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 서는 33세의 한국 출신 호주 입양아로 삶에서 여러 비극을 겪었다. 파푸아 뉴기니와 피지에서 가족과 함께 외국인으로 살면서 가난과 특권 정치에 어렸을 때부터 휘말렸다. 하지만 가족의 붕괴가 서의 삶을 바뀌게 해 백인이 주류인 호주 시골로 날아가게 했다. 서는 2019년 IKAA 모임에 참여했고, 다른 입양아들의 커뮤니티, 특히 호주 입양아들과의 연결을 찾아냈다. 이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이다.
션: 제 이름은 션 시어 헤드릭이라고 합니다. 제 중간 이름은 입양 전 이름에서 따왔어요. 한국어로는 서지만 전 시어라고 발음하죠. 하지만 그게 입양 부모님들이 준 이름이죠. 나이는 만 32세입니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호주 가족에게 입양되었죠. 멜버른에서 3시간 걸리는 와논볼스라는 마을에 입양되었어요. 제가 입양 상황에 대해서 아는 일은… 사실 꽤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생물학적 어머니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아주 짜증 나는 일이죠. 제가 아는 이야기는 제 생물학적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교제 중이었다고 해요. 서로 다른 지역의 가발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가발 회사가 망했다고 해요. 아버지와의 연락이 끊기고 난 뒤 어머니가 임신 사실을 아셨죠. 다른 자료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사실이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주 자세한 자료는 있어요. 제 부모님, 부모님의 가족, 출생 장소, 3명의 아들과 2명의 딸 중 셋째였다는 사실, 어머니의 육체적 특징, 키, 유전병이 없다는 증명도요. 하지만 절 입양시키신 이유는 감정적인 상태와 금전적인 문제로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때에는 입양이 제일 나은 선택이었던 셈이죠. 흥미롭게도 산부인과의 이름도 언급하더라고요. 나중에 이야기하죠.
션: 출생 6개월 때 입양되어서 호주로 왔어요. 어머니는 영국인이었고 아버지는 호주인이었죠. 우리 가족은 이 와논볼스 마을에서 첫 6년 정도 같이 살았어요. 마을 근교에서 땅을 가진 채로 살았죠. 꽤 괜찮은 시골이었죠. 하지만 다시 마을로 돌아왔어요. 제가 학교에 가야 했거든요. 하지만 동시에 아버지가 파푸아 뉴기니에서 일할 기회를 얻어서, 파푸아 뉴기니로 갔죠. 아버지는 엔지니어셨어요. 제조업계에서 일하셔서 그쪽에 있는 큰 제조 공장에서 일하셨죠. 그 시절에는 엔지니어가 되려면 대학을 나와야 했고, 아버지는 공대 출신이셨어요. 두 분께서는 불임이셨어요. 어머니께서 젊으셨을 때 수술을 받으셨거든요. 두 분은 관계를 맺으시면서 아이를 가질 거라고 생각은 안 하셨다고 해요. 물리적으로 가질 수 없어서 인지는 모르지만요. 하지만 관계를 이어 나가시면서 관심을 가지게 되셨다고 해요. 호주 내부에서의 입양도 찾아보셨지만, 호주 내부 입양에 관한 법이 마음에 안 드셨다고 해요. 호주에는 친부모가 입양 보낸 자식에게 항상 연락할 권리가 있거든요. 그래서 불편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우연히 일하시다가 아시아계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여성분을 보셨죠. 어머니께서는 꽤 직접적인 분이시라, 다가가서 “당신 아이인가요?”라고 물어보셨다고 해요. 그러니 상대방이 “네.”라고 답하시자 “남편분이 중국인이신가요? 아니면 입양하신 건가요?”라고 물어보셨다고 해요. 알고 보니 그 여성분이 아이를 한국에서 입양하셨더군요. 그러한 연결을 통해서 제 부모님이 절 입양하시게 된 거죠. 그 상황에서 다른 입양 가족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었던 사실이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물론 항상 옆에 살지는 않았어요.
션: 제가 한 여섯 살쯤 제 아버지가 파푸아 뉴기니로 전근을 가셨죠. 하지만 그전에 한국에 가셔서 제 여동생을 입양하셨어요. 제가 3살인가 4살 때였죠. 그렇게 저희 4인 가족이 파푸아 뉴기니로 이사를 했어요. 해외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경험은 흥미로웠죠. 당시의 파푸아 뉴기니는 상당히 치안이 안 좋았어요. 그래서 거대한 보안 주택지에서 해외 가족 둘과 같이 살았죠. 2층 높이의 철조망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지역이라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었어요. 기억이 아주 자세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러한 안전 조치에 대한 이유는 기억이 나요. 파푸아 뉴기니에서 살 때 첫 자전거를 받았어요. 반짝반짝 윤이 나는 예쁜 붉은 자전거였어요. 연습용 바퀴도 달려 있었죠. 크리스마스에 받아서 온종일 타고 다녔어요. 그런데 다음날에 보니까 없더라고요. 그리고 보안 주택지의 정문이 활짝 열려 있었죠. 경비원이 일보다는 그 자전거를 더 원한다고 생각하고 자전거를 훔친 거죠. 경비원은 다시 보지 못했어요. 빈곤함이 엄청났던 거죠.
션: 거기 살면서 불운한 일을 겪었어요. 파티에 참여했는데 거기 수영장 문을 누가 열어 놨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우리 가족은 여동생을 수영장 사고로 잃었어요. 우리 가족 셋에게 있어서 아주 큰 충격이었어요. 그리고 그 상황이 저희 부모님이 이혼하는 과정까지 이어졌어요. 바로는 아니었지만요. 충격과 슬픔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봐요. 하지만 그 이후로 파푸아 뉴기니에서 바로 또 다른 아이를 입양하는 결정을 하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제가 외동으로 자라는 일에 대해 걱정을 하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에게는 아직도 고통스러운 기억이라 길게 이야기해 본 적이 없어요. 이해하고 존중하는 일이죠. 그래서 제 여동생이 죽고 난 뒤 1년이 되지 않아 제 남동생을 입양했어요. 아주 빨리 일어났죠. 그러기로 한 이유가 한국에서 입양하는 과정은 길고 준비가 필요하지만, 파푸아 뉴기니에서 살고 있었으니 파푸아 뉴기니에서의 입양은 좀 더 쉬웠기 때문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제 남동생이 생겼어요. 하지만 몇 달 동안만 데리고 있었죠. 비밀 입양이어야 했지만 입양한 아이의 가족이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았고, 경비원이 그 가족을 알아서 우리 주택지에 들여보내 줬거든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돈을 요구했고 그러한 문제 때문에 아이를 파양해야 했어요. 힘든 시기였어요. 그리고 그 뒤로 우리 가족이 피지로 옮겨갔죠.
션: 제가 8살이었을 때였어요.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몰랐죠. 그 일이 가족과 저에게 얼마나 힘들고 충격적이었는지 이해를 못 했어요. 하지만 피지에서 다시 깔끔하게 시작하려고 했죠. 아버지가 더 나은 일을 받으셨어요. 공장 전체 관리자가 되셨죠. 피지는 정말 대단했어요. 아주 다른 환경이었죠. 사람들이 훨씬 친절했고 주말마다 밖에 외출해서 사람들과 교류도 가능할 정도로 안전했어요. 꽤 좋은 삶을 살게 됐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전 약간 고생을 하고 있었어요. 초등학교를 네 번 전학했어야 했으니까 조금 화가 났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1년 정도 있다가 부모님이 다른 아이를 원한다는 결정을 내리셨어요. 그렇게 해서 제 또 다른 여동생을 입양하셨죠. 그렇게 제가 인도계 여동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꽤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기억하는 일이 하나 있어요. 저희 인도 여동생을 입양했을 때 어머니가 저에게 이렇게 물었죠. “새 여동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그 말에 저는 이렇게 답했죠. “이번 여동생은 데리고 있을 건가요?”
션: 그게 제가 어렸을 때의 사고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또 다른 일은 전 그때 아홉 살이었어요. 그래서 제 여동생과 큰 나이 차가 있었죠. 9살짜리 꼬마 남자애…. 적어도 저는 아기에 관해서 관심이 없었어요. 뭐 전 저 혼자서 노는 것도 좋아하는 행복한 꼬마였어요. 하지만 그 나이 차가 저를 소외시킨 것 같기도 해요. 우리 가족은 위층에 침실이 두개, 아래층에 침실이 세 개가 있는 큰 집에 살았어요. 그래서 위층에 우리 전부 있을 수가 없었죠. 그래서 제가 아래층 침실을 썼는데 약간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어요.
션: 하지만 여동생을 데리고 있던 게 1년도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때 아버지가 일 가시기 전에 저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하셨죠. 아버지는 “네가 잘 못 한 게 아니지만 네 엄마와 내가 이혼을 하게 됐단다. 그래서 넌 호주로 가서 살아야 해. 난 여기 있게 되고.”라고 말씀하셨어요. 충격적이었죠. 어린 아이일 때도 말이죠. 그 정도로 관계에 문제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랑 어머니랑 제 여동생이 와논볼스로 돌아왔죠. 음…. 이혼은 보통 이혼이래도 아주 엉망이죠. 해외에서 막 입양한 아이를 데리고 오는 일은 더 힘들죠. 개인적으로는 피지 학교는 아주 좋았어요. 국제 학교에 다녔는데 아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다녔죠. 30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다녔으니까요. 인종 문제도 전혀 없었고 그냥 머리카락 색이 좀 다른 정도였죠. 그 나잇대에는 인종차별 같은 건 없으니까요. 하지만 와논볼스는 3000명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어요. 제가 학교에서는 유일한 아시아계였죠. 마을에서도 몇 명 안됐고요. 부모님 이혼에 슬퍼하고, 5번째 초등학교 전학을 하고, 그리고 자기감정을 이해하거나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어요.
션: 그때 어머니에게서 최초로 약함을 본 것 같아요. 물론 부정적인 뜻은 아니에요. 부모님의 인간적인 면을 처음으로 보게 되는 거죠. 그런 경험을 하는 시기는 보통 십 대잖아요. 하지만 어머니의 세계가 붕괴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그 일도 힘들었죠. 그렇게 저희는 다시 와논볼스에서 삶을 재구성하려고 했어요. 그래도 다행이었던 점은 제 1학년 때의 친구들이 아직도 와논볼스에 살고 있었다는 점이죠. 저희가 와논볼스로 돌아간 큰 이유이기도 했어요. 어머니가 저에게 물었죠. “와논볼스에 돌아갈 수도 있단다. 가족과 친구들이 거기에 있지. 아니면 멜버른으로 갈 수도 있단다.” 어머니의 형제가 거기에 살고 있었고 친구들도 있었거든요. 딱히 후회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생각해요. 멜버른이라고 말했다면 제 삶이 어떻게 변했을지요. 큰 도시에서 자랐으면 좀 더 쉬웠을까? 뭐 그렇다고 해도 돌아와서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일은 즐거웠어요.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죠. 물론 여러 문제가 있는 삶이긴 했어요. 어머니는 우울증에 걸리셨고, 전 10살 남자애였고 여동생과는 9살 차이가 났죠.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뭐가 잘못되었던 건지, 아버지가 저에게 이혼한다고 말씀해주신 충격적 대화 등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그리고 여동생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났던 것 같아요. 물론 9살 차이 나는 남매가 같은 집에서 산다고 해도 그리 친밀한 관계가 될 것 같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러한 충격과 문제가 있는 상황 때문에 같이 살긴 했어도 그리 친밀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상당히 차가운 관계였죠. 그러한 관계는 제 잘못이고 지금도 후회하는 일이에요. 여동생이 절 필요로 했지만 제 문제를 해결하느라 도움을 못 줬으니까요.
션: 그 시기에는 전 재능이 많은 학생이었어요. 그때 어머니가 저에게 “미안하구나! 션. 네 숙제를 못 도와줄 것 같아. 도움이 필요하면 학교에서 찾아야 할 것 같구나.”라고 말씀하셨죠. 이러한 상황들이 합쳐져서 제가 독립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아마 너무 독립적이게 되었던 것 같기도 해요. 여러 특이한 상황들, 입양, 해외에서 외국인으로 살기, 그리고 제가 왜 이런 감정을 가지는지 이해하는 일 때문에 제가 아주 독립적인 성향이 있게 되었어요. 예를 들면 제가 아주 심하게 따돌림을 당했을 때 전 이유를 알고 있었어요. 제가 그 학교에서 유일한 아시아계였으니까요. 모두랑 다르게 생겼고 그래서 괴롭히는 애들의 말이 저를 깊게 상처 입혔죠. 꽤 감정적인 아이였다고 생각해요. 특정 당해서 계속 괴롭힘 당했죠. 저희보다 먼저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했던 친구 가족이 미국에서 일하다가 고등학교를 위해서 호주로 돌아왔어요. 제나랑 저는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었죠. 그래서 매우 친했어요. 여러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고 가족끼리도 친한 친구였죠. 그래서 학교 외부에서도 서로 만났죠. 흥미로웠어요. 학년에서 단둘인 아시아계였죠. 그래서 조별과제 같은 일을 하게 되면 친구들이 저희에게 물었죠. 남매 관계인지, 그리고 서로 업어 줄 수 있는지 물었죠. 괜찮겠냐고. 제나와 저 둘 다 아주 부끄러워했어요. 그 뒤로는 학교에서 서로 만나지 않으려고 했죠. 전 최대한 다른 애들과 맞아 들어가려고 했어요. 딴 애들이 제가 아시아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면 할 정도로요.
션: 그 일과 관련해서, 시골 마을에서 다문화가정이면 눈에 띄게 마련이죠. 가족과 함께 길을 걷고 있거나 슈퍼에 가면 사람들이 저희를 항상 쳐다봤어요. 항상 그러한 시선을 느꼈죠. 전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보이고 싶었어요. 하지만 평범하게 보이는 일 자체가 문제였죠. 고등학교 시절은 대학 입학을 위해서 기다리는 시절이었어요. 항상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멜버른으로 가고 싶었어요. 와논볼스는 너무 좁았죠. 그리고 제 해외 경험이 저를 좀 더 다양한 배경의 사람이 있는 곳으로 절 이끌었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아주 즐거운 시기가 시작됐어요. 십 대는 힘들었죠. 사춘기는 어떤 아이한테나 힘들고요. 여자애들이 절 좋아했으면 싶고, 인기 많은 애와 친해지고 싶고, 전 최대한 섞여 들어가려고 노력했어요.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랬지만 적어도 학업적으로 전 큰 성공을 거뒀어요.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죠. 그래서 학교에서 그렇게 큰 노력을 하려고 한 것 같지는 않아요. 수업에서 노력하는 일은 멋있지 않으니까 하지 않았고 운동하는 일은 멋있으니까 운동을 더 하려고 했죠. 그 일이 맞건 틀리건 적응을 했어요. 많이 도움이 되었죠. 많은 애가 절 외계인 보듯이 봤던 것 같아요. 다가가기 어려운 아이라는 거죠. 제가 말이 별로 없던 것도 문제긴 했겠죠. 어쨌든 행동 변화가 저에게 도움을 주긴 했어요.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가진 그것처럼 어떤 편견도 없이 다른 애들과 교류하는 일 자체가 어려웠죠.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 항상 편견을 가졌죠. 그래서 항상 맞아 들어가지 않고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 갈 때가 되자 아주 기뻤죠. 오랫동안 기다려온 기회였으니까요.
션: 멜버른에 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도시를 걸어 다니는 일이었어요. 멜버른과는 친숙했죠. 친척들이 거기에 살고 있고 학교 여행으로도 여러 번 갔으니까요.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아무도 저에게 신경 쓰지 않고 사람들과 섞인다는 사실에 기뻐했죠. 그리고 그곳에서 생활이 제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자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때까지는 제 아시아계 정체성을 밀어냈죠. 제 입양아 친구들은 고등학교 때 친부모를 찾아냈어요. 그리고 한국에 큰 관심을 가지고 한국어도 배웠죠. 친구들이 저도 같이하라고 압박을 넣었죠. 전 거부했어요. 그러고 싶지 않고 관심도 없었으니까요. 대학교 1학년 때 두 아시아 남자들과 조별과제를 하게 됐어요. 흥미로운 경험이었죠. 아시아계 가정에서 자란 아시아계 친구들은 그 애들이 처음이었으니까요. 아주 친절한 애들이었어요. 둘 다 멜버른 출신이었죠. 그 애들이 악의는 없었지만 웃으면서 “션 너 너무 바나나 같아. 가장 호주인 같은 호주인 같이 생기지 않은 호주인이야.” 라고 말했어요. 그때 웃긴 했지만 충격이었어요. 아시아계 애들마저도 절 밀어내는구나 하고요. 그 경험으로 아시아계와도 멀어진 기분이었어요. 저와 맞지 않는 다른 그룹이라는 느낌이었죠.
션: 그때 한국이 호주에서 더 큰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죠. 정확히 말하자면 서구 세계에서 더 큰 존재감을 가지게 되었어요. 한국 고깃집이 나타났고, K-POP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어요.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흥미롭고 멋있는 일이 됐죠. 한국 정체성에서 약간 떨어져 있던 저로서는 흥미롭네. 좀 더 알아볼까?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죠. 그러한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니 제 생물학적 어머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죠. 제 주변에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생물학적 부모를 만난 친구가 둘이나 있었으니 더욱더 흥미를 느꼈죠. 그래서 조금씩 찾기 시작했어요. 조금 무섭기도 했죠. 아주 외국의 일이기도 하고, 어렸을 때 그런 고생을 했는데 다시 인생을 복잡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요. 제가 20대 중반일 때야 친부모를 찾기 위한 일을 시작했죠. 제가 친어머니를 만나고 싶다기보다는 단순한 흥미가 더 컸어요. 무의식적으로 흥미를 느끼고 있었고 논리적으로는 나이가 먹고 나서 알고 싶어졌을 때 알지 못하게 되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절차를 시작하고 절차 도중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절차를 밟으려고 동방사회복지회에 직접 연락했어요. 그러니 제가 거주하는 주 정부 관련 부처로 연결을 해주더군요. 사회복지사를 배정받았고, 여러 번 논의를 했어요. 논의 중 하나는 상담 관련에 집중되어 있었고요. 연결과 재결합을 위한 구조 자체는 좋았지만, 예산이 없었어요. 그래서 엄청 느리게 움직였죠. 그래서 1년 정도 걸려서 호주 내부에 있는 제 서류를 찾고 기관의 반응을 기다렸죠. 전 기대가 그렇게 크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회복지사 분의 의견으로는 절차에 대해서 아주 좋은 대응을 하고 있다고 하셨죠. 그리고 딱 기대할 수 있는 만큼 기대하고 있다고 평가하셨죠. 대학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전화가 기억이 나요.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정보를 기관 기록과 대조했는데 관련 정보가 없고 입양 부모 정보도 없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끝났죠. 두 감정을 느꼈어요. 첫 감정은 안심이었죠.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감정. 하지만 그 뒤로 실망으로 발전하더군요.
션: 그 이후로 한국에 관한 관심은 꽤 낮아졌어요. 제 첫 한국 여행은 사실 의도하지 않았었어요. 고등학교 때 일본어를 배웠고 아주 좋아했죠. 그때 제 교제 상대가 일본 여행 표를 손에 넣어서 우리 둘 다 일본에 가기로 했죠. 일본에 집중하고 일본에 대해서 배운 곳을 방문하고 그러려고 했죠. 그런데 그때 교제 상대가 “한국이 바로 옆 나라인데 한국도 가볼까? 당신 고향이잖아.”라고 말했죠. 그래서 동의했죠. 딱히 생각하지 않고 있었지만 말이죠. 한국 음식은 좋아하고 K-POP도 좋아하긴 했지만, 한국 자체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그래서 여행지로도 생각하지 않았죠. 그리고 제 친부모를 찾을 수 없어서 딱히 갈 생각도 없었죠. 그래서 여행지에 추가했죠. 여행가기 딱 좋을 때였어요. 제 소꿉친구 제나가 한국에 영어를 가르치러 가서 적응을 잘 하고 있었거든요. 첫 여행지는 일본이었고 제가 기대했던 것 그 이상이었어요. 돌아다니기 편했죠. 그리고 한국에 도착했어요. 제가 생각하지 않았던 일 중 하나가 한국이 저에게 감정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것이었어요. 한국에 가니 압도되는 느낌이었죠. 일본도 흥미롭긴 했어요. 제가 방문한 첫 아시아계 국가였고 아시아인들이 주류였죠. 하지만 한국에 가니 그러한 감정이 5배는 증폭된 기분이었어요. 도착하니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감정들이 떠올랐죠. 한국에서 계속 살았다면 삶이 어땠을까? 그리고 주변에 걷는 사람들과 저의 비슷함을 느꼈고요. 반대로 그 사람들도 저에게 그런 감정을 느낀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저한테 길을 물었죠. 혼란스러운 경험이었어요. 처음에 저한테 한국어로 말을 걸고, 제가 영어로 답하면, 영어를 할 수 있는 분들은 영어로 답했죠. 그 사람들이 제가 한국어를 못한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고 심판하는 듯이 봤어요. 예를 들면 밤에 길을 걷고 있는데 취한 사람이 길을 물었죠. 그래서 제가 “아 저 영어밖에 못합니다.” 라고 영어로 대답했고 그러자 취한 분이 “아 죄송합니다. 한국인인 줄 알았어요. 어디 출신이세요?”라고 영어로 대답했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 출신입니다.”라고 답했죠.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면서 걸어가 버리시더라고요. 이상했어요.
션: 말하자면 첫 한국 여행을 그리 즐기지 못했어요. 힘든 일이었고 일본보다 모든 일이 조금씩 더 불편했어요. 일본 같은 경우에는 구글 맵스를 사용하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죠. 한국에서는 구글 맵스가 안 통하더라고요. 그래서 한국 지도 앱을 사용해야 했죠. 친구와 친구의 남자친구를 만나는 일은 즐거웠지만 동시에 어려웠어요. 다시 돌아와서 좋은 휴가였지만 한국은 잘 모르겠네. 라고 생각했죠. 그 이유가 한국에 관광객으로 방문해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평범한 일이긴 하죠. 결혼식 때문에 한국에 갔던 두번째 방문 때 좀 더 사람들과 가깝게 교류할 수 있었고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좋은 장소들을 찾아낸 셈이죠. 두번째 여행에서 인천공항을 통해서 떠날 때 상당히 감정적인 기분이 들었죠. 꽤나 놀라운 일이었어요. 전 그렇게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거든요. 제 마음속에서 집을 떠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놀랍고 제 정체성을 확인하게 해주는 계기였죠. 전 다른 사람들보다 제 정체성을 찾는 일에 늦었어요. 한국에 간 첫 여행 때가 26세에서 27세 사이였죠.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늦은 편이었어요. 거기에 저는 제 직업에 집중하는 편이라 일자리를 잡았을 때부터 거기에 집중을 많이 했죠. 제 독립성을 통해서 제 직업은 제가 마음대로 관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래서 저의 20대 동안 해외에 사는 일은 제 관심에서 벗어난 일이었어요. 그래도 만약에 과거로 돌아간다면 20대에 한국에 살면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제 뿌리를 찾으려고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전 다른 선택을 했죠. 제 직업에 좀 더 집중하게 됐고, 이 COVID-19가 끝나면 한국에 더 자주 가고 싶어요.
션: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저희 부모님이 이혼하고 나서 아버지께서는 몇 년간 피지에서 계셨어요. 그리고 이혼하기 전부터 직장에서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어머니가 이혼하기 전에 그 사실을 알았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중요하지는 않죠. 그리고 아버지는 저희에게 전화하시고는 했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멜버른으로 돌아오시고 난 뒤에는 여동생과 같이 주말에 방문하고는 했어요. 아버지가 피지에서 돌아오셨을 때는 재혼하신 뒤였죠. 그리고 새어머니께서는 전 결혼에서 가진 아들이 한 명 있었어요. 그 뒤로 딸도 하나 가지셨고요. 그래서 이복 여동생도 가지게 된 거죠. 아버지는 저희와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내셨어요. 매주 전화도 하셨고 긴 주말이 있으면 멜버른에 가서 같이 지내기도 했죠. 꽤 특이한 경험이었어요. 그 새로운 가족과 같이 지내야 했으니까요. 적어도 제 머릿속에서 아버지가 만든 새 가족을 전 그렇게 불렀어요. 같이 보내는 시간이 항상 어려웠어요. 제가 13살쯤 됐을 때 아버지를 일부분만 가지는 일은 힘들다고 결론을 내렸고 아버지와 연락하고 싶지 않다고 결정을 내렸어요.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전화하던 때에 어머니에게 “더 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죠. 그리고 어머니가 받아들이셨고요. 겨우 몇 년 전에야 아버지와 멀어졌고 서로 이야기도 안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아주 강한 언어 사용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그 시기에 아직도 어린아이로서는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일이 저에게 충격을 주었죠. 제가 잃어버린 두 번째 가족인 셈이죠.
션: 20대 때 여러 감정적 변화를 겪었어요. 20대 초반에 제가 여러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하지만 그 문제를 마주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죠. 진지한 연애를 해본 적도 없었고,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일도 어려웠고, 분노하지만 왜 분노하는지 몰랐어요. 물론 밖에서 보면 전 멀쩡해 보였죠. 그러한 문제를 내부에서 처리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이 제 삶의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어렵게 했어요. 다행히도 제 주치의가 좋은 분이셨어요. 제가 다른 문제로 병원에 가 있을 때 저한테 질문하셨고 전 많은 문제가 있다고 답했죠. 의욕도 없고, 감정 기복도 심하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시니 의사 선생님께서 정신과 전문의인 친구를 소개해 줄 테니 상담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죠. 저 같은 경우에는 정신과 상담이나 상담 자체와 그리 좋은 경험이 없었어요. 부모님 이혼 뒤에 어머니가 저와 제 여동생이 상담을 받게 하셨죠. 그렇게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그래서 상담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주치의 선생님이 추천해준 전문의와 만났고 아주 상담이 잘 진행됐죠. 그리고 거의 처음으로 제가 가진 온갖 문제를 설명할 수 있었죠. 첫 여동생의 사망, 남동생 입양 실패, 이혼, 국가 변화, 인종적 정체성,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죠. 그때 주치의 선생님에게 고마워하고 있어요. 그러한 문제를 알아주셨으니까요. 그렇게 제 삶을 개선하게 해주시고 정신상태도 개선하게 해주셨죠.
팟캐스트: 아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감정도 거기에 끼어 있었나요?
션: 네. 관련된 여러 감정이 있었죠. 슬픔, 실망, 분노, 왜 이 가족에게 입양되었지? 라는 감정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어요. 물론 단순한 감정이었죠. 제 어머니는 제가 아는 여성 중에 가장 강한 여성이세요.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저랑 제 여동생을 키워내셨죠. 저랑 제 여동생 둘 다 제대로 된 어른이 됐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입양아로서 세계 어디든 입양될 수 있었는데 라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한때는 왜 이 가족에 입양되었고, 왜 아버지가 저희를 입양했는데 책임을 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그러한 불만을 느끼기도 했어요. 그러한 이유가 이혼하지 않고 가족을 유지할 이유는 아니라는 것을 알죠. 그런 결혼은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요. 하지만 어렸을 때는 그런 생각을 못 했죠.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느낌이네요. 아버지와는 20년간 말도 안 나눠 봤으니까요. 그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저에게 이득이 될 것 같지는 않아요. 어머니나 제 여동생이 다시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서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도 궁금하죠. 그러한 복잡함은 제 삶에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지금의 가족들을 소중히 여기고 싶어요.
션: 제가 앞에 언급했다시피 제 입양 서류에 제 산부인과가 언급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드렸죠. 제 입양 관련 정보를 더 깊숙이 찾아본 결과 입양아들이 동양사회복지회와 일하는 데 겪는 어려움을 알았고, 복지회의 투명성과 협조성 문제에 대해서도 알게 됐죠. 그래서 4년 전에 해외입양인연대와 연락해서 2차 조사를 부탁했죠. 해외에 사는 제가 생각해도 제 서류에는 많은 정보가 있었거든요. 어머니의 본명, 나이, 출신 지역, 산부인과 등의 정보가 있었죠. 그래서 입양인연대와 연락해서 같이 찾기 시작했죠. 아주 협조적이었고 연대에서 산부인과를 찾아냈어요. 하지만 이미 폐업한 뒤였죠. 하지만 그 소유 의사를 찾아냈다고 했죠. 그래서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병원 측에서 개인정보 보호 문제로 정보를 제공할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단서가 있는데도 정보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상당히 답답했죠. 또 제 서류에는 제가 안양 지부에서 입양되었다고 적혀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 안양 지부는 존재하지 않죠. 그래서 제 어머니가 절 찾으려고 해도 찾을 길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막다른 길에 도달했죠. 그 시기에 또 한창 유전자 검사가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23 and me이나 Ancestry.com 같은 사기업 검사들이죠. 그래서 제가 순수 한국인인지 혼혈인지 궁금해서 한번 검사를 해봤어요. 첫 검사가 특이했는데 그 전에는 유전자 자료가 부족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제가 자료를 받았을 때 제가 100% 동아시아계라고 떴거든요.
션: 150불이나 지급했는데. 전에 몰랐던 사실을 알았네- 라는 느낌이죠. 그리고 유전자 관련 정보가 떴는데 사촌일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흥미롭다고 생각했죠. 사촌? 가까운 친척이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연락하니 등록된 사람의 아내와 유전자 정보가 섞여서 아내 쪽이 친척일지도 모른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의 아내와 연락을 했죠. 하지만 답이 없었어요. 여러 번 연락했는데도 답이 없었죠. 그래서 아 관심이 없나 보다. 실망스럽네. 라고 그만뒀죠. 또 다른 막다른 길이었던 거에요. 그리고 그 검사 등록이 1년 정도 가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그 검사기관 측에서 자료를 잘못 확인했다고 언급하면서 그 아내분이 저의 이복 자매이거나 이모일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주 가까운 친척이죠. 그래서 뭘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쪽에서 저한테 이름을 제공해줬고, 링크드인에서 그분의 이름을 찾았어요. 그리고 한 달 정도 그 정보를 가지고 고심했죠. 개인정보 침해인가? 만약에 제가 여러 번 연락했는데도 답이 없었다면 그걸 존중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결국 메시지 하나 보내는 일은 큰 문제가 없겠지 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메시지를 보냈어요. 그리고 그녀가 답을 해줬죠. 남편이 이야기를 해주기는 했는데 아이를 낳고 그러다 보니 바빠서 답을 못했다는 거예요.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 시작했어요. 그쪽도 입양아여서 친부모를 찾을까? 라고 생각했다고 해요. 하지만 그녀의 상황에서 얼마나 어려울지 알고 그만뒀다고 해요. 그녀의 경우 미국으로 입양되었는데 관련 정보가 전혀 없었다고 해요. 입양 관련 자료를 찾아보려고 하니 권한이 없다고 거절당했다고 하고요. 그래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한국에 직접 가서 탐문이었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너무 가능성이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냥 삶을 살아가기로 한 거죠. 그 뒤로 페이스북으로 연락을 나누다가 영상 통화를 하기도 했어요. 꽤 흥미로운 경험이었죠. 저와 비슷한 얼굴 특징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사람에게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어요. 그리고 말의 억양이 달라도 저희가 생각하는 방식과 인식이 비슷했어요. 흥미로웠죠. 지금은 저희 둘 다 바쁘게 살아가고 있고 시간대도 달라서 계속 연락하기에는 힘들지만, 미래에는 계속 이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어요. 이 COVID-19 이전에는 내년 4월쯤에 뉴욕에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지금은 무리죠. 그래도 그러한 혈육이 있다는 사실이 희망적이죠.
팟캐스트: 이복이거나 의붓남매인 건가요?
션: 네. 저보다 3살 연상이니, 고모나 이모일 가능성은 낮죠. 이복이거나 의붓남매일 가능성이 크겠죠. 저희 유전자를 유전학자들에게 직접 분석을 맡기면 어느 부모 쪽인지 확실히 알 수 있겠죠. 하지만 저와 그녀가 동의하는 사실은 저희의 유전적 연결이 저희 친부모를 찾는 데는 도움이 안 될 거라는 사실이이에요. 그저 흥미로운 사실이겠죠. 제가 친부모를 찾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은 친어머니나 친아버지와 의미 있는 인연을 만들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또 다른 사실은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일이었어요. 서로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나서, 비슷한 경험을 했더군요.
팟캐스트: 한국에 있는 가족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가까운 핏줄을 찾을 수 있다니 대단하네요. 저기, 동방사회복지회가 션 씨의 어머니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션 씨에게 넘겨주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션: 제가 하지 않은 일이 있는데…. 서류 확인을 안 했어요. 저한테 넘겨준 서류에 어머니의 본명이 적혀 있어요. 나이, 고향도 적혀 있죠. 제가 원한다면 미래에 그 서류를 볼 수 있겠죠. 고향 마을에 가서 확인할 수도 있고요. 그리고 저도 동의해요. 그 사람들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겠죠. 하지만 더 찾으려면 시간과 금전적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겠죠. 거기에 현재의 COVID-19 사태로 인한 장벽도 있고요. 하지만 미래에 더 확인해 볼 것 같기는 해요.
팟캐스트: 션. 제가 들은 바로는 이렇게 찾았는데, 발견한 사람이 또다시 션 씨를 실망하게 할까 봐 주저하고 있는 부분도 있으신 것 같은데. 저도 그럴 거예요. 실망하는 일이 두려운 거죠.
션: 네.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특히 연대에 연락해서 2번째 조사를 부탁했을 때는 그랬죠. 처음에 정부 기관과 일했을 때는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연대를 통해서 일했을 때는 좀 더 직접적이었어요. 전 최대한 외교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했죠. 제가 충분히 노력한다면 어머니를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관심도 보여주지 않은 어머니의 삶에 침입해도 되는가? 절 찾고 싶어서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했죠. 만약에 찾았는데 저를 만나고 싶지 않다면, 그 결과가 저를 부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을 거예요. 그때 보던 상담사님과 이 이야기를 자주 나눴어요. 그분은 이렇게 반응하셨죠. “전부 맞는 반응이고 그렇게 마음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션. 하지만 자기 보호 적이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 조언을 듣고 저 자신을 위해서 찾는 일이라고 인정할 수 있었어요. 제 삶에 항상 가지고 있던 간격이고 지금까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더 알고 싶은 간격이었죠.
션: 제가 알 권리가 있는지는 아주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제가 알 수 있는 것이라면 제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두 번째 조사를 의뢰한 거죠.
팟캐스트: 많은 정보를 가지고 계시죠. 어머니 이름, 어머니의 고향도 알고 있고요. 꽤 높을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준비된 뒤에 하셔야겠지만요.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발품 좀 팔아야 할지도 모르고 한국에 가셔야 할지도 모르죠. 큰 책임이 따르는 일이에요.
션: 네. 좀 더 큰 이야기를 하자면, 작년에 처음으로 IKAA 모임에 참여하게 됐어요. 아주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30대에서 40대 사이가 아닌 입양아들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 모임이었죠. 그 경험이 저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탐구하고 입양아 사회에 이바지하고 싶게 했어요. 우연히 그 시기에 호주 TV에서 국제 입양에 대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죠. 그리고 입양아들에게 관점을 맞추려고 했어요. 많은 매체가 입양 부모에게 많은 관심을 두고 이 프로그램도 그런 관점의 에피소드를 방영했지만, 이번에는 변화를 주려고 한 거죠. 제가 그 프로그램에 참여한 7명의 입양아 중 하나였고, 저희 경험을 프로그램에서 이야기하게 됐죠. 이 팟캐스트에서 언급한 비슷한 이야기를 그 프로그램에서도 진행했어요. 그게 TV에서 방영됐고 제 SNS에도 공유했죠. 우선 첫째로 제가 어렸을 때도 그러한 경험을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요. 그랬다면 제가 그렇게 소외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두 번째로 제 프로그램을 보고 저에게 다가온 사람들에게 약간 압도된 느낌이었어요. 많은 사람이 저를 지지해줬죠. 제 가장 친한 친구들, 심지어 제 어머니마저도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고 그러한 문제를 겪고 있는지 몰랐다고 이야기하셨죠. 아주 성취감이 들었어요. 또 그러한 TV 프로그램이나 이 팟캐스트와 같은 매체의 중요성도 깨닫게 해주었죠. 정보 공유의 중요성을 알게 된 거예요. 제가 만약에 어렸을 때 간접적인 정보, 저한테 직접 오지 않고 나중에 제가 직접 찾아볼 수 있는 정보가 있었다면 제가 생각하고 있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아요. 물론 젊은 남성들을 대표해서 하는 말은 아니죠. 그 세대와 공감하고 감정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거든요. 그리고 만약 제가 어렸을 때 제가 살던 마을에 멘토 프로그램 같은 교육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전 거부했을 거예요. 하지만 덜 침해적인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많은 도움이 됐겠죠. 제가 그때 보지 않았다고 해도 나중에 볼 수 있었겠죠. 사람들이 지원해야 하는 제도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를 자주 겪으니까요. 지방 같은 곳에서는 더더욱 그렇죠. 다른 입양아들과 다른 경험을 겪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요즘 제가 큰 흥미를 느낀 분야 중 하나에요. IKAA에서 입양아 다큐멘터리 상영회도 가졌고, 질문과 답변 회도 가졌죠. 60 쌍의 입양 부모가 와서 토론에 참여해 주셨어요. 아주 큰 성취감을 느꼈죠. 제 상황을 지금 보면 몇 년간 제가 그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될 일에 고생했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리고 계속 그 동기를 위해서 이바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요.
팟캐스트: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저도 션 씨처럼 한국에 가기 전에 일본에 먼저 갔었죠. 션 씨라던가 다른 입양아들에게 있어서 일본이 한국보다 좀 더 안전한 3국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적어도 중압감이 덜 한 곳이 될 수도 있다고 보시나요?
션: 네. 당연히 그렇게 볼 수 있다고 봐요. 해외 일반인들은 보통 한국보다는 일본에 대해서 더 잘 안다고 봐요. 물론 그 간격이 좁혀지고 있긴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그렇죠. 초밥, 사무라이, 도쿄 같은 정보를 알지만, 한국은 그런 정보가 없죠. 또 접근성이 달라요. 호주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관광지가 일본, 그 중에서도 도쿄죠. 웃긴 이야기지만 제 현재 직장이 일본 기업이에요. 현재 정규직이 되기 전에도 1년 정도 그들을 위해서 일했죠. 한국과 일본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감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저 같은 경우에도, 완벽하게 한국인도 아니지만, 호주인도 아닌, 둘이 섞인 정체성을 가진 경우에도 그 역사를 알고 나니 일본 기업에서 일해도 되는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아주 이상한 관점이죠. 전 호주인이잖아요. 하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죠. 도요타에서 일하는 한국인과도 수치심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눴죠. 입양아 정체성의 문제라고도 봐요. 항상 생각해 봐야 할 문제죠.
팟캐스트: 션 씨. 앞에서 어렸을 때 많은 상실을 경험하셨다고 했죠. 제대로 생각할 수 있기도 전에 말이죠. 많은 트라우마가 엮여 있을 것 같아요. 그러한 결과로 관계를 맺거나 신뢰를 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셨죠. 지금도 해결하는 데 노력하고 있는가요? 그리고 지금까지 보완하는 데 성공하셨나요?
션: 네. 지난 3년간 그런 변화와 관련해서 큰 발전을 이뤘다고 봐요. 지금까지는 중간 기간의 연애를 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2년을 넘어가는 데 문제가 있었죠. 그 넘어가는 상태에서 문제 중 하나는 2년 정도 같이 있다 보면 이 연애가 진지한지, 가족 관련해서 이야기도 나오고 아이나 결혼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게 되죠. 그러한 상황에서 제 반응이 그렇게 긍정적이지는 않았어요. 전 결혼과 아이에 대해서 상당히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한 관계는 영구적이니까요. 하지만 처음 연애할 때는 그러한 감정을 잘 이해하고 있지 못했고 그러한 일은 제 잘못이죠. 여성의 관점에서, 또 연애의 관점에서 보면 연애가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확인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맞다고 봐요. 저의 20대 중반에는 그러한 진지한 연애를 할 각오가 안 되어 있었고 무서워했죠. 거기에 압도된 느낌도 있었어요. 그래서 제 연애 상대에서 파괴적으로 대응한 것 같아요. 왜 압박하느냐, 왜 그리 빨리 움직이고 싶어서 하느냐- 라는 식으로요. 물론 2년이 관계를 아는데 충분한 시간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제가 이러한 논의에 접근한 방법은 건전하지 않았고 많은 관계를 파괴해버린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발전해 나가면서 그러한 문제를 알게 됐어요. 애착 관계에 대해서도 많이 읽었고 관계에 대해서 이해하는 일이 과거의 제 반응을 이해하게 해줬죠. 제 어린 시절에 대한 이해가 제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됐죠. 전 지금 제 삶에서 최고의 시점에 도달해 있다고 생각해요. 저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제 삶을 좋게 발전시켰어요. 좋은 친구들도 많고, 부정적인 감정도 적고, 현재 직업도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죠. 생존, 경제, 자가 지원 같은 경우에는 제가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션: 연애는 항상 문제였죠. 특히 연애할 때는 준비 안 된 결정을 내려야 하고 숨 막힌다고 불평하면서 연애하지 않을 때는 외로웠죠. 살면서 엄청 멋진 일들을 많이 겪었어요. 특히 작년에 TV에도 나오면서 그렇죠. 하지만 누구와도 그러한 경험을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이 외로웠어요. 그래서 지난 몇년 동안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죠. 지금은 호주계 한국인과 연애를 하고 있어요. 제가 한국인을 찾아다닌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러한 이야기를 나눠 보는 일이 도움이 된다고 봐요. 지금 여자친구의 경우 10살 때 한국을 떠나와서 호주에 이민을 왔거든요. 그래서 입양아들이 가진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죠. 그래서 그녀와 더 깊은 관계를 맺고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 것 같아요. 특히 COVID-19 때문에 서로와의 시간이 늘어나서 이러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도 도움이 됐죠.
팟캐스트: 이러한 인터뷰를 하고 팟캐스트에 오기 위해서 감정적으로 안정되어야 하고 자신을 마주 봐야 하니, 아주 많은 일을 하신 것 같아요. 제가 지금 여쭤봐도 될지는 모르겠고, 너무 이를지도 모르지만,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으실 것 같나요? 아니면 지금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인가요?
션: 네. 이 문제에 대해 상담을 했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죠. 확실히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보긴 해요. 그러한 결과가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는 여부로 나오지 않아도 말이죠. 다른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봐요. 결국, 균형의 문제죠. 저 자신에 대해서 생각을 하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안위를 생각하느냐의 문제죠. 현재는 아버지를 찾아가서 대화해서 얻는 이득이 손해를 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상황을 입양과 가족의 문제에서 보면 흥미롭겠지만 적어도 제 생각으로는 아버지는 이미 새 가족을 가지고 계셔요. 애도 3명이나 있죠. 제9년에서 10년간의 인생에서의 아버지를 확실히 아버지라고 인정했고 결정을 존중해요. 입양아들이 입양 부모들에게 고마워하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요. 하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부모님에게 고마워요. 적어도 9년 동안 전통적 가족과 함께 좋은 삶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제가 가진 가족들에게 더 노력을 쏟고 싶어요.
션: 아 그리고 어른이 된 뒤로 저와 제 여동생은 훨씬 더 가까워졌어요. 우리가 좀 더 나이를 먹고 나서 좀 더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죠. 여동생이 자라면서 평범한 어린애 동생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갔으니까요. 그리고 저보다 9살이나 어린이면서도 어린 두 명의 딸을 둔 엄마이기도 하죠. 그 경험 자체가 저에게 큰 도움이 됐다고 봐요. 무감정하고 차가운 사람이고 아이들을 무서워하지만, 제 조카들에게 느끼는 애정을 느끼니 그러한 감정들이 사라졌어요. 지금까지 저는 이러한 기준이 맞춰지지 않으면 아이를 가질 수 없어- 라는 식으로 아이 가지는 일을 미뤄 왔거든요. 하지만 20대 초반인 제 여동생이 가족들로 보여준 결과는 그러한 기준이 없어도 좋은 가정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었죠. 제 감정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죠. 제가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여동생에게서 배운 게 아주 컸어요. 입양 부모들이 입양아들이 어머니가 될 때 이러한 감정을 겪었을 것 같지만, 제 여동생이 아이를 가졌을 때 어머니가 임신한 적이 없어도 이러한 조언을 했지만 해주지 못해서 고생했고, 신생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둘 다 몰랐고요. 이러한 경험이 가족들을 더 가깝게 엮어준 것 같아요. 지난 주말에 가족들을 방문했어요. 제 조카들의 두 살 생일 기념이자 어머니 71세 생신 기념이었죠. 같이 저녁을 먹었죠. 제 조카들이 강제가 아니라 처음으로 직접 와줬죠. 원래는 좀 시간이 걸리는데 이번에는 션 삼촌- 하면서 저에게 온 다음에 같이 놀 수 있었죠. 아주 기뻤어요. 그리고 저녁을 같이 먹는데 어머니가 71세가 됐구나. 라고 말하고는 부정적인 면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을 보자꾸나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제가 여러 가지 상담을 하고 있고 여러 일을 하고 계신 걸 알고 어머니는 최대한 지지해주려고 하셨죠. 이해하기 어려워하시지만요. 어머니가 항상 사랑해주시고 지원해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어요. 입양아들이 자라면서 부모를 이해할 수 없어서 하는 일이 저는 이해할 수 없었어요. 25세쯤에야 그런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리고 사랑받으면서 자란 것에 감사했고 여러 일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저번에 입양아를 돕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에 대해서 질문받았죠. 입양아들이 지원받아야 할 일은 많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근본적 문제 해결이라고 생각해요. 미혼모들을 잘 지원해 주지 않는 한국 같은 나라의 미혼모들을 돕고, 현재 뿌리 적 문제를 해결하고, 현재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하는 일이죠. 물론 지금은 확실한 답이 없긴 하지만 이러한 미혼모들이 아이를 입양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면 슬프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