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자해, 아동 학대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성적 학대 포함)
로버트 칼라브레타 이 (35세) 씨는 한국에서 미국의 학대 가정으로 입양되었다. 로버트 씨는 미시간주에서 뉴욕주로 이주하면서 힘든 성장기를 보냈고 16살에 독립해 친구들의 우정과 뉴욕주 이타카 한인 교회의 도움으로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로버트 씨의 이야기에는 홀트의 정보 부족 통보, 가족과의 재회, 그리고 그가 인신매매의 희생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등, 여러 반전이 있다.
로버트: 제 이름은 로버트 리입니다. 적어도 리로 바꾸려고 하고 있죠. 현재는 제가 입양될 때 주어진 성인 칼라브레타를 쓰고 있어요. 이번 COVID-19 때문에 시간 인지 능력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올해로 35세가 됩니다. 그리고 현재는 뉴욕주 퀸스에서 살고 있어요.
팟캐스트: 식도락의 중심지에서 살고 있군요.
로버트: 단순히 식도락만 아니라 제가 눈에 띄지 않는 첫 거주지이기도 했습니다. 이 선웨이 지역에서 사는 이득 중 하나는 미국에서 아시아계 인구가 주류인 지역 사회 중 하나라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점이죠. 밖에 나가서 식사해도 어떤 사람의 주목도 받지 않아요.
팟캐스트: 칼라브레타는 이탈리아계 성인가요?
로버트: 네. 이탈리아계 성이죠.
팟캐스트: 그 성과 관련해서 재밌는 이야기가 많겠군요?
로버트: 네. 몇 년 전에 뉴욕주 북부에 있는 화이트 플레인 시에서 보험 회사들을 대신해서 카센터들을 관리하는 일을 했죠. 그 카센터 중 상당수는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카센터들과 협상하는 일은 어려웠지만, 제가 성을 밝히면 분위기가 바뀌더군요. “오 이탈리아인이네요? 지미! 이분도 이탈리아인이래!” 이러면서 협상이 훨씬 쉬워졌습니다. 제가 성을 바꾸게 되면 그러한 이득을 잃게 되겠죠.
팟캐스트: 뉴욕주 북부에서 자랐나요? 아니면 다른 곳에서 자라나셨나요?
로버트: 제가 생후 6개월에 입양되었을 때, 제 수양 가족은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시 교외에 살고 있었죠. 6살 이후로는 뉴욕주 중심부 이타카에서 자랐습니다. 사람은 200명이고 2000마리의 양이 사는 아주 작은 마을이죠.
팟캐스트: 상상이 가는 광경이지만,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로버트: 이타카는 마을에 신호등이 없어요. 신호판 정도는 있었죠. 저보다 3살 어린 한국에서 입양된 여동생이 있었어요. 물론 혈연관계는 없습니다. 우리 둘만 백인이 아닌 주민이었죠. 따라서 다른 애들에게 온갖 인종 차별을 겪었습니다. 애들이 우리에게 돌을 던지기도 했고, 다른 인종 차별을 당하기도 했죠. 백인들에게 소외를 당해서 때문에 20대가 되자 백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워야 했어요. 살기 위해서 싸우기도 해야 했습니다. 어른이 되자 이 모든 일을 받아들이고 절 치료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죠.
팟캐스트: 어린 시절에 괴롭힘을 당하셨군요?
로버트: 싸움에서 진 적은 없지만, 그때의 충격과 트라우마가 아직도 생생하죠. 뉴욕시 중심에서 벗어나면 몸이 긴장되고 정신 상태가 혼란스러워지는 경험을 자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죠. 주변 사람에게 잡히거나 공격받는 상황에 항상 대비하다 보면 정신적으로 힘들거든요.
팟캐스트: 부모님에게 이런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었나요? 그분들이 이 문제를 아셨나요?
로버트: 제 삶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어요. 전 제가 16살일 때 독립했습니다. 그때는 왜 독립했는지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방치와 학대에서 벗어나려고 독립했죠. 16살 때 독립하고 나서는 칼라브레타 가족과는 교류가 얼마 없었습니다. 저를 내버려 두는 가정환경에서 벗어나야 했고, 독립이 제 생존 방법이었어요.
팟캐스트: 두 아시아계 아이들을 뉴욕주 한복판의 작은 마을에 입양해놓고 그러한 고통을 양부모님이 전혀 몰랐다니 충격적이네요. 왜 칼라브레타 가족이 그곳으로 이사를 했죠? 직업상의 문제였나요?
로버트: 또 다른 설명을 해야 하는 문제네요. 우리를 입양한 가족의 남성 성인은 빌이었어요.
팟캐스트: 그 사람들을 양부모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군요?
로버트: 네. 그 사람들을 양부모님이라고 부르면 저와 제 여동생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를 입양한 남자 빌은 목사였고 이타카 마을 교회에서 목사로 일했죠. 물론 그의 직업만 목사였지 그가 한 일은 감옥에 가고도 남았을 일이었어요. 우리를 입양한 여성도 그랬죠. 빌과 지니 둘 다 나쁜 사람들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어떤 학대를 당했는지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제 양아버지도 목사였는데, 전 양아버지에게 성적으로 학대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로버트 씨의 이야기가 슬프게도 익숙하네요.
로버트: 이런 이야기를 공유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에는 운이 좋게도 물리적인 학대였죠. 제 여동생은 충격적이고 어두운 학대를 당했어요.
팟캐스트: 로버트 씨의 여동생도 성적으로 학대를 당했군요?
로버트: 네. 그리고 전 4년 전까지 제 여동생이 성적 학대를 당했는지 몰랐습니다. 제 여동생의 이야기를 대신하고 싶지는 않아요. 여동생을 보호하고 싶죠. 제 여동생도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과 연결을 끊었습니다. 이러한 여동생의 독립과 학대를 알게 된 과정도 어이가 없어요. 4년 전에 출장을 가기 위해서 마을을 방문했을 때 빌이 저에게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제 여동생과의 교류가 끊긴 이유가 자기가 그 애를 성적으로 학대했기 때문이라고 저에게 말했어요. 하지만 거짓말이었죠. 빌 말로는 여동생을 입양한 뒤 1년만 성적으로 학대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동생은 빌이 12년 동안 자신을 학대했다고 하더군요. 우리를 입양했던 성인 여성, 지니도 이 학대의 공범자였습니다. 제 여동생이 지니에게 이러한 학대가 일어나고 있다고 호소했지만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으니까요. 어느 시점부터 학대 방조가 범죄가 되는지 궁금하죠. 그러한 일이 계속 일어나는지 몰랐다면 어머니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4년 전에 그런 사실을 알게 되고 나자 전 자유로워졌죠. 더 제 유년 시절의 기억을 추억할 필요가 없고, 더는 제 과거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과거는 제가 기억하던 대로의 악몽이었죠. 아시아계의 죄책감 서사는 아시아계 입양아에게는 두 배로 적용됩니다. 사람들은 입양아들이 양부모를 돕고, 기분 좋게 하고, 행복하게 하려고 왔다고 해요. 입양아들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좋게 보려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보죠. 여동생의 학대 사실을 알게 되자,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생겼던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었어요. 제가 나쁜 아들이라 16살 때 그 집에서 도망치지 않았죠. 빌과 지니 밑에서의 노예 생활에서 도망쳤습니다. 20대에는 제가 살 곳이 없던 경우도 있었어요. 전 대학교 등록금과 생활비를 전부 학자금 대출과 아르바이트로 충당했죠. 그 결과 살 곳이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요.
팟캐스트: 같은 가정에서 자라는 형제자매들이 다른 형제와 자매들에게 가해지는 학대를 모를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죠. 지금 로버트 씨가 되돌아보면 여동생에게 가해지는 학대의 조짐이 보였나요? 아니면 주변 성인들이 그러한 학대를 숨기는데 능했나요?
로버트: 지금 그 이야기를 하시니 흥미로운 점은, 전 학대 사실을 알게 되자 제가 부모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죽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전 그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인지 몰랐죠. 그 사람들이 우리를 잘 키우려고 노력했지만, 우리가 그 노력을 이해하지 못해서 독립해야 했다 서사가 사라졌습니다. 그 사람들을 더는 사람으로 볼 수 없었어요. 제가 학대 사실을 알았냐는 질문에 답을 하자면 몰랐습니다. 하지만 어디서 나왔는지는 몰라도 무의식적으로 그 애를 보호하려고 하던 방법이 있었죠. 우리는 서로 신체 접촉이 별로 없었고, 여동생의 육체적 문제에 관심을 두거나 접근 자체가 금기였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의 말을 끝내줄 수 있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으니 괜찮았죠. 학대 사실을 제가 직접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무의식적으로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동생의 학대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제가 죄책감을 느꼈다고 생각해요. 제가 직접 학대를 받지 않아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 상황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도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로버트 씨는 성장하면서 가족이 부끄럽다고 생각했나요?
로버트: 네. 제 청소년 초반기에는 아시아계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죠. 제가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아시아계, 한국계 정체성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제 경험이 입양아 사회와 연관된 다양한 관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죠. 많은 입양아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인종과 주변 사람들의 인종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제 여동생과 저는 한국에 대해 거의 몰랐지만, 백인 사회가 우리를 거부해서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른 입양아들보다 더 빠르게 자각하게 됐어요. 전 어쩌다 보니 한인 교회의 청소년부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빌과 지니는 한인 교회에 다니기를 원치 않았지만 저는 거기 참여했고, 다른 한국인들과 교류할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저의 한국인 정체성을 교회 참여를 통해서 구축할 수 있었죠.
팟캐스트: 작은 마을에서 어떻게 한인 사회와 접촉할 수 있었죠? 한인 교회는 어떻게 접촉하게 되었나요?
로버트: 이야기를 좀 더 이상해지지만, 전 2학년 때부터 재택교육을 받았어요. 목사네 자식이라는 특이점에 재택교육을 받았다는 점까지 더해서 더 이상한 사람이 되었죠. 물론 재택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이야기도 아니고, 재택교육도 제대로 하면 좋은 경우도 많지만, 제가 받은 재택교육은 책을 잔뜩 받고 제가 알아서 공부해야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3학년 이후부터는 독학으로 공부를 했죠. 재택교육의 필요조건 중 하나는 외국어였어요. 이타카 한인 교회가 있어서 제가 가서 한국어 수업을 들었습니다. 제가 12살에서 13살 때였어요. 거기에 10명에 12명 한인 아이들로 구성된 정도의 청소년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 애들이 제 진정한 가족이 되어주었습니다.
팟캐스트: 그게 제가 가진 또 다른 질문의 답이네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고, 동시에 아시아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정체성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자원이 어디에 있었나 궁금했는데, 한인 교회와 교회 사람들이 있어서 로버트 씨의 한국 문화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었군요?
로버트: 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들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미국의 경제지) 잡지가 있었는데 일본 수상의 사진이 나와서 그 사진을 잘라내서 보관했죠. 제가 찾을 수 있는 아시아계 정체성은 전부 찾아서 모았어요. 제 옷장 내부에 상자가 하나 있었고 그 안에 제 아시아계 정체성을 만들려는 노력이 담겨 있었습니다. 대부분 잡지에서 오려낸 짧은 기사들이었어요. 90년대 미국 시골이라 AOL 인터넷이 겨우 들어온 수준이었으니 인터넷을 통해 정체성을 찾는 일은 어려웠습니다.
팟캐스트: 잡지를 잘라서 앨범을 만드셨나요??
로버트: 네 그런 셈이죠. 전 북한에 관한 기사도 모아서 수집했습니다. 그때 왜인인지는 몰라도 미국 잡지에 북한에 관한 기사가 많이 실렸죠. 북한 병사들의 얼굴이 저와 비슷해 보였고, 저는 친밀감과 동질감에 굶주려 있었죠.
팟캐스트: 로버트 씨는 한국 가족에 대해 생각을 하고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나요? 아니면 아예 생각하지 않았나요? 한인 교회에 가서, 한인 교회 친구들과 놀고 그 친구들 부모님과 일을 하면서 한국 가족이나 한국 기원에 대해서 생각하셨나요?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셨나요?
로버트: 청소년 남자애라면 여자애를 사귀는 일, 차를 사는 일, 누가 더 근육질인지에 대해 신경을 쓰기 마련이죠. 저는 한인 교회 친구들 집에 놀러 가서 친구들 부모님이 한국어로 애들 이름을 부르고, 밥 먹으라고 부르는 일이 기억에 남아요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전 외로웠습니다. 그때 제 부모님이 누구인지 물어보면 빌과 지니를 지목했겠지만, 동시에 전 한인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그런 가족 관계를 원했죠. 친구들 부모님이 친구들에게 게임 그만하고, 좀 더 공부하라는 잔소리마저 부러웠습니다. 집에서 방치된 기간이 길어서 그런지 그런 관심을 받는다는 생각만 해도 아주 기뻤죠.
팟캐스트: 로버트 씨가 어떻게 방치되었는지 예를 좀 들어줄 수 있나요?
로버트: 제 양이모가 말해주시기를, 빌과 지니가 제가 어렸을 때 벌을 준다고 저를 어두운 지하실에 가뒀다고 하더군요. 양이모는 자기 자매와 자기 자매의 남편이 이렇게 저랑 제 여동생을 대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더군요. 이제 우리는 입양아가 잘못하면 아이를 어디 가두거나 외롭게 하지 말고, 가족이 모여서 아이의 잘못을 짚어주고,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다독여야 입양아들이 가진 공포를 관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빌과 지니는 그러지 않았죠. 오히려 제가 가진 공포를 증폭시켰고, 결국 전 살기 위해서 그 집에서 도망쳐 나와야 했습니다. 빌은 저에게 너무 화가 나서 이 방에서 안 나가면 절 죽이겠다고 했어요. 그러한 분노를 받아내야 하는 사실 자체가 아주 무서웠죠. 물론 과장일지도 모르지만 어렸을 때의 저는 그 협박이 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팟캐스트: 듣기만 해도 긴장되고 불안해지네요.
로버트: 네. 좀 더 물리적인 학대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너무 충격적이니까요.
팟캐스트: 16살에 짐을 싸서 그 집에서 나오셨다고 했는데, 어디로 가셨는지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로버트: 제가 16살에 독립했던 이유는, 전자 기타 때문이었습니다. 제 입양 가족은 보수적인 집이었죠. 제가 전자 기타를 소지할 수 없다고 그 둘이 선언했어요. 그게 계기였습니다. 더는 그 집에서 지낼 수 없겠다고 생각했죠. 전 재택교육을 받아서 고등학교 교육을 16살 때 끝낼 수 있었고, 전문대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대학교로 진학하긴 했지만, 그 전문대에 일본인 친구가 있었어요. 나카지마 히로키라는 이름의 친구였죠. 일본 전과자 출신으로, 갱생하고 나서 미국에서 사업을 공부하기 위해서 유학 온 친구였습니다. 아주 뛰어난 전자 기타 연주자였고, 전 히로키에게서 전자 기타를 샀어요. 저와 히로키와 아주 빠르게 친해졌고, 전 히로키의 룸메이트가 되었어요. 히로키와 온갖 즐거운 이야기를 공유했습니다. 학대와 방치로 가득한 집에서 살다가 저와 비슷하게 생기고, 절 친형처럼 챙겨주는 사람과 같이 살게 되니 아주 좋았어요. 히로키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찾으려고 노력했죠. 히로키는 제가 그 집에서 나와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팟캐스트: 히로키 씨의 이야기는 전직 전과자가 미국에 와서 삶을 다시 바꾸려고 하는 이야기고, 로버트 씨의 이야기는 자유를 되찾는 이야기군요. 두 분은 반항아라고 하긴 그렇지만, 서로 닮았다고 생각하셨나요?
로버트: 서로 닮았기 때문에 히로키가 저를 받아들여 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반항아여서 같이 락 앤 롤에 빠졌다고 생각하고요.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도 생겼죠. 제 삶을 위해서 최고의 전자 기타리스트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전부 히로키 덕분이죠.
팟캐스트: 밤새 연주를 하고, 일본 음식을 먹는 그런 장면이 떠오르네요. 히로키가 오므라이스를 만들어주거나 그랬나요?
로버트: 네. 히로키와 제 우정은 저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해줬죠. 은행 계좌에 5달러밖에 없을 때 히로키가 저를 먹여 살려줬어요. 히로키와 저는 기타를 들고 어디든지 같이 다녔죠. 같이 동네 슈퍼마켓을 돌아다니면서, 히로키가 카트를 밀고 제가 카트에 앉은 채로 기타와 앰프를 들고 연주하고는 했습니다. 어디 가든지 연주를 했어요. 히로키가 오래된 밴 하나를 가지고 있어서 그걸 몰고 다니면서 같이 돌아다니기도 했죠.
팟캐스트: 둘이서 커버 밴드였나요, 아니면 독자적인 노래도 작곡해서 연주했나요?
로버트: 저랑 히로키 둘 다 U2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U2 노래를 많이 연주하고는 했죠.
팟캐스트: 돈을 벌기 위해서 공연하기도 했나요? 식사 비용이나 연료비를 공연비로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벌었나요?
로버트: 몇 번 그런 적이 있어요. 전문대 카페테리아 중심에서 앰프에 기타를 꽂고 카페테리아 전체를 위해서 연주하기도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드디어 자유를 처음으로 찾은 사람이 잃을 것도 없고, 자기 자신을 찾고 있다면 당연히 그런 일도 일어나기 마련이죠.
-광고-
팟캐스트: 히로키 씨를 마지막으로 본 때가 언제죠?
로버트: 제가 주립 대학교에 진학했을 때가 마지막이었죠. 그 뒤로 히로키가 뭘 했는지는 모릅니다.
팟캐스트: 서로 헤어질 때 작별인사를 했나요?
로버트: 제가 대학교에 진학할 때 나이가 17살~18살 정도였어요. 우리는 친한 친구였고, 같이 한 일의 추억을 가지고 웃었죠. 히로키를 다시 찾을 수 있다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다시 범죄의 길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죠. 야쿠자는 아니었겠지만, 일본 범죄조직의 일부였다고 들었습니다.
팟캐스트: 문신이나 염색을 하고 있었나요?
로버트: 네. 염색한 머리는 미국에 왔을 때는 이미 색이 빠졌지만, 적어도 제가 본 사진에서 나온 청소년기의 히로키는 머리도 염색하고 문신도 있었죠. 그래도 아주 멋진 사람이었어요.
팟캐스트: 계속 연락을 하지 않았군요? 영화처럼 그렇게 서로 헤어지고 끝났나요?
로버트: 어떻게 헤어지게 됐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냥 주립 대학교가 있던 뉴욕주 버펄로시로 이사하는데 바빴던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사하면서 여러 가지가 바뀌었죠. 히로키가 먼저 일본에 돌아갔을지도 몰라요. 히로키가 저에게 먼저 작별인사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히로키에게 작별인사를 먼저 하지 않았던 기억밖에 없죠.
팟캐스트: 그다음에는 무슨 일을 하셨죠? 다음 이야기는 뭐로 하고 싶으시죠?
로버트: 음…. 결혼을 했죠.
팟캐스트: 오 결혼을 하셨군요? 상대는 누구였죠?
로버트: 사라 리와 결혼했죠. 동명의 빵 가게는 관계없습니다. 제 아내는 한국계 미국인이고 8년 전에 결혼했어요. 대학교 졸업 후에 서로를 만났죠. 아내는 석사 학위를 준비하고 있었고, 전 버펄로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대학교 입학 뒤에도 버펄로 한인 교회를 찾아서 사회적 교류를 할 수 있었죠. 제 아내도 한인 교회에서 만났고, 아내를 만난 첫날 집에 돌아와서 제 동거인들에게 아내와 결혼할 운명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삶에서 운명을 느낄 때가 있고, 이 운명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죠. 물론 제 아내를 놓고 저와 경쟁하던 다른 3명의 남성과 싸워서 이겨야 했으니 큰 성공이라고 볼 수 있어요.
팟캐스트: 다른 남성들과 경쟁해서 승리하면 더 교제 상대를 소중하게 여기게 되는 법이죠.
로버트: 그렇기는 하네요. 그래도 제 경쟁자들도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팟캐스트: 로버트 씨가 어렸을 때 한인 교회에서 좋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한인 교회와 사회를 찾으신 이유는 이해하는데, 로버트 씨는 한국어를 못하시죠? 거기에 빌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품었을 것 같은데, 한인 교회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셨네요?
로버트: 꽤 오랫동안 기독교에 대해서 반감을 품었죠. 사실 전 한인 교회에 가서 한국 사람들을 만나고, 한국 사회를 느끼고, 공짜 한국 음식을 먹었습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가지는 않았어요.
팟캐스트: 한인 교회에서는 항상 음식을 제공해주죠.
로버트: 네. 항상 음식이 있어요. 그래서 벗어나기 힘들죠. 항상 주변에 저를 잘 대해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전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고, 대학교 때는 주변에 두기 좋은 사람은 아니었어요. 사람은 보통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는 경우가 많아서 기억을 믿을 수 없지만,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저는 대학교 때 분노에 가득 차 있었고 그 분노를 세상에 뿜어내려고 했죠.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가 제가 한국어를 못한다고 하셨는데, 네 그렇죠. 한국어를 못하면서 한국인들 주변에서 지내는 한국계 입양아들은 자신이 한국인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물론 전 한국인이지만, 다른 한국인들이 저를 한국인으로 보지 않았죠. 그래서 한국인들도 입양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한국인들의 농담이나, 관련 정보를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에게 다가온 멋지고, 다정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눈치를 보고 저에게 농담을 설명해 주는 경우가 많았죠. 입양아는 입양된 나라의 사회에도, 본국의 사회에도 맞아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게 됩니다. 제가 대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이었죠. 카오미 씨의 질문이 제가 한국어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말이 삼천포로 빠졌네요.
팟캐스트: 로버트 씨의 분노를 이해합니다. 로버트 씨의 분노가 자기 앞길을 망치거나, 자기 파괴적이라고 생각하셨나요?
로버트: 제가 겪은 방치가 얼마나 흔했는지 모르지만, 방치 상태가 일상이 된 바람에, 평범의 기준이 아주 낮아졌죠. 그래서 결혼하고 나서 배울 것이 많았습니다. 제가 평범하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문제가 많았어요. 그걸 인식하고 고치려면, 제가 비인간적 고생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니 힘들었습니다. 제 과거를 재인식하고 뭐가 맞고 뭐가 틀렸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긴 시간을 보내야 했죠. 지금도 그런 과정과 절차를 거쳐서 사랑, 그중에서도 전체적인 사랑에 대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어른이 되었을 때, 제 마음은 스위스 치즈처럼 수많은 구멍이 뚫려 있었죠. 전체적으로 누굴 사랑하고 돌보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카오미 씨가 빌이 제가 기독교에 대해서 반감을 품게 했냐고 물었는데, 확실히 기독교에 대해서 반감을 품게 되었죠. 그 반감 중 일부는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제 경험에 따라서 하나님이 절 버렸다고 생각했어요. 전 버려지는 일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입양아에게 있어서 버려지는 일은 큰 트라우마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에게 가졌던 질문도 그랬죠.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 대학교 때 가진 분노의 뿌리를 찾아보면, 우주에 대한 분노였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개인적인 분노였고, 신에 대한 분노였죠. 하지만 신앙으로 만들어진 사회에서 활동하면서, 분노에 가득 찬 저에게 조건 없는 사랑과 도움을 주고, 용서해주며, 어떤 대가도 원치 않는 사람들을 만나니, 그 사람들의 신앙을 거부할 수 없었고, 저에게 신앙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세상에는 파괴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알았고, 제가 느끼고 있는 사회적 신앙과 사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팟캐스트: 로버트 씨가 만나게 된 한국계 이민자 사회, 아니, 로버트 씨가 찾아간 한국계 이민자 사회가 로버트 씨가 어렸을 때 느끼지 못했던 사랑과 가치를 느끼게 해줬군요?
로버트: 네. 제가 현재 퀸스에서 사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지역 교회에서 만난 사람 중 일부가 제가 크리스마스 휴가 때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들 집에 절 초대해줬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국계 집에서 지내면서 그 사람들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가족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느낀 사랑은 대단했어요. 제가 많은 가족을 가지게 된 느낌이었죠.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 그분들이 부모 역할을 해줬습니다. 말이 또 삼천포로 흘렀네요. 제가 가진 분노가 저를 다치게 했는지 질문하셨죠. 네 저를 다치게 했습니다. 제 청소년기에 자해했죠. 스트레스를 조절하기 위해서 몸에 상처를 내고는 했어요. 저 자신에 대한 분노였는지, 버림받은 고통을 조정하기 위한 행동이었는지는 모릅니다. 아마 둘 다 일지도 모르죠. 자신에게 벌을 주는 행위였지만 외로움을 관리하기 위한 행동이었어요. 물론 이러한 자해행위를 옹호하거나, 권장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 왼팔은 지금도 흉터투성이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런 사실을 밝히는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죠. 제가 살아남기 위해서 한 행동 중 일부이고, 저 자신이 느끼던 고통과 정신적 갈등의 일부였습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로버트 씨가 느낀 정신적 고통을 물리적 고통을 통해서 풀었군요?
로버트: 네. 적어도 그 물리적 고통은 조절할 수 있으니까요. 물리적 고통은 왔다가 가죠. 생각해보면 파괴적이지만 동시에 편안한 느낌이 듭니다. 항상 조정할 수 없는 버림받았다는 고통, 외로움의 고통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적어도 물리적 고통은 자신이 고통을 가하고, 느끼고, 치유하는 단계를 관리할 수 있어요. 망가진 방식이긴 하지만 고통을 조정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물론 자해를 권장하지 않고, 이런 인식에는 큰 문제가 있죠.
팟캐스트: 자해를 얼마나 하셨죠?
로버트: 집에서 지내고 있을 때 자해를 시작했고, 1년에서 2년 정도 지속하다가 제가 이사를 나왔습니다. 다시 언급하긴 좀 그렇지만 히로키와 같이 지낸 시간은 희열로 가득 찬 시간이었죠.
팟캐스트: 로버트 씨와 히로키 씨가 같이 연주하면서 자유와 행복을 만끽하는 광경을 보고 싶네요.
로버트: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했죠. 그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았으니까요.
팟캐스트: 그래서 그 입양 가족과 관계는 어떻게 됐죠? 결국, 관계를 진짜로 끊어 낼 수 있었나요?
로버트: 올해 내로 제 성을 바꾸게 되는데, 그게 제가 법적으로 그 둘과 관계를 끊어내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겠죠.
팟캐스트: 계속 칼라브레타 성에 복잡한 감정을 가져서 그 성을 유지하셨나요? 아니면 그 성에 대해서 다른 감정을 품어서 성을 유지하셨나요?
로버트: 이 질문이 제 삶의 전환점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4년 전에 빌이 여동생에게 가했던 학대를 밝히자, 빌과 지니, 그리고 저의 어린 시절에 대한 모든 감정적 연결이 끊어졌죠. 저의 어린 시절, 제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가족의 죽음을 추모해야 했어요. 저의 어린 시절과 가족은 저에게 있어서 진짜였습니다. 하지만 과거는 부서졌고 추억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 둘은 죽은 셈이었죠. 그러한 죽음의 단점은 장례식을 치를 수도 없고, 그들을 위한 추모를 할 시간도 없다는 점입니다. 한 2년 정도 우울했고, 제 한국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죠. 전 제 한국 이름도 몰랐어요. 나중에 중요해지는 사실이긴 하지만, 제 서류에 기록된 한국 이름은 이성수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이성수라는 이름 자체도 저와 관련된 사회복지사에게서 받은 정보였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라는 성도 주어진 성이고, 성수라는 이름도 주어진 이름이었죠. 그래서 진짜 이름이 없었습니다. 칼라브레타 가족이 준 성은 쓸 수 없지만, 제 진짜 이름은 아무도 몰랐어요. 제가 가진 정보는 단지 한국에서 입양될 때 주어진 K-86 서류 번호뿐이었습니다. 그게 제가 가진 진짜 정체성에 가장 가까웠죠. 그때부터 제 친가족을 찾아야 한다는 욕구를 느꼈어요. 제 진짜 이름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친부모 조사를 시작했죠. 그게 2년 전이었습니다. 이 팟캐스트를 듣고 있는 분 중 상당수는 알고 계시겠지만 아주 무섭죠. 자신의 삶에서 공포를 마주하면서 자기 자신을 위험에 노출하는 일이니까요. 친부모 조사를 안 한 입양아들에게도 조사를 안 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주 무서운 일이니까요. 누구도 그 조사를 하는데 용감하게 돌진하지 않죠. 조사를 진행하고, 어떤 경우에는 부모를 찾지 못한 입양아들을 칭찬하고 싶어요.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용감한 사람들입니다. 그 조사를 하는 데만 큰 용기가 필요하고 사람들이 그 용기를 인식해야 하죠.
팟캐스트: 유기가 입양아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공포인데 그걸 직접 마주하고 고통을 다시 겪어야 하니까요. 로버트 씨 말대로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로버트: 어렸을 때부터 꾸던 꿈은 무언가 저를 쫓아오는 악몽이었습니다. 항상 돌아서서 뭔지 바라보기 무서웠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한 악몽들이 버림받는 일에 대한 공포이고, 아주 무서운 일이예요. 전 제 친부모 조사를 하기 위해서 배서니 입양 기관을 통해 홀트아동복지회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홀트아동복지회가 몇 달 뒤에 저에게 다시 연락해서 저와 관련된 정보가 전혀 없고, 제 친부모님이 어떤 정보도 남기지 않았다고 했죠. 그 이메일을 받고 나니 제가 또 다른 부모님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친부모님을 찾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하지만 실제로 제가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자, 친부모님의 부고를 들은 기분이었어요. 다시 슬픔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입양아들이 유독 나쁜 경우에 놓이는데, 이러한 슬픔을 관리하기 위한 사회적 절차가 없기 때문이죠. 만약에 가족이 죽으면 그 가족의 장례식을 하고, 가족을 잃게 된 일을 받아들이고 끝을 낼 수 있어요. 하지만 친부모 조사를 했는데, 친부모를 찾을 수 없거나, 그들이 입양아를 만나려고 않으면 그 슬픔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슬픔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고민했어요. 제가 현재 이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AKA(Also-Known-As, 뉴욕시 기반 국제 한국계 입양아 단체)를 통해서 여러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이 팟캐스트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인데, 한국 입양 기관이 거짓말을 한다는 이야기를 여기서도 들었거든요. 여러 입양아가 입양 기관이 자신들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저도 그런 경우일지도 모르고, 홀트아동복지회가 저에게 말하지 않은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동권리보장원(NCRC)을 통해서 한국 가족 조사를 진행했죠. 그쪽에서 따로 조사를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감정적 혼란을 겪어야 했죠. 다시 가족을 찾지 못했다는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이게 2019년 겨울에 일어났던 일이었어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 조사를 하기 위해서 제 서류를 한국에 보냈죠.
로버트: 친부모 조사를 하던 도중에 제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신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진짜 목사가 되었어요. 제가 목사가 된 일에도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있죠. 제가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던 날의 아침이었습니다. 제가 일어나서 이메일을 확인해보니 아동권리보장원을 통해서 제 아버지를 찾았다는 연락이 들어와 있었어요. 제가 15분 뒤에 사람들 앞에서 연설해야 하는데 이 정보를 알게 되었죠. 그래서 그 자리에 앉아서 울었습니다. 서럽게 운 것도 아니고 모든 힘이 빠져서 그냥 거기 앉아서 울었죠. 감정적인 소모가 너무 크기도 했고, 서럽게 울고 싶었지만, 힘이 빠져서 그냥 앉아서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장원에서 조사를 하고 싶냐 물었고, 전 당연히 동의했죠. 첫 편지가 보냈는데, 그 집에 사람이 없어서 반송됐다고 하더군요. 보장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고, 다시 편지를 보내겠다고 연락을 했습니다. 제 친아버지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고, 다시 반송됐죠. 보장원에서는 3번 이후로는 우리가 더 연락할 수 없고, 이 정보를 경찰에 넘겨줘야 하고, 제가 다른 방법으로 조사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전 다시 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3번째 편지를 보냈을 때 제 아버지와 연락이 닿았고, 그 소식을 제가 연설 이전에 받았던 이메일로 받았죠. 이메일에는 제 아버지가 보장원에게 연락을 해왔고, 절 기억한다고 했죠. 아버지가 울면서 저에게 미안하다고 하셨고, 절 잊은 적이 없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둘 다 살아 계시고, 동생도 두 명이나 있다고 했어요. 그걸 듣고 나니 시간이 멈추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세상이 뒤집히는 기분이었죠. 이게 2020년 1월이라 아직 COVID-19가 세상을 휘감기 전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어요. 아버지가 문학 교수는 아니지만, 아버지가 쓴 편지는 따뜻했습니다. 아버지가 절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우리가 서로를 찾아서 기쁘고, 같이 미래를 공유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편지에 쓰여 있었어요.
로버트: 아버지가 저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 2가지 흥미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왜 자꾸 보장원이라는 곳에서 편지가 오는지 몰라서 편지를 열어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3번째 편지를 열어봤고, 거기에 1986년생 이성수 씨가 가족을 찾고 있는데 정보를 안다면 이 번호로 연락을 달라고 쓰여 있었다고 하더군요. 1986년에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맞는데, 이성수는 아버지의 성함이었죠. 제가 쓰고 있던 한국 이름인 이성수가 제 아버지의 성함이었습니다. 제가 아버지에게 답장할 때, 아버지가 이렇게 사과하시지만, 아버지는 제 이름으로 곁에 같이 있었다고 편지를 썼죠. 제가 제 정체성의 일부로 붙잡고 있던 제 이름이 아버지와 연관되어 있었어요. 제가 알게 된 또 다른 정보는 병원이 저를 고아원에 넘겼을 거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머니가 제가 태어난 사실을 확인하고 제 손가락과 발가락을 보고 간호사에게 넘겼는데 그게 어머니가 저를 본 마지막이었죠. 병원에서 제 몸 상태가 안 좋다고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고 하더군요. 어머니가 절 임신하고 계셨을 때 어머니 건강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어머니에게 제가 죽었다고 하고, 병원에게 장례 절차를 맡기는 서류를 작성하게 했죠. 보통 부모들은 죽은 아기를 받아서 따로 장례를 치르려고 않으니까요. 그래서 제 가족 전체가 제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슬퍼했습니다. 제가 장남이었는데 태어나자마자 죽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게 제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34년 뒤에 자기들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놀라셨죠.
로버트: 어머니가 제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해서 저에게 연락하는 데 3달이나 걸렸습니다. 어머니는 불교 신자인데, 절 위해서 불교에서 아이가 죽고 난 뒤에 하는 추도식을 세 번이나 하셨어요. 저를 놓아주기 위해서 해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훨씬 더 빠르게 연락을 하셨죠. 그리고 어머니와 화상 통화를 할 수 있었어요. 아동발달 심리학자가 말하길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자라지만, 태어나고 나서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세상을 인식한다고 하죠. 사람들이 가진 트라우마 대부분이 우리를 보고 웃는 어머니의 얼굴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고 어머니 얼굴에서 제 얼굴을 봤어요. 제가 어렸을 때 가지고 있던 아시아계 사람들의 사진이 아니라 진짜 어머니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게 됐습니다. 제 어머니는 대단하고 현명한 여성이죠. 제 얼굴을 어머니 얼굴에서 보게 되니 그걸로 충분했어요. 그리고 COVID-19가 전 세계를 덮쳤습니다. 어머니와 화상 통화로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지금까지 아버지의 이름을 써왔으니 어머니가 저에게 새 이름을 지어 달라고 했어요. 어머니가 직접 조사를 해서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제 강제입양으로 인해서 고통을 겪은 사람 중에서 어머니가 가장 깊은 고통을 느끼셨으니 어머니가 절 다시 받아들일 기회를 드리고 싶었어요. 제 한국 이름은 이한일입니다. 하늘이 아니라 한일입니다. 그리고 제 성도 리로 바꿀 예정이에요. 제 생일도 서류에 적혀 있던 생일과 달랐습니다. 제 이름도 달랐죠. 35세에 자기 생일과 자기 이름을 알게 되는 경험은 뭐라고 할 수 없었어요. 다시 입양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아예 입양을 취소하고 다시 복귀하는 느낌에 더 가까웠습니다. 제 친가족이 진짜 가족이라고 느낄 수 있었어요. 이제 매주 연락을 하죠. 어머니에게는 적어도 매주 한 번 연락을 드리고, 제 형제자매들과도 매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다시 가족을 찾은 셈이에요. 제가 가족들에게 운명과 확률을 뛰어넘어서 죽음에서 되돌아간 셈입니다. 제가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생각과 기독교로 다시 이야기가 돌아오게 되네요.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했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죠. 제 고통을 정당화하고 축소하려는 행동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삶이 이어져 있고, 고통이 하나님의 이야기 중 일부라면, 우리가 세상에서 시련을 겪는 이유는 하나님의 곁에서 영원히 평온을 찾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그런 경험을 조금씩 한다고 생각하고, 제가 운이 좋게도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아주 대단한 이야기이네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확률의 이야기기도 합니다. 어떤 날에는 어디에서 잘지도 몰랐는데, 역경을 넘어서 결국 그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간 셈이니까요.
로버트: 가족과 같이 제주도로 여행을 간 적이 있어요. 제주도에 가 보셨는지는 모르지만, 밤에 오징어 어선들이 바다로 출항합니다. 그리고 조명을 켜서 오징어들을 유인하죠. 막 해가 질 무렵에 제주도의 상공에서 바다에 불이 켜지는 아주 아름다운 광경을 봤어요. 그 광경을 보니, 제가 아주 오랫동안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바다에 저와 같은 빛들이 같이 떠 있고,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주 무섭고 두려웠던 광경이 아름답게 보였죠. 바다에서 혼자 표류하던 저 주변에 이제 가족이 있었어요. 제가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을 때 이야기입니다. 인천공항에 내리기 30분 전에 좌석에 누워 있었어요. COVID-19 사태 덕분에 자리들이 비어 있었고, 밤이라서 불이 꺼져 있었죠. 공중에 뜬 채로 어둠 속에 아이처럼 웅크려 있었어요. 한국에 도착하면 어머니를 만나게 될 예정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두 번째 탄생과 가장 가까운 시점이라고 생각했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고, 그 과정을 기억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팟캐스트: 분노도 느끼셨나요? 부모님에게서 35년간 강제로 떨어지게 되어서 분노하셨나요?
로버트: 남동생이랑 여동생의 사진을 봤을 때 감정이 가장 격해졌죠. 제 여동생은 저보다 한 살 어려서 저와 세대가 비슷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자랐다면 비슷한 여동생과 비슷한 생활을 했겠죠. 동생들의 생활 광경을 사진으로 보니 사진 안으로 들어가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죠. 대신 어머니가 제가 가지고 온 어렸을 때의 사진을 가족 앨범에 넣어서 가족 앨범을 꾸미셨어요. 그래서 지금 보면 가족 앨범에 제 사진도 끼어 있어서 기쁩니다. 질문으로 돌아가면, 제가 느낀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좌절감이었어요. 과거로 돌아가서 어머니, 아버지가 싸우고 무서워할 때 같이 있고 싶었죠. 부모님이 제 고등학교 입학 때 같이 있었으면 했고, 그분들 곁에 있었으면 했습니다. 시간이라는 벽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제 이모가 해준 말이 있죠. 거기 있었을 때 제 조부모와 삼촌, 이모, 고모들을 만나는 대단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분들을 만날 때 이모가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한일아. 네가 만약에 여기 남아 있었다면, 너희 부모님이 아들 한 명으로 만족해서 여동생과 남동생이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관점이 또 바뀌었죠. 커다란 모순이었어요. 제 한국의 생활과 동생들, 둘 다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여동생과 남동생은 둘 다 대단한 애들이고 전 그 애들을 사랑해요. 그 둘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죠. 그런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로버트: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 어머니와 같이 14일 동안 격리되었어요. 그 격리 기간은 전혀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대단한 경험이었죠.
팟캐스트: 로버트 씨가 한국에 가족이 있으니 따로 격리되지 않고 바로 가족과 만날 수 있었군요?
로버트: 네. NCRC가 홀트와 같이 가정 격리가 가능하도록 도와줬죠. 홀트가 저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도움이 됐던 때였습니다. 홀트아동복지회를 깎아내리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홀트가 보내준 서류 중 유일하게 그 서류가 제가 한국 가족과 진짜 가족이라는 점을 증명해줬죠.
팟캐스트: 홀트가 왜 아무런 정보가 없다고 했는지, 왜 그런 정보 오류를 냈는지, 서류를 잘못 읽었는지 질문하지 않았나요? 어떻게 병원이 로버트 씨를 매매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았나요?
로버트: 우선, 제가 아는 일은 이게 저만 아니라 다른 입양아들에게도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한 10년 전에 고아 판매망을 한국에서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한국 아이들을 국제 입양시켜서 한국 경제가 큰 이득을 봤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겠죠. 제 납치와 매매가 그 이야기에 맞아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상품에서 부당함의 대상으로 자신의 인식을 바꾸는 일은 어렵죠. 현재 저는 제 시작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이야기는 부당함과 잔혹함에서 시작했으니까요. 적어도 제도에 대한 관리가 부족했다고 생각하죠. 어머니는 병원에 여러 번 돌아가서 제가 어디에 묻혔는지 질문했습니다. 병원은 어머니가 서류를 작성했으니 제가 어디에 묻혔는지 알 권리가 없다고 했죠. 제 부모님은 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고 노력했었는지만 알 수 없었어요. 이 일이 일어난 병원은 대구적십자병원이었는데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병원입니다. 인신매매 관련 스캔들인지는 모르지만 스캔들때문에 문을 닫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80년대에 이런 작은 병원들에서 납치와 인신매매가 일어났다고 하더군요. 제 부모님이 그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병원들은 주로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영업했고, 제 부모님은 그때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으니까요. 부모님이 사실을 알아도 병원에 맞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부모님을 상대로 이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서류를 작성하게 만들어서 관련 권리도 빼앗았군요. 홀트는 뭐라고 했나요?
로버트: 홀트에게는 이런 추궁을 하지 않았어요. 홀트에 대해서 너무 화가 나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하죠? 우리 가족의 삶 자체가 뒤집혔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면 멈추게 하고 과거의 부정행위를 밝히는 일이었어요. 과거의 부정행위 고발은 생각해볼 예정입니다. 그 부정행위를 고발할 방법이 있다면 그 길을 확인해보고 싶죠. 하지만 지금은 이 고통을 받아들이고 제 새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 집중하고 싶습니다.
팟캐스트: 남동생과 여동생이 로버트 씨를 형이나 오빠로 부르기 시작했나요?
로버트: 네. 그 둘이 저를 형이나 오빠로 불러준 순간 음악을 들은 기분이었죠. 둘 다 저를 빠르게 받아들여 줬어요. 제 친가족은 아주 따뜻하고 멋진 가족입니다. 아버지는 최소주의적인 맞춤 가구를 만드는 목수시고, 어머니는 레스토랑을 운영하십니다. 제 여동생은 신생기업에서 일하고, 제 남동생은 대구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죠. 제 가족이 이렇게 성공한 모습을 보니 아주 자랑스러웠습니다. 제 어머니와 적은 시간을 같이 보냈는데도 서로 비슷하니 아주 이상하면서도 재밌죠.
팟캐스트: 어머니와의 공통점을 몇 개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로버트: 우리 둘 다 외향적이고, 사교적이면서, 친구를 만들 수 있고, 사업가이죠. 예술적인 재능이 있고, 전화와 키를 놓은 곳을 잊어버리기도 해요. 그래서 집에서 나갈 때마다 우리 핸드폰을 찾으러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핸드폰을 까먹었는지 묻죠. 어머니가 요리하실 때 다섯 가지 요리를 동시에 시작하셔서 모든 요리를 동시에 진행하는데 제가 일하는 방식과 비슷하죠. 물론 저는 시작한 모든 일을 끝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문제가 생깁니다. 물론 아버지와 닮은 점도 많아요. 아버지는 B형이고 어머니는 A형이고 전 AB형이죠. 제 부모님의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전부 물려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제가 어머니를 더 닮았다고 하시죠.
팟캐스트: 가족과 만난 지 1년 정도 지났나요?
로버트: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그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지만, 이 만남이 로버트 씨를 바꾸셨다고 생각하나요? 바꿨다면, 어떤 식으로 로버트 씨의 삶을 바꿨죠?
로버트: 네. 제 삶을 바꿨습니다. 제 정체성을 꽃병으로 묘사한다면, 여전히 깨져 있고 망가져 있지만, 이제 그 꽃병에 아름다운 꽃들이 꽂혀 있죠. 적어도 제가 묘사한다면 그런 느낌이에요. 여전히 내면의 버릇과 정신적인 문제는 존재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문제에 대한 답이 훨씬 빠르고 쉽게 나오고, 제 삶에서 그 문제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제 삶에 있어서 큰 변화를 하나 꼽으라면…. 잘 모르겠지만, 가족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한다는 점이죠. 제 부모님의 건강에 대해서 걱정하고, 제 동생들이 더 좋은 직업을 가지기 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가족에 대한 걱정과 곤란을 봤지만, 지금까지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사람들이 왜 그런 가족에 대해 생각을 하는지 알았지만, 마음속 깊이 이해하지는 못했죠. 가족에 대한 감정과 걱정을 이해하게 되자 상당히 충격적이었어요. 부모님이 나이가 드시면 그분들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가족에 대해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하죠. 모든 일에 최대한 감사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친부모와 이런 관계를 맺고 다시 만날 수 있는 입양아들은 아주 적죠. 그래서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짜증이 나거나 답답한 일도 제가 감사할 수 있는 일이 되죠. 조금만 생각하면 몇 년 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아버지가 세 번째 편지를 열어보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했겠죠.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로버트 씨. 사람들이 로버트 씨와 연락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죠?
로버트: Y_o_o_l_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습니다. 또 hanillee0507@gmail.com 으로 이메일을 보내셔도 되고 페이스북에 Robert Hanil lee 계정이 있으니 페이스북 DM으로 연락을 주시면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