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Hope 는 그가 자란 동네 이름이기도 하다.)
“그 어떤 친밀감도 못 느끼는 성을 지니고 살았죠. 새 이름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이 Poole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죠.”
한국인과 흑인 혼혈인 55세의 에릭풀씨와 그의 일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전편에 이어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가족이란 새로이 찾아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에릭씨를 만나보시죠.
어린 시절에 벌을 많이 받았다고 했죠. 그냥 다르게 행동한다는 이유만으로요. 순탄치 않은 시기를 보내고 트라우마까지 있는 아이를 말이에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줄수 있나요?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이나 5학년때쯤일거에요. 쉬는 시간에 싸움이 붙었는데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때 어떤 암흑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던것 같아요. 현실을 부정하거나 도피하거나 한것은 아니에요. 뭐랄까 나에게 해를 끼치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찾아서 일부러 싸움을 붙이고 다녔죠. 내가 상대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아도 나를 자제할수 있는 능력이 없었구요. 그래서 그 녀석 얼굴을 막 발로 찼는데 그때 친구들이 달려와서 나를 떼어냈어요. 교장실로 불려갔고 아마 퇴학이야기도 나왔었던것 같아요. 지금 돌아보면 그때가 아마 적기이지 않았나 싶어요. 전문가등이 나를 도울수 있는 타이밍이었죠. 그런데 그냥 당신들이 얼마나 실망했는지 계속 이러면 한국으로 다시 돌려보낸다 이런 말만 들었던 기억이 나요. 제 행동의 결과로 돌아오는것은 결국은 다시 협박과 공포뿐이었죠. 그냥 저 혼자서 상황을 타개해야했어요. 그리고나서 아마도 외출금치를 당했던것 같은데 마치 교도소 독방에 갇힌 것 마냥 제 방에서 혼자서 삭혀야했어요. 신체적 체벌은 전혀 받지 않았죠. 저를 때리거나 한적은 없어요. 다만 그때 그 과정에서 입양부모와의 사이에서 오간 일련의 대화들이 나를 너무 힘들게 했어요. 그 상황들이 다루어진 방식들이나 나에게 겁을 줬던 방식들이요.
그들의 직업은 뭐였나요?
아버지란 사람은 엔지니어였고 어머니였던 사람은 방부용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했던 것으로 기억이 나요. 장례식장에서 쓰는 용품들을 만드는 회사였던것 같아요.
(4:45) 고등 교육을 받은 백인들이었군요. 70년대에. 저도 70년대에 미네소타로 입양됐거든요. 입양부모가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멀리 타국에서부터 트라우마를 지닌채 오는 타인종의 아이를 돌볼 준비가?
그럼요. 거기서 모든 문제가 시작된거죠. 아이를 입양한다는 사실에 현실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해보지 않았어요. 더군다나 인종이 다른 아이릉요. 70년대에는 그런 인식이나 체계도 없었구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Liz Riley가 입양이 되어 가는 아이들 사이의 등급이 있다는 책을 썼어요. 그 사이에 폭리를 취하는 사람이나 기관도 있고요. 그러니 70년대에는 백인들사이에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이나 노력이 전혀 없었죠. 지금은 어떻게든 안하려고 버티고요. (웃음)
지금이 팟캐스트 같은 것은 일종의 사회적 나눔이나 재능기부 활동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런 맥락으로 접근하면 안되죠. 어떻게 보면 시작부터 망치고 들어가는 거죠. 그러니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답을 하자면 네 맞아요. 준비가 안되어 있었죠. 그분들한테 최대한 유리하게 “의도는 좋았다” “라고 말하곤 해요. 그런데 부모가 되어준다는 것은 좋은 의도만으로는 힘든 일이죠. 또 그분들은 나이도 많았어요. 아이들을 키우는데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가잖아요. 지금의 제 나이에도 어린 아이를 키운다면 엄청 힘든일일텐데. 더군다가 힘든일을 많이 겪은 아이를말이에요.
그러니 그 누구를 데려와도 저 같은 아이를 키우는 것은 아주 힘든일이었을거에요.
우리가 친부모 자녀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항상 명제처럼 따라다녔어요. 그 누구를 만나든 그 사실이 먼저 거론되었죠. 그러니 우리 사이에 장막이 쳐진것 같았죠. 친구들이 놀러와도 먼저 “저분들이 네 부모님이야?” 하고 놀랐고 학교 직원들도 제게 말할때 굳이 “입양”부모임을 강조했죠. 그러니 항상 자연스럽지 않고 진짜가 아닌 가족이다라는 사실을 확인받았죠. 그런 공간에 당사자인 바로 그 아이로서 존재한거죠. 이름뒤에 항상 별표가 쳐져있는 아이였군요. 그런데다 그 부모라는 사람들은 “다시 돌려보낸다” 같은 말로 안그래도 있는 장막을 더 두껍게 했죠. 자기들도 지각하지 못하면서요. “입양됐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이런 말로요. 대화나 혹은 그냥 하는 소리에도 항상 은연중에 뭔가를 내포하는 것 같았고 그런 것들이 항상 우린 진짜 가족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 같았죠. 그리고 제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저와 같이 유색인종이었던 형과 누나들이 서서히 떨어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했죠. 다음은 나구나 내 차례는 언제일까 하면서요. 그때쯤에 알았죠. 이대로는 못 살겠다는 것을요. 희망이 없다는 것을요. 이 가정에서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것을요,
(9:31) 한국에 살때도 그곳에 속하지 못한다고 느꼈잖아요. 마치 한국인이 아니기라도 한것처럼요. 사람들이 대놓고 그 사실을 분명히 했잖아요. 미국에 오니 양부모와 피부색이 달랐죠. 혹시 가족 안에서 인종차별을 경험했나요? 그리고 그땐 자신의 흑인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요?
한국에 살때도 우리는 흑인이었죠. 그리고 끊임없이 껌**등등으로 불렸어요. 고아원에서는 까마귀라고 불렸던것도 기억나고요. 아주 어릴때부터 인식했던것 같아요. 나는 한국인이 못되고 흑인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백인가정으로 입양이 됐잔아요. 저는 1퍼센트도 백인같지 않은데 말이죠. 나이가 들어가며 조금씩 동양인의 특징이 나오고는 있긴해요. 지금은 하와이나 필리핀혹은 사모아쪽 출신이냐는 이야기도 가금 듣거든요. 광대뼈가 있네요. (*백인에 비해서 도드라지는 동아시아 인들의 특징) 네. 얼굴도 넙적하구요. New Hope에 와서 살게 되었을때 제 이름은 그냥 그 “흑인애” 였어요. 마치 그 이름이 저의 모든 것인양 말이죠. 100퍼 백인동네에 살고 있었는데도요. 저는 한국인의 피가 섞였건 안섞였건 그냥 흑인으로 퉁쳐졌달까요. 그리고 초등학교때 친했던 두 친구도 흑인이었어요. 미국의 흑인문화에서는 흑인됨의 범위가 아주 광범위하죠. 백인처럼 밝은 피부의 흑인도 있고 아주 까만 흑인도 있고요. 그만큼 포용하는 범위가 넓어요. 같은 편이라고 받아들여주는 것말이에요.
어릴 때 그 흑인 친구네 집에 놀러 갔었어요. 아마 가족모임 같은거였을거에요. 친구의 엄마가 저를 그 남부출신인 할아버지께 소개하며 저를 반은 한국인이라고 소개 했어요. 그랬더니 그 할아버지께서 웃으면서 하시는 말이 “아무리 그래도 깜**는 깜**지” 이러시더라구요. “한국피가 섞였다고 하면 노예로 안 팔릴것 같아?” 마치 이런 뜻으로요. 그때가 생생히 기억나요. 나는 아무말도 안했는데 왜 그러나 좀 억울하기도 했고. 그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보다 좀 나아보이는 것 같았을까요? 제 흑인임을 어떻게든 없애보려는 걸로 보였겠죠. 흑인보다는 한국인임을 내세워서요. 그때 그 할아버지의 눈빛이 마치 “넌 어떻게 해도 흑인이니까 별수 없어” 이러는 것 같았어요. 제게는 적어도 그렇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그때가 뭐랄까 흑인됨의 그 묘한 뉘앙스 같은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던 때이기도 해요. 초등 고학년이나 중학교였던것 같은데 역사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이 나라에서 흑인이라는 그 미묘한 위치를 말이에요. 그때가 이상하게 제 뇌리에 남았어요. 어떻게 보면 큰 배움의 순간이었죠. 그 한번의 대화를 통해서요.
(15:00) 제가 오랫동안 궁금해하던 일인데 에릭씨도 생각해봤는지 모르겠네요. 이 미국이라는 나라가 노예 억압의 역사위에 세워졌잖아요. 한국도 마찬가지죠. 식민지배를 당했죠. 그런데 에릭씨는 한국에서 또 이 미국으로 그것도 백인 가정으로 입양이 되었네요. 어떻게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나요? 아니면 본인의 출생과 성장 배경이 너무 난해한가요?
그 부분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해요. 지금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조금 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보면 당연히 서구유럽중심의 자본주의 구조죠. 실제로 잘 작동해 왔구요. 그런데 현재의 인류들은 뭐랄까 그 속살을 해부하기 시작했다고 할까요? 어떻게 여기에 도달했고 앞으로 도달하게 될 곳이 어디고 인류라는 공동체로서 이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공정한 곳으로 만들기 위에서요.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가다서다를 반복하고 있죠. 그곳에 도달할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채요.
제 존재와 살아온 경험이 그것과 아주 큰 관련이 있죠. 한국에서 태어난 어린아이로서 또 흑인 어린이로서, 그리고 이 나라의 성인으로서 말이에요.
궁극적으로는 백인들이 창조한 문화가 파괴적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는 데서부터 시작하죠. 백인들이 만들어 낸 것들중에 훌륭한 것들도 있죠. 그렇지만 동시에 굉장히 어두운 면도 철저히 탐구해봐야죠. 더 이해하고 파헤쳐가다보면 그게 진보하는 것일테구요. 그런데 저항도 만만치 않아 보여요. 인간애 같은 취지로 앞으로 진보할수 있는 맥락을 만드는데 말이에요.
너무 횡설수설 한것 같은데 말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저는 언제나 물이 반 컵밖에 없다기 보다는 반컵이나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저 같은 사람이 더 나은 앞날을 믿지 못한다면 말그대로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같은 상태가 되는거죠. 그리고 이 미국의 현 상황 특히 정치적인 상황이 혼란스러울 수록 마틴 루터킹이 말한 The Arc of Justice (역자 주 : “The arc of moral universe is long but it bends towards justice. 도덕적인 세계로 향하는 궤적은 멀지만 결국은 정의로 나아간다”를 축약해서 말한것으로 보인다.)인것 같아요. 거시적으로 보면 앞으로 진보하고 있지만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암담한 상태 말이에요. 마틴루터 같은 사람을 존경해요.사상적인 면에서요. 앞을 내다봤죠. 당대의 사람들이 왜 그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지 몰라봤는지 이해가 안돼요. 그래서 아무튼 전 희망을 봅니다.
(18:50) 제가 에릭씨를 알게된 건 오래지 않았지만 뭐랄까 희망을 놓지 않아서 여기까지 왔네요.
그럼요. 제 와이프도 항상 그래요. 현재에 충실하라는 명상책 같은것도 와이프가 많이 읽는데. 어려서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항상 일단 어떻게든 하루만 버터보자 이런 마음으로 지냈던것 같아요. 그날 그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일단 버티면 이기는 거라고요. 누군가가 먹을 것을 주고 또 누군가는 지낼곳을 마련해주고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넘겼어요. 성인이 된 지금도 그래요. 지금은 그럭저럭 잘 살고 있지만 지금도 그날 그날을 무사히 넘기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향이 있어요. 어린 시절의 유산인가봐요.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요. 그리고 그 덕에 힘들었던 과거에 붙잡히지 않을수 있는것 같아요. 크게 우울증 같은 것도 없어요. 사람들도 그래요. 힘든 일을 많이 겪은 것에 비하면 꽤 밝게 잘 산다고요.
(21:00) 어린 시절에는 같은 고초를 겪었지만 지금은 세 아이들의 아버지이고 항공 조종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유색인종들을 위해 높은 진입장벽을 허물고 있고요. 정말 엄청난 길을 걸어왔네요.
초기에는 다른 사람들 도움이 많이 필요했어요 믿고 의탁해야 할때도 있었고요. 그게 항상 올바른 쪽으로만 풀렸던 것은 아니지만 제 인생 전반을 놓고 봤을때 언제나 길을 찾도록 도와줄 사람이 있었던것 같아요. 의정부에서도 그랬고, 고아원에 갔을때는 싱글리 아저씨가 그랬고요. 미국에 와서 한 동안은 힘들었죠. 결국엔 며칠씩 신세를 지곤 하던 친구들 그룹을 만들게 됐어요. 그러다가 입양가족하고 상황이 아주 나빠졌을때 Poole 가족 집에 가서 아예 살게 됐어요. Chuck Poole이 제 풋볼팀 친구였거든요. 그러다가 아예 제 진짜 가족이 되어버렸죠. 그들도 흑인이었나요? 아니요. 백인들어있어요. 그리고 제 입양부모보다 좀 젊었고요. 그들도 문제없이 행복하기만 한 가족은 아니었어요. 마치 Norman Rockwel 그림속의 가족 같았다고나 할까요? (역자 주 – Norman Rockwell은 미국 중산층의 생활 모습을 묘사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아버지는 알콜중독 경력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그때 당시에 아마 20년째 금주중인가 그랬을거에요. 그래서였는지 저를 더 잘 이해해주고 제 힘든 속내를 제가 스스로 극복해나가는데 도움이 됐던것 같아요. 알콜중독 치료의 12단계라는 것도 있잖아요? 저를 잘 이해해주고 환영해주고 조건없이 받아들여줬죠. 제 입양부모로부터는 받아보지 못한 것들 말이에요. 저를 이래저래 판단하거나 아님 제 출신이 뭔지등등 따지지 않고요. 일부러 제 속내를 끄집어 내려고 하지도 않았죠. 제가 살 희망을 갖도록 도와줬어요. 저를 잘 돌봐주고 지지해줬죠. 그래서 정말 많이 의지했어요.
(23:53) 조건없이 받아들여주고 용서해주고 지지해 주는것이 무엇인지 아는 분이었군요.
그래서 제가 그 이름을 이어받았어요. 제가 입양됐을때 제 이름은 WITBECK이었어요. 항상 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공허한 이름을 지니고 사는 느낌이었죠. 그러다가 해군에 입대를 했고 그때 아버지가 큰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중상이었어요. 헬기로 큰 병원으로 이송을 했을 정도로요. 덩치가 큰 분이라 모두가 아버지를 Big Jim이라고 불렀어요. 저도 중환자실로 찾아갔는데 온몸은 퉁퉁 붓고 노랗게 변하고 그래서 아주 거대한 형체가 병원침대에 누워있더라고요. 그때 아버지를 잃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쯤 마침 Witbeck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찾으려고 하던 때였는데 그렇다고 Kim이라는 이름을 쓰기는 싫었거든요. 어떤 이름을 지니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막 고민하던 때였는데 그 순간 분명하게 알았죠. 이 사람들이 내 가족들이라는 것을요. 곧 돌아가실수도 있는 이 사람이 내 아버지라는 것을요. 그래서 중환자실에 누워계신 사람한테 말을 했어요. 의식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요. 이름을 바꿀 거라고요. 그랬더니 온몸에 주사바늘하고 온갖 튜브가 연결되어 있는데도 몸을 막 일으키시려고 했어요. 나중엔 기억을 본인이 그랬다는 것을 기억도 못하시더라고요. 그때 이 사람들이 저한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알았죠. 그래서 아무런 친밀감을 못 느끼는 이름을 버려 버리고 새 이름을 찾았죠. 그래서 제 성이 Poole이 된거에요. 아버지와 실제 함께 산 기간은 얼마 되지는 않아요. 그리고 한가지 해피엔딩은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어요. 2016년 즈음에 돌아셨어요. 그래서 제 아이들은 그분들을 할머니 할아버지로 알고 컸고 삼촌으로 알아요. Chuck하고는 자주 연락해요. 틱톡 비디오 같은거 저한테 막 보내거든요. 그렇게 가족이 생겼고 그것이 타인종간 입양에 대해서 꼭 부정적으로만 볼것은 아니라는 반증이 된다고도 생각해요. 입양부모가 많이 준비하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을요. 어쨌거나 제일 중요한 사실은 부모가 되어준다는 것이잖아요. 자녀가 어떤 힘든 상황을 지닌채 오더라도 잘 받아들여줄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죠.
그래서 그분들이 서류상으로도 입양을 했나요?
아뇨. 그때 전 이미 성인이 된 후였어요. 그래서 이름만 바꿨어요. 16살때 아예 그집에 가서 살았어요. 12살부터 16살까지 친구네 집을 전전하며 신세를 지며 살았었거든요.
(28:40) 입양부모와 사이가 이미 너무 틀어져버려서?
네. 그때쯤 이미 그 어떤 소통도 하고 지내지 않았어요. 집에가서도 아무 말도 안했고 그분들도 굳이 그럴 시도조차 하지 않았어요. 그때 이미 한집에 살긴 하지만 서로 모르는 사람 같았죠. 외할머니하고는 그래도 좀 친밀하다고 느꼈었었는데 그분께서 제가 대학때 물어물어 저에게 연락을 하셨더라고요. 그때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노스타코타 대학에서 비행강사로 일하고 있었어요. 그때 뜬금없이 할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더라고요. 그 사이 그쪽 가족들과 연락이 끊긴 지가 이미 오래였었거든요. 형제들도요. 다들 제가 창피했었나보다 라고 생각하던 차였어요. 그래서 저는 다들 제가 없어져서 속시원한가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어느날 갑자기 전화를 하셨더라고요. 제 생각엔 제 출신 고등학교로 전화를 해서 제가 어느 대학으로 갔는지를 알아낸 다음 제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계속 유도심문을 하신 모양이더라고요. 개인정보를 안 알려주니까요. 그만큼 노력하셨다는 이야기죠. 나중에 알고보니 할아버지가 먼저 제가 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하셨대요. 그때 이미 나이도 많으시고 병도 있으셔서 본인이 직접 못하시니 할머니께서 나셔셨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뭐랄까 그 집에서는 볼드모트 같은 존재였거든요. 이름을 입에 올려서는 안되는 존재 말이에요. 그렇게 할머니랑 연락이 되고나서 다른 형제들하고 연락이 됐어요. 입양자녀들말고도 친자식이 셋이나 더 있었거든요. 저보다 열 살정도 많았던 커트 형하고 연락이 닿았죠. 그리고 첫 번째로 입양 됐었던 테시누나하고도 연락이 닿았는데 그 누나는 그 후에 입양이 된 다른 누나의 친 동생이었죠. 그렇게 연락을 하고 살았었는데 그 뒤로는 살다보니 좀 소원해졌고요. 한국 누나들하고 연락을 하고 살았다고요? 네 둘째 누나하고요. 저랑 나이상으로 제일 가까웠었거든요.
(31:55) 그런제 진정한 가족은 풀씨네 가족이었군요.
그럼요. 제게 필요로 했던 것들을 필요했던 시간에 저에게 줬으니까요. 그때서야 비로소 제가 처음으로 제가 있을 곳에 있는 것 같았으니까요. 대학 신입생 때 풋볼선수 가족들이 방문해서 소개하는 날이 있잖아요. 하프타임때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분들을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았었어요. 그냥 빅짐과 밥 (Big Jim and Barb)이라고 불렀죠. 부모님을 소개하는 날이라 하니 어떻게 해야하나 좀 고민하고 있다가 전화를 드렸어요. 혹시 오실 수 있냐고요. 그랬더니 “당연하지”라고 하시며 오셨어요. 그리고 하프타임때 그분들을 제 부모님으로 소개됐죠. 그순간부터 뭐랄까 영구적이고 공식적이 된 날이라고나 할까요?
(33:20) 에릭씨의 인생을 영화로 만들었다고 치면 마침내 최고의 선수가 되어서 부모를 소개하는데 빅짐과 밥이 등장하며 클로즈업이 되는 감동적인 장면일것 같아요. 그때 그 순간에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이 부모로 소개될때 말이에요
그때 그 순간에는 별다른 생각은 없었던것 같고요. 그 뒤로부터 그분들과 대화할때 어머니 아버지라라고 불렀던것이 생각나요. 정확한 순간은 기억이 안나지만요. 엄마아빠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어본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아버지가 사고를 당했을때 그때 모든것이 분명히 굳어진 순간이었죠. 제가 그떄까지 생각해오던 것들을요.
(34:30) 어쩜 보면 에릭과 그분들 모두 필요할때 서로를 위해 있어줬네요.
너무 자세한 사정까지 밝히기는 그렇지만 제가 대학을 가고나서 그분들도 결국은 이혼을 하셨어요. 나중에 Chuck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그 전에도 조금씩 잡음은 있었대요. 행복하기만 한 가족은 아니었던거죠. 그랬는데 제가 오고 나서 문제가 완전히 해결 됐었던 것은 아니지만 상황이 좀 좋아졌었다고 해요. 그리고 제가 대학을 가고 나서 두 분 사이가 다시 원 상태로 돌아갔대요. 결국엔 이혼까지 하셨고요. 문제없이 완벽한 가정에 제가 식구로 들어갔던 것은 아니었던 거죠. 한편으로는 제 입장만 놓고 봤을때는 그렇게 서로 싸우기도 하던 불완전한 보통의 가족의 모습이 제게 필요한 가족이었어요. 그분들도 저처럼 아픔이 많은 아이를 보듬어 주면서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들이나 서로간의 관계를 돌아보기도 하고 이 가족이 앞으로 얼마나 갈수 있을까도 시험해봤을테니까요. 저를 받아들이면서 그들이 가진 문제도 조금은 봉합이 된거였겠죠.
(36:05) 혹시 Colin Kaepernick근황은 알고 있나요?
최근 소식은 몰라요. 초반소식이랑 무릎꿇은 사건까지만요. 꽤 큰 사건이었잖아요. (역자 주 : Colin Kaepernick은 미국 프로리그 미식 축구선수로 미국의 인종주의와 경찰의 인종차별적 과잉 진압에 항의하는 의미로 경기 시작 전 미국 국가 제창시 무릎을 꿇은 사건으로 유명하다)
그가 그래픽노블을 출간했어요. 혹시 들어봤나 해서요. 몰랐어요.
(36:28) 저도 아직 안 읽어봤는데 타인종의 부모한테 입양된 이야기와 입양부모로부터 겪은 인종차별등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요. 흑인 특유의 머리스타일을 했더니 부모가 흑인 불량배같다고 했다던 이야기등이요.
저도 어릴때 비슷한 일을 참 많이도 겪었어요. 70년대 80년대까지만 해도 싱글리 아저씨와 연락도 하고 영향을 많이 많았었거든요. 그런데 미네소타에 살았잔아요. 흑인음악 같은 것을 접할 길이 없었어요.
라디오에 KMOJ라는 지역 채널이 있어요. 중학교때 다른 흑인 친구를 통해서 그 채널을 알았어요. 그래서 흑인음악을 듣고 브레이크댄스에도 빠져보고 초기 힙합도 듣고 그랬어요. 그때 싱글리 아저씨가 저한테 녹음테잎을 보내주고 그랬어요. 자기 목소리도 녹음하고 나머지는어반뮤직으로 채우고요
(36:10) 그때 들었던 노래들 제목이 기억나나요?
Parliament Funkadelic songs, Lakeside, Old Cameo boy, 이런 노래들은 공중파에서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노래들이었죠. 이 노래 테잎을 가지고 가서 지금 와이프인 백인 친구들 동네로 가서 놀았어요. 다들 너무 좋아했어요. Rapper’s Delight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때가 지금도 생각이 나요. 제가 처음으로 돈을 모아서 산 레코드였죠. 신문배달을 했거든요. 15분이나 되는 노래였는데 그 노래를 밤새 뒤로 돌려가며 가사를 받아 적고 이틀에 걸려서 외웠어요. 그럼 제 백인 친구들이 다 저희 집으로 와서는 라디오 스피커 옆에 바로 다른 라디오를 붙여서 녹음을 해가고 그랬어요. 그렇게 제가 아주 백합처럼 하얗기만 하던 동네에 힙합뮤직을 소개한거에요.
또 유명한 운동선수들 사진을 방에 붙여 놓고 우상시 하고 그랬어요. Walter Payton 이나 Muhammad Ali. 같은 사람들이요. 뮤지션 사진들도요. 그런데 언젠가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부모님이 들어오셔서 “왜 이렇게 흑인들만 좋아해? 한국 문화를 더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라고 하시는 거에요. 12살짜리한테 그런 소리를 하면,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건지 알아듣지도 못하죠. 전 한국애를 입양하기를 바랬는데 흑인애가와서 혼란스러운가 하고 받아들였죠. 우리집에 놀러오던 애들 중에서 같은 동네에 살지 않는 애들은 다 흑인 친구들이었거든요. 그럴때면 제가 하는 말이며 행동을 다 지적 했어요. 흑인문화를 은근히 죄악시했죠.
Colin Kaepernick도 같은 일을 많이 겪었을 거예요. 꼭 백인들처럼 머리가 촤르르 떨어지게 한다고 고데기로 제 머리를 편 적도 있었어요. 그런 날이 많았어요. 큰 누나 제 머리를 많이 봐줬는데 머리를 곧게 펴서 양갈래로 빗을수 있도록 해줬었어요. 그런데 머리를 감고나면 바로 다시 엉켜버리곤 했죠. 그 덕인지 누나가 결국엔 미용학교로 진학을 했죠. 정작 저는 크고 둥그런 아프로 머리를 하고 싶었는데 말이죠. 머리를 그렇게 펴도록 했던것도 은근히 흑인문화를 터부 해서 그랬던것 같아요.
42:25 한국에 대해서는 지금은 어떻게 생각해요?
풋볼선수 하인즈 워드 기억해요? 그럼요. 흑인 혼혈 풋볼선수잖아요. 수퍼볼 MVP가 된 다음에 한국을 방문했고 엄청난 환대를 받았죠. 한국에선 아직도 혼혈 아이들을 달갑잖게 보는 시선이 있다고 해요. 저를 인터뷰 했던 Men’s Journal 의 박준 기자한테 들었어요. 한국인인데 캐나다에서 공부한다음 다시 한국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아직도 얼마나 한국에서 혼혈 아이들이 힘들게 사는지 말해줬어요. 차별이 심하대요. 저도 흑인 혼혈로서 한국에 대해서 아픈 기억이 남아 있죠. 지금 한국과 그 외에 동아시아 국가들이 미국 흑인 문화를 많이 받아들이고 있잖아요. 한국이 이젠 세계적인 국가가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케이팝을 통해서요. 그러니 이제 한국이 다양성을 수용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박준 기자가 말하길 요즘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조금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기성세대가 인종들을 바라봤던 방식과는 다르게요. 그러니 내일의 한국은 오늘의 한국보다는 더 나을거라는 희망이 있어요. 카오미 당신하고 제가 자랄 때의 한국보다는 훨씬 나은 한국 말이에요. 한국인들이 정상 혹은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범주 밖의 사람들도 받아들여줄수 있는 한국 말이에요. 신체적으로 불편한 사람들이나 혼혈들도요. 아직도 갈길이 멀긴 하겠지만요. 그 생각을 하면 좀 슬프죠.
그런데 또 말하고 나니까 나이를 먹으면서 한국에 대한 친밀감이 조금씩 커가는 것 같기는 해요. 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의 뿌리를 먼저 알아야 하잖아요. 지금 현재 외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으니 지금이 적당한 때죠. 지금은 한국 문화에 순수하게 관심이 많아요. 음식도 아주 좋아하고요. 메뉴 선택을 할일이 있으면 한국음식을 먹죠. 어렸을 때 한국음식을 좋아했었는지 아닌지는 기억이 안나요. 고아원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요. 아무튼 이제는 한국을 받아들일 때가 된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그러기 싫었죠. 지금은 조금 더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중이에요. 내가 어떻게 태어나고 자랐는지 그 맥락을 이해하려고 해요. 그러면 저도 조금더 나은 삶을 살게 되겠죠. 이해가 되나요?
(46:30) 그럼요. 조금 복잡한 심경이겠죠. 나를 내쳤던 나라를 받아들이는 거잖아요.
맞아요. 아마도 많은 흑인들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느끼는 바와도 같을거에요. 어떤 백인들은 도데체 그게 왜 문제인지도 절대 이해못하는 정서 말이에요. 또 제 생각에 그래도 알만하고 또 더 알아야 하는 사람들이 또 그런 미묘한 정서들을 이해 못하기도 하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희망이 있다고 봐요. 제 아이들을 보면 어떤 인종인지 쉽게 가늠이 안되거든요. 큰애가 그래도 제일 저랑 비슷하긴 한데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아마 푸에르토리코 쪽 이거나 브라질쪽인가 할거에요. 둘째 말콤이 그래도 제일 동양인 스럽긴한데 또 키가 거의 190이거든요. 그래서 한국인 같아 보이지는 않아요. 눈이 동양인인것만 빼면요.
막내 마일즈가 제일 사람들이 갸우뚱해 할거에요. 하와이쪽인가 싶기도 할거에요. 긴 머리에 서핑을 즐기는 소년 같은 아미지에요. 재밌는건 세 아이들 모두 막 태어났을때는 뭐랄까 한국인 할머니 같은 모습이었어요. 다들 검은 곱슬머리였거든요. 그러다가 다들 금발로 변하더라고요. 셋 다 세네살 정도까지는 모두 아주 금발이었어요. 그러다가 차츰 연한 갈색으로 변했고요.
(48:58) 아이들 엄마는 백인인거죠? 진짜 다양한 인종이 섞여있네요. 아이들은 자신들의 인종을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아직은 어려서 이렇게도 해봤다가 저렇게도 해봤다가 할것 같은데.
가끔씩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들여다보고 싶잖아요. 어느날 같이 저녁을 먹는데 한 녀석이 아시안들의 악센트를 놀리는 듯한 농담을 했어요. 꽤 오래전 일인데 다른 두 녀석이 낄낄대고 웃다가 제가 웃지 않는 것을 보고 아빠는 안 웃기냐고 묻대요. 그래서 제가 그건 좀 심한것 같다고 그랬더니 그게 왜 심하냐고 되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것을 흉내내며 웃는건 잘못이다 그리고 너도 아시안이다 라고 했더니 자기는 “부분적으로” 아시안이래요. 그래서 맞다고 유전적으로 봤을때 부분적으로 아시안이다. 아시안 문화 속에서 살지도 않고 모든 면에서 사람들이 너를 아시안으로 보지도 않지만 아시안인 다른 친구 부부의 이름을 대며 그들 앞에서 같은 농담을 하겠냐고 물었더니 안하겠대요. 그러니 그런 농담을 하지 말라고 했죠.
제 아이들도 다 알죠. 부분적으로 흑인이고, 또 부분적으로 한국인이고, 반은 백인이죠. 그리고 또 이곳 미네소타에서 백인들에 섞여서 살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언뜻 보기에는 백인에 가까워서 제가 어렸을때와는 다르게 인종이라는 주제가 매일의 큰 화두는 아닌것 같아요. 제가 어릴때는 하루도 그냥 지나는 날이 없었거든요. 제가 남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확인받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하루도 없었어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가 인종이라는 것에 대해 가르치고 왜 그런지 설명할때 제가 겪었던 것처럼 인종이라는 것이 삶에 너무 큰 잣대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아이들 세대에서는 인종이라는 것이 좀 덜 심각하고 덜 예민한 주제였으면 해요. 이곳 North Field에는 대학이 두개나 있어서 인종적으로 꽤 다양하고 큰애한테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 꽤 많았거든요. 그래서 큰애한테 백인과 흑인 혼혈인 친구들도 꽤 있었고 동아프리카 쪽에서 온 친구들도 꽤 있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국경을 막론한 친구관계를 맺는 큰 아이에게 이런 인종적인 이슈가 어쩌면 그냥 문제거리도 안되는 이슈인 것 같기도 하고요. 문제 자체가 안되는 거죠.
그런데 또 조지플로이드 사건(역자 주 : George Flyod; 2020년 5월 미국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 시에서 백인 경찰의 과잉 대응으로 질식사한 흑인 남성을 말한다.) 이 났을때 아이들과 아주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어요. 제가 우는 모습을 아이들이 처음으로 목격한 날이기도 했죠. 그 영상을 제가 차마 못 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 친구가 꼭 봐야 된다고 해서 방에 들어가서 혼자 봤거든요. 그걸 막내가 보고 아빠가 지금 운다고 아주 큰일이라도 난듯이 떠들어대서 아이들이 다 뛰어왔어요. 아빠가 운다고요. 그래서 아이들과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는 계기가 되었죠. 온 가족이 조지플로이드 기념비를 찾아가서 추모도 했어요. 아이들은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거라고 믿어요. 아마 그때쯤에는 인종문제보다 더 심각한 다른 문제를 겪어야 할수도 있지만요. 테네시 같은 곳에서도 젊은 세대들이 나서서 운동을 주도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희망이 있다고 봐요.
(54:20)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 있나요?
열심히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팬데믹이 터졌죠. 마지막으로 갔을때 기억으론 제가 태어난 곳만 빼고는 다 개발이 되어 있더라구요. 제 기억에 남아 있는 한국은 지금의 한국과는 아주 많이 다르지만 제가 태어난 정착촌 같았던 곳은 아직도 좀 불결하고 가난한 동네로 남아있더라고요. 참 재밌죠. 지나는데 하수구 냄새가 나기도 했고요. 마치 박제된것 같은/시간이 멈춘것 같은? 집의 형태 같은 것들은 많이 현대화 됐죠. 그때는 말그대로 초가 지붕 집들이 있었거든요. 그래도 주변에 있는 높은 빌딩들하고 너무 극명하게 대조가 되더라고요. 곧 재개발이 될거라고 통역하는 사람이 설명해줬어요. 아마 아파트가 들어서겠죠. 처음 갔을때는 못 알아봤어요. 큰 산이 있었는데 한쪽이 깍이고 고가도로가 생겼고요. 군부대는 아직도 있었고요. 아이들을 데리고 방문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막 팬데믹이 터져서 포기해야 했죠. 곧 가야지 하고 생각중이에요. 의정부도 보여주고요.
(56:45)아이들도 관심있어 하나요?
어린 녀석들은 아직 별 생각이 없는것 같아요. 나이가 좀 들어야 관심이 가는 그런 일이 잖아요.
지금은 아빠의 이야기에 대해서 알긴 아는데 아직은 와닿지 않는 단계인것 같아요. 잡지 글이 처음 나왔을때 아이들한테 읽어줬거든요. 그런데 그냥 아직 좀 어린것 같아요. 언젠가 조금은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겠죠. 그럼 그때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주면 되죠. 원래 기사는 7000단어 분량이었는데 기자분이 10000단어로 초고를 쓴다음 줄였나보더라고요. 그 잡지에서 분량이 가장 긴 글이었대요. 아무튼 그 기자가 12000단어 분량의 원고로 정리해서 저에게 기념으로 보내줬어요.
대단한 것은 배경조사도 열심히 했더라고요. 고맙게도요. 제가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 사실이나 맥락 같은 것을 그 글을 통해 더 알게 됐어요. 한국에 군인들을 보내면서 인종차별도 같이 보냈잖아요. 제가 미국인은 다 흑인인줄로만 알고 컸던것에 이유가 있었더라고요. 제가 만난 미국인들은 다 흑인들이었으니까요. 한국전쟁이 1950년대였으니 미국도 아직 인종분리가 아주 심할때였고. 그러니 백인인 미군이나 흑인인 미국이나 다 힘들었겠죠. 백인인 미군은 흑인인 미군들하고 음수대도 같이 써야했고 방도 같이 써야했고요. 서로 교류도 없었고 기지촌 여성들도 그랬고요.? 이해가 되죠.
(59:10) 흑인 병사들이 더 험지로 보내지고 그랬다죠?
맞아요. 조사하다보니 알게 되었대요.
그게 인종차별이죠.
네. 전투에서도 더 위험한 일을 맡았대요. 저도 군복무를 한지라 얼마전에 VA( Veteran Affairs : 미 보훈청)로부터 안내장이 왔는데 그동안 보훈청이 흑인병사들에 대한 보상을 차별적으로 다뤘다는 지적을 받아들이고 소급하여 다시 재조사를 한다고 하더라고요. 공식적으로 인정을 한거죠. 흑인 퇴역군인들에게 혹시 필요하면 다시 보상신청을 하라고요.
(1:00:00)입대했을때 혹시 친아버지에 대한 생각도 했나요?
별로요. 일단 저는 장교로 입대를 했어요. 생계를 위해서 입대한 것이 아니고 조종쪽으로 더 경험을 쌓으려 갔죠. 그래서 유전자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진 않았어요. 제 친아버지는 아마도 계급으로 봤을때 낮은 계급이었을거에요. 그때는 흑인이 장교로 입대할 가능성이 희박했으니까요. 그러니 아마도 사병으로 공병단 일을 했거나 했겠죠. 한가지 기억나는 것이 “Baker”에요. (역자 주 – 제빵사를 뜻하나 “김” “이”처럼 미국의 아주 흔한 “성”이기도 하다) 그것이 성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보직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아버지를 그 이름으로 불렀던것만 기억이 나요. 엄마가 살아계셨을때 제 아빠가 누군지 분명히 알고 있었던것 같아요. 우리 셋이 같이 찍은 사진이 있었거든요. 제가 아주 어렸고 저를 안고 찍은 사진이에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계속 그 사진을 가지고 다닌 기억이 있는데 고아원에 간 이후 어느 순간 없어졌어요. 사진속의 저는 아주 어린 아이였고요.
(1:02:28)혹시 결혼을 했었던걸까요? 아니면 아빠가 그냥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던 것인지?
그 뒤에도 엄마가 계속 기지촌에서 일한것으로 봐서는. 글쎄요. 모르겠어요.
어쨌거나 에릭씨에 대해서 알았던 거네요.
그런거죠. 아무튼 그 사진 한장으로 아주 많은 질문들이 떠오르죠. 그래서 유전자 등록등으로 가족찾기를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원치 않는 한 사람의 과거를 파내는 일이 될수도 있잖아요. 갑자기 나타나서 해명을 해보라고 하는. (웃음)
아직 준비가 안된건가요?
그렇다기 보다는 그냥 그렇게 궁금하지 않아요. 어머니쪽이나 아버지쪽으로 혹시 살아있는 친적들이 있는지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 별로 알 필요를 못 느껴요. 언젠가 해볼수도 있고. 언젠가 제 아이들이 해볼수도 있고요.
아이들중에 하나가 언젠가 DNA테스트를 해보겠죠.
어느날 갑자기 말이죠.
지금은 아직 어려서 이 모든 일이 그냥 아빠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언젠가 자신들의 이야기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을테니까요.
그러길 바래요. 궁극적으로 그런쪽으로 흘러가서 어느 순간 궁금해지고 알아내겠죠. 이제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것을요. 저도 한 15년 20년쯤 전에 그랬어요. 한국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파보고 그랬어요. 한 동안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적도 있었으니까요. 그때의 상황 상 말이에요. 부정하고 싶어도 그 또한 내 일부분이니 받아들여야죠. 그래서 말인데 곧 아시안조종사 연합 컨퍼런스에 나가서 강의를 하게 되었답니다. 인구수에 비해서 아시안 파일럿 비율이 많이 낮거든요.
그럼요. 에릭씨도 같은 아시안이죠.
좀 이상하기도 한 부분이 그 잡지 사진기자가 말해줬는데 한국인들은 성공만 하면 장땡이고 같은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준다고 하대요. 그 기자가 직접 한말이에요. 하인즈 워드 선수의 경우도 그렇잖아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데 크게 성공했으니 이제 같은 편이라고요. 그런데 그냥 보통사람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고요.
혼혈이 아닌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멀리 내쳐진 다음에 자력으로 크게 성공해서 돌아오면 이젠 우린 같은 한국사람이니 같은편이라고 한대요.
혹시 카오미 당신을 인터뷰한 팟캐스트도 있나요(웃음)?
네. 시즌3에 있어요. 다른 입양인이 저를 인터뷰했어요.
다음 재생목록으로 당첨이네요.
어느순간 말이 안되더라고요. 제가 사람들을 인터뷰하다보니 어느 순간 사람들이 네 이야기는 언제 들려줄거냐고 하대요. 제가 처음에 이 팟캐스트를 시작했을때는 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거든요. 우리 기자들은 본인을 드러내면 안되니까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저도 참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더 할게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네요. 너무 재밌었어요. 혹시라도 아직 더 치유되어야 부분이 남아있나요? 아니면 이만하면 되었다거나 혹은 가족을 통해서 치유가 되었나요?
완성형인 존재는 없잖아요. 그러니 물론 조금 더 치유되어야 할 부분이 남아있죠. 그런데 지금 이 상태의 나로 만족해요. 그래서 더 강해질수 있고 휘둘리지 않으면서 마음속에 눌려있던 부분들을 들여다볼수 있으니까요. 지금 55살까지 많은 일이 있었지만 잘 이겨내 왔잖아요. 지금 생각으로는 굳이 들춰내지 않아도 되는 일들은 들춰내고 싶지 않아요. 어린 시절에 겪었던 힘든 일들을 굳이 끄집어 내지 않아도 잘 살수 있으니까요. 완전히 치유가 됐다고 말할수 없을지도 모르죠. 어릴때 미식축구를 하며 하도 그쪽으로 많이 넘어져서 오른쪽 팔이 완전히 펴지지가 않거든요. 그렇다고 수술을 하거나 해서 고쳐보고 싶지도 않아요. 완전히 고쳐질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게 현실이죠. 그냥 살짝 불편한 팔로 살아가는 거죠. 신체적 트라우마처럼 정신적 트라우마도 같은 것 같아요. 그냥 안고 살아가는 거잖아요. 들춰내는 것이 꼭 치유를 말하는 것인지 더 심하게 만드는 것인지 알수가 없기도 하고요.
그간의 경험들을 통해서 지금 이 자리에 꼭 필요한 내가 됐죠. 지금의 나로 만족해요. 그리고 지금 나에 대해 말하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죠.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경험도 필요했고 많은 내적대화도 필요했죠. 그러니 이제 내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것보다는 내 아이들이 오래된 제 이야기에 천착하겠죠. 그러니 이젠 풀어놔봐야죠. 최대한요. 하면 할수록 더 담담하게 이야기 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카오미씨에게 너무 감사해요. 이런 공간과 매체를 만들어 주는 것이죠. 시즌이 몇개가 있다고 했죠?
많아요. 6개나 있어요.
고마워요.
내적 평화를 이룬것 같네요.
네. 맞는 표현이에요. 언제 만나서 식사나 한번 할까요
언제 North Field에서 만나서 유명한 Ole Store같은데 같이 한번 가죠. 제가 올라프 대학 출신이라 그 근처를 잘 알아요. 30년 전의 이야기이지만요.
꼭 한번 봐요.
혹시 한국의 엄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이 질문은 지금까지 아무도 저한테 물어보지 않았는데. 부모가 되어보니 아이들에게 제일 바라게 되는 것은 성공도 아니고 그냥 좋은 사람으로 크는 것이더라고요. 제 와이프하고도 항상 이야기 하는데. 그래서 저도 제 엄마한테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잘 자라서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요. 가족도 꾸리고 좋은 아빠가 되고 좋은 남편이 되고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었다고요. 제가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되었고 그게 엄마도 원하는 일이었을거에요. 그말 밖엔 할말이 없네요.
고마워요. 에릭씨. 그리고 우리 입양인 커뮤니티에도 너무 많은 것을 주고 있네요.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거든요. 아무리 그 전에 잡지에 인터뷰를 했다고 해도 팟캐스트에서 이렇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 놓는 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아요. 제가 민감한 질문도 많이 했잖아요. 이 모든것이 결국은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죠. 이 이야기들이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니까요.
멋진 조각보 같아요. 카오미씨가 이 이야기들을 연결하고 있고요. 그 조각보 이불이 우리를 따듯하게 감싸고 보듬어주네요.
번역 : 전유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