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스트레이커(51세)는 다섯 살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그는 입양 시기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망가진 입양 가정에서의 성장, 자살 시도, 수도사 생활, 한국으로의 귀향과 한국 여성과의 결혼해 가족을 꾸리기까지의 정신적 충격과 문제를 해결하는데 몇십 년을 소모했다. 현재 그는 많은 상처를 치료하는 데 성공했지만, 아직도 치료해야 할 상처가 남아있다.
제임스: 제 이름은 제임스 스트레이커입니다. 현재 미국 애리조나주 글렌데일시에서 살고 있죠. 피닉스 근교의 작은 도시입니다. 현재 51세이며 제가 선호하는 인칭 대명사는 He이죠. 제 입양 서류에 기재되어 있던 제 한국 이름은 박민규입니다.
팟캐스트: 처음부터 시작하죠.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아시죠?
제임스: 현재 저는 큰 전환기를 맞이했고, 꼭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시기에 도달했죠. 저는 그러할 일을 해야 할 힘도 얻고 있고, 성장할 용기도 얻고 있어요. 제가 감명 깊게 본 말이 있는데 “삶은 개인의 용기에 따라 성장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51세가 되니 삶이 다시 성장하는 기분이에요 매일 개인적 인식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 성장하고 변화하죠. 하지만 청소년기가 닥치고 트라우마나 다른 것이 그 성장을 멈추는 일도 있습니다. 그리고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20년 정도 그 성장이 멈춰 있었어요. 13세에서 33세까지 뭘 하는지, 뭘 해야 할지 몰랐고,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했죠. 주머니도 없고 손도 없고 돌과 같이 20년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상황에 놓여 있죠. 이러한 변화의 큰 영향은 33세부터 지금까지 제가 한 일에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저에게는 목소리가 있고 신께서 이 목소리를 주셨다는 사실을 알죠. 매일 제 세계,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를 성장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어렸을 때 알았다면 좋았겠지만, 동시에 문제를 겪어야 성장하는 면도 있죠. 그게 제가 현재 알고 있는 점입니다.
팟캐스트: 많은 입양아가 이러한 여정을 중년에 시작하죠. 왜 그렇게 되는지에 대해서 개인적인 의견이 있나요? 그리고 제임스 씨의 여정도 그런 느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임스: 네 그렇습니다. 중년에 시작된 여정이 맞죠. 요즘 치료사를 만나고 있는데 그분께서 서 말씀하시길 “제임스 씨가 현재 겪고 있는 일은 51세에 상당히 흔한 일입니다.”라고 하더군요.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을 돌아보는 과정이라고 하더군요. 여기에서 오른쪽, 여기에서 왼쪽, 그리고 하지 않은 일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위기인 셈이죠. 하지만 저는 이 위기를 재난이나 긴급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전 위기를 결정의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중년은 자신의 선택과 자신의 미래와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생각할 때라고 생각해요. 이러한 선택들이 내가 원하는 길로 가는 데 도움이 될까? 라는 질문이 있죠.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주 위기를 겪는다고 봅니다. 입양아의 경우에는 더합니다. 입양아가 아닌 경우에는 그래도 삶의 계획과 변화에 어느 정도 계획을 세우고 영향을 끼칠 수 있죠. 하지만 입양아의 경우에는 비유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대부분 다른 사람이 만든 길을 따라가야 하고, 그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제가 다섯 살일 적에, 한국의 고아원에서 미국으로 입양되고 싶으니 물었다면, 아니라고 답했을 겁니다. 하지만 입양아인 이상 그냥 가야 했죠. 자기가 원치 않는다고 해도 남이 그걸 정해줘요. 감정적으로 사회적으로 극본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의 연극을 하게 되는 셈이죠.
제임스: 많은 입양아가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일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만들어진 목소리가 아니라 자기 주도적인 목소리에 대해서 말이죠. 어머니가 뭘 말하면 그 말을 똑같이 하고, 사회가 입양에 대해서 말하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를 입양아들이 중년이 되기 전에…. 적어도 제 나이인 51세가 되기 전에는 자기의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고 봐요. 13세나 14세이어도 좋지만, 더 뒤에도 상관없죠. 적어도 제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지만 입양아의 경우에는 적당히 강해지고, 성공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치료된 뒤에야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고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죠. 세계를 망가트리지 않고 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입양아가 안개에서 벗어나는 느낌이라고 묘사합니다. 아주 많이 들은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하죠.
제임스: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비유지만, 적어도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전부 묘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일어나는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성장을 멈추거나 배움을 멈추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안개를 빠져나오는 일은 단계적인 일이고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죠. 그래서 사람이 안개를 빠져나왔다, 안개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이야기를 하면, 마치 안개를 빠져나오는 것이 하나의 시험처럼 여겨지게 되죠. 어떤 순간에 안개를 빠져나와서 그 증명서를 얻는 것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여기 6월 며칠에 안개를 빠져나왔다는 증명서가 있다는 접근은 사실과는 아주 다르죠. 삶의 어떤 부분이 안개가 끼고 찾기 어려워졌다가 다시 맑아지고는 해요. 그리고 다른 부분이 다시 안개가 끼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안개 속에서 길을 잃게 된다는 비유를 좋아하지 않아요. 정확하지 않은 비유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된다는 느낌이죠. 현재 저는 더 강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요구나 기대에 저 자신을 부응하려고 하지 않죠. 사람들의 기대를 제가 맞춰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치료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안개에서 빠져나와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많죠.
팟캐스트: 무언가 제임스 씨 쪽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들리시나요?
제임스: 노트북 소리인 것 같네요. 자리를 옮길까요?
팟캐스트: 아니 계속 소리가 나서요.
제임스: 노트북 내부 쿨러 소리라서 어쩔 수가 없네요.
팟캐스트: 별수 없죠. 제임스 씨 개인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30대 이후에 일어난 일이….
제임스: 원래의 길로 돌아가려고 했다는 일인가요?
팟캐스트: 아뇨. 세뇌를 해제하는 느낌이었나요? 아니면….
제임스: 약간 뒤로 돌아가 보죠. 제가 트라우마 속에서 길을 잃었던 20년간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그 20년간 트라우마가 삶을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되었죠. 전 다섯 살 때 입양되었어요. 5살과 6살 사이에 입양 과정을 거쳤다고 제 서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 대한민국 출신이고 제 입양 가족은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시에 살고 있었죠. 1975년 9월에 미국에 도착했고 입양 가족과 지내게 되었어요. 제 아버지는 오하이오 주립대를 갓 졸업한 전기 기사이었고 제 어머니는 전업주부셨습니다. 그 시기에 이미 네 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어요. 3명은 제 부모님의 친자식이었고 1명은 저와 같은 입양아였죠. 콜럼버스시 내부에서의 국내 입양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백인이고 아버지가 흑인인 흑백 혼혈이었죠. 그리고 제가 입양된 뒤에도 아이들이 늘어서 9명의 아이가 같은 집에서 생활하게 됐습니다. 5명의 입양아와 4명의 친자식이 같이 지내게 되었죠. 다른 한국계 입양아 둘과 여동생과 남동생이 늘었습니다. 추가된 입양아 모두 홀트를 통해서 입양된 비혈연 입양아였죠. 그래서 제가 가족에 추가됐을 때는 5명이었지만 나중에 3명이 더 입양됐고 부모님이 딸을 하나 낳아서 9명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9명의 아이까지 합해서 11명의 가족이 되었어요.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가 작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려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제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냥 미국인이 되고 싶었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죠.
제임스: 전 제 과거를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트라우마 관련으로 기억을 억누르고 있다고 봐요. 트라우마 적인 기억을 억누르면서 제가 선호하는 기억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전 기억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어요. 제 형제자매들이 할머니가 왔을 때의 크리스마스를 기억하는지 물으면 기억하지 못한다고 답해야 해요. 그래서 자신의 입양되기 전의 삶을 기억하는 입양아들을 보면 항상 놀랍니다. 제 여동생이 가진 기억력에 대해서는 항상 놀라죠. 제 여동생과 아버지는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도 제가 입양되면서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제가 입양된 사실을 알고 있냐고 물었는데, 다인종 간 입양이니 당연히 제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특히 가족이 백인이고 전혀 다른 인종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냥 미국인이 되려고 했던 감정은 기억이 납니다. 사회에 맞아 들어가고 싶었죠. 이 주제에 대해서 글도 작성했는데, 그 연령대에 제가 되고 싶었던 상태를 잘 묘사했다고 봐요.
제임스: 전 콜럼버스시의 가톨릭 학교에 다녔었죠. 그리고 선생님과 같이 어떤 계획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나요. 그 옛날에 천장에 달아서 빛을 쪼여서 영상을 보여주는 프로젝터가 있었습니다. 애들이 전부 한 줄로 선 뒤에 빛을 받았죠. 그리고 선생님이 걸린 검은 종이에 우리의 그림자를 따라 그렸어요. 일종의 미술 놀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그림자 그림을 잘라낸 다음에 잡지들 신문을 잘라내서 우리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그림을 채워 넣게 되었죠.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채워 넣기 위해서 잡지들을 찾다가 미국 국기 배색으로 쓰인 “AMERICAN”이라는 글자를 찾았어요. 그걸 잘라서 제 이미지 정중앙에 놓았죠. 거기에 전 제가 운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대통령이 지미 카터였고 제 이름도 지미였습니다. 그래서 지미라는 이름을 잘라서 붙였죠. 이블 카니블(미국 70년대의 유명한 스턴트맨)의 사진도 붙였습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어요. 70년대의 아이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죠. 그리고 그를 닮고 싶었습니다. 그 사람은 미국인이었고, 용감했고, 온갖 일을 했죠. 그 사람과 닮고 싶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제 아버지는 제가 그냥 미국인이 되려 했다고 기억하시죠. 한국에 관해서 이야기하거나, 한국을 그리워하거나 한국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어요. 아마도 제가 한국을 잊어버렸을 겁니다. 아니면 제가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었고 이곳이 저의 새로운 집이고, 그냥 미국인이 되고 싶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어렸을 때 제가 미국인이 되려고 했다는 점이 아주 신기해요. 보통 아이들이 멕시코인이나 일본인이 되려고 한다 생각하지는 않죠. 하지만 저는 미국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어린 시절은 아름답고 즐거운 시절이었어요. 우리 가족은 행복했죠. 제가 10살쯤 됐을 때 아버지가 직업을 바꾸셨고 애리조나주 피닉스시로 이주했습니다. 청소년이 되게 바로 전인 시점이죠. 그리고 제가 13살이 되어서 청소년이 됐을 때…. 제 형제자매들이 동시에 청소년기에 진입했습니다. 전부 한 살에서 두 살 터울의 형제자매들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현재 두 아이를 가진 부모로서 청소년기에 접어든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죠. 귀여운 아이들이 자라나는 과정을 보는 것은 힘듭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점에서 보려고 해요. 특히 어머니의 관점에서 보려고 하죠. 우리가 자라면서 우리가 바뀌었고, 필요도 바뀌었습니다. 어머니 주변에 붙어 있지 않고 세상을 탐험하려고 했어요. 어머니들에게 있어서 그런 일은 어려울 수 있죠. 특히 어머니의 역할에 비중을 두는 여성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대가족을 두셨군요. 혼혈, 입양아에 친자식까지…. 행복하셨다고 했지만 스스로 자격지심을 가지거나 괴롭혀지거나 그런 일은 있었나요?
제임스: 네 일어났죠.
팟캐스트: 가족들 사이에서도 말인가요?
\
제임스: 네. 슈퍼마켓 같은데 들리는 것도 큰일이었죠. 특히 우리가 나이 먹으면서 더더욱 그랬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 우리가 콜럼버스시에 살고 있었을 때 애들이 저를 “납작한 얼굴”이라고 놀리고는 했습니다. 그리고 그 놀릴 때마다 마음의 상처를 입었죠. 제가 한국인이라서 그런 놀림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런 예도 있었죠. 70년대까지만 해도 부모가 쇼핑할 동안 아이들이 차에서 기다릴 수 있었어요. 형제자매들과 스테이션 왜건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다른 차에서도 애들이 비슷하게 기다렸습니다. 과거에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오렌지 BMW 소형 버스를 타고 다녔어요. 그리고 부모님이 시어스에 쇼핑하러 들어가 있었고 우리는 밖에 주차한 채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두 차 안에 앉은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죠. 그리고 서로에게 욕을 하면서 놀았어요. 애들이 다 그렇듯이 말이죠. 제가 누나를 상당히 심하게 놀렸던 모양인지 누나가 “적어도 나는 레코드판처럼 납작한 얼굴은 아니지!”라고 받아쳤습니다. 그리고 그걸 듣자마자 즐거운 분위기가 순식간에 식었고 누나가 저에게 사과했죠. 지금 되돌아보면 남이나 다른 애들이 납작한 얼굴이라고 놀리면서 외모를 가지고 비난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가족들도 그렇다는 것은 아주 충격적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면 남들은 절 모르니 사실이 아니라고 저 자신에게 말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누나에게 들으니 충격이 심하더군요. 제가 못생겼고 납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물론 누나는 지금까지도 미안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누나는 저에게 항상 좋은 누나였기 때문에 이미 충분히 사과했다고 말해주죠. 하지만 누나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사건의 감정을 누나와 공유할 수 있었던 경험은 좋았어요. 저에게 있어서는 삶을 바꾸는 사건이었지만 누나는 기억하지 못했죠.
팟캐스트: 선생님이 제임스 씨의 그림을 그렸을 때, 그 그림이 신경 쓰이셨나요?
제임스: 네. 그림을 보자 제 얼굴이 다른 애들보다 납작하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리고 지금까지도 제 얼굴이 납작하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감이 느껴져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의 하나는 한국으로의 귀향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아 얼굴이 납작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얼굴이고, 모두와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주 중요해요. 인종적, 유전적 거울과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가 못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팟캐스트: 부모님께서 왜 그렇게 많은 아이를 입양하셨죠?
제임스: 네.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렸을 때도 자주 이야기를 했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이야기한 것과는 분위기가 달랐죠. 그때는 마치 극본과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입양은 아름답다! 동양에서 씨앗을 가지고 오자! 해리 홀트의 이야기. 성령이 날갯짓하게 하자! 그런 이야기였어요. 또 그분들이 부모가 되셨을 때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70년대 중반이었죠. 히피 혁명이 일어난 뒤였고, 대학교가 있는 도시에서 살고 계셨어요. 두 분의 고향인 작은 오하이오주의 마을과는 다른 자유주의적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두 분 다 이상주의적이고 큰 꿈을 품고 계셨어요. 어머니가 특히 더 그러셨죠. 어머니는 가톨릭교도로 자랐고, 큰 가족을 원하셨습니다. 항상 큰 가족을 원했다고 하셨고 왜 그랬는지 몰랐죠. 나중에 알게 됐어요. 하지만 어머니에게 있어서 큰 가족은 성경에 항상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마치 올리브 나뭇가지에 자란 올리브와 같고, 아이들은 축복인데 왜 더 가지려고 하지 않겠나요? 32명이든 48명이든 모든 축복을 다 받는 거죠. 그때는 그랬습니다.
제임스: 최근에 아버지와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머니는 건강 문제가 있으셔서 멀리 나가시지 못해요. 아 물론 COVID-19 이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좋아하는 애플비즈(북미 패밀리 레스토랑 체인)에 가서 맥주 몇 잔을 주문하고 이야기를 시작했죠. 그때 아버지에게 사회 복지쪽으로 진로를 잡을 거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현재는 사회학쪽으로 바꾸기는 했지만요. 그리고 입양에 관해서 이야기하려고 했죠. 그래서 관련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중 하나는 어머니가 왜 큰 가족을 원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어머니가 원하는 일을 하셨거든요. 항상 그랬죠. 어머니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시는 분이 제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이유는 이랬죠. 어머니가 여름마다 미시간주에 있는 삼촌 집을 방문했고, 삼촌이 대가족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그 대가족을 행복과 평화의 이미지와 연관해서 대가족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가족 상황이 정반대였던 것도 한몫했죠. 어머니는 나이가 많은 오빠와 언니가 있어서 어머니가 중학생일 때 이미 오빠와 언니는 대학교로 독립해 나갔습니다. 제 이모는 어머니에게 차가웠어요. 제 외할아버지는 어머니를 학대했습니다. 어머니가 필요로 하던 감정적 지지대가 되어주지 못했죠. 반면에 어머니가 방문한 삼촌은 정반대였어요. 그림으로 그린듯한 완벽한 가족을 가진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어머니가 큰 가족을 원했습니다. 아 이야기를 보면 사람들이 왜 입양을 하고 싶어서 하는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아이를 입양하는 일은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어려운 일이죠.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입양을 한다면 입양아의 경험과 입양 부모의 경험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봅니다. 우선 이 주제는 넘어가죠.
팟캐스트: 대가족이 된 이유가 어머니의 욕구 때문이었군요.
제임스: 네 그렇습니다.
팟캐스트: 최근에 아버지와 이 이야기를 나눴나요?
제임스: 몇 년 전이었죠.
팟캐스트: 대화를 나누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는 결과에 도달하기를 원하셨나요?
제임스: 아버지에게 제가 인식하는 입양이 제가 자라나면서 배운 입양에 대한 인식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싶었습니다. 좀 더 현실적이고 전체적인 관점으로 입양을 보겠다는 의미였죠. 입양은 전부 좋은 과정도 아니고 전부 나쁜 과정도 아닙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진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어머니의 입양에 대한 욕구는 상호의존적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먹고 독립하기 시작하자 육체와 정신 건강상 불안을 겪기 시작하셨어요. 그 문제가 우리 가족을 찢어 놓고, 상황이 나빠졌죠. 아버지와 제가 가족 사이에 일어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야기하고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랐어요. 입양은 이 모든 일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입양은 해결책이자 쌍방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고 알려졌지만, 현실적으로 우리 가족의 경우에게는 쌍방에게 이득이 되는 일은 아니었어요. 카오미 씨도 알겠지만, 입양아들은 집도 있고, 밥도 먹을 수 있고 가족도 있으니 감사해야 한다고 배우죠. 하지만 사회는 입양아들에게 항상 감사하라고 가르치지만, 입양 가족에게 입양아를 키울 수 있으니 감사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입양 가족들이 원하는 일을 입양아들이 제공을 함에도 말이죠. 사회는 입양 가족들이 감사하지 않으면 그들을 비판하지 않아요.
제임스: 입양은 이중 잣대로 가득 하죠. 부조리하고 불합리합니다. 거짓말로 구성되어 있기도 해요. 영적인 단어로 장식된 거짓말로 가득한 과정입니다.
팟캐스트: 아버님의 반응은 어떠셨죠?
제임스: 아버지는 그렇게 공감을 잘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저와는 다르죠. 전 어떤 사람과도 대화하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장점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어떨 때는 약점이기도 하죠. 아버지는 그렇지 않아요. 그래도 아버지가 이해하셨죠. 그리고 너무 많은 아이를 키웠다고 인정도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인정하셨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어요.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항상 말하는 전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진실을 말씀하셨어요.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이유기도 했죠. 진짜 사실을 알기 위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아버지가 반응하셨죠. 그래서 아버지가 저와 똑같은 입양에 대한 관점을 가지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버지가 제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에 대해서 알고, 저도 아버지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에 대해서 알죠. 그 사실을 기반으로 관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어머니 곁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고, 거기에 70대이시기도 하므로 힘이 얼마 없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일은 어머니를 돌보는 일이죠. 그리고 우리 형제자매들은 어른이 된 지금도 그 사실을 알고, 아버지가 도울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압니다.
팟캐스트: 어머니와 똑같은 대화를 나누고 싶나요? 그리고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제임스: 그 대화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두렵네요. 여러 단계에서 말이죠. 인식적으로 가능할지도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네. 어머니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죠.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할 생각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제 어머니를 사랑해요. 아버지도 사랑하고 가족도 사랑하죠. 사랑하기 때문에 제가 진정으로 생각하는 것과 제 감정을 알아주기 바랍니다. 그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꾸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죠. 입양아로서 그분들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많은 입양아는 입양 부모가 죽기 전까지 자유롭다고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저도 그 기분을 이해하지만 동시에 자유를 느낄 방법이 죽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들으면 슬퍼지죠. 망가진 가족에서 자라면서, 물론 제 부모님은 노력하셨지만, 제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절 선택해준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길에서 누군가에게 1불만 달라고 부탁한 뒤, 그 사람이 75센트밖에 없다고 하면서 75센트를 주면, 그 사람에게 1불이 없다고 화를 내지 않고 고맙게 받겠죠. 제가 제 부모님과 가족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야 했어요. 감정적, 영적, 그리고 물리적으로 양육이나 가족 경험에 있어 우리 형제자매 모두가 1달러를 필요로 했지만 75센트밖에 받지 못한 셈이었습니다. 부모님에게 화를 낼 수도 있죠. 왜 25센트를 못 줬나요? 그래서 제가 망가졌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과거에 그런 적도 있어요. 하지만 계속 화난 채로 지낼 수는 없죠. 그러한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가지는 일은 위험하고 자기 자신을 헤칠 뿐입니다. 그러한 기능 장애를 최악의, 충격적 방식으로 겪게 되면 문제가 심하죠. 요즘은 어머니와 직접 만나는 것도 힘듭니다. 어머니를 볼 때마다 감정적으로 힘들고, 여러 가지 충격이 되살아나기 때문이죠. 그래서 지금 제가 가진 문제에서 벗어나려면 더 강해지고,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언젠가는 그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팟캐스트: 제임스 씨, 제임스 씨의 입양된 형제자매들과 친 형제자매들 간의 성장 경험이 다르다고 보시나요?
제임스: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고 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전부 우리의 양육 방식이 완벽하지 않았다는 점에 동의해요. 그리고 우리가 대학을 가거나, 입대하거나 그래서 집에서 독립했을 때, 독립하고 싶어서 독립했다는 점도 모두 동의합니다. 모두 지금까지 그러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죠.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팟캐스트: 여러분이 왜 도망쳤는지 이해합니다. 너무 많은 애들, 방치, 힘들어하는 부모님 등….
제임스: 지금까지도 아주 통제적이죠.
팟캐스트: 어머니가 매우 통제적인 분이었단 말이었군요.
제임스: 네 어머니는 매우 통제적인 분이셨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 말에 고분고분하게 따르죠. 지금은 어느 정도 균형이 맞지만, 우리가 자랄 때는 그런 균형이 없었어요. 물론 행동을 통한 통제는 아니었습니다. 그거 입지 말아라, 저거 하지 말라는 식은 아니었어요. 감정을 통해서 사람을 통제하셨죠. 항상 모든 것을 어머니의 방식대로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어머니의 방식은 잘못됐었죠. 하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방식대로 해야 했어요. 바보 같은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도망치게 했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가족 의식을 반복하면서 연극을 하는 일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팟캐스트: 한국은 언제 처음으로 방문하셨죠?
제임스: 첫 귀국이요? 제가 30대 중반일 때였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지내고 있었죠. 그리고 막 제가 살기로 마음먹었던 수도원에서 나온 직후였어요. 30대 초반에 최악의 상황에 도달했죠. 자살 시도도 했습니다. 더 고통을 받고 싶지 않았고 너무나도 많은 문제와 고통이 있었어요. 긴 이야기를 짧게 하자면, 하나님에게 도움을 찾았고,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배운 모든 것이 가짜이고, 가짜라 배운 것이 진짜라고 배워야 했어요. 하나님이 저를 버린 것이 아니라 제가 하나님을 버렸던 거였죠. 그게 저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제가 안다고 생각한 것이 진실이 아니었어요. 세상도 제가 생각했던 것이 아니고, 하나님도 제가 생각했던 분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구축하고, 신앙을 다시 찾을 때 크게 도와줬던 분이 베네딕도회 수도사이셨죠. 캘리포니아 소노라시에 스카이팜이라는 은둔처를 건설하셔서 그곳에서 거주하셨습니다. 스카이팜은 아직도 소노라에 있죠. 지금은 사망하셨고 신탁이 은둔처를 인수했습니다. 수도사들이 그곳에 살면서 은둔처를 관리하고 있어요. 그분과 만난 것이 1997년 부활절이었습니다. 그곳이 아니라 좀 더 북쪽에 있는 이스턴 크리스천 수도원으로 그분과 함께 갔어요. 거기에서 일주일간 그분과 함께 지냈죠. 계속 기도하면서 수도사들과 함께 성경 공부를 진행했습니다. 피닉스로 이사하기 전, 어렸을 때 이후로 최초로 느낀 평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수도승의 삶이 저를 부르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수도원에서 몇 년 동안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마음의 치유를 진행했어요. 바닥을 닦고 창문을 닦고, 기도하면서 자연과 함께 살고, 나무도 자르고…. 수도원 특유의 조용하고 기도하는 삶이었죠. 저에게는 치료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야 제가 무엇으로부터 치료받고 있는지 알게 되었어요. 입양과 관련된 경험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족을 잃은 경험, 입양 가족에서의 트라우마 등이었죠.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수도원에는 인터넷 연결이 있었어요. 1990년대 후반이었는데도 말이죠. 수도원 컴퓨터에 넷스케이프가 있었습니다. 넷스케이프를 기억하시나요? 그리고 그걸 사용해서 한국 입양과 관련 정보 검색을 진행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그 검색을 통해서 수많은 정보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찾은 정보는 뉴욕 기반 입양아 단체였던 Also Known As, AKA였어요. 여러 가지 대단한 일을 하고 있었고 제 관점에서 제가 살고 싶었던 삶을 사는 입양아들의 단체였죠.
팟캐스트: 건강한 입양아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제임스: 건강하고 행복해 보였어요. 평범한 사람들처럼 보였죠. 그리고 저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행복하거나 건강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망가졌다고 생각하셨군요
제임스: 네. 망가지고 부서져 졌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여기 제가 생각할 수도 없는 삶을 사는 입양아들이 있었죠. 그때는 하나님께서 제가 수도원에서 치료되고 은둔하기를 원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주기 원하는 것을 받으시죠. 하나님께서 의사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이것을 포기하기 원한다,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저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는 것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만약에 여러분이 의사가 되어서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에게 바치면 그분은 받아들이시겠죠. 우리가 어떤 것을 버리고 하나님에게 그것을 바치고 싶다면 하나님은 받으실 겁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어요.
팟캐스트: 청취자 중 일부는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제임스: 알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그러니까,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뜻인가요?
제임스: 네. 좀 더 비종교적으로 이야기를 하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전 항상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거의 유일하게 제가 기쁨을 찾은 일이 음악 감상이었죠. 제가 젊었을 때 조이 디비전이라는 밴드를 들었어요. 이 어둡고 강한 느낌이 드는 음악이었죠. 나중에는 U2도 들었어요. 이 둘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두 밴드이고, 어둠과 빛의 테마가 있다고 봅니다. 입양아로서 제가 가진 감정을 소화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어요. 하지만 이 음악들을 통해서 빛과 어둠을 찾았고 제 감정을 소화할 방법을 찾았죠. 그래서 기타를 사서 배웠습니다. 하지만 제가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음악 관련 물건을 전부 처리했거든요. 기타는 오만함의 상징이었고 음악도 오만함의 일부였기 때문에 제가 거부해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전 음악에 대해서 항상 갈등하고 있었어요. 음악은 영적이고 아름답지만 오만한 면도 존재하죠. 그래서 저는 음악을 전부 없애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제대로 음악을 볼 수 있었어요. 수도원 근처의 숲에서 기도하던 때가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우주에 음악을 버리고 순종하겠다고 기도했죠. 그리고 수도원으로 돌아왔어요. 식사하기 위해서 식당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더군요. 전에는 보지 못한 햇빛을 받으면서 놓여 있는 기타가 보였죠. 제가 몇 달 동안이나 수도원에 있었는데 보지 못한 기타였습니다. 제가 음악을 거부했지만, 우주가 기타를 연주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 작은 사건이 우주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에 대해서 알려주었죠. 하나님을 우리는 보통 가능성의 부재로 인식합니다. 저것을 할 수 없고, 이곳에 갈 수 없다는 식으로 인식을 해요. 하지만 전 우주와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기가 원하는 일을 선량한 의지로 하라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광고-
제임스: 수도원에서 살면서 무언가를 놓아야 한다고 생각해도, 사실 그걸 놓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저는 제가 가족을 꾸리고, 아버지가 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꿈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전 사실 수도사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때는 제가 수도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기도하고 수도원에서 지내면서 생각이 바뀌었죠. 하나님이 제가 수도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우주가 제가 되려고 일을 받아들여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제가 수도원에 있든, 가족을 만들던 하나님을 잘 받아들여 줄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수도원에 있으면서 계속 독서를 했습니다. 수도원에는 큰 도서관이 있었고, 수많은 문학, 시, 신학, 철학과 수많은 지식의 보고였죠. 그리고 T.S. 엘리엇의 시를 계속 읽은 기억이 납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시인 중 한 분이에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성당의 살인>을 얽었죠. 그 시에서는 가장 큰 배신은 옳은 일을 옳지 않은 이유로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보니 제가 수도원에서 하는 일이 생각이 나더군요. 제가 옳은 일을 하는 것은 맞았고, 하나님에게 제 삶을 바치고 싶었지만, 옳지 않은 이유로 그 생활을 선택했습니다.
팟캐스트: 수도원의 생활 덕분에 자살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제임스: 큰 도움을 주긴 했지만 역시 주변 사람들이 가장 큰 도움이 됐죠. 샌프란시스코의 버스 정류장에 홀로 남아있던 저를 데리러 와준 던스턴 신부님, 수도원의 수도사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이 도움을 주셨고, 제가 그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극복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은 일을 좋지 않은 이유로 하려고 하는 실수를 하려고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수도원을 떠났죠.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확실히 밝혀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좋은 일을 좋지 않은 이유로 할 수 있다는 자각이 제가 가장 큰 비극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었어요. 가장 큰 비극은 가장 나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비극은 두 번째로 좋은 선택지를 택하는 일이죠. 저에게 있어서 그것은 가장 최악의 선택을 하는 것보다 나쁘다고 봐요. 왜냐하면, 하나만 바꾸면 최고의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의미인데, 그것을 못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수도사가 되려고 했던 일은 두 번째로 좋은 선택을 하려는 일이었고, 두 번째로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삶의 방식은 아니죠? 그래서 수도원을 떠나게 되었어요. 물론 근처 지역에서 일하면서 관련 사회와의 연결망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에 가게 되었죠.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던 제 누나가 한국 혼혈인 동료와 같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누나가 저에 관해서 이야기했고, 그렇게 해서 저와 그분이 만났죠. 그 뒤로 그분 집에 초대되어 한국인인 어머님과 만나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한국 음식과 한국 문화를 느꼈습니다. 아주 즐겁고 대단한 경험이었어요. 그리고 그분, 정 씨가 한국에 돌아갈 것이라고 하셨고 같이 가지 않겠냐고 권유하셨죠. 전 그때까지 한국에 돌아간 적이 없었습니다.
팟캐스트: 언급하시는 분이 동료분인가요, 동료분의 어머니이신가요?
제임스: 네 어머님이셨죠. 한국에 있는 가족을 만나러 갈 텐데 동행하지 않겠냐고 권유하셨습니다. 아주 기쁘게 동의했어요. 물론 그분은 아주 한국인이셨어요. 거기 있을 때 사워크림을 섞으려고 하자, 하지 말라고 호통치셨죠.
팟캐스트: “아줌마”이셨네요.
제임스: 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아줌마”이셨죠. 하지만 한국에 간다는 것은 그러한 통제를 받아도 해야 할 경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그분께서 저를 돕고 여행안내자 노릇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엄청 좋은 경험이었죠. 구로구 고척동에 사는 그분의 가족들과 같이 지내게 됐어요. 이게 인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제가 언급한 이분 “정 씨”가 제 아내의 고모가 되십니다. 그러니 제 누나의 동료분은 제 아내의 사촌이 되는 셈이죠.
팟캐스트: 결혼해서 가족이 되신 셈이군요.
제임스: 네. 결혼해서 그분들과 가족이 된 셈이죠. 지금 되돌아보면 꽤 재밌는 일이에요. 제가 한국에 방문해서 제 아내를 만났죠. 가족과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제가 같이 여행한 정의 조카였죠. 그리고 아내한테는 언니가 한 분 있었는데, 바로 근처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까이 살고 있었고, 지금도 그래요. 그렇게 같이 즐겁게 지냈죠. 그리고 제 아내와 저도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알 수 있죠. 아 정 고모님이 우리를 맺어주려고 그랬구나.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 아줌마들이 하기 좋아하는 일이니 확신이 갑니다.
팟캐스트: 그래서 의도적으로 중매쟁이 노릇을 하셨다고 보신다고요.
제임스: 네 그렇습니다. 우리 부부에게 있어서는 행운이었지요. 그래서 가끔 농담으로, 신의 뜻으로 저와 제 아내가 만나서 결혼했지만 사실 정 고모의 뜻이 더 크지 않았을까? 이라고 이야기하고는 하죠.
팟캐스트: 우선 약간 되돌아가 보죠. 다른 입양아들과 한국의 첫 방문이 달랐네요. 한국 가족과 같이 지냈으니까요
제임스: 단순 여행이 아니었죠.
팟캐스트: 네. 가족과 함께 지냈으니까요. 그래서 한국에 도착했을 때 어떤 느낌이셨죠?
제임스: 여름이었죠. 출국 전에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 제가 찾지 못한 저 자신을 찾는 나라를 방문하게 되는 것을 기다렸어요. 한국에 도착하니 공기, 냄새, 사람들이 전부 달랐죠. 한국 사람들과 한국 얼굴들로 둘러싸여 있고, 한국 동네를 걸어 다니는 행동 전부가 대단하고 힘든 경험이었어요. 거기에 거의 24시간 넘게 여행을 했으니 더더욱 그랬죠. 비행기 탑승, 내려서 움직이고 그런 것이 전부 힘들었습니다. 몸도 힘들었고 정신도 힘들었죠. 물론 같이 지낸 사람들은 좋았어요. 그게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 제가 같이 간 이모분이 장녀 이셨어요. 그래서 제가 더 편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죠. 다른 사람들이 제가 방문하는데 거부감을 표시하거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누나와 언니가 데리고 온 사람인데 거부할 수 없죠. 지금 돌아보면 운이 좋았습니다. 시장과 길을 걸어 다니면서 버스를 타고 매일 평범한 일상을 누렸어요. 고향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네. 아주 깊은 내부적이고 외부적인 고향의 느낌이 들었어요. 특히 육체적으로 고향이라는 느낌이 중요했어요. 그러한 감정은 미국에서는 한국계 입양아로서는 느끼기 어렵죠. 저에게 깊고 대단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때부터 그분들은 저를 가족의 일부로 받아들여 주셨죠. 그리고 제가 결혼한 뒤에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리고 저희 부부는 한국에서 결혼했죠.
제임스: 그러니 설명을 하자면 제 아내는 이미 미국에서 거주 경험이 있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고모와 같이 지내면서 미국에서 대학교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향수병에 걸려서 한국으로 돌아온 상태였죠. 그래서 영주권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미국에서 영주권을 취소했고,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미국 시민에, 캘리포니아에서 아무런 연고도 없이 사는 싱글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으로 이주하게 되었죠. 아내와 교제하고 한국에서 살아보려고 말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3년간 살게 되었죠. 그리고 한국에서 결혼했습니다. 한국에서 제 아들이 태어났어요. 확실히 보통 입양아들이 관광객으로 겪는 한국 경험이 아니죠. 새로운 가족에 받아들여졌으니까요. 제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한국 부모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제 친부모님은 아니지만, 엄연히 제 부모입니다. 한국 부모인 셈이죠. 제 아이들에게는 한국 이름과 영어 이름을 둘 다 주었습니다. 영어 이름을 보통 쓰는 이름으로 주고 한국 이름을 중간 이름으로 주었죠. 그래서 한국에 갈 때마다 제 한국 가족들은 제 아이들을 한국 이름으로 부릅니다. 집에서는 영어를 섞어 쓰긴 하지만 제15살 딸은 자기 오빠를 여전히 “오빠”라고 하죠. 자라나면서 버릇이 된 겁니다. 그래서 한국 가족이 있던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고, 아주 대단한 경험이었어요.
팟캐스트: 제임스 씨, 언제부터 아내분을 사랑하신다고 느꼈죠?
제임스: 처음에는 그냥 평범한 친구 수준이었습니다. 동갑이라 이것저것 일을 같이하고 다녔죠. 같이 돌아다녔습니다. 그 왜 나이 많은 분들이 힘들어서 못 다니겠다고 하지만 사실 젊은 사람들이 같이 돌아다니길 원해서 하는 말이 있지요? 저도 요즘은 가끔 그러죠. 젊은 친구들끼리 서로 우정을 쌓기를 원하니까요. 그리고 정 고모가 하신 일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저기 멋진 곳을 돌아다녔어요. 인사동도 가고, 한강도 갔고, 같이 한국을 경험했습니다. 버스도 같이 타고, 지하철도 같이 타고 다녔죠. 뭐 당연히 서로 잘 맞았어요. 그리고 제가 떠날 때가 되자, 제가 아내한테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아내도 저에게 마음이 있었고요. 서로 만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가깝게 느껴지니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캘리포니아로 돌아갈 때가 되어서 돌아갔어요. 하지만 서로 연락을 계속 주고받았죠. 제가 떠나기 전에 이미 서로 연애 감정이 있었고 그것이 우리를 혼란하게 했습니다. 서로 전부 30대 초반이었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감정적 문제와 여러 가지 혼란 때문에 30대 초반이 될 때까지 제대로 된 연애도 못 했거든요. 제가 못생겼다고 생각했고 못 할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짝이라 생각하고 서로의 감정을 탐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처음부터 한국 여성과 결혼하고 한국 여성과 교제를 가지고 싶었어요.
팟캐스트: 언제부터 그런 마음을 가지셨죠?
제임스: 수도원에서 더 지내고 싶지 않고 가족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할 때부터 한국 여성과 만나고 싶었죠. 그래서 그때부터 계획을 세웠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런 계획을 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입양되었을 때 저에게서 무언가를 빼앗긴 느낌이었어요. 물건이 아니라 여러 기회를 빼앗긴 기분이었죠. 한국에서 살아갈 기회를 빼앗기고, 한국 친구들을 사귈 기회, 한국어를 배울 기회, 한국 여자애들과 사귈 기회, 한국 동료들과 회식을 할 기회 등 많은 것이 저에게 빼앗긴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들을 다시 찾고 싶었어요. 제가 한국에 있었다면 가난하고 고아였다고 해도 가족을 가질 수 있었다고 확신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해서 확신이 있어서, 삼성의 후계자와 결혼하거나 그러지는 않겠지만 좋은 아내를 맞아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입양되면서 여러 가지의 거래가 있었다고 생각하셨던 거네요.
제임스: 네.
팟캐스트: 한국인과 결혼하면 자기 자신의 정체성 구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셨나요?
제임스: 네 그것과 관련해서 다양한 이야기가 있죠. 재밌네요. 저번주에 우리가 문자로 연락하면서 제가 왜 한국 여성과 결혼하고 싶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요? 저에게 빼앗긴 기회를 다시 찾고 싶은 욕구가 있었습니다. 삶을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구성하고 싶었죠. 그리고 카오미 씨(팟캐스트 진행자)가 거래에 관해서 이야기하셨을 때, 거래된 것 중 가장 큰 것은 한 버전의 저와 다른 버전의 저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여성과 결혼하면 이 두 가지 버전의 저를 하나로 합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더 깊게 생각해보니 미국에서 자란 아시아계 남성의 이미지도 있다고 보죠. 제가 어렸을 때 저는 저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했어요. 전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미남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저를 잘 생겼다고 평가해준 적도 없지요. 그래서 절 멋있게 생각해줄 사람과 연애를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스스로 아주 괜찮게 생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죠. 그래서 미국의 기준이 아니라 한국 미의 기준으로 절 평가해 줄 한국 여성과 결혼하고 싶었어요. 그러한 평온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 여성은 제가 원하는 관점인 제가 입양되지 않았다면 제가 봤을 방식으로 저를 봐줄 것이니까요.
제임스: 카오미 씨도 알고 있지만, 저는 넷플릭스를 구독하고 있어요. 그리고 치어스(미국 시트콤)가 넷플릭스에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보기 시작했죠. 하지만 보니 우울해져서 끄고 뭐가 일어났는지 생각했습니다. 제가 아시아계로서 미국에서 느꼈던 투명함을 다시 느꼈어요. 치어스는 아시아계가 없죠. 만약에 있다고 해도 엑스트라이거나 더 나쁘면 농담거리로 나왔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미국에서 투명한, 존재감 없는 사람이었을 때의 기억을 나게 했어요. 그 쇼를 틀기만 해도 쓸모없음, 숨기, 그리고 투명함을 느끼게 됐죠. 단순히 우리 스스로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느낄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입양되지 않았다면 될 수 있었던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물론 지금 보면 웃기고, 왜 그걸 원했는지도 알 수 없고요. 과거에 될 수 있었던 사람이 되면, 현재의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겠죠.
팟캐스트: 역사를 바꾸고 싶어서 하셨군요.
제임스: 네. 그게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습니다. 입양제도에게 “나만의 계획이 있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죠.
팟캐스트: 그리고 한국 문화를 나에게서 뺏어갈 수 없다고 외치고 싶었군요.
제임스: 네 그렇습니다. 입양이 저를 바다 건너 나라로 옮겼고 이러한 일을 하게 만들었지만, 한국에서 자라난 사람이 되겠다고 선언했죠.
팟캐스트: 네 남성성을 빼앗기고, 인정받지 못한 채로 자라났다고 생각하셨다고 했죠. 한국에서 30대 초반 남성으로서 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고 보시나요?
제임스: 네. 사람들이 절 보고 잘 생겼다고 하더군요. 미국에서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죠. 물론 예의상으로 몇 번 듣기는 했죠. 할머니들이 주로 칭찬용으로 많이 쓰셨지만…. 한국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절 보고 잘 생겼다고 했습니다. 음.
팟캐스트: 아주 기분이 좋았겠네요.
제임스: 아주 좋았죠. 전 177cm 정도 되는 키라 한국에서는 키도 크고 잘생긴 사람 취급이었죠. 거기에 사람들이 저를 보고 똑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팟캐스트: 영어도 하시고요.
제임스: 네. 영어도 잘한다고 칭찬받아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성들만이 아니라 아이들도 제가 재밌고 좋은 선생님이라고 생각했죠. 한국에서 살 때는 영어를 가르쳤거든요. 아주 좋은 경험이었죠. 물론 좋은 경험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한국의 면이 있지만 동시에 왜 이런 거지? 이라고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면도 있죠. 하지만 그 나쁜 점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무언가를 사랑해야 한다면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사랑할 때와 똑같죠. 물론 그 말은 변화를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미국에서 변화를 추구하지 않았다면 미국의 상태가 어떨까요? 미국에서도 계속 변화가 일어나고 있죠. 그리고 한국에서 살면서, 경험하고, 평범한 삶을 사는 경험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 때마다 돌아가려고 하죠.
팟캐스트: 한국계 입양아 남성들에게는 한국인들이나 한국계 미국인과 맺어지려는 욕구가 있죠?
제임스: 잘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제가 모두를 대표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한국계 입양아 사회에 있으면 누가 누구와 맺어지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냥 사회의 일부로서 알게 되는 지식이죠. 그리고 이것을 보면 한국계 입양아 여성들은 비한국계와 많이 맺어지는데, 한국계 입양아 남성들의 경우 아시아계나 한국계와 맺어지는 경우가 많더군요. 물론 제 주변의 일이니 전부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가 본 주변 상황은 그랬죠. 왜 그러는지 이해해보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프로이트적으로 생각해 봤죠. 아니 물론 낡은 이론이기는 하지만 왜 오랫동안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계 입양아 여성들에게 있어서 보통 아버지가 한국계가 아니죠. 안전한 느낌이 들고, 보호해주고, 지탱해주고, 사랑해주는 상대가 말입니다. 한국계 입양아 여성이 그런 것을 찾지 않을 이유가 없죠. 그것이 부성의 기본이에요. 남편, 그리고 반려의 이미지 그 자체입니다. 한국계 입양아 여성의 경우에는 그러한 경험을 한국계 아버지에서 받은 적이 없어요. 오히려 정반대로, 얼굴이 없고 알지도 못하는 믿을 수 없는 상대입니다. 반면에 한국계 입양아 이성애자 남성은 어머니에 대한 이미지가 좀 다르죠. 물론 제가 모두를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를 다시 하고 싶어요. 저의 경우에는 어머니를 한국 어머니에게서 찾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입양 어머니였죠. 하지만 입양 가족이 붕괴했을 때 어머니와의 연결점도 붕괴한 것 같아요. 그래서 한국 입양아 남자들에게는 아시아계 여성, 그리고 한국계 여성에게서 어머니의 느낌을 찾고, 그래서 아내로 맞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전부 매우 프로이트적이죠.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느낌이 있어요. 정확히는 설명할 수 없지만 말이죠.
팟캐스트: 성별의 문제도 확실히 존재하겠죠. 거기에 한국 사회는 매우 가부장적이고 특정 성 역할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은 가정을 관리하고 돌보는 모습이죠. 그리고 입양아 여성들은 그러한 문화적 이해도가 없으니 대응성이 떨어질 수가 있겠네요.
제임스: 알고 있는 것을 기반으로 일을 하기 마련이죠.
팟캐스트: 그리고 한국 남성들은 아무래도 자신들이 자란 것을 기반으로 여성 파트너들에게 역할을 요구하고 입양아 여성들은 그걸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제임스: 그렇지요.
팟캐스트: 입양아 남성들이 한국계 여성들과 맺어지면 반대로 한국계 여성들이 그러한 가정을 입양아 남성들에게 제공해줄 수 있죠.
제임스: 성별 지정 역할과 사회적으로 파트너에게서 찾는 덕목도 있죠. 당연합니다. 사회학 수업을 들을 때 교재를 읽으면서 배우자를 선택하는 방법에 대해서 읽었어요. 가장 개인적인 일이니 가장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많은 사람이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화, 관습, 도덕 등 다양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 이상이죠. 아주 사회적인 활동입니다. 한국어를 배우는 일에 관련해서는 확실히 한국어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한국으로 처음 갔을 때 미래의 아내와 같이 간 곳은 서점이었습니다. 교보문고와 종로 문고에 같이 갔죠. 그리고 한국어 교육 교재를 잔뜩 구매했어요. 물론 초보였지만, 여섯 단계의 교재를 한꺼번에 구매했습니다. 이번이 첫 방문이었고, 다시 못 올 가능성도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다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많은 분이 제가 한국어를 배울 수 있었던 이유가 제 아내의 모국어가 한국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렇지 않아요. 전 한국어를 독학했고, 인터넷을 통해서 배웠죠. 그리고 여러 단어를 담은 상자들을 놓고 한국어와 영어 단어들을 서로 맞춰 보기도 했습니다. 여러 문법을 담은 공책들도 잔뜩 있었습니다. 왜는 이렇게 말하고, 단어 다음에는 이것을 말하고 등의 정보를 담은 공책들이었죠. 그리고 이것들을 사용해서 계속 공부를 했습니다. 웃긴 이야기지만 보통 이런 이야기에서는 제 아내가 저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전개가 되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그런 전개가 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둘이서 대화가 안 되면 영어를 통해서 대화를 풀어내는 경우가 많았죠. 그래서 제가 가끔 아내한테 이건 무엇이고 저건 무엇이냐는 수준의 작은 질문은 했지만, 한국어 대부분은 독학했습니다.
팟캐스트: 그럼 두 분의 소통은 영어로 주로 이루어지신 거군요?
제임스: 네. 아내는 영어를 잘합니다. 한국에서 영어 선생이었거든요.
팟캐스트: 그래서 제임스 씨의 한국어는 유창한가요?
제임스: 유창하는 지는 않아요. 제 수준은 평범한 수준이죠. 한국어 듣기와 읽기가 가장 쉽습니다. 모든 정보가 제공되니까요. 말하기가 그다음으로 어렵지요. 그리고 쓰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죠. 듣기와 말하기는 그럭저럭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정확히 발음하지 않으면 소통이 어려워집니다. 너무 빨리 이야기하시면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제가 존댓말과 낮춤말을 잘 몰라서 관련 소통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죠. 예를 들면 반말은 가장 낮은 말로 친구들과 소통할 때 사용하지만, 가장 높은 존댓말은 하나님, 대통령, 왕에게 쓰는 말입니다. 그러니 저는 말할 때 이러한 높임말의 차이점을 모르니 조심해야 하죠.
팟캐스트: 그리고 한국계 가족이 잔뜩 있으시니 더 조심해야겠네요.
제임스: 다행히도 가족이라면, 오히려 반말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존댓말을 쓰려고 하죠. 최대한 말할 때 요를 많이 붙이려고 해요.
팟캐스트: 언어가 언급되었으니 궁금한 점이 있는데, 자식들이 이중언어 사용자인가요?
제임스: 아뇨. 이중언어 사용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와 제 아내 둘 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죠. 하지만 저희는 영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가르치면 둘 다 제대로 배우지 못할 줄 알았죠. 하지만 지금은 두 개 언어를 배우면 둘 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거짓이고 설화라는 사실을 압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걸 알았다면 다른 방식으로 교육을 진행했겠죠. 하지만 지금 아이들의 언어는 영어입니다. 물론 한국어 몇 개를 알고, 제 아들 같은 경우에는 고등학교 때 일본어를 전공했죠. 한국에 가면 물론 빨리 배우긴 하지만 쓰지 않으면 다시 잊어버려요. 그러니 한국에서 돌아오면 다시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이를 좀 더 먹고 나면 한국어를 좀 더 배울 겁니다. 그리고 적어도 저보다는 더 기회가 많겠죠. 한국에 가족들이 있고, 제가 있고 아내가 있으니까요. 적어도 제가 기대하는 바는 그렇습니다. 제가 지금 저한테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지 물으면 아이들은 아니라고 하겠죠. 하지만 20대가 넘어가면 달라질 겁니다.
팟캐스트: 자식들 나이가 어떻게 되죠?
제임스: 17살과 15살입니다.
팟캐스트: 한국 가족의 일부가 되는 것의 치료적 측면에 관해서 이야기하셨는데, 제임스 씨가 직접 자식을 가진 것도 그러한 영향을 끼쳤나요?
제임스: 네. 다른 입양아들도 자식을 가지는 이야기를 했는데, 확실히 피가 이어진 가족이 생긴다는 사실 자체가 무게감이 다르죠.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피로 이어진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저의 경우에는 제 가족생활, 제 아내와 제 가족과의 관계가 절 존재하게 해줘요. 지금 카오미 씨와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전부 가족들 덕분이죠. 같이 경험하고, 자라나고, 공유한 경험 덕분입니다. 모두 같이 했다는 점이 제가 안전하게 치료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죠. 그 아이들이 태어난 때를 기억해요. 아내가 임신하고 있을 때도 기억하죠. 모든 감정도 기억합니다. 그리고 우리 집은 두 아이가 있어요. 한국으로 치면 완벽한 가족인 셈이죠. 첫 아이가 남자애인가요? 네. 완벽한 가족이네요! 이라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저는 모르겠네요. 어떤 가족 형태가 되었던 저에게는 완벽했을 겁니다. 물론 항상 편하지는 않았지만, 부모와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하고 공을 들여야 합니다. 남편이자 아버지의 역할은 항상 희생이 필요하죠. 제가 원한다고 생각했던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을 포기하면, 수많은 다른 일들과 가능성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자신만의 가족 품에서 치유를 찾고 가족을 키우고 돌보는 일은 아주 좋았습니다.
제임스: 입양아로서 아이들을 좀 더 다르게 키우려고 노력했어요. 아이들에게 제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죠. 그래서 `아이들은 제가 가장 좋을 때와 나쁠 때를 봅니다. 아이들에게서 무언가를 숨기려고 하지 않아요. 제가 실수하면 실수했다는 것을 인정하죠. 그리고 그것이 삶이며 우리가 이것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줘요. 그 애들에게 제가 배우는데 너무나도 오래 걸린 일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물론 저도 그 애들이 알아서 배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죠. 아이를 키우는 경험은 좋은 선택이자 길이었습니다. 모든 나잇대의 아이들은 각자 천재성이 있죠. 그리고 지금 아이들은 청소년입니다. 항상 행복하고 즐겁던 아동 시절은 이제 지났어요. 하지만 그것을 대신할 것들이 아이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고 그것도 대단합니다. 그것도 같이 확인하고 공유할 수 있어요. 정말 대단하죠.
팟캐스트: 아이들에게 입양아의 트라우마를 물려줄 수 있다는 걱정이 있나요?
제임스: 네 있었죠. 그리고 아직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들의 육체에 있고, 정신에 있고 우리를 강하게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트라우마가 세대를 통해 전해진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이러한 트라우마가 저를 좀 더 세상에 대한 관점을 넓혀 주었고,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는 다르게 세상을 보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전부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죠. 입양된다는 것 자체가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상태이자, 분류이자 사건이면서 동시에 관점이죠. 그리고 그러한 관점을 소중하게 여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실 지금까지도 누구에게도 입양되는 경험을 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지금 현재 저는 51세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다른 사람이 입양 경험을 겪게 하고 싶은지에 대한 확신이 없죠. 그래도 저에게 일어난 방식과 제가 성장한 방식에는, 그 고통에서 얻은 무언가 있다고 봅니다. 그 지속하는 어둠과 빛 사이에서 발견한 관점이 있고, 충분히 그 가치가 있다고 봐요.
제임스: 저는 자신의 불완전함과 망가짐을 인정하고 가면을 항상 쓰지 않는 사람들과 공감합니다. 이들은 입양아들을 만나고 교류한 경험에 기초하면, 제가 만난 가장 진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진실성은 우리의 시초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항상 중간에 있는 정체성이죠. 특히 다인종, 국가 간 입양아의 경우가 더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제가 한국에 가서 한국인 행세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진짜 한국인이 될 수는 없고, 그 사실을 이해합니다. 그것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지요. 전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없습니다. 항상 중간에 있어요. 물론 이것을 다양한 관점으로 볼 수 있죠. 실제로 제가 살면서 이 관점을 다양한 측면에서 보아왔습니다. 그리고 제 나이가 되자, 이 중간성이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입양아들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관점은 아주 귀중해요. 높은 가치와 통찰력이 있죠. 그래서 제가 아이들에게 트라우마를 물려주는 것에 대해서 걱정을 하고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미 트라우마를 물려줬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네. 그렇죠. 아버지가 무언가를 읽거나 피아노를 연주할 때 우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트라우마를 물려주는 셈입니다. 제가 그 애들에게 화를 낸다면 그것도 트라우마를 물려주는 셈이죠. 그래서 부모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거기에서 끝나지 않죠. 그것만 물려주면 그 애들에게 상처만 물려줍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에게 좋은 것도 물려주려고 노력해요. 그렇게 우리가 이걸 넘어설 것이라고 믿죠.
제임스: 결국 개인적인 문제와 전체적인 문제 간에 연결이 존재하죠. 입양아가 유리한 점 중 하나가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문제의 연결이 입양 문제 하나에 압축되어 존재하니까요. 그래서 수 세기 동안 창작자들을 매혹해 왔습니다. 신화와 문학을 보면 수많은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고아와 입양아들입니다. 슈퍼맨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팟캐스트: 배트맨도 있지요.
제임스: 배트맨도 고아죠. 루크 스카이워커도 있고, 정글북의 모글리, 타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죠. 단순 문학만 아니라 설화와 신화에도 많지요. 그래서 입양아 사회를 가지고 입양아들의 진실한 관계, 경험, 믿음, 감정과 태도를 공유하면 개인적인 문제에서 전체적인 문제로 이야기가 확장되고 수많은 사람이 우리의 이야기에서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제임스 씨. 사람들이 제임스 씨를 구독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제임스: 인스타그램 @strakerjames 개인 계정이 있습니다. 페이스북에서는 단순히 James Straker입니다. 인스타그램을 중점적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인스타그램에서 사람들이 덜 싸우는 것 같거든요. 인스타그램에 입양아 전문 계정도 있습니다. @the_ex_adoptee 계정입니다.
팟캐스트: Ex adoptee 계정은 뭐 하는 계정이죠? 왜 그런 이름인가요?
제임스: 사회학을 배우고 있다가 계급에 대한 것을 배웠죠. 그리고 그러한 계급이 삶에 대해서 바뀐다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아내, 관리자와 같은 계급이 평생 사람을 따라오죠. 그런데 그렇다면 전 아내, 전 사장이라는 계급도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전 입양아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입양됐냐고 물어보면, 입양아였지만 이제는 전 입양아라고 답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러한 사회학적, 입양아적 경험, 입양아 경험의 넓이와 깊이에 대한 농담이죠. 그리고 제가 좀 유머 센스가 비틀려 있기도 하거든요.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제임스 씨.
제임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