비아에는 입양아들이 생물학적 부모를 만나게 되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만날 때는 아주 감동적이죠. 그 프로그램을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오랫동안 봤어요. 10년에서 15년간 봤죠. 그 프로그램이 제 부모님과 다시 만나는 꿈에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TV에 기반을 둔다니 이상한 느낌이지만 저한테는 그랬어요.

팟캐스트: 음 그럼 다니엘 서류에는 그분들 연락 기록이 없다면 다니엘에게 주어진 기록은 검열된 기록이었나요? 가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던가?

다니엘: 생물학적 어머니가 저에게 연락하겠다고 하지는 않으셨지만, 사회복지사께서 궁금함과 기대가 깃든 목소리라고 하긴 하셨어요. 거기에 직접 자필로 편지를 써서 번역되었죠. 그러니까 생물학적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 다 읽어보셨죠. 그리고 좋은 양육 환경에 안심을 표하고 좀 더 알고 싶어서 하는 것 같았지만 더 넘을 용기가 없으신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 이상을 요구하고 싶지는 않았죠. 전 이미 팔을 벌렸고 문은 열려있으니 오고 싶을 때 오실 수 있다는 거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요. 제 태생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시간이 가면서 오고 간 거죠. 하지만 더 한국과 이어진 느낌이 들어요. 작년에도 갔다 왔어요. 그때는 댄스 예술가로서 행위 예술의 다양성, 접근성 그리고 포용성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간 거였죠. 한국에서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는 셈이죠. 한국에서 더 많이 일하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한국인들을 스웨덴에서 일하게 하고 싶기도 하고요. 여기에 한국인이 늘었으면 좋겠어요. 네. 스웨덴에 접근성과 대표성이 더 필요해요. 아주 하얀 국가거든요.

팟캐스트: 아 그거 관련해서 질문하고 싶었는데, 성장할 때 매력적인 느낌이 들거나 그러셨나요? 다수 백인 국가에 아주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살잖아요? 거기에 한국에서는 매력적인 느낌이 드셨나요?

다니엘: 아주 흥미로운 질문이네요. 제가 이거 관련해서 자주 이야기했으니까요. 아시아인 남자로서 자라나면서, 아시아인들이 남성적인 이미지로 유명하지는 않잖아요. 거기에 스칸디나비아 하면 바이킹이잖아요. 그래서 남자가 강하고 좀 더 투박하다는 느낌이 있죠. 반면에 한국 사람들은 좀 더 마르고 한국 사람들은 예쁘다- 라는 소리를 많이 하잖아요. 그런 느낌이죠. 스웨덴에서 제가 매력적이라고 느낀 적은 여러 번 있죠. 아 그리고 제가 게이라는 점을 짚고 가죠. 이 상황이 문제를 낫게 만들어주지는 않죠. 많은 게이 남성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공포를 약간씩 느끼고 있거든요. 따라서 남성성을 추구하고 그게 게이 커뮤니티에서는 자연스러운 느낌이 되는 정도에요. 아시아인들은 게이 커뮤니티에서 문제를 겪게 되는 거죠. 데이트 사이트 같은 데 가보면 사람들이 “아시아인, 흑인, 여성스러운 사람 안 받습니다.”라고 프로필에 써놓죠. 아주 대놓고 말이죠. 그래서 소수자 집단 안에 소수자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이러한 경험은 런던에서는 덜 겪었어요. 더 많은 국적과 인종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으니까요. 사람들이 다른 얼굴을 보는 데 익숙하고 모두가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죠. 하지만 스웨덴에서는 제가 그 전형적인 매력은 가지고 있지 않긴 해요. 한국에 왔을 때는 2014년에 처음에 왔을 때는, 약간 적응하지 못한 면도 있었지만, 확실히 외양이 있었죠.

다니엘: 한국의 게이 커뮤니티에는 접근하지 못하긴 했어요. 아주 완벽히 숨겨져 있으니까요. 스웨덴은 LGBTQ 인권에서는 매우 진보적인 나라지만 한국은 그렇게까지 발전해 있지는 않죠. 앞으로 미래에는 그렇게 됐으면 좋겠지만요. 여자애들이 절 보면서 웃는 거예요. 흥미로운 경험이었어요. 사람들이 절 보면서 관심을 가지고 말하고 싶어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거든요. 그래서 익숙치 않았죠. 그래서 대단했어요. 이거 이야기할 때 얼굴을 붉히게 되네요. 외모는 또 자랄 때 큰 문제죠. 혼자서 특이하게 보인다고 생각하면 그렇잖아요. 하지만 여기 오니까 갑자기 안보이게 되는거에요. 하지만 제가 와서 서구적인 행동거지를 가졌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분위기가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제 한국 친구들이 그러는데 “너 한국인이지만 한국인같이 행동 안하네.” 그러더라고요. 행동 같은게 말이죠.

팟캐스트: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스칸다나비아인들만의 특유의 행동이 있나요?

다니엘: 스웨덴 사람들은 거리를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해요. 여기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는 쉽죠. 항상 2미터에서 3미터 정도 떨어져 있으니까요. 조용한 사람들과 문화에요. 그래서 이 문화에서 약간 튀려면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약간 시끄럽거나, 약간 자기 주장을 하거나 그럼 확실히 튀죠. 덴마크 사람들과는 다르죠. 덴마크 사람들은 외향적이고, 직설적이고, 자기 생각을 말하고요. 스웨덴인들은 좀 더 간접적이고 돌려 말하지만 그래도 비판할 때는 하죠.

팟캐스트: 수동적 공격성이라고 할수 있나요?

다니엘: 네. 수동적 공격성이라고 할 수 있죠. 인종차별도 비슷해요. 여기에서 인종차별은 직접적인 거라고 인식하죠. 직접 가서 사람을 미워하는 일 말이죠. 하지만 여기는 사람의 생활 방식이나, 언어, 행동, 대화,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 등…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만 간접적으로 다치게 하죠. 스웨덴에서 흔히 하는 이야기가 미국인들은 시끄럽고 외향적이라고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스웨덴 문화가 아주 내향적이라 그렇다고 봐요. 그래서 카루트에서 다른 입양아와 저를 비교해보면 성장 경험이 달랐어요. 자유롭게 입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는지, 말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사항, 언제 알게 되었고, 자라난 곳에 대한 옹호 등… 요즘에는 국제적 입양의 경우 부모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좀 더 많이 배우게 되고, 입양아들이 겪을 문제에 대해서도 교육받아요. 제 부모님은 그런 교육을 받지 못하셨죠.

팟캐스트: 다니엘씨가 27세이시니, 27년 전만 해도 그런 정보가 없었군요.

다니엘: 아뇨. 사회복지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입양아를 키운 다른 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긴 했지만, 교육이나 정보나, 입양아 문제를 논의할 장소도 없었죠. 그래서 어렵게 배우셨다고 생각해요. 전 꽤 반항적이고, 시끄럽고, 주장이 강한 아이였으니까요. 제가 어렸을 때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무용 학교에 들어가려고 15살 때 집을 나왔거든요. 그때부터 독립성을 키웠고 좀 더 자기주장을 하고 싶었죠. 제 입양아로서, 그리고 인종차별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부모님으로서 그런 이야기를 듣는 일은 어려웠을 그거로 생각해요. 그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셨으니까요. 그래서 부모님에 대해서 나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요. 그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셨으니까요. 하지만 자란 뒤 보니 좀 달랐으면 하는 사실들이 있긴 했죠.

팟캐스트: 예를 들자면?

다니엘: 제가 학교에서 괴롭힘당했을 때, 제가 바뀌는 게 어떻냐고 말씀하시고는 했죠. 물론 나쁜 의도는 아니었고 이해를 잘 못 한 것일지도 몰라요.

팟캐스트: 다니엘 씨가 너무 섬세하다? 그런 뜻인가요?

다니엘: 네. 아니면 자기 자신이 되렴이라는 조언을 해주시고는 했죠. 하지만 그 조언에는 큰 문제가 있어요. 주변 사람들이 절 저로 보지 않는데 어떻게 제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겠어요? 이 사실이 사람들의 사회적 대응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오는데…. 예를 들면 제가 시장에 가면 많은 사람이 저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요. 제가 스웨덴어로 대답하면 몇몇 분들은 스웨덴어로 답하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영어로 계속 말하죠. 인식을 못 하는 거예요. 제가 그러한 상황에서 매번 대응해야 한다는 사실이 이상하죠.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저와 그 사람들이라는 구분이 생기는 거죠. 전 저 자신으로서 스웨덴인의 삶을 살려고 할 뿐인데 다른 사람들은 절 스웨덴인으로 보지 않죠. 제가 스웨덴 인하면 생각나는 전형에 맞아 들어가지 않으니까요. 결국, 제가 저 자신으로 있는 것이 아주 힘들죠. 아주 화나는 일이었어요. 항상 그 문제에 대해서 뭐라고 하기보다는 조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소란을 일으키거나 친구와 가족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이거 마음에 안 든다. 방해된다고 직접 말하게 됐죠. 제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들을 가르치고 대화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한국에 돌아갔던 일이 그러한 상황에서 말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나요?

다니엘: 네. 한국에 돌아간 일이 저에게 힘을 줬죠. 서구 문화에서 소수자인 저의 정체성을 찾는 데 도움이 됐어요. 한국에서는 저는 맥락의 한 부분이었죠. 따라서 튀지 않았어요. 뭐 특정 상황에서는 눈에 띄긴 했지만 제가 직접 만든 저의 특성 때문이었죠. 맞지 않는 점이 조금 있지만, 그 상황에서는 저의 문제였어요. 외부 관점에서 보면 아무도 모르죠. 제가 조금 다르다는 점을 알지도 모르지만 그런 경우에는 제가 게이인지 고민하지, 제 출신지를 고민하지는 않겠죠. 또 제 스웨덴 정체성을 찾는 데도 도움을 줬어요. 제가 우상시한 한국의 이미지가 확실하지 않았다는 거죠. 저는 매우 자유주의적인 스웨덴적 관점을 가지고 있지만 제 정체성과 크게 연관 짓지 않았었죠. 하지만 저의 정체성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2014년에 한국에 방문했을 때 제 가족과 친구들과 더 친밀한 기분이 들었죠. 가족들과 친구들을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된 기분이었고 더 깊게 받아들일 수 있었죠. 전에는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절 이해하지 못하고 같은 주파수에서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 느낌이었죠. 입양이나, 소수자로서의 관점 같은 일이요. 한국을 기준점으로 보니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좀 더 정확해진 느낌이에요. 사람들은 저와 비슷하고, 비록 매일 생활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제 주변에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죠.

팟캐스트: 아주 흥미롭네요. 자라나시면서 항상 사람들과 다르고,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다른 느낌이 들게 하셨다고 했죠. 하지만 한국에 가서 완벽하게 한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니 돌아와서 스웨덴 가족과 친구들과 더 가까워지셨다니 말이죠.

다니엘: 네 그 사실에 대해서 계속 생각해요. 2년에서 3년 동안 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했어요. 단순히 스웨덴이나 한국의 정체성이 아닌 그 중간에 있다는 정체성을 만들었죠. 이러한 정체성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입양아들이나 가족 중 다른 문화권 출신이 있다면 또 다른 문화 정체성이 있을 수도 있죠. 전 그러한 정체성을 가진게 괜찮다고 봐요. 그러한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거죠. 스웨덴 정체성으로 자신을 바꾸거나 한국 정체성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더 노력하는 일을 하지 않고 그 중간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예요. 거기에 독립된 정체성이 있고 그 정체성을 받아들이면 충분히 힘이 될 수 있어요. 우리가 힘이 있고, 목소리가 있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할 수 있죠. 아주 아름다운 일이죠. 전에 변화하려고 다른 정체성에 저를 끼워 넣으려고 할 때보다 훨씬 만족스러워요.

팟캐스트: 관련해서 다른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다니엘 씨. 스웨덴에서 아시아인이나 다른 인종인 분들을 만나면 스웨덴어로 말을 걸려고 하시나요?

다니엘: 네. 최대한 스웨덴어로 말하려고 하죠. 받는 사람들이 스웨덴어로 답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말이에요. 물론 대부분 틀리죠. 하지만 받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봐요. 거기에 느낄 수가 있다고 해야 하나…. 이상하나요? 하지만 전 상대방이 스웨덴 출신이라고 생각하는 게 상대를 외국인이나 해외 출신이라고 가정하는 일보다는 낫죠. 물론 사람들이 나쁜 의도로 그렇게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하지만 그러한 행동이 필요 없는 제외를 일으킨다고 봐요. 좀 더 포괄적으로 생각하고 싶은 거죠.

다니엘: 또 어렸을 때 항상 완벽한 스웨덴어에 신경을 써서, 약간 고전적으로 말하고는 했어요. 몹시 어려운 책들도 많이 읽었고, 학교에서 스웨덴어를 가장 잘했죠. 문법도 항상 좋았고요.

팟캐스트: 다른 사람들에게 다니엘 씨의 스웨덴어가 완벽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으셨나요?

다니엘: 네. 모두가 난 스웨덴인이고 스웨덴어를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잘하고 제가 완벽한 스웨덴어를 하면 누구도 와서 제가 스웨덴인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을 테니까요. 꽤 많은 도움을 줬다고 봐요. 스웨덴어를 말할 수 있으니 확실히 동화되는 느낌이 들었고 이미 말했다시피 제 청소년기에는 좀 더 자기주장이 강해졌거든요. 아이일 때 그런 스웨덴어에 대한 욕구가 제가 스웨덴어를 사용해 제 주장을 하고 교류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줬죠. 거기에 춤과 창조도 그 일부분이 됐죠. 제 춤 동작에 문자를 적용하고는 하거든요. 그래서 런던에서 스웨덴으로 돌아오고 싶어 한 부분도 있을지도 몰라요. 제 언어를 매일 사용하는 일은 영어를 사용하는 일보다 표현력을 높여주니까요. 그래서 스웨덴에 돌아왔을 때 다시 스웨덴어를 쓰고 말하는 일을 기대했죠.

팟캐스트: 문자를 많이 사용하신다는 뜻이 무엇이죠? 대화에 맞춰 춤을 춘다던가? 아니면….

다니엘: 네. 춤출 때 말을 하기도 하지만 춤출 때 해설을 깔기도 해요. 많은 소품이 문자 기반이기도 하고요. 댄서로서 일하면 연관된 사람들, 극장, 블랙박스, 대단한 공연을 하는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댄서로서 일할 때 중요한 절반은 소통이라고 봐요. 제대로 된 문서를 작성하고, 다른 사람들과 협력자들과 연락하고, 생각을 구성하고, 그래서 댄서로서 일할 때 언어는 아주 중요하죠. 사람들이 자주 잊는 일이긴 해요. 하지만 전 마음에 들어요. 전 글 쓰는 것도 좋아하거든요.

팟캐스트: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다니엘 씨가 스웨덴인이라고 증명하라고 고전 스웨덴어도 사용하셨다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뜻이죠? 할아버지가 말할 용어를 사용하신다던가 그런 느낌인가요? 아니면 안 쓰이는 오랜 스웨덴식이라던가?

다니엘: 아뇨.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다채로운 단어를 썼죠. 그걸 무기로 사용했어요. 사람들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거나 고향으로 돌아가라! 라는 소리나 끔찍한 소리를 하고는 했어요. 그리고 저는 언어와 단어를 통해서 사람들을 논파하는 데 사용했죠. 그리고 어떨 때는 제가 뭐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더라고요. 즉 제가 그 사람들보다 더 스웨덴인다웠다는 거죠. 어린애 같은 웃긴 일이긴 해요. 그 나이 때에는 자기방어를 위해서 뭐든지 하기 마련이잖아요. 그게 제 방식이었죠.

다니엘: 표면적이지 않은 차별이 더 위험해요. 사람들이 알지 못하면 해결할 수가 없죠. 보이지 않으면 부글부글 끓다가 터지게 됩니다. 제 친구들의 경우 인종차별이나 그런 거 보거나 들은 적 없는데, 일어나면 이야기해줘 그런 식으로 대답하죠. 친구들이 찾지 않는 이유는 친구들은 당하지 않으니 찾지 않는 거죠. 그런 친구들에게 절하로만 따라다녀 보라고 이야기해줘요. 직접 느껴보라고. 제가 그렇게 말하고 친구들이 따라와서 나가서 외식하고 밤 생활을 보내면, 친구들이 이렇게 말하죠. “네 말이 맞네.” 친구들이 그런 경험을 겪게 되면서 인식하게 되죠. 전 그런 일을 매번 겪고 익숙하니까요. 성희롱당하는 여성들에게도 비슷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남자들이 잘 모르거나 느끼지 못하는 거죠. 관심이 없으니까요. 경험할 이유도 없고. 물론 제가 여성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비슷한 일이니까요.

팟캐스트: 다니엘, 청취자들이 당신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서 하면 어떻게 알 수 있죠?

다니엘: 인스타그램 danieljeremiahp 계정이나, 페이스북 daniel.jeremiah.p 계정을 구독해주시면 되요. 페르손이라는 성은 영미권의 앤더슨과 같이 흔한 이름이거든요.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다니엘. 즐거운 대화였어요.

다니엘: 네

팟캐스트: 대화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