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2, Episode 14:호정 아우데나에르데

저는 호정 아우데나에르데입니다. 최근에 한국 서울로 이사왔으며, 이곳에 산지는 이제 약 3주 정도 되었네요. 나이는 45살입니다. 저는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로 보내졌습니다. SWS를 통해서 입양되었는데, 서울 지국으로 보내진 후 바로 위탁가정에서 지내게 되었으나 정확한 날짜나 기간에 대해서는 몰라요. 서울에서 지내다가 로마에 살고 있는 플래미쉬 벨기에 출신의 부모님에게 입양되었어요. 아버지는 전자공학 박사셨는데, 제가 입양된 지 6개월 후 교수직 위임을 받아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가족은 벨기에로 가 짐을 정리하고 시민권과 관련된 서류 절차를 완료한 후, 미국 위스콘신주 매디슨으로 가게 됐죠.

그때 몇 살이었죠?

입양되었을 때가 26개월이었어요. 그리고 저희 가족이 11월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저는 2월생이니 만 3살이 되지 않은 때였죠. 이 모든 일들이 만 세 살이 되기 전에 일어났습니다.

외동이었나요?

아니요, 피가 섞이지 않은 오빠가 있어요. 오빠도 입양되었는데, 부모님이 네덜란드에 살 때 입양하셨죠. 저희 부모님은 결혼 후에 바로 외국으로 이주하셨고, 그 후로는 한번도 벨기에에 사신 적이 없어요. 먼저 네덜란드로 간 후, 이탈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죠. 미국에서도 아버지의 직업 특성상 이사를 많이 다녔어요. 모두 큰 대학교가 있는 도시들이었죠. 순서대로 말해 보자면, 매디슨, 메릴랜드, 다시 매디슨(매디슨에서는 몇 번이나 살았어요), 시애틀, 다시 매디슨, 그리고 뉴욕주립대가 있는 뉴팔츠라는 도시였어요. 그 후 저희 부모님은 별거를 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미국 동부 지역에 계속 머무르시고,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저는 다시 매디슨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18살이 되던 해 뉴욕시로 가서 살게 됐죠.

본인이 미국인이라고 느꼈나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집에서는 플래미쉬(벨기에 북부지방에서 쓰이는 언어)를 썼고 집안 분위기도 유럽풍이 강했어요. 저는 한 번도 벨기에에 살았던 경험이 없기 때문에 플래미쉬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지만, 집에서 쓰는 언어는 플래미쉬였죠. 부모님은 저희가 매우 좋은 교육을 받기를 바라셨어요. 여기서 교육이란, 단순히 학업만이 아니라 스포츠, 음악 등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빠랑 저는 다양한 방과 후 활동을 했는데, 학교와 그런 방과 후 활동은 전부 다 미국식이었죠. 집 밖에서는 이렇게 미국 친구들과 어울렸기 때문에, 두 세계를 왔다갔다 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다 어느날 흥미로운 일이 생겼어요. 부모님의 별거 전인지 그 후인지 시기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제가 더 이상 플레미쉬가 아닌 영어만 사용하게 된 거예요. 집에서는 몰라도, 밖에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영어만 쓰고 싶어 했어요. 최근에 알게 된 언어학자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이민 가정의 자녀들에게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자기들 생각에 영향력이 더 크다고 느껴지는 언어가 생기면서 그 언어만 사용하기를 원하게 되죠.”

그러니 저에게 있어서, 그게 영어었던 거예요. 플래미쉬는 다른 언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수의 사람만 사용하는 언어예요. 벨기에 중에서도 일부 지역에서만 사용하죠. 어린 마음에도 플레미쉬가 소수 언어라는 게 느껴졌나 봐요. 그리고 부모님이 비록 유럽인이긴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민자라는 소수자 신분이잖아요. 오빠와 저는 한국인이지만 부모님은 벨기에인이고, 우리는 미국에 살고 있고. 이런 인종 및 문화가 여럿 섞여 있는 환경인데다, 당시는 70년대였으니까 정치적인 면에서도 지금과는 매우 달랐죠. 인종차별도 존재했고요. 그래서 미국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강렬했던 것 같아요. 미국인으로서 그 안에 섞여들고 싶었죠. 현실적으로는 절대 그렇게 될 수 없는데도 말이에요.

그런 정체성과 관련해서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게 매우 힘들었을 것 같아요.

하하, 네, 조금 그랬죠.

이 복잡한 이야기를 매번 반복해야 하는 거잖아요.

맞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웃긴데, 당시에 저는 정체성 문제로 스스로를 참 많이도 괴롭혔어요. 사람들을 만나면 항상, 정말 매번,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을 받거든요. 제일 처음 물어보는 게 그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무슨 답을 듣고 싶어 하는지, 제 인종과 관련된 답을 듣고 싶어 한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시간을 끌면서 정확한 답을 주지 않았어요.

매디슨 출신이라고 이야기했나요?

그때 그때 우리가 살던 곳의 이름을 대곤 했어요. 그럼 상대방은 “사는 곳 말고… 고향은 어디…?” 라고 묻곤 했죠. 제가 국적이 벨기에라고 대답하면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고, 계속 그런 질문들이 이어졌어요. 도대체 당신이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고 묻고 싶을 때까지 말이죠. “제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알고 싶은 건가요? 출생지는…” 그렇지만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는 건 제게 매우 어려운 일이었어요. 진행자님도 저랑 비슷한 나이고 미국으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잘 아시겠지만, 저희 부모님들은 저희가 주변 환경에 잘 동화되기를 바라셨잖아요.

맞아요.

입양 기관에서도 부모의 문화권에 상관없이, 그 문화권에 아이를 동화시키라고 권하고요. 그랬기 때문에,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제가 다른 행성에서 왔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았어요. 너무나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졌으니까요. 벨기에 국적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였어요. 매우 낯설게 느껴졌죠. 벨기에에 대해 잘 모르니까요.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말하자면, 2중으로 이방인인 거잖아요.

맞아요. 게다가 이사를 자주 다녀서 매번 이방인 같았죠. 독특한 이름 때문에 전학한 학교에 첫 등교하는 날은 항상 괴로웠어요. 선생님이 출석을 부를 때마다 앞일이 예상되는 거죠. 게다가 알파벳 순으로 출석을 부르는데 제 성은 A로 시작하잖아요. 선생님이 이름을 보고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서 침묵이 길어질 때면, 제가 먼저 손을 들고 말했어요. “네, 저 여기 있어요.”

병원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죠. 저도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르다 멈칫 하면 그냥 제가 먼저 말하거든요.

네, 맞아요. 그리고 제 이름이 정말 어렵잖아요. 부모님께서 제 한국 이름은 그대로 가져왔는데, 성은 플래미쉬로 되어 있으니까요. 10자가 넘는 데다가 모음은 또 얼마나 많은지…

쉬운 이름으로 바꾸고 싶은 유혹은 없었나요? Hannah나 뭐 다른 것으로요.

당연히 그런 마음이 있었죠. 제 이름은 매우 특이에요. 왜냐하면 부모님이 저의 한국 이름을 그대로 붙여 주셨지만, 플래미쉬를 사용하기 때문에, J(ㅈ)를 Y(이)로 발음해요. 그래서 저는 평생 ‘호영’으로 불렸어요. 어느 시점에서는 ‘호영’이 아닌 ‘호정’이라고 발음하는 거라는 걸 알았지만 ‘호영’이 이미 익숙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계속 썼어요. 그리고 제가 한국에 와서 아빠(친부)를 만났을 때, 아빠는 왜 자꾸 제가 이름을 ‘호영’이라고 하는지 물었죠. 한국에서는 ‘ㅈ’ 과 ‘ㅇ’이 완전 다른 글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저를 호영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호정’이 맞는 거죠. 그리고 아빠가 또 묻더라고요. ‘근데 왜 ‘호정’이야? 내가 지어준 이름은 ‘효정’인데…’

입양인들에게 이름은 언제나 흥미롭긴 하지만 저는 제 이름을 정말 싫어했어요. 한국에서 이름은 두 글자(호와 정)로 나뉘어져 있죠. 그치만 저는 언제부터인가 이름을 한 단어로 붙여서 썼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가끔 저를 ‘호’라고 불렀는데, 특히 힙합이 막 유행하기 시작하던 80년대에 ‘호'(매춘부, 음탕한 여자를 뜻하는 ‘whore’를 힙합에서는 ‘hoe’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음)라는 이름은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창피한 이름이었죠. 누가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고 싶겠어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가게 되었을 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죠. “지금이 이름을 바꾸기 매우 적절한 시기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될 테니, 지금 이름을 바꾸렴.” 그렇지만 스스로 이름을 정한다는 게 정말 쉽지 않더군요.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어야 할까?’ 생각하면서 저는 많은 아이디어를 떠올렸어요. 부모님은 J를 ‘이’로 발음하셨기 때문에, 저를 ‘호영’이라고 불렀지만 어머니가 저를 부르던 별명은 ‘정이(Jungie)’였거든요. 그래서 준(June)이나 주노(Juno)와 같은 이름을 생각했었죠. ‘주노’라는 이름은 꽤 심각하게 고려했었기 때문에 사람들한테 저를 ‘주노’라고 불러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호영’이라는 이름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주노’라고 부를 때는 반응하지 않았죠. ‘호정’도 마찬가지에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사람들이 ‘호정’이라고 부르면 그게 저를 부르는 건지 몰랐죠. 이름이란 참 신기해요.

1999년에 저는 처음으로 인도 마이솔에 요가 수련을 하러 갔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매우 많은 시간을 보냈죠. 2007년이 되어서야 바르셀로나로 옮기게 되었어요. 2001년부터 2006년에는 뉴질랜드 출신의 파트너와 함께였는데, 그 당시 저희는 정해놓은 베이스가 없었어요. 파트너는 뉴질랜드, 저는 인도가 우리의 베이스라고 생각했죠. 인도에서 선생님과 수련을 하고, 여러 나라에서 요가를 가르쳤어요.

궁금한 게 있어요. 인도나 다른 나라에서도 정체성과 관련해서 같은 질문을 받았었나요? 아니면 질문이 조금 달랐나요?

확실히 달랐어요. 제가 요가에 정말 진지하게 임하게 되었을 때, 특히 인도에 가게 되었을 때, 친숙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영적인 연결’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비슷한 느낌이 있었어요. 그리고 재미있는 건, 한국에 처음 왔을 때도 그렇고 매번 한여름에 방문했는데, 한국의 무더위 때문에 인도가 더 친숙하게 느껴진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영적으로 연결된 것도 있고 인도는 저에게 확실히 특별한 면이 있어요. 사람들이 저에게 물어보는 것도 다르고, 커뮤니티도 훨씬 영적이죠. 인도 마이솔에서는 수련생 중 몇 명만 인도인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었어요. 인도인들조차 그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이고요. 서양의 다른 국가에서 자랐거나 인도의 다른 지역에서 마이솔로 수련을 위해 온 경우였죠. 진짜 마이솔 출신 수련생은 극소수였어요. 이렇게 다들 이방인이다 보니 모두가 동등한 입장이었고, 그게 저한테는 기분 좋은 변화였어요.

친부모님에 대해서 얼마나 이야기하실 수 있나요?

궁금하신 점에 대해 다 이야기할 수 있어요.

2007년에 친부모님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되신 거죠?

제가 유럽으로 돌아가게 된 이유부터 말씀드리면 이 질문에 답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단 한 번도 미국 시민권자였던 적이 없어요. 그 당시 벨기에에서는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시민권자가 아니라 영주권자로 미국에 살고 있었죠. 그런데 9/11 테러가 발생하고 나서 이민법이 대폭 바뀌었어요. 이전에 ‘영주권’이라고 하면 평생 유효한 것이었는데, 갑자기 10년이라는 유효기간이 생겨버린 거죠.

권리가 축소된 거네요.

그렇죠. 그리고 10년마다 갱신해야 할 뿐만 아니라 1년에 6개월 이상 미국에 실질적으로 거주해야 한다는 규정도 생겼어요. 아니면 외국에 살더라도 6개월마다 한 번씩 미국에 다시 들어와야 했죠. 그런데 당시 저는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다 보니까 입국 시기를 한 번 놓쳤고, 영주권이 박탈됐죠. 미국에 있어야 할 큰 이유를 느끼지 못했던 데다가, 유럽연합 체제에서는 (벨기에 국적으로) 유럽에 사는 게 수월했어요. 그래서 유럽에서 요가를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됐죠. 당시에 뉴질랜드 파트너와 함께였는데, 그 사람과 함께하는 삶은 항상 여름 속에 사는 것 같았어요. 항상 여름인 시기에 맞춰 남반구와 북반구를 옮겨 다니면서 지냈죠. 그러다 그 사람과 헤어진 후 마드리드에서 요가를 가르치는 일을 맡았어요.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지금까지의 생활과는 완전히 달랐죠. 그리고 당시에 저는 매우 금욕적이고 절제된 삶을 살고 있었어요. 이별 후유증도 심하게 앓았는데, 저에게 이별은 항상 어려운 일이에요. 삶의 여러 가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명상을 많이 했어요. 당시 제가 품었던 질문 중 하나도 헤어짐, 이별에 대한 것이었어요. 왜 저는 항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지 하는 질문이요. 저는 양부모님과도, 입양된 오빠와도 관계가 원활하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제 생각보다 훨씬 뿌리 깊은 원인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겪는 정체성의 문제가 입양되었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불현듯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 과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 거죠. 입양이 아니라 친부모와의 이별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말이에요.

당시 제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생일이 가까워지면 항상 ‘나의 뿌리는 어디이고 부모님은 누구지?’ 같은 질문들이 떠오르곤 하거든요. 입양된 사람들이 자신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면서 던지는 온갖 질문들이요. 그래서 인터넷에 저의 입양을 주선했던 기관인 SWS를 검색했어요. 웹페이지는 전부 한글로 되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작게 영어로 ‘입양 후 서비스’라고 써있더군요. 클릭했더니 이름과 생년월일, 문의글을 남길 수 있는 창이 떴어요. 16살에 독립할 때 양부모님께서 입양 관련 서류를 주셨기 때문에, 저는 그 서류에 있는 정보를 입력했어요. 저의 이름, 이탈리아로 입양되었다는 것, 양부모님이 벨기에 출신이라는 것, 입양 서류 번호, 그리고 친아버지의 이름….

친아버지의 이름도 알고 계셨어요?

네, 서류에 이름이 있었어요. 제가 갖고 있던 정보를 모두 입력한 후, 입양기관에 있는 정보를 모두 저에게 알려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한 달 가까이 답변을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시 한번 문의글을 남겼죠. 한 달 전 쯤 글을 남겼는데, 혹시 받아보지 못했냐고 말이죠. 그러자 바로 연락이 왔어요.

“보내주신 정보 잘 받았습니다. 신원 확인을 위해 본인 신분증 2종류를 제출해 주시면, 관련 서류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신분증을 보냈더니 바로 이렇게 답변이 오더군요.

“신원을 확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입양 서류 전체를 찾을 수 있었고, 친부모의 소재를 파악한 후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제 생일이 2월 18일인데, 처음 이메일을 보낸 게 1월이었으니까 답변을 받았을 때는 제 생일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아쉬탕가 요가는 달의 움직임, 음력에 따라 수련을 하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해요. 입양기관에서 다시 연락을 해 온 게 4월의 신월이었어요  2개월 만에 다시 연락이 온 것이니, 매우 빠른 편이었죠.

친아버지뿐만 아니라 친어머니도 찾았다고 했는데, 저에게는 정말 뜻밖의 일이었죠. 왜냐하면, 입양 서류에 친어머니 이름은 없었거든요. 보통은 입양 서류에 친부모에 대한 설명이 두세 줄 정도고, 그것조차 없는 경우도 있잖아요. 제 서류에는 설명이 3줄이었는데, 이런 내용이었어요. “친모가 아이를 1년 동안 키웠지만 그 후 친부에게 아이를 맡김.” 그래서 저는 자라면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입양 서류를 본 후부터, 친어머니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아이를 친부에게 맡기고 떠난 사람이라고 하니, 의식적으로 친모를 전혀 떠올리지 않았죠. 이름도 몰랐기 때문에 아예 제 머릿속에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친부모님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후, 몇 년 동안 가만히 계셨던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당시 저는 너무 놀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입양기관에 답장을 써서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자세히 알려달라고 했죠. 보통은 편지를 주고받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당연히 언어가 안 통할 테니 입양기관에서 편지를 번역해주겠다고 했어요. 아, 그리고 친부모를 찾았다고 연락하면서 몇 가지 정보를 더 알려줬었어요. 친아버지는 저와 연락할 의향이 있다는 것, 친부모님은 서로 헤어진 상태라는 것 등이요. 제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은 결혼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미혼모였던 거죠. 그리고 또 알려준 정보는, 어머니가 10년 전에 뇌졸중을 앓았다는 것이었어요. 당시가 2007년이었으니까, 뇌졸중이 일어난 건 1997년 즈음이었겠죠. 정확한 날짜는 알려주지 않았어요.

친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전신마비가 와서 말을 못 한다고 했어요. 엄청난 충격이었죠. 이런 상황 때문에 친모 대신 외삼촌이 저와 연락할 의향이 있지만, 친어머니 상태를 고려할 때 어머니가 저를 만나는 건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다고 했죠. 그래서 엄마 쪽으로는 섣불리 행동을 취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아빠가 저에게 먼저 편지를 썼는데, 거기에 제가 답장을 하면서 아빠와는 자연스럽게 연락을 주고받았어요. 편지를 세 번쯤 주고받고 전화번호도 교환했죠. 그때 저는 격변의 시기에 있었어요. 막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로 옮겨서 아쉬탕가 요가 스튜디오를 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죠. 당시에는 스마트폰이 아직 나오기 전이니까, 노키아 폴더폰을 사용했는데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온 거예요. 당시 국제통화는 품질이 좋지 않았잖아요? 듣기만 해도 거리감이 느껴지고, 목소리가 울렸죠. 상대방이 “여보세요? 네 아빠다.”라고 하는데 너무 깜짝 놀라서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어요. 아빠가 영어를 조금 할 줄 아셨는데, “스페인 간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때 제일 처음 든 생각은 ‘맙소사, 나는 준비가 안 됐는데!’였어요. 그래서 제가 입양기관에 편지를 쓸 테니까 그쪽이랑 먼저 이야기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입양기관에 편지를 썼죠. ‘아빠가 오신다는데, 저는 시간이 더 필요해요. 이사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어요.’ 당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던 데다가 친아버지를 만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였어요. 완벽히 준비가 갖춰진 상태에서 만나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일이 너무 빨리 진행된다고 느꼈거든요. 그래서 비행기 표를 사기 전에 저에게 미리 말해달라고, 시간을 좀 달라고 입양기관을 통해 전달했어요. 그러고 나서는 아빠도, 저도 약간 멈췄던 것 같아요. 한 걸음 물러선 거죠. 당시 저는 요가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면서 바르셀로나에 자리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어요. 그 후로 한두 번쯤 편지가 더 온 후 연락이 끊겼어요. 그때가 2007년 여름이었고, 저는 2009년 1월에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면서 그 사람에게 저의 이런 이야기를 조금씩 하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 그 사람이 “네가 한국에 가는 게 좋겠어.”라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친아버지가 위암이 있었는데 좀 좋아지셨거든요. 그러니 친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만나 뵙는 게 어떻냐는 거죠. 저는 그냥 넘기려고 했는데, 그게 제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라며 계속 권했어요.

무엇이 두려웠나요? 왜 망설이신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망설이길 잘한 것 같아요. 엄청난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게 아닐까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가 망설였던 건 사실이에요. 저를 중심으로 한 엄청난 비밀을 발견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아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었나요?

네. 정확한 실체는 알 수 없었지만, 전혀 모르는 것을 마주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어요.

한국에 가서 친부모님을 만나는 이야기를 파트너와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면서, SWS에 연락해 “한국에 갈 예정이며 친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제가 특별히 ‘아빠’를 만나고 싶다고 한 건 그동안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이에요. ‘아직 살아계신다면’ 만나고 싶다고 했죠. 왜냐하면 연락을 주고받은 지 이미 5년이 지났기 때문에 아빠의 건강 상태에 대해 확신할 수가 없었거든요. 어쨌든 ‘한국에 갈 예정’이라고 이야기했죠.  

그랬더니 얼마 있다가 SWS에서 연락이 와서, 아빠가 중간에 이사를 해서 소재 파악이 조금 힘들었지만 결국엔 아빠를 다시 찾았고, 저를 만나실 의향이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알겠다, 8월에 한국에 가겠다.”라고 답했죠. 그리고 재미있는 건, 제 파트너인 브루노와 함께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 않는 곳을 많이 갔었거든요. 사람들이 쉽게 갈 수 없는 외진 곳일수록 더 좋다는 게 저희 생각이었죠. 브루노는 저와 함께 한국에 오기 위해 8월을 통째로 휴가 냈는데, 스페인의 일반적인 직장인 생활을 하는 브루노에게 한 달은 엄청난 시간이었죠. 그래서 이왕 한국으로 갈 거면 북한도 가보는 게 어떻냐고 브루노가 제안했어요. 그래서 제가 입양 후 처음으로 다시 밟았던 한국 땅은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었어요. 먼저 북한 여행을 하고 아빠를 만나러 남한으로 왔죠.

북한 여행이 가능하기는 한가요? 여행사를 통해서 간 건가요?

저는 벨기에 국적을, 브루노는 스페인 국적을 가지고 있어요. 스페인 여행사를 통해 투어를 신청했고, 일행 규모는 상관없었어요. 2명이어도 되고 심지어 한 명이어도 가능하죠.

벨기에 국적이었기 때문에 미국인보다 북한 여행이 쉬웠던 거군요.

확실히 그래요. 제가 알기로 지금은 미국인의 북한 여행이 완전히 금지되었을 거예요. 어쨌든 저희는 북한을 열흘 동안 여행했어요. 신기한 건, 아빠의 고향이 북한이라는 거예요. 입양 서류에는 아빠가 중국 출신이라고 기재되어 있어서 당시에는 몰랐어요. 중국 만주가 아빠 고향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제 생각에는 아마 한때 북한에 속했던 지역 출신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까 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 제가 반은 중국인이라고 생각했죠.

북한 출신이라고 하면 입양이 어려울까 봐요?

아마도요. 아무래도 입양기관에서는 친부가 북한 출신이라고 밝히지 않을 것 같아요. 아무튼 북한 여행은 정말 흥미로웠어요. 특히 최근 남북 대화가 활발히 일어나고 있잖아요. 통일에 대한 논의는 항상 있었지만, 현재 정권에서는 논의가 더 활발한 것 같아요. 하지만 사람들이 북한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다면 어떨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통일에 대한 논의가 있기는 하겠지만… 북한은 정말 다른 세상이거든요.

만약 남한을 먼저 방문한 후 북한에 갔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해요. 북한은, 뭐랄까, 타임캡슐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는 느낌이었어요. 여행자는 북한이 공개를 허용하는 것만 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말이죠. 비행기에서 내린 순간부터 항상 가이드 2명과 운전사가 저희와 함께 다녔어요. 가이드가 2명인 이유는 너무 많은 정보를 발설하지 않도록 서로 감시하기 위한 거라고 해요. 핸드폰은 공항에 맡겨야 하고, 여행하는 내내, 호텔 방에 있는 때만 빼고는 가이드 2명이 항상 저희를 따라다녔어요. 심지어 호텔에서도 로비에서는 가이드와 함께 있어야 했죠. 저희랑 함께 앉아서 대화를 하거나 식사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매 순간 감시당하는 거예요.

북한은 매력적이면서도 이상하고 초현실적인 곳이었어요. 매 순간 의심하게 되거든요. 하루는 가이드가 저희를 공원에 데려갔는데, 사람들이 소풍을 즐기고 있더라고요. 그러면 ‘이건 그냥 쇼가 아닐까? 설정이 아닐까?’ 이런 의문이 드는 거죠. 저희는 가이드가 보여주는 것만 볼 수 있으니까요. 정해진 식당에서만 식사를 할 수 있고, 정해진 장소만 방문할 수 있어요. 저희가 북한 여행 일정을 열흘이나 잡은 이유는, 아주 외진 곳에 있는 산악지대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장마 때문에 홍수로 다리가 유실되어서 갈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게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그냥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는 수밖에요. 북한은 매력적이면서 확실히 이상한 곳이었지만, 동시에 매우 인간적으로 느껴졌어요. 북한 주민들도 사람이잖아요. 여행하면서 가정집을 방문하고 사람들과 일대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사람들도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일 뿐, 그냥 사람이더라고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북한에서 남한으로 바로 올 수는 없어요. 그래서 저희는 베이징을 경유해서 서울로 왔죠. 아직 6~7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북한에 있다가 기술의 최첨단에 있는 한국에 오니… SWS는 강남에 있는데, 북한과 극명한 대비를 이뤘죠. 저는 인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개발도상국에 익숙한 편이었어요. 그리고 한국이 가난했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요. 그래서 한국이 이제는 많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발전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북한을 보고 온 직후라 그런지….    

충격이 컸군요.

매우 충격적이었어요. 북한에서 받은 것과는 정반대의 충격이었죠.

서울의 SWS 지사를 방문한 후 대구로 내려갔어요. 다른 입양기관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SWS는 처음 제가 연락했을 때부터 항상 투명하게 정보를 공유했었어요. 아빠가 직접 저를 입양 보낸 것이기 때문에 제 서류가 더 잘 갖춰진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저희 오빠는 길거리의 박스에 버려진 채 발견되었기 때문에 아무런 정보가 없거든요. 그런데 저의 경우는, 아버지가 직접 저를 입양기관에 맡기면서 이름도 알려줬기 때문에 상황이 달랐어요. 그리고 저한테 입양 서류를 보여줬을 때, 지금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제가 운이 좋았을 수도 있는데, 방에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저 혼자 서류를 볼 수 있게 해줬어요. 서류 대부분이 한글로 되어 있어서 제가 읽을 수는 없었지만, 이런 일은 아주 예외적인 거예요. 어릴 때는 오빠 말고는 주변에 입양인이 거의 없었지만, 최근에 IKAA(세계 한인 입양인 협회) 모임에 참여해서 입양인들의 다양한 사연을 접했는데, 입양기관에서 정보를 숨긴다든가 서류를 보여주지 않거나 일부만 보여주는 등 제가 했던 경험과는 완전 다른 사례가 아주 많더라고요.

아무튼 대구로 내려가서 SWS 대구 지사에서 아빠를 만났어요. 방에 저랑 브루노가 들어갔는데, 거기에 아빠와 나이 든 여성, 어린 아이, 그리고 다른 여자 2명이 더 있었어요. 아빠가 저를 처음 보자마자 한 말은 “많이 컸구나!”였어요. (웃음) 저를 아기 때 보고 그 후에 처음 본 것인데다 제가 아빠보다 키가 컸거든요. 그러니까 많이 큰 게 맞죠. 그렇게 아빠를 만났는데 이상하게도 저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어요. 친아버지란 사실 말고는 완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아빠는 제가 어릴 적에 대한 기억이 아주 많았거든요. 아빠 입장에서는 그 만남이 감동적이었겠죠. 같이 있던 나이 든 여성은 아빠의 형수님이었어요.

다른 2명의 여성 중 한 명은 통역사였고, 다른 한 명은 SWS 직원이었고요. 아빠와 저의 만남을 보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어요. 그런데 저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어요. 그게 충격 때문인지 트라우마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거죠. 어쨌든 인사를 나눈 후 본격적으로 앉아서 서로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입양 서류에 있던 정보를 바탕으로 통역사를 통해 질문을 했는데, 아빠가 하는 대답은 서류에 있는 거랑 완전히 다른 거예요. 어느 시점에서는 제가 브루노에게 “이 사람, 우리 아빠가 아닌 것 같아.”라고 입 모양으로 말할 정도였죠.

(웃음) 이름이나 주민등록번호는 서류와 일치하는데, 중국 만주 출신이 아니라 고향이 북한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아빠가 의대생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실상은 전혀 달랐어요

대학생이 아니었나요?

대학생이었는데 막 제대한 직후였다고 해요. 이런 식으로 제가 입양 서류에서 본 정보와는 많이 달랐어요. 게다가 제가 아빠를 닮지 않았기 때문에, 친딸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죠. 하지만 아빠는 제가 친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저희 아빠가 맞았어요.

그러면 엄마를 닮았나요?

네, 엄마를 더 많이 닮았어요. 재미있는 점은, 제가 그동안 인도를 포함해 여름인 곳에서만 지냈기 때문에 피부가 많이 까맸거든요. 머리도 아주 길었고요. 제가 요가를 수련하면서 인도에서 오래 지냈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아빠의 형수님 되시는 분이 제 손을 어루만졌던가, 뺨을 쓰다듬으셨던가… 아무튼 저를 보면서 “그동안 고생을 좀 한 것 같구나.”라고 하시더군요. (웃음)

피부가 까매서요?

네, 제가 약간 히피처럼 보였겠죠. 그리고 하는 말이 “너희 엄마는 정말 피부가 하얬단다.” 마치 피부가 하얀 것이 좋은 것처럼요. 계속해서 하얀 피부 이야기를 하는데(웃음), 저는 전혀 그렇지 않았죠. 피부색은 아빠를 더 닮았어요. 아빠는 텃밭을 가꾸셔서 햇빛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피부가 아주 까맣거든요. 그러니 제가 아빠를 닮은 유일한 점이라면 피부색이었어요. 그리고 엄마와는…

결국 엄마를 만났나요?

네, 만났어요. 그 이야기를 하자면… 이 인터뷰 며칠이나 할 수 있죠? (웃음) 농담이고요. 결국 엄마를 만났어요. 입양인들은 대부분 주변에 나와 닮은 사람이 없는 환경에서 평생 살게 되잖아요?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난다는 건 적응이 필요한 일이더군요. 당시 한국을 방문해서 찍은 사진을 계속 들여다볼수록 이제는 닮은 점이 보여요. 하지만 당시엔 닮았다고 못 느꼈죠. 닮은 사람이 없는 것에 너무 익숙해지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서 나와 닮은 점을 알아차리는 게 정말 어려워요.

아빠와의 첫 만남으로 다시 돌아가자면, 그 자리에서 아빠가 결혼해서 자녀가 3명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데 아빠의 가족 중 누구도 저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어요. 아빠는 결혼 전에 자식이 한 명 있었으며 입양 보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입양인과 친부모의 만남에서는 모든 의사소통이 통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잖아요. 대화 내용이 얼마나 충실하게 통역되는지도 알기 어렵죠.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는 아빠가 한참을 이야기했는데 통역은 몇 마디밖에 안 해주는 거예요. 제가 “진짜 그게 다예요?”라고 물을 정도였죠.

맞아요, 막 20분 동안 이야기했는데 말이죠. (웃음)

네, 분명히 몇 마디보다는 많이 말한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런데 제가 그렇게 물으면 “네, 그게 다예요.”라는 답이 돌아오니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그만큼 통역사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하니까요. 어쨌든 그렇게 대화가 오가는 중에 아빠의 결혼 소식을 전하면서 통역사가 하는 말이, 아빠의 가족이 저에 대해 모르고, 알아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알면 안 된다고요?”라고 제가 반문했더니, 아빠가 결혼하기 위해서는 혼외자식이 있어서는 안 되니 아이는 없는 것으로 해야 했다고 대답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전 그저 알겠다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아빠는 저랑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정말 노력했어요. 저희가 한국에 있는 동안 총 4일을 아빠와 함께 보냈어요. 연속해서 4일을 만난 건 아니었는데, 아빠에겐 다른 자식 3명이 있었고 그중 둘은 결혼해서 아이가 한 명씩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빠가 이틀 동안은 손주를 돌보러 가야 했어요. 하지만 저희를 만날 때는 아빠가 가족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어요. 아침 8시부터 저희가 묵는 호텔로 데리러 와서, 하루 종일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말이죠. 하루는 저희를 부산에 데려가서 자갈치 시장이랑 이것저것 구경도 시켜주셨어요. 그리고는 저녁 8시가 되어서야 다시 호텔로 저희를 데려다주셨죠. 아빠는 우리가 가족이라고 생각해서 그랬겠지만, 호텔 방까지 따라 들어와서 객실 슬리퍼를 신고 의자에 앉곤 했어요. 그러면 저는 ‘와, 지금까지 온종일 같이 있었는데, 집에는 도대체 언제 가시는 거지?’ 싶은 생각이 드는 거죠. (웃음)

그리고 아빠와 SWS에서 처음 만났을 때를 제외하곤 통역사 없이 만났어요. 많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게, 서로 함께 있다는 게 중요했죠. 아빠가 영어를 조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손짓, 발짓으로 어떻게든 의사소통은 가능했어요. 아빠가 정말 노력을 많이 하셨죠. 브루노와 제가 해인사에서 며칠 동안 템플 스테이를 했는데, 아빠가 해인사까지 데려다주시고 마지막 날에 데리러도 오셨어요. 그리고 중간에 갑자기 찾아오기도 하셨죠. “그냥 오후에 시간이 비어서 너를 보러 왔어.”라고 하시더군요. 확실히 저를 아끼신다는 게 느껴졌어요.

통역사가 함께 있었던 첫 만남에서 아빠는 저에게 큰 죄책감을 갖고 있다고 했어요. 그런 죄책감 때문에 결국 위암이 온 거라고 말이죠. 아빠가 엄마에 대한 질문도 많이 했어요. 지금 어디 있는지 같은 걸 물어봤죠. 아직 엄마를 만나지 못했고, 어디 사시는지 모르고, 엄마가 뇌졸중을 앓았다는 이야기를 해드렸는데… 뭐랄까, 아직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 같았어요. 아빠가 하는 질문이나, 끈질기게 계속 물어보는 점에서요. 신기한 건, 두 분 모두 아직 대구에 사신다는 거예요. 같은 도시에 계신 거죠.

첫 번째 만남에서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반면, 대구역에서 아빠와 헤어지면서는 달랐어요. 제가 울었거든요. 헤어짐에 유난히 서툰 탓인 것 같아요. 무언가가 제 감정을 건드린 거죠. 지난 며칠을 함께 보낸데다 언제 아빠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여러 이유로 눈물이 났어요. 당시로서는 제가 한국에 다시 오게 될지, 앞일을 몰랐으니까요. 바르셀로나에서 요가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었고 매우 바쁘던 시기였어요. 요가 티칭에 대한 책임감도 매우 컸죠. 한국에 언제 다시 올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헤어지는 거였으니까 무척 가슴이 아팠죠. 그렇게 저희는 바르셀로나로 돌아왔고, 그 후에는 제가 먼저 아빠에게 연락하지 않았어요. 가족들에게 저를 숨기고 싶은 아빠의 마음을 존중한 거죠. 진행자님이나 제가 입양을 갔던 그 시기에는 지금과 달라서 모든 게 비밀리에 진행되었잖아요. 저희 어머니(입양모)가 이렇게 말해주셨거든요. 저랑 오빠를 입양하면서 ‘아이를 절대 한국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한국과의 모든 인연을 끊겠다’라는 내용의 서약서를 작성했어야 했다고요.

정말요?

네, 어머니 말씀은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친부모님을 찾았을 때 어머니가 많이 놀라셨어요. 그렇게나 비밀로 치부되었는데 어떻게 친부모를 찾았는지 모르겠다는 거죠. 제 느낌이지만, 마냥 기뻐하시지만은 않았어요. 어쨌든 당시에는 입양이 매우 비밀스럽게 진행되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아이를 입양 보내면서 본인 이름을 밝혔잖아요. 언젠가 호정씨와 다시 만나게 될 거라 기대하시지 않았을까요?

그 부분은 잘 모르겠어요. 이름을 기록에 남기시긴 했지만, 친권 포기 각서를 쓰셨으니까요. 여기서 또 신기한 점은, 제가 SWS에서 본 입양 서류에 이 포기 각서도 있었는데, 저는 사실 이 서류를 보면 안 되는 거였어요. 방에 혼자 앉아서 서류를 보다가 담당 직원이 들어오길래 제가 그 서류를 가리키며 “이건 무슨 내용이에요?”라고 물었어요. 그 페이지만 좀 달라 보였거든요. 그랬더니 직원이 당황하면서 “그 서류는 보시면 안 되는 건데…”라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입양 과정에서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 일종의 서약을 하는 거예요. 아빠는 아버지로서 저에 대한 모든 친권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쓰고, 양부모님은 한국과 연락을 모두 끊겠다고 서약한 거죠.

처음 아빠를 만나고 온 후 6개월 정도는 아빠가 저에게 연락하시다가 점점 연락이 뜸해졌어요. 2012년 8월에 첫 만남이 있었는데, 다시 아빠한테서 연락이 온 건 2014년 10월이었으니까 2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였죠. 당시 저는 인도에서 수련하고 있었는데, 아빠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병원’이라는 말은 알 수 있었어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죠. 인도 마이솔의 수련생들 사이에는 매우 국제적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어요. 그곳에 한국인도 있었고 재미교포도 함께 수련을 하고 있었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아빠와 영상통화를 했고, 암이 재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전이가 일어나서 뇌종양이 생겼고, 뇌수술을 2번이나 했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종양이 더 퍼져 뇌 기능을 상실하기 전에 저와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으니 한국으로 올 수 있냐고 물으셨어요. 앞으로 증상이 얼마나 악화될지 의사도 알 수 없었거든요. 당시 브루노는 바르셀로나에 있었는데, 제가 전화를 걸어서 상황을 설명하고 아빠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한국에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어요. 브루노가 흔쾌히 함께 가주겠다고 했죠. 저는 작별 인사를 위해 가는 것이라면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한국 방문일 테니 엄마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다고 말했어요.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연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요. 브루노는 저를 적극 지지해줬어요. 그래서 저는 SWS에 다시 연락해서, “아빠의 연락을 받고 한국에 다시 가려고 한다,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라고 했죠. 2007년에 SWS의 연락을 받았을 때, 엄마가 뇌졸중을 앓았지만 외삼촌은 저와 만날 의향이 있다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엄마쪽 가족을 만날 수 있게 연결해 달라고 부탁했죠. 며칠 후 답변이 왔는데, 외삼촌은 저를 만날 의향이 있지만, 조건이 있다고 하더군요. 제가 친아버지나 그쪽 가족을 아직 만나지 않았다면, 이라는 조건이요. 친부를 이미 만났다면, 저와 만나지 않겠다는 거였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뭔가 사연이 있다는 걸 직감했죠. 제가 친아버지를 만난 건 이미 SWS도 아는 사실이었지만, 외삼촌에게는 제가 아빠를 만난 적이 없고, 삼촌을 만나 엄마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고 전해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답변이 와서, 삼촌이 저를 만나는 데는 동의했지만, 엄마의 건강 상태 때문에 아직 제가 엄마를 만나는 건 안 된다고 했어요. 삼촌을 설득하고 싶다고 SWS에 이야기했더니, 그건 제가 하기 나름이니까 우선 외삼촌을 만나서 뭐든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외삼촌을 만나기 전에 알아둘 것이 하나 더 있다면서 SWS에서 이메일이 왔는데, 외삼촌이 시각장애인이라고 거예요. ‘아, 시각장애인이라니…’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당시에는 정확히 깨닫지 못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제가 SWS에 답장을 써서, 외삼촌에게 엄마 사진을 가져올 수 있는지 물어봐 달라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에 사진이 거의 없을 거다”라는 답변이 왔어요(웃음). 그때야 아차 싶었죠.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사진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제야 많은 것들이 와닿기 시작했어요. 외삼촌은 제가 엄마를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결정권을 쥔 사람인데, 앞이 안 보이니 제가 엄마를 닮았는지에 이야기해 줄 수 없고… 매우 묘하고 복잡한 기분이 들었죠.

외삼촌이 호정씨를 직접 본다면 설득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군요?

맞아요. 하지만 어쨌든 외삼촌을 만나고 싶다고 SWS에 답장을 썼어요. 그리고 도착 첫날, 아니면 둘째 날에 삼촌과 만나는 일정을 잡았을 거예요. 방문 일정이 열흘밖에 안 됐고, 아빠와도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만나야 했으니 일정이 빡빡했어요. 그렇게 만날 약속을 잡았는데, 출발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 아빠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어요. “네가 한국에 오더라도 못 만날 거다”라고요.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지 정말 당황스러웠죠. 그래서 입양기관에 이메일을 써서 “방금 이런 문자를 받았다, 이번 여행 자체가 임종 전에 아빠를 만나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한 것인데, 이게 무슨 일이냐”라고 물었죠. 게다가 이미 아빠를 만났기 때문에, 작별 인사를 하는 것도 저한테는 매우 중요했어요. 기분이 정말 이상하고, 다시 아빠에게 버림받는 기분이었죠. SWS에 연락을 취해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알아봐 줄 수 있냐고 부탁했어요.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아빠 가족 중에 저에 대해 알게 된 사람이 있는 것 같고, 제가 아빠와 연락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죠. 제가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지만 어쨌든 한국에 갈 예정이며, 아빠를 만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했더니, SWS에서는 “최선을 다해보겠다”라는 답을 주었죠. 그렇게 아빠를 다시 만나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브루노가 “아빠와의 첫 만남에 같이 나왔던 그 여자아이한테 편지를 써봐”라고 했었거든요. 어떻게 된 일이냐면, 처음 아빠를 만나는 자리에 형수님이 같이 나왔다고 했잖아요? 그 형수님이 본인 손녀도 같이 데려왔었어요. 그런데 당시 통역사가 특정 단어가 영어로 생각나지 않아서 통역을 못 하고 있을 때…

아이가 영어를 더 잘했던 건가요?

네, 그 단어를 영어로 통역해줬죠. 그 만남에서 그때까지 아이의 존재를 거의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가 제 눈에 띈 거예요. 누구냐고 물었더니, “이분이 할머니이고, 이분은 할머니의 시동생”이라고 설명하면서, 자기는 미국에서 태어나서 일리노이에 사는데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에 잠깐 들어와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이번 방학은 진짜 최고예요. 저한테 숨겨진 육촌 고모가 있었다니!”라고 하는 거예요. 상황을 설명하자면, 아빠에게 형님이 계신데 그분은 상당히 부유한 편이어서 자식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고, 그중 한 명이 미국 시카고에 살면서 대형 건축회사에 다니고 있었어요. 이 여자아이는 그 딸이었고요. 물론 저는 이런 상황에 대해 당시에 전혀 몰랐죠.

그래서 그 아이가 첫 만남에 함께했군요…

네, 그리고 헤어지면서 그 아이랑 이메일 주소를 주고받았어요. 그렇지만 브루노가 그 제안을 했을 때,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나는 숨겨야 하는 존재라고. 그 아이가 가족들에게 내 얘기를 했을 리 없어.”라고 말했죠. 하지만 브루노는 “내가 아이 셋을 둔 아빠로서 장담하는데, 걔는 분명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부모님께 바로 말했을 거야”라고 하더군요. 저는 비밀을 끝까지 지키는 입이 무거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 아이도 비밀을 지켰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어쨌든 그 아이에게 이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을 받지 못한 채 서울에 도착했죠. 아빠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애나(그 여자아이)한테 연락도 없는 상태로요. 그리고 외삼촌을 만나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너무나 가슴 아픈 이야기였어요. 외삼촌과의 만남은 아빠를 만났을 때와 완전히 달랐어요. 일단 입양기관 사무실에서 만난 게 아니었거든요. 저희가 묵는 호텔로 외삼촌이 찾아왔고, SWS에서 제공하는 통역 서비스도 없었어요. 그때가 크리스마스와 새해 연휴가 있는 시기여서 모두가 휴가 중이었거든요. 그래도 다행이었던 게, 브루노의 아들이 런던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당시 룸메이트가 한국인이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한테 연락해서 지금 도움이 절실한 상황인데 통역을 도와줄 수 있는지 물었고, 도움을 받게 됐죠. 외삼촌은 아들, 누님과 함께 오셨어요. 시각장애인이니까 아들이 옆에서 길 안내를 도왔죠. 외삼촌과의 만남은 아빠와의 만남과 다르게 굉장히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였어요.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이, 처음 만나서 자리에 앉기 전에 외삼촌이 발을 헛디디셨어요. 제가 붙잡아드리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제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시는 거예요. 저랑은 손끝도 닿고 싶지 않다는 듯한 느낌이었죠.

아무튼 자리에 앉아 외삼촌은 당신이 아시는 범위 내에서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앞을 못 보시는 분이니까, 아무래도 정보가 제한적이었죠. 저는 외삼촌이 어쩌다 시력을 잃으셨는지에 관해서 묻지 않았어요. 한국에서는 어른에게 그런 이야기를 묻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기도 하고, 아주 개인적인 부분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외삼촌이 하시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기만 했어요. 그러다 중간중간 엄마에 관한 질문을 몇 개 했던 것 같긴 해요. 엄마는 8남매 중 한 명이었는데, 그중 2명은 일찍 죽어서 6남매로 자랐고, 지금은 두 분이 더 돌아가셔서 4남매라고 해요. 그 자리에 함께 나오셨던 큰이모, 외삼촌, 엄마, 그리고 그 아래로 외삼촌이 한 명 더 있는 거죠. 그리고 4남매는 이복 남매였어요. 저희 엄마가 5살 때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외할아버지가 재혼을 하시고 작은 외삼촌을 낳은 거죠. 그리고 그전에도 외할아버지께서 재혼을 몇 번 하셨던 것 같은데, 왜냐하면 엄마와 그 앞을 볼 수 없는 외삼촌만 부모님이 같았거든요.

엄마가 5살 때 두 분의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외할아버지는 재혼하신 후 자식을 한 명 더 낳았지만, 엄마가 7살 때 외할아버지도 돌아가시게 돼요. 그러니 엄마는 새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거죠. 새어머니 입장에서는 남편의 전처 자식을 갑자기 떠맡게 됐고, 한 명은 앞을 못 보는 아이니까, 그 생활이 쉽지는 않았겠죠. 그리고 시각장애인인 외삼촌이 집안의 가장 노릇을 했어요. 가부장제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가 가장이 되잖아요. 그러니 나이가 가장 많았던 삼촌이 가족을 책임져야 했었겠죠. 원래 엄마네 가족은 대구 근처 지방에 살고 있었는데, 삼촌이 대구에 있는 시각장애인 특수대학에 다니게 되면서 엄마와 함께 대구로 이사를 했어요.

당시 두 분은 아주 작은 방에서 함께 지냈고, 엄마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그러다 아빠를 만난 거예요. 엄마가 외삼촌에게 임신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삼촌은 앞이 보이지 않으니 엄마가 임신한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해요. 그러다 어느 날 방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렸고, 그때서야 엄마가 아이를 낳았다고 털어놓았다고 해요. 저는 이 이야기가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한 방에서 함께 지내는 가족인데, 어떻게 임신과 출산 사실을 오빠에게조차 이야기를 못 할 수 있죠? 임신 기간 내내, 또 혼자 아이를 낳으면서 엄마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생각하면 정말 충격적이고 마음이 아프죠.

어쨌든, 엄마가 아빠에게 저를 맡겼던 이유는 가난 때문이었어요. 부모도 없는 매우 가난한 처지였으니까요. 저희 부모님은 사회 계층이 완전 달랐던 거죠. 외삼촌 말로는, 그런 집안 차이 때문에 아빠네 가족이 두 분의 결혼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거래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제가 아빠와 연락하는 사이라면 저를 만나고 싶지 않다던 외삼촌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아빠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컸던 거죠. 외삼촌이 보기에 엄마와 결혼하지 않은 아빠의 행동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고, 또 삼촌은 아빠가 저를 입양 보낸 사실도 전혀 몰랐어요. 외삼촌과 엄마가 저를 아빠에게 보냈던 이유는, 물론 엄마가 미혼모였던 것도 있지만, 아빠네 집이 부자였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자식이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를 따라가잖아요. 그러니 엄마나 외삼촌은 제가 아빠한테 가면 더 나은 삶을 살거라 생각하고 저를 맡긴 후 모든 연락을 끊었대요. 아빠를 두 번 다시 보지 않았죠. 그리고 두 분은 제가 한국에서, 아빠네 가족 손에 길러질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당시 아빠가 형님분 내외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도 아이가 있으니…

그 집에서 잘 키워줄 거라고 생각했던 거군요.

네, 그리고 아빠한테는 남동생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죠. 제 생각에 삼촌은 제가 해외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에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직접적으로 표현하신 건 아니지만, 외삼촌이 아빠와 그 가족을 미워한다는 느낌은 확실히 있었어요. 외삼촌이 기대하셨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었으니까요.

엄마는 그 후로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은 적이 없었고, 47살이 되던 해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전신마비가 오고 말을 못 하게 됐죠. 엄마의 인생이 어땠을지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엄마를 직접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강렬해졌죠. 직접 만나 두 눈을 바라보면서 괜찮냐고 묻고 싶었어요. 너무나 불행한 인생을 살았으니까요. 외삼촌과 만나는 자리에 삼촌의 누님도 함께 나오셨는데, 제 생각엔 그 누님이 삼촌을 설득했던 것 같아요. 두 분이 한국어로 대화를 잠시 나누신 후에 외삼촌이 “그래, 엄마를 만나게 해주마.”라고 하셨거든요. 그 자리에 외삼촌과 함께 나온 아들분(저한테는 사촌인 셈이죠)과 같이 병원에 가도록 일정을 잡았어요. 언제 갈 수 있냐고 묻길래, 다음 날은 SWS와 일정이 있어서 안 되지만 그 이후로는 언제든 가능하다고 했죠. 그렇게 사촌과 함께 KTX를 타고 엄마를 만나러 갈 약속을 잡았어요.

한편 저에게는 여전히 아빠와의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남아있었죠. 그다음 날이 SWS와 만나는 날이었는데, 그날 밤 한밤중에 눈이 떠졌는데 그 후론 잠이 안 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메일을 확인했는데 애나한테 답장이 와 있었어요. 제가 누구인지 당연히 기억한다면서, 부모님께 저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자기 아빠한테 전화하라며 전화번호를 알려줬어요. 바로 스카이프로 전화를 걸었더니 그쪽도 전화를 바로 받더군요. “호정씨, 그동안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아이한테 당신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너무 놀라운 소식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호정씨 아버지가 가족 내에서 골칫덩어리라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제가 먼저 연락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네요. 지금이라도 도와드릴게요.”

저는 왜 아빠가 저와 만나지 않으려 하는지, 아빠네 가족의 상황이 어떤지 물어봤어요. 2012년에 제가 아빠를 만났을 때, 아빠가 결혼해서 3명의 자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요. 아빠가 저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던 건, 아직 아이들이 어릴 때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서 아내와 자식들을 버렸다는 사실이었어요. 그러니 그 아이들은 홀어머니 밑에서 아주 어렵게 자랐던 거죠. 따돌림도 많이 받고요. 한국에서는 이른바 ‘정상’이라는 범주를 벗어나면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거든요. 요즘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더 심했죠. 저는 직접 겪지 않았으니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런 것 같아요.

어쨌든 미국에 사는 그 사촌의 말에 따르면, 아빠의 자녀들은 매우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고, 사촌은 그 아이들과 거의 함께 자랐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친남매나 다름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아빠가 위암 판정을 받았을 때, 아빠와 새 가정을 꾸렸던 그 여자는 아빠를 버렸고, 아빠는 다시 가족에게 돌아갔어요. 가족들이 아빠를 다시 받아주긴 했지만, 집안 내에서 아빠에 대한 미움이 엄청나다는 거예요.

그제서야 어떤 상황인지 보이기 시작했어요. 아빠가 제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사실을 전부 알려주진 않은 거죠. 물론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겠죠. 친부모와의 재회란 그런 것 같아요.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를 입양 보냈다는 사실을 용서받으려는 건 아니지만, 본인의 어려웠던 상황만 이야기하는 거죠.

어쨌든, 외삼촌과 만난 다음 날 SWS에 갔더니 아빠의 가족이 편지를 보내왔다면서 건네줬어요. 가족 중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은 한 여성이 SWS에 전화를 걸어왔고, 그 후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를 번역했으니 읽어보라고 했어요. 편지를 읽어보니, 아빠의 3남매 중 둘째가 쓴 것이더군요. 첫째는 약간의 장애가 있어서 둘째가 쓴 것 같았어요. 내용은 이미 사촌에게서 들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어요. 아빠가 어렸을 때 자식들을 버렸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고요. 저의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 채 살다가, 아빠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되자 저에 대해 털어놓았는데, 자기는 이 사실을 엄마나 다른 형제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고 했어요. 너무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아빠가 다른 여자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있고 그 사실을 숨긴 채 결혼한 것이라고 엄마에게 말할 수 없다고 적혀 있었어요.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죠. 제가 친부모님을 찾겠다고 했을 때, 저는 그 누구의 삶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저 저에 대해 더욱 깊은 이해를 얻고 싶었기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어요. 제가 누구인지, 왜 이런 감정들을 느끼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죠. 자라면서 저는 항상 슬픔, 우울, 노스탤지어, 비밀 같은 것에 마음이 끌렸거든요. 이랬던 이유를, 저에 대해 점차 알아가면서 이해하기 시작했죠. 우리는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잖아요. 저의 과거를 알자 제 성격을 더욱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실제로 후성유전학(epigenetics) 연구 결과에 의하면, 생애 첫 3년뿐만 아니라 태아가 자궁에 있을 때 일어난 일도 한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해요. 그렇게 물려받게 되는 트라우마가 단순히 과학적인 사실일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영향을 미친다고 해요. 저는 이런 것들을 실제로 믿어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경험에서 우러나온 거죠. . 겉으로 보면, 저는 입양을 통해 아주 많은 기회를 얻었어요. 물론 뿌리를 잃고 떠돌아 다닌다는 이방인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좋은 가정에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죠. 그러다가 양부모님의 별거와 이혼을 계기로 큰 전환점을 맞았던 것 같아요. 그 일을 계기로 가족들이 서로 간에, 또 각자 안고 있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졌고 그 후로 각자 매우 다른 삶을 살게 됐죠. 헤어짐에 대해 제가 갖는 근본적인 어려움도 이 때 깨닫게 되었어요. 물론, 그때는 너무 어려서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니 브루노와 헤어진 것이 매우 궁금한데요. 헤어짐의 연속이었던 역사 위에 또 다른 헤어짐을 쓰게 된 거잖아요. 뭔가 홀로 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었나요? 당신의 생각이 궁금해요.

성인 이후로 형성된 저의 모든 파트너 관계 중에서 브루노와의 이별은 가장 의식적으로 내린 결정이에요. 저와 브루노가 헤어진 이유가 단순히 저는 한국에 있고 싶은데 브루노는 그걸 원하지 않아서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것도 하나의 이유이긴 하지만요. 저희 둘의 관계에서 다른 부분은 크게 문제가 없어요. 물론 둘 사이의 관계, 최근에 브루노 전 부인의 죽음으로 인한 가족 관계의 변화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이 길은 당분간 제가 혼자 걸어야 할 길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한국으로 매번 길게 여행 올 때마다 그냥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혼자서 경험해 나가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말이죠. 다른 사람의 요구나 필요를 신경 쓰거나 배려하는 것을 지금 당장은 생각하기 어려워요. 브루노도 이 점을 잘 이해하고, 항상 저에게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해요. 저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은 매우 자신 있어요. 하지만 브루노는 제가 저를 아끼고 돌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가르쳐 줬죠. 아마 지금이 그럴 시기인 것 같아요. 관계에 있어서 전 항상 저 자신을 잃어버려요. 상대방에게 너무 집중해서, 그들의 삶에 순응하고 그게 저의 삶이 되어버리죠. 그러다 보면 제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잊게 되곤 해요. 지금은 그런 성향을 극복하는 시기인 거죠.

맞아요. 브루노가 큰 역할을 했죠. 브루노는 저보다 18살 연상이고 장성한 자녀가 3명 있어요.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 심지어 요기나 명상가를 통틀어서도, 가장 자아가 안정적이고 균형 잡힌 사람이죠. (웃음) 매우 강인하고 현명한 사람이에요. 제가 지금까지 걸었던 길을 브루노가 아닌 다른 사람과 걷는 것은 상상할 수 없어요. 그리고 본인의 행복보다 저의 행복을 위해 저를 놓아준 유일한 파트너이기도 해요. 저희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많은 대화를 나눠요. 이별로 인생이 망가질 만큼 절망하는 건 아니지만, 브루노도 이별로 힘들어하고 있어요. 지난주에 편지를 쓰면서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저를 보내줄 용기를 내줘서 매우 고맙다고요. 저는 먼저 헤어지자고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저희는 지금도 연락을 하지만, 한국으로 오기 전 몇 달간은 매우 힘들었어요. 패닉 상태와도 같았죠. 그에게 매일 묻곤 했어요. “우리가 헤어지는 게 맞는 걸까? 그게 최선일 걸까?” 그러면 브루노는 그저 가라고 말해 주었고, 그렇게 제가 한국에 오게 된 거죠. 그리고 이게 맞다고 느껴져요. 몇 가지 덧붙이자면, 하나는 아빠가 아직 살아계신다는 거예요. 2014년 이후로 연락을 하지 않았지만, 제가 알기로는 그래요.

결국 아빠를 만나 작별 인사를 했나요?

네, 사촌이 제 이복 자매를 설득하면서 중간에서 많이 도와주었어요. 제가 아빠와 계속 연락하는 건 반대하더라도 최소한 작별 인사를 하게 해 달라고요. 그렇게 해서 아빠를 만나 인사를 나눴어요. SWS를 통해 외삼촌을 만났고, 엄마도 만나러 갔어요. 아빠를 만났던 것과 비교하자면 엄마와의 만남은 매우 감정적이었어요. 요양병원 같은 시설에 계신 엄마를 사촌과 함께 보러 갔는데, 엄마는 저희가 오는 것도 모르셨어요. 사촌이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를 하는데, 제 사진 몇 장 가지고 본인이 먼저 병실에 올라가서 엄마에게 보여주고 만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로비 의자에 앉아 기다렸어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마다 계속 그쪽을 쳐다봤죠. 그 순간은 정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어요. 마치 관찰자로서 상황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마침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나타났어요. 엄마는 휠체어에 앉아 계셨는데, 보자마자 눈물이 펑펑 났어요. 브루노도 울고 제 사촌도 울었죠. 엄마는 우시지는 않았지만 격한 감정을 느끼시는 것 같았어요. 눈물을 흘린 건 아니지만 느낄 수 있었죠.

왜 아빠와의 만남에서는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흘렸나요?

이미 엄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엄마의 신체적인 상황도 그랬고요. 그리고 엄마는 말을 못 하니까 저한테 당신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줄 수 없잖아요. 글씨를 쓸 수도 없고 의사소통이 어려운 상태니까. 저는 영원히 엄마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알 수는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엄마가 호정씨를 알아보신 거죠?

네,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저를 알아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저 느낌일 뿐이지만 말이죠. 매우 추운 날이었어요. 12월 29일이었죠. 우리는 엄마의 병실로 올라갔지만 전 준비가 안 된 상태였죠. 지금은 12인실로 옮기셨지만, 당시에는 엄마가 10인실에서 지내셨는데, 병실에 있는 환자들이 모두 뇌 기능 장애와 신체 마비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다들 정도는 조금씩 달랐지만요. 삶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장면이었죠. 삶의 유한성이나 연약함 같은 것에 대해서요. 엄마와 몇 시간을 함께 보낸 후 다시 헤어짐의 시간이 왔는데, 매우 가슴이 미어졌던 순간이었어요. 복잡한 감정을 느꼈죠.

그리고 12월 31일에 아빠를 만났어요. 하지만 이번 만남은 2012년의 만남과는 매우 달랐죠. 엄마를 만난 후이기도 했고, 특히 2012년에는 알지 못했던 아빠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까요. 2012년 만남에서는 ‘아빠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라는 열린 마음이었고, 조금은 알게 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014년에는 ‘아빠가 누군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제가 2012년에 만났던 사람은 아빠의 진짜 모습이 아니잖아요.’ 이런 마음이었어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마음속으로 아빠를 믿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과 거리감을 품은 상태였죠.

하지만 역시나 브루노는 제게 섣불리 아빠에 대해 판단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어요. 아빠가 왜 그 여자를 떠나서 가족에게 다시 돌아갔는지 저는 모르니까요. 관계에 있어서 누구나 그럴 수 있다며 말이죠.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고 했죠. 그리고 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지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 어려웠죠. 아무튼 그렇게 아빠를 만나는 자리에 나갔어요. 통역사분이 저희와 함께했죠. “아빠네 가족이 저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더니 아빠는 그렇다고 답했어요. “가족들 모두가 알고 있나요?”라고 되물었더니 또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아빠를 믿을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아빠의 3남매 중 한 명만 저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 이복 자매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죠. 아마 제가 듣고 싶은 말만 이야기해주려고 아빠가 그랬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가 아는 사실과 다른 대답을 하는 아빠의 말을 들으니, 절반의 진실만 말하는 아빠를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더군요.

아빠에게 2012년에 했던 것과 비슷한 질문을 많이 던졌어요. 하지만 뇌수술의 후유증으로 2년간 노화가 급격히 진행되어서 기억이 예전 같지 않으셨어요. 2012년에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제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하시는 부분이 있었는데 더 심해진 거죠. 친부모와의 재회에 대해 묻는 다른 입양인들에게 제가 항상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 2014년 당시에는 입양인 커뮤니티에 대해 전혀 모르다가 2016년부터 커뮤니티 모임에 나가게 되었어요. 2014년에 한국에 와서 엄마와 아빠를 만났던 일이 저에겐 정말 힘들었기 때문이죠. 새해를 맞이하기 전날인 2014년 12월 31일에 아빠를 만나서 마지막 인사를 했어요. 그러고는 대구의 호텔 방에 돌아와 침대에 앉아서 브루노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머리가 고장 난 것 같아.” 흥미로웠던 것은, 보통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부서졌다(heart is broken)고 표현하는데, 저는 머리가 고장 난 것 같다고 표현했다는 거예요. 가슴이 찢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머릿속에 멍해지면서 정말 아무 생각이 안 났거든요. 만약 제가 친부모님과 재회하기 전에,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누군가 저에게 이야기해줬더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했을 거예요. 지어내기조차 힘든 이야기죠.

그동안 제가 갖고 있던 모든 생각을 뒤흔드는 사건이었죠. 입양아로서 우리는 뿌리에 대해 알고 싶어 해요. 그래서 끊임없이 찾고 질문을 던지곤 하죠. 기억이 안 나는 일도 기억하고 싶어 해요. 무의식에 있는 것들을 깨우고 싶어 하죠. 하지만 부모님들은 정반대예요. 잊고 싶어 하죠. 무의식 깊은 곳에 파묻어 버린 채 다 잊어버리고 새 출발을 하고 싶으신 거죠. 트라우마를 남기는 아픈 경험이었다면 특히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출산과 입양 경험은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죠. 상황이 매우 절박하기 때문에 입양을 보내는 거잖아요. 상황이 좋아서 아이를 포기하고 입양을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입양이란 양측 모두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인 것 같아요.

저는 항상 정화(purity)에 집착하다시피 했고 스스로를 정화하려고 노력했어요. 어느 순간부터인가, 제가 엄청나게 큰 잘못을 저질렀거나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저를 버린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10살 때 양부모님이 별거를 하게 되면서 그 생각이 더 강해진 것 같아요. 어린아이들은 세상이 모두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모든 게 자신 탓인 것만 같죠. 그래서 저도 이 모든 일이 저에게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서 일어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해왔던 모든 치유(healing)가 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 같아요. 최대한 깨끗해지고 싶었기 때문에 인도를 갔고, 그런 영적인 커뮤니티에서 저는 항상 잘 지냈어요. 뭔가 다른 느낌이죠.

힘을 주는 곳이군요.

정확해요. 하지만 바르셀로나에서는 다시 힘들었고, 그래서 Plum Village라는 곳에서 리트릿에 참여했어요. 그곳에서 또 한 번의 엄청난 변화를 겪었죠. 저는 오랜 시간 동안 제가 겪은 고통에 대해 타인과 나눌 수 없었어요. 하지만 리트릿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저의 속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었죠. Plum Village에서는 서로 마음을 나누는 일, 자비심으로 듣기(deep listening), 사랑으로 말하기(loving speech), 비폭력적인 의사소통을 수련해요. 치유를 위한 훌륭한 방법들이죠.

2014년 이후로 아빠와 연락을 하지 않았어요. 엄마는 제가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뵙고 있어요. 두 번째 한국 방문이 워낙 강렬하기도 했고 아빠와 작별 인사를 하는 슬픔도 있었지만, 그 방문 후에 제가 그렇게 힘들었던 이유 중 하나는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에요. 그저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병원에 찾아갔고, 엄마는 제가 오는 줄도 몰랐던 데다가 불과 몇 시간 후에 돌아왔으니까요. 엄마는 계속 마비 상태로, 말도 못 하는 상태로 10인실 병실에 다른 환자들과 함께 있는데 말이죠.

답을 찾고 싶은 마음에 시작했던 일이 커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죄책감인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엄마를 보면 이런 생각도 들거든요. ‘도대체 뇌 기능이 얼마나 작동하고, 얼마나 인지 능력이 있는 걸까?’ 뇌의 특정 부분이 망가져서 의사소통도 못 하고, 글을 읽지도 못하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어요. 엄마와 눈을 마주쳤을 때, 엄마는 저를 알아봤어요.

호정씨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신을 돌보고 사랑하는 일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것 같아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지금 한국으로 돌아온 것도, 영적 수련을 하는 것도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져요. 한국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 이번에는 한국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바라는 게 있나요?

아니요, 특별히 없어요. 저는 지금까지 항상 앞일을 계획하지 않고 사는 편이었거든요. 저는 매우 논리적인 부모님 밑에서 컸어요. 엔지니어이자 과학자인 아버지에게 있어 비논리적인 일,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일은 의미 없는 일이죠. 동시에 매우 현실적이기도 하죠. 어렸을 때 저를 불러 앉혀서 향후 5년 계획에 대해 묻곤 했었어요. 그럼 전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죠. 저는 계획을 세우는 편이 아니에요. 친부모님과의 만남도 계획한 일이 아니었죠. 제 삶의 어느 시점에서라도 과거 5년을 돌아보면, 아무것도 계획대로 일어난 일이 없어요. 그냥 일어나는 대로 마주한 거죠.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지금 이 자리에서 팟캐스트에 출연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도 하지 못했죠. 그래서 저는 삶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그럴수록 더 좋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의식적인 선택을 내리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의식적인 선택은, 말씀하신 것처럼, 스스로를 돌보는 일에서 시작되죠. 물론 이런 선택들이 모두 좋을 수는 없겠죠. 2014년 말에 엄마를 만나고 최근까지, 그 만남을 후회한 것은 아니지만 과연 그게 올바른 일이었는지 자꾸 돌이켜봤어요. 부모님을 찾아서 다시 만난 일이 과연 좋은 선택이었나 하고 말이죠. 그 후에 제가 너무 많이 힘들었거든요.

이게 모두 호정씨 스스로가 자신을 용서하는 과정들이었다고 생각하나요?

제 자신에 대한 용서, 그리고 아까 말했듯 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됐죠. 무조건적으로, 온전히 나를 사랑하는 법을요.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거나, 파트너에 의지하거나, 엄마나 아빠로부터 어떠한 보상이나 치유를 얻는 게 아니라, 제가 스스로에게 사랑을 주는 거죠. 우리가 엄마의 자궁에 있을 때, 태어날 때, 어렸을 때, 자라면서 받지 못했던 것들, 그동안 느꼈던 모든 감정들… 이런 것들을 모두 털고 일어나 스스로를 돌보고 사랑하는 것. 그게 우리 모두가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한글 번역: 주현아 & 장보영