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음
카오미 리 씨 (49세)는 생후 6개월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카오미 씨는 미네소타주 시골에서 인종적으로 고립되어 가족의 외동딸이자 유일한 입양아로 자라면서 미네소타주 다른 아이들과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무를 타고, 눈 요새를 짓고, 성가대에서 노래하고 클라리넷과 배구를 배웠다. 하지만 카오미 씨는 자기 자신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카오미 씨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너무 일찍 끝내 버린 고통스러운 비밀을 가지고 있다. 11살 때 카오미 씨는 성적인 학대를 당했고, 그 학대는 가족의 비밀이 되어 비밀을 숨기고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친부모가 어떤 정보도 남기지 않고 자신을 버려, 찾을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는 점이 또 다른 상처가 되어 마음속에 열 수 없는 금고가 되었다. 카오미 씨는 부모의 학대를 자신의 입양 기관인 한국 홀트아동복지회와 몰리 홀트에게 보고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한다. 복지회의 누구도 사과하거나 고통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고, 그 반응은 실망적이면서도 충격적이었다. 이 시즌 최종 에피소드에서 카오미 씨는 2016년에 처음으로 팟캐스트에 참여해 입양과 학대, 유기에 대한 감정에 대해 인터뷰한 알리시아 순 씨와 같이 이야기를 한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카오미: 제 이름은 카오미 게이츠입니다. 한국 이름은 이소라이고, 미네소타주 세인트 폴에서 살고 있으며, 49세입니다.
팟캐스트(알리시아): 여기에 질문이 적혀 있는데 그냥 아무 시점에서 진행할까요?
카오미: 전 1970년대에 태어났고, 제가 발견되었을 때 탄생 뒤 11일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서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평택 군청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제가 어떻게 거기에 도착했는지, 누가 발견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11일생일 때 발견되었죠. 사람들이 어떻게 제가 11일생인지 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배운 바로는 이소라는 한국어 이름이고, 70년대에는 흔하지 않은 이름이었다고 하더군요. 제 연령대에 유명 가수 이소라가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나중에 유명해지긴 했지만, 소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30대와 20대에서 더 흔하게 보이죠. 제가 한국에서 한국어를 배울 때 소라라는 이름이 예시로 나오더군요. 한국어 이름이 좀 더 인기를 끌다가 다시 한자 이름으로 돌아간 느낌이 듭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는 한국어 이름이 인기가 없었죠. 어떤 사람이 말해주기를 시대를 고려했을 때 약간 특이한 이름이라고 했어요. 이름 뜻은 조개류를 뜻합니다. 제 친어머니에 대해서 가진 몇 안 되는 실마리이죠. 어머니가 평범하지 않았다는 증거일지도 몰라요. 제 이름을 어머니가 지어줬다면 그렇다고 봅니다.
카오미: 제가 양육되었던 고아원에 방문하기도 했죠. 대부분의 고아원들이 그렇듯이 이전을 해서 원래 장소에 있지도 않고 더 고아원이 아니라 양로원이더군요. 양로원장이 고아원이 닫기 전의 원장이었습니다. 그분에게 제 이야기와 제 이름을 말해주자, 소라라는 이름은 고아원에서 지어주는 이름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줬어요. 제가 고아원에서 이름을 받았다면 한자 이름을 받았을 겁니다. 미국으로 치면 자기 아이의 이름을 운명이라고 짓는 일과 비슷할지도 모르죠. 잘 모르겠네요. 제 친가족이나 친어머니에 대해서 정보가 전혀 없죠. 많은 입양아가 비슷한 배경 이야기를 받았다는 사실도 압니다. 저에게 가짜라고 해도 배경 이야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기도 하죠.
카오미: 제 부모님이 대학생이었는지, 둘이 사랑을 했지만, 양가 부모님의 반대로 헤어져야 했는지, 그런 이야기를 알고 싶죠. 전 그런 배경 이야기도 받지 못했습니다. 전 고아원에서 이틀 정도 지내다가 바로 홀트 아동복지회로 넘겨졌다고 하죠. 거기에서 위탁가정에 맡겨졌다고 해요. 서류가 특이한데, 어떤 방면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하지만 다른 방면에 대해서는 정보가 별로 없죠. 이름도 없고 어디에서 지냈는지에 대한 정보도 없습니다. 제 위탁 아버지는 건축계에서 타일 기능사로 일하셨고, 위탁 어머니는 전업주부셨다고 해요. 이상한 상세정보긴 하지만, 이분들 이름도 없었죠. 홀트아동복지회에 부탁해서 위탁 부모님을 찾을 수 있냐고 물었지만, 그때 그 시절은 워낙 혼란스러웠고, 많은 위탁 부모님들이 와서 아이를 돌봐서, 정보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가 고아원/양로원에 돌아가서 관련 자료가 있는지 물어봤어요. 하지만 자료가 전부 처분됐다고 했죠. 너무 탐사를 늦게 시작했고, 왜 제가 이렇게 늦게 자료를 찾기 시작했는지 책망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어쨌든 자료가 전부 처분되었고, 남아 있지 않다고 들었죠. 하지만 창고에서 먼지가 덮인 골판지 상자를 찾아서 꺼내 왔는데, 그 안에 사진이 가득 들어있더군요. 원하면 기념품으로 가지고 가라고 이야기를 했죠. 그걸 보니 고아들에 대해서 얼마나 신경을 쓰지 않았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카오미: 입양아의 이야기가 어떤 이름도 없이 상자 어딘가에 담긴 채로 잊혔죠. 고아들이 어떤 건물 앞에 모여 있는 사진 하나를 찾은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불만족스러운 경험이었죠. 저는 위탁가정에서 4달 정도 지내다가, 제가 5개월에서 6개월 정도 나이를 먹었을 때 미네소타주의 부부에게 입양되었습니다. 제 부모님은 미네소타주 북부에 있는 마을에서 살고 있었는데, 공식적으로 마을이라고 인정받았으니 아마 15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사는 작은 마을에 입양되었죠. 아버지가 루터 교회 목사였고 친자식은 없었어요. 제가 3살 때 그 마을에서 이사를 나왔으니 거기에서의 기억은 없지만, 저에게 있어서 큰 변화가 그 마을에서 일어났습니다. 제 입양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친자식을 낳았죠. 제가 아기일 때 입양되었지만 얼마 있지 않아 어머니가 임신하셨어요. 저와 제 남동생은 18개월 나이 차이가 납니다. 제 동생과 제 나이 차이를 계산해보니 몹시 화가 났죠. 물론 그때는 사람들이 가족계획 같은 개념이 없었고, 모든 아이가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제가 그 시기에 아기로서 필요한 돌봄을 받았는지, 부모님과 애착을 생성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그러지 못했다고 생각하죠.
카오미: 어머니와 저는 서로 애착 관계를 생성하는데 고생했고, 어머니가 없는 아이 같다고 생각했어요. 전 저 자신을 스스로 키웠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남동생이 제가 도착하고 나서 바로 태어나 남동생을 돌보는 데 신경을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남동생이 더 어렸지만 비슷한 연령대였죠. 어머니가 항상 저에게서 남동생을 지키려고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놀면 서로 싸우기도 하는데, 제가 항상 잘못했고, 항상 벌을 받았어요. 적어도 제 인식 상에서는 그랬죠. 제 어머니와 제 남동생은 깊은 유대 관계가 있어요. 항상 그랬고 지금도 그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유대 관계 문제에 대해서 최근까지 생각하지 않았는데, 저에게 있어서 고통이 되었어요. 전 항상 다른 사람은 사랑을 받지만 저는 사랑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고 그 결과 질투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삶에서 다른 사람들이 더 나은 대접을 받거나, 귀염을 받는 일에 대해서 문제를 가지게 되었죠. 이런 삶의 태도가 저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 문제 해결법 중 하나는 이런 감정과 반응의 뿌리가 어디에서 나오고, 제가 왜 그렇게 반응하는지 알아보는 일입니다. 저에게 남동생 2명이 있고 제 부모님의 친자식이죠. 입양아들이 양부모를 닮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지만, 저의 경우에는 본성과 양육의 싸움에서 본성이 이겼어요. 전 항상 튀는 아이였죠. 제 남동생들은 부모님과 성격과 관심사가 비슷했습니다. 저는 항상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여행하고, 배우고, 모험하는 일을 좋아했죠. 어머니는 정반대였어요. 항상 저에게 왜 세계를 돌아다니려 하는지 물었습니다. 세계에 관한 관심이 없으셨죠. 제가 왜 유학을 가려 하는지, 외국으로 살러 가려 하는지, 왜 미네소타주를 떠나려고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셨습니다. 제가 미네소타주 밖으로 대학교에 가려고 하니 부모님이 반대하셨어요. 제가 너무 멀리 살러 간다고 생각하셨죠.
팟캐스트: 미네소타주 밖으로 대학교에 가려고 한 이유가 카오미 씨의 성격과 관련된 문제였나요? 아니면 가족들과 멀리 떨어지려고 하신 일이었나요?
카오미: 가족들과 떨어지고 싶기도 했지만 저는 매우 독립적인 성격이기도 하죠. 실질적으로 저 자신을 혼자 양육하다 보니 독립적인 면이 주목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 제 어머니와 장벽을 만들어서 미네소타에는 같이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자신을 돌봐야 했으니 적어도 부모님이 저를 대놓고 내버려 두는 곳으로 가는 일이 낫다고 생각했죠. 멀리 떨어져 있으면 적어도 멀리 떨어져 있으니 어머니가 저에게 전화하지 않고, 가깝게 지내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 와서는 과도한 걱정이었다는 생각을 알죠. 현재 어머니와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미네소타주 세인트 폴에서 지내는데도 서로 연락하지 않으니까요. 현재 연락을 하지 않는 이유는 의도적입니다. 어머니와 의도적으로 관계를 멀리하고 저 자신을 치료하고 있죠. 현재 상담도 받고 있는데, 제가 갖은 고통 상당수가 제가 아기일 때 버림받은 고통, 제 첫 위탁 가족과의 이별,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한 일, 부모님과 연관 관계를 맺지 못한 일 등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어요. 생후 6개월의 아기가 주변 환경이 뒤바뀌고, 다른 나라에서, 다른 언어, 다른 냄새, 다른 사람들이 있는 환경에 적응했죠. 현재 6개월 생 아기에게 그러한 환경 변화는 큰 문제가 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아이들의 반응과 감정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안다고 생각하죠.
카오미: 3살 이후에 또 다른 작은 마을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800명 정도의 사람이 사는 미네소타주 시골 마을이었죠. 제가 유일한 유색인종이었어요. 단순히 유일한 아시아계가 아니라 아예 유일한 유색인종이었습니다. 또 다른 입양아들과 교류하지도 않았고 입양아 캠프도 참여하지 못했어요. 제가 70년대와 80년대에 자라났지만, 입양아 캠프들이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때가 80년대 중반이어서 그 캠프 시기를 놓쳤습니다. 많은 입양아와 비슷하게 입양아 캠프에 참여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한국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일은 나쁘다고 생각했죠. 저 자신에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 특성을 강조하고 비슷한 입양아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관심이 없었죠. 지금 제가 어머니에게 왜 더 한국과 관련된 경험을 시켜주지 않았는지 물으면, 어머니는 제가 가려 하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사실이긴 했지만, 저는 부모가 가진 통찰이 없었죠. 많은 사람이 제 부모님이 그 시기에는 최선의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제 형제들과 차이점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인종을 인식하지 않는 방법이었어요. 현대에는 접근 방식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죠. 특히 사람들의 자아 구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압니다. 다른 부모님들은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죠. 어떤 부모들은 더 많은 접근성을 제공하려고 노력했거나, 백인 위주의 지역에 유색인종 아이를 입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복잡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카오미: 그때 그 시기에 입양 기관들이 부모들에게 해준 조언에 기반을 둔 방식이긴 했지만, 부모님을 완벽하게 용서할 수도 없죠. 제 가족을 포함한 많은 가족에게 해당하는 일이지만, 백인 가족이 한국을 포함한 다른 국가에서 아이를 입양할 때, 아이의 나라에 관해 관심이 없는 일이 많아요. 제 부모님도 한국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물론 관심도가 너무 높아서 아예 한국인처럼 활동하는 백인 부모도 있죠. 과도한 한국에 관한 관심도 입양아들이 한국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게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가족이 전혀 관심이 없는데 한국에 관심을 가지는 일 자체가 힘들죠. 그러한 관점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가족에 최대한 맞아 들어가려고 하죠. 제가 유일하게 아는 가족이 한국에 관해서 관심이 없다고 하니 저도 한국에 감정적인 연결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카오미: 입양아들이 스스로 감정적인 연결이 없다고 하면 부모가 기뻐하는 경우가 많죠. 양부모가 충분하고, 애들이 망가지지 않았다는 증거로 받아들이니까요. 입양아들이 부모를 만족하게 하려고 감정적인 연결이 없다고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이 저에게 중요하지 않아요, 거기에서 태어났지만 제 삶은 잘 풀렸죠. 이런 이야기를 우리 양부모들이 원하죠. 입양아와 양부모 사이에 의견충돌이 생기게 됩니다. 양부모가 거부하는 진실을 숨기면 모두 행복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고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게 됩니다.
팟캐스트: 카오미 씨가 보통 입양아들이 받는 배경 이야기를 받지 않으셨다고 하지만, 그 시기 한국계 입양아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이야기는 우리가 한국에서 구원받았다는 서사입니다. 구원자, 운이 좋은 아이 같은 흔한 이야기이죠. 거기에 카오미 씨의 부모님은 목사였으니 그러한 직책이 그러한 서사에 큰 영향을 끼쳤나요? 그러한 배경은 제 경험에 있어서 한국과의 괴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국에서 구원받았으니 당연히 큰 의미가 없다는 접근 방식이었죠. 그러한 접근 방식이 카오미 씨의 가족에게도 영향을 끼쳤나요?
카오미: 예. 부모님이 한국을 묘사할 때 후진국으로 묘사하셨죠. 물론 제가 입양될 때는 아직 한국은 전쟁에서 회복 중인 개발도상국이었어요. 우리가 아는 반짝이는 서울의 이미지도 없었습니다. 한국에 가서 서울만 방문한다면 새로운 대도시만 보게 되지만, 한국에서 화려한 도시 개발 자체는 최근에 일어난 일이죠. 아버지가 자주 하던 농담이 있는데 악의가 있는 농담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간접적으로 미국에서 자라서 다행이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하신 셈이에요. 어쨌든 아버지가 항상 하시던 말은 제가 한국에 있었다면 밥과 생선 머리만 먹어야 했다고 하셨죠. 아버지가 부적절한 농담을 하는 사람이었고 농담이었지만, 그런 이야기가 저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미국에서 이렇게 좋은 음식을 먹고 자라는데 한국에서 살았다면 생선 머리를 먹어야 하죠. 누가 생선 머리를 먹으려고 하겠어요? 그런 한국을 후진국으로 묘사하고, 원시적인 곳으로 묘사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항상 감사를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도 문제였어요.
카오미: 아버지가 목사이기 때문에 부모님은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어요. 최근에 어머니에게 저의 종교적인 구원을 위해서 입양했는지 물었습니다. 어머니의 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이었어요. 인구 조절 문제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입양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미국/서양 우월주의적 관점에서 나온 대답이라고 생각하죠.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 백인 국가가 아닌 나라들이 인구 조절도 못 하고 인구가 폭증하고 있다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나라들이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지 못하고 인구 조절도 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어요. 입양해서 나라들을 돕자는 인식이 있습니다. 물론 이게 제 예측이지만 인구 과밀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아이를 입양한다는 관점으로 보였어요. 잘 모르지만, 미국 70년대에는 인구 과잉이 큰 문화적 문제로 인식됐다고 하죠. 부모님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인구 과잉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통해 입양했습니다. 또 제가 내재화한 문제가 있는데, 제가 부모님이 입양하려고 한 아이가 아니었다는 점이에요. 부모님은 한국에서 다른 아이를 입양하려고 했지만, 그 애가 폐렴으로 죽어서 제가 대신 입양되었죠. 그러한 인식이 항상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머니가 죽은 아이의 사진을 보관하셨어요. 항상 제가 대체 입양아나, 대체품이라는 느낌이 들었죠. 거기에 아이가 없는 사람으로서 어머니가 사진에 많은 희망과 꿈을 담았고 그래서 지금까지 그 사진을 보관해 뒀습니다. 어머니가 그 아이를 받지 않고 저를 대신 받았죠. 저는 항상 대체품이었고, 어머니에게 있어서 만족스럽지 않고, 어머니가 원치 않은 아이였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카오미: 어렸을 때 대체품이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자존감 문제가 생겼고 불안했어요. 제 입양아 정체성에 대해서 논의하는데 시간이 걸린 이유는 아버지가 절 성적으로 학대했기 때문이죠. 아버지가 목사였는데도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저에게 있어서 항상 복잡한 문제였어요. 아버지는 마을에서 존경받는 명사였고, 일요일마다 하나님의 말을 설교하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모여서 일요일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야 했죠. 그렇지만 저는 아버지의 어두운 비밀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이 성적 학대를 알리지 말라고 한 적은 없지만, 분위기상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어요. 우리 집에는 3명의 아이가 있었고, 작은 마을이니 모두가 목사 가족인 우리 집에 주목하고 있었죠. 첫 학대를 당했던 때는 제가 11살 때였어요. 제가 뭘 할 수 있는지 몰랐죠. 만약 경찰에 신고했다면 가족이 분열되었을 겁니다. 11살의 아이였던 저는 경찰을 부를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고, 가족을 분열시키고 싶지 않았죠. 어머니는 저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어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조용하게 대응했습니다.
팟캐스트: 어머니가 알고 계셨나요? 맥락 이해가 어렵네요.
카오미: 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도록 하죠. 어머니가 저를 내버려 두고 남동생과 막냇동생에 대해서 애정을 쏟았어요. 그 빈 자리를 아버지가 대신했고 저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자라날 때 아버지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느꼈어요. 그 관심과 방치가 연관되어 있는지는 모르죠. 아버지가 저에게 애정을 보여서 어머니가 동생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였는지, 아니면 반대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아주 비슷하죠. 그래서 서로 더 이해했는지도 몰라요. 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행복하지 않은 결혼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지적으로 서로 교감할 수 없었고, 저는 왜 부모님이 결혼했는지도 모르죠. 아버지가 더 고등 교육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단순히 고등학교 졸업을 한 뒤 속기사가 되셨지만, 아버지는 대학교에 입학한 뒤, 신학 대학교에 들어가서 목사 안수를 받았죠. 아버지와 저는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지만, 어느 순간에 가까운 관계의 장벽이 무너졌다고 생각해요. 아버지와 낮잠을 자는 일도 어린 여자애에게는 흔한 일이죠. 아버지 무릎에 앉거나 그런 일도 평범하지만, 제 아버지는 그래도 되는 때가 지났어도 제가 계속 그러도록 했어요. 아버지와 저는 친밀한 관계라 노스다코타주에 있는 친척 목장에 놀러 갔을 때도 말을 같이 타기도 했어요. 아버지가 말을 잘 탄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저에게 누우라고 했죠. 평범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곳을 만지기 시작했어요. 이러한 일이 잘못됐고 이상하다고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자각하지 못했던 이유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너무 깊어서 이러한 일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팟캐스트: 아버지가 어른이었으니 더욱 그랬겠군요? 거기에 아버지를 믿었으니까요.
카오미: 네. 그렇죠. 성폭력 생존자나, 아동 성폭력 생존자가 느끼는 유체 이탈된 느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제 몸 밖에서 나와 있다는 생각을 하면 좀 더 버티기 쉬웠어요. 감각을 전부 집중해서 그 일이 일어날 때 몸 밖으로 유체이탈을 하는 방식으로 대응했죠. 그러한 대응이 성인이 되고 나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제 몸과 감정이 서로 맞지 않는 기분이 들죠. 몸과 감정을 서로 연결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해요.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많은 상황에서, 특히 20대에서 30대에 저 자신에 대해서 확신이 없었을 때 애들에게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묻고는 했죠.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했고, 이런 상황이 일어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묻고 했어요.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내가 어떻게 너의 감정을 알 수 있느냐고 반응했죠. 아이들이 레인지가 만지면 뜨겁다는 사실을 알고 본능적으로 하지 않는 반응과 제 감정 반응이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감정적 반응 성장에 있어서 어렸을 때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죠. 저에게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 계속 지속하였고, 학대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과 몸을 분리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생존 방법이긴 했지만, 이 일이 지금까지 저에게 문제를 일으키고 있고 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고, 누가 저에게 나쁜 일을 하거나 부정적으로 대응하면 반응하기 어렵죠.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일 자체가 어렵고, 자연스러운 감정적 대응을 하기도 힘듭니다. 감정적인 반응이 멈춰버려요. 제 감정과 의견을 믿지 않기도 하죠.
카오미: 아버지의 성추행이 오랫동안 진행되지는 않았어요. 한번은 확실히 일어났었고, 다른 일들이 있었을 수도 있죠. 적어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알았습니다. 어머니에게도 말할 수 없었죠. 제가 어머니에게 말했는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고백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머니도 제가 성추행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추행도 결국 어느 순간에는 멈췄어요. 어머니가 말하기를 아버지가 멈춘 이유가 어머니가 멈추라고 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6학년 이후로 청소년기로 접어들면서 화장을 하고 싶지 않고, 몸을 드러내는 옷을 입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성욕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죠. 성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무성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그런 복장을 하고 다녀도 괜찮았어요. 절 제외하고 1명의 아시아계가 있고, 나머지는 백인인 공립학교였죠. 제가 중학교 1학년에서 2학년에도 또다시 이사했는데, 그 마을에서는 아무도 우리 가족을 몰랐고, 그래서 더 많은 인종 차별을 겪었습니다. 한 남자애가 국(Gook, 아시아계 비하 단어)이라고 저를 부르기도 했고, 자기가 중국어라고 생각하는 말을 하기도 했죠. 괴롭힘도 당했습니다. 다른 곳에 비해서 편하지 않은 학교 환경이었고 저는 소외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때에 다른 반에 입양안지, 중국계인지 모르겠지만 또 다른 아시아계 아이가 전학 왔고 그 애도 소외되었죠. 지금도 그 애에 대해서 생각해요. 그 애가 전학 왔을 때 그 애의 친구가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둘 다 표적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의 집중을 받고 싶지 않았어요. 만약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면 서로 지탱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 그러지 않았죠. 친구가 없어서 학교생활이 힘들었습니다.
카오미: 제 성적 학대는 어렸을 때 자랐던 마을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렸을 때의 마을에는 절 지지해주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죠. 유치원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같이 자란 친구들이 있었고 서로를 전부 잘 알았어요. 다른 애들처럼 백인 아이같이 행동하면 인종적으로 소외되는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팟캐스트: 그 아이들이 집단의 일부로 카오미 씨를 받아들이고 익숙해져 있었군요? 흔한 일이죠.
카오미: 그랬죠. 하지만 제 청소년기에는 제 아버지와 관계가 멀어지고 아버지에게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전형적인 반응이지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죠. 청소년기에 자라나면서 성적으로 학대당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팟캐스트: 질문을 해도 괜찮나요? 질문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카오미: 언제든지 질문하고 싶을 때 하세요. 지금 혼자서 불평하고 하는 셈이나 다름없습니다.
팟캐스트: 아니에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으니 약간 압도됐을 뿐입니다. 몇 가지 질문이 있어요. 제 이야기와 제 자매의 이야기와 비슷한 점도 있는데, 여러 가지가 일어나고 있었네요? 그래서 우선 이사를 하게 된 이유가 이러한 성적 학대와 관련이 있었나요? 가족들이 이런 문제를 자각하고 마을에서 이사를 간 건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로 이사를 나가게 됐나요?
카오미: 제 어머니를 제외하고 아무도 제 아버지가 저를 성적으로 학대했는지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팟캐스트: 부모님이 정보가 알려질까 무서워서 이사했다던가 그런 느낌은 없었나요?
카오미: 아뇨. 그 성적 학대가 처음으로 일어났던 때가 제가 11살 때였는데,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이사를 하였거든요. 거기에 제가 이런 일을 겪었다고 사람들에게 고백하지도 않았죠. 기억에서 그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학대 자체를 오랫동안 기억하지도 못했습니다. 루터교 목사들은 몇 년마다 다른 마을로 이사를 해야 해요. 우리 가족은 이미 그곳에 오랫동안 있었죠.
팟캐스트: 부모님이 두려웠나요? 어머니와도 복잡한 관계를 맺고 계시고, 아버지와는 복잡하면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까요. 자기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고 했나요? 아니면 육체의 변화를 숨기려고 한 이유가 부모님이 두려웠기 때문인가요?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없고 드러낼 수 없어서 숨기려고 하셨나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야기만 들으면 힘들고 외로운 삶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카오미: 그 질문들이 전부 정답이라고 생각해요. 저 자신을 성적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자기 성적인 매력을 자각하고, 모험하고 드러내야 할 때 그러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죠. 그러한 매력을 드러내는 일 자체가 위험한 일로 인식되었어요. 그런 성적 변화 자체를 멈추고 싶었죠. 고등학교 때는 쉬웠습니다. 아무도 저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고등학교 때는 마치 지구상에 내려선 외계인 같은 느낌이 들었죠. 누구도 절 무도회에 데려갈 생각도 하지 않았고, 집에 데려가서 여자친구로 소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팟캐스트: 소외당하고 다른 사람인데 어떻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이라는 감정이었군요?
카오미: 네. 아무도 절 여자친구로 인식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팟캐스트: 카오미 씨가 백인이 아니었으니까요.
카오미: 네. 백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사실 남자애들이 저를 여성으로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고등학교 같은 반에 남자애들이 몇 명 없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저를 매력적으로 보거나, 흥미롭게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죠. 이상한 일입니다. 아버지가 저를 성적으로 건들기는 했지만, 매력적으로 봐서 그랬다고 생각되지는 않아요. 힘이나, 친밀감이나, 울타리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욕망의 대상이 되는 일이 나쁘다고 생각했죠. 생존자처럼 그 마을과 제 가족에게서 떨어져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을에서 나가서 대학교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생존 본능이 감정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좋은 목사의 딸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한번은 가출한 적도 있는데, 그렇게 멀리 가지도 못했고 친구 집에서 지내다가 돌아왔죠.
카오미: 어머니와 제가 서로 경쟁 관계에 놓인 느낌이 들어서 전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가끔 서로 같이 쇼핑을 하거나 점심을 같이 먹고는 했지만 서로 둘이서 시간을 보낸 때는 적었어요. 항상 남동생들과 같이 어머니와 시간을 보냈지 어머니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 적은 없었죠. 살면서 어머니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고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와 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결과 어머니와의 관계가 끊어졌고, 외롭고 소외된 시간을 보내야 했죠. 그러다가 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23세에 처음으로 사람과 키스했어요. 제가 일본에서 지내고 있을 때의 일이었죠. 아시아에서 지내고 있었고, 그이는 일본인이었습니다. 그 경험이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죠. 저 자신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물론 그러한 느낌이 두렵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팟캐스트: 그때 부모님과 관계가 어땠나요? 물론 아직도 그분들에게 애정을 품고 있을 수도 있죠. 그런 생각을 하는 일 자체가 이상하긴 한데, 부모님에게 지지를 받으셨나요? 관련된 질문인데, 멀리 있는 대학교에 진학했는데 충분한 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셨나요?
카오미: 저 자신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저의 미래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죠. 한 학기를 해외에서 공부할 수 있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홍콩에 갔습니다. 홍콩 방문이 최초 아시아 방문이었죠. 홍콩 경험이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잡지와 간판에 아름다운 아시아계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자라나면서 전혀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죠. 아주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절 매력적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외계인처럼 느껴지지 않고 여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시아계 주류인 국가에서 느꼈던 감정이었죠. 제 눈을 열어주었어요. 입양에 대해서 생각하고, 입양이 긍정적인 일이었나, 부정적인 일이었나 생각했죠. 1990년대에 학생 연구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보조금을 받았습니다. 여름을 연구에 소모했죠. 그때 저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서 탐구하고, 이 팟캐스트를 시작하게 될 기반을 닦았죠. 학부생으로 지내면서 제 입양에 대해서 생각을 했어요. 제 교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부분의 입양아 출신인 사회복지사, 입양 연구가, 입양 비판 학자들이 90년대에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죠. 입양아들이 주축이 되어 연구한 입양 연구가 제가 학부생일 때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어요. 제가 처음 시작했을 때는 관련 연구가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공부한 연구들은 백인 연구가들에 의해 진행된 연구였고, 연구자이기도 했고, 입양에 관심이 있던 백인 부모가 주축이 되었죠. 그러한 연구들 상당수가 특정한 결과를 원했습니다. 인터뷰한 입양아들은 인종과 상관없이 대부분이 아이들이었어요. 백인 부모의 지원을 받는 아이들에게 물으면 당연히 입양이 좋다는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죠.
팟캐스트: 그런 인터뷰를 통해서 백인 연구자들이 믿고 싶은 사실을 만든 거죠.
카오미: 연구를 하면서 입양아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자기 자신을 입양된 국가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를 했죠. 한국계 입양아면서도 스칸디나비아인, 스웨덴인으로 인식했다고 합니다. 그때는 그렇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저는 저를 노르웨이계나 덴마크계로 인식하지 않고 아시아계로 인식했습니다. 몇몇 입양아들이 자기 자신을 스웨덴인이나 노르웨이인으로 생각해서 특이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죠. 지금 그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다른 답을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러한 인식이 그렇게 특이하지도 않았고, 제 학부생 연구서는 입양 자체는 긍정적이지만, 부모가 더 큰 노력을 해야 한다고 결론을 냈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똑같은 결론에 도달할지는 모르죠. 그때는 입양 긍정파나 부정파 중 하나를 정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그때까지는 성적 학대를 받았다는 자각을 하지 못했을 때기도 했습니다.
카오미: 대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일본에 영어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일본에서 3년간 살았습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살았어요. 3년 살고 난 뒤 돌아보니 일본에서 참 많은 일이 일어났죠. 25살이 되었을 때였고, 과거를 짚어보다가 성적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냈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다시 미국 문화에 적응하면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어요. 아버지와 제 할머니에게 분노하고 있었죠. 할머니도 이 문제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어머니도 알고 있었지만, 할머니에게 분노하는 일이 더 쉬웠습니다. 제 부모님이 아니었으니까요. 제 할머니도 이런 성적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야기하지 않았죠. 저에게 위로, 지지, 보호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어느 시기에도 제 삶에 있던 어른들이 저에게 상담을 권유해주거나, 지원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팟캐스트: 정신적 지지나, 대화도 해주지 않았군요?
카오미: 네. 아무런 지원도 없었죠. 지금 되돌아보면 어머니가 그 가족에 남아 있던 점에 화가 났다고 생각해요. 전 어머니가 아버지가 딸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그러한 환경에서 딸을 8년 넘게 살게 할 수 있었는지 이해 가지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생존했는지 잘 모르겠죠.
팟캐스트: 나중에 어머니와 성적 학대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신 것 같은데,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와 카오미 씨가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를 하고 싶나요? 하지만 저는 어머니와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더 알고 싶네요.
카오미: 전 화가 나 있었죠. 남동생들은 이런 이야기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충격을 받았어요. 가족 내부에서 얼마나 비밀을 지키려고 노력했는지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남동생들이 어린아이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전혀 몰랐죠. 지금까지도 남동생들이 이야기하려는 주제가 아닙니다. 2009년에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고, 남동생들은 아버지의 좋은 기억들을 남겨두려고 하죠. 동생들은 제가 아버지의 기억을 망가트리는 일을 원치 않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는 일 자체가 어려웠어요. 제가 아버지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일 자체가 어렵죠. 전 아버지를 사랑하긴 했습니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웠고, 아버지가 절 항상 지지해주셨죠. 제가 뭘 원하거나, 하려고 하거나,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 학자금 대출을 받을 때도 지원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지지해주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저와 너무 달라서 제가 하려고 하는 일에 가치를 보지 못하셨죠. 아버지가 제가 하려는 일에 대해서 가치를 보고 지원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도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복잡해요. 제가 상담을 받을 때, 상담사가 아버지가 성적으로 카오미 씨를 학대하고 약점을 사용해서 욕망을 채웠는데, 어떻게 그를 사랑할 수 있는지 묻죠. 전부 맞는 말이에요. 지금까지도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일 자체가 힘듭니다. 그 이유로 아버지와의 관계가 계속 이어졌죠. 아버지가 저를 성적으로 학대했고, 그 문제에는 화를 냈어요. 아버지 때문에 저에게 남자 친구가 없고, 남성에 대해서 불편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제가 관계를 맺지 못 하는 일에 대한 핑계가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책임이 있다고 느껴요. 하지만 이 관계에는 양면성이 존재하죠. 문제가 있거나, 나라 반대편으로 이주해야 하거나, 다른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준 사람이 아버지였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돕지 않았죠. 하지만 아버지가 저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 사람이기도 했어요. 이 이야기의 교훈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일까요?
팟캐스트: 현실에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는 없죠. 그러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냥 일상을 살아갈 뿐이죠.
카오미: 사람을 신뢰하는 데 큰 문제를 겪었어요. 제가 기자가 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하죠. 많은 기자가 그런 이유로 기자가 되기를 선택합니다. 진실을 찾기 위한 여정과 고통이 이러한 직업을 선택하게 했다고 하죠. 제가 의도적으로 기자를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팟캐스트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하고 지난 몇 년간 팟캐스트가 지속한 이유라고 생각해요. 이 팟캐스트를 진행하기 위해서 시간을 많이 들였습니다. 단순히 인터뷰만이 아니라 다른 일에도 시간을 들였죠.
팟캐스트: 편집이라던가 다른 일에도 시간을 들이셨죠?
카오미: 편집만이 아니라 음악과 다른 일에 시간을 들이고 있죠. 이런 일을 돈이나 명예를 위해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해야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고 있죠. 아주 오랫동안 제 이야기를 못 한 시기를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입양아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제공하고 싶습니다. 입양아들과 같이 앉아서 이야기하다 보면 사람들이 밝히려던 이야기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밝히고는 하죠. 그 이유 중 하나는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경험을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와 같은 가족 문제를 겪지 않았다고 해도 서로의 경험을 이해하는 일이 아주 강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이 팟캐스트를 들으면 입양아와 입양아가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일에 대한 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카오미: 제가 팟캐스트를 계속 진행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한국에서 지내면서 받던 지원금이 끝난 뒤에도 이런 이야기를 공유하는데 가치를 느꼈습니다. 다른 입양아들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었고, 이런 이야기를 미화하고 싶지 않았죠. 진짜 고통, 학대, 입양아들에게 일어난 나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이런 진짜 이야기들을 입양아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 전달되는 뉴스에서는 듣지 못합니다. 진실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물론 입양아 중 일부는 입양에 대해서 특정한 서사를 지키려고 하죠. 그런 사람들은 입양과 관련된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팟캐스트에서는 그런 진실을 숨기려고 하지 않죠. 그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고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숨기고 이제 괜찮으니 괜찮고, 석사 학위도 있고 좋은 일도 있으니 괜찮다고 넘어갈 수는 없어요.
팟캐스트: 그런 접근 방식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카오미 씨가 하는 일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카오미 씨가 두 입양아가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셨죠. 하지만 동시에 특정한 답과 결과를 기대하지 않고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비 입양아들이나 입양 가족과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들은 좋은 결말과 좋은 이야기를 원합니다. 어떤 입양아들은 이런 진실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죠. 모든 입양아가 이러한 이야기에 있어서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으니까요. 제 한국에서의 첫해에 관한 이야기를 입양아들이 별로 들으려고 않는다고 생각했죠. 그러한 이야기를 안전하게 할 수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개인 상담이나 단체 상담을 제외하고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죠. 이러한 다양한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팟캐스트를 운영하시고 있다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카오미 씨가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이유도 아주 명백하죠. 보통 입양아들이 이야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아시니까요. 전 카오미 씨가 하는 일과 카오미 씨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카오미: 감사합니다. 저도 알리시아 씨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팟캐스트: 감사합니다.
카오미: 제가 그러한 방황을 멈추고 입양아의 정체성을 받아들였던 때가 4년에서 5년 전이었습니다. 2015년이 저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해였죠. 그때 저는 이미 40대 중반이 되었던 시점이었어요. 제 직업에 몰두하고 있었고, 자주 이주하면서 제 입양아 정체성이나 입양이나 한국에 대한 감정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 없다가 40대에 들어와서 이 입양아의 정체성을 탐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단순히 40대에 접어든 나이만이 아니라 다양한 문제가 겹쳐서 이러한 자아 찾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이 모든 문제에 있어서 제가 가진 문제와 왜 자꾸 고생하는지 알아보려고 했죠. 길이 한국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본능적으로 문제의 근원이 한국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나중에 해결하겠다고, 중요하지 않다고 무시하다가 나중에 더 무시할 수 없는 단계까지 도달했어요. 많은 사람이 겪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길이 전부 한국으로 이어지고, 길을 걸어갈 준비를 해야 하죠. 그래서 한국에 방문하게 되었어요. 온라인상에 있는 입양아 사회와 인연을 구축하고 한국 입양아 문화에 대해서 모든 정보를 배우려고 할 때는 순진했습니다. 사람들을 찾아서 인연을 맺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했죠. 하지만 동시에 아주 무서운 일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정신적 충격을 받아온 집단이기도 하고, 각자 상담과 지원을 받고 있으며 모두가 조금이나마 문제를 안고 있어요. 하지만 그 문제를 몰랐죠. 문제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카오미: 전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서 입양되었어요. 홀트아동복지회의 사회복지사에게 저에게 일어난 문제에 대해서 편지를 썼죠. 40대에 들어서 제가 성적으로 학대당했다는 이야기를 그 사람들에게 했습니다. 입양 이전에 시험과 정신적 조사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었어요. 물론 그때는 아무런 기준도 없었겠죠. 그렇게 홀트아동복지회에 이메일을 썼는데 놀라지 않았더군요. 하지만 몰리 홀트에게 연락이 닿았죠. 이 홀트아동복지회 창립자인 홀트 부부의 딸이었습니다. 몰리는 이미 노인이 된 상태였고 일산에서 살고 있었죠. 일산은 아직도 장애 고아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제가 몰리 홀트와 연락이 닿은 이유는 제 이야기가 고위층으로 올라가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죠. 홀트아동복지회의 이사회가 이 정보를 알기를 원했지만 대신 몰리 홀트와 연락이 닿았어요. 몰리 홀트의 이메일 주소를 받아서 이메일을 보냈죠. 몰리의 반응은 아주 이상했습니다. 몰리는 제가 기자라는 사실을 보고 그래도 교육은 받았으니 됐지 않느냐, 70년대에 한국에서는 아이들은 마구 죽어 나갔으니 살아있으니 기뻐해야 하고, 교육도 받았으니 좋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했어요. 입양기관에서 보일 반응은 아니라고 생각했죠. 제가 겪은 문제에 대해서 미안해하고 일이 더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좋은 정책이 적용되었다고 안심시켜주거나, 상담을 추천해줄 거라고 생각했죠. 입양기관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니 성적으로 학대당한 일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반응할 줄은 몰랐습니다. 성적으로 학대를 받아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식의 반응이었어요.
카오미: 그러한 반응을 듣고 입양아 페이스북 그룹에 가서 다른 입양아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리는지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몰리 홀트에게 이메일을 작성해서 비슷한 대답이 나오는지 알려 달라고 부탁했죠. 그렇게 페이스북에 올린 뒤 나온 반응이 저에게 있어서 충격이었습니다. 입양아들의 공간도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몇몇 입양아들은 저를 거짓말쟁이라고 추궁하거나, 홀트 가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다니 안된다고 비난했어요. 또한, 행복한 입양아 서사를 지지하는 입양아들도 있어서, 그러한 기회를 준 사람들을 어떻게 비판할 수 있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모독적인 말을 한 듯이 취급되었고, 상처를 입었어요.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결국 페이스북 그룹 관리자가 글을 삭제해야 했죠.
팟캐스트: 양부모에게 당한 학대 관련해서 거짓말을 했다고 추궁했나요? 아니면 몰리 홀트의 반응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다고 추궁했나요?
카오미: 몰리 홀트의 반응과 관련해서 거짓말을 한다는 추궁을 받았고, 입양 절차와 정책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 취급을 받았어요. 사실 그러한 문제에 있어서 가장 좋은 대응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제 정신적 충격에 대응하려고 하는 일이었습니다. 입양 기관과 제 문제와 관련해서 상담하고 싶어서 찾아간 사람에게 받은 대응을 이해하려고 한 일이었죠. 정의가 없는 듯이 느껴졌어요. 입양 절차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죠.
팟캐스트: 카오미 씨의 반응을 이해해요. 저도 그러한 반응을 많이 보고 느꼈으니까요. 제 친부모님도 어떤 부정적인 일이 일어났어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어요. 제 친가족도 제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였죠. 하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접근이 맞을지도 모르죠. 한국 가족의 관점에서, 입양으로 이득을 본 사람들 처지에서는 맞는 관점일지도 몰라요.
카오미: 그러한 반응 때문에 다시 입양아들과의 교류를 끊고 숨어들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할 수 없고, 입양아 사회와 움직일 때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이야기를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죠.
팟캐스트: 학대의 이야기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법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입양아 대부분은 그러한 폭탄을 가지고 있으므로 공정하지는 않지만,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이야기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골라내야 하죠. 생존자의 정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일 중 하나입니다.
카오미: 그렇죠. 그때는 확실히 순진했어요. 지금은 페이스북 그룹에 들어가서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일 자체가 문제라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그때는 제가 느꼈던 본능적인 감정에 대한 지지나 이해가 필요했죠. 하지만 원했던 이해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집에서 임종시설 치료를 받아야 했어요. 전립선암을 앓으면서 죽어가고 계셨죠. 큰 고통을 겪어서 모르핀을 맞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집에 갈 때마다 아버지가 사과하시고, 저에게 용서를 구하고 계셨어요. 그 사과를 들을 때마다 복잡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학대는 항상 제가 들고 다니던 목발과 같았고 아직 아버지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죠. 아버지에게 항상 할 이야기가 있었어요. 날 학대하지 않았는지 몰아붙일 수 있었죠. 아버지가 죽어가던 동안, 아버지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래서 더 분노했어요. 아버지가 원한다고 저에게 용서를 요구할 수 있는지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차갑게 나오는 일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죠. 10년 후에 마음이 바뀌어서 용서할 수 있었는데 용서를 못 했다고 하면 후회할지도 몰랐습니다.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죠. 결국, 아버지를 용서했어요. 그래도 잊지 못할 겁니다.
카오미: 제 아버지의 사과가 텅 빈 사과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유가 아버지가 스스로에 대해 변명을 했기 때문이죠. 자기 어머니가 그리 좋게 대우해주지 않았고,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했어요. 어머니로 인해서 고통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과를 하는데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어른이자 부모로서 행동을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 점이 큰 문제였죠. 제가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아프게 한 뒤에 제가 성적으로 학대를 받아서 그랬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좀 과장된 비유이긴 했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팟캐스트: 그게 차이점이죠? 카오미 씨는 그러한 태도로 살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카오미 씨는 남을 상처 입히려고 하지 않죠. 카오미 씨의 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고 끝까지 그러한 결론을 믿었죠. 하지만 카오미 씨는 그러지 않았죠. 그런 결론보다 훨씬 나은 일을 하셨고, 자신을 위한 훌륭한 탐구를 떠나서 더 나은 결론을 냈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자신이 고통받았다고 남이 고통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되지 않을 겁니다. 항상 과거의 특정 사건을 우리가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핑계로 대지 않죠. 우리는 똑같은 일을 반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죄송해요. 약간 제 할 말만 했네요.
카오미: 아뇨. 정확하게 말해주셨어요.
팟캐스트: 저도 이해해요. 제 인생의 문제이기도 했으니까요. 카오미 씨가 결론을 낼 수 있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안타깝네요. 아버지와 제대로 된 담판을 짓지 못한 일도 문제죠. 그 대화에서 아버지가 주권을 잡고 있었다니 더 안타깝죠. 하지만 아버지와 담판을 지은 결론에 만족하시나요?
카오미: 알리시아가 말했지만, 더 나은 결과를 낼 수도 있었겠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결론을 내지는 않았으니까요. 아버지가 암으로 죽어가는 도중이었으니 시간이 없었습니다. 저도 약간 비관적으로 보는 관점이 있는데, 만약에 아버지가 암으로 죽어가지 않았다면 용서를 구했을까요? 우리가 서로 거리가 멀어진 상태는 아니었지만 동시에 친밀한 상태도 아니었죠. 아버지에게서 오랫동안 멀리 거리를 둬왔으니까요. 또 다른 복잡한 문제는 제가 어머니에게 가진 분노였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가진 양면성 때문에 부모님에게 잘못을 묻는 일 자체가 어렵죠. 부모님이 밥을 먹여주고, 양육해줬고, 어머니만의 방식으로 절 사랑한다는 사실도 알아요. 하지만 그 방식이 제 남동생들에 대한 사랑과는 달랐죠. 특히 제 바로 밑 남동생에 대한 사랑과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 둘은 친밀해요. 어머니는 자신이 남동생을 더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한 적이 없죠. 그 사실도 문제였습니다. 최근까지는 그 사실은 어쩔 수 없고, 제가 입양된 가족은 그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했어요. 상담을 받으면서 어머니가 준 차별 자체가 아주 원시적인 상처이고, 그 상처가 치료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래서 아예 어머니와의 연락을 끊어야 했어요.
팟캐스트: 제 다음 질문과도 연관되어 있네요.
카오미: 어머니에게 이 반응은 제가 11살 때 해야 했을 일이지만, 11살 때는 힘도 능력도 없어서 불가능했다고 설명했죠. 하지만 저에게 일어났던 일이 문제였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고 거리를 둬야 했습니다. 제가 고통받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그 학대를 용인한 사람들과 거리를 둬야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학대를 막아 주기를 원했던 일 자체가 과도한 요구였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어머니가 절 사랑해줬다면 저에게 안전한 장소를 제공해줄 수 있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어머니는 절 돕지 않았어요. 어머니도 그 사실을 알고 제가 연락을 끊기 전에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버지가 저를 실망하게 했던 문제에 집중하고 제 문제 대부분이 아버지와 성적 학대와 관련이 있었어요.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무시해서 많은 문제가 생겼다고 보죠. 전 항상 사람들에게 용인되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어머니가 주지 않은 사랑을 추구하고 있어요. 그러한 사랑 추구가 제 친구 관계에서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카오미: 친구에게 요구하기는 너무 큰 감정이니까요. 친구들을 사귀는 일은 좋고, 저도 친한 친구들이 있지만, 모든 사람이 그러한 감정적인 지지를 원치 않고 많은 사람이 그러한 지지를 할 수 있는 단계에 놓여 있지도 않죠. 전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한 감정적인 지지를 원하지만 자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깊은 감정적인 연결을 원하는 이유는 아버지에게서 사람들 사이에 경계를 두는 건강한 방식을 배우지 못해서 그렇죠. 제가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 중 하나이고, 그 문제 해결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 긍정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려고 하고 있고, 치유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확실히 치유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자신을 보호하고 사랑하기 위한 일을 하지 않으면 치료할 수 없죠. 아이일 때 제 주변의 사람들은 절 지켜주거나 사랑해주지 않았어요. 지금 저는 저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을 배워 나가고 있죠. 그 단계 중 하나는 잠시일지도 모르고, 평생일지도 모르지만,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일입니다. 어머니가 80살이 넘으셨고,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죠. 제가 치료를 완료하고 어머니와 화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질문이에요.
팟캐스트: 카오미 씨가 사람들의 경계를 찾기 위한 탐색을 하고 있다는 점이 자랑스럽네요. 많은 입양아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탐구하는 일은 중요한 문제죠.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이러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는 알지만, 입양아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입양아들은 자기 자신의 고통스러운 일과 문제를 무시하고 인식하지 않는 데 익숙해져 있지만, 결국 어떤 방향으로는 드러나기 마련이죠. 카오미 씨가 말했지만, 사람들 간의 관계, 사랑, 기대에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저와 제 자매도 이 문제로 자주 이야기를 나누지만, 직접 이 문제를 언급하고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죠.
카오미: 그렇죠.
팟캐스트: 카오미 씨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서 안타깝지만, 동시에 카오미 씨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 무척이나 기뻐요.
카오미: 현재 제가 좋은 단계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이미 더 강한 기분이 들고, 현재 자주 사람들이 하기 좋아하는 이야기가 자기애와 자기관리지만,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죠. 입양아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자랄 때 받지 못했던 사랑을 주거나,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일을 저도 지속하고 배우고 싶어요. 지금 그러한 일을 하고, 행복을 위해서 건강한 성장 단계를 밟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모든 이야기를 지금까지 공유하지 못했던 이유라고 생각하고요. 감정과 문제를 해결하는 중이고, 한국에서 1년 동안 지내고 온 경험도 치유를 위한 절차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 자체가 맞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저 자신을 다시 고아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상황이 아주 무서운 상황이죠. 현재 남동생 중 하나와 남동생의 가족과는 아직 친밀하게 지내고 있지만, 좋은 어머니가 아니었다고 해도 양어머니와의 관계를 끊는 일 자체가 무서운 일입니다. 제 곁에 어떤 사람이 남아 있는지 생각하게 되죠. 현재 저는 연애 관계를 맺고 있지 않고, 아이들도 없고, 아내나 남편도 없습니다. 여전히 제가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문제예요. 쉽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절 사랑하기 위한 단계 중 하나라고 생각하죠.
팟캐스트: 제가 카오미 씨의 경험 자체, 분노, 이야기를 전부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제 성적 학대와 제 여동생의 성적 학대를 알고 있으니 그러한 접근 방식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저도 가족도, 애인도 없는 독거 상황이지만 저 자신을 돌보려고 생각 중이고 저도 문제 있는 가족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했거든요. 자기 자신을 믿고, 자신이 하려는 일이 맞는다고 생각해야 해요. 그게 우리 상황에 있어서 큰 문제 중 하나죠. 누구도 우리의 선택이 맞았다고 하지 않고, 몰리 홀트가 우리를 위해서 상황을 고쳐주지도 않고, 우리 같이 망가진 사람이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우리 자기 자신만이 우리의 이야기를 알고 우리 자기 자신만이 관리할 수 있죠.
카오미: 고마워요. 알리시아 씨
팟캐스트: 절 믿고 인터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오미 씨.
카오미: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네요.
알리시아: 그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