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4, 에피소드 22: 앨리 디 레이시

Audio available April 13, 2021 at 7 am ET.

앨리 디 레이시 (25세) 씨는 두 살 때 중국에서 영국으로 입양되었다. 에든버러에서 기혼자로 반인종차별주의 활동가로 일하는 디 레이시 씨는 인종적 고립 속에서 성장하며 겪어온 인종 차별 경험과 COVID-19 사태로 인해 자신이 겪고 있는 인종 차별에 관해 이야기한다. 디 레이시 씨는 자신의 과거를 조사해, 자신의 과거를 더 모르게 된 사실을 공유한다. 

앨리: 제 이름은 앨리 디 레이시입니다. 중국에서 입양되었죠. 고아원에서 저에게 준 이름은 중국어 발음이 안 좋긴 하지만 양이룬이에요. 이름의 뜻은 아침 나뭇잎에 매달린 아침 이슬을 뜻한다고 합니다. 현재 25세이지만, 여전히 12살처럼 보이죠. 에든버러에서 살고 있고 에든버러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한 뒤 지난 7년간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대학교에서는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전공했죠.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어요. 몹시 어려운 주제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에든버러로 온 이유가 전공 때문이었죠. 영국에서 유일하게 중국어 학위와 러시아어 학위를 딸 수 있는 학교가 에든버러에 있습니다. 

팟캐스트: 에든버러 대학교인가요?

앨리: 네. 에든버러 대학교입니다. 제가 따려고 했던 학위는 아주 특수한 학위였죠. 고등학교서 대학교 전공을 고를 때는 미래에 대해서 전혀 다른 꿈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전 대학교를 고를 때, 간첩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어/중국어 전공을 선택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좋은 간첩이 되지 못했겠지만, 대학교 전공을 선택할 때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팟캐스트: 고전적 냉전 시대의 간첩을 생각하셨군요?

앨리: 아직 어려서 간첩이라는 일에 대해서 순진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죠. 이걸 하면 간첩이 될 가능성이 있어서 이걸 하겠다는 식으로 접근했어요. 나중에 가서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죠.

팟캐스트: 앨리 씨는 영국 시민인가요?

앨리: 네. 그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하겠죠. 제 양부모님은 영국 백인이십니다. 그러니 그 두 분께 입양된 저도 2살 반에 영국 시민권을 받았어요.

팟캐스트: 알겠습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에서 자라지는 않으셨죠?

앨리: 아뇨. 사실 저는 잉글랜드에 있는 옥스퍼드시에서 자랐습니다. 물론 제 발음에 영국 억양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건 제 성장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제 가장 친한 소꿉친구가 캐나다인이에요. 그래서 북미풍의 억양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죠. 제 녹음된 목소리를 들어보면 제 억양이 자주 바뀌어요. 영국 억양을 쓸 때도 있고 미국 억양을 쓸 때도 있습니다.

팟캐스트: 단순히 억양만 들으면 영국에서 장기간 사는 캐나다인이나 미국인이라는 느낌이네요.

앨리: 그런 소리를 자주 듣죠. 에든버러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에든버러에 방문하신 적이 있나요?

팟캐스트: 방문해본 적이 있어요.

앨리: 오 언제 방문하셨죠? 

팟캐스트: 관련해서 이야기를 좀 한 적이 있는데, 옛날에 킹스크로스에서 기차를 타고 에든버러에 방문했죠. 축제 기간이었고, 친구 집에도 방문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도시였죠. 앨리 씨의 비디오를 보니 에든버러의 풍경이 기억나더군요.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앨리: 아주 아름다운 도시이면서 다문화적 도시이죠. 제 억양이 더 미국적으로 변한 이유 중 하나가 에든버러가 매우 국제적인 도시라 그래요. 많은 사람이 국제적인 억양을 가지게 됩니다. 

팟캐스트: 영국 억양은 특정 계급 선입견과 연관이 있는데, 국제 억양은 어떤 영향을 끼치나요? 사람들이 앨리 씨를 판단하는데 어렵게 하나요? 아니면 계급 구분을 거부하는 새로운 억양인가요? 

앨리: 네. 영국에서는 억양으로 계급을 나누는 일이 큰 문제죠. 영국에는 인종 문제가 아니라 계급 문제도 존재해요. 우리가 익히 아는 영국 억양은 표준 발음(Received Pronunciation)이라고 합니다.

팟캐스트: 소위 말하는 고급 억양이군요?

앨리: 그렇습니다. 그리고 표준 발음은 아 발음과 긴 모음이 많아요. 목욕탕(Bath)을 바스로 발음하지만, 영국 북쪽에선 배스로 발음하죠. 북쪽 발음은 강세가 들어가죠. 저는 영국 발음이 강하지 않지만,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부스라고 발음하기도 해요. 반면에 남쪽에서는 바스라고 발음을 합니다. U 발음과 A 발음의 중간이죠. 언어학적으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계급 차별의 동기도 되고, 억양에 따라 상대방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영국에는 수많은 방언과 억양이 존재하니까요. 거기에 인종까지 더해지면 더 심해지죠. 영국에는 이민자가 많은데, 영국식 억양이 아니라 다른 억양의 영어를 하면 눈에 띄게 됩니다. 결국, 더 많은 선입견과 편견의 대상이 되죠. 주로 소수 민족과 노동 계급이 차별의 대상이 되어요. 아주 흥미로운 주제이고,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과거 이야기로 들어가고 싶지만 우선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Girl with many faces)에서 먼저 시작하죠.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 영상-

앨리: 전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입니다. 하지만 어떤 얼굴도 제가 선택한 얼굴이 아니죠. 집이 마음은 둔 곳이라면, 제집은 항상 부서져 있었어요. 서류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전 정돈되어 있고 법규를 지킵니다. 하지만 전 겨우 두 살 때 서류에서 선택되었어요. 제 얼굴은 성공과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 상징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저 자신일 뿐이죠. 입양이 아름답고, 상냥하고, 옳은 일이라는 인식이 있어요. 문제가 있다면 사람의 문제일 뿐이죠. 갈색 아이를 데리고 와서 하얀 옷을 입힌다고 달라지지 않아요. 그 아이들의 색을 지우고, 언어를 빼앗은 뒤에도 성장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 애의….

-영상 편집됨-

앨리: 사실 그 영상에서 약간 떨어져야 했어요. 영상을 올리고 난 뒤에 고작 몇십 명에서 몇백 명이 보면 운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아내가 며칠 전에 말해주기를 페이스북에서만 영상이 26만 번 조회됐다고 하더군요. 아주 대단한 일이죠. 그리고 인스타그램에도 비디오가 올라와 있습니다. 전 기술에는 조예가 없어서 관련 영상 조회 수도 모르고 아내가 어떻게 정보를 얻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제 영상을 봐줬으니 대단하다고 생각하죠. 서로 연락을 했을 때 이미 들으셨지만, 사람들과 교류하는 일은 신기해요. 사람들이 연락하면 서로 이해하면서 교류하며 영적인 연결을 구축할 수 있지만, 동시에 사람들을 직접 만난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니 아주 이상한 경험입니다. 사람들을 알게 되지만 직접 알지 못하니까요. 

팟캐스트: 많은 입양아가 앨리 씨에게 연락을 해왔나요?

앨리: 죄책감이 느껴지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람들과 그렇게 깊게 교류하지 않았어요. 물론 메시지를 받으면 답신을 하려고 했죠. 하지만 30~40개가 넘는 메시지를 받으니 15개의 메시지에만 답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저에게 연락해서 제 영상을 보고 공감했다고 하는 일 자체가 매우 감명 깊었죠.

팟캐스트: 어떻게 그 영상을 찍게 되셨죠?

앨리: 그거 자체만으로도 이야기 하나가 나오네요. 전 상 운동권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성별 기반 폭력 반대 운동과도 깊은 관계가 맺었죠. 제가 한 아이 정책을 시행하던 중국에서 입양되었으니 성차별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성별 기반 폭력의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제, 남아선호사상 등이 연관되어 있으니 더 끔찍하죠. 과거에 성차별 반대 운동을 꾸준히 진행해왔지만 인종 차별에 대해 운동은 하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할 수 있을지 몰랐고, 그 시점에는 그 운동과 연관될 좋은 이유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든버러에서 2020년 12월에 에든버러 대학교의 학생이 동아시아계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공격당했어요. 8명에서 9명의 사람에게 집단 구타를 당했죠. 그 학생은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지역 사회에서 큰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제 친구와 저도 영국 거주 아시아인이었기 때문에 같이 모여서 이런 혐오 범죄를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COVID-19 사태 이전에도 반아시아계 인종 차별은 존재했지만, 사태가 일어난 뒤로 인종 차별이 급증해서 더는 차별을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앨리: 그래서 에든버러 인종 차별 폭로(Racism Unmasked Edinburgh) 단체를 창립했어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습니다. 저의 현명한 아내가 SNS 마케팅을 통해 우리 단체를 도와줬기 때문에 온라인상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죠. 여러 기자에게 연락했고, 그 기자 중 하나가 우리를 BBC와 연결해 줬어요. COVID-19 혐오 범죄와 관련된 기사를 쓰는 BBC의 부서에서 저를 인터뷰했습니다. 요약하자면, 페이스북을 통해서 언론에서 일하는 유색인종들을 위한 단체와 접촉했어요. 반아시아계 인종 차별 문제 인식을 높이고, 혐오 범죄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으니 기자들이 도와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 영상을 같이 촬영하게 될 진 링이 연락을 해왔죠. 진이 절 능력이 닿는 대로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혐오 범죄에 대한 영상을 찍을 예정이었어요. 하지만 온라인 통화로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삶에 관해서 이야기하니 이야기 흐름이 바뀌었죠. 진 링은 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 시민입니다. 진에게 제 삶과 제 과거를 공유했어요. 진은 그걸 듣고 입양과 중국 입양아의 영국에서의 삶에 대해서 영상을 찍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전 그걸 듣고 좋다고 했고, 진은 생각해둔 영상 아이디어가 있는지 저에게 물었죠. 제가 생각해둔 연설문이 있으니 그걸 바꾸면 된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거짓말이었습니다. 정확히 생각해둔 연설문은 없었죠. 하지만 마이클 잭슨의 노래대로 거짓말을 계속해서라도 성공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연설문이 있다고 말한 뒤 2시간 동안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의 대본을 적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썼던 글들을 대화체로 바꿔서 적었어요. 과정이 아주 흥미로웠죠. 제 아내가 제가 처음으로 이런 종류의 글을 쓰는 셈인데 걱정이 안 되냐고 물었고, 저는 유튜브로 강의를 들으면 된다고 답했습니다.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 영상 재시작-

앨리: 전 저에게 일어난 일을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도 옹호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부모님이 저를 입양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절 입양하지 않아도 됐다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죠. 제가 이러한 생각을 공적으로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무서워서 못해요. 입양아들이 조용히 망가진 과거를 넘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영원히 중국인이 될 수 없지만 동시에 백인도 되지 못하겠죠. 그래서 이 과거를 단순히 넘길 수 없다고 생각해요.

-영상 편집됨-

앨리: 지금 생각해보면 그 영상은 개인적 힘의 표시였을 뿐만 아니라 분노의 표시였다고 생각해요. 제가 표현할 수 있었던 가장 복잡한 감정이었다고 생각하죠. 과거에 저는 입양에 관해서 이야기한 적도 있고 중국 기반 입양 단체인 어머니 사랑의 다리(Mother’s Bridge of Love)와 같이 활동했습니다. 사랑의 다리는 신란이라는 이름의 훌륭한 기자가 운영하는 단체이죠. 신란 씨는 “중국의 선량한 여성들”(Good Women of China)이라는 책을 출판한 작가이기도 해요. 그 책은 중국 역사 동안 여성들이 받아온 대우와 비극에 대해서 저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불안정하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 그리고 문화대혁명 시기의 여성 대우에 대해서도 저술하고 있죠. 문화대혁명 시기는 홀로 놓고 봐도 흥미로운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신란 씨는 그 책의 후속작으로 “중국에서 어머니는 기억한다.”(Somewhere in China, Mother Remembers) 이라는 책을 저술했죠. 이 주제도 매우 흥미로웠어요. 90년대에 버려진 중국계 고아들이 많았죠. 여성이 대부분이었는데 신란 씨는 그 고아들의 친어머니들을 익명으로 인터뷰했고, 이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은 말을 받아 적어서 그 사람들 대신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출판했습니다. 아주 강력하고 아주 무거운 내용들이었죠. 제 고등학교 과제의 일환으로 저는 신란 씨에게 연락을 해서 인터뷰를 하게 됐습니다. 대단한 기자이자 작가가 영국 고등학생에게 시간을 내줬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신란 씨가 제 이야기를 들었고, 저의 글을 쓸 생각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 친어머니에게 편지를 썼어요. 아주 무거운 내용이긴 했지만 동시에 저는 15살에서 16살 정도의 나이였죠. 아직도 인터넷 어딘가에 올라와 있을 겁니다. 제가 신란 씨에게 편지를 보내자, 신란 씨가 중국어로 편지를 번역해서 어머니 사랑의 다리 단체 내에 있는 친어머니들에게 줬다고 합니다. 물론 그분들 중에 제 친어머니가 있을 가능성은 아주 적지만, 입양아가 그러한 글을 써서 친어머니들에게 그런 편지를 전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편지 작성이 제가 입양 관련해서 한 일 중 가장 훌륭한 일이었지만 주제의 논점이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앨리: 반면에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 영상은 제가 알지 못하는 어머니, 얼굴이 없는 여성을 찾으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국제 입양아로서 자라면서 겪었던 차별과 고통과 관련된 사회 청문회를 여는 셈이었죠. 입양아는 가족, 친구에게서 그런 문제를 겪게 됩니다. 물론 의도적인 차별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과 피부색이 다르면 당연히 소외되는 느낌을 받게 되죠.

팟캐스트: 그 영상을 제가 감명 깊게 봤던 이유는 입양의 복잡함을 잘 잡아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입양아들이 입양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지만 백인 가족이나 친구들과는 이런 대화를 나누기 어렵고 아예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경우가 나은 경우도 많죠. 반면에 앨리 씨의 영상이 감명 깊었던 이유는 이런 주제를 직접 언급하고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앨리: 쉽지는 않았어요.

팟캐스트: 영상에서 말한 대사가 과거에 이야기하고 싶었던 말이었나요?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앨리: 네. 영상을 찍을 때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어요. 그 사실 자체가 상당히 역설적이죠. 제 부모님이 입양 문제에 대해서 깊게 파고들어서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영상을 찍기 이전에, 정확히는 BBC 인터뷰 이전에 부모님에게 내용이 너무 분열적이거나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게 했습니다. 확인을 받는 일 자체가 입양아의 검열 문제와 입양아가 완벽하지 못해서 죄책감을 가지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봐요. 부모님에게 글을 검사받는 과정에서도 제 일부는 부모님이 괜찮지 않다고 해도 그냥 진행해야 할지 걱정했죠. 결국,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영상은 결과적으로 제 부모님과 타협으로 만들어진 영상이었습니다. 부모님을 존중하고, 모욕하지 않으면서 영상을 만들려고 노력했죠. 영상 중간에 제가 제 가족을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해야 했죠. 제가 글을 쓰면서 이 영상에 가장 큰 반발을 하는 사람들이 다른 양부모들과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하는 백인들, 제가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백인들이 되리라 예측했거든요. 세상의 일이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 있는 균형을 찾고 싶었습니다. 저에게 시간이 더 주어지고 관점이 넓었다면 제가 말하려고 하는 사실 자체를 잘 설명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는 입양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앨리: 하지만 제 영상의 댓글 중 상당수는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전 최대한 그 영상의 댓글에 반응하려고 했고, 부정적인 댓글에도 반응하려고 했어요. 제가 들으려고 한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영상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은 우리가 입양 자체를 하지 말아야 말고 아이들을 그냥 고아원에 내버려 두고 고통받게 해야 하냐는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영상에서 입양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죠. 고통이 많은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무시하는 사실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입양이 고아로 사는 일보다는 나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무시하는 일도 문제입니다. 네. 입양아의 삶이 고아의 삶보다는 낫죠. 하지만 고아의 고통과 입양아의 고통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어요. 입양되는 일이 고아에게 있어서는 가장 나은 일이고, 가족이 없는 아이가 안전하게 양육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어야 하는 일은 맞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이 잃은 삶과 문화에 대해서 슬픔을 표시할 수도 있는 일이고 그 감정이 있다고 해서 입양 자체를 부정하는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어요. 

앨리: 우리 입양아들이 입양아의 이야기와 고통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입양아들의 이야기, 고통, 분노가 전부 자신의 소유이고 다른 사람이 개입할 수 없죠.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승인,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어요. 제가 영상을 찍을 때도 부모님의 동의를 얻었는데 이 영상을 찍는 일은 위선적인지 고민했죠. 결국, 부모님의 뜻과 제 이야기의 균형을 찾아야 했어요. 편한 정답도 없고 맞는 답도 없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막 해버리고, 후폭풍을 신경 쓰지 않는 길도 있었죠. 하지만 제 분노를 드러내면서도 그 분노를 공손하게 표현하려고 했다고 생각해요. 사회 전체에게 보내는 이야기지만 어린이, 특히 입양아 어린이들은 분노를 건강하게, 그리고 생산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감정을 지우고 묻는 법을 배우고, 결국 삶을 조정받게 되죠. 분노는 부정적이고 나쁜 감정으로 인식됩니다. 분노하고 있다면 분노를 없애고, 놓아주거나 억제하라고 배우죠. 분노가 개인의 잘못이고 문제라는 인식 자체가 양부모들, 나아가서는 사회가 입양아의 분노에 가지고 있는 책임을 없애게 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분노를 받아들이고 처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가 말했듯이 이러한 상황에서의 분노는 당연한 일이죠. 이런 가족의 상실에서 입양이라는 요소를 빼봅시다. 어떤 사람이 가족을 교통사고로 전부 잃었다면 사람이 장례식에 와서 그래도 좋은 일을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 적어도 넌 살아남았다고 위로하지는 않죠

팟캐스트: 차에 같이 타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하지는 않죠. 

앨리: 그러지 않죠. 왜 이 상황에 행복하지 않은 지, 왜 화를 내는지 묻지 않아요. 가족 전체를 잃었지만 적어도 분노를 조절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큰 과장이 들어간 이야기긴 하지만 다른 슬픔과 분노는 사람들이 동정해주고 공감해주죠. 하지만 입양은 그러지 않아서 화가 납니다. 그 이유는 국제적 입양에 따라오는 거대한 무의식적 인종 차별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백인 구세주 콤플렉스에 관해서 이야기하고는 하죠. 하지만 이러한 인식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어요. 유색인종 아이를 입양하는 백인 부모들이 전부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 부모님과 저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제 부모님과 저는 관련 서적도 작성하고 있어요. 적어도 제 부모님과 저는 객관적이고 균형적으로 서로의 관계를 볼 수 있는 관계를 맺고 있죠. 하지만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저의 어린 시절은 완벽하지 않았어요. 제 부모님은 항상 인종 차별이나 무의식적 미묘한 차별과 같은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하는데 거부감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죠. 제 부모님이 저에게 그러한 환경을 제공해서 훨씬 더 강하게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입양아가 저처럼 운이 좋은 환경에서 자라나지 못했다는 사실도 알아요. 우리 가족은 부모가 구세주처럼 인식되는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하고는 했죠. 부유한 1세계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나가서 아이들을 입양하니까요. 가난하고 뒤처져 있는 국가들에 가서 이 불쌍한 고아들을 입양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고, 어떤 가치도 없고 미래도 없는 아이들에게 삶을 선물한다는 인식이 있어요. 그러한 인식 자체가 입양아에게 큰 해가 된다고 생각하죠. 문제가 있는 감사 문화가 입양아를 망가트린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항상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하고 기대에 맞춰야 한다는 압박이 존재하죠. 그러한 감정은 처리하기 힘들어요. 

팟캐스트: 전부 말이 되네요. 힘의 역학과 차이가 입양아들에게 더 나은 삶을 준다는 인식을 강화합니다. 고아들에게 더 나은 삶의 기준을 제공해주고 가난한 나라 출신의 아이에게 부유한 나라의 기회를 준다고 생각하게 하죠. 아주 흥미로운 일이예요.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관계를 반대로 하면 그러한 관계가 성립할지 의문입니다. 중국의 부유한 가족들이 미국 백인 아이들을 입양하기 시작한다면 세계가 그러한 관계를 잘 받아들일지 의문이죠.

앨리: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생각해보면 좋게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카오미 씨가 맞아요. 대중매체의 국제 입양 묘사에서는 항상 부유한 백인 가족들이 다른 국가에 가서 타국의 아이들을 입양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돌아간다면 그 사실 자체가 받아들여질까요? 전 세계적인 분노를 일으킬지도 모르고 더 큰 중국 공포증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미국 언론이 반중국 선전을 방송하는 광경이 그려지네요. 부유한 중국인들이 미국 아이들을 훔쳐간다는 방송을 할 겁니다. 사회적으로 그러한 불편함이 있다고 생각해요. 많은 유색인종이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 한정된 관점으로 접근하게 되죠. 제가 서양 문명을 싫어하는 사람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서양 민주주의의 장점과 활동 방식에 대해서 확실히 이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중국이 구식이고 구닥다리라는 묘사가 대중매체에 넘쳐나는 일도 사실입니다. 항상 중국에 초점을 맞추면 이 사람들이 구식이고, 박쥐나 먹는 비현실적인 사람들이라고 묘사하죠. 이 사람들이 비좁은 아파트에 다닥다닥 모여 살고 이런 가난한 천민들의 삶을 보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한 묘사는 중국의 극히 일부만을 과장해서 보여줄 뿐입니다. 중국은 아주 강한 영향을 세계에 끼치고 있는 신흥 강국이에요. 경제적, 기술적인 발전은 아주 놀라울 정도이죠. 제가 2019년에 관련 통계를 보고 있었는데 중국의 특허 신청이 미국의 특허 신청을 뛰어넘었어요. 그래서 중국을 그렇게 후진국으로 묘사하는 일 자체가 사실적이지 않죠. 물론 동아시아 입양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앨리: 아프리카가 가난한 지역이라고 묘사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해요. 아프리카에도 얼마든지 부유한 지역이 많죠. 아프리카 자체를 하나의 지역으로 엮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아프리카는 아주 넓고 거대한 지역이니까요. 사람들이 아프리카, 아시아라는 거대한 지역을 하나로 인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아프리카라고 하면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라고 생각하죠. 아프리카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화와 인종에 대해 인식을 하지 못합니다. 남아프리카, 짐바브웨, 이집트가 동시에 아프리카 대륙 안에 존재하죠. 거기에 인종적 차이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많은 서양인이 그 차이점과 깊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인식의 문제는 아시아에도 존재하죠. 사람들이 아시아라고 말하면 보통 중국을 생각하지만, 아시아는 아주 드넓은 지역인데, 아시아를 중국으로 인식하는 일 자체가 문제가 많아요. 아시아에 수많은 국가가 있는데 전부 중국이라고 부르는 일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앨리 씨, 현재 전 세계적으로 반아시아계 증오범죄가 증가하고 있는데, 앨리 씨도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폭언을 들은 적이 있나요?

앨리: 자주 들었죠. 

팟캐스트: 입양아로서 그러한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

앨리: 솔직하게 말하자면, 충격적이고 모욕적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너무 많이 들은 이야기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이미 다 알고 있어요. 그 사실 자체가 아주 슬프죠. 슬픈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라면서 자주 들은 이야기라 이미 익숙해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 때 유일한 아시아계로서 생활하는 일에는 매우 익숙해져 있었죠. 제 고등학교에만 학생이 2000명이 있었는데 그중 4명에서 5명이 유색인종이었죠. 제가 약간 과장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숫자가 아주 적었습니다. 아시아계는 5명 정도밖에 없었고 그중 하나가 제 자매였죠. 아시아계는 제 성장기에는 아주 극소수 인종이었습니다. 아시아계 집단이 있지도 않았어요. 학교 전체에서 저를 그 아시아계 여자애로 인식했죠. 그래서 항상 인종 차별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항상 눈에 띄기 마련이고,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독창성이 없는 차별을 들으면 오히려 실망하게 되어요. 좀 더 기발한 모욕을 할 수 없었나? 이라는 기분이 들죠. 하지만 COVID-19가 퍼지고 나서 생활이 좀 더 어려워졌습니다. 집 밖에 나가려고 해도 준비를 해야 하죠. 전 권리 운동을 하면서 자아를 찾을 수 있었어요. 제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활동을 하면서 가끔 문제아들과 싸우는 일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밖에서 전혀 보호받지 못하고, 영국의 인종혐오 범죄가 증가하고, 사람이 다치고 죽는 일을 보게 되니 두려워요. 아시아계의 외모를 하고 밖에 나가면 공격받을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 인종 차별 자들에게 한 말 중 좋은 말 몇 가지만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앨리: 여러 가지 말을 준비하죠. 어떨 때는 그 말에 대답해주고 같이 대화할 때도 있어요. 그리 생산적인 일도 아니고, 어른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제가 중국 시민이라고 생각하고 저에게 차별적인 말을 하면, 제가 그냥 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이 대응하죠. 사람들이 차별적인 말을 반복하게 만들어요. 그러다 보면 그 사람들도 자기들이 말하는 이야기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고 도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제 출신지를 물을 때도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영국에서 왔다고 대답하는 때도 있죠. 그렇게 대답하면 진짜 어디에서 왔는지 묻습니다. 그럼 저도 영국 옥스퍼드 출신이라고 대답하죠. 옥스퍼드는 영국 남부에 있고, 아주 부유한 동네에, 유명한 대학교도 있는 곳이에요. 

팟캐스트: 아주 유명하죠.

앨리: 하지만 대부분은 대응을 안 하려고 하죠. 몹시 나쁜 일입니다. 제가 눈치챈 또 다른 일은 영국 태생 아시아계와 이주 아시아계 사이의 차별이었죠. 전 영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중국계 영국인도 아니죠. 하지만 운이 좋게도 그러한 배경과 비슷한 성장환경에서 자라났어요. 전 어렸을 때부터 영국 영어를 배우면서 자랐고, 그래서 특수한 억양이 없죠. 사람들이 제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제가 영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사실이 절 더 고통스럽게 만들죠. 제 친구 중 일부는 중국 출신인데 중국식 억양을 가지고 있고, 제가 가진 언어적 보호막이 없습니다. 제가 몇 달 전에 음식을 포장하러 갔을 때 코로나바이러스를 원치 않는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죠. 그 말에 저는 “코로나라니 뭔 소리예요? 전 여기에서 23년간 계속 살았는데요.” 그렇게 대답하자 사람들이 제가 영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사과를 한 다음 말하는 방식을 바꾸더군요. 전 좋은 아시아계 중 하나이니 괜찮다는 인식이었죠. 이 말이 이해가 되나요?

팟캐스트: 그 이야기도 매우 무서운 이야기이네요. 우리가 가지고 성장한 백인의 특권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한 셈이죠?

앨리: 그렇죠.

팟캐스트: 너는 괜찮다.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우리의 일부라는 인정이죠.

앨리: 하지만 그건 칭찬이 아니죠. 사람들이 저에게 칭찬이라고 이상한 소리를 한 경우가 너무 많았고, 전부 모욕이나 다름없었어요. 하지만 제가 화를 내면 사람들이 놀라더군요. 영어 실력이 아주 좋다고 칭찬을 하면 제가 모국어이니 당연히 잘하죠? 이라고 답하고, 제 개인적인 생활에서도 남자들이 저에게 다가와서 “아시아인은 취향이 아니지만 넌 귀엽네.”라고 하던가 “아시아계 여자애치고는 귀엽네.”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런 소리를 계속 듣다 보니 여성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했을지도 몰라요. 뭐 농담이지만, 그런 인종차별적 발언을 해도 사람들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일이 문제라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페티시 문제도 있죠.

앨리: 아주 심각해요. 오리엔탈리즘까지 합하면 아주 끔찍하죠. 제 정보를 많이 공유하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제가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남자와 데이트를 그만둔 이유 중 하나지만, 그 남자가 갑자기 “나 아시아계를 먹어 본 적이 없어.” 이런 소리를 하더군요. 음식도 아니고 뭔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죠. 많은 아시아계 남성들의 경우는 정반대였습니다. 아시아계 남성들은 항상 조롱의 대상이죠. 너무 화가 나서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없네요. 전 아름답고 잘생긴 친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들이 연애할 때마다 인종 차별을 겪는 경우가 많아요. 백인 여성들도 인종 차별을 하죠. 난 아시아계 남자에는 관심 없어. 크기가 작거든. 이런 소리를 하고 다녀요. 이러한 개인적인 이야기가 마구 남발됩니다. 대중매체가 이런 문제에 있어서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아시아계 남성들을 매력적이지 않게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시아계 남성들이 작고, 약하고, 쓸데없다는 묘사가 많죠. 그리고 아시아계가 그런 선입견을 받아들이게 된 일도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요. 

팟캐스트: 물론 현재에 와서는 BTS나 한류 스타들 때문에 아시아계 남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여성들이 늘어났나요? 그게 페티시의 일부라고 생각하시나요?

앨리: 아주 이상하죠. 아시아계 남성들에게 조금 기분 좋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동시에 페티시적인 접근이고 충격적인 접근이죠. 제 동아시아계 남성 친구들은 아시아계 남성에게 적대적인 환경에서 자라왔는데 갑자기 아시아계 남성, 특히 한국계 남성과 데이트하는 일이 유행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제 배경은 좀 독특하긴 하지만 LBGTQ+ 사회에서도 이런 유행은 마찬가지죠. 제 전 여친도 한국계라면 뭐든지 다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제가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제가 한국계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니 전 여자 친구의 반응은 이상했습니다. 보통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은 과거의 배경이 뒤흔들린 일에 대해서 걱정을 하는데 제 전 여자 친구는 한국인과 사귀고 있다니 대단하네! 이런 반응을 보이면서 기뻐했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배경을 알게 된 이야기를 하자면, 19살 때 제 배경과 혈통을 알기 위해서 중국에 방문했죠. 그 방문 결정 자체도 매우 갑작스럽게 내려진 일이어서 제 부모님이 기뻐하지 않았죠. 19살에 중국어도 못하는 상황에서 혼자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제 출신지의 고아원을 방문했죠.

팟캐스트: 어디에 있죠?

앨리: 양저우라는 곳에 있어요. 양저우식 볶음밥으로 유명하죠. 백만 명의 거주자가 있지만, 중국 기준으로는 소도시입니다. 상하이에서 다섯 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죠. 고아원에 도착해서 제 서류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어요. 제가 입양되었을 때의 고아원장은 아니었지만 고아원장이 나와서 제 서류 작성을 잘못했다고 이야기했죠. 처음에 듣고 뭔 소리인지 이해를 못할 때 고아원에서 저에게 설명을 했습니다. 제가 다른 고아원에서 이전된 고아였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해안가 출신 도시인 둥타이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그걸 듣고 괜찮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이번에는 제가 중국계인 한국계인지 모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입양 절차에 연관된 많은 입양아가 한국계였기 때문이죠. 고아원에서 서류가 분실되었기에 제가 중국계 고아인지 한국계 고아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지역에는 조선족 거주지와 북한인 이민자가 많으므로 정확한 민족 출신을 알 수 없다고 했어요.

팟캐스트: 그 조선족 거주지가, 일본 제국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만든 거주지였나요? 아니면 독립군 계통 거주지였나요?

앨리: 아마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거주지라고 생각합니다. 고아원에서는 제가 한국계나 한국계 혼혈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를 해줬어요. 적어도 그 한국계 혈통이 대한민국 혈통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둥타이에 있는 한국계 거주자들은 북한 출신이거든요. 그 사실을 알게 되니 답답했죠. 사실을 알아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약에 둥타이에 가서 제 혈통을 찾으려고 해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요. 아주 웃긴 이야기이기도 한데, 제가 중국에 있을 때 절 보고 모두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중국 억양을 안 가지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지만 많은 사람이 저에게 와서 한국인인지 물었죠. 그걸 들으면 저는 그렇다고 답했어요. 제가 한국인이라고 답하는 일이 제가 영국인이라고 하는 일보다 훨씬 쉬웠습니다. 사람들에게 제가 영국인이라고 할 때마다 저를 믿지 않았거든요. 그 외모로 영국인이라니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고,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한국인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했죠.

팟캐스트: 자라나면서 사람들이 타국에서 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입양된 곳으로 돌아가니 그곳 사람들도 타국 출신이라고 인식하다니 아주 역설적이네요.

앨리: 네 그렇죠. 이상했습니다. 사실 그곳을 방문하는 일 자체가 저에게 있어서 큰 충격이었죠. 1번도 제가 중국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어요. 제가 중국에서 입양되었으니 당연히 중국계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고아원에서 한국계이거나, 혼혈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묘했습니다. 이제 제 혈통에 대해서 아는 사실이 없었죠. 제가 모른다는 사실만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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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 모두 이런 경험을 했는지는 몰라요.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저와 제 입양아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우리가 고아원 입구에 생년월일이 쓰인 카드가 붙여진 포대기에 넣어진 채로 남겨져 있었다고 이야기를 해주시고는 했죠. 제 부모님이 저에게 말해주신 이야기가 이랬고, 그 이야기를 믿으면서 자랐습니다. 그 이야기를 의심할 이유가 없었어요. 하지만 제가 고아원에 갔을 때 고아원에서 이야기는 거짓말이라고 말해줬습니다. 모든 고아에게 주는 배경이라고 이야기했죠. 제가 이런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던 이유가 제가 중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이야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소통의 오류가 적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뭐가 사실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 사실 그 배경 이야기가 나온 이유가 번역 오류 때문이었죠. 부모님이 저를 입양하셨을 때 번역가가 제가 생후 5일이라고 서류를 번역해줬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고아원에 비치된 제 서류를 직접 읽어보니 5일이 아니라 5달이었죠. 5일과 5달은 아주 큰 차이가 나요. 둥타이 고아원에서 양저우 고아원으로 이전될 때 나이였습니다. 제가 아는 정보에 의하면 둥타이 고아원은 과잉수용 상태였다고 합니다. 수많은 여자아이가 버려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한 고아원에서 다른 고아원으로 아이들을 이주시키는 제도가 만들어졌고, 그렇게 해서 제가 둥타이에서 양저우로 옮기게 됐습니다. 사실 중국 방문 때 시간이 없어서 둥타이는 방문하지 못했어요. 둥타이가 어떤 곳인지 알고 싶어서 한번은 방문하고 싶습니다. 해안가 도시라는 정보는 알지만, 제가 아는 정보는 이게 다예요.

팟캐스트: 둥타이 고아원의 과잉수용으로 인해서 다른 고아원으로 보내지셨군요? 그럼 부모님이나 다른 정보는 없나요?

앨리: 관련 정보는 전혀 없습니다. 불확실성이 너무 많고,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제 삶 전체를 거짓말로 도배한 셈이었죠. 제가 언제 태어났고, 어디 출신이었고, 입양되었을 때 나이가 어땠는지 전부 거짓말이었습니다. 제 출생 시기가 적힌 종이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거짓말이었죠. 고아원장이 저에게 제 생일은 제 진짜 출생 일자가 아니라, 고아원에서 마음에 든 날짜를 생일로 정해줬다고 했습니다. 그걸 듣고 나니 제 삶에서 뭐가 진짜였는지 의심이 갔죠. 몹시 화가 났어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사람들의 이야기도 믿을 수 있는지 의심이 갔습니다.

팟캐스트: 그 사실을 알고 난 뒤에 생일 축하하는 데 문제가 생겼나요? 아니면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생일을 축하할 수 있었나요?

앨리: 받아들이기 어려웠죠. 저는 제가 안 과거 배경이 전부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더 많은 사실을 알기 위해서 중국에 갔고. 19년간 그 정보를 믿으면서 자랐는데, 40분 만에 모든 사실 바뀌었고, 불확실성이 너무 많이 늘어나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고아원에서 맛있는 점심을 대접해줘서 고맙다고 하고 나왔어요. 그 뒤 몇 시간 넘게 울었던 기억이 나고, 간신히 호텔에 돌아가서 제 부모님에게 연락을 드렸죠. 제가 혼자 부모님의 압박에서 벗어나 저 혼자 사실을 찾으려고 했는데 역설적이지만 그때 어머니에게 울면서 여기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일이 기억이 납니다. 그 방문 이후 몇 년 동안 생일에는…. 제가 벌써 25살이라니 나이를 많이 먹었네요. 제가 현재 25살입니다. 어쨌든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그 방문 이후 몇 년 동안 생일이 어려웠던 기억이 나죠. 생일이 될 때마다 오 오늘 생일이네- 아닌가? 이런 반응을 보이고는 했거든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반응이 부드러워졌죠. 저에게 생일은 확실히 존재하고, 제가 생일이라고 축하하는 때와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으니, 아예 생일이 아니라 생월을 축하하게 됐습니다. 달 내내 제 탄생을 축하하죠. 

앨리: 제가 한국계이거나 한국계 혼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매우 기묘했어요. 양저우에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어서 다시 고아원에 방문했습니다. 주변 상황이 많이 바뀌었어요. 우선 가장 큰 변화는 국내 입양 허용이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입양될 때는 국내 입양이 불가능했거든요. 그래서 고아원에서 지내는 아이들의 숫자가 훨씬 줄었고, 1자녀 정책도 완화되어서 많은 사실이 바뀌었습니다. 고아원에 방문해서 직접 아이들도 만날 수 있었죠. 아이들과 직접 만나는 경험 자체가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애들처럼 생활한 적이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고아들의 구성 자체가 바뀌어서 많은 아이가 장애인이었어요. 거기에 제가 입양되었을 때는 여자애들뿐이었는데 성비도 바뀌었습니다. 오후 내내 고아원에서 이름이 귀여운 한 소년과 시간을 보냈어요. 제가 거기 갔을 때 갈색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그 가방을 당겨서 제 시선을 끌고는 했죠. 그 경험이 제 기억에 남았고, 제가 가야 하니 그 남자애가 매우 슬퍼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 생각에는 저, 중국 중국인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고 생각해요. 

앨리: 제가 학위를 따기 위해서 노력할 때, 학위를 따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제가 평범하게 자랐다면 알았을 언어를 다시 배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이 저에게 얼마나 감정적 영향을 끼칠지 생각하지 못했죠. 제가 중국에 갔을 때 중국어 실력 부족이 얼마나 저에게 영향을 끼칠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중국어를 못한다고 바보 같다고 하는 중국인이 많았죠. 제 능력 부족이 저를 얼마나 슬프게 할지 몰랐어요. 제가 아무리 노력하고 집중해도 진짜 중국인이 말하는 중국어를 따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슬펐죠. 제가 영국 백인들 사이에서 자랄 때는 항상 제가 그 사람들에게서 소외된 기분이었죠. 하지만 제가 중국에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소외된 기분이었어요. 제가 왜 중국에 가면 더 나아진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중국에 방문했을 때 아주 텅 빈 기분이었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는 기분이었습니다. 문화의 틈새에 사는 사람의 문제였죠. 중국인들이 저에게 긍정적으로 반응했을 때는 제가 중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와 제가 한국인이거나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고, 서양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죠.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중국인으로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중국인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었을 때는 제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뿐이었습니다.

팟캐스트: 고향에 돌아가서 같은 민족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그 일 자체가 불가능했군요? 

앨리: 네. 되찾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죠. 결국, 문제는 제가 대화를 나눈 사람 중 상당수가 제가 동아시아인처럼 생겼지만, 중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지 이해를 못 했기에 생겼습니다. 그러한 혼란과 의문은 사람들이 사실적이라고 논리적이라고 인식한 대답을 찾았을 때나 사라졌죠.

팟캐스트: 간첩 교육을 받았다면 이런 상황에서 쓸모가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앨리: 제 부모님도 똑같은 말을 하셨어요. 중국에 발령되어서 주변에 섞여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이라고 반응하셨죠. 그때 저는 제가 중국어를 쉽게 배우고, 중국에 섞여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중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자 언어의 복잡함을 이해했죠. 전 중국어를 하는 일은 어렵고, 아무리 중국어를 연습해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어요.

팟캐스트: 중국어를 대학교 때 배우셨죠? 그 이전에도 배우셨나요?

앨리: 아뇨. 대학교 때 들어가서야 본격적으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죠. 몹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전 자연스럽게 중국어를 배우지 못했어요. 전 중국어를 쉽게 배울 수 있다고 오만한 착각을 했지만 몹시 어려운 언어였습니다. 

팟캐스트: 다른 백인 학우들이 앨리 씨보다 중국어를 더 잘하는 예도 있었나요? 그럴 때 앨리 씨는 어떤 기분이 들었죠?

앨리: 백인 친구들이 단순히 저보다 중국어를 잘한다는 사실보다 더 영향을 끼친 일이 있었어요. 제가 학과 친구들과 중국어 학생을 위한 파티에 가거나, 중국에 방문하면 최대한 중국어를 많이 쓰려고 했죠. 제가 중국어를 제대로 말하려고 하고 좋은 주제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면 저와 대화하는 중국 사람들의 반응은 평범했어요. 반면에 백인인 제 아내는 중국어를 잘 하지 못하고 관련 학위도 없는데 중국어 몇 단어를 하면 중국 사람들이 아내를 칭찬해줬죠. 그러한 이중 잣대가 저에게 있어서 큰 역경이 되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노력하고, 중국어 실력을 키우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았죠. 심지어 지금도 제 노력과 실력을 사람들이 인식했으면 합니다. 예를 들면 파티에 제 아내를 데리고 가면 제 아내가 중국어로 인사를 하거나 중국어로 널 사랑해, 라는 조그마한 중국어 단어를 합니다. 제가 제 아내에게 가르쳐준 단어를 사용하니 귀엽죠. 하지만 백인들이 중국어를 배우는 일을 더 높이 평가하니 제 노력이 의미가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도 중국어를 모국어로 배우지 않고 자란 영국 사람이고, 제 부모님도 중국어를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제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10배는 더 노력해야 했죠.

팟캐스트: 한국에서도 한국 입양아 상대로 그러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요. 한국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 하는 일이 우리 잘못이고, 한국인이나, 중국인이 아닌 타국인, 특히 백인이 한국어나 중국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해도 말하는 일 자체가 높이 평가되죠. 저 외국인들이 노력하고, 자신을 개선하려 한다고 인식합니다.

앨리: 중국에서 사람들은 절 한국인으로 인식했죠.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중국 사람들에게 대화하려고 하면 중국어를 하려고 한다고 더 높은 평가를 해줬어요. 제가 영국인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일보다 더 높이 평가를 해줬습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제가 영국인이라 중국어를 잘 못 한다고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저를 믿지 않았어요. 제가 아무리 매끄러운 영어를 해도 믿지 않았죠. 영어로 말을 바꿔서 이렇게 영어를 잘하니 전 영국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이 저를 믿지 못했어요. 제가 영국인일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들에게는 믿기지 않는 일이었죠. 제가 대화를 한 사람 모두가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추궁했어요. 중국인들이 저와 대화를 나눠준 이유는 친구의 친구라는 이유 때문이었죠.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 이 친구의 친구이니 넌 믿을 수 있구나. 모국어가 영어인 이유는 영국에서 자랐기 때문이고 그래서 영국인이구나.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제 이야기를 믿어줬죠. 왜 사람들이 그렇게 저를 믿지 못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제가 한국인이라고 말하고 다닌 이유도 거기에 있었죠. 제가 중국어로 말하려고 하면 사람들이 절 모자란 사람으로 알았거든요. 저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소개하기 전까지는 제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죠. 제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제가 국제 입양아라는 사실보다 그 사람들에게는 더 믿기 쉬운 사실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중국에 방문하셨을 때 주변을 돌아보면서 주변에 나이가 많은 여성들이 어머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찾아보셨나요? 아니면 중국에서 자라났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생각하신 적은 있나요?

앨리: 그러기도 했고, 그러지 않기도 했죠. 적어도 고아원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그런 상상을 했습니다. 제 출신지를 방문했을 때는 누구든지 제 어머니일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제 삶 자체가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더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달 출신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으니까요. 중국에 방문했을 때 중국에서 생활하면 어떨지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중국으로 이주할까 생각했죠. 하지만 중국에서는 지내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웠어요. 틈새가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제가 직접 중국에 방문해서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과 거리가 여전히 존재했죠. 그리고 고아원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는 계획이 바뀌었습니다. 현재는 COVID-19 때문에 어디 여행을 가지 못하지만, 유행이 끝나고 나면 한국을 방문해볼 생각이에요. 제가 생각해보지도 못한 배경이죠. 하지만 지금은 아무거나 해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전 중국도 방문했고, 중국어도 배우고, 중국 문화를 배우기 위해서 평생 노력했어요. 하지만 제가 중국에 방문하니 고아원에서 제 출신지도 모르고, 제 혈통이 한국계일지도 모른다고 했죠. 그 반전 자체가 워낙 저에게 큰 충격을 줘서 한국을 직접 방문해야 하기로 했습니다. 정답도 없고,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모르죠. 물론 카오미 씨도 아시겠지만 23 and Me나 Ancestry.com(유전자 조사 회사들)이 있으니 유전자 검사를 해볼까 생각도 했죠. 제가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알아서 제 민족에 대한 결론을 내고 싶었어요.

앨리: 제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연애를 하고 관계를 맺은 사람은 태국 입양아 남자였어요. 서로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죠. 둘 다 백인 가족에 입양된 아시아계였습니다. 그때는 이러한 배경이 제가 필요로 하는 요소이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영혼의 단짝이 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했죠. 제가 그러한 생각을 했던 이유는 서로 비슷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고, 서로와 비슷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설명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 아내와 만나서 사랑에 빠져서 결혼한 뒤에 생각해보면 제 아내는 제 첫 연인처럼 제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죠. 하지만 굳이 아내가 절 이해해주기 원하지 않아요. 아내는 단순히 제 이야기를 들어주고 문제를 같이 생각해주면서 저를 많이 도와줍니다. 전 제 아내를 사랑하고, 우리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요. 매우 깊고 감정적인 관계이죠. 하지만 아내와의 관계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일은 입양에 관한 대화입니다. 제 아내, 캣은 저에게 공간을 줘요. 다른 입양아와 교제하면서 느낀 문제는 둘 다 입양아의 정체성과 과거에 대한 깊은 트라우마, 불안정성, 고통을 서로 가지고 있는데, 우리의 관계에서 그 2명분의 고통을 관리할 수 없다는 문제였습니다. 서로의 문제를 전부 신경 쓸 수 없었고, 우리의 정체성이 너무 망가져 있었어요. 그때 우리의 관계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전 더 혼란스러워졌고, 서로에게서 필요한 도움을 절반만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 아내와의 관계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저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되고, 제가 충분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아내가 저 자신을 고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전 항상 강하지 않습니다. 많은 입양아에게 있어서 정신 건강은 아주 심각한 문제죠. 영국에서 입양아들의 자살 시도율은 평균 자살 시도율보다 4배나 되고 끔찍한 일이예요. 아주 무거운 주제지만, 사실이죠. 부모에게 버림받고, 문화, 고향, 사람들에게서 괴리되니 아주 힘든 일입니다. 백인 여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일은, 제가 괜찮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있다는 점이에요. 아내는 절 가르치려 들지 않고, 절 구하거나 고치려고 하지도 않죠. 

앨리: 전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입니다. 하지만 어떤 얼굴도 제가 선택한 얼굴이 아니죠. 집은 마음은 둔 곳이라면, 제집은 항상 부서져 있었어요. 서류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전 정돈되어 있고 법규를 지킵니다. 하지만 제가 겨우 두 살일 때 서류에서 선택되었어요. 제 얼굴은 성공과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저 자신일 뿐이죠. 입양이 아름답고, 상냥하고, 옳은 일이라는 인식이 있어요. 문제가 있다면 사람의 문제일 뿐이죠. 갈색 아이를 데리고 와서 하얀 옷을 입힌다고 달라지지 않아요. 그 아이들의 색을 지우고, 언어를 빼앗은 뒤에도 성장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사회가 선을 지우는 광경을 봐요. 소녀는 웃는 법을 배우고, 모든 일이 괜찮다고 연기하는 법을 배우죠. 트라우마는 사람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할 때를 제외하고는 사실이에요. 유색인종 아이들이 구원받는 일은 돈이 되는 일입니다. 입양은 단순하지 않고, 존경할 일도 아니죠. 전 제 고향을 잃었고, 제 이름도 잃었어요. 다시는 완벽해지지 않겠죠. 

앨리: 전 제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이 저에게 준 사랑에 고마워합니다. 제 가족이 절 지금 있게 해줬고 그 사실을 변하지 않아요. 가족은 저에게 강해지라고, 제 목소리를 쓰라고 했죠. 전 저에게 일어난 일을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도 옹호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부모님이 저를 입양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절 입양하지 않아도 됐다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죠. 제가 이러한 생각을 공적으로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무서워서 못해요. 입양아들이 조용히 망가진 과거를 넘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영원히 중국인이 될 수 없지만 동시에 백인도 되지 못하겠죠. 그래서 이 과거를 단순히 넘길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저와 같은 사람을 위한 장소는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제 얼굴은 항상 바뀝니다. 인종에 집착하는 세계에서 저와 같은 사람을 위한 장소는 없죠. 아무도 입양과 입양아가 겪은 일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입양아가 공개적으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말하면 배은망덕하다고 비판을 받죠. 가족이 있지 않으냐, 신이 베푼 은혜를 생각해라, 넌 괜찮다, 이러한 말들은 제 고통을 줄여주려고 한 말이었습니다. 

앨리: 무지가 시끄러워지면 대화를 바꿔야 하죠. 사람들이 분노하지 않도록 대화를 조심해야 해요. 하지만 이러한 어려운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전 괜찮지만, 괜찮지 않아요. 입양의 의미 자체를 좋아하지 않죠. 제가 은혜를 몰라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고마워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고통을 받을 수 있죠. 입양아들이 겪는 역경을 사람들이 이해해줬으면 할 뿐이에요. 사람들이 좋은 의도로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우리의 고통을 쉽게 해주지 않고 더는 연기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이 삶을 사는 사람이고, 가면을 매일 바꿔 쓰는 사람이죠. 저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는 일에 너무 익숙해졌고, 얼굴을 너무 자주 바꿔서 횟수를 기억하지 못해요. 전 많은 얼굴을 가진 소녀지만, 모두 제 얼굴이죠. 전 제 이야기를 하고 싶고,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합니다. 입양아들이 마이크를 잡고 전통에 저항하고 있고, 전 제 인생 전체를 말하기 위해서 기다렸고, 이제 여러분들이 들을 시점이에요.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앨리 씨와 연락을 하거나, 구독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죠?

앨리: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어요. 잠겨 있지만, 친구 신청을 하면 받아줍니다. Racism Unmasked 인스타그램 계정이 트롤들의 공격을 받아서 개인 계정을 잠가야 했어요. 또 다른 문제죠. 그래서 인스타그램 계정도 있고, 페이스북 계정도 있습니다. Allie De Lacy로 검색하시면 됩니다. 프랑스 계통 이름이라 앨리 디 레시라고 발음하기도 하죠. 참 고급스럽네요. 어쨌든 인스타그램도 페이스북도 똑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